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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 행 정 사 학 회 - kapahistory.comC7%D1%B1%B9%C7%E0%C1%A… · 11) 김태영, “여말선초 성리학 왕정론의 전개”, 조선시대사학보 14 (2000), p.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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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국 행 정 사 학 회

    임 원

    고 문 : 강신택(서울대 학술원 회원)

    유종해(연세대), 이광종(청주대), 장동희(단국대)

    한영춘(단국대), 권기성(광운대)

    회 장 : 오열근(단국대)

    부 회 장 : 이대희(광운대), 이명재(상명대), 강창구(상지대)

    김권집(충남대), 김춘식(천안대), 최종연(단국대)

    집행이사 : 곽효문(편집이사, 한영신대) 권정호(연구이사, 인천대)

    김정기(편집이사, 경문대) 남기범(섭외이사, 성결대)

    백정현(연구이사, 충남대) 소광섭(연구이사, 건양대)

    송낙선(운영이사, 백석대) 안외순(편집이사, 이화여대)

    유준석(총무이사, 백석대) 이상엽(편집이사, 한서대)

    정시구(연구이사, 건양대) 정우열(편집이사, 경운대)

    최한규(섭외이사, 선문대) 이선엽(편집이사, 홍익대)

    감 사 : 강병태(인천조달청), 조경훈(한성디지털대)

    편집위원 : 김정기(위원장, 경문대)

    김춘식(천안대), 안외순(이화여대)

    곽효문(한영신대), 정우열(경운대)

    이상엽(한서대), 이선엽(홍익대)

    서유경(경희대)

  • 第 18 號

    2006. 6

  • 목 차

    1.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 곽 효 문·············································································· 1

    2. 頤齋亂藁 에 나타난 忠淸道 木川・全義縣 官屬의 運營實態 / 노 혜 경············································································ 35

    3. 정도전의 행정사상과 부동산정책 관리방향

    / 윤 기 상············································································ 79

    4. 퇴계 ․율곡의 행정사상과 책임론적 의의 / 이 광 종·········································································· 115

    5. 역대 정부 행정의 사상적 기반에 관한 연구

    / 이 대 희·········································································· 153

    6. 삼국지 에서의 제갈량의 조직혁신 리더십

    / 정 시 구·········································································· 181

    7. 다산 행정제도 개혁론의 현대적 의의

    / 최 종 연·········································································· 215

    8. 한국행정사학회의 연구현황과 과제

    / 김 경 수·········································································· 251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ontemporary Significance of

    Medical Welfare Policy in Chosun Dynasty

    곽 효 문(Hyomoon, Kwak)*)1)

    목 차

    Ⅰ. 머리말

    Ⅱ.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발흥

    Ⅲ.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실재

    Ⅳ.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

    Ⅴ. 맺음말

    초 록

    조선조의 제도와 문물은 고려를 계승하고 중국을 벤치마킹하였지만 그들의 단순

    한 재생이나 이식이 아니다. 민족주체성에 의한 독자적인 창발(creative initiation)

    에 의하여 사회와 시대에 알맞도록 재조직하고 정비함으로써 조선조의 모든 제도

    가 왕실과 양반지배층 위주로 마련된 것이지만 조선조가 유교적인 왕도정치를 이

    상으로 한 만치 모든 사회복지정책 면에서 민본사상이 크게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자연재해로 인해 잦은 흉년과 이에 따른 전염병의 창궐이 심했던 조선

    조에 있어서 의료 기구와 정책 등은 조선조 전 기간을 통하여 일반민중들을 구휼

    하고 구료해 주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제어 : 독자적인 창발, 민본사상, 창궐

    * 한영신학대학교 교수, Ph. D. in Social Welfare Policy

    (Hanyoung Theological University, Professor)

  • 2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Ⅰ. 머 리 말

    역사상 의료활동의 제도적․정치적 형태는 의료복지의 정치제도사적 접근을

    요구하며 역병의 광범위한 전염은 의료복지의 사회복지사적 접근을 요구한다.

    또한 아프다거나 고통스럽다 또는 병이 생겼다는 의미를 밝히기 위해 의료복

    지는 사회문화적 배경의 해독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심리학적이며 철학적 접

    근이 시도되어야 함을 전제한다.

    오랫 동안 의료사 연구에 몰두한 Unschuld는 자신의 저서1)에서 다음과 같이

    의료사 연구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새로운 접근방법을 택함으로써 길고도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는 중의를 그 경제사회적 배경 그리고 사회⋅이데올로

    기적 배경 안에서 이해하고 동시에 그 치료법의 다양성과 그 변화양상을 설

    명하고자 한다. 이는 고문헌에 대한 역사적이고도 체계적인 접근방식을 요구

    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구체적으로는 첫째, 하나의 경제⋅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세계관 그리고 그에 부합하는 의료개념을 파악해야

    한다. 둘째, 또 하나의 사회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구성원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양한 개념의 혼재가 불가피하다. 셋째, 이러한 개념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동시에 변하게 된다. 넷째, 정치⋅경제적으로 우세한 집단은 자

    신들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의료개념을 만들고 유지한다. 다섯째, 의료개념을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서만 강조한다면 소수의 다양한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다양한 2차적인 의료개념들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

    상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틀 즉, 패러다임을 이용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2)

    그는 의료사를 과학사의 부속이 아닌 사회사의 영역으로 확대하였다. 따라서

    이미 서양은 역사상 치열함을 음미하였기 때문에 역사학에서도 일찍 전염병과

    1) P. C. Unschuld, Medicine in China (Univ. of Cal. Press, 1994), p. 4.

    2) 김 호, “조선전기 대민 의료와 의서 편찬”, 국사관논총 68 (국사편찬위원회, 1996), p. 26.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3

    사회의 관계가 연구되었다.3) 이러한 연구는 오늘날 전염병의 사회사를 넘어서

    아픔이나 질병의 고통이 가져오는 심리학적 현상 또는 집단정신의 형성에 미

    치는 현상의 연구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나아가 신체를 둘러싼 정치권력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4)

    따라서 조선조의 제도와 문물은 고려를 계승하고 중국을 벤치마킹하였지만

    그들의 단순한 재생이나 이식이 아니다. 민족주체성에 의한 독자적인 창발

    (creative initiation)에 의하여 사회와 시대에 알맞도록 재조직 정비한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의료제도와 정책을 통해서도 밝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이 글의 연구목적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이 글은 출발하고자 하지만 모든 문제를 한 논문

    에서 모두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조선조 개국 이후 안민의 방법

    으로 적극적인 의료복지를 실천코자 했다는 데에 초점을 두고 기술적 방법을

    중심으로 접근코자 한다.

    Ⅱ.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발흥

    1. 의료복지정책의 구상과 운용의 과정

    조선조에서 추진된 의료정책은 국가의료기구의 정비와 의학교육, 의서의 편

    찬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국가의료기구의 정비방향은 고려의 제도를 수용하

    3) Terence Ranger & Paul Slack eds., Epidemics and Ideas (Cambridge Univ. Press,

    1992), p. 37.

    4) Roy Porter, “History of the Body”, in Peter Burke eds., New Perspectives on

    Historical Writing (N. Y. : Polity Press, 1991), p. 51.

  • 4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여 내의원, 전의감5), 혜민서의 三醫司 체계로 차츰 정리되었다. 내의원은 왕

    실의료, 전의감은 관료에의 의료, 혜민서는 대중의료라는 형태로 경국대전에

    규정된 3의사체계는 조선조 후기까지 크게 변화를 겪지 않고 유지되었다. 의

    료기구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의료를 담당할 인력을 키우는 의학교육을 진

    흥시킬 필요가 있었다. 의서습독의 설치와 계속되는 勸懲措置, 그리고 세조의

    의약론 반포 등은 의학교육에 대한 국가의 노력이 적극 반영된 것이었다.6)

    한편 의학의 학문적 발전 역시 도모하였는데 당시의 의료체계에서 요구되

    었던 것들은 치료의 효율적 수행과 함께 의학내적인 발전 즉, 의학이론의 정

    교화로 대별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구에 부응한 의서의 편찬을 국가주도로

    수행하엿다.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추로 대표되는 조선조 전기의 의서편찬은 향

    약론을 통하여 치료의 효율성을 높임과 동시에 중국에서 진행되었던 의학적

    성과를 수용하기 위한 작업이었다.7)

    조선조 전기에 구상된 의료기구의 운영과 향약집성방, 의방유추 중심의 의

    료정책은 15세기 말 이후 정치적 갈등의 노정과 국가재정의 위기 속에서 큰

    어려움을 맞고 있었다. 16세기 養生論의 전개와 구급방 의서들의 계속된 간행은

    조선조 전기 국가의 의료정책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의서도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 간행이 널리

    행하여지면서 의학이론의 정립이라고 하는 의학 내적인 요구는 강해지고 있

    었다. 1592년 시작된 전란이 끝난 직후 東醫寶鑑이 편찬되었던 것은 16세기

    조선의 의료체계가 놓인 총체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작업의 하나였다.

    동의보감 서문에서 밝힌 중국에서 도입된 의서의 정리와 養生 원리에 입각한

    5) 고려의 전의사를 모방한 전의감은 태조 원년 문무백관의 제도를 정할 때에 설치되었다.

    이때 전의감은 내의원이 독립하기 이전이었으므로 內用藥材의 조달과 王室, 朝官의 진료,

    약재의 賜與, 약재의 재배와 채취, 외국약재의 구입, 판매, 의서편찬, 의학교육, 그리고 취

    재 등 국가의 모든 의료사업을 관장하였다. 이후 내약방(내의원)이 독립하면서 왕실에 관

    한 업무가 이전됨으로써 왕실과 종친이 구분되어 전의감에서는 종친과 조관에 대한 의료를

    담당하게 되었다.

    6) 김성수, “조선시대 의료체계와 동의보감”, 박사학위논문 (경희대학교, 2006), pp. 2-3.

    7) 박찬국, “동의학의 성립에 대한 연구”, 대한원전의사학회지 5 (1991), p. 12.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5

    의서의 편찬, 鄕藥의 장려는 16-17세기 초까지 의료체계에서 요구되었던 사항

    이었다. 이는 의학론 정리와 그에 따르는 의서의 편찬이라고 하는 의학 내부

    적인 요청과 국가의료체계 속에서의 효율적인 운용이라는 의료복지 욕구를

    지적한 것이었다.

    16세기 중국으로부터의 의서의 도입이 활발해지면서 이때까지 중국에서 간행

    되었던 100여 종이 넘는 의서들이 수입 간행되고 있었다. 8) 특히 16세기 새로

    도입된 중국의서는 김원사대가의 이론을 중심으로 각각의 유파를 형성하였으며

    또 각 醫論을 절충한 의학이론이 매우 복잡하게 섞여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선조 초기 의방유추 이후 수용된 의서들을 가려 정리해야 하는 1

    차적인 목표가 있었다.9) 이때 의서의 정리를 위해서 여러 의학이론을 일관된

    체계로 엮을 수 있는 원칙이 필요하였고 그 방안을 修養論(養生論)에서 찾고

    있었다. 16세기 양생론의 확산은 질병을 중심으로 의서를 구성하였던 이전의

    방식과는 다르게 인체를 중심으로 하는 의학적 시각의 전환을 가져왔으며 內

    景, 外形, 雜病이라는 동의보감만의 독특한 편찬체계를 가져왔다.10)

    또한 향약의 장려는 여말선초 향약론의 활발한 전개 이후 다시 등장하였던

    논의였다. 향약집성방 이후 향약론을 중심으로 하는 의서편찬이 계속되지는

    않았으나 약재의 수급을 위한 향약의 장려는 조선조 전기 의료복지정책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었다. 따라서 동의보감에서의 향약의 장려는 약재수급과 관련한

    국가의료복지정책의 하나로써 제기되었던 문제였다.

    한편 양생론을 수용할 수 있는 문화사상적인 배경은 양생을 통하여 건강을

    추구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부정하기 힘든 인간의 욕구

    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에 부응하는 도가의 내단사상이라고 하는 것들 역시

    이미 조선조 초기에도 소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배경에는 1차

    적으로 국가의료복지의 실천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양생은

    8) 김두종, 한국의학사 (서울 : 탐구당, 1966), pp. 267-270.

    9) 허 정, “동의보감의 보건사적 연구”, 구암학보 2 (1992), pp. 87-88.

    10) 신동원, 조선사람 허준 (한겨레신문사, 2001), pp. 178-181.

  • 6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분명 개인의 문제이지만 양생론이 사회 속에서 확대된다고 했을 때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2. 의료복지정책의 발흥

    여말선초 성리학자의 정치론을 수용하고 있던 신흥사대부들이 불교를 비판

    하고 성리학적 仁政 혹은 왕정을 수립한다고 할 때 人命과 관련되는 의학이

    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종대 향약집성방과 의방유

    추의 편찬이 그 결과11)로 의서의 편찬을 두고 仁政本末巨細 兼盡而無遺矣12)

    라고 하였다. 이 후에도 의학은 王政之大事 혹은 至仁之政이라고 하여 그 진

    흥을 강조하였다.

    의학진흥을 위한 의서의 편찬 외에도 국가에서는 실제로 의료업무를 담당

    하는 기구의 정비에도 노력하였는데 기본적으로 조선조의 의료제도는 고려의

    그것을 많이 채용하였다. 고려는 중앙에 상약국, 태의감, 동서대비원, 혜민국

    등을 설치하고 서경에 의학원, 기타 지역에는 의학박사나 의학 등을 파견함과

    동시에 藥店을 설치하였다.13) 조선조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의료제도를 정비하

    여 세종 때 경국대전의 편찬에 의해서 중앙에서는 삼의사체제로 완비되었다.

    삼의사 가운데 왕실의 구료를 담당하였던 내의원은 고려의 상약국과 같은

    것으로 초기에는 內藥房으로 불리었으며 典醫監 안에 별도로 속해 있었다. 그

    러다가 세종 25년에 이르러 吏曹의 건의에 따라 내약방을 내의원으로 개칭하고

    정원을 마련하는 등 독립적인 체계로 운영될 수 있게 되었다.

    고려의 惠民局을 계승한 혜민서는 약을 典賣하고 일반대중의 구료를 담당

    하는 기관이었다. 혜민서는 초기 혜민국으로 불리었으나 세조 6년 濟生院이

    11) 김태영, “여말선초 성리학 왕정론의 전개”, 조선시대사학보 14 (2000), p. 19.

    12) 세종실록 권60, 세종 15년 6월 임진, 향약집성방 서문.

    13) 손홍렬, 한국중세의 의료제도연구 (서울 : 수서원, 1988), pp. 88-116.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7

    合屬되면서 기구가 확대되었고 세조 12년에는 혜민국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경국대전이 반포되기 이전 성종대에 濟生署로 개칭되어 향약의 施輿와 의생과

    의녀교육을 주관토록 하는 건의가 있기도 하였으나 혜민서의 명칭은 계속 존속

    하였다.

    이와 같은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의 이른바 삼의사 체제는 경국대전의 반포와

    함께 조선의 국가의료기구로서 확정되었다. 이 밖에도 의사제도의 변천과정에서

    병자의 치료 이외에 빈민이나 기아 등을 구료하는 제생원이 있기도 하였으나

    혜민서에 통합되었다. 또 고려의 동서대비원과 같은 제도로써 진휼을 담당하면서

    특히 전염병의 발생시 이의 구료업무를 담당하는 활인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14)

    한편 조선조에서는 지방의료에 관심을 두고 의원을 설치하려고 노력하여

    태조 2년에는 전라도 按廉使인 김희선이 界首官마다 의원을 설치하여 생도를

    교육하고 지방민을 구료하도록 하자고 進言하였다. 그리고 세종대에는 수령들로

    하여금 의원의 생도들을 잡무에 복역시키지 말고 醫業만을 전념하도록 하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하였으며 단종 즉위년에는 임원준이 여러 도의 좌우 계수

    관에 醫局을 설치하여 약을 제조하여 팔도록 하자고 진언하였다.

    또 예종 즉위년에는 이인휴가 상서하여 외방에 의원을 설치하자고 하였는

    데 그 내용을 각 도마다 의원을 세 곳에 설치하여 퇴거한 의원과 의생 가운데서

    의술에 정통한 사람을 골라서 의관15)을 삼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태조 2년 계수관마다 의원을 설치하자는 의견이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였고 그

    에 따라 지방의료가 계속적으로 요구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4) 이상협, “조선시대 동․서 활인서에 대한 고찰”, 향토서울 56 (1996).

    15) 의관의 위치는 조선조 초기에 확립된 큰 원칙을 벗어나지 못했다. 의관은 잡관의 하나로

    서 士族과 구별되었다. 성종실록에서는 의원은 처음부터 잡과를 거쳐서 진출한 자이므로

    祖宗 때부터 士林의 반열에 끼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곧 의과출신인

    의관이 동반과 서반의 양반 顯職에 나갈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의과출신 의관

    이 원칙적으로 현직인 의정부나 6조의 요직이나 지방수령의 외관직을 나갈 수 없는 것만

    을 뜻하지 않는다. 의관이 비록 잡과에 속하지만 일반 양인에 비해서는 비교가 안 될 정

    도로 높은 지위였다. 말단으로서 지배층의 일원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의관도 정식

    품계가 있는 관직으로서 관의 녹봉을 받았으며 관인이 누릴 수 있는 특전을 누렸다. 신

    동원, “조선후기 의원의 존재 양태”, 한국과학사학회지 26-2 (2004), pp. 215-216.

  • 8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경국대전 반포 이후 지방의료를 담당하였던 것은 의학교유, 심약, 의생이었다.

    교유는 지방의료의 중심존재로서 각 도에 설치된 의원에 1명씩 파견되어 의생

    교육과 관민의 치료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교유는 파견된 도의 각 지역을 1년에

    두 차례씩 순회하면서 의생을 교육하였고 지방민의 치료와 약재의 채취의 일도

    담당함으로써 의생교육과 관민치료가 부실하게 되었다. 심약은 전의감과 혜민서

    소속의 의관으로 각 도에 파견되어 약재채취에 종사하던 의관으로 그 직무상

    지방의료에서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16)

    실제로 지방의 의료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은 의생들이었다. 교유

    나 심약이 도에 1명에서 많게는 3명 정도의 매우 적은 수효가 책정되고 있었다

    는 점에서 의생이야말로 지방의료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들은 의학교육을

    받는 외에 교유를 보좌하여 지방민의 질병치료를 직접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

    러나 외방에서 상납하는 약재를 운반하기도 하였으며, 잡역에 동원되기도 하였

    기 때문에 의학교육을 제대로 받고서 의료를 담당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까

    닭에 세종은 삼의사에 의생방을 설치하여 제약과 의서를 습독케 하고 의술에

    능한 다음에 시험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한편 이 밖에 採藥人으로서 藥夫가 있었다. 성종 9년에 각도의 채약인으로

    大官은 5호, 小官은 3호씩 배정하여 雜役을 면제하고 약재만을 채취하여 世業

    토록 하여 鄕藥의 채취와 보급에 노력하였는데 이 때 정한 채약인이 경국대

    전에는 약부로 정하여졌다.17)

    의료제도의 정비 외에도 의료인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지방에 의원을 설치하여 의생을 교육시키도록 하는 한편 의서습속관 제도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방에 설치되었던 의원의 수효도 매우 적었으며

    의료담당자인 의생의 교육도 부짆여 지방의료는 부실함을 면치 못하는 실정

    이었다. 의서습독관의 제도는 세종대 마련된 이후 세조와 성종 때에 집중적으

    로 육성하는 상황이었지만 이후 그 운영이 부실하여지고 다만 국가재정을 악

    16) 경국대전, 권1, 이전, 외관직조.

    17) 경국대전 권4, 병전, 잡류.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9

    화시킨다고 하여 폐지를 논의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조선조의 의료제도 정비과정은 여러 차례의 조정이 있었지만 국

    가의 위민정책의 실현으로써 의의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운용에 있어서

    의료정책의 문제점들이 노정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의료정책의 시혜가 중앙관

    료기구의 담당자들에 집중되는 양상을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각 사에 설치된

    약방은 경국대전에 따른 의료기구는 아니었지만 18) 조선조 초기부터 설치되기

    시작하여 15세기 말 무렵 점차로 그 운영이 확대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 혜민서의 운영이 위축되고 있었다. 이들 약방이 설치된 곳은 종친부, 충

    훈부, 의정부 등 권력의 핵심기관이었다.

    16세기 초반 이후 이들 이외에 다른 아문에서도 약방을 설치하려는 시도가

    빈번하게 나타나 약방설치의 확대현상까지 등장하였다. 각사약방의 운영과 설

    치의 확대는 이들 약방에 약재를 제공해야 하는 혜민서의 운영을 어렵게 만

    드는 한편 중앙의 양반관료를 중심으로 의료체계가 운영되도록 하고 있었다.

    특히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계속되는 饑饉과 疫病의 猖獗로 인하여 늘어나

    는 대중의료의 수요에도 불구하고 혜민서, 활인서의 운영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19) 또한 조선조 초기부터 지방에 대한 의료정책을 계속 강조함에도 불

    구하고 실제 지방의 의료실태는 매우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3. 의⋅약제도의 대외교류

    우리 나라는 고대사회로부터 의원, 의서, 의약 등을 주변의 여러 나라와 교

    류하여 왔다. 한족의 여러 왕조와의 이러한 교류는 매우 빈번한 것이었으며

    특히 의서와 의약품은 공․사무역을 통해 수입․수출되어 의학발달에 많은

    18) 경국대전, 권4, 의원조.

    19) 손홍렬, “조선중기의 의료제도”, 한국과학사학회지 15-1 (1993); 김 호, “16세기 후반 경

    ․향의 의료환경” 대구사학 64 (2001), pp. 145-150.

  • 10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외국과의 교류를 주로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이루어졌다.

    1) 중국과의 교류

    중국과는 국초부터 약재, 의서, 의원 등의 교류가 있었다. 조선조는 공무역

    을 통한 약재의 구입을 정례화하였던 것이다. 즉, 태종 6년(1406)부터 매 使行

    마다 의원 1명을 보내 약재를 구입하게 하였으며 세종 5년(1423)부터는 매 사

    행마다 전의감, 혜민국, 제생원 등으로 하여금 흑마포 5필로 중국약재의 구입

    을 恒式으로 삼게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사행 때 의원이 구입해 오는 약재는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

    는 것과 왕의 병에 꼭 필요한 것 또는 전갈 같은 기를 수 없는 곤충 등이 그

    대상이 되었고 때로는 용안 등과 같은 희귀식물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수입한 약재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조 초기 중국에서 사신편에 조선의 왕실에 보내온 약재를 보아 이

    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의서는 의원과 의생을 교육하고 민질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의서의 수입은 약품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어서 조선조에는 많은

    중국의서가 수입․간행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의서가 수입되었는지 이를

    모두 확인할 수는 없다. 의원의 교류는 약재나 의서와는 달리 그리 빈번하지

    않았으며 중국 의원의 내왕보다 우리 나라 의원의 중국 왕래가 더 많았는데

    그것은 사절을 따라가서 약재, 의서 등을 구입하였기 때문이며 때로는 향약의

    藥性을 감별하기 위해서 파견되기도 하였다.

    2) 일본과의 교류

    여말 선초에 창궐한 왜구는 두 나라 사이의 문화교류를 단절시켰다. 따라서

    이러한 교류는 왜구가 종식된 세종 이후에야 가능하게 되었다. 일본과의 교류는

    주로 왜왕을 비롯한 각 지의 영주에 의한 약재의 헌납과 이에 대한 賜給의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11

    형식을 취한 공무역이 많았으나 두 나라의 상인에 의한 사무역도 적지 않은

    것이었다. 일본과의 의원․의술의 교류는 주로 사절을 따라온 의원이나 일본의

    요청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밖에 일본에 가는 통신사 일행에 의원 1명이 수행하였고 후기에는 내의사

    (전의감․혜민서) 의원 각 1명이 수행하였으므로 이들에 의한 교류도 많이 있었

    던 것이다. 조선조 후기는 일본의 德川幕府시대로서 쇄국정책에 의해 국민이

    외국인을 대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러한 때 대규모의 사절단인 조선통신사의 내왕은 특히 지식인들에게는

    외국의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조 사절이 오

    면 일본 각 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조선조의 文士, 議員과 대담하였기 때문

    에 조선조에서도 학식이 있는 자들을 보냈고 일본에서도 의학에 정통한 의관

    의 파견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20)

    이러한 의원, 의서의 교류보다 더욱 빈번했던 것은 약재의 교류였다. 세종

    원년(1419) 대마도정벌을 계기로 왜구는 거의 終息되고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

    환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삼포왜란으로 일시 중단되거나 통상규정이

    개정되어 내왕하는 일본 각지의 歲遣船의 수효가 일정치는 않았으나 세종 때

    세견선 약정자 112명이 1년 동안 파견하는 세견선, 수직선, 수도서인선이 모두

    204~218쌍이 되었고 이때 進上, 下賜의 형식을 취한 공무역의 물량도 상당히

    많아 국가의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조선조에서 파견한 사절은 태조 7년~선조 25년까지 2세기 동안 모

    두 62회였고 왜란 이후 선조 40년(1607)~순조11년(1811)까지 조선조 후기에

    파견된 통신사는 모두 12회로서 전후기 합해 74회였는데 이것은 입국왜사의

    경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과의 교역은 수출보다 수입

    이 훨씬 많았고 이 가운데는 약재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수입된 물품이

    100여 종이나 되므로 그 품목을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20) 손홍렬, “조선중기의 의료제도”, 한국과학사학회지 15-1 (1993), pp. 22-25.

  • 12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3) 남방제국과의 교류

    일본 이외의 남방제국과도 약재의 교류가 있었다. 즉 조선조 태조 원년

    (1392) 8월에 사신을 보낸 이래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약재류를 헌납하였다.

    세종 즉위년(1418) 8월에도 사람을 보내 단목 등을 바쳤으나 일본에 비해 내왕

    횟수나 교역량이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이들을 통한 남방산의 진귀한 약재의

    헌납은 약재의 공급과 함께 조선조의 대외교섭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Ⅲ.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실재

    1. 의료기구

    대중에 대한 의료정책은 중앙과 지방에 설치한 의료기구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조선조 초기부터 중앙과 지방에 의료기구를 설치하여 民疾을 救活하는

    정책을 편 것은 역성혁명의 과정에서 離叛된 민심을 돌리기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직후에 바로

    고려를 답습하여 의료기구를 설치하였다. 이때 설치된 의료기구 가운데서 제생원,

    혜민국, 동서활인원은 대중들의 질병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설치된 기구였다.

    이러한 대민의료기구는 명칭과 직제가 약간 변하기는 하였지만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어 조선조 말기까지 대중에 대한 의료정책을 수행하였다.

    대중에 대한 의료정책을 실시한 대표적인 의료기구는 양의사로 불리는 전

    의감과 혜민서였다. 전의감은 왕실소용의 약재를 공급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

    지만 이 밖에도 관료들에게 질병이 발생할 경우 질병치료를 담당하였고 또한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13

    대중들의 질병치료와 의생교육에도 관여하였다. 특히 전국적으로 발생하는 전

    염병 치료에도 관여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전의감 외에도

    대중들의 의료정책을 담당한 곳이 혜민서였다. 전의감과 혜민서는 크게 차별

    성을 띠지 못함에 따라 일시적으로 통합되기도 하였으나 곧 다시 分置되었다.

    이러한 두 의료기구의 기능은 점차적으로 구분되어 혜민서는 都民醫藥을, 전

    의감은 朝臣醫藥을 담당하였다. 또한 질병치료의 목적보다는 빈민구제의 성격이

    더 강한 활인서가 있어서 대중들을 구제하였다. 혜민서의 설치는 본래 대중의

    구활을 위한 것이고 활인서는 都城民 의 구활을 위하여 설치되었다. 특히 활

    인서는 도성내 民庶들을 외부환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차단역할을 담당하였

    으나 18세기에 이르러 활인서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유명무실해짐으로

    써 활인서가 아니라 殺人署라고 불릴 정도였다. 21)

    이러한 의료기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해이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18세기에 이르면 활인서를 비롯한 혜민서 등 하층민을 위한 의료제도가

    부실해졌는데 활인서와 혜민서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되돌리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숙종 때에는 전염병이 크게 번져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자

    혜민서 의관을 벌주기를 청하고 동서활인서에 의한 구활사업이 제대로 시행

    되지 못하자 활인서 관원을 줄일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또한 숙종 44년에는

    혜민서의 약물이 백성들을 위해서 쓰이지 않자 관서를 폐지하여 진휼의 밑천

    으로 쓰기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활인서는 혜민서 의관들의 불성실과 비리,

    병자를 구료할 재원이 부족하였고 官舍가 오래되어 숙종 때 이후에 활인서의

    重建문제가 논의되기고 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후 활인서는 정조4년(1780)에 革罷가 논의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인서의

    혁파가 논의된 것은 약의 典賣와 환자의 구료라는 임무를 주요 기능으로 하

    였던 혜민서에 비하여 17세기 이후 도성보호기능이 약화됨으로써 활인서는

    뚜렷한 기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로 전락되어 혁파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

    렇지만 활인서는 계속적으로 존치되어 도성민의 구활사업을 수행하였다.

    21) 허재혜, “18세기 의관의 경제적 활동양상”, 한국사연구 71 (한국사연구회, 1990), p. 95.

  • 14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이러한 의료기구는 대중들의 질병치료에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특히 전염병

    구료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염병은 인명의 손상에 있어서 흉년과 기아

    다음가는 재난이었으므로 역대 통치권자들은 의료정책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이를 위하여 양의사에 명하여 의원과 약물을 내려보내 치료하도록 하였다. 연

    산군 3년 서로에 전염병이 크게 번지자 성실근면하고 方書를 잘 해석하는 의

    원을 뽑아서 파견하고 病症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면 내의원에서 방서를

    상고하여 증세에 맞는 처방을 만들어 보내는 등 전염병 구료에 盡力하였다.

    이 밖에도 명종 원년과 효종 원년, 숙종 19년과 34년에 발생한 전염병에도

    내의원이나 양의사에 하명하여 의원과 약재 또는 처방을 보내 구료하도록 하

    였다. 이후 전염병에 대한 대책은 정조조에 들어와서 비교적 상세하게 마련되

    었는데 疹疫求療節目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의료관할구역을 지정하여 전의감은

    서울의 서북부와 중부대로의 서쪽을 담당하게 하였고 혜민서는 동남부와 중

    부대로의 동쪽을 전담하게 하는 등 전염병 대책을 마련하여 두 의료기구로

    하여금 전염병 치료에 힘쓰도록 하였다.

    그러나 양란을 겪은 후 질병치료가 여의치 못하여 관리들도 약 한첩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중들은 민간의료나 呪術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병자를 격리수용하고 치료에 정성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巫俗을 비롯한 민간신앙 등에 의한 의료행위는 매우 흔하게 행해졌

    다.22) 또한 조선조 후기의 인구증가와 이에 따른 의료시설의 부족 등으로 혜

    민서나 활인서에 의한 대민의료정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서 크게

    기여한 것은 민간의료를 통한 치료행위였다.

    조선조 중기 이후 중인들에 의해서 의업이 세습되면서 의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의생의 수효가 전기에 비하여 증가하였다. 이러한

    의생수효의 증가는 질병치료에 대하 지배층의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의학공

    부를 전업으로 하는 의학생들을 양성하는 규모를 늘리지 않을 수 없었다. 23)

    22) 이병도 역, 난선제주도난파기-부조선국기 (서울 : 일조각, 1975), p. 133-139.

    23) 홍희유 ․ 채태형, 조선교육사 1 (서울 : 박이정, 1998), p. 159.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15

    조선조 전기에 80명에 불과하였던 의생수효가 조선조 후기에는 118명으로 증가

    하였다. 이 가운데서 일부는 과거와 취재를 통하여 관직으로 진출하였지만 관직

    에는 정원의 한계가 있어서 관직을 얻지 못한 상당수의 의관 지망생이 민간

    에서 시술하는 등24) 민간의료의 폭이 넓어졌다. 특히 조선조 후기에는 전문적인

    의원수효의 증가, 약상업의 발달, 대중간편의서의 편찬 등으로 인하여 한의학과

    한방의료가 소수의 지배층이 아니라 민간 깊숙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25) 한

    지배층 위주로 운영되어 국왕과 고관들의 건강과 질병치료가 중요하게 여겨

    졌다. 반면에 대중과 饑民, 전염병 환자 등 소외계층에 대한 의료정책은 미약

    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조선조 후기의 취약한 대중의료정책은 조선

    조 중기 이후 꾸준히 성장한 민간의료로써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26)

    1) 전의감

    궁중에서 쓰는 의약의 공급과 임금이 하사하는 의약에 관한 일을 하던 관

    청으로 의학교육과 의학취재 등의 사무도 겸하여 관장하였다. 전의감은 의료

    행정과 의학교육의 중추기관으로서 왕실과 朝官들의 診視와 和劑, 약재의 種

    植, 의학취재 등의 일을 겸하였다. 조선조 초기의 관원은 판사, 감, 소감, 승,

    주부, 겸주부, 직장, 박사를 각 2인, 檢藥 4인, 조교 2인을 두었다. 그 뒤 몇

    차례의 관제개혁을 거쳐 세조12년(1466)의 개혁 때에는 검약을 부봉사로, 조

    교를 참봉으로 고치고 兼正, 직장을 각 1인씩 없애고 판관 1인을 늘렸다. 경

    국대전에는 정, 부정, 첨정, 판관, 주부 각 1인, 의학교 1인, 참봉 5인으로 관

    원을 정하여 인원을 축소하였다. 속대전에 따르면 부정을 없애고 의학교수,

    봉사는 각 1인씩, 부봉사는 2인, 참봉은 3인을 감원하여 그 기구를 축소하였다.

    그러나 고종4년(1867)에 편찬된 육전조례에 따르면 治腫敎授 1인, 침의 3인,

    24) 김대원, “강명길의 제중신편”, 한국보건사학회지 3-1 (1995), p. 5.

    25) 신동원, 한국근대보건의료사 (서울 : 한울, 1997), p. 43.

    26) 이규근, “조선시대 의료기구와 의관”, 동방학지 104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9), pp.

    97-104.

  • 16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부사과 1인을 증원하고 吏隷로서 書員과 庫直, 대고직 각 1인, 사령 5인, 驅

    從, 군사 각 2인을 두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전의감에는 제조 2인을 두고

    取才 때는 分數가 많은 사람을 뽑았다. 판관 한 사람은 久任으로 하고 구임과

    교수, 훈도를 제외한 관원은 遞兒職으로 1년에 두 차례 도목27)한다. 취재시에

    차점자는 外任으로 차출하고 주부 이상의 관원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으로 임

    명하며 의서습득관은 세조 때 15인에서 30인으로 증원하였다. 1894년 갑오경

    장에 의하여 전의감은 태의원으로 개칭되었으며 서양의술이 보급되면서 그

    역할이 감소되었다. 28)

    2) 내의원

    왕의 어약을 조제하던 관청으로 內局, 內藥房, 藥院 등으로 불리었다. 조선

    조 건국 초에 반포한 관제 가운데는 그 이름이 없으나 태종 때 왕실의 內用

    藥을 맡은 기관으로서 내약방이 있었다. 그 뒤 세종 25년(1443) 6월에 이조에

    啓請하여 내약방을 내의원이라 칭하였는데 관원 16인을 두고 3품은 提擧, 6품

    이상은 別坐, 參外는 조교라 하였다. 따라서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독립관제

    로서의 내의원이 설치된 것이다.

    세조 12년(1466) 1월 관제개혁 때 내의원에 소속된 관직은 正, 僉正 각 1인,

    判官, 注簿 각 2인, 直長 3인, 奉事와 副奉事, 參奉 각 2인씩 두었다. 이것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면서 인원수에 약간 증감이 있었을 뿐 그 관제는 그대로

    존속되었다. 특히 이때에 와서는 새로이 都提調, 제조, 부제조를 1인씩 두었는

    데 부제조는 承旨가 겸임하였다. 그 뒤 속대전에 와서는 직장이 3인에서 1인

    으로 감축되었다.

    육전조례에는 위의 관원 외에 散員醫官으로 정원이 없고 위직으로 충당되는

    堂上과 당하 12인, 위직 2인, 鍼醫 12인, 議藥同參 12인, 御醫 3인, 吏胥로는

    27) 관리의 공과를 평정하여 승진 또는 출척시키는 인사행정의 한 영역이다.

    2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 (2003), p. 556.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17

    書員 23인, 種藥書員 2인, 大廳直 2인, 徒隷로는 本廳使令 7인, 임시사령 5인,

    의약청사령 2인, 침의청사령 2인, 汲水使令 1인, 軍士 2인, 醫女 22인, 水女工

    2인, 童便軍士 3인, 三廳軍士 18인을 두었다. 내의원은 1885년에 太醫院, 민족

    항일기에는 李王職典醫局으로 되었다. 29)

    3) 치종청

    종기를 치료하기 위한 일을 관장하던 관서로서 설치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성종 16년(1485)에 확정된 경국대전 예전에 치종의를 두어 치료에 종사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또 증보문헌비고, 전의감부치종청에서도 선조 36년(1603)에

    치종청을 다시 설치하여 치종30)을 관장하게 하였으나 훗날 전의감에 병합하

    였다고 한다. 관원으로는 교수 1인31), 鍼醫 3인, 전함 10인, 생도 10인을 두었

    다고 되어 있다. 처음에는 독립된 관서로 설치하였다가 뒤에 전의감에 합병된

    것으로 추정된다. 32)

    이와 같은 치종청의 別設은 당시 腫氣를 치료하는 기술이 상당히 발달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것은 임언국의 치종비방과 같은 치종

    전문의를 명종 14년(1559)에 간행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임언국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성종 때 말(1490년 이후)에서 명종 대 초

    (1540년)의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정읍인으로 영은사의 노승에게서 의

    2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2003), p. 592.

    30) 종의는 종기만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의원인데 침의 가운데서 더욱 전문화된 경우도 있

    었고 특별한 고약 따위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이 모두 일반적인 의학과 경락을 중시한

    침구학과 다른 별종의 의학이었다. 따라서 종기만을 전문으로 하는 종의가 생겨났으며

    그것은 국가의 의학교육 안에서 학습되었다. 내의원에는 정원이 없고 전의감과 혜민서

    에만 각 1인씩 존재했다. 전의감과 혜민서에 소속한 종기전문의원은 모두 치종교수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조직 안에서 수와 위치를 고려할 때 종의는 침의가 겸하거

    나 따로 두었다 해도 그것의 전문적인 위치는 침의보다 낮았다고 할 수 있다. 신동원,

    “조선후기 의원의 존재양태”, 한국과학사학회지 26-2 (2004), p. 220.

    31) 전의감 교수로서 치종청에 이속시켰다.

    32) 김두종, 한국의학사 (서울 : 탐구당, 1979), pp. 127-129.

  • 18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술을 배워 모친의 병을 치료한 후 수만 명의 병을 치료하여 예빈사 주부에

    특서되었으나 그 기술을 다 전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전라도 관찰사가 그 遺

    方을 얻어 금산군수에게 부탁하여 간행한 것이 일본에 전하고 있다.

    이 밖에 역시 일본에 전하는 것으로서 임언국의 저서라 여겨지는 治腫指南

    2권은 종기의 외과적 수술과 외용약을 사용하여 치료하는 신기법을 창안하였

    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33)

    이러한 새로운 외과의학의 발달이 치종청과 같은 독립된 치료기관을 신설

    하게 하였을 것이나 뒤에 廢置되었고 선조 36년 復設된 것은 임진왜란으로

    많은 질병이 발생하고 부상자의 속출로 외과학이 발달하여 전문의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기 때문에 다시 설치하였을 것이다. 이 치종청이 언제

    전의감에 合屬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숙종 때에도 치종교수가 별설되

    어 있던 것으로 보아 치종청이 설치되어 있던 기간은 전후 합해 적어도 100

    년 이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4) 혜민서

    의약과 서민을 救療하는 임무를 관장하는 관서로서 조선조 초기에 고려조의

    혜민국을 답습하여 태조 1년(1392)에 惠民庫國이라는 명칭으로 설치하고 判官,

    令, 丞, 주부, 녹사를 두었는데 태종 14년(1414)에 혜민국이라 개칭하고 승, 부정,

    녹사, 부녹사를 두었다. 세조 12년(1466) 관제를 개정할 때 혜민서라 고치고

    주부 1인, 의학교수 2인, 직장과 봉사, 훈도 각 1인, 참봉 4인을 두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제조 2인을 두고 취재시험에서 득점이 많은 사람과 직장

    이상의 관원 가운데 1인은 久任으로 하고 구임원 이외는 체아직이며 1년 양

    도목의 시험에 차점인 사람은 지방관원으로 임명하였다. 관원은 종 6품의 주

    부 1인, 의학교수(종 6품, 1인은 문관이 겸임하였다), 직장 종 7품, 봉사 종 8

    품, 의한훈도 정 9품 각 1인, 참봉 종 9품 4인을 두었다. 육전조례에 따르면

    33) 손홍렬, “조선중기의 의료제도”, 한국과학사학회지 15-1 (1993), p. 12.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19

    의의 관원 이외에 散員으로 치종교수 1인 衛職 2인, 刑曹月令 1인, 사헌부월

    령 1인, 내국월령 2인, 침의 1인, 吏隷는 書員 1인, 庫直 1인, 사령 5인, 驅從 2

    인, 軍士, 의녀 31인을 두었다.

    민중치료를 담당하였던 혜민서의 직제는 조선조 후기에도 거의 변화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의학교육의 효과를 위해서는 반드시 기술에 정통한 사람이

    마음을 다해 가르쳐야 기술에 정통한 자가 된다는 전제 아래 선조 33년 7월

    에는 의학교수 즉, 의생과 의녀를 교훈하는 자는 文士가 아니라 의술을 아는

    사람으로 임용하라는 전지를 내리게 되어 혜민서의 의학교수는 의관으로만

    임용하게 되었다.

    5) 활인서

    도성 안의 병자를 구료하는 관서로서 凶荒으로 饑民이 발생하고 굶주림

    으로 인해 갖가지 질병에 걸렸을 때 그 활동이 활발했다. 특히 관개수리시

    설이 미흡하고 주된 산업을 농업에 의존했던 조선조에서는 흉년34)은 기근을

    불러일으켰고 기근으로 많은 농민들이 죽어갔으며 전염병의 猖獗을 유발하

    였다. 따라서 失農한 농민들이 굶주림으로 몸이 쇠약해지면 전염병에 쉽게 노

    출되는 것이었다. 전염병은 한 지방에서 발생하면 인근으로 옮기고 심한 경우에

    는 전국적으로 창궐하는 경우도 있었다.

    활인서는 조선조 초기에는 가난한 병자들을 救療하는 것으로 그 임무가 포

    괄적이었으나 점차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그 주된 역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정부는 예방적 격리요법을 쓴다거나 의관을 지방에

    파견하고 약재의 발송, 專門方書의 보급과 함께 疫鬼의 퇴치를 위해 癘祭를

    34) 흉년이 들어 飢流民이 발생하면 1차적으로 동⋅서 활인서에 나누어 수용하여 이들을 賑

    祭케 하고 饑民의 수효가 너무 많아 활인서에서 모두 수용하지 못할 때에는 普劑院, 利

    泰院 등에 진제장을 두어 구휼하였다. 그러나 동⋅서 활인서는 원래의 설치목적이 병자

    의 구료에 있었기 때문에 기민들이 병자들과 뒤섞여 거처하기를 싫어하여 활인서에 오

    지 않거나 오더라도 곧 도망가 버리곤 하였다. 이상협, “조선시대 동⋅서 활인서에 대한

    고찰”, 향토서울 56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1996), p. 84.

  • 20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실시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병자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혜택을 주게 되는 것

    은 활인서의 구료사업이었다.

    활인서는 태조 1년(1392) 7월에 고려의 제도에 따라 동서대비원을 두어 병

    자와 갈 곳이 없는 사람을 수용하여 구활하였는데 관원으로 副使 1인, 錄事 2

    인을 두었다. 태종 14년(1414) 9월에 불교의 명칭을 벗고 동서활인원으로 개칭

    하였는데 그 위치는 세종실록 지리지 한성부조에 동활인원은 동소문 밖에 서

    활인원은 서소문 밖에 두어 도성 안의 병자와 오갈 데 없는 사람을 치료하고

    의식을 지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세조 12년(1466) 1월에 동활인원과 서활

    인원을 통합하여 활인서로 고치고 참봉 1인을 가설하였는데 경국대전의 활인

    서관제는 태종부터 성종까지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쳐 확정된 것이다.

    즉 提調 1인, 별제 4인, 참봉 2인, 서리 4인이고 참봉과 의원은 遞兒職이며

    1년에 두 번 都目을 거쳤다. 육전조례에는 위의 관원 외에 吏隷로 書員 2인,

    庫直 1인, 사령 5인, 驅從 1인을 두었다. 활인서는 임진왜란 때 일시 중절되었

    으며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다.

    활인서의 운영을 위해서는 田地의 지급과 운영경비의 조달, 양식과 약물의

    지급이 따라야 했다. 전지는 세종 때에 일시 지급되었으나 이내 혁파되었

    다.35) 이후 활인서에서 징수하는 巫稅는 활인서의 의료행위나 歸厚署의 장례

    비용에 충당되었으며 국가에서 巫覡陰祀를 금지하면서도 巫稅를 계속 징수함

    으로써 무격의 존재와 음사를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모순성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영조 50년에는 활인서에 소속되어 그 인근에 거주하던 무격들을 모두

    한강 밖으로 축출하고 난 뒤부터 무격으로부터의 무세징수는 폐지되었다. 그런데

    5년 후인 정조 3년 經筵官 송덕상의 啓에 따라 다시 무세를 징수하게 되었는데

    서울의 경우 무격을 모두 한강 밖으로 축출하였기 때문에 무세를 거둘 수 없자

    종전과 같이 균역청에서 운영경비를 지급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정조 이후 다시 활인서에서 무세를 거둬들여 이를 운영경비로

    충당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부의 黜巫政策에도 불구하고 도성 안에서는 여

    35) 세종실록, 권79 세종 19년 11월 병신.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21

    전히 무격이 존재하고 祭儀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동⋅서 활인서의

    무세징수는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활인서에 수용되는 전염병 환자에게 지급되는 약물은 전의감과 내의

    원의 두 醫司에서 담당하여 이 곳에서 조제된 약물을 활인서에 내려 주어 병

    자를 구료케 하였다. 이와 함께 더운 여름철 그늘을 만들어 주기위해 활인서

    부근에 나무를 심어준다거나 열병환자를 위해 얼음이 지급되기도 하였다.

    6) 활인원

    서민대상의 의료기관으로 고려조의 동서대비원의 후신이다. 태조 1년(1392)

    관제개혁 때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으나 태종 14년(1414) 동서활인원

    으로 개칭하였고 다시 세조 12년(1466) 관제개정 때 활인서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동서의 제도는 계속되어 동활인서는 도성의 동쪽(동소문 밖)에, 서

    활인서는 도성의 서쪽(서소문 밖)에 그대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제조 종2품 1인, 별제 4인(뒤에 2인), 참봉 2인이 있었고 서원 2

    인, 고직 1인, 사령 5인, 구종 1인 등의 이속이 있었다. 그 밖에 한의원과 醫

    巫, 그리고 幹事僧, 埋骨僧 등이 배치되어 실제적인 구료사업에 참여하였다. 주

    된 업무는 도성 안의 병자를 구료하는 일이었지만 때로는 도성 안의 무의탁자

    를 수용하는 등 진휼사업도 하였으며 사망자를 매장해주는 일도 맡았다.

    업무수행과정은 병자의 많고 적음을 고직이 본원에 보고하면 본원은 매월

    1일과 15일에 다시 한성부에 부고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병자에게 필요한

    약물은 예조에 보고하여 예조 소속의 양의사로부터 보급받았다. 조선조 후기의

    경우 대개의 재원이 균역청으로부터 조달된 것으로 보인다.

    7) 제생원

    태조 6년(1397)에 조 준의 건의에 따라 설치되었다. 혜민국과 함께 일반민

  • 22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중의 질병구료와 향약제생집성방 등의 의서편찬, 구호사업, 각 도의 향약재

    수납과 저장, 의녀의 양성을 맡은 관서였으며 관원으로는 지원사, 영, 승, 주부,

    녹사를 두었다. 1414년에 영을 승, 승을 부승, 주부를 녹사, 녹사를 부녹사로

    고쳤으며 뒤에 전의감 또는 혜민서의 소속으로 되었다.

    2. 의료복지정책

    1) 의료사업

    의료사업은 국가의 중요한 사회복지정책으로 건국 초기부터 의학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의관의 수효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태종 9년에 의약활인법을

    정하여 의학에 뜻을 둔 사람들을 제생원과 혜민국 등에서 공부하게 하면서

    백성들을 치료함으로써 의업출신의 閑散人으로 의원을 增置하고 의료실적에

    따라 서용하는 제도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조선조 초기에는 6학을 설치하여 良家의 자제들로 하여금 의학 등을

    익히도록 하였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반면에 의원은 조선조 초기부터

    관직을 世襲하도록 하였는데 의원은 3대를 계속하지 않으면 그 약을 복용하

    지 않았으니 이후부터는 서운관과 전의는 그 관직을 세습하게 하여 그 사무

    를 정밀히 학습하도록 장려하였다.

    이러한 조선조의 의료정책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왕실과 종친,

    고관에 대한 의료정책, 둘째, 민중에 대한 의료정책이다. 이 가운데서 왕실에

    대한 의료정책을 담당한 곳이 내의원으로 의료기구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관료들과 民庶에 대한 질병치료를 담당하고 왕실 안에서 소용

    되는 약재의 공급을 전담한 곳이 전의감이었고 대민질병치료는 혜민서에서

    담당하였다. 또한 전염병에 대한 구료와 빈민에 대한 구활사업은 활인서에서

    전담하였다.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23

    왕실의료는 지극히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내의원 의관 즉, 내의, 침의,

    의약동참에 의해서 진찰, 문안, 시약, 의약 등이 행해졌다. 때문에 내의원 의관은

    상례적인 대책 외에도 특이한 배려와 조처가 다양하게 강구되었는데 중종 때에는

    의관 박세거가 상례 중이었음에도 의술이 뛰어나다고 하여 白衣 黑笠으로 궐내에

    출입시키고 月俸을 지급하였다.

    또한 숙종 35년 내의원 의관 권성징이 연행수행의로 지명되었을 때 침술이

    精通하여 保護聖躬의 요원이라는 이유로 燕行이 취소되었고 숙종 40년에는 患

    候가 至重하자 8도에 통첩하여 널리 醫方과 奇方을 구하여 말을 내려보내 상경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순조 때에는 유배 중인 정약용을 의약에 정통하다고

    하여 특명으로 내의원의 議藥 同參에 서용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왕실에 위급

    한 환자가 발생할 경우에는 내의원 의관이 질병치료를 전담하였으며 이들이

    다스리지 못할 경우에는 다른 의사나 전국의 의인들의 비방을 통하여 치료하

    였다.

    내의원 의관이 담당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의료업무는 宗親을 비롯한 현직과

    전직의 고관에 대한 의료행위이다. 태조 2년 11월 좌시중 조 준의 건의로 朝

    官의 질병에 의관을 파견하여 진료하는 법을 만든 후 모든 조관을 다 같이

    취급하였다. 그런데 세종 때 2품 이상과 종친은 병이 있으면 의원을 시켜 진

    찰하게 하고 제생, 전의, 혜민국에서 살 수 없는 약은 적당하게 주고, 3품 이

    하는 예조에 보고하면 진찰하여 치료하게 함으로써 종친과 고관의 각 품계에

    따른 질병치료의 정책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종친과 고관에 대한 의료정책은

    경국대전에서 법제화되었다. 36) 그렇지만 내의원 의관의 조관과 종친에 대한

    질병치료는 주로 임금의 특명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내의원 의관의 지배층에 대한 치료는 조선조 후기에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내의원 의관은 의업을 世傳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것은 의관뿐만 아니라

    모든 중인신분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난 조선조 후기의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내의원 의관에 의한 의관직의 세습은 세의자손들이 우대되었던 것과

    36) 경국대전, 권3, 예전, 혜휼조.

  • 24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도 관련성이 있다. 특히 영조의 경우에는 내의원에 결원이 생길 경우 世醫子

    孫을 수용하도록 하였는데 대부분 내의원 의관의 자손이 다시 내의원에 들어

    가게 됨으로써 내의원의 관직도 몇몇 명문가문에 집중되었다. 세의자손들은

    국왕의 총애를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加資와 賞이 빈번하게 주어졌고 의

    관으로서의 지위도 비교적 높았다.

    2) 의녀제도

    醫女제도는 조선조 초기에 처음 설치된 것으로 아직까지 없었던 이 제도가

    생기게 된 이유는 주자학의 영향으로 남녀의 구별이 어느 때보다도 더 엄격

    해져서 良家의 여자들이 男醫에게 진찰받기를 꺼려하여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태종 6년(1406) 3월 의녀제도를

    신설하고 제생원에서 童女에게 의술을 가르침으로써 의녀가 생겨나게 되었다.

    처음 의녀로서 교육을 받은 자는 京內 창고와 관사의 官婢들이었고 그 수효

    도 매우 적었다. 그것은 태종 18년(1418) 제생원에서 의녀의 수효를 늘려주도

    록 건의한 것으로 보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세종은 의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였으나 의녀가 모두 경중각사의 관

    비들이어서 成才한 뒤에도 이들의 활동무대가 주로 京中이었기 때문에 外方의

    부녀는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에 세종 5년(1423)부터는 界首官의

    관비 중에서 총명한 자를 女妓의 選上例에 따라 뽑아 올리게 하여 교육을 시킨

    다음 本處에 보내 의료업무에 종사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녀의 선발과 교육은 세종 때에 제도로서 확립되었고 세조 때에는

    의녀의 勸懲法까지 만들어져 이들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종 9년(1478)에는 의녀에 대한 勤課條目이 다시 마련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교육한 醫書는 대개가 기초과목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독

    립된 의원으로서 활동하기는 매우 어려웠고 따라서 의녀는 의사로서 보다는

    간호의나 의원의 보조자 또는 産婆로서의 역할이 더욱 중시되었던 것이다. 이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25

    렇게 의녀는 의술을 인정받아 매달 料米를 지급받던 혜민서 소속의 內醫와

    궁중의 內侍醫女, 각 의료기관과 출신지에서 의원을 보좌하면서 鍼灸를 시술

    하고 看病에 종사하던 간병의, 학습단계에 있던 初學醫 등 3부류의 의녀가 있

    었으나 이 밖에 산파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산파가 곧 의녀는 아니지만 의녀제도가 창설된 이후 이들에게는 진맥과 침구

    외에 산과와 부인과에 대한 교육을 특별히 시켰고 이 가운데서 診脈이나 鍼

    灸보다 出産의 기법에 숙달한 자를 선택하여 分娩의 일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산파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하나의 직업인으로 사회에

    봉사하게 되었던 것이다.37) 이렇게 산파가 직업인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의녀

    제도의 성립 이후로서 이 제도의 설치는 의사 혹은 간병인으로서의 의녀 뿐만

    아니라 산파라는 새로운 여성직업인을 탄생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에 국가에

    서도 산파의 기능을 인정하여 매년 歲抄 때 가장 성과가 많은 산파 1명에게

    料米를 지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의서의 편찬과 간행

    조선조에는 전기에 많은 의서가 편찬, 언역, 간행되어 한국의학사상 빛나는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의학은 인간의 생명과 관계되는 것이어서 중기

    와 후기에도 많은 의서가 저술, 간행되었다.

    조선조 대표적인 의서의 하나인 동의보감은 어의 허 준이 단독으로 선조

    29년(1596-1610)에서 시작하여 14년 동안의 각고 끝에 편찬한 것으로서 국내

    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널리 실용되었다. 동의보감에 대하여는

    그 동안 많은 연구가 있었기 때문에 편찬목적과 의의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정구가 이 책 머리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당시에는 의원이 증가하여

    37) 손홍렬, “조선중기의 의료제도”, 한국과학사학회지 15-1 (1993), pp. 5-7.

  • 26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학설은 많아졌으나 새로운 것이 없고 남의 이론을 표절하여 저술은 늘어났으나

    의술발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으며 庸劣한 의원들이 方文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약을 잘못 쓰거나 固陋한 이론을 그대로 답습하여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둘째, 당시는 전란으로 전국이 황폐하여 병자가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

    었고 많은 의서가 散失되어 처방마저 힘든 지경이었기 때문에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의서의 출현이 기대되던 때였다.

    셋째, 仁政을 목표로 하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위정자의 愛民, 恤

    民의 정신을 받들고 또 신하된 입장에서 이를 실현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넷째, 저자인 허 준은 의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절실히 깨닫고

    의술로써 活人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지식은 물론 당시 의학계의

    전 지식을 총망라해서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편찬하려 했으며 나아가

    쉽게 구할 수 있는 鄕藥을 활용하고 또 이를 권장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다음으로는 동의보감의 실용적 가치와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 내용에는 일부 도의적인 이용후생주의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다른 의서에는 없는 內景篇을 편찬하는데 있어서 淸淨과 修養을 본으로

    삼는 도가의 실용성을 채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그의 실용주의는 종래

    의학의 공상적 이론을 배격하고 지극히 과학적인 입장에서 당시 의학계의 전

    지식을 총정리하게 하였던 것이다.

    둘째, 향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향약의 보급과 이용을 강조하고 있다. 즉

    集例에서 향약에 대하여는 약명, 산지, 채취시기, 陰陽乾正法 등이 씌어 있으

    므로 이용하기 쉽고 또 멀리서 구해 온다거나 얻기 어렵다는 폐단이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치료하는데 있어서 향약의 이용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를 위해 湯液篇 3권에 들어있는 향약 가운데 640개의 향약명을 한글로 기재

    하였는바, 이는 누구나 쉽게 향약을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러한 한

    글 향약명은 국어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것이다. 향약에 대한 연

    구가 매우 부진하던 당시의 동의보감은 향약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동시에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27

    한의학을 부흥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셋째, 방대한 참고문헌을 통해 풍부한 지식을 전달하고 있는 실용의서라는

    점이다. 허 준이 이 책을 편찬하는데 참고한 의서는 86종이나 된다. 이와 같이

    이 책은 동양의학의 대표적 의서를 참고하여 편찬되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없는 臨床醫에게 매우 유용하게 실용될 수 있었다.

    넷째, 동의보감은 한국의 의학수준을 세계에 과시한 실용의서로서 역사적 가

    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즉 病症에 따라 病論과 方藥을 빠짐없이 채록하

    였고 또 그 出典이 밝혀져 있기 때문에 고금의 治方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하였으며 곳에 따라서는 俗方과 자기의 經驗方을 붙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임상의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국내는 물론 중

    국과 일본에까지 널리 전해져서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이 책이 동양3국에서

    이렇게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다른 의서보다 실용적인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며 한국인의 저술이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이용된 것은 동의보

    감이 으뜸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다섯째, 이 책에서 허 준은 한국의학을 하나의 독립된 의학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集例에서 중국의 의학을 북의와 남의로 나누고 우리 나라

    를 동의라 하면서 그것은 단지 동쪽에 있다는 지역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의학의 연구가 독자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왔기 때문에 동의라 부를 수 있

    다고 함으로써 한국의학이 중국과 대등한 의학적 전통과 수준을 지니고 있는

    독립된 의학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동의보감은 단순히 왕명에 의해 편찬된 것이 아니라 숭고하고 뚜렷한

    목적을 지닌 의서였기 때문에 학술적․실용적 가치와 함께 역사적 의의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 허 준은 상급기술관인 의관으로서 치료에 능함은 물론 동의

    보감을 비롯하여 여러 권의 의서를 저술하고 또 한글로 번역하여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한국의학의 학문적․기술적 발달에 큰 공적을 이룩하였다. 38)

    38) 손홍렬, “조선중기의 의료제도”, 한국과학사학회지 15-1 (1993), pp. 29-31.

  • 28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Ⅳ.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

    조선조의 의료 기구와 정책에 관하여 고찰한 결과를 개괄할 때 비교고찰이

    미흡하여 단언은 곤란하지만 고려에 비하여 발전되고 중국의 그것과도 상이

    한 독자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1. 의료기구

    의료기구의 측면에서 보면 당시의 여건에 비추어 극히 조직적인 체계를 통한

    합리적인 운영이 이루어졌으며 존치기간은 짧았지만 혜민서를 두고 다시 동일

    성격인 제생원을 倂置한 사실은 그만치 민중의료를 중시한 증거라 할 수 있고,

    침의와 여의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사례가 드문 창발적인 제도이다.

    鍼灸부분을 독립시키고 치종청을 설치한 것은 의료영역에 있어서 내과와 외

    과의 분리 전문화를 시도한 점에서 침의제는 큰 의의가 있으며 여의제는 固

    陋한 유교적인 사회윤리의 부산물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인 과제의 적

    극적인 해결과 당시의 사회활동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이 신분은 낮았지만

    의술로써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겠다. 또한 약사행정이 의료 못지않은 관심 아래 잘 운영된 것도 특기할 만

    한 일이다.

    2. 의료정책

    왕실의 지대한 애민사상은 京外를 막론하고 세심한 배려 아래 다양하고 충실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29

    하게 연구 추진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교통이 불편한 당시에도 불구하

    고 의원의 파견과 훈련, 처방, 약물의 수송, 의무관과 지방관리의 檢察 등 지방

    의료에 傾注된 용의주도한 정책은 ‘常賤은 양반계층의 지지를 위한 존재’라는

    조선조 통치조직의 대전제를 넘어서 인명존중과 애민정신에 입각한 인도주의와

    민본사상의 강한 發露라 할 수 있다.

    전염병자의 隔離受容과 施療, 棄兒保護, 學校醫, 軍醫官制, 罪囚醫療 등 그 전

    부가 우리의 창의가 아니며 또한 그 운용에 있어서 완벽을 기한 것은 아니지만

    서구의 의료제도 유입 이전부터 이러한 측면에서 銳意 腐心했다는 사실은 놀라

    운 일이며 이와 같은 정책들이 일시적인 彌縫策이 아니라 끊임없이 검토 개선

    되어 법제화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3. 의서의 편찬

    의서의 편찬과 간행을 보면 조선조의 대표적 의서인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40여 종이 편찬, 언역, 간행되어 의학의 학문적 성과를 이룩하였으며 중국의

    서의 간행(복간)도 매우 활발하여 조선조 전기와 후기에 100여 종이 간행되어

    의술보급과 민질치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조선조 중기는 의료제도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전기에 발달한 학문

    적 토대를 바탕으로 새로운 의서의 편찬과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한국의학의

    명맥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4. 의녀제도

    의녀제도는 조선조의 유교적 여성관을 실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여

    성의 질병을 치료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궁중 여성 내지는 사족의 여성들에

    게 남녀유별의 도리를 실천해주기 위한 명분을 보장해 주는 방법으로 여성을

  • 30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조선조 사회가 지향하는 유교적 여성관에 합치된 여성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며 이에 따라 의녀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녀는 전문의료인으로서 사회에 봉사하게 되었으나 이들이

    모두 경향각사의 관비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사회적 활동에는 많은 제약이 있

    었다. 그러나 이들의 의료봉사를 통한 사회참여는 전통사회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Ⅴ. 맺음말

    1. 연구결과의 요약

    조선조의 모든 제도가 왕실과 양반지배층 위주로 마련된 것이지만 조선조가

    유교적인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한 만치 모든 사회복지정책 면에서 민본사상이

    크게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자연재해로 인해 잦은 흉년과 이에 따른 전염병의 창궐이 심했던 조

    선조에 있어서 의료 기구와 정책은 조선조 전 기간을 통하여 일반민중들을

    救恤하고 救療해 주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조선조에 있어서 의료복지는 건국 초기부터 구료사업을 전개함과

    동시에 전염병 환자를 위하여 도심지로부터 떨어져 있는 곳에 동서활인원을

    설치하고 환자들을 수용하여 시약과 급식을 제공하여 구호와 의료를 병행하

    였음은 의료와 구빈이 동일체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조의 의료복지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잘 되어 있었다고 하

    겠다. 즉, 중앙에는 왕실의 의료를 전담하는 내의원이 있었고 육조의 관리와

    일반백성의 시료와 의료교육을 담당하는 전의감, 혜민서, 제생원 등이 있었으

    며 도성 안의 전염병 질병의 퇴치를 위한 동서활인원을 두었고 부인들의 질

  • 조선조 의료복지정책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연구 31

    병치료를 위한 의녀제도와 약재의 種植을 위한 種藥色 등이 있었다. 그리고

    지방 각지에도 각급의 의원, 審藥, 醫學敎諭, 月令醫 등을 배속시켜 지방의 의

    료보호와 의학교육에 종사케 하였다.

    고종31년(1894)에는 갑오경장과 더불어 외국의 새로운 의학지식과 기술이

    도입되어 종래의 한의방 위주의 의료행정제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광제원, 의학교, 대한의원 등을 설치하여 신식 의료사업을 보급하였으며

    지방에는 융희3년(1909)에 자혜의원을 개설하여 현대 의료를 시작하고 전염병

    예방을 위한 種痘예방규정도 제정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말엽에 이르러 국정과 사회가 급변과 혼란에 빠짐에 따라

    각종 의료복지도 점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곤란하였음은 당시의 어쩔 수

    없는 시대상황이었기에 안타까움이 남아있다.

    2. 연구수행에 따른 제한점

    조선조는 소빙기 등의 급격한 자연환경의 변화와 함께 疫病의 발생도 비례

    하여 증가하게 된다. 또한 인구증가 등 사회환경의 변화로 기존의 국가의료체

    계가 이완되면서 상대적으로 민간의료중심의 구료체계가 마련되어 가는데 이

    에 대한 정리는 다음의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 32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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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4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ABSTRACT

    A Study on the Contemporary Significance of

    Medical Welfare Policy in Chosun Dynasty

    Hyomoon, Kwak*)39)

    Though Chosun dynasty succeeded culture and civilization of Koryo and took

    a benchmarking from those in China, it is neither a play-back nor

    transplantation of theirs. It reflected on democracy as for its all social welfare

    policy so that Chosun took king centered politics as its ideal through

    reorganization and arrange of it suitably for newborn nation with the creative

    initiation by ethnic identity, even if a political system had been made out mainly

    for the Royal family and nobility.

    Above all, it can be impressive that the medical organization and policy

    rescued people in general during whole reign of Chosun dynasty especially with

    many years of bad harvest and epidemics by frequent disasters.

    key word : creative initiation, people centered thought, rampancy

    * Hanyoung Theological University, Professor.

  • 초 록 본고에서는 18세 후반, 黃胤錫이 수령직을 지냈던 木川縣과 全義縣 官屬의 구성

    과 운영에 대해 살펴보았다. 頤齋亂藁 와 重記, 현존하는 두 지역의 邑誌, 輿地

    圖書 를 통하여 官屬의 담당 업무와 임명에 대한 몇 가지의 사실을 밝혀 낼 수 있

    었다.

    목천현과 전의현 관속은 鄕廳과 作廳, 軍官廳 이하 奴婢 등으로 구성되었으나 주

    로 鄕廳과 作廳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두 지역 모두 다양한 色吏가

    만들어졌으며, 각각의 특색에 따라 色吏와 그 업무도 차이를 보였다. 官屬의 職任者

    들은 잦은 교체를 보이고 있었고, 특정직임에 還差하는 경우도 많았다.

    頤齋亂藁 에 나타난 忠淸道 木川·全義縣 官屬의 運營實態

    The local official's administrative operation in

    Mokcheon(木川) and Jeoneu(全義) shown in

    Ijaenango(頤齋亂藁)

    노 혜 경(Roh, Hyekyung)*)1)

    목 차

    Ⅰ. 머리말

    Ⅱ. 木川縣과 全義縣의 官屬 규모와

    구성

    Ⅲ. 官屬의 운영

    Ⅳ. 맺음말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연구실 연구원

    (Researcher, Jangseo-gak,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 36 韓國行政史學誌 第18號

    鄕吏任과 鄕所는 특정 집안, 특정 인물이 독점했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목천

    현 吏任은 申氏가, 전의현 吏任은 黃氏가 戶長·吏房職 등을 독점했다. 그 편중된 정

    도는 목천현이 더욱 심했다. 또 鄕所도 특정인물이 都監·別監을 兼差했다. 목천현

    의 경우 金氏·李氏·柳氏·尹氏의 특정 인물이, 전의현의 경우 金氏·李氏·鄭氏의 특

    정인물이 독점했다.

    兼職의 상황을 보면 六房任과 色吏任의 경우와 色吏任만의 兼職 등 두 상황을 모

    두 보이고 있었다. 특히 경제적 이권을 가질 수 있는 직임을 겸직한 경우가 많았

    고, 이 또한 특정집안에 집중되고 있었다. 향청에서는 업무상의 分掌으로서 座首

    와 別監 사이에 上下관계는 없었으며, 지역마다 맡은 역할이 달랐다. 목천현에서

    는 좌수가 年分都監을 맡았고, 一別監이 戶籍·大同·倉色 등의 도감을 맡았다. 전의

    현에서는 一別監이 官廳別監을 맡았고 二別監이 司倉別監을 맡았다. 다만 목천현에

    서는 一別監과 二別監의 陞差관계가 있었다.

    18세기 후반에는 書員이 吏職化하여 鄕吏·色吏·書員 간에 上下관계가 없었으며,

    戶長과 吏房 사이에도 상하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鄕所도 상하관계가 없었지만

    특정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좌수나 별감의 履歷이 필요했다. 호적식년에는 이

    에 관련된 직책이 임시적으로 설치되었으며, 그 직임도 특정 규칙에 따라 임명되

    었다. 또 수령의 행차에 支應했거나 수행한 향리들에게는 특혜로서 都書員·書員·倉

    色 등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官屬의 換房은 1월과 6월 정도에 정기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수시로 特差가 있었

    다. 이런 규칙은 邑 내부에서 관례로 행해졌으며 邑事例의 형태로 남아 있다. 따라

    서 수령은 자의적인 임명과 함께 많은 경우 邑事例에 의거하여 인사권을 행사하

    였다.

    주제어 :木川縣, 全義縣, 官屬, 陞差, 特差, 獨占, 兼職, 換房, 邑事例

  • 頤齋亂藁 에 나타난 忠淸道 木川·全義縣 官屬의 運營實態 37

    Ⅰ. 머 리 말

    조선 왕조는 유교적인 통치이념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국가로서, 고도의

    관료주의를 통해 지방의 하부 조직까지 장악·통제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지속

    해 왔다. 조선 후기에는 중앙정부로부터 파견된 수령이 鄕吏 등의 지방행정조

    직과 鄕廳 등의 자치조직까지 수령의 官屬으로 두게 되었다. 이렇듯 수령은

    조선 전기에 비해 더욱 확대된 권한을 가지게 되었으나, 지방에는 그 지방의

    실정에 맞는 각각의 행정조직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官屬들의 실제업무도 각

    각 차별성을 보였다. 따라서 수령은 국왕으로부터 위임받은 專權을 기반으로,

    실제 시행되고 있던 지방행정조직을 좀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 지방 官屬들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연구는 鄕吏와 鄕廳 등에 관

    한 문제가 각각 고찰되었다. 鄕吏에 대해서는 1980년대 이후 관심이 고조되어

    鄕吏세력의 변동, 향리층의 신분 이동, 향리 지식층의 성장 등 신분사 연구에

    집중되었다.1) 그 밖에 地方吏胥集團의 조직구조의 변화와 吏額의 증가, 吏胥

    層의 逋欠현상 등을 다룬 논문이 있다.2) 또 지방행정조직의 관점에서 吏職의

    1) 李勛相, 「掾曹龜鑑의 편찬과 간행」, 진단학보 53·54, 1982.

    ───, 「조선후기 慶州의 향리와 安逸房」, 역사학보 107, 1985.

    ───, 「安東鄕孫事蹟通錄의 간행과 조선후기 安東향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