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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주차: 한국불교(Buddhism in Korea)

    ▢ 서론(Introduction)

    한국불교는 1700여년의 역사를 내려오면서 다양한 교파와 문화를 접합해 인도 중국과는

    다른 독창적인 불교를 형성한다. 그 특징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선불교(禪佛敎)에 바탕을

    둔 회통불교(會通佛敎)다. 즉 선불교를 중심으로 삼되 염불(念佛), 주력(呪力), 토속신앙

    등 다양한 수행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종합형 불교인 셈이다. 또 하나 특징은 보살도를

    중히 여기는 대승불교의 근간을 형성하면서도 붓다 당시의 출가중심 불교를 고수한다는 점

    이다. 이는 초기 불교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동남아 불교나 대승 불교를 강조하는 중국이

    나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는 일본과도 다른 점이다. 이 같은 한국불교의 특징을 형성한데는

    조사(祖師)와 사찰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특히 구한말에 등장한 걸출한 선승들에 의

    해 한국불교는 조사 중심의 선불교라는 특성이 강조되고 발전됐다. 이러한 한국불교를 각

    시대에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 삼국의 불교(Buddhism in the Three Kingdoms)

    한국불교의 요람은 삼국 시대(372-668) 중엽인 4세기 후반 무렵부터다. 불교는 중국과 직

    접 국경이 맞닿은 고구려에 맨 먼저 도착하게 되었다.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로 하여금 불상과 경전을 고구려에 전하도록

    국내성에 파견해왔다. 그때 전해진 불교가 어떤 내용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구마라집(鳩

    摩羅什, Kumārajīva)의 삼론종(三論宗) 계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2년 뒤(374)에 승

    려 아도(阿道)가 또 왔고, 다시 1년 뒤(375)에는 최초의 사찰 성문사(省門寺)가 건립됨으로

    써 드디어 한국불교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그 다음 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 늦게 침류왕(枕流王) 1년(384), 남중국의 동진(東晋)에

    와 있던 인도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바닷길로 직접 건너와서 불교의 기원을 열었다. 그

    이듬해에는 한산에 절을 짓고 승려 자격자 10인을 배출했다. 뒤이어 고구려에서도 불교를

    전해왔다. 그 뒤 140년쯤 지나 동명성왕(東明聖王)이 나와서 불교를 크게 신장시켰다. 일본

    에 불교를 전해준 왕도 이 왕이었다. 왕이 불교 융흥을 위하여 진력한 여러 공적 중에서 겸

    익(謙益)을 인도에까지 보내어 계율을 연구시킨 것도 큰 공적 중의 하나였다. 당시의 백제

    불교는 계율 중심의 불교였다.

    끝으로 신라에 불교가 들어오기는 백제보다 다시 수십 년 뒤인 눌지왕(訥祗王)(417-457)

    때, 고구려에서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는 원만한 수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단에 위치하여 중국과의 교통도 열리지

    않았고, 이질 문화에 대한 마음의 개방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교가 국가적으

    로 공인되어 수용되기는 제 23대 법흥왕(法興王) 15년(528) 때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통

  • 해서였다. 법흥왕은 불교번영을 도모하여 흥륜사(興輪寺)를 세웠으며, 불교가 국가 민족을

    수호해주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신라에는 원효(元曉, 618-686), 의상(義湘, 625-702)과 같은 역사에 빛나는 대덕들이 해

    성처럼 나타났다. 원효는 화엄학(華嚴學)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널리 불교학에 통달

    하고, 원융무애한 사상을 바탕으로 한 『십문화쟁론(十門和爭論)』을 비롯한 수많은 명저를

    남기면서, 교학적으로 한국불교의 8종의 조사라고 일컬어지는 업적을 남겼다. 실천행동에는

    사람의 의표를 찌르는 데가 있고, 승려도 속인도 아닌 독자적 경지를 걸어서, 어느 때는 산

    중에서 좌선 명상에 빠지는가 하면, 어느 때는 시정에 나타나서 염불과 설법에 열을 올리

    는, 그야말로 변화무쌍하고 무애자재한 생활로 일관했다.

    ▢ 통일신라의 불교(Buddhism in the Unified Silla)

    통일신라시대(669-935)는 한국불교가 확립·정착한 시대였다. 이 시대에 민족 불교로서 독

    자성이 배양되면서 찬란한 불교 전성시대를 불러왔다.

    신라에 의해 삼국의 통일이 이뤄지면서 사회는 크게 변하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불교계

    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불교의 정치이념으로서의 역

    할이 축소되고, 대신에 개인의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측면이 강화된 점이다. 불교 대중화라

    고 불리는 이와 같은 변화를 주도한 사람들은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활동하였던, 원효(元曉)

    와 같은 일군의 승려들이었다. 이들은 왕궁이나 사찰이 아닌 시장과 마을을 다니면서 불교

    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직접 서민적 신앙생활을 보여 주었다.

    ▢ 고려의 불교(Buddhism in Koryo)

    고려시대(918-1392)에 불교는 국교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왕건(877~943)은 고려의 태조

    (재위 918~943)가 되어 왕위에 오르자 고려의 건국은 불법(佛法)의 가호(加護)에 의한 것이

    라고 믿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운의 번영을 위해 많은 사탑(寺塔)을 세우고

    불사를 크게 일으키며 불교 옹호에 힘썼다. 동시에 불교 신앙에 의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운

    의 가호를 얻으려고 했다. 그래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으며 절을 짓고 법회를 열었

    다. 특히

  • 위선양과 민족문화 수호에 이바지하는 등 사회적으로 많은 순기능을 하였으나 많은 경비를

    들여 자주 절을 짓고 불교행사를 마련한 것은 고려가 기울게 된 원인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 조선의 불교(Buddhism in Joseon)

    조선 왕조시대(1392~1897)는 불교 탄압정책으로 말미암아 숨어서 겨우 명맥만 유지되어

    온 쇠퇴기였다. 조선의 건국 초기부터 유교국가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계획적인 불교 정

    비사업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국가의 재정과 인적인 자원을 확보하려는 현실적인 요구에

    서 일어났던 것이며, 결코 사상적인 극복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즉 유학 자체를 진흥

    하려는 적극적인 사상운동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불교의 현실적인 폐단인 경제적 세력을 몰

    수하는 데 주요한 목적이 있었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주의자들의 열의에 찬 숭유정책(崇儒政策)에도 불구하고 왕실

    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는 좀처럼 청산되지를 않아 때로 유교주의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

    다. 고려말기에 있어서의 유교의 진흥운동은 불교 배척을 계기로 그 척불 운동이 정치적 또

    는 행정적인 방면의 주장에 의해서 힘을 얻었던 것이며 결코 순전한 학문적인 이론 투쟁과

    같은 정신 운동의 소산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는 유교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불교

    를 완전히 물리치고 사상과 행정의 여러 면에 완전히 독점적인 지위를 바라기는 어려운 일

    이었다.

    태조 이성계만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불교의 폐해가 지적되고 이론이 있을 적에는 민심에

    큰 충격을 주지 않을 한도 내에서 척불정책을 채용하려 했으나 그의 개인 생활이나 종교적

    신앙 면에선 오직 한 사람의 불교도로서 일관했다. 이성계는 즉위 초에 무학(無學)을 왕사

    (王師)로 모시는 등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리고 군역의 면제자인 승려의 수를

    억제하는 한편 승려의 질적인 향상도 아울러 꾀하기 위해 태조 때부터 도첩제(度牒制)를 강

    화하여 실시하였다.

    이렇듯 태조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불교의 부패청산에 손을 대었지만 일부 유교주의자

    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불교의 근절이라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아니하였다. 그것도 그런 것

    이 삼국시대로부터의 불교는 국가를 이롭게 하고 국민을 복되게 하여 주는 신앙으로서 여전

    히 대중에 대한 교화력을 유지하여 가고 있었고 특히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처음으로 실시

    된 수륙회(水陸會)만 보더라도 그의 유연성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조는 말년에 아예 양주의

    회암사에서 주석하며 지내기도 했다. 또한 조선 최대의 대찰이었던 회암사의 창건에도 큰

    몫을 차지하기도 했다.

    태종이 왕에 즉위하면서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태종은 태조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결국 숭유억불(崇儒抑佛)의 방침을 시종 견지하여 정책상으로는 많

    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역(役)의 부담자인 민정(民丁)의 확보와 공천(公賤)의 보충이라

    는 인적 물적 국가 재원(財源)의 재확보를 위해 도징(道澄)과 설연(雪然)의 비행을 기회로

    불교사원의 정리에 손을 대었다. 이리하여 사원의 재산을 동결시키고 사전(寺田)을 몰수하

    였다. 그리고 전국의 남겨둘 공인사찰(公認寺刹)로 242사(寺)를 정하였고 여기에 상주할 승

  • 려의 정원수도 책정하여 그 정원수에 따라 전지(田地)와 노비가 책정되었다. 이러한 일들로

    지배층에서는 오히려 조세원을 확대할 수 있었고 환속당한 승려들과 사원의 노비들은 양인

    이 되어 부역과 조세의 부담을 져,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단단히 하는데 한 몫을 담당한다.

    결국 전국에 242개의 사찰만이 남게 되었고 왕사와 국사 제도도 폐지되었으며 능사(稜師)의

    제도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종전의 11개의 불교 종단을 7개로 축소시킨 것은 불교의 발전을

    저해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세종에 이르러서는 억불보다 더한 훼불(毁佛)정책이 강행되었다. 태종 때의 불교 종단이

    11개에서 7개로 통폐합되었던 것이 세종 때 다시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전국의 사찰 수도 제한하여 태종 때의 242寺 법정 사찰에서 36寺로 축소되어 선교양종에 배

    속되었다. 그리고 세종은 한성부내에 토목공사를 실시하여 수도의 경영을 위해 한때는 승려

    들을 노동에 참여하게 하여 노동력을 이용했지만 그 이후로는 승려의 파계를 이유로 도성

    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이 때 세종의 친형이 효령대군이 불교를 숭신하여 천태

    종 승려 행평(行平)에게 사사, 제자가 되어 노승의 사실(師室)에 귀의하고 승려들이 하는

    모금운동에 참여하여 탑등의 사찰건립이나 중수에 사용할 기부금을 모았다. 세종이 이를 묵

    과해 준 까닭은 왕실에서 불교 신앙에 젖은 대비(大妃)를 비롯한 여성뿐만 아니라 궁녀들이

    삭발하고 승려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적인 불교 억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은 집안의 복을 위해 재를 올리고,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제사 때에는 승려를 초

    청하였다. 그리고 민중들 사이에서는 초파일 연등행사가 나라의 억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매

    년 행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감화 받은 세종은 점차 숭불의 왕으로 변신해 갔다. 말년에는

    세종도 불교를 신봉하게 되어 붓다의 일대기를 엮도록 명하였고 우리글자 훈민정음으로 불

    교 서사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짓기도 했다.

    조선의 대호불왕(大護佛王)이라 할 수 있는 세조는 유신(儒臣)들의 반발을 억누르고 독실

    한 신자로 자처하며 불교를 중흥시켰다. 세조가 호법 사업을 편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 측

    면에서 파악될 수 있다. 첫째는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친족과 정적을 많이 살해한 데서 오

    는 죄책감에서 일수도 있다. 둘째는 그의 집권과정상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현재의 야당

    격이었던 불교를 수용하는 측면이 있었다. 셋째는 정변에 따른 민심의 동요를 불교의 보호

    와 장려로서 수습하고자한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불교 신자였던 세조가 후세에 큰 영향

    을 미친 것은 『법화경(法華經)』,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금강경(金剛經)』, 『반

    야심경(般若心經)』 등의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배포한 것이다. 그리고 세종의 명에 따

    라 수양대군(세조)이 김수온(金守溫)과 승려들의 후원으로 귀중한 불교서적들이 많이 간행

    되었다. 세조는 금강반야경을 직접 썼으며 대규모의 왕실 원찰인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

    였고, 세종 때 금지했던 승려의 도성출입을 다시 허용하는 등 많은 호법사업을 했다.

    성종은 세조 당시 불교를 신봉하던 훈구파(勳舊派)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유교정치를 지

    향하고 사림파(士林派)를 대거 등용하였으며, 중단되었던 억불정책을 다시 시행하였다. 당

    시 도첩(度牒)을 가지지 않은 승려들이 증가하는 것은 민정(民丁)의 확보라는 점에서 국가

    의 중대한 관심이었다. 그러므로 유신(儒臣)들은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색출하여 도첩제(度

    牒制)를 엄격히 시행하고 불교 자체도 뿌리 뽑아 없애려는 급진적인 억불책을 서둘렀고 급

    기야 성종 23년에 도첩제 자체를 폐지하여 승려가 되려는 자의 길을 국가가 공적으로 막았

  • 다. 이리하여 승려들이 환속당하여 절이 텅텅 비는 사태가 곳곳에서 도출되었다. 이러한 강

    력한 불교 억압정책으로 인해 사대부 양반들의 개인적 불교 신앙마저도 극도로 위축되어 그

    나마 유지되던 불교식 장례나 제사법은 점차 사라져 갔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도 억불

    정책을 폈다. 그는 사찰에 있던 승려들을 쫓아내어 관노로 삼았고 토지도 몰수했으며 승과

    (僧科)도 폐지하였고, 선교 양종의 본사도 폐지시켰다. 이로 인해 승려들은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연산군에 이어 중종에 이르러 억불정책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지난날의 사화(士禍)로

    힘을 꺽었던 사림파 유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그들에 의한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불교는 더욱 억압받게 되었다. 그는 승과를 합법적으로 폐지시켜 선교 양종의 종단 자체까

    지 그 존재가 무의미 해졌고 마침내 선명치 않은 無종파의 혼합적 현상으로 전락하고 말았

    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절과 승려는 계속 늘어났는데, 그 이유는 봉건 지배계급의 가혹한

    수탈로 파산한 민중이나 도적들, 부역 기피자등이 절로 들어온 때문이었다. 이는 한 마디로

    불교 억압정책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과 착취당한 민중들이 이해관계를 같이 하여 결합하기

    시작한 것이었으며 불교의 적극적인 반항이었다. 이에 대해 지배층에서는 이른바 미풍양속

    을 퍼뜨리고 미신을 타파하려는 명분으로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 지배이념을 지방까지 퍼뜨

    려 민중의 오랜 신앙이었던 불교를 타파하고자 하였다. 특히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민중의

    오랜 신앙이었던 민중의 불교적 공동체 생활조직인 향도(香徒)나 계를 말살하고자 한 것이

    었으며 이러한 지배층의 억불정책에 의해 끝내는 거의 말살되고 말았다.

    인종의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한 탓으로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어머니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섭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불교는 다시 부흥의 기운이 감돌았

    다. 대비는 지나친 억불정책으로 인해 오히려 불법적인 불교의 반항이 커짐을 알고 불교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약간 부흥시켜 주었다. 그녀는 중종의 배불정책을 바꾸어서 6년

    (1551년)에는 중흥불사의 대임을 보우(普雨)에게 맡기고 보우의 진언에 따라 양종과 승과를

    다시 시행하고, 도첩(度牒)을 주어 봉은사를 선종으로, 봉선사를 교종으로 삼았다. 그리고

    승과를 통해 휴정(서산대사), 유정(사명대사)등의 후대의 뛰어난 불교 지도자를 발굴했다.

    명종 때 활약한 보우(普雨)는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과 아울러 선교일치론(禪敎一致論)

    을 주장했다. 유교와 불교는 국가 사회에 나타난 면에서는 각기 다르지만 그 이치의 근본을

    따지자면 서로 일치하여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다 같이 인간의 본심과 본성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선(禪)은 행(行)의 철학이며 화엄(華嚴)은 이(理)의 철학이

    라고 하면서 선과 화엄의 융합을 꾀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1565년 4월에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친히 정사에 임하고, 보우를 탄핵하는 여론을 받아들여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그 후

    보우는 창살당하여 목숨을 잃었고, 그 다음 해에 양종의 승과제도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연

    산군 이전의 제도를 부활시켜 왕이 승하한 15년간은 조선불교의 중흥기라 할 수 있으며, 보

    우의 업적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산간으로 축소된 불교는 그 속에서 수도와 전법에 힘쓰면서 자활의 길을 모색했다. 하지

    만 문정대비의 승하 후 배불정책은 날로 심해갔다. 그러던 가운데 조선 중·후기에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계기로 의승군들이 왜적과의 싸움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자,

  • 선조는 조직적 역량이 있는 승려들을 전투에 이용하고자 했다. 이때 휴정(休靜)과 유정(惟

    政)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휴정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33세에 승과에 급제했었고 임진왜란 때 나라의 부름에 부응

    하여 73세의 노승으로 승군 오천여명을 이끌고 유정과 함께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실천으로 보여준 현실 참여 의식과 민중 구제의 사상은 『청허집(淸虛集)』과 『선가

    귀감((禪家龜鑑)』등의 저술로 나타났고, 억불로 쇠퇴의 극에 달하던 불교를 중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은 휴정과 마찬가지로 명종 때의 승과출신으로,

    휴정을 도와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는 전란 후에도 민생문제와 국력회복에 관한 방침을

    건의하였고, 『사명집(四溟集)』 등의 저술을 남겼다. 휴정이나 유정은 당시 선종의 대표적

    인 지도자였다. 그들 모두 승과에 합격하여 명리를 누릴 수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참선

    수도의 길을 걸었다. 이는 이전의 선사들과 다르게 형식주의적, 계율주의의 속박과 지배 이

    념과 신분을 뛰어넘어 자유인의 경지로서 사회참여와 실천에 앞장 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조선말기의 불교(Buddhism at the end of the Joseon)

    조선 말기의 불교는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어수선한 정세와 맞물려 민중의 편에 서서

    왕실에 저항하기도 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한 가지 형태와, 현실과는 동떨어져 지배층

    의 불교 배척에도 불구하고 상류지향적 문화를 추구하면서 지배층에 아부하는 자들이 그것

    이다. 후자는 나중에 참선과 염불을 구하는 이판승(理判僧)과 절의 사무와 제반 역입에 종

    사하는 사판승(事判僧)으로 나뉘어 교단의 명맥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불교억압

    정책은 국가적·귀족적 불교를 소멸시키고 대중들의 종교로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미륵 신앙이 민중과 밀착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말법(末法) 시대

    의 고통을 구제할 미륵불(彌勒佛)의 왕림을 고대하는 미륵신앙이 민중을 중심으로 깊숙이

    침투하였다. 이러한 미륵 신앙은 조선의 임꺽정의 난, 정여립의 난, 이몽학의 난, 홍경래의

    난 등으로 그 흐름이 이어졌다. 그리고 줄곧 승려들이 입성금지의 법령에 묶여 있던 것이

    일본 승려의 상서(上書)에 의해 1895년 입성 금지가 완전히 해제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불교(Korean Buddhism Under the Japanese Occupation)

    1)사찰령(寺刹令)과 본산제(本山制)

    1910년 일본 제국의 강점 이후 불교계를 비롯한 모든 종교계는 일본의 정책에 의해 극심

    한 제약을 받았다. 특히 일본이 불교에 대한 통제책으로 내세운 것은 1911년 반포된 사찰령

    과 그 시행규칙이다. 사찰령과 시행규칙에는 사찰을 병합, 이전하거나 폐지하고자 할 때 총

    독의 허가를 얻도록 명시하였고, 전국의 사찰을 30개의 본사와 말사로 재편하는 규정을 담

    고 있었다. 또한 본사와 말사의 경우에 본사주지는 총독, 말사 주지는 도장관의 허가를 얻

    어야 한다는 규정이 명시되었다. 그 결과 법통이 중시되어야할 본말사의 관계가 행정적인

    조직이 되었고, 사찰의 주지는 총독부의 지배를 받는 관료와 다를 바 없는 위치가 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불교정책은 한국불교의 행정체계를 총독부에 종속시키고 승려의 세속화를 권

    장하면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크게 위협하는 결과를 주었다. 사찰에 속한 토지, 삼림, 건물,

  • 기타 귀중품 등의 재산을 총독의 허가가 아니면 주지가 임의로 처분치 못하게 한 규정은 표

    면상으로는 사찰재산의 보호였던 것이나 실제는 사찰의 재산이 비밀리에 항일독립운동의 자

    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 그 저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불교개혁론의 제창

    일본의 지배아래 한국불교의 전통과 발전방향이 크게 왜곡 되어가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불교의 자각과 개혁을 부르짖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용성(龍城)스님은 ‘귀원정종(歸源正宗)’

    을 통해 기독교의 활발한 포교활동에 비해 뒤떨어진 불교의 상황을 꼬집고 적극적인 포교에

    나설 것을 주장하였고, 1913년 발표된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불교개혁을 제시하

    였다.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사회 진화론적 인식에 기초를 두고 불교의 평등주의, 구

    세주의에 개혁의 이상을 설정하였다. 한용운은 구체적인 개혁방안도 제시했는데, 승려 교육

    의 진흥, 참선법의 개정, 염불당의 폐지, 의식의 간소화 등을 통해서 불교의 본질을 회복하

    자고 역설했다. 또한 사원을 도시로 옮기고, 승려의 취처(娶妻)를 허용하여 교세를 확장시

    키고, 승려의 단결을 촉구하면서 교단 통일기관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개혁안들은 일본불교의 영향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보여 주고 있지만, 침체에 빠진 조

    선불교를 개혁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개혁론은 불교

    청년운동으로 이어졌고 그 이론적 논거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3)불교계의 항일운동

    불교계의 항일운동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한용운은 3ㆍ1 독립

    선언에 33인의 민족대표로 참가하여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

    용운은 불교계에 독립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중앙학림(오늘날의 동국대학교)의 학승들을

    대대적으로 조직하여 전국 사찰로 독립 선언서의 배포와 만세운동의 확산을 도모하였다. 그

    리하여 3.1운동 당일 중앙학림의 학승들 거의 전원이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에 동참하였고 가

    두시위를 하였다. 이윽고 만해의 지시를 받은 학승들은 연고 사찰로 흩어져 전국 주요 사찰

    승려들의 만세운동 동참을 이끌어 냈다.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건봉사, 봉선사 등 주요

    사찰들은 강원 학승들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전국 방방

    곡곡이 민족적 자존심을 되새기는 데 기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승려들이 투옥되어 수

    형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시적인 만세운동의 동참에서 나아가 조직적으로 항일 운동에 동참한 승려들도 많

    았다. 상해 임시정부 이전에 13대 대표자 회의가 인천 월미도에 열려 한성 임시정부의 창립

    을 선언하였는데, 여기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박한영, 이종욱이 참여하였다. 특히 이종욱은

    월정사 승려로 3ㆍ1 운동 당시 시위에 동참하였고, 곧이어 27구국 결사대에 행동대원으로

    동참하였다. 이후 이종욱은 김법린, 김상호, 백성욱, 신상완, 김상헌, 송세호, 백초월, 정

    남용, 이석윤 등 많은 승려들과 협의하여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승려 신분으로 참여하

    였다. 이들은 전국 지리에 밝아 주로 산중 사찰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의 조직과 재정후원사

    업에 동참하였다. 특히 이종욱의 활약은 주목할 만하였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무부

    국내 특파원과 참사, 그리고 의정원(오늘날의 국회) 의원이 되었고, 임정의 국내 행정조직

  • 인 ‘연통제’의 국내 총책 소임을 맡기도 하였다. 이종욱은 국내 특파원으로 들어와 청년 승

    려들을 독려하여

    전국 사찰의 재정모금을 꾀하였고, 주요 사찰을 기반으로 연통제의 확산과 의승군 조직을

    도모하였다. 의승군은 임진왜란 당시 의승들의 전통을 되살리는 시도였으나 중도에 탄로가

    나 수포로 돌아갔다.또한 이들은 1920년에 「승려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불교계 주요 고

    승 10여 명의 서명을 받아 상해와 프랑스 파리까지 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교계의 이러

    한 항일 운동은 일제의 간교한 탄압으로 대부분 구속되어 와해되어 갔으며, 일부 청년 승려

    들은 청년회를 조직하여 사찰령 철폐운동을 벌여 나가기도 하였다.

    3.1운동 이후에 일본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현실을 자각하고 비판을 가하던 청년 승려들

    은 대체로 전통적 강원이나 선방을 거치지 않고 중앙학림 등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근대적 학문을 익힌 경우가 많았으며, 전통불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불교청년운동의 조직으로는 1920년에 창립된 조선불교청년회,

    1921년에 창립된 불교유신회, 1922년에 창립된 조선여자불교청년회 등을 들 수 있다. 청년

    들은 정교 분리라든지, 사찰령의 철폐, 주지의 전횡 반대 등을 주장하며 교단의 자율적 운

    영과 발전을 꾀했다. 하지만 점차로 침체되어 가던 불교청년운동은 1928년에 조선불교청년

    회로 재기하였고, 1929년 1월에 개최되었던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

    하여 중앙종회의 구성과 종헌의 제정을 이루어 내기도 했다.

    4)선학원과 전통불교의 수호

    일제의 강압적인 불교정책과 주지들의 세속화 경향, 근대적인 불교개혁이 교단의 풍토를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전통 불교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던 선방의 수행승들의 입지는 점차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선학원은 그러한 수행승들의 자구책으로 전통 선의 보존과 중흥을

    위해 설립되었다. 선학원은 1920년에 남전, 도봉, 석두 등의 수좌들이 중앙에 대표적인 선

    원을 만들고자 결의하여 용성, 만공, 성월 등의 협의를 거쳐 1921년 11월에 완공하였다. 선

    학원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다가 적음 스님이 선학원을 맡으면서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

    고, '선원'을 창간하여 선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선학원은 1934년 12월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으로 개

    편하고 그 위상을 더욱 안정화시켰다. 1941년, 선학원에서 열린 유교법회(遺敎法會)는 청정

    비구승 40여 명이 모인 대규모 법회였다. 이 법회는 일제 말 점차 희미해져 가는 선종의 전

    통을 확인하고 승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행사였다. 선학원 이외에도 일본의 불교정책과 일본

    불교에 맞서서 전통불교를 수호하고 정체성을 지키려는 여러 움직임이 있었다. 1925년 용성

    이 망월사에서 주도한 ‘만일선회결사(萬日禪會結社)’라는 참선결사를 비롯하여, 1926년 용성

    이 주축이 되어 100여 명의 승려가 함께 ‘대처(帶妻)와 육식(肉食)’을 반대하는 건백서를 총

    독부에 제출한 것도 전통적 수행풍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해

    방 이후 정화운동 과정에서 선승들이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명분을 갖게 한 큰

    밑거름이 되었다.

    5) 일제강점기 불교의 빛과 그림자

  • 이미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불교는 일제 치하에서 승려의 ‘대처(帶妻)’용인과

    중앙집권 형 근대 종단체제를 맞아 정체성이 흔들렸다. 물론 일제가 한국불교에 끼친 긍정

    적 영향도 많다. 가장 큰 장점은 대중포교와 교육이었다. 조선 500년을 거치면서 한국불교

    는 생존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 때문에 대중포교 승려교육은 엄두

    도 못냈다. 그 결과 승려의 지위는 천민으로 떨어졌고 불교의 정체성도 심하게 훼손됐다.

    나락으로 떨어진 한국불교를 일거에 신분 상승시킨 것이 일제였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일제

    를 거치면서 한국불교는 특정사찰을 중심으로 하는 조사형 불교에서 종단 중심의 중앙집권

    제로 바뀌고 막대한 토지 자본을 바탕으로 엘리트들이 다수 배출된다. 또 일본 불교의 영향

    을 받아 도심 포교당이 들어서고 대중교화, 교육에 눈을 뜬다. 그 가운데 전래부터 내려오

    던 조사선 역시 민족주의 경향을 띠면서 세를 형성하는데 해방 후 절대 소수 위치에 있던

    비구승들이 새로운 종단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 오늘날의 한국불교(Korean Buddhism Today)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대한민국이 독립을 하면서 한국불교는 일본불교의 지

    배와 그 영향권을 부정하고 새로운 의미에서의 불교를 부흥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

    하여 유명한 사찰이 많이 소실되고 전란 후 불교도들 사이에서 자각의 소리가 높아감에 따

    라 한국불교는 주체와 자립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로 인한 첫 걸음은 일본불

    교의 강요와 영향 아래 생겨난 대처승(帶妻僧)의 추방이었다. 한국불교의 역사적 전통에서

    보면 승려가 처자식을 거느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처자식을 거느리는 승려가 배출되어 조계종의 전통이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우

    선 대처승을 추방하고 사찰의 생활을 바르게 하는 정화운동에 착수했다. 1954년 5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의 “대처승은 사찰에서 퇴거하라.”라는 정화지지 유시문을 발표하여 정화운동

    이 본격화되었다. 여러 차례의 혼돈 끝에 정화운동은 성과를 보여 1962년 대처와 비구측은

    상호 합의하여 통합종단을 출범시키고 '대한불교조계종'이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구 중심의 종단운영은 대처 측의 반발을 샀고, 일부 대처 측은 결국 1970년 독자적인 태

    고종(太古宗)을 창종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한국의 불교종파는 조계종을 위시하여 태고종,

    진각종, 원효종, 천태종 등 30여개 교단들로 나누어져 있다. 종단이 다양화되는 상황에서

    불교계의 통일성과 종단의 고유성을 조화시키는 일은 앞으로 불교계의 중요한 과제로 제기

    되고 있다.

    ▢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Historical features of Korean Buddhism)

    첫째는 통불교적 성격이다. 한국불교의 역사를 통찰하면, 교학면에서나 실천면에서나 각

    각 다른 종파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언제나 흐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종합통일

    을 이룩한 지도자가 높이 숭배되었다. 중국의 수·당 시대 이후의 이른바 종파불교를 수용하

    면서도 그런 성격에는 변화가 없었다. 한국 불교는 일본으로 전해졌으므로 고대 일본에서는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나중에는 중국에서도 직접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후로

    는 선택의 입장에서 중국 이상으로 분파를 만들면서 종파불교를 발달시켰다. 일본에서는 분

    파독립을 달성한 사람이 조사(祖師)로서 존경받는데, 한국에서는 종합 통일을 이룩한 사람

  • 이 존경받는다는 점이 바로 그 특징이다. 한국 불교가 최근까지 크게 조계종이라는 한 울타

    리 안에서 지내오게 되었던 사상과 배경도 그런 특징에 말미암는 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호국불교이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23년(551)에 시작한 법회의 종류에는 백고좌

    강회(百高座講會)와 팔관재회(八關齋會)가 있다. 백고좌강회는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

    (仁王護國般若波羅密多經)』의 설을 따라 내란과 외환 등의 악운을 물리치고 왕실과 국가안

    전을 기원하기 위해서 행한 법회였다. 팔관재회는 8계를 호지하여 전사한 병사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한국불교를 시종 일관한 전통은 이 호국불

    교의 정신이다. 이러한 이념이 강하게 나타난 것은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이다.

    오계 가운데 제 1조는 ‘나라(임금)에 충성할 것이며’, 제 4조는 ‘싸움터에서 물러나지 말라.’

    고 되어 있다. 이러한 원광의 임전무퇴의 계율이 고구려와 백제와의 싸움에서 큰 힘이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정신적인 힘이 되었던 것이다. 또 적국의 항복을 발원한 황룡사

    (黃龍寺) 9층탑의 건립이라든가 일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석굴암의

    불상, 그리고 ‘죽어서 호국의 혼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해저왕릉을 지을 것을 부탁한

    태종 무열왕 등도 강렬한 호국의식을 상징한 것이라 하겠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무력침공

    을 극복하려는 비원이 담긴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 조판되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壬辰倭亂) 때 서산(西山)과 사명(四溟) 등의 의승이 무기를 들고 의군으로 전투에 참가하

    여 조국방위를 위해서 피를 흘렸다. 이러한 신라불교의 호국정신은 조선조에 이르도록 그

    맥을 생생히 이어온 것이다.

    ▢ 사찰이란 무엇인가(What is the Temple)

    사찰(寺刹)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불도를 닦는 수행 도량이자 불법을 널리 펴서 중생을

    제도하는 전법의 장소이다. 같은 의미지만, 사찰의 명칭은 사(寺), 사찰(寺刹), 사원(寺

    院), 가람(伽藍), 도량(道場), 정사(精舍), 총림(叢林), 승원(僧院), 선원(禪院), 암(庵),

    암자, 포교원(布敎院)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절이라 부른

    다. 사찰을 ‘절’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확실치 않지만 두 가지 설이 있다. 불교가 우리나

    라에 처음으로 전파된 신라시대 때 당시 아도(阿道) 화상이 묵호자(墨胡子)란 이름으로 ‘모

    례(毛禮)’라는 사람의 집에 숨어 살았는데, 그 모례의 집이 우리말로 ‘털례의 집’ 이고 그

    ‘털’이 ‘덜’로 바뀌었다가 다시 ‘절’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사찰에 와서는 절을 많이 하여야

    하기 때문에 ‘절’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초의 사찰은 인도 마가다(Magadha)국의 빔비사라(Bimbisāra) 왕이 붓다와 제자들을 위

    해 기증한 죽림정사(竹林精舍, veḷuvana)이다. 불교가 처음 일어났던 BC 6세기경 인도 승

    려들은 무소유를 이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일정한 거주지 없이 유랑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인도에서 우기에 쏟아지는 비로 생명의 위협을 겪기도 하고 길을 덮는 벌레들 때문에 뜻하

    지 않는 살생을 피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부득이하게 3개월간 일정한 곳에 머물면서 수행

    하는 안거(安居, vasso)제도를 도입하였다. 안거가 정착되면서 유력한 신도들이 붓다와 비

    구들이 머물 수 있는 원림을 기증한 것이 바로 죽림정사였다. 죽림정사를 시작으로 승려들

    이 거주하면서 수행처로 자리 잡기 시작한 사찰은 평지가람과 산지가람 그리고 석굴가람의

    형태로 나누어졌다.

  • ▢ 사찰의 구조(Temple Architecture)

    우리나라의 사찰은 대웅전(大雄殿)을 중심으로 누각, 종각, 강당, 승방 등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사찰과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에서 전혀

    볼 수 없는 특이한 종교 공간으로 산신각과 칠성각이다. 사찰에 가면 반드시 눈에 띄는 것

    은 붓다와 보살을 그린 만다라(曼陀羅, mandala)1) 즉 탱화(幀畵)2)가 대웅전을 비롯하여

    모든 전각에 걸려 있는 점이다. 12신장도 대웅전 좌측 벽에 그려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법

    당 만다라는 붓다와 보살을 비롯하여 석가팔상도, 화엄회, 수륙회, 제석천, 신장, 지옥, 관

    음, 나한, 칠성, 산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려져 있다. 법당과 모든 전각에는 이와 같은 만

    다라로서 장엄되어 있는 것이 한국사찰의 특징 중 하나이다.

    ▢ 피안교(彼岸橋)

    피안교(彼岸橋)는 ‘이 언덕(此岸)’에서 ‘저 언덕(彼岸)’으로 건너가는 다리라 하여 그렇게

    불린다. 차안(此岸)은 헤맴의 사바세계요 피안(彼岸)은 깨달음의 열반세계이다. 사찰에 피

    안교(彼岸橋)가 있는 것은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을 초월한 이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음을

    의미한다.

    ▢ 산문(山門)

    사찰에서의 구조물로서 요사채나 전각들이 아닌 입구로서 본법당을 가기 전에 거치는 문

    들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다시 말해서, 사찰의 중심인 큰 법당에 들어서기 위해 통과하는

    문의 순서를 말하는 총칭으로서, 그 순서는 일반적으로 일주문(一柱門),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이다. 넓게는 절이나 불교의 계파를 말할 때에도 사용된다.

    ▢ 일주문(一柱門)

    대개 사찰에 들어서면 일주문(一柱門)이 나온다. 일주문은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즉 일심(一心)으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자’는 뜻이 담긴 절의 첫째 문으로 기둥을 일직선

    상에 세웠다는 것에서 유래했다. 즉 네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 가옥과는 달리 일직선

    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것이다. 문에 현판을 걸어 사찰의 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 천왕문(天王門)

    일주문을 지나면 부릅뜬 눈에 무서운 표정 또는 천진난만한 모습의 천왕이 지키는 천왕문

    (天王門)이다. 천왕(天王)은 그 절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문지기다. 천왕문은 절에 있을 지

    도 모를 나쁜 귀신을 내쫓거나 밖에서 들어올지도 모를 나쁜 귀신을 물리쳐 절을 깨끗한 도

    1) 만다라(曼陀羅, mandala)는 힌두교와 불교에서 종교의례를 거행할 때나 명상할 때 사용하는 상징적인 그림이

    다.

    2) 탱화(幀畵)는 불교의 신앙 대상이나 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 량으로 유지하기 위해 만들었다. 사천왕들의 발밑에는 나쁜 귀신들이 짓밟힌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중생에게 인과응보를 가르치는 상징이다. 그런

    데 재미있는 것은 이 천왕들을 보면 불교가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한국으로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천왕들의 얼굴은 중앙 아시아인이고 옷은 중국 원나라 장수의 갑옷을

    입었으며 손에는 조선 검을 들고 있다.

    ▢ 불이문(不二門)

    마지막으로 나오는 문은 불이문(不二門)으로 너와 나, 현재와 미래, 삶과 죽음은 둘이 아

    니라는 것을 상징한다. 즉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본당에 들어서기 전의 이

    문들을 산문(山門)이라고 하는데 절의 상징어로도 쓰인다.

    ▢ 대웅전

    대웅전(大雄殿)은 석가모니 붓다를 주불(主佛)로 모신 법당을 말하며, 절의 중심에 위치

    한 가장 큰 건물이다. 대웅전은 글자 그대로 ‘위대한 영웅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의 영웅은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석가모니 붓다를 가리킨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붓다의 양 옆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함께 모셔놓고 있다. 왼쪽의 문수보살은 붓다의 지

    혜를 상징하고 오른쪽의 보현보살은 덕을 상징한다. 법당에 들어갈 때는 좌우 양쪽 문으로

    출입한다. 가운데 문은 조실스님이나 주지스님만 출입한다.

    ▢ 극락전(極樂殿)

    극락전(極樂殿)은 서방극락 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3)을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불의 광

    명과 수명은 끝이 없다 하여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아미타불의 좌우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 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다.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 무량

    수전이 유명하다.

    ▢ 미륵전(彌勒殿)

    미륵전(彌勒殿)은 미래의 붓다인 미륵불을 모신 곳이다. 일명 용화전(龍華殿) 또는 자씨

    전(慈氏殿)이라고도 한다.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사 미륵전이 유명하다.

    ▢ 원통전(圓通殿)

    원통전(圓通殿)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이다. 관세음보살은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

    通)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소멸해준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 그 절의 주불전일 때 원통

    전, 부불전일 때 관음전이라고 한다. 강원도 양양에 있는 낙산사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유

    명하다.

    3) 아미타불은 본래 임금의 지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비구로서, 보살이 닦는 온갖 행을 다 닦아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48대원을 세워 마침내 아미타불이 되어 극락정토를 주재하게 되었다.

  • ▢ 약사전(藥師殿)

    약사전(藥師殿)은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 즉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모신 법당이

    다. 약사여래는 현세중생의 모든 재난과 질병을 없애주고 고통에서 구제해주는 현세이익적

    인 보살이다. 일명 만월보전, 유리광전, 보광전이라고도 한다.

    ▢ 팔상전

    팔상전(八相殿)은 석가모니 붓다의 일생을 여덟 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봉안한 곳이

    다. 일명 영산전(靈山殿)이라고도 한다. 충북 보은에 있는 법주사 팔상전이 유명

    하다.

    ▢ 나한전

    나한전(羅漢殿)은 석가모니 붓다의 제자 중 아라한과를 성취한 성인, 즉 나한을 모신 곳

    이다. 석가모니 붓다를 주불로 하고,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협시, 16나한,

    500나한 등 봉안하고 있다. 일명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진리와 합치한 분

    들을 모셨다’라는 의미이다.

    ▢ 명부전

    명부전(冥府殿)은 시왕전(十王殿) 또는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이 법당의 주불(主

    佛)은 지장보살이며 그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로 봉안하

    며 다시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한다.

    ▢ 대장전

    대장전(大藏殿)은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축조한 건물이다.

    ▢ 적멸보궁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석가모니 붓다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전이다. 적멸(寂滅)은 불교

    의 최고 이상인 열반(涅槃, nibbāna)의 다른 이름으로, 붓다가 생을 마감하고 열반에 들어

    간 것을 상징한다. 내부에는 붓다와 보살을 모시지 않고 비어 있다. 우리나라의 5대 적멸보

    궁으로는 영축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이

    있다.

    ▢ 조사당

    조사당(祖師堂)은 한 종파를 세운 스님이나 후세에 존경받는 큰스님, 그리고 창건자나 역

  • 대 주지스님의 영정 또는 위패를 모신 당우이다. 조사당의 건립은 조사들의 신앙이 강한 선

    종(禪宗)에서 먼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선종의 사찰에서는 고승들이 입적하면 사리탑

    인 부도(浮屠)를 건립하고 조사당을 지어 그 영정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것이 다

    른 종파에까지 전파되어, 큰 사찰에서는 대개의 경우 조사당을 갖추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의 송광사 국사전이 있다.

    ▢ 삼성각

    삼성각(三聖閣)은 우리나라 고유의 토속신들 즉, 산신(山神), 독성(獨聖), 칠성(七星)을

    모신 곳이다. 셋을 분리해서 산신각(山神閣), 독성각(獨聖閣), 칠성각(七星閣)을 지어 따로

    모시기도 한다.

    ▢ 범종각

    법종각(梵鐘閣)이란 범종을 보호하는 건물을 말한다.

    ▢ 요사채

    사찰 내에서 전각이나 산문 외에 승려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승려들의 일상생활을 위해 지어진 건물을 이른다. 요사(寮舍)라고도 한다. 여

    기에는 선방이나 승방은 물론 곳간, 부엌, 측간까지도 포함된다. 또한 신도들이 어우러져

    식사를 하는 공간도 마련된다. 이러한 요사채에도 격(格)에 맞추어 그럴듯한 당호(堂號)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심검당(尋劍堂)은 지혜의 칼을 갈아 무명(無明)의 풀을 벤다는 뜻이

    고, 적묵당(寂默堂)은 말없이 참선한다는 뜻이며, 설선당(說禪堂)은 강설과 참선을 함께 한

    다는 말이다. 이밖에 향적전(香積殿)은 향나무를 땔감으로 하여 법당에 올릴 공양을 짓는다

    는 뜻이고, 염화실(拈花室)은 조실스님이나 대덕(大德)이 머무르는 곳이다.

    ▢ 탑

    탑(塔)은 산스크리트어 스투파(stūpa)와 빨리어 투파(thūpa)에서 유래된 말이다. 원래

    돌, 벽돌, 나무 따위를 깎아 여러 층으로 쌓아올린 집 모양의 건축물로 붓다나 고승의 사

    리, 유품 등을 안치하는 곳이다. 이 탑의 기원은 붓다가 열반에 든 후 그 사리(舍利)를 모

    신 무덤인데, 이후 붓다의 사리가 여러 지방으로 옮겨지면서 여러 형태의 탑이 만들어졌다.

    중국에서는 전탑(塼塔), 우리나라는 석탑(石塔), 일본에서는 목탑(木塔)이 발달하였다.

    ▢ 금강계단

    금강계단(金剛戒壇)은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장소이다. 우리나라의 통도사 금강계단이 가

    장 대표적이다. 금강(金剛)은 금속 중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리하기 때문에 불교의 경론 속에서 굳고 단단한 것의 비유로 쓰이고 있다. 금강계란 금강

    보계(金剛寶戒)에서 유래된 말로 금강과 같이 보배로운 계라는 뜻이다.

  • ▢ 석등

    석등(石燈)은 사찰 경내를 밝히는 등이다. 불교에서 등불을 밝히는 것은 공양 중에서도

    으뜸이므로 일찍부터 등불을 안치하는 공양구의 하나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형태

    는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 화사석(火舍石), 옥개석(屋蓋石) 등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며,

    옥개 위에는 보주(寶珠)를 얹는 것이 일반적이다.

    ▢ 부도

    부도(浮屠)는 고승의 사리를 모신 탑을 말한다. 원래 불타(佛陀, Buddha) 또는 솔도파

    (率堵婆, Stūpa)라는 음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처음에는 불상, 사원, 불탑을 의미했지만 뒤

    에는 고승들의 사리를 담는 석탑을 지칭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 당나라로부터

    선종이 들어온 9세기 이후 각 구산선문(九山禪門)에서 사자상승(師資相承)으로 법맥이 이어

    지면서 불상 숭배보다는 조사(祖師)들의 사리와 유골을 담은 묘탑이 중요한 예배대상이 되

    어 많은 부도가 세워졌다.

    ▢ 한국의 사찰(Korean Temples)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은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375년에 세운 초문사(肖門寺)와 이불

    란사(伊佛蘭寺)이다. 우리나라 사찰들은 대부분 산수가 아름다운 명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

    는데 그 이유는 수행을 중심으로 한 선종(禪宗)이 많기 때문이란 설과 풍수도참설(風水圖讖

    說)의 영향이란 설, 그리고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영향 때문이란 설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들은 대부분이 삼국시대에 건립되어 임진왜란과 6.25동란 때 소실된 것을 재건 또는 중

    창을 거쳐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3대 사찰이라고 하면,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신

    라의 옛 수도인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 등이 유명하지만, 3대 사찰은 한국불교의 불(佛,

    Buddha), 법(法, Dharma), 승(僧, Saṅgha)의 삼보(三寶, tri-ratana)를 나타내는 사찰로서

    통도사는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어 불보(佛寶) 사찰로,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수장되어 있

    어 법보(法寶) 사찰로, 송광사는 수행도량으로서의 수선사가 있으므로 승보(僧寶)사찰로 삼

    고 있다.

    ▢ 사찰음식(Temple Food)

    채식주의자들이 많이 관심을 갖는 음식 가운데 하나가 사찰음식이다. 또한 요즘은 사회

    전반에 웰빙(well-being) 문화가 유행하면서 불교신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자연친화적이고

    건강에 유익한 사찰음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불교 초기에는 모든 승려들이 특별한 거처 없이 산속이나 동굴에서 살면서 탁발을 하여

  •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지냈다. 승려를 일컫는 비구(比丘)는 팔리어 ‘빅쿠(bhikkhu)’나 산스

    크리트어 빅슈(bhikṣu)의 음역으로, 원래 음식을 빌어먹는 걸인을 가리킨다. 비구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덕이 있는데, 첫 번째 덕이 바로 개인의 재산을 모으지 않고 걸식하며 살아가

    야 한다는 것이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입는 옷조차도, 일반 대중들이 입다가 해진 옷을 걸

    레로 쓰고 그러다 더 이상 걸레로도 쓸 수 없어 버린 천들을 모아 만들었다. 초기 불교의

    승려들은 한마디로 집도 절도 없이 탁발로 연명했다. 이 집 저 집에서 주는 음식을 먹으며

    지냈기 때문에 가리는 음식 없이 무엇이나 먹었다. 따라서 육식을 피하진 않았다. 이들은

    탁발한 음식으로 오전 중에 식사를 마쳐야 하고 1일 1식의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따

    라서 정오에서 다음 날 일출까지는 비시(非時)라 해서 음식물을 입에 대지 않았다.

    불교 초기에는 거처가 따로 없이 지내던 승려에게 우기 3개월 동안 한 곳에 머무르는 생

    활이 허락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안거제도(安居制度)이다. 이런 안거제도가 차츰 발달하면

    서 왕족과 부호들이 집을 지어 기증했다. 이로 인해 최초의 사찰인 죽림정사가 생겨났고 주

    위에 회랑 또는 담장을 둘러서 원으로 발전하게 됐다. 이러한 주거공간의 변화는 승려들의

    식생활로 이어졌다. 탁발을 하던 승려들은 이제 신도들이 만들어 주는 음식을 먹게 됐던 것

    이다. 더욱이 왕권의 보호로 귀족 불교가 되고 여러 유형의 불교가 생기면서 예외적인 식생

    활 형태가 나타나게 됐다. 1일 1식의 원칙도 변화하여 하루에 한 번 이상 먹는 것이 허용되

    었다.

    초기 불교에는 특별히 음식에 대한 금기는 없었는데 고기는 아무 고기나 먹어도 상관없다

    는 것은 아니다. 고기는 삼종정육(三宗淨肉)만을 허락했다. 삼종정육은 자신을 위해 죽이는

    것을 직접 보지 않은 짐승의 고기, 남으로부터 그런 사실을 전해 듣지 않은 고기, 자신을

    위해 살생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가지 않는 고기를 말한다.

    불교 전래 초창기 중국에서는 승려들과 일반 불교신도들도 고기를 먹었지만 남조 양나라

    의 무제(武帝) 이후 점차 채식으로 바뀌었다. 대승불교가 흥성하면서는 마늘, 파, 달래, 부

    추, 흥거와 같은 오신채(五辛菜)도 음식에 넣지 않게 됐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 의하

    면 삼매(三昧, samādhi)를 닦을 때에는 오신채를 끊어야 하는데, 이 채소들을 익혀서 먹으

    면 음란한 마음이 일어나고, 날것으로 먹으면 성내는 마음이 더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와 달리 대승불교권의 승려들은 사원 안에서 먹거리를 조달하고 직접

    요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고기와 오신채를 넣지 않는 사찰음식이라는 독특한 음식문화가

    형성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사찰음식, 일본의 쇼진요리(精進料理), 중국의 자이판(斋饭)과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4) 한국의 사찰음식은 사찰이나 지역마다 조리법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고기와 오신채, 인공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단솔한 맛을 내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러나 사찰음식은 어디까지나 불교의 불살생(不殺生)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출가자의 수행과 정진에 도움이 되기 위한 음식으로서, 그러한 음식을 준비하고

    먹는 과정 자체가 이미 수행의 한 과정이었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사찰음식의

    4) 중화권에서는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고 식물성 음식만을 섭취한다는 뜻을 가진 채식(菜食)을 ‘희고 순수하다’라

    는 뜻의 ‘소(素)’자를 써서 소식(素食)으로 표현한다.

  •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다면, 사찰음식은 그저 현대인들이 ‘잘 먹고 잘사는 것’ 정도의 의미로

    신중하지 못하게 언급하는 하나의 고급스러운 웰빙 문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발우공양

    발우공양(鉢盂供養)은 사찰에서 스님들이 하는 식사법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밥 먹는

    것을 ‘공양(供養)’이라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밥을 먹는 행위가 아니라 붓다의 탄생,

    성도(成道), 열반까지의 과정을 생각하고 많은 보살과 부처를 생각하고, 자연과 뭇

    중생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보살로서 살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서원을

    다짐하는 거룩한 의식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한다고 해서 대중공양, 밥 먹는 것도

    수련이자 수행이기 때문에 법공양(法供養)이라고도 한다.

    발우(鉢盂)는 스님들이 쓰는 그릇을 말한다. 발우는 포개어지는 네 그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큰 순서대로 어시발우, 국발우, 청수발우, 찬발우라고 한다. 어시발우에는 밥을

    담고, 청수발우에는 청수라고 불리는 물을 담으며 국발우에는 국을, 찬발우에는 반찬 류를

    담는다. 네 그릇의 크기가 일정하게 줄어들어서 가장 큰 어시발우 안에 국발우, 청수발우,

    찬발우 순으로 넣은 것을 보자기에 싸서 보관한다. 공양을 할 때는 자신의 왼쪽 무릎 앞에

    어시발우, 오른쪽 무릎 앞에 국발우를 놓고 두 발우와 같은 간격으로 어시 발우 뒷 쪽에

    찬발우, 국발우 뒷 쪽에 청수발우를 놓는다. 즉, 발우를 펼 때는 왼쪽 무릎 앞에 포개진

    발우를 놓고 시계반대방향으로 차례대로 놓으면 되고, 공양이 끝나면 왼쪽 뒤편에 놓인

    찬발우부터 시계방향으로 거두어서 어시발우 안에 세 발우를 겹쳐서 넣는다. 발우 외에

    공양할 때 준비해야 할 것으로 발우깔개와 발우의 물기를 닦을 헝겊 수건과 수저가 있다.

    보관시에는 보자기를 싼 발우 위에 올려놓는다. 발우를 폈을 때 수저는 청수발우에 둔다.

    발우와 수저가 닿을 때 나는 소리는 최대한 줄여서 조용하게 마음을 지켜보는 가운데

    발우공양을 한다.

    발우공양 때의 게송 오관게(五觀偈)에는 겸허의 마음이 내재해 있다. 즉 ① 내 자신

    공(功)의 많고 적음을 헤아린 채 이 음식 건네 오게 된 인연을 생각하며, ② 자신 덕행을

    헤아려 결함을 온전히 한 채 공양에 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③ 스스로 마음을 방호하고

    과실과 탐욕 등 여읨을 종(宗)으로 삼으며, ④ 마른 몸 치료하는 약으로 생각한 채, ⑤

    오직 도업(道業) 성취를 위해 이 음식을 받습니다”는 다섯 내용을 관찰해야 함을 말한다.

    이에는 음식물을 대하는 수행자의 자기성찰의 자세가 요청된다. 즉 음식이란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인의 육체를 최소한 지탱키 위한 약으로, 맛을 탐닉하기 위한 대상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발우공양은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 친환경적인 식사법이다. 자신이 먹을 만큼의

    음식물을 받고 그것을 남김없이 먹기 때문에 음식물 쓰레기가 전혀 나오지 않으며 따로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어서 설거지물도 절약된다. 사찰 신도들도 식사를 할 때에 음식물

    찌꺼기를 남기지 않고 깨끗이 닦아 먹는 실천을 한다. 현재 발우공양은 불교 관련 행사나

    템플스테이(Temple Stay)에서 빠지지 않는 프로그램으로 관광객 및 일반인도 쉽게 체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