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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 행 정 사 학 회C7%D1%B1%B9%C7%E0%C1%A4... ·  · 2007-08-20한 국 행 정 사 학 회 임 원 고 문 : 강신택(서울대 학술원 회원) 유종해(연세대), 이광종(청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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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국 행 정 사 학 회

    임 원

    고 문 : 강신택(서울대 학술원 회원)

    유종해(연세대), 이광종(청주대), 장동희(단국대)

    한영춘(단국대), 권기성(광운대)

    회 장 : 오열근(단국대)

    부 회 장 : 이대희(광운대), 이명재(상명대), 강창구(상지대)

    김권집(충남대), 김춘식(천안대), 최종연(단국대)

    집행이사 : 곽효문(편집이사, 한영신대) 권정호(연구이사, 인천대)

    김정기(편집이사, 경문대) 남기범(섭외이사, 성결대)

    백정현(연구이사, 충남대) 소광섭(연구이사, 건양대)

    송낙선(운영이사, 백석대) 안외순(편집이사, 이화여대)

    유준석(총무이사, 백석대) 이상엽(편집이사, 한서대)

    정시구(연구이사, 건양대) 정우열(편집이사, 경운대)

    최한규(섭외이사, 선문대) 이선엽(편집이사, 홍익대)

    감 사 : 강병태(인천조달청), 조경훈(한성디지털대)

    편집위원 : 김정기(위원장, 경문대)

    김춘식(천안대), 안외순(이화여대)

    곽효문(한영신대), 정우열(경운대)

    이상엽(한서대), 이선엽(홍익대)

    서유경(경희대)

  • 第 19 號

    2006. 12

  • 목 차

    1. 한국 공무원단체활동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 강 승 규·············································································· 1

    2. 조선조 의녀제도의 사회복지적 의미에 관한 연구

    / 곽 효 문············································································ 23

    3. 朝鮮初 褒貶制度와 公務員 退出

    / 김 용 린············································································ 53

    4. 역대 한국 정부의 조직개혁 변천사

    / 박 수 경············································································ 81

    5. 제3,4공화국의 경제성장 동력을 위한 정부 역학구도의 분석

    / 송 낙 선·········································································· 121

    6. 暗行御史 朴定陽의 書啓 ․別單의 分析 / 윤 재 풍·········································································· 151

    7. 傳統的 人事行政 原理에 對한 一 考察

    / 이 광 모・이 재 토························································· 1918. 국가주도형 국가재난관리에 대한 혁신

    / 정 시 구·········································································· 231

    9. 포스트모더니즘 組織論의 成立과 老子의「道德經」

    / 오 열 근·········································································· 259

  • 현재 한국은 공무원단체활동에 관한 새로운 전환기적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정부도 이제는 공무원들의 단체활동에 대한 일정한 지원과 지도를 통하여 공무원들

    의 단체활동을 건전하게 육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의 헌법규정에 나타난 공무

    원의 노동기본권 및 단체활동 정책의 변화과정은 과거 정권별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제헌 헌법에서는 노동기본권을 노동자의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

    의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고 규정하고 5차 개정 헌법에서 민간노동자와 공무원의 노

    동관계를 구분하여 규정하였다. 공무원단체활동에 대한 변화과정을 시대별로 살펴

    보면 국민과 정부 모두가 공무원들의 단체활동에 대하여 소극적 입장을 보여 온 것

    을 알 수 있다. 현행법상 공무원단체활동을 인정받고 있는 공무원은 사실상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 및 고용원에 한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공무원단체활동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Shift of public employee union(s) in

    Korea Government

    강 승 규 *

    kang seung kyu

    Ⅰ. 서 론

    Ⅱ. 공무원단체활동의 이론적 기초

    Ⅲ. 한국공무원단체활동의 변화과정

    Ⅳ. 결 론

    * 호서대학교 외래교수

    초 록

    목 차목 차

  • 2❚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주제어】

    공무원, 변천, 노동조합, 단체교섭, 국제노동기구

    Ⅰ. 서 론

    전통적으로 공무원은 특수한 신분관계에 있기 때문에 사기업의 노무자와 같은

    단체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사기업

    의 근로자와는 입장이 다르지만 세계 각국은 공무원도 노동자이고 따라서 단체를

    결성하여 그들이 기본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통하여 공무

    원의 단체활동을 허용하는 추세에 있다.1) 그러나 사기업과 똑같은 방법이 아니라,

    공무원의 특성에 맞는 제한적인 활동을 보장해 주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행정

    의 이념인 능률성과 민주성을 향상시킴으로써 국가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것

    이다.

    현재 한국은 공무원단체활동에 관한 새로운 전환기적 상황에 처해 있다. 1987년

    6.29 선언이후 전반적인 사회변화에 따라 민간부문의 노동활동이 활발하게 전개

    되어 있으며2), 이에 편승하여 공무원의 단체활동이 단체행동으로 나타나는 경우

    도 발생하고 있다. 한국은 90년대 초에 국제노동기구에 가입했으나 결사의 자유를

    1) Felix. A. Nigro & Lloyd G. Nigro, The New Public Personnel Administration (Itasce: F. E.

    Peacock Publishers, Inc. , 1986), pp. 114-121.

    0. Glenn Stahl, Public Personnel Administration (N. Y.: Happer & Row Publishers, 1983), pp.

    419-430.

    Siegel & Myrthe, Personnel Administration, (Boston : Houghton Mifflin Company, 1985), pp.

    374-375.

    2) 1987년 6.29 선언 이전에 2천 7백개 단위조합에 100만명에 불과하던 노조가입 근로자 수

    가 6.29 선언 이후 1년 만에 4천 7백개 조합에 150만명(조직율 20%)으로 늘어 났다. 「중

    앙일보」 1988년 8월 19일자, 5면.

  • 한국 공무원단체활동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3

    규정한 핵심조항인 87호「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보호조약」과 98호「단결권 및

    단체교섭조약」의 비준을 미뤄왔고 현재는 6급 이하 하위직을 대상으로 노동3권

    가운데 우선 단결권에 한정해 허용하는 방안으로 협의체 형식의 ‘공무원직장협의

    회설립․운영에관한법률’(법률 제 5,516호)을 공포되어 최소한의 단결권이 보장될

    것이지만 협의사항 이행에 대한 강제규정이 없어 실질적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렵

    게 되어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맥락에 맞추어 공무원단체활동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펴보

    고자 한다.

    Ⅱ. 공무원단체활동의 이론적 기초

    1. 공무원단체활동의 개념

    공무원단체는 공무원의 근무조건, 지위 및 복지증진과 사기제고 및 행정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으로서 현대인사행정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

    다.3)

    따라서 공무원단체라는 용어 대신에 공무원조합 또는 공무원노동조합이라는 용

    어를 사용하기도 한다.4) 공무원 노동조합(Union)은 가장 노동운동에 적극적이고

    호전적인 조직으로 파업(strike)을 선호한다. 이에 비해 단체교섭협회는 정치적인

    활동을 강조하며 감독직도 포함된 조직으로서 파업을 상대적으로 덜 선호하는 조

    직이며, 미국의 노동조합 총연맹(AFL-CIO)에 가입한 조직을 일컫는다. 비단체교

    섭조직은 단체교섭에 임하지 않는 순수 친목회적 조직을 말한다.5)

    3) 박연호,「인사행정신론」(서울: 법문사, 2001), p. 413.

    4) 유 훈, “공무원 노동조합에 관한 연구,"「행정론집」 창간호(1969), 107면

  • 4❚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한국에서는 대체로 광의의 개념과 협의의 개념으로 2분하여, 광의의 공무원단

    체는 “공무원들이 조직하는 모든 단체로서 비공식, 자생집단 까지를 포함하는 조

    직”을 의미하는 것이고, 협의의 공무원단체는 “노동조합의 형태를 갖춘 공식적인

    단체”라고 하는데 견해가 일치되고 있다.

    공무원단체는 그 구성원들의 협동심을 고취하고 행정발전에 기여한다는 등의

    부수적 목적을 함께 표방하는 것이 보통이다. 공무원단체의 활동으로는 크게 네가

    지로 ⅰ) 오락 및 친목 활동, ⅱ) 상조활동, ⅲ) 교육 및 홍보 활동, ⅳ) 대표활동

    (representation of employees)등이 있다. 이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중요시되

    며, 또 가장 많은 쟁점을 안고 있는 것은 대표활동이다. 단체교섭권, 단체행동(파

    업)권등은 대표 활동의 수단이 된다.6)

    2. 공무원의 노동종속성

    한국은 역사적으로 볼 때 억압적 강권기구로 제도화됨으로써 사회내의 강제적,

    공리적, 상징직 자원을 독점하게 되었고, 이러한 자원을 활용하여 국가기구를 관

    장하는 통치계층은 헤게모니를 획득하고 지속적으로 사회통제를 행함으로써 절대

    적 수준의 국가자율성을 유지하게 되었다.7)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한국공무원들

    이 국가에 봉사는 면만 강조했지 그들의 처우개선을 주장할 수 있는 노동자성 권

    리를 주장할 수없게 하여 왔다.

    공무원의 노동기본권은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즉 노동 3권을 지칭하

    는 것으로, “근로자, 즉 타인에게 고용되어 종속노동을 급부하고 그 대가를 받아

    생활을 영위할 수 밖에 없는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인정된 기본권

    이다.”8) 이는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서 노동자와 사용자의 대립에 있어서 노동자

    5) 서원석, “한국공무원의 단체활동에 관한 인식분석적 연구.”(연세대학교 대학원, 1990), pp.

    17-18.

    6) 오석홍,「인사행정론」(서울: 박영사, 2000), p. 680.

    7) 최장집, “해방 40년의 국가, 계급구조, 정치변화에 대한 서설,” 최장집편,「한국현대사Ⅰ」

    (사울:열음사, 1985), pp.31-40.

  • 한국 공무원단체활동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5

    의 약자적 지위를 강화하여 노사대등관계를 확보하고, 노동력의 상품성을 유지시

    키는데 그 의의가 있다.9)

    근로자의 개념에는 종속노동관계가 전제가 되는 것이고, 종속노동관계가 현실

    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의 여부로 노동종속성에서 근로자의 규정 될 것이다. 대

    표적으로 경제적 종속설과 인격적 종속설이 있다.

    경제적 종속설은 근로자는 경제적으로 타인에 의존하는 이외에는 독립해서 생

    활을 영위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 노동력을 경제적으로 강요당하고 있

    는 근로자와 생존수단의 소유자인 사용자간에는 현저한 경제적 불평등 존재에 있

    다 할 것이다. 이 때문에 계약체결에 있어서 노동임금과 근로조건의 결정에 대하

    여 근로자는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조건에 수동적으로 복종 해야만 하는

    경우를 노동관계에 있어서 노동의 경제적 종속이라고 하는 것이다.10)

    인격적 종속이란 노동자가 현실의 노동관계에 들어가서 노동을 수행하는데 있

    어 나타나는 종속관계이고 사용자의 명령과 통제에 따라서 노동해야 할 입장이

    현실속에서 사용자의 직접적인 지휘․결정에 예속되어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다. 따라서 노동자는 근로계약을 매개로하여 사용자의 지배에 복종한다고 하는 채

    무를 부담하는 측면과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지배종속의

    측면을 가진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근로계약이 상호모순하는 신분관계

    의 형태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러한 견해를 인격적 종속이라고 하는 것이다.11)

    경제적 종속설은 노동의 종속성이라는 원인에서 기인된 것이고 인격적 종속설

    은 종속성의 내용에 중점을 두어 구성된 이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경제적 종속성

    과 인격적 종속성의 개념이 종속노동을 설명한다고 할 것이다.12)

    공무원은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사회의 총자본’으로서의 국가에 종속적인

    관계를 가지고 경제적 약자로서 국가의 지휘․결정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공무원이 국가의 의사를 집행하는 인적 담당자로서의 성격으

    8) 신인령,「노동기본권연구」(서울: 미래사, 1985), p. 4.

    9) 상게서. pp. 19-38.

    10) 김치선,「노동법 강의」(서울: 박영사, 1989), pp. 72-73.

    11) 상게서, p. 73.

    12) 신인령, “교원의 노동삼권”, 사회과학논집, 제9집(1991), p. 7.

  • 6❚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로 외견상 일반근로자와 달라 보여도 국민에 대한 국가의 기관으로서의 활동면

    (공무원의 대국민관계)을 제외하면 공무원들은 근로자로서의 사회․경제적 지위

    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근로관계(공무원의 대국가관계)도 국가의 종속하에

    수행된다는 점에서 종속노동관계에 있음은 명백하다고 하겠다. 선출직 공무원과

    정책결정의 지위에 있는 고위공무원을 제외한 일반적인 공무원들은 국가의 법과

    결정된 정책의사에 입각하여 근무하는 이상 공무원의 노동종속성은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13)

    따라서 공무원의 근로자성 여부는 노동의 공공성이나 국가와 공무원과의 특별

    한 관계에 상관없이 노동관계에서 공무원의 신분은 근로자이며 어떤 일반 근로자

    들과 동등하게 사회적, 경제적, 인격적 종속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

    다.14)

    Ⅲ. 한국공무원단체활동의 변화과정

    1. 시기별 전개과정

    한국의 헌법규정에 나타난 공무원의 노동기본권 및 단체활동 정책의 변화과정

    은 과거 정권별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제헌 헌법에서는 노동기본권을 노동자의

    이익균점권과 더불어 제18조에 규정하고 있다.15) 즉 노동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고 규정하고 이른바 노동자의 이

    익균점권까지 규정하였다.16) 따라서 이 시기의 입법은 공무원도 행정의 운영의 묘

    13) 이철원, “공무원의 노동기본권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 교대학원, 1991), p. 7.

    14) 신인령,「노동법 판례연구」(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5), pp. 532-533.

    15) 「제헌헌법」 제18조 참조.

    16) 백종섭, “한국 공무원단체활동의 영향요인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 한국 공무원단체활동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7

    에 의해 노동관계법을 적용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다.17) 이러한 헌법규정에

    따라 구 노동조합법 제66조는 “노동자는 자유로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또는 이

    에 가입할 수 있으며, 단, 현역군인, 군속, 경찰관리, 형무관리와 소방관리는 예외

    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또 구 노동쟁의조정법 제 5조는 단서에서 단순한 노무에

    종사하는 이외에 공무원에게 쟁의권의 제한을 규정하였다.

    제5차 개정 헌법에서 민간노동자와 공무원의 노동관계를 구분하여 규정하였다.

    즉, 민간노동자에 대하여 자주적인 노동 3권을 인정하고 공무원에게는 법률로 인

    정된 자를 제외하고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가질 수 없다고 하여 공

    무원의 노동운동을 원칙적으로 금하였다. 그리하여 공무원의 노동운동은 그 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다.18) 제7차 개정된 유신헌법은 국가안보의 강화, 국민의 총화단

    결, 경제성장의 지속과 남북대화의 계속이라는 통치이념하에 제정된 것으로서,

    “공무원과 국가, 지방자치단체, 국영기업체, 공익사업체 또는 국민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업체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

    하여 제한하거나 인정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단체행동권

    의 제한을 공무원이나 공익사업체에 종사하는 근로자외에도 국영기업체와 국민경

    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업체에 종사하는 근로자에도 확대 적용하도록 되어

    있다.

    1) 제1․2공화국

    이 시기는 노동3권과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이 보장되었다. 제헌헌법 제 18조는

    근로자의 단결․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법위내에서 보장함을 담고

    있었다. 1948년의 8월 12일 공포된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의 복무와 관련하여 공

    무원은 국민전체의 봉사자로서 친절․공정히 집무해야하고, 공무원은 정치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며 공무 이외의 일을 위한 집단적 행동을 금지하고 있었다.

    논문, 1991), p. 21.

    17) 백상기, “한국공무원의 노동기본권에 관한 연구”,「행정연구」제11권(1975), p. 54.

    18) 상게논문, p. 55.

  • 8❚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공립 및 사립학교 교원은 노동조합결성자체가 금지되않았음에도 불구하고 4.19

    이전에는 이들의 노조결성이 구체화되지 못한 것은 자유당의 정치체제때문으로

    볼 수 있다.

    1960년 제2공화국 수립이후 정부는 교원노조의 명칭을 교원연합회 또는 교원조

    합 등으로 개칭하고, 교원의 생활 권익을 위한 단결은 인정하나 교육에 지장이 있

    는 단체행동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교원노조를 인정하려는 태도를 보이

    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교원노조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은 인정하되 단체협

    약권과 단체행동권은 부인하는 교원단체법을 제정하여 대처하기로 방침을 정하였

    으나 정부 당국은 교원노조측의 노동조합설립신고를 받아주지 않아 교원노조의

    투쟁은 계속되었고 그로 인해 교원노조의 투쟁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하였

    다.19)

    2) 제3․4공화국

    제3공화국은 1962년 12월 26일 헌법개정에서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해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가지나 공무원인 근로자는 법률로 인정돤 자를

    제외하고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가질 수 없다. 라고 하여 공무원의

    노동권은 법률유보사항으로 규정되었고 선택적으로 인정된 공무원만 노동권을 행

    사 할 수 있게 되었다.

    제4공화국은 유신헙법에서 근로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은 법률

    이 정하는 범위 안에서 보장하되 공무원인 근로자는 법률로 인정된 자를 제외하

    고는 노동3권을 가질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공무원과 국가, 지방자 치단체,

    국영기업체, 국익사업체, 또는 국민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업체에 종사하

    는 근로자의 단체행동권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를 제한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여 노동권을 제약 받는 근로자와 공무원의 범위는 확대되기 시

    작 했다.20)

    19) 김락중, 「한국노동운동사」(청사: 1982), p.286.

    20) 이규환, “한국 공무원단체활동에 영향을 주는 요소에 관한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대학

    원, 1997), pp.31-33.

  • 한국 공무원단체활동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9

    3) 제5․6공화국

    제5공화국 헌법에서는 제31조 2항에서 “공무원인 근로자는 법률로 인정된 자를

    제외하고는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가질 수 없다”고 규정하여 원칙상

    공무원의 단체활동을 금지하고 있었다.

    1980년 개정헌법에서 제5공화국의 헌법은 공무원에 대한 근로조건의 향상의 위

    한 명분으로 자주적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지되,단체행동권의

    행사는 법률이 정하는바에 의하며 공무원인 근로자는 법률로 인정된 자를 제외하

    고는 노동3권을 가질 수 없도록 하였다. 국가, 지방자치단체, 국공영기업체, 방위

    산업체, 이익사업체 또는 국민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업에 종사하는 근로

    자의 단체행동권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를 제한 하거나 인정하지 아니

    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근로자의 단체행동권 행사는 더욱 제약을 받게 되었고, 제

    4공화국 헙법에 비해 국영기업체와 방위산업체가 추가되어 국가공무원법상 공무

    원의 노동권을 제약하는 뒷받침이 되었다.21)

    제6공화국 헌법 제33조 2항은〔공무원 법률이 정하는 자에 한하여 단결권, 단체

    교섭권,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헌법규정을 기초로 하여

    국가공무원법 제66조와 지방공무원법 제58조는〔사실상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

    이외에는 노동운동 기타 공무 이외의 일을 위한 집단적 행위를 할 수 없다)고 규

    정하고 있다.

    따라서 현행법상 단체활동을 인정받고 있는 공무원은 이른바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 즉 철도청, 정보통신부 소속 현업기관과 국립의료원의 작업현장에서 노무

    에 종사하는 기능직 공무원 및 고용원에 한정되어 있다. 사실상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의 경우에 있어서도 단결권과 단체교섭권만을 가지며 단체행동은 금지되고

    있다.

    1987년이후 공공부문의 노동조합 활동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공공부문의 노사

    관계는 전반적으로는 민간부문보다 평온한 편이지만, 1987년 이후 설립된 신생노

    조들은 대부분의 정부출연연구기관 노조와 지방의료원 노조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21) 이규환, 전개논문, pp. 33-35.

  • 10❚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에 동참하고, 정부를 상대로 공동임금인상투쟁

    을 전개하는 등 ‘전투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서울지하철공사 노동조합의

    경우에는 수차례에 걸쳐 강력한 쟁의행동을 전개했으며, 단체활동이 금지되어 있

    는 철도기관사들이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파업을 벌이는가 하면, 교원들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4․19시기 이후 30여년 만에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한국전력과 한국통신 등 그동안 상대적으로 평온한

    노사관계를 유지해 오던 공공부문 노동조합에서도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되는 움

    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2. 분야별 공무원단체활동의 전개과정

    1) 전국철도노동조합

    철도노동조합은 해방후 설립한 다른 노동조합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운동과 반공

    단체로서의 성격 등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조직으로 출발 하였다. 그 후 1961년 국

    가재건최고회의 포고령 제6호에 의하여 다른 정치단체, 사회단체와 마찬가지로 해

    체되었으나 그해 8월 3일 근로자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공포됨에 따라 산

    업별 노동조합인 전국철도노동조합이 재건 되었다. 그후 1971년 「국가보위에 관

    한 특별조치법」으로 노동조합의 단체교섭등을 규제함으로써 철도노조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22) 그후 1980년 12월에 개정된 노동관계법에 의하여 노동조합기

    능과 역할이 축소되어 노사간 불균형을 이루었고 1988년 7월 26일 근로개선을 위

    한 철도기관사 파업이 있었고 노동조합활동이 신장되고 있는 실정이다. 1996년에

    공사화 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공무원이란 신분상 제약에서 탈피, 가일층 조직의 확

    대 강화를 기하여 철도집행부에서는 공사화 전환에 앞서 제도적 측면에서 조합원

    의 권익신장과 복리가 보장되도록 노력고 하고. 또한 조직의 시대적 상황 변화에

    부응하기 위하여 참된 민주철도 발전개혁 의지로 규약 및 제 규정을 보완하였다.23)

    22) 전국철도노동조합,「철도30년사」(서울: 철도노동조합, 1977)참조

  • 한국 공무원단체활동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11

    2) 전국체신노동조합

    전국체신노동조합은 정책조합으로서 조직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

    다. 특히 1982년 1월 한국전기통신공사의 발족으로 전국우전통신노동조합 연맹

    산하 단위노동조합으로 전락한 당조합은 명맥만 유지하다가 1985년 7월 전국우전

    통신연맹을 탈피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대우어패럴사건’등 노동문제가 정치현안

    으로 등장하여 연맹 탈피 및 노총 가입을 위한 임시대회를 무기한연기하게 되었

    다. 민주적인 노조를 재건하기 위해 1987년 12월 18일 역사적인 임시전국대의원대

    회를 개최하여 전국우정통신노동조합연맹 탈퇴를 결의하고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에 가입키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88년 2월 23일 한국노총의 대표자회의에서 체신노동조합의 한국노

    총가입이 확정되어 전국체신노동조합인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재건되었고 1991년

    도 전국대의원대회와 중앙위원회가 열려 조합이 추진할 활동지침을 교육시키고

    조합원의 단결력을 강화하기위해 조합원들이 격고있는 제반사항을 집단적으로 모

    색해 나가도록 함으로써 사무능률향상 및 근로조건 개선 노력을 추진하고 있다.24)

    그후 조합원의 처우개선을 위해 보수인상, 인사제도개선, 근무조건개선을 위해 외

    국의 관련단체를 방문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3) 국립의료원노동조합

    국립의료원노동조합은 철도노조나 체신노조에 비하여 여러가지 제약조건이 많

    고 가입되어 있는 조합원이 적기 때문에 활동범위가 제한이 되어있다. 한국노총

    산하 전국연합노조연맹과 전국공무원노동조합협의회에 참여하여 그 나름대로 열

    심히 활동하고 있다.25)

    23) 전국철도로동조합,「활동보고」(서울: 전국철도노동조합, 1992), p. 33.

    24) 전국체신노동조합, 「91년도사업보고」(서울: 전국체신노동조합, 1992), pp. 145-164.

    25) 이정만, “한국공무원노동조합에 관한 연구.”(충남대학교대학원, 1992), p. 71.

  • 12❚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4)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교원노조 법제화의 큰 의의는 교원들이 1960년 4월19일 교원노조 이후 38년만

    에 헌법상 노동기본권을 자주적으로 행사하게 되었다는데 있을 것이다. 교직사회

    에 노동기본권과 결사의 자유가 보장됨으로써 교원들의 다양한 의사 표현이 가능

    하게 되었고 이로써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하여 실효성 있는 제약을 가할 수 있게

    되었고 교육입법 및 정책에 대한 교사들의 정당한 목소리를 정부에 그대로 전달

    할 수 있는 체제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26) 할 것이다.

    직능단체로서 전교조가 굳이 노동조합의 형태를 취한 이유는 조직 단결구성의

    법적 근거를 이루는 노동조합법에 따라 노조를 구성함으로써 단체교섭권, 단체행

    동권을 합법적으로 인정받아서 실추된 교사의 제권리를 보장 받음과 동시에 보다

    강력하게 교육의 정상화를 꾀하기 위한 것이다. 또 이것은 교육회의 형태를 취함

    으로써 사회의 구조모순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아무런 법적 보장을 받을 수 없었

    던 대한교총(한국교총의 전신)조직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과거의 교원노조운동의 역사적 경험이 노동자로서의 교직관을 표방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으나, 60년대와 80년대 교원노조가 교육 현실 개혁의 명분으로 주장한

    공통된 사실은 교육의 민주화와 대한교련의 어용화에 따른 교사들의 이해를 대변

    할 수 있는 조직의 필요성이었다.

    따라서 1980년대 초 교직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교원단체들은 학교조

    직의 관료적 폐단과 전문직으로서의 교권의 한계로 인한 교사의 역할 갈등을 체

    험하고 교사들의 자율성 확보방안으로 교원노조의 결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1980년의 자발적 교원단체의 결성은 이제까지 국가권력의 권위주의적 강

    압에 억눌려 있던 교육주체로서의 책임 회피를 반성하고 교육자로서의 사명감과

    윤리성에 기초하여 교사의 목소리를 새로운 단체 구성을 통하여 교사 자신이 중

    심이 된 교원단체를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1987년 ‘전국교사협의회(이하 ‘전교협’)’를 창립하고,

    1989년 2월 19일 전교협 대의원대회에서 노조 결성 및 단체교섭에 관한 법률이 통

    26) 노동법률(중앙경제: 서울, 1999. 9월호), p. 56.

  • 한국 공무원단체활동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13

    과되게 되었다. 하지만 1989년 3월 9일 노태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입법화가

    좌절되었고, 1989년 7월 1일 문교부(현 교육부)에서는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 전원

    에 대해 파면 내지 해임 방침을 발표하면서 1,527명의 교사가 파면, 해임되기에 이

    르렀다. 이에 국제교육연합(EI)과 국제노동기구(ILO)는 우리나라 정부에 전교조

    및 관련단체에서 제소한 결사의 자유 인정과 해직교사 복직을 계속적으로 권고하

    였다.

    이후 1993년 전교조 해직교사에 대한 고등법원의 해임무효 소송에서 해직교사

    들이 승소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94년 해직교사 1,524명 중 1,291명이 복직하게

    되었으며, 계속적으로 교원노조의 합법화를 정부에 요구하는 과정 속에서 98년 2

    월 6일 제1기 노사정 위원회에서 “교원노조를 98년 정기국회에서 입법화하고 99

    년 7월 1일부터 시행한다”는 합의안을 기초로 1999년 2월 8일에 와서야 비로소 입

    법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999년 7월 1일 전교조가 합법화되었다.

    전교조가 표방하는 참교육 운동의 발전을 위한 주요정책 연구과제를 보면 ①

    민족민주 인간화 교육의 발전적 재검토, 녹색교육 모색, ② 학교모델, 학제개편,

    ③ 새로운 교사상 정립, ④ 교육정보화와 인간교육의 관계, ⑤ 7차 교육과정, 수행

    평가, 무시험 입학제 등 재검토, ⑥ 실업(직업)교육, ⑦ 학생자치, 학생인권, 청소

    년 문제, 대중문화, ⑧ 지역사회와 학교의 역할, ⑨ 농어촌 지역 작은 학교 살리기,

    ⑩ 평화교육, 인권교육, 통일교육, 환경교육, 성평등교육 등을 들고 있다.

    전교조의 이러한 정책 연구과제는 지난 10년 동안 ① 교육민주화, ② 교원의 사

    회경제적 지위향상, ③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참교육), ④ 국내외 제민주 세력과

    의 연대의 4대 강령을 유지해오고 있다.

    전교조는 합법화 이후 처음으로 요구하고자 하는 단체교섭 내용으로는 ① 교

    장․교감 자격증 폐지와 교장․교감 보직제 도입, ② 2002년까지 학급당 학생수

    30명 이하 감축, ③ 전교조 및 사학민주화 운동 관련 해직교사 복직과 원상회복,

    ④ 현행 6-3-3-4 학제의 2-5-5-2-4 학제로의 개편, ⑤ 2001년부터 주 5일제 수업실

    시, ⑥ 임용고사제의 폐지 및 목적형 양성체계의 확립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27)

    27) 중앙경제, 전게서, p. 58.

  • 14❚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5) 공무원직장협의회

    공무원의 노동3권의 보장은 그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정도와 관련되어 있다. 스

    웨덴,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군인까지, 영국의 경우에는 우리의 국정원과 같은 정

    보기관에도 노동조합이 있고 선진국이라고 일컫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경찰까지

    도 노동조합 결성이 허용되고 있다.

    한국의 공무원 노동조합은 일부 기능직 공무원에게 허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리고 공무원 노동조합은 점차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97년 12월 23일 노사관계개

    혁위원회에서 공무원노동조합을 조속히 인정하기로 하고, 우선 1999년부터 직장

    협의회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1998년 2월 노사정위원회에서는 공무원의 노동기본권을 단계적으로 보장

    하기로 하고 공무원은 1999년부터 직장협의회를 우선 허용하고 공무원노조는 관

    련법 개정 등의 절차를 거쳐 빠른 시일내에 허용하기로 하고, 교원의 경우 전교조

    를 1999년 7월부터 인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공무원직장협의회의설립․운영에관한법률」이 제188회 임시국회

    에서 통과되어 98년 2월 24일 법률 제5516호로 공포되었다. 즉, 공무원직장협의회

    는 단체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공무원의 노동기본권을 단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방안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3. 공무원의 노동권 현황

    1) 단결권

    수차에 걸친 헌법개정으로 노동권의 보장내용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제6공화

    국 헌법 제33조에서 근로자의 노동3권을 인정하거나 공무원인 근로자의 노동3권

    을 법률에 위임하였다. 헌법 제32조 제2항은 “공무원인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자에 한하여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규정하여, 일부 공무

    원에 대해서만 노동3권을 인정하고 있다. 노동조합법 제8조는 “근로자는 자유로

  • 한국 공무원단체활동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15

    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가입할 수 있지만, 공무원에 대하여는 따로 법률을 정한

    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국가공무원법 제66조 제1항 및 지방공무원법 제58조

    제1항의 “공무원은 노동운동 기타 공무 이외의 일을 위한 집단적 행위를 하여서

    는 아니 된다. 다만 사실상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은 예외로 한다”는 규정에 의

    해 구체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 조항은 교육공무원에게도 적용된다. 즉 현행 헌법

    과 법률에 의하면 공무원의 단결권은 ‘사실상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을 제외하

    고는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사실상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의 범위는 공무원복무규정 제28조에 의해

    “정보통신부 및 철도청 소속의 현업기관과 국립의료원의 직업현장에서 노무에 종

    사하는 기능직공무원 및 고용직공무원”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거기에서도 다시

    “서무, 인사 및 기밀업무에 종사하는 자, 경리 및 물품출납사무에 종사하는 자, 노

    무자의 감독사무에 종사하는 자, 보안업무규정에 의한 보안목표시설의 경비업무

    에 종사하는 자, 승용자동차의 운전에 종사하는 자” 등은 제외되어 있다.28) 그러

    므로 사실상 공무원들의 단결권은 보장되어 있지 않다 할 것이다.

    한국은 1991년 12월 9일 ILO의 152번째 회원국이 되었으며29), 1996년에는 ILO

    비상임 이사국에 진출하였다. 한국은 아직도 단결권 관련 주요 협약(제87호, 제98

    호, 제151호)에 대해 비준하지 않고 있지만, ILO에 가입하였다는 것 자체가 단결

    권 보장에 관한 ILO의 기본정신을 수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압력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공무원의 단체활동에도 긍정적 작용을 할것으

    로 보인다.

    2) 단체교섭권

    한국은 현재 법률적으로 일부부처 소속의 노무에 종사하는 기능직 및 고용직

    공무원에게만 단체 교섭권을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일부

    공무원은 제외되고 있다. 그 근거는 단결권 부정과 동일한 헌법 제33조 제2항 및

    28) 박영범, 이상덕,「공공부문의 노사관계」(서울: 한국노동연구원, 1990), p. 154.

    29) 이준범,「현대노사관계론」(서울: 박영사,1999), p. 182.

  • 16❚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국가공무원법 제66조 제1항, 그리고 사립학교법 제55조 및 제 58조 제4호이다. 공

    무원 및 사립학교 교원의 단체교섭권을 둘러싼 법해석론적․입법론적 논쟁도 기

    본적으로는 단결권을 둘러싼 논쟁과 동일한 상황에 있다. 즉 합헌론 및 찬성론의

    입장에서는 공무원 및 교원의 직무의 특수성과 공공의 이익보호 등을 이유로 이

    들에게서 단체교섭권을 박탈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고, 반대론자들은 직무의 특

    수성이나 공공의 이익이라는 이유가 단체교섭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필요충분한

    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맞서고 있는 것이다.30)

    공무원의 단체교섭권과 관련해서 또 다른 쟁점은 공무원의 임금 및 각종 노동

    조건은 법률에 의해 정해지며, 예산상의 제약을 받는다는 점에서 발생 한다는 것

    이다. 즉 법률제정 및 개폐권과 예산심의․의결권이 의회에 있는 민주국가에서는

    공무원의 단체교섭권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공무원을 제외한 공공부문의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단체교섭권이 보장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기관이 재정적이나 정보관리측면에서 정부 의존도가 높아 단체

    교섭의 실효성이 약하고, 교섭구조가 기관별로 분산되어서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

    나고 있다. 1990년 이후 실시된 정부의 임금 억제정책으로 인하여 공공기관과 민

    간부문의 임금격차가 확대 되었으며, 동일한 공공부문 내에서도 독점적 사업체 여

    부, 소속기관의 영향력 등에 따라 임금격차가 발생하는 등의 문제점이 노출되었

    다.31) 뿐만 아니라 일부 공기업에서는 정부의 임금억제정책을 피하여 비공식적․

    편법적인 방식으로 사실상 임금을 인상시키는 이른바 ‘대리인 비용’의 문제도 나

    타나기도 하였다. 다른 문제점으로는 공공부문 경영자의 교섭권이 법과 예산 그리

    고 소속기관의 방침에 의해 제약되고 있다는 것이다.

    3) 단체행동권

    역대 정부에서도 법률로써 공무원이 아닌자는 집단행위를 할 수 없다고 규정

    하여왔다. 현행 노동쟁의조정법 제12조 제2항은 국가․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의

    30) 박영범, 전게서, p. 88.

    31) 김상헌, 「공무원의 적정보수」(서울: 한국조세연구원, 1998), p. 32.

  • 한국 공무원단체활동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17

    쟁의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공무원법 제66조 제1항은 사실상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을 제외한 공무원의 노동운동을 금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사

    립학교법도 사립학교 교원의 노동쟁의를 금지 시키고 있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자

    면 ‘사실상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은 국가공무원법상으로는 노동쟁의가 허용되

    지만, 노동쟁의조정법상으로는 노동쟁의가 금지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노동쟁의조정법 제12조 제2항의 소정의 쟁의행위 주체가 될 수 없는

    공무원이 아니기 때문에 쟁의행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판시한 바 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도 노동쟁의조정법 제12조 제2항의 ‘국가지방자치단체에 종

    사하는 근로자’의 쟁의행위를 금지한 부분에 대해서 헌법 제33조 제2항과 불합치

    하다는 결정을 내리고 95년 12월을 시한으로 하는 ‘일정한 테두리의 공무원인 근

    로자가 단체행동권을 갖도록’하는 방향으로 입법촉구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아직 개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재 그 효력이 상실된 상태로서 개

    정이 시급한 개정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사실상 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을 제

    외한 나머지 공무원의 쟁의권을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서는 일부 노동법학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 타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 논거는 ① 공무원의 쟁의행

    위가 지위의 특수성과 공공성에 상치되며, ② 공무의 폐지를 가져와 국민전체의

    공동이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위험이 있고, ③ 노동조건이 법률과 예산에 의해

    결정되므로 쟁의행위를 인정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에 배치되며, ④ 공무원에 대

    해서는 제도상 정비된 대상조치가 강구되고 있다는 것32)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도 공무원단체활동을 제약하는 문제점이라 할 것이다.

    Ⅳ. 결 론

    한국의 경우 정부수립 후 오늘날까지 경제성장을 국가의 우선적 정책과제로 표

    32) 이병태, 「최신 노동법」(서울: 현암사, 1994), p. 181.

  • 18❚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방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경제성장을 이루어 오면서 노동조합에 대한 평가는 매

    우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은 생산을 저해하는 동시에 소비를 증대시켜

    자원을 낭비케 함으로써 경제성장에 소요되는 자본형성을 저해한다는 생각을 갖

    고 있기 때문이다.33) 특히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외국자본의 유치를 위해 외국인

    투자기업에 있어서는 특별법을 제정하면서까지 일체의 노조활동을 불허하였다.

    경제제일주의는 자본축적과 수출증대로 나타났고 이를 위해서는 외국자본의 도

    입과 안정적인 필요라는 이유로 노동부문에 대한 통제에서 나타났다. 정부는 선성

    장․후분배 이데올로기를 노동자에게 주입시킴으로써 저임금을 정당화하였다. 그

    리고 노동권을 억제하는 각종 규제입법을 만들어 내었다. 노동쟁의는 치안차원에

    서 엄격하게 규제되었고 노동자들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배제되었다.34)

    한국에서 선진국형 노동관계가 형성된 것은 1987년 노동자들의 총파업이후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민간부문의 경우는 이제는 노동관계가 정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노동운동이 폭발적인 시기였던 1987년 당시에도 공공부문의 노

    동관계는 발전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여전히 정부의 안정과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막혀서 발전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실정법상 제한근거에 대한 법적 이론적 타당성과 인사행정의 효용

    성여부를 떠나서라도 우리나라는 ILO가입에 따른 ILO헌장 정신과 조약이행 등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직면해 있다. 국내의 특수한 여건에 관

    계없이 국제 노동기준의 이행에 대한 요구와 압력은 더욱 커질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노동자의 단결권보장 문제는 ILO의 핵심적인 정신이기 때문에 정부측의 적

    극적인 태도가 필요하고 앞으로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공무원단체활동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33) 배무기, 「노동경제학」(서울: 경문사, 1995, p. 308.

    34) 안병만, 「한국정부론」다산출판사, 1993, p.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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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ABSTRACT

    A Study on the Shift of public employee union(s) in

    Korea Government

    kang seung kyu

    As for the collective activity of public employee union(s) in Korea, it is now facing

    a new situation in transition. It is necessary, therefore, for the Administration to bring

    healthily up such an activity through a certain support and guide.

    Policies of basic labor rights and group activities of the government officials, which

    are revealed in the Korean constitutional regulation, have been changed in accordance

    with historical changes of political powers. The early establishment constitutions

    defined that the basic labor rights including the freedom of workers for collective

    bargaining and action were guaranteed within a range of law. The fifth amendment of

    constitutions defined that labor relation between the government officials and civil

    workers needs to be distinguished.

    To investigate carefully process of historical changes on laws about group actions of

    the government officials, one may note that the governments as well as the people

    were passive on the issue of collective action of the officials.

    Current laws inform that government officials with the right of collective action are

    limited to those who work for labor service.

    【Key Words】

    public official, change, labor union, collective bargaining, ILO

  • 이 연구는 의녀제도를 통해서 조선조의 사회복지적 의미를 탐색코자 하였다. 새롭

    게 조선조에서 만들어진 의녀제도는 조선조의 유교문화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 사례이다. 의녀는 남녀유별의 유교문화를 확립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또

    한 남녀유별의 문화가 확산되면서 당시의 여성들이 수치심으로 인해 남의들에게 질

    병치료를 꺼림으로써 생명에 위협을 주는 사태에 이르자 유교의 생명존중문화는 이

    를 방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새롭게 여성을 치료하는 여의를 양성하는 의녀제도를

    운영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조 의녀제도의 사회복지적 의미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social welfare significance of woman

    doctor system in Chosun dynasty

    곽 효 문*

    Hyomoon, Kwak

    Ⅰ. 머리말

    Ⅱ. 의녀제도의 성립과 활동

    1. 의녀제도의 성립

    2. 의녀의 활동

    Ⅲ. 의녀제도의 품계와 자율성

    1. 의녀의 품계

    2. 의녀의 자율성

    Ⅳ. 의녀제도의 사회복지적 의미

    1. 의녀의 사회적 역할

    2. 의녀의 사회봉사활동

    Ⅴ. 맺음말

    1)

    * 한영신학대학교 교수.

    초 록

    목 차목 차

  • 24❚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의녀는 오랜 기간 동안 체계적으로 의학교육을 받아 의학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

    전문의료인이다. 서울에 있는 혜민서와 내의원에서 고도의 의학기술을 익히기도 하

    였다. 의학교육의 내용이 방대하여 곤란에 직면하자 의녀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즉 맥의녀, 침의녀, 약의녀 등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영역을 전문

    적으로 습득하였다. 이는 전문성을 중시한 유교문화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제어】

    유교문화, 남녀유별, 생명존중

    Ⅰ. 머 리 말

    醫女제도는 조선조 초기에 처음 설치된 것으로 아직까지 없었던 이 제도가 생

    기게 된 이유는 주자학의 영향으로 남녀의 유별이 어느 때보다도 더 엄격해져서

    良家의 여자들이 男醫에게 진찰받기를 꺼려하여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태종 6년(1406) 3월 의녀제도를 신설하고 제생원에

    서 童女에게 의술을 가르침으로써 의녀가 생겨나게 되었다. 처음 의녀로서 교육을

    받은 자는 京內 창고와 관사의 官婢들이었고 그 수효도 매우 적었다. 그것은 태종

    18년(1418) 제생원에서 의녀의 수효를 늘려주도록 건의한 것으로 보아 이를 짐작

    할 수 있다. 세종은 의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에 대한 교육을 강

    화하였으나 의녀가 모두 경중각사의 관비들이어서 成才한 뒤에도 이들의 활동무

    대가 주로 京中이었기 때문에 外方의 부녀는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

    에 세종 5년(1423)부터는 界首官의 관비 가운데서 총명한 자를 女妓의 選上例에

    따라 뽑아 올리게 하여 교육을 시킨 다음 本處에 보내 의료업무에 종사하게 하였

    던 것이다.

  • 조선조 의녀제도의 사회복지적 의미에 관한 연구❚ 25

    이러한 의녀의 선발과 교육은 세종 때에 제도로써 확립되었고 세조 때에는 의

    녀의 勸懲法까지 만들어져 이들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

    고 성종 9년(1478)에는 의녀에 대한 勤課條目이 다시 마련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교육한 醫書는 대개가 기초과목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독립된

    의원으로 활동하기에는 매우 어려움으로써 의녀는 의사로서 보다는 간호의나 의

    원의 보조자 또는 産婆로서의 역할이 더욱 중시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의녀는 의

    술을 인정받아 매달 料米를 지급받던 혜민서 소속의 內醫와 궁중의 內侍醫女, 각

    의료기관과 출신지에서 의원을 보좌하면서 鍼灸를 시술하고 看病에 종사하던 간

    병의, 학습단계에 있던 初學醫 등 3부류의 의녀가 있었으나 이 밖에 산파로 활동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산파가 곧 의녀는 아니지만 의녀제도가 창설된 이후 이들에게는 진맥과 침구

    외에 산과와 부인과에 대한 교육을 특별히 시켰고 이 가운데서 診脈이나 鍼灸보

    다 出産의 기법에 숙달한 자를 선택하여 分娩의 일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산파라

    는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하나의 직업인으로 사회에 봉사하게

    되었던 것이다.1) 이렇게 산파가 직업인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의녀제도의 성립 이

    후로서 이 제도의 설치는 의사 혹은 간병인으로서의 의녀뿐만 아니라 산파라는

    새로운 여성직업인을 탄생하게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의녀는 조선조의 유교적 풍습에 의해 탄생한 계층으로 의료활동을 비롯

    한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쳤던 여성들이다. 당시의 유교윤리에 따라 여성은 가정의

    사람으로만 인식되어 사회적인 모든 활동이 제한되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의녀는

    비록 국가의 필요에 의해 설치된 제도 속의 여성들이었으나 이들의 사회참여활동

    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더구나 조선조 후기에는 신분제 변동과 관련하여 의녀들

    의 지위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출발한 이 글은 의녀라는 한 계층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조

    초기에 의녀제도가 설치된 이후 후기로 내려오면서 이들의 여러 가지 활동과 사

    회적 기능은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를 탐색해 보고자 함이 이 글의 목적이다.

    1) 손홍렬, “조선중기의 의료제도”, 한국과학사학회지 15-1 (1993), pp. 5-7.

  • 26❚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연구의 방법은 여성의 역사를 연구하는 관점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2) 하나는 이미 확립된 기존의 방법에 따라 과거 여성의 행태에 대

    한 정보를 더 보태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여성중심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해석하

    는 방법이다. 앞쪽의 방법은 남성의 역사에 기여한 소수의 빼어난 여성들의 업적

    을 부각하는 보상연구와 여성억압의 사례를 발굴하는 피해학의 입장이다. 뒤쪽의

    방법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여성의 일도 사회적 활동으로 평가받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이 해왔던 일인 사적 분야의 일, 즉 여성생활의 일상사

    를 부각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3) 이 글은 여성이 행한 사적 영역의 일이 아닌 공

    적 영역의 일을 연구대상으로 채택하였으므로 앞쪽의 방법을 이용하여 서술하고

    자 한다.

    Ⅱ. 의녀제도의 성립과 활동

    1. 의녀제도의 성립

    1) 의녀제도의 필요성

    조선은 유교적 여성관 즉 남녀유별관과 절열관에 입각한 구체적 실천으로써 내

    외법과 수절을 지향하였다. 여성을 사적 영역(內房)에 직분을 두게 한 내외법은

    남녀 사이의 자유로운 접촉을 금지하는 일종의 행동규제법이다. 조선조 초기 국가

    의 여성들에 관한 많은 관심표명은 우선 여성들의 풍기문란을 문제시하여 여성의

    외출억제를 위한 여러 조치가 강구되기 시작하였다. 조선건국년(1392)에 대사헌

    남 재의 上言을 보면

    2) 박선미, “조선시대의 의녀교육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pp. 5-6.

    3) 강숙자, 한국전통사회 여성의 삶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7), p. 9.

  • 조선조 의녀제도의 사회복지적 의미에 관한 연구❚ 27

    “고려조 말에 풍속이 頹廢해져 사대부의 아내가 권문세가의 장례에 직접 참석

    하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 識者들이 이러한 현상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니 앞으

    로 문무양반의 부녀들은 부모, 친형제, 친자매, 친숙부, 친외숙, 친이모 등을 제외

    하고는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여 풍속을 바로 잡으소서”4)

    라는 것에서 여성의 외출억제가 관심으로 등장함을 알 수 있으며 이는 풍속을

    바르게 하기 위한 것으로써 강구된 것이다. 사대부 부녀의 자유로운 출입을 규제

    하여 유교적 풍속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목적 아래 당시의 여성들이 빈번하게

    외출한 곳인 사찰왕래금지조처가 강구되었다. 즉, 태종 4년(1404) 12월 사간원에서

    당시의 時務를 논의한 가운데에

    “부녀의 도리는 단정하고 정숙하여 스스로 貞節을 지키는 것을 주로 삼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국가에서 법령을 엄히 세워 무릇 부녀로서 절에 올라간 자를 금단

    하는 법을 엄격히 시행하여 風敎를 밝게 하였습니다. 근래 令이 해이해져 부녀가

    절에 올라가는 것이 길에 끊이지 않으니 공공연히 음행을 저지르고 失節하는 것

    이 이러한 까닭에서 비롯되는데, 攸司로 하여금 부녀로서 절에 올라간 자는 부모

    를 추모하는 법회를 물론하고 일체 모두 금단하여 풍속을 바르게 하소서”5)

    라고 하여 부녀자의 사찰출입금지를 時務의 하나로 제시하였다. 조선조의 국시

    가 억불숭유정책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당연한 일로 여길 수 있으나 단지 억불정

    책의 하나로써 주장된 것이기 보다는 부녀자의 실절방지를 명분으로 한 부녀자

    사찰출입금지조처라 하겠다. 당시 불교가 일으킨 폐단 가운데 하나인 부녀자들의

    上寺는 남녀무별의 풍속을 낳아 결국 나라가 망한 것으로 인식하고 남녀유별의

    도를 명확히 하기 위한 방법으로 부녀자의 상사금지조처가 마련되었다. 실제로 부

    녀자의 상사는 음란함과 실절하여 풍속을 더럽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므로 이

    를 금단함으로써 남녀유별의 도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4) 태조실록, 권2, 태조 원년 9월 21일(계해).

    5) 태종실록, 권8, 태종 4년 18월 8일(을해).

  • 28❚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남녀유별의 도를 실천하기 위한 내외법은 심지어 성대한 국가의 행사 관광을

    위한 외출에까지 논의되었다. 성대한 행사가 있을 때 부녀자들이 집 밖에 나와 구

    경하는 행위에 관해 세종13년(1431) 7월에 대사헌 신 개 등이 상소하기를

    “禮에 부인은 낮에 뜰을 거닐어도 안 되고 까닭 없이 중문을 나가서도 안 된다

    고 하였으니 聖人이 婦道를 엄히 함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本朝의 부

    녀들은 前朝의 弊風을 그대로 좇아 彩棚儀禮나 성대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거리

    낌 없이 구경하니 차마 입에 담기조차 부끄럽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부녀가

    구경하는 것을 일체 금하여 폐풍을 개혁하고 부도를 바로 하십시오6)

    이는 유교적 예법에 근거하여 부도에 위배되는 행위를 금지해야 한다는 뜻을

    피력한 것이다. 부인의 외출금지는 유교적 예속화 즉, 여성교화를 그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는 다음의 기록에서도 잘 알 수 있다.

    “禮에 부인이 나갈 때는 반드시 그 얼굴을 가리고 궐문 안에 해가 미치는 것을

    가리어 백리 밖의 초상에는 달려가지 아니하고 부모가 있더라도 1년에 한 번 친

    정에 문안드리게 한 것은 외출을 막고 삼가서 남녀의 분별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유사에 명하여 부인의 출입을 방지하여 禮俗을 이루게 하소서”7)

    라고 한 사간원 대사간 김수녕 등의 상소에서 남녀의 분별은 부인의 출입금지

    로부터 이루어지는 선행조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내외법의 시행은 바로 守節을 위한 최우선 조건이다. 남녀 사이의 격리

    를 기초한 내외법은 실은 여성들의 失節을 방지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수절의 선행조건으로써 더욱더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다음의 기록에서 분

    명히 알 수 있다.

    6) 세종실록, 권53, 세종 13년 7월 21일(계미).

    7) 성종실록, 권 10, 성종 2년 5월 20일(임진).

  • 조선조 의녀제도의 사회복지적 의미에 관한 연구❚ 29

    “사간 유맹문의 상소에 부부는 人倫의 근원이며 萬化의 근원입니다. 한번 더불

    어 같이 하면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할 三從의 도가 있고 다른 것을 좇는다는 것

    은 의리가 없습니다. 常人이라면 내외가 분별이 없고 출입이 일정한 때가 없으니

    혹 强暴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청하옵건대 지금부터는 失行

    한 양반부녀는 典刑을 밝히어 淫亂을 방지하여 風俗을 바르게 하소서”8)

    내외의 분별없음이 실행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고 내외의 분별만이 수절을 방지

    할 수 있는 조건임을 제시하였다. 이는 유교적 여성관인 남녀유별관의 내외법은

    節烈觀을 실현시키는 선행조건으로써 절열관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내외의 분별을

    엄수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여성들의 실절을 방지하기 위한 최우선의 조

    건인 내외법을 시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녀자의 출입봉쇄에 주력하였다.

    성리학에 의한 새로운 질서확립에 노력한 조선은 여성이면 당연히 해야 할 규

    범으로 절열관에 입각한 수절에 가치를 절대적으로 부여하였다. 여성에게 수절이

    란 부부간의 義를 실천하는 잣대로써 인식하고 임금에 대한 忠 , 부모에 대한 孝

    와 동등한 비중을 두었다. 따라서 여성의 再嫁禁止를 위한 여러 가지 법규를 제정

    하는 가운데 부녀의 道는 스스로 貞節을 지키는 것 이상이 없다고 인식하여 수절

    을 강조하는 국가차원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2) 의녀제도의 체계

    (1) 의녀의 등장

    조선조는 남녀의 자유로운 접촉을 기피하던 때이므로 中庶階級에 속한 여자들

    은 이와 같은 직업에 종사하기를 원하지 않아 창고나 궁사 소속의 婢女들 가운데

    서 童女를 뽑았을 뿐만 아니라 외방 각도의 界首官의 女婢 가운데 영리한 동녀를

    선택하여 鍼灸術과 藥餌法을 가르쳐서 그 술법을 습득시킨 뒤에 지방으로 돌려보

    내어 부인들의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들 외방에서 선발된 의녀들은

    먼저 천자문과 효경, 정속편을 가르친 다음에 서울로 올려 보냈는데 이것은 제생

    8) 세종실록, 권 45, 세종 11년 9월 30일(계해).

  • 30❚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원에서 의방을 습득하기에 앞서 글자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16년(1434) 7월에도 제생원 의녀들을 권장하기 위하여 女妓의 예에 따라 1

    년에 두 번씩 미곡을 내리게 하였다. 그리고 성종9년(1478) 2월에는 예조에서 의

    녀를 권장하기 위하여 여섯 조항을 계청하여 성적에 따라 내의녀, 간병의녀, 초학

    의녀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 권장의 법을 달리하였다. 이들은 주로 의방서, 진맥,

    명약, 침구, 점혈 등 의료업무에 종사해 왔으나 사회적 처우는 賤流에 속한 기녀

    나 노비계급과 비슷하게 취급되었다. 1485년에 천류 자녀의 종량법을 정할 때에도

    의녀는 기녀와 같이 종량될 수 있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고 있다.

    속대전 예전에 따르면 영조 때에 와서는 장려책으로 내국여의와 혜민서여의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제도는 조선조의 말기까지 그대로 채택되었다.9)

    (2) 의녀의 교육체계

    의학에 대한 천시의식은 여성들에게도 의학교육의 길을 개방하게 하였다. 君子

    와 달리 小人이 하는 의학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業을 하는 것이므로 소인과 같

    이 여겨진 여성들도 의학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성들에게 정히 권장할

    방법을 마련한다면 그 術業이 정밀하게 되어 여성 의료인의 역할을 나름대로 수

    행할 수 있으리라 상정한 것이었다. 결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군자학10)을 개

    방하지 않아 관료로서의 길을 봉쇄한 반면에 소인과 동격인 여성들에게 소인의

    학문인 雜學의 길은 열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의학을 군자학과 동일하게 인

    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7 (성남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5), p. 520.

    10) 유학은 성인지학으로 聖人의 도를 배우는 군자가 그 지향점이다. 자연의 도로서 天道

    와 地道를 두고 이를 따르는 人道 등 삼도합일론을 맥으로 하는 유학은 천도인 乾道

    에는 군자를 둔 반면에 지도인 坤道에는 소인을 상정하였다. 기본적으로 유학에서는

    天尊地卑를 전제하였다. 즉 ‘하늘은 존귀한 것으로서 위에 있고 땅은 친하기 때문에

    아래에 있다’ 라는 철학적 근거 아래 군자와 소인을 君尊小卑로 인식하여 군자를 존귀

    한 자로 구분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군자와 소인을 서로 상반된 대비적 구조 아래

    놓고 이상적 인간상으로 설정된 군자를 설명한 것이 유학이다. 따라서 군자의 도는 자

    연의 도를 이해하여 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는 것인 반면에 소인은 몽매하여 다스려짐

    을 그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 상반된 것이다. 군자는 다스리는 지위에 있는 자로 하늘

    로부터 내려진 인간본연의 성을 스스로 깨닫고 실현하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어야

    남을 다스리는 지위에 오른다고 한다. 박선미, 전게논문, p. 24.

  • 조선조 의녀제도의 사회복지적 의미에 관한 연구❚ 31

    식하였다면 어떤 목적이든지 여성에게 형식적 교육의 기회가 열려질리 만무하였

    다. 의학에 대한 천시의식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의학교육을 실시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방법으로서 의학은 조선조가 건국된 지 2년 만에 6학(兵, 律, 字,

    譯, 醫, 算)의 하나로 설치되었으며 良家의 자제들로 하여금 의학을 하게 하였다.11)

    태종6년(1406)에는 의학이 10학(儒, 武, 吏, 譯, 陰陽, 風水, 醫, 字, 律, 算, 藥)의

    하나로 설치되었고 提調를 두어 각 약의 생도들을 권장하여 학업에 정진하도록

    하였다. 전의감, 혜민국, 제생원 등의 삼의사에 있던 의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세

    종16년(1434)에는 삼의사에 儒醫 즉, 문신들을 임명하였다. 그 뜻을 살펴보면 당시

    이조에서 아뢰기를

    “의술은 모름지기 음양오행의 生克消息의 이치를 연구하여 아는 자라야 능히

    병을 진찰할 수 있고 약을 쓸 수 있습니다. 또 옛적의 좋은 약방문에 유의의 손에

    서 많이 나왔으므로 理致에 통달한 문인이 겸하여 의술을 다스림은 그 예가 있습

    니다”12)

    라는 논의에 입각하여 세종은 그 건의를 그대로 따라 전의겸정, 겸부정, 겸판관,

    겸주부 각 한사람씩을 더 설치하고 모두 博學文士로서 제수하고 혜민국과 제생원

    에 提擧 別坐 가운데 한 사람을 학식이 있는 문사로서 差定하게 하였다.

    醫司에 儒醫를 설치한 것은 의학 교육과 의술을 兼治하게 한 것으로 의학에 대

    한 儒者들의 천시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유자들로 하여금 의술을 배격하

    지 않도록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새로이 세종 연간에 의서

    습독관제도를 창설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士族의 자제로 하여금 연소하고 聰敏한

    자를 가려서 습독관으로 삼아 여러 의학방서를 읽게 하고 遞兒職을 주어 勸勵케

    하는 제도이다.13) 세종 때는 그 勸懲法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효과가 적자 단

    11)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10월 27일(계해).

    12) 세종실록, 권65, 세종 16년 7월 25일(경자).

    13) 세조실록, 권 12, 세조 4년 3월 20일(정미).

  • 32❚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종 2년(1454)에 와서 습득의 법이 細細히 마련되었다.14) 이는 교육과 고과에 의생

    보다 나은 처우를 해줌으로써 유의와 양의양성에 그 목적을 두었다. 세조8년

    (1462)에는 의서습독관권징조건을 마련하여 현직관원과 습독관출신의 다른 관원

    에게도 의학을 계속하도록 독려하였다.

    이와 같은 고찰을 통하여 의녀교육의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봉건성이다. 봉건제도를 지지하기 위해 지배이념으로써 봉건사상인 유학

    을 채택하여 피지배계급에게는 유학을 통한 의식의 규제라고 할 수 있는 敎化를

    통해 그리고 지배계급은 봉건사상으로 무장된 고도의 교양지식인을 양성하기 위

    해 교육도 그들만을 위한 것에 한계를 두었다. 말하자면 봉건적 교육은 신분에 따

    라 교육을 받을 권리확보와는 달리 나타나는 것을 그 특질로 한다. 따라서 봉건성

    은 신분에 의해 교육의 한계를 두고 궁극적으로 그것은 지배계급을 위해 그 목적

    을 충족하고 있음을 그 성질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피지

    배계급으로서 의녀에게 교육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신분에 의한 일

    종의 身役으로써 행하여 졌음은 바로 의녀교육은 강제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둘째, 전문성이다. 의녀교육은 그 목적이 여성의료인의 양성이다. 의료인은 전

    문인으로 교양인과 반대의 속성을 지녔다. 당시 여성에게 있어 교양인이란 유교적

    여성이 되는 婦德에 합치하는 여성을 일컫는다. 그리고 활동공간은 閨房으로 한정

    된 가정적 존재였다. 반면 의녀는 가정의 울타리가 아닌 사회로 공간적으로 볼 때

    사회적 존재였고 유교적 여성의 필수조건인 貞女와는 달리 妓女로서의 역할을 하

    였다. 특히 의녀는 다른 관비들과 달리 문자와 의학지식을 지닌 것으로 인해 사회

    활동의 범위가 넓었던 것으로 사회봉사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부덕에 합치된

    여성은 하나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의 전문성을 충족하는 것이 아닌 반면 의녀는

    의술의 정밀함을 전적으로 요구하는 의료인이라는 전문성에 가치를 부여받는 존

    재였다.

    셋째, 하위성이다. 신분요인에 의한 성격을 봉건성이라면 남성에 대한 하위성이

    라는 성별요인에 입각하여 남성들보다 한 단계 아래에 위치하는 교육을 의미한다.

    14) 단종실록, 권 12, 단종 2년 8월 22일(신축).

  • 조선조 의녀제도의 사회복지적 의미에 관한 연구❚ 33

    이것은 서로 일정한 관계를 맺으면서 작용하는 것이 의녀교육의 성격이다. 의녀의

    교육은 전문성의 성격을 지니면서 남의들보다 양적․질적으로 하위의 교육을 받

    았다. 교육의 내용에서 의녀는 남의들보다 적은 양의 의학지식을, 그리고 질적으

    로도 주로 진맥이나 침구를 위주로 하여 교육받았다. 따라서 의녀는 당시에 의료

    인으로서의 완전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진찰인으로서만 활동을 하

    였다. 즉, 의료인으로서 치료에 관한 것은 남의가 전담하게 하여 약에 관한 지식

    이 부족하였고 또한 병의 원인과 치료책의 결정권한도 여의가 전혀 갖지 못하는

    이른바 핵심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주변인으로서 활동의 제한을 받았다는 점이

    다. 이는 의녀가 남의들보다 하위에 위치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며 또한 신분상

    의 요인인 중인과 천인이라는 차이로 말미암은 요인이기도 하다.

    넷째, 대상성이다. 동등의 입장에서 같은 의료인으로서의 교육이라 할 전문교육

    을 받지 못하였던 현실은 의녀로 하여금 교육받는 조건부터 다른 여러 활동을 하

    면서 교육에 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수행하면서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기능을 수행하여 교육의 효과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

    였다. 가장 천시하는 일 즉, 기녀의 일을 의녀가 함으로써 의녀의 천시풍조를 야

    기시키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의녀가 성적 대상으로 기능함을 말한

    다. 성적 대상으로서 의녀는 제도적으로 장식이나 치장을 허용하였고 첩살이를 통

    한 자식의 從良 등의 법적 장치마련은 의녀의 성적 대상성을 결정짓는 것이다. 이

    는 오로지 교육을 받지 않아도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첩의 길을 통

    한 자식의 종량이라는 방법은 더욱더 교육에 임하는 태도를 소극적으로 만들게

    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말할 수 있다. 또한 항상 남의들보다 하위의 교육을 받음으

    로써 결과적으로 의녀들에 대한 열등의식의 조장은 의녀들로 하여금 주변의 가치

    들을 그대로 따르면서 열등한 존재로 그냥 머무르게 만들었다. 자신의 책임을 제

    대로 하지 못해도 의료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남의들이 있기 때문에 의녀는

    자율성이 보장되지 못하는 만큼 책임감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15)

    의학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일로서 그 중요성은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다.

    15) 박선미, “조선시대 의녀교육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pp. 199-204.

  • 34❚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이러한 중요성은 士族 여성들이 생명을 다루는 의녀를 양성하는 계기가 제대로

    마련되어야 여성의료인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으므로 의녀교육제도가

    체계화될 수 있었다. 즉, 조선조 군자학을 추구하여 실용적인 학문이라 할 잡학에

    대한 격하풍조 속에서도 의학은 지배자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특성으로 인하여 다

    른 잡학보다 우선시 되었다. 게다가 생명을 다룬다는 것은 그 기술의 소업이 정통

    한 것이 더욱 요구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의학교육이 체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의녀의 활동

    1) 의료활동

    의녀가 의료인으로서 한 활동은 진찰, 침구, 조산, 간호, 명약 등이다. 이 가운데

    의녀의 교육내용이 주로 진맥과 침구 위주였던 것으로 보아 실제 의료활동은 주

    로 診脈을 통한 診察과 鍼灸였으며 부수적으로 助産과 看護, 命藥 등을 한 것으로

    보인다.

    (1) 진찰

    의녀가 행한 의료활동 가운데 診察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진맥을 함으로써 남녀

    유별의 도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가장 많이 행해진 의료행위이다. 진찰법은

    눈으로 환자의 얼굴 빛, 살갗의 색 등을 살펴보는 望診, 환자와의 문답을 통해 진

    단에 도움을 받는 問診, 환자의 목소리나 기침의 상태를 듣고 증세를 파악하는 聞

    診, 손을 환자의 몸에 대서 여러 가지 이상을 살피는 切診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남녀유별의 도에 위배되는 망진과 절진은 의녀가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의녀

    의 진찰활동은 주로 절진의 한 방법인 진맥을 통한 진찰이었으며 이와 함께 망진

    의 한 방법인 察色을 이용하여 좀 더 정확한 진찰을 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의녀들은 진찰의 한 방법인 진맥에 대해서는 전문가적인 입장에 있었

  • 조선조 의녀제도의 사회복지적 의미에 관한 연구❚ 35

    다. 또한 이러한 점이 侍女와 구분되는 의료인으로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밤중에 궁중여성들이 병이 났을 경우에 內人들이 의녀를 불러 수라와 수면의 상

    태를 전하면 의녀는 시녀의 말을 고려하여 진찰을 하였다.16)

    (2) 침구

    침구는 진맥을 통한 진찰활동과 더불어 의녀들의 주요 의료활동이었다. 침구술

    이라는 것은 실제로 살을 주무름으로써 이루어지는 의료행위이기 때문에 당시 남

    녀유별의 도를 실천하기 위한 여성의료인의 양성이라는 점을 보면 당연히 의녀의

    주된 임무였다.

    실제로 의녀가 침술을 한 경우를 보면 현종13년 慈殿(인선왕후)의 腫氣증세에

    破腫한 기록이 있고17) 숙종 14년에는 대왕대비의 외감증에 의녀가 執針한 사실이

    있다.18) 또한 숙종 24년에는 嬪宮의 다리통증과 관련하여 의녀가 下鍼하였다. 빈

    궁이 다리에 통증을 호소하자 의녀로 하여금 入診하게 하여 상세히 症候를 안 연

    후에 鍼藥을 의관이 결정하는 절차에 따라 침의와 어의가 針穴을 결정하자 이에

    따라 의녀가 하침하였다. 19)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의녀는 內殿의 병에 鍼術을 직접 행했는

    데 이 때 침혈의 결정은 의관들이 하였고 집침은 의녀들이 했다는 사실이다.

    (3) 조산

    의녀는 산파로서의 의료기능도 담당하였다. 의녀가 여성인 만큼 여성들이 解産

    하는데 있어 의녀들의 조산활동은 진맥을 통한 진찰활동이나 침구활동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의녀가 양성되기 이전부터 해산의 일

    을 돕는 산파는 존재하였다. 산파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산파는 급료한다’20)고 규

    16) 승정원일기, 책 94, 인조 24년 5월(임술).

    17) 승정원일기, 책 229, 현종 13년 9월(을유).

    18) 승정원일기, 책 329, 숙종 14년 5월(정축).

    19) 승정원일기, 책 379, 숙종 24년 6월(신유).

  • 36❚ 韓國行政史學誌 第19號

    정되어 있어 국가로부터 일정하게 급료를 받는 직업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경

    국대전 이외에 산파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정확히 의녀

    와 산파가 어떻게 다른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으나 의녀는 국가에서 실시하는 의

    학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았으며 종합의료인으로서의 기능을 가진 반면에 산파는

    경험에 의해 습득된 분만과 관련된 지식 내지 기술을 이용하여 오로지 해산에 관

    계된 일만을 하였던 직업인이라 하겠다.

    실제로 의녀가 해산에 관계한 기록을 살펴보면 인조 4년에 국가에서 産室廳에

    소속되어 의료활동을 한 의관과 의녀에게 상을 내리는 기록이 주목된다. 이 기록

    에 따르면 당상의관 즉, 어의 3명이 해산의 일에 참여하고 있고 이들은 그 공로로

    半熟馬 1필 또는 兒馬 1필 등을 지급받았음이 나타난다. 이와 함께 의녀와 하인들

    도 해당 曹로부터 米布를 題給받았다.21) 이 사실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궁중여성

    들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