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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言敎會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Sermon on the Christian Life 01 사람의 최고의 목적과 성경과 교회 개혁교회 기본도리 시리즈 세 개가 하나 되는 네 쌍의 신앙고백에 기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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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言敎會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Sermon on the Christian Life

01

사람의 최고의 목적과

성경과 교회

개혁교회 기본도리 시리즈

세 개가 하나 되는 네 쌍의 신앙고백에 기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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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최고의 목적과 성경과 교회 (전 12:3)

첫 번째 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1문답은 다음과 같이 묻고 대답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

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대답). 신앙고백문답의

첫 번째 질문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시작되며, 그에 대답은 그야말로 명답 중의

명답으로 평가 됩니다. 아마 이런 의미에서 존 머레이 교수는 이 신앙고백문답을

가리켜 “세상에 존재하는 문서들 가운데 가장 최고의 문장력이 돋보이는 내

용”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로 제시되는 질문과 대답이 간단 명료하

면서도 핵심적입니다. 그렇지만 의미가 대단히 함축적이어서 깊은 숙고와 사색이

뒤따르지 아니하면 충분한 의미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본 질문의 핵심은 ‘성경적 인간관’의 바른 정립과 이해에 있습니다. 일찍이 전

도서 기자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

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고 했습니다. 여기서 ‘본분(本分)’이라는 단

어는 주목을 요합니다. 이 단어를 영어역(NIV)에서는 ‘의무(duty)’로 번역하였습니

다. 그렇지만 이 단어를 순수한 우리말로 풀어 설명하면 ‘사람됨의 본질’, 혹은 ‘사람됨의 가치’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전도서 기자의 말인즉, 사람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께 감심으로 순종하는 자’가 될 때에, 비로소 사람다운

가치를 온전히 나타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솔로몬인 사실을 고

려하면, 그의 이와 같은 고백은 실로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윗의 영광을 계승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야말로 인간이 누려볼 수 있

는 모든 것을 다 누려본 사람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사실 인간은 창조된 존재인고로 창조주께 의존하는

한에 있어서 비로소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요, 그리하여 그 생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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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적 성격을 온전히 발휘하여 그야말로 영원무궁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타락과 상관 없는 상태에 놓였던 최초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죄

에 빠져듦에 따라 인간은 무궁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축복을 상실하고, 저주로

떨어진 생명으로서의 무궁한 고통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곧 그 후에 바로 들어가게 될 영원한 형벌을 보증하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죽음의 필연성을 들어, 곧 이어지게 될 심판의 당연성을

증거합니다(히 9:27).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저주와

사망이 더 이상 왕노릇 하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

는 능력이 죄의 왕노릇 하는 권세보다 더 강한 권세로써 작동하기 때문입니다(롬 5:12-21). 더 강한 권세자께서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시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구원

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그에 따라 우리는 구원을 받아 새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롬 6:2-5). 이때 새 생명의 특징은 본래 인간이 처음에 타락하기 전에 누

리던 삶의 목적을 회복한 데서 드러나게 됩니다. 타락이 들어오기 전에 에덴 동

산에서 누리던 아담과 하와의 삶의 양식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복음의 목적인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할 중요한 의무

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여기 신앙고백문답 제1문답이 묻고 요구하는 대답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

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가르치며, 또한 “우리 중에 누

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

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라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누리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들 거듭난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창조의 목적이 회복된 것이요, 이런 의미에서 ‘새

창조물(a new creature)’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불리웁니

다. 역사적 개혁파 교회는 이 중요한 원리를 신앙으로 고백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특별히 교회의 예배를 통하여 일차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궁극의 기

관이 되게 하시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이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러한 예배가 보존되고 계속 진행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터전이요, 기관입니다. 물론 이러한 예배는 단순히 주일 오전 11시에

모여서 절차를 진행하는 한 시간의 의식 그 자체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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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주일에 드려지는 예배는 한 주간의 삶 전체를 대표하는 의미를 가지기 때

문입니다.

다음으로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

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과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령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그 무엇을 즐거워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

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현세를 벗어나 속히 내세에 들어가기를 그리워하는 이유

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부족한 사람들의 말처럼 그곳에 가면 아무 일을 안 해

도 먹을 것이 뚝 뚝 떨어지는 그런 풍족한 곳이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참된 이

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나라에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

을 뵈옵게 되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데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항상 그것의 동기의 순수성 문제입니다. 우리

는 어떠한 동기로 신앙생활을 합니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모든 기독교적인 영역에 속하게 되었

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됨에 있어서 아무 것도 대가를 지불한 것이 없는데, 그렇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

은 오직 하나님께서 선물로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물의 가치가 그야말

로 상상을 초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친히 세상에 들어오신 가운데 그

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 ‘자기를 대속물로 내어주려 함에 있다’(막 10:45)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 자신을 즐거

워하는 것이 신앙의 동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얻

어내기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 그분 자신을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물질적인 복을 내려주시는 것도 감사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때 그러한 축복의 원천이신 하나님 자신을 제쳐놓

고, 축복 그 자체만을 즐거워한다면 아주 잘못된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말

하듯이 자식이 아버지를 즐거워하지 않고, 아버지께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재산

에 집착한다면, 이 얼마나 불쾌하고 가당치 않은 태도이겠습니까? 인간의 입장에

서 볼 때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겠습니까?

오늘날 다수의 부흥사들이 구약성경을 왜곡시켜 잘못된 복음인 기복주의를

전파하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사실 구약의 성도들조차도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축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 자체를 즐거워했습니다. 시편

에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시 73:25)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시인은 “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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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

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라고 했습니다.

시인들의 이와 같은 고백은 진공 상태에서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시인들

의 고백은 자기들의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자기에게 어떠한 분이 되시는가를 아

는 지식에서 나왔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아는 지식만이, 하나님과

의 교제를 즐거워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러한 앎은 단순히 정보의 습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나

누는 바, 교제(交際)의 과정을 거치면서 확신에 이르게 된 지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차원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고백이 실제적인 삶으로 구현될 수 있었습니

다.

오늘날 우리에게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통상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은 자주 하지만, 그렇게 자주 말하는 만큼에 비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

혜의 분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생각함에

있어서 기껏해야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분이라고 하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

는 데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지금 우리는 순수 기독교가 기복주의로 변질된 시대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 앞에서 심각해져야 합니다.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조건

으로, 무슨 육체의 질병을 고침 받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는 옳지

못한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자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즐거워하는 자세가

될 수 없고, 단지 하나님을 이용하기만 하는 못된 자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오직 섬김과 사랑의 대상

이십니다. 그 절대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으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영

생에 이르게 하시려고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데 대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

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

셨느니라”(롬 5:8).

과연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

상 심판에 떨어져야 하는 죄인의 신분에 놓여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

라 황공하게도 하나님의 아들로까지 받아들여졌고, 게다가 하나님의 유업을

“주님을 따르지 않으려면, 주님을 빙자하지 말고, 내게서 배우지 않으려면, 나를 들먹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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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

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

니라”(갈 4:4-7).

두 번째 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의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을 이루는 방법과

수단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규칙을 우리에게 주시어 어떻게 자기

를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것을 지시하셨습니까(제2문)?” “신구약 성경에 기재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것을 지시하

는 유일한 규칙입니다”(대답).

복음은 그 성격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과 방법조차도 하나님께로부

터 온다는 진리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

워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이 본분을 이루는 방편과 수단으로 성경(聖經)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서의 권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성경의 권위에 절

대적으로 순복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은 영화로워지실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성경을 충실히 따르는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을 생각할 때에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전제가 있음을 선포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문제입니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전체적으로 타락한 존재인 까닭에 하

나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비로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

의 도움을 받음이 없이 자기 생각에 옳다고 생각되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하는 이 중요한 사실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갖가지 타락한 경배 형태에 빠져버리게 됩니다(롬 1:18-32).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철저하게 부패했기 때문에 성경을 주셨고, 따라서 우리

는 신앙을 진행함에 있어서 성경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바, ‘계시의존사색신앙

(啓示依存思索信仰)’ 원리를 추구해야 하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방법과 수단을 떠나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불변의 법칙으로 알아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을 충분히 내셨습니다. 결국, 성경은 교회

를 발생시키기 마련이고, 그로 말미암아 발생된 교회는 성경의 진리 안에 굳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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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명을 수행케 됩니다.

성경의 결과가 교회이며,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성립합니다. 또한 성경은 부

족한 것이 없으며, 완전하며 충족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순종

하는 것 이상으로 충만하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방법도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익한 호기심에 이끌려 자꾸 새로운 것을 계발(啓發)하거나 개

발(開發)하려 들지 말고, 이미 수립되어 있는 원리에 보다 더 충실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존재인 까닭에 밝히 주어진 진리를 보수

하는 일에서조차도 치명적으로 무능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신

학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보수적이어야 하며, 실천에 있어서 철저하게 개혁적이어

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에 있어서 성경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원리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적용의 실례를 보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통상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라는 주제를 내세우곤 합니다. 만일 이 말이 ‘성경으로 돌아

가자’라는 의미라면 옳게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초대 교회 당시에

일어났었던 ‘초월적인 부흥의 역사’를 답습해 보겠다는 욕심으로 이러한 주제를

설정하는 교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초대 교회의 특성의 진정은, 그러한

초월적인 부흥 사건’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사도적 교회’로서의

‘성경적 교회’였다는 데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초대 교회의 삶은

하나님께서 흡족히 받으시는 신앙생활을 구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초대 교회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교회였습니다.

강조할 필요가 있거니와 초대 교회의 특성은 철저하게 사도적 교회였다는 데

서 찾아지며, 이것은 곧 성경에 충실한 교회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은 영화로워지십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초대 교회의 원리로 돌아가

야 합니다. 오늘날 성경에 충실한 교회가 바로 ‘정통적 교회’인 것이요, ‘사도적 교

회’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교훈을 붙잡는 데서 그 교회는 비로소 정통적 교회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가르침은, 마치 예수님의 가르침이 구약성경의 가르침

과 분리되지 않듯이,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습니다(엡 2:20-22), 사도들은 교회를 세

움에 있어서, 실제적인 삶을 통하여 신앙고백을 전수시켰고, 교회의 질서인 직분

을 제정하였으며, 사도적 정경을 기록하였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원리, 곧 성경의

진리에 굳건히 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이며,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세를 견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성경은 우리로 하

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것을 지시하는 유일한 규칙입니다. 그러

면 이때 성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여 교회를 건강하게 이루어내

는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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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편이요, 그 수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주어져

있는 사실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지 아

니하셨다면 우리는 큰 어두움에 빠져서 방황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격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보다 더 잘 반영해낼

수 있게 되며, 거듭난 새 생명의 특성을 풍성하게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라고 하였고,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

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

의 말씀에 의존되는 방식으로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아니 오직 말씀만이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시 19:9)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교회에 위탁하시사 당신을 영화롭게 하게 하셨

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과 이 성경을 잘 보존하고 해석하

고 선포하는 기관으로서의 교회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실상 교회의 권위는 성

경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또한 교회를 통해서만 보존되고 해석됩니

다. 이렇게 볼 때에 교회는 진리를 증거하는 기관이기 이전에, 먼저 그러한 진리로

써 성립되어 있어야 함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교회와 성경은

동등의 권위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원리를 놓고 볼 때에 성경은 교회원 개개인에게 위탁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교회 공동체에게 위탁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참된 교회

안에서만이 비로소 성경은 정당하게 해석되고, 성령께서 쓰시는 방도가 되어 효

력을 드러내게 됩니다. 즉 원리상으로는 참된 교회가 없이는 성경은 독자적으로

활동하거나 효력을 발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을 잘 배우고

잘 가르쳐야 하는 의무를 지닙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다름 아닌 바

로 교회를 세우는 일인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영화롭게 되어지시며, 우리는 하나님을

교회란, “하늘에 좌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므로,

구원 받음은 ‘교회 바르게 이루기’와 분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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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워하는 삶을 사는 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바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는 때문입니다. 이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희생시

키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셨습니

다. 독생자 안에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던 때의 목적을 회복하셔서, 역시 독생

자 안에서 인간의 본분을 펼쳐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을 영화

롭게 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인생의 근본적인 목적이 될진대, 이것은 성경적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

의 근원이 되고 밑바탕이 되는 성경을 그대로 계승받고 보존하여 다음 세대로

계승시키는 일을 충실하게 감당할 때, 비로소 교회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에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원리에 따라 각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가 수행해야 할 시대적인

사명도 부각되는 것입니다. 먼저, 철저하게 성경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이때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올바른 교회를 세워나간

다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과 교회의 통일

성을 잘 나타내야 합니다. 지금과도 같이 성경이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전락되

어서는 안 되고, 교회는 철저하게 성경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문답

신앙고백문답의 세 번째 질문은, 앞에서 진술된 두 번째 질문을 좀 더 구체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으로서의 성경의 주요한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인간의 본분’에

대한 것이었고, 두 번째 질문은 ‘성경의 목적’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제 세 번째 질

문에서는 ‘성경의 내용’에 대한 것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제일 요

긴하게 교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제3문)?”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교훈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여 어떻게 믿을 것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

무에 대한 것입니다”(대답).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크게 두 가지이니,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하는

내용으로서의 ‘진리 체계’와 그러한 진리 체계에 대한 순종으로서의 ‘행위 문

제’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교리(敎理)와 실천(實踐)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칭의

의 구속에 뒤따르는 거룩한 삶을 강조합니다. 오늘날 일부에서 교리에 대해 ‘말라

빠진 교리’라고 천대하면서 ‘실천적 사랑의 행위’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봅니다. 아마도 이신칭의로 말미암는 구원 개념을 오해하여 행위가 뒤따르지 아

니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비판하는 데서 나오는 반동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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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행위의 근거이고, 올바른 신앙생활의 기초가 됩니다. 바르게 아는 데서 바른

순종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의 합당한 행위를 이끌어내려 함에 있

어서 먼저 교리를 선포합니다.

교리에 입각하지 않는 도덕적이고도 윤리적인 선행 추구는 일종의 도(道)를

닦는 ‘수양 종교’는 될 수 있을는지 몰라도, 궁극적 구원을 현재적으로 누리는 특

성의 기독교를 표현하는 방식인 것은 아닙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감심

으로 순종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나아가 양자로까지 삼아주신 일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

사실을 확실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데 기초합니다.

누구라도 자신에게 이루어진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서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근거하여, 피택자의 전인(全人) 안에서 행하신 구

체적인 역사(役事)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요, 더불어 교제하는 것의 의미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께 올리는 순종의 삶을 통하여 전개되며,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

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일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으려면

거듭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거듭남의 근원이 되어주

신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

서 거듭난 존재인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거듭남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和睦祭物)로

삼으셨습니다(롬 3:25). 이처럼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동적인 행위로 말미암

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인 것이요, 결코 단순한 느낌이나 감정, 기분

혹은 어떤 종교적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당연히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구원 받은

목적에 대한 관심에로는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법입니다.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의 경우와 별달리 구별

되지 않는 불분명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대개 자신에게 이루어진 구원이 의미

하는 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여러 가지 종교적인 분위기

와 형식들에 젖어 있는 것을 통하여 그저 막연하게 구원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나갈만한 ‘구원론적 이해력’이

전무합니다. 이 때문에 자신이 외형적으로 처해 있는 종교적인 환경들에 비견할

만한 ‘새 사람의 능력’은 발휘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감정적인 분위기에 빠져들

때는 틀림 없이 구원 받은 사람인 것 같은 확신이 생기지만, 어떤 습관적인 죄 문

제와 관련해서는 도무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인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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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복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여 이신칭의와 그로 말미암은 하나

님의 자녀됨이라고 하는 자신의 신분을 과감히 주장해 나갈만한 ‘논리적 구원

론’이 자기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규칙과 질서가 없고 그저

매사에 즉흥적으로 움직입니다. 어쩌다 내는 열심도 순전히 자의적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는 일체의 자의적 숭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법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제아무리 외형적으로는 갖가지 기독교적 요소들로

치장할지라도, 내면적 실상이 성경적이지 못하게 되면, 그러한 모든 것들은 자의

적 숭배일 뿐이며, 자의적 숭배는 ‘신(新) 우상주의(偶像主義)’의 일환일 뿐입니다.

한 번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일찍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등록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일에는 빠짐 없이 열심히 예배에 참석합니다. 나름대로 기도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 진행하는 바자회

에도 가담합니다. 물론 여름이 되면 소중한 휴가를 아끼지 아니하고 교회의 수련

회에 기꺼이 투자(投資)하고 참가(參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행위들

을 가능케 하는 동기 혹은 근거를 볼 것 같으면 그야말로 막연한 도덕심 내지는

군중심리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나 원리 혹은 방향을 구체적으로 깨

닫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에 의지적으로 자신을 적용시켜 나가는 방식

이 아닌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람은 그저 그 시대의 기독교적 유행을 답습해 나가

는 수준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따라서 가끔씩 성경을 연구하는 것조차도 그러한

자신의 생각에 양념치는 듯한 자세로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의적인 신

앙생활은 결국 자신의 의지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이 사람에게서의 기

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어느덧 자기라고 하는 종교적 인격체를 좀 더 윤택하게

하는 수단들 중의 하나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내신 방식에 순종하는 성격의 경배가 아니면 어

떠한 경배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

서 그들에게 명하지 아니한 다른 불을 드렸다는 오직 이 한가지 이유 때문에 징

계를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레 10:1). 그것이 차원 높은 수준의 윤리적인 것이었

느냐, 아니면 보다 더 깊은 헌신으로의 자기 희생적이었느냐의 정도에 따라, 하나

님께서는 그 사람의 경배를 받고 안받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핵심은

단지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방식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성격상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고, 한정되

고, 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예배의 중요한 원리로 선포합니다. 선포하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이라고 하는 큰 원리에 입각하여, 그리고 그 성격에 부합되게끔 가르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계시하는 바에 따

라 드려지는 예배라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는 결론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지 아니하는 지성주의는 기독교의 큰 대적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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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당신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대답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데서 찾아진다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게 행하신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바르게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많은 부분에서 미신으로 오염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

경은 첫째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며, 다음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수단이 됩니다(딤후 3:15-17). 하나님은 자기의 모든

것을 성경으로써 계시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순종이라고 하는 방식이

아니면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합당이 경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경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합당이 섬

기게 합니까? 성경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라고 하는 큰 기둥을

제시합니다. 우리의 인격에게 이루신 ‘구원의 큰 일’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것입니

다. 그러면 또 다시 이렇게 질문해 봅시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받아들인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믿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

루야!”라고 감정을 격정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을 가리킵니까? 물론 때에 따라서는

이런 것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그야말로 구원을

처음으로 받아들이던 당시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감정의 초보적 발산이어야 합니

다. 일년 내내 아니 몇 십 년이 자나가도록 그러한 소리만 하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그 구원방식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을 떠나서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계속해서

구원하신 목적을 깨닫는 단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성경의 전체 구조가 이렇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

신 구원방식을 선포합니다. 즉 교리가 진술되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로, ‘그러므

로’라고 하는 말로써 그렇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마땅히 진행해야 할 새 생명

의 원리에 대해서 실천적으로 진술하는 것입니다. 교리와 생활이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이런 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바르게 섬기게 하

시고 또한 그 요구하시는 의무에 바르게 순종하게 하십니다. 이런 윈리로 말미암

아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중요한 신학적 명제들을 알아

야 하는 의무에 이르게 됩니다. 속죄, 화해, 하나님의 나라, 새 생명, 성령 충만, 구

“설교자가 말씀의 학생이 되려 애쓰지 않는다면,

강단에 올라갈 때에 목이 부러지는 것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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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사, 심판, 교회, 은사, 은혜, 제자, 집사, 사도신경, 기도, 그리스도의 영, 예배 등등의

수많은 신학적 개념들로 표현되고 있는 구속적 진리들의 의미를 알고, 거기에 자

신을 적용해 나가는 데서 비로소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보다 풍성하게 구현해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이 모든 개념은 ‘교회’라고 하는 대표적인 명제 아래 속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아는 지식은 구원론적인 근거를 가집니다. 따라

서 올바른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일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을 믿

는 믿음의 방식이 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마 16:18). 계시의 구조 안에서, 문자적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교회의 출현을 계시하는 모형이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교회 출현을 가리키던 계시를 완성하셨고,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몸을 양육하시는 구주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단순히 기

독교적 용어를 사용하는 종교인들의 모임에 불과한 것에 지날 수 없는 법이며, 거듭난 피조물로서의 새 생명 권세를 실제적으로 발휘하는 구원의 실존체가 됩

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요, 그 영광스러운 현현의 극치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어야 합

니다. 구원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아는 지식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아는 지

식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교회를 아는 지식인 것이

요, 교회를 아는 지식에 속하지 않고서는 일체의 기독교적 교리들은 무익한 관념

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원리는 실천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교

회를 이루어 나가는 일로 연결되지 않는 채로는 어떠한 기독교적인 선행도 합당

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즉 교회의 교회됨을 이루는 일에 이바지 되지 않는 개

인의 경건은 일종의 수양(修養)으로 전락할 뿐인 것입니다.

정리와 결론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인간의 본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데 있습니다(제1문답). 물론 이것은 인간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로는 누구라도 하나님을 섬기

거나 즐길 수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반드시

성경을 필요로 합니다(제2문답). 즉, 성경은 구원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첫 번째 문

답을 이루는 수단과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

여 어떻게 믿을 것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가 무엇인가를 가르

쳐 줍니다(제3문답). 그런데 이처럼 구원 받은 사람과 성경과의 만남, 바로 이 만남

의 사실, 또는 결과가 맺어내는 열매가 있는데, 곧 교회(敎會)입니다. 이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가입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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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결과인 교회, 또는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에 속하여, 성경

의 선포를 믿고 성경의 가르침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영화롭

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게 됩니다.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3개 1조 4쌍의 신앙고백

시작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정착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제네바 교회 신앙고백 21개조 (Geneva Church Confession, 1536)

제네바 교회 신앙교육서 33개조 (Geneva Church First Catechism, 1537)

제네바 교회 신앙고백문답 373문답 (Geneva Church Catechism, 1542, 1545)

벨기에 신앙고백 37개조 (Belgic Confession, 1561)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129문답 (Heidelberg Catechism, 1563) 도르트 신조 5개 교리 (Canons of Dort, 1618/9)

형성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종결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프랑스 (갈리아) 신앙고백 40개조 (France [Gallican] Confession, 1559)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25개조

(Scots Confession, 1560) 스위스(헬베틱) 신앙고백 30개장

(Swiss [Helvetic] Confession, 1536, 156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3개장 (Westminster Confession, 1643-9) 웨스트민스터 대신앙고백문답 196문답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3-9)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107문답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3-9)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主言敎會

교회의 ‘설교문’은 목사의 생활을 지지해주는 교회의 위임 아래 수행된 것이므로, 설교자 개인이 아닌 교회에 모든 권리가 있습니다. 주언교회는 “거룩한 공회와 ...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바에 따라, 보편의 참된 교회를 섬기는 일환으로 본 설교문을 이익과 결부된 책으로 판매치 아니하고 공개리에 배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