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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8 2008 1 1 27065 요일 새로운 문명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발상의 전환과 실천적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서로 의존하는 인 간’의발견, 사회통합을지향하는‘공화민주주의’ , ‘사 회적 책임’을 다하는 자본주의, 사회문화적 차이들의 ‘가로지르기’와‘융합’을통해새문명은피어난다. ’호모레시프로쿠스’의탄생 새로운 문명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전제로 한다. 신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은 근대는 생각하 는 인간, 즉‘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찾았다. 그러나 이는 자기중심적 사 고의 팽배, 이기심의 발호, 타인에 대한 지배와 같은 부작용을 낳았다. 19세기엔 노동과 실천행위가 중요 하다는 인식이 퍼졌다. 노동하는 인간‘호모 파베르 (Homo Faber)’는 생각하는 인간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다. 그러나 노동하는 인간 역시 그 성과를 타인과 공유하기보다 자신의 이기심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호모 사피엔스’와‘호모 파베르’모두 타 인에 대한 배려와 공생에 대 한 생각이 부족했다. 21세기 새로운 문명은 무엇보다 서 로 의존하는 인간, 즉‘호모 레시프로쿠스(Homo Reci- procus)’의 탄생을 필요로 한다. ‘호모 레시프로쿠스’ 는 상대와 경쟁하지만 상대 에 의존하고 협력하지 않고 는 자신도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을 말한다. 근대는 인 간을 해방시켰다. 하지만‘자기중심적 휴머니즘’만 으로 인류의 해방은 요원하다. ‘호모 레시프로쿠스’ 가 요구되는 이유이다. 민주주의를 넘어 공화주의로 한국은 1948년 건국 이래 9번의 헌법개정을 거치 면서도‘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제1조 제 1항의 규정을 바꾼 적이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상 당한 정도의 민주주의를 성취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이기적인 민주 주의에 머물러 있다. 계층간₩노사간₩지역간₩세대간 갈등은 오히려 증폭되었다. 민주화는 정치발전의 필 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충분조건 은 민주를 바탕으로 사회통합과 공동체 조화를 이루 는‘공화(共和)’에서 이루어진다. 한국은 그동안 헌 법에 적시된‘민주’의 이념은 충분히 반영했지만, ‘공화’의 덕목을 실천하는 데는 미숙했다. 핀란드는 복지를 통해‘공화’를 추구하고 있는 대 표적인 나라다. 헬싱키대 파트리크 스케이닌 행태과 학대학 학장은“모든 사람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인식이 복지제도를 만들었 으며, 이것이 바탕이 되어 고도성장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척박한 토지에 오랜 기간 스웨덴과 러시아의 식민통치를 받은 핀란드는 모든 사람을 공동체의 일 원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사람으 로 만들어야 했다. 서로 의존적인 공동운명체를 건설 하기 위해 복지가 필요했으며, 이것이 상호협력을 통 한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20세기 들어 심대한 도전을 겪었다. 자 본의 지배는 빈부격차를 더욱 벌려, 못 가진 자들의 전체적인 거부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평등을 강조 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또한 인간의 본성과 역사 의 동력을 잘못 이해한 나머지 결국 1990년대 최후 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폐해는 여전 히 심각하다.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고, 국가간의 격 차는 날로 확대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빌 게이츠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자본주의를 강조한다. 세계 제일의 갑부인 게 이츠는 2000년 부인 멜린다와 함께 게이츠재단을 만 들어 자신이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처음 1000억 원의 출연금으로 시작된 게 이츠재단은 그 후 2년 만에 2 조원, 그리고 또 다른 세계적 갑부인 워런 버핏으로부터 30조원을 기부받아 이제 무 려 34조원의 재원을 갖고 있 다. 오늘날 자본가들은 이윤 을 극대화하면서도 그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여 자본 주의의 건강성을 회복시키고 있다. 서로 다른 문화의 가로지르기와 융합 새로운 문명은 종교와 예술 분야도 비켜가지 않는 다. 지금까지 20세기 문명은 자기 문명권 내에 안주하 면서 다른 생활방식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우월함 만 주장했다.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처럼 극단적으로 충돌하거나, 서구문명의 보편성을 전제로 다른 문화 권을 정복하는 문화제국주의 양상을 띠었다. 하지만 이젠 다양한 문화의 가로지르기와 융합만이 풍요로 운 삶을 가져온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공연 예술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현대 공연예술은 장 르들을 섞는‘종합예술’을 지향한다. 그 첨단에 프랑 스‘태양극단’의 설립자이자 아방가르드 연출가인 아리안느 므누슈킨이 있다. 러시아계인 그녀는 서양 과 동양문화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녀는“서양 연극의 형태로는 더 이상 관객을 감동시킬 수 없다” 고 말한다. 뮤지컬‘라이온 킹’을 연출한 줄리 테이머 역시 서구전통 양식인 뮤지컬에 인도네시아 인형극 과 아프리카 민속음악 등을 창의적으로 융합함으로 써 대성공을 거두고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새로운 문명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이동수 경희대 NGO대학원장₩정치사상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새로운 문명’ 의 징후를 탐색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전 공 교수 12명이 1월 초 집중적으로 세계를 누비고 독자 여러분께‘새로운 문명’의 현 장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동수 경희대 교수(정치사상)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공동체의 조화를 추구 하는 공화주의 현장을 찾아간다. 핀란드의 의회 및 교육현장을 통해‘공화’의 가능성 을 발견하고, 공화주의 철학자 모리지오 비 롤리 프린스턴대 교수 인터뷰를 통해 공화 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한다. 정윤재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정치리더십)는 북아일랜 드 벨파스트의 종교분쟁현장을 탐방하고, 장인성 서울대 교수(국제정치)는 일본의 공 동체 연구자들을 만나 동아시아‘트랜스 내 셔널’공동체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염재호 고려대 교수(행정학)는 기업의 사 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미국‘게이츠 재 단’을 방문하고, 박용승 경희대 교수(경영학) 는 인간의 가치를 경영에 응용하고 있는 기 업인 미국‘멘스 웨어하우스’를 찾아 21세기 새로운 기업의 모습을 진단한다. 김용학 연 세대 교수(사회학)는 수많은 네티즌이 만들 고 있는 인터넷 백과사전‘위키피디아’의 작 업을 통해‘집단 협동’이라는 생산방식이 새 로운 문명의 씨앗이 될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제 과학기술은 단순히 경제동력을 얻기 위해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을 위한 과학이어야 한다는 패러다임으로 전 환하는 순간에 있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 학기술사)와 이상욱 한양대 교수(과학철학) 는 시민을 위한 과학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네 덜란드 라테나우 연구소를 찾아가 과학기술 발전의 방향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최재 천 이화여대 교수(사회생물학)와 이관수 동 국대 교수(과학기술사)는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통합 학문’을 추구하는 미국의 학문 현 장을 찾는다. 전영백 홍익대 교수(미술사), 김 학민 경희대 교수(오페라연출)는 미술과 오 페라₩뮤지컬 등 예술분야에서 서로 다른 장 르가 관통하는 새로운 예술의 흐름을 진단한 다. 이한수 기자 [email protected] ☞ 동영상 chosun.com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저자 브라이슨은 46억년 지 구의 역사에서 우리 인류가 얼마나 최근에 등장했는가를 이렇게 설명한다. “두 팔을 완전히 펴고, 그것이 지구의 역사 전체를 나타낸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역사는 손톱줄로 손톱을 다듬을 때 떨어져 나오는 중간 크기의 손톱 가루 한 알 속에 들어가버린다.” 지구 생태계의 막둥이 우리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 들어준 두 사건으로 흔히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꼽는다. 지금부터 약 1만년 전에 일어난 농업혁명은 우리 인간에 게 부의 축적을 허락하며 폭발적인 인구 증가의 발판을 마 련해 주었다. 그러나 거의 800년 동안이나 이어온 농경의 역사는 18세기 중반 산업혁명에 의해 급격한 도시화로 이 어진다. 약 5만년 전 비교적 정교한 도구를 제작하기 시작 한 인간이 드디어 제품의 대량생산에 성공한 사건인 산업 혁명은 표면적으로는 제조업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이어 서 벌어진 두 정치혁명, 즉 미국혁명(1775년)과 프랑스혁 명(1789)에 비춰볼 때 산업혁명은 사실 영국식 사회혁명이 었다. 그래서‘인간 등정의 발자취’의 저자 브로노우스키 는 이 세 혁명을 한데 묶어‘삼각 혁명’이라 부른다. 이 같은 혁명의 시대를 거치며 역사의 헤게모니는 어느 덧 동양에서 서양으로 이동했고,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그 리고 자유민주주의가 때론 차례로 또 때론 한데 뒤엉켜 일어난 격동의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친다. 역사학자들은 흔히 1905년‘피의 일요일’사건으로 촉발된 1917년 러 시아혁명에서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1991년 소련 의 해체에 이르는 20세기를‘이념의 세기’로 규정하지 만, 과학자인 나는 이 두 세기를 애써 구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탈이념의 근거를 마련해준 과학은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꾸준히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철도와 증기선의 발명으로‘80일간의 세계 일주’가 가 능해지더니 1895년에 자동차, 그리고 1903년에 비행기가 발명되면서 세계는 더 작아졌고, 1837년 모스 통신, 1876 년 전화와 1890년대 무선통신의 개발로 이제 세상은 아 예 하나가 되었다. 일군의 사회학자들이 제3의 혁명으로 규정하는 정보혁명은 급기야 그 최근 발명품인 휴대전화 와 인터넷으로 북한의 고립 문명 체제마저 무너뜨리기 일보직전이다. 우리는 이미 21세기의 첫 7년을 보냈다. 나는 20세기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세계화의 물결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21세기를 삼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예측을 문화와 문명의 차이로 분석해본다. 문화는 원래 문명보 다 더 큰 개념이었다. 예전에 이 세계는 몇 개의 거대 문 화권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각의 문화권마다 크고 작은 문명들이 흥망성쇠의 역사를 거쳐왔다. 하지만 나는 이 제 전세계가 하나의 거대문명 또는 메타문명(meta-civ- ilization)으로 묶이고 그 안에 수없이 다양한 문화 유형 들이 탄생과 죽음을 거듭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시대를‘혼화(混和)의 시대’로 정의한다. 모든 게 섞이고 있다. 서로 다른 과학과 기술이 섞이고 문화가 섞이고 피가 섞이고 있다. 나는 이러한 변화를 매 우 긍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어느 한 국가가 독자적으로 거대한 문명을 일으켜 세울 필요가 없어졌다. 이미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문명네트워크로 연 결되고 있다. 게임의 법칙은 이제 그 속에서 누가 더 독특 하고 전염성 높은 문화를 만들어내는가를 묻고 있다. 열 린 마음으로 새로운 문명을 품어야 한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조선일보 신년특집 새로운 문명이 온다. 갈등과 반목, 무절제한 자유와 획일적인 평등을 넘어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이 루는 신(新)문명은 21세기 우리에게 곧 다가온다. 종교₩국가₩종족₩언어의 차이를 넘어 인간 모두가 행 복한 삶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 새 문명의 징후들은 이미 세계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조선일보는 경 희대(총장 조인원)와 공동으로 신년기획‘새로운 문명이 온다’를 연재한다. 정치₩경제, 사회₩문화, 과 학₩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전공한 교수 12명을 새해 벽두 세계 구석구석에 집중 파견, 지구촌에서 벌 어지고 있는 새로운 문명의 현장을 직접 답사한다. 1월 중순 첫 보고를 시작으로 10회에 걸쳐 독자 여 러분들을 새 문명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12인 학자들이 진단하는 문명의 새 물결 참여교수 프로필 김용학 교수(55)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미국 시카고대 박사 조직사회학 김학민 교수(46) 경희대 예술학부 교수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 박사 오페라 연출 박용승 교수(44) 경희대 경영학부 교수 미국 미네소타대 박사 인적자원관리 염재호 교수(53)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 산업·통상정책 이관수 교수(42) 동국대 교양학부 교수 서울대 박사 과학기술사 이동수 교수(48) 경희대 NGO대학원장 미국 밴더빌트대 박사 정치사상 이상욱 교수(39) 한양대 철학과 교수 영국 런던정경대 박사 과학철학 장인성 교수(51)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일본 도쿄대 박사 국제정치 전영백 교수(44)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영국 리즈대 박사 미술사 정윤재 교수(55)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미국 하와이대 박사 정치리더십 최재천 교수(54)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미국 하버드대 박사 사회생물학 홍성욱 교수(47)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서울대 박사 과학기술사 새로운 문명이 온다 조선일보-경희대 공동기획 지난 세기 배려와 공생의식 부족‐ 다른 문화 긍정하는 창의적인 융합의 길 나서야 인류는 지구 생태계의 막둥이‐ 거대한 혼혈인종으로 거듭난다 국경과 이념 가로질러 共生의 북소리를 울려라 고대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 중세 호모 아베우 Homo Aveu 고백하는 인간 17세기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 생각하는 인간 18세기 호모 에코노미쿠스 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 19세기 호모 파베르 Homo Faber 노동하는 인간 20세기 호모 폴리티쿠스 Homo Politicus 권력적 인간 21세기 호모 레시프로쿠스 Homo Reciprocus 상호 의존하는 인간 호모 심비우스 Homo Symbious 공생하는 인간 인간 종류의 진화 100 <가나다 순> 교수 12명 세계 곳곳에 파견‐ 이달 중순부터 10회 연재 새로운 문명이 다가온다. 갈등과 반목을 넘 어 인간 모두가 행복한 삶의 공동체를 만 들고 있는 새 문명의 징후들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세계 최대 공연 기업‘태양의 서커스’공연에서 출연자들 이 하늘로 비상하는 몸짓을 하고 있다.

2008 새로운문명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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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2008 새로운문명이 온다

A18 2008년 1월 1일 나 제27065호요일화

새로운 문명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발상의 전환과

실천적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서로 의존하는 인

간’의발견, 사회통합을지향하는‘공화민주주의’, ‘사

회적 책임’을 다하는 자본주의, 사회문화적 차이들의

‘가로지르기’와‘융합’을 통해 새 문명은 피어난다.

◆’호모 레시프로쿠스’의 탄생

새로운 문명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전제로 한다.

신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은 근대는 생각하

는 인간, 즉‘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찾았다. 그러나 이는 자기중심적 사

고의 팽배, 이기심의 발호, 타인에 대한 지배와 같은

부작용을 낳았다. 19세기엔 노동과 실천행위가 중요

하다는 인식이 퍼졌다. 노동하는 인간‘호모 파베르

(Homo Faber)’는 생각하는 인간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다. 그러나 노동하는 인간 역시 그 성과를 타인과

공유하기보다 자신의 이기심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호모 사피엔스’와‘호모 파베르’모두 타

인에 대한 배려와 공생에 대

한 생각이 부족했다. 21세기

새로운 문명은 무엇보다 서

로 의존하는 인간, 즉‘호모

레시프로쿠스(Homo Reci-

procus)’의 탄생을 필요로

한다. ‘호모 레시프로쿠스’

는 상대와 경쟁하지만 상대

에 의존하고 협력하지 않고

는 자신도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을 말한다. 근대는 인

간을 해방시켰다. 하지만‘자기중심적 휴머니즘’만

으로 인류의 해방은 요원하다. ‘호모 레시프로쿠스’

가 요구되는 이유이다.

◆민주주의를 넘어 공화주의로

한국은 1948년 건국 이래 9번의 헌법개정을 거치

면서도‘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제1조 제

1항의 규정을 바꾼 적이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상

당한 정도의 민주주의를 성취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이기적인 민주

주의에 머물러 있다. 계층간₩노사간₩지역간₩세대간

갈등은 오히려 증폭되었다. 민주화는 정치발전의 필

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충분조건

은 민주를 바탕으로 사회통합과 공동체 조화를 이루

는‘공화(共和)’에서 이루어진다. 한국은 그동안 헌

법에 적시된‘민주’의 이념은 충분히 반 했지만,

‘공화’의 덕목을 실천하는 데는 미숙했다.

핀란드는 복지를 통해‘공화’를 추구하고 있는 대

표적인 나라다. 헬싱키대 파트리크 스케이닌 행태과

학대학 학장은“모든 사람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인식이 복지제도를 만들었

으며, 이것이 바탕이 되어 고도성장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척박한 토지에 오랜 기간 스웨덴과 러시아의

식민통치를 받은 핀란드는 모든 사람을 공동체의 일

원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사람으

로 만들어야 했다. 서로 의존적인 공동운명체를 건설

하기 위해 복지가 필요했으며, 이것이 상호협력을 통

한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20세기 들어 심대한 도전을 겪었다. 자

본의 지배는 빈부격차를 더욱 벌려, 못 가진 자들의

전체적인 거부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평등을 강조

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또한 인간의 본성과 역사

의 동력을 잘못 이해한 나머지 결국 1990년대 최후

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폐해는 여전

히 심각하다.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고, 국가간의 격

차는 날로 확대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빌 게이츠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자본주의를 강조한다. 세계 제일의 갑부인 게

이츠는 2000년 부인 멜린다와 함께 게이츠재단을 만

들어 자신이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처음 1000억

원의 출연금으로 시작된 게

이츠재단은 그 후 2년 만에 2

조원, 그리고 또 다른 세계적

갑부인 워런 버핏으로부터

30조원을 기부받아 이제 무

려 34조원의 재원을 갖고 있

다. 오늘날 자본가들은 이윤

을 극대화하면서도 그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여 자본

주의의 건강성을 회복시키고 있다.

◆서로 다른 문화의 가로지르기와 융합

새로운 문명은 종교와 예술 분야도 비켜가지 않는

다. 지금까지 20세기 문명은 자기 문명권 내에 안주하

면서 다른 생활방식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우월함

만 주장했다.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처럼 극단적으로

충돌하거나, 서구문명의 보편성을 전제로 다른 문화

권을 정복하는 문화제국주의 양상을 띠었다. 하지만

이젠 다양한 문화의 가로지르기와 융합만이 풍요로

운 삶을 가져온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공연

예술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현대 공연예술은 장

르들을 섞는‘종합예술’을 지향한다. 그 첨단에 프랑

스‘태양극단’의 설립자이자 아방가르드 연출가인

아리안느 므누슈킨이 있다. 러시아계인 그녀는 서양

과 동양문화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녀는“서양

연극의 형태로는 더 이상 관객을 감동시킬 수 없다”

고 말한다. 뮤지컬‘라이온 킹’을 연출한 줄리 테이머

역시 서구전통 양식인 뮤지컬에 인도네시아 인형극

과 아프리카 민속음악 등을 창의적으로 융합함으로

써 대성공을 거두고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새로운 문명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이동수 경희대 NGO대학원장₩정치사상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새로운 문명’

의 징후를 탐색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전

공 교수 12명이 1월 초 집중적으로 세계를

누비고 독자 여러분께‘새로운 문명’의 현

장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동수 경희대 교수(정치사상)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공동체의 조화를 추구

하는 공화주의 현장을 찾아간다. 핀란드의

의회 및 교육현장을 통해‘공화’의 가능성

을 발견하고, 공화주의 철학자 모리지오 비

롤리 프린스턴대 교수 인터뷰를 통해 공화

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한다. 정윤재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정치리더십)는 북아일랜

드 벨파스트의 종교분쟁현장을 탐방하고,

장인성 서울대 교수(국제정치)는 일본의 공

동체 연구자들을 만나 동아시아‘트랜스 내

셔널’공동체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염재호 고려대 교수(행정학)는 기업의 사

회적책임을강조하고있는미국‘게이츠재

단’을방문하고, 박용승경희대교수(경 학)

는 인간의 가치를 경 에 응용하고 있는 기

업인미국‘멘스웨어하우스’를찾아 21세기

새로운 기업의 모습을 진단한다. 김용학 연

세대 교수(사회학)는 수많은 네티즌이 만들

고있는인터넷백과사전‘위키피디아’의작

업을통해‘집단협동’이라는생산방식이새

로운 문명의 씨앗이 될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제 과학기술은 단순히 경제동력을 얻기

위해발전시켜야하는것이아니라인간의삶

을위한과학이어야한다는패러다임으로전

환하는 순간에 있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

학기술사)와 이상욱 한양대 교수(과학철학)

는시민을위한과학을연구하고실천하는네

덜란드 라테나우 연구소를 찾아가 과학기술

발전의 방향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최재

천 이화여대 교수(사회생물학)와 이관수 동

국대교수(과학기술사)는분과학문의경계를

넘어‘통합학문’을추구하는미국의학문현

장을찾는다. 전 백홍익대교수(미술사), 김

학민 경희대 교수(오페라연출)는 미술과 오

페라₩뮤지컬 등 예술분야에서 서로 다른 장

르가관통하는새로운예술의흐름을진단한

다. 이한수 기자 [email protected]

☞ 동 상 chosun.com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저자 브라이슨은 46억년 지

구의 역사에서 우리 인류가 얼마나 최근에 등장했는가를

이렇게 설명한다. “두 팔을 완전히 펴고, 그것이 지구의

역사 전체를 나타낸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역사는 손톱줄로 손톱을 다듬을 때 떨어져 나오는

중간 크기의 손톱 가루 한 알 속에 들어가버린다.”

지구 생태계의 막둥이 우리 인간을 만물의 장으로 만

들어준 두 사건으로 흔히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꼽는다.

지금부터 약 1만년 전에 일어난 농업혁명은 우리 인간에

게부의축적을허락하며폭발적인인구증가의발판을마

련해 주었다. 그러나 거의 800년 동안이나 이어온 농경의

역사는 18세기 중반 산업혁명에 의해 급격한 도시화로 이

어진다. 약 5만년 전 비교적 정교한 도구를 제작하기 시작

한 인간이 드디어 제품의 대량생산에 성공한 사건인 산업

혁명은 표면적으로는 제조업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이어

서 벌어진 두 정치혁명, 즉 미국혁명(1775년)과 프랑스혁

명(1789)에비춰볼때산업혁명은사실 국식사회혁명이

었다. 그래서‘인간 등정의 발자취’의 저자 브로노우스키

는 이 세 혁명을 한데 묶어‘삼각 혁명’이라 부른다.

이 같은 혁명의 시대를 거치며 역사의 헤게모니는 어느

덧 동양에서 서양으로 이동했고,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그

리고 자유민주주의가 때론 차례로 또 때론 한데 뒤엉켜

일어난 격동의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친다. 역사학자들은

흔히 1905년‘피의 일요일’사건으로 촉발된 1917년 러

시아혁명에서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1991년 소련

의 해체에 이르는 20세기를‘이념의 세기’로 규정하지

만, 과학자인 나는 이 두 세기를 애써 구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탈이념의 근거를 마련해준 과학은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꾸준히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철도와 증기선의 발명으로‘80일간의 세계 일주’가 가

능해지더니 1895년에 자동차, 그리고 1903년에 비행기가

발명되면서 세계는 더 작아졌고, 1837년 모스 통신, 1876

년 전화와 1890년대 무선통신의 개발로 이제 세상은 아

예 하나가 되었다. 일군의 사회학자들이 제3의 혁명으로

규정하는 정보혁명은 급기야 그 최근 발명품인 휴대전화

와 인터넷으로 북한의 고립 문명 체제마저 무너뜨리기

일보직전이다.

우리는 이미 21세기의 첫 7년을 보냈다. 나는 20세기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세계화의 물결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21세기를 삼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예측을

문화와 문명의 차이로 분석해본다. 문화는 원래 문명보

다 더 큰 개념이었다. 예전에 이 세계는 몇 개의 거대 문

화권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각의 문화권마다 크고 작은

문명들이 흥망성쇠의 역사를 거쳐왔다. 하지만 나는 이

제 전세계가 하나의 거대문명 또는 메타문명(meta-civ-

ilization)으로 묶이고 그 안에 수없이 다양한 문화 유형

들이 탄생과 죽음을 거듭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시대를‘혼화(混和)의 시대’로 정의한다.

모든 게 섞이고 있다. 서로 다른 과학과 기술이 섞이고

문화가 섞이고 피가 섞이고 있다. 나는 이러한 변화를 매

우 긍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어느

한 국가가 독자적으로 거대한 문명을 일으켜 세울 필요가

없어졌다. 이미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문명네트워크로 연

결되고 있다. 게임의 법칙은 이제 그 속에서 누가 더 독특

하고 전염성 높은 문화를 만들어내는가를 묻고 있다. 열

린 마음으로 새로운 문명을 품어야 한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조선일보 신년특집

새로운 문명이 온다. 갈등과 반목, 무절제한 자유와 획일적인 평등을 넘어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이

루는 신(新)문명은 21세기 우리에게 곧 다가온다. 종교₩국가₩종족₩언어의 차이를 넘어 인간 모두가 행

복한 삶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 새 문명의 징후들은 이미 세계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조선일보는 경

희대(총장 조인원)와 공동으로 신년기획‘새로운 문명이 온다’를 연재한다. 정치₩경제, 사회₩문화, 과

학₩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전공한 교수 12명을 새해 벽두 세계 구석구석에 집중 파견, 지구촌에서 벌

어지고 있는 새로운 문명의 현장을 직접 답사한다. 1월 중순 첫 보고를 시작으로 10회에 걸쳐 독자 여

러분들을 새 문명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12인 학자들이

진단하는

문명의 새 물결

참여교수 프로필

김용학 교수(55)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미국 시카고대 박사

조직사회학

김학민 교수(46) 경희대 예술학부 교수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 박사

오페라 연출

박용승 교수(44) 경희대 경 학부 교수

미국 미네소타대 박사

인적자원관리

염재호 교수(53)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

산업·통상정책

이관수 교수(42) 동국대 교양학부 교수

서울대 박사

과학기술사

이동수 교수(48) 경희대 NGO대학원장

미국 밴더빌트대 박사

정치사상

이상욱 교수(39) 한양대 철학과 교수

국 런던정경대 박사

과학철학

장인성 교수(51)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일본 도쿄대 박사

국제정치

전 백 교수(44)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국 리즈대 박사

미술사

정윤재 교수(55)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미국 하와이대 박사

정치리더십

최재천 교수(54)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미국 하버드대 박사

사회생물학

홍성욱 교수(47)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서울대 박사

과학기술사

새로운 문명이 온다

조선일보-경희대 공동기획

지난 세기

배려와 공생의식 부족‐

다른 문화 긍정하는

창의적인 융합의 길 나서야

인류는 지구 생태계의 막둥이‐거대한 혼혈인종으로 거듭난다

국경과 이념 가로질러 共生의 북소리를 울려라

고대호모 루덴스 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

중세호모 아베우 Homo Aveu

고백하는 인간

17세기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

생각하는 인간

18세기호모 에코노미쿠스 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

19세기호모 파베르 Homo Faber

노동하는 인간

20세기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권력적 인간

21세기호모 레시프로쿠스Homo Reciprocus

상호 의존하는 인간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공생하는 인간

인간 종류의 진화 100

<가나다 순>

교수 12명 세계 곳곳에 파견‐ 이달 중순부터 10회 연재

새로운문명이다가온다. 갈등과반목을넘어 인간 모두가 행복한 삶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 새 문명의 징후들은 이미 세계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세계 최대 공연기업‘태양의 서커스’공연에서 출연자들이 하늘로 비상하는 몸짓을 하고 있다.

Page 2: 2008 새로운문명이 온다

A192008년 1월 1일 나요일화제 호27065

“새로운 문명은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휴머니

즘을 발견하려는 인간의 노력 여부에 달려 있다.”

지난달 19일 독일 에센 문명연구소(KWI₩Kulturwissenschaftliches

Institut)에서 만난 요른 뤼젠(70₩Joern Ruesen) 연구소장은“지금 지구

는 갈등과 반목에 있다. 열쇠는 인간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종

교₩지역₩국가₩종족의 차이를 뛰어넘는‘타협할 수 없는 것의 타협 가능

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에센 문명연구소는 1998년 공산주의가 최종적으로 몰락한 이후, 다가올

새로운 문명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됐다. 보쿰대, 도르트문트대, 에센-두

이스부르크대 등 3개 대학이 연합해 설립했지만, 연구재원은 모두 독일

정부에서 지원을 받는다. 1920년대 세워진 3층짜리 전기회사 건물을 개조

해 연구실과 콘퍼런스룸, 방문 연구자들의 숙소를 마련했다. 지금은 중국

₩일본₩인도₩남아공₩멕시코 등 여러 나라의 학자들과 함께‘문명 간 협력

하는 인류’‘유럽 휴머니즘 비판’‘휴머니즘과 종교’‘휴머니즘과 경제’

‘휴머니즘과 교육’‘탈휴머니즘의 도전’등 6개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상주 연구원은 25명 안팎이지만, 콘퍼런스와 학술회의에 참여하며

공동 연구하는 학자는 100여명에 달한다. 뤼젠 소장은“세계 각국의 석

학들을 6개월간 초빙해서 공동연구를 진행한다. 단순히 학술 연구에 그

치는 것이 아니라 강연회와 심포지엄, 교육과 출판을 통해 세계적인 네트

워크 형성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는 지금 공존과 공 을 위해 협력하는 인간의 새로운 문명을 모색

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 뉴멕시코주 산타페 연구소(Santa Fe Institute)는

근대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는‘통합 학문’의 연구를 통해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물리학₩생물학₩컴퓨터학 같은 과학 및 기술분야, 환

경₩정치₩경제 같은 인문사회과학 역을 아우르는 통합 학문의 정립을

위해 40여명 연구진이 공동연구를 펼치고 있다. 물고기 무리의 행동 양

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주식 투자가들의 행동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개미의 행동 양태를 분석하여 새로운 노사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식

이다.

2000년 남아공에 설립된 스텔렌보쉬 연구소(The Stellenbosch Insti-

tute for Advanced Study)도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통합하는 연구

를 진행하고 있다. 빈곤과 보건위생 같은 아프리카의 지역적 문제에 실질

적으로 도움이 될 연구를 하면서도 각 분야 첨단지식의 교류와 융합으로

‘새롭고 종합적인 학문’을 탐색한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라테나우

연구소(Rathenau Institute)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어떤 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는 대표적인 연구소다. 급격한 기술변

화가 인간의 삶의 양식과 사회구조 전반에 어떤 향을 끼칠 것인지 분석

한다. 1986년 설립된 이후 매년 세계에서 주목하는 각종 보고서를 내고

있다.

미래의 전망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국가의 실질적인 발전을 가져오

기도 한다. 복지와 성장을 동시에 달성하고 있는 북유럽 국가 핀란드는

새로운 환경에 대처하는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의회 산하에‘미래 위원

회’를 두고 있다. 목재를 팔던 기업‘노키아’를 세계적인 IT기업으로 발

전시킨 동력은 미래위원회의‘선택과 집중’전략 때문이다. 부(富)의 편

중과는 관계없이 동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핀란드의 명품 교육 역시

미래 진단을 통해 인재를 활용하는 전략에 입각해 있다. 석사학위를 주고

교사가 될 자격을 부여하는 헬싱키대 응용교육학과는 인기가 높아 매년

경쟁률이 10대1을 넘는다. 지난해에도 2061명 지원자 중 10%에 불과한

211명만이 합격했다. 그러나 누구도 교육불평등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지난달 21일 핀란드 헬싱키대 연구실에서 만난 유하니 히토넨(Juhani

Hytonen) 학과장은“핀란드는 누구나 동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지

만 결과의 평등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떨어진 사람도 시스템 때문에 떨

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경쟁에서 실패하더라도 필요한

곳에 다시 인재를 활용하는 공생의 사회체제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에센(독일)₩헬싱키(핀란드)=이한수 기자 [email protected]

“‘우분투(ubuntu)’라는 말이 있다. 휴머니즘

에 해당하는 아프리카 말이다. 우리 모두 인간이

라는‘인간의 가치’가 전제되지 않으면 새로운

문명은 결코 오지 않는다”

독일에센문명연구소를창립때부터 10년간이

끌고있는요른뤼젠소장은‘새로운휴머니즘’을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그는“다른 것을 다르다는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갈등이 비롯된다. 인간성의

본질을제대로알고문화적차이를새로운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새로운 문명은 어떤 모습인가.

“먼저 새로운 인간성을 발견해야 한다. 학술대

회 같은 곳에서는 보통 동양과 서양의 차이만을

이야기한다. 동양은 전체를 추구하고 서양은 개

인주의이며, 서양은 물질주의인 반면 동양은 그

렇지 않다는 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인간이

라는 공통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를 비

평하지 않고 남만을 비평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

생한다. 스스로를 비평하면 자기 안의 미개함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이 말하는‘새로운 인간성’은 어떻게 만

들 수 있나.

“인간의 어두운 면을 확연히 밝혀놓지 않으면

새로운 인간성을 발견할 수 없다. 내 안에 인간성

이 있는 것과 동시에 비인간적인 인간성(Die un-

menschliche Menschlichkeit)이 있다는 인식

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러낼

때 새로운 인간성이 드러난다. 그래야만 새로운

문명을 이야기할 수 있다.”

—너무 당위적인 말이다.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

능한가.

“독일은 역사적으로 인류문명에 내놓을 훌륭한

작가와 철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제국주의

와 제2차 세계대전의 학살을 저질 다. 독일은 교

과서에 이런 사실을 기록했다. 그 결과 더 많은 것

을 얻었다. 일본은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스스

로 감추고 바꾸려 하지 않으니까 갈등을 변화시

키지 못한다. (일제 식민지로 고통을 겪었지만) 그

래도 한국이 해야 할 일은 일본의 범죄를 용서하

는 것이다. 용서할 때 새로운 관계를 정립할 수 있

다. 북한이라는 곳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

는 전체주의 국가이며 감옥과도 같은 곳이다. 하

지만 한국은 북한과 물리적 접촉뿐만 아니라 정

신적으로 가까이 하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그것

이 정치적인 휴머니즘이다.”

—종교간의갈등은새로운문명의걸림돌아닌가.

“일본에서 10여 년간 선불교를 공부하고 깨달

음을 얻은 70세 된 독일 가톨릭 신자 이야기가 독

일 신문에 난 적이 있다. ‘당신은 이제 불교도가

되었는가’라고 묻자 그는‘선불교를 통해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됐다’고 했다. 나는 이것이 서로

다른 종교를 극복한 사례로 본다. 독일 마인츠 성

당의 한 성직자는‘무슬림에게 말하는 그리스도

인들’이란 주제로 설교를 했다. 오케스트라가 연

주할 때 한 가지 악기만 연주한다면 음악이 될 수

있겠는가, 다양한 악기가 연주될 때 훌륭한 음악

이 되지 않느냐 하는 내용이다. 종교의 다양성은

결코 새로운 문명의 적이 아니다.”

에센(독일)=이한수 기자

☞ 동 상 chosun.com

국내의 문명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2005년부터 3년째‘문

명과 평화’국제 포럼을 개최하고 있는 중이다.

“다양한 문명 간의 대화를 통해 지구 위의 모두가

평화롭게 더불어 사는 방안을 모색한다”는 취지

를 내세웠다. 세계석학 초청강연, 국제 포럼 개최

등을 통해 평화로운 공존의 문명을 탐구하고 있다.

서울대는 김광웅 교수(행정학)를 중심으로 지

난해‘미래학문을 위한 범대학 콜로키엄’을 4차

례 개최했다. 과거의 분과학문은 융합학문으로 발

전한다는 점, 융합학문은 미래의 일이지만 과거에

도 사례가 발견된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연구를

진행 중이다. 올해에는 새로운‘미래 대학’을 디

자인하는 데 역점을 둔다는 계획이다.

경희대는 2005년‘네오 르네상스 문명원’을 설

립하고 민주화₩산업화₩과학화라는 근대 문명의

바탕 위에서‘평화와 공 ’의 새로운 문명을 연

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매년‘UN 평화의 날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세

계 NGO(비정부기구) 단체들과의 네트워크를 만

들어가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2009년에는‘세계

시민 포럼’(World Civic Forum)을 열고 세계 석

학들이 참여하는 학술원을 구성한다는 원대한 계

획도 짜놓고 있다. 이한수 기자

조선일보 신년특집

21세기는 경계 없는 �통합 학문3의 시대

시작 단계에 들어선 국내의 문명 연구

새로운 문명 모색하는 세계의 연구 기관들

1스스로를 비평하는 자세에서

새로운 인간성이 만들어진다2

요른 뤼젠 독일 에센 문명연구소장

새로운 문명이 온다

조선일보-경희대 공동기획

종교와 민족, 국가와 언어의 차이는 더 이상 갈등의 요소가 아니다. 문화의 다양성은 새로운문명의 적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풍요롭게 해주는 자원이다. 수많은 익명의 프로그래머들이‘집단 협동’을 통해 만든 컴퓨터 운 체제 리눅스(위), 종교분쟁으로 도심에서 자동차가불타고 있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가운데), 신기술을 실험하고 있는 핀란드 기업 노키아의연구실(아래).

Page 3: 2008 새로운문명이 온다

A212008년 1월 28일 다조 선 일 보 요일월제 호27088

“우리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

습니다. 핀란드가 추구하는 목표

는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회만이

아닙니다. 더 좋은 미래를 위해

온 국민이 참여하고 협력하는 사

회입니다.”

지난달 말 핀란드 헬싱키대학에서 만난 파트릭

스케이닌(Patrik Scheinin) 행태과학대학학장은 1

시간 넘게 대화하는 동안“협력”“균형”“통합”이

란 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복지와 성장은

서로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다. 사회 통합을 위해서

는 두 가지 가치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핀란드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평

등과 분배를 강조하는‘사회민주주의’혹은‘복지

국가’로 설명할 수 없다. 인구 530만명의 이 소국

(小國)은 자유와 평등, 복지와 성장의 균형을 통해

사회 통합으로 나아가는‘공화’체제를 지향하고

있다. ‘공화’는 타인에 대한 존중, 공동 세계의 구

성, 법치의 구현, 자유와 평등의 균형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자신이 속한 공동체(국가)에 대한 내면

으로부터의 인정과 충성심이 핵심이다.

핀란드는 특히 교육을 통해 공동체에 대한 국민

의 애정을 끌어내고 있었다. 스케이닌 학장은“공

정한 교육시스템이야말로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

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을 갖게 할 수 있는 가장 중

요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는“핀란드는 정부 정

책의 최우선 순위를 항상 교육에 두고 있다”면서

“교육은 미래에 대한 투자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유하니 히토넨(Juhani Hytonen) 헬싱키대 응용

교육학과 교수 이야기도 비슷했다. 그는“핀란드

의 평등 교육이란‘결과의 평등’까지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사회적 지위나 금전적 차이에

관계없이 질 높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하면서

국민을 통합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OECD 통계 국가투명성 1위, 국가경쟁력 1위, 1

인당 국민소득 4만650달러인 핀란드는 사실 20세

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뒤떨어진 나라

다. 600년에 걸친 스웨덴 지배, 이후 100년 가까

운 러시아 지배를 받고 1917년 겨우 독립한 북유

럽의 후진국이었다. 그러나 고난이 오히려 발전의

바탕이 됐다. 오랜 식민 통치 때문에 귀족 중심의

봉건제도나 절대 왕정이 없었다. 민주주의를 정착

시키기가 오히려 용이했다는 것이다. 독립 후 내전

(內戰)과 좌우 대립도 겪었지만 다시 예전으로 돌

아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타협과 통합이 중요하

다는 것을 배웠다. 스케이닌 학장은“인간은 망각

에 익숙한 동물이다. 핀란드는 과거 갈등의 기억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공화’란 서로 다

른 의견의 존중과 타협에서 나온다”고 덧붙 다.

갈등과 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초

경제의 20%를 의존하던 소련이 붕괴하고 금융위

기가 닥치자 배급제를 실시할 정도로 경제 공황에

직면했다. 1991년 실시된 선거에선 복지와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민주당이 참패하고 복지 축소와 임

금 감축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실업이 증

가하고 소비가 위축되면서 경제위기가 더욱 가중

되었다. 그후 핀란드는 좌우세력이 타협하여 복지

와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전략을 택했다.

정치제도상으로도 타협과 협력은 두드러진다.

2000년 제정된 신헌법은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을

나누는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하고 있다. 2006년 선

거에서 사회민주당 타르야 할로넨(Tarja Halo-

nen)이 여성 대통령으로 재선되었고, 중도당의 반

하넨(Matti Vanhanen)은 우파 연합을 이뤄 의회

를 장악하고 다수당 당수가 차지하는 총리가 되었

다. 타협과 균형은‘탈코트(talkoot)’라는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핀란드말로‘함께 일

한다’는 뜻의 이 말은 서로 주장하는 강력한 이념

보다 서로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동양 학자에게 중국 녹차를

연방 따라주던 스케이닌 학장은 대화를 마치고 일

어서기 직전 말했다. “핀란드는 사람이 전부입니

다. 누구든 사회의 일원으로 역할을 다해야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복지와 교육을 통해 사회를 통

합하고, 그 바탕 위에서 경쟁과 창의력으로 발전을

추구합니다. 누구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유연한 사회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1핀란드, 복지와 성장의 균형 통해 사회통합 만들어가2

실패하더라도

누구든 다시 서는

유연한 사회 목표

국가경쟁력

OECD 1위 도약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3

헌법 제1조 제1항의 규정이다. 한국은 1948년 건

국헌법에서부터‘민주’와‘공화’를 최고의 정치적

가치로 여겨왔다. 그동안 9차례의 헌법 개정을 거

치면서도 이 조항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여기

서‘민주’란‘인민 주권’‘권력 분립’‘다수의 지

배’를 말한다. 반면‘공화’는 시민의 자유를 존중

하고, 그들 모두를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며, 권력

분립 속에서도 사회 통합을 어떻게 이룰지, 또 다

수의 지배 속에서도 소수의 권익을 어떻게 보호할

지에 관심을 둔다. 그동안 우리는‘민주’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공화’를 잊어버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神) 중심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근대의 출발 원리는

‘공화’를 강조하는‘공화주의’ 다. 중세 봉건제

도하의 왕정(王政)이나 귀족정(貴族政)을 타파하

고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인 자유도시를 건설하여

타인에 대한 존중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통해 사

회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후‘공화주의’는

‘자유주의’와‘민주주의’로 나뉘었는데, ‘자유주

의’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면서 개인의 권익 보

호에 집중했다. 반면‘민주주의’는 평등을 중시하

면서 민중의 정치 참여를 강조했다. 하지만 오늘날

왜곡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방종하고 자기 자

신만 위하는 자유로 타락하거나 획일적인 평등으

로 전락하여 공동체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공화’는‘레스푸블리카(res publica)’즉‘공적

인것’을중시하는개념이다. 개인은자유를추구하

되 그것이 공적인 자유가 되기 위해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며, 또한 나의 자유를 공적으로 보장해

주는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법에 대한 신뢰를 가져

야한다. 평등도사회유지를위해서는단순히획일

적 평등이 아니라 각자 부분으로서의 역할을 다한

다는 의미에서 중층적 평등이어야 한다. 공화주의

이론가모리지오비롤리(Maurizio Viroli) 프린스턴

대 교수에 따르면 공화정은 �개인의 자유를 공적으

로보장하기위해공동선과공동체에대한애정, 그

리고 법치에 의존하는 정치체제3이다.

‘공화’의 관점은 고대 로마, 근대 초기(14~15세

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미국 건국 그리고 현대

핀란드에서 발견된다. 로마 공화정은 이방인조차

로마를 사랑하고 시민권을 획득하면 동료로 받아

들 다. 원로원과 행정관 그리고 민중의회와 호민

관의 적절한 역할 분담을 통해 사회 통합과 발전을

극대화했다. 르네상스기(期) 피렌체와 베네치아 같

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도 주에 예속되지 않은

자유민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다. 사회 유지를 위해

소수의 행정관으로 구성된 시뇨라 위원회와 시민

들로 구성된 민회가 각각 역할을 분담하고 상업의

장려를 통해 국가를 발전시켰다. 건국기(期) 미국

도 개인의 자유를 공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연방국

가를 이뤄 하나의 공화체제를 만들었다.

이동수 경희대 교수

최근 한국 학계에서도 공화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

하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지난 24일 연구소

대회의실에서‘공화주의 토론회’를 열었다. 곽준혁(고

려대 정외과) 교수가‘왜 그리고 어떤 공화주의인가’

를 발표했고, 안병진(경희사이버대 미학과) 교수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이론의 현실적 의

미’를 발표했다. 곽 교수는“최근 공화주의에 대한 관

심이 증폭되고 있다”면서“일상생활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갖는 개인과 민족주의에 발목 잡힌 한국적 세계

화의 배타성을 극복하는 방안을 공화주의를 통해 모색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근 출간된 계간지‘사회비평’2007년 겨울호는

‘공공성(公共性)’특집을 다루면서 공화주의를 집중

논의했다. 임혁백(고려대 정외과) 교수는‘공공성의 붕

괴인가, 공공성의 미발달인가: 한국에서의 허약한 공

화주의’논문에서“최근의 개헌 논의 와중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 1항인‘대한민국은 민주공화

국이다’라는 조항이 아홉 번의 헌법 개정에도 불구하

고 유지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 다”면서“우

리가 추구했던 정치체제는 국민들이 주인이 되는 민주

주의일 뿐만 아니라 시민적 덕성을 갖춘 시민들이 공적

역에 참여하고 나아가 공적 업무에 책임을 지는‘민

주공화국’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행하는 계간지‘정신문화연

구’는 2007년 봄호에서‘공화주의’특집으로 다섯 편

의 논문을 실었다. 이한수 기자 [email protected]

새로운 문명이 온다

조선일보-경희대 공동기획

조선일보는 경희대학교와 공동으로 기획한‘새로운 문명이 온다’시

리즈를 연재한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홍익대, 동국대, 한

국학중앙연구원 등 유수 대학에서 정치₩경제, 사회₩문화, 과학₩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전공하고 있는 학자 12명이 취재진이 됐다. 이들은 새로

운 문명의 도래를 보여주고 있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신(新)문명의 징후를 생생한 르포와 인터뷰를 통해 중계한다. 대학교수

들이 신개념 르포기사를 선보인다.

참여교수 명단

김용학연세대(사회학과₩55) e미국시카고대박사

김학민경희대(예술학부₩46) e미국텍사스오스틴대박사

박용승경희대(경 학부₩44) e미국미네소타대박사

염재호고려대(행정학과₩58) e미국스탠퍼드대박사

이관수동국대(교양학부₩42) e서울대박사

이동수경희대(NGO대학원장₩48) e미국밴더빌트대박사

이상욱한양대(철학과₩39) e 국런던정경대박사

장인성서울대(외교학과₩51) e일본도쿄대박사

전 백홍익대(예술학과₩44) e 국리즈대박사

정윤재한국학중앙연구원(55) e미국하와이대박사

최재천이화여대(에코과학부₩54) e미국하버드대박사

홍성욱서울대(생명과학부₩47) e서울대박사

〈가나다순〉

[1] 민주주의의 위기, 이제는 공화주의다

후원:

한국 학계에서도 �공화주의3 논의 활발

조선일보 DB

1948년 7월‘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 제헌헌법에 서명하고 있는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

AP

2006년 재선한 타르야 할로넨 핀란드 대통령이 지지자들 앞에서 환호하고 있다. 그녀가 이끄는 핀란드는 분배와 성장의 균형을 통해‘공화(共和)’를 지향하고 있다.

헬싱키(핀란드)=이동수 경희대 NGO대학원장

평등 중시하고 민중의 정치참여 강조

공동체 조화위해 소수의 권익도 관심공화주의

민주주의

Page 4: 2008 새로운문명이 온다

A172008년 2월 5일 다조 선 일 보 요일화제 호27095

새로운 문명이 온다

조선일보-경희대 공동기획

프리몬트=박용승경희대경 대학교수

“우리의 사명은 고객에

게 최상의 품질과 서비스

를 제공하는 데 있다. 우

리는 이것이 우리 스스로

즐겁게 일하고 우리가 믿

는 가치를 계속 유지함으

로써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가 믿는 가

치는 창의성, 함께하는 성장, 실수를 통한

학습, 행복의 추구, 건강한 인생, 공동체의

식, 자아실현을 위한 노력이다.”

지난 8일 찾은 미국 캘리포니아 프리몬

트에 있는 의류업체‘멘스 웨어하우스’

(Men’s Wearhouse) 로비 벽면에는 회사

의 사훈(社訓)이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걸려 있었다. 직원들이 즐겁게 일하고 자

아실현을 해야 고객에게 최상의 품질과 서

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신선했다.

새 문명 출현의 징후는 기업의 생산관

리, 직원관리 부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생산성 제고를 위해서 사람을 소모품으로

쓰고 버리는 산업혁명 이후의 보편적인 기

업문화는 이제 종언을 알리고 있는 것이

다. 멘스 웨어하우스는 직원 관리에서부터

새 문명 시대를 맞이하는 미래 기업의 징

후를 엿보도록 해주고 있다. 창업자 조지

지머(George Zimmer)의 뒤를 이어 이 회

사 사장에 오른 찰리 브레슬러(Charlie

Bresler)씨는“회사의 성공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직원에 대한 존중과 투자

다”고 말했다. 그는“모든 구성원들이 회

사의 핵심가치와 문화에 대해 강한 연대의

식을 가지고 큰 의미와 보람으로 삼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따뜻한 배려를

통해 일궈내는 인간의 에너지가 궁극적으

로 기업의 성공을 가져온다”고 덧붙 다.

직원들의 복지는 동종업계와 비교할 때

파격적이다. 모든 직원들은 입사 후 6개월

에서 1년 사이에 이 회사 교육시설인‘수

트 대학(Suits University)’에서 교육을

받는다. 직원에 대한 훈련과 투자가 거의

없는 미국 의류소매업계에서‘멘스 웨어

하우스’의 전략은 놀라운 일이다. 인적자

원 개발부문 부사장 슐로모 마오르(Shlo-

mo Maor)씨는“직원 훈련은 입사 면접을

치르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지원자 개인의

가치관이 회사의 가치와 일치하는가가 가

장 중요한 선발 기준이다”라고 말했다. 그

는“일하는 기술보다 정신이 중요하기 때

문”이라고 했다.

멘스 웨어하우스는 정규직 직원 고용을

고집한다. 시간제(파트타임) 근로자는 극

히 일부에 불과하다. 각 매장의 매니저 이

상 관리직은 내부승진으로만 이뤄진다. 한

마디로 비용이 많이 드는 시스템이다. 그

러나 멘스 웨어하우스는 직원에 대한 신

뢰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낳고, 직원의

충성심은 고객의 회사 제품에 대한 신뢰

와 서비스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다는 믿

음을 갖고 있다. 비용이 다소 증가하더라

도 매출이 더 큰 폭으로 증가할 때 수익도

따라서 증가하기 때문이다. 비용과 수익이

제로섬 관계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직원 평가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뤄진

다. 하나는 직원 개인의 업실적이고, 다

른 하나는 동료에 대한 배려와 팀 중심의

활동이다. 이 중 더 중요한 것은‘개인 실

적’보다‘팀 정신’이다. 고용관계부문 부

사장인 줄리 레이시(Julie Lacy)씨는“어

느 한 직원이 다른 직원과 협력하지 않고

혼자서만 높은 성과를 올렸을 경우 해당

종업원은 매장 매니저와 상담을 해야 하

며, 그래도 행동이 교정되지 않으면 해고

될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최근 최고 수

준의 업 실적을 보인 미시간 주 한 업

점의 직원을 이런 이유로 해고시켰다고 했

다. 레이시 부사장은“그가 떠난 후 해당

업점 전체의 성과는 오히려 30% 증가했

다”면서“스타는 떠났지만 평균적으로는

회사의 활력과 팀 정신이 이전보다 살아

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치 미국 프

로야구에서‘수퍼스타’가 즐비한 팀이 오

히려 우승하지 못하는 역설과도 비슷하다.

‘멘스 웨어하우스’는 회사의 업종이 의

류업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복을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사람 산업(people

business)’이라고 말한다. 한 회사 직원

은“내가 코디한 정장을 입고 기뻐하는 고

객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가장 큰 보람”

이라고 했다. 이들은 인간의 행복은 전염

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물건을

사고팔기 전에 고객과 깊은 인간적인 교

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회사의 핵심가치는 열정과 배려,

그리고 사업적 성공이 균형을 이루는 것

입니다. 재정적 고려와 인간적 고려 사이

의 균형 말이죠. 회사 사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런 균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가치체계는 한 번 무너지면 다

시 회복하기 어렵습니다.”상담심리학 박

사 출신인 브레슬러 사장은“멘스 웨어하

우스에서는 두 가치의 균형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21세기 지식기반 경제환경에서 사람

중심의 전략이야말로 진정한 기업 경쟁력

의 원천이다.”

제프리 페퍼(Jeffrey Pfeffer) 미국 스

탠퍼드대 경 대학원 교수는 단호하게 말

했다. 그는 벌써 10년 전부터‘휴먼 이퀘

이션(The Human Equation)’이란 책에

서‘인간 중심의 경 ’을 주장하면서 경

학의 새로운 지평을 시도했다. 이 책은

멘스 웨어하우스의 기업이념의 학문적 기

반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전화선 너머에

서“회사 구성원 간의 신뢰가 기업의 성

공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

했다.

—당신은 인적자원이 경쟁력의 핵심요소

라고 했다. 하지만 기업들은 그렇게 생각

하는지는 몰라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

것 같다.

“많은 기업들이 여전히 임금을 적게 주

고 비용을 절약하는 것이 기업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라 믿고 있다. 일부 기업

은 고용 안정이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생

각한다. 그 이유는 (사람 중심 경 에 대

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고용

과 정리해고는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좋지 않은 방법이다. 사람들은 언제 떠날

지 모를 직장을 위해 동료와 지식을 공유

하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신뢰’를 만들 수 있는가.

“쉬운 문제다. 회사가 직원에게 거짓말

을 하지 않고 진실로 대하면 된다. 직원들

에게 진실을 말하는 행동이 신뢰를 쌓게

한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간단한 것이

다.”

—비정규직 고용, 정리해고 같은 고용 유

연화가 기업에 도움을 주는 측면도 있다.

“그렇지 않다. 회사는 직원 해고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 성공하는 회사들은 한결같

이 직원 해고에 신중하다. 사우스웨스트

항공은 2001년 이후 동종업계에서 유일하

게 단 한 사람의 직원도 해고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시장점유율은 괄목할 만큼

상승했다. 유럽의 항공군수산업 납품업체

EADS도 같은 기간 직원을 한 명도 해고

하지 않았는데, 미국 보잉사를 압도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정리해고와‘다운사이

징’이 기업의 주식시세와 생산성에 긍정

적인 향을 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

다.”

—당신은 개인보다 팀 중심의 보상시스템

을 강조한다. 그러나 집단 성과를 강조하

면‘무임승차(free rider)’문제가 생기지

않나.

“인간이 무임승차를 지향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무임승차란 용어는 조직경

제학자들의 학문적인 용어일지는 몰라도

실제 현실과는 무관하다. 사람 중심의 조

직문화와 구성원 간의 신뢰는 동료들 사

이에 일정한 통제기제(peer monitoring

pressure)를 형성하게 되어 무임승차의

가능성을 더욱 낮춘다. 집단 성과 시스템

이 개인 성과 시스템보다 조직의 성과 제

고를 위해 훨씬 바람직한 제도다. 만약 직

원 간 업무 상호의존성이 없고, 서로 지식

공유와 학습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라면 개

인 성과급제도도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오늘날 지식기

반사회의 작업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박용승 경희대 교수

1성공하는 회사들은 직원 해고에 신중2

후원:

21세기 새로운 문명은 결국 사람을 통해 구현될 것이다. 이번 기획취재팀이 선각

적 기업 경 에서 그 징후를 읽어내려 시도한 이유도‘새로운 사람 경 ’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 의류소매업체‘멘스 웨어하우스(Men’s Wear-

house)’는‘사람 중심 경 ’이라는 새 문명의 현상을 보여주는 기업이다. 직원에

대한 과감한 투자, 개인 실적보다 팀을 중시하는 독특한 보상체계로 업계 1위를 기

록하고 있다.

1973년 자본금 7000달러로 시작한 이 회사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캐나

다에 650여 개 업점과 1만 명이 넘는 종업원을 거느린 대규모 남성정장 의류소

매 체인점으로 성장했다. 1999년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포천’지가 선정하는 가

장 일하고 싶은 100대 기업에 들고 있다. 제프리 페퍼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21

세기 지식기반 경제환경에서는 사람에 대한 투자, 직원들의 업무경험에서 나오는

지식과 노하우가 기업의 성공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박용승 경희대 경 대학 교

수가 미국 캘리포니아 프리몬트에 있는‘멘스 웨어하우스’를 찾아가 기업에 나타

나는 새 문명의 징후를 르포했다. 이한수 기자 [email protected]

[2] 사람중심 경 이 기업을 살린다

8년간 �일하고 싶은 100대 기업3 美 의류업체 �멘스 웨어하우스3

2002 2003 2004 2005 2006

매출액(백만달러)

1295 1393 1547 1725 1882

매출총이익률(%) 35.1 36.9 39.0 40.4 43.3

업이익률(%) 5.4 5.9 7.6 9.6 11.9

멘스 웨어하우스 5년간 업실적

자료:멘스웨어하우스 2006년 업보고서

개인 실적 좋아도 팀워크 해치면 해고‐ 동료 배려 중시

개인 가치관이 회사와 일치하는가가 중요 선발 기준

● 제프리 페퍼 스탠퍼드大 교수

1스타보다 팀워크‐ 기업은 행복 창출해야2

멘스 웨어하우스 제공‘동료에 대한 배려’와‘팀 정신’을 강조하는 미국 의류업체‘멘스 웨어하우스’의 사내 교육기관‘수트 대학’에 참여한 직원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교육을 받고 있다.

Page 5: 2008 새로운문명이 온다

A18 2008년 2월 11일 나 조 선 일 보제27098호요일월

트랜스내셔널 공동체의 이상형

(ideal type)은 지구시민사회의 실현

일것이다. 일부진보지식인과비정부

단체들은지구시민사회를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에서도오사카에있는장래

세대협동연구소의 김태창 소장과 야

마와키 나오시(山脇直司) 도쿄대 교

수등은지구적공공성을모색하는연

구를하고있다. 하지만지구시민사회

의 실현은 아직 이르다. 국민국가와

국민문화가 아직 강고하며 내셔널리

즘도상존하고있기때문이다. 사에키

게이시(佐伯啓思) 교토대 교수는 오

히려경제적자유주의( 로벌리즘)에

대항할정치적보수주의(내셔널리즘)

와 국민국가의 재생을 주장한다.

반면 지역공동체는 지구화의 맥락

에 부응할 트랜스내셔널 공동체의

유력한 형태다. 동아시아는 내셔널리

즘의 발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상

호의존을 높여가고 있다. 사람₩재화

₩정보가 역동적으로 환류하는 공간

으로서 지역성도 강화하고 있다.

히라노 교수의‘현대아시아학의

창생’프로젝트는 중요한 변환을 상

징한다. 동아시아를 보는 시선과 방

법이 눈에 띈다. ‘지역’에는 경제와

같은 물질적 토대만이 아니라‘국

가’‘내셔널리즘’‘역사’‘문화’등

도쿄=장인성서울대외교학과교수

일본 도쿄 신주쿠(新宿) 와세다대

학 정문에서 오쿠마 시게노부(大一

重信₩두 차례 총리를 지낸 와세다대

설립자) 동상이 서 있는 법학대학 앞

까지 이어진 캠퍼스 중앙로에는 살을

스미는 한기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

학생들이 재잘대는 소리로 화사했다.

100년 전 이곳에 유학한 젊은 최남선

과 이광수는 이 길을 걸으며‘민족’

과‘근대’를 고민했을 것이다. 지금

이라면 두 지식인도 유럽연합(EU)을

떠올리며‘동아시아 공동체’와‘탈

(脫)근대 문명’을 상상할지 모른다.

와세다대는 지금 동아시아‘트랜

스내셔널(Transnational₩초국적)’

공동체를 모색하는 연구의 중심에

있다. 도쿄대 명예교수이기도 한 히

라노 겐이치로 와세다대 정경학부

교수는 지난 5년간 중국 전문가 모리

가즈코(毛里和子) 교수와 함께‘현

대 아시아학의 창생’프로젝트를 이

끌며‘트랜스내셔널 공동체’를 주창

해 왔다. 교수 20여 명과 대학원생

100여 명이 참여한 이 연구는 동아

시아의 지역연구와 공동체론, 그리고

동아시아학 교육 프로그램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대사업으로 평가

되고 있다. 히라노 교수는“트랜스내

셔널 공동체의 형성만이 동아시아의

희망이자,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결연하게 말했

다. ‘트랜스내셔널 공동체’가 동아

시아지역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그에게 따져 물었다.

—트랜스내셔널 현상이란 무엇입니

까. 그것이 국가와 인간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옵니까.

“트랜스내셔널 현상은 사람₩재화

₩정보의 국제이동과 국경의 다공화

(多孔化₩국경의 침투성이 높아지는

현상)로 특징지울 수 있습니다. 이미

국가의개인구속력은약해졌고국민

경제는 세계시장에, 국민생활은 지구

적경쟁에노출되고있습니다. 하지만

상위의 국제기구나 지역조직, 하위의

지방제도나 민간조직이 국가를 대체

할 정도는 아닙니다. 국가는 복지와

인권을 확충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국제관계에서 문명과 문화는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문화는 인간의 삶과 생활에 불가

결한 모든 요소입니다. 문명은 단순

히 문화의 총합이 아니라 다양한 문

화요소 중 타 지역에도 통하는 범용

성(汎用性)을 획득한 문화입니다. 단

갈등요소를 억지할 공통의 정체성과

공공성도 요구된다는 것이다. 히라노

교수는 말했다. “현대 아시아학은 종

래의 일국주의적인 동아시아 연구를

극복하고 동아시아를 전체로서 파악

하는 시도다. 연구 대상 지역을‘한

국 연구’‘중국 연구’식으로 단면

적₩고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한국’‘중국’이라는 평면적 구분의

위에도 아래에도 다양한 지역이 중

층적으로 존재함을 상정한다.”

모리 교수도 동아시아학은 특정

국가와 사회를 분석하는‘타자 연

구’가 아니라 일본 스스로를 포함한

‘자기 연구’여야 한다고 말한다. 아

울러 동아시아 공동체의 조건으로서

동아시아의 초국가적 활동이 만들어

일한 세계문명을 지향하면 문명충돌

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

서 문화의 양식이 바뀌어야 문명도

바뀝니다. 트랜스내셔널 국제관계에

서는 사람들의 이동범위와 생활권이

지역으로 확대되어 지역적 공통성과

지역문화가 생성됩니다. 국가₩지역

₩지구 레벨의 문화의 중층성(重層

性)을 인정하는 다문화주의적 자세

와 관용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트랜스내셔널 역은 지구시민사

회도 있습니다. 굳이 동아시아 공동

체를 주장하는 이유는 뭡니까.

“지구시민사회는먼미래의일입니

다. ‘지역’은 세계와 국가 중간의 느

슨한 문화권으로서 지구화로부터 인

간의 삶을 보호해줄 수 있습니다. 사

람의 월경(越境)과 국경의 다공화를

통해가까운사회들끼리공통성을찾

고지혜를교환하고해결책을모색해

야합니다. 지역공동체는지리적근접

성, 문화의 상대적 공통성, 운명의 공

동성, 문제의 공통성을 지닙니다. 지

역문화도 필요합니다. 다만 국민국가

와국민문화의존속, 문화와정체성의

중층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지역들

이 결합해 세계국가를 이룰 수는 없

습니다. 동아시아공동체는다른지역

내는 관계망에 주목하는 한편, 동아

시아인들이 관용과 포용력뿐 아니라

‘아시아성(asian-ness)’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프로젝트의 연구성과인‘동아시아

공동체의 구축’(전4권₩이와나미 서

점, 2007)과‘새로운 동아시아: 지역

공동체를향하여’(A New East Asia:

Toward a Regional Community,

Singapore: NUS Press, 2007)는 각

종 자료와 분석 기법을 동원해‘동아

시아’가 여러 분야의 복합 네트워크

로서 경제활동을 중심으로 다중화와

일체화의경향을보이고있음을보여

준다. 특히사회문화관련네트워크가

특이한교류패턴을보이면서상관성

을 높이는 반면, 정치교류 역은 독

립된양상을보이고있다. 경제통합이

정치통합을 유도한다는 기능주의적

접근과는다른방식으로다중적복합

네트워크가 동아시아 지역형성을 추

동한다는 발견이다. 획기적인 연구로

평가될만하다. 프로젝트를뒤이어신

설된‘아시아 연구기구(OAS)’도 짧

은시간에동아시아공동체에관한지

식과언설을열정적으로생산하고있

다. 장인성 서울대 교수

주의(regionalism)에의 대항뿐 아니

라 지역문화가 출현하는 지역형성

(regionalization)의현실을반 합니

다. 동아시아 지역형성은 동아시아의

발전과공생의필요성에서나왔고, 지

역공동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일제의‘대동아공 권’을 떠올리

는 사람도 있습니다. 동아시아 공동

체 형성에는 장애요인이 많습니다.

“일본은 국익 우선의 지역주의론,

편협한 내셔널리즘에 현혹되지 말고

지역형성에기여할수있어야합니다.

역사인식과전후처리문제는공동체

형성 과정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입

니다. 전전(戰前) 일본의아시아공동

체구상도반성해야합니다. 동아시아

정체성도 다중정체성의 하나여야 합

니다.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는 교류

접촉이늘면서아시아에대한관심이

높아지고있습니다. 단아시아회귀는

아니고, 서구에 대한 관심이 반감한

것도 아닙니다. 동아시아 공동체 형

성에 가장 큰 장애요인은 현재 일본

의 미국 의존입니다. 중국 경계심도

우려됩니다. 미₩일 관계와 일본₩아시

아 관계는 공존관계여야 합니다.”

—동아시아에서 평화와 공생의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해서 내

셔널리즘을 완화하고 지역주의를 강

화해야 평화와 공생이 가능합니다.

동아시아 시민의식과 토론의 장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동아시아의 정체

성은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의 결과

생겨날 것입니다. 다문화주의 관점과

관용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문화의

작은 공통점이라도 찾아내 키우고

문화의 차이점은 서로 존중해야 합

니다. 이(異)문화와 공생하려면 상호

이해와 관용이 필요합니다. 국민국가

와 문화를 존중하면서 지역공동체를

만들어갈 때 안전과 평화는 보장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문명이 온다

조선일보-경희대 공동기획

“동아시아도 EU처럼 지역공동체 모색할 때”

一國主義 넘어서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로 파악

문화₩사회의 다중적 결합‐ 정치 역은 독립

국민국가와 산업화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문명을 출현시켰듯, 오늘날 전 세계적인 지

구화와 정보화는 새 문명 출현의 바탕이 되고 있

다. 국민국가의 경계가 사라지고 정치와 경제, 사

회와 문화가 통합되는 트랜스내셔널(초국가적)

공동체는 그 유력한 전망의 하나다. 아직 전 지

구적 공동체의 형성은 요원하지만, 지역을 통합

하는 트랜스내셔널 공동체는 이미 실현되고 있

다. 유럽은 국민국가의 틀을 지키면서 지역적 삶

을 공유하는 유럽연합(EU)이라는 지역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동아시아지역의 초국가적 공동체에 대한 연구

는 일본이 앞서가고 있다. 히라노 겐이치로(平野

健一郞₩71) 와세다대 교수는 연구자 120명과 함

께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에 관한 연구를 지난 5

년간 진행해 왔다. 장인성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가 동아시아 트랜스내셔널 공동체를 주창하는 히

라노 교수를 심층 인터뷰했다. 이를 통해 과거 일

본 제국주의 침략이 가져온‘대동아공 ’이라는

역사적 상처를 극복하고, 국가 간 소통과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동아시아 트랜스내셔널 공동체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인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한수 기자 [email protected]

[3]동아시아 트랜스내셔널 공동체 히라노 겐이치로 와세다大 교수 인터뷰

세계 경쟁 체제에서

국민 보호할 수 있어

각국 문화 인정하는

관용과 이해 필요

일본의 미국 의존이

공동체 설립 걸림돌

● 동아시아공동체 연구

구 이미지

위성에서본동아시아위성에서바라본동아시아지역이지구의반을차지하고있다. 동아시아공동체의형성을주창하는 히라노 겐이치로 교수는“내셔널리즘을 완화하고 지역공동체를 만들어야 평화와 공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장인성 교수 제공

히라노 겐이치로 와세다대 교수(오른쪽)와 장인성 서울대 교수가 동아시아 공동체의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장인성 교수 제공

일본에서 출간된 동아시아 공동체 관련연구서들.

후원:

Page 6: 2008 새로운문명이 온다

A22 2008년 2월 18일 나 조 선 일 보제27104호요일월

새로운 문명이 온다

조선일보-경희대 공동기획 [4] 비폭력적 공존의 세계 북아일랜드 평화운동으로 노벨상 수상 메어리드 매과이어 여사

21세기 새로운 문명은 기다리면 저절로 찾아오는

‘선물’이 아니다. 전쟁과 폭력이 없는 평화와 공존

의 신(新)문명은 이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의 힘겨운 노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12

명 교수로 구성된‘새로운 문명이 온다’기획취재

팀은‘비폭력적 공존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사람

들의 경험 속에서 새 문명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고 판단했다.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사상)가 지난

40여 년간 가톨릭과 신교 사이의 종교분쟁으로 유

혈 사태가 벌어졌던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현장으로

날아가 메어리드 매과이어 여사를 만났다. 그녀는

1976년“종교의 이름으로 벌이는 살생을 중단하라”

고 외치며 전국적인 평화운동을 전개한 공로로 노

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30여 년간 지

속적으로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비폭력만이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매과

이어 여사는“‘평화는 불가능하다’는 우리 안의 편

견을 깨뜨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한수 기자 [email protected]

1인간은 전쟁엔 전문가, 평화 만들기에선 어린아이2벨파스트(북아일랜드)=정윤재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보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은 전쟁을

일으키고 무기와 총을 만드는 방법은 잘

알고 있지만, 평화 만들기에 대해서는 아

는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평화

만들기에 관한 한 인간은 어린아이에 불

과합니다.”

지난달 찾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지

난 40여 년간 가톨릭과 신교의 종교분쟁

으로 유혈사태가 벌어졌던 이곳에서 더

이상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양측은 퇴

임 전인 토니 블레어 총리의 중재로 맺은

평화협정에 따라 지난해 5월 무기를 모

두 반납했다. 하지만 거리의 건물 곳곳에

는‘순교자’들의 얼굴을 그린 걸개 그림

이 나부끼고 있었고, 신₩구교 지역 사이

에는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철제 담장이

높게 둘러쳐져 있었다. 도시는 회색 구름

이 잔뜩 낀 날씨만큼이나 음산했다.

◆‘평화는 가능하다’는 믿음이 중요

유혈사태의 중심 현장이었던 벨파스트

피나기(Finaghy) 거리를 함께 걷던 메

어리드 매과이어(Mairead Maguire₩64)

여사는“‘평화는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교육과 계몽을 한다면

‘비폭력적 공존’이라는 인류의 새 문명

을 열어갈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그녀

는“우리 안에서‘폭력의 문화(cultures

of violence)’를 없애는 일이 가장 필요

하다”고 말했다.

—평화협정이 맺어졌지만 지역 주민들

사이의 통합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재 양측 종교기관이 나서서 교환방

문, 친구 만들기, 이웃되기 프로그램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곳에 사는 주

민들끼리 서로 왕래하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국에서는 충돌을 방지한

다는 이유로 높은 담장을 세웠는데, 오히

려 이것이 공포와 불신의 상징이 되고 있

습니다.”

—이곳에서 가톨릭과 신교도 사이의 갈

등이 어느 정도 습니까.

“1960년대에는 신₩구교 모두 미국 마

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에 향을 받

아 함께 인권개선운동에 참여했어요.

1969년 일부 과격한 신교도들이 이 운동

을 물리적으로 공격하자, 국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추구했던 가톨릭신자들 사이

에‘폭력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양

측 극단주의자들은 각각 아일랜드공화국

군(IRA₩가톨릭계)과 얼스터자위군

(UVF₩신교계)을 조직하고 서로 전투를

벌 어요. 신₩구교를 막론하고 예배당은

모두 폭력 센터 고, 순진한 어린 아이들

마저 총을 들었습니다.”

◆“폭력은 종교의 가르침 아니다”

—여사가 평화운동을 벌이게 된 계기는

뭡니까.

“1976년 8월 열아홉 살짜리 IRA 지원

병 대니 레논(Danny Lennon)이 국군

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았습니다. 동시에

그가 몰던 차가 반대편 인도로 돌진해서

마침 엄마와 함께 걷고 있던 내 어린 조

카 3명을 죽게 했지요. 그들의 엄마인 내

여동생은 크게 다쳤고 심한 육체적, 정신

적 고통을 받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

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날 저는 벨

파스트 시내에서 이런 무모한 폭력과 살

생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집회를 주도했

고, 비폭력 평화집회는 전국으로 번져가

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운동을 전개했습니까.

“살생₩구속₩보복 그리고 전과자의 대

량생산이라는 악순환이 끊이지 않았어

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들

이 총을 들고 싸우도록 방치하고 있는 정

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평화주

의자가 아닐지라도 우리가 믿는 예수는

평화주의자 습니다. 이제라도 깊이 반

성하고 크리스천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Christ-like) 합니다.’서로 하나

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가르침과 정

반대로 서로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현실

을 비판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시민들이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수

천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No

More Killing(살생은 이제 그만)!’을 외

치며 시위를 했습니다. 저는 동료들과 함

께 매주 토요일 집회를 주도했고, 전국

각 도시를 방문하며 시위를 이끌었습니

다. 5개월쯤 지나자 벨파스트에서 교전

횟수는 70% 이상 줄었고, 종교적 이유로

인한 무모한 살생은 피해야 한다는 공감

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비폭력만이세상을참되게변화시켜”

—세계 평화에 대한 비폭력적 접근이 현

실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런 견해는 폭력을 당연시하거나 여

전히‘정의로운 전쟁론’에 사로잡혀 있

는 데서 비롯되는 지혜롭지 못한 편견일

뿐입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가‘사랑’

‘인내’‘존경’‘비폭력’에 정신적 뿌리

를 두고 있음을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생명의 인정, 사랑과 자비, 인내와 존경

과 같은 비폭력의 힘만이 세상을 참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과이어 여사의 조카들이 희

생되었던 길목에 서서 잠시 애도의 시간

을 가졌다. 그녀에게 이 사건은 여전히

트라우마(내면의 상처)로 남아있는 듯했

다. 길을 걷다가 전 IRA대원이던 톰 켈

리(Tom Kelly)씨와 전 UVF 대원이었다

는 짐 테이트(Jim Tate)씨를 만났다. 그

들은“이제 총을 겨누는 싸움에 질렸다.

우리는 아이들이 평화로운 가운데 학교

다니며 즐겁게 뛰어 노는 것을 보고 싶

다”고 말했다. 평화를 갈망하는 그들의

말에서 작지만 강한 희망이 느껴졌다.

벨파스트에서 만난 메어리드 매과이어

여사는“비폭력적 공존은 가능하다는 믿

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21세기 평화와 공존의 새로운 문명은

‘저기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적인 노력으로‘건설되는 것’이란

점을 강조했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인류 역사는‘폭력을 용인하고 폭력에

바탕을 둔 문명’으로 요약된다. 종교와

이데올로기 대립, 자연 파괴 경쟁, 민족

국가 간 대결이 지속된 시대 다. 정치결

사체와 종교단체는 물론 기업까지‘정의

로운 전쟁론’(just war theory)에 입각

해 세력을 유지하고 확장한다.

정치사상가들도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용인하거나 조장했다. 플라톤 이후 마키

아벨리₩로크₩홉스₩루소₩마르크스 등 주

요 정치사상가들 모두 폭력을 당연시했

다. 세계 비폭력연구센터를 운 하는

렌 페이지(Glenn Paige) 교수는“이제

는‘비폭력적공존’의미래를도모해야할

때”라고지적한다. ‘비살생사회는가능하

다’(A nonkilling society is possible)는

전제를 가지고 21세기 인류사회를 폭력

과 살생이 없는 사회로 만드는 데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의 하나

로 과거의 경험들 속에서‘비폭력적 공

존’에 성공했거나 그 가능성을 보 던

역사적 사례들에 대한 재발견과 성찰이

필요하다.

간디를 시작으로 비폭력 인권운동을

전개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 그리고 메

어리드 매과이어 여사를 비롯한 수많은

비폭력운동가들은‘비폭력적 공존’의 리

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21세기 신

(新)문명의 큰 흐름이‘비폭력적 공존’

이어야 함을 올곧은 행동으로 보여준다.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후원:

르네상스 이후 인류역사는 �폭력을 용인한 문명3‐ 정치 사상가들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

평화는 가능하다는

우리 스스로의 믿음이

가장 중요한 일

사랑₩자비같은

비폭력의 힘만이

세상을 참되게 변화시켜

AP

지난 2001년 6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발생한 신₩구교의 충돌로 자동차가 불길에 휩싸이고 있다. 30여 년간 평화운동을 펼치고 있는 매과이어 여사는“비폭력의 힘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정윤재 교수 제공

북아일랜드 평화운동으로 노벨상을 받은 메어리드 매과이어 여사(오른쪽)가 정윤재 교수에게 유혈 사태로 얼룩졌던종교분쟁의 현장을 안내하고 있다.

Page 7: 2008 새로운문명이 온다

A18 2008년 2월 25일 다 조 선 일 보제27110호요일월

새로운 문명이 온다

조선일보-경희대 공동기획 [5] 매스 컬래버레이션 (mass collaboration₩집단 협동) 加 토론토大 네트워크硏 배리 웰만 교수

1인터넷 시대엔 익명의 다수가 공익창출에 앞장2토론토=김용학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캐나다 토론토에는 화‘닥터 지바고’

에서나 보았던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칼바람 추위를 피해 토론토 대학 한가운데

있는‘네트워크 연구소(Netlab)’에 서둘러

들어섰다. 현관문 안쪽에는 열기가 후끈했

다. 현관문을 사이에 둔 눈보라와 열기, 오

프라인 세계와 온라인 세계 사이의 거리도

이쯤 떨어진 것일까.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

치는데 이 연구소 소장 배리 웰만(Barry

Wellman₩66) 교수가 나타나 반갑게 맞아

줬다. 여러 나라에서 온 연구원들도 함께 배

석시켰다.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사회 현상

들을 연구하는 이들 연구원들은 포르투갈,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중국, 터키 등 주로

인터넷이 한창 보급되고 있는 나라에서 인

터넷의 사회적 파급효과를 배우려고 이 연

구소를 찾았다고 한다.

‘네트워크 연구소’는 캐나다의 어느 중

산층 마을을 골라 고속 인터넷을 깔아 주고,

인터넷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

는지 실험적으로 연구하여 세간의 관심을

모은 적이 있는 대표적인 인터넷 연구소다.

토론토대에서 커뮤니티 사회학을 가르치는

웰만 교수는 2003년 창립 때부터 이 연구소

를 이끌어 오고 있다. 서로 인사를 끝내자마

자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인터넷을 통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집

단 협동‘매스 컬래버레이션’(mass col-

laboration₩익명의 다수가 자발적으로 협

력하는 작업방식)이 새로운 문명의 씨앗으

로 여겨질 수 있나.

“협동은 인류가 집단으로 생활하면서부

터 늘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인터넷은 수만년

동안 이루어진 협동과는 전혀 새로운 형태

의 집단협동을 만들어 냈다. 전 세계에 흩어

져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인터넷 네

트워크에 연결되어 가치를 창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위키피디아’를 꼽

을 수 있다. 아주 훌륭한 백과사전이 익명의

다수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협동, 즉 집단

지성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컴퓨터 운 체

제 리눅스도 마찬가지다. 네트워크 사회가

진전될수록‘매스 컬래버레이션’은 사회의

공공적 가치나 기업의 부가가치를 위해서

더욱 발전할 것이다.”

—개인이나 기업이 만들어내는 가치와 어

떻게 다른가.

“위키피디아는 누구나 저자로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사전이다. 기업 안에서의 협동

이 사익(私益)을 추구한다면, 집단협동은 공

공의이익을만들어낸다. 위키피디아는 2001

년 처음 개설된 후 올 초에 이미 221만 개 이

상의 항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담고 있다.

2억 번에 달하는 수정과 편집을 거치면서 지

금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특정

개인이나 기업이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매스 컬래버레이션은‘집단 지성’을 낳

기도 하지만‘집단 바보’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특정한 사람이나 조직을 해치기 위해 집

단적으로협동하는경우도있다. 이들은간혹

집단적광기를부리기도한다. 인터넷은유토

피아도디스토피아도아닌단지가능성의공

간이다. 네트워크를 통해서 사람들은 현명한

집단(Smart Mobs)으로변할수있는가능성

이 활짝 열렸다. 이것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인류 공동체의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다.”

—집단 협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어떤 사

람은 다분히 이타(利他)적인 동기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행위 동

기를 너무 좁게 가정한다. 인간은 원래 자신

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존

재다. 리눅스 개발자 리누스 토발즈(Linus

Torvalds)가 말했듯‘일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에 동조하는 사람들, 도움

을 받았으면 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믿는 호

혜적 인간들, 자신이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

고 있다는 자존감, 그리고 명성을 얻기 위한

목적 등 동기도 다양하다.”

—인터넷이 남을 도와주는 정신을 촉진시

키는 것인가.

“그런 증거는 확실히 있다. 젊은 세대가

나이든 세대보다 온라인에서 남을 더 잘 도

와준다. 인터넷 사용자들이 비사용자보다

더 잘 도와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익명의 다수가 모인 오프라인 집단보다

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집단 협동이 더 활

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커뮤니티는 지리적인 이웃이 아니라 사

회관계망이라는 사실을 뉴욕에서 살던 어린

시절깨달았다. 인터넷커뮤니티도사회관계

망에 불과하다. 상호작용을 통해 커뮤니티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생기고, 이러한 신뢰

가협동을더욱쉽게만든다. 그리고이커뮤

니티는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

때마침 터키에서 온 바바라 연구원이 거

들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활성화 정도는

그 사회의 오프라인 커뮤니티 활성화 정도

와 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각 나

라의 문화적인 차이가 공공적 가치를 만드

는 데 참여하는 정도에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죠.”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인터

넷이 세계 제일 수준으로 발전했다는 한국

에서 왜‘집단 협동’의 사례는 드문지 단초

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은 혈연₩지연₩학

연 등‘연줄 공동체’안에서 상부상조하던

역사적 전통이 뿌리깊기 때문에 열린 공동

체를 위한 집단 협동에는 아직 덜 익숙한 것

이 아닐까.

‘집단 협동’이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례들

은 온라인 백과사전‘위키피디아’외에도

많다. 한 명의 천재 프로그래머에 의해 기본

구조가 만들어져 공개된 리눅스는 수많은

익명의 프로그래머들의 집단적 노력으로 누

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컴퓨터

운 체제(OS)로 자리 잡았다. 리눅스는 현

재 1억 줄이 넘는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프로그램 한 줄을 개발하는 데 드는

미국 업계의 통상 비용이 100달러라는 기준

을 적용하면 집단 협동에 의해서 100억 달

러라는 가치가 무상으로 창출된 것이다.

기업들도 집단협동을 활용하여 돈을 벌

기 시작했다. 회사의 연구개발(R&D) 혹은

기술적인 문제를 자신들이 직접 풀기보다

는 외부 사람들에게 기대는 방식이다. 캐나

다 금광 회사‘골드코프(Goldcorp)’는 최

고 수준의 실력을 갖춘 지질학자를 고용해

금광을 찾았지만 실패하자, 자신의 금광 후

보지에 대한 모든 지질학적 정보를 인터넷

에 공개한 후 현상금을 걸고 전 세계 사람

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회사는 추천된 후

보지 80%에서 총 220\의 금을 발견하는 대

박을 터뜨렸다. 미국 티셔츠 생산 회사‘트

레드리스(Threadless)’는 옷 디자인과 디

자인에 대한 평가를 소비자에게 맡긴 후 좋

은 평가를 받은 옷만 생산해 성공한 기업이

됐다. 생산을 위해서 선택되면 1만2500달러

를 소비자 디자이너에게 지급하고 셔츠 150

만개를 생산, 20달러씩에 판다. 2007년 최

고의 디자인으로 선정된 사람은 상금으로

10만 달러를 받기도 했다.

기업이 기업 밖 익명의 다수의 도움으로

가치를 생산하기 시작하자‘집단 소싱

(crowd-sourcing)’이라는개념도등장했다.

NASA는화성의지형에이름붙이는작업을

집단 소싱했고, 그 결과 화성의 분화구와 평

야들은전세계에흩어진네티즌의자발적인

참여로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이름을 갖게 됐

다. 시각장애인에게책을읽어주는인터넷사

이트는짬생길때마다한페이지또는반페

이지씩을읽어주는수많은봉사자에의해서

매일같이 오디오 북을 생산해 내고 있다.

집단 협동은 세계적 차원의 네트워크 없

이는 만들어 낼 수 없었던 가치를 생산해 내

고 있다. 집단 지능을 활용하는 기업이 점

차로 늘어날 전망인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다양한 동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집단 협

동이라는 새로운 생산 방식이 거대한 문명

사조로서 발아할 수 있을지는 더 두고 보아

야 할 일이다. 김용학 연세대 교수

2001

50만

0

100만

150만

200만

250만(항목 수)

20032002 2005 2004 2007 2006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 실린 수의 증가 추이

자료:위키피디아

인터넷의 전 세계적인 보급과 발

전으로 익명의 다수가 가치를 만들

어내는‘매스 컬래버레이션(Mass

Collaboration₩집단협동)’이 21세

기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 2001년 개설된 온라인 백과사

전‘위키피디아’는 2007년 말 현재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

등록한 저자 638만7732명이 221만

개 이상의 항목을 집필했다. 컴퓨터

운 체제‘리눅스’는 수많은 익명

의 프로그래머들이 참여해 100억

달러 가치가 있는 운 체제를 만들

어냈다.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는‘집단

협동’이라는 현상은 21세기 인류의

새로운 문명을 열어갈 씨앗이 될 가

능성이 높다. 하지만 위험성도 있다.

인터넷에서일어나는사회현상을집

중 연구하고 있는 배리 웰만(Barry

Wellman) 토론토대 교수는“‘집단

지능’은‘집단 광기’로 변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용학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그를 만나‘매스

컬래버레이션’이 신(新)문명의 보

편적 가치 생산방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집중적으로 따져 물었다.

이한수 기자 [email protected]

후원 :

기업들도 집단협동 적극 활용‐ NASA는 화성지형 이름짓기 네티즌에 맡겨

위키디피아 220만개항목, 2억번이상수정거치며진화

인터넷은 가능성의 공간‐ 때론 집단광기 표출되기도

김용학 교수 제공

배리 웰만 토론토대 교수(오른쪽)는“네트워크 사회가 진전될수록‘집단 협동’이라는 생산방식은 공공적 가치와 기업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데 더욱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왼쪽은 김용학 연세대 교수.

Page 8: 2008 새로운문명이 온다

A18 2008년 3월 3일 라 조 선 일 보제27116호요일월

새로운 문명이 온다

조선일보-경희대 공동기획 [6] 미술은 친 한 소통을 원한다 국 조각가 안토니 곰리

1대중, 표피적 자극에 질려‐ 혼의 자극이 필요2이제껏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명의 징후는 정치와 경제

역은 물론 국제관계와 인터넷 공

간에서도 요동치고 있음을 지난 시

리즈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미

술 같은 예술분야에서도 새로운 문

명의 싹은 힘차게 움트고 있다.

국 조각가 안토니 곰리

(Antony Gormley)는“새 시대의

미술은 표피적인 자극이 아니라 친

한 소통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누드 전신을 석고로

뜬 주물 작품을 런던 시내 빌딩과

워털루 브리지 등 31곳에 세우는

전시를했다. 온몸으로대중과소통

하겠다는의식의표현이다. 런던시

민들은 벌거벗은 그의 작품에 옷을

벗어입혀주며호응했다. 국신문

‘가디언’은“그는 어느 유파에 속

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신체 작

품을 통해 인간의 휴머니티와 우리

가 살고 있는 공동체를 되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 백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가 그

의 작업실을 찾아가 새 문명 새로

운 미술의 흐름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이한수 기자 [email protected]

런던=전 백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사람들은 감각적 미술에 질려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표피적인 자극이 아

니다. 오늘날 미술은 머리로 구사하는 수

사학은 지극히 발달해 있지만, 몸과 몸의

인간적 관계는 사라져가고 있다. 새로운 미술에서 요구

되는 것은 친 성의 소통이다.”

세계적인 작가들 중 가장 철학적이라 꼽히는 국의 대

표적 조각가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58)는 단호히

말했다. 그는 1994년 국의 권위적 미술상인 터너상

(Turner prize)을수상했고, 여러나라에서대규모설치조

각전을가져국제적명성을얻은작가다. 그의조각과설치

작업은 혼을 흔드는 소통의 미학을 추구한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그의작업을보기위해런던킹스크로스역근처

대규모작업장을찾았다. 엄청나게큰은색철판문을 고

들어서자 곰리의 스튜디오가 압도적인 스케일로 나타났

다. 벽에는 자신의 맨 몸을 주물(鑄物)로 만든 작품이 그

의 분신이나 되는 것처럼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당신은 직접 자신의 몸을 석고로 떠서 주물을 만드는

인체 작품을 최초로 시행했다. 이런 작업이 새 문명의 새

미술로 생각될 수 있다고 보나.

“서구의현대미술은정신성에갈급해있다. 이성과논리의

발달로 치달은 문명과 그 미술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정신성과내적체험은새시대를맞는미술의중요한내용이

될것이다. 그단초를나는동양의명상에서찾고있다.”

인터뷰를 위해 앉은 대형 드로잉 테이블 중앙에는 엄

청나게 큰 동양화 붓들이 한 질 걸려 있었다. 지극히 서

양적인 조각을 위한 드로잉이 동양화 붓으로 그려지고 있

는 것이다.

—당신의 작업에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어떻게 녹아 있나.

“동양에 대한 나의 첫 체험은 70년대 초 인도에서 다.

거기서 3년 동안 전문적 명상훈련을 했다. 일본, 중국 그

리고 한국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나에게 동양은 사고의

근본이고 내면이다. 특히 명상은 작업 과정과 직접 통한

다. 나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직접 주물로 뜨면서 나를 비

우는 마음의 수련을 거친다. 그리고 이런 예술적 체험을

다수의 타인들과 나누는 것이다. 최근에는 삶의 일상적

안주에서 벗어나 의식적으로 명상의 경지로 들어가게 하

는 설치를 적극적으로 도모하고 있다. 그러한 것이 현대

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대중이그런시도를제대로따라올수있나. 일반인

들은 자르고 부수면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미술을 선호한

다. 자극과 충격이 있어야 대중의 주목을 끄는 게 아닌가.

“그런 작품의 대중성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

나 미술이 너무 감각적 충격에 치중하는 것은 좋지 않다.

대중과의 소통을 다른 방식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나의

경우 작년 여름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연 개인전‘눈

먼 빛(Blind Light)’에서 대중의 호응에 스스로 놀랄 정

도 다. 2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해서 갤러리 역사

상 생존 작가의 전시 중에선 최다 관객 유치를 이뤘다. 그

런 현상은 이 시대의 요구, 새로운 미술의 체험을 원하는

사람들의 절실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절실하게 원하는 미술의 체험이란 무

엇인가.

“이제까지 지나치게 발달한 언어는 몸과 몸의 친 한

소통을 상실하게 했다. 새 문명, 새 시대의 미술은 이러한

신체 소통을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 나의 전시 중 유리방

하나를 온통 새하얀 안개로 채워놓아 한 치 앞을 못 보는

상황에서 관객이 인체와 공간의 관계를 직접 체험하게 한

것이 있다. 조용한 사색적인 전시 분위기에서 관객은 때

로 극단적 고독감이나 두려움을 경험하고 눈물을 흘리기

도 했다. 나 또한 놀라운 체험이었다. 지극히 사적인 경험

이 대중과 공유될 수 있다는 점이 기뻤다.”

—당신의 작품이 가진 어떤 특징이 새 문명의 미학과 통

한다고 생각하나.

“나의 작품은 사실 밖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자아의 상

태이다. 상실감에 멍하니 빠져 있거나 무력감에 압도되

어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이 내 조각이 가진 특징이다. 그

렇게 하면서 나는 당당하게 주체를 강조하던 인체 조각

의 암묵적 전통을 뒤집는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미적 과

정을 거치면서 이제까지의 미술에서 추구하던 나와 타인

의 관계를 다르게 인식한다.”

—당신의 미술이 추구하는 것이‘친 성의 소통’이라 했

는데‘눈먼 빛’전이 갤러리 밖 공간까지 연장되었다는

점도 소통과 관련되나.

“그렇다. 전시가 열린 갤러리를 중심으로 템스강 너머

까지 인체 주조물 31점을 설치해서 그 도시 공간을 전시

장으로 삼았다. 건물 꼭대기, 길거리, 다리 위 등에 놓인

나의 누드 조각은 친 한 경험을 도시 전체에 노출시킨

것이다. 그 조각들에 보인 런던 시민들의 애착이 흥미로

웠다. 그 조각들을 구 보존하자는 여론이 일었고, 워털

루 다리 위에 놓인 조각의 경우 지나가는 시민들이 입던

옷을 벗어 입혀주기도 했다. 친 성을 소통하려는 시도

는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하다.”

—새 시대의 미술이 드러내는‘나’는 무엇이고 또 남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라 보나.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요청해서 된 것이 아니다.

‘던져진 존재(thrown being)’로서의 나인 셈이다. 이것

을 깊이 새기면 그러한 존재가 갖는 남과의 관계 또한 말

이나 의식을 넘어 신체적이고 보다 본질적인 관계라는 것

을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 미술은 이러한 소통의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다룰 것이다.”

현대 미술의 중심지답게 런던은

역동적이었다. 테이트모던 전시장에

들어서자 마치 지진이 지나간 것처

럼, 미술관 입구에서부터 드넓은 홀

의 바닥 전체에 한 줄의 커다란 균열

이 가 있었다. 콜롬비아 여성 작가 도

리스 살세도(Doris Salcedo)의 특별

전이었다. 바닥에 난 균열 자체가 그

의 작품이다. 리버풀에서는 역대 터

너 상 수상자 및 지명자의 대규모 기

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 전시의 수

상자들 중에는‘yBa’(젊은 국작

가들)라 불리는 국의 작가들이 여

럿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미술에서 충격 가치

(shock value)라는 말이 낯설지 않

은 데는 이‘yBa’의 공이 크다. 최근

15년 정도는 충격을 통한 반문화적

역동성이 부각되던 시기 다. 마크

퀸(Marc Quinn)은 자신의 피를 모

아 두상을 만들었고, 마르커스 하비

(Marcus Harvey)는 악명 높은 아

동 연쇄살인범의 거대한 초상화를

희생당한 아이들의 손 지문으로 만

들었다. 충격의‘원조’인 데미안 허

스트(Damien Hirst)는 수백 마리의

파리 떼와 실제 소고기 머리를 대규

모 틀에 설치했다.

신체를 구성하는 피로 또다시 신

체를 빚어내고, 피해자의 자취로 가

해자의 초상을 만든다는 것은 경악

할 일이었다. 그리고 수백 마리 파리

떼의 돌고 도는 하루살이가‘천 년’

이라는 제목과 대비되며 인간 삶을

역설적으로 조롱하는 작품은 우리의

일상적 사고에 충격을 주었다.

사람들이 열광했던 것은 그 끔찍

한 작품들이 지니는 위반의 자유와

일탈의 반항이었다. 이들의 작품은

세계적 소장가들의 러브 콜을 수없

이 받았고 연예인을 능가하는‘스타

작가’라는 말이 익숙하게 되었다. 그

러나 최근 미술계를 뜨겁게 달군 허

스트의 다이아몬드 해골‘신의 사랑

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

는 가격이 작품 자체보다 충격적이

었다. 경매 기록이 예술적 가치보다

앞서 얘기되는 상황에 대해 점차 냉

소적 반응이 나오고 있다. 충격 가치

를 감각적 미술에서 구하는 것에 대

해 경각심이 높아진다. 감각적 충격

을 추구해 온 현대미술의 행보에 제

동이 걸리고 있는 것이다.

현대 미술에서‘충격’이 중요하지

만, 신(新)문명을 맞는 21세기에는

미적 충격이 다양해지고 있다. 미술

이 계속적으로 감각적인 충격을 추

구하다 보니 요즈음은 그 자극효과

가 둔감해진다. 미술사학자 곰브리

치는 이러한 양상을 감각주의와 더

불어‘집중력의 결핍’이라 비판했

다. 곰브리치와 같은 감식가가 그러

한 최근의 경향과 달리 곰리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의 미술이 주는

내면적 충격에 있다. 과연, 미술이 촉

진하는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은 감

각적 자극보다 친 한 체험에 근거

한 내면의 역동성에서 도래하는지

기대해 볼 만하다.

전 백 홍익대 교수

후원 :

파리떼₩소머리 전시‐ �충격 미술3에 반성 일어

전 백 교수 제공

지난해 열린 곰리의‘눈먼 빛’전시의 설치작품. 안개가 가득 차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방 안에서 관객이 인체와 공간의 관계를체험하도록 했다.

깨부수고 자르는 것은 이제 한계

작가의 내적 체험, 타인과 공유를

서양에 �동양적가치3 접목절실해

김태이 작가 촬

국 조작가 안토니 곰리는“이성과 논리의 발달로 치달은 현대 문명의 미술은 사람들간의 친 한 소통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Page 9: 2008 새로운문명이 온다

A16 2008년 3월 10일 나 조 선 일 보제27122호요일월

새로운 문명이 온다

조선일보-경희대 공동기획

[7] 시민을 위한 과학 네덜란드 라테나우 연구소

21세기 신(新)문명은 과학기술 연

구도 새로운 방향으로 선회할 것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과학은 일반 시

민들과는 무관한 전문가들만의 세계

다. 그러나 전문가라 할지라도 과

학연구가 사회에 미칠 파장을 미리

모두 예측할 수는 없다. 과학기술을

향유하고 이용할 시민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삶에 향을 받을 시민

들이 어떻게 과학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는지 의견을 제시하고, 이를 연구

에 반 하는 일은 21세기 과학연구

에는 더 늦출 수 없는 일이다. 1994

년 설립된 네덜란드 라테나우연구소

는‘시민을 위한 과학’을 표방하고,

시민 참여를 통해 과학기술이 사회

에 미치는 향에 대해 연구하는 대

표적인 기관이다. 이상욱 한양대 교

수(과학철학)가 연구소를 찾아가

‘시민을 위한 과학’이 새로운 문명

의 과학연구 방법으로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취재했다. 홍성욱 서울

대 교수(과학기술사)는‘시민에 의

한, 시민을 위한 과학’이 대두된 이

유를 압축적으로 정리했다.

이한수 기자 [email protected]

헤이그=이상욱 한양대 교수₩과학철학

“세계에서 씨감자를 가장 많이 수출

하는 나라가 어딘지 아세요?”

네덜란드 라테나우(Rathenau) 연구

소 소장인 얀 스타만(Jan Staman)씨와

함께 훈제소시지와 감자로 만든 전형적

인 네덜란드 점심‘스탐팟(Stamppot)’

을 먹고 있었다. 그가 묻고 대답했다. “감자는 세계 어느 나

라에서나 많이 먹지만, 그런 감자를 생산하는 데 필수적인

씨감자는 거의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우

리 연구소는 씨감자 연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던 기술 향평가 팀장 프란스 브롬(Frans

Brom) 교수와과학시스템평가팀장피터반덴베슬라(Pe-

ter van den Besselaar) 교수도 연방 고개를 끄덕 다. 시

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식량원이자, 네덜란드 산업에서 중

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씨감자 생산의 장기적인 미래

를 확보하기 위해 어떤 추가 연구와 사회적 기반이 필요한

지 시민들의 의견을 듣고 주의 깊게 고찰하는 것이 연구소

의 주요 활동 중 하나라는 말이다. “저희 연구소는 시민의

삶이나나라의산업과 접하게관련된쟁점을시민들과함

께 논의해서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대비책을 제시하

는 연구를 진행합니다.”스타만 소장이 덧붙 다.

—사회적파급효과가큰과학기술이란어떤것을말하나요.

“낙농업이 발달한 네덜란드에서 매우 중요한 축산기술

에 대한 기술 향평가 연구 같은 것들입니다. 최근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는 뇌 과학, 전문가 사이에서도 그 범

위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통합생물학(synthetic

biology) 같은 첨단 과학기술도 저희 연구 대상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과학기술이 사회에 끼치는 향을 연구하

는 목적은 뭡니까.

“유전자 변형식품의 안전성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사회

적 논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과학기술 연구는 사회적으로

상당한 파급효과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일단 기술개발이 완

료된 후 이런 파급효

과를 관리하려고 하

면 사회적 비용이 너

무 많이 듭니다. 민주

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고요. 우리 연구소

는 시민의 삶이나 산

업의 미래, 정부의 정

책 등에서 과학기술

과 관련되어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 같은

주제를 미리 찾아내

서 사회적 향을 분

석한 후 바람직한 방

향으로 과학기술 개

발이 이루어지도록

대책을 제안합니다.

시민을 위한 과학연

구가 제대로 이루어

지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정부가 발주하는 연구를 진행하는 겁니까.

“우리가 어떤 연구를 할 것인지는 대부분 우리 스스로

결정합니다.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은 받지만 주제 선정이

나 보고서 내용에 있어서 정부는 일체의 간섭을 하지 못하

게 되어 있습니다.”

—지원만 하고 간섭할 수 없다면 정부가 불만을 갖지 않

을까요?

“정부 관리들이 저희가 낸 보고서가 너무 비판적이라고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가

철저하게 독립성을 지켜야 우리가 내놓는 의견이 네덜란

드 과학기술 연구의 미래를 위해 유용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연구엔 전문가들뿐 아니라 시민들도 참여합니까?

“우리 연구소는 다양한 분야의 지적 배경을 가진 우수

한 연구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전문가에 의

한 연구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최근‘뇌

알아보기(brainspotting)’행사를 했습니다. 뇌 연구는 새

로운 문명의 화두로 여겨지고 있어서 일반 시민의 관심이

높습니다. 뇌 과학의 세계를 다양한 체험 행사를 통해 소개

하면서, 뇌의 일부라도 대체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어떤

사회적₩윤리적₩법적 문제가 나타날 수 있을지에 대해 참가

한 시민들과 함께 토론회도 열고, 어떤 뇌 과학 연구를 원

하는지 설문조사도 했습니다. 시민들의 좋은 의견을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시민에게 과학을 일방적으로 홍보하

는 것보다 정보와 토론을 동시에 제공하는 것이 시민을 위

한 과학에 걸맞은 활동입니다.”

—그것이 과학기술 연구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은

아니잖습니까.

“합의회의나시민배심원제도처럼과학기술연구에대한

직접적인 형태의 시민참여제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

의 직접 참여는 원자력 기술처럼 대상 기술이 비교적 분명

하게 정의되어 있고 일상생활에 미치는 장₩단점이 이해하

기 쉬울 때 유용합니다. 나노기술처럼 첨단 기술에 대해 합

의회의를 시도할 때는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첨단신기술에대해서는일반시민들이어떻게참여합니까.

“미래기술발전방향이아직불확실한나노기술과같은신

기술에 대해서는 일반시민들에게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연구로부터 어떤 것을 기대하는지를 자유롭게

말하게합니다. 그다음시민들의인식을정리해서연구자들

에게 제공하고 이런 기대를 충족시키는 연구를 하라고 제안

합니다. 이런방식의시민참여가새로운문명의‘시민을위한

과학’의 모습을 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일지 모릅니다.”

네덜란드 헤이그(덴 하

그) 외곽에 자리잡고 있다. 1978년

네덜란드 정부는 당시 막 시작된 디

지털 시대가 네덜란드 사회에 어떤

향을 끼칠 것인지를 분석하기 위

해 특별위원회를 설립했다. 저명한

실험 물리학자인 G. W. 라테나우

(Rathenau) 교수가 위원장을 맡았

다. 위원회는 디지털 기술이 네덜란

드 사회에 끼칠 향에 대한 분석과

함께 이후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기

술의 향을 보다 체계적인 방식으

로 평가할 수 있는 기관의 설립을 권

고했다. 네덜란드 정부가 이 권고를

받아들여 1986년 NOTA(네덜란드

기술 향평가기관)를 설립했고,

NOTA는 1994년‘라테나우 연구소’

로 이름을 바꾸었다. 연구소 팀장들

은 대부분 교수들이며, 자연과학₩공

학₩사회과학₩인문학 등 다양한 지적

배경을 가진 연구원 등 53명이 연구

를 진행하고 있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기술사학자 토머스 휴즈(Thomas

Hughes)는 기술관료주의 이념에 따라

계획된 현대 문명의 거대 기술시스템을

비판하면서,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기술

프로젝트만이 21세기 사회에도 지속될

수 있는 해법임을 역설했다.

보통‘기술관료주의’라고 번역되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는 기술 프로젝트의 해결책이

전문 과학기술자에 의해서 제시되어야 하며 시민사회는 이

들이 제시한 해결책을 받아들이고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기술 프로젝트는 무척 복잡하고 난해해서 오랜 기간 동

안의전문적인훈련을받아야하기때문에일반시민들은과

학기술과 관련된 의사결정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과학기술 프로젝트는 더 이상‘전문가’

들에게 맡겨 둘 수 없는 것이 되고 있다. 구미의 경우 오래

전부터 핵에너지₩환경₩유전자재조합₩유전공학 등이 커다

란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전문

가주의’혹은‘기술관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

색하기 시작했다. 세 가지 인식이 이러한 변화를 이끌었다.

첫째, 현대 기술 프로젝트의 향은 종종 국가와 국민,

더 나아가 전 세계에 미친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시민은 특

히 정부에서 추진하는 기술 프로젝트의 정보에 대한 접근

권, 과학기술 정책과정에의 참여권, 의사결정이 합의에 기

초함을 주장할 권리, 개인이나 집단을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할 권리 등이 있다는 생각이 부상했다.

둘째, 어떤 경우에는 주민이나 환자와 같은 비전문가들

의 축적된 경험이 엔지니어나 의사와 같은 전문가들의 지

식보다 유용한 경우가 발견됐다. 시민들의 경험과 지식은

전문가의 전문지식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수정하

거나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회가 더 민주적이 되면서 절차적 정당성이

중요해진다는사실이인식됐다. 결정된정책자체의효율성

만이 아니라 그것이 결정되는 과정이 민주적이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더 민주적으로 결정된 정책은

더많은시민의지지를받고그효율성도커지는반면, 전문

가들과 정부 관료들이 실 행정을 통해 결정한 정책은 시

민대중의 저항에 직면한다. 민주주의 사회는 오래 전부터

시민들의여론을수집하고청취해서정책에반 했다. 여론

조사₩공청회₩청문회₩국민투표가 기존 모델이다. 그렇지만

최근에는소극적인시민참여의모델을벗어나서, 더적극적

인 의미의 시민참여 메커니즘이 각국에서 실험적인 차원이

나실제적으로운 되고있다. 적극적시민참여의메커니즘

으로는 참여적 기술평가₩합의회의₩시나리오 워크숍₩시민

배심원₩시민자문회의₩규제협상 등이 있다.

1일단 연구가 끝난후엔

돌이킬 수 없는 것 많아

논쟁여지 많은 과학기술

미리 찾아내 대안 제시2

1과학, 더 이상 전문가 전유물 아닌 시민의 것2

라테나우 연구소는

후원:

과학이 미치는 파장, 시민 참여로 미리 해결

이상욱 교수 제공

라테나우 연구소 얀 스타만 소장.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Page 10: 2008 새로운문명이 온다

A18 2008년 3월 17일 다 조 선 일 보제27128호요일월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

에드워드 윌슨

의‘통섭’이 우

리말로 번역되어

출 간 된 것 이

2005년 4월이니

아직 3년이 채 못

되었다. 그리 길

지 않은 이 기간 동안‘통섭(統攝)’

은 어느새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향을 미치는 보편적인 개념어가 되

었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

드 도킨스가 제안한‘문화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통섭은 상당히 성공

적인 밈(meme₩전승을 되풀이하는

문화 구성요소)이다.

나는 통섭이 이처럼 성공적인 밈

이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사회적 배경

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기업들은

컨버전스와 M&A를 겪고 있었고, 문

화는 온갖 종류의 하이브리드를 만

들어내고, 미식가들은 퓨전 레스토랑

을 찾고 있었다. 피가 섞이고 문화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나는 그래서

우리 시대를 혼화(混和)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혼화의 시대에 등장하는 사회현상

들은 거의 대부분 복잡계 수준의 문

보스턴=이관수 동국대 교수₩과학기

술사

“분과 학문을

통섭하는연구없

이는자연에대한

더 깊은 통찰, 복

잡한 기술문명의

존속이힘들것이

다. 생물학 연구

를 통해 개별 유전자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유전자들이 어떻게 결합해서 전체 시

스템을 작동시키는지 알지 못한다.

이를 규명하려면 다양한 분야를 전공

한 연구자들의 통섭적인 연구가 반드

시 필요하다.”

지난 40년간 세포생물학자로 활동

해온 미국 하버드대 의대 마크 커시

너(Marc Kirschner) 교수는 지난

2004년 하버드대 의대에 시스템생물

학과를 창설한 주역이다. 수학₩물리

학₩화학₩기계공학₩컴퓨터과학 등 다

양한 분야를 전공한 젊은 연구자들이

이 학과 박사과정에 참여하며 통합적

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커시너 교

수는“분과 학문에 매몰된 연구로는

답을 알 수 없다. 다양한 분야를 통섭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스템 생물학과를 창설한 이유는

무엇인가.

“생물학 연구 내적인 맥락에 강력

한 필요가 있었다. 인간은 약 2만

2000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생

물학 연구를 통해 개별 유전자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상세한 정보를 확

보했다. 이것은 엄청난 성과다. 하지

만 여전히 유전자 단계 이후에 전체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모르

고 있다. 개별 유전자는 다양한 기능

을 위해 반복 사용된다. 시스템 작동

을 이해하려면 각 구성요소들이 서로

어떻게 얼마나 상호작용하는지를 알

아야 한다. 이 같은 문제는 기존 생물

학만으로 해답을 얻기 어렵다.”

—전체를 통합적으로 연구하는 시스

템적 관점이 왜 중요한가.

“생물은 대단히 유연하면서도 강

건한 시스템이다. 사람들의 유전자는

제각기 다르지만, 남녀의 유전자가

하나의 수정란 세포에 모이고, 스스

로 살아갈 수 있는 개체로 성장한다.

대단히 경이로운 일이다. 핵심적인

제들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홀

로 풀어낼 수 없는 문제들이라는 말

이다. 이 같은 사회 변화를 인식하고

일찌감치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모색

하기 시작한 곳이 미국 뉴멕시코주

에 있는 산타페연구소(SFI: Santa

Fe Institute)이다. 그곳에는 물리학

자, 생물학자, 인문사회학자들이 한

데 모여 생명의 기원과 합성을 탐구

하고‘생물학적 뉴턴의 법칙’을 모

색하며 인간사회의 갈등과 협동에

관한 모델링을 통해 문명의 역동성

을 분석하고 시장의 혁신을 도모한

다. 1984년 많은 학자들의 우려 속에

문을 연 산타페연구소는 이제 21세

기 학문활동의 전형으로 우뚝 섰다.

1933년 하버드대학에 세워진 명예

교우회(Society of Fellows)는 지식

의 통합은 서로 다른 분야의 학자들

간의 격식 없는 토론, 즉 잡담에서 시

작된다는 믿음을 실천에 옮긴 기관

이다. 철학자 콰인이 노벨상 수상 신

경생물학자 데이비드 휴벌과 마주앉

아 인간의 뇌를 들여다보게 된 곳이

다. 스키너, 촘스키, 윌슨 등이 그곳

을 거쳐간‘젊은 학자(junior fel-

low)’들이다. 1970년에는 미시간대

학에도 명예교우회가 만들어졌고 나

는 그곳에서 1990년대 초반 주니어

펠로우로 꿈같은 3년을 보냈다. 그 3

유전자와 단백질 중에는 진화과정을

통해 거의 변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기초적인 구성요소는 같아도 그들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새로운 생물이 나타난다. 마치 레고

블록 같다. 레고 블록으로 만든 모델

을 이해하는 것은 블록 한 개의 특성

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개별 유전자의 작동뿐 아니라 그들

이 결합하는 방식, 즉 통합적 시스템

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하버드대의 시스템 생물학 프로그

램이 과학의 새로운 조류를 상징한

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 문제는 이제 새로운 흐름

을 넘어 주된 흐름으로 갈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나라도 불

과 몇 세대 동안만 과학을 선도했다.

20세기 초에는 화학이 중요했고, 독

일이 최고 다. 20세기 후반을 주도

년이 내 학문의 주춧돌을 놓아주었

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자연과학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인문사회학의 경계에 기대어 있는

듯한 생물학은 가장 화려한 변신을

거듭한 학문 분야이다. 20세기를 거

치며 분과 학문시대의 표상처럼 수

없이 많은 학과들로 쪼개져 있던 생

물학은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주립

대학에서‘통합생물학과’로 거듭난

다. 부분만 들여다보아서는 결코 복

합적인 생명현상의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시작된 통합의

바람은 이제 하버드대학에서 시스템

생물학으로 진화하고 있다. 물리학,

화학, 컴퓨터과학, 공학 분야의 전문

가들이 학문의 벽을 허물고 최근 폭

발적으로 늘어난 유전자 정보를 바

탕으로 생명현상을 진화된 시스템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있다.

지구촌은 이제 하나의 거대한 과

학기술 메타문명으로 묶여 있다. 그

속에서 온갖 형상의‘문화바이러스’

들이 자신들의 전염 역을 확장하

고 있다. 전염성이 강한 문화바이러

스는 당연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이 풍요롭게 일어날 수 있는 토

양에서 자란다. 21세기 경쟁력은 외

곬 전문성이 아니라 전문인들 간의

유기적인 통섭에서 나온다. 통섭은

이제 선택사항이 아니다. 새로운 문

명의 원동력이다.

한 분야는 생물학이고, 미국이 중심

지 다. 이제는 다양한 분야를 통섭

하는 일이 큰 흐름으로 될 것이다. 여

기에는 컴퓨터과학이나 물리학이 더

큰 기여를 할 것인데, 중국₩인도₩한

국₩이스라엘 같은 나라가 중요한 역

할을 할 것으로 본다.”

—시스템 생물학과 창설로 당신의

연구도 변화했나.

“나로서는 그것이 가장 놀라운 점

이다. 학과를 만들 때 나는 계속 세

포생물학 연구를 하면서 다른 사람

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리라고 예

상했다. 4년 반이 지난 지금 내 연구

의 절반은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

던 일들이다. 다양한 분야 출신의 사

람들에게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면서 나 자신도

그들의 향을 받았다.”

—생물학 이외의 다른 전공자들도

관심을 보이는가.

“내가 놀랐던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분야의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

것이다. 동료 생물학자들은 물론 엔

지니어들도 관심을 보 다. 복잡하면

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에

대해서 엔지니어들이 관심을 갖는 것

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런데 언어

학자들도 관심을 보일 줄을 몰랐다.

언어는 엄격한 규칙을 가지면서도 대

단히 유연하다. 조상들이 세포생물학

이나 컴퓨터 분야에 사용될 것을 생

각하고 언어를 구성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 과거에

는 상상하지 못했던 활동을 하고 새

로운 개념을 표현한다. 건축가들이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공간을 구성하

고 사용하는 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예기치 못했던 분

야들에서 비슷한 질문을 하고 통찰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앞으로 통섭의 관점이 계속 중요

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물론이다. 이제는 피할 수 없다.

생물체는 물론 비행기나 철도체계

처럼 현대 기술문명이 만들어낸 복

잡한 시스템은 몇 차례 시험해보았

다고 해서 확인했다고 할 수 없다.

시스템적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동

안 과학이 거둔 놀라운 성과들을 바

탕으로 다양한 학문들이 새로운 통

합으로 나아가고 있다.”

[8] 학문의 통섭 하버드大 시스템 생물학과 창설 마크 커시너 교수

후원 :

난 20세기까지 학문의 경계는 뚜렷했다. 하

지만 21세기 새로운 문명은 분과(分科) 학

문의 경계를 뛰어넘는‘통섭’의 학문을 요

청하고 있다. 진리의 세계는 인위적으로 분류한 학문

체계로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문의 대통합은 1988년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자신의 저서‘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지

식의 대통합을 주장하면서 지식사회의 화두로 떠올

랐다. 한국에서는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가 이를‘통

섭(統攝)’이라고 번역하며 처음 소개했다. 그에 따르

면‘통섭’은 불교와 도교 같은 동양사상에서 자주 쓰

이던 말로‘큰 줄기(統)를 잡는다(攝)’는 뜻이다.

학문의‘통섭’은 아직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을 모두 아우르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자연과학

분야에서 분과 학문을 넘어서는 통합 연구는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하버드대 의대는 2004년 시스템 생물

학과를 창설하고 수학₩물리학₩화학₩컴퓨터과학₩공

학을 아우르는 통합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관수

동국대 교수가 시스템 생물학과를 창설한 마크 커시

너 하버드대 교수를 인터뷰했다. 최재천 교수는 기고

를 통해“학문의 통섭은 새로운 문명의 원동력”이라

고 주장한다. 이한수 기자 [email protected]

새로운 문명이 온다

조선일보-경희대 공동기획

1한 우물만 파지 말라‐ 학문도 퓨전시대2

● 21세기 경쟁력은 통섭에서 나온다

1한 분야에 매몰된 연구는

분명한 한계가 있어

생물학₩수학₩물리학 등

통합적 연구가 필요

�통섭의 학문3을 통해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2

이관수 교수 제공

하버드대 의대에 통합 학문을 지향하는‘시스템 생물학과’를 창설한 마크 커시너 교수.

�벽을 허물고 通하라‐ 거기 진리가 있을 것이다3

일러스트 이철원기자 [email protected]

Page 11: 2008 새로운문명이 온다

A16 2008년 3월 24일 나 조 선 일 보제27134호요일월

시애틀=염재호고려대행정학과교수

봄볕은 따뜻했

지만 시애틀을

둘러싼 산맥의

정상엔 아직 눈

이 덮여 있었다.

미국 마이크로소

프트 본사가 있는 레드먼드 캠퍼스

에는 100여 개 넘는 건물들이 대학

의 연구소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변

호사 출신으로 로벌 기업과 사회

봉사를 총괄하는 파멜라 패스먼

(Pamela Passman) 마이크로소프트

부사장은“우리는 전통적인 자본주

의 기업에 안주하지 않는다. 경제적

대우를 충분히 받는 엘리트 직원들

은 사회의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자

신의 가치를 실현하려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인 마이크로

소프트가 마치 정부가 하는 것처럼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철학이

나 비전은 뭔가.

“마이크로소프트는 초기에 학교에

소프트웨어를 지원하는 등 일차원적

인 사회봉사에 참여해 왔다. 하지만

회사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우리 직

원들이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활

동하고 있는데, 비슷한 사회문제로

고민하는 정부와 NGO(비정부기구)

들을 보게 됐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기술과 자원에서 우위에 있기 때문

에 각국 정부와 NGO보다 더 효율적

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교육₩건강₩국정

운 같은 문제에서 첨단기술이라는

기업의 전문성을 갖고 사회문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사회문제 해결

에 적극적인 이유는 뭔가.

“유능한 직원들이 마이크로소프트

에 오는 이유는 이들이 기술로 세계

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직원들의 적극적인

사회봉사 의식과 자긍심 고양을 위

해 사회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사회적 문제해결에 참여하게

되면 장기적으로는 회사의 업이익

에 도움이 되는 소프트웨어의 개발

도 가능하게 된다. 성공한 기업으로

서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점

도 있다. NGO나 공공기관들이 해결

못하거나 기술이 부족할 때 우리의

지원은 더 의미 있다.”

—전에는 기업의 사회적 기여가 법

인세 납부, 자선단체 기부 등으로 나

타났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왜 직접

문제해결을 하려고 하나. 정부의 비

효율성 때문에 세금을 내기보다는

기업이 직접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고 생각하는가.

“세금 감면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회사와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사회봉

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회사의 경비

로 자원봉사 조직을 만들고 다양한

의견을 전 세계적으로 받아들여 우

리의 기술로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다. 전에는 기업들이 사회봉사기관에

돈을 지원하든가, 제품을 무상으로

제공해서 세금 감면을 받곤 했다. 이

것은 기업의 초기 수준의 사회봉사

다. 이제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기업

의 전문성을 활용해서 봉사할 필요

가 있다. 그렇게 할 때 사회봉사도 효

과적으로 되고 장기적으로는 기업에

도 이익이 돌아온다.”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회장이

설립한‘게이츠 재단’은 2005년 13

억5000만달러 기부로 세계 1위를 기

록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게이츠 재

단의 기부 활동과 어떤 관계가 있나.

“이념은공유하지만게이츠재단은

순수하게빌게이츠가족의개인재산

으로출연된재단이다. 그곳에서는아

프리카말라리아병, 결핵퇴치등제3

세계국가의그늘진문제를주로해결

하려고 한다. 우리는 마이크로소프트

가갖고있는기술적우위를바탕으로

사회적 봉사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는 게이츠 재단에 기부도 하지 않는

다. 사회의문제를적극적으로해결하

려는노력과지역사회에대한봉사등

에서 가치를 공유할 뿐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봉사를 하나.

“다양한프로그램들이있다. 한국에

서도컴퓨터를이용해구직을하지않

나? 마이크로소프트는주로 IT관련지

원을한다. 100만개가넘는소규모기

업을위해텔레센터를무료로도와준

다든지(telecentre.org), NGO에 무료

혹은싼값으로소프트웨어를제공한다

든지(techsoup.org), 소프트웨어를 활

용하기 위한 기술을 무료로 지원한다

든지(Npower.org), 공공도서관에컴퓨

터를 제공한다든지, 재난 구제활동에

기술적도움을준다든지하는것이있

다. 몇 해 전 유럽의 한 직원이 코소보

난민사태때유엔고등판무관실을도와

서난민들의신분증명서를카메라와컴

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만들어 줬

다. 그 이후 난민들의 신분증명서에는

이프로그램이계속활용되고있다.”

—직원들의 사회봉사를 어떤 방식으

로 지원하나.

“본사의 직원 45명이 참모본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세계 각국

의 직원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봉사

프로그램을 검토하고 지원한다. 우리

는 직원들의 사회봉사 참여를 적극

적으로 권유하고 있다. 그들이 사회

봉사를 위해 시간을 쓰면, 그만큼의

시간을 시간당 17달러로 계산해서

사회단체에 기부한다.”

—기업의 사회적 참여가 21세기 정

부의 기능을 대체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부와 시

민단체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을 활용해

서 도울 뿐이다. 우리가 하는 일에 대

해서는 워싱턴대 정치학과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끊임없이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정부와 시민단체, 그리고

기업이 각자의 장점을 갖고 사회문

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협동하며

진화하고 있는 과정이라고 본다.”

새로운 문명이 온다

조선일보-경희대 공동기획 [9]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자본주의 MS 사회봉사 총괄 파멜라 패스먼 부사장 인터뷰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21세기 신(新)문명을 이끄는 자본

주의는 과거 자본주의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

다.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는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의 모습이 아

니라 빈곤₩질병₩양극화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들

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미국 재단센터(The Foundation Center) 2007년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이 만든 재단들은 1996년 138억 달러를 기부했지만, 2006년에는

407억 달러로 10년 사이에 기부 총액이 3배 이상 늘어났다. 마이크로

소프트빌게이츠회장은기업들이사회적책임을다하는‘창조적자

본주의’로나갈것을주장하기도했다. 염재호고려대행정학과교수

가‘창조적자본주의’실현을위해노력하는시애틀마이크로소프트

본사를찾아가사회봉사를총괄하는파멜라패스먼부사장을인터뷰

했다. 21세기 새로운 문명을 만들며 진화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습

을 심층적으로 소개한다. 이한수 기자 [email protected]

마르크스는 19세기 자본가들의 탐

욕적인 이익추구를 보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멸망을 예견했다. 그러나 마

르크스 연구가인 국 런던정경대학

(LSE)의 메그나드 데사이(Megh-

nad Desai) 교수는“자본주의는 진

화를 거듭하며 새롭게 젊어지고 있

다”고 최근 저작‘마르크스의 복수’

(Marx’s Revenge)에서 밝혔다.

20세기에 인류는 자본주의 발전과

정에서 두 가지의 길을 택했다. 동구

는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공산주의

실험을 시작했고, 서구 사회는 정부

가 빈곤과 질병의 문제를 짊어짐으

로써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비했다.

20세기 말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고, 서구 국가들은 비대해진 재

정적자를 해결하지 못해 평등과 사

회복지를 포기하고 작은 정부로 체

질 개선에 나섰다. 그러면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실에서 사회의 빈곤과

질병의 문제는 누가 해결할 것인가?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회장은

2008년 다보스 포럼에서‘창조적 자

본주의’(Creative Capitalism)를 주

창했다. 정부나 시민단체가 풀지 못

하는 사회문제를 기업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 들어 자본주의가 사회문제

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미국 뉴욕

에 있는 재단센터(Foundation Cen-

ter)의 최근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은

새로운‘자선활동의 황금기’(golden

age of philanthropy)’를 맞고 있다.

미국에는 약 7만여 개의 자선단체들

이기부활동을벌이고있는데이가운

데 절반 가까운 3만1000개의 재단은

지난 1995년에서 2005년 사이에 설립

된것이다. 특히 100만달러이상자산

을 가진 재단의 절반 이상이 지난

1990년이후에설립되었다. 이들재단

이기부한기금은매년증가해2006년

전년도에비해 11.7%, 총 43억달러가

증가했다. 재단들의 총자산도 5506억

달러로 사상 최대가 되었다.

정부나 시민단체보다 기술이나 자

원에서 월등하게 우위에 있는 이런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사회문제 해결

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은 이제 자본

주의가 단순히 단기적인 이익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다. 한국의 기업들도 기업광고에서

행복과 같은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

고 있다. 염재호 고려대 교수

연도별 미국 재단의 기부총액

자료: 미국 재단센터

0

100억

200억

300억

400억

1996 1997 1998 1999 2006년200520042003200220012000

407억 달러

138억

美 자선단체 3만여개, 1995년 이후 설립

후원:

AP2002년 3월 게이츠 재단이 남아프리카 4개국에 기금 15만 달러를 지원했다. 왼쪽부터 빌 게이츠 아버지인 윌리엄 게이츠, 넬슨 만델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다.

염재호 교수 제공

파멜라 패스먼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사회봉사 총괄 부사장.

자본주의, 탐욕의 허물 벗고 빈곤 퇴치 나서다

순위 재단 기부총액

1위 게이츠 재단 13억5000만달러

2위 브리스톨 마이어 5억8000만 달러

3위 메르크 프로그램 5억3000만 달러

4위 포드 재단 5억1000만 달러

5위 락소스미스클라인 4억3000만 달러

6위 릴리 인다우먼트 4억2000만 달러

7위 얀센 오르소 3억8000만 달러

8위 로버트우드존슨재단 3억7000만 달러

9위 휴렛 재단 3억1000만 달러

10위 애넨버그 재단 2억7000만 달러

기부총액상위 10위재단(2005년)자료: 미국재단센터

1기업들, 21세기 들어서

사회문제 자발적 해결 나서

컴퓨터₩SW기술 등 제공

제3세계 IT관련 집중지원‐

자본주의는 진화합니다2

Page 12: 2008 새로운문명이 온다

A172008년 3월 31일 다조 선 일 보 요일월제 호27140

파리=김학민 경희대 교수₩연극 화

전공

“나는 동양 연

극에서 서양 연극

이 흉내낼 수 없는

위대한 원천을 발

견했습니다. 서양

연극의 형태만으

로는 더 이상 관객

들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프랑스 태양극단을 창단한 세계적

인 연출가 아리안느 므누슈킨(Aria

ne Mnouchkine)은 파리 뱅센느 숲

태양극단의‘카르투슈리(Carto

ucherie)’창고극장 정문에서 관객

들에게 티켓을 팔고 있었다. 그는 잠

시 후 시계로 12시를 확인한 뒤 막대

기로 바닥을 세 번 두드렸다. 문이 열

리고 700여명 관객들이 극장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44년 전인 1964

년 태양극단 창단 이래 하루도 빠지

지 않고 거행하는 유명한‘문 열기

의식’이다. “배우가 관객을 초대하

고 관객이 연극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이란 설명이다.

≪제방의 북소리≫ 대본작가로 태

양극단에 참여하고 있는 세계적인

여성 작가 엘렌 식수(Helene Cixuo

s)는 태양극단의 다문화적 배경이 극

단을 성공으로 이끌고 있다고 말했

다. “70여명 태양극단의 배우는 유럽

₩중남미₩중동₩일본 등 세계 20여 개

국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동양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동양에는 아직 우리를 감동시키는

‘유령’이 남아 있기 때문이죠.”

그는 연극의 대본도 다양한 문화

의 배우와 스태프들이‘다문화적인

공동창작’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사실 제가 쓴 대본은 이미 출판된

상태 는데, 배우들이 연습하고 토론

하면서 제 대본의 내용을 바꿨죠. 그

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저도

공동작업에 참여하면서 대본을 고친

것이 아마 1000번도 넘을 거예요. 당

시 작업했던 것을 정리한 17개 판본

도 보관하고 있어요.”

태양극단 터줏대감으로 20년 넘게

홍보를 맡고 있는 릴리아나 안드레옹

(Liliana Andreone)은“우리는 언제

나 세상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있

다”면서“때로는 불법체류자의 입을

통해, 때로는 보스니아 난민의 모습

을 통해, 모든 문화에 보편적인 인간

의 삶들을 공연에 녹여내고 있다”고

말했다. 30년간 태양극단 음악감독으

로 있는 장자크 르메트르는“저는 태

양극단의 연극을‘삶의 연극’이라

부르고 싶다”고 덧붙 다. 동양과 서

양, 이슬람과 기독교 등 모든 문화와

종교를 넘어‘인간’그 자체의 삶이

어우러져 표현된다는 말이다.

지금 공연되고 있는 연극은 3년 전

초연하고 다시 재공연에 들어간 ≪

하루살이 삶들≫이다. 3대에 걸친 아

르메니아계 러시아 가족과 유대인

가족의 고난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

돌아보게 하는 7시간짜리 대작이다.

엘렌 식수는“이번 연극은 사전 대본

없이 여러 나라에서 온 배우들의 개

인적인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었다”

며“대본이 없기 때문에 10개월 이

상 준비가 필요했다”고 했다.

카르투슈리 극장은 파리 시내에서

30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시골처럼 푸근한 정경이다. 극장 안

은 동양의 소품과 디자인으로 동서

문화가 융합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관객을 맞는 로비 한쪽 벽면에는 황

금빛 불상이 크게 그려져 있다. 옆면

에도 100개가 넘는 작은 불상 그림

이 가득하다. 관객들이 음식을 먹는

휴식공간과 입구에는 한국의 청사초

롱이 밝은 불을 밝히고 있었다.

태양극단은 창단 이래 공동창작과

공동분배를 내세우고 있다. 연출가도

배우도 기념품을 판매하고, 수익은

모두 똑같이 나눠 갖는다. 오히려 불

합리한것은아닐까? “이곳에서는함

께 일하고 함께 나눕니다. 무대 작업

도 같이 하고, 음식 준비나 기념품 판

매도 같이 하고, 창작도 같이 해요.”

연극 ≪제방의 북소리≫ 한국공연

에서 내레이터 역으로 한국 관객에게

도 얼굴이 익숙한 여배우 줄리아나

카르네이로(Juliana Car neiro)는 간

식 준비를 하다가 일손을 멈추고 말

을 건넸다. “우리는 모든 배우와 스

태프가 수입을 똑같이 나눠요. 그렇

기 때문에 나이든 배우는 어린 배우

를 존중하고, 어린 배우는 선배 배우

를 공경합니다.”

연극 시작 전 티켓을 팔던 연출가

므누슈킨도 어느새 기념품 판매대에

서공연관련책자와비디오등을팔고

있었다. 열 살 안팎 아역배우들은 공

연 중간 쉬는 시간에 음료수 수레를

끌고 관객석을 돌았다. 한 아역 배우

는“여기는 너무 재미있어요. 공연도

즐겁지만 함께 일하는 게 더 좋아요”

라고 했다.

세기 새로운 문명의

징후는 정치₩경제, 사

회₩문화, 과학₩예술

등 모든 역에서 세계 곳곳에 나

타나고 있다.

조선일보는 경희대와 공동으

로 지난 3개월간 서울대₩연세대

₩고려대₩이화여대₩홍익대₩한양

대₩동국대₩한국학중앙연구원 등

국내 유수대학의 12명 학자들과

함께 세계 구석구석을 찾아가 신

(新)문명의 모습을 탐색했다.

정치 역에서 공화주의와 비

폭력적 공존의 세계, 그리고 동

아시아 트랜스내셔널 공동체를

살펴보고, 경제 역에서 사람 중

심의 경 , 사회적 책임을 다하

는 자본주의, 온라인상에서 벌어

지는 집단협동의 현상을 탐색했

다. 전문가만이 아니라 시민들이

참여하는 과학, 여러 분과학문의

통섭, 친 한 소통을 지향하는

미술도 새로운 문명의 징후들로

나타난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융합의 문

화는 21세기 문명의 새로운 모습

이다. 동양과 서양의 유구한 전통

이 한데 섞이며 새로운 인류 문명

을 이끌고 있는 현상은 공연예술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김학

민 경희대 교수(연극 화 전공)가

이질적인 문화를 아우르며 새로

운 공연예술의 지평을 확대하고

있는 프랑스 태양극단을 찾아가

생생한 리포트를 전한다.

이한수 기자 [email protected]

[10₩끝] 東西문화 가로지르는 공연예술 프랑스 �태양극단3 연출가 아리안느 므누슈킨

1964년 5월‘공동작업과공동분배’

의 새로운 기치를 내건 연출가 아리

안느므누슈킨에의해창단된파리의

태양극단(Le Theatre du Soleil)은

다문화적 공연예술을 선도하는 프랑

스의대표적인극단이다. 10개월정도

의오랜연습을거쳐몇년에한편정

도 새로운 작품을 내놓지만, 40년 이

상의 세월이 축적되다 보니 세상에

내놓은작품들만해도상당수가된다.

다루는소재와문화적배경은다양하

다. ≪캄보디아왕: 미완의 끔찍한 이

야기≫(1985)에서는 살아있는 캄보

디아의 삶의 현장을 그렸고, ≪앵디

아드≫(1987)에서는 국에서 해방

된 인도의 종파 간 분규를 다뤘다. 우

리나라 국립극장에서도 순회 공연되

었던 ≪제방의 북소리≫(1999)에서

는 권력 앞에 선 인간의 추악함과 이

를 아우르는 대자연의 힘을 동양적

배경의 철학적 우화로 풀었다.

태양극단은 다양한 형태로 다문화

주의를 포용한다. ≪아트레우스의 후

손들≫(1990)에서는 일본 가부키와

인도 카타칼리 춤 등 동양 연극의 형

식을빌려그리스비극과동양연극의

만남을 시도했다. 최근 작품인 ≪오

디세이≫(2003)에서는망명자들의문

제를 심도 있게 다룬 바 있다. 음악은

서양고전음악과 대중음악과 더불어

인도음악, 중국음악, 한국음악 등이

교차하고, 특히≪제방의북소리≫를

위해전단원이한달동안한국₩일본

₩대만₩베트남 4개국을탐방하며아시

아문화를익혔고사물놀이연주자를

파리로 초청해 7개월간 연주법을 익

히기도했다. 태양극단은본부인파리

‘카르투슈리’의 공연뿐 아니라 동서

양 방방곡곡을 순회공연하면서 다문

화적메시지를세상사람들에게전달

한다. 지난 44년간 27개의 작품을 통

해이들의공연을본사람은벌써 200

만명이 넘었다. 바쁜 공연 일정의 중

간에는캄보디아등지구촌의소외되

고외진곳으로워크숍이나자선활동

을 하러 떠나기도 한다.

다양한 사회문화적 배경과 소재를

포괄하는 태양극단의 활동이 특별히

다문화적관점에서빛을발하는까닭

은동서양을막론하고가치있는공연

문화형식들을편견이나우월감없이

수용하고이를통해기존의형식을새

롭게거듭나게하기때문이다. 태양극

단의현장에서우리는동양과서양을

넘어서서 전 인류가 상생(相生)하는

새로운연극의가능성을보았다. 인종

을넘어서고지역과문화를넘어서는

새로운‘다문화’연극은대등한시선

으로다양한문화와다양한인종의삶

을 받아들임으로써 보편성과 진정한

세계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김학민경희대교수

① 민주주의의 위기, 이제는 공화

주의다 (이동수 경희대 교수₩1월

28일자 A21면)

② 사람중심 경 이 기업을 살린

다 (박용승 경희대 교수₩2월5일

자 A17면)

③ 동아시아 트랜스내셔널 공동

체 (장인성 서울대 교수₩2월11일

자 A18면)

④ 비폭력적공존의세계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2월18일

자 A22면)

⑤ 매스컬래버레이션 (김용학 연

세대 교수₩2월25일자 A18면)

⑥ 미술은 친 한 소통을 원한다

(전 백 홍익대 교수₩3월3일자

A18면)

⑦ 시민을 위한 과학 (이상욱 한

양대 교수, 홍성욱 서울대 교수₩3

월10일자 A16면)

⑧ 학문의 통섭 (이관수 동국대

교수,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3월

17일자 A18면)

⑨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자본주

의 (염재호 고려대 교수₩3월24일

자 A16면)

⑩ 동서문화를 가로지르는 공연

예술 (김학민 경희대 교수)

김학민 교수 제공

태양극단연출가아리안느므누슈킨이공연직후객석에앉아 생각에잠겨있다.

실은 순서

21

새로운 문명이 온다

조선일보-경희대 공동기획

국경없는 무대‐ 인류의 新문화 막이 올랐다

‘제방의 북소리’위해 한국 사물놀이 7개월 맹연습

캄보디아₩인도₩일본₩그리스‐ 편견없이 문화 흡수

●태양극단, 연극으로 인류의 相生을 외치다

“서양 연극의 형태로는 더 이상 감동 줄 수 없어

국가₩종교 경계 허물고, 다문화적 작품으로 성공

20여개국 배우들 공동창작₩분배로 극단 운 해”

후원:

조선일보 DB

프랑스 태양극단의 연극‘제방의 북소리’의 한 장면.

Page 13: 2008 새로운문명이 온다

A16 2008년 4월 7일 다 조 선 일 보제27146호요일월

e사회:이동수=이번 기획은 현대 문

명의 여러 폐해를 넘어서는 담론과

실제로 현장에 가서 살펴본 내용들

로, 정치₩경제₩문화₩과학₩예술의 전

분야를 망라해서 연재했다. 원래 기

획 의도는“현대 문명이 너무나 물질

적인 쪽으로 치우쳐 인간들 사이 상

생(相生)의 관계가 부족한 게 맹점

이고, 새 문명은‘협력’‘상생’‘통

합’‘융합’을 지향한다”고 생각한

데서 출발했다. 이것이 상당히 일관

되게 증명된 것 같다. 각자가 느낀

‘새로운 문명’이란 무엇인가?

e염재호=흥미로운 기획이었다. 20

세기 후반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나오

면서 인류 문화에 대한 반성이 출현

했고 기존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도

있었지만, 과연 어떤 모습일까에 대

한 논의는 없었다. 내가 했던 작업은

국가가 나서서 문제를 풀어주는 사

회민주주의가 20세기 말에 한계에

다다르면서 그 대안을 찾으려는 데

서 나온 것이었다. 기업이 빈곤₩질병

₩양극화 같은 사회적 문제를 풀기 위

해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이다. 또

한 이것은 20세기에 너무나 전문화

된 역의 울타리를 어떻게 넘을까

에 대한 시도라는 의미가 있었다. 하

지만 그 새로운 시도들이 아직 확실

한 단계는 아니지 않을까.

e박용승=사람 중심의 기업 문화와

기업 관리가 기업 경쟁력의 중요 요

인이 된다는 부분을 맡았다. 고전적

경제학의 통제와 감독 같은 개념에

서 벗어날 때 종업원은 스스로 일에

대한 몰입감과 조직에 대한 가치를

느끼면서 태도가 변한다. 하지만 사

람 중심 경 으로 종업원의 행복지

수와 기업 가치를 함께 높이는 데 성

공하는 회사는 아직 드물다. 또 다른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게 구현되기

위해서는 뭔가가 그 안에 있어야 하

는데, 예를 들어 내가 인터뷰했던 한

경 자는 채용 면접에서 유머를 측

정했다고 한다. 유머를 정말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남을 배려할 줄 안다는

것이다.

e김용학=네트워크 사회의 진행은

누구도 막을 수 없게 됐다. 매스 컬

래버레이션(mass collaboration₩집

단 협동)이라는 21세기 새로운 생산

방식은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끼리 하나의 주제를 놓고 협

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시적으로 보면 굉장히 커다란 문

명의 변화다. 하지만 땅에 떨어진 씨

앗 하나가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을

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집단 협

동’을 하는 기업이 지금은 소수라서

잘나가지만 이것이 모든 기업으로

퍼질 수 있을까? 인터넷을 통한 협동

은 창조적으로 갈 수도 있지만 파괴

적이 될 가능성도 있다.

e전 백=‘새 문명’에 대해 얘기

하면서‘이렇게 나갔으면 좋겠다’

는 우리 스스로의 욕망도 투 된 것

이 아닐까? 미술의 경우 창조의 개

념이 바뀌어가는 것 같다. 현대미술

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을‘창조’라고 하지는 않는다. 결

국 어떤 다른 분야와 연관을 맺고,

차이를 갖는 역들이 어떻게 연합

되는지의 문제다. 지금까지‘동서양

의 만남’이라면 너무나 다른 컨셉트

라서 자연스럽게 통합되는 작품이

없었는데 요즘은 확실히 다르다. 이

성과 논리에서 벗어나려는 것도 또

하나의 흐름이다. 자꾸 스스로를 주

장하려 하기보다는‘인간과 인간’

‘나와 타자’의 관계, 사적인 허물까

지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소통하

는 것이다.

e이동수=아직‘새 문명’에 불확실

성이 존재한다는 의견이 많다. 최근

방한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세계주의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냐

는 질문에‘세계주의가 왔다고 생각

하지 않는 한 그것은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문명이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것은 창

조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e이관수=과거의 과학기술사를 전

공하는 내가 앞을 보는 것은 자기모

순적이라는 생각을 했다.(웃음) 사

실 과학에서 현상을 종합적이며 시

스템적으로 봐야 한다는 말은 예전

부터 있었다. 그런데 지금 통섭(統

攝)은 전체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지난 50~60년 동안 세부적인 부분

이 상당히 많이 연구됐기 때문에 이

제야 그걸 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처럼 직관

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산과 모델링

에 의해서 전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e이상욱=‘과학 연구’와‘사회’를

두 축으로 놓고 상호작용을 살펴보

면‘새 문명’은 징후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폭넓게 나타난다. 20세기 초

에는‘과학이 발전할수록 점점 더 많

이 알게 될 것’이라는 낙관주의가 있

었지만 세계대전을 거치며 환상이

깨졌고 1960년대부터는 반(反)과학

주의적 태도가 나타났다. 과학연구는

위험하고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제 두 시각 모두를 극복하는 흐름

이 나타났는데, 예전처럼 무조건 만

들어 놓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만들

때 결과를 미리 예측하는 예방적인

태도다. 과학연구 자체의 진행과 과

학에 대한 사회적 태도라는 양쪽을

바꿔 나가게 된 것이다.

e염재호=환경 문제에서도, 정보와

지식의 문제에서도 인간이 상호 협

조해야 한다는 가치관이 높아지고

있다. 모더니즘과 전문화(專門化)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윤리를 찾

는‘무의식적인 협력 강박관념’같

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과연 새

로운 문명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것이 새로운 질서로서 형성되기까지

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2030년이 될 수도 2050년이 될 수도

있다.

e전 백=예술 쪽은 분명한 변화가

있다. 1990년대에는 너무나 강박주

의적으로 흐른 반체제적이고 파괴적

인 예술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예전

처럼 다 부수는 것은 아니고 건설적

인 측면들이 보여진다.

e이관수=적어도 과학에서 보면 여

러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물론 층서

(層序₩지층이 쌓인 순서)를 이루면

서 계속 쌓여가고 있지만 옛 층서들

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새로

운 징후가 보이면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e이상욱=살아남기 위해서 상호 의

존한다면, 그걸 실현하는 본질은 무

엇일까? 생존을 위해서 기존 체제를

희생하는 것인가, 아예 바뀌는 것인

가? 유럽 국가들의 경우 유전자 식품

개발이나 복지제도를 일방적으로

어붙이면서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

었고, 그 때문에 미리 비용을 지불하

려는 의도에서 사회와의 협력이 일

어났다. 그런데 이렇게 기존 체제가

약간씩 양보해서 유지하려 했던 시

도가 역사적으로 성공한 사례가 없

다. 선거권의 경우에도 조금씩 허용

하다 결국 모든 사람이 투표에 참여

하게 됐다. ‘내가 하던 기존 연구를

그대로 가겠다’는 위기관리의 시각

으로는 안 되고, 조금씩 바꿔 가지 않

을 수 없을 것이다.

e이동수=근대성이‘주체의 건설’

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이‘주체의 해

체’라면, 새 문명에서는 그냥 주체

가 아니라 같이 뭔가 협력하지 않으

면 주체적이란 게 형성될 수 없는

‘상호주체적 인간’이 등장하지 않을

까. 이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생각하는 인간), 호모 파베

르(Homo Faber₩노동하는 인간)가

아니라‘호모 레시프로쿠스(Homo

Reciprocus₩상호 의존하는 인간)’

로 향하는 과정에 있다. 정치학에서

보면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민주

주의에서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파편

화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협력적인 공존과 상생을 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냐가 중요해진

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협력하지 않

으면 인류라는 종(種)은 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취지에 공감하

며 이번 기획에 참여해 주신 여러 선

생님께 감사드린다.

정리=유석재 기자 [email protected]

좌담 참석자와 집필 내용

김용학(55)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5회‘매스 컬래버레이션(집단 협동)’

염재호(53)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9회‘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자본주의’

이동수(48) 경희대 NGO대학원장: 1회‘민주주의의 위기, 이제는 공화주의다’

박용승(44) 경희대 경 학부 교수: 2회‘사람중심 경 이 기업을 살린다’

전 백(44)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6회‘미술은 친 한 소통을 원한다’

이관수(42) 동국대 교양학부 교수: 8회‘학문의 통섭’

이상욱(39) 한양대 철학과 교수: 7회‘시민을 위한 과학’‘새로운 문명이 온다’결산 좌담에 참석한 학자들. 왼쪽부터 이관수₩박용승₩이상욱₩전 백₩김용학₩염재호 교수, 이동수 원장. 전기병 기자 [email protected]

현장취재 참가한 교수 7인의 결산 좌담

새로운 문명이 온다

조선일보-경희대 공동기획

양극화₩빈곤 해결은 결국 기업의 몫으로

맹신₩불신을 넘어 �예측의 과학3 꽃필 것

예술은 反사회₩파괴→건설₩소통쪽 이동

21세기 생산방식은 �네트워크 집단협동3

생존을 위한 상호의존이 변화의 출발점

협력형 인간 �호모 레시프로쿠스3 시대로

“국경과 이념을 가로질러 공생(共生)의 목소리를 높여라.”1월 28일부터 3월

31일까지 모두 10회에 걸쳐 조선일보 지면에 연재된 조선일보₩경희대 공동

기획‘새로운문명이온다’는, 12인의학자들이세계곳곳에서벌어지고있는

‘새로운 문명’의 징후를 탐색하는 대형 기획기사 다. 공화주의, 사람 중심

경 , 비폭력적 공존의 세계와 학문의 통섭…. 다양한 분야에서 동시다발적

으로 일어나고 있는‘새 문명’의 싹들로 인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변화할 것

인가? 기획에참여했던 7명의학자가시리즈를마무리하는좌담에참여했다.

후원:

1상생₩협동₩융합의 새 물결은 이미 동시다발 진행중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