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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러시아를 비롯한 구 소련 지역 체제전환 ...thetomorrow.kr/wp-content/uploads/2017/12/...현실 사회주의 체제는 사실상 붕괴했지만,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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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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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 사회주의 학술행사를 개최하면서

    러시아 혁명이 발생한지 100년이 되었습니다. 과거 혁명가들의 온갖 희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련 동구사회주의는 결국 실패하였고,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지도 벌써 3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이제 혁명의 역사는 오랜 역사책에만 남아있는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습니다. 청년시절 마르크스 레닌의 저작을 탐독했거나 소련 동구 사회주의 붕괴 과정을 외신을 통해 지켜보았고, 국내에서 이를 둘러싼 논쟁에 관심을 갖거나 참여했던 세대에게는 여러 가지 감회가 들겠지만, 지금의 청년들에게는 러시아 혁명 100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쿠바, 북한 등 여전히 사회주의 이념을 고수하는 나라가 남아있지만, 이런 나라들이 미래의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사회주의의 실험, 그 실패의 교훈은 쉽게 무시하고 넘어갈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러시아혁명과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모순과 문제점이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역사의 종말’이 온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실험을 반복할 이유는 없지만,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건설해야할 미래사회의 청사진은 어떠해야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혁명당시 서구의 좌파들이나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소련 사회주의 건설과정이나 공업화 과정에 소련을 방문했던 수많은 지식인들의 비판의 시선과 주장은 소련 붕괴 이후 더 크게 다가왔으며, 그들의 비판의 지점은 더 많은 숙고를 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사회주의 붕괴 이후 구소련과 동구가 걸어온 길, 중국 베트남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개혁개방의 길을 걸어온 나라들의 시장화, 신자유주의화의 과정도 크게 주목할만한 대상입니다. 이들 국가는 대체로 또다시 주변주 자본주의의 일원으로 편입되었고, 복지자본주의의 경험을 가진 나라들보다 훨씬 더 천박한 시장주의와 부패로 얼룩져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과거 식민지 경험과 주변부 자본주의의 국가에 속했던 남미나 아시아 국가들의 사회주의 실험, 즉 자본주의 경제와 노동계급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던 나라들의 역사적 경로를 특별히 주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개발독재나 신자유주의도 이런 나라들의 겪고 있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포스트사회주의 국가의 자본주의는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점과 극복과정을 고민하는데도 큰 참고가 됩니다. 한국은 아직 분단국가이고, 북한 사회주의와 군사적으로 대결한 상태에 있습니다. 남한 자본주의가 체제경쟁에서는 사실상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북한은 192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가, 이론가들의 투쟁이 집결된 현실 국가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남한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섰다고 해서, 그것이 곧 북한을 굴복시키고 남한이 통일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북한의 체제위기가 와서 붕괴하거나, 남북한이 두 개의 국가로서 병존하면서 평화, 통일의 길로 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어떤 통일된 국가, 어떤 체제를 건설할 것인가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남북한 코리안들이 과거의 현실사회주의, 포스트 사회주의의 실험을 어떻게 소화하고 넘어설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매우 중요한 실천적인 과제가 될 것입니다. 한국인들에게 러시아 혁명과 과거 사회주의 실험은 남의 나라 일이 아닙니다. 특히 중국, 베트남, 북한은 아시아적 전통을 가진 국가들이기 때문에, 이들 나라의 사회주의 실험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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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에게도 여러 가지 교훈을 줄 수 있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이 20세기는 식민주의와 냉전,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큰 격변의 와중에 있었지만, 21세기에는 세계 문명을 선도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국가주의, 유교문화, 소농의 생산방식의 전통을 가진 아시아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토론이 과거 사회주의의 실험과 포스트 사회주의의 모든 쟁점을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오늘 한국이 처한 정치경제적 어려움을 전제로하면서 한국의 미래를 모색하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백년연구원 원장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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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혁명과 소련 국가사회주의, 그리고 체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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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혁명과 소련 국가사회주의, 그리고 체제 전환

    정재원(국민대)

    1. 들어가며

    올해는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 지 100 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가 사실상 거의 모두 다 붕괴된 현재 러시아 혁명을 기리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없거나 심지어 정신이 나간 사람들끼리의 말장난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학술적인 차원에서든 운동적인 차원에서든 러시아 혁명은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많은 논쟁과 토론의 주제로 남아 있으며, 특히 100년을 맞는 올 해에는 전 세계적으로 러시아 혁명과 관련한 다양한 논의의 장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러시아 혁명 100 주년을 맞아 러시아 혁명 자체를 재해석하고 재평가하는 것 자체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련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정리와 그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지금까지 소련을 위시한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의 원인들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들이 있었지만, 소위 진보좌파적 관점에서의 논의는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논의가 주를 이루었고, 결국에는 다수의 침묵과 무지 속에 극소수의 목소리 높은 집단들의 극도로 관념적인 주장들이 주류를 이루는 상황에 이르렀다. 스탈린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며 그 이후 수립된 전 세계의 사회주의 체제는 본래의 사회주의와는 상관이 없는 모종의 자본주의 체제인 양 왜곡하거나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그 수와는 상관없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회주의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며 과거 존재했던 사회주의체제는 별도의 영역인 양 사고하는 이들도 있다. 현실사회주의체제에 대한 비판적 연구와 진지한 고민 없이 무조건 노동해방, 자본주의체제 철폐를 외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정반대로 화려하지만 도무지 일반인들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각종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관념적 논의들로 비판과 반성의 자리를 메우는 이들도 있다. 이들 모두 역사와 민중 앞에 무책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는 사실상 붕괴했지만, 그것이 남긴 유산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회주의체제가 존재함으로 인해 자본주의체제도 수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많은 옛 서구 식민지 국가들에게 주변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했었다. 그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체제에서 발달한 보편적, 포괄적 사회복지제도들은 서구 복지 국가가 탄생하는 데 중요한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우리에게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시장 원리에 입각한 경쟁 사회가 아닌 데에서 비롯되었던 장점들이 많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장점들은 생산의 발전하지 못 할 경우 지속가능하지 못 했다. 그리고 사회복지를 포함한 사회의 일부 영역들에서의 성과를 제외하면 민주주의와 인권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는 오히려 심각한 후퇴를 겪었던 것이 사실이다. 놀랍게도 혁명 전까지 지키고자 했던 사회주의 원칙들은 혁명 직후부터 폐기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혁명을 결정적으로 배신했지만, 이는 테르미도르 반동이 아니라 필연적인 역사적 수순이었다. 그 이후 소련 붕괴까지의 역사는 안타깝지만 새로운 관료지배집단들이 민중의 피로 억지로 이끌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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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재 러시아는 권위주의적 정권이 시민사회를 압박하는 형국으로서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 하고 있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구 소련 지역 유라시아 국가 공히 유사한 상황에 놓여 있다. 놀라운 것은 거의 대부분의 옛 소련 지역 국가들에서 심각한 부의 불평등과 지배계급의 부정부패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의 저항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구 소련 국가들의 이러한 특징은 바로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유산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소련사회주의 체제의 유산이자 그 체제 붕괴의 원인으로 관료 지배 집단의 형성, 민주주의의 부재, 관료제, 일당 체제, 민족 문제 등등 다양한 논의들이 있어왔지만, 이 모두 체제 붕괴의 근본 원인을 찾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들에 대해 고의적으로 회피하거나 무지한 논의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하의 글에서는 기존에 잘 알려진 체제 붕괴에 대한 정치적 영역들에 대한 논의들은 과감하게 생략하도록 한다.

    2. 소련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성과와 그 한계 2.1. 러시아 혁명 이후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의 사회 발전

    사회주의 체제 하 소련에서는 혁명 직후 몇 년 기간을 제외하고는 개개인이 장래에 도래할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전부 혹은 일부를 갹출해서 지불하는 식의 보험원칙과는 반대로 수혜자가 전혀 갹출금을 부담하지 않고 그 재원이 국가예산으로 충당되는 급양원칙을 사회복지정책의 원칙으로 결정하여 시행해 왔다. 사회주의 체제는 자본주의체제와는 달리 소득이 시장에 의해 창출되지 않기 때문에 정부는 임금 등을 직접 통제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임금 결정을 통해 소득평준화 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다. 또한 소득세가 매우 낮아 이를 통한 소득 이전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국가는 임금율을 조정함으로써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임금격차가 존재하여 임금 차이에 근거한 불평등의 문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일찍이 1912년 프라하에서 있었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 6차 전당대회에서 레닌은 국가가 포괄적인 사회보험체계를 도입할 것을 촉구한 바 있었다. 이러한 그의 구상은 혁명 직후 집권한지 일주일도 안 된 1917년 11월 2일에 ‘모든 노동자 농민을 포괄하고 소득손실의 모든 위험을 포함하여 모든 비용은 고용주에게 부과하며, 특히 이러한 보험 행정은 피보험자 스스로가 관리한다’는 등의 5개 원칙 하에서 새로운 사회주의식 사회보험계획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비록 내전 등으로 인해 제대로 시행이 되지는 못했지만, 같은 해 12월에 실업보험과 출생, 장례 및 질병에 관한 현금 시혜와 무료 의료 시혜에 관한 법령이 통과되었다. 노동자 자치라는 다른 모든 실험들처럼 보험 업무도 피보험자들 당사자들에 의한 자치행정을 지향했던 볼셰비키들의 이상주의적인 방침은 1년도 안 되어 폐기되고 정부기관이 사회보험의 관리통제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국유화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1918년에 제정된 최초의 볼셰비키 헌법에서 ‘보편적 노동의무’를 규정하면서 파업권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다른 자주적 권리들은 점차로 후퇴되었지만, 종전보다 훨씬 더 보편적이고 보괄적인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러한 사회복지정책은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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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무 부과에서 보이듯 기본적으로 노동과 연계된 복지 정책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19년 공산당 전당대회를 통해 보편적이고 의무적인 무상 교육 실시를 천명하고, 주거 정책에 대해서도 공평한 주거 배분을 강조하는 등 노동과는 무관한 포괄적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후 1921년부터 시작된 신경제정책 시기 노동자들의 권리와 의무는 1922년 노동법전에 명시되었는데, 기본적으로 자유노동시장원칙으로의 회귀와 더불어 이에 따른 사회보장의 보편주의적 원칙이 포기되었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에 따라 자영업, 자영농, 전문 직종 종사자 등 직접적인 임금 노동자가 아닌 경우 수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상의료나 실업연금, 상해연금 등 소득혜택을 받게 되는 위험항목들은 포괄적으로 규정되어 종전과 다를 바 없이 유지되었다. 1928년에 마련된 노령연금 프로그램은 최소한 25년의 노동기록이 있어야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골자였는데, 이는 사회권으로서의 사회보장원칙이 아닌 노동연관성 사회보장 시스템으로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급격한 산업화가 추진되던 당시 소련의 경제적 상황이 반영된 이 노령연금 프로그램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특히 1920년대는 놀라울 정도로 일찍 사회화된 의료 시스템이 도입되고 발전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모든 피고용인들과 그 가족들은 갹출금 없는 사회보험에 의해 무상으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나, 도시 지역과는 달리, 농촌 지역에서의 수혜 수준은 매우 낮았다. 특히 구 체제의 지배계급들은 사회보험에서 제외됨으로써 완전한 전 국민 무상의료 제도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교육에 대해서도 볼셰비키들은 혁명 초기부터 문맹퇴치운동과 더불어 노동자들의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 했으나, 이미 혁명 직후부터 15세까지의 무상의무교육을 실시하도록 규정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학생들 스스로에 의한 교육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대해 수많은 논의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산업화가 가속화되고 5개년 계획 등이 수립되면서 급격하게 사라지게 된 반면, 숙련 노동력의 보급을 위해 무상의무교육에 기초한 다양한 교육에 대한 정부의 노력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러나 1929년 1차 5개년 계획이 수립된 이후 스탈린 정권 하에서 모든 원칙들은 크게 후퇴하게 되었다. 급속한 산업화를 위해 농업은 강제적으로 집단화 과정을 겪었고, 이후 공업 분야에서의 노동력 동원이 필요하게 되자 노동력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시작되었다.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직장 선택권이 박탈되고, 실업구제를 위한 시혜가 중단되고 노동자들은 실업 상태에 놓이면 안 되며 어딘가에서 반드시 노동을 해야 하는 등 이동권이 박탈되었다. 그 외 노동규율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고안되었고, 벌칙도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회보험은 노동유인 및 동원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노령 및 노동이 불가능한 장애인 등 비생산인구에 대한 복지혜택이 크게 삭감되었다. 1933년부터는 이러한 모든 사회보험에 대한 행정은 당의 통제 하에 있는 노동조합이 담당하게 됨으로써 이제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이 아니라 복지를 담당하는 국가기구의 한 부분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노조의 권력기구화의 정도가 강해짐에 따라 노동조합 회원들에게는 더 많은 복지 혜택이 주어져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가입률이 매우 높아졌고, 결국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각종 복지 혜택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1936년에 제정된 소련 헌법은 무상의료 등 복지에 있어서 차별적 항목들을 철폐하고, 다시 모든 노동자들에게 사회복지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 과정 속에서 재원조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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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보험이 아닌 국가예산에서 담당하게 되었고 결국 재원이 노동조합에서 국가예산으로 이전되었다. 의료 뿐 아니라 노령, 장애 등 다양한 연금들과 노동자 주택의 재원 모두 국가예산으로 이전되었다.

    2.2.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 붕괴 시기까지의 사회 발전의 한계

    2차 대전 이후부터는 주택 건설이 우선순위가 되기는 했지만, 그 이전까지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도시로의 대규모 이주에도 불구하고, 주택 보급은 턱없이 모자랐다. 따라서 놀랍게도 1950년대까지 도시주택의 약 1/3이 아직 개인 소유로 남아 있었다. 주택 문제는 스탈린 시대 이후로도 가장 해결이 어려운 문제였으나 낮은 집세 등으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인 슬럼화나 게토화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교육 역시 1936년 헌법에서 소련 시민의 권리로 규정하여 무상 교육의 원칙을 천명하였으나, 7년 교육이 의무화된 것은 1949년부터였다. 그러나 특히 농촌 지역에서 실제로는 이를 제대로 이수하는 농민 자제의 비율은 여전히 높지 않았다. 그러나 무상교육의 원칙 뿐 아니라 다양한 입학 조건의 완화 및 다양한 대학 입학 자격, 장학금 제도 등으로 인해 노동자 농민의 자제들에게도 고등교육의 기회가 많아진 것은 매우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금액 자체가 비싸지는 않았지만, 등록금 제도가 도입되는 등 사회주의적 원칙과는 멀어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후 스탈린 사후에야 다시 무상교육의 원칙이 부활되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기 소련의 경제는 완전히 파산 상태나 다름없었다. 사망자 수만 약 2천 7백만 여 명에 이르렀고, 1940년에 비해 공업 생산은 약 1/3에서 3/5 정도로 감소했고, 농업 생산은 약 1/3 정도로 감소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소련은 다시 1930년대 정책으로 회귀했다. 즉 극도의 소비 억제 정책을 통해 총투자를 최대로 끌어 올리는 방법으로 고정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려 공업 부문의 전후 복구는 계획을 뛰어 넘는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총 공업생산은 1940년대에 비해 173%에 달하는 등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나, 생산 분야는 매우 편중되어 소비재생산이나 농업생산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중반 정도까지의 시기는 소련 경제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공업의 성장 추세는 계속되었다. 특히 이 시기는 다시 주민의 복지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스탈린 사망 직후부터 흐루시쵸프 시기에는 혁명 이후 줄곧 소외되어 왔던 농업 분야에 대한 투자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고, 사회복지정책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산업 노동자 수는 급격하게 증가하여,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약 인구의 60%가 산업 노동자였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노동자들은 휴가와 휴양소 이용권리, 교통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혜택을 받았지만, 석탄 산업 등 노동조건이 열악한 산업 분야 생산직 노동자들의 경우 여타의 사무직 노동자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았으며, 주택, 교육, 의료 등에 있어서 더 많은 복지 혜택을 받았다. 또한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도 급격하게 증가하여 전 소련 기간 내내 50% 대를 유지했다. 교육의 수혜에 있어서도 고등교육 과정까지도 여성들은 차별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생산직 노동자들을 더 우대한 것은 아니었고, 여성들 역시 고위직으로의 진출에는 장벽이 있는 등 이상적인 평등 사회를 이루지는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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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기 소련의 공업은 연 평균 7%의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세계 최초의 우주선 스뿌뜨니끄와 세계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호 발사 성공 등이 상징하듯 과학기술적 진보도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 소련 경제 동시에 구조적 문제점도 노정하고 있었는데, 특히 공업 구성상에 있어서 심각한 불균형은 시정되지 않고 있었고, 경제와 과학 기술 발전에 기반한 서구와의 군사 경쟁 속에서 심각한 위기의 전조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미국에 비해서 훨씬 뒤떨어지는 GNP 수준에도 불구하고 벌인 군사무기와 우주과학 경쟁으로 인해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맞게 되기도 했다. 이러한 비시장적 명령 혹은 계획 경제는 1960년대 말부터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위기를 맡기 시작했다. 비시장적인 중앙집중적 경제제도는 복잡하게 뒤얽히는 상품 유통의 문제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였고, 각 경제 부문들과 지방 경제 주체들에서 중앙의 계획은 차질을 빚어 허위보고, 뇌물, 매수, 부정부패 등이 만연하게 되었다. 경제의 정체는 지하경제의 확산을 가져 왔고, 공식 경제와 비공식 경제는 각각 별도의 메커니즘을 갖게 되었다. 소련 경제의 비효율성은 비시장적 원리에 입각한 관료주의적 계획 경제체제에서 기인하였다. 공업계획 체제는 극도로 중앙집중화되어 있었다. 각 산업의 계획은 먼저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에서 수립하였고, 각 산업은 각 부에서 관리하였는데, 각 부는 기업군에서 개별 공장에 이르기까지 하급부서에 대해 생산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하달하였다. 중앙기구가 수백 만 종에 이르는 정보를 수집해서 각 공장 단위에까지 사용할 원료의 종류나 수량, 공급처, 공장의 생산 품목과 수량, 임금, 생산성 향상 목표, 생산품 공급처 등에 대해 결정한다는 것은 극도로 비효율적인 것이었다. 특히 스탈린 시대에는 급속한 성장정책으로 비롯된 물자 부족으로 말미암아 각 부에서 기업 단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위들은 자원 조달을 위해 서로 극심한 경쟁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부패가 난무하였고, 비공식 네트워크가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통을 낳기도 했다. 기업들은 신규설비 등에 드는 비용을 일부러 낮게 책정하여 중앙계획을 담당하는 관료들의 관심을 끌어 계획을 승인 받은 후 실제로 필요하거나 위험에 대비한 수준의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등의 관행이 만연하게 되었다. 또한 각 기업들의 경영진들은 기업에 대한 평가와 그에 따른 자원의 지원이 생산목표 대비 실적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낮은 생산목표를 할당받기 위해 고의로 생산성을 낮춰 보고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항상 부족하거나 불량일 가능성이 높은 원료의 확보를 위해 경영자들은 계획의 기초가 되는 현장 단위 정보부터 왜곡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계획은 그 기초단계부터 심각한 문제점을 안게 되는 것이었다. 업종별 담당 부서가 다 다르다 보니 예컨대 소련의 한쪽 끝에 위치해 있는 한 공장은 다른 정반대 끝에 있는 공장으로부터 원료를 조달받아 운영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경우 엄청난 수송비가 낭비되었을 뿐 아니라, 한 공장에는 재고가 넘쳐 나는데, 바로 인근 공장에서는 자재 부족을 겪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업종별로 담당부서가 달라 발생하는 이러한 극도의 비효율성을 타개하기 위해 흐루시쵸프는 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각 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 하는 상황 속에서 관료제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해 각 지역경제협의회(소프나르호즈)를 만들어 각 지역경제협의회들이 해당 지역 내 기업의 생산과 분배를 가장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실현해 보려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이후 브레즈네프 시기는 이러한 소련 경제 특유의 고질적 구조적 문제들이 한층 더 악화되고 고착화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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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점점 더 자본주의 체제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지면서 공산당 정부는 이데올로기적 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제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데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었다. 지방의 사회경제적 위기는 한층 더 심각해졌고, 여기에 민족문제까지 겹쳐 1985년 고르바쵸프의 집권 이후에 실시된 전방위적인 개혁 시도에도 불구하고 회생하지 못 할 정도로 파국으로 치달아 결국 붕괴의 수순을 밟지 않을 수 없었다.

    3. 소련 사회주의 체제 붕괴의 원인

    소련 사회주의 체제는 민주주의 문제, 국가와 시민사회 관계, 일당 국가 시스템, 민족 문제 등등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경제 문제였다. 그 중 무엇보다도 시장을 제거하고 국유화된 경제 체제에 가장 큰 문제점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생산수단이 국유화되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적 착취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들의 노동의 성과가 자기 자신들의 복지 증진으로 연결될 수 있으므로 노동자의 노동동기가 자본주의체제에서보다 한층 더 강화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공동노동과 공동분배가 이루어지는 단위가 과도하게 커질 경우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자신의 개별 이익 차이 간의 괴리를 크게 느끼게 되어 공동체의 이익 증진에 헌신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국유화는 주인-대리인의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이론상으로는 국유화된 생산수단은 전 인민의 소유물이지만, 실제로는 국유화된 생산수단의 사용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국영기업의 경영자, 당과 국가 관료 등이다. 이들은 이론적으로는 노동대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기능하는 대리인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특권화된 이 집단들은 인민 다수의 이해관계에 반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다. 생산수단의 대부분이 국유화되어 있고, 시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권력 집중도가 높은 국가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이러한 주인-대리인 문제는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난다. 계획 경제 자체의 문제점도 매우 다양하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구체적인 생산방식까지도 중앙기관에서 결정해서 각 기업에 하달함으로써 각 기업의 경영자들은 생산과정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특히 변화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어렵고, 새로운 경영방식과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경제운영에 필수적인 정보의 전달, 수집, 분석 등과 관련하여 비효율성이 발생하기 쉬운데, 시장에 의해 자원이 분배되어 막대한 정보량이 가격 정보로 수렴되는 자본주의체제에서와는 달리, 계획경제체제에서는 개별 경제주체들에게 분산되어 있는 다양한 정보가 계획 당국에게 정확하게 전달이 되어야 하는데 이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앙 경제 계획 기구는 수없이 발생하는 미시적인 사안들로 인해 경제의 거시적인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전략을 세우기가 어려웠으며, 특히 국내외적으로 생산에 차질을 주는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생산과정에서 병목현상이 자주 발생하였고, 이러한 결과 생산 과정에 커다한 장애가 되는 경우 잦았다. 그리고 막대한 양의 다양한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는 일 자체도 그렇지만, 개별 경제주체들이 정확한 정보를 계획 당국에 보고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국영기업의 경영자들은 최대생산 가능량을 축소해서 보고하는 한편, 반대로 투입요소 필요량은 과대하게 보고함으로써 안정적인 기업 운영을 꾀하는 경향, 즉 연성예산제약 문제가 만연해 있었다.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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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율적 자원배분을 심각하게 저해했다. 기업차원에서도 동기부여체제가 부족했었는데, 기업의 소유권이 불분명하고 경영성과에 대한 보상이 미약한 상황에서 대다수의 기업 경영자들은 위로부터의 계획에 기초해 구체적으로 지침을 부여받지 않는 한 새로운 기술이나 자원을 기업 내부에 축적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는 동기는 미약하여 경영 기술 혁신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비자들 역시 자신들의 소비욕구를 계획당국에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거나 못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자신이 원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입하면 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와는 달리, 계획경제에서는 자신의 소비 욕구, 특히 공개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욕구들은 계획 당국에 표현될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다. 또한 경제주체들이 보유한 정보와 지식 중에는 본능, 감각, 취향 등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영역들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성격의 정보와 지식은 특히 소비자의 소비욕구와 관련하여 타인에게 언어로 전달하기 어렵다. 따라서 언어를 통한 정보 전달 외에는 전달의 수단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계획경제에서는 소비자들이 보유한 중요한 정보의 상당 부분이 활용되지 않는 경우가 잦다. 바로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국가를 막론하고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과학이나 공학적 지식과 관련된 생산재 산업분야는 크게 발달했지만, 소비재 산업은 발달이 더딘 경우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가격 왜곡의 문제도 심각했는데, 시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계획 경제체제에서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을 계획당국이 결정하다 보니 그러한 계획 당국이 설정하는 가격은 그 재화나 서비스에 대한 소비자의 욕구의 크기나 그 재화 생산에 수반되는 기회비용의 크기를 제대로 반영하기 어렵다. 따라서 어떤 재화는 과잉 생산되고 또 다른 재화는 과소 생산되는 문제가 심각했다. 소련 사회는 기본적으로 노동 가치론에 입각해 있었기 때문에 상품의 가치결정에서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욕구 수준을 고려하지 않았고 또 그 결과로 기회비용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계획 경제에서 가격 왜곡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계획 경제는 경직성이 큰 경제운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계획이 일단 수립되어 집행되기 시작한 뒤에서는 계획의 수정이 매우 어렵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한 부문의 계획 수정은 다른 부문의 계획 수정을 수반하고 연쇄적인 수정을 요할 수 있기 때문에 일단 계획이 한 번 수립될 경우 그 계획대로 집행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원리 때문에 개별 기업 단위에서 시도할 수 있는 생산방식 등의 변화는 장려의 대상이 아니라 억제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국가가 주도하는 대규모 사업에서의 기술 발전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도 기업 수준에서의 미시적 기술혁신은 크게 발전되지 못 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데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경제구조의 왜곡현상도 심해서 경공업과 서비스 산업을 희생하는 가운데 대규모 중공업 위조로 형성된 생산구조는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 하고, 여러 개의 정부부처가 각자에게 주어진 산업부문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복잡한 통제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경제가 중복구조를 지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자원의 낭비와 경제적 비효율성이 초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외적인 요인도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이러한 계획 경제 체제의 발전이 한계를 맞으며 정체되기 시작한 시기 외채에 대한 과다한 의존으로 자본주의 세계 경제에 적극적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이후 외부로부터의 영향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폴란드,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중동부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서구 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는 계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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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어 1980년대 외채 부담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가령 폴란드의 경우 수출의 96%가 외채를 상환하는 데 쓰였고, 소련의 경우 석유, 가스 등의 국제 가격에 경제가 크게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특히 서구에서의 탈산업화, 이와 관련한 국제경제의 성장과 질적 변화 등 자본주의 체제의 새로운 국면에서 동유럽 국가들은 대처를 하지 못해 세계 경제 내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의 서방국가들의 경제적, 군사적 경쟁은 한층 더 체제의 붕괴를 촉진하게 되었다.

    4.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의 근원

    그렇다면 이러한 국가사회주의체제의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지금까지 많은 좌파들은 사회주의의 핵심적 원칙들이 스탈린에 의해 왜곡되고 파괴되었으며 그 결과 사회주의체제는 붕괴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국유화와 계획 경제 자체는 사회주의가 아니며, 중요한 것은 노동자 민주주의가 실현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당연히 그러한 문제만으로 단순화할 수 없지만, 설사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치더라도, 안타깝게도 이미 레닌 시기에 그러한 원칙들이 폐기되거나 변질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당제와 시장체제를 인정하되 노동 대중의 직접 참여 민주주의와 다양한 형태의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아닌 일당 국가 하에서의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비시장적 계획 경제는 필연적으로 붕괴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혁명 직후 레닌 시기 민중 자치적 직접민주주의 제도였던 소비에트와 현장 생산 단위에서의 산업민주주의를 실현했던 공장위원회, 그리고 국가와 시장을 넘어 사회적 소유의 실험이었던 협동조합의 실험의 성패는 사회주의체제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1. 민중자치권력(코뮌)의 탄생과 좌절: 소비에트의 변질  혁명 전의 소비에트는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등과 더불어 노동자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기구였다. 일찍이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의 원칙으로 권력의 통합을 극찬한 바 있었는데, 이러한 원칙을 따랐던 소비에트는 모든 급에서 입법과 행정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었다. 레닌 역시 코뮌적 원칙과 더불어 바로 이러한 원칙이 소비에트에서 실현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소비에트는 볼셰비키 당이나 그 이념으로부터 독립적인 조직이었다. 그리고 볼셰비키도 중앙집권적인 혁명적 정당이나 조직이 아닌 일반 노동자 대중 조직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소비에트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레닌은 4월 테제 이후 소비에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러시아 혁명에 있어서 소비에트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볼셰비키의 중앙집권주의 원칙과 대립되는 소규모 코뮌적 조직들로 분산될 조짐을 보이자 레닌은 다시 프롤레타리아 중앙집권주의만이 사회주의를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광범위한 지방 분권주의의 원칙을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볼셰비키는 중앙집권적이고 행동이 통일된 혁명적 정당이나 조직이 아닌 일반 노동자 대중 조직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적-생디칼리스트적이라는 혐의를 씌우며 소비에트를 비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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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혁명 이후부터 일상 업무를 담당하는 수 백 명의 소규모 소비에트와 집행위원회 안에서 세분화된 업무 분담을 위한 소위원회들이 형성되는 등 점차 일종의 행정 기구처럼 변하게 되면서 소비에트는 아래로부터의 통제는 사라지고 관료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소비에트를 통한 노동자 민중권력 원칙은 볼셰비키 자신에 의해 파괴되었다.

    4.2. 노동자 생산 통제 실험의 폐기: 공장위원회에 대한 탄압  1917년 2월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는 아직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등이 발생했다. 그중 1917년 4월 2일에 페트로그라드의 군수산업 노동자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공장위원회가 소위 이후의 노동자자주관리운동이나 노사공동결정제도 등 다양한 노동자 생산 통제 혹은 산업민주주의의 시초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주장의 핵심은 노동자들이 공장위원회를 통해 모든 생산 과정과 기업경영을 직접적으로 감시, 감독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이는 서구 노동조합운동과는 전혀 다른 급진적인 요구를 내건 조직 운동이었다. 놀랍게도 이러한 노동자들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부정적이었던 레닌은 자주적으로 행동하는 공장위원회를 경계하였고, 이들의 분권적 자치 정부 주장에 대해 비판하면서, 노동자 통제는 전국적 기구 하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노동자 통제’는 계급투쟁 수단이지 노동자 통제 자체는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노동자 통제를 회계나 사유 재산 몰수, 자본가 사보타주 감시 기능이라고 생각했고, 생산에서의 직접 경영이나 노동자 결정권을 노동자 통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공장 일반 노동자들의 임금 결정권, 이윤과 분배 결정권 혹은 경영 개입권 등의 주장은 볼셰비키의 생각과 대립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로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감에 따라 레닌은 노동자들이 산업을 직접 경영하고 관리, 통제할 수 있도록 자치기구들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라고 선동하면서 생산과 경영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닌은 다시 혁명 직후부터 국유화를 통한 노동자 통제를 무력화시키는 방안에 착수하여 전국적 규모의 종합적 계획과 관리가 없는 생산 부문에서의 노동자 통제의 비효율성을 비판하였고, 결국 볼셰비키가 장악한 소비에트를 이용하여 은행, 대규모 기업의 국유화에 이어 공장위원회를 노동조합 산하로 조직, 통제하는 데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레닌은 노동자 통제에 대해 쁘띠 부르주아적, 반혁명적 무정부주의-생디칼리즘적 경향의 운동이라며 강력하게 비난하고 반대로 노동 규율 강화, 미국식 테일러주의 경영방식 도입을 찬양하였다. 

    4.3. 사회적 소유 실험의 폐기: 협동조합 경제의 파괴

    사회적 경제는 경제 영역에서 사회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국가와 시장이 아닌 시민사회가 경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시민의 요구를 반영한다는 데에서 매우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의 대안적 개념은 사회적 경제로 하여금 사회적 필요에 대응해서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참여와 협력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서 사회적 배제에 대응하여 시장과 국가에 대한 사회적 자원의 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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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 경제의 핵심이 바로 협동조합이다. 레닌을 포함한 볼셰비키들의 협동조합에 대한 입장은 전시 공산주의 시기까지도 큰 변화가 없이 부정적이었다. 레닌은 협동조합을 지주와 농업 부르주아 계급에의 이익을 보장하는 자본주의의 작은 섬으로 간주했고, 특히 생산협동조합, 특히 소농들의 조합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집산주의가 아닌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18년 이후 레닌은 돌연 협동조합에 대해 '낡은 자본주의 국가의 유산인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칭송하기 시작했다. 특히 신경제정책이 본격화되면서 그는 미래 사회주의체제 하에서 사회는 단일한 국가적 협동조합체계로 변화될 것, 즉 사회주의 사회란 하나의 거대한 협동조합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심지어 1923년 초에 그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부르주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승리가 이루어진 곳에서 나타나는 개명된 협동조합원들의 체제야 말로 사회주의 체제라고 주장했다. 신경제정책을 협동조합에 적응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신경제정책 하에서 모든 인민들을 단일한 협동조합으로 끌어들이는 보편적 협동조합체계를 지향했다.    그러나 점차로 비(非)국가, 시장 부문이 확대되자 공산당 정부는 협동조합은 아직 자본주의적 요소가 존재하는 일부 경제 부문에서의 기업적 요소가 착취를 확대할 수도 있는 근거지라고 규정하고, 협동조합과 같은 이른바 '소규모 경제 단위'에 대해 반대하며 모든 경제 부문에서의 기능과 역할을 국가가 통제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협동조합의 국유화가 시작되었다. 협동조합의 재국유화 이후 국가 권력기구들과 관료조직들은 경제의 모든 부문을 통제하게 되었고 스탈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기 이전 이미 협동조합은 본연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4.4. 국가소멸론의 소멸: 변질의 시작

    고도로 발달된 산업자본주의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마르크스-엥겔스의 예측과는 달리, 후진 농업 국가인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레닌은 마르크스-엥겔스의 국가론을 변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레닌은 과도기 단계에 수립된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는 소멸 이전에 잠정적으로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존속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즉 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이 곧 부르주아 국가가 철저하게 파괴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 국가의 폐지와 공산주의 사회 건설 사이에 장기적으로 존속하는 국가 형태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프롤레타리아트 국가의 기능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소수의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한 통제를 실행할 수 있도록 엄호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견고하게 조직된 혁명 정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원칙의 후퇴는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했다. 백군과의 내전, 제국주의 간섭군의 원조, 생산과 경제의 철저한 붕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유럽에서의 혁명의 좌절 속에서 사적 소유와 시장의 폐지와 그 대안으로서의 사회적 소유는 곧바로 국유화와 동일시하는 상황으로 치달으며 마침내 전 공업의 국유화가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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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었다. 이어서 경제가 붕괴된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의 직접적 정치, 경제를 아우르는 자치 권력은 현실에 맞지 않는 소규모 분산 경제, 혹은 무정부주의로 폄하되었으며, 따라서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소비에트는 놀라울 정도로 급속하게 그 기능을 상실했다. 그 대신 생산에 있어서 테일러주의가 찬양되었으며, 잠시 동안의 끔찍했던 소위 ‘전시 공산주의’ 실험 이후 생산력 복구를 위해 시장 기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구 차르 체제 관료, 공장 경영주들이 복귀하기에 이르렀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적인 통제 장치가 없는 강제적 국유화 이후 진정한 사회적 소유와 생산자 직접민주주의 실험의 폐기가 이후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되는 주원인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정반대로 레닌이 주도하던 러시아 혁명 초기 단계에 이미 일당-국가가 완벽히 시장요소를 제거한 채 시민사회와 경제 전반을 지배하는 체계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발전이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이러한 형태의 국유화 경제는 더더욱 노동자 민주주의의 원칙과도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위에서 보았듯 시장을 완전히 제거하고 민주주의적 토론이나 국가의 계획으로 생산을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이 혁명 직후 실험 뒤에 곧바로 깨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다른 한 편으로는 대규모 경제, 집산적 경제, 중앙 집중적 경제를 외쳤지만, 실제로는 혁명 직후 곧바로 그것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는 사실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어찌 되었든 신경제 정책이라는 실험의 결과도 제대로 보지 못 한 채 레닌이 사망하고 이후 스탈린의 집권 과정 속에서 문헌상의 상호 모순적인 부분들은 수도 없이 발견되지만, 그러한 문헌들과는 달리 실제 역사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향후 소련 사회주의 체제가 갖게 되는 핵심적 특징들은 이미 혁명 초기에 불가피하게 공고화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간섭군의 침입, 백군과의 내전, 선진 노동자들의 전선 복무 및 사망, 부르주아 계급의 사보타지, 경제 붕괴 등등 혁명을 파괴하려는 세력들도 초기 사회주의 체제 정책 수립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요인들은 이후 확립되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본질과는 커다란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5.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포스트 사회주의 러시아

    5.1. 사회주의 국가들의 세계자본주의체제로의 재편입과 위계적 분화

    위계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된 이후 말 그대로 공식적으로도 공간적 확대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으로는 동유럽 지역과 구 소련 지역의 국가들이 확연하게 대조되는 구 사회주의 체제 국가들은 서구 중심부 국가들의 이해에 따라 시장을 매개로 한 철저한 분업구조가 형성되면서 중심-반주변-주변부로 변화, 분화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즉, 체제 붕괴 이후 중부와 동남부 유럽의 옛 사회주의 국가들 역시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입되는 과정 속에서 과거의 지위를 상실하고, 다시 반 주변부 혹은 주변부 국가의 위치로 강제되었는데, 특히 금융세계화 시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서구 금융자본으로의 종속 현상이 두드러졌으며 그에 따라 국가자율성이 크게 제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사회주의 국제체제로부터 이탈하여 국민 국가 형태의 복귀한 것처럼 보이는 과정은 한 국가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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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의 자립화가 아니라 세계시장의 편입 형태로 나타났으며, 이들 국가에서의 신자유주의화, 즉 자유화, 사유화, 탈규제, 노동유연화 과정은 곧 불균등한 세계자본주의 경쟁질서로의 종속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 주변부 혹은 주변부로 전락한 중동부 유럽 및 구 소련 지역 국가들에 있어서 서구 자본에게는 선별된 자본, 지역, 계급의 발전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은 역내 국가들 간의 불균등한 발전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고, 계급, 지역, 민족 등 수많은 단위에서의 갈등과 분쟁을 낳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의 확산 속에서 더욱 노골화된 신자유주의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반)주변부에 대한 중심부 자본의 지배 혹은 선택적 편입을 더욱 강화하려 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시기 서구 국가들 역시 신자유주의 국가로 변모함으로써 신자유주의의 강제는 한층 더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이미 서구 중심부 국가들이 소위 탈산업화, 정보화 혁명으로 산업화 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발전을 보이고 있을 때, 모순적이게도 이러한 경향을 따라잡기 위해 경제적 침체기 속에서도 사회주의 국가들은 소비재와 선진기술을 수입하기 위해 더 많이 석유와 가스를 비롯한 원자재나 농업 생산물들을 수출해야 했으며, 이러한 방법으로도 정체와 후퇴를 거듭하던 경제를 되살릴 수 없었던 이들 국가들은 1970년대부터 서구 국가와 IMF 등 국제금융기구로부터의 대규모 차관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이 강화되는 가운데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소련을 포함한 중동부 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서구 자본에 대한 의존성과 종속성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이제 다시 서구의 주변부 혹은 반주변부로서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사실상 편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이들 지역 국가들은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일부가 됨으로써 여타의 반주변부 혹은 주변부 국가들과 유사한 사회경제적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진영 내 국가 간 계층화, 분화가 진행되었다. 한 편에는 세계 시장에 직접 통합되어 서구 중심부 자본의 소유 혹은 그들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하청 기업 집단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는 위기에 봉착한 식량 등 1차 산업과 에너지를 중심으로 하는 원료 수출 중심 경제가 광범위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체제전환 이후 공히 이들 국가들은 심각한 경제적 쇠퇴를 경험했지만, 일부 국가들은 서구로의 경제적 의존과 종속을 스스로 받아들임으로써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로 편입을 시도해 왔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주변부 혹은 반주변부로 분화하는 가운데 이 지역의 후진성이 중심부의 발전을 위한 조건으로 변화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체제 붕괴로 인한 국가 경제의 파산 극복과 사회주의 경제권의 연결망의 파탄으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시장 경제 체제의 창출은 불리한 조건 속에서의 국제 분업구조로의 적극적인 편입의 불가피성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초기 자본주의와 유사한 상황 속에서 내수시장의 확대보다는 대대적 사유화 등을 통한 해외 자본의 유치 및 중간재와 원료 수출 중심 경제 구조로의 적극적인 전환만이 위기를 극복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시장 경제로의 전환과 세계자본주의체제로의 재편입을 통한 번영의 약속은 정확히 그 반대의 과정으로 나아갔다. 오히려 서구 중심부 국가들과의 격차는 점점 더 커져갔다. 거의 모든 국가들에서 서구 중심부 국가들, 특히 서유럽 국가들로의 의존은 한층 더 급격하게 심화되었다. 결국 사회주의 시절 잠시 중단되었다가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한층 더 큰 규모로 나타나게 된 종속 현상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결국 비공산 민주주의 체제와 시장 경제로의 복귀란 이제 무조건적으로 서구 경제에 의존했었던 공산주의 시대 이전의 주변부 자본주의 구조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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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역 모든 국가에서 국제금융기구들은 급속한 사유화, 비공식 경제와 부패의 확산, 빈곤의 여성화, 노동조합의 약화, 두뇌 유출, 주변부화를 강요하는 경제 통합, 높은 수준의 실업율과 노동이주 등을 동일하게 강요해 왔다. 특히 초국적 자본의 기획에 따라, 상대적으로 중부 유럽 국가에서는 점차로 자본 집약적, 기술 집약적 산업이 증가한 반면, 동남부 유럽 국가에서는 자원과 식량 부문 혹은 중소규모 기업으로의 투자 집중에 따라 노동 집약적 산업이 증가하게 되었다. 어느 지역이든 노동 시장은 유연화되었고, 임금은 상대적으로 낮아졌으며, 노동 조건은 불안정해지면서 실업과 빈곤이 만연하게 되었는데, 그 정도나 규모는 동남부 유럽이나 구 소련 내 저발전 국가들이 더욱 심각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세계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의 편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온 결과, 거의 모든 이 지역 국가들의 경제는 수출 중심 경제 구조가 확대되었는데, 이러한 수출 중심 경제 구조는 외국 자본이 가장 깊숙이 침투한 금융 부문을 비롯한 확고한 외국 자본의 통제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 현상의 핵심인 금융의 지배 이 지역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서구 금융자본은 이 지역 은행들의 압도적 다수를 소유함으로써 서구 자본의 지배를 확고히 하고 있다. 결국 서구 자본에 대한 종속은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1990년대 이후 자동차, 제조업, 전자제품 등 중동부 유럽의 주요 산업들은 해외 자본이 소유하게 되었고, 글로벌 상품 사슬에서 일부만을 담당함으로써 경제적 성과들은 이들 국가들에 있어서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또한 그러한 투자가 집중되는 산업은 경공업 분야로써, 서구의 초국적 기업 네트워크에 있어서 하청 관계에 입각한 초국적 노동 분업 구조로 재편되었고, 사회주의 시절 발전했던 중공업 부문은 몰락하게 되었다. 특히 마치 서구 자본주의의 주변부적 역할과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러시아 역시 국가 사회주의체제의 붕괴 이후 세계자본주의체제로 재편입되는 과정 속에서 과거의 지위를 상실하고, 다시 원료 공급지와 같은 준 주변부 혹은 주변부 국가의 위치로 강제되었다. 이렇듯 ‘민주주의와 세계 시장 경제로의 통합’이라는 이름 하에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 중심부 국가의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 실현은 이미 이러한 국가들 내에서의 정치, 경제 과정에 침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1980년대에 폴란드, 헝가리, 구 유고슬라비아 등 상당수의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외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IMF와 서구 금융자본의 급진적 시장도입 프로그램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융자본은 체제전환 이전에 상업차관의 형태로 구 소련에도 유입되었는데, 1991년 당시 이미 그 액수가 628억 달러에 달했다. 이렇듯 IMF를 비롯한 국제금융기구들과 미국 정부, 서구 전문가 등의 권고에 따라 신자유주의 체제전환 방식을 공식적으로 채택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채권자인 국제금융자본은 급격한 시장경제 도입은 물론 그를 위한 급진적인 구조조정을 강요했다. 특히 국유기업의 사유화를 통한 기업의 사적 소유로의 전환은 자본시장과 노동시장 등을 창출하여 자신의 축적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국제금융자본은 사유화와 국제자본의 자유화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 과정 속에서 서구 금융자본은 각국의 관료집단들과 결탁하여 사유화, 국채매입, 금융자금 도피 과정에서의 막대한 수수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득을 얻었다. 동유럽과 구 소련 국가들은 헤지펀드와 기관투자자 등으로 구성된 금융자본에게 고수익을 보장해 줌과 동시에 금융자본의 항상적인 취약성에 노출시켰다. 국제투기자본들은 사회주의 시절부터 누적되어 온 외채 이자 상환과 경제 발전을 위한 자본 조달 수단으로 발행했던 러시아 국채에 대대적으로 투자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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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에는 러시아 정부가 발행한 채권에 헤지펀드 등 민간 투자자들이 집중 투자하면서 주식과 채권으로의 외국인 포트폴리오 투자가 급격히 늘어났다가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잠시 주춤한 이후 유가 등의 영향으로 러시아 경제가 살아나자 국제금융자본은 부채의 일부를 러시아 유망기업들의 지분과 교환하는 출자전환 방식을 통해 다시 대대적으로 러시아 자본시장에서 주식투자를 집중하면서 러시아 자본시장에서 금융축적을 강화하고 있다. 한편 체제전환 국가들에서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통해 자본을 조달받고 있는 등 은행이 기업의 최대 이해관계자라고 할 수 있는데, 서구 금융자본들은 1990년대 심각한 경제적 혼란 속에서도 각 국가의 은행 부문에 적극적인 자본 참여를 확대했다. 그 결과 현재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에서 거의 대부분의 은행들이 외국인 소유임을 알 수 있다. 해외 금융 자본의 유입을 일정정도 통제해 온 러시아의 경우, 상대적으로 외국인 소유 은행 숫자는 적은 편이지만, 그 대신 국내 타 은행들보다 몇 배나 높은 수익률을 내고 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서구 중심부 금융자본은 사유화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여 체제 전환국들의 대규모 기간산업 기업들의 가치를 크게 저평가하여 헐값으로 구입하였다. 세계은행과 IMF은 물론 EU, USAID 등 수많은 서구 국제기구들은 앞 다투어 사유화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초국적 금융 자본들을 위한 법과 제도들 만들었으며, 이들 국가들의 지배 엘리트들로 하여금 짧은 시간 안에 기업들을 사유화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하며 세계 경제에 편입할 것을 강요했다. 특히 미국은 러시아의 기업 규모가 대규모 복합 기업들이며, 무엇보다 석유, 가스 등 에너지 관련 기업들인 경우가 많아 러시아 내 신자유주의 관료들과의 결탁을 통해 대대적인 원조 및 투자를 감행했다. 이렇게 서구 금융자본들이 사유화에 커다란 관심을 가진 데에는 기업 자체의 소유 지분 확보를 통한 체제 전환 국가들의 경제 장악 외에도, 이와 더불어 사유화가 완료되어야만 은행과 주식시장에서의 대출, 주식매매를 통해 자본이득을 획득할 수 있다는 데에도 목적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은행은 기업의 주식을 소유하면서 기업을 지배하고 있는데, 금융자본이 체제전환 국가의 은행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금융자본이 체제전환 국가들의 기업을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대규모 기업들의 경우 외국자본이 최대 지분을 획득하였고, 핵심적 산업들이 초국적 자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렇듯 러시아를 비롯한 체제전환기 국가들은 여타의 비중심부 국가들과 유사하게도 국내 계급구조와 대외적 종속의 상황 속에서 국제적 분업의 역학 관계를 국내에 전달하고 이러한 역학에 따라 국내 계급과 정치권력을 재생산하는 대리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거대한 외부로부터의 변화의 강제 속에서 탄생한 신생 자본주의 러시아 국가는 자본을 집중시키는 과정을 진행하였고, 이러한 자본 축적의 과정은 생산이 아니라, 생산 외적 영역인 상업과 금융, 그리고 범죄적인 비공식 부문에서 이루어졌다. 이 과정 속에서 흥미롭게도 동시에 금융 산업을 통해 축적을 이루면서 매우 짧은 시간에 금융자본주의에 적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푸틴 정권의 등장 이후 중동부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러시아는 금융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는 세계자본주의체제에 정면으로 반하는 정책을 취하지는 않으면서도 서구의 세계 지배 전략에 맞서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서구와 갈등을 야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고유가에 힘입어 경제력을 회복하면서 옛 소련 국가들을 다시 끌어들여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광대한 지리적 이점, 에너지 자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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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 고숙련 저임금 노동력을 특징으로 하는 거대한 배후지로 삼아 또 다른 헤게모니 국가로 등장하려 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그에 이은 일련의 사태는 이러한 대립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6. 포스트 사회주의 러시아 자본주의체제의 특징 6. 1. 노멘클라투라 자본주의에서 올리가르히 자본주의로(1991-1999)

    세계자본주의체제의 비중심부 지역들은 물론, 러시아를 비롯한 체제전환기 국가들에서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역사적인 맥락은 서구와는 완전히 달랐다. 러시아는 국가가 지배적으로 소유권을 행사하는 사회주의 국가였고 그로부터 급격하게 탈피한 상태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체제전환을 선언한 당시 민간영역은 이제 생겨나기 시작하였으며, 자본가 계급 역시 막 형성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시장제도는 거의 무(無)에서 구축되어야 했다. 또한 서구에서는 자본가 계급이 신자유주의의 지배적 주체였던 반면, 러시아에서는 국가가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주체였다. 개혁 초기 단계에서 국가는 혁신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했다.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서두르던 러시아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의 다른 국가들처럼 자본축적의 시기 신자유주의 개혁 실행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러시아 국가는 자본축적을 가속화하기 위해 시장을 재창출하고 국가로부터 시장을 자유롭게 하며, 러시아를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에 재편입시키는 개혁에 착수했다. 옐친 시기 러시아의 급진적 개혁세력은 영미식 자본주의 모델에 기초하여 러시아 경제를 개조하는 기획이었다. 상품시장·자본시장·노동시장의 도입, 경제에 대한 정부개입의 최소화, 외국과의 경쟁에 대한 장애의 제거, 금융 안정화와 자유변동환율제 등을 포함하는 신자유주의 모델에 따라 러시아는 급진적 방식에 의한 체제전환, 즉 “빅 뱅(Big Bang)식” 체제전환 프로그램을 도입하였다. 이는 주요 서방정부와 국제기관(IMF, 세계은행, EBRD), 그리고 저명한 경제학자들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 이와 함께 다양한 서구의 지원프로그램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 특히 안정화, 자유화, 사유화 정책을 뒷받침하는 이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다. 1992년에 IMF와 옐친 정부 내 신자유주의 관료들의 주도로 시작된 소위 ‘충격요법’은 이러한 맥락에서 시작된 종속적 신자유주의 국가로의 전환의 시작이었다. 국제금융기구들과 옐친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개혁이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등의 채무국에 강요되었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그대로 도입한 것에 불과한 충격 요법이라는 급진적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 정책으로 인해 국가경제는 파탄에 이르렀고, 국영기업들이 대규모 파산을 맞았으며, 복지 제도는 붕괴되었고 실업과 범죄, 질병과 빈곤이 급증하였다. 생산력은 그 전 해에 비해 50% 이상 하락했으며, 경제안정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소비자 물가는 100 배 이상 증가한 반면, 임금 상승은 10 배에 불과했는데, 이는 실질임금의 급격한 하락은 물론, 연금 기금의 가치 상실 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IMF와 세계은행은 국가복지제도는 자체 재원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사실상 복지제도를 붕괴시켰으며, 국가가 지원했던 학교, 병원, 문화예술, 스포츠 등의 거의 모든 분야도 형식적으로는 국가소유로 남아있기는 했지만, 스스로 운영자금을 마련해야 하거나 내부에 사적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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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을 확대하도록 권고되었다. 범죄조직은 국가기구에 침투해 막강한 압력집단을 구성하면서 새로운 과두지배세력으로 성장했는데, 이들은 정부의 사유화 정책을 통해 국가자산을 헐값에 매입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들은 국가재산을 강탈하고, 막대한 자산을 해외로 은닉하면서 철저하게 국가를 약탈했지만, 국가는 철저하게 극소수의 신흥 과두지배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로 변모해 갔다. 이러한 가운데 일어난 루블화의 붕괴는 서구 국가와 자본이 러시아의 천연자원을 수탈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국내산업 보호정책이나 산업 활성화 방안 등의 정책이 부재한 가운데, IMF 등이 제시한 거시경제정책은 주요 재화의 수출과 수입에 있어서 규제를 철폐하는 등 철저한 자유화 정책이었다. 수입품들이 러시아 국내시장을 장악해 러시아의 주요 경공업 부문이 폐쇄되었고, 군산복합체를 비롯한 국가경제 핵심 부문에 대한 외국자본의 선취가 합작기업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국가예산으로 책정되어 있던 정부보조금이 동결되었고, 남은 예산은 IMF의 권고대로 외채를 상환하는 데 쓰이는 등 외채 상환 문제는 서구의 지원 이면에 있는 또 다른 모순적 상황이기도 했다. 해외로의 자본 유출로 러시아의 국제 수지 적자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러시아를 지원한다는 서구 국가들의 원조는 양도성 원조가 아니라 차관형식을 띤 금융지원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외채를 누적시키고 서구의 채권단이 러시아를 더욱 확실하게 통제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IMF의 경제 처방은 러시아에 외채상환을 강요하고, 러시아의 외채를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IMF식 경제 처방으로 인해 국가경제가 마비되면서 러시아가 차관에 의존하는 정도는 더욱 심해져 외채와 구조조정이라는 굴레에서 오랜 기간 동안 벗어나지 못 했다. 옐친 정권이 추진한 러시아의 시장경제화는 노멘클라투라-마피아 자본주의 혹은 올리가르히 자본주의라고 불린 독특한 러시아 자본주의를 낳았다. 즉 노멘클라투라로 불리는 구사회주의 시대의 엘리트와 마피아가 자본가로 전환하였으며, 그들 중에서 특별히 성공한 소수가 올리가르히(oligarch)로 불릴 정도로 압도적인 경제력의 집중을 가져온 것이다. 옐친 시기 러시아의 재벌은 주로 젊은 기업가가 정치인 및 관료와의 관계를 배경으로 하면서 은행 및 천연자원산업을 중심으로 하여 성장해 왔다. 이들은 주식소유관계를 통해 금융, 산업, 미디어의 3개 부문 에서 산하 기업을 늘려 왔지만 자원산업 이외의 제조업에는 거의 진출하지 않았으며, 금융투기와 국유자산의 탈취에 의해 자본을 축적했다. 올리가르히 개인의 부와 정치력은 일반 대중의 그것과는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범죄 집단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추측이 난무했다. 사유화조치와 더불어 구 국영은행의 일부를 사유화하는 조치와 상업은행들의 신규설립이 허가되는 등 금융부문에 있어서의 자유화와 사유화를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1988년에서 199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약 2000 여 개 이상의 신규 상업은행들이 설립되었고, 이러한 상업은행을 바탕으로 성장한 일부 금융자본가들은 1993년 대통령과 의회 간의 극심한 갈등으로 빚어진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 언론매체들과 기업들을 인수해 소위 ‘금융산업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거대 금융자본이 기업군을 거느리는 과두 지배 세력은 옐친 대통령의 재선이 위기에 봉착하게 된 1995년도에 옐친의 재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주식 담보 대출이라는 방식으로 에너지부문 기업들을 헐값에 사들임으로써 러시아 경제의 거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경제 영역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한 후 199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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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정치 영역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지지율이 8%에 불과했던 옐친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할 경우, 자신들의 불법적이고 범죄적인 국유재산 강탈행위에 대해 비판적인 공산당이 집권하게 됨으로써 생겨난 위기 의식과 안정적인 기득권 수호를 위해 옐친 재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이들은 막대한 정치자금은 물론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언론매체를 통해 공산당 집권을 저지하고 옐친 재선 성공에 직접적인 공헌을 했으며, 이들은 그 댓가로 이제 정부의 고위 요직까지 겸직하는 등 정치적 권력까지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올리가르히로 불리는 이들 과두 지배 세력들은 아직 러시아 정부를 움직이는 소수의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보호와 후원에 의존해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 대해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다. 초기에 이들이 정치 엘리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한된 영향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아직 자본주의적 체제가 확립되지 못 한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국가의 자본가 집단들과는 달리, 각기 다른 목적을 지닌 자본가들의 단순한 집합에 불과해 자본가 집단으로서의 단일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갖지 못 했던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1996년 대선을 계기로 국가와 올리가르히들 간의 관계는 이러한 종속적 관계에서 공생관계 혹은 자본의 우위적 관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 올리가르히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정책결정에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정도로 국가권력을 이용할 수 있는 위상을 갖게 되었다.

    6.2. 국가-자본 관계의 재편: 국가자본주의 혹은 국가주도 신자유주의(2000-현재) 1998년 8월의 금융위기는 올리가르히의 정치적 영향력을 급격히 감소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파산상태에 빠진 은행들이 생겨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러시아 정부의 모라토리엄 선언과 루블화의 대폭적인 평가절하 조치는 러시아 은행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 은행들의 파산이나 퇴출이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렇듯 러시아 금융시스템의 붕괴는 금융 부문에 기반을 둔 올리가르히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혔는데, 심각한 자금난에 빠진 기업들은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아 매입한 주식 지분들을 다시 정부에 양도하거나 매각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 속에서 이들은 정치권으로부터의 후원이나 지원을 절실히 요구하게 되었고, 금융위기 이후 국가와 올리가르히 간의 관계는 국가의 일방적인 우위로 전환되게 되었다. 그러나 푸틴은 자신이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오르고 그 권력이 공고화되기 전까지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푸틴의 전략적 전쟁이었던 2차 체첸 전쟁을 지지하는 여론을 조성하고, 2000년 대선에서는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등 올리가르히들 역시 정권 교체가 일어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들은 옐친이 후계자로 임명한 푸틴의 권력 정당인 ‘단합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푸틴을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국가와 올리가르히들과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 전망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과는 달리, 푸틴은 취임 직후부터 경제를 재건하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불법적 국부 강탈과 부정부패, 자금세탁, 조세포탈 등을 자행해 온 올리가르히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특히 과거 사유화 과정에서 부당하고 불법적으로 국가 재산을 획득한 올리가르히들을 단죄하고 다시 해당 기업들을 국유화할 것이라는 등 올리가르히들을 압박했다. 이 과정 속에서 올리가르히들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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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경제 영역에만 관심을 가질 경우 법적인 보호를 보장해 주는 방식으로 푸틴 정권은 올리가르히들을 길들였다. 이와 동시에 푸틴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통치 전략에 따라 올리가르히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반강제적으로 부과하여 거두어들임으로써 자본을 국가의 의지에 종속시키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종국에는 지방 권력과 올리가르히 사이의 유착은 한층 더 강화시키게 되는 결과를 가져 오기는 했으나, 푸틴은 중앙 권력의 강화를 위해 주지사와 공화국 대통령 등 옐친 시기에 극대화되었던 지방 정치 엘리트들의 지대 추구 행위와 중앙 정부에로의 막대한 영향력을 차단하는 조치들을 취했다. 이제 정치, 경제적 구조조정을 완료한 푸틴 정권은 옐친 시대 서구 국가와 금융자본, 그리고 국내 정치, 경제 엘리트에 의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던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급진적 체제전환 방식을 거부하고, 국가의 시장 개입과 자본 통제로 상징되는 비자유시장주의적 개발독재식 혹은 신자유주의에 반하는 경제정책을 도입하는 소위 ‘국가자본주의’ 모델을 도입한 것처럼 보였다. 한편 금융에 토대를 두고 형성된 러시아 대자본, 즉 금융산업집단(FIG)의 특수성과 그 규모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금융산업집단은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올리가르히들의 사적 이익을 위한 횡령과 부패가 만연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 하고 있었다. 반면 천연가스 생산과 수출, 석유생산 등에서 수위를 다투고 있을 정도로 국제에너지 시장에서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러시아는 에너지 가격 상승과 자원민족주의 확산, 그리고 미국 등 제 국가들의 에너지 자원 확보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에너지 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규정하고 기업을 국가에 종속시켰다.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부문과 같은 전략적 산업은 올리가르히와 같은 사적 자본에게 맡겨서는 안 되며, 국가가 에너지 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는 원칙은 물론 이 분야로의 외국자본의 과도한 허용을 제한해야 한다는 논리도 강조되었다. 이러한 기조 하에서 점차로 러시아 정부가 다수지분을 차지하면서 수직적으로 통합된 대규모 금융산업기업의 육성을 도모하였다. 특히 에너지 가격의 장기 상승과 자원민족주의의 확산, 그리고 미국을 위시한 제 국가들의 에너지 자원 확보 경쟁은 천연자원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필요성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이제 가즈프롬과 로스네프찌를 내세워 석유와 가스 부문의 기업들이 통제되었고, 그 외 전략산업들, 즉 군수산업에서는 로소보론엑스포르트, 원자력 산업에서는 아톰에네르고마쉬, 은행업에서는 브네쉬토르그뱅크 등의 국유화된 기업들을 통해 산업에서의 국가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또한 철도나 자동차산업 등에서도 국유화가 진행되거나 대규모 국유기업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또한 새로운 법안에 근거하여 나노산업 육성, 주택 및 유틸리티 부문 개혁, 원자력 부문 통합, 군수산업 발전 및 무기 수출 등을 위해 새로운 국영기업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념이 내세우는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의 제한이라는 것도 사실은 국가 개입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친시장적 국가개입을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 올바르다는 관점 하에서 볼 때, 푸틴과 올리가르히 간의 관계로 대변되는 국가와 자본 간의 관계는 대립적이거나 일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가 아님은 물론이며, 해외자본과의 관계 역시 국내 자본과 해외 자본 간의 대립으로 보는 것은 현재 러시아에서의 국가와 자본 간의 관계에 있어서 올바른 분석을 방해하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푸틴 정부는 이러한 구조 변화를 통해 경제 성장을 주도해 왔다. 옐친 초기의 노골적인 신자유주의식 급진 개혁 정책 기조는 단 수년 만에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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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화, 사유화, 탈규제화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확고히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사회는 심각한 변형을 겪었다. 특히 서구 주도의 신자유주의에 의문을 갖는 푸틴 정권의 등장 이후에 강력한 국가가 자본을 지배하면서 마치 신자유주의에 반하는 정책을 도입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분배적 측면이나 노동과 사회복지 영역 등 전 사회적 차원에서 민영화나 시장화, 유연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는 등 러시아는 명백하게 국가 신자유주의(state neoliberalism)적인 특성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7. 체제전환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화

    7.1. 체제전환의 사회경제적 결과

    러시아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들이 마련한 정책적 틀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전 세계 모든 지역의 시장경제의 모델로 생각하는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와 같은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근본주의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었다. 이들은 미국식 자유시장제도가 보편화되면 전 세계의 번영이 촉진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러한 기조 하 러시아에 도입된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충격요법이라고 할 수 있는 가이다르 프로그램은 가격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화가 핵심이었다. 거래 가능한 재화의 90%에 대해 가격 통제가 철폐됨으로서 가격은 무려 250% 상승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50% 정도만 인상되었으며, 이로 인해 경제의 대부분은 소수의 독점 기업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이 소수의 옛 국영 기업 경영진과 같은 이들은 다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 반면, 대다수의 노동대중들은 빈곤층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1992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유화는 1994년 말까지 러시아 대규모 및 중규모 산업기업의 3/4를 사유화함으로써 러시아 국내총생산의 50% 이상이 사적 부문에서 생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구의 강력한 지지 하에서 극소수에게만 사유화의 혜택이 돌아가고 압도적 다수를 소외시키는 특권계급을 위한 사유화가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처음에는 외부자들로부터 내부자들인 경영진과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저항하여 전체 기업 중 70% 정도의 기업에서 이들 기업내부자들이 주식회사로 전환되는 과정 속에서 지배 주주가 되었지만, 구 소련 자산의 개인의 자산으로 변화가 완료된 이후부터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 소수의 경영진들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노동자들은 다시 권리를 잃게 되었다. 이 외에도 거시 경제 안정화 정책이라는 미명 하에 긴축 재정을 강화하고, 각종 보조금을 삭감했으며, 사회복지 예산을 크게 줄임과 동시에 복지의 시장화, 상품화, 민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사회의 위기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체체전환기적 특징을 갖는 각종 불안정, 불완전 노동 형태가 급증했고, 은폐된 실업이 만연하게 되었으며, 비공식 경제의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 1991년 12월에서 1996년 12월 사이 소비재 가격은 무려 1,700 배나 상승했다. 그 결과 러시아 인구의 80%가 어떠한 형태의 저축도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저소득 빈곤층은 인구의 30%, 약 5000 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였고, 그 중에서도 극빈층도 급증하여 약 5-10%, 즉 최대 1500 만 여 명은 극심한 궁핍과 영양실조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반대로 이 기간 극소수의 새로운 부자들인 ‘신 러시아인’들은 인구의 3-5 % 정도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월평균 소득은 무려 최대 10만 달러에 이르기도 하는 등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1996년 당시 러시아 국민들 중 약 1/4 정도가 공식 최저생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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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준인 70 달러에도 못 미치는 수준에서 살고 있고, 이들의 실질 소득은 40% 이상 하락했다.(일류신) 인구의 70 % 정도가 월 124 불 이하의 소득을 얻는 데 그쳤고, 부유층과 저소득층 간의 소득 비율은 1990년 4.4에서 1996년 13으로 증가했다. 공식적인 실업률은 1996년 당시 9.5 % 정도로 여타의 체제전환기 국가들의 실업률에 비해 의외로 높지 않다고 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이는 실제 수치보다 크게 낮게 계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낮은 수준의 실업 수당으로 인해 많은 실업자들이 공식 등록을 꺼릴 뿐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들이 조세 및 기타 지불비용을 줄이기 위해 장부상으로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것처럼 되어 있었지만, 이들이 실제로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고 있지는 않아 은폐된 실업이 만연하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급 강제 휴가 상태에 있거나 불완전 단기 고용 상태나 임시직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급속하게 증가한 비공식 경제 영역에서 비공식 노동에 종사하는 일이 만연하게 되었다. 국제노동기구에서는 이러한 은폐된 실업에 속하는 사람들이 인구의 1/3 정도라고 예측했다. 아울러 정부는 수많은 피고용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