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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도서관 다른 삶을 상상하는

Living library 2014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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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삶을 상상하는 사람도서관(20140524) 10인의 인터뷰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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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도서관

다른 삶을 상상하는

32

사람 도서관(사람책)이란?

『Living Library』라는 명칭으로 시작된 사람책 행사는 덴마크

출신의 사회운동가 로니 에버겔(Ronni Abergel)이 2000년

덴마크에서 열린 뮤직 페스티벌(Roskilde Festivel)에서

창안한 것으로, 지역사회 내에 산재한 편견과 차별을

없애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다. 참가자들은 사람책

도서관에 와서 ‘책’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Human

book)‘을 빌린다. 독자들은 준비된 사람책 목록을

살펴보고 읽고 싶은 사람책을 선택하여, 책과 마주 앉아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살아있는 경험과 지혜를 읽을 수

있다.

여성환경연대의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 일시: 2014년 5월 24일 오후2시 - 4시30분

� 장소: 카페 벼레별씨

2:00 - 2:30 사람책 오리엔테이션 (30분)

2:30 - 3:10 1차 대출활동 (40분)

3:10 - 3:30 개별 독후활동 & 쉬는 시간 (20분)

3:30 - 4:10 2차 대출활동 (40분)

4:10 - 4:30 전체 독후활동 (20분)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을 여는 이유

새로운 삶을 꿈꾸지만 어떻게 상상해야 하는지 막막한가?

왠지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와는 다른

특별한 경우처럼 여겨지는가? 혹은 막연한 환상과 낭만

혹은 불편과 고단함이 떠오르는가? 그러나 어쩌면 그들도

나와 같은 고민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현대 문명과

생태 위기, 자본주의 시대에 ‘어떻게 살면 좋을까’ 대안을

찾고 소박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사회의

생태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을 기획하게 되었다.

사람책을 생생하게 한 장 한 장 넘길 때, 자기 삶의 접점을

발견하고 우리 사는 공동체가 훨씬 더 평화롭고 상생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사용설명서

➊ 대출 활동

• 사람책 한 권 당 대출시간은 40분입니다.

• 원활한 대화를 위해 최대 4명의 독자가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 사람책과 독자는 열린 마음으로 자유롭게 대화합니다.

• 사람책은 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에는 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사람책과 독자의 만남은 정해진 장소에서만 이루어집니다.

• 독자가 연락처 교환 및 개인정보를 요구할 경우, 사람책은 거절할 수

있습니다.

• 독자가 무례하게 굴거나 인신공격을 한다면 사람책은 대출활동을

중단할 수 있습니다.

➋ 독후 활동

• 개별 독후활동은 쉬는 시간 동안 이루어집니다. 사람책과 독자 모두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포스트잇에 작성해 독후활동지에 붙여주세요.

• 전체 독후활동은 모든 대출활동이 끝난 후 이루어집니다. 사람책과

독자 모두 다함께 모여 소감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➌ 기타 활동

• 독후활동이 끝나갈 무렵, 즉석사진을 찍어드립니다. 즉석사진은

오늘 소중한 책이 되어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신 사람책에게 선물로

전해드립니다.

• 종이책을 준비해 오신 분들에 한해, 원하는 책으로 교환 가능합니다.

이 소책자는 2014년

여성환경연대가

처음으로 기획한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을 위해 진행한

사람책 사전 인터뷰 및

참여독자의 독후감을

정리한 기록물입니다.

사람 도서관 소개글

목차

세딸맘인터뷰

1

목차

�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 전/후의 삶

� 무식하면 어때, 엄마인데

� 전화 한 통이 세상을 바꾼다

� 바쁜 엄마와 가정 그리고 시댁

� 밤 새워 구글링하는 엄마들

독자 추천

� 긍정에너지를 받으려는 엄마

� 사회를 위해 행동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 세상을 바꾸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 오래 가면서 즐겁게 사회를 바꾸고 싶은

사람

아이를 둔 부모들이 모여 방사능

문제를 고민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차일드세이브’의 대표. 평범한 세 딸의

엄마로 살다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경력 단절 주부에서 아이들을 위해

지구를 지키는 엄마로 대 변신 중이다.

지금처럼 아마추어리즘을 추구하면서

한 시민으로서 가늘고 길게 가는 게

꿈이라는데.

엄마들이 모여

방사능 공부를

한다?

1. 세딸맘 <엄마들이 모여 방사능 공부를 한다?> 5

2. 펭펭 <동네 아줌마들과 좀 놀아본 청년 활동가> 11

3. 김소영 <나는 도시의 에너지 경작자> 18

4. 달군 <농사·그림·자립을 달달하게 ‘달군’> 24

5. 주은진 <청순한 그녀의 무모한 시골 살이 8년차: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음> 33

6. 박은선 <삶, 노동, 예술, 현장의 경계를 허물다> 38

7. 이윤숙 <에코페미니즘,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44

8. 김수향 <홍대 앞 카페 사장님이 고민하는 오가닉푸드> 48

9. 신필식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53

10. 김란이 <비혼여성공동체, 서로의 빽이 되어주다> 61

독후감1. 잇지 <다른 삶을 모색하게 해준 사람 도서관> 69

독후감2. 김진회 <그의 목소리를 타고 전해져오는 시골의

향기를 맡았다> 72

독후감3. 김진회 <결국, 쉬운 길은 없다> 74

독후감4. 이은 <사람이 역시 희망인 것인가> 76

독후감5. 이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 77

독후감6. 곽문주 <책보다 ‘사람’이다> 78

독후감7. 임은주 <마이너리티의 히든 파워> 82

사람책

사전

인터뷰

대출자의

독후감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사진 85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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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과연 우리가 안전한가’ 질문하며 온라인에서 엄마들이

모였다.

‘82쿡(www.82cook.com)’이라는 살림 정보를 나누는 온라인 공간이 있다. 차

일드세이브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과연 우리가 안전 한가’라는 질문을 던지

며, 정부가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에 의문과 걱정을 가지고 82쿡에서 독립해 나온

온라인 커뮤니티이다. 아무래도 여러 가지 이슈를 다루는 공간은 이슈가 너무 많

아서 어떤 이슈들은 자연스럽게 묻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원전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모여 방사능 측정기를 사고, 대기선량을 측정하는

활동 등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을까 적극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재 회원 중 80여명이 여성 회원이며, 80명 중 70명은 30-40

대 엄마들로 젊은 엄마 그룹이 다수이다. 현재는 원전 문제도 문제지만, 세월호 사

건에 대한 이야기와 활동이 커뮤니티에서 많이 오간다. ‘지구를 지키자’라는 거창

하고도 단순한 가치 아래 이슈에 따라 움직이기도 한다.

안전한 먹거리가 궁금한 엄마에서 지금은 차일드세이브 대표까지

차일드세이브 활동 전까지는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을 부정적으로 바라 봐 왔

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정보가 없어서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고 차일드세이

브를 알게 되었다. 초기 몇 개월 동안은 정보를 얻는 차원에서 끝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 혼자 조심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구나’를 느꼈다. 자연스럽게 조

직적 활동의 필요성에 동의하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실은 처음 가입한 엄마의 대부분은 차일드세이브 페이지를 안전한 먹거리 정보

를 얻고 구매하는데 활용한다. 단계로 따지면 입문이랄까(웃음). 이 시기가 지나

면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구조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검사를 의뢰 하는 등 적

극적 활동을 개시한다.

아이들은 나의 활동 에너지

아이들이 가장 크다. 초등학교 6학년, 4학년, 2학년 딸 셋의 엄마로 아이들의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지금처럼 가다가는 우리 아이들은 대기업 하청 직원, 일용

직 근무자, 비정규직 밖에는 선택지가 없다. 특히 후쿠시마 이후 아이들이 안전하

게 살 수 있는 세상인가에 대한 질문에 방점을 두고 있다.

밤 새워 구글링하는 엄마들

일단 구글에 매우 감사하다(웃음). 차일드세이브도 일반 시민으로서 다루기 힘

든 정보들을 얻고, 쉬운 말로 풀어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인터넷

을 통해 외국의 사례, 보고서 등을 찾으면 외국에 사는 교민 회원 분들이 번역을

해주시기도 한다. 우리는 민원을 넣고, 전문가를 상대해야 하니까 공부를 할 수 밖

에 없다. 전문적인 용어가 많은 소송들은 용어를 찾아가면서 공부한다. 차일드세

이브에서 전문 자료를 쉽게 풀어서 해석해주고, 자료를 공유하고 있다.

전화 한 통이 세상을 바꾼다

현재 지역모임을 활성화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선거를 겪으면서 오프라인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온라인상으로는 뜨겁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많은데 정

작 선거의 결과는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결국 온라인 활동은 자기 위로에 불과한

것이다. 엄마들이 모여 정부와 국회의원에게 항의 전화를 하고, 이러한 행동을 통

해 작은 변화를 만드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오프라인 활동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

작했다. 현재 강서구, 상계구 등이 모임이 활발하다. 물론 강연회, 행사 등을 열면

서울 중심인 경우가 많아 지역이 고급 정보에 있어 너무나 소외되고 있다는 고민

도 든다. 그래서 지역에서도 지역 모임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0명이 1만

원만 모아도 자체 강연회를 열 수 있다. 이런 지역 모임이 슬슬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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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바쁜 엄마와 가정 그리고 시댁

딸들은 이제 엄마가 무슨 활동을 하는지 알고, 방사능이나 안전한 먹거리에 대

한 인지도도 높다(엄마가 어릴 때부터 유난을 떨어서). 남편도 활동에 대해 이렇

다 저렇다 큰 반응이 없다. 하지만 시댁에는 비밀이다. 요 근래 2년 동안 바빠지면

서 아무래도 살림에 대해 소홀하게 된다. 이럴 때마다 그 비판이 아이에게까지 쏟

아져 시댁에게는 여태 숨기고 있다. 전업주부들이 가지는 직장맘에 대한 콤플렉스

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이 여성을 공격하는 경우가 생긴

다. 직장을 다니면서 육아에 소홀해도 부정적인 시선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돈벌

이가 되지 않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이해받기 힘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들과 함께 활동을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

목이 터져라 방사능 이야기를 해도 활동이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

국의 로널드 레이건호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수습을 위해 현 앞 바다에서 구

조 활동을 했었다. 방사능 측정기가 울렸을 텐데도 6개월 동안 구조 활동을 강행

했다. 이후 당시 활동했던 사람들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소송이 시작되었다는 기사

가 1년 만에 났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구조 활동을 나갔던 소방대

원이 떠올랐다. 알아보니, 국내 소방대원들도 검사를 하긴 했었는데 공식적으로는

피폭된 수치는 없었다. 그 분들은 재해지 가까이에 가서 천막을 치고 자면서 구조

활동을 선량계도 없이 했다고 들었다. 사명감만을 가지고 방사능에 대해서 아무것

도 모르는 상태였던 것이다. 활동을 하면서 우리는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열심히

이 사건에 대해서 설명했었는데 당시에는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SBS 기자가 취재에 관심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슈화 되고, 그 이

후 청원을 넣고 재검사를 하기로 결정 났던 적이 있다. 이 사건을 보면서 가장 뿌

듯했다.

‘아줌마들 골 때리더라’ 라는 소리에 속상하긴 하지만 피할 때는 피하는 것도 상책

공무원 상대하면서 대화 통하지 않아 열 받는 순간들이 꽤 많았다. 차일드세이

브 페이지가 원전 관련한 정보가 많은데, 정치적인 이슈가 터졌을 때 신상 조사를

위해 염탐 차 가입해서 분위기만 흐리고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차일드세이브 회

원 대부분이 육아를 하는 엄마가 많다 보니 ‘아줌마들 골 때리더라’, ‘완전 막무가

내 아줌마들이야’라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그럴 때 마다 속상하긴 한데, 크게 신

경을 쓰지는 않는다. 천성이 쿨 한 것도 있지만, 피할 때는 피하고, 바짝 엎드릴 때

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차일드세이브 카페의 목표는 안정적으로 오래

가는 것이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아야 할 때도 있는 거고, 매순간 감정을 표출하며

대응할 필요를 못 느낀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나의 인생의 전환기

고백하자면 차일드세이브 전까지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만 살아왔다. 90년대

학번으로 소위 X세대로 불렸고, 대학을 다닐 때 운동권 주도의 학생운동이 활발했

지만 관심은 없었다. 정치적으로도 독재정권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겪었으

니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으며, IMF를 겪긴 했지만 부모의 덕으로 생계

를 책임질 필요도 없었다. 대학 때 부산국제영화제가 처음으로 개막했으니 문화적

으로도 풍요롭게 20대를 보낸 셈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인생의 전환기이다. 졸업 후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며 직장을 그만두고선 평범한 경력단절 주부로 살며 육아에만 매진하다가 TV에

서 후쿠시마 사고를 보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미국의 911테러도 충격적이었

지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현장이 언론에 실시간 보도되는 것을 보면서, 방사

능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도 찾

아보고, 며칠 밤을 새면서 끙끙 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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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활동가가 아닌 ‘지구를 지키는 엄마’

나는 스스로를 활동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굳이 명명하자면 ‘지구를 지키

는 엄마’ 정도 되겠다. 대한민국 부모 대다수가 마찬가지이겠지만 ‘아이들을 위해

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엄마’이다. 차일드세이브 활동을 하면서 만난 진보적인 활

동가들을 보면 도덕적인 청렴도가 지나치게 강하다. 본인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검

열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인데 뭐 때로는 그럴 수 있지 하고 생각한다(물론 천성

자체도 그런 경향이 강하지만). 경력단절 주부이면 어때, 무식하면 엄마인데 어때

하면서.

가늘고 길게 활동하는 시민으로서의 꿈

가늘고 길게 시민으로서 열심히 활동하고 싶다. 차일드세이브도 계속 아마추어

리즘을 추구하면서 가늘고 길게 갔으면 좋겠다. ‘지구를 지키자’를 모토로 활동하

는 엄마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2014. 4. 22

펭펭인터뷰

2

목차

� 20대, 성에 활짝 눈을 뜨다

� 아우성 전문가를 꿈꾸다가 청년 활동가로

� <달수다>를 아시나요?

�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행복한 마을로

� 청년들의 활동과 노동 사이 :

동동프로젝트

독자 추천

�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

� 야한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

� 지역의 활동과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

여성환경연대의 지역 조직인 초록상상의

청년 활동가. 구성애 선생님처럼 성교육

전문가가가 되려다가 3년 전, 당시

초록상상 사무국장(현 여성환경연대

공동대표)에게 홀딱 반해 마을의

성교육팀 <달수다>를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는 다양한 분야의

청년 활동가들이 어떻게 즐겁고 오래

활동할 수 있을까를 고민 중.

동네 아줌마들과

좀 놀아본

청년 활동가

12 13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성교육 양성과정에 집중하고 있는 초록상상의 활동들

초록상상은 중랑구를 기반으로 한 여성환경연대의 풀뿌리 지역 단체이다. 나는

초록상상에서 성교육 활동가를 양성하고, 거리의 가출 청소년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가 3년차인데, 처음 1년 동안은 거리에서 부스

를 설치하고, 가출 청소년,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성교육 캠페인을 진행

했다. 초창기에는 대학생 자원 활동가와 초록상상의 회원들과 함께 진행했었는데,

자원 활동가의 경우 활동이 끝나면 총알같이 집에 가기를 원했고, 남아 있는 회원

들은 40-50대가 많아 청소년들과 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혼자 캠페인을 진행하는 것이 벅차기도 하고, 지역의 회원들이 편안하게

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교육을 진행 할 수 있는 그룹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래서 2년차부터는 1년 동안 마을 성교육팀을 양성하는데 주력했다.

이전까지 초록상상에는 건강교육팀, 생태교육팀만 있었는데 지금은 성교육

팀이 만들어졌다. 사람을 키운다는 것이 만만치 않고, 굉장히 오래 걸리는 작업

이지만 다양한 캠프, 행사, 자체 교육 등 통해 지속적으로 기회를 만드는 작업

을 하면서 초록상상 성교육활동가들이 생겨났다. 지금은 현재의 활동을 즐겁게

하고 있다.

20대, 성에 활짝 눈을 뜨다

나는 연애를 하는 친구들을 한심하다고 약간 오만하게 생각하며 나의 욕망을

거세하고 청소년기를 보냈다. 대학에 오니 매력적인 친구들이 많았다. 문제는 여

자인 내가 봐도 매력적인 여자 친구들 조차 몸에 대해 많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

고, 첫 성경험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부정적으로 시작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

이다.

주위에 성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누는 게이 친구들과 여자 친구들이

많아, 야한 농담을 즐기고 편하게 성에 대한 수다를 떠는 게 익숙해 있었다. 그러

다보니 주변에 낙태를 경험한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무척 충격적

이었다. 생각보다 낙태·성폭력 등의 사건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 빈번했고, 점차

이것이 엄청나고 큰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성 경험을 통해

여성이 자신의 욕구를 잘 표현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지 않은 현실을 보면서 안타

까움도 많이 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공부하고 이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우성 전문가를 꿈꾸다가 마을의 성교육활동가로

처음에는 아우성 강사 양성과정을 밟으면서 시작했다. 현재는 아우성 강사 활

동보다는 초록상상에 더 애착과 무게를 두고 있다. 성은 알면 알수록 너무 광범위

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단기에 갖는 것이 어려운 영역이다. 초록상상에서 활동을

하면서 얼마큼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느냐 보다는 지역에서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함께 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필요한 지식과 관점을 설명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마을 성교육팀에 더 애정을

갖게 되었다.

의외로 성교육 활동에 대한 긍정적인 주위의 반응들

편견이 많을 것이라 예상하는 분들이 많은데 요즘은 매우 다르다. 어느 세대를

만나도 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젊은 친구들은 재미있는 일을 하는구나 하

고, 조금 나이가 있는 세대는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하는구나 하며 격려해주신다.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14 15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성에 눈뜨기 전, 디자인을 공부하며 방황하던 시기

본래 대학에서는 디자인을 공부했었다. 대체로 디자인을 가르치는 교수나 학생

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이 많아 그 사이에서 빈부격차를 느꼈다. 디자인의

주제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들었다. 주로 소비재인 경우가 많은데, 그 때마다 나는

소비재를 살 수 없는 사람들과 그 환경에 대해 더 신경이 쓰였다. 디자인이 삶의

필수적인 요건이 아니라는 생각에 회의를 느끼면서 대학 때는 자퇴를 고려할 정

도로 방황하기도 했다.

우연한 계기에 학생회 활동을 도와준 경험이 있다. 당시 학생회가 학내의 비정

규직 청소노동자, 식당노동자, 시간제 일자리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

으며 매주 밥을 함께 먹는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묶어 책으로 발간하

려던 시점에 책 디자인 작업을 함께 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사

회적 공헌이었다.

트위터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한 초록상상 활동

2012년 4월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데, 활동을 시작하던 당시는 25살이었

다. 아우성 강사를 준비하는 상황이었는데 일정의 강사료를 받으며 일을 하기 위

해서는 10회의 강의 경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무작정 검색을 하다가 초록상상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활동가나 시민단체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단지

초록상상에서의 활동이 필요한 경험이 되겠다 싶어 지원했다. 물론 돈도 필요했고

(참고로 당시 활동비는 월 60만원이었다).

중랑구는 저소득층, 방치되는 청소년과 아동이 많은 지역인데, 초록상상은 지역

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해 여러 분야의 여성환경운동을 해오고 있었다. 그 중 하나

가 서울시의 브릿지 사업(가출·방황 청소년을 쉼터와 연결하는 사업)이었는데,

초록상상에서 청소년 거리상담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트위터로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활동을 하다보니 사람도 좋고 집도 가까워서 지금까지 하고 있다.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장이정수 선생님과의 인연도 크다. 그 때 초록상상은 주

로 40-50대 활동가가 대부분이었는데, 젊은 활동가가 와서 활기가 생겨 좋다는

분위기였다. 장이정수 선생님께서 내가 활동하는 것에 대한 의미부여와 지지를 많

이 해주셨다.

지역에서만 활동해도 답답하지 않아

풀뿌리 활동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그 지역에 살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 내

가 살고 있는 공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초록상상에서 갖게 된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과 공동체가 행복한 공간인가에 대한 질문을 초록상

상이 해 준 것이다. 일단 초록상상은 여성환경연대의 중랑구 지부 격인데, 다른 시

민단체와는 다른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공간은 창고를 겸한 작은 사무실과

그 옆에 딸린 카페로 이루어져 있는데, 카페는 초록상상 회원분들의 자원 활동으

로 운영 되고 있다. 나는 사무국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특정한 출퇴근 시간이 없

다. 이 자율성이 약간 반골적인 기질을 가진 내가 계속 활동할 수 있는 이유인 것

같기도 하다(웃음). 또한 장이정수 선생님과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의 지지와 의미

부여가 만족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청년들의 활동과 노동 사이: 동동프로젝트

대화문화아카데미의 프로그램인 ‘배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동동프로젝트’라는

것을 진행하고 있다. 주로 하는 일은 청년 활동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정리해

서 공유하는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는 청년활동가들이 힘들어 하는 지점이 무엇일까라는 단순한 궁금

증으로 시작했다. 나는 지역에서 활동하며 현재의 일자리에 만족하고 있는데, 의

16 17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외로 활동을 하면서 그만둘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청년 활

동가들을 만나 커피도 사주고, 업무 구조, 임금, 연애, 취미, 고충, 윗세대와의 갈등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너무 전문적인 지식에 집착하는 우리의 활동, 이대로 좋을까?

요즘은 활동가들에 대한 고민이 많다. 활동가들이 너무 전문적인 지식에 집착

하고, 이상적인 성향이 강해 결과적으로는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활동가

나 사회운동가는 사회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생

각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과

정이 쉽지 않다 보니 활동가가 일반인을 만났을 때,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쉽게 간과하고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반대

의견을 마주했을 때, 갈등을 회피하고 오히려 사람을 만나거나 대화를 꺼리게 되

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면 관계의 복구가 불가능하고 일상이 상처만 남게 된다.

좀비 같은 사무국 활동가, 활동가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고민

활동가가 어차피 돈을 조금 밖에 받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다른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내가 하는 활동과 일에 대한 결정권,

출퇴근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권 등 이 이에 해당한다. 활동을 하는 것이 재미

있고 함께 하는 것이 행복해야 하는데 가끔 여성환경연대 본부 사무국 활동가들

을 보면 다들 좀비 같다(인터뷰어도 공감한다).

대다수의 청년 활동가들은 인적 네트워크도 부족하고, 그렇다고 노동환경이 끝

내주게 좋은 것도 아니다. 이전부터 활동을 해온 소위 386세대는 활동에 대해 충

분한 사회적 지지라도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경제

적 여건이 나아진 것도 아니다. 사회적으로도 활동가라는 직업은 당연한 헌신을

요구받는다(가족기업, 사회복지사, 교회전도사를 제외하고선. 웃음).

모든 활동가들이 일반 노동자처럼 노동 3권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상쇄할 수 있는 무언가를 선배 활동가가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역 안에서 인

적 네트워크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주고, 활동가가 사회의 어

떤 위치와 자리에 있는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일들 말이다. 이렇게 자유롭게 활동

하고 있는 나도 가끔은 쉽게 말 할 수 없는 지점이 있는데, 다른 노동조건을 가진

단체의 활동가는 오죽할까 싶고 생각할 때마다 너무 안타깝다. 갈등구조를 그냥

외면하고 무시하는 일은 갈등을 계속 곪게만 만든다. 상처만 갖고 활동가가 떠나

버리기 번에 우리 모두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다.

2014. 4. 23

19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김소영인터뷰

3

목차

� 직장맘에게도 세상을 아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

� 성대골에 도서관이 생기면 어떤 일이?

� 90만원을 30만원으로 월세 깎는 노하우

� 마을학교, 에너지 슈퍼마켓과

해바라기 카페

� 성대골 마을의 독일견학 이야기

� 마을에서 지치지 않고 활동하는 비법

독자 추천

� 미래세대를 걱정은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 독일의 에너지자립 마을 7개 견학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

� 마을에서 이웃 만들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

치안도 불안하고 어린이도서관도

하나 없던 동네. 오로지 마을사람들이

후원해 준 책과 돈으로 만든

성대골어린이도서관장으로 3년간

활동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마을에서 에너지문제를 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그 속에서

상도3,4동은 서울시에서 가장 유명한

에너지자립마을이 되었다. 수많은

마을공동체에 에너지 절전소, 해바라기

카페 등 상상력을 제공하며,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작년

10월 동네주민들이 쌈지돈을 모아

독일견학도 다녀와서, 에너지전환에

대한 꿈이 더 단단해졌다. 올해 초부터

동네주민들이 출자한 협동조합 ‘에너지

슈퍼마켓’에서 활동 중이고, 5학년인

쌍둥이 두 딸의 엄마이다. 현재는 탈핵,

마을공동체, 미래세대, 용기를 삶의

키워드로 고민 중.

나는

도시의

에너지 경작자

직장맘에게도 세상을 아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

나도 오랫동안 직장맘이었고 세상에 나가서 일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다 아는 건 아니었다. 세상을 아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2009년 신종플루가

유행할 때 구립어린이집에 다니는 쌍둥이 딸을 둔 엄마였다, 구립어린이집이 신종

플루 때문에 갑자기 한 달 동안 문을 닫고, 아이들을 어디 보낼 데도 없어서 한 달

간 휴직을 했다. 원래는 휴직하고 나서 복직하려고 했는데 2번의 기회를 놓쳤다.

2008년도에도 구립어린이집 급식비리가 터져서 잠깐 활동하긴 했지만, 직장 때문

에 열심히 활동하기는 어려웠다. 휴직하고 점심시간에 학부모들과 모여서 도서관

만들자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3-4월이 가고, 그때 당시 도서관추진

위 대표를 하고 있었고, 곽노현 캠프도 지원했었다. 2011년에 도서관이 문을 열고

나서는 다시 직장 생활을 할 수도 있었는데 도서관 관장을 그냥 그만 두기가 미안

했다. 직장을 다닐 때는 좋았고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파격적이고 유

별난 행동을 제안해도 직장에서는 잘 받아줬었다. 1년에 2번씩이나 다시 복직하

라는 요청을 받는 일이 흔하지 않는데, 그 때 그만 두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생긴 성대골도서관의 변화

2010년에 도서관이 만들어졌다. 2011년 후쿠시마 발전소 사고를 지켜보면서

에너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 마을도서관 관장 지위를 이용해

서 에너지와 관련한 무언가를 강하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웃음). 그 때 당

시는 정보도 별로 없었지만, 내가 알고 옆의 아줌마도 함께 알아야지 않을까 싶었

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는 일을 중요하다고 여겼다. 처음 두어 달은

이런 이야기가 먹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무 큰 일만 안 벌이면 되지, 하고 싶으

면 하라는 정도로 반응했다. 그러다보니 점점 잊히기 시작해서 에너지 특강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던 시기다.

20 21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당시에는 도서관 월세인 100만원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급박한 일이었다. 도서

관 후원회원이 하루에 6~7명 늘어나던 시기여서 사람들 붙잡고 이야기를 열심히

했다. 동네에 학교도 없고 도서관도 없었으니, 마을 도서관을 만들고 초기에 기획

하고 벌이는 사업마다 반응이 좋았다. 동의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마을

도서관이 주민들에게 잘 스며들고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그래서 운영위원회에

서 ‘나는 어떻게든 후쿠시마를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고 선포했다. 그 이후 7월부

터 도서관이라고 얻어놓은 빈 창고 같은 건물에서 환경특강을 시작했다.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아이들이 꿈꾸는 마을 도서관의 그림을

도서관에 붙여 놨다. 아이가 자기 그림 보여주고 싶어서 가족들을 끌고 오면서 아

이 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를 만나게 되었다. 오는 사람들마다 눈여겨보고, 말 시

켜보면서 운영위원 10명을 찍었다. 도서관을 만들기 위한 추진위원회에는 마포희

망나눔, 노동당 등 조직도 있었지만 일반 주민도 4~5명 있었다. 이제는 동네 분들

이 알음알음 물품을 지원할 사람을 알아보고, 저렴하게 장터를 운영한다. 잔잔하

게 마을에 스며들고 있는 중이다.

90만원을 30만원으로 월세 깎는 노하우

요즘 성대골어린이도서관이 돈 많은 도서관으로 소문났다. 실제 운영비는 180-

250만원 정도 든다. 마을학교랑 나눔부엌 합쳐서 임대료만 280만원이나 된다. 운

영비를 벌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한다. 사람은 쉽게 설득이 안

되는 게 정상이다. 꼬시면 안 넘어 오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금방 공감을 얻지

못해도 상처 받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내가 이러저러해서 후원해 달라고 부탁할

때 선뜻 100만원 씩 내주는 사람들이 이상한 거다(웃음). 금방 넘어오지 않는 것

을 정상이라 생각하고 끝도 없이 이야기 하는 것, 거절은 당연한 것이니 상처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을 자꾸 만나다 보면, 점점 사람들의 어디를 건드려야 그 사람 안의 무언

가와 내가 갈구하는 무언가가 만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마을에서 사람들을 만나

면 묻는다. “선생님은 불 나면 어디로 가실 거예요?” 서울은 대도시라 갈 곳이 없

다고 답하면 “우리집으로 오세요” 하며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한 번은 태권도장

선생님이 불러서 가봤더니 도서관추진위 대표를 안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안타까우니 그만

두라는 것이다. 그런 분들도 있지만 선뜻 100만원을 내어주신 할머니도 있다. 맘

변하기 전에 가져가라고 하시더라. 그 사람들에게 마음의 빚이 생겼다. 그 사람이

개인 김소영에게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들이 바라는 세상에 투자한 것이다.

그 분들이 바라는 세상이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고 보답해야겠다 싶어서 더 열심

히 하고 있다.

마을학교, 에너지 슈퍼마켓과 해바라기 카페

어느 날 보니 하루아침에 마을학교, 에너지 슈퍼마켓, 해바라기 카페가 생긴 것

이 아니다. 매주 목요일 10시에 4-5명이 회의를 하고 그 회의를 위해서 또 매주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 그 시간이 쌓이다보니 생겼다. 나는 노심초사 조바심을 내

는 성격이다. 혼자 한다면 두려워서 못했을 것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

능했다. 내가 하는 일은 별거 없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다. 어떤 사

람은 일주일에 한 번도 회의를 나오지는 않지만 마을학교에서 마을교사는 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그 사람을 두고 불평을 하면, 나는 “회의 한 번 안 나오면서 마을교

사 계속 하는 것이 기특하고 고맙지 않냐”고 묻는다. 누군가 나에게 와서 다른 사

람에게 쌓인 불만을 이야기 하면, 나는 마지막에 딱 한 마디만 덧붙인다. 상대방이

타인을 곱게 볼 수 있도록 무언가 한 마디 정보를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다르게 보인다. 조직은 관계를 만드는 과정이다. 마을은 정말 단순해야 한다. 학력,

22 23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경제력, 정치색 등이 다양해서 초창기에는 ‘비정치·비지역·비종교’라는 원칙이

있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에너지 슈퍼마켓을 만들면서 개인이 각각 30만원씩 출자했다. 그 때 당시 계산

해보니 15명이 최소 200-300만원씩은 내야 가능한 금액이었다. 그런데 누가 그

금액을 출자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하겠는가? 이야기만 나오고 돈을 내지 못

해 관계가 깨질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을 잃게 된다. 20-30만원 정도면 남편 몰래

쌈짓돈으로 낼 수 있는 금액이다.

성대골 마을의 독일견학 이야기

2013년에 마을 사람들과 독일의 에너지자립마을 7곳을 견학 다녀왔다. 아이들

도 데려가서, 한 가족 당 거의 7-800만원 정도 들었다. 그 바람에 어떤 집은 시골

시아버지가 올라와서 이혼하라고 하기도 했다더라. 참가한 사람들의 80%가 비행

기를 처음 타보는 사람들이었다. 거의 총 경비를 합산하면 1억 정도 들었을 것이

다. 이렇게 큰 비용을 무릅쓰고도 다녀왔던 이유는 모두들 에너지자립마을의 미래

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때 독일 견학을 다녀왔던 사람들이 가장 강력한 탈핵 활동가가 되었

다. 초기 활동은 나를 보고, 나에 대한 연민으로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함께 하는 사람들 스스로의 신념이 있어야 오래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일

견학을 함께 갔던 중학생, 고등학생 아이들은 다녀와서 재생에너지 전력 회사를

만드는 꿈을 꾼다. 함께 하는 사람들과 이 사람들의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면서 이

2세들이 에너지자립마을을 완성할 것이라 믿는다.

독일 견학을 가기 전에는 정보를 많이 얻어 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고민과 기

술력의 차이가 너무 커서 사실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삐삐를 가진 사람이 스마

트폰 가진 사람을 견학 간 것이라고나 할까. 독일은 1974년에 이미 에너지 자립마

을과 관한 정책이 있었고,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이후 빠르게 확산되었다. 우리

가 유럽을 30년 앞섰다는 둥 과장된 홍보들이 난무한데, 막상 직접 가서 보면 그

차이가 훨씬 느껴진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쉐나우라는 마을이다. 주민들 스스

로가 전력회사를 만든 지역인데, 평범한 아줌마가 재생에너지 전력회사의 중심에

있었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는데, 그 할머니의 아들이 전력회사의 대표를 하고

있었다. 그 때 그 할머니도 만났는데, 우리 아이들이 가장 집중해서 듣더라.

마을에서 지치지 않고 활동하는 비법

지금도 노량진역 앞에서 매일 7시에 4.16 세월호 참사 추모제를 한다. 사람들한

테 가자고 하면 아이들 저녁 먹여야 해서 못 간다고 한다. 그러면 도시락 싸서 가

자고한다. 아니면 매일 가지 못하더라도 오늘은 네가 가고 내가 아이를 맡고, 내일

은 내가 가고 그러자고 한다. 갈 수 있는 사람은 추모제 가고, 어려운 사람은 도시

락을 서로 싸거나 아니면 마을하교 간식 좀 늦게 먹이라고도 하고. 못 하는 사람을

죄인취급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난 그런 감정들을 솔직히 얘기한다. 밥을 사든

지, 노량진을 가든지, 노란 리본을 사오든지, 아이를 좀 맡아주든지 몇 가지 안을

내고 가능한 것을 하게 한다. 미안하게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만큼 함께 참여하

게 하는 게 중요하다.

2014.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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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4대강 토건 공사에 맞서 유기농지보존작전을 펼치던 ‘두물머리 밭전(田)위’에 농

사 짓다

2014년 4월 무렵이었는데, 당시 해방촌의 빈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는 자전거 타기를 좋아했고, 몇몇은 자전거메신저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친구

한 명이 우연히 생협 모임에 나갔다가 자전거 도로를 짓기 위해 농지를 밀어버리

고 있다는 두물머리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자전거를 함께 타던 친구들이 두물머

리까지 가보자는 제안을 했다. 서울에서 ‘우리는 두물머리에 자전거 도로가 필요

없다’라는 메시지를 걸고 두물머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 때 한 번 가보고 난 후 다시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두물머리는

땅도 좋았지만, 풍경도 아름다웠고, 농부 아저씨들도 매력적이었다. 두물머리 농

민들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게 말씀도 잘 하시고, 약간 선비 같은 느낌도 있었다

(웃음). 4대강 문제에 관심은 있었지만 너무 멀어 자신이 없었는데, 두물머리 정도

면 자주 왕래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두물머리에서 매주 에코토피

아 캠프를 열며 활동을 시작했다.

2014년 4월, 두물머리의 현재

2012년 행정대집행 이후, 합의안을 둘러싸고 논쟁이 많았다. 합의안은 대체 이

게 뭘 의미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애매하게 끝났다. 그렇게 여지들 둔 채로, 민간

과 정부가 협의하는 과정이 1년 동안 이루어졌다. 현재는 연구 용역도 맡기고, 두

물머리 지역을 일반 공원이 아닌 어떤 방식으로든 유기농을 남길 수 있는 공간으

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싸우던 농민 4분은 두물머리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최근에는 농민

중 한 분이신 요왕아저씨가 농막을 만들 때, 친구들과 공간 만들기 작업을 함께하

기도 했다. 두물머리를 지키면서 ‘두머리작목반’이라는 이름으로 농사를 짓던 친

달군인터뷰

4

목차

� 기술활동가로 지내던 시절

� ‘두물머리 밭전(田)위’에서 농사 짓다

� 이어붙이는 뜨개 농성장 : 대한문과

강정코

� 자립손노동과 기찻길 옆 오막살이

독자 추천

� 삶에서 사회적인 문제를 만났을 때

개인적·일상적 실천을 고민하는 사람

� 귀농과 반농, 서울과 탈서울 사이에 있는

사람

� 손노동에 관심 있는 사람

� 올해 농사를 열심히 짓고 싶은 사람

‘이어붙이는 뜨개 농성’을 통해

대한문 앞 쌍용차 농성장과 강정마을

농성장에 뜨개질 꽃을 피웠다. 그

전에는 두물머리 농지를 지키는

활동을 하며 두물머리밭전위원회

친구들과 농사를 지었다. 그 전에는

‘진보네트워크센터’에서 기술 활동가로

활동했다. 현재는 두물머리 근처에서

기찻길 옆 오막살이를 하고 있다. 농사도

짓고, 그림도 그리며 자립적인 생활을

고민 중.

농사, 그림, 자립을

달달하게

‘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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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구들은 계속 이 곳에서 농사를 하고 있다. 두물머리 싸움이 끝나기 전 고도된 공동

체성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합의 이후 조금 지

치기도 하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현재는 농사를 매개로 계속 만나고 있다. 지금

은 시민 형태의 텃밭도 조성되었고, 최근에는 시농제도 열었다.

인터넷의 가능성을 낙관했던 시절, 기술활동가로 지내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인터넷이 급성장하는 시기였다. 인터넷의 가능성이 크다

고 느끼면서 기술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이 강했던 시기였다. 당시 학내에서 활동

을 하면서 조금씩 소통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뭔

가가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럴수록 작은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자보쓰기 운동도 했지만 소통이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다고 느

끼던 찰나였는데, 인터넷은 상대적으로 더 평등해보였다.

책을 보면서 인터넷과 네트워크 등 공부를 했다. 홈페이지를 만들어야 하는 상

황이었는데, 책을 보면서 배운 프로그램이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홈페이지를 만

드는 일이 돈도 많이 들지 않고,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었다. 그렇게 홈페이지를 만들면서 프로그래머, 해커의 꿈을 키웠다. 정보공유운

동에 관심이 많았는데,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서 공유재로 풀어 놓는 사람들이 너

무 부러웠기 때문이다. 개발자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쓸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만들어 배포하고, 사회적인 영역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가 진보네트워크도

알게 되고, 프로그래밍을 배울 겸 활동을 시작했다. 2009년까지 활동했는데, 결국

프로그래머가 되지는 못했지만, 웹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낮아진 기술의 문턱, 사라진 개성

지금은 낙관적이지는 않다. 웹 자체도 스마트폰, 컴퓨터가 발전하는 방식처럼

편리해졌다고 느끼지만 정작 최종적으로 사용하는 유저는 아무것도 몰라도 사용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더 쉽고 접근성은 좋아졌지만 개성은 사라졌다. 즉

세련되어보여도 다 비슷비슷한 플랫폼인 것이다.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은 틀이 정

해져 있고,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다. 어떻게 보면 웹의 안정

기라고 볼 수도 있겠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많이 말하면 말할수록 달라질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지금은 웹을 통해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회의적이다.

인터넷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영향과 긍정적인 매력을 동시에 느끼는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현대의 상징이기도 하고, 기술과 육체를 드러내는 것 같

기도 하고. 플랫폼을 만드는 일도 여전히 재미있다. 하지만 단체나 활동은 기술적

인 부분을 세련되게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는 진보적인 축이 기술적인 축

을 선도하고 있었는데, 현재는 기업의 자본주의적인 기술로 인해 격차가 벌여져서

따라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웹상에서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은 다른 기술

에 비해 개인적, 소규모인 측면이 있다. 어느 순간 대등하게 개입할 수 있는 가능

성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만남과 여행, 내가 좋아하는 것

대학 졸업 후 5년 동안 IT업계 종사자답게(웃음) 며칠간 밤새가면서 진보넷에

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몸도 안 좋아지고 갑자기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

는데 그만두고 싶어졌다. 사무실에만 앉아 있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고나 할까. 사

무실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일이 용산 참사와 관련한 것이었다. 물론 누군가는 해

야 하는 일이고 필요한 일이지만, 사무실에만 앉아 인터넷으로만 일을 하는 것이

너무 싫어졌다. 나오고 나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졌고, 당시 낙서

수준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쉬면서 화실도 다니고 그랬다. 그러다 우연히 새

만금의 ‘살자페스티벌’을 계기로 환경, 농사, 생태 운동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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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여성주의 운동은 학생 때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비혼생태여

성 귀농 공동체를 꾸리려는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그 때 그 친구들과 함께 귀농한

언니들을 찾아다니는 귀농 여행을 다녔다. 아직도 그 여행의 영향이 나에게 아직

도 남아있는 것 같다.

대한문의 쌍용자동차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을 뜨개질로 짓기

뜨개질을 하던 친구들(구름, 세희)과 양말 뒤꿈치 뜨는 방법을 공유하자며 사진

을 올린 적이 있다. 손노동에 관심이 많아 우스갯소리로 ‘뜨개연구회’를 만들자고

우리끼리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중구청이 대한문 앞의 쌍용자동차 농성

장을 밀어버리고 화단을 만든 사건이 터졌다. 누군가 SNS에 yarn bomb이라고 불

리는 거리예술의 사진을 올렸는데, 슬금슬금 그것들이 이어지고 서로에게 영감을

주면서 농성장에 뜨개질로 농성장을 지으면 어떨까 하는 그림으로 연결되었다. 마

침 문화연대에서 프로그램을 만들길래 살짝 껴서 함께 하게 되었다. 농성장에 뜨

개질이라는 할거리가 있으니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연스레 많아지고 재미있

었다.

활동을 해오면서 늘 답답했던 것이 내가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것,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 지점을 계속 고민했었다. 그 지점을 계속 찾고 고민했었

는데, 두물머리에는 농사였고, 현재는 그림을 그려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집회에

나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피켓만 들고 있다가 오는 일도 많았고, 농성장에 갔

을 때도 뻘쭘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닌가 고민이 들 때가 많았다. 방법적

인 고민을 계속 하다 보니 당시에는 뜨개질로 표현된 것 같다.

이어붙이는 뜨개농성장, 대한문에서 강정까지

대한문의 이어붙이는 뜨개농성장이 조금 알려지면서 강정에서도 하게 되었다.

강정도 정말 멀어서 갈 때마다 부담스럽고, 정작 구럼비 발파 할 때 한 번 가고 다

시 가지 못해서 계속 부채감이 남아있었다. 상황도 추상적인 싸움들만 알려지고,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잘 모르는데 누군가에게 물어보기는 더 부

끄러워 계속 멀어지고 있던 찰나였다. 강정에서도 뜨개농성장을 하자는 제안이 들

어왔을 때 처음에는 그곳은 많은 사람들이 부대끼고 싸우고 있는데 뜨개질이 너

무 요식적으로만 비춰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많이 알리지는 않

고, 소극적으로 활동했는데 (심지어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인 생각도 가지고 있었

다. 웃음.) 엄청난 양의 뜨개질이 모아져서 많이 놀랐다.

뜨개질만 한다고 뭐가 변할까

큰 그림 없이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것처럼 사안별로 움직여도 되나 고민이 된

다. 그 동안은 ‘큰 그림을 그리고 연결시키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소소하게 하는

사람도 있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활동해왔다. 그러다보니 너무 소소한 실천에만

집중하고 진지한 고민을 미루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책적인 측면

은 전문가에게 미루고, 정치적인 측면은 정당 활동가에게 미루고.

뜨개질을 한다고 뭔가 변화되지는 않는다. 물론 뜨개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홍보되는 측면이 있어서 한편으로 마음이 편해

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직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정작 나는 핵

심에서 멀어지고 소홀해진 것 같다. 항상 불만을 가지게 되는 부분이 명료하고 쉽

게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활동이 현재 돌아가는 시스템 안에 투

척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무리 와글와글해도 무시하면 땡인 사회니까. 이

전까지는 재미없다고 여기며 무시해왔던 활동이 개인적으로 많았는데, 지금은 내

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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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양수역 기찻길 역 오막살이와 농사짓기

원래는 서울에 살았다. 서른이 되면 독립해야지 하면서. 서른이 되기 직전에 여

행간 친구의 반지하 방에서 살면서 독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온라인 네트워크에서

만난 사람들과 비혼 모임을 꾸리면서 비혼 공동체도 고민하기도 했다. 두물머리를

만나고 나서, 지금은 양수역 근처에서 짝꿍과 함께 농사짓고 그림도 그리며 지내

고 있다. 우리끼리는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고 부른다(웃음).

밭농사를 400평 정도 하고, 올해는 논농사도 300평 정도 기계를 빌려서 하고 있

다. 작년에는 콩을 심었는데 고라니가 한 알도 안 남기고 다 먹어버려서 망해버렸

다(웃음). 쌀은 아예 안 사먹고, 야채는 밭에서 나온 것들을 먹는다. 두부, 국수류,

가공식품 외에는 거의 안 사먹는다. 겨울에 하우스 제배도 하지 않는다. 먹는 것은

거의 70% 정도 자급하고 있다.

가사분업이 명확한 농사짓는 사회의 문법

귀농은 조금 무서웠다. 양수역 근처로 옮길 때도 이사 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농

사도 진짜 ‘농사’라고 말할만한 수입을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물론 꼭 수입을 만

들어야 농사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사회적인 순환이 되는 농사는 아니다.

자급하고 친구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정도니 취미농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래서

딱히 귀농의 어려움을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다.

농사일 자체가 사실 힘들긴 하다. 우리는 기계도 안 쓰고 멀칭도 안 하고 농사

를 짓는데, 나는 삽질도 잘 못하니 같이 살면서 함께 농사짓는 친구에게 조금 의존

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혼자서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도 하면서. 두물머

리를 오가면서 농사짓는 사회의 문법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생산자는 두물

머리의 농부이고, 소비자는 아줌마인 경우가 많고, 그 사회 안에서 가사분업도 명

확하다. 부엌일을 하는 것은 여자의 몫이고, 여자에게 새참을 요구하는 것을 당연

하게 여긴다. 좋은 해결법이 뭘까 고민이 든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고, 할 필요도 없는 ‘자립’

전에는 ‘독립’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부모님 밑에 살면서 혼자 살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는데 집중했다. ‘독립’과 ‘자립’은 비슷한 말이기는 한데 ‘자립’은 타인과의

관계와 더 연결되는 것 같다. 독립적이면서 상호의존적이랄까. 혼자서는 모든 것

을 다 할 수 없고, 할 필요도 없다. 옷을 만드는 친구와 농사지은 작물을 교환하거

나, 쓰지 않는 물건들을 교환하는 것, 이런 것들이 자립이 아닐까.

자립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다 해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쓰는 것들이 어디서,

누구로부터,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아는 것이다. 채식을 시도 하면서 이런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내가 먹고 있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동안 몰랐었는데,

‘아 이런 걸 먹는구나’ 알아가면서 그동안 몰랐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 경

험이 매우 신기했는데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매일 자주 만지는 핸드

폰도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내가 만들어 쓸 필요는 없지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아는 일은 중요하다. 점점 사용자는 말초적인 사용법만 알 수 있

고, 복잡해지고 모를수록 편리한 상품으로 여겨진다. 그 과정에서 오는 문제들도

많다. 이러다간 사회 시스템도 어떻게 복잡화 되는지 그 과정은 알지 못한 체, 편

하게 살 수 있으면 좋다고 여길 것이다. 이런 것들을 알려고 하고, 누구나 알기를

원한 다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자립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실천이 연결되어 자립적인 조건을 갖춘 사회를 꿈꾸며

자립이라고 해서 기본적으로 뭐든 다 만들어 쓰면 소규모의 작은 삶을 지향하

게 된다. 나도 한동안 뭐든 내 손으로 해결하고 싶어 했고 그것이 옳다고 여겼었

는데 지금은 꼭 그래야 하나 질문이 생긴다. 그럼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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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을 시도할 수 있을까? 소수 몇몇의 여건이 가능한 사람만 할 수 있게 되지 않을

까? 그렇다면 관점을 바꾸거나 넓혀하지 않을까?

모두가 자급, 자립 가능한 삶이란 뭘까? 이런 고민이 요새 많이 든다. 개인이 이

룩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사회가 자립적인 조건을 갖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

다. 개인적 실천이 중요하기는 한데, 그것들을 연결하고 시스템화 하기 위해서는

다른 고민들이 필요하다. 전까지는 사례를 만들고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의미를 두었는데, 지금은 이것들을 어떻게 전파하고 실질적으로 시스템화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전체 시스템 자체가 자립을 지향하고, 자립할 수 있

는 시스템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그때 반응하며 실험하는 삶

나도 내가 뭘 하는지 잘 모르겠다. 뚜렷하고 구체적인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이

렇게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고 실험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일관성도 없어 보이고, 산만하기도 한데 나는 잘 하고 있다고 느낀다. 사람들이 내

가 사는 방식에 대해 물어볼 때는 약간 환상을 갖는 경향이 있다. 나는 반응형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때그때 나는 어떤 반응을 하고 있었고, 초점을 맞춰 살고 있었

다. 어떻게 보면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 같으면서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주제

다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자립적이다’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

다. 활동을 하게 만든다거나, 농사를 짓게 만든다거나 어떠한 형태로 본인의 삶에

서 구현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다.

2014. 4. 24

주은진인터뷰

5

목차

� 느리게 사는 삶을 위해, 쾌속 질주한

연애와 결혼

� 생태근본주의자의 욕심 없는 건방짐

� 없는 길을 만들면서 가는 것은

매력적이기만 한가

� 지나고 보면 즐겁고 행복한 시간,

기다려지는 마흔

독자 추천

� 귀촌을 꿈꾸는 젊은이

� 시골살이의 좌충우돌이 궁금한 사람

� 돈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

석유문명은 조만간 망할 것이라는

확신과 갑갑한 도시를 떠날 기회만

노리던 참에, 8년 전 유기농펑크가수

‘사이‘를 만나 6개월 만에 짐을

꾸려 경남 산청으로 내려간 여인.

생태근본주의자로 살고 싶어 냉장고

세탁기, 전기 없이 지낸 2년여. 먹을

것, 사는 곳을 우리 손으로 짓고,

아무리 가지려고 해도 원체 욕심이

없으니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아이가 생기고 출산과 육아의 과정을

겪으며, 티격태격 다툼도 잦아지고,

생태근본주의자였던 삶은 현실과

조금씩 타협점을 찾기도 했는데.

청순한 그녀의 무모한

시골 살이 8년차 :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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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느리게 사는 삶을 위해, 쾌속 질주한 연애와 결혼

석유문명은 조만간 망할 것이라는 확신과 갑갑한 도시를 떠날 기회만 노리던

참에, 8년 전 유기농펑크가수 ‘사이‘를 만나 6개월 만에 결혼과 동시에 귀촌했다.

경남 산청에 빈집 있다고 해서 트럭을 하나 사서 짐을 꾸려 내려갔다. 1년 동안 집

을 수리해서 살았다. 그런데 집주인이 나가달라 해서 다른 데로 옮겨 폐자재 얻고

흙벽돌을 나르고 쌓아 집을 지었다.

남편은 인드라망 귀농학교에서 만났던 간사로 나와는 8살 차이였다. 그 때 남편

은 가까운 친구들과 월든, 헬렌-스콧니어링의 자서전, 자급관련 서적들을 읽고 또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나서, 석유문명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했

고 귀농을 결심했다. 나 또한 도시의 생활이 싫었고 가장 근본이 되는 삶을 찾아

가고 싶었다. 처음부터 결혼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귀농을 꿈꾸었고 가까이

에 그 사람이 있었다.

결혼식은 산청에서 친구, 가족 30여명만 조졸하게 불러 산에서 조용하게 치렀

다. 깨끗하게 옷을 지어입고, 화관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서약하고, 사이와 내가

함께 만든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식은 전부였다. 남편의 가족은 식구가 많지 않고,

시어머니는 처음부터 너희들 살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하셨다. 남편도 젊은 때부터

험난(?)한 시절을 겪으며 고생도 많아서, 무엇이든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의

지가 강했다. 나도 남의 말 잘 안 듣고 고집도 세서 결혼할 때 아버지의 반대에 부

딪히지는 않았다.

생태근본주의자의 욕심 없는 건방짐

산청에서 살 때는 냉장고, TV, 세탁기 등 가전제품 없이 살았다. 친구나 가족들

과 통화할 수 있는 휴대폰 1대면 족했다. 천기저귀를 손빨래하고, 할 수 있다면 가

스 없이, 가진 것 없이 살고 싶었다. 그때그때 맛있는 것 해먹고. 세수할 때 헹구

는 물로 옷을 빨고, 목욕물도 버리지 않고 빨래할 때 다시 사용했다. 바로 그 자리

에서 해먹는 음식 중에서 가장 먹고 싶은 것이 김치였다. 냉장고가 없으니, 김치를

보관할 곳이 없었다. 또 음식을 만들고 정리할 때 2-3시간이 소요됐다. 생태근본

주의자로 살고 싶어 냉장고 세탁기 없이 지낸 2년여. 먹을 것, 사는 곳을 우리 손

으로 짓고, 아무리 가지려고 해도 원체 욕심이 없으니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한 달 전기세가 천원을 넘은 적이 없었다. 집을 지을 때는 임신한 몸으로 벽돌을

나르고, 밤에는 촛불을 켜고 한 달 동안 지내기도 했다. 달빛 아래 촛불 켜고 책도

보고 낭만적일 것 같지만, 글씨 하나 읽을 수 없었다. 집짓고 농사짓고 석유 없이

살면서 나 혼자만 정말 바르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좌충우돌’ 없는 길을 만들면서 가는 것은 매력적이기만 한가

가전제품 없이 살면서 더운 여름철에는 음식을 보관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고,

무엇보다도 김치가 제일 그리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TV를 제외하고 작은 것 하나

씩 들이기 시작했다. 몇 년 지나다보니 그렇게 사는 게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제일 작은 미니냉장고로 들였다. 그것으로 2년을 버티다가 김치를 두고 먹을 수

있는 일반 냉장고로 바꾸었고, 빨래도 세탁기를 사용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우리는 욕심 없이 생태적으로 잘 사는데 다른 사람들은 왜 못하지? 여겼던 것이

건방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본주의자에서 ‘타락’해서 이제는, 농사짓고 아이 키

우며 가전제품도 필요에 맞게 적당히 사용하면서 살고 있다.

계획에 없던 아이가 생기고 키우면서 힘들어졌다. 출산하기 전에 내가 몸에 자

신 있는 건강한 타입인데다, 병원에서 낳고 싶지 않았다. 옆집 아주머니께서 애 낳

는 것을 봐주신다고 해서, 출산할 때 도와달라고 했다. 그런데 사전에 구체적인 얘

기를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옆에

서 봐주시기만 할 뿐이었다. 12시간 동안 진통을 하다가 결국 1시간 차를 타고 병

36 37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원에서 출산했다. 자연출산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었는데 무모했고 아쉬움이 컸

다. 육아하면서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다 경험했던 것 같다. 생각이 비슷하다고 생

각했던 남편과 나,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사람인가 매일매일 다툼과 싸움의 연속

이었고 서로를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느티(아이 이름)는 5살부터 유치원에 다녔는데, 자라면서 친구들과 비교하는

일이 생겼다. 다른 집 아이들은 전원마을에 기본적으로 여유로운 형편이었고, 우

리 집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 같다. 처음에는 학교 보내지 않고, 소박하게

살면서 홈스쿨링을 할까 생각도 했었지만 느티가 사람들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대안학교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기도 했고,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아이에게

생태적으로, 대안적인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골에 와서 지내고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은 커뮤니티, 공동체에 대한 갈

급함이다. 25살에 혼자 떠났던 유럽여행을 어떻게 다녀왔을까 싶을 만큼, 불특정

다수를 만나서 얘기하고 맞추면 사는 것이 기질 상 쉽지는 않다. 하지만 시골의 삶

은 다르다. 소소하게 친분을 쌓는 사람들 생기고, 비슷한 취미로 모여 인형극도 하

고. 귀촌 3년차 때에는 하도 유동이 없어서, 운전면허를 땄다. 한 살림 조합원들이

하는 민화, 바느질 모임도 초반에는 참여했었지만,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엔 시간

이 많이 소요되고 이동하는데 여러 가지 고려할 것이 많아 중간에 그만 두었다. 차

만 있으면 가까이 있는 솔뫼 공동체에 왔다 갔다 하면서 교류하기 좋다. 차 없이

교류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지나고 보면 즐겁고 행복한 시간, 기다려지는 마흔

내가 원하는 삶은, 소박하게 살면서 농사하는 것이다. 농사는 최고의 경영인이

다. 나는 직장도 한 군데 오래 있어 본 적 없고, 남이 시키는 일은 잘 못한다. 그런

데 농사는 그렇지 않다. 시기와 때를 따라 내가 알아서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쉰다.

비가 오면 쉬어서 기쁘고, 해가 나면 작물이 잘 크니 기쁘다. 농사짓는 일 재미있

는데 아직까지 부산물이나 퇴비를 활용하는데 있어서 익숙하지 않고 부담이 있지

만, 노력하려고 한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 시간이 만들어 준 밭을 경험하고 자연농법을 시

도하고 싶다. 자연농법 공부도 하고 교육받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찾아가 배우고

싶다. 시간이 지나면서 풀에 대해서 조금씩 알고 재미를 느낀다. 그 전까지는 조급

한 마음이 있었다. 먹는 것이든 무엇이든 직접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생활

에서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먹고사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돈이 필요하긴 하다. 산청에 아는 남자분이 시골로 내려와서 자기는 돈을

한 번도 벌어 본 적 없이 사셨다고 하시더라. 워낙 부지런하셔서 나무하고, 약초캐

시면서 사셨다. 자기 역할을 하는 모습이 좋았다. 돈에 대해서는 조급한 마음을 버

리고 길게 보고 천천히 찾아야겠다. 그동안 이동하는 일 많았지만, 한 곳에서 10

년 이상 농사 지어보고 싶다. 농사로 생활이 어렵다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돈은

다른 것으로 버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남편이 음악을 만들고, 공연을 다니면서 받는

수입도 사실 농촌 살이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이사를 앞두고 있는데, 심사숙고해서 알아보고 개척해야겠다. 하지만 좌충우돌

하는 삶에서 얻는 교훈도 분명히 있다. 지나고 나면 즐겁다. 힘든 일을 겪고 한 걸

음 나아가는 것. 고생은 고생대로 이뤄놓은 것도 없고, 농사도 아직 성과 없지만,

마음이 되면 나름대로 쌓이는 게 있지 않을까. 나이 마흔 즈음엔 어떻게 살고 있을

까. 기다려지고 설렌다.

201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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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박은선인터뷰

6

목차

� 문턱이 높은 예술작품에 대한 고민

� 강을 밟다 : 4대강 공사현장과

생태적 관점

�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면

� 내성천을 지키며 : 남자중심적 사고를

벗어나는 운동이란 무엇일까

� 작은 희망 : 강을 기억하는 친구들

독자 추천

� 세월호 사건을 보며 한국이 크게

잘못되었고, 환경파괴도 분명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왜 바뀌지 않고 이길

수 없는지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

�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긍정적인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

2009년 말, 4대강 공사현장을 처음

답사한 후, 어마어마한 살육에

충격을 받고 매주 한 번씩 내성천에

내려가 ‘내성천습지와새들의친구’에서

지율스님과 함께 활동 중.

강•생명•예술을 주제로 한 전시

공간 ‘공간모래’의 큐레이터이자

동시에 예술•건축•디자인 그룹인

리슨투더시티(listen to the city)의

디렉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송전탑 공사 현장인 밀양을 오가며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많은 것을 잃고 있는지 고민 중.

삶, 노동,

예술, 현장의

경계를 허물다

문턱이 높은 예술작품에 대한 고민

학생 때 회화를 전공했다. 페인팅 전시, 조각 작품을 만들어 전시하기도 했었는

데, 부잣집 사모님에게 소모된다는 느낌이 강했다. 작품을 사는 사람들은 결국 소

비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사람들뿐이다. 작품을 소장하는 형태가 마음에 들지 않

았고, 소비되지 않는 형식의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생태에 관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생태보다는 도시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잠

시 영국에 거주하면서, 도시건축을 하는 친구들을 만났고, 도시문제와 관련한 잡

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도시는 보수적이다. 도시와 건축은 사람이 돈을 엄청 투자

하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가시화 되지 않은 도시의 영역을 가시화

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강을 밟다 : 4대강 공사현장과 생태적 관점

우연히 2009년 10월, 4대강 현장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강이 너무 예뻤고, 파괴

되는 현장이 끔찍했다. 처음으로 강이라고 생각하면서 꽁꽁 언 강을 밟아봤다. 그

때 지금까지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대강 문제가 너무 심각한데 아무도 하고

있지 않아서 4대강 지키기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지율스님 밖에 없었

다. 운하반대교수님들이 움직이긴 했지만, 현장 방문은 적었다. 처음에는 운하반

대교수모임과 어떻게든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만화 그리고, 선전지를 만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며가며 지율스님과 연이 닿았다. 스님이 사람을 많이 가

리시는 편이라 2년 넘게 뵈면서도 같이 일을 하지 않았다. 지율스님이 겪은 일들

은 나중에 알게 되었고, 스님과 함께 조계사의 4대강 전문 갤러리 ‘프로젝트 스페

이스 모래’를 만들면서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돈도 없고, 싼 비용으로 전시를 준

비하다보니 고생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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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4대강 이전에는, 삼성반도체 백혈병 싸움을 오가기도

삼성 반도체 이야기를 들으면서, 2009년 황상기님을 만나 페인팅 작업을 하기

도 했다. 하지만 페인팅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한계가 있기에 결국 일러스

트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일러스트가 나름 귀여워서, 이것들을 판매해서 삼

성 백혈병 싸움에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삼성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집회가 있었는데, 그 집회를 참석하며 대기업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쉽지 않은 지점이 있었고, 그림으로 전달하

는 것도 한계가 많았다. 이때의 경험을 계기로 연대를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을 깨달았다. 책임감 없이 덜컥 시작했고, 특별히 도움이 되지도 못해서 아직도 미

안함이 많이 남아있다.

4대강과 예술의 사회적 역할

전시를 하면서 강을 다뤘다. 전시가 미디어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

각해 보지 않았는데, 우리의 전시가 그런 역할을 해서 매우 놀랐다. 우리가 만든

선전지와 포스터를 보고 4대강 문제를 처음 알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깜

짝 놀랐다. 그 과정에서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민중미술

은 실은 보수적이었지만, 지금의 민중미술은 오히려 복고적이고 반동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 미술이 어떻게 해야 미술적으로 오래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가치를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한다.

예술가냐 활동가냐 라는 질문을 두 영역에서 동시에 받는다. 이렇게 범주화·

계량화 하는 습성은 모더니즘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태그를 확실하게 달고 싶어

한다. 나는 태그를 거부한다. 태그는 하나의 족쇄이다.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볼 때 우리는 예술가로 보인다. 예술 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활동가라 부른다. 굳이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 않고 싶다. 그 사람들이 있는 시기에 카테고리화 된 범주

를 계속 사용하면서, 스스로 끼어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성천 지키기 활동을 오래 한 비결 :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면

누군가는 기억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기본적으로 환경

운동을 하는 사람은 정치나 조직에 욕심 부리면 안 된다. 지향하는 바가 물론 다

다를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아나키즘적인

생각과 페미니즘적 생각이 같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철저히 아나키적으로 움직여

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현장을 어떻게 해서라도 1주일에 한 번씩은 꼭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너무 힘들어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강이 힘들게 파헤쳐지고 있

는 것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큰 안타까움을 느낀다. 꾸준히

모니터링 하는 작업을 누군가는 해야 하고 필요한 일이다. 모든 시스템이 무너지

고 있다고 느끼지만, 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강을 배우고 있다.

현장 이해도 낮고, 언어프레임에서도 패배한 기존의 환경운동

영주사람들은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99%가 새누리당을 지지한다. 아무리 댐

건설을 반대해도, 박근혜는 지지한다. 이런 맥락과 상황을 이해 못하면서 박근혜

를 타도하자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이미 진행하고 있는 운동이 큰 타격을 입는다.

내성천 하류정비사업도 정확하게 어디에 어떤 조사가 들어가는지 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어쩌다 한 번씩 현장에 와서 정권타도와 연결시켜 운동하려는 사람들을

겪을 때 힘들었다. 계속 현장에서 운동을 해 왔던 사람이 비판을 하면, 일정 부분

존중하려는 노력도 필요한데 사태도 잘 파악하지 못하면서 자기주장만 앞세우는

경우가 있었다. 문득 내가 남자였으면 이렇게까지 할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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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언어프레임이나, 로고 등과 관련해 애매모호한 문제들도 겪었다. 내성천도 지율

스님이 유일하게 알리고 있는 강이다. 4대강은 언어프레임에서 이미 졌다. 순수하

고 좋은 언어를 만들지 못했는데, 스님이 좋은 언어를 만들면 운동을 하는 사람들

이 아무렇지 않게 가져다 쓰기도 했다. 밥숟가락 얹기로 보인 달까. ‘지구별의 유

일한 모래강, 내성천’도 엄청 고민하면서 만든 말이다. 출처를 밝히지 않고 그냥

가져다 쓰는 운동가들을 보면, 염치도 없고 왜 운동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내성천을 지키며 : 남성중심적 사고를 벗어나는 운동이란 무엇일까

수유너머에서 페미니즘 공부를 하긴 했는데 여전히 잘은 모른다. 강을 다니면

서 지율스님이 겪은 일들도 만약 이 스님이 남자였으면 사회가 이렇게까지 했을

까, 저렇게까지 무시하면서 못되게 했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사회적으로

젊은 여성의 지위는 썩 좋지 않다. 강에 문제가 많은 보에 사진을 찍으러 가면 젊

은 여자가 왜 여기 있냐며 아저씨들의 질문공세가 이어진다. 지율스님이 여자라

서 할 수 있었던 것도 분명히 있다. 강을 걸으면 되게 신기하게, 남자들의 다리로

는 송사리가 잘 붙지 않는다(뻥 같지만 실제로 그렇다. 나도 보고 놀랐다). 4대강

지키기 활동을 하면서 만나게 된 환경운동하는 아저씨들은 생태 감수성은 있을지

몰라도 성평등 개념은 전혀 없다.

도시재생, 자립을 키워드로 활동하는 리슨투더시티

2009년 한국 디자이너들과 도시 문제에 대한 콜라보레이션을 하며 리슨투더시

티를 시작했다. 4대강 문제를 다룰 때는 또 다른 멤버들과 작업한다. 리슨투더시

티는 도시재생, 자립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활동 하는데, 현재는 밀양의 초고압

송전탑 공사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8월에는 신촌의 자립음악생산조합, 미술가들

과 함께 신촌재생포럼의 일환으로 퍼레이드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작은 희망 : 강을 기억하는 친구들

4대강 문제와 관련해서 단체들은 사안이 생겼을 때만 보도 자료를 내고 간헐적

으로 결합하는 것에 비해, 오히려 지금까지 길게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강에 계속 오시는 분들이 있다. 물론 나도 경제적

으로는 어렵지만 매주 1번씩 내려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4년 전, 어린 시절부터 온

아이는 이제 고등학생이 되어 새박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강을 기억하는 친구들

이 있다.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강을 기억하는 것이다.

2009년 4대강 활동을 시작한 이후 마음 편하게 잠든 날이 없다. 그 때부터 마음

이 계속 불편했다. 내성천은 2012년에 큰 변화를 겪었다. 수몰지의 나무를 베어버

려서, 살았던 부엉이들, 아름다운 계곡이 사라졌다. 이 과정을 목격하면서 너무 분

노하고 화가 났다. 그래도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되었는데, 자연의 회복능력을 보면

서이다. 버드나무들이 생각보다 빨리 성장을 하고, 모래가 다시 채워지는 것을 보

면서 크게 낙담할 것은 없구나 싶었다. 담수가 되더라도 밀양 할매들처럼 할 수 있

는 데까지 하고 싶다.

2014. 4. 22

45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80-90년대를 통과하며 느낀 공허함과 의문

8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뜨거운 열기가 87년 6월 항쟁과 문민정부 출범

으로 한 숨 돌린 때, 90년대 초 소련이 망했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했

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이었고 공허함이 들었다. 온전하지 않지만 정치민주화는 작

은 달성을 이루었고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가 성장하는 성

과도 있었다. 진보와 보수 모두가 자본의 영향 아래 경제성장과 개발 담론에 놓였

다. 하지만 생산력의 증대와 발전은 무한 발전인가, 자연 파괴와 환경오염을 수반

하는 발전이 과연 좋은 세상을 가져오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환경문제는 삶의 문제이자 여성의 현실

우리교육 출판사에서 일을 하면서, 일본의 반핵운동 그룹과 교류하고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일본하면 극우민족주의, 군국주의가 먼저 연상될지 모르겠지만,

일본 민중들의 삶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 반핵운동, 천황제반대 운동 등 전개하는

일본인들과 함께 원자폭탄이 터졌던 히로시마 처음 가봤다. 아직까지도 피폭의 흔

적과 여운을 보았다. 일본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유학을 결심했다.

우리보다 근대화가 앞선 일본에서는 환경공해로 인한 문제, 미나마따병, 이타이

이타이병과 같은 환경병도 30-40년 이상 먼저 시작되었는데, 이를 일상의 힘으로

회복하고 치유하는 일은 아이를 키우고 집안의 살림을 맡아했던 엄마들, 주부들이

해왔다는 점에서 놀랐다. 근대화를 기치로 개발과 성장을 추동했던 고위 관료들은

대부분 남성들이었지만, 벌어진 일을 책임지고 살리는 역할을 해온 이들은 여성들

이었다는 것을 논문을 쓰면서 깨닫게 됐다. 환경 문제가 곧 삶의 문제이자 여성의

현실이며, 환경 문제에서도 여성들의 시각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했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꿈지모)

이윤숙인터뷰

7

목차

� 환경문제는 환경문제일 뿐이라고?

�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

� 파괴된 자리에 삶의 지속성은 누가

책임지나?

�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자기

몸과 삶의 주인으로 사는 법

독자 추천

�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달픈 청년

� 소비, 성형 등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는

문화에 넌더리 느끼는 사람

처음엔 사회학에서 시작해서

미국유학길에 올라 여성과 영성을

접했고, 일본에서 침뜸을 비롯한

동양의학을 공부하며 인간과 사회에

대해 두루두루 배웠다. 현재는

한국YWCA연합회 생명비전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에코페미니즘,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46 47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한국에 에코페미니즘을 처음으로 소개한 생태정치학자인 문순홍 선생님을 중

심으로 관심 있는 사람들이 공부했다. 문순홍 선생님이 대학에서 ‘여성과 환경’ 과

목을 가르치시면서 그 수업을 듣던 사람들이 합류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지렁이는

자웅동체로 한 몸에 여성과 남성을 모두 갖고 있다. 지렁이처럼 어느 한 쪽으로 치

우치지 않고, 여성과 남성이 함께 ‘살림’을 펼치는 세상, 죽이거나 파괴하지 않고

모두가 조화롭게 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뜻으로 ‘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꿈지모)’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꿈지모가 생긴 무렵은 한국에서 환경운동이 크게 성장하던 때다. 쓰레기, 환경

호르몬, 새만금 등 쟁점이 많았다. 그런데 기존 운동에서는 여성을 주체가 아니라

가르쳐야 하는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주부들이 음식물쓰레기를 마구 버려서 환경

이 오염된다는 식이었다. 반면에 실제로 여성의 몸이 더 큰 피해를 입음에도 불구

하고, 다이옥신 등 환경호르몬이 문제가 됐을 때 ‘정자 수가 줄어요, 여성화돼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등 남성 중심의 문구가 많았다. 지금까지 남성들의 입장으

로 드러났던 세상의 모습과 언술이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환경과 세상을 바라봐

야 한다고 생각했다. 꿈지모를 통해서 각자 관심 있던 농업, 생명공학, 조산 등 다

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작업들을 했었다.

돌이킬 수 없는 후쿠시마 사고, 삶의 지속성 책임져온 여성들

일본 의료전문대학에서 한의학 공부하던 중 2011년 3월 11일, 일본을 강타한

진도 9.0의 지진과 초대형 쓰나미에 넘어진 후쿠시마 원전의 블랙아웃은 파국적

재난을 초래했다. 원전사고는 한번 터지면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절멸이다. 우리

보다 먼저 원전을 짓고 그 폐해를 경험했던 서구의 에코페미니즘이 어떻게 반핵

운동으로 형성되었으며 망가진 삶의 터전을 여성들이 어떻게 지켜왔는지, 가까운

일본에서 발생한 후쿠시마 사고는 우리의 현실로 다가왔다. 남성들이 개발업자들

의 돈에 매수됐을 때, 갯벌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끝까지 저항한 건 여성들이

었다. 지금 밀양 송전탑에 대항해 싸우는 할머니들과 탈핵운동을 하는 100만 인의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이다. 에코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이 서구에서 들어왔지만 사

실은 한국 여성들이 예전부터 살아온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됐다.

2012년 한국으로 들어올 때, 취직하지 않고 번역하고 소소하게 글을 쓰는 아르

바이트를 하면서 매이지 않게 살고 싶었지만, 지금 YWCA에서 탈핵운동을 하면서

전국의 여성들과 함께하고 있다.

교묘한 폭력과 허구,

여성의 몸을 파편화하는 자본주의 가부장제에 저항하기 위해

돈이 없으면, 예쁘지 않으면, 학벌이 좋지 않으면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사회. 88

만원세대로 살아가는 오늘날 청년들의 삶은 고달프고 애달프다. 자본주의 가부장

제는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여성의 몸을 파편화, 상품화하며 교묘하게 폭력과 허

구를 행사하고 있다. 대접받고 싶으니까 명품을 소비하고 성형 수술을 하며, 자기

몸을 가꾸기와 자기 개발, 힐링이 자율적 선택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자기 삶의

주체되지 않고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회. 사회가 양산하는

몸에 대한 고민은 개인의 책임으로 남는다.

자연에 대한 태도와 우리의 몸을 대하는 태도가 닮아 있지 않나. 자기 삶의 주

인이 되는 여정은, 우리 사회와 나의 삶에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찾고 누리는 과정

이 될 것이다.

2014. 5. 1

49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소수자 중의 소수자로 살다

부모님 세대가 일본으로 왔을 때는 남한과 북한이 나뉘어있지 않았다. 총련계

아버지, 민단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조선적을 갖고 살았다. 초등학

교 때까지 우리(조선)학교에 다녔고, 이후에는 일반 일본 학교에 다녔고 일본 이

름으로 바꾸지 않았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설명해야하는 것이 귀찮고 힘들었다.

일본 내에 조선적을 가진, 한국이름의 카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소수자 중의 소수

자였다, 국적에 관계없이 만났던 성당의 친구들은 평생지기들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숨통이 막히는 만원 지하철의 시달림, 남성중심의 직장

문화를 벗어나 새로운 삶의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조선 사람이니까 한국의 문화

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막상 그렇지는 않

았다). 한국에서 지낸지 17년이 되었다.

오가닉을 지향하는 카페 수카라가 있기까지

한국에 와서 했던 일은 한국의 대중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방송 및 잡지 매체

코디네이터였다. 한국문화를 소개하고 알리는 일을 통해 재일교포들, 이후에 태어

날 나의 자녀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한류열풍으로 거대 자본이 휩쓸며 대중

문화와 연예계 소식이 붐을 이루고 한·일간 활발한 교류가 있었지만, 나는 한국

의 음식과 전통문화, 지역을 소개하는 일이 재미있고 잘 맞았다. 잡지 취재하고 글

을 쓰면서, ‘먹을거리, 음식‘에 대한 뚜렷해진 관심과 나의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밤늦게까지 노트북 들고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편집할 때면 번번이 끼니를 챙

기지 못해 힘이 들었다. 카페에서 일하면서 건강한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일본에서 직장을 다닐 때 퇴근 시간을 피해 휴식하기 위

해 스스로에게 투자하는 셈 치고 카페를 찾아다녔는데, 공정무역 커피의 생산자들

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카페에서 위로를 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때마침 산울림

김수향인터뷰

8

목차

� 자이니치 조선인, 소수자 중의 소수자

� 한국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면서, 나의 길을

발견하다.

� 몸과 마음이 기뻐하는 음식 카페 ‘수카라’

� 후쿠시마 사고 이후,

진화하는 오가닉 개념

� 농부와 요리사가 만나는 도시장터

‘마르쉐@’

� 잊혀져가는 지역의 맛을 찾는 먹거리 여행

독자 추천

� 관계가 담긴 오가닉 푸드에 관심 있는

사람 (특히 요리사)

� 내가 먹는 음식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알 수 있는 카페 공간을 꿈꾸는 사람

� 일본과 한국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

자이니치 조선인(조선적 재일동포)

3세로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 외국인에

대한 타인의 시선과 호기심에 대한

피곤함을 잠시 피하고, 한국을 알고

싶어서 1997년 한국에 왔다. 한국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매체 코디네이터와

한국문화잡지 편집을 통해 한국의

음식과 맛에 매료되어 한국음식문화를

전문으로 작업한다. 2006년부터 홍대

앞에서 한 끼의 건강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카페 '수카라'를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2011년 후쿠시마 사고는

지금까지 삶의 전반을 되돌아보는

큰 충격이었고, 오가닉(Organic)의

개념에 에너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현재 도시형농부장터를 기획하는

마르쉐친구들에서 활동하고 있다.

홍대 앞 카페 사장님이

고민하는

오가닉(Organic) 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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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소극장 1층 공간을 인수해 카페를 열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극장장님의 제안으

로, 당시 2층에 있었던 잡지사와 1층 카페를 둘 다 기획관리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매월 발행하는 잡지 일에 카페까지 만드느라 생활은 무너져갔고, 이후

에는 카페만 남기고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카페 수카라는, 오가닉 카페라기보

다는 오가닉을 지향하는 카페다. 모든 식재료를 유기농으로 구할 수 없거니와 이

미 지구는 오염될 대로 오염되고, 농가의 대규모 단작 시스템은 다양한 농산물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음식의 재료가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 이야기가 있는 카페,

마음 놓고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아닌) 카페, 바쁘게 돌아가는 일

상 속에서 쉬어가고 위로 받는 카페를 만들고 싶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오가닉 개념에 ‘에너지’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후쿠시마 사고 1년 전 즈음 일본의 한 백화점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다가 ‘풍요

로움’에 대해 생각한 일 있었다.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면 자동으로 불이 켜지고,

자동으로 엉덩이를 씻겨주고, 물도 내려주고, 말려주고, 나올 때 자동으로 불이 꺼

지고, 손을 씻고 말리는 것도 모두 자동이었다. 화장실에서 가서 고작 내가 한 일

은 바지를 내리고 올리는 일 뿐이었다. 일본에서 신축된 건물의 80%가 자동시스

템으로 지어졌다.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움이란, 사람을 바보로 만들면서 에너지

(자원)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이에 적응하게끔 하는구나, 공포감을 느꼈다, 또 사

고 이후에 일본정부의 태도를 보면서, 국가는 원전을 지키려고만 하지, 국민(사

람)은 버리는구나, 원전 시스템을 유지시키려고 안전하다 재가동해야한다는 거짓

말을 하고 믿을 것이 없구나, 풍요로움과 편리를 가장하면서 자본의 노예가 된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먹을거리도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믿을 수 있는 음식, 공장에서 가공된 패스트

푸드, 인스턴트가 아닌 손이 가더라도 살아있는 건강한 음식을 만들고 싶었다. 내

가 먹는 채소는 누가 키우고 어디에서 온 것인지, 내가 쓰는 에너지가 어디에서 어

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무관심이 결국은 원전 사고로 이어졌다는 생각이 떠나

지 않았다.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우리 카페도 오가닉 개념 안에 ‘에너지’가 들

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농약, 무비료, 화학농사 아닌 음식을 먹는 것이 오가

닉이라고 생각했지만, 때에 맞게 오가닉의 개념은 계속 변했다. 제철 먹을거리, 가

까운 먹을거리를 생각하게 됐다. 메뉴에 재료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시기에 나

는 재료에 맞춰 메뉴를 생각하게 되었다.

의심하지 않는 먹을거리, 잊혀져가는 미각을 찾아다니다

일본의 파머스마켓에서는 소농들이 생산한 250여종이 넘는 채소를 만날 수 있

었는데, 한국에서는 알음알음 알게 된 농가를 찾아다녔지만 소농들을 만나기 힘들

었다. 처음에는 거의 생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르쉐가 필요했고 기

획하게 되었다, 어떻게든 생산자의 얼굴을 직접 보고 이야기를 들으며 재료를 구

입할 수 있기 때문에 심적인 거리가 좁아지고 만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

는 즐거움, 누가 재배한 토마토, 누가 키운 허브 등을 사다 요리를 하면 더 마음을

써서 재료를 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한 달에 한번 생산지 방문해서 바로 잡은 싱싱한 생선과 바로 수확한 농산물로

생산자에게 직접 요리를 배우고 소개하며, 현대의 입맛에 맞게 다시 구성(창조)

한 레시피를 잡지에 싣고 있다. 발효로 유명한 한국음식은 세계적인 슬로푸드임에

도, 전국 곳곳에서 나는 식재료로 만들어지는 고유의 맛이 점점 잊혀져가는 것이

아쉽다. 아직 경험하지 않은 맛, 사라져가는 맛을 기억하기 위해, 미각을 잃지 않

기 위해 전국의 5일장을 카페의 스텝들과 다녀오기도 한다. 5일장에는 지역의 특

색에 맞는 새로운 재료들이 눈길을 끌고,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음식을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본다. 전국에서 만난 귀한 이야기와 먹을거리를 여러 사람들과 나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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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싶어, 최근에 카페에서는 정기적으로 토종씨앗으로 길러진 재료로 워크샵을 하

고 있다.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맛을 찾아다녔던 이야기, 워크샵으로 풀어낸 생생

한 기록을 찬찬이 남기고 싶다.

2014. 5. 1

신필식인터뷰

9

목차

� 오염된 고향 바다의 기억과 생태감수성

� 소년의 꿈, 에코페미니즘을 만나다

� 누구나 돌봄과 살림을 하는 세상

� 여성학은 남성 역시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한다

독자 추천

� 왜 남자들은 이렇게 다르고 바뀌지 않는지

고민하는 사람

� 이분법에 대해 다른 상상을 하고 싶은

사람

� 소수자, 타자에 대한 고민과 질문을 안고

있는 사람

� 아이를 키우는 게 힘들다고 느끼는 여성들

서울대가 여성학협동과정을 개설 한

후, 처음으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두 아이의 아빠. 고향 앞

바다의 오염을 기억하며 농과대학에

진학, 졸업 후 자연과 사회의 연관성에

대한 고민을 안고 환경대학원 진학.

우연히 홍동의 풀무학교 답사를

계기로 에코페미니즘의 세계를 만났다.

삶의 질문을 농학-환경사회학-

에코페미니즘-여성학으로 연결된

학문의 탐구로 이어가며 답을 풀어가고

있는 중.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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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오염된 고향 바다의 기억과 생태감수성

여성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

다. 고향이 마산인데, 어린 시절과 달라진 바다의 모습을 보면서 환경에 대한 감수

성을 키웠다. 어려서부터 마산 앞바다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저 바다가 오염되어

가고 있는 것에 대해 아무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한 세대 이

전에는 수영을 할 수 있었던 바다가, 60년대 중반 무렵 수출을 시작하면서 80년대

에는 결국 악취가 심해 아무도 가까이 다가가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이

는 그저 감수해야 하는 비용처럼 여겨졌다.

대학에서는 환경공학과 정화에 관한 일을 하고 싶어서 농학과에 진학했다. 하

지만 공부를 하다 보니 정화보다는 오염을 시키는 활동이 더 많아 보였고, 고민이

깊어져 방황을 하며 학교를 졸업했다. 당시에는 유기농, 토양 등에 더 관심을 느껴

서 귀농운동본부를 기웃거리며 교육을 받고 귀농에 대한 고민도 했다. 졸업 후 1

년 정도 고민을 했다. 이 때 얻은 깨달음은 ‘기술이 개발된다고 다가 아니구나’였

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환경을 자연과학적으로 바라보다가 사회과학적인 접근

법에 더 관심을 갖게 되면서 환경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전까지는 환경을 기술로

생각했다면, 대학원에 진학을 결정하던 시기에는 제도도 중요하지만, 사람-환경-

사회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소년의 꿈, 에코페미니즘을 만나다

사람-환경-사회로 연결된 고민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람에 대한 중요한 관점

으로 ‘젠더’를 만나게 되었다. 이게 ‘에코페미니즘’과 첫 만남이었다. 공부를 하면

서 홍성 지역의 풀무학교 사례를 접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이 환경적으로 친화적

이면서 젠더적 관점에서 독특한 면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여성이 더 적극적·활동

적이면서 자유롭고, 남성들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

었다. 홍성 풀무학교를 보고 겪으면서, 지역문화를 젠더적으로 접근함과 동시에

환경적으로는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석사 논문

의 주제를 ‘에코페미니즘적 관점에서 환경 농업의 영향’으로 잡았다. 친환경적인

환경을 받아들이는데 젠더적 방식이 더 좋은 조건인건지, 혹은 연결성이나 상호성

을 갖는지, 결과적으로 여성에게 변화를 가져오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논문

을 마치고도 여성학을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석사를 졸업하고 약 2년 반 쯤 후

에 여성학을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 여성학은 에코페미니즘과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깨닫고, 현재 2년 동안 여성학을 이해하고 공부를 하고 있다.

남성이 여성학을 공부한다는 것

2007년, 아버지가 되고 나서 여성학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 남자로, 아

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살아가면서, 한 개인의 정체성은 단지 생물학적으로만

설명될 수 없고 개개인의 조합과 속성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여성이 여성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여성의 모든 경험을 다 이해하고 아는 것은

아니다. 석사 공부를 할 때 지도교수님은 여성분이셨는데,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해도 있고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2010년부터 여성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여성도 여성이지만 남성에게 내가 여성학을 공부한다는 것

을 이야기할 때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나에게는 중요한 공부가 되었다. 내가 생

각한 의미와 이해의 시작이 타인에게는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게 되었고, 자연스

럽게 여성학, 여성운동, 환경운동의 위치를 느낄 수 있었다. 주로 ‘신기하다’ 혹은

‘왜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 때마다 여성학을 변호하고, 나의 입장을 설명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초기에는 내가 이야기를 더 잘 할 수 있어야겠다 싶었다.

남성이 여성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질문들을 피하지 않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 때문에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생물학적인 ‘남성/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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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성’과 ‘남성적/여성적’이라는 표현의 의미, 차이 등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하기 시

작했다.

생물학적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스스로를 페미니즘에 지지를 보내는 남자라고 여기며, 페미니즘은 여

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성들의 연대는 생물학적으로 보장

되는 것 같지만, 동시에 다른 한 성을 분리해야 한다는 딜레마와 이분법적인 구분

이 겪는다. 이것이 여성학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여성/남성’, 페미니즘적 ‘억압/부

억압’, ‘긍정/부정’ 등의 이분법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비판자이자 참여자로서

의 주체가 남성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야만 했다.

나의 결론은 ‘이분법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이다. 페미니즘의 기본은 우머니스

트와 페미니즘의 차이에서 출발한다. 생물학적 여성에 기반을 두거나 혹은 여성성

에 대한 이야기다. 결론은 여성성은 남자도 가질 수 있다. 여자가 가질 수 있는 무

언가를 여성성, 남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남성성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생물

학적인 경계는 있을 수 있지만, 페미니즘의 핵심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역할, 기대,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의 페미니즘은 호르몬에 관한 것

맨(man)/우먼(woman), 페미닌(feminine)/메스쿨린(masculine), 페미닌

(feminine)/맨(man)이 비교 대상이 아니다. 두 가지 호르몬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어느 것이 더 발현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남자도 페미닌한 부분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할 수 있는 것, 여성이 판드시 페미닌 하기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페미니

즘의 가치라 생각한다. 타인에게 완벽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렇게 생각하면서

스스로 편해진 부분도 있다.

남자는 남성적이어야 하고, 여자는 여성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가부장적인 관점

이다. 그 비율에 대해서는 다를 수 있지만, 그 관점 자체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 둘 다를 인정하는 것이 나와 타인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사회적으로 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돌봄과 살림을 하는 세상

한국적인 에코페미니즘이 돌봄, 살림 등의 키워드로 연결될 수 있다고 볼 때, 그

경험을 자기 이야기를 통해 돌아볼 수 있고, 에코페미니즘이 응원과 위로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적으로 한국의 어머니들이 개발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머니의 삶이 어땠는지를 다시 떠올려 볼 수 있는 연구를 하

고 싶다.

현재 여성의 위치를 가족과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두고, 제도 안에서는 어떻게

읽어내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박사논문 주제이다. 한국에서 ‘어머니’에 대한 규

정은 집안에만 위치해있었으며, 일과 살림을 같이 하는 어머니에 대해서 한국사회

는 제도로서 보장하지 않고 있다. 집에 있는 어머니들에게만 좋은 정책을 만들자

가 아니라 일을 하는 어머니를 지역에서, 사회에서 같이 존중하려는 노력이 제도

적으로 필요하다. 이론적으로 출발해 사회를 보다가 연구로 이어졌다. 개인이 구

조 안에서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굉장히 순진한 생각이다. 구조와 제도 안에 경

계가 얼마나 강하게 있었는지에 대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을 인식하고 풀려

는 노력이 중요하다. 제도가 남성성과 여성성을 각자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전제

에 수정이 필요하다. 나는 그 전제에서 빠져나와 개인적으로 유복해졌다고 느끼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나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조건이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나오

라고만 이야기기는 어렵다. 조건을 바꾸기 이전에 인식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

드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58 59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에코페미니즘과 감수성의 회복

대학 중반 ‘마을 숲’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마을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숲이 대대로 있었는데, 근대화 되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마을의 숲들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마을 숲’은 다시 마을의 의미를 문화, 전통, 공동체성 등과 관

련해 회복하는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사람들에게 숲은 미움이 아니

라 잊힌 대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숲이 훼손되어도 분노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

들의 인식에서 숲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결국, 환경은 사람들 시각의 범위 안에 속

하느냐, 속하지 않는다면 어느 위치에 머물고 있느냐에 따라 관점과 인식이 달라

질 수 있다.

흔히들 에코페미니즘을 감수성이라 이야기 하는데, 그렇다면 그 감수성이 어떻

게 지켜지고 길러질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필요하다. 연약하지 않

은, 사회적으로 열린 감수성이 어떻게 하면 길러질 수 있을까. 결국 자기 경험과

해석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사람에 대한 감수성이 먼저 회복되어야 자연에 대

한 감수성도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아끼는 마음을 갖고, 무언가를

길러내고, 아이 때부터 돌본 감수성을 계속 지킨 사람이 자연을 사랑할 수 있다.

나-사람-자연 사이에 관계는 있지만 경계는 없는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고민을 공부로 푼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노가 내 안에 있다. 유년시절 바다를 보며 커왔던 기억, 자

연에 대한 경험이다. 나에게는 소중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훼손

하고 막 대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다. ‘안돼요’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말만

으로는 힘들고, 아무 말도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해 스스로 분노가 생긴다. 처음에는

아파하다가 지식욕이 생겼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안 그

럴 수 있는지, 당신에게도 좋은 일인지 전달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 하고 싶

다. 생태주의도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도 같은 맥락이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마주한 편견

먼저, 성적 정체성이 다른지 훑어보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

서는 젠더/여성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고민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든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고민이 더 필요할 것이다. 떳떳하

게 나의 정체성에 대한 안정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또 다른 경험은 우리 사회에

서 여성학/소수자 운동을 하는 사람에 대한 인식을 마주할 때이다. 기득권 그룹은

이런 사람들을 적으로 여긴다. 소수자 카테고리에는 여성, 장애인, 노인 등이 분류

된다. 사회에서 여성인 반인데 소수자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소수의 사람들

이 대부분인 다수를 마이너리티로 쪼개서 스스로를 주류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런 규정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그리고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지가 고민이

다.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만나게 되는 여성들과의 관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좋은 기대로 봐주시는 부분이 많다. 여성학은 여성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나에게

도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이런 편견을 마주할 일이 적지 않을까.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여성과 남성들 사이에서 둘의 감각을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가 달라 오해가 많은 것 같다. 함께 꾸준히 이야기 하고, 적절한 시기에 서로

변화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페미니즘과 에코페미니즘

흔히 명절이 되면 남성과 여성이 같냐/다르냐 논쟁이 펼쳐진다. 에코페미니즘

이 가진 딜레마도 이와 비슷할 것 같다. 에코페미니즘에서 지향하는 돌봄의 가치

에는 여성이 담겨 있다. 여성을 돌봄의 주체로 상정하는 것이 좋지만 동시에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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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는 것을 여성학은 인지하고 있다. 에코페미니즘이 이를 완전히 가져갈 것인

가, 완전히 포기할 것인가의 딜레마에 놓여 있다. 여성성을 인정하는 것이 남성성

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둘 다를 가질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지 않는 에

코페미니즘은 여성학과 화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에코

페미니즘에 대해 오해하고 있고, 이런 딜레마적인 영역이 여성학에서 에코페미니

즘을 바라보는 지점이다.

2014. 4. 17

김란이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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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여성과 비혼의 정체성이 만나다

� 비혼(非婚)여성들의 비행(飛行), 그 시작

� 비혼(非婚)여성들의 비행(飛行), 그 진화

� 1인 가족 네트워크와 조금은 다른 삶

� 공동체의 두 가지 기둥, 공부와 돌봄

� 문화생활공간 ‘비비’

� 비비 2기와 3기의 시도

� 이제는, 여성노인공동체를 향해

독자 추천

� 비혼여성공동체를 만들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사람

� 여성들끼리 산다는 것에 대해 반신반의

하는 사람

� 혼자 외롭게 살기는 싫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

� 여성들만의 공동체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

서른이 넘어 결혼하지 않은

삶을 선택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주위의 여성들을 모아

비혼여성공동체의 초기 소모임을 만든

장본인. 당시에는 전주여성의전화

사무국장이었고, 현재는 1인 가족

네트워크로 구성된 전주비혼여성공동체

비비에서 공부하고, 고민하며, 행복한

일상을 꾸리는 중.

비혼여성공동체,

서로의 빽이

되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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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여성과 비혼의 정체성이 만나다

실질적으로 비혼과 여성 모두 크게 신경 쓰고 있었던 키워드는 아니었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결혼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결혼이 나의 미래상

은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와 학생 운동을 오래하게 되었고, 사회운동을 접하게 되

었는데 그 안에서 딱히 나의 비전을 찾지 못했다. 뭉뚱그려서 시민사회운동이라는

종합적인 공간에 머물다가, 전교조 간사활동을 2년 정도 했다. 당시 전교조가 합

법화 되고, 노조세력이 되면서 직장에 잘리게 되었다. 그 때가 30살을 바라보는 나

이었다. 그 즈음 교육운동이 나의 비전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았는데, 그렇다

고 해서 다른 것을 특별히 생각해본 적도 없어서 고민을 하던 차에 여성운동을 하

던 친구의 소개로 전주 여성의전화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활동을 하면서 처음으로

여성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이것이 내 삶에 큰 영향

을 미쳤다.

비혼(非婚)여성들의 비행(飛行), 그 시작

여성의전화에서 활동을 하면서 서른이 넘은 나이에 결혼하지 않은 삶을 선택했

을 때 필요한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여성의전화에서 조차 끊임없이 왜 결혼하지

않는가 질문을 받기도 했다. 당시 독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결혼 계획은 없었다.

그 즈음 내 주위를 둘러보니, 30대에 진입했거나, 진입 하려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결혼 계획이 없는 사람들이 보였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을 하는 친구들의 모

임을 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의전화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사람들

을 조직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고, 여성의전화 내 소모임의 형태 시작되었다.

30대가 되어 특별한 재력도 없고, 안정적인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는 불안정을

느낀다. 불투명 한 미래를 가진 여성으로서 고민하는 부분이 있었고, 이를 돌파

할 수 있는 무기를 개발 할 수 없을까 생각을 하면서 소모임을 시작했다. 여러 가

지 모임을 꾸려보니 모임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그 때

는 서로의 상태를 나누고 지지할 수 있는 공부모임을 제안했다. 당시 제안했던 사

람들의 조건은 1)30대 이거나, 30대에 가깝거나, 30대를 넘었거나 2)가까운 시일

내에 결혼 계획이 없고 3)직장이 있고(백수는 또 나눌 수 고민 지점이 다를 거라

생각했다) 4)어떻게 살 것인가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

다. 2002년 사람들께 제안하며 밑작업을 했고, 2003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처음

에는 1달에 꼭 1번씩 만나서 여성주의와 관련한 책읽기를 했다. 당시 비혼 여성을

키워드로 나와 있는 책들이 별로 없었고, 주로 또하나의문화에서 출간한 책들을

읽었다. ‘단독비행’이 처음 읽은 책인데, 현재 비비(비혼여성들의비행) 이름을 짓

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초창기에는 서로 모르는 사이라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친구가 되고자 했

다. 여성단체 활동가, 공무원, 어린이 영어강사, 일반 회사원 등 굉장히 다른 곳에

서 일하고 있었는데, 생애주기 안에서 느끼는 고민은 서로 비슷했다. 30대의 여성

으로서 각각의 조직에서 위치도 비슷해서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처음

에는 모여서 전문지식의 습득이나 학습 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고민에 초점

을 맞췄다.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이야기를 많이 하다 보니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친구이면서, 가족이라는 느낌과도 약간 다른 가족 같은 동지랄까.

비혼(非婚)여성들의 비행(飛行), 그 진화

2004년 여성의전화를 나오기 전까지 관리 아닌 관리를 내가 하고 있었고, 2005

년까지는 그냥 여성의전화 내 소모임으로 이름을 두고 진행했다. 그러다가 2006

년 처음으로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여성의전화 내 소모임으로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동의하에 독립하게 되었다. 형식이 우리에게 중요하지는 않

았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다보니 형식의 틀을 만들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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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고, 2006년 우리를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지며 정관을 만들게 되었다.

비혼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기본으로, 서로를 지지하고 우리의 경험

을 나눠주는 역할을 하자는 생각을 하면서,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할까 고민을 시

작했다. 그래서 공동체와 관련한 책도 읽으면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이

미 우리가 공동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지나친 규칙, 규율, 처벌 등

이 사람을 떠나게 만들기도 하고, 반드시 공동체라는 이름의 깃발을 꽂고 공동체

를 시작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지향을 우리에게 어울릴만한 삶의 울타리로 만드

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1인 가족 네트워크와 조금은 다른 삶

비비의 구성원은 2006년부터 2008년 독립하기 시작했다. 비비는 비혼여성공동

체이지만, 정체성은 1인 가족 네트워크이다. 현재 모두가 살고 있는 임대주택은

초기에는 1친구가 먼저 살고 있었는데, 임대료도 저렴하고 조건도 좋아 (전주에

거주하는 세대주면 가능, 50년 기한으로 반영구임대, 2년에 한 번씩 계약, 계약 할

때마다 50만원 인상, 현재 보증금 2200만원에 월세 8만원) 자리가 날 때마다 서로

정보를 공유하다보니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현재는 총 7명이 같은 임대주택

에 거주하고 있다. 각자 자신의 집을 가지고, 같은 동네에 살면서 긴밀하게 연결되

다보니 혼자 살아도 혼자 사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을 받는다.

각자 직장을 다니면서 1인 가족 네트워크가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나누면서, 직

장을 통해 번 돈으로 각자의 삶을 꾸리는 방식이 아닌, 원하는 것을 하며 조금은

다르게 살 수는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비의 경험을 전달하면서, 우리의 자

원을 잘 배분한다면 충분히 즐겁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정보를 모

으고 배출 할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이 필요해졌고, 39살에 직장을 그만두고 40대

의 나를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1년 동안 백수가 되어 이것저것을 고민하다가 비혼

워크샵을 시작했다. 2009년에는 비비의 3명이 백수가 되어, 함께 공간을 구하고

공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했다. 한 달의 한 번 하는 정기모임에서의 우리의

회비는 2003년 시작부터 10만원이었다. 그 때는 명절에 함께 해외여행 갈 계획으

로 조금 큰 금액을 모았는데, 이제는 우리들의 생활비, 생계비가 되었다. 이 돈으

로 2006년부터 월드비젼을 통해 3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기도 하고. 비혼으로 사

는 것이 불안하지 않은 지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불안하지 않으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세상을 몰라서 하는 일이야’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지만, 결국

은 시도해보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

는 버리고, 내려놓아야 하는 지점도 있다. 욕망을 자제하면서 사는 것이 쉽지는 않

다. 하지만 400만원 번다고 해서 40만원 버는 것보다 10배로 행복해 지지 않는다

는 것은 분명했다. 선택은 어렵지만,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공동체의 두 가지 기둥, 공부와 돌봄

먼저 삶을 영위하는 부분은 크게 3가지 무기가 있다. 책읽기 공부, 여행, 그리고

밥이다. 책 읽고 이야기 하는 것을 처음에는 힘들어 했는데, 이제 자연스럽게 공부

하고 있다. 주제에 맞춰서 고민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관련된 영화를 보거나, 사람

을 초청해 강연을 듣기도 하면서 단순히 수다를 떨거나 친목회처럼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여행은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고, 기억을 공유하는데 큰 역

할을 했다. 어느 순간 여행을 가면서 각자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배분되었는데, 여

행이 주는 환기를 나눌 수 있다는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좋다. 우리 모두

는 함께 먹고, 서로의 식사를 챙겨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30대를 살아날 수 있는 가장 큰 자원은 30대 비혼 여성으로서 서로의 백이 되

어준다는 것이다. 30대 이상의 여성들에게는 자원이 별로 없다. 결혼을 하면 남편,

자식이 생기지만 특별히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직장에서 여성들은 연수만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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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나지, 특별한 기능이 늘어나지는 않는다. 남성들은 형님아우 해가며 사회에서 서

로 백을 찾지만, 여성은 리더쉽을 배울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런

것들을 비비 안에서 배우고, 서로의 자원이 되어준다. 직장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

주기도 하고, 공부하고 싶은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생활공간 ‘비비’

우리의 경험을 나누는 거점으로서 공간이 필요해 공간을 마련했다. 우리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

각해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게 중요해졌다. 각자 박봉의 월급으로

어렵긴 했지만 현재의 공간을 마련했다. 운영은 비비가 지원하지만, 비비의 회비

와는 최대한 분리해 공간의 회원 회비로 운영비를 충당하고 있다. 현재 3명이 직

장을 그만두고 비비의 공간을 운영하며 생활하고 있다. 3명의 월급은 비비회비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정리해서 (한 달에 40만원, 이 금액으로 충분하다고 하다) 운

영되고 있다. 이 공간을 마련하면서 전혀 빚을 지지 않았다. 우리 모두 이 점은 매

우 뿌듯하다(웃음).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이 공간에서 영화 상영회도 꾸준히 하

고 있고, 소설읽기, 요가모임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공익단체는 아니다. 단체

등록도 하지 않았다. 우리 마음에 공공성에 대한 의식은 있지만, 공익이라는 목적

을 가진 단체는 아니다. 프로젝트나 지원을 받는 사업은 지양하는 것이 우리의 원

칙이다.

비비2기와 3기의 시도

예전에는 비혼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기도 했다. 그 때마다 설명은 상대방의 태

도에 따라 조금씩 달랐던 것 같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더

설명을 해주기도 했지만, 비혼에 대해 이미 자기 선입견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는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지금은 많이 넉넉하고 자연스러워진 것 같다. 오해

하게 두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흥분하지는 않는다(웃음). 설명한다고 되지 않고,

삶으로서 보여줘야 겠다는 생각이 든 달까.

‘N개의 비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혼을 바라보는 관점도 가지작색이다.

솔직히 비혼이 썩 좋은 지위는 아니다. 골드미스를 떠올리지, 가난한 비혼을 좋아

하는 사람은 없다. 결국 약자의 조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크게 비비를 보는 관점

은 2개로 나뉜다. 너희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보기는 좋지만, 정작 본인은 들어 와

하기 어려워하는 축과, 이런 모임에 적극적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축이다.

공간 비비를 열어두긴 했지만, 생각보다 활발하지 않아 비비와 같은 모임이 여

러 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비비2기를 모집하기도 했다. 하

지만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유지되지는 못했다. 왜 모임이 유지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단 모임을 적극적으로 이끄는 주체가 없거나, 보살핌만을 필요로

했던 사람이 훨씬 많았던 것 같다. 모임이 공동체성을 띄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데, 사람들은 공동체를 선물 받고 싶어 한다. 우리 모임은 서로를 보살피는 사람들

이 정말 많다. 또 특정 모델이 없었고 우리가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상대

적 박탈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이제는, 여성노인공동체를 향해

내년이 비비 공간이 마련된 지 5주년이 된다. 공간을 넓힐 계획을 갖고 있다. 현

재의 공간은 2팀이 동시에 세미나나 활동을 진행하기도 어렵고, 수익을 더 내기도

어렵다. 공간을 매개로 각자의 재능을 통해 주변 사람들과 이웃에 환원하고, 그 자

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꾼다. 현재의 직장이 자신의 비

전이 아니라면, 비비 안에서 해소되었으면 좋겠다. 나중에는 비혼이 아니라 여성

노인이 더 강한 정체성이 올 것이다. 그 때를 위해 여성노인 공동체를 준비하는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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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대 간의 연계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까에 대한 고

민도 든다.

2014. 4. 25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대출자의 독후감

1. 김란이 <비혼여성공동체, 서로의 빽이 되어주다>를 읽고

<다른 삶을 모색하게 해준 사람 도서관> —독자: 잇지

독서는 또 다른 세계로의 접촉이다. 우리가 책을 펼쳐들면, 책은 일상의 반경 너

머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문자로 실어나르며 또 다른 세계의 접촉 창구가 된다.

우리는 문장이 이끄는 경로를 따라 세계의 질감을 느끼고 이에 반응한다. 때론 웃

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또 때론 냉소하거나 심각해지며 짓는 우리의 표정은 접촉

의 생생한 결과물일 것이다. 문장을 써내려간 책의 저자는 이런 우리의 표정을 짐

작하고 있을까.

사람책의 독자는 바로 자신 앞에 앉아있는 책의 저자이자 책 자체인 사람에게

자신의 표정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다. 또 자신의 표정을 본 저자의 표정까지 훑

으며 교감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문장 대신 표정, 제스처, 향기 등 다양한 감각

을 통해 책과의 풍성한 접촉이 가능하다. 지난 5월24일 초여름 볕이 부드럽게 내

리쬐는 합정동 카페 벼레별씨에서 사람책을 대출해주는 도서관이 열렸다. 나도 그

곳에서 사람책을 대출했는데, 내가 읽었던 책의 말, 표정, 제스처, 향기가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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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생생하기만 하다. 그 풍성한 감각을 오래 기록해두기 위해, 또 함께 하지 못한 사

람들을 위해 이 독후감을 쓴다.

난생 처음으로 읽은 사람책은 ‘김란이’ 사람책이었다. 김란이 사람책의 제목은

‘비혼여성공동체, 서로의 빽이 되어주다’. 여성환경연대에서 보내준 총 10권의 사

람책 목록을 살피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이 책을 택했다. 평소 비혼으로 사는 것

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나의 선례가 될지도 모르는 실제 비혼공동체가 어떻게

꾸려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또 김란이 사람책이 속해 있는 전주 비혼공동체

‘비비’ 언니들의 명성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마주

한 김란이 사람책. 나와 같은 책을 대출한 2명의 독자 그리고 김란이 사람책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접촉을 시작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동글동글 쌍꺼풀 짙은 눈이 매력적인 김란이 사람책은 목소

리에서도 힘이 느껴지는 사람책이었다. 비혼 언저리를 맴도는(?) 사람들의 느슨한

모임에서 공동체가 되기까지 비혼공동체 비비의 성장담을 들으며 김란이 사람책

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모임을 꾸리고 사람들을 모으는 일부터 모임이

공동체로 나아가는 단계 단계마다 녹아있는 그녀의 고민과 노력도 엿볼 수 있었

다. 이야기를 들으며 독자들의 질문이 쏟아지기도 했는데 이에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녀의 대답은 생생하고 솔직했다. 비비를 모델로 생겨난 다른 비혼공동체들이 오

래가지 못함을 일러주며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각을 조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는 말에서는 경험이 지닌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비비가 보낸 시간을 훑으며 혼자 막연하게 그리던 공동체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비비가 구성원들에게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기 인상적이었

다. 각 구성원이 동일한 분담금을 내 모인 돈을 함께 운영하는 경제적 공동체, 거

의 매일 한 끼는 함께 먹는 생활공동체, 서로의 어려움과 걱정거리를 함께 하는 정

서적 공동체이기도 한 것이다. 7명의 구성원이 한 동네긴 하지만 각자의 집을 갖

고 따로 사는데, 2009년부터는 함께 하는 공간을 마련해 비비에 속하지 않은 사람

들과도 함께 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쯤 듣고 있으니 비비의 무

궁무진한 진화는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지 기대감이 몰려왔다.

40분이라는 짧은 대출시간 때문에 무척 아쉽게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쉬

는 시간을 반납하면서까지 김란이 사람책에 쏟아진 독자들의 질문, 고민들은 다

음을 기약하며 마무리됐다. 아쉬워하는 독자들을 위해 김란이 사람책은 독자들에

게 공간 비비로 놀러오라고 말하며 1박은 책임지겠다고까지 했다. 비록 비비가 넉

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이렇게 넉넉한 마음을 지닐 수 있는 것은 구성원들에게 든

든한 빽이 되어준 덕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마도 비비의 넉넉한 빽은 내게도 유

효할 듯하다. 언제든 가서 비혼으로서의 고민을 물어볼 언니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벌써부터 마음이 든든해지기 때문이다.

여성환경연대에서 이번에 주관한 ‘사람 도서관’의 부제가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이라는 걸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비비로 비혼의 삶에 한발짝 가까

워진 나는 애초 취지대로 책을 잘 읽은 독자가 된 셈이다. 이번 독서는 어떤 독서

보다 내게 비혼공동체라는 삶에 대한 상상력을 확장해주는 계기가 됐다. 아마도

그 접촉이 문장이 아닌 눈마주침과 대화와 표정으로 이뤄져 더욱 생생하게 느껴

졌다. 이렇게 사람책이 전해준 다른 삶으로의 상상력은 알게 모르게 내 삶에 새로

운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책장을 덮고 카페를 나오며 나의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두근두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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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2. 주은진 <청순한 그녀의 무모한 시골 살이 8년차>를 읽고

<그의 목소리를 타고 전해져오는 시골의 향기를 맡았다>

—독자: 김진회

그가 독자들에게 한 첫 요청은 제목에서 ‘청순한’이라는 낱말을 지워달라는 것

이었다. 어찌 되었건 그는 넘치는 생기로 빛을 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정글에 가

서 살다온 건가 싶을 고생담을 주섬주섬 꺼내며, 아주 밝게 수다를 떨었다. 아니,

나도 세탁기 없이 잠깐 살아봤는데 진짜 빨래가 얼마나 중노동인지 한 달도 못 되

어 지쳤다. 그게, 나는 그냥 수도를 틀면 물이 콸콸 나오고 심지어 온수까지 나오

는 집에서 그걸 했다다. 이분은? 가마솥에 불을 때서 물을 데우고, 그 물로 세수하

고 씻고 난 뒤 빨래까지 했다는, 좀처럼 믿기 어려운 얘기.

아이를 뱃속에서 일고여덟 달을 키워놓은 상태로 집을 지었다는 얘기에는 허허

허,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처음 시골에 내려가셨을 때가 딱, 지금 내 나이 정도

라고 하시는데, 이거야 원. 나를 포함해 내 둘레의 또래들을 떠올려보면, 스타워즈

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물론 그의 이야기가 ‘시골 갔다가 고생만 한 얘기’는 아니었다. 그 고생을 하고

도 8년을, 그리고 여전히 살고 있다는 거니까 더 의미심장한 것 아니겠는가? 우선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살면서 한 번도 뭔가 해보고 싶다거나 그랬던 적

이 없었어요. 농사짓고 시골에서 사는 것에 대한 책들을 읽었을 때 처음으로 가슴

도 뛰고, 밤잠을 설쳐가면서 상상도 해봤어요.” 아! 이 정도면 그렇게 갑작스럽게

시골로 내려갈 수 있었던 것도 이해가 된다.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지금, 바로, ‘무작정’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해내는 일들. 그런 이

야기들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벅차다.

처음 상상했던 것들은 얼마간 그에게 감동을 주었다. 마당에 자라는 풀들이 순

전히 그 초록빛이 너무 예뻐서 깎지 않고 내버려둘 정도로. 시간이 흘러 구더기가

끓는다는 표현의 탄생을 이해하고, 자연이 무섭다는 걸 실감하고, 아무것도 모르

고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딱 그만큼의 온갖 고생도 했다. 이젠 김치냉장고와 세탁

기 정도는 쓰고, 조금은 서울과 가까운 곳에 살기도 하고, 함께 사는 이의 다른 정

체성도 인정하며, 아이를 어느 학교에 보낼까 고민한다.

아아- 이 독후감의 독자들도 느낄지 모르겠지만, 사람책을 빌린 나라는 독자는

여기까지 읽고 책을 반납해야만 했다는 것이 참 아쉬웠다. 40분 대출에 연장은 20

분이었는데, 몇몇 구절만 보고는 책을 덮는 게 어찌나 안타깝던지. 밥도 조금 더

먹고 싶을 때 그만 먹으라고 하긴 하지만, 그래도 뒷부분을 조금만 더 엿볼 수 있

다면! 간절해지던 순간이었다.

크게 아쉬웠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시간이 좋았다는 뜻이리라. 이야기 한마디 한

마디에 이렇게 ‘쫑긋’ 귀를 세우고 들었던 것이 얼마만인가 싶을 정도다. 뻔한 얘

기지만, 고등학교 때 이렇게 수업을 들었으면 어딘가에 갔겠지. 중요한 건, 내가

그 일에 가슴이 뛰지 않았다는 것. 그게 나라는 사람이 지금 서있는 곳과 앞으로

나아갈 곳을 말해주는 가장 큰 단서이자, 실은 하나뿐인 삶의 이유일지도 모르겠

다. 그가 거기에서 그의 삶을 찾았듯, 나 역시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걸 찾아 ‘무작

정’ 뛰어들어, 기꺼이 고생스러울 수 있는 삶을 찾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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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3. 김란이 <비혼여성공동체, 서로의 빽이 되어주다>를 읽고

<결국, 쉬운 길은 없다> —독자: 김진회

두 번째로 대출했던 사람책은 비혼여성공동체 김란이였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든 생각은, 독후감의 제목처럼 결국 쉬운 길은 없다는 거다. 아, 너무 비관

적이라고? 글쎄, 꼭 그렇지는 않다. 차근차근 짚어보자.

지금까지 나름 성공사례라고 하는 사례들을 여럿 보면서 느낀 건데, 처음부터

그리 될 줄 알고 시작했던 곳은 내가 아는 한에서는 한 군데도 없었다. 듣다보면

다 ‘저기서 저런 우연이?’, ‘어쩜 저렇게 잘 맞아떨어졌을까’ 하는 곳들이 있다. 써

놓고 보니 마치 천지신명의 조화라든가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딱 그거

다. 혹자는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바로 그것.

그의 이야기에도 나온다. 이런 거 하고 싶다는 사람들끼리 묶어서 그룹을 만들

어준 적도 있었다고. 다 실패했단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이런 상

태’를 선물 받고 싶었던 것 같다고. 누군가는 이렇게 가고 싶다는 깃발을 들고 있

어야 사람들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 것 같다고. 오랜 시

간과 노력도 필요하고, 그동안 상처받은 적도 많다고. 우리도 처음에는 그냥 독서

모임으로 시작했고, 모두가 꼭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고.

몇 번을 곱씹어도 정말 맞는 얘기다. 박태환과 비슷한 키와 몸무게, 그와 똑같은

코치 밑에서 똑같은 훈련, 그와 똑같은 식사를 한다고 해서 그와 같은 수영선수가

되는 건 아니다. 하물며 어떤 단체나 모임의 경우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하는 만

큼, 그 어떤 예측도 불가하다. 수능문제 풀듯이 어떤 공식에 a, b, c를 대입한다고

늘 같은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공동체부터 생각하면 어렵다고. 결국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시작하는 것

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아마 각자의 지향을 가지고 방향을 찾아가며, 각

자의 마음을 다해 함께 그 마음과 서로의 일상을 나누며, 함께해보는 것뿐이지 않

을까. 사람이 만나면 뭔가 생긴다. 일단 만나는 것. 그게 참 소중한 거 같다는 생각

을 많이 하는 요즈음이다.

세 걸음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오늘 한 걸음 걷기를 망설이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언제부터 인간이 모든 미래를 예측하고,

모든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며 살았던가.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막 살자는 것이 아니라, 어찌 되었건 내일 일은 알 수 없고, 우리는 오늘을 살 수

있을 뿐 아닌가. 결국 앞의 사람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 가슴 뛰는 일을, 좋아

하는 사람과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하고, 해나가는 수밖에는 별 방법이 없다. 어떻

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쉬운 길은 없다는 거다.

무슨 펀드를 해서, 어떤 보험에 들어서 미래를 설계하고 노후를 완벽하게 대비

할 수 있나? 그건 환상이라고 본다. 그는 0원으로 사는 데 익숙해졌다고 했다. 아

마 첫 사람책의 그도 처음부터 가마솥에 물 데워서 씻는 게 익숙하진 않았을 거다.

조금만 익숙해지면 없이 살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은가보다. 앞서 성공, 실패

라는 낱말들이 나왔는데, 깊이 생각하면 그런 건 없는 거 같다. 당장은 실패 같은

일도 거기에서 뭔가 배우고 느꼈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며, 성공이라고 하는 것

이 도대체 뭔지는 모두에게 다 다르니까. 우리는 ‘성공’ 혹은 ‘실패’가 아닌 여전히

오늘 속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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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4. 박은선 <삶, 노동, 예술, 현장의 경계를 허물다>를 읽고

<사람이 역시 희망인 것인가> —독자: 이은

4년 정도 활동했던 여성단체 활동가직을 내려놓은 후 한동안 정체성의 혼란에

빠졌었던 것 같다.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작은 영화 상영회도 기획하고, 나름 ‘동

네 활동가’로도 여러 모색을 해봤지만 결국은 동력이 고갈됐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지리하고 희망이 없게 느껴졌으며 그 전에 내 몸과 마

음이 닳아 없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까지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을 만나 글로 담아내는 일, 내가 원하는 이야

기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꿈은 전혀 빛바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

었다.

여전히 단체의 활동에도 눈과 귀를 열어놓고 지내던 와중, 사람책 도서관을 알

리는 메일을 받았다. 대규모 강연이나 소규모 인터뷰에만 익숙한 내게 무엇보다

신선한 프로그램이었고,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곳에서 열린다는 점도 좋았다. (현

재 망원동에 거주 중)

어색어색 하기만 했던 프로그램과 각자의 소개 시간이 끝나고, 본격적인 사람

책 읽기 시간. 첫 이야기 손님은 박은선님이었다. 나 또한 여러 일을 오가며 지치

기도 하고 무관심에 안타까울 때가 많았기에 4대강을 지키려 애쓴 그간의 세월과

그와중에 만들어낸 많은 작업들, 잡지와 전시, 포스터 등을 보며 그 에너지가 부럽

기도 했다. 순수미술을 전공한 작가이자 미술사를 강의하는 강사로서 이 많은 일

들을 해왔다는 사실이 그간의 노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의 생명줄인 강을 지

키는 일이 이제는 주류 환경 단체조차 함께 하지 않는 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마음 아팠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사실에 아파하고 작은 행동이나마 지지할 수 있

다는 것도 위안이 되었다. 사람이 역시 희망인 것인가.

5. 김수향 <홍대 앞 카페 사장님이 고민하는 오가닉푸드>를 읽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 —독자: 이은

김수향님의 이야기는 참으로 다양한 키워드를 품고 있었지만 역시 우리는 자연

의 일부라는 사실, 삶과 죽음 앞에 얼마나 겸허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주었

다. 재일교포 3세로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 얘길 들으니,

역시 사람은 자신의 핸디캡, 남과 다르다는 사실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40분의 시간이 짧게 느껴질 만큼, 재밌는 화두와 이야깃거리들이

쏟아졌는데 그래서 다음에 다시 만나 뵙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 그 현장에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 뛴 적이 참 간만이

었던 것 같다. 그래서 참여하길 백 번 잘했다고 되뇌며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주신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 독후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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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6. 김란이 <비혼여성공동체, 서로의 빽이 되어주다>를 읽고

<책보다 ‘사람’이다> —독자: 곽문주

‘호주에서 유학했던 여학생들은 성적으로 문란할 것이다.’

최근 희망제작소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위 내용이 꽤 비중 있게 차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결혼정보회사 회원 관리에

서 여자 회원의 경우 호주 유학 이력이 있으면 감점 처리된다고 하니, 이 터무니없

는 편견이 현실에서 폭력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겠

다. 사람책 읽기는 그야말로 이런 ‘편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책이 되어 ‘사람

책’을 대여한 ‘독자’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을 갖는다. 그러나 이번 여

성환경연대에서 주관한 사람책 읽기는 우리의 편견을 깨뜨리는 사람책 읽기라는

콘셉트보다 우리에게 대안적 삶을 제시하는 사람책 읽기에 더 가까운 것 같더라.

1인세대의 고민이 담긴 사람책, 비혼 공동체

이번 사람책 읽기에서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은 ‘전주 비혼 여성 공동체, 비비’ 이

야기를 들려줄 김란이 씨였다. 마흔 즈음의 나는 현재 비혼이다. 뭐, 독신주의, 이

런 이즘은 내 삶에 없다. 어찌 하다 보니 마흔까지 솔로로 지내고 있다. 물론 모태

솔로는 아니었다. 나도 뭐,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알았겠나. 5년 전 가을, 나는 내

인생에서 소중한 한 사람을 떠나보냈다. 가장 좋은 벗이며, 라이벌이며, 친구 같았

던 연인. 우리는 결혼 대신 동거를 택해 몇 년 함께 살기도 했으니, 사별 비슷한 이

별을 경험한 셈이다. 그 사람이 없는 인생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었다. 그래도 지구

란 별에서 그럭저럭 잘 맞는 사람이었기에 쭉 그의 인생에 얹혀가야지 싶은 마음

이 없지 않았던 거다. 그가 떠난 이후 내 삶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최근에야 내 과

거의 이력이 무엇이든, 현재 나는 1인세대이며 앞으로도 결혼제도에 편입할 의지

는 없으니, 어찌했든 비혼 상태를 즐기며 유쾌하게 잘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하던 차였다. 그러니 김란이 씨의 비혼 공동체 이야기가 참으로 궁금하다

밖에.

여성 비혼 공동체 VS 비구니 암자

솔직히 사람책을 읽기 전에 이런 선입견이 있었다. ‘여자들만 바글바글한 비혼

공동체라니? 비구니들이 모인 암자도 아니고….’ 일로든 사적으로든 여탕 모임에

익숙한 나로선 남녀 비율의 균형감이 매우 중요한데, 인생의 반을 여자들과 살아

야 하다니. 오호, 통재라! 그나마 안도했던 건 한 집에 함께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는 것. 한 임대 아파트에서 각자 따로 살며 비비라는 카페 공간만 공유하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음, 관심 가질 만 한데, 라며 귀를 더욱 쫑긋했다.

비비는 김란이 씨 없이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터. 그녀는 대학 때 학생운동을 성

실히 했다고 한다. “뭐, 아쉬움도 크긴 하지만, 당시는 내 삶이 역사가 되는 구나!

뿌듯했어요”라고 말한다. 당시 운동권 선배들이 결혼하지 않은 후배들의 인생에

간섭을 좀 했다. 이유가 참으로 가부장적이어서 놀랐다. 남자 활동가가 활발하게

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자 활동가가 물심양면 지원을 하기 위한 대의를 위한

짝짓기. 헐, 가장 진보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

이렇게 획일적일 수가!(이런 이야기 들으면 개인적으로 나도 모르게 분노 게이지

상승!) 암튼 이 일 때문에 그녀는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지만, 전혀 결혼할

의지가 없었기에 “No!” 했단다. 그녀가 비혼 공동체를 모임을 만든 건 서른 즈음

전북여성의전화에서 일할 때다. 처음엔 그녀가 비혼 공부 모임을 하자고 제안하

니, 다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나, 독신주의자 아니거든! 이 모임 때문에 평생

시집 못 가면 어쩌려고!” 하는 말로 받아쳤다. 그러나 그녀는 비혼 모임의 의도가

현재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미 있게 살아보자, 라는 의미라며 한 사람 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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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람 정성껏 설득했다. 그래서 서른에서 서른세 살의 친구 7명을 모았다. 다들 직장

이 있었고, 바로 결혼 계획이 없고, 자기 성장의 욕구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한 달

에 한 번 씩 만났다. 이때 꼭 학습을 했다. 비혼 관련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할 때

는 여성학 책을 봤고, 독립생활 할 때는 경제 서적을 훑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

스럽게 ‘자기 고백’이 이루어졌고 비비 공동체가 꾸려지는 데 가장 중요한 신뢰감

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생의 궤적이 꿰어졌죠. 그러면서 서

로 가족처럼 느꼈던 것 같아요.”

학습으로 정신적 유대를 가졌다면 기둥 자금을 통해 공동체 마련의 경제적 터

를 닦았다. 초창기 모임부터 한 달에 무조건 10만 원의 회비를 냈단다. 그 비용으

로 솔로들이 가장 괴로운 명절이나 연휴 때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7년을 이어오니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관계로 얽혀, 생활공동체로 묶여있다

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06년부터 모임이 아니라 공동체라 부르기 시작하고, 공동

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 란이 씨가 50년 영구임대 아파트를 마련하

여 독립을 한 계기로 비비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이 아파트 단지로 이사해 왔다. 같

은 동 다른 층, 바로 옆 동 등에 살면서 가족이나 이웃처럼 지낸다.

1인세대일지라도 당당하게!

비비 카페는 그녀들의 제2의 직업과도 관련이 있다. 마흔 즈음이 되자 란이 씨

와 다른 두 명의 친구가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기둥 자금을 빌려 카페 비비를 창업

했다. 카페 비비에서 그녀들은 자신의 재능을 도구 삼아 다양한 강좌를 마련하기

도 한다. 비비 공동체는 1인세대의 어려움인 정서적 문제와 경제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 가고 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건 쉽게 따라한다고 될 수 있는 건 아니

겠더라. 그녀들에게는 12년이라는 세월이 있었다. 함께 학습하고 놀고 밥을 나누

며 서로 돌직구를 날려 대도 상처받지 않을 만큼 신뢰하는 가족 이상의 가족이 되

었기에 미래의 삶을 함께하는 게 가능한 게다. 하지만, 이렇게 여자들끼리의 공동

체도 유쾌하게 꾸려질 수 있다는 걸 하나의 사례로 보여 준 것만으로도 참 대단하

고 나 같은 비혼자에게 힘이 된다.

내겐 이모할머니 두 분이 계셨는데, 모두 전쟁으로 미망인이 되신 이후, 아이들

을 데리고 두 집이 한 가족을 이루어 사셨다. 돌이켜 보면 두 분 모두 재혼하지 않

고 의지하며 사신 것 또한 여자들끼리의 공동체가 아니었을까? 전주의 비혼 공동

체가 아무리 좋은 사례라 할지라도 내 삶으로 적용하긴 힘들 터, 결혼 제도 밖 가

족을 이루며 살 수 있는 대안이 되는 삶을 또 내 삶 안에서 치열하게 찾아갈 터. 요

즘 김규항 씨 말대로 ‘좌파란 진정한 삶의 즐거움을 좇는 사람’이 아닐까. 내 삶을

유쾌하고 건강하게 일굴 내 나름의 대안가족을 한 번 꾸려볼 용기를 얻는다. 그 고

민을 앞서한, 그것도 씩씩하고 유쾌하게 만들어 나간, 전주에서부터 사람책이 되

기 위해 그날 그 자리에 와 주신 김란이 씨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 라는 말을 전하

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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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 도서관

7. 김수향 <홍대 앞 카페 사장님이 고민하는 오가닉푸드>를 읽고

<마이너리티의 히든 파워> —독자: 임은주

인간 김수향

소수자로 태어나 사람과 인생에 대해 독특한 시선을 갖게 된 개성적인 사람. 자

신의 튀는 인생을 일평생 타인의 잣대로나 재다가 좌절해 버리지 않는, 강한 사람.

가녀린 어깨에 ‘사명과 소임’ 하나를 더 얹어 무겁고 진지하게 사는 사람. 먹을거

리와 환경에 대한 지혜문을 열어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멋진 사람. 자신의 ‘다름’

을 수용하고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키워내, 거대한 강물

로 일어선 가슴 뜨거운 사람. 내가 그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사람책

여성환경연대는 흥미 있는 기획을 하게 되었다. 이름하여 사람책, 휴먼 라이브

러리로도 불린다. 사람책이란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여성들’을 초대하여 독

자들과 만나게 해주는 이벤트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 행사를 알게 되었고 ‘대안

적인 삶’에 관심이 많은 터라 신청하게 되었다. 합정역 한적한 카페 공간을 빌려

진행한 이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마침 참가 독자들에 대한 자

기소개 시간이 있어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그날 작가, 기자, 회사원, 독립영화 감

독, 취업준비생 등 다양한 직업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재일교포가 일본에서 한국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재일교포가 일본에서 일본 이름을 갖지 않고 한국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본에는 약 60만 명의 재일교포가 산다고 한다. 그중의 약 90%

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여 자신의 뿌리가 한국인임을 숨기고 산다. 김수향은 재

일교포라는 소수, 그중 한국 이름을 사용하는 소수 중의 소수였다. ‘다르다’는 태

그는 김수향을 늘 따라다녔다. 다름은 김수향의 운명이었다. 스물 세 살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지?” 똑같은 질문을

수 만 번 이상 하고 나서야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김수향이 “나는 어느 나라 사람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여느 사람들처럼 취직을 하였다. 3년간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했던 그 시절은 그에게 악몽이었다. 콩나물시루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타는 지하철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무엇이 뜨끈하여 손으로 코를 훔치면 코피였

다. 그러다가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했다. 에너지를 예민하게

느끼는 김수향은 퇴근시간이 두려웠다. 지하철을 타고 흉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지하철을 타는 일을 피하고만 싶었다. 그 시절 그에게 유일한 도피처는 도쿄의 작

은 카페들이었다고 한다. 그때 ‘나도 언젠가 카페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

다.

마이너리티의 힘

스물세 살이 되던 해 김수향은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왔다. 어느 나라 사람도

아니었기에 일본과 한국을 더 잘 통찰할 수 있었고 그 재능을 살려 양국의 문화소

개에 힘썼다. 그는 홍대에 있는 산울림에 사무실을 쓰게 되었는데 우연한 기회로

‘수카라’ 경영을 맡게 된다. 수카라는 숟가락의 일본어 발음으로 유기농을 지향하

는 카페다. 그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해 ‘식품의 원산지와 제조, 유통을 숨기는

시스템’에 눈떴다고 한다. 원가절감이라는 명목 하에 뿌려진 농약, 살충제, 제초제

를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 말이다. 수카라는 아직도 실험중이다. 우리

몸에 좋은 제철요리, 로컬식품, 유기농 원재료를 써도 카페 운영이 가능한가를 실

험중이다. 수카라에서 기르고 있는 효모빵에 들어가는 천연효모는 태어난 지 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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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었다. 해마다 강해지고 있다. 마이너리티 출신이자 채식인인 김수향의 신념

과 가치관도 해마다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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