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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1. 머리말 2. 巨濟島 지역의 僑郡 1) 巨濟縣 2) 松邊縣․鵝洲縣 3) 溟珍縣 3. 南海島 지역의 僑郡 1) 南海縣 2) 蘭浦縣․平山縣․興善縣 4. 연안 지역의 僑郡 : 梁州 5. 맺음말 1. 머리말 고려의 지방제도는 外官邑司의 행정적 상하관계를 바탕으로 편성된 縣-屬縣體系 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이 체계는 외관의 增置에 따라 점차 수 령 중심의 운영체계로 전환되어 나갔다. 이와 함께 兩界의 군사적 운영체계가 해소되어 南道와 같은 체계로 전화되어 나감으로써 일원적인 지방제도가 자 리잡게 되었다. 이 과정은 조선초기까지 이어졌다. 1) 1) 이러한 추세 속에 고려후기의 지방제도는 전기 이래의 체계가 유지되는 한 편에서 새로운 운영이 모색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 시기 지방제도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이 작업은 고 려 지방제도의 성격을 구체화하는 방안인 동시에 조선 지방제도의 역사적 의 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불가결한 토대가 된다. * 이 논문은 2006년도 정부재원(교육인적자원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학술 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KRF-2006-321-A00218) 1) 尹京鎭, 2000 高麗 郡縣制構造運營 , 서울대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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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

    -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윤 경 진

    1. 머리말

    2. 巨濟島 지역의 僑郡

    1) 巨濟縣

    2) 松邊縣․鵝洲縣

    3) 溟珍縣

    3. 南海島 지역의 僑郡

    1) 南海縣

    2) 蘭浦縣․平山縣․興善縣

    4. 연안 지역의 僑郡 : 梁州

    5. 맺음말

    1. 머리말

    고려의 지방제도는 外官과 邑司의 행정적 상하관계를 바탕으로 편성된 主

    縣-屬縣體系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이 체계는 외관의 增置에 따라 점차 수

    령 중심의 운영체계로 전환되어 나갔다. 이와 함께 兩界의 군사적 운영체계가

    해소되어 南道와 같은 체계로 전화되어 나감으로써 일원적인 지방제도가 자

    리잡게 되었다. 이 과정은 조선초기까지 이어졌다.1)1)

    이러한 추세 속에 고려후기의 지방제도는 전기 이래의 체계가 유지되는 한

    편에서 새로운 운영이 모색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

    시기 지방제도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이 작업은 고

    려 지방제도의 성격을 구체화하는 방안인 동시에 조선 지방제도의 역사적 의

    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불가결한 토대가 된다.

    * 이 논문은 2006년도 정부재원(교육인적자원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학술

    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KRF-2006-321-A00218)

    1) 尹京鎭, 2000 高麗 郡縣制의 構造와 運營 , 서울대박사학위논문.

  • 180 韓 國 文 化 40 ․

    하지만 이에 대한 연구성과는 그리 많지 않다. 주요 연구 성과를 살펴보면,

    우선 조선 지방제도가 성립하는 前史로서 고려후기의 변화 내용을 정리한 연

    구가 있다.2)2)이것은 고려후기 지방제도의 모습을 전반적으로 정리하였다는 점

    에서 이 분야의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되지만, 조선 지방제도를 준거로 앞

    시기를 조망했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한계를 가진다. 이외에 鄕․部曲의 변질

    과정에 대한 연구,3)3)중기부터 파견되기 시작한 監務에 대한 연구,4)4)14세기 군

    현 구조와 외관제에 대한 연구5)5)정도가 이루어졌을 뿐이다.

    한편 아직 연구자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문도 발견되는데, 그 중 특히 주목

    되는 것이 바로 僑郡이다. 교군이란 특정 군현이 원래 설치되었던 지역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에 임시로 설치 운영되는 것을 말한다. 교군의 이념적 연원

    은 중국 고대에 諸侯가 자신의 領地를 잃고 다른 제후에게 의탁하는 데서 찾

    을 수 있다. 이것이 군현제 하에서 원용된 것이 바로 교군이라 할 수 있다.

    교군은 전란 등으로 군현 주민이 대규모로 이주하게 될 때, 이들을 관할하

    는 행정 관부까지 함께 이동함으로써 설치된다.6)6)곧 주민이 다른 군현으로 이

    주하였다고 해서 그 군현의 주민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종전과 마찬가지

    로 군현으로 유지되며 행정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군현의 구성 요소

    가 주민과 관부, 영역이라 할 때 교군은 이 중 영역의 요소가 빠진 형태라 할

    수 있다.

    교군은 원칙적으로 故土를 회복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도록 예정되어

    2) 李樹健, 1984 「朝鮮初期 郡縣制整備와 地方統治體制」, 韓國中世社會史硏究 , 一潮閣.

    3) 朴宗基, 1980 「高麗時代 鄕․部曲의 變質過程」, 韓國史論 6 ; 1990 高麗時代 部

    曲制硏究 , 서울大學校出版部.

    4) 元昌愛, 1984 「高麗 中․後期 監務增置와 地方制度의 變遷」, 淸溪史學 1 ; 羅恪

    淳, 1988 「高麗時代의 監務에 대한 硏究」, 閔丙河停年記念論叢 ; 金東洙, 1989 「고려 중․후기의 監務 파견」, 全南史學 3 ; 이인재, 1990 「고려 중․후기 지방

    제 개혁과 감무」, 外大史學 3.

    5) 張東翼, 1983 「高麗後期 守令 任命 實態 : 14세기 慶州․永州․安東․羅州 先生

    案을 중심으로」, 경북대학교논문집 36 ; 박종기, 1994 「14세기 군현구조의 변동

    과 향촌사회」, 14세기 高麗의 政治와 社會 , 민음사 ; 윤경진, 2003 「고려후기

    先生案 자료를 통해 본 外官制의 변화」, 國史館論叢 101.

    6) 교군은 해당 치소가 자신의 영역 범위를 넘어 다른 군현 지역으로 들어간다는 점

    에서 동일 군현 영역 안에서 치소를 옮기는 것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181

    있기 때문에 그 운영은 임시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또한 교군은 대개 인

    구가 격감하고 생산력 기반이 취약해지기 때문에 수취 부담에서도 명백한 한

    계를 가진다. 정부와 주민 모두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원래 자리로 돌리려는

    노력을 하지만, 교군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고 원래의 자리에 복구되기도 어려

    운 경우에는 폐지되어 다른 지역에 통합될 수도 있다. 곧 교군은 복구와 폐지

    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연혁을 밟게 되는 것이다.

    교군의 대표적인 예는 중국 南北朝 시대에 漢人 왕조가 남쪽으로 이동하면

    서 당시 州縣들도 함께 이동하여 운영된 것을 들 수 있다.7)7)우리나라에서는

    고려후기에 교군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주된 원인은 바로 倭寇의 침탈

    이었다. 원간섭기 말부터 급증한 왜구로 인해 서․남해 島嶼 및 沿岸 지역의

    군현 주민들이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주민들을 내륙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도서와 연안 지역은 왜구의 침입에 가장 취약하였기 때

    문에 이들을 내륙 지역으로 이주시킨 것인데, 이로 인해 교군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8)8)

    이러한 설치 경위에서 드러나듯이 교군의 존재는 영역보다는 주민 쪽에 통

    치의 중심이 놓이는 전근대 지방제도의 기본적인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검토는 군현제의 운영원리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특히 고려말 조선초의 교군은 그 연혁이 동시기에 진행되는 군현제

    의 전면적인 개편과정과도 맞물려 있다. 이 점에서 교군에 대한 검토는 이 시

    기 지방제도 변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본고는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고려말 조선초에 설치되어 재편 과정을 겪

    7) 중국 남북조 시대 교군의 설치에 대해서는 朴漢濟, 1996 「東晉․南朝史와 僑民 :

    ‘僑舊體制’의 形成과 그 展開」, 東洋史學硏究 53 ; 박수정, 1999 「東晉시대 僑州

    郡縣制의 성립」, 中央史論 12․13합 참조.

    8) 이에 앞서 몽고의 침입으로 西北面 지역의 州鎭이 海島에 入保하였다가 出陸하는

    과정에서 일부 僑郡이 발생하였고, 전쟁 후에는 東北面 북부 지역이 몽고(元)에

    몰입되면서 이 지역에 있던 州鎭들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역시 僑郡으로 운영된

    일이 있었다. 이 때의 교군은 관련 사적이 자세하기 않은 데다가 양계라는 지역

    적 특성도 개재되어 있어 그 내용이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반면 왜구로

    인해 발생한 남도 지역의 교군은 내용이 구체적이고 자료가 상대적으로 분명한

    만큼 이에 대해 먼저 검토하려는 것이다. 양계의 교군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작업

    을 통해 차례로 분석할 예정이다.

  • 182 韓 國 文 化 40 ․

    는 교군에 대해 검토하려는 것으로, 우선 경상도 지역에서 발생한 사례를 중

    심으로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이는 다시 거제도 지역, 남해도 지역, 그리고

    연안 지역 등 세 권역으로 나누어진다. 이들 지역에서 교군의 사례를 추출하

    고,9)9)이들이 최종 복구 또는 폐지될 때까지 밟게 되는 연혁 과정을 분석할 것

    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견되는 지리지 연혁의 오류에 대해 보정 작업을

    병행할 것이다.10)10)한편 같은 시기 전라도 및 충청도 지역 등에서 발생한 교군

    에 대해서는 후속 논고로 정리할 것이다.

    2. 巨濟島 지역의 僑郡

    고려전기 거제도에는 縣令官인 巨濟縣과 그 속현으로 溟珍縣․松邊縣․鵝

    洲縣 등 모두 4개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중 명진현에는 뒤에 監務가

    설치되어 행정체계가 분리되었고, 나머지 두 군현은 고려말까지 거제현의 속

    현으로 유지되었다. 왜구의 침입으로 거제도 일원도 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들 군현은 왜구를 피해 내륙으로 이동하였다. 먼저 거제현의 僑寓 연혁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나머지 군현의 교우 양상을 정리하기로 한다.

    9) 新增東國輿地勝覽 에서 邑城과 樓亭 등의 항목에는 그와 관련하여 작성된 記文

    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글은 대개 서두에서 해당 군현의 연혁과 관련하

    여 특기할 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이 중 도서 및 연안 지역의 군현으로서 僑寓

    를 경험한 경우에는 그 사실을 자세히 제시하고 있어 이를 통해 교군의 사례와

    구체적인 연혁을 확인할 수 있다. 경상도 도서 및 연안 지역의 군현 중에서 지

    리지 연혁에 僑寓 사실이 나오는 것은 巨濟縣과 溟珍縣, 南海縣 등 세 군현 뿐

    이다. 그런데 문집 자료를 통해 梁州의 교우 사실이 확인된다. 그밖에 거제현의

    속현인 松邊縣과 鵝洲縣, 남해현의 속현인 蘭浦縣과 平山縣은 신증동국여직승

    람 의 古跡 항목과 主縣과의 행정 관계 등을 통해 교우 사실을 확인 또는 유추

    할 수 있다.

    10) 교군에 대한 검토는 조선초기 연혁까지 포괄하므로 세종실록 지리지의 연혁을 주된 자료로 활용하고 필요에 따라 고려사 지리지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의 연혁을 參用할 것이다. 또한 병합된 교군이 분리 복구되는 연혁이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여타 자료를 통해 보

    정하였다.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183

    1) 巨濟縣

    세종실록 지리지에 정리된 거제현의 고려말 조선초 연혁은 다음과 같다.

    ① 元宗十二年 辛未 因倭失土 僑寓居昌之加祚縣

    ② 本朝 太宗 甲午(태종 14, 1414) 合于居昌 號濟昌縣

    ③ 乙未(태종 15, 1415) 復析爲居昌縣

    ④ 今上四年 壬寅(세종 4, 1422) 復還舊島 以四品以上 充知縣事

    위의 연혁 ①을 보면, 거제현이 교군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원종 12년

    의 일로 되어 있다. 또한 거제현이 교우하던 加祚縣의 연혁에도 “元宗辛未 移

    屬巨濟”라고 하여 같은 시점을 명시하고 있다.11)11)

    그러나 고려의 연안 및 도서 지역이 왜구의 침탈로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충정왕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倭가 固城․竹枺․巨濟를 노략질하니 合浦千戶 崔禪와 都領 梁琯 등이 싸워 격

    파하고 300여 급을 斬獲하였다. 倭寇의 침탈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12)12)

    거제․고성 지역은 대마도와 최단거리에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왜구의 피해를 입었다. 위에서 그 시점이 충정왕 2년으로 되어 있음에 비추어

    원종 12년에 거제 등이 왜구로 인해 교우하게 되었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加祚縣 연혁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종 때 거제현이 三別抄의 난을 피해서 이곳에 治所를 두고 僑寓하였는데, 그

    대로 거제라 일컬었다.13)13)

    곧 거제현의 교우는 왜구 때문이 아니라 삼별초 때문이라고 적고 있는 것

    11) 高麗史 地理志의 巨濟縣 및 加祚縣 연혁도 동일하다.12) 高麗史 권37 世家37 忠定王 2년 2월 “倭寇固城 竹枺 巨濟 合浦千戶崔禪 都領

    梁琯等 戰破之 斬獲三百餘級 倭寇之侵 始此”

    13)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居昌郡 屬縣 加祚縣 “元宗時 巨濟縣 避三別抄之亂 僑治于此 仍稱巨濟”

  • 184 韓 國 文 化 40 ․

    이다. 진도에 들어간 삼별초의 영향력이 남해안 일대에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간이 불과 몇 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경상도 쪽의 도서 군

    현이 삼별초를 피해 內地로 들어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연혁은 다른 자료에서 왜구 때문이라고 한 것을 가조현 연혁에서만 삼

    별초 때문이라고 고친 결과로 보아야 하는데, 이는 원종 12년이라는 시점을

    의식한 것이다. 곧 이 시기에는 왜구로 인한 교우를 상정할 수 없기 때문에

    삼별초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별초를 교우의 원인으로 볼 수는 없으므

    로 그대로 왜구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대신 거제의 교우 시점을 고쳐서 이

    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다음 기록을 통해 뒷받침된다.

    邑城(李甫欽의 記) : 前朝 말년에 기강이 무너지고 섬 오랑캐가 침범하니, 거제

    백성이 옛 땅을 버리고 居昌 경내에 僑寓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14)

    14)

    위의 기록에 따르면 거제현이 교우한 것은 “前朝 말년”으로 표현되어 있다.

    원종 12년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볼 때, 이는 실

    제 왜구가 극성을 부리던 공민왕대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원종 12년은 다른 연기를 잘못 적은 것으로 판단되는데,

    사실 지리지의 연혁에는 간지의 오기․오독으로 인한 오류가 적지 않게 발견

    된다.15)15)이 경우도 그러한 관점에서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같은 간지에 해당하는 공양왕 3년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후술할 자

    료에서 나타나듯이 공양왕대에 들어서면 왜구의 피해는 점차 수그러드는 추

    세였다. 따라서 이 시점에 비로소 거제현이 내지로 옮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간지의 일부를 잘못 읽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경우 거제현의

    교우는 辛丑年(공민왕 10, 1361) 정도로 비정해 볼 수 있다.16) 인접한 남해현

    14)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巨濟縣 城郭 邑城 李甫欽記 “前朝之季 紀綱陵夷 島夷侵陵 巨濟之民 棄其舊土 僑寓居昌之境者 有年矣”

    15) 고려사 지리지 연기 정리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尹京鎭, 1999 「 高麗史 地理志의 연혁정리 방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 ‘高麗初’의 연기비정과 관련하여」, 奎

    章閣 22 참조.

    16) 辛卯年(충정왕 3, 1351)으로 볼 수도 있으나 왜구의 침탈이 시작된 이듬해 곧바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185

    이 공민왕 7년에 출륙하여 교우하게 됨을 감안하면 거제현의 교우 시점을 공

    민왕 10년으로 잡는 것은 무리가 없다.

    이와 함께 가조현의 이속 시점과 통합적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시점의 연혁을 하나로 통합하여 인식하는 것 또한 지리지

    에서 자주 발견되는 오류의 하나이다.17)17)일단 가조현의 연혁에서 이속 시점으

    로 되어 있는 원종 12년은 1주갑 뒤인 공양왕 3년으로 보고 이 시점에 거제현

    의 교우까지 통합 인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거제현의 교우

    는 이보다 앞선 시점이 되어야 한다.

    교우는 다른 지역에 임시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우 지역을 교군에 이속,

    혹은 통합시킨다는 것은 곧 영역을 마련하여 안정성을 부여하는 조치이다. 왜

    구로 인한 전란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교우에 행정적 재편이라는 조

    치가 바로 수반되기는 어렵다. 이는 교우가 상당 시간 지속되면서 그에 따른

    지방통치의 난점을 줄이기 위한 조치로 이해해야 한다.

    이 때 참고되는 것은 공양왕대부터 新定監務가 파견되면서 속현을 이속해

    주거나 두 군현을 兼官으로 운영하는 방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

    다.18)18)가조현(속현)을 本縣에 교우 중이던 거제현(현령관)에 이속시킨 것은

    속현에 감무를 설치하면서 인접한 속현을 이속시킨 것과 같은 원리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 당시 조치에 교군 지역도 포함되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당초 “辛未”라는 연기는 가조현의 이속 내지 병합을 나타내던 것

    이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공양왕 3년에 해당한다. 결국 공민왕대에 거제

    현이 가조현 지역에 교우하게 되었고, 공양왕대의 군현제 개편 과정에서 가조

    로 교우하게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17) 대표적인 것이 고려사 지리지에 보이는 “高麗初 更今名 來屬”이다. 종래 이 연혁을 하나의 시점으로 보고 읍호 변화를 통해 來屬의 시점을 추정하기도 하였

    다. 그러나 이것은 연기정리 방식의 오류로 파악된다. 곧 태조 23년으로 비정되

    는 “更今名”의 시점과 현종 9년으로 규정되는 “來屬”의 시점이 자료상 드러나지

    않을 때 각기 ‘高麗初’라는 막연한 연기로 처리된다. 이 두 연혁이 겹친 경우 선

    후 관계를 판단할 수 없어 두 연혁을 모두 하나의 ‘高麗初’로 묶어 서술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연혁은 구문으로는 하나의 시점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은 시

    점이 다른 두 연혁으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윤경진, 1999 앞의 논문).

    18) 공양왕대의 新定監務에 대해서는 尹京鎭, 1991 「朝鮮初期 郡縣體制의 개편과 運

    營體系의 변화」, 韓國史論 25 참조.

  • 186 韓 國 文 化 40 ․

    현이 거제현으로 이속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을 지리지에서는 하나의

    연혁으로 인식하였고, 다시 연기를 원종대로 올려 비정하는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19)19)

    한편 다음 자료는 거제현이 가조현에 교우할 당시의 영역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觀音窟, 津寬寺, 臺山 上元寺, 巨濟 見庵寺에서 매년 2월 15일에 행하던 水陸齋

    를 앞으로 정월 15일에 행하는 것을 定式을 삼도록 하라.20)20)

    위에서 언급된 견암사는 거창군 牛頭山(가야산 서쪽 줄기)에 있던 사찰이

    며, 우두산은 가조현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찰의 소재지가 “巨

    濟”라고 표현된 것은 바로 거제현이 가조현 지역에 교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지역에 대한 인식이 거제를 준거로 삼고 있었던 데 따르는 결과로 해석된

    다. 전술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가조현 연혁에서 “그대로 거제라 일컬었다”

    라고 한 부분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나타낸 것이다.

    당시 거제현이 교우하고 있던 가조현은 본래 陜州의 속현으로 편성되어 있

    다가 고려후기에 居昌郡으로 이속되었다. 고려말 조선초에 이르면 속현은 군

    현으로서의 단위성이 거의 탈각되고 소속 군현의 영역으로 간주되면서 점차

    흡수 통합되고 있었다. 현령관인 거제현이 가조현에 교우하게 되면서 가조현

    은 거창군이 아니라 사실상 거제현의 영역으로 전환되었을 것인데, 가조현 연

    혁에서 “移屬巨濟”로 표현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연혁 ②를 보면, 거제현은 태종 14년에 居昌縣과 병합하여 濟昌縣이라

    개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조치는 당시 시행된 군현 병합책이 일환으로 시

    행된 것이었다.21)21)당시 정부는 廩祿 절감을 위해 군현의 규모가 크지 않은 인

    19) 교우 시점의 간지 오독으로 인해 두 연혁을 하나로 인식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

    다. 물론 간지 오독을 따로 상정하지 않더라도 남해현의 교우 시점이 공민왕대

    라는 점에 비추어 거제현의 교우를 공민왕대의 일로 보는 것은 가능하다.

    20) 太宗實錄 권27, 태종 14년 2월 庚戌 “觀音窟 津寬寺 臺山上元寺 巨濟見庵寺 行每年二月十五日水陸齋 今後行於正月十五日 以爲式”

    21) 조선초기 군현병합책의 전개에 대해서는 李樹健, 1984 앞의 논문 ; 金東洙, 1990

    「조선초기의 군현제 재편작업 : 군현 병합 및 직촌화 작업을 중심으로」, 全南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187

    접 군현을 병합 조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가조현에 교우 중이던 거제현

    도 종래 가조현이 속해 있던 거창현과 병합된 것이다.

    그런데 태종 14년의 군현 병합은 이듬해 대부분 원 상태로 환원되면서 실

    패로 끝났다.22)22)이 때 연혁 ③에 보이듯이 거제현은 거창현과 다시 분리되었

    고, 거제도로 환원될 때까지 계속 가조현 지역에 교군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거제현이 교우하는 동안 거제도 지역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처음

    왜구의 노략질로 주민이 흩어지고 고을을 내륙으로 옮기면서 거제도 지역은

    황폐해졌다. 조선 건국 후 왜구의 기세가 잦아들면서 거제도 등지에 인구가

    유입되기 시작하였는데, 세종 즉위 당시 거제도 등지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었다.

    巨濟와 南海 두 섬은 왜적이 다니는 곳인데, 근래 賊變이 가라앉았습니다. 이에

    人民이 役을 피해 두 섬으로 들어가니 남해가 200여 호, 거제가 360여 호입니다.

    만일 변고라도 있으면 반드시 노략질을 당할 것이니, 두 섬에 들어가 사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守城軍을 두어 방비를 엄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23)23)

    위에서 세종 즉위 당시에 이미 두 섬에는 적지 않은 주민이 들어가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군현이 설치되지 않았으므로 주민은 역의 부

    담을 피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왜구의 활동이 뜸해지자 많은 인구가 유입되

    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부로서도 원래대로 거주를 금하지 않을 것이라면 왜구

    방비를 위한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수성군의 주둔은 자연 군현의 복

    구를 전망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건의는 논의를 거쳐 목책을 설치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거제도 등지에 주민이 늘어나고 생산이 이루어지면 다시 이를 노린

    왜구가 기승을 부릴 수 있었으므로 주민의 疏開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었다. 세종 2년 경상도관찰사는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史學 4 참조.

    22) 太宗實錄 권29, 태종 15년 4월 癸亥23) 世宗實錄 권1, 세종 즉위년 8월 丙申 “巨濟南海二島 倭賊往來之地 近年以來

    賊變寢息 因此 人民避役于二島 南海二百餘戶 巨濟三百六十餘戶 萬一有變 則必爲

    所掠 若不禁二島居民 則當置守城軍 以嚴守禦”

  • 188 韓 國 文 化 40 ․

    도내의 巨濟․南海․昌善의 세 섬에 개간한 田地가 모두 1,130여 結인데, 부근

    각 고을의 人民이 몰래 들어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만약 賊變을 만나면

    노략을 당할까 우려됩니다. 앞으로 백성이 들어가 농사짓는 것을 금하십시오.24)

    24)

    위의 주장은 거제도 등지에 다시 倭變이 생길 것을 우려한 것이었는데, 上

    王(태종)은 田地가 많은 곳에 한하여 木柵이나 土城을 만들고, 백성이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서 농사를 짓게 하되 포구에 兵船을 배치하여 수호하도록 하였

    다. 정부로서도 이미 많은 주민이 경작하고 있던 사정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

    이다. 다만 전지가 적은 곳은 경작을 금하여 수호의 효율성을 높이도록 하였다.

    한편 이 해 11월에는 태종의 명으로 거제도에 營田이 설치되었다.25)25)영전은

    船軍으로 하여금 전지를 경작하도록 한 것인데, 이를 侍衛軍으로 대체하면서

    폐단이 많아졌다. 이 때문에 2년 뒤인 세종 4년에 영전이 폐지되었다.

    巨濟 古縣 사람과 전부터 왕래하면서 田地를 경작하던 沿邊 州郡의 백성들을

    모두 섬 안으로 옮기고, 그 營田은 혁파하여 그들에게 분급하여 농사짓게 하고 조

    세를 면제하십시오.26)26)

    위의 조치는 결국 거제도에 주민의 입주를 공식적으로 허가하는 것이었다.

    巨濟 古縣人이란 곧 내륙에 교우하고 있던 거제현 주민을 말하는 것이며, 연

    변 주군의 백성은 전술한 세종 즉위년 기록에서 언급된 사람들이다. 영전을

    혁파하여 이들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거제도에 고을을 복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거제현 연혁의 ④에서 세종 4년에 “復還舊島”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조치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때에는 종전과 같이 현령이 설치된 것이 아니라 4품 이상으로

    知縣事를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 조치는 왜변을 막기 위해 수령에게 군사적

    기능을 겸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도서 군현과 연안 군현의 주요 포구에는

    24) 世宗實錄 권7, 세종 2년 윤정월 丙申 “道內巨濟南海昌善三島 墾田凡一千一百三十餘結 附近各官人民 多潛入耕稼 如遇賊變 被掠可畏 乞今後禁民入耕”

    25) 世宗實錄 권10, 세종 2년 11월 庚寅26) 世宗實錄 권15, 세종 4년 2월 壬子 “巨濟古縣人民及在前往來耕田沿邊州郡之民

    幷令移入島內 革其營田 分給耕稼 蠲免租稅”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189

    萬戶가 설치되어 방어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거제도의 주요 포구에도 만호

    가 있었는데, 바로 이들이 도내의 영전 개발을 담당하고 있었다.

    거제도 外面 栗浦의 田土는 河淸浦와 加耳瑟浦에 사는 사람에게 예전처럼 경작

    하는 것을 허락하고, 玉浦․永登浦萬戶에게 살펴 수호하도록 하십시오.27)27)

    위의 기록은 세종 3년의 것으로, 거제도 지역이 영전으로 개발되고 있던 시

    점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군현이 설치되기 전 주민의 전토 경작에 대해 만호가 고찰 수호하

    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술할 남해도의 영전 개발도 역시 萬戶가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다.28)28)이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면서 만호로 하여금 수령을 겸직

    하는 형태로 운영한 것이다. 이는 물론 왜적 방비 등 군사적 기능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만호는 4품으로서 6품인 현령보다 상위였기 때문에 그 직함을 현

    령 대신 知縣事라고 하여 구분하였다.29)29)

    군현 복설에 이은 후속 조치로서 거제에 새로 이주한 사람[新徙人]에게 종

    자와 식량을 營田의 생산물로 지급하도록 하였고,30)30)이듬해에는 이들이 경작

    하는 전지에 대해 조세 감면을 규정하였다. 곧 熟田은 첫해에 전부 면제하고

    다음 해에는 반을 거두고 3년 이후에는 전부를 거두도록 하고, 새로 개간한

    곳은 면제 기간을 1년 추가하도록 한 것이다.31)31)

    거제현이 복구된 후 治所의 이동이 논의되었다.32)32)복구 과정에서 자리잡은

    治所는 원래의 古邑 지역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7년 병조에서는 거

    27) 世宗實錄 권53, 세종 3년 7월 己丑 “巨濟島外面栗浦之田 聽河淸加耳瑟浦接居之人 仍舊耕作 令玉浦永登浦萬戶 考察守護”

    28) 世宗實錄 권53, 세종 13년 7월 己丑29) 만호의 상위직인 同僉節制使는 종4품이었다. 그리고 僉節制使 등 3품 이상이 현

    의 수령을 겸할 경우에는 判縣事라 하였다. 이 제도는 조선초기에 변경과 도서

    지역의 방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초기 군사 지휘관의 수령 겸

    직에 대해서는 따로 검토할 예정이다.

    30) 世宗實錄 권16, 세종 4년 4월 庚寅31) 世宗實錄 권21, 세종 5년 8월 庚戌32) 조선초기 지방제도 개편에 과정에서 치소의 이동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에 대

    해서는 金東洙, 1992 「조선초기 郡縣治所의 移設」, 全南史學 6 참조.

  • 190 韓 國 文 化 40 ․

    제현의 현재 치소가 좁고 지대가 낮아 적변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고읍 지역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33)33)이어 거제도를 둘러보고 온 敬差官은

    沙月浦 지역이 읍성을 설치하기에 적합하다고 보고하였고, 세종은 이를34)따랐다.34)

    세종 9년 거제현 주민의 狀啓 중에는 저간의 치소 이동이 정리되어 있다.

    壬寅年(1422, 세종 4)에 (고을을) 다시 세울 때 深浦의 水月平에 각 浦의 船軍

    으로 목책을 설치하고 잠시 官舍를 세웠는데, 丙午年(1426, 세종 8) 봄에 다시 沙

    等里를 살펴 邑을 옮기고 비로소 성곽을 쌓았습니다.35)35)

    위의 내용에서 세종 4년 거제현이 복구될 때에는 水月平에 임시로 머물렀

    고, 이어 세종 8년에 沙等里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36)36)이들이 위의 세종

    7년 기록에서 언급된 현 치소와 사월포에 각각 해당한다.

    거제현은 문종 초 다시 한번 읍치를 옮기게 된다. 전술한 거제현 읍성의 李

    甫欽 記에는 다음 내용이 보인다.

    世宗께서 즉위하신 지 5년인 壬寅年에 거제 백성이 本土로 돌아가기를 원하므

    로 성곽을 쌓아 백성을 살게 하고 守護를 배설하여 외적을 막도록 명하였다 (중

    략) 지금 우리 主上殿下(문종)께서 議政府右贊成 晉陽相公 鄭苯에게 음양을 살피

    고 샘물을 보아 옛 治所 남쪽 10리에 치소를 옮겼다.37)37)

    위의 내용에서 거제현이 세종 즉위 5년, 곧 세종 4년에 본도에 복구되면서

    성곽이 축조되었고, 이어 문종 초에 다시 읍치가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33) 世宗實錄 권27, 세종 7년 2월 丁卯34) 世宗實錄 권30, 세종 7년 10월 辛巳35) 世宗實錄 권35, 세종 9년 정월 壬寅 “壬寅年復立之初 於深浦水月平 以各浦船

    軍 設木柵 暫立官舍 丙午春 更相沙等里移邑 始築城郭”

    36) 세종 7년 말에 읍치 설치 지역으로 결정된 沙月浦가 곧 沙等里인 것으로 판단된

    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거제현 산천조에는 沙等浦가 보이는데, 이곳은 치소에서 북쪽 10리에 있었다. 후술하듯이 문종 즉위년에 거제현의 치소를 옛 치소의 남

    쪽 10리로 옮겼는데, 여기서 사등포가 옛 치소였음을 알 수 있다. 곧 沙月浦와

    沙等浦는 동일 지명의 이표기인 것이다.

    3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巨濟縣 城郭 邑城 李甫欽記 “世宗卽位之五年壬寅 巨濟之民 願還本土 命築城郭 奠厥民居 設守護以禦其侮 (중략) 今我主上殿下 命議

    政府右贊成 晉陽相公 鄭苯 相陰陽觀水泉 乃移治於舊治之南十里”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191

    에 대한 실록의 관련 기사를 살펴보자.

    문종 즉위년 10월 節制使 鄭苯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신이 巨濟邑城을 살펴보니, 둘레가 1,916척인데, 처음에 법대로 쌓지 않아 낮고

    좁습니다. 반드시 改築한 뒤에야 一島의 백성이 入保할 수 있겠습니다. 신이 古丁

    部曲을 보니 地勢가 넓고 평탄하고 골짜기가 깊고 은밀하며, 또 우물과 샘이 있어

    경작하고 살 만한 땅이 자못 많습니다. 청컨대 邑城을 이곳에 옮겨 내년 10월까지

    축조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38)38)

    위의 기록을 통해 문종 즉위년 정분의 건의로 거제현의 읍성을 古丁部曲

    (고정리)으로 옮기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거듭된 읍성의 이전에 대해 주민의 반대도 있었다. 읍성을 고정부곡

    자리로 옮기는 것에 대해 거제현 주민이 다음과 같이 上言하였다.

    本邑은 전에 섬 안의 水月里에 木柵을 설치했으나, 지난 丙午年(1426, 세종 8)

    에 沙等里로 옮겨 관청을 설치하고 城池를 건설하는 일이 戊辰年(1448, 세종 30)

    에 이르러 끝났습니다. 이제 都體察使 鄭苯이 살펴 정한 데 따라 또 古丁里로 옮

    기려 합니다. 본읍의 人吏와 官奴婢가 이미 모두 토착하여 번성한데 이제 고을을

    옮기게 한다면 營繕에 끝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옮겨 설치하지 말아서 民生

    을 편안하게 하시고, 만약 부득이하다면 뭍으로 나가 옮겨 살게 하여 長久함을 도

    모하게 하십시오.39)39)

    위의 상언을 통해 거제현의 읍치가 처음(세종 4)에 수월리(수월평)에 있었

    고, 이어 세종 8년에 사등리(사월포)로 옮겼으며, 이곳의 축성이 세종 30년에

    마무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불과 2년 만에 다시 읍치를 이동하게

    되자 人吏와 官奴婢의 부담이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문종과 정부는 이 문제를 논의한 결과 어차피 성곽을 개축해야 하는 상황

    38) 文宗實錄 권4, 문종 즉위년 10월 戊戌 “臣審巨濟邑城 周回一千九百十六尺 初不依法造築 低微窄狹 必須改築 而後一島之民 可得入保 臣觀古丁部曲 地勢寬平

    洞壑深密 且有井泉 可耕可居之地頗多 請移邑城於此 將以明年十月造築爲便”

    39) 文宗實錄 권7, 문종 원년 5월 癸卯 “本邑舊在島內水月里 設木柵 去丙午年 移于沙等里 建設館舍 修築城池之功 至戊辰年 乃訖 今因都體察使鄭苯審定 又欲移于

    古丁里 本邑人吏官奴婢 已皆士著阜盛 今使移邑 則營繕無窮 願勿移設 以安民生

    如不得已 則出陸移居 以圖長久”

  • 192 韓 國 文 化 40 ․

    이므로 더 나은 장소로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결정을 내리고 古丁里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에 문종 원년 11월 거제현의 읍성이 축조되었다.40) 신증

    동국여지승람 거제현 고적조의 고정부곡 항목에서 “지금의 치소”라고 설명된 것은 그 결과이다.

    이처럼 거제현은 공민왕대 가조현 지역에 교우한 후 세종 4년에 이르러 비

    로소 本島로 돌아왔다. 그러나 왜구에 대비해야 하는 문제가 상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합한 곳을 찾아 치소를 설치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이로 인해 거

    듭 치소를 옮긴 끝에 문종 원년에 비로소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치소

    이동은 교우와는 다르지만, 교우에 따른 여파로 발생한 문제라는 점에서 교우

    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2) 松邊縣․鵝洲縣

    거제현의 교우에 수반하여 그 속현인 송변현과 아주현도 함께 교우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두 군현의 연혁은 “두 현은 사람들이 모두 없어져 지금은 直村이 되었다[二縣人物皆亡 今爲直村]”라고 하여 궁극적

    으로 폐지된 사실만을 밝히고 있을 뿐, 교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두 현의 폐지는 고려말 조선초에 진행된 군현제 개편의 결과이며, 그에 앞서

    이들 또한 僑郡으로 존속한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는 다음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鵝洲村 : 巨濟가 加祚縣에 僑寓할 때에, 本島 안의 屬縣 및 驛院 등을 가조의

    경내에 아울러 교우하게 하였는데, 鵝洲縣은 군 동쪽 10리에 있고, 松邊縣은 茂村

    驛 남쪽 5리에 있으며, 烏壤驛은 가조현 서쪽에 있었다. 주민이 지금도 그대로 일

    컫는다.41)41)

    위의 기록을 통해 거제현이 교우할 때 그 속현인 아주현과 송변현도 함께

    40) 文宗實錄 권10, 문종 원년 11월 甲子41)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居昌郡 古蹟 鵝洲村 “巨濟寓加祚時 以本島內屬縣及驛

    院等 倂僑置于加祚之境 鵝洲縣在郡東十里 松邊縣在茂村驛南五里 烏壤驛加祚之西

    居民至今仍稱云”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193

    가조현 경내에 교우하였음을 알 수 있다.42)42)

    이들이 거제현과 함께 가조현에서 교우하게 된 것은 행정적으로 거제현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는 후술할 명진현이 감무관으로서 거

    제와 다른 지역에 교우한 것과 대비된다. 아주현 등은 세종 4년 거제현이 본

    도로 돌아갈 때 함께 환원되어 바로 直村으로 廢合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溟珍縣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명진현의 연혁은 珍城縣 연혁에 통합되어 있다. 다음은 진성현 연혁 중에서 명진현 부분의 고려말 조선초 연혁을 추출한 것이다.

    ① 元宗 辛未 避倭出陸 僑寓晉州任內永善縣

    ② 本朝 恭靖王元年 己卯(1399) 倂二縣(江城․溟珍) 號珍城

    위에서 명진현의 교우 시점도 원종 때로 되어 있다. 이는 거제현 연혁에 연

    동된 것으로 판단되는 바, 역시 공민왕대로 조정해야 할 것이다. 당시 조치가

    거제도의 주민을 내륙으로 이주시키는 것이므로 거제현이 교우할 때 명진현

    도 함께 교우하였을 것이다. 다만 명진현은 監務가 설치되어 행정적으로 분리

    되었기 때문에 거제현과 다른 장소에서 교우하였다. 반면 전술한 바와 같이

    속현으로 남아 있던 송변현과 아주현은 거제현과 같은 장소에서 교우하였다.

    그 뒤 태조 3년 명진현의 교우처인 永善縣을 명진현에 예속시키는 조치가

    있었다.43)43)이것은 전술했듯이 거제현의 교후처인 가조현이 “移屬巨濟”로 처리

    된 것과 상통하는 내용이다. 명진현은 감무가 파견되었고 영선현은 진주의 속

    현이었는데, 현실적으로 두 군현이 한 영역 단위가 된 상태에 맞추어 영선현

    42) 이 과정에서 烏壤驛도 함께 교우하고 있음은 주목되는 현상이다. 驛에는 驛吏,

    또는 驛子와 같이 해당 役을 지는 부류가 배속되어 있었고, 이들 또한 일종의

    단위체로서 구분되고 있었기 때문에 교우 과정에서도 따로 관리된 것으로 생각

    된다. 오양역은 세종 7년에 복구되었다( 世宗實錄 권29, 세종 7년 8월 癸未). 한편 남해도의 德新驛은 出陸하여 浣沙驛으로 개명되었는데( 世宗實錄 地理志 昆南郡), 이 역시 오양역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43) 太祖實錄 권5, 태조 3년 3월 丙午

  • 194 韓 國 文 化 40 ․

    을 진주 소속에서 명진현 소속으로 바꾼 것이다.44)44)

    그 뒤 명진현은 江城郡과 합쳐 珍城縣으로 편성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기

    록에 따라 오차가 있다. 위의 연혁 ②에서는 공정왕, 곧 정종 원년의 일로 되

    어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실록 기사는 태조 7년의 일로 되어 있다.

    경상도 溟珍縣을 江城郡에 병합시키고 이름을 珍城이라 불렀다. 溟珍은 예전에

    는 巨濟 땅에 있었는데, 왜적으로 인해 사는 곳을 잃고 晉州의 남쪽 변두리[南鄙]

    에 出居하였다. 땅이 좁고 백성이 적으므로[地狹民小] 監司가 청하여 병합하였

    다.45)

    45)

    여기서 실록의 태조 7년과 세종실록 지리지의 공정왕 원년은 사실상 같은 연도를 나타내는데, 이 현상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위의 기사는 태조 7년 12월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9월에 정종이

    태조의 양위를 받아 즉위한 상태였다. 곧 왕기로 따지자면 정종 즉위년인 것

    이다. 정종은 세종 초에 서거한 후 廟號를 받지 못하여 恭靖王으로만 칭해졌

    다.46)46)이 영향으로 공정왕일기 , 곧 정종실록 은 즉위부터 정리된 것이 아니

    라 이듬해부터 정리하였고, 즉위년 부분은 태조실록 에 들어가 있다.

    한편 조선초기에 국왕의 왕기를 언급할 때에는 즉위년부터 계산하고 있었

    다. 전술한 거제현 읍성의 이보름 기에는 “世宗께서 즉위하신 지 5년인 壬寅

    年”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임인년은 세종실록 의 踰年稱元에 의하면 세종 4

    년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즉위년 칭원으로 인한 연기 오차가 빈발하고 있는데,

    47)47)이는 당시의 왕기 표시의 관행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44) 加祚縣의 거제 이속이 공양왕대로 판단되는 것과 달리 永善縣의 명진 이속이 조

    선 태조대에 와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은 영선현을 속현으로 관할하던 진주의 반

    발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정은 후술하듯이 昆明縣의 분리 과정에

    서도 지적되고 있다.

    45) 太祖實錄 권15, 태조 7년 12월 壬戌 “以慶尙道溟珍縣 倂于江城郡 號曰珍城 溟珍 古在巨濟之地 因倭失所 出居晋州南鄙 地狹民小 監司請倂之”

    46) 恭靖王은 숙종 때 가서 비로소 ‘定宗’이라는 묘호를 받게 된다

    47)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칭원법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례가 자주 보인다. 일례로 경기 군현들이 尙書都省에 직속되는 것이 고려사 지리지에는 문종 16년의 일로 되어 있으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문종 17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연기 오차 현상에 대해서는 별고에서 좀더 세밀하게 검토할 예정이다.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195

    위의 두 요소를 고려해 보면 태조 7년 후반은 당시의 인식에서는 공정왕이

    즉위한 첫 해, 곧 원년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실록 기사와 세종실록 지리지 사이의 연기 오차는 이와 같이 설명되며, 내용적으로 동일한 시점으로 파악되

    는 것이다.

    한편 명진현이 강성군과 통합되는 과정에는 명진현의 이동이 수반된 것으

    로 파악된다. 당초 명진현이 교우하던 永善縣은 진주의 동남쪽 48리에 있었다.

    앞에 인용한 기록에서 명진현이 교우하던 지역으로 언급된 “晉州의 남쪽 변

    두리”는 바로 영선현 지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명진현이 있던 곳은 다음 기록

    에 보이듯이 더 동쪽이었다.

    溟珍部曲 : 永善 동쪽 15리에 있다. 고려 말기에 巨濟縣 溟珍浦 사람들이 여기

    에 僑寓하였다. 本朝에서 본토로 돌아갔으나 그대로 부르고 있다.48)48)

    위에서 溟珍捕는 곧 명진현을 가리킨다.49)49)명진현이 있던 곳은 이들이 본토

    로 돌아간 뒤에도 명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 강성군은

    뒤에 丹溪縣과 합쳐 丹城으로 바뀌는데, 그 경계는 진주의 서쪽 38리 지점이

    었다. 곧 명진현과 강성군 사이에 진주목과 영선현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명진현이 영선현에 교우한 상태에서 강성군과 병합될 수 없는 상황

    이었다. 물론 越境地 형태로 유지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

    록 기사에 보이듯이 “地狹民小”가 병합의 원인임을 볼 때, 명진현은 영선현

    경내에 계속 교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판단된다. 이에 교우 장소를 강성

    군 쪽으로 이동시킨 뒤 두 군현을 병합시킨 것이다.

    다음에 명진현이 본토로 돌아가는 과정은 어떠했을까?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명진현과 강성군이 합쳐진 진성현 연혁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뒤

    명진현이 분리되어 본토로 돌아가는 연혁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신증동국

    48)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晉州牧 古蹟 新增 溟珍部曲 “在永善東十五里 高麗末 巨濟溟珍浦人 僑居于此 本朝還本土 因名之”

    49) 도서 지역에 설치된 군현 중에는 浦와 연계된 경우가 여럿 발견된다. 남해도의

    蘭浦縣은 蘭浦, 平山縣은 平山浦와 연계되어 있다. 도서 군현의 편성에 대해서는

    별고로 다룰 기회를 가질 것이다.

  • 196 韓 國 文 化 40 ․

    여지승람 의 단성현 연혁에는 세종 때 명진현을 다시 거제에 예속시키고, 강

    성군을 단계현과 합쳐 단성현이라 했다고 밝히고 있다. 다만 그 연기는 명시

    하지 않고 있다. 또한 同書 거제현 고적조의 溟珍廢縣 항목에 정리된 연혁도

    역시 세종조에 本島에 예속되었다는 내용만 밝혀 놓았다.

    그런데 이 과정은 실록 기사에도 보여 이를 통해 명진현이 본도로 돌아가

    거제현에 廢合되는 시점과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세종 9년 거제

    현 주민이 올린 狀啓의 첫 항목은 명진현과 관련된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

    과 같다.

    巨濟縣과 그 任內인 溟珍縣은 前朝 때에 왜구로 인하여 땅을 잃고 육지로 나왔

    는데, 거제현 사람은 居昌에 寓居하고, 명진현 사람은 江城에 우거하면서 병합하여

    珍城이라 했습니다. 壬寅年(세종 4, 1422)에 거제현을 復置하고 거창에 우거하던

    人吏 15명과 官奴婢 30여 명을 돌려보냈는데, 명진 사람들은 아직 江城에 소속되

    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거제현 사람은 수가 적어 役을 감당하지

    못하니, 명진 사람을 本縣으로 돌려보내기를 청합니다.50)50)

    위의 내용은 거제현이 본도에 돌아와 復置된 후 부족한 인적 자원을 보충

    하기 위해 아직 강성군과 병합되어 있던 명진현을 이속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건의 중에는 거제현에 자원하여 들어온 사람들을 당분간 돌려보내지 말

    고 本縣(거제현)에 그대로 놔둘 것을 요청한 내용도 있었고, 정부에서도 역시

    도망해 온 관노비라 하더라도 거제현의 읍세가 회복될 때까지는 本邑(원 소

    속 군현)으로 돌려보내지 말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 명진현에 대해 어떻게 조치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

    다. 다만 세종실록 지리지의 수록 연혁은 세종 14년을 하한으로 하며, 세종 말년에 개척된 4군 6진이 추록 형태로 뒤에 붙어 있다. 이것은 세종실록 지리지가 이 때 편찬된 八道地理志 를 전재한 것이기 때문이다.51)51)이에 비추어

    50) 世宗實錄 권35, 세종 9년 정월 壬寅 “巨濟縣及任內溟珍縣 前朝之時 因倭寇失土出陸 巨濟縣人物 寓於居昌 溟珍縣人物 寓於江城 倂號珍城 歲在壬寅 復置巨濟

    縣 還其寓居居昌人吏十五名 官奴婢三十餘名 溟珍人物 尙屬江城而不復 由是巨濟

    縣人物數少 不堪其役 請還溟珍人物于本縣”

    51) 4군 6진의 개척은 세종의 중요한 업적이기 때문에 각각 平安道와 永安道 항목에

    附錄하였다.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197

    명진현은 세종 9년의 건의 당시에는 본도로 환원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실제 세종 14년 4월 기사에도 珍城이라는 읍호가 보인다.52)52)

    그런데 세종 18년 기록에는 명진현이 본도로 환원된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珍城縣은 본래 江城이라 칭했는데, 왜구 때문에 땅을 잃게 되므로 그 屬縣인 丹

    城과 溟珍縣을 합쳐 珍城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명진이 이미 巨濟로 移屬되었는데

    그대로 진성이라 부르니 名實이 서로 어긋납니다. 청컨대 단성으로 개칭하십시

    오.53)

    53)

    위의 기록은 세종 18년 2월 吏曹에서 啓한 것인데, 왜구로 인해 교우한 것

    은 명진현이기 때문에 문맥은 다소 혼선이 있다. 이 조치로 미루어 볼 때 단

    성현이라는 읍호가 제정된 것은 세종 18년의 일이 된다. 다만 이 조치가 명진

    현의 거제 이속에 연동되어 곧바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볼 때, 명

    진현의 이속은 이보다 앞설 것이다. 따라서 그 시점은 세종 14년에서 18년 사

    이로 잡을 수 있다.

    이상에서 명진현은 공민왕대 왜구로 인해 출륙하여 진주 임내인 영선현 지

    역에 교우하였으며, 정종 즉위년에 강성과 합쳐 진성현이 되었다가 세종 14년

    에서 18년 사이에 다시 거제도로 돌아가 거제현에 폐합되는 과정을 밟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南海島 지역의 僑郡

    고려전기 남해도에는 현령관인 南海縣과 그 속현으로 蘭浦縣․平山縣 등

    모두 3개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와 함께 인접한 창선도에는 고려후기

    에 興善縣이 새로 설치되었다. 흥선현은 행정체계상 진주의 속현이었으나 왜

    구의 침탈로 인한 교우 과정은 남해도의 군현과 같은 상황인 만큼, 여기서 함

    께 다루기로 한다.

    52) 世宗實錄 권56, 세종 14년 4월 甲辰53) 世宗實錄 권71, 세종 18년 2월 庚子 “珍城縣本稱江城 因倭失土 以其屬縣丹城

    及溟珍縣 合爲珍城 今溟珍已移屬巨濟 而仍號珍城 名實相違 請改稱丹城”

  • 198 韓 國 文 化 40 ․

    1) 南海縣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남해현의 연혁은 昆陽(昆明)과 합쳐진 昆南郡에 통합 정리되어 있다. 곤남군 연혁 중 남해현과 관련된 연혁의 고려말 조선초 부

    분을 추출하면 다음과 같다.

    ① 恭愍王 戊戌(공민왕 7, 1358) 因倭失土 僑寓于晉州任內大也川部曲

    ② 本朝 太宗甲午(태종 14) 合于河東 稱河南縣

    ③ 乙未(태종 15) 復置河東縣 以晉州任內金陽部曲 屬于南海 稱海陽縣

    ④ 丁酉(태종 17) 以金陽還屬晉州 復爲南海縣

    ⑤ 己亥(세종 1, 1419) 合于昆明

    남해현은 전술한 거제현에 비해 복잡한 연혁을 보이고 있다. 우선 ①의 연

    혁은 남해현이 공민왕 7년에 왜구로 인해 땅을 잃고 晉州의 任內인 大也川部

    曲에 僑寓하게 되는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남해현의 교우는 자료에 따

    라 시점이 조금 다르게 된 경우가 보인다.

    邑城 : 그 지역이 倭의 섬과 아주 가까워 庚寅年(충정왕 2, 1350)부터 왜구의

    피해를 입기 시작하여 잡혀가거나 이사가서 縣의 속현인 平山과 蘭浦는 쓸쓸하게

    사람이 없었다. 8년이 지난 丁酉年(공민왕 6, 1357)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나와 晉

    陽 鐥川의 들판에 거처하였다.54)54)

    위의 기록에 따르면 남해현이 진주 鐥川, 곧 大也川部曲55)에 우거한 것이

    丁酉年부터로 되어 있다.56)56)1년의 오차가 있는 셈인데, 이것은 앞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칭원법 적용 방식에 따른 결과이거나, 시행 결정과 실체 이루어진

    상황의 시차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54)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南海縣 城郭 邑城 鄭以吾記 “其境壤 與倭島密邇 自庚寅之歲 始被倭寇 或虜或徙 縣之屬縣平山蘭浦 蕭然無人 越八年丁酉 出海而陸 就

    晉陽之鐥川而野處”

    55) 鐥川部曲은 音借하여 표기하던 ‘대야(大也)’를 한자로 바꾸어 표기한 결과이다.

    이것은 薩川部曲을 ‘矢川(살내)’으로도 표기한 것과 같은 원리이다.

    56) 高麗史 지리지에는 공민왕 7년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新增東國輿地勝覽 의 南海縣 建置沿革에는 공민왕 때로만 되어 있고 연기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199

    남해현의 연혁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교우 과정에서 여러 차례 병합 조

    치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우선 ②에서 보듯이 남해현은 태종 14년에 河東縣

    과 병합하여 河南縣으로 편성되었다. 이것은 거제현에 대한 설명에서 다룬 바

    와 같이 태종 14년에 시행된 군현병합책의 일환이었다.

    당시 남해현이 교우하고 있던 대야천부곡은 진주 邑治에서 서쪽으로 40리

    지점에 있었다.57)57)그런데 진주 읍치에서 昆陽郡 경계까지 27리이고, 河東縣 경

    계까지 67리로 되어 있다.58)58)곧 대야천부곡은 진주 소속이지만 실제 위치는

    곤양과 하동 중간에 자리한 越境地였던 것으로 판단된다.59)59)당시 昆陽, 곧 昆

    明縣은 진주의 속현이었고, 하동현은 명종 2년에 감무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에 정부에서는 외관 축소의 목적에 맞추어 하동현과 남해현을 통합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개편은 이듬해에 대부분 원상으로 복구되었다. 남해현 역시 하

    동현과 분리되었는데, ③의 연혁을 보면 이 과정에서 다시 진주 임내인 金陽

    部曲을 이속받아 海陽縣으로 개편되었음을 알 수 있다.60)60)金陽部曲은 晉州의

    임내였지만, 그 위치는 하동현 경계로 넘어가 있는 월경지였다.61)61)곧 처음 남

    해현이 교우한 대야천부곡과 유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하동과 분리한 남

    해현을 다시 금양부곡과 합친 것은 교군으로서 읍세가 열악하여 영역과 인구

    의 보전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조치 또한 ④에 보이듯이 2년 만에 원상으로 복구되었다.62)62)여기

    에는 대야천부곡에 이어 금양부곡까지 내어주는 진주 쪽의 반발도 있었으리

    라 짐작된다.63)63)환원 조치에 따라 금양부곡은 다시 진주에 환속되었고 남해현

    5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晉州牧 古蹟 大也川部曲58)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晉州牧 四境59) 越境地에 대해서는 李樹健, 1984 「越境地考」, 韓國中世社會史硏究 , 一潮閣 ;

    朴宗基, 1982 「14-15세기 越境地에 대한 再檢討」, 韓國史硏究 36 ; 金東洙,

    1992 「朝鮮初期 郡縣體制의 改編 : 主縣化 및 屬縣化, 任內의 이속작업및 越境

    地의 정비작업을 중심으로」, 許善道停年紀念論叢 , 一潮閣 참조.

    60) 이 조치는 실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61) 慶尙道地理志 하동군의 越境處 조항을 보면 “晉州任內 金陽部曲 越入於縣東白村里”라고 기재하고 있다.

    62) 金陽部曲은 昆明縣 치소에서 동쪽으로 45리에 있었다. 따라서 곤명현보다 서쪽

    에 교우하고 있던 남해현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었고, 이 때문에 2년 만에 복구

    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 200 韓 國 文 化 40 ․

    도 원래의 이름을 회복하였다.

    그 뒤 남해현은 세종 원년 곤명현과 통합되어 곤남군으로 개편되었는데, ⑤

    의 연혁은 이를 나타낸 것이다. 이 때의 개편은 남해군 자체보다는 곤명현의

    승격으로 인해 유도된 것이었다. 곧 이 때 세종의 胎室을 곤명현에 설치함에

    따라 곤명현의 官號를 올려주게 되었던 것이다.

    원 간섭기 이후 왕의 태를 안치한 곳은 관호를 올려주는 것이 관례였고, 이

    는 조선초기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태조의 태실을 둔 珍同縣이 珍州로 승격하

    였고, 태종의 태를 안치한 京山府가 星州牧으로 승격하였다. 진주의 속현이던

    곤명현 사람들이 이러한 관례를 내세워 외관 설치를 청원하자 세종은 논의를

    거쳐 곤명을 교우 중이던 남해현과 합쳐 昆南郡으로 만드는 것으로 결정하였

    다. 곤명현은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 외관 설치에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남해현과 통합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논의 당시 監司 申商은 곤명현을 떼어 남해현과 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

    견과 함께 지도를 작성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대해 세종은

    형세로 볼 때 곤명을 당연히 남해와 합해야겠지만, 昆明을 빼앗아 南海에 주면

    진주 사람들이 호소하고 원망할 것인데 어찌해야 하겠는가.64)64)

    라고 문의하였다. 세종의 지적을 통해 남해현이 교우하고 있던 지리적 위치

    와 아울러 곤명현의 분리에 대한 진주 쪽의 반발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이것

    은 곤명현의 安胎에 따른 승격 조치였지만 진주 쪽에서 보면 자신의 관할 속

    현을 분할하여 남해현에 이속시키는 셈이었다. 세종은 이러한 관점에서 분쟁

    의 소지가 있음을 거론한 것이다. 이는 앞서 금양부곡을 이속시켰을 때의 반

    발을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해 元肅 등은

    63) 남해현이 하동 등과 병합되는 과정에서 교우처를 옮기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거제현이 교우하던 가조현이 거제현으로 흡수 통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야천

    부곡도 남해현이 교우함에 따라 진주 관할에서 벗어나 남해현에 흡수되었을 것

    으로 생각된다.

    64) 世宗實錄 권3, 세종 원년 3월 辛未 “以勢觀之 昆明當合南海 然奪昆明與南海 則晋人必訴寃 奈何”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201

    昆明이 진주 사람의 횡포에 시달려 따로 고을을 만들려고 한 것이 오래였고, 또

    진주는 토지도 넓고 인물도 많아 남방 고을 중 으뜸이니 곤명의 백 호 정도를 줄

    인다고 해서 별 영향이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御胎를 그 땅에 埋安하지 않

    았습니까? 곤명을 남해에 합쳐 따로 곤남군을 만드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입니

    다.65)65)

    라고 건의하였고, 세종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남해현은 세 번째로 병합 처리

    되었다.

    남해현이 곤양과 다시 분리되는 것은 세종 19년의 일이다. 신증동국여지승

    람 의 남해현 연혁에는 분리 시점을 “世宗朝”로만 표시하였으나 昆陽郡 연혁

    을 보면 세종 19년에 곤남군에서 남해현을 분리하고 곤명과 금양부곡을 합쳐

    곤양군으로 한 사실이 보인다.66)66)

    한편 남해도 지역은 세종 즉위 후 거제도와 함께 개발 상황이 논의됨과 아

    울러 관리를 위한 조치도 강구되고 있었다. 곧 전술한 세종 즉위년 당시의 보

    고에 따르면 역을 피해 남해도에 유입된 주민의 수가 200여 호가67)되었다.67)

    또한 세종 2년의 거제․남해․창선 3개 도서에 대한 개간이 공식적으로 허용

    되었다.68)68)당시 조치를 발판으로 거제현은 세종 4년에 복구되었다.

    그러나 거제현과 달리 남해현은 바로 복구되지 못하였다. 이는 남해현이 세

    종 원년에 어태를 안치한 곤명현과 병합하여 곤남군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

    었다. 남해현을 복구할 경우 곤명의 읍세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세

    종의 태실을 둔 곤명을 도로 강등시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남해현

    은 본도의 개발에도 불구하고 바로 환원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남해도는 한동안 군현 복설 대신에 종래와 같은 營

    田 방식으로 개발되고 있었다. 다음 자료를 통해 이 당시 남해도의 상황을 엿

    볼 수 있다.

    65) 世宗實錄 권3, 세종 원년 3월 辛未 “昆明困於晋人侵暴 思別爲邑久矣 且晋之爲州 土地之廣 人物之多 爲南州最 雖減昆明百戶 不是瘠矣 況今御胎安於其地乎 合

    昆明於南海 別爲昆南郡 庶合事宜”

    66)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昆陽郡 建置沿革67) 世宗實錄 권1, 세종 즉위년 8월 丙申68) 世宗實錄 권7, 세종 2년 윤정월 丙申

  • 202 韓 國 文 化 40 ․

    1. 南海島 東外面 蘭浦의 주민은 本島 內面으로 옮겨 살게 하고, 그 田土는 赤

    梁萬戶로 하여금 살펴 守護하게 하여 내왕하면서 경작하게 하십시오. 1. 남해도 南

    外面 加火浦․古乙浦의 주민들이 경작하는 牛峴 內面 平山營田 한 곳의 전토는 平

    山萬戶에게 수호하게 하여 오가면서 경작하게 하고, 牛峴 外面 바닷가의 전토는

    백성들의 起耕을 금하십시오.69)69)

    위의 기록은 세종 13년 경상도관찰사의 보고 중 일부로서 남해도 지역의

    개간과 관리 방안을 건의한 부분이다. 여기서 거제도의 경우 영전 운영이 폐

    지되고 군현이 복구되었던 반면, 남해도는 영전의 운영이 지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항목들은 남해도 외곽 지역의 개간지에 대한 관리를 건의한 것인데,

    이들 지역은 포구와 영전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종래 난포현과 평산현이

    있던 곳이다. 이들 지역이 남해도의 외곽에 자리하고 있어 주민이 왜구의 피

    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內面에 거주하면서 萬戶의 보호 아래 왕

    래하면서 경작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남해도 지역에도 점차 주민이 많아지게 되자 이들을 관할하기 위한

    군현의 설치가 다시 요구되었다.

    南海島는 토지가 기름지고 성이 튼튼하며 주민이 많은데, 관할하는 곳이 없어서

    대체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또 근처의 郡邑과 멀리 떨어져 있어 만일 倭變이라도

    있으면 구원이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원컨대 縣을 설치하고 武略이 있는 자를 差

    任하여 변경을 튼튼히 하십시오.70)70)

    위의 기록은 세종 19년 6월 경상도관찰사의 보고에 따라 병조에서 남해현

    의 복구를 청하는 내용이다. 이 건의가 수용됨으로써 동년 7월에 남해현이 복

    구되었다.71)71)이 때 “武略이 있는 자를 差任한다”라는 것은 거제현 연혁에 보

    69) 世宗實錄 권53, 세종 13년 7월 己丑 “一 南海島東外面蘭浦居民 徙居于本島內面 其田地 令赤梁萬戶考察守護 來往耕作 一 南海島南外面加火浦古乙浦居民等所

    耕牛峴內面平山營田一處之田 令平山萬戶守護 來往耕作 其牛峴外面大洋邊之田 禁

    民起耕”

    70) 世宗實錄 권77, 세종 19년 6월 辛巳 “南海島土地沃饒 城子完固 居民衆多 而無所管轄 有乖大體 且其旁近郡邑相距遙隔 儻有倭變 未及救援 乞置縣 擇有武略者差

    任 以實邊圍”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203

    이는 바와 같이 만호가 겸임하는 知縣事의 설치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곧

    일반 수령이 아니라 만호 등에게 수령을 겸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연혁에는 그대로 현령을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남해현은 왜구를 피해 공민왕 7년(6년)에 출륙하여 대야천부곡에

    교우하였다. 태종 14년 군현 병합 때 하동과 합쳐 河南이라 하였다가 이듬해

    분리한 뒤 금양부곡을 이속받아 海陽縣이라 하였다. 태종 17년에는 다시 원상

    복구되었다가 세종 원년 곤명에 御胎를 안치하면서 이들을 합쳐 昆南郡이라

    하였다. 세종 4년 조치에서 거제현과 달리 남해현이 복설되지 못한 것은 안태

    에 따라 병합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남해현은 세종 19년에 이르러 비로소 본

    도로 환원되어 복설되었고, 곤명은 금양부곡과 합쳐 昆陽이 되었다.

    2) 蘭浦縣․平山縣․興善縣

    남해현의 속현이었던 난포현과 평산현의 교우 여부는 자료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거제도의 송변현․아주현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이들도 일단

    남해현과 함께 이동하여 교군으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들은

    송변현 등과 비교해 연혁 과정에 다소 차이가 있었다.

    난포현과 평산현은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왜구로 인해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고, 단지 토지만 있다[因倭人物俱亡 但有土地耳]”라고 되어 있다. 이는 거

    제도의 송변현․아주현의 연혁이 “人物皆亡 今爲直村”이라고 되어 있는 것과

    표현에 차이가 있다. 거제현 지역은 세종실록 지리지의 준거 시점 당시 거제도로 환원된 상태였다. 곧 옛 송변현․아주현 소속의 주민은 거제현으로 흡

    수되었고, 그 영역도 거제현에 편입되었다. 이 때문에 ‘直村’으로 편성된 것을

    연혁에서 밝힌 것이다.72)72)

    반면 남해현은 아직 本島로 환원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전술했듯이 두

    속현이 있던 지역은 營田 형태로 개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세종 13년

    71) 世宗實錄 권78, 세종 19년 7월 辛卯72) 直村에 대해서는 李樹健, 1978 「直村考 : 朝鮮前期 村落構造의 一斷面」, 大丘史

    學 15․16합(1984 韓國中世社會史硏究 , 一潮閣에 재수록) ; 김동수, 1990 앞의

    논문 참조.

  • 204 韓 國 文 化 40 ․

    이 지역에 들어와 살던 주민을 內面으로 옮기고 왕래하면서 경작하도록 조치

    하였다. 두 군현에 대해 “但有土地”라고 표현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송변현과 아주현의 경우에는 고려말 연혁이 보이지 않으나 난포현과 평산현은 “뒤에 왜구로 인해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

    다[後因倭寇 人物俱亡]”라는 연혁 내용이 나와 있다. 이것은 거제도의 송변현

    과 아주현은 교군으로서 조선초기까지 유지된 반면, 남해도의 난포현과 평산

    현은 남해도 환원에 앞서 이미 폐지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

    만 관련 자료가 보이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렵다.

    한편, 남해도에 인접한 창선도의 興善縣도 난포현 등과 유사한 과정을 밟았

    을 것으로 생각된다. 창선도는 본래 有疾部曲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고려후

    기에 彰善縣으로 승격하여 晉州에 소속되었다가 충선왕 때 왕의 이름을 피하

    여 흥선현으로 바뀌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이 역시 “後因倭寇 人物俱亡 爲直村”이라 적고 있다. 이에 대해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아예 항목으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흥선현은 왜구로 인해 남해현 등이 교우할 때 역시 이주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바로

    군현이 폐지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난포현 등과 달리 고려말 연혁에서

    “爲直村”을 명시한 것은 이곳이 진주 소속으로서 군현 폐지와 함께 바로 진주

    의 직촌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난포현 등은 남해도 안에 이를 관할

    할 수 있는 군현이 없었으므로 “人物俱亡”만을 표시한 것이다.

    4. 연안 지역의 僑郡 : 梁州

    고려말 왜구의 피해는 도서 군현에 가장 큰 피해를 입혔지만, 이와 함께 바

    다에 인접한 연안 군현도 대부분 그 영향을 받아 城邑이 파괴되고 주민이 유

    리하였다. 개중에는 본읍을 벗어나 다른 군현 지역으로 들어가 교우하는 경우

    도 여럿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리지 연혁에는 이에 해당하는 경상도 군

    현의 사례는 보이지 않으나 梁州의 경우 문집 자료를 통해 교우 사실과 그

    연혁을 확인할 수 있다.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205

    ① 雙碧樓 : 洪武 辛酉年(우왕 7, 1381) 봄에 왜적이 양산에 침입하여 불을 지

    르니 양산 백성들이 그 땅을 잃고 屬縣 東平에 성을 쌓고 옮겨 살았다. 항상 고향

    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 돌아가 정착하기를 바라고 모여든 지 여러 해가 되었다.

    壬申年(조선 태조 1, 1392) 10월에 玄風監務 田侯 平遠이 良吏로 좋은 평가를 받

    아 양산으로 옮겨왔다. (중략) 田侯가 부임하자 양산 사람들이 서로 이르기를 “우

    리 고을이 장차 흥하리로다. 양산이 비록 제 땅을 잃었으나 예로부터 다스리기 쉽

    다 하였는데, 더욱이 우리 侯가 한다면 어찌 玄風과 같기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중략) 侯가 이에 옛 모습을 회복할 뜻이 있어 여러 父老들과 의논하여 이 樓를

    새로 짓기로 하였다. (중략) 후일 과연 옛 모습을 회복시켜서 양산 사람들의 여

    망에 답한다면 趙公의 말이 징험이 있는 것이리라.73)73)

    ② 梁州는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어 왜적에게 소모되는 것이 더욱 심하였다. 遺

    民이 피하여 金海의 마을에 僑寓하는데, 겨우 官號를 지킨 것이 여러 해가 되었다.

    戊辰年(우왕 14, 1388)에 晉陽 河得孚가 수령이 되었다. (중략) 그 후 河君은 교체

    되었다. (중략) 양주 역시 성이 완성되어 백성이 舊業을 회복하여 양주에 다시 떨

    칠 기세가 있으니 題詠하는 자 중에 현달한 자가 많은 것은 실로 좋은 일이다. 庚

    午年(공양왕 2, 1390) 여름에 沈于慶이 萬夫長으로서 양주의 수령을 겸하였고 河

    君은 조정의 명을 받아 김해에서 鹽課를 감독하였다. 우연히 만나 말하다가 그 詩

    를 城樓에 걸어 양주의 영예로 삼고자 하여 내가 유배온 곳에 찾아와 그 일에 記

    를 청하므로 위와 같이 적었다. 무릇 양주에 성을 쌓는 것은 河君의 뜻이었다.74)74)

    우선 ①의 내용을 통해 양주는 우왕 7년 이후 교군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교우 지역은 관할 속현인 東平縣 지역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

    이 파악되는 시점은 태조 원년 전후로 이해된다. 그런데 ②에는 양주가 교우

    한 곳이 동평이 아니라 金海로 되어 있고, 그것이 파악되는 시점은 우왕 14년

    전후로 나타난다. 곧 교우 지역이 동평과 김해 두 곳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양주의 교우 지역이 이동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그 전말은 다음

    73)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梁山郡 樓亭 雙碧樓 金時用記 “洪武辛酉年春 倭寇梁而火之 梁之民 失其地 乃城於屬縣東平而徙之 常有懷土之心 以望其還定安集者 有

    年矣 越壬申年冬十月 玄風監務田侯平遠 以良吏最 移於梁 (중략) 旣下車 梁人相

    謂曰 吾邑其將乎 梁雖失所 古稱易治 我侯爲之 豈若玄風而已哉 (중략) 侯乃有復

    古之志 謀諸父老以新斯樓 (중략) 他日果能復古 以答梁人之望 則趙公之言爲有徵矣”

    74) 陽村集 권7, 梁州城樓詩幷序 “梁爲州瀕于海 倭耗尤甚 遺民避地僑寓於金海之村 僅守官號者數祀 戊辰 晉陽河君得孚爲宰 (중략) 厥後河君見代 (중략) 梁亦成城

    民復舊業 梁有再振之勢 而題詠者多至顯榮 誠可嘉也 庚午夏 沈候于慶以萬夫長兼

    宰于梁 河君以朝命董鹽課于金 會遇而言 欲以其詩揭于城之樓以爲梁榮 謁予謫次

    請記其事 故書于左 若夫城梁者 河君之志”

  • 206 韓 國 文 化 40 ․

    과 같이 정리된다. 우선 ①에 보이는 우왕 7년은 양주가 왜구의 노략질을 당

    한 때로서 이것이 교우를 시작한 시점이 될 수는 있지만, 이 때 반드시 동평

    현으로 이동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田平遠이 부임한 조선 태조 원년 당

    시 양주는 동평현에 성을 쌓고 교우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은 그가 쌍

    벽루를 건립할 당시도 마찬가지로, 인용문 말미의 내용에서 양주가 여전히 본

    토로 돌아가지 못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때의 양주성은 교우

    처인 동평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②의 河得孚가 수령이 된 것은 우왕 14년의 일이다. 찬자인 權近은 글

    을 청탁받을 당시 이곳에 유배와 있었다. 그가 공양왕 원년 12월에 김해로 유

    배된 사실이 고려사 세가에서 확인된다.75)75)따라서 양주가 공양왕 2년을 전후하여 김해에 교우했던 사적은 그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이므로 명확하

    다고 볼 수 있다.

    위의 두 기사를 연결해 보면, 결국 양주는 처음에 김해에 교우하고 있다가

    우왕 14년경부터 성곽을 축조하였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이 성이 축조된 시점

    은 문맥의 순서를 따른다면 공양왕 2년 이전이 될 것이며, 성의 완성과 함께

    양주는 이곳으로 이동하였다. 성이 완성되어 백성이 舊業을 회복했다고 한 것

    은 이를 의미한다.

    ②에서 성이 어디에 축조되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 ①에서 양주는

    태조 원년 당시까지 본토로 돌아가지 못하고 동평현의 성에 있었다. 그렇다면

    ②에서 하득부의 발의로 축조된 양주성이 바로 ①에서 말하는 동평현의 성이

    라고 판단할 수 있다. 태조 당시까지도 동평현에 있던 양주는 태종 5년 동평

    현이 양주에서 東萊縣으로 이속되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태종 5년 이전에는

    본토로 돌아갔을 것으로 판단된다.

    양주의 교우가 지리지 연혁에서 드러나지 않는 데는 양주와 교우처 사이의

    관계가 행정적으로 밀접하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동평현은

    양주의 속현으로서 그 관할 범위에 있었다. 따라서 지역 주민 사이에는 명확

    한 구분 의식이 있었을 것이나 정부의 관점에서 이들은 행정적으로 하나의

    범주로 인식될 수 있었다. 이는 속현이 사실상 본읍의 영역으로 인식되는 고

    75) 高麗史 권45, 恭讓王 원년 12월 己亥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207

    려말 상황에서는 더욱 뚜렷했을 것이다.

    한편 김해는 원 간섭기 말엽 양주와 兼官 형태로 운영되었던 사실이 확인

    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가 참고된다.

    慶源 李國香 군이 都官正郞으로 梁州郡守가 되었는데 청렴하고 재능이 있다는

    명성이 있었다. 국가에서는 諸道의 수령이 오랫동안 교체되지 않아 백성에게 매우

    해가 되므로 그 중 심한 것을 도태시키고 가까운 고을로 하여금 겸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이 때문에 李君이 고을(金海)을 임시로 맡게 되었다.`76)76)

    위의 글은 李穀이 찬한 「金海府鄕校水軒記」의 일부인데, 작성 시점은 분명

    치 않으나 이곡의 활동 시기를 감안할 때 원 간섭기 말엽으로 잡을 수 있다.

    여기서 양주의 수령이 김해를 겸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는데, 언제까지

    겸임으로 운영되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바로 앞까지 행정적으로

    통합된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연혁 파악에서 양주의 김해 교우를 구분하지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다시 말해 양주의 사례는 동일 군현 안에서 읍치가 이

    동한 것과 같은 현상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양주는 처음에 왜구를 피해 한 때 겸관으로 운영되었던 김해 쪽에 교

    우하다가 우왕 14년에서 공양왕 2년 사이에 속현인 동평현에 성을 쌓고 이주

    하였으며, 태종 5년 이전에 본토로 돌아오고 동평현은 동래현으로 이속되었던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양주의 기존 행정체계 안에서 이루

    어진 현상으로 인식되어 연혁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5. 맺음말

    이상에서는 고려말 왜구로 인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僑郡 중에서 우선

    경상도 지역의 사례를 추출하고 그 연혁 과정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확인

    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76) 稼亭集 권2, 金海府鄕校水軒記 “慶源李君國香以都官正郞 出守梁州 有廉能聲 國家以諸道守令久不移易 頗有厲民 則沙汰其尤者 俾所近州兼治之 由是李君權守

    是府”

  • 208 韓 國 文 化 40 ․

    거제도에는 현령관인 巨濟縣과 그 속현인 鵝洲縣․松邊縣, 그리고 監務가

    설치된 溟珍縣 등이 있었다. 거제현은 연혁에서 원종 12년에 出陸 僑寓한 것

    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연혁의 오류이다. 실제 거제현이 왜구로 인해 교우하

    게 되는 것은 공민왕대의 일로 판단된다. 거제현은 고려말 군현 개편에서 교

    우처인 加祚縣을 이속받아 내륙 군현으로 전환되었다. 태종 14년 군현 병합

    조치에 따라 居昌과 병합하여 濟昌縣이라 하였다가 곧이어 다시 분리되었다.

    그 뒤 거제도로 들어가 사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자 세종 4년 기존의 營田을

    폐지하고 군현을 복설하였다. 이 때 종래 영전을 관리하던 萬戶로 하여금 수

    령을 겸하도록 하여 현령 대신 知縣事가 설치되었다.

    군현 복설 후에는 치소의 입지가 문제가 되어 여러 차례 이동이 있었다. 복

    설 당시 치소는 水月里에 있었으나 세종 8년에 沙等里(沙月浦)로 옮겼으며,

    문종 즉위년에는 古丁里로 옮겨 새로 읍성을 축조하였다.

    거제현의 속현이었던 아주현과 송변현은 연혁상 교우 사실이 나와 있지 않

    으나 다른 자료를 통해 거제현과 같은 지역에 교우하였음이 확인된다. 이들은

    행정적으로 거제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교우 역시 같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명진현도 연혁상 원종 12년에 출륙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거제현과

    마찬가지로 공민왕대에 內地로 나와 교우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명진현은

    이미 감무가 설치되어 거제현과 행정적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그와 다른 지

    역에 교우하였다. 처음 진주 속현인 永善縣에 교우하면서 영선현을 이속받았

    으나 땅이 좁아 정종 즉위년에 江城으로 옮기고 이를 합쳐 珍城縣이라 하였

    다. 그 뒤 세종 14년에서 18년 사이에 다시 거제도로 돌아가 거제현에 폐합되

    는 과정을 밟았다.

    한편 남해도에는 현령관인 南海縣과 그 속현인 蘭浦縣과 平山縣이 있었으

    며, 인접한 창선도에는 고려후기에 興善縣이 설치되었다. 남해현은 왜구를 피

    해 공민왕 7년(6년)에 출륙하여 진주의 임내인 大也川部曲에 교우하였는데,

    이 부곡은 곤명과 하동 사이에 있던 월경지였다. 남해현은 태종 14년 군현 병

    합 때 하동과 합쳐 河南縣이라 하였다가 이듬해 분리한 뒤 역시 진주의 임내

    인 金陽部曲을 이속받아 海陽縣이라 하였다. 태종 17년에는 다시 원상 복구되

    었는데, 여기에는 계속해서 영역을 내어준 진주 쪽의 반발이 작용한 것으로

  • ․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 209

    보인다.

    이어 세종 원년에는 곤명에 御胎를 안치하면서 남해와 곤명을 합쳐 昆南郡

    이라 하였다. 세종 4년의 조치에서 거제도의 영전이 폐지되고 거제현이 복설

    된 것과 달리 남해현은 복설되지 못하였는데, 이는 남해현이 어태 안치에 따

    른 곤명의 승격에 수반하여 병합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남해현은 세종 19년

    에 이르러 비로소 본도로 환원 복설되었고, 곤명은 금양부곡과 합쳐 곤양이

    되었다.

    한편 남해현의 속현이었던 난포현과 평산현 역시 남해현과 함께 교우하였

    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난포현 등의 연혁은 “但有

    土地耳”라고 하여 “今爲直村”이라고 되어 있는 송변현 등과 차이가 있는데,

    이는 당시 거제현이 복설된 것과 달리 남해현은 복설되지 않아 각각을 파악

    하는 기준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남해도에 인접한 창선도의 흥선현 역

    시 교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도서 군현 외에 연안 군현도 왜구의 피해로 교우한 사례가 있었다. 이

    는 지리지 연혁에서는 파악되지 않으나 문집 자료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

    는데, 경상도 지역의 경우 梁州가 이에 해당한다. 양주는 처음에 왜구를 피해

    한 때 兼官으로 운영되었던 金海 쪽에 교우하다가 우왕 14년에서 공양왕 2년

    사이에 속현인 東平縣에 성을 쌓고 이주하였다. 그 뒤 태종 5년 이전에 본토

    로 돌아오고 동평현은 동래현으로 이속되었다. 교우처가 兼官과 속현이었다는

    특징으로 인해 양주의 교우는 기존 행정체계 안에서 이루어진 현상으로 인식

    되었고, 이로 인해 지리지의 연혁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필자 : 경상대학교 인문학부 사학전공 조교수)

    주제어 : 僑郡, 巨濟島, 南海島, 梁州, 군현 병합

    투고일(2007.10.30), 심사시작일(2007.11.6), 심사종료일(2007.11.30)

  • 210 韓 國 文 化 40 ․

    The Implementation and the Reorganization of

    Gyogun/僑郡 units in the ending days of Koryeo

    and the beginning of Joseon

    Yoon, Kyeong-Jin *77)

    The term 'Gyogun(僑郡)' refers to a Gun or Hyeon unit which has been

    relocated from its original position to a new location in a temporary fashion.

    The existence of units like Gyogun shows us that the running of Gun/Hyeon

    system at the time was based more upon the residents themselves than

    upon regional locations of certain units. During the ending days of the

    Koryeo dynasty, due to the invasion of the Japanese pirates, many of the

    Gun/Hyeon units, inside the islands located along the Southern and Western

    coastlines of the peninsula and also other coastal areas, were operated as

    Gyogun units.

    In case of the Gyeongsang-do province, we can view the Gun/Hyeon

    units at Geoje-do and Namhae-do, and the Yangju(梁州) region which was

    located at the coastal area. They were relocated to the inner areas of the

    peninsula and operated as Gyogun units. In some cases they were merged

    with existing Gun/Hyeon units in the vicinity of their new location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all the Gyogun units were returned to their

    original location, and in the process most of the Sokhyeon(屬縣) units were

    dismantled.

    Key Words : Gyogun(僑郡), Geoje-do(巨濟島), Namhae-do(南海島),

    Yangju(梁州) Merging of Gun/Hyeon units

    *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Assistant Professor

    고려말 조선초 僑郡의 설치와 재편1. 머리말2. 巨濟島 지역의 僑郡3. 南海島 지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