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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국립민속박물관은 해외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들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그들의 문화적 특성을 고찰하기 위해 1996년부터 한인동포의 생활문화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 . 그동안 중국, 중앙아시아, 일본, 하와이 등지의 조사를 통해서 한인들이 겪어온 여러 가 지 어려움과 고통을 현지조사를 통해서 생생하게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인동포의 생활문화에 대한 조사는 해외에 살고 있는 한인과 우리들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생각합니다. 금년에는 멕시코 지역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조사가 실시되었습니다. 다른 지역의 한인들 이 모두 암울했던 시기에 조국을 떠나서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했던 것처럼 멕시코의 한인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우 리나라를 떠나야 했던 초기의 한인이주자들은 지금까지 문화와 언어가 전혀 다른 지역에 서 힘겹게 새로운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특히 우리의 무관심으로 인해서 멕시코의 한인들 은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채 오랜 기간동안 잊혀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멕시코의 한인 들의 생활문화에 대한 조사가 이번 기회에 실시되어 이들의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의의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멕시코로 이민 간 초기의 한인들은 유카탄 지역에서 경제적 곤란을 견디지 못하고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상당수의 한인들이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역인 티후 아나로 이주하여 오늘날까지 한인사회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들이 오랫동안 한국과 교류가 단절된 상태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거의 한국어를 잊어버리고 살았지만 아직도 이들의 생활에는 한국의 문화요소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보면 문화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됩니다. 특히 내년은 멕시코의 한인들이 이민 100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이민 100주년을 맞이 하여 멕시코 초기 이민자의 후손들의 생활상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획득하고 새로운 시각 으로 이들의 생활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더욱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번 조사를 계

발간사efw.nfm.go.kr/media/book/pdf/RF071_2004MXAL.pdf · 둘째, 멕시코 한인사회 연구는 문화변동, 문화접변, 공동체적 적응 등의 주제와 관련해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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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간사

    국립민속박물관은 해외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들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그들의 문화적

    특성을 고찰하기 위해 1996년부터 ‘한인동포의 생활문화’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

    다. 그동안 중국, 중앙아시아, 일본, 하와이 등지의 조사를 통해서 한인들이 겪어온 여러 가

    지 어려움과 고통을 현지조사를 통해서 생생하게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인동포의 생활문화’에 대한 조사는 해외에 살고 있는 한인과 우리들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생각합니다.

    금년에는 멕시코 지역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조사가 실시되었습니다. 다른 지역의 한인들

    이 모두 암울했던 시기에 조국을 떠나서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했던 것처럼

    멕시코의 한인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우

    리나라를 떠나야 했던 초기의 한인이주자들은 지금까지 문화와 언어가 전혀 다른 지역에

    서 힘겹게 새로운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특히 우리의 무관심으로 인해서 멕시코의 한인들

    은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채 오랜 기간동안 잊혀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멕시코의 한인

    들의 생활문화에 대한 조사가 이번 기회에 실시되어 이들의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의의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멕시코로 이민 간 초기의 한인들은 유카탄 지역에서 경제적 곤란을 견디지 못하고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상당수의 한인들이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역인 티후

    아나로 이주하여 오늘날까지 한인사회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들이 오랫동안 한국과

    교류가 단절된 상태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거의 한국어를 잊어버리고 살았지만 아직도

    이들의 생활에는 한국의 문화요소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보면 문화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됩니다.

    특히 내년은 멕시코의 한인들이 이민 100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이민 100주년을 맞이

    하여 멕시코 초기 이민자의 후손들의 생활상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획득하고 새로운 시각

    으로 이들의 생활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더욱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번 조사를 계

  • 기로 멕시코 한인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과 지원이 확대되어서 체계적인 학술연구와 더불

    어 문화교류의 장이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티후아나의 한인들은 인적․물적 자원의 이동이 빈번한 국경도시라는 특징 때문

    에 밀집된 주거지를 형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긴밀한 사회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지역보다도 조사에 노고가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티후아

    나의 한인들이 한국어를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관계로 현지조사를 하는 데에도 더 많은 시

    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아무쪼록 이런 노력이 좋은 결실을 맺어서 더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무더운 티후아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충실한 조사로 좋은

    성과를 거둔 조사단과 물심양면으로 조사에 협조를 해주신 티후아나, 멕시코시티, 메리다

    그 외 멕시코 각 지역의 한인들 그리고 멕시코 주재 한국대사관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을 드립니다.

    2004년 12월

    국립민속박물관장 김 홍 남

  • 서문

    2005년은 멕시코 한인 이민 백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이다. 1905년 천 여명의 조선

    사람들이 멕시코 남부 유카탄주의 에네켄 농장으로 이주하였다. 언어도 통하지 않은 전혀

    낯선 사람들의 지배와 전혀 경험해 보지 않았던 문화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계약농민으로

    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일을 했으나 계약이 끝난 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태평양과

    일제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이 그들을 가로막았고 팽개쳤던 것이다. 그들 중 살아남은

    자와 후손들은 유카탄에 정착하였고 일부는 과테말라, 쿠바, 멕시코 시티, 티후아나 등으로

    흩어져 갔으며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그 이래 100년 동안 고국과의 완전한 단절 속에서 그들은 현지화라는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 속에 원래의 민족적 문화전통과 정체성을 상실하는 과정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들 중 일부는 민족의식을 지키기 위한 눈물겹고도 처절한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최근

    에는 2세 3세들까지도 적극적으로 정체성 회복의 조직적 시도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시

    점에서 올해에 멕시코의 한인 동포에 대한 조사를 한 것은 의미가 심장하다.

    1996년부터 한국문화인류학회는 국립민속박물관의 용역사업으로 중국 길림성의 조선족

    동포에 대한 조사를 시작으로 하여 중국의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일본 관서지역, 중앙

    아시아의 우즈벡스탄, 카자흐스탄, 연해주, 그리고 미국 하와이의 한인 동포의 생활 문화의

    역사와 현실을 종합적으로 조사하는 작업을 매년 한 건씩 수행해 왔다.

    금년에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이 조사 사업을 맡게 되었다. 이 사업은 그 내용이

    나 연혁으로 보나 인류학자들이 주축이 되어야 실현이 가능한 것임에 틀림없으며 앞으로

    도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번 조사는 본 연구원 산하의 비교문화연구소가 주관

    하여 인류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수행되었다.

    조사원들은 이번 과제를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 속에서 가히 자기희생적인 자세로 해내

    었다고 본다. 한국과 멕시코 사이의 항공료 뿐 만 아니라 멕시코의 지역구조로 인하여 현

    지에서의 지역 이동에 드는 비용이 이미 조사비의 60%를 넘었다고 하니 불편한 여건 속

  • 에서 재정적으로도 고생을 했음이 역력하다. 무엇보다 멕시코의 한인들이 이미 한국어를

    거의 잊었고 스페인어 외에는 다른 언어사용 능력이 없기 때문에 조사원들은 이 지역에 대

    한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현지 언어 능력을 갖추어야 했다. 책임 조사원인 김세건 교수(강

    원대, 인류학)를 비롯하여 주종택 교수(순천향대, 인류학), 서성철 박사(재외동포재단 기획

    조사실 차장, 라틴 아메리카문학), 문남권 박사(한국외국어대학 중남미 연구소 책임연구원.

    국제관계학), 권봉철 멕시코국립대학 지역학박사후보생 등은 모두 멕시코 지역 사회와 민

    족과 문화의 전공자들로서 어려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주었다. 권숙인 교수(숙명여

    대. 인류학)는 일본지역이 전공이지만 이미 한국문화인류학회가 수행한 해외 한인동포 생

    활문화 조사 사업에 참여를 했던 경험을 살려서 남자 인류학자에 비하여 심층적 접근에 유

    리한 의식주 생활 부문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연구보조원인 송지영 석사(평화박물관건립추

    진위원회, 인류학)의 헌신적인 노고에 대한 감사도 빠뜨릴 수 없다.

    이번의 조사 보고서가 우리가 잊어버렸던 먼 이역의 동포를 다시 발견하고 그들 속에서

    우리의 역사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지구화 시대에서 한민족의 탈경

    계적 공동체를 위한 정책 수립에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멕시코 한인 동포의

    후예에 대한 이 조사는 또한 민족과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이 어떻게 변화와 지속의 역동적

    과정 속에 놓여지는가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심화하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끝으로 이 조사사업을 지원해 준 국립민속박물관 김홍남 관장과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

    사를 표한다.

    2004년 12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장 김 광 억

  • 차례

    발간사

    서문

    원색화보

    Ⅰ. 총론: 멕시코 한인들의 삶을 찾아서/ 김세건(강원대학교 ․ 문화인류학) ·· 17Ⅱ. 멕시코 초기한인이민 역사/ 서성철(재외동포재단 ․ 기획조사실) ················ 45Ⅲ. 지역사회의 구조/ 문남권(한국외국어대학교 ․ 지역학) ································· 73Ⅳ. 가족과 친족생활/ 김세건(강원대학교 ․ 문화인류학) ····································· 97Ⅴ. 직업과 경제생활/ 주종택(순천향대학교 ․ 국제문화학) ······························ 153Ⅵ. 식생활/ 권숙인(숙명여자대학교 ․ 일본학) ···················································· 169Ⅶ. 의생활 ․ 주생활 ․ 생활용구/ 권숙인(숙명여자대학교 ․ 일본학) ·············· 193Ⅷ. 언어생활과 한국교육/ 서성철(재외동포재단 ․ 기획조사실) ························ 217Ⅸ. 신앙생활과 의례생활/ 주종택(순천향대학교 ․ 국제문화학) ······················ 243Ⅹ.세시와 놀이/ 문남권(한국외국어대학교 ․ 지역학) ········································· 257

    연구초록

    Abstract

    Resume de Invetigación

  • 한인들이 도착한 유카탄의 프로그레소 항구에서 왼쪽부터 문남권, 김세건, 서성철, 주종택, 권숙인, 권봉철

    Ⅰ. 총론

    멕시코 한인들의 삶과 사회를 찾아서

    김 세 건(강원대학교 ․ 문화인류학과)

    1. 들어가는 말∥192. 멕시코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한인 이민사 개관∥21

    3. 멕시코 한인사회에 대한 연구∥254. 티후아나 한인사회의 형성과 그 특징∥26

    1) 티후아나의 역사지리적 배경∥26 2) 티후아나 한인사회의 형성 배경∥285. 조사단의 구성 원칙 및 연구인력∥29

    6. 조사 방법 및 연구일정∥327. 앞으로의 멕시코 한인사회 조사를 위하여∥42

  • Ⅰ. 총론 : 멕시코 한인들의 삶과 사회를 찾아서

    1. 들어가는 말

    본 연구는 국립민속박물관의 해외동포사회 실태조사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국립민속

    박물관은 8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진행된 한국의 주변 국가, 특히 중국과 구소련

    사회의 변화 속에서 한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 해외동포사회에 대한 심층적

    인 연구의 필요성에 따라 1996년부터 중국의 길림성을 시작으로 해외동포사회에 대한 현

    지조사를 매년 실시해 왔으며, 그 연구 성과는 해외 한인사회에 대한 기초 자료로써 큰 역

    할을 해왔다. 2004년 연구대상지로 멕시코 한인사회가 결정되었는데, 여기에는 멕시코 이

    민 100주년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크게 작용하였다. 국립민속박물관의 담당자에 따르면,

    2004년의 연구 대상지로는 이민 100주년을 맞이해서 수행되었던 하와이 한인사회 연구로

    인해 미루어졌던 일본 관동지역으로 계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민 100주년과 맞물려

    진행된 2003년 하와이 한인사회에 대한 연구 결과를 접한 주한 멕시코대사관이 하와이 이

    민과 함께 진행된 멕시코 한인사회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내부 검토를 거쳐

    2004년 연구대상지로 멕시코 한인사회가 결정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본 연구는 멕시코 한인사회, 특히 1905년 이민자들의 후손들의 생활

    문화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목표로 하였다. 해외한인사회1) 중에서 멕시코 한인에 대한

    연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먼저 멕시코 한인사회의 연구는 한민족

    의 이산(diaspora)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연구대상이다. 20세기 초반부

    터 시작된 멕시코 및 중남미로의 한인 이주는 한반도의 근현대사와 긴밀한 관련 속에 진행

    되었다. 라틴아메리카 제국가의 한인사회는 다양한 시기와 맥락 속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하와이에서 형성된 백금(白金)의 신화를 쫓아 1905년 멕시코 에네켄

    (henequén) 농장으로 떠난 사람들, 해방 후 분단과 독재정치로 인한 정치적 탄압 또는 경

    제적 궁핍을 피해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지로 농업이민 등을 떠난 사람들, 그리고 1980년

    대 이후 미국 수출 및 경제적 목적을 위해 진출한 사람 등이 라틴아메리카 한인사회를 구

    1) 현재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은 대략 600만 명 내외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해외동포는 전 세

    계에 걸쳐 거주하고 있으나 특히 몇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동포 다수가 거주하는 지역

    을 보면, 중국에 약 214만 명, 미국에 215만 명, 일본에 64만 명, 구소련에 55만 명, 중남미에 10만

    명, 캐나다에 17만 명 등의 순으로 나타난다(외교통상부, 2003 : 13).

  • 20 멕시코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성하고 있다. 이처럼 오래 전부터 한인들이 라틴아메리카로 이주해서 생활하기 시작했고,

    전 세계 해외동포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과 라틴아메리카 국

    가들 사이의 교류가 그다지 활발하지 못한 관계로 인해 라틴아메리카에 형성된 한인사회

    는 한국에서 크게 관심의 영역이 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멕시코 한인은 하와이 한

    인들과 더불어 초기 한국이민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멕시코 한인의 사회문화에 대한 연구는 무시되고 간과되어 왔다. 따라서 멕시코 초기 한인

    사회에 대한 연구는 하와이 한인사회와 더불어 한민족 이산의 초기 역사로 자리매김하는

    작업이며, 나아가 멕시코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한인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초창기의 한인사회가 현재까지 어떤 형태로 남아 있으

    며 어떤 변화과정을 거쳤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멕시코는 오늘날 한국과의 교

    류가 활성화되면서 한인사회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더욱이 남미지역의 경제가 악

    화되면서 오래 전에 남미로 이주했던 한인들이 멕시코로 유입되면서 한인의 수가 급격하

    게 증가하고 있다. 이런 실정에서 멕시코에서 초기의 한인사회가 오늘날의 한인사회와 어

    떤 관계를 갖고 있는 지를 살펴볼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즉 멕시코 나아가 라틴아메리카

    로의 한인 이민사 및 한인사회의 사회문화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위해 멕시코의 초기 한인

    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연구가 시급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둘째, 멕시코 한인사회 연구는 문화변동, 문화접변, 공동체적 적응 등의 주제와 관련해

    매우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한다. 19세기 후반, 기근과 궁핍을 피해 조국을 떠난 사람들과

    일제 식민지 시절 정치 망명길에 오른 독립 운동가들과 강제 징용자 등으로 이루어진 중

    국, 구소련, 일본의 한인사회, 그리고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떠난 초기 하와이 이민자 사회

    들이 일정정도 한인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 후손들의

    사회는 가장 많이 현지화(localization) 되었다. 멕시코의 초기 이민 1세대는 4년의 계약기

    간 동안 일을 한 후 귀향할 것으로 생각하여 고향에 가족을 두고 홀로 이민을 떠난 경우도

    많았으며, 현지에서의 생활도 굳이 서둘러 ‘현지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조국

    이 일제 식민지가 되면서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렸고, 또한 태평양이라는 지리적 거리가 더

    욱더 귀향의 장애로 다가오면서 한인들은 점차 멕시코 사회로 동화되어 갔다. 이런 점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현지에서 태어난 2세, 3세에 이르러

    서는 멕시코 현지화가 더욱더 가속화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멕시코 한인사회는 현지

    문화와의 접변을 통해 어떤 문화적 요소들은 지속되고, 변모되고, 또 완전히 소멸되어 가

    는 등에 대한 중요한 사례를 제시해 줄 것이다.

  • Ⅱ. 멕시코 초기한인이민 역사 21

    마지막으로 멕시코 한인들의 사회문화에 대한 연구는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멕시코 사회

    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는 멕시코에 대

    해 찬란했지만 이미 과거지사가 되어버린 아스텍, 마야 등 고대문명의 땅, 춤과 음악, 마약,

    빈곤, 게으름, 부정부패, 제 3세계, 후진국, 축구 등의 이미지를 덧씌운다. 이런 이미지에는

    가치평가가 대입되고, 이는 사람들의 행동과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미지는 일순

    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의 산물이다. 또한 이미지, 상징, 담론은 그것의 생산

    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조직화하고 나아가 재분배하는 일련의 사람들의 권력관계의 산물

    들이다. 따라서 멕시코에 대하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이러한 권력관계의 산물

    임에는 틀림없으며, 이는 이민 등과 같이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만났을 때 더욱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민은 개인 또는 집단의 물리적 공간이 단순하게 지리

    적으로 이동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들 인간이 담지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법

    적, 종교적, 사회문화적 의미 등이 함께 하는 총체적인 사회현상이다. 따라서 이민에는 필

    연적으로 문화적 충돌이 수반되기 마련이고, 이 충돌의 지점에서 서로에 대한 이미지가 드

    러난다. 이런 맥락에서 접근할 때 멕시코 한인들의 삶에 대한 고찰은 멕시코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전체 멕시코사회를 보다 뚜렷하게 부각시켜 줄 것이다.

    2. 멕시코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한인 이민사 개관

    오늘날 멕시코 한인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멕시코, 나아가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 사이에 이루어진 이민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김세건, 2003 참조).

    한국과 라틴아메리카는 1905년에 이루어진 멕시코 이민에서 공식적인 첫 만남이 시작되었

    다고 볼 수 있다. 멕시코 이민은 1902년에 이루어진 하와이 이민의 연결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조정의 무능, 양반 및 관리들의 부정부패, 열강들의 침탈과

    이권쟁탈, 농민반란, 1901년 흉년 등과 맞물린 기근 등으로 혼란의 상태에 놓여있었다. 농

    촌은 피폐해졌고, 땅을 떠난 농민들은 도시와 개항부두에 몰려들어 일용노동자나 부랑아로

    연명하였다. 이런 상황은 당시 일본 출신 노동자들을 대체할 노동력을 찾고 있던 하와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경영자들의 이익과 맞물리면서 하와이 이민으로 귀결되었다. 즉 임금

    인상 및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파업을 하는 등 조직화된 일인(日人)노동자를 대체할 필요

    성을 절감하면서도 노동력 부족의 상황에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

    장주들은 조선에서 그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1902년부터 조선정부의 수민원(綬民院, 이

    민국)을 통해 희망자가 모집되었고, 그해 약 100여명의 한국인이 12월에 인천을 떠나

  • 22 멕시코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1903년 1월에 호놀룰루 항에 도착하였다. 최초의 이민사를 기록한 이들을 뒤이어 1905년

    4월 이민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65회에 걸쳐 총 7천여 명이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계약노

    동이라지만 실제로는 노예노동과 다름이 없었던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고국(故

    國) 조선보다는 훨씬 낫고 안정되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사실이 태평양을 넘나

    들면서 조선에서는 ‘백금(白金, 사탕수수)의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멕시코 이민

    도 이렇게 하와이의 조선 이민자들에 의해서 형성된 백금 신화의 맥락에서 받아들여졌다.

    멕시코의 사탕수수와 에네켄 농장 경영주들은 1900년 초부터 모자라는 노동력을 확보하

    기 위해서 중국과 일본에서 인력을 모집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응모자가 적어 여전히 노동

    력 부족을 타개할 수가 없었다. 이때 하와이로 이주한 조선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사탕수수

    농장에 적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멕시코 농장주들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조선에 접근

    하였다. 당시 미국과 멕시코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한국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

    이며, 멕시코는 미국과 별반 차이가 없는 부유한 곳으로 간주되어졌다. 따라서 당시 “대륙

    식민회사는 하와이 이민도 함께 모집했던 터라 하와이 이민을 가려고 찾아간 사람들 가운

    데 멕시코 이민으로 변경된 경우도 많았다. 하와이행 모집이 끝났다고 멕시코행을 권유받

    았거나 또는 하와이로 가는 줄 알고 이민선을 탄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진남포 사무소 같

    은 경우는 멕시코 이민은 먼저 마감한 터라 멕시코로 가려던 사람들이 하와이로 떠났다”

    (이자경, 1998: 75). 결국 하와이 이민모집의 초기모습과는 달리, “1905년 러일전쟁으로 민

    심이 흉흉한 터에 묵서가(墨西哥, 멕시코)라고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아메리카에

    있는 나라이니 미국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민중들은 각 지역에 모집책이 돌아다니자

    대리점 문을 열기 무섭게 이주계약을 맺었다고 한다”(패터슨, 1983: 37, 김귀옥, 1995: 17

    7~8 재인용).

    처음 하와이 이민 희망자를 모집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와이 ‘백금 신화’

    의 효과를 톡톡히 보며 1904년 10월 15일까지 일시에 1,033명(남자 802명, 어린이와 부녀

    자 2백 31명)의 멕시코 이민희망자가 모집되었다. 이들은 1905년 초에 인천항을 떠나 일

    본 요코하마를 거쳐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멕시코 살리나크루스(Salina Cruz) 항에 도착

    하였다. 이들은 다시 기차로 멕시코를 횡단하며 베라크루스(Veracruz)의 코앗사코알코스

    (Coatzacoalcos) 항으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배로 갈아탄 후 유카탄의 프로그레소

    (Progreso)항에 내려 주도(州都) 메리다(Mérida)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조선 사람들은

    약 24개의 농장으로 10~50명씩 분산되었다.

    이처럼 조선과 멕시코 간의 만남은 뜻밖에 이루어졌지만,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배

  • Ⅱ. 멕시코 초기한인이민 역사 23

    고픈 착취의 땅,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조선 사람들은 양반이든 상놈이든 모두가 하

    나가 되어 낯선 땅에서 백금 신화가 실현되는 새롭고 희망찬 미래를 기대하였다. 즉 “조선

    사람들은 같은 옷에, 긴 담뱃대와 신발, 갓을 쓰고 쌍쌍이 모여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이야

    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관해서는 관심을 잃어 말조차 꺼내려 하지 않았다”(산체스

    박, 1988: 38). 그러나 계약노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멕시코로 건너간 사람들은 얼마 지

    나지 않아 처참한 생활에 처하였다. 조선 정부는 1905년 4월 4일 이민금지령을 내렸고, 노

    예 같은 생활을 하던 한인들의 실상을 파악하고 구제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외교적 역량의 부족과 미숙 그리고 일본의 방해로 인하여 조선 사람들은 국제

    적 미아가 되었고, 조선은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일본에게 주권을 상실하였다.

    멕시코에 남겨진 조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4년을 넘어 지속된 계약노동에 묶여 있어야

    했고, 계약이 끝난 후에도 언어 장애와 에네켄 농사 외에는 기술이 없는 까닭에 에네켄 농장

    을 떠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멕시코 혁명의 과정에서 대부분 해방이 되어 일부는 유카탄

    에 남고, 일부는 멕시코시티, 티후아나, 과테말라(1913년경), 쿠바(1921년) 등으로 흩어졌다.

    그렇지만 일제시대, 분단과 6·25 전쟁의 과정 속에서 그들의 존재는 잊혀졌고, 멕시코 땅의

    한인들은 주인과 노예라는 불평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주변인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본 연구

    는 당시 티후아나로 이주하였던 한인 및 그 후손들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연구이다.

    일제식민지 시기에 러시아, 만주, 일본 등으로의 이민이 끊이지 않았지만, 멕시코를 비롯

    한 중남미로의 이주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석방’으로 중립

    국을 택한 반공포로들이 인도를 거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지만, 한국과 멕시코

    나아가 중남미간의 인적․외교적 관계는 여전히 미미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특히 1960년

    대는 한국과 중남미 관계의 한 획을 긋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정치․외교적으로 한국은

    1959년 브라질과 수교를 기점으로 1960년대 초 대부분의 중남미 주요국가와 수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또한 사회․문화적으로도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지속된 농업이민 등을 통

    해 중남미로 한국인이 대거 이주하였다.

    1961년 들어선 제3공화국은 국토의 인구밀도를 낮추려는 의도에서 해외에 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1962년 3월 ‘해외이주법’을 제정, 당시 높은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던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지로의 농업이민을 시도하였다. 결국 1963년 2

    월 12일에 18세대 92명의 한국인이 한백진흥공사를 통해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 항구에

    도착하면서 농업이민이 현실화되었다. 농업이민은 1980년대 초반까지 브라질을 넘어 점차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의 중남미 각국으로 확산․지속되었다. 이주자의 일부

  • 24 멕시코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농촌에 정착하기보다는 도시로 진출하였다. 이렇게 중남미 한인사

    회는 농촌이 아닌 도시를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고, 현재의 한인사회를 특징짓게 되

    었다. 도시로 나온 이들은 행상 또는 구멍가게를 열어 생활했으며, 점차 보따리 장사, 의류

    업, 봉제업, 식당업 등으로 영역을 확대해 나가면서 경제적 기반을 잡게 되었다. 다른 한편

    농업대신 도시에서 상업 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한국인들이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를 발판

    으로 미국으로 재이주하는 경우가 빈번해지면서 많은 외교문제를 초래했다. 중남미 정부들

    은 일명 5.4조치(1977년)처럼 한국인들에게 이민비자의 발급을 억제하는 등 이주제한 조

    치를 취함에 따라 1970년대 중반이후 중남미로의 공식적인 이주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

    다. 그러나 70, 80년대에 초청, 취업, 결혼 이민 등이 꾸준히 이루어졌고, 무엇보다도 볼리

    비아와 파라과이를 경유하여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로 들어가려는 불법이민자가 많아짐에

    따라 중남미의 한인사회는 점점 확대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들

    에서 한인사회가 형성되었고, 또한 멕시코에서도 1905년 이주한 한인사회와 별도로 멕시

    코시티 등을 중심으로 한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의 경제성장으로 중남미와 경제력 격차가 더욱더 심화

    되면서 중남미에 대한 한국의 자본투자는 급증하는 것에 반비례하여 중남미로의 이민자수

    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특히 90년대 중반이후에 이르러서는 중남미로의 한국인 이주는 거

    의 없는 상태이다. 한국이 1997년 IMF를 경험하면서 경제적 불안, 고비용의 불안전한 교

    육 환경 등을 벗어나고자 많은 사람들이 “높은 삶의 질”을 찾아 미국과 캐나다 등을 향해

    이주하였지만, 중남미는 철저하게 외면당하였다. 단지 중남미, 특히 멕시코는 현실적으로

    직접 미국으로 갈 수 없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코스로 간주되었다. IMF를 경험하면서 일

    시적으로 불법이민자들이 중남미, 특히 멕시코로 몰려들었고, 이와 더불어 중남미 각국의

    한인사회들 내에서 재이주가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즉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의 경제 위

    기가 장기화되면서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등으로 경제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멕시코

    로의 재이주가 급증하였다. 이에 1999년까지 3천명에 미치지 못하던 멕시코의 한인들은

    2000년에는 무려 2만 명에 이르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멕시코 한인사회는 조선말기의 멕시코 유카탄반도를 향한 계약

    이민자를 비롯하여 오늘날의 상업이민 등이 복잡하게 맞물려 형성되었고, 이들은 각기 독

    특한 특성과 분절적 성격도 나타낸다. 본 연구는 기본적으로 초기의 멕시코 이민자들을 중

    심으로 이루어지며, 해방 후 이루어진 이민자들의 사회와 문화는 초기 멕시코 이민자 사회

    와의 연관성에서만 살펴볼 것이다.

  • Ⅱ. 멕시코 초기한인이민 역사 25

    3. 멕시코 한인사회에 대한 연구

    멕시코 한인사회에 대한 연구는 멕시코가 한국사회에서 지니는 위상만큼이나 아주 미약

    한 수준이다. 특히 1905년에 건너간 초기 멕시코 한인이민에 대한 연구는 중국, 일본, 미국

    등의 한인사회에 대한 연구에 비해 그 양과 질에서 너무나도 빈약하며, 특히 많은 연구들

    은 하와이 또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다루는 과정에서 약사(略史)수준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한국과 멕시코의 경제교류 및 한인이민들의 멕시코로의 이주가 활발해지고,

    특히 2005년 멕시코의 이민 백주년을 맞아 한인이민사 및 한인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

    다. 그에 따라 멕시코 한인사회, 특히 초기 한인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결과물(서성철,

    1995, 김귀옥, 1995)들이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연구물로는 멕시코로의 한인 이민사를 개

    괄한 이자경의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1998)를 들 수 있다. 이자경은 이민의 배경, 이

    민과 적응과 재이주의 과정, 한인 사회문화에 대한 서술뿐만 아니라 1998년과 1990년 두

    번에 걸쳐 메리다, 코앗사코알코스, 멕시코시티, 티후아나, 쿠바 등의 한인후손-현재 이들

    대부분은 고인이 되셨다-들과 행한 인터뷰의 내용을 상당부분 수록하고 있는데, 이 자료는

    이후 진행된 한인연구의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 이 외에 멕시코 한인들의 자취를 찾아

    기록한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의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 멕시코․쿠바

    (2003)」와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 연구소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초기 멕시코․쿠바 한인이민사에 대한 연구」(2003) 등은 최근에 이루어진 주목할만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체계적인 실태조사를 통해 한인사회의 생활문화를 총체적으로 접근한 학술적 성

    과가 부재한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기존의 연구도 초기 멕시코 한인들이 정착했던 유카탄

    메리다와 멕시코시티의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반면에 티후아나 한인사회는

    1000여명 이상의 한인후손들이 살고 있고, 멕시코의 다른 한인사회에 비해 독특한 경제

    적, 사회문화적 특징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티후아나 지역의 한인사회는 학자들의

    관심으로부터 소외되어 왔고, 독립적인 연구는 전무하다. 티후아나 한인사회에 대한 연구

    는 ‘메리다의 일부 한인들은 티후아나로도 이주했다’고 언급하는 수준에 머물러있다고 해

    도 과언은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티후아나 한인사회의 생활문화 조사연구는 멕시코

    초기 한인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써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 26 멕시코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지도 1-1] 멕시코 지도 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4. 티후아나 한인사회의 형성과 그 특징

    1) 티후아나의 역사지리적 배경

    본 연구의 주 대상지역인 티후아나(Tijuana)는 멕시코 북서쪽 연안 바하칼리포르니아

    (Baja California) 주(州)에 위치한 국경 도시이다. 바하칼리포르니아는 북쪽으로는 미국,

    동쪽으로는 캘리포니아 만, 서쪽으로는 태평양, 남쪽으로는 바하칼리포르니아수르(Baja

    California de Sur) 주와 경계를 이룬다. 바하칼리포르니아는 1887년에 연방구역이 되었

    고 처음에는 엔세나다(Ensenada)를 주도로 했다가 이어 멕히칼리(Mexicali)로 옮겼으며,

    1952년에 주가 되었다. 남쪽에 새롭게 생긴 바하칼리포르니아수르 주와 구별하기 위해

    1974년에 바하칼리포르니아 노르테(Baja California de Norte)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1979년에 다시 바하칼리포르니아로 개칭했다.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의 모든 지역은 여러

    세기 동안 고립되어왔다. 그러나 1950년대를 전후로 멕히칼리, 티후아나, 엔세나다 등의

    도시들이 급성장하면서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증대하였다. 1960년대 후반 이후 도로가 포

    장되면서 소노라 주 등 멕시코의 다른 지역과 소통이 원활해졌고, 특히 1970년대 중반에

    티후아나에서 시작되어 바하칼리포르니아수르의 주도(州都) 라파스(La Paz) 등과 연결되

    는 도로가 완공되면서 태평양에 접한 해안 도시로의 접근이 용이해졌다.

    바하칼리포르니아는 미국 서부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하였다. 즉 미국과의 국경도시인 멕

    히칼리, 티후아나, 엔세나다 등은 20세기에 들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는데, 그 이유 중의

  • Ⅱ. 멕시코 초기한인이민 역사 27

    [사진 1-1] 티후아나 중심가

    하나는 미국 시장에 가까이 있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이 지역은 미국시장을 겨냥한

    목화, 밀, 포도 등의 농업과 식품 가공, 생선통조림, 맥주, 포도주, 비누 제조업 등의 산업이

    성장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이 지역의 성장은 미국의 배후 관광지와 휴양지로서의 독특한

    위치에서 비롯되었다.

    한인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티후아나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고(San Diego)와

    는 약 20km 떨어져 있다. 1940․50년대까지 티후아나는 광대한 주변 농지를 관개·개간하

    여 밀, 보리, 포도 등을 재배하여 수출하는 인구 6만이 안되는 농업지역이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도박장, 유흥업소 등이 자리를 잡으면서 급속하게 발전하

    게 되었으며, 이 시기에 유카탄의 메리다 지역에 살던 한인들이 티후아나로 본격적으로 이

    주하였다. 즉 한인들은 미국관광객 및 급증하는 내국인을 상대로 상업, 특히 식료품점을

    하면서 점차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일부는 엔세나다 등지로 재이주 하였다. 티후아나로부터

    남쪽으로 120㎞ 정도 떨어져 있는 엔세나다는 멕시코의 태평양 연안 항구 중 가장 중요한

    항구 가운데 하나로 연어, 가재 등의 어업이 성행하며, 해산물 요리, 수영, 사냥, 심해 낚시

    등이 유명하다. 초기에 이주한 한인들은 티후아나에서 엔세나다에 이르는 해안가에서 미역

    등을 채취하여 먹었다고 하는데, 지금 이곳에는 별장이 즐비하다. 본 연구가 진행되던 7월

    3일 오후에 티후아나 한인회장 페르민(Fermín) 가족과 함께 엔세나다에 살고 있는 어머니

    의 사촌 에르난 킹(Hernán King)의 집을 방문하였다. 휴양지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미국

    독립기념일(7월 4일) 기간의 휴가를 즐기려는 차들로 가득 차 있었고, 돌아오는 저녁에는

    이들이 솟아 올린 폭죽들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오늘날 티후아나는 미국 관광객들이 캘리포니아에서 멕시코로 갈 때 이용하는 주요 통

    로로, 이곳에는 여전히 투우, 하아알라이(스

    페인의 대표적인 옥내구기), 경마, 개 경주

    등이 성하며, 시내 중심가는 관광객을 대상

    으로 하는 멕시코 특산의 피혁제품, 솜브레

    로, 민예품 토산품 가게들이 즐비해 있다.

    요즈음은 티후아나 중심가에 미국인을 상대

    로 하는 약국이 많이 생기고 있다. 여기에서

    는 의사의 처방전이 없이도 약을 살 수 있

    어서 많은 미국인들이 이곳으로 약을 사러

    온다고 한다.

  • 28 멕시코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사진1-2]티후아나 변두리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 미국 시장을 겨냥

    한 외국 기업 등이 빠른 속도로 이 지역에

    진출하고 있다. 미국에 주기적으로 일시농

    업이민을 보내던 브라세로(Bracero) 정책

    이 1960년대 후반에 끝이 나면서, 많은 멕

    시코인들이 불법으로 미국 국경을 넘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티후아나 등 국경도시

    에 정착하였다. 20세기 후반, 특히 1994년

    나프타(NAFTA) 발효의 영향 등으로 티후

    아나, 멕시칼리를 비롯한 국경도시들은 미

    국시장을 겨냥한 수출산업, 즉 마킬라(Maquila) 산업의 중심지로서 자리매김 되고 있다.

    이처럼 티후아나는 이곳에서 일자리를 찾거나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한 밀입국자들이 몰리

    면서 시의 외곽은 이들이 세운 주택으로 넘쳐나고 있다.

    2004년 현재 티후아나의 인구는 115만에 이른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없는 사람들이 미

    국으로 가기 위한 기회를 잡기 위하여 티후아나로 몰려들고 있어 어느 누구도 티후아나의

    인구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실제로 티후아나의 인구에 대하여 물어볼 때마다 인구수는 150

    만 명에서 300만 명 사이를 오갔다.

    2) 티후아나 한인사회의 형성 배경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초기 유카탄 반도에 거주했던 한인이민들이 4년간의 계약노동이

    끝난 후, 쿠바 및 멕시코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티후아나는 그 중의 하나였다. 유카

    탄으로 이민을 간 후손들이 티후아나로 이주한 것은 메리다 에네켄 농장의 임금은 낮아지

    고 물가가 상승하던 1940년대에 시작되어 1950~60년대에 본격화되었다. 특히 1950년 유

    카탄 반도를 베라크루스와 멕시코시티로 연결하는 철로가 완공되어 이 철도를 이용한 한

    인들의 이주가 급증했다(이자경, 1998: 466). 이자경(1998: 470)에 따르면, “한인들의 티후

    아나 이주는 194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몇몇 이

    주자들의 이름을 밝혀보면 1937년 6월 유베나(최월봉 처제), 1946년 멕시코시티의 김기용

    의 맏아들 김은성, 1947년 8월경 체투말에서 장사하던 김기창 부부가 이미 그곳에 진출한

    이돈희(잡화점)의 둘째딸(외손녀)을 데리고 떠났고, 1950년경 메리다의 양희용, 1957년 3

  • Ⅱ. 멕시코 초기한인이민 역사 29

    월 27일 메리다의 청년그룹 6명이 함께 떠났는데, 고(故) 김정식의 둘째딸 김에데(16세),

    고 김정욱의 맏아들 김세계(26세), 고 김태식의 다섯째 딸 김로사(16세), 박선관의 손녀 박

    로사(15세), 정학조의 맏딸 정엘레나(23세) 등이었다.” 초기에 이주한 한인들은 티후아나

    의 성장과 더불어 대부분 식료품점(abrrote) 등 상업을 통해 경제적인 부를 일구었다. 이

    과정에서 메리다 등지에 거주하던 친인척을 티후아나로 불러들었고, 이들이 오늘날 티후아

    나 한인사회를 구성하는 주체들이 되었다. 현재 티후아나에는 1000~1500명 정도의 한인 후

    손들이 살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들만의 독특한 한인사회를 형성, 유지해나가고 있다.

    초기 이민자 후손들의 한인사회와 별도로 티후아나에는 최근에 들어온 한국인들의 한인

    사회가 형성되고 있다. 마킬라도라가 활성화되면서 1990년대 들어 티후아나에는 현대정공,

    삼성전자, 삼성정공 등 한국의 대기업과 하청기업들이 진출하였다. 이와 더불어 많은 한국

    인들이 티후아나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근무지인 티후아나에 거주하기보다는

    생활 및 자식교육 등의 여건이 좋은 미국 샌디에고에 거주하며, 멕시코에서의 근무기간이

    끝나면 한국으로 귀환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기업체들이 거주지원 비용의 증가

    등의 이유로 주재원에게 티후아나에 거주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정 등으로

    최근에 들어서는 점차 티후아나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한 한

    인들의 모임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한인 후손들과 최근에 들어온 한국인들은 서로 교

    류가 거의 없는데, 가장 큰 장애가 언어라고 한다.

    5. 조사단의 구성 원칙 및 연구인력

    2004년 4월 중순경 국립민속박물관에서 2005년에 이민 100주년을 맞는 멕시코의 한인

    사회를 재외동포실태조사 연구 주제로 정한 공식 공고가 있었다. 그 후 한국문화인류학회

    는 멕시코 지역을 연구하였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준비팀을 구성하였다. 준비팀은 제한된

    예산으로 단기간에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연구진 구성을 검토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연구진을 구성하였다.

    먼저, 연구진은 최소인원으로 구성하기로 하였는데,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경비문제가 고

    려되었다. 한국에서 멕시코까지의 여비는 차치하더라도, 연구의 주대상지인 메리다와 티후

    아나가 서로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어서 추가 여비가 많아, 여비가 전체 연구비의 60%에

    이른다는 점이다. 경비문제로 인해 티후아나를 주 연구지로 선정하는 것에 대하여 상당부

    분 이견도 있었지만, 멕시코 한인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비해 연구에서는 철저하게 소

  • 30 멕시코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외된 티후아나 한인사회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

    라서 국립민속박물관의 예산 지침서에는 연구원 6명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본 연구팀은 최

    소한의 5명으로 구성하기로 하였다.

    둘째, 언어문제가 고려되었다. 현재 주로 한인 3․4․5세의 후손들이 주를 이루는 티후

    아나 한인사회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국경 산업도시인 티후아

    나에서 통역을 구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즉 한국기업체들이 많이 있

    어 일부 통역요원들이 있지만, 시간당 급여가 너무 비싸서 통역요원을 고용하는 것을 생각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단기간 내에 이루어지는 현지연구에서 스페인어를 일정 정도 구사할

    수 있는 연구자가 요구되었다.

    셋째로 본 연구는 멕시코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여 메리다, 티후아나, 멕시코시티의 한

    인들의 삶의 세계와 생활문화에 대한 총체적(holistic) 연구로 ‘문화’에 대한 폭 넓은 안목

    과 충분한 지식을 갖추는 연구자가 필요하였다. 특히 멕시코 한인사회는 지난 백 년 동안

    거의 한국과 교류가 없이 멕시코 현지화 되었다. 이에 한인들의 삶과 사회문화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한인사회가 위치한 보다 큰 사회․문화적 실체인 멕시코의 사회와 문

    화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문화의 상호접촉과 교류를 통한 혼성문화의 특

    성과 양국 문화에 대한 지식이 요구되었다.

    넷째, 기존의 해외동포실태조사 연구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본 연구의 조사기간은 약 10

    일 내외의 단기간에 불과하다. 따라서 거의 일회적인 만남에 그칠 수밖에 없는 단기간의

    심층연구에서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자료 수집을 할 수 있는 사전지식과 훈련 혹은 경험을

    갖춘 연구자가 요구되었다. 또한 단기간의 공동연구에서는 연구원 상호간에 공조가 필요하

    다. 즉 조사기간 동안 담당주제에만 국한하여 조사를 진행하기 보다는 본 연구가 다루고

    있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상호 연관성 하에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자

    세를 갖춘 연구자가 요구되었다.

    이상과 같은 점들을 기준으로 삼아 멕시코 한인사회의 생활문화연구를 위해 다음과 같

    이 연구팀을 구성하였다.

    ① 김세건 (연구책임자, 강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조교수)

    멕시코 중남부에 위치한 산 안드레스 데 라 칼(San Andrés de la Cal) 마을의 농

    촌근대화에 따른 사회문화적, 생태적 환경의 변화에 대한 연구로 멕시코국립대학교

    에서 인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멕시코 농촌사회와 환경문제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총론과 가족과 친족을 담당했다.

  • Ⅱ. 멕시코 초기한인이민 역사 31

    ② 서성철 (재외동포재단 기획조사실 차장)

    멕시코국립대학교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공부하였고, 1995년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멕시코에서 거주(1984년~1995년)하면서 여러 차례 메리다, 멕시코시

    티, 티후아나의 한인사회에 대한 현지조사를 했고, 이에 대한 여러 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2002년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2년간 멕시코 및 아르헨티나 한인이

    민사회에 대한 연구 과제를 수행하고 있으며, 2003년 여름에는 멕시코와 쿠바 한인

    사회의 실태조사를 했다. 현재 재외동포 지원 전담기관인 외교통상부 산하 재외동

    포재단의 기획조사실에서 조사연구 사업을 담당하고 있고, 재외동포연구에 대한 국

    내외 학자들의 연구용역, 실태조사 및 학술회의 개최 지원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한

    편, “멕시코이민 100주년 기념사업”의 준비, 그리고 2004년도 8월 개최했던 동 100

    주년 기념과 관련, 국제학술회의 실무를 맡았다. 본 연구에서는 이주역사와 정착배

    경 및 언어생활을 담당했다.

    ③ 주종택(순천향대학교, 국제문화학과 조교수)

    멕시코 오아하카(Oaxaca) 주에서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으며, 농촌의 사회경제적 변

    화, 종족정체성, 경제활동과 국제노동이주, 종교변화 등에 관한 연구를 실시했다. 오

    랜 기간의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통해서 멕시코 사회에 대한 많은 자료와 연구 성과

    를 이루고 있다. 이번 조사에는 직업과 경제생활과 신앙과 종교생활을 담당했다.

    ④ 권숙인 (숙명여자대학교 일본학과 부교수)

    일본의 아이즈 지역 산촌에 대한 현지조사를 통해 전통과 ‘후루사토’(故鄕)의 의미

    를 가지고 어떻게 주민들이 아이덴터티를 구성하는 가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또한

    “재일 한인의 아이덴티티”와 2002년 (국립민속박물

    관)의 일환인 “일본 관서지역 한인동포 생활문화연구”에 참여하여 의식주 생활과

    생활용구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이번 조사에서도 멕시코 한인들의 의식주 생활과

    생활용구를 연구했다.

    ⑤ 문남권(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 책임연구원)

    멕시코국립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였다. 국제교류와 멕시코 사회연구에 관

    심을 갖고 연구 활동을 해왔다. 멕시코 원주민 문화에 대한 연구를 현재 진행 중이

    며, 본 연구에서는 사회조직 및 세시풍속과 의례생활을 담당했다.

  • 32 멕시코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⑥ 권봉철 (멕시코 현지 연구보조원, 멕시코국립대학 지역학 박사과정)

    멕시코국립대학교에서 지역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아스텍 원주민의 세계관

    (Cosmovisión)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 현재 멕시코시티에 거주하면서 현

    지의 문헌조사 및 현지연구의 일정 등을 조정하고 현지조사 동안 통역 및 연구보조

    를 담당했다.

    ⑦ 송지영(한국 연구보조원,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강원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석사를 마쳤다. 연구원들 간의 전반적인 연락과 업무

    조정 그리고 중간보고서 및 최종보고서의 편집과 교정을 담당했다.

    6. 조사 방법 및 연구일정

    본격적인 현지조사에 들어가기 전에 멕시코 한인사회와 관련된 자료, 문헌 등 기존에 이

    루어진 연구 결과물들을 수집하고 분석하였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의 티후아나 상황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한 「한국인 멕시코이민사」(이자경, 1998)를 제외하고는 티후아나

    한인사회에 대한 연구가 거의 전무한 상태여서 티후아나 한인사회의 기본 현황도 조사하

    기 힘들었다. 한편으로는 이 기간 동안 멕시코 한인사회에 연구협조를 위한 사전준비작업

    을 수행하였는데, 여기에는 티후아나를 15여 년 전에 방문하여 조사한 적이 있으며, 현재

    관련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서성철 연구원과 권봉철 현지연구원의 역할이 컸다. 또한

    2005년 이민 백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재멕시코 한국대사관과 티후아나 한인회와의 상호교

    류가 활성화 되고 있었는데, 재멕시코 대사관의 조규형 대사와 유영식 외무관 등이 연구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과 협조를 해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연구원들이 모여 각자가 담당

    한 주제에 대하여 조사항목 등을 정리하여 상호 검토하였다. 특히 재외동포실태 조사에 참

    여하였던 주종택, 권숙인 연구원의 경험과 방향 제시는 조사항목을 준비하고 전체 틀을 짜

    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본 현지조사는 연구원들의 일정과 사막지대인 티후아나와 아열대지역인 메리다 지역의

    기후 등을 고려하여 2004년 7월 1일부터 7월 12일까지 11박 12일간 진행하였는데, 심층조

    사는 티후아나를 중심으로 7월 2일부터 7월 9일까지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티후아나 한인

    회를 통한 공식적이고 집단적인 관찰과 면접에 중심을 두었다. 특히 7월 4일 50여명이 넘

    는 한인들과 갖은 공식 모임에서 본 연구팀은 구체적인 연구방향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남

    은 연구기간동안 개별적으로 가정과 직장을 방문하여 심층조사를 할 수 있는 관계를 형성

  • Ⅱ. 멕시코 초기한인이민 역사 33

    할 수 있었다. 공식모임 후 각 연구원들은 개별적으로 한인을 방문하여 심층 면담을 하였

    고, 필요한 경우에만 집단 면담을 하였다. 개별 면담을 하는데 있어서는 가능한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는 티후아나가 외연이 거대한 도시이고 한인들이 도시 곳

    곳에 흩어져 살기 때문에 이동거리가 길고, 또한 연구원의 안전 등을 고려한 조치였다. 그

    리고 면접에 있어서는 단기간 연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매일 저녁 또는 아침에 전체

    회의를 통해 각 연구원의 연구 진행 상황을 점검하였다. 이를 통해 각 연구원들은 담당 주

    제를 심화하였고, 면접에 있어서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 상호 보조를 하였다. 무엇보다 아

    침부터 저녁까지 장거리를 이동하며 정신없이 돌아가는 연구과정 속에서 연구원들이 지쳐

    있었는데, 전체회의는 서로를 독려하고 힘을 북돋아주는데 장이 될 수 있었다. 구체적인

    연구과정은 다음과 같다.

    2004년 7월 1일 목요일

    오후 2시 10분발 일본항공(JAL) 952편에 몸을 실었다. 만원이었다. 비자 받기도 힘들

    고, 입국 검사가 까다롭고 불편한 미국을 경유하기보다는 캐나다 밴쿠버를 통해 멕시코로

    가는 노선을 선택하다 보니 그런다고 하였다. 거기에다 일본항공의 요금이 다른 항공사에

    비해 저렴하여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고 하였다. 도쿄에 4시 30분경에 도착해서 밴쿠버로

    가는 JAL 012편으로 갈아탔다. 비행기의 좁은 공간 안에서의 장시간의 여행이 점점 갑갑

    함과 몸의 비틀림으로 다가왔다. 1905년 한인들은 일포드(Ilford)라는 영국 상선으로 태평

    양을 건넜다. 몇 달 동안 망망대해의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지냈으며 무엇을 생각하였을

    까? 하긴 조그만 상선에서의 생활은 고통스러웠을지는 몰라도, 그들에게 도래할 환한 미래

    를 생각하면 결코 이 순간이 고통스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비행기가 밴쿠버에 도착하니

    현지시각 11시이었다. 이 곳에서 1시간 30분가량 비행기 정리를 위해 로비에서 쉬었는데,

    타고 왔던 승객 중 절반 이상이 멕시코시티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휴식동안 로비를 벗어날

    수 없는데 동료가 없다면 갇힌 공간에서의 기다림이 무척 지루할 것 같았다. 멕시코 공항

    에 도착하니 한국시간 7월 2일 아침 9시 30분, 멕시코 현지 시간 7월 1일 오후 6시 30분이

    었다. 집을 나선지 꼭 24시간 만에 멕시코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택시를 타고 멕시코 차풀

    테펙 대로(Avenida Chapultepec)에 위치한 세고비아 호텔(Hotel Segovia)에 도착했고,

    멕시코 현지 연구원인 권봉철 연구원도 합류하였다. 권봉철 연구원으로부터 현지연구의 구

    체적 일정을 듣고 재점검하였다. 그런데 서성철 연구원이 이번 조사를 위해 직장에서의 일

    을 마무리하느라고 무리했는지, 감기 몸살로 여행 내내 고생하였는데 멕시코에 도착해서도

  • 34 멕시코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전혀 차도가 없었다.

    2004년 7월 2일 금요일

    서성철 연구원의 몸살감기가 심해져 아침 일찍 문남권 연구원과 함께 병원에 다녀왔다.

    지금부터 한인사회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연구해 온 서성철 연구원의 역할이 절실히 요구

    되는데, 몸이 좋지 않아 걱정이 앞섰다. 서성철 연구원을 제외한 모든 연구원들은 아침 10

    시에 멕시코시티 중심가 소나 로사(Zona Rosa)지역의 론드레스(Londres) 188번지에 위

    치한 멕시코 대한민국 한인회 사무실을 찾아갔다. 한인회 사무실에서 2시간에 걸쳐 천세택

    회장과 인터뷰를 하였다. 한참 진행 중인 한인 이민 백주년 기념과 관련된 정부지원, 한인

    회 계획들이 어우러져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최근에 이주한 한인들로 구성된 멕시코 대한

    민국 한인회가 마치 한인후손들의 한인회 같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멕시코 대한민국

    한인회에는 한인후손들의 참여공간이 없었는데 말이다. 또한 한인 이민 백주년 기념과 관

    련해서는 한인백주년기념사업회가 구성되어 있는데, 한인회와 기념사업회간에는 조직구성

    관계, 정부지원금 운영 주체 등과 관련하여 갈등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오늘

    인터뷰에 백주년기념사업회의 서동수 회장도 함께 하기로 하였는데, 개인적 사정을 이유로

    오지 않았고, 서동수 회장은 별도로 만나기를 희망하였다. 한인회 사무실 다른 파트에서는

    한인 3세인 다비드 킴(David Kim)이 회계사 일을 보고 있었다. 천세택 한인회 회장에 따

    르면, 다비드 킴은 한인후손 담당 부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다비드 킴 본인

    은 공식조직의 임원이라기보다는 한인회의 한 공간을 공식적으로 빌려서 회계사 일을 하

    면서 한인회 일, 특히 한인후손 관련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하였다. 다비드 킴은 새롭게 한

    인 2․3세를 중심으로 한 한인회 조직을 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7월 말경에 구성이

    될 계획이라고 하였다. 7월 말에 재멕시코 한국대사관에서 한인후손한인회가 구성되었다.

    한인회에서 인터뷰를 끝낸 후, 오후 1시에 근처에 있는 한국식당 청기와로 옮겨 재멕시코

    한국대사관의 조규형 대사 그리고 유영식 외무관과 점심을 같이 하였다. 특히 유영식 외무

    관은 본 연구팀이 티후아나 한인회와 일정정도 신뢰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해주

    었다. 이 자리에서 조규형 대사는 백주년 기념을 맞아 정부의 지원 및 기념식에 관련 계획

    등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오찬이 끝난 후 호텔에 돌아와 짐을 가지고 다시 공항으로 갔다. 오후 3시 30분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티후아나에 가는 오후 4시 50분(멕시코시티 시간) 아스테카(Azteca) 항공

    의 비행기에 올랐다. 멕시코 제 2의 도시 과달라하라를 경유하여 티후아나에 도착하니 밤

  • Ⅱ. 멕시코 초기한인이민 역사 35

    7시 20분이었다. 멕시코시티는 밤 9시 20분일 것이다. 공항에는 티후아나 한인회장 페르민

    킨(Fermín Kin)의 부인 라파엘라(Rafaela)와 그 딸 사만타(Samanta)가 출장을 떠난 남

    편을 대신하여 마중을 나와 주었다. 30분 만에 레알데리오 호텔(hotel real de río)에 도착

    하였고, 로스앤젤레스에서 곧바로 온 권숙인 연구원이 합류하였다.

    2004년 7월 3일 토요일

    서성철 연구원도 감기몸살이 차도가 있어 점차 연구팀에 활기가 돌았다. 지난 15여년 만

    에 다시 티후아나 한인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힘이 난다고 하였다. 서성철 연구원의 필드

    노트에는 1987년 당시 티후아나 한인회의 회장 페르민 킨(Fermín Kin, 현 한인회장)과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 아침 9시 호텔 로비에서 페르민 회장과 티후아나 한국 명예영사

    인 페드로 디아스 코로나(Pedro Díaz Corona)를 만났다. 우리가 온 목적을 간단하게 설

    명한 후 함께 식사를 하였다. 페르민 회장은 서성철 연구원이 내미는 사진에 무척 반가움

    을 표하였다. 이곳의 한인은 약 1000-1500명 정도인데, 한국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

    다고 하였다. 마킬라도라가 활성화되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들어왔는데, 이들 대부분은 미

    국의 샌디에고 출라비스타(Chulavista)에 거주하며, 언어문제로 인해 한인 후손과 최근에

    들어온 사람들 사이에는 상호 교류가 없다고 하였다. 많은 한인후손들이 안식일교회 신도

    들인데, 오늘이 마침 토요일이라 예배가 있다고 하여 교회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교회로

    가기 전 숙소를 바꾸기로 하였다. 현 호텔의 숙박비가 비싸서 우리들의 연구경비로는 상당

    한 출혈이 예상되어 어쩔 수 없었다. 티후아나가 관광지라 숙박비가 비싸다고 하였다. 하

    긴 레알데리오 호텔이 멕시코시티의 세고비아 호텔에 비해 시설 등의 면에서 큰 차이가 없

    었는데 가격이 약 2.5배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11시 30분경 호텔을 나와 모두 페르민과

    명예영사의 차에 나누어 타고 명예영사가 추천하는 호텔 인(Hotel Inn)으로 숙소를 옮겼

    다. 호텔 주인이 오스트리아 명예영사로 페드로 디아스 명예영사와 친분관계가 있어서 요

    금 할인도 해주었다. 방도 깨끗하고 좋았다. 방에 짐을 내려두고 다시 차를 타고 교회로 향

    했다. 교회에 도착하니 예배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여기에서 페르민의 외삼촌인 한인 3세

    펠리페 킹(Felipe Timoteo King Ham)을 만났다. 교회의 담당목사와 인사를 나누고 우리

    일행은 교회의 제일 앞에 마련해 준 자리에 앉아 다른 교인들과 함께 예배에 참여하였다.

    예배가 끝난 후 목사는 우리 일행을 신도들에게 소개해 주었고, 펠리페는 신도를 대표하여

    인사를 하였다. “우리 할아버지들은 우리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우리 할아버지

    들은 이렇게 한국인들이 멕시코의 우리들을 방문하는 때가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

  • 36 멕시코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사진 1-3] 엔세나다의 에르난 킹과 페르민 한인회장 가족: 왼쪽부터 차례대로 페르민 딸 사만타, 페르민 장모 라디스 코로나, 페르민 어머니 타이데 킹, 페르민 부인 라파엘라, 후디트 여동생, 에르난 킹의 부인 후디트, 에르난 킹, 페르민, 에르난의 첫째 딸 과달루페, 둘째 딸 루르데스, 앞의 유모차에는 페르민의 둘째 딸 소피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펠리페 인사말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예

    배 후 서성철을 비롯한 연구원들은 펠리페 집으로 이동하였다. 여기에서 점심을 먹고, 펠

    리페의 안내로 마르시아 킹(Marcía King), 사비나 코로나(Savina Corona) 등의 집을 방

    문하였다. 가족과 친족을 담당한 김세건 연구원은 엔세나다에 살고 있는 에르난 킹

    (Hernán King)의 손녀 생일파티에 페르민과 함께 참석하였다. 에르난은 다음 주 수요일

    에 연구원 전원을 초대하였고, 우리 연구팀을 위해 한국음식을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모두

    밤늦게 호텔로 돌아오는 바람에 일단 연구진행에 대한 전체회의는 내일로 미루고, 오늘 밤

    에는 조사한 내용을 정리․검토를 하기로 하였다.

    2004년 7월 4일 일요일

    오후 1시에 티후아나 한인들과 공식모임을 갖기로 되어 있었다. 오전에는 어제 조사에

    기반하여 전체회의를 하였다. 여기에서는 일단 한인들이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살고 있어

    접근의 어려움, 대상자들의 생업활동에 따른 심층 면접의 어려움 등이 거론되었다. 그리고

    오후에 있을 공식모임과 관련하여 각자 준비부분에 대한 상호 검토가 있었다. 12시 30분쯤

    되어 페르민 회장이 우리를 데리러 왔다. 1시가 되지 않아 한인회관에 도착하였다. 한인회

    관을 본 순간 모든 연구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1970년대에 티후아나 한인들이 돈을 모아

    마련한 공간으로 단층 건물이다. 정면에는 한인회관(Centro Social Coreano de B.C.)이

    라는 이름과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다. 예전에는 정면에 멕시코 국기도 함께 그려져 있었는

  • Ⅱ. 멕시코 초기한인이민 역사 37

    [사진 1-4]한인후손들과의 공식모임

    데, 세디요(Zedillo) 정부 때 멕시코 국기는 멕시코 정부기관만 그릴 수 있다고 하여 지웠

    다고 하였다. 회관 안으로 들어가 의자를 정리하고, 사진을 촬영하는 사이에 20명의 후손

    들이 도착하였고, 일부 연구원들은 공식모임이 있기 전의 시간을 이용하여 이들과 인터뷰

    를 시작하였다. 사비나의 딸은 오랫동안 이곳에 오지 못했는데, 정말 많이 황폐화되었다고

    말하였다. 연구원들이 보기에는 회관의 상태가 그런대로 좋아보였는데, 예전에는 얼마나

    활기가 있었고 좋았으면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페르민 회장도 예전에는 한인회가

    활성화 되었는데, 지금은 소강상태라고 하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약 5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어른들의 이야기소리,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등으로 회관이 시끌벅적하였다. 2시

    에 모임을 시작하였다. 한인회장 페르민이 먼저 환영사를 하였고, 우리들은 연구원들을 소

    개하고 연구목적을 설명하였다. 그런 후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연구원들은 개별

    적으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 4시경이 되어 페르민 회장이 중국집에서

    점심을 가져 왔다. 뷔페식으로 각자 음식을 가져와 서로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연구원

    들은 간단히 요기를 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려고 분주히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 인터

    뷰를 하였다. 많은 한인들은 다음에 만나

    기로 하고 자리를 떴으며, 연구자들은 저

    녁 7시 30분경에 페르민 회장 가족들과 함

    께 한인회관을 나서 호텔로 돌아왔다. 얼

    마나 각 연구자들이 정신없이 한인들과 이

    야기를 나누었는지, 지나고 보니 회관에

    모인 한인들 모두와 함께 사진 한 장도 찍

    지 못했다. 호텔 식당에서 간단히 저녁식

    사를 하고나니, 하루의 피로가 몰려들었다.

    2004년 7월 5일 월요일

    아침 9시에 오전회의를 하였다. 어제 연구과정을 상호 검토하였는데, 점차 연구의 방향

    이 구체화되었다. 언어생활, 음식과 의식주, 의례생활 분야에서는 멕시코 현지화가 두드러

    져 가능한 한 현재의 생활을 충실하게 담아내는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또한

    가족과 친족분야는 많은 한인들이 자신들의 조상과 기원에 대한 관심이 두드려지게 나타

    나 가능한 한 많은 가족들의 가계도를 그려내고, 그것을 중심으로 가족사를 간단하게 정리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오늘부터 개별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주종택, 문남권 연

  • 38 멕시코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구원은 초기 티후아나 한인사회의 산 증인들인 페드로 디아스 코로나 명예영사와 알폰소

    킴(Alfonso Kim) 등을 만나러 나갔다. 권숙인, 권봉철 연구원은 티후아나의 로사리토

    (Rosarito) 지역에 살고 있는 오네이다(Oneida Angel King) 가족을 방문하였다. 서성철

    연구원은 한인 중 최고 고령자에 속하는 사비나 코로나(Sabina Corona) 할머니, 김세건

    연구원은 라디스 코로나(Ladis Corona de Hernández), 펠리페 킹 집 등을 방문하였다.

    밤이 늦어서야 모두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 9시에 호텔 식당에 모여 저녁식사와 연구일정

    을 점검하였다. 짧은 일정이 점점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2004년 7월 6일 화요일

    주종택, 문남권 연구원은 티후아나의 한인들이 경영하는 몇몇 상가를 방문하였다. 한인

    들의 생업활동으로 인하여 오후에 약속이 잡힌 나머지 연구원들은 오전에 티후아나 중심

    가 및 최근에 삼성, 현대 등 한국기업들이 위치한 신흥시가지를 방문하였다.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숙과 식당을 겸하고 있는 할매식당을 찾아가 점심을 먹었는데, 멕시코에 오기 전

    에 먹은 한국 음식 그대로였다. 재료는 샌디에고에서 모두 사 온다고 하였다. 최근에 들어

    온 한국인들의 사회와 동향에 대하여 물어보니 요즈음 한국인들이 많이 늘어나 교회도 두

    개나 된다고 하였다. 아주머니가 최근에 오고 바깥출입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한인후손의

    존재조차도 모른 것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서로 전혀 교류가 없다고 하였다. 식당을

    나선 후 초기에 이민을 오신 사라 리(Sara Lee) 할머니 집을 방문하였다. 도착하니 사라

    할머니는 아버님의 유품이라고 대한국민총회 회원증을 내놓았다. 1942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아 태평양전쟁기간 중 한인들과 일본인들을 구분하기 위해 발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

    간 가는 줄 모르고 사라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 9시에 호텔 식당에 모여 저녁

    식사와 연구회의를 하였다. 주종택, 문남권 연구원도 이번 상가 방문을 통해 상당히 성과

    가 있다고 하였다. 이제 연구 성과를 전체적으로 점검하고 남은 기간 동안에 부족한 부분

    을 점검하기로 하였다.

    2004년 7월 7일 수요일

    엔세나다에서 살고 있는 에르난 킹(Hernán King)이 연구팀을 점심에 초대하였다. 아침

    10시 30분 쯤 페르민 회장이 우리 일행을 데리러 왔다. 엔세나다로 가기 전 페르민은 우리

    연구팀에게 감사의 깜짝 선물이라며 시내로 데리고 나가 ‘얼룩색깔의’ 당나귀 마차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었다.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였다. 1시경에 에르난 집에 도착하였다.

  • Ⅱ. 멕시코 초기한인이민 역사 39

    우리들을 위하여 자신들이 알고 있는 김치, 지짐이 등을 준비하였다. 음식준비를 위해 샌

    디에고에 다녀왔다고 하였다. 한국 음식이 나오자 식생활을 담당한 권숙인 연구원의 카메

    라와 연구노트가 정신없이 바빠졌다. 다른 연구들은 가족들과 개별 인터뷰를 하였다. 특히

    이 자리에는 에르난의 동생 이그나시오가 서류 뭉치를 가지고 왔었다. 거기에 에르난의 할

    아버지가 한국을 떠나면서 가져 온 대한제국이 발행한 여권원본이 들어있었다. 이 여권은

    있다는 것만 알려졌지 어느 누구도 수집하지 못하였다. 기초 자료를 가장 많이 수록한 이

    자경의 책에서도 몇 줄로 언급만 되어있었을 뿐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메리다, 티후아

    나 한인사회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연구를 해 온 서성철 연구원도 처음 보았다며 기쁨을 감

    추지 못하였다. 그는 사진촬영을 하고 그것도 미덥지 못해 정신없이 필사를 하였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큰 성과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연구원들은 몇 번이고 액자에 넣어 잘 보관

    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도 넘겨주지 말라고 이 가족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였다. 얼마나 많은

    자료들이 언론 종사자들과 연구자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분산되고 또 분실되었던가? 개별

    면접은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티후아나에서 가장 큰 집안 중의 하나인 킹 윤(King

    Yun) 집안은 에르난을 비롯한 형제들 모두가 티후아나에 초기에 이주하여 경제적으로 크

    게 성공하였다. 특히 에르난은 티후아나에서 엔세나다로 진출하여 한 때는 엔세나다에서

    몇 손가락에 들어갈 정도로 부를 축적하였다고 하였다. 지금은 사업체를 다 임대해주고 임

    대수입으로 아주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연구팀이 작별을 고할 때는 이번 주말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트로 태평양 바다낚시를 가자고 초대를 하였다. 그렇지만 금요일에

    메리다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초대에 응할 수 없었다. 티후아나로 돌아오니 밤 10시가

    되었다.

    2004년 7월 8일 목요일

    점심부터 약속들이 잡혀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시간은 오전밖에 없었다. 오전은 이제까

    지 연구를 검토하고 보충조사를 하기로 하였다. 서성철, 김세건 연구원은 한인 후손 최초

    의 여의사인 닐다 야네스(Nilda Llanes)를 만났다. 그녀가 부모님들의 혼인증명서를 내놓

    았다. 이처럼 모든 한인들이 부모님들의 유품을 고이 간직해 온 것 같았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자료들을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간직하도록 하는 것일

    까? 무엇이 이토록 이들로 하여금 열성적으로 가족의 기원을 찾게 하는 것일까?

    12시쯤 호텔로 페드로 디아스 코로나 명예영사, 알폰소 킴, 페르난도 킹, 그리고 페르민

    회장이 왔다. 세 대의 차로 나누어 타고 티후아나 해변의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함께 했다.

  • 40 멕시코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여기에서는 최근까지 한국 대사관에서 일하였고, 현재는 페드로 디아스 명예영사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강정부씨가 늦게 합류하였다. 그에 따르면 티후아나에 한국기업들이 많이 진

    출하면서 한인후손들과 별도로 한국인 사회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하였다. 그를

    통해 최근에 이주한 한국인 몇 사람을 오늘 저녁 페르민 회장 집에서 있을 예정인 저녁식

    사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저녁 8시경에 페르민 회장 집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강정부,

    김덕선, 이상균 목사 등 최근에 이주한 사람들이 모였고, 우리는 이들과 함께 한인 후손들

    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이상균 목사는 오랫동안 한인후손들에 관심을 가지고 멕시코 전

    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300여 가구를 방문, 조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보기 힘든 아주 귀

    한 자료라며 액자에 넣어 보관해 오던 여권을 보여주었다. 전날 엔세나다의 에르난 집에서

    보았던 여권과 같은 것으로 좀더 세상풍파에 시달린 듯 하였다. 갑자기 방문 손님이 많아

    진 바람에 페르민의 가족들이 손님 대접에 당황스러워 하였다. 게다가 우리가 뜻하지 않는

    방문객과 연구에 열을 올리니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페르민 가족은 부엌에만 머물렀다. 우

    리는 연구 욕심에 페르민의 가족을 헤아리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참으로 이들은

    많이 불편했을 터인데 짜증스러운 표정 하나 보이지 않고 방문객 모두를 정성스럽게 대접

    하였다. 뭐라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헤어지는데 우리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였

    다. 이별 그리고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2004년 7월 9일 금요일

    아침 9시 15분 정각에 아스테카(Azteca)항공 비행기는 티후아나 공항을 출발하였다. 이

    제까지 한번도 시간을 어기지 않았다. 멕시코의 만만디 타임은 어디에서도 없었다. 2시간

    30분 걸려 멕시코시티 공항에 도착하니, 시간은 2시 30분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는 시차

    를 넘나드는 것도 익숙해진 듯 하였다. 메리다로 가는 비행기는 오후 4시 45분에 있으니 2

    시간 가량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며칠동안 정신없이 티후아나를 돌아다니다가 그곳을 떠

    나오니 무기력증에 빠진 듯 모두가 그저 의자에 앉아 출발만을 기다렸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드디어 아에로메히코(Aero México) 비행기에 올랐다. 남으로 향할수록 녹음은 짙

    어져만 가고, 티후아나의 황량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후 6시 35분에 메리

    다 공항에 내렸다. 공항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깨끗하였다. 무척 더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비가 온 뒤라 그런지 그런 데로 참을만하였다. 호텔로 가는 길의 가로수를 보

    며 권숙인 연구원은 한국의 가을 분위기가 난다고 이야기하였다. 모두가 수긍을 하였다. 시

    내 중심가 근처에 자리 잡은 엠바사다(Embasada) 호텔에 여장을 푸니 오후 7시 30분이다.

  • Ⅱ. 멕시코 초기한인이민 역사 41

    2004년 7월 10일 토요일

    공식 일정으로 오후 1시에 유카탄 한인회장 울리세스 박(Ulises Park)을 만나기로 하였

    다. 오전은 모처럼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모두 메리다 시내에 위치한 인류학 박물관을 방

    문하였다. 주로 마야 문화유적이 소장되어 있었다. 오후 1시 울리세스 박의 집을 방문하여,

    울리세스 박, 그의 어머니 텔마 리(Telma Lee, 한국이름 이덕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유카탄 한인회관, 상무회관 등의 건물들을 방문하였다. 상무회관은 흔적도 없이 사

    라졌고, 유카탄 한인회관에는 멕시코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백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도 우물의 장식대에는 1906년이라는 표시가 명확하게 남아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쉬

    었다. 서성철, 김세건 연구원은 호텔 식당에서 한인 후손 중 최고령자로 내년이면 백 살을

    맞는 고흥룡 할아버지의 막내아들 에밀리오 코로나(Emilio Corona)를 만났다. 고흥룡 할

    아버지는 티후아나 살고 있는 사비나 코로나 할머니의 큰오빠이다. 고흥룡 할아버지를 만

    나기로 하였는데, 갑자기 일이 있어 메리다에서 자동차로 3 시간 걸리는 곳에 위치한 콜로

    니알 유카탄(Colonial Yucatán)에 살고 있는 아들집에 가셨다고 하였다. 여전히 장거리

    여행하실 수 있을 만큼 정정하시다고 하였는데, 내년 백주년 기념식에 한인이민사의 산 역

    사인 고흥룡 할아버지가 건강한 모습으로 참석하셨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았다.

    2004년 7월 11일 일요일

    아침 일찍 모든 일행은 김씨 형제들이 살고 있는 윤쿠(Yunku) 마을을 찾아 떠났다. 서

    성철 연구원이 1986년에 방문하였던 곳으로 김씨 형제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가지고 왔다.

    서성철 연구원은 부인 코보리 카오루(Kobori Kaoru)가 꼭 사진을 전달해주라고 했다며

    임무를 다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좋아하였다. 참 대단한 부부이다. 한 때 한국인이 쿠바를

    방문할 수 없을 때, 일본인인 부인 카오루가 서성철 연구원을 대신하여 쿠바의 한인들을

    두 번이나 만나러 갔을 정도이니 말이다. 두 시간 정도가 지난 후에야 마을에 도착하였다.

    서성철 연구원으로부터 들어 온 마을 풍경과는 180도 달랐다. 허름하고 가난한 농촌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도 깔끔하게 정돈된 마을이었다. 2002년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후로 정부

    와 은행의 지원으로 집과 마을을 재정비하였다고 하였다. 한인 후손으로는 김씨의 10 형제

    가 살았다고 하였다. 지금은 10형제 중 3명은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형제들도 멕시코시티,

    메리다로 이주하였고, 여섯째인 식스토 킴(Sixto Kim)만이 홀로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식스토 킴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고 부인과 함께 정부가 지원하는 식료품점을 경영하며 살

    고 있었다. 에네켄 농장이 없어진지는 꽤 오래되었다고 하였다. 이 부부와 한참동안 이야

  • 42 멕시코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기한 후, 마을을 돌아보고 우리 일행은 윤쿠 마을을 떠났다. 오후 무렵에 100년 전 한인들

    이 메리다에 오기 위해 배를 타고 내렸던 프로그레소(Progreso)항구에 도착하였다. 황혼

    빛에 멕시코만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2004년 7월 12일 월요일

    아침 10시 15분발 비행기로 멕시코시티에 도착하니 12시 30분이었다. 공항에는 며칠 사

    이에 전임 회장이 된 천세택씨가 마중을 나왔다. 시내의 한국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하

    며 티후아나로 떠나기 전에 부탁하였던 멕시코 대한민국 한인회와 관련된 자료를 넘겨받

    았다. 이로써 공식적인 일정을 무사히 마무리 하였다.

    7. 앞으로의 멕시코 한인사회 조사를 위하여

    본 연구는 멕시코 한인사회의 생활문화 전반에 첫 실태조사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 멕시코 한인사회는 잊혀진 역사였다. 1990년대 들어 한인사회에 대

    한 연구들이 이루어져 왔고, 점차 한민족의 역사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노력들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연구들은 이민의 과정, 정착, 농장 생활 등 초기 이민사에 맞추어졌다.

    한편으로 이런 현실은 멕시코 한인사회가 얼마만큼 우리의 관심 밖에 있어왔는지를 반증

    하는 것으로, 이 점은 “한국인들이 오면 우리들에게 왜 한국말을 하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99년 동안 정부는 우리를 잊고,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가 100주년이라고 우리에게 한국말

    을 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면 아무도 우리를 찾지 않을 것이다”라는 티후아나 한

    인회장 페르민의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처럼 본 연구는 멕시코 한인사회에 대한 첫걸음

    으로서 의미는 있지만, 여전히 한계가 많고 미약하기가 그지없다. 본 연구의 의의가 살아

    나기 위해서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연구, 특히 기초조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메리다, 멕

    시코시티, 쿠바, 티후아나 한인사회는 서로 연관되어 있고, 각각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

    는 전체를 아우르는 생활문화 전반에 대한 기초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실 본 연구팀은

    연구가 진행 동안, 티후아나 한인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 특히 메리다 한인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기존의 생활실태조사 연구팀들이 제안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