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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1 " 준수씨, 문 열까요? " " 네... 니요...! 아직, 열지 마세요! 10 분 후에. 제가 말한 거 다 준비 됐어요? " " 네. " " CD 혹시라도 튀면 바로바로 교체할 수 있도록 사람 오디오 옆에 붙여 놓으세요. 아! 그리고 와이셔츠 바지 안으로 집어 넣으시구요. " 준수는 눈을 찡긋 거렸다. 스물 다섯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웃는 그의 얼굴은 10 대 소년처 마냥 어리게만 보인다. 선하게 내려가는 눈꼬리와 가지런한 치아 덕분에, 사람들에게 단번에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인상이다. 그는 몇몇 가지 지시 사항들을 종업원들에게 내리 고 자신의 손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야, 한참이나 웃고 던 얼굴이 싸악 굳어지며, 그 작은 입술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 떨려 죽겠다. " 무릎까지 보이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그는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고 머리를 매만졌다. 얼마전에 다듬은 머리는 짙은 갈색의 자연스러운 색깔로, 준수의 원래 머릿빛이다. 뉴욕 에서 한창 유학생활을 할 때, 객기로 금발머리를 했던 적이 있었다. 준수는 그 때의 악몽 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할 때마다 옥수수 뿌리를 말리는 기분 이었어... 그 개털머리를 하고 졸업사진을 찍은 것이 인생 최고의 오점이다. 머리가 다시 자란 후에야, 미용실에서 갖은 트리트먼트와 온갖 영양제를 쳐발라 가까스로 원래 머릿 결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보들보들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심하게 좋아하는 준수. 분 명히 떨리는 마음으로 화장실로 들어왔는데, 지금은 이상한 데로 정신이 팔린 것 같다. " 아! " 그제서야 자신이 왜 들어왔는지 자각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오늘은 그가 파티 플래 너가 된 후 처음으로 여는 파티다. 한국에서 생소한 직업이었기에 외국까지 나가서 비싼 돈을 들여 전문 교육을 받고 다시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소개해준 첫 일 은 나이가 꽤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와인 파티다. 분위기 있는 와인 바(bar) 섭외부 터, 음악, 조명, 파티의 컨셉까지 모조리 준수가 책임져야만 했다. 귀국하자마자 대한민 국의 공기를 느낄 새도 없이 (느껴봤자지.) 골머리를 싸매고 일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리 고 드디어 파티의 당일 날, 그는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 마치 수능 치르러 가는 고 3 처럼. 턱시도를 변형시킨 검은색 상의를 가다듬고, 활동하기 편한 청바지의 길이를 적당히 조 절했다. 마지막으로 센스있는 남자들의 영원한 친구 가그린으로 입 안을 헹궈주는 미덕 도 잊지 않는 준수. 한참이나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데,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Happy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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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jae fanfic happy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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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Happy Together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1

" 준수씨, 문 열까요? "

" 네... 니요...! 아직, 열지 마세요! 10분 후에. 제가 말한 거 다 준비 됐어요? "

" 네. "

" CD 혹시라도 튀면 바로바로 교체할 수 있도록 사람 오디오 옆에 붙여 놓으세요. 아!

그리고 와이셔츠 바지 안으로 집어 넣으시구요. "

준수는 눈을 찡긋 거렸다. 스물 다섯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웃는 그의 얼굴은 10대 소년처

럼 마냥 어리게만 보인다. 선하게 내려가는 눈꼬리와 가지런한 치아 덕분에, 사람들에게

단번에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인상이다. 그는 몇몇 가지 지시 사항들을 종업원들에게 내리

고 자신의 손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야, 한참이나 웃고 있

던 얼굴이 싸악 굳어지며, 그 작은 입술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 떨려 죽겠다. "

무릎까지 보이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그는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고 머리를 매만졌다.

얼마전에 다듬은 머리는 짙은 갈색의 자연스러운 색깔로, 준수의 원래 머릿빛이다. 뉴욕

에서 한창 유학생활을 할 때, 객기로 금발머리를 했던 적이 있었다. 준수는 그 때의 악몽

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할 때마다 옥수수 뿌리를 말리는 기분

이었어... 그 개털머리를 하고 졸업사진을 찍은 것이 인생 최고의 오점이다. 머리가 다시

자란 후에야, 미용실에서 갖은 트리트먼트와 온갖 영양제를 쳐발라 가까스로 원래 머릿

결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보들보들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심하게 좋아하는 준수. 분

명히 떨리는 마음으로 화장실로 들어왔는데, 지금은 이상한 데로 정신이 팔린 것 같다.

" 아! "

그제서야 자신이 왜 들어왔는지 자각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오늘은 그가 파티 플래

너가 된 후 처음으로 여는 파티다. 한국에서 생소한 직업이었기에 외국까지 나가서 비싼

돈을 들여 전문 교육을 받고 다시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소개해준 첫 일

은 나이가 꽤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와인 파티다. 분위기 있는 와인 바(bar) 섭외부

터, 음악, 조명, 파티의 컨셉까지 모조리 준수가 책임져야만 했다. 귀국하자마자 대한민

국의 공기를 느낄 새도 없이 (느껴봤자지.) 골머리를 싸매고 일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리

고 드디어 파티의 당일 날, 그는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 마치 수능 치르러 가는 고 3처럼.

턱시도를 변형시킨 검은색 상의를 가다듬고, 활동하기 편한 청바지의 길이를 적당히 조

절했다. 마지막으로 센스있는 남자들의 영원한 친구 가그린으로 입 안을 헹궈주는 미덕

도 잊지 않는 준수. 한참이나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데,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Page 2: Happy Together

들려왔다.

- 준수씨, 문 열게요!

" 오케이, 나가요! "

모든 건 자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언제나 '변수'가 있다는 것을, 그는 아직 깨닫

지 못한 듯 싶다.

* * *

그 '변수'는 파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거의 정장이나 투피스 같

은 격식있는 옷차림을 한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검은색 라이더 자켓을 입고 있다. 그리

고 헤질 대로 헤진 청바지는, 분명 동대문에서 산 듯한 모양새다. 그것도 두타나 밀리오

레가 아니라 평화시장 표. 평화시장에서도 새벽에 떨이로 파는 오 천원짜리 청바지...

" 죄송하지만, 초대장 보여주시겠습니까? "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먼저 초대장을 보여주든지, 파티 플래너에게 얼굴을 보인 후 웃으

며 안으로 들어가지만, 그는 예외였다. 들어오자마자 긴장한 표정의 종업원이 들어와 초

대장을 요구했다. 분명히 어디서 술 냄새를 맡고 들어 온 버러지 쯤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 이거? "

" 아... 예. "

진짜 초대장을 들고는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종업원. 오늘 파티는 분명 나이 있고

격식 있는 사람들이 주체가 되는 와인 파티인데, 이 남자는 자기 또래처럼 어려보이는데

다 옷차림은 그야말로 합바리다. 그러나 칼라복사한 것도 아닌 진짜 초대장을 스윽 내밀

고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 술술. "

" 네? "

" 술 한병. "

어찌저찌 하지도 못하는 종업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와인 진열장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

그에게 가져갔다. 준수는 저만치에서 이 파티의 주최자와 한껏 웃으며 대화 중이었기에,

쉽게 말을 시키거나 불러내기도 어려웠다. 그 틈을 타서 와인 한 병을 병째로 입에 붓고

있는 저 남자. 잘생긴 목젖이 제대로 한 번 움직이거니, 잘생긴 미간이 제대로 찌푸려 진

Page 3: Happy Together

다.

" 씨팔, 이게 술이냐! "

" 수... 술인데... "

잔뜩 쫄아가지고 옆으로 슬금슬금 게걸음치는 종업원을 무시하고, 남자는 의자에 앉아

주위를 휙 둘러 보았다. 약간 붉은끼가 도는 머리는 대체적으로 짧다. 눈썹 위로 깡총깡

총 뛰어 올라간 앞머리 덕분에 상당히 어려보이지만, 다리 건들거리는 간지를 보아하니

여간 인생 고달프게 산 듯 싶다.

검은색 라이더 자켓의 남자, 유천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저녁 열 시. 분명히 오늘 여기에

이 시간 쯤에 온다는 정확한 제보를 받았다. 이제 슬슬 모습이 보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

하며, 그는 몸을 낮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 끄아아- "

이상한 소리로 하품 하고는, 옆에 놓인 와인 병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태생 부터가

소주파인 그에게, 와인은 도저히 입에 맞지 않았다. 소주의 그 알싸하면서,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의 짜릿함이 없어- 궁시렁거리며 다리를 여전히 건들건들 거린다. 들어 오는

문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가, 자세를 낮추고 건들거리던 다리를 멈췄다. 무언가 목표물

을 잡은 듯한 눈초리다. 먹잇감을 노리는 암사자의 눈!

유천이 바라보는 그 곳에는, 이제 막 들어온 한 남자가 서있었다. 얍실하게 생긴 길고

긴 얼굴형에 두꺼운 몸. 그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안으로 들어오더니 누

군가 아는 얼굴을 만난 듯 반색을 하며 조금 더 와인 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 손님... "

" 씨팔, 개새끼. "

" .... 네? "

수상한 남자가 파티에 온 것 같다는 종업원의 말에, 서둘러 달려온 준수의 눈이 동그랗

게 커졌다. 자신이 듣기로는 분명 씨팔, 개새끼라고 한 것 같은데.

" 조져버리겠어. "

" 소... 손님? "

" 임혁필!!! "

Page 4: Happy Together

순간, 의자가 날라가듯 저만치 쳐박히면서 유천의 검은색 라이더 자켓이 하늘로 솟구쳤

다. 그리고 기겁하는 준수를 뒤로한 채 유천은 임혁필이란 남자에게 전속력으로 달려갔

다. 혁필은 유천을 발견 하자 마자 비명을 지르며 테이블 위를 넘어 필사적으로 뛰기 시

작했다. 조용하던 와인바에 순식간에 비명 위에 비명이 주저앉으며 테이블 위가 박살난

유리조각으로 디스플레이 되었다. 강은비 놀란 표정 마냥 입이 길쭉해진 여자들이 소리

를 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얌전히 올려져 있던 와인 병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 이 개새끼!!! 어딜 토껴!? 이 씨팔놈!!! "

" 아! 아! 씨발! 박형사! 좀 살... 아아! "

결국 혁필의 목덜미를 잡아 테이블 위로 엎드려 눕힌 유천이, 손을 뒤로 꺽어 품 안에서

수갑을 꺼내 채웠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유천의 표정이 그제서야 만족스럽게 변하

는 듯 싶다. 예쁜 테이블 위로 사정없이 구겨진 혁필의 얼굴이 보기 안쓰럽지만, 그에게

는 별다른 배려심이 보이지 않았다. 유천은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며 혁필에게 조

용한 목소리로 그 유명한 미란다 원칙을 읊기 시작했다.

" 임혁필 씨,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 변호

사를 선임할 능력이 없다면 공익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진술 중에 언제

든지 중단할 권리가 있답니다. "

" 으.... "

준수는 덜덜 떨리는 걸음으로 유천이 범인을 검거한 현장으로 다가왔다. 그에게는 유천

이 범인을 잡았건, 뭘 했던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다만, 몇 주 전부터 자신이 모든 힘을

쏟았던 첫 파티의 현장이 처참하게 구겨진 몰골만 악몽처럼 다가올 뿐이다.

" 근데, "

유천의 낮은 목소리에 준수가 걸음을 멈췄다. 이미 놀라서 나가버린 손님이 반. 호기심

으로 몰려든 손님이 반.

" 혁필아... "

" 으... 응? "

혁필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자기로서는 유천에게 배려심을 유

발하기 위한 최후의 방책이었을지 모르나,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유천의 꼭지가 다시

돌아버렸다. 씨팔! 완벽한 범죄자의 얼굴이잖아! 유천은 혁필의 뒷머리를 강하게 잡아

채고 다시 한 번 테이블에 거칠게 비벼 박았다.

Page 5: Happy Together

" 이 씨팔놈아, 내가 너 때문에 몇날 며칠을 밤을 꼴딱 샜는 줄 아냐?! 경감한테 얼마나

쿠사리 먹었는 줄 알어?!?! 씨발!!!!! 아악!!!! 내가 새벽에 먹은 컵라면만 몇 박스인 줄

아냐?!!! 그것도 돈 없어서 코딱지만한 신라면 먹었어!!! 너 잡을라고!!!! 너 잡을라고! "

" 바.. 박형사...! "

" 이 개새끼야! 내가 경고하는데, 암말 안하고 꼴에 묵비권 행사하면 넌 즉시 뒈진다. 꼴

에 변호사 선임한다고 깝치며 변호사까지 단체로 합숙훈련 들어간다. 심문할 때 아가

리 제 때 안 열면 얼굴을.... "

" 살려줘어....! "

" 얼굴을..... "

저 얼굴을 뭐, 어떻게 더 할 것도 없겠구나. 유천은 중얼거리며 다시 뒷머리를 테이블에

연속으로 박아댔다. 쾅쾅쾅- 신명나는 소리...

" 죽여버린다. "

그제서야 속이 좀 풀린 얼굴로 반듯하게 선 유천이, 핸드폰을 귀에 대고 싱글싱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네! 지금 잡았습니다. 아니요, 말썽 안부리고 곱게 잡았어요. 네. 그러믄요. 미란다

뭐시기 다 말해줬어요. 지금 소환 하겠습니다. 예이-! "

탁, 핸드폰 끊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유천이 혁필의 목덜미를 질질 끌고 와인 바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그를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단지 그가 걸을 때마다, 바닥에 산더미

처럼 쌓여진 유리조각들이 바사락 소리를 내며 밟힐 뿐이다.

그리고 유천이 모습을 감췄을 때, 준수는 그제서야 자리에 주저앉아 와앙- 큰 소리로 울

어버렸다. 절대로 완벽할거라 의심치 않았던 자신의 첫 일. 첫 파티. 생각치도 못했던 변

수 때문에 모조리 망해버렸다.

" 죽어버려어어! "

뭐, 그렇게 쉽게 죽을 남자로는 안 보인다만.

* * *

" 안녕? "

Page 6: Happy Together

" 네? "

" 김재중, 맞지? "

" ... 네. "

" 아버지가 김준혁, 맞지? "

재중은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또 무슨 사고를 쳤구나! 그새 조용

하다 싶어서 관리를 소홀하게 했더니 또 슬금슬금 기어나가 골 때리는 일을 저지른 모양이

다. 재중은 최대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 아닌데요. "

" 그래? 그럼 이건 누굴까. "

자신과 똑같이 밝게 웃고 있는 그 남자의 손에는, 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들려 있었다.

" 나랑 닮은 사람인 것 같은데... "

" 재중아, "

" 네? "

" 그냥 가자. 대낮이잖니. 주위에 보는 사람들도 많고. "

썅! 얼마 전에 이사 간 단칸방에 유일하게 있는 가족사진이었다. 가족이래봤자 태어나자

마자 죽은 어머니 빼고, 아빠와 나. 단 둘 뿐이었지만. 재중은 속으로 이를 갈며 저 사진

을 액자에 끼워 놓은 자신을 저주했다. 그나저나 저 사진을 입수한 걸 보면, 이미 집안에

들어가 난리를 쳐놓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집안 곳곳에는 재중의 대학 이름

이 걸린 파일과 공책들이 난무하기에 찾기는 쉬웠을 것이다. 썅! 재중은 다시 한 번 속으

로 이를 갈았다. 명문대 들어왔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허구언날 학교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공책들만 주구장창 사댔던 것이 화가 될 줄이야.

" 저 여기서 개길건데요. "

" 니네 학교 앞이잖아. "

" 네. 학교 앞에서 저 후려치면 금방 경찰와요. 학생들이 바로 신고 때리니까. "

" 나 너 후려 안칠거야. "

" 네? "

" 이걸로 그냥 긋고 갈거야. "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며 씨익 웃었다. 재중은 순간적으로 얼어 붙었다.

이 남자의 말은 허풍이 아니다. 저 팔에 건강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문신으로 봐서는,

단순한 양아치 새끼도 아니다. 그저그런 양아치들은 나중에 피부 잘못 될까봐 저렇게

커다란 문신도 하지 못한다. 재중은 숨을 고르고 양 옆으로 늘어선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포커 페이스에, 짧은 머리를 하고 있다. 건전한 캠퍼

스에 갑자기 들이닥친 정체불명의 사내들 때문에, 구경꾼들이 하나 둘 씩 몰려들었다.

Page 7: Happy Together

" 경찰이 무섭지도 않으세요? "

" 푸하하하하- "

빌어먹을... 이미 경찰 쪽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인가 보군. 재중은 혀를 입 안으로 말며

시선을 떨궜다. 명색이 국내 최고 권위있는 대학교에서 법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인데,

이럴 때 할 수 있는 말이 아무 것도 없다니.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법이라며, 그런

데 이들은 그 법을 길바닥 달라붙은 껌보다 천시하는 듯 하다.

" 김재중. "

" ........... "

한참이나 웃던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재중은 살면서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

빨리 변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껄렁껄렁 거리며 껌이나 질겅질겅 씹길래 무시했는

데, 무표정으로 변한 남자의 얼굴은 소름끼치게 차가웠다. 그 남자의 손에서 놀고 있

는 단도가 빠른 속도로 회전한다.

" 웃으면서 말하니까 장난 같아 보이냐? "

" ...... "

" 이 잘난 대학교 안에서 목에서 피뿌리고 네 인생 쫑내고 싶냐? "

" ...... "

" 타라. 안 그래도 내 귀여운 칼언니가 네 목 위에서 춤 추고 싶어 죽을라 한다. "

재중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옆에 서 있던 남자들이 재중의 양 어깨를 잡았다. 끌려

가듯 질질 끌리던 재중이,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치며 손을 뿌리쳤다.

" 갈 테니까 이거 놔! 이 새끼들아! "

쫘악-!

순간 자신의 볼 위에서 세계 2차대전이 일어나는 줄 알았다. 번쩍, 하는 느낌과 함께

엄청난 것이 얼굴을 후려쳤다. 손바닥 한 대 맞고 바닥에 널부러졌다. 주위에 몰려

든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그러나 섣불리 나서서 재중을 돕기엔 주위에

둘러 서 있는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들의 서늘함이 주위를 짓누르고 있었다.

" 주제 파악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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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웃음도, 빈정거림도 없었다. 차갑게 재중을 노려보던 남자는, 그대로 그의

머리채를 잡아올려 검은색 승용차 뒷좌석으로 밀어넣었다. 힘 없이 밀려 들어가던

재중의 머리 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자리잡았다.

' 좆됐다. '

어느 날씨 좋... 다고 하기엔 조금 추웠던 11월 중순. 재중은 자신이 다니던 학교의

캠퍼스 한 복판에서, 정체도 모르는 수상한 남자들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가

버렸다. 한 쪽 볼따귀는 호떡마냥 퉁퉁 불어서.

* * *

" 수고했어요, 박형사. "

" 이번에 진! 짜! 오래 걸렸다고! 나 혁필이 저 새끼 얼굴 보고 울 뻔 했잖아요! 존! 나!

반가워서! "

" 어쨌거나 한숨 돌렸네요. 그 동안 피곤했으니까 푹 쉬어요. "

" 그럴겁니다. 검사님도 쉬세요. "

창민은 빙그레 웃으며 두꺼운 서류파일을 책상 서랍 안으로 집어넣었다. 두 달이 넘게

잡히지 않던 임혁필은, 거의 소탕된 홍초파의 두목이었다. 행동대장까지 모두 잡아 넣

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가리가 잡히지 않아 강력반 전체가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달을 꼴딱 센 결과, 강력 1반 최고의 포악한 성격을 지닌 유천이 범인을 검거

한 것이다.

" 그나저나 박형사, 범인도 사람이에요. 때릴 때는 얼굴 말고 다른 데를 때려. 혁필이

얼굴 보고 다른 사람인 줄 알았잖아. 다 뭉개져서. "

" 걔 원래 그렇게 생겼어요. "

창민은 한숨을 쉬며 아까 보았던 범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빨 나가.. 입술 터져.. 눈

시퍼래.. 코피 줄줄나.. 어디서 K-1 하다가 끌려온 줄 알았다.

" 아, 박형사. 범인 잡을 때 또 때려 부쉈어요? "

" 네? "

" 저번에, 홍초파 부두목 양배추 잡을 때 술집 하나 때려부쉈잖아. 그래서 손해 배상

청구액이 얼마가 나왔는 줄 알어? 그거, 다 우리 강력반에서 물어주는 거에요. "

" 살살 했는데? "

" 그 때도 살살 했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테이블 여섯개 부숴지고 소주 궤짝으로 두 개

날로 먹었다며. 주방은 초토화시키고. 후라이팬 여섯개 깨먹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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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사님 아시잖아요! 양배추 그 새끼가 얼마나 포악한지! "

살면서 너보다 포악한 사람은 본 적 없어요.. 박형사. 창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유천을 바라보았다. 가만히만 있으면 정말로 곱상하게 생긴 얼굴인데, 어찌하다 성격

이 저리 태어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가끔 창민은 유천이 형사가 된 것을 신께

감사드리곤 한다. 범죄자로 삐딱선 탔어 봐. 저 놈은 아무도 못 잡는다.

" 이번에는 손해 배상 청구 안 들어 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요. "

" 아! 살살 했다니까 그러네! 주방도 안 들어갔어! "

유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력 1반의 문이 부숴질 듯 큰 소리를 내며 옆으로 열렸다.

그렇게 열린 문 앞에는 살인마 못지 않은 살기를 띄우고 있는 남자, 준수가 서 있었다.

" 누구 찾아 오셨어요? "

" 여기, 박유천이 누구야. "

" 응? "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유천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막 익기 시작한 컵라면을

먹으려 젓가락질을 하던 중이었다. 거기에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남자가 서 있었다. 유

천은 그를 어디서 봤더라 머리를 굴리며 잠시 생각했다.

" ... 아! 생각났어! "

혁필이 잡으러 가기 전에 내 옆에 왔던 남자다! 유천은 라면을 후루룩 먹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래도 기억력 있는 걸 보니까, 뇌 속에 주먹질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러

고보니, 엄청 예쁘게 생긴 남자다. 예쁘다, 못생겼다- 단 두 가지로만 사람의 인상을 판

단하는 단순한 유천은, 다시 고개를 들고 준수를 바라보았다. 특이한 모양의 눈매에, 하

얗고 깨끗한 피부에, 아래가 꽉 깨물어져 더욱 붉어 보이는 입술.

잡아먹고 싶게 생겼...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에게 그런 생각을 품은 자신에게 놀라며, 유천은 얼굴을 찌푸렸

다. 이거 지금 무슨 생각이야? 썅놈의 대가리 같으니.

" 내가 왜 왔는 줄은 알지? "

Page 10: Happy Together

다짜고짜 반말로 나오는 준수의 말투에 순간 기분이 나빠지는 유천이다. 예뻐서 넋놓고

보고 있을라 했더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다다다다 쏘아붙이는 꼴이 얄밉다.

" 몰라. "

" 그 자리가 무슨 자리였는 줄 알어?! "

" 혁필이 잡는 자리. "

" 야! "

" 씨발, 너 몇살이야?! 지금 누구한테 개겨?! 내가 누군줄 알어?! "

" 너 누군지 내가 알바 없고, 이거나 물어내. "

준수가 내민 종이는 몇 번이나 봐왔던 익숙한 것이었다. 범인을 검거한 후에 꼭 저런

종이를 받고는 했었지. 손해 배상 청구액... 옆에서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창민은

한숨을 쉬며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또, 또, 위로 불려가서 한 소리 듣게 생겼네.

" 뭔데? "

" 니가 내 파티에서 날려먹은 돈들이다! "

" 얼만데, 난 그런 거 모르니까 저기 심검사님한테 가서 말해 봐. "

" 니가 깨부쉈잖아! "

" 응. "

뭔가 대화가 안통하는 시츄에이션이다. 준수는 터질 듯한 분노를 억누르며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최대한 위로 치켜떴다.

' 오, 섹시한데! '

이 와중에서도 준수의 모습을 열심히 캡쳐하고 있는 유천은 모뇽.

" 일 억 갚으라고!! "

콰당!

평소에 절대로 자제력을 잃지 않기로 유명한 창민이 바닥으로 뒹굴었다. 강력반으로

온 후 처음으로 보는 모습인 듯 싶다. 주위에서 다른 형사들이 수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범인들 보다 더 사고치고 다니는 박형사가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일억이

라는 천문학적인 액수가 나왔는지 궁금한 듯 싶다. 창민은 땡기는 뒷목을 잡고 다시

의자에 앉아 오랜만에 하이톤의 목소리로 지겨운 그 이름을 불렀다.

Page 11: Happy Together

" 박유천! 그 종이 가지고 내 앞으로 당장 튀어와!!!! "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2

어디 가는 거에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재중은 입술을 달싹거릴 수도 없었다. 아까

맞은 곳이 욱신거려서 입술을 움직이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세게 때린 건

지는 몰라도, 손바닥 한 대에 얼굴이 그 지경이 됬으니, 다른 곳을 연신 강타로 맞았다면

아마도 재중은 지금 저 세상 사람.

" 거의 다 왔으니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보지 마. "

" ...... "

" 맞은데, 아프지? 그러길래 맞을 짓을 왜 했어. "

" ....... "

" 너희 아버지 토낀 죄라고 생각해라. 우리 조직한테 3억 넘게 빚져놓고 도박으로 죄다

날려먹었어. 그리고 홀연히 사라졌고. "

씨팔!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빌어먹을 영감탱이...! 손에 카드를 쥐지 않으면 풍걸린 사람

마냥 덜덜 떨고 지랄이야! 재중은 도리질을 치며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의 도박 때문에

어려서부터 겪은 시련이 몇이던가. 이제는 모두 생각나지도 않는다. 잘나갈 때는 제대로

잘살았던 기억도 있다. 재벌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준재벌급으로 떵떵거리며 살았다. 재

중은 법을 공부했지만, 피아노 치기라는 고상한 취미도 가질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꽤

재능있던 재중이 유명 피아니스트와 해외에서 리사이틀을 열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다 꿈이지... 쯧, 재중은 혀를 차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다 왔어. 여기야. "

" ? "

암흑의 조직이라고 하길래, 뭔가 어두운 건물을 생각하고 있었다. 시꺼먼 콘크리트 건물

이라던가, 일반인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골목길의 지하방 쯤. 그러나 재중의 눈 앞에 보이

는 것들은 일반 주택가와 다를 바 없는 그런 곳이다. 잘 가꿔진 정원이 있는 아담한 주택

들이 줄지어 양 옆으로 서 있었고, 그 한 가운데 가장 커다랗지만 검소해 보이는 모노톤

벽의 저택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재중은 내리며 중얼거렸다. 물론 바

Page 12: Happy Together

로 아파오는 입술 덕분에 입을 앙 다물긴 했지만.

" 왜, 네가 상상했던 곳이 아니라 실망했어? "

" ........ "

" 이 일대가 모두 우리 조직의 땅이야. "

" .......! "

" 대단하지? 미개발 지역이지만 앞으로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갈 곳이야. 이 주택들은

모두 조직원들이 사는 곳이다. 우리들이 사는 곳이 하나의 도시나 마찬가지지. "

그리고 저기, 가장 큰 저택에 네가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어. 재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찌됐던 간에, 단도에 목이 잘려 죽을 위험은 피해야 했다.

자신은 아직 젊고 죽기 싫었으니까. 게다가 군대까지 갔다왔는데 죽어버리면 너무 억

울하잖아!!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어마어마한 조직의 보스라니까 틀

림없이 꽉 막힌 사람은 아닐거야. 재중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 * *

남자는 하얀 도복을 입고 있었다. 아침마다 개인 공터에서 몸을 수련하고 연마하는 것

이 자신의 첫번째 스케줄이기도 했다. 그의 조직의 태생은 뉴욕으로, 한국으로 건너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뉴욕에서는 '조직'이라기 보다는 '마피아'라는 이름으로 불리

워지곤 했었다. 조직원들이 100% 한인들로 이루어졌으며 주로 미국 땅에서 불합리한

처사를 받고 있는 한인들을 도와주는 일을 해왔다. 물론 주된 사업은 마약도매업이었

지만. 한국으로 거처를 옮긴 후 그는 어느 때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었다. 아마

고국의 피란 건 이런 것일테지..... 그는 숨을 들이쉬며 공터 뒤로 펼쳐진 대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 보스. 데려왔습니다. "

" 응.. 그래. 곧 갈게. "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보이지 않게 씨익 웃었다. 왔다 이거지... 그럼 맞이할 채비를

해볼까.

* * *

" 술 값만 육백만 원?!?!!! "

" 한 병에 육십만 원짜리 열 병 깨먹었거든요. "

" 인테리어 천만 원?!?!!! "

" 진열장에, 테이블 유리에, 의자에.. 그거 모두 수입품이에요. 우리 나라에 없는 거라

구요. 이태리에서 제값보다 비싸게 들여온건데, 모두 깨먹었으니 배상하셔야죠. "

Page 13: Happy Together

" 박유천!!!!! "

유천은 딴청을 피우며 습관처럼 다리를 건들거렸다. 그러나 그도 인간인지라, 상상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금액에 마음 속으로는 식은땀 한 방울 정도 흘려주고 있었다.

" 이건 또 뭐야, 업무 방해죄 삼천만 원!?!?! "

" 거기 모인 사람들이 누군 줄 알아요? 모두 사회에서 저명있는 높은 분들이야. 완전히

아수라장 만들어놓고, 사람들 다 나가게 만들어놓고, 파티에 들어간 돈이 얼만데 그걸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잖아! "

" 박유천!!!!! "

" 아니, 내가 그런 파티인 줄 알았나... 그냥 술 먹는 모임인 줄 알았지.. 중년남자들 부부

동반 동창회 같은 거.... "

그래도 일 억은 안 된다. 도대체 남은 돈 들은 어디다 써먹은 거야?! 창민은 눈을 부라리

며 종이를 훽훽 넘겼다. 오천만 원짜리 정신배상금액? 뭐야, 이건?

" 저 남자 때문에 내 첫 일을 망쳤어요. 뉴욕에서 몇 년동안 뼈빠지게 공부하면서 간신히

자격증 따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어렵사리 맡은 첫 일을 그 따위로 망쳐놓았다고! 앞

으로 내 앞날은 어쩔거고,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은 어쩔거야?! 내가 받은 정신적 충격

이 얼마나 큰 줄 알어?! 여기까지 찾아오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쓰러지는 줄 알았어! "

진짜 앙칼진 목소리다... 제대론데. 유천과 창민 모두 그렇게 생각하며 바락바락 소리지

르는 준수를 바라보았다. 창민은 한숨을 쉬며 종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 나머지는 모두 배상하겠습니다. 하지만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청구한 오천만 원은 저

희가 해드릴 수가 없네요. "

" 왜요! 왜!! 당신들이 뭘 한 줄 알어?!! 내 앞날을 막았어! 한 사람 인생 망쳐놨다고!! "

" 저희는 분명 수사협조의뢰를 드렸습니다. 받지 못하셨나요? "

" 그게....! "

도대체 유천이 어떻게 초대권을 가지고 들어왔을까, 준수는 꼬리에 꼬리를 잡고 수색해

나갔다. 결국 자신이 피곤해 잠들었을 때 대타로 문의 전화를 받던 조수 한 명이 의뢰를

받아들이고 유천에게 초대장을 보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조수는 기억력이 나빴기에

금세 그 사실을 까먹고 미처 준수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 파티 플래너라고 하셨죠. 그 직업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파티에 대한 총체적인

관리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강력반 형사가 범죄자를 잡기 위해

수사 협조를 의뢰했을 때, 이 정도 손해가 날 것은 예상 하셨어야죠. "

Page 14: Happy Together

생각보다 손해 배상액은 꽤나 크지만... 유천은 또박또박 말하는 창민의 말에 덩달아 자

신도 날뛰며 준수를 몰아부쳤다.

" 맞아! 니가 다 관리하는 거 아니야?! 씨발! 대한민국 형사가 범인 잡겠다고 나서는데

파티고 자시고 신경 쓸 겨를이 어디있어?! 우리 니네 지키는 사람이거덩?! 막말로 그

새끼 못 잡았으면, 언제 어디서 그 새끼가 너한테 해꼬지 했을 지 어떻게 알어?!?!?! "

" ...... "

" 꼬시다! 푸하하하! 다 니 잘못이지?! 꼬시다! "

아이고 배야~! 를 외치며 웃겨 죽겠다며 옆에서 낄낄거리고 웃는 유천. 창민은 들고 있

던 서류뭉치로 그의 대가리를 바람 소리나게 후려치고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준수는

말이 없었다. 그래, 자신의 잘못이 아예 없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기에는 너

무나 분하고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거의 한 달을 고민하고 매진했던 첫 일이었는

데... 너무 쉽게 망가져버렸어...

" 할 말 없지?! 니가 잘못했지?! 이 쪼끄만 게 어디 와서 난동이야?! 일 억 좋아하네! 그

게 누구네 똥개 이름이냐?! 내가 뼈빠지게 일해도 그 돈 못 모아!! "

.. 스스로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유천... 자기가 말해놓고도 아니다 싶어서 머리를 긁

적거렸다. 그리고 다시 준수를 바라보는데,

" 얼래? 너 우냐? "

어쩐지 조용하다 싶었더니, 그는 울고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소리내지 않게 조용히.

눈을 내리뜨고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남자

가 이렇게 조용히, 그리고 예쁘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유천은 순간 당황했다.

분명 남자가 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여자가 우는 모습을 보는 듯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이 들었다. 자신이 뭔가 큰 잘못을 했다는 기분도 덤으로 들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주위에서 남자가 울면, '남자가 울면 좆빠져, 새꺄!' 하고 뒷통수를 후려치기 일쑤였는

데, 준수에게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 아... 저기, 왜 울어? "

너 때문이잖아!!!!!! 창민은 눈을 사납게 부라리며 다시 서류뭉치를 들고 유천의 머리를

연속타로 내리쳤다. 만약 유천이 형사들 중 가장 범인검거에 열심히인 형사가 아니었

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력반에서 내쫒았을 것이 분명했다. 창민은 한숨을 쉬며 울

고 있는 준수의 등을 토닥거렸다.

Page 15: Happy Together

" 어느 정도 손해 배상은 저희 쪽에서 하겠습니다. 일단은 그게 원칙이니까. "

그래도 준수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박형사!' 등의 야유가 쏟아지며

강력 1반의 형사들이 혀를 찼다. 유천이 당황하면 당황할 수록, 준수는 더 많이 울었다.

차라리 울음소리라도 내고 크게 울면 좋을 텐데, 입술만 깨물고 눈물만 주구장창 흘려

대는 덕분에 유천의 당황감만 배로 늘어갔다.

" 박형사, 데리고 나가서 사과하고 돌려보내세요. "

" 아... 네! "

" 그리고 다시 한 번 이따위 금액을 손해배상 청구액으로 받아오면, "

죽여버린다- 창민의 입모양이 그렇게 말했다. 유천은 순간 온 몸에 돋는 소름을 자제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심검사가 또 화내면 말릴 사람이 없지. 서둘러 준수를 데리고

강력 1반 밖으로 튀어나갔다. 자신의 손에 한 줌으로 잡히는 그 마른 손목에 또 놀라며.

' 닭 모가지 잡은 기분이네... '

그 와중에도 저 따위 비유밖에 못하는 건, 역시 박유천이기 때문에.

* * *

" 들어가. "

커다란 문이 열리고, 재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적당히 어두웠으며 적당히

넓었다.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조직원들의 포스 또한 막강했다. 꿀떡 넘어가는

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서, 재중은 쪽팔린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걸어가

적당한 자리에 섰다.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는 실루엣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 오느라 고생 많았어. "

불이 조금 밝아지며 그제서야 보스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재중은 순간 토하는 줄

알았다. 씨팔, 저걸 얼굴이라고 모가지에 달고 다니냐!! 하긴, 저렇게 생겼으니까 할

줄 아는 게 싸움질 밖에 없었겠지. 진정으로 싸움 걸고 싶게 생긴 얼굴이다..

" 너희 아버지 김준혁. 도박판에서 유명하더군. 일단 밑천만 모이면 걸고 본다고. "

Page 16: Happy Together

" 부자관계 인연 끊은 사람입니다. 저랑 상관 없어요. "

" 그래? 그럼 느이 아버지 잡는 즉시 칼로 모가지 후벼파도 되겠냐? "

" ....... "

아우... 빌어먹을 신아, 너는 왜 나를 김준혁 자식으로 태어나게 했냐...! 재중은 발광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효도는 못할 지언정, 아버지

목 따겠다는 말에 시니컬하게 '그러렴' 하고 말할 정도로 정신나간 놈도 아니다.

" 느이 아버지가 워낙 얍샵해서 잡히지가 않는구나. 3억이 애들 이름도 아니고, 일단

뭐라도 갚아야 우리가 마음을 놓고 사업을 하지. "

가진 땅으로 봐서는 3억도 우스울 남자 같은데, 재중은 쪼잔하다고 생각하며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남자의 입에 물린 시가가 치익, 소리를 내며 타들어간다.

" 아들인 너가 갚아. "

" 저 돈 없는데요. "

돈이 어딨어, 씨발! 일인당 삼만 원 내라는 엠티비도 없어서 엠티도 못 갔는데! 물론

간다고 어울릴 친구들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 사는 단칸방도 간신히 얻은 거다.

물론 단칸방 집문서가 있긴 하지만, 팔아봤자 오백 만원이나 나올려나. 그것도 아버

지한테 들키면 도박판으로 저당잡힐까봐 땅 밑에 파묻었다. 삽질하고 파묻었지...

" 돈이 없으면 몸으로 갚아. "

" 네?!?!!! "

순간, 재중은 고개를 번쩍 들고 황당한 표정으로 보스를 바라보았다. 뭘로 갚어?! 몸?!

씨발... 이게 말로만 듣던 신체 포기 각서냐?!! 혹시, 저 남자.. 지금 나 따먹을라고?!?!!

나보고 저 제삿상 올려진 돼지 대가리 같이 생긴 남자한테 후장 뚤리라고?!

" 뭘 생각했길래 표정이 그래? "

" 싫어요! 다른 건 몰라도 몸으로 갚는 건 싫다구요! 벗길 생각 하지 마..! 씨발! 차라리

혀 깨물고 죽어버릴 테니까! "

풋..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린다. 재중이 고개를 돌려보니 보스의 양 옆으로 서있는 조직원

들 중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킥킥거리며 웃고 있다.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

Page 17: Happy Together

만 틀림없이 간 큰 남자임이 분명하다.

" 조용히 해, 정윤호. "

" 죄송합니다, 보스. "

보스는 피식 웃으며 재중 앞에 서류를 던졌다. 설마 신체 포기 각서일까 싶어서 조심스

레 서류를 집어 들춰보았는데,

" 진짜 신체 포기 각서잖아!!! "

" 멋대로 이상한 상상하지 마. 난 남자 따먹는 취미는 없어. 게다가 너는 너 자신이 3억

이라는 가치가 있는 남자라고 생각하나? "

재중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하긴, 나 한 번 따먹고 3억이라고 생각한 내가 미친놈

이지. 내가 무슨 헐리우드 톱급 여배우도 아니고. 재중은 스스로 무덤을 판 자신을 자책

하며 서류를 훑어보았다.

" 국내 최고의 명문대에서 법을 공부하는 남자라지. 그것도 수석 입학에, 장학금은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수재 중의 수재라고. "

" ....... "

" 이번 학기가 마지막 학기로 알고 있다. 아마 졸업하면 넌 사시를 보고 변호사나 검사

가 되겠지. "

" 떨어질지도 모르, "

" 아니, 넌 절대로 합격한다. "

무슨 소리야, 그건. 재중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를 덮었다. 한 번도 누구보다 공부로

뒤쳐진 적은 없었다. 그건 어린 시절부터 굴곡있는 인생을 살았던 재중의 마지막 자존

심이기도 했다. 아무리 집안이 개판이라도 나만 정신차리고 떳떳하게 살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재중의 지론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사법고시에 한 번에 패스할 수 있을거

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자신보다 유능한 선배들도 몇 번이나 떨어지고 간신히 붙

은 것이 그 시험이 아니던가. 게다가 졸업 후 몇 년을 더 공부하고 고시원에서 책을 파

야 시험 볼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저 남자는, 졸업 후 바로 사시를 패스 할 수

있다는 황당무계한 지론을 펼치고 있다. 넌 뭐냐?

" 우리가 합격시켜 줄 테니까. "

" 뭐....? "

믿을 수 없는 말에, 재중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도대체 이 조직의 힘이 어디까지 뻗어

있길래 국가에서 치루는 시험의 승패까지 결정한단 말인가.

Page 18: Happy Together

" 넌 내년에 치루는 사법고시에 반드시 합격할 거야. 그리고 유능한 변호사나 검사가

되겠지. 우리는 네 능력을 3억 대신 돌려받을 생각이다. "

" 무슨.... "

" 우리 조직을 위해서 일해. 변호사가 되면, 우리 조직의 고문 변호사로 일하는 거다. "

재중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법을 공부한 것은 단 두가지 이유

였다. 첫번 째는 고수익의 직종이기 때문이고, 두번 째는 불의를 처벌할 수 있다는 매

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보고 깡패새끼들을 위해 일을 하라고...?

" 웃기지 마! "

" 안 웃긴데. "

" 내가 지금까지 니들 같은 깡패 새끼들 살리려고 법전 판 줄 아냐?! 이 씨발놈들아!!!!

사람 인생 결정하는 게 그렇게 우스워?!?! 차라리 돈으로 갚을 테니 나는 내버려 둬! "

후우, 보스는 한숨을 내쉬며 거의 다 타들어간 시가를 비벼껐다. 그리고 양옆에 서있던

남자들 중, 가장 앞에 서있는 남자. 윤호에게 고개짓을 했다.

" 정윤호, 네가 맡아. "

재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보스가 가리킨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서있던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고, 재중은 숨이 멎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이런 와중에서 이런 생

각을 하는 것이 참으로 우습지만, 자신은 태어나서 저렇게 아름답게 생긴 남자를 한번

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신이 조각한 듯한 완벽한 외모와 완벽한 스타일. 재중은 순간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 앞으로 저 남자가, 김재중 네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줄거다. 너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어. 우리 조직을 위해서 일해. 넌 이미 신체 포기 각서에 싸인을 했다. "

" 내가 언제!?! "

싸인이라니, 펜을 쥔 적도 없는데! 재중은 기가 찬 목소리로 대답하고 서류를 찟으려

양 옆으로 쥐었다. 순간 저만치 서 있던 윤호가 무언가를 던졌다. 손등에 와 닿는 아

픔에 재중이 순간적으로 손을 움켜쥐고 서류를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건 검은색 만

년필. 몽블랑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검은색 펜 촉. 손등 한 가운데 맺힌 핏방울에,

재중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윤호가 다가와 재중의 손을 낚아채고 땅에

떨어진 만년필 펜 촉으로 엄지 손가락을 날카롭게 그어버렸다.

" 아악! "

" 엄살은, "

Page 19: Happy Together

시니컬한 목소리로 응수한 윤호는, 피가 맺힌 재중의 손가락을 그대로 서류 아래에

찍어버렸다.

" 이걸로 계약 완료입니다. "

" 수고했어, 데리고 나가. "

만족스러운 보스의 웃음에, 윤호는 재중의 팔을 거칠게 잡아채며 방 밖으로 끌어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에, 재중은 어떠한 대처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빠른 두뇌 회전으

로 자신이 앞으로 더 이상 평탄한 삶을 살 수 없으리라는 사실만을 확신할 뿐이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다지 평탄하게 살아오지 않은 재중이었지만.

* * *

" 저... 이제 그만 울면 안 될까? "

유천은 한 시간째 울고 있는 준수를 달래는 중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울고 있는 준수

를 구경하는 중.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그는, 휴게실로 들어와서도 잠자코

울기만 했다. 무릎에 두 주먹을 꼬목 쥐어 얹고서. 그의 하얀 와이셔츠는 눈물로 적셔진

지 오래, 그의 뽀얀 두 볼은 눈물이 길을 튼 지 오래. 유천은 시계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

었다. 살다살다 이렇게 많이 쳐 우는 남자는 처음 봤다.

" 내가 미안해. 혁필이 그 놈을 몇 달 동안 쫓아다녔거든. 눈 앞에 보이니까 뵈는게 없더

라. 그 놈이 홍초파 두목이야. 홍초파 알지? 홍초불닭 말고, 홍초파. 뉴스에도 나왔어!

엄청 흉악한 놈들인데... 내가 그 두목이랑 부두목을 다 잡았어. 하하... "

웃으려다 째려보는 준수의 눈빛에 금세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제야 눈물이 멈췄는지,

준수는 눈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잔뜩 움추러든 어깨와 빨간 눈이 귀엽

다.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유천은, 자꾸만 올라가는 자신의 손을 어찌하지 못하다가

결국엔 준수의 어깨를 슬쩍 안았다. 오, 여린 어깨! 너무 많이 울어서 힘이 다 빠진건지

웬일로 준수가 가만히 있다. 그 모습에 괜히 탄력받아서, 유천은 어깨를 조금 더 끌어

안았다.

" 형이 미안해... "

Page 20: Happy Together

나이도 모르면서 형이랜다. 유천은 그렇게 말하고는 슬쩍 울고 있는 준수를 내려다보

았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보면 볼 수록 더 예쁜 것 같다.

" 울지 마, 응? "

손가락으로 눈물을 슬쩍 닦아냈는데, 손에 와 닿는 피부가 놀랄만큼 부드러워서 깜짝

놀랐다. 살면서 여자 피부도 제대로 만져본 적 없는 유천이지만 (술 먹고 객기 부리며

지나가는 여자 엉덩이 만지다, 싸대기 맞고 자기가 일했던 경찰서로 끌려온 적은 있다.)

아마 세상 누구도 이렇게 고운 피부를 가질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뭐, 한마디

로 지랄이지. 유천은 자신도 모르게 피부를 몇 번 손가락으로 훑다가,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입술을 훑었다. 오메, 따뜻한 거.

' ... 어라? '

뭔가 아래가 묵직해진다 싶어서 내려다봤더니, 자신의 분신이 빳빳이 서 있다. 지금

남자 아이 하나 위로해 주면서 이게 뭐하는 시츄에이션이냐, 유천 자신에게 황당해

져서 다리를 오무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 뭐야... "

준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넋놓고 준수만 바라보고 있던 유천은, 갑자기 들리는

준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가락은 아직도 준수의 입

술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는 상태.

" 너도 게이냐? "

너도 게이냐 너도 게이냐 너도 게이냐 너도 게이냐...

너 게이냐, 도 아니고 너도 게이냐, 그렇다면 게이인 사람이 여기에 한 명 더 있다는

소리인데... 이 휴게실 안에는 자신과 준수, 둘 밖에 없다.

" 엄마야! "

순간 놀란 유천이 뒤로 물러섰다. 여기 있지도 않은 엄마까지 불러대면서. 잔뜩 당황한

표정의 유천을 바라보며, 준수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Page 21: Happy Together

" 아니면 말고. "

태어나서 게이냐는 질문은 처음 받아봤다. 그렇게 오해하게 행동한 적도 처음이다. 남

자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다니. 친구들이랑 찐득한 장난 치면서도 저런 짓꺼리는 처음

해봤다. 호기심으로 남자끼리 하는 야동을 돌려본 적은 있지만 (주로 유천이가 물주였

다.) 실제로 관심을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디 뚫을게 없어서 뒤를 뚫어?!

" 짐승같은 새끼, 품위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새끼, 개념이라고는 국에 말아먹은 새끼.

너 같은 새끼가 형사라는 사실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슬퍼진다. "

온갖 악담을 퍼부었는데도 유천은 뭐라고 싸댈 수가 없었다. 너 게이냐?! 라고 물어보고

싶은 걸 꾹 참고 일어선 준수만 빤히 바라보았다. 너도 게이냐, 그 질문이 머리속에서 자

꾸 회오리친다.

" 다시 내 눈 앞에 보이면 알아서 해. 면상 치우고 다녀. "

앙칼진 목소리로 마무리 지은 준수가, 도도한 걸음걸이로 휴게실 문 밖으로 나갔다. 살

랑살랑 거리는 걸음걸이가 꼭 계집애 같다. 그러면서도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것

이 더 이상하다. 유천은 넋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어

나서 누군가에게 모진 소리 듣고도 가만히 있었던 적은 처음이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천이 주먹질을 하거나 큰 소리를 내기에, 준수는 유천에게 '내겐 너무 예쁜

그대' 였기에.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3

" 뭐야, 내 물건들이 왜 다 여기있어?! "

" 말했잖아. 처음부터 너한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고. "

Page 22: Happy Together

윤호의 뒤를 따라 주택가의 끄트머리에 있는 가장 작은 집에 들어갔다. 아무도 살지 않는

듯, 황량하기만 한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1층짜리의 단독 주택은 깨끗한 브라운 톤의 색

깔에 짙은 갈색의 아담한 문이 달려있었다. 방은 두 개가 딸려 있었는데, 아직은 아무도

살지 않는 듯 인기척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침대와 책상이 딸린 방 안에는, 재중의 것으

로 보이는 책들과 옷가지들이 난잡하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황당한 표정의 재중은, 자신

의 물건들을 챙기며 낯선 방을 둘러보았다. 아버지와 둘이 간신히 얻어 살던 단칸방보다

훨씬 난 모양새지만, 조폭 소유의 거대한 동네에서 조폭들과 어울려 지내야 한다니... 아

무리 생각해도 이건 뭔가 드라마야. 그것도 현실감 없기로 유명한 SBS드라마.

" 꼭 여기서 살아야 해? "

" 네가 언제 도망갈지 모르니까. "

" 씨팔, 넌 법이 무섭지도 않냐? 이건 납치야! "

" 이게 어째서 납치야, 합법적인 기브 앤 테이크지. "

" 뭐...? "

" 너희 아버지가 우리 조직에서 돈을 빌려갔고, 그걸 갚지 못해서 튀어버렸어. 그러면

당연히 그 아들인 너에게 책임이 전가되는 것이 아닌가? 가난뱅이인 너한테는 당장

돈을 갚을 능력이 없고, 그럼 너가 가지고 있는 그 잘난 머리로 대신 삭감해주겠다는

데 뭐가 불만이야. "

" ....... "

" 만약 너가 뛰어난 수재가 아니었다면, 네가 아까 쇼한대로 진짜 넌 후장 뚫려야 했을

지도 모르지. "

" 뭐?!?! "

" 만약이야. 뭘 그렇게 놀래. "

놀려먹는 게 재미있는 듯, 윤호는 피식 웃다가 재중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뭔가 포스가

느껴져서 뒤로 두 걸음 피한 재중이, 두꺼운 법전을 방패막이 삼아 앞으로 내밀었다. 아

무리 곱상하게 생겨도 저 놈은 깡패다. 아무리 연예인 같이 생겨도 저 놈은 깡패새끼야..

머리속으로 자기암시를 걸어 보아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저 남자는 너무 잘생겼다.

" 야! "

바로 코 앞에 다가온 윤호가, 재중의 턱을 잡더니 훽 들어 올렸다. 처음 봤을 때도 키가

크다고 생각했지만, 꽤 장신인 재중이 올려다 봐야 할 정도로 키가 크다. 남자에게 턱

을 잡혀 옴싹달싹 못하는 꼴이 쪽팔려서, 재중은 머리를 얼굴을 틀었다. 그러나, 다시

윤호에게 잡힌 턱은 이제는 움직이지도 못하게 꽉 붙들려 버렸다. 손가락 힘이 저렇게

세다니, 재중은 그가 새삼 두려워졌다.

" 머리 잘라. "

" 뭐? "

순간, 재중의 머리속으로 자신의 대가리가 댕강, 하고 목에서 분리되는 그림이 그려진다.

Page 23: Happy Together

" 얼굴이 안보이잖아. 안 어울려. 치렁치렁 기르고 다니는 거. "

아.. 머리카락 얘기였구나. 씨발! 그럼 머리카락이라고 해야될 거 아냐! 한숨을 쉬면서

재중이 짜증난다는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 니가 뭔데 내 헤어스타일에 이래라 저래라야?! 지랄 짬뽕 까네, 진짜. "

" 지금 자르고 와. "

" 싫어! "

... 라고 말했지만, 두 번은 못 말할 것 같다. 차갑게 재중을 내려다보던 윤호가, 핸드폰

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난데, 지금 12호 집 앞으로 차 한대 보내. 근처 미용실 데려가서 신참 머리 자르게 해. "

넌 무슨 위치에 있길래 마음대로 차를 부르고 미용실 보내는 시덥지 않은 일까지 명령을

하는 거냐?! 재중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입을 꾸욱 다물고 윤호를 노려보

기만 했다. 옆으로 슬쩍 보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머리는 사실 길긴 길었다. 법대생들

이 다 그렇지만, 똥 쌀 시간도 없어서 밥도 안 먹는 게 법대인들이 아니던가. 군에서 제

대한 후 세월아 내월아 하면서 기른 머리는, 어느새 한 쪽 눈을 다 덮을 정도로 길게 내

려와 있었다. 가끔 공부하다가 귀찮으면 머리띠로 앞머리 까고 공부하기도 한다. 머리띠

가 없으면 동네 문방구에서 파는 하나에 50원짜리 실핀으로 앞머리를 양 옆으로 까면서

공부해왔던 재중. 새삼 자신의 머리가 대책없이 자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근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

" 시력이 몇이지? "

" ... 1.5. "

갑자기 왜 눈깔 타령이야. 재중의 짐을 천천히 책상 위에 올려놓던 윤호는, 의자에 걸터

앉으며 씨익 웃었다.

" 다행이네. 안경 낄 걱정은 없어서. 넌 눈이 예쁘거든. 가리지 마. "

지랄하네. 어이가 쳐없어서 입만 벌리고 윤호를 바라보던 재중은, 밖에서 들리는 클락

슨 소리에 깜짝 놀라 창문을 바라보았다.

Page 24: Happy Together

" 차 왔다. 가서 예쁘게 자르고 와. "

" 넌.... 뭐냐?! "

" 뭐긴, 너 아껴줄 사람이지. "

또 지랄한다. 재중은 법전을 윤호에게 거칠게 던져버리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윤호는

재중의 갈굼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법전을 후루룩 넘기더니, 머리 아프다는 듯 얼

굴을 찡그리고 책을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아까 재중의 엄지 손가락을 사정

없이 그어버렸던 만년필을 꺼내 손가락 위에서 돌리기 시작했다.

" 그만 나가. 시간 끌지 말고. "

윤호의 손등 위에서 노는 만년필을 바라보다가, 재중은 서둘러 방에서 나와버렸다.

뭔가 잘못 걸린 기분. 만년필을 가지고 노는 저 사내가 심히 마음에 걸린다.

* * *

" 박형사, 화상파 김경욱 제보 들어왔어. 새벽에 잠복근무 부탁해. "

" ..... "

" 박형사? "

" ..... "

" 야! 박유천!!!!! "

최근 들어 창민이 소리지르는 타이밍이 많아졌다. 요즘 들어 넋놓고 다니는 유천 덕분

이다. 왜인지는 몰라도 유천은 요새 제정신이 아니다. 강력반 책상 위에 앉아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강력 1반에서는 흉악범이 절대로 심문에 응하지

않거나 지나친 묵비권을 행사하면 유천을 보내곤 했었다. 범인의 다리 한 짝 날라가는

한이 있더라도, 중요한 사항들은 모조리 캐내는 것이 악명높은 박형사의 이유였는데,

요새는 무슨 일을 하든 시큰둥하다.

" 박형사, 무슨 일 있어? "

" 아니요... "

창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힘 없는 유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어제 있었던

서울 연쇄강간범 범인과 대질심문을 하게 해줬는데도, 유천은 온순하게 범인의 말을 듣

고만 있었다. 평소처럼 범인의 모가지를 뒤틀거나, K-1 암바기술(...)을 걸지도 않았다고

했지.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얼굴이 멍해? 원래 좀 멍청하게 생기긴 했지만,

Page 25: Happy Together

" 새벽에 이태원으로 잠복근무, 갈 거냐고. "

" 아... 그럴게요. "

" 약도 그려줄테니까, 여기서 한 열한 시 넘어서 나가면 될거야. 확실한 제보니까 부탁해. "

" 네... "

진짜 힘없다.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가는 어깨가 축 쳐지... 기엔 좀 많이 넓구나. 유천은

약도를 아무렇게나 품 안으로 구겨넣고,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손해배상청구 서류를 봤을 때.. 그 남자의 이름은 김준수라고 했다. 스물 다섯살. 나보다

두 살이 어리네. 게다가 듣도 보도 못한 파티.. 뭐시깽이 어쩌고. 아... 자꾸만 생각난다!!

그렇게 보내고 다시 만나길 기대한 내가 병신인거지. 그 때 확 잡아버리고 전화번호라도

물어봤어야 하는건데. 아니.. 내가 전화번호를 왜 물어봐?! 그것도 남자를? 진짜 미쳤나!

유천아... 넌 지금까지 이십 칠년간 정상인으로 멀쩡히 살아왔어...! 여자를 제대로 사귄

적도 없지만 그래도 남자한테 꼴렸던 적도 없잖아...!

" 아이고오.....! "

" 박형사, 괜찮아? "

보다 못한 동료 형사가 유천의 등을 토닥거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 안 괜찮슴니더.... "

이럴 줄 알았다면 그 동안 여자라도 많이 사귀면서 정상적인 연애도 하고 그럴껄. 뭔가

너무 외로웠던 모양이지.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나랑 같은 거 달린 남자한테 정신 뺏기

고 헬렐레 거리다니... 형사 때려치고 절이라도 들어가까?

어쩌면 자신은 처음부터 이런 성향의 남자가 아니었나 별별 생각까지 다 드는 유천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유천은 여자를 사귀었던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단다... 있다고 생각

한 그 여자도 술 먹고 왕게임 하다가(...) 벌칙으로 10분간 사귀었던 것뿐이다. 그다지 빠

지지 않는 외모와 스타일을 지닌 유천이 지금까지 솔로였던 이유는 그의 성격처럼 단순

했다.

왜냐면 성격이 거지같거든.

* * *

Page 26: Happy Together

" 더 잘라 드릴까요? "

" 아니요! "

앞머리가 짧아졌다. 뒷머리도 짧아졌다. 신경 안쓰고 다닐 때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던 앞머리가 훌쩍 위로 올라갔다. 어색한 머리를 매만지며 재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다시 그 지옥같은 곳으로 돌아가나 싶어 주위를 둘러봤는데, 자신을 데려온 조직원

이 보이지 않는다. 재중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미용사에게 조용히 물었다.

" 여기 앉아있던 남자.. 어디 갔어요? "

" 아, 그 무섭게 생긴 분이요? 잠깐 화장실 가신다고 나갔는데? "

" ... 언제요? "

" 방금요. 아, 어디 가시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

재중은 마른 입술을 잘근 씹으며 유리문 밖을 내다보았다. 검은색 차는 아직도 세워져

있지만, 그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방금 나갔다면 아마 금방 돌아오겠지. 남자가 여자

처럼 뭐 내리고 앉고 올리고 이러는 것도 아니고, 자크 하나만 내리면 끝나는 일이니까.

(아, 큰 일이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겠다. 화장실에 휴지가 없다면 더더욱!) 재중은 반

짝거리는 눈을 감추며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 여기, 뒷문이 어디에요? "

" 뒷문이요? 저쪽으로 나가시면 바로 있어요. 그런데 왜요? "

" 그 남자 오면 계산하라고 하세요. "

재중은 재빨리 몸을 틀어 뒷문으로 향했다.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쿵쾅 거렸다. 분명히

도망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도망가자마자 경찰서로 뛰어가 지금까지 있었던 황당

무계한 사건을 얘기하면 보호라도 받을 수 있을 테지. 재중의 걸음이 빨라졌다. 뒷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바람이 확 불어왔다. 아...! 자유의 공기가 이렇게 맑은 줄 몰랐다네!

재중은 엄청난 속도로 미용실에서 벗어났다. 그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 시내로 나와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 헉! "

골목길 담벼락에 서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미용실 앞문 쪽으로 검은색 자가용이 급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운전석에 앉은 조직원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면서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재중은 해방감에서 비롯된 웃음을 지으며 가운데 손가락을 차 뒤로 날

렸다. (차마 앞에 날리진 못했다.)

" 뻐큐나 쳐먹어, 개새끼야! "

Page 27: Happy Together

* * *

" 히익, 이게 뭐야!? "

심창민이 그려준 약도를 보고 이태원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온 유천은, 간신히 클럽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클럽은 간판도 없었고, 홍보용 찌라시도 없었다. 지하에 위치한 작

은 규모의 클럽인 줄 알았는데,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별세계에 유천의 눈이 크게 떠졌

다. 엄청나게 화려한 인테리어의 클럽이다. 시끄러운 하우스풍의 음악에 귀가 다 멍멍

했다. 오늘도 역시 검은색 라이더 자켓에 평화시장 표 청바지를 입은 유천은, 돌아다

니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임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여자는 출입 금지인가? "

적당한 바에 앉아서 병맥주 하나를 시킨 유천은, 종업원을 보고 또 한 번 놀라야했다.

맥주를 갖다주는 종업원도 남자였는데, 여자라고 해도 믿을만큼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김준수보다야 못하지만- 근데 또 왜, 나 김준수 생각 하고 있는거지?

" 씨발.. 범인이나 잡자. "

내 주제에 무슨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 사랑이야. 유천은 혀를 끌끌차며 맥주를 병째

들이부었다. 오늘 이 클럽에 온다는 제보가 들어온 화상파의 김경욱은, 행동대장급

으로 잔머리를 꽤나 굴리는 놈이다. 홍초파를 탕진하고 급부상한 화상파는, 강력 1반

의 새로운 문제거리로 떠올랐다. 오늘 김경욱을 잡아 넣는다면 그 밑의 부하들은 알

아서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유천은 일에 집중하려고 애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 히익...! "

생각없이 스테이지를 바라보던 유천이, 기겁하듯 놀랐다. 정신없이 춤을 추는 사람들

모두 남자였는데, 자세히 보니 그들 모두 허리에 손을 감거나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바짝 붙어서 끈적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

이었다. 게다가 저 쪽에서는 소파에 누운 남자 둘이 혀를 교차시키며 키스하기에 바

쁘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방관하는 주위 사람들. 이 안에서

누구도 여자와 사랑하지 않는다. 모두가 남자를 원하고, 남자를 안을 뿐. 유천은 그제

서야 창민이 조용히 했던 말을 되새길 수 있었다.

' 평범한 클럽은 아니니까, 가서 충격먹고 오지 마. '

Page 28: Happy Together

" 이 썅놈의 새끼는 왜 이런 곳에 나타나고 지랄이야! "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분위기에, 스스로 부끄러워진 유천이 병맥주를 입에 부으며 눈

을 이리저리 돌렸다. 놀랄 정도로 예쁘게 생긴 남자들이 많다. 모델을 해도 될 정도로

몸 좋고 스타일 좋은 남자들도 많고- 대한민국 여자들은 참으로 불쌍하구나. 남자를

남자에게 뺏기다니. 유천은 처음 보는 별세계에 정신이 팔려 입을 벌리고 구경했다.

그러고보니...

김준수도 게이일까? 분명 나에게 '너도 게이냐' 라고 물었지. 그렇다면 나는 게이라는

소리인데,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내 주위에 그런 사람들은 없지만, 일반인들 모르게

동성애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엄청난 숫자로 늘어난다고 했지. 게다가 김준수는 남

자라고 하기에는 왠지 모르게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걸음걸이도 사뿐사뿐 했고. 그리

고 무엇보다... 날 설레이게 만들었어. 빌어먹을... 나 어떡해.

" 오오- "

지가 뭐하러 왔는지 까맣게 잊어먹은 유천이 스테이지 구석에서 열심히 키스하고 있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잘생긴 남자 둘이 엉겨붙어서 자기들만의 세계에 열

심히 몰입 중이시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유천의 분신은 어느새 또 세상을 향해 솟았다.

김준수도 저렇게 남자들과 키스할까. 그 생각까지 하게 되자 유천은 미칠 지경이었다.

왜! 도대체 왜! 두 번 밖에 보지 않은 남자 때문에 내가 병신 같은 생각을 하는 거냐고!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며 의자 모서리에 머리를 쿵쿵 찍어대고 있는데, 순간 믿을 수

없게도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얼굴이 눈 앞에 나타났다. 스테이지로 들어오는 남자는

분명히 김준수였다. 화려한 색상의 스트라이프 무늬 와이셔츠를 입고 리듬을 타며 댄

스 플로어로 나오더니, 다른 남자들처럼 제 짝을 찾아 나선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

굴을 보니 속이 탈 지경이었다. 쟤, 지금 저기서 뭐해?! 입만 벌리고 쳐다보던 유천이,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김준수는 틀림없는 게이야.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그런데, 왜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고 있는 거지.

Page 29: Happy Together

유천은 다가가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서서 준수를 지켜보기만 했다. 댄스 플로어에

나가 준수에게 다가가봤자 뭐 어쩔 것인가. 다른 게이들처럼 몸을 흔들며 작업걸 수

도 없는 노릇이고, 김준수에게 다짜고짜 '네 전화번호!' 라고 소리치면, 미친놈 취급

받고 걷어채일지도 모른다. 김준수의 앙칼진 성격으로 봐서는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준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무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볼 때는 그저

섹시하다고 생각했던 눈매가, 생글생글 웃으며 반달모양을 그리니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가지런한 치아가 붉은 입술 사이로 보였다, 감춰진다. 귀에 매달린 십자가 귀

걸이가 살랑살랑 흔들리며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유천은 맥주를 손에 쥐고 넋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쁘다. 그는 단순했기에, 그저 그 생각만 했다. 아, 졸라 이뻐.

" ....! "

노래가 거의 끝나가고 다른 노래로 오버랩 될 타이밍에, 준수의 뒤로 유천의 목표물이

보였다. 김경욱. 화상파의 행동대장. 그가 준수 가까이로 다가가고 있었다. 딱히 준수

에게 다가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천의 눈에는 김경욱과 김준수, 단 두 사람이 보였다.

노래가 점점 끝나가며, 다른 노래로 체인지되는, 그 몇 안되는 조용한 타이밍을 틈 타

유천이 자신도 모르게 다급하게 소리질렀다.

" 김준수!!!! 위험해!!!! "

클럽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유천의 복식호흡에,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준수와

김경욱까지도- 유천은 그제서야 아뿔싸, 싶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박유천을 알

아본 김경욱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바로 앞에 있던 준수의 목을 팔로 휘어감

고 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냈다.

" 꺄아아악!!!! "

순식간에 클럽 안이 아수라장이 되며 사람들이 스테이지에서 도망쳤다. 준수의 목을

감고 있는 김경욱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인질극에, 그것도

자신이 주인공이 된 인질극에 준수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순간, 클럽 안의 모든 음악

이 끊기도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만천하에 드러난 범인과 인질의 얼굴에, 사람들은

비명 지르며 물러섰다. 유천은 지갑을 꺼내 사람들에게 보인 후, 뒷춤에서 총을 꺼냈

다.

" 서울지검 강력반 형사 박유천이다! 김경욱, 당장 그 칼 내려놓고 인질 풀어줘! "

Page 30: Happy Together

" 씨발... 박형사! 지겹지도 않냐! 그만 쫓아 다니라고! "

" 개새끼야, 너를 잡아야 그만 쫓아다니지!! 씨발, 진짜 지겨운 게 누군데 그래!! "

" 홍초파 대가리도 다 니가 잡았다며! 힘들지도 않냐! 좀 쉬어라! 새끼야! "

" 너 깜방에 쳐넣고 쉴거거든? 이리와, 좋은 말로 할 때. "

안절부절 하지 못하며 뒷걸음질 치던 경욱이, 문을 찾으려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뒤에

위치한 계단문을 알아채고, 경욱이 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전히 준수의 목을 팔로

결박한 채. 가뜩이나 여린 몸이 우직한 남자에게 붙잡혀 부서져버릴 것 같다. 생전 처

음 겪는 엄청난 일에 준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자신의 목에 닿은

차가운 칼 끝의 감촉에 금방 혼절이라도 할 것 같다.

" 사... 살려주세요.. 아저씨... "

" 시끄러워! 저기 박형사 보이지!! 저 새끼가 나한테 다가오면 넌 죽어! 여기서 모가지

칼로 따고 죽는다고! 알겠어?! "

" 저.. 저 죽기 싫.... "

" 닥쳐! "

경욱은 단도를 뒤로 잡아, 칼집으로 준수의 머리를 후려쳤다. 찢어진 머리에서 흐른

피가 금세 와이셔츠 카라를 적시고, 사람들의 비명이 더욱 커졌다. 단 한 번의 일격

으로 인한 육체적 충격과, 정신적 충격까지 합쳐져 준수는 바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 닥치라고!! 씨발새끼들아!!!!! "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지 바락바락 악을 쓴 경욱이, 걸음을 빨리 하며 계단문으로 향했

다. 유천은 총구를 경욱의 팔에 겨냥했다. 준수의 목에 칼을 대고 있는 그의 손으로.

" 더 이상 움직이지 마. 쏜다. "

" 쏴바! 쏴바! 씨발, 니네 형사새끼들 공포탄 때문에 겁먹고 쇼한거 한 번이면 족하거든?!

쏴보라고!! "

유천은 무표정으로 경욱을 노려보았다. 그의 팔 안에서 기절해있는 준수에게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애써 눈을 돌렸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말아라, 목표물과

너 자신에 대한 긍지만을 생각해라. 자신에게 사격을 가르쳤던 코치의 가르침이 떠올

랐다. 유천은 숨을 몰아쉬고 총을 천장에 대고 정확히 두 발을 쏘았다.

탕! 탕!

Page 31: Happy Together

" 아아악!!!!! "

바닥으로 모두 엎드린 사람들이, 바들바들 떨며 클럽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도망가버려, 유천은 오히려 부담을 떨칠 수 있었다. 쓸데없는 희생은 막고

너와 범인 둘 사이에서 일을 처리해, 박형사... 심검사의 말도 떠올랐다.

" 네가 말했던 공포탄이다, 개새끼야. 이제부터는 긴장타라. 내 가드 올리면 네 놈의

대가리에 바로 구멍 뚫리거든. "

" 쏴바! 형사면 사람 마음대로 조져도 되는 거냐?! 웃기지마! 넌 나 못 죽여! 그리고

네 놈이 어딜 쏘든, 내 손에 있는 이 새끼 목도 같이 조지는 거야! 알겠냐?!? 그리

고 너는 인질 하나 구출하지 못한 무능한 형사라고 대문짝만하게 찍히는 거지! "

유천은 사격 특채로 형사가 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지방의 작은 경찰서에서 시작했

지만, 거의 초인적인 끈질김으로 범인을 붙들고 늘어짐에 따라 그의 위상이 올라갔

다. 결국 부산에서 일어났던 연쇄살인범을 현장에서 몸을 날려 검거함에 따라,표창

까지 받고 서울지검까지 발령나게 된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사격으로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실패할 거라는 생각도 한 적 없었다. 그러나 순간 두려워졌다. 범인의

손에 붙들려 있는 저 여린 남자 때문에.

김준수...

유천은 속으로 그의 이름을 되새겼다. 그리고 마른 침을 마지막으로 삼켰다.

탕!

그의 실탄은 정확히 김경욱의 왼팔에 명중했다. 왼팔이 쥐고 있던 단도가 떨어졌고,

김경욱이 피가 철철 흐르는 자신의 손을 쥐어잡고 계단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

다. 승패는 이미 결정났다. 유천은 사실, 사격 뿐이 아니라 그 어떤 체육종목에서도

남에게 뒤쳐진 적이 없는 전설적인 인물이었기에.

" 김경욱, 넌 묵비권 행사, 변호사 선임, 능력 없을 시에는 국가 변호사 선임할 수 있다.

기타 등등, 모르면 서울지검 컴퓨터 네이버에서 검색해. 씨발놈아. "

유천은 거칠게 그의 팔을 뒤로 꺽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팔이 뒤로 꺽여지자, 경욱이

죽을 듯이 비명을 질렀다. 개무시하고 수갑을 채워버린 유천은, 아까 그가 준수의 머

리를 칼집으로 내려치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 때, 진짜 제대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Page 32: Happy Together

" 이 미친 새끼! "

유천은 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두 손으로 경욱의 머리를 들어올려 그대로 아스팔트

바닥에 갈아버렸다.

" 아아악! 박형사! 박형사! 머.. 머리 좀..!! "

" 넌 예전부터 잔머리 굴리는 걸로 유명했지만, 오늘 잔머리는 심하게 더러웠다. 인질도

인질 나름이지, 누굴 잡고 머리를 쳐대?! 대가리 좀 갈고 가자, 경욱아! "

그 후로 오랫동안, 유천은 열심히 아스팔트에 경욱의 머리를 갈았다...

* * *

재중은 생각보다 너무나 늦게 경찰서를 찾을 수 있었다. 어디에 쳐박힌지 모르는 동네는

알고보니 요새 새로 신도시를 건설하고 있다는 판교였다. 그 으리으리하던 조폭들의 주

택가를 벗어나니, 동네는 너무 한적하고 조용해서 난감할 지경이었다. 아파트 신축 공사

현장에 도착해 인부를 잡고 '여기서 가장 가까운 경찰서가 어디에요?' 하고 묻고 또 물어

서 간신히 경찰서의 위치를 파악한 재중이었다.

" 씨발... 이 동네는 도둑 들면 누가 잡나! "

하긴, 조폭이 판치고 있는데 도둑이 들이댈 구멍도 없겠구나. 재중은 피곤한 다리를 간

신히 움직여 경찰서 쪽으로 향했다. 날씨가 시원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여름 날

이런 일을 겪었다면, 불쾌지수 100을 추가해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 하아.... 다 왔다. "

저만치 보이는 경찰서를 보고, 재중이 그제서야 마음 놓고 웃었다. 당장에 들어가서

조폭들의 위치를 불고 보호받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먼데서부터 걸어온 자신의 목

이 너무나 메말라 있었다. 재중은 절뚝거리며 근처의 슈퍼로 들어갔다. 파워 에이드

하나를 집어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후우... 숨을 몰아쉬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려

는데,

" 제가 계산할게요. "

Page 33: Happy Together

어디선가 너무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저 옆에 틀어놓은 TV에서 나오는 목소리도

아니고, 너무 피곤해서 들리는 환청도 아니다. 재중은 순간 굳어버린 몸을 간신히 돌

려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윤호가 지갑에서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주인에게 내밀고 거스름돈을 받고 있었다.

그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검은색 정장을 입고 깔끔하게 다듬어

진 머리도 흠잡을 데 없다. 도망친 재중을 찾았다녔다면 정신없을만도 한데, 그는 마

치 아까부터 여기서 재중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여유로워 보였다.

" 가자. "

" 너.... 너.... "

" 가자, 재중아. "

상상할 수도 없는 힘으로 재중의 손을 잡아 끈 윤호가, 재중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거스름돈으로 받은 천 원짜리 몇 장을 재중의 입에 구겨넣었다. 순간 느껴지는 돈의 시

큼한 냄새와 쓴 맛에, 재중이 미간을 찡그렸다. 언제 대놓은 건지, 슈퍼 바로 앞에 검은

색 재규어가 서있다. 재중이 입에 문 돈을 뱉으려 하는 동시에, 윤호가 그를 앞좌석으로

밀어넣었다.

" 야!!! "

잠궈버린 문을 두드리며 재중이 소리질렀지만, 윤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문이 닫혔을 때, 차 안에는 윤호와 재중, 단 둘 만이 남았다.

" 문 열어! "

" 소리지르지 마. 나 지금 너 도망가서 열 받았거든. "

" 열라고! "

윤호는 아무 말 없이 재중을 노려보더니, 시동을 걸고 바로 전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심플하게 잘 빠진 재규어가 최대한의 속력을 내며 아무도 없는 텅 빈 도로를 질주했다.

갑자기 튕겨나가는 몸에, 재중이 시트를 잡고서 목소리를 더 높혔다.

" 미쳤어?!?!!!! "

" 문 열려면 지금 열어. "

" 뭐?! "

" 지금 문 열어 줄테니까, 뛰어 내려서 굴러가다가 뒈지는지 마음대로 해. "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잠굼이 풀어졌다. 재중은 차의 문고리를 잡고 잠시 망설였다.

Page 34: Happy Together

그러다 이내 체념하고 시트에 기대 눈을 감아버렸다.

역시, 죽는 건 싫어... 라고 중얼거리며.

" 김재중. "

" 왜. "

" 넌 상황파악을 잘 못하는 것 같아. "

" 충분히 했거든. 납치 당했다가, 내가 도망나왔고, 다시 붙들려가는 상황이잖아. "

" 네 주제 파악도 못하는 것 같고. "

" 니네 조직의 차기 고문 변호사라며, 신참이라며. "

재중아... 그렇데 대들다가 쳐맞는 수가 있다. 재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호가 클락슨

을 길게 눌렀다. 빠아아앙-! 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재중이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거짓말 아니고 정말로 고막 터지는 줄 알았다.

" 씨발... "

재중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앞만 보고 운전하는 윤호의 눈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워 보여서 건들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한 마디라도 하면 바로 차 문을 열고,

자신을 발로 까버릴 것 같은 압박감.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재중은 닥치고

조용히 따라가야만 했다.

" 상황파악, 주제파악, 다 하게 해줄 테니까 입닥치고 따라와. "

순간, 불안감을 느끼고 재중이 고개를 올려 윤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싸늘히 식어

있었다. 그래... 이 남자, 조폭이였지. 그것도 보스 바로 옆에 서 있던 실력자. 재중은 마

른 침을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나, 왠지 제대로 잘못 걸린 것 같다.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4

Page 35: Happy Together

준수가 깨어났을 때에는 온 몸이 뻐근해 제대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팔을 짚고

일어났을 때, 자신이 생전 처음 와보는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딱딱한 의자가 여러 개 이

어져 간의 침대를 만들었고, 그 곳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꽤나 추워진 최근 날씨에도 불

구하고 정체불명의 이곳은 히터도 틀지 않은 건지 왠지 오슬오슬 춥다. 준수는 옷을 여미

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일어나서 정신이 몽롱하지만, 주위가 완전 산만한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 씨발! 난 모른다고!! 니 좆대로 하세요!! "

" 제대로 안 불어?! 이 새끼가 어디서 볼륨을 높혀?! 에이, 썅! "

평소에 전혀 듣고 살지 않는 거친 욕짓거리가 바로 옆에서 라이브로 들려 온다. 준수는

화들짝 놀라며 옆을 바라보았다. 클럽 안에서 보았던 형사, 유천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자신을 칼집으로 내리쳤던 남자와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고 있었다. 자신을 인질로 잡

았던 남자를 보는 순간, 준수는 그 때의 악몽이 떠올라 온 몸이 굳어버렸다. 죽음이 그

렇게 가깝게 느껴졌던 적은 처음이었다.

" 니네 두목 어디 쳐박혀 있는지 제대로 불기 전에는 오늘 여기서 못 나간다. "

" 아! 모른다니까 그러네!! 안그래도 현상수배 되서 조직에서 나와 도망 다닌 지가 어연

몇 개월인데!! "

" 자랑이냐? 시끄럽고, 원래 있던 니네 화상고 본거지나 불어. "

" 모른다고! "

순간 유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특기이자 취미인, 범인의 머리칼

잡고 좌우로 빙빙 돌리다가 그대로 책상에 쳐박는 모션을 실행했다. 콰앙-! 하는 소리

와 함께 범인의 머리가 책상 모서리에 그대로 쳐박혔다.

" 아아악!!! "

그걸로 끝나지 않은 듯, 유천은 자신의 앞에 놓여져 있던 컴퓨터 키보드를 들어다가,

바로 범인의 머리에 직각으로 꽂아버렸다. 우수수- 하며 키보드에 박힌 자판들이 제

모습을 잃고 떨어져 나간다. 비명에 비명을 거듭 지르던 범인의 목이 추욱 늘어지자,

유천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망가진 키보드를 저만치 던져버렸다. 그리고 책상 밑에 있

던 새 키보드를 꺼내 컴퓨터와 연결하고 다시 물었다.

" 니네 대가리, 어디 있어. "

" 차... 창원으로 내려간 것만 알아.. 그 다음은 몰라...! "

" 창원 어디. "

" 진짜 모른다니까! "

Page 36: Happy Together

" 응. 알게 해줄게. "

유천은 서랍을 뒤적거리다 다 쓴 건전지 하나를 꺼냈다. 그걸 주먹에 쥐고는 범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 경욱아, 넌 어린애가 아니야. 이빨 나가면 새로 돋는 게 아니라 새로 심어야 해. 쓸데

없이 돈지랄 할래, 아니면 여기서 깨끗이 불고 나갈래. "

" 바.. 박형사....! 응..? "

" 결정했어? "

" 썅! 나 좀 봐줘!! 아까 그렇게 아스팔트에 머리 간 걸로 부족해?!?!!! "

유천은 대답없이 주먹을 높게 들어올렸다.

" 아아악!!! 아, 알았어!!! 창원 톨게이트 지나면 두목 소유의 별장 하나 있어..!! 그 외엔

나도 몰라! "

그제야 만족한 듯, 유천이 건전지를 손에서 빼고 의자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는 키보드를

타다닥 두드리기 시작한다. 새 키보드라서 그런지 손에 잘 익는 느낌이야... 유천은 중얼

거리며 무의식적으로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 어, 깼어? "

" ...... 여기, 어디야? "

언제 일어난 건지- 준수가 백짓장처럼 새하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인질로

잡혔을 때보다 더 굳었으면 굳었지, 풀어지지는 않은 얼굴이다. 유천은 방금 자신이 행

한 강한 시츄에이션을 준수가 보았다는 생각에, 씨익 웃었다. 어때, 나 남자답지!! 유천

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 하나, 불행히도 준수의 머릿속에는 유천과 킹콩이 오버랩 되며

그려진다. 말을 하지 못해 가슴을 두드리며 의사표현을 하는 킹콩이나.. 대화를 시도하

기도 전에 키보드로 대가리를 찍어발리는 유천이나.. 별 다를 게 없어 보인다.

" 서울지검 강력반 취조실이야. 아까 너 목 딸려고 발악했던 새끼, 기억 나지? "

정신적 충격으로 쓰러졌던 사람을 앞에 두고 얘기하기엔 너무 필터링 가동 안 된 문장

인 듯 보인다. 준수는 새파래진 얼굴로 경욱을 바라보더니, 아직도 두려운 듯 꼼짝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내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클럽에서

기절했던 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저 남자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나.

Page 37: Happy Together

" 씨발.. 딸 수 있었는데. "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주둥이 나불거리는 경욱의 말에, 준수가 몸을 웅크리며 뒤로 물

러섰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았던 죽음의 문턱 때문인지, 그는 아직도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정신상태였다. 경욱의 말을 들은 유천의 얼굴이 싸악 굳어지더니, 다시 의자에

서 일어나 서류뭉치로 그의 머리를 몇 번이나 후려쳤다.

"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뭐라고 지껄여?! "

" 아, 그만 좀 때리라고!! "

" 이 새끼가!!! "

" 야!!!!!! "

취조실에 울린 날카로운 준수의 목소리에, 경욱와 유천 모두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

보았다. 도대체 정신을 잃었으면 알아서 집에 데려다 주든지 하지, 왜 여기까지 끌고

와서 말도 안되는 모습들을 보여주는지 모르겠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형사와 범인의

거친 취조심문에, 준수는 진절머리가 난 듯 소리를 꽥 지르고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

났다.

" 집에 데려다줘. "

" 아, 가고 싶어? "

" 여기를 왜 데려 온 거야? 이런 자리에 내가 필요해? "

" 아니... 그런 건 아닌데. "

유천은 할 말을 찾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굳이 데려오지 않아도 되었다.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충 맡기고, 정신을 차리면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유천이 굳이 준수를 취조실까지 데려와 의자로 침대를 바리바리 만들어 놓고 눕힌 까닭

은 단 한가지였다.

' 니 전화번호. '

이대로 돌려보내면, 정말 다시는 만날 수가 없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기절한 준수

를 경찰차에 태우고 삐뽀삐뽀까지 울리며 달려온 것이다. 자신도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랬다. 보내기 싫어서.

" 어, 김형사. 난데, 경욱이 이 새끼 니가 취조 맡아. 나 잠깐 밖에 다녀올 테니까. "

측근에게 일을 떠넘긴 유천은, 준수를 위 아래로 훑어보는 경욱의 눈빛에, 또 욱해서

Page 38: Happy Together

키보드를 통째로 뽑아 들어올렸다.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는 경욱을 보고 간신히 참기

는 했지만.

" 나가자. "

준수는 말이 없었다. 아까의 충격으로 아직도 정신이 뻐큐인건지 헤롱헤롱 거린다. 유

천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준수를 바라보다가, 슬쩍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번에도 가

만히 있는다. 품에 쏘옥 들어오는 모양새가 좋아서, 유천은 괜히 웃었다.

" 집에... 빨리 가고 싶어. "

" 걱정 마. 세상 어느 차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차가 있으니까! "

" ... 페라리라도 모는 거야? "

" 그건 쨉시도 안 되지! "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는 준수에게, 유천은 자신있게 웃어보이며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안에 들어있는 자동차 열쇠를 확인했다.

세상에서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자동차.

모든 신호를 무시하고 도로를 무법 천지로 달릴 수 있는 그들만의 스피드 카,

그것은 경찰차.

* * *

" 아파!! 이거 놔아!! "

차에서 내리자마자 윤호에게 머리채가 잡힌 재중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자신의 새

집으로 끌려 들어갔다. 어찌나 손 힘이 센지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그러나 남자에게

머리채가 잡혀 우는 꼴은 보이기 싫어서, 재중은 눈을 부릅 뜨고 윤호를 노려보았다. 방

으로 들어온 윤호는 책상 의자에 재중을 거칠게 앉혔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

는 법전들을 재중의 눈 앞에 던졌다.

" 공부를 하든, 학교를 다니든, 내 의지로 해.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리래야!? "

쫘악!

Page 39: Happy Together

난생 처음으로 남자에게 뺨을 맞아봤다. 씨발...!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입이나 다

물고 있을 걸...! 머리가 통째로 터지는 줄 알았다....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어이가 없고 억울했다. 어려서부터 집안 말아먹는 게 취

미였던 아버지 덕분에, 대학 졸업하지도 않은 이 젊은 나이에 여기서 뭐 하는 짓인지.

TV에서만 봐왔던 조폭들이 깽판치는 동네에서 모르는 남자에게 뺨이나 얻어 맞다니.

그렇게 뼈빠져라 공부했던 결과가 고작 깡패 새끼들을 위한 고문 변호사라니... 전부

다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재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법전을 집어던졌다. 고분 고분

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개념없이 대드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나,

쫘악!

똑같이 윤호의 뺨을 내려친 재중의 손이 얼얼하다. 태어나서 누군가와 싸대기를 교

환하며 기선 제압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윤호는 완전히 반대편으로 돌

아간 고개를 다시 돌리더니, 제대로 화가 났다는 듯 다시 재중의 뺨을 내리쳤다.

쫘악! 쫘악! 쫘악..!

몇 번이나 서로의 뺨을 내려치고, 누가 먼저 쓰러지나 내기라도 하는 듯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다. 다섯 대가 넘게 맞았을 때, 비로소 재중의 입술이 터져버렸다.

" 독한 새끼. "

그렇게 재중에게 맞았는대도 전혀 아프지 않은 듯, 턱을 한 번 삐끗 돌린 윤호는 주

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나야. 김재중 신체 포기 각서 들고 이태원 기지촌으로 데려가. "

" 야... 야....! "

" 필요 없으니까, 넘겨 버려. "

핸드폰을 끊은 윤호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재중을 바라보았다. 맞은 것 보다

방금 들은 말이 더 믿기지가 않아서 멍한 표정이다. 기지촌이라면, 미군들을 상대

로 몸을 파는 윤락 여성들이 모여있는 유흥가를 뜻하는데, 도대체 거기에 나를 왜

데려간다는 건데? 재중은 서서히 부어오르는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뒤로 물러

섰다. 화에 못 이겨 손찌검을 하는 정윤호보다, 가만히 있는 정윤호가 더 무섭다.

" 내가 거길 왜 가? "

" 어딜 보내든 내 마음이야. 어차피 네 몸에 대해서 네 권리는 없으니까. "

Page 40: Happy Together

" 야! 정윤호! "

" 내 이름은 알고 있네. "

그가 피식 웃었다. 모를리가 없지 않는가. 이 상황에서 무어라 할 말도 없고 어떻게 할

행동도 없어서, 재중은 의자에 털썩 앉아 불안한 마음으로 윤호를 바라보기만 했다. 곧

방 문이 열리고, 조직원들이 들어와 재중의 양 어깨를 잡았다.

" 야! 이게 뭐하는 짓인데?! "

" 데려가. "

" 야! 야! 정윤호!!!!!! "

돌아보지도 않는 그의 무심한 등에 왠지 화가 난다. 재중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윤

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제 눈 앞에 있는 법전들을 집어던져 버렸

다. 끼익, 하고 세워진 차에 다시 실린 재중은, 그의 이름을 곱씹어야 했다. 정윤호.

넌 도대체 날 어떻게 할 생각이냐.

.

.

.

차가 도착한 이태원은 재중이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이다. 외국인들이 많기로 유

명한 이곳은, 한국임에도 불구하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자신이 처한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재중은, 낯선 곳에 신기한 듯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자신을

데리고 어디론가 향하는 조직원들의 무표정에 몸을 사려버렸지만.

" 그러길래 곱게 좋은 조건 제시했을 때 잘 들었어야지. 왜 스스로 화를 자초하냐. "

"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

" 인생 밑바닥까지 온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가는 곳. "

그럼 내 인생이 지금 밑바닥이라는 거냐....!? 하긴, 더 이상 내려갈 구석도 없는 듯 하다.

언제 품 안에서 칼을 꺼내 내 목을 따버릴지 모르는 이런 깡패새끼들 때문에, 무서워서

남들에게 도움도 청하지 못하는 꼬락서니라니. 씨발.. 갈 데까지 가보자. 설마 정윤호한

테 싸대기 얻어맞은 것보다 더 비참하겠냐.

" 물건 데리고 왔으니 주인 나오라고 그래. "

거미줄 같은 골목을 지나서, 간판도 없는 이상한 가게들이 줄줄이 나왔다. 재중은 한 눈

에 그곳이 기지촌임을 알 수 있었다. 술 취해 돌아다니는 미군들과, 그 앞에서 엉덩이를

Page 41: Happy Together

흔드는 여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도 조금 더 구석에 있는 가게에서

재중은 간신히 조직원들에게 풀려날 수 있었다.

" 우리랑 거래한지 얼마 안 됐지? 뉴욕에서 왔다고 했나? "

" 뉴욕? "

재중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단순히 한국에서 생겨난 깡패조직인 줄 알았는데, 뉴욕에

서 왔다니. 이 새끼들 국제적으로 노는 놈들이었어?!

" 얼마 쳐 줄 수 있어? "

조직원들의 말에,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이 실감이 났다. 나는 지금 팔려가고 있는

거야.조선시대 심청이도 아닌데 말이지. 심청이 같은 효녀도 아닌데, 그 빌어먹을 영

감탱이의 빚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야!! 아,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는 거지!

" 예쁘게 생겼네. "

" 손 치워! "

" 성깔은 더럽고. "

어쩐지 이상한 분위기다 싶었더니, 분명히 여자인데 목젖이 있다. 말로만 듣던 트렌스

젠더가 자신을 앞에 두고 훑어보고 있었다. 재중은 목젖과, 봉긋 솟은 가슴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상당히 놀라야 했다. 그녀(또는 그.)는 재중의 턱을 들어올려 이리저리 훑

어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 한 장. "

" 두 장은 받아야 해. "

" 한 장 반. 그 이상은 못 줘. "

조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로 불러냈다. 재중은 멍청하게 야스러운 색깔의

조명이 휩싸인 가게 앞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가게와 달리 이 곳에는 트렌

스 젠더를 비롯해 소년들이 많았다. 남자라고 하기엔 너무 얄쌍하게 생긴 미소년들과,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또래의 남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서 껌을 질겅질겅 씹어대고 있다.

" 난 또, 이런 경우는 처음 보네. "

재중의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묘한 표정으로 재중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기에 재중은 가만히 있었다. 자꾸만 불안감이 밀려온다. 차라리 조직원들

Page 42: Happy Together

의 동네에 있었던 게 더 마음이 편했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까지 들면서, 자신이 들어온

이곳에 대한 의심이 생겨났다. 유흥가 한 복판에 있는, 미소년과 트렌스 젠더를 고용한

정체 불명의 가게. 여기는...

" 처음에 후장 뚫릴 땐 많이 아플 거다. "

난 팔린 거야. 몸으로 일하는 이 빌어먹을 창녀촌에.

" 야!! 나 데려가!!!! "

" 그러길래 처음부터 말 잘 듣지 왜 그랬어. "

차에 타고 휑하니사라지는 그들을 보면서, 재중의 심장박동 수가 점점 더 빨라졌다. 다

른 곳을 보고 있는 주인 여자를 보다가, 재중은 냅다 뛰어버렸다. 어디든 좋았다. 여기만

아니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채가 잡히는

아픔이 느껴지더니, 몸이 뒤로 확 밀쳐졌다. 어느새 뒤에서 따라온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재중을 땅바닥에 내팽겨치며 발로 가슴을 짓밟았다.

" 이 새끼가 어디서 도망을 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줄까?! "

머리에 가해지는 발길질에, 재중의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지경까

지 와버린 거지... 처음부터 내 삶이 이렇게 고달팠던 건 아닌데. 아버지의 사업이 잘 될

때는 남 부럽지 않은 위치에서 살아본 적도 있었다. 씨팔, 그러면 뭐해. 지금 내 꼴을 봐.

유흥가의 더러운 골목길에 엎어져서 쳐맞는 꼴이라니....

차라리 정윤호에게 뺨 맞던 한 시간 전이 나았다.

* * *

" 아아아악!!!!! "

" 재밌지!! 재밌지!!! "

" 꺄아아아아!!!! "

" 이것이 바로 스피드!!! 크하하하하!!!! "

준수는 안전벨트를 두 손으로 잡고 최대한 몸을 웅크랜 채 덜덜 떨고 있다. 차에 타자

마자, 지상 최고의 스피드를 느껴주겠다며 유천이 엑셀을 무한대로 밟아버린 것이다.

삐뽀삐뽀- 거리는 경찰차의 빨간 불을 시끄럽게 틀어놓고, 유천의 말 대로 차는 모든

신호를 무시하며 전력질주로 도로를 달렸다. 준수는 미칠 지경이었다. 죽음의 문턱에

Page 43: Happy Together

서 벗어난 것이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자신을 살려줬던 형사라는 이 남자가 또 죽

음에 밀어넣으려고 하고 있다. 차창 밖으로 사신(死神)이 보이는 것 같다...

" 속도 좀 줄이라고!!! "

" 짜릿하지 않아?! "

이게 짜릿한 거냐!!!!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구토가 나올 것 같다!! 준수는 올라올 것 같은

속을 부여잡고 눈을 꼭 감았다. 신이시여.. 제발 여기서 죽게 하진 말아주세요.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경찰차를 타고 스피드 지르다가 뒈지면 너무 불쌍하잖아...!

" 다 왔어. 여기 맞지? "

한참이나 빙글빙글 돈 끝에, 간신히 준수의 눈 앞에 자신의 오피스텔 건물이 보였다.

" 아, 기다려. "

드라마를 보면, 꼭 남자 주인공이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 줄 때 차 문을 열어주며 에스

코트 하고는 했었다. 왠지 준수에게 그러고 싶어지는 유천이다. 그러나 차 문을 열었을

때도, 준수는 내리지 않고 안전벨트만 붙잡은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 왜 안 내려? 한 번 더 탈까? "

" 닥쳐!!!!! "

소리를 바락 지른 준수가,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안전벨트를 푸르고 차에서 내렸다. 내

리자마자 몸이 휘청 거려, 생각지도 못하게 유천의 품으로 안겨버렸다. 또 생각지도 못

하게 준수를 품에 안은 유천이,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자제하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많

이 밟지도 않았는데 무서워 하는 모습이라니, 너무 귀엽잖아! 다음에는 경찰 오토바이

태워 줘야지-

" 괜찮아? 어지러워? "

" 너... 진짜 짜증나. "

분명히 짜증난다고 말했는데, 유천의 귀에는 그게 안 들린다. 그냥 고 귀여운 입술로 뭐

라고 옹알대는 소리로만 들린다. 애기가 옹알이 하는 것 같애. 졸라 귀여워!

" 이제 그만 니 똥차 타고 꺼져. "

Page 44: Happy Together

" 어? 차 한 잔 안 줘? "

내심 기대하고 온 유천이다. 그래도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데, 그 정도 대접은 예의가 아

닌가. 게다가 난 아직 네 전화번호도 못 땄어!

" 내가 왜? "

" 아까.. 클럽에서 구해주기도 했고, 드라이브도 시켜 줬잖아. "

그게 드라이브냐!!!! 목숨 건 객기지!!!! 또 소리칠뻔 한 걸 간신히 참고, 준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이 남자는 자신을 구해주긴 했지만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게다

가 자신이 인질이 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유천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범인이

형사의 위치를 알아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보니 기가 막히다. 자신을 두 번이나

죽음으로 밀어 넣었다는 생각에, 준수의 짜증이 하늘을 찔렀다.

" 니가 클럽에서 소리치지만 않았어도 괜찮았잖아! "

" 그렇긴 하지만... "

난 경욱이 새끼가 니 뒤에 있길래, 불안해서 나도 모르게 그랬지...

" 그리고 운전 좀 똑바로 해! 오바이트가 몇 번이나 나왔는지 알아?! 그게 운전이냐?!

폭주지!! "

" 재밌는 건데... 형사들 끼리 심심하면 새벽에 경찰차 경주도 해. "

" 폭주족이랑 다를 게 뭐가 있어?! 양아치 새끼들.... "

" 야!! "

자신이 좀 심한 말을 한 것 같다는 생각에, 준수가 입을 합 다물었다. 하긴, 형사를 양아

치에 비교하는 건 좀 심한 것 같기도 하다. 흉악범들만 상대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성격

이 거칠어졌겠지.

" 너가 누구 때문에 밤 길을 맘 놓고 다니는 건 줄 알어?! 다 우리 경찰들 때문이야! 너가

아까처럼 인질 잡혀서 씨팔새끼들한테 끌려가면 누가 구해주는 건 줄 알어?! 나야! 썅!

24시간을 시민들 보호하느라 지쳐먹는 사람들한테 양아치? 씨팔.. 더러워서 못해먹겠

네... 아우, 씨! "

워낙 직업의식이 투철한 유천이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준수에게 심한 말을 해버렸다.

그러나 바로 표정이 굳어지는 준수를 보고 바로 후회를 해버렸다. 아직 점수 딴 적도

없는데 욕질에 삿대질이라니... 박유천, 니가 왜 근 이십 칠 년을 솔로로 살았는지 알

겠다.

Page 45: Happy Together

이대로 헤어지는 건 죽어도 싫은데. 씨발.. 아무튼 이쁜 것들은 꼭 얼굴값을 한다니까.

넌 좀 많이 이쁘니까, 많이 싸가지 없어도 되긴 하지만...

" ... 미안. "

처음으로 기를 죽이고 사과하는 준수의 행동에, 유천의 귀가 쫑긋 섰다. 방금 분명히

미안하다고 했지?

" 그러려고 한 말은 아닌데, 내가 원래 말을 막 해. 성격이 이러니까 이해해. "

이해해- 하고 거만하게 명령하는 듯한 준수의 말에도, 유천은 마냥 좋댄다... 팔불출

처럼. 금세 표정이 밝아진 유천이, 때를 놓치지 않고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려 주둥이

를 나불거렸다.

" 그럼, 술 한 잔 마시고 가도 돼? "

" ... 술은 없고, 차라면 있어. "

" 차? 무슨 차? 너 차 끌고 다녀? "

" 차!! 차!! 달리는 차 말고 먹는 차!! 녹차! 홍차! 둥글레차! 쌍화차! 모르냐?!!?! "

" 아... 먹는 거! "

뭐 저런 무식한 새끼가 다 있어... 어이가 없어 혀를 차던 준수는, 먼저 몸을 돌려 오피

스텔 정문으로 향했다. 뒤에서 신이 난 표정의 유천이, 마치 달에서 유영하는 우주 비

행사처럼 가벼운 몸으로 한 걸음에 달려오며 소리쳤다.

" 같이 가!! "

* * *

신명나게 쳐맞고, 기절한지가 어연 한 시간 째. 재중이 간신히 눈을 떴을 때는 처음 보는

방에 누워 있었다. 자신이 원래 살던 단칸방보다도 훨씬 작은 방 안에는, 침대와 서랍장

하나가 달랑 놓여져 있다. 사방이 벽으로 꽉 막힌 터라, 답답한 기분이 들어서 몸을 일으

켰는데,

" 으...! "

Page 46: Happy Together

맞은 곳이 욱신거리며 아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씨발스러워- 재중은 다시 침대에 누

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싸구려 벽지가 다닥다닥 붙여져 있고, 요상한 냄새가 가득하다.

양키놈들의 암내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여기 기지촌이였지.재중은 멍하니

누워서 볼 것 없는 천장 벽지만 감상했다. 도망칠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앞으로 학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데에 팔려온 주제에 멀쩡한 법대생이라니,

완전히 코메디잖아. 아까 그 새끼들이 학교는 다니게 해줄까. 설마 지금까지 피똥칠하

며 공부해온 내 4년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는건 아닌지... 등록금도 없어서 장학금

으로 간신히 캠퍼스에 발 붙히고 살아왔는데... 아, 난 정말 지금까지 뭘 위해 산 거지.

" 씨발... 억울해... "

너무 분해서 눈물까지 다 나왔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난지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나날을 지옥처럼 보내야 할까.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것도 온 몸이 부서질만큼 힘이 든데, 내일은, 또 그 다음 내일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 거지. 진짜 죽고 싶다.... 눈물이 나는 걸 억지로 막지 않았다. 지금

은 울어도 창피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끔찍한 상황인 것 같아서.

" 신참! "

문이 달칵, 거리며 열리더니 처음 보았던 그 트렌스젠더가 들어왔다. 그녀(혹은 놈) 는

재중을 보고 싱긋 웃더니, 맞은 곳은 괜찮냐며 물었다. 괜찮게 생겼냐?!?! 재중은 짜증

이 솟구쳐 미간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토할 것 같다.. 이 이상한 냄새나는 방에,

저 신참이라는 소리는 하루에 몇 번이나 듣는 거냐.. 여기서도 신참, 저기서도 신참..

씨발! 군대의 악몽이 떠오르잖아!

" 그런데 어쩌나, 벌써 손님이네. "

" .... 네? "

" 지명이야. "

그게 뭔데, 재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조금 더 넓게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턱관절을 늘어놓고, 입을 쩌억 벌렸다.

" 안녕. "

정윤호가 서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느긋한 표정으로.

Page 47: Happy Together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5

재중은 입만 벌리고 멍하니 윤호를 바라보았다. 단정한 정장차림의 그 남자는, 거침없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거침없이 웃옷을 벗었다. 사방이 꽉 막힌 코딱지만한 방 안에서 재중

은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옷 벗는 윤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손목에 채워져

있던 시계를 서랍장 위에 툭 던져놓고, 그는 침대 위에 앉아있는 재중을 내려다보았다.

" 30분 값 냈으니까, 빨리 하자. "

" 응? 뭘? "

" 너도 처음인데 1시간은 힘들 테고. "

" 뭐가 힘들어? "

" 응, 그래. "

뭐가 그래야? 동문서답하는 윤호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그가 와이셔츠 단추를 푸르기

시작하자 기겁하는 재중이다. 남자 둘이 있는데 스트립쇼 할 것도 아니고 저걸 왜 풀러?!

" 와... "

아직 어떤 상황인지 구체적으로 파악 안되는 재중이, 와이셔츠를 벗자 드러난 윤호의

상체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같은 남자지만 저렇게 완벽한 몸매는 처음 본다.

탄탄한 가슴과 곧게 내려오는 복근에, 저절로 눈이 간다. 게다가 양 옆으로 떡 벌어진

어깨와 와이셔츠를 정리하는 팔에는 보기좋게 근육이 잡혀 있다. 도대체 얼마나 몸을

만들어온 건지는 몰라도, 재중은 새삼 허옇고 빼빼 마른 자신의 몸을 떠올리며 잠시나

마 게으른 자신을 자책했다. 재중아, 이 새끼야, 허리가 잘록한건 여자들의 로망이지,

그 비실비실한 몸으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니... 저 몸을 보니 내가 부끄러워진다.

" 되게 보네. "

" ... 옷을 왜 벗어?! 자랑하냐?! "

" 왜, 내 몸 좋아? "

" ........ "

응, 좋다! 라고 말하기도 웃기고, 지랄하네, 꺼져! 라고 말하기도 뻘쭘하다. 우물쭈물

하는 재중을 보던 윤호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무릎을 대고 올라와 재중

을 뒤로 슬쩍 눕혔다.

Page 48: Happy Together

" 뭐해? "

" 벌써 5분 지났어. "

" 뭐.... 야!!! "

갑자기 귓볼을 할짝 핥는 윤호의 행동에, 재중이 기겁하며 무릎으로 윤호의 가슴팍에

직격탄을 날렸다. 살짝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던 그는, 신경쓰지 않는 듯 오히려 어정

쩡하게 누운 재중의 자세를 바로 잡아주며 본격적으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스웨터 안을 파고드는 윤호의 손에, 재중이 진실된 비명소리로 방안을 채우기 시작했

다.

" 이 새끼가 미쳤나!!! 어딜 만져!!!? 내려 와!!! "

" 왜, 내가 첫 손님인게 마음에 안 들어? "

" 뭐? "

" 삼십분에 십만 원짜리야, 너. "

" .... 뭐? "

" 새삼스럽게 왜 그래. 넌 네가 뭐로 팔린 거라고 생각한 거야, 지금까지 아무 생각도

안하고 여기서 잠만 잤냐? "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은 윤호의 손길에, 재중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추렸다.

아까 전에 몸 좋은 남자에게 실컷 맞은 곳이 아직도 욱신거리며 쑤신다. 윤호는 행

동을 멈추더니 앞머리를 슬쩍 올려보고는, 스웨터를 반쯤 올려 재중의 상체를 대강

훑었다.

" 때렸어? "

" 그게, "

" 도망치려고 했지? "

" ........ "

" 많이도 맞았네. "

순간 표정이 안쓰럽다는 듯 변하더니, '제발 내려와 옷 갈아입고 나가주세요' 하는 재중

의 표정에 다시 발동걸린다. 본격적으로 스웨터를 들어올린 윤호가, 얼굴을 배에 묻고

혀를 세웠다. 이상한 기분을 느낄 틈도 없이 온 힘을 다해 윤호의 머리를 내려쳤다.

" 왜. "

" 나... 남자야. "

" 근데? "

" 너... 지금 하려고 하는 게, "

Page 49: Happy Together

혹시 그거니? 라고 물어볼 수도 없잖아....! 재중은 입술을 깨물고 최대한 몸을 비틀었다.

아까부터 정윤호의 그것이 제 몸에 느껴질만큼 가깝게 밀착되어있어, 기분이 심히 이상

하고 좋지 않았다.

" 나 너랑 자려고 돈 낸 거야. 너는 그런 일 하려고 여기 팔려 온 거고. "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서, 한참이나 어정쩡하게 누운 그 자세로 가만히 있다가,

윤호가 다시 자신을 만지려 하자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은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다. 같은 남자의 밑에 깔려서 대책없이 몸을 내

주는 꼴이라니, 그것도 삼십분에 십만 원짜리라는 굴욕적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그

렇게 싸구려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런

말과 그런 행동을 취하는 정윤호는, 자신을 밑바닥 끝까지 비참하게 만들었다.

" 왜 울어. 네 일 하는데. "

" ........... "

" 벌써부터 울면 어떡해. 시작도 안했는데. 오늘이 첫 날인데, 응? "

" .... 흐... "

정말이지 이 남자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죽어도 싫다. 이 남자에게 고개 숙이는

것도 싫고, 지는 것도 싫고, 굴복하는 것도 싫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존심이 있고,

그것이 꺽여지는 순간 말로 할 수 없는 허탈감과 창피함, 그리고 자신에 대한 실망을

하게 된다. 재중이 지금 바로 그랬다. 결국은 빌고, 또 빌어야 한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왔다. 30분이 지나, 이 남자가 나가버리기 전에 잡아야 한다는 사실도.

" 하지 말까? "

" 응.... "

" 옷 입을까? "

" 응.... "

" 건드리지 마? "

" 응.... "

누가 이렇게 살고 싶어 하겠어. 누가 자기 자신을 값싼 돈에 팔고 싶어 하겠어. 내 인생은

비참할 지언정, 내 자신은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싶어.

" 빌어먹을 개자식아... 나 데리고 나가.... "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로는 금세 재중의 위에서 내려와, 와이셔츠를 챙겨 입고 겉옷

을 입었다. 서랍장에 풀어놓은 시계를 들어 바라보고는,

Page 50: Happy Together

" 아직 20분이나 남았는데, 아쉽다. "

... 랜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서, 재중이 고개를 들고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노려본다고

눈 깜짝 하지 않는 남자지만. 윤호는 재중의 옆에 앉아, 눈물로 엉망이 된 그의 볼을 손

가락으로 쓰다듬고, 머리를 가볍게 안았다.

" 진짜 할 줄 알았냐? "

" ... 나 가지고 장난 치는 거 재미있냐. "

" 처음부터 너 여기에 팔 생각도 없었어. 쇼 한 거야. 너 겁 좀 주려고. "

" ... 뭐!? "

" 네가 얼마나 대단한 인재인데, 우리가 그렇게 쉽게 놓아줄 리가 없잖아. "

" 야...! 너 그러면.....!! "

" 여기 주인한테 부탁 좀 해놨지. 우리 조직원 중 신참이 상황파악 주제파악을 못해서

그런데, 벌 좀 줄테니까 잘 데리고 있어 달라고. "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마저 쏙 들어가 버렸다. 자신을 안고 있던

윤호를 파악! 밀쳐낸 재중이, 배게를 윤호에게 집어 던졌다.

" 죽어버려!! 재수없어!! 씨발!! 아악!!!!! "

" 조용히 좀 있지, 그 새를 못 참아서 맞냐? 이리 와봐. "

" 저리 가!!! "

" 하긴, 너무 고분고분하면 재미 없지. "

재중의 두 팔을 뒤로 강하게 결박한 윤호가, 재중의 앞머리를 들어올리고 찢어발린

상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말도 안되게 걱정스러워 보여서, 재중은 비웃음이 튀어나

오려 하는 걸 참고 끝임없이 욕만 뱉어댔다. 뼈 발릴 새끼.. 눈깔 뽑을 새끼.. 썅놈...

" 그러니까, 이렇게 맞기 싫으면 다시는 도망가지 마. "

윤호는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다시 손목 시계를 차고 재중을 일으켜 세웠다. 맞았던

몸이 갑자기 일어나서 그런지 다리가 저려온다. 재중이 입술을 깨물고 고통을 참자,

윤호가 갑자기 그의 목 뒤와 무릎 사이로 손을 넣어 들어올렸다. 와악! 갑자기 공중

부양 된 자신의 몸에 놀라서, 재중이 비명을 질렀다.

" 오늘은 소리 그만 질러. 이젠 진짜 귀 아프다. "

" 내려 놔!!!! "

" 싫어. 너 또 도망갈까봐. "

" 안 갈 테니까 놔아!!! "

Page 51: Happy Together

" 그래도 싫어. "

방 밖으로 나오자, 똑같은 방들이 여러 개 붙어있는 복도가 나오고, 복도를 지나자

그제서야 바깥이 보였다. 아까 보았던 기지촌의 현란한 밤거리가 그대로 펼쳐져 있다.

" 잘 길들였어요? "

" 아직. "

" 당신 부탁이니까 들어 준 거야, 정윤호. 아니... 유노라고 부를까? "

아까 보았던 트렌스 젠더가 그 둘에게 다가와 씨익 웃었다.

" 내 친구도 뉴욕에 있어. 한국에서 이 짓했는데, 결국 넘어가서도 그 짓이야. 거기서

당신, 정말 유명하다며. "

" 별로. "

" 도움받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던데. "

" 기억 안나. "

" 그럴 수밖에. 도와준 사람이 워낙 많을테니.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깡패 새끼한테!! 뭘 도와줘?! 지랄 깝싸네!! 욕이 튀어나

오려는 걸 간신히 막았다. 지금 여기서 이 소리를 했다가는 정윤호가 또 날 바닥으로

내팽겨칠지 몰라. 오늘 신나게 쳐맞았는데, 여기서 추락했다가는 정말 또 기절이다.

" 한국에 온 걸 환영해. "

그녀(혹은 놈.)가 웃으며 문 틀에 기대 섰다. 윤호는 살짝 웃어보이고는 재중을 차에

실었다. 투덜투덜 거리지만, 아마 다시는 도망치지 않겠지. 잡아두는데 생각보다 힘

이 많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윤호다.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종말을 맞이하는 표정

의 재중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하여튼 이쁜 놈.

* * *

" 와! 와아!! "

" ........ "

" 우와아아아!!! "

" ........ "

Page 52: Happy Together

" 오오오- 와악!!!! "

아까 전 부터 방과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환성을 지르는 유천 때문에, 준수의 신경은

지금 바늘처럼 예민하다. 그것도 왕바늘 말고 실 끼워 넣을 때 열라 좁은 구멍을 자랑

하는 실바늘처럼. 준수의 오피스텔은 확실히 혼자 살기엔 화려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그다지 자각하고 살진 않았다. 준수의 집안은 어려서부터 부유했으니까. 무역

업을 하시는 아버지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중년남자였고, 그의 어머니는 갤러리를 운

영하는 품위있는 여자다. 확실히 어느정도 상류층이라 할 수 있는 집안에서 자라왔고,

성북동에 있는 자신의 원래 집은 이 것보다 훨씬 크고 아름답다. 그래서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뭘 보고 좋아하는 거냐?

" 너 엄청 부자구나?! "

" 엄청은 아니고, 쫌. "

그 말투가 심히 재수없음에도 불구하고, 유천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커다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소파라기 보다는 거의 침대에 가까운 모양으로, 앞에 놓여진 벽걸이

TV를 보며 뒹굴거리기엔 더 없이 좋은 디자인이다. 게다가 이곳 저곳에 그림 액자

도 많이 걸어져 있고, 가구들이 모두 색다른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센스 있게 색깔

을 맞춰 놓았다. 왠지 모르게 고품스러워 보이는 분위기 속에서, 유천은 적응하지

못하고 그저 턱관절만 늘렸다. 우와- 거리며.

" 차만 마시고 나가. "

" 아, 응! "

어떻게서든 나가기 전에 핸드폰 번호를 따내고 점수를 따야 해! 목표가 생긴 유천의

의지가 활활 타오른다. 부엌으로 총총 걸어가는 준수를 보며, 유천이 침을 꿀꺽 삼

켰다. 에라이, 몰라. 남자면 어때! 딱 보고 삘 제대로 꽂혔으면 밀고 나가는 거지! 썅!

유천은 의지를 굳건히 하며 소파에 편히 기댔다. 자신이 그렇게 밀어 붙였다가 지금

까지 연애 한 번 못해보고 비참한 솔로로 찌들어 간다는 사실은 망각하지 못한 채.

" 그나저나... 무지 잘 사네. "

아까 보니까 침대도 무지 크던데. 기집애들 처럼 인형은 졸라게 쌓아 놓고- 거기서

잠을 자는 거야? 흐흐흐.

" 뭘 그렇게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어? "

어느새 거실로 나온 준수의 손에 뭔가 묵직한 것이 들려있다. 어려서부터 꽃꽃이나

Page 53: Happy Together

다도를 즐겨하시던 어머님 덕분에, 준수도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왔다.

차를 마실 때는 단 한 번도 시중에서 파는 오 천원짜리 티백 세트를 사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일본에서 들여온 최고급 찻가루에, 고급 다도 도구들을 써서 직접 타 먹고는

했다.

" 뭐냐? 그게 차야? "

" 시끄러워. 끓여주려고 가져왔잖아. "

" 니가 직접 만드는 거냐?! "

" 당연하지. 난 시중에서 파는 그런 것들은 안 먹어. "

도도한 표정으로 다도 도구들을 내려놓은 준수는, 숨을 가다듬고 바르게 앉았다. 자기

소파도 아닌 남의 소파에 엎드려 누워있는 유천이 호기심 어린 눈을 바라보았다. 뭔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다. 유천의 주위에는 뭔가를 먹겠다고 이렇게

바리바리 이상한 물건들을 싸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밥 먹고 싶어, 그러면 편의

점 가서 햇반 데워먹고, 반찬 먹고 싶어, 그러면 편의점에서 볶은김치 사먹는 게 유천

의 인생이니까.

뜨거운 물이 가득 든 주전자를 두 손으로 얌전히 받쳐 올리고, 찻잔에 붓는다. 그리고

요상하게 생긴 나무 주걱으로 물을 젓기 시작한다. 그 동작들이 아주 조용하고 군더더

기 없어서, 유천은 마치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냥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도 하느라 정신 없는 준수를.

보통 남자들이 저렇게 기집애처럼 앉아서 조용조용 무언가를 한다면 참 웃겨 보일텐데.

준수는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단아하고 정갈해 보이기만 했다. 유천은 미칠 지경이

었다. 웃으면 귀여워, 화내면 섹시해, 차 끓이면 단아해... 널 어쩜 좋냐. 몸 달아오른다.

" 차를 아예 모르는 것 같아서, 그냥 무난하게 녹차 가져왔어. 괜찮지? "

" 아, 응! "

" 마셔라. "

또 또 명령한다, 저 새끼. 준수는 거만한 자세로 찻잔을 유천에게 내밀고 자신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윽한 맛이다...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고 있는데, 옆에서 유천이 시

끄럽게 쫑알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 아! 써! 맛 졸라 없네!! "

" ......... "

" 야야, 이런 걸 뭘 그렇게 깽깽거리며 만들어? 난 또 뭐 대단한 거 만든다고! "

" ......... "

" 술 없냐? "

Page 54: Happy Together

아... 정말 미개인이다. 준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촌스러운 라이더 자켓을 입고,

자신이 손수 끓여주기까지 한 차를 내치는 박유천. 생전 처음 겪는 스타일의 남자라

적응이 되질 않았다. 게다가 뉴욕에서 유학생활까지 하며 글로벌을 온 몸으로 겪은

준수라, 심하게 한국 경상도 남자적인 유천의 마인드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단순히

솔직한 것뿐이었지만, 준수의 눈에는 그것마저 단점으로 보였다.

" 후우, 넌 정말 고상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구나. "

" 씹, 그게 뭔데! 그게 밥 먹여 줘?! "

" 밥은 안 먹여 줘도, 적어도 나와 친해질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고는 하지. "

준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TV를 틀었다. 클래식 방송이 한창이다. 아아.. 좋은 음악

이야. 다음 파티를 맡게 되면 저런 음악을 메인으로 해보고 싶어. 준수는 준수대로,

유천은 유천대로 다른 생각에 여념이 없다.

" 나도 고상한 거 해! "

준수와 친해질 수 있다는 계기라는 말에 유천의 귀가 쫑긋 솟았다. 고상.. 뭐 그까이꺼,

" 뭐? "

" 그 머시냐, 문화생활 정도? "

" 예를 들면? "

" ... 베토벤 정도는 알아. "

어디서 들어봤더라. 아! 1년 전에 잡은 다구리파 두목 헤어스타일이 베토벤이랑 닮았

다고 형사들 전체가 웃고 난리가 났었지. 그 때 베토벤이 누군지 몰라서 네이버 검색

창 열어봤다. 헤어스타일 졸라 웃기더라!

" 흠,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있어? "

베토벤이 무슨 음악을 했는지 알게 뭐냐!! 유천은 베토벤의 그 낄낄스러운 헤어스타

일을 생각하다, 준수의 질문에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유명한 음악가니까 유명한 음

악을 만들었을테지. 내가 아는 피아노 연주가 뭐가 있더라!

" 그거! "

" 뭐? "

" 딴딴딴딴딴딴딴딴딴딴딴딴- 딴딴딴딴딴딴딴딴 - "

" 그만해! 젓가락 행진곡은 베토벤 꺼 아니야!!! "

Page 55: Happy Together

모르면서 아는 척은- 앙칼지게 쏘아붙인 준수가 볼 거 없다는 표정으로 유천을 노려

보았다. '넌 무식해, 넌 나와 안어울려, 너 주제에 어디 나와 여기서 차를 마셔!' 등의

온갖 재수없는 망상들의 혼합체지만, 불행히도 유천에게는 코딱지만큼도 전해지지

않은 듯 싶다.

" 나 너한테 궁금한 거 있는데- "

차를 거의 다 마실 때 쯤, 이제 그만 나가달라고 준수가 말하려 하는데 유천이 먼저

말문을 텄다.

" 뭐? "

" 너..... "

유천이 질문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너, 게이냐? 라고 물으면 상처 받을까?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거 싫어하려나?

" 나 뭐. "

" ........ "

" 나, 게이냐고? "

" 응! "

우린 뭔가 통하는 구나! 쓸데없는 걸로 기쁜 유천이다.

" 맞아. "

" 아.... "

" 그러는 너는 왜 그 게이 클럽에 있었는데? "

" 경욱이 그 새끼가 거기 나타난다고 제보가 들어와서.... "

" 흐응, 난 또 너도 같은 취향이라고. "

" 어?! "

" 그렇잖아. 게이 클럽에서 마주쳤으니. 게다가 너, 나 볼 때마다 시선이 심히 뜨거워.

내가 모르는 줄 알았냐!? "

톡톡톡- 졸라게 쏘아붙인다... 준수는 승리자의 미소를 띄우고 여유롭게 유천을 바라

보았다. 이미 그의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

" 난... 남자랑 사겨본 적은 없어! "

Page 56: Happy Together

" 여자랑도 없겠지. "

" 어? 어떻게 알았어? "

누가 사겨.

" 난... 그렇다! 정말로 태어나서 사랑은, 딱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진실된 사랑

한 번이면... 충분하다. "

당황하고 쑥쓰러워서 말하다 보니, 유천의 고향인 갱상도 사투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고개를 푹 숙이고 찻잔을 매만지며 말하는 유천의 저 말은, 꼭 '너와 진실된 사랑을 함

해보고 싶다.' 정도의 고백으로 들린다. 준수는 콧방귀를 뀌며 입꼬리를 실쭉하니 올렸

다.

" 여기 조선시대 춘향이 나셨습니다요- "

" 아니... 난 진짜! "

"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남자 스타일이 뭔 줄 알어? "

" 뭔데? "

" 무식하고, 힘만 세고, 교양없고, 상식없고, 개념없고, 말 보단 힘으로 승부하려고 하는

남자들이야. "

" 아, 그래? "

... 너 얘기잖아.

전혀 자각하지 못한 유천은, 열심히 새겨들으며 그렇게 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한다.

" 덤으로 못생긴 남자. "

" 오... 눈 높구나. "

" 그 정도 가치는 있으니까 ."

수그러들 줄 모르는 잘난척이 집 천장을 뚫고 올라가 윗집에서 밥먹는 아저씨의 엉덩이를

찌르고 인네...

준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천을 훑어보았다. 확실히 무개념 돌머리긴 하지만, 생각보다

스타일도 좋고 인물도 놀랍다. 처음에는 입만 뚤리면 나오는 욕짓거리에 질려서 쳐다보

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가만히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유천의 얼굴은 꽤나 그럴싸하다.

" 여자랑 자 본 적도 없지? "

" 응.... 아! 아니!! 있어!! "

Page 57: Happy Together

" 구라. "

" 야! 내가 나이가 몇인데! 군대도 갔다 왔는데! 경험 있어! "

" 그래? 언제? "

" .... 왜, "

유천의 심장이 도곤도곤 뛴다. 거짓말 하면서 살아왔던 적은 없는데, 이 나이 먹도록

총각딱지 떼지 못했다는 사실이 쪽팔리고 쪽팔렸다. 자 본 적은 커녕, 여자의 입술에

자기 입술 비벼 본 적도 없는 유천이다. 가끔 강력반 사람들과 회식을 할 때 술집 아

가씨들과 끈적한 음악에 맞춰 블루스를 춘 적은 있지만 그 뿐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무언가 몸으로 교감한다는 것도 싫었고, 기분도 괜히 찝찌름했다. 그 결과 순

정은 지킬 수 있었으나 자존심은 버려야 했다. 뭐냐고요... 스물 일곱까지 총각이야..

" 흥... 그럼 이건 어디다 써? "

발을 쪼옥 뻗더니, 유천의 물건을 발꼬락으로 톡톡 건들이는 준수의 대담한 행동거지.

소스라치게 놀란 유천이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섰다. 아까 전만 해도 찬지 뭔지 다리며

단아한 모습으로 유천의 마음을 사로잡던 준수였는데, 지금은 딴 사람 같다.

" 쉬 쌀 때 쓰지! 어디다 쓰냐!! "

" ...... "

아, 내가 말해놓고도 비참해... 그나저나 이 녀석은 뭘 그렇게 아는 게 많길래 그런 얘

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걸까. 분명히 남자랑 자 봤을거야. 씨바알... 왠지 억울해.

" 귀여운 맛은 있구나, 그래도. "

어느새 유천의 곁으로 다가온 준수가, 거의 누워 있는 유천을 새초롬히 바라보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씨익 웃고서 유천의 골반에 걸터 안았다. 두 다리를 쩌억 벌리

고서. 준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기겁한 유천이 일어났지만, 그래도 준수의 가랑이

는 이미 유천을 향해 입을 벌린 상태.

" 그럼 이런 것도 해본 적 없겠네? "

" 뭐... 뭐.... "

" 그냐앙- "

하면서 슬쩍 허리를 돌리는 바람에, 유천의 아래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얘가 지금

뭐 하는 거냐?! 자신의 다리 사이로 확실한 준수의 그것이 느껴지지만, 이상하게 불쾌하

지가 않았다. 만약 다른 자신의 친구들이 이런 짓을 했다면, 바로 죽빵 날렸겠지만, 상대

Page 58: Happy Together

가 준수이기에 유천은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얼어버려야 했다.

" 야... 야....! "

" 왜, 싫어? "

" 아니.... 그건 아닌데... "

아.... 난 몰라...! 빙그르르 돌아가는 준수의 허리를 손으로 둘렀다. 덥지도 않은데 벌

겋게 달아오른 유천의 얼굴을 보다가, 준수가 콧방귀를 뀌고 입꼬리를 실쭉 올렸다.

" 쫄기는. "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유천의 위에서 냅다 내려온 준수가, 느긋하게 다도 도구들을

정리하고 일어나 부엌으로 걸어가 버린다. 무언가 본격적인 것을 기대하던 유천은,

달아오를 때로 달아오른 그 자세로 멍하니 준수의 뒷모습만 바라봐야 했다. 쟤 지금

뭐 한 거냐?

" 그만 나가. 늦었어. "

뭔가 농락당한 기분이다. 다리를 오무린 유천이, 자신이 지금 쟤랑 뭘 했나 생각하며

쪽팔린 기분에 고개를 푹 숙였다. 리드하지는 못할 망정 리드당해 버리다니, 물론 경

험이 전혀 없는 총각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였지만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 나 진짜 가? "

" 그럼, 뭘 기대하고 있는데? "

" 아니.... 그냥.... "

현관 앞에 서서 운동화를 신고 머뭇거리는 유천. 뭔가 진전된 것 같으면서도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이 집에서 나가면 또 마주치기도 힘들거고.

안 나가고 뭐 하냐는 준수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는 듯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 번호? 싫어. 너 맨날 전화해서 귀찮게 굴 거잖아. "

" 그게 아니라.... "

" 나한테 관심 있어? "

핸드폰 번호 하나 알려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왠지

그랬다가는 준수의 성깔에 또 어떤 보복이 돌아올지 모른다. 유천은 입술을 꽈악 깨

Page 59: Happy Together

물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진짜 쪽팔린다. 이렇게 대놓고 고백했다가 차이면

그게 뭔 쪽이냐....

" 흥... "

팔짱을 끼고 도도하게 유천을 올려다보던 (자신보다 키가 한참이나 큰 건 꽤나 마음

에 드는 면이기도했다.) 준수가, 어려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번호를 찍기 시작했다.

" 문자는 해도 좋지만, 먼저 전화하지 마. "

" 진짜 니 번호야?! "

" 어- "

" 우와! "

무슨 고대 시대 유물이라도 되는 양 신기하게 쳐다보던 유천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

었다. 정상회담도 아니고 무슨 악수야, 눈쌀을 찌푸리며 유천의 손을 바라보던 준수가

선심쓴다는 표정으로 팔 한 짝을 내밀었다.

" .....? "

웃으며 악수를 하려던 유천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 되었다. 자신에게 팔을 내민 준수

의 손목에, 믿기지 않을 만큼 시뻘건 줄이 그어져 있었다. 동물적 감각으로 준수의 팔

을 낚아챈 유천이, 눈을 크게 뜨고 그 흔적을 바라보았다.

" 이거... 뭐야? "

" 뭐야?! 놔! "

거칠게 자신의 팔을 빼낸 준수가 손을 뒤로 숨겼지만, 유천은 나머지 다른 한 쪽 팔도

낚아채 소매를 걷어 올렸다. 양 쪽의 손목에 모두 너무나도 선명한 붉은 줄이 가있다.

깊게 패여지만 분명히 손목을 그으려고 했던 흔적은 아니다. 자살 시도라고 하기에는

미약했지만, 그저 생긴 흔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했다. 놓으라고 소리치는 준수

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양 손목을 번갈아 바라보던 유천의 얼굴이 굳어갔다.

뭐야, 뭘 했길래 손목이 이 지경이야. 이 정도라면 피도 통하지 않을 만큼 몇 시간이나

무언가로 묶었다는 증거인데. 씨팔.. 가뜩이나 닭모가지 같은 손목에다가...!

" 어쩌다 이랬어? "

" 네가 무슨 상관이야?! 놔!! "

Page 60: Happy Together

" 씨발! 누가 이랬냐고!! "

" 누구면, 어쩔건데!! 네가 잡아서 죽이기라도 할 거냐?!?! "

" 죽여줄 테니까 말이나 해! "

점점 더 커지는 목소리에, 준수가 말을 멈추고 체념한 듯 손목을 떨궜다. 그리고는 힘

들다는 표정으로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 내가 너랑 무슨 사이라고 시덥지 않은 얘기까지 해야해. 손 두고 나가. "

" 야! "

" 제발 좀... "

가까스로 눈물을 참는 듯, 벌게진 얼굴로 입술을 깨문 준수가 발로 유천의 정강이를

걷어 찼다. 갑작스러운 공격이 당해서 다리가 휘청거린다. 그 사이에 자신의 팔을 뺀

준수가 유천을 문 밖으로 냅다 밀어버렸다.

" 준수야...! 저기! "

" 친한 척 내 이름 부르지마. 재수없어. "

콰앙... 하고 닫힌 문 앞에서, 유천은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잘 나가다가 이게

무슨 꼴인지. 거의 패일 듯이 새겨진 손목의 흔적을 보고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아주 오랜 세월을, 학대 받아온 손목이다. 아주 부러질 듯이 가늘고 약한.... 어떻게 된

경위인지 묻고 싶었지만, 준수는 절대로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세상을

단단하게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철저하게 검색하고 관찰하는 타입이

니까. 유천이 준수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그는 알 수 없

었다. 단지, 준수의 알 수 없는 상처에 신경이 쓰여 오래도록 그 앞을 지나치지 못했다.

* * *

" 내려. "

고분고분하게 차에서 내린 재중은, 윤호의 뒤를 따라 자신의 집, 조폭동네 12호로 들어

갔다. 황량했던 집 안은 어느새 꽤 많은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거실에는 TV도 있고,

소파도 있다. 방에는 책꽂이가 정리되어 있어서 자신들의 법전이 한 눈에 보였다. 침대

시트도 깔끔한 것으로 갈아져 있고, 벽걸이 시계도 걸어져 있다. 기가 찼다. 이 새끼는

내가 다시 돌아올 거란 사실을 알고 모두 준비해 놓은 거야. 재수없는 새끼 같으니.. 지

금은 너무나 피곤해 그냥 아무데라도 누워 눈을 감고 싶다. 하루 사이에 너무나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것도 다 비현실적인.

Page 61: Happy Together

" 들어와. "

재중이 침대에 누워 윤호에게 나가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데, 방 안으로 조직원 한 명

이 들어왔다. 아까 전에 자신을 태우고 미용실에 갔던 그 남자다. 화장실에 갔다왔다

나를 놓쳐버린... 재중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에, 그 남자와 윤호를 번갈아 바라

보았다. 정윤호의 눈은 살벌하고 아주 냉정했다.

" 감시 제대로 하라고 했지. "

" 죄송합니다! "

쿠당탕...!

재중이 말릴 새도 없이, 윤호가 그 남자의 가슴팍을 발로 밀어버렸다. 두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로 아주 여유롭게. 거구의 남자가 방 구석으로 나뒹구는 것을 보고, 재중이 침대

에서 벌떡 일어섰다. 더 이상 그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내 눈 앞에서. 그래,

조폭의 변호사든 뭐든 할 테니까 제발 나 좀 그만 괴롭히라고...!

" 야! 정윤호!! "

" 날 그 따위로 가볍게 부르지 마. 너라도 용서 안 해. "

" 저 사람은 잘못 없잖아! 내가 도망친 거잖아! "

" 널 도망치게 내버려 뒀잖아. "

" 화장실 간 사이에 내가 도망간거야! 어쩔 수 없었어! 씨팔! 그럼 넌 방광 꽉 차면 그냥

개기냐?! 생리전 현상을 어떻게 무시해!!? "

윤호는 재중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나뒹굴어있는 그 남자 앞에 앉아서

거칠게 턱을 들어 올리고 얼굴을 다시 후려쳤을 뿐이다.

" 두 번 실수 했다간 용서 안 해. "

" 죄송합니다...! "

" 난 성공에는 더없이 자비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실수에는 가차없이 냉정한 사람이야.

자비로운 나를 보고 싶으면, 앞으로 김재중 감시 잘해. 저 녀석이 다시 내 눈 앞에서

사라지면, 다음에는 네 목을 딸 거야. "

" 정윤호! "

그렇게 부르고는 바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을 노려보는 윤호의 눈빛이 지나치게

냉정해서. 그리고 몇 초가 흘렀을까. 정적을 깨고, 윤호가 자신의 정장 앞주머니 앞에

꽂혀있던 만년필을 꺼냈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펜 촉으로,

Page 62: Happy Together

" 아아악!! "

조직원의 손등을 거칠게 쑤셔버렸다. 순식간에 피로 물드는 바닥에, 재중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이제 더 이상 놀랄 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 나가봐. "

피가 철철 흐르는 손등을 쥐고, 조직원이 고개를 90도로 숙이고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바닥에 묻은 검붉은 피가 선명하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와서, 재중은 입을 틀어

막고 눈을 아예 감아버렸다.

" 이런 곳이야, 여기는. "

아무렇지 않게 사람의 손등을 펜촉으로 후벼파는 곳. 그렇게 당하고도 아무 소리 하지

못하고 설설 기며 도망가는 곳. 모든 것이 힘 있는 사람의 뜻대로, 힘이 곧 권력이며

지위가 곧 명령이며, 보스의 말이 곧 법인 이 곳. 재중은 소름끼치는 현실에 다시 한 번

이를 악 물어야 했다. 내가 살아가야 하는 곳은 이런 곳이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재중

의 턱을, 들어올렸다. 윤호의 손가락에 묻은 붉은 피가 재중의 입술에 묻었다. 비릿한

맛에 눈쌀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현명한 재중이었기에, 이미 모든 걸

파악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 남자에게 거역이란 통하지 않는 다는 거.

" 무지 쌩뚱맞지만, "

잠시 후 들려온 윤호의 말에 재중이 눈을 떴다. 아까 전과는 다른, 조금은 풀린 부드

러운 목소리다. 이 남자는 어디까지 잔혹하고, 어디까지 자비로운거지. 아무것도 모

르겠어. 그래서 무서워.

" 백설공주라는 동화, 알지? "

" ........ "

" 백설공주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가졌을 때 이런 기도를 했대. "

" ........ "

" 눈처럼 하얀 피부와... 흑진주처럼 검은 머리와...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아이를

달라고. "

" ....... "

" 예뻐, 너. 그 년처럼. "

그 년이랜다. 모르는 사람에게 이유없이 욕 먹은 불쌍한 백설공주는 지금 이 말을 듣고

있을까. 재중은 벙찐 표정으로 윤호의 얼굴을 응시했다. 피 묻은 그 붉은 손가락이 살짝

Page 63: Happy Together

입 안으로 들어온다 싶었더니, 구역질 나는 그 맛에 재중이 입을 벌릴 찰나,

" ......! "

그는 처음으로 남자와 키스했다.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6

" 도대체 뭐였을까.... "

그 상처는. 유천은 하루 종일 그 생각으로 여념이 없다. 준수의 집에서 돌아온 날 밤부터

지금까지, 여린 손목에 그어진 그 붉은 상처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유천의 모습은 보기 드문 것이었기에, 창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다가

왔다.

" 박형사? "

" 으헉! "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

생각한다- 라, 유천과 참 안 어울리는 단어다. 그는 언제나 동물적 감각으로 행동해서

무언가에 고민하고 몰두한다, 라는 그림이 그려지지를 않았다. 범인을 찾을 때도 조사

하고 수사하기 보다는, 냄새를 맡거나 자신의 감에 맡겨 이리 뛰고 저리 날고 요리 숨

곤 했다. 타고난 천성이 형사인지, 어떻게 하든 범인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오긴 했지만.

" 검사님. "

" 어- "

" 손목에요... 이렇게, 상처가 있거든요? "

자신의 손목 주변을 둥글게 그리며 열심히 설명하는 유천이다. 아침부터 쌩뚱맞게

왠 상처 타령이야- 미간을 찌푸리던 창민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유천의 옆에

앉았다.

Page 64: Happy Together

" 근데. "

" 어떻게 생긴 상처일까요? "

" 뭐, 증거 자료 같은 거야? "

"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는 사람 팔에 그런 상처가 있는데, 왜 생겼는지 말을 안 해

줘요. "

" 해주고 싶지 않거나, 말 못할 사정이 있으니까 안 하는 거겠지. "

" ... 예를 들면 어떤 거요? "

" 자살시도는 아니고? "

" 네. 무슨.. 밧줄 같은 거에 엄청 세게 묶인 흔적이에요. 그것도 진짜 오랫동안. "

" 흠, 묵였다- 하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 첫 째, 누군가에게 감금 당해서 도망

가지 못하도록 손목이 묶이다- 둘 째, 죄를 짓고 도망치다가 잡혀서 손목이 묶이다.

어느 쪽 같아? "

" 둘 다 가망성 없어요! "

" 왜? "

" 어디에 감금 당해서 사는 사람도 아니고, 죄 지은 사람도 아니에요. "

" 그럼.... 정기적으로 손목이 묶인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겠네. 누군가에게. "

" ... 역시 그렇죠? "

요목조목 설명해주는 창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기적으로

누군가에게 손목을 그 따위로 거칠게 묶이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도대체 왜?

" 누군데, 친해? "

" 아... 친한 건 아닌데.... "

" 하긴, 박형사야 오지랖이 넓어서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신경 쓰고 다니니까. 그런 걸

오바라고 하지. 상대방이 부탁했으면 괜히 캐지 마.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은 들춰지

는 순간 사람한테 비참함만 줘. "

" ... 그래도 알고 싶은데. "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해요. 파티 뭐시깽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거랑,

집이 잘 사는 거랑, 차는 자기가 손수 끓여 먹는 거랑, 그 외 몇 가지. 조금 더 많이 알고

싶은데 왜 그렇게 경계하는 걸까.

" 검사님. "

" 또 왜. "

" 나요, 딱 봤을 때 어때요? "

" 뭐가 어때. "

" 음... 이성적으로 끌릴 스타일이에요? "

" 풉-! "

뭐냐, 입을 벌리지 않고 볼따귀에 바람만 풍부하게 집어넣은 창민이, 우스꽝스러운

Page 65: Happy Together

표정으로 웃음을 삼킨다. 순간 유천의 기분이 상당히 불쾌해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나 소리를 질러댔다.

" 왜요!! 구려요?! "

" 그런 말 하기 전에, 옷이나 좀 바꾸지. 안 그래도 한 달 내내 그 가죽 자켓만 보니까

여기가 무슨 폭주족 단합회장 같잖아. "

" 아! 검사님! 형사의 로망은 라이더 자켓이죠!! "

" 아니, 그 자켓 입는 건 좋은데... 좀 빨아 입으라고. "

맞아! 박형사! 안 그래도 냄새나! 양말은 며칠 째 신은 거냐!!? 주위에서 그 동안 참았던

불만들이 쏟아진다. 유천은 자리에 앉아 운동화를 벗고, 자신의 양말에 코를 박아 보았

다. 그다지 냄새는 안 나는데, 안 갈아 신기는 했다. 아아.. 목욕한지도 진짜 오래됐는데-

오랜만에 목욕탕이나 가서 때나 밀어야지! 사람들한테 내 물건 자랑도 좀 하고!

... 자랑 하면 뭐해, 쓸 데가 없는데.

곧 좌절하는 유천이다.

* * *

" 안녕. "

이 새끼는 틈만 나면 인사하고 지랄이야- 눈을 떴을 때, 윤호가 침대 옆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는데, 왠지 기름기 번드르르한 자신의

얼굴이 부끄럽다. 저 남자는 언제 일어났는지 몰라도, 깨끗한 얼굴에 스웨터와 청바지

차림이다. 저렇게 입으니까 평범한 대학생 같아. 재중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 아홉 시 수업 아니야? "

" ... 지금 몇 시인데? "

" 여덟시. "

" .... 야!! "

가뜩이나 빡센 교양 수업이다. 지각까지 무조건 결석으로 처리해 버리는 악마같은 대

머리 교수 새끼...! 재중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샤워도 하지 못

하고 대충 고양이 세수만 한 후에, 방에서 책들을 가방에 주섬주섬 담았다.

" 늦은 거야? "

" 여기서 몇 시간이 걸리는데!! "

" 여기서 삼 십분이면 충분해. "

Page 66: Happy Together

" 그... 런가? "

생각해보니 그렇겠구나.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재중은 서둘러 가방 문을 닫고 어깨에

맸다. 방을 나가려고 하는데, 윤호가 갑작스럽게 문 앞에서 자신을 막더니 얼굴을 가

까이 가져왔다. 키스하려고 고개를 45도 각도로 튼 그 자세로- 갑자기 어제의 일이 떠

올라 바로 윤호의 콧구멍에 손가락 두 개를 쑤셔넣었다.

" 아! "

" 다시 한 번만 그래봐. 죽여버린다. "

" 되게 비싸게 구네, 그거. 삼십분에 십 만원짜리였던 주제에. "

" 야!!! "

" 내가 안 한 건줄 아냐? 미룬 거지. "

중얼거리며 먼저 문을 나가는 윤호. 재중은 벙찐 표정으로 윤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를 따라 집 밖으로 나갔다. 이상하게도 동네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조직원들이라면 모두 아침에 일어날텐데. 아무도 없는 조폭동네의 텅빈 거리를 보며,

재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니네 쫄다구들은 아침 잠이 많나봐? "

" 무슨 소리야? "

" 아무도 안 나와 있잖아. "

" 아아, 안 나온 게 아니라 집합한 거지. 다들 너처럼 늦게까지 퍼잘 줄 아냐. "

" ... 어디로!? "

" 중앙 저택 뒷뜰로. 아침마다 수련하니까. "

" 너는, 안 가? "

" 원래는 가야하는데 도망쳤어. 너 때문에. "

" 왜 내 핑계 대? "

" 너 학교 데려다 주려고- 오늘이 마지막이야. 내일 부터는 어제 봤던 조직원이 데려다

줄거야. 그 새끼, 손이 심하게 다쳐서 오늘 쉬거든. "

너가 어제 그렇게 후벼팠으니 정상일리가 없지...! 재중은 순간 온 몸에 돋는 소름을

정돈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피 묻은 손가락을 내 입에 넣었다가, 또 뭐를 내 입에

넣었더라. 혓바닥이였지. 그것도 남자의. 순간 정신을 놓아버리는 줄 알았다. 정윤호

의 혓바닥과 내 혓바닥이 뒤엉킬 때에는 진짜 죽고 싶더라. 설명할 수도 없는 괴물 같

은 힘에 밀려서 타액 교환하긴 했지만, 입술을 뗐을 때에는 기분이 진짜 묘했다.

" 내가 키스했을 때 어땠어? "

" 혓바닥 뽑아버리고 싶었어. "

" 왜, 너무 좋아서? "

" ... 너, 게이냐? "

" 너한테는. "

Page 67: Happy Together

무슨 대답이 저 따위야. 재중은 얼굴을 찡그리고 윤호를 돌아보았다. 말끔한 얼굴로

앞만 보고 운전하는 그 남자의 옆모습은 그야말로 조각이다. 재중은 또 감탄 하려는

자신의 탄성을 가까스로 목구멍으로 밀어넣고, 침을 삼켰다. 뉴욕에서 살다 왔다고

했지... 이 남자. 그래서 그런가, 왠지 이국적인 분위기도 풍긴다. 이렇게 험한 일을

하고 있으면서 지나치게 세련되 보이고- 지나치게 지적으로 보인다. 이 아이러니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 왜 조직을 뉴욕에서 한국으로 옮겼어? "

" 이제서야 하나 둘 씩 궁금해? "

" 스케일이 다르잖아. "

" FBI가 대대적으로 한인 마피아 소탕 작전에 들어갔거든. 우리는 그래도 개념있게

장사만 죽어라 했는데, 제 멋대로 총 난사하고 다니는 다른 조직들 덕분에 피봤지.

게다가 마약은 한국에서 훨씬 비싼 값으로 팔리거든. "

" ... 마약, 해? "

" 나는 안 해. 인생 망치고 싶지 않거든. "

" 미친놈, 남의 인생 망치는 건 즐겁고? "

" 마약 하라고 하지 않았어. 우리는 선택을 주는 것 뿐이지.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겠다고 선택한 사람들에 대해서 약은 지불하고 돈은 받지만 그 뒤로 책임까지

지지는 않아. "

" 또 무슨 일을 해? "

" 글쎄, "

" ... 기지촌에서 들었던 얘기는 뭐야? 누구를 도와준다며. 믿기지는 않지만. "

윤호는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는 차의 오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기분 좋은 음악이

흘러 나온다. 정말 묘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직업을 가진 남자와,

멋진 차를 타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학교로 향하고 있다니.

" 차차 알게 될 거야. 어차피 넌 앞으로 우리 조직에서 일할 사람이니까. "

재중은 말대꾸 하는 것을 체념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 후, 자신이 다니는

학교가 보였고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 졌다. 현실 바깥 세상에 있다가 다시 현실로 돌

아온 기분이다. 학교 안의 울타리 안에 있으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까.

법을 공부하는 자신이, 조폭과 연계되어 있어 앞으로 그 조직의 고문 변호사로 일하

게 된 사실을 다른 이들이 알게 된다면 어떨까. 재중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 수업 세 시에 끝나지? 데리러 올게. "

" 나 끝나고 도서관에서 죽치고 공부하거든? "

" 집에서 하면 되잖아. "

" ... 너 같으면 주위에 사람 패죽이는 조직원 놈들이 버티고 서 있는데 잘도 공부가

되겠다. "

Page 68: Happy Together

" 패 죽이지 않아, 쏴 죽이지. 아, 우리 총 밀매도 해. "

아, 예.

" 12시까지 공부할거니까, 그 때 차 보내든지 해. "

" 12시?! 너무 늦잖아. "

갑자기 왜 저런 표정을 지어. 확 구겨진 얼굴이 가히 볼만하다. 마치 땡깡 피우는 애들

표정 같다. 아니면 왜 놀아주지 않냐고 칭얼거리는 갓 사귄 여자친구.

" 늦으면 어때. 내년에 고시 보라며. 지금부터 죽어라 해도 될까 말깐데, 나보고 탱자탱자

놀면서 사법고시 패스하라는 꿈 같은 얘기를 지껄이는 건 아니겠지? "

" .... 흠, 난 수업 끝나면 같이 밥이라도 먹고 영화라도 볼까 했지. "

" 미쳤냐? 연애하냐? "

" 도서관에 있는다고 했지? 흐음.... 어디 가지 말고 거기만 있어. 다른데로 새면 진짜로

이번엔 안 봐줘. 팔아버릴거야. "

그 말에 온 몸이 사악 굳어버렸다. 재중의 머릿속에, 자신이 팔릴 뻔 했던 기지촌의

화려한 밤거리와 그의 머리를 내려쳤던 남자의 사악한 얼굴. 트렌스 젠더 주인 여자

의 능글맞은 웃음이 떠오른다.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인데도 믿기지가 않아서 한참이

나 멍하니 서있어야 했다.

" 딴데로 샐 시간이 어디 있어?! 법대생이 그렇게 한가한 줄 아냐?! 우리는 똥 쌀 시간도

아끼느라 밥도 제대로 안 먹어! "

" 드러운 얘기 하지 말고. "

" ... 같잖은 이유로 깡패 새끼들한테 팔려 왔지만, 내 삶 포기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야.

부탁인데,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할 테니까 나 좀 내버려둬. 사법고시 패스하고 변호사

하면서 너희 안에서 일하면 되는 거잖아. 그게 다잖아. "

" 그게 다가 아닌데. "

" .... 뭐? "

" 그게 다가 아니라고. "

이 남자는 무슨 말을 더 하려는 걸까. 윤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재중은 차에서

내렸다. 위잉- 하면서 차창이 반쯤 내려갔고, 윤호가 씨익 웃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

았다.

" 재중아. 너는 진짜 아무것도 몰라. "

그게 무슨 말인데- 하고 물어보려고 하는데ㅡ 그의 차가 빠른 속도로 학교 정문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학교로 들어가도 되려나, 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부아아앙- 하는

Page 69: Happy Together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윤호의 차가 곧게 후진하며 다시 재중에게

향하고 있었다. 운전 졸라 잘하네... 후진을 어떻게 저렇게 똑바로 하냐.

" 참, "

" 또 뭐! 나 수업 들어가야 해! "

" 혹시나, 주위 사람들에게 너한테 닥친 일을 말한다던지, 몰래 경찰을 부른다던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한다던지 하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너 뿐만 아니라 네가 입

을 나불거린 그 새끼들까지 모조리 잡아와 죽여버릴 테니까. "

" ........ "

" 농담 아니야.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게 만들 정도로 비참하게 괴롭히다가 죽일거야. "

" ... 알.. 겠으니까 무서운 소리 좀 그만하고 꺼져. "

" 그러니까 체념해. "

어떻게 저런 소리를 지껄이면서 싱글거리며 웃을까. 재중은 넋나간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뉴욕 출신의 마피아에, 마약밀매에, 총 밀매에, 생각보다 대단한 조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잔혹한 남자일지도 몰라.

하루만에 체념하게 될 줄은 몰랐어. 재중은 중얼거리며 법관으로 올라가는 언덕길로

향했다.

* * *

" 오셨습니까. "

" 제이슨은, "

"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용서해 주시는 것이... "

" 언제부터 네 의견을 그렇게 대놓고 말했지? 언제부터 그렇게 건방졌어. "

" 죄송합니다. "

윤호는 차가운 눈빛으로 대답한 다음 지하로 연결된 계단으로 내려갔다. 습기 차고

어두운 지하 복도를 지나, 낡고 쇠로 만들어진 커다란 문이 나왔다. 윤호가 문을 열

고 들어갔을 때는, 역겨운 피비린내와 뼛속까지 떨릴 듯한 오한이 느껴졌다. 공기도,

바람도, 따스함도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독방. 그 속에 처절하게 쓰러진 한 남자가

있었다. 손 등이 펜 촉으로 찔린 남자.

" 죽었나? "

" 아닙니다. 기절했을 뿐입니다. "

" 심하게 하지도 않았는데, 한국으로 온 이후로 모두들 너무 헤이해졌어. "

" 아무래도 FBI와의 전쟁도 끝났으니까.... "

Page 70: Happy Together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윤호의 곁에 있던 남자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가슴팍이

발에 채인 채. 넘어지자마자 다시 일어선 그 남자는, 입술을 깨물고 있지만 통증을

참기가 힘든지 미간이 상당히 찌푸려져 있다.

" 너 부터가 헤이해졌어. "

" 죄송합니다. "

" 저 새끼, 일으켜 세워. "

뒤에 있던 조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쓰러져 있는 시체같은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어제 재중을 놓쳤던 그 조직원이, 간신히 숨이 붙어있는 상태로 빨래처럼 늘어졌다.

의자에 털썩 앉히자, 몸에 와닿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윤호를 보고는 바로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 반성은, 많이 했나. "

" 네. "

" 다시는 실수하지 마라. 내가 명령한 것에, 티끌만큼도 실수하지 마. 특히 어제처럼

큰 실수는 더더욱. "

" 네...! "

" 끌고가. 상처 치료해주고, 집에서 쉬게 해. "

윤호는 뒤돌아 서늘한 독방에서 나왔다. 조직원들에게 저토록 심한 벌을 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어제 같은 경우는 조금 특별한 경우였다. '그 녀석'을 놓쳐버렸으니.

김재중이 사라졌다는 전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윤호였다. 어떻게 잡은 녀석인데

하루만에 놓쳐버리다니. 그 조직원을 보자마자 죽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재중

의 눈 앞에서는 손등을 후벼 파 겁을 주는 것으로 끝냈고, 재중이 잠든 후에는 독방으로

데려와 죽기 일보 직전까지 육체적으로 고통을 가했다.

" 학교에 조직원 한 명 붙여. 뭘 하고 지내는지, 누구와 어울리는지, 뭘 먹고, 어디를

자주 가는지, 모두 다 나에게 보고해. "

" 네. "

윤호의 바로 옆에 서 있는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맨 처음 재중을 이곳으로 데려왔을 때,

재중에게 '보스'라고 소개했던 남자다. 그러나 그는 지금, 윤호의 곁에서 고개를 숙이고

명령을 되새기고 있었다. 김재중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일보다 맹목적이고 소름 돋을정

도로 집요한 남자다. 한참이나 말이 없는 정윤호를 바라보며, 남자는 침을 삼켰다.

" ... 그럼 위로 올라가지. 어제 러시아에서 들여온 총들을 확인하고 거래처들을 확보해야

하니까. "

Page 71: Happy Together

윤호는 옆에서 건네받은 서류를 넘기며 꼼꼼하게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남자.

뉴욕에 있을 때부터 조직원들을 물과 불 같은 방식으로 다스리기로 유명했다. 칭찬 받을

일을 했을 때는 물처럼 부드럽게. 그러나 실수를 저질렀을 때는 불처럼 타오르게. 그의

이런 독보적인 카리스마는,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원동력이자 중추돌임이 분명했다.

" 한국에서는 아직 총을 대대적으로 거래하는 조직들이 없습니다. 있어봤자, 소규모로

어려운 루트를 통하는 까다로운 조건들입니다. 저희가 대대적으로 총을 팔게 된다면,

많은 조직들이 접촉해올 겁니다. "

" 서울에 있는 커다란 조직들을 명단에 올려 놔. 일단 그들과 거래하는 척 하면서 본거

지를 알아내도록 해. "

" 그 후에는... "

" 킬러를 보내 보스들만 처리한다. 대가리가 없는 조직은 와해되는게 당연하니까. "

서류를 넘긴 윤호는, 시계를 힐끗 바라보고는 싱긋 웃었다. 김재중이 사회와 법 과목을

들을 시간이다. 그는 이미 재중의 시간표를 꿰차고 있었다. 그는 재중의 모든 것을 알고

외울 생각이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전부 다...

" 그럼, 저희는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보스. "

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그는 앞으로 할 일이 많았다. 아직 총과 마약 밀매가

활발하지 않은 한국의 루트를 뚫어서, 대대적으로 거래처를 잡아둬야 했으며- 서울의

중요 조직들을 모조리 와해시킬 작정이었다. 뉴욕에서 그는 한인 마피아들 중 어둠의

제왕으로 불렸다. 살인과 갖가지 범죄가 판치는 뒷골목, 그 어둠의 세계에서 정윤호는

신이었으며 보스 중의 보스였다. 검은 머리를 가진 이 남자는, 피로 절여진 이 세계에서

절대적인 존재의 남자, 그들의 보스. 정윤호.

그 모든 것을 감추고 있는 김재중의 새로운 지배자.

* * *

오..늘....볼...수이쓱ㄲ..

" 아악!!! "

강력반을 뒤흔드는 유천의 비명에, 다른 형사들이 흠칫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다. 혼자서 살인흉기만한 핸드폰을 들고 열심히 문자를 쓰다가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는 것이. 유천의 핸드폰은 문자 쓰기 쉬운 천지인도 아니고, 익숙해지면

다른 거 못쓴다는 싸이언도 아니었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구시대의 유물.

Page 72: Happy Together

무전기만한 깜장색 핸드폰. 핸드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커버린, 핸드폰을 가장한 무선

집 전화. 문자 쓰기가 유독 힘든 그 핸드폰을 들고 끙끙대는 유천이 불쌍하다.

" 누구한테 그렇게 문자 보내는데? "

" 아직 보내지도 못했어요! 씨팔! 뭐가 이렇게 어려워! "

" 핸드폰 좀 바꿔. 요즘 누가 그걸 써? "

" 전화만 잘 터지면 되지... 아, 근데 이거 문자쓰기 엄청 힘드네! "

" 애인이야? "

애인- 이라는 말에 유천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고는 배시시 웃더니 고개를 젓고

문자판을 뚝뚝 다시 누르기 시작했다.

"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

" ... 박형사,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

창민의 말에, 강력반이 술렁거렸다. 박형사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 있어? 이제 제대로

연애 하는 거야? 그런 말들이 오가고, 유천은 손을 휘저으며 아니라고 버럭 소리 질렀

다. 나 혼자 좋아하는 거에요!! 유천의 그 말에 모두가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누가 사겨...

" 누군지 몰라도 불쌍한 여자네. "

누군가의 그 말에, 강력 1반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맞아! 누군지 몰라도 불쌍하다!!

세상에서 가장 포악한 짐승 새끼한테 물렸잖아! 그것도 한 번 물면 안 놓는다는 악질

박유천한테-!

여자 아닌데. 남잔데.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기 자신도 동성애에 아직까지

적응이 되지 않았는데, 이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유천은 한숨을 쉬면서 다시 문자쓰

기에 열중했다. 오늘 볼 수 있을까- 이 한 마디가 왜 이렇게 쓰기 어렵냐!! 저번에 준

수에게 무턱대고 전화했다가, 목소리로 맞아 죽는 줄 알았다. 이 새벽에 왜 전화를

하냐며, 다시 한 번만 전화하면 죽여버린다고 앙칼진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 질렀지..

하긴, 그 때가 좀 늦은 시각이긴 했어. 잠복 근무 하느라고 새벽 네 시까지 경찰차에서

밤새다가 너무 심심해서 전화한건데..

" 목소리 딱 한 번만 더 들어야지. "

Page 73: Happy Together

유천은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휴게실로 도망치듯 나와 통화 버튼을 길게 눌렀다. 신호

음이 가고, 그가 받기를 기다리며 가슴을 졸였다. 그 때 준수의 집에서 헤어지고 1주일

이 넘도록 보지 못했다. 며칠 전에는 준수의 집에 직접 찾아갔으나, 새벽 내내 오지 않

아 허탕만 치고 돌아갔다. 그도 그럴 것이, 준수는 자신의 차를 주차장에 세워놓고 엘리

베이터를 타고 바로 올라갔으니, 오피스텔 정문에서 기다리는 유천을 볼 리가 없었다.

-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

" 준수야! 끊지마! 끊지마! "

- 지금 일 구상하는 중이라고! 짜증나게 자꾸 이럴래!? 저번에는 새벽에 전화하는

몰상식을 온 몸으로 보여주질 않나!!

" 미안해... 씨발! 나는 사람들이 새벽 네 시에 다 깨어있는 줄 안다고!! "

- 또 씨발이래, 또 씨발이래.

" 입에 붙었는데 어떡해! 씨발!

뚝.

하고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 유천은 끊어진 핸드폰에 준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왜 말만 하면 입에서 욕이 나오지, 빌어먹을...

" 박형사! 어디가?! "

" 사격실이요. "

마음 다스리는 데는, 사격이 최고니까.

.

.

.

탕! 탕! 탕!

몇 시간 째 총을 잡고 사격에 열중하는 유천은, 아까 전부터 엉망인 자신의 실적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사격으로 남들에게 져본 적은 없는데, 아까부터 사람 모양의 과녁에

발가락과 무릎만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일부러 그렇게 쏠려고 해도 안되겠다.... 마지막으

로 쏜 총알이, 과녁의 옆구리에 맞자, 유천은 와악! 하고 비명을 질러버렸다.

여기도 준수.. 저기도 준수.. 천장에도 준수가 대롱대롱.. 바닥에서 준수가 슬금슬금.. 어

딜 보나 김준수밖에 안 보여. 으어어- 난 점점 또라이가 되가고 있다...!

땀이 비오듯 흐른다. 사격은 다른 운동에 비해 많이 움직이는 운동은 아니었지만, 두꺼운

사격복을 입어야 하는 데다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저절로 땀에 젖어버렸다.

Page 74: Happy Together

킁킁- 온 몸에서 습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오늘은 꼭 목욕을 해야 할 것 같다. 유천은 총

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정말 왜 이러지...

" 박형사, 미쳤어? 과녁판이 저게 뭐야? "

어느새 사격실로 내려온 창민이, 자판기 커피를 유천에게 권했다. 유천은 내심 놀랐다.

창민이 사격실로 내려온 것은 5년 만이었기에.

" 웬일이에요? 여기는? "

" 한밤 중까지 누가 총을 쏴대나 해서. 총탄 멋대로 낭비하지마. 아니, 과녁판 발가락에도

맞췄어? 일부로 맞추라고 해도 못하겠다. 심장이랑 머리랑 목은 고대로네- "

" 집중이 안 되요. "

" 왜, 그 사람 때문에? "

" 네. "

유천은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힐끔 창민의 눈치를 살폈다. 유천이 사격으로 누군가에게

져본 적은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심창민. 지금의 심검사. 지금이야 몸으로 뛰기 보다는

머리를 굴리는 사람이지만, 5년 전만 해도 창민은 누구보다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점잔

만 빼는 것이 검사라는 편견을 가진 유천도, 창민 만큼은 예외로 인정하고 있었다. 누구

보다 강했고, 특히나 사격에 있어서는 거의 천재적인 실력을 가진 남자였지만... 창민은

다시는 총을 잡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약혼녀를 쏘아 죽인 이후로는.

" 사격, 하실래요? "

유천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에게 총을 내밀었다. 창민은 굳은 표정으로 총을 내

려다 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직은. "

그럼 저나 마저 졸라게 쏴대야 겠네요... 이거라도 안하면 머릿속에 집중이 되지 않아요-

유천은 중얼거리며 총을 다시 집었다. 타앙! 하고 정확하게 심장을 겨눴는데도, 총탄은

배꼽에 꽂혔다. 아이고... 가지가지 하십니다. 뒤에서 창민이 시니컬하게 비웃는다.

" 뭘 그렇게 박형사 답지 않게 끙끙거려? 좋으면 그냥 밀어붙여. "

" 그게 안 되는 성격이니까 그렇죠! "

" 어떤데? "

" 무지 도도하고, 아무튼... 엄청 잘나보여요. 그래서 함부로 못하겠어요. "

" 그런 사람일 수록, 자기 외적인 배경 신경쓰지 않고 무대포로 달려드는 남자한테

Page 75: Happy Together

더 약한 거 몰라? 일단 부딪혀보지도 않고 왜 겁을 먹어. 박형사한테 안 어울리게. "

진짜 안 어울린다. 범인 잡을 때는 짐승처럼 무대포로 달려들어 어떻게서든 포박해놓는

박유천이, 연애문제 하나로 끙끙대면서 사격도 그지같이 하는 꼴이라니. 창민은 픽 웃고

서 다 마신 자판기 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 남한테 맞추는 것도 좋은데, 그건 연애 시작하고 해도 늦지 않아. 처음 다가갈 때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 보여줘. 안 그러면 나중에 서로 힘들어져. 꾸민 모습으로 잘 보

여서 연애 시작하면, 나중에 다 들통나고 실망하고 끝나거든. "

" 흐유, 죽어도 안 넘어올 것 같은데. "

" 하긴, 요새는 열 번 찍어도 안 넘어오는 나무들 많다고 하더라. "

김준수는 열 번이 아니라 스무 번을 찍어도 넘어가기는 커녕 찍힌데 청테이프로 둘둘

싸고 콧방귀 뀔 놈이다. 유천은 한숨을 쉬며 자신이 왜 그런 녀석에게 반해버린 건지,

제 자신을 책망하기 시작했다.

" 못 올라갈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죠... "

" ..... 박형사.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유식한 말 쓰려고 노력하지마. "

" 왜요? "

" 배 잡고 굴러. "

못 올라갈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보는 게 아니라 쳐다보지 않는 거다- 창민은 어이상실한

표정으로 순수하게 눈을 껌뻑이고 있는 유천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이 누군진 모르지만,

박유천의 이런 부끄럽지 않은 멍청함을 매력으로 느끼기엔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 사격 끝나고 찾아가 봐. 박형사 식으로 해. 연애든, 일이든. "

창민은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리고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사격실을 둘러보

았다. 한 때는 나도 이곳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살았던 적이 있었지..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 건 내 성격이지만, 아직은 총의 그 차가운 감촉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다. 내 손으

로 내 여자를 죽였던 그 날이 떠오를 것만 같아. 창민은 씁쓸하게 웃으며 사격실을 나섰

다.

* * *

" 씨발! 춥다!! "

Page 76: Happy Together

준수의 오피스텔 앞에서, 유천은 세 시간째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열 한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 아까 전 용기를 내어 준수에게 전화를 했을 때, 그는 바깥이라고 했다. 무

슨 일을 하는 진 몰라도,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번에는 뒷문과

앞문을 모두 체크하기 위해 틈틈히 뒷문까지 둘러보고 오는 집요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준수는 이미 아까 엘리베이터를 지하에서 타고 유유히 자신의

오피스텔로 올라간지 오래였다. 알 길이 없는 유천은 그저 추위에 떨며 준수를 기다

리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불쌍한 녀석 같으니...

" 후으으.. 이제 진짜 겨울이네. "

이런 겨울에 목도리 떠줄 애인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애인이 김준수라면...!

차도 끓여마실 정도로 섬세한 녀석이니까, 분명 뜨개질도 잘 할거야. 그 야들한 손가

락으로 실을 돌돌 굴려대면서 목도리를 뜨겠지... 우후후. 졸라 이쁘겠다.

이쁘고 자시고, 집으로 들어오기나 하지! 지금까지 어디서 뭐를 하고 있는 거냐. 설마

또 게이 클럽에 가서 남자새끼들한테 생글생글 웃어주는 건 아니겠지. 유천은 고개를

저으며 애써 부정했다. 클럽에서 인질극까지 벌어졌으니, 당분간은 겁먹어서라도 그

런 곳에 가지 않을 것이다. 빨리 왔으면, 하고 빌면서 유천은 딱딱- 부딪치는 이를 위

로했다. 조금만 참어.. 준수 오면 다짜고짜 붙잡고 니가 끓여준 차 먹고 싶다고 해야지..

그렇게 한참이나 기다리다가, 문득 잠이 들었다. 그 혹한 속에서도 잠들 수 있는 것은

졸리면 졸립다- 배고프면 배고프다- 한 가지만 생각하는 유천의 특이한 능력. 추위도

잊고 졸음 속에서 눈을 감았던 유천이, 어느 순간 확 눈을 떴다. 형사의 본능이었다.

내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박... 사박...

" 김준수...! "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김준수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깔끔한 구두에 검은색 코트와

청바지를 입고. 걸음 걸이가 조금 빠른 것 같기도 하고, 느린 것 같기도 하다. 이 새벽에

어디를 가는 걸까. 유천이 조심스럽게 그 뒤를 밟았다. 좋아하는 사람을 미행하는 것은

왠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직감할 수 있었다. 손목에 난 비밀스러운 상처, 분명히 그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 * *

Page 77: Happy Together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7

유천은 조심스럽게 미행했다. 그의 생활 중 한 부분이었으니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걸으며 상대방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쯤은

눈 감고서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상대가 그 앙칼진 김준수이기 때문에 더더욱 신경써야

했지만. 웬만한 흉악범 미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집중력을 요구하고 있다. 유천은

숨을 고르게 쉬며 차근차근 준수의 뒤를 밟았다. 그는 자신이 미행당하는 것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조근조근한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가는데, 목적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 숨겨둔 애인을 만나러 가는 건가. 아니면 손목이 그 지경이 되도록 묶어놓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건가.. 으으으, 아무튼 이 야심한 새벽에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는 것 자

체가 기분나빠...! 도대체 어떤 놈일까. '

누구 만나러 간다는 소리도 안했는데 혼자서 각본 짜고 수정까지 다 해놓은 유천. 그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조금 더 속도를 냈다. 하긴, 저렇게 예쁜 얼굴을 하고 애인이 없다

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지. 분명히 숨겨놓은 애인 원 투 쓰리가 있을 거야. 지금 만나는

놈은 원일까, 투일까. 아니면 원투? 씨발... 가수 원투 아냐? 점점 해괴망칙한 상상들로

자신의 머리를 매꿔나가는 유천이다.

" ... 어? "

그렇게 한참이나 미행을 하고 있는데, 준수는 도무지 어디로 가는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

다. 이 근처의 오피스텔 촌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그냥 그곳을 지나쳐 걷고만 있다. 도대

체 어디까지 가는 거냐며 준수의 뒤를 밟던 유천의 눈에, 이상한 것이 잡혔다. 확인해 보

려고 바로 뒤로 다가가 다시 한 번 준수를 살펴보자, 유천은 그제야 뭔가 문제가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 준수...야? "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준수는 듣지 못한 건지 여전히 어디론가

걸어갔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아서 유천이 달려가 준수의 어깨를 돌려 세웠을 때, 준수

의 눈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흐리멍텅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

하더니, 넋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서있는 것이다.

" 야! 너 왜 이래?! 김준수!!! "

Page 78: Happy Together

유천이 준수의 어깨를 거칠게 잡고 흔들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 지더니 갑자기

유천의 목을 졸라대기 시작했다. 정말로 가녀리게만 보이는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

오는지 모를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자신의 목을 쥐어 짜고 있는 준수의 손을 가까스로

떼어내고, 유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준수의 뺨을 내리쳤다. 정신차려!

" .... 아.. "

뺨을 거칠게 얻어맞고 난 후에야 행동을 멈춘 준수가... 그제야 유천을 똑바로 쳐다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의 눈이 점차 떨리기 시작하더니, 유천의 목

을 졸랐던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 ... 준수야, 괜찮아? "

" 으.... 으.. 흐으윽.. "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어쩔 줄 모르고 바닥에서 웅크려 앉아있던 준수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이라기 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

이, 준수가 주저앉은 바닥 앞에 똑같이 앉아버린 유천이 그를 안았다. 자신의 품 안에

안긴 준수는, 여전히 계속 울고만 있었다. 울음소리인지, 비명소리인지 모를 정도로

커다란 소리를 내며.

길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 새벽에, 누군가 홀로 걷고

있는 준수를 발견했다면 모두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

* * *

" 어제 괜찮았냐? 애들끼리 너 얼마나 걱정했는데! 핸드폰도 연락 하나도 안 되고! "

" 미안하다.. 진짜 정신이 없어서 말 할 틈도 없었어. "

" 어디 다친데는 없고? 사람들이 그러던데! 완전 깡패새끼들이라고! 온 몸에 문신이

도배질 되어있고 막 그렇다며! 때린 데는 없어?! "

응. 온 몸 다. 아직도 욱신거리는게 아주 죽겠다. 재중은 어제 쳐맞은 자신의 몸을 떠올

리며 한숨을 쉬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몰려든 사람들은, 같은 동아리에 든 법대 친

구들이었다. 어제 자신이 수상한 사람에게 끌려간 소식을 뒤늦게 들은건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부를 물어온다. 그러나 재중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이

Page 79: Happy Together

없었다. 정윤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농담이 아님을, 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사실을 털어놓는 순간,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일상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것도 매우 잔혹한 방법으로.

" 어제, 무슨 일 때문에 부른 거야? 사람들이? "

" 그냐앙... "

가장 친한 선배 누나와 학관으로 향했다. 출출한 김에 저렴한 학관 밥을 열심히 먹고

있는데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대학에 와서 가장 친해진 사람은 여자

선배인 민정이었다. 남자들과 친해지려면 새벽마다 이어지는 술자리는 물론이며 주말

마다 축구에, 오락에, 정신없이 부대끼며 살아야 했지만 재중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수석으로 입학하긴 했지만 식비와 교통비마저 부족했던 그는

한 학기만 다니고 입대를 해야 했다. 재중이 군에서 제대했을 시즌이, 동기들이 군대에

입대하는 시즌이었다. 결국 그는 함께 입학한 남자 동기들과 완전히 멀어지게 된 것이다.

" 또 아버지 때문이야? "

" 좀... 그래요. 우리 영감이 워낙 사고를 잘 치잖아. "

아직 서른 해도 살지 않은 인생이지만, 자신의 인생에 참으로 풍파가 많았다고 생각하는

재중이다. 군에서 제대했을 때에는 놀랍게도 그 사이 아버지의 사업이 다시 일어나 준재

벌급으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그 때에는 면허를 따서 외제차도 끌고, 그렇게 좋아

하는 피아노 리사이틀을 열며 해외여행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부유함은 2년을 가지

못했고, 다시 아버지의 사업이 빚으로 쫄딱 망해버림에 따라 재중의 차도 팔렸고, 피아노

는 사치스러운 취미가 되어버렸으며,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는 서민으로 돌아갔다.

아니, 차라리 서민이었으면 다행이련만... 극빈곤층 대열에 합류해야만 했지.

" 너보고 빚이라도 갚으래? "

" 아니.. 뭐,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니까 나한테 뭐라고 할 수는 없지. "

" 아버지는, 아직 연락 안 돼? "

" 네. 어디서 끈질기게 살아있겠지. 그 영감탱이야 워낙 질긴 인생이니까. "

" 그래도 걱정하고 있잖아. 아버지랑 연락 되면 나한테 말해줘. 걱정되 죽겠다. "

그녀는 재중이 부유할 때나, 극빈곤층일 때나 변함없이 위해 주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다. 한 때는 비밀스러운 CC라는 농담이 떠돌 정도로 사람들이 묘한 시선으로 보기

도 했다. 재중과 민정, 둘 다 서로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까지

그 어떠한 고백도 하지 않았다. 재중은 재중대로 성공해야겠다는 집념으로 공부에 여념

이 없었고, 그녀도 재중의 그런 사정을 알았기에 딱히 보채거나 닥달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 이대로가 딱 좋았다. 서로에게 아무도 없기에, 마치 연인처럼 의지하고 선배

후배- 하면서 즐겁게 웃을 수 있는 현재가...

Page 80: Happy Together

밥을 먹다가, 문득 윤호와의 키스가 떠올랐다. 그녀에게 남자와 키스했다고 말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거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고 공유하는 사이지만, 어제 이래로 그녀와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골이 생긴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위로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고민이란 건 사랑과도 같아서, 공유하고 나누고

함께 해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절박스러운

상황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칼로도 모자라 총을 휘두르는 포악한 새끼들에게 걸려서.

" 재중이 너, 법과 생활 레포트는 다 썼고? "

" 아...! 그거 커트라인 언제에요?! "

" 내일이잖아! 미친거 아니야?! 그 교수 얼마나 깐깐한데! 시작도 안했어?! "

" 밤 새야겠다.... 누나, 자료 같은 거 저한테 좀 건네줘요- "

" 안그래도 도서관 가려고 했으니까 같이 가자. "

도서관에서 마음 잡고 공부나 하려고 했더니, 오늘 밤은 PC방에서 컵라면와 함께 보내

야겠네. 재중은 한숨을 쉬며 밥을 마저 먹었다.

* * *

윤호는 자신의 커다란 서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꾸며진 서재에는

어마어마한 책 부수가 채워져 있었다. 체리나무 색의 책장은 천장까지 이어져 있었고,

사다리가 연결되어 있어 높은 곳에 있는 책을 쉽게 뽑아볼 수 있었다. 둥글게 디자인된

커다란 책장 앞에 놓인 의자에 그가 앉아있었다. 붉은 양탄자에 발을 놓아두고, 의자에

몸을 편히 기댄 채 눈을 감고서. 그가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가 흘러나오며

그의 귀를 부드럽게 적셨다.

그는 재중을 생각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그를 생각하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진 그의 몇 안되는 습관이었다. 살인과 범죄로 얼룩진 그의 일상

에서 유일하게 편안한 시간이었으며,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못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 피아노 치는 모습 보고 싶다... "

그는 중얼거렸다. 윤호가 재중을 처음 봤을 때, 그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뉴욕의 꽤

유명한 피아노 리사이틀 회관에서. 그 리사이틀의 주인공은 재중이 아닌 다른 피아니

스트였다. 재중은 그 피아니스트의 무대가 시작되기 전에, 분위기를 돋구기 위해 연습

생 신분으로 나와 청중들 앞에서 짧은 시간을 연주했다. 그러나 충분히 아름다운 연주

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음악에 매료되었다. 윤호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조직의

보스라는 어두운 사회적 신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취미는 고상했으며

클래식에는 통달할 정도로 전문인이었다. 윤호는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옛날의 분위

기를 풍기는 것들을 좋아했다. 재중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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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 보았을 때 어땠었나. 윤호는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모습에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클래식한 아름다움의 결정체를 맛보았다.

그는 마치, 먼 옛날 존재했던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고고한 귀족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

다. 이마를 덮는 검고 아름다운 머리카락과, 만져보지 않아도 그 매끄러움을 느낄 수 있

는 피부. 그리고 조용히 음율을 따라 달싹이는 지독하게 붉은 입술까지. 현대 시대에 살아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 순간 정윤호는 김재중에게 매료된 것이다. 4년 전 뉴욕에서.

" 재중아... "

이렇게 그의 이름을 그의 눈 앞에서 부르기를 얼마나 고대했는가. 윤호는 피식 웃었다.

비정상적이까지 한, 김재중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게 된 지가 오래였다.

김재중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 남자가, 4년 전부터 얼마나 자신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었는지. 재중이 처음으로 뉴욕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열었을 때, 피아노의 음율이 아

닌 자신의 모습을 두 시간 동안 놓치지 않고 자신의 가슴에 박아놓았던 사람이 있었던

것을.

그러나 윤호는 모든 것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할 생각이었다. 그의 눈을 자신에게

향하게 하는 법 부터, 그와 자신 사이에 끼어들 무언가를 모조리 제거하는 것. 그리고

그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까지... 그는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재중은 자신의 손에 있었으며, 그의 소유인 집 안에서 잠이 들었으니. 그를 자신의 품 안

에서 잠들게 하기 까지는 아마도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윤호는 걱정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의 뜻 대로 되어가고 있었으니.

한국으로 조직을 옮기게 된 이유는 단 두가지였다. 첫번째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FBI의 대대적인 한인 마피아 소탕 작전 때문이었으며, 두 번째는 그 남자 때문이었다.

재중은 2년 전부터 더 이상 뉴욕에서 리사이틀을 열지 않았다. 그렇기에, 윤호가 그를

찾으러 한국으로 온 것이다.

* * *

" 무겁지 않아...? "

" 하나도 안 무거워. "

" 박유천.... "

" 왜. "

" 무섭지 않아...? "

" 하나도 안 무서워. "

" ......... "

준수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정신을 차린 이후로, 유천은 말 없이 우는 자신을 다독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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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 업어 주었다. 왜 신발을 신고 나오지 않았냐며 장난스럽게 웃다가, 준수의 시려운

발을 손으로 잡아주었다. 유천의 등에 대롱대롱 매달린 준수의 발은 춥지 않았다.

" 그러게 왜 그렇게 많이 걸었어... 이제야 다 왔네. "

눈 앞에 보이는 오피스텔을 보며, 유천은 한숨을 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들 투성이다.

도대체 이 새벽에 왜 신발도 신지 않고 나와버린건지, 갑자기 자신의 목을 조르려 했던

행동은 무엇인지, 그 엄청난 눈물은 뭔지... 너에게 무슨 비밀이 있는지. 그러나 유천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준수를 업었다. 창민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

을 들켰을 때, 상대방은 어느 때보다 비참하고 절망적이라는 이야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준수는 이미 유천에게 자신의 비밀의 일부를 들켜버렸다. 아주 우연이였지만

돌이킬 수 없는 필연으로. 준수는 눈을 감아버렸다.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 추운 날, 맨발로 나와 정처없이 길거리를 헤매다가 너를

죽이려고 목을 졸라댔던 미친 새끼를...

" .. 업어줘서 고마워. "

" 나 차 한 잔 줘. "

" ... 맛 없다며. "

" 먹고 싶어서 그래. "

유천은 여느 때와 다르게 조용했다. 늘 설치고 깨부수고 다니는 그라 할 지라도, 이런

때에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준수는 말없이 땅을 쳐다 보다가,

들어오라며 애써 웃었다. 그는 불안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좋다고 했던 남자가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지를.

준수의 집에 들어갔을 때, 유천은 딱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신발이 가지

런히 현관에 놓여져 있는 것을 제외 하고는. 집으로 들어와 침실로 들어가려는데, 준수가

제지하며 막아섰다.

" 거실에 있어줘. "

" ... 방에 뭐 있는데. "

" 네가 알 거 없잖아. "

" 이미 반 은 안 것 같은데. "

준수의 표정이 새파랗게 굳어버린다. 반을 알았다고 말했지만, 정확히 그 반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준수에게 일반인들과는 다른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야

밤에 맨발로 길거리를 배회하는 남자는 극히 드무니까.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유천은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았다. 준수가 미쳤다는 생각은 절대로 들지 않았다. 미치도록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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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 저기... 나 지금, 다도 할 힘이 없는데- "

" 아무거라도 좋으니까 따뜻한 거 줘. 나 얼어 뒈지는 줄 알았어. "

" ... 오피스텔 앞에 있었어? "

" 응. "

" 왜? "

" 너 기다렸어. "

준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조금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 왜 기다려? 너 스토커야? 나 미행했지? 내가 거기까지 갈 동안, 내 뒤에서 따라왔지?

저 새끼 미친놈 아니냐면서 구경하며서 따라왔지? 형사들은 다 그러냐? 모든 사람을

범인 취급하면서, 따라다니고, 관찰하고, 다 그래?! "

" 그런 거 아니야...! "

" 왜 따라와! 가면 그냥 내버려 두지! 왜 나를 따라와!! 집 앞에서는 왜 기다려? 내가 너

같은 거 만날 줄 알어!?! 골 빈 형사 새끼 주제에 왜 나한테 지랄이야...! 흐.... "

한참이나 소리지르던 준수가 결국 또 주저앉아 울어 버린다.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던

유천은 주저앉은 준수를 다시 안아야 했다. 평소 같았으면 안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혼

자 좋아하며 웃어댔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틀렸다. 잔뜩 더러워진 발바닥을 보면서 유

천이 양말을 벗기고 차가워진 발바닥을 손으로 감쌌다.

" 뭐하는 거야! 더럽잖아...! "

" 가만있어. 차가워서 그래. "

" 놔! "

" 발 무지 작다... "

맨 발을 꼼질거리며 만지던 유천이, 붉어진 준수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비웃음이 아닌,

안심하고 불안해 하지 말라는 편안한 웃음으로. 얼음장 같은 발을 자신의 옆구리에 끼우고,

유천은 나머지 한 쪽 발도 자신의 옆구리에 끼웠다. 두 옆구리 사이에 끼워진 준수의 발의

모양이 우스웠지만, 둘 다 웃지 않았다. 한 쪽은 혼란스러웠으며, 한 쪽은 불안했다.

" 옆구리가 제일 따뜻하대. "

" ... 내 발에서 암내 나면 책임 질거야? "

" 그 때는 씻겨 줄테니까 걱정마. "

준수는 울음을 멈추고 자신의 발을 옆구리에 살살 문지르는 유천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변함없는 가죽자켓에 촌스러운 청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 준수는 내심 놀랐다. 당황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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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모습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천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았던 사람들 중에 유천 같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 그랬지. 금세 소문이 퍼지곤 했었다.

들었어? 그 김준수, 사실은... 이라며. 박유천도 그럴까.

" 손도 차갑잖아... "

준수의 양 손을 쥔 유천이, 자신의 볼에 가져가댄다. 함께 바깥에서 돌아왔음에도 불구

하고 유천의 얼굴은 따스했다. 가만히 그의 얼굴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준수는 조용히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너, 왜 그랬어? 왜 미친놈처럼 그렇게 돌아다녔어? 사실

대로 말해봐- 너... 정신병자지. 흐흐.. 준수는 작게 웃었다. 사람들 모두가 그랬다. 호기

심으로 나의 비밀을 물어보고서, 알게 된 후에는 주위 사람들에게 소문내고 나를 정신

병자 취급하고 미친놈 취급 했다. 나는 학교 안에서 모든 이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자 두려

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자마자 뉴욕으로 유학을 갔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새로 시작하고 싶었지만... 빌어먹을 나의 병은 고쳐지지 않았어.

" 몸이 다 차갑네... "

양 발과 양 손을 놓아준 유천이,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을 끌어안았다. 누군가를 이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진심으로. 너무나도 안아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불안에 떠는 강아지 같은 눈으로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 혹여나 나를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호기심이 생기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살았을까.

언제부터... 그렇게 위험하게 멍한 정신으로 밤거리를 돌아다닌걸까.

" 준수야, "

" 나 정신병자 아니야. 그건 확실해. "

" 나.... "

" 미친놈도 아니야. 미리 말해두는 거야. 나 이상하게 보지마. 그냥 어디 좀 아파서 그래.

그러니까..... "

" 나, 너...가, 좋다. "

유천이 띄엄띄엄 말했다. 혹여나 이렇게 부드럽게 안아주고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할

까봐 미리 말해놓은 준수의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유천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오늘 밤에 벌어졌던 김준수의 위험한 외츨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서, 좋아한다며

끌어 안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준수는 당황해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 그냥... 그렇다고. "

그리고 준수를 놓아준 유천이, 배시시 웃었다. 순간, 왜 인지 모르겠지만 울컥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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났다. 오늘 몇 번이나 이 남자 앞에서 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물어보지도 않았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저 추운 밤에 나갔다 왔으니 몸이 차갑다며

자신의 몸을 이용해 안아주었다...

" 나 갈게. 너무 늦었으니까 오늘은 일찍 자. "

유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옆구리에 코를 박고는 킁킁거렸다.

" 니 발냄새 나. "

" ... 뭐? "

" 앞으로는 신발 신고 다녀. 그렇게 다니면 발냄새 난다. "

유천은 현관으로 가 운동화를 신고 앞까지 따라나온 준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하고, 표정은 넋이 나가있다. 이렇게 가는 것은 불안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저 사람이 좋아. 남자든, 뭐든, 그저 가슴에 스크래치 남기지 않고

보살펴주고 잘 해주고 싶어.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궁금한 것을 물어본다면 분명히

상처 받을 거야. 나는 연애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건 알 수 있어.... 유천은 조용하게

준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몸을 돌렸다.

" .... 나! "

나가려는데, 준수가 입을 열었다. 눈 밑이 붉어서 금세 다시 눈물이 흐를 것처럼 하고는.

유천은 나가지 않고 멈춰 섰다. 준수는 나, 까지만 말하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닫았

다. 그리고는 유천에게 다가와 그의 뒤에 있는 현관문을 다시 걸어 잠궜다.

" 병 있어. "

" ...... 아파? "

유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준수는 자신의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들어가도 되려나

생각하다가 운동화를 벗었다. 그리고 준수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달라 지지

않은 아담하고 포근한 느낌의 방. 준수는 자신의 침대에 앉아 옆 자리를 통통 쳤다. 내

심 당황한 유천이 쉽사리 앉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것 봐. 방금 널 좋아한다고 고백

했는데 침대로 끌어들이면 어쩌자는 거냐!

" 이거... "

결국 준수의 옆에 앉은 유천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준수의 눈치를 살폈다.

Page 86: Happy Together

그는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침대 옆의 서랍장을 열더니, 거기에서 시꺼멓고 단단해 보

이는 검은색 줄을 꺼냈다. 조금 두껍고, 투박해 보이는.

" 뭔 줄 모르지. "

줄. 줄의 굵기.준수의 손목에 난 상처와 비슷하다. 유천은 자신도 모르게 준수의 소매를

걷어올리고 손목의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그 줄을 손목에 가져가댔다. 같은 굵기의 줄.

늘 김준수의 손목을 아프게 했던 건 이거였어...

" 밤마다... 내가 나를 묶어. "

그는 다시 울었다. 그러나 아까처럼 자제하지 못하고 우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또박

또박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절제된 눈물이었다. 흐르는 눈물은 어쩌지 못하는 지.

"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묶고... 입으로 이 줄을 물어서.. 다른 한 손을 같이 묶어... "

" .... 뭐? "

" 몽유병이거든, 나. "

그것도 굉장히 심한. 그래서 밤마다 내가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가 없어서.. 내가 나를

묶지 않으면 잠을 들 수가 없어.

" 무섭지. "

그렇게 말하고, 준수가 웃었다. 울면서 웃었다.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8

윤호의 재규어가 도서관 앞에 섰다. 재중이 다니는 대학의 도서관은, 가장 크고 화려한

건물이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2시까지 공부한다고 했지. 정각 12시에 들어가

데리고 나와야지. 윤호는 시계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제 한 시간 남았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자신이 자유롭게 거리를 다닌 적이 아주 오래되었던 것 같다. 뉴욕에 있을 때는

Page 87: Happy Together

수행원들을 대동하지 않고서는 어디에도 다닐 수 없었다. 자신들의 조직이 그래왔던것

처럼, 다른 조직들도 모두 정윤호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자신의 머리

나 목에 총구가 겨눠질지 몰랐고, 실제로 그랬던 적도 몇 번 있었다. 빗나가지 않았다면

자신의 머리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고, 자신의 육체는 땅 속에 묻혔을 것이다.

그랬다면 많이 슬펐겠지. 다시는 김재중을 볼 수가 없었을테니.

" 그래. "

- 잡혔습니다.

" 어디야. "

- 광주.. 라는 도시랍니다. 지금 푼돈을 가지고 아는 사람의 집에 숨어 지낸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 내버려둬. 어차피 빚은 이미 갚지 않았나. "

- 정말로 되돌려 받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 .... 그래. "

윤호는 대답하고 웃었다. 처음부터 3억 따위에 관심은 없었어. 그는 뉴욕에서 마약상과

총 밀매로 이미 어마어마한 돈을 가졌다. 스케일이 큰 나라에서의 사업이었던 것 만큼,

그 보수도 확실히 짭잘했지. 이 대한민국의 어느 조직도, 드넓은 주택가를 통째로 사들여

조직원들을 평범한 동네 사람들처럼 위장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진 않았을 거야.

윤호는 짧은 대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재중의 아버지는 광주에 있었다.

잡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처음부터 그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

면 이미 잡아서 어떻게서든 돈을 받아냈을 것이다. 그에게 불가능이란 없었으니까. 허나,

그의 아버지를 잡으면 재중을 곁에 둘 구실이 없어져 버린다. 아무 이유도 없이 억지로

그를 잡아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더욱 마음을 열기가 힘들어 질테니. 윤호는 구

실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로 재중의 아버지에게 3억이라는 달콤한 액수로 유혹하고,

뒤에서 손을 써 그의 모든 도박이 질 수밖에 없도록 조작한 것이다. 윤호에게 그 모든 일은

단순하고 가벼웠다. 도박이란, 일정한 트랙만 있으면 처음부터 승자와 패자가 정해지기도

하는 단순한 놀이에 불과했으니까.

" 12시다. "

그는 차에서 내려 문을 잠구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재중에게 붙여놓은 조직원의 말로는

그는 '열람실'이라는 곳에 있다고 했다. 학교에 다닌 적도 없고, 그런 곳에서 공부한 적도

없는 윤호에게는 생소한 곳이었다. 그래서 더 신선하기도 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

에서 살고 있는 재중이.. 윤호에게는 모든것이 다 새로웠다.

" 어디 있니... "

조용히 중얼거리며, 재중은 '제 1열람실'이라고 쓰여진 곳으로 들어갔다. 새벽이 다 되었

Page 88: Happy Together

는데도 꽤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칸막이가 쳐진 책상에 고개를 박고 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저들 중 누가 김재중일까. 아무리 둘러봐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한 바퀴를 다 돈 후에야, 윤호는 이 안에 재중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았다. 들어오기 전에 이미 '제 2열람실'이 있다는 사실 쯤은 간파하고 있었으니까.

제 2열람실로 들어간 윤호는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주위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상하게

재중은 끝까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지독하게 잊지 못할 정도로 고고했던 그만의 아우

라가 없었다. 모두 다 평범하고 그저 그런 사람들일 뿐이다. 그제야 윤호의 표정이 조금씩

굳었다.

" 여기도 없네... "

어디 갔을까나. 12시에 데리러 오겠다고 분명히 얘기했는데. 애가 또 내 말을 안 듣고

어디로 새버렸지... 윤호는 핸드폰을 꺼냈다.

" 어디 있어, 김재중. "

- 저... 그게,

" 응? "

- 너무 열심히 공부하길래...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자버렸는데.. 깨어나보니까...

" 없어? "

- 죄송합니다....!

핸드폰을 던져버렸다. 엄청난 소리를 내며 단숨에 두동강이가 나버린다. 도서관을 나

오던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윤호를 바라보았다. 깔끔한 정장을 입은, 엄청나게 잘생긴

남자 하나가 숨을 고르게 쉬며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서있다.

" 빌어먹을. "

이건 데려와도 문제야, 이 개 같은..

* * *

" 아! 다했다! "

" 나도! "

" 누나, 제 거 읽어봐요. 괜찮은지. "

" 내 거 파일 읽어줄 테니까 이상한데 없나 검토해줘. "

" 간신히 카트라인 맞췄네... "

" 그나저나 대단하다. 나는 1주일이나 걸렸는데.. 벌써 다 했어? "

Page 89: Happy Together

" 대충 한 거에요, 대충. "

" 하긴. 이렇게 머리가 좋으니 4년 내내 수석이지- "

민정은 피식 웃으며 레포트를 훑었다. 민정과 재중은 다섯 시간 전에 PC방으로 와서

레포트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의 신의 속도로 타자를 쳐가던 재중은, 낮에 도서관

에서 찾은 자료와 정리해놓은 글들을 요약하며 10 장 짜리의 완벽한 레포트를 만들어

냈다. 민정은 레포트를 읽어내리며 혀를 내둘렀다. 오늘부터 시작한 레포트라고 하기

에는 재수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그녀는 눈을 흘기며 오타

가 없는지 대충 검토만 해두었다. 보지 않아도 분명 A+일테니.

" 괜찮아요. "

" A 정도? "

" 응. 그 정도. "

재중은 웃으며 먹다 남은 컵라면을 마저 먹었다. 아까부터 가슴이 답답한게 뭘 먹어도

먹는 것 같지가 않다. 왜 자꾸 무언가를 잊은 듯한 기분이 드는 거지?

" 벌써 새벽 세시다... "

" 으헉! "

택시비도 없는데! 그 빌어먹을 조폭 동네까지 언제 가란 말이야! 재중은 비어있는 자신

의 지갑을 열어보며 한숨을 쉬었다. 통장에 저금해둔 돈도 야금야금 까먹고 있고..아르

바이트를 시작해야지 안 될 것 같다. 공부할 시간도 부족해서 웬만하면 있는 돈 아껴서

살려고 했는데, 이제 졸업 논문도 쓰기 시작하면 들어갈 돈이 한 두 푼이 아닐거야.

" 누나, 미안한데 나 택시비 좀 빌려줘요. "

" 빈곤하다, 김재중. "

" 내일 갚을게. "

" 지금은, 혼자 살아? "

" 아.... 응. "

혼자 살긴 혼자 살지. 사는 동네가 비현실적이라 그렇지.

" ... 집에 가서 밥이나 반찬 같은 거 해줄까? 남자 혼자 살면 빨래도 안할텐데.. "

" 아니에요! 신경쓰지 마요! "

재중은 손사래를 치며 정색했다. 그 모습에 민정이 괜히 속이 상했다. 사실, 아버지가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서 계속 마음에 걸렸던 민정이었다. 재중은 천성적으로 보듬어

주고 싶은 분위기를 타고난 남자였고, 그건 민정 역시 느끼고 있었다. 좋아하지 않는

Page 90: Happy Together

다면 거짓말이겠지... 물론, 여자보다 예쁘게 생긴 남자라는 점이 문제지만.

" 내가 그러는 건 불편해? "

" 아... 뭐, 그런 건 아닌데. "

만약 자신이 원래의 집에 살고 있고, 일상생활에 변화가 없었다면 허락했을지도 모른다.

재중은 힘이 든 상태였다. 지금까지는 공부를 핑계로 그 어떤 누구도 사귀지 않고 마음을

주지 않았지만, 몇 번이나 집안의 풍파가 계속되고 홀로 살아왔던 나날들이 길어지면서..

이제는 자신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싶어졌다. 그것이 민정이라면 딱히 부담가질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재중에게 가장 편안한 여자이기도 했으니까. 그저 편안하기만 해

서 문제였지만.

" 나 남한테 신세지는 거 싫어하잖아. 게다가 우리 집 너무 지저분해서 누나처럼 여자가

보면 기절할지도 몰라. "

" 그렇게 더러워? "

" 무지무지. "

잠시 자신이 사는 집을 떠올렸다. 지나치게 깨끗하다면 깨끗하지, 절대로 더럽지는 않다.

그리고 자신이 원래 살았던 집을 떠올렸다. 바퀴벌레와 공생하는 사이좋은 나라.

" 집에 까지 바래다 줄게요. "

" 택시비 대신이야? "

" 응. "

재중은 웃으며 레포트를 출력하고, 자신의 가방 안 파일에 끼워넣었다. 옆에서 프린트

하고 있는 민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착하고, 똑똑하고, 귀여운 여자다. 설레임은 없

지만 연인사이 하기에도 무리없는 여자. 흐음... 재중은 곰곰이 생각하며 팔짱을 꼈다.

힘이 들 때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법이지.

" 추운데 이거 둘러요. "

재중은 자신의 목도리를 둘러주며 민정을 데리고 PC방에서 나왔다. 나오자마자 후회

하기는 했다. 썅! 졸라 추워! 지금 와서 목도리 달라고 하면 온갖 욕을 다 먹을지 모른다.

재중은 덜덜 떨며 민정의 집으로 향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윤호의 존재는 완전히 망각한 채.

Page 91: Happy Together

* * *

" 중학교 때 처음으로 알았어. 내가 몽유병이 있다는 사실을. "

준수의 집 거실로 나와서 따뜻한 코코아를 마셨다. 새벽 다섯 시가 넘도록, 준수와 유천

은 잠들지 않았다. 준수는 유천의 앞에 앉아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 했

다.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 처음에는 약한 정도였어. 집 안에서 배회하는 정도. 그러다가 점점 심해지더라. 밤에

엄마가 나왔는데, 내가 부엌에서 밥을 먹고 있었대. 그런데 난 전혀 기억 못하는 거야.

그제서야 부모님이 심각하게 생각하셔서 병원으로 데려갔어. 몽유병이래. 그 때만 해

도 금방 나을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라. "

" ... 심해졌어? "

" 늘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종종 이래. 그래서 잘 때마다 긴장을 늦출 수가 없어. 처음

에는 그저 주위를 돌아다니는 수준이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집 밖으로 나갔어.

내가 몽유병 상태로 행하는 일들은 모두 기억할 수가 없었어. 전부 다 모르는 거야. "

" ...... "

" 점점 더 심해졌어. 훨씬 더. 고 2 때, 수학여행을 갔어. 잠들지 않으려고 발악했는데,

마지막 날 밤에 결국 잠들었어. 그리고 새벽에 나 혼자 일어나서.... "

준수는 말을 잇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학교 아이들이 모두 있는 호텔에서

몽유병 상태로 돌아다녔겠지.

" 몽유병이 최고로 심한 사람들은, 늘 머릿속에 '몽유병 살인'이라고 하는 공포감이

있어. "

" 몽유병 살인.... "

" 넌 들어 봤겠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니까. 몽유병 상태에서 사람을 죽이는 거야.

몽유병 상태로 돌아다닐 때, 누군가가 자신을 억지로 깨우려고 몸을 흔들거나 방해하면

나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위험한 행동을 하게 돼. 그게 심해져서 일어나는게 살인이야.

내가... 지금 뜬구름 잡는 얘기 하는 것 같아? "

" .... 아니. "

살인이라니. 유천은 그가 듣지 않도록 조용히 침을 삼켰다. 자신이 잡는 범인들은 하나

같이 흉악범들이었다. 연쇄살인범, 연쇄강간범, 습관성 폭력범들. 준수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살인을 저지를 여지가 있는 남자라고 밝혔다.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커다란 사실

이라, 유천은 메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준수의 말을 끝까지 듣기만 했다.

" 사람을 목 졸라 죽일뻔 했어. "

" .........! "

" 너.. 모르지. 자신이 한 행동을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기억

Page 92: Happy Together

상실증과는 틀려. "

" 전혀... 모르는 거야? "

" 전혀. "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미소가 사라져버릴 것 같다.

" 뉴스나 신문에서, 가끔 범인을 잡지 못한 살인 사건이 나오면 난 늘 무서워. 혹여나

내가 죽인 게 아닌가 하고. 제 정신이 아닌 채로 돌아다니다가, 나도 모르게 누군가

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 유천의 주위에는

몽유병은 커녕, 그 흔한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더 안쓰럽고,

그래서 더 안아주고 싶다... 내가 모르는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서 더욱.

" 뭐.. 이 정도. 네가 궁금했던 거, 이제 알았어? "

코코아를 다 마신건지 준수가 컵을 내려놓고 웃었다. 그러나 유천은 웃을 수가 없었다.

난 사람을 죽였을지도 몰라- 난 사람을 죽일 뻔했어- 라는 말을 담담하게 말하면서 아

무렇지 않게 자신의 아픔을 꺼내 펼쳐놓는 이 남자가 너무나도 불쌍해서.

" 그만 가. 나 잘래. "

총총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준수를 따라 유천이 걸음을 옮겼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그는, 아까전에 유천에게 했던 말 그대로 손을 묶기 시작했다.

" ... 준수야. "

" 왜, 니가 묶어주게? "

" ......... "

" 소름끼치지. "

" ......... "

" 나, 엄청 오래 전부터 이러고 살았어. 내가 왜 부모님이랑 따로 사는 줄 알어? 우리

부모님도 나 무서워 하거든. 주무실 때, 방 문 잠구고 자. 내가 새벽에 방에 들어와서

식칼이라도 휘두를 줄 알거든. "

유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자신의 팔을 입을 이용해 묶는 준수를 보다가

방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유천이 나가자, 준수는 무언가 가슴에서 빠져나간 듯 해서

멍하니 방 문을 바라보았다. 왜 유천에게 자신의 비밀을 모두 이야기 했는지 몰라도,

이유 없이 내가 좋다며 추운 나를 안아주는 저 남자의 따뜻했던 품 안이 좋았다.

Page 93: Happy Together

결국에는 저렇게들 다 떠나가는 구나. 다 그랬지. 내 부모님도, 친구들도, 전부 다.

준수는 마저 팔을 묶었다. 평소처럼 두 팔을 침대 위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누웠다. 오늘

몽유병 증세로 바깥에 나가게 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실수 탓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10분만 눈을 붙이려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는데 깜박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일

어났을 때에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천과, 텅 빈 밤 거리가 주위에 있었다.

박유천에게 자신의 비밀을 들켜버린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로 죽고만 싶었다. 온갖 잘난

척에 도도한 척에, 있는 꼴깝은 다 떨어 놓았는데... 저 남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 나, 니 칫솔로 이빨 닦는다! "

" 엄마야! "

갑자기 유천이 방 문을 활짝 열고 칫솔을 흔들었을 때, 준수는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다.

물론 누워서 자빠질 구석도 없었지만. 유천은 나가지 않았다. 칫솔을 입 안에 밀어 넣고

치카치카질을 하던 그는, 준수의 곁으로 다가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 뭐... 뭐! "

" 그냥... 내 눈 앞에서 묶여있으니까 기분 묘하다. "

아뿔싸. 이 새끼, 날 좋아한다고 했지...! 무언가 불안감이 밀려온다. 지금 이대로 덮친

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지 손으로 자신의 손을 묶어놓고, 침대 위에 발라당 누워서

덮쳐달라는 꼴로 기다리고 있으니- 애초부터 유천을 집으로 끌어들인 것은 자신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책임질 준비는 되어있어. 준수는 체념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 남자

란 어차피 다 똑같은 동물이지. 넣고 빼고 싸는 것만 생각할 줄 아는.

" 하고 싶으면 해. "

" 야! 니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냐?! "

" ... 뭐, 하려던 거 아니었어? "

" 씨팔! 맨날 지가 먼저 여우짓 해놓고 나 변태로 몰아! "

.... 하긴. 그 때도 내가 먼저 엉덩이 돌리긴 했어. 준수는 괜히 민망한 마음에 헛기침을

해댔다. 그 때는 그저, 한 번도 섹스를 해 본 적 없다는 유천의 말에 신기해서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지금이야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묶여서 누워있을 뿐이고. 이런저런 생각

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유천이 자신의 팔에 묶여진 끈을 푸르기 시작했다.

" 야! 뭐야!? "

" 오늘은 묶지 마. 아프잖아. "

Page 94: Happy Together

" 아까 봤잖아! 내가 무슨 짓을 하는 지! "

" 오늘은 내가 옆에 있어줄 테니까, 이런 거로 묶지 말고 그냥 푹 자. "

유천은 다시 칫솔을 입 안으로 넣더니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그는 샤워도 할 생각이다.

처음으로 준수의 곁에서 밤을 새는데, 냄새나는 꼴로 찌질하게 앉아있을 생각은 없었다.

" 팬티 없어? "

" 너... 진심이야? "

" 응. "

" 그러다가 너 자면 어쩌려고. 내가 일어나서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

" 걱정마. 이래뵈도 배태랑 형사거든. 밤 새는 건 자신 있어. 밤샘 잠복 근무가 내 생활

이니까. 범인이 눈 앞에 있는데 잘 리가 없잖아. "

유천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더니, 팬티 없냐며 주위를 휘적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

했다. 그러면서 옷장 서랍 하나를 훽 열었는데,

" ... 와, 무지 작다. "

귀여운 삼각 팬티가 보인다. 딱 준수의 엉덩이만한 싸이즈다. 올망졸망한.

" 내려놔!! "

빛의 속도로 달려온 준수가, 새빨개진 얼굴로 자신의 삼각 팬티를 쑤셔넣고 그 안을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입지 않은 줄무늬 트렁크 팬티를 유천의 얼굴에 던

지... 려다, 그건 왠지 뭔가 아닌 것 같아서 손에 쥐어 주었다.

" ... 요게 다야. 난 트렁크는 잘 안 입으니까. "

옆에 있는 걸 허락해 주겠다는 뜻이다. 자신을 믿는다는 말이기도 해서, 유천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앗싸뵹- 을 외쳤다. 어이가 없어서 준수는 웃어버렸다. 자신의 모든 비밀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천은 아무것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 오늘만이야. "

" 준수야! 나 니가 정말 좋다! "

원래는 저 말이 아닌데. 준수야, 나 니가 정말 무섭다! 이 말이 정상인데.. 적응되지 않는

Page 95: Happy Together

유천의 행동에 준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니... 자다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남자인데.

" ... 빨리 씻고 와. 나 졸려. "

.

.

.

준수가 가지고 있는 옷들 중, 가장 커다란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었는데도 왠지 낑겨

보인다. 유천은 누워있는 준수의 옆에 앉았다. 준수는 자신의 팔이 침대에 묶여있지

않은 것이 어색한지 자꾸만 상처난 손목을 만졌다. 자꾸 그가 손목을 만지며 잠들지

못하자, 유천이 준수의 손목을 낚아채 잡아버렸다.

" 빨리 자. "

" 너... 진짜 자면 안 돼. 안 그러면 나 너한테 무슨 짓 할지도 몰라. "

" 풉! "

" ... 웃냐? "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뭘로 들은 거야. 게다가 넌 아까 나한테 목도 졸려 봤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해서, 다시 일어나려는데 유천이 자신의 팔목을 잡고 침대 위로

강하게 눌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이게 인간의 팔

이냐!! 뭐가 이렇게 세?! 준수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제야 유천이 싱긋 웃으며 팔을 풀

어주었다.

" 넌 나한테 쨉도 안 돼. 이 팔로 잡은 살인범만 몇 트럭인데. "

" 야! "

" 아까처럼 굴면, 싸대기 한 대 치면 될 거 같은데. 한 대 치니까 금세 정신 차리더라. "

어쩐지 뺨이 좀 아프다 했어. 준수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자, 유천은 슬쩍 그의 손을

잡더니 어색한 듯 시선을 피했다.

" 손... 내가 잡고 있을 테니까 걱정말고 자. "

" ... 진짜 놓으면 안 돼. "'

" 응. "

단순하게, 그러나 간결하게 대답한 유천의 말에 왠지 믿음이 간다. 준수는 그제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몇 분이 흐르고 힐끔 눈을 떴을 때, 유천은 정말 병신같은 표정으로 자

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입은 헤- 벌리고 눈은 헤롱헤롱 거리면서. 이뻐 죽겠다는 표정

이다.

Page 96: Happy Together

" 병신. "

" 아직도 안 자냐?! "

" 눈 감은지 10분도 안 지났거든. 침 떨어져. 입이나 다물어. "

준수의 말에 입을 합, 다물었다. 너무 대놓고 쳐다보았나. 괜히 민망해진 유천이다.

그래도 어쩌겠어. 새근새근 거리면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너무 예쁜데. 아까부터

빳빳하게 서버린 채로, '나가게 해주세요, 주인님!'을 외치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자제

시키느라 바쁘다. 유천은 애국가를 부르며 그저 준수의 손만 꼭 잡고 있었다. 절대로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지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이 사람을.

* * *

" 아... 따뜻하다. "

본의 아니게 민정의 집까지 들어와 버렸다. 그녀는 지방에서 올라와 대학 근처의 자취방

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원룸이었지만 미닫이 문으로 두 공간이 나뉘어져 있는, 꽤 큰 방

이다. 덜덜 떨며 가려는 재중에게 뭐라도 마시고 가라고 했다. 여차여차해서 들어와 보니,

왠지 기분이 묘하기도 하다. 여자선배의 자취방에서 새벽에 유자차나 마시고 있다니.

" 다섯 시간만 지나면 또 수업이야. 알어? "

" 아... 집까지 언제 가냐. "

" 너, 우리집 온 거 처음이지? "

" 아... 뭐, 저번에 동아리 애들이랑 다 같이 온 적은 있었잖아요. "

재중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야심한 새벽에 여자 자취방에 남녀 단 둘이 차

나 마시고 있으니-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 춥다며 한 이불을 다리에 얹고

말없이 유자차를 홀짝 마시던 중, 민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밖에 정 추우면... 자고 가고. "

아... 이를 어쩌나. 매몰차게 거절하는 건 왠지 싫고, 그렇다고 넙죽 자고 가겠다고 하는

것도 너무 속이 보이고.

" 야! 이상한 뜻으로 말한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구! 어차피 수업도 얼마 안 남았는데,

Page 97: Happy Together

너희 집까지 다시 갔다가 금세 일어나는 것도 힘들잖아. "

" 아... 그렇긴 한데, "

" 저쪽 방에서 자고 가. 이불 따로 깔아줄 테니까. 넘어오면 죽는다! "

괜찮아요! 라고 말하려는데 민정이 일어섰다. 재중은 말리지도 못하고 유자차를 손에 든

채 어정쩡하게 앉았다. 후우, 아무리 설레임이 없는 여자라고 해도 이 늦은 새벽에 한 집

에서 함께 잠드는 일이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잖아. 시계를 바라보니 기가막힌 시간이다.

사실은, 따뜻한 곳으로 들어와보니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여기서 눌러 앉아 자고 싶어..

" 아!! "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던 재중이, 그제야 윤호가 자신을 데려다 주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12시까지 데리러 온다고 했었지...!

" 누나! 저요! "

" 어? 왜? "

벌써 이부자리까지 펴놓고, 옷장에서 쓸만한 박스티와 반바지를 꺼내고 있는 민정이다.

그녀는 딱히 재중과 뭘 어쩌겠다는 흑심을 가지고 있던건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는 남자와 하룻밤을 같은 집에서 보내는 두근거림 정도는 원하고 있었다. 재중은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씨발. 내가 언제부터 그 새끼 말에 네네- 하면서 잘 따랐다고! 돌아가지 않을 것도 아니고

도망갈 것도 아니니까 외박 정도야 굳이 허락받지 않아도 되겠지. 흥... 차도 있으니 추위

에 떨 염려도 없을 거 아냐. 히터 팍팍 틀어놓고 어느정도 기다리다가 쳐자겠지.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 아니, 그냥. "

그래도 왠지 마음에 걸린다. 정윤호가 떠올랐다. 자신을 바라볼 때의 그 묘한 눈빛. 처음

으로 '남자와' 키스한 경력을 만들어준 그 잘생긴 입술. 사실, 그를 볼 때마다 재중은 이

상한 감정을 갖고는 했다. 딱히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에 매혹된다고 했지. 나도 그런 것일까. 재중은 생각을 떨쳐버렸다. 지금까지 정

상적인 남자로 살아왔던 자신이, 하루 아침에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려놓은 현실성 없는

남자 때문에 흔들릴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것도 성적인 이유로는 더더욱.

그 남자와의 키스가 어땠나.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그대로 집어

삼켜버리는 줄 알았지. 고작 혓바닥 하나 들어온 거 가지고, 정신 못차리고 헤롱거리다

Page 98: Happy Together

나중에는 그를 밀어내려던 손에서 힘까지 빠져버렸다. 아... 미친 새끼.

" 자고 갈게요. "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얘기했다. 그런 양아치 조폭 두목 새끼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

물론 윤호는 그저 그런 양아치는 아니었지만, 재중은 자기 멋대로 판단해버리고 결국은

그녀의 집에 머무는 것을 택했다. 무엇보다 그의 묘한 눈빛과, 강압적이었더 키스에 이

상한 상상을 품고 있는 자신을 견딜 수가 없었다.

" 누나. "

" 응? "

자신의 코 앞에서 옷들을 정리하고 있는 민정에게, 재중이 입술을 부딪쳤다. 여자의 목

을 끌어안고 혀를 밀어 넣었다. 여자의 키스하는 것이 얼마만이더라. 당황한 듯 재중을

밀어내던 민정은, 이내 손을 멈추고 가만히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 좋아해요. "

좋아하는 걸까? 설레임이라는 감정도 없으면서, 누군가 재중의 마음에게 그렇게 물었지만

그는 무시해 버렸다.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다. 두 눈이 멀고 가슴이 미칠 듯이 뛰는 사랑. 10대 소녀들이 언제나

꿈꾸는 그런 사랑이 존재하지 않다는 걸 아는 어른 남자다. 뭐가 설레임이고 뭐가 사랑인지

딱히 구분지을 필요는 없어. 곁에 있어주면 하는 사람이 내 앞에 있다면 굳이 망설일 필요

는 없겠지.

" 덮치지 않을 거니까, 안심하고 자요. "

재중은 웃으며 그녀가 내민 옷을 받아 들었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혀 설레이지 않았다. 자신과 그녀의 관계가 달라졌다고 느껴지

지도 않았다. 웃긴 말이지만, 재중은 그 순간에도 윤호와의 키스를 떠올리고 있었다.

왜 내가 하는 키스보다, 내가 받는 키스가 더 짜릿했던 걸까. 방금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르

겠어. 키스가 이렇게 물컹거리고 느낌 없는 거라면, 섹스는 더더욱 하기 싫을 것 같다.

Page 99: Happy Together

* * *

" 어... 자고 있다. "

유천이 눈을 떴을 때는, 준수가 자신의 손을 잡고서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밤새

지켜준다고 큰소리 뻥뻥 쳐놨는데, 진짜로 뻥치고 말았다. 깜빡 잠이 들어 버렸지만,

다행히 준수가 먼저 일어나지 않아서 유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일어나서 내가 자고

있는 꼴을 봤다면 또 얼마나 갈궈댔을까... 준수의 새근새근 거리는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유천은 잡은 손을 살짝 놓고, 안쓰럽게 붉은 줄이 간 그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준수가 어제 자신에게 말한 것은, 아마 고통의 일부분일테지. 저렇게 자신의 손을 학대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정신을 가지고 살았을까.

" 아으... 졸라 귀여워. "

부비적 부비적. 주먹 쥔 손으로 눈을 부비더니, 고개를 돌려서 유천이 있는 쪽으로 돌아

누웠다. 입을 반 쯤 벌리고. 입 안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액체, 일명 침이 지익- 하고 늘

어지지만 유천의 눈에는 필터링 된지 오래. 유천은 고개를 수그려 준수의 자는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 보았다. 눈꼽에, 번지르르한 기름기에, 허옇게 달라붙은 침에,

김준수가 아무리 날고 길게 예쁘다고 해도 누구나 자는 동안은 어김없이 망가지는 법이다.

누가 사람의 잠자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그랬느뇽. 이 갈고, 침 흘리고, 개시키처럼

낑낑대다가 혼자 허벅지 긁고, 온갖 추태가 다 일어나는 시간이 잠자는 시간이다. 그래서

연인과의 잠자리는 함부로 가지면 안되는 것을.

" 아기 천사 같다.. "

똥 싸고 있네. 콩깍지가 마치 앙드레김 패션쇼 특유의 겹겹이 싸맨 옷처럼 두껍게 자리잡

은 유천이다. 그는 마냥 좋았다. 어제 준수가 자신에게 가장 비밀스러운 치부를 내보인것

조차 행복했다. 그가 울면서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았을 때, 유천은 안타까움과 맞물려 묘

한 행복을 맛보았다. 누구도 쉽게 알 수 없는 그의 비밀을 자신이 알게 되었을 때, 김준수

의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듯 했다.

자신도 모르게 조금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준수의 더운 숨소리가 유천를 자극했다.

허옇게 침이 말라붙은 그 입술이 뭐가 좋다고, 유천은 두 손으로 침대 위를 짚고 준수의

입술을 향해 유난히 퉁퉁한 자신의 주둥이를 내밀었다.

" 아아악!!!!! "

갑자기 자신의 머리채가 확 잡아당겨졌다. 고개가 뒤로 완전히 젖혀진 유천이 비명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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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며 물러섰다. 순간 눈을 뜨고 일어난 준수가 다짜고짜 그의 머리채를 잡고 비틀어 버린

것이다. 그거 졸라 아픈데...

" 이럴 줄 알았어. 역시 이런 놈이지. 잠든 틈을 타서 어떻게 덮칠까 밤새 고민했겠지! "

" 아니라고!! 이거 놔! 씨팔! 나 대머리 만들 셈이냐!!! "

" 머리털 있으나 없으나 그게 그 면상이지. 한 번만 더 그래봐, 죽을 줄 알어. "

유천의 머리카락을 주우욱- 뽑으며 앙칼지게 뿌리친 준수가, 자신의 손에 잡힌 머리털

을 툭툭 털고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눈을 떴을 때 박유천이 바로 앞에서 주둥이를 내밀

고 있어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소세지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줄 알았네. 준수는 투덜거

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 꺄악! "

" 무슨 일이야?! "

준수의 비명소리에, 바로 들어온 유천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거울을 보고 자신이 놀라

있었다. 준수는 칫솔을 집어 던지는 것으로 유천을 쫒아내고 다시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세상에나- 그 동안 늘 두 손을 묶고 잤기 때문에, 준수의 잠자리는 고정되어 있었고 딱히

흐트러질 일도 없었다. 두 손을 높게 묶인 그대로 잠이 들어서 미동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누군가를 믿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고 난 다음 날, 준수의 몰골은 그야

말로 처참했다.

이 침! 이 침자국! 감당 못하게 사방으로 뻗어나간 머리털! 눈꼽 중에서도 가장 최악인

잘 떨어지지도 않는 액체 눈꼽! 개기름 좔좔 흐르는 T존 부위와 부어버린 얼굴!!

" 이 몰골을 박유천이 봤다고...?! "

아. 뭔가 창피해. 게다가,

" 하아, "

손을 동글게 오므리고 자신의 입냄새를 맡아보는 준수. 아침에 일어나서 치카치카질도

안했으니 당연히 좋은 냄새가 날리가 없다. 자고 일어나면 단내가 다는 것은 사람의 당

연한 이치이거늘... 결국 세면대에 손을 얹고 주저앉아버렸다.

" 아가리 똥내 나.... "

Page 101: Happy Together

결국 양치질을 10분 넘게 한 준수는, 느즈막히 욕실에서 나갈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싱크

대에서 세수를 하고, 발까지 씻은(...) 유천이 행주를 목에 두르고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 아, 지금 간다니까요! 어제 잠복 근무 때문에 한 숨도 못잤어요! 아! 범인은 못잡았죠!

씨발! 그렇게 쉽게 잡히면 그게 강력반용 범인이야!? 교통순경용 범인이지!! 아! 지금

가요! 심검사가 내 마누라야?! 졸라 바가지 긁어대!! "

뚝- 하고 끊어진 전화에 유천이 내심 불안하다. 워낙 다혈질인 성격이라 입에서 튀어

나오는대로 말하긴 했는데, 마누라 들먹거린건 오바한 듯 싶기도 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뒤를 돌아보니 준수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서있다. 자, 잘봐! 내 깨끗해진 피부를 봐! 청결

해진 입 안을 느껴봐! 가라앉은 머리를 봐! 대략 이 정도의 포스였건만, 유천은 별다른 변

화를 느끼지 못하고 목에 두른 행주를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사실 그에게는 김준수가 씻든

말든 별 상관은 없었다. 이미 사랑의 콩깍지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는 상대방의 청결이나

그 외의 것들이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내 눈 앞에 그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의

시작이었으니.

" 나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

" 가라? "

" ... 어제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 일도 없었지. "

유천의 말에 준수는 할 말을 잃었다. 사실이었다. 누군가를 믿고 그렇게 편안하게 잠든

것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심하게 뒤척거리며 자유롭게 침대에서 뒹군 적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잠든 자신을 내버려 둔 남자도 유천이 처음이었고.

" 내가 너 지켜주고 싶은데. "

" .. 네 일은 지키는 게 아니라 잡는 거잖아. "

" 맞아, 너 잡고 싶어. "

험험, 무언가 낮간지러운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적응이 되지 않는다. 멋진 말을 하고 싶은

데 딱히 무슨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순간, 아직까지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준수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멘트가 필요했다. 센스있고 간결한.

" 넌 범인이잖아. "

" .... 뭐? "

" 내 마음을 훔쳐갔어!!!!! "

이 정도면 되려나, 하고 생각하는 유천. 불행히도 준수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굳고 있다.

Page 102: Happy Together

" 나가. "

" 응? "

" 나가라고. 나가, 좀. "

부엌에서 국자를 집어 든 준수가 유천의 엉덩이를 후려치며 현관으로 내몰았다. 마음을

훔쳐간 범인이라니. 마치 15세 미만 여학우들이 즐겨보는 천사소녀 네티에 나왔던 대사

를 떠올리게 만든다. 시대를 한참 거슬러 올라간 유천의 멘트에 어이가 상실하여 국자를

마구 휘둘렀다. 현관까지 내몰린 유천이 가까스로 운동화를 구겨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 준수야...! 자.. 잠깐 얘기... 아악! "

" 센스없는 새끼. 니 시꺼먼 잠바 가지고 경찰서나 가버려! "

유천의 라이더 자켓을 얼굴에 집어 던지고, 현관문을 완전히 걸어잠궜다. 문 밖에서

'준수야아아-' 하며 애절하게 자신을 부르는 유천의 목소리가 몇 번 더 이어졌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거실로 돌아왔다.

준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내친다고 해서, 안 올 그가 아니라는 것을. 아마도

유천은 별다른 일이 없다면 오늘도 자신의 오피스텔 앞에서 준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준수는 피식 웃고서 자신의 차 키를 힐끔 쳐다보았다. 오늘부터는 지하철을 타고 다닐까.

주차장 엘리베이터로 가지 말고, 오피스텔의 정문으로 들어와야겠어.

- Rrrrrr Rrrrrr ..

분명히 유천일거라고 생각하며 발신자 번호를 봤는데 그가 아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의

번호. 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폰을 받았다.

" 여보세요? "

- 김준수 씨?

" ... 맞는데요. "

- 파티 플래너, 김준수 씨 맞죠?

" 아... 예! "

핸드폰을 고쳐 잡고 방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사건들이 몇 개나 연속 터져서 정신이 없었

는데, 생각해보니 그의 일이 급선무였다. 와인 바의 첫 파티가, 유천의 등장으로 그렇게

어이없이 망가지는 바람에 그 이후로 딱히 누구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Page 103: Happy Together

- 파티 하나 부탁하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 말씀하세요! "

- 나이는 20대 초반이구요, 제 친구들이랑 같이 하려고 하는데,

" 예! "

- 몽환적인 클럽 같은 분위기로 하고 싶거든요... 음악은 슬로우 잼으로 해주시구요.

" 슬로우 잼이요? "

- 네. 많이는 안 올거고, 열 다섯명에서 스무 명 정도 즐기려고 하거든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테니 신경 좀 써주세요.

" 그럴게요! 저, 다시 연락 드릴게요! "

- 계좌번호와 은행은 문자로 알려주세요. 돈은 바로 입금 시켜 드릴 테니.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남자인데 목소리가 건방지기 짝이 없다. 그래도 새 일거리가 들어

왔다는 생각에 마냥 좋은 준수다. 그렇지 않아도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 지 막막

했던 참이었다. 다른 일들을 소개시켜 준다고 했던 아버지의 친구분은, 그렇게 엉망진창

의 파티를 보낸 이후로 연락이 완전히 끊겨버렸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다시 손을 벌리

고 싶지는 않았다. 몽유병 환자의 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창피해 하시는 분인데... 준

수는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기분에 기분 좋게 웃었다.

가만 있어봐, 슬로우 잼이라면. 어디서 들어 봤더라. 아, 뉴욕에 있을 때 밤마다 라디오

에서 줄기차게 틀어줬던 음악이다. 슬로우 잼은, 연인들이 주로 사랑을 나눌 때 듣는 음악

이기도 했다. 끈적하고 천천히 리듬을 느끼는 음악이 대부분으로, 저녁이 되면 이 장르의

음악만 틀어주는 라디오 방송만 따로 있을 정도였다.

" 섹시한 분위기를 원하는 것 같은데... "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섹시하든, 야하든, 슬로우 잼을 틀어놓고 지들끼리 무엇을

하든 준수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는 성인이었고 성에 관해서는 다분히 개방적인 남자였

으니까.

* * *

" 같이 학교 온 거야? "

" 아... 응. "

" 재중이 너... 어제랑 옷이 똑같다? "

" 나 거렁뱅인 거 알잖냐- "

" 흐응... "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는 친구들을 보면서, 재중은 식은땀을 흘리기 바빴다. 어찌나

눈치가 빠른 건지, 민정과 학교에 함께 오자마자 자신들을 보는 시선이 여간 따갑지 않다.

워낙 예전부터 둘 사이에 묘한 소문이 많이 돌았던지라, 어제와 똑같은 옷을 그대로 입고

Page 104: Happy Together

방금 일어난 듯한 뻗친 머리를 한 채 걸어오는 재중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몇몇은 이미

'분명히 둘이 어제 잤다.'라는 확신에 찬 가설을 세워놓고 떠들어대는 듯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재중은 입학 시절부터 남자 치고 지나치게 예쁜 용모로 다른 과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게다가 수석입학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후로는, 거의 원폭에 가까운 여자들의

애정공세를 받기도 했었다. 집안이 폭싹 망한 이후로 많이 수그러들긴 했지만.

" 둘이 사귀기로 했어? "

친구의 질문에, 재중은 머뭇거렸다. 머릿속이 워낙 복잡한 상태에서 키스를 한 지라 사실

지금와서는 후회하는 면도 있다. 그러나 민정은 이미 재중과 자신의 사이가 한 단계 발전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 했다.

" 응. "

에라이, 모르겠다. 사귀는게 뭐 별 건가. 밥 같이 먹고, 자기 전에 잘자라고 문자 보내주고,

적당히 스킨쉽 하고 진도 빼면 사귀는 거지. 그런건 내 일상 중 작은 부분밖에 되지 않는다.

현명한 그녀라면 공부에 영향을 끼치지도 않을 것이고, 딱히 그녀에게 지금 내 비현실적인

상황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 될 일도 없을 것이다. 편하게 생각하자. 나는 나이에 맞

게 연애를 하고 있는 것 뿐이다. 연애라고 하기엔 사실 별 감정이 없긴 하지만.

쏟아지는 야유 속에서, 재중은 민정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둘렀다. 그래, 적당히 하면서 연

애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혼란스러울 이유도 없겠지. 남자와 키스했던 그 빌어먹을 기억

도 자연스럽게 잊혀질테고. 그림같은 CC의 모습으로 법관으로 향하는데, 재중의 눈에 익

숙한 차가 보였다. 검은색 재규어. 아아... 저 끈질긴 새끼 같으니. 재중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여전히 민정의 어깨에 손을 두른 자세로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정윤호에게 꿀릴 이유는 없어. 그는 내 사생활까지 간섭할 이유는 없다. 나는 그의 말대로

아버지 빚 대신 깡패 새끼들의 조폭 변호사가 되기로 계약했다. 그 이상 나에게 이래라 저

래라 할 필요는 없는 거야. 긴장 타지마, 김재중. 씨팔... 그런데 왜 이렇게 떨리냐.

" 어이, 외박. "

어쩐 일로 그가 웃고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재중에 비해서,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늘씬하게 잘빠진 몸에 여느 때처럼 검은색 수트를 입고, 차에 기댄 채 손을

흔들고 있다. 재중은 굳어있는 안면근육을 자체이완 시키며 입꼬리를 올렸다. 전투 태세에

들어간 기분으로 윤호에게 웃어보였다.

" 잘 잤어? "

Page 105: Happy Together

" 누구야? "

"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이름이, "

" 아... 민정이요. 이민정. "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인사했다. 자신이 모르는 재중의 측근에게 소개한다는 사실에 꽤

긴장하고 있는 듯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윤호는 상대방을 긴장시킬 만큼 수려한 외모와

묘하게 카리스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그저 웃고 있는데도 왠지 모를 위화감

과 불안감을 느껴서, 민정은 재중의 손을 잡았다. 왠지 모르게 두려워, 이 남자.

" 어제 재중이가 민정씨 집에서 자고 왔나 봐요? 집에 안 들어와서 걱정했는데. "

" 같이... 살아요? "

" 네. "

재중이 끼어들 틈이 없다. 재중만 쏙 빼놓은 채, 윤호는 웃으며 민정에게 말을 이었다.

" 각별한 사이인가봐요? 같이 잠까지 잔 걸 보면. "

" 네...? 아... 그런 건 아닌데... "

" 섹스 했어요? "

그 질문에, 재중과 민정 모두 할 말을 잃고 윤호를 바라보았다. 대낮도 아닌 아침에 대놓

고 저 따위 질문을 던지다니. 그것도 보수적인 대한민국에서.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

는데, 새빨개질대로 빨개진 민정이 세게 도리질을 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 오해 하시고 있는 것 같은데... 그냥 너무 늦어서 자고 가라고 했어요. "

" 후.... "

순간 윤호의 표정이 굳었다. 재중은 침을 삼켰다. 이 남자가 무엇을 할 것인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가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 남자는 무엇

이든지 자신의 멋대로 하는 괴팍하고 성질머리 더러운 새끼니까.

" 재중아... 아직도야? "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한 윤호의 말에, 재중이 눈을 크게 뜨고 자신도 모르게 '응?'

이라며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뭐가 아직도야?

" 여자 집에서 자고 왔다고 하길래, 기대했었는데... 아직도인가 보네요. "

" ... 예? "

Page 106: Happy Together

" 야! 너 무슨 소리를 하려고....!! "

" 재중이가 남자 구실을 못하거든요. "

적막.

순간 민정과 재중의 표정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힐끔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까지

단체로 굳어버렸다. 남자 구실을 못하거든요. 이 말이 또박또박 정윤호의 입에서 나풀거

리며 날아간다.

" 성불구자에요, 재중이가. "

" 정윤호!!!!!! "

" 나라고 이런 말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야. 너 이런 식으로 헤어진 여자친구만 해도

몇 명이니. 새로 사귈 여자면, 미리 알려줘야지. 감추는 건 잘못하는 거야. "

" 씨팔! 야!!!! 너 지금 무슨 개 소리를 지껄여?!?!!! "

" 이번에는 성공할 줄 알았더니, 그 쪽 앞에서도 안 섰나 보네요. 재중이 물건이. "

그 말을 끝으로, 정윤호는 이만 가보겠다며 재규어의 앞 문을 열고 운전석으로 올라 탔다.

" 김재중, 오늘은 늦지 마. 어제 동네 사람들이 너 찾느라 밤새 뛰어다녔거든. "

김재중, 오늘 늦으면 죽여버린다. 어제 내 부하들 시켜서 너 찾느라 밤새 뒤지고 다녔거든.

윤호의 감춰진 말이 재중의 귀에 생생하게 들린다. 탁, 하고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차가

출발했다. 법관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차를 보면서, 재중은 아찔해지는 머리를 짚고

민정을 바라보았다.

" ......... "

" 누나! 의심해요?! 저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

" ......... "

" 나, 그, 그거 안 서는 거 아니라니까?!?!?! "

" 너무 큰 소리로 얘기하지마. "

묘하게 일그러진 민정의 표정이 가히 볼만했다. 주위에서 숙덕거리는 남자들의 표정들도.

재중은 이 사태를 수습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잠시 가만히 서서 눈을 감아야 했다.

이 얼마나 치졸하게 지능적이고 한 마디 말로 엄청난 타격을 주는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남자에게 그 한 마디가 얼마나 치명타가 되는 줄 알면서도, 정윤호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날름 차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 나 진짜 아니라고!!!!!!! "

Page 107: Happy Together

재중의 절규가 법관 앞에서 울려 퍼졌다. 민정은 괜찮으니 소리를 줄이라며 재중을 토닥

이고서, 먼저 법관 알으로 들어갔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졸지에 재중은 최

고로 무능력하고 불쌍한 남자로 전락해 버렸다. 정윤호의 말 한마디의 위력으로.

.

.

.

윤호의 차 안에서는 언제나처럼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일관된 표정으로 핸들을 돌리던

윤호의 입술이, 조용히 달싹였다.

" 여자랑 있었네. "

너와 동침할 자격도 없는 그런 거지같은 년이랑, 밤새 같이 있었단 말이지. 남자보다 못

생긴 얼굴로 뻔뻔하게 너를 유혹했단 말이지. 그 유혹에 넘어가서 내 눈에 닿지 않는 곳

에서 누웠단 말이지...

윤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그의 재중의 머리채를 잡아서 차에 태워

끌고 오고 싶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이성을 지킬 줄 아는 인간이었고, 그 상황에서

재중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재빨리 캐치했다. 성불구자

라는 말에 그토록 심하게 펄쩍 뛰던 재중이라니, 너도 그 얼굴을 하고 꼴에 남자라고 꽤나

자존심이 무너졌다.. 이거지. 윤호는 피식 웃었다. 어디 진짜로 그렇게 만들어 줘 볼까나.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짜릿한 방법으로.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9

서울에서 꽤나 큰 규모의 조직들을 몇 개나 일망타진하고, 강력 1반의 위상은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거의 모든 조직의 우두머리를 현장에서 검거한 귀신같은 박

형사와, 냉철한 판단력으로 강력 1반의 중춧돌 역할을 하고 있는 심검사의 활약은 유독

두드러졌다. 꽤나 두둑한 액수의 보너스를 받은데다 준수와의 관계에도 눈부신 진전이

있어서, 유천의 기분은 한껏 고조되었다. 서울중앙지검의 특급 형사였지만 정작 월급은

그다지 센 편은 아니었고, 허구언날 동료 형사들과의 술값과 밥값으로 날리는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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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 잔고는 그다지 남아있지도 않았다. 현재 유천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란 통장 한 개와

남산 근처의 옥탑방 정도가 전부다.

" 박형사!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나? "

" 아무 생각도 안하는데요? "

" ... 새 임무에 대해서 내가 지금 열심히 브리핑 중인데, 아무 생각을 안하고 있다고? "

창민의 얼굴이 정색으로 돌변했다. 아까전부터 '보너스, 준수, 고기' 등등만 중얼거리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유천이 계속 신경쓰였던 것이다. 참지 못하고 이름까지 지명

했는데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댄다.

" 아... 저, 오늘 심검사님 헤어스타일이 유난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

" 푸핫! "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스프레이를 앞머리에만 뿌린

덕분에, 마치 에이스 벤츄라에 나오는 짐 캐리를 연상시키는 머리를 하고 있는 창민이

었다. 유천의 황당한 말에 어이를 상실한 듯, 창민이 들고 있던 서류를 돌돌 말아서 유

천에게 다가왔다. 잠시 후 유천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서류뭉치의 소리가 경쾌하다.

" 거물급 자제놈들 중에 해외 유학파들이 많은 건 알고 있겠지. 이번에 한국으로 귀국한

녀석들 중에, 김형진 국회의원 아들놈 하나가 있어. 워낙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녀서 외국

으로 보낸건데, 거기서도 개버릇 남 못주고 습관적으로 마약 복용했다는 소리야. "

" 잡을 거에요? "

" 이번에 대대적으로 상습 마약 복용하는 놈들 잡아들이라는 지시가 떨어졌어. 지금까지

거물급 자제들은 쉬쉬 하면서 뒤로 봐줬던 모양인데 이번엔 그렇겐 안될걸. 일단 내가

맡은 이상은 국회의원이고 대통령 아들 나부랭이고 모조리 잡아들일거야. "

유천은 한숨을 쉬고 쓰고 있던 모자를 고쳐 썼다. 보너스도 받고, 홍초파 사건도 일단락

되었고, 조금 쉬나 했더니 금세 다른 임무가 주어진다. 바쁘게 뛰어다니며 형사 수첩을

팔락거리는 그 모습을 동경해 형사가 되었지만, 정작 자기 시간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자기 시간이 있어봤자 연애도 하지 않고 딱히 다른 할 일이 없었던 유천이었지만 준수가

자신의 인생에 들어온 이후로는 하루가 24시간인 것이 이다지도 모자를 수가 없다. 그의

생각을 멍하니 하다보면 하루의 절반이 가있다. 아침에 해 뜰 때 준수의 머리카락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준수의 오른쪽 장딴지를 생각하다 보면 해가 지고 있다. 이런 식이다.

" 이번 사건은 언론으로도 대대적으로 보도될거다. 물론 우리가 마약 단속에 일차를

가하겠다는 얘기는 아무도 몰라. 윗선에서도 허락한 문제고, 국회의원 배경에 쫄아서

뒷걸음칠 필요 없다는 얘기다. 모두들 수사 확실하게 하도록 해. 제보 들어오거나 꼬리

잡히는 즉시 현장 검거 할 생각들 하고. "

" 아무튼 어린 새끼들이 벌써부터 지랄이야.. 마약은 개뿔이 마약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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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파나, 홍초파나, 모두 대대적인 마약 사업을 하는 조직들이었습니다. 일단 그들의

조직이 와해된거나 마찬가지인 지금, 마약을 거래하는 거의 모든 루트는 일시적으로나마

막혔을 텐데요- "

" 흐음... "

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화상파나 홍초파가 짧은 시간에

서울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막강한 재력 덕분이었다. 그 재력은 마약상에서

비롯된 돈들이었고. 두 조직은 서울 안의 마약 거래 루트를 독점하고 있었다. 모든 마약이

두 조직에서 흘러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재로써는 대량으로 마약을 거래할 수

있는 방법이 일시적으로나마 차단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검찰이 새로운 마약 거래 루트를

발견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했다.

" 지는 자들이 있으면 뜨는 조직이 있기 마련이다. 제 2세력 다툼을 하던 조직들을 철저

하게 감시해. 그들은 분명히 화상파와 홍초파가 독점하던 마약상을 대물림하려고 할

테니까. "

창민은 서류를 정리하고 영상기를 껐다. 형사들이 모두 나간 후에도, 유천은 혼자 멍하니

의자에 앉아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저 새끼가 요새 왜 저런데?

" 검사님. "

" 어? "

" 저는 이번 일에서 좀 빠지면 안될까요. "

" 뭐?! "

유천의 말에 본인보다 더 크게 반응하는 창민이다. 유천이 형사가 된 후 많은 세월을

곁에서 지켜봐왔지만 저런 말을 했던 적은 없었다. 일이 없으면 쓰잘데기 없는 경찰들

일까지 지가 도맡아 오바하기 일쑤였는데. 범인을 잡지 못하면 몸이 쑤신다며,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 있던 유천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 임무의 일선에서 빠지겠다니.

" 왜? "

" 저 그 동안 한 번도 안쉬었잖아요. 힘들어서요. "

" 박형사가 힘들다는 말을 다 하고, 약먹었냐? 왜 이래? "

" 아! 씨팔! 지금까지 졸라게 부려먹었잖아요! 홍초파랑 화상파 대가리들도 다 내가

잡아 쳐넣었는데!! "

" 흥.. 그건 사실이지만. "

박형사가 있어야 일이 빨리빨리 진행될텐데. 창민은 열심히 고민했다. 다른 형사들에

비해서 유천이 휴가도 내지 않고 주구장창 일만 해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강력반에 세운 업적이 대단해서, 이제는 그가 없으면 그 어떤 사건도 해결될 것 같지가

않았다. 이번 일이야 물론 그다지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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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뭐 하는 일이라도 있어? "

" 네. "

" 뭔데? "

김준수네 집 앞에서 밤새기요- 하고 대답하려다 말았다. 모자 아래 그늘진 유천의 눈은

시커멓게 다크 서클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벌써 며칠을 밤을 샜는지 모른다. 마음 같

아서는 준수의 집에 아예 들어가 저번처럼 늘 곁에서 손을 잡아주고 재우고 싶었다. 하

지만 요새 새 파티 일을 맡았다는 준수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같이 자면 안돼?'

라는 말에 '미친 변태 새끼' 라고 단번에 몰아붙이고 핸드폰을 끊어버렸으니.... 그 덕분

에, 유천은 늘 새벽을 준수의 오피스텔 앞에서 보내야 했다. 혹여나 그가 몽유병으로 위

험한 일이라도 벌일까봐 걱정이 되어 옥탑방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 연애요. "

" .... 응? "

잘 못들었다는 건지, 뭘 들은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한 창민이 눈을 크게 떴다.

분명 그는 연애- 라고 했다. '연애' 라, 창민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반적인 연애의

개념을 정리했다. 남자와 여자가 마음이 맞아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되는 것. 손을 잡고

랄랄라 명동이나 강남역에서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둘 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

남자는 여자를 집에 데려다 주고, 여자는 집에 홀로 가는 남자를 위해 집 전화로 세 시간

동안 수다를 떨어주는 것.

그걸 니가 한다고?

" 뭐... 꿈에서 해? "

" 아! 진짜로!! "

" 박형사... 여자 생겼어? "

남잔데. 창민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어 답답한 마음에, 유천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주

위에 아무리 사람들이 많으면 뭐해. 가장 기본적인 연애 고민조차 털어놓을 사람이 없는데.

"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

" 진짜야? "

" 근데, 좀 많이 아파요. "

" 뭐... 불치병에 걸린 여자와의 마지막 사랑, 이런 스토리는 아니지? "

" 됐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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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이라도 일을 쉬면, 조금 더 준수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겠지. 낮에

준수가 일을 할 때 곁에 있어줄 수도 있고, 어디를 갈 때 경찰차로 최고의 스피드로 태워다

줄 수도 있고(...) 정 바쁘면, 아예 우리 경찰 오토바이를 임대해서 태우고 다닐 수도 있고.

아무튼 간에, 나만의 시간이 있으면 모두 김준수에게 쏟아부을 테니까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워 질 수 있어.

" 진심이야? "

" ... 네. "

화악, 하고 빨개진 유천의 얼굴에 또 한 번 놀랐다. 입이 거칠고 몸은 두 배로 거친 유천

이지만, 의외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보기 드문 총각이었다. 형사들과 2차나 3차로

단란주점 같은 곳을 가도, 유천은 아가씨들의 '접대'를 받는 경우가 없었다. 여자를 어떻게

해볼까 하기 보다는 정말 사람들이 좋아서 혼자 술 바가지로 마시고 꼴아 박는게 대부분

이었으니까.

" 진짜 졸라 좋거든요. 하루 종일 걔 생각 밖에 안나고,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맨날 생각

해서 일도 못하겠어요. 씨팔.. 진짜 미치게 이쁘거든요. 막 TV보면서 송혜교나 전지현

나와도 다 꺼져 막 이러고... 아! 검사님! 저 미친거 아니에요?! "

단단히 홀렸구나. 어떤 여자인지 몰라도 박형사를 이렇게 돌게 만들 정도면 꽤나 콧대

높고 미인일 것 같은데. 창민은 상대방이 도대체 누구인지가 궁금해졌다. 송혜교랑 전

지현보고 꺼지라고 할 정도면 어떤 여자를 만난다는 거냐?

" 근데, 뭐... 원래 연애하고 사랑하면 제정신인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미친 거 아니야.

아니, 미친게 정상인게 사랑이지. "

" 그런가? "

" 그래도 나는 사랑은 해봤잖아. "

창민은 쓸쓸하게 웃었다.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지금도 사랑하며 살고 있었겠지. 아마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을테고, 아이도 낳았을테고... 얼마나 아름다운 가족일까. 하

지만 그녀는 죽었고, 나는 혼자다. 아마도 앞으로 오랫동안. 창민은 잠시 자신의 사랑

을 떠올렸다. 5년전, '그 일'만 없었더라면 그녀는 살아있었겠지. 내 앞에서 죽는 일은

없었을텐데.

" 알았어. 빼줄게. "

" ... 잠깐만. "

유천이 가죽 잠바 안을 뒤적거리더니, 녹음기 하나를 꺼냈다. 그가 증거 소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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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들고 다니는 것이기도 했다. 주로 범인의 목소리나 증인들의 고백을 녹음하는.

" 자, 말해요. "

녹음 버튼 눌러놓고 말하랜다...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냐. 발끈한 창민이 이때다

싶어서 서류뭉치로 그의 옆구리를 강타로 내리쳤다.

" 장난하냐! "

" 분명히 심검사가 나 이번 사건에서 빼준다고 했음. "

" 아, 하지 말라고!! 쉬어! 됐냐!??!!! "

" 오케이, 녹음 완료. "

앞으로 잃어버리지 않도록 소지하고 다녀야겠어- 유천은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자... 잠시 동안의 휴식이다. 김준수에게 쏟아부을 휴식. 유천은

기분 좋게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 * *

" 얼굴이... 왜 그래요? "

자신의 새 집이자, 돌아가기 싫은 집이 되어버린 12호 저택. 재중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정원에서 막 나오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처음에 자신

을 미용실에 데려다 준 남자였다. 자신이 도망치는 바람에 정윤호에게 손등을 펜촉으로

패인 남자. 내내 미안했던 재중이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이행했지만, 자신 때문에 잘못

한 것도 없이 손등을 찍혀야 했다. 그 피가 철철 흐르던 손등이 어찌나 아파 보였던지.

그런데 남자가 다친 곳은 손등 뿐만이 아니었다. 얼굴이 완전히 뭉게져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인간 자체가 틀려보였다.

" 별거 아닙니다. "

" 나한테 왜 존댓말 해요? 처음에는 반말 했잖아요. "

" 아... 그게, "

남자는 말을 아꼈다. 그가 정윤호에게 어떤 존재인지 전 조직원이 다 알고 있었다. 보스가

동성애자라고 하여 웅성거릴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나마 정윤호는 양호한 편이지. 뉴욕의

많은 암흑가의 보스들이, 얼마나 변태적인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김재중을 잡아들이기 전, 정윤호는 전 조직원 앞에서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김재중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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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앞에서 자신이 보스인 것을 숨겨달라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팔을 대신

보스라고 숨기고, 자신은 그의 참모인 듯 행동하고 있었다. 장난처럼 반복되는 정윤호의

행동에 조직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정윤호의 말과 행동이 법

이며 불문율이었다. '왜','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명령과 복종만이

존재하는 것이 조직원들의 삶이었으니까.

정윤호가 거짓말을 한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쉽게 김재중에게 다가가 그의 마음을 잡고

쥐흔들며 놀고 싶었다. 그러기에 보스라는 직함은 너무나 거추장스러웠지.

" 정윤호한테 맞았어요? "

" 아닙니다! "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지.. 재중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그 때 손등을 파해친

것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얼굴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손을 댔단 말이야..?! 이 빌어먹을

새끼 같으니...!

" 그 새끼, 지금 어디 있어요!? "

" 중앙 저택에 계십니다. "

" 데려다줘요. 정윤호한테. "

오늘 아침부터 그 남자 때문에 얼마나 큰 곤욕을 치뤘는가. 남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치명적인 얘기를 장난처럼 흘린 덕분에, 재중은 정말로 성불구자 취급을 받으며 친구들과

선배들의 동정어린 눈빛을 받아야 했다. 민정이 부담스러워 했던 것은 당연하고.

" 그 새끼한테 그렇게 맞고, 열 안받아요!? 같은 조폭들이잖아! 무슨 보스도 아니고! 왜

그렇게 쫄아요!? "

" 그런 게 있습니다. "

아마도 당신은 조금 더 늦게 알게 되겠지만. 남자는 자신이 몇년 전부터 섬기고 있는

고결한 그들의 보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남자가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김재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보스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이 남자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 마치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그런 묘한 아름다움을. 아마도

보스는 저 남자의 그런 면에 매혹되었겠지. 남자는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김재중의 앞에

서서 길을 안내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데, 김재중만 몰랐다. 그는 이미 조직 내에서 정윤호 다음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남자가 되어버렸다. 자의든, 타의든, 그는 정윤호의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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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여기가 어디에요? "

" 유도실입니다. "

" 유도?! "

" 조직원들은 모두 유도와 가라데, 태권도 같은 기본 무술을 연마합니다. "

" 당신들은 총으로 싸우잖아...? "

" 몸이 단단하지 않으면 총도 소용 없어요. 총이란 건, 다루는 사람이 얼마나 강인하냐에

따라서 엄청난 무기가 되기도 하고, 그렇기 못한 고물이 되기도 하니까. "

남자는 문을 열었다. 새파란 시트가 깔려져 있는 커다란 방 안. 재중은 안을 두리번거리며

발을 딛었다. 곧 문이 닫혔고, 재중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왠지 그와 나 단 둘이만

남는 것은 불안하다. 그 때의 그 일도 있고...

" 한 판 할까? "

갑자기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재중이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자신의 눈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확, 하고 돌려지는 몸에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뒤로 다가온 윤호가 웃고 있었다.

새하얀 유도복을 입고서.

" ...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야. "

" 유도 할 줄 알어? "

" 할 리가 있냐! 내가 이런 걸 배울 시간이 어디있어?! "

" 하긴, 공부벌레 샌님이니까. "

발끈. 윤호의 말에 핏줄이 불끈 하고 서버렸다.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물론 누군가와 제대로 맞짱을 떠본 적도 없지만, 남자로 태어나 쪽팔리게 웅크

리고 살았던 적은 없다. 난 공부벌레 샌님 따위가 아니야. 다만 어렸을 때부터 흔들렸던

집안 덕분에 일찌감치 맘잡고 공부한 애늙은이일 뿐이지.

" 네 유도복은 저기 있어. 입고 나와. "

허리에 둘러진 끈을 졸라맨 윤호가, 재중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매트로 걸어갔다.

" 너나 해. "

" 왜, 겁나? "

" 뭐?! "

" 무서워?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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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가리 똥찼냐? 뭐라고 지껄여?! "

화가 솟구쳐서, 재중은 유도복을 훽 들고서 간의 탈의실로 들어갔다. 무섭기는 누가!

물론... 내 뺨을 내려칠 때나, 조직원 손등을 후려팔때는 좀 무섭기는 했어... 좀.

" 잘 어울리네. "

유도복을 입고 나온 재중을 보며, 윤호가 씨익 웃었다. 느긋하게 몸을 풀고 있는 윤호를

보며 재중은 내심 긴장했다. 현명한 그가,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관망하는 건 절대로 아

니었다. 단지, 처음부터 겁 먹고 뒤로 내빼며 말로만 주절거리기 싫었을 뿐이다. 완전히

깔려서 팔이 꺾이더라도, 너 따위에게 겁먹지 않고 덤빌 수 있다는 내 마인드가 중요한

거다...! 재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 덤벼봐. "

팔짱을 낀채로 여유롭게 선 윤호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재중에게 덤비라고 말했다.

자신은 그의 공격을 적당히 받아주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비웃음에 열이 받아서 재중

이 와락 달려들었다. 윤호의 옷자락을 거칠게 잡아서, 발을 걸고 온 힘을 다해서 미는데-

" 덤비라고. "

... 끄떡도 않는다. 분명히 자신은 건장한 대한민국의 청년이 분명하고, 군대까지 갔다

왔는데도 지금 뭐하자는 거냐. 이가 갈릴 정도로 힘을 주고 윤호를 밀어붙였는데 그의

발바닥조차 움직일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숨소리도 여전히 고르고 가볍다. 독이 올라서

재중은 저만치 떨어졌다가, 몸으로 밀어 붙이기로 했다.

" 흐아얍-!! "

정체불명의 요상한 소리를 지르며 윤호에게 정면으로 달려든 재중이, 눈을 감고 온 몸을

그에게 부딪쳤다.

" 재중아... "

좀 움직이는 척이라도 해봐라! 이 씨발라마! 한심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정윤호를

보니 죽고 싶다. 벌써 기가 빠져서 재중은 헉헉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대로

그만두고 싶지 않아서, 무작정 달려들어 그의 옷을 여기저기 잡고 발을 여기저기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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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칙이든 뭐든 주먹을 온 몸에 날리고 지랄발광을 해대며 그를 '한 발자국' 움직이기에

총력을 다했다.

" 으아! "

어느 순간에, 자신의 몸이 가볍게 들렸다. 생쇼를 하고 있던 자신의 손을, 정윤호가 가

볍게 잡아챘다. 그리고 재중을 들어올려 그대로 바닥에 내쳤다.

" 아으으으...! 야! 공격하면 공격한다고... 으악! "

몸이 앞으로 돌려지더니, 정윤호가 그대로 위로 넘어졌다. 그리고 가볍게 재중의 두 손

을 포박했다. 그것도 한손으로. 이 남자, 정말로 엄청난 힘을 가졌구나.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의 숨은 여전히 고르고 부드러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한 표정인

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힘이 온 몸을 짓눌렀다. 차오르는 숨에, 재중이 고통

스러워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 놔아! "

" 내가 왜 강한 줄 알아? "

" 내가 알 바 없잖아! "

" 강하지 못하면, 죽어. 알아? 내가 사는 세상은 그래. 손에 총이 없으면 머리로 총구가

들어오지. 상대방의 가슴팍을 다리로 짓누르지 않으면, 내 다리가 꺾이고 넘어져버려.

먼저 죽이지 않으면 죽어. 난 그렇게 살았으니까 강한 거야. "

" 으... 아프다고! "

" 넌 내 세상 안으로 들어왔지만, 강할 필요는 없어. 내가 강하니까, 너는 강하지 않아도

돼. "

윤호의 얼굴이 재중의 코 앞으로 다가왔다. 식은땀이 흐르는 와중에, 재중은 눈을 감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심하게 움직였어. 내가 너무 심하게 뛰고, 주제 모르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래서... 내 심장이 뛰어. 너무 많이 움직여서, 숨이 차서, 내 심장이 이렇게 뛰는 거야.

" 사람이 힘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강해지거나 혹은 아름답거나. "

" ......... "

" 그건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거야. 정신차리고 보면, 나는 강해져서 이미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 "

" ........ "

" 너는 어때? "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

Page 117: Happy Together

바로 자신의 입술 가까이 다가온 윤호의 입술에, 재중은 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조금이

라도 입술을 움직이면 바로 닿을 것 같아.

" 네가 원하지 않아도 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야. "

" ... 뭐? "

" 이를테면.. 나를 움직이는. "

키스. 윤호의 혓바닥이 재중의 입 안으로 부드럽게 들어왔다. 정신없이 헤집는 키스

속에서, 재중은 민정과의 입맞춤을 떠올렸다, 그녀와의 키스가 이랬던가. 단지 키스

하는 것만으로 온 몸이 저려올만큼 짜릿하고 모든 세포가 날뛰었던가. 미쳐버릴 것 같다.

싫다는 표현조차 할 정신이 없을 만큼, 나는... 나는...

" .....! 야...! 야!!! "

윤호가 입술을 떼었을 때, 재중은 아직도 헤롱거리는 정신을 어찌저찌 하지 못한 채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 순간, 윤호는 매트를 짚고 있던 자신의 다른 한 손을

자연스럽게 재중의 바지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것도 다리와 다리 사이의 정 중앙으로.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윤호의 손은 곧장 그곳으로 일방통행했다. 속옷 안으로

들어온 그의 손이, 거침없이 재중의 물건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엄청난

일에 재중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속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뭔 줄 알아? "

" 아으... "

" 길들여지는 것. 그 길들임 속에서 사람이 가장 잊지 못하는 건... "

" ... 아.. 흐..! "

자신의 귓볼을 한 입에 집어넣은 윤호가, 혀를 굴리며 손을 조금 더 빨리 놀렸다. 리드

미컬하게 움직이는 그 손놀림에 어느새 온 몸에 힘이 빠져버렸다. 자신의 두 손을 포박

하고 있던 윤호의 한 손이 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재중은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자신의 두 손을 그대로 위로 가지런히 모아놓고 몽롱해진 정신을 구름 위로 올려놓

느라 바뻤다. 둥둥 떠다니고 있다.. 조각난 자신의 정신들이..

" 결국 몸이야. 왜냐면 사람은 본능의 동물이니까. 누군가에게 길들여지는 건 이런거다.

거창한 정신적 구속이 아니라... 결국엔 몸이 기억하는 쾌락과 짜릿함이 다야. 그런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고 졸졸 너를 따라다니지.. "

거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재중은 자신도 모르게 윤호의 등을 끌어안고 그 얇은 허리가

Page 118: Happy Together

아래 위로 요동치기 바빴다.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진 몸이, 이렇게까지 달아오를 줄은

몰랐다. 그것도 다른 남자가 해주는 마스터베이션이. 모든 사고가 일시적으로 정지하고

이 세계가 아닌 우주 속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순간이었지만, 이런 기분으로 미친

다면 평생을 정신병원에 갇혀있어도 좋을 것 같아.. 재중은 거기까지 생각해버린 후 바로

사정해버렸다.

" 그렇게 좋아? "

입꼬리를 올리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정윤호를 보고서야, 재중은 지금 내가 무엇을

했는지 어렴풋이나마 정리할 수 있었다. 정윤호의 손에 묻어있는 저것이 무엇인고 하니..

신이시여. 내가 지금 남자 밑에 깔려서 무엇을 한겝니까. 내가 방금 어떤 행동을 하면서

어떤 소리를 냈더라. 내가 분명히 정윤호를 끌어안고...

" 아아악!!!! "

" 그 비명보다, 방금전에 네가 내 손에 싸면서 낸 비명이 훨씬 더 듣기 좋아. "

할짝, 정윤호의 입 안으로 사라지는 자신의 흔적을 보며 대략 할 말을 잃어버린 재중이다.

쟤, 지금 뭐하니? 나는 지금 뭐하고? 멍하니 반쯤 내려간 유도복 바지를 바라보는데 그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느긋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 조금 더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서. 먼저 나갈테니까, 옷 정리하고 나와. "

타박타박... 윤호의 발걸음이 멀어지고, 유도실의 문이 닫혀서야 재중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정윤호가 해준 마스터베이션에 좋아서 죽을뻔

했다. 이대로 미쳐서 정신병원까지 가도 상관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 아.... "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 아직까지 아랫배가 알싸하고 온 몸이 전율에 휩싸인 듯 했다.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재중에게 일어난 것이다. 자신과 똑같은 성을 가진 남자에게

몸이 맡겨진채 농락당했고, 그 농락으로 별세계에 다녀온 듯한 엄청난 쾌락을 맛봤다.

- 왜냐면 사람은 본능의 동물이니까.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재중은 팔을 이마 위에 올려놓고 오랫동안 유도실을 나가

지 못했다. 머릿 속이... 터질 것만 같아.

Page 119: Happy Together

* * *

" 스트립걸이요? "

" 응. 우리는 분위기 죽이는 섹시한 파티를 원하니까, 그 정도 양념 쯤은 기본 아니겠어?

니가 알아서 섭외하고 최고급 콜걸 애들만 불러서 갖다 세워놔. "

" 아... 네. "

" 초대장 리스트는 확인해봤어? "

" 네. "

" 똑바로 해. 듣자 하니까... 예전에 네가 열었던 와인 파티에서 왠 미친놈 하나가 설쳐대서

완전히 망친 적 있다며. "

" ..... "

" 내가 너 구제해주는 거나 다름없잖아. 일 똑바로 하면 다음에도 불러줄 테니까, 정신 차

리고 내가 말한 거 모두 지켜. "

" ... 네. "

사람에게 명령하는 저 따위 태도는 어렸을 때부터 몸에 베인 것이 분명하다. 정말 대단한

집안의 자제라고 하더니, 하는 행동 꼬락서니가 정말 '대단하다' 싸가지가 없어도 저렇게

없을 수가 있다니.. 준수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며 자신이 꾸며놓은 집을 둘러보았다.

하우스 파티였기 때문에 딱히 장소 섭외에 대한 고민은 없었지만, 집 전체의 인테리어를

다시 꾸며야 한다는 압박감도 만만치 않았다.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길래, 파티 하나를 위

해서 거실 인테리어를 모조리 바꾸라는 거야... 자신도 꽤나 떵떵거리는 집안에서 태어나

재력으로는 남 부럽지 않게 살아왔는데... 준수는 혀를 내둘며 벽에 기댔다.

딩동!

[언제와 나 기다리고 있어]

" 고집쟁이. "

유천의 문자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새벽 내내 집 앞에서 기다리는 짓을 하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말 안 듣는 유천이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고맙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자

신이 그저 좋다며 추운 날 앞에서 라이더 자켓 하나만 걸치고 기다려주는 유천이 대단해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준수는 불편해졌다. 저런 식의 행동이 언제까지 갈까..

언제까지 나를 목적없이 좋아해주며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대해줄까.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함께 있기 마련이다. 유천이 제 풀에 지쳐 떨어져 나간다면, 자신이 겪게 될 허무함은

어느 정도일까. 준수는 이미 유천에게 적은 부분일지라도 의지하고 있었다. 늘 집 앞에서

기다리는 유천 덕분에, 준수는 벌써 몇 주째 손을 침대에 스스로 묶지 않고 잠들었다.

" 음악도 조금 더 끈적하고 그럴싸한 걸로 바꿔. "

" 네. 그럴게요. "

" 그리고 여기, 커텐 색깔을 완전히 바꿨으면 좋겠는데. "

Page 120: Happy Together

준수는 서둘러 그 쪽으로 뛰어갔다. 그는 아직 어렸고, 일을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

으며, 모든 것이 서툴고 불안했다. 그것을 감추고 경력을 쌓아가는 것이 '일'이며 '직업'

이겠지만, 준수는 어째 자신이 맡은 이번 파티가 꽤나 찝찝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

유천은 몇 시간 째 준수의 오피스텔 앞에서 죽 치고 앉아있었다. 아까 사온 캔맥주는 벌

써 다 마셨고, 삼각 김밥과 초코우유도 다 해치웠다. 열 두시가 넘어가는데 준수는 언제

오려나.. 이 놈의 오피스텔은 출입용 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들어갈 수도 없으니,

유천은 별 수 없이 오피스텔 정문 앞에서 늘상 추위에 바들바들 떨며 준수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점점 날씨가 추워지고 완연한 겨울의 간지가 난다. 저번에는 기다리다가

너무 쉬가 마려워서 근처 놀이터에 노상방뇨를 하러 갔던 적이 있다. 손이 죄다 얼어버

려서, 바지 자크를 내리지 못해 뒈지는 줄 알았다. 바지에 싸는 줄 알았어...

" 씨팔! 오늘은 뽕을 빼고 돌아가겠어! "

준수와 같이 살고 싶다. 아니면 준수를 데려와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고 싶었다. 불안하

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오피스텔 앞에서 밤을 새는 것도 한계가 있지..

언제까지 그를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휴가를 끝내면 분명히 심검사가 흉악범에

관련된 가장 빡세고 힘든 수사를 맡길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밤새 다른 곳에서 잠복 근

무를 하거나 조사하러 다녀야 할 텐데.. 그 사이에 준수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

쩌려나. 아니, 준수가 밤마다 자신을 침대에 묶고 자는 모습 마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아... 보고 싶다. "

허연 입김을 뿜으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내 마음은 이렇게 진실되고 한 곳만 바라보

는데.. 왜 그 사람은 몰라줄까.

.

.

.

" 이거 얼마에요? "

" 이 천원이요. "

" ... 이거 두 봉지 주세요. "

집에 가는 길에, 호두과자를 파는 아저씨를 보았다. 준수는 잠깐 차를 세우고 호두과자

봉지를 받아들었다.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냄새. 살짝 웃으며 봉지 안으로 코를 박았다.

Page 121: Happy Together

아... 좋은 냄새 나. 식지 않도록 품 안에 안고 다시 핸들을 잡았다. 오늘도 분명히 유천

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했다. 날은 점점 추워지는데 어째 감기도 안 걸리고

잘도 버틴다. 준수는 속도를 조금 더 내며 자신의 오피스텔로 차를 돌렸다.

" 어... "

지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빠른 걸음으로 오피스텔 정문에 도착했는데, 어디에도 유천

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다시 문자를 확인해 보기까지 했다. 분명히 기

다리고 있다고 했는데. 하긴, 오늘 날씨가 좀 유난히 쌀쌀하긴 하다. 괜히 섭섭해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정문 앞에서 밍기적 대는 준수다. 그러다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사

람을 기다리느라 들어가지도 못하고 깨갱대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 보였다. 박유천이

자신을 기다린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렇게 익숙해져 버렸을까.

" 어? 김준수다. "

타박타박- 저만치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박유천이 무언가를 손에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와.. 아직 안가고 있었네. 괜히 달려오는 박유천이 반가워서 준수는 자신도 모르

게 생긋 웃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려 준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구나.

" 어디 갔다 왔어? "

" 졸라 추워서 몸 좀 뎁힐라고 술 사왔어. "

" 야, 길거리에서 술 마시려면 우리 집 앞에 있지 말고 서울역 노숙자 지하 동네로 가! "

" 씨팔! 니가 집으로 들어오라는 소리도 안하잖아! "

" 내가 왜 그런 소리를 해야 되는데!? "

분명히 마음은 아니었는데, 입을 열자마자 뭔가 싸우고 있는 시츄에이션이 벌어진다. 준

수는 손에 들고 있던 호두과자를 뒤로 숨겼다.

" 어? 호두과자다! "

재빠르게 준수의 뒷춤에서 달랑거리고 있는 호두과자를 캐치한 유천이, 날렵하게 그것을

잡아챘다. 와- 이거 술 안주로 먹으면 되겠다. 중얼거리던 그는 바알갛게 상기된 준수의

볼을 손등으로 매만지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 차갑잖아. 감기 걸리겠다. "

" 남이사. "

Page 122: Happy Together

지 감기 걸릴 생각은 안하나.. 추우니까 알딸딸한 정신으로 버티겠다고 술이나 사오는 박

유천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말에 괜히 마음이

동해서 찡해졌다. 준수는 유천이 들고 있던 검은 봉지 안의 맥주캔을 힐끔 보다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 ... 오늘은 들어오게 해줄게. "

* * *

" 크하! "

뭔가 짐승적인 표효다. 맥주를 단숨에 들어마신 유천이, 입가에 묻은 허연 거품을 닦으며

좋다고 난리다. 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맥주 한 캔 정도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마실

수 있겠지. 준수는 자신이 사온 호두과자를 먹으며 유천을 힐끔 쳐다보았다. 눈 밑에 왕국

을 형성한 다크 서클이나, 제대로 피곤해 보이는 충혈된 눈이 안쓰럽게 보이기까지 하다.

분명히 요새 새벽 내내 추운 곳에서 자신을 기다린 덕분에 얻은 찌꺼기들이겠지.

" 나 휴가 얻었어. "

" 휴가? 왜? "

너랑 조금 더 같이 있으려고- 이 말을 하지 못해서 우물쭈물 거린다. 그 얼굴을 보고 감이

온 준수가, '흥' 정도의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 그래봤자 내가 같이 놀아줄 줄 알어? "

" 씨팔! 나는 너 때문에 휴가도 냈는데! 나 형사 되고서 휴가 낸 거 처음이란 말이야! 졸라

깐깐한 심검사도 구슬려서 겨우 얻어낸 거라구! "

" 난 바쁜 몸이야. 너랑 한가하게 놀아줄 시간 없어. "

" 있잖아, 준수야! "

흥분한 덕분에 또 갱상도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유천은 새 맥주캔을 단숨에 들어마시고

오늘은 뽕을 빼고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 내랑 같이 살자! "

" 미쳤냐? "

" 내, 니한테 진짜 손 안댈끼다! "

" 그걸 어떻게 믿어? "

" 참말인디! 내, 좋아하는 사람헌테 그렇게 손꾸락 쉽게 대는 놈팽이 아이다! "

Page 123: Happy Together

뭔가 언밸런스하다. 리얼하게 튀어나오는 사투리를 보며, 준수가 웃음을 참았다. 솔직

히 보면 볼 수록 잘생긴 얼굴이다. 더러운 성격만 아니면 여자를 줄줄이 사귀고도 남았

을범직 하다. 게다가 운동으로 다져진 몸 또한 최상품이고.(고기냐...) 게다가 흥분할때

마다 튀어나오는 사투리처럼, 유천은 순박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점이 준수의 마

음에 들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혼란스러울 정도로.

" 내가 와 휴가를 냈는지 아나... 니 땜에 그랬다.. 니 마음을 좀 제대로 잡아보고 싶은데,

맨날 아새끼들 잡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나니까.. 너 볼 시간도 없지 않노.. 그릉께, 휴

가 낸 김에 니랑 같이 살믄서 너한테 더 잘해주고 점수 따볼라 한다... 와 그렇게 나를

못 믿노.. "

" 박형사. "

" ? "

" 나한테 키스해봐. "

뭐시깽이?! 하면서 펄쩍 뛴 유천이, 뒤로 물러서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준수를 바

라보았다. 그러나 김준수는 여전히 도도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다리만 꼬고 앉아

있다.

" 왜? 해보라니까. "

" 아니... 저기.. 준수야.. 키스는... "

" 해줘. "

키스를 어떻게 하는 것이더라. 유천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자신이 봤던 야동들 중 키스에

관련된 데이터만 뽑아 씨리즈로 날렸다. 입술을 부딪치고, 살짝 벌린 후 혀를 밀어넣고..

씨팔! 혀가 입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엑스레이로 보여줬던 야동은 하나도 없었어!

" 난 키스도 못하는 순댕이랑 어떻게 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어. "

준수의 말에 오기가 생긴다. 유천은 손에 쥐고 있던 맥주 캔을 한손으로 찌그러트렸다.

다리를 비비 꼬고 앉아 있는 도도한 그 남자 곁으로 엉덩이를 가깝게 붙였다. 자신은 쳐

다보지도 않은 채 콧방귀만 뀌고 있는 김준수가 얄밉다.

" 진짜 한다. "

" 해라? "

" ... 괜찮어? "

" 뭐가? "

" 우리 아직 깊은 사이도 아닌데 키스하는 거, "

Page 124: Happy Together

와, 진짜 생각하는 거 완전 70년대 그 시절이다.. 말할 때마다 졸라와 씨팔이 빠지지 않는

성격 더러운 박형사가, 키스 하나 하지 못해서 쩔쩔대는 꼴이라니. 생각할 수록 귀여워서

더 데리고 놀고 싶어진다. 준수는 고개를 유천에게 돌리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 남자를 한 번 믿어볼까. 할짝, 맥주 맛이 나는 혀로 그의 입술을 훑었다.

" 엄마야... "

죽겠다는 표정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유천이, 침을 꿀떡 삼키며 준수의 어깨를 턱

잡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 아, 해봐. "

" 아? "

아? 하고 벌린 준수의 입술로, 유천이 목표물을 겨냥하듯 혀를 바로 집어 넣었다.

뭐야 이거!!!!!!

" .......... "

" .......... "

순간, 준수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분명히 박유천이란 남자에게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

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을 알고서도 도망가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고, 몽유병에 걸린채

자신의 목을 졸라댔던 미친 남자를 감싸안았다. 자신이 지켜줄테니 침대에 손을 묶지 말

라며 보듬어줬고, 추운 새벽밤을 오로지 자신을 위해 밤을 새며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 괜찮았어? "

입 안에 혀 넣고 메롱메롱 하는 것 같아. 아무 감흥도 없고 짜릿함도 없는 유천의 바보천

치 같은 키스에 기가 차는 준수다. 설마 한 번도 키스 못해봤다고는 하지만, 남자는 본능

적으로 어떻게 리드해야 하는지 몸이 알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앤 모뇽.

" ...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

내가 뭘 잘못 한 거야?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응응? 당황하며 달려드는 유천의 싸대기를

매섭게 날리고, 준수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휴. 앞으로 알려줘야 할 것들이 산더미구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Page 125: Happy Together

.

.

.

오랫동안 맥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렇게 분위기 좋게 놀다가 어느새 잠이 들

었다. 술이 센 유천이었지만, 끝도 없이 마신 맥주 덕분에 배도 부르고 눈도 감겨서 금세

잠이 들었다. 둘 다 취한 터라, 자기 전에 손을 묶어야 한다든지, 유천이 자지 말고 준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든지,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 흐....! "

숨이 막혀 온다. 그 생각에 유천이 눈을 떴다. 아주 어두운 거실 안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두 팔로 조르며 위에 올라타 앉아 있었다. 그 얇디 얇은 손으로 사람의 목을 조르며,

죄책감 하나 느끼지 않겠지. 목을 조르는 것은 김준수의 제정신이 아니니까. 정신을 차린

후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래서 몽유병에 취한 김준수의

팔에는, 망설임도, 죄책감도 없다.

" 준수야.. 정신차려....! "

죽지는 않는다. 유천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인생은 운동으로 단련되어 왔다. 이

렇게 목이 졸려서 여기서 죽지는 않는다. 나는 강한 남자니까. 그는 최대한 목에 힘을 주

고 자신의 목을 쥐고 있는 김준수의 팔을 떼어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망설임과 죄책감

이 배제된, 자고 있는 김준수의 또 다른 유령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이 세고 강했다.

" 김준수...!!!! "

점점 손에 힘이 빠져 온다. 유천은 몽롱해지는 정신을 애써 바로 세우며 한 손으로 거실

바닥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손에 집히는 빈 맥주 캔으로, 죽이지 않을 만큼의 힘을 실어

서 준수의 머리를 내리쳤다. 갇혔던 숨이 입으로 토해지며 한참이나 웅크리고 숨을 고르

게 쉬었다.

" 준수야...? "

정신을 차린 후에야, 고개를 들어 준수를 살폈다. 바닥에 나뒹군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유천이 다가가 어깨를 일으켜 세웠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힘이 모조리 빠져버린 얼굴의

길 없이 흐르는 눈물과 멍하니 벌려진 입술이 애처로웠다.

Page 126: Happy Together

" 나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그러니까, "

" 다가오지 마요. "

" 내가 잘못했어. 내가 안 자고 너 봤어야 하는 건데, 내가 병신이라서.... "

" 죽어요... "

아아아.. 하며, 그가 유천의 품에 안긴 채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더 이상 졸립지 않았다.

유천은 준수를 품에 안은 채 그저 등을 쓸어안고, 토닥였다.

" 괜찮아.. 다 괜찮아... "

" ..... "

" 준수야.. 듣고 있지. 나.. 너 안 무서워... 괜찮으니까... 울지 마.. "

아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자는 너를 곁에서 지켜보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그 불쌍한 병에 걸린 네가 무서워서 도망가는

짓은 하고 싶지 않은데...

그를 흔들어보지만, 입으로든 몸으로든 대답하지 않는다. 어느새 정신을 잃은 준수가,

축 늘어진 채 유천의 품 안에서 잠들어 버렸다. 기절한 준수를 안아서 침대로 데려갔다.

그의 새햐안 시트 위에 올려두고 이불을 덮었다. 눈물이 메말라 까슬한 볼을 매만지다

거실로 나왔다.

범인을 놓칠 때, 언제가 가장 힘이 들고 죄책감이 드는 줄 아니. 범인이 양 갈래 길로

도망쳤을 때야.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둘 중의 하나는 확실한데 정답은 알

수가 없어. 차라리 나눠진 길들이 많다면 죄책감을 덜 수 있지. 하지만 단 두가지 길이

내 눈 앞에 존재한다면... 나는 서른 번도 더 고민해야 해. 그리고 범인을 놓쳤을 때는,

아주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리지. 거기서 내가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갔다면, 내가

그 때 다시 한 번만 생각했다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는 두 가지 선택 사

이에서 고민하는 거야. 그 선택이 실패했을 경우, 나머지 하나의 길로 가지 못한 자신

을 오랫동안 자책하게 되니까.

유천은 현관 앞에 서서 오래도록 고민했다. 지금 이 신발을 신고 나갈까.. 아니면 말까.

여기서 그만 둘까... 말까. 사랑할까... 말까.

" 후우.. "

뒤돌아섰다. 준수가 잠든 방으로 다시 돌아와, 그의 곁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곤히

잠든 그의 얼굴에서, 아까 전 자신을 죽이려 달려들던 소름끼치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Page 127: Happy Together

" 후회... 안 할게. "

내가 선택한 거니까. 다만.. 내가 선택한 이 길이 맞기를 바랄 뿐이다.

자신은 두 번이나 죽을 뻔 했다. 그것도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려 하는 김준수에게. 그러

나 물러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박유천은 언제나 그랬다. 해결하지 못할 연쇄 살인 사

건을 맡아도, 모두가 꺼려하는 흉악범을 맡아도, 그는 피하며 방법을 찾지 않았다. 정면

돌파로 맞서며 자신의 승리를 믿었다. 그에게는 사랑도 마찬가지라서.. 피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그가 나를 죽이려 달려든다고 해도.

" 병.. 내가 고쳐 줄게. "

" ..... "

" 준수야.. 듣고 있지. 나.. 너 안 무서워. 도망가지도 않아.. 그러니까 나 믿어.

고쳐줄게.. "

.

.

.

" 일어나. 박형사! "

눈을 떴을 때는, 준수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아무 일도 없었

다는 표정으로. 어제와 다름없는 새침한 표정으로 한 손에 들고 있는 사과잼을 내밀었다.

" 이거, 열어줘. "

" 아... 응. "

새콤한 냄새가 나는 사과잼을 한 손으로 열고, 준수에게 내밀었다. 와아.. 진짜 힘이 세긴

세구나. 힐끔 자신을 쳐다본 준수가 웃으며 머리를 한 대 툭, 쳤다.

" 빨리 가서 씻고 나와. 어제 나랑 놀아줬으니까 오늘 아침 정도는 차려줄게. "

" ... 준수야, "

" 응? "

" 괜찮아? "

" 뭐가? "

" 아니... 그냥.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유천을 바라보던 준수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Page 128: Happy Together

" ... 어제, 나 또 이상한 짓 했어? 혹시? "

" 아니. "

" 갑자기 그런 소리 하지 마! 놀란단 말야! 아침부터 성질 긁고 난리야.. 빨리 씻고 나와! "

자신을 욕실로 떠미는 준수의 손길에, 유천은 멍하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자신이 어제 무슨 짓을 했는지.. 저 녀석의 머릿속에는 아

무것도 없어.

- 너.. 모르지. 자신이 한 행동을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기억

상실증과는 틀려.

그 말을... 이제야 알 것 같아.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10

" 일어나. "

" 아... 10분만 더어.... "

" 그래? 그럼 10분만 더. "

갑자기 이불 속으로 파고 드는 이상한 생명체에, 재중이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윤호가 슬금슬금 자신을 안고 침대 속에서 자리잡는게 보인다. 이 새끼는 언제 또 여기로

온 거냐! 발로 가슴을 뻥- 차려고 하는데 오히려 발을 한 손에 잡혀버렸다.

" 오, 좋은 자세. "

재중의 발을 잡고 다리를 위로 높게 치켜올린 윤호가, 묘한 미소를 띄우며 몸을 밀착시

켰다. 깬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정신이 헤롱헤롱거리는데 정윤호의 행동에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재중은 손에 잡히는 배게로 윤호의 머리를 내려치고 몸을 발딱 세웠다.

" 아! 새벽 여섯 시잖아! 왜!? "

" 운동 해야지. "

Page 129: Happy Together

" 뭔 동?! "

" 운동. 너도 슬슬 조직원들 일상에 익숙해 져야지. 아무리 장래 변호사라고 해도, 자기

몸 지킬 실력 정도는 연마해 둬야 정상 아닌가. 내가 언제나 널 지켜줄 수도 없는 거고. "

진지한 말로 이야기 하는 윤호의 얼굴을 비웃어 주고 싶어 진다. 언제나 널 지켜준다니.

제발 잡아먹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재중은 툴툴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사실은 어제

유도실에서 있었던 기억 때문에 정윤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조차 쪽팔렸다. 옷을 갈아

입으려고 윤호를 내보내는데, 그가 키스를 하려고 고개를 꺾었다.

" 아우, 하지 마! "

" 왜? "

" 왜!? 우리가 무슨 사이야?! 나는 너처럼 게이도 아니고... "

" 어제는 좋아서 죽으려고 했던 주제에. "

" 야! "

" 날 때부터 게이인 사람은 없어. 나도 널 만나기 전에는 게이 아니었으니까. "

내가 너를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소리냐? 기가막혀. 만난지 얼마나

됬다고 개소리야. 재중은 혀를 차며 윤호의 등을 마저 밀었다.

" 너랑 더 얽히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나가. 나한테는 여자친구도 있고... 아악! "

'여자친구' 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윤호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재중의 머리채를 화악

잡아끌어 아래로 내동댕이 쳤다. 아침부터 남한테 머리채 잡혀서 쓰러지는 꼴이라니. 잠

이 확 달아난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매섭게 눈을 치켜떴는데, 윤호의 차가운 표정에 금세

꼬리를 내리고 눈을 깔아버렸다.

" 한 번만 더 여자 얘기 꺼내봐. 그 년이랑 쌍으로 죽여버릴 줄 알아. "

내가 정말 저 남자가 무서운 건.. 저렇게 말하는 거친 소리가 농담이 아니라는 거야..

.

.

.

" 흐아아... 무지 크다! "

어느새 감탄하고 있다. 조직원들의 뒤를 따라 중앙 저택의 뒷뜰로 나왔을 때, 재중은 입

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엄청난 대지 위의 저택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뒤에 이렇게 커다란

공터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뒤에는 대나무 숲이 정갈하게 펼쳐져 있었고,

Page 130: Happy Together

앞에는 넓직한 나무 마루 위에서 정윤호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김재중. "

" 어? "

" 맨 앞에 서. "

이렇게 많은 조직원들 가운데서 이름을 호령하는 모습이라니. 재중은 쪽팔린다는 생각

에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밍기적대며 눈초리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정윤호는 조직의

간부 중에서도 대가리 급인 듯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수 많은 남자들이 정윤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일 리가 없으니까. 하긴, 그렇게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니까 나에게

막 대하겠지. 재중은 물끄러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윤호를 바라보았다. 하얀

도복이 맞춤처럼 잘 어울린다. 아침 햇살처럼 깨끗한 미소로 재중에게 한 번 웃어준 윤

호가, 다시 차가운 눈빛으로 조직원들에게 호령했다.

" 공격의 기본은 유도. 방어의 기본은 태권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너희들은 적어

도 합 10단 이상의 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 이 자리에는 1단도 가지지 못한

신참이 한 명 있다. "

저 새끼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 김의형, 이주형. 앞으로 나와. "

윤호의 말에, 재중의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한 명은 재중을 처음

이곳으로 데려왔던 온 몸에 문신이 가득한 남자다. 괜히 움추러 들어서 뒤로 물러섰다.

" 태권도 기본 동작을 보여줘. "

두 남자가 마주보고 섰다. 하얍!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뭔가 대단한 것을 보여줄 것처럼

굴더니 고작 열심히 방어 하고 있다.

" 이것이 아래 막기! "

" 잘 봐둬. 기본 방어 동작이니까. "

" 몸통 막기, 얼굴 막기! "

" 얼굴 막기는 특히 잘 봐둬. 너는 얼굴이 제일 비싸니까. "

" 손날 몸통 막기, 거들어 막기! "

" 어려운 동작은 없지만 무엇보다 스피드와 순발력이 필요한 것이 기본 방어 동작이야.

넌 머리가 좋으니까 한 번 보고 금세 외울 수 있겠지. "

Page 131: Happy Together

자기 앞에서 열심히 방어하고 있는 남자 둘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윤호의 말대로, 한 번

보기만 해도 동작을 모조리 외울 수 있었다. 태어나서 무술을 배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딱히 배울 필요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정윤호의 말대로 조직에 들어온 이상

자신의 몸을 지킬 기본 무술 따위는 배워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재중은 잡생각을 지우

고 방금 보았던 동작을 머릿속으로 짜맞추기 시작했다.

" 내가 파트너를 해줄 테니, 방금 본 것들을 따라해봐. "

" 이 앞에서?! "

" 그럼,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갈까? "

능글맞은 윤호의 표정에 싸대기라도 날려주고 싶다. 재중은 입술을 깨물고 기본 동작을

취했다. 그래... 나는 이미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불법 집단에 들어왔다. 정윤호라는 저

남자가 있는 이상, 나에게 빠져나갈 길이란 없어.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이 집단

안에서 찾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 몸통 막기! 얼굴 막기! "

" 옳지, 잘 한다. "

" 거들어 막기! "

" 김재중, 조금 더 빠르게 움직여. "

이 빌어먹을 남자를 상대로, 내 한 몸 지킬 방법을 모색하는 길 뿐이야.

" 처음이신데 잘하십니다! "

뒤에서 재중과 윤호의 수련을 구경하고 있던 조직원들이, 웃으며 박수를 날리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묘한 기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서워 쳐다

보지도 못했던 조직원들이, 기본 동작 잘 한다며 박수 치며 응원해주는 꼴이라니.

" 모두 흩어져서 수련하도록 해. "

" 예! "

윤호의 명령에, 모두가 우렁차게 소리치며 삽시간에 흩어졌다. 조용했던 공터 안이, 곧

기합 소리로 가득 찼다. 저 쪽에서는 맨 손으로 운동하는 것도 모자라 단도를 들고 쉭쉭

거리며 상대방을 제압하고 있다. 이것이 조직원들의 삶이구나. 새벽부터 수련이라니.

" 잘했어. "

" 뭐... 난 머리가 좋아서 한 번만 보면 금세 외우니까. "

Page 132: Happy Together

" 그건 아닌 것 같은데. "

" 뭐? "

" 예전에 보았던 사람의 얼굴을, 단번에 떠올릴 수는 없는 것 같아서. "

" ... 무슨 소리야? "

멍하니 서있는 재중의 허리를 잡고, 윤호가 단숨에 바닥으로 내리쳤다. 으악!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재중의 다리에 윤호의 다리가 엉켜들어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꽉 조여댔다.

" 아프잖아! 으...! "

" 이건 나중에 배우게 될 거야. 유도의 기본 동작. "

" 공격의 기본은 유도라고 했지. 내가 유도를 다 마스터 하면 너 부터 족칠거다. 정윤호. "

" 영광인데. "

엎어진 재중을 도로 일으킨 윤호가, 그의 하얀 도복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조용히 물었다.

" 나..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

" 응? "

" 나 처음 봤을 때, 그런 생각 들지 않았어? 어디서 본 얼굴 같다고. "

" 아니, 전혀. "

처음 봤을 때 그런 잡다한 생각을 할 틈이 어디 있어. 상황 파악도 안되서 죽을 지경이었

는데. 도복을 탁탁 털고 윤호를 멀뚱한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그는 씁쓸한 얼굴이다.

" ... 알겠어. "

" 뭘 알어, 나 기본 동작 더 가르쳐주고 가. "

" 잘 봐. "

윤호는 재중을 앞에 세우고 조금 더 디테일한 기본 동작 포즈를 취했다. 옆에서 열심히

따라하는 재중을 힐끗 보면서 피식 웃어버렸다.

넌 정말 기억 못하는구나. 난 너에게 꽃다발을 안겨 준 적도 있었어, 재중아.

* * *

" 안 된다니까. "

" 글쎄, 왜 안되는데?! "

" 초대장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

Page 133: Happy Together

" 형사라고 하고, 형사수첩 들이대고 들어가면 돼! 우리나라에 서울중앙지검 강력반 형사가

들어가지 못할 곳이라고는 아무데도 없어! "

" 아우, 그만 좀 우겨! "

아까부터 옆에서 보채고 있는 유천이다. 자신의 두 번째 파티장에 참석하기 위해 아까부터

옷을 매만지고 머리를 하고 있는 준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렇게 예쁘게 차려 입고 어

딜 혼자 간다는 건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김준수는 27년동안 정상인으로 살아왔던

자신까지 단번에 게이로 바꿔놓을 만큼 매력이 출중한 녀석이다. 저렇게 잘 차려입은 모습

을 보고 누구든 반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팔불출 다운 생각으로 징징거리느라 바쁘다.

" 아! 썅! 옷 좀 구리게 입고 가! 왜 그렇게 이쁘게 차려입어?! "

" 내가 뭘 입든 무슨 상관이야. 제발 징징대지 말고 좀 떨어져. "

가뜩이나 예민한 신경인데 유천이 되도 않는 이유로 보채니 신경질만 자꾸 난다. 자기도

파티에 데려가 달라면서 먹히지도 않는 말을 조르고 있다. 무슨 파티에 가고 싶은 신데렐라

도 아니고, 준수는 한숨을 쉬며 자신이 아끼는 십자가 귀걸이를 보석함에서 꺼냈다.

" 아! 그거 끼지 마! 달랑달랑 거리면서 이뻐 보인단 말이다! "

" ... 너 진짜 짜증나게 굴래? "

확 가라앉은 준수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진짜 열받았다는 표현이다. 박유천 덕분에

자신의 첫 파티를 망친 경험이 있는 준수는, 두번째 파티 만큼은 절대로 망치고 싶지 않

았다. 그래서 아무리 싸가지 없게 구는 고용인이라도 네네- 하면서 비굴하게 굽신거리며

일을 진행해왔다. 오늘 파티만 무사히 마치면 비로소 좋은 경력이 하나 쌓이게 될 거고,

앞으로 다른 일들을 도맡아도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 흠... 갔다 올게. "

" 나도 갈래. 불안해서 혼자 너 못 보내. "

" 뭐가 불안한데. 내가 파티 하면서 잠이라도 잘 줄 알어? 그래서 몽유병 걸려서 비몽사몽

돌아다니기라도 할까봐? "

" 아니... 내 말은 그런게 아니라. "

" 난 눈 떠 있을 때는 누구보다 정상이야. 꼭 정신불안증 환자 처럼 취급하지 마. 기분

나빠. "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정말로 기분이 상한 듯 보이는 준수의 얼굴에 기가 죽었다. 유천

은 준수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서 거실로 나왔다. 아이보리빛의 트렌치 코트를 수트 위에

걸치고, 현관에서 앞 코가 귀여운 구두를 골라 신었다. 오늘따라 반짝반짝 눈부신 오로라

파워를 내뿜고 있는 준수 덕분에 정신이 몽롱하기까지 하다. 아... 정말 이쁘다.

Page 134: Happy Together

"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할 일 없으면 DVD 빌려 보든지. "

" 진짜 가면 안되냐. "

" 응. "

박유천이 내 주위에 있으면 꼭 무슨 사건이 터진다니까. 불안해서 못 데리고 다니겠어.

준수가 나간 후, 유천은 한참이나 거실에서 왔다갔다 거리며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이대로 준수를 따라 나설 것이냐. 그의 말대로 집에서 기다릴 것이냐.

" 씨팔! 내가 무슨 무능력한 남편도 아니고! 집에서 왜 기다리고 있어! 내가 왜! "

몇 분 생각하다가 머리 아파서 포기해버린다. 유천은 자켓을 걸치고 오토바이 키가

주머니에 잘 들어 있는지 투닥거렸다.

.

.

.

" 정리는 잘 됐어요? "

" 네. 준수 씨 일찍 나오셨네요. "

" 아무래도 저번 파티를 망쳐서 신경 쓰이니까. 이번에는 파티 초대장 일일이 검토하고

보냈으니까 불청객 들어올 일은 없을 거에요. "

준수는 웃으며 집 거실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은 완벽해 보였다. 창문을 완전히 차단하는

와인 빛의 화려한 커텐도, 거실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스테이지는 스트립 걸들을 위한

장치였다. 스테이지는 네온 조명을 이용해 화려하게 장식했고,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도록

고급스러운 침대 겸 소파를 거실 사이드에 배치해 두었다. 음악도 그들이 원하는 끈적한

슬로우 잼들로만 골랐고.

" 준수 씨. "

" 네? "

" 저... 밖에요, 경찰 오토바이가 한 대 서있거든요. 무슨 단속이라도 나오는 건가요? "

" ... 경찰 오토바이요? "

" 네. 아무래도 파티 주최인들이 경찰이나 그런 사람들 보면 불편해 할 것 같은데. 아까

부터 안 가고 계속 죽치고 서있거든요. "

내 이 놈을 그냥...! 단번에 누구인지 알아차린 준수가, 울그락불그락 해진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집에 있으라고 했는데 말 안 듣고 따라 나오지!

Page 135: Happy Together

" 박형사! "

" 어? 어.. 준수야. "

"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

아니나 다를까. 화려한 저택 앞에, 버젓이 유천이 경찰 오토바이를 세우고 앉아있다.

자판기 커피를 홀짝 마시면서. 준수는 기가 막혀서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쏘아 붙였다.

" 박형사, 진짜 스토커냐!? 나 좋다는 건 알겠는데! 일하는 데까지 따라오진 말아야지!!

사람들이 경찰 오토바이 보고 잘도 편하게 술 먹고 놀겠다! 생각이 있긴 있어?! 내가

박형사 때문에 하루 종일 불편해 하면서 일 해야 돼?! 왜 자꾸 유치한 짓을 해!? "

" 아니... 나는, "

" 들어가. 귀찮게 굴지 말고. "

" 씨... 나도 들어가 있으면 되잖아! 아무 짓 안하고 너 옆에 보디가드처럼 붙어 있기만

할게! 그것도 안 되냐!? "

" 안 돼! "

" 왜! "

순간, 정말로 짜증이 난 준수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나오는 말대로 유천에게 떠들어댔다.

" 박형사가 파티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

" .... 뭐? "

" 여기에 얼마나 대단한 집안 녀석들이 오는 줄 알어!? 무슨 의원 아들부터 시작해서

재벌집 딸들까지 모두 모인다고! 그런 사람들 틈에서 박형사가 어울릴 것 같아?! "

" 내가.. 뭐가 어쨌는데. 나는 그런 사람들이랑 어울리면 안 돼? "

" 촌스러운 가죽 자켓에, 시장표 청바지에, 닳고 다 닳은 운동화에, 내가 미쳤냐? 쪽팔리게

박형사를 나 아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게!? "

" ........ "

" 엄청 촌스럽고 구식이야! 박형사! 짜증나니까 제발 좀 가라고! "

그렇게 말해 놓고 유천이 아무 말이 없자, 그제야 자신이 좀 심했던가 입을 다무는 준수다.

그러나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길이 없어서, 그는 유천의 굳어진 표정을 살피기만 했

다. 그러니까... 누가 귀찮게 자꾸 따라 오래..

" 내가 쪽팔리냐? "

" ........ "

" 이렇게 옷 입고 다닌다고, 쪽팔리냐고. "

" ... 아니, 나는 그냥 그 옷이 이런 자리랑 어울리지 않으니까, "

" 너도 진짜 속물이다. "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유천에게, 준수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 했다.

Page 136: Happy Together

" 갈게. 일 잘 하고. "

유천은 말 없이 오토바이에 올라타 핼멧을 쓰고 시동을 걸었다. 바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가 빠른 속도로 준수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떠나가는 유천을 보면서 준수의 작은

주먹이 꼬옥 쥐어졌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나는 그냥...

" 준수 씨, 전화 받으세요! "

" 아... 네. "

이미 사라져버린 유천의 오토바이의 끝을 살피며, 준수는 집으로 들어왔다. 이제 곧 파티

가 시작되고, 아마 별 탈 없이 끝나겠지만... 그의 마음은 전혀 편안하지가 않았다. 차가운

말로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입힌 한 남자 때문에, 가슴이 돌로 짓누른 듯 답답하기만 했다.

* * *

" 논문은 잘 되가? "

" 그럭저럭. "

" 어차피 수석으로 졸업할 거, 애쓰지 말고 적당히 해. "

민정이 웃으며 자판기 커피를 내밀었다. 도서관의 컴퓨터실에서 세 시간이 넘도록 논문

에 열중하는 재중이었다. 좀 쉴 법도 한데 일어날 줄을 모른다. 민정은 한숨을 쉬면서

재중의 옆에 앉아 자신의 논문 파일을 꺼냈다. 법대 최고의 인재인 김재중과 연인사이로

발전했다는 소문이 떠돌면서, 민정은 본의 아니게 여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려야 했다.

어떻게 자기보다 더 예쁜 남자와 뻔뻔하게 CC를 할 수 있냐느니, 이제 곧 졸업이니까

바로 결혼하는 것 아니겠냐느니, 별별 말들이 다 돌고 돌았다. 그러나 정작 재중은 자신

들을 둘러 싼 소문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민정에게 아예 관심이 없는 듯 보여서 그녀는

괜히 속이 상했다.

" 우리 잠깐 나갔다 올까? "

" 어, 왜요? "

" 아니.. 너무 오랫동안 앉아있으면 엉덩이 커진대. "

" 흐음.. 그럴까나. "

그제야 재중이 일어났다. 두툼한 겉옷을 챙겨 입고 힐끗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저녁

열 시. 열 두시에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 두 시간이 남았구나. 오늘은 정윤호가 데려오지

않는다고 했지... 많이 바쁜가. 어느새 정윤호의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화들짝

놀라서 도리질을 쳤다. 미쳤어!

Page 137: Happy Together

" 재중아.. 너 요즘 괜찮니? "

" 왜요? "

" 정신적으로 불안해 보여. 혼자 있으면 멍할 때가 많고. "

"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졸업이니까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런가봐. "

사실은 멍하니 있을 때면 늘 정윤호를 떠올리곤 했다. 자신도 믿기지 않지만, 정윤호가

자신에게 안겨줬던 그 충격들이 너무나 커서 쉽사리 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유도실에서

있었던 그 일은 정말이지...

" 날씨 점점 추워진다... "

도서관 옥상으로 올라온 재중과 민정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학교 정경을 구경했다. 그렇

게 나란히 앉아있는데, 민정이 춥다며 품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가까워진 그녀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재중이 입술을 가져갔다. 그래.. 이 여자가 내 여자친구고, 나는 여자친구가

있는 정상적인 대한민국의 남자야. 혼란스러워 할 필요는 없어. 그녀의 얼굴을 잡고 깊게

입을 맞췄다. 정성을 다해서 키스했건만... 어쩐지 좋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가 않는다.

" 하아... 재중아.. "

오랜 키스 끝에 그녀가 입술을 떼고 비음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가슴팍으로 파고든

손이 재중을 조심스럽게 만졌지만.. 전혀 흥분되지가 않았다. 뭐가 문제인거지. 키스도

제대로 했고, 여자 쪽 반응도 제대로 왔는데, 어째서 나는 하나도 좋지가 않고 자꾸 다른

생각만 드냔 말이야.. 이를테면 정윤호와의 키스라든가.

" 재중아...! 사람 올라오면 어쩌려고... "

" 괜찮아요. 아무도 안 와. "

한참이나 고심하다가, 그녀를 끌어안고 두터운 스웨터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가슴이 만져지고, 민정이 당황한 듯 재중을 올려다보았다. 입을 맞춰오는 재중

의 다정한 키스에 그녀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들은 성인이었고, 곧 대학교 졸업을 앞둔

예비 사회인이기도 했다. 잠자리를 함께 가진다고 해도 무어라 할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

이다. 그러나...

왜지. 왜 아무것도 안 느껴지지.

열심히 그녀를 끌어안고 애무를 해보지만, 좋기는 커녕 오히려 뭔가 찝찝하기만 하다.

Page 138: Happy Together

남자들이야 여자의 가슴을 만지거나 키스를 할 때마다 그것이 서는 건 당연한 자연의

이치이거늘, 재중의 몸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 재중아....? "

" ... 미안해요. 추운데 그만 들어가자. "

재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민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뭔가 부끄러운 마음에 그녀가

얼굴을 붉히고 옷을 추스렸지만, 재중의 표정은 그닥 감흥도 없었고 좋아 보이지도 않는다.

습관처럼 그녀에게 팔을 두르고 옥상의 문을 열었다.

" .....! "

저 남자가 지금 여기 왜 서있어. 윤호가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느긋한 표정으로 재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온 몸이 굳어져 버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 안 내려가? "

" ...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누나 먼저 내려가 있어요. "

" 응. 빨리 내려와. "

민정은 웃으며 재중의 볼을 쓰다듬고는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민정이 가고 재중과

윤호 둘만 남게 된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 사람 심어 놨지. "

" 응. "

" 나 뭐하는지, 어디서 누구랑 있는지, 일일이 너한테 보고하는 거냐? "

" 응. "

" 왜 그딴 짓을 해? 내가 도망가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말 했잖아! "

" 니가 이따위 짓 할까봐. "

" 뭐? "

" 그 년이랑 키스 하니까, 좋았어? "

아니! 하고 대답이 튀어나올 뻔했다. 전혀 좋지 않았어. 분명히 내 여자친구고, 내가 좋아

서 사귀기로 한 사람인데 키스를 하든 가슴을 만지든 전혀 좋지가 않았다고. 그래서 내가

혼란스러워. 네가 내 입술을 후벼팠던 그 시간들이 잊혀지지가 않아서 누구랑 뭘 해도 좋

지가 않고 감흥도 안 생겨. 나 어떡해야 돼?

" 내 생각 났지. "

" ........ "

Page 139: Happy Together

" 내 생각 나서, 아주 미치겠지. "

" 응. "

이번에는 말이 튀어나오는 대로 냅뒀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재중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버려두기로 했다. 내 자제력을 떠난 입이 혼자서 뭐라고 떠드는지.

" 그래서 너랑 한 번 더 하고 싶어. 뭐가 문제인지 모르니까. "

가만히 서있는 재중의 손목을 잡고, 윤호가 근처의 아무 손잡이나 돌렸다. 이미 시간이 지

나 폐쇄 되어버린 자료열람실의 문. 열리지 않자 윤호가 우왁스럽게 손잡이를 뜯어버렸다.

" 미친놈. "

대롱대롱... 은색 손잡이가 윤호의 손 위에서 비참하게 망가져버렸다. 구멍 난 손잡이 부

분에 손을 집어넣어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자료열람실 안은 냉기가 가득하다. 저 쪽

까지 거대하게 늘어선 책장들이 무서워 보이기까지 하다. 물론, 현재 이 남자보다 무서운

것은 재중에게 없겠지만. 아무도 없는 도서관은 이런 분위기구나. 커텐 사이로 새어드는

달빛이 책장을 비추고, 길게 늘어선 책장의 그림자가 그들을 맞이했다. 괴기스럽기까지

한 그 도서관에서, 윤호는 재중을 책장 사이로 데려가 일단 입을 맞췄다.

" 도서관에서 키스 해봤어? "

" 아니. 난 학교 다닌 적 없어. 이런 곳에서 공부했던 적도 없고. "

너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분명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할만큼 드라마틱한 삶이었겠지. 재중

은 허옇게 드러난 달빛 사이의 윤호를 바라보았다. 괴기스러운 책장의 길쭉한 그림자들

사이에서, 이 남자는 마치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묘하게 이질적이다. 그건 재중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붉은 재중의 입술을 보며, 윤호는 자신이 매혹된 김재중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만끽해야 했다. 그러다가, 참을 수 없어서 입을 맞췄다.

재중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입술을 삼키

고 또 삼켰다.

끼익,!

책장이 움직이는 걸 처음 보았다. 기분나쁜 소리를 내며 책장이 반쯤 밀려났다. 윤호의

팔 힘에. 화들짝 놀라서 괜히 주위를 살피지만,

" 아무도 안 와. "

" 누가 보면... "

"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면 되지. "

Page 140: Happy Together

" 너는 그런 소리 좀 작작해. 네가 말하면 다 진담처럼 들려서 무서워. "

" 진담인데. "

이런 시시껄렁한 대화를 할 사이가 없다며, 윤호가 다시 입을 맞춰왔다. 뭐가 다른지 이제

야 알 것 같다. 그녀는 내가 원하지 않았고, 이 남자는 내가 원해. 그래서 키스가 다른거야.

재중이 입고 있던 스웨터를 목까지 끌어올린 윤호가, 벗길테니 손을 위로 번쩍 들어보랜다.

힙합 콘서트도 아니고, 뭐가 손을 머리 위로 컴온이야!

" 벗기지마. 다시 입기 귀찮아. "

같잖은 이유로 옷 벗기를 거부한 재중이, 키득대는 윤호의 웃음을 애써 무시한채 다시 입

술을 찾았다. 이 남자와 키스하고 있으면 내가 내 자신이 아닌 것 같다. 그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답답하고 짜증나는 일상에서 탈출하는 기분이야. 응..

그 정도.

자연스럽게 재중의 버클로 손을 가져간 윤호가, 순식간에 바지를 벗겨 내렸다. 사락,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바지가 창피해서 다리를 오무리는데 그의 손은 집요하기만 하다. 잠깐만,

을 외치는 재중과 개의치 않고 손을 놀리는 윤호의 실랑이가 계속 되었다. 결국엔 후들거

리는 다리를 윤호에게 의지한 채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가쁜 숨소리를 뱉어내는 재중의

패(敗). 열에 달아오른 재중의 얼굴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던 윤호가, 조금 더 몸을 가까이

밀착시켰다.

끼익,!

" 힘 좀 빼. "

" 책장이 약한거야. "

달빛에 드러난 허연 허리를 끌어안고, 윤호가 입을 맞추며 자신의 바지 버클을 풀렀다.

냉기가 가득한 도서관 안에서 뜨거운 것은 오로지 그 둘의 두 다리. 한 쪽 다리를 재중의

다리 사이로 밀어넣은 윤호가, 책장에 손을 얹고 다시 몸을 밀어 붙이는데,

끼이익,!

조금 더 거친 소리를 내며 책장이 저만치 물러선다. 넌 뭘로 만들었길래 이렇게 약해빠졌니.

" 에이, 씨발! "

" 나와. "

Page 141: Happy Together

재중의 바지를 다시 올려 입힌 그가, 자신의 바지도 추스리며 재중의 손을 잡고 도서관

바깥으로 향했다. 바닥에 널부러진, 망가져버린 문고리가 보인다. 아예 대각선으로 밀려나

버린 커다란 책장도- 하하... 하고 재중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윤호는 불만스럽게

답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계단으로 내려왔다. 아직 재중의 옷과 가방과 책들이 컴퓨터실에

남아있겠지만 아무것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미처 저장시켜놓지 못한 논문이 주인을 기다

리고 있겠지만 그것마저 상관 없다. 기다리고 있을 민정은 더더욱.

" 뛰자. "

하긴, 둘 다 급하긴 했다. 아마도 윤호의 차에 올라타자마자 적당한 곳으로 차를 몰아놓고

그대로 시트를 뒤로 젖혀버릴 그들이었다.

* * *

파티는 별 탈 없이 치뤄졌다. 아니, 이것이 탈 없는 파티라고 말 할 수 있는 건가. 준수는

자신의 눈 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애써 외면하며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 거렸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거실의 스테이지로 스트립 걸들이 요란스럽게 쇼를 하며 슬로우 잼 음악에

리듬을 맞췄다. 바닥에서 뒹굴고, 소파에 엎어진 정신 나간 남녀가 제멋대로 엉켜들면서

보기에도 민망한 장면들을 연출했다. 애초부터 이런 식의 파티가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앞에서 겪으니 견디기가 힘들다.

준수는 조용하고 아담한 파티를 좋아했다. 파티 플래너 공부를 하면서도, 늘 그런 파티

를 기획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일만 찾아서 할 수 없는 게 현실이지만,

지금 이 광경은 파티라기 보다는 미친놈들 집합소 같아. 꺄악, 거리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짜증스럽게 들려왔다.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바닥에 그냥 오바이트를 해대는

여자부터 시작해서, 정신 차리지 못하고 소파에 엎어져 헤롱거리는 남자까지.. 좋은 집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살아왔으면 적당히 성공 가도를 달리며 원하는 일을 찾아 할 수 있을

텐데, 왜 저렇게 더럽게들 사는 걸까. 준수는 한숨을 쉬며 옆에 놓여진 위스키를 살짝

마셨다.

" 들어오시면 안 된다니까요! "

워낙에 시끄러워서 처음에는 실랑이 소리를 잘 듣지 못했다. 준수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활짝 열려진 현관 앞에서 자신의 어시스트들이 정체 불명의 남자들을 막아내며 준수를

부르고 있었다.

" 준수 씨! 이 사람들 좀 막아봐요! "

" 무슨 일이십니까? "

Page 142: Happy Together

급히 달려온 준수가, 어시를 떼어내고 앞에 섰다.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한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 김준수 씨? "

" 그 쪽은..... "

" 저번에 뵌 적 있죠. 서울중앙지검 강력 1반 담당 검사 심창민입니다. "

" 아.... "

" 실례지만, 그 쪽 직업이 파티 플래너라고 들었습니다. 이 파티 기획한 사람이, 준수씨

맞으신가요? "

" 예... 그렇습니다만, "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창민이 수사 영장을 꺼내며 뒤로 늘어선 경찰들에게

눈짓을 했다.

" 마약 파티를 한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비켜주세요. "

" ... 무슨 파티요? "

준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창민의 지휘에 따라 경찰과 형사들이 우르르 저택 안으로 몰려

들었다. 꺄아악,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거실이 온통 난장판이 되었다. 거의 벗은 몸을 가

리며 스테이지에서 내려오는 스트립 걸들과, 술에 탄 마약을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 소파

에서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며 엎어져 버렸다.

" 모두 체포해. "

" 잠시만요! 마약이라니...! "

아직도 약에 취한 건지 덜덜거리며 바닥에 엎어진 남자의 품 안에서, 창민이 봉투 하나를

꺼냈다. 하얀 가루가 가득한 봉투. 창민은 입구를 열어 가루 냄새를 살짝 맡아본 후, 고개

를 끄덕이더니 옆에 서 있는 형사에게 내밀었다.

" 증거 자료로 채택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체포하고, 마약들 모두 압수해. "

모두가 취해 있었기 때문에 체포는 어렵지 않았다. 준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기지 못

하고 주저앉았다. 마약이라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사람들이 미친놈 처럼 뒹굴면서

소리지르고 웃고 떠들어도, 그저 술에 취한 거려니 생각하고 신경쓰지 않았다. 하얀 가루

를 술에 타는 것을 보았지만, 외국에서도 최음제 같은 약들을 술에 타서 자기들끼리 즐기

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기획한 파티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어서.. 준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끌려나가는 고용인들 바라보기만

Page 143: Happy Together

했다.

" 준수 씨, 죄송합니다만 함께 가주셔야 되겠습니다. "

" ... 네? "

" 이 파티를 기획한 사람이라면, 파티의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있을 게 아닙니까.

마약 파티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셨나요? "

" 저는.... "

" 함께 마약을 복용하거나 한 적은 없구요, 그저 파티만 관리했습니까? "

" 안했어요...! 저는... "

" 일단 함께 가시죠. "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손이 뒤로 꺾여지며 수갑이 채워졌다. 처음 당해보는 이런

일에 적응이 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을 죄인 취급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두려움이 앞섰다.

저번에 보았던 창민이라는 남자는, 그 때 당시만 해도 예의바르게 자신의 손해배상 청구에

대해 친절하게 응해 주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냉정한 눈길로 자신에게 범죄 혐의를 묻더니

일단 함께 서까지 가자며 준수를 밖으로 끌어냈다.

" 저는 아무 것도 안했어요...! "

" 그건 가서 얘기합시다. 일단 가서 마약 테스트를 받아보고, 양성인지 음성인지 그것부터

확인할 테니까. "

" 저는 아무것도... "

" 이 마약 파티의 총 기획자가, 그런 소리를 하면 누가 믿어 줍니까. "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 그 생각에 온 몸의 힘이 빠졌다. 억지로 경찰차에 올라타

닫혀지는 문 사이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어디에도 유천은 없었다. 왜 지금 이 순간, 그가

이다지도 보고싶은지 모르겠다. 만약 박유천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더 묻지도 않고 나를

믿고 꺼내주었을 텐데.

" 흐.. 박형사.... "

" 박형사? "

앞좌석에 올라탄 창민이, '박형사' 라며 울먹거리는 준수의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 남자가 부르는 '박형사'가, 자신이 아는 그 박유천이 맞는지. 맞다면 왜 이런

상황에서 유천을 부르고 있는 걸까. 서럽게 흐느끼는 준수를 보고, 괜히 안쓰러운 마음에

창민이 입을 열었다.

" 박유천 형사와 아는 사이에요? "

" ... 흐읍... "

" 박형사, 이번 사건에서 빠졌어요. "

" 박형사... 박유천 형사... 흐윽... 박형사 불러줘요... "

Page 144: Happy Together

왜 울면서 박유천을 찾는 걸까. 창민은 복잡한 머리를 정돈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일단은

서로 데려가 마약 테스트를 받아 보고, 수사해야겠지만... 뒤에 앉은 저 남자는 대담하게

마약이나 복욕할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 저번에도 강력반까지 손수 찾아와서, 자신의 일을

망쳤다는 이유로 1억이라는 말도 안되는 금액을 청구한 당돌한 남자가 아니던가. 일단은

안면을 튼 사이기 때문에, 창민은 다른 용의자들보다 준수를 조금 더 조심스럽게 다를 수

밖에 없었다.

" 울지 마요. 죄 없으면 금방 풀려나요. 그냥 조사만 받는 거야. "

" 흐으윽... 저 아무것도 몰라요.. 진짜 마약.. 이런 거 하나도 몰랐다구요... "

" 그건 서에 가서 얘기하고, 일단은 울지 마요. 사람 마음 약해지게. "

정말 서럽게도 운다. 손이 수갑에 채워지는 바람에 눈물도 닦을 수 없는 준수가, 콧물까지

흘려가며 엉엉 울어댔다. 창민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일단은.... 저 남자가 찾는

박유천에게 전화를 걸어 볼 셈이었다.

" ... 박형사, 지금 어디야? 여기 마약 파티 현장 검거하고 용의자들 죄다 잡아서 가는 중

인데, 그 중 하나가 자꾸 너를 찾네. "

창민의 전화통화를 들으며, 준수가 쏟아지는 울음을 억지로 참았다. 빨리... 빨리 와. 빨리

와서 나 죄인 취급 하는 이 사람들 혼내주고, 나 이 수갑 풀러줘. 박형사..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11

윤호의 차는 목적지도 모르는 길로 들어섰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어서, 재중은 불안

한 눈초리로 윤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까 전이야 제대로 ‘Feel’을 받은 터라 자신도

모르

게 윤호에게 먼저 들이대는 꼴이 되어버렸지만, 막상 상황이 닥쳐오자 마음이 또 다르다.

흥분이 가시고 제정신을 차리자, 도서관에 두고 온 논문부터 시작해서, 이유도 없이 사라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민정도 염려되었다.

게다가 이 남자와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도서관에서 뛰쳐나왔는지 확실하게 머리가 인식하고

있기에, 당황스러움은 배로 더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미친 정신으로 정윤호에게 키스하고 그 이상의 것을 허락한 채 이 차에

올라탄 거지.

Page 145: Happy Together

“어디 가?”

“일단은 저택으로.”

“아까는 차에 타자마자 할 기세더니.”

아뿔싸. 자꾸만 말이 자제력을 잃고 튀어나온다. 윤호는 적당한 소리로 웃더니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오디오 버튼을 눌렀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온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음악이다 싶더니,

재중이 예전에 해외 리사이틀에서 공연했던 곡이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화려한 현악기들에 둘러싸여 재중의 연주는 누구보다 빛났다.

생각해보면 사치스러운 날들이었지.

뉴욕까지 날아가 유명 피아니스트들과 어울리며 연습생으로 커다란 무대에 서기도 했고, 개인

리사이틀을 열기도 했었다.

그 때 쏟아졌던 찬사는 아직도 재중의 머릿속에 생생하다. 아마 재중의 집안이 끝도 없이

유복했으며, 지금처럼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피아노를 치고 있을지도 모르지. 재중은 자신의 손가락이 하얀 건반에서 춤을

추고 있는 그 짧은 순간을 사랑했었다.

“피아노 칠 때, 예뻐.”

“뭐?”

“머릿속에서 악보를 그려내느라 눈동자는 허공을 응시하고, 입술은 반쯤 열려져 있거나 굳게

닫혀져 있고, 숨소리는 일정하지만 가끔 빠른 박자를 따라 가빠지고, 손가락은 정확하게

하얀

건반과 검은 건반 위를 짚어내고... 가끔가다 선율에 맞춰서 눈을 감고 살짝 미소 지을 때도

고.”

“... 누가?”

“글쎄.”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던 윤호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서 다른 한 손은 재중의 무릎

위에 얹었다.

재중의 허벅지는 윤호의 손바닥 안에 꽉 들어찰 만큼 가늘었다. 자기 자신도 놀랄

지경이었다. 그세 뭘 그렇게 못 먹어서 이렇게 살이 빠졌지.

부실한 하체에 대한 걱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윤호의 손이 자꾸만 허벅지를 타고

올라와 재중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치워.”

“릴렉스 좀 해. 너 엄청 긴장하는 거 눈에 다 보인다. 귀여운 놈.”

어느새 검은색 재규어가 그들의 거리로 들어왔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거대한 검은색

철문으로 막아져 있었고,

Page 146: Happy Together

조직원들이 교대로 밤을 새워가며 들어오는 차량을 일일이 검색하는 시스템이다. 그들은

윤호의 차를 보고 딱히 검색할 시늉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재중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조직원들의 태도에, 재중은 심히 혼란스러웠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이 조직의 간부급이 된 기분이랄까.

“사람들이 다 나를 보면 인사하더라.”

“그래?”

“왜지. 난 니들이 말하는 신참인데.”

“내가 말했잖아. 힘이란 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갖게 되는 거야.”

“이상하게 너가 내 곁에 있으면, 모두가 고개를 숙이는 기분이 들어.”

“그래서, 기분이 어떤데?”

“묘해. 아주 이상해.”

마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인생이 결정된 기분이랄까. 애초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식으로, 낮선 곳에서 들어온 이방인인 나를,

조직원들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대하지.

“내려.”

친절히도 윤호가 재중의 차 문을 열어주었고, 그는 어색함을 느끼며 차에서 내렸다. 차에

올라탈 때만 해도 서로 열에 들 떠 일이라도 치루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정윤호는 인내심이 강했으며 이성적으로 판단할 줄 알았다. 만약에 그대로 차

안에서 시트를 젖혀놓고 충동적으로 일을 쳤다면 어땠을까.

재중은 한숨을 쉬며 윤호의 뒤를 따라 타박타박 걸었다. 거대한 중앙 저택의 앞에 서서,

윤호는 자연스럽게 재중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매섭게 쳐냈지만, 윤호는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재중의 허리를 단단하게

감았다.

“한국에 왔을 때.. 하고 싶었던 일이 두 가지 있었어.”

그의 넓은 시선은, 자신의 조직원들이 사는 드넓은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이런

평범한 주택가를,

뉴욕에서 단체로 이주해 온 마피아들의 새 터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한국에서.

재중은 다시 한 번 정윤호의 거침없는 스케일에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중앙 저택에서 동네를 한 눈에 바라보았던 적은 처음이다. 은은하게 불이 켜진 가로등

사이에서, 아담한 크기의 저택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는 모양새는

아름다웠다. 마치 외국의 한적한 주택가를 연상시키는 그런 모습. 서늘한 바람 사이로

이국적인 향기가 느껴진다. 그건, 오랜 세월을 타지에서 살았던 이 남자 때문일까.

Page 147: Happy Together

“뉴욕에 있을 때, 우리는 맨하튼의 파크 에비뉴에 살았다. 세계 최고의 도시였지만, 우리는

한 번도 마음 놓고 편안하게 살았던 적이 없었어. 내 조직원들은 모두 지하에 은둔해야

했고,

그나마 나와 간부들만이 비밀리에 지어진 맨션에서 살았어.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왜냐면

두가 갈 곳 없는 자들이었거든. 나를 비롯해 우리 조직원 모두가, 버림받아 최후로 발을

딛은

곳이 한인 마피아라는 불법 조직이었으니까. 죽을 때까지 사회에서 떳떳하게 살 수 없는

사람

들인데... 잠을 자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집은... 잘 지어주고 싶었어. 뭐, 내 자존심이기도

고.”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재중은 자신과 윤호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다. 무언가

딱히 정의내릴 수 없는 관계다.

그는 아버지의 빚 대신 자신의 능력으로 조직에 봉사하기로 한 재중의 감시자이자, 정확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직의 간부이기도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재중에게 본능적인 끌림과 몸으로 열망하는 법을 가르쳐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래, 나는 이유도 없이 이 남자에게 끌리고 있다. 그러나 굳이 이유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배우는 법학처럼,

모든 것이 이론적이고 원인과 결과가 뚜렷한 것이 사랑이라면.. 사람들은 그토록 평생에 걸쳐

사랑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테지.

때로는 설명으로 불가능한, 제어가 불가능한 감정선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굴복해버린다.

지금의 나처럼.

“제이 에비뉴. 난 그렇게 부르고 있어. 우리들이 사는 비밀스러운 이곳을. 이 작은 도시를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나는 행복했다. 처음으로 평범함을 누리는 그들의 모습이 좋았어.

사람

들은 결국 이런 거야. 제 한 몸 누울 수 있는 집과, 세 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밥... 그

단순한

것들을 위해 살아가. 우리도 마찬가지야.”

“깡패 새끼 주제에 입은 살아서.”

재중의 비웃음에도, 윤호는 화내지 않았다. 그저 웃음으로 일관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동네, 제이 에비뉴는 조용했다.

“나머지 하나는 뭐야?”

“나머지?”

Page 148: Happy Together

“한국에 왔을 때, 하고 싶었던 일이 두 가지 있었다고 했잖아.”

“아... 그거.”

그는 대답이 없었다. 재중이 재촉하려는 찰나, 뒤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서 있었다.

처음 재중에게 보스라고 거짓 소개했던 남자, 윤호의 참모다.

“... 보스.”

윤호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당황해 자신의 뒤로 숨는 재중의 모습이

그저 즐거울 뿐이다.

내가 이제와 너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너는 어떨까. 아마도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내 뺨을

내리치고, 왜 거짓말을 했냐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겠지.

하지만 나는 아직은 저 자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아직은, 너의 옆에서.

“언제 네 자리로 돌아올 거냐.”

“글쎄요.”

“편안하게 지내는 건, 지금까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장난은 그만 두고 그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뜻이다. 윤호는 자신의 뒤에서 알아듣지

못할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재중을 힐끔 바라보았다.

너를 내 세상 안으로 초대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너는 이제 막 내 세상에

적응하기 시작했어.

“... 그에게 아직 벅차요.”

“그래... 그렇게 보여, 나에게도.”

윤호와 그 남자가 마주보고 웃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으리라.

“무슨.. 뜻이야?”

“너는 몰라도 돼.”

윤호는 재중에게 웃어 보이고, 완벽한 거짓말을 위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Page 149: Happy Together

김재중, 내가 왜 아직까지 너에게 거짓말을 하는 줄 아냐. 네가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야. 내가 네 앞에서 보스로 돌아가는 순간,

너는 만인 앞에서 내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텐데, 이 땅에 뼈를 묻고 나와 함께

살아가기에... 너는 아직 준비가 덜 되어있어. 내가 말했지.

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갖게 되는 거라고. 강하거나, 혹은 아름답거나. 너는 아름답기에

내가 택했고, 그로 인해 힘을 가졌다.

그러나 네게는 그 모든 것이 벅차기만 하겠지. 그래서 나는 기다리는 거야. 네가 스스로 내

세상에 익숙해지고 나를 사랑할 때까지.

그래서 네 발에 네 손으로 족쇄를 채워서 내 곁을 떠나지 못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제이 에비뉴야?”

“응. 정윤호, 김재중. 이니셜을 찾아보니까 공통적으로 J가 들어가더라.”

“.... 장난치지 말고.”

“진담이야.”

이 도시, 모든 것이 너의 것인데 너는 아직 모르지.

* * *

유천은 아주 뒤늦게야 도착했다. 그 사이 준수는, 엉엉 우는 바람에 진술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태어나 난생 처음 강력반으로 끌려와

취조실에서 험상궂게 생긴 형사들을 맞닥뜨리려니, 울지 않으래야 안 울 수가 없었다. 이

남자들에 비하면 유천은 그야말로 곱상한 도련님 중의 도련님이지.

준수는 자신에게 고함을 지르며 이름을 똑바로 대라는 형사의 매서운 눈초리에 완전히

얼어버렸다. 자신은 분명히 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들은 자신을 죄인처럼 대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실제로 죄를 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누가 너보고 범죄자래?! 그냥 진술만 제대로 하고 죄 없으면 돌려보낸 대잖아!”

“저는... 저는.....”

“아, 놔, 돌아버리겠네!”

남들 앞에서 당당하고 도도하게 행동했던 것은 뉴욕으로 유학 갔을 때 생긴 태도였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새 세상에서,

한국에서의 끔찍한 악몽은 모두 잊고 새 출발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신병 따위는 앓지 않는

부유한 집안의 도련님처럼 행동하고 다녔다.

내면에 바스러진 알맹이를 감추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이렇게 가끔씩, 알맹이가

껍질 사이로 튀어나와서 어느새 겁에 질린 자신을 보곤 한다.

“어, 박 형사!”

Page 150: Happy Together

그 말에 준수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취조실 문이 열리고 유천이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을

마주보고 있던 험상궂게 생긴 형사에게 무어라 속삭이더니,

자신이 대신 취조실 의자에 앉았다. 문이 닫히고, 취조실 안에는 유천과 준수. 단 둘 만이

남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내가...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유천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라이더 자켓을 벗어놓고, 가볍게 걸친 티셔츠

차림으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그리고는 눈을 치켜뜨며

준수에게 형식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이름.”

“... 뭐?”

“네 이름.”

“박 형사... 왜 그래... 나,”

“일단 취조실에 왔으면 혐의가 있다는 거고. 혐의가 있는 사람은 그 누구든 봐주지 않고

기본

절차를 거치게 되어있어. 그러니까 다른 소리 말고 이름 말해.”

“.... 김.. 준수.”

늘 다정다감했고, 자신 앞에서 어리버리 하느라 바보처럼 보였던 박유천이 아니었다. 그는

형사였다. 준수는 가끔 그 사실을 잊어버렸지만,

취조실에 앉아있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한 형사였다. 마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도.

싫어, 그런 눈은. 나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는데 그렇게 보지 마.

“나이.”

“... 박 형사, 제발 그만 하자.”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거든.”

“... 스물다섯.”

“거주지.”

“.............”

“거주지.”

너무 서러워서, 울음이 터졌다. 유천이 이럴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얼어버린 채 대답도

하지 못하고, 유천이 달려와 자신을 구해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유치하게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신이 현재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유천이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Page 151: Happy Together

준수의 기대를 외면하고 다른 형사들처럼 준수에게 형식적인 취조만을 요구하고 있었다.

“... 그럼 이건 다음에 하기로 하고.”

“박 형사...”

“처음에 이 파티 기획을 제의받았을 때, 마약 파티인지 알고 있었나?”

“........”

“아니면, 기획 도중에 안 건지, 아니면 파티 도중에 안 건지, 알았다면 왜 검찰에게

연락하지

않았지? 대한민국에서 마약 복용이 얼마나 큰 범죄인지 알 텐데. 게다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스트립 걸까지 불러서 요란스럽게 하는 마약 파티는 대담한 범죄 행위야. 알고 있어?”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김준수,”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라. 정말 아무것도.....”

“... 김준수?”

“나는 아무것도 몰라. 정말 몰랐어. 제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이 그렇게 되어 있었어.

나한테는

죄가 없어. 나는 정말 잘못한 게 없어. 난 잘못없어. 나는.. 나는 아무것도....”

“.... 준수야....!”

“나는... 나는.... 잘못이....”

머리가 혼미스럽다. 악몽 같은 지난날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지배한다. 준수는 양 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고 ‘난 아무것도 몰라, 난 잘못이 없어’식의

말만 중얼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안 유천이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준수에게 다가왔다. 준수야, 준수야!

그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이미 준수는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미친 듯이 중얼거리던 그의

입이 멈추지 않는다. 준수의 두 어깨를 거칠게 잡고 흔들어 보아도,

그의 중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유천은 준수를 끌어안고 머리를 토닥거렸다. 알았어. 너

아무것도 잘못한 거 없어.

그렇게 속삭여도, 준수는 끊임없이 울음을 토해내며 자신이 무죄임을 입술로 나열했다.

“흐으윽.... 나... 나...”

“그래.. 그래, 준수야...”

“...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완전히 젖어버린, 그러나 비어있는 멍한 눈으로 준수가 유천에게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괜찮아?”

“아직.. 안 일어났어요.”

Page 152: Happy Together

“엄청 여린 놈인가 보네. 그냥 혐의만 조사받는 건데 기절이라니.”

“그러네요... 온갖 독한 척은 다 하더니...”

“잡혀온 새끼들 족쳐보니까, 파티 플래너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아. 그들은

철저하게

자기들끼리 즐기는 주의라서, 이방인은 절대로 들이지 않는다더라. 아마 김준수란 남자는 정

말로 몰랐을 거야. 실수로 마약을 입에 댔는지 안 댔는지는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아마

성 반응이 나와도 법적으로 처벌받지는 않을 거야.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는 복용은 죄가

되지

않으니까.”

“후우,”

유천은 답답한 마음에 담배 연기를 창밖으로 내보냈다. 벌써 몇 개를 태우는데 준수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준수가 기절하기 전, 자신이 너무 심하게 다그쳤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가시질 않는다.

“검사님은... 좀 쉬세요. 여기는 제가 지킬게요.”

“안 그래도 나가봐야 해. 조사해야 될 부분들이 있거든.”

“준수 깨어나면 집에 데려다 줄게요.”

“... 언제부터 그렇게 친한 사이가 됐어?”

창민은 미묘한 표정으로 준수와 유천을 번갈아보았다. 강력반에 손해배상청구액을 들고 올

때만 해도, 준수는 유천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 났었다.

유천도 아무것도 모르고 바락바락 대드는 준수를 조그만 생쥐 보듯 쳐다보듯 보았고. 그

이후로는 전혀 만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들이 있었길래 박 형사를 불러줘, 준수를 집에 데려다 줄게요, 하며 그리도 절친한

사이가 되었을까.

“흐음... 일단 나가 있을게. 이 사람 깨어나면 잘 마무리하고 나한테 콜 해. 이번 사건에서

의심

되는 부분이 몇 있으니까.”

“그럴게요.”

창민이 나간 후, 유천은 잠든(혹은 기절했거나) 준수의 곁에 털썩 앉았다. 눈물이 말라붙은

볼이 안쓰러워 죽을 지경이다...

후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다그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이 썅놈의 박유천...!

준수가 자신을 몰아붙이며 차가운 말들로 상처줄 때, 유천의 마음속에는 온갖 복잡한 생각이

다 들었다. 자신이 반한 김준수라는 남자가,

고작 사람의 옷차림으로 위치를 판단할 만큼 골 빈 남자라는 생각에 속이 상했고, 너무

신경이 예민한지라 그랬을 거라는 자기 위로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Page 153: Happy Together

그래도 준수의 그 말은 너무 심했어. 늘 자신을 그렇게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남자로 봐왔던

걸까. 그래도 나는 언제나 내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준수에게는 사람의 진심보다, 입고 있는 옷이나 사회적 지위 따위가 더 중요한 부분인가.

내가 과연 김준수와 어울리는 남자인지... 유천은 심히 고민해야 했다.

“빨리 일어나자....”

준수의 메마른 볼에 자신의 볼을 맞대고, 유천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창민의 전화를 받고

취조실로 뛰어오면서 복잡한 상황 속에서 홀로 남아있을 준수를 걱정했다.

그러나 막상 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의자에 앉아 겁먹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온갖 잘난 척은 다 하면서 자신을 차갑게 쫓아버리고,

이제와 자신을 부르며 빨리 빼내달라는 그의 이기심도 미웠다. 그래서 괜히 냉정함으로

위장한 얼굴로 그에게 되도 않는 객기를 부렸다.

그거 봐. 그러기에 지켜준다고 했을 때 말 잘 듣고 나를 곁에 두지 그랬어. 꼴좋다.

비웃어주며 조금 더 혼내보려고 했었는데....

빌어먹을, 난 이렇게까지 충격 받았을 줄은 몰랐어.

“정신이 들어?”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단 둘 뿐인 휴게실의 정적이 깨진 것은 한 시간쯤이 지난 후였다.

자신이 여기 왜 누워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 준수가,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유천을 바라보았다.

“박 형사....”

뒤는 생각하지 않고 안아버렸다. 포옥... 품 안에 들어오는 작은 몸에서, 그만의 향기와

더운 체온이 느껴진다. 미안해, 준수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유천이 말했다.

괜한 객기 부려서 미안해. 어차피 이렇게 내가 너한테 져버릴 거, 되도 않는 심술 부려서

미안해...

“너 아무 잘못 없대.”

“........”

“아무것도 몰랐잖아, 그치?”

“응....”

“너는 그냥 네 일만 한 거잖아.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맞지?”

“...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아무도 안 믿어줘서....”

“누가 그랬어. 내가 다 패버릴까? 죽탱이 날려줘?”

Page 154: Happy Together

아무튼 저 입버릇 하고는. 다시 울먹거리려던 준수가, 눈을 흘기며 유천의 어깨를 밀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남자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하고 보내버렸는지 죽도록 후회했다. 유천마저 자신을 믿지 않고

의심할까봐, 심장이 오그라들어 없어지는 줄 알았다.

“다른데 가지 마.”

“응.”

“여기만 있어.”

“응.”

너가 그렇게 하라면 그렇게 할게. 따뜻하게 웃는 그 미소가 좋아서, 준수는 유천의 어깨를

어안았다. 자신의 목덜미에 와 닿았던 유천의 얼굴이 돌려진다 싶더니, 미숙한 그 솜씨로

어색하게 턱을 잡고는 얼굴을 살짝 비틀어 그에게 다가갔다.

잠에서 방금 깨어난 유천의 더운 입김이 준수를 적셨다. 여전히 그의 키스는 어렸지만, 받는

기분만큼은 어리지 않았다. 열심히 입 맞추는

유천의 눈 감은 얼굴을 훔쳐보며, 준수가 슬쩍 웃어버렸다.

* * *

창민의 주도로 잡아들인 마약 파티의 주범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집안의 자식이었고, 덕분에

언론사에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마약 복용 혐의자들을 구속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사회적으로도 큰 이슈가 되었다.

국희의원들과 대기업의 총수들이 서울중앙지검으로 직접 납시었고, 아직도 약에 쩔어

헤롱거리는 자신의 자식들을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언론에 해명하기 바쁜 그들을 보며, 창민은 한숨을 쉬었다. 언론들은

부유층의 자제들이 어째서 마약을 복용 했는가 보다는,

그들의 파티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며 어떤 대단한 집안의 자식들이 모였느냐에 더 초점을

맞췄다. 몇 시간동안 이어진 인터뷰에 응한 후,

창민은 그제서야 타이를 느슨하게 푸르며 문을 닫았다.

“Tox mapko라...”

증거품으로 제출된 마약은, 분명히 대한민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마약이지만

국내에는 아직 유입되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마약인데... 그들은 이것을 복용하고

있었다.

Page 155: Happy Together

- 뉴욕에 있을 때부터 피웠던 거에요.

- 어떤 루트를 이용했지? 누구에게 받았어?

- 전... 잘 몰라요...

홍초파와 화상파가 유입하던 마약은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알약 형태의

엑스터시였는데. 도대체 어떤 루트를 통해서 거래한 거지.

창민은 마약을 취조를 담은 녹음테이프를 다시 돌렸다.

- 뉴욕에 있을 때부터 알던 거래상들이 있었어요....

- 어떤 거래상,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그들과 연락했나?

- 아니요... 저는... 그냥... 들었어요...

- 뭘?

- 그들이 한국에 왔다고.... 뉴욕에 있는 제 친구가 알려줬어요... 한인 마피아 집단...

저희가

마약을 구했던 그 거래상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모두 한국으로 갔다고 했어요...

- 한인... 마피아?

- 자세한 건 몰라요... 저는...

한인 마피아라. 들어본 적은 있다. 뉴욕의 거대한 암흑가에, 한인들로만 이루어진 마피아

집단이 몇 있다고 들었어. 모두가 한국인들로 이루어져있으며,

마약상과 총 밀매로 어마어마한 부를 끌어 모았다고. 그런데 어째서 그들이 한국에 와있다는

거지.

- 그 마피아의 거래상이.. 저에게 연락했어요.. 저는 뉴욕에 있을 때도 그 사람을 통해서

모든

마약을 구했는데... 제가 한국으로 귀국한 것을 알고.. 그 사람이 먼저 연락했어요....

- 뭐라고?

- 자신들도 한국으로 옮긴다고... 그러니까... 다시 한국에서 만나자고...

-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 자세한 건 전 몰라요.. 저는 그냥 마약을 구하려고.... 그냥.. 그냥...

치익,

테이프를 끄고, 창민은 의자에 앉아 가죽 시트에 깊숙이 머리를 기댔다. 단순한 마약 파티인

줄 알았는데, 그들의 입에서 뜻하지 않았던 얘기를 들었다.

한인 마피아 집단.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베일에 싸인 집단.

그들이 한국에 왔어요. 한국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뭐하는 새끼들이야.....”

Page 156: Happy Together

어쩐지, 만만치 않은 사건일 듯한 느낌이 든다. 부유층 자제들을 구속함으로 언론에 마약 복

용에 대한 사건을 대대적으로 다루고 싶었다. 그래서 마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

이번 사건의 최종 목적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그들이 마약을 거래한 루트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조직의 것이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마피아라. 창민은 쓴웃음을 지으며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 작성하기 시작했다

* * *

“이게 네 방이야?”

탄성을 금할 길이 없었다. 윤호가 재중을 데려간 곳은 분명 ‘방’이라고 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중이 보고 있는 것은 거대한 팬트하우스를 연상시켰다.

주위는 모두 엔틱한 분위기였다.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남자였던가. 가구들과 벽지들

모두가 고풍스러운 느낌이다.

심지어, 방 안에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마저 클래식이라니. 마치 저명 있는 학자의 집을

방문한 기분이다. 화려한 응접실을 지나오자 윤호의 서재가 나왔다.

재중은 입을 틀어막고 나오는 탄성을 삼켰다. 와아아...!

“마음에 들어?”

“이 책... 전부 다 네 거야?”

“그래.”

거대한 방의 전 면이, 모두 책장으로 되어있었다. 높은 곳에 꽂혀진 책은 꺼낼 길이 없어

사다리까지 달린, 그야말로 ‘도서관’을 방불케 했다.

재중은 책장에 꽂혀진 책을 한 권 꺼내들고, 가뜩이나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떴다. 모든 것이

원서였다. 하긴... 뉴욕에서 살았으니, 놀랄 것도 없지.

모든 것이 자신이 생각한 정윤호라는 남자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깡패 집단의

우두머리라면, 누구보다 거칠고 단순하며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전혀 다르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서재를 가지고 있는 남자라니.

“다 읽었어?”

“거의.”

“설마.”

“미안한데, 거의, 야. ”

한참이나 서재에서 노닥거리는 재중을 보느라 윤호는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래, 너는 이런 곳에 잘 어울려. 고풍스럽고 우아한 붉은 양탄자 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책을 꺼내보는 네가 예쁘다.

Page 157: Happy Together

책장에 기댄 채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윤호를 뒤로 하고, 재중은 서재의 끄트머리에

달린 또 다른 문을 열었다.

“아....”

음악이 여기서 나오는 거였구나. 우습게도, LP판이 돌아가고 있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LP를

돌리고 있는 거지. 레코드판이 돌아가는 모습을 쳐다보며 재중이 웃었다. 이 남자, 의외로

웃긴 구석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일을 하면서,

자신의 삶은 이토록 품격 높게 꾸며놓았다니.

“침실도 마음에 들어?”

“거만하다. 보스도 아닌 주제에 이런 방이라니.”

“그렇게 생각해?”

“뭐야... 그럼 이 저택에, 이거보다 더 훌륭한 방이 있다는 소리잖아.”

보스라는 남자는 도대체 얼마나 화려한 곳에서 사는 거야. 재중은 투덜거리며 윤호가

수집해놓은 LP판을 구경했다. 온통 클래식 일색이다.

“안 어울려.”

“왜?”

“마약이나 팔고 살인에 납치나 하는 주제에... 이런 데서 이런 음악을 들으며 사는 거. 사치

냐?”

“생각하기 나름이지.”

잠시 옛 생각에 젖었다. 우연치 않게도, 윤호가 자주 듣는 듯 꺼내놓은 LP판들은 모두

재중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자신이 리사이틀에서 연주했던 곡들. 행복했던 시절 손가락으로 만들어냈던 피아노 선율.

가만히 LP판을 안고 있는 재중을, 뒤에서 그가 끌어안았다.

“자고 갈래, 그냥 갈래.”

그 말에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먼저 침실로 들어왔다. 변명할 거리는

없겠지.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만 오면 늘 발을 한 걸음 뒤로 빼는 재중이었다.

이게 정상인걸까. 빚 대신 사람을 납치한 사람과, 그것도 나와 같은 성을 가진 남자와 이런

식의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Page 158: Happy Together

“무서워?”

“... 아니.”

일단 자고 볼까, 아니면 조금 더 두고 볼까.

“싫어?”

“.... 그것도 아니.”

재중은 뒤돌아,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마주보고 있는 윤호의 앞에 섰다.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들어 올려 윤호의 얼굴을 훑었다.

사실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감탄해 마지않았던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윤호의 두 볼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밀려드는 그의 혀와 재중의 혀가 입맞춤을 하고,

조금 더 깊숙이 핥았다.

그녀와 했을 때 가지지 못했던 감정을, 이 남자와 키스하면서 느낀다. 설레임. 두근거림.

짜릿함. 몽롱함... 그리고 두려움.

무어라 대답해야 할 지 몰라서 재중이 한참이나 망설일 때, 윤호는 재촉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기다리는 것은 윤호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아직까지 자신의 마음에 확신을 내릴 수 없어 갈팡질팡하는 그의 모습마저 두고두고 보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가뜩이나 바알간 입술을 깨물어,

붉은빛이 한 줌이다.

그래. 지금은 입술로 만족할 수 있어. 윤호는 싱긋 웃었다.

“데려다 줄게.”

“... 어?”

“너희 집에.”

“그......”

“곧 졸업이지. 내년에 바로 사시 보도록 해. 빨리 내 곁에서 일하는 모습을 봤으면 하니까.

아,

그리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윤호는 자신의 방 서랍장을 열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하얀색 가죽으로 덥혀 있는 무언가를 꺼내 재중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컴퓨터 없어서, 늘 학교 컴퓨터실에서 논문 쓴다며. PC방에서 컵라면이나 먹고.”

Page 159: Happy Together

“... 너, 어디까지 스토커질 할 생각이냐?”

“그런 짓 안 해도 네가 뭘 하는지 눈에 빤히 보일 때까지. 선물이야. 네 거니까 가져.”

하얀 가죽에 달린 자크를 열었을 때, 재중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새하얀

노트북이었다. 최신 기종의. 얼마나 갖고 싶던지.

자신의 집에 차압 딱지가 붙어 개인 컴퓨터까지 모조리 빼앗긴 후로, 한 번도 컴퓨터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그걸 보고 윤호가 또 좋다며 웃었다.

“가자. 늦었다.”

아직 얼떨떨한 표정의 재중의 허리를 안고, 윤호가 자신의 침실을 나섰다. 그 화려한 서재를

지나, 아름다운 응접실을 지나, 재중의 12호 저택으로 걸어가는 내내 재중은 꽤나 밝은

표정이었다.

“의외로 선물에 약하구나. 네가.”

“뭐?!”

화악 붉어지는 얼굴에, 재중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아악... 새벽 세 시가 넘어가면 제이

에비뉴의 모든 가로등의 불이 꺼진다. 완연한 어둠 속에서,

재중은 윤호의 얼굴마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미소에, 자신의 심장이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이미 오래전 사랑에 깊이 빠진 한 남자와, 아직까지 그 사랑에 물들기를

두려워하는 한 남자가 같은 시각 잠이 들었다.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12

준수의 마약 테스트 결과는 음성이었다. 파티에서 위스키를 한 잔 마셨다는 말에, 걱정이

되어 받게 했지만 다행히도 약을 타지 않은 술이었다. 그들이 복용했던 마약은 Tox mapko

라는 이름의 독성이 강한 종류로, 미국이 주 원산지였으며 대마초나 코카인과 비슷한 가격

이었으나 중독되는 시간은 훨씬 더 짧았다. 그러나 한 번 입에 대면 쉽게 끊을 수 없을 정도

Page 160: Happy Together

로 자극적인지라 젊은 부유층 사이에서 쉽게 번져나가고 있는 듯 했다. 한국에 유입되지는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 취조 녹음은 다 들어봤어? "

" 네. "

" 어떻게 생각해? "

" 정확히 뭐를요? "

" 이번 마약 거래 루트.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루트가 생긴 것이 분명해. "

" 한인 마피아라... 이름 한 번 거창하네요. "

강력 1반의 새로운 사건이 제시되었다. 마약 복용으로 붙잡힌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인

마피아라는 조직을 이름에 담았다. 뉴욕에 있을 때부터 그들과 거래했던 조직이며, 모두

한국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마피아라고 했다. 한국의 그렇고 그런 깡패 집단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거대한 무리들이라고.

" 이렇게 종합해볼 수 있어. 새로운 마약 루트가 탄생했다. 마약 거래상들은, 이제까지

한국에 밀매되지 않은 뉴욕의 새로운 마약을 유입했다. 그들은 일단 뉴욕에서 자신과

거래했던 한국의 부유층 자제들을 발판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

" 다른 조직들을 졸라게 부셔트린 다음에 자기들이 대한민국의 마약 루트를 독점하려

할 것이다. 이거 아니에요? "

유천의 말에, 창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커다란 깡패 조직들을 몇 개나 잡아 들여서

이제 좀 쉬나 했는데... 더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왠지 예감이 안 좋아. 이번

사건, 만만치 않게 커져갈 느낌이야. 창민은 몇 년 동안 검찰에 몸을 담았던 자신의 직감을

믿으며 한숨을 쉬었다.

" 일단 그 조직이 어떤 조직인지부터 파악해자. 대가리는 누구고, 어느 정도의 규모고,

언제 한국으로 거처를 옮긴 건지. "

" FBI 쪽에 연락 넣을까요? "

" 오케이, 그리고 뉴욕의 한인 마피아 집단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도 부탁해. "

심검사 너무 불타오른다... 유천은 자신의 앞에 놓여진 새로운 일거리를 노려보았다.

창민을 간신히 조르고 졸라서 얻은 휴가는 1주일도 채 넘기지 못했다. 마약 파티 사건이

종결되자마자, 마약 루트를 찾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뉴욕 출신의 '진짜'

마피아들이라는 말에 다른 형사들은 모두 긴장타고 있는 눈초리였지만, 유천은 예외였다.

미파아든, 빈 라덴의 군대든 유천에겐 다 같은 범죄자일 뿐이니까.

" 아, 그 사람은 괜찮아? "

" 누구요? "

" 왜, 그 저번에 기절했던 남자 있잖아. 김준수? "

Page 161: Happy Together

" 멀쩡해요! "

'김준수'라는 이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유천이다.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며 금세 싱글

벙글 웃는다. 대놓고 좋아하는 유천의 얼굴이... 왠지 뒤가 구리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 하다. 이것저것 캐내길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창민은 은근슬쩍 찔러보았다.

" 엄청 예쁘게 생긴 그 남자 맞지? "

" 뭐에요? 검사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

" ........ "

" 아, 뭐야! 씨팔! 관심 갖지 마요! "

" 뭐?! "

" 강력반으로 오지 말라고 해야지... 심검사님은 너무 엘리트라 위험해. "

뭐라고 하는 거냐? 저 새끼가? 황당한 표정의 창민은 서류를 돌돌 말아 유천의 머리를

버릇처럼 내려쳤다. 머리를 열심히 맞으면서도 유천은 두 손가락으로 문자질 중이다.

가뜩이나 구려서 안 눌러지는 핸드폰을 집요하게 눌러대며, 무지하게 느린 속도로

문자를 써내려 가는데....

졸라보고싶다준수야... 라? 김준수가 왜 보고 싶은 건데?

" ... 박 형사, 요새 연애한다고 했지? "

" 아, 한 번 말할 때 파딱파딱 알아들어요! "

" 상대, 누군지 물어봐도 돼? "

창민의 말에, 유천의 얼굴이 사악 굳으며 그제서야 핸드폰을 뒤로 숨긴다. 다 봤다. 이

자식아... 그리고는 차 키를 집어들고 서둘러 강력반을 빠져나간다.

" 어디가! "

" 순찰 돌고 올게요! "

" 야! 아까 내가 한 말 뭘로 들었어!? 한인 마피아 조사하라고 했잖아! "

" 아! 씨발! 그건 머리 좋은 김형사가 알아서 A4용지 쫙 묶어서 갖다 주잖아!! "

니가 순경이냐? 뻑 하면 경찰차 갖고 스피드질하고 지랄이야- 창민은 투덜거리며 유천

의 책상에 놓여진 낡은 수첩을 슬쩍 훑었다.

졸라 이쁜 김준수... 웃을 때 이쁜 김준수... 준수.. 이름도 준수해 캬하하

Page 162: Happy Together

" 어라.... "

분명히 남자였는데. 김준수라는 그 놈은. 년이 아니었는데. 창민은 흐음, 거리며 수첩

을 덮었다.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박 형사는 꽤나 아슬아슬한 연애를 시작한 것 같다.

* * *

" 할 말이 뭐야? "

조금은 토라진 투로 얘기했다. 컴퓨터 실에서 그렇게 사라진 후로, 재중은 달라져 있었다.

어디가 달라졌다고 확실하게 말하진 못해도, 자신을 피하는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그리

약은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티나지 않게 구는 법도 몰랐다. 재중은 민정 앞에서 머뭇거리

며 입술을 안으로 말아넣었다. 미안한데요, 누나랑은 아닌 것 같아요.

" 저요... "

" 으, 춥다. 학관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 "

학생회관 건물 안으로 억지로 재중을 밀어넣고, 민정은 곧 들려올 말을 불안하게 기다

렸다. 헤어져요. 이 말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그리 눈치없는 여자는 아니니까.

" 자, 말해. "

엊그저께 끝낸 논문을 품에 안고 재중은 잠시 망설였다. 이제 방학이고, 바로 졸업이다.

논문은 분명히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이고, 졸업하기도 힘들다는 이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

하겠지. 그러면 재중에게는 새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 그, 새 인생으로 완전히 들어서기

전, 재중은 마지막 망설임을 하고 있었다.

" 누나... 제가요. "

헤어지자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민정은 쿨하고 멋진 성격의 여자다. 그래, 그러자- 하고

돌아서겠지. 그리고 나서 나는 어떻게 될까. 정윤호가 정해준 인생대로, 그 마피아에서

고문 변호사를 맡고 폭력을 변호하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그리고... 아마도 나는 그에게

점점 매료되고, 나중에는 헤어나오지 못할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을 수도 있다. 남자로서

정말 최악의 삶이지. 같은 성을 가진 남자와 끈적지근한 관계를 갖고, 소속은 폭력배에..

아, 정말 혼란스러워.

Page 163: Happy Together

" 여러번이나 고민하고 하는 말인데요. "

" 응... "

" 진심으로 미안해요. "

아직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와 헤어지지 않는다면 어떨까. 어떻게서든

정윤호에게서 벗어나, 당당하게 사법고시에 패스해 떳떳한 변호사나 검사가 된다면 어떨까.

평범한 여자와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리고, 내 힘으로 사회에서 성공하여 살아간다면

어떨까. 아직 나에게는 그럴 수 있는 최소한의 가망성은 남겨져 있다. 재중아.. 너에게

달린거야. 선택은 네 몫이니까.

" 뭐가. "

" 그게.... "

... 씨팔. 그 빌어먹을 정윤호 새끼. 내가 먹는 밥에 약이라도 탄 거냐. 분명히 내가 가는

길은 위험 천만의 지뢰밭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놈이 시킨대로 따라가

게 되어버린다.

아버지의 빚을 제외하고,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

" 헤어져요. "

" .... 뭐,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

" 미안해요. "

" 이럴 때는 미안해요, 가 아니라, 잘 살아요, 하는 거야. "

" ... 잘 살아요. "

" 그래. 너도. 나중에 법원에서 보자. "

나의 예상대로, 그녀는 멋지게 돌아섰다. 아마도 현명하고 능력있는 저 여자는 나중에

훌륭한 법조인이 되어서 법원에 설 것이다. 그럼, 아마도 나와는 적으로 만나겠지. 나는

폭력을 감싸안고 살인을 정당화 시키는 일을 하게 될 테니.

" ... 나와요. "

" ........ "

" 아, 뒤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오라고! "

학관의 기둥 뒤에서 사복 차림의 조직원이 슬그머니 기어나온다. 심어놀려면 제대로

심어 놓을 것이지. 저렇게 덩치 큰 새끼가 허구언날 뒤를 졸졸 따라다니니, 알기 싫어도

눈치 까게 되잖아!

" 방금 봤죠? 정윤호한테 연락 해요. 김재중이, 여자랑 정리하고 지금 도서관으로 공부

Page 164: Happy Together

하러 간다고. 데리러 오려면 12시에 오라고. "

" 잘하셨어요. "

기가 막혀서 웃었다. 조직원은 나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남들이 볼까봐 쪽팔려서

황급히 남자의 고개를 세웠다. 누가 보면 대단한 집안 자제인 줄 알겠네.

" 나한테 왜 그렇게 깍듯해요? 당신들 다 그래. 갈수록 나 어렵게 대해. 왜 그래요? "

" 그게, "

" 처음에는 아주 머리채 질질 끌고 납치하더니. "

" 높은... 분이니까. "

" 네? "

" 저희들, 다 부릴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

조직원은 그 다운 냉정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아마도 정윤호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나는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며 논문을 끌어안았다.

당신들을 모두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내가?

왜? 나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는데. 그래봤자 빚에 끌려 온 신참일 뿐인 불쌍한 남자가,

어째서 당신들을 모두 부릴 수 있다는 거야. 어째서 내가 높은 사람이라는 거냐고.

" 12시에 도서관 앞에서 보자고 하십니다. 그리고... PC방에는 가지 말라고. "

재중은 논문 뒤에 소중히 안고 있던 하얀 노트북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돈은 졸라게

많은 새끼가, 이거 하나 갖고 열라 생색내네. 치사해.

" 저기, "

" 예. "

" 내가 당신들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말, 무슨 뜻이죠? "

" ..... "

" 왜 내가, 당신들을 부려? "

" 곧 알게 되실겁니다. "

조직원은 웃어도 무섭구나. 그 남자의 미소 어린 대답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재중은

알겠다고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는 먼저 학관에서 나와버렸다. 바람이 완연히 차갑다.

이제 12월 중순. 방학이자 졸업이다. 재중은 하얀 입김을 불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Page 165: Happy Together

아버지의 빚을 제외하고,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

그 대답은 이미 나온 것 같아. 나는 제대로 낚였어. 정윤호한테.

* * *

" 검찰? "

" 예. 이미 신문을 통해서 보셨겠지만, 제대로 한 방 먹인 것 같습니다. "

" 흥... 부패한 대한민국 검찰이라더니, 아주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군. 설마 그렇게

대단한 자식들을 단체로 잡아들일 줄은 몰랐는데. "

" 어떻게 하실 겁니까? "

" 이미 다 불어버렸을테니, 죽여도 소용 없잖아. "

윤호는 자신의 서재에 있었다. 붉은 카펫 위에 앉아서, 책상에 기댄 채 조직원의 보고를

들으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이 작은 나라에서, 마약 거래를 시작했으면 검찰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예상보다 조금 빨랐다. 검찰은 이미 수사를

시작했을 것이고, FBI에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 우리가 한국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어도, 그 거처를 쉽게 알지는

못 할 거다. 일은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해. "

" 그럼... 어느 조직부터 시작 하시겠습니까. "

" 리스트는 훑어 봤어. 가까운 곳 부터 시작하자. "

카펫 위에서 일어나, 의자 위에 걸쳐 두었던 자켓을 입었다. 쌀쌀해지는 날씨에 코트를

덧입고, 목도리를 둘렀다. 정문으로 나서는데 날씨가 꽤나 춥다.

" 하얀 목도리 하나 사둬. "

" 네? "

" 김재중에게 어울리는 걸로. "

순백의 피부에는, 무엇보다 하얀색이 제격이다.

.

.

.

차가 멈춘 곳은 사당 부근의 회색빛 건물이다. 음지에 있어서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곳.

윤호가 차에서 내리자 시꺼먼 옷을 차려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들을 에워쌌다.

윤호가 동행한 조직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서 다섯명. 전면전으로 나가지 않는

Page 166: Happy Together

담에야 윤호는 조직원들을 모조리 이끌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 약속 되어있습니다. "

" 이름을 대. "

다짜고짜 반말로 나오는 남자의 행동에, 윤호의 참모가 얼굴을 찌푸리며 뒷춤으로 손을

넣었다. 치워- 윤호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총은 일단 넣어둬.

" 정윤호. "

" 두 명만 들어와. 나머지는 밖에서 대기해. "

윤호는 어깨를 으쓱 거리고는 참모와 동행한 뒤 앞으로 나섰다. 두 명도 필요 없었다.

아니, 마음만 먹으면 정윤호 혼자도 충분했다. 사람은 말투와 행동으로 아우라가 나오기

마련이다. 쓰레기같은 상대편 조직의 조직원들을 보고, 윤호는 고개를 저었다. 5분이면

충분하다.

" 그 쪽이 정윤호? "

" 네. "

" 생각보다 어리군. "

대현파의 보스는 50대 중반으로, 윤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였다. 배불뚝이에,

살집이 얼굴 여기저기에 잡혔으며 웃음소리가 호탕했다. 그러나 걸음걸이가 더디고

이빨이 누런 걸로 보아서, 게으른 골초 이상은 되지 못할 것이다. 윤호는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신속히 일을 진행했다.

" 마약 거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고. "

" 네. "

" 자네 조직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는데. 게다가... 보스라는 남자가, 내 아들 뻔이군.

장난 칠 거면 지금이라도 꿇고 빌어. "

웃음이 터질 뻔한 걸 간신히 막고, 윤호는 본론부터 꺼냈다.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다.

이런 가벼운 일은 빨리 끝내고, 12시까지 재중을 데리러 도서관으로 가야 했으니까.

" 현재 홍콩에서 대마초를 수입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

" 돈벌이가 되는 장사지. "

" 홍초파와 화상파라는 조직이 와해된 후로... 떠오르는 마약상이라면서요. "

" 우리 말고도 몇몇 더 있어. 이번에 국회의원 아들내미를 비롯해서.. 그 마약 파티 하다

잡혀간 놈들 기사 봤지. 그 놈들이 피운 마약은, 우리가 제공한 것이 아니야. 듣도보도

Page 167: Happy Together

못한 것이든데. "

" 우리 조직이 대준 겁니다. "

" ... 뭐? "

" 앞으로, 서울 전역의 마약 루트는 우리가 관리하겠습니다. "

" 하하... "

이 애송이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남자는 호탕하게 웃다가, 곧 무서운 표정으로 돌변

했다. 야! 들어와서 이 새끼 아가리 조져버려- 곧 상대편 조직의 조직원들이 들이닥쳤고,

윤호와 참모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러나 윤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저희 조직 밑에서 일하십시오. 홍콩에서 대마초를 들여오는 일은 계속 하되, 저희의

관리 하에서 거래하라는 뜻입니다. "

" 이런 미친 새끼를 보았나...! "

갑자기 연락을 취한 정체 불명의 조직에선, 20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남자를

보스로 모셨다. 진짜 나이가 몇 살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아직 눈가에 주름도 잡히지

않은 젊은이였고, 수트 위에 코트를 걸친 모습이 모델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단지 앉아있는

모습 만으로도 왠지 위화감이 들어서, 남자는 서둘러 이들을 처리하고 내보내기로 했다.

" 헉...! "

윤호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키려던 남자의 손이, 오히려 윤호의 손에 꺾여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의 입 안에 총구를 들이댔다. 총. 리볼버의 차가운 금속이 남자의 입 안에서 움직

였고, 윤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70 대 30으로 하기로 하지요. 서울은 시작입니다. 앞으로 전국의 마약 밀매는 저희가

관리할 예정입니다. 물론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대한민국은 그리 크지 않으니 염려

마세요. 댁의 조직만 엿 먹일 건 아니니까. "

" 바.. 바깥에 얘들 다 불러 모아!! "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윤호는

자신이 잡고 있던 조직원을 바닥으로 내팽겨쳐 목을 짓밟은 채, 참모에게 눈짓을 했다.

이 정도는 네가 처리하라는 뜻이다.

뒷춤에서 총을 꺼낸 사내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정확히 세 발을 날렸다. 첫번째

총탄은 가장 먼저 들어온 남자의 무릎에 박혔고, 두번째는 그 뒤의 남자의 어깨에. 마지막

총탄은 서랍에서 자신의 낡은 총을 꺼내고 있는 보스의 옆에 놓여진 화분을 향했다.

쨍그랑,!

Page 168: Happy Together

" 총을 어떻게 쏘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서 악을 쓰고 있는 자신의 동료를 보고, 어느 하나 쉽게 달려

들지 못했다. 윤호는 총을 들고도 쏘지 못하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어깨죽지를 가볍게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 남자의 등에 타고 올라가, 손을 꺾고 남자의

손에 들려있던 총을 빼앗았다. 매그넘 리볼버. 아무튼 개나 소나 이 총은 다 가지고 있어.

" 탄환이 한 발 들어있네. "

빙그르르.. 탄환창을 돌리며, 윤호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총구를 남자의 머리에 대고

속삭였다.

" 당신의 운은 얼마나 좋은지 볼까. "

" 사.. 사.. 살려...! "

" 형편없는 보스네. 당신 조직원들이 지금 저렇게 피뿌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혼자만

살겠다고 목숨을 구걸해? "

" 살려줘! "

마음에 안들어. 장전을 하고, 남자의 머리채를 뒤로 거칠게 잡아당겼다. 완전히 꺾여진

목에 핏줄이 울퉁불퉁. 이런 흉측한 것은 오래 볼 수록 기분만 나빠진다.

" 80 대 20으로, 내가 하자는 대로 해. "

" 흐... 흐읍.. "

" 계약서는 곧 보내도록 하지. 앞으로 당신네 조직의 마약은 모두 우리를 통해서 거래한다.

수입 또한 우리가 관리해. 한 달에 한 번 장부를 보내도록 해. 위조하면 죽여버릴 테니. "

" 흐.. 흐으으... "

" 타앙,! "

" 아아악! "

입으로 총소리를 내며, 윤호가 방아쇠를 당겼다. 총은 나가지 않았다. 아마도 이 남자는

행운을 한 번 써버린 모양이지. 오줌 지리기 직전의 나약한 보스를 바닥에 팽겨치고, 윤

호는 겉옷을 털며 일어섰다. 목도리가 헝클어져서, 모양을 가다듬어야 했다. 윤호의 참모

또한 다른 조직원들을 총 하나로 완전히 봉쇄시킨 채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 가자. "

" 이 새끼들은 어떻게 할까요. "

Page 169: Happy Together

비명과 울음이 뒤섞인 채, 바닥에서 총 맞은 부위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들이 보인다.

윤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문을 나섰다. 저런 버러지들까지 내가 책임져야 해? 그건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 물러나. "

윤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자신의 참모가 터주는 길로 나갔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직원들은 생각보다 훨씬 빠른 시간 안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자신들의 보스를

환영하며 차 문을 열었다.

" 어디로 갈까요. "

" 일단은 제이 에비뉴로. 구두에 피가 묻었어. "

앞 코에 묻은 핏자국을 바라보며 윤호가 투덜거렸다. 아직은 그에게 피냄새를 풍기고

싶지 않아. 그게 언제까지 계속 될지는 모르겠지만.

* * *

" 여기 두었던 내 정장 못봤어요? "

" 정장이요? "

" 네. 세탁소에서 오늘 갖다준다고 해서, 내 사물함에 넣어두라고 했는데. "

" 글쎄요... 저는 못 봤는데? "

창민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개인 사물함 문을 닫았다. 분명히 이 시간까지 갖다 준다고

했는데. 세탁소에 전화 해봐야겠다. 아는 사람이 상을 당해서, 저녁에 장례식에 가려고

급히 구한 옷이다. 가뜩이나 오늘 밝은 색상의 옷을 입고 와서 난감한데...

" 박 형사는? "

" 퇴근 했는데? 오늘은 저랑 이 형사가 야근이잖아요. "

" 흐음, "

뭔가 수상해. 창민은 세탁소집 전화번호를 누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Page 170: Happy Together

준수는 몇 번이나 시계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시간이 더딘 걸까. 여덟 시가 되려면

20분이나 남았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옷 매무새를 다시 한 번 고쳤다. 도톰한 남색의

코트에, 드레시한 하얀 캐쥬얼 와이셔츠. 너무 꾸민 것 같지도 않고, 너무 신경 안 쓴 것

같지도 않다. 박유천이 유난히 좋아하는 십자가 귀걸이를 목걸이와 세트로 걸고 부르튼

입술을 위한 딸기향 립밤을 발랐다. 유후♡ 입술로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 보지만 땡기지는

않는다. 음.. 수분 공급이 충분히 되었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 멈춘 거냐! "

처음으로 박유천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했다.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자신이 먼저 연락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더군다나 이건 누가 보나 확실한 데이트

신청이 아닌가. 눈치코치 없는 박유천은 맨날 '만나자, 보고 싶어, 니네 집 갈래' 따위의

말만 늘어놓았지, '오늘 근사한 데서 저녁이나 할까, 영화 보자, 쇼핑 할래' 등등의 데이트

어감이 나는 말들은 한 적이 없었다.

참다 참다 못해서 먼저 연락해서 만나자고는 했는데 괜찮을런지... 그 바보 같은 남자가

우쭐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래도, 보고 싶은 건 보고 싶은 거니까. 요새 새 일을

맡았는지 허구언날 야근이다. 혹여나 새벽이라도 자신의 오피스텔에 오는 것이 아닐까,

자지 않고 기다려 본 적도 있지만 (물론 말은 안했다. 쪽팔려서.) 유천은 늘 강력반이나

경찰차 안에서 잠드는 듯 했다.

- Rrrr Rrrr

" 어디야! "

- 집 앞!

" 나... 나... 음, 할 일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곧 나갈게. "

- 아! 왜! 지금 빨랑 나와! 졸라 보고 싶어!

" 나 바쁘거든? 일찍 와서 어디다 신경질이야? 기다리고 있어. "

최대한 도도한 목소리로 말하고 끊었다. 사실 준비는 1시간 전에 마치고 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지만, 가볍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소파에 다시 앉았다. 전화하자마자

나가면, 꼭 내가 너 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린 것 같잖아.. 자존심 상하게시리.

(그랬으면서. 아닌 척 하기는.)

" 아씨, 할 거 없어! "

그래도 10분은 뻐팅기고 나가야지. 연인을 기다리는 남자의 미덕을 박 형사도 좀 알아야

해. 연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Page 171: Happy Together

별 거 가지고 쇼하는 준수다. 정확히 10분이 지났을 때, 준수는 총알처럼 튀어나가 미리

준비해둔 (옷이랑 색깔도 맞춘 구두라오.) 구두를 신고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내내, 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연애. 사람을 설레이게 만드는 것. 설레임이 없는 삶은 얼마나 단조롭고 지긋한지.

사랑에서 비롯된 설레임은 사람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든다.

그 행복으로 인해 아름다워지는 것이 여자의 몫지만, 준수는 그 몫을 가졌다.

" 아우, 씨! "

저 사이렌 좀 치우지! 대한민국 폴리스의 경찰차를 보며 투덜거렸다. 삐뽀삐뽀- 울리

면서 가기만 해봐! 범인 잡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뭐야. 형사 월급이 그렇게 쥐꼬리인가.

저 나이 되도록 차 하나 안 뽑고 뭐했대! 아우... 쪽팔려.

" 어딨어! 또! "

나왔는데 유천이 보이지 않는다. 사이렌을 올려놓은 경찰차만 보이고, 유천은 안에 없다.

차 안을 들여다 보던 준수는, 자꾸 부는 싸대기 바람에 머리를 두 손으로 꾹 잡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빨리 오지... 늦게 오면 찬 바람에 머리 헝클어지고 얼굴 빨개진단 말이다!

" 준수야! "

저 만치서 유천이 달려오고 있다. 준수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기서 달려오는

저 남자.. 분명히 유천이 맞는데, 유천이 아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한결 같았던 검은

색 라이더 자켓과 청바지 차림이 아니다.

" 우와... "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우와, 정말 우와스럽다. 유천이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와이셔츠까지 갖춰진 완벽한 정장. 마치 장례식장에 가는 것처럼 온통 시꺼먼 색이었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데다 팔 다리가 길어서 옷발이 누구보다 잘 받

는다. 준수는 놀란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Page 172: Happy Together

달려오는데 왕자님인 줄 알았다. 으... 멋있..

" 베지밀 비! 추운데 먹으라고 편의점에서 사왔다! "

" 박 형사... 옷... "

" 아, 괜찮냐? 데이트라서 신경 썼다! "

유천은 준수의 눈치를 살피며 약간 짧은 정장의 소매를 손가락으로 괜히 늘렸다. 창민의

정장을 도둑놈처럼 몰래 훔쳐 입고 나왔다. 키는 엇비슷한데, 사이즈는 조금 안 맞는 것

같다. 유천은 조금 끼는 정장을 릴렉스 시키며 씨익 웃었다. 준수의 표정은 꽤나 놀라고

있는 것 같다. 이 정도면 합격인가?

" 갑자기 왠 정장이야? "

" 아, 그, 너가 그랬잖아. "

" 뭐? "

" 나 촌스럽다고. 뭐, 정장 정도면 뭘 입어도 촌스럽지는 않지? "

아... 순간 알싸해지는 가슴에, 준수가 눈꼬리를 내리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그 때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유천이 그 말을 신경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 멋있다... "

" 진짜? "

" 응. 내가 본 모습 중에 최고로 멋있어. "

" 아! 심 검사님 고마워요! "

" 응? 뭐가 고마워? "

" 아냐, 가자. 뭐 먹을까? "

유천은 싱글벙글 웃으며 운전석으로 걸어갔다. 와, 준수에게 멋있다는 말 들었다! 나는

병신인가. 그 말 한 마디로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라니.

" 풉... "

운전석으로 걸어가는 유천의 바지 정장 아래로, 닳고 헤진 운동화가 보인다. 어디서

정장을 빌려 입었는진 몰라도, 구두도 신어야 한다는 생각은 미쳐 하지 못했나보다.

그 모습이 더 귀여워... 준수는 소리내어 웃었다.

장례식용 정장에, 양말 색깔이 다 보이는 헤진 운동화를 신은 남자와 사이렌을 울리는

Page 173: Happy Together

경찰차를 타고 데이트 하러 간다. 그래도 즐겁다. 준수는 평소처럼 거침없이 엑셀을 밟는

유천에게 바로 꽥, 소리를 지르며 속도를 조절했다.

.

.

.

그 시각, 창민은 어디론가 사라진 자신의 정장을 애타게 찾고 있었더랬다.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13

옆좌석에 앉은 준수는 다리를 꼰 채 도도하게 앉아 운전하는 유천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처음으로 데이트 마인드로 준수와 나들이에 나선 그는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아까 전, 준수가 사이렌을 당장 뒷좌석으로 던져놓지 못하겠냐고 소리지른 후로는 더더욱

쫄았다. 그러나 와이셔츠 단추를 세 개씩이나 풀러놓은 그의 넘치는 야성미(...) 덕분에,

준수는 눈을 쉽게 뗄 수가 없었다. 와이셔츠 속으로 보이는 유천의 단단한 몸은 기대 이상

이었다. 온갖 운동과 고난과 역경으로 단련된 유천의 몸은, 단지 가슴팍의 단면과 살짝

드러나는 쇄골만 봤을 뿐인데도 남다르다.

" 어딜 갈까? "

" 응? "

" 뭘 그렇게 봐? "

멍하니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고 있는 건 눈치까지도 못하고, 유천이 궁금한듯 물었다.

아까부터 조용히 말이 없는 준수다. 사실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옷을 갖춰 입고 나온 유천

의 등장부터 내내 설레였기 때문에, 자신의 두근거림을 쉽게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 아무것도 안 보거든? "

" 그럼 말고. "

" 설마, 내가 네 몸이라도 보고 있을까봐? "

" ... 누가 그랬대? 왜 생색이야? "

Page 174: Happy Together

제 발 저린 준수가, 괜히 더 신경질을 내며 고개를 훽 돌렸다. 차창으로 보이는 유천의

운전하는 옆모습이 근사하다. 저 남자... 처음 보았을 때는 정말 지방 촌구석에서 갓 상경한

노숙자인 줄 알았는데, 저렇게 제대로 입혀놓고 보니까 정말 그럴싸 하구나. 아마 언제나

저렇게 차려입고 다녔다면, 여자들이 가만 두지 않았을 거야. 갑자기 유천의 구린 옷차림과

괴팍한 말투, 연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단순한 뇌세포가 마음에 든다. 그렇게 살아와서

지금까지 사랑 한 번 못해봤잖아. 그래서 내가 처음이잖아.

" 여긴 어디야? "

" 아, 오늘 뭐 먹을지 내가 많이 고민해봤는데, 죽이는 메뉴를 하나 골랐다. "

" 뭔데. "

또 잔뜩 들떠서 사투리 쓰는 걸 보니 심히 불안하다.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는 골목길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데 준수가 생각하던 근사한 레스토랑은 전혀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돈까스나 팔면 다행이지.

" 따라 와봐. "

어두운 골목길에 경찰차를 주차시키자, 근처에 있던 담배 피던 고삐리 양아치들이 바퀴벌레

떼처럼 우수수 흩어진다. 형사와 같이 다니면 이런 점이 좋긴 좋구나. 차에서 내린 유천은,

담배 꽁초를 바닥에 버린 고삐리들을 쫓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당연히 차 문을 열어

줄거라고 기대하던 준수를 내버려둔 채. 멍하니 차 안에 앉아있던 준수는, 자기가 차 문을

열고 나왔다(...).

" 이 씨팔 새끼들! "

씨, 와 팔, 에 악센트를 강력하게 준 유천이, 고삐리 너 댓명을 이끌고 준수가 서 있는

곳으로 끌고 왔다. 분명히 10초도 안 되서 뛰어간 것 같은데 괴물같은 달리기 실력이다.

고삐리들을 벽에 밀어놓고, 유천은 바닥에 침을 퉤엣- 뱉었다. 누가 보면 삥 뜯는 어른과

당하는 고삐리로 보겠다.

" 니네 고삐리지? 씨발, 니네 엄마가 담배나 쳐 피라고 골반뼈 빠지게 애 낳은 줄 알어?! "

" 저희 엄마 제왕절개로 저 낳았는데요. "

" 이 새끼가! "

곰발바닥 같읕 손바닥으로 고삐리의 대가리를 후려찬 유천이, 네 명의 머리를 순서대로

내리치며 갖잖은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중삐리 때부터 입에 담배를 문 자신이 하기에는

너무 양심없는 짓이긴 하다.

Page 175: Happy Together

" 다시 한 번만 내 눈에 걸려봐. 그 땐 니 대가리에서 뇌수가 철철 넘쳐 흐르는 꼴을 보게

될 거다. "

" 저.. 박 형사. "

" 들었지? 형사야, 나. 씨팔! 니네 화상파랑 홍초파 이번에 잡힌 거 뉴스에서 들었지?!

그거 다 내가 잡았어! 나 TV에서 못봤냐?! "

" ....... "

준수에게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고삐리 훈계는, 어느새 점점 자신의

자랑으로 발전해가고...

" 내가 강력반 들어왔을 때부터 전설의 박 형사라고 소문이 자자했어! 성북동 연쇄 살인범

그 새끼도 내가 잡은 거야! 니네 알지?! 그 배때기 칼로 쑤시고 다녔던 졸라게 미친놈!!

그걸 내가 잡았다고! 걔만 내가 잡았냐?! 잠실 연쇄 살인범, 야! 니네 기억나지!? "

" 네... 네.. "

" 그 새끼도 내가 잡았거든! 육교 위에서 날려차기로 대가리 후려차고 정강이 총으로 파앙!

명중시켜서 그 자리에서 잡았거든! 하하! 피가 육교 위에 좔좔좔... "

" 대단하시네요... "

" 대단하지! "

이 새끼 뭐야? 정도의 표정으로 서있는 고삐리들은 보이지도 않는지, 유천은 자꾸만 뒤를

힐끔 바라보며 준수의 표정을 살피기 바빴다.

방금 들었어? 내가 이렇게 대단한 놈이야!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새끼가 나라고! 너는

제대로 걸린 거야. 내가 죽을 때까지 너 전용 보디가드 해 주면서 안전하게 지켜줄게!

" 박 형사. 그만 가자. "

" 한 번만 더 걸려봐! 강력반 취조실에서 키보드로 대가리 후두려 맞기 싫으면 정신 차려! "

고작 담배 한 번 핀거 가지고 강력반까지 나온다... 고삐리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준수에게

끌려가는 유천을 보며 자기들끼리 숙덕거린다. 낮술 먹고 미친 놈인가봐-

" 진짜 구제불능이다. "

" 응? 뭐가? "

" 후우, 길거리에서 객기 부리고 다니지 말라고. "

" 난 강한 남자니까. 저런 고삐리들한테 괜히 쫄지 마. 앞으로는 다 나한테 말해. 내가

어디든 사이렌 울리면서 달려갈게. "

유천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씨익 웃었다. 에효, 이 개념없는 형사님을 어떻게 살살

Page 176: Happy Together

구워줘야 하나- 준수는 한숨을 쉬며 거미줄 같은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잘 가던 집인

듯 능숙하게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들어가던 그는, 낡고 낡은 해장국 집의 유리 미닫이

문을 열었다.

" 이게... 뭐야? "

" 선지 해장국집! "

" 선지... 해장국? "

" 뭔지 몰라? "

" 응. "

선지? 그게 뭐지. 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단 안으로 들어왔다. 쾌쾌한 냄새가 나는

음식점은, 손님들이 거의가 다 30,40대 중반의 아저씨들 뿐이다. 천장에 달려있는 코딱지

만한 TV에서는 뉴스가 한창이고, 뭔가 그윽하면서도 걸쩍지근한 냄새가 풍겨왔다.

" 이모! 여기 선지 해장국 3인분이요! "

" 야, 우리 둘이잖아. "

" 여기가 딥따 맛있다! 나는 여기 오면 2인분 먹는다! "

" 아.. 그러세요. "

이모, 라니. 이모, 라면 대한민국 남자 대학생들이 단골 술집 갈 때마다 부르는 아줌마들이

아니던가. 얼마나 자주 왔길래 이모타령이야. 이모라고 하기에는 유천과 너무 안 닮아 보이

는 여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물컵을 탕!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 박 형사, 오늘 장례식 갔다 왔어? 갑자기 왠 시꺼먼 정장? "

" 어울려요? "

" 그렇게 입으니까 무슨 모델 같다, 야! "

당연하지. 누구 남잔데. 자신있는 미소를 지으며 도도하게 턱을 치켜 올리는 준수다.

" 같이 온 사람은 누구야? 심 검사님은 어쩌고 남이랑 왔어? "

" 아, 이쁘죠? "

" 남자 맞지? 엄청 곱게 생겼네. "

당연하지. 얼마나 피부 관리를 열심히 하는데. 자신있는 미소를 지으며 턱을 더 치켜

올렸다.

그러다가 모가지 넘어가겠다... 선지 뭐시깽이를 기다리며 TV를 보는데 우연찮게도 창민이

나오고 있었다. 아직도 이슈가 되고 있는 마약 파티 사건이 뉴스에서 다뤄지고 있었다. 모두

벌금형을 물고, 보석으로 풀려난 듯 했다.

Page 177: Happy Together

- 이번에 발견된 마약은, 국내에 없던 신종 마약으로 뉴욕이 주 원산지 입니다. 검찰은

현재 새로운 마약 루트를 찾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으며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 아! 준수 너, 뉴욕에서 유학생활 했다고 했지? "

" 응. "

" 한인 마피아라고... 들어봤어? "

" 응. "

물을 한 잔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봤어?! 눈을 크게 뜬 유천이, 가방 안에서 형사

수첩을 꺼내며 펜 뚜껑을 열었다. 어디서든 증거 될 만한 자료가 나오면 바로바로 캐치

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 어때? 뭐를 알고 있어? "

" 뭐야.. 꼭 취조받는 기분이잖아. 기분 나빠. "

" 아! 말해주라! 이번에 강력반에서 한인 마피아 조사에 들어갔단 말이야! "

" 흐음... "

뭐가 있더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뉴욕에 거주하는 한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조직들이

몇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건,

" K 카르텔. "

" 응? "

"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유학생들 중에는 한국에 있어봤자 할 게 없어서 부모 등쌀에 밀려

온 녀석들이 많거든. 그 녀석들은 마약 같은 거에 쉽게 빠지곤 했는데, 가장 유명했던

마약 루트가 K 카르텔이라는 곳이었어. 마약 거래도 하고... 총 밀매도 하고... 아무튼,

한인들로 이루어진 마피아 사이에서는 가장 유명해. "

" 그 조직이, 한국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소리 들어본 적 있어? "

" 아니? 내가 뭐 그런데 관심이 있냐? 몰라! "

자신을 앞에 두고 일을 하는 유천의 모습에 괜히 속이 상한다. 자신과 있을 때는 형사고

살인범이고, 일은 접어두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몰두했으면 한다. 준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물컵으로 탕탕- 소리를 내며 주방을 바라보았다. 빨랑 음식 내오라는 뜻이다.

" 선지 해장국이 무슨 뜻이야? "

" 먹어봐. 지인짜 맛있어! 특히 술 먹은 다음 날 해장으로는 최고다! "

" 난 분위기 있고 그럴싸한 곳으로 데려갈 줄 알았더니. "

" 아니.. 뭐, 내가 그런 데를 모르니까... "

Page 178: Happy Together

그래도 내가 알고 있는 곳 중에서는 여기가 가장 맛있고 괜찮은데. 유천은 형사 수첩을

집어넣으며 준수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 음식점과 준수는 무던히도 안어울린다. 마치

포토샵으로 합성한 듯한 분위기다. 귀티나고 뭔가 있어 보이는 준수에 비해, 음식점은

허름하고 무너질듯 초라했다. 준수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엄청 촌스럽고 구식이야, 박형사.

" 준수야. "

" 왜. "

" 내가 원래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놈이거든. 내, 돈 벌어서 나 꾸미는 법도 모르고, 아직

차도 없고 통장도 별로 없다. "

" 근데. "

" 그래도... 니 좋거든. "

" 그래서. "

" 내.. 함 믿어봐라. 내, 막 화려하게 뭐 해주고 그런 건 없어도, 진심으로 니 아껴주고

잘할끼다. "

유천이 사투리를 쓰기 시작하면 왠지 귀엽다. 준수는 빙그레 웃으며 손바닥으로 유천의

얼굴을 감쌌다.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도 좋다. 내가 뭘 하든, 하나하나

신선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유천의 순수함이 좋다.

" 그래. "

" ........ "

" 앞으로 나한테 잘해. "

" 응! "

뽀뽀해주고 싶은데 보는 눈이 너무 많다. 물을 마시던 준수는,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열었다.

" 아! "

" 뭐? "

" 아까 네가 말했던 그 한인 마피아 있잖아. "

" 응! "

" 보스가 아주 어리다고 들었어. 기껏해봐야 우리 또래일걸. "

" 진짜? "

"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대단한 미남이라던데. 베일에 싸여있어서 더 유명했어. 그리고..

"

" 그리고? "

" 듣기에는, 뉴욕에 사는 한인 불법 체류자들을 도와준다고 들었어. "

" 도와... 준다고? "

" 왜, 여권도 없이 무작정 불법으로 들어온 사람들 있잖어. 뉴욕에도 한인 유흥가가 엄청

Page 179: Happy Together

크거든. 요새 더 번창하고 있고.. 아무튼 그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불법

체류자라서, 미국 경찰들에게 걸리면 바로 한국으로 돌려보내지거든. 그런 사람들을

K 카르텔에서 보호해줬대. "

" ... 그래? "

" 그래서, FBI 쪽에서도 쉽게 해결할 수 없던 조직이라고 들었어. 불법 체류자들이 목숨을

걸고 그 조직의 거처를 숨겼거든. 그래서 마지막까지 FBI에게 당하지 않았던 유일한 조직

이야. 내가 아는 놈들 몇몇이 뉴욕 유흥가에서 아주 살다시피 했거든. 그래서 건너건너

들었어. 뭐...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 "

도와주는 마피아라-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고마워, 고개를 끄덕이는데 마침 해장국이

나왔다. 버얼건 물에 야채가 송송송...

" 맛있게 먹어! "

" 뭐... 그러도록 노력해볼게. "

준수는 얼굴을 찡그리며 수저를 들었다. 한 입 떠먹어 봤는데, 꽤... 그럴싸하다. 뭔가가

비릿하기도 하지만 얼큰하기도 하고, 한국의 맛이 느껴진달까. 몇 입 떠먹은 준수는 처음

맛보는 맛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천에게 물었다.

" 맛있네? "

" 그치! "

테이블에 질질 흘리며 허겁지겁 떠먹느라 정신이 없는 유천이다. 어머머. 빌려온 하얀

와이셔츠에 선지 국물이 튀었다. 밥까지 말아서 수저에 한웅큼 떠먹는 유천을 보고,

준수는 생글거리며 국물만 냠냠 먹었다.

준수, 너 선지가 뭔지는 알고 먹는 거뇽.

* * *

" 뭐하는 거야? "

" 코디. "

오늘 자로 모든 강의가 종강했으며, 재중은 논문을 제출했다. 이제 졸업이다. 홀가분하면

서도 왠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다. 자신의 마지막 학생 시절이 마감되었다는 기분에, 집

으로 돌아온 재중은 내내 말이 없었다. 그러던 중 윤호가 연락없이 등장했고 손에는 종이

봉투를 들고 있었다. 재중을 거울 앞에 세우더니, 하얀 목도리를 목에 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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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쁘다. "

" 샀어? "

" 네 피부색이랑 잘 어울려서. "

오, 갑자기 왠 로맨틱한 척이야. 재중은 털 감이 좋은 목도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씩

웃었다. 그리고 그가 내미는 새로운 핸드폰.

" 이건 또 뭐야. "

" 네 핸드폰. "

" 나 핸드폰 있는데? "

" 내 번호만 저장해. 나한테만 연락하고, 아무에게도 번호 알려주지마. "

" 야, 나 아직 논문 평가도 못 받았고 학교에도 몇 번 더 가야해! 친구들도 만나야 되고- "

" 그럼 졸업할 때까지만 이 핸드폰이랑 두 개 같이 써. 졸업 하면, 네 핸드폰 해지시켜. "

" 왜 그래야 하는데? "

" 왜, 싫어? "

" 정윤호. 가끔 너 진짜 제멋대로인 거 아냐? "

이 남자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세상과 단절된 채 자신하고

만 연락하며 살아가라니.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아내를 구속하는 속 좁은 남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 왜 싫은데. "

" 내가 무슨 네가 만든 개집에서 사는 애완용 강아지냐? 나도 나만의 일이 있고, 나만의

세상이 있는 거야. "

" 넌 그러면 안 돼. "

" .... 뭐? "

" 네가 조직원이 된 이상, 세상에서 네 흔적을 하나씩 지워야 한다는 뜻이야. "

무슨 말이야... 윤호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재중이, 목도리를 푸르며 침대에 앉았다.

윤호는 진지한 표정이다. 그는 요새 무얼 하고 다니는지 통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주

늦은 새벽에,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재중이 살며시 문 밖으로 나가고는 했다. 그러면

윤호가 탄 차가 중앙 저택으로 들어가고, 중앙 저택의 모든 불이 환하게 켜졌다. 저 남자는

분명 대단한 위치의 간부임이 틀림없다.

" 우리 조직원들을 비롯해, 나는 뉴욕에서 불법 체류자였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야.

우리에게 국적이란 없어. 나는 주민등록증도, 그 아무것도 없어. 의료보험도 없고,

가지고 있는 여권도 전부 다 가짜야. "

" .......! "

" 그래서 검찰은 우리를 쉽게 찾아내지 못하지. 아무런 흔적도 없으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Page 181: Happy Together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

그 정도 였던가. 이 자들의 치밀함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니. 대한민국 어디

에도 이 남자가 정윤호라는 증거는 없다. 자기 자신이 확신하지 않는 이상, 정윤호가 누구

인지는 아무도 몰라. 모든 조직원들이 그렇다. 지문 인식을 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DNA 검사를 해도 일치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 이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으니까.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 너만 유일해. 너만 이 세상에 흔적들이 너무 많아. 네 이름으로 가입한 인터넷 사이트도

많겠지. 모두 다 삭제해. 의료보험을 비롯해, 은행의 통장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지워.

아니, 네가 싫다고 해도 우리가 알아서 다 삭제할거야. "

" 뭐...?! "

" 너도 나와 같아져야지. 누구도 네가 김재중임을 알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숨겨야 해.

너는 처음부터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사람이니 흔적을 모두 없앨 수는 없겠지만, 주민

등록증과 네가 다닌 학교의 기록 정도만 남기고 모든 기록을 말소할 거다. "

"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

"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

이 남자의 말은 진짜야.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주체할 길이 없다. 생각보다 나는, 정말로

위험한 길에 접어든 걸지도 모른다. 그것도 정윤호에게 끌리는 내 심장만 믿고. 세상에서

말소된 기록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니. 나중에 내가 이 남자와 틀어지기라도 하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가.

"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

" 그래야 해. "

" 그럼 내 일은...? 내 생활은...?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어? "

" 조직이 있고, 내가 있잖아. "

" ... 그게 다야? "

" 그래. 앞으로 네 삶은 그게 다야. "

오로지 나와, 나를 위해서 일할 조직을 생각해. 윤호는 단호히 말했다. 김재중에게 다른

생각을 심어주고 싶지 않다. 오로지 나만 생각하고, 나만을 위해서 살아가게 하고 싶어.

그러니 내 뜻대로 해.

" 뭔가가.. 틀린 것 같아. "

" 뭐가. "

"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

" ....... "

" 나... 나갈래. "

Page 182: Happy Together

무언가가 두려워졌다.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거지. 알 수가 없어. 지금

제 정신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나를 어떻게 만들고 싶은 거야. 세상에서 내 기록

을 말소시키고, 나를 없는 사람처럼 만들고 싶다고...? 그게 사람이 사는 거야?

" 어디가. "

문을 열고 나가려는 재중의 손목을 낚아챘다. 순간 정말로 두려움이 들어서, 재중은 차갑

게 그 손을 뿌리치고 뛰어나갔다. 현관 문을 열려는데 윤호가 뒤에서 그의 허리를 안아서

끌었다.

" 놔! "

" 갑자기 왜 이래. "

" 네가 날 무섭게 만들잖아! "

" 장난이라고 생각했어? "

" 네가 그랬잖아...! 너희 조직에서 단순히 고문 변호사 일을 하면 되는 거라고...! "

거칠게 몸을 빼며 빠져나가려는 재중을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완전히 그를 눕혀놓고,

윤호는 재중의 허리 위로 타고 올라가 바둥거리는 두 팔을 바닥으로 짓눌렀다. 아파..!

그가 소리질러도 놓아주지 않았다.

" 네가 빨리 자각했으면 좋겠어. "

" 놔아! "

" 내 옆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

" 아...! "

재중이 입고 있던 와이셔츠의 목덜미를 아래로 잡아당긴 윤호가, 드러난 가느다란 목과

양 옆으로 벌어진 날개뼈에 입을 맞췄다. 강하게 입술로 빨아들이며 한 손을 재중의 바지

안으로 밀어넣었다. 한 손에 가볍게 잡히는 마른 둔부를 손바닥 안에 넣고 천천히 매만졌다.

이 남자가 지금 또 무얼 하는 건지. 이런 몸놀림 따위에 골골거리고 싶지 않아서, 재중은

최대한 힘을 주어 몸을 틀었다.

" 아파...! "

손바닥 하나로 재중의 들려진 어깨를 다시 짓누르고, 바지 안으로 들어가 있던 손바닥을

앞으로 돌렸다. 한 손에 꽈악 잡힌 자신의 분신에, 재중이 넘어갈 듯한 숨소리로 답했다.

빳빳해지는 허리를 아랫배로 누르고 재중의 검은 머리칼에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속삭

였다. 잘 들으라며.

Page 183: Happy Together

" 우리 조직은 앞으로 수면으로 드러날 거고, 검찰은 우리를 찾으려 발을 구를 거야. 많은

조직원들이 잡혀갈지도 모른다. 그 때마다 네가 나서서 조직원들을 구해. 착한 거짓말로

변호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가 저지른 살인과 범죄를 네가 구제해. 그 때마다

사람들이 말하겠지. 김재중이 누구야, 고문 변호사 김재중이 도대체 누구야. "

그의 말처럼 느릿한 손놀림에, 빳빳했던 허리가 나른해지며 재중이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놓아줘, 라는 말이 나오질 않는다.

" 세상 사람들이 너를 궁금해 할거야. 아무리 너를 알려고 해도, 알지 못할 거다. 기본적인

자료들만 남기고, 모든 걸 지워버릴 테니까. 너도 나처럼 그림자같은 존재가 되는 거야.

분명히 눈에 보이지만, 실루엣만 보이고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처럼... 아무것도 알지

못하도록.. 너도 숨길 거야. "

싫다... 그런 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 말라는 정윤호의 말이 먹먹하다.

" 자신 있어...? 그렇게 살아가는 거. "

자신 없어. 넘어갈 듯한 숨소리를 삼키고, 재중이 중얼거렸다. 점차 빨라지는 윤호의 손을

견디지 못하고, 재중이 허리를 강하게 비틀며 사정했다. 자신의 흔적이 묻은 손가락을, 재

중의 입 안에 밀어넣었다. 젖어버린 입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넌 더 강해져야 해. 더 나한테 어울리도록, 그렇게 내가 만들거다. 싫다는 말은 하지 마.

너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어. "

" ....... "

" 내가 만약에 보스라면, "

윤호는 그 말을 하며 웃었다. 내가 보스야... 넌 아직 모르지만.

" 너는 이 조직의 안주인이나 마찬가지야. 알아? 이 조직의 두 번째 보스라는 뜻이다. "

" ... 그런 말을 나에게 왜 해. 설마, 나보고 지금 보스의 안주인이라도 하라는 뜻은

아니지.

만약 그런 말을 하면 널 죽여버릴 거야. "

" 설마. "

" 네가 보스라는 소리는 하지 마. 그런 엄청난 남자 옆에서 살아갈 자신 없어. 지금의 너도

나에게는 벅차. "

" ..... 그래. "

이래서 네가 아직 안 된다는 거야. 우리 약한 재중이는, 아직 보스의 옆자리이자 이 조직의

Page 184: Happy Together

안주인이 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네.

" 언제까지 누워있을 거야. "

온 몸의 힘이 빠져서 누워있는 재중에게, 윤호가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죽여버려..!

재중이 그렇게 소리쳤다. 진짜 이럴 때마다 너 죽여버리고 싶어! 그 소리에 윤호가 또 웃어

버린다.

" 그래, 그 기운으로 살아. 그리고 날 죽이려면, 나중에 침대에서 죽여주게 해봐. "

" 이... 개새끼야! "

- Rrrr Rrrrrr

핸드폰을 받으며 윤호가 구두를 신었다. 풀린 다리를 간신히 세워서 일어난 재중이, 바지

를 추켜 올리며 눈을 매섭게 떴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미워보이지. 내가 한 선택을 후회

할 정도로 얄밉다.

" 그래. 지금 갈게. "

" 내 집에 마음대로 들어오지 마. 이 새끼야! "

" 내 집? 이 집은 내 거야. 너도 내 거고. "

윤호는 재빨리 현관문을 열고 나와버렸다. 뒤에서 무언가를 집어던지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아무튼 한 성깔 한다니까. 윤호는 피식 웃으며 자신을 맞이하는 옆 집의 조직원에

게 웃음으로 인사했다. 하긴, 그 정도의 성깔은 있어야 우리 조직의 안주인 노릇을 하지.

" 가자. "

" 아, 그리고 보스. 어제 찾아갔던 우연회 말입니다. 말을 통 듣지 않는데요. "

" 뭐라는데. "

" 죽어도 마약 루트를 내주지 않겠답니다. "

" 그래? "

시간 끌 필요는 없지. 윤호는 조직원에게 검은 구두와 코트를 준비하게 시켰다. 이제는

사람들을 피에 절일 시간이다. 피가 튀지 않도록 조심하자. 아직까지 내 김재중은 피비

린내를 맡기엔 너무 어리니까.

" 그럼 죽여버려. "

Page 185: Happy Together

그의 결단은 언제나 단호하고, 빠르다. 그것이 정윤호가 가진 최대의 장점이기도 했다.

곧 그를 맞이할 차가 도착했고, 언제나처럼 뒷좌석에 올라 탔다. 윤호는 자신의 뒷춤에

준비 된 매그넘을 습관처럼 만졌다. 흔한 총이었지만, 윤호가 새겨넣은 글씨가 손잡이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K 카르텔. 윤호의 조직의 이름이.

* * *

" 우웨에에엑-!!! "

" 괜찮어? "

" 우웨에에에에엑-!!!! "

" 아.. 아.. 약 좀 사다줄까? "

미친 듯이 토해내고 있다. 선지가 소의 피를 굳혀서 만들었다는 소리에, 얼굴이 새하애

지더니 바로 근처의 전봇대로 뛰어간 준수였다. 자신이 그토록 맛있게 먹은 해장국이

결국엔 피가 주 원료라는 소리에, 준수는 방금 먹은 그것을 모조리 게워버렸다. 모르고

먹는 음식이 더 맛있는 법을 왜 몰랐을까. 싱글벙글 웃으며 '소 피!'라고 외친 유천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준수의 등을 두드리느라 바쁘다.

" 나한테 뭘 먹여?! 소 피?! 야! 너 진짜 개념 태웠냐!? "

" 마, 맛있다며! "

" 웨에에에엑-! "

다시 구역질을 시작하며 허리를 수그렸다. 입에서 위액이 주욱, 흘러내렸다. 근처 가게에서

얻어온 휴지로 준수의 입술을 열심히 닦고 있는데, 그는 차갑게 유천을 밀어내고는 혼자서

타박타박 걷기 시작했다.

" 다, 다음에는 니가 좋아하는 스테이크 먹자! "

" 됐어. "

경찰차 앞에 서서 발로 문을 탕탕 쳐댔다. 저러다가 정말로 문이 까일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유천이다. 차에 올라탄 준수는, 아직도 비릿한 입 안에 사탕을 집어넣고 열심히 빨았다.

몸 안에서 소가 울부짖는 듯 하다. 워어, 보신탕보다 더 큰 충격이야. 세상에 그런 음식이

존재했다니.

" 집으로 빨리 가. "

" 벌써? "

" 그럼 뭐 하게! "

" 아니... 어디서 좀 얘기나 하면서, "

Page 186: Happy Together

" 됐으니까 빨리 가. "

단단히 화난 준수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도대체 맨날 왜 이런 거지? 처음부터

준수에게 밉보이고, 오늘까지 이 지랄이라니. 왜 같이 있으면 늘 기분 나쁘게 만들까. 아오,

진짜 죽어라. 이 화상아.

" 아.. 미안하다, 진짜. 난 니가 그렇게 싫어하는 줄 몰랐다. "

" ..... "

" 화 그만 내라.. 무섭다.. "

창밖을 보며 아무 말이 없다. 유천은 핸들을 돌리며 마음 속으로 자기 자신을 여러번이나

사격했다. 빨간 신호등이 걸리고, 유천은 핸들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아... 속상해, 진짜.

" 멈춰. "

말없이 차를 운전하고 있는데, 준수가 갑자기 멈추랜다. 그래서 멈췄다. 끼이이익-!

" 길 한 복판에서 멈추면 어떡하냐! "

" 니가 멈추라며... "

" 길 가에다 세워야지! 아! 박 형사!! "

" 아, 응. "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는데. 준수와 함께 있으면 내 머리가 바보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준수의 말 밖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으니...

" 왜 멈추라고 했어? "

차에서 내린 준수는, 가벼운 타박타박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향했다. 어디로 들어가는가

싶었더니 신발 가게다. 뒤따라 들어온 유천이 유리문 바깥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무지 비싸보이는 가게다. 유천은 한 번도 이런 곳에서 신발을 사 본

적이 없었다. 늘 평화시장에서 새벽에 떨이로 파는 칠천 오백원짜리 운동화만 사봤지.

" 들어와, 박 형사. "

" 나? "

" 그럼 여기 박 형사가 너 말고 또 있냐? "

Page 187: Happy Together

있을지도... 주위를 살펴 보고 있는데 준수가 소리를 바락 지른다. 황급히 신발 가게 안으로

들어온 유천이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 보았다. 점원이 반갑게 웃으며 자신을 맞이하고,

갑자기 자신의 닳고 헤진 운동화가 부끄러워지는 지금 이 순간.

" 발 사이즈 몇이야? "

" 285. "

" 곰 발 같으니. 285 사이즈로 이 구두 하나만 갖다 주세요. "

날렵하게 잘 빠진 앞 코가 예쁜 구두다. 내 안목은 틀림 없어. 준수는 고고하게 직원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았다. 유천은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서 두리번 거리다, 아무데나

앉았다.

" 저 손님... 그건 신발을 쌓아 놓은 박스라, 안으시면 안 되요. "

" 아! 의자에 앉어! 의자에! "

내 눈에 지금 의자가 들어오냐! 예쁘게 앉아있는 너만 보이는데. 유천은 투덜거리며 의자

에 앉아 애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쳐다보았다. 곧 직원이 구두를 가져왔고, 준수는 구두를

유천에게 내밀었다.

" ... 뭐야? "

" 신어봐. "

으응. 유천은 운동화를 벗고 구두를 신었다. 맙소사. 무릎의 절반까지 올라오는 스포츠

양말이다. 저 하얀 양말에 정장을 신었단 말야...? 준수의 머리가 아찔하다. 구두는

유천에게

잘 어울렸다. 이제서야 한 벌 양복을 입은 것 같다. 흐음, 역시 내 안목이란. 준수는 만족한

미소를 띄우며 유천에게 한 번 돌아보라고 말했다.

" 이렇게? "

멋있어. 음, 갈 수록 괜찮아져. 어느새 선지 해장국의 악몽은 까맣게 잊고, 자신 앞에서

정장을 입고 멋진 새 구두를 신고 돌고 돌고 있는 유천에게 흠뻑 빠져버렸다.

" 그만 돌아! "

언제까지 돌 참이냐. 준수가 그만 돌라고 말하기 전까지 빙글빙글 돌고 있는 유천을 세워서

자리에 다시 앉혔다.

Page 188: Happy Together

" 씨팔! 돌라며! "

" 욕 집어넣어. 이거 계산해 주세요. "

준수의 카드 안에서 나오는 골드 카드를 보고 눈이 휘둥그래진다. 갑자기 구두 선물이라니.

자신은 준수에게 제대로 된 선물도 못 해봤는데. 뭔가 창피해서 구두를 황급히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으려는데, 준수가 손가락 끝으로 운동화를 집어다 직원에게 내밀었다.

직원도 받기 싫어하는 닳고 헤진 운동화.

" 이거 버려주세요. "

" 준수야! 멀쩡한 운동화를 왜 버려? "

" 저게 멀쩡하냐? 앞 코에 빵꾸나서 네 양말 색깔 다 보이거든? "

" 그래도 여름에는 통풍 잘 되서 신기 편하다! "

" ... 시끄럽고, 그 구두 선물하는 거니까 잘 신어. "

" 왜! "

왜... 냐니. 그 질문에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좋아하니까 사주지. 사주고 싶으니까

사주지.

너는 바보냐? 그렇게 물어보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

" 일단 나와. "

구두를 신은 유천이 준수에게 끌려나왔고, 경찰차 앞에 서서 어색하게 자신의 새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제대로 된 구두를 가져본 것이 얼마 만인지.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 사주고 싶어서 사줬다, 왜. "

" ..... 왜 사주고 싶은데. 나 운동화 신고 다니면 쪽팔려서 그래? "

박 형사는 촌스럽고 구식이야- 이 말이 다시 유천의 귓가에서 맴돈다. 그런 마음으로

사준 거라면 받고 싶지 않다. 차라리 맨발이 나. 같이 다니는 내가 창피해서 산 거라면

안 받을래. 나 창피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슬프다.

" 그런거 아니야! "

" 왜 또 소리질러. "

" 좋아하니까 사주지! 사주고 싶으니까 좋아하지! 아, 아무튼! 좋다구! 박 형사! "

Page 189: Happy Together

이렇게 직접적으로 듣는 고백은 처음이라서, 유천의 얼굴이 싸아악 굳었다. 저 김준수가

지금 나에게 뭐라고 말 한 거지? 아까 전까지만 해도 선지 해장국 먹였다고 죽일 놈 보듯

쳐다보았던 녀석이..

" 그냥 내 마음이야! 잘 받고! 잘 신어! 그리고 양말은 냄새나니까 빨아! "

" ...... "

" 아니면... 내가 빨아줄까. "

푸욱, 고개를 숙이고 준수가 창피하다는 듯 말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유천은 한참이나

준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와아... 이렇게 기쁘다니.

" 아! 잠깐만! "

다짜고짜 끌어안고 입을 맞추려 하는 유천을 밀어내고, 준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지만 불안하다.

" ... 빨리 우리 집으로 가자. "

" 응! "

" 가서 마저 하자. "

" 응? "

" 이런이런 거에서 저런저런 거까지. "

흥. 넌 못하니까 내가 알아서 해줄게. 준수는 차 문을 열고 멋지게 타려고 했지만.. 차 문이

잠궈져 있는 관계로 실패.

" 빨리 열어줘! "

" 응! "

유천은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준수를 번쩍 안아올렸다.

" 엄마야! "

" 흐... 우리 예쁜 준수. "

쪼옥, 볼에 와 닿는 유천의 도톰한 입술이 좋다. 에라, 누가 보면 어때.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들. 유천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에 찌인, 하게 쪽쪽이를 날리고 차 안으로 밀려...

Page 190: Happy Together

" 아악! "

" 헉... "

" 던지면 어떡하냐! 내가 택배냐?! "

마지막까지 앙칼진 준수다. 오늘 밤은 무사하게 넘길 수 있으려나. 유천은 서둘러 운전석

으로 올라탔다.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오피스텔로 날아가기 위해, 뒷좌석에서 뒹굴고

있던 사이렌을 꺼내 차 위에 올렸다. 삐뽀삐뽀- 김준수 잡으러 가는 사이렌 소리가

경쾌하다.

" 가자! "

신호등 개무시. 횡단보도 개무시. 경찰차가 미친 듯이 달린다. 아무도 없는 밤 거리를.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14

" 아니.. 박 형사.. 그렇게 빨리 하지 말고 좀 천천히... "

" ........ "

" 응..... "

오피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유천을 덮치듯 입술을 부딪힌 준수는, 천천히 소파까지 그를

인도하며 무사히 착지했다. 메롱메롱 키스로 준수를 황당하게 하던 그 때가 생각나, 준

수는 천천히 입을 맞추며 유천이 쉽게 흥분하지 않도록 가르치고 또 지도했다. 속도는

천천히. 혀는 릴렉스하게, 그러나 리드하도록. 목구멍까지 닿지 않도록 적당하게 안으로,

그러나 너무 혓바닥 가지고 장난치지 말고 다른 곳까지 아찔하게 매만지도록.. 준수의

아낌없는 가르침을 받아, 유천은 거의 넋이 나간 상태로 키스에 집중했다.

츄으....ㅂ. 준수의 윗입술을 머금다가 살짝 떨어진 유천의 입술에서 키스 소리가 났다.

괜히 민망해서 혼자 웃다가, 유천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준수의 두 볼을 손바닥 안에

넣고 고개를 틀었다. 하면 할 수록 좋은 것 같아. 키스라는 건. 저번에 했던 키스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영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드라마틱하고 꿈 같아. 평소에 늘상

거칠고 제멋대로였던 유천이지만, 그의 앞에만 서면 자꾸만 보듬어주고 안아주고 싶다.

자상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어. 그만큼, 키스도 그만큼 달았다.

" 박 형사... "

Page 191: Happy Together

" 왜... "

" 닿아. "

거의 달려드는 포즈로 준수를 안은 유천이 눈을 살짝 뜨고 '응?'하고 물었다. 웅크린채

유천의 키스를 받아내던 준수가 발 끝으로 유천의 그곳을 정확히 톡톡, 두 어번 쳤다.

" 이거... "

" 아! "

이노무시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이 상태에서 애국가를 부를 수도 없는 거고. 유천

은 다리를 오무리고 민망한 표정으로 준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생글거리며 웃기

만 한다. 괜히 얄미워서, 뒷 목을 다시 잡아끌어 입을 맞췄다. 이제야 키스의 맛을 알아버

린 유천에겐 키스만으로도 모든 것이 벅찼다.

에효, 키스만 해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진도 더 나가면 아주 작살나겠네. 이제는 제법 능

숙하게 혀를 놀리는 유천의 등을 끌어안고 준수가 손을 슬쩍 와이셔츠 안으로 넣었다.

" 앗! 차거! "

" ..... "

" 놀랐잖아! "

꼭 중요한데서 애는 무드가 없어. 아직까지 다 녹지 않은 준수의 손에 화들짝 놀란 그가

준수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고 호오, 불었다.

" 손이 왜 이렇게 차.. 나는 뜨거워 죽겠는데. "

참 따뜻하다. 이 남자. 자신의 손을 비비며 호오, 거리는 유천의 행동에 괜히 마음이 찡

해진다. 이상하게도 이 남자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감동받고 마음이 아련해지는건

왜 일까. 준수는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는 유천의 손을 잡아서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가운데 손가락을 입에 넣자, 유천이 뭐라고 해야 될 지를 몰라서 가만히 있는게 보인다.

" 박 형사. "

" 응? "

" 샤워하고 와. "

" ... 그, 음.... 그래도 될까? "

" 응. "

" 아, 음.... 그럴까? "

" 응. "

Page 192: Happy Together

" 어... 그래, 음.... 빨리 씻고 올게. "

말을 더듬거리며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유천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뛰어가듯

달려간다. 준수는 키득거리며 입고 있던 자신의 코트를 벗어 옆에 놓았다. 들어간지 얼

마나 됐다고, 쏴아아- 하는 물소리가 벌써 들린다. 옷을 찢어발겨 벗은 것 같다. 준수는

소파에 길게 누운 채 유천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박유천... 그의 이름을 몇 번이나 중얼거리며.

.

.

.

" 여보세요? "

- 검사님!

" 박 형사? "

- 지금 바뻐요?!

" 아니.. 그냥 뭐 좀 조사하고 있어.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렇게 다급해? "

- 그... 검사님! 그게요!

다짜고짜 전화해서 검사님 타령이야- 창민은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싶어, 보고 있던

자료에서 잠시 눈을 떼고 핸드폰을 다잡았다. 유천의 목소리가 상당히 다급해 보인다.

마치 범인을 코 앞에 두고 미행이라도 하듯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 뭐야, 수사인력 필요해? 누구 보내줘? "

- 아! 씨팔! 그런 거 아니에요!

" ... 그럼 뭐야? "

- 제가요! 오늘 좋아하는 사람이랑 그거 할 거 같거든요!

" .... 뭐? "

이 새끼가 또 뭐라고 지껄여. 황당한 표정의 창민이,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다가 멈췄다.

뭐를 해?

- 지금 여기가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네 집이거든요! 근데 오늘 할 거 같아요! 아마!

" ... 섹스? "

- 아! 누가 들어요!!!!!

아무도 없거든. 여기 내 집이거든. 창민은 횡한 자신의 오피스텔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어

웃어버렸다. 밤 늦도록 한인 마피아에 대한 조사로 여념이 없는데, 같은 강력반인 유천은

또 다른 일에 대한 준비로 여념이 없어보인다.

Page 193: Happy Together

- 어.. 어떻게 해야 돼요?! 검사님은 해본 적 있잖아요!

" 상대방은 어디 갔어? "

- 샤워하거든요! 아.. 저 미칠 거 같아요. 저 진짜 하나도 모르는데!

" 박 형사 뽀르노 많이 보잖아. "

- 씨! 요새 안 보거든요!

" ...... 박 형사, 내가 하나만 물어볼게. "

아무래도 김준수- 그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것 같은데... 머리가 복잡하다. 가장 아끼는

후배이자 강력반 최고의 유능한 형사인 유천이, 어쩌자고 동성애에 발을 딛었을까. 만약

유천이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그 이유로 그를 멀리할 창민은 아니었지만, 마음 약

하고 순진한 그가 첫 연애로 너무나 힘든 길을 택한 것 같아서 걱정이 앞선다. 게다가 김준

수라는 그 남자.. 보통 성깔내기가 아닌 것 같았는데. 만약이라도 박유천을 갖고 놀기라도

하는 거라면, 그가 나중에 받을 상처는 장난이 아닐 것이다.

" 남자 맞지. "

- ..........

" 김준수라는 남자, 맞지? "

- .... 어떻게... 아셨어요?

" 너 맨날 회의 시간에 김준수김준수 하고 미친놈처럼 중얼거리잖아. 무슨 빙의 씌인

사람도 아니고. "

- 검사님... 저요....

유천의 말소리가 줄어든다. 창민은 잠시 컴퓨터 화면을 꺼놓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한참

이나 일에 몰두했더니 배가 출출하다. 이럴 때 누가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준다면 좋을 텐

데. 남자든 여자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저렇게 골골거리는 박유천이 오히려 부럽다.

- 진심이거든요.

유천의 확고한 그 말에, 창민이 우유를 따르던 손을 잠시 멈췄다. 정말이네, 이 녀석. 정

말 진지한 말을 할 때면 목소리가 낮아지고 떨리기까지 하는 유천이다. 자신의 약혼녀의

장례식장에 왔을 때에도 그랬었다. 넋이 나가있는 창민의 옆에서, 유천은 평소의 거칠고

다혈질인 성격을 접어두고, 오랫동안 그의 곁에서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위로하고 또 위

로했었다.

- 저 미친놈처럼 보이면요, 전화 끊으세요.

뚝.

핸드폰을 접고, 창민은 딱 오 초를 셌다. 5..4..3..2..1. 다시 유천의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Page 194: Happy Together

걸자, 그가 한 번에 받는다. 아무튼 단순한 놈.

- 죽여버려!!!!!!!!

" 적이 되진 않을 테니까 안심해. 누가 뭐래도 나는 박 형사 아끼는 사람이니까. "

- .... 진짜 끊은 줄 알고 놀랐잖아요!

" 다만, 남자끼리의 관계는 조심해서 해. 후우, 내가 내 주위의 사람한테 이런 말 하게 될

줄은 몰랐네. "

- 나 진짜 하나도 모르는데, 남자끼리 하는 거 보기는 봤거든요? 그런데.. 무지 아프다고

울고 난리도 아니던데, 아...! 애 나올 때 됐어요! 무슨 코멘트 없어요?!

" 남자든 여자든, 관계시에 지켜야 할 점은 단 한 가지야. "

- 뭔데요?

" 믿음을 줘. 나중에 이 사람과 헤어진다고 해도, 함께 보낸 시간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줄 거라는 믿음. 그거 하나면 돼. "

우리 박 형사... 어른이 되어가고 있네. 왠지 아들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다. 창민은 아무

대답이 없는 유천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얼마나 떨릴까. 하긴, 워낙 오랫동안 총각이었

어야지.

- 나중에 보고하겠습니다.

" 오케이. 놓치지 않길 바라네, 제군. "

- 염려 마십쇼.

뚜욱.. 하고 끊어진 전화. 창민은 가득 따라진 우유를 마시며 다시 컴퓨터로 향했다. 아마

오늘부터 아끼는 후배의 연애담으로 귀가 아파질 것 같다.

.

.

.

침대에 두 팔을 짚고 푸샵을 하던 유천은,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의 탄탄한 상체에 만족

하며 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셨다. 몸매에 대한 자신은 있다! 어깨도 넓고, 뱃살도 없고,

왕자도 그럭저럭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부실한 하체도 아니야. 다만...

" 혹시나 작동 안하면 어떡하지. 성불구자라든가. "

그런 씨발스러운 일이 생기면 난 당장 이 오피스텔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리고 말테다. 유

천은 지금까지 순결을 지켜온 자신의 물건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움직여라,

아가야.

" 박 형사- "

Page 195: Happy Together

" 어? 어! "

" 수건 좀 줘! "

욕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천이 어쩔 줄 모르고 오피스텔을 휘젓고 다니다가 적당

한 크기의 수건을 들고 욕실로 뛰어갔다. 아랫도리에 하얀 타월을 감은 준수가 물이 뚝,

뚝, 떨어지는 모습으로 빼꼼히 자신을 보고있다. 아... 내가 미쳐.

" ... 행주거든. "

" 악! 수건 어딨는데! 못 찾겠다! "

" 베란다에 걸려져 있어. "

너는 코도 없냐. 냄새도 못 맡냐. 황당한 표정으로 행주를 집어던진 준수가, 이내 미소를

띄우고 헐레벌떡 달려오는 유천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얼마나 애가 타고 있을까. 아이구,

귀여워라.

" 머리 말려줘. "

유천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받은 수건을 도로 내밀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서 머리카락

을 내미는데, 화악 풍겨오는 샴푸 향에 머리가 아찔해진다. 무슨 샴푸를 쓰는 걸까? 나는

빨래비누 쓰는데- 빨개진 얼굴로 수건으로 준수의 머리를 닦아내는 유천이다. 톡톡톡...

가느다란 갈색머리를 털고, 목덜미에 묻은 물기도 닦아냈다. 곧고 얇은 준수의 목덜미가

아래를 향해 있다. 또옥... 하고 흐르는 물 한 방울에, 유천의 침 한 방울도 그대로

넘어간다.

" 귀에 물도 닦아줘야지. "

수건에 손가락을 넣고 준수의 귓구멍을 살짝 닦아내자, 강아지처럼 깨갱거리며 웃는다.

상체를 훤히 드러낸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 건지, 준수가 여전히 생글거리며 유천을 보고

웃었다. 귀를 닦아내고, 준수의 얼굴에 묻은 물도 마저 닦아내는 유천은 더 이상 웃지 않

았다. 다 내 걸로 하고 싶어.

" 준수야. "

" ... 어? "

" 장난 그만 치고, 하자. "

갑자기 진지해진 유천의 태도에 적응이 되지 않아 '응?' 하는 표정으로 머뭇거리기만

했다. 늘 당황하고 먼저 움추러들고 쩔쩔대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화난 것 처럼

보이기까지 하다. 실상은 누가 더, 라고 할 것도 없이 떨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Page 196: Happy Together

" 저기이... "

자신의 손목을 덥썩 잡고 침실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유천의 발걸음이 거침없다. 게다가

뒤에서 보는 그의 등이 왜 이렇게 넓어 보이는 건지. 딱히 맞는 준수의 옷이 없어서, 그저

후줄근한 박스티 한 장을 걸쳤을 뿐인데도, 티셔츠 바깥으로 드러나는 그의 남자다운 등선

과 멋지게 떨어지는 허리선에 두근거린다. 준수는 들고 있던 수건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놓

고 그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분명히 경험이 많은 것은 자기 쪽인데, 지금은 마치 유천이 모든 걸 다 알아서 할 테니 맡

기고 너는 그냥 눈만 감으라는 상황이다. 뭐야... 사실은 처음이라는 거, 다 개뻥 아니야?!

" 박 형사... 정말로, 내가 처음이야? "

" 응. "

저 남자의 매력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무슨 말을 하든 다 믿어버리게 돼. 앞으로

그건 더 심해지겠지.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면 할 수록, 박유천이 빨간색 보고 초록색이라

고 해도 나는 믿어버릴지 몰라. 박유천이 환한 아침에 지금은 밤이라고 말해도, 나는 믿을

지 몰라. 그 만큼.. 저 사람은 나를 믿게 만들어.

" 그리고 마지막이야. "

정말로 위험한데. 너가 처음이야, 너가 마지막이야. 너무나도 흔한 남자들의 작업용 멘트

가 아니던가. 게다가 준수처럼 원나잇을 즐기던 이들에게는 더더욱이나 흔한 말이다.

한 번이라도 자보고 싶어서, 입에 발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던 남자들이 떠오른다.

내 사람은 틀릴 거라고, 사람들은 사랑을 시작할 때 언제나 바보같은 착각을 해. 사랑이

끝나고 나면... 내 사람도 다른 이들과 똑같았는데. 다를 것 없는 사랑이었는데. 그러나,

나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도 또 바보같은 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달콤하기 짝이없는

이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차오르지. 당신이 마지막일 거라는 단단해 보이는

확신에, 모든 걸 주고 싶고 사랑이 하고 싶어져.

박 형사... 당신은 제발 틀려줘.

가볍게 준수를 침대 위로 눕힌 유천이, 마치 처음부터 그를 사랑했던 것처럼 아주 쉽게

준수를 안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목덜미로 내려온 입맞춤이, 처음으로 입술이 아닌 다른

곳을 빨았다. 아주 투박하고 우왁스럽지만, 믿음직스러운 유천의 손바닥이 준수의 가느다

Page 197: Happy Together

란 허리를 안고 마르고 헬쓱한 등을 쓸었다. 한참이나 그의 하얀 상체를 입 안에 머금고서

단 맛을 즐기던 유천이, 조금 머뭇거리다 둘러진 타월 속으로 손을 넣었다.

" 괜찮아? "

" ... 응. "

준수는 자신의 손으로 타월을 묶어놓은 매듭을 천천히 풀렀다. 풀러놓은 매듭을 헤쳐놓고,

유천이 타월을 모조리 벗겨 침대 밑으로 던졌다. 완전히 드러난 자신의 나신에 왠지 부끄

러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유천이 바로 그의 턱을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강하다는

건 이런 것일까. 한치의 웃음도 허용하지 않는 유천의 진지한 표정에 심장이 뛴다.. 언제나

내 앞에서 바보처럼 굴고, 어리숙하다고만 느끼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강한 남자였구나.

" 내 앞에서 고개 돌리지 마. 뭐가 부끄러운데. "

" 다 보여주니까.. 부끄럽지. "

" .. 다 못 봤는데. "

여자보다 더 늘씬한 길고 곧은 다리를 세웠다. 분명히 처음이었지만, 그의 몸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리드해야 하는 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은 유천 자신에게도

처음이었기에 사실은 놀라고 있었다. 준수가 욕실에서 샤워를 할 때만 해도, 눈앞이 깜

깜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창민에게 전화까지 걸고 온갖 난리를 쳤었는데.. 막상

준수가 자신의 눈앞에 있으니 모든 것이 확실해진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 아... 아읏..! "

다급해져서 유천의 팔을 붙들고 몸을 틀었다. 설마, 처음 잠자리에서 유천이 오럴을 할

줄은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키스할 때도 눈치만 보던 그였는데. 정말로

당황해서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눕히려 하는데, 유천이 긴 팔을 뻗어 준수의 허리를

다시 곧게 눕게 했다. 그 투박하고 따뜻한 손바닥이 아프지 않게 자신을 눌렀고, 준수는

다리를 움찔거리며 자신의 가장 은밀한 부분에 입을 맞추고 있는 유천을 내려다보았다.

거의 터지기 직전에, 유천이 침대를 손으로 짚고 다시 올라와 준수를 따뜻하게 안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입고 있던 반바지를 벗었다. 유천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 들어찬

준수의 머리가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져서... 유천은 고개를 숙여 다시 그의 속눈썹에

입을 맞췄다. 예쁘다...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분명 자신은

처음도 아니었고, 그다지 깨끗하게 살아온 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치 처음으로 누군

가에게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서, 많이... 행복하다.

자신보다 훨씬 선이 굵고 남자다운 유천의 다리가 파고 들었고, 그가 몸을 위로 올라자

다리가 넓게 벌려졌다. 자신의 안에 누군가 가득 차 있는 기분이 든다. 준수는 손가락으로

Page 198: Happy Together

유천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 빨래 비누 냄새 나... "

" 응. 그걸로 머리 감아. "

뭐야! 웃음을 터뜨리자, 유천이 또 화난 표정을 짓더니 이럴 때에 웃지 말라며 혼내는 모

션을 취한다. 웃음을 멈추고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유천의 목을 끌어안았다. 빨리, 빨리..

보채는 준수 덕분에 망설이지 않고 손으로 그의 허벅지를 만지며 조금 더 넓게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나서 아래를 슬쩍 만져보니, 아마도 자신이 들어갈 길이 느껴진다.

- 믿음을 줘. 나중에 이 사람과 헤어진다고 해도, 함께 보낸 시간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줄 거라는 믿음.

나는 너와 헤어지지도 않을 거고, 함께 보낸 시간을 후회하지도 않게 해주고 싶은데. 내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네가 다 알 수 있을까. 너는 내가 아니라서.. 내 마음의 절반도

모를텐데.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준수의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하얗고 땀에 젖은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그의 손목에 붉게 둘러진 상처를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상처를 숨기려 드

는 준수에게 괜찮아, 하고 말했다.

" 하나도 안 흉해. 흉 아니야, 이거. 너 지키려고 네가 만든 거잖아. "

" 이상하지... "

" 안 이상해. 이것도 예뻐. "

정말 다정하게 손목을 쥐고 그 위에 입을 맞춰서.. 정말로 눈물이 났다. 유천은 준수에게

믿음을 주고 싶어 했지만, 몇 단어를 조합해 문장으로 만들기에는 알고 있는 사랑의 언어

들이 너무나 적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안아주기로 했다. 온기와, 체온을 주기로 했다..

믿니, 그렇게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난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완벽

한 일체감에 온 몸이 터져나갈 듯 떨려왔다. 눈물을 참고 간간히 숨소리를 내뱉는 준수의

얼굴에 온 가슴이 터져나갈 듯 하다. 그의 가는 허리를 안고, 그의 가는 머리카락을 안고,

유천은 오래도록 사랑을 주었다. 평생 그가 잊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 * *

- 얼마 전에 신림동에서 발견된 사체는 서울의 폭력 조직 중 하나인 우연회의 두목인

Page 199: Happy Together

강정남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검찰은 현재 이 살인사건의 목격자를 찾고 있으나,

아직까지 밝혀진 단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우연회의 두목인...

치익,

며칠 전에 총에 맞은 사체가 검은 봉지 안에 담긴 채 발견되어 전국이 떠들석했다. 시체의

머리와 목에 총탄이 하나씩 박혀져 있었다. 아주 깔끔하고 치밀한 것으로 보아, 고용된 전

문 킬러의 소행이 분명하다며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폭력 조직 간의 암투야 일반 사람들

모르게 오래 전부터 계속 되어왔던 것이었지만, 이렇게 깔끔한 실력으로 '총'으로 인해 죽

은 경우는 드물었기에 더욱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재중은 TV의 전원을 끄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윤호의 침실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여유

롭게 이 방을 드나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요새 정윤호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밤새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의 서재에서 오랫동안 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정윤호의

책장은 대단하다고 생각될 만큼 없는 분야가 없었다. 법전부터 시작해서 의학까지, 모든 분

야의 서적이 골고루 배치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책이 전부 다 읽은 테가 난다는 것

이다. '미안하지만, 거의 다 읽었어.' 정윤호의 그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그는 얼마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까.

" 김재중, 여기 있어? "

" 아...! "

문이 달칵 열리고 윤호가 들어왔다. 그는 제대로 갖춰진 수트 차림이다. 엄숙해 보이기

까지 하다. 나이보다 몇 살은 더 들어보이는 것 같다. 재중은 침대에서 일어나 어색하게

내려왔다. 이런 타이밍에 들어오면 곤란한데. 꼭 기다리고 있던 사람 같잖아.

" 미안한데, 지금 나가줘야겠다. "

" .... 왜? "

" 저택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어. "

" 네 방은 상관 없잖아. "

" 아주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나가줘. 네 집으로 가서 쉬고 있어. 공부를 하든지. "

마치 내쫒기는 기분이라서 괜히 싫다. 재중은 겉옷을 걸치고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윤호는 오늘따라 더 위압감 있는 분위기다. 저럴 때 건들면 자기만 손해인 듯해

말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저택의 커다란 1층 홀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거나 서 있었다.

" ......! "

Page 200: Happy Together

TV에서 많이 보았던 사람이다. 물론 뉴스에서. 검찰이 그렇게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최대 폭력 조직의 보스들이 여러명이다. 세상에... 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다니.

" 누구인지, "

그 중 한 명이 윤호가 데리고 나가던 재중을 보며 물었다. 조직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곱상하게 생긴 얼굴이다. 총이라고는 만져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여리여리한 몸.

" K 카르텔의 고문 변호사입니다. "

" 굉장히 어려보이는데? "

" 젋고, 아름답죠. 그게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무기 아닌가요. "

윤호는 그렇게 대답하고 웃었다. 하긴, 맞는 말이지.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말들이 튀어

나오고 그 사이를 틈타 정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바래다 주지는 못하겠다. 잘 들어가. "

" K 카르텔? "

" 우리 조직의 이름이야. "

윤호는 그렇게 말하고 문을 닫았다. 콰앙... 그 거대한 문이 닫혀지며, 마치 자신만이 단

절된 기분이 들었다. 12 호의 저택으로 가는 내내 주욱 늘어서 있는 조직원들이 거슬린다.

이제는 자신을 보고 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지만, 자신이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오히려 더 거슬린다.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궜다.

그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구나.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됬다고.. 저렇게 대단한 폭력배들을

자기 저택으로 초대하다니. 그 중에 한 명은, 검찰에서 현재 지명 수배하고 있는 남자다.

잠이 오지를 않는다. 정윤호는 그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내가 모르는 그의 모습

이 얼마나 많을까. 모든 것이 궁금하다. 그것이 그에 대한 하나의 관심임을, 재중은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두 시간 쯤이 지났을 때, 그는 몰래 뒷문을 열고 집을 빠져나갔다.

* * *

" 우연회 사건은 심했어. 조금 더 구슬려보지 않고 그렇게 죽일 것 까진 없었잖아. "

" 저는 결단력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 의견에 바로 동조해주신 여러분들을

저의 은밀한 곳까지 모셨구요. 여기 계신 분들은 앞으로 어떤 의심도 갖지 않고 믿을

생각입니다.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계약이 성사되죠. 아닌가요. "

Page 201: Happy Together

" 맞는 말일세. "

분명 자신의 아들 뻘 되는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홀에 모인 각 조직의 보스들은 모두가 다

윤호의 아우라에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어떻게 살아왔길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강한 위압감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다들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저는 피 흘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괜한 에너지 낭비죠. 피라는 건,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입을 뚫리게 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

물론 당신들이 내 의견에 마지막까지 동조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 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저격수들로 당신들의 목을 딸 수도 있어. 당신들의 바로 곁에서 경계하고 있는 저

돼지같은 보디가드들과 함께.

" K 카르텔... 뉴욕의 한인 마피아. 그 유명한 조직의 이름은 나도 들어봤어. 보스가 이리도

어린 남자일 줄은 전혀 몰랐지만. "

" 그건 저를 무시하시는 발언으로 들립니다만, "

" ... 아닐세. 나는 단지 놀랐다는 표현을 한 것 뿐이야. 기껏해야 20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가 이토록 커다란 조직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에. "

윤호의 차가운 답변을 들은 다른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돌렸다. 대단한 남자다.

조직을 위해서 어마어마한 부지를 통째로 사들이고, 거기에 자신들의 도시를 건설하다니.

도대체 얼마만큼의 부를 소유했기에 이토록 거대한 스케일 자랑하는 걸까.

" 그러면 모두, 저희 조직과 손을 잡기로 합의를 보신 겁니까. "

윤호의 말에, 남자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 받았다.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힘을 키우는 것이다. 그 힘을 키워도 최고가 되지 못할 시에는 최고에 붙으면 된다. 최고란

냉혹함과 인자함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냉혹함으로 자신의 계약을 처리할 것이고,

인자함으로 손 잡은 이들을 끌어안을 것이다.

" 우리도 쓸데 없는 피를 보기는 싫으니까. 게다가 K 카르텔의 엄청난 총기류 소지에

대해서는 익히 얘기를 들었네. 대한민국에는 아직까지 총으로 전면전을 펼치는 조직이

없지. "

"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뉴욕에서는 아무도 각목과 주먹으로 싸우지 않으니까요. "

그건 너희들의 나약함을 비웃는 말이기도 했다. 단번에 그 말 뜻을 알아챈 자들이 굳어진

표정을 애써 풀며 웃었다.

Page 202: Happy Together

" 한 가족이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저 쪽에 만찬이 준비되어 있으니 가서 드시기 바랍

니다. 물론 술도 충분합니다. "

윤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에게 악수를 청하는 남자들이 서로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정윤호의 손을 잡고, 앞으로 자신의 조직에 별 탈이 없기를 빌었다. 국내에 몇 없는 킬러

의 수준으로 저격 실력을 갖추고 있는 모든 조직원들. 우연회의 두목이 어떤 식으로 깨끗

하게 처리되었는지는 이미 언론을 통해서 상세하게 들었다.

" 앞으로 잘 부탁하네, 보스. "

쨍그랑,!

" 누구야! "

바로 뒷춤에서 리볼버를 꺼낸 윤호가 소리난 쪽으로 정확히 총구를 겨냥했다. 깨어진

도자기 뒤에서, 재중이 보였다.

" 너...! "

재중이 그에게 다가왔다. 방금 자신이 들은 소리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네가...

네가 보스였어? 재중은 옆을 돌아보았다. 자신 보스라고 알고 있던 남자, 윤호의 참모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서 있었다.

쫘악,!

" 건방진 새끼. "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윤호가 망설임 없이 재중의 뺨을 내리쳤다. 순간 눈에서 불꽃이

튀는 줄 알았다. 엄청난 힘에 주저앉은 재중이, 뺨을 쥐고 윤호를 올려다보았다. 그에게선

미안함이나 죄책감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다만, 어째서 내 명령을 여기고 몰래 여기

로 숨어 들어온 것이냐는 분노만이 가득했다. 왜 내 말을 어겨. 그의 눈은 그저 보스였고,

오너(Owner)였다. 자신에게만 특별하다고 여기던, 몰래 흐뭇해 하던 따스함도 없었다.

" 아래로 데려가. "

Page 203: Happy Together

재중을 일으킨 조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끌고 나갔다. 반항 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당황이라도 할 줄 알았다. 만나서부터 이제까지 자신을 속여온 거짓말에 대해,

미안함이라도 눈빛에 담을 줄 알았다. 정윤호에겐 그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나 당당하게

재중을 바라보았고, 내가 보스인 것이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대했다. 게다가

다시는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손찌검까지.

지하 독방으로 데려가라는 윤호의 말에, 재중의 발이 계단 아래로 향했다. 저 남자가 보스

였어. 정윤호가...

" 죄송합니다. 머리가 좋다고 예뻐해 줬더니, 건방이 하늘을 찌르네요. "

" 하긴, 이 세계에서는 무엇보다 힘으로 다스리는 것이 법이죠. "

별 일 아니라는 듯 윤호가 소동을 마무리했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른 남자들과 함께

만찬이 차려진 홀로 향했다.

김재중, 너는 내 유일한 약점이야.

남들 앞에서 네가 나의 약점이라고 당당하게 떠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냐...

* * *

" 어.. 김준수 없다. "

부스스 눈을 뜨자마자 준수를 찾는 유천. 옆 침대에 휑- 하니 비어져 있다. 설마 어제에

있었던 일이 꿈인가 싶어서 한참이나 고민해 보지만 그건 역시 아닌 것 같아. 아아.. 갑

자기 어제의 감동이 떠올라 혼자 어쩔 줄 모르고 웃어버리는 유천이다. 침대 위에서 비

비적 거리면서 흩어진 김준수의 향기를 맡으려고 킁킁대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그토록

보고 싶던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 똥개 같애. 빨리 일어나. "

하얀 이불을 몸에 돌돌 말고 머그잔을 든 준수가 서 있었다. 이불 사이로 드러나는 하얗

고 여린 어깨에, 어제 자신이 새겨놓은 흔적들이 즐비하다. 총총총- 걸음걸이로 침대에

다가온 준수가 머그잔을 내려놓고 이불을 펼쳐 그 안으로 유천을 품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보드라운 속살이 유천의 가슴에 와 닿았다.

" 풀어줄게. "

Page 204: Happy Together

유천의 다리 위에 걸터 앉아서, 그의 손목에 묶어진 줄을 풀렀다. 어제 정사가 끝난 후,

준수는 여느 때처럼 자신의 팔을 줄로 묶으려 했다. 언제까지 유천이 자신을 바라보며

잠을 이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자신의 몽유병이 고쳐진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유천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준수의 팔목과 자신의 팔목에 줄을 연결하여 둘 다 편안하게 잠이

들기를 원했다.

- 네가 설마 바깥으로 나가려 움직이며는, 나도 같이 움직일거야. 그러면 잠에서 깰 거고,

너 깨워서 다시 재울게.

- 몽유병 상태로.. 내가 줄을 풀면 어쩌려고.

- 걱정마. 난 형사거든. 형사란 말야, 임마. 자다가 고양이 지나가는 소리에도 깨어나는

사람들이야. 엄청 예민한 신경을 가졌으니까 걱정 마. 그런 건.

- 내가 너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 쓸데없는 걱정 마. 너 같이 야리야리한 녀석한테 당할 만큼 약해 빠진 놈 아니거든.

그리고 너한테 목도 졸려 봤잖아. 견딜만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거. 덤덤하게

말하는 유천의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준수의 가슴을 찔렀다. 그래, 그렇게 찌르고 또

찔러야 면역성이 생기지.

" 잘 때... 나 아무 일 없었지? "

" 응. "

" 나... 매일 그러는 건 아니야. 어쩌다가 가끔 그래. 되게 운 나쁠 때만, 밖으로 나가.

그러니까.... "

나 이상한 취급 하지 마. 그의 뒷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유천은 준수의 뺨에 가볍

게 입을 맞추고 웃었다. 같이 밤을 보낸 첫 번째 날 아침인데 우울한 얘기는 하지 말자.

침대에서 내려와 준수와 이불을 함께 돌돌 만 채로 욕실까지 함께 갔다. 다리가 꼬이고,

불편해서 몇 번이나 이리저리 부딪혔다. 부딪힐 때마다 유천은 웃었고, 준수는 아프다며

징징댔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 사랑해. "

그런 말을 가슴으로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 * *

Page 205: Happy Together

" 추워... "

재중이 가둬진 곳은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지하 방이었다. 이런 화려한 저택

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축축하고, 습기차고, 벽 사이로 바람이 스며

들고, 온기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곳. 재중은 선 채로 웅크려 양 어깨를 손으로

잡고 떨었다. 자신을 데려왔던 조직원들은 아무 말 없이 나가버렸고, 혼자 남았다. 차라리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나았다. 귀신이 나올 것 같아, 이런 소리나 지껄일 재중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어둠은 싫다.

그는 차가운 벽을 등지고 서서 윤호를 떠올렸다. 그가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고,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뒷길을 통해 중앙 저택으로 다시 갔던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정윤호가 무슨 말을 할까. 정윤호는 도대체 조직에서 얼만한 위치이길래

그런 유명한 조직의 보스들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는 걸까. 모든 것이 궁금했다.

정윤호는 늘 다 보여줄 것처럼 굴면서도 정장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찾아내고 싶었는데, 생각치도 못했던 사실에 놀라 인기척을 내버렸다.

보스.

" 개자식... "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었어. 웃음이 다 나왔다. 나에게 보스라고 속였던 그 남자는

정윤호의 진짜 부하겠지. 처음부터 앞에 나를 데려다 놓고 모두가 가지고 논 거였어.

제이 에비뉴에 살고 있는 모두가 정윤호가 보스임을 알았는데도 나에게 아무말 하지

않았어. 정윤호가 철저히 입막음 한 거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소름이 끼쳤다. 도대체 그 남자는 왜 나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일까. 고작 해봐야 아버지의

빚 때문에 끌려온 가난뱅이인 고학생에게, 왜 처음부터 자신의 직위를 숨긴 걸까.

그러나... 재중에게 충격을 준 것은, 자신이 이미 마음을 주기 시작한 남자가 한 조직의

보스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두가 있는 가운데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

의 뺨을 내리친 정윤호의 차가운 손길 때문에 더더욱. 재중은 혼란스러웠다.

너에게 나는 도대체 뭘까.

끼익,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에 재중이 답답해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Page 206: Happy Together

그리고 그가 서 있었다. 약간 술에 취한 듯한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김재중을 바라

보고 있었다.

" 이제 오셨어요? "

" ....... "

" 보스. "

" ....... "

" 왜 처음부터 거짓말 했어. "

그가 비웃는다. 윤호는 말 없이 재중에게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그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다. 커다란 종이 백.

" 입어. "

" .... 뭐야, "

종이백 안을 들여다 보니, 하얀 수트가 있다. 재중은 기가 찬 표정으로 옷을 들어올렸다.

깔끔하고 하얀 수트와 나비 넥타이. 부담스럽지 않은, 세련된 프릴이 수놓아져 있는 와이

셔츠. 도대체 지금 이걸 나에게 내미는 이유가 뭐야. 너의 생각은 단 하나도 모르겠어.

" 그걸 입고 나와서.... 피아노를 쳐. "

" .... 뭐? "

" 연주해. 앞에서. "

" ..... 싫어. "

나는 도대체 너에게 뭐지? 고문 변호사라는 건 유치한 타이틀이고, 결국엔 네 마음대로

휘둘리는 불쌍한 노리개에 지나지 않잖아...!

" 넌 도대체 뭐하는 새끼야? "

" ........... "

" 처음부터 나에게 무슨 생각을 품었어? 왜 처음부터 나한테 거짓말 했어? 이유라도 알고

화를 내야지 답답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도대체 너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하나도 모르겠어...! "

" ........... "

" 네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네가 키스하고 싶으면 키스하고! 네가 만지고 싶으면

날 만지고! 네가 하라는 곳에서 공부하고! 여자도 못 만나고! 모든 사람들과 연락도

하지 못하고! 나는 뭐야! 도대체 네가 뭔데 내 모든 걸 마음대로 해! 왜 나한테 명령해!!!

"

윤호의 손이 올라온다. 다시 그가 뺨을 칠까봐, 재중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고개를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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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다. 싫다, 그 엄청난 아픔은. 그런데도 소리가 들리지 않고 아픔도 느껴지지 않아서 눈을

뜨고 윤호를 바라보았다. 윤호의 손은 아까 전 자신이 때렸던 재중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 아팠지. "

" ........... "

"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면 안 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히면 안 돼.

그 순간 내 약점이 보이고 틈이 보이니까. "

" ........... "

" 너는... 내 약점이야. "

그래.. 이 눈이야. 한 순간 보이는 정윤호의 감정.

" K 카르텔은, 내가 스무살 때 만든 조직이야. 그래.. 내가 보스야. "

" .........! "

" 약해지면 안 돼, 나는. 그것이 설령 너라도... 나는 약해지면 안 돼. 너에게도 강해야 해.

그러니까, "

그가 재중을 끌어 안으려 한 발자국 다가왔지만, 재중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정말

이 남자가 보스였어. 이 조직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 죽여왔을까. 그 살인 위에

정윤호가 있어. 모든 피의 살육전은... 정윤호를 통해 이루어져. 이 남자가.. 그 주인이야.

" 나를 나약하게 만들지 마, 재중아. "

윤호는 수트를 재중에게 넘긴 채 문을 나섰다. 지금 당장 그 옷으로 갈아입고 위로 올라와.

그의 말이 차가운 방 안에서 웅얼대며 울렸다.

결국, 정윤호에게 원하는 답변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왜 나에게 보스라는 사실을 숨기고

날 만났던 처음부터 거짓말을 한 건지.

그러나... 그에게, 내가 특별한 존재임을 알 수가 있어서 마음이 공허하지는 않다니, 내가

정말로 저 남자에게 빠져버렸구나. 빌어먹을...

" ........! "

수트를 들고 한참이나 서 있던 재중이, 입을 살짝 벌리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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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피아노를 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안 거지.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15

- 2003. 12. 20.

- New York , Manhattan, New&Y Recital

" 표는? "

" 지갑 안에 있습니다. "

" 7시 시작이지? "

" 네. "

윤호는 손에 들고 있는 붉은 빛의 장미 꽃다발을 가슴에 안았다. 가시를 모조리 제거한

이 아름다운 꽃다발은 새하얀 웨딩 천으로 감싸져 상당히 우아하다. 어느 꽃을 골라야

할지 몰라서 한참이나 망설였다고 말한다면 모두가 웃겠지. 그러나 처음으로 선물하는

꽃다발에는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수수하지만 아름다운 작약, 순결한 백합, 청초한

프리지아나 사랑스러운 튤립도 아니다. 역시 그에겐 장미가 어울려. 오래전부터 꽃들의

여왕이었던 붉은 장미.

" 오늘 연주 리스트가 어떻게 되지. "

"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 3번이 첫 곡이라고 들었습니다. "

" 그리고? "

" 쇼팽의 즉홍 환상곡이 두번째 곡입니다. "

잘도 자신에게 어울리는 곡만 선곡했구나. 웅장하고 아름다운 시작으로 커텐을 열고,

빠르지만 우아한 곡으로 낭만을 얘기하고,

" 베토벤의 소나타 8번, 비창입니다. "

" 네번 째는? "

" 슈베르트의 마왕이 네번째 곡이네요. "

" 마지막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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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논 변주곡입니다. "

꽤나 어려운 곡들을 골랐네. 그러나 마지막은 달콤하고 편안하게. 자신이 스스로 선곡

한 것이라면 그 사이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얼마나 더 아름다워졌을까.

예술을 사랑하는 뉴욕의 브로드웨이 근처에는, 아마츄어 피아니스트들을 위한 리사이틀

회관이 여러 곳 있었다. 재중은 이 리사이틀에서 작년 여름부터 연주를 해왔다. 처음에는

유명 피아니스트의 연습생 신분으로 정식 공연 전에 한두 곡을 연주했고, 작년 겨울부터는

자신의 개인 리사이틀을 열어 그다지 많지 않은 소수의 인원 앞에서 피아노를 치곤 했다.

그리고 올 해 여름, 재중은 마찬가지로 뉴욕을 찾아 윤호의 그리움을 만족시켰고, 겨울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 카드는, 쓰셨습니까? "

" 응. "

" 공연이 끝나고 따로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하는 것이 빠를텐데, "

" 아니야. 그러지 마. "

억지로 그러는 건 싫어. 내가 처음부터 그에게 호감을 가졌던 것처럼, 그도 처음부터 내게

호감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기적인 욕심이지만 나는 그래.

윤호는 장미 꽃다발 사이로 끼워져 있는 하얀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세 번의 연주를 보며

단 한번도 김재중에게 말을 걸었던 적이 없었다. 연주회가 끝나면 재중은 로비로 내려와

자신의 연주를 감상해준 사람들에게 간단한 영어로 감사의 말을 하고, 사진을 찍고, 악수

를 하고 웃으며 작별을 고하고는 했다. 윤호는 한 번도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신중한 성격이었고, 때를 기다리는 남자였다.

그리고 오늘, 윤호는 자신의 신중한 결정 끝에 김재중에게 꽃다발을 안기기로 했다. 나는

어떤 판결을 보게 될까. 늘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던 그 하얀 얼굴의 남자가, 내 꽃다발을

안으며 나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줄까. 모든 건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더 짜릿하다. 결과

를 알 수 없는 게임을 시작할 때, 나는 언제나 흥분을 느낀다.

공연장의 불이 어두워지고, 그다지 크지 않은 무대에는 새하얀 그랜드 피아노와 간단한

현악기로 이루어진 연주단이 있었다. 그리고 김재중은 그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뚫어지

게 건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당히 가운데 앉은 윤호는 우선 미소를 지었다. 기대보다

더, 그는 아름답다. 여름보다 조금 더 기른 흑빛 머리칼은 단정하고, 와이셔츠 바깥으로

곧게 뻗어난 목은 가늘다. 심호흡을 하고 있는 입술은 지독하게 붉고, 건반을 내려다보고

있는 눈동자는 지나치게 검다. 윤호는 턱을 괴고 앉아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린 재중을

섬세하게 가슴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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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 보았을 때가 떠오른다. 한국의 유명 피아니스트가 이곳에서 연주한다는 말에

시간을 내어 보러왔을 때, 정작 윤호의 눈과 귀를 사로 잡은 것은 저 남자였다. 그 때의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마치 다른 시대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김재중 덕분에.

그의 클래식한 아름다움을 단 번에 꽤뚫어 보았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고전적인 향기가

피아노 선율을 타고 윤호의 앞에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의 남자입니다.

우습겠지만, 그랬어. 윤호는 미소지으며 재중의 연주를 찬찬히 훑었다.

.

.

.

" 의외네요. 고문 변호사의 취미가 고상하게도 클래식 피아노라니... "

그 때와 똑같이, 재중은 윤호의 앞에서 연주하고 있다. 그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듣는

관객이 자신이 전혀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점. 그리고 어깨를 짓누르는 두려움과 부

담감 때문에 제대로 집중을 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이제는 정윤호의 존재를 정확하게

인식한다는 점. 재중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자신의 손가락이 기억하고 악보가 있다

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건반을 누르니, 바로 어제 연주를 했던 것처럼 손가락이 멋대로

빠르게 움직였다. 물론 그 때보다야 투박하고 섬세함이 결여된 연주였지만, 평생 클래식

이라고는 모짜르트와 베토벤 정도밖에 듣지 못한 다른 조직들의 우두머리에겐, 충분히

고상한 선물일 것이다.

" 신참 주제에 건방 떤 것에 대한 직접적인 사과입니다. "

" 아.. 뭐, 그렇게 신경쓰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

" 남자가 참.... "

하얀 수트를 입고, 점차 리듬을 몸으로 익히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재중을 보던 남자들의

시선이 모호해졌다. 처음에는 그저 곱상하게 생긴 변호사인 줄 알았는데, 천천히 훑어보

니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용모에 손가락을 가지고 있다.

" 왜요, 혹시 저희 쪽 변호사에게 의뢰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

" 아니... 그런게 아니라, "

" 어렵게 구한 인재입니다. 그렇게 탐나는 눈으로 쳐다보시면 곤란하죠. "

" 뛰어난 인재인가 봅니다. 많이 아끼시는 것 같은데, "

윤호는 느긋하게 붉은색 소파에 기댄 채 연주하는 재중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 자기 조직원 아끼지 않는 보스도 있습니까. 저 남자도 그 중 한 명일 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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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한 명이지. 윤호는 웃음을 삼키고 연주에 집중했다. 재중은 윤호의 명령에 따라

얼마 지나지 않아 수트를 차려입고 홀로 올라왔다. 연주된 지가 오래되어서 자신은 없지만,

노력해보겠다는 짧은 인삿말과 함께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확실히 그의 연주는 많이 투박

해지고 느끼기 힘든 실수도 잦지만, 피아노를 치는 그 하얀 손가락은 여전히 아름답다.

차라리 그 때 같았다면 좋았을 텐데, 윤호가 보지 못했던 2년 사이에 재중은 많이도 야위고

많이도 힘들어 보였다. 그 덕분에 생긴 위태로움과 갸냘픔이 묘한 매력을 덤으로 선물했다.

" 여기까지... 인데요. "

연주가 끝나고, 재중이 피아노에서 일어섰다.

" 수고했어. 나가 봐. "

재중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윤호를 노려보았다. 들키지 않을 적대감이었지만, 저 남자는

충분히 자신의 지금 기분이 어떤지 알 것이다. 결국 저 남자의 명령에 따랐다는 비참함이

온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아직 풀리지 않은 궁금증에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내가 피아노를 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어. 내 뒷 조사라도 한 거냐? 무엇 때문에?

" 귀가 먹었나, 김재중. "

" ... 죄송합니다. "

" 아까처럼 사람들 앞에서 따귀 맞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처신해. "

비웃는 저 남자의 입꼬리가 싫다. 그와 동시에 저 입꼬리에 입맞춤 당하고 싶어하는 나도

싫다. 재중은 한숨을 쉬며 홀을 나갔다. 제이 에비뉴에 온 후로 한 번도 편안하게 잤던 적

이 없던 것 같다. 오늘 역시 그렇겠지.

.

.

.

2년 전, 12월 20일 날. 재중은 자신의 품에 안겨진 붉은 장미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자신에게 꽃다발을 안긴 그 남자는, 빙그레 웃기만 하더니 이내 홀을 나가 버렸다.

순간이지만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인 자신이, 똑같은 남자인 그에게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낀 것이다. 훤칠하게 큰 키에 검은색 코트를 걸치고 있던 그 남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연주 늘 잘 듣고 있어요' 라며, 짧은 인사를

건네고 사람들 틈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Page 212: Happy Together

이름이라도 물어볼까, 하는 사이에 뉴욕의 한인 신문사에서 온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대며

연주에 대한 소감을 물었고, 다른 교포들이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몰려들었다. 재중은 금세

자신을 떠난 그 남자의 존재를 묻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북적거리는 틈 사이에서 꽃다발

이 엉망이 되어버린다. 윤호가 건네준 그 꽃다발 위로 다른 꽃다발이 얹히고, 또 얹히고,

결국에는 꽃다발 사이에 끼워진 정윤호의 하얀 카드가 바닥으로 떨어져 사정없이 짓밟혀

버렸다.

" 감사합니다. "

" 내년 여름에 또 리사이틀 여나요? "

" 아마도요. 그 때도 꼭 보러오세요. "

자신의 연주를 좋아한다는 노부부에게 따뜻하게 웃어주고, 재중은 한 품에 안을 수 없는

꽃다발을 다른 이에게 나눠주었다. 밑에 깔려 있던 장미 꽃다발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 이 꽃다발을 건넸던 남자. 재중은 발꿈치를 들어 그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았고, 재중은 주위를 몇 번 둘러본 뒤 대기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정윤호는 그렇게 잊혀졌다. 자신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던 한 멋진 남자. 그 이상

의 의미는 되지 못한 채, 수 많은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묻어버렸다.

" 안 오려나... "

윤호는 타임 스퀘어 아래에서 시계를 바라보았다. 지금쯤 연주회 마무리가 되었을 테고

사람들의 축하도 모두 받았을 범직한데.. 이 시간까지 타임 스퀘어로 나오라고 한 것이

무리였을까. 윤호는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가 오기를 바란다. 내 한 번의 인사에,

나처럼 심장에 잔잔한 파동을 느끼고 나에게 초대되길 바란다면 좋겠다.

뉴욕의 겨울은 춥다. 윤호는 옷깃을 여미고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조금 더, 가 반나절

이 되어서... 그는 결국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돌아가야 했다.

내년 여름이 되면, 운명같은 만남을 기대하는 자신의 환상은 접어두고 직접 재중에게 말

을 걸고 인사를 하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했다. 그러나 재중은 다시 뉴욕에 오지 않았다.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고, 또 다시 여름이 되어도 김재중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Page 213: Happy Together

" 괜찮아... "

그 때를 회상하며, 윤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지금은 내 눈 앞에 있으니까 괜찮아. 너를

찾아내기 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지. 너를 데려오는 방법이 정당하지 못했다는 점

은 나도 인정해. 하지만... 모든 일에는 작전이 필요하고 그 작전을 수행하는 용기가 필요

한 법이야. 나는 내 식으로 너를 얻은 것이고, 너는 너 식으로 나를 사랑하게 되겠지.

* * *

" 어제 어땠어? "

룰루랄라- 리듬을 타며 강력반으로 들어오는 걸 보니 일을 치르긴 치른 모양이군. 창민은

피식 웃으며 유천의 어깨를 툭 쳤다. 창민의 질문에 대답 못하고 눈동자 굴리는 꼴이라니.

" 그렇게 오랫동안 쓰지 않는 물건도 고장은 안나는구나. "

" 아! 말짱하거든요?! "

" 그럼 됐고. "

그러고보니 남자와 일을 치른 것이 아닌가. 남자들 사이에서야 성에 대해 여자들보다 훨씬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은밀한 환상이 큰 법이다.

창민은 잠시 앙칼진 목소리와 도도한 눈매를 가지고 있던 김준수라는 남자를 떠올렸다. 그

남자는 분명 처음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 어제야 비로소 총각딱지를 뗀 유천이 얼마나 어

리버리하게 일을 치뤘을까. 게다가 여자도 아닌 남자에게.

" 좋았대? "

" 네?!? "

" 박 형사는 처음이잖아. 제대로 하기는 했어? "

" 그.... 하니까 되던데요? "

" 그거야 박 형사 생각이고, "

" ...... "

" 상대방은 전혀 못 느꼈을 수도 있잖아. "

" 아니... 그게! "

분명히 앙앙 거리면서 요리조리 꿈틀거리긴 했는데, 어제 자신의 밑에서 한참이나 소리를

질렀던 김준수를 떠올리니 또 아랫배가 묵직해진다. 창민의 말을 들어보니 신경쓰이지 않

았던 부분이 갑자기 신경쓰인다. 자기야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관계고,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과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 기절해버릴 뻔했지만, 김준수도 그랬을까..

Page 214: Happy Together

" 좋았... 을껄요! "

" 걱정이네... 누구랑 해본 적이 있어야 좋아하는 건지, 아닌 건지 알지. 그 나이 되도록 뭐

하고 살았어? 자리로 가서 내가 준 자료들이나 검토해봐. 취조실에 끌어앉힌 놈 있으니까

패대기 쳐서 사건 조사하고- "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온 유천이, 핸드폰을 부여잡고 바로 준수의 번호를 눌렀다.

자신의 두번째 파티마저 산산조각 난 이후로, 준수는 집에서 심기를 가다듬으며 살고 있다.

- 왜.

받자마자 왜- 라니. 아무튼 이 깍쟁이 같은 성격을 좀 어떻게... 유천은 남들에게 들리지 않

을 목소리로 소곤소곤 거리며 몸을 숙였다.

" 우리 준수! "

- 아, 왜.

" 뭐해? "

- 자다가 깼거든.

" 또 잤어? "

- 미인은 잠꾸러기잖아.

" 아... 음, 내 생각 하고 있어? "

- 아! 또 왜 간질하게 굴어?!

" 아니... 있잖아, "

- 빨리 말해. 나 쉬마려.

" 우리 준수, 어제 나랑 좋았어? "

- 또 뭐야?!

" 아니... 형이 또 처음이니까, 너가 좋았나 싶어서... 잘 모르니까... 응? "

- 서른 다 되도록 총각인게 뭐 자랑이라고 또 들먹여? 내가 어제 좋았다고 했잖아!

" 그... 우리 준수도 형 만큼 좋았을까? "

- 아! 형! 형! 형타령 좀 그만해! 늙은 게 훈장이냐?! 나 쉬마려! 끊고 일이나 해!

뚜뚜뚜뚜 -

" 매정해... "

잠자리를 가진 후에는 좀 사근거리나 싶더니.. 유천은 가뜩이나 두툼한 입술을 앞으로

내밀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취조실에 가서 키보드로 범인 대가리나 후려쳐볼까

하는데, 갑자기 강력반 문이 활짝 열리면서 김 형사가 뛰어들어왔다.

" 상계동에서 또 살인입니다! "

Page 215: Happy Together

" 뭐?! "

" 강정남 살인 사건과 같은 방식이구요! "

" ... 박 형사, 옷 입고 당장 나와! "

강력 1반이 술렁거린다. 강정남 살인사건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미궁이었다. 범인을 본

목격자도 없을 뿐더러, 피해자가 폭력 조직의 보스이다 보니 증언을 해줄 사람도 마땅히

찾을 수가 없었다. 유천은 방금 전까지 준수에 대한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찬 머리를 비워

버리고 라이더 자켓을 걸쳤다. 빠르게 나가는 창민의 뒤를 따라 사건 현장으로 걸음을 옮

겼다.

.

.

.

" 또, 총이야. "

" 강정남 살인사건에서 실탄으로 알아낼 수 있는 실마리는 없었습니까? "

" 없어. 아주 평범한 총알이었어. 조사해본 결과 총도 리볼버야. 물론 한국에서야 흔하지

않은 것이 총이지만, 또 흔치 않게 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것들도 거의 리볼버지. "

" 검사님... 이 사람이요, 그... "

" 맞아. 검흔파의 이석주야. "

또 폭력 조직의 보스다. 창민은 이미 죽어버린 남자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서울과 수도권의 폭력 조직들의 보스가 죽어나가고 있다. 이제 단 두명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히 연쇄 살인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게다가 우연회와 검흔파 모두 미미하게나마

마약 루트를 가지고 있던 조직들이었다. 마약 루트를 가지고 있던 조직들의 보스가 하나

둘 씩 죽어간다... 라.

" 같은 살인 방법이야. 범인도 같아. "

" 화상파와 홍초파가 와해된 후, 새로운 마약 루트를 점령하기 위한 조직들 간의 싸움으

로 보이는데요. "

" 글쎄. 한국에서 이렇게 쉽게 총으로 사람을 쏘아죽이는 살인 사건을 본 적이 있었던가. "

" 흠, "

" 게다가 박 형사도 알다시피, 우리나라가 언제 영화에서나 볼 법하게 킬러를 그럴싸하게

고용해서 보스의 목을 따는 방법을 취했어? 총기류 소지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조직들은 마약 루트에 공을 들이는 대신 총기 소지는 포기하는게 대부분이었어.

아직까지 우리나라 폭력배들은 총이 아닌 주먹과 몸으로 싸워. 그런거, 한 두 번 봤어? "

" 맞는 말이네요. "

아직까지 감이 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유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차

라리 잘됐다고 생각한다. 일반인이 죽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나 골치 썩히던 조직 폭력배

가 살해당한 것이 아닌가. 어차피 수사해봤자 증인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고...

Page 216: Happy Together

" 굉장히 능숙한 솜씨야. 아주 오래전부터 총을 다뤄온.... "

" 저격수를 고용했나보죠. "

" 킬러?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 킬러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들이 이런 흔해빠진

리볼버를 사용할 것 같아? "

" 아! 썅! 몰라!! "

" 김 형사! "

" 네? "

" FBI 쪽에서 보내기로 한 자료, 언제 도착하기로 했지? "

" 아마 내일일겁니다. 그건... 왜요? "

" 평범한 리볼버로 접근전을 이용해 보스의 목을 딸 수 있는 부하를 소유한 조직이라...

총을 아주 오래 다뤄본, 그리고 쉽게 총을 소지할 수 있는 조직... "

" 한인 마피아....? "

이제야 감이 왔다는 듯, 유천이 창민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체에 흰 천

을 덮고 폴리스 라인을 나왔다.

" 그 대단하다는 FBI의 눈을 어떻게 속여왔는진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절대로 안 돼. "

* * *

" 맛은 어때? "

" 굉장히 맛있네요. 태어나서 이런 건 처음 먹어봐요, 정윤호 씨. "

" .... 모자라면 조금 더 가져다 먹어. "

" 아니요. 제가 감히 건방지게 그런 짓을 하나요. "

" 김재중. "

달각. 윤호가 나이프를 내려놓고 재중을 노려보았다. 재중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꼬리를 올렸다. 왜-에-요? 하고 반듯한 목소리로 물으며.

"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그 빌어먹을 말투 좀 어떻게 해 봐. "

" 제가 뭘 어쨌다고요? 대단하신 보스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데 이 정도 예는 기본이죠.

이렇게 말대꾸 하는 것도 참 송구스럽네요. 저 같이 미천한 버러지 같은 놈과 식사 하는

보스의 기분도 좋지는 않으실 텐데요. "

" 김재중! "

타앙..! 테이블을 내려친 손바닥이 진동으로 미미하게 떨려온다. 순간 흠칫, 놀랐지만 재

중은 내색하지 않고 그저 생글생글 웃었다. 정윤호가 사실대로 모든 것을 말할 때까지

원래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래, 한 번 때린 거. 어디까지 패대기 치나 보자. 네가

답답해서 모든 걸 불어버릴 때까지 난 네 속을 박박 긁어놓을 거다.

Page 217: Happy Together

" 무서워라... 나가 있을까요? 보스? "

" 그 보스 소리 좀 집어 치워! 언제부터 네가 나에게 극존칭을 썼어! "

" 그거야 제가 워낙 머리가 나빠서 눈치를 채지 못하고 빌빌거릴 때 얘기죠. 지금이야

모든 걸 알았는데 어떻게 예전과 같이 대하나요. 저는 빚 대신 끌려온 미천한 몸인데.

조선시대로 치면 노예 쯤 되려나? "

" .... 노예면 노예답게 굴어. 비꼬지 말고. "

" 비꼬는 거 아니에요, 주인님. "

저걸..! 윤호는 아랫 입술을 깨물며 나이프를 집어 던졌다. 재중은 피아노 연주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생각할 것들이 많을 것 같아서 일부로

내버려 두었는데, 한참이 지나도 얼굴을 보이지 않아 결국엔 윤호가 재중을 식사 초대를

빌미로 부른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김재중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처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정윤호를 보지도 않았고, 자신의 속내가 빤히 보이던 그 정직한 표정도 아니

었다. 그 대신 비웃고 조롱하는 말투로 정윤호를 대하며 애를 먹이는 것이다.

" ... 김재중. "

테이블 건너편에서 열심히 고기를 썰어먹는 재중의 손목을 낚아챘다. 예전 같았으면 바

로 화를 내며 소리질렀을텐데, 지금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그저 손목이 낚인 채 물끄러

미 윤호를 바라볼 뿐이다.

" 이렇게 나온다고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 줄 알아? 내가 보스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 건

순전히 너 때문이었어. 널 가지고 장난칠 생각은 없었다고. 내가 말 했잖아! "

" 글쎄요. 저는 워낙 머리가 나빠서 이해가 되질 않네요, 보스. "

" 어느 누가 마피아의 안주인을 하고 싶어해! 누가 마피아의 두번째 주인이 되고 싶어해!?

누가 보스의 옆에 있고 싶어해...! 네 입으로 그랬잖아! "

" .... 당신은 처음부터 나를 속였잖아. 이미 나를 속일 모든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

도대체 언제 부터야. 나는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 결과, 답은 하나로 모아지더라.

처음부터 정윤호는 나를 알고 있었어.

" 김재중... 나는, "

" 나는 당신에게 내가 피아노를 쳤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말했던 적이 없어. 그런데 당신

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에게 피아노를 연주하라고 명령했어. 왜? 처음부터 내가 피아노

를 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었어...! 내 말이

틀려!? "

" 맞아. "

Page 218: Happy Together

저 남자에게는 당혹감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걸까? 기가 차서 잠시 말문을

닫은 재중이, 으르렁 거리듯 쏘아 붙였다.

" 개 같은 스토커 새끼...! "

" 뭐? "

" 누구를 시켜서 내 뒷조사를 하게 했어...?! 처음부터 나를 이 말도 안 되는 곳으로 끌고

온 것도 다 계획적이었지?!! 처음부터 내가 목적이었어.. 아버지의 빚 따위는...? "

아버지의 빚. 그것 때문에 나는 이 조직으로 끌려왔어. 그런데 저 남자는 애초부터 내가

끌려올 것을 알고 조직원으로 신분을 위장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

" 아버지의 빚도... 네가 조작한 거야....? "

또, 소름. 저 남자를 만나고 하루에 몇 번이나 소름이 끼치는지. 설마, 싶은 표정으로 재중

이 뒷걸음질 쳤다. 설마.. 거기서부터는 아니겠지.

" 말해봐.. 정윤호....! "

" 보스, 라고 비웃을 때는 언제고 또 정윤호네. 아무튼 너는 너무 감정적이야. "

" 말해!!!!!!! "

" 그렇다면, 지금와서 뭘 어쩔건데. "

하하... 웃음이 나와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워낙 평소에 도박을 즐기던 남자라, 그가

빚을 내어서 도박을 하고 모조리 말아먹었다고 해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

부터 정윤호는 미끼를 던지고 내 아버지를 말아먹게 만드려고 작정했단 말이지.

" 우리 영감을 돈으로 옭매고... "

그걸 빌미로 나를 잡아오려고. 제 옆에 끌어 앉히려고.

" 너.. 도대체 어디서 부터야.... "

이제는 정말로 무서워져서, 재중이 눈에 띄게 뒷걸음질 치며 윤호에게서 물러났다. 그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재중의 허리를 끌어안으려 팔을 뻗었

지만 재중은 쉽게 잡히질 않았다.

Page 219: Happy Together

" 미친놈. 정신나간 새끼. 너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이 개사이코 같은 새끼..! 너 뭐야?!

뭐 하는 새끼인데 내 인생을 이딴 식으로 망쳐놔!??!!!! "

망쳐?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떤 방식을 이용했든, 우리 둘이 만났고 서로에게

끌리고 있는데, 내가 네 인생을 망쳐? 오히려 도와준거지.

" 다가오지마아....! 이제 너 같은 사이코 새끼 말 따위 안 들어!! 도대체 어디서부터 날

알았고 나한테 수작부렸어...!? 우리 아버지는 지금 어디 있어!!!! "

" 잘 있으니까 걱정 마. "

" ... 뭐? "

" 그 영감, 지금 우리가 잘 감시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그래봤자 돈 잃고 날려먹은

건 사실 아니야? "

물론 도박을 조작해서 억지로 판 돈을 잃어버리게 한 건 내 지시였지만.

" 이...! "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어서, 윤호가 재중에게 빠르게 다가가 허리를 낚아채고 바둥대는

그의 다리를 옭아맸다. 그러나 재중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사실

을 알아버린 뇌가,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해도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짓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눈 앞에서 뻔뻔하게 제 허리를 끌어안고 나른한 눈으로 내려보는

그 정윤호의 얼굴에, 뱉어버렸다. 침을.

" ......... "

제대로 뱉었다. 손등으로 재중의 침을 닦아낸 윤호가, 혓바닥으로 입술을 쓸더니 피식

웃으며 재중의 손목을 억세게 휘어잡았다.

" 어쩔거냐, 나 화났는데. "

" 그래서? 이거 놔아!! 이 정신병자 새끼...! "

" 수위 넘었다, 재중아. "

" 씨팔! 갈 때까지 가 봐!! 당장 여기서 나갈거야!! 뭐? 니 이름이랑 내 이름에 J가

들어가서

제이 에비뉴?! 지랄깝싸네..! 거짓말 밥먹듯 하는 정신병자 모시는 조폭들이랑 살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 손 놔! "

" 가만히 있어!!!! "

" 나 끌어앉혀놓고 뭐 하려고 했어?! 이 개사이코 새끼야...! 고문 변호사?! 그거 다 네

수작

이지!? 진짜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왜 이런 짓을 저질러?!!? 이 미친 새끼....! "

Page 220: Happy Together

자기 스스로 감정 조절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냉철한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윤호

였지만,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할 말과 해서는 안 될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놓으며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재중을 보고, 윤호는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

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단지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어서 비록 정당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할 지라도 내 식으로 데려왔을 뿐인데, 그 힘든 일을 한 결과가 고작 미친 개사이코 소리나

듣는 거라니.

" 이 염병할 새끼야! 변명이라도 해 봐!! 이 씨팔새끼! 이 소 만도 못.... 아! 아아!!!!! "

재중의 머리채를 확 낚아챈 윤호가, 그대로 자신의 방에 올라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했다.

머리카락이 한웅큼 잡힌 채 질질 끌려오듯 윤호의 뒤를 따르던 재중이 비명을 고래고래

질러대며 이걸 놓으라고 외쳤다. 그 많은 조직원들은 다 어딜 간건지 보이지가 않는다.

" 사람 살려!!! "

" 여긴 사람 죽이는 곳이거든. "

나즈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윤호가 손에 힘을 주며 재중을 더욱 끌었다. 이러다가 머리채

다 뽑히겠다는 생각에, 재중이 최대한 윤호의 손에 자신의 머리를 가깝게 붙이며 억울하게

아픔을 줄여나갔다. 빌어먹을 폭군 새끼...! 그렇게 고개가 꺾여진 채 윤호의 방에 들어와,

화려한 응접실과 고아한 서재를 지나 그는 거침없이 침실로 들어갔다. 이런 젠장, 위험함을

감지한 재중이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숨을 죽이고 입을 다물었다.

" 아퍼!!!!!! "

거칠게 머리채를 뜯으며 재중을 침대로 몰아세운 윤호가, 자신의 머리를 움켜잡고 죽겠다

며 웅크린 재중을 내려다보았다. 내려다보다- 그 단어 만으로도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어

있는 분위기. 자신의 앞에서 또 능숙하게 넥타이를 푸르는 윤호를 보니, 갑자기 기지촌에서

자신을 거침없이 덮쳐오던 그의 어깨가 생각난다. 재중은 뒤로 물러서려다 이곳이 침대임을

깨닫고 서둘러 아래로 빌을 딛었다. 물론, 바로 발을 침대 위로 꺾여올린 정윤호 덕분에

소용없는 짓임을 일찍 깨닫긴 했다.

" 너한테 진짜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지. "

" 뭐... 뭐... "

아까의 그 기세는 어디로 간 건지, 재중이 자신을 방어할 그 무언가를 찾아 눈을 굴렸다.

결국 쓸데없이 배게를 끌어안고 경계심 어린 눈으로 윤호를 바라보았다. 윗옷을 벗은 그는

자신의 와이셔츠를 찢어버리듯 벗겨냈다. 눈 앞에 드러난 탄탄한 상체를 보고 그제야 진짜

Page 221: Happy Together

로 겁이 나서 배게를 정윤호에게 집어던졌다. 물론 손등으로 집어친 그의 완력의 승리.

" 너 발가벗겨서 하루종일 가지고 노는 거. "

이 미친 새끼가...! 튀어나오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저 남자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기에, 재중은 서둘러 뇌를 굴리며 이 사태를 수습할 방법을 떠올렸

다. 일단은 침대에서 내려와야해. 이곳은 100% 정윤호에게 승리를 안겨줄 최고의 고지다.

" 잠깐만. "

재중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낯뜨거울만큼 요염하게 웃고서, 자신의 벨트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정윤호가 쳐다보기도 전에 스르르 벨트를 풀러버렸다.

" 내가 벗을게. "

다소 황당한 표정의 그를 앞에 세워두고, 재중은 끊임없이 야살스럽게 미소지으며 벨트를

풀렀다. 자신에게도 이런 '끼'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세상은 살고 봐야 아는 법이

야. 벨트가 모조리 풀러지고 자신의 손에 감기자, 재중은 뒤로 약간 물러나며 윤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발가벗겨서 하루종일 갖고 놀고 싶었어...? "

" 응. "

바로 대답하지 말아줄래, 씨방새야.

" 그랬구나... "

윤호의 경계가 조금 풀어지는 틈을 타서, 재중이 날렵하게 손을 들어올려 벨트의 버클로

손의 모든 힘을 다해 정윤호의 얼굴을 후려쳐버렸다. 악,! 하는 그의 경쾌한 비명 소리와

함께 완전히 반대로 돌아간 얼굴이 보이자, 재중은 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손에 벨트를

감고 서재로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바로 뒤에서 자신의 얼굴을 감싼 채 따라나온 윤호가

거의 폭팔해버린 표정으로 손에 잡히는 책상 위의 스탠드를 집어던졌다.

" 너, 오늘 진짜 죽자. 재중아. "

" 너나 죽어! 이 씨발 새끼야! "

" 이....! "

Page 222: Happy Together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윤호가 빠르게 재중에게 달려왔지만 재중도 그만큼 물러서서

손에 휘감긴 벨트를 미친듯이 휘둘렀다. 잘 하는 짓이다... 보기에도 우스운 그 꼴을

보다가, 윤호가 눈을 번뜩이며 벨트의 끝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자신의 마지막

무기를 빼앗긴 재중이, 이번에는 손에 닥치는대로 책들을 책장에서 빼내 집어던지기 시작

했다. 워낙 고서들이 많아서 책을 맞는 윤호의 얼굴에 아픔이 서렸다.

" 안 멈춰?!?!!! 야!! 김재중!!!! "

자신에게 날아오는 책을 손바닥으로 밀쳐내고, 윤호가 달려오듯 다가와 재중의 머리채를

다시 낚아채고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조르듯 쥐었다. 그 숨막히는 순간 속에서, 재중이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숙여 윤호의 손등을 물어뜯었다.

" 아악!!!! "

" 잘난 니가 가르쳐준 유도의 공격기술에, 물어 뜯기는 없더라? "

피가 흐르는 손등을 쥐고, 윤호가 다시 재중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재중은 서재 가운데로

들어서며 책장에서 닥치는대로 책을 빼내 던졌다. 그거로도 모자라 책상 위의 서류들을

모조리 엎어버리고, 회전 의자를 들어다가 던졌지만, 아슬아슬하게 윤호의 옆을 비껴갔다.

생존본능으로 강해진 재중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이곳을 안전하게 빠져나가

저 웃통을 훌러덩 벗어재낀 정윤호 밑에 깔리는 불상사를 피해야 한다는 집념 뿐이다.

" 나 좀 제발 가만히 내버려.....?! "

서랍장을 열어 서랍장을 통째로 윤호에게 집어던졌는데... 재중의 시선이 윤호가 아닌 바

닥으로 향했다. 나동그래진 서랍장 곁으로, 어지럽게 흩어진 파일과 종이 쪼가리와 신문

들이 보였다. 도대체 왜 저 신문이 정윤호의 책상 서랍에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낯선 신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재중 자신이 주인공으로 찍혀있는 사진이 실렸기 때문에.

" 이거....? "

자신이 부유했던 시절, 뉴욕에서 리사이틀을 마치고 한인 신문사의 기자들에게 찍힌 사진

이다. 한인 신문에 실린 재중의 연주회 때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재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문을 들어올려 눈을 크게 떴다. 꽃다발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재중의 뒤에,

지나가듯 찍힌 저 남자는 분명히...

" 너... "

Page 223: Happy Together

" ....... "

" 이 때.. 부터야? "

아마도 2년 전. 재중이 마지막으로 뉴욕에서 연주회를 끝난 직후의 사진일 것이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이 기사가 한인 신문에 짧게 실린 이후로는 뉴욕에 갔던 적이 없다. 가세가

기운 집안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 이후로는 피아노도 접어버렸고. 재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뒤에 찍힌 정윤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금과 똑같이 수려

한 얼굴. 그리고... 재중이 안고 있는 장미 꽃다발의 원래 주인.

" .... 너였어? "

그제야 모든 것이 생각난다. 나에게 장미 꽃다발을 안겨주었던 남자. 다시 찾아볼틈도 없

을만큼 바쁜 와중 속에서, 너도 모르게 잊어버린 남자. 꽃다발을 안겨주며 환하게 웃을 때

그 미소가 근사해서 나도 모르게 눈동자를 고정시키고 입술을 반 쯤 벌리게 했던 그 남자.

" 진짜.... 화려하게도 알아낸다. "

정윤호는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완전히 엉망이 되버린 자신의 서재를 둘러보았다. 책들

이 여기저기 흩어진 것은 둘째치고, 책상 위의 중요한 서류들이 엉망으로 뒤집혀졌다. 게다

가 망가진 스탠드와 지 혼자 빙글빙글 돌면서 누워있는 회전 의자... FBI가 내 집을

뒤진다고

해도 이딴식으로 어지럽히진 않을텐데. 허탈하게 웃으며 스탠드를 일으켰다.

" 뭐, 굳이 설명 더 필요해? "

" ...... "

" 네 연주,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챙겨 들었어. 갈수록 피아노 실력 늘더라. 잘했어. 기교는

부족하고 쇼맨쉽도 없었지만, 정직하고 곧은 연주였어. 뭐... 나야 피아노 감상 보다는

너한테 목적이 있어서 리사이틀 찾은 거지만. "

"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 "

" 우리 조직이 왜 튼튼한 줄 알아? 인재들이 많거든. 여러 분야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인재

가 널려있지. 왜냐면 나한테는 인재를 알아보는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 너도 마찬가지야.

내 사람 알아보는 남다른 내 능력 덕분에, 한 눈에 너 알아봤어. "

" 뭐를 알아봐... "

" 쟤 데리고 살아야겠다, 이런 거. "

어느새 재중의 곁으로 다가온 윤호가, 그가 보고 있던 신문을 접어두고 시선을 마주쳤다.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재중이 땅에 떨어진 신문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교차되

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윤호가 재중의 턱을 끌어당겨 눈을 바라보게 했다.

Page 224: Happy Together

탄탄하고 건장한 어깨 위로 단정하게 생긴 그의 얼굴이 보인다. 이 남자가, 나를 4년 전부

터 품고 살았단 말이지. 그래서 그런 말도 안되는 짓거리로 나를 제 옆에 끌어다 앉혔다는

소리지. 유지되는 침묵 속에서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뭐 저렇게 생겼냐. 정말

이지 지독하게 잘생긴 그 얼굴을 훑으며 한숨을 쉬었다. 흐아,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에 약

하다고 하더니. 나 역시 별다를 바 없는 사람이구나.

" 뭐라고 말해줄까. "

" 뭐를. "

" 거짓말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줄까, 죽을만큼 사랑한다고 말해줄까, 아주 미치게 너한테

빠졌다고 말해줄까, 아니면 영원히 너만을 바라보겠다고 말해줄까. "

" 좆까. 듣는 내가 닭살 돋는다. 역겨워서 못 들어줘. "

" 그렇지? "

" 네 식으로 말해봐. "

" 지금 당장 나랑 세번쯤 하고, 같이 옷 입고 나와서 서재 치우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

거짓말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안 어울려. 죽을만큼 사랑한다는 말도 안 어울려. 미치게

빠졌다는 말도 안 어울려. 영원히 나만을 바라보겠다는 말을 정윤호가 하면 토할지도 몰라.

달콤한 사랑의 고백이 어울리지 않는 이 거만한 남자에게는, 무엇보다 솔직하고 당당한

고백이 가장 잘 어울린다.

쫘악,!

난데없이 윤호의 뺨을 후려친 재중이, 고개가 완전히 돌아간 윤호에게 나즈막히 말했다.

" 다시 한 번만 거짓말 하면 죽어. "

" 응. "

이 남자와 어떻게 될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대방을 갖고 싶은 건 너뿐만이 아닌

것 같아.

" 뭐... 어제 어떻게 할까. "

재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호가 표범같은 속도로 달려와 재중을 책상 위로 번쩍 들어

앉혔다. 그 딱딱한 책상에 허리가 닿자마자, 재중이 놀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지만 윤호

는 막무가내로 도로 눕혔다. 머리가 아파! 재중이 소리치자마자 옆에서 뒹굴던 두꺼운

책을 배게삼으라며 베어준다. 군살하나 없는 윤호의 배가 재중의 배에 와 닿고, 재중은

어느새 풀어 해쳐진 자신의 윗옷이 책상 아래로 떨궈지는 모양새를 봐야 했다.

" 이런 씨발...! 어째서 책상 위여야 해! 열 발자국만 뛰어가면 침대잖아! "

" 멀어. "

Page 225: Happy Together

" 차라리 카페트에서 해!! "

" 그것도 멀어. "

" 바로 아래거든!! "

" 이렇게 너랑 몸 부딪히고 있어도... 아직 멀게 느껴져. 알어? "

그의 솔직한 얼굴을 보니 기분이 묘하다. 정말로 급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재중의 바지를

벗겨내려가는 윤호의 손이, 빠르다 못해 보이지도 않는다. 풀썩.. 바지가 완전히 벗겨지고

윤호의 손에 의해 다리가 넓게 벌려졌다. 제기랄. 하필이면 오늘 왜 파란색 땡땡이 무늬가

새겨진 속옷을 입은 거냐. 속옷을 벗기려던 윤호의 손이 멈칫하더니, 한심스럽다는 표정으

로 재중을 내려다본다.

" 취향 참... "

" 이렇게 될 줄 알았냐고! "

" CK팬티 세트로 사줄테니까 다음 부터는 관리 좀 해. "

개나 소나 다 입는 그 팬티 너도 입냐?! 투덜거리려는 찰나, 속옷이 완전히 벗겨지고 얼굴

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보는 정윤호의 야한 표정에, 자기도 모르게 옆

에 놓여진 책을 집어던졌다.

" 왜 자꾸 던져. 남의 책을. "

" 그러게 누가 책상 위에서 하래?! "

" 침대에서 하면 배게 집어던지고, 카페트에서 하면 쿠션 집어 던지고, 차에서 하면 핸들

뽑아서 집어 던지겠다, 아주. "

" 시끄러워! "

" 시끄러우면 너나 입 다물어. 몰라, 나 한다. "

뭐를! 하는 사이에, 재중의 두 다리가 윤호의 어깨 위로 곧게 들어올려졌다. 자신의 하반신

에 몸을 밀착시키고, 한 손으로는 제 속옷을 벗고 한 손으로는 재중의 머리를 감쌌다. 가끔

느껴지는 정윤호의 이런 부드러움이 좋다. 다정하게 키스하는 정윤호는 눈을 감고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부드럽게 키스하는 남자라니.... 씨팔. 너무 멋지잖아.

" 으... 야! "

" 응, 그래. "

" 뭐가 응,이야! 읏...! 야아!!! "

윤호의 아랫배가, 아까전부터 서버린 재중의 분신을 맛사지하듯 아래 위로 쓸어내렸다.

꼴딱 넘어가는 숨을 참지 못하고 길게 토해버린 재중이, 허리를 슬쩍슬쩍 움직여주는 그의

선정적인 몸짓에 끊임없이 반응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와 동시에 파앙...!

Page 226: Happy Together

" $#%%&@$#$!! "

" 응.. 응, 그래. "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재중의 입을 억지로 막고, 윤호는 달래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여오는

재중의 다리 사이에서 열심히 움직인다.. 요령을 피울 줄 모르는 재중 덕분에 자신까지 아

파와 가끔씩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조금 더 앞으로 숙였다. 애 저러다가 죽겠다... 숨 넘어

갈듯 끅끅거리는 재중을 나름대로 배려한다지만, 어째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가 않는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참았던 탓인지, 점점 이성을 잃어가는 윤호가 결국에는 사정 봐주

지 않고 미치게 밀어붙였다. 나 안해! 이거 빼! 엉엉. 귀에 따갑게 쏘아대는 재중의 비명은

무시한 채.

.

.

.

" 저기 책 또 떨어져 있다. "

이대로 움직이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재중의 주장에 따라, 그는 소파에 길게 누워 쉬었고

윤호는 열심히 움직이며 책을 치웠다. 원래 노출 욕구가 많은 남자인지 바지만 대충 걸친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꽤나 섹시하다. 이런 말 하면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힘들게

살아온 인생의 표식처럼 온 몸에 달고 다니는 상처들마저 멋지다.

" 윤호야. "

" 응? "

" 너랑 같이 살면... 내 몸에도 그런 상처 생길까? "

" 왜, 무서워? "

"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할지 감이 안와서 그런다, 감이. 졸지에 마피아 부두목 되는 거

아니야... "

" 부두목이 아니라 안주인이지. 부두목이 뭐냐, 촌스럽게. "

" 안주인이 더 촌스럽거든. 아예 임자, 하고 부르지 그러냐. 노땅 티 팍팍 나게. "

" 그런가.... "

마지막 책을 책장에 꽂고, 소파로 다가온 윤호가 풀썩 앉았다. 앉아도 뱃살 접히지 않는

몸매라니. 난 아무래도 이런 섹슈얼한 매력에 약한가봐. 재중은 중얼거리며 윤호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 그럼... 난 뭐야, 그냥 K 뭐시기의 고문 변호사? "

" K 카르텔. 너희 집 이름인데 좀 외워라. 머리도 좋으면서 왜 노력을 안하냐. "

" 흥... "

" 부두목도 싫고, 안주인도 싫으면 그냥 간단히 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걸로. "

" 뭘로. "

" 연인. "

Page 227: Happy Together

연인. 이라는 윤호의 단호한 말에, 재중이 웃어버렸다.

" 마피아의 연인? 영화 제목으로 해도 되겠다. "

" 다른 사람들에겐 영화겠지만 우리한테는 현실이지. "

" 윤호야, "

" 응? "

" 이제와서 이런 말 하는 거, 너 되게 약올릴지 모르겠는데. "

" 해 봐. "

그가 느긋하게 뒤에 기대고 앉아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연인이 얘기하고 있는데

잘도 담배 꼬나무는 꼴이라니. 재중은 매끈한 발바닥으로 윤호의 옆 머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 너가 굳이 복잡하고 말도 안 되는 방법 쓰지 않고, 그냥 나한테 와서 나와 자고 싶다고

말했어도... "

" 그럼 넌 날 그 자리에서 죽였을걸. "

" 아니야, 나 바로 너랑 잤을 거야. "

그 정도로 너는 매력있는 남자거덩.

" 잘 해보자, 연인 씨. "

지금 사업상 절차 밟고 있냐. 갑자기 왠 악수야. 황당해서 또 웃어버리고, 윤호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아래 위로 흔들며 정중히 악수를 하면서 그가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이제부터는 좀 빠르게 진행하자며.

" 잘 부탁해, 정윤호. "

* * *

" 아무런 기록이 없다고?! "

" 네. 그 서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답니다. "

"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그 커다란 조직이, 아무 흔적이 없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

창민은 서류를 집어던지며 한숨을 쉬었다. 말도 안 돼. FBI에서 보내온 서류는 기대를 완전

Page 228: Happy Together

히 무너뜨릴 정도로 간결했으며 짧았다. 한인 마피아들 중 최근에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린

조직은 <K 카르텔> 이라는 이름이며, 그들은 전부가 불법 체류자 출신의 한인 교포들로 이

루어져 있다는 내용이었다. 덤으로, FBI가 유일하게 소탕하지 못한 한인 마피아 조직이며,

그 이유는 그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한인 불법 체류자들의 절대적인 도움과 세상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들의 묘한 삶의 방식 때문이라고 했다.

" 흔적이 없다니... "

" 불법 체류자인만큼, 미국 시민권도 없으며 대한민국의 주민등록증도 없습니다. 때문에

어떤 기록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뉴욕에서는 '유노' 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부하들도

같은 이유로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가 않답니다. "

" 의료보험, 운전면허, 그 아무것도 기록이 없다는 것이 말이나 돼?! "

" 저도 믿기 힘들지만... 그렇답니다. 그래서 FBI 쪽에서도 유노라는 남자의 얼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20대의 젊은 남자라는 사실만 알고 있습니다. "

" 20대의 젊은 남자? 마피아의 보스가? "

뭐야... 이 조직은. 지금까지 처리해왔던 조폭들과 차원도 틀릴 뿐더러 노는 물도 틀리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들이라니. 자기 자신이 증명하지 않으면 본인이 누구인지 알 수

도 없다는 말이 아닌가.

" 어떻게... 더, 조사 하시겠습니까? "

조용해진 강력반에서 창민은 말없이 담배만 물었다. 얼굴과 이름이라도 알아야 조사를

하던지 할 거 아니야. 그 잘난 FBI에서도 고작 이 정도 자료를 보내주는 마당에,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씨팔..!

" 일단은... 덮어둬. "

창민이 강력반 검사로 내정된 후, 해결되지 못했던 사건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미해결 사건이 등장했고, 그것이 창민의 자존심을 한없이 추락하게 만들었다. 조사도 하지

못하고 끝맺다니. 검사 된 이래로 이런 일은 처음이다.

" 나가서 담배 태우고 올 테니까, 다른 사건들 조사하고 있어. 박 형사는 어디로 갔어?!! "

" 아까 애인이랑 점심 먹는다고 나가던데... "

" 이... 썅! 요새 군기가 빠졌어! 다들 똑바로 해둬!! "

잔뜩 신경질을 내고 창민이 나간 후로, 강력반은 잠시 조용했다. 가장 시끄러운 박 형사

마저 없으니 더더욱 조용하다.

Page 229: Happy Together

" 심 검사님 장난 아니네. 이번 사건에서 걸리는 놈들 완전 목 잘리는 거 아냐? "

" 심 검사님 들어오고.. 미해결 사건이 이번이 처음이지? "

" 처음은 아니야. 그 왜... 5년 전에, "

" 아아. "

금기의 말을 꺼내기라도 한 듯 형사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 중,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 형사가 분위기를 맞추지 못하고 조용히 물었다.

" 5년 전에 뭐요? 그.. 심 검사님 약혼녀 강간범 못 잡았다는? "

" 이 씨팔 새끼.. 눈치도 없냐? 조용히 해. "

" 그거 진짜에요? 심 검사님이 자기 애인 쏴 죽였다는 얘기는... "

타앙..! 책상 위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김 형사가 눈을 부라리며 그만 입을 다물라고 시켰

다. 창민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 사이에서는 금기에 해당되었고, 그가 없는 자리에서 남의

끔찍한 기억을 들추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리에 있는 형

사들 중 오래된 이들은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창민이 싸늘히 식어버린 약혼녀의

시체를 안고, 얼마나 처절하게 울었는지도.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16

계절이 바뀌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이 지나고, 옷장 청소를 시작해야 하는 새

계절이 왔다. 올해는 대단한 꽃샘 추위도 오지 않아서 따뜻한 날씨를 한결 빨리 느낄 수

있었다. 유천의 옷차림도 다소 가벼워졌다. 라이더 자켓 안에 터틀넥 대신 티셔츠를 입고

겨울용 청바지 대신 봄.가을용 청바지를(...)입었다. 그의 걸음걸이가 빨리지고 있다.

몇주 째 준수를 볼 수 없었다. 잠복 근무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있느라, 전화로만 사랑을

속삭여야 했다. 게다가 준수는 새로 맡은 클래식 파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라 핸드폰을

꺼놓기 일쑤였다. 경보하듯 빠른 걸음으로 걷던 유천이, 냅다 뛰기 시작했다.

" 아! 졸라 보고 싶어!! "

자신의 주머니에서 준수의 오피스텔 스페어 키를 꺼냈다. 이제는 제 집 드나들듯 자주

들락거리는 준수의 집 문이 활짝 열렸다. 신발이 곱게 정리되어 있는 걸 보니 다행히

집에 있는 듯 하다.

Page 230: Happy Together

" 우리 준수! "

저 '우리' 자 좀 빼면 안 되냐.. 들어오자마자 바락 소리를 지른 유천이, 성큼성큼 거실로

갔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멈칫 서버렸다.

아마도 자신이 함께 자 주지 못했던 시간들은 저렇게 지냈겠지. 침대 맡에 꽁꽁 묶여있는

두 손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불쌍한 녀석... 유천은 꽃다발을 내려두고 침대 맡으로 와서

일단 준수의 두 손을 옭아맨 밧줄부터 풀렀다. 어찌나 세게 묶었는지 희미해졌던 상처가

다시 붉게 타오른다.

" 응... 박 형사? "

" 보고 싶어 뒈지는 줄 알았어.. "

부스스 깨어난 준수를 와락 품에 안고, 유천이 머리를 부비적거리며 말했다. 잠복 근무

하면서 온갖 험한 꼴 다 당하는데, 자꾸 우리 준수 생각나서 죽는 줄 알았어. 새벽에 기차

타고 칙칙폭폭 서울로 올라가려다가 김 반장님이 감시해서 도망갈 수도 없었어... 우씨.

" 언제 왔어..? "

" 방금. 피곤하지? 눈이 시뻘겋네, 아주. "

" 나 지금 엄청 추하니까 잠깐 나갔다 들어와.. 씻고 나갈게. "

" 아냐. 졸라 이뻐. "

이제는 유천의 앞에서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침 달라붙은 입술을 내밀어도 창피하지가

않다. 이래도 졸라 이뻐, 저래도 졸라 이뻐. 유천의 '우리 준수 예뻐해주기' 모드는 끝날

줄을 몰랐고, 준수도 차차 그의 단순한 사랑법에 익숙해졌다. 눈꼽을 샥샥 떼면서 유천의

품 안에서 부비던 그는, 저만치 얹혀진 꽃다발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 뭐야? 저 이상한 건? "

" 아! 오다가 너 생각나서 샀다! 이쁘지! 나 누구한테 꽃 주는 거 처음이다! "

" ... 이게 꽃이냐. "

" 꽃이지! 야! 이게 젤로 이쁘더라! 귀엽지 않나! "

누가 애인한테 안개꽃을 뭉탱이로 선물해줘..... 준수는 하품을 하며 코딱지만한 안개꽃을

손가락으로 살랑댔다. 박유천의 이런 황당한 짓거리도 이제는 익숙해진다. 그래.. 박 형사

가 나한테 장미꽃을 안겨주는 건 도저히 상상이 안 되지. 일단 꽃을 줄 정도로 성숙해진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 박 형사 뭐해? "

Page 231: Happy Together

" 응! 그 동안 못했으니까.... "

열심히 지 벨트를 푸르고 있는 유천을 보며, 준수가 황당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다가 바로

유천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아악! 비명이 방 안에 경쾌하게 울려퍼지고, 준수는 침대

아래로 내려가 안개꽃다발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 꿈 깨. 나 피곤해. "

" 준수야! "

" 응. 그래, 우리 준수 여깄다. "

부엌으로 나와서 예쁜 물컵을 대충 골라서 물을 따르고, 유천이 사온 안개꽃을 꽂아뒀다.

하아... 이 두리뭉실한 걸 어디다 둔담. TV 옆 서랍장 위에 올려두고 피식 웃어재꼈다. 아

무튼 못 말려. 따라나오는 유천에게 타박을 주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 박 형사! 이거 다 뭐야?! "

잠결에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얼굴에 생채기가 장난이 아니다. 혹시나 하

는 마음에 자켓을 확 벗겼더니, 반팔 티셔츠 차림의 유천의 손에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다. 티셔츠를 들어올리니 온 몸에 상처가 가득하다. 준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아물지도 않은 상처를 주먹으로 마구 두드리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 내가 다치고 오지 말라고 했잖아! 맞을 거면 두 배로 패고 오라고 했잖아! 이게 다 뭐야!!

이게 니 혼자만의 몸이야!? 어디서 이렇게 몸에 낙서를 하고 들어와!! 얼굴이 이게 뭐야!

깡패같잖아!! "

" 어.. 우리 준수 화났다... "

" 내가 몸 함부로 굴리지 말라고 했잖아! 또 누가 이랬어! 어떤 새끼야! 어느 조직 새끼야?!

많이 다친거야?! "

" 괜찮아. 그냥 애새끼 몇 명 잡다가 좀 다쳤어. 그 새끼들이 칼 휘두르는 바람에.. 갑자기

그래서 피할 틈도 없었다. 깊게 베인 거 아니니까 걱정 마. "

" 칼?!?!?!?!! "

" 아! 막 무서운 칼 아니고! 그냥 짧은 칼이었다!! 걱정 마라!! "

"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냐?!! "

그래서 내가 형사라는 직업이 싫다는 거야. 언제 죽을 지 알 수가 이어야지. 처음에 유천이

얼굴에 엄청나게 맞은 꼴을 하고 왔을 때에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왜 이랬냐고 물어보니,

안양의 조폭들과 10:1로 싸우다가 어쩔 수 없이 몇대 맞았댄다. 그래도 범인들은 모조리

잡아 쳐넣었으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웃어버리는데... 진짜로 할 말이 없더라.

" 밖에서 이렇게 아프게 하고 다니면 어떡해... 니네 준수 걱정되서 죽을 것 같잖어... "

Page 232: Happy Together

총총총 걸음걸이로 서랍장에서 약상자를 꺼냈다. 원래 이런 걸 잘 가지고 다니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유천과 사귄 이후로는 늘 집에 몇 상자씩 두고 다닌다. 인터넷에서 가벼운

상처 응급처치 하는 법 정도는 다 검색해서 외워뒀고. 이 정도면 대한민국 형사의 애인

답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 스스로 자부해왔지만, 정작 유천이 실제로 몸에 상처를 입고

오면 그렇게 화가 나고 무서울 수가 없다. 내가 없는 곳에서 박유천 혼자서 얼마나 힘들게

싸우고 맞고 때리고 범인 잡고 살았을까.

" 아! 그거 빨간 약! 나 싫다! 안 발러! "

" 확! 까버리기 전에 일로 와서 앉어. "

" 아! 준수야! "

" 응응. 니네 준수 여기 있어. 빨리 와서 얼굴 대. "

유천과 함께 있던 탓인지, 꽤나 입이 거칠어진 준수가 빨간약을 꺼내 유천을 제 앞에 끌어

앉혔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유천의 상처에 빨간약을 바르자, 그가 엄살을 피우며 발광을

해댄다. 칼로 찟겨 본 적도 있는 주제에 고작 빨간약 하나로 세상 끝날 마냥 비명지르기는.

" 이거 그냥 냅두면 고름 지고 흉 날지도 모른단 말야. "

" 내가 그렇게 약한 존재가 아니거든! "

" 가만히 있어봐아... 약 흐르잖아. "

유천을 자신의 무릎이 눕히고, 준수가 그의 팔뚝에 난 상처에 살살 약을 발라갔다. 누워서

준수를 올려다보던 그가 편안하게 자세를 바로잡으며 준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 나 많이 보고 싶었어? "

" 응... "

" 당분간 심 검사가 쉬게 해준댔으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

" 너 때문에 선지 해장국도 먹고, 보신탕도 먹고, 족발도 먹었거든? "

" 이번에는 니가 좋아하는 그 두꺼운 고기 먹으러 가자. "

" 스테이크거든? "

" 응응. 그거. "

한 끼에 5000원만 넘으면 지랄발악을 해대는 박 형사가, 사만 원짜리 스테이크 보고 잘도

사주겠다. 준수는 피식 웃으며 약 뚜껑을 닫았다. 이렇게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피곤해

보여서 속상하다. 형사들은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챙겨먹나. 보나마나 지방에서 술이나

먹고 담배나 한 번에 두 개씩 태우고, 늦게까지 야한 거 보다가 안 잤을 것이 뻔해. 그러니

까 이렇게 얼굴이 초췌해지지. 아... 속상해.

" 상처 생겨도 바로바로 치료하기다. 알았지? "

Page 233: Happy Together

" 응. "

" 자꾸 맞고 오지 마. 내가 박 형사 강한 모습이 좋다고 했지? 이렇게 비실대면 안 돼. "

" 야! 10명이 떼로 덤비는데 어떻게 한 대도 안 맞냐! 내가 초인이야!? "

" 그만큼 박 형사를 소중히 여기라는 거지... "

아무튼 저 다혈질 성격 좀 어떻게... 준수는 시끄럽게 떠드는 유천을 달래며 웃었다. 그는

준수의 배에 얼굴을 묻고, 포근하다며 쩝쩝거린다. 허리를 감싸안은 유천의 손이 그리웠다.

난 정말이지 박 형사가 지방으로 잠복 근무 하러 갈 때마다 너무너무 싫다. 이제는 하루라도

그가 곁에서 안아주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어.

" 간지러워... "

어느새 준수의 티셔츠를 끌어올리고, 보들보들한 배에 고개를 묻은 유천이 그대로 그의

위에 엎어졌다. 하긴... 그 동안 나도 엄청나게 그리웠어.

" 그리웠던 것 만큼 죽여줘. "

유천, 그 말에 폭주하다.

* * *

" 수련에 들어가기 앞서, 모두 앞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되서 기쁘다. "

기쁘면 얼굴 좀 펴, 임마.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마루에 선 윤호가 하얀 도복 차림으로

조직원들을 내려다보았다. 재중이 서 있는 곳은 그들 가운데가 아닌 정윤호의 곁. 재중이

윤호와 연인사이를 먹고 난 후, 윤호는 늘 재중을 곁에 세우고 다녔다. 다른 조직원들이야

정윤호의 아름다운 남자 연인에 대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정윤호의 곁에 설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장 신뢰하는 참모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과

다른 의미로 가장 중요한 위치의 인물이 늘어난 것이다. 보스의 연인으로.

" 김재중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

" 우와아아아- "

순수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이 공부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인물이기에

거의가 명문대 수석 출신의 재중을 동경하고 있는 터였다. 게다가 맹목적으로 자신의 보스

를 순수하게 따르는 추종자들에게는, 김재중의 존재가 보스 만큼이나 강렬하게 와 닿았다.

김재중의 존재가 K 카르텔에 있어서 단숨에 엄청나게 중요하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굳이

Page 234: Happy Together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정윤호의 연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이

미 조직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으니까.

" 그것도 한 번에. 우리가 뒤에서 손을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사법고시라는 게,

이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힘든 시험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들도 몇

번씩 떨어지는 것이 사법고시지. 그걸 한 번에 붙었다는 소리다. "

" 야.... "

" 내가 보기엔 공부도 별로 하지 않았는데 타고난 머리가 좋은 것 같다. 뭐, 김재중이 명문

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건 다들 알고 있겠지... 공부라는 것이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야.

타고난 머리가 있어야 되는 거다, 머리가. "

애가 갑자기 왜 이래. 다소 흥분한 말투로 자신의 합격에 대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늘어

놓는 윤호를 황당하게 쳐다보는 재중이다.

" 고로, 오늘 저녁은 중앙 저택 뒷뜰에서 축하 파티다. "

" 우와아아아- "

조직원들 사이에서 함성이 들려나왔다. 파티래봤자, 바베큐 판을 설치해놓고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이 다였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더할나위 없는 유흥이다. 재중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

어버리고 팔짱을 끼고 섰다. 가끔가다 보이는 이런 팔불출 같은 행동이 귀엽긴 하다만은..

조직원들 사이에서 위엄있어 보여야 한다는 주장은 네가 한 거 아니였냐?

" 축하해. "

재중의 어깨를 툭 치며 윤호가 웃었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어서 괜시리 뿌듯하다. 재중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오늘 저녁에 고기나 맘껏 먹어야 겠다며 중얼거렸다.

.

.

.

" 뭐야? "

" 축하 선물. "

긴 정사가 끝나고, 재중은 나른해진 몸을 침대 위로 눕히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럴 때

남자가 내민 뜻밖의 선물은 재중을 감격하게 했다. 그는 선물을 포장할 줄도 모른다. 박스

에 담는 것조차 할 줄 모른다. 덕분에 앙상하게 드러난 은색의 얇은 반지가 재중의 시야에

맺혔다. 일반 반지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 윤호는 그 반지를 재중의 새끼손가락에 끼웠다.

Page 235: Happy Together

" 뭐야... 연인들끼리 반지는 네번째 손가락에 끼우는 거야. 그런 것도 몰라? "

" 아는데, 너무 평범하잖아. "

" 평범하게 좀 가자, 응? "

" 난 네 새끼손가락이 좋아. "

재중의 새끼손가락을 입 안에 잠시 머금고 있던 윤호가 중얼거렸다. 네 손가락은 다 예쁘

지만 그 중에서 새끼 손가락이 가장 예뻐.

"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유난히 네 새끼 손가락이 작은 거 알고 있냐? "

" 그런가... "

" 그래서 애 같아. 이렇게 널 보고 있으면, 금세 기분이 묘해질만큼 아주 매력있는 어른

남자인데, 손가락은 갓난애 같아. 그래서 좋아. 어른 김재중도 안고, 아이 김재중도 안는

것 같아서. "

" 완전 변태다. "

" 나름대로 내 로맨스인데 그걸 그렇게 치부해버리면 섭하지. "

유치하게도, 정윤호와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의 반지다. 얇은 백금이 하트를 만들며 새끼

손가락 위에서 반짝거린다. 하트라니... 갑자기 왜 이런 취향이야. 재중은 웃음을 터뜨리며

하트를 매만졌다. 기집애 같아.

" 너, 나한테 목걸이나 팔찌 선물해도 늘 십자가나 다른 심플한 걸로 했었잖아. 이건 뭐야?

심정의 변화라도 있었냐? "

" 귀엽지. "

" 야! 진짜 안 어울려! "

손가락을 넓게 펼치고, 그래도 반지가 좋아서 웃어대는 재중을 끌어안았다. 땀 냄새가 약

간 섞인 그의 상큼한 바디 샴푸향이 좋다. 윤호는 재중의 목덜미에 머리를 부비적거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사랑한다는 말 자주 못해주니까, 그거 보면서 늘 상기시켜 주려고. "

꽤나 고심하면서 골랐겠구나. 그런 그의 모습이 왠지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깥

에서는 파티 준비가 한창일 것이다. 재중은 왁자지껄한 뒷뜰의 소음을 인식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검은 옷의 조직원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다지 낯설지 않다.

" 뭐 입을 거야? "

" 응... 아무거나. "

Page 236: Happy Together

옷장으로 다가간 그가, 웬일로 평범한 청바지에 얇은 스웨터를 꺼냈다. 평상복 차림의

정윤호를 보는 것은 드문 일이다. 늘 정장을 갖춰 입기 때문에 그에게서는 자연스럽게

어른의 향기가 났다. 그러나 청바지에 다리를 넣고, 스웨터를 입고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

하는 그는, 그저 평범한 20대의 잘생긴 청년으로만 보인다.

" 윤호야. "

" 응? "

" 나 왜 이렇게 너가 좋냐... "

그의 넓은 등이 좋다. 그의 가슴에 안기는 것도 좋지만, 그의 등에 안기는 것도 좋다. 곧게

뻗은 그의 척추가 느껴지고 내 심장의 박동을 가만히 맞대고 있으면... 이것으로도 충분히

하나가 된 것 같아.

.

.

.

" 축하드립니다! "

" 아... 예. "

" 대단하십니다! "

" 아... 뭐, 그냥. "

아무리 이들이 친근해졌다고는 하나, 딱딱하게 각이 져서 건네는 인사는 받기 힘들다. 이

들은 뉴욕 태생이지만, 제대로 영어를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거의 교육을 받지 않았고

한인 타운 안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할렘가에서 뒹굴던 정윤호 같은 이는

능숙하게 외국어를 하는 편이고 그런 이들은 조직에서 꽤 중요한 간부급 위치에 있다.

" 와.. 맛있겠다! "

" 뉴욕의 LA갈비를 먹어보셔야 하는데... 진짜 맛있어요. 한국 고기는 미국 고기보다 훨씬

연해서 좋아요. "

" 이거 잘라줘요. "

고기가 맛있게 익어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을 한다. 잘라주는 고기를 받으면서, 문득 이

광경이 참 아이러니하게도 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근방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

겠지. 뉴욕에서 건너온 한인 마피아가, 이렇게 커다란 동네를 거처로 삼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재중 또한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묘한 광경이었다. 몸에 총을 지니고

사는 폭력배들이, 아침마다 집 앞을 쓸고 자기 집 지붕을 손질하고 화단을 가꾸는 것이다.

불법적인 일을 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이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Page 237: Happy Together

" 뉴욕에서는 이런 바베큐 파티도 제대로 못했어. 숨어 다니느라 바빠서. "

" 다들 좋아보이네... "

" 고기 좋아하거든. "

그들은 재중에게 친절했다. 자신들이 섬기는 보스의 연인이기도 했지만, 재중은 한 눈에

호감을 가질 정도로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런 고고한 외모를 가진 자가

나름대로 친절하고 소탈한 성격을 가졌다는 점에서 더 큰 환심을 샀다. 재중은 정윤호의

연인이라는 빌미로 그들을 부리거나 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

바로 당황해하며 함께 인사를 하는 김재중의 귀여운 면을 좋아했다.

" 조용하다... "

윤호와 나란히 걸으며 재중이 말했다. 시끄러운 뒷뜰을 지나 중앙 저택 정문으로 나오자

사방에는 고요함만이 존재했다. 조직원들이 비어있는 동네는 유령 도시처럼 조용하다..

윤호는 말버릇처럼, 이 모든 것이 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중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피아의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가서, 특별함을 느낄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요 근래 윤호의 조직에게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정윤호는 단시간

에 서울과 수도권 근교의 모든 마약 루트를 독점했고, 본격적으로 미국과 홍콩과 러시아의

마약 거래를 진행하고 있었다. 자신이 불법적인 일로 이루어진 조직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늘 곁에 서 있는 정윤호의 따뜻한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 너, 가끔 보면 엄청 귀여워. "

" 지금 그게 나한테 할 소리냐. "

" 지금 같을 때. "

나란히 걷다가, 은근슬쩍 재중의 손을 잡은 윤호가 헛기침을 했다. 잠자리에서는 손이고

발이고 닥치는대로 잡아채면서, 둘이 분위기 흐르는 길가를 걸을 때면 제대로 손도 잡지

못하고 앞만 보고 걷기 일쑤다. 그는 묘한 남자다. 당당함과 망설임이 교차하는.

" 요즘 들어 생각하는 건데... "

" 뭐를. "

" 요즘만 같다면... 마피아의 연인도 할 만한 직업인 것 같아. "

" 직업이냐, 그게. "

" 그냥 그렇다고. 요새 아무 일도 없고 편안하잖아... 좋아. 계속 이랬으면 좋겠어. "

" 그럴 수야 없겠지. 우리가 놀고 먹는 사람들도 아니고. "

" 딱 더도 말고 요즘만 같았으면 좋겠다. 가끔가다 바베큐 파티도 하고, 너랑 몰래 빠져

나와서 제이 에비뉴 산책도 하고. "

이렇게만 산다면... 마피아의 고문 변호사를 하든, 늘 몸에 총을 지니고 다니는 남자가 내

연인이든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아. 재중은 웃으며 윤호의 손에 깍지를 꼈다.

Page 238: Happy Together

* * *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

" 왜 말이 안 되는데!? "

" 니가 지금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잖아!! "

사건의 발단은 단순했다. 유천의 옥탑방에 놀러온 준수는 늘 그래왔듯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유천의 어지러운 집안 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파티 때문에 얼마 오지 못했더니,

그 사이에 빨래통이 넘쳐날만큼 빨래가 쌓여있고 (게다가 팬티가 뒤집어진채로 쳐박혀

있다.) 싱크대가 터져나갈 듯 그릇들이 썩어가고 있었으며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이불과

먹다 만 소주와 안주들이 좌우 대칭을 이루며 준수를 환영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멍하니

그 꼬라지를 바라보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두 팔을 걷어부치고 청소를 시작했다. 그런데

유천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들을, 그저 흔한 종이 쪼가리인 줄 알고 쓸어 담은 것

이다.

" 씨발! 그거 PC방에서 뽑고 바로 파일 삭제했단 말이야!! 그걸 어떻게 다시 뽑아!??! "

" 메일함에 저장이라도 해두지, 그렇게 중요한 걸 왜 바로 지워?! "

" 니가 쓸데없이 청소만 안했어도 다시 뽑을 일 없잖아!! "

" 니 방 꼴을 보고 어떻게 청소를 안 하냐! "

" 아! 씨팔! 니가 내 집에서 살아!? 왜 참견이야!? "

" ... 뭐? "

가끔가다가 이렇게 다혈질로 터져주시는 유천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다시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유천의 머릿속에는 서류로 자신의 머리를 내려치는

심 검사와 그 어마어마한 자료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준수에게 해선 안 될 말까지

해가며 잔뜩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 중이다. 뒷 일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 아악!! 그걸 얼마나 힘들게 조사한 건데!!! 독수리 타자라서 키보드 치는 것만 꼬박 하루

걸렸단 말이다!!!! "

" 그 나이 되도록 타자연습도 안 하고 뭐했냐?!! "

" 씨발 김준수!!! "

" 자꾸 나한테 욕 하지 말라고!!!!!!! "

꽤액- 하고 소리를 지른 준수가, 숨을 고르며 주먹을 쥐었다. 이럴 때 유천은 정말이지

패주고 싶을 정도로 정나미가 떨어진다. 연인이란 것이 원래 사랑하다 싸우고, 키스하다

집어던지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유천은 워낙 평소에 자신에게 자상했고 잘했기 때문에

조금만 변하거나 말투가 거칠어져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Page 239: Happy Together

" 나는.. 나는.. 니네 집 더러워서 청소한 건데... 빨래도 1주일치 밀려있고 설거지도 엄청

쌓여있고.. 막 쾌쾌한 냄새나고.. "

" 우리 집이 니네 집이냐?! 그렇게 청결하지 않아도 나 충분히 살어!! "

" 나도 가끔 와서 자는 집이잖아!! "

" 아무리 그래도 니 거랑 내 거 구분도 못하냐?! 너는 내가 하는 일이 그렇게 우습게 보여!?

그거 내일까지 심 검사한테 제출해야 한 단 말이다!! "

유천의 일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천의 책상에 있는 종이쪼가리들을 그닥

중요하게 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늘 발로 뛰고 몸으로 범인 잡는 형사들이 뭐 중요한

서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쳐다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구겨 넣어버린 것이다. 그 점

이야 충분히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청소해준 것을 눈꼽만치도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 유천의 뻔뻔함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 다음 부터는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마. "

" 박 형사 진짜 웃긴다. 니 거 내 거 구분할 게 뭐 있냐고, 우리 집에서도 칫솔 치약 맘대로

썼던 게 누군데 그래? "

하긴 그랬지. 그러나 그거랑 이건 차원이 틀린 문제가 아닌가. 당장 내일 제출해야 했던

서류가 통째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는 사실이 유천을 절망 속으로 밀어넣었다. 깐깐한

심 검사가 내일 하루 종일 얼마나 타박을 줄까.. 생각만 해도 죽어버리고 싶다.

" 아.. 씨팔. 나 어떡하라고. "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담배를 꺼냈다. 준수의 앞에서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오늘은 마음도 답답하고 준수와 싸워서 그런지 심기도 불편하다. 불을 붙이기 전에 준수가

담배를 훽 뺏어버렸다.

" 내 앞에서 피우지 않기로 했잖아. "

" 한 대만 피자. "

" 싫어. 집에 담배 냄새 배겨. "

" 아! 이게 니네 집이야?! "

" 가뜩이나 코딱지만한 방 구석에서 그렇게 담배를 피워대니까 쾌쾌한 냄새가 나지!!!

이 집 나 준다고 해도 싫어! 누가 이런 난방 냉방 안 되는 시대 덜 떨어진 집에서 살고

싶대!? "

" 뭐? "

" 다음부터 다시 내가 청소하나 봐! 누군 이런 구질구질한 집 청소하고 싶어서 한 줄 알어!

다 너 생각해서 한 건데.... "

" 씨발... 김준수!!! "

담배곽을 통째로 던져버린 유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위압감 느껴지는 유천의 등치

Page 240: Happy Together

에 바로 뒤로 물러선 준수다. 이런... 말 실수 했다. 금전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절대로 건드

리지 않기로 했었는데.

" 내가 내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너 잘 살고 나 못 사는게 그렇게 중요해?!

구질구질한 집?! 너 지금까지 이런 구질구질한 집에서 사는 남자랑 어떻게 사겼냐?! "

" 내가 그렇게 말 하려고 한 게 아니라... "

" 너.. 진짜 가끔가다가 그런 소리 하면 진짜, "

진짜 나 속상해. 너 땟깔나는 옷 한 벌 못 사주는 내가 무능력해 보여서 싫다고. 누구보다

내 직업에 대해서 자부심 갖고 살아왔고, 지금 나 이렇게 옥탑방에서 전세로 사는거 쪽팔

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가끔가다 너 그런 소리 하면... 씨팔. 진짜로 쪽팔려. 병신처럼

밤에 자다가 이런 생각도 한다. 내가.. 그냥 대한민국 형사 이런 거 하지 말고, 대기업 직원

이나 성공한 벤쳐 사업가 쯤 됬으면 하는 생각. 졸라 유치하지.

" ... 나 갈게. "

한참이나 이어진 침묵을 견디다 못하고 준수가 신발을 신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워낙에 싸우지 않고 준수가 위에서 군림하며 지내왔기 때문에, 이렇게 유천

이 폭팔해서 마구잡이로 소리지르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남들보다 두 배로 속

상하기도 하고... 너무 가슴 아파.

좀 잡아 주지. 준수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도, 유천은 답답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하다.

" 나 진짜 간다. "

" ... 가. 나도 PC방 가서 밤 새야 되니까. "

우리 집 와서 하면 되잖아. 그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아서 삼켜버렸다. 후우, 싸움이란 건

정말 싫어. 혼자 집에 가는 길이 너무 외로울 것 같아...

* * *

" 뒤로 몰래 빼돌렸다 이거지. "

" 네. 저희에게 보고하는 양 보다, 훨씬 많은 마약을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

" 분명히 독점 거래를 조건으로 손 잡는 것을 허락했는데 말이지... "

까닥, 윤호의 손등 위에서 놀고 있던 만년필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 거짓말은 윤호가 가장

Page 241: Happy Together

싫어하는 죄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사업상에 있어서는 더더욱.

" 어떻게 생각해. "

" 네? "

" 봐주면 말야... 다른 조직들도 똑같은 수법으로 마약을 뒤로 빼돌릴 테지. "

" 본보기가 필요한 법입니다. "

" 나도 그렇게 생각해. "

요새 느슨해지긴 했지. 힐끗, 시계를 바라보았다. 재중과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었다.

" 이우혁... 그 놈,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내. "

" 예. "

처리는 재중과 저녁을 먹은 후가 낫겠다. 피 묻은 손으로 수저를 들고 싶지 않으니까.

" 새벽에 차 대기시켜. 그 때까지 위치 알아내고. 도망가진 않았을 거다. 들킨 줄도 모르고

있을 테니까. "

" 직접 하시겠습니까. 다른 녀석들 보내도 충분할텐데. "

" 본보기는 주인이 직접 하는 거야. "

의자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섰다. 오늘 늦은 저녁에는 조금 바쁠 것 같으니까 그 때까지는

김재중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야겠다. 그래야 힘도 내고, 사람도 빨리 죽이고 하지.

" 응...? "

재중의 집으로 들어서는데, 좋은 냄새가 난다. 신발을 벗고 부엌으로 들어가자 재중이 뭔

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 재중이 요리하는 모습은 처음 봐서, 신기한듯 뒤에서 쳐다보았

다. 뭐..앞치마를 걸치고 사뿐사뿐 움직이는 사랑스러운 모습은 아니지만, 소매를 올리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쁘다. 썅! 탔어!.. 하고 간간히 내뱉는 욕은

좀 빼고.

" 뭘 그렇게 만드냐? "

" 언제 왔어? "

" 방금. 먹는 거야? "

" ... 부엌은 먹는 걸 만드는 공간이거든요? "

" 요리한 거, 처음 봐서. "

" 혼자 살아온 것이 몇 년인데 이 정도는 기본이지. 근데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낯설다. "

Page 242: Happy Together

계란말이와 두부 부침 정도의 간단한 반찬을 만들어 놓고, 밥솥에서 밥을 푸는 재중의

손길이 꽤나 능숙하다. 하긴, 맨날 도망다니는 아버지 덕분에 꽤 오랫동안 혼자 살았겠지.

재중의 아버지는 현재 지방에서 조직원들의 감시 하에 편안하게 살고 있다. 물론 본인은

자신이 감시당하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을 테지만.

" 나가서 먹기로 했잖아. "

" 맨날 나가서 먹잖아. 그냥 만들어 봤어. 왜, 보기만 해도 졸라 맛없어 보이냐? "

" 그런 건 아니고. "

늘 누군가 해주는 밥을 먹지만... 내 사람이 해준 밥을 먹고 사는 건 기분 좋은 일 같다.

윤호는 실수로 타버린 소세지를 먹으며 싱긋 웃었다.

" 저녁에 뭐해? "

" 잠깐 일 있어. "

" 흠... 드라이브 하고 싶었는데. "

" 내일 하자. "

잠깐 일 있어- 그 말에 내포된 뉘앙스를 느끼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재중은 전혀

모르고 있겠지. 이 저녁을 너와 함께한 후, 나는 나가서 손에 피를 묻히고 사람을 죽이고

유유히 너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걸. 너는 아직도 잘 모르고 있어. 늘 편안하게 제이 에비

뉴 안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에..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알지 못하지. 너는 아마

내가 마피아라는 사실도, 단어 하나로만 인식할 거야. 아, 마피아구나. 이렇게 가볍게.

" 너 방으로 가 있을까? 일 하고 오면 바로 보게. "

" ... 아니. 오늘은 따로 자자. 늦게까지 바쁠 것 같아. "

" 왜에, 또 누구 패고 이딴 일 하느라고? "

너는 그 말도 그렇게 장난스럽게 말하지. 김재중... 너는 한 번도 내가 사람을 어떻게 죽

이는지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너에게는 살인을 일로 삼는 마피아가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

이미지조차 없을 거야. 그래서... 가끔은 걱정 된다. 언젠가는 진짜로, 네가 피바다 한복판

에 설 날이 올 텐데.

"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

" 예뻐서. "

" 토한다. 밥이나 빨리 먹어. "

너와 이러고 있으면, 가끔 내가 평범한 누군가의 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건

정말로 위험한 느낌인데 말이지.

Page 243: Happy Together

* * *

" ... 어라, 이게 왜 여기 있지? "

새벽에 강력반으로 잠시 들어온 유천은, 필요한 자료를 찾아 다시 나가려다가 눈을 크게

떴다. 아까 전에 준수에게 그렇게나 화냈던 원인. 내일까지 심 검사에게 제출해야 하는

파일이 책상 서랍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 아.. 맞다!! "

집에 두면 까먹고 안 가져갈까봐, 미리 여기에 뒀었지...! 그걸 깜빡 잊었다! 이 머저리!!!

유천은 의자에 풀썩 앉아서 멍하니 파일을 들고 자신의 머리를 내리쳤다. 실수는 생각하

지도 못하고 무작정 준수에게 화를 내다니. 나는 아직도 멀은 것 같아...

" 아... 어떡해. 아까 무지 화났는데.... "

PC방에서 분노의 타자질을 하느라 잠시 준수의 상태를 잊어버렸지만, 그는 아마 지금까

지 연락 없는 유천에게 단단히 화가 났을 것이다. 실수를 알아차린 이제서야, 유천은 자신

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우리 준수에게 화냈다.

아까 전이야 그 작업을 다시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제정신이 아니라 마구 소리 질렀지만,

평소에 자신의 그런 모습을 전혀 모르던 준수가 얼마나 놀랐을까. 유천은 한숨만 푹푹 쉬

다가 서랍을 닫고 경찰차 키를 꺼냈다. 지금이라도 오피스텔로 가서 무릎 꿇고 빌면 용서

해 줄 거야. 빨리가서 싹싹 빌어야지...

- Rrrrrr.. Rrrrrr ..

" 왜 안 받어... "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핸드폰은 열리지가 않는다. 하긴, 늦은 새벽이긴 하지. 하지만 요새

일이 많다며 늦게까지 자지 않던 준수였는데... 왠지 불안한 마음에 빨리 차에 올라타 사이

렌을 켰다. 지금이야 말로 신호등 개무시하고 달려야 하는 시간.

Page 244: Happy Together

.

.

.

" 준수야! "

오피스텔로 들어오자마자 방 문을 열어재꼈다. 거실에도 없는 준수는 방에도 없었다. 유천

은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준수의 서류들을 정리하고 의자에 풀썩 앉았다. 잠깐

편의점에 먹을 거라도 사러 갔나... 침대 위에 핸드폰이 올려져 있는 걸 보니 두고 간 것 같

다. 책상 위에 훝어진 서류를 힐끗 쳐다봤는데, '박유천 나쁜놈 미친놈 또라이' 등등의 낙서

가 적혀져 있다. 피식 웃어버렸다. 이렇게 화를 내도... 나 생각하면서 일했다는 게 기쁘다.

어떻게 하면 화를 빨리 풀어줄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무릎 꿇는 것이 가장 쉬울 것 같다.

유천은 거실로 타박타박 나와서 현관 앞에 곱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혼자 킥킥댄다.

김준수가 집으로 돌아와서 문을 딱 열었을 때, 쨔안.. 하고 내가 요렇게 빌고 있으면 어이

없어서라도 빨리 용서해 줄 거야. 하하.. 나의 똑똑한 머리.

" ....? "

웃어재끼다 현관 바닥을 바라보았다. 들어올 때는 시선이 높아서 몰랐는데, 이렇게 무릎을

꿇고 앉으니 낮은 시선으로 그제야 볼 수 있었다. 현관의 바닥을.

아까 전, 자신의 집에서 준수가 신고 나갔던 운동화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 준수...! "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유천이 바로 일어나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

하고 현관 문을 열어재꼈다.

.

.

.

어두운 골목길. 윤호는 자신의 발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한 남자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가 떨고 있는 것이 발 끝으로 전해진다. 살려달라고 비는 애처로운 목소리도.

그러나 살려주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다. 본보기에 자비란 필요 없는 법이니까.

" 유언은, 필요 없나? "

Page 245: Happy Together

" 사... 살려.... 줘... "

" 살려줄거면 이렇게 폼 잡고 있지도 않아. 유언이 없으면, 눈 감아. 마지막으로 보는 세상

도 그다지 좋은 풍경은 아니니까. "

비명이 골목 안을 처절하게 매웠고, 윤호는 망설임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꿈틀대던

머리가 바로 주저앉았고, 바닥이 흥건하게 피로 물들었다. 죽은 벌레 같은 남자의 시체를

발로 걷어내고, 윤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또 피가 튀었어... 그렇게 조심하면서 쐈는데도.

" 손수건. "

다른 이가 내민 손수건으로 자신의 구두 앞을 닦아내던 윤호의 시선이, 문득 앞을 향했다.

숙여진 고개로 보이는 시야에... 신발을 신지 않은 어떤 이의 두 발이 보인다. 하얀 양말을

신고 우뚝 서 있는 두 발.

" 거기 누구야!!!! "

바로 몸을 일으킨 윤호가, 총을 겨누고 앞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걸까. 어두

운 골목의 끝에, 한 소년이... 아니면 소년처럼 보이는 남자가 서 있다. 멍한 표정으로 떨리

는 몸. 그리고 분명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 살인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

" ......!! "

바로 방아쇠를 당겼지만, 불행히도 총탄이 들어있지 않았다. 다급해진 윤호가 조직원들을

바라보았고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뒷춤에서 총을 꺼내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에

다들 당황해버렸다. 타앙..! 첫 번째 총이 빗나갔다. 살인에 있어서, 목격자가 생긴 것이다.

" 죽여버려! "

다음 총의 방아쇠가 당겨지려는 찰나, 믿지 못하게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이렌 소리를 요

란하게 울리는 경찰차가 골목길 끝에 섰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신발을 신지 않은 그 남자

를 차 안으로 끌어당기고, 문을 닫았다. 타앙! 두 번째 총성이 울렸고, 총알은 경찰차의

뒷 창문을 쏘았다.

" 쫓아!!!!! "

" 반대편 골목입니다! "

" 이... 이게... "

Page 246: Happy Together

다른 조직원이 내민 총을 들고, 윤호가 빠르게 뛰었다. 골목 끝에서서 저만치 나가는 경찰

차에 막무가내로 총을 쏘았다. 타앙! 탕! 쨍그랑! 창문이 깨지고, 트렁크에 총알이 박히고,

그래도 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서 어느새 보이지 않는 길가에 접어들었다.

" 지금 가셔야 합니다! 총성이 너무 많이 울려서...!! "

" 보스!! "

" ...... "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기도 전에, 다른 남자

들이 윤호를 데리고 차에 태웠다. 검은 하늘에 울려퍼진 몇 발의 총성으로 사람들이 몰려

들 것이다. 그리고 이 시체를 보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

" 방금... "

" 괜찮으십니까!? "

" 날 봤어. "

이런 빌어먹을....! 불안감으로 이렇게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던 적은 정말 오래간만이다.

윤호는 시트를 주먹으로 몇 번이나 내리치며 분노를 다스렸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 그 새끼가 날 정면으로 봤다고!!! "

어떻게서든 알아내서 죽여야 해. 윤호가 조금씩 떨리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17

준수의 오피스텔 지상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급히 내렸다. 다행히 가로등 덕분에 주위가

밝다. 유천은 뒷춤에서 꺼낸 총을 장전시키고 떨리는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보

이지 않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꺼내 급히 창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 박 형사... "

" 나오지 마! "

Page 247: Happy Together

유천의 다급한 말에, 준수가 다시 몸을 차 안으로 숨겼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유천의 경찰차에 올라타 있었고, 창문이 부숴지는 엄청난 소음이 귀를

울렸다. 비명을 지르며 엎드리자, 깨진 창문의 파편이 시트에 흩어지고 여러번 더 총소리

가 울렸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유천은 백미러로

뒤를 돌아보며 급하게 핸들을 돌렸다. 나... 또 무슨 짓을 해버린 거야.

" 아윽....! "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박 형사가 저렇게 새파래진 표정으로 총을 쥐고 주위를 두리번거리

는 거냐고. 준수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안고 몸을 웅크렸다. 알 수는 없었지만, 평범한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자신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나 속상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

오자마자 책상에 앉아 일을 끄적거리고, 뭐를 했더라.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또 방심하고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버렸어. 그리고... 또 스스로 걸어나가 알지도 못하는 짓을 했겠지...

" 검사님! 접니다! 당장 수사 인력 보내주세요!! "

분명히 살인이다. 자신은 정확히 보지 못했지만 감으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어렴풋이

보였던 그 남자들은, 모두가 총을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차에 몇 발을 날린 거야....! 자칫

했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뻔했다. 준수가 반대편 골목길에 서있기만 했어도 바로 죽었어.

그 생각을 하니 몸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유천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엉망이

되버린 차를 살폈다. 타이어를 맞추려고 한 것 같지만 빗나갔다. 하지만 창문이 모조리

깨졌고 자칫하면 기름통이 터져버릴 수도 있었어. 아마츄어의 솜씨는 아니다.

" 박 형사... 박 형사.. "

그제야 차 안에서 떨고 있는 준수에게 달려갔다. 얼마나 놀랐을까. 일단 그를 차에서 빼내

품에 안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자신들의 계획에 없던 엄청난 총성으로 인해, 그

들도 당황해 바로 사라졌을 것이다. 따라오지는 않았을 거야. 한숨을 내쉬고 차 문을 닫았

다. 그리고 온 몸이 떨리는 그를 토닥였다. 빌어먹을... 내가 화만 내지 않았어도..! 준수를

그렇게 보내지만 않았어도... 내가 미안하다는 사과 전화 한 통화라도 했다면..

" 아무 일 없어. 걱정 마. "

" 왜.. 총 꺼내.. 그 총 소리들 다 뭐야....! 응...? "

"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 준수... "

" 애 취급 하지 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잖아!! "

일단 들어가자.. 간신히 준수를 다독인 유천이, 그를 부축하고 오피스텔 안으로 향했다.

.

Page 248: Happy Together

.

.

" 말해줘. "

거실에 앉혀놓고 담요를 가져다 덮었다. 따뜻한 코코아를 타서 목을 축이게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그제야 진정이 되는 듯 숨을 고른다. 아직도 눈물 자국이 선명한 두 볼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준수가 물었다. 나...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 금방 나가봐야 해. 혼자 있을 수 있지? "

" ........ "

" 같이 자주지 못하니까, 네 방식대로 팔이라도 묶고 자. 아니, 절대로 묶고 자. 절대로

나가지 마. 어디든 가지 말고 방 안에만 있어. 무조건. "

" .... 박 형사, 나... 뭐 하고 있었어? "

핸드폰이 울린다. 아마도 유천을 찾는 창민의 전화일 것이다. 유천은 잠시 핸드폰을 끄고

준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직도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볼을 자신의 볼에 맞대고, 시린

입술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발바닥을 제 무릎 사이에 끼우게 하고, 그렇게 가깝게 앉아서

몇 번이나 입을 맞추고 또 맞췄다.

" ... 준수야. "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다. 총. 개인이 모두 총을 소지하고,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기다니.

오랫동안 총을 사용했던 자들이야. 게다가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누군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도 죽었겠지. 총을 이용한 살인 사건. 몇 달 전에 미해결 사건으로

끝난 그 사건의 연장선이야.

" 아무것도 기억나는 거 없어? "

" .... 없어. "

" 기억나는 곳 부터 말해봐. "

" 정신.. 차리고 보니까 차에 타고 있었어. 총 소리가 울렸고... 고함소리가 들리고... 창문

이 깨지고... "

" 그 전에는, 없어? "

" 없어. "

" 누구 죽는 거, 보지 못했어? "

죽다니... 누가? 순간 심하게 떨리는 준수의 눈동자에, 유천이 다시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내가 그를 차 안으로 끌어당겼을 때, 그리고 차에 앉아서야 제정신이 든 거야. 준수는 누가

살인을 했고, 범인의 얼굴이 어떤지 기억하지 못해.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Page 249: Happy Together

" 사람이 죽었어. "

" ..... 뭐? "

" 네가... 몽유병 상태로 살인 사건을 봤어. 준수야, 범인의 얼굴, 범인의 무기, 그 외의

사람

들까지 모두... 네가 봤어. 잠든 상태의 네가. "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창민이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것이고, 자신도 바로

나가서 아까 그 현장에 도착해야 한다. 유천은 준수의 양 어깨를 잡고 힘을 주어 말했다.

" 네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해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에게 너는

살인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야. 지금 시간이 없어서 길게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내 말,

알아 들어? 그 새끼들이 누구든.... "

어떤 자들이든, 살인을 목격한 증인을 내버려두지 않아. 그 어떤 폭력 조직도. 만약 내가

생각하는 한인 마피아가 맞다면 더더욱.

" 집에만 있어. 내가 올 때까지 절대로 문 열어주지마. 3분마다 한 번씩 나한테 문자 보내.

10분마다 한 번씩 전화하고. 끝나는 대로 바로 올게. "

" 가지 마... 나 무서워...! "

무서워. 그 말에 유천이 나가려던 몸짓을 멈추고 준수를 내려다보았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자신이 무슨 일에 휘말렸는지, 인식이 되지 않았어. 유천은 이대로

준수의 곁에서 끝까지 머물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했다. 그는 감정에 치우져 일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는 책임감 있는 어른이며, 유천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 빨리 돌아올게. "

준수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고, 다시 끌어안았다. 그리고 도로 잡기 전에 오피스텔을 나

섰다. 박 형사...! 준수의 마지막 말이 현관 문에 걸려 잘려버렸다. 무거운 발걸음에 억지

로 속도를 내어 아래층까지 단숨에 뛰어내려왔다.

- 지금 어디야!! 핸드폰을 꺼두면 어떡해! 미쳤어?!!

"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 "

- 살인이야.

" .... 가서, 말씀드릴게요. "

Page 250: Happy Together

핸드폰을 끊고 차에 올라탔다. 아직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살인이 일어났다는 사실

보다도, 그 살인을 우연치않게 목격해버린 불쌍한 자신의 연인 때문에.

* * *

" 아... 시끄러워. "

바깥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혼자 잠든 침대가 유독 크다고 느끼며

커텐을 열었다. 윤호가 돌아와 자신을 안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홀로 그의 방에서 잠들

었던 재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는 대신, 아랫층에서 무언가를 큰

소리로 지시하며 조용한 제이 에비뉴를 깨우고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하면서 슬리

퍼를 신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세상에... 이 새벽에 홀의 불이 환하게 켜져있고 수 많은

조직원들이 잠도 자지 않고 모여있다. 게다가 다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표정.

" 윤호야- "

그 한 가운데 서 있는 정윤호를 풀렀다. 그는 재중을 돌아보더니, 올라가 있으라며 손짓

하고는 다시 무언가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인데. "

작은 일은 아닌듯 해서, 재중이 그들 사이로 들어왔다. 윤호는 복잡한 표정으로 재중을 힐

끔 쳐다보더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도 카르텔의 일원이기 때문에, 어차피 알

게 될 일을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다.

" 나와 같이 있던 녀석들은 모두 얼굴을 봤어. 나도 봤고.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다.

소년 같지만, 그저 동안일 뿐 어린 아이는 아니야. 오늘 나와 동행했던 애들은 모두 그 근

처에서 어떻게서든 그 남자를 찾아내. 지금쯤 경찰이 시체를 발견했을 거다. 들키지 않도

록 조심해. 그 남자가 우리들의 얼굴을 다 봤으니까. "

" 시체... 라니? "

" 사람을 죽였거든. "

방금 밥 먹고 왔거든- 정도의 대화를 하듯 윤호가 나즈막히 말했다. 사람을 죽였어...? 아,

이 남자는 마피아였지. 그러나 자신의 입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왔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서

재중은 한동안 굳어진 채 입만 벌려야 했다. 살인을 하고 왔다니. 이 새벽에.

Page 251: Happy Together

" 양말을 신고 있었어. 왜 그런 차림으로 있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걸어나온 걸로 봐서는

분명히 그 근방에 살고 있는 남자야. 일대를 샅샅히 뒤지며 찾아내. "

" 예. "

" 찾아내는 즉시, 데리고 올 필요도 없어. 저녁이 될 때까지 미행하다가 인적이 드문 곳

에서 바로 죽여버려. "

" 지금 바로 나가서 알아보겠습니다. "

" 그리고... 경찰이 있었다. 차 번호는 외우지 못했지만, 분명히 경찰이었어. 어째서 경찰

이 그 순간에 나타나 목격자를 데려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거야!! 그 순간에 왜 경찰이 나타난거지. 처음부터 우리가 거기서

일을 치룰 것임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러면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는 말인데, 그건 말이

안 돼. K 카르텔 사이에서 누구도 스파이는 될 수 없어. 그렇다면 도대체... 뭐지.

" 경찰은 아마도 그 길을 우연히 지나가다 목격자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

" ... 그렇지. "

" 처음부터 우리가 그곳에 올 것임을 알아차릴 수도 없고, 만에 하나 안다고 해도 혼자서

올 리는 만무합니다. 주위에 경찰들을 쫙 깔아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겠지요. "

" 네 말이 맞다. "

" 지금 중요한 것은 목격자를 찾아 처리하는 일입니다. 그가 경찰과 접촉한 이상, 몽타주

가 나오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

뉴욕에 있을 때는 사람을 죽일 때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다. 워낙에 밤 늦은 시각에

사람들이 잘 돌아다니지 않기도 하지만, 늘 누군가에게 쫓기며 살았기 때문에 온 몸에 긴

장이 베어있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온 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어. 그래... 나부터가 달라

졌지.

" 상황이... 많이 안 좋아? "

이 녀석에게 너무 많은 신경을 쏟았어. 평생 하지 않을 줄 알았던 실수를 하다니.

" ... 일단은, 오늘 나와 동행했던 자들은 근처에서 목격자를 찾도록 해. 나머지는 당분간

행동을 조심하고 다녀. 검찰 측에서 수사를 시작할 거다. "

조직원들이 모두 홀에서 나가고, 재중은 굳은 채 서 있는 윤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끌어

당겼다. 이렇게 침착하지 못한 모습은 처음 봤기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 윤호는 말없이

재중을 품에 안고 한참을 서 있었다. 두근... 두근.. 그의 심장소리가 조금 빨라서, 재중은

그의 가슴 위에 손바닥을 얹고 오랫동안 다독였다. 사랑하는 이가 불안해 할 때 곁에서

다독여 주는 것은 연인의 몫이므로.

Page 252: Happy Together

* * *

" 틀림없어. 연쇄 살인이야. "

시신을 살피고 유천의 말을 살핀 후 창민이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몇 달 전에 미해결 사건

으로 덮어준 범죄의 연장선이다. 이제야 비로소 실마리가 풀리는 듯 하다. 게다가 이번에는

목격자까지 있다고 하니.

" 서울과 수도권에서 마약을 거래하던 모든 조직들이 일제히 손을 뗐어. 마약 루트를 접고

간단한 땅 투기나 하며 살겠다는 거야. 이게 말이나 돼? 게다가 이 남자 말이야. 이우혁,

우리가 쫓고 있던 조직의 두목이야. 얼마 전에 이 남자가 보스로 있는 조직이 마약 거래를

하다가 우리한테 덜미가 잡혔단 말이야. 뭐가 앞 뒤가 맞는 것 같지 않아? "

" 현재 유일하게 마약 거래를 하던 조직의 보스가 살해당했다... 라. "

" 어느 한 조직이, 마약 루트를 독점하기로 한 거야. 마약 루트를 가지고 있던 조직의 보스

가 죽어나갔던 것도 그 이유야. 말을 듣지 않아서 처단했겠지. 그리고 이 남자가 죽은 것

도 같은 이유야. 거대한 조직의 말을 듣지 않아서 살해당한 거야. 어떻게 생각해? "

" 바른 추리네요. 서울과 수도권의 마약 루트를 독점하기 위한 전쟁... 정도로 볼까요. "

한인 마피아. 그들이 확실해. 그 동안 증거가 없어서 아무런 수사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제

야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이다. 그들의 목적은 마약 루트의 독점에 있고, 그렇다면 마약을

거래하는 자들이 그들의 부하라는 소리지. 더욱 철저히 감시해야겠다. 그나저나.. 살인을

목격했다고 했지. 박유천의 그녀... 아니, 그 가.

" 일단 데려와. 박 형사가 못하겠으면, 내가 앉혀놓고 물어볼게. "

" 아니... 그게요. "

" 마피아 조직에서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카드야. 얼굴을

기억하고 있으니 몽타주도 그릴 수 있고, 그 때의 사건에 대해 대강 얘기라도 들을 수가

있잖아. 데려와. "

" 안 돼요. "

" 박 형사. 지금 자기 애인 챙길 때야? 우리가 무슨 취조 한다고 했어? 중요한 증인이니까

확보하겠다는 소리잖아! "

" 그 애는 아무것도 몰라요! "

" 살인을 봤다며! "

갑자기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끌어들이는 것은 형사가 할

짓이 아닌데. 창민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르며 미간을 찡그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한

일에 끼어들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범인을 잡아야

김준수란 남자도 위험에서 벗어날 것이 아닌가. 마피아들은 분명 그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 일단은 증인 보호 신청할 테니까, 박 형사가 24 시간 따라 붙으며 보호해. "

Page 253: Happy Together

" 그렇게 하지 말라도 할 거에요. "

" 수상한 자들 있으면 혼자 처리하려고 하지 말고, 바로 수사 인력 부르고. 아, 일단은 다른

말 필요 없고 김준수인지 그 남자 불러와. "

" 진짜 안 된다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니까요! 내가 거짓말 하는 것 같아요!? "

" 야-!!!! "

야, 는 창민이 정말로 화가 났을 때 유천을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유천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김준수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 지금 장난해?!! "

" ... 저랑 얘기 좀 해요. 검사님. "

" 검사고 판사고! 일단 불러 오라고-!!! 내가 해꼬지라도 한댔어?!?! "

" 얘기 좀 하자구요!!!!!!! "

창민의 목소리보다 더 커진 유천의 목소리에, 그 둘이 조용해졌다. 서로 언성을 높히며

굳이 이 자리에서 싸울 필요는 없지. 자신들을 힐끗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창민이 경찰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유천은 창민의 옆자리에 올라타고 차 문을 닫았다.

" 후우.... 큰소리 내서 일단은 미안한데, 워낙 사건이 애 장난이 아니니까. "

" 장난 아닌 건 저도 알아요. 연쇄 살인 한 두번 맡아봐요? 게다가 이번에는 그냥 조직도

아니고 미국물 먹고 건너온 정체도 알 수 없는 새끼들이니까. "

" ... 그런데 왜 자꾸 말을 안 들어. 일단 목격자를 불러서 몽타주라도 그려야 현상금이라도

걸든지 하지. "

유천은 담배를 하나 물었다. 준수의 얘기를 떠벌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 준수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

" 봤다며. "

" 봤어요. "

" .... 말 장난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봤는데 왜 아무것도 몰라. "

" 준수가 본 건 맞는데...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요. "

" ........? "

유천은 타들어가는 담배를 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입에 물고만 있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이 고지식한 심 검사가 제대로 알아들을까.

" 몽유병이라고, 알아요? "

" .........! "

" 굉장히 심해요. 아마 몽유병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수준일 거야. 어릴 때부터 그랬대요.

Page 254: Happy Together

지금도 잘 때, 자기 손 침대에 묶어두지 않으면 잠들지 못해요. 그 정도로 심각해요. 사

람 죽일 뻔한 적도 있대요. 무의식 중에 누군가 자기 건들면, 자기도 모르게 목을 조르고

그래요. 저도 목 졸려 봤어요. "

" 그게... 말이나.. 돼? "

" 말 안 되는 것 같죠. 저도 제 눈으로 보기 전에는 안 믿었어요. 준수가.... "

그 때의 일이 생각나서, 잠시 눈을 감았다. 나, 늘 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지만

네 손목을 묶는 줄을 볼 때마다 심장이 타들어갈 것 같아.

" 준수가 새벽에 양말 차림으로 나가서, 뒤따라온 나를 두 손으로 목 졸라 죽이려고 하기

전 까지는 말이죠. "

" ........ "

" 진짜 안 믿기죠. 있잖아요 형사님. 세상에 진짜 별별 사람들 다 있거든요. 우리도 평범한

것 같지만, 찾아보면 진짜 특이한 구석 많을 지도 몰라요. 준수도 그거랑 똑같아요. 그냥

조금... 남들과 다른 면이 있는... 그런 애에요. "

" 몽유병 상태에서... 살인을 봤단 말이야? "

" 봤는지, 그저 그 곳에 서 있었는지 저도 알 수 없어요. 다만 확실한 건, 준수는 그 때

자고

있었어요. 의식은 잠들어 있었고, 그저 몸만 움직이며 우연히 살인 현장에 있었던 거에요.

그는 살인의 목격자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내 말 이해 하겠어요? "

그제야 유천이 왜 준수를 데리고 올 수 없다 우겼는지 알 것 같았다. 세상에나. 창민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손등으로 막았다. 몽유병이라니. 그것도 무척이나 심각한.

하필이면 왜 유일한 목격자가....!

" 그래... 알겠어. 알겠는데, "

" ......... "

" 범인들은 이 사실을 몰라. 내 말 알지? 그들은 김준수가 몽유병인지 뭔지 모른다고. 그저

자신들의 범죄 현장을 완벽하게 들켰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든 김준수를 찾아내서

죽이려고 할 거야. "

무릎 위로 올려진 유천의 두 주먹이 떨리는 것이 보인다. 박 형사, 위로 하나만 할까. 그나

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불행한 남자의 애인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능하고 강한 형사

라는 거야.

" 총력을 다해서 잡을 거야. 검찰이 병신도 아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을 거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보호해. 24 시간 내내 지켜. "

" ... 네. "

" 목격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한다고 생각하면 훨씬 쉬울 거야. "

Page 255: Happy Together

툭, 유천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의 머릿속에는 내 말이 들어오지 않겠지. 집에서 떨고 있는

김준수 생각 뿐일 거다.

" 그만 가봐. 네 일 해야지. 김준수, 잘 보호해. "

털 끝 하나 손대지 못하게 할 겁니다. 유천이 중얼거렸다. 굳이 불안감을 가지진 않겠다.

그는 강한 남자니까. 게다가...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강해지기 마련이다.

* * *

새벽 내내 곤란한 표정으로 서재를 배회하던 윤호는, 아침이 다되서야 간신히 잠에 들었다.

그의 곁에서 안아주느라 함께 한 숨도 자지 못한 재중의 눈이 쾡하다. 다음 날이 되어도 목

격자가 잡혔다는 얘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 그러니까... 그 자가, 네가 사람 죽이는 걸 봤단 말이야? "

" 그래. "

"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경찰도 있었다며...! "

" 목격자는 죽이고, 검찰 수사는 따돌려야지. "

" ....... "

" 내가 사람 죽인다고 하니까, 이상해? "

" ... 응. "

너는 아직도 우리가 평범한 연인인 줄 알고 있어. 책장에 기댄 채 재중을 바라보다가, 손목

을 잡아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어디 가... 그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다정한

연인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지. 그건 꼭 너를 속이는 것 같아서 싫거든. 내가 진짜로 어떤 남

자인지, 재중이 넌 반도 알지 못해.

" 무슨 동물 좋아해? "

" 동물? 갑자기 왜? "

" 너 사주게. "

" ... 지금 애완 동물이나 보러 다녀도 돼? 일이 심각하다며. "

" 지금으로선 목격자를 찾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

" 우리끼리 이렇게 나가도 되는 거야? "

" - 해도 되는 거야, 라는 질문은 나한테 하지 마. 하지 못할 일도 나는 다 해. "

Page 256: Happy Together

저택 바깥으로 나와서 자신의 차에 재중을 태우고 핸들을 잡았다. 경비가 삼엄해진 철문을

지나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 보니 번화가가 나온다. 지금 정말로 애완 동물 하나 때문에 그러

는 걸까. 복잡한 표정으로 주위를 바라보는데, 길거리에서 귀여운 토끼를 몇 마리 팔고

있다.

" 정말 사줄 거야? "

" 응. "

" 그럼... 저거 사줘. 토끼. "

" ... 그러든지. "

끼이익,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윤호가 내렸다. 따라내린 재중이 철장 안에 갇혀있는 귀여운

토끼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이 에비뉴에서 토끼를 기르면 좀 웃길 것 같은데.

조직원

들이 상추 뜯어주고, 윤호가 당근 잘라주고... 생각만 해도 웃기다. 그래도 뒷뜰도 넓으니까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는 있을 거야.

" 이거... 하얀 거요. "

" 주세요. "

" ... 윤호야, 이런 데는 카드 안 돼. "

" 현금 없는데? "

이런 씨발. 너는 토지를 통째로 사재끼면서 어떻게 현금은 하나도 안 들고 다니냐. 어이없는

놈 같으니. 한숨을 쉬며 지갑을 꺼낸 재중이, 제 돈으로 계산하고 토끼를 안아들었다.

" 가자. "

기분이 묘하다. 갑자기 애완 동물을 사준다며 번화가로 나온 윤호는, 토끼는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래도 자신의 품 안에서 꿈틀거리는 하얀 생명체가 귀여워서,

재중은 조용히 웃으며 토끼의 입에 손가락을 물렸다.

" 가는 길에 당근이나 상추 같은 것도 좀 사자. "

" 필요 없어. "

" 집에 있어? "

" ....... "

" 너, 어디 안 좋아? 왜 그렇게 표정이 차가워? "

" 별로. "

Page 257: Happy Together

말 없이 담배를 입에 물고 운전하는 윤호의 옆 모습이 오늘따라 파리해보인다. 하긴, 걱정

이 되고도 남겠지. 남을 죽이는 걸 들켰으니. 하지만 솔직하게 말한다면 상상이 되지 않는

다. 저 깨끗한 손가락으로 총의 방아쇠를 당겨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갔다니. 솔직히 말하면

난 아직도 그가 마피아라는 것이 종종 믿겨지지가 않아.

" 이름은 뭘로 할까? "

" 네 마음대로 해. "

" 호야로 할까? 윤호-야. "

" .... 너 진짜 귀엽다. "

그제야 피식 거린 윤호가 재중을 힐끔 쳐다보았다. 꼼틀대는 토끼를 품에 안고 좋다며 환

하게 웃는 그가 예쁘다. 하지만 너무 약하지.. 그게 문제야. 너가 사랑하는 정윤호라는 남

자가, 정말로 어떤 마인드를 가졌는지 알 필요가 있어. '사람을 죽였어.' 라는 말을 우스갯

소리로 듣지 마, 재중아. 너는 아직도 네가 어떤 남자를 사랑하는지 모르고 있어.

" 목격자는, 찾았어? "

" 아직입니다. "

" 검찰에서 증인 보호를 요청했을 거야. 그의 곁에 경찰이나 형사가 붙어 있을 거다. 조심

하라고 전해. "

차에서 내리자마자 고개를 숙이는 조직원을 지나, 다시 저택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오

던 재중은 바로 부엌으로 가서 야채들을 찾으려 했지만 윤호의 걸음은 그 쪽이 아니었다.

" 어디로 가? "

" 뒷뜰. "

뒷뜰은 갑자기 또 왜에... 하며 그를 따라갔다. 하긴, 오랜시간을 철장 속에서 갇혀 살았을

텐데 자유롭게 풀어둬야지. 뒷문을 지나 뜰로 나오자마자 토끼를 풀어주었다. 대나무 숲이

보이는 이 넓은 뒷뜰을 좋아한다. 아침마다 이곳에서 하는 수련도 이제는 익숙하다. 이제는

제법 조직원들을 상대로 공격할 줄도 알고, 날아오는 윤호의 발차기를 방어할 줄도 안다.

넌 강해져야 해. 입버릇처럼 말하는 윤호의 부탁에 그렇게 되려고 늘 애를 썼다. 왜 그렇게

나를 강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 귀엽지. "

" ........ "

" 그래도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면 찾기 힘들 텐데. 보통 때에는 네 방에서 키워도 돼? 똥은

내가 다 치울게- "

윤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천천히 뒷춤에서 총을 꺼냈다. 재중이 알아차리기

Page 258: Happy Together

전에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 ......!! "

토끼를 맞추지는 않았지만 그 소리가 뜰 안에 크게 울렸다. 기절할듯 놀란 재중이 윤호의

팔에 매달리며 총을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윤호는 총을 내어주지 않았고, 장난치

듯 일부러 짐승을 빗겨가게 방아쇠를 당겼다.

" 그만해!! 뭐 하는 거야...!?! 장난치지 마! 놀라잖아!!! "

" ... 장난? "

토끼를 끌어안으러 달려가려는 재중을 붙들었다. 그의 두 팔목을 교차시켜 한 손으로 잡고

턱을 돌려 앞을 보게 했다.

" 내가 사람을 죽일 때, 어떻게 하는 지 보여주는 거야. 친절하게. "

" 정윤호!!!!! "

" 물론, 지금처럼 총알을 낭비하지 않아. 정확히 총구를 겨누고 급소를 맞춰. "

탕,!

재중의 비명이 찢어질듯 울렸다. 끔찍할만큼 시뻘건 피를 토하며 쓰러진 토끼가 꿈틀댄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사랑스럽던 하얀 털의 토끼는 없다. 피로 뒤범벅이 된 한 마리의 짐승이

썰어지기 일보 직전의 고기처럼 땅에 누웠다. 도대체 왜 그러냐며 울부짖는 재중의 끌고서

죽어가는 토끼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미 눈이 뒤집힌 토끼의 몸통을 발로 짓밟았다.

" 그만해...! 흐... 흐윽... 뭐하는 거야...!! 이게 뭐하는 거냐고!!!!! "

" 잘 봐. 이게 사람이라고 생각해. 되도록이면 사람을 네 눈 앞에서 죽여주고 싶었어.

하지만

일단은 아쉬운대로. "

" 정윤호!!!! 너 미쳤어! 너... 너 미쳤... "

그가 다시 방아쇠를 잡았다. 미친 듯이 몸을 비틀며 주저앉으려 하는 재중의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잘 봐. 네 눈으로 똑바로 봐. 내가 어떻게 총을 다루는지. 어떻게 피를 보는지.

" 목. 아니면 머리. 아니면 심장. 셋 중 하나를 겨눠. "

Page 259: Happy Together

경련을 일으키는 그 피로 절여진 토끼의 작은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아악,! 비명을 토하는

재중에게 배려따위는 없었다. 아니, 하루라도 빨리 자신이 어떤 이인지 깨닫고, 살인자에게

어울리는 연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큰 배려였다.

" 이렇게 가깝게 총을 대고. "

" 윤호야.... "

" 두려움에 떠는 상대방의 눈을 응시해. 그리고 승리를 확신하면, 방아쇠를 당겨. "

나는 이렇게 사람을 죽인단다. 깔끔하지. 아픔없이 한 번에 보내는 자비심도 가지고 있어.

방아쇠를 당긴 윤호의 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토끼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름을 뭐라고 할까, 뭘 좋아할까, 방금 전까지 자신이 중얼거렸던 말들이 모두 거짓 같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재중이, 이미 머리가 날아가버린 토끼의 끔찍한 형상

을 바라보았다. 징그러워. 끔찍해. 소름끼쳐. 역겨워.

" 넌 미쳤어.... "

" 나 봐. "

재중의 어깨를 거칠게 잡고, 윤호가 차갑게 말했다. 내가 미쳤다고?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살인은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살인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이미 너를 선택하고 사랑하고 있는데 이제와서 어쩔까. 너는 아직도 나와 달콤한

연애를 상상하고 있잖아. 우리는 때론 이렇게 잔혹해지고, 미친 사람처럼 살인을 저지르고

그걸 비밀리에 덮어버리고 사라져야해.

" 쥐어. "

" ........ "

" 쥐어, 김재중. "

억지로 재중의 손에 총을 쥐인 윤호가, 총구를 이미 죽어버린 짐승에게 겨누게 했다.

" 싫어... "

" 쏴. "

" 이미 죽었잖아!!! 네가 죽였잖아! 눈 앞에서!! 죽은 것한테 몇 번이나 총을 쐈잖아!!! "

" 그래. 이미 죽었어. 그러니까 안심하고 쏴. "

" 난 못해... "

" 나를 사랑하면, 쏴. 네 손으로 시체에 총알을 박아봐. "

부들부들. 총을 쥔 재중의 손이 심하게 떨려온다. 정윤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겠다. 난

바보가 아니니까. 자신의 곁에서 살아가는 것이, 이런 삶을 동반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피

Page 260: Happy Together

를 보고, 그 피를 보고 토하지 않을 강인한 정신을 원하고 있겠지. 나는... 나는 너를

사랑해.

타앙,!

짐승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이 원래 어떤 동물이었는

지도 알 수가 없다.

" 총탄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쏴. "

저것이 살아있다고 생각해. 살아있는 생명을, 네 손으로 앗아가는 거야. 그게 내가 하는

일 중 하나고, 나에게 떼어낼 수 없는 핏자욱이야. 그리고 너 또한 익숙해져야 하는 일.

재중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총을 쐈다. 총소리가 울릴 때마다, 핏덩이는 반동으로 흔들

리며 질퍽한 액체를 쏟아내고 또 쏟아냈다. 잘했어, 총탄이 모두 떨어진 후에야 재중은

총을 떨어뜨렸다. 그의 곁에 윤호가 다가와 총을 집어들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해.

" 우..욱..! "

핏덩이를 윤호가 집어들었다. 너덜너덜해진 살점이 덜렁거린다. 뇌수가 흐르고, 굳어지지

않는 붉은 액체가 손에 한 가득 묻었다. 재중이 몸을 수그리고 토악질을 해댔다. 먹은 것도

없어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지만, 진득한 애액이 토해졌다. 역겨워... 죽을만큼 역겨워.

" ... 방으로 가자. "

" 만지지 마. "

그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손으로 날 만지지 마. 말없이 노려보았다. 피가 묻은 그 손

으로 재중의 팔을 잡고 뒷문으로 향했다. 만지지 마...!!! 재중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거침없이 저택으로 들어가, 아무렇게나 너덜해진 짐승의 가죽을 던져버렸다. 그 꼴을 보니

다시 구역질이 나와 재중이 몸을 숙였다. 넌 가끔가다 이렇게 가차없어. 힘들어 하는 나는

봐주지도 않고 네 뜻대로만 해.

욕실에서 대강 손을 씻었지만 피비린내는 가시지 않는다. 아직도 붉은 그 손으로 재중의

허리를 붙들고 입을 맞췄다. 입 안에서마저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아까 전 네 손으로

죽여버린 그 불쌍한 짐승의 마지막 뜀박질이 떠올라... 침대로 엎어진 재중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굳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의 냉정한 눈을 보는 일

이 무엇보다 힘이 들 것 같아서.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저만치도 잔혹하다는 사실이.. 가끔

슬프다.

아래를 더듬는 손은 아짓도 비릿해서, 재중은 몇 번이나 구역질을 참아야 했다. 하지만 굳

Page 261: Happy Together

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재중은 즐길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입 안

에 오기를 넣고 시트를 쥔 손에 힘을 줄 수는 있었다.

.

.

.

" 되게 못생긴 동물을 사달라고 할 걸 그랬어. "

" ...... "

" 예뻐서 더 우울해. 예쁜 거 죽여서. "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는 재중의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살인을 한 건 아니지만,

살인을 전제로 총을 쏘게 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안고서 함박 웃음을 지어주었던 귀여운

생명체에게, 죽어서도 쉴 수 없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게 했다. 그러나 윤호는 일말의 죄책

감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말을 듣고 방아쇠를 당긴 재중의 첫 번째 총성에 고개

를 끄덕였을 뿐이다. 이제야... 조금은 알았지. 내가 실제로 무슨 일을 하는 지.

" 네 거야. "

윤호가 내민 것은 총이었다.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총. 순 은으로 만들어진 데져트 이글.

K 카르텔의 표식이 손잡이 부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아름다운 만큼 섬뜩한 느낌으로

재중의 손에 쥐어졌다.

" 내 연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널 노릴지 몰라. 아까 내가 쏘아죽인 그

짐승이, 네가 될 수도 있다는 소리야. "

" ....... "

" 그 전에 네가 먼저 죽여. 너를 노리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방아쇠를 당겨. 죄책감 따위

가지지 마. 생명은 지키는 자의 몫이야. "

" ....... "

" 네 총이야. 늘 지니고 다녀. 너에게 죽이는 살인까지 강요하지 않을테니, 지키는 살인은

아끼지 마. "

자신의 손에 쥐어진 총을 바라보았다. 이런 것을 쥐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내일부터 사격 배우자. "

" 총... 쏘는 법? "

" 알려줄게. 위험한 순간에 단 한 발로 너 지키는 법. "

" 사람 죽이는 법이겠지. "

" 배워둬. 언젠가, 네 손에 누군가 죽게 될 지도 모르니까. "

Page 262: Happy Together

네 사랑법은 참 이상해... 재중이 말했다. 어쩌면 맞아, 윤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랑인 건 확실하잖아.

* * *

" 다 왔다며! 왜 이렇게 안 와?! "

- 지금 오피스텔 보여!

" 그렇게 구린 차를 타고 다니니까 늦지!! "

- 세상에서 경찰차가 제일 빠르거든!

" 아... 박 형사. 나 혼자 있는 거 싫어. 빨리 와아. "

- 응응. 다 왔어.

하루 종일 오피스텔 안에 갇혀서 죽은 듯이 지냈다. 그나마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초반기라

다행이지, 후반기였으면 하루 종일 유천 없는 바깥에서 홀로 일을 해야 했을 것이다. 준수

는 손톱을 씹다가 신발을 구겨 신고 바깥으로 나갔다. 오피스텔 안 이라면 괜찮겠지. 엘리

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1층으로 내려와 차마 바깥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유리문 앞에 서서 차도를 바라보기만 했

다. 이 문은 출입인 카드가 없으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혹여나 그들이 근처에 있다고

해도 여기까지는 들어올 수 없을 거야.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앞만 바라보고

있는데, 유천의 경찰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박 형사, 를

불렀다.

" 내가 정말로.. "

박 형사를 사랑해. 차에서 내리고 이 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터질 것 같

아. 그 검은 자켓 안으로 들어가, 어리광을 부리며 머리를 부비고 싶어. 그 투박한 손으로

빨리 나를 안아주면서, 아무 일 없으니 걱정 말라고 웃어줬으면 좋겠어...

" 박 형사! "

그 짧은 순간 조차 기다릴 수가 없어서, 준수가 유리문을 나서 유천에게 달려갔다. 마중나

온 그의 그림자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 유천이다. 순간 총에 손을 대고 주위를 둘러보

았지만 다행히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위험하다고. "

" 그 남자들이 귀신도 아니잖아. 어떻게 알아.. "

Page 263: Happy Together

" 아무튼 말 안듣는 건 김준수 따라갈 새끼가 없지. "

" 또 새끼래. 아무튼 말버릇.. "

포옥.. 한 품에 들어오는 그의 가녀린 어깨가 좋다. 여자보다 가늘고 아름다운 머리카락도.

준수야, 너는 내가 지켜줄 테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 지금도 얼마나 불안해 할까. 평생을

불안감으로 살아온 사람인데, 왜 이렇게 인생이 꼬이냐. 한숨을 쉬며 준수의 어깨를 안고

토닥거렸다.

" 들어가자. "

" 응.. 맛있는 거 해놨어. "

오피스텔 정문으로 들어가려 준수가 품 안에서 카드를 꺼냈다. 꼬물꼬물대는 귀여운 손가

락을 바라보며 웃다가, 유리문을 바라보았는데-

" ......! "

" 카드가 또 안 먹혀. "

" 엎드려!!!! "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그 거대한 유리문이 산산조각 내며 깨어진다. 바로 몸을 수그린 유

천과 준수의 몸 위로 유리조각들이 흩어졌다. 빠르게 뒷춤에서 총을 꺼낸 유천이, 유리문

에 비친 그 남자를 향해 돌아섰다. 당겨지는 방아쇠보다 빠르게 준수를 안고 몸을 굴렸다.

그와 동시에 한 손으로 정확히 남자의 몸에 총구를 겨냥하고 총구를 당겼다. 쓰러지는 남

자의 손에서 총이 빠져나갔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유천이 일어나 달려갔다.

" 그대로 엎드려 있어! 움직이지 마! "

" 흐으... "

" 씨팔!!! 있는 놈들 다 나와!!!!! "

고요한 침묵 속에, 엄청난 총성과 파열음에 놀란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달려오는 경비원들과 주위 사람들을 보며, 유천이 서서히 총을 내렸다. 미친놈이 아니고서

야 일반인들의 수 많은 눈을 무시한 채 총을 당기지 않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빌어먹을. 이렇게 빨리 찾아낼 줄이야.

" 어떻게 된 거에요?! "

" 살인이야!!!!! "

" 죽.. 었어...! "

" 서울중앙지검 형사입니다. 다들 물러나세요- "

Page 264: Happy Together

형사수첩을 들어보이고, 유천이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정확히 심장에 맞고 즉사했다.

늘 범인을 죽이려 총을 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김준수가 뒤에 있어서 그랬다. 죽이지 못하

면 죽는다. 폭력배들의 삶의 방식은 유천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자신 또한 그랬으므로.

죽이지 않으면.. 죽었어. 핸드폰을 꺼내 창민의 번호를 누르려다, 뒤에서 웅크려 앉아있는

준수에게 먼저 뛰어갔다.

" 죽었어...? "

" 응. "

" .... 네가.. 죽였어? "

"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었어. "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지킬게. 그 말을 실감했다.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18

" 죽어? "

" 예. "

" ... 다른 피해는. "

" 없습니다. 총소리가 들린 후 저희가 뛰어갔을 때는, 민간인들이 너무 많이 모여있어서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

대한민국으로 이주하고 나서 처음으로 벌어진 피해다. 숨진 조직원은, 조용하고 남에게

부탁 같은 것은 거의 하지 않는 소극적인 남자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충성심이 강해서

윤호가 특별히 아껴왔던 자이기도 했다. 돌려진 회전 의자에 앉아있던 윤호의 손이 허

벅지를 쥐어짜듯 잡았다. 일이 생각보다 크게 번지고 있다.

" 서울중앙지검의 형사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쪽의 검찰이 관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보호하고 있던 자는, 저희들이 봤던 목격자가 맞습니다. "

" 형사... 라. "

" 박 형사, 라고 불렀습니다. 목격자가. "

그 지긋지긋한 형사. 편하게 사는가 싶더니 벌써 발목을 붙들었어... 윤호는 잠시 눈을 감

았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어. 다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가 잠시 생각 할뿐이다.

Page 265: Happy Together

" 시신은 어디있어. "

" 검찰 측에서 회수한 것 같습니다. "

" 시신을 찾아와. "

" 예. "

" 그리고 서울중앙지검 컴퓨터를 해킹해. 사건은 분명히 강력반에서 맡고 있을 거다. 목

격자를 보호하고 있는 형사를 찾아내. 그를 쫓으면, 목격자를 찾아낼 수 있을 테니. "

죽은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는, 그가 살았던 세상 속의 사람들의 마지막 인사를 건네

주는 거겠지.. 좋은 녀석이었는데. 윤호는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 그 형사는 죽이지 마. 검찰 측의 사람을 죽이면 일이 더 복잡해지니까. "

* * *

" 기록이 없다구요?! "

" 네. 아무것도 없어요. 저희도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

한인 마피아로 추정되는 자의 DNA를 검사했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검사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주민등록에 일치하

는 결과도 없었고, 전과자 중에도 없었다. 문득 FBI 쪽에서 보내왔던 서류의 내용이 떠올랐

다. 아무런 흔적과 기록도 남기지 않는 지능범들. 시민권조차 없는 한인 마피아 무리.

" 이로써, 한인 마피아가 살인의 주범임은 확실해졌네요. "

" ... 그래. "

" FBI가 보내온 서류와 일치하잖아요. 아무리 쑤셔봤자 알 수 있는 것이 없다고. "

" 불법 체류자나 마찬가지지. "

" 시신은 어떻게 할까요. "

" 일단 영안실에 배치해놔. 그리고 박 형사, 잠깐 나 좀 봐. "

서울지검으로 황급히 달려온 박유천의 곁에는, 마치 버려진 아기 고양이처럼 덜덜 떨고

있는 불쌍한 목격자가 있었다. 김준수. 창민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유천을 따로 불렀다.

" 같이 가면 안될까요? "

" ... 그러든지. 어차피 둘 사이에 비밀은 없을테니까. "

휴게실로 들어온 창민은, 안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던 형사들을 모조리 내보냈다. 그리고

유천과 준수를 앉히고 자신은 벽에 기대 편하게 섰다. 유천의 커다란 손에 잡혀있는 준수

의 자그마한 손을 보고, 창민은 불현듯 이 둘의 사이가 생각보다 깊은 것 같다고 느꼈다.

Page 266: Happy Together

김준수라는 자는 박유천에게서 죽어도 떨어지지 않으려 온 몸을 밀착시키고 있었고,

유천은 그런 준수를 바로 곁에서 보듬으며 몇 번이나 괜찮으냐고 묻고 있었다. 게다가

저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눈들이라니. 박 형사가 진심이라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구나.

" 둘의 사이는 알아요. "

" ... 예? "

" 박 형사에게 얘기 들었어요. 그리고 준수 씨에 대한 병도. "

" .......!! "

" 아, 비밀을 누설했다고 박 형사한테 화내지는 말아요. 준수 씨를 검찰 측으로 데려와서

살인 사건에 대한 거 꼬치꼬치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그거 말리면서 박 형사가 어쩔 수

없이 말한 거에요. "

그래요... 준수는 한숨을 쉬며 불안한 눈초리로 창민의 눈치를 살폈다. 심각한 몽유병 환자.

자신을 정신병자로 보지는 않을까. 이 남자는 유천처럼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게다가

지나치게 사무적으로 보인다. 딱딱한 말투와 유천보다 조금 더 커보이는 키. 그리고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초리.

"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으니까 걱정 말아요. 난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얘기 듣고도 별 걱정

하지 않았으니까. 한마디로, 동성애마저 너그럽게 인정할 수 없는 속 깊은 남자라는 거

야. "

싱긋. 그제야 창민이 웃었다. 웃으면 선해지는 인상이구나. 준수는 한숨을 쉬며 유천의 손

을 더욱 꼭 붙들었다. 이 자리에 불러서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 한인 마피아라고 알죠? "

" ... 예. "

" 박 형사한테 들었어요. 아, 말 놔도 되나? 그 쪽보다는 나이 많은데. "

" 아, 그러세요. "

" 그래. 아무튼 들었어. 뉴욕에서 유학생활 하면서 K 카르텔에 대해 들어봤다고. "

" ....... "

" 한인 불법 체류자들을 도와주던 마음씨 좋은 마피아, 어쩌고 저쩌고 했다며. "

" ... 맞는데. "

" 그런 거 다 집어 치우고, 여기는 뉴욕이 아니라 한국이야. 그리고 그 마음씨 좋다는 마피

아가 지금 너 죽이려고 이 바득바득 갈고 있고. "

준수는 잠시 자신이 뉴욕에 있을 때 그들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때는 전혀

몰랐다. 그 자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게 될 줄은. K 카르텔. 얼마나 유명했던가.

" 다시는 네가 살았던 오피스텔 근처에 가지 마. 짐은 빠른 시일 내로 싸가지고 나와. 우리

Page 267: Happy Together

가 사람들 붙여줄 테니까 걱정 말고. 당분간은 박 형사 집에서 함께 살아. 박 형사,

아직도

그 반지하 방에서 사나? "

" 저 이사했잖아요. 옥탑방으로. "

" ... 숨은 탁 트여서 좋겠군. 어쨌거나 둘이야 연인 사이니까 함께 사는 거 안 불편하겠지.

"

본격적으로 동거하는 건가. 이 상황에서도 괜히 좋아서, 유천이 실실거리며 웃었다. 순간,

머리를 강타하는 창민의 서류뭉치가 몇 번이나 허공에서 쉭쉭 멤돌았다.

"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 "

" 아프잖아요!!!! "

" 애인 앞에서 개망신 당하고 싶지 않으면 내 말에 집중하고 들어. "

머리를 감싸고 소리를 버럭 지르던 유천이, 금세 고개를 숙이고는 준수의 손가락을 꼼지락

댔다. 씨팔.. 쪽팔려.

" 우리도 이렇게 빨리 그자들이 준수 씨를 찾을 줄은 몰랐어. 생각했던 것보다 발이 빠른

놈들이야. 그리고 얼마나 그쪽을 죽이려고 이를 바득 갈고 있는 지 알 수 있었고. "

" 애 겁먹잖아요!! "

" 겁 먹으라고 하는 얘기야. 아무튼, 나는 이번 사건으로 다시 한 번 그들을 간과할 수 없게

되었어. 내 생각으로는, 그들은 어떤 수를 써서든 준수 씨를 다시 찾아낼 거야. "

" 진짜 겁 먹었잖아요!!! "

저걸 그냥. 서류 뭉치를 다시 휘두르려다 접어두었다.

" ...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는 '역'으로 준수 씨를 이용해 볼까 해. "

" 네?! "

" 그자들이 어떻게 서든 준수 씨를 찾아낼 정도로 머리가 좋은 자들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곧, 준수 씨가 있는 곳에 그 자들이 나타날 거라는 뜻도 되거든. "

" 지금 애를 미끼로 쓰겠다는 얘기에요? "

" 잘 들어, 준수씨. 그리고 그만 닥치고 내 말 들어, 박 형사. 마피아래잖아. 대한민국의

일반 조직 폭력배들보다 스케일이 큰 새끼들이야. 그런 새끼들이, 자기들이 저지른 살인

의 목격자를 가만 둘 것 같아?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알아내서

죽여. "

" ........ "

" 한 마디로, K 카르텔 일당이 모조리 잡히지 않는 담에야 준수 씨의 완벽한 안전은 보장

할 수 없다는 뜻이야 "

그 자들을 잡아야 당신이 안전하게 살 수 있어요. 내 말 알아 들어요? 창민의 다정하면서도

Page 268: Happy Together

또박또박한 말투에, 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 걱정 하지는 마. 박유천 이 남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능한 형사거든. 잘 지켜 줄 거야.

"

" .. 네. "

" 우리 쪽에서도 최대한 신변 보장을 해 줄거야. 준수 씨가 외출할 때는, 박 형사 말고도

수사 인력을 조금 더 붙여줄 테니까, 안심해요. 쉽게 죽도록 내버려두진 않아. "

창민의 말이 끝나고, 준수는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유천과 창민을 번갈아 보았다. 이렇게

강한 남자들이 자신을 지켜준다니. 안심이 된다.. 하지만 그만큼 창피하고 속상하다. 남의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을 정도로 약한 남자라니.

" 그럼.. 전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되죠? "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던 창민은, 불안이 가득한 준수의 질문에 편안하게 웃어보였다.

" 일단은 박 형사 집으로 가서, 한 숨 자. 앞으로 피곤한 일들이 많을 테니까. "

.

.

.

유천과 준수가 돌아간 후로, 창민은 책상에 오랫동안 앉아서 한인 마피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점검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다가 문득, 습관처럼 아직 잡히지 않은 범인들의

목록을 클릭했다. 서울지검의 홈페이지에 표시되어있는 이들은, 전국적으로 수배명이

떨어진 자들이다. 하루가 다르게 범인이 잡히고, 또 잡히는 만큼 잡히지 않은 범인들이

새로 홈페이지에 오르곤 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창민이 찾는 얼굴은 나타나지 않는다.

" 어디 있는 거냐.. "

자신의 약혼녀를 강간했던 그 빌어먹을 남자. 그 자를 찾는 것은 창민의 떨칠 수 없는 습관

이었다. 아직도 창민의 머릿속에는 그 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약에 취한 것처럼

동공이 흔들리던 불안정한 눈동자. 길고 더러운 머리카락. 썩은 나무색과 같은 피부와 덜덜

떨리고 허스키했던 목소리. 기절한 약혼녀의 목을 쥐고 있던 끔찍한 손바닥...

-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봐...! 이 여자의 목에 칼을 쑤셔 넣을 테니...!

결국에 그 목에, 내가 쏜 총탄이 박혔었지. 창민은 고개를 수그리고 컴퓨터 화면을 껐다.

Page 269: Happy Together

벌써 5년이 지났는데, 나는 아직도 그녀의 환영과 그 개자식의 환영에 시달려. 언제쯤이면

그를 잡을 수 있을까...

" 검사님,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

" ... 이 형사. "

" 저 지금 나가는데, 같이 나갑시다. 가는 길에 술 한잔 하구, 응? "

아니오- 라고 말하려다, 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죄책감에 시달려 웅크리고 앉아

있어봤자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 이제 그만 현실에 충실하며 살아야 할 텐데.

의자에서 일어나 겉옷을 들고 차 키를 꺼냈다. 창민이 나가고 문이 완전히 닫혀진 강력 1반

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 * *

"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 "

" 전혀? "

" 흠.. 유 형사, 먼저 들어가. "

" 강 형사님은요? 오늘 야근 하시게요? "

" 알아봐야 될 것들도 많고... 조금 더 있다 들어가려고. "

강력 3반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던 두 남자들 중 한 명이 일어섰다. 일정하지 못한 생

활은 형사들에게는 일상이었고,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먼저 들어갈게요-! 인사를

건넨 후 한 남자가 사라졌고, 남겨진 강 형사는 자판기 커피를 홀짝 마시다 눈을 감았다.

피곤하기도 하고, 하지만 할 일이 산더미다.

- .... .. ....

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철문을 열려는

소리 같기도 하고, 소근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확실한 것은 이 시간에 이런 소리가

들릴 이유는 그다지 없다는 사실이다. 강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력 3반을 나섰다.

" 거기, 누구 있어? "

소리가 들려오는 쪽은 지하였다. 워낙 소리가 잘 울리는 곳이기 때문에 꽤나 시끄럽다.

이 시간까지 안 가고 누가 지하에서 장난질이야. 미간을 찌푸리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어째 주위가 음산하고 기분이 영 좋지가 않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추리고 뒷춤에 있는

총에 손을 대려다, 말았다. 서울중앙지검에서 불안감을 느끼고 총질이라니. 우스운

일이다. 피식 웃으며 지하로 내려와 손전등을 찾았다. 바로 앞에 걸려 있어야 할 손전등이

없다.

Page 270: Happy Together

" 경비가 가져갔나... "

핸드폰 조명을 키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쪽은 시체들

이 안치되어 있는 중앙지검 내 영안실이었다. 왜 하필이면 이런 재수없는 쪽에서...?

" ......?! "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나무 토막처럼 크고, 기분 나쁜 것.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를 내려

다 보았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았다. 무엇이 있는가 보려고 핸드폰 조명을 비추는데,

" .....!! 이런 씨....!!! 거기 누구야!!!!!! "

바닥에 나뒹구는 손전등이 부숴져 있고, 그걸 손에서 놓친 경비가 쓰러져 있었다. 동공이

뒤집힌 채 이미 숨졌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저만치까지 퍼져 있었고, 강 형사는 입을

틀어막고 총을 꺼내려 손을 뒤로 돌렸다. 철컹, 그와 동시에 바로 앞에서 영안실의 문이

열렸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푸른 빛에 두 어명의 남자들의 실루엣이 비췄다. 그리고 다시

소리지를 찰나, 강 형사는 자신의 목이 뜨거워짐을 느낌과 동시에 바닥으로 쓰러져버렸다.

" 크.. 크흡..! 허억... "

말조차 나오지 않는 목을 쥐어뜯으며, 핸드폰에 손을 뻗었지만 이미 의식이 흐려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시야에는, 두 남자가 영안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총이, 달빛을 받아 순간 반짝거렸다...

* * *

" 와아-! "

유천은 내심 걱정하는 중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준수가 유천의 집에서 동거하게 되

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살던 집과 자신이 사는 집은 형편이 너무 달랐고, 또 너무 좁았다.

그러나 유천의 그런 걱정을 무시라도 하는 듯, 준수는 옥탑방 앞의 나무 마루에 앉아 서울

시내 야경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어보인다. 유천의 집은 남산 근처였기 때문에, 옥상에서

서울 야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그 화려한 네온 사인의 별천지에, 준수는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잠시 잊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 광경은 언제 봐도 예쁜 것 같아.

Page 271: Happy Together

" 오늘 따라 더 예쁜 것 같아. "

" 그치? 그래서 여기가 땅값이 좀 비싸. 내가 이 옥탑방 사느라 통장이 하나 밖에 안 남았

잖아. 하하하. "

" ........ "

" ... 그래도 고정 수입이니까 걱정 마. 너 하나 먹여 살릴 능력은 있어! "

" 누가 뭐래냐. "

입술을 삐죽 내밀고 다시 아래를 내려다본다. 준수는 이불을 온 몸에 돌돌 말고 옥상에서

야경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 이 집에 왔던 날이 생각난다. 생각보다 더 누추한

꼬라지에 준수가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데, (생각보다 훨씬 좋다! 와!

여기가 박 형사가 사는 곳이야? 등등의 멘트를 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유천이 준수의 손

을 이끌고 무작정 야경 부터 보여주었다. 그 때의 감동이란.. 마치 박 형사가 나를 위해서

준비한 선물 같았어.

" 앗! 기름 튄다! 이불로 몸 더 꼭 말고 있어. "

" 안 그래도 그러고 있어. "

" 바짝 익혀서 줄까? "

" 응. 난 익은 고기만 먹으니까. "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는 유천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동거 기념으로 고기나 구워먹자며,

자기 딴으로는 비싼 차돌배기를 사왔다. 저거 고기 중에서도 꽤나 비싼 고긴데. 박 형사가

엄청 눈물 흘렸겠구만.. 준수는 돌판 위에서 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기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또 이게 센스도 있어. 김치도 같이 구워주는 센스. 그것도 김치 이파리만.. 이런 센스쟁이!!

" 어때, 죽이지. 서울 야경 쫘악 바라보면서 고기 상추 쌈 먹는 기분! "

고기에, 김치에, 콩나물까지 얹어서 상추쌈을 푸짐하게 싸 준수에게 먹인 유천이 소리쳤다.

입이 터질만큼 상추쌈을 집어넣고, 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써-! 동그래진 콧구멍이

너무 귀여워서 유천은 자신의 손가락을 준수의 콧구멍에 넣으려다(...) 뺨 맞을 뻔 했다.

" 이게 다 나랑 사귀니까 가능한 일이야!! "

" 그렇게 잘난 사람이 이제까지 여자 한 번 안 사귀고 뭐 했냐? "

" 응. 나도 뭐 했나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

어쩜... 이 남자는 가끔가다가 이렇게 로맨틱한 말로 감동시켜줄 줄 아는 매력도 있다. 평

소 안 그러던 사람이니만큼, 가끔가다 튀어나오는 유천의 저런 말은 준수를 한 없는 사랑의

블랙홀로 인도한다. 너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리. 이 사랑의 블랙홀에서 영원이 춤을 추다

죽을 것이다... 절대자의 말이 들리는 듯 하다.

Page 272: Happy Together

" 막.. 사랑을 이 사람한테 퍼주고, 저 사람한테 퍼주면 나중에 정말 퍼줘야 할 사람한테는

모자를 수 있잖아. 그니까.. 그런 걸 대비해서 내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기다린거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 만났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 퍼다줄라고. "

" 그 사람이 나야? "

" 이 새끼는 또 알면서 그렇게 묻는다! 창피하게! "

" ... 새끼라고 하지 말랬잖아. "

풋고추를 초장에 찍어먹으며 오물거렸다. 처음에는 이런 걸 어떻게 먹냐며, 난 니 거는

먹어도 이 고추는 절대로 못 먹는다고(...) 발악을 해댔지만, 저번에 고기집에 갔을 때

유천이 화장실 간 사이를 틈타 호기심에 먹어보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자기가 오랫동안 몰라서 그렇지 준수의 원래 입맛은 한국식이었던 것같다. 선지 해장국도

그렇게 맛있었고.. 이제는 스테이크보다 족발이 더 좋아.

" 여기는.. 그자들이 알아채지 못하겠지...? "

" 아마도. "

" 아마도? "

" 내 존재를 카르텔 쪽에서 모를 리가 없어. 게다가 네 오피스텔 앞에서 벌어졌던 총격전에

누군가 더 있어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분명히 내 존재를 조직의 우두머리에게 알렸을 거

야. 목격자를 보호하는 형사가 있다고. 그러면 나도 함께 찾겠지. "

" ... 미안해. 나 때문에 박 형사까지 재수없게 됐네. "

" 야!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

파편 튀겨. 박 형사... 얼굴에 붙은 상추 쪼가리들을 떼어내고, 준수가 말 없이 고기만 깨작

댔다. 그렇게 깨작대며 먹지 말라 했잖아! 유천이 커다란 상추에 고기를 여러 개 얹어서 쌈

을 싸며 중얼거렸다.

" 재수 없다니.. 내가 니 때문에 얼마나 재수 좋은 놈이 됐는데. 내가 니 아니면 어떻게 이

르케 이쁜 애인을 만나겠나? 나는 너 같이 예쁜 애가 나 사랑해주는 것만으로도 자다가도

막 벌떡 일어나서 살사 댄스 추고 싶다. "

" ... 나야말로 운이 좋은 거지. 세상 누가 몽유병 앓고 있는 남자를 데리고 살고 싶어해. "

" 세상에 그런 놈 하나 없어도 된다. 나 있으니까 필요 없다. 내가 너 데리고 살게. "

" ... 진짜 죽을 때까지? "

" 죽는 다는 재수없는 말 하지 마라. 아, 그리고 죽는다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만약에

그 새끼들이 너 죽이려고 총 겨누고 그래도... 내가 몸 내던져서 구할 테니까 걱정 마라.

내가 인간 방탄 조끼도 되주고, 인간 보호막도 되주고 그럴게. "

" 박 형사. "

갑자기 진지해진 준수의 얼굴에, 유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냐고 물었다. 유천이 내민

상추쌈을 잠시 옆으로 비켜놓고, 준수는 돌돌 만 이불을 푸르고 팔을 꺼내 유천의 손목을

잡았다.

Page 273: Happy Together

" 나랑 약속 하나만 하자. "

" 무슨 약속? "

"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박 형사 몸 날려서 나 구하겠다는 생각 하지 마. "

" 왜!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내가 뭐하러 사냐! "

" 자기 목숨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남자는 싫어. "

" 귀하게 생각하니까 너한테 주는 거지!! "

" ...... "

" 귀하지 않으면, 너한테 주지도 않았다! 이렇게 귀한 거니까 너 주겠다고 하는 거잖아! "

... 아무튼 너라는 남자는 말이지.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파고 또 팔 수록 사랑하고 싶은

매력이 넘쳐서 내가 감당이 안 돼. 쑥쓰러워서 이런 말 제대로 못 하지만.. 박 형사가 날

사랑해 주는 거, 나 스스로 축복이라 생각하고 있거든.

" ... 소중하게 생각하라고. 그만큼. "

" 알아. 그리고, 세상 어느 누구도 나 죽일 수 있는 놈은 없으니까. 그런 건 걱정 마. "

" 죽는다는 재수없는 얘기 그만 하구, 고기나 먹자. "

" 내 말이! 자, 그런 의미에서 아~ 해! "

" 아~ "

애가 갑자기 왜 이래. 눈을 반쯤 뜨고 고개를 치켜 올린 준수가, '하아' 하며 입을 섹시하

게 벌린다. 상추쌈을 먹이려던 유천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 또, 또 왜 이래! "

" 내가 뭘. 빨리 상추쌈이나 먹여죠. "

아아- 하면서 눈을 지긋이 감은 준수가, 아빠다리 하고 있던 발을 푸르고 버릇처럼 발을 뻗

어 유천의 허벅지를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난 세상에서 박 형사 놀려먹을 때가 가장 재밌어.

" 빨리.. 빨리 먹고 언넝 안으로!!! "

빛의 속도로 쌈을 싸는 유천의 손을, 준수가 저지시켰다. 아직도 너는 침대 위에서만 사랑

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무튼 하나 하나 가르쳐주지 않으면 늘지가 않는 다니까. 한숨

을 쉬고 이불을 망또처럼 두르고 유천의 곁으로 다가가 위로 엎어져 버렸다.

고기 굽는 돌판 따위 저만치로 꺼져주세용.

* * *

Page 274: Happy Together

" 밤 늦게까지 야근하다고 해서.. 저는 먼저 들어갔거든요... 그 때까지만 해도 이상한

낌새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는 했지만 전 듣지 못했고..

그 때 제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

흐느끼는 남자를 앞에 두고, 창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야근을 서고 있던 강 형사가

목숨을 잃었다. 중요한 사실은, 이 건물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서울중앙지검 안에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느낀 이곳에서 살인이 일어나다니. 터져나는 언론을 감당하지

못하고, 창민은 잠시 비상구로 향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된 놈들이지.

어떻게 이렇게 대범한 범죄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느냐고....!

" 시신이 사라졌습니다. "

" .......... "

" 아마도, 그자들이 가져간 듯 싶습니다. "

" .. 그러겠지. 아니면, 누가 신원 확인도 안 된 시체를 훔쳐가겠어. "

이미 죽어버린 조직원의 시신을 훔치기 위해, 자신들이 가장 피해야 할 이곳까지 잠입하는

놈들이다. 다른 조직들과는 다르게, 조직원을 끔찍하게 위하는 놈들이 틀림없어. 그렇다면

분명 부하들은 보스에게 절대 충성할 것이고, 스파이를 끼워넣거나 조직원 한 명을 매수하는

짓은 할 수 없다는 얘기다.

" 검사님... 괜찮으십니까. "

강 형사가 죽은 날, 나는 야근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밤 늦도록 일을 하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갔어. 내가 만약 그날 야근을 섰더라면... 강 형사 대신 내가 죽었을까. 아니면, 그를

구할 어떤 방도라도 찾을 수 있었을까.

" 형사님. "

" 네? "

" 아주 오랫동안 검사직에 있었지만 말입니다... "

사람을 구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창민이 중얼거렸다.

* * *

" 몸이 긴장하면 안 돼. 힘을 풀어, 재중아. "

" 총을 들고 있는데 어떻게 긴장을 안 하냐! "

" 힘 빼. "

Page 275: Happy Together

데져트 이글을 들고 아까 전부터 사격 연습에 한창이다. 조직원의 장례를 치룬 후로, 윤호는

어느 때보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형사 한 명을 죽인 것 같습니다. 라는

직원의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물론이다. 검찰 측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 거

야.. 그 지긋지긋한 전쟁을 피해서 정도 들지 않은 대한민국까지 도망쳤는데, 또

시작이라니.

" 나아지고 있으니 다행이야. "

" 그래? "

" 응. 이제는 사격판에 총알이 박히잖아. "

" ........ "

" 처음에는 허공에다 쏴대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지. 난 눈에 보이지 않는 물체라도 있는 줄

알았다. 니가 너무 자신있게 허공에다 쏴대서. "

" 내가 너처럼 인생을 총이랑 보낸 사람이랑 같냐?! "

" 다르지. "

그래서 같게 만드려고 지금 이렇게 용쓰고 있잖아. 윤호는 재중의 총을 쥐고 정확하게 다섯

발을 쐈다. 저 총소리는 언제 들어도 고막이 찢어질것 같아. 어깨를 잔뜩 움추린 재중은, 눈

을 크게 뜨고 사격판을 바라보았다. 다섯발 모두 명중이다. 한 가운데에. 총 쏠 때 빙의라도

씌이는 거냐! 귀신도 아니고 뭘 저렇게 잘 쏴대.

" 재중아. "

" 왜? "

" 이런 상상하면 안되는데, 난 가끔 너가 미니스커트 입고 다녔으면 좋겠다. "

" ... 내가 너한테 란제리 입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하면 기분 좋겠냐?! 이런 미친 새끼를 봤

나... "

" 넌 다리가 예쁘잖아. 난 딱 남자 다린데. "

" 언제는 내 하체 부실하다고 랩처럼 입에 달고 다녔잖아. "

" 딱.. 너가 미니 스커트 입고, 그 총 스타킹에 꽂고 다녔으면 죽이게 섹시할 거 같아서. "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할 때 보면, 그는 그냥 장난기 많고 야한 농담을 좋아하는 평범

한 20대 청년 같아 보인다. 평범함... 그에게 결여된 것들 중 하나. 윤호의 뒤를 졸졸

따라서

2층으로 올라온 재중은, 그가 좋아하는 서재의 붉은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그는 이렇게

누워서, 소파 아래 앉은 윤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을 좋아했다. 이 남자가 평범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자라온 환경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구나.

" 언제 사람을 처음 죽여봤어? "

" 그건 갑자기 왜 알고 싶은데. "

Page 276: Happy Together

" 그냥. "

" 글쎄... 열 살 때였나. "

멈칫.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내가 구구단을 외우던 나이인 것 같은데. 그 때에

사람을 죽였단 말야...? 윤호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머리 계속 만져줘.' 란다. 그렇게

져주는 느낌이 좋다며.

" 누구를? "

" 양 아버지. "

" .... 친 아버지 말고? "

" 친 아버지는 누군지 몰라. "

" 왜.. 죽였어? "

" 우리 엄마를 죽였거든. "

" ...... "

" 그런 일, 흔했어. 한인계 빈민들이 사는 곳은 뉴욕 이스트 할렘가 부근인데, 하루에도

몇 명씩 홈리스들이 죽어나갔어. 불법 체류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장례도 해주지 않았지.

우리 어머니도 그랬어. 장례식 할 돈도 없었거든. "

" 그래.. "

" 생각해보면, 내 사격 실력은 그 남자를 닮은 걸지도 몰라. 양 아버지는 우리 엄마를 한 발

에 저 세상으로 보내버렸거든. 심장에 한 발. 그래서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죽였어.

아버지

시체도 어머니랑 다를 바 없이 누추하게 버려졌을거야. 뭐.. 그 때 부터는 혼자 살았어. "

그의 책장이 넘어가질 않는다. 아마도 그 때를 생각하고 있는 듯, 윤호의 시선은 책에 머물

고 있었지만 그의 잡념은 다른 곳에 있는 듯 했다. 재중은 계속 윤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재중이 머리를 만져주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마치 어머니에게 안겨드는 작은 아이처

럼, 하루에도 몇 번이고 품 안에서 자신의 머리칼이 재중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싶어했다.

" 친구들이랑 놀아본 적도 없겠네. "

" 나랑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은, 애초부터 싹수가 노래서 학교 따위도 다니지 않았어. 도둑

질로 먹고 살고.. 그러다가 잡히면 죽기 일보 직전까지 맞는 거고... "

" 장난감은, 갖고 놀아본 적 있어? "

" 탄환 있잖아. 그게 여러가지로 재미있어. 그 탄환 속에 화약이 들었거든. 그걸 빼내는

거야.

그게.. 빼내다가, 잘못 건드리면 탄환이 터지거든? 그럼 손이 막 날아가는데... "

" 아니, 그런 거 말고 로보트나 비행기 조립품 같은 거 있잖아. "

" 기억에 없는데? "

조금 더 부드럽게 윤호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응... 기분 좋다.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젖혀 재중을 바라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아름다운 어린 시절이 결여된 불쌍

Page 277: Happy Together

한 남자.

" 우리, 언제 놀러 나갈까? "

" 미쳤냐. 할 일이 산더미인데. "

" 하루쯤은 괜찮잖아. 네가 무슨 일에 얽매인 노예도 아니고, 사람이 즐길 거 즐기지 못하면

스트레스로 화병 얻어서 죽어. "

" 난 너랑 충분히 즐기니까 괜찮어. "

" ... 본능적인 거 말고, 그냥 우리가 연인임을 느낄 수 있는 다른 평범한 것들 말야. "

" 딱히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해주고 싶은 거야. 윤호야... 이렇게 너의 곁에 가까이 있을수록,

너에

게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이 보여서 많이 서글프다.

" 놀이동산 가봤어? "

" ... 그, 허공에서 움직이는 커다란 배 위에서 사람들이 꿱꿱 소리지르는 곳? "

" 응. "

" 애새끼들이 색칠한 것처럼 유치한 색상의 말들이 막 돌아가는 곳? "

" 응. "

" 기차가 철로 위에서 달리면 사람들이 비명 지르면서 거품 무는 곳 말하는 거냐? "

" 맞아. 거기. "

알긴 아는 구나. 그 다운 비유에, 재중이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우리 거기로

놀러가자. 솜사탕도 먹고, 같은 청바지도 입고, 은근한 커플 목걸이도 하고 돌아다니자.

다른 사람들처럼 줄을 서서 놀이기구를 기다려보고, 바이킹을 타면서 사랑한다고 소리치고

인형탈을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사진도 찍어보고, 밤에는 풍선을 타고 천장을 다니며

화려한 저녁 퍼레이드도 보고, 응?

" 너가 이렇게 유치한 놈인 줄 몰랐다, 재중아. "

" 근데 너, 왜 기대하는 표정이냐? "

" ... 아니거든. "

책 등으로 재중의 머리를 가볍게 찍고, 윤호가 먼저 일어섰다. 침실로 향하면서 그가 하는

행동은, 섹시한 남자들의 기본 수칙 중 하나. 한 손으로 티셔츠 끌어올려 벗어재끼기.

" 정윤호. 너 내 앞에서 아니면 아무데서나 옷 벗고 다니지 마. "

" 왜? "

" 보는 사람 마음이 심란해지거든. "

Page 278: Happy Together

저 섹시한 남자 품에 안기고 싶어 하는 건 나로 충분하거든. 이래뵈도 난 꽤 질투심이 많은

남자란 말야. 다른 누가 저 등을 끌어안으면, 나야말로 폭주하고 너처럼 총을 아무렇게나

뽑아서 죽여버릴지 몰라.

.

.

.

" 뭘 그렇게 고민해? "

" 응. 일 때문에. "

습관처럼 이불을 돌돌 만 준수는, 향긋한 피존향이 나는 이불에 코를 박고 킁킁거린다. 준

수와 같이 산다고, 하루 종일 이불 빨래와 집안 청소로 하루를 다 보냈던 유천의 노력 덕분

이다. 침대 옆에 놓여진 자그마한 책상에 종이들이 여러 뭉치 뒹굴고 있다. 새로 맡은 일은

준수의 신변의 위험과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워낙 일 욕심이 많은 그였기 때문에 유천

은 딱히 말리지 않았지만, 앞으로 자주 바깥에 나다닐 것을 생각하니 한숨부터 나온다.

" 이 그림들은 다 뭐야? "

" 응. 퍼레이드 기획안. "

" 퍼레이드? "

" 이번에 맡은 일이 놀이동산 퍼레이드 관련 일이거든. "

" 그런 것도 해? "

" 어떻게 보면 퍼레이드도 하나의 파티잖아. 보는 관객과 즐기는 관객이 분명한 파티. "

" 놀이동산에서... 그, 막 가면 쓰고 분장 하고 드레스 입고 돌아다니는 거 말하는 거지? "

" 응. "

이번 퍼레이드의 컨셉은 최대한 사랑스럽게,야. 봄인 만큼 아이들이 놀이동산에 많이 오거

든. 디즈니의 가족 뮤지컬을 컨셉으로 한 환상적인 이벤트가 될 거야. 야무지게 자신의 생각

을 늘어놓는 준수를 보니, 또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 며칠 후에 놀이동산 가야 하는데... 괜찮겠지? "

" 거기야 뭐, 사람들 많으니까. 게다가 너 외출할 때는 나 말고도 다른 형사들 붙으니까

상관 없어. "

" 일만 체크하고 올 거야. 의상이랑, 퍼레이드 장치 같은 거 체크해야 되니까. "

거기 가서, 덤으로 데이트도 하면 좋겠다. 유천이 중얼거리자 준수는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나도 그 생각 했어. 바이킹도 타고, 롤러 코스터도 타고, 회전 목마도 타고 그러자. "

" 진짜? "

" 응. 우리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못했잖아. "

Page 279: Happy Together

" 하긴... 요새 너무 긴장 타면서 살긴 했었어. "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상상이긴 하지만, 유천은 이불을 두른 준수의 팔을 헤치고

보드라운 살결에 얼굴을 묻었다.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19

" 아, 너무 맞춰 입은 거 같잖아! "

" 그러면 안 되냐. "

" 웃기잖아! 내가 파란색 입을 테니까 너는 회색 입어. "

" 왜, 같이 입지. "

" 아, 벌써 10시잖아! 9 시에 개장이란 말이야!! "

" 바가지 긁는 모습도 섹시한 재중이. "

" 씨팔, 바지 구멍 머리에 넣기 전에 빨리 입어. "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해서 둘 다 알람 소리를 못 들었다. 후다닥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나와보니, 윤호가 무표정으로 커플 티셔츠를 꺼내놓고 무슨 청바지를 입을까 고심하고 있

었다. 딱히 맞춘 옷은 아니었지만, 같은 파란색의 슬립한 티셔츠를 보며 재중은 경악을

했고,

윤호는 '왜?' 정도의 표정으로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지금 그 인간장터에 남자 둘이서

커플 티셔츠 입고 가자는 거냐?!

" 아, 그리고 거기에서 카드 계산하기 귀찮으니까 현금 챙기고. "

" 응. "

" 운동화 편한 걸로 신고... 야야, 너 지금 뭘 챙기는 거야....?! "

자연스럽게 침대 맡에 놓여진 총을 챙기는 걸 보고, 재중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너는 놀이

동산 가면서도 그걸 못 참고 총을 잡냐?! 윤호의 총을 빼앗아 저만치 던져버렸다.

" 왜.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

" ... 보통 사람들은, 놀이 동산 갈 때 최대한 가볍게 가지 저런 무거운 금속 따위 몸에

지니지

않는다구. "

" 난 총 없으면 불안해서 못 다녀. "

" 지금 사격 시합 나가냐? 인간 사냥하러 가? 뭐하러 저 무거운 걸 숨기고 다녀?! "

Page 280: Happy Together

" 그래도, "

" 몰라. 너 총 가지고 나가면 오늘 아무것도 안 해. "

침대에 팔짱을 끼고 풀썩 앉아서 심통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좀 평범한 연인들처럼

편안한 차림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려고 했는데, 시선은 긴장되어 있고 손은 총을 만지작

거리고, 언제 누구를 겨눌지 모르는 총구를 뒷춤에 숨겨두고. 그게 도대체 뭐야?

" .... 알았어. 아무튼 김재중 바가지는 못 이긴다. "

" 진짜지? "

" 좀 작은 총은... "

" 안 된다니까! "

" 그럼 작은 칼 정도는 괜찮지. "

" 야-! "

" 습관이라니까. "

" .... 내가 보관할게. "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우리는. 윤호는 중얼거리며 서랍장 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재중에게 쥐어주었다.

" 다 예방 차원이야. 이런 거 가지고 다녀서 안 좋을 거 없다. "

" 알어, 알어. 그러니까 빨리 준비하고 나가자. 아침에 일찍 가야 사람들 없단 말이다!! "

* * *

" 여기는~ 롯~데월드! 여기는~ 롯~데월드! "

" 좀 닥쳐줄래? "

거의 10년만에 롯데월드를 와봤다는 유천은 어째 준수보다 더 신나보인다. 입구에서 산

미키마우스 머리띠를 자신과 준수의 머리에 각각 안착시키고, 발랄한 걸음으로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데 산만해 죽을 지경이다. 롯데월드에 도착하자마자 할 일은 일단 준수의 직업

미팅이었다. 미키마우스 머리띠를 유천에게 맡겨두고, 준수는 퍼레이드 기획실 안으로 들

어가 몇몇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기획안을 보여주고 여러가지를 얘기했다.

" 디즈니 만화 주인공들을 전면으로 내세울 거에요. 디즈니는 동심의 대표적인 캐릭터고,

어른들도 모두 알만한 친숙한 얼굴들이니까. 신데렐라나, 인어공주 같은 무대는 아기자기

하고 최대한 사랑스럽게 갈 거구요, 알라딘이나 라이온킹은 역동적으로 갈 거에요. 일단,

여기 기획안 보시구요. "

Page 281: Happy Together

일하고 있는 준수의 모습은 또 색다르다. 늘 앙앙거리는 목소리로 안기거나, 투정부리는 것

이 익숙했지만, 서류를 들고 있는 그는 어른스럽고 단정하다. 유천은 사무실 바깥 쪽에 혼자

서서 유리창 너머로 준수를 빼꼼히 쳐다보았다. 무어라 떠드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열심히 무

언가를 설명하는 준수의 모습에 괜히 뿌듯하다. 간간히 웃는 걸 보니 일의 경과가 좋은 것

같다.

" 다 끝났어? "

" 응. 조금 있다가 두 시쯤에 퍼레이드 의상이랑 기계 장치 체크하러 갈 거야. 그 때까지는

프리. "

" 그럼 놀아도 돼? "

" 뭐, 그런 셈이지. "

다시 유천에게 미키마우스 머리띠를 뺏어온 준수가, 자신의 머리에 앙증맞게 올려놓고는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본다.

" 나중에 자이로드롭 탈 때는 그거 빼고 타. "

" 왜? "

" 너 자이로드롭 괴기 일화 모르냐? "

" ... 그게 뭐야? "

'천국의 계단'에 나왔던 송주오빠와 정서의 사랑의 만남터, 회전목마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데, 유천이 으스스한 표정을 짓더니 준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 어떤 여자가 자이로드롭을 타다가, 머리카락이 기계에 걸린 거야. "

" 그런데? "

" 너도 알다시피, 그 놀이기구가 한 순간에 쫘악-! 내려가잖아? "

" 응. "

" 어떻게 됬겠어. "

" ........? "

" 여자의 머리카락이 걸린 채, 머리 두피랑 얼굴 가죽이 완전히 벗겨진거야. 그리고 여자는

시뻘겋게 얼굴에서 피를 토하며 그대로 즉사했고. "

" 야아아아아아-!!!!!!!!!!!!! "

귀를 막으며 쓰러져보지만 이미 상황 종료.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무서운 이야기를 들어

버린 준수는, 한 쪽 주먹으로 유천의 어깨를 거칠게 두드리며 눈을 부라렸다.

" 거짓말 하지 마!!!!! "

" 진짜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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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기네!! 그냥 지어낸 얘기잖아!!! "

" ... 준수야, 그 사건 우리 강력반에서 담당했었어. "

" ......... "

" 시체도 내가 처리했었고. 아직도 기억 난다. 얼굴 가죽 완전히 벗겨져서, 눈알이 아주

그냥

달랑달랑... "

" 꺄아아아아!!!!! "

비명을 지르며 저만치 도망가는 준수를 보며, 킬킬거리며 배를 잡는 유천이다. 구라지롱.

.

.

.

혜성특급을 타기 위해 매직 아일랜드로 향한 둘은, 의외로 사람들이 없는 덕분에 쉽게 건물

안 쪽으로 들어와 나란히 줄에 섰다. 이렇게 놀이동산에 와본 적이 얼마만이더라.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단체로 이곳에 소풍을 왔던 적이 있었다. 준수는

출석만 체크하고 혼자 다른 곳을 돌아다녔다. 혼자 근처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멍하니 시내를 구경하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갔지. 고 2 때, 준수의 몽유병이 전교에 알려진

이후로는 아무도 그와 다니려고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제대로 된 연애를 하는 것도 아주 오래 전인 것 같다. 뉴욕으로 유학을

떠난 후에도 그는 남들에게 자신이 몽유병인 것을 들키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굳이

기숙사를 놔두고 자취를 했던 것은 물론이고, 친구들은 절대로 집에 들이지 않았다. 사람을

사귄다고 해도 함께 아침을 맞는 일은 없었고, 잠자리를 가진다고 해도 섹스 후에는 상대방

의 집에 돌려보냈다. 결국에는 깊은 관계까지 가진 못하고 겉핥기 식으로만 여러 명을 만났

지... 사랑에 있어서 성숙해지지도 못하고, 그저 허기진 배만 달래는 식이었다.

" 응, 왜? "

갑자기 품 안으로 파고드는 준수의 작은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다행히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는 않는 것 같다. 머리 위에서 달랑거리는 미키마우스가 귀여워서, 유천은 기분좋게

웃으며 몰래 귓볼에 입을 맞췄다.

" 사랑해.. "

" 야, 갑자기 이런데서 사랑한다고 말하면 내가 너무 기쁘잖아! "

" 목소리 너무 크다. "

내 정신병자 같은 모습을 보고서도 달아나지 않은 건 네가 처음이었어. 내 손에 목이 졸려

죽을 뻔했으면서도, 미친놈이라며 떨지 않고 손을 잡아준 것도 네가 처음이야. 사람은 있지,

혼자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일 때 가장 외로움을 타는 법이거든. 나는 늘 혼자여야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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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외로웠고.. 그래서 이 남자의 소중함이 가슴으로 와 닿는다.

" 어? 다음 번에 우리 타겠다! "

센티하게 젖어있는 준수를 달래면서, 유천은 속으로 나름대로의 망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

었다.

' 어둡다. '

단순한 유천은, 주위가 어둑어둑하자 슬쩍 준수의 눈치를 보고는 의지를 굳건히 다졌다. 뭔

가 그에게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

' 키스하고 싶다. '

어두우니까... 저만치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놀이기구의 의자를 확인하면서, 유천은 고

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로 붙어 있으면 문제 없어. 난 불가능이란 모르는 의지의 사나이 박

유천이니까.

- 안전벨트 착용해 주시고, 소지품은 오른편에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 으아... 떨려! "

" 떨리나. "

" 떨린다! "

" 내 손을 잡으라. "

푸슈슝- 엄청난 소리를 내며 혜성특급이 출발했고, 그들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빨려 들

어갔다. 별로 속도도 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목청을 가로 세로로 찢고 계신 여성들의 비명

에 귀가 다 아파온다. 유천은 가르는 바람을 느끼며 주위를 살폈다. 현란한 불빛과 어두운

조명이 그야말로 완벽한 조명 세트다. 옆에서 발악을 해대는 준수의 손을 꼬옥 잡은 채, 눈

을 이리저리 굴렸다. 지금 키스한다고 사람들이 볼 껀덕지도 없다. 이 놀이기구는 졸라게

빠르니까!!

" 박 형사!! 박 형사!! 꺄아아악!! 무서.....?! "

두 손을 안전벨트에 찹쌀떡처럼 밀착시켜놓고, 눈을 꼭 감은 채 비명을 지르던 준수는, 자

신의 입 안으로 무언가 물컹한 것이 들어옴을 느꼈다. 눈을 간신히 떴을 때에는, 이 엄청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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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감에도 불구하고 몸을 완전히 자기 쪽으로 틀어버린 유천이 자신의 양 볼을 잡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지금 넌 이걸 타면서 키스를 하고 싶냐!!!!!!

평생 추억으로 남겨 주고 싶던 유천의 의지 때문인지, 그는 열차가 수직으로 하강하고 돌고

뺑글이 치는 것에도 불구하고 준수의 두 볼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완전히 틀어버린 몸을

아예 준수 쪽으로 밀착 시키고, 휘몰아치는 바람을 배경으로 죽도록 입술을 빨았다. 이러다

정말로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아서, 준수는 몇 번이고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열차가 거칠게 움직이는 바람에 오히려 그의 옷자락을 쥐고 안기는 꼴이 되어버렸다.

" 허억... 허억.. "

열차가 서서히 바깥으로 나오면서, 그제야 유천이 입술을 떼고 몸을 제자리에 안착시켰다.

일단은 자기 뜻대로 키스했다는 만족감에 씨익 웃으며 옆을 바라보았다. 미친년개산발머리

에 저쪽 너머로 흐르는 침을 정처없이 떠나보내는 준수가, 멍한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

었다.

" 아으, 귀여워. "

지랄을 한다. 지금 놀이기구 타다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아직도 정리가 안된 준수가 비틀

거리며 의자에서 내려 자기 소지품을 찾았다. 일단은 질질 흐르는 침을 닦고, 혼미스러운

정신을 정리했다. 아니.. 놀이기구에서 키스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회전 목마 타면서 몰래

볼에 할 수도 있는 거고, 신밧드의 모험 타면서 스무스하게 흘러가는 배 위에서 할 수도 있

는 거고, 귀신의 집에서 불 살짝 꺼졌을 때 귀엽게 입술 부딪힐 수도 있는 거잖아... 정신없

는 혜성특급 타면서 비명지르는 와중에 꼭 그렇게 몸을 틀었어야 했니.

" 머리 미친년산발 됐다. 형아가 정리해 줄게. "

" 박 형사.. "

" 응? "

사랑하긴 하는데.. 가끔가다 존나 까고 싶어..

* * *

" 재밌지! "

롯데월드의 대명사 자이로드롭을 깔끔하게 한 번 날려주고, 재중이 신이 난 표정으로 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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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팔에 매달렸다. 오랜만에 오니 더 재미있는 것 같아. 아무튼 이런데는 날씨 좋을 때 사랑

하는 사람이랑 오붓하게 오는 것이 제일이다. 애새끼들 없는 날이면 더 좋고! 신나 죽을 것

같은 재중의 표정과는 달리, 윤호는 어째 그다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다. 아니, 마음

에 들지 않는다기 보다는 무언가 굳어있다.

" 야... "

" 응? "

" 내가, 스물 두 살 때 다른 스페니쉬 할렘 가에서 건방지게 놀다가 총에 맞아 죽을 뻔한 적

이 있거든. "

" 갑자기 그런 소리는 왜 하냐?! "

" 내 아랫배 보면 수술한 자국 있잖아. 왜.. 길게 죽 그어져 있는 거. "

" .... 응. "

" 그 때, 그 스페인 새끼가 내 배에 총탄 박았을 때보다 더 무서웠다. "

보통은 자이로드롭보다는 살인 저지르는 총이 더 무섭다고 하지 않냐? 황당한 표정으로

윤호를 바라보다가, 정말로 굳어있는 표정이 왠지 귀여워서 웃어버렸다. 하긴, 자이로드롭

처음 타보는 사람들은 다들 저렇지. 떨어지기 직전에, 언제 떨어지는지 몰라서 숫자를 세며

긴장탈 때의 짜릿함은 거의 초스릴과 대단한 공포의 시간들이다.

" 아! 츄러스 먹자! "

" 아까도 구슬 아이스크림 먹었잖아. "

" 그건 그거고-! 놀이동산에서 먹어야 더 맛있는 것들이 있단 말이다! "

" ... 너, 되게 신나 보인다? "

어쨌거나 나도 이런 곳은 오랜만이니까. 집이 폭싹 망한 이후로는, 이런 꿈의 나라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이런 곳에 다정하게 데려올 여자친구도 없었고. 사람들이 놀이동산을 좋아

하는 이유는, 현실과 괴리감이 있는 몇 안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온통 사랑과 행복을 노래

하며 사방이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럽게 꾸며진 이 꿈동산은, 현실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작은 축제의 도시니까... 그러나 재중에게는 그와 정 반대의 이유로 이곳이 좋았다.

현실감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마피아들의 비밀스러운 동네, 제이 에비뉴에서 벗어

나 일반 사람들 틈에 섞여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세상 속으로 돌아온 것 같다.

" 제이 에비뉴 안에만 갇혀 있는 건 싫으니까. "

" ... 나랑 같이 있잖아. "

" 난 원래 이렇게 살던 사람이잖아. 그렇게 제이 에비뉴 안에만 갇혀서 사격 연습이나 하고

아침마다 유도 수련이나 하며 살다가는 답답해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

" ... 그래, 가끔 이렇게 나오자. "

안그래도 뭘 어떻게 해야 네가 죽이게 예쁘게 웃는 꼴을 볼까 고심하던 차였는데, 잘됐네.

재중이 나눠준 츄러스를 입에 물고 기분 좋게 매직 아일랜드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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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퍼카? "

" 응. 나 운전해보고 싶다! "

" 아... 저 애새끼들 타는 쪼그만 걸로 뭐를 운전해. 그냥 발로 차면 나가겠네. "

" ... 탈래. "

아무튼 뭘 얘기해도 늘 이렇게 부정적이야. 츄러스를 입 안에 가득 물고 범퍼카로 향했다.

워낙에 차가 몇 대 없는 데다가, 타는 시간은 또 오지게 길어서 놀이동산에서 가장 줄서기

힘든 기구 중 하나다. 윤호는 츄러스를 열심히 씹어 먹으며, 옆에서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

찍기에 바쁜 재중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야, 그저 끌렸다. 그건 예뻐서일 수도 있고, 그냥 인연이기 때문일 수도 있

겠지. 외적인 면에 끌리지 않았다고 하면 완전한 거짓말이다. 그저 아름다움 만으로도 충

분히 가질 가치있는 놈인데, 김재중의 가장 큰 매력은 지루하지 않다는 거다. 지루함은

곧 질린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서, 연인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허나

재중에게는 그러한 면이 전혀 없었다. 그는 윤호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 온 사람이기에

삶의 방식, 생각하는 방식 하나하나가 모두 윤호와 틀렸고, 그래서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김재중이 아니라면 내가 이런 일반인들이 득실대는 무리 속에서 어울릴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뉴욕에 있을 때에 나는, 철저하게 나의 세계 안에서만 살았다. 내가 즐길 수 있는

몇 안되는 유흥거리가 클래식 음악회나 연주회였고, 거기서 김재중을 만날 우연을 얻었지.

그렇게 만난 이 가치있는 녀석은, 나를 자꾸만 세상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상당히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흥미롭다. 나도 이런 평범함을 가장하고 끼어들어서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구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겠지. 평범한 학생

이라...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는 자꾸 나에게 새로운 걸 생각하게 해.

" 너.. 진짜 죽인다. "

슬금슬금. 사람들 틈에 끼어서 자꾸만 재중의 아래로 내려오는 윤호의 손을 저지했다. 이

빌어먹을 새끼는 때와 장소를 안 가려! 네가 보기엔 여기가 일을 치룰 장소로 보이냐!?

" 좋아서. "

" 넌 좋은 걸 꼭 그런 식으로만 표현하지? "

" 가장 몸에 와 닿잖아. "

" 그딴 짓 여기서 안 해도 되니까, 그냥 웃어! 웃으면 졸라 좋은가 보다 알아서 생각할테니

까! 씨, 넌 이런데서 흥분이 되냐!? "

알았으니까 바가지 그만 긁어... 재중의 말대로, 그저 웃으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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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몸을.. 구겨 넣어야 되는 거냐.. "

윤호가 타기엔 확실히 작아보이는 범퍼카에 몸을 구겨넣고, 얼굴을 찡글며 안전벨트를

맸다. 안전벨트? 도대체 범퍼카에 이게 왜 필요한 거냐?

" 안전벨트 매셔야 되거든요- "

" ...... "

" 저, 매셔야 되는데... 규칙이라서요. "

" 난 안 매도 돼. "

윤호의 직설적인 한 마디에, 아르바이트생이 땀 한방울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아,

출발합니다! 하는 큰 목소리와 함께. 계속 매어야 한다고 말했으면, 바로 안전벨트로 목을

졸라 죽여버릴 포스였다.

" 윤호야! 나 따라 와!! "

늘 스포츠카 류를 모는 윤호에게야,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 정도의 시시껄렁한 장난감

이었지만, 재중에게는 그것이 꽤나 신나는 일인 듯 보인다. 하긴.. 놀이동산 도착하자마자

아주 발광을 해대며 좋아 죽으려고 했지. 윤호는 미소지으며 장난감 같은 핸들을 돌렸다.

앞에서 신나게 질주하고 있는 재중의 차를 따라잡아 뒤에다 바로 박아버렸다.

" 오-! "

반동력이 꽤나 심하다. 몸이 앞으로 심하게 튕겨져 나가는 걸 보고, 윤호가 표정을 굳히며

안전벨트를 찾았다.

" 매야 겠구나... "

" 윤호야! "

" 어, 간다. "

열심히 안전벨트를 몸에 걸치고 다시 핸들을 잡았다. 저만치서 좋다고 핸들 돌리고 운전

하고 있는 재중이 귀엽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장난감 차를 타고, 이렇게 사람들이 득실대는

곳에서 노다니는 걸 생각하지도 못했겠지만... 지금은 왠지 모든 것이 익숙하다. 좋은 건지

그 반대인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김재중과 함께 범퍼카를

박아대는 이 순간이 그저 즐거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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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좀 쉬자. "

" 늙은이. "

신나게 범퍼카를 굴리다가 밖으로 나오니 왠지 어질어질하다. 윤호는 근처의 유치한 색

상의 벤치에 풀썩 앉았다. 바로 앞에 보이는 석촌 호수가 예쁘다. 윤호의 곁에 앉은 재중이

소매를 걷어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렇게 유치하다고 무시만 하더니 혼자 열불나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박고 다니더라... 웃겨서 죽는 줄 알았어.

" 즐겁지? "

" 그건 또 왜 물어. "

" 너 만나고, 오늘. 지금. 여기 이 벤치에서 보는 네 표정이 가장 좋아보여. "

너한테 이런 걸 선물해주고 싶었어. 연인과 함께 하는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일상. 너에겐

드문 일이겠지만, 나는 이런 걸 쉽게 선물해줄 수 있어. 앞으로도 여러번 이랬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나는 정윤호가 긴장 풀려서 감정 얼굴에 드러나는 꼴이 너무 보고 싶다고.

그의 어깨에 기대려는데, 갑자기 윤호가 몸을 앞으로 쭉 뺐다. 그 덕분에 허공에 삽질한

재중이 헛기침을 하며 윤호의 시선을 쫓았다. 뭘 저렇게 보고 있는 거지.. 갑자기 그의

표정이 진지하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서 말을 걸려고 하는데, 윤호가 먼저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아무튼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놈. 뒤따라 일어선 재중이 도로 웃으며 뒤에서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 ...... "

" 윤호야? "

이번에는 아틀란티스! 하며 윤호의 옷 소매를 끌어당기는데, 윤호는 어째 미동도 없이 가만

히 제자리에 서버렸다. 무엇을 봤나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지만 특별히 다른 건 없다. 곰돌이

탈을 쓴 사람들만이 무겁게 두 손을 흔들며 다꼬야끼를 팔아대고 있을 뿐.

" 왜 그래, 뭐 봤어? "

" ... 재중아. "

" 응? "

" 네 말을 듣기를 잘한 것 같다. "

" 무슨 뜻이야? "

" 놀이동산 온 거 말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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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웃음까지 나왔다. 그렇게 사방을 찾아 헤매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이렇게 우연히

만날 줄은 또 몰랐네. 서두르지는 말자. 내 눈 앞에 있는 이상, 도망갈 곳은 이미

차단되었으

니 일은 천천히 진행해도 괜찮아. 이제는 더 이상 만만하게 보지 않는다. 철저하게 알아내고

최악의 사태까지 대비할 방도까지 찾아 둬야지.

" ... 윤호야? "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가만히 쳐다보는 재중의 어깨를 감쌌다. 오늘은 네가 원

하는대로 평범한 연인이 되줄 테니까 걱정 마. 그리고는 자신의 두 눈이 쫓는 두 남자의 뒤

를 따랐다. 박유천과 김준수의 뒤를.

* * *

" 너, 진짜 이거 타다가 키스하면 그 자리에서 죽인다. "

" 안 한다니까! "

" 이건 야외에서 뚜껑도 없이 달리는 거니까 절대로 안 돼! "

" 안 해! "

" 하면 진짜로 여기다 박 형사 버리고 나 혼자 일하러 갈 거야. "

아까 전 예고없는 롤러 코스터 위에서의 키스 후, 준수는 무엇을 타든 유천을 경계하며

그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트를 쳤다. 롯데월드의 백미. 롯데월드의

진수. 대한민국 현존 역사상 가장 짜릿하고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 아틀란티스 앞에서

줄을 서면서, 준수는 몇 번이고 그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이 남자는 하나를 생각

하면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는 사람이니까. 그게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 줄이 꽤 기네... "

인기 있으니까- 준수는 이럴 줄 알았다며 사온 떡볶이와 구슬 아이스크림을 번갈아 입에

넣으며, 높다랗게 서있는 아틀란티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톡톡..

" ? "

" 실례지만, 여기서부터 몇 분이나 기다리는지 혹시 아세요? "

순간 떡볶이가 코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목에 매운 것이 걸려서 켁켁대는 것을 달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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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이 대신 대답했다.

" 아까 표지말에 30분 정도라고 써 있던데요? "

" 아... 오래 걸리네. "

" 이게 가장 인기 있대서요! 딱 보기에도 졸라 화려해 보이잖아요! "

처음 만난 사람과도 무리없이 친해지는 성격의 유천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준수에

게 말을 건 이 남자는, 친절한 답변을 건네주고 싶을 정도로 그 외모와 스타일이 출중했다.

그러나 지독하게 잘생긴 외모 덕분인지 왠지 모를 위압감을 풍기고 있어서 가볍게 대하기

는 조금 어려운 그런 스타일. 얼굴이 벌개진 준수가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고는 힐끔 앞을

쳐다보았다. 준수가 놀란 것은 자신에게 말을 건 그 남자 때문이 아니었다. 그 남자의 옆에

가만히 서 있는 김재중 때문에.

' 진짜 예쁘게 생겼다... '

살면서 예쁘게 생겼다는 소리는 수도 없이 들었고, 어려서부터 그런 소리를 워낙 듣는 바람

에 어쩌다 게이의 길을 걷게 됬지만, 이 남자는 자신이 보아온 그 어떤 남자보다 예뻤다. 남

자로 태어난 것이 대단한 실수로 느껴질 만큼..

" 괜찮으세요? "

" 아.. 예. "

" 맛있겠다... 내가 아까 떡볶이 사먹자고 했잖아! "

" 대신 츄러스 먹었잖아. "

게이 커플이야. 준수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 바닥에서 살아온 것이 몇 년인데. 손을 쥐고

있는 것도 그렇고, 서로 쳐다보는 눈빛도 우정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무엇보다 둘이 풍기

는 분위기가 그렇다. 저들도 우리를 알아봤을까. 준수는 유천의 손을 잡고서 앞으로 끌었다.

괜히 예쁜 남자와 같이 있기 싫다. 한 순간이라도 박 형사가 다른 사람한테 눈 돌리면서 예

쁘다고 생각하는 거 못 참어. 난 질투맨이니까.

" 거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

" 저요? "

" 네. "

" .... 왜요? "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저 남자. 웃고 있는데도 왠지 거리감이 느껴진다. 물론 처

음 본 사람이라 당연하겠지만... 왠지 모르게 껄끄러워. 머뭇거리고 있는데, 유천이 약간 표

정을 굳히고 준수를 뒤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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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왜 물어보세요? "

" 아.. 물어보면 안 되는 건가요? 그냥 기다리면서 말동무라도 할까 그랬는데. "

데이트 중이기도 했지만, 근무 중이기도 했다. 갑자기 준수의 이름을 물어오는 남자의 행동

에 유천이 티나지 않게 표정을 굳히며 윤호를 바라보았다.

- 20대의 남자.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대단한 미남이라던데..

선지 해장국 집에서 준수가 한인 마피아에 대해 말했던 것이 얼핏 떠올랐다. 그는 분명히

미남이고, 20대 중반 쯤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너무 쉽게 단정짓는건 코메디다. 놀이동산

에 놀러왔다가 갑자기 살인자를 만나는 시츄에이션이라니, 이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

" 저기, 앞에 저만치 나갔는데... "

재중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제야 유천이 허둥지둥 준수의 손을 잡고

앞으로 뛰어갔다. 재중은 준수와 마찬가지로 경계심을 느끼며 힐끔 윤호의 표정을 살폈다.

이름은 왜 물어 보았을까? 그것도 처음 보는 남자에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진짜 무지

하게 예쁘게 생겼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야들하게 생겼을까. 나보다 키도 작고, 아담하고,

엄청 사랑스러운 성격일 것 같아. 애교도 많고.. 게다가 난 웃는 모습이 자신 없는데, 저기

저 남자는 웃을 때 엄청나게 예쁘잖아...! 정윤호, 너 저런 스타일 좋아하냐?

" 이름은 왜 물어봤어? "

" 왜? "

" ... 남자가 이쁘게 생겼지? "

" 가까이서 보니까 그러네. "

" ...... "

" 질투하냐? "

" 지랄한다. "

걱정 하지 마. 쟤랑 너는 완전히 틀리니까. 너는 내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사람이고, 쟤는

내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꼭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이니까.

" 이쁘지. "

" 누구? "

" 저.. 뒤에 있는 남자. "

앞으로 온 준수가,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줄이며 힐끔 뒤를 쳐다보았다. 옆모습도 진짜 이

Page 292: Happy Together

쁘다...!

" 에엥!?! 저게?!!? "

" 왜.. 이쁘잖어. "

사람은 원래 자신과 반대되는 스타일에 끌리는 법이고,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는

법이다. 잠자리에서야 다르지만, 가만히 있으면 그저 사랑스러운 소년 이미지에 나름대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준수의 눈이 빠르게 돌아간다. 나도 저렇게 섹시한 이미지 갖고

싶어. 머리카락도 새까매서, 딱 보고만 있어도 막 인형 같다는 느낌 있잖아.

" 야, 저게 뭐가 예쁘냐! 졸라 여시같이 생겼잖아! "

" 되게 화려하게 생기지 않았어...? "

" 남자 정기 다 빨아먹게 생겼다! 까만 옷만 입혀놓으면 바로 프란체스카 고정 출연 해도

되겠구만. "

" 박 형사는 저렇게 생긴 남자 안 좋아해? "

" 야, 내가 원래 남자를 좋아하는게 아니고 그게 너니까 남자를 좋아하게 된 거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줄이나 똑바로 스라. 가만히 보면 준수 너도 심미안 참 없다. 봐라,

쟤랑 너랑 비교가 되냐?! 하늘과 땅 차이다! 니가 수 억만배 더 이쁘다! "

" 아.. 알았으니까 목소리 좀 줄여. "

박 형사는 저렇게 인형같이 예쁘게 생긴 스타일 싫어하는 구나. 내심 기분이 좋아서 살랑

거리며 유천의 팔에 매달렸다. 다시 뒤로 가까이 다가온 윤호와 재중 일행은, 그 둘과 비슷

한 대화를 하다 이제 막 도착한 참이다. 윤호는 가만히 서서 유천을 바라보았다. 지금 마피

아에게 쫓기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남자

가 보호하는 형사인가... 형사와 목격자 사이라고 하기엔, 너무 서스럼없는데.

" 연인이세요? "

대뜸 윤호가 그렇게 물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 자신의 곁에도 남자가 서 있었으니. 유천의

손을 꽉 잡고 있는 준수의 손을 보고,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다고 느낀다.

" 저희도요. "

윤호가 재중의 손을 잡고 살랑, 흔들었다. 무엇보다 경계심을 푸는 것이 가장 첫 번째 일이

다. 그래야 자신에 대한 신상명세가 술술 나오지. 그리고 사회적으로 멸시되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받아들이는 몇 안되는 너그러운 마음씨의 무리들에게 약한 법이다. 윤호는 당황해

하는 재중에게 슬쩍 웃어보였다.

Page 293: Happy Together

" 아... "

" 어쩐지, 분위기 요상하드라. "

확실하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동질감이 생겨서, 준수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싱긋 웃

었다.

" 야, 너 아무한테나 웃어주지 마. "

" 들리잖아! "

" 우리 준수는 웃는 게 너무 이뻐서.... "

한 품에 포옥 들어오는 준수를 끌어안고, 유천이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부러

운 재중이다. 정윤호는 길거리에서는 저런 거 절대로 해주지 않겠지. 조직원들이 있으면,

늘 똥폼만 잡고 나한테까지 보스인 척 맨날 명령만 하니까. 아, 나도 저렇게 다정한 연애

하고 싶어. 이 새끼는 뭐야. 나한테 총질이나 가르쳐주고, 틈만 나면 길거리 나가서 누구

한 명 진짜로 죽여볼래? 이 딴 말이나 던지고... 죽어버린 토끼한테 구멍 내라고 시키질

않나,

생각해보면 이 남자는 연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위험해.

" 부럽다... "

그에게 들리도록 슬쩍 말했는데, 윤호는 다른데 정신이 팔려 있는 듯 하다. 그가 너무 유천

과 준수를 바라보는 것 같아서 괜히 속이 상했다. 정윤호도 저렇게 귀여운 스타일을 좋아하

겠지. 누구든 귀여운 걸 싫어하는 남자는 없으니까... 쓸데없는 걱정으로 표정이 안 좋은 재

중과는 달리, 윤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유천과 준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분명히 그 때 내 살인을 목격한 그 남자가 맞아. 그리고 그의 연인이라는 남자는 형사가 분

명하다. 총을 많이 다뤄본 사람들은 손가락과 손바닥에 굳은 살이 베기지.. 많이 잡아 봤던

사람일 수록 심해. 저 키가 큰 남자의 손바닥은, 오랫동안 총을 다룬 남자의 손이다. 그랬던

거구나. 두 사람이... 연인이라. 정말 우습네.

" 롯데월드에서 이게 가장 재미있대요! "

" 그래요... 처음 와봐서. "

" 정말요? 대한민국 사는 사람들은 죽기 전에 적어도 한 번도 와본다는데! "

" 이런데 별로 안 좋아해요. 이 녀석이 이런 걸 좋아해서. "

다시 표정을 푼 윤호가 재중을 끌어안았다. 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줄어드는 줄을 보며

윤호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Page 294: Happy Together

" 그 쪽 커플은, 이런데 자주 오나요? "

" 아니요! 저도 진짜 오랜만에 와요! 사정이 있어서 오긴 했는데... 오랜만에 오니까

좋네요. "

" 사정이요? "

" 아, 제가 이 놀이동산 퍼레이드 기획을 맡아서요. "

" ... 그런 쪽 일 하시나봐요. "

" 파티 플래너에요. "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의 직업에 누구보다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였고, 많은 인

맥을 쌓는 것이 파티 플래너의 또 다른 덕목이기도 했으니까. 이 남자는 왠지 고급스럽고

주위에서 파티도 많이 열 것 같아서, 알아두면 손해볼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남자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파티가 잘 어울릴 것 같아.

" 파티 플래너요? 처음 봐요. 그런 일 하는 사람. "

" 별로 없으니까... 그 쪽은 학생이세요? "

" 예. 학생이에요. 저희 둘 다. "

윤호가 대뜸 대답했다. 자신있게 자신의 직업을 말하는 것처럼, 재중도 '얼마 전에 사법고

시 붙었어요!' 라고 자랑하듯 말하고 싶었는데... 괜히 심통나서 윤호를 흘겨보았다. 무슨

학생이냐! 너 때문에 마지막 학기는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는데! 게다가 너는 학교 구경도

못해봤다며 무슨 구라를 그렇게 까... 하긴, 저희는 마피아 보스, 마피아의 고문 변호사입

니다... 라고 소개하는 게 더 웃기겠구나.

" 학생 때가 좋지! 아, 근데 대학은 말이야. 군대 가기 전의 시절이 가장 좋아요! 갔다오면

완전히 복학생에 할배 취급 받아서! 나야 뭐, 체대였으니까 얘들이 전부 다 1학년 신입생

시절부터 폭삭 삭아뵈긴 했다만... "

" 체대 다녔어요? "

" 네. "

" 보기에는, 유도나 태권도 했을 거 같은데... "

" 아니에요! 사격 했어요. 메달도 무지 많이 땄고, 솔직히 내가 대한민국에서 총 하나는

가장

잘 쏘거든! "

" 아... "

그래서 내 부하를 그렇게 한 발에 죽여버렸구나.

" 또 총이야... "

재중이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어째, 게이들은 이쪽이나 저쪽 둘 다 총에 환장한다? 물론

저 남자야 정윤호보다야 훨씬 부드럽고 다정다감해 보이지만...

Page 295: Happy Together

" 아, 들어가요! "

줄이 끝났고, 넷은 같이 기계를 기다렸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줄이 끊김에 따라 둘은 함께

맨 마지막 열차를 탑승하게 되었다. 유천과 준수가 앞에 앉고, 재중과 윤호가 뒤에 앉았다.

" 무서웡! "

" 꼭 잡아라!! 안 그러면 튕겨나가서 목 180도로 돌아가서 죽어버린다!!!! "

" 내 앞에서 그런 얘기 하지 말라고 했잖아! 박 형사!!! "

형사... 자신의 직업이 드러나서, 유천은 잠시 뒤를 살폈다. 너무 긴장이 풀어졌다. 하긴,

기서 누가 긴장을 하며 주위를 둘러볼 수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놀이동산인데.

" 형사신가봐요? "

" 아... 뭐, 그런 셈이죠. "

" 멋지네요. "

윤호가 편안하게 웃으며 재중의 안전벨트를 살폈다. 꽉 졸랐어? 야, 뭘 이렇게 많이 졸....

너 진짜 허리가 얇긴 얇구나. 이거 타고 밥 좀 먹어야 겠다. 무뚝뚝하긴 하지만 꽤나 다정

다감한 내용에, 유천이 한숨을 쉬며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순간을 즐기자. 설마, 저 사람들이 마피아겠어.

- 출발합니다! 모두 안전벨트를 확인해 주시고 즐거운 시간 되세요!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20

" 그 쪽은 안 무서웠나봐요? 타는 내내 소리 안 지르던데! "

비명에 괴성을 거듭하며 아틀란티스 위에서 생쇼를 하던 유천과 준수와는 달리, 뒷자리는

내내 조용하기만 했다. 윤호는 윤호 나름대로의 생각에 열차가 수직으로 하강을 하든 위로

Page 296: Happy Together

냅다 달리든 무표정으로 일관했고, 재중은 그보다 더 심각했다. 아틀란티스 운행내내 준수

가 '박 형사'를 부르는 바람에, 앞에 앉은 남자가 형사임을 알아버린 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정윤호는 뻔뻔하게 형사랑 노가리나 까고 앉아있는 거야... 이 개념없는 새끼. 옆에서 노려

보는 재중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윤호는 그저 웃고만 있다.

" 저희는 롯데월드 안으로 들어가서 놀건데.. 여기서 더 있으시게요? "

" 예. 그러려구요. "

"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

" 언제 파티 같은데 초대하게, 이름이랑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이태원에서 게이 커플 파티

같은 거 심심치 않게 하는데... "

" 괜찮아요. 저희는 조용하게 노는 걸 좋아하니까. "

준수의 말을 딱 잘라버린 윤호가, 손목 시계를 흘낏 보고는 재중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

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해 견딜 수 없었던 재중은 빠르게 그의 손을 잡아당

겼다.

" 그만 가자. "

" 재미있게 노세요. 그리고,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꼭 인사해요, 응? "

" 그럴게요. "

" 아! 그리고 이건 제 명함이에요. 혹시 파티 같은 거 하실 계획 있으면 연락주세요. "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드는 준수다. 정말 애교 많고 귀여운 남자구나. 형사라는

남자한테 많이 사랑받겠다... 그 와중에도 준수의 선한 인상에 덩달아 웃은 재중이, 서둘러

윤호의 팔을 잡아 끌고 반대편으로 걸었다.

" 다음에 또 봐요! "

.

.

.

유천과 준수가 거의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재중은 인적이 드문 호숫가 구석으로 가서 윤호

를 노려보았다.

" 개념 없냐? 너는? "

" 왜. "

" 형사래잖아! "

" 알아. "

" 겁도 없냐!? 너는?! "

" 잠시만. "

Page 297: Happy Together

재중의 입을 틀어막고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들과 짧은 만남

이었지만, 윤호에게 들었던 의문점 중 몇가지는 해결되었고, 몇 가지는 해결되지 못했다.

윤호는 자신을 향해 아무 경계심 없이 선하게 웃었던 준수를 떠올렸다.

" 무슨 생각 해? "

" 내가 건 도박의 결과. "

" ... 그건 또 뭐야. "

"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

" 뭐가? "

" 내가... 목격자 앞에서 살인을 했던 게 얼마 전이지? "

" ...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기분 나쁘게. "

" 꽤나 오래 지났잖아. 그리고 내 조직원이 죽은 지도 얼마는 흘렀어. "

수면이 반짝거리는 호숫가를 보면서 한다는 얘기가 고작 그거냐. 재중은 미간을 찌푸리며

윤호의 곁에 털썩 앉았다. 그래.. 처음부터 많은 걸 바라지는 말아야지. 나랑 이런 곳에

놀러

와준 것만으로도 어디냐. 그는 바쁜 남자니까. 즐거운 와중에서도, 습관처럼 머리는 조직을

생각했겠지.

" 보통 목격자가 범인을 정확히 목격하면 말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몽타주가 나온다고. "

" ......... "

" 그 몽타주가 길거리에 쫙 달라붙어야 정상인데, 내가 살인을 한지 한참이 지나도 몽타주

는 커녕 내 살인에 대한 새로운 증거가 언론에 나왔던 적이 전혀 없어. "

" ......... "

" 범인은 20대의 장신의 남자로, 그 당시 무슨무슨 옷을 입고 있었다.. 정도의 뉴스 거리도

충분히 나올 수 있거든. 그런데 그러한 언급은 전혀 없었어. 범인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

라고만 하지. 결정적으로 말야, "

" ......... "

" 검찰은 지금 우리가 저지른 살인에 대해 실마리도 제대로 못 잡고 있는 상황이야. 얼마나

위에서 압박이 심하겠어. 이런 와중에 목격자가 나타났으면, 대대적으로 목격자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검찰이 능력있게 일을 진행중이다, 라는 경과를 보고하는게 정상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무능력한 검찰이라고 여기저기서 손가락질 받거든. "

그런데 그 동안, 내가 말한 것들 중 아무것도 없었어. 정상적으로 나와야 할 몽타주는 물론

이고, 목격자에 대한 이야기는 언론 어디에서도 없었다고. 이게 뭐를 뜻하는 줄 알아?

" ... 목격자가, 아무런 실마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

" 맞아. "

검찰은 목격자를 없는 사람 취급 하고 있다. 목격자가 얼굴도, 옷차림도, 그 때의 상황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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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떠한 자료도 내보낼 수가 없는 거야.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분명히 네가 그랬잖아. 너를 정면으로 봤다고...! "

" 확실해. "

아까 본 그 남자가 맞아. 나를 정면으로 보고,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내 살인을 목격한 게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 나를 전혀 못 알아봐. "

" ......! "

" 아까 그 남자, 나를 못 알아 본다고. "

" 정윤호..... "

" 김준수.. 전문 파티 플래너. 내 살인을 목격한 그 남자가, 나한테 자신의 명함을 줄

정도로

나를 기억하지 못해. "

기가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너, 네 의문점을 풀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뻔뻔한 얼

굴로 목격자에게 인사를 한 거냐...? 그러다가 너를 알아보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바로

옆에는 형사가 있는데...!

" 너 진짜 미쳤구나. 돌았어? 도박도 도박 나름이지! 그 남자가 연기하는 건지 어떻게 알아!

못 알아보는 척 연기하는 거면 어떡하려고 그래!? "

" 그건 확실히 아니야. "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네가 신이야?! "

" 만약 그 남자가 내가 범인인걸 알았다면 바로 옆에 있는 형사에게 우리 몰래 신호를

줬겠지.

그런데 두 남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우리 앞에서 떠들고 놀았어. 마지막엔

나에게 이렇게 명함 까지 줬잖아. 병신같이. "

" 하지만...! "

" 그리고 나는, 거짓말 하는 사람의 눈 정도는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야. "

거짓말 하는 눈은 절대로 아니었다. 정말로 나를 모른다는 얼굴이었어. 놀이동산에서 우연

히 만난 게이 커플에 좋은 호감을 가지고, 좋은 인연을 만들어 보고 싶어서 안달난

얼굴이다.

옆에 있는 박 형사라는 남자도 마찬가지였어. 나에게 자신이 형사라는 걸 아무렇지 않게 말

하고, 어떠한 경계도 하지 않고 내 앞에서 자신의 연인과 손을 잡고 다정했다.

" 그럼.... "

Page 299: Happy Together

힘이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듯 쪼그려 앉았다. 그 남자가 윤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천만

다행이지만... 그렇게 친다면 목격자는 존재하나 쓸모없는 것이 아닌가. 살인을 하는 곳은

어두웠을테니 얼굴을 잘 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 윤호의 착각일 수도 있다.

" 그 남자는 죽이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

" 왜? "

" ... 왜.. 라니. 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무슨 이유로 그 남자를 죽여. 지금까지

몽타주

나오지 않았으면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거 아냐. 게다가 너를 쫓고 있는 형사마저 아무 것

도 모르고 지나치는 마당에, 쓸데없이 왜 일을 벌려? "

" 일을 벌리는 게 아니라 마무리 짓는 거지. "

" ........ "

" 김준수 때문에 죽어버린 내 조직원은, 누가 보상해줘. "

총 한 발에 죽었다. 그 남자 때문에. 나를 봤음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병신같은 남자 때문에,

내가 선물해준 집에서 오랫동안 살지도 못하도 그대로 가버렸어. 쓰레기 같은 의사 새끼들

앞에 허연 몸뚱아리를 드러내놓고 누워있었어. 나만 믿고 대한민국까지 따라온 녀석이...

" ... 죽이지 마, 윤호야. 그 남자만 죽이지 않으면 일 다 마무리 되는 거잖아. "

" 너랑 내가 다른 건 알아. 내가 이만큼 너에게 맞춰주고 있으면, 너도 나한테 맞춰. "

" 네가 뭐를 맞춰줬는데. 고작 놀이동산에 와서 히히덕거리며 놀았던 게 맞춰주는 거냐? "

" 미안하다. "

대뜸 미안하다고 말하는 윤호의 말에 재중이 입을 다물었다. 나쁜 새끼. 저렇게 나오면 내가

더 이상 무어라 말할 수가 없잖아.

" 내가 스무살 때부터 친가족 처럼 함께 살았던 남자야. 복수가 아니라... 보상이야. "

적어도, 그를 그렇게 만든 원인을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않냐.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

내 익숙한 번호를 누르고 입을 열었다.

" 나야. 목격자를 찾았다. 잠실의 롯데월드, 사람을 보내. "

잠시동안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윤호는 힘없이 쭈그려 앉은 재중의 머리에 손바닥을 얹고

몇 번을 만지작 거렸다. 마음이 이다지도 약하구나... 우리 재중이는.

" 좋은 사람 같이 보이던데... "

Page 300: Happy Together

중얼거리는 그의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고, 벤치에 기대 반짝거리는 호숫가를 시야에 담았

다.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다만... 풀리지 않는 의문은 그대로 머릿속에 남아있다.

" 왜 기억하지 못하지.... "

나를 정면으로 보았으면서, 왜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내가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면 그도 나를 기억해야 정상이다. 내가 있는 곳이 특별히 그림자가 졌다거나 어두웠던 것

도 아니었어. 우리는 똑같은 공간에 서 있었으면서도.. 한 쪽은 기억하고, 한 쪽은 전혀

모른

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걸 안다면 내

의문은

풀릴텐데, 뭐.. 상관없다. 그는 어차피 이 아름답고 즐거운 곳에서 조용히 죽어갈테니.

* * *

" 옷에 물 다 튀었잖아! 비린내 나! "

" 괜찮아. 넌 생선은 아니니까... "

아마존 익스프레스를 타고 옷에 튀긴 물방울에 신경질을 내며 투덜거린다. 유천은 여전히

신나는 표정으로 준수의 뒤에서 졸졸 따라오며 이번엔 무얼 타볼까 고민 중이다. 불행히도

시간은 너무나 일찍 흘러갔고, 준수는 시계를 힐끔 바라보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 일할 시간. "

" 벌써?! "

" 우리 일 하러 온 거잖아. 잊었어? "

" 아니... 잊은 건 아닌데... 아직 다 못 탔잖아!! "

" 음, 오래 걸리는 건 아니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의상 얘기하고 몇몇가지만 체크하면

끝나니까. "

아이 달래는 엄마처럼 유천을 어르고, 서둘러 퍼레이드 관련 사무실로 향했다. 누구보다

자신의 일에 프로의 마인드로 임하는 준수였지만, 지금은 자신도 유천처럼 일 보다는 그

저 이 즐거운 곳에서 놀고 떠드는 것이 더 좋았다.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니까 간

단히 이것저것만 체크하면 될 거야. 그 다음에는.. 회전목마도 타고, 음... 아래 스케이트

장에도 잠깐 들려볼까. 롯데월드 지상으로 나오니 아침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로 주위

가 북적거린다. 유천은 준수를 놓치지 않도록 손을 꼭 잡고 주위를 둘러보며 앞으로 걸었다.

딱히 이런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을 대비한 경계

는 형사에게 당연한 본능이었다.

Page 301: Happy Together

" 소프트 아이스크림 먹자. "

" 기다려. "

저 새끼 은근히 돼지잖아. 롯데월드에 와서 벌써 몇 개째야. 유천은 비어가는 지갑을 보며

티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먹여살리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 것 같다. 빼짝 말라가지고 배

에 식충이가 집 차렸나... 초코와 바닐라를 혼합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들고 돌아서는데,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는 준수가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한 발자국 뒤에 서서 보는 준수는

또 다르다. 내가 만약 저 남자를 모르고 스쳐 지나갔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저 남자가

어떻게 저 따위로 생겼냐, 하면서 힐끔 쳐다보고 말았을지도 몰라. 사람 인연이란 그런 거

니까... 하루에도 수 많은 인연이 옷깃을 스쳐지나가지. 인연은, 두 사람을 이어주는 필연

이 없다면 불가능한 기적이다. 가만히 서서 준수를 바라보며 슬몃 웃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혁필이 그 새끼한테 고마워 해야 되는 건지도 몰라. 그 새끼 덕분에 준수를 만났으니.

" 우리 준수! "

또 습관처럼 그 놈의 우리 준수를 부르며 날렵하게 뛰어가던 유천이, 지 발에 걸려 한 발자

국 엇갈려 내딛었다. 그 바람에 바닥으로 쏟아진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처참하다. 에이 썅!!

하나에 천 오백원이나 하는데!!!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에 욕지거리를 내뱉다가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고개를 들었는데.

" ........! "

총이다. 준수의 뒤에 앉은 남자가 무릎에 총을 올려둔 채 그 위를 신문으로 가리고 자신은

또 다른 신문을 읽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읽고 있는 척을 하고 있다. 그 남자의 눈

은 여전히 사방을 훑으며 준수의 등을 노리고 있었다. 다른 아이스크림을 쥐고 있는 유천의

손이 티나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떨렸다. 도대체 왜...? 저 새끼들은 귀신이라도 되는 건가?

어째서, 이런 곳에서 총을 신문 아래 숨기고 표적을 노리고 앉아있는거지...!

" 빨리 와! 떨어진 아이스크림이 리플레이 되서 원상복귀 되냐?! "

다급한 유천의 마음은 알지도 못하고 준수가 손을 흔든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사방에 사람

들이 빠른 발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쉽게 총을 들지 않는 남자는 계속 눈을

굴리며 민간인들이 한적해질 틈을 노리는 듯 했다. 아니면 준수가 한적한 곳으로 향하거나.

터질듯한 심장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유천의 경우는 단 한가지만 생각

하면 어렵지 않았다. 그를 지켜. 당황하지 말고 이곳에서 빠져나가.

" 준수야. "

Page 302: Happy Together

" .... 야!! "

준수에게 뛰어오자마자, 유천이 고의적으로 아이스크림을 떨어트렸다. 황당한 표정으로

눈이 커진 준수가 소리치려 입을 크게 벌렸다. 이거...! 하면서 준수가 몸을 수그림과

동시에,

유천이 그의 손을 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 뛰어. "

" ... 뭐? "

" 죽기 싫으면, 내 손 잡고 뛰어. "

그와 동시에 유천이 준수의 한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태어나서 이렇게

빠른 속도로 달려본 적은 처음인 것 같다. 난데없이 뛰는 유천의 속도에 맞춰 준수의 발도

미친듯이 바닥을 밟았다. 목적지도 없이 달리면서 유천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일어서 총을 옷 안으로 숨긴다. 빌어먹을... 암살자가 맞아.

순간, 꽤 큰 소리와 함께 유천과 준수가 지나간 거리의 조각상이 무너졌다. 곁에 있던 사람

들이 놀라 물러섰고, 유천은 멈추지 않고 뛰었다. 그 남자가 있던 곳이 아니야. 다른 방향에

서 날아온 총알이다. 암살자는 한 명이 아니야...!

" 김준수!! "

" 허억... 헉.... 왜... 왜 뛰어...! "

" 널 죽이려는 새끼들이 여기 있어!! "

" ......!!! "

" 나 믿고! 뛰어!! "

아무리 대단한 저격수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를 뛰어가는 우리를 쉽게 맞추지는

못해. 그리고 민간인들을 함부로 죽이지도 못할 거다. 우리가 가진 최대의 무기는, 이 많은

인파와 뜀박질이야. 그러니까 뛰어...!

" 안으로 들어가!!!! "

" 나.. 나 심장이... 흡... 아파... "

" 그러길래 평소에 운동 좀 하지 그랬냐!!!! "

" 알았으니까 잔소리 하지 마!!! "

이런 씨발.. 총알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방향을 보면 오른쪽이고, 분명히

위에서 쏘아댄 것이 확실한데.. 유천은 사방을 훑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건물들

과는 다르게 회색빛으로 칠해진 도시적인 건물은, 롯데월드 안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발걸

음으로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Page 303: Happy Together

- 곧 퍼레이드가 시작합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꿈과 환상의 세계를 두 눈으로 확인하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안내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유천과 준수가 들어간 건물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빠르게 움직인다.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

" 씨팔.. 안으로 들어가 숨어! "

먼발치에서, 아까 보았던 남자가 뛰어온다. 언제나 쫓기고 있는 사람이 불리하기 마련이다.

숨이 차서 죽어버릴 것 같은 표정의 준수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섰다. 온통 드레스로 치장

한 여자들과 동물의 탈을 쓴 남자들이 가득하다. 도대체 여긴 어디야...! 이 개사이코 같은

인간들은 다 뭐야?!

" 여기... "

"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일반인 출입 금지에요. "

" 퍼레이드 기획자입니다. "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준수가 말했다. 아... 그제야 유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여기가 어딘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퍼레이드를 위해 고용된 사람들의 대기실이다. 곧 시작할 퍼레이

드를 위해 사람들이 손동작과 춤을 연습하고, 봉을 굴리고 부채를 펼치고 난리도 아니다.

" 아.. 다음 퍼레이드 기획자로 오시기로 한, "

" 여기 명함이요. 그럼 들어갈게요. "

여기서 지체할 시간 없어. 준수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선 유천이, 의자에 주저앉듯 앉아

숨을 고르며 준수를 살폈다. 운동으로 다져진 유천마저 이렇게 힘이 든데 준수는 오죽할까.

얼굴이 새하얀게 힘이 하나도 없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며, 유천이 지

나가는 사람을 붙잡았다.

" 이 퍼레이드... 롯데월드 안을 전부 도나요? "

" 네? "

" 이 안을, 모두 돌고 다시 여기로 오냐구요. "

" ... 네. 물론... "

당황한 여자의 손을 놓고, 유천이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아래입술을 말았다. 아직도 숨을

몰아쉬던 준수가, 불안한 눈빛으로 유천을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공간 안이 더없이 안전하게 느껴지지만, 어쨌거나 자신들은 쫓기는 입장이다. 일반인

Page 304: Happy Together

출입을 금지하는 이 공간 안에 언제까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언젠가는 여기서 나가

그들과 다시 맞닥뜨려야 할텐데... 어떻게 할 거야, 박 형사.

" 준수야. "

" 응? "

" 너... 화장해본 적 있냐? "

" 나 트렌스젠더 아니거든. "

이 상황에서 갑자기 왜 쌩뚱맞은 소리야...?! 얼굴을 찌푸린 준수가 여전히 주위를 살피며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아까보다는 여유를 가진 유천이 준수를 일으켜 세워 안 쪽으로

데려왔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옛 어른들 말씀을 따라볼까나.

" 나랑 떨어져서 여기 혼자 있을래, 아니면 나랑 같이 있을래. "

" 그걸 말이라고 해?! 지금 나 혼자 두고 어디 가겠다는 소리는 아니지? 응? 나 무서워...

아까 우리 뛰었던 길의 조각상 부숴지는 거 봤어? 그거 총으로 쏜 거지? 그 총.. 내가

맞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나 죽잖아...! "

" 그렇게 쉽게 죽는다는 말 하지 마. 나는 장식용으로 니 옆에 있냐. "

나 역시 너 혼자 두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일단 그들은 쉽게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거야.

그렇다고 우리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나가서 그들을

찾아야지. 들키지 않는 모습으로.

" 따라 와. "

- 곧 퍼레이드가 시작합니다. 모두 자신의 위치로 가 주세요. 다시 말합니다. 곧 퍼레..

롯데월드의 길가에 퍼레이드를 위한 길이 만들어지고, 아이를 데려온 어른들은 그 길의

바로 앞에서 이제 곧 시작할 퍼레이드를 기다렸다. 엄마, 언제 시작해? 보채는 아이를

어르면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이 화려한 쇼를 보기 위해 피곤한 다리를 곧게 세웠다.

퍼레이드는 약 30분 동안 진행된다. 완전히 차단된 길목은 텅 비어있었고, 퍼레이드가 시작

되는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롯데월드 안을 가득 메웠다.

" 일단은.. 놓쳤습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긴 했는데,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형사란 놈이

눈치채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 안에서 저격총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

에 2층에 배치하진 못했습니다. 예.. 오늘 안으로 처리하겠습니다. "

윤호의 조직원은 뒷춤에 숨긴 총을 매만지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후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그 빌어먹을 형사 새끼가 어떻게 눈치 챘는지는

Page 305: Happy Together

몰라도, 손을 쓰기도 전에 뛰어버렸다. 제길..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칫했다간 들켜버린다.

조금만 방아쇠를 빗겨 당겨도 바로 다른 사람의 머리통을 쏘아댈거다. 그러나 쫓는 사람은

언제나 유리하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손은 여전히 총 손잡이에.

" 꺄아아-! "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퍼레이드를 구경하러 달려간다. 짜증나는 애새끼들.. 남자는 침을

바닥에 뱉고 유천과 준수가 들어간 건물을 바라보다, 다시 주위를 살폈다. 귀신같이 빠른

놈들이니, 언제 저기서 나올지 모른다. 저만치서 화려한 퍼레이드가 시작되었고, 가장 앞에

선 봉을 든 여자들이 군무를 추며 환한 표정과 함께 앞으로 걸어나온다. 남자는 잠시 퍼레

이드 일행에 시선을 주다가, 다시 돌렸다.

.

.

.

" 이게 뭐하는 짓이야... "

자신의 머리에 얹어진 기다란 금발머리 가발을 손으로 뒤로 훽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유천

이 제안한 것은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퍼레이드의 일행으로 롯데월드 안을 완벽하게 돌면서

저격수들을 직접 찾아내자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소리질렀지만, 그것

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변장을 하고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서서 손을 흔드는 퍼레이

드 일행이, 자신들이 죽여야 하는 사람임을 절대로 눈치챌 리가 없다. 게다가 유천은 '지키

는' 것 외에도 '잡아야' 하는 또 다른 의무가 있었다. 언제까지 도망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 안에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 엄마, 진짜 이쁘다! "

자신을 보고 꺅꺅 소리지르는 아이들을 보며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준수가 타고

있는 마차는 신데렐라의 호박마차를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동그란 꽃마차였다. 여기저기에

색색깔의 화려한 꽃들이 치장되어있고, 그곳에 올라탄 준수와 다른 외국인 여자는 언제나

손을 흔들며 자신들을 보며 환호하는 관객들에게 웃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가발을 뒤집어

쓰고 드레스를 입고, 준수는 자신이 지금 무슨 미친 짓거리를 하나 머리가 어질했지만, 별

다른 방도는 없었다. 저만치서 사자 탈을 뒤집어 쓰고 있는 유천보다는 차라리 나았다.

" 아르바이트로 해본 거 아냐.. 뭘 저렇게 잘해. "

방방 뛰어다니며, 이리저리 나대는 사자 탈을 쓴 유천을 보고 웃어버렸다. 이 와중에서도.

목숨이 위태로운 이 와중에서도 나를 웃게 만드는 저 남자를.. 정말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Page 306: Happy Together

준수는 자신의 드레스자락을 정리하며 다시 환하게 웃고 손을 흔들었다. 나폴거리는 하얀

색 드레스자락이 자꾸만 발에 밟힌다. 살면서 이런걸 입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정

말 굴곡 많은 인생이다.

" 씨팔.. 어디 있어. "

유천은 유천 나름대로 사방을 훑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까 보았던 남자의 얼굴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수많은 인파들 중 그를 찾기란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뒤에서 손을 흔들며 웃어주는 준수가 신경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설마 그들이 저렇게 차려

입은 김준수를 알아보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 그만 봐야지... "

자꾸만 뒤돌아 준수를 쳐다보게 된다. 거기 있는 드레스들 중, 가장 화려하고 꽃이 만발한

옷을 입혀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드레스가 준수의 얼굴에 죽는다. 황금빛 긴머리 가발을

뒤집어쓰고, 다소곳이 앉아서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김준수는 영락없는 여자의 모습이다.

옆에 함께 앉은 여자가 외국인이라 워낙 등치가 있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외소해 보이는

김준수는 살짝 드러난 어깨선마저 여자같다. 무서워서 혼자 울어버리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해내는 것 같다. 만약에 김준수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상상이 되질

않지만 아마도 딱 저런 모습일거야. 그가 그녀였다면 더 좋았을까,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그의 성별 따위 문제되지 않을 정도로 그에게 흠뻑 취했다. 아름다움은 성별에 상관

없이 찾아오는 법이니까.

" ......! "

롯데월드의 반을 돌았을 무렵, 유천은 되도록이면 구경하는 일반인들 가까이에 가려고 애를

썼다. 탈을 뒤집어써서 얼굴을 완전히 가렸기에 들킬 걱정은 전혀 없었다. 차단선 바로 앞까

지 가서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손을 흔들며 그렇게 시선을 여기저기에 박아두었다. 그리

고, 아까 전 총을 신문으로 덮어주었던 그 남자를 발견했다. 분명히 그 남자다. 여전히 한

에는 신문을 들고 복잡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찾았어.. 유천이 중얼거렸다.

" 엄마, 저 사자가 이상해! "

퍼레이드는 진행되는 와중에, 거기서 완전히 서버린 유천이 자신의 팔을 인형옷 안에 숨긴

총으로 향했다. 정확히 손잡이를 잡고, 장전을 한 후 한 쪽 팔을 감싸고 있는 인형옷을 완전

히 벗어버렸다. 인간의 팔이 드러난 거대한 사자에,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시선을 쏟았고,

암살자도 유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자의 손에 들린 총구를 본 순간 표정이 굳었다. 그가

자신의 총을 꺼내려 했을 때에는 이미 상황 종료.

Page 307: Happy Together

" 꺄아아악-!!!!! "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사자가 총을 쏘았다. 그것도 장난감이 아닌 진짜 총을. 총

을 뽑으려던 남자의 손이 피를 뿜으며 힘없이 떨어졌고, 유천은 빛과 같은 속도로 달려가

남자의 팔을 뒤로 꺾어버리고 정강이를 걷어차 바닥으로 엎드리게 했다. 그리고 등에 올라

타 총구를 머리에 겨눴다.

" #%$&$#$%^!! "

자신의 목소리가 인형탈 때문에 제대로 나오지 않는 걸 알고서, 다른 손으로 탈을 완전히

벗어버렸다. 몸뚱아리만 사자인 인간 남자가 땀으로 범벅이 된 머리를 올리고 소리쳤다.

" 서울중앙지검 강력반 박유천 형사다!! 숨어 있는 새끼들 다 나와!!!! "

퍼레이드는 진행되었지만, 그 주위에 있던 퍼레이드 일행이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거기서

완전히 줄이 멈춰버렸다. 반으로 뚝 잘라진 퍼레이드는, 앞에서는 여전히 화려한 노랫소리

와 함께 쇼를 진행하고 있었고, 유천을 중심으로 뒷줄은 멈춰버렸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멈춰버린 쇼의 중심에 있는 준수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잡았어...!

" 씨팔!! 이 새끼 대가리 날려버리기 전에 다 나와!!! 니들 동료는 안중에도 없는

버러지냐!!!

죽여버리기 전에 나와!!!!!!! "

" 크흑... 이 미친 새끼.. "

" 닥쳐!!! 누가 지시했어!! 너희 보스가 누구야!? "

유천의 밑에 깔린 남자가, 피가 흐르는 자신의 손이 널부러진 꼴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은

무리다. 설마 저런 방법을 써서 직접 찾아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남자는

최후로 몸을 비틀고, 꺾여진 고개로 유천을 노려보았다. 너 같은 새끼의 손에 잡히실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안심할 수 있다. 또한, 나는 그 분에게 짐이 되는 짓은 죽어도 하지

않을 것이다.

" 말하지 않아. "

" 다른 일행은 어디있어!!!! "

" 나오지 않을 거다. 우리가 모시는 분은, 일에 차질이 생기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우선으로 챙기라고 명령한 남자니까. "

" 닥쳐! "

" 하지만... 그분에게 짐이 되기 전에, "

Page 308: Happy Together

남자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유천은 단번에 그가 무슨 짓을 한지 알 수 있었다.

이런...!

그의 입에서 피가 토해진다. 검붉은 피가 끝도 없이 쏟아진다. 떨리는 눈으로 남자의 죽어

가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혀를 깨물었어...

" 경찰을 불러!! "

" 모두 비켜나세요!! "

순식간에 몰려든 직원들이 사람들을 저지하며 유천에게 몰려들었다. 바지 뒷주머니에 있는

형사수첩을 보이고, 유천이 이미 죽어버린 남자를 허탈하게 쳐다보았다. 자신의 보스에게

짐이 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남자다. 이런 새끼들이 조직원이라니.... 이런 자들이

몇이나 더 있을까. 소름이 끼쳐온다.

" 움직이지 마! "

이 쪽으로 다가오려는 준수에게 소리쳤다. 이 사태가 진정되고, 우리가 안전한 곳으로 갈 때

까지는 그대로 있어. 아직.. 다른 한 명이 붙잡히지 않았다. 유천은 손에 들려있던 인형탈을

거칠게 내팽겨쳤다.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우리가 이 곳에 있다는 사실은. 어느 하나 알

있는 것이 없다. 그나마 이 와중에 다행인 사실은, 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는

김준수가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하다는 사실 하나 뿐.

.

.

.

사태가 진정되고 퍼레이드가 완전히 망쳐진 후, 놀이동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바이킹이 움직였고, 회전목마가 돌아가고, 후룸라이드가 물살을

가르며 내려온다. 그러나 사람들 모두 아까 있었던 그 끔찍한 일에 대한 충격으로 대화를

멈추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놀이동산을 빠져나가기 바쁘다. 그런 복잡한 와중에, 구석진

곳에서 기둥에 기댄 한 남자가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 죽었습니다. "

- ........

" 죄송합니다. 손을 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자가 머리에 총구를 대고 있었고, 함부로 총을

쏘았다가는... "

- 너희들 눈 앞에 있었다.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어. 그런데도 놓쳤단 말이지..

" 죄송합니다. "

- .... 일단 돌아와. 시신은, 어디에 있어.

Page 309: Happy Together

" 그자들이 가져갔습니다. "

- .... 이번에는 찾기 힘들거다.

한 명 더 죽였구나.. 윤호가 나즈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 어떻게 그 자들이 너희가 있는 곳을 귀신같이 알아내느냐 이거야. 뭘 하고 다닌 거야!? "

"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요! 준수 일 때문에 놀이동산 갔다가.. 제가 오죽 급했으면 동물탈

쓰고 그런 짓까지 했을까봐! "

" 잘 생각해봐. 너희들, 어디에 스케줄 흘리고 다녔던 적 없어? "

" 그럴리가 없잖아요! 내가 병신인가! "

유천과 함께 등장한 또 한구의 시체는 처참했다. 혹시나 해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그의

DNA판정을 맡겼지만, 이번에도 어떤 자료도 나오지 않았다. K 카르텔의 두 조직원이 죽어

나갔다. 그들이 이제 어떤 수를 쓸지 예측이 안 돼.

" 또 시신을 찾으러 올 거에요. 영안실 근처에 미리 형사들을 배치해두면... "

" 그들이 생각이 없는 자들인 줄 아나. 한 번 썼던 방법을 똑같이 쓸 정도로 머리가

나빴다면

벌써 우리 손에 잡히고 남았어. "

" 후우, "

의자에 앉아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준수는 지금 자신의 옥탑방에 혼자 있다. 이번 일로

준수가 맡기로 한 퍼레이드는 완전히 취소되었다. 자신의 일이 망가진 탓도 있겠지만 무엇

보다 끈질기게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려 하는 '그들'에게 몇 배의 두려움이 생겼을 것

이다. 유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눈을 감았다.

" 준수 씨는, 집에 있어? "

" 네.. "

창민은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우리들에게 딱히 퇴근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일단은

법적으로 정해진 퇴근 시간이 다 되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꽉 막힌 강력반에서 비비고

있어봤자 풀리는 문제는 아무 것도 없다. 창민은 지금쯤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 김준수를

떠올렸다. 가뜩이나 약해 보이는 남자였는데, 지금쯤 피가 마르고 뼈가 덜덜 떨릴 정도로 많

이 무서울 거다. 그러나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되버린 이상, 그들을 불러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카드. 김준수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대화가

필요해.

Page 310: Happy Together

" 오늘은, 박 형사 집에 같이 갈까? "

" 네? "

" 왜. 내가 있으면 불편해? 둘의 스윗 홈을 방해해서? "

"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준수가 불편할까봐요. "

아무튼 저 솔직한 성격. 창민은 웃어재끼고는 유천의 등을 툭 쳤다. 가는 길에 박 형사가 좋

아하는 차돌배기 사줄게. 그 말에 귀가 솔깃한다.

.

.

.

" 이 좁은 집에서 잠이 와? "

유천의 집에 들어선 창민이 가장 먼저 한 말이 그것이다. 그 말에 유천은 빨개진 얼굴로 화

를 냈고, 준수는 입을 다물었다. 집이 좁은 것은 사실이다. 부엌과 붙어있는 거실에 미닫이

문으로 나눠진 거실과 방. 혼자서 널찍한 오피스텔에 사는 창민에게는 가만히 서 있는 것만

으로도 천장이 낮아보여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현관 문을 나서면 바로 앞에 서울의

멋드러진 야경이 쫘악 펼쳐져 있다는 것이 메리트라면 메리트일까. 집에서 구워먹으면 고기

냄새가 삼일 내내 빠지지 않을 것 같다는 말에 따라, 그 때처럼 바깥에서 구워먹기로 했다.

나무 마루 위에 돌판을 올려놓고, 창민이 사온 비싼 차돌배기를 맛나게 구웠다.

" 검사님이 오실 줄은 몰랐어요... "

" 왜. 나 오면 불편해서? "

" 아뇨.. 검사님은 그냥.. 이런 데랑 안 어울릴 것 같아서요. "

" 뭐가? "

" 맨날, 비싼 고기집에서 등심이나 먹고 다니실 것 같아요. "

" 박 형사 말로는 준수 씨도 잘 산다고 하던데. 직업도 딱 들었을 때 뽀대나는 거잖아. "

" 에이, 뽀대로 치면 검사가 최고죠. "

내가 공부만 더 잘했으면 그거 했죠. 옆에서 고기를 굽는 유천은 맛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자기가 해온 된장찌개를 옆에 놓고 호호- 불어재끼면서 국물을 떠먹는다. 오늘 오전에 있

었던 총격전과 끔찍했던 일은 이미 멀찌감히 잊어버린 얼굴로.

" 박 형사는.. 아무렇지 않은가봐요. "

" 왜? "

" 저는요, 아까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거든요. 그런데 박 형사는

진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저렇게 고기나 굽고, 된장찌개나 먹고. 그렇잖아요. 나는

지금도 사실은, 검사님이랑 형사가 옆에서 지켜주고 있는데도 하늘에서 총알 떨어지지

않을까 무서워 죽겠는데. "

Page 311: Happy Together

귀여운 남자구나. 그가 종알거리는 말을 들으며 창민이 웃었다. 박 형사가 이런 스타일에

약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이 위험한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귀여운 스타일의 여자나 소

개해줄 걸 그랬나. 하긴, 이런 말을 하면 또 둘이 나를 얼마나 갈궈댈지. 안에서 밑반찬들

더 가지고 올게요! 유천이 벌써 저만치 뛰어간다. 고기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어대면서

창민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이 남자와 둘이 있는 건 좀 어색하다. 늘 공주처럼 나를 떠

받들어주는 박 형사한테 익숙해진 탓인가..

" 박 형사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너무 숙련되 있어서 그렇지. 이런 일에. "

" 그런가... "

" 준수 씨도 인생 참 고달펐겠지만, 박 형사도 만만치 않았어. 워낙 성격이 불 같고 다혈질

이라 이 사건 저 사건 안 끼어드는 일들이 없었거든. 초반에는 죽다 살아난 일들도

많았어.

오늘 같은 일, 박 형사에게는 '좀 센 일' 중의 하나일 뿐이야. 준수 씨에게는 걱정되는 말

이겠지만. "

" 불쌍해요... 형사를 애인으로 둔 사람들은. "

홀짝, 소주 한 잔을 마시고는 쓰다며 혓바닥을 내민다. 창민도 비워가는 술잔에 동참했다.

오늘은 왠지 술을 마시고 싶은 날이다. 일단은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 있고, 하늘도 맑고,

내려다보이는 야경도 멋지고, 날씨도 좋고. 남자에게는 이런 환경에서 마시는 한 잔의 술

이 최고의 보약이다. 나라고 언제나 비싼 위스키만 마시는 건 아니지. 게다가 혼자 마시는

그런 술은 지독하게 쓰다.

" 내가 한 건데, 맛있을지 모르겠네! "

" 딱 봐도 맛없어 보인다. "

유천이 집 안에서 가져온 밑 반찬은 형편없이 갈라진 계란말이와 쪼그라든 오징어무침이

다였다. 지금 이거랑 차돌배기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창민이 면박을 줬지만, 그는 무조건

먹는 것은 많아야 좋다고 생각하는 '질보다 양' 주의다. 소주를 병째 들이부으면서 기분이

좋은 듯 옆에 앉은 준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오늘도 너 지켜줬다. "

" 응응. 알아.. 그런데 이렇게 마셔서야 나 지키겠어? "

" 이런 깐순이! "

지랄을 한다. 한 마디 던지려다, 둘의 모양새가 좋아서 관뒀다. 사실은 둘이 어떤 꼬라지로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남자 둘이 이런 좁은 옥탑방에서 동거라. 무슨 짓들을 하면서

살까. 김준수라는 저 남자는 딱 보기에도 가정일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어 보이는데. 아까 본

손가락은 눈에 띄게 고왔다. 손가락에 물 하나 묻히지 않고 살았을 스타일이야. 물론.. 곱게

자라지는 않았겠지. 병이 병이니만큼.

Page 312: Happy Together

" 참, 검사님은 애인 없어요? "

" 야! "

미처 얘기하지 못한 모양인지, 준수가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다. 창민은 입에 넣으려던 술잔

을 잠시 멈칫하다 그대로 부었다.

" 박 형사가 얘기 안 했나봐? "

" 뭐를요? "

" 나중에 둘이 얘기해. 내 앞에서는 지금 하지 말고. "

사고는 한 순간이었다. 제 눈 앞에서 기절한 채 강간당하고 있는 연인을 보고 눈이 뒤집혀,

그대로 총을 꺼내 범인의 머리에 박아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는 창민의 덜덜 떨리는 손을

비웃으며 그녀의 목을 휘어잡고 칼을 목에 들이댔다. 가까이 오면 이년을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창민은 자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단 한 번도

사격에서

실패했던 적이 없었다. 늘 최고였다. 그 사격 실력을 뽐내고 싶어서, 검사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저 사건 뛰어다니며 총구를 뽑아들고 범인들을 직접 체포했던 적도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총을 쐈다. 표적은 범인이 총을 들고 있는 쪽의 어깨였다. 그러나 총알은 빗나갔다.

총알은 정확히 자신의 연인의 목을 관통했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 여기서는 듣고 싶지 않아. "

그는 무덤덤히 웃었다. 벌써 5년이 지난 일이였다. 그러나 가끔 목에 질척한 피를 흘리는

그녀가 꿈에 나타날 때면, 그 일이 어제 일어난 듯 느껴지곤 해 머리를 쥐어 뜯으며

뒹굴었다.

" 응.. 미안해요. 잘은 모르지만, 아무튼 미안. "

" 됐어. 술이나 마시자. 오늘은 술 마시러 온 날이니까. "

소주병이 여러 병 비워졌다. 준수는 자신의 곁에 앉아있는 이들이 모두 주당임에 놀랐다.

유천이야 소주병을 나발로 불고 있었고, 창민은 취하지 않을 정도로 잔을 기울이며 적당

히 분위기를 맞췄다. 그 둘의 이야기는 주로 지금까지 해결한 사건들의 모험담과, 현재

사건의 심각성이었다. 가끔 알아듣지 못할 전문용어가 튀어나와서, 준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바로 옆의 야경을 바라보고는 했다.

.

.

.

Page 313: Happy Together

" 이 화상! "

결국에는 가장 먼저 취해버린 유천이 그대로 엎어졌다. 나 방광이 터질라 한다! 하면서 화

장실로 떠난지가 언젠데 돌아오지를 않았다. 걱정이 되서 가보니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서

코를 골고 있더라.. 힘겹게 그를 침대에 눕히고, 준수는 도로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술잔을

홀로 기울이고 있는 창민은, 꽤나 취한 듯 했지만 유천 정도는 아니었다. 준수는 술자리를

정리하며 웃었다.

" 신기해요. "

" 뭐가. "

" 오늘 있었던 일들을.. 별 일 아닌 일로 만들어 버렸잖아... "

" 그게 술의 힘이라는 거야. 꼬마야. "

창민의 말에 괜히 신경질을 내고, 돌판을 치우고 밑반찬들을 정리했다. 한참을 주섬주섬

챙기며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창민은 마루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이렇게 밖에서 자며는

감기걸려요- 준수가 옆에서 종알거려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 준수 씨. "

" 네? "

" 박 형사, 힘들게 하지 않을 자신 있지. "

" ... 벌써부터 힘들게 하고 있잖아요. "

자신도 말짱한 정신은 아닌지라, 약간 꼬이는 발음으로 웃으며 답했다.

" 좋은 사람이야. 박 형사. 그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주위 사람들 다 챙기고 술맥이느라 남는

돈도 별로 없겠지만, 뭐... 사람이 돈이 다가 아니잖아. 성격 좋고, 인물 괜찮고, 몸도

좋아.

물론 잠자리에서 많이 봤겠지만... "

" ........ "

" 연애, 잘 해. "

" 그럴거에요. "

" 워낙 둘이 고생고생 하면서 사귀고 있으니까, 오래 갈거야. 암초를 피한 배일 수록 훨씬

단단한 법이거든. "

뭐라고 하는지... 이마에 손등을 대고 눈을 감았다. 옆에 폴짝 뛰어올라 앉은 준수가 아빠

다리를 하고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 누군가와 어울린다... 라는 거, 박 형사가 처음 알려줬어요. "

" 응... "

Page 314: Happy Together

" 나는 아주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니까, 어릴 때 어울리던 사람들이 없었거든요. "

고등학교 때 갔었던 수학여행은 나에게 끔찍했던 기억이었다. 그렇게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

했지만 결국에는 잠들었고, 내 빌어먹을 병은 그 날을 빗겨가지 못했다. 하필이면 왜 그 날

이었을까. 나는 동급생 한 명의 목을 졸랐고, 괴물이 되어버렸다.

" 함께 해야, 좋은 것 같아요. "

" 응... "

창민은 그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준수가 허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술 때문에 집에도 들어가

지 못하고 여기서 잘 거니까, 잘 거면 제대로 자요! 집으로 들어가요! 쪼끄만 거실에 이불을

깔아놓고, 창민은 눕는 둥 마는 둥 거실 바닥에 누웠다. 사실은 정신이 나갈 정도로 취한 건

아니었다. 기분 좋은 알딸딸함 정도.

" ... 그게 뭐야? "

닫히지 않은 미닫이 문 사이로 보이는 준수가, 어디서 가져온 기다란 줄을 꺼내서 자신의

손목에 묶고 있었다. 창민이 그걸 발견하자,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 줄을 유천의 팔목에

연결했다.

" 잠 들 때 늘 이래요.. 나 멋대로 나가고 그러니까. "

" 아아... "

다 알 수는 없지만, 저 남자 정말 고되게 사는 구나. 창민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준수의 붉은

손목을 바라보고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기에는 아름다운 한 쌍의 커플이 있고, 여기는

연인을 잃은 불쌍한 외톨이가 있다. 죽음에 쫓기고 있는 불쌍한 몽유병 환자와, 그 환자를

지키는 머리 단순한 형사와, 과거를 떨치지 못하는 안쓰러운 검사 한 명.. 누가 가장 불쌍한

사람일까. 쉽게 결론낼 수 없어서, 창민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

" 으음, "

술을 거하게 마시면, 꼭 새벽에 깨곤 한다. 타는 듯한 목마름과 함께. 물이 어디있는지 몰라

창민은 더듬더듬 손을 뻗어 부엌으로 향했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

는 아니라 다행이다. 자그마한 냉장고를 열어보니 반 쯤 채워진 생수가 보인다. 다행히도,

수돗물 먹으면서 살지는 않는구나. 물을 허겁지겁 들이마시니 그제야 속이 풀리는 것 같다.

Page 315: Happy Together

해장은 역시 찬 물이 최고야. 창민은 한숨을 쉬고 물통을 도로 집어넣었다.

꽤나 아늑하구나. 이런 자그마한 옥탑방도. 바로 이 천장만 뚫으면 하늘이라 생각하니 기분

이 묘하다. 아담한 집에서 살고 있는 귀여운 연인의 보금자리를 훔쳐보는 기분이다. 닫혀진

미닫이 문을 슬쩍 열었다. 지금쯤 나란히 누워서 귀엽게 새근새근 하겠지. 아니, 박 형사는

내 기억에 의하면 심하게 코를 고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른 형사들은 눈치껏 몰래 졸면서도

박 형사는 꼭 그렇게 코를 골아서 '나 자고 있소' 하며 티내곤 했지. 피식 웃고서 빼꼼히

안을

들여다 보았다.

" .......! "

저게.... 뭐지.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21

다음날 일찍 일어났을 때, 창민은 집에 없었다. 이부자리가 차가운 걸로 보아서 나간지 한참

된 듯 싶다. 유천은 기지개를 펴며 옆에 누워있는 준수를 바라보았다. 곤히 잠들어 있는

그는

아직 한밤중인지 숨소리가 곤하다. 깨울 생각이 없어서 내버려두고, 응차-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교복인 라이더 자켓과 청바지를 찾았다. 아침을 대강 해놓고 준수를 깨워서 밥을 먹인

다음에 함께 중앙지검으로 갈 생각이었다. 어제 창민과 못 다한 이야기도 있었고...

그렇다고

혼자 준수를 내버려 두기엔 이제 일 분 일 초가 불안하다.

- Rrrrr Rrrrr ..

" 어? 뭐야 썅. "

한참을 울리는 준수의 핸드폰을 찾아 액정을 보니, 창민의 번호다. 언제 번호까지 알아내고

통화까지 하는 사이가 됐어? 기분 나쁜 생각에 창민이 훽 열어재끼고 소리부터 질렀다.

" 왜 전화해요! 왜!! "

- 뭐야? 준수 씨 어디있어?

" 옆에서 자요! 깨우지 마요! 내 밥 할 때까지는 안 깨울 거에요! "

- 걔가 겨울곰이냐? 깨워봐.

Page 316: Happy Together

" 왜요? 준수랑 나는 일심동체니까 나한테 말해요. "

- 썅. 박 형사, 내 성격 알지. 바꿔.

이 남자가 또 왕년에는 나 못지 않은 갱스터한 성격으로 강력반 휘어 잡으며 살았다고 했지.

유천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창민이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창민의 나즈막한 욕지거리에

할 수 없이 준수를 흔들었다. 왜에- 하면서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천은 이불 속으로 머리를 넣고 준수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아침 마다 아

가리 똥내 난다고 키스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준수라, 이런 짓을 하면 금세

일어난다.

" 아! 이빨 닦고 와!!! "

" 심 검사님이 너 바꾸래. "

" ... 검사님이? "

" 너... 어제 나 취해서 잠들고 검사님이랑 뭐했어? "

" 뭐? "

" 막... 그런 거 아니지?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 "

" 닥치고 내밀어. "

유천이 척 내미는 핸드폰을 받아서 부스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김준수입니다. 아침

부터 무슨 일이세요-

- 준수 씨,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 ... 네? "

- 파티를 열 거에요. 준수 씨가 준비하는 파티를. 자세한 사항은 조금 있다 강력반으로 오면

얘기해줄게요. 일단 준수 씨가 준비해야 하는 건, 담력이에요. 준수 씨를 미끼로 해서

범인

들을 잡을 거에요. 내 말, 이해해요?

" .... 저는 이해가, "

- 일단 강력반으로 와요. 자세한 얘기는 여기서 해 줄게. 그리고 지금 TV 틀어봐요.

" TV요? "

핸드폰을 잡은 채 거실로 나가서 유천의 자그마한 TV를 틀었다. 이 낡고 낡은 중고 티비는

치지직 거리는 소리가 5분 이상 지속된다. 시끄러운 TV를 탁탁, 치고서 준수는 채널을 이리

저리 돌렸다. 뭐 딱히 중요한 건 없는 것 같은데.

- 9번 틀어요. 뉴스 나오죠?

" 예... "

- 박 형사 바꿔봐요.

유천의 귀로 넘어간 핸드폰 너머로, 창민이 침착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뉴스에

Page 317: Happy Together

나오고 있는 거, 보고 있어?

" 화재 사건이요? 보고 있어요. 근데 왜 저런 걸 저한테 보여줘요? 저런 건 수십 번도 넘게

봤는데. 무슨 연쇄 방화 이런 거에요? "

- 화재 난 곳이 어디인지 잘 봐.

" 서울시 중구... 응...? "

그제야 유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자신이 살던 집이다. 얼마 전까지 살던 반지하가 활활 타

오르고 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는 듯 부상자 명단만 나오고 있었지만, 불길이 옆 집까지

옮겨서 주위가 순식간에 불바다에 휩싸이는 것이 보인다. 우연의 일치일까... 할 말을 잃고

뉴스를 바라보는데, 창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박 형사, 이사하고 아무데도 신고 안했지? 주민등록의 집 주소도 그대로고, 우리 측에도

주소 수정 신고하지 않았지?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니까, 박 형사 주소 예전 걸로 되어있어.

저기 불 타고 있는 집 주소로. 내 말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

" 화재 원인이 뭐에요? "

- 아무도 몰라. 갑자기 불이 났대. 화재 원인은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아나운서 목

소리 들리지?

" .... 제가 생각하는 거랑, 검사님이 생각하는 거랑 똑같으면 진짜 재수없는 일인데- "

설마, 내 뒷조사까지 한 거냐. 내가 김준수의 보호인임을 알고 나까지 노리고 있는 건 아니

겠지. 핸드폰을 쥔 유천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런 거구나. 준수가 느끼는 기분이 이런거

구나. 다행이다. 그의 기분이 어떤지 내가 알 수 있도록, 내 목숨까지 위협받아서.

- 추측일 뿐이야. 저 화재 사건은 우연일 수도 있고, 화재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것도 우연

일 수 있어. 다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자는 거야. 내 의견을 말해줄까? 놈들은 박 형사도

노리고 있어. 지금 중앙 컴퓨터의 해킹 여부를 검사할 거야. 빨리 옷 갈아입고 이리로 와.

핸드폰이 끊기고, 유천은 잠시 멍하니 바닥만 바라보았다. 물 불 안 가리는 놈들이구나. 심

검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거의 패소한 적이 없는 엘리트다. 유능한

남자고, 사건 해결에 있어서는 자신의 목숨까지 거는 남자야. 믿을 구석이 있다는 건 불행중

다행이다. 옆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TV와 자신을 번갈아보는 준수를 끌어안았다.

" 뭐라고 해? 일이 많이 안 좋대? "

" 빨리 씻고 옷 입어. 밥은 가는 길에 네가 좋아하는 샌드위치 맛있는 걸로 사줄게. "

" 박 형사... "

" 우리 준수, 피부 관리 해야지. 이렇게 걱정하면 피부 안 좋아진다. "

" 왜? 요새 나 피부 안 좋아 보여? "

" 뭐... 초반에 비하면... "

Page 318: Happy Together

이 와중에 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역시 박유천과 김준수라서.

.

.

.

창민은 심각하게 바빠보였다. 유천과 준수가 강력반에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어, 왔어?'라

는 말만 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녀서 정신이 없다. 네네- 지금 갑니다, 강력반에서 창민이 도

로 나간 후 준수는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정대로라면 오늘 다시 놀이동산으로

가서 새 퍼레이드 연습을 진행하고 있을 텐데... 그러나 직업 운이 없다는 생각은 버리기로

했다. 내 직업 덕분에 박 형사를 만났으니까. 준수는 얼마 후에 들어오는 창민의 급한 얼굴

을 보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 박 형사, 이거 받아. "

" 이게 뭐에요? "

" 범인의 몽타주. "

무슨 소리야? 유천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종이를 바라보았다. 컴퓨터로 그려진 남자의 얼굴

이 종이를 꽉 채우고 있다. 얄쌍하고 긴 턱선. 차갑지만 단정한 눈매. 꽉 다물어진 입술과

짧고 뒤가 깔끔한 머리. 그리고 검은색 정장...

" 어디서 본 적 없어? "

" 이게... "

" 본 적 있을 거야. 둘 다. "

" 익숙한데... "

유천과 준수 둘 다 미간을 찡그리고 몽타주에 집중했다. 확실히 어디에서 본 얼굴이다. 그

저 컴퓨터로 그려진 그림이라 확실하진 않지만, 이 비슷한 느낌의 얼굴을 어디선가 확실히

본 적이 있다. 그게 어디였더라. 아주 최근인 것 같은데... 아래입술을 말고 한참이나 고민

하고 있는데, 창민이 다시 몽타주를 가져가더니 이번에는 의자를 끌고 와 자신들의 앞에

앉았다.

" 놀이동산에서 누구 만났던 적 있지. "

" 놀이동산..이요? "

" 잘 기억해봐. 준수 씨는 그 사람에게 명함까지 줬어. "

그 남자...! 둘 다 몸이 경직되어버렸다. 그래, 어디서 많이 보았다 했더니 놀이동산에서

자신들에게 말을 걸었던 두 남자 중 한 명이다. 확실히 위압감이 있었던 검은 눈동자의

남자. 유천은 몽타주를 급히 다시 보며 그제야 종이를 거칠게 구겨버렸다.

Page 319: Happy Together

" 지금 이 남자가 범인이라고 말하는 거에요!? 말이 안 되잖아요!! 이 남자는, 그냥

놀이동산

에서 만난 학생이에요!! 이 남자가 범인이라면 우리한테 다가올 리가 없잖아!!! 게다가

아무

도 범인을 본 적이 없는데 이 그림은 도대체 뭐에요?!! 씨팔!! 설명을 해줘야 이해를

하지! "

" 설명은 나중에. "

" 검사님!!! "

" 코 앞에 있어. 범인들이 당신들 코 앞에 있다고. 지금 설명이고 자시고 따질 시간이 없어.

그자들은 당신들의 이름과 직업까지 모두 알고 있어. 확실히 우리가 불리한 상황이지. 난,

이걸 역으로 이용할 거야. 그자들은 우리가 범인의 '얼굴'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 "

" 지금 그 남자가 범인이라고 말 하는 거에요?!?! "

" K 카르텔의 보스. 지금까지 죽어간 조직원들이 모시는 자. 우리 측의 형사를 죽이고, 조직

폭력배 보스들의 목을 몇 이나 따간 남자. 이 자가 맞아. "

자신감에 가득찬 창민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 남자는 하룻밤 사이에 뭘

어떻게 알아서 몽타주까지 만들어왔단 말인가. 새벽 내내 잠을 한 숨도 자지 않은 얼굴이다.

그러나 벌겋게 충혈된 창민의 눈빛은 살아있었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몽타주에 대한 확신

도 대단했다. 믿을 수가 없어서, 구겨진 몽타주를 던지며 고개를 숙였다. 창민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범인을 앞에 두고 신상명세를 떠벌렸다. 이름 뿐만 아니라 직업도, 우리가 연인이라

는 사실도. 우리가 이곳에 있으니 부하들을 보내서 우리를 죽여달라고 스스로 노래를 부른

셈이다. 옆에서 손톱을 깨물고 있는 준수의 손을 잡아채 두 손으로 감쌌다.

" 괜찮아. 아직 아무 일도 없었잖아. "

" 잘 들어요. 파티를 준비하고 있어요. 파티 플래너는 김준수 씨의 이름으로 걸거고, 준비는

우리가 알아서 할 거야. 준수 씨의 직업을 알고 있으니, 그 직업을 이용해 준수 씨를 알아

낼 것이 틀림없어요. 파티에 그자들이 등장하길 기다릴거에요. 최대의 수사 인력을 동원해

그자들을 잡을 겁니다. 이번에는 자결 따위 하지 않도록 우리가 먼저 손을 쓸 거에요.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됩니다. 준수 씨는 그저, 미끼 역할만 충실하게 해 주면 되요. "

설명은 충분하지 않지만, 지금은 설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잡는 것이 중요한 거니

까. 창민은 싱긋 웃고서 뒤에서 다른 형사들이 가져오는 엄청난 량의 몽타주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 이건 아직 뿌리지 않을 겁니다. 최악의 사태가 닥치면, 서울 시내에 도배를 해둘 거에요.

최악의 사태가 닥치기 전에, 그 쪽에서 알아서 미끼를 물어 주면 좋겠는데... "

* * *

Page 320: Happy Together

" 사망자가 없어? "

" 네. 그리고 그 집에 20대의 남자는 살고 있지 않았답니다. 어린 아이가 딸린 신혼 부부

뿐이었습니다. 아마도 박유천이란 자는 주소를 옮긴 후 바꿔놓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다. 윤호는 미칠 지경이었다. 자결했다는 자신의 조직원

을 데려오지 못하는 일 만으로도 죄책감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

어서 화재를 위장한 박유천의 살인도 화재 미수로 그쳤다. 둘 중, 어느 하나 손도 대지 못했

다. 얼굴을 확실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무슨 꼴인가. 손에 잡히는 책을 거울에

집어던질 뻔한 것을, 앞에 있는 재중을 보고 간신히 참았다. 윤호보다 더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저 남자였다.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게다

가 그가 하는 짓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 아직까지 살인에 익숙하지 못한 재중으로서는,

도와주기보다는 말리고 싶었다.

" 후... "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명함을 꺼냈다. 이제는 정말 최후의 수단이다. 겨우 목격자 하나

가지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끌었던가. 다시는 실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의 이름과 너

의 직업과 너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나야. 다시 말해, 이 게임은 내가 절대로

이길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김준수. 파티 플래너.

" 전화 하려고 해? "

" 응. "

" 혹시 모르니까, 핸드폰 말고 서재 전화로 걸어. 서재 전화는 발신자 번호가 뜨지 않잖아.

"

" 그럴 거야. "

서재 책상에 올려진 전화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김준수 씨. 당신에게 파티를 의뢰하고 싶

습니다. 파티 이름이요.... 당신의 장례식.

.

.

.

" 발신자 번호 금지 전화에요. "

오랜 시간을 검찰에 있던 준수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핸드폰을 들었다. 창민은 발신자

추적 장치의 전원을 올리고 헤드폰을 꼈다. 그리고 준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

Page 321: Happy Together

" ... 여보세요. "

- 안녕하세요, 저 기억 하시나요. 저번에 놀이동산에서 만났던.

그 남자가 맞아...! 겉잡을 수 없는 공포에 준수의 눈동자가 떨렸다. 바로 곁에서 손을 잡아

주고 있는 유천이 있었지만 전화를 받고 있는 것은 본인이다. 지금 통화하고 있는 이 남자가

바로 범인이다. 자신을 죽이려 몇 번이나 부하를 보냈던 그 남자야. 그렇게 생각하니 핸드폰

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약해 빠진 소리지만, 결국 총구가 향하는 쪽은 내 머리잖아.

" 괜찮아요, 준수 씨. 아무렇지 않게 대화 유도해. "

" ... 네. 기억나요. 무슨 일이시죠? "

- 다름이 아니라, 파티를 의뢰하려고 합니다.

" 준수 씨, 내가 말했던 대로 말해. "

창민은 볼륨을 높히며 준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만큼 긴 통화로는 추적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범인이 건 전화는 발신자 번호 마저 도무지 뜨지를 않았다. 철저하게 통제했구나.

창민은 범인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며 준수와 계속 시선을 마주쳤다.

" ... 죄송한데, 지금은 파티를 맡을 수 없어요. 현재 하고 있는 파티가 있거든요. "

- 아, 그러세요? 혹시 알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때 너무 급하게 헤어진 것 같아

마음에 걸렸거든요. 그런 인연도 쉬운 것이 아닌데,

" 예. 알려드릴게요. "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창민이 손을 저었다. 지금의 준수는 너무나 굳어있다. 그나마 목소

리가 원래 하이톤이라 긴장하고 있음이 쉽게 들키지 않아 다행이다.

" 그렇지 않아도, 아주 화려하고 재미있는 파티에요... 마침 오늘 저녁부터 하는데,

오시려면

미리 저에게 이름과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스텝에게 말해둘 테니까.. "

- 그러지 말고, 장소와 시간을 말하면 제가 가서 연락드릴게요. 이 번호로 연락하면 되죠?

" ...... "

어떻게 해요? 준수가 입 모양으로 창민에게 물었다. 이 자는 끝까지 이름과 연락처는 알려

주지 않을 것 같은데.

" 그냥 알겠다고 해. 계속 물으면 의심할 거야. "

" ... 알겠습니다. 장소는 압구정동의 클럽 가든이에요. 시간은 오늘 저녁 9시. 오셔서 전화

주시면 되요. "

- 예 그럴게요.

Page 322: Happy Together

" ......... "

- 그 때 뵙죠.

달각. 전화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준수가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그가 범인임을 알고 대화하

는 것은 처음이다. 이 자가 나를 죽이려 나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어...

" 괜찮아, 괜찮아 준수야. "

곁에서 달래주는 유천이 없었더라면 벌써 쓰러지고 남았을 것이다. 이제는 뭘 어떡하면 되

죠.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묻는 준수를 보며 창민이 애써 웃었다. 앞으로가 문제인데. 저

나약한 남자를 어떻게 설득시켜야 하나.. 창민은 헤드폰을 벗었다. 발신 추적은 애초부터

기대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토록 치밀한 조직이 설마 이런 기계 하나에 번호가 걸릴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을 테니까.

" 아마도 그 자가 직접 올 겁니다. 자신의 조직원이 둘 씩이나 살해가 당했기 때문에 상당히

감정적일 테니까요. 그리고 이번 기회가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직접 처리하려

할 겁니다. 두번 째 죽은 조직원이 자결한 것으로 보아, 보스와 조직원들 간의 관계가

상당

히 깊고 신뢰가 충만했을 겁니다. 분명히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려 할 거에요. "

" ........ "

" 범인의 얼굴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자는, 김준수 씨와 박 형사 밖에 없어. 알고 있지? "

" 네. "

" 박 형사는 밖에 배치할 거야. 최대한, 클럽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범인을 생포할 수 있도

록. 준수 씨는 클럽 안에 들어가 있도록 해요. 우리 쪽의 형사가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

" 클럽 밖에서 잡지 못하면... 어떡해야... "

" 만일 그 자들이 용케 클럽 안으로 들어온다면, 준수 씨가 클럽 안에 있는 형사들에게 눈짓

으로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요. 그럼 우리에게 무전기로 연락이 올 테고, 바로 안으로 들

어가 잡을 거야.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다 프로야. "

" 준수를 그 클럽 안에 나 없이 혼자 둔다구요!? "

" 걱정 마. "

창민은 흘낏 준수를 바라보았다. 클럽 안에 서 있는 건 당연히 위험한 일이지. 그들이 언제

어디서 김준수의 목을 단 한발의 총알로 노릴지 모르는데.

" 이 파티는, 최대한 화려하고 혼란스럽게 갈 거야. 그래야 범인들이 준수 씨를 알아보지 못

할 테니까. "

" 검사님.. 하지만, 저- "

" 변장시킬 테니까, 걱정 말아요. "

Page 323: Happy Together

창민이 씨익 웃었다. 왠지 불안한 느낌에 유천이 준수의 손을 꼬옥 잡았지만 별 다른 도리

는 없었다.

* * *

" 직접 가게? "

" 응. "

" 직접 하지 마, 윤호야! "

" 어째서? 어차피 그들은 내가 범인인지 몰라. 너도 확인 했잖아. "

재중은 여전히 도리질을 쳤다. 예감이 좋지 않다. 게다가 재중의 머릿속에는 김준수와 박유

천의 선명한 웃음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내가 모르는 사람을 죽였지만, 이번

에는 다르다. 나와 인사를 했고,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보냈던 사람들을 죽이려고 해.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그의 총에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 걸 생각하면...

" 내가 아는 사람들이잖아, 응? "

" 우리 조직원을 둘이나 죽인 사람이야. "

" 내가 아는 사람들을 네가 죽이는 거잖아. 나 그런 거 싫어. 내가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네 손으로 피투성이가 될 거 생각하면 너무 끔찍해. 소름끼쳐. 나, 너 얼굴 못 볼 것

같아. "

끔찍해. 소름끼쳐. 그 말에 손을 뻗었던 총을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너는 아직도

내가 살인을 할 때면 그렇게 몸서리를 치는 구나...

" 네 손으로 죽이지는 마... 윤호야. "

" .......... "

" 아니.. 그 사람들, 죽이지 마. 응? "

나 그 사람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김준수라는 남자는 더더욱. 환하게 웃으면서 우리한

테 호감어린 표정으로 웃었어. 우리가 게이 커플이라는 소리 듣고, 그저 동질감에 웃으면서

자기 명함까지 내밀었던 남자야. 순수하고, 성격 좋고, 착하고, 귀여웠어. 옆에 있는 연인이

다정하게 챙겨주는 모습 보고 얼마나 부러웠는데. 너도 저렇게 다정하고 자상했으면 해서,

속으로 질투하고 샘내고 그랬어.

그런데 너, 지금 그 사람들 죽이겠다는 거잖아. 내가 아는 사람들. 나한테 웃어줬던 사람들.

네 손으로 피 묻히고 오겠다는 거잖아. 살인하고 돌아오면, 내가 너를 어떻게 안아주니. 나

좀 이해해줘.

" 미안해. "

Page 324: Happy Together

재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결심은 이미 확고하여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두 명

의 조직원을 잃었던 것은, 그 자리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윤호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살인의 목격자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 목격자로

인해 검찰이 자꾸만 K 카르텔의 수사망을 좁혀간다는 것이 문제였다.

"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금방 돌아올게. "

" 너 걱정되서 그래.. 윤호야, "

" 걱정할 거 아무것도 없어. 내가 말했지. 유리한 사람들은 우리라고. 절대로 질 수가 없는

게임이야. 오늘안으로 다 죽일 거야. "

" ...... "

내가 너를 사랑하긴 하는데, 그렇게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사람을 죽이고 오겠다고 인사하지

마. 그것도 내가 아는 사람들을 네 손으로 죽이고 오겠다고. 소름끼치는 그 손을 차갑게

뿌리

치고 재중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저렇게나 이중적이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냉철한 마음이 함께 공존한

다.

" 금방 돌아올게. "

서재의 문을 나서는 윤호의 등을 잡고 싶다. 죽이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하지만 그는

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너무 오랜 세월을 피비린내와 함께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재중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윤호의 뒤를 따라 서재를 나섰다. 이번만큼은 틀렸

다. 윤호가 죽이고 오겠다는 사람은, 재중의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되어있는 아름다운 커플이

었고, 그 사실이 자꾸만 재중을 흔들리게 했다. 그 사람들을 살리고 싶어.

" 윤호야... "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입술을 깨물며 한참이나 생각했다. 내 눈 앞에

서, 손을 그렇게 꼭 잡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두 남자를 살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재중은

조용히 계단을 내려와 윤호가 문을 닫고 나간 중앙 저택의 거대한 정문을 바라보았다. 그리

고, 조용히 뒷문으로 향했다.

윤호와 재중, 그 두 사람 모두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완벽하게 유리하리라 생각하는 그

게임이 사실은 모든 밥상을 차려 놓고 총구를 겨눈 채 기다리고 있는 검찰의 머리라는 것을.

Page 325: Happy Together

* * *

" 진짜 파티 같네요. "

" 범인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해야 하니까. "

담배 하나를 입에 문 창민이, 차 안에서 여전히 바깥을 주시하고 있었다. 파티가 시작되기

30분 전. 그들은 아마 파티가 시작되자마자 들어닥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최고조로

많아지길 기다렸다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김준수를 찾아내려 하겠지. 그들이 원하는대로

파티는 극도로 혼란스럽고 화려할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클럽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체포

하는 것이 좋겠지만... 만약에 몽타주의 범인이 아닌, 다른 조직원들이 들어온다면 손 쓸 방

법은 없다. 박유천과 김준수가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놀이동산에서 봤던 그 둘 뿐이니까.

" 이제 물어봐도 되요? "

" 뭐를. "

" 어떻게... 놀이동산의 그 남자가, 범인인 걸 아셨어요? 게다가 그 정확한 몽타주는

뭐고요.

준수 말고, 다른 목격자가 또 있나요? 혹시? "

" 아니야. "

" 검사님, 저 머리 나쁘거든요? 그렇게 돌려 말하시면 못 알아들어요. "

" 박 형사 머리 나쁜 건 나도 알고 있어. "

씨발라마. 유천은 욕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고 목소리를 낮췄다.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다. 창민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지금이야 범인을 잡는 것이 한시가 급한 일

이니 궁금증이야 뒤로 미뤄놓았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의문을 감출 길이 없다. 심 검사는

어떻게 우리가 놀이동산에서 '그들'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

하지 못하는 김준수에게, 어떻게 몽타주를 완성시키게 했을까?

창민은 창민 나름대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날 밤. 자신이 유천과 준수의 방

안에서 보았던 것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도 아직까지 이렇게나 혼란스러운데.

무엇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김준수 본인이었다. 본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받아

들일지... 창민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아주 약하고, 유천의 손을 잡지 않으면

불안에 떠는 여린 남자였으니까. 본인에 대한 몰랐던 비밀을 남의 입으로 듣게 되는 순간,

그가 받게 될 충격은 아마도 상상 이상의 것일테지.

" 몽유병. "

" 네? "

" 잠든 사이에 육체는 움직이고 있지만 정신은 자고 있다. 뭐, 내가 알고 있는 건 대충 이

도. 네이버에서 찾아보면 나오더라. "

" ... 그건 갑자기 왜요? "

" 몽유병이란 건, 무의식 상태로 돌아다닌 다는 거야. 그건 박 형사도 알고 있지? "

Page 326: Happy Together

" 당연하죠. 내 애인인데. "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는 모르겠는데, 창민은 무어라 입을 열까 망설이다가 질문으로

유천의 입을 닫아버렸다.

" 만약에 의식이 있다면, 그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

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유천이 도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의식이

있다니.

" 그는 나한테 모든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았어. 그가 나한테 이야기를 해 준 시간은 아주

짧았거든. "

" 내가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설명을 해봐요!!!!! "

성질이 폭팔한 유천이, 거칠게 차창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창민을 노려보았다. 왜 내가 사랑

하는 사람에 대해서 당신은 알고 나는 몰라야 해. 나는 그 녀석에 대해 하나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안 돼. 게다가 이런 긴박한 상황에 있어서는 더더욱.

" 내 말 잘 들어요, 박 형사.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준수 씨에게 말하지는 말아요.

본인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 테니까. "

" ...... "

" 내가 박 형사와 준수 씨와 옥탑방에서 술을 마시고 잤던 날, 나는 그 날 밤에 우연히 무언

가를 보았어. "

.

.

.

저게.. 뭐지.

그 날 밤. 창민은 열려진 미닫이 문으로 자고 있는 유천과, 그 옆에서 울고 있는 준수를 보

았다. 그 때의 묘한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문을 열고 들어온 창민과 눈이 마주친 준

수는, 어딘가가 아주 다르게 보였다. 그는 아주 불안해 보였고,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창민

이 준수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서자, 그는 뒤로 물러서며 잠든 유천을 내려다보았다. 유천이

술에 거하게 취해 깨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 ... 검사님.

Page 327: Happy Together

- 준수 씨?

분명히 김준수가 맞는데, 김준수가 아니었어. 그 때의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있을까.

그 눈은 분명히 내가 알던 김준수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 다른 사람을 앞에 앉

혀놓고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당혹스러움에 창민이 쉽게 다가서지 못할 때, 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것을 김준수라고 할 수 있었을까.

- 나는.. 김준수가 아니에요.

- 준수 씨, 왜 그래요? 어디 아파?

- 김준수이기도 하지만, 그는 확실히 아니에요.

시간이 없어서 길게 얘기하지는 못해요. 내 말 잘 들어요. 박유천이 위험하고, 김준수가 위

험해요. 범인을 본 건 김준수가 아니지만, 나는 범인들을 확실히 봤어요. 그 날 밤.

골목에서

총성을 울리던 그 남자들을 봤어요. 그 자들의 얼굴과 옷차림, 모두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

요. 진짜 목격자는 나에요.

당신은 누구야, 창민의 말에.. 그 남자는 슬프게 웃었다. 김준수가 웃고 있었지만, 김준수가

아니었다. 온 몸이 굳어버리는 공포에도 불구하고, 창민은 검사의 본능으로 그가 대단히 중

요한 열쇠를 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나는, 김준수의 몽유병이 만들어낸 존재에요.

.

.

.

" 그게... "

피우고 있던 담배가 모조리 타들어가, 자신의 옷 위에 떨어져 검은 연기와 재를 지저분하게

뿌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창민의 말에, 유천은 그저 굳어버린 채로 흘러가는 시간

을 느낄 여력조차 없었다. 창민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 날 밤.

심창민은 의식이 있는 몽유병 상태의 또 다른 김준수와 대화를 나누었다. 범인에 대한 목격

자의 진술과, 놀이동산에서 만났던 수상한 한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 그들이 김준수과 박유

천에 대한 얼굴과 직업을 알고 있으며, 김준수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그의 경고도.

덧붙여, 김준수가 죽으면 나도 죽어버린다는 그의 두려움에 가득한 한 마디도.

" 김준수는 몽유병이 아니야. "

Page 328: Happy Together

" ............ "

" 그에게는 두 가지 인격이 있어. "

" 내가 사랑하는 김준수... "

" 그래, 박 형사가 사랑하는 김준수와, 극심한 몽유병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인격체. 두 명

의 인격이, 김준수라는 몸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거야. "

말도 안 돼... 유천이 중얼거렸다. 말이 되고 안 되고는, 오늘 저녁에 알 수 있을 거야.

나도

믿고 싶지 않은 또 다른 김준수의 증언이 맞다면, 오늘 이 자리에는 K 카르텔의 보스와 조직

원들이 들이닥칠 테니까.

" 박유천이라고... 했어요? 준수가? "

" 박유천과 김준수가 위험하다고 했어. 그가. "

유천은 고개를 젖힌 채, 답답한 차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검사님, 그거 알아요. "

" .....? "

준수는, 늘 나를 박 형사라고 불러요. 박유천이 아니라.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22

" 여기가 맞아? "

" 예. 맞습니다. "

윤호의 차를 비롯해, 두 대의 차가 클럽 앞에 섰다. 조금은 멀찌감치 차를 주차시켜 놓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클럽 바깥은 한산하다. 오히려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질만큼 한산하고

조용했다. 몇 대의 차가 주차되어있고, 클럽의 스텝으로 보이는 남자가 문 바깥에 서있다.

표적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클럽 안에서 죽이는

것은 힘들다. 사람들이 많을 테니 조준이 힘들 것이다. 게다가 불행하게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한다면 일은 더 커질 테니까. 아무래도 그를 불러내어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Page 329: Happy Together

" 보스, 잠시만! "

" .......? "

앞 좌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윤호의 핸드폰을 저지하고 창 밖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남자의

시선은 클럽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 서울중앙지검 컴퓨터를 해킹했을 때, 박유천 말고도 다른 강력반 형사들의 정보를 몇몇

알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강력 1반의 형사들도, 목격자의 보호에 관여하고 있을 테니

까요. "

" 그래서. "

" 클럽 앞에 서있는 저 남자, 제 기억에 의하면 분명히 강력 1반의 형사가 맞습니다. 박유천

과 같은. "

형사라... 이 상황을 생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박유천 말고도 다른 형사가 있을 수 있다.

" 그리고 저 앞에 세워져 있는 차들 말입니다. "

" 검은색 차들? "

" 네. 아까 전부터 클럽 앞에 서 있는 형사의 시선이 그 차로 향하고 있거든요. "

" 일행? "

" 그럴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김준수를 바깥으로 불러낸다면, 분명히 형사가 동행할

겁니다.

보스가 직접 가시는 것은 아마 위험할 것 같습니다. "

" 클럽 안으로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구나. "

" 괜찮을까요? "

" 상관없어. 어차피 저들 중 누구도 우리의 얼굴을 모르니까. 단,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한

꺼번에 들어가면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으니, 내가 먼저 들어가겠다. "

" 아닙니다. 저희가 먼저 들어간 후,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

" 클럽의 문이 저 하나인가? "

" 뒤 쪽에 하나가 더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 그 쪽으로 가자. "

차를 돌리기 전, 윤호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뒤에 있는 차를 탄 다른 조직원에게 연락

을 취했다.

" 정문 쪽에서 일을 하나 만들어. 형사들의 눈이 모두 그 쪽으로 쏠리도록. "

.

.

.

" 총성입니다! "

Page 330: Happy Together

먼발치에서 들리는 총성에, 유천과 창민 모두 차에서 내렸다. 뒷춤으로 향한 손으로 총을

꺼내고 총성이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검은색 자가용이 저만치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차를 쫓아! 유천이 소리쳤고,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형사들이 바로 차에 올라타서

사이렌을 꺼냈다. 소동에 놀란 다른 형사들이 뒤 쪽에서 모두 뛰쳐나왔고, 주위를 둘러보며

또 다른 일행은 없는지 눈을 돌렸다. 그러나 더 이상의 총성은 들리지 않았고 주위는 조용

했다. 분명히 총소리였는데... 미간을 찌푸린 유천이, 클럽 안의 형사에게 지속적으로 연락

을 취하며 준수의 안부를 물었다.

" 준수는 괜찮은 거죠?! "

" 걱정 마. 절대 들킬 염려 없게 변장 시켰으니까. "

" 뭐를 시켰길래...! "

그 동안, 차 안에서 창민의 말을 정리하며 홀로 복잡한 머리를 감싸 안고 있던 유천이었다.

클럽 안에서 다른 형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을 준수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지금은 무엇

보다 범인들을 잡는 것이 급선무지. 그들을 모두 잡고 생각하자. 너의 병에 대해서도...

" 잠깐만. "

" 네? "

" 뒤 쪽에 있던 형사들, 제 자리에 있어? "

" 아마도 그 차를 따라간 것 같습니다만... "

" .... 박 형사, 나와 함께 클럽 안으로 들어가. 나머지는 이 앞에서 대기하고 기다려. "

혹시 우리들의 눈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일부러 총성을 내고 일행을 도주하게 만들었

을지도 모른다. 급한 마음에 창민과 유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뒤 쪽에 아무도 없었다면,

나머지 일행은 뒷문을 통해 클럽 안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어.

" 아!!! 정신 없어!!!!! "

지하로 내려오자마자 터질 듯한 음악 소리에 고막이 터질 것 같다. 유천은 얼굴을 잔뜩 찌

푸리며 일단 준수부터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혼란

스러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금세 찾을 수 있을 텐데.

" 준수 어디 있어요!!!!! "

" 저기 있잖아!!!!! "

" 잘 안 들려요-!!!!! "

" 준수 씨, 저기 있다고!!!! 저게 김준수야!!!!!! "

Page 331: Happy Together

창민이 가리키는 손을 따라, 유천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 끝에, 분명히 김준수가 서 있었

다.

" .... 저렇게 변장시킨다곤 안 했잖아!!!!!!!! "

* * *

- Hey sister, go sister, soul sister, flow sister

Hey sister, go sister, soul sister, go sister

레이디 마멀레이드의 터질 듯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준수는 훤히 드러난 자신의 허벅지를

붉은색 망사 스타킹으로 감싼 채 다른 스트리퍼들과 다를 바 없이 리듬에 몸을 맡겼다.

그래,

창민이 물어오는 질문이 수상쩍다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을 변장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대체 그 남자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은 거야!!

- 다리 예뻐?

- 네?!

- 춤은, 잘 춰?

- .... 그냥...

- 범인들이 준수 씨를 봐도 못 알아보고 스쳐지나가게 만들어줄 테니까, 걱정 마.

분명 이런 나를 보고 단번에 알아보진 못할 거다. 세상 어느 미친 놈이 여장을 하고 이렇게

대범한 차림으로 스테이지를 누비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할 테니까. 검사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 언니!! 더 흔들어!!!! "

아래서 발악을 해대는 남자들을 보며, 준수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물랑 루즈 뮤직

비디오에 나오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같은 차림을 해놓고,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짓인가.

허리까지 늘어뜨린 미친 푸들 금발머리 가발을 살랑거리며, 준수는 그나마 상체를 가리고

있는 퍼(Fur) 탱크탑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올린 후, 다른 스트리퍼들 속에 섞여나갔다. 손

바닥만한 미니 스커트를 입은 나를 보고, 박 형사는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 심 검사를 죽이

려고 들꺼야.

Gitchi gitchi ya ya hee (hee oh)

Mocca chocolata ya ya (ooh yeah)

Creole Lady Marmalade (ohh)

Page 332: Happy Together

Voulez-vous coucher avec moi, ce soir (oh oh)

Voulez-vous coucher avec moi (yeah yeah yeah yeah)

오늘밤 나랑 자고 싶어?

오늘 밤 나랑 자고 싶어?

현란스러운 조명 아래서 섞여드는 김준수를 보며, 유천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클럽 안에 있을 지도 모르는 범인을 추리는 일이겠지만, 자신의 앞에서

술집 콜걸들이나 차고 다닐 법한 가터 벨트를 한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김준수에게도 도통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씨팔...! 심창민 이 개자식!!! 남의 애인을 저 따위로 입혀 놓고

남자

들 앞에 대놓고 세워두면 어쩌자는 거야?!?!!!

" 다 벗겨 놨잖아!!!!! "

" 미쳤냐? 벗겨 놓으면 남자인 거 뻔히 아는데, 중요한 부분은 다 가렸으니까 걱정 마. "

" 미친년 만들어 놨잖아요!!!!! "

" 잘 어울리는데 뭐. 닥치고 주위나 둘러봐. 어디 숨어있을지 모르니까 확실히 봐. 놀이동산

에서 봤던 두 남자 중,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나를 불러- "

I'ma keep playing these cats out like Atari

나는 이 남자 사냥을 계속 다니겠어

Wear high heel! ed shoes, get love from the Jews

하이힐을 신고, 유대인의 사랑을 얻고

Four bad ass chicks from the Moulin Rouge

물랑 루즈의 네 명의 나쁜 여자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혼란스러운 음악 속에서, 유천은 총에 손을 가져가 댄 채로 시선

을 옮겼다. 이 수 많은 사람들 속에서..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

.

.

.

" 보이지가 않는데요!!! "

"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

뒷문을 통해 가까스로 클럽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터져나갈 듯한 클럽 안에서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인파 속으로 발을 뗐다. 빌어먹을.. 사람이 이렇게 많아서야, 찾아낸다고 해도 총

을 쏠 수가 없잖아...!

Page 333: Happy Together

" 만약 김준수를 발견하면 밖으로 데리고 나가!!! 이 안에서 죽이지는 마!!! "

내 목소리나 들리런지. 미친 듯이 몸을 흔드는 사람들 틈을 지나치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

무리 둘러봐도 김준수는 찾을 수 없었다. 설마, 이 안에 없는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돼.

한참

이나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 ......! "

박유천. 그를 발견했다. 정문 쪽의 문에 서서 뒷춤에 손을 가져간 채로 자꾸만 무언가를 보

고 있다. 박유천이 이 안에 있다면 김준수도 이 안에 있다는 뜻이다. 김준수의 신변 보호를

담당하고 있는 저 남자가, 김준수를 혼자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그들은 연인

이 아닌가. 김재중이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했던 이유... 사랑하는 연인들이었으니까.

윤호는

피식 웃으며 총을 쥐었다. 아무튼 김재중 너는,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큰일이야.

그나저나 이 안에서 저 남자를 죽이면 더 혼잡해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렇게 인간들이 머

리를 흔들고 춤을 춰대는 마당에, 잘못해서 다른 이가 맞았다가는 일만 더 커져. 아직은

아냐.

그런데... 저 남자, 자꾸만 무얼 그렇게 넋을 빼놓고 보고 있는 거지. 박유천의 시선의 끝을

따라서 윤호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는 스트리퍼들이 옷을 홀딱 벗고 춤을 추고 있는 스테이

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남자라 이거냐. 저런 걸 보고 군침을 흘리.....?

" .... 아하. "

유천의 시선을 쫓던 윤호가, 누군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걸' 보고

있던 거구나. 박유천이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 찾았다.

" 찾았어. "

" 네?!!! "

" 김준수를 찾았다!!!!! "

저자를 끌고, 이 빌어먹게 시끄러운 곳을 빠져나가. 윤호는 씨익 웃으며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트리퍼 차림의 여장한 김준수라니, 박유천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알아보지 못했

을 거다. 저딴식으로 숨겨놓았을 줄이야.

Touch of her skin feeling silky smooth, oh

Page 334: Happy Together

실크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살의 감촉

Color of cafe au lait, alright

카페오레같은 피부색이

Made the savage beast inside

Roar until he cried

그가 소리지를때까지 내면의 야수를 미치게 만들지

More, more, more

좀더, 좀더....

준수가 스트리퍼들 사이에 숨어 있는 스테이지를 힘겹게 발을 옮기며, 윤호는 총을 쥐었다.

이제 다 끝났다. 저 자를 이 시끄러운 클럽 바깥으로 끌고 나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머리

에 총알을 박을 거야. 그 다음은 분노에 미쳐하는 박유천, 네 차례다.

* * *

그와 같은 시각. 재중은 클럽 가든 안으로 들어섰다. 위치를 알아내느라 꽤나 고생하기는

했지만, 클럽 앞에서 아무도 입장을 제지하는 사람이 없어서 들어가기는 수월했다. 덥고

인파가 가득한 댄스 플로어 안으로 들어서면서, 재중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 엄청난 사람들 속에서 김준수는 커녕 정윤호도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 설마, 벌써 그

들을 죽인 건 아니겠지. 아니야... 만약 죽였다면, 이 클럽이 이렇게 정상적으로 돌아갈리가

없어. 늦지 않게 왔을 거야.

어째서 여기까지 따라왔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내가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감싸면, 나에게 화를 낼까... 아무것도 알 수는 없었다. 단지, 나는 네 명령으로 움직이는

인간은 아니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고집을 꺾을 수는 없어. 나는

그들이 죽지 않기를 원해. 네 손으로 내가 아는 이들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지 않기를 원해.

내가 무얼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단지 방관하고 있을 수 없어서 찾아온 거야.

" 김준수든.. 정윤호든.. 제발 내 눈 앞에 보이기만 해.. 씨팔..!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

"

정신없이 사람들 틈을 헤집고 다니는 그와 동시에, 바로 곁에 있던 유천이 눈을 크게 뜨고

재중을 바라보았다. 저... 남자! 분명히 놀이동산에서 보았던 그 남자다. 몽타주에 그려진

살인범은 아니지만, 그 살인범과 연인 사이라고 말했던 남자야. 유천은 최대한 침착하며

주위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방을 살피고 있는 창민의 옷깃을 끌었다.

" 왜!!!!! "

Page 335: Happy Together

" .... 찾았어요. "

" 뭐라고?!?!!! "

" 찾았다고!!!! "

" !!!!!!! "

자신보다 더 놀란 표정의 창민이, 유천이 가리키는 손 끝을 따라 한 남자의 얼굴에 멈췄다.

준수가 (준수, 라고 하기에는 또 다른 그의 인격체가.) 설명했던 몽타주와는 전혀 다르지만

유천이 말하기를, 그는 놀이동산에서 보았던 두 남자 중 한명이라고 했다. K 카르텔의 일원

일 가능성이 높은 남자다. 창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방에 배치되어 있던 형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용의자를 찾았다. 나와 박 형사가 있는 쪽으로 모두 집결해. 그의 연락을 받은

나머지

형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재중은 여전히 인파 속을 헤치면서

윤호를 찾았다.

" 뭐.. 뭐야?!! "

갑자기 자신의 두 팔을 뒤로 꺾는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의 용모에, 재중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소리지르려는 찰나, 갑자기 입 안으로 무언가가 들어오더니 입을 다물 수도 없게

만들었다.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심장을 끌어안고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생각하기

도 전에, 익숙한 얼굴이 자신의 앞에 형사 수첩을 내밀며 섰다.

" ... 체포한다. "

아직도 믿기지 않는 표정의 얼굴이, 재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놀란 눈으

로 유천을 바라보았지만 그 또한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도대체 내가 K 카르텔인 줄 어떻

게 알았지?! 놀이 동산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정윤호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던 그가...!

" 다른 조직원들처럼 자결할 생각은 하지 마. 네 놈들의 보스는 어디 있어?! "

유천의 곁에 있던 창민이 다가와 소리지르며 재중의 머리를 후려쳤다. 갑작스러운 아픔에

머리가 완전히 옆으로 돌아갔다. 곁에서 자신의 팔을 결박한 채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는

다른 형사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어떻.. 게 해야 하는 거지? 도대체 나를 어떻게 알아봤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윤호야.. 정윤호...! 이 안에 있으면 대답 좀 해봐!

.

.

.

Page 336: Happy Together

" 헤이, 언니! "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을 보고 차갑게 웃고 있었다.

단지 술 먹고 깽판치는 미친놈만 아니면 좋겠는데, 준수는 무시한 채 계속 스트리퍼들 사이

를 헤집으며 열심히 리듬에 몸을 맞췄다. 그나저나 범인은 도대체 언제 잡겠다는 거냐. 내가

언제까지 이런 미친년 옷을 입고 여기서 엉덩이나 흔들어야 되는 거냐고!!! 툴툴거리며 계속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데, 누군가 자신의 팔을 이끈다.

" 누구야!? "

앙칼진 자신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막무가내로 자신의 팔을 이끌기만 했다. 도대

체 어느 미친놈이야?! 다급한 표정의 준수가, 자신을 보호하고 있던 형사에게 시선을 던지

려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클럽 안에 배치되어

있던 형사들이 전원 사라졌다. 어디로 가버린 거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팔을

무작정 잡아끄는 남자를 바라보는데,

" ..... 당신, "

" 오랜만이지? "

정윤호가 서 있었다. 놀이동산에서 보았던 그 남자. 창민이 범인이라고 말해주었던 남자.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명함을 건넨... 그 살인자. 순간 온 몸이 굳어버려 털 끝만큼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서늘한 표정으로 준수를 바라보던 그는 말없이 뒤돌아섰다. 준수의 손목을

잡고 있던 남자들 또한 얼굴에서 장난스러운 웃음기를 거두더니 그대로 그를 인파 속으로

끌고 나왔다. 도대체 나를 지키고 있던 형사들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두려움

에 덜덜 떨리는 어깨를 움추리고 속수무책으로 그들을 따라나섰다.

박 형사.. 당신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 보스...!! "

뒷문으로 나가려는 순간, 조직원 하나가 다급하게 윤호의 어깨를 잡았다. 왜, 하며 뒤돌아

선 그는 조직원의 손 끝이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 ... 김재중? "

Page 337: Happy Together

자신의 연인이, 형사들에게 둘러싸여 입에 재갈이 물려진 채 바깥으로 끌고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바라보는 것이 틀리기만을 빌었지만 그건 틀림없는 김재중이었다.

도대체 네가 여기에 왜 있어....?

- 그 사람들 죽이지마, 응?

서재의 문이 닫혀지기 전, 답답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재중의 시선이 떠오른다. 완전

히 굳어버린 표정으로 윤호가 멍하니 끌려가는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 손에

잡힌 김준수가 문제가 아니야... 네가 저기서 뭐를 하고 있어,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속에서

윤호가 입으로 손을 틀어 막고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으로 벽에 기댔다. 그와 동시

에,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려던 유천이 뒤를 돌아보았다.

.

.

.

" 준수... "

" 박 형사! 뭐 하고 있어?! "

" 검사님.... 저거요.. 저거, 준수 맞... 아요? "

윤호와 똑같은 자세로, 그도 보았다. 자신의 연인이 마피아들의 손에 이끌려 뒷문으로 끌려

나가려는 모습을. 들고 있던 총을 떨어뜨릴 뻔한 걸 간신히 손에 힘을 주었다. 설마 싶어서

스테이지를 바라보았지만, 준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천의 말에 고개를 돌린 창민이

바로 준수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 김 형사!!!! 다시 안으로 들어와!!!! 일행이 더 있어!!!! 목격자를 인질로 잡았다!!!! "

그들과 윤호의 눈이 마주쳤고, 윤호가 무슨 말을 할 것 처럼 입을 벌렸다. 그리고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형사들이 모조리 클럽 안으로 들어와 천장에 총을 쏘았다. 타앙...!

총소리와 동시에, 클럽의 음악이 끊겼으며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클럽 안에서, 유천은 놓치지 않고 윤호와 준수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놓쳐서는

안 된다. 절대로 내 눈이 확보해야 해. 그건 윤호도 마찬가지였고, 끌려 나가려 하는 자신의

연인을 지켜보았다.

" 빌어먹을.. 뒷문으로 형사들을 보내!! 지금 당장!!! "

" 준수야!!!!!!!! "

유천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총구를 겨눴다. 그자들이 내 연인의 등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아서, 유천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정윤호의 머리를 겨눴다. 유천과 마찬가지로 윤호도 총을 뽑아들었다. 두 개의 흔들리는

Page 338: Happy Together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치고, 재중아, 라는 그의 비명이 클럽 안에 휘몰아쳤다.

" 지금 나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스까지 체포당합니다!! "

" 놔!!!! "

" 보스를 차 안으로 모셔!!!! 빨리!! 시간이 없어!!!! "

이거 놓으라고!!!! 이성을 잃은 그가 총을 쏘아댔지만 단 한발도 맞지 않았다. 양 옆에서

윤호의 어깨를 잡아 끈 조직원들이 그를 차로 데려갔다. 지금 이 순간, 재중을 구하기 위해

다시 클럽 안으로 들어간다면 분명히 모두가 잡힐 것이 뻔했다. 이렇게 상황이 돌아갈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윤호의 조직원들은 적은 숫자만이 움직였을 뿐이다. 그에 비해

검찰 측은 몇 배의 일행이 대기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체한다면 큰일이다. 지금 김재중의

안위는 두 번째 문제였다. K 카르텔의 수장인 정윤호의 안위가 무엇보다 중요했으므로,

조직원들은 현명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차 문을 닫아!!! "

" 문 열어!!!! 김재중이 잡혔어!!!! 새끼들아!!! 문 열라고!!!!!! "

" 출발해!!! 지금 당장!!!! "

" 문 열라고 했잖아!!!!! "

죄송합니다, 핸들을 잡은 조직원이 급히 말한 후 엑셀을 밟았다. 튕겨나가듯 출발한 차가

텅 빈 도로를 질주했다. 거의 반 미쳐버린 유천을 진정시키느라 뒤늦게 클럽에서 나온 창

민이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을 차에 태워 뒤로 빠져나간 마피아 일행을 쫓게 했다. 그러나

늦어버렸음을 직감했다...

" 그 새끼들의 차가 보이나!! 어떻게 되가고 있어!?!! "

보이긴 합니다만, 이미 너무 멀리 가버렸습니다. 게다가 뒷 문에 대기하고 있던 차들이 하

나도 없었던 터라 아무도 막아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무전기를 통해 들려오는 다른 형사

의 말에, 유천이 미친 듯이 경찰차로 뛰어들어가 앉아 있던 형사를 바깥으로 끌어내고 자신

이 핸들을 잡았다. 차를 출발시키려는 찰나 창민이 시동을 막고 유천의 팔을 끌었다.

" 내려!!!! 지금 너 운전했다간 사고나!!!! "

" 닥쳐요!!!! "

" 죽고 싶어?!!!! 지금 너 제정신 아니잖아!!!!! "

차 바깥으로 유천을 끌어낸 창민이 두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 팔을 뿌리치고, 유천이 창

민의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

Page 339: Happy Together

" 이 개새끼야!!!! 김준수가 잡혀갔잖아!!! 그 새끼들이 죽여버린다고!! 그 새끼들이

죽여!!! "

" 안 죽여, 박 형사. 안 죽이니까 진정해. 지금 운전하면.... "

" 죽이면!!! 죽이면 너가 책임 질 거야?!!! 흐... 흐윽... 준수가 지금 내 앞에

없는데!!!!!! "

이 개새끼야... 네가 우리 준수 살려낼 거냐고.. 그 녀석 죽으면 네가 살려낼 거야...

오열하며

바닥에 주저앉은 유천이 창민에게 끊임없이 소리질렀다.

" .. 차는, 추격하고 있어? "

- 죄송합니다, 검사님! 놓친 것 같습니다!

" ... 알았어, 돌아와. "

다시 유천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거의 넋 나간 사람의 표정으로 경찰차로 오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준수를 도로 데려와야 겠다는 일념 하나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말해도 들어먹지 않을 거야. 운전석에 올라 탄 유천을 다시 끌어내리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

렸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정신차리게 만드는 데는, 무엇보다도 주먹이 최고다. 창민은

몇 번이나 유천의 얼굴이 주먹을 날린 후 아예 수갑으로 그의 손을 포박해버렸다. 지금은

박 형사의 다혈질 성격이 필요한 시점이 아니야.

" 이거 풀러줘!!!! 이 개자식아!!!!!! "

" 나한테 뭐라고 욕하는 건 좋은데, 박 형사 이거 하나만 기억해라. 너 지금 김준수 구한답

시고 뛰쳐나가서 개짓거리 하면, 분명히 그 새끼들한테 잡혀서 쌍으로 대가리 구멍 뚫려.

"

" 그딴 거 알 바 없으니까 이거 풀러줘!!!! 준수가.....! "

준수가 지금 혼자 있잖아.. 나 없이는 잠도 들지 못하는 녀석이.. 오늘까지 나도 몰랐던...

자신도 모르고 있는 그런 '병'을 앓고 있는 녀석이.. 지금 개새끼들에게 잡혀서 머리에 총구

를 들이대고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정신을 차리니...

" 우리에게도 인질이 있어. "

창민이 재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한 남자가 뒷문으로 빠져나가기 전, 재중이라는 이름

을 외치며 이 쪽으로 뛰어오려고 했어. 굉장히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주위

에 있던 남자들이 '보스' 라는 말과 함께 그 남자를 억지로 뒷문으로 끌고 나갔어.

보스...라.

아까 내가 보았던 남자가 보스라면, 그 보스가 이름을 부르며 달려들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

지금 검찰 측에 인질로 잡혀있다. 만약 이 자가 보스에게 중요한 남자라면, 우리 또한

주요한

Page 340: Happy Together

인질을 붙잡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들 또한 김준수를 쉽게 죽일 수 없어. 우리는

대등한

위치에 서 있다.

" 당신이 지금 내 기분을 알아?!!! 씨팔!!!!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준수가!!!! "

" 네 기분 충분히 알아. "

사랑하는 사람이 죽기 일보 직전일 때, 기분이 어떤지 충분히 안다고. 창민이 말했지만 유천

에게는 씨도 안먹히는 소리일테지. 그는 계속 소리지르며 눈물만 흘려댔다. 준수의 이름을

불러대면서. 저대로는 안될 것 같아서, 창민은 그의 급소를 가볍게 가격해 정신을 잃게했다.

지금은 차라리 기절해버리는 것이 나을 거다. 박 형사가 정신을 차리면.. 그 때 다시 말해야

겠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반드시 구해낼 테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다만.. 지금 걱정되는 것은, 김준수의 이중 인격. 만약 그것이 그들 앞에서 드러난다면..

좋을

것은 하나도 없을 텐데.

.

.

.

" ...... "

재중은 빠져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곁에 단단하게 앉아있는 형사들을 보면서 재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는 유천처럼 감정적으로 쓰러지며 사랑하는 이를

부르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런 면이 준수와 재중의 다른 부분일 것이다. 그는 침착하게 자신

의 상황을 일단 헤아렸다. K 카르텔에서는 김준수를 납치했고, 그들은 나를 인질로 삼았다.

그렇다면 정윤호는 김준수를 쉽게 죽이지 못할 것이고, 검찰 측에서는 인질 협상을 요구하며

나를 내세울 거야.

무엇보다 나의 태도가 중요하다... 최악의 상황. 정윤호가 구속되는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내가 무엇보다 그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인물인지 그들에게 숨

겨야 해. K 카르텔의 일원임을 숨기자. 머리를 굴려... 재중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눈을 감았다. 긴장되는 이 와중에, 재중은 윤호를 떠올렸다.

지금쯤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아니... 얼마나 화가 났을까.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행동했다가 어이없이 인질이 되어버린 나에게.. 많이 화가 났을 거야.

그러나 그는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알 수 있어...

Page 341: Happy Together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23

" 죽이시려면 죽이십시오. "

" ......... "

" 그 상황에서 제가 아니가 그 어떤 조직원이라도, 저 처럼 행동했을 겁니다. "

제이 에비뉴로 들어와 중앙 저택에 차가 멈추자마자, 윤호는 차에서 내려 운전석에 타고

있던 자신의 조직원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쏘지는 못했다. 그의 말이 맞다. 그 상황

에서 조직원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김재중 하나 때문에 검찰 무리에게 덤벼들었다간,

윤호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조직원들이 체포 되었을 것이다. 그래.. 그건 알아.

열려 있는 문 속으로 손을 넣어 잔뜩 웅크리고 앉아있는 준수의 머리채를 잡아 끌었다.

" ... 미친년. "

손에 끌려나오는 건 화려한 블론드빛의 가발 뿐이다. 가발을 저만치 던져버리고 김준수의

진짜 머리를 낚아 채 차 밖으로 끌고 나왔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지, 그는 쳐다보지도 못

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도대체 여기 어디지. 두 손바닥으로 땅을 짚고 고개를

올렸다.

처음 보는 거대한 저택과,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그 남자도.

" 으... 으아... "

뒷 머리칼을 자비심 없이 낚아채고 준수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댔다. 윤호의 손이 흔들릴

때마다 그 무자비한 쇳소리가 준수의 귀를 어지럽혔다. 철컥, 스으. 이 자그마한 총구 안에

한 사람을 순식간에 저 세상으로 보내버릴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총알이 들어있다. 윤호가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자신은 유천의 이름 한 번 불러보지 못하고 죽어버릴 것이다.

" 살려.. 살려주세요... "

" ......... "

" 살려주... 흐윽... 살려줘요.... "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직원들 모두, 그가 쉽게 준수를 죽이지 못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Page 342: Happy Together

일찌감치 죽였어야 하는 살인의 목격자는, 김재중을 찾아올 수 있는 유일한 카드가 되어버

렸으니. 검찰은 분명히 인질의 교환을 요구해올 것이다. 만약 이 자리에서 김준수를 죽인다

면 김재중도 절대로 찾아올 수 없다. 게다가 김재중은 K 카르텔의 조직원이라기 보다는 정

윤호의 연인이었다. 조직의 생활이 익숙해졌기 보다는 정윤호와 함께 하는 제이 에비뉴의

삶이 익숙해졌을 뿐이다. 그들은 절대로 검찰이란 것들을 믿지 않았다. 불법적으로 김재중

에게 모진 고문을 가해서 K 카르텔의 본거지를 불게 할 수도 있고, 온갖 죄목을 덮어씌워서

감옥에서 몇 년을 썩게 만들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김준수와 김재중의 온전한 타협이 없

을 시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었다.

" 너 같은 새끼 하나 때문에 이 지경까지 왔어.. 이런 미친년 하나 때문에 김재중이, "

아..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쯤 나 없는 곳에서 얼마나 두려워 하고 있을까. 애초에 그는 자

신이 살던 삶과는 너무나 먼 남자였다. 게다가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김재중이

원했던 삶은, 지금 자신을 잡아간 검찰 측의 사람이 되어서 대한민국의 법을 수호하는 남자

가 되는 것이었겠지. 그런데 그 반대가 되어버렸어.. 입에 재갈이 물린 채 형사들에게 끌려

가던 재중의 뒷모습을 생각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 제대로 된 옷으로 갈아입히고 독방으로 끌고 가. 곧 내려갈테니. "

" 네. "

" 제발 살려줘요.... "

" 한 번만 더 그 입 놀려봐. 네 하반신에 걸쳐진 그걸 벗겨서 개 같이 굶주린 놈들한테

던져

버릴 거다. "

서슬 퍼런 눈으로 준수를 노려본 윤호가, 총을 거두고 뒤돌아섰다.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났

다는 안도감에 온 몸에 긴장이 풀렸다. 털썩, 바닥으로 완전히 쓰러진 김준수의 양 어깨를

잡고 다른 조직원들이 그를 일으켰다.

" 아저씨..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아악!!!!! "

완전히 뒤로 꺾여버린 팔에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입 닥치라며 무자비하게 준수를 끌고 가

는 그들에겐 '제발'이란 말은 죽어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뼈져리게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이 낯선 공간에 박 형사는 없으며,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 무언가 잘못되면

나는 이름도 모르는 이곳에서 머리에 구멍이 난 채로 시체가 되버릴 거야... 나는 생사의 갈

림길에 서있다. 나는.. 죽을 지도 몰라.

늘 나를 지켜주던 그 남자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철저히 혼자야.

그 사실이, 무엇보다 김준수를 두렵게 만들었다.

Page 343: Happy Together

* * *

" 풀어달라고? "

애타게 고개를 끄덕였다. 취조실에 앉아있는 재중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벽인데다, 왼 편의 벽에는 커다란 거울이 걸려져 있다. 자신의 추측이 맞다면 거울

건너편에는 검찰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매직 미러겠지. 재중은 거울을 흘낏 쳐다보

았다. 재중의 생각대로, 거울 안 쪽에서는 창민과 다른 형사들이 취조실 안의 재중을 바라

보고 있었다. 김준수를 잃은 대가로 얻은 유일한 인질을.

" 이 자리에서 네가 혀 깨물고 죽어버리면, 김준수는 어떡할건데. "

" ......... "

" 개자식아. 우리 둘을 앞에 놓고 가지고 노니까 재밌든? "

아무래도 안되겠어. 박 형사는 지금 너무 감정적이다. 창민은 고개를 젓고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내가 직접 해야겠어.

- 박 형사, 나와. 내가 대신 들어간다.

" 닥쳐요!!!!! 심 검사가 뭔데 남의 일에 참견이야!!!!! "

- 남의 일? 착각하지 마. 검찰 전체의 문제다. 당장 나와.

" 웃기지 마!! 이 새끼 조져버리는 건 내가 할 거야!!! "

아무튼 저 다혈질 새끼를.. 창민은 타이를 느슨하게 푸르며 문을 열고 나갔다. 직접 끌고 나

오는 수밖에 없다. 또 말을 안 들어먹으면 인질 앞이고 나발이고 급소 가격해서 기절시킬테

다. 취조실 문을 벌컥 열고 창민이 들어오자마자 유천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 이번에는 나도 그냥 안 당해!!! 기절시킬 생각 하지도 말아요!!! "

" 김준수 죽이고 싶어? "

" ... 뭐? "

" 김준수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야, 이 남자. 박 형사 지금 미쳐서 개처럼 날뛰면 이도

저도 손 쓸 방법 없다는 소리야.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나가서 지켜보고 있어. "

" ... 검사님 말대로 준수 걸린 일이에요. 나 못 나가요. "

저 빌어먹을 똥고집. 창민은 한숨을 쉬고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지금 유천에게는 의자에

앉으라고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열받으면 의자를 집어던질지도 모르니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재중을 바라보았다. 두려워 보이는 이 남자의 속내를 알 수가 없다. 분명,

놀이동산에서 박유천이 보았던 두 명 중 한 사람이라고 했지. 만약 몽타주 속의 남자가 카

Page 344: Happy Together

르텔의 보스가 맞다면... 이 남자는, 보스의 연인일지도 모른다. 만약 놀이동산에서 그들이

연인이라고 한 말이 사실이라면. 보스의 연인이라... 창민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내 주위에는 도대체 왜 이런 게이 커플이 꼬이는 거냐.

" K 카르텔 조직원이 자결했던 적이 있어. 너도 재갈을 풀리면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지 모

르는데, 우리가 뭘 믿고 그걸 풀러줘. "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저들은 지금 내가 K 카르텔의 조직원임을 확신하고 있어. 그렇다

면... 내가 조직원이 아니라는 사실만 증명하면 되는 거지.

" 컴퓨터? "

재중의 시선이 컴퓨터에 향하자 창민이 그렇게 물었다. 재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키보드를

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키보드라... 창민은 잠시 고민했다. 키보드로 자결할 일은

없겠지. 물론, 가끔 박 형사가 키보드로 범인 머리를 개패듯이 내려치는 건 몇 번 봤지만,

그 정도로 사람이 죽진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키보드를 재중에게 내밀었다. 그는 빠르게

무언가를 쳐내려갔다.

- 나를 왜 체포한 겁니까

" ......? 뭐야? '

재중이 쓴 글을 보고, 창민이 눈을 크게 떴다. 나를 왜 체포한 겁니까?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이다. 이 남자는 지금, 자신이 왜 취조실에 갇혀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 K 카르텔의 조직원. 설마 모른다는 건 아니겠지. "

창민의 말에 재중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반응에, 두 사람이 모두 놀랐다. 아니라니..?

" 거짓말 하지 마!!! 놀이 동산에서 너는 분명히 그 새끼랑 같이 있었어!! 연인이라고

하면서

우리 뒤에 있었잖아!!!! 그렇게 뻔뻔한 얼굴을 하고!!!! 이 개자식아!!!! 이 깡패

새끼야!! "

또 고개를 젓는다. 미친 듯이. 도대체 내가 여길 왜 끌려왔는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창민은

그제야 무언가 의문점을 느꼈다. 그러고보니 이 남자... 손을 쥐어보았다. 총을 잡아본 적이

Page 345: Happy Together

없는 손이다. 약간의 굳은 살이 배기긴 했지만, 마피아 조직원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

게 깨끗하다. 총을 오래 잡았던 사람들이 가지는 굳은살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게다가

이 남자의 소지품 검사에서는 의심이 될만한 그 무엇도 나오지 않았다. 총도, 칼도, 무기도.

" 자결하지 않을 자신, 있나. "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재중의 행동에, 창민이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손을 뻗어

재중의 재갈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 이게 무슨 짓이에요?!?!!!! "

재갈을 풀자마자 쏟아지는 재중의 비명에, 창민 뿐만 아니라 유천도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짓이라니? 그것이 지금 보스의 연인일지도 모르는 자가 할 수 있는 소리인가? 설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른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 나를 여기 왜 잡아왔어!!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하고 이렇게 재갈부터 물리면 어쩌자는

거야!! 당신들 검찰이라며!!! 사람에게 인권이 있다는 기본 지식도 없나?!! "

" ... 허튼 수작 부리지 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도, 그 대가리 잘못 굴리면 바로 구멍

나는 수가 있어. "

화를 삭힌 유천이 나즉히 말했다. 떨리는 몸을 숨기고, 유천을 노려보았다. 저 남자의 눈은

진심이다. 정윤호와 마찬가지로.. 저 남자도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태야. 제 정신이

아닐 거다. 아마 윤호도 저런 모습이겠지... 정윤호, 보고 싶어. 그러니까, 널 보기 위해서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 최선의 거짓말을.

" 대가리에 구멍? 너야말로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아무 죄도 없는 내가 입에 재갈이 물린

걸로도 부족해서, 지금 이런 이상한 방에 갇혀있어. 나야말로 너희들 고소할 수 있어. "

" 지금, 본인이 K 카르텔의 조직원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가...? "

" 난 그딴 게 뭔지도 몰라!!!! 당장 여기서 나가게 해줘!!!!! "

뭐야, 이건...! 창민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켰다. 지금 이 남자는 자신이 한인

마피아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자는 분명히 놀이동산에서 범인과 함께 있었어.

그것도 연인사이라고 하면서.

" 이 자와 놀이동산에서 만난 적 있지. "

" ... 맞아. "

" 그 때 당신과 함께 있던 남자, 연인이 맞나? "

Page 346: Happy Together

" 맞아. 그게 어때서? 지금 내가 게이라는 이유 때문에 잡혀 온 것은 아니겠지? "

당당하게 자신에 맞서며 눈을 부라리는 재중에게 할 말을 잃었다.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

르게 흘러가고 있다.

" 이 새끼가 지금 구라를 치잖아요!!!!! "

" 가만히 있어, 박 형사!! 그렇게 소리 지를거면 나가!!!! "

" ... 너, 구라까지 마. 아가리에 총 쑤셔넣기 전에. "

유천을 저만치로 밀어낸 후, 창민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후우... 어디서부터 정리를 할까.

" 우리 측 입장부터 말하지. 당신의 연인, 이름이 어떻게 되나? "

" ....... "

내가 너의 이름을 말해도 되는 건가. 잘 모르겠다. 다만, 정윤호의 이름을 말해도 그는 아무

런 신상명세도 나오지 않아. 그가 했던 말이 맞다면... 정윤호는 대한민국 어디에도 흔적이

없으니까.

" 정윤호. "

" 뭐? "

" 정윤호야. 그의 이름이. 그런데 그게 어째서? 무슨 문제라도 되는 건가? "

" 그래. 정윤호. 그 남자는 K 카르텔의 보스야. 내 추측이 맞다면. 그 남자는 현재 연속

살인

의 유력한 용의자다. 검찰이 좆빠지게 찾고 있는 남자라고. 그런 남자를 연인으로 둔 네가

K 카르텔의 존재를 모른다고 말하는 건가, 지금? "

" 모른다고 했잖아!!!! 그는 나에게 학생이라고 했어!!!! 아주 우연히 만났다고!!! "

" ......... "

" 사랑하는 사이가 맞지만 나는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몰라!! 학생이고!! 나이가 몇 인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해!! 우연히 게이 바에서 만나서 사귀게 되었어!! 그게 다라고... 그는

나에게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어.. 그저 학생이라고 했어..

그런데 지금, 그가 카.. 뭐, 조직의 보스라고? "

설마 들키지는 않았을지. 재중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자신이 더 놀란 척을 했다.

연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같은 조직원이라고 판단지을 수는 없다. 심증이 있어도

물증이 없으면 불가능해.

" ... 당신의 연인이, 마피아단의 보스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

Page 347: Happy Together

더 당황한 표정의 창민이 채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비벼끄며 물었다.

" 마피아의 보스...? 정윤호가 마피아의 보스라고 말하는 거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

" ......... "

" 난 아무것도 몰라.. 그저 그와 우연히 만나서 사귀게 되었고.. 그게 다야. "

" 그럼, 그 클럽에는 왜 갔어. "

" 그건.... "

재중은 잠시 망설였다. 당신들을 살리기 위해서 갔어.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지.

재중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유천이 바로 앞으로 튀어나왔다.

" 저거 봐요!! 거짓말 하니까 제대로 말 못하잖아!!!! "

" 개인적인 일이라 꺼리는 것 뿐이야. "

어떻게서든 시간을 벌자. 뭐라고 변명해야 저들이 속을까... 뭐라고...

" 말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 말 못 믿어. "

" ... 그에게 전화하니까, 클럽에 간다고 했어요. 내가 그런 곳 싫다고 가지 말라고 하니까

굉장히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꼭 가야 한다고 했어. 왜, 당신들도 알잖아. 클럽에서

그럭저럭 춤 추다가, 남자든 여자든 한 명 끼고 빠져나가서 원나잇 하는 거 쉬운 일인 거.

걱정되고 의심되서 몰래 따라나갔어. 여기까지 내가 말해야 되는 건가? "

" 웃기지 마!! 그걸 우리더러 믿으라고?!?!! "

" 믿기 싫으면 믿지 마!!! 이 세상에 자기 연인이 바람 피울까봐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나 밖

에 없을 줄 알아?!! 당신은 연애도 안 해?! 남의 연애사를 믿던 말던 난 관심 없어!!!! "

이 남자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정말로 모르는 얼굴을 하고서, 거짓말이라고는

전혀 모를 것 같은 깨끗한 얼굴을 하고서...

" 못 믿겠어? "

"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어. "

" 나는, "

재중은 침을 삼켰다. 심장이 진정되었다. 맥박도 정상적으로 뛰고 있다. 이렇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다니. 그것도 검사나으리 앞에서... 마피아의 안주인 노릇 톡톡히 하는

구나.

" 얼마 전에 사법 고시를 통과했어. "

" ... 뭐?! "

Page 348: Happy Together

" 당신의 후배라고, 검사 나으리. 내 꿈이 뭔 줄 알아? 당신처럼 되는 거야. 법조인이라고.

그런 내가... 연인이 깡패 새끼라는 사실을 알고서 가만히 있었을 것 같아?! "

" 거짓말 하지 마!!! 나에게 분명히 학생이라고 말했잖아!!!! "

" 처음 만난 사람에게 고시 패스했다는 자랑이나 늘어놓는 성격은 아니니까. "

" 검사님!! 저거 다 거짓말이에요!!!!! 씨팔!! 똑바로 말 안해!??!!! "

" 저딴 새끼가 형사란 말야..? 이봐, 내가 검사였으면 당신 같은 형사는 바로 전출이야.

알아?

깡패보다 더 깡패 새끼 같은 주제에.... "

" 박 형사!! 키보드 내려놔!!!! "

키보드를 뜯어 올리려는 유천을 자제시키고, 창민이 그의 팔을 끌어 문 밖으로 내보냈다.

" 지금 당장 나가서, 이 남자의 신원 조사를 해와. 그럼 알 수 있을 거다. 이 남자가 한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

" 검사님!!! "

" 이 남자가, 진짜 조직원이 아니라면 신상명세를 확인할 수 있어. "

" ......... "

" 기억하지? K 카르텔의 조직원들은, 주민등록증도, 그 아무 흔적도 없는 놈들이야. 만약에

이 남자의 말이 맞다면... 이 자는 신상명세가 뚜렷히 남아있을 거다. "

" 우리 준수요... "

" 그래, 네 준수 반드시 구해줄 테니까 나가서 조사하도록 해. 그리고, 지금부터 시내에 몽

타주를 뿌려. "

유천을 밖으로 내보내서야 비로소 조용해진 기분이다. 창민은 의자에 다시 털썩 앉고는

뚫어지게 재중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인가... 아닌가, 나도 구분하지 못하겠다.

" 거짓말 탐지기라는 거 있다며, 검찰에. "

" ......!! "

" 의심가면 그거라도 써봐. 난 떳떳하니까. 결백해. 내 신원조사를 한다고? 그래, 해 봐.

얼마전에 사법 고시를 패스하고, 유명 모 대학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김재중에 대한

조사가 쫘악 나올 테니까. 내가 뭐 아쉬운 것이 있어서 깡패 새끼를 숨겨 놔? 당신들보다

더 비참한 기분은 나야.... 난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연인이 깡패라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

" ......... "

" 정윤호가 지금까지 나에게 거짓말한 사실을, 여기서 알았다고. 내 말 알아먹어?! "

거짓말 탐지기는 호흡이나 혈압, 맥박의 신체적인 변화를 기록하는 기계다. 거짓말을 하게

되면 불안감 때문에 신체적인 반응이 일어나고.. 이것을 기계가 기록하지. 그러나 지금 내게

거짓말 탐지기를 쓴다고 해도, 발각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 난 지금 너무 태연하니까.

스스로

믿기지 않을 만큼, 잘 해나가고 있다.

Page 349: Happy Together

절대로.. 들켜서는 안 돼. 내 거짓말이 성공한다면, 나는 죄 없는 시민이 된다. 그들 앞에서

유유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어...

- 너는 처음부터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사람이니 흔적을 모두 없앨 수는 없겠지만, 주민

등록증과 네가 다닌 학교의 기록 정도만 남기고 모든 기록을 말소할 거다.

윤호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내 모든 흔적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 기록은 남아있다.. 내가 K 카르텔의 조직원이라는 증거는 찾을 수 없어. 재중은 편안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그 말을 곱씹으면서.

* * *

자신은 사람을 죽일 뻔한 적이 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낯선 사람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의 밑에 깔려 눈이 뒤집힌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 때의 공포를 사

람들은 알까? 사람들은 모두 내가 무섭다고 했다. 나의 부모님마저 내가 무섭다고 했다.

자고 일어나면, 내가 밤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모두가 내가

무섭다고 했지만... 정작 세상에서 나란 사람을 가장 무서워했던 건, 바로 나였어. 귀신도,

살인범도, 나에게는 두번 째였다. 내가 잠든 그 시각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고쳐지지 않는 병도, 낯선 사람의 목을 조르고 있는 내 손이 두번 째다.

지금 이 순간이 첫번 째야.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시간. 나에게 증오를 품은 자들이 주위에

서있고, 빛이라고는 실낱처럼 들어오는 이 어둡고 습기찬 방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 사형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태어나서.. 이렇게 무서웠던 적은 없었어.

" 이거, 보여? "

지하 독실로 끌려오자마자 자신의 양 어깨를 잡은 사내들이 두 손을 뒤로 묶어버렸다. 두

다리도 묶어버린 채 의자에 앉혔다.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다. 비명을

지를 권리마저 빼앗긴다면, 정말로 기절할지도 모른다. 준수는 자신의 앞에 떨어진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몽타주... 그의.. 몽타주다.

" 어떻게 된 걸까, 한참을 생각했다. 분명히 너는 놀이동산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했었고..

나는 그 사실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어. "

또박.. 또박. 걸어오는 그의 발걸음이 너무나 공포스러워, 준수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나 자신의 뒷머리를 바로 낚아챈 윤호의 거친 행동에 비명이 튀어나왔다. 손에 쥐고

Page 350: Happy Together

있던 총으로 준수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 엄청난 고통은 비명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피...

검붉은 피가 흘러내려 입술을 적셨다.

" 네가 알고 있는 것. 그대로 다 말해. "

" 아... 아으.... "

" 말해봐, 내 살인을 봤어? "

" 아니에요.. 아니... "

의자가 완전히 쓰러졌다. 덩달아 쓰러진 준수의 배 위에, 윤호의 발길질이 가해졌다. 비명

을 지르고 그의 바지 끄트머리를 잡아봐도, 그는 마치 더러운 것을 보는 냥 그렇게 노려보며

걷어차기만 했다. 속에서 터진 피가 입 안에서 주륵, 흘러내렸다.

" 클럽 안에는 형사들이 가득했다. 마치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너는 내 살인을 보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건 또 무슨 개 소리일까.

너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 내 얼굴을 똑똑히 봤어. 틀려? "

" 아니에요.. 흐윽... 살려.. 살려줘..... "

병신같은 새끼. 나약한 새끼. 두려움에 자신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도 모를 거다. 윤호는

그의 목을 한 손으로 쥐고 반쯤 일으켰다. 이미 더러워진 그 얼굴은 눈물과 피범벅으로 가득

했지만 안쓰러움이라곤 들지 않았다. 너 때문이야. 모두 너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어.

" 죽여버리기 전에 말해. 내 인내심은 한계가 있어. 나는 지금 김재중이 그 새끼들 손에

잡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너를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싶어. 알아? "

" 흐..... "

" 네가 알고 있는 것, 그걸 다 말해. "

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상처난 부위를 손으로 짓누른 윤호가, 준수

의 복부를 다시 사정없이 걷어찼다. 발길질이 가해질 때마다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차라

리 기절해버렸으면 좋겠어.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차라리...

박 형사.. 박 형사... 나 살려줘.

" 저는... 저는... "

" ......... "

Page 351: Happy Together

" 몰라요... 흐윽... 검사님이... 그랬어요... 흑... 검사님이 갑자기 몽타주를 가지고

왔어요..

범인의 몽타주라고.. 흐으윽... 놀이동산에서 우리가 봤던 사람이 범인이라고.. 살인자라

고... 흑... 제가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니까... 흐으윽...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

" ........ "

" 그게 다에요... 살려줘요.... 죽기 싫어요.. 정말 내가 알고 있는 건 그게 다에요..

흐윽...

검사님이.. 그랬어요..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그러니까 잡을 수 있다고... "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어째서?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 목격자의 이름, 얼굴, 직업까지. 이

게임에서 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형사들은 우리를 미리 기다렸으며

이 몽타주는 도대체 뭐지. 내가 그를 죽일 때 입었던 옷과, 나의 얼굴. 모든 것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네가 목격자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이 정보를 검찰에게 전해줬어...

" 넌 나를 봤어. 그런데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지. "

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울 뿐이었다. 그에게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시키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에게 몽유병이라고 말한다면

믿지도 않을 거야...

" 살려주세요.... "

그저 싸늘히 쳐다보았다. 다른 건 다 집어 치우자. 이 새끼 때문에 이 지경이 됐어.

김재중이,

무엇보다 김재중이 지금 내 옆에 없다. 나 없이.. 홀로 그 새끼들 손에 잡혀 있어. 너 같은

끼 때문에,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어이없이 잃어버린 병신이 되어버렸어.

" 반 죽여 놔. 기절하면 물을 끼얹어서라도 깨워. 자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똑똑히

상기 시켜둬. "

" 네. "

" 1시간 뒤에 돌아오겠다. 그 때엔.. 그들이 원하는 협상을 준비해야겠지. "

뒤돌아섰다. 살려줘요, 제발... 흐느끼는 그의 울음소리 따위 무시했다. 제발, 이라는 말이

통할 시기는 지났다. 저 새끼 하나로 나의 조직원 두 명이 사라졌고, 김재중은 잡혔어.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들고 있던 총을 거칠게 내던졌다. 몇 걸음 더 옮기기도 전에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Page 352: Happy Together

재중아...

* * *

" 그 자의 말이 맞았습니다. "

" ...... "

" 김재중. 자신이 말한 대로 얼마 전에 사법 고시를 패스한 남자입니다. 명문 대학교 법학과

를 수석 입학,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아마도 최연소 고시 패스자 일겁니다. 대단한 인재죠.

정확히 말하면.. 검사님의 후배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

나도 꽤 어린 나이에 고시를 패스했는데... 제대로 머리가 좋은 작자구나. 창민은 김재중에

대한 보고서를 훑어보며 심란한 마음을 다스렸다. 그는 K 카르텔의 조직원이 아닐 수도 있

다. 아니, 상황을 봤을 때에는 아니라고 판정짓는 것이 맞다. K 카르텔의 조직원들은 흔적이

없어. 그들은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FBI가 보내온 자료를 봐도 알 수가

있어.

게다가 카르텔은 뉴욕에서 건너온 마피아다. 하지만 김재중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랐어. 뉴욕에서 마피아 생활을 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 그들에게 연락은 왔습니까? "

" 아직요. "

" 대기하세요. 곧 연락이 올 겁니다. "

그렇다면, 김재중의 말이 맞다는 뜻이 된다. 웃긴 일이다. 마피아의 보스까지 되는 남자가

자신의 신변을 숨기고 평범한 일반인과 연애라...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일이지만 현실에

서 아예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조직 폭력배의 보스들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평범한 여자를 첩으로 두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렇게 된다면.. 그자가 풀어달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텐데요. "

" 아니요. "

" 네? "

" 그건 아니에요. 김재중은 김준수를 데려올 수 있는 마지막 카드에요. 돌려보낼 수야 없지.

"

솔직히 말하자면, 김재중을 붙잡지 못했다면 김준수는 죽었어. 지금쯤 시체가 되어 박 형사

의 앞에 배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 유천이 폭주할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 박 형사는? "

Page 353: Happy Together

" 울어요. "

" 네? "

" 울고 있습니다. 내내. "

후우, 한숨을 쉬고 강력반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보니, 유천

은 구석에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박고 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바로 눈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납치되는 모습을 봤다.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아픈

것을 떠나서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언제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지 모른다는

공포.

" 박 형사. "

흔들어 봤지만 미동도 없다.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온 몸이 힘이 빠진 그는 축 늘어졌다...

눈물로 젖어버린 얼굴이 생소하다. 박유천이 운다, 라.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창민은

안쓰럽게 고개를 저으며 유천의 머리를 살짝 내리쳤다.

" 니네 준수, 안 찾을 거냐. "

" ...... "

" 아직 안 죽었어. "

" 죽는 다는 얘기 꺼내지 말아요. "

" ........ "

" 무서워서 그래요, 나. "

" ......... "

" 눈 앞에서 놓쳤어. 눈 앞에서.. 끌려갔어요. 그 새끼들한테. 내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늘 지켜준다고 말했는데, 약속 못 지켰어요. "

나 같은 게 도대체 왜 살아 있죠.. 검사님. 유천이 나즉히 말하며 눈을 감았다.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하다고 느껴질만큼, 그는 많이 울었다. 준수를 눈 앞에

서 잃어버린 그 순간 부터.

" 많이.. 무서워 했어요. 자신이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사실에. 그래서 옆에서 늘 말해주고

달래줬어요. 화도 냈어요. 왜 무서워 해? 내가 옆에 있는데 왜 무서워 해? 나 못 믿어? 나

못 믿어서 지금 무서운 거잖아... 준수야, 나 믿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그랬는데... "

" 응.. 그래, 다 알아. "

" 그랬는데.. 지금 내 옆에 없잖아.... "

원래 이 시간에는요, 준수가 내 옆에 있어야 해요. 그를 지키는 것이 내 일이잖아요. 열심히

일 하면서, 같이 사랑했어요. 일과 사랑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기만 했어요. 내

Page 354: Happy Together

옆에서 택택거리던 준수는.. 금세 웃으면서 박 형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하면서

안기며

웃었어요.. 준수와 나.. 함께 있어야 하는데... 그가 내 옆에 없어요.

" 많이 사랑해요... "

" ....... "

" 사랑해 준수야... "

담배를 내밀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입에 물고서, 창민은 불을 붙였다. 사랑이라...

" 후우... 기억 나? "

" ..... "

" 박 형사 처음 강력 1반 들어왔을 때, 나한테 그랬지. 검사님. 앞으로 강력반은 제가

접수하

겠습니다. 대한민국 좆같이 만드는 개쉐이들, 내가 다 머리채 끌고 검사님 앞으로 데려올

게요. 그러면 검사님은 품위있게 바라보기만 하세요... "

" ..... "

" 처음의 나랑 많이 닮았어. 내가 처음 검사가 됐을 때, 나는 사실 앉아서 일 하는 것보다는

내가 자신있는 사격 실력 뽐내면서 범인 직접 잡아오는 게 더 좋았어. 가오 살잖아.

거리에

서 총 꺼내면서, 움직이지 마! 강력반 검사다, 그러는 거. 후우... "

안 어울려요, 검사님이랑.. 유천이 조용히 말했다.

" 나도 알아. 예진이도 그랬어. 위험한 일 자처하며 다니지 말라고. 총도 두고 다니라고. 검

사에게 총은 안 어울린다고. 당신은 멋지게 정장 입고서 법원에서 판사님, 어쩌고 저쩌고

하는 모습이 더 멋지다고.. 그녀가 그러더라. "

" ...... "

" 말 오지게 안 들었지.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인데도, 난 그게 싫었다. 늘 총 가지고

다니면서

험한 사건이나 끼어들고 몸에 상처만 내고 돌아왔었어. 예진이가.. 많이 울었었어.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

" 약혼녀... "

" 알았어, 이제부터는 당신 말대로 할게. 그렇게 약속하기로 했어. 그 날 저녁에 예진이

만나

멋진 곳에서 밥 먹으면서... 앞으로 결혼하면, 당신이 바라는대로 품위있는 검사나으리가

될게. 응... 그날 마지막으로 내가 총을 가지고 나갔었지. "

" ...... "

" 그리고 그 날, 사고가 터졌어. 그렇게나 그녀가 싫어하던 총으로.. 그 사람 죽이고.. 나는

지금 이제까지 살아있어. "

Page 355: Happy Together

후우우- 담배 연기가 길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눈을 깜빡이며, 유천이 멍하니 허공만 응

시했다.

" 나, 되게 많이 힘들었을 것 같지. "

" .... 네. "

" 응. 맞아. 죽지 못해서 살았다는 표현이 맞아. 예진이 내 눈 앞에서 죽는 거 보고, 온

몸에

힘이 풀려 쓰러지는 바람에.. 그 자리에 있던 범인도 놓쳤어. "

" ......... "

" 박 형사처럼, 눈 앞에서 놓쳤어. 내 바로 앞에 총이 있고.. 내 눈 바로 앞에 범인이

있는데. "

" ......... "

" 나 알거든. 박 형사 마음이 어떤지 알아. 하지만 박 형사는,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잖아. 살아서 박 형사가 구해주길 기다리고 있잖아. 응? "

그런데 나는 없어. 구해주고 싶은 그녀도 없어. 그러니까... 나보다는 박 형사 처지가 훨씬

낫다는 소리야. 힘내. 당신보다 힘든 사람, 깔리고 깔렸어. 바로 곁에 나도 있고.

" 곧 연락이 올 거야. 그 자들이 뭘 원하는지 직접 들어야지, 안 그래? "

" 그래... 야죠. "

" 나는 박 형사 아껴. 내 옛날 모습이랑 많이 닮았어. 나도 박 형사처럼 엄청 다혈질인거

알고 있지. 성질 죽이면서 살고 있는 거야. "

" ....... "

" 박 형사 아껴서, 박 형사 사랑도 같이 아껴. 그러니까 나도 최선을 다해서 준수 씨 구해.

혼자 용쓰는 거 아니야. 곁에 나도 있고, 다른 형사들도 있어. 김준수 아직 안 죽었어.

마치 장례식 온 표정으로, 세상 다 끝난 표정으로 그렇게 맥아리 없이 앉아있지 마. 보는

사람 답답하니까. "

" 죄송해요.. "

" 알았으면 그만 일어나. 일 안 할 거야? 니 사람, 안 구하냐? "

창민이 유천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구해야죠... 내 이름 수 천번도 더 불렀을텐데..

대답

해줘야죠. 응, 그래.. 우리 준수. 박 형사가 간다. 내가 너 사랑하니까... 너 구해.

.

.

.

" 조사는 해 봤어요? "

재중은 여유로운 표정이다. 떨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히 사법 고시 패스부터 시작해

법학과 수석 졸업이라는 타이틀까지 나왔을 테니까. 거짓말로 인한 두근거림조차 없었다.

Page 356: Happy Together

" 당신 말이 맞았어요. 미안해요. 오해한 거. "

" 그럼, 전 이제 가도 되는 건가요? "

" 아니. "

단호한 창민의 말에 재중이 눈을 치켜떴다. 왜요?!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왜 여기에 갇

혀 있어야 해!

" 정윤호, 사랑해? "

" .... 네? "

" 네 연인은 살인의 용의자야. 그리고 현재 인질을 잡고 있어. 그런 남자.. 사랑해요? "

" 그런 개인적인 질문에 대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 정윤호의 집이 어딘지는 알아? "

" 몰라요. "

" 주로 어디서 만났지? "

" 그의 차. "

" 차 번호는? "

" 몰라요! 우린 깊은 관계 아니였어요! 오래 만나지도 않았어!! 나한테 꼬치꼬치 묻지 마요!

나는 정말로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어!! "

창민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어쨌든간에 이 남자는 우리 측에서는 중요한 카드다. 재중은

다시 뛰는 자신의 빠른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사랑해요... 내가 그런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살인을 눈 깜짝하지 않고 저지르는 잔혹한 남자를. 저 남자의 연인을 납치하고 죽이

려 드는 그 잔인한 남자를. 나에게만 다정한... 냉혹한 마피아를. 그런 남자를 사랑해서,

나는 이렇게 거짓말로 나 자신까지 완전히 속이고 있어. 오로지 사랑만 보고. 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지... 이것까지 순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사랑의 범위는 정말로 없는 거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우리 측, 도와줘요. "

" ... 네? "

" 당신의 애인이 마피아야. 지금 여기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면, 당신은 살인 방관죄나

마찬 가지야. 당신이 이대로 가버리면.. 정윤호 측에서 붙들고 있는 인질이 죽이요. 그가

인질을 죽이지 않는 이유는 단 한가지야. 당신 때문에. 우리가 당신을 잡고 있어서. "

" 내가 왜.. 도와줘야 하죠...? "

" 사법 고시를 패스했다며.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남자가, 지금 살인을 방관하겠다는

건가?

당신은 앞으로 나 같은 검사가 되어서 검찰에서 일하는 것이 목적 아니야? 왜, 냐는

질문이

필요한 건가? 나는 지금 당신에게 어울리는 일을 하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뿐이야. "

흔들림 없는 창민의 시선에 재중이 입술을 깨물었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Page 357: Happy Together

" 나보고... 내 애인의 적을 도우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잖아!! "

" 깊지 않다며. "

" ......... "

" 당신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 깊은 관계 아니라며. 그렇다면 망설이지마. 깊지도 않은 관계

의 애인 때문에, 당신의 장래까지 망치지 말라는 소리야. 지금 우리를 도와주면 당신의 앞

날 튼튼하게 내가 보장할게. "

" 나는... "

" 곧 그들에게서 전화가 올 거야. 당신이 직접 설득해. 인질 풀어달라고. "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 남자의 말이 맞다. 내 거짓말이 아무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

다. 내 입으로 정윤호와 깊은 관계가 아니라고 말해버렸으니. 사실은 끝도 없이 깊은데.

" 그럼 그렇게 알게요. 함께 나가죠. 김재중 씨. "

현기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재중은 그 정도로 나약한 남자는 아니었다.

당황하기는 하지만 흔들리지는 않았다.

정윤호... 당신은 도박을 좋아한다고 했지. 위험한 도박을 즐긴다고 했어.

나도 한 번 그래볼까 해.

" 검사님! 전화입니다! "

다른 형사의 긴박한 목소리에, 유천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갔다.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창민은 느슨하게 묶여 있던 타이를 아예 풀어서 던져버렸다. 그리고 앞에서 멍하니

서있는 재중에게 눈짓했다.

" 나와요. 당신 애인 전화야. 최선을 다해서 우리 도와줘요. "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24

" 여보세요? "

Page 358: Happy Together

발신 추적기는 3분이 지나야 위치 추적이 가능하다. 그러나 애시당초 이 기계에 희망을 걸

고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최대한으로 대화를 이끌어도, 기껏해야 어느어느 지역이라

는 아주 간단한 정보만이 나올 것이 뻔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카르텔의 모든 전화기에는

웬만한 위치 추적기를 무시할 수 있도록 손질이 되어있는 상태였으므로. 창민은 조심스럽

게 수화기를 들었다. 자신이 받겠다고 막무가내로 소리 지르는 유천을 떼놓으라, 조금 늦긴

했다.

-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지.

" 아니, 괜찮아. 기다리는 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으니까. 당신들이 버리고 간 불쌍한

남자 덕분에. "

상대방이 조용하다. 동요하고 있다는 뜻이다. 생각보다 김재중이란 자가 정윤호에게 미치

는 영향이 큰 것 같다. 창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통화 내용이 잘 녹음되고 있는지 확인했다.

통화 내용은 스피커를 통해 다른 형사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의 연인을 납치해 간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천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인질은 무사한지, 그것부터 확인하게 해줘. "

- 물론 무사해. 너희들이 잡아간 녀석은 무사하겠지. 걱정하진 않아. 청렴결백한 대한민국

검찰들이 잡아두고 계시니까.

" 그 남자라면, 우리 측 형사가 개패듯 패놔서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이야. 죽진 않았으니까

걱정하,

- 지금 이 자리에서 인질을 죽여버릴 수도 있어.

그가 극도로 동요한다. 소름끼치도록 서늘한 윤호의 목소리에, 자리에 있던 남자들이 순간

긴장했다. 이 남자의 말은 진심이다. 안 돼... 자그맣게 중얼거리며 창민의 수화기를 뺏으려

달려드는 유천을 또 간신히 진정시켰다.

" 분위기 좀 풀어보려고 농담 한 거야. 너에게 대단한 자인가 보지? 김재중이? "

- 그래.

윤호야... 불안한 눈빛으로 서 있던 재중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창민은 긴장하지 않고 천

천히 말을 이었다. 우선은 인질의 신변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 김준수를 바꿔줘. "

- 김준수는 무사해. 죽지'는' 않았어.

" 죽지는 않았다니, 어감이 이상한데. "

- 말 그대로야. 죽이지는 않았으니 안심하라는 얘기야. 심장도 뛰고 있고 맥박도 뛰지. 물론

불안정하긴 해.

" 수화기 내놔요!!!!! "

Page 359: Happy Together

말릴 새도 없이 창민에게서 수화기를 뺏어든 유천이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르며 울먹였다.

죽이지는 않았다니? 범인들의 저런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우리 아이는 살아있어? 부모들

이 납치된 아이들의 안부를 물으며 울부짖으면, 범인들은 태연하게 저렇게 말하곤 했다.

죽이지는 않았으니 안심해. 절박한 심정으로 수화기를 붙드는 어른들을 보면서, 그저 안쓰

럽고 안타깝기만 했다. 분노가 치밀기도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지.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기에, 그 마음을 절절이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죄 값이라고 하기엔 너무 하잖아.

" 이 개자식아!!!! 김준수 바꿔!!!!! "

" 박 형사!!! 수화기 내놔!!!! "

" 준수 바꾸라고!!!! 당장 바꾸지 않으면 김재중 저 새끼 죽여 버릴 거야!!! 개새끼야!!!! "

" 박유천!!!!! "

순간 조용해지는 주위. 전화가 끊겼다. 창민은, 끊어져버린 수화기를 들고 멍하니 서 있는

유천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 다시 한 번만 지랄해. 김준수 죽어도 난 몰라, 미친 새끼야. "

" ........ "

" 휴게실에서 내가 한 말 잊지 마. 내가 구한다고 했으면 구해. 걸리는 시간에 급급해서 지랄

할 거면 지금 나가. "

" .... 검사님.. "

하긴,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들어먹지 않을 거다. 창민은 수화기를 다시 내려놓고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렸다. 김재중 저 새끼 죽여 버릴 거야, 유천의 말 한 마디에 전화가 끊겨버렸어.

김재중은 자신의 입으로 정윤호와 깊지 않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정윤호에게는 아니야. 이

자는 생각 이상으로 그에게 중요한 남자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

.

.

" 보스... "

으스러진 뼈를 끌어 안고, 준수가 간신히 숨을 내쉬며 윤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총구도. 이제는 두려움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아프다, 오직 그 느낌만이 준수의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이렇게 죽기 일보 직전까지 맞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살면서 이보다 더 큰 육체적 고통

은 맛 볼 일이 없을 테니까. 완전히 장전된 윤호의 총이 흔들린다.. 준수는 눈을 감았다.

Page 360: Happy Together

" 사실이 아닌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 김재중이.. 다른 이가 농담으로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쉬워? "

그 녀석은 나에게도 아직 어려워. 그런 사람을, 그들은 마치 농담처럼 죽이고 살린다며 내

앞에서 그의 목숨을 가지고 흥정한다. 이런 개 같은 기분은 정말 오래간만이야.

" 다시 전화를 거십시오. 기다리실겁니다.. 재중 씨가. "

" ...... 아아악!!!!!! "

준수의 뒷목을 잡고 으스러지듯 바닥에 거칠게 누른 윤호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이번에

도 남의 사람을 안주거리 삼을 시에는, 교환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준수를 죽여버릴 생각

이었다. 뭐라든 상관 없어. 그에 대해선 내 인내심의 한계는 창피하리만큼 짧다.

" 박 형사아... 박 형사.... "

시끄러워, 저 입을 막아놔. 윤호의 말에 주위에 서 있던 자들이 재갈을 물렸다. 완전히 닫혀

진 입 안에서, 준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그를 불렀다. 올 거라는 거 알고 있어.

안 믿는 거 아닌데... 빨리 와줬으면 해..

.

.

.

" 여보세요. "

- 다시 한 번만 그 따위로 나온다면 협상은 없어.

" 우리 측 실수를 인정해. 하지만 당신도 똑같이 중요한 사람 뺏겼어. 둘 다 똑같은

마음이야.

그냥 넘어가줬으면 좋겠어. "

- 김재중을 바꿔.

" ...... 그 전에, 김준수는 무사한지 알려줘. "

- 김재중을 바꾸라고 말했어.

어느 한 측이 유리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굳이 꼽으라면 이자들이 우위에 있다. 우

리는 김재중을 어떻게 할 수 없어.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 자들은

틀려. 꼭지가 돌아버리면 그 자리에서 김준수를 어떻게 하고, 엄청난 총기류를 소지한 채 바

로 검찰에 총구를 들이댈 수가 있어. 그렇게 되면 일이 커진다.. 어떻게 서든 막아보자.

" 당신 바꾸래. "

" .......... "

" 우리가 했던 말, 기억하지? "

Page 361: Happy Together

" ...... 알아요. "

" 잘 설득시켜. "

창민은 차가운 눈초리로 재중에게 수화기를 건넸다. 딱딱한 플라스틱의 수화기를 건네 받

으며, 재중은 오만가지 생각을 순식간에 정리해야만 했다.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해. 제발

정윤호가... 내가 그들에게 무슨 거짓말을 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으면 좋겠는데. 재중은

숨을 고르게 쉬고 눈을 떴다. 그리고 수화기를 받자마자,

" 이 개자식아!!! "

- ...... 재중아,

" 네가 뭔데 나한테 엿먹여! 너 때문에 내 입장이 얼마나 난처하게 된 줄 알아?!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어째서 여기서 검찰들한테 심문이나 받아야 해!! 사법고시까지 패스한 내가!

이자들은 이미 내 신상명세를 조사했어. 그건 곧, 내가 K 카르텔의 조직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야. 내 말 알아들어, 윤호야?

- ... 미안해, 재중아.

" 미안하다고 해서 끝낼 일이야!? 왜 나를 속였어!!!!! "

- ... 재중아?

" 마피아라며!! 깡패 새끼라며!?! 처음부터 거짓말로 나 속이고 만난 거였냐?! 학생이라며!!

다 구라친 거였어?!?!!! "

- .......

윤호야, 제발.. 내 말 알아먹어.

" 이 자들이 나에게 네 진짜 직업이 뭔지 알려줬어!!! 내 말 알아 들어?!! 여기서 네가

마피아

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넌 감쪽같이 날 속였어!! "

창민은 벽에 기댄 채,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눈을 붉히는 재중을 바라보았다. 묘한 일이다.

김재중은 마치, 자신이 검찰에서 우리들과 무슨 이야기를 해는지 정윤호에게 전달하는 것

같아. 우리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애써 전달하려는 것 같

은 모습이야.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어쩔 도리는 없지...

- ... 재중아.

" 그래!! 이 개새끼야!!! 할 말 있으면 해 봐!!!!!! "

- 빨리 데리러 갈게. 미안해, 거짓말 한 거.

Page 362: Happy Together

잠시 말을 잊었다. 그는 알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보다,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훨씬 더 크게 그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보지 않

아도 알 수 있다. 가슴이 흔들려서, 재중은 바짓자락을 세게 쥐었다. 재중 씨, 설득해봐요.

옆에 있던 창민이 작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 ... 윤호야, 그 남자 그냥 풀어줘. "

- 왜?

" 왜... 라니, 그게 지금 납치한 자가 할 소리야? 너 지금 죄 짓고 있는 거야, 윤호야. "

- 죄 안 지으면서 살았던 날들이 없었어. 이제 와서 천사표 노릇 할 생각 없다.

" 세상 일에 늦은 건 없어. "

- 그들이 너에게 시켰구나.

" 뭐? "

- 그렇게 말하라고, 너 협박했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 격양된 것 같다. 재중은 불안한 마음에 다급히 외쳤다. 아니야!

" 그런 거 아니야! 나... 나..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죄 짓는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너 지금 엄청난 짓 하고 있는 거야, 윤호야... 그러니까 그 남자 그냥 풀어줘. 그럼 나도,

"

- 씨도 안 먹힐 소리 할 거면 네 말이라도 안 들어. 그러니까 그만 둬. 그들이 시키는대로

하지 마.

더 이상은 말하지 마요- 창민인 손을 저었다. 지금의 정윤호는 심히 감정적을 보인다. 아마

김재중이 검찰의 협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저대로 나가다간 저 화를 낼 거야.

그렇다면 곁에 있는 김준수가 위험해. 창민은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라며 손을 움직였다.

김준수가 무사한지, 그 여부를 물어봐요.

" 김준수는... 무사해? "

- 네가 걱정할 거 없어.

" 무사하냐고 물었잖아!!!! "

- ... 그래.

" 손 끝 하나 대지 않았지...? 건들이지 않았지...? 그 남자, 안 다치고 무사한 거지...?

윤호의 목소리에 금세 심약해진 재중이, 의자에 쓰러지듯 앉고서 고개를 숙이고 수화기를

꼬옥 쥐었다. 난 그를 믿고 있어. 김준수에게 손 끝 하나 대지 않았을 거야.

- 미안해.

" ........ "

" 미안하다니... 그게 무슨 뜻인데...? "

Page 363: Happy Together

구석에서 한참이나 울고 있던 유천이, 윤호의 말에 다시 일어나 비틀거리며 재중에게 다가

왔다. 멈춰, 옆에서 창민이 잡아끌자 이번에는 아무 반항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준수가

무사한지 알려주는 것이 그렇게 힘들어...? 당신 애인은 아무 데도 다치지 않고 이렇게 무사

하잖아. 말짱하게 당신 기다리면서 이렇게 전화 잘 받고 있잖아. 그런데 내 김준수가 무사

하다는 말은 왜 죽어도 하지 않아...

" 윤호야... 정윤호, 준수 씨 무사하니? "

- 아니.

" 바꿔줘요.... 나..... "

" 박 형사, 물러나. 아까처럼 전화 끊기는 사태 일어나면 나도 이번에는 못 막아. "

- .........

" ... 윤호야, "

- 이 남자 때문에 너 그렇게 됐어.

" 나 아무렇지도 않잖아.. 나 멀쩡해, 아무데도 안 아파. 내가.. 내가 뭐가 어떤데... "

- 너 지금 내 옆에 없잖아. 나 없는 곳에서 너 혼자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싸우고 있잖아.

아무 죄도 없는 네가 죄인 최급 받으면서 이상한 눈초리 받고 있잖아.

" .......... "

- 그래서, 이 새끼 반 죽였어.

뭐...? 반 죽였어? 놀란 재중의 시선이 유천과 마주쳤다. 반 죽였어, 죽지 못해 살아있어.

너무나 많이 들었던 말이다. 유천 자신도 그렇게 범인들을 험하게 대해왔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반 죽여버릴 거다, 농담처럼 했던 그 말이 가시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줄 몰랐다.

달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재중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수화기... 나 줘요.

- 재중아,

" 나... 나, 재중이 아니야.

- ..........

" 준수 바꿔요. "

- 박 형사, 맞지.

" ........ "

- 내 조직원을 둘 씩이나 골로 보낸.

" ........ "

- 놀이동산에서 네 자랑은 잘 들었어. 사격에 그렇게 자신이 있다고.

" ........ "

- 내가 그 말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알아? 아하, 그렇게 뛰어난 사격 솜씨라서

내 부하를 한 번에 골로 보냈구나. 유언마저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빨리 죽였구나.

" 죽이지 않았으면 준수가 죽었어. "

- 그 말은 지겨워.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검찰이나, 깡패 새끼나.. 사는 건 다 똑같아.

안 그래?

그래.. 그래, 다 알았으니까 준수 바꿔. 이제는 기다리기도 지친 그의 눈물이 자꾸만 흐른다.

곁에서 지켜보던 재중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손등으로 틀어막았다. 놀이동산에서 두 사람을

Page 364: Happy Together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더라. 참 예쁜 커플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와 남자가 아닌, 사람과 사

람이라고. 두 사람이 사랑에 끌려 만나, 참 예쁘게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서 부러웠다. 나는

저렇게 평범한 연애 하면서 살 수 없겠지.. 질투가 나기도 했었어. 그런데, 그게 다 끝났어.

그것도 마치 나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처럼 죄책감이 든다. 내가 그 사랑을 깨트려놓은 것

같아서 고개도 들 수 없을 만큼, 이만큼 죄책감이 들어.

" 이봐요... 아까부터 내가 한 가지만 부탁하잖아.. 준수요.. 준수 무사해요....? "

울지 말아요. 그렇게 밝게 웃으면서 사랑하는 사람 이름 불렀던 남자가, 내 앞에서 울지 마.

마치 내가 당신들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잖아. 나 때문에 지금 당신 애인 처절하게 울고

있는 것 같잖아...

- 김준수, 네 전화야.

" 준수야, 내 말 들려? "

.

.

.

사실은 그것이 유천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의 목소리인지 분간할 힘조차 없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구타로 거의 정신을 놓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입을 열어도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끄윽 거리기만 했다. 한참을 수화기 앞에서 끅끅대는 준수를 보고,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물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 준수야... 내 말 들려? 형이야, 괜찮아?

아... 박 형사다. 거의 놓을 것 같은 정신을 간신히 똑바로 세우고 앞을 보게 했다. 그래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억지로 쥐어짜니 끄윽대는 것이 다였다. 곧 준수의 얼굴 앞에

놓인 물컵이 그의 입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목구멍을 적셨다. 물인지, 피인지 알 수 없는

비릿함에 얼굴을 찡그렸으나 뱉지는 않았다. 지금은 무엇이라도 삼키고 목을 뚫어서 소리

를 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 박 형사... "

- .... 너 목소리가 왜 그래?

" 흐... 박 형사... 나 아퍼... "

- 그 새끼들이 어디 때렸어, 많이 때렸지, 많이 아프지... 흐으... 준수야아.. 어디가 그렇게

아파서 병신처럼 울고 있어어....! 준수야아아...

" 아픈데, 아픈데에.. 참을 수 있으니까.. 빨리 와.... 내가 못 참을 때까지 기다리게 하지

마..

빨리 와... "

- 응, 형 빨리 갈게. 니네 박 형사, 날아서 갈 테니까 조금만 참아, 응? 준수야...

Page 365: Happy Together

" 보고 싶어.... "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입을 닫았다. 혼미스러운 정신을 세워 보려 했지만 이번에는

무리다. 되지 않는 것에 미련을 가지는 성격은 아니다. 준수는 수화기를 떨어뜨리듯 내려놓

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쉬고 싶어, 그가 올 때까지... 쉬고 싶다. 눈을 뜨면 그 사람이 내

에 웃으며 손을 벌리고 서 있었으면 좋겠어. 그 때까지, 나 좀 자게 내버려 둬요..

.

.

.

" 준수야? 준수야아.. 김준수우.. 김준수!!! 대답해봐! 응...? 준수야.. 흑... 김준.. "

- 신파는 거기까지 찍어.

" .... 우리 준수가, "

- 그만 닥치라고 했어.

차가운 것도 정도가 있고, 냉정한 것도 정도가 있다. 유천과 준수의 통화를 바로 곁에서 듣

던 재중이 입술을 깨물었다. 서로 떨어져 있는 연인이 울부짖으며 목소리를 찾아 허덕이는

데, 저것을 바로 곁에서 듣고서 하는 말이 고작 뭐..? 신파는 거기까지 찍어?

" 너 진짜... "

넌 진짜 나와는 다른 사람이구나. 아니,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구나. 네가 다르다는 것

은 이해한다. 어려서부터 넌 나와 다른 환경에 자랐어. 어린 나이에 네 어머니가 죽는 모습

을 봤고, 네 손으로 양아버지를 죽일 만큼 피를 온 몸에 묻히고 살았어. 그게 불쌍하고 안타

까웠다. 왜냐면 널 사랑하니까. 네가 살인을 하고 아무렇지 않아 하는 모습까지 슬펐었다.

왜냐면 너를 사랑하니까. 그렇게 감정이 죽어버린 네가 불쌍해서.

" 수화기 줘요. "

준수의 옷깃이라도 되는 듯 수화기를 꼭 붙들고 있던 유천에게서 그것을 빼앗았다. 흐느

끼며 바닥에 주저앉는 그의 곁으로 창민이 다가가 일으켰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더

는 볼 수가 없어서, 재중은 손에 힘을 주고 또박한 목소리로 그에게 전했다.

"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다 진심이니까. "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내 진심이야, 윤호야. 너 같이 눈물을 모르는 사람에겐 어떤 말을 해

도 먹히지 않겠지만, 적어도 네가 사랑하는 내 말이라면 귀를 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해 봐.

Page 366: Happy Together

" 그 남자에게, 앞으로 손가락 하나 대지 마. "

- 재중아, 이 남자 때문에 네가...

"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어. 똑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삼류 양아치 새끼나 하는 짓

나를 핑계로 하지 말란 말이야. 나 욕먹이지 마. 내 핑계 대면서 양아치 흉내내지 마. "

- 재중아...

" 내 이름 당당하게 부르고 싶으면, 너도 당당하게 나와. 그 남자 더 이상 건드리지 마. "

- .......

" 너한테, 실망하게 하지 말란 말이야. "

윤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주위는 조용했다. 언제 끊길지 모르는 통화만이 이어질 뿐이

다. 순간, 발신 추적기를 확인하고 있던 형사 한 명이 눈을 치켜뜨며 창민에게 조용히 손짓

했다.

" 응? "

" 아주 약간이지만, 잡힙니다. "

" ... 추적이 돼? "

"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워낙 긴 통화이다보니 미미하게나마 위치는 잡히는 것 같아요. "

" 지역은.. 지역이라도 알 수 있나? 수도권 안은 맞는 거지? "

" 판교 쪽입니다. "

" 판교.... "

- 1시간 후. 남산타워 아에서 인질을 교환하도록 해. 똑똑히 들어둬.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우리 손에 있는 이 자를 죽이겠다.

" 정윤호!!!!! "

-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총으로 너희들 대가리를 벌집으로 만들어놓는 한이 있더라도,

김재중은 다시 데려갈 거야. 서로에게 무엇이 최선의 방법인지 똑똑히 생각해봐.

전화는 끊겼다. 이제 더 이상 걸려오지 않을 것이다. 재중은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래... 너는 이런 식으로 나를 사랑하는 남자야. 이런 식의 사랑을 선택한 것도

나고, 내가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니. 양심도, 뭣도 다 버리고 사람을 인질로 잡아 죽도록

패고 말도 못하게 만들어 놓은 너를 내가 사랑한다는데. 그래도....

" 준수야.... "

" ... 미안해요, "

" 흐윽... 말도 못해요.. 우리 준수가.. 말을 제대로 못해..... "

"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 "

사람의 눈물을 보면서 함께 울어줄 수 있다는 것이, 내 최후의 양심이다...

Page 367: Happy Together

" 모두 잘 들었지?! 1시간 후 남산 타워야. 그자들도 홀몸으로 나오진 않을 거다! 모두 자기

한 몸 챙길 마인드는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강력반 형사 모두 남산 타워로 집결해! "

분주해지는 강력반 속에서, 창민은 제정신이 아닌 유천을 벽에 세워두고 그의 총을 손에

쥐어주었다. 난 이걸 정말로 안 좋아하지만, 오늘은 왠지 이것이 꼭 필요한 날이 될 것 같아.

" 나한테 뭐라고 그랬지? "

" .......... "

" 우리 준수, 내가 지킬거에요. 박 형사가 나한테 그랬어. "

" ... 그럴.. 거에요. "

" 그래. 알고 있으면 지금 당장 나가. 가서, 네 손으로 구해와. "

눈이 죽어있지 않아서 다행이야. 총을 잡는 유천의 손에 힘이 들어가서 다행이다. 창민은

그의 어깨를 툭 치고 강력반 밖으로 내보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아직 아무것도 모

른다. 다만... 전력을 다해 누군가를 구하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결과는 두렵지 않을 거다.

" 유 형사. "

" 네? "

" 유 형사는 가지 말고 남아. "

" 하지만 모두.... "

" 부탁할 것이 있어. "

" 부탁이라면..... "

창민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판교 지역의 부동산 목록을 그에게 내밀었다. 어쨌든

지역은 알아냈다. 인질을 잡아 구타할 정도라면, 틀림없는 자신의 공간이 확보 되었다는

얘기다. 게다가 뉴욕에서 건너온 '마피아'라는 이름을 단 조직단이, 허접쓰레기 같은 곳에

거처를 마련하진 않았을거란 말이지... 분명히 그들의 아지트가 있다.

" 뉴욕에서 대거로 불법 침입자들이 몰려왔어. 보스와 조직원들 간의 사이가 친밀하다면

사는 곳도 친밀하다는 뜻이야. 그렇다면 커다란 건물을 구입했을 가능성이 높아. 1년 안에

빌딩류의 건물을 매입한 사람들의 명단을 뽑아놔. 가짜 신분으로 땅을 샀다고 해도, 무언

가를 '샀다'는 흔적은 분명히 남아있어. 그걸 찾아내. "

" 알겠습니다. "

" 분명히 나올 거다. 그들은 귀신들이 아니야. 흔적은.. 지우다 보면 얼룩이 남는 법이니까.

"

* * *

Page 368: Happy Together

" 기절했어? "

" 네. 아마 깨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 ... 손 발은 푸르게 하고, 독방에 가둬. 감시자는 붙이되 손은 대지 말라고 해. "

" 예. "

" 먹을 것도 좀 넣어둬. "

축 늘어진 준수를 내려다보다가 독방을 나섰다. 차라리 기절한 것이 다행이다. 또 그 지긋

지긋한 살려주세요, 를 듣지 않아도 되니까. 홀에 가득 모인 조직원들 앞에 서서, 윤호는

나즈막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 저격 실력이 가장 뛰어난 열 명을 뽑아. "

" 남산으로, 데려가실 겁니까? "

" 아니. "

" 그럼.... "

" 너희들에게 지금부터 개인적인 임무를 주겠다. 나와 손을 잡겠다고 나선 서울 조직 연합

회의 보스들에게 연락을 넣어. 만약 검찰이 우리 조직의 이름을 대면서 마약 거래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다고 해도, 입도 뻥끗 하지 말라고 해. 허튼 수작 부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고. "

" 예. "

" 너희들 10명은, 각 보스들에게 따라 붙어. 이상한 낌새가 보인다 싶으면 바로 죽여라. "

그리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남산으로 가자. 그들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우리를 모조리 잡아

들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을 거다. 뜻대로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지. 전면전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면, 다 같이 바베큐나 구워먹자. "

조금은 가벼워보이는 목소리로 윤호가 웃었다. 그러나 따라 웃는 그들의 웃음은 짧았고, 모

두가 예측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지는 검찰과의 첫 전면전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 나는 잠시 쉴 테니까 준비들 하고 있어. 그리고 너희 둘은 남산으로 미리 가서 상황이 어떻

게 돌아가는지를 알려. "

2층의 서재로 올라가 활동하기 조금 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붉은 소파에 몸을 내던지듯

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온다. 방금 전 들었던 재중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윤호를

괴롭혔다.

- 너한테 실망하게 하지 말란 말이야.

Page 369: Happy Together

사랑하는 사람에게 듣는 실망이란 단어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대체 왜 나에게 실망했니, 나는 단지 우리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그 남자에게 걸맞는 형

벌을 내렸을 뿐인데.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김준수란 남자 하나 때문에.. 죄도 없

는 네가 그 새끼들 사이에서 움추리고 있잖아. 널 죽여버리겠다는 둥, 개 같은 작자들이 네

목숨을 가지고 흥정하도록 만들었잖아. 그래서 화가 났어. 너 때문에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화가 나서 죽지 않을 만큼 손을 댔다. 그것이 왜 너를 실망시켰어...?

-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어. 똑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삼류 양아치 새끼나 하는 짓

나를 핑계로 하지 말란 말이야. 나 욕먹이지 마. 내 핑계 대면서 양아치 흉내내지 마.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였다. 그는 정말 많이 화가 났다. 그래서 무섭다.. 사랑하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무엇보다 무서워. 화를 내면서 실망했다고 했다. 그래서 어찌해야 될 지를

모르겠다. 나는 늘 이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며 살아왔는데, 네가 그 방식을 욕하며 내게

실망해서.. 나는 어떡해야 할 지 모르겠어.

" 재중아.... "

나한테 화 내지 마. 너가 화내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 보스!! "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는데, 서재의 문이 벌컥 열리며 조직원 하나가 다급한 얼굴로

뛰어들어왔다. 쉬겠다고 했잖아, 윤호가 미간을 찡그리며 일어서는데 그가 급하게 외쳤다.

" 인질이...! "

" 뭐? "

" 나와보십시오!! "

무슨 일이야, 그것이 그리 작은 일은 아닌듯 해서 윤호는 서둘러 1층으로 내려왔다. 소동은

지하의 독방이 근원지인 듯 했다. 조직원들이 잔뜩 몰려가 무언가를 저지하고 있었다. 다들

비켜!! 윤호가 거칠게 그들을 밀어내고, 그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에 다가갔다.

" ......!! "

너.... 뭐야,

Page 370: Happy Together

* * *

방학 철도 아닌데다 날도 약간 흐린 편이라 일반 시민들이 없는 것이 다행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유천은 주위를 살폈다. 아직까지 수상해 보이는 자들은 없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지극히 한정되어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불리해. 유천은 마른 침을

삼키며 차에 앉아 있는 재중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생각이 없어보인다. 멍한 표정

같기도 하고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이라도 저 자를 끌고 나와

속이 시원할 때까지 패주고 싶었다. 같이 끌려간 김준수는 얼마나 맞았는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데, 그는 저렇게 멀쩡히 앉아서 자신의 깡패 애인이나 기다리고

있다니... 기가막히다.

" 불공평해... "

아픔에 절어 있던 준수의 목소리가 생각 나 미칠 지경이다. 담배를 씹어먹듯 피던 유천은,

재중이 타고 있던 경찰차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갑자기 유천이 자신의 옆자리로 올라타자

재중은 흠칫 놀랐다. 이 자는 무섭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할 지도 모르고, 어떤 면으로 봤을

땐 정윤호와 닮은 구석도 있어. 화가 나면 물 불 안 가리는 스타일이다. 차가운 유천의 얼굴

에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이 자리에서 내 뺨을 후려쳐도, 나는 할 말이 없다.

"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

" ......... "

" 너한테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는데, 네 애인이 잡아간 김준수는 손가락이 부러졌을지도

몰라. "

" ......... "

" 내가 제 정신으로 보여? "

" ......... "

" 솔직히 말해줄까? 그 남자가 그랬지. 김준수를 죽일 수도 있다고. 그래.. 나도 솔직해질게.

나도 이 자리에서 널 죽일 수 있어, 알아?! "

그는 총을 가지고 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유천의 말이 맞다. 정윤호나 박유천이나 지금 다

를 것이 뭐가 있을까. 두 사람 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뵈는 것이 없는 건 똑같은데.

" 나 죽여도 좋아요. "

" ... 개자식아,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거 알면서 비웃지 마. "

" 진심이에요. 이 자리에서, 당신이 차 문 잠궈놓고 나 개패듯이 패도 할 말 없어요. 지금

내 연인도 당신 연인 그딴식으로 대하고 있으니까. "

" ......... "

" 내 기분도 개 같아. 알아? 당신한테 이해해 달라는 거 아니야. 하지만 나도 기분 엿같애.

내 애인이란 남자가 그래.. 양심이란 눈꼽만치도 없이, 끌고 간 인질 반 죽여놓은 남자야.

Page 371: Happy Together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가 내 애인이야... 그런 애인 둔, 내 기분도 정말 빌어먹게 더러워.

"

" ......... "

" 나 패고 싶으면 패. 죽이고 싶으면 죽여 봐. 그런데 한 가지만 말해 줄까? 날 반쯤 죽이면,

당신이 사랑하는 김준수도 나만큼 기분 더러워져. 나 핑계로 밑바닥 양아치 새끼처럼 주먹

이나 휘두르고 발로 걷어차고.. 그딴 짓 하면... 기분 정말 더러워져... 슬퍼져... "

" ... 네가 왜 울어. "

정윤호... 난 많은 생각을 했다. 네가 마피아의 안주인을 하라며, 내 손에 총을 쥐어주고 내

손에 피를 묻히게 해도, 나는 이 정도로 심한 거부 반응은 느끼지 못했어. 실감이 나지 않았

다고 하면 정답일까. 하지만 이제야 정말 피부와 뼛속까지 실감이 나. 내가 너와 살아가려고

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난... 이렇게 살기 싫어, 윤호야. 나 때문에 우는 사람 만들기 싫다.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고 너에게 돌아간다면, 나는 죽어도.. 정말 죽어도 네 방식으로 살지

않을 거야. 이런 삶은 끔찍해. 울고, 울부짖고, 빌고, 슬퍼하고, 이런 건 지옥이야.

" 씨팔... 김재중 당신이 왜 우는데!!!!! "

울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김준수와 나야. 너는 아무일도 당하지 않았잖아. 다치지도

않고 지금 멀쩡하잖아. 그런데 네가 왜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고 쳐울고 있어. 개새끼야..

서럽게 우는 재중을 두고, 차 바깥으로 나왔다. 어쩌면 다들 똑같은 연인일 뿐인데 이리도

사랑하는 방식들이 틀릴까. 유천은 벤치에 털썩 앉아 뒷춤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총을

매만졌다.

.

.

.

" 그들의 전화야! "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침착한 것도 아니지만, 유천은 최대한 숨을 고르게 쉬고 전화를

받았다. 창민의 방법이 옳다. 다짜고짜 화를 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

이 내 손에 달려있어. 외줄타기 하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 네. "

- 30분 후, 인질을 서로 교환하도록 하지. 김준수를 남산 정자 옆의 돌담에 놓아둘테니,

김재중을 남산 안내판 앞에 세워놔.

" 당신 말대로 하겠다. "

- ... 하나만 물어보지.

" ...... "

-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Page 372: Happy Together

" .... 뭐... 를? "

- 인질의 병.

" ........! "

- 아주 우연히, 궁금증이 풀렸어.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거든. 김준수에게 저런 '병'이 있는

줄은 말이야. 내가 추측해볼까? 너희들은 우리를 놀이동산에서 만날 때 까지만 해도 정말

내가 범인인지 모르고 있었어.

" ....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

- 그 후에 알게 된 거지. 김준수의 '병'이 재발하는 덕분에.

김준수가 이중인격자인 것을, 이들은 알아. 그렇다면 또 다른 김준수가 나왔었다는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아무것도 알 방법이 없어 답답하다. 하지만 김준수가 이중인

격이라고 해서, 그의 두번째 인격이 진짜 목격자라고 해서, 지금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는

인질을 교환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희 무리를 이 자리에서 체포할 테니까.

- 괴물같은 애인을 데리고 사느라 힘들겠어, 박 형사.

" ... 닥쳐. "

- 아, 화를 돋구는 건 아니야. 단지 대단해서 그랬어. 난 칭찬하는 거야. 저런 무서운 남자를

데리고 사는 당신이 정말 대단해.

" ........ "

-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던데.

" 김준수에게 말하지 마...! "

- 물론 말하지 않을 거야. 왜냐고? 내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당신의 입에서 듣는 자신의

'병'이 훨씬 끔찍할 테니까.

전화는 끊겼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정돈시킬 마음도 들지 않는다. 유천은 울음을 참고

형사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수사 인력을 절반으로 나눠. 절반은 김재중에게, 절반은 김준수

에게 가도록 해. 우리들의 목표는 김준수의 무사함과 K 카르텔 조직원들의 대대적인 체포다.

보스의 몽타주를 반드시 상기시켜둬. 졸개들을 놓치는 일이 있더라도, 정윤호 그 자는 놓치

지 마.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안전이 우선이다.

" 박 형사, 괜찮아? "

" 응. "

" 우리가 김재중을 데려가기로 했으니까, 박 형사 자네는 김준수 씨 쪽으로 가. 주위를 잘

살펴. 그들이 분명히 잠복하고 있을 거다. "

" 알아. "

" 좋아, 그럼 출발해. 행운을 빌어. "

쉽지 않은 일이 될 거다, 유천은 형사의 본능으로 직감했다.

* * *

Page 373: Happy Together

" 알아냈어? "

" 그렇긴 한데... 어렵네요. 검사님도 아시다피시, 그 일대가 요새 땅값도 장난 아니고 워낙

언론에 오르락내리락 한 곳이잖아요. 땅 투기자들이 눈에 불 키고 덤벼드는 곳이고. 그래

서 한꺼번에 많은 토지를 사들인 사람들이 많아요. "

" 젊은 사람을 대상으로 알아봐. "

" 알아봤는데, 그것도 꽤 까다로워요. 땅부자들이 어디 지 이름으로만 땅을 삽니까? 이제

대학 들어간 아들내미 명의로 땅 사고 그러죠. 20 대 위주로 알아봤는데, 그런 자들도 많

아요. 물론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

" 그래.. 일단 명단 줘봐. "

20대 위주로, 최근 1년 사이에 판교 지역에서 넓은 토지를 사들인 사람들의 내역을 뽑았다.

형사의 말대로 그다지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대 여섯명의 20대 남자들의 명의로 땅이 팔렸

고, 모두 그럴싸하게 큰 토지들이다.

" 이들이 사들인 땅에, 뭐가 세워져는지는 파악했어? "

" 네. "

" 가장 수상쩍은 데가 어디야? "

" 일단은, 현재 빌딩을 건축하고 있는 지역이 있거든요. 아무래도 그 조직원들이 살려면

이런 빌딩 한 채 있는 것이 가장 편하지 않습니까. 공사가 끝나지는 않았는데, 사람들이

살 만큼 모양새는 그럴듯하게 지어진 것 같고... "

" 나머지는? "

" 나머지는 아직 공사도 시작하지 않은 그냥 허허벌판도 있고, 다른 데는 평범한 주택가에요.

그 동네에 이번에 고급 주택들 대거 들어서잖아요. 아마 그런 것 같은데- "

" 평범한 주택가? "

" 네. 그런데야 볼 필요 있겠습니까? 그냥 민간인들 사는 곳일 텐데.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30,40대 층을 다시 검토해봐야 될 것 같은데.... "

" 지금 옷 걸치고 나와봐. 여기 올려진 명단대로 그 부근을 쫙 돌아야겠어. "

박 형사 무리는 분명히 인질 교환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거야. 그렇다면 그 사이에 우리

도 제대로 다른 일들 건들여 봐야지. K 카르텔의 은신처, 그들이 거주하는 곳. 거기만 알아

낸다면 어려울 일은 없다. 무기 밀매, 마약상, 증거들이 잔뜩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 박 형사가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25

Page 374: Happy Together

- 박 형사. 검은색 모자 쓴 자들 주목해.

약속 시간에서 10분 정도가 흐르고, 초조해진 유천이 사복 형사라는 사실도 잊고 티나게

주위를 둘러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를 봐도 준수를 닮은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깡패고, 법이라고는 국에 말아먹는 자들이다. 확실히 인질 교환에 대한 약속을 하긴 했지만

정확하게 지킬 지는 미지수다. 김준수를 풀어주지 않고 김재중만 빼어갈 수도 있고. 절대로

방심할 수는 없다. 유천은 무전기로 안내판 앞의 상황을 물었다. 김재중도 아직 경찰차 안에

갇힌 그대로다. 이 쪽에서 김준수가 먼저 나타나지 않는 이상, 경찰 측도 김재중을 풀어 줄

용의는 없었다.

" ... 평범한 학생들이야. "

정자에 앉아서 노가리나 까고 껌이나 질겅질겅 씹어대는. 유천은 모자 쓴 자들을 여러번

훑어보다가, 별 다른 의심가는 부분이 없자 다시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준수는 언제쯤

모습을 보인다는 거냐-

" ........?! "

한참이나 정자와 그 부근을 번갈아 보고 있는데, 정자에서 놀고 있던 남자들이 일어서더니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유천은, 정자에

그 무리들 중 한 명이 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모자를 푹 눌러쓴, 여리여리한 체형

의 남자. 왠지 눈길이 가서 그대로 보고 있었는데 그는 조금 더 깊게 고개를 숙이더니 바로

쓰러져버렸다. 모자 아래로 보이는 갈색의 얇은 머리카락...

" 방금 아래로 내려간 자들을 쫓아가!!!!! "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던 형사들이 대거 나와, 방금 아래로 내려간 검은 모자의 무리를 쫓기

시작했다. 유천은 무전기를 쥔 채 정자 아래로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뛰어갔다. 준수야...!!

" 준수야!!! 김준.....? "

" 으, "

" ... 너, 뭐야. "

김준수가 아니다. 말짱하게 생긴, 아주 어려보이는 남학생이 바닥에 부딪힌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한 표정으로 유천을 올려다보고 있다. 김준수와 비슷한 헤어스타일이지만

그는 절대로 아니다. 유천은 무전기를 들고 나머지 무리의 뒤를 쫓고 있는 형사들에게 연락

을 취했다.

Page 375: Happy Together

" 쫓고 있는 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어? "

- 도망치고 있어!! 아마도 그들인 것 같아!!!

" .... 방금, 너와 같이 있던 무리. 아는 사람이야? "

" 몰라요- "

" 똑바로 대답해!!!! 이 자리에서 죽고 싶지 않으면!!!! "

화가 치민 유천이 소리 지르자, 남학생은 잔뜩 얼어버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 아.. 아는 사람들인데... 제 친구들... "

" 뭐? "

" 어떤 남자가.. 저희한테 돈을 쥐어주면서.. 이 근처에서 놀다가.. 한 명이 쓰러지는 척을

하고.. 나머지는 도망가라고... "

" ........!! 김 형사!! 지금 쫓고 있는 자들 그냥 내버려둬!! 범인들이 아니야!!! "

도대체 누가...? 무전기를 쥔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유천이, 퍼뜩 무언가 생각난 표정으

로 김재중 측에 가 있는 형사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치지직, 거리며 연락이 닿지 않

는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아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학생을 거칠게 일으켜 세우고

다른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김재중을 교환하기로 한 안내판이 있는 곳으로.

" 김 형사!!! 지금 김재중 측으로 뛰어와!!! 무언가 이상하다!!! "

- 무슨 소리야?

" 그 새끼들이 우리를 분산시켜 놓은 거야!!!! "

먼 발치에서 총소리가 난다. 멈칫, 자리에 서버린 유천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래.. 고분

고분 김준수를 넘겨줄 자들이 아니였다.

.

.

.

완전히 아수라장이다. 근처에 있던 민간인들은, 한 발의 총성에 기겁하며 도망가 버렸다.

차라리 그것이 나았다. 민간인 피해라도 생긴다면 일은 겉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그러

나 이미 일은 커져버렸다. 김재중이 타고 있는 차 앞을 지키던 형사 둘이 어디에서 날아온

지도 모르는 총에 맞아 쓰러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놀란 재중이 차에서 나왔으며, 누군가

그의 허리를 감싸며 다른 곳으로 빼돌린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김재중을 빼냄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 같지만, 형사들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 이 개새끼들이...!! "

Page 376: Happy Together

잠복해있던 형사들이, 총알이 날아오는 곳을 파악해 근처에 숨어있던 조직원들을 알아냈고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생사에 갈림길에 놓인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곳곳에서 형사들과

조직원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은 곧 총과 총 사이의 대립전으로 이어졌다.

" 윤호.... "

자신을 끌어 안은 것이 누구인지 몰랐다. 갑자기 앞에 서 있던 형사들이 피를 튀기며 쓰러

지는 것을 보고, 놀라서 나온 것뿐이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자신의 허리를 안고 다른 차로

옮겨 타도록 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정신을 차릴 틈도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옆좌석의 누군가를 바라보았을 때엔, 윤호가.

그의 눈이 붉어져 있는 것도 몰랐다. 표정이 많이 일그러지다가, 자기 스스로 자제하려는

듯 숨을 몰아쉬는 것도 몰랐다. 그러다가 다시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져 고개를 숙이고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 너 어떻게.... "

" 재중아, "

" 어떻게 된 거야...? 차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

" 나한테 실망하지 마. "

대뜸 그가 그렇게 말해서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지 잘 몰랐다. 재중은 입만 뻐끔거리다가

따뜻해지는 등을 느끼며 그가 자신을 안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은 너무 정신이 없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방금 전까지 형사들에게 둘러싸여 감시를 받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네가 나를 안고 있는 거지.

" 나, 너한테 그 말 듣고... "

" ...... "

" 나는 너 없어져서 진짜.. "

" ... 윤호야, "

너를 가장 먼저 보면 화부터 내려고 했어. 죄 없는 사람 납치해놓고, 반 죽여놓은 주제에

입만 살아서 다른 사람들 울린다고. 내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얼마나 불안하고 가슴을

졸였는지 너는 모르지. 죄를 짓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이렇게 불안하고 가슴이 뛰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살아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잘못된 방법으로 다

른 이들을 울리는 그런 깡패밖에 되지 못하는 구나. 진짜 기분이 엿 같아서, 너 만나면 화를

내면서 그딴 식으로 살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런데,

" 재중아.. 김재중... "

Page 377: Happy Together

눈 밑이 붉어져서 나 끌어안고 내 이름 부르는 너 보니까, 화도 못 내겠다.

숨이 막힐 듯 끌어안았다. 그 짧은 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사실은 나.. 그런 거 다

때려치우고, 그냥 너 보고 싶었어. 입술에 와 닿는 윤호의 부드러움에 입을 벌렸다. 이렇게

서로 안고 키스를 하고 예쁘게 사랑하고 싶은데, 너랑은 그게 참 어렵다. 간절한 입맞춤에

서로에 대한 갈증을 채웠다.

" 사랑해. "

그 붉어진 눈가 만큼이나 마음을 저리게 하는 짧은 고백에 웃었다. 그래.. 나도 사랑해.

" 보스!!! "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차창이 두드려졌고, 길고도 짧은 시간은 지나가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느낌. 윤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머리에 피가 흥건한 남자가 미간을 찡그린 채 그를 부

르고 있었다. 퍼뜩 정신이 들어서 윤호를 쳐다보았다. 그래, 나를 지키고 서 있던 형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 여기에만 있어. 다른 이들이 지켜줄 거야. "

" 어디가!! 윤호야!!!! "

" ... 하루 아침에 내 삶의 방식이 바뀔 수가 없잖아, 미안해. 사랑해. "

그대로 열려진 문 밖으로 윤호가 뛰어나갔다. 윤호야!! 재중의 외침은 닫혀진 문 너머로 둔

탁하게만 들린다. 여기저기서 남발되는 총 소리에 재중이 몇 번이나 어깨를 웅크리며 불안

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곧 운전석으로 올라탄 다른 남자가, 재중에게 총을 건넸다.

" 재중 씨 겁니다, 안심하세요. 밖에서 다들 지키고 있으니까- "

데져트 이글... 내 총. K 카르텔의 표식이 새겨진, 내가 정말 그의 사람이라는 것을 각인시

키는 그 총. 재중은 힘을 주어 총을 쥐었다. 나는 절대로 이 총으로 다른 이들의 눈에서 눈

물 흘리게 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정윤호 너와 함께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다시 우리

들의 침실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스스로 나를 지켜야겠지.

* * *

Page 378: Happy Together

탕 - !

정확한 한 발에 남자가 쓰러졌다. 뒤늦게 달려온 유천은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냉철해질 수 밖에 없었다. K 카르텔은 협상을 거부하고 먼저 총을 쏘았다. 열려진 차 문

안으로 김재중은 보이지 않았고, 그들은 김재중을 빼돌린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김준수

는 어디에. 형사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여러번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은 많았다. 뼈가 부러

질 정도로 얻어맞고, 총알이 살갖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던 적도 있다.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은 몇 번을 받았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런 위태로움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을 몇 번이나 내주고 싶은 그런 이가 위태롭다. 유천은 휘청거리는

다리를 바닥에 곧게 세우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가 죽는다면. 잠시 아찔해지는 정신에, 눈을 잠시 감았다 총을 바로 쥐었다. 김준수가 죽

는다면 앞으로의 나는 없다. 이 직위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의 목숨을 앗아간 개새끼들을

하나 둘 씩 죽일 거야. 나를 그런 괴물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내 눈에 그를 보이게 해.

" 박 형사! 다른 형사들은!! "

" 지금 오고 있어요- 저 새끼들이 트릭을 쓰는 바람에 늦었습니다. "

수 적으로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무리가 반으로 갈라지는 바람에 형사들의 수가 확 줄었다.

그러나 눈에 띄게 불리하지는 않았다. 총을 가진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사격에 능통한 형사

위주로 팀을 짰기 때문에 모두가 능숙하게 적의 심장을 겨눴다.

" 준수.. 아예 데려오지 않은 건.... "

" 그건 아니야.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카드가 김준수잖아. "

"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

" 일단 내가 찾을게. 박 형사는 총격전에 가담해. 아무래도 사격에 있어서 박 형사 따라갈

사람은 없으니까- "

" ... 꼭 찾아. "

총을 쥐고 한 가운데로 달려들었다. 위치가 드러난 조직원들이 속속이 모습을 드러내며 방

아쇠를 당겼다. 아직까지 형사 측 사망자는 없지만, 무기가 총인 만큼 언제 사상자가 나올지

모른다. 유천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드시 내 손으로 구하고, 내 손으로

잡고, 내 손으로 마무리 지을 거야. 이 끔찍한 일들.

.

.

.

" 아무래도 위험합니다!! "

Page 379: Happy Together

생각보다 밀리고 있다. 김재중만 빼내서 재빠르게 이곳을 뜨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형사들

이 너무 빨리 우리들의 위치를 파악했고 조직원들을 바깥으로 끌어냈다. 다른 형사 패거리

의 발목을 잠시 잡아둔 덕분에 초반에야 우세한 듯 했지만 갈수록 접전이다. 윤호는 흐르는

땀을 내버려둔 채, 뒤로 보이는 차를 힐끗 쳐다보았다. 안에 재중은 아직까지 아무 일 없이

무사한 듯 하다. 마음 같아서는 저 안에 함께 들어가 손을 잡아주고 싶지만 그건 말도 안 되

는 일이지. 사격 실력이 뛰어난 형사들만 조직적으로 움직인 건가.. 사격이 절대 밀리지 않

을 뿐더러, 우리 측 애들보다 훨씬 침착한 것 같다. 윤호는 초조한 마음에 마구잡이로 총을

놀렸다.

" 시간을 계속 끌다간 다른 경찰들까지 합세할 겁니다!! 지금 빠져 나가야 하는데, "

" ... 여기서 놈들을 막고 있어. "

최악의 상황에 치닫았을 때 쓸 수 있는 마지막 카드. 윤호는 가장 뒤 쪽의 차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뒷좌석에 두 손이 포박당한 채 엎드려 누워있는 김준수.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일으

켜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 나와. "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진 준수의 멱살을 쥐고 일으켰다. 김재중이 내가 이 남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아마도 기절할거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여기를

빠져나갈 수가 없어. 혼은 나중에 나더라도, 일단은 너를 데리고 나가야겠다.

" 보스!!! "

" 무슨 일이야, 내가 막고 있으라 했잖아. "

" 제이 에비뉴에 남겨둔 녀석들에게 연락이 왔는데, 형사와 검사가 왔답니다. "

" .... 뭐? "

" 조사차 나온 거라고, 일단 안으로 들여보냈다고 하는데... 많은 인원은 아니고 단 둘이

왔다고 합니다. "

씨팔. 갈수록 일이 왜 이리 꼬여. 여기서 이 지긋지긋한 검찰들과 맞붙는 걸로 부족해서,

우리가 모조리 제이 에비뉴를 비운 사이에 형사에 검사까지 딸려왔다니. 도대체 에비뉴는

어떻게 알아서!! 피가 터져나올만큼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죽여버려야 성에

찰 것 같다. 하지만 형사는 물론이고, 검사를 건들이는 건 최악이다.

" ... 일단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라고 해. 제이 에비뉴는 특별히 걸릴 것이 없어. 내부로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평범한 동네일 뿐이니까. 그들도 의심하진 않을 거다. "

" 예. "

Page 380: Happy Together

검사 나으리까지 납셨단 말이지. 한 시라도 빨리 여기를 정리하고 돌아가야 한다. 다급해진

그가 준수를 앞세워 머리에 총을 겨눴다.

" 걸어. "

" 흐으윽..... 살려줘요... 풀어 준다고 했잖아....! "

" 닥치고 걸어. 여차하면 대가리를 날려버릴테니. "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머리에 와 닿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에 뼛속

까지 저리다. 부들부들 떨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

까. 나... 아직은 죽기 싫은데.

* * *

" 여기가 맞아? "

" 네. 맞아요. "

" 흠, 깔끔하네. "

요새 주택가는 이렇게 동네에 들어서는 길목에 정문을 만들어 놓고 관리하는구나. 늘상

오피스텔에서 살아온 창민이라, 조용하고 한적한 주택가가 낯설다. 조사한 대로 이곳은

20대의 후반의 남자가 매매한 토지로, 지금은 이런 주택가가 들어섰다. 창민은 유 형사와

정문 앞에 서서 저쪽 너머로 보이는 주택가를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색칠 된 벽을 봤을 때

그리 오래된 주택가는 아니다. 이 일대가 워낙 신도시다 보니... 고개를 끄덕이며 관리실을

기웃거렸다.

" 어떻게 오셨습니까- "

관리인 치고는 젊은 남자다. 편안한 복장의 남자가 웃으며 나와 물었다. 일단은 안으로 들

어가 둘러봐야 하니, 검사라고 밝히는 것이 좋겠지.

" 서울중앙지검 강력반 심창민 검사입니다. 이 쪽은 같은 과 형사인 유진우 형사구요. 조사

할 것이 있어서 그런데 주택가 안으로 좀 들어가봐도 되겠습니까? "

" 검.. 사요? "

" 네. 별일은 아니고, 간단히 둘러보기만 하면 되거든요. "

" 아, 그러세요. "

관리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잠시 서 있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Page 381: Happy Together

"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관리인으로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많거

든요. "

" 그냥 들어가는데도 허락을 맡아야 합니까? "

" 이 주택가 사는 사람이 아니면 쉽게 들어가실 수 없게 되어있거든요. 죄송합니다. "

" ... 그럼 기다릴 테니까 알아봐주세요. "

되게 깐깐하게 구네- 유 형사는 침을 뱉고서 벽에 기대 섰다. 그다지 어색한 풍경은 아니다.

요새 들어서는 신형 고급 빌라촌들은 거의 다 이런 식으로 되어있다. 사는 사람들이 젊고,

신흥 졸부들 천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대접받고 싶어 한다. 자신들 아니면 쉽게 출입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겠지... 특권의식인가, 창민은 씁쓸하게 웃으며 높

다란 담벼락을 바라보았다. 관리실 안으로 들어간 남자는 누군가와 짧게 통화를 하더니,

빠르게 바깥으로 나왔다.

" 들어가셔도 된답니다. 검사 분들이라고 하니 그냥 허락해 주시네요. "

창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썩 마음이 내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너무 평범한

주택가였고, 범인들이 살기에는 무리가 있다. 늘 총을 관리하거나 인질을 붙잡아 놓고 다른

조직들과 거래를 할 텐데, 이런 조용한 주택가에서 사는 것 부터가 무리고 말이 안 된다. 게

다가 깡패 새끼들이 이런 곳에 사는 건 정말이지 안 어울려...

" 야아- 살기 좋은 곳이네요. "

산책하는 기분으로 제이 에비뉴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조용한 동네 속에서 천천히 걸

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깨끗하고 아담한 동네다. 주택들도 모두 비슷한 형식으로 지어졌

고, 페인트도 비슷한 톤으로 칠해놔서 깔끔해 보인다. 잔디밭도 깨끗하고... 나중에 은퇴하

면 이런 곳에서 편안하게 노후나 보내고 싶어- 중얼거렸다.

" 여기가 마지막 곳인데... 전혀 아닌 것 같죠? "

" 그래... 뭐, 평범한 주택가잖아. "

" 진짜 어디지, 판교 근처는 확실한데. 기계가 틀렸을리도 없구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 봐야 될 것 같아요. 가짜 신분으로 구입했을테니, 꼭 20대라는 법도 없고- "

" 그러게. "

오늘 돌아본 곳들 중에는 마피아의 은신처라고 생각될 곳이 아무데도 없었다. 짓다 만 빌딩

은 물도 나오지 않았고, 완공이 끝난 빌딩에는 상가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다. 다른 곳들은

아직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토지이고. 마지막으로 찾은 이 주택가는 그냥 평범한 동네다.

" 그런데... 이상하게 조용하네요- "

" 응. "

Page 382: Happy Together

그래서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이 시간에 바깥에 나와 있을 이유는 별로 없지. 남자

들은 직장에 나갔을 테고, 요새는 여자들도 맞벌이니까. 그만 돌아가요, 유 형사는 창민을

재촉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서려던 창민의 눈에, 맨 끝에 위치한 중앙 저택이 눈에 들

어왔다.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훨씬 크고 화려한 저택이다. 앞에 위치한 정원도 멋드러지고.

아마도 사는 사람이 꽤나 대단한 사람들인가 보지.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

" 뭐, 찾으셨어요? "

" 아니요. 그냥 조용하고 좋은 동네네요. "

" 예. 사는 사람들이 모두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이라, 낮에는 이렇게 조용해요. "

" 그래요... "

주택가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관리인이 씨익 웃으며 정문을 닫

았다. 젊은 사람이 저런 곳에서 심심하겠구나. 쯧즈. 창민의 차가 제이 에비뉴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곧 그들의 머릿속에서도 평온하고 조용한 주택가는 기억으로만 남았다. 윤호가

제이 에비뉴를 만들며 노린 부분도 이런 점이였다. 사람들의 고정관념. 그 아무도, 평범한

주택가를 우리들의 은신처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창민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 * *

차 안에 오랫동안 홀로 앉아있었다. 자신을 지키고 있던 자들도 총을 들고 급히 어디론가

뛰어나갔다. 아마도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 분명히 검찰과 총구를 겨누고 목숨이

오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조심스럽게 차에서 빠져나온 재중은 소리나지 않는 작은 발걸

음으로 앞을 내딛었다. 주위에 일반인으로 보이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격해지는

총소리라니. 저 한 가운데 정윤호가 있어... 불안감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총을

장전시키고 방아쇠를 쥔 채 한걸음씩 나아갔다.

- 계속 쏴!!! 시간을 오래 끌지 마!!!! 오래 끌 수록 유리한 쪽은 검찰이다!!!!

- 총을 단단히 잡아-!!!

- 이 씨팔새끼들아!!!!

갑자기 들리는 윤호의 거친 목소리에 그 자리에 멈춰섰다. 저 욕설은 정윤호다. 그의 목소리.

굳어버린채 서 있다가 조금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수풀 뒤에 몸을 숨기고 주위를 살폈다.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쪽은 K 카르텔의 조직원들이 몇몇 있는

듯 하다. 어느새 이들에게 의지하게 되다니... 재중은 마른 침을 삼키며 앞을 바라보았다.

" .... 정윤호... "

Page 383: Happy Together

그가 서 있었다. 한 손으로는 김준수의 목을 조르고, 한 손으로는 총구를 그의 머리에 겨눈

채로. 그와 대립해 서 있는 다른 형사들은, 총을 쥔 채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인질을

어이없이 뺏겨 버리고, 이제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카드도 남아있지 않다. 이렇게 된다면

절대적으로 검찰이 불리하다. 윤호는 하늘에 총을 한 발 쏘아버리고, 다시 김준수의 머리에

총을 들이댔다.

" 다음엔 이 머리야. 이 남자가 코앞에서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다들 물러나. "

" 총 내려 놔!!! "

" 개지랄 떨지 마. 너네 새끼들이야 말로 당장 총 내려 놔. "

김준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아무 죄도 없는 저 자는

내 연인에게 목이 졸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있다. 도대체 저게 뭐야...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어. 옳은 일을 한다면 내 사람이

다치는데...

" 봤지. 총 내려 놨어. 김준수 씨 풀어줘. "

" 닥쳐. 다들 물러나!!!!!! "

흩어져 있던 K 카르텔의 조직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김준수를 방패막이 삼아, 다시 차에

올라 타 빠르게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다. 이대로 무사히 여기를 빠져나간다면 좋겠지만,

저 남자는 죽겠지. 김준수는 바로 죽음이다. 조직원들이 어느정도 모이자, 윤호는 뒤로 빠

지라는 눈짓을 하며 김준수를 단단히 잡고 더욱 강하게 총을 들이밀었다. 살려주세요..!!!!

그 비명을 들을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최악이야... 지금.

" 조금이라도 허튼 짓 하면 바로 방아쇠를 당긴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마. "

천천히 뒤로 물러서는 정윤호가, 차를 준비시키며 형사들을 노려보았다. 이제 끝인가. 복

잡한 심정으로 정윤호를 바라보다가, 재중은 시선을 약간 돌려 저 뒤 쪽을 바라보았다.

" .....!!!! "

박유천. 그 남자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유천이 조용하게 총을 들고 다가오고 있다.

재중과 마찬가지로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그의 총구는 정윤호의 머리

와 목을 겨누고 있다. 유천을 보는 순간, 재중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만 소리 지를 수도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데져트 이글을 눈앞에 가져갔다.

" 윤호야... "

Page 384: Happy Together

쏘지 마. 쏘면 안 돼. 유천이 가까이 다가올 수록, 그 말이 비명처럼 튀어나올 것 같다. 재

중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총을 장전시켰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 정윤호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재중에게 정상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눈 앞에서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제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그가 죽는다면,

난 어떡하지. 정윤호가 총에 맞는 모습은 악몽도 끔찍해.

철컥, 장전시킨 총을 쥐고 한 쪽 눈을 감았다. 반쪽짜리 눈 앞에... 그가 보였다. 조금씩 정

윤호에게 다가오는 박유천. 정윤호를 죽이고, 그에게 위협받는 김준수를 데려갈 생각이다.

나는... 나는, 당신들이 밉지 않아. 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검찰에 잡혀갔을 때도, 울며

김준수의 이름을 부르는 형사의 모습에 눈물까지 났었다. 그런데... 내가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누게 될 줄은 몰랐다.

윤호야, 너도 늘 이렇게 살았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그래서 결국엔 자신에게 최선인 이기적인 마음으로 방아쇠를 당기게 되는 걸까..

" 그 사람 죽이지 말아요... "

.

.

.

바로 눈 앞에서 준수가 목이 졸리는 모습을 봤을 때, 유천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한 사람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무언가가, 다른 누군가에겐 하찮은 흥정거리가 될 수 있구나.

내가 그렇게 곱게 사랑하고, 늘 품에 안아서 재우고 토닥여줬던 사람이 누군가의 팔에 목이

졸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았다. 그 때의 기분을 누가 알 수가 있을까. 내 자신이 목 졸려

죽는 그 순간보다, 더 공포스럽고 두려운 것을.

누구도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만 잘 하면 해결 될 수 있어. 정윤호를

한 발에 죽이고, 김준수를 끌어안자. 내가 총알 받이가 되어도 좋아. 뒤에 있는 다른 조직

원들이 총을 쏘고 나를 죽여도, 내 품 안에 있을 그는 안전할 거다. 내가 그랬지. 몸을 날려

서라도 너를 구해줄게. 너는 그러지 말라며 늘 화를 내곤 했지만.. 이런 상황이 올 줄 누가

알았겠니. 결국 지켜야 할 순간이 오게 되면 사람에겐 이성 대신 본능이 앞서.

" 미안해.. 준수야 미안... "

다가서며 끊임없이 유천은 중얼거렸다. 미안하다고. 내가 늘 네 곁에 있었는데. 지킨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깨는 거 무지 쉽지. 망가지는 거 엄청 쉽지.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되거든. 네가 왜 그러고 있어야 하는 건지. 준수야.. 너 왜 그러고 있어.. 얼굴은 왜 그렇게

부었니, 팔에는 왜 멍이 들었어. 나 만날 때 네 팔이 붉어서 싫었다. 사랑하는 몸에 안 좋은

흔적이 있어서 우울했다. 어느 하나 다치지 않고, 그 작은 몸 잘 다독거리면서 살려 했는데

Page 385: Happy Together

벌써 그렇게나 아파버렸어... 그것도 나와 사랑하는 시간 속에서.

내가 다 끝낼게. 빨리 우리들의 옥탑방으로 돌아가자. 서울 시내 야경이 보이는 마루에

앉아서, 새콤한 포도알을 하나씩 입에 넣어 주면서 속삭이자.

사랑해. 사랑해...

.

.

.

" 박 형사!!!!!!!!! "

순식간이었다. 유천의 왼쪽 부근에서 피가 터져나간 것은. 재중은 너무나 정확히 총을 쏘

았고, 악몽처럼 주위가 붉어졌다. 아아악!!!!!! 재중의 비명이 공간을 울렸고, 그와 동시에

윤호의 손에서 힘이 빠지며 유천과 재중을 번갈아가며 돌아보았다. 재중이 너...! 자신이

쏜 후, 나무토막 인형처럼 쓰러지는 유천에 경악하며 주저앉았다. 다른 형사들이 총알이

날아온 곳을 감지해 무작위로 총을 쏘아댔다. 위험합니다! 누군가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여기저기서 조직원들이 뛰쳐나와 재중을 차로 데려갔다.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누구도 무사할 수 없었고, 재중 자신도 몸의 어딘가가 뜨거워지는 기분과 함께 정

신을 놓아버렸다...

" 체포해!!!! "

총을 떨어뜨리며 고꾸라진 유천과, 수풀 너머로 잠시나마 보였던 재중의 얼굴에 윤호도

돌처럼 단단할 수는 없었다. 혼란스러운 정신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자신이 들고 있던 총이

바닥으로 떨궈졌다. 누군가 손잡이 부분을 정확하게 쏘아버린 것이다. 다시 총을 집으려

몸을 숙임과 동시에, 재빠르게 달려나온 검찰 측 형사들이 바닥으로 향하는 윤호의 손을

짓밟고 무릎 뒤 쪽을 거칠게 가격했다.

" 가서 박 형사 돌봐!!!! 준수 씨, 괜찮아요?!!!!! "

" 박 형사... "

" 정윤호!! 살인 및 마약 밀매 및 총기류 밀매 혐의로 체포한다!!!! 너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을 선임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을 경우 국가변호사를 받을 수가

있.... 씨팔!!! 다 집어 치우고 이 새끼 당장 체포해!!!!!! "

끝났다... 완전히 엎어진 자신의 몸 위로, 다른 형사들이 달려와 수갑을 채우고 총을 압수

했다. 너무나 허탈해 제정신이 아닐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윤호는 고개를 들어 재중이

있던 곳을 살폈다. 괜찮아... 그 쪽에는 우리 조직원들이 꽤 있었으니까- 안전한 곳으로

그를 데려갔을 거야. 재중아... 미안하다. 같이 있어줘야 하는데.

Page 386: Happy Together

" 준수 씨!! "

걸을 수가 없어서 기었다. 질질, 기어서 유천에게 가는 시간은 짧았지만 그에게는 길었다.

바닥에 완전히 쓰러져 있는 유천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의 왼쪽 심장이

터져버렸는지 완전히 피로 물들었고, 감겨있는 눈은 속눈썹마저 가지런하다.

" 박... "

이제는 말도 나오지 않아서, 준수가 가슴을 치다가 유천의 위로 엎어져 버렸다. 일으켜요!

바로 병원으로 데려가야 해! 숨을 쉬지를 못하잖아!!! 웅성거리는 주위 소리도 들리지 않았

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유천을 끌어안고 지금까지 쏟았던 눈물, 딱 그만큼을 다시 쏟

았다. 살면서 흘렸던 눈물만큼, 그 만큼의 눈물을 그의 몸 위에 쏟아부었다.

너 뭐해.. 바보.. 병신.. 머저리.. 나쁜 새끼야.. 일어나아...

" 준수 씨도 같이 병원으로 이송해!!!! 몸이 정상이 아니야!!! 일으켜!! 준수 씨! "

" 이거 놔아.... "

- 자기 목숨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남자는 싫어.

- 귀하게 생각하니까 너한테 주는 거지! 귀하지 않으면, 너한테 주지도 않았다! 이렇게

귀한 거니까 너 주겠다고 하는 거잖아!

- ... 소중하게 생각하라고. 그만큼.

- 알아. 그리고, 세상 어느 누구도 나 죽일 수 있는 놈은 없으니까. 그런 건 걱정 마.

박 형사 죽일 수 있는 사람 세상에 없다며. 나한테 자신있게 그랬잖아. 나는 절대 죽지 않

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 말 믿어도 되는 거지... 너.. 너어, 안 죽은 거지.. 그렇지..

" 일어나... "

" 준수 씨 일으켜요. 병원으로 함께 데려가. 나머지는, 나머지 일당은 잡혔어?! "

" 절반은 잡히고, 절반은 도망간 것 같습니다. 김재중도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는 그들이

함께 데려간 것 같습니다. "

" 후우, 일단은 보스를 잡았으니까. "

" 형사님. 우리 진짜 대어 낚은 거야. 알아요? "

수갑이 채워진 것으로도 부족해, 다섯 명이 넘는 형사가 윤호에게 따라붙어 경찰차까지

이송했다. 온 몸을 수색하고 차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를 실은 차가 떠나고, 곧 응급차가

Page 387: Happy Together

도착했다.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는 유천의 심장을 살리기 위해서-

박 형사.. 이제는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비명지르다,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마지막 그의 모습을 담았다. 들것에 실려지는 박유천... 힘 없이 떨궈지는 그의 손... 얼굴에

씌워지는 산소 호흡기와 달려드는 의사들... 모든 것이 꿈인 것 같아서, 준수는 차라리 잠들

기로 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 했던 잠이, 지금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가 죽는 것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 죽으면, 나도 죽어. 내 심장까지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반드시 살아.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26

" 어떻게 된 거야!!!! "

뒤늦게 유천의 사고 소식을 접한 창민이 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 유천은 수술실로 들어가

있었고 준수는 기절해 입원 중이라고 했다. 그 또한 납치 도중 다친 곳들이 많아 몇몇 잔수

술을 준비할 예정이라며, 다른 형사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 총에 맞았어요. "

" 총?! 누가 쐈어?!! 박유천을!! "

" 모르겠어요. 그 때 상황이, 정윤호가 김준수를 인질로 잡고 도주하려던 상태라 형사들이

다들 한 곳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갑자기 날아온 총알에 저희도 놀랐습니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카르텔 쪽 조직원이겠죠. "

" 후우, 다른 부상자는. "

" 가장 크게 다친 이가 박유천이에요. 생명에 위협이 갈 만큼 부상입은 자도 박유천이고.

나머지도 수술대에 오르긴 했는데 걱정하지는 마세요. 총알 제거하고 얼마 입원하면

괜찮을 겁니다. "

" ... 심해? "

" 심장 부근에 맞았어요. "

하필이면 왜 박 형사가. 창민은 안쓰러운 얼굴로 수술실 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쉽게 총

에 맞을 남자는 아닌데. 분명히 김준수 구하겠다는 생각 하나로 나머지 둘러 볼 여유가 없

었을 거다. 한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쨌든 정윤호는 그 자리에서 생포에 김준수

Page 388: Happy Together

는 무사하다. 박유천의 목숨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값진 대가가 있었다. 정윤호는 현재 중

앙 지검의 독방에 수감되어 있으며 곧 취조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워낙 거물급이라 함부로

취조를 시작하지 못했으며 모든 부분은 창민이 도맡게 될 것이다. 검찰에서 가장 신뢰하고

있는 검사 중 한 명이었으므로.

" 죽으면 어떡하죠, 박 형사. 간신히 인질도 구하고 범인도 생포했는데. "

" 죽어? "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인데...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창민에게 다른 형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박 형사가 죽는 건 정말 생각 안 해봤는데요, 지금 너무 불안하잖아요.

수술도 이렇게 길어지고... 남자의 질문에 창민은 대답 대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 박유천이 누군데 죽어, 그 녀석은 절대로 안 죽어. "

* * *

" 진정하세요, 재중 씨. "

" 흐으윽... 윤호야... 정윤호!!!! "

" 괜찮아요. 진정하세요. "

재중과 함께 남산을 빠져나간 무리 중에는, 윤호의 오른팔인 참모도 섞여 있었다. 그는 반

드시 빠져나와야 할 인물 중 하나였다. 윤호의 부재 시 조직의 내부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가 그였으니. 남자는 침착하고 서두르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정윤호의 체포에

조직원 모두가 당황하고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K 카르텔의 가장 큰 무기는 정윤

호에 대한 조직원들의 믿음이었고, 그만큼 그것이 흔들릴 때의 타격 또한 굉장했다. FBI에

게도 잡힌 적 없는 정윤호가 어이없게 생포당한 것이다.

"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은.. 제이 에비뉴로 돌아가는 것이... "

" 거기는 위험해. "

" 절대로 알아채지 못할 겁니다. 검사가 왔었지만 곧 돌아갔다고 합니다. "

" 한 번 왔던 사람은 두 번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나. 게다가 김준수가 그쪽에 있어.

그는 짧게나마 자신이 감금되어 있던 저택과 주변을 제 눈으로 봤어. 그곳은 위험해. "

" 그럼.... "

" 일단, 발 빠른 애들 몇 명을 제이 에비뉴로 보내. 각자 집에 숨겨 놓은 총들을 수거해와. "

" 네. "

자신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제이 에비뉴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이제는 어떡해야 하는가...

막막하기만 했다. 정윤호가 있다면 분명히 어떤 대책을 강구했을 텐데. 보스의 빈자리는

너무 커서, 따르는 자들은 부재시 방황을 선택해야 한다. 일단은 거처가 필요했다. 하지만

Page 389: Happy Together

지금은 어디에 가 있어야 하는지... 뉴욕에 있을 때에 자신들의 은신처가 들키면 숨을 곳이

있었다. 그들은 늘 한인 불법 체류자들을 도와주곤 했었고, 그들은 그 대가로 카르텔의 조직

원들을 숨겨 주었다. FBI 가 쉽게 그들을 체포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들을 숨겨주었던 사람들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야.

" 내 말 잘 들어요, 재중 씨. 당신이 보스의 옆자리를 선택했을 때는, 그만한 각오를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 나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요... 당신들처럼 총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고...

"

" 그런 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중, 가장 안전한 사람이 당신이에요. 재중 씨는

우리와 다르게 세상에 흔적이 있고, 그것을 K 카르텔의 조직원이 아니라는 증거로 내세

울 수도 있어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요? 당신은 지금 무죄야. 검찰이 심증만 가지고

당신을 조사한다고 해도, 죄가 될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요. "

" 나는 그 형사를 쐈어요...!!! "

그래. 내 손으로 사람을 쐈다.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어. 얼마 전까지 내 곁에 앉아서, 나를

미워하며 자신의 연인을 그리워하던 그 살아 숨쉬던 생명을 내 손으로 죽이려 했어. 아니면

죽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나는 살인을 한 셈이다. 아니, 이미 살인을 시도했던 사람이다.

나는 늘 정윤호의 끔찍한 살육을 증오하고 두려워했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와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내가 그랬어.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이에게 피를 묻혔다.

" 아무도 보지 못했어요. 당신은 숨어 있었고, 형사들은 재중 씨 보지 못했어요. 모르겠어요?

당신은 현재 깨끗해요. 우리들 중에서 정윤호를 당당하게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재중 씨 밖

에 없어요. "

" 내가 어떻게... "

" 잊었어요? 당신, 우리측 고문 변호사잖아. "

" ......... "

" 이름만 카르텔의 안주인이라고 보스 옆에 앉아있던 거 아니잖아.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

는 총도, 힘도 아니에요. 우리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직업... 재중 씨는 그거 갖고

있어요. "

- 우리 조직은 앞으로 수면으로 드러날 거고, 검찰은 우리를 찾으려 발을 구를 거야. 착한

거짓말로 변호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가 저지른 살인과 범죄를 네가 구제해.

" 보스는 앞으로 재판에 회부될 겁니다. 그자들은 보스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마약 밀매와 총기류 밀매에 대한 서류들은, 보스가 자신만이

아는 곳에 숨겨 두었어요. 나도 그곳을 모릅니다. 아마도 절대로 찾지 못하도록 아주 깊숙

한 곳에 숨겨 두었을 거에요. 검찰은 절대로 찾지 못할... 증거는 없어요. "

" 하지만.. 그렇게 쉽게... "

"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보스는 자신들과 거래했던 조직의 보스들에게 저격수를 한 명

씩 붙여 두었습니다. 검찰이 아무리 다른 조직들을 파해쳐도 자신들의 목숨이 걸려있는

Page 390: Happy Together

한, 그들은 절대로 불지 못해요. "

나는.. 잘 모르겠어요. 내가 어떻게... 한 번도 변호사로 일했던 적 없고, 사법고시를 패스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그의 목숨이 달린 재판에 나서.

" 게다가 보스의 살인을 목격한 것은, 김준수 한 명뿐이에요. 그들은 이미 살인의 용의자로

보스를 완전히 지목한 것 같지만.. 증거 불충분이에요. "

" 김준수를 납치한 건 사실이잖아요. 게다가 서울 한 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였어. 이건 어떻

게 설명할 거에요. 이건...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뒤집어지지 않을 명백한 죄에요. "

" 어차피 잡힌 이상 무죄로 풀려나는 건 무리가 있고, 그렇다면 최대로 형을 줄여야죠. "

" .......... "

" 여차하면, 사형이에요. "

사형. 상상하기도 싫어, 그런 건.

" 재중 씨에게 달렸어요. "

" 하지만 김준수가 있잖아요...!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목격자는 있어요!! "

" ... 그 부분에 대해서, 재중 씨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남자는 잠시 말을 끊었다. 지금으로선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하지만 참모의 말을 들으며

재중은 점점 무언가가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지금의 상황들. 현재

불리한 것은 카르텔이지만, 정윤호를 체포한 검찰도 죄목에 대해서 정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 지금 제이 에비뉴로 가는 자들에게, 김준수가 독방에 수감되어 있을 때의 모습이 찍혀

있는 CCTV 테이프를 가져와. "

" 네. "

" 그건 왜.... "

" 보면 알아요. 목격자에게는 목격자의 자격이 있기 마련이니까. "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진 잘 모르겠지만, 재중은 흐르던 눈물을 닦고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그 누구도 자신 만큼 정윤호를 변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승리하기 위해 변호를 맡는 것과,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변호를 시작하는 것은 근본부

터 다르다. 마음가짐이 다른 시작은 끝도 다르다. 이제부터는 내 손에 달렸어... 재중은 자신

의 손에 쥐어진 데져트 이글을 멍하니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너와 다시 만나면, 이런 물건 따위 내게 쥐어주지 말라고 화내고 싶었다. 총도, 살인도, 피도

모두 싫다. 나는 그런 것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에게 네 삶의 방식을 강요

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젠 다 틀렸어. 나는 내 손으로 사람의 심장에

Page 391: Happy Together

총구를 겨누었다. 그렇게 한없이 미안하던 사람에게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어. 그 순간

깨달았던 것 같아. 세상에 그 누구도 처음부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 동기가 있다면 누구든

살인자가 될 수 있고, 누구든 한 순간에 자신의 인생을 뒤집을 결정을 할 수 있어. 나에게는

네가 동기였어, 윤호야... 나는 너를 살리기 위해 총을 쥐었고, 이제부터는 너를 구하기 위해

마피아의 변호사로 변호를 시작하겠지.

" 이제부터 절반은 재중 씨 손에 달렸으니까. 재판을.. 준비하는 게 좋을 겁니다. "

* * *

" 이름. "

" 알고 있잖아? "

" 나이. "

"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는 건, 너희들이 먼저 알려줬어. "

" 그렇게 묵비권 행사하다 골로 가는 수가 있어. "

" 골로 가는지 홍콩 가는지는 두고 봐야 알겠고. "

박유천이 왜 취조를 하다가 키보드를 뽑아 던지는지 알 것 같았다. 창민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앞에 앉아있는 윤호를 노려보았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는,

확실히 불리한 입장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다. 오히려 묵비권으로

검찰을 답답하게 만들 뿐이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윤호가 얼마 후 창민을 바라보았다.

" 박유천은, 죽었어? "

" 그 놈이 어떤 놈인데 죽어. "

" 흥, 하긴. "

이럴 줄 알았다면 재중이에게 조금 더 확실하게 총 쏘는 법을 알려주는 거였다. 분명히 그

였어. 그가 총을 쏘고.. 스스로 놀라서 비명을 지른 거다. 얼마나 놀랐을까. 내가 총으로 동

물을 쏠 때만 해도 그러지 말라며 울며 매달린 놈인데. 너에게 이런 말을 하면 화내겠지만,

깨끗한 네 손에 피를 묻힐 만큼 나를 사랑하는 걸 다시 알 수 있어서 행복하다. 물론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니

재중은 무사하게 빠져나간 듯 하다. 다행이다.

" 서울 지역의 조직 폭력단의 보스들이 죽어나갔어. 왜 그런지는 네가 알고 있겠지? "

" 글쎄. 모르겠는데. "

" 네가 죽였잖아! 네가 살인을 지시했고! "

" 내가 왜? "

이 개새끼가...

Page 392: Happy Together

" 너희 K 카르텔은 뉴욕에서 쫓기는 입장이었다. FBI가 대대적으로 유색인종의 마피아의

소탕 작전을 펼쳤지. 꽤나 잔머리 굴린 덕분에 살아남을 수는 있었지만, 더 이상 뉴욕에

있을 수 없어서 대한민국에 불법으로 들어왔다. 여기까지는 사실이겠지? "

" 글쎄. "

" 너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돈줄이 될 법한 사업에 손을 대기로 했지. 마약 밀매와 무기

밀매. 하지만 우리나라 조폭 새끼들도 요새는 스케일 크게 놀아서, 이미 마약을 대대적

으로 거래하는 자들이 꽤나 있었어. 우연찮게, 너희들이 한국에 온 그 시점에 가장 컸던

마약 밀매 조직이 두 개나 와해되었고. "

" ....... "

" 기회는 이 때다 싶었겠지. 그래, 좋은 기회였어. 너희들은 검찰 측에서 알아서 처리해준

두 조직은 무시하고, 나머지 조직들을 협박했어. 마약 거래 루트를 카르텔로 모조리 넘기

지 않으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거다. 너희에게는 우리나라 어떤

조직도 엄두 못낼 어마어마한 무기류가 있었을 테니까. 게다가 늘 총을 가지고 싸웠던 너

희에게, 주먹이나 휘두르던 작은 조직들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깔아줬겠지. "

만만하지 않은 상대구나. 윤호는 창민의 말을 들으며 직감했다. 정확히 몇 살인지 모를 정

도로 꽤나 동안이지만, 마피아의 보스의 취조를 맡길 정도라면 검찰 측에서 가장 신뢰하고

있다는 소리다.

" 그래서 그들을 협박하고,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죽였다. "

" 죽여? 내가? "

" 그럼 네가 아닌 누구지? "

" 내가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한 건가? "

뻔뻔한 얼굴로 그렇게 물어오니 답할 말도 없다. 기가 막혀서 말을 놓고 윤호를 노려보았다.

" 우리 측에 목격자를, 네 손으로 직접 납치하지 않았나? 김준수 말이야. 네가 데리고 있던

그 남자. 너희 측에서 죽도록 패논 덕분에 지금 치료받고 있는 불쌍한 남자.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그 정도로 네가 치매 끼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

" 아아... 김준수, 그 미친 새끼. 그 새끼는 날 전혀 못 알아보던데. "

" ... 그 남자는 네가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확실하게 봤어. "

" 그래? 잘못 본 거겠지. 아니면 그가 보지 않았거나. "

이 남자...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것인가. 오히려 거칠 것 없는 윤호의 태도에

창민이 당황할 지경이다. 아니, 잠깐만... 그가 보지 않았거나?

" 왜 김준수가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

" 이봐, 당신 이름이 어떻게 되지? "

Page 393: Happy Together

" ... 검사님이라고 불러. "

" 그래, 검사님. 난 지금 졸리거든. 좀 자게 해줘. "

" 개소리 집어 치우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

" 개소리는 네가 하잖아. 짖는 소리로 밖에 안 들려. 재워줘. 침대있는 방으로 해서. 나는

침대 체질이거든. "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창민이, 윤호의 앞에 걸어와 손을 치켜올렸다. 당장이라도 이 남자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다. 명백하게 죄를 지어놓은 주제에 이렇듯 뻔뻔하다니. 그것도 나를

상대로.

" 왜, 때리시게? "

" .......... "

" 이거 봐. 답답하면 그냥 나를 깜방에 쳐넣으면 되잖아. 납치 및 서울 한복판에서 총 들고

설친 죄로. 그러면 징역 몇 년 쯤 하려나? "

" 살인 및 납치. 마약 밀매. 총 밀매. 그거 다 합치면 사형감이지. "

" .......... "

" 징역 몇 년? 웃기지 마. 숨이 끊어져서 다시 태어나야 정신 차릴 놈이야, 넌. "

느긋하게 웃고 있던 윤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참이나 서로를 노려보다가, 창민이 먼저

고개를 돌리고 노트북을 닫았다. 일단은 감금해두자. 이런 식으로 말장난이나 하다가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김준수가 깨어나면 그 때 다시 시작해야지. 납치되어

있던 곳을 봤다면 대충 어느 부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거고, 수사를 시작할 수 있을 거다.

증거 수집이 가장 첫 번째 일이니까.

" 나야, 정윤호 이 새끼 독방에 수감시켜. CCTV 두 개쯤 달고. 일반 간수 말고 강력반 형사

들 앞에 배치시켜놔. "

네가 거물급이라면, 나도 거물급에 맞는 대우를 해주겠다는 소리다.

* * *

" 으응... "

눈을 떴을 때는 온 몸이 저릿했다.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목소

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주 많이 맞긴 했지만, 늘 몸이 긴장되어 있었다. 그 긴장이

풀리고 아예 정신을 놓아버리자 지금까지 참아왔던 아픔이 한꺼번에 몸에 밀려드는 기분

이다. 준수는 눈만 뜬 채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병원인가...

Page 394: Happy Together

" 박 형사... "

가장 먼저 유천을 찾았지만 그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기절하기 직전 눈에 보였던 영상

이 다시 선명하게 떠오르며 준수를 두려움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총에 맞았다. 심장에

맞고 쓰러졌어. 내 가까이에서.. 그 검붉은 피를 온 몸으로 쏟으며 쓰러졌다. 나를 바라보지

못했다. 감겨지는 그 눈은 여유조차 없어보였다. 그렇게... 그 남자가 나를 구하려다,

" 박 형사!!!!! "

" 정신이 들어? "

" 흐으윽... 박 형사.... 어디 있어요.... 어디 있어... 왜 안 와요... "

" 두 번째 수술에 들어갔어. "

" 검사님..... "

" 안 죽어. 그 놈이 그렇게 쉽게 죽을 인간으로 보여? 아슬아슬하게 심장 비껴나갔지만

워낙 출혈이 심해서 병원 온 후 계속 수술 받고 있어. 아마 수술 끝난 후에도 한동안 누워

있어야 할 거야. 준수 씨는 괜찮아? "

" 안... 죽죠? "

" 내가 거짓말 하는 거 봤어? 말짱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절대로 죽지는 않아. 다시 일어

나서 준수 씨 볼 올 거니까 걱정 하지 말고 자기 몸이나 챙겨. 남 걱정할 타임이야? "

살아 있다는 그 말에 안도감이 밀려 들면서 다시 잠이 쏟아진다.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오랜 시간 동안 유천과 헤어져 있었던 것이 가슴을 짓눌러서 숨도 쉬지 못

할 것 같다.

" 말을 할 수는 있는 상태지? "

" 조금 힘들지만... 괜찮아요. "

" 지금 준수 씨 힘든 거 알아. 박 형사 때문에 정신 못 차리는 것도 알겠는데, 중요한 거니까

내 말에 집중해줘. "

" .......... "

" 납치당했을 때, 주변이 어땠는지 기억 나? "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준수는 작게 중얼거리고 눈을 감았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

는데 일어나자마자 질답이라니. 창민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 K 카르텔의 보스가 잡혔어. "

" .......!! "

" 그 새끼, 사형감이야. 알고 있지? 우리측 형사 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사람 죽여놨어.

마약에, 총에, 해서는 안 될 짓들만 골라서 하고 있는 새끼야. 그런데 그가 살인을 지시

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가 없어. 조직원들은 죽어도 입을 안 열어. 그 남자가 사람을 죽이

는 모습을 본 건... 준수 씨 하나야. "

" 난 보지 못했다고 했잖아요... "

" ........... "

Page 395: Happy Together

그러고보니 이 남자. 아직까지 자신이 무슨 병을 앓고 있는 지도 모르는 구나. 창민은 많이

피곤해 보이는 준수의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이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상태를 알아야 앞으로 치료를 받든지 하지. 언제까지 그런

병을 안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유천에게 직접 듣는것

보다는 자신이 말해주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 나.. 박 형사 수술실 앞으로 데려다 줘요. "

" 지금 혼자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 "

" 휠체어 같은 거 있잖아. 수술실 앞에 가서 다 얘기할게요. 지금 여기서는 너무 힘들어서

아무 것도 못 할 것 같아... 나약한 새끼라고 욕해도 좋아요... "

그럼 그렇게 해요. 창민은 일어나 휠체어를 찾으러 나갔다. 힘들게 몸을 일으킨 준수는

링겔을 들고 창민이 다시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분이 굉장히 이상하다. 슬프면서도

묘했다. 그는 한없이 강해보였다. 고비를 넘길 일들이 많았어도, 늘 유천이 곁에 있었기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철옹성 같은 존재가 유천이었는데. 이렇게 그가 무너져서 곁에

없다고 생각하니 두려웠다. 수술대에 올라가 몸을 찢고 피를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견

딜 수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믿던 유천마저 곁에 없는 지금, 자신을 지켜줄 이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아서.

" 앉아. "

곧 창민이 휠체어를 가지고 왔고, 준수의 링겔을 대신 들어주었다. 그의 몸도 성하지 않다.

뼈도 몇몇 곳이 부러졌고, 타박상도 심하다. 쯔읏.. 하얀 피부에 선명하게 새겨진 멍자국을

보며 창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검사라는 정의로운 가면만 쓰지 않았다면, 자신도 똑같이

재중을 이런 식으로 대했을지도 모른다. 그 빌빌거리는 몸을 끌어 안으며 수술실 앞으로

향하는 김준수가 대단할 뿐이다. 처음 타보는 휠체어가 낯설어서, 준수는 혼자서 잘 움직

이지 못했다. 결국 창민이 뒤에서 천천히 밀어줘야만 했다.

" 미안해요. "

" 괜찮아. 힘든 일도 아닌데, 그리고 이런 사소한 일 가지고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사이

아니잖아. 같이 술도 먹었는데. "

" ........ "

" ... 그 때, 그 술자리 끝나고 말이야. "

당신이 나에게 어떤 행동을 했었는지 기억 나? 그 말을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아직은

아니다. 일단은 유천의 수술실 앞으로 데려가 스스로 진정이 되면 말을 꺼내도 늦지 않다.

" 뭐가요? "

Page 396: Happy Together

" 아니야. 여기야. 박 형사 수술실. "

아... 낮은 탄성을 낸 준수가 흔들리는 눈으로 거대한 수술실 문을 응시했다. 이 문 뒤에서

박 형사가 의식을 잃고 누워있다는 소리지. 그의 살결을 칼로 찢어내고 수술을...

" 괜찮아? "

참 연약한 남자다. 흐느끼는 준수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래도

앙칼진 구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첫인상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다. 세상 모든 걱정과 슬픔을

짊어진 사람 같다. 눈물이 두껍게 가득 차오른다. 끄윽, 대며 울기 바쁜 준수의 어깨를 토닥

였다. 나라고 박 형사를 걱정하지 않는 건 아니야. 다만, 지금 내가 이렇게 담담할 수 있는

건 그 녀석이 죽지 않을 거란 걸 알기 때문이야. 이런 일로 죽을 박유천이면 처음부터 내가

아끼지도 않았다. 물론 이번 일은 타격이 조금 심하긴 하지만. 준수를 토닥이다 옆에 있는

의자에 걸터 앉았다.

" 나 구하려다가 이렇게 된 거죠. "

" ... 정윤호가 준수 씨 인질로 잡고 있을 때, 뒤에서 총 들고 다가서고 있었어. 그 때

누군가

박 형사 발견하고 먼저 손을 쓴 거야. "

한참을 멍하니 수술실 문을 바라보던 준수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 정원.. 같은 곳이 있었어요. "

" ? "

" 맨 처음 나를 차 밖으로 내팽겨쳤을 때, 정원에 쓰러졌던 거 같아요. 잘 손질되어진. "

" ........ "

" 그 뒤로는 정신이 없어서 끌려가기만 했어요. 정신 차렸을 때는, 지하의 독방 같은 곳

이었고... 굉장히 습기차고,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어요. "

" 독방.. "

" 아주 커다란 저택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차에 올라 탈 때엔 머리채가 잡혀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정말 평범한 동네였어요. "

" .......!! "

" 평범한 주택가였는데... 내가 소리 지르면서 울어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내가 본 건

그게 다에요. 검사님이 이해해줘요. 너무 정신이 없고 너무 무서워서, 돌아볼 틈도 없었,

"

" 아니야. 그거면 됐어. "

자리에서 일어선 창민이 준수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주택가. 아주

커다란 저택. 잘 손질되어진 정원. 아주 최근에 본 곳이다. 절대로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

각해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고 나왔던 곳. 나중에 노후를 이런 곳에서 보내면 좋겠다고 가볍

Page 397: Happy Together

게 생각하고 뒤돌아섰던 곳. 판교에서 마지막으로 둘러보았던 그 주택가.

" 알 것 같아. "

" 어떻게... "

" 시간이 없어. 놈들이 먼저 손을 썼을 지도 몰라. 난 지금부터 준수 씨가 말했던 그곳에

가볼 테니까, 준수 씨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설마, 혼자 있을 수 없는 건 아니지? "

" .... 네. "

" 걱정 마. 곧 다른 형사들이 올 테니까. "

잡았어. 뒤돌아서며 바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 검사님?

" 나야. K 카르텔의 거처를 찾아낸 것 같아. 차 대기시켜. 바로 출발할 거야.

* * *

" 어때요, 결론은 내리셨어요? "

조직의 대처는 신속했다. 제이 에비뉴에서 증거품이 될 만한 자료들을 모조리 빼왔다고 한

다. 제이 에비뉴에 더 이상 있을 수 없기에 결국엔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다. 재중은 심란한

마음으로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안아 생각을 정리했다. 정윤호와 대판 싸웠던 곳. 이태원의

기지촌. 다른 이유로 또 다시 이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때엔 정윤호가 데리러 올 것

이라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희망을 걸어야 하는 사람은 재중이

아니라 윤호 쪽이었으니.

" 네... 다 봤어요. "

" 저희도 놀랐습니다.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을 기억하지 못 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런 이유에서였는지는 몰랐어요. 운이 좋았죠. 아마 그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겁니다. "

" ... 들은 소식 같은 건, 있어요? "

" 재판이 시작 된다면 재중 씨에게 연락이 올 겁니다. 일단 변호사 선임할 권리가 있으니까

그쪽에서 알아서 연락이 닿을 거에요. "

" 그래도... 저, 난 사건에 휘말렸던 사람이고- "

" 마피아 보스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죄가 될 수는 없죠. 죄가 없는 변호사는 스스로 변호할

사람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

나만 마음을 다잡으면 되는 거다. 재중은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며 침대에 길게 누웠다.

윤호가 곁에 있었다면 자신의 침으로 축여줬겠지. 그 키스로 달래줬을텐데. 하루 빨리 입

맞춤을 하기 위해서라도... 그에게는 내가 필요해.

Page 398: Happy Together

" 김준수.... "

그 남자가 관건이다. 정윤호가 살인을 지시한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조직원들

은 하나같이 입을 굳게 다물고 절대로 실토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정윤호가 사람을 죽이

는 것을 직접 본 김준수가 유일한 증인이자 목격자라는 소리인데... 방금 본 그 비디오 테이

프에 의하면, 충분히 우리 쪽에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 난... 이번 일이 처음이에요. "

" 알아요. 하지만 보스가 늘 그러셨습니다. 재중 씨의 나이에 사법 고시를 패스한다는 것은

천재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누구보다 머리가 좋고... 강하다고. "

그 팔불출. 재중은 잠시 자신이 처음 사법 고시에 합격했던 날을 떠올렸다. 자신보다 더 좋

아하는 표정을 지었던 것은 윤호였다. 그리고 조직원들 앞에서, 팔불출을 연상케 하는 행동

까지 보였다. 스스로 전혀 인식하지 못했었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나는 웃기면서도 행복했

어. 저 사람이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어서 기뻤다.

" 그 사법 고시... 정말로 카르텔이 손 쓴 것은 아니겠죠? "

" 아닙니다. 절대로요. 사실 저는...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보스에게 말씀드렸더니

불 같이 화내셨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지켜보지도 말라고 하시면서. "

" ........ "

" 스스로를 믿으세요. 지금 보스에게 가장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마 재중 씨가

가장 잘 알겁니다. "

힘들 때 가장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유능한 변호사도, 대단한 재력가도 아니에요.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겠지. 스스로 믿음이 생기고, 용기가 생긴다. 그 사람은 곁에 없어도

나를 이렇게 단단하게 만들어.

" 재판.. 준비할게요. "

" 예. "

" 제가 부탁하는 자료들, 모두 조사해 주세요. "

" 그럴게요. "

"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는 건가요? "

" 많이 누추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저희들을 숨겨줄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자

들 말고는 아무도 없어요. "

" 괜찮아요. 나 걱정 하지 말아요. "

그는 잠깐 고개를 숙이고는, 재중의 방에서 나갔다. 쾌쾌한 냄새가 가득한 침대에 누워서

벽지가 뜯어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원래 이 시간에는 그와 함께 그의 아름다운 침실에 누워

Page 399: Happy Together

사랑을 나누는 것이 정답이겠지. 제이 에비뉴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저택은 가장 아름다

웠어. 정윤호의 침실은 그중에서도 최고였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저릿하다. 내 가슴이 저릿하니, 정윤호의 가슴도 지금쯤 저릴거다. 이렇게

마지막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 안에서 조금 더 황홀하게 지낼 것을.

* * *

" 정신이 들어? "

그의 회복력은 거의 불사신에 가까웠다. 목숨을 건 수술을 마친 사람은 오랜 시간을 혼수

상태로 누워 있는 것이 당연지사거늘, 유천은 수술이 끝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눈썹을

꿈틀거리며 눈을 떴다. 이 남자가 심장에 총을 맞고 거의 죽어가던 남자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나름대로 하루 이틀은 혼수 상태에 빠진 유천을 앞에 두고 울 준비를 하고

있던 준수는, 갑자기 눈을 뜬 유천의 얼굴에 놀라 뒤로 물러났다. 무슨.. 무슨.. 부활하는

드라큐란 줄 알았어!

" 박 형사! 박 형사? "

" 으...! "

그 오랜 수술을 하고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아 눈을 떴으니 마취약 후유증에 수술 부위가

아파오는 것은 당연할 터. 깨어난 유천은 준수도 보지 못하고 일단 소리 지르는 것으로 자

신의 부활을 알렸다.

" 으아아악!!!!! 아프다!!!!!!! "

" 자, 잠깐 기다려! 의사 부를게! "

몸이 찢어진다!!!!! 토나와!!!!! 비명을 지르며 아프다고 발악하는 것을 보고, 준수가 허겁지

겁 의사에게 호출을 했다. 곧 달려온 의사들과 간호진은 예상보다 너무 이른 시간에 깨어난

유천을 보며 내심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몸 상태와 수술 경과를 확인했다.

" 수술은 무사하게 끝났, "

" 진통제 없어요?!?!?!!!!! 아아악!!!!!! "

" 진통제 놔드려. 수술은 무사하게 끝났... "

" 씨팔!!!! 아프다!!!!!! "

" 진통제 빨리 놔드려. 수술은 무사하게 끝, "

" 아아악!!! 주사 바늘 더 작은 거 없어요?!?!! "

의사 말 좀 하자 바쁘신 분인데.... 약간 두려워하는 의사를 앞에 두고, 몇번이나 비명을 지

Page 400: Happy Together

르며 몸을 비틀던 유천은, 거대한 주사로 진통제를 몇 방 맞고 난 후에야 진정이 된 듯 다시

침대에 제대로 누웠다. 그제야 곁에서 동그란 눈을 뜨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준수를 발견

했다.

" 준수야!!!!! "

" 박 형사!!!! "

" 수술은 무사하게 끝났습니다. 위험한 수술이었지만 다행히 총알을 빨리 제거했고, "

" 괜찮아?!!! 준수야!!! 내 옆으로 와!!!!! "

" 출혈이 심하긴 했지만 수혈이 쉽게 이루어져서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가진 않았어요. "

" 박 형사, 정신이 들어??? 나, 나 알아보겠어?! "

" 당분간은 병원에서 지내야 할 겁니다. 환자의 회복 상태를 봤을 때 어쩌면 금방 퇴원할

수도 있겠군요. "

" 이리 와. 만져보자, 우리 준수.... "

" 굉장한 회복력입니다. 그럼 이만, "

이번에도 자신의 말이 끊길가봐, 쏜살같이 할 말을 끝내려 했지만 저 둘은 의사의 수술 경과

보고에는 관심이 없어보인다. 뻘쭘해진 의사는 간호진들 데리고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의사가 나가자마자 휠체어를 움직여 문을 잠군 준수가, 다시 바퀴를 굴려

재빨리 유천의 곁으로 다가와 팔을 뻗었다.

" 괜찮아? 응? 많이 아프지? 박 형사... "

" 너, 이거 뭐야. 니가 휠체어를 왜 타고 있어? "

" 아직은 움직이기 힘들어서.... "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휠체어 바퀴를 돌리며 준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다리가 아직은

많이 안 좋대. 곧 일어날 수 있다니까 걱정 마. 지금은 몸에 힘이 잘 안들어가서.. 서 있기도

벅차다. 배시시 웃는 그의 얼굴을 보자 눈물부터 차오른다. 네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걸

타고 움직여... 예쁜 두 다리 가지고 있는 녀석이.

" 박 형사... 눈물 되게 많다... "

" 너어.. 다른 곳은 괜찮아? 씨발... 얼굴은 이게 뭐야.... "

군데군데 멍이 들어있는 시퍼런 얼굴 구석을 바라보며 유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많이 다

쳤으리라 생각했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니 말이 나오질 않는다. 터진 입술은 물론이고 눈가

의 선명한 멍은 언제쯤 없어질까. 이 멍이 다 없어질 때 쯤이면, 가슴의 멍도 사라질까. 앙상

하게 뼈만 남은 손목을 쥐고서 '이 닭모가지 같은 손목을 어떻게...' 하며 중얼거리던 그가,

갑자기 침대에서 내려오려 몸을 일으키더니 신발을 찾기 시작했다.

" 아직 움직이면 안 돼! 방금 깨어났잖아! "

" 이 개새끼들을.... 그 새끼들 어디있어?! 다 잡혔어?!!! 죽였어?!! "

Page 401: Happy Together

" 보스를 잡았대. 박 형사, 진정하고 빨리 누워. 이러다가 수술한 부위 터지면 어떡해... "

" 심 검사님은 어디있어!! 그 새끼들 씨팔.. 빨리 다 죽여버려야 되는데에.... "

" 조사할 거 있다고 나가셨어. 빨리 누워. 박 형사.. 지금도 아파서 얼굴이 새하얗잖아. "

객기 한 번 부려 본 대가가 크다. 끊어질 듯 아파오는 수술 부위에, 유천이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몸이 이 지경까지 되다니... 이래가지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너를

곁에서 지켜주기 힘들잖어.. 중얼거리며 자신의 배와 심장을 손바닥으로 훑었다. 느껴지는

상처 부위. 총알을 바로 받았던 자신의 가슴팍. 준수 몰래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 숨겼다.

그래, 두렵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소름끼칠 정도로 두려웠다. 내 앞에서 네 모습이

흐려지고 엄청난 고통과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서 삶의 끝이 보였어. 이대로 죽는 구나, 너를

다시 안아보지도 못하고 여기서 죽는구나. 그 때의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 괜찮아...? "

간신히 몸을 일으켜 준수의 상체를 끌어안은 유천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묻었다. 사람이

죽을 때는 미련이 없어야해. 죽기 전에 너무 많은 미련이 남아 있으면, 가는 그 순간이 말

할 수도 없이 처절하게 고통스러워. 특히나 너 같은 사랑하는 이를 앞에 두고 떠나는 순간

이야말로... 최고의 형벌이다. 나,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무서웠어. 그래도 너에게 투정부리

기에는 네가 받은 상처와 충격이 나보다 더 크지. 준수야, 너 상한 모습 보니까 아팠던 가슴

또 아프다. 수술 제대로 안 됐어. 수술 망했나부다. 이렇게 가슴 또 아픈거 보니까.

" 응... "

갑작스러운 입맞춤을, 사실은 너무 기다리고 있어서 바로 목을 끌어안았다. 너무너무 그리

웠던 키스라서, 그리움만큼 세포 하나하나에 정확히 새기고 기억에 꼼꼼히 넣어두었다. 더

운 입김이 입 안으로 밀려들자 그제야 진정이 되고 여유가 생긴다. 우리.. 이렇게 다시 만나

키스하고 있구나. 그래, 그러면 됐어. 이제는 뭐라도 다 괜찮아. 그럴 것 같은 기분이야.

" 준수야, 손바닥 펴봐. "

" 응? "

" 손바닥 쫙 펴서 이렇게 내밀어봐. "

으응.. 유천의 말대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자그마한 그 손바닥 위에, 유천의 두 주먹이 손등

을 위로 향한 채 척- 하고 올려졌다.

" 이게 뭐야? "

" 무릎 꿇고 싶은데... 움직이지를 못하겠어. 그래서 무릎 대신 주먹꿇음 할게. 용서해줘. "

" 박 형사..... "

" 너 눈 앞에서 놓친 거, 이렇게 아프게 한 거, 내 이름 부르면서 울 때 달려가지 못한 거.

Page 402: Happy Together

다 용서해줘. 전부 다. 만약 니가 용서해 준다면 지금까지 사랑해준 거 배로 사랑할게. "

나야말로 너무 나약한 인간이라서 한 시 한 순간이 너무나 미안한데... 주먹 위로 눈물을

쏟았다. 거칠어진 그 주먹에 입을 맞추고, 톡톡 건들였다. 귀엽다, 주먹 꿇기..

" 살아줘서 고마워.... "

" 너도 무사해줘서 고마워. "

" 형아.... "

" 응???? "

내가 잘못 들었나? 방금 형아- 라고 부른 거 같은데. 유천이 눈을 크게 뜨고 준수를 바라보

자, 그는 젖은 눈을 반달로 만들며 입모양으로 확실히 '형아-'를 그리고 있었다.

" 형아- "

" 어라.... "

" 형아- "

" 으..... "

" 유천이 형아! "

엄마 어뜩해.... 너무 귀여워!!!!!! 아픈 것도 잊고 몸을 날려 준수를 끌어안은 유천이, 몸이

닳도록 키스를 퍼부었다. 여기저기. 말미잘처럼 닿았다 떨어지는 유천의 도톰한 입술에,

준수가 장난스레 얼굴을 찡그리며 미소로 화답했다. 늘 이렇게 형이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괜히 쑥스러워서 언제나 박 형사였지. 박 형사, 응. 준수야.. 이거보다, 형, 그래. 우리

준수.

이게 훨씬 더 사랑스럽잖아.

" 준수야 어떡해, 진짜 너 너무.... "

막 너무 사랑스럽고 예쁘고 귀여워서 미쳐버릴 것 같아... 이러다가 나도 모르게 너 빨아먹

다 없어질지도 몰라.. 와씨, 깨어나자마자 골로 보내게 만들려고 작정했냐. 그렇게 웃으면서

자꾸 형아라고 부르지 마. 지금 내 몸이 병신처럼 빌빌거리는 게 너무 한스럽잖아. 그냥 널

이 병원 침대에 대자로 눕혀서 머리부터 발 끝까지 먹어버리고 싶어지잖아..

" 이렇게 부르는 게 더 좋아? "

" 앞으로는 형아라고 불러. 유천이 형, 응? "

" 응! "

" 자, 불러보자. "

" 유천이 형! "

" 또, 또! "

Page 403: Happy Together

" 유천이 형아♡ "

" 조금 더 귀여운 목소리로! "

넌 나만의 유천이 형아♡ 여기 죽을 고비를 넘기고 깨어나자마자 지랄하는 한 커플이 있습

니다..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27

" 여기가 확실해? "

" 맞아요. "

검찰에서 대대적인 수사 인력을 지원 받아 제이 에비뉴로 향했다. 설마 싶어서 다시 그 일

대의 토지를 사들인 남자를 다시 조사했다. 부동산에서 허술하게 관리하는 바람에 정확한

정보는 알지 못했으나, 확실한 것은 그 토지를 사들인 남자의 신원을 컴퓨터로 맞춰본 결과

'없는 사람'이라는 답이 나왔다는 것이다. 없는 사람이라... 가짜 신분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K 카르텔과 일치한다. 창민은 100% 확신하고 있었다. 그 주택가가 카르텔의 본거지

라는 것을.

" 나 참... 진짜 황당하네. 검사님, 우리 그 때 똑똑히 눈으로 봤잖아요? 그런 곳이 어떻게

조직의 본거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이야? 그런 거- 봤어요? 난 형사 생활 10년 하면서 처음

봤어. "

" 우리가 실수한 거지. 하지만 김준수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나도 여기는 생각하지도

않았을 거야. "

마피아의 은신처라고 하기엔 너무나 단란한 주택가잖아. 제이 에비뉴 앞에 서서 관리실을

바라보았다. 그 때 보았던 관리인은 없다. 당연한 건가. 이곳이 들킬 줄을 알았다면 벌써

손을 써서 빠져나갔겠지. 한 발 늦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정문을 열어재꼈다.

" 1 수사팀은 왼쪽. 2 수사팀은 오른쪽 주택가를 샅샅히 뒤져. 증거가 될 만한 물건들을 모두

가지고 와. 그리고 나와 형사들은 저기 앞의 가장 큰 저택으로 간다. "

이곳이 전부 다.... 창민은 마른 침을 삼켰다. 설마, 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맞았어. 이게 다

그 새끼들의 은신처였어. 건물 하나가 아니였다. 이곳 전부가, 모두 죄였어.

Page 404: Happy Together

아무도 없는 주택가는 조용하다. 설마 숨어있는 자들이 나올지도 몰라 주위를 경계했지만

아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 그들의 보스는 잡혀 있고, 이런 조직은 보스의 명령없인

제멋대로 사고를 치지 않는다. 중앙 저택으로 들어선 창민은 그 내부의 화려함에 한번 더

놀라야 했다. 씨팔... 대한민국 엘리트라는 검사보다 낫네. 차라리 이 직업 접고 마피아나

해버릴까봐, 중얼거리며 발을 딛었다. 형사들로 조직된 수사팀을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눠서

저택을 수사하게 했다. 남김없이 모두 뒤져. 증거가 될만한 것들은 하나라도 찾아와.

" 그들이 마약을 거래하고 무기를 밀매하고, 다른 조직들을 협박하고 보스를 살인한 증거.

그거 될만한 거 모두 긁어모아. 대충 보지 마- "

창민은 곁의 두 형사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2 층은 1층 홀에 비해선 아담한 크기였지만,

그 화려함에 있어서는 1층 못지 않았다. 손님용 방으로 보이는 곳은 휑하니 비어있었고 작

은 거실과 베란다는 일반 주택과 별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모양새다.

" 여기가... 아마도 보스의 거처일겁니다. "

그 중, 가장 크고 화려한 문을 열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정리된 아름다운 응접실이 나타

났다. 여기서부터 뒤져, 형사 하나를 남겨두고 두 번째 문을 열자 붉은 카펫이 강렬한 엄청

난 규모의 서재가 나타났다.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을 보고 머리가 아찔해졌다. 저걸

언제 다 뒤지고 앉아있으려나...

" 이쪽은, 침실 같은데요? "

" 여긴 내가 살필 테니 서재를 뒤져봐. "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침실이다... 내심 놀랐다. 살인을 메인 요리로 하는 마피아 보스께

서, 잠은 이렇게 우아한 곳에서 주무신다 이거지... 웃기는 일이다. 엔틱한 가구들을 둘러보

다 침대 옆의 서랍장을 뒤졌다. 별다른 물건은 나오지 않는다. 면도크림, 빗 등 평범한 물건

들 뿐이다. 서랍장 옆으로 놓여진 선반에는 클래식 LP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참나...

그것들을 집어 들며 창민이 어이 없다는 듯 웃었다. 난 또, 이런 취향의 보스는 처음보네.

" 깨끗해.. "

사람의 발길이 방금 닿았다 떨어진 느낌이 난다. 아마 놈들이 먼저 선수를 쳤을 거야. 하지

만 이곳은 정윤호의 개인적인 공간인 만큼, 그가 숨겨놓은 몇몇가지들이 분명히 있겠지.

그걸 찾아내야 하는데.

" 검사님, "

" 응? "

Page 405: Happy Together

" 방금 검찰에서 연락이 왔는데.. 정윤호 그 자가 자신의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합니다. "

" 누구를? "

웬만큼 간 큰 자가 아니고서야 거물급 보스의 변호를 맡을 사람이 없는데. 성공할리도 없

지만, 성공한다고 해도 돈 때문에 흉악범을 감쌌다는 비난을 제대로 받고 이 세계에서 떨

어져나갈 리 만무하다. 창민은 LP판을 끄적거리며 대답을 기다렸다.

" 김재중이라고 하는데요. "

" ... 김재중? "

" 네. 방금 연락이 닿았고, 그 자가 정윤호의 변호를 맡는다고 합니다. "

쯔읏. 혀를 차고 침실에서 나왔다. 아무래도 중요한 자료들은 이 서재에 있을 것 같은 기분

이 들어. 그나저나 이 엄청난 책들을 언제 다 뒤지지... 대단한 놈일세 그려. 총질과 주먹질

만 하는 새끼인 줄 알았더니. 그나저나 김재중이라... 첫 변호일텐데, 엄청난 놈을 맡았네.

자기 입으로 분명히 깊은 관계가 아니었다고 했었지. 그건 아마 거짓일거다. 김재중은 분

명히 정윤호와 깊은 관계야. 그렇기 때문에 위험을 무릎쓰고 그의 변호를 맡았겠지. 허나

지금 와서 그런 사실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 형사들을 더 모아서 서재를 중점적으로 뒤져. 분명히 무언가 나올 거다. "

" 네. "

" 아, 그리고 박 형사는 깨어났대? "

" 네. 깨어났답니다. "

" 벌써?! "

" 원래는 며칠 더 혼수 상태 빠지는 게 일반적인데, 뭐 그 놈이 일반적인 놈이 아니잖아요.

지금 죽도 아니고 밥먹고 있답니다. "

" .... 괴물이야. "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재로 들어서는 창민이다.

* * *

" 누워서 먹으면 살찐다는데. "

" 너는 쪄도 돼. 우리 준수는 너무 말랐어. 손목도 이렇게 닭모가지 같고, 진짜 모가지는

바싹 말라 비틀어진 나뭇가지 같단말야. "

" 그래서, 만지기 싫어 ? "

" 아니이... 또 그런 건 아니지이.... "

Page 406: Happy Together

환자복 안으로 손을 넣어서 준수의 척추뼈를 쓸어 만지던 것이 어느덧 두 시간 째.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다리를 질질 끌어서 유천의 침대에 함께 누운 준수는, 병실의 문을 잠궈놓고

오랫동안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이느라 바쁘다. 그 동안 떨어져 있어서 보고 싶었던 마음이

구름을 뚫어 옥황상제의 똥침을 찌른 거 까진 알겠으나... 심히 보기 배알 꼴린다. 한참이나

준수의 등을 어루만지던 유천은, 서서히 나아가고 있는 준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콧등에

입을 맞췄다. 열심히 사과를 베어먹느라 여념이 없는 우리 준수... 돼지처럼 잘도 먹지..

이리보고 저리봐도 예쁘다.

" 그 새끼들이... 너 어디 만지고 막 그런 건 없었지? "

" 무슨 뜻이야? "

" 아니... 너 끌려갔을 때 옷차림이 되게 야했잖아.... 그거 계속 걸려서, "

" 옷 갈아 입혔어. "

" 니가 갈아입었지?! "

" 응. "

거기 보스가 게이래잖아. 그래서 혹여나 너 보고 이상한 마음이라도 품었을까봐. 사실은

그 부분도 엄청 신경쓰이고 그랬었는데...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유천이 조심스러운 목

소리로 물었다. 묻고 싶은 것들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 때의 얘기를 쉽게 꺼냈다간 준

수가 어떻게 상처를 받을지 모르고, 언제 화를 낼지 모른다. 게다가 정윤호는 말했었다.

준수의 '병'에 대해서. 그 부분이 가장 혼란스럽다. 그는 김준수의 단순한 몽유병을 본 것

일까. 아니면 김준수의 또 다른 인격을 본 것일까.

심 검사는 유천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몽유병 증세가 심각해지면서, 그 병으로 인해

또 다른 인격이 태어난 것 같다고.. 하지만 그 인격은, 평소에는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

았다. 준수의 목숨이 위태로워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받았을 그 상황에 믿기지 않게 등장해

검찰에게 엄청난 증거를 내놓고 홀연히 사라졌다. 카르텔에게 납치되었을 때 정윤호가 보

았다던 준수의 '병'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 평소에 인격을 드러내지 않는 그저그런

몽유병 증세? 아니면 이중인격?

"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

" 응... "

너에게도 말해줘야 할텐데.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준수는 분명히 치료를

받아야 하고 또 다른 인격을 죽이는 상담도 전문적으로 받아야 해.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을

그저 심각한 몽유병 환자라고 생각해왔던 준수가, 이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몽유병 만으로도 자신이 정신병자라고 생각하며 그간 고통 받아왔던 남자다. 이중인격이란

새로운 사실을 접하고서도... 예전처럼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확신이 안 서.

" 김준수. "

" 왜 갑자기 성 붙이고 불러? 정떨어지게! "

" 너는... 내가 너를 얼만큼 사랑하는 거 같아? "

Page 407: Happy Together

" 갑자기 그건 왜? "

" 그냥, 얼마만큼 알고 있나 궁금해서. "

마음을 재는 자가 있었으면 좋겠어. 가로는 몇 센티. 세로는 몇 센티. 총 이러이러한 크기의

사랑이 당신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 그런건... 왠지 말하기 그렇다. 너무 상투적인 질문이잖아. "

" 너가 심한 몽유병 환자라는 소리 들었을 때도,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 한 적 없다. "

" .... 그런 소리는 왜 해? "

" 그냥... 그렇다고. 너한테 어떤 결점이 있고 어떤 흠집이 있어도, 나는 그걸 장점으로 만들

자신이 있다는 소리야. "

네가 이중인격이라도 나는 상관 없어. 그래... 문제는 내 마음이 아니라 네 마음이지. 너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는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눈물을 그친지 얼마

되지 않은 네가... 또 얼마나 울까.

" 정윤호에게.. 네가 몽유병이라는 사실을 말했었어? "

" .... 아니? 전혀. 그런 말 해도 콧방귀 뀌며 헛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남자야. "

머리가 복잡하다. 연인과 함께 있는 시간은 연애하기도 바쁜데, 이렇게 사건 수사에 질문

을 가장한 취조나 하고 앉아있어야 하다니... 유천은 한숨을 내쉬며 준수를 더욱 꼭 끌어안

았다. 마음 같아서는 형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준수와 함께 도망가고 싶다. 그들이 절대

찾지 못할 곳으로. 그리고... 심 검사가 머리 후려치지 못할 그런 먼 곳으로.

" 심 검사님이 오시면... 얘기 많이 해야 될 거야. "

" 검사님 무서워. 요새 신경 날카로워서 장난 아냐. "

" 준수야. "

" 응? "

" 검사님이 너에게 많은 얘기들 할 거야. 하나하나 놓치지 말고 잘 들어. 그중에 네가 받아

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다고 해도, 너 혼자 끙끙 앓지 말고 그냥 나한테 안아달라고 해. "

" ...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 "

" 그냥... 검사님이 워낙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말하니까. "

" 옆에 있어 줄 거지? "

" 네가 원한다면. "

" ... 왠지 무섭다. "

벌써부터 겁 먹으면 어떡하냐. 막상 중요한 이야기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아마 내일이면

심 검사가 찾아올 거고, 달콤한 지금의 이 시간도 끝이다.

Page 408: Happy Together

" 준수야, "

" 응? "

" 나... 하고 싶다. "

바스락, 이불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준수가 놀란 표정으로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몸도 성치

않은 남자가 무슨 객기로 지금 하고 싶다고 그래. 다리도 제대로 못 쓰면서.

" 우리 둘 다 지금 병신인 건 알고 있어? "

" 응. "

" 형아 수술 끝난 지 얼마 안 됐어. 나두 아직 몸 많이 아프고... "

" ... 아무래도 그렇지? "

으응... 준수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으로라도 해줘? 하고 애교있게 물었다. 고개를 저으며

그저 입만 맞췄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꼭 무슨 일이 터질것 처럼 불안해. 준수 너는 네

병이

어떤 건지 알지도 못하고, 아직 정윤호에 대한 재판은 시작하지도 않았고, 심 검사가 너에게

뭐라고 말할 지도 걱정되고... 네가 내 옆에 있는데도 이렇게 불안했던 적은 처음이야.

" 자자. "

" 우리 또 이렇게 같이 자는 거 간호사 누나가 보면 뭐라고 할텐데... "

" 내가 그년들 다 이겨. "

" 욕 좀 하지 마! "

" 응응. 알겠으니까 빨리 자. 우리 준수... "

휴가라고 생각하자. 우린 지금 짧은 휴가를 온 거야. 휴가가 끝나면 다시 일터로 돌아가

지긋지긋한 전쟁같은 일상과 싸워야 겠지. 우리는 일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친 싸움터로

발을 딛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저 다 잊고 너와 이렇게 끌어안고 자고 싶다.

.

.

.

유천은 아주 늦게 잠이 들었다. 일단은 준수의 병에 대한 고민으로 오랫동안 한숨을 쉬어야

했고, 이제부터 시작될 재판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정윤호는 분명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야. 그들이 어떤 카드를 들고 나올 것인가. 만약에 정윤호가 김준수의

이중인격을 목격했다면, 그건 큰 문제다. 정신 이상자로 판정된 자들의 증언은 법적 효력이

없다. 김준수가 살인을 목격했다는 그 큰 증거가...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야.

" 음.... "

Page 409: Happy Together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간신히 잠에 들었다. 하지만 얕은 잠이었던건지, 새벽녘에 눈을 떠

버리고 말았다. 아뿔싸...! 그러고 보니, 잠들기 전에 준수와 자신의 손을 연결하지 않았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냐는 마음에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찾는데, 그는 깨어있었다.

" ... 아직 안 잤어? "

" 응... "

" 왜 이렇게 안 자.. 내일 아침에 또 주사 맞고 밥 먹고 치료 받아야 되잖아. "

준수는 빤히 유천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 검푸른 눈동자가 참 예뻐서 바라보았다. 너는..

아침에, 한 낮에, 저녁에, 이른 새벽녁에, 언제 봐도 예쁘구나. 사랑하는 이에게 취해서 멍

하니 수 천번째 반하고 있는데, 준수가 손가락으로 유천의 얼굴을 훑었다.

" 당신... 참 잘생겼어. "

" 이제 알았냐? 나도 거울 보면서 그렇게 생각해. "

" 눈도... 코도.. 입술도. "

" 그중에 뭐가 가장 마음에 들어? "

" 입술. "

살짝 고개를 든 준수의 입술이, 유천의 입술을 머금었다. 아주 조용한 움직임. 그에 따른

바삭거리는 이불소리. 천천히 등을 타고 올라오는 준수의 작은 손. 자신도 모르게 준수의

여린 어깨를 감싸 안고 키스했다. 이런 새벽에 하는 키스는... 또 다르다. 자다 깨어나서

감성어린 마음으로 누군가를 안는 기분은 더더욱 색달라. 유천은 그렇게 준수를 안았다.

" 준수야... "

" 하고 싶다며. "

" ... 지금? "

" 나도 하고 싶어. "

생긋 웃던 그는, 손바닥을 천천히 유천의 아랫도리에 가져갔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간신히 유천의 골반 위에 얹혀놓고, 그대로 걸터앉았다. 쓰러지듯

유천의 몸 위에 누워서 소리내어 웃었다.

" 야아... 너 안 아파? "

" 괜찮은데? "

" 진짜 괜찮아? "

" 하고 싶잖아... "

네가 그렇게 나오는데 피할 이유가 뭐가 있냐!! 자꾸만 귓가에 속삭이는 느릿한 음성에, 유

천이 굳이 마다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준수의 환자복 단추를 풀어내려갔다.

Page 410: Happy Together

" 사랑해.. "

응, 그 말은 언제 들어도 좋아. 미소에 화답하고 유천이 조심스럽게 준수의 바지를 벗겼다.

달빛에 훤히 드러난 그 가느다란 허벅지에 여전히 멍든 푸른 자욱. 안쓰러운 눈으로 보면서

손바닥으로 문지르니 아프다며 미간을 찡그린다. 유천의 바지를 저만치 벗긴 준수가 길게

누운 그대로 결합하기 위해 몸을 살짝 위로 들었다. 골반을 단단하게 잡고 준수를 올려다

보면서 자꾸만 물었다. 정말 괜찮아?

" 하아... 준수야... "

들어갈 듯 말 듯, 그렇게 애를 태우면서 유천을 놀린다. 낮지만 비음 섞인 그 웃음소리가

여느 때처럼 사랑스럽다. 유천의 쇄골을 핥다가 한 번에 제 몸을 벌리고 유천을 받았다.

준수의 골반을 잡았던 유천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준수는 움직였다. 나풀거리듯이 그렇게

살랑살랑... 아주 조용하고, 그래서 더욱 은밀하게 몸을 섞었다.

준수는 웃고 있었다. 그렇게 아프다면서, 그래도 다리를 옆으로 벌리고 두 팔을 유천의 가

슴에 얹어놓고 오랫동안 움직였다. 어느새 더워진 유천의 몸이 극한 오르가즘으로 헐떡거

려 넋을 놓을 정도로 숨이 차올라도... 준수는 웃었다. 좋지, 당신... 그렇게 물으면서

여러번

웃었다.

" 아...! "

따끔하다 싶었다. 들뜬 숨소리를 내뱉으며 허리를 들썩거리던 준수가, 어느새 자란 긴 손

톱으로 유천의 가슴팍을 그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겠지만, 새빨간 핏방울이 가늘게

맺혔다.

준수야.. 준수야... 여러번 유천이 숨 찬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준수는 한 번도 대답

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그의 위에서 나폴거렸다. 살랑살랑,

.

.

.

" 또 여기서 주무셨어요?! "

이럴 줄 알았어. 꿈 같은 시간이 지나면 그 꿈을 깨는 악녀가 등장하기 마련이지. 못생긴

Page 411: Happy Together

간호사가 떽떽거리며 유천과 준수를 흘겨본다. 다 큰 총각 둘이 한 침대에서 뭐하냐며

앙칼지게 짜증을 부린다. 유천은 눈을 부스스 뜨며 피곤해 죽겠다고 하품을 연신 해댔다.

그러면서도 괜히 어제 새벽의 일이 떠올라, 웃으며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준수의 볼을

톡톡 쳤다.

" 응... 아침이야? "

" 마녀 왔어. "

뭐가 와?! 눈을 째리며 차트를 들춰보던 간호사가 짜증을 부린다. 아침이나 먹고 순서대로

진료 받으러 나가세요!! 예예- 고개를 끄덕이며 맛대가리 없는 병원식을 받았다. 그리고

절대로 문 좀 잠구지 마세요! 도대체 남자 둘이 여기서 뭐하는 거야?! 궁시렁거리며 그녀가

나간 후, 유천은 준수를 흔들어 깨웠다. 어제 무리해서 힘든 건 알겠지만 밥을 먹어야 기운

을 차리지. 오늘부터는 심 검사도 와서 무지하게 괴롭힐텐데.

" 아으... 나 더 자면 안 돼? "

" 안 돼. 니가 자초한 일이니까 빨리 일어나. "

" 뭐라고 하는 거야... "

귀찮다는 듯 머리를 배게 사이로 파묻던 준수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 몸이 욱신거린다며 빌빌거리던 그는, 유천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로 내려와 화장실로

향했다. 일어나자마자 세수하고 이를 닦고, 청결한 자세로 식사를 만나는 건 당연한 일.

" 반찬 뭐야? "

" 오이 냉채랑 계란말이랑 깍두기랑... "

" 됐어! 그만 말해! 거기까지만 들어도 충분히 구려! "

에이씨.. 맛있는 거 먹고 싶어. 중얼거리며 칫솔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 몸이 욱신 거려. "

" 당연히 욱신거리겠지! "

어제 내 위에서 그렇게 용을 써댔으니... 유천이 힐끗 준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는 늘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잠자리에서 대담한 행동으로 유천을 놀래킬 때가 많았다.

하긴, 유천에게 준수는 처음이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한 때는 그 사실이 속상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다 지나간 일이다. 부끄러움 없이 서로를 대하는 방법은 준수가 알려줬고,

유천은 준수의 그런 대담한 면 또한 사랑한다. 그러나 어제는 뭐랄까...

" 야했어. "

Page 412: Happy Together

" 응? "

" 어제 너, 야했다고. "

" 뭐래? "

헛소리 한다며 이를 닦느라 정신이 없다. 짜식... 또 부끄럽다고. 배시시 웃으며 수저를 들

고 한 입 떴다. 졀라 맛없어 썅.

" 아! 몸이 욱신 거려!! "

" 많이 움직였으니까. "

" 뭘 움직여! 어제 휠체어 타고 내 병실이랑 형아 병실 왔다갔다 한 거 밖에 없는데에! "

" 그거야 그거고... 또 어제 새벽에는 다르지. "

" 잤거든? "

" 에이..... "

" 짜증나, 아침부터 헛소리야. "

퉷- 양치물을 뱉고 얼굴을 깨끗히 닦고 휠체어 바퀴를 굴려 다시 유천의 곁으로 다가왔다.

수저를 들고 식단을 바라보면서 얼굴을 찡그린다. 잠시 준수를 바라보던 유천이 물었다.

" ... 그렇게 몸 안 좋으면서, 어제 새벽에는 왜, "

" 왜 자꾸 새벽 타령이야?! 꿈 꿨냐?! "

" ...... "

" 에이, 맛없어. "

밥을 한 입 뜨던 유천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꿈? 한참이나 가만히 준수를 바라 보다가

자신의 가슴팍을... 어제 그가 그었던 손톱의 흔적은 그대로인데. 꿈이라니, 그건 현실이야.

" 준수야... "

" 응? "

" 이 상처, "

" 그건 또 뭐야? 어디 긁혔어? "

" ...... "

" 하여튼 칠칠맞어. "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유천의 가슴팍을 살짝 누르려 다가섰다. 그 순간, 유천이 뒤로

물러서며 몸을 뺐다. 소름이 끼쳤다. 네가 한 거잖아, 준수야.

" 왜 그래? "

" .... 그게, "

" 오늘 나부터 진료지? 지겨워... 그래도 이제 수술 받을 일은 없다고 하니까 다행이다. 참,

Page 413: Happy Together

오늘 검사님은 몇 시에 오신대? "

목이 마르다. 아까 물을 마셨는데도, 타는 듯이 목이 마르다. 물잔을 찾아 손을 뻗었다. 시

원한 물이 이상하게 미적지근하다. 마셔도 마셔도... 입 안이 바짝 말라온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밥을 조금씩 떠먹는 준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맞는데.

" 준수야... 잘 잤어? "

" 응? 응. 한 번도 안 깨고 푹 잔거 같아. 그런데 왜? "

" .... 피곤해 보여서. "

" 몸이 이 꼴인데 당연하지. 이 멍 좀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 "

종알종알.. 밥그릇을 비워가는 준수를 멍하니.

네가 분명한데, 어제 나와 몸을 섞고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너는 어디에 있니.

* * *

" 아무것도 없다고? "

" 네. 컴퓨터는 완전히 망가져 있고, 그나마 복원시킬 수 있는 컴퓨터도 몇 대 없습니다만,

중앙 저택이 아닌 다른 조직원들의 사택에서 나온 컴퓨터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

씨팔.. 한 발 늦은 것 같다. 몇 대 째 피운 담배인지 모르겠다. 제이 에비뉴는 깨끗했다.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특히나 기대했던 정윤호의 서재에서는 더더욱. 큰 기대를 걸었다가 허

탕만 쳤다. 창민은 허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아.. 왜 이렇게 힘들지.

곧 병원으로 찾아가 박 형사와 김준수도 만나고, 김준수를 앉혀놓고 그의 병에 대해서 다시

설명을 해야 한다. 그것만 생각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 곧 병원에 갈 거니까, 박 형사에게 연락 넣어둬. "

" 네. "

그래도 쉴 수는 없지. 일단 맡은 사건이 있으면 끝을 보는 것이 창민의 성격이다. 겉옷을

들고 강력 1반을 나섰다. 스쳐보이는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은 몰골이 말이 아니다. 며칠째

밤새 수사하느라 면도도 하지 못했고 머리도 엉망이다. 후우, 어디가서 검사라고 하면 믿지

도 않을 거다.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그지새끼라고 하는 게 더 걸맞겠어. 가기 전에 면도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복도 코너를 돌았다.

- 놔!!! 이 개새끼들!!!! 썅!

Page 414: Happy Together

- 안 닥쳐?!!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기 전에 제대로 걸어!

- 으아아악!!!!! 놔!!!!!

강력 3반 쪽이다.. 또 어떤 개자식을 잡았길래 목소리가 저렇게 높아. 지저분한 머리를 하고

지저분한 옷을 입을 남자가, 저만치에서 끌려오고 있다. 아마도 갓 잡힌 듯 취조가 시작될

것 같다. 타이를 느슨하게 푸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전형적인 범죄자 스타일이다. 닳고 닳은

운동화를 내려다보다, 시선을 올렸다. 천천히, 그와 그의 어깨를 잡은 형사들이 다가왔다.

예진아.

순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들고 있던 서류를 놓쳤다. 하얀 종이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

어진다. 창민은 늘 생각해왔다. 그녀를 더럽히고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던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건 어떤 자리일까.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을 것이고, 쫒아가며

총구를 겨눌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우연히 다른 범죄 현장을 조사하다 찾아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 수많은 상상을 했었다. 그 남자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할까.

칠까, 죽일까, 아니면 내가 울까.

" 검사님, 지금 나가세요? "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전혀 달랐다. 그 남자를 칠 수도, 죽일 수도, 그리고 자신이 울지도 않

았다. 창민은 멍하니 다른 형사들에게 잡혀 들어온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강간하고

결국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으로 총을 헛질하게 만들어 숨을 끊어놓은 그 남자를. 평생을

쫓아다닐 것 같던... 잡히지 않던 그 남자를.

" 이.. 남자, "

" 건들이지 마세요! 이 새끼 완전 미친놈이에요! 재판 할 것도 없어요, 이 새끼는! 바로 사형

이니까, 이 미친 새끼야! 제대로 걸어-! "

흐흐... 그 남자는 창민을 보고 웃었다. 온 몸이 돌처럼 굳어버린다. 살아있었어...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살아있었어... 어떻게 네가 살아있어. 그녀가 죽었는데 너는 왜.

" 너가... 너... 하.. 예진이를... "

" ... 검사님? "

" 아.... "

할 일이 많은데. 빨리 병원으로 달려가 준수 씨를 앉혀놓고 그의 병에 대해서 설명해야해.

당신은 이중인격이니까 하루 빨리 치료받아야 한다고 설득 시켜야해. 하지만 이제 곧 재판

이 시작되고, 당신은 중요한 참고인이니까 그 사실에 절망하지 말고 제발 우리를 도와달라

Page 415: Happy Together

부탁해야해. 유천의 몸도 살펴야지. 죽다 살아난 녀석에게 밥이라도 한 끼 사먹야해. 무엇

보다 K 카르텔의 문제가 남아있다. 그 건방진 살인자를 하루빨리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게 만들어 죄악의 씨를 잘라내야 하는데, 그 수많은 일들이 창민의 머릿속에서 거짓말

처럼 한 번에 지워졌다.

" 아아아악!!!!!!!!! "

순식간. 창민은 그 남자의 멱살을 쥐고 벽에 밀쳤다. 바로 주먹을 날리고, 복부를 걷어차

쓰러지게 만들어 끊임없이 발로 걷어찼다.

" 검사님!! 왜 이러세요?!?!!! 심 검사님!! "

" 정신차려요!!! 왜 이래요?!! 검사님!!! 지금... 검사님! "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다른 강력반의 형사들과 경찰들까지 뛰어나와 창민을 말렸

지만 그는 엄청났다. 아무리 달라붙어도 모조리 뿌리치고, 바닥에 쓰러진 그 남자를 개만도

못하게 걷어찼다. 개만도 못하게라니- 짐승에 비유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 너는 짐승도

못되는 자야. 자? 너에게는 '자'라는 표현도 걸맞지 않아. 너는 그냥 숨만 쉬는 무언가야.

어떠한 고유명사도 붙일 수 없는 쓰레기. 썩지도 않는, 고약한 쓰레기. 나의 그녀를...

" 너가... 너가... 너가 예진이를... 흐으으윽.... 왜 네가 살아있어...!! "

검사님! 간신히 형사들 대 여섯명이 달라붙어 창민의 팔을 제지했다. 미쳐버린 머리가

제멋대로 날뛴다. 피를 토하며 숨을 헐떡거린 그 자가, 고개를 들고 창민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 이게 누구야... "

알아보았다. 창민을.

" 총으로 지랄했던 그 새끼네... 푸흐흐, 맞지? 큭.... "

아아아... 바닥에 고개가 닿도록 머리를 수그린 창민이, 울부짖으며 팔을 휘저었다. 이거

놔아...! 저 새끼는 내가 죽일 거야. 내가 죽여야 해. 내가!!!!!!

네가 죽으면, 내 가슴 속에 뿌리 채 박혀있는 나의 죄책감도 덜어질까.

Page 416: Happy Together

너를 죽이면, 그녀가 더 이상 울지 않고서 내 꿈 속에 나타날까.

* * *

" 지금쯤 제정신이 아니시겠는데... "

" 네. 장난 아니였어요. 형사들이 다 달라붙었는데도 꼼짝을 안 하시더라니까. 왕년에 제대

로 날리신 몸이란 소리가 헛소린 아닌가봐요. "

" 괜찮아? 심 검사님. "

" 스스로 취조하실 생각이신 것 같아요. "

" .... 그래? "

" 죽여버린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솔직히 무섭기도 하고. 하긴, 사형감이죠. 그 새끼. "

창민은 오늘 병원에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잠깐 들린 후배 형사의 말을 전해 듣고, 유천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나 잡히지 않던 그 빌어먹을 강간범이 드디어 잡

혔다고 한다. 살인까지 죄목에 추가되어서. 살인 및 강간이라, 이건 볼 것도 없이 사형이다.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일단은 창민이..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쳐 취조 중 사고라도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유천은 전화를 걸까 하다 말았다.

" 아직도 그게 상처가 되게 많이 되셨나봐요. 엄청 울고, 아무튼 장난 아니었어요. 형사들

다 뛰쳐나오고, 다른 검사님들도 난리나고... 심 검사님 그렇게 망가지는 거 처음 봤어요.

맨날 냉철하고, 아무튼 엄청 카리스마 있었잖아요. 강력반 중에서도 이거였는데- "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도리질을 쳤다. 그렇게 울부짖으며 쓰러지는 모습이라니.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 모두가 당황에 당황을 거듭할 정도였다.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범인을

데려간 후, 창민은 스스로 그자의 취조를 맡겠다고 자처했다고 한다. 현재 그가 맡고 있는

일은 검찰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다루고 있는 K 카르텔의 재판이였지만, 창민은 막무가내로

두 사건을 모두 맡겠다고 고집했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그가 고집을 피우는 모습을 처음 보

았기에, 결국엔 허락해줄 수밖에 없었다. 하긴.. 창민의 과거사는 강력반 쪽 사람들 뿐만 아

니라 다른 쪽 검찰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언론에 떠들썩하게 오르락내리락 하기도

했지만 워낙 그 사건으로 창민이 받은 타격이 어마어마 했었다.

" 수술 후유증은 괜찮구요? "

" 아파 죽겠어. "

" 에이... 그래도 총 맞고 살아난 사람 주제에 하루만에 깨어나는 게 어디있어요? 지금 강력

반에서 박 형사님 불사신이라고 부르는 거 몰라요? "

" 불사신이고 불살라고, 아무튼 오늘 검사님은 안 오신다 이거지. "

" 네. 아마 내일 오실 거에요. 그리고 재판 일자 잡혔어요. "

" 그래? "

" 네. 뭐... 어렵지는 않을 거에요. 심 검사님이 맡았으니까. 당연히 사형이겠죠. 그 새끼. "

Page 417: Happy Together

" 정윤호는 어떻게, 잘 가둬놨냐? "

" 독방에 수감하고 형사들 둘 셋씩 붙였어요. 안심하세요. 엄청 철통경비니까. "

그래... 알았어.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만 나가보라며 손짓했다. 형사가 나간

후 유천은 침대에 편한 자세로 기대 숨겨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준수는 현재 치료중이다.

아마 한 두 시간 후에는 돌아올테고... 유천의 오늘 스케줄은 딱히 없다. 위급한 상황이지만

건강이 건강인만큼, 딱히 검찰 측에서 유천에게 무엇을 지시하거나 터치하는 일도 없었다.

재판이 시작된다면 늘 출석해야겠지만.

" 준수야, 나는 너가 둘이라도 좋아... 에이, 씨팔! "

도대체 어떻게 얘기를 꺼내란 말이야. 톡 까놓고 너는 이중인격자야. 그래서 치료를 받고

정상으로 돌아가야해... 라고 내가 어떻게 말을 꺼내? 미칠 것 같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심 검사에게 떠맡기도 싶었다. 그 남자라면 내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준수가 최대한

상처받지 않는 쪽으로 이야기 할테니까. 하지만 지금 심 검사가 맡은 일도 장난이 아닌데

내 개인적인 문제까지 들먹거릴 수야 없지. 후우우... 연기를 길게 뿜으며 눈을 감았다.

네가 뭐라도 상관 없어. 그래도 널 사랑해.

이 말이 너에게 위로가 될까. 하루빨리 너에게 사실을 말하고 네 병을 고치고 싶다. 아침에

내가 얼마나 소름이 끼쳤고, 두려움을 느꼈는지 너는 모르지. 너는 어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와 몸을 섞고, 내 위에 올라가 웃으며 사랑한다고 말했던 일들을 몰라. 왜?

그건 네가 아니니까. 나는.... 어제 김준수가 아닌, 또 다른 그와 사랑을 나눴다. 비현실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그건 모두 김준수의 병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그를 괴롭혀왔던,

그래서 끔찍한 악몽이 현실이 되어버린 빌어먹을 몽유병. 그리고 또 다른 인격.

몸을 일으켰다. 이 병원은 종합병원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정신치료 부분의 의사들도 있

을 거야.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봐야지.

.

.

.

" 이중인격이요? "

" 예. "

" 본인의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

" 다른.. 사람이에요. 본인은 그 사실을 몰라요. 저도 그 사실을 안지 얼마 되지 않았구요. "

의사는 유천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중인격에 대한 치료에

관한 자료들은 얼마 없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워낙 보수적인 나라라, 치료받기 전에

Page 418: Happy Together

스스로 주위에서 배척당하고 자살하거나 홀로 살아가는 것이 다반사니까요. 의사의 말을

듣고 주먹을 쥐었다. 그 정도로 괴로운 일이란 말이지.

" 환자분의 또 다른 인격과 만나보신 적은 있습니까? "

" ....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

그제야 예전의 일이 차근차근 떠오르는 유천이다. 맨발로 길거리를 걷던 준수를 잡았을 때,

엄청난 힘으로 목을 졸라왔던 그 남자. 자던 도중 자신의 위에 올라타 목을 졸라왔던 그 자.

그리고 어제... 나와 섹스했던 그. 전부 다, 김준수가 아니었어. 아찔해지는 머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 대화를 해 보신 적은? "

" ... 제대로 된 대화는 해본 적 없어요. "

" 몽유병에서 발병한 이중인격이라. 특이한 사례네요. 아마 외국 자료를 찾아보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일단은, 환자분의 또 다른

인격과 대화를 나누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

" 제... 가요? "

" 환자분도 자신이 이중인격이라는 사실을 하루 빨리 아셔야 합니다. 이중 인격의 치료는

일반적으로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서로 두 인격이 있다는 사실을 안 다음, 서로가

대화를

나눠서 자연스레 소멸하는 방법이지요. 주로 두번 째 인격이 발생한 이유를 찾아내면 쉽게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

" 서로 대화를 한다구요? "

" 네. 김준수 씨와, 또 다른 인격이 서로를 인식하는 것이 일 순위입니다. "

그 전에, 자신의 병명을 제대로 알고도 김준수가 절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한숨을 쉬며

의사의 말에 집중했다.

" 환자분에게 사실은 언제 얘기하실 겁니까? "

" ........ "

" 오늘이라도 얘기하고 빨리 치료를 받게 하세요. 그것이 급선무입니다. 이중인격이 심해지

면, 나중에는 제 자신의 본성마저 잃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

" 네....? "

"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경우입니다. 최악의 상황이죠.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른다고. 속으로 말을 삼켰다. 넘어가지 않는 침을 삼

키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곧 다시 올게요. 그 때엔.. 그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 * *

Page 419: Happy Together

" 이거 봐! 멍이 흐릿해졌지? "

치료를 마친 준수는, 꽤 자신이 생겼는지 휠체어를 저만치 밀어놓고 조심스럽게 두 발로 걸

었다. 다리에 딱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납치 당했을 시에 받은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커서, 그것이 몸으로 드러난 것뿐이다. 힘들게 유천의 곁으로 다가온 준수가 품에 안긴채

배시시 웃었다.

" 이게 뭐야? "

" 인형. "

" 인형? 어디서 났어? "

" 병원에... 유치원동 있잖아. 꼬마애들 노는데. 거기 지나가다 가져왔어. 귀엽지? "

" 박 형사 갈수록 정신연령이 하위다? 완전 유치해. "

피식 웃으며 인형을 만지작 거리던 준수가, 유천의 침대로 올라와 곁에 앉았다. 배게를 끌

어안고, 병실 문을 잠궜다며 키스해도 된다고 웃는다. 조금 깊게 입을 맞춘 유천이 배게를

앞에 얹혀놓고 준수의 한 쪽 손을 잡았다.

" 준수야. "

" 응? "

"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 "

" 뭔데? "

" 너 기다리면서, 내가 연습한 거야. "

어떻게 해야 네 상처를 덜까. 어떻게 해야 가장 부드럽게 너를 설득시킬까. 머리를 굴리는

것은 내 천성은 아니야. 하지만 어울리지 않게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오른쪽 왼쪽으로

굴렸어. 너를 위해서. 유천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방금 전에 한 입맞춤은 따뜻했다. 눈물도

없었다. 그의 말랑말랑한 입술을 사탕처럼 그렇게 달게 빨았어.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너와의 입맞춤이, 축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눈물 젖지 않았으면.

" 옛날에... 김준수라는 예쁜 꼬마가 살고 있었습니다. "

" 최고로 유치해!!!!!!! "

배게를 유천의 얼굴에 던지며 깔깔대고 웃었다. 아까 간호사 누나가 방울 토마토 줬어. 나

한테 흑심있는 것 같은데, 형 어떡할거야? 자그마한 토마토 하나를 입 안에 쏘옥 넣고 길게

누웠다. 유천은 어색하게 웃다가 다시 배게를 그 앞에 놓고 인형 하나를 올려놓았다. 준수를

닮은 인형이다. 헝겁으로 만든 귀여운 꼬마 남자아이 인형.

" 누구보다 사랑스럽게 생긴 그 아이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

Page 420: Happy Together

" 이 인형은 누구야? 형? "

"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박유천이란 남자가 있었습니다... "

닮았다- 키득거리며 유천의 손에 쥔 인형을 만지작거린다. 토마토 하나가 입 안에서 달게

터졌다.

" 누가보다 사랑스러운 그 꼬마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습니다. "

" 뭔데? "

" 잠이 들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모르는 곳을 여행하는 비밀이. "

" ... 재미없어. 그런 우울한 얘기 그만해. "

살짝 표정을 굳히며 유천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던 준수가, 멈추지 않는 유천의 동화를 가장

한 고백에 입을 다물었다.

" 그러나 유천은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밤마다 무슨 일을 하던, 그는 온전한 김준수

였고.. 그가 사랑하는 소년이였습니다... "

자신을 닮은 인형으로, 준수를 닮은 인형을 안았다. 이렇게 포옥 끌어안으며 사랑했습니다.

유천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 그러던 어느날... 유천이 사랑하던 소년이 속삭였습니다. "

" 뭐라고? "

앉아있는 유천의 옆으로, 길게 누운 준수가 웃었다. 사랑한다고? 아니면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고? 그것도 아니면... 아픈 와중에도 형이랑 같이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준수의

말에 유천은 그저 손가락으로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준수를 바라보지 않았다. 사실은 자신

이 없어서.

" 안녕하세요.. "

" 김준수입니다아- "

" 저는 김준수가 아니랍니다... "

" .........? "

잠시 말을 끊고, 유천은 자신이 쥐고 있던 준수를 닮은 인형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마른

침이 자꾸만 넘어가지 않아 목이 아프다. 아무것도 모른 채 동그란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

보는 준수의 시선에 슬퍼진다. 혀 끝이 자꾸만 말을 삼키고 한숨을 내뱉는다.

Page 421: Happy Together

" 저는.. 김준수가 아니랍니다. "

" ......... "

" 자고 있던 준수가.. 나를 만들었어요. "

" ......... "

" 그럼 당신은 누구에요, 유천이 물었습니다. "

" 형....? "

그는 대답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또 다른 김준수입니다.

* * *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28

취조실에 들어서기 전. 창민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손에 들고 있는 캔커피를 의미없이

만지작 거렸다. 취조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는 현장에서 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고 한다.

여자가 목이 졸려 죽어있었고, 그 죽은 여자를 상대로 강간을 치다 걸린 것이다. 그 남자

는 자신이 죽였다고 순순히 고백했다. 약에 취해 있었고, 예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화성 근처에서 벌어지던 연쇄 여성 살인 및 강간에 대한 범죄는 최근 들어 더욱 심해졌는

데, 창민이 맡고 있는 강력 1반의 담당이 아니라 그는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K 카르텔의

문제 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예전처럼 다른 사건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

었다. 그 사이에 이러이러한 일들이 있었고... 결국 범인은 화려하게 체포당했다.

" 이름... "

맨 처음 그를 보면 무엇을 물어야 할까. 이름, 나이, 사는 곳, 직업, 이런 소소한 것들을 묻

고 싶지 않다. 그런 걸 물을 정신도 아니다. 창민은 그에게 단 한 가지만을 묻고 싶었다.

왜 그랬어. 왜...

문을 열고 취조실 안으로 들어서자,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창민을 바라보았다. 씨익.

소름끼치는 미소에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리고 싶다. 그 마음을 꾹 참고 책상을 사이에 두

고 의자에 앉았다. 차가운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리고 간신히 입을 연다.

" 이름. "

" 강석구. "

" 나이. "

Page 422: Happy Together

" 서른 일곱. "

" 사는 곳. "

" 정해져 있지 않아. 어제는 서울역, 오늘은 잠실역, 이렇게? "

" 직업. "

" 살인 및 강간 범죄자. "

타이핑을 하던 손가락을 멈추고 그를 노려보았다. 참 대단한 직업이다. 그는 5년전에도 저

모습이었다. 건들면 손가락이 썩어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더러운 몰골. 방금 오물통

에서 나왔을 것 같은 악취로 가득한 옷자락.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분노가 치미는 얼굴이다.

이미 아까 한 번 미쳤었고, 몇 번이나 뺨을 맞은 후에야 창민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분명히 5년 전의 그 사건의 되새김으로 넋을 잃을 정도로 망가졌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 창민에게는 그것을 구분시킬 이성적인 능력이 있었다. 다만...

그것이 힘들 뿐이지.

그녀는 죽었고, 이 남자는 그녀를 강간했고, 그것을 목격한 충격으로 나는 총을 헛질했다.

이 사실은 죽어도 변하지 않아.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은, 이 자를 내 손으로 사형대로 보내는

일이다.

" 여성 강간 및 살인. 모두 인정하나? "

" 그래. "

" 마약은, 언제부터 했지? "

" 생각 안나. 오래 된 것 같은데... 난 돈만 생기면 술과 약을 샀어. 어디서 샀을까? 그건

나도 몰라. 생각이 안나니까. "

반 정신이 나간 것 같다. 흐흐, 거리며 질질 흐르는 침을 손등으로 닦고 창민을 보고 헤벌쭉

웃는다. 보고만 있어도 눈이 썩어버릴 것 같다. 타이핑을 치는 창민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 네 죄값을 치룰 방법은 사형밖에 없어. 알아? "

" 사형... "

" 그래. 사형. 너는 재판할 이유도 없어. 바로 사형이야. 사형.... "

그가 죽는다. 드디어. 나를 지금까지 괴롭히던 악몽이, 현실 속에서 죽는다. 내 손으로 사

형대에 보냈다. 그래... 내가 할 일은 끝났어.

" 하나만 물어보자. "

그를 똑바로 즉시했다. 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제 다 끝난 일이다. 빨리 이 취조를 마

치고 이 자가 사형대에 올라가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보고 말겠다. 그 다음에는... 뭘하지.

아, 카르텔의 재판이 남아있지. 하지만 창민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살아오면

Page 423: Happy Together

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늘 쫓던 남자의 환영이 실체가 되어 눈앞에 나타나자, 오히려 허무

한 느낌이다. 이 기분을 누가 알 수 있을까.

" 왜... 그랬어. "

" 뭐를? "

" 그 여자는... 나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어. "

" 아아, 기억도 안나. 어떤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총으로 목을 명중시킨 그 여자

말인가? "

그래, 내가 죽였어.

" 왜 하필이면... 그녀었어. 웨딩드레스를 꿈꾸고 있던 불쌍한 여자를.. 죽여야 할 필요가

있었냔 말이다...! "

.

.

.

- 어떤 웨딩드레스가 마음에 들어요?

- 다 똑같아 보이는데.

- 창민 씨는 그게 문제에요. 여자 마음을 너무 몰라요. 이럴 때는 '아무거나 입어도 다

예뻐.'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알겠어요?

결혼을 앞두고 들린 웨딩드레스 샵에서, 예진은 잔뜩 들떠 보였다. 시트콤 '프렌즈'에 나오

는 명언 중, 이런 말이 있다. 당신은 언제부터 결혼을 꿈꿨어? 여자들은, 인형놀이를 시작하

는 그 순간부터 결혼을 꿈꿔. 여자들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결혼에 대한 환상이 가득하지.

모든 것이 완벽하고 아름다워야해. 창민도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단지 그는 상냥하고

여자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모르는 미숙한 연애자라서, 환하게 미소지으며 드레스를 고르

는 자신의 약혼녀가 사랑스러울뿐이다.

- 이 샵에서 제일 잘 나가는 게 어떤 거에요?

- 난 그런 거 싫어요. 왜 창민 씨는 꼭 그렇게 남들이 하는 거 따라하려고 해요? 레스토랑에

가도 꼭 '여기서 가장 잘나가는 메뉴 주세요' 하고, 자동차 매장에 가도 '제일 잘 나가는

차가 뭡니까' 이러고. 여자들은 그런 거 싫어해요.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무언가를 갖기

원한다구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드레스를 열심히 고른다. 뒤에서 허리를 살짝 끌어안고 드레스를 골랐

다. 사실, 그녀가 무엇을 입든 창민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무엇을 입든지 아름다운 사람

에게는 옷의 디자인은 중요하지 않은 법이다.

Page 424: Happy Together

- 이거, 입어볼래요.

- 너무 야하잖아.

- 이게 뭐가 야해요?

- 등이 파였잖아.

- 이 정도 가지고 뭐...

- 안 돼. 다른 거 입어.

- 난 이게 마음에 들어요!

순하고 얌전하고 여성스러웠지만, 그녀는 꽤나 고집이 셌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창민에게 몇 번이나 졸라보지만, 그는 완고하다. 창민은 목까지 원단이 감싸고 있는 두터운

드레스를 고르며 예진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 난 몰라. 입고 나올래요.

-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

- 이거 입을게요.

토라진 표정으로 피팅룸에 들어가버린다. 창민은 어이없다는 듯 웃고서 샵에 마련된 소파

에 느긋하게 앉았다. 이런 것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겨주는 남자들고 있겠지만, 자신은 그런

성격이 되질 못했다. 결혼 반지도 예진이 골랐고, 결혼식장도 예진이 골랐다. 그에게는 어디

서 어떤 반지를 교환하고 어떤 드레스를 입는 것보다 그녀와 완전히 결합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고, 또 중요했다. 물론... 그녀는 아름다울 것이다. 세상 어느 신부보다 더.

- 정말... 많이 파였나요?

- 이건 속옷을 입으면 안 되는 디자인이거든요. 파이긴 했지만, 예쁘잖아요. 요새 젊은

신부들이 가장 많이 찾는 디자인인데.

드레스를 갈아입으며, 그녀는 다소 걱정했다. 괜한 고집이 들어서 피팅룸까지 갖고 들어오

긴 했지만 창민의 말대로 드레스의 뒤는 시원스럽게 파여있었다. 옷을 다 갈아입은 후에도,

이게 지퍼를 다 올린 거냐며 당황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거울 속의 그녀는 누구보다 아름다

웠고 틀어올린 머리 위에 씌워진 티아라도 눈부시게 빛났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여자의 본능이다.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고, 피팅룸의 커텐을 걷어내기

전 창민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떤 말을 해줄지 심히 두근거렸다.

- ... 괜찮아요?

살구빛의 커텐이 걷혀지면서, 예진은 드레스 자락을 쥐고 물었다. 오픈 숄더 디자인으로

그녀의 어깨가 조명과 맞물려 환하기 그지없다. 바로 앞에 놓아진 소파에 앉아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창민의 시선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전혀 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화내지도

않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Page 425: Happy Together

- 안 돼.

- 네?

한참이나 그렇게 시선을 피하고, 부딪히고, 피하고, 다시 보고. 서로를 쳐다보다가 창민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겉옷을 챙겨 들고 예진에게 다시 갈아입고 나오라며

손짓을 했다. 그건 아니야, 너랑 안 어울려.

- 그럴게요...

속상하다.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예쁘다'고 말하는 것은 신부에 대한 기본 예의가 아닌

가. 아무리 그가 무뚝뚝하고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남자라고 해도... 속상한 마음에 고개

를 푹 숙이고 피팅룸으로 다시 들어갔다.

- 신랑 될 사람이 무뚝뚝하신가봐요?

- 네... 좀 그래요.

- 눈을 떼시질 못하시던데, 말은 저렇게 해도 다 예쁘다고 생각해요.

- 아니에요.. 제가 먼저 애교부리지 않으면 웃지도 않고, 재미있는 농담도 할 줄 몰라요.

- 그래도 엄청 미남이시던데.

- 좀 많이 차가워요. 이러다가 결혼 생활도 얼음장처럼 변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요. 저도

그렇게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지퍼를 내리고, 드레스를 벗고, 자신의 투피스로 갈아입으며 예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중요한 예복을 맞추는 순간에도 저런 말 밖에 못 해주다니. 물론

저런 면을 알고서 사랑을 시작했지만, 그래도 이건 일생이 걸린 문제니까.

- 전 뭔가 따뜻한 가정을 원하거든요. 아이를 낳고 저이가 아이 아빠가 되어서도, 자상하고

상냥하게 저 대신 아이 안아주고. 주말이면 소풍도 가고, 놀이동산도 가고 싶어요.

아침에

먼저 일어나서 토스트도 구워주고, 가끔 청소도 자기가 대신 해주고...

- 세상에 그런 남자 절대 없어요. 아직 결혼 전이니까 환상 갖는 거지!

- 하긴.. 그래요. 창민 씨는 그런 거랑은 거리가 먼 남자니까. 약속 시간에 1분만 늦어도

정색하고, 기다리는 건 할 줄 몰라요. 낭만이랑 거리도 멀고. 청혼할 때 무릎도 꿇지

않았어요. 게다가... !

- 예진아, 밖에 다 들린다. 빨리 나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놀란 눈으로 입을 막고 커텐 사이를 살짝 바라보았다.

심술맞은 표정으로 서있는 창민과 눈이 마주쳤다. 난 몰라. 또 엄청 뭐라고 하겠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돈하고 나오자, 그는 벌써 차를 대기시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Page 426: Happy Together

- 창민 씨...

- 너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버릇은 언제 고칠 거냐?

- ... 화났어요?

- 빨리 타.

화났나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옆자리에 올라탔다. 차를 운전하는 창민은 내내 말이 없었다.

이러다가 숨막혀 죽으면 어떡하지. 그래도 속상하다.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인데, 한 쪽은

늘 이렇게 속상해야 하고, 한 쪽은 늘 그렇게 지만 잘났고. 앞으로 결혼 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을까? 무뚝뚝한 저 남자의 성격에 나 혼자 힘들고 울어버릴지 몰라. 설마 아이마저

창민 씨의 성격을 닮지는 않겠지? 그럼 집이 완전히 남극일텐데. 으... 생각만 해도,

- 내려.

예진의 집은 장미 덩쿨이 멋진 주택이다. 어둑어둑해진 골목길 앞에 차를 세워두고, 창민이

먼저 내렸다. 차 안에서 내내 말이 없던 두 사람은 같이 서있어도 싸늘하기만 하다. 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 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까 전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어떤 드레스를

고를지 마음에 설레여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는데...

" 미안해요, 창민 씨. 화 많이 났어요? "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본성이 여리고 순종적인 예진은, 늘 이렇게 먼저 숙이고

들어갔다. 속으로는 자신도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이 앞서지만, 다른 이와 잘 지내기 위해서

애써 웃는 것은 그녀의 천성이기도 했다. 그런 면을 사랑하는 것이 창민이었고. 창민은 말이

없었다. 한동안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난데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왜 이래요?! 일어나요! 창민.... "

" 나랑 결혼해줄래? "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말에, 예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네?'하며 되물었다. 청

혼은 분명히 했었는데- 아주 멋없긴 했지만. 반지를 손에 띡 끼워주면서 '결혼하자.' 이게

다였다.

" 바지 더러워 지잖아요! 빨리 일어나요! "

" 이런 청혼 받고 싶었다며... "

" 네? "

" 아까 그랬잖아. 청혼 할 때 무릎도 안 꿇어서 속상했다고... "

" 아... "

Page 427: Happy Together

입술은 반쯤 나와서, 마치 조폭 두목처럼 꿇어 앉아있는 자세가 사실은 웃기다. 무뚝뚝한

그가 내가 살짝 흘린 말에 그렇게 신경을 쓰고 결국 바지까지 더럽히다니. 이러면 안 되지

만 웃음이 나와서, 예진은 그만 웃어버렸다.

" 웃냐?! "

" 아.. 미안해요, 그런데 너무 웃겨서.... "

" 에이씨, 내가 안 할라고 그랬어! "

발딱. 바닥에서 일어선 창민이 무릎을 툭툭 털고, 웃느라 정신이 없는 예진을 확 끌어안았다.

사실 집 앞에서 이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진의 부모님은 상당히 엄하신 편이라, 이러고

있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꽤나 한소리 하실 거다. 그래도 지금은 그저 안고 싶었다.

" 자상하고.. 상냥하고.. 아무튼, 니가 원하는 남편이랑 아빠 되도록 노력할게. "

" ... 진짜요? "

" 그러니까, 나랑 결혼하는 거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 세상 어느 남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결혼 앞두고 불안해 하는데 기분 좋겠냐. 내가 알아서 다, 너 행복하게 해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냥 시집이나 잘 와. 알았어? "

" 알았어요... "

" 사랑해. "

나도 사랑해요... 조용하게 그녀가 속삭인다. 이 순간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느낀다.

창민은 그녀를 품에 안고 미소 지었다.

빨리, 네가 내 신부가 됬으면 좋겠어.

.

.

.

" 하필이면 왜.. "

눈가가 젖어든다. 감성에 젖지 않겠다고 그렇게 맹세했지만, 이 남자 앞에서는 모든 것이

헛수고다. 창민의 인생의 절반을, 어쩌면 절반 이상을 망쳐버린 남자가 눈 앞에 있는데 뭐가

정상이고 뭐가 이성적이겠는가. 애써 자신을 추스리며 물었다. 소용없는 질문인 건 알지만.

" 왜? 그냥, 그 순간에 하고 싶었으니까. "

Page 428: Happy Together

그래.. 이런 자 앞에서 이성을 지킬 필요 따위는 없는 것이다. 한참이나 그를 노려보던 창민

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고 있던 정장 윗도리를 벗어, 취조실에 달려 있는 CCTV 를 덮었다.

" ... 으... 으아아악!!!!!!! "

책상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의자를 그에게 던져 버린 후, 바닥으로 쓰러진 남자 위에 올

라타 컴퓨터 키보드로 머리를 내리쳤다. CCTV의 화면을 보고, 다른 경찰들이 달려올 거다.

그 전에 이 남자를 내 손으로 죽일 수만 있다면.... 미친 듯이 주먹을 날리고, 머리채를 잡아

올려 구타했다. 터지는 핏자욱과 짓눌려지는 얼굴의 살덩이마저 혐오스럽다.

"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너 같은 건 죽어도 싸!!! 사형대까지 갈 필요도 없어!!!

내가!!

내가 죽일 거야!!!! 그래.. 내가 널 왜 못 죽여... 예진이도 내 손으로 죽였는데!!!!!! "

" 푸... 푸흐흐흐..... "

" 웃어? 웃어?! 이 개새끼야!!! 웃어 봐!!!! 그 웃음이 끊나기 전에 뒈질 테니까!! 웃어

봐!!!! "

목이 졸리면서도, 남자는 웃었다. 정말로 미친 사이코 새끼. 이런 새끼에게 그녀가...

" 그렇게 그 더러운 짓거리가 하고 싶어서 여자들을 죽였어?!?!!! 말해봐!!! 너에게 당하기

싫어했던 그 여자들을 네가 다 죽였잖아!!!! 울면서 반항했을 여자들을!!! "

" 푸하하하.... 크흑...! "

" 그래!! 계속 웃어 봐!!! 미친 새끼야!!! 넌 태어난 것 자체가 죄악이야!!!! 사람

죽이면서까지

하고 싶었던 그 짓거리!!! 지옥 가서나 실컷 해!!! 개자식아!!!!! "

남자는 목을 졸리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문 여세요, 검사님! 심 검사님! 차단된

CCTV를 보고 달려온 다른 형사들이 취조실 문을 두드리며 창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밑에 깔린 남자의 목을 조르며 이미 이성의 끊을 반쯤 놓아버린 상태였다..

" 쿨럭, 큭,! 이봐... 검사나으리....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에... "

" 개소리 지껄이지 마!!!! "

피떡칠이 된 얼굴이 그래도 지껄인다. 그의 머리카락을 치켜올렸다가, 바닥에 박아버렸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입을 놀렸다.

Page 429: Happy Together

" 비밀 하나 알려 줄까...? 검사님...? "

" 뭐?!!! "

" 그 여자... "

" 더러운 입에서 그녀 얘기 꺼내지도 마... 흐으윽... 죽어버려!!! 이 나쁜 새끼... "

" 당신이 사랑한다는 그 여자 말이야.... "

" 흐읍.... 흐으윽.... "

결국엔 제 울음에 못 이겨 손을 놓아버린 창민이 흐느껴 울었다. 네가 죽으면 나는 이제 무

엇을 쫓으며 살아야 하나. 오로지 널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검사직에 앉아 있었어. 그런데

네가 이제 허망하게 죽어버리면... 나는 그녀에게 더 이상 뭘로 죄값을 치뤄...

" 그 여자를 당신이 죽였다고 생각해...? "

" ..... 뭐? "

우당탕,! 문이 거칠게 열리고 형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이대로 가다간 창민이 이성을 잃고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창민의 두 팔을 잡고, 제발 그만하라고 다

른 과 형사들이 말리는 와중에, 창민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 이 개자식아!!! 일어나!!! "

" 그 여자를.. 당신 손으로 죽였다고 생각하고 살았지...? "

그녀는 내가 죽였다. 내가 헛질한 총에 맞아서, 목이 맞았다. 시뻘건 핏물이 흘러 그녀의

하얀 옷을 적셨어...

" 검사님!! 이 남자 상대하지도 마세요!! 말 못 들으셨죠?! 이 새끼 완전 사이코에요!!! "

"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

" 단순히 그짓이 하고 싶어서 내가 반항하는 여자들을 목 졸라 죽였다고...? "

" 닥쳐!!! 이 개새끼야!! 검사님 일으켜! 심 검사님! 나가세요! 여기는 제가 있을게요!! "

" 잠깐만.... "

온 몸에 힘이 빠진 창민이, 자신을 꽉 붙들고 서 있는 형사들을 뒤로 밀치며 다시 물었다.

" 무슨 소리야... "

" 그 여자는.. 당신이 죽인 게 아니야... 흐, 몰랐어? "

" ..............!! "

" 당신이 총으로 그 년을 쏘기 전에... 내가 이미 죽여놨어.... 몰랐어...? 푸흐흐... "

뭐....?

Page 430: Happy Together

" 검사님! 물러 나세요!! 이 새끼 완전 사이코에요!! 이 새끼, 시체애호증이라구요!!! "

" 그게.... "

" 나는 시체가 아니면 섹스를 할 수 없어... "

" ........... "

" 반항하는 여자들을 왜 죽였을까...? 푸하하.. 난 죽은 여자가 아니면 섹스를 할 수 없으

니까! 몰랐나? 그 년도.. 하기 위해서 죽였을 뿐이야. 내가 먼저, 너보다 내가 먼저. 어?!

"

" 닥쳐!!! 이 미친 새끼 끌고 빨리 나가!!! 검사님, 괜찮으세요?! "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 라고 했나, 저 남자가. 5년 동안이나 내가 알고 있었던 사실

을 한 마디로 뒤집어 버렸다. 자신이 죽였다고?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고?

" 후아.. 정신병자 새끼.. 검사님, 이 사건 담당 아니라 모르셨죠? 저 새끼 완전 변태에요!!

강간한 여자들, 강간하고 죽인 게 아니에요! 모두 죽이고 나서 강간한 거에요! 시체가 아

니면 성욕을 느끼지 못한대나... 괜찮으세요?! "

내가.. 죽인 게 아니었어. 내 손으로 그녀를 죽인 것이 아니야...

" 검사님 일으켜! 아, 그리고 방금 K 카르텔 쪽 재판 때문에 검사님 찾는 전화가 오던데요!

박 형사랑 준수 씨 만나러 병원에는 언제 오실 건지... "

하지만, 그 남자 손에 죽었어. 내 손에 죽은 것 만큼 끔찍하게... 다른 이의 손에 죽었다.

" 나는.... "

" 검사님....? "

" 난.. 지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제발 부르지 마... "

" 지금 나가셔야 돼요! 재판이 곧 시작인데!! 준비 다 안 하셨잖아요! "

"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

제발 누구도 나 부르지 마. 혼자 있고 싶어...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박 형사든..

준수 씨든... 카르텔이든.. 정윤호든 누구든... 다 상관없어. 이대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도

상관 없어... 지금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

" 그 재판.. 안해요.. 나, 아무 것도 안 할테니까... 그렇게 알아... "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되는 것은 한 순간. 창민은 그 한 순간에 머릿속이 새하얗에 변해버

Page 431: Happy Together

렸다. 그녀가 죽고 5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나. 결혼을 앞둔 신부가 정신 이상자에게 강간

당했고, 나는 범인을 코 앞에 두고서도 병신처럼 총을 헛질해 그녀에게 피를 보게 했고...

그렇게 내 총을 맞고 그녀가 죽은 줄 알았다. 시체를 제대로 검사하지도 않았다. 몸에서

짓눌러진 총알을 빼내고, 부검 따위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더 이상 그녀의 몸에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장례가 치뤄졌고, 범인은 잡히지 않았지.

그런데 이제와서, 그녀를 내가 죽은 것이 아니었다고.. 내가 총을 뽑아들기 전에도.. 그저

엄청난 충격에 기절한 줄 알았던 그녀의 숨이 이미 끊어져 있었다고. 기절한 것이 아니라

잠자는 듯 죽어버린 거라고. 그녀를 내가 죽이지 않은 대신... 그 남자가 죽였다고...

모든 것이 너무나 혼란스러워. 창민은 잠시 자신의 사고의 기능을 정지해버렸다.

* * *

" 그럼, 본인은 전혀 알지 못했다는 뜻인가요? "

" ....... "

" 주위 사람들도, 단순한 몽유병으로 알았다는 뜻이겠군요. "

유천의 손에 이끌려 결국 정신과를 찾았다. 의자에 앉아 진료를 받으면서도, 준수는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의 전부를 믿을 수가 없어 한참이나 입을 다물어야 했다. 오히려 곁에

있는 유천이 모든 것을 빠르게 정리하고 앞만 보고 걷기로 한 것 같았다.

" 환자분에게는 특이하게도, 몽유병과 이중인격이 내재된 것 같습니다. 몽유병 증세가 발병

하게 되면, 그것이 지나치게 되었을 때 두 번째 인격이 나타나는 경우랄까요. "

" 치유는 가능하죠? "

준수의 손을 놓지 않고 꼬옥 쥔 유천이 빠르게 물었다. 사실 그에게는 치유보다도, 우선

카르텔과 있을 재판에서의 증언이 중요했다. 그러나 마음 같아선 준수가 편안한 곳에서

자신의 보호를 받으며 정신적 안정을 취했으면 했다. 어느 누가, 사랑하는 사람이 혼란스

러운 상황 속에서 어려운 일을 떠맡기를 바라겠는가.

" 일단은 환자분의 두 번째 인격을 만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가 어째서 태어났으며,

어떤 성격과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지를 파악해야죠. "

" 어떻게... "

" 가장 일반적인 걸로는 최면요법이 있습니다. "

" 최면이요? "

" 네. 많은 정신과 시술에서 쓰이는 방법인데, 환자를 일시적으로 잠재운 다음 두 번째 인격

Page 432: Happy Together

을 불러들이는 경우죠. 준수 씨의 경우는 몽유병 자체가 이중인격의 키워드니까 또 다른

인격을 불러들이는 것이 더 쉬울 겁니다. 일단 잠에 빠지면, 원래 준수 씨의 의식은 잠들

테니까요. "

흔들리는 눈으로 의사가 꺼내는 추를 바라보았다. 이런 치료 따위 받고 싶지 않아.... 내가

왜 지금 정신과에서 이 의사와 앉아 있어야 하지. 나는.. 나는, 단지 수면에 문제가 있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야. 두 번째 인격이라니.... 그거야 말로,

- 너는 괴물이야.

" 준수야....? "

마주잡은 준수의 손이 심하게 떨려서, 유천은 두 손으로 그의 한 손을 잡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 너는 어려서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다고 했지.

그래서 네 자신이 남들과 다른, 별종의 괴물이라도 되는 듯 몸을 웅크리고 살았다고 했어.

결국엔 이 땅을 떠나 아주 먼 곳에서 오랫동안 홀로 살아야했지.. 하지만 그건 다 과거잖아.

과거를 붙들고 늘어지기에는 현재가 너무 빨라. 내일이면 이 시간도 과거가 되버려. 그러니

눈을 앞으로 봐, 준수야. 네 곁에는 내가 있고... 나에게 너는 그저 사랑스러운 연인이다.

" 여기 누우세요. "

" .... 최면에 걸렸다가.. 깨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죠...? "

"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

" 걱정 마. 그 때는 너를 패 죽여서라도 깨워줄 테니까. "

유천은 웃고 있었지만, 서로가 웃고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안심시키기 위한 표정

연기일 뿐이다. 속으로는 어느 누구보다 유천이 긴장하고 있었다. 준수를 이 진료를 받게

하는 것도 애를 먹었다. 자신이 이중인격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후, 그는 비명을 지르며

거짓말 하지 말라고 유천에게 소리쳤다. 그 따위 거짓말을 하는 네가 죽도록 밉다면서.

현재의 문제는, 이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닌 사실이라는 것에 있다.

" 당신은... 현재 아주 피곤하고 졸립니다. 당신의 몸은 천근 만근 같습니다. "

유천의 손을 놓았다. 현실과 부딪히는 매개체는 없어야 한다고 했다. 두 손을 가슴에 포개

놓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유천의 눈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몸이... 무겁다.

" 셋을 외치면, 준수 씨는 잠에 빠져듭니다. "

" ....... "

" 하나.... 두울..... "

Page 433: Happy Together

" ....... "

" 셋...! "

준수야...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이라도 너를...

.

.

.

그는 거짓말처럼 잠에 빠졌다.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준수를 보고, 유천은 불안한 심장을

쥐고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준수야... 의사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또 다른 준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제 목소리가 들립니까? "

" ........ "

"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

" ........ "

" 절대로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그저 대화를 원할 뿐입니다. "

준수의 속눈썹이 꿈틀거린다. 그 미세한 떨림에 유천이 몸을 일으켰다. 어디가 잘못된 건

아니죠? 빠르게 의사에게 물었지만, 그는 조용히 하라며 유천에게 쉬이... 달랬다. 준수는

그저 눈을 꿈틀거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손가락이... 그러다가 입술이, 점차 깨어나는 몸이

왠지 낯설어서, 유천은 의자에 앉아 자신의 연인을 지켜보았다.

" ... 당신은 누구죠? "

그가 눈을 떴다. 눈꼬리가 아래로 쳐진 그 사랑스러운 눈을 뜨고서, 몇 번을 꿈뻑거린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의사와 유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준수와 시선이 마주치고

유천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김준수가 아님을.

" 저도.. 잘 모르겠어요. "

" 이름도 없습니까? "

" 예... "

" 당신은 언제 태어났죠? "

" 준수가... 열 일곱살 때. "

그렇게나 오래 되었던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서 유천은 말을 잇지 못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목소리가 같은데도. 전혀 틀리다.

이 자는 김준수가 아니다.

Page 434: Happy Together

" 왜 태어난거죠? "

" 모르겠어요... 준수는.. 늘 잠에 드는 것을 두려워했고.. 아주 심한 몽유병을 앓고 있었죠.

그리고 어느새 제가 태어난 거에요.... 처음 내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내 몸이

정상

이 아님을 알았죠. 두 사람이 한 사람의 육체를 쓰고 있다는 것도... "

그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느릿했다. 그리고 기어들어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듯 다급한 것 같기도 했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기도 했다.

" 길게 말할 시간이 없어요... "

" 잠깐만, "

유천에게 손목이 잡힌 준수가, 눈을 크게 뜨며 팔을 빼냈다.

" 건들이지 말아요. 불안정한 상태에서 신체적 접촉이 더해지면 사라지는 수가 있습니다. "

" 당신은 왜.... "

당신은 왜 나랑 잤어요, 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당신은 김준수가 아니잖아.

" 당신은 스스로 사라질 생각이 있습니까? "

" ......... "

" 언제까지 숨겨진 인격체로 김준수 씨의 몸 안에서 살아갈 생각이죠? "

의사의 질문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사람보다 불안정한 건 유천이었다. 그는

정작 해야 할 말을 모조리 삼킨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그 목소리로 말하는 남자를.

" 나는.. 아직 사라질 수 없어요. "

" 그럼 언제까지 김준수 안에 있겠다는 건데!!!!!! "

감정이 격렬해진 유천이 그의 두 어깨를 잡고 거칠게 물었다. 지금 이 감정을 뭐라고 설명

해야 할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안지 못 하는데. 이게 김준수가 아니라는데,

" 너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됐어!!!! 네가 그 살인을 봐서!! 네가 멋대로 나가버려서!!!!!

네가 내 목을 조르고!!! 너는... 너는 왜 태어났어... 네가 뭔데 나와 김준수를 힘들게

해!!!

Page 435: Happy Together

남의 몸에 붙어먹지 말고 사라져!!! 네가 왜.... "

네가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몸 안에서 살고 있어. 그리고 왜 그 몸으로 나와 사랑했어..

부서질듯 어깨를 잡은 채 흐느끼는 유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당황한 의사가 유천을

떼어내려해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처음부터 남의 말 따위 듣는 사람은 아니었다. 제발...

좀 사라져... 흐느끼며 애원하는 유천에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당신은 이제 잠에서 깨게 됩니다. 하나, 둘, 셋! "

유천의 감정이 격렬해지고, 그가 쥐고 있는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준수의 온 몸에서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더 이상 내버려 두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에 의사가 서둘러 숫자를

셌다. 셋, 과 동시에 그의 고개가 젖혀지며 의자에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갑자기 손에서

빠져나간 느낌에 유천이 고개를 들어 준수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넌 누구일까... 내가 사랑

하는 김준수니... 아니면 다른 그...

" 아.... "

희미한 소리에, 유천이 준수의 목 뒤로 손을 넣어 그를 일으켰다. 식은땀에 온통 젖어버린

그 얼굴이 되살아났고, 유천은 그제야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김준수로 돌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잘했어... 잘했어, 준수야... "

" 흐... 흐으...흐으윽... "

" 수고했어... 응, 우리 준수.. "

아이를 얼르듯, 유천이 한참이나 준수를 그렇게 안고 다독였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보는

나도 두려웠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그것이구나. 모든 것을 알고 처음부터 지켜보는 너의

또 다른 모습은 나를 두렵게 했다. 한 순간이나마.. 내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한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타인이라는 사실에 뼛속까지 공포가 서렸다. 그 마음을 너는 알까.

" 어렵겠는데요. "

" 네...? "

곁에서 지켜보던 의사가, 한숨을 쉬며 의사에 앉았다. 그리고 진료 차트에 무언가를 써내

려가기 시작했다.

Page 436: Happy Together

" 또 다른 인격을 없애는 방법은, 그 인격이 태어난 이유를 안 후에 그 이유가 문제되었던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죠. 한 남자가 이중인격입니다. 그는 어릴 때

자신을 학대했던 어머니 때문에, 극도의 여성 혐오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중

인격의 원인이 되어서 여성을 혐오하는 두 번째 인격이 태어난 것이죠. "

" 그런 경우는... "

" 그런 경우는, 자신을 학대했던 어머니와 정서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던가, 스스로

여자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식의 방법으로 서서히 두 번째 인격을 사라지게 할 수 있

습니다. "

" ..... 그럼, 준수는요. "

" 그게 문제에요. 방금 대화를 통해 아셨겠지만, 준수 씨의 두 번째 인격의 탄생에는 특별

한 '동기' 가 없습니다. 단순히 극도의 몽유병에서 우연히 태어난 인격이에요. 잠결에

태어났다고 할 수도 있겠죠.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기에 저로써도 딱히 무어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

" 그럼, 평생을 저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요?!?!?!!! "

말도 안 돼. 그럼 내가 사랑하는 김준수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순간들이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는 소리야...?

"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몽유병을 고치는 것이 가장 큰 방법일 듯 합니다만... 그것도 그리

쉬운 방법은 아니지요. 몽유병이 없어진다고 해도, 이중인격이 남아있을 수 있고. "

" 그럼 어떻게 해야.... "

" 현재로선, 저 두 번째 인격이 어째서 사라지지 않고 김준수 씨의 몸 안에서 살아가는 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진료가 필요하죠. "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치료는 쉽지 않다. 재판이 시작되면, 준수는 매일 같이 법정에 나가

야 할 것이고 중요한 참고인으로 서게 될 것이다. 여리고 나약한 그에게, 너무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어. 지금 누구보다 혼란스럽고 두려울텐데.

"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

다리에 힘이 풀린 준수를 아예 업었다. 진료실에서 나오며 의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기댈 사람 중 하나이다. 누구든.... 제발 이 아이 좀 도와줘. 아직 자신의 몸도 성치 못한

유천

이었다. 총을 맞은 곳은 단단히 압박하긴 했지만, 아직도 움직일 때마다 몸이 욱신거리며 쑤

셔온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이유로 준수를 언제까지 내버려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일단 숨

을 쉴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으면 된 거야. 그러면 어떻게서든 지켜줄 수 있어.

- Rrrrrr Rrrrrrr ...

Page 437: Happy Together

" 어, 유 형사. "

힘들게 그를 업으며 병실로 향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간신히 받아 들었더니 다급한 목소

리의 유 형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 그 소식 들었어?!

" 무슨 소식.... "

- 심 검사님! K 카르텔의 재판 포기하셨어!!!!

" .... 뭐? "

- 오늘 스스로 말씀드렸대! 당분간 검사 직에서 물러나 있겠다고, 사표 낸 거나 마찬가지야!

아직 사표 수리는 안 됐어! 검찰에서 그렇게 유능한 검사를 놓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본인이 그만 두겠다고 했어! 내 말 듣고 있어?!

왜.. 하필이면 이럴 때 몸이 이다지도 병신 같은 걸까. 아찔해오는 머리와, 후들거리는 다리.

등에서 식은 땀을 흘리며 누워있는 준수. 그리고 숨이 막힐 정도로 아파오는 상처 부위.

내 자신이 이렇게 나약하게 느껴졌던 적은 처음이다.

* * *

" 검사가 바뀌었다구요? "

- 네. 급하게 바뀌었답니다. 원래 담당이었던 심창민 검사에서, 강형진이라는 검사로 바뀌

었다고 합니다.

" 확실해요? "

- 네.

이런... 재중은 한숨을 쉬며 책상에 기댔다. 지금까지 심창민이 맡아왔던 자료들을 보면서

그의 공격법과 재판 스타일을 익히던 도중이었는데, 이제와서 갑자기 바뀌다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담이 덜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심창민의 재판 과정은 프로 중의 프로였다.

이제 일을 시작한 재중이 따라잡기는 확실히 벅찼다. 게다가 그의 가장 큰 무기는, 호소력

있는 주장력이었다. 재판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배심원들에게, 창민의 주장은 100%이상

먹혀 들어갔다. 하지만 재중에게는 그런 카리스마와 연설력이 부족했다.

" 강형진 검사라는 사람은.... "

- 유명한 검사입니다만, 심창민 검사 만큼은 아닙니다. 게다가 워낙 성격이 워낙 다혈질인

것으로 알려져 재판 도중 싸움을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 성격이 다혈질이라구요? "

- 네.

Page 438: Happy Together

흠... 곰곰히 생각하던 재중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를 챙겼다. 누구든 심창민 그 사람

보다는 나을 것 같다. 취조실에서 잠깐 만났던 남자이지만- 남의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확실히 연륜이 묻어나고 보고만 있어도 당당함이 느껴지는 남자였어...

" 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 "

- 지금 출발하실 겁니까?

" 네. 행운을 빌어줘요. "

핸드폰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래 카르텔의 나머지 조직원들과 이태원의 기지촌에서

살던 재중이었지만, 함께 있다가는 위치가 발각될 수 있다는 참모의 충고에 따라 홀로 거주

지를 옮겼다. 어렵게 얻은 월세방은 누추하고 더러웠지만, 평생 여기서 살 건 아니기에

그다지 신경쓰지는 않았다. 재판이 끝나면 자신은 정윤호와 다시 제이 에비뉴만큼 아름다운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재중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늘은 정윤호를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피고인과 변호사가 대면하는

형식적인 자리. 그러나 그 어느 날보다, 재중에게 최고로 중요한 날임이 틀림없었다.

.

.

.

" 면도기 없어? "

" 뭐? "

" 면도기. "

" 이 새끼가 뭐라고 지껄여?! "

손바닥만한 작은 아랫문에서 하루에 두 번 식사가 들어온다. 아주 맛없는 식사. 그 구멍을

열고 윤호가 간수를 불렀다. 독방에 걸려있는 거울은 깨진 것을 다시 붙였는지 형편없었지

만, 지금은 그걸로 만족해야 할 형편이었다. 내 방 침실에는 커다란 거울이 걸려있었다.

아침에 먼저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오면, 네가 부스스한 몰골로 침대에서 일어나 멍하니

나를 바라보곤 했었어. 그 때 나는 거울 속의 네 모습을 자주 훔쳐봤었는데, 정신 없이

비몽사몽 거리는 옆모습이 참 예뻤다.

" 향수라도 줘. 이 방, 퀘퀘해서 기분이 안 좋아. "

" 꺼져! 미친 새끼... "

아무도 나를 이렇게 대하지 않았는데.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삼키고, 윤호는 방안

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몰골이 말이 아니다. 면도를 며칠째 하지 못한데다 머리도 엉망.

게다가 이 시퍼런 죄수복이라니. 샤워도 제대로 하지 못해 온 몸에서 퀘퀘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정돈하고 깨끗히 세수를 했다. 김재중을 만나는 날인데,

Page 439: Happy Together

이런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어... 물론 만나지 못하는 것 보다야 낫겠지만.

그래도 늘 쫙 빼입고 녀석을 맞이했던 내가, 죄수복 차림으로 면도도 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네 앞에 서게 되다니. 남자로서 쪽팔리고 창피하다.

" 정윤호, 나와. 네 선임 변호사랑 면회다. "

이게 얼마 만에 나가는 것인지. 독방에 들어온 이후 윤호는 한 번도 밖에 나가지를 못했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몇 명의 형사들이 돌아가면서 그를 감시했으며 아프

다는 핑계에는 아예 귀를 닫았다. (정말로 핑계였지만.) 화장실도 그 안에서 사용해야 했으

며, 햇빛이라고는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통해 들어오는 한낮의 그것이 다였다. 내리쬐는

햇볕에, 윤호는 잠시 눈을 찡그렸다.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떨까.. 완전한 범죄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겠지.

면회실의 문이 열리고, 재중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런 말을 하면 재중이 웃겠지만, 너무 오

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두근거려 미칠 것 같다. 어두운 톤의 정장을 빼입고 앉아있는 재중

은 그 사이 조금 수척해졌지만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자신을 둘러싼 형사들 사이로 의자에

앉아 재중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하는 대화는 모두 공개적이었으며, 어떤 비밀스러운 말도

교환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면도를 하는

건데... 윤호는 자신의 턱을 가리며 재중을 힐끔 쳐다보았다. 의외로, 그는 미소를 지었다.

" 면도 안 한 모습도 멋있네요. "

" ... 그러냐. "

김재중 다운 말이다. 피식 웃고서 편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는 좀 긴 것 같기도 하고,

입술은 좀 텄구나. 하긴 그 동안 내가 빨아주질 못했으니까. 피부도 약간 거칠어진 것 같은

데... 마음 고생 시켜서 미안하다, 라고 말해주고 싶어.

" 선임 변호사 김재중입니다. 곧 있을 재판에 앞서, 피고인과 면회하러 들렸습니다. "

" 네.. 그러세요. "

존칭을 써가며 말을 높이는 재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곁에서 바라보는 형사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윤호야, 윤호야, 하면서 유리벽에 입술이라도 부딪히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너는 내 운명의 황정민처럼 유리벽이라도 타고 넘어

가려고 다리 한 짝 들어 올렸겠지. 그렇다고 윤호가 전도연처럼 울면서 사랑한다고 말해줄

놈은 절대로 아니지만. 재중 또한 피식 웃고 간단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정해진 시간들은

길지 않으니까.

" 현재 정윤호 씨에게 씌워진 혐의에 대해, 정확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점으로 공격할

겁니다. "

Page 440: Happy Together

" 네에. "

" 그리고 정윤호 씨의 살인에 대해서는, 저희가 가지고 있는 카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

요. "

" .... "

아마 참모가 재중에게 그 영상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김준수가 독방에 갇혀있을 때 CCTV로

찍은 영상. 그걸로 어떻게든 해볼 작정인가... 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지만, "

재중은 이 대목에서 가까스로 웃음을 삼켰다.

" 법정 안에서는 내내 조용해 주세요. 배심원들이 중요한 몫입니다. 그들에게 죄를 뉘우치고

있으며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결백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재판 전에는 면도도

허락될 거에요. 샤워도 할 거고. "

" 냄새 나냐? "

" 정윤호 씨 냄새 나요. "

내가 사랑하는 냄새. 알겠어? 재중은 씨익 웃고 말을 이었다.

"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니 믿고 맏겨주세요. "

최선을 다해서 너 살릴게. 그러니까 믿고 사랑해줘.

" 믿어. "

그런 말 안해도 충분히 너 믿어. 그 동안 수고하고 애쓰느라 고생 많았어.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 재중아, "

이제 그만 헤어져야 될 것 같네요. 물끄러미 윤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재중이 일어섰다.

나가려는 그를 윤호가 불러세웠다. 형사들에게 두 어깨가 잡힌 채, 윤호가 편안하지만 단단

한 시선으로 그를 붙들었다.

Page 441: Happy Together

" 나, 살려. "

" .... 응. "

이곳에서 사형 당해서 형장의 이슬로 삶을 마감하고 싶은 좆 같은 생각 추호도 없어.

그러니까, 나 살려줘.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존재만으로도 날 죽였다 살리는 사람.

재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나섰다. 콰앙... 그가 완전히 사라진 후, 윤호는 그제야 몸

을 돌려 면회실을 나섰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 이봐, 형사님. "

" 뭐야? "

" 나.. 지금 행복하다고 하면 믿을 건가? "

" ... 미친 새끼. "

하하... 윤호는 기분좋은 소리로 웃었다. 내 목숨이 흔들리는 이 순간에도, 나는 사랑하면서

미쳐가고 있다. 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일인지. 게다가 내가 사랑하는 김재중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까.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가 않아.

* * *

어제오늘 계속 대청소로 바빴어요!ㅠㅠ

이거 올리고 또 청소해야함 (-_-;;;) 토나와...ㅡㅠㅡ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29

" 퇴원은 불가능합니다. 무조건! 절대로! 안 되요! "

" 대한민국 형사라니까요?! 지금 내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 줄 알아?!! "

" 저는 대한민국 의사입니다! 제가 맡은 환자도 모두 중요해요! 제발 그만 고집 피우고

침대에 누우세요-!! "

" 아아악!!!!! "

유천의 비명에, 의사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역시 이 남자는 무서워.. 처음에 총을 맞고 실

려왔을 때만 해도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반반씩 마음을 먹었다. 힘든 수술 끝에 살아나고서

하루만에 눈을 떴을 때도 솔직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괴물'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Page 442: Happy Together

어떤가. 한 달도 되지 않아 팔팔 날아다니고 있다. 분명히 몸이 욱신거리며 아파올텐데도,

저 남자는 초싸이언인가... 의사는 친료 차트를 넘기며 식은땀을 닦았다.

" 지금 맡으신 일이 중요하다는 건 알겠지만 환자분의 몸도 중요합니다. 힘들게 움직이면

수술 부위가 터지는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길 원하십니까? "

" 안 터지게 내가 잘 움직이면 되잖아요!! "

" 환자분 하는 꼴로 봐서는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

" 아, 의사 선생님!!! "

" 그래도 존칭은 붙여주시네요. 일단, 누워서 주사 맞고 한숨 푹 주무세요. "

이 고지식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유천은 이를 갈며 의사를 노려보았다. 준수는 현재

마지막 치료를 받는 중이다. 거의 완치가 된 그는, 두 다리로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도 있고

휠체어도 필요 없었다. 단지... 몸 대신 마음이 병들었을 뿐이지.

" 아, "

" 네? "

" 부탁할 것이 있는데요. "

" 뭐가요? "

" 그게..... "

.

.

.

아주 늦은 저녁. 유천은 언제나 그렇듯 준수를 끌어안고 있었다. 자신의 진짜 병명을 알게

된 후로는 잠깐의 시간도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였다. 하지만 현재 준수를 가장 불

안하게 만드는 것은 유천이었다. 치료를 받을 때마다 자신의 두 번째 인격이 튀어나올텐데,

그걸 이 남자는 어떻게 볼까. 지금이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것을 감싸주지만, 후에는

질려서 떠나갈지도 모른다.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도 나오지가 않는다.

" 흠, 조용하지? "

" 응... 형아, 졸려? "

" 아니아니. 오늘은 자면 안 돼. "

" 응? "

아까 전 면회를 왔던 유 형사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실하게 유천에게 전해주었다.

창민은 자신의 약혼녀를 강간했던 범인을 스스로 취조하고 사형대로 보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자신이 쏘아 죽인 줄 알았던 약혼녀가 실은 변태 성욕자의 살인으로 이미 목숨이

끊어져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충격으로 현재 제대로 사고를 할

수가 없어 모든 일을 접고 검찰을 떠났다는 것이다. 사표까지 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냉철하고 모든 일에 이성적이던 창민이 오래전에 죽은 약혼녀의 환영에 아직도 시달려

고통스러워하다니, 이건 안 될 일이다. 재판이 아니더라도 안 될 일이야.

Page 443: Happy Together

" 형아... 무슨 생각해? "

" 중요한 생각이야. "

" 있잖아... "

" 응? 무슨 할 말 있어? "

" 나 치료 받았을 때... 어땠어? "

침대에 엉덩이를 걸쳐 앉아 유천의 품 안에서 고개를 묻고 있던 준수가 물었다.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준수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던 유천이 귀를 쫑긋하며 내려다본다.

" 뭐가 어때? "

" 막... 이상하거나 그러지 않았냐구.... "

" 뭐가? "

" 이상하잖아. 방금 전까지 형형, 거리던 애가 갑자기 딴 사람이 되가지고 말을 막 하니까,

엄청 놀랐지... 나 최면에서 깨고 이상하게 보였지? "

" 왜? "

얘는 왜 쓸데없이 이런 걸 물어... 유천은 투덜거리며 준수의 머리카락 위로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이 녀석은 다 좋은데 이게 문제다.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게 하는 거.

" 네가 뭐든 상관 없다고 했잖아. 그... 내가 언어 표현이 서툴러서 멋진 말을 못하겠어.

아무튼 니가 몽유병이든, 이중인격이든, 문둥병이든, 에이즈든, 나는 다~ 상관 없어.

이거 내가 몇 번째 말하는 거냐, 지금? "

" ...... "

" 알았으면 일어나. "

" .... 왜? "

" 형아가 오랫동안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탈출해야 될 거 같다! "

" 어?!?!! "

이 남자가 또 뭐래냐. 준수는 황당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는 유천을 바라보았다. 탈출이

라니. 지금 우리가 동물원에 갇힌 마다가스카 팽귄들도 아니고 갑자기 왜 탈출이야?!

" 지금까지 이 사건을 맡고 있던 사람이 심 검사님이야. 지금 옆에 심 검사님 안 계시니까

그냥 심 검사라고 할게. 아무튼 그 놈이 처음부터 계속 우리 일을 쭈욱 도맡아서 했는데,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구 같은 새끼가 지금에 와서 재판을 맡냐 이 말이지! 이 사건은

그 새끼 아니면 절대로 못 맡아! "

" 그... 새끼라면, "

" 심창민 검사님. "

Page 444: Happy Together

으응...

유천은 침대 밑에서 무언가를 부시럭 거리며 꺼냈다. 자신이 병원에 실려왔을 때 입고 온

라이더 자켓과 청바지다. 갈아입을까 하다가, 온통 피가 묻어 있어서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

그래도 두 사람 모두 병원복 차림으로 나가는 것은 좀 위험하니까, 라이더 자켓을 준수에게

걸쳤다.

" 검은색이라 피 묻은 거 티 안 난다! "

" 뭐하게? "

" 나갈거야. 이 병원. "

" 지금?! "

" 심 검사 만나서 담판을 지어야지. 그 사람이 맡지 않으면 불안해. 사는 오피스텔이 대강

어딘지는 아니까 쉽게 갈 수 있을 거야. "

" 차도 없잖아! "

" 택시 타면 되지. 주머니에 만 원짜리 몇 장 들어있을 거야. "

" 하지만....! "

" 하지만은 서울시 사는 하지만이고, 빨리 나가자. "

지금 몸도 다 낫지 않았을 텐데...! 자신은 이제 거의 다 나았고, 구타 당했던 상처도 많이

아물었지만 유천은 다르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남자가 아닌가. 심장 바로 옆에 총을

맞고 혼수 상태까지 갔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지난 일이라고 벌써 병원을 빠져나가

위험한 탈출을 시도하겠다는 소리일까? 아무리 사랑해도, 저 무대포 정신은 이해가 안 돼.

준수는 기겁하며 유천을 말리려 했지만 그는 이미 준수의 팔을 끌고 병실을 나선 후였다.

" 쉿! 소리 줄여! 지금부터 뒷꿈치를 들고 최대한 소리를 죽인다! 실시! "

" .... 실시. "

군대냐. 준수는 궁시렁거리며 유천의 옷깃을 잡았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기구한 운명이다.

하루 아침에 정신 이상자라는 판단을 받고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나, 지금은 형사와 함께

몰래 병원을 탈출하고 있다니. 준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엄청난 사실들이 한꺼

번에 닥쳤는데도 자신이 이만큼 제정신일 수 있는 건 역시,

" 우리 준수, 어두운데 형아랑 뽀뽀나 하고 갈까? "

... 이 남자 때문이겠지.

* * *

Page 445: Happy Together

" 신사동이요! "

" 신사동! "

냅다 소리지르는 유천을 따라 준수도 소리질렀다. 뒷문으로 간신히 병원을 탈출하긴 했지

만, 택시는 오지게도 잡히지 않았다. 준수는 양말이라도 신고 있었지만 유천은 맨발레 슬리

퍼 차림이다. 게다가 병원복. 아무리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지랄을 해봐도 택시는 슝슝

그들을 스쳐가기만 했다. 결국엔 준수가 자켓을 벗고 바짓자락을 치켜 올리며 엄지손가락을

세우자 그제야 택시가 잡힌 것이다. 왜 이런 미친 행동에 택시가 멈춰주었는지는 아리송하나

어쨌든 새벽은 쌀쌀했기에 그들은 무작정 뒷좌석에 올라탔다.

" ... 정신병자유? "

" 아닌데요! "

둘이 동시에 소리지르고, 뒷좌석에 편안하게 몸을 눕혔다. 이제야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

준수는 유천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가 습관처럼 목에 팔을 둘렀다.

" 가서.. 뭐라고 말하려고? "

" 이 사건, 검사님 아니면 아무도 맡을 수 없으니까 정신 차리고 돌아오라고 해야지. "

" 또? "

" 분명히 약혼녀 생각에 눈물 줄줄 짜면서 궁상맞게 참이슬이랑 동침하고 있을 테니까

같이 술이나 한 잔 하면서 달래줘야지. "

" 또? "

" 사표 낸 거 취소하고 빨리 검찰로 돌아오라고... "

" 또오? "

또오오오-? 하고 입술을 귀엽게 오무리는 준수를 보고, 유천이 힐끔 앞좌석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운전하는 기사 아저씨. 네 할 일이나 열심히 하세요. 딴데 신경 쓰지 말고.

" 여기로... 좀 와 봐. "

" 여기? "

" 좀.. 더 안으로. "

운전석 바로 뒤에 붙은 유천이, 기사의 눈치를 보며 준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 안았다.

그리고는 감히 앞좌석에서 눈치 챌 수 없도록 막무가내로(...) 준수의 입술을 삼켜버렸다.

" 형아! "

" 가만있어. "

" 하지만...! "

" 어허, "

Page 446: Happy Together

... 뒤에서 뭣들 하냐. 운전 기사는 슬쩍 눈을 돌렸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를 하면

어때. 원래 이 새벽에는 별 미친놈들이 다 타기 마련이다. 술 먹고 토나 안 하면 하나님이지.

목적지까지 잘 바래다주기나 하자. 올바른 생각으로 열심히 운전하시는 아저씨시다.

.

.

.

" 여기가 맞아? "

" 응. "

" 후아... 좋은 오피스텔이다! "

" 준수 너가 살았던데랑 비슷할걸? "

" 와봤어? "

" 한 번. 옛날에 집들이 했을 때 형사들이랑 단체로 왔었어. "

고층의 높은 오피스텔을 올려다보며 잠시 자신들이 살았던 옛 집을 떠올렸다. 솔직한대로

말하자면 유천의 옥탑방 보다야 살기는 훨씬 편했다. 온.냉방도 잘 되고, 깨끗하고, 주위

환경도 좋고 벌레도 없고. 하지만 옥탑방만큼 운치는 없었지... 잠시 옛 생각을 하다가 준수

의 손을 잡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의 기억에 의하면 창민의 집은 의외로 도어락

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열쇠로 따고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거라면 자신있다.

" 검사님! 안에 있어요?! "

탕탕탕-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인기척도 나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어. 쉽게 문을 열어 줄

남자가 아니지. 갑자기 터진 일로 제정신도 아닐텐데, 그 정신으로 차를 몰고 운전할 리도

없고.... 분명 집 안에서 궁상맞에 술병이랑 뒹굴고 있을 거다. 유천은 문에 귀를 대고서

한참

이나 인기척을 살피다가 안되겠는지 주머니 안에서 헤어핀 몇 개를 꺼냈다.

" ... 형아, 머리에 핀도 꽂아? "

" 가만있어봐. "

헤어핀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찌익- 일자로 늘린 후 끝을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렸다. 그렇

게 몇 개를 만들고, 그것을 열쇠 구멍 안으로 밀어 넣는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문 따기?!

"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

" 예전에 내가 길거리에서 잡은 도둑 새끼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전과 40범인거야.

어떻게 집 털었냐고 물어보니까 죽어도 안 가르쳐줘. 그래서 키보드로 머리 몇 번 후려

쳤다? 그러니까 이걸 가르쳐주대. "

Page 447: Happy Together

" 이... 걸로 문을 따? "

" 쉽대. "

이렇게 안으로 넣고, 딸깍 거리는 소리가 나는 장치를 밀어 올리라고 했지... 찾았다!

" ... 열렸어! "

이거이거. 형사 하다가 지능형 도둑으로 길 트는 거 아니야. 준수는 심히 불안한 눈으로

유천을 바라보다가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싸늘한 냉기... 창문을 모두 열어 놓았는지 집

안이 차다. 구두가 놓아져 있는 걸로 봐서는 안에 있는 거 같은데- 유천과 준수는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왔다. 창민의 오피스텔은 원룸이었지만, 특이한 디자인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는 커다란 평수였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아서 사방이 어두웠고 잘 보이지가 않았다. 스위

치를 찾아 더듬거리던 유천이, 전원을 켰다.

" 검사님!! "

구석에 창민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새하얀 무언가를 끌어 안고. 그 모습이 기괴하면서도

슬퍼보여서, 둘은 한동안 다가서지 못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내딛었다.

" 문이 닫혀 있어서... 이걸로 따고 들어왔는데.. "

헤어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창민의 앞에 웅크려 앉았다. 이럴 줄 알았어... 술냄새! 그래

도 이 남자는 위스키급으로 노는 구나. 바닥에 뒹구는 술병들을 집어 들어 테이블에 올려

놓고 창민의 고개를 들게 했다. 얼마나 마셔댄건지 술에 쩔어버린 사람 같다.

" 정신 차려요!! 이 귀신 같은 건 뭐야?! 절로 치워!! "

" 어.... 이거, "

웨딩드레스야. 준수가 놀란 눈으로 드레스자락을 들었다. 새하얀 순백의 웨딩드레스. 창민

이 이것을 왜 가지고 있을까. 풍성하고 아름다운 치맛단을 들고 만지작거리다 부스스 움직

이는 창민을 일으켰다.

" 만지지 마... "

" 검사님, 나 알아 보겠어요?! 무슨 술을 목구멍 귓구멍 똥구멍으로 다 먹었어?! 이게 뭐야?!

정신 좀 차려봐요-!!! "

" 으.... "

Page 448: Happy Together

머리가 아찔하다. 그러고보니 어제 몇 병이나 들이부었더라. 깨질 듯한 머리를 쥐고서 몸을

일으켜 드레스를 도로 품에 안았다. 산지 아주 오래된 드레스인데도, 아직도 그녀의 체취가

묻어나는 것 같아.

" 예진아아..... "

이 드레스를 입은 네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너 아니면 아무도 이 드레스의 주인이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는 다음날 너 몰래 웨딩샵으로 차를 돌렸다. 그리고 네가 갖고 싶어하던

이 드레스를 샀어... 네게 갑작스럽고 행복한 선물을 안기고 싶어서, 너는 그런 로맨틱함을

좋아했잖아...

" 아, 씨! 예진이고 예자고!! 검사님 지금 꼴이 어떤 줄 알아요?!!! "

" 형아... 화 그만 내. 검사님 힘드시잖아... "

" 힘들고 자시고, 이게 얼마나 무책임한 모습인지 자기가 자신을 좀 봐요-! "

이 귀신 소복 같은 건 또 뭐야!! 창민이 품에 끌어안고 있던 드레스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제야 몸을 움직여 유천이 쥔 드레스를 도로 빼앗은 창민이, 제발 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 혼자 있게 내버려 두라고!!!! "

" 혼자 있으면, 어쩔건데?!! 이 소복 끌어안고 쳐울다가 술 퍼마시고 죽어버릴 거에요?!!! "

" 네가 무슨 상관이야!!!! "

" 나 원래 오지랖 넓은 놈이잖아요!! 검사님 이렇게 그지같이 사는 꼴 못 봐요!! 빨리 정신

차리고 일어나요!!!! "

드레스를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엔 유천이 잡고 있던 드레스자락을 화악

놓아버렸다. 그 바람에 뒤로 나자빠진 창민이 술 기운 때문인지 일어나질 못하고 바닥에

뒹굴며 우욱, 거리기 시작했다.

" 에이, 썅!!! 이런 건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

소매를 걷어 올리고, 유천이 나뒹구는 창민에게 다가갔다. 이게 사람 사는 꼴이야? 나는

이 남자가 이런 삶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에 얽매여 술병이나 끼고 사는 건

패배자나 할 짓이야. 삶에 굴복하기에 이 남자는 너무 젊고, 또 창창하잖아. 유천은 냅다

창민을 타고 올라가 성하지도 않은 주먹을 얼굴에 내리꽂았다.

" 형!!!!! "

" 정신 차리라고!! 이 새끼야!!!! "

Page 449: Happy Together

" 검사님이야!!!!! "

" 검사고 판사고 나한테는 지금 술 취한 미친놈이야!!!! "

으... 상처 부위가 욱신거린다. 유천은 미간을 찡그리다, 가슴을 움켜잡고 잠시 숨을 고르게

쉬었다. 씨팔... 아래서 비릿한 피냄새에 창민도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바둥거린다. 만약에

술에 취하지 않고 이 남자와 겨루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박유천도 모른다. 약혼녀의

사고가 있기 전의 심창민은, 누구보다 활동적이며 거친 형사 타입의 검사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저 이빨 빠진 호랑이일 뿐이다. 그 이빨, 내가 다시 끼워줄 테니까 제발 정신

좀 차려라...!!

" 아악!!!!! "

제대로 얼굴에 유천의 무쇠 주먹을 맞은 창민이 비명을 질렀다. 형!! 어쩔 줄 모르는 준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천은 이를 악 물고 창민의 멱살을 쥐었다.

.

.

.

" 정신이 좀 들어요? "

욱신거리는 얼굴을 만지며 눈을 떴을 때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준수가 손수건을 들고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문을 잠궈놨는데 여기 박유천과 김준수가 왜 앉아있어. 가

까스로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온 몸이 쑤시고 아프다. 얼굴은 더더욱.

" 누워 있어요. 많이 아플거에요. 제가 말리려고 했는데 말을 안 들어서... "

" 그러기에 누가 그렇게 술 쳐먹고 궁상떨고 앉아 있으래요?!?! "

" 박 형사... 얼굴이 왜 그래. "

" 왜 그러긴!!! 검사님이 이렇게 만들었잖아!!!! "

내가? 눈쌀을 찌푸리며 입가가 터지고 머리가 쥐어 뜯긴 유천을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그나저나 너희 둘, 왜 내 앞에 앉아있는 거냐. 나는 분명 혼자 있고 싶다고 검찰까지 떠나

숨어 있었는데.

" 빨리 일어나요. 해장국 끓여놨으니까 언넝 먹고 얘기나 합시다. "

" 이봐...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서 뭐 하는 거야....? "

" 들어올 일이 있으니까 들어왔지. 아아, 뭐 훔쳐가는 거 없으니까 안심해요. 서울지검 최고

검사라면서 순 개뻥 아니야? 집에 금덩이 하나가 없어? 죄다 서류뭉치에 시꺼먼 가구에...

에이, 멋대가리 없어. "

Page 450: Happy Together

스윽 일어난 유천이 먼저 식탁으로 다가갔다. 걱정스레 이마 위에 손수건을 얹은 준수가

보인다. 아... 그래. 나, 니 사람이 관련된 재판을 맡기로 했었지. 그러나 무엇이든 생각할

힘이 소진되어서 그만 두었다. 지금은 그냥 편하게 쉬고 싶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죄다

포기하고 그녀만 생각하면서 낮과 밤을 흘려보내고 싶어.

" 형한테.. 얘기 들었어요. 검사님 얘기. "

" ........ "

" 다시 돌아오라고 떼쓰는 거 아니에요. 그냥.. 일어나서 뭐라도 먹어요. 폐인 같아요. "

" ... 신경 쓰지 마. 준수 씨 일 만으로도 벅찰텐데, "

그러고보니 이 남자. 자신의 진짜 병에 대해서는 들은 건가. 후우... 한숨을 쉬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 저, 다 알아요. "

" ......... "

" 형이 다 얘기해줬어요. 내 병. "

" ... 괜찮아? "

" 치료도 한 번 받았어요. "

" 뭐라고 했어, 의사가? "

" 내 몸에서... 사라지고 싶지 않대요. "

그는 쓸쓸하게 웃었다. 의외였다. 나약한 이 남자는, 기절할듯 울고 인생을 전부 포기하고

덜덜 떨며 병원에 틀어박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다. 쓸쓸하지만 분명히 입꼬리가

올라가 있고, 심히 불안정해 보이지도 않는다. 창민은 말없이 얼굴을 닦았다. 손수건을

뒤집으려 하는데-

" ...뭐야, 왜 피가 나. "

" 아, 아까 형아가 막무가내로 달려들어서.... "

씨팔. 어쩐지 얼굴이 쑤신다 했어. 창민은 서랍장 위에 올려진 손거울을 들어 얼굴을 바라

보았다.

" 박유천!!!!!!!!!!! "

" 우렁찬 목소리 듣기 좋네요! 검사님 이리 와서 해장해요! 아, 시원하다! "

터져나간 입술과 시퍼래진 눈가에, 굳은 코피가 아직도 윗입술에 달라붙어있다. 비릿해...!

창민은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성큼성큼 유천에게 걸어가 손거울로

뒷통수를 내려치고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Page 451: Happy Together

"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집에서 나가.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

" 혼자서 뭐 할 건데요? 또 저기 무슨, 삼벤지 소복인지 허여멀건한 옷 끌어안고 술쳐먹다

바닥에서 쳐잘라고 하잖아요. 그게 사람 사는 꼴이에요? "

" ... 내가 병신 같은 건 아는데, 내가 박 형사가 아니잖아.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 박

형사가

알아? 모르잖아. "

" 모르니까 이렇게 대책없이 덤비지. 검사님 얼마나 마음 아프고, 뭐 눈물 나고, 미치겠고,

이러는 거 다 좋아요. 그런데요, 그거 다 그 약혼녀 5년 전에 죽고 한바탕 치뤘던 홍역

아니에요? 이제와서 왜 뒤로 빠꾸하냐 그거죠, 내 말은. "

" 그건 내가 몰랐던 사실이... "

" 일단 밥이나 먹읍시다. 난 나갈 생각 없어요. 쫓아내려면 여기서 또 한 판 뜨던지. "

" ... 씨발. 내가 술만 안 먹었어도 너 같은 거 한 주먹감도 안 돼. "

" 한 주먹이든 한 발꼬락이든, 일단 해장이나 해요. "

의자를 드르륵 밀고 창민을 억지로 앉혔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해장국에 따뜻한 밥.. 이런

식사를 얼마만에 먹어보더라. 멍하니 식탁을 바라 보는데, 유천이 손에 수저를 쥐어 주었다.

" ... 박 형사가 한 거야? "

" 네. "

국물을 한 수저 떠서, 가까스로 입 안에 넣었다. 넣자마자 터진 부분과 맛물려 입이 쓰리다.

얼굴을 찡그리다가 간신히 삼켰다.

" 나도 입 안에 터졌거든요? 서로 아픈 마당에 쪽팔리게 아픈티 내지 맙시다. "

" ... 맛없어. "

" 어? 뭐가 맛이 없어요?!! "

" 개떡같아. 이게 국이냐, 내가 발로 끓여도 이거 보다는 잘 끓이겠다. 요리하지 마. "

" 이거 사실은 준수가 끓인 건데? "

옆을 스윽 바라보니, 사색이 된 표정으로 국자를 들고 있는 준수가 보였다.

* * *

" 안 해. "

사실은 박유천을 갈구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준수는 소심하게 고개만 숙

Page 452: Happy Together

였다. 요리한 거 맛없다고 한 적 한 번도 없었는데... 형은 늘 맛있게 먹었는데.. 남겨진

해장

국을 홀로 맛보며 무엇이 문제인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준수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준수를 뒤로 하고 침대로 걸어와 털썩 앉았다. 어떻게 문을 따고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형사와 범인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모든 범행의 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쉬고 있는

창민에게, 유천은 다짜고짜 사표를 취소하고 검찰로 돌아와 재판을 맡으라고 말했다.

" 왜 안 해요? 이제까지 제일 열심히 뛴 사람, 검사님 아니었어요? "

" 그랬지. "

" 그런데 왜 지금 와서 안 해요!! 그 새끼, 검사님 아니면 처리 못 해요! 지금까지 다 봐오고

조사했던 검사님이 나서야 된다구요,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요!! "

" 너는 내가 힘든 건 눈에 보이지도 않냐, 박유천?! "

섭섭해서 소리 질렀다. 네 연인이 저렇게 죽을 상을 하고 앉아 있는 건 알겠지만 사람에겐

자기 자신이 먼저다. 창민은 굳이 그것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정의

실현을 위해 잠도 자지 않고 일해왔다. 나도 이제는 쉬고 싶어. 그냥... 그냥.. 내 집에서,

예진이와의 추억 생각하면서 시간 보내고 싶다고.

" 검사님은요... 분명히 그 약혼녀랑 연애했을 때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을 거야. 맞죠? "

" 뭐? "

" 그래요, 나 지금 엄청 답답해요. 준수 걸려있는 재판이라 더 그래요. 검사님이 그랬잖아.

완벽하게 처리하지 않을 때까지 준수가 위험하다고. 그렇기 때문에 모두 쳐넣고, 완전히

사건 해결하겠다며! 검사님 믿고 여기까지 왔어요. 그런데 지금 빠지겠다고 하니까 내가

빡이 안 돌아요?! "

" 너가 내 입장이 되어봐! 5년 전에 죽었던 내 약혼녀가, 사실은 내가 총을 쏘기도 전에 그

개자식한테 목이 졸려 죽었다고 하는데 내가 안 미치냐?! "

" 미치죠! 미치겠죠!! 그래서 진짜 미칠 거에요?!!! 검사님 미치라고 약혼녀가 죽었어요?! "

" 말 함부로 하지 마!! "

" 잘도 좋아하겠다, 천국에서 잘도 박수 치면서 깔깔 거리겠습니다, 그 여자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5년 전에 죽은 자기 때문에 일상도 못 챙기고 구질구질하게 집에서 술쳐먹고 쓰러

져 자고 있는데 잘도 웃겠다구요!! "

" ......... "

" 내 사랑아, 나 너 때문에 일도 그만 두고 집에서 술을 벗삼아 뒹굴며 살기로 했다. 어때?

졸라 죽이는 인생이지? 사랑해! 이렇게 말하면 그 여자가 나도 사랑해! 이러면서 좋아할

거 같냐구요!!!! "

하아, 흑, 가쁜 숨을 몰아쉬며 유천이 가슴을 쥐었다. 너무 무리했나... 수술 부위가 아프다.

유천이 몸을 구부리자, 뒤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던 준수가 달려와 부축했다.

" 괜찮아?! "

Page 453: Happy Together

아니... 안 괜찮아. 아무래도 너무 무리한 거 같아. 어쩐지, 너무 빨리 나았다 했다.. 심장이

아파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수그렸다. 숨이 차오른다.

" 박 형사...! "

" 나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준수 좀 신경 써 달라구요!! 검사님 하나만 믿고 재판 서는 애에

요! 애 많이 힘들어요... "

하아, 하윽, 이제는 정말로 아픈 것 같아서, 온 몸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아서, 어느새 흘린

식은땀이 축축하다. 형!!!! 준수가 비명을 지르며 입을 틀어 막았다. 서둘러 유천을 일으킨

창민이, 핸드폰을 찾았다. 병원에 빨리...

" 검사니임.... "

그 와중에도 창민의 멱살을 잡고 눈을 뜬 유천이, 흐르는 식은땀 덕분에 눈을 찡그리며 이

를 악물고 말했다...

" 그 여자도... 이런 거 원하지 않아요... "

.

.

.

유천에겐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병원으로 긴급 이송된 후, 준수는 자신들 때문에

병원이 발칵 뒤집혔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려오는 유천과 다급한 준수를 보자마자 의사는

불 같이 화를 내며 제정신이냐고 소리쳤다.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자들이 무슨 짓이냐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울면서 살려달라고 했다.

" 머저리 새끼... "

사실은 자기 자신 추스릴 시간도 부족한데, 유천이 눈앞에서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엉엉 울면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울부짖는 준수를 다독거리며 병원으로 데

려갔다. 그를 실려보낸 후에야, '그 사건' 이후로 처음으로 집 바깥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예진의 살인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후 자신의 기분이 어땠던가. 모든 것을 때려치

고 방 안에 틀어박혀 그녀의 꿈이나 꾸며 살아갔으면 하고 바랬다. 사람들이 왜 방 구석에

틀어박혀 폐인의 삶을 선택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 같은 기분이었을거야... 세상이 무섭고

모든 죄가 나로부터 시작하는 기분이 들어서.

" 괜찮다고 했으니까 그만 울어. "

" 하지만... "

Page 454: Happy Together

" 죽지 않잖아. 준수 씨 눈앞에 살아 있잖아. 뭘 더 바래. 그리고 이 새끼, 괴물이라서 금방

일어날 거야. 총 맞고도 일어난 놈이잖아. "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놀라야 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내 정신 차릴 틈 없는 미친놈이었

다. 그런데 어느새 준수를 달래고, 유천을 보살피고, 상황을 정리하고 있다니. 이게 내 천성

인 걸까. 예진이 그렇게나 불만스러워했던 차갑고 냉정한.

" 잠깐 나갔다 오자, 준수 씨. "

" 형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잖아요.... "

" 영원히 저러고 있을 거 아니잖아. 나가서 몸 좀 추스리고 오자. "

병원 바깥으로 나와버렸다. 아직도 얼굴에 눈물이 채 가시지 않은 준수가 벤치에 앉아 창

민이 내미는 담배에 도리질을 쳤다.

" 난 좀 피울게. "

히끅, 거리며 아직도 울어대는 준수를 보니 그의 마음이 오죽이나 클까 싶다. 창민은 늘 유

천이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왔다. 거친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강하고

강한 그가 지켜줄 수 있을 만큼 약한 사람. 아마도 이 남자는 두 가지를 전부 가지고 있겠지.

자신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알고서도 무너지지 않은 김준수는 강하고, 자신의 연인이 정

신을 잃은 채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온 슬픔을 질머진 표정을 한 김준수는 약하다. 흐느낌이

어깨에 그대로 전해진다. 가늘게 떨리는 준수의 등을 다독이며, 연기를 길게 뿜었다.

박 형사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야. 선배 형사의 자식들 대입부터 시작해서, 후배 형사들의

발가락 무좀까지 신경쓰고 다녔지. 그런 박 형사를 보면서 나중에 저 남자에게 사랑받을 사

사람은 죽도록 행복하거나, 죽도록 귀찮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김준수는

죽도록 행복하겠지. 그는 자기 감정 표현에 솔직한 남자다. 서로에게 솔직한 두 사람이 만났

으니, 사랑하기 까지의 과정은 길지 않았을 거야. 솔직하게 사랑을 모두 고백하고, 열렬하게

사랑하겠지... 나는 솔직한 사람들이 부러워.

" 내가 사랑했던 여자는... 자기 속마음을 잘 말하지 못하는 여자였어. "

뭐가 싫고, 뭐가 좋고를 말하지 못했지. 그저 내가 하자는대로 따르고 기쁘다며 웃는 착한

여자였어.

" 나도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남자야. 백 번을 사랑하면... 한 번을 사랑한다고 말했어. "

Page 455: Happy Together

그래서 후회가 돼. 미련이 남아. 당신들처럼 솔직하게 사랑했다면, 우리에겐 더 추억이 많

았을 거야. 그런데 나는 아니었어. 사랑하기 까지도 오래 걸렸고, 사랑하면서도 모든 것이

느렸고, 사랑이 아픔이 된 후에도 그걸 잊는 것이 오래 걸려.

" 검사님한테... 억지로 저희 재판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생각 없어요. "

" ....... "

" 힘드시잖아요. 저희.. 그렇게 못된 놈들 아니에요. "

그건 나도 알아. 창민은 대답하고 담배를 비벼 껐다.

" 그냥.. 저는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거에요. 저희 재판 맡지 않으셔도 좋아요. 하지만

일을 그만 두고, 그렇게 힘들어 하면서 살지 마세요. 형 말대로... 그건 그 여자분이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

" ...... "

" 속마음 만큼 많이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련 많이 남으시잖아요. 세상에 없다고 미련으로만

남기지 마세요. 정말 사랑하면, 죽어서도 그 사람과의 약속 지켜주고 아껴주는 거에요. 저

는 그래요...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듯, 사랑에도 개인차가 있을 거에요. 하지만... "

" ...... "

"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잖아요. "

응... 그래. 그가 살짝 웃었다. 준수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병실에 누워있을 유천이 걱정

되고 또 걱정될 것이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창민이 먼저 일어섰다. 뒤따라 일어선 준

수가, 그의 대답을 기다리느라 가지도 못하고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였다. 창민은 싱긋 웃

고서 준수의 어깨를 두 어번 툭툭 쳤다.

" 내가 정리하고 돌아올 때까지... 버텨줘. "

* * *

" 그러니까, 여기 써 있는 것이 모두 사실이란 소리죠? 김준수 씨가 현재 이중인격이며,

정윤호의 살인을 목격한 것은 당신의 두 번째 인격이다. 그러므로 준수 씨는 살인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마피아에게 납치 당했다가,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

새로운 검사는 창민과 나이대는 비슷했지만 얼굴은 훨씬 늙어 보였다. 게다가 말투도 훨씬

딱딱해서 마주 앉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으로 그

를 바라보았다. 유천은 생각보다 일찍 깨어나지 않았고, 폐 기능에 이상이 생기는 바람에

Page 456: Happy Together

또 다른 수술을 받으러 수술실로 가 있었다. 아마도 얼마 후면 수술이 끝날 것이고, 마취가

풀려서 깨어나기 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사이에 준수는 사건을 담당한 새

형사와 만나게 되었다.

" 이거이거, 엄청 복잡한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카드가 준수 씨인데, 이런식

이면 곤란해요. "

" ...... "

" 정신 이상자의 증언은 법적 효력이 없다는 거, 알고 있죠? "

정신 이상자- 그 말에 준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남에게 저렇게 직설적으로 저런 소리를

들었던 것이 얼마만인지. 너는 아무 문제 없는 사람이라고. 단지 조금 특이한 병을 앓고 있

을 뿐이라고 유천은 늘 말해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저렇게 직설적으로

병을 판단한다. 정신에 이상이 있다고.

" 카르텔 쪽에서는 준수 씨의 병명을 아나요? "

" 아마도... 모를 거에요. "

" 그렇다면 우리 쪽에서는 일단 연기를 해야겠네. 준수 씨가 보지 않은 건 맞지만 그 때 당시

상황은 정확하게 알고 있잖아요. "

" 네... "

" 게다가 준수 씨를 납치한 적도 한 번 있으니까, 납치 되었을 때 심한 구타를 당했다고

했죠.

수술도 받았고. "

" ...... "

" 그것도 증언해야겠습니다. 흠, 정신과 치료는 받고 있어요? "

" ... 네. "

" 뭐, 문제가 많은 가요? 재판 도중에 두 번째 인격이 튀어나와서 법원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다던가. 아, 이건 헐크가 됬을 때나 가능한 얘기지. 하하... 미안, 웃어서. 하지만

진짜

황당하긴 하네요. 이런 사건을 처음 맡아서. "

유천이 곁에 있었다면 이 남자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고통받으며 살았던

남의 치부를 그딴 식으로 치부해 버리냐고. 하지만 준수는 화를 삭혔다. 일단은 재판이

중요하니까.

" 재판 첫 번째 날에 법정에 서게 될 거에요. 거기서 자신이 두 번째 인격이라고 생각하고

증언하도록 해요. 그리고 납치 되었을 당시 받았던 폭력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게 얘기해

요. 사람들이 듣고 몸서리 칠 정도로 잔인하게. "

" 그 얘기를... 제가 해야 하나요...? "

" 그럼 누가 해요? 뭐, 준수 씨 두 번째 인격이 튀어나와서 대신 해주기라도 한대요? "

이 남자... 날 도대체 뭘로 보는 걸까. 단순히 모자란 정신 이상자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떻

Page 457: Happy Together

게 남의 아픈 부위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들추는 거지. 새로운 검사와 대화를 나누며,

준수는 이 자가 창민과 같은 검사임에도 불구하고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민

이 똑같은 얘기를 했다면 그는 준수가 상처받지 않도록 현명하고 우회적으로 얘기했을 것

이다. 창민은 준수의 안전과 범죄 조직의 소탕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는 자

신의 승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아. 단지.. 경력에 하나가 추가되는 것뿐이야. 이건

냉정한 것이 아니다. 인간미가 없는 거야.

" 그쪽에서 나온다는 변호사가 신참인게 다행이야. 김재중?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데, 흥.

처음부터 잘못 걸린게 불쌍한 뿐입니다. 뭐.. 대화는 이쯤 해두기로 하지요. 내일 있을

재판 대비해서 잠이나 푹 자둬요. 아, 잠이 문제라고 했었나? "

" ...... "

" 그, 뭐 재판 잘 끝나면 어디서 치료 좀 제대로 받고. "

빈정거리며 준수를 아래 위로 훑어본 검사는 서류를 챙기고 문을 나섰다.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도 잠시, 준수는 바로 일어나 유천의 병실로 향했다. 내일 시작될 재판

때까지는 깨어나야 할 텐데...

.

.

.

" 비디오 자료는? "

- 준비 되었습니다. 오늘 안으로 받으실 겁니다.

" 고마워요. 그만 쉬세요. "

- 잘 부탁드립니다. 재중 씨.

글쎄요, 나도 어떻게 될 지는 잘 몰라요. 단지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했

다는 것뿐이죠. 내일 재판에 가지고 들어가야 할 서류들을 챙기고, 재판에서 입을 정장을

깨끗히 다려서 걸어놓았다. 재판이 어디까지 갈지는 나도 모른다. 단지... 이제는 혼자 잠

드는 시간이 너무 힘들어. 잠이 들 때, 내 곁에 그가 없다는 사실을 참기가 힘들다.

" 윤호야... 우리 내일 데이트 하자... "

데이트 한다고 생각하자. 법원에서.

재중은 컴퓨터로 준비 된 파일을 검사하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내일 법원에서 이 동영

상을 보여주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 미안해요, 준수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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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함은 사실이지만, 죄책감도 사실이지만, 양심과 사랑.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

다면 난 망설임없이 사랑이다. 당신도 아마 내 입장이었다면, 이렇게 했을 거야.

.

.

.

저녁으로 나온 주먹밥을 먹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다. 오늘 밤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새벽에 공복으로 배가 아플까봐, 야식용으로 남겨둔 것이다. 달빛이 비추는 창가

아래 앉아서, 윤호는 주먹밥을 입에 넣었다. 차갑고, 딱딱하고, 돌맹이를 씹는 기분이지만

할 수 없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생각하는 힘도 사라지고 바닥에 빌빌 기어다녀야 하니까.

새벽 내내 그를 생각하고, 내일의 만남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배가 차 있어야 한다. 꾸역꾸

역 주먹밥을 입 안에 넣으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 좀 떨리기도 하고... "

재중이 승소하지 못 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사형? 그의 얼굴을 다시 보지도 못하고 죽

음을 맞이해야 하나?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어쩌면 남은 몇 일의 재판이 그와의 마지

막 만남이 될지도 모른다. 형편없다. 새파란 죄수복을 입고 샤워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마지막 만남이라니... 최악의 상황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막상 코앞으로 닥쳐오자 가

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하다.

" 설레이기도 하고... "

그래도 어쨌든, 내일은 너 만나는구나. 재판 도중에 웃어버리면 큰일인데 말이지...

.

.

.

" 괜찮아?! "

아주 새벽에, 유천은 눈을 떴다. 깨어나자마자 느낀 것은 가슴이 욱신거리는 얼마의 고통과

눈 앞에 사랑하는 사람이 보인다는 안도감이었다. 손을 뻗어 까칠한 준수의 뺨을 만졌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참 보들보들했는데 말이지... 요새 많이 힘들어서 그런가.

" 움직이지 마! 가만히 누워있어. 함부로 몸 썼다가 또 수술하면 어떡하려고... "

" 걱정 마. 이 정도로 안 죽어. "

" 죽지 않기만 하면 다행인 줄 알어?! 이러다가 어디 하나 잘못되면 어떡하려고 그래? 형은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

Page 459: Happy Together

" 또 운다... "

쯧쯔. 혀를 차고 준수의 머리를 끌어당겨 품 안으로 안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기다리고 있

었던 걸까. 하긴. 사랑을 하면 사람이 다 약해지지.. 어느새 서로가 없으면 잠들지도 못하는

한 연인이, 품 안에 서로를 안고 웃으며 눈을 감았다.

" 내일, 재판이야. "

" ... 검사님은? "

" 정리하고, 돌아오신다고 했어. "

" 재판이 내일이잖아...! "

" 기다릴 수 있어. 버틸 수도 있으니까 걱정 마. "

" 돌아오면 진짜 패버릴 거야. "

" 우리들은... 형이 죽고, 내가 죽어본 적이 없잖아. "

빨리 돌아와야 할텐데. 한숨을 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깨어난 유천과, 지금까지 지키

고 있던 준수 모두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달빛을 머금어야 했다. 마치 아침처럼 밝다.

" 잘... 되겠지? "

" 아마도. "

멋지게 승리할 거라고 믿자. 유천은 속삭이고 준수의 입술을 찾았다.

몸이 아파도... 키스 정도는 선물해줄 수 있어.

* * *

여행 떠나기 전에 한 편 정도 더 올리도록 노력할게요!

(노력만....?)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30

" 정말 괜찮겠어? "

" 응. "

" 난 혼자 있어도 괜찮으니까 병원에 누워있어도 돼. 괜히 아픈 몸 끌고 나왔다가 또 잘못

되면 어떡해. "

Page 460: Happy Together

" 진짜 말짱하다니까! "

" 의사 선생님이 허락 안 해줄텐데? "

" 걱정 마. 협박해서 허락 받아놨어. "

" 뭐라고 협박했는데? "

" 수면제 먹고 뒈질테니까 위세척 해주기 싫으면 그냥 보내달라고 했어. "

못 살아. 피식 웃고 유천을 부축해 병원에서 나왔다. 재판 당일 날. 유천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재판에 참여하겠다며 생때를 썼다.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병원

바깥으로 나와 택시에 올라탔다. 혼자 증인석으로 올라갈 준수는 지금부터 긴장이 되는 건지

유천의 손을 잡고 놓지를 못했다. 초조함이 손바닥에 베인 땀으로 전해졌다.

" 떨지 마. "

" ... 응. "

" 다... 잘 될 거야. "

그리고 웃었다. 가볍게 손등에 키스하고, 어깨를 토닥거린다. 내가 예전에 그랬었지. 형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모두 믿어버리게 된다고. 그건 당신을 사랑하게 된 가장 첫 번째 이유

이자 당신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야. 나... 지금도 그 말을 믿어. 형이 잘 될거라고

말한다면,

나는 오로지 그 말을 귓가에 고정시켜놓고 그렇게 믿을게. 사랑해... 박유천.

.

.

.

" 죄수복도 잘 어울리네요. "

" 너 존댓말 좀 안 할 수 없냐? 닭살 돋아. "

" 신성한 법정 안이니까요. "

" 웃겨... 김재중. "

두 손이 묶인 채 피고인 측에 앉은 윤호는 깔끔한 모습이다. 면도도 마쳤고, 샤워도 했을 것

이다. 단정하게 잘라진 머리는 조금 짧아졌지만 상관 없다. 그는 어떤 모습도 잘 어울리니까.

저 새파랗고 낡아 보이는 죄수복마저 맞춤처럼 멋드러지잖아. 정숙한 법정 안은 종요하다.

재판 참석을 위해 여기저기서 모인 일반인들이 앉았고, 아직 검찰 측은 도착하지 않은 것

같다. 뒤에 앉아있는 윤호에게 힐끔 눈을 돌리며 재중이 보이지 않게 웃었다. 데이트 치곤

꽤나 조용하고 남들 눈치 봐야 하잖아.

" 등장이시네. "

윤호의 중얼거림에 앞을 바라보았다. 유천을 비롯해, 준수와 검사가 법정 안으로 들어왔다.

저 남자가 강 검사라고 했지. 재중은 표정을 굳히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분명 나를 초

Page 461: Happy Together

짜 애송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뻔하다. 그렇기 때문에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겠지. 내가

노릴 점은 여기다.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비웃

음을 샀을 때 느끼는 분노가 배로 큰 법이지.

" 쟤는 어떻게 아직도 안 죽고 살아있냐. "

" 그러게... "

" 누가 쐈는지 몰라도, 일단 총을 들었으면 과녁을 제대로 맞춰야 될 거 아냐. 심장이나 목

따는 게 그렇게 어렵나? "

" ... 씨발, 누가 사격 선생님이었는데? "

" 조용히 해. 들릴라. 그리고 나는 그렇게 안 가르쳤어. "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유천을 바라보던 윤호가 싱긋 웃었다. 저만치에서 유천이 지금이라도

품 안에서 총을 꺼낼 듯 울그락불그락해진 얼굴이 보인다. 재중은 헛기침을 하고 판사가 입

장하기를 기다렸다.

" 괜히 성질 돋구지 마. 가만히 좀 있어. "

" 그럴게요, 변호사님. "

이 남자는 두려움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두 손이 포박된 채 자기를 죽이네 살리네 하는 장

소에 와서까지 왜 이렇게 뻔뻔한거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류를 정리하는 재중이다.

" 변호사님. "

" 왜. "

" 오늘따라 예쁘네. "

씨이이익.

능글맞게 웃는 윤호를 보며, 재중이 보이지 않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엠병한다.

* * *

" 모두 일어서세요. "

판사가 등장하고, 법원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섰다. 재중은 마른 침을 삼켰다. 내가

설득시켜야 할 당사자다. 저 남자의 손에... 내 남자의 생명이 걸려있어. 살리지 않으면 죽는

다. 윤호가 나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이 세계에서는, 죽이지 않으면 죽어. 그 때엔 그저

그의 잔인한 생존법칙이 두려울 뿐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이해가 돼. 죽이지 않으면

죽어. 살리지 않으면 죽어. 이거나 그거나 마찬가지야. 사람들은 삶의 아주 많은 부분에서,

Page 462: Happy Together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받는다. 나도 그와 같은 경우겠지... 너를 살리기 위해서 버리는 나의

양심 따위는 이미 십 원짜리도 되지 못한다.

"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

판사가 먼저 자리에 앉아서, 일반 방청객들과 나머지가 자리에 앉았다. 강 검사는 쓰고 있던

뿔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 존경하는 판사님, 그리고 일반인 여러분. 오늘 이 사건은, 과정과 결말이 불을 보듯 뻔한

사건입니다. 저기 앉아있는 저 남자, 피고인 정윤호는 현재 언론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흉악범으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알고 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미국 뉴욕 태생의

한인 마피아 조직 K 카르텔의 수장으로, 뉴욕에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FBI 의 유색 인종

마피아 소탕을 피해 대한민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가 현재 저지른 범죄는 마약 밀매.

무기 밀매. 살인 및 협박, 그리고 납치 그 외에도 폭력 및 불법 체류 등의 수많은 죄들을

안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의 이 자리는,

이 자의 결백을 주장하는 말도 안 되는 우스운 자리가 되지를 않길 바라는 것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이 남자가 정확하고 근거있는 자료들에 의해 사형대로 향하는 모습

을 보시게 될 겁니다. 존경하는 판사님의 정의로운 판결, 부탁드립니다. "

뭐래... 궁시렁 거리는 정윤호에게 슬쩍 눈짓을 하고 재중이 침을 삼켰다. 긴장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건 정윤호 없이 보냈던 어제 새벽을 마지막으로 하자. 지금은 긴장

이 아니라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강해. 나는..

그걸 믿어. 뒤에서 나를 잘 봐. 내가 어떻게 너를 지키는지.

" 존경하는 판사님. 그리고 이 재판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여러분.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

드릴 것은, 저는 이 자리에 정윤호 씨의 완전한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기 앉아있는 이 남자는, 분명히 K 카르텔의 수장으로 마피아라고 불리는 많은

조직원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확실히 한 남자를 납치하고 그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했습

니다. 하지만 마약 밀매, 무기 밀매 및 살인? 이 죄목에 대한 합당한 근거가 있습니까?

그가 이 재판에 회부된 것은 폭력 조직의 보스로서 저지른 몇몇의 죄값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증거도 없는 죄목으로 한 사람을 쉽사리 사형대로 보내는 판결,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판사님의 현명한 판결을 부탁드립니다. "

목소리가 떨리진 않았다. 다행이다. 내 목소리는 남자치고는 얇고 미성인 편이라 걱정이

되기도 했다. 호소력 짙은 저 남자의 목소리보다는 설득력이 떨어졌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 시작이니까.

" 증인은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

Page 463: Happy Together

제 자리에 앉아있던 준수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혼자 나가야 한다.

저만치 앉아있는 유천은 불안한 표정이다. 만약 유천의 손을 잡고 저 자리에 설 수 있다면

훨씬 마음이 편할텐데. 그러나 법정은 그런 개인적인 바람까지 허락하는 곳은 아니다.

" 증인은 신성한 법정 안에서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까? "

" ... 네. "

강 검사가 준수를 힐끗 바라보고는 앞에 섰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시키는대로 말할 것이다.

살인을 실제로 보지는 않았지만, 일단 목격자는 김준수 안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이다. 그가

이중인격이라는 사실을 카르텔은 모를 것이고, 김준수는 또 다른 자신이 증언했던 내용을

토대로 자신이 살인을 목격한 것처럼 정확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걱정할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준비되어 있으니까. 검사는 느긋하게 종이를 넘기며 준수를 응시했다.

이중인격이라니, 저런 정신 이상자가 이 사회를 활보한다는 사실 자체가 위법이다. 사실은

저 자를 병원에 집어넣고 치료나 받게 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일단은 이 재판의 승리가

중요했다. K 카르텔 재판 건은 현재 검찰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사건이다. 원래대로라면

승승장구 하고 있던 심창민이 이 사건을 맡아야 했지만, 운이 좋게도 자신에게 돌려진 것이

다. 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붙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이 재판만 승리하면 자신의 주가는

것잡을 수없이 올라갈 것이다.

" 증인의 이름은? "

" 김준수 입니다. "

" 나이와 직업은? "

" 스물여섯살... 이고, 파티 플래너. 파티의 기획을 맡고 있습니다. "

비웃는 듯한 저 남자의 얼굴이 싫다. 진심으로 창민이 빨리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저 남

자는 처음부터 나를 재판이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어.. 내가 만약 중요한

증인이 아니었다면, 내 병명을 듣고 버러지보듯 했을 남자야. 내 편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

웃고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다. 정신 이상자... 당신 머릿속엔 내가 그렇게 보이겠지. 그래서

그를 바라보며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힘들다.

" 증인은 피고인 정윤호가 살인을 저지르던 날을 기억합니까? "

" 네. 기억합니다. "

" 그 때 당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

" 그러니까.... "

자꾸만 떨리는 시선을 애써 감췄다. 사실 나는 아무 것도 몰라요. 소리치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Page 464: Happy Together

" 새벽에... 우연히.. 골목길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고..

호기심에 그쪽으로 발을 돌렸습니다.. 골목 안쪽은 달빛 때문에 어둡지가 않았습니다. 전

그 안을 들여다 보았고.. 여러 남자들이 한 명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중

보스라고 불리는 남자가 피고인이며... 그가 자신이 꺼낸 총으로 남자의 머리에 총을 쏘고

살인을 했습니다... "

" 그 때 들었던 대화 내용은 어떤 건가요? "

" 자신들에게... 독점 마약 루트를 내주지 않는다면서.... "

"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걸로... 끝인 거야? 온 몸에 힘이 풀린다. 사실 더 할 말도 없지만, 준수는 내려가라는 검

사의 손짓에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심장이 아직도 미칠 듯이 뛰고 있다.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지는 않았을까. 무서워져... 저기 앉아있는 김재중과 정윤호의 표정은 왠지

아무렇지도 않아보여.

" 존경하는 판사님, 이 증인은 정확하게 살인 사건을 목격했으며, 실제로 피고인 정윤호의

몽타주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유일한 목격자이자, 이 살인 사건의 산 증인입니다. 더 이상

어떤 말이 더욱 필요하겠습니까? 살아있는 증거이자, 세상에 완전 범죄는 없다는 것을 알

려주는 예이기도 합니다. "

재중과 윤호는 미동도 없었다. 그나마 재중은 집중을 하고 있었지만, 윤호의 시선은 아까

부터 제 옆보다 앞 쪽에 서있는 재중의 힙선을 향하고 있었다.

" 피고인 정윤호는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독점적 마약 루트 형성을 위해 마약을 거래하고

있던 다른 조직들의 보스를 협박했습니다. 그 중 그들의 말을 들은 조직은 연합회의 형식

을 띄게 되었고, 끝까지 거부한 나머지 조직은 보스가 살해됨으로 모조리 와해되었습니다.

증인이 목격한 이우혁 살인 사건 외에도 강정남, 이석주 모두 저기 앉은 저 남자.

정윤호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이 죄목 만으로도 그에게는 사형이 합당합니다. 이상입니다. "

유천은 뒤를 돌아 보았다. 재판에 참여한 일반인들은 하나같이 수긍하는 표정이다. 그러나

종종 들려오는 대화도 무시할 수 없었다. 범인이라고 하기에, 조직 폭력배의 보스라고 하기

에는 피고인이 너무 어려보이고, 또 놀랄 정도로 수려한 외모라는 사실. 저 얼굴을 하고 정말

사람을 죽였을까?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유천은 당장이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금

전까지 뭘 들은 거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유천은 퇴장일테고 준수

는 홀로 남겠지. 가까스로 화를 삭히고 준수를 응시했다. 그는 여전히 불안한 손가락짓을

하며 유천을 힐끔거리고 쳐다보았다. 그가 볼 때마다 유천은 웃어주었지만, 사실 힘들었다.

"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 신성한 법정에 설 수 있는 증인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

다소 쌩뚱맞은 재중의 첫 마디에, 판사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소리를

Page 465: Happy Together

하고 있는 건가? 판사의 질문에, 재중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 재판에 참석하신 일반인 여러분. 법에 관심이 많은 여러분들도 알고 있는 기본적인 지식

이 있습니다. 증인의 조건, 사건을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을 만큼의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대한민국의 시민들. "

설마... 알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유천이 불안한 눈으로 재중과 윤호를 바라보았다. 윤호는

분명 유천에게 준수의 '병'에 대해서 물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몽유병일 수도 있었어. 설

마... 준수가 저들 앞에서 두 번째 인격을 드러냈다면, 하지만 그건 아닐 거야. 김준수의

두번

째 인격은 자기 스스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남자다. 그렇기 때문에 심창민 앞에 모습을

드러내 증언을 하지 않았던가. 자신을 납치한 조직의 우두머리 앞에서 함부로 모습을 보였

을리가 없어. 그래... 그럴리가 없어.

" 저는 우선, 저기 앉아있는 김준수 씨가 과연 이 재판의 증인이 될 수 있는지 부터 묻고

싶습니다. "

" 이의있습니다! 피고인 변호사는 사건과 전혀 무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 아니요!! 절대로 상관 있습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피고인 측에서 준비한 자료 공개 여부

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 ... 인정합니다. "

재중은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눈짓으로 자료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곧 법정 안에 커다란

화면이 준비되었고, 재중은 가져온 동영상을 플레이 시켰다.

" ........ "

잠시, 준수를 바라보았다. 불쌍한 남자. 당신에게 동정심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이겠지.

왜 이 사건에 말려들었어. 정말로 불쌍한 남자...

" 이 동영상은, 증인 김준수 씨가 카르텔 쪽에 납치되었을 당시 우연히 찍힌 영상입니다.

화질이 다소 안 좋아 복원시켰습니다. 소리도, 선명하게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아, 한

가지 덧붙여 말씀드리죠. K 카르텔 쪽이 김준수 씨를 납치한 것은, 검찰 측에서도 똑같이

한 명의 사람을 죄 없이 구속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가 보스에게 중요한 자였기 때문에,

정윤호 씨도 그와의 교환을 위해 김준수 씨를 납치한 것뿐입니다. "

" 거짓입니다!! 검찰이 데리고 간 사람은 당신이었잖아!! 지금 정윤호의 변호를 맡고 있는!

당신도 저 마피아의 일원이 아닌가?!! "

" 이의있습니다. 자신의 추측을 확신으로 거짓 발언하고 있습니다. "

" 인정합니다. 주의하세요, 검사. "

Page 466: Happy Together

울그락불그락 해진 검사가 자리에 앉으며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소문대로 다혈질

이구만.. 조금만 더 건들면 터지겠는데.

- ... 치이익,

화면에 영상이 뜨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보자마자, 유천은 피가 거꾸로 쏠리는 것을 멈출

길이 없었다. 자신의 연인이 쓰러져 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온 몸이 멍 투성

이리라.. 얼마나 맞았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저만치 앉아서

자신이 납치 당시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김준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떨고 있었다. 그

때의 악몽이 떠올라서...

- 야, 물이나 마셔.

- 안 일어나?!

조직원들로 보이는 남자가 쓰러진 김준수 앞에 다가와 물잔을 내밀었다.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킨 유천이 화면을 응시했다. 저렇게.. 혼자서 힘들어 했구나.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언제 구하러 올지도 모르는 무력한 나를 기다리면서. 자꾸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유

천은 눈에 핏발이 서도록 힘을 주었다. 그러나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내 연인이... 얼마나

힘이 들고 괴로웠는지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불리하기만 한 저 영상을 왜 틀어놓은 것일까. 불안감이 온 몸을 엄습한다.

" ......!!!!!!! "

허억, 꺄악! 짧은 비명이 일반석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보고 있던 유천도 스스로 놀라 몸을

튕기듯 앞으로 향했다.

- 이 개 같은 자식이...

죽은 듯 쓰러져 있던 준수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물을 건네던 남자의 목을 조르며 위로 올라

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것은 유천 자신도 경험했던 일이다. 갑자기 다른 인격으

로 바뀌며 목을 졸라오던 김준수. 하지만 저건...

- 개만도 못한 새끼들이.. 감히 나를 건드려...? 이 씨팔새끼.. 개같은 새끼들.. 몇 번을

죽여

도 시원치 않을 개새끼들...

저게... 김준수의 목소리라고....? 아니야.. 저건 김준수가 아니야.

Page 467: Happy Together

- 크헉...! 큭...!!

- 이.. 이 미친 새끼가...!!! 무슨 짓...! 아아악!!!!

한 손으로 목을 조르고 있던 김준수가, 다른 손으로 자신에게 달려든 조직원의 눈을 후벼

파내듯 손으로 눈을 찢어갈겼다. 금세 얼굴이 피로 물들어간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조직원이 바닥에서 구르며 아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엄청난 비명에 곳곳에서 다른 조직원

들이 몰려왔다.

-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이 나를 쳐...? 죽어버려!!!! 여기서 나한테 목을 졸리면 혀가 길고

흉측하게 늘어질거다... 하하하...!! 아하하하... 볼만 하겠어... 눈알이 튀어나오고 온

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질거야... 아하하..!

미친 듯이 남자의 목을 조르며 고개를 젖힌다. 광기어린 웃음소리가 법정 안을 가득 메웠다.

사람들이 술렁거린다.

- 왜...? 무서워? 왜 다가오지 못해...? 내가 먼저 다가가? 왜 그런 눈으로 봐...?

- 가.. 가까이 오지 마...!!!! 야!! 이 새끼 잡어!!!!

- 더러운 손으로 만지지 마!!!!

엄청난 힘이다. 달려드는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다 바로 벽에 밀쳐낸 준수가, 여전히 머리채

를 손에 든 채로 나머지를 노려보았다. 엄청난 힘으로 머리가 깨어진 남자는 기절한 듯 미동

도 없다. 질퍽한 피가 준수의 손을 적셔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 너희들 하나 하나... 어떻게 맛있게 요리해줄까.... 응? 아니지... 아니면 너희들이 나를

있게 먹어줄래...? 왜, 나 예쁘지 않아? 원한다면 네 녀석들 모두 상대해줄 마음도

있어...

발가벗고 너희들 위를 타고 올라가 쾌락에 미쳐서 죽을 때까지 허리를 돌려줄 수도 있어.

어때...? 나랑 놀래... 아니면,

콰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다시 바닥에 짖이겨진 남자의 머리를 밟는다. 끊어질 듯한 그의

웃음소리가 괴롭다... 그러나 유천은 귀를 막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몸으로 그 모

든 것을 지켜보았다. 저 남자는 누구야.. 나는.. 나는 저런 사람을 몰라...

- 내 손에 즐겁게 죽을래...?

- 으아아아악!!!!!!

Page 468: Happy Together

아래 위로 비벼지는 준수의 발짓에, 깔린 남자가 비명을 질러댔다. 분명히 남자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김준수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동영상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 자가 지금

얼마나 미쳐있고, 또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그는 제정신이 아니다. 저 남자는 미쳤어...

- 왜..? 말해봐. 왜 그렇게 두려운 눈으로 나를 봐...? 내가 괴물 같아? 내가.... 아아악!!!

빈정거리는 말투로, 요염한 몸짓으로, 타오르는 시선으로, 다른 조직원들에게 다가가던

김준수가 갑자기 몸을 구부리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비명에 놀라, 법정 안도 다시

비명으로 가득찼다. 그 아무도 비명 외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두려움에 떠는

모습으로 법정에 서서 증언을 했던 그 여려보이는 남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자신들을

공포스럽게 하고 있었다. 얼굴은 똑같은. 그러나 전혀 다른 남자가.

- 하아.... 하아아.. 하윽.....!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고개를 일으켰다.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갑자기 눈물을 떨궈낸다.

- 이.. 이게 무슨...

- 제가.. 한 짓이 아니에요....

저 남자...! 유천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준수에게 첫 최면 치료를 했을 시에 나타났던 그의

두 번째 인격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던.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 광기

어린 모습의 김준수는 도대체 누구란....

- 저는 말릴 생각이었어요.. 곧 무사할테니까.. 그러지 말라고..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약해서.. 하지를 못해요.. 저는...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지금까지 보았던 영상보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짧은

영상이 더 충격적이었다. 김준수의 얼굴이 울부짖다가, 삽시간에 일그러져 버리는.

- 웃기지 마.. 너도 죽이고 싶었잖아!!!!!! 아니.. 난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거짓말

하지 마!!!! 네 몸에서 피를 볼 때마다 이 새끼들도 똑같이 해주고 싶었잖아!!!! 넌 항상

그렇게 위선적이야.... 난 그런 마음 품은 적 없었어.. 그건 너야... 나.. 난 이런 일

하지

않았어.. 늘 네가 그랬잖아....! 나만 그랬다고? 난 바람대로 해준 것뿐이야...

아니야...

Page 469: Happy Together

몇 번이나 얼굴이 바뀌었다. 울먹거리고, 소리 지르고, 다시 울부짖고, 비아냥거리고. 분명

똑같은 얼굴의 김준수인데. 그 안에는 두 명이 있었다. 서로 다른 두 명이.

- 무슨 일이야!!!!!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와 동시에 김준수는,

아니.. 김준수가 아닌 '그들'이 동시에 쓰러졌다. 바닥으로 다시 쓰러지 김준수는 미동조차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자기 스스로 주고 받은 그 대화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조용하게.

" .... 여기까지입니다. "

고요한 법정 안에서, 재중이 침묵을 깨트렸다. 심지어 동영상을 본 판사마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법정에 30년 넘게 서왔지만 저런 자료는 처음이었다. 재중 또한 입을 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충격적인 영상이다. 처음 이 영상을 봤을 때 어땠

더라. 저게 도대체 뭔지 파악하는 것만 해도 오래걸렸다. 시시각각 변하는 김준수의 목소

리와 표정과 몸짓에 단지 경악했을 뿐이다. 놀이동산에서 만났던 그의 얼굴과 겹쳐졌다.

해맑게 웃으며 자신의 연인의 품에 행복하게 안겼던 그 남자. 사람에게는 누구나 비밀이

있는 법이지만 그는 조금 더 컸다. 그래서 의지와는 다르게 밝혀지는 순간 충격도 클 것이다.

고개를 돌려 김준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안해요. 재중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연인을 위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완

전히 망쳐 놓았다.

그는 울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조용하지도 않았다. 그는 울지 않고 앉은 자세 그대로 멍하

니 꺼진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응시하는 눈빛의 파동이 재중에게까지 전해진

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저런 사람임을 알았을까.

" 김준수 씨는 해리성정체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

" ........!! "

알고 있었어...! 검사의 표정이 경악으로 뒤덮혔다. 지금까지 자신이 본 영상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터질 만큼의 충격이었는데.

" 그의 안에는 세 가지 인격이 있습니다. "

마른 침을 삼키고, 판사를 직시했다.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그러니까 왜 정윤호의 인

Page 470: Happy Together

생에 끼어들었어.

" 김준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파티 플래너가 첫 번째. 목을 조르고 광기어린 모습

으로 카르텔 쪽의 조직원들을 죽이려 했던 남자가 두 번째. 그리고 그것을 말리고 자신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남자가 세 번째. 총.. 세 가지 인격입니다. 그는

다중인격자입니다.

완벽한 정신 이상자죠. "

" 아니에요!!!!! "

그제야 김준수가 소리를 낸다.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재중에게 향했다.

그러나 곧 경찰들에 의해 저지되었고, 그 때부터 울어야 했다.

" 증인의 조건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사건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대한민국의 시민입니다. 저 남자가 그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까? 천만에요. 그는 아주

심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입니다. 피고인 정윤호보다 더 위험한 존재일지도 모릅니

다. 언제 범죄를 저지를지 모르고,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순수하게 기억조차 하지 못 하는

남자입니다. "

" 난 아니야... 저건 내가 아니야!!!!!! "

" 준수야! "

유천이 뛰어들었다. 사실은 그도 움직이기 힘든 몸이었다. 가뜩이나 치료로 아픈 몸인데다

방금 본 영상으로 타격 받은 정신도 온전치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연인이 울고 있었고, 자

신은 그 눈물을 닦아줘야 할 의무가 있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 그거 못 놔!?! 이 개새끼들아!!!!! "

" 무슨 짓입니까! 신성한 법정 안에서!!! "

" 신성!? 그런건 개나 주라고 해!!!! 김준수에게서 손 떼라고!!!!! "

" 아아악!!!!! "

비명을 지른 준수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죽을 만큼 잊고 싶던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

속을 점령한다. 죽일 마음으로 목을 줄랐던 동급생들. 자신을 괴물이라고 손가락질 했던 그

사람들.. 부모님마저 자신을 무서워했다. 겉으로는 웃고 있으면서 모두들 나를 피했어.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어. 나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모두 내가 저지른 일이야.. 내

얼굴을 하고.. 내 손으로 사람들을...

" 당신에게 증인의 자격이 있습니까?!! 저 자들은 신성한 법정을 모독했습니다!! 증인으로

설 수 없는 남자를 데려와 위증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반 형사 박유천 씨!! 당신은

김준수 씨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들 모두! 내 말이 틀립

니까?!! "

" 뭐라고...? "

Page 471: Happy Together

" 납치극 당시 박유천 형사는 총상을 입었고, 서울 종합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김준수 씨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정신과에 그를 데려가 직접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내 말이 틀립니까!? "

언제 그 사실까지... 준수를 부축하던 유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당신들 모두가 저 남자가 증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법정에 세우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조롱했습니다!!!! "

" 아니야!!! 개소리 집어 치워!!!! "

" 조용히 하세요-!!!! "

" 판사 님!! 저 자들의 일방적인 억측입니다!! "

" 억측이라고요? 존경하는 판사님, 방금 전 보신 영상을 똑똑히 기억하신다면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을 겁니다! "

" 닥쳐! 이 애송이 새끼야!!!! "

" 이의있습니다. 검사는 지금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법조인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

" 인정합니다. 한 번만 더 그럴 시에 퇴장입니다. 다들 조용히 하세요!!! 재판 중입니다!! "

숨이 거칠어진다. 재중의 눈에 핏발이 선다. 눈물이 차오른다. 쓰러져 울부짖는 김준수를

보며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면 벌써 울었는지도 몰라. 재중은 뒤돌아 멍하니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정윤호를 바라보았다. 너, 지금 보고 있지. 내가 어떤 거짓말로 저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지옥으로 몰고 가는지 똑똑히 보고 있지. 내가... 이렇게 너를 지켜. 네가 사랑

하는 김재중이 이런 남자야. 이렇게 잔인하게 너를 사랑해. 알어?

" 거기 앉아있는 증인이라는 김준수 씨, 당신이 누구인지나 알 수 있습니까? "

" 닥쳐! 이 개새끼야!!!! 네가 뭔데 지껄여!!! 네가 뭘 안다고!!!!! "

" 저 남자를 끌어내세요! 형사를 끌어내!! "

" 놔!!! "

" 강 검사. 당신은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했습니다. 당신은 위증을 강요했습니다. 내 말

인정합니까!?! "

" 웃기지 마!!! "

그는 다혈질이라고 했다. 재중은 그 점을 노렸다. 어때, 네가 만만하게 봤던 상대에게 뒷통

수 맞고 앞통수까지 깨지는 기분이. 이미 이성을 잃은 검사가, 타이를 내던지고 재중에게

달려 들었다. 법정 안은 이미 난장판이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리고, 검사가 변호사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리고, 그걸 보자마자 윤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묶여있는 손 대신

발로 그 남자를 걷어찼다.

" 다들 끌어내!!!!! 어서!!!! "

목이 쉬도록 판사가 소리를 질렀다. 재중에게 달려든 검사가 억지로 끌어내졌고, 유천도

Page 472: Happy Together

준수에게서 떨어져 경찰들의 손에 잡혀 법정 바깥으로 끌려나갔다. 준수야!!!! 나가서도

그의 목소리가 먼발치서 들려왔다. 홀로 남은 김준수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덜덜 떨면서

재중을 바라보았다. 왜.. 왜 나를 이렇게 만들어요.....

" 당신은 누구죠? "

" 나는... 나는 김준수야... "

" 그걸 당신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당신의 진짜 모습이 뭔지 알고는 있는

건가요? "

" 나는 김준수야!!!!! "

" 당신은 세 가지 인격을 가지고 있는 다중인격자이며 확실한 정신 이상자입니다. 사회에서

격리되어 치료 받아야 할 남자가, 이 신성한 법정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거죠? "

나는...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니야.. 다 그렇게 보지 마... 법정 안의 모두가, 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운 눈빛으로. 웅성거리며.

무서워, 괴물이야, 만지지 마, 너도 죽을지 몰라, 그래. 다 들었던 말이야. 반 아이들 모두가

나를 무서워했어. 나는..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아무 기억도 없는데....

런데 지금, 과거가 현실이 되어버렸어.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거슬러 올라왔어.

" 이 법정 안에서 나가세요. 당신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닙니다. 병원이지. "

모든 것이 조용하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나는 도대체

누구지... 준수가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 검사 측의 발언을 모두 무효화 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이상입니다. "

판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재중이 자리로 돌아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윤호의 표정에서는 아

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나를 봐. 방금 전 잔인하게 한 남자를 정신적으로 죽여버린 나를 봐.

이런 나라도... 너는 사랑해야 해.

* * *

" 피고인 측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대요. "

" ......... "

Page 473: Happy Together

" 오늘 있었던 김준수의 증언. 모두 무효 처리되었답니다. "

" ......... "

" 다음 공판 시에는... 절대로 김준수 씨와 박유천 씨 모두 법정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

" ......... "

" 준수 씨는... 위증으로 고소되었고, "

" 됐어. 거기까지 말해. "

유천이 듣기 싫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곁에 서 있던 후배 형사가 머뭇거리며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아 보이냐, 네 멀쩡한 눈에는. 유천은 그만 나가보라며 손짓했다. 형사가 나간

후 유천은 침대 위에 머리를 박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 준수야아.... "

그는 기절했다. 법정 안에서 기절해 병원으로 실려왔다. 그는 강제적으로라도 병원 치료를

받을 것이고, 몇 번이나 더 이렇게 기절할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막막했다. 울음이 터졌다.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김준수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

서 자신의 치부를 들켰다. 그래... 가장 사랑하는 내 앞에서, 자신조차 알지 못하던 비밀을

두 눈으로 보았어. 너는 무슨 기분이었니. 죽고 싶었다고는 말하지 마. 나를 두고 죽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지금의 너라도 용납 못 해.

" 나는 괜찮아... "

그러니까 제발 너도 괜찮아져. 나는 네 비밀을 오늘에야 알았지만, 그렇다고 네가 김준수가

아닌 것은 아니잖아.

왜 조금 더 깊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나의 인격이 더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쩌면 내가 눈

치 챌 여지는 충분히 있었을지도 모른다. 심 검사에게 조용히, 그리고 또박또박 자신의 목격

담을 말했던 그 남자는 나약하고 조용한 남자였어. 내 목을 조르고 살인하려 했던 사람과는

전혀 달랐다. 최면 요법으로 나타난 그는.. 여전히 조심스레 말했어. 도란도란한 말투였다.

- 길게 말할 시간이 없어요...

- 잠깐만,

그래.. 치료 도중에도 충분히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어. 내가 그의 손목을 잡았을 때, 그는

놀란 표정으로 팔을 빼냈지. 나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 전날의 새벽에, 스스로 나에게

입을 맞추고 내 몸 위에 올라가 옷을 벗었던 대담한 행동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사랑하고

함께 몸을 섞고 싶다고 농염하게 말했던 그 남자라고 절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왜 나는...

왜 더 깊게 생각하지 못했나.

Page 474: Happy Together

- 나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그러니까,

- 다가오지 마요.

- 내가 잘못했어. 내가 안 자고 너 봤어야 하는 건데, 내가 병신이라서....

- 죽어요...

내가 준수의 집에서 키스하고, 맥주를 마시고, 잠이 들었던 날. 내 목을 조르던 김준수는 정

신을 잃기 직전 그런 말을 했었다,. 다가오지 마요, 죽어요. 그것도... 어쩌면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또 다른 김준수. 처음부터 아주 작은 부분들은 나에게 이미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왜 이다지도 어리석었나. 조금만 더 오래 생각해볼 것을.

" 아.... 아아.. 준수야... 김준수.... "

이렇게 울어도... 네 상처는 그대로야. 너를 이만큼이나 사랑하는 내가, 너를 위해 울어도

네 상처는 거기에 있어. 어떡해... 정말 어떡하냐. 네 상처가 자리를 잡았어. 내가 뿌리를

자르러 칼을 찾을 동안, 상처는 네 몸을 먹으며 뿌리를 내려 눈물을 빨아. 뒤늦게 돌아와

내가 네 상처의 뿌리를 자르려 해도.. 이미 네 몸을 삼켜버린 거대한 상처는 나를 비웃어.

나는... 너가 죽을지 모른다 해도 네 상처를 도려내고 싶어... 그거, 갖고 살면 안 돼. 너는

상처 따위 몸에 지고 살기엔 너무 작아서, 몇 발자국 인생을 걷다 넘어질지도 몰라. 나는

그런 너를 위해 있는 거지.

" 그래도.. 사랑해..... "

준수의 손이 젖어간다. 깨어날 줄 모르는 그의 굳어버린 몸의 일부가 젖어간다. 손을 잡은

유천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준수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더운 눈물로 온기를 불어넣었다.

신은 서로 사랑하라고 했어.

내가 너희를 사랑했듯,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어.

우리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믿지 않는 신이라도 지켜줄 거야.

보이지 않는 신의 손바닥이 되어서 너를 어루만질테니... 내 손을 잡고 일어나, 우리 준수야.

* * *

다녀올게요!

Page 475: Happy Together

나 잊으면 안돼ㅠ oㅠ

알라뷰쏘마취! 엠 에비뉴 패밀리!^ㅡ^/♡

쪽-3-♥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31

" 다시는 법정 안에서 그런 행동 하지 마세요. "

여느 때와 같이, 유리창을 가운데에 두고 재중이 차갑게 말했다. 아니, 차가워 보이도록 말

했다. 가만히 듣고 있는 윤호의 시선은 처음부터 재중에게 향해 있었다. 재중은 윤호를 보자

마자 화부터 내기 시작했다. 재판 도중 그런 식으로 소란을 피우면 어떡하냐고. 강 검사가

자신에게 달려들어 손을 대자마자, 뛰쳐나와 발로 검사의 배를 걷어 차버린 윤호였다. 결국

경찰들에게 끌려서 자리로 돌아갔고,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개자식' 을 중얼거려 주의를 받

아야 했다.

" 지금 정윤호 씨는 피고인의 입장입니다. 제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자각해주시길 바래요. "

" 내가 뭘 어쨌는데. "

" 재판 도중에 소란 피웠잖아요. 조용히 있어도 모자랄 판에. "

" 그 개자식이 먼저 너한테 손을 댔잖아. "

" 손이 아니라 발도 대고 머리로 찧어도 가만히 있어요. "

" 그걸 말이라고 하냐?! "

" 말이니까 입으로 하죠. "

사실은 윤호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두렵기까지 했다. 법정 안에서 그렇게 냉정하게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려 놓고, 시종일관 상대편 검사의 빈정을 상하게 하는 말투로 반론을

펼치고, 자기 앞에서 사람이 쓰러져 나가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았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리고 정윤호도 이런 모습의 김재중과 사랑하지 않았는데. 그는

어떤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냉정하다고 생각할까. 차갑다고 생각할까.

" 수고하셨고, 다음 재판에서는 조금 더 절제된 모습으로 뵈었으면 합니다. "

" 재중아, "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좀 말라니까!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자, 간수들에게 두 팔이 잡혀

끌려나가기 직전의 윤호가 가만히 자신을 응시한다.

Page 476: Happy Together

" 미안해. "

우리 사이에 저 유리창이 없었다면, 우리 주변에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마음 놓고 하고

싶은 얘기들을 할 수 있었을텐데. 무엇이 미안하고 무엇이 힘든지.

미안해, 재중아. 말랑말랑한 네 마음을, 억지로 태양 아래 말려서 겉표면에 금이 갈 만큼

딱딱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아. 너 지금 억지로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는 거 같아. 혼자서

싸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너를, 곁에서 나는 안아줄 수가 없지.

괜찮니, 윤호야. 혼자서 싸우는 나를 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재판이 끝나 홀로 감방으로 돌아가 무엇을 할까. 그 차가운 감옥 안은 괜찮니. 재판

이 성공적으로 끝난다고 해도 너는 다시 그 안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사랑해... 그 말 좀 대놓고 당당하게 해봤으면. 재중은 씁쓸하게 웃고 면회실을 나섰다.

.

.

.

재중이 재판을 하면서 노린 것은 심리전이었다. 어차피 정윤호에게는 납치와 폭력이라는

명백한 죄가 있었고, 결국 형을 받을 것이라면 사형이란 극형을 피해 최대한 낮은 징역을

받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살인에 대한 혐의를 완전히 벗어야

하는데, 유일한 증인인 김준수의 퇴장은 무엇보다 재중이 원하던 바였다. 그 다음은 검사

의 화를 돋구는 일이 우선이다. 강 검사는 다혈질인데다 심하게 감정 기복이 심한 남자다.

" 검사님은 시력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봅니다. 자기 눈 앞에서 증인이 퇴장하는 꼴을 보고도

아직까지 증인증인, 운운하십니까? "

" 니들이 납치해서 가둬놓은 독방의 CCTV를 제출한 주제에 뭐가 잘났다는 거야!! "

" 검사님은 존칭을 배우지 않으셨나 봅니다. 존대어는 아이들도 다 아는 기본 지식인데 말

입니다. "

" 뭐야?!! 이 새끼가...!! "

" 조용히 하세요! 법정 안에서의 기본 예의범절도 잊어버린 겁니까! "

" 하지만 판사님!!! "

" 다시 한 번만 소동을 부린다면 오늘 재판을 기약없이 뒤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어이없게 증인을 되려 고소당한 후, 강 검사는 작정하고 덤벼들기로

한 것이 분명했다. 재중이 무슨 말을 하든 공격적으로 반론한다는 것이, 자신의 성질을 이기

지 못하고 법정 안에서 자꾸만 소동을 피워댔다. 그는 예전에도 법정 안에서 여러 번이나

Page 477: Happy Together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분명히 냉철하고 유능한 검사였지만, 그것이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단점이었다. 재중이

느긋하게 반론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의 화를 억제하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결국

판사까지 재판 내내 짜증스러운 눈길로 검사를 바라보는 꼴이 되어버렸다.

" 애송이 새끼. "

재판을 마치고 퇴장하는 중, 자신의 곁을 지나치던 검사가 재중에게 빈정거렸다. 재중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웅성거리는 소란. 자신과 다른 문으로 끌려나가는 정윤호. 한숨을

쉬고는 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 개자식, "

" 뭐야?!!! "

" 이라고 정윤호 씨가 전해달래요. "

* * *

준수는 깨어난 후 내내 말이 없었다. 하루의 반이 지나도록 멍한 표정으로 창 밖을 응시하

다가, 유천이 식사를 가져오면 간신히 입에 대곤 했다. 죽어버리겠다는 둥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유천은 애써 위로하며 식어버린 식사를 저만치 치워버렸다. 준수는

위증으로 고소되었지만 실제로 벌금형을 치루거나 징역을 선고받지는 않았다. 그의 병명의

특수성으로 인해 당분간 정신과에서 집중 치료를 받을 것을 권고 받았을 뿐이다.

" 박유천 씨. "

난데없는 준수의 말에, 유천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준수

의 눈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 내가 누군지 알아요? "

그렇게 말하고 웃었을 때,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는 사실을 굳이 부인하지 않겠다. 지금 자

신을 바라보며 내가 누군지 아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 저 남자. 김준수인가, 아니면 또 다른

그 두 명인가. 유천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김준수를 잘 알고 있는 건 나라고 생각

했는데.

" ... 쫄지 마. 장난 친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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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히 굳어버린 표정으로 준수가 고개를 돌렸다. 형도 똑같지, 다른 사람들이랑. 내가 무

섭지. 언제 다른 사람으로 돌변할지 몰라서 긴장하고 있겠지. 나를 사랑하는 사실마저 무섭

겠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해버려서... 앞으로 이런 나를 데리고 어떻게 사랑해야 할

까, 걱정하고 또 고민하고 있겠지.

그 동영상을 본 이후로 준수에게는 정상적인 사고가 거의 불가능했다. 일어나서 먹고 마시

고 사랑을 나누고, 그 모든 일상적인 일들을 변두리로 치워버렸다. 준수의 중심에는 자신의

병의 실체를 보았던 법정 안에서의 기억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다

른 인격이었을 때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체를 목격하게 되었을 때, 받아야

했던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다중 인격이라니.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의 김준수가

살아가고 있다니.

" 지금도 이 안에는.. 나 말고 두 명이 더 있는 거야. "

가만히 자신의 심장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준수가 중얼거렸다. 난 내 두 눈으로 봤어. 한

명은 울부짖으며 모든 것을 그만 두라고 쓰러졌지. 다른 한 명은 사람을 죽이려 달려들어서

목을 조르고, 눈을 할퀴고, 미친 사람처럼 자지러지게 웃으며 소리 질렀어. 나와 똑같은 얼굴

을 한 사람들이... 그 안에 있었다. 두 명의 김준수가 있었어.

" 도대체 어떤 김준수가 진짜 김준수일까. "

나도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었다.

" 어디가... "

" 왜, 혼자 내버려두면 불안해? "

" ........ "

" 언제 또 다른 김준수로 변할지 몰라서, 무서워? "

" 그런 거 아니야. "

" 그렇게 다정하게 말하지 마. 내가 만약 형이였어도, 나 보면서 소름 끼쳤어. "

형은 그 영상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하필이면 이런 정신병자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땅을 치면서 후회했을지도 모르지. 만약 형이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해도 원망하지는 않아.

그래... 사람들은 누구나 정상적인 사람과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어해. 어느 누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정신병자를 데리고 평생을 살고 싶어 하겠어.

" 세 시에 치료 받으러 가야해. "

" 내가 알아서 갈테니까 형은 그만 가. 일 안 해? "

" 네 옆에 있는 게 내 일이야. "

Page 479: Happy Together

" 그건 내가 증인이었을 때 얘기지. 이젠 다 소용없잖아. 난 고소당했지만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불쌍한 이유로 벌을 받지 않았어. 대신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세상과 격리되어 살

라고 부탁받았지. 아니.. 부탁이라기 보다는 명령이겠지. 나 같은 건 보통 사람들이랑

어울

리면서 살 수가 없으니까. "

조용히, 그리고 차근차근 얘기하는 준수를 보며 유천은 그 어떠한 위로의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을 질책했다. 박유천이라는 남자는 원래부터가 그럴싸하고 듣기 좋은 말들을

멋지게 꾸며서 포장할 줄 모르는 남자였다. 그저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정리해서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그의 사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떠한 사랑의 말도

제대로 해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다 괜찮아. 네가 뭐라고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런

말을 듣고 한 번에 정신차릴 김준수가 아니었으니까. 형은 다 괜찮으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치료 받고 다시 행복하게 살자. 그 한 마디로 웃을 수 있는 김준수가 아니야. 그 정도로

아물어질 상처라면 얼마나 좋을까..

" 증인을 지키는 것이 내 일이 아니라... 그냥 김준수 옆에 있는 것이 내 일이야. "

너는 나한테 증인도, 참고인도, 정신병자도 아니야.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어. 너는 그냥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나에겐 그게 다야.

" 난 원래 단순하잖아. "

화장실로 들어가려는 준수를 불러세우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정하게 웃어주는

그의 얼굴에 보답할 수 없어서 슬프다. 유천을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그 문에 기대서 한 손

에는 칫솔을, 한 손에는 치약을 들고 한참이나 미끈한 욕실의 타일을 바라보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

.

" 지금부터 셋을 세면, 김준수 씨는 깊은 잠에 빠질겁니다. 온 몸의 긴장을 푸세요. 자..

하나, 두울, 셋- "

치료는 똑같이 진행되었다. 다만 그가 두 가지 인격이 아니라 세 가지 인격을 가지고 있다

는 새로운 사실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마음이 약해진 만큼, 준수는 쉽게 최면에 걸렸다.

바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준수의 손을 잡고, 유천은 초조하게 또 다른 그가 깨어나길 기다

렸다.

" 세 명이라고 했죠. "

Page 480: Happy Together

" 네. "

" 그럼.. 마지막 인격은 아마도 대단히 지능적인 인격체일겁니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숨겨왔다는 뜻이니까요. "

" 굉장히 폭력적이고, 세 가지 인격 중에 가장 위험해 보였어요. "

" 일단 대화가 중요해요. 자... 내 말, 들리십니까? "

잠들어 있던 준수의 눈꺼풀이 꿈틀거린다. 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이런 모습을 보아도 처음처럼 놀랍지 않다. 유천은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또 다른

준수의 얼굴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

" 당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

" ..... "

" 준수가 세 가지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거. 당신 말고 다른 한 명이 또 있다는 거. "

" ... 그래요. "

" 왜 말해주지 않았어? "

잠에서 깨어난 두 번째 인격은,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나즉한 목소리였다. 유천이 잡고 있던

손을 빼내 무릎 위로 가지런히 올려두고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 위험하니까. "

" 뭐가? "

" 그는 위험해요.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것도 이젠 지쳐요.

그의 인격체가 강해질수록.. 나는 그를 통제할 수가 없게 되요. "

"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

" 지금은 내가 통제하고 있어요. 하지만 언제 나올지 몰라요. 그가 나오게 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

" 그 남자와 대화하게 해줘요. 어째서 그가 김준수의 몸 안에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

의사는 차트를 접어두고 또 다른 김준수를 불러내기 위해 그를 설득했다. 아마도 세 번째

김준수가 가장 위험하고, 가장 극단적인 인물일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므로 병

실의 문을 잠구고, 유천은 의사에게 눈짓을 했다. 준수의 두 팔을 의자에 고정시켰다.

"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어요. "

" .......... "

"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

" 해치는 건 내 몫이지. 당신은 절대로 날 못 죽여. "

이 남자인가. 동영상에서 보았던 그 엄청난 인물이. 유천은 자신의 목을 손가락으로 더듬

었다. 준수가 목을 졸랐던 그 때의 느낌이 아직도 확연하다. 이 남자가.. 내 목을 조르고 날

죽이려고 했었다.

Page 481: Happy Together

" 왜 그렇게 두려운 눈으로 봐? 내가 무슨 짓이라고 할까봐? 그래서 내 손을 이렇게 묶어

두고 미친놈 취급을 하는 건가? "

" 당신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

"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

" 사람들 목을 조르고 날 죽이려고 했잖아...!! 다른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미친놈처럼 사람

들에게 달려들어 결국엔 김준수를 정신병자 취급 받게 했잖아!!!! "

결국엔 이 남자가 원흉이다. 준수의 학창시절, 그는 수학여행에서 동급생의 목을 졸랐던

기억이 있었다. 그 이후로 그의 삶은 극도로 폐쇠적으로 변해갔다. 모두가 자신을 피하고,

모두가 자신을 두려워했다. 부모님마저 그의 같은 지붕 아래서 잠드는 것이 두렵다고 했어.

모두 너 때문이야, 네 극단적인 행동으로 결국엔 김준수의 삶 전체가 흔들렸어.

" 내가 왜 태어난 줄 알아? "

그는 느긋하기까지 했다. 동영상에서처럼 누군가에게 달려들어 살인하려 하지도 않았고,

미친 듯이 소리 지르지도 않았다. 조용히 병원 의자에 몸을 뉘인 채, 자신의 묶인 손을 내

려다 볼뿐이다.

" 나는 김준수가 만든 거야. 그 불쌍한 아이가.. 날 만든 거지. "

또 다른 인격이 태어나는 데에는 그에 따른 이유가 있어요-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이유를

알면 치료도 가능해. 유천은 숨을 죽였다.

" 그 착한 아이는... 몽유병으로 늘 고통 받았어. 자기도 모르게 학교 안을 돌아다니고..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멍하니 넋을 놓고 맨발로 걸어다녔지. 사람들이 그를

뭐라고 불렀는 줄 알아? 괴물 같다, 라고 말했어. 너는 상상이나 할 수 있어?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행동을 사람들이 운운하며 손가락질 하는 거야.. "

" ......... "

" 처음에는 슬펐지.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마저 그를 멀리했어. 안타깝고, 슬프고, 눈물이

나고, 외로웠어. 그런데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잖아. 사람의 감정이란건 변하기 마련이

니까. "

" ......... "

" 슬픔, 외로움, 안타까움, 좌절.. 그 모든 것들이 단 하나의 감정으로 변해갔어. 분노로.

병을 앓고 있는 자신을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 모두 죽여버리고 싶다고. 입장 바꿔 생각

하지 않는 냉정한 그 사람들이..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김준수는 그걸 원했지. "

" 준수가... "

" 사람은 누구나 다 그래. 처음에는 이해해주길 바라지. 그러나 바램이 뒤틀려지면, 그건

이해해주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로 변해가. "

Page 482: Happy Together

죽여버리고 싶어. 다 내가 죽여버렸으면 좋겠어. 그 불쌍한 아이는 끝도 없이 그렇게 생각

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지. 왜? 착한 아이니까. 살인이란 건 누구나 쉽게 할 수 없거든.

" 그래서... 내가 태어난 거야. 그가 원하는 걸 해주기 위해서. "

누구나 죽이고 싶은 사람 한 명 쯤은 있잖아....? 그가 웃었다. 의사도, 유천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마주보고, 그의 미소를 바라보고, 침을 삼키고, 그 시간이 계속

되었다.

" 나는.. 김준수와 완전히 다른 인격체이자, 그의 일부이기도 해. 난 아직도 들려. 준수가

지르는 비명,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해. "

" 웃기지 마. "

간신히 소리를 내어 그렇게 말했다. 웃기지 마.

" 웃기는 건 너야. 알고 보면 쉬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잖아. 사람에게는 누구나 어두

운 부분이 하나쯤 있어. 이 불쌍한 아이처럼. 나는 그걸 만족시켜주기 위해 태어났어.

그리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준 것뿐이야. "

" 내 목을 조른 것도 김준수가 원해서 한 일이야?!! 웃기지 마!!! 네 멋대로 한 일이잖아!!!

"

" 그는 자신의 주변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걸 싫어해. "

" 착각하지 마!! 어느 누가 아무도 없이 혼자 살고 싶어해?! "

" 박유천 씨, 환자를 도발하지 마세요! "

" 너야말로 착각하지 마. 이렇게 정신병자 꼴을 하고 있는 김준수가 가엾지? 불쌍하지?

네 싸구려 동정심이 언제까지 갈 꺼라고 생각해? 결국 김준수 곁에 끝까지 남는 건 나야.

언젠가는 질릴대로 질려서 떠나버릴걸. 난 알아. "

다들 그랬으니까. 움찔, 손을 묶어놓은 의자가 흔들거린다. 팔을 빼내려는 듯 거칠게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 네까짓게 뭔데 나를 이렇게 묶어 놔!! 이 개자식... 네가 김준수를 얼마나 알아?!! 사랑?!

밤마다 내가 네 목을 조르고 지랄을 해도 네가 사랑 타령하며 붙어 있을 수 있을까?! "

" 당신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은... "

" 네가 사랑하는 김준수가 이런 남자야!! 겉으로는 착해 빠진 척 해도! 속으로는 이렇게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어할 정도로 분노에 가득 차있는 새끼가 김준수라고! 알아?!! "

의사가 다급하게 숫자를 세고, 거짓말처럼 그는 의자에 축 늘어졌다. 온 몸이 땀으로 흥건

하다. 바라보고 있던 의사와, 유천의 등이 옷에 달라붙었다. 기절한듯 늘어져 있는 준수를

Page 483: Happy Together

보며 의사가 떨리는 손으로 차트를 들었다.

" 방금.. 들었지요? "

" ........ "

" 자신을 욕하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싶어해. 김준수 씨의 내면의 어두운 면이

만들어 낸 마지막 인격입니다. 방금 본 저 사람이. "

형...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유천이 사방팔방으로 뛰쳐나간 정신을 정리하고 손을 잡아

주었다.

" 세 번째 김준수의 사라짐의 여부는.. 김준수 씨 자신에게 달렸어요. "

" 저... 요? "

" 곁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외로움이 되고, 그 외로움이 분노가 되어 아직까지 준수 씨의

몸 안을 헤집고 다니는 겁니다. "

바로 앞에서 자기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유천의 존재조차 믿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나에게서 떠나겠지. 마음 속 어디쯤에서, 그렇게 불안해 하고 있었던 거야..

" 나 좀... 믿어, 응? "

준수의 머리가 이렇게 작아보였던 적은 처음이다. 한 품에 들어오는 그 머리를 끌어안고

결국엔 울어버렸다.

준수야... 그거 아니. 이렇게 지독한 동정도, 지독하게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어.

* * *

" 희생자가 필요해요. "

늦은 밤에 이태원의 기지촌으로 와서, 재중이 대뜸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희생

자가 없으면 비껴갈 수가 없어. 윤호의 참모는 재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처음 만났을 때 이 조직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

로 유약하게 보였던 남자의 입에서.. '희생자'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 일단 김준수가 퇴장당했기 때문에 살인 혐의는 어느 정도 비껴갈 수 있어요. 또 다른 목격

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를 벗을 거에요. 물론 또 다른 목격자는 없겠

Page 484: Happy Together

지만. 하지만 나머지 마약이나 무기 밀매 건에 대해서는 또 다른 탈출구가 필요해요. "

" 정윤호가 아닌 다른 조직이 마약 루트를 독점하려고 했다... 이런 거짓 사실을 임의적으로

만들자는 뜻인가요? "

" 네. "

" 그러기 위해서는 재중 씨 말대로 희생자가 필요하겠군요. "

아주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일 시간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이미 한 사람의 인생을 짓밟고 말아먹었다. 이렇게 까지 된 마당에, 다른 몇 사람의

인생을 더 망가뜨린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어차피 나는 내 의지로 이 길을 선택했다.

" 좋아요. 현재 우리 아래 들어와 있는 연합회에서 희생자를 찾도록 하죠. "

"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

" 뻔하잖아요. 이 바닥에서 죄 없는 남자 한 순간에 교수형으로 만드는 건 아주 쉬워요.

그런 말 못 들어봤어요? 조직원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보스나, 보스의 친인척 대신

감옥으로 보낸다. 감옥에서 몇 년 썩고 오면 넌 조직의 간부급이 되어있을 거다. 아주

뻔한

스토리죠. "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정윤호의 죄를 뒤집어 씌우는 거다. 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생각

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이었다. 죄없는 누군가가 정윤호의 형을 대신 살아

주는 것이다.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겠지.

" 말 나온 김에, 지금 당장 실행하도록 하죠. "

" 지금... 요? "

" 연합회의 조직 중 한 명에게 지시할 겁니다. 마약을 대대적으로 거래하라고. 그럼 우리는

검찰 쪽에 그 정보를 흘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재중 씨도 함께 가시죠. "

말이 끝나자마자 참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내가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이

러나. 문을 나서며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이지, 정윤호라는 남자 하나 때문에 내가 무

슨 짓까지 하게 되는 건지.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람이 미친다는 게 맞는 말인가 보다. 재중은

고개를 저으며 차에 올라탔다. 지금의 누가 자신을 정의로운 법조인으로 생각하겠는가. 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남의 인생을 멋대로 짓밟는 흉악범

에 불과한데.

.

.

.

그들의 방식은 아주 폭력적이며, 빨랐다. 어느 조직의 거처에 차를 세우자마자 조직원들이

품 안에서 총을 꺼내들고 상대편 조직원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총이란 것은 참 편리해. 그냥

손가락 사이에 방아쇠를 넣고 머리에 겨누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버리니까.

바닥에 머리가 닿도록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남자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

Page 485: Happy Together

" K 카르텔에 충성하겠다고 했지? "

" 그... 그랬... "

" 제대로 얘기해. 내 총이 지금 나가고 싶다고 안달이야. "

" 당신의 말이.. 맞소. "

" 그 충성심을 보고 싶어. 지금 우리 보스가 재판에 회부되어 있어. 당신들의 보스가 말야.

그렇다면 당연히.. 그 부하된 도리로서, 무언가를 해줘야 되지 않겠어? "

" 뭘... 뭘 어떻게... "

" 간단해. 몇몇가지 죄목만 뒤집어 쓰고, 깜빵에서 몇 년만 콩밥 먹으면서 살다 오면 돼. "

" 그런..!! "

" 감옥에서 나오는 날이, 너의 세상이 될 거다. 그건 우리가 보장하지. "

어느 누가 남을 대신해 하지도 않은 죄로 감옥에 가고 싶어 하겠어. 부들부들 떨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그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재중이 자신의 데

져트 이글을 꺼내 무자비하게 남자의 머리에 겨누었다. 갈 때까지 가보라지. 정윤호만 살릴

수 있다면, 정윤호만 그 빌어먹을 감옥에서 금방 빠져나올 수 있다면 나는 뭐든지 해.

" 망설이지 마. 개자식아. 정윤호 대신 감옥에 가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 지금부터 내가 하

는 말 잘 들어. K 카르텔에 실행하고 있던 서울 및 수도권의 마약 루트 독점 계획은 너희

조직의 몫이야. 너희 조직이 그 계획을 실행하고 있던 거야. 내 말 알아먹어? "

" 사.. 살려줘... "

" 살리고 죽이고는 내 마음이야. 내가 하라는 대로 해. 그렇지 않으면 내 놈의 머리통 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네 개새끼들 같은 조직원들 대가리에 구멍을 내줄 테니까. "

타앙! 천장에 올려 쏜 엄청난 파열음에, 그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수그렸다.

" 만약 검찰에 입이라도 뻥끗하는 날이면... 어떻게서든 너를 죽여버릴 거야. "

지금의 나는, 살인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로지 눈에 하나밖에 안 보여. 총을 다시 자리

에 집어넣고 재중이 일어섰다. 그리고 참모에게 시선을 준 뒤 어두운 방을 나와버렸다.

- 너희들은 우리가 정해준 날짜, 정해준 시간, 정해준 곳에서 러시아 마약상와 마약을 거래

하게 될 거다. 우리가 검찰에 정보를 흘릴 거야. 검찰에게 붙들리면.. 우리가 시키는

대로

착하게 불기만 하면 돼. 우리가 마약 루트를 독점하려고 했다. 모든 것이 우리의 죄다..

문 뒤에서 들려오는 참모의 목소리에, 재중은 눈을 질끈 감고 벽에 기대 섰다. 이렇게 또 한

명을 망가뜨렸다. 그 불쌍한 김준수처럼... 아무 죄 없는 남자를 정윤호를 위해 감옥으로 보

내기로 했어.

Page 486: Happy Together

" 하필이면 왜 마피아야. "

차라리 동네 양아치였다며 좋았을 텐데. 이렇게 거창하게 머리쓰지 않아도, 경찰서에서

무릎 꿇고 경찰들에게 싹싹 빌면 풀려나는 그런 3류 양아치 새끼였다면 얼마나 좋아.

"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

깜방에서 나와, 최선을 다해 날 사랑하지 않으면 죽여버릴거야.

.

.

.

" 그게 무슨 소리야?!!! "

다음 공판을 며칠 앞둔 날, 인천의 항구에서 러시아 마피아와 마약을 거래하고 있는 조직이

대거 잡혀 들어왔다. 보스를 비롯해 행동 대장까지. 서울에서도 꽤 큰 규모의 조직인지라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그들이 거래하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약도 세세하게 보도

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서울과 수도권의 마약 루트를 독점하려

했다고 자백한 것이다. 지금까지 K 카르텔의 소행이라 짐작하고 있던 검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당연히 거짓말이야! K 카르텔 쪽에서 협박한 거라고! "

"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

" 그 놈의 증거! 증인! 씨팔! 누가보나 명백하잖아!!! "

" 어쩔 수가 없어요. 그들이 그렇게 자백한 이상, 수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돼요.

그리고 지금 재판 중인 정윤호에 대한 혐의 또한 자연적으로 사라질겁니다. "

" 그게 말이나 돼?! 지금까지 내가 목이 터져라 우겨댔는데?!! "

" 어쩔 수가, "

" 어쩔 수가 없다는 말 좀 집어 치워!!! 씨발,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들이 없어! "

서류를 집어 던지며 화를 삭히는 강 검사를 보며, 강력반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이 사건은

저런 다혈질 검사를 필요로 하지 않아. 저 사람보다 훨씬 냉철하며 이성적인 남자. 심창민이

누구보다 필요하다. 만약 그가 이 재판을 맡았더라면.. 지금보다 상황은 훨씬 좋아졌을 거야.

그러나 누구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저 성질 더러운 검사의 속을 긁어 놓아서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 유 형사는 나 따라오고, 나머지는 강력반에서 대기해. "

Page 487: Happy Together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후 검사가 강력반을 나가고, 모두가 주저앉듯 자리에 앉아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언제까지 더 성질 더러운 검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하는 건지. 카르텔

재판은 이상하게 꼬여만 가고, 어디서 듣도 보도 못했던 애송이 변호사가 온갖 수를 이용해

판사를 구워 삶아내고 있다. 정윤호만 체포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다간

정윤호는 가벼운 형만 선고받고 검찰은 날아가는 새 꽁무니나 올려다보는 신세가 될 거다.

" 검사님은, 아직도 연락두절이야? "

" 핸드폰이 아예 꺼져있어요. "

" 아... 진짜 힘든 건 알겠는데, 지금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어?! "

" 돌아오신다고 하셨는데, 아직 사표 처리도 안 됬잖아요. 도대체 언제쯤 오시려나. "

그들은 잠시 저 가운데 자리에 앉아서 일을 처리하던 창민을 떠올렸다. 박 형사의 머리를

서류뭉치로 내려치며 가끔씩 소리를 질러댔던 그 젊은 검사를.

" 오실 거라고 믿어야죠. "

지금은 별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자기 스스로 정리하고 돌아오기 전 까진, 빌어도 오지

않을 거에요. 원래 잘난 사람들은 자신이 정해놓은 길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 법이니까.

* * *

" 누구시라구요? "

- 벌써 목소리도 잊었냐. 박 형사는 남자랑 사랑하는 게 다행이야. 나중에 낳은 애가

박 형사 머리까지 닮으면 어떻겠어.

" ... 검사님? "

- 오냐.

독한 마취제로 준수를 잠들게 하고, 유천은 밤마다 준수의 곁을 지켰다. 마취제 덕분인지

준수는 잠에 취해 특별히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유천은 간간히 눈을 붙이며 피곤한

나날을 하루 위에 덮어 씌워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새벽에 걸려온 전화는 생각치도 못했

던 사람의 것이었다.

" 지금 어디에요?! 살아는 있어요?! "

- 전설의 고향 찍냐. 내가 죽어서까지 박 형사한테 전화를 왜 걸어.

" 언제 올 거에요! 씨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요?!!

- 몰라.

Page 488: Happy Together

이 남자 도대체 뭐하고 살길래, 신문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는 재판 내용을 모른다는 거냐.

유천은 기가 찬 목소리로 준수가 깨지 않도록 핸드폰을 쥐고 문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듣는 창민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많이 좋게 들렸다. 어두워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억지로

밝게 꾸미는 목소리도 아닌, 평소의 그의 것.

" 김재중 그 빌어먹을 새끼가 무슨 짓을 했는 줄은 알아요!? "

- 아무것도 몰라. 세상이랑 완전히 인연 끊고 살았어.

" 지금 어디에요?! "

- 내 차 안.

" 뭐에요, 차 타고 산에 절간이라도 들어갔다 왔어요? 지금 여기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피말라가고 있는데, 혼자서 마실이라도 나가겠다는 거에요, 뭐에요?! "

- 내가 말했잖아. 나도 정리되지 않았는데, 누굴 정리해. 정리하고... 돌아가는 길이야.

" ... 언제 올 거에요. "

준수 때문에 피지 않았던 담배를 주머니에서 꺼내 입에 물었다. 이럴 때면 진짜, 창민과

나란히 앉아서 태우는 담배 하나가 최고인데. 도대체 이 남자는 어디서 뭘 하고 이제야

연락하고 지랄이람.

" 갈려면 좀 제대로 된 후임이나 엮어주고 가던가. 별 미친놈 하나 꼬여서 재판 완전히

아작났어요. "

- ... 누가 후임으로 맡았는데?

" 강 검사요. "

- 에에? 누가 그 새끼를 추천했어?

" 그게 다 검사님 때문 아니에요!! 에에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쳐 와요!! "

- 그 새끼 보통 다혈질이 아닐텐데. 또 법정 안에서 뭐 때려 부수고, 뒤집고 하지 않았어?

" 그래서 지금 우리 쪽이 판사한테 완전 밉보였잖아요! "

- 난리도 아닌가 보네. 나, 지금 가면 많이 늦는 거냐?

후우우... 담배 연기를 길게 뿜고, 병실 안을 살짝 들여다 보았다. 준수는 잘도 자고 있다.

" 아예 안 오는 거 보다는 나아요. 검사님 만나서 하고 싶은 얘기도 너무 많아요. 나, 진짜

지금이 내 인생 최고의 고비에요. 죽겠어요, 진짜. "

- 안 그래도 박 형사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어.

" 부탁? 불안하네.. 제대로 된 부탁은 아닐텐데. "

- 평소 내 인상이 그렇게 비정상적이었냐? 이상한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지금 준수 씨 자?

" 네. 마취제 놓아서.. 요즘엔 거의 안 일어나요. "

- 지금 병원 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앞으로 튀어나와.

" 지금요?! "

- 내일 볼까 했는데, 얘기 들어보니까 사정 돌아가는 게 난리도 아닌 거 같아서. 하루 빨리

정리하고 돌아가야지.

" 씨팔!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진짜! "

Page 489: Happy Together

-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씨' 라고 씨불거리면 바로 차 돌려서 절간으로 들어가는 수가 있어.

" 지금 쳐나갑니다. 됐어요?! "

- 오케이. 앞에 차 세워둘게.

무언가 답답하게 막혔던 속의 일부가 긁어져가는 기분이다. 유천은 담배를 비벼 끄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곤히 잠들어 있는 준수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라이더 자켓을 챙겨 들었다.

" 형아 나갔다 올게. 우리 준수, 집 잘 보고 있어. "

.

.

.

창민은 많이 야위여 보였다. 머리도 약간 긴 것 같고,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다.

정장 차림이 아닌 창민의 그런 캐쥬얼한 옷차림은 처음 보아서 내심 당황하기도 했다.

타, 빙긋 웃으며 차 문을 열어주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차의 뒷좌석에는 담요를 비롯해서

커다란 배낭과 음악 CD들이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 우리 피말릴 동안, 뭐 했어요? "

" 정리. "

" 그 많은 나날들을 죄다 드라이브 하면서? "

" 예진이랑 갔던 곳들... 한 번씩 다 둘러보고 왔어. "

" .... 그래요, "

" 같이 등산했던 산이랑, 갈매기 보러 갔던 바다랑, 촌스러운 체크무늬 담요 싸가지고 소풍

갔던 공원이랑, 자주 거닐던 담 근처랑, 그녀가 좋아했던 갤러리. 아기자기한 책방. 뭐..

이런 것들. "

아.. 여기선 이러이러한 일들이 있었지. 모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장소에 들어가

는 순간 모든 것이 기억나는 거야. 왜, 그런 거 있지? 과거의 냄새. 과거의 아스라한 그

무엇.

그런 것들이 추억의 장소에 들어서는 순간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지더라. 참 좋았어. 혼자

과거를 여행한다는 거.

" 뭐를 부탁한다는 건데요? "

" 어디 좀 같이 가줘. "

" 어디를요? "

" ... 박 형사는 아직도 그렇게 말이 많아? 가자면 그냥 쳐 가주기나 해. "

조용히 운전하는 창민을 바라보다가, 창틀에 몸을 기대고 입을 열었다. 다시 돌아올 작정

이라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는 알아야 될 거 아니에요. 유천은 조용한 목

소리로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제 나름대로 정리하여 창민의 앞에 펼쳐 놓았다. 준수의 다

Page 490: Happy Together

중 인격을 얘기할 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떤 동영상이 소개되었는지. 자신도 보고 소름끼쳤던 그 영상 덕분에, 준수는 지

금 정상적으로 사고를 할 수가 없어 멍하니 하루를 지내고, 증인의 자격을 박탈 당하고,

정신과에서 집중적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고.

" 진짜 말 그대로 '난리' 났구나. "

" 카르텔 쪽에서 어떻게 손을 쓴 건지는 몰라도, 마약 루트를 독점하려고 했다며 주장하는

새로운 조직이 나타났어요. 이번에 러시아랑 마약 거래하다가 들킨 놈들인데, 아마도 카

르텔 쪽이 죄를 덮어 씌우려고 협박한 거 같아요. 그런데 증거가 없으니 족칠 수도 없고,

이래저래 복잡해요. "

" 흠, "

" 여차하면, 정윤호 그 새끼 진짜 가벼운 형만 선고받고 풀려날지도 몰라요. "

" 그건 안 되지. "

죄가 명백한데 거짓말에 거짓말로 기름칠을 해서 풀려나게 해줄 수야 없지. 창민은 중얼

거리고 핸들을 돌렸다. 생각보다 일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구나.

" 진짜 어디로 가요? "

" 다 왔어. "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차를 적당한 곳에 주차시키고, 문을 열고 내렸다. 주위

를 둘러보니 꽤나 퀘퀘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 쓰레기 소각장이다. 저 남자는 오랜만에 만나

서 하필이면 왜 이런 냄새나는 곳으로 데려오고 지랄이야. 유천은 투덜거리며 창민의 뒤를

따랐다.

" 이거, "

뒷 트렁크를 열자 아직도 새하얀 그녀의 웨딩 드레스가 눈부시다. 아직까지 갖고 있었던

걸까. 아름다운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매만지다, 창민이 드레스를 꺼냈다. 한 품에 안기도

힘든 풍성한 치맛단을 간신히 품에 안고 유천을 바라보았다.

" ... 설마, 나보고 지금 입어 달라는 겁니까? "

" 너, 아무도 없는 이 소각장 앞에서 살인 당해보고 싶은 거냐. "

" 농담이에요. "

그러고보니, 이 웨딩 드레스. 창민의 집에 무작정 쳐들어 갔을 때에도 그가 안고 있었지.

그 때엔 그냥 귀신이나 입는 소복인 줄 알았는데 굉장히 아름다운 웨딩 드레스다. 창민은

그녀 몰래 이 드레스를 샀다고 했다. 너무나 입고 싶어했던 그녀에게 깜짝 선물을 해주고

싶어서.. 약혼녀 몰래 웨딩샾으로 차를 돌려 드레스를 포장했다. 결국엔 주인에게 돌아가지

Page 491: Happy Together

못하고 짝을 잃은 약혼자 옷장에서 먼지만 소복히 쌓이게 되었지만.

" 네가 태워줘. "

" 네?! "

" 나는... 이건 못 할 거 같아서. "

유천에게 다짜고짜 드레스를 안기고, 창민이 주머니에서 라이터 하나를 툭 던졌다. 진심이

구나. 유천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드레스를 든 채 쩔쩔대기만 했다. 이걸 내가

어떻게 태워요? 검사님이 지금까지 고이고이 간직했던 약혼녀와의 마지막 추억인데.

" 이 소각장에서, 예진이랑 처음 만났거든. "

... 그래도 나는 준수랑 파티장에서 처음 만났는데, 검사님의 첫 만남은 좀 냄새가 나네요.

" 처음이자 마지막인 공간이랄까. 시작을 여기서 했으니까, 끝도 여기서 맺고 싶어서. "

" 하필이면 왜 이런데서 만났어요? "

" 그러게. "

창민은 잠시 그 때를 생각하며 웃었다. 그녀는 쓰레기를 버리고 있었고, 나는 쓰레기를 덮

어 쓰고 있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황당하게 보던 그녀의 눈이 아직도 생각나.

" 저 안에 넣고, 가볍게 태워. "

" 싫어요. "

이런 걸 왜 내가 해요? 유천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창민에게 드레스를 안겼다.

" 내가 그 때 입이 닳도록 말했던 거 뭘로 들었어요? 그 약혼녀가 잘도 좋아하겠습니다.

시작은 심창민이 하고, 끝은 이름도 모르는 별 괴상한 형사 새끼 하나가 입지도 못한

자기 웨딩 드레스 태우고 앉아 있고.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검사님이 직접 하세요. 이건

검사님 몫이에요. "

박 형사가 그렇게 말 할 줄 알았어.. 창민은 조용하게 웃고 라이터를 건네 받았다. 그냥...

곁에 누군가가 있어줬으면 했어. 박 형사 밖에 생각 안 나더라구. 우리 둘, 사랑 때문에 서

로에게 못 볼 꼴 많이 보였잖아. 나 마지막으로 지지리 궁상 떠는 모습도 박 형사가 좀 봐줬

으면 해서. 나중에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안주거리로 삼기 좋잖아.

Page 492: Happy Together

" 진짜... 마지막이야. "

라이터를 켜는 순간이 좋다. 금방 사라져버리는 불씨도 좋다. 이 불씨가 사라지기 전에,

나는 늘 담배에 불을 붙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이 불씨가 사라지기 전에, 드레스

자락에 불을 붙여야 해. 그리고 타들어가는 드레스 자락에... 내 미련도 함께 태우겠지.

" 잘 가세요, 미련한 검사님의 약혼녀 씨. "

유천이 드레스를 소각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창민은 오랫동안 라이터를 껐다 켰다를 반복

했다. 그리고서...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 불이 켜진 라이터를 드레스 끝자락에 붙였다.

어둠 속에서도 눈이 부신 새하얀 웨딩 드레스는 금새 타올랐다. 활활. 주위가 순간 환하고

밝아진다. 그 불빛 속에서, 공허한 창민의 표정이 보였다. 이제... 다 끝났어. 아주 작은 일

이라도, 끝은 언제나 가슴에 허공을 남겨둔다.

드레스가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유천과 창민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타들어가는 드

레스를 바라보며.. 서로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천은 지금쯤 병실에 홀로 잠들어

있을 사랑에 대한 걱정을. 창민은 자신의 손으로 미련을 태워버린 공허한 마음을 달래며.

" 박 형사. "

" 듣고 있어요. "

" 나 잠깐 울고 올 테니까, 여기 그대로 있어. "

우리 너무 막연한 사이 된 거 아니에요? 남자가 갑빠가 있지- 운다는 소리 그렇게 쉽게 하

는 거 아닌데. 예전 같았다면 창민의 등을 내려치며 쪽팔리다며 웃어버렸겠지만.. 지금의

유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차에 기댔다. 자신도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김준수 때문에

흘린 눈물만 모으더라도, 평생 먹을 음식의 간을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거다. 창민은 저만치

걸어가 정말로 울었다. 어깨를 아주 간간히 들썩거리며.

" 아... 이제 진짜 끝났다. "

순간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벌개진 눈으로 걸어온 창민이, 눈물 때문에 목이 잠겨서 코맹

맹이 소리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와, 이제 진짜 끝났어. 어른 코맹맹이도 귀엽구나. 유천은

간신히 웃음을 삼키고 차에 올라탔다.

" 그럼 이제는 검사님이 내 부탁 들어 줄 차례에요. "

" 뭔데. "

Page 493: Happy Together

차에 올라탄 창민이 시동을 걸었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타오르는 드레스에 머물지 않았

다. 아직도 타오르고 있는 드레스를 등지고, 그의 차가 소각장을 빠져나간다.

" 뻔하잖아요. "

" 뭐- "

" 검사님이 돌아왔으니 재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걸로 치죠, 뭐. "

그 동안 자리 비워서 미안해. 그렇지 않아도 오늘 이 새벽부터 제자리로 돌아갈 생각이야.

일단은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리부터 해야겠다. 창민은 핸드폰을 꺼내 익숙한

번호를 돌렸다.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강력반으로.

" 나야, 지금 그리로 가는 중이야. 카르텔 재판 현재까지 진행된 사항 정리해서 파일로 만

들어줘. 일은 지금 당장 시작할 거야. 그리고 커피 한 잔 준비해 둬. "

제정신으로 돌아오는데 시간 참 많이 뺏어먹었다. 유천은 한숨을 쉬고서 병원으로 향하는

한적한 길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뭐? 커피가 없어?! 이 새끼들아! 강력 1반에 맥심 커피는 떨어지게 하지 말라고 내가 그렇

게 얘기했잖아! 씨팔, 돌아갈 때까지 사두지 않으면 전원 알아서 해라! "

... 똑똑한 사람들은 모두 이런 걸까? 사소한 거에 목숨을 거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유천은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뜨리고 창문을 열었다. 왠지 바람이 시원하다. 답답했던 하나가 뚤리

니, 나머지도 시원스레 안개가 걷혀질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단지 예감일 뿐이지

만, 사람은 그 예감이 너무 잘 맞아 떨어져서 가끔은 슬프고 때론 기쁜 법이 아닌가.

* * *

재중이 생일에는 꼭 올리려고 발악을 했음!

카벨에 글이 안 올려집니다-_ㅠ 왜지? 말머리 수정하고 다시 올리려니까 아예 글 올리는 칸이

클릭이 안되네.. 아으 새벽에 돌겠어여ㅠㅠ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32

"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제 와서 검사를 바꾸겠다니요! 내가 무슨 대타도 아니고, 장난합

니까?! "

Page 494: Happy Together

" 대타였으면서. "

" 박 형사!! "

강력반으로 창민이 돌아오자마자 모든 형사들이 쌍수들고 환영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물론

그의 사표도 처리되지 않았고, 창민의 책상이라던가 그가 만지는 컴퓨터 등 모든 것들이 그

대로였다. 단지 문제는 창민이 자리를 비웠을 동안 어거지로 밀고 들어왔던 불청객.

" 그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됐어요. 불쑥 나타나서 사건 맡겠다고 하는 거 웃기지만, 지금

상황 돌아가는 꼴도 말이 아니고- "

" 무슨 말을 그 따위로 해요!? 내가 상황 이렇게 만들어 놨다는 소리에요?!! 그게 다 병신 같

은 증인 하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꼬인 거잖아요!! "

" 누가 병신이야!? "

" 박 형사, 가만히 있어. "

" 준수 보고 병신이래잖아요! "

" 누가 얘 좀 데리고 나가. 시끄러워. "

" 씨팔! 내 몸에 손 대지 마! "

대고 싶지도 않네요... 유천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마자 다른 형사들이 물러났다. 아무튼 심

검사나 박 형사나, 닮지 않는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 한다면 저 불 같은 성격이 아닐까. 창민

은 한숨을 쉬며 강 검사를 설득했다. 지금은 설득이고 뭐고 할 시간도 사실 없었다. 일이 어

떻게 돌아가는지 확실히 판단하고 자료 수집 하는 데만 해도 일 분 일 초가 촉박할텐데.

" 이 사건은 내가 맡아요! 심 검사가 하지 않겠다고 도망친 거 아닙니까! 자기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이제 와서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요?! "

" ...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검사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거죠. 강 검사도 내 사정 알잖아요. 입장 바꿔 생각해봐요. 그런 일을

당했는데 정신 차리고 누구 재판 맡을 수 있겠어요? "

" 나 같으면 그런 병신 같은 일 당하지도 않았습니... 아악! "

유천의 주먹이 날아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무튼 저놈의 개성질.

" 아이쿠, 주먹이 미끄러졌네. "

" 너.... 너... 이 새끼...!!! "

" 야, 쟤 데리고 나가. 박 형사. 내가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들어오지 마. 죄송합니다. 쟤가

우리 강력 1반에서 최고로 말 쳐안듣는 애에요. "

" 지금 사람을 쳤잖아!!! "

" 사람이 아니라 기계를 친 거 같은데, 감정도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

창민은 자신의 책상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강 검사의 서류를 정리해서 그에게 건넸다.

그 동안 내 책상을 이렇게 더럽게 썼다 이거지. 커피 앙금이 그대로 남아있는 유리잔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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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해도 드러워 죽겠네...

" 뭐라고?! 심 검사, 말 다했어?! "

" 죄송합니다. 아무튼 이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제가 맡도록 할게요. 처음부터 봐왔

으니 한 발자국 늦게 따라왔다고 해서 어려울 건 없을 겁니다. "

" 어디서 술이나 쳐먹다 와서 남의 일 뺏겠다는 심보 아니야!? 심 검사가 그렇게 잘났어?! "

난 잘났어. 창민은 그 말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삼켰다. 어른이 되면 해야 될 말과 숨겨야

될 말이 따로 있는 법이다.

" 처음부터 제 자리를 강 검사님이 잠시 채워주신 것 아닙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 "

" 당신이라고 뭐 제대로 할 줄 알아?! 정신병자 같은 증인 새끼는 퇴장에! 애송이 변호사는

겁나 싸가지 없게 재판 내내 빈정대질 않나!! 강력 1반에 딸린 형사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

이 무능력해?! 일을 시키면 제대로 해 오는 게 아무 것도 없어!! "

저 새끼가 수위를 넘나드네.

" 씨팔! 이 새끼들이 쌍으로 날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 아악!! "

내가 저럴 줄 알았어. 강 검사의 복부를 후려찬 창민의 왼발을 보고, 형사들이 동시에 그렇

게 생각했다. 원래대로라면 달려들어가 막아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모두가 가만히 보고

만 있었다. 가끔은 해서는 안 될 일도 종종 필요한 법이다. 이를 테면 창민의 발차기 같은.

" 어머나, 발이 미끄러져서. "

" 으.. 심 검사!! 당신 미쳤어?! "

" 여기 강 검사님 서류랑 그 외에 기타 등등. 말싸움 그만 두시고 나가주세요. 죄송하지만

제 발이 자꾸만 치고 싶다고 난리네요. "

억지로 그를 강력반 바깥으로 밀어냈다. 문을 닫자마자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창민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말았다. 어째 내 주위에는 박유천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시끄러운 인간들이 많은 걸까. 자기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키니, 그제야 제 자리로 돌아온

기분이 든다.

" 컴백을 축하합니다, 검사님. "

몇 안 되는 인간들이지만, 워낙에 손바닥이 두터운 형사들인지라 박수 소리도 컸다. 창민은

싱긋 미소로 답하고는 키보드를 잡았다.

Page 496: Happy Together

" 다시 시작합시다. "

* * *

" 오랜만이네. "

그 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준수를 보자마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예전에도 아주 마른 얼굴

이었던 것 같은데, 무척이나 수척해졌다. 유천의 말에 따르면 계속 되는 치료는 별다른 진전

이 없다고 했다. 두 번째 인격은 늘 조용하고, 세 번째 인격은 늘 시끄럽고. 유천은 나름대로

별 일 아니라며 농담까지 곁들여 말했지만, 그 모습이 더 씁쓸해 보여서 웃지도 못했었다.

수면은 마취제 없이 하지 못한다고 했다. 지독하게 많은 량의 마취제를 투여해야지만 밤에

별 사고 없이 잠이 들어 늦은 아침에 일어난다. 준수의 일상은 그야말로 엉망이었고, 그건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가뜩이나 마른 사람인데. "

" 오셨어요.. "

" 다소곳한 척 하긴. "

창민은 겉옷을 내려놓고 병실 침대 옆에 걸터 앉았다. 창민을 보고서도 준수는 별 다른 반

응이 없었다. 예전의 준수 같았다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했을 텐데. 마음 고생

이 얼마나 심했을까. 서로 다른 이유로 가슴을 후벼 파봤지만, 아마도 그 깊이는 엇비슷하지

않을까.. 창민은 한숨을 쉬고 입을 뗐다.

" 치료를 봐야겠어. "

" ... 검사님이 왜요. "

" 봐야할 거 같아. 준수 씨가 아무리 증인 위치에서 퇴장 당했다고 해도, 유일한 살인의

목격자인 것은 틀림없잖아. "

" 내가 아닌 거 알고 있잖아요. 게다가 난 이미 증인의 자격도 잃었어요. 내가 아무리 정윤

호가 사람을 죽였다고 떠들어봤자, 돌아오는 건 정신과 치료나 받으라는 말 밖에 없어요.

"

" 우선은... 준수 씨의 치료를 보고 싶어. "

" 싫어요. "

내 괴물 같은 모습, 보는 건 의사랑 형 만으로 충분해요. 더 이상 그 누구도 내 진짜 모습을

보는 거 원하지 않아요.

" 검사님도 다를 거 없어요. 보고, 놀라고, 동정하고, 걱정하고, 그리고 끝일 거에요. "

" .... 글쎄, 난 겪어보지 않은 일에 그렇게 확신하는 재주는 별로 없어. "

Page 497: Happy Together

" 형이랑 의사 만으로도 충분해요. 누군가의 구경거리 되는 거 원하지 않아요. 기분 나빠. "

감정이 상당히 예민한 상태인 거 같다. 창민은 힐끔 유천을 바라보았다. 병실에 들어오자

마자 준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유천이다. 그 동안 혼자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 어쨌든, 돌아왔다는 인사 하려고 들렸어. 인사 정도는 해도 될 사이잖아. "

" ... 축하해요. "

" 한 가지 말해두고 싶은 게 있는데, "

" ...... "

" 그 다중 인격이니 어쩌니 하는 병 말이야, 이겨내야 할 사람은 나도 아니고 박 형사도

아니야. 준수 씨야. "

" ...... "

" 그 따위 바람 빠진 풍선 같은 꼴로 앉아 있으면 아마 평생 병 짊어지고 살아야 할 거야. "

" 검사님! "

" 박 형사 사랑한다며. 준수 씨는 미안하지도 않니. "

둘 다 양기를 빨아먹힌 몰골을 해가지고... 아마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런 모습이겠지.

박 형사가 나를 보고 얼마나 답답해 했을 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아무튼 사람은 입장을 바

꿔봐야 그 기분을 제대로 알 수가 있지.

" 박 형사, 잠깐 나와봐. "

병실 바깥으로 유천을 불러냈다. 창민은 병실 안을 힐끔 들여다 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 치료 시작할 때, 진료실 밖에 있을게. 준수 씨 정신 잃으면 바로 날 불러. "

" 꼭.. 보셔야 겠어요? "

" 그래. "

도대체 그 인격들이 남아있는 이유가 뭘까. 둘이 봐서 알 수가 없다면, 셋이라도 봐야겠지.

.

.

.

" 서울과 수도권의 마약 루트를 독점하려고 했다는 진짜 범인이 나타났어요. 이로써, 윤호

씨가 가졌던 혐의는 어느 정도 벗게 될겁니다. 아직도 검찰은 정윤호 씨를 의심하고 있지

만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

" 누구지, 그 진짜 범인이? "

" 서울의 진추회라고 하는 조직이고, 러시아 마피아와 마약 거래를 하다가 붙잡혔어요.

현장범이기 때문에 재판도 필요 없을 거에요. "

Page 498: Happy Together

가만히 재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에게 죄를 덮어 씌웠구나. 그건 너의 생각이니

아니면 우리 조직원의 생각이었을까. 재중의 표정은 담담하다. 윤호와의 모든 대화에 도청

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속내를 말할 수는 없었기에, 지금으로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최선

이었다.

" 그 범인은 어떻게 되는 거지. "

" 글쎄요. 그건 제 알 바 아닙니다. "

" 사형? "

" 마약 독점을 위해 다른 조직의 보스를 죽인 사실이 드러난다면 그럴 지도 모르죠. "

아마도 그렇게 될 거다. 애초에 그들에게 약속한 것은, 마약 거래 혐의로 감옥에서 몇 년을

지낸 후 출소하면 그에 따른 두둑한 보상이었다. 그러나 카르텔은 살인 혐의까지 그들에게

덮어 씌울 작정이었다. 보스의 가족들이 인질로 잡혀있다. 그 남자의 어린 딸과 부인이. 자

신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 아마도 그들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겠지. 죄 없는 누군가는

정윤호 대신 교수형을 선고 받을 지도 모른다.

" 사형을 선고 받으면 기분이 어떨까. "

나직하니 그렇게 말했다. 그래..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야지. 다른 누군가를 대신 죽이고서

라도 살아야지. 그렇게 더러운 수를 쓰지 않으면 이 어둡고 칙칙한 곳에서 평생을 보내든지

아니면 단 번에 죽게 생겼잖아.

" ... 그건 정윤호 씨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닙니다. 어쨌든 사형은 확실하게 면하게 됐네요.

축하드려요. "

" 감사합니다, 라고 말해줘? "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는데도 윤호는 그다지 밝은 표정이 아니다. 이 남자, 애초부터 자신이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겠지. 어떻게 보면 사형 직전까지 갔던 남자는 현재 가장 편

한 위치에 있다. 조금 춥고 어두운 곳에서 슬슬 시간이나 보내면, 바깥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다른 이들이 온갖 더러운 수를 쓰며 일을 진행시키고 있으니까.

" 어제, 세수 하다가 거울을 봤어요. "

" ....... "

" 나 같지가 않아서, 놀랐어요. "

" ... 왜, "

" 원래는 조금 더 따뜻한 눈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

Page 499: Happy Together

지금의 나는 어떤 눈을 하고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정윤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도 두

렵다. 그가 이만큼이나 변한 나를 알아차릴까봐. 당신, 감옥에서 나와도 예전처럼 나를 사

랑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 둘 다 살인자야.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그렇게 짓밟아놓고,

예전처럼 웃으며 사랑해,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는 당신을 변호하고 있는 내 자신마저

아낄 수가 없어.

" 만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해본 적 있어? "

" ......... "

" 난... 없는데. "

그 말을 하는 윤호는 조금 힘들어 보여서 익숙치 못하다. 자꾸만 말라가는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손가락을 꼼지락댄다.

" 만난 거 후회하고, 앞으로도 후회할 거 같고... 그런 생각 해 본 적 있어? "

" ....... "

" 나는.. 진짜 없는데... "

고개까지 저어 가면서. 그래도 재중은 대답이 없다. 지금의 재중을 바라보는 것이 왠지 미

안하고, 또 미안하다. 윤호는 자신의 가슴 한 구석이 이상하게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그건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심장 구석에 얇게 깔려있던 그 말이

딱딱해지려고 한다. 심장 바닥을 찌를 것처럼.

" 후회... 안 하지? "

네가 만약 날 만난 걸 후회한다고 말한다면.... 나, 남자로써 정말 할 짓이 못 되지만 고개

숙이고 눈시울이 붉어질지도 모른다. 나는 너에게 그 말을 듣는 것이 가장 무서워.

" 응...? 재중아, "

안고 싶어. 키스하고 싶어. 머리를 보듬어주고 싶어.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고 싶어.

" 정윤호 씨. 나 힘들어요. "

Page 500: Happy Together

당신 때문에 정상적인 내 삶이 삐걱대고, 내 손에 피를 묻히고, 남을 짓밟고, 거짓말을 하고,

눈물을 쏟게 하고, 그래. 그것도 힘들어. 하지만 지금의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은 역시

당신의 부재겠지. 내 옆에.. 정윤호가 없어서 힘들어. 잘 때, 날 안아주는 단단한 팔이 없어.

어디갔어.. 라고 중얼거려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서 힘들어.

" ... 미안. "

아, 이 말을 하는 것이 왜 이렇게 창피한 거지. 결국엔 고개를 숙여버렸다. 비로소 지금의

내가 어떤지 직시할 수가 있다. 지금의 나는, 거대한 마피아의 보스도, 살인자도,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범죄자도, 그 무엇도 아니야. 그냥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약해

빠진 한 남자다. 내 자신이 이렇게 비참해보일 때가 있다니, 창피함이란 건 이런 건가.

만약 우리 둘 사이를 가로 막는 유리막이 없었다면, 나는 저 남자의 얼굴을 들어 올리고

웃어주고 입을 맞추겠지. 재중은 유리벽에 가만히 손바닥을 대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린 윤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어서 조금은 놀랐다. 굉장히... 많이 창피한 표정.

귀엽다, 재중은 피식 웃었다.

사랑해,

들리지 않도록.. 그렇게 입모양으로 윤호에게 전했다. 그제야 그의 표정이 환하게 펴진다.

누가 당신을 살인자라고 생각 하겠어. 내 말 한마디, 내 입모양 한 번에 그렇게 아이 같이

웃어버리는 남자를.

" 후회한 적 없어요. 걱정 말아요. "

이제 다.. 끝났어. 이 재판이 끝나면, 우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

.

.

" 들어와요. "

바깥에서 기다린지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유천이 창민을 불렀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자

거짓말처럼 잠든 준수와 그 앞에 앉아있는 하얀 가운의 의사가 보였다.

Page 501: Happy Together

" 저렇게.. 두 팔을 묶어 놓고 검사를 해? "

" 마지막 인격이 난폭해요. "

창민은 의자에 자세를 고쳐 앉고는 준수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꺼풀. 깨어나는 두 번째

인격. 창민은 이미 그를 예전에 만났던 적이 있었다. 그가 사건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지.

그가 아니었다면 정윤호를 생포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 이 빌어먹을 개새끼는 또 누구야, "

" ......? "

유천이 당황한 듯 의사를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늘 두 번째 인격이 먼저 나오고, 다음

세 번째 인격이 나오기 마련인데. 오늘은 다르다. 갑자기 튀어나온 욕설에 창민이 눈을 크게

떴다.

" 누군데 앞에서 나를 구경하고 있어, 씨팔... "

" 박 형사. 이 자가... "

마지막 김준수. 생각보다 훨씬 폭력적인 성향이다. 묶여진 두 팔에 힘줄이 불거져 나온다.

" 당신도 김준수를 동정하지...? 아니면, 내가 무서워? 내가 괴물 같아? "

" 헛소리 집어 치우고, 이 새끼는 뭐야? 무슨 귀신이 빙의 씌운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소름

끼쳐?! "

" 말 가려서 해요, 검사님. 굉장히 난폭하고... "

" 아아악!!! 풀러줘!!! 이 개자식아!!! 네 목을 조르기 전에!! "

이 남자가 나오면 대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요. 우리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거의

하는 말이 욕설과 저주 밖에 없어요. 이 남자가 나오면.. 진짜 김준수의 몸에 무슨 해꼬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지켜보는 것이 다에요. 유천이 조용히 말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

르고, 거친 욕설이 난무하는 공간에 정적이 흐른다.

" .... 내 말, 들려요? "

유천이 조심스럽게 얘기하자, 잠시 기절해있던 준수의 눈꺼풀이 다시 흔들린다. 창민은

옆에서 축축해진 손바닥으로 준수의 볼을 쓰다듬는 유천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연인의 저런 모습을 보고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을 거야. 준수 씨의 연인이

박유천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Page 502: Happy Together

" 나, 만난 적 있죠. "

" ..... 검사님. "

이제야 대화가 되는 것 같아서, 창민은 의자를 가까이 가져갔다.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민을 마주보았다.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한 김준수인데도.. 이렇게나 다르구나.

" 제가.. 다루는 것이 점점 힘들어져요.. 언젠가는 제가 통제할 수 없을 거에요.. "

" 당신이 통제할 수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

" 누가.. 진짜 김준수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상황. "

폭력적이고 반 미친 김준수만이 남을 지도 모르죠. 유천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건 생각

하고 싶지도 않아. 내가 사랑하는 건, 저런 살인에 목이 마른 미치광이가 아니야.

"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

" ... 나한테? "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를 보며 창민이 입을 뗐다. 그러고보니, 이 남자. 예전에도 자신

에게 처음으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사건의 실마리를 안겨 주었다.

" 박유천 씨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당신은 김준수를 많이 사랑해요, 그건 알아요.

하지

만 사랑하기 때문에 냉정하게 상황 파악을 할 수 없잖아요. 김준수 씨에게 위험한 그 어떤

일도 시키지 않으려고 들 거에요... 유천 씨는. "

" 무슨 일을.... "

" 그래서, 검사님에게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당신은.. 제 3자의 입장이니까. 내 말을 듣고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가 있을 것 같아서. "

" 무얼, 말하고 싶은 겁니까. "

그는 약간 힘들어 보였다. 말할 때도 띄엄띄엄. 그래서 더욱 집중해야 했다.

" 내가 완전히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직감할 수 있어요. 나는

약해지고, 그는 강해지고, 그래서 언젠가는 정말로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죠. "

" ...... "

" 하지만 나는 사라져야겠죠. 이 몸은 내 몸이 아니니까. 나는 이유 없이 태어난 몸이고..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 알아요. "

사라져야겠죠- 이 말에 유천이 눈을 크게 떴다. 자기 스스로 사라지겠다고 한 적은 이번에

처음이라서.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Page 503: Happy Together

" 하지만 아직은 사라질 수가 없어요... 그건.. 예전에도 말했을 거에요. 나는.. 오랜 시간을

준수와 함께 살아오면서, 이 몸을 사랑하게 됬어요. 내 몸이자, 내 몸이 아닌 기묘한

몸을.

그리고.. 이 아이의 완전한 안전을 원해요.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

그가 이토록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처음이라서, 의사도 긴장해야 했다.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 나를... 법정으로 데려가요. "

" ........!! "

그게 무슨 말이야. 창민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법정으로 데려가라고?

누구를? 김준수를? 아니면 당신을? 아니면 그 누구를?

" '나'를요. 김준수가 아닌 '나'. 살인 사건을 직접 목격한 나를 데려가요. "

" 당신은.... "

" 나는 완전한 인격체에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 병의 실체를 잘 알고

있을 거에요. 한 사람의 몸 안에, '서로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 그건 곧... 김준수와

나의

인격이 완전히 다른 것을 뜻해요.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죠. "

서로가 완전히 다른 사람. 김준수는 법정 안에서 퇴장 당했다. 하지만 이 자는...

" 김준수는 법정에 설 자격이 없지만, 난 아니에요. 나는 그와 완전히 다른 인간이에요.

내가 법정 안에서 증언을 한다면... 위증이 아니겠죠. 나는 실제로 그의 살인을 목격했으

니까. "

그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 듣는 창민조차 확실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또 다른

카드는 없다.

" 진짜... 증인을 세워주세요. 내가 또 다른 김준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요. "

* * *

Page 504: Happy Together

" 어떻게 하실 거에요? "

" 글쎄, "

깊게 잠든 준수를 바라보며 유천이 물었다. 정말... 그가 말했던 대로 할 생각이세요? 법정

에 다른 인격의 김준수를 세우는 짓을?

" 진짜로 할 거 아니죠. "

" 글쎄. "

" 준수... 사람들 앞에 세워놓고 구경거리 만들 생각 아니죠? "

" 글쎄. "

" 대가리에 글쎄 밖에 안 들었어요?!!! "

" 대가리가 뭐야, 검사님한테. "

한참이나 손톱을 물어 뜯던 창민이, 겉옷을 집어 들고는 병실을 나섰다. 이런 건 깊게 생각

하지 말고 도 아니면 모, 라는 심정으로 도박을 거는 것이 제격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걸고

하는 도박에 기회는 단 한 번 뿐이고, 그 한 번에 완전한 승패를 결정 지어야 한다. 한 번의

재판으로 모든 것을 뒤엎을 수 있는 강력한 카드가 두 개 정도만 있어도 걱정이 없을 텐데.

" 어디 가요! "

" 찾으러. "

" 뭐를요?! "

" 나도 몰라. "

뭐라는 거냐?! 황당한 표정으로 창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고개를 돌렸다.

" 준수 씨 챙겨! 그게 박 형사 몫이야! 알지? "

.

.

.

범인은 사건 현장에 반드시 증거를 남긴다고 했다. 하지만 살인 사건 현장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흔적이 없는 인간이라, 본인이 누군지 알아내는 것만으

로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이고, 분명히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흔적을

남겨 두었을 텐데. 아무리 날고 긴다는 범죄자라 할 지라도, 사람인 이상 완벽할 수는 없다.

" 오랜만에 와보네. "

창민이 차를 돌린 곳은 제이 에비뉴. 강력반 형사들과 경찰들까지 수 십명을 동원해 뒤져도

Page 505: Happy Together

제대로 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던 곳이다. 사람이든 개새끼든 자기가 살았던 집에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 정상이야. 우리가 찾지 못했던 그 무언가를... 나 혼자 찾아낼 수 있을까. 제이

에비뉴에는 아직도 많은 수의 경찰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창민을 알아본 몇 형사들

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고, 창민은 미소로 답한 후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다른 곳은 둘러보지 않고 중앙 저택으로 발을 옮겼다. 사람이 살지 않는 그 저택은, 처음에

느꼈던 온기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바닥이 차갑다. 먼지가 소복히 쌓인 가구들은 여전히

멋스럽다. 중앙 홀을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분명히 보스가 쓰던 집이다.

" 여기.... "

윤호의 방에 들어선 창민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여기가 관건이야. 그는 많은 업

무를 여기서 해결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책상의 서랍장은 많이 열고 닫았던 흔적이 뚜렷

하고 의자의 시트와 등받이도 깊숙히 들어가 있어. 많이 사용했다는 증거다. 여기서 마약과

무기 밀매에 대한 서류들을 정리하고 사업을 주도했을 것이 뻔하다. 그리고 그 주요 문서들

은 정윤호가 보관하고 있었을 거야. 컴퓨터 안에 파일로 저장된 것들은 검찰이 수사하기 전

에 모조리 지워버렸겠지. 그렇다면 그 나머지... 실제로 읽고 만질 수 있는 서류들은 어디에

보관했을까. 보통, 가장 중요한 문서들은 보스의 오른팔도 알지 못할 그런 곳에 조직의 수장

이 직접 보관하기 마련이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아주 비밀스러운 곳에 숨겨두지.

" 도저히 모르겠다. "

한참이나 이곳 저곳을 뒤지던 창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의자에 풀썩 앉았다. 보물

찾기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이람. 하지만 오랫동안 검찰에 몸을 담았던 자의 직감이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어딘가에 보물이 있을 것 같단 말이지.

" 그나저나... 진짜 대단한 책들이네.. 이걸 다 봤을라나... "

고시 공부 하면서 봤던 책들도, 이거 보다 많지는 않겠다. 어마어마한 책장을 바라보며 휘

유우- 휘파람을 불었다. 하긴, 그 젊은 나이에 그만한 조직을 이끌어 나가려면 머리에 뭔가

들어 차 있다는 소리겠지.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한 남자다. 그 똑똑한 머리를 사회에 이바지

하는 쪽으로 썼다면 얼마나 좋아. 뭐, 자기도 사정이 있어서 그런 험난한 세상에 발을 딛고

결국에는 최악의 범죄까지 저질렀겠지. 어울리지 않게 감상에 젖어 있다가 의자를 주르르-

끌어 책장으로 다가갔다.

" 오... 칸트의 철학 전집... 이건 나도 못 읽어 본 건데, "

닥치는 대로 다 읽었나보네. 소설부터 시작해서 철학에, 심리학에, 심지어 의학에 관련된

Page 506: Happy Together

서적까지 죄다 늘어져 있다.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나 책을 하나하나 뽑아가던 창민이, 속

으로 놀라며 책들을 훑었다. 책 모두가 훑어본 흔적이 있다. 여기저기 접어 놓았고 종이도

사용감이 있고. 정말로 이 많은 책들을 다 읽어 보았나...

갑자기 그 자에 대해서 궁금해진다. 어떤 남자일까. 해서는 안될 감탄을 거듭하며 책장을

옮겨 가던 창민이, 붉은 색깔의 책 위에 손을 얹고는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 세계역사학 대 백과사전.... "

원서들이다. 앨범만한 굵기의 어마어마한 책들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빽빽하게 꽂혔다.

한 권을 뽑는 데만 해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먼지가 가득한 책을 넘기자, 깨알 같이 작은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씨팔... 이건 나도 못 읽어.

" 어라.... "

뭔가 다르다. 뭐가 다른 거지. 책장을 넘기던 창민이, 무언가 느낌이 다른 것을 직감하고

바로 옆 책장에 꽂혀 있던 다른 책을 꺼냈다. 이 책장에 꽂혀있는 백과 사전들은...

" 읽지.. 않은 책들. "

전혀 읽지 않았다. 완전한 새 책들이야. 접어 놓은 흔적도, 책장을 넘긴 흔적도, 사람의 손

길이 닿았던 흔적도 아무것도 없어. 책을 많이 읽어 본 사람들은, 한 장만 남겨도 이 것이

때가 탄 책인지, 그렇지 않은 새 책인지 단숨에 알 수가 있다. 창민은 바로 옆의 다른 책장

에서 아무 책이나 골라 꺼내보았다. 모든 책들이 읽어 본 흔적이 있는데 이 책들은 아니야.

아니, 이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 전부가, 새 책이다. 몇 권을 뽑아 본 결과 금세 알 수

있었다.

창민은 한참이나 그 책장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책장의 맨 아래 쪽에, 유난히 앞

으로 튀어나온 모서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창민은 책장 아래 깔려져 있는 붉은 카페트를

슬쩍 거뒀다. 바닥에 날카롭게 무언가로 긁힌 흔적들이 가득하다. 그 앞에 쭈그려 앉아서

모서리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손으로 그 모서리를 위로 올렸다. 그것이 부드럽게 밀려 올

라가고...

" ... 찾았다. "

거대한 크기의 책장 하나가,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창민의 눈 앞에서 열렸다.

Page 507: Happy Together

* * *

구정 잘 보내세요^ㅡ^유후!!

오늘 오랜만에 갈비찜을 먹었더니 배가 불러요......

해피 투게더는 아마 40편 안으로 완결이 나지 않을까 싶네요.

매가 썼던 글 중에 가장 짧으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졀라 길더군요(-_-) 한글 파일로 정리중인데, 페이지가 유후?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33

" 검사님 예상대로 평범한 금고는 아닌데요. "

" 있어? "

" 네. "

문처럼 열려진 책장 뒤에는, 자그마한 크기의 금고가 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회색의 차가

운 금속 금고. 두근거리던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고, 폭탄 제거 전문반을 불렀다. 억지로

잡아 뜯어낸다면 열릴 금고겠지만, 심창민은 정윤호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

이 닥쳐와 이 금고가 발견된다고 치자, 중요한 물건이 담겨 있을 이 금고를 그대로 방치해

둘까. 나 같으면 절대로 그러지 않아. 얼마 후 달려온 폭탄 제거 전문반은 금고의 내부를

투시하고 폭탄의 유무를 검사했다. 결과, 창민의 예상대로 평범하지 않은 금고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 더럽게 운 나쁜 사실인데요, "

" 뭐가? 혹시 제거가 불가능한 폭탄이란 말은 하지 마. "

" 그런 폭탄은 세상에 없어요. 폭탄 만들 때 가장 재미있는 단계가 뭔 줄 아세요? 마지막

이에요. 폭탄을 제거하는 마지막 수단을 만들 때. 미치광이 폭탄범도 마지막 단계 건너

뛰는 법은 절대로 없어요. "

" ... 그럼 뭔데. "

" 폭탄의 크기가 어마어마해요. "

" 얼만큼. "

" 이 저택 날려버릴 만큼, 이라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

자신이 아닌 남이 뜯어내는 즉시, 모든 걸 사라지게 만들 생각인가. 금고 하나에 이 저택이

날아갈 만큼의 폭탄을 설치해 두다니. 분명히 A급 무언가다.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도 그들

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서류들이겠지.

" ... 그럼 제거해야겠네. "

Page 508: Happy Together

" 그래야죠. "

나머지 폭탄 제거반들이 금고 주위의 벽을 엑스 레이로 촬영한 후, 폭탄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벽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곧 흙먼지가 바닥에 가득 쌓였고, 복잡한 회로와 기폭제

로 보이는 기계 등이 드러났다. 쿨럭,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한 창민이 미간을 찡그

리며 어마어마한 구조의 폭탄 장치를 바라보았다.

" 어떤 식이야? "

" 전자식이에요. 이거... 테러 조직에서 자주 쓰는 방식인데, 국내에서는 처음 보네요. "

" 어려워? "

" 전자회로를 이용한 폭탄인데, 지문 인식기가 달려있는 걸로 봐서, 다른 사람의 손이

비밀번호를 누르는 순간 폭파하게 되어 있어요. 검사님, 안 건들이신 게 천만 다행입

니다. "

만져보려고 했는데. 보이지 않는 식은땀을 한 방울 흘리고 복잡한 회로를 살폈다.

" 일단은 지문 인식 센서를 분리하고, 기폭제를 제거해야겠네요. "

" ... 나야 이런 방면에 있어서는 아는 바가 없으니까 잘 좀 해줘. 중요한 거야. "

" 저희, 지금 목숨 걸고 일하는 겁니다. "

자칫하면 저희 전부가 날아가요. 조용히 중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불안하다. 제거반

요원들은 일단 지문 인식 센서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폭탄 회로를 건들이지 않도록 조심

스럽게 센서를 분리하고, 센서에 부착된 전기 회로선을 끊었다.

" 자... 이제부터가 진짜인데, "

이 복잡한 회로를 어떻게 해볼까나. 얇은 고무 장갑을 끼고, 엑스 레이를 회로에 가깝게

가져갔다.

" 액화질소 가져와. "

" 네. "

" 일단 얼려야겠네요. 조금이라도 작동을 멈추게 하고 손을 봐야 하니까. "

드라이 아이스처럼 허연 연기로 가득한 액화질소로 가장 복잡한 회로의 중심선을 단숨에

얼려 버렸다. 검사 생활을 하면서 폭탄 제거를 본 적은 여러번 있지만, 이렇게 복잡해 보이

는 폭탄은 처음이다. 게다가 크기도 어마어마해. 어쩌면 여기 이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폭

탄 구경이나 하다가 단숨에 저 세상 갈 수도 있다는 소리인데... 아, 난 왜 이렇게 위험한

일들 도맡아서 하는 거지. 예진이 말대로 검사 책상에 앉아서 점잖이나 빼고 사는 건데.

Page 509: Happy Together

한숨을 쉬며 나머지 작업을 관찰하는 창민이다.

" 이게 기폭제에요. 이걸 제거해야 하는데... 연결된 회로들을 잘라내야 되요. 전자식으로

되어 있어서 이 안에 바이러스를 침투시키면 알아서 멈출 겁니다. "

" 아, 뭐, 난 말해도 모르니까 설명하지 말고 그냥 해. "

왠지 기분 나쁜 녹색의 액체가 담긴 주사를 가방 안에서 꺼낸다. 그걸 받아든 요원이 두꺼

운 주사 바늘을 망설임 없이 회로 가운데 꽂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전자회로가 천천

히 부식 되어갔다. 일을 처리하는 제거반이나, 곁에서 바라보는 창민이나 초조함과 불안함

에 손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곧 나머지 회로들이 전부 부식 되어갔고, 조심스럽게 회로를

가위로 잘라냈다.

" 저... 그런 건 없는 거야? "

" 뭐요. "

" 빨간선이랑 파란선 이렇게 막 있어서... 어느 거 자를까 고민하는 거 있잖아. "

심 검사 왜 이래.

" ... 검사님, 영화 너무 많이 보셨어요. 우리는 그딴 거 몰라요. 태극기도 아니고 무슨 빨간

선 파란선 타령이야... "

어이없다는 듯 궁시렁 거린 제거반이, 머슥해하는 창민을 뒤로 한 채 나머지 회로들을 조

심스럽게 잘라냈다. 손가락 하나 떨리지 않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기까지 하다. 마른 침을

삼킨 창민이, 마지막 회로가 잘라지는 모습까지 놓치지 않고 바라 보았다.

" ... 됐어요. "

" 수고했어. "

후아아아- 긴 한숨이 터지고, 그제야 주위에 있던 제거반이 소리 내어 숨을 쉬기 시작했다.

창민은 바닥에서 일어나 금고에 손을 댔다. 이걸 어떻게... 뜯어내야 하는 건가.

" 폭탄은 제거 했으니까 뜯어 내면 되요. 연장이랑 그런 거 있으니까 저희가 할게요. "

두꺼워 보이는 금고의 문이, 짙은 색깔의 철근 같은 연장으로 부숴지듯 열렸다. 창민은 그

안에서 자신이 기대하고 있던 서류 뭉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조리 영어로 쓰여 있지만

쉽게 읽어내려갔다.

Page 510: Happy Together

" 러시아 마약상들과 거래 내역이야.. 이건 무기 밀매자들에 대한 리스트... "

" 찾으시던 겁니까? "

한 번만 더 증거 운운하면서 오리발을 내밀어 봐. 이 서류들을 천 만부씩 복사해서 네놈들

머리 위로 뿌려줄 테니. 창민은 만족한 미소를 띄우며 서류를 찬찬히 정리했다. 그러던 중

서류 사이에 끼워진 무언가가 팔랑, 소리와 함께 가볍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 이거.... "

이게 뭐야, 바닥으로 고개를 수그린 창민이 자그마한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아... 이거..?

복잡한 표정으로 그것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자그맣게 삐익, 거리는 소리가 들

려왔다. 어디서 나는 소리야? 창민과 폭탄 제거반이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 ....!!!! 이거 뭐야?!!!! "

모두 제거한 줄 알았던 부비트랩이 다시 돌아가고 있다. 끊어진 회로와는 상관 없게, 자기

스스로 작동하며 붉은 빛을 번쩍거린다. 사색이 된 표정으로 회로선을 바라보던 요원이,

소리치듯 말했다.

" 씨팔!!! 이거 이중 부비트랩이야!!! 당장 여기서 나가!!!!!!! "

비명이 서재 안을 가득 메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들고 있던 모든 것들을 내팽겨치고

서재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 와중에서도 창민은 들고 있던 서류를 잊지 않았다. 품 안에

넣고 미친 듯이 달렸다. 계단을 내려오는 건지, 굴러오는 건지, 여기저기 사람들이 엎어지

고 다시 일어나 정문을 향해 뛰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한 달 동안 포상 휴가를 받아낼 거야!! 이를 악 물고 정문을 나오는 순간,

엄청난 폭음과 함께 딛고 있는 땅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2층의 서재가 완전히 폭파

되면서 중앙 저택 자체가 흔들렸다. 정문을 빠져 나오자 마자 정원에 엎어진 창민이, 바로

옆을 지나고 있던 요원을 부축을 받아 다시 일어섰다.

" 뛰세요!!! 이 저택 전체가 무너질겁니다!!!!! "

" 나 신경쓰지 말고 먼저 뛰어가!!!! "

" 으.. 으아아악..!!!!! "

비명이 비명을 덮고, 뒤늦게 나온 요원들이 거의 기어서 정문을 빠져 나왔다. 콰아아앙..!

Page 511: Happy Together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 창민은 엎어져 있는 다른 남자의 옷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몇번이나 흔들리는 지축에 발이 꺾일 뻔했다.

" 차에 올라 타세요!!! 주위에 나무가 많아서 불이 순식간에 번질 겁니다!!!! "

방금 전까지 존재하던 저택이, 굉음과 함께 으스러지듯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솟아오른

불길이 순식간에 정원을 뒤덮었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불길이 춤을 추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나무와 숲을 길로 삼아 휘몰아치듯 태워버리기 시작했다. 차에 올라 탄 창민은 정신

없이 시동을 키고 차를 몰았다. 엄청난 소리에 놀란 경찰들이, 정문 앞에서 흩어지는 모습

이 보인다. 거의 반 정도 넋이 나간 정신으로 차를 몰며, 잠시 뒤를 돌아 보았다.

완전히 무너져내린 저택을 삽시간에 불길이 감싸 안았다. 검사 생활 몇 년을 해오면서 저

런 거대한 규모의 폭팔은 처음 보았다. 창민은 축축히 젖어버린 등과 어딘가에 긁혀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바짓자락에 문지르며 근처 모퉁이에 차를 세웠다. 심장이 뛰고 있어서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대로 건물 잔해에 묻혀버렸을지도 몰라. 그럼 이 심장이

지금쯤 멈춰 있었겠지. 죽다 살아난 기분이 이런 건가...

" 검사님!! 괜찮으세요?!!! "

" ... 그래요. "

주변에 차를 세운 제거반 요원들이 달려왔다. 창민은 차창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

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소방차가 떼로 달려오는 모습이 얼핏 보인다. 이건 진짜...

" 포상 휴가를 두 달은 얻어내야겠어... "

차를 돌리며 창민이 중얼거렸다. 백미러로 보이던 불길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보인다...

* * *

- 괜찮으세요?! 그래서?!!

" 저택에서 도망칠 때 나도 모르게 여기저기 긁혔나봐. 치료는 대충 했어. 무사해. "

- 그 새끼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저택을 통째로 날려버릴 폭탄을 설치해놔?!!

" 거기까지 손을 댔다면, 이미 모든 걸 포기하고 몸만 도망쳐야 되는 상황이 왔을 거라고

미리 예상했겠지. 아무튼... 원하던 것들은 얻었으니 상관없어. "

- 그 상황에서 그것들은 또 갖고 나왔어요?!!

" 미친놈. 그러면 내가 목숨까지 걸고 빈 손으로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냐. "

- 독하십니다... 진짜 독하십니다...

" 시끄러워. 아무튼 안부 전화 고마워. 재판 당일 날 보자고. "

Page 512: Happy Together

- 몸 관리 잘 하세요.

" 오냐. "

아, 쓰읍... 꽤나 긁힌 흔적이 많다.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팔이고 다리고 부딪히고 긁히고

여기저기 멍도 들었다. 아무래도 계단에서 완전히 구르며 내려온 것이 원인이었나.. 그 땐

절대로 죽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몸만 날렸지. 그 와중에서도 서류들을 챙긴걸

보면 박 형사 말대로 독한 놈이 맞는가 싶기도 해. 창민은 얼얼한 팔을 매만지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레 터진 사건으로 검찰 자체가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재판은 코 앞에 닥쳐왔고, 할 일이 산더미다. 그간 여러가지 조사와 자료 수집 덕분에

하루를 48시간으로 치고 보냈다. 이틀 동안 한 시간은 잔 건가..

" 유강혁 앉혀 놨습니다. 취조 시작하실 겁니까? "

" 그래. "

"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 일은 다른 형사들에게 맡겨도 되는데.. "

" 쉬다가 왔잖아. 걱정 마. "

홀로 취조실 안으로 들어서자, 두 팔과 두 다리가 의자에 묶인 남자 하나가 보인다. 행동

대장급이라고 했지. 저 자는 마약 루트를 독점하기 위해 다른 조직의 보스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아마도 사형을 받을 테고, 잘해봐야 무기징역. 지금 정윤호의 죄를 떠맡고 있는

자가 저 남자. 창민은 의자에 앉기 전에 테이블을 그 남자 가까이에 붙여 가깝게 마주보고

자리에 앉았다.

" 진추회 행동 대장 유강혁. "

" ...... "

" 시간이 없으니까 까고 얘기하자고. 왜 그랬어? "

" .... 네? "

" 왜 니가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구라까고 사형 기다리고 있냔 말이야. "

" ... 그 얘기는 지겹지도 않아요? 내가 했다고 했잖아!! 내가 다 죽였다고!! 마약도 우리

조직에서 독점하고 싶어서 개지랄 떤 거야!!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먹어?! "

악에 받쳐 소리 지르는 모습이 안쓰럽다. 무슨 약점을 잡혔을지는 이미 간파했다. 창민은

어제 밤새 다른 형사들과 이 남자의 뒷조사로 하루를 꼬박 샜다. 어제 마신 맥심 커피만

해도 머그 컵으로 다섯 잔이 넘을 거다. 잠깐 땡기는 뒷골을 잡아다가 들고 있던 사진들을

남자의 앞에 툭, 던져 놓았다.

" 니 애, 니 부인. 맞지? "

" .....!! "

" 부인이 아직 어리던데. 조사해 보니까 어렸을 때 미성년자 매춘으로 몇 번 깜방 갔다 온

기록이 있더라. 스무 살 때에는 소매치기도 몇 번 했었지. "

" 씨팔!! 니들이 개새끼야?!! 왜 구린 뒤를 캐고 지랄이야?!! 그런 짓을 하면 쪽팔리지도 않

Page 513: Happy Together

냐?!! 과거에 뭐를 했건 니가 무슨 상관이야!! 우리 영주 지금은 그런 좆같은 짓 안 해!!

"

" 알아. 뒷조사 하느라고 밤 좀 샜어. "

왕년에 술집 나갔던 여자로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어리고 착하게 생긴 여자다. 사진을 힐

끔 바라보고 아이 사진을 맨 앞에 꺼냈다.

" 룸쌀롱에서 만나서, 신기하게 연애하고 결혼까지 골인했다며. "

" 왜! 그게 죄냐?!! 우리 같은 자식들이 여자를 어디서 만나는데!! 룸쌀롱 출신 여자는 결혼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왜 상관 없는 사실을 갖고 지랄이야!! "

" 아이는 1년 전에 얻었고. 예쁜 딸. 이름이 지윤이라지. 유지윤. 아빠가 깡패라는 건 아나?

아마도 모르겠지. "

" ........ "

" 깡패짓 하면서 산다고는 하지만, 평범한 가정이야. 아내는 이제 술집에도 안 나가고 집에

서 귀여운 딸 기르면서 늘 조바심 내며 살고 있겠지. 사랑하는 남편이 언제 무사히 돌아

올까 노심초사 하면서. "

" ........ "

" 부인이랑 딸, 지금 어디 있어. "

수소문 끝에 찾아낸 집은 엉망이었다. 아내와 딸도 없었고 집은 뒤집어진 채 황량하기만

했지. 뒷골목 인생을 사는 자들이라도 소중한 것은 있기 마련이다. 절대로 버릴 수 없는

가족을 걸고 목숨을 흥정했다 이거지. 이 개만도 못한 새끼들. 창민은 사진을 남자의 눈

앞에 내밀고 또박또박 말했다.

" K 카르텔에 네 부인과 딸의 목숨을 쥐고 있지, 내 말이 틀려? "

" ........ "

"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부인을 다시 술집으로 팔아버린다고 하던가? 아니면 아직 어린

딸을 죽이겠다고? 뭐라고 협박했어. "

" ... 난.... 나는... "

" 둘을 함께 죽여버리겠다고, 그런 식으로 협박했나? "

" .... 흑, 흐으.... 흐으윽.... "

" 과거는 다 접고 새출발 하고 싶어 하는 젊은 부인과, 말도 하지 못하는 귀여운 딸에게 부

끄럽지도 않냐, 이런 모습이. "

울음을 터뜨린 남자의 앞에 사진을 내려놓고, 창민이 한숨을 쉬었다. 늘 검찰에게 쓰레기

만도 못한 새끼들이라고 욕 먹고 사는 놈들인데, 아내와 자식 지키겠다고 제 목숨까지 걸

고 하지도 않은 죄를 덮어 쓴 이 놈이 불쌍하다. 창민은 울고 있는 남자의 입에 담배를 물

리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의자 뒤로 돌아가 묶여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 죽인다고 했어요.... 영주랑 지윤이 죽인다고.... "

" 너 말고 협박 받은 놈들 더 많을 거다. 그렇다면 카르텔 잔챙이들 숫자가 꽤 된다는 말

Page 514: Happy Together

인데. "

" 모두.. 총을 가지고 있었어요.. "

" 종이를 줄 테니까, 협박 받은 놈들의 명단을 써. "

" 소용 없어요. 당신들이 뭘 해줄 수 있는데...! 검찰이 낌새를 차리고 움직인다 싶으면

바로 죽여버린다고 했어요... "

" 이게 뭔 줄 알아? "

옆에 내려 놓았던 서류 뭉치를 남자 앞에 내밀었다. 물론.. 읽지 못할 거다. 거의 다 영어로

써 있으니까.

" 지금 유식한 거 티냅니까... 뭐라고 쓴 건데요... "

" K 카르텔의 대한민국 마약 루트 독점 계획 및 해외의 마약 거래상들 리스트야. "

" .........! "

" 이건 또 뭘까.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이루어진 무기 밀매에 대한 상세한 서류들이지.

이 두툼한 서류들은? 밀매한 무기에 대해서 종류 별로 정리해 놓고 어디에 팔아먹을지

적어 갈긴 서류들이야. 이 정도면 특 A급 기밀 서류들이지. "

남자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런 걸 어디서 찾아냈냐는 표정이다. 뭐... 운이 따라주었지.

내가 책에 아예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면, 어째서 그 책장만 읽지도 않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는지 관심도 없었을 거다. 그 책장은 기밀 서류들을 보관하는 금고를 가리고 있었어. 누

구도 평범한 책장을 뜯어낼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다. 아아.. 그 책장이든, 저택이든, 거기

에 대한 생각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 내 몸을 향해 무너져 내리는 건물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 너희가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이유를 알아. 검찰을 믿지 못해서겠지. 하지만 상황이 달라

졌어. 우리는 절대적인 증거를 잡았다. 마지막 재판에서 나는 모든 걸 뒤엎을 생각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의 자백이 필요해. K 카르텔의 협박이 있었다는 자백. "

" .......... "

" 억울하지도 않냐. 남의 죄 덮어 쓰고 끽소리 한 번 못하고 뒈지는 인생이. "

" ... 검찰을.. 어떻게 믿어... "

그건 우리도 똑같아. 검찰이 조폭들을 어떻게 믿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난관을 해쳐나갈 수 없는 상황이 아니냐.

" 약속하지. 우리 측 뜻대로 K 카르텔의 협박 사실을 인정한다면, 너는 아무 죄 없이 풀려나.

그리고 네 부인의 전과와 너희 조직원들의 전과도 어느 정도 말소시켜 줄 수 있어. "

" ....... "

" 부인과 자식의 안전도 보장한다. 분명히 너희 조직원들 중 누군가가 K 카르텔과 연락을

취하고 있을 거야. 그 연락망을 알려줘. 내 명예를 걸고 너희 가족을 무사 귀환 시켜줄

테니까. "

" .. 정말.. 무사하게... "

Page 515: Happy Together

" 무사하게 네 곁으로 돌려보낸다. 내 검사 인생을 걸고 맹세해. "

.

.

.

한참 후에야 창민이 취조실에서 나온 후, 앞에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이 다가섰다. 요 근래

통 잠을 자지 못한 사람들이라 얼굴이 말이 아니다. 어지러워... 벽에 손을 짚고 잠시 비틀

거리던 창민을 부축했다.

" 괜찮으세요? "

" 졸려. "

" 눈 좀 붙이세요. 무슨 인간 병기도 아니고... 이러다가 재판 당일 날 법정 안에서 주무시면

어떡합니까? "

"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저주를 해야겠냐. "

" 그나저나... 어떻게 됐어요? "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창민이 들고 있던 서류를 유 형사에게 건넸다.

" K 카르텔과 연락을 취하고 있는 진추회의 조직원 명단이야. 그 연락망을 뚫어서 카르텔

잔챙이들의 위치를 알아내. 그 쪽에서 행동 대장급 녀석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고 있어.

인질을 빼내는 최후의 순간까지 들키지 않도록 조심히 움직여. "

" 예. "

" 그리고... 현재 카르텔의 죄를 덮어쓴 자들을 조용히 석방시켜. 아, 카르텔의 눈에 띄지

않도록 보호 감시를 붙이고. "

" 인질을 빼내러 갈 때는 수사 인력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

" 필요한 만큼 콜 해. 그리고 모두 무기 소지 허락한다. 총탄도 넉넉하게 가져 가. "

" 예. "

" ... 30분 뒤에 나가지. 나 눈 좀 붙일 테니까, 출발할 때 깨워. "

" 함께 가실 겁니까? "

" 그래. "

그 전에 조금 자둬야 겠지만... 창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이러다가 뇌에 이상한

종양이라도 생기는 거 아닌지 몰라.

"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 놈들 모두 총기류를 소지했고... "

" 걱정 마. 내 총도 챙겨둘 테니까. "

" .... 검사님은, "

총에 손도 대지 않으시잖아요. 말을 머뭇거렸다. 약혼녀의 사고 후에는 한 번도 사격을 하

지 않았던 창민이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는 유 형사의 품 속에, 창민이 손을

Page 516: Happy Together

넣었다. 그리고 뒷춤에 꽂혀있던 총을 스스럼없이 꺼내 들었다.

" 됐어요? "

" .... 네. "

아주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총을 꺼내야 할 것 같다.

* * *

" 제이 에비뉴가... 어떻게 됐다구요....? "

완전히 타버렸어요. 중앙 저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참모의 전화를 받고 재중은

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가 사라졌다고? 제이 에비뉴의 뭐가? 그다지 무겁지도

않은 전화기가, 마치 철근처럼 무겁게 느껴져 더 이상 들고 있을 수 없었다. 굴러 떨어진

전화기를 멍하니 내려다보다 바닥에 풀썩 주저 앉았다. 이제... 없다. 제이 에비뉴는 없어.

" 윤호야... 우리 집 사라졌대... "

우리가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보냈던 그 시간을 담아둔 공간이 없어. 다시 찾아갈 틈도

주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대. 너는.. 아마도 모르고 있겠지. 믿을 수가 없어서 손톱

만 깨물고 있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택시를 잡아 타고 익숙한 그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믿을 수가 없어서 '설마'를 수 천번은 반복했다. 그렇게 쉽게 사라질 집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쉽게 사라져야 될 집은 더더욱 아닌데.

- 폭팔의 흔적이 있는 걸로 봐서는 폭탄이 터졌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아마 보스가

무언가를 숨겨두고 그것이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꺼내졌을 시에 터뜨리게 만들

어 놓은 부비트랩일 겁니다.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고, 화재로 절반 이상이 타버렸답니다.

폭탄을 설치해 놓을 정도로 귀중한 무엇이.. 분명히 검찰이 발견했을 것이다. 그 무언가를

찾아냈을까. 도대체 그것이 뭐지...? 기밀 서류...? 아아, 지금은 뭐든 상관 없어. 지금의 난

사라져버린 우리의 터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제정신으로 돌아올 거 같아.

" 여기가 맞습니까? "

" ... 예... "

" 아무것도 없는데, 얼마 전에 엄청난 화재가 난 모양인데요? 경찰들이 막고 있는데- "

" 내려주세요. "

Page 517: Happy Together

허겁지겁 택시에서 내려 제이 에비뉴의 정문으로 달려갔다. 그럴 리가 없어. 저 새까맣게

타버린 담벼락이, 저택일 리가 없어. 완전히 불길에 휩쓸려 재만 남은 저 공간이.. 우리의

정원일 리가 없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 허공이.. 우리가 사랑하던 그 집일 리가 없잖아..

" 일반인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

정문을 들어가려는 순간, 문 앞에서 지키고 있던 경찰들 여럿이 재중을 밀어냈다. 아직도

뒷처리가 끝나지 않은 건지 꽤나 많은 숫자의 경찰과 소방관 대원들이 저만치 가득 보인다.

당신들이 뭔데 남의 집에 들어와 있어... 여긴 윤호가 나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우리들

의 도시인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구르다, 아무도 모를 뒷편으로 뛰어갔다. 제이 에비뉴의 중앙 저

택 뒤뜰에는 거대한 대나무 숲이 자리잡고 있다. 그곳은 저택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곳으로

재중과 그 외 몇 몇만 틈새 구멍을 알고 있었다. 대나무 숲 사이로 뚫린 구멍을 통해서 중앙

저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윤호와 자주 산책하던 곳이었는데.

" 아... "

대나무 숲을 해치고 나오자, 그제야 재중의 눈 앞에 중앙 저택의 흉측한 뼈대가 보였다.

모든 것이 완전히 타버린 그 공간에는 검게 그을린 담벼락과 철골 구조물. 무너진 시멘트와

엉망으로 나뒹구는 가구들만이 보인다. 이게... 이게 어떻게 우리 집이야.

" 아무 것도.. 없어... "

무너진 잔해 사이로 걸어 들어와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여기는... 중앙 저택의 커다란 1층

홀이었어. 가끔 저택 안에 아무도 없을 때면, 홀의 피아노에 앉아 그를 위해 연주하곤 했다.

윤호는 내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좋아했어. 가만히 연주를 듣고 있다가 내 곁으로 다가와

건반을 치고 있는 손가락에 입을 맞추곤 했었다. 커다랗고 따스한 손으로 내 머리칼을 넘겨

주면서.

" 여기에.. 계단이 있었는데, "

너의 응접실과, 서재와, 침실로 가는 길목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너의 공간이 보였지. 그 안은 완전한 우리들의 공간이었어. 문을 걸어 잠구고 아무도 들어

오지 못하도록 만들었어. 그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했었나. 거의 타버린 채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 붉은 카페트 조각을 끌어 안았다. 나는 이 카페트를 좋아했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좋았어. 그 위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너의 모습도 좋아했어.

Page 518: Happy Together

저 위에는 침실이.. 침대가 있었어... 너와 나만이 누울 수 있었던 곳. 사랑을 나누고, 추억

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정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던 그 곳. 도대체... 왜 없는 거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줄 알았다. 다시는 이곳에서 살 수 없을 지라도, 우리가 사랑했던

공간 만큼은 존재할 줄 알았다. 그래서 언젠가 이곳으로 돌아와 너와 손을 잡고 기억들을

더듬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나는 아직도 너무 어려서.. 그저 환상을 품고 있었던 걸까.

" 이게... 다 뭐야... "

이제는 어디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잖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우리의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억에 구멍이 뚫렸어.

"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여기는 일반인 출입 금지에요! 돌아가세요!! "

멍하니 폐허 가운데 서 있는 재중을, 다른 이들이 발견하고 끌어냈다. 아직도 어디가 무너

질지 몰라요! 위험하단 말입니다! 그들의 말도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의지와 다르게

바깥으로 끌려가면서,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존재할 수 없는 마지막 은신처를

그리워 할뿐이다.. 아름다웠던 우리의 제이 에비뉴를.

* * *

" 그렇게 오지 말라고 노래를 불렀는데도 오냐. "

" 오지 말라면서 장소랑 시간 다 알려주는 건 무슨 심보에요? "

" ... 까놓고 얘기해서 박 형사 필요하니까 그렇지. 강력반에서 박 형사보다 총 잘 쏘는 사람

나 밖에 없잖아. "

" 얼래? 뭐에요? 그 잘난척은?! "

" 잘난척이란 건 진짜 잘난 사람이 떨어야 재수가 없는 거야. "

잠든 준수를 뒤로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몸이 제대로 낫지 않은 유천이지만

강력반 전체의 문제를 뒤로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동료 형사들이 뛰는 마당에 제 혼자만

애인 곁을 지키겠다고 남아있을 성격도 아니었다. 늦은 시각, 이태원은 소란스럽다. 마치

대낮처럼 밝다. 네온 사인이 바다를 이루고 소음이 사방에 가득하다. 조용했던 병원에서

지내다가 오랜만에 사람 사는 소리를 들으니 조금 살 것 같기도 했다. 장전된 총을 만지작

거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 대단한 인력이네... 다 데려 왔어요? "

" 응. "

" 아무튼 검사님 스케일 크게 노십니다. "

Page 519: Happy Together

" 이 꺼리만 제대로 처리하면 문제 없어. 인질만 무사히 데려다 놓고.. 그 다음에 재판이고

그 다음에 끝이야. "

"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무진장 길고 긴 여정이었던 거 같네요. "

" 길었지. "

워낙 별별 사건들이 다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유천의 시선은 아까부터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창민의 손. 들고 있는 저것은 분명히 총인데... 유천의 기억에 의하면, 창민은 사고

이후로 한 번도 손에 총을 쥔 적이 없다고 했다. 저 남자, 정말 모든 걸 정리하고 새로 출발

하기로 작정 한 건가. 유천을 힐끔 바라보다 창민이 픽 웃어버렸다. 들고 있던 총을 장난스

레 유천의 머리에 겨누면서.

" 제발 장난이라도 그런 짓 하지 말아요!!!! 씨팔! 간 떨어지잖아!! "

" 내가 총 잡는 모습 보니까 생소하냐? "

" 그럼 안 생소합니까!? "

" 오늘 똑똑히 봐라. 내가 너 보단 사격에 있어서 선배다. "

" 웃기네요. 오랫동안 쉰 손 주제에 어디에 들이대요? "

" 재능이란 건 말이야, 시간하고는 상관 없는 거야. 중요한 순간에 빛을 내는 게 재능이지. "

" 워워- "

손을 휘휘 젓고는 무전기를 입에 가져왔다. 오늘 사격 지시는 전적으로 유천의 담당이고

아직은 카르텔의 행동거지를 살피며 별 다른 실행은 옮기지 않았다. 연락망을 통해 알아낸

그들의 본거지는 이태원의 기지촌이다. 그 많은 인원이 한 곳에 숨어 있었다니. 놀랍기도

했다. 기지촌에는 뉴욕에서 불법 체류 도중에 쫒겨난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하나 같이

뉴욕의 불법 체류 기간 도중 K 카르텔의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뉴욕에서

한인 불법 체류자들을 도와주는 일을 앞장 서서 해왔고, 그 결과 FBI에게도 들키지 않는

안전한 은신처를 얻게 된 것이다. 불법 체류자들이 그들을 숨겨왔다.

" 기브 앤 테이크라는 건가... "

창민의 중얼거림이 멈추고, 유천이 한 곳을 가리켰다. 기지촌의 뒷골목에 위치한 건물이

그들의 은신처였다. 살펴본 결과, 3층의 방 하나에 인질들이 묶여 있었고, 그 주위에 그들을

지키는 조직원들 몇 몇이 보였다.

" 오케이.. 장소 확인했습니다. 옆 건물을 통해서 옥상 위로 올라간 다음, 이 건물 옥상으로

위치 옮겨요. 그 후에 로프 이용해서 뒷편 창문으로 내려와 한꺼번에 치고 들어갑니다. "

무전기에 대고 지시를 내린 다음, 요원들이 조심스럽게 옥상으로 이동했다. 옥상에서 로프

를 이용해 창문을 타고 내려와 들이닥칠 생각이었다. 자칫하면 인질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최후의 순간까지 들키면 안 된다. 이미 건물 뒤편으로 수 십대의 장거리 사격용 총이 배치

되어 있었다.

Page 520: Happy Together

" 그럼 저놈들 먼저 처리하고- "

뒷문을 지키고 있는 조직원들 몇 명이 보인다. 유천은 소음기를 단 총을 조심스레 꺼냈다.

저 자들을 처리한 후, 뒷문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가 창문으로 들어온 요원들과 합세한다.

미리 세워둔 계획이지만 워낙 큰 건수이다 보니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유천은 조용한 가

운데 천천히 조준을 맞췄다. 생포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심장이 아닌 다리와 팔을 겨눴다.

발포 동시에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형사들이 달려가 그들을 생포할 것이다.

" 지금...! "

창민의 발포 허가가 내려오자마자 유천이 방아쇠를 당겼다. 조용한 가운데 비명이 어두운

뒷골목에 짧게 울렸고, 그들이 총을 꺼내기도 전에 형사들이 달려와 팔을 꺾어버렸다.

" 오케이. 뒷문 뚫었... 씨팔, 뭐야! "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방금 전에 생포된 자들이 바로 혀를 깨물고 자결해버렸다.

아뿔싸, 검찰에게 잡히느니 제 혀를 물고 죽어버리는 놈들이었지. 놀이동산에서도 그랬다.

눈앞에서 혀를 물고 죽었지. 창민은 미간을 팍 찡그리고는 이미 시체가 된 자들을 뒤로 빼

냈다.

" ... 독한 새끼들. "

무전기에 입을 대고, 전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는 형사들 및 다른 요원들에게 전달을 내린다.

" 만만치 않은 놈들입니다. 죽는다 싶으면 발포하세요. 모두 발포 허가합니다. 총을 주먹

처럼 다루는 놈들이고, 국내 다른 조직과 같은 급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들이 총을 꺼

내기 전에 먼저 발포하십시오. "

제발 우리측에서 사상자가 나오지 말아야 하는데.. 마른 침을 삼키고 뒷문 앞에 형사들을

배치했다. 창문이 깨지고 요원들이 건물 안으로 침투하는 즉시 윗층으로 올라갑니다- 창민

의 말에 모두가 대답을 보내왔다. 어느새 건물 옥상 위로 올라간 자들이 몸에 로프를 감고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조심스럽게 줄을 내려 빌딩 벽을 타고 아래

로 내려갔다. 모든 것은 침묵 속에서 행해졌다. 그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 ... 지금. "

Page 521: Happy Together

낮은 목소리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빌딩 3층의 창문이 완전히 깨

졌다. 그와 동시에 뒷문이 열리고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이 삽시간에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

왔다.

" 인질 보호를 우선으로 해라!!! 한시라도 총에서 손을 떼지 마!!! "

" 박 형사!! 들어가지 말고 여기서 사격 지시 하고 있어!! 몸도 병신이잖아!!! "

" 누가 누구더러 병신이래요?!?!! "

아무튼 가만히 못 있는 성깔이지. 뒷문이 열리자마자 유천이 총 두 개를 집어들고 건물 안

으로 뛰어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미처 예상치 못했던 공격에 놀란 조직원들의 얼굴이 보

였다. 인정 사정 보지 않고 총으로 팔이나 다리를 갈겼다. 총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주로

손바닥 자체를 쏘아버렸다.

" 으아아.. 으아악!!!!! "

" 사정 봐주지 말고 치고 올라가!!!! "

" 인질은 무사합니까!!!! "

계단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조직원들과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가는 형사들의 치열한 총격전

이 계속 되었다. 총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그대로 바닥에 꿇어 앉혀진 채 머리에 총구를 허

락했고, 총을 가진 자들은 미친 듯이 길을 텄다.

" 이 개새끼들이!!! 모두 총 내려놔!!! "

" 죽기 싫으면 당장 무기 내려놓고 바닥에 엎드려!!!! "

" 막아!!!! 박 형사!! "

이런 씨...! 가지고 있던 총 하나의 탄환이 모두 떨어지고, 유천은 총을 버리는 대신 손에

쥐고 상대편의 머리를 가격했다. 총알처럼 빠른 것이 그의 발차기와 주먹질이었고, 수도

없이 밀려드는 형사들에 당황한 조직원들의 틈을 놓치지 않고 밀어붙였다. 우직한 손으로

머리채를 잡아채 얼굴을 무릎으로 찍어 버리고, 빈 총으로 목 뒤를 가격했다. 끝도 없이

들려오는 비명과, 몇 장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깨져버리는 창문 덕분에 유리 파편이 얼굴

로 날아들어왔다. 타들어갈 듯한 긴장감에 몸을 짓누르고 있던 총격전의 부상도 잠시 잊혀

진 듯 했다. 그는 천상 형사였고, 그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 박 형사!!! "

뒤를 돌아볼 찰나, 자신의 얼굴에 총구를 겨눈 조직원 하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제발,

지금은...

Page 522: Happy Together

심장이 떨어질 찰나, 조직원이 눈앞에서 피범벅이 된 손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 ... 검사님. "

" 앞으로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러. "

분명히 반듯하게 메어져 있던 넥타이가 어느새 거칠게 풀어 헤쳐졌다. 피가 튄 와이셔츠는

빨아도 깨끗해지지 않을 것 같다. 총을 들고 씨익 웃고 있는 창민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긁힌 건지 얼굴에 온통 생채기 투성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폭파 사고로 제정신이 아닐 텐데.

하긴.. 여기서는 누구도 제정신으로 살아남을 수가 없지.

" 폼 잡지 말고 뒤나 돌아봐요!!! "

유천과 창민이 동시에 다시 총을 뽑았다. 물밀듯이 밀려들던 조직원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이 몸으로 느껴진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창민이 빈 총을 버리고 뒷춤에서 새 총을 꺼내

들었다.

" 인질들은 어떻게 됐어!!! "

" 모두 무사합니다!! "

" 인질 보호를 우선으로 합니다! 지키고 있는 인질들 모두 아래로 내려보내요!!! "

.

.

.

연락이 완전히 끊어진 참모와는 더 이상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말만

지겹도록 반복되고 있다. 재중은 들고 있던 전화를 힘없이 내려놓았다. TV에서는 방금 벌어

진 인질극에 대한 속보가 전 채널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태원 기지촌에 잡혀 있던 인질들은

전원이 무사하게 구출되었다고 한다. TV에 간간히 보이는 창민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돌아

와 사건을 일사천리로 진행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젠 어떡하지. 도무지 답을 모르겠어. 머릿속이 텅 비어가는 느낌이다. 윤호는... 정윤호는

그 차가운 감옥 안에서 나만을 믿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가 믿으라고 말했는데.

" 윤호야... "

나... 너 살리지 못하면 어떡하니.

* * *

Page 523: Happy Together

아아

이번편은 특히나 더 레포트 두 개 쓴 기분ㅠ oㅠ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34

오랜만의 재판이라 긴장되긴 긴장되네. 그러고 보니 내가 마지막으로 맡았던 재판이 언제

였더라. 아... 천안에서 일어났던 연쇄 살인범 때가 마지막이었지. 그 때의 재판은 잘 기억

나지도 않는다. 현장범이었고 워낙 흉악한 놈이라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도 사형 판결 받고

재판은 무사히 끝났었다. 지금은 그 때의 마음가짐과 확연히 다르다. 아주 길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이 사건을 마무리 짓는 단계. 사건 자체에도, 그리고 나에게도.. 아주

많은 일들이 있었던 기분이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걸 정리하고 쉬고 싶은 그런 기분.

" 준수 씨는? "

" 옆 방에 앉아 있어요. "

" 아직 최면 안 들어갔지? "

" 네. "

" 여기로 오지 말고 준수 씨 옆에 있어. 가뜩이나 불안해 할 텐데. "

"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맞는 건지 모르겠어요, 검사님. "

" 언제는 뭐 확실히 알고 했나. 모 아니면 도 라고 생각해. 안 되면 안 되는 거고.. 되면

좋은

거지. "

" ... 검사님은 역시 그렇게 잘 차려입은 모습이 제일 잘 어울려요. "

" 박 형사는 그 가죽 자켓에 청바지가 제일 잘 어울려. "

준수는 이거 싫어하던데. 유천은 피식 웃고 방을 나섰다. 재판은 한 시간 후. 지금쯤 상대편

변호사와 피고인도 모두 도착했을 거다. 오늘 재판에서 모든 것이 판가름 나겠지. 그는 어떤

판결을 받게 될까. 그건 나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김재중 당신이 원했던 결과는 절대로

나오지 않아. 책상 위에 올려둔 서류와 안경을 챙겼다. 그리고... 본인에게 돌려줘야 할 물건

도 함께.

.

.

.

" 떨려? "

" 응. "

준수는 넘어가지 않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될 줄은

Page 524: Happy Together

몰랐다고 생각하면서. 법정에서 퇴장 당하며 다신 이 안으로 들어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준수에게 하나의 충격이자, 하나의 안도였다. 정상인으로 이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충격

과, 이토록 숨 막히는 자리에 다시는 올 일이 없다는 안도가 교차했다. 그러나 지금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다. 그저 두려움과 불안만이 교차했다. 다시 저 자리에 섰을 때 재판을 바라

보는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무서워.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기분은 끔찍하다.

" 최면을 걸었을 때.. 잘못해서 사고라도 일어나면 어떡해. "

" 무슨 사고? "

" ... 미쳐버린다던가. "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인 또 다른 내가 나오면 어떡해. 누군가에게 달려들어 목이라도

조른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야. 저런 위험 인물을 법정 안으로 데려온 검사님을 욕할 거야.

모든 것이 악순환이야. 나의 이 빌어먹을 병이 고쳐지지 않는 이상,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처럼 손가락질을 받아. 그래서...

" 또, 또, 무서운 표정 하고 있다. "

누구보다.. 형이.. 형아가.. 내 곁에 있는 것이 너무도 힘들어.. 나 같은 사람 데리고 살아서

욕만 먹잖아. 잃는 것만 많잖아. 살만 빠지고, 잠도 자지 못하고, 늘 걱정이 태산이고, 대체

사랑해서 행복한 것이 아무 것도 없잖아. 그게 어째서 사랑하는 거야. 고통 받는 거지.

" 너 몰래 두고 나가서 화났었어? "

" .......... "

" 다 잘 됐잖아. 인질도 무사히 구출했고, 몸도 다친데 없이 돌아왔잖아. 응? "

그러나 막상 그가 내 곁에 없다고 생각하면, 밀려드는 두려움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유

천이 인질극을 도우러 병원을 나갔을 때, 아침에 일어난 준수는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음을

알고 그대로 울어버렸다. 잠시 어디에 나갔겠지, 화장실에 갔겠지, 다른 치료를 받으러 갔

겠지,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어. 곁에 유천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포가 밀려와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라는 사람은 참 아이러니지. 형이 떠나길 바라면서, 형이 떠나면 견딜

수 없어 해.

" 이 재판이 끝나면... 선물 줄게. "

" ... 무슨 선물? "

" 있어. 궁금하지! "

이 상황에서도 그런 장난을 치고 싶니. 힘없이 웃어버렸다.

Page 525: Happy Together

"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선물이야. "

" 뭔데... "

" 기대해도 돼. 재판 끝나면 줄게. "

싱긋 웃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던 중 의사가 들어왔고, 준수는 자신의 차례가 왔음을

직감했다.

" 기분 어떠세요? "

" ... 그냥, 그래요. "

" 상당히 기력이 약해진 상태가 때문에 그만큼 최면에 쉽게 걸려요. 재판 도중에 최면이

깨지는 상황은 아마 없을 겁니다. "

" 그래야죠.. "

" 그럼, 눈을 감으세요. "

일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른다. 다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금의 나약하고 병자인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만족해.

.

.

.

" 윤호야, "

" .. 웬일이냐. 이름을 다 부르고. "

" 불러보고 싶어서 그랬다. "

많이 피곤해 보인다. 잠도 자지 못한 건지 눈이 퀭하고, 피부도 까칠해. 머리를 토닥거리고

재판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아까 전까지 머리가 터질 것처럼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오히

려 텅 빈 것처럼 새하얗다. 오늘 재판에 처음 나오는 창민은 무엇을 준비했을까. 어떤 말로

내 입을 막아버릴까. 그런 것들도 이젠 지긋지긋해.

" 있잖아. 만약에.. 진짜 만약에, 그러니까 정말로 만약에. "

" 뭐- "

"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어떡할래. "

" 최악의 상황? "

" 내가.. 너 구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 "

" 사형? "

그 말 좀 쉽게 하지 마. 그 말 나오지 않게 하려고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개지랄을 했는데.

" 그래. 사형. "

Page 526: Happy Together

" 글쎄, 그럼 뭐 죽겠지. 요새는 전기 의자 방식이 없어서 다행이야. 아픈 건 질색이거든. "

" 목 매달아 죽는 건 안 아프냐, 병신. "

" 하긴.. 그것도 아프겠지. 잠깐이긴 하지만. "

너한테는 불안감이라는 게 없냐? 하도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얘기 가지고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

" 걱정 마. 사형 당하게 되면 죽기 전에 유언으로 꼭 니 얘기 해둘게. "

" 뭐라고? "

" 같이 죽여달라고. "

" ......... "

" ......... "

" ......... "

" .... 야, 농담이야.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

그래.. 너만 죽게 될 바에는 차라리 같이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 * *

"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다. 재중은 반대 편에 서 있는 창민을 바라보았다.

법정 안에서 그의 모습은 처음 본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장과 뿔테 안경. 이 자리에 어울

린다. 이 자리에 서야 될 것만 같은 분위기다. 나약해지면 안 되는데.. 적을 보자 심장이 더

오그라든다. 지금 손을 잡아줘야 할 사람은 나인데.. 윤호야, 네가 내 손을 잡아줬으면 좋겠

다. 지금 네 심정이 어떨진 몰라도, 나는 지금 무지 떨리고 두렵다. 무섭다.

" 존경하는 판사님, 그리고 재판에 참석해주신 일반인 여러분. 재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결과가 둘 중 하나인 재판. 또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재판. 지금까지 이

재판의 종류는 아마도 후자 쪽이었을 겁니다. "

갑작스러운 증인의 퇴장과 불충분한 증거에 대한 재빠른 공격. 그리고 몇번이나 법정에서

소란을 피우던 급한 성격의 검사까지. 운이 좋은 건지, 그들의 능력인 건지 재판은 그들이

원하던 대로 흘러갔다. 체포하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던 정윤호는 생각지도 못하게 가벼운

형을 선고 받고 풀려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창민은 잠시 저만치 앉아있는 윤호와 그 옆에

서 있는 재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 피고인. 피고인은 이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

Page 527: Happy Together

준비해 두었던 서류를 들었다. 정윤호의 저택에서 목숨을 걸고 찾아낸 서류들. 정말 목숨을

걸고 찾아냈지. 조금만 이중 부비트랩의 경고를 늦게 들었다면. 조금만 저택에서 늦게 빠져

나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재중의 표정에 변화가 있는 반면 윤호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 피고인만이 알 수 있는 서류일 텐데요. "

저 남자. 찾아냈구나. 윤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치도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 첫 번째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이 서류는 피고인 정윤호의 저택에서 발견된 극비 문서로

대한민국 마약 루트 독점 계획에 관련된 문서입니다. "

윤호야.. 자기도 모르게 재중이 중얼거렸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조용히.

" 이 서류들 또한 함께 제출합니다. 러시아의 무기 밀매상들과 거래한 내역 및, 일본으로

역 수출하는 무기들의 목록이 적힌 서류들입니다. 두 번째 서류는 마약 거래에 대한 서

류로, 주요 거래국은 러시아와 중국, 홍콩, 일본입니다. 또한 그들은 Tox mapko라는

신종 마약을 뉴욕에서 수입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거래했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부유층

자제들의 마약 파티에서 입수된 마약이기도 합니다. "

장내는 조용하다. 창민은 서류들을 제출한 후 재중을 바라보았다. 절대로 반박할 수 없는

서류들이다.

" 피고측 변호인. 변호인은 이제껏 피고인에게 마약 및 무기 밀매에 대한 혐의를 부인해

왔습니다. 불충분한 증거를 원인으로 대오면서 말입니다. 눈앞에서 확실한 증거를 둔

지금도 계속 부인하시겠습니까? "

" ....... "

" 아니면, 준비하신 반론이라도 있으십니까? "

" ... 없습니다. "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렇게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다니.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창피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잖아. 나는...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저런 걸 내 눈 앞에 들이대며

말을 해보라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

" 좋습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이 녹음 테이프와 서류를 두 번째 증거로 제출합니다.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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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이태원 기지촌에서 일어났던 인질극을 기억하실겁니다. 남산에서 일어났던 총격전

때 달아난 K 카르텔 조직원들의 임시 거처가 있던 곳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보스의 석방

을 위해 타 조직원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았습니다. 그 후 정윤호가 갖고 있던 살인 및 마

약 루트 독점 계획 등의 모든 혐의를 타 조직원들에게 강요했습니다. "

살아는 있을까.. 자신과 자주 통화했던 윤호의 참모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혹시나 윤호가

감정에 치우쳐 법정 안에서 소란을 피우진 않을까 잠시 긴장했다. 자신의 조직원들에 대해

서라면 늘 민감하게 대처했던 윤호였다. 다행히 그는 소리를 지른다든가 난동을 피우진 않

았다. 그저 가만히 창민을 주시할뿐이다. 그래서 더욱..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 이 테이프는 피고인의 죄를 덮어 쓸 것을 요구받은 자들의 자백입니다. 또한 진추회가

러시아 마약상들과 거래 도중 검찰에게 붙잡힌 것도 모두 K 카르텔의 계획이었으며,

무고한 죄를 덮어쓴 자들은 현재 모두 석방 조취를 취한 바입니다. 이 서류들은 그들의

진술을 문서로 정리한 것입니다. 피고측 변호인. 변호인은 이 증거에 대해 반론하실 의

사가 있습니까? "

" ... 없습니다. "

법정 안이 술렁인다. 검사의 끝도 없는 증거 나열에, 피고측 변호인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

고 그대로 수긍하고 있었다. 재중은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윤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가 안쓰러웠다.

" 좋습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피고측은 현재까지 증거 불충분으로 모든 혐의를 부인했습

니다. 하지만 지금, 모든 증거물을 제시한 후 한 마디의 반론도 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모든 범죄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K 카르텔의 보스 정윤호

는 자신의 조직원들과 함께 불법 체류자 입장으로 대한민국에 입국. 그 후에 뉴욕 및 세

계 각국에서 마약을 밀수했습니다. 또한 타 조직에서 행해지던 마약 거래를 독점하기

위해 월등하게 소지하고 있던 총기류로 서울 및 수도권의 조직들을 상대로 마약 거래

중단을 요구했습니다. 그 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조직의 보스는 무자비하게 살해

했습니다. "

" 이의있습니다. 살인에 대해서는....! "

살인은 안 돼. 극형이다. 재중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창민에 의해 저지되었다.

" 제출한 증거 서류들 중 마약 거래 독점 계획에 관련 문서를 보시면 증거가 될 만한 문항

들이 있습니다. 그 서류 안에는 방해가 되는 조직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제거할 것임을

드러내는 사항들이 몇 몇 있습니다.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

" 계획이 언제나 실행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판사님!! "

" 그렇다면 그 동안 살해 되었던 조직의 보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그들은

모두 카르텔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마약을 거래하던 자들이었습니다. "

" 그건... "

Page 529: Happy Together

" 판사님. 증인의 출석을 요청드립니다. "

증인...? 재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증인이라니. 도대체 또 어떤 증인이 있단 소리지. 증인은

없어. 김준수는 퇴장당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심창민이 날고 긴다고 해도, 퇴장당한 증인을

불러들일 방법 따위는 없다. 게다가 김준수는 만인 앞에서 병명이 들통났는데.

" 피고인 정윤호의 살인을 목격한 증인입니다. "

법정 양 옆에 위치해 있던 문이 열리고, 준수가 들어왔다. 그의 곁에는 유천과 의사가 함께

였다. 법정 안이 다시 술렁거렸다. 예전에 자신들 앞에서 공개된 충격적 영상의 주인공인

그가 아닌가. 분명히 퇴장 당했는데 어째서 다시 법정 안으로 들어서는 건지. 게다가 그는

기절한 상태였다. 휠체어를 탄 채.

" 이의있습니다!! 증인 김준수는 분명히 법정 안에서 퇴장 당했습니다!! 그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로, 그에게는 증인의 자격이 없습니다! "

"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증인으로 요청한 이 자는 김준수가 아닌 다른 자입니다. "

"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이게 어떻게.... "

" 피고측 변호인은 지난번 법정에서 증인 김준수의 해리성정체장애를 이유로 그를 퇴장

시켰습니다. 해리성정체장애는 한 사람의 몸 안에 여러 인격이 존재하는 것으로, 각각

다른 인격이 따로 살아있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요청한 증인은 김준수가 아닌 또 다른

인격으로, 퇴장당한 김준수와는 분명히 별개의 사람입니다. "

" 말도 안 돼... "

증인석에 선 김준수는 아직도 기절한 상태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창민마저 혼란스러웠다.

창민 뿐이 아니라 재판의 과정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무엇이 옳은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완벽한 다중인격자로 판명되었으니, 퇴장당한 김준수가 연기하는 것이라 생각

할 수도 없었다. 다만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고 현재까지 이러한 유례가 없었기 때문에 어

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 판사 또한 알 수 없었다.

" 이건 말도 안 되는 행위입니다!! 이곳은 법정이지 정신병원이 아닙니다!! "

" 존경하는 판사님, 분명히 유례가 없던 일입니다. 하지만 지난번 법정에서 피고측 변호인

이 밝힌 바 있드시 김준수 씨는 분명한 다중인격이며 그 안에 또 다른 인격이 존재합니다.

정윤호의 살인을 목격한 것은 그의 또 다른 인격으로, 검찰이 피고인의 몽타주를 그리고

수사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도 또 다른 인격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 판사님!! "

" 어째서 김준수 씨가 살인을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의 살인 행각을 상세하게

설명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분명히 그 살인을 목격한 자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범인의 몽타주 또한 실제 피고인 정윤호와 일치합니다. 몽타주라는 것은 목격자가 존재

하지 않다면 절대로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목격자를 증인으로 요청합니다, 판사님. "

" ... 인정합니다. "

" 판사님!!! 그는 정신병자입니다!! 제정신이 아닌 자를...!! "

Page 530: Happy Together

" 그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신병 덕분에 검찰이 피고인을 체포한

것도 사실입니다. "

일단.. 증언을 들어봅시다.. 판사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증인의 출석은 허락

받았다. 이제는 모든 걸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창민은 의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발.. 이 법정 안에서 김준수의 마지막 인격이 나오지 않기를.

.

.

.

" 증인은.. 신성한 법정 안에서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까? "

" 네. 맹세합니다. "

아무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증인석에 서 있는 저 남자가 누구인지. 의사가 무어라 기절한

준수에게 지시한 후, 그는 얼마 후 눈을 떴다. 그리고 약간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

보고는 스스로 증인석에 섰다. 분명히 퇴장당한 김준수의 얼굴을 하고서 김준수가 아니라

한다.

" 저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일정한 직업도 없고.. 여기 계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제 몸이 아닌 다른 이의 몸을 빌려 살아가는 인격체입니다. 하지만 저란 사람은

분명히 살아있고.. 저는 분명히.. 누군가의 살인을 목격했습니다. "

그는 말하는 것이 조금은 힘들어 보였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마지막 인격을 통제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최후의 기회라 생각하며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 저기 피고인석에 앉아있는 저 사람이.. 제가 본 살인자입니다. 그 말고도.. 그의 주위엔

다른 남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저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들은 알아채지

못했고.. 저는 그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우혁.. 이었던가..

그랬어요.

그들이 죽인 자의 이름이. "

맞아. 창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윤호의 제안을 거절한 타 조직의 보스다.

" 잘 들리진 않았지만.. 마약이라는 단어는 여러 번 들렸습니다.. 왜 말을 듣지 않냐는 소리

도 들었어요. 그들은.. 몇 번이나 남자를 협박하다가.. 곧 총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저기 앉은 정윤호 그가 총을 꺼냈어요. 마지막에 들었던.. 그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유언은

필요 없냐고 했어요.. "

Page 531: Happy Together

" 아니야.. 다 거짓말이에요...! "

이성을 잃을 것 같은 재중이 떨리는 눈을 차마 감지 못했다. 그만 말해요.. 제발.

" 자신의 발 아래 짓밟힌 남자를.. 망설임 없이 쐈어요.. 그리고... 피가 튀었고.. 정윤호의

구두에도 피가 묻었어요. 그가.. 자신의 구두에 묻은 피를 닦으러 고개를 숙였고.. 그 때

저를 발견했습니다. 아니... 김준수의 모습을 한 저를.. 그리고 저를 죽이려 총을 꺼내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탄이 들어있지 않았어요.. 저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습니다. 이상.. 입니다. "

" 다 거짓말이에요!!! "

" 피고측 변호인은 조용히 하세요. "

" 말도 안 돼...!! 인정할 수 없습니다!!! 판사님.... "

위험해요.. 의사가 말했다. 그만 최면을 풀자는 의사의 눈짓에 창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조금만 더.

" 제가 할 수 있는 증언은 여기까지입니다. 김준수 씨와 저는.. 서로 다른 인격체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살인이라는 것이 불행

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피고인 정윤호는... 살인자라는 것,

이상입니다. "

고마워요. 창민이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했다. 사실은, 자신이 누구에게 고맙다고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유일한

증인의 증언은 이제 모두 끝이 났다. 자신이 준비한 카드는 여기까지다. 결정은 내 것이

아니야.

휠체어에 앉은 그는 바로 법정을 빠져 나갔다. 법정을 빠져 나갈 때까지 우려했던 폭력적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준수의 모습이 완전히 법정에서 모습을 감추고, 그제야 창민이

다시 중앙에 섰다.

"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사건의 증거, 증인은 여기까지입니다. 나머지, 마지막 판단은

판사님의 몫입니다. 피고인 정윤호는 뉴욕 출신의 마피아 K 카르텔의 보스이자 지금

까지 일어난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는 마약 및 무기를 밀매했으며, 자신의

계획에 장애물이 될 만한 모든 자들을 가차없이 살해했습니다. 목격자를 없애기 위해

김준수를 납치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폭력을 가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확인되지

않는 가짜 신분으로 거대한 토지를 불법으로 사들였고, 결국엔 자신의 죄를 다른 자에게

덮어 씌우기 위해 죄 없는 자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았습니다. "

아니야.. 그건 윤호가 한 게 아니야.. 그건 내가 했어요. 내가.. 윤호를 살리려고,

Page 532: Happy Together

" 모든 죄목을 미루어 봤을 때, 그에 합당한 처벌은 단 하나 뿐입니다. 본인은 피고인

정윤호에게 사형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

* * *

-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어떡할래.

- 최악의 상황?

- 내가.. 너 구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

- 사형?

그 대화를 나눴던 것이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주 멀게만 느껴진다.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재중과 윤호, 누구도 말이 없었다. 법정 안에서 몇 번이나 이성을 잃을 뻔

했던 재중은 가까스로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 있었다.

" ....... "

툭, 하는 소리. 앉아있는 윤호의 머리가 바로 곁에 서 있는 재중의 다리에 기댄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편해.. 하고 중얼거리면서.

" 네 무릎 베고 자고 싶다.. 재중아. "

" .......... "

" 그 동안 너무 피곤해서 자고 싶어. 아주 푹. "

" 너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 "

" .......... "

" 잠들어서, 깨기 싫을 정도로 피곤해? 너는 널 죽이겠다는 판결이 나와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겠다. 피곤하다며. 평생 재워주겠다는데 아주 좋다고 환영하겠다. "

" 재중아, "

" 너는 양심도 없어? 너는 감정이란 것도 없어? 너는... 너는 내가 안 보여...? 옆에서 네가

어떻게 될 지 몰라서 지금 불안해 반 죽을 거 같은 난 안 보여? 어떻게 그런 소리를 아무

렇지 않게 하냐... 너란 인간은 어떻게 그래!!! 왜 그렇게 태평해!! 네 머릿속에는

죽는다는

개념이 아예 없어?! "

" 그런 거 아니야. "

" 난 죽을 거 같아!! 난 미치겠어!! 아주 돌겠어!! 너!! 너 죽으면 난 살 것 같아?! 지금

한 사람 목숨 가지고 죽이네 살리네 판결 기다리는 줄 알어?! 두 사람이야.. 나도...

나도 못 살아, 너 살지 못하면. 그런데 넌 어떻게 그래...? 왜 넌 제정신이야...!! "

나도 제정신은 아니야, 재중아... 그런데 지금은 내가 죽고, 죽지 못하고의 문제 보다..

Page 533: Happy Together

몇 날 몇 칠의 밤을 샜는지 모를 네 힘든 얼굴과 쓰러질 것 같은 나약한 몸이 더 신경

쓰여서 그래. 내가 이 자리에서 죽기 싫다고 울부짖고 너한테 매달리면, 넌 여기서 더

무너질 거잖아. 그거 알면서 내가 어떻게 너한테 그래.

" 그 동안.. 고생 시켜서 미안하다. "

" 왜.. 왜 그런 말 해.. 앞으로도 고생 시켜도 좋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마... "

" 고생해줘서... 고마워. 나 때문에 고생해서.. 정말 미안하다... "

그리고 사랑한다... 재중아.

.

.

.

" 피고인 정윤호는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너무나 많은 죄를 저질렀다. 살인. 마약 밀매.

무기 밀매. 납치. 협박. 폭력. 그 모든 죄가 무겁기에 합당한 처벌은 단 하나 뿐이라는

것이 법원의 판결이다. "

조용한 법정 안에는 침묵 만이 감돌았다.

" 피고인 정윤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

가끔.. 저녁에 홀로 잠이 들 때면 이런 생각을 종종 해왔다. 그가 사형을 선고 받으면 어떨

까. 그가 내 눈앞에서 죽음을 선고 받으면 어떨까. 그가 사형대로 올라간다면 어떨까. 나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상상은 그저 상상일 뿐이었다. 반드시 그를 구해서

둘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나자고. 그렇게 윤호에게 말할 생각이었어. 이제는 손에 피를

묻히는 짓은 그만 두자. 그래서 나를 힘들게 만드는 짓은 그만 둬. 그냥.. 우리 다른 이들

처럼 평범하게 연애하며 세상 속으로 스며들자.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

" 당신이 뭔데... "

네가 뭔데 정윤호한테 죽음을 선고해.

네가 무슨 권리로 정윤호를 죽여. 당신들이 뭔데 정윤호를 죽여....

" 당신이 뭔데 정윤호를 죽여!!!!! 누구 마음대로 사형이야!!! 왜 그가 죽어!!!! "

" 재중아! "

Page 534: Happy Together

윤호가 일어설 틈도 없었다. 조용히 사형 판결을 듣고 있던 재중이, 순식간에 판사가 앉아

있는 위 쪽으로 뛰어 올라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판사에게 달려드는 재중을 주위에

있던 경찰들이 제지했다. 워낙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라 누구라도 말릴 틈이 없었다.

" 왜 정윤호가 사형이야!!! 당신들이 뭘 얼마나 안다고 사형이야!!! 당신들이 뭔데 사람을

죽여!!!! 누가 사형이야!!!! "

" 이 사람 끌어내!! 당신 미쳤어?!!! 감히 어디서... "

" 감히!? 씨발... 감히 정윤호한테 사형 선고를 내린 게 누군데!!! 아악!! 이거 놔!!!! "

도저히 안되겠다 싶은 건지 주위에 배치되어 있던 다른 경찰들도 달려 들었다. 무릎이 꿇

리고 목이 조아려진 재중이, 끊임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난 인정 못 해. 정윤호가 죽는 거

인정 못 해. 우리 다시 시작하지도 못했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 제대로 키스 한 번

못했어. 그런데 죽여..? 누가 누굴 죽여... 나도 죽이지 못하는 남자에게 누가 손을 대..

" 그만해!! 김재중!!!!! "

무엇이 무너지고, 고함이 토해지고,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는 창민 마저 당황스러운 소란이

계속 되었다. 저 남자, 저 정도였나. 그렇게 이성을 잃을 정도로 정윤호를 사랑했던가. 원하

던 판결을 받아낸 창민의 속이 시원스럽지가 못하다. 그러던 중 윤호의 목소리가 법정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소리에 재중의 울음이 멈췄다. 울부짖으며 죽이지 말라던 재중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윤호야... 자그마한 울림이 목구멍에 맺혔다.

" 그래!!! 씨팔!!! 다 내가 죽였어!! 됐어?!! 다 내가 총으로 쏴 갈겼다!!! 머리통을 쏘고!!

목을

쏘고!! 다 죽여버렸어!!!! 속이 시원해?!!! "

" 그만해... 윤호야아.... 너 안그랬다고 말해..... 죽이지 말라고 말해.... "

" 죽여!!! 사형이고 지랄이고 해!!! 다 끝내!!! 나도 이 재판 지긋지긋해!!! 쳐 앉아서

당신들

개지랄 떠는 거 보기 지겨워!! 그러니까 끝내!!!! 다 내가 죽였어!!! 모두 내가 한

짓이다!!

됐어?!! 씨팔! 죽이라고 해!! "

너 왜 그래.. 이건 장난이 아니잖아.. 객기 부릴 일도 아니잖아.. 너 죽는대잖아....

" 그러니까... 다 내가 죽일 놈이니까.. 내 잘못이니까..... "

" ...... "

" 너도... 그만해, 김재중... "

" ... 왜... 왜 그만하라고 해... 흐으윽... 그만 둘 일이 아니잖아... 너 죽잖아...! "

" 이젠.. 정말 그만 두자. 다... 끝났으니까... 너도 그만 둬. "

" ..... "

Page 535: Happy Together

" 나 때문에 그만 울라고, 병신 새끼야.... "

다 끝났으니까, 다 끝낼 테니까.... 나 때문에 그만 울어. 그만 빌어. 그만 힘들어 해.

그만..

다 그만 두자... 사랑하고 미안한... 재중아..

* * *

" 수고하셨습니다. "

"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

" 수고하셨어요. "

재판이 끝난 후, 물 밀 듯이 밀려드는 취재진을 피해 간신히 한적한 곳으로 피신했다. 창민

은 벽에 기대 아직도 허탈한 마음을 달랬고,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그의 어깨를 치며 인사를

건넸다. 아마도 올 한 해 가장 시끄러웠던 재판으로 기억 될 사건의 주역으로, 수고했다며.

창민은 힘겹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힘들었어. 이제... 다 끝났다.

" 준수 씨는? "

" 병원으로 갔어요. 저도 곧 갈 겁니다. 아무튼.. 수고하셨어요. "

" 그래... 너도 수고했어, 박 형사. "

옆으로 선 유천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하나를 물고 다른 하나는 창민에게 내밀었다.

" 이상하죠. "

" 뭐가. "

" 원하던 대로 다 받아냈고... 우리 준수, 이제는 안전할텐데... 왜 이렇게 기분이, 뭐랄까..

허탈하기도 하고.. 엄청나게 긴 마라톤 뛴 사람처럼 힘들고 쓰러져 자고 싶긴 한데..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은 없는 거 같고- "

" 동감이야. "

자꾸만 판사에게 달려들으며 울부짖던 재중이 떠오른다. 이상하지. 지금까지 적으로 알고

지낸 사람인데 말이야. 막상 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고 나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문제들이 마음에 걸리고 난리네. 자신이 변호하던 자가 사형 선고 받은 후

기절할 듯 울어버리던 김재중이나... 이젠 그만 두자며 최후의 순간에 자신이 살인했다고

실토하는 정윤호나, 다 마음을 이상하게 만들어. 동정도 아닌데 말이지.

" 그.. 김재중이란 남자, 우리한테 그랬잖아요. "

Page 536: Happy Together

" 응? "

" 정윤호랑... 그 자식이랑.. 깊은 관계 아니라고. "

" 그랬지. "

" 지금 와서 보니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그죠? "

" 응. 거짓말이더라. "

" 사형 판결 나고.. 그리고 나서 갑자기 막 미친놈처럼 단상 위로 뛰쳐 올라가 달려들면서

소리 지르는데... 그냥.. 마음이 뭐랄까, 조금 먹먹하기도 하고. 웃기죠? 우리 죽이려고

안간힘을 쓰던 놈들인데 말입니다. 이게 이긴 자의 여유라는 건가. 이긴 자의 동정인가. "

" 어쨌든 확실한 건 우린 이겼다는 거야. "

후우우.. 둘이 동시에 담배 연기를 뱉었다. 어쨌든 재판은 끝냈다. 아니, 전쟁은 끝났다.

" 먼저 갈게요. "

" 그래. 준수 씨한테 안부 전해. "

" 네. "

" 곧 찾아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

맛있는 거 사와요! 크게 소리 내며 저만치 뛰어간다. 든든한 그 어깨를 바라보다가, 담배를

비벼 껐다. 자... 이젠 뭘 해야 하지. 재판이 끝나면 늘 이렇다. 밀려드는 허탈함과 피곤함.

포상 휴가를 얻어내러 가볼까.. 발길을 돌리려는데, 저 쪽에서 누군가 걸어온다. 아니, 경찰

에게 몸을 기댄 채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김재중. 창민은 잠시 그 자리에 섰다. 곧 탈진할 것

만 같은 얼굴이다. 지금까지 법정 안에서 소리 지르고 난동을 부렸을 것이 뻔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기분은 어떨까. 왠지 모를 안쓰러움. 들어서는 안 되는

동정심. 쯔읏..

" 잠시만요. "

제 옆을 지나치려는 재중의 눈은 흐리멍텅하다. 넋이 나가 보이는 그를 멈춰 세웠다. 그가

고개를 돌려 창민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아마 곧 쓰러지겠지. 사랑에

관한 고통은 절반은 이해할 수 있다.

" 이거... 당신한테 전해줘야 될 거 같아서, "

품 안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을 받아든 재중의 손이 가늘게 떨려온다.

" 정윤호 씨의 저택 금고 안에서 함께 찾은 겁니다. 주인한테 돌려주고 싶네요. "

" ........ "

Page 537: Happy Together

" 남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진이라.. 그 안에 함께 넣어둔 것 같아요. "

" ........ "

" 그럼, "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등을 보인 채 먼저 걸어갔다. 내 몫은 여기까지. 내가 할 일도 여기

까지. 자... 그럼 이제부터 할 일을 찾아보자.

.

.

.

그건 낡은 사진이었다. 자신의 모습이 찍혀 있는. 몇 년 전인지도 까마득한. 아주 오래전에

뉴욕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 재중의 옆모습이 흐릿하다.

건반을 내리치는 손가락은 하얗다. 그의 머리칼은 그 때도 검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런

재중을 보는 윤호 또한 그러했으리라.

" 아... "

다른 이들에겐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아했던, 그래서 그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그의

마지막 비밀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 윤호... 윤호야... "

그리고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 * *

오늘 나에게 힘을 내게 해준 새벽에 먹은 죽 한그릇과 상상 플러스 재방송에게 이 영광을

바칩니다-_-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35

교수형은 오전에 이루어진다. 사형 집행을 오전에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후의 어두

운 하늘 아래서 목을 매는 것 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형수들은 아침을 기다린다.

그들은 자신의 사형 집행날을 알 수 없고 그저 기다릴 뿐이다. 아침이 무사히 지나가면 다

음날 아침을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했던 날 아침에 사형을 집행한다면, 세상

Page 538: Happy Together

에 대한 미련을 정리할 틈도 없이 숨이 끊어져 버리는 것이다. 윤호 또한 그랬다.

" 면회. "

지독하게 어둡고 습한 독방을 나설 때면 늘 눈을 찡그린다. 이젠 햇빛보다 어둠이 익숙하

다. 독방에서 지낸 시간도 꽤 늘어가는 구나. 생각해보면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나. 씁쓸

하게 웃어버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면회실로 가는 길. 길지 않은 그 길은 가운데서 두 갈래

로 나눠진다.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답답해져 가는 가슴을 발견하다.

" 언제 저리로 갑니까? "

" 내가 어떻게 알아. "

두 갈래로 나뉘어진 길. 한 길은 면회실로. 한 길은 사형대로.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이 길로 들어서는 순간 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기쁨이, 저 길로 들어서는 순간 그 기쁨을

뒤덮는 절망이. 왜 하필 이런 식으로 길을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면회실

문으로 들어섰다. 재중은 정장 차림이 아니었다. 편안한 청바지 차림으로 어깨도 한결 누

그러져 있었다. 재판 때 재중의 모습은 늘 우스웠다. 멋드러진 정장을 빼 입고 어울리지도

않는 존칭을 써대며 차갑게 굴곤 했었지.. 이젠 다 끝났다 이거냐.

" 둘만 남을 수는 없나요? "

" 안됩니다. "

" 재판도 다 끝났어요. 얼마 안 남았잖아요.. 둘만 있게 해줘요. "

" 법에 어긋납니다. "

언제까지 이렇게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 틈에 둘러 싸여서 눈치나 보며 얼굴 힐끔 바라봐야

되는 거냐. 재중은 눈물이 터질 듯한 눈으로 다시 한 번 부탁했다.

" 이 남자.. 이젠 흉악범도 아니고.. 피고인도 아니고, 마피아, 무슨 깡패, 이런 거

아니에요.

사형수에요. 얼마 남지 않은.. 그러니까 나가줘요. 부탁이에요. "

사형수. 너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니... 아니면 내가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니. 결국엔 윤

호와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울음을 터뜨린 재중이, 끄윽끄윽 소리까지 내며 형사들을 당황

하게 만들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형수. 그러나 정윤호의 경우는

조금 남달랐고, 지나칠 정도로 그를 감시하라는 상부의 지시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 제발.. 부탁드릴게요.. "

Page 539: Happy Together

무릎이라도 꿇을 태세다. 서로 눈치를 보던 형사들이 곧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괴물도 아니고 초인도 아니다. 아무리 날고 기던 범죄자라도 이 면회실에서 도망이

라던가 사고를 치는 건 어려울 것이다. 곧 정윤호의 곁에 있던 형사들이 자리를 떴고, 안

에는 둘만 남았다. 정윤호와 김재중.

" ... 네 눈물 연기가 먹혔나 봐. "

" 연기 아니야. 진짜로 울었어. "

" 알아. 그 정도로 약아 빠진 애 아니야, 너. "

웃으려고 하는데 입꼬리가 잘 올라가지 않는다. 포기하고 재중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벌써 눈이 시뻘개진 재중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결국엔 윤호가 먼저 유리 가까이 얼굴을 대고 이리 오라며 손가락 하나를 까닥였다.

" 숨 쉬어 봐 "

" ... 뭐? "

" 숨소리 듣고 싶어. 그 동안 제대로 못 들었어. 우리 같이 잘 땐.. 늘 네 숨소리 들으면서

잤는데. 가끔 코도 골았지만. "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고 유리벽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가까이서 본 윤호는 더 말랐다.

극도로 선명해진 얼굴이 안쓰럽다. 이렇게 잘생기고.. 이렇게 잘난 남자가 내 남자다. 얼

마 남지 않는 삶을 정리하는지, 그냥 내버려 두는지도 알 수 없는 내 남자. 자그맣게 뚫린

구멍으로 얼굴을 바짝 기댄 채, 재중이 눈을 감고 그저 숨을 쉬었다. 편안하게. 마치 그의

품 안에서 잠들던 예전처럼.

머리카락이 흔들거린다. 코 끝에 바람이 와 닿는다. 함께 내쉬는 두 사람의 숨결이 서로의

기억을 노크한다. 그의 팔 안에 내가 살았고, 내 가슴 안에 그가 살았던 그 날들의 기억을.

잠시 후에 눈을 떴을 때, 윤호는 이제야 살 것 같다며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그가 부럽기까지 했다. 나는 이제 웃는 법을 잃어버렸는데. 찾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잃어버렸는데. 그는 아직도 내 얼굴을 보고 웃는다. 내가 너무 현실을 직시해서일까,

아니면 그가 너무 현실을 외면해서일까. 헤어짐을 앞둔 연인은 우리 둘인데, 하나는 웃고

하나는 운다. 그 꼴이 우스꽝스럽다.

" 사형수들은... 죽기 전에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한대. "

" .......... "

" 네가 해준 밥 먹고 싶어. 제이 에비뉴에서 네가 만들어줬던 밥. 뜨듯하게. "

" .......... "

" 역시 안 되겠지. "

너 정말 왜 그래... 결국엔 참지 못하고 아아, 울음을 터뜨렸다. 죽음을 앞둔 사람 앞에서

Page 540: Happy Together

이런 식으로,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비참하다는 식으로 울어버리는 건 실례일텐데. 재중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절망스러운 것이 누구인지. 정말 두려운 사람이 누군지.

" 재중아, "

" 부르지 마!!!! "

" 김재중, "

" ........... "

" 그만 울고 나 좀 봐. 시간 얼마 안 남았어. 너한테는 울 시간 같은 게 있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그딴 거 없어. 지금 너 많이 보고 얼굴 하나하나 기억하는 걸로도 벅차. "

무덤덤하게 얘기하는 그 말이 더 슬퍼서 울었다. 울지 말라고 말해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 들이는 그 모습을 받아 들일 수 없어서, 스스로 정리하고 있는 그의

담담한 말투를 들을 수가 없어서, 재중은 제 눈을 막고 제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윤호는 끝까지 그의 고개를 일으켜 세워 자신을 보게 했다.

" 너.. 오른쪽 귀에 작은 점 하나 있구나. "

" ..... "

" 몰랐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

이젠 시간이 정말 없는데, 진짜 어떡하냐. 윤호의 중얼거림에 결국엔 손으로 입을 틀어 막

아야 했다. 이 남자는 벌써 준비를 모두 마친 건가. 그래서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머릿속에

담을 내 얼굴을 하나하나 완벽하게 그릴 재료를 모으고 있는 걸까. 죽어서도 잊기 싫다는

듯 뚫어지게 재중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슬프다. 정말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 같아서 무섭다. 나는 아직 정리의 시작도 못했는데, 그는 정리의 마무리를 하고 있다.

" 시간 다 됐습니다. "

만지지 못할 재중의 얼굴을 만지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유리벽에 손바닥을 대고 한참

이나 재중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면회실의 문이 열렸고, 그들이 들어왔다. 윤호을 일으

키는 손이 단호하다. 안 되요.. 데리고 가지 말아요.. 그 말 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할 시간도 부족한 면회를, 그저 울고 불고 가슴 태우는데에 썼다. 문 바깥으로 나가

려던 윤호가 잠시 뒤를 돌았다. 끄윽끄윽 울어대며 유리벽을 손바닥을 내리치는 재중에게

씁쓸하니 웃어보였다.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건, 내일 해주고 싶어서야.

그러니까... 내일도 너를 만나고 싶다고.

내 말은 그러니까, 내일도... 살고 싶다고...

Page 541: Happy Together

* * *

재판이 끝났다. 그 사실은 이 사건에 연관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대부분

의 사람들에겐 가장 크고 위험했던 사건의 종결이었지만, 몇 몇에겐 그 이상의 의미였다.

특히나 사건의 중심에 서 있던 몇 인물들은.. 원하던 쪽으로 결과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모

든 것이 잘 될 수는 없었다. 그들 또한 그랬다. 누구보다 큰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준

수와 유천이었다. 특히나 준수는 재판이 완전히 끝난 후 더 큰 우울증을 앓는 듯 보였다.

자신을 위협하던 조직의 와해도 그에겐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의 괴로움의 중심에

는 여전히 정신병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 이젠.. 뭘 해? "

" 뭘 하긴? "

" 검찰로 복귀하잖아, 형. 지금까지는 증인 보호를 이유로 내 옆에 있었다고 쳐도 이제부턴

원래 일로 돌아갈 거잖아. "

" 그래야지... "

" 예전처럼 잠복근무도 하고, 지방으로도 자주 내려가고, 전화 해도 못 받고, 그렇겠지. "

" 아마도. "

그리고 나는 이 잡고 답답한 병실에 갇혀 일 주일에 몇 번 있는 치료나 기다리며 우울하게

살아가겠지. 하는 일도 없이 무능력하게. 언제 올지 모르는 형이나 기다리면서.

" 이제는.. 내 옆에 있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

" 왜. "

" 재판도 끝났고.. 나는 더 이상 위험하지도 않고.. 아무튼 일 없잖아. "

" 내가 네 옆에 있던 이유가 일 때문이였냐? "

" ...... "

" 너 뭔가 잊은 거 같은데, 그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우린 연인이었어. "

약간 화난 듯 보이는 유천의 말에 준수가 대답없이 고개를 숙였다. 답답하다. 그래. 우리는

연인이다. 하지만 늘 같이 있을 수는 없지. 세상의 모든 연인이 그렇겠지만 우리는 특히 더

심해. 그는 밤을 새는 걸 일상으로 하는 고된 직업이고, 나는.. 병자다. 나는 이 병원에서

더 우울해 질테고, 그는 내가 나가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겠지.

그러면 우리는 더 멀어질 거고, 멀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이거 봐. 결국에는 믿지 못하고 있잖아.

" 바람 좀.. 쐴래? "

Page 542: Happy Together

등이 따뜻하다 했더니, 유천이 뒤에서 끌어 안고는 조용히 물었다. 나가서 바람 좀 쐬자.

.

.

.

" 고등학교 때 맨날 수업 땡땡이 까고 옥상으로 올라와서 놀았다? 겨울에 그렇게 놀면 졸라

얼어 죽는 거고, 여름에 그렇게 놀면 졸라 일사병 걸리는 거고, 봄이나 가을에 올라와서

담배 한 대 물고 누워서 잠을 자면 완전 천국이었다! "

병원 옥상은 바람이 시원하다. 뒤로 쓸리는 머리칼이 부드럽다. 준수는 환자복을 여미고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이런 날씨에 유천과 시내에 나가서 영화도 보고 밥

도 먹고 데이트 했었는데. 지금은 이런 환자복이나 입고 병원을 나가지도 못하는 구나.

이런 비참한 인생이 언제까지 계속 될까. 나는.. 언제 세상 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의사 선생님한테 말해놨어. "

" ... 뭐를? "

" 여행 다녀 오겠다고. "

정말.. 이야? 준수의 눈이 크게 떠진다. 유천은 아슬아슬하게 옥상 난간에 올라가 씨익 웃

고 있었다.

" 나도 특별 휴가 받거든. 심 검사만 잘났냐? 나도 잘났다! 덤으로 휴가 얻었어. 너랑 놀러

가려고 보너스도 좀 두둑하게 받았다. 여행가면 니가 좋아하는 고기 사줄게! "

" 고기는 형이나 좋아하지... "

" 아무튼 좋은 데로 갔다 오자. 갔다 오면 어떻게서든 너 퇴원 시킬 거야. "

정말 그럴 수 있어? 난간 위에서 위험한 곡예를 하고 있는 유천을 올려다보았다. 병원에서

나갈 수 있어? 사람들이랑... 어울려서 살 수 있어?

" 으아아악!!!! "

" 아악!!!! "

갑자기 팔을 바둥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유천 때문에, 준수가 덩달아 비명을 지르며 유천의

옷자락을 꽈악 잡았다. 꽉 감았던 눈을 뜨자, 씨익 웃으며 자신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있는

유천이 보인다.

" 죽여버려!!!! "

" 장난이었다. 귀엽게 굴긴, 짜식. "

Page 543: Happy Together

진짜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놀란 가슴을 쓸어 만지며 유천을 노려보고 있는데, 그가 한

참이나 키득대며 웃더니 무언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 뭐 찾아? "

" 선물. "

" 선물? "

" 재판 끝나면 선물 준다고 했잖아. 그새 잊었어? "

아... 하도 정신이 없어서 생각하지도 못했다. 주머니를 부스럭 거리던 유천은 안에 들어

있던 잡동사니를 아무데나 버리기 시작했다. 뭐가 저렇게 많이 들었담. 담배곽에 사탕봉

지에 현금 영수증에 다 쓴 라이터까지.. 저 쓰레기통 주머니 안에 선물이 들어있단 말이야?

" 아, 뭐, 좀 거창하게 해서 주고 싶은데 정신이 없어서 곽도 못 챙겼다. "

" 이게... 뭐야? "

" 뭘까? "

뭐긴 뭐야. 반지지. 자신의 눈 앞에 척, 하고 들이민 반지를 보고 준수가 살짝 미간을 찌푸

렸다. 아무리 봐도 반지라기 보단 십원짜리 동전 테두리로 밖에 안 보인다.

" .. 십원 짜리 알맹이 빼내고 테두리만 가져왔어? "

" 엉? 그렇게 보이나? "

" 응. "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백금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뭘로 만든 거람.

" 어쨌든... 고마워. "

" 이거 뭘로 만든 건 줄 알아? "

" ... 뭐? "

구리 아냐?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갑자기 유천이 준수의 손을 자신의 옷 안으로 넣었다.

까끌하게 느껴지는 흉터의 흔적. 화들짝 놀란 준수가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 들었지만,

유천은 그의 손을 꽉 잡은 채 자신의 흉터를 만지게 했다.

" 수술 흔적.. 느껴져? "

" 이걸 왜.. "

" 난 이게 좋다. 샤워 하다가 거울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어. 와.. 사랑하는 사람 구하

Page 544: Happy Together

려다 몸에 이렇게 큰 훈장을 얻은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런 생각이 들거든. "

" ... 바보 아냐? 이런 상처가 무슨 훈장이야. 평생 없어지지 않을 지도 모르는데. "

" 나한테는 그래. "

" ...... "

" 이 반지는... 이 흉터에서 태어났어. "

" ... 뭐? "

그제야 제 옷에서 준수의 손을 빼내고, 그의 가는 손가락에 구릿빛 반지를 끼워 넣었다.

다행이다. 딱 맞아서.. 요새 네가 살이 더 빠져서, 헐렁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뿌듯한

표정으로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만지작 거린다.

" 그게.. 무슨 말이야? "

" 내 심장을 관통할 뻔한 총알을 녹여서 만들었어, 이 반지. "

" ....... "

" 널 구하려고 다 걸었던 나에 대한 증거잖아. "

주머니에서 똑같은 반지 하나를 꺼내 준수에게 내밀었다. 네가 끼워줘, 웃으면서.

" 이거 만드느라고 고생했다, 야. 뭐.. 모양은 별로지만 그게 중요하냐?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건데. "

" 정말.. 총알을... "

" 항상 끼고 다녀. "

반지를 끼운 손가락 위에 입을 맞추고, 품에 준수를 안았다. 아직도 모든 것이 불안하고

두려운 불쌍한 내 연인.... 이 작은 선물에 네게 약간의 믿음이라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준수야. "

" ...... "

" 너는 그런 사람이야. 나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사람. 반지 보면서 늘 기억해둬.

네가 몸에 지니고 있는 그 총알처럼, 네 행동 하나, 말 한 마디가 언제든지 내 심장을

관통할 수 있어. 너란 사람이 나한테 그래. "

가슴이 따뜻하다. 아마도 젖어가고 있겠지. 이 녀석은 눈물이 많아서 탈이라니까.. 따뜻

하게 웃었다. 유천은 자신의 손가락을 찾아 반지를 끼워가는 준수의 작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 사랑스러워라.

" 사랑해.. 형. "

Page 545: Happy Together

서로의 생명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연인이야, 우리는. 늘 그거 잊지 마.

* * *

" 언제 돌아오세요? "

" 나도 몰라. "

" 무작정 떠나는 거에요? "

" 그건 아니야. 돈은 다 챙겼어. "

어련 하시겠어요. 오랜만에 만난 창민은 떠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우리도 곧 여행 갈

거에요! 유천의 말에 피식 웃으며 제발 같은 곳으로는 가지 말자며 장난스레 애원한다.

창민의 자동차 트렁크에는 큼지막한 가방들이 여럿 들어있었다. 아마 오랫동안 해외에서

지낼 것 같댄다. 검찰에 들어온 이후로 제대로 휴가 낸 적 없이 일에 치여 살았으니 이 정

도 보상은 당연한 거라 생각한다. 게다가 이번 사건에 있어서 누구보다 창민의 공이 크지

않았는가.

" 어디로 가요? "

" 스위스. "

" 스위스?! 쌩뚱맞게 거긴 왜?! "

" 왜 쌩뚱맞어. 세계적인 관광지야. 그냥 물 좋고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오랫동안 쉬

고 싶어서. "

" 핸드폰은.. 가지고 가죠? "

" 전혀. 도착하면 연락 할 테니까 걱정 마. 이 지긋지긋한 곳이랑 연락 완전히 끊고 여행할

거야. 아... 드디어 자유다. 군에서 제대할 때도 지금처럼 시원섭섭하진 않았는데. "

차에서 내린 창민이, 비스듬히 기댄 채 병원을 올려다보았다. 스위스로 떠나기 전 마지막

으로 들린 곳이 여기다. 유천은 좋아 보인다. 얼마 전에 그 장난감 같은 커플링을 교환한

이후로는 준수의 상태도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요새는 빨리 여행을 가고 싶다며 보채는

바람에 피곤해 죽겠다며, 유천이 웃었다. 그래.. 다 잘 됐다.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았지.

" 꼭.. 전화 하세요. "

" 그래. "

많이 보고 싶을 거에요- 유천의 말에 미소로 응수했다. 나도, 라고 말하면 닭살스러우려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병원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차에 올라탄 그가

시동을 걸기 전 창 밖으로 고개를 빼고 유천을 불렀다.

" 박 형사, "

Page 546: Happy Together

" 네? "

" 그.. 김준수의 또 다른 인격 말이야. 마지막 인격. "

" ... 왜요? "

" 박 형사는 왜 죽이지 않았을까? "

" ..... 예? "

그렇잖아. 병원 치료를 받기 전에,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기 전에, 박 형사의 옥탑방에서

함께 지낼 때. 준수 씨의 오피스텔에서 함께 지낼 때.. 마지막 인격은 언제든지 박 형사를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왜 가장 죽이기 쉬운 사람을 곁에 두고 죽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모

든 세상을 불신하고 사람들에 대한 살의로 가득 찬 인격이 말이야.

" 그건.. 왜요. "

" 그냥 궁금해서. 생각해보니, 이상하기도 하고. "

글쎄요.. 내가 무서웠나보죠. 유천의 혼란스러운 대답에 창민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 또 다른 김준수도.. 박 형사를 사랑했을까. "

" 네? "

" 아냐, 그냥 내 추측이야. 흘려들어. "

그들도.. 당신을 사랑했을지 모른다는 그저 그런 추측. 왜, 형사나 검사들은 늘 이렇잖아.

추측하고 답을 찾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려서. 직업병이랄까.

" 진짜 간다. "

" 조심히 잘 갔다와요. 괜히 이런 저런 일에 끼어들어서 국제 망신 시키지 말고! "

" 걱정 마라. 바로 코앞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도 손끝하나 안 댈 거다. 난 완전 자유야.

완전 휴식 선언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 먹다 올 거야. "

" 몸매 관리는 하십쇼. 강력반은 불어터진 검사는 사양합니다. "

차렷, 경례! 하고 유천이 장난스럽게 인사를 붙였다. 그는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 Good Bye! "

.

.

.

Page 547: Happy Together

새벽 두 시.

이 때 쯤이 새벽 두 시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직감할 수 있었다. 희미하게 스며드는 달빛

아래 섰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지 설레이는 건지 알 수는 없다. 아니면 그 두 개가 같은

것인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살이 빠졌어. 초췌해 보이기도 하고. 면도

도 제대로 하지 못해 꼴이 말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죄수복. 더럽게 내 취향 아니야.

" 촌스러워. "

새파란 죄수복을 만지작거리던 윤호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금이 간 거울을 손

바닥으로 매만졌다. 아마도 지금인 것 같다.

쨍그랑...!!

- 무슨 일이야!?

유리가 깨지는 시끄러운 파열음과 함께, 바깥에서 지키고 있던 형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독방 안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다른

이들이 달려왔고, 시꺼멓고 두꺼운 철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 .....!!!! 씨팔!!! 빨리 전화 넣어!!!! "

.

.

.

밤새 잠들지 못한다. 불면증은 최근에야 생겼다. 재판이 끝난 이후로. 언제 잠드는지 자신

도 알 수 없었다. 침대 모서리에 기댄 채 멍하니 싸구려 벽지를 바라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받아봤자 뭐해. 윤호도 아닌데.. 힘 없이 고개를 무릎에 묻고, 이제는 나오지도 않

는 눈물을 속으로 흘리고 있다. 그래도 핸드폰은 끈질기게 울려댔고 결국엔 고개를 들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재중 씨?

" ........ "

- 내 말, 듣고 있어요?

" ... 네. "

힘없이 늘어져 있던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Page 548: Happy Together

* * *

여행 가방까지 모두 챙겨 두었다. 내일 아침이면 의사가 허락하든 허락하지 않든 떠날 생각

이었다. 준수의 병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다. 치료 받지 않는다고 해서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다. 답답한 곳을 빠져나와 차를 타고 여러 곳을 여행하며 흐르는

시간과 같은 믿음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의 마지막 인격은 타인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만든

산물이라고 했다. 그걸 지워주고 싶었다. 그에게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믿음과 사랑을 안겨

주고 싶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급했다. 가까스로 얻어낸 휴가가 무색하게, 유천은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으로 오게 되었다.

" 미친 새끼. "

" 그러니까요. 알고 보니까 오늘 아침이 사형 집행일이었다네요. "

" 그럼 어떻게 되는 거냐, 연기 되는 거야? "

" 예. "

정윤호는 독방 안에 걸린 거울을 부수고 유리 조각으로 자살을 기도했다. 미수로 그쳤지만

흘린 피가 상당해 수혈을 해야 했고, 병원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아무

리 사형수라고 해도 몸 상태가 온전치 못한 인간을 교수형에 처할 수는 없었다.

" 천부 인권, 그런 것도 있잖아요. 몸이 다 나을 때 까지는 병원에서 안정 취해야 되요. 사형

수도 인권이 있고 뭐, 그런 거. 우리 배웠잖아요. "

" 씨팔.. 곱게 가지, 왜 손목을 긋고 지랄이야! "

" 그러게요. 그래도 자존심은 있었나 보지. 남의 손에 죽기는 싫었나 보죠, 뭐. "

병원에서도 그는 독실을 썼다. 그 앞은 강력계 형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몸이 완전히 낫는

대로 그는 다시 독방으로 향할 것이다. 사형은 미루어진 것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

한 거냐. 꼭 똥 싸고 뒤를 덜 닦은 것처럼.

" 형사님은 왜 나오셨어요. 휴가잖아요. 강력계 법칙 몰라요? 아무리 좆같은 일이 터져도

휴가 때는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한다. 심 검사님도 핸드폰 다 두고 떠났다고 하던데. "

" 야야, 나도 신경 끌 거야. 오늘 마지막으로 와 본 거야. 그래도 내가 맡은 사건이었으니까.

"

" 이젠 끝났어요. 그냥 쉬세요. "

그래야지... 침대에 누워 있는 정윤호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하다.

쯔읏, 혀를 차고 뒤돌아 걸었다. 이제는 나와 별개의 문제다.

Page 549: Happy Together

" 잘 지키고, 난 간다. "

" 걱정 마세요. "

제 아무리 날고 길던 정윤호라 할 지라도 뭘 어쩌겠어요- 후배 형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

.

.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열 한시가 훌쩍 넘었다. 괜히 갔다왔나. 난 또 정윤호에 관련

된 일이라길래 습관처럼 뛰쳐 나갔지. 휴가라는 것도 깜빡 잊었다. 한숨을 쉬고 병실 문을

열었을 때는 준수가 보이지 않았다. 비어있는 침대를 보고 손잡이를 꾸욱 쥐었다. 바로 옆

에 붙어 있는 화장실도 어둡다.

" 김준수. "

조금 크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없다. 잠시 그 자리에 굳은 돌처럼 섰다. 이 시간은

위험하다. 게다가... 아까 밖으로 나가기 전 준수가 뭐라고 했더라. 내일은 아침 일찍 여행

을 떠나니, 지독한 수면제는 먹고 싶지 않다고 했어. 제대로 정신 차릴 수 없을 거라면서.

그 대신 형이 빨리 돌아와 예전처럼 함께 팔을 묶고 잠들자고 했었지..

" 준수야!! "

깨어난 건가.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도대체 이 시간에 어디를...!! 복도 끝에 있는 엘리베

이터로 뛰어가다가, 반 쯤 열려져 있는 비상구 문을 보았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성거리다,

비상구 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 번에 두 개, 세 개씩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설마 싶으면

서도 발이 그 쪽으로 향했다. 만약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있다면, 준수 네가 나를 부른 거다.

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가 나를 부른 거고, 듣지 못하는 내 귀가 너를 알아챈 거야.

" 김준수!!!!! "

옥상 문을 열자마자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환자복을 입은 채로 난간에 아슬아슬

하게 서 있는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 앞까지 달려간 후,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자칫하면 뒤로 넘어질지도 모를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다. 도대체 언제

이 위로 올라온 거지...!

" 위험해.. 준수야, 내 말 들려? "

" 죽을 거야. "

Page 550: Happy Together

그가 아니다.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김준수가 아니야. 누구지, 자기 자신의 몸을

위태롭게 만드는 너는 누구야.

" 이제 다 지긋지긋해졌어. 이런 몸 따위.. 지겨워. "

" 그럼 너도 같이 죽어. "

" 상관없어. 난 어짜피 김준수와 하나니까. 그가 죽으면 나도 죽고, 내가 죽으면 그도 죽어.

"

" 네가 죽어도 김준수는 안 죽어. 네가 죽어야 김준수가 살아. "

" 웃기지 마. "

조금.. 발 뒤꿈치를 옮긴다. 그러지 마, 터져나오는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마른 그의 몸이

하늘거린다. 종잇조각 같아. 후우, 하고 입으로 바람을 조금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

로움에 아찔해진다.

" 네가 말했지.. 넌 김준수를 위해 태어났다고. 자신을 욕하는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싶어

하는 김준수의 어두운 마음이 너를 태어나게 했다고.. "

" 그래. 난 김준수가 만들었어... "

조금씩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 김준수는 아무도 믿지 못한다고, 너가 아닌 누구도 김준수와 영원할 수 없다고.. 네가 그

랬지.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찬 녀석이 김준수라고, "

조금만 더 가면 팔이 닿을 듯 한데.. 조금만 더. 위태로운 그는 아직도 난간 위에 서 있다.

" 다른 사람 아직 못 믿어도, 준수는 나 믿어. "

" 네 착각이야. "

" 너야말로 착각하지 마. 죽고 싶으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으면.. 너 혼자 해. 김준수는

할 일 많아. 나랑 사랑도 다 못했어. "

아주 천천한 걸음걸이가 난간 위의 준수 바로 앞까지 향했을 때, 유천은 쉽게 손을 뻗지

못하고 그의 눈을 직시했다.

" 여기까지만... 해. "

감정의 파동을 겪는 듯 눈이 떨린다. 불안하다. 유천이 손을 뻗었을 때, 그가 세차게 고개를

Page 551: Happy Together

저으며 뒤로,

" 아아아악!!!!!! "

" 준수야!!!!! "

그건 순식간이었다. 준수의 몸이 완전히 뒤로 넘어져 팔이 허공을 가리킨 것은. 비명과

함께 준수의 발이 허공을 딛었고, 그 순간 유천의 한 손이 준수의 한 손을 잡았다. 몸이

함께 휩쓸려 넘어갈 뻔한 것을 간신히 난간을 붙들어 힘을 주었다. 한 손으로 한 사람의

몸을 지탱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힘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마르고 갸냘펐던

하얀 몸뚱아리가, 엄청난 무게로 유천의 손에 매달렸다. 손에 모든 힘을 주고 힘줄이 불

거져 나올만큼 난간을 세게 쥐었다. 자신의 손 하나에 매달린 그의 발이 허공에서 발을

구른다.

" 준수... 으...! 꽉 잡아! 김준수!!!!! "

" 놔!!!! 이거 놓으라고!!!! 죽으려고 올라왔어!!! 더 이상 죽일 사람도 없어!!!! 알어!?!! "

" 닥치고 손에 힘이나 줘!!!! "

" 네 말이 맞아.. 난 알아!! 김준수는 이제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아해!!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 나를..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김준수는.... "

" 입 다물어!!!!! "

손에 힘이 빠져 나간다. 한밤중의 소란을 들은 건지, 저 아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곧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병원이 불을 밝히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떨어지는 건 한 순간이다.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누구라도 살아

남기 힘들어. 총탄을 가슴에 맞고도 살아났던 나도, 여기서 추락한다면 즉사다. 식은땀이

흐른다. 내가 잡고 있는 건 단지 김준수가 아니라 그의 생명 전부다.

" 그래서 그를 죽여... 마지막으로.. 최후로.. 나를 태어나게 한 김준수를 죽여... "

" 손에 힘을 줘!!! 준수야!!!! 내 말 들려?!?!!! "

팔에 힘이 빠져간다. 유천은 난간을 붙들고 있던 다른 팔을 빼내, 두 팔로 준수의 한 손을

잡았다. 그의 온 힘이 실린 무게에 자신마저 난간 아래로 떨어질 것 같다. 넘어가지 않도록

두 다리와 배에 힘을 주고 자신의 몸으로 준수의 무게를 지탱했다. 여기서 네가 죽으면,

내 손으로 붙들고 있던 네가 죽으면, 나는 평생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

" 여기까지만 하라고...? 너야말로 거기까지 해. 뭐 같지도 않은 동정심으로 붙잡지 말고

죽겠다고 지랄할 때 내버려둬!!! 너도 귀찮잖아.. 너도 그가 없어져 버렸으면 하지... 내

말이 틀려...? 가식떨지 마, 이 손 놔!!!! "

" 준수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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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내 손에서 가지 마, 준수야.. 나를 붙들어. 끝까지 너를

붙드는 나를 잡아..

" 사랑해... 준수야, 들리지... 응? 사랑해.. "

" 이런 미친새끼를 왜 사랑해... "

" 나도 미쳤으니까... 세상에 사랑하면서 미치지 않는 새끼가 어디 있어!!!! "

그가 운다. 유천의 젖은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준수의 젖은 눈으로 맺힌다. 허공에 매달린

그가 울었다. 빠져나가는 힘을 도로 끌었다. 이가 부러질 듯 갈린다. 병원의 불이 더 밝아지

고, 소란이 커진다. 사람들이 달려올 거야. 그 때까지만 버티자.

" 준수야... 내가 반지 주면서 했던 말 기억하지... "

김준수도 아닌 그에게, 유천은 흐느끼며 말했다. 죽을 만큼의 힘을 더해 그를 붙잡으며.

" 서로의 생명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연인이라고... "

" ........ "

" 내 말이 맞잖아.. 우리 지금, 서로 쥐고 있잖아. 딱.. 내 말이 맞지.. "

" ........ "

" 너는.. 너는 나한테... "

이제는 말 할 힘도 없다. 목소리를 낼 힘으로 그를 더욱 세게 붙들어.

" 씨팔.. 사랑해!!!!! "

거의 악을 쓰듯 소리 지른 유천이, 젖은 눈의 준수를 끌어 올렸다. 붙들고 있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지금의 유천은 제 자신의 힘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악을

쓰며 온 몸을 뒤로 빼냈다. 동시에 조금씩 위로 들어 올려진 준수를 놓치지 않았다. 절대로

살릴 거니까, 너는 내 손만 붙들어. 발로 난간을 밀어내며 몸을 최대한 뒤로 젖혔다. 준수의

한 쪽 팔이 난간 위로 끌어 올려졌을 때, 유천은 밀려드는 어지러움을 접어두고 준수의 팔

목을 거칠게 잡아 끌었다. 더 이상, 놓아 달라는 비명도, 죽어 버릴거라는 고함도 들리지

않았다. 한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한 남자의 흐느낌만이 고요한 병원의 옥상을 메웠다.

준수의 상체가 난간 위로 완전히 끌어 올려졌을 때, 유천은 쥐고 있던 손을 그제야 놓았다.

그리고 준수의 허리를 들어 올려 허공에 매달려 있던 발까지 끌어 올렸다. 하아... 그의 이

름을 부르기도 전에, 준수의 몸이 유천의 몸 위로 완전히 쓰러졌다. 콰앙, 그와 동시에 옥상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다. 씨발.. 빨리도 온다...

Page 553: Happy Together

" 괜찮으세요?! "

저만치서 사람들이 달려오기 전에.. 유천은 젖어버린 준수의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잡고

입을 맞췄다. 내 입 안으로 들어오는 이 부드러운 혀가 김준수가 맞구나. 내 입술에 와 닿

는 사랑스러운 입술이 김준수가 맞구나. 바보처럼 부딪히는 고른 치아가, 내가 사랑하는

김준수가 맞구나.. 그 황홀감에 정신 없이 입을 맞췄다.

" 형... "

아아, 정말 내가 사랑하는 김준수가 맞구나. 눈물이 또 터진다. 멈출 줄을 모른다. 이 물은.

" 형.. 형아... 사랑해... 흐으윽... 사랑.. "

" 그래.. 그거 하자.. "

앞으로도 계속 그거만 하면서 살자. 우리 준수야...

* * *

감옥 안에서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달빛만 보고도 지금이 몇 시 쯤인지 알 수 있다는 것

정도. 윤호는 병실의 창 밖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한 새벽 세 시쯤.

" 흠, "

생각보다 많이 아프다. 스스로 그었던 손목을 내려다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상처가 오래

남겠는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재중이에게 많이 혼나겠구나. 중얼거리며 제 팔에

꽂혀 있던 링겔을 소리나지 않게 뜯어냈다. 그 링겔 줄을 손에 감고, 조용히 침대에서 일

어났다. 다행히 그들이 신발을 아래 모셔 두었다. 맨발로 나갈 일은 없겠구나. 윤호는 소

리나지 않는 걸음으로 병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셋..? 아니, 둘.

" 이것들이... "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정윤호를 감시하는데 고작 둘이 뭐야. 하긴, 자살 기도까지 한 미친

놈한테 둘 이상 붙여 놓는 건 인력 낭비라고 생각했겠지. 이제 슬슬 나에 대한 감시가 풀어

질 때지. 그래서 이 때를 노린 거다. 재판도 끝나고, 집행만 기다리고 있는 이 때를. 문고리

에 손을 대고 말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이상의 소란은 없는 것으로 보아 복도에는

Page 554: Happy Together

이들 둘 밖에 없다. 새벽 세 시에 병원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딱 둘이다. 정신병자랑

응급 환자를 위해 뛰어가는 의사. 그 중 아무도 없다.

- 그래서 마누라가 소리 지르면서 내 와이셔츠를 그대로 빨래통에 쑤셔 박는 거야. 그 때

씨발,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그 와이셔츠 뒷면에 립스틱 자국이 찍혀 있거든.

- 아하하...

시덥지도 않은 농담 따먹기로 자기들끼리 즐겁다. 그는 속으로 셋을 세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하나.. 두울,

" 그래서 다음 부터는 검은색 티셔츠만 입으려고. 그럼 티도 나지 않.....!!!! "

" !!!!! "

문고리를 확 잡아당긴 윤호가, 링겔 줄로 형사 하나의 목을 휘감음과 동시에, 팔꿈치로 옆

에 서 있던 남자의 목 아래 급소를 정확하게 찔렀다. 아주 순식간에 둘이 동시에 바닥으로

쓰러졌다. 윤호는 고개를 숙여 둘의 심장 위에 손바닥을 댔다.

" ... 좋아. "

죽지는 않았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중 제대로 기절한 듯 보이는 남자의 옷을

빠르게 벗겨 내려갔다. 물론 겉옷 만이다.

.

.

.

검은색의 차는 아까부터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나오실 때가 됐는데, 참모의

말에 재중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다가 지쳐서 절뚝거리며 걷고 있다. 뭐가 잘못된 건 아니

겠지. 나오다가 들킨 거 아니겠지. 무슨 사고라도 생긴 건...

" 나오실 겁니다. 긴장 푸세요. "

윤호의 참모에게 전화를 받았을 때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재중 씨, 하는 그의 목소리

를 들었을 때 죽어가던 한 줌의 풀에 시원한 단비라도 내린 듯했다. 핸드폰이 부서질듯 꼭

잡고 여보세요.. 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의 무사함을 알려 주었다. 정윤호의 소식도 함께.

- 어떻게 된 거에요?

Page 555: Happy Together

- 인질극에서 탈출하기 직전에 형사 하나한테 잡혔어요.

- 그런데...

- 세상 일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일은 돈으로 안 되는 게 없죠. 우리들 같은 사람

에게는 다행이랄까.

- ... 매수했어요?!

- 간신히. 내 목숨 살리려고 어마어마한 돈을 끌어다 쓴 건 죄송스럽지만, 결국에는 보스의

탈옥에도 연결되는 문제니까. 거기에 돈을 더 얹어서 잠깐이나마 연락을 취했어요.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감옥에서 나올지, 한 번의 연락에 모든 것이 정해졌으니까.

- ... 윤호, 살아요?

- 설마... 그대로 사형 당하실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믿음이 그렇게 없어서야, 참모의 혀 차는 목소리가 아직도 떠오른다. 그 남자가 죽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 질문에 얼굴이 화악, 하고 달아올랐다. 네.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나

에게 남은 건 그와의 짧은 추억을 그리며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 외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나는, 아직도 당신의 연인으론 부족한가봐. 보스의 연인으로는 내공 수련이 덜 됐어.

" .....!! "

멍하니 그 때의 일을 생각하는데, 병원 뒷문으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저 남자...

청 자켓을 입고 짙은색 면바지를 입은 남자. 벙거지를 눌러 쓰고 느긋하게 걸어나오는 저

남자.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내 연인. 차가 그의 쪽으로 움직인다. 창 밖으로 고개를 빼

고 있던 재중이 손잡이를 잡았다.

" 오랜만. "

가까이 다가온 윤호가, 창 밖으로 빼꼼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재중에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웃었다. 오랜만, 한 마디를 던지면서.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도, 그늘이 져도,

달빛을 받아 높다랗게 솟아오른 코만 우두커니 빛나도, 그는 여전히 아름답다. 잘생겼다.

" 지금 출발하시면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하실 겁니다. "

" 그래. 천천히 운전해. 새벽이라 차도 없겠지만. "

차에 올라타자, 운전석에 앉은 참모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호의 시선은 여전히 재중에게 고정된 채로, 시트에 앉자마자 청자켓을 벗었다.

" 뭐야.. 이 아저씨 옷은.. "

" 어쩔 수 없었어. 형사 옷이 다 이렇지, 뭐. 걱정 마. 벗을 거니까. "

Page 556: Happy Together

올라타자마자 재중의 목덜미를 끌어 안고 입을 맞추려다, 스윽 고개를 돌려 앞에서 열심히

운전하고 있는 제 참모에게 낮은 목소리로 주의 시켰다.

" 뒤 돌아 보지 마라. "

" 보라고 해도 안 봅니다.

" 그리고 운전 좀 천천히 해. 흔들리는 건 좋은데 몸이 쏠리니까. "

" 윤호야, 말 그만하고 빨리.. "

윤호의 멱살을 쥐듯 옷을 끌어서 제 품으로 안긴 재중이 윤호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단숨에 벗겨 올라가는 제 상의를 재빠르게 벗어냈다. 벨트를 차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다. 단추를 푸르고 지퍼만 내려도 바지가 쉽게 벗겨지니까. 제대로 내려가지 않으면

찟어발길 판이다. 부드럽게 내려간 바지를 저 밑으로 치워버리고, 윤호가 허리 사이에 몸을

틀고 누웠다. 좁아 터진 차 안에서 잘 하는 짓이다.

" 듣는 사람 있으니까 소리 내지 마. "

하하.. 재중의 웃음 소리가 듣기 좋다. 사실은 그의 얼굴을 보면 눈물이 먼저 날 줄 알았다.

그런데 둘 다 울지 않았다. 둘 다 끌어안고 신파를 찍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이 연인은, 만나자마자 바라던 것을 찾아 안고, 품고, 가지는 것으로 그리움의 종말을 알

렸다.

" 보고 싶었어... "

제 바지를 끌어 내리는 윤호를 품에 안고 재중이 속삭였다. 짙은 입맞춤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사실 보고 싶었어, 사랑해, 그리워 미칠 뻔했어, 라는 말은 그들 사이에 필요 없었다.

그들에겐 서로가 있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 * *

에필로그까지 함께.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 에필로그 [完]

Page 557: Happy Together

준수의 마지막 치료가 끝이 났다. 최면으로 잠든 준수를 앞에 두고, 아무리 '그들' 을 불러

도 대답이 없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유천은 직감적으로 '그들'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30분이 넘도록 아무런 대답이 없자, 준수는 그대로 최면에서 깨어났다. 의사는 진료 차트를

덮으며 준수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여행, 잘 다녀오세요.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 날, 그들은 그토록 지긋지긋하던 병원을 떠났다. 간소한 짐을 챙겨서 병원에서 나와

그들이 함께 살던 유천의 옥탑방으로 돌아갔다. 옥탑방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들은 그날 옥상 마루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들이 유

난히 좋아하는 차돌배기를 산더미만큼 쌓아 놓고서.

그리고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수면제도, 두 손을 묶는 줄도 없이 그대로.

그리고 새벽녘에 유천이 문득 눈을 떴을 때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는 아름다운 연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약간 슬퍼 보였고, 또한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그 동안 고마웠어요, 유천 씨...

잠결이라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지도 잘 몰랐다. 유천은 몽롱한 정신 속에서 그저 웃었다.

아.. 예쁜 우리 준수, 중얼거리며. 그리고 다시 그를 끌어안고 잠에 들었다.

잠에서 깨어 났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어젯밤 꾸려 놓은 여행짐과 여전히 지저분한

옥탑방의 거실이었다.

.

.

.

" 비행기가 곧 착륙합니다! 나와 주세요! "

승무원이 아무리 화장실 문을 두드려도, 들어간 두 사람은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시끄

러운 소리와 함께 활주로를 가로지르는 비행기의 소음이 커지고 기체는 흔들리는데, 이들

은 그런 것 따위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제발 좀 나오세요! 거의 애원조로 바뀐 승무원의

목소리가 애처롭다.

비행기 안의 화장실은 최악이다. 세상에서 최고로 좁다. 볼일을 보고 있으면 남자는 엉덩

이가 닿고 여자는 무릎이 닿을 정도다. 그 섬세하게 좁은 공간 안에서 그들은 나름대로의

'볼일'을 보고 있었다. 한 사람 서 있기도 벅찬 공간에 두 사람이 안간힘을 쓰고 다리를 끼

워 맞췄다. 결국엔 윤호의 한 쪽 다리를 변기통 위에 올려둬야 했다. 움직일 때마다 다리로

Page 558: Happy Together

흘러내린 바지가 같이 춤을 춘다. 이 비행기 화장실을 부셔버리겠다는 의도인지, 날아가겠

다고 열심히 활주로 뛰고 있는 비행기를 불살라 버리겠다는 다짐인지, 그들은 비행기에 탄

그 순간부터 이 화장실 안에서 세상사를 잊고 황홀경에 몰두 중이다.

- 정말 날아요...! 제발 나오세요!

" 하아... 윤호야.. 하읏..! 비행기.. 비행기... 난대... "

" 그럼... 아..! 비행기가... 후우, 날지... 흐읏, 기냐... "

" 이러다가... 하응.. 사고.. 사고 나면... "

"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 아, 재중아...! 진짜 사고 나게 하고 싶으면 계속해. "

비워진 퍼스트 클래스의 두 자리가 유난히 돋보인다.

.

.

.

" 비행기 화장실 안에서 섹스하는 사람들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 "

" 왜 없어. 세상에 미친놈년들이 얼마나 많은데. "

아직도 정사의 여진이 남아 있어서 온 몸이 나른하다. 길게 몸을 뉘인 재중과 윤호가 아

시아나 담요를 나란히 덮고 그 안으로 손을 넣어 깍지를 꼈다.

" 그래도.. 비행기 이륙하는 거 무시하고 한 사람들은 별로 없겠지? "

" 아마도. 그런 놈년들은 진짜 제대로 미친 놈년들이니까. "

" ... 누가 놈이고 누가 년이야? "

" 아무래도 내가 년 하는 거 보다는 네가 하는 게 낫겠지. 귀여운 년. "

비행기는 스위스로 향한다. 가장 유리한 곳이라고 했다. 윤호의 개인 자금은 모조리 스위

스 은행으로 돌려져 있다. 세계의 모든 검은 돈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들의 선택은 탁월했

다. 일단은 은행에서 돈을 찾고, 그 다음엔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지. 윤호의 중얼거림에

재중이 조용히 물었다.

" 또.. 그 짓? "

" 왜, 그 짓 또 하고 싶어? 방금 전까지 하고 왔잖아. "

" 그 짓 말고, 그 짓! "

아아.. 그 짓. 소리내어 웃는다.

Page 559: Happy Together

" 그만 두려고. 마피아는. "

" .... 진심이야? "

" 많이 사라지고.. 많이 죽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꽤 많은 조직원들이 살아 있어. 그들은

전부 대한민국에서 살 거야. 아마도 이태원에 뿌리를 내리고 조용히 살아가겠지. 살아가기

위해서 마피아에 들었고 총을 들었던 놈들이야. 살아가기 위해서... 또 다른 짓도 할

거야.

아마도 제 힘으로 먹고 살겠지. 검찰 눈에 밟히지 않도록 조용하게. "

" 너는...? "

" 나는 아무래도, 얼굴이 꽤나 알려졌으니 대한민국에서 살 수는 없잖아. 게다가 그 녀석들

없이 K 카르텔을 다시 만들기도 힘들고. "

" 그러면, "

" 구체적으로 생각 안 해놨어. 그건 너랑 같이 의논하려고 남겨 뒀거든. "

뭐든, 잘 하지 않겠어? 윤호의 물음에 재중이 또 소리내어 웃었다. 사실은.. 그가 다시 총을

잡는다고 해도 지금은 말릴 기력도 없다. 그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살을 섞고, 입술을 먹

고, 이렇게 마주보고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사고 기능이 마비될 것 같으니까.

" 어떻게 살까, 우리. "

" 그건 천천히 생각하자. 비행기 여행은 끝도 없이 길거든. "

그건 그렇다 치고... 이리 와봐. 윤호가 담요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며 재중을 끌어 당겼

다. 윤호야... 여기 공공 장소야. 재중의 속삭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벌써 네가 고파졌어, 윤호의 말에 재중이 또 한 번 소리내어 웃었다.

우리가 늘 사랑했던 제이 에비뉴의 아름다운 저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너와 내가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은,

새로운 도시로 떠나기 위한 허공의 정거장.

우리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이곳이,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거리, 우리들의 에비뉴.

.

.

.

" 까만색 가방은! "

" 여기 있어! "

" 갈색 옷 가방은! "

" 여기! "

" 세면 도구는 따로 챙겼어?! "

Page 560: Happy Together

" 응! 앞좌석에 있다! "

" 핸드폰은! "

" 여기! "

" 그거 봐! 이 멍청아! 그건 두고 오라고 했잖아!! "

아.. 어쩐지 뭘 까먹은 것 같더니- 유천이 머리를 긁적이며 핸드폰을 저만치 던져버렸다.

" 좀 좋은 차 좀 빌리지... "

" 왜! 이것도 좋다! "

" 아무리 그래도 구형 프라이드는 너무 하잖아. "

" 왜! 프라이드! 자존심! 한국의 자존심 아니냐! "

" 그럼 색깔이라도 제대로 된 거 가지고 오던가! 세상에 보라색 프라이드가 뭐야?! "

" 아니... 난 또 보라색이 신비스러운 색이라길래... "

참으로 신비스롭습니다. 혀를 쯧쯧 차며 결국 웃어버렸다. 하긴, 차가 구형 프라이드면

어떻고 티코면 어떻겠는가. 운전석엔 사랑하는 박유천이 있고, 조수석엔 사랑하는 김준수가

있는데. 차에 올라타고 문을 쾅, 닫자마자 차가 흔들린다.

" 아... 형아! 다음부터는 좀 단단한 걸로 빌려! "

" 문 살살 닫아라. 박살나겠다, 야. "

부르릉... 시동 소리 한 번 요란합니다, 그려.

" 출발합니다! "

" 출발! 출발! "

유천이 핸들을 돌리기 시작할 때, 준수는 손잡이를 돌리며 창문을 열심히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두 사람의 머릿결이 함께 흔들린다. 라디오를 켜고

볼륨을 높였다.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흥겨운 팝송이 흘러나온다.

" 유천이 형아! "

" 왜, 우리 준수! "

" 안전 멜트 안 맸잖아!!! "

바락 소리를 지르며 운전석으로 몸을 튼 준수가, 벨트를 메어주는 척 하다가 유천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Page 561: Happy Together

사랑해...

사랑하는 연인을 태우고, 한적한 도로를 질주한다.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친숙한 팝송을 즐겁게 흥얼거린다.

운전석에 앉은 그는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한 손은 핸들을, 한 손은 연인의 손을 잡는다.

반 쯤 열린 차창은 시원한 바람을 선물하고,

반 쯤 열린 입술은 끊임없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준비한다.

늘 함께여서 행복한 사랑하는 연인들은, 그렇게 하늘 아래 추억을 아로새긴다.

.

.

.

Imagine me and you, I do

당신과 함께 있는 날 상상해 봐, 나처럼.

I think about you day and night

난 밤낮으로 당신을 생각해

It's only right to think about the girl you love and hold her tight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고 꽈악 안아 주는 건 그저 좋을 뿐이지,

So happy together

그럼 함께 행복해지는 거야,

If I should call you up, invest a dime

동전 하나로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지

And you say you belong to me

넌 내가 네 것이라고 말했어

And ease my mind

내 마음이 편해져,

Imagine how the world could be

어떻게 하면 세상이 괜찮아질런지 상상해 봐,

So very fine, so happy together

멋질 거야, 우리 둘이 함께라면..

Page 562: Happy Together

I can't see me loving nobody but you for all my life

내가 평생 동안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걸 생각할 수도 없어,

When you're with me baby the skies will be blue for all my life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 평생 하늘은 언제나 푸르겠지,

Me and you and you and me

나와 당신, 그리고 당신과 내가 함께라면

No matter how they tossed the dice

주사위가 어떻게 던져졌는 가는 중요하지 않아,

It had to be the only one for me is you and you for me

날 위한 오직 하나는 너이고, 날 위한 너라면

So happy together

그러면 우린 모두 행복해 지겠지.

Me and you and you and me

나와 당신, 그리고 당신과 내가 함께라면

No matter how they tossed the dice

사람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It had to be the only one for me is you and you for me

날 위한 오직 하나는 너이고, 날 위한 너라면

So happy together

그걸로 우린 행복해지겠지,

So happy together..

So happy together..

So happy together..

So happy together..

해피 투게더 (Happy Together)

The End

2006. 02. 04. Made By Manish

Page 563: Happy Togethe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