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제2회『사회연구』학술상 수상논문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박성진 11) 1. 머리말 역사를 희소한 가치 를 둘러싼 갈등의 역사라고 할 때 희소한 가치를 누가 언제 어떻게 차지할 것인가의 문제는 국가의 최대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 2차 대전 이후 전세계적으로 특히 해방된 식민지에서 초래된 식량의 심각한 현상 (bottlenecks)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였고 (Armstrong Glyn and Harrison 1991: 6 10˜11) 이는 1945년에 해 방된 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에서 1948년까지 한반도 에서 미군정의 식량정책은 당시에도 심각한 논란거리였고 오늘날 학계 에서도 당시의 식량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들이 미국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명확한 정책을 결여했다는 인식 1) 의 연속선상에서 미군정기의 식량정책이 실수 혹은 박성진 건국대 정치학과 박사과정(한국정치사). 최근 논문으로「사이버 시대와 철 학의 빈곤: 동서양의 만남을 위하여」 (2002) 「미군정의 전략적 선택과 배제」 (2001) 「구한말(舊韓末) 고문관(顧問官) 샌즈(William F. Sands: 山島)에 관한 연구」(2000) 등이 있음. 1)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할 때까지 구체적인 정책을 갖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러나 이를 미국 무지론 혹은 미국 실수론 으로 볼 수는 없다. 1945년 당시 미 국의 대외전략은 무지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44년부터 미 국무부와 타부서의 요원들은 전후 한국의 지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고 한반 도에 진주한 군정 관리들도 그들의 국가 이익이 무엇인가를 명백히 인식하고 있 었다(Bernstein 1972: 35 FRUS: 1944(V) 1966: 1234 Meade 1951: 7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ksrc.or.kr/~socialissues/content/vol_4/ss4_8psj.pdf · (Valley of Transition)에서 발생하는 인플레이션 실업 사회적

  • Upload
    others

  • View
    2

  • Download
    0

Embed Size (px)

Citation preview

  • 제2회『사회연구』학술상 수상논문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박성진11)

    1. 머리말

    역사를 희소한 가치를 둘러싼 갈등의 역사라고 할 때 희소한 가치를

    누가 언제 어떻게 차지할 것인가의 문제는 국가의 최대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 2차 대전

    이후 전세계적으로 특히 해방된 식민지에서 초래된 식량의 심각한 병

    목 현상 (bottlenecks)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였고

    (Armstrong Glyn and Harrison 1991: 6 10 1̃1) 이는 1945년에 해

    방된 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에서 1948년까지 한반도

    에서 미군정의 식량정책은 당시에도 심각한 논란거리였고 오늘날 학계

    에서도 당시의 식량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들이 미국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명확한 정책을

    결여했다는 인식1)의 연속선상에서 미군정기의 식량정책이 실수 혹은

    박성진 건국대 정치학과 박사과정(한국정치사). 최근 논문으로「사이버 시대와 철

    학의 빈곤: 동서양의 만남을 위하여」(2002) 「미군정의 전략적 선택과 배제」

    (2001) 「구한말(舊韓末) 고문관(顧問官) 샌즈(William F. Sands: 山島)에 관한

    연구」(2000) 등이 있음.

    1)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할 때까지 구체적인 정책을 갖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그

    러나 이를 미국 무지론 혹은 미국 실수론으로 볼 수는 없다. 1945년 당시 미

    국의 대외전략은 무지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44년부터 미

    국무부와 타부서의 요원들은 전후 한국의 지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고 한반

    도에 진주한 군정 관리들도 그들의 국가 이익이 무엇인가를 명백히 인식하고 있

    었다(Bernstein 1972: 35 FRUS: 1944(V) 1966: 1234 Meade 1951: 7

  • 220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무지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고 결론짓거나(Cumings 1981: 201

    Lauterbach 1946: 223 로빈슨 1988: 244 2̃45) 미군정이 진주 이

    후 취한 식량자유시장제를 미군정의 임기응변식의 대응으로 파악하기

    도 하며(전상인 2001: 94 116) 혹은 미군정의 농지 개혁에 초점을 맞

    추며 식량정책을 부수적인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신병식 1992 이혜

    숙 1992 최봉대 1994).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미국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가졌던 자유민주

    주의와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국가의 형성이라는 거시적인 목표가 식량

    정책이라는 부문 정책(sectoral policy)을 통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

    며 군정기 동안 식량정책의 실패로서 논의되는 부분조차도 군정당국에

    의한 의도적 실패의 측면이 있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여기서 국가형

    성(state making)은 국가의 전일적 지배에 도전하는 경쟁 세력들을 체

    계적으로 제거해나가는 과정 (Tilly 1990: 96)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방

    이후 진주한 미군정은 식량정책을 통해 미군정에 도전하는 좌익 및 우

    익 세력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이 논

    문은 다른 연구들과 달리 미군정기 식량정책의 전반적인 측면이 성공이

    었으며 이를 통해 미군정은 사회주의 혁명의 방지와 급진적 사회 개혁

    추구 세력의 저지라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2. 국가형성전략과 식량정책 변화

    서구의 국가형성과 비교하여 해방 후 한국의 국가형성은 미국이라는

    중심부 국가의 압도적 규정력이 영향을 미치면서 미군정에 의해 한국

    국가의 기본적 구조와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해

    방 후 형성된 국가는 미국에 의해 수입된 국가(Badie and Birnbaum

    Baldwin 1973: 10 이길상 1990: 178 1̃79). 또한 미군정 기간 동안 여러 시

    행착오가 있었지만 곧 시정되어 미국의 정책 목표대로 추진했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미국의 준비부족이 그렇게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다(이완범 2001: 20˜21).

  •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221

    1983: 115)였다. 미국이라는 타율적 존재에 의한 국가형성은 필연적으

    로 구(舊)식민기구의 존폐에도 영향을 미쳤다. 해방 후 진주한 미국은

    기존에 존재하던 일본 식민통치기구를 파괴하기보다는 일정 기간 존속

    시켰는데 이는 구식민기구가 붕괴한 이후 발생한 공백상태에서 구체

    제의 유산과는 상관없이 미래를 스스로 확립해 나가는 경로창출

    (path-shaping)과정보다는 제도는 역사와 사회의 산물로서 쉽게 변하

    거나 이식될 수 없는 것으로 인위적인 청사진을 가지고 위로부터 기존

    의 제도와 조직을 급격히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구체제의

    유산들이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경로의존

    (path-dependency)과정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Nielsen Jessop

    and Hausner 1995: 6 7̃ Stark 1992: 1 2̃).

    경로의존과정이라는 국가형성의 거시적인 방향과 더불어 국가형성전

    략은 급진적 전략과 점진적 전략의 모습을 띠게 된다. 급진적 전략은

    백지상태 위에 그려진 청사진을 통해 신속한 속도로 포괄적인 범위에서

    모든 개혁조치들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으로 국가형성 주도세력들이 반

    대세력에 대해 반대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다. 급진적 전략

    하에서 부문 정책들은 일관되게 추진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정책들의

    변경이나 번복이 대중적 지지의 감소를 가져오고 이것이 체제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점진적 전략은 점진적인 속도로

    부분적인 범위에서부터 개혁조치들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으로 급진

    적 전략이 국가형성과정에서 사회세력들의 저항으로 인해 본래 개혁의

    의도가 변질되는 것을 우려하는 반면에 점진적 전략은 구제도를 일시에

    파괴하기보다는 그것을 당분간 활용하고 장기적으로 새로운 제도로 대

    체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점진적 전략 하에서 정책의 전환

    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는 사회세력들 간의 연합 내지 반연합의 형태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전략선택에서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이 전환비용

    (Transition Cost)의 문제인데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는 이 비

    용을 구제도를 신제도로 바꾸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하는 전환의 계곡

    (Valley of Transition)에서 발생하는 인플레이션 실업 사회적 혼란 등

  • 222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의 사회적 비용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부담해야할 비용이라고

    개념지었다(Przeworski 1991: 137 1̃87).

    서구의 국가형성과정과 식량정책의 연관성에 대해 틸리(Charles

    Tilly)는 국가형성 주도세력들이 취하는 식량정책의 선택이 국가가 어느

    계급과 연합할 것인가 하는 정치적 문제 국가의 재정정책의 성공여부와

    농업과 산업 생산의 증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의 경제적 문제 국가

    중앙관료들의 규모에 따른 행정적 문제 그리고 식량공급의 통제를 둘러

    싼 폭력적인 갈등의 시기 범위 장소에 따른 사회적 문제에 영향을 받는

    다고 말하며 국가형성 주도세력들에 의한 식량정책의 전환은 국가형성

    전략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Tilly 1975: 393 454). 해거드(S.

    Haggard)도 2차 대전 이후 해방된 식민지의 경우에 식민지에 진주한

    외부 점령군이 정책변화에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면서(Haggard

    1990: 3 31) 점진적 전략 하에서 정책의 가다-서다 (stop-go)를 반

    복하는 정책의 전환이 정치적으로 효율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Haggard 1986: 164).

    쉐보르스키와 틸리가 논의한 점진적 전략과 그 부문정책으로서 식량

    정책은 국가형성의 초기 국면 특히 2차 대전 이후 해방된 식민지에서

    사회적 긴장과 혼란을 방지하고 전환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오며 점

    진적 전략 하에서 식량정책의 전환은 국가형성 주도세력들이 자신들에

    게 대항하는 세력들 특히 급진 개혁을 추구하는 좌익세력들을 무력화시

    킬 수 있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경우에도 식량정책의 전환을 통해 반정부적인 농민들을 국가 내로 체내

    화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 것에서도 볼 수 있다(Skocpol 1979: 219˜

    225). 이러한 점에서 미군정기 식량정책은 쉐보르스키와 틸리의 이론

    적 논의를 적실하게 보여주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쉐보르스키와 틸리

    의 논의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에서 보듯이 국가형성전략으로 점진적 전략이 선택된 가운

    데 그 부문정책으로서 식량정책의 전환은 국가형성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즉 점진적 전략은 급진적 전략에 비해 사회적 혼

  •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223

    란을 덜 야기하고 기존의 정치세력들이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추구하며

    국가형성 주도세력들의 권력을 위협할 때 점진적 전략을 통해 이들의

    도전을 무력화시킬 수 있으며 전환비용에서도 급진적 전략보다는 점진

    적 전략이 사회적 비용이 낮은 측면이 있는 것이다(박성진 2000: 9˜

    18). 이렇듯 점진적 전략이 취해진 가운데 식량정책의 급격한 전환은

    국가형성 주도세력들이 목표로 하는 국가의 성격과 구조를 획득할 수

    있는 훌륭한 자원이 될 수 있다.

    미군정의 국가형성전략과 식량정책 변화

    1) 미군정의 점진적 국가형성

    제2차 대전을 전후해서 미국의 궁극적인 세계전략은 자본주의의 유

    지와 재편성에 있었고 이러한 목표에 가장 걸림돌이라고 판단한 것은

    사회주의와 국유화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이었다(Kolko and

    Kolko 1972: 11 1̃3 25).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유럽과

    일본에서 식량과 연료의 심각한 부족은 패전국을 비롯한 탈식민지 국가

    들에서 자본가계급에 대한 불신을 불러왔고 기존의 사회체제를 위협하

    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패전국인 일본과 독일에 진주한 미군은 강

    국가형성 전략과 식량정책의 전환

  • 224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력한 점령군을 통해 기존의 부르주아적 지배를 유지복원하는 데 전념했

    는데(Armstrong Glyn and Harrison 1991: 6 16) 그 이유는 2차 대

    전을 전후로 중심부 국가로 떠오른 미국의 중요한 관심이 기존 질서의

    유지와 사회적 안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Myrdal 1957: 59).

    미국의 사회주의 혁명의 발발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한반도에서도 그

    대로 나타난다. 1943년 6월 경 미 전쟁성은 약 200페이지에 달하는 한

    국 관계 보고서를 통해 한국 내에 극심한 빈부격차가 존재하며 이러한

    사회적 격차는 공산주의에 대한 일반인들의 호의를 높이고 있다 고 지

    적했으며(이길상 1992(I): 14 1̃37) 1944년 말에서 1945년 초에 미

    군 정보기관들이 제출한 보고서들에서도 일본 지배의 종식은 만약 공

    공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무

    질서와 약탈을 가져올 것이며 이에 대해 한국인들의 반응은 이에 쉽

    게 동조할 것이고 따라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군정이

    이 나라를 책임지고 한국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질서를 유지

    할 것 과 이를 위해 한국에 존재하는 그룹들과 일정 정도 타협해야 할

    것 (이길상 1992(I): 164 1̃65 172 178 193)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보고서들을 바탕으로 1945년 6월에 제출된 국무부의 정책보고

    서에서는 한국 내 상황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데 좋은 조

    건을 제공하고 있으며.... 소련의 후원을 받는 조선 내 사회주의 정권의

    정책과 활동은 대중의 지지를 쉽게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 전

    망했다(FRUS: 1945(VI) 1969: 561 5̃63).

    사회주의에 대한 미국의 이러한 우려는 1945년 9월 1일에 발표된 군

    단 야전명령 제55호(Corps Field Order No. 55)와 10월의 민정에 대한

    초기기본훈령(SWNCC 176/8)에서도 드러나고 있는데 두 문건은 공통

    적으로 현존하는 모든 정당 단체 및 정치적 결사는 군정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하며 그 활동이 군사점령의 목표 및 요구와 일치하는 단체는 장

    려될 것이나 그 활동이 군사점령의 목표 및 요구와 일치하지 않는 것들

    은 폐지되어야 한다 (Hoag 1970: 104 1̃05 FRUS: 1945(VI) 1969:

    1081)고 지적하고 있다. 그 결과 일본 식민지기구의 유지가 논의되기

  •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225

    시작했고 하지(John R. Hodge)에게 국가형성전략으로서 점진적 혹은

    현상유지적 전략을 수행하라는 지침이 1945년 8월경부터 전달되기 시

    작했다. 1945년 8월 26일 마닐라 주재 총영사는 미군정 하에서 조선

    총독 및 그의 일본인 참모진을 한국의 행정에 그대로 활용한다는 것이

    기본 계획 (FRUS: 1945(VI) 1969: 1041)이라고 지시했고 1945년 8

    월 29일 미태평양사령부(AFPAC)도 기존 일본의 정부조직을 그대로 이

    용할 것을 하지에게 통보했다(HUSAFIK 1948: Part I Chapter I 65˜

    66).

    특히 1945년 9월 1일 한반도 점령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 목표 군정

    에 대한 구상을 담은 야전명령 55호에서는 기존의 정부조직은 활용될

    것이며 현직 인물들의 해고는 현 정부의 통제와 조직의 효율성을 떨

    어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Hoag 1970: 103 1̃05)라고 규정했다.

    이는 일본인 관료들의 해임에 관한 예외 사항을 둔 것으로 기존 총독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에 앞서 하지는 야

    전명령 55호를 입안한 프레스코트(B. E. Prescott) 대령에게 다음과 같

    은 질문을 했다.

    하지: 한국인들은 해방된 국민으로 취급해야 하는가?

    프레스코트: 그렇습니다. 다만 한국인들은 자신의 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없으므로 변화는 점진적이어야 합니다 (Hoag 1970: 101)

    (강조문 필자).

    또한 하지는 1945년 9월 2일에 발표한 포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

    고 있다.

    국가조직의 개변(改變)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그 안녕유지에는 큰 혼란 및 유혈을 동반함을 명심할

    것이다. 어떠한 개혁도 서서히 진행되므로 그와 함께 민중에 있어

    서도 장래에 예비하여 각자 및 국가형성을 위하여 또한 민주주의 하

    생활의 유지를 도모하기에 각자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 하여야 할 것

    이다(한국일보 1955년 8월 18일)(강조문 필자).

  • 226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이와 같이 미국의 공식비공식 문서들에서 지적하듯이 해방 직전 한반

    도의 정치적 상황은 사회주의 혁명의 발생 가능성이 높은 편이었고 이

    에 따라 미국은 한반도에서 일본의 구제도를 유지하는 점진적 전략을

    선택했다.

    2) 미군정기 식량정책의 변화

    미군정은 해방 직후 나타난 자생적 국가형성 노력 및 급진적 개혁에

    대해 극히 부정적이었고 여러 차례에 걸쳐 향후 급격한 변화보다는 점

    진적 변화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임을 공언하고 있었다(중앙신문 1945

    년 11월 17일). 특히 미군정은 일본의 조선총독부체제가 합리적일 뿐

    만 아니라 실용적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고(Meade 1951: 76) 남한에 진

    주한 24군단도 전술군으로서 점령지의 질서유지와 군사적 안보를 최우

    선으로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구체제와 구사회질서를 온존시키며 현지

    의 좌익세력이나 변혁세력에 대해서는 극히 부정적이었다(박찬표

    1997: 54 5̃5). 이와 더불어 미군정의 국가형성 전략으로서 점진적 전

    략과 식량정책과의 관계는 당시 미국의 전쟁부 장관이었던 패터슨(R.

    Patterson)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다.

    현 미군의.... 군정업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가 점령국에 대

    한 식량정책이다. 식량정책을 통해..... 이들 국가들에 민주주의 원

    칙과 제도를 양성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점령정책도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동아일보 1947년 2월 15일).... 만약 미국이 점령지구

    내 민간인의 식량을 보유하지 않는다면 동 지역 내에는 불안과 혼란

    상태가 발생될 것이며 이는 공산주의 사상의 가장 적당한 온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쟁에 있으며.... 이 경쟁은 전 세계를 통

    하여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의 진정한 경쟁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조선일보 1947년 3월 30일).

    위와 같은 발언의 의미는 점령지에서의 식량정책의 성공여부가 미국

    이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국가의 수립 및 확산

  •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227

    의 성공여부와 일치하며 또한 점령지에 존재하던 공산주의 세력들과의

    갈등을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경쟁의 잣대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

    다. 이러한 미국의 인식은 미군정의 주요 인물들에 의해 계속해서 강조

    되었다. 군정장관이었던 딘(William F. Dean)은 1947년 12월 26일 기

    자들과의 회견에서 이러한 군정당국의 인식을 드러냈다.

    내가 유럽에 있을 때 자유매매를 허락하면 식량기근이 올 것 같

    아서 통제한 일이 있다. 전시 중에는 무기나 화약 같은 것은 통제한

    다. 그러한 측면에서 식량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무기이다

    (경향신문조선일보서울신문 1947년 12월 27일)(강조문 필자).

    미국 및 미군정 주요 인물들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듯이 미국이 한반

    도에서 목표로 하는 국가의 형성은 식량정책에 의해 좌우될 수 있었다.

    에서 보듯이 미군정 식량정책은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 1945년

    8월부터 1947년 10월까지 수차례 변화했다. 이러한 단기간내 식량정

    책의 통제 → 자유 → 통제 → 자유 → 통제로의 변화는 이례적인 것이

    었다. 미군정의 식량정책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미군정기 식량정책의 변화(1945˜1947)

    발표일자 법령 주요내용 비고

    1945년 8월 9월 건국준비위원회의 식량정책 식량에 대한 통제 통제

    1945년 10월 5일 일반고시 1호 미곡의 자유시장 공표 자유

    1945년11월 19일 일반고시 6호 미곡에 대한 통제 방침통제

    1946년 1월 25일 법령 45호 1945년도산 미곡수집령

    1946년 4월 24일5월 20일

    법령 77호법령 87호

    서울시 특별미곡 반입령

    부산시 특별미곡 반입령자유

    1946년 5월 28일5월 29일8월 12일

    법령 90호중앙식량규칙 제1호(하곡수집)중앙식량규칙 제2호(미곡수집)

    경제통제령

    1946년산 하곡수집

    1946년산 미곡수집

    통제

    1946년 8월 31일 법령 105호 1945년도산 미곡수집령 폐지 자유

    1947년 5월 8일8월 18일9월 27일

    중앙식량규칙 제5호(하곡수집)중앙식량규칙 제6호(미곡수집)

    법률 제6호(과도입의)

    1947년도산 하곡수집령

    1947년 미곡수집안

    1947년 미곡수집법

    통제

  • 228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미군정의 식량자유시장정책 (1945. 8. ̃1945. 11.)

    해방과 건준의 식량관리

    해방 직후 한국 사회는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미군의 보고서는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8월

    15일 이후 무기한의 축제에 들떠 있으며... 한국은 완전히 선동의 무대

    가 되어버렸다 (FRUS: 1945(VI) 1969: 1050)고 보고할 정도였다. 또

    한 식량과 석탄의 심각한 부족 운송체계의 마비는 사회경제적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FRUS: 1945(VI): 1051 Gayn 1948: 458

    Wedemeyer 1951: 14). 특히 1945년 9월 17일 서울 지역에서 식량

    배급을 요구하기 위해 모인 2500 3̃000명의 군중들에게 미군이 진주

    한 이후 최초로 발포하여 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미군은 식량부족

    이 위험한 상황에까지 이르렀음을 절감하게 되었다(HUSAFIK 1948:

    Part III Chapter VI: 25). 이후 미군의 보고서들에서는 이러한 식량의

    부족사태가 심각하게 발전할 경우 혁명의 발발 가능성까지 보고하고 있

    었다(신복룡 1991(IV): 91 9̃6).

    따라서 남한에 진주한 미군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식량과 석탄의

    부족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모든 정치상황은 식량문제에 의

    해 직간접적 영향을 받았고 보다 많은 쌀배급을 확보한 집단이 가장 많

    은 추종세력을 확보한 실정이었다(HUSAMGIK 1946: Part III 173).

    그러나 해방 직후 식량관리는 이미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장악

    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었고(HUSAFIK 1948: Part III Chapter

    IV Part 1 50) 또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도 좌익 세력들의 활동을 크

    게 고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1945년 8월 10일 조선총독부로부터 국

    내치안과 신국가건설 준비 등의 권한을 받은 여운형(呂運亨)의 건준은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 이후 맞부딪칠 강력한 경쟁자였다. 당시 건준의

    활동은 왕성했고 그 호응도도 높은 편이어서 1945년 9월 초에 이르러

    건준의 지부 수는 140개에 이르렀고(매일신보 1945년 9월 4일) 12월

  •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229

    에 가면 건준의 지부들 대부분이 인민위원회로 대체되어 그 수는 13개

    도지부와 31개 시지부 220개 군지부 및 2282개 마을단위 지부를 갖추

    게 되었다(이강국 1946: 4).

    식량관리의 측면에서도 건준은 이미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942년 당시에 이미 여운형은 이정구(李貞求)와 식량영단에서 근무하

    던 김재홍(金在弘)에게 당시의 식량동태에 대하여 조사를 해둘 것을 지

    시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이만규 1947: 198 1̃99)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자 이전부터 활동하던 이정구와 식량영

    단에서 근무하던 김재홍을 중심으로 한 전문가 10여 명이 식량문제의

    해결이 건국공작(建國工作)의 최대급무(最大急務) (이정구 1946: 50)

    라는 인식 하에 식량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8월 16

    에는 건준 부위원장인 안재홍(安在鴻)이 방송을 통해 식량의 배급 및 분

    배가 현 상태를 유지할 것임을 알렸다. 이렇듯 현상유지적인 식량 관리

    를 진행하면서 건국식량대책위원회는 민주적 기구로 건국식량협의회의

    창설을 건의하며 이 기구를 지방의 인민위원회에 기반하여 운영할 것을

    미군정에 제의하기도 했다(이정구 1946: 57 5̃8).

    그러나 해방 직후 현상유지적인 식량정책을 취한 건준의 활동에 대해

    9월 8일 진주한 미군은 남한내의 심각한 식량사정을 인지하고 있었음에

    도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근거는 미군의 진주를 전

    후하여 조선총독부가 미군에게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8월 하순의 보고

    서에서 단경기에 식량이 궁박하여 조선치안에 영향이 있을 것으로 생

    각되므로 만주로부터 잡곡 수입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森田芳夫

    1980(1): 21)는 보고와 이미 남한내의 식량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

    렀다는 미군 정보부서들의 보고(W/S No. 2: 2 신복룡 1991(III-1):

    254) 1945년 9월 8일 새벽 건준의 대표단 자격으로 미군 함대를 찾아

    간 여운홍(呂運弘) 등이 하지의 참모장에게 한국의 식량사정이 심각함

    을 알렸다(HUSAFIK 1948: Part III Chapter VI 24 여운홍 1967:

    162 1̃66 로빈슨 1988: 59)는 것 그리고 하지도 9월 11일 기자들과

    의 회견에서 식량이 부족한 것은 잘 알고 있으며 식량수입의 가능성까

  • 230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지 내비치고 있었다(매일신보 1945년 9월 12일)는 사실은 미군이 당시

    식량의 부족사태를 이미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당시의 남한의 심각한 식량사정보다는 정

    치적인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24군단이 한반도에 진주하

    기 전에 미군에게 정보를 제공하던 조선군관구사령관인 코오즈키 요시

    오(上月良夫)는 1945년 8월 31일 하지에게 조선인들 가운데 공산주의

    자와 독립 선동가들은 현재의 정세를 이용하여 평화와 질서를 파괴하려

    고 있으며 적색 노조에 의해 선동된 인천부두의 300여 하역 노동자들

    이... 미군의 상륙을 방해할 가능성도 있다 고 전했고(HUSAFIK 1948:

    Part I Chapter I 58 5̃9) 미군에게 진주한 이후 영어로 된 350권의

    비망록을 전달한 일본인 관리들도 당시 건준의 활동을 공산주의와 연계

    시키고 있었다(HUSAFIK 1948: Part I Chapter IV 38 Cumings

    1981: 140). 결국 미군은 해방 초기 상황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건준이

    공산주의에 연계되었다는 일종의 불안감과 불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식량관리에서도 건준의 모든 활동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미군정의 선택은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식량관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

    고 있었던 건준을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식량정책에서 파멸적

    (disastrous)인 결과를 초래했다(HUSAFIK 1948: Part III Chapter

    IV Part 1 50).

    2) 미군정의 미곡자유시장정책

    1945년 10월 5일 하지는 일반고시 제1호를 통해 미곡의 자유시장

    (Free Market in Rice)을 공표했다. 일반고시 1호의 의미는 미군정에

    의해 공표된 최초의 식량정책이었지만 동시에 기존의 식량정책의 현상

    유지를 주장하던 건준[인공]의 식량대책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즉

    실질적으로는 미군정의 첫 번째 식량정책이었지만 기존에 유지되어 오

    던 식량통제를 무력화시키는 전환적 성격을 가진 정책이었다. 이와 더

    불어 5일 후인 10월 10일 아놀드(A. V. Arnold) 군정장관이 조선인민공

    화국을 원색적으로 비난했고(매일신보 1945년 10월 11일) 10월 15일

  •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231

    에는 재일본 정치고문 애치슨(George Atcheson Jr.)이 좌익에 대해 적

    극적인 조치를 요구했으며(FRUS: 1945(VI) 1969: 1092) 11월 2일에

    가서 하지는 좌익에 대한 단호한 탄압행동이 필요하다고 맥아더(D.

    MacArthur)에게 보고했다(FRUS: 1945(VI) 1969: 1106).

    미곡자유시장의 공표와 뒤이은 군정의 인공에 대한 이러한 일련의 조

    치들은 미곡자유시장 공표가 좌익에 대한 적극적 조치와 관련이 있다

    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공식적으로 군정당국이 미곡자유시장을 공표한

    이유로 든 것은 일본으로의 쌀수출 중단에 따른 국내 쌀 보유량의 증가

    1945년도 미곡의 풍작 예상 일제하의 식량공출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

    식량통제를 유지할 미군정 요원들의 부족 자유시장 설치를 통한 미국에

    대한 호의와 미군정에 대한 한국인들의 협조 기대 농민들과 중간 상인

    들이 은닉해둔 미곡을 시장에 출하시키기 위한 유인 많은 일본인들의

    본국으로의 귀환 등의 요인 등이었다(HUSAFIK 1948: Part III

    Chapter VI 26 2̃7).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인 기록보다는 미군정의 자유시장 선포에는 보

    다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1946년 1월 9일 식량문제대책을 협의

    하기 위해 서울시내 5천석 이상 수확하는 지주들과 서울시장 시청군정

    관 윌슨(P. S. Wilson) 농산국장 대리가 모여 협의를 가졌는데 윌슨 군

    정관은 애초 여러분의 희망으로 쌀을 자유 판매한 것인데... 오늘에 와

    서는 쌀을 내놓지 않는다 고 불평했고(동아일보 1946년 1월 11일)(강

    조문 필자) 또한 식량행정처의 스탑(Stop) 소령도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군정의 지난해 식량정책이 실패한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지난해에는 우리의 준비가 안되었던 것과 일부 조선의 정당이 반대를

    했었기 때문 이라고 언급했다(동아일보 1946년 9월 19일).2) 여기서

    2) 이러한 인식은 여러 군정당국자의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1946년 9월 4일 군정

    의 경제고문인 번스(Arthur C. Bunce)는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식량 자유 지상의

    실패와 경제 위기를 조선인 고문의 말을 들었기 때문 이라고 했고(조선일보서

    울신문 1946년 9월 5일) 군정장관인 러취(A. L. Lerch)도 1945년도에 미곡 통

    제를 하지 않은 이유를 여러 선의의 조선인 단체들이 이를 반대했기 때문 이라

    고 언급했다(동아일보 1946년 10월 25일).(강조문 필자)

  • 232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말하는 조선의 정당은 우익세력의 집결체인 한민당이었다. 또한 당시

    미곡의 자유시장 선포와 더불어 식량가격이 급등하고 백미를 매점매석

    했던 모리배들에 대한 원성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곡 모리배들이

    미군정의 원조와 지지를 받고 있던 양반실업가들이기 때문에 미군정은

    이들을 단속하지 않았다는 증언(Lauterbach 1946/1947: 219)은 미곡

    자유시장 선포에 정치적 의미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당시 미군정은 앞으로의 상황을 낙관하면서(HUSAFIK 1948:

    Part III Chapter VI 25 FRUS: 1945(VI) 1969: 1051 W/S No. 4:

    3) 1945년산 쌀 수확량이 1940년 이래 가장 많은 15969700석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으나(Summation No. 3: 193) 실제로 수확량은

    12835829석에 그쳤다(조선은행조사부 1950: I-63). 이와 더불어 해

    방 이후 물가의 광란기(한국산업은행조사부 1955: 469 4̃77) 속에서

    미가의 폭등은 사회적 혼란을 더욱 부추기게 되었다. 당시 군정당국은

    미곡자유시장의 실패 원인을 쌀소비의 폭발적 증가 화폐가치의 급락

    한국인들 사이에 일본으로 쌀을 수출한다는 소문 쌀가격의 상승기대로

    인한 쌀 보유 남한 인구의 급격한 증가 운송수단의 부족 때문이라고 분

    석했다(FRUS: 1945(VI) 1969: 1151 1̃152).

    이러한 분석과 더불어 군정당국이 미곡의 자유시장을 실시한 것은 현

    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특히 일본군 20만 명이 한국

    에서 농업관련 업무에 종사했다(HUSAFIK 1948: Part III Chapter VI

    37)는 사실은 현실적으로 미군정이 식량부족을 해소하는 방법으로서 통

    제 방식을 취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미군정이

    미곡자유시장을 허용한 이유는 일제의 식량통제기제가 붕괴되고 그것을

    대체할만한 군정의 통치력이 농촌지역에까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는 것이다(전상인 2001: 92 최봉대 1994: 46 차남희 1997: 102).

    그러나 이러한 주장으로는 1946년 8월 31일 군정당국이 법령 105호

    를 통해 미곡수집령을 폐지하고 미곡의 도시반입을 허가한 측면에 대해

    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1946년 8월경이면 군정당국의 국가능력은 남

    한전체에 미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통치력 측면에서도 미군진주 초기

  •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233

    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군정의 통치력 부족으

    로 인해 미곡의 자유 유통을 선포했다는 주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

    다. 이러한 측면에서 커밍스가 만약 미군이 충분한 준비를 갖춰 한국

    을 보다 확실히 이해하고 더 많은 전문요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왔을까 라고 반문하면서 당시의 모든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란 해답을 얻었다 는 분석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Cumings 1973: 86). 그리고 군정당국은

    1945년 11월 19일 일반고시 6호를 통해 통제경제로의 회귀 모습을 보

    여주었는데 그렇다면 이는 미곡의 자유시장을 선포한 10월 초순 이후

    한달 만에 군정당국의 국가능력과 통치력이 획기적으로 증대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특히 단순히 군정당

    국의 물리력의 수치만 보아도 이러한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군정당국의 식량정책 즉 미군정 기간 동안 식량공출이 성공적인 해로

    평가되던 해인 1947년을 예로 들어보면 1947년 6 7̃월 당시 군정당국

    이 보유하고 있던 전술군군정요원경찰력의 수는 72942명이었고

    1945년 10 1̃1월의 수는 92643명이었다(박찬표 1997: 172 1̃73).

    물론 식량관리를 담당하는 관리들과 비공식적 인원을 포함하면 1947년

    6 7̃월의 수는 크게 늘어나겠지만 단순히 전술군과 군정요원경찰의 수

    를 비교해 보았을 때 군정당국이 물리력의 한계로 인하여 미곡자유시장

    을 실시했다는 주장은 이론이 제기될 수 있다(박성진 2002: 47 4̃8).

    결론적으로 미군정당국이 발표한 미곡의 자유시장은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이었다. 남한에 진주하기 이전부터 좌익세력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던 미군은 성공적인 식량관리를 해오던 건준이 식량통제권을 갖

    게 되면 강력한 무기(unbeatable weapon)를 얻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

    고(W/S No. 30: 5) 이를 막기 위해 1945년 10월 5일 미곡의 자유시장

    을 선포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군정기 식량자유시장의 실패라고 평가받

    는 부분은 군정당국의 의도한 실패였다. 이러한 미군정기의 자유시장

    과 건준 주도의 미곡정책의 와해는 점령기간 중의 정치와 경제정책 사

  • 234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이의 긴밀한 상관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Cumings 1981:

    208 2̃09).

    5. 미군정의 식량통제정책(1945. 11. ̃1947. 12.)

    1) 미군정의 식량통제정책의 수립

    1945년 10월에 실시한 미곡자유시장제도는 예상과 달리 물가의 급격

    한 상승과 사회적 불안을 더욱 야기시키면서 1945년 연말과 이듬해 동

    안은 쌀 부족과 매점매석쌀폭동물가폭등 등으로 점철되었다(로빈슨

    1988: 81 8̃3 Lauterbach 1946/1947: 218 2̃20). 이러한 사회경제

    적 혼란 속에서 군정당국은 다른 어떤 정책보다도 식량정책이 미군정의

    경제정책 현안들 가운데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

    는데 그 이유는 인구의 2/3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미곡의 자유시장

    정책이 심각한 식량부족을 야기했으며 인구의 1/3을 차지하는 비농업

    부분 인구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군정당국이 동원할 수 있는 유일

    한 정책수단이 식량에 대한 통제였기 때문이었다(신복룡 1991(III-3):

    205).

    그러나 주목할 것은 식량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이 미곡의 자유시장을

    선포하기 이전에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남한에 진주하

    기 이전에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대일 훈령을 적절히 손질하여 적용

    시키는 것으로서(FRUS: 1945(VI) 1969: 1041) 전후 일본에서 군정의

    식량정책은 전시상태에서 유지되고 있던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의 통제

    를 그대로 유지하고 경제에 대한 통제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었기 때

    문에 남한에서도 경제통제 특히 식량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군정당국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Summation No. 1: 16). 따라서 정

    치적 고려에 의해 건준[인공]의 식량관리를 부인한 군정당국이 자유시

    장을 선포한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식량의 통제에 나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군정당국에게 안정(stability)과 현상유지(status

  •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235

    quo)는 한반도의 점령 원칙이었다(W/S No. 42: Inclosure #1 1).

    또한 틸리가 국가형성과정에서 국가가 식량의 공급과 분배에 적극적

    으로 개입하게 되는 원인으로 들었던 농민들의 집단화 국가에 의존하는

    사람들과 국가가 이용할 수 있는 국내외적 식량공급간의 불균형 증대

    식량정책의 전환 식량에 대해 국가가 최초로 선택한 추출방법(Tilly

    1975: 392 3̃93)도 식량의 공급과 수요를 통제해야 할 절실한 필요성

    을 군정당국에 주게 되었다. 농민의 집단화와 관련하여 당시 남한에서

    1945년 12월 8일을 기점으로 전국적 조직인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

    농]이 결성되어 있었고 결성 당시 보고된 전농 소속 농민들은 남북한을

    합쳐 3백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민주주의민족전선 1946: 167). 군정

    당국도 이 수치는 과장된 것이긴 하지만 소속 농민 중 약 100백만 명이

    명백히 좌경 성향(definite leftist tendencies)을 띠고 있다고 평가했다

    (정용욱 1994: 292). 이러한 수치는 군정당국에게 전농과 인민위원회

    가 연계되어 지방에서 사실상의 정부(de facto government)(Meade

    1951: 54)로 행사하는데 대한 일종의 불안감을 주었고(W/S No. 22: 6)

    이러한 불안감은 1946년 8월경에 가면 전농의 해체를 심각히 고려할 정

    도로 확대되었다(W/S No. 49: Inclosure #2 1 2̃).

    국가의 식량배급에 의존하는 빈민과 정부기관 소속 인물의 증대도 군

    정당국의 우려사항 중의 하나였다. 군정당국은 1945 4̃8년 동안 배급

    대상 인구가 총 인구의 39.0%를 차지하는 약 740만명 정도로 추정했지

    만 1947년에만 실제 배급 대상인구는 44.0%인 약 874만명에 이르렀다

    (박성진 2002: 56 5̃7). 또한 급격하게 증가한 경찰들과 행정관료들

    에게는 특별배급을 실시해야 했기 때문에(남조선과도입법의원속기록

    제45호: 15 1̃6 동아일보 1946년 3월 30일 조선일보 1946년 4월 7

    일) 군정의 식량필요는 더욱 증대되었다. 결국 전농을 통한 농민의 조

    직화와 이에 따른 식량정책에 대한 저항의 증가 그리고 군정당국에 의

    존하는 식량배급 인구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군정당국은 기존의 자유

    시장정책을 전환하게 된다.

    군정당국은 1945년 10월 30일 법령 19호와 11월 19일 일반고시 제6

  • 236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호를 공표하여 미곡에 대한 군정의 통제방침과 최고소매가격을 지정 고

    시했지만 그 실효성이 적었다. 본격적인 식량에 대한 통제정책은 45년

    12월 6일 군정 법령 33호를 통해 신한공사를 설치하고 일제의 귀속 재

    산을 전부 장악한 후 1946년 1월 25일 법령 제45호를 통해 미곡수집령

    의 발동을 통해 나타났다. 이후 1946년 5월 28일에 법령 90호가 발표

    되어 중앙경제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중앙식량행정처를 설치하여

    전면적인 통제경제의 실시와 식량에 관한 통제 및 식량배급제를 실시하

    게 되었다.

    2) 1946년도 미군정의 식량정책과 좌익과의 갈등

    1946년 1월 1945년산 미곡수집령이 발표되자 이에 대한 좌익의 반

    응은 격렬했다. 당시 미곡수집령은 사실상 모든 농가들과 쌀 소유주들

    의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뿐만 아니라(HUSAFIK 1948:

    Part III Chapter IV 43) 이는 곧 일제시대의 식량공출제도를 사실상

    재수립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인정식 1949: 78 95 9̃9). 특히 기존

    의 전농과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식량관리 업무를 맡아오던 좌익 측에

    게 군정의 미곡수집령 발표는 좌익의 활동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으므

    로 좌익의 저항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군정당국의 식

    량공출에 대해 좌익은 기존의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한 식량의 인민관

    리를 재차 주장하며 강하게 반발했다(조선인민보 1946년 3월26일 민

    족주의민족전선 1946: 102 1̃03 서울신문 1946년 2월 23일). 그러

    나 이 주장에 대해 군정당국의 반응은 다소의 희생이 있더라도 수집과

    배분은 규정의 방침대로 하겠다 (독립신보 1946년 9월 24일)며 좌익의

    주장을 일축했다.

    군정당국과 좌익측의 이러한 상반된 입장은 곧 1945년산 미곡수집에

    대한 좌익측의 거부로 나타났다. 군정당국은 1945년산 미곡수집령 발

    표와 동시에 총생산을 1285만석(이후 1702만석 수정)으로 예상하고

    수확량의 42.9%에 이르는 551만석을 공출한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실

    제로 수집된 것은 총생산량의 5.3%에 지나지 않는 68만석에 그치고 말

  •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237

    았고 이는 목표량의 12.4%에 불과한 것이었다(조선은행조사부 1949:

    I-242 I-243). 군정당국은 이렇게 저조한 실적이 본질적으로 농촌에

    존재하는 전농과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 때문이라고 판단

    했다(W/S No. 21: 6 W/S No. 22: 6). 또한 1945년산 미곡 수집의

    실패 이후 군정당국이 실시한 1946년산 하곡수집도 목표량의 전체 할

    당량 199만석 가운데 97만석만을 거두어 49%밖에 거두지 못하는 상황

    이 벌어졌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102 재정리). 당시 하곡의 할

    당량에서 농민들이 크게 저항한 이유는 군정당국의 비현실적인 미곡 할

    당량 책정과 이를 집행하는 하부기관의 비리(이정식 1974: 156 1̃58)

    그리고 당시 지방에서 식량할당량의 책정을 미국의 승인을 받은 고위

    공무원 지역 유지 사업가 그리고 대지주들로 구성된 지역위원회가 결

    정하고 있어서 농민들의 고충이나 요구사항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기 때

    문이었다(로빈슨 1988: 138).

    1945년 말과 1946년 봄에 이르는 기간동안 군정당국의 식량수집 실

    패는 결과적으로 식량위기를 촉발시켰고 특히 1946년 여름에 이르러

    홍수와 전염병의 창궐로 인한 지역간 격리 등으로 식량사정은 더욱 악

    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군정당국은 이러한 식량수집의 실패가 무엇보다

    좌익세력에 그 원인이 있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만약 좌익들이 식량통제

    권을 얻게 되면 그들의 목표를 이룰 강력한 무기를 얻는 것과 동시에 나

    아가서는 사회적으로 쌀 공산주의자(rice communists)의 대두를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W/S No. 30: 5 No. 43: 4 5̃). 이러한 군정의 판단

    은 1946년 7월에 전농 위원장인 이구훈(李龜壎)을 비롯한 간부 5명의

    전격적인 검거구속으로 나타났다(동아일보 1946년 7월 17일). 이와

    더불어 군정당국은 1946년 미곡수집이 국가경제적 입장에서 중차대한

    의미 (원용석 1948: 102)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에 전력을 기울

    이기 시작했다. 특히 미군정은 수집기간을 자발적 수집단계로서의 1단

    계(2개월)와 강제 수집단계로서의 2단계(2개월)로 구분하고 1단계에서

    는 수집할당량의 정확한 고시와 수집장려물품의 제공 기타 재정적 혜택

    의 제공 등을 내세웠고 2단계에서는 경찰국방경비대기타 관리들이 동

  • 238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원되어 강력히 제재하도록 계획했다(USAMGIK 1947: 6 1̃0).

    그러나 이러한 군정당국의 강력한 1946년산 미곡수집대책은 그 집행

    과정에서 농민들과 민중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경상도와 전

    라도에서는 경찰에 대한 불신으로 1946년도 한 해에만 200회 이상의

    집회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고(Millet 1997: 516) 쌀 수집에서도

    경찰의 부정과 부패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HUSAFIK 1948:

    Part III Chapter IV Part 1 51 5̃2). 이러한 경찰의 부정과 부패로

    인해 대구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사회주

    의적 혁명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정당국의

    이에 대한 인식은 이것이 군정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암

    약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하지는 농민들의 반발이 소련의

    지시를 받는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과 늘어나는 충동질과 그리고

    어떠한 외부의 통제에 대해서도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본래의 반감 때

    문 이라고 보고했다(FRUS: 1946(VIII) 1971: 750 7̃51 Summation

    No. 13: 23 2̃4 로빈슨 1988: 138 1̃39). 그러나 결국 군정당국은

    공산주의자의 극심한 수집 방해에도 불구하고 1946년산 미곡수집은

    총 할당량 795만석 가운데 663만석 즉 83.5%의 높은 성공(한국농촌경

    제연구원 1986: 101)을 거두게 되었다.

    1946년도 미곡수집은 10월 대구사건과 잇따른 농민들의 미군정의 식

    량정책에 대한 불만이 극도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거둘 수 있

    었는데 그 요인은 첫째 군정당국이 식량정책의 잇따른 전환을 통해 군

    정의 식량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감소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정당국은 1945년 10월 미곡의 자유시장정책에서 1946년 1월 미곡의

    통제정책으로 첫 번째 정책전환을 보여주었고 통제경제령이 발동된 상

    황에서 1946년 4월 24일 법령 77호와 1946년 5월 20일에는 법령 87

    호로 서울과 부산에 대한 특별 미곡 반입령을 선포하여 미곡반입을 허

    용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또한 1946년 8월 31일 법령 제105호를

    통해 45년도산 미곡수집을 위해 공표되었던 미곡수집령을 폐지했다.

    이러한 군정당국의 조치는 일반 시민들에게 식량의 통제정책이 곧 폐지

  •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239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었고 쌀값이 폭락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만

    들어 쌀 소비를 억제하는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서울신문동아일보

    1945년 8월 25일). 결국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미군정이 식량에 대

    한 통제정책을 취하는 중에서도 정책전환을 통해 오히려 정책의 효율성

    을 높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신한공사의 역할을 들 수 있다. 1946년 2월 21일 법령 52호로

    군정의 부속기관으로 일제하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재산을 관리하던 신

    한공사는 독립부서로 재창설되었다. 당시 신한공사는 남한 최대의 지

    주(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97 114 1̃15)로서 미군정의 입장에서

    는 소작료를 거두는 일뿐만 아니라 식량수집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

    행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전상인 2001: 100)였다. 신한공사 소작농

    들은 1946년도 하곡수집실적이 전반적으로 부진한 가운데서도 81.3%

    의 높은 수집율을 보여주었고(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101 1̃02 재

    정리) 이후에도 다른 농민들이 공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신복룡 1991(III-1): 471). 신한공사 총재를 역임했던 미첼(C. Clyde

    Mitchell)도 신한공사에 대해 군정청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행정력 가

    운데 하나는.... 한국 농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신한공사의 강력하

    고 정확한 행정력이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106 1̃07)고 고

    백할 정도였다. 결론적으로 1946년 미곡수집의 성공은 군정당국의 정

    책전환과 더불어 신한공사가 큰 역할을 담당했다.

    3) 1947년도 미군정의 식량정책과 우익과의 갈등

    미군정기 식량정책을 둘러싼 갈등은 좌익과의 갈등만이 아니었다.

    우익세력과의 갈등도 좌익과의 갈등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특히 지주

    들을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들은 미곡의 자유시장제를 폐지한 1946년 1

    월 당시부터 1945년산 미곡수집령에 결코 찬성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우익세력의 분위기는 한민당을 통해 군정당국에 미곡의 최고가

    격 철폐와 쌀의 자유유통에 대한 건의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민주의원과

    고문회의 등의 공식적 정치기구를 통한 식량통제정책의 해제와 자유시

  • 240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장제로의 환원 요구로까지 나타나게 되었다(서울신문 1946년 2월 17

    일: 2월22일 동아일보 1946년 3월 29일 조선일보 1946년 2월 21

    일). 이러한 공식적 정치기구를 통한 요구 및 건의와 더불어 지주세력

    들은 일반농민에게도 불공출을 권장하는 등의 적극적 저항을 표시하기

    도 했다(김종범 1984: 100). 지주계급을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의 식량

    공출에 대한 반발은 1946년 말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하 과도

    입의)을 통해 좀더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군정당국은 당시 과도

    입의를 통해 미군정의 정책에 대한 정당성과 지지기반을 마련하고 좌익

    세력의 효과적 배제를 의도했는데 당시 과도입의는 우파가 67명 좌파

    가 11명 무소속이 20명으로 우익세력이 압도적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

    다(김혁동 1995: 70 7̃1).

    당시의 식량정책과 관련해서 과도입의를 통한 곡물수집정책의 조선

    화(남조선과도입법의원속기록 20호: 20 2̃9 서울신문경향신문

    1947년 4월 8일)는 경찰을 앞세운 기존의 곡물수집이 농민들로부터 거

    센 저항을 받았고 10월 대구사건의 주요 봉기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히

    게 되자 군정당국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을 축소시키려는 군정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따라서 군정당국은 과도입의를 독자성을 가진 기관이

    기보다는 군정당국의 발의에 의해 정해진 한도 내에서 정해진 결과만을

    산출하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이는 군정당국이 입법의원들에게 입법권

    을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입법의원이 결의한 법령을 군정장관이 거부

    할 수 있는 권한(조선일보 1946년 10월 12일 동아일보 1946년 10월

    19일)을 부여한 데서도 드러난다.

    그럼에도 과도입의는 개원 이후 하곡수집의 전면적 폐지를 제안하기

    도 했으나 이 제안에 대해 군정당국은 이를 이상주의적인 안에 불과하

    다고 일축했고(W/S No. 82: 7 8̃) 결국 1947년 5월 8일 중앙식량규칙

    제5호로 하곡수집령이 공표되었다. 이 법령을 통해 신한공사가 공식적

    으로 곡물수집의 주도적 기관으로 결정되었고 1947년도 하곡수집은 전

    체 할당량 109만석 가운데 107만석을 거두어 평균 98.5% 수집이라는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102). 그러나 군

  •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241

    정당국과 과도입의의 갈등은 이후 1947년 미곡수집에도 그대로 이어졌

    다. 당시 군정당국이 제정한 중앙식량규칙 6호와 과도입의가 제정한 법

    률 6호는 경작면적에 따른 면세점 설정과 자유반입 및 자유매매를 둘러

    싸고 양측간의 큰 차이를 보여주었다. 군정당국과 과도입의의 갈등은

    23일에 개최된 과도입의 159차 회의에서 입법의원들이 중앙식량행정처

    장 지용은(池鎔殷)을 상부명령에만 움직이는 기계라고 비난하며 소량

    의 미곡반입을 허가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지용은은 자신은 아무런 권

    한이 없다 는 말로 입법의원들의 주장을 일축하며 서로간에 벌인 설전

    에서도 확인된다(조선일보동아일보 1947년 10월 25일).

    이러한 논란 속에 과도입의는 10월 24일 160차 본회의에서 미곡수집

    법 개정에 관한 법률안과 행정명령 제8호의 중지를 군정당국에 건의할

    것을 각각 결의했다(동아일보 1947년 10월 26일). 그러나 이러한 과

    도입의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미곡수집안은 군정의 반대로 인하

    여 현장에서 시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군정당국의 과도입의의 법안에

    대한 반대는 당시 과도입의의 무용론이 제기된 상황에서 존속 기로에

    있던 과도입의에 최후의 타격을 준 것이었다(동아일보서울신문 1947

    년 12월 4일). 결국 군정당국의 중앙식량규칙 6호에 따라 미곡수집이

    진행되었고 총 할당량 796만석 가운데 663만석을 수집하는 할당량의

    96%를 채우는 대성공을 거두었다(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101).

    이러한 1947년도 식량수집의 성공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과도입법의원의 구성을 통한 군정의 조선화를 들 수 있다. 식

    량정책과 관련하여 군정당국은 과도입의를 군정당국에 대한 비판을 막

    아줄 수 있는 일종의 방패막이로 이용했으며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차남희 1997: 148). 둘째 1946년산 미곡수집에서 성공적으로 임무

    를 수행한 신한공사는 1947년산 하곡수집과 미곡수집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1947년산 쌀 수집에서 군정당국은 신한공사 소속 소작인들

    에게 주어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 그들의 땅을 잃을 수 있다는 위

    협과 할당량을 채울 경우 소작계약이 연장될 것이고 경작지를 구입하는

    데도 최우선권을 줄 것이라는 등의 유인책을 병행 사용함으로써 수집량

  • 242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을 늘릴 수 있었다(신복룡 1991(III-1): 427 W/S No. 99: 7

    Summation No 21: 39 김성호(외) 1989: 269 2̃81). 결국 군정당국

    은 신한공사를 통해 1947년산 쌀 수집의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한공사 소작인과 일반 농민간의 분할전략을 통해 일반 농민들

    의 조직적 저항 가능성을 낮출 수 있었다(최봉대 1994: 122 1̃29).

    세 번째 요인은 좌익에 대한 대대적 탄압(red purge)의 결과였다.

    1947년 9월경에 하지는 군정의 행정부는 우익적이다...... 공산주의자

    들은 정부의 실무수준에는 많이 침투했으나 우리는 너무나 빈번하게 이

    들을 잡아내고 있다 (신복룡 1991(II-2): 26 2̃8)고 고백할 정도로 당

    시의 좌익에 대한 군정의 탄압은 강력했다. 이러한 전국적인 좌익 검거

    의 열풍 속에서 1947년 8월부터 48년 5월까지 좌익신문을 통해 산발적

    으로 확인된 검거자 수만도 총 1300여명에 이르렀고(박찬표 1997:

    243 2̃49) 사회 전반에 걸친 좌익에 대한 검거가 1947년산 하곡수집

    과 미곡수집에 큰 도움이 되었음을 군정당국도 인정했다(W/S No. 106:

    10). 결국 군정당국에 이용당한 과도입의 곡물수집에 효율적인 능력을

    지닌 신한공사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친 레드 퍼지는 1947년 식량정책

    을 둘러싼 여러 갈등수준에도 불구하고 군정당국의 승리를 이끌 수 있

    었다. 는 1946년산 하곡미곡 수집과 1947년산 하곡미곡 수집

    1946년산 하곡미곡, 1947년산 하곡미곡 수집상황

    (단위: 조곡 석)

    구 분 1946년 하곡수집 1946년 미곡수집 1947년 하곡수집 1947년 미곡수집

    전체 할당량

    신한공사소작농할당량

    1985870

    273449

    7945375

    2324031

    1088010

    114277

    9538610

    2944776

    일반농가할당량 1712421 5621344 973277 6593834

    전체

    수집량

    신한공사소작농

    수집량 972310(49.0%)

    222320(81.3%) 6634492

    (83.5%)

    1935881(87.5%) 1071605

    (98.5%)

    115386(101.0%) 9149511

    (95.9%)

    2974991(101.0%)

    일반농가

    수집량749990(43.8%)

    4698611(82.9%)

    956219(98.2%)

    6174520(93.6%)

    출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101 1̃02 재정리.

  •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243

    의 총괄표이다.

    6. 결론

    이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미국에 의해 타율로 이루어진 해방은 미군정기 3년 간에 걸쳐 한

    국의 압축적인 국가형성을 이끌었다. 제2차 대전을 전후로 미국은 세계

    자본주의 유지와 재편성을 세계전략으로 삼았고 이에 가장 큰 걸림돌은

    사회주의 혁명의 발발 가능성이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해방된 한국

    에서 급진적 세력을 저지하고 기존의 부르주아지 지배를 복원유지하기

    위해 구체제가 유지되는 경로의존과정을 따랐고 이에 따라 점진적 전략

    이 취해졌다.

    [2] 점진적 전략 하에 식량정책은 그 당시의 정치사회경제 등의 모

    든 분야가 영향을 받는 정책으로 해방된 한국에서 누가 식량통제권을

    장악하느냐는 곧 누가 한국의 권력을 잡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신복룡 1991(III-3) 301). 따라서 한국의 국가형성을 주도하는 군정

    당국은 식량정책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즉 빈번한 정책전환을 통해

    군정당국이 목표로 한 사회주의 혁명의 방지라는 것을 완수할 수 있었

    다. 부언하면 일반적으로 정책의 일관적 유지가 정책의 효율성을 더 높

    인다고 생각되지만 오히려 정책의 빈번한 전환은 국가형성 주도세력들

    의 목표를 훌륭히 이룰 수 있는 자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3] 1946년과 1947년의 식량정책을 둘러싼 좌익과 우익 그리고 군

    정당국간의 갈등 속에서 군정당국은 빈번한 정책전환 신한공사라는 구

    체제 기구의 유지 무력한 과도입의 그리고 좌익에 대한 무력적 탄압을

    통해 1946년 초기의 할당량 대비 12%라는 저조한 식량수집에서 1947

    년 말경에 가서는 할당량의 98%를 거두는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

    다. 결국 미군정은 식량통제정책을 둘러싼 좌익세력과의 주도권 다툼에

    서 좌익세력을 압도배제시킴으로써 도시와 농촌에서의 불안 요인을 상

    당 부분 제거할 수 있었고 나아가 사회주의 혁명으로까지 진행될 수 있

  • 244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었던 초기의 분위기를 훌륭히 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각

    종 통제기구를 통해 경제정책 전반에 자본주의적 요소를 심어놓을 수

    있었다. 또한 우익과의 갈등 속에서도 우익을 정치적으로 이용함으로

    써 군정이 의도했던 식량수집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미군정의 식량수집에서의 성공은 군정의 사회 전반에 대한 통치력이 증

    가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또한 미국이 한반도에 진주하며 목표로 했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국가형성을 위한 사회적 자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 참고문헌 ▣

    경향신문 독립신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서울신문 조선인민보

    조선일보 중앙신문 중앙일보 한국일보 해방일보 .

    남조선과도입법의원속기록 .

    김성호 외(1989) 농지개혁사연구 농촌경제연구원.

    김종범(1984) 조선식량문제와 그 대책 돌베개.

    김혁동(1995)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설치배경과 운용실태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리처드 D. 로빈슨 저정미옥 역(1988) 미국의 배반 과학과 사상사.

    민주주의민족전선 편(1946) 조선해방연보 문우인서관.

    박성진(2002) 미군정하 식량정책의 형성과 변화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

    과 석사학위논문.

    박찬표(1997)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 미군정기 자유민주주의의 초

    기제도화 고려대학교 출판부.

    신병식(1992) 한국의 토지개혁에 관한 정치경제적 연구 서울대학교 정

    치학과 박사학위논문.

    신복룡 편(1991) 한국분단사자료집(I-IV 전8권) 원주문화사.

    여운홍(1967) 몽양 여운형 청하각.

    원용석(1948) 조선의 식량사정 조선생필품영단.

  •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245

    이강국(1946) 민주주의 조선 건설 조선인민사 후생부.

    이길상 편(1992) 해방전후사자료집(I) 원주문화사.

    이길상(1990) 미군정 시대 연구에 있어서 준비부족론의 문제점 정신문

    화연구 13권 2호.이만규(1947) 여운형선생투쟁사 민주문화사.

    이완범(2001) 삼팔선 획정의 진실 지식산업사.

    이정구(1946) 건국도상의 식량관리 인민과학 1권 2호.이정식(1974) 金奎植의 生涯 新丘文化社.

    이혜숙(1992) 미군정의 경제정책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연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인정식(1949) 조선농업경제론 방문출판사.

    전상인(2001) 고개 숙인 수정주의 전통과 현대.

    정용욱 편(1994) 해방직후정치사회사자료집(5) 다락방.

    조선은행조사부(1949) 조선경제연보 1948 조선은행조사부.

    ---------------------(1950) 경제연감 1949 조선은행조사부.

    차남희(1997) 저항과 순응의 역사정치학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최봉대(1994) 미군정의 농민 정책에 관한 연구: 농민층 통합과 한국 국가

    의 기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한국농촌경제연구원(1986) 농지개혁사관계자료집 제4집 한국농촌경제

    연구원.

    한국산업은행조사부(1955) 한국산업경제10년사 한국산업은행.

    Armstrong Philip Glyn Andrew and Harrison John(1991) Capitalism

    since 1945 Cambridge: Basil Blackwell.

    Badie Bertrand and Pierre Birnbaum(written)Atthur Goldhammer

    (trans.)(1983) The Sociology of the Stat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Baldwin Frank(1973) Introduction. Baldwin Frank(ed.) Without

    Parallel New York: Pantheon Books.

    Bernstein Barton J.(1972) American Foreign Policy and the Origin

  • 246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of the Cold War Bernstein(ed.) Politics & Policies of the Truman

    Adminstration Chicago: Quardrangle Books.

    Cumings Bruce(1973) American Policy and Korean Liberation

    Baldwin Frank(ed.) Without Parallel New York: Pantheon Books.

    -----------------------(1981)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 1̃947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G-2 Weekly Summary(W/S)

    Gayn Mark(1948) Japan Diary New York: William Sloane Associates

    INC.

    GHQ SCAP(1946) Summation of Non-Military Activities in Japan and

    Korea(Summation No. 1-5).

    -------------------------- Summation of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Activities In Korea(Summation No. 6-22).

    Haggard Stephan(1986) The Politics of Adjustment: Lesson from the

    IMF's Extended Fund Facility Kahler Miles(ed.) The Politics of

    International Debt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0) Pathway from the Periphery:

    The Politics of Growth in the Newly Industrializing Countries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Hoag C. L.(1970) American Government in Korea: War Policy and the

    First Year of Occupation 1941 1̃946 Washington D. C.: OCMH at

    Department of the Army.

    HUSAFIK(History of the U.S. Armed Forces in Korea)(1948)

    Washington D.C. U.S. Army Historical Manuscript File.

    HUSAMGIK(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Washington D.C.: U.S. Army Historical Manuscript File.

    Kolko Joyce and Kolko Gabriel(1972) The Limits of Power: The

    World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 1945 1̃954 New York:

    Harper & Row.

  • 한국의 국가형성과 미군정기 식량정책 247

    Lauterbach Richard E.(1946/1947) Danger from the East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ers.

    Meade E. Grant(1951)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New

    York: King's Crown Press.

    Millet Allen R.(1997) Captain James H. Hauseman and the Formation

    of the Korean Army 1945 1̃950 Armed and Forces Society Vol.

    23 No. 4.

    Myrdal Gunner(1957) Economic Theory and Under-Developed

    Regions London: G. Duckworth.

    Nielsen Klaus Jessop Bob and Hausner Jerzy(1995) Strategic

    Choice and Path-Dependency in Post-Socialism Aldershot: Edward

    Elgar Publishing Co.

    Przeworski Adam(1991) Democracy and the Market: Political and

    Economic Reforms in Eastern Europe and Latin America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Skocpol Theda(1979) States and Social Revolutions: A Comparative

    Analysis of France Russia and China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Stark David(1992) Introduction East European Politics and

    Societies Vol. 6 No. 1.

    Tilly Charles(1975) Food Supply and Public Order in Modern

    Europe Charles Tilly(ed.) The Formation of National States in

    Western Europ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Tilly Charles(1990) Coercion Capital and European States: AD

    990-1992 Cambridge: Basil Blackwell.

    U.S. Department of the State(1966) FRUS: 1944 Vol. V The Near

    East South Asia and Africa Washington D.C.: USGPO.

    -------------------------------------------(1969) FRUS:

    1945 Vol. VI The British Commonwealth The Far East

    Washington D.C.: USGPO.

  • 248 제2회『사회연구』 학술상 수상논문

    USAMGIK(1947) National Economic Board in Cooperation with U.S.

    Department of State Survey of Grain Collection in South Korea

    1946.

    Wedemeyer A.C.(1951) Report to the President: Korea 1947

    Washington D.C.: USGPO.

    森田芳夫(1980) 朝鮮終戰の記錄: 資料編 第一卷 東京: 巖南堂書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