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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에서 우는 삶의 지혜_ 목이 막힐까 먹지 않 는 다 (因 噎 廢食 70 • 상장 2012. 3월호

고사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목이 막힐까 먹지 않는다(因 噎 廢食 · 고사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_ 목이 막힐까 먹지 않는다(因 噎 廢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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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고사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목이 막힐까 먹지 않는다(因 噎 廢食 · 고사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_ 목이 막힐까 먹지 않는다(因 噎 廢食

고사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_ 목이 막힐까 먹지 않는다(因 噎 廢食

70 • 상장 2012. 3월호

Page 2: 고사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목이 막힐까 먹지 않는다(因 噎 廢食 · 고사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_ 목이 막힐까 먹지 않는다(因 噎 廢食

명(明)의 이현(李賢)은 등(鄧) 땅 사람이다. 향시(鄕試)

에 수석을 하였고 이어서 진사에 올랐다. 고공낭중(考功

郎 中)이 되어서《문선(文選)》을 수정하였고,북정(北征)

에 따라 갔다가 군사가 패하자 탈출하여서 돌아왔다. 병

부 우시랑(右侍郎 )이 되었다가 호부를 거쳐서 이부로 자

리를 옮겼다. 본받을 만 한 옛 제왕의 일을 모 은 〈〈감고록

(鑑古錄)》을 편찬하여서 올렸다.

영종(英宗)이 복위한 뒤 그에게 한림학사를 겸하도록

맡겨 그는 문연각(文淵閣)에 입직하면서 서유정(徐有

貞)과 국가의 주요업무에 참여하였고 이어서 상서(尙書)

에 승진하였다. 영종은 6대,8대 황제이다. 선종(宣宗)의

맏아들로서 외적의 침입이 있자 친정(親征)에 나섰다가

패하여 북쪽으로 피했다. 선종의 둘째 아들 성왕(J [王)이

감국(監國 : 권한대행)을 하다가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곧

7대 경제(景帝)이다. 그 뒤 영종이 돌아오자 석형(石亨),

서유정 등이 맞아들여서 복위시켰던 것이다.

이현은 몸가짐이 장중하고 아뢰는 일이 시의(時宜)에

맞았으므로 황제가 깊이 신임하였다. 산동(山東)에 기근

이 들자 내탕금(內帑金)을 풀어 구호하려고 서유정과 이

현을 불러 물으니 서유정이 ‘내탕금을 풀면 중포(中飽)

가 많습니다.” 하였다. 중포’ 란 국가에서 인민에게 내린

내탕금을 아전이 중간에서 빼돌려 사복(私腹)을 불린다

는 뜻이다. 이현이 “중포를 우려해 앉아서 백성이 굶어 죽

는 것을 본다면 ‘목이 막힐까 보아 먹지 않는 것(因噎 廢

食)’ 과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내탕금을 증액하라고 명

하였다.

석형과 조길상(曹吉祥)이 서유정과 권력을 다투었는데

모두 이현을 꺼렸다. 어사{御史)가 석형과 조길상을 탄핵

하였는데 이들은 서유정과 이현이 뒤에서 조종한 일이라

의심하고 황제에게 참소하여서 두 사람은 구속이 되 었다.

마침 바람과우레의 이변이 생겨서 석방되어 이현은복건

(福建)의 참정으로 좌천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왕고

(王翱 )가 이현은 크게 쓸 만한 사람이라고 건의하여서 이

부좌시랑이 되었다가 다음 달에 상서에 복귀하여 전처럼

내각의 일을 맡아보았다. 석형은 황제가 그를 두텁게 신

임하자 화가 났으나 어쩌지 못하고 짐짓 사귀는 척하였

고,이현도 감정을 누르고 부름이 없으면 들어가지 않았

다. 그러나 임금은 그를 더욱 가까이 하여 하루가 멀다 하

고 그를 불러들이므로 석형의 마음은 미움으로 들끓었다.

이 때 황제도 석형과 조길상의 발호를 싫어해서 좌우를

물리치고 이현에게 “저들이 정사에 간여해서 지방에서

올라오는 문서가 그들 손에 먼저 들어가니 어쩌면 좋겠

소?” 하고 물었다. 이현이 “폐하께서 독단(獨斷)하시면

그들에게 붙는 무리가 절로 없어질 것입니다.”하였다. 황

제가 “전번에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더 니 얼굴에 핏발이

서더군.” 하자 이현이 “시나브로 제재하셔야 합니다.” 하

였다.

석형,조길상의 기세가 치솟자 이현은 직설적인 언사를

피하고 조용히 논하고 응답하며 제재할 방도를 아뢰곤 하

였다. 석형이 죄를 받게 되었는데 황제가 이현에게 그의

전횡에 관해 물었다. 이현이 “수레를 맞아들여 복위시킨

일은 잘했으나 문서가 그 손에 들어가는 것은 후세에 알

릴 수 없는 일입니다. 천자의 권력은 폐하의 고유권한입

니다.” 하였다.

이현의 독대(獨對)는 한두 번이 아니 었으며 독대할 때

마다 오래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내보냈다.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를 불러서 가부를 물었고 혹 내시를 보내 묻기

도 하였는데 이현은 전체적인 체제에 힘을 썼다. 인재를

아끼고 언로信路)를 트는 일에 더욱 힘을 기울였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전제(專制)를 병통으로 여기지 않았다.

권세를 부리던 문달(門達)이 죄를 받아 유배되었는데

그의 무리가 은밀히 투서하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이

현을 얽어댔다. 황제는 위사(衛士)를 보내 이현의 집을

지키고 드나들 때는 호위하게 하였다. 성화(成化) 2년

(A.D. 1466)에 아버지 상을 당하자 기복(起復 : 상중에 나

와 집무하게 함)을 명하였다. 그해 겨울에 59세로 생을 마

쳤다. 황제는 그의 죽음에 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애도

하였고 증직을 하고 시호를 내렸다.

이현은 할 말은 모두 하였다. 경제가 죽자 왕후(汪后)

를 순장(殉葬)하려고 하다가 이현의 말을 받아들여 중지

하였다. 2대 혜제(惠帝)의 작은 아들이 60년씩이나 연금

(軟禁)이 되자 영종이 가엾게 여겨 이현에게 물어서 풀어

주었다. 명산대천(名 山大川)에 제사 지내는 일이 밤에 있

어서 편치 않아 대행시키려 하자 이현이 선조의 훈계를

들어 말하여서 몸소 행하게끔 하였다. 그리고 내탕금에

여유가 생기면 사치스런 생각이 움터서 토목(土木)이나

여악(女樂)에 관심을 갖게 된다며 빈민의 구제와 병사를

돌보아야 한다고 아뢰어 내탕금을 풀어 구제한 일이 매우

많았다.

이현은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 위기를 넘기면서 소신을

펼 수 있었고 임금을 바른 길로 이끌었다. 국정에 깊이 참

여하면서도 교만하거나 치부를 하지 않았고 바른 길만을

추구하였다. 한 사회의 기강과 건전한 발전은 관료와 공

무원이 공직자의 윤리와 규범을 잘 지키는 데 달려 있다.

우리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하는 말이 있

듯이 인열폐식(因噎 廢食)은 일을 하는데 작은 문제 때문

에 큰일을 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明史 卷176]

홍혁기 고전연구가

한국상장회사협의회·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