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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부설 자활정책연구소 - 2 - 이 연구는 의 후원으로 이뤄졌습니다.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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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 1 -

자활사업 15주년 기념 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

2009. 12

부설 자활정책연구소

- 2 -

연구책임자 : 이 문 국 (안산공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공동연구원 : 김 승 오 (한국사회서비스관리원 사업개발팀장)

노 대 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김 정 원 (자활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

연구보조원: 이 선 민 (자활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이 연구는 의 후원으로

이뤄졌습니다.

Page 2: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 3 -

발 간 사

구슬땀으로 일군 ‘생산․나눔․협동’의 가치

자활사업 15년, 협회 창립 10주년. 2010년은 자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입니

다. 1996년에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자활사업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시행과 함

께 근로빈곤층의 자립지원정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급격한 양적 팽창을 해왔습니

다. 아마도 한국의 사회복지 역사에서 지역자활센터만큼 빠른 시일 내에 양적 팽

창을 한 조직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자활지원사업은 동아시아 근로연계복지정책

의 독특한 사례로 국제적인 관심이 점차 확산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급격한 양적 팽창이나 국제적인 관심의 확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활

사업이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 조직화의 선두에 서 왔었다는 사실입니다. 자활사

업을 규정하는 이념과 가치인 ‘생산․나눔․협동’은 바로 사회적 경제의 기반이

되는 이념과 가치입니다. 자활사업은 초창기부터 ‘생산․나눔․협동’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꿈꾸어왔고 이런 꿈은 현장에서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실천과 함께

정책적으로 다양하게 반영되기도 했었습니다. 마이크로크레디트와 사회적 기업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며, 노인일자리사업, 사회서비스 바우처 사업, 사회적 일자

리 창출 사업 등은 자활사업을 기반으로 추진된 정책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자활사업은 각 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이 주인이 되는 무수히

많은 경제조직들을 만들어왔습니다. 자활공동체가 바로 그것이지요. 또한 자활사

업을 통해 조직되는 각종 사업들은 노동과 경제 외에 사회적 기여가 결합되는 조

직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대안적인 가치를 담는 사업들이 펼쳐졌습니다. 이 사

업들 중 일부는 대안경제를 표방하는 각종 조직들로 최근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

리고 자활사업의 활동을 매개로 각 지역에서는 대안경제를 표방하는 조직화가 확

산될 기미를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 4 -

이처럼 커다란 의미에도 불구하고 자활사업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정책적 평가

는 인색한 실정입니다. 이번 백서는 이런 상황에서 자활사업이 갖는 이념과 가치

를 역사적 구성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것과, 자활 현장의 실무자들에게 역사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부심을 심어주고자 하는 것과, 대외적으로 자활사업의 의미

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로 작업이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이번 백서는 해외에 보급

해 자활사업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의 확산을 더욱 크게 하고자 합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만, 많은 분들의 노력에 힘입어 귀한 결과물이 나오

게 되었습니다. 우선 백서의 연구책임자인 이문국 교수를 비롯해 김승오, 노대명,

김정원 등 공동 연구진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분들의 노력으로 자활사업의 역사

가 일관성을 갖고 기술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백서가 최종적으로 빛을 보기까지

귀찮은 일들을 맡아준 이선민 연구원과 김은주 정책국장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협회 내에서 백서 발간을 지속적으로 점검해주신 이부년 대구지부장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2010년은 자활사업의 역사에서 새로운 변화를 위한 도약의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백서가 이를 위한 나침반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

니다.

2009년 12월 31일

(사)한국지역자활센터 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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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서 문

다시 ‘처음’처럼 나눔 세상을 향해

자활사업은 단순한 비즈니스가 아니다. 근로 가능한 실직수급계층의 근로활동

만을 강조하는 공공부조만도 아니다. 그런데 자활사업 시행 15주년 협회 창립 10

주년을 맞이한 2010년을 휘감고 있는 분위기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이미지로만

오로지 자활이 부각된다.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가장 협소한 영역이 가장 극

대화되어 강조되는데 사태의 본질이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 기념백

서를 준비하게 되었다. 자활사업의 출발 정신과 철학을 더듬어 오늘을 살펴봄으

로써 초심을 회복하고, 다시 오늘날의 사회적 경제운동의 관점에서 과거 자활사

업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임을 자활현장에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백서의 제목도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으로 독특하게 제시했다.

자활사업의 일선 수행기관은 ‘자활지원센터’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여 ‘자활후견

기관’을 거쳐 현재 ‘지역자활센터’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지역자활센터

는 출범 초기부터 생산․나눔․협동을 자활사업의 기본 이념적 모토로 내걸고 출

범하였다. 자활사업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회운동이라는 것을 세상을 향해 명백

히 선언한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미풍양속인 두레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생산

과정에 임하며 그 노동을 통해 파생된 잉여물을 세상과 나눔으로써, 공동체와 나

눔이 상식인 세상으로 변화되도록 활동하겠다는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이는 결코 선진화의 잣대가 가벼이 측정할 수 없는, 작지만 강한 아름다움이 녹

아있는 것이 자활사업임을 표현한다. 그런데 지역자활센터의 전국적 확산 과정에

서 표준화된 사업모델이 강조되고 그에 매몰되면서 체계로부터 생활세계를 침탈

당하는 부단한 과정이 현재의 자활현장의 모습이 아닌가 심히 우려된다. 다시 자

활센터의 지역화 깃발과 전략 수립이 적극적으로 모색될 시점임을 알 수 있다.

지역자활센터의 지역화 실천은 ‘각 지역에서 생산․나눔․협동의 이념을 바탕

- 6 -

으로 지역의 빈곤층이 갖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이 과정에서

국가 및 전 지구적 수준의 사회적 이슈와 결합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중앙집

중형 사회시스템이 낳는 사회 문제를 지역사회 수준에서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또한 지역자활센터의 지역화 전략의 자기회귀적 목적은 ‘전통적으로 지역사회

의 특성이었던 호혜의 관계망을 구축하고 지역의 자기의사 결정력을 강화하며 지

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도록 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중앙집중

형 사회 시스템이 낳은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창출하는 기능과 역할을 다하도록 본

래의 모습으로 지역자활센터를 복원시키자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적 경제의 토대

를 공고히 구축하는 주체로 지역자활센터가 거듭 성장할 것을 간곡히 기대하는

절실한 심정이 전략 목적에 담겨져 있다.

시범단계 이전의 자활사업의 뿌리는 빈민지역사회에서의 생산공동체운동에서

그 전형을 발견한다. 이를 사업의 기반으로 시범자활사업이 수행되었고 생산․나

눔․협동의 이념적 전망이 두 다리를 지탱하는 땅위에서 관철되도록 쉼 없이 노

력해왔다. 이 기념백서를 통해 각 지역자활센터와 실무자들이 고유의 자활 정신

과 소통하고 미래의 사업을 준비하고 기획하는 창조적 변화과정을 맞이하는 계기

가 된다면 집필진들로서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다.

본 백서의 1장인 생산공동체운동 시기는 백서 집필의 연구책임자인 본인이 작

성했다. 자활센터 대표실장, (준)자활협회 임시 사무국장, 국기법제정 연대회의 집

행위원 겸 정책위원, 자활정책연구회장, 자활정보센터 소장, 협회임시이사, 자활정

책연구소장을 두루 역임한 소위 ‘자활판’ 경험이 본 백서의 집필에 반영되었다. 2

장인 시범사업단계는 시범사업 당시부터 실무자, 실장, 대표실장, 관장, 사업위원

장을 두루 거쳐 현재 한국사회서비스관리권 사업개발팀장을 맡고 있는 김승오 선

생이 집필했다. 3장인 제도화 초기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 이후 국책연

구기관인 보건사회연구원의 일원으로 주요 자활정책을 생산하고 자활전문연구자

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해온 노대명 박사가 집필했다. 마지막 4장인 제도화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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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집필은 시범사업시기에는 현장 실무자로 출발하여 전북지역

대표실장과 관장을 거쳐 현재 자활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김정원

박사가 작성했다. 나름 해당 시기의 자활 현장 및 정책 단위와 긴밀하게 호흡하

고 소통한 사람들로 집필진을 구성했고 역할 분담했다고 자부하는 바이다.

그런데 본서는 단순히 사실관계를 나열한 일반 백서가 아니고 자활역사를 통해

자활의 시대정신과 철학을 반성적으로 검토하고 다시 현재의 원칙과 관점에서 과

거를 되새기는 의도를 가지고 기술되었기에 다소 집필진의 주관성이 강하게 비쳐

질 수도 있다. 하지만 본서의 행간을 통해 집필진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뜨거운

속내의 깊은 메아리에 보다 귀기울여주길 간곡히 바란다.

2009년 12월 31일

연구책임자 이문국 (안산공과대학 사회복지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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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 차 ● •∙

제1장 자활사업 제도화 전 단계 : 생산공동체운동 시기

1. 두레공동체의 부활·····················································································

2. 몬드라곤 사례의 전파와 노동자 협동조합운동의 전개······························

3. 소결 ············································································································

제2장 시범 사업 단계 : 자활사업 제도화 초기

1. 시범사업의 배경·························································································

2. 시범사업 시기의 정치 사회적 환경···························································

3. 초기 자활지원센터 지정 및 운영현황························································

4. 내부 조직 및 커뮤니티··············································································

5. 주요사업 ·····································································································

6. 소결 ············································································································

제3장 자활사업의 제도화 단계 : 근로연계복지의 출범

1. 자활사업 제도화의 토대로서의 기초생활보장제도·····································

2. 자활사업 제도화 초기단계의 특징·····························································

3. 자활사업 제도화 초기의 사회적 경제························································

4. 소결 ············································································································

제4장 자활사업의 정착 단계 : 제도적 정형화와 다양한 모색

1. 제도의 정착·······························································································

2. 사회적 기업의 등장과 사회서비스의 확대·················································

3. 자활내부의 다양한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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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결 ············································································································

참고문헌 ·····················································································································

부 록

부록 1 ··············································································사진으로 보는 자활의 역사

부록 2 ······································································· (사)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 연혁

부록 3. ·····················································································이사명단 및 활동현황

부록 4 ····································································자활사업 관련 자료 및 도서 목록

부록 5-1 ·························································································협회 및 지부 현황

부록 5-2 ················································································전국지역자활센터 현황

부록 5-3 ······························································································부설기관 현황

부록 5-4 ········································································전국청소년자활지원관 현황

부록 5-5 ····························································전국지역자활센터 자활공동체 현황

부록 5-6 ··························································중앙자활센터 및 광역자활센터 현황

부록 5-7 ················································································가사간병교육센터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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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목차

【표 2-1】‘삶의 질 세계화’를 위한 국민복지의 기본구상 중 자활지원 관련

내용 ·································································································

【표 2-2】초기(1996~1999) 자활지원센터 지정 현황 ·····································

【표 2-3】자활지원센터 당 연간 보조금 규모 ··············································

【표 2-4】시범운영 시기의 자활센터협회 주요 연혁 ····································

【표 2-5】시범사업 초기 전국자활지원센터 사업현황(1998년말 현재) ········

【표 2-6】시범 자활지원센터 후반기(1998.7~2000.6) 특별취로사업 현황 ····

【표 2-7】시범 자활지원센터 후반기(1998.7~2000.6) 자활공동체 현황 ········

【표 2-8】공공근로의 민간위탁 및 인력지원현황 (1998-2003년) ················

【표 4-1】자활공동체 창업자금 지원사업 내용 ······································

【표 4-2】근로장려세제 내용 ······································································

【표 4-3】사회적기업 육성법을 둘러싼 정부 및 시민사회의 흐름 ····

【표 4-4】2009년 9월 현재 자활사업이 모태가 된 인증 사회적 기업

【표 4-5】자활공동체와 사회적 기업의 비교 ··········································

【표 4-6】노무현 정부 사회서비스 일자리 총괄 ····································

【표 4-7】2005년 이후 사회서비스에 대한 지역자활센터의 주요 대응

【표 4-8】자활이 갖는 기업사회공헌과의 연계 활동의 강점 ··············

【표 4-9】2005년 이후 기업사회공헌과의 연계 ······································

【표 4-10】2007년 현재 각 주민자치조직 설립년도 ·······························

【표 4-11】2007년 현재 주민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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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목차

【그림 2-1】 한국자활지원센터협회 CUG ······················································

【그림 4-1】 사회서비스 일자리 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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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자활사업 제도화 전 단계 : 생산공동체운동 시기

이문국 | 안산공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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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공동체운동 흐름 속 정부와 ‘창조적 긴장관계’

1996년부터 시범 자활사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작은 가시적인 계기

일 뿐 국가 체제내로 제도화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었다. 1990년대 초 제도화

이전의 자활사업은 70~80년대 민주화운동을 수행했던 도시재개발 지역의 민중교

회1)가 거점이 되어 빈민지역운동의 연장선에서 진행되었다. 보다 정확하게 여러

다양한 빈민지역운동 중에서도 생산공동체운동이라고 표현해야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자활사업은 단순히 탈빈곤 복지사업이 아니라 자활운동이라고 강조된다.

빈곤지역에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거주했던 활동가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불합

리한 하청구조에서 오는 경제적 불이익을 극복하고, 동시에 민주적인 의식과 공

동체적 품성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대안적 틀로서 생산공동체에 주목했다(신

명호․김홍일, 2002; 한국주민운동정보교육원, 2009).

당시 재개발을 위한 철거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던 빈곤지역의 주민들과 목회

자가 육체노동을 함께 수행하였고 이를 생산공동체운동이라고 지칭하였다. 생산

공동체운동은 단순하게 가난한 사람들의 먹거리를 해결하는데 그치지 않고 물질

만능으로 우상화된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자 하는 변혁적 사고를 전제하고 있었다.

빈민지역운동의 궁극적 관심인 주민 의식화와 조직화를 도모하여 주민정치력을

고양하고자 했다(신명호, 1999; 이호, 1994). 이러한 주민들의 힘과 의지를 바탕으

로 야수의 얼굴을 가진 천민자본주의를 인간 친화적 제도로 바꾸고자 희구한 것

이다.2)

1) 민중교회란 소위 달동네라 지칭되던 도시빈민 밀집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민중이 되도록 섬

기는 것을 핵심과제로 삼고 주로 선교사업을 실시하는 교회"를 말한다(한국도시연구소 편,

1996). 또한 “교회가 자선사업의 관점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처해있는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

을 지향하고 주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조직하고 교육하며 훈련하는”

교회를 의미한다(상게서, p. 264). 이러한 정신과 활동을 기저로 1970년대 이후 반독재 운동의

중심이 되어 투쟁을 전개하면서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의 발전과 인권성장에 중요한 일조를 하였

다.

2) 우리나라 최초의 생산공동체 협동조합 정관인 ‘실과 바늘’의 정관에는 “...무엇보다도 불안정하고

열악한 도시빈민들의 고용구조와 노동조건을 개선 ...... 협동적 노동을 통해 도시빈민들의 공동

- 14 -

이러한 소망을 담은 변혁의 도구이자 모델로 선택된 것이 스페인 몬드라곤의

협동조합복합체3)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하는 사람이 노동 자체와 노동과정에

서 소외되지 않으면서도 생산적 효율성을 극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서구사회의

성과가 80년대 말부터 90년 초에 걸쳐 우리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2년 번

역된 몬드라곤 복합체의 사례는 대단히 고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한국도시

연구소 편, 1996). 다양한 네트워크로 연결된 민중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공동 학

습하였고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묵시적 명시적 결의를 토대로 각자의 교회가 위치한 도시재개발 지역사

회에서 생산공동체운동을 전개하였다.4) 주로 도시재개발사업이 진행 중이던 철거

지역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제도화 이전 단계의 자활사업이 도시공동체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는 것을 의미한다(한국도시연구소 편, 2003). 즉, 상호 소원한

채로 무관심하게 원자화되어 파편적으로 살아가는 거대도시에서 생산 활동을 매

개로 주민 상호간에 깊은 유대감을 교류하고 보다 긴밀한 관계를 나누는 생활공

동체를 형성할 것을 추구했다. 흔히 대안경제 혹은 사회적 경제라고 지칭되는 새

로운 인간 중심의 경제공동체를 우리 사회에 접목하기 위한 진지 구축운동이었다

고 21세기 현재적 관점에서 평가된다.

이러한 정신과 철학이 전제된 상태에서 비정부단체(NGO)로 지칭되던 민중교회

나 사회운동단체가 생산활동과 사업을 매개로 과거 적대시하던 정부와 결합하는

체적 의식과 품성을 형성하고, 협동적 소유와 경영참여를 통해 도시빈민들의 민주적 훈련과 자

치능력을 함양하며, 형제애적 정의로운 생산관계와 기업운영을 통해 경제민주화에 기여”하는 것

으로 기술되어있다(김성오․김규태 엮음, 1993).

3) 생산공동체운동의 전망에 대해 호의적이던 난곡 소재 민중교회의 K목사는 이렇게 서술한다. "몬

드라곤의 기적은 한국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사람의 얼굴을 그려내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이

면서 인간적인 생산체계......생산자들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일구어나가는 미래사회에 대한 맹아

적인 운동에 대한 시각을 열어주었다....."(김기돈, 1995).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현실에 맞지않

는 몬드라곤 모델에 대한 과신이 생산공동체운동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4) 당시 생산공동체운동을 전개했던 목회자들은 도시빈민지역 생산자 협동조합이 도시민민의 현실

적인 필요에 기초하여 운영되고 설립된다는 입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도시빈민에게 지역사

회는 생활권이면서 동시에 고용기회를 획득하는 연결망 역할을 수행했고 최소한의 노동력을 재

생산하는 생존권의 기반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도시빈민에게 발생하는 강제철거는 단순한 주

거권 침해를 넘어 생존권 전반에 총체적 위협을 가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조은․조옥라,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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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새로운 민관협력모델의 결실이 90년대 중반 이후의 시범 자활지원사업이었다. 이

러한 관(官)과의 관계를 이들은 스스로 '창조적 긴장관계'라고 명백히 정립했다(한

국도시연구소 편, 1996). 새로운 세상을 열기위해 관변조직과의 관계를 재설정하

되 결코 관에 대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겠다던 이중적 입장을 절충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 두레공동체의 부활

두레는 우리나라 전통 농촌사회에서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마을 및

부락 단위로 형성된 조직체이다. 상호부조, 공동오락, 협동노동을 목적으로 조직

되었다. 이러한 협업의 성격을 띤 공동노동은 고대부터 일제강점기 직전까지 오

랜 기간에 걸쳐 우리나라 농촌경제를 지배해왔던 노동조직이었다.5) 이러한 상호

부조 정신과 협동노동을 지향하는 두레가 20세기 말 서울과 인천 등 거대도시의

빈곤밀집지역에서 부활하였다.

초기 생산공동체운동의 초점은 가난한 사람들이 직면한 불안정 고용과 복잡한

하청구조를 타파하는 데 있었다. 빈민들이 가난한 이유는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

니라 아무리 노동을 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있

는 것으로 보았다. 최초 생산공동체운동의 특징은 1991년까지 의식 있는 목회자

의 개인적 차원에서 산발적으로 시도되었다. 90년대 초 부활한 두레공동체는 노

동자협동조합이나 사회적 협동조합이라는 사회적 경제체제의 한 축으로까지는 성

장 발전하지 못했다. 오로지 두레의 명칭이 지닌 상징성을 유의미하게 담보한 채,

도시 하층노동자들의 단순한 모임수준이거나 공동작업장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가진 지역운동가나 목회자들이 하청의 폐해를 줄이거나

5)두레조직은 조선후기 이앙법이 전개되면서 농민문화의 풍물을 발전시키는데 일조했다. 두레에는

여성들의 길쌈을 위해 조직된 '길쌈두레'와 남성들의 대마농사를 위한 '삼두레'가 있었다

(http://ko.wikipedia.org/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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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층노동자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소박한 꿈은 점차

스페인 몬드라곤의 사례를 통해 노동자협동조합의 가능성을 알게 되면서 이후 자

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대 이데올로기를 모두 지양 극복하겠다는 거대 담론으로

까지 확장되어갔다.

1) 건설일꾼 두레의 조직화

도시 생산공동체의 시원적 형태로 평가받는 지역사회 조직체는 1990년에 출범

한 '건설일꾼 두레'였다. 건설일꾼 두레는 1974년부터 강북 산동네인 하월곡동에

민중교회를 세우고 빈민운동을 전개한 H목사가 해당 지역 건설일용직 노동자들

을 모아서 만든 건설 생산공동체였다. 그 전 해인 1989년 H목사는 가난한 사람들

의 생활과 교육받은 중산층인 성직자의 삶 사이에 큰 괴리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서슴없이 목사직을 교단에 반납하고 건설노동자의 삶을 시작하였다(김수

영, 2006).6) 그는 생산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경외심과 기득권자로서의 부끄러움

때문에 막무가내로 생산활동에 몸을 던졌다고 진술했다. 처음에는 무척 외롭고

고통스러우며,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 하지만 전체가 모두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공동체를 형성하여 사는 것만이 우리 사회의 총체적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대

안이라는 것을 생활 속에서 체득했다(한국도시연구소 편, 1996).

건축현장의 모순과 극단적인 노동강도에 비해 형편없이 부족한 임금수준은 개

인적 차원의 분노의 감정을 넘어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느끼게 되었다. H목사는

그 원인을 건설시장의 복잡한 다단계 하청구조에 있다고 진단하였다. 이러한 왜

곡된 하청 고리를 최소화하여 잉여이익을 노동자들이 공유한다면 소득이 훨씬 상

승하리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제대로 된 건설 자재를 사용하면 올곧은 건축이 가

능하리라고 판단했다. 건축주인 중산층 건축소비자에게도 이익이 되는 모범을 우

리 사회에 가시화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에 따라 H목사는 함께 일하던

6) 당시 모 월간지에서는 H목사를 달동네의 망치를 든 예수라고 인물평을 했다.

Page 9: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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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노동자들과 함께 '건설일꾼 두레'를 조직하였다.

H목사는 스스로 이러한 활동에 대해 사회운동의 새 지평을 여는 활동이라고

의미 부여했다. 그는 이 신사회 운동(neo-social movement)의 과제와 전망을 다음

과 같이 제시했다(한국도시연구소 편, 1996). 첫째, 나태와 무능으로 낙인이 찍힌

가난한 사람들의 참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다. 둘째, 만성적 불안정 고용으로 인한

빈곤의 악순환을 스스로 극복케 하는 빈민의 주체적 해결을 도모하였다. 셋째, 신

뢰와 성실을 바탕으로 건설업에 임하여 중산층에 봉사하고 그들과 함께 삶의 질

을 높이고자 하였다. 넷째, 이 모범을 확대하면 한국의 산업구조를 혁신적으로 변

모시킬 것으로 전망하였다.

현실은 이러한 장밋빛 전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건설일꾼 두레에 다음과

같은 한계와 어려움이 산재되어 있었다. 건설일꾼 두레는 심각한 경영상의 어려

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H목사가 스스로 진단하는 위기의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허병섭, 1994). 첫째, 건설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의 기본 품성과 치열한 장인정신

을 모두 결여하고 있었다. 둘째, 원가 이하의 저비용으로 고가의 좋은 집을 짓고

싶어 하는 모순된 중산층 건축소비자들의 무리한 요구가 있었다. 그런데 건설일

꾼 두레는 건축주의 과도한 구조변경이나 자재변경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수

용함으로써 건설수주를 확보할수록 재무구조가 열악해지는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새로운 사회에서 통용되는 올곧은 건설업계의 규칙을 정립하고 공고히 한다는 입

장에서 무한 사후보수 철학의 관철도 이러한 수지악화에 기여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변화를 통해 중산층을 운동의 동인에 끌어들이고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삶의 질을 고양하려던 원대한 꿈과 사회계획은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으

로 다소 주춤하게 되었다.

2) 인천 두레협업사

인천 사랑방교회의 P목사는 건설일꾼 두레가 출범한 동일한 해인 1990년에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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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역 주민들을 조직하여 부업공동체를 설립하였다. 두레협업사의 이름으로 하

청생산업을 하게 된 기본 동기는 마을 여성들의 부업 단가를 높이고 생계에 도움

을 주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협동정신을 느끼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기

획되었다(김수영, 2006).

빈곤지역에 부업형태로 이루어지던 주부들의 개별 노동은 단가가 매우 낮았다.

소위 ‘오야지’로 지칭되던 중간상이 고수익의 유통마진을 챙겼기 때문이었다. 두

레협업사는 중간상에 의한 착취구조를 타파하고 중간상이 수행했던 역할을 스스

로 감당하는 체계를 갖추고 협업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상과 같은 건설일꾼 두레나 두레협업사의 1990년 초 개별 빈곤지역에 부활한

두레공동체는 빈곤 지역사회 주민들의 안정적 고용과 노동강도에 부합하는 소득

창출을 도모하였다. 이는 지역사회 주민조직화를 통한 지역사회개발(community

development)의 차원이었다. 두레공동체는 지역사회 구성원 전체가 공동 노력으

로 고용과 빈곤이라는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와 철학을 담은 그릇이

었다.

Page 10: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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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몬드라곤 사례의 전파와 노동자협동조합 운동의 전개

단순한 하층노동자 지역모임 수준의 생산공동체 방식에서 법인격이 부여된 본

격적인 생산조직체(productive organization)로의 틀을 갖추게 되는 계기는 스페인

몬드라곤의 협동조합복합체가 알려지면서부터다. 1992년 이후 빈민운동 진영에

생산자협동조합의 변혁적 가능성이라는 일치된 강력한 담론이 형성되면서 생산공

동체운동은 빈곤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실험적 확산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한국도시연구소 편, 2003).

두레공동체의 지역모임 차원과 노동자협동조합이라는 공식 경제조직체의 형성

에 가교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 1991년 ‘월곡여성생산공동체’였다. 그 이후 본격적

인 노동자협동조합의 결성기로 접어들었다. 1992년 대한성공회 ‘나눔의집(Sharing

House)’의 진보적 젊은 사제들이 중심이 되어 봉제노동자협동조합인 ‘실과 바늘’,

건설노동자협동조합인 ‘나섬건설’을 조직하였다. 1992년 도시 건설노동자들이 자

발적으로 설립한 ‘마포건설’이 발족했다. 1994년 ‘건설일꾼 두레’와 ‘나섬건설’이

발전적 해체를 거쳐 하나의 건설노동자협동조합인 ‘나레건설’을 설립했다.7) 1995

년 여성노동자회의 출자로 설립된 인천 봉제노동자협동조합인 ‘옷누리’와 구로지

역에서 노동운동을 수행했던 여성봉제노동자들이 봉제노동자협동조합인 ‘한백’을

설립했다. 그리고 재개발 지역에서 주민주체적 역량으로 탄생한 새로운 도시재개

발 모델인 행당동 가이주단지의 철거주민 마을공동체 내에 ‘논골의류협동조합’이

생겨났다. 이처럼 90년대 초에 나타난 진보적 사제 중심의 노동자공동체나 노동

자협동조합이 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인적자원과 지역

사회로 급속히 확산되어갔다.

대안 경제 질서의 구축과 같은 거대담론이 우리 사회에서 실현되기란 쉽지 않

았다. 사회를 건강하게 변화시키려는 생산공동체운동 참여자들의 진정성과 강력

7) 나섬건설의 ‘나’와 건설일꾼 두레의 ‘레’를 각각 따서 ‘나레’라고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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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전 의지에 비해 현실적 여건이 매우 취약하였다. 첫째, 노동자협동조합에 참

여 중인 지도자를 포함한 전체 조합원의 기술력, 경영능력, 지도력이 공통적으로

부족했다.8) 둘째, 산동네 하층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합원을 구성하다보니 선택

가능 업종이 집수리, 봉제, 단순가공업 등으로 제한되었다. 이와 같은 사양 산업

에 집중되다보니 경영적 성장에 내재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 산동네주민

과 민중교회 목회자가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기 때문에 인적․물적 자원동원능력

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자본주의 대안 운동이라고 내세웠지만 역설적으로 숙달

된 전문 기술자, 조직 전체를 관리하는 유능한 경영자, 재정동원능력을 갖춘 자본

가가 필요하다는 다소 모순적인 벽에 부딪혔다.

본 백서에서는 지역노동자모임 수준에서 노동자협동조합으로의 가교 역할을 수

행하였고, 제도화된 자활사업과는 무관하게 현재의 시점까지 유일하게 거의 원형

그대로 생존하고 있는 여성화장품 제조업 공동체인 ‘월곡여성생산공동체’9), 집수

리나 건축업종 자활공동체의 원형인 ‘나레건설’10), 봉제노동자협동조합에서 조직

가나 조합원으로 참여하였다가 훗날 자활지원센터의 센터장이 된 ‘실과 바늘’ 및

‘한백’의 경우를 자활사업의 전형이면서 자활제도화 전단계의 독특한 사례로 선택

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타 90년대 초반에 조직된 생산공동체 중 자활제도화

의 길로 적극 이어져 자활사업에 원형 그대로 편입된 생산공동체는 본 제도화 이

전 사례에서 제외하거나 간략히 다룰 것이고, 간략히 다루었거나 빠진 사례는 시

8) 이러한 면을 충족하고자 출범한 것이 제도화된 자활사업이었지만 여전히 제도화 이전이나 시범

사업단계에 비해 오히려 훨씬 열악해진 참여주민의 인적자본과 근로의욕을 상실케 하는 제도 내

적 한계, 자활참여주민에 대한 정책 당국의 무리한 경제적 자립 유도, 생산공동체운동의 후신인

자활공동체에 대한 제도적 방치 등으로 인해 오히려 문제를 가중시키는 형편이다.

9) 화장품제조업 생산공동체가 당시엔 월곡동의 여성주민을 중심으로 출범하여 ‘월곡여성생산공동

체’란 이름이 붙여졌지만, 20여년이 다되어가는 현재까지 일부 참여 구성원의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인근 방학동에 지역여성센터를 설립하여 공동작업을 활발하게 계속하고 있다.

10) 건설일꾼 두레를 조직했던 H목사를 존경하고 따르는 후배사제로서, 나섬건설과 나레건설의 실

질적인 조직화 주역이었던 대한성공회 S신부는 자활사업의 국가 정책화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996년 시작된 시범 자활지원사업에서 K자활지원센터의 센터장이 되었고 뒤이어 자활지원센터

협회장을 겸직하였다. 1998년 IMF 이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을 위한 연대단체의 집행위

원장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자활 제도화에도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였다.

Page 11: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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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사업단계와 제도화 단계에서 보다 심층적으로 언급할 것이다.

1) 월곡여성생산공동체(이하 월곡공동체)11)

월곡공동체는 1991년부터 월곡동 산동네에서 출범 준비를 시작했지만, 그 이전

부터 오랜 기간 해당 지역사회의 활동가로서 Y자매가 전개해온 여성 및 아동 관

련 지역 활동의 연장선에서 비롯되었다.12) 90년대에 접어들자 함께 관계를 맺어

온 지역의 가난한 여성들의 소득증대와 운영비 마련을 목적으로 생산공동체를 모

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봉제업, 도시락공장, 반찬공장, 식당 등을 염두에 두고

타당성 조사를 하였다. 생산공동체사업에 참여를 희망하는 ‘어머니학교’13)를 수료

한 여성들이 주축이 된 사업 준비모임은 자신들이 이전부터 하청 봉제노동자로서

지녀온 봉제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하청 형태의 봉제업 생산공동체를 적극적으로

희망하였다.

동생인 Y1씨는 유사업종의 다른 생산공동체를 조사하면서 봉제업은 전형적인

사양산업으로 사업적 전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준비모임에 다른 업종을

선택할 것을 제안하고 Y1씨 스스로 대안업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우연히

‘레몬화장수’ 제조법을 알아 달라는 지역주민의 부탁으로 학습하게 되면서, 이를

생산공동체의 주력업종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시장조사 결과 시중에 자연화장

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Y씨 자매는 심층 연구작업에 몰입했다. 동생인 Y1씨는

자연화장품 원료의 특성 파악을 위해 인근 대학의 식품영양학과에 청강을 했고,

언니인 Y2씨는 ‘자연미용법화장연구회’라는 단체에서 실시하는 6개월간의 전문연

구생 과정을 이수했다. 이렇게 학습을 통한 연구와 실험을 통한 시행착오를 반복

11) 본 사례는 신명호(2003)의 생산공동체 경쟁력 요인분석에 관한 논문의 내용을 주로 참고하여

인용하였다.

12) Y자매(이하에서 봉제협동조합 ‘한백’의 Y씨와 구분하여 구체적으로 Y자매의 동생을 언급할 경

우 Y1, 언니를 언급할 경우 Y2로 약칭할 것이다)는 건설일꾼 두레를 조직한 H목사의 민중교회

소속 지역 활동가들이었다. 그래서 두레공동체와 노동자협동조합운동의 중간매개자로서 월곡여

성생산공동체는 중요한 가교역할을 수행하였다.

13) ‘어머니학교’는 Y자매가 진행해온 여성을 위한 지역사회프로그램의 공식명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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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그 과정에서 레몬화장수는 보존기간이 짧은 단점을 발견했다. 레몬을 대체

하는 화장품 원료로 알로에를 실험했다. 알로에의 찬 성질을 발견하고 이를 중화

할 한약재를 첨가하여 샘플 평가를 주변에 요청한 결과 대단히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알로에 자연화장품의 본격적인 생산과 판매에 돌입하여 지역 교회를 중

심으로 판매하다가 전문 유통업체인 생활협동조합 ‘한살림’과 생활협동조합중앙회

에 납품하였다. 화장수가 대량 유통되면서 기존 고객 관리를 위해 세숫비누의 대

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세안제와 자연팩을 추가 개발했다.

IMF의 국가위기 시절에도 본 월곡공동체는 좋은 경영실적을 보였고 발생한 수

익금을 지역의 다양한 NGO의 운영비와 사업비로 지원했고, 외부 종교단체에도

요청이 있을 경우 후원금을 마련했다. 현재의 지역여성센터 건립비용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월곡공동체는 출범 당시부터 생산활동을 통해 발생하는 일체의 수

익금은 구성원들의 소유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지역사회 기여금으로 상당한 수

익금이 지출될 때도 내부 구성원으로부터 어떠한 이의제기가 없었다. 이러한 운

영방식은 조합원 중심으로 수익금을 정산하는 노동자협동조합과는 다르다. 또한

공식 경제단체로서 단순한 노동자모임 수준에 머무는 두레공동체와도 구별되는

독특한 조직형태였다.

즉, 지역사회의 빈곤여성을 중심으로 잉여금을 지역사회에 재분배하는 생산공

동체의 운영방식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민관 모두에서 공히 전염병처럼 유행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social enterprise)14)이나 서유럽 사회적 협동조합의 전형을 선구

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우리나라 사회적 경제운동 차원에서 역사적 의의를 부

여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또한 철저한 생산공동체 내외 역량파악, 객관

적 사업 전망의 분석, 철저한 시장조사, 도전적인 제품 개발, 심층 연구와 실험정

신, 공동체적 나눔의 원칙 구조화 등 사회적 기업과 사회적 경제운동의 원칙을

14) 당시에는 몬드라곤 협동조합복합체를 통해 노동자협동조합은 약간 알고 있었으나, 90년대 초반

당시 유럽에서 사회적 경제운동의 일환으로 확산되었던 다양한 사회적 기업에 대한 이해나 소개

는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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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실천한 Y씨 자매는 사회적 기업가로서의 전형을 보였다고 평가된다. 월곡

공동체는 자활사업에 편입되지 않고 현 시점까지 독자적인 지역사회 빈곤여성 생

산공동체로서 남아있다. 생존하고 있는 유일한 생산공동체로서 월곡공동체는 오

늘날 자활 현장에서 추구하는 자활사업 지역화전략의 실천에 많은 함의를 제공한

다.

2) 건설노동자협동조합 ‘나레건설’

나레건설은 1996년에서 1999년까지 시범 자활사업 단계에서 노동자협동조합 집

수리사업체가 나아가야 할 이정표가 되었다. 이 나레건설의 경험을 기초로 관악

자활지원센터는 집수리사업체인 ‘비전건설’을 창업하였다. 또한 나레건설은 2000

년 자활사업이 공공부조체계에서 작동하는 사회보장 제도화 이후 창업한 자활공

동체이자 사회적 기업인 ‘CNH 건설’의 전신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신설

된 주거급여(housing benefit)15)를 활용한 집수리 자활근로사업단의 영적 토양으

로 작용하고 있다.

1993년 우리 사회의 대표적 저소득 밀집지역이면서 재개발 구역인 봉천동에 거

주하는 건설노동자를 결합하여 7명의 조합원으로 ‘나섬건설’이 출범하였다. 대한

성공회 봉천동 나눔의집 사제였던 S신부는 세속적 물질을 나누고 영적으로 절대

자를 섬기는 공동체를 추구한다는 입장에서 나눔의 ‘나’와 섬김의 ‘섬’을 자구적으

로 결합하여 ‘나섬건설’을 발족하였다. 결국 사회적 실천은 진보적으로, 신앙적 입

장은 보수적으로 철저히 일관하고자 했던 S신부의 신앙공동체 철학과 지역 공동

체 조직의 정신이 적절히 반영된 명칭이었다.

1990년부터 하월곡동 지역에서 H목사가 조직했던 ‘건설일꾼 두레’는 태동하여

3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자본과 기술력의 부족, 두레 참여자들 간에 심각한 알력과

갈등을 겪는 중이었다. 같은 운동적 지향을 갖고 있으며 두 목회자간의 관계가

15) 신설된 주거급여는 집수리사업단에게 안정적인 집수리사업 바우처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집

수리사업단의 보호된 시장(cared market)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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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독했던 점이 시너지효과로 작용하여, 1994년 건설일용노동자의 경제적 자립, 부

실공사 및 하도급 비리의 척결, 생산자협동조합의 육성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나

레건설’로 통합하였다. 앞선 절에서 지적했듯이, S신부 나섬건설의 ‘나’와 H목사

건설일꾼 두레의 ‘레’를 조합하여 ‘나레건설’로 이름 지었다. 결국 두레의 지역공

동체 조직 정신과 나눔이라는 지역사회 실천원리를 기초로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

려는 두 사제의 개혁적 의지가 화학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레건설’ 역시 ‘건설일꾼 두레’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저렴하고

튼튼한 주택 건설’을 모토로 걸었지만 이를 구현할 내적 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첫째, 건설공사 전반을 관리할 수 있는 기술자가 없었다. 공사관리란 터

파기부터 마감에 이르기까지 전 건축공정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을 뜻한다. 흔

히 사업현장에서 일머리를 통째로 파악한다는 의미이다. 시공기술에 관한 전문지

식을 갖추지 못했던 협동조합 지도자들은 주관적 판단과 주먹구구식 경영으로 일

관했다. 당연히 건축주와의 사업계약부터 비현실적인 저가로 수주했다.16) 둘째,

조합원의 낮은 기술수준도 문제였다. 빈곤지역 건설일용노동자들은 대개 도면을

보지 못할 정도로 숙련도가 떨어지거나 아예 기술이 없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작

업한 결과는 항상 하자가 빈발했고 하자보수에 매진하다보니 예산에 없는 추가적

인 비용과 시간은 필수적인 공정이 되었다. 적어도 7시 이전에 시작하는 일반 건

설현장의 관행과 비교하건데, 9시 정시출근에 6시 정시퇴근의 노동권 원칙을 고

수했던 나레건설은 참여조합원의 장인정신이 결여된 적당주의를 가속화했고 경영

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17) 셋째, 운용자금 부족이라는 노동자협동조합의 고질적

인 문제가 가중되었다.

16) 나레건설 당시 조합원이었고, 15년이 지난 현재 K자활지원센터에서 조직한 자활공동체이자 사

회적 기업인 CNH 건설의 대표인 L씨는 당시를 이렇게 진술한다. “제 값을 받고 제대로 일해

주려다 보니 전혀 수지가 맞지 않았다. ‘좋은 집'이란 좋은 재료와 충분한 품(노동력)의 투입으로

만들어지는데, 건축주는 무조건 싼 가격에 좋은 집을 짓고자 하니 모순이었다. 오늘날 내가 체득

한 소박한 진리는 ’이 세상에 값싸고 좋은 물건은 없다‘는 것이었다.”

17) 시간만 때우면 일당은 나온다는 몸에 배인 관행을 오랜 교육과 토론을 거치면서도 참여 조합원

들이 극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시 출퇴근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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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정에서 ‘나레건설’은 쌓여만 가는 많은 부채를 감당치 못하고 청산작

업의 길을 갔다. 하지만 ‘나레건설’이라는 조직체는 없어졌지만 사람은 남는 운동

적 성과는 명백했다. 사람만 남으면 조직은 언제나 복원 가능했다. 나섬건설 시절

부터 조합원이었던 L씨는 4년간 중견건설업체에서 다양한 현장 경험을 축적하면

서 주경야독을 통해 건설시공기술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이 건설현장에서의 경

험과 자격증을 토대로 건설노동자협동조합 ‘CNH 건설’을 K자활지원센터와 K나

눔의집이 연대하여 창업하였다. 최근 노동부로부터 사회적 기업 인증도 취득했다.

종합건설면허를 가진 CNH 건설은 좋은 물건을 적정가격에 공급한다는 원칙에

따라 덤핑 입찰은 절대 금하는 원칙을 일관하고 있다.

3) 봉제노동자협동조합 ‘실과 바늘’과 ‘한백’

먼저, ‘실과 바늘’은 ‘한백’보다 설립 시기가 선행하였고 보다 전형적인 봉제생

산공동체의 사례로서 1992년 상계동 산동네에서 출범하였다. ‘실과 바늘’은 대한

성공회 S신부가 역할 했던 ‘나레건설’과 마찬가지로 대한성공회 최초로 설립된 N

나눔의집 관할사제였던 K신부가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18) ‘실과 바늘’은 조직체

도 그대로 남았지만 나레건설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 또한 남겼고, 이들은 민들

레 홀씨처럼 다양한 분야에 흩어져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실과 바늘 참여 조합원 중에서 N자활지원센터의 실무자들이 배출되었고 이후 사

제의 길을 밟거나 '사회투자지원재단‘이나 기타 다양한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사회

적 경제운동이나 실업운동의 주역으로 현재 활동 중이다.

‘실과 바늘’은 빈민지역의 많은 젊은 노동자들의 고용상태가 매우 불안정하며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대안적 사업이 부재하다

는 문제의식으로 출발하였다(한국도시연구소 편, 1996). 주민들의 생산문제는 교육

이나 탁아보다 일상적이며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 동안의 빈민운동은 주로

18) 이 K신부와 S신부는 훗날 자활사업과 노동자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을 우리 사회에 소개

하고 적극적으로 도입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공히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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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2차적인 관심사에 경도되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역사회를 고민한 K신부는 몬드라곤 협동조합복합체의 사례를 고무적으로 학습

한 후, 주민들의 협동공동체를 건설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실과 바늘’의 정관

은 빈민지역 생산공동체 중 노동자협동조합 최초의 정관이 되었다. 상계동 산동

네의 낡은 집에서 뜨거운 열의를 가지고 1993년 4월 8명의 조합원으로 출범한

‘실과 바늘’은 다음과 같은 운영상의 문제점을 보였다. 첫째, 조합원들 간의 알력

이나 갈등이 적절히 해결되지 못했다. 둘째, 일반 공장들의 억압적인 강제력을 대

신할 긴장감이나 강제력이 없었다. 셋째, 운영을 위한 집행력과 지도력이 부족했

다. 넷째, 경영능력에서 한계가 있었다. 다섯째, 숙련노동자의 부족과 공간의 열악

성이었다. 여섯째, 봉제업이 사양산업이었다.

‘실과 바늘’은 몬드라곤 협동조합복합체에 크게 감명을 받아 빈민지역에서 처음

부터 협동조합 정신과 운영방법을 선택하였지만 성공사례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그 한계로 지적된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듯이 새로운 미래를 여는 고귀한 씨앗

이었음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구로지역의 여성봉제노동자를 조직하여 봉제노동자협동조합 ‘한백’의 창업 주역

이 되었고, 제도화 이후 설립된 자활지원센터의 소장이 된 Y씨는 다음과 같이 봉

제노동자 생산공동체의 창업동기를 밝혔다(윤혜련, 1997). “<몬드라곤에서 배운

다>라는 책자가 소개되면서 봉제노동자의 인간적인 일터, 안정된 직장, 자주적이

고 창의력을 살려나가는 일터, 이 사회에 올바른 경제 질서를 실현시켜 나가는

역할을 하기 위해 새로운 생산양식인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결의가 있었다. 1994

년 준비모임이 조직되고 학습이 시작되었으며 1995년 3월 1일 9평 정도의 지하공

간을 구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한백’의 구성원들은 다음과 같은 운동원칙을 수립하고 철저히 고수하고자 노력

했다. 첫째, 재하청의 연결고리를 해소하고 고용창출 및 고용보장을 도모하여, 불

안정 고용을 완전히 해소하고 인간다운 삶과 자주성을 살린다. 둘째, 봉제나 의류

Page 14: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 27 -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개선한다. 셋째, 지역사회의 공동체 문화

창달에 이바지한다. 넷째, 타 협동조합들과 공고한 연대의 틀을 형성한다.

이러한 운동 원칙과 철학을 유지하기에는 현실적 여건이 따르지 않았다. 경영

상의 이유나 개인적 사유로 5명의 조합원 중 3명이 회사를 떠났다. 1997년 4월에

는 협동조합 대표를 맡고 있던 고기술 인력이 인근 지역에 독자 사업체를 창업하

면서 독립하였다. 공백을 메우기 위한 기술습득을 목표로 부단한 작업 후에도 많

은 야간 교육과 운영회의를 거쳤지만 실질적인 어려움은 해소되지 못하고 경영상

의 어려움에 직면하여 해산하게 되었다. 이 협동조합 활동 경험이 토대가 되어 Y

씨는 자활지원센터를 지정받았고 센터장으로 또한 서울지부장으로서 다양한 중책

을 수행하였다.

- 28 -

3. 소결 : 오롯이 이어진 아름다운 사람들과 정신적 자산

시범 자활사업이 출범하기 이전 시기에 우리 사회의 어떤 운동적 경험과 원칙

이 자활정책과 운동을 주도하고 지역 현장에서 자활사업단과 공동체를 창출하는

정신적 지주로 작용했는지를 밝히는데 집중했다. 나아가 90년대 초 다양한 생산

공동체운동의 전개가 단순히 제도권 내에서의 자활사업을 구축하는 한계를 넘어

서, 현재와 미래의 사회적 경제운동 혹은 대안 경제 운동과 어떻게 일맥상통하는

지를 규명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다양한 생산공동체운동을 검토하면서 확인된 것은 지역사회 투신을 통한 지역

사회문제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인식, 이를 공동체적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운동

적 원칙의 고수, 사업체로서는 망하더라도 사회의 등불이 되는 많은 건강한 주민

지도자를 배출함으로써 계속적인 전망을 재창출하고 현장에서 실천하는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사업보다 소중한 아름다운 사람들과 귀한 정신을 남겼다.

이상과 같이, 자활사업은 지역사회에 철저히 매몰되어 존재성을 망실하였거나 사

장된 사회적 배제자로서의 개별 빈민에게 먹거리 해결을 위한 고기잡이 기술을

전파하는 식의 천박한 차원을 넘어선 그 무엇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범지구적으로 상상하고 소지역사회 단위에서 행동하려는 실천원칙

과 운동철학이 오늘날과 같은 자활사업의 제도화된 하드웨어를 형상화하였다고

정리된다. 물론 그 원대한 담론의 크기에 비하면 현장에서의 실천내용은 많이 일

천했다. 하지만 제도화 이후 만 10년이 경과한 현재의 시점에 이르러서도 지난

시기의 생산공동체운동은 자활사업의 지역화전략의 수립과 실천을 위한 나침반이

며, 올바른 최종 목표지점에 도달키 위한 등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공유하

며 본 단원을 끝맺는다.

Page 15: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 29 -

제2장

시범 사업 단계 : 자활사업 제도화 초기

김승오 | 한국사회서비스관리원 사업개발팀장

- 30 -

사회적 경제 토대 닦은 자활 시범사업

1996년에 자활사업은 시범사업으로 출범한다. 불과 5개의 자활지원센터가 법적

근거도 갖지 않은 채 시범적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

이었다. 이후 자활사업의 역사는 한국에서 근로연계복지의 역사가 되었고, 사회적

경제의 물적 토대를 닦은 역사가 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동아시아 복지국가가 갖

는 특수한 사례로서 해외의 관심을 끌기도 한다.

또한 자활사업은 정부와 민간 비영리부문이 국가 정책의 영역에서 조직적으로

파트너십을 형성한 사례이기도 하다. 물론 현재 자활사업은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정책적 성과의 취약함을 지적한다. 또 일각에서는 정부 정책의

단순도구가 되어 간다는 지적을 한다. 초기에 가졌던 문제의식이 희미해져간다는

지적도 있다. 이 지적들은 일면 타당하다. 무릇 제도화는 그 이전의 시도를 확장

하는 의미와 그 과정 속에서 일정한 변형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

서 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 또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는 그 자체가 제한된 평

가일 수밖에 없다.

자활사업은 1996년에서 1999년까지 시범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시범사업 시기

자활지원센터의 실무자들은 ‘자활운동’이라고 표현했고, ‘자활활동가’라고 표현했

다. 그리고 탈빈곤 활동이 아니라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활동으로 자신들의 활동

을 규정했다. 그 시기를 살펴보는 것은 제도화 이후의 시기를 살펴보는데, 나아가

서는 미래의 자활사업의 방향을 설계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줄 것이다.

Page 16: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 31 -

1. 시범사업의 배경

한국의 자활사업은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수행했던 도시재개발 지역의

민중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전개한 빈민․지역운동 차원의 생산공동체에서 시작되

었음은 1장에서 밝힌 바 있다. 1970~1980년대에 전개된 민중교회의 주민조직화

활동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빈민지역 생산공동체운동으로 재탄생한다. 이들의

생산공동체운동은 노동자생산협동조합운동19)으로 일컬을 수 있었다. 주로 수도권

에서 전개된 이들의 활동은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을 받으며 활성화되었으나 실상

은 오래가지 못하고 파산하거나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기의 반복이었다.20)

이런 가운데 1993~1994년을 전후로 생산공동체를 통한 탈빈곤의 노력들이 언론

에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학계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21), 개발독재시기에 미

흡했던 국가복지의 개선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던 당시 김영삼 정부는 생산공동체

운동에서 정책적 아이디어를 얻고자 했다. 생산공동체운동 진영 역시 자생적인

조직화를 통한 탈빈곤 활동에 일정한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학계 및 정부의

관심에 적극 호응했다.

당시 한국의 복지정책은 소득이전을 통한 생계․주거․의료 등 최저생활보장정

19) 굳이 구분한다면 생산협동조합, 생산자협동조합, 노동자협동조합, 노동자생산협동조합, 생산(자)

공동체 등을 각각 다르게 정의할 수 있겠으나, 이 글에서는 서로 같은 개념으로 포괄하여 ‘생산

공동체’라는 명칭을 사용하겠다.

20) 이에 대한 내용은 신명호(2003), 김수영(2006)을 참조.

21) 당시 생산공동체의 활동을 소개한 대표적인 연구자료들은 아래와 같다.

1993 (준)협동조합연구소

일하는 사람들의 기업

(김성오, 김규태, 1993, 나라사랑)

※ 일꾼두레, 실과 바늘 등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의 사례를 소개

1993 한국개발연구원

빈곤대책의 재조명 : 협동조합을 통한 탈빈곤운동의 활성화를 중심으로

(권순원, 1993.11, 한국개발연구 제15권 제2호)

※ 일꾼두레, 실과 바늘, 나섬건설, 마포건축 등 사례를 조명

1995 보건사회연구원

저소득층의 실태변화와 정책과제: 자활지원을 중심으로

(김용하 외, 1995.9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단행본)

※ 자활지원센터 설치의 필요성과 모형을 제시

<부표 1> 자활사업의 제도화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연구들

- 32 -

책과 함께 근로능력이 있는 저소득층에게는 소득이전 대신 생업자금융자, 직업훈

련 등을 통한 자립지원정책의 두 축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까지 자립지원정책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김영삼 정부는 사회복지정책의 이념과 목표를 ‘삶의 질 세계화’로

설정하면서 이를 위한 추진동력으로서 국민복지기획단을 창설하였다. 당시 국민

복지기획단에 참여한 학계․전문가들은 생산공동체를 통한 탈빈곤 가능성을 연구

하는 과정에서 교류하게 된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의 건의를 받아 자립지원정책의

일환으로 생산공동체 모형을 도입한 생산적․예방적 복지를 구상22)하게 된다.

자립지원을 위한 생산적 복지시스템의 구축

영세민 자활공동체결성 제도화- 근로능력은 있으나 교육.기술.자본 등 자활여건이 취약한 영세

민들이 자영업이나 생산공동체, 근로공동체 활동을 통해서 자활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

영세민 밀집지역에 자활후견기관(자활지원센타)

지정․운영

- 공동작업실과 회의실 등 사업공간, 노동시장정보․일감정보 등을 제공하며, 영세민들의 자영업 창업지원, 생산공동체 활동을 지원

- 금년 상반기 중 영세민 밀집지역 2-3곳에 종교단체, 사회복지관 등을 중심으로 시범적으로 지정 운영하고, 점차적으로 확대 설치

민간주도의 자활지원재단 설치 - 영세민에 대한 생업자금융자사업과 공동체 자활사업 금융지원, 영세민 자녀 대학 학자금 장기저리융자사업 등 실시

<표 2-1> ‘삶의 질 세계화’를 위한 국민복지의 기본구상 중 자활지원 관련 내용

자료 : 보건복지부(1996)에서 인용.

국민복지기획단은 ‘삶의 질 세계화를 위한 국민복지의 기본구상’에서 ‘21세기

국민복지의 비젼’으로서 생산적․예방적 복지의 추구를 제시하였으며, 이를 위한

5개 과제를 발표하였다. 이 중 “Ⅲ. 국민최저생활 수준의 보장”에서는 ‘자립지원

을 위한 생산적 복지시스템의 구축’을 위하여 ①영세민 자활공동체결성 제도화,

22) KDI가 공청회를 주최한 것은 1995년 5월이었으나 확정 발표된 것은 1996년 2월이었다. <부

표 1>에 제시된 권순원의 연구가 1993년이었으니 대략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 후에야 본격적

인 모색이 이뤄진 셈이다.

Page 17: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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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영세민 밀집지역에 자활후견기관(자활지원센타) 지정․운영,③민간주도의 자활

지원재단 설치 등 자활지원센터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이 제시되었다.

당시 복지부에서 발표한 정책해설 자료(표 2-1)를 보면 민간에서 요구한 정책의

상당부분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활사업의 제도화를 추진한 생산공

동체운동 진영이 학계 및 정부와 상당한 파트너십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국민복지기획단의 회의에는 K나눔의집의 S신부가 참가해 발제를 했는데,

이는 제도정치권의 회의에 빈민운동 지도자가 참여한 최초의 사례였다. 당시 S신

부가 발제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혜가 아닌 참여를 제공하는 복지

로 ‘복지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야 한다. 둘

째, 빈민지역 활동가 및 단체들의 잠재력과 헌신성을 인정하고 민관협력체계를

갖춰야 한다. 셋째, 고용과 교육활동을 함께 펼쳐나갈 지역공동체 시스템으로 발

전시켜야 한다. 넷째, 자활지원센터는 협동조합운동을 지원해야 한다(김수영,

2006).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자활사업은 1996년 2월에 자활지원센터 시범사업으로 출발

을 하게 된다. 당시 자활사업은 생활보호법의 자활보호와는 독립된 지위를 가졌

다. 그래서 자산조사를 하지 않았고 빈곤층 밀집지역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일자

리나 훈련기회를 제공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 34 -

2. 시범사업 시기의 정치․사회적 환경

1) 정치적 환경

시범사업 시기는 김영삼 정부 후기(1996~1998. 1)와 김대중 정부 초기(1998.

2~2000)였다. 1993년 2월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영삼 정부는 군부 출신의

대통령이 아닌 민간인 출신의 정부라는 의미로 ‘문민정부’로 정부의 성격을 규정

했다. 1993년 8월에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을 통해 해야 한다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였다. 1996년 12월 아

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으나, 누적된 경제위기

에 잘 대응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97년에 외환위기로 인한 IMF 구제금융을 겪

게 되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의 복지 시스템은 전임 정부에 비해 크게 변화된 것은 없었다.

그러나 1995년에 ‘삶의 질 세계화’를 복지정책의 이념으로 설정하고, 삶의 질 세

계화를 위한 국민복지의 기본구상에서 ‘생산적․예방적 복지’의 개념을 도입하였

다.

김영삼 정부로부터 외환위기의 유산을 물려받고 시작한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

기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이를 위

하여 국정 전반의 개혁, 경제난의 극복, 국민 화합 실현, 법과 질서 수호 등을 국

가적 과제로 제시하였다. 또한 재벌의 독과점 폐해 견제와 재무구조 건전성 강

화, 순환출자 및 상호지급보증 해소 등 시장경제 규율을 확립하는 정책을 시행했

다.

특히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을 통해서 국가의 책임을 명시한 근대적 의미

의 공공부조 정책을 실시한 것은 한국의 사회복지 역사에서 큰 획이었다. 그러나

공공부조와는 거리가 있는 자활사업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포함되면서 이후 자

활사업의 질곡으로 작용하게 된다. 한편, 김대중 정부는 IMF의 구조조정 요청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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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함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본격화함으로써 사회적 양극화 등의 여러 부작

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2) IMF로 인한 경제난과 대량실업

시범 자활센터 시기의 시대적 특징은 무엇보다 외환위기로 인한 IMF 구제금융

이었다. 그러나 구제금융의 조건은 매우 가혹해서 대량의 실업과 자영업자의 몰

락, 실직으로 인한 가정파탄과 대량의 실직노숙자 발생, 고금리 등 사회전반에 걸

쳐 매우 힘든 상황이 계속되었다.

경기침체로 인한 전반적인 구매력 저하와 시중 자금의 부족, 고금리로 인한 인

플레이션 등은 시장진입형 생산공동체 위주의 사업을 펼치고 있던 자활지원센터

에게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실례로 K자활지원센터에서 운영하던 생산공동

체인 ‘나눔물산’의 경우 한 때 직접 고용한 종업원이 35명이나 될 정도로 사업이

확장 되었었으나, IMF의 구제금융이 끝날 무렵 폐업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 기간이 자활지원센터에게는 오히려 변화의 기회로

작용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활지원 대상자의 측면에서 볼 때 그 전까지 자활지

원대상자들은 비록 육체적 근로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장기간 저소득과 고용불

안정으로 인해 자활의지가 빈약했다. 반면에 외환위기로 인한 실직자들은 상대적

으로 자활의지와 노동시장 적응력이 높았다. 특히 당시 정부는 공공근로 민간위

탁사업을 비롯한 각종 실업대책을 전개했는데, 이를 자활사업과 접목시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부업장 및 취업알선센터, 공동작업장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초

창기 시범자활센터로서는 1998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특별취로사업23)은 시장진입

형 공동체의 기반형성 및 지역사회 내 유용한 사회적일자리 창출의 계기가 되었

23) 생활보호법 시기에 있었던 취로사업은 정부에서 직접 실시했으며, 주로 제방이나 하천, 도로 정

비 등의 일을 담당했다. 실시 기간도 매우 짧았다. 시범사업 시기에 자활지원센터는 민간 조직으

로서 취로사업을 수탁‧운영 했었다. 이를 특별취로사업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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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프로그램들은 후일 자활근로사업으로 발전되었다.

3) 민․관 파트너십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정치적 민주화의 확산과 함께 1990년을 전후한 동구 사

회주의권의 붕괴는 한국에서 사회운동의 새로운 시기를 열었다. 각 운동 진영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렇듯 변화된 시대상황 속에서 주민운

동, 지역운동, 빈민운동 진영 역시 그 동안 외곽에서 견제와 비판, 대항의 대상으

로 여겼던 제도권영역으로의 적극적인 진입을 시도하게 되었다. 특히 빈민운동

진영에서는 1980년대 주요사업이었던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철거투쟁위주의 운동

범위에서 벗어나 지역주민들의 생활, 문화, 교육 영역에서 다양한 사업을 펼치게

되었다(권춘택, 1997).

이들 진영이 벌여왔던 교육, 탁아, 문화운동은 비록 제도권처럼 ‘복지’라는 이름

은 붙이지 않았지만 훨씬 더 주민과 가까운 곳에서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기반

을 조성해 왔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월계동(일꾼두레회), 상계동(실과 바늘), 봉

천동(나섬건설) 등에서는 생산공동체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1장에서 살펴본 것

처럼 이들이 초기 자활지원센터의 사업수행 주체가 되었다.

초기 자활지원센터들은 비제도권 영역에서 활동해왔으며, 비교적 정부와 대립

적 입장을 견지해 왔던 민간단체들이 상당수 지정되었다. 이들은 제도권으로 진

입하기 위한 과정에서 정부 영역24)과 지속적인 대화와 설득의 입장을 견지했다.

정부 역시 민간의 경험과 전문성이 필요했으므로 민간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였다.

그 결과 시범사업시기에는 민․관이 매우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사업을 수

행했었다.25)

24) 정부를 포함해 정부의 주요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학계․전문가를 포함해서 사용한 개념

이다.

25) 당시의 협력관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이 자활공동체이다. 자활공동체에서 ‘자활’은 정부의

자활보호로부터, ‘공동체’는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의 공동체운동으로부터 끌어와 만들어진 용어이

다. 정부가 ‘공동체’ 개념을 수용했다는 것은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의 활동 방법론을 수용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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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초창기의 협력관계는 자활지원센터의 확대와 함께 변화하기 시작한다.

특히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 이후 자활사업이 뚜렷한 제도적 기반을 갖게 되

면서 이 관계는 크게 변화한다. 정부는 체계적인 관리를 생각하게 되고, 반면에

자활지원센터들은 제도권 사업이 갖는 사무행정에 대한 부담, 까다로운 회계처리,

사업성과의 개량․가시적 성과 요구들로 인해 애로를 겪게 된다. 한편 정부는 자

활후견기관 관리를 위한 제 규정의 도입과, 실무자들의 임금동결, 사업성과 평가

에 따른 규모별 지원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초기의 긴밀한 민․관 파트너십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였다(김승오, 2001).

것이다. 그리고 ‘자활’이라는 개념을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이 수용했다는 것은 의도와는 무관하게

빈곤에 대한 정부의 담론을 수용하게 될 가능성이 큼을 의미한다(김수영,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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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기 자활지원센터 지정 및 운영현황

1) 지정 현황

국민복지기획단의 기본구상에서 생산적 복지시스템은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에서

추진해온 사례를 중심으로 설계가 되었다. 따라서 초기 자활지원센터들은 생산공

동체운동에서부터 출발한 빈민운동진영의 다양한 경험과 사례를 가지고 있는 민

간 조직들을 중심으로 지정 되었다.

1차 년도에는 생산공동체운동 분야에서 경험이 있는 종교단체26) 위주로 지정되

었으나, 2차 년도는 사회복지법인들이 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3차 년도 이후에

는 사단법인 및 시민단체 등까지 다양한 민간 조직들이 지정되었다. 1999년까지

지정된 자활지원센터를 운영주체별로 살펴보면 종교단체 9개소, 학교법인 1개소,

사단법인 2개소, 사회복지법인 7개소, 시민사회단체 1개소 등 주로 제도권 영역

밖에서 활동하던 민간단체들이 지정되었다.

이처럼 제도권 밖에서 활동하던 민간 조직들이 초기 자활지원센터의 주류로 자

리 잡으면서 초기 자활사업은 사회운동으로서의 지향이 강한 모습을 보였다. 지

금까지도 회자되는 ‘자활운동’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자활

사업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이 종종 발생하는 것도 시범사업 시기에 형성된 문

화가 현재까지 전승되기 때문이다. 결국 시범사업 시기에 주로 지정된 자활지원

센터들에게서 형성된 활동 방식과 지향점은 자활사업의 모형과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이후의 자활사업에도 커다란 영

향을 미치게 된다.

26) 저소득밀집지역에서 근로능력 있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생산공동체 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

던 대한성공회의 나눔의 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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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개소) 지 역 운영 법인(단체) 대표자 유형

1996(5개)

서울 관악 (재) 대한성공회 봉천동나눔의집 송경용 종교단체서울 노원 (재) 대한성공회 상계동나눔의집 김홍일 종교단체서울 마포 (학) 이화학당 성산종합사회복지관 김성이 학교법인인천 동구 (재) 대한성공회 송림동나눔의집 조흥식 종교단체대전 동구 (재) 대한성공회 성남동나눔의집 유낙준 종교단체

1997(5개)

서울 성북 (재) 대한성공회 성북나눔의집 이재복 종교단체부산 사상 (사회) 청십자두레마을 모라종합사회복지관 박영규 사회복지법인대구 북구 (사회) 생명의전화 산격종합사회복지관 김선왕 사회복지법인광주 남구 (사회) 인애동산 인애종합사회복지관 김인제 사회복지법인경기 광명 (사회) 한국복지재단 하안종합사회복지관 김승의 사회복지법인

1998(7개)

부산 동구 (사회) 한국복지재단 동구종합사회복지관 김상도 사회복지법인대구 남구 (사회) 불교사회복지회 김경도 종교단체울산 남구 (사단) YMCA 남구종합사회복지관 김용호 사단법인울산 북구 참여자치연대 황미영 시민단체충남 천안 (재) 대한성공회 쌍용나눔의집 문상윤 종교단체전북 전주 (재) 대한성공회 전주교회 허종현 종교단체전남 해남 (사회) 두성재단 해남종합사회복지관 서정복 사회복지법인

1999(3개)

경기 성남 (사단) 한국참사랑복지회 김창배 사단법인강원 태백 (사회) 태백사회복지회 백윤구 사회복지법인경북 포항 (사회) 열린가람 김지찬 종교단체

20개소

- 종교단체 9 개소 (대한성공회 7, 불교단체 운영 사회복지법인 2) ※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 포함- 학교법인 1개소 (이화학당)- 사단법인 2개소 (YMCA, 한국참사랑복지회), - 기타 사회복지법인 7개소 (사회복지관 6, 태백사회복지회)- 시민단체 1개소 (참여자치연대)

<표 2-2> 초기(1996~1999) 자활지원센터 지정 현황

자료 : 보건복지부 생활보호과 내부자료, 2000. 2.

2) 인력 및 예산

시범사업 시기에 자활지원센터에 대한 예산은 센터 당 연간 9,600만원(월평균

800만원)내외로 지원되었으며, 1999년에는 예산이 8,000만원으로 줄어드는 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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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기도 했다. 시범 사업 첫해인 1996년에는 국고보조금만으로 지원되었으나, 이후

부터는 국고와 지방비의 매칭(matching)27)으로 교부되었다.

인력은 4명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사회복지사 4호봉 인건비를 준용하여 예산을

책정하였다. 그러나 이 기준은 정부의 예산책정 기준일 뿐 인건비의 지급 기준을

자활지원센터에 강제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각 자활지원센터들은 자체적으로

인건비 지급기준을 정하여 지급했으며, 예산의 범위 내에서 4~7명까지 자율적으

로 인력을 채용하였다. 인력채용 기준(사회복지사 유자격자 등)은 별도로 정한 바

없었으며, 직제 및 보수에 대한 규정도 없었다.

연도 1996 1997 1998 1999 2000금액 104,000천원 94,700천원 96,000천원 80,000천원 105,000천원

<표 2-3> 자활지원센터 당 연간 보조금 규모

3) 기관의 법적근거 및 명칭의 변화

1996년 처음 자활지원센터가 시범 운영 될 때는 법적인 근거가 없이 시작되었

으며, ‘자활지원센터’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997년 11월에 생활보호법

이 개정되면서 동법 제11조 2항을 통해 ‘자활후견기관’의 지정․운영에 대한 법적

근거를 갖춤과 동시에 명칭이 변경 되었다.

생활보호법이 개정되면서 생활보호법 및 보건복지부의 생활보호사업안내에서

‘자활후견기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선현장에서는 1999년까지

자활지원센터라는 명칭이 계속 사용되었다. 자활지원센터라는 명칭은 2000년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시행과 함께 ‘○○자활후견기관’이라는 명칭으로 개정(개명)

하여 사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자활지원센터’라는 명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

지게 되었다.

27) 서울은 국비와 지방비가 50:50이었으며, 그 외 시․도는 70:30이었다.

Page 21: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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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소년자활지원관 시범운영

1997년에 빈곤의 되물림을 예방하기 위한 취지로 청소년의 자립․자활을 지원

하기 위한 청소년자활지원관 10개소가 시범적으로 운영되었다. 처음 명칭은 청소

년 교실이었다. 그러나 1999년 자활지원센터 직원 워크숍에서 청소년 교실의 정

체성을 찾기 위한 과제로 ‘청소년자립지원센터’를 제시하고 이러한 견해들이 국민

기초생활보장법에 청소년자활지원관이라는 명칭으로 수용된다.

청소년자활지원관은 자활지원센터의 부설기관의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예산은

개소 당 연간 약 4,400만원이 지원되었다. 인력은 평균 2명을 채용하였으며, 채용

기준은 별도 정한 바 없었다.

초기에는 개별 자활지원센터의 모법인(단체)에서 운영하던 공부방, 방과 후 교

실, 청소년 프로그램 위주의 사업을 단순하게 이관하여 시행하였다. 그러나 정부

측으로부터 사업 효과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받음과 동시에, 청소년자활지원관 스

스로도 새로운 프로그램의 개발 필요성이 대두되어 점차 다양하고 체계적인 사업

을 실시하게 되었다.

- 42 -

4. 내부 조직 및 커뮤니티

1) 협회의 설립

자활사업이 도입될 수 있도록 주도적 역할을 했던 K자활지원센터는 대정부, 정

책생산, 소통 등 여러 분야에서 초기 자활지원센터들의 중심으로서 역할을 했었

다. 1996년 당시 5개 센터에 불과했던 자활센터는 정보의 교류 및 자체 역량강화

를 위해 보다 긴밀한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 K자활지원센터의 총

괄기획실장이던 L씨는 ‘자활지원센터협회’의 설립을 제안했고 그 해 12월 협회설

립을 준비하기 위한 자활센터협회(준)사무국을 구성했다. 그러나 별도의 사무공간

이나 인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평소 업무에 협회설립준비를 위한 업무를 덧붙

였다. 일종의 자원봉사였던 셈이다.

연 월 주 요 연 혁

1995.

1996. 1997.

1998.1999.2000.

3.

6.12. 6.

9~11.9~11. 2.10.7~11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저소득층의 실태변화와 정책과제> 연구를 통한 자활지원센터 필요성 제기

국민복지 기획단, 자활지원센터 설립 제안(“저소득층의 실태변화와 정책과제”) 자활지원센터 출범(시범 5개소 실시) 자활지원센터협회(준) 사무국 운영 자활지원센터 5개소 추가지정 (총 10개소 시범운영) 자활지원센터 협회 발족(협회장 : 송경용) 전국 청소년자활지원관 10개 지정 자활지원센터 7개소 추가 지정(총 17개소) 자활지원센터 3개소 추가 지정(총 20개소) 사단법인 한국자활후견기관협회 설립 총회(협회장 송경용)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및 자활후견기관으로 명칭 변경 전국 청소년자활지원관 10개 추가 지정  자활후견기관 50개소 추가 지정(총 70개소) (협회 홈페이지에는 46개소로

표시)

<표 2-4> 시범운영 시기의 자활센터협회 주요 연혁

Page 22: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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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6월에 5개소의 자활센터가 추가 지정되면서, 설립총회를 거쳐 자활지원센

터협회가 설립되었다.28) 설립 당시에는 법인격을 갖추지 않는 임의단체의 성격을

지녔으며, 사무실은 K자활센터의 일부 공간을 활용하였다. 1998년에 7개소가 추가

지정되어 자활센터가 17개소가 되면서 자활지원센터협회의 산파역할을 하면서 사

무국장을 겸임했던 L씨가 물러나고 자활지원센터협회는 상근 사무국장 체제로 변

모했다.

2) 협회의 주요 역할

초창기 자활지원센터협회는 회원기관 간 사업운영에 대한 노하우를 교류하는

것에 주력하였다. 자활지원센터의 주요 사업이 부업장 및 공동작업장 위주였는데,

20개 지역자활센터 중 생산공동체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곳은 4~5개의 센터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자활지원센터는 협동조합운동을 하는 조직으로

공유가 되었다.29) 그래서 협회는 이들의 경험이 전체로 공유될 수 있도록 정기적

인 워크샵을 개최하였으며, 신입실무자 및 실장단을 위한 교육이 병행되었다.

또한 생산적․예방적 차원의 자활사업에 대한 경험이 없기는 정부도 마찬가지

였다. 협회에서는 수많은 정책보고서와 제안서를 만들어 정부에 제안하였으며 정

부도 적극적으로 현장의 의견을 수렴하였다.30)

IMF 시기에는 기존의 생산공동체 방식에서 벗어나 사회적일자리, 일용직 근로

자를 위한 쉼터, 제3섹터 및 보호된 시장의 진출 등 다양한 방식의 자활사업이

시도 되었다. 심지어 일부 자활지원센터는 노숙인의 자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31) 협회는 회원 기관 간 토론과 학습을 통하여 이런 사업들이

28) 필자는 자활지원센터협회가 1997년에 정식으로 설립되었으므로, 일부에서 총회 또는 회장의

차수를 말할 때 사단법인 설립 이후부터 계수하는 것에 대하여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다.

29)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인식은 외환위기 이후 공공근로의 대규모 실시와 함께 사회적 일자리라는

개념이 제기되면서 차츰 희미해진다.

30) 당시에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바뀔 때마다 자활지원센터 현장을 방문하여 의견을 수렴하고 격려

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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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되고 실현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3) 실업운동조직과 연대

외환위기 이후 각 지역에서는 자발적으로 실업운동조직들이 결성된다. 이들은

외환위기와 함께 범국민운동 차원에서 조직된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현 ‘함께

일하는 재단’)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32) 지자체의 공공근로사업을 위탁받으면

서 활동을 전개했다. 한때 100여개가 넘을 정도로 크게 조직된 전국의 실업운동

조직들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 이후 상당수33)가 자활후견기관으로 지정된다.

이들이 공공근로민간위탁사업을 수행하면서 얻은 경험은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자활근로사업이 시행될 때 많은 자활지원센터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1) 대전, 천안, 전주의 자활지원센터들이 그랬다.

32) <부표 2>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사업지원규모(1998-2002년)

(단위: 건, 연명, 백만원)

사업별 사업건수

금액 지원인원및 건수 사업기간지원결정액 집행액

기획사업

실직가정돕기범국민결연사업 1(191) 24,547 22,738 258,785 98/11~99/12실업자종합지원센터 1(4) 957 785 11,852 99/02~00/04실업극복지원센터 1(100) 17,095 16,324 514,998 00/01~01/03

장기실업자심층추적상담사업 1(16) 880 759 12,266 01/09~02/08기타 실직노숙자지원사업 등 22(50) 2,630 1,625 84,101 수시

소계 26 46,109 43,232 882.002

제안공모사업

1차 실직여성겨울나기 등 23 2,606 2,484 64,575 98/10~99/092차 실직가정 교육지도 및 무료급식 등 63 12,746 12,079 486,253 98/12~99/123차 사랑의 도시락 등 83 8,096 6,580 277,827 99/04~99/124차 저임금인력 해외취업 2 503 475 515 99/12~00/065차 실직가정자녀 무료학습지원 등 69 6,193 5,519 282,971 00/01~00/12자활공동체 지원사업 20 999 9556차 실직가정 긴급구호사업 1(77) 4,192 4,032 18,442 01/01~01/037차 실업자일자리창출사업 56 5,387 5,015 202,841 01/07~01/06

실직가정 생활안정지원 47 2,745 1,924 01/08~02/078차 무료간병도우미지원사업 등 41 2,594 400 추진중 02/07~03/06소계 405 46,061 29,463 1,333,424

계 431 92,170 81,694 2,215,426주: 건수 중 괄호는 참여단체수임.

자료: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2002: 417~418) 참조해서 재구성. 김정원(2008)에서 인용.

33) 2000년 신규로 지정된 자활후견기관 50개소 중 실업운동단체가 14개였다(2001. 3 자활지원센

터협회 내부자료). 참고로 이때부터 자활지원센터 대신 자활후견기관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

작했다.

Page 23: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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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실업운동조직 출신의 자활지원센터들은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에 소속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활지원센터협회는 자연스럽게 실업운동조직과 연대를 할

수 있었으며, 자활지원센터 내 동일사업간 공동사업을 모색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었다.

4) 시대를 앞서 갔던 커뮤니티 도구 (온라인 게시판 ; BBS)

당시 협회에서는 전국에 산개해 있는 회원기관들의 효율적인 의사소통과, 지식

및 정보를 공유․관리하기 위한 도구로서 온라인 게시판을 활용하였다. 협회는

‘PC통신 참세상’에 사이버 공간을 마련하였으며, 1998년 PC통신참세상이 진보네

트워크로 개편되면서 CUG34)를 개설하였다. CUG 개설을 계기로 온라인 커뮤니

티는 본격적으로 활성화35)되었다. BBS 형태의 CUG는 2000년 5월 자활지원센터

협회 홈페이지가 개설되기까지 사용되었다.

<그림 2-1>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 CUG

1997년에는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 유니텔 등 상업용 BBS36) 등이 이제 막

뿌리를 내리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는 1994년에 상용서비스(ISP ; Internet

34) WEB에서 승인된 회원제로 운영되는 홈페이지와 유사하다. 전자우편, 전자회의, 게시판 등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고객관리와 자료실로 이용하기도 한다.

35) 1999년 말까지 전자게시판 및 파일자료실의 연번호가 1,000개를 넘었었다.

36) 전자게시판. PC통신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용자들이 컴퓨터를 통해 정보와 편지를 교환하고 대

화하거나 비상업적인 프로그램을 서로 공유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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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vice Provider)가 도입되었고, WWW(World Wide Web) 서비스는 1998년 이후

에야 초고속통신망의 등장과 함께 활성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 시절의

온라인 커뮤니티는 매우 선진적인 것이었다.

5) 일본노동자협동조합연합회와의 교류

1990년대 생산공동체운동을 하던 민간단체들은 수십년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

고 있던 일본노동자협동조합과 교류를 하였다. 자활지원센터협회(준)에서는 1997

년 일본노동자협동조합연합회를 방문하여 이들의 사업방식과 경험들을 배우게 되

었다. 당시 일본의 노동자협동조합들은 특별한 기술이 없고 연령이 높은 층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업에 주력하고 있었으며 각 사업단들이 상당한 규모로 안

정된 운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자활지원센터에게 일본의 사

례는 간접경험을 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였다.

1997년의 협회 방문단은 일본노협의 조직, 지역사업단의 마케팅, 지자체와 협력

방법, 사업아이템 발굴 과정 등을 견학하였으며, 1999년의 2차 방문 이후부터는

청소 및 빌딩관리 등 기술적인 견학을 병행하였다. 현재 자활사업의 주요 업종인

청소와 간병은 일본 노동자협동조합과의 교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후 일

본과의 교류는 2003년까지 격년으로 지속되었다.37)

37) <참고>일본노동자협동조합의 주요업종(1996년 현재) ①빌딩의 종합관리, 개수, 개축, 병원관련

업무, ②생활협동조합 물류센터, ③노인급식 등의 사회적 서비스업무, ④공원관리, 도시녹화, 산

림보전 업무, ⑤쓰레기처리, 자원재생업무, ⑥농업노동, 농산물생산, 물류업무, ⑦토목, 건축업무.

Page 24: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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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주요 사업

1) 시범사업 초기 (1996~1998 상반기)

시범사업 초기는 생산공동체(공동작업장)38) 위주의 사업들이 진행되었다. 이는

자활지원제도를 설계할 때 민간진영의 ‘생산공동체를 통한 탈빈곤 노력’이 주요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 저소득층 밀집 지역에 설치한 공동부업장, 일용

직을 위한 취업알선센터 등이 소규모 운영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생산공동체 경험이 있던 일부 자활지원센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민을 모집(조직)하거나 사업아이템을 발굴하는 수준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

다. 2차년도인 1997년부터 대전동구(봉제공동체), 부산사상(청소공동체) 등 일부

기관에서 생산공동체 방식의 사업을 시작했으나, 대부분 사업들은 사업규모면에

서 부업장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사업 분야 역시 저소득층의 직업이력 및

학습능력 등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건설․봉제․청소 등 노동집약적 산업에 머

무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이러한 상황에 대한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업시행 후 2

년밖에 되지 않았던 점이다. 둘째, 삼미▪기아 등 대기업의 연쇄부도와 은행의 부

실채권 및 경상수지 적자의 증가 등 본격적으로 국가차원의 경제위기가 발생했던

것도 원인이다. 셋째, 별도의 자금지원 없이 인력에만 의존해서 생산공동체를 만

들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넷째, 후발 주자의 경험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1998년 3월 자활지원센터협회(준)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고민 끝에 정부에

새로운 방식의 자활지원프로그램으로서 특별취로사업39)의 도입을 제안하였다.

당시 자활지원센터에서 제안한 특별취로사업은 과거의 취로사업을 개선하여 생산

38) 생산공동체적 방식으로 조직된 이 사업들을 보건복지부는 사업지침을 비롯한 공식문서에서 ‘공

동작업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었다.

39) 자활지원센터에서는 일용직 근로자를 위한 쉼터와 함께 이미 폐지된 취로사업 제도를 발전시켜

‘근로능력이 있는 저소득층들이 탈빈곤을 위한 자활프로그램(공동작업장 또는 생산공동체)에 참

여할 경우 최소한의 근로수당을 지급’하는 제도를 구상하여 정부에게 요구하였다(이문국,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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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명 주요 사업 현황

1차년도(1996)

서울 관악*

공동부업장(신림10동, 7동, 장애인), 푸른환경 코리아(청소용역협동조합), 비젼(건설일용직협동조합), 나눔물산(봉제협동조합. 자체브랜드 ‘겨레옷 솜누리’ 생산), 생업자금융자, 취업알선

서울 노원*

실과 바늘(봉제협동조합), 우리품새(봉제협동조합), 늘푸른사람들(청소용역협동조합), 생업자금융자, 지역조사, 주민교육(임대아파트 순회 창업설명회, 임대아파트 주민교육) 취업알선 및 전산망 구축

서울 마포*

마포푸른환경(청소용역공동체), 그림같은 집(건축공동체), 아름다운세탁나라(공동작업장), 사라미(봉제공동체), 약손엄마회(간병인 공동체), 주민교육(실직자직업 훈련 중심), 취업알선

인천 동구*

풀비(도배용역), 다산건설(건설사업단), 공동작업장(자동차배선, 돗자리가공), 부업사업, 창업지도, 기술교육(산후조리인, 텔레마케터, 디자인 등), 취업알선 및 정보제공

대전 동구*

청소하기 좋은날(청소용역공동체), 성원건축(건설공동체), 간병인 공동체, 공동작업장(삼보식품유통, 솜씨 공동체), 공동부업장, 생업자금융자알선, 고용지원(일꾼쉼터 운영), 지역사업(실업 관련 사업), 지역공동체사업(효행상 시상, 무료급식 등)

<표 2-5> 시범사업 초기 전국자활지원센터 사업현황(1998년 말 현재)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준비기간(직업능력 개발, 판로개척 등에 필요한 견습 기간)

과 기초자금(손익분기점에 도달할 때까지의 운영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또한 특별취로사업은 생산공동체를 준비하기 위한 견습과정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비영리 부문에서 지역사회 내 유용한 일자리 창출로서 의미를

갖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후일 사회적 일자리, 사회적 기업 등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유의미한 시발점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시사점은 생산공동체를 운영한 일부 기관들의 경험이 신규 자활지원

센터에게 전파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신규 기관(또는 경험이 없는 기관)들이 생

산공동체의 개념을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위한 구체적 능력까지 갖출 수 없

었기 때문이다. 즉 타인의 경험을 숙지했다는 것은 참고일 뿐 내 것으로 체화한

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자활지원센터 이전의 민간진영들은 단순히 의욕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구성원 조직화 과정, 지역(주민)과의 밀접한 결합력, 헌신과

모험 등 그들만의 특별한 방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 모형을 보편적으로 확

산․적용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 신중했어야 했다.

Page 25: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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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년도(1997)

서울 성북*

두레건축(건설일용직협동조합), 늘푸른사람들(청소용역협동조합), 음식물찌거기 재활용사업(특별취로사업), 지역사업(성북복지포럼 7회 개최), 성북실업자 한마당 개최, 취업정보 제공 및 취업알선 상담

부산 사상*

다솔용역(청소용역 협동조합), 창조하는 사람들(집수리 건축팀), 공동부업장(통발제작, 전자기기부품조립), 부업설명회, 주민교육(주민한마당-자활인의 밤, 부업공동체 참여 주민교육, 용역사업 참여주민 교육 등), 취업정보 제공 및 취업알선 상담, 생업자금융자 상담 및 알선

대구 북구*

녹색마을(건설용역 공동체), 풀비(도배용역공동체), 공동부업장(종이가방, 섬유제품, 기획사제품 하청작업), 공동작업장(건축자재조립, 수출용 핀 제작),

광주 남구*

우리드리(건설일용직협동조합), 창업진원(중고품재활용판매센터, 재활용품 하치장), 공동작업장(두부공장), 생업자금융자 알선, 주민상담(가정방문 및 내방상담), 주민직업교육(간병인, 컴퓨터보수교육, 요리자활교육), 신용협동조합, 취업정보 제공 및 취업알선,

경기 광명*

참사랑간병인회(용역사업), 세상꾸미기(도배사업단), 베이비시터(아동보육), 공동부업장(1작업장 : 수첩제작, 2작업장 : 전자부품조립, 구두갑피제작), 창업지원, 고용지원사업(직업교육 등)

3차년도(1998)

부산 동구

공동작업장, 부업(가내부업, 공동부업장 등), 주민교육(자활보도교육, 조리사자격증, 도배교육, 미용사자격증 등), 구인 구직 상담 및 알선

대구 남구

일구건축(건설사업단), 일구보부상(재활용 공동판매장), 창업지원(일구구구치킨센터), 주민상담(모자세대, 부자세대 등), 지역사업(모자세대 간담회, 쉼터이용자 간담회 등), 생업자금융자 알선, 취업상담 및 알선

울산 남구

꿀벌사업단(청소, 주방일, 산모조리, 유아돌보기 사업 등), 지역조사(지역주민 욕구조사), 실직가정 결연사업(실업극복운동본부와 연계), 취업상담 및 알선

울산 북구

늘푸른환경(청소용역공동체),창업지원(녹색가게. 북구재활용센터)지역사업(실직가정 방문상담, 결연사업), 주민교육(정리해고 주민 대상으로 생산협동조합교육), 고용지원사업

전북전주

청소용역사업, 공동부업장(1작업장 : 실크인쇄, 2작업장 : 국물용 멸치 티백포장, 쓰레기침출수 응결제물방망이 포장), 지역조사(서학동 주민의 사회경제적 실태조사), 고용지원사업(고용지원상담소운영, 직업훈련프로그램 정보제공)

충남 천안

성노건축(건설일용직협동조합), 공동부업장(전자부품조립, 봉제하청), 창업지원, 지역사업(저소득실직가정 발굴 및 후원, 실직 노숙자 쉼터운영), 취업상담 및 알선

전남 해남

용역사업(영농단지 및 집하장 일자리 연결), 유통사업(농산물 영세 판매자와 도시판매망 연결), 주민상담, 지역조사(지역주민 150명 면접조사), 취업상담 및 알선

주 : * 표시는 부설 청소년자활지원관을 운영하고 있는 센터

자료 : 이정운(1999)에서 인용.

2) 시범사업 후반기 (1998 하반기 ~ 2000상반기)

① 특별취로사업

열악한 사업 환경과 경험부족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초기 자활지

- 50 -

기관명 사 업 명관악 무공해비누만들기/ 복지시설지원사업/ 경로당 등 청소사업/ 세탁사업/ 환경정비사업/ 지역복지도우미사업/ 무료간병인/ 공공시설환경정비/ 결연사업도우미노원 임대아파트무료청소사업/ 생보자 가정환경개선사업/ 무료간병인사업/ 무료간병인/ 무료세탁지원/ 무료도배사업마포 공공시설청소․소독/ 간병사업/ 무료세탁/ 무료간식제공/ 제과제빵사업/ 도시락제공사업/ 간병인사업인천 청소 및 정비/ 간병인사업/ 노숙자실태조사사업/ 사회복지관청소/ 간병인사업/ 집수리사업/도배사업/거리청소/ 복지시설지원사업

대전동구음식물쓰레기재활용/ 헌옷재활용사업/ 가정도우미사업/ 후드뱅크지원사업/ 농수산물시장청소/ 자원봉사자관리보조사업/ 간병인사업/ 영세기업체 협동조합지원사업/ 도농직거래사업/ 지역자원조사/ 후드뱅크사업지원/ 공공기관특수청소/ 고령자생산협동조합/ 전문청소사업/ 컴퓨터수리/ 고령자생산공동체사업/ 음식물재활용/ 장애우제과제빵사업/ 자활공동체지원

부산동구 의류재활용사업/ 환경정비사업/ 장애인공동작업장/ 도배지원사업/ 사회복지시설업무지원/ 농촌인력지원사업/ 의류완성사업(은빛사업단)성북 헌옷재활용사업/ 음식물찌꺼기재활용사업/ 간병인사업/ 컴퓨터재활용사업/ 청소도우미사업/ 집수리사업/ 청소년재활용품사업광명 간병인사업/ 파지사업/ 베이비시터사업/ 홈케어사업/ 예술병사업/ 파지사업/ 세차사업/환경개선사업/ 요식업사업/ 제과제빵사업/ 콩나물재배사업

대구남구 집수리사업/ 간병인파견사업/ 헌옷재활용사업/ 특수청소사업/ 간병가사도우미사업/ 청소용역/ 주거환경개선사업대구북구 풀비사업(무료도배)/ 녹색마을(수리 및 점검)/ 소망사업단(무료간병)/ 물레사업단(헌옷재활용)/ 블루넷사업단(집수리홍보)/ 집수리사업/ 헌옷재활용사업/ 무료간병인사업/ 잔디생산사업

천안 재활용사업/ 무공해먹거리사업/ 집수리조합/ 복지시설지원/ 간병인사업/ 조사사업/ 청소대행업/ 고용지원센터/ 무공해먹거리생산/ 헌옷재활용/ 공동부업장

<표 2-6> 시범 자활지원센터 후반기(1998.7~2000.6) 특별취로사업 현황>

원센터들은 특별취로사업의 도입으로 자활사업이 활성화되는 일대 전기를 맞게

되었다. 특별취로사업을 활용하여 생산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

었으며, 시장영역(제1섹터)뿐만 아니라 새로운 영역(제3섹터)에서 유용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계기와 다양한 사업 아이템들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자활프로그램 측면에서 볼 때 특별취로사업은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자활근로

사업과 자활공동체로 발전되었다. 구체적으로 영리형 사업은 시장형자활근로․자

활공동체․사회적기업의 모델이 되었으며, 비영리형 사업은 공익형자활근로․사

회적일자리․사회적기업의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Page 26: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 51 -

울산남구 간병인사업/ 재가봉사사업/ 도배페인트사업/ 물탱크청소/ 임대아파트청소/ 재활용품수거/ 농한기채소재배사업/ 컴퓨터재활용사업/ 헌옷재활용/ 재생비누만들기/ 특수청소울산북구 청소용역사업/ 도배사업/ 음식물재활용사업/ 컴퓨터가전제품재활용/ 페지헌옷재활용사업/ 폐자원재활용/ 헌옷재활용/ 무공해비누/ 음식물재활용시범농장/ 봉제

포항 건축개보수사업/ 간병인사업/ 가사도우미/ 김치배달서비스태백 소외가정지원사업/ 나무나라자활지원사업해남 도배지원사업/ 재활용사업/ 청소사업/등산로정비사업/ 벌초사업/ 수해복구 및 방역사업/ 도배사업/ 재활용의류사업/ 특수청소대행

광주남구 무등산가꾸기/ 재활용비누제작/ 독거노인간병사업/ 무료간병인사업/ 도배사업/ 의류재활용사업부산사상 공원변환경정비/ 학교도서관환경정비/ 건물개보수/ 간병인파견사업/ 도배사업/ 환경정비사업/ 무료간병인사업/ 도배사업/ 집수리사업

전주 무료집수리/ 간병인사업/ 헌옷헌신발재활용/ 음식물재활용사업/ 폐목재활용/ 음식물재활용/성남 간병인사업

자료 : 김승오(2000)에서 인용.

② 자활공동체(공동작업장)

자활사업이 민간진영의 생산공동체를 모델로 도입되었으나, 초기부터 사업이

활성화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업분야는 대부분 봉제, 청소, 건설, 재활용, 간병

등 노동집약적 산업에 집중되었다. 자활 대상자들의 학력, 연령, 직업이력, 자금조

달능력 등이 취약했기 때문에 단기간에 직업능력을 배양하여 시장에 진출하기 어

려웠다.

1996~1997년의 자활공동체 사업 부진과 달리, 1998년 하반기부터는 다양한 자

활공동체 사업단이 생겨났다.40) 이렇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는, 첫째, 자활지원센

터에게 생업자금융자 대상자를 선정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됨으로써 생업자금을

대출 받아 자활공동체 창업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금조달능력이 생겼고, 둘

째, 특별취로사업과 공공근로민간위탁사업이 시행되면서 판로개척 및 잉여금의

축적 등 사업기반조성기의 손실을 보전함으로써 지속가능성이 제고되었으며, 셋

째, 자활지원센터 내부의 활발한 정보교류와 경험의 공유, 넷째, 동일 직종끼리

40) 당시의 자활공동체와 지금의 자활공동체는 다르다. 당시는 지금처럼 자활공동체에 대해 일정한

요건을 제시하는 제도적 규정이 없었다.

- 52 -

연대41) 및 공동사업의 성과가 컸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시범사업과 기초생활보장제도와 비교해 볼 때, 시범사업기간의 자활공동체 활

성화가 자활지원센터 내부의 동력에 기인한 것이라면, 기초생활보장제도 이후의

양적성장은 5대표준화 사업의 시행 및 성과평가 등 정부주도로 추진된 것을 시사

점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업분야 시행센터 (사업체명)봉제 관악(나눔물산), 노원(실과 바늘, 우리품새), 대전(솜씨공동체), 성북(들

무새), 부산동구(MC어패럴)청소용역 관악(푸른환경), 노원(늘푸른사람들), 성북(늘푸른사람들), 울산북구(늘

푸른사람들), 부산사상(다솔용역)

건설관악(비젼, CNH), 노원(나눔건설), 마포(그림 같은 집), 성북(두레건축), 천안(성노건축), 부산사상(창조하는 사람들), 대구북구(녹색마을, 풀비), 대구남구(일구건축), 인천(다산건설)

헌옷재활용사업 성북(늘푸른마을), 울산북구(자린고비)음식물사업단 전주(되살림사업단), 성북(음식물재활용사업단)

일반재활용사업 관악(재활용센터), 광주남구(재활용센터)간병인 마포(약손엄마회), 노원(나눔간병인), 인천동구(한마음도우미), 광명(베

이비시터)세탁 마포(아름다운 세탁나라)

먹거리 마포(오곡나눔, 맛을 만드는 사람들), 천안(늘푸른식품)

<표 2-7> 시범 자활지원센터 후반기(1998.7~2000.6) 자활공동체 현황

자료 : 김승오(2000)에서 인용.

③ 생업자금 융자

생업자금은 저소득계층에게 소규모의 자금을 융자해줌으로써 생업의 기반을 조

성하는 동시에 자활자립 및 생활안정을 도모하는 취지로 자활지원센터 도입 이전

부터 시행되고 있었다. 원종욱 외(1999)에 따르면 ①생업자금을 융자받아서 사업

41) N자활지원센터의 청소자활공동체 ‘늘푸른 환경’은 소정의 설비투자가 필수적인 사업 인․허가권

을 다른 자활지원센터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사(지점)를 허용했다.

Page 27: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 53 -

에 성공한 비율은 13.3%(사업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이전보다 생활이 나아졌다고

조사된 가구는 17.7%), ② 생업자금을 창업(사업)에 사용한 경우는 72.5%(나머지

는 생활안정자금 등 타용도로 사용)로 조사되었다. 같은 책에서는 금융기관의 수

익성 평가를 통한 미시적 효율성은 높게 평가하였으나, 융자금을 창업지원에 국

한하여 정부입장의 비용․편익분석을 바탕으로 한 거시적 효율성은 낮게 평가하

였다.

자활사업 대상자의 특성상 자본조달능력이 취약할 뿐만 아니라, 자활지원센터

역시 비영리 조직의 특성상 별도의 사업자금을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자활지원

센터에서는 생업자금융자대상자 선정 권한을 공무원뿐만 아니라 자활지원센터에

게도 부여해줄 것을 정부에 제안하였다. 정부는 자활사업단 구성원에 한하여 자

활지원센터가 생업자금융자대상자를 선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생업자금융자대상

자를 선정할 수 있는 권한42)이 생김으로써 초기자본 투자가 불가피한 시장진입형

자활공동체에게 자금조달 방안이 생겼으며, 자활공동체 설립 및 활성화에 긍정적

으로 작용하였다. 지금처럼 마이크로크레디트가 활동하지 않았던 당시에 자활지

원센터가 생업자금융자대상자를 선정할 수 있었던 것은 사업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④ 공공근로민간위탁사업

외환위기로 인한 대량실업 대책43)의 한 방편으로 정부는 1998년부터 공공근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1998년 노동부에서 자치단체 정보화(호적 및 하수관리 전산화

등), 수도물 절수사업 등을 시행하였으며, 점차 행정자치부, 보건복지부, 농림부,

환경부 등으로 확대 시행되었다. 초기에는 부적격자 및 이중참여자, 형식적 근로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42) 2000년 하반기 기초생활보장제도 시행 후 생업자금융자대상자 선정 권한은 다시 없어졌다.

43) '98.3.26 개최된 제3차 경제대책조정회의에서 이기호 노동부장관이 보고한 실업문제 해결을 위

한 종합대책을 말한다.

- 54 -

구분 사업위탁 인력지원단체수 예산지원액 선발인원 단체수 지원인원

1999 177 10,637 5,364 1,901 14,8232000 515 11,220 5,896 3,073 12,5492001 132 5,092 2,455 1,756 9,9082002 113 4,181 2,453 1,048 3,768

2003 1/4 10 186 79 174 322

<표 2-8> 공공근로의 민간위탁 및 인력지원현황 (1998-2003년) (단위: 백만원, 명)

공공근로사업의 수요가 폭증하자 실업대책을 위한 별도의 인프라를 갖추지 못

한 정부로서는 1999년부터 공공근로사업을 민간에게 위탁하게 되었다.

주 : 분기별 실적을 합한 것으로 1999~2002년도의 연평균 실적을 구하기 위해서는 위의 수치에

1/4을 곱해야 함.

자료 : 행정자치부 지방재정과 내부자료.전병유 외(2003)에서 재인용.

공공근로사업을 수탁 받은 민간조직에서는 음식물 재활용, 숲 가꾸기, 저소득층

집 고치기, 복지간병 등 다양한 사업을 시행하였다. 이런 사업들은 당시 자활지원

센터가 특별취로사업에서 주로 실시하던 사업이었다. 즉, 자활지원센터는 공공근

로민간위탁사업을 수행하던 민간조직들에게 일종의 전형을 제시한 셈이다. 공공

근로민간위탁사업의 직접적인 성과로는 취업애로계층(또는 실직자)에게 소득이전

과 함께 근로기회를 부여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공공근로민간위탁사업의 또 다른 성과로는 민간단체들의 연대와 노력으로

지역사회 내 유용한 일자리가 개발되었으며, ‘사회적일자리’로 발전될 수 있는 시

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활지원센터 조직화 측면에서도 특별취로사업 외 공공

근로민간위탁을 병행하여 수행하거나, 실업단체들과 연대함으로써 조직의 안정화

및 사업 활성화의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Page 28: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 55 -

6. 소결 : 의욕과 열정으로 함께 만든 길

시범사업 시기의 자활사업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이들의 의욕 넘치

는 활동’이었다. 시범사업은 규격화가 이뤄지기 전이었으므로 다양한 가능성이 열

려 있었다. 가능성은 열정을 낳았고,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열정을 가지고 뚫고

나가던 시기였다.

사회환경적으로는 외환위기로 빈곤과 실업이 만연했고,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모금 등을 통해 국민들의 참여를 동원해내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제도를 만

들어내려 시도했다. 시범사업으로 출범한 자활지원센터는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

뿐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은 가운데 자활지원센터들은 협회를 설립하고 교류를 활

성화시키면서 협동조합적 방식의 조직(자활공동체)을 만들어 갔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방식의 일자리(사회적 일자리) 창출을 전파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우호적

인 연구자들이 등장하고 함께할 수 있었으며, 정부 또한 제법 우호적인 관계 속

에서 함께 해나갔다. 이러한 관계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과 함께 자활사업

이 제도화되는 과정까지 이어지고, 그 결과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의 물적 토대를

다지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 56 -

제3장

자활사업의 제도화 단계 : 근로연계복지의 출범

노대명 |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Page 29: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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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근로연계복지제도와 사회적 경제

우리사회에서 2000년 자활사업의 제도화는 근로연계복지의 성장과 관련해서 중

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한국판 근로연계복지제도를 특징짓는 구성요소였기

때문이다. 즉, 미국처럼 기초보장제도 수급자 중 근로능력자에게 근로의무를 조건

으로 부과하였지만,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강화하고 그 안에 사회적 경제의 요

소를 포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활사업이 처음부터 근

로연계복지제도의 성격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생산자협동조합 또

는 생산공동체 이념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는 제도화 이전에 존재하던 <자활지원

센터>의 조직구성과 사업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활사업의 제도화는 분명 근로연계복지제도를 지향하고 있었으며,

기존 자활사업을 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이전의 자활지원

센터가 도시의 저소득층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미취업자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인

하고 생산공동체를 설립하는데 초점을 두는 방식이었다면, 제도화 이후의 자활사

업은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중 미취업 근로능력자를 대상으로 취업 및 창업을

촉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점은 참여의 자율

성과 프로그램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제도화 이전의 자활사업은 자율성과 사

회적 경제로의 지향성이 강하였지만, 제도화 이후에는 타율성과 근로연계복지로

의 지향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자활사업 제도화의

특징으로 근로연계복지제도로서의 발전단계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또 다른 특징은 제도화 이전에 잠재되어 있던

사회적 경제에 대한 지향성이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이한 해석이 가능하

다. 한편으로 자활사업은 제도화 초기단계에서 사회적 경제로의 지향을 상실했다

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활사업의 양적 확대과정에서 사

회적 경제로의 도약에 필요한 토대를 구축했다는 평가 또한 가능하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 해석 중 후자의 해석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자 한다. 이를 간략하

- 58 -

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자활사업의 제도화는 사회적 경제의 맹아적 발전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

다. 첫째, 자활사업 제도화는 자활사업의 양적 확장을 통해 많은 비영리민간단체

를 사회적 경제로 인도하는데 매우 결정적인 매개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실제

로 2000년 이전 자활사업을 수행하는 비영리민간단체(지역자활지원센터)는 20개소

에 불과했지만, 2004년에는 242개소로 확장되었으며, 그곳에서 일하는 실무자도

약 2천 명으로 증가하였고, 사업참여자 또한 약 1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자

활사업이 사회적 경제로의 이행에 필요한 다양한 토대를 구축할 수 있는 최소한

의 물적 토대를 제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자활공동체 사업은 그 공과

에 대한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로크레디트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사회적 일자리나 사회적 기업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둘째,

자활사업의 제도화는 근로연계복지에 대한 비판적 경험을 통해 사회적 경제의 필

요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제도화가 갖는 사업운영의 경직성과

정부예산에 대한 의존성 증가 문제로 인해, 자활사업이 정부의 수급자 지원사업

에 대한 관리대행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사업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제도화 이전 비영리민간단체들이 지향했

던 자율성과 창의성, 그리고 지역사회 기반구축의 문제가 새롭게 관심의 대상으

로 부각되기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자활사업 제도화 국면을 특징짓는 근로연계복지와 사회적 경제의

내적 갈등과 변화과정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Page 30: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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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활사업 제도화의 토대로서의 기초생활보장제도

자활사업의 제도화는 1999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에서 그 출발점을 찾

을 수 있다. 그것은 그 이전에 존재하던 자활사업이 이 법의 제정을 통해 제도화

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활사업이 근로연계복지제도의 중

요한 구성부분으로 이어지게 된 것 또한 이를 계기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

서는 자활사업이 근로연계복지제도로 발전하게 된 과정을 다음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복지의 정치(welfare politics), 근로연계복지제도로의

특수성, 자활사업의 딜레마가 그것이다.

1) 복지정치에 있어 새로운 주체의 출현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함의와 관련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하

지만 여기서는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우리사회 <복지의 정치>에서 갖는 의미에 대

해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과정에서 다양한 이

해관계집단이 개입하는 새로운 형태의 복지정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1990년대 초반이후 빠르게 성장한 시민사회단체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다.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과정에서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의 역할이 매우 지

대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특히 기초생활보장제도 연대회의의 존재는

많은 시민단체들이 기초생활보장 제도를 법제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

여주는 중요한 논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기초생활보장제도

는 빈곤정책의 제도화 과정에서 정부 및 정치가의 영향력에 의존해 왔던 한국 복

지정치사에서 중요한 변화를 알리는 사건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비판적 관점에서 보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은 단순히 시민단체의 주

도적 역할로만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것은 복지정치의 보다 상위에서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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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힘 관계의 변화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첫째, 기초생활보장제도는 1993년 최초의 민선정부, 1997년의 수평적 정권교체

로 인해 가능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정권교체 과정에서 많은

재정이 수반되는 새로운 제도도입을 뒷받침할 강력한 정치세력이 전제되어 있음

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이 1998~1999년 우리사회의 대

표적 사회보장제도를 도입 또는 개편하였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실제로 국민

의 정부는 4대 사회보험의 도입 및 개편, 공공부조제도의 정비 등 각종 복지제도

를 개편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둘째,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은 외환위기라는 특수한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

다고 말할 수 있다. 외환위기는 지난 수십 년간의 고도성장이후 처음으로 맞이했

던 국가적 위기였다는 점에서 우리사회 전반에서 대규모 재정을 필요로 하는 복

지제도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실제로 1998년 여름 서울역에 출현했던 실직노숙자와 1999년 2/4분기 정점에 달

했던 실업률 등은 복지제도 도입을 정당화하는 현실여건이었던 것이다.

셋째, 외환위기 이후 국제금융기구들의 통제를 받던 정부입장에서 이들 기구의

정책방향 선회 또한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외환위기 직후 IMF가 우리

사회에 권고했던 주요정책은 주로 신자유주의적 탈규제와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

라는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각종 조치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1998

년 인도네시아의 각종 사회갈등은 경제 및 노동영역에서의 개혁을 위해서는 사회

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각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1998년 중반이후 IMF와

World Bank는 사회안전망 강화를 권고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러한 권고안은

1990년대 OECD와 IMF를 중심으로 제시되었던 저발전국 및 개발도상국 사회보장

제도 개편모델, 즉 공공부조제도 강화방안이었다. 이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

을 가능하게 했던 또 다른 요인이었던 셈이다.

넷째, 1999년 국민의 정부가 직면했던 각종 로비사건과 그로 인한 정치적 지지

Page 31: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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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하락문제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옷 로비 사건 등 각종 사건이 정권

에 대한 지지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이를 돌파하는 방법, 즉 전

통적으로 정부가 시도했던 정국돌파방안 중 하나로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되었

던 것이다.44)

이러한 측면을 감안할 때,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을 둘러싼 복지의 정치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시민단체 주도의 복지정치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제반 여건 속에서 주도적으로 제도를 발의하고 관철시키는데 시민단

체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우리사회에서 복지정치는 이러한 한

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이후의 복지정치에서도 여실히 확인되는

것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이후, 명실상부한 시민단체 주도의 법제화가 성공

한 사례를 찾기는 힘들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예산이 수반되지 않는 법안 등 파

급력이 작은 제도를 제외하고는 대규모 재정이 수반되는 대부분의 복지제도는 그

와 다른 메커니즘을 통해 제도화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복지정치에서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은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지만, 지속

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모델로 자리 잡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복지제도의 도입과 관련한 복지정치에서 여전히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는 청와대와 집권정당, 그리고 정부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청와대와 집권정당의 관계가 원만한 경우에는 집권정당이 각종 법안제출에 주도

적인 역할을 하게 되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청와대와 정부부처를 중심으로 법

안제출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정부입법은 점차 증가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복지정책의 제도화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각 정책영역을 담당하는 개별부처의 역할 외에도

예산을 관리하는 핵심부처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지난

수십 년간 형성되어 온 관료조직의 특성과 힘 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44)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울산발언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과정에서 어떠한 힘 관계가 주도

적으로 작용했는가를 보여주는 예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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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힘 관계에도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난 20년간 진행

된 민주화 과정에서 각종 제도도입에 개입하는 이해관계집단과 시민단체의 영향

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지난 수년간 정치권과 정부가 각

종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격렬한 사회적 갈등은 이미 정책결정의 환

경이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자활사업과의 관계에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공과

기초생활보장제도가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는 아

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1960년대 초반 일본의 생활보호법을

모방한 생활보호제도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제도로 개편한 것이라는 점에서, 빈

곤층에 대한 기초생활보장을 사회권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근로빈곤층

에 대한 소득보장을 규정하고 있는 최초의 공공부조제도라는 점에서, 보다 과학

적인 방법으로 빈곤층의 욕구를 측정하고 보장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첫째, 기초생활보장제도가 1960년대 제정된 생활보호제도를 대략 40년 만에 대

대적으로 개편하였다는 점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

서 한국 법제와 행정체계가 1990년대 이전까지 일본의 각종 법제를 모방하는 단

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참고로 불과 수년 전까지도 우리나라 대표적 행정도

시의 도시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일본 특정도시의 도시계획안을 모방했다는

비판은 이러한 잔재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정책의 수입과 모방이 현재 미

국의 정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큰 변화가 없다는 비판 또한 가

능할 것이다. 하지만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다양한 측면에서 새로운 혁신을 의미하

는 것이었다.45)

45) 이제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사회복지분야 연구자들이 한국의 기초생활보장제도와 자활사업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은 분명 격세지감이다. 그것은 사업의 공과를 넘어 기초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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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

둘째,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빈곤층에 대한 소득보장을 하나의 사회권(social

right)으로 정립하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생활보호제도가 빈곤층에

대한 소득보장과 관련해서 정부의 임의적 지원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빈곤층

은 자신의 생계가 힘들더라도 국가를 상대로 소득보장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법조문에 국민들의 청구권을 명시함으로

써 자산조사 및 기타 수급기준을 충족하는 빈곤층의 경우, 정부를 상대로 소득보

장을 요구할 수 있는 제도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이는 물론 공공부조제도가 갖는

한계, 즉 사회적 합의와 예산제약이라는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것

은 그 이전의 생활보호제도와 비교할 때, 놀라운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다.46)

셋째,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근로능력이 있는 빈곤층에 대한 소득보장, 특히 생계

급여를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생활보호제도와 중요한 차

이점을 나타내고 있다. 과거 생활보호제도는 빈곤층에 대한 소득보장에 소극적이

었으며, 근로능력자에 대해서는 생계급여를 지급하지 않았다. 거택보호대상과 자

활보호대상으로 구분된 집단 중 후자는 근로능력자이며, 취로사업 등에 참여할

수 있었고, 일부 현물급여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더욱이 사실상 근로능력이 없는

빈곤층 중 상당수도 이 제도를 통해 보호받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 비교할 때, 기

초생활보장제도는 근로능력이 있는 빈곤층이라도 생계급여를 비롯한 각종 소득보

장을 근로능력이 없는 빈곤층과 동일하게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갖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것이다.

물론 우리사회에서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초기 근로빈곤층에 대한 소득보장 문

보장제도와 자활사업이 동아시아 복지국가가 갖는 특수성에 대한 외국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

기 때문이다.

46) 우리사회에서 사회권을 둘러싼 논의는 지난 10년간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물론 최근 들어

그 논의가 다시 침체국면으로 접어드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소득보장권, 노동권, 주거권, 건강

권, 교육권 등에 대한 논의를 활발하게 함으로써, 자유권적 기본권이 갖는 한계를 보완하고 있

다. 그리고 사회권은 향후 우리 사회정책, 특히 사회보장정책이 주목해야 할 사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2008년 심포지움 자료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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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는 쉽사리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근로능력이

있는 빈곤층에 대한 소득보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근로빈

곤층에 대한 소득보장이 이들의 도덕적 해이를 야기하며, 노동시장에서 일하는

많은 저임금근로자와 비교할 때, 역차별의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다

행정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에서 근로빈곤층에 대한 소득보장이 시기상조라는 지적

또한 있었다. 그것은 근로빈곤층의 취업특성이 임시직과 일용직 중심으로 구성되

어 있다는 점에서 소득파악이 힘들며,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이들의 근로의지를 촉

진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근로능력

자에 대한 소득보장과 관련해서 한 가지 단서조항을 추가하게 된다. 그것은 근로

능력자 중 미취업자는 자활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소득보장을 한다는 것

이었다. 이것이 바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조건부과 규정이며, 한국 근로연계복지

제도의 특성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넷째,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생활보호제도와 비교할 때 빈곤층의 욕구파악과 지

원방식에 있어 과거에 비해 훨씬 체계적인 방법을 도입하였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가구규모별 최저생계비를 계측하고 보건복지부장관이 매년 말 공표하는

방식으로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을 위한 소득기준선을 설정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생활보호제도의 급여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충급여방식을 선택하고,

그것이 초래하는 근로유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근로소득공제 등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도입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제도시행과정에서는 원안으로부터의 후퇴가

있었다. 특히 근로소득공제제도를 내실화하지 못했다는 점은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근로연계복지제도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실제로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제도시행이후 불과 1~2년 뒤부터 다양한 비판에 노

출되게 된다. 그것은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선정기준 중 부양의무자 기준의

적절성 문제, 통합급여체계의 문제, 근로빈곤층 수급자의 복지의존성 문제, 자활

사업과의 충돌 문제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다는 점

Page 33: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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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자와 정책결정자들이 합의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하

지만 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더라도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우리사회에서 근로빈곤

층에 대한 소득보장을 강화하고, 한국판 근로연계복지제도를 정초하였다는 점은

중요한 의의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3) 근로연계복지의 특수한 형태로서의 자활사업

자활사업은 기초생활보장제도와의 관계 안에서만 근로연계복지제도로서의 의미

를 가지므로 그 자체를 근로연계복지제도라고 말할 수 없다. 근로연계복지제도는

복지수급자의 취업 및 탈수급을 촉진하기 위해 근로인센티브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결합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활사업

은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대상 취업촉진사업으로써 근로연계복지제도의 한 축

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자활사업에서 소득보장과 근로인센티브

그리고 취업지원정책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자

활사업은 근로연계복지제도의 불완전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자활사업이

기초생활보장제도를 통해 성장할 수 있었지만, 그 안에 갇혀 본래의 목적을 달성

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근로연계복지제도로 변신한 자활사업이 제도화 초기국

면에서 경험했던 문제는 크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정부주도의 근로연계복지정책은 자활사업에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실험

을 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주는 한계와 정부의 각종 지침

이 갖는 태생적 한계는 자활사업이 갖는 중요한 힘의 원천을 약화시킨 측면이 있

는 것이다. 즉, 자발성과 헌신이 그것이다. 생산공동체 운동과 시범사업기의 자활

사업은 시민운동가들의 자발성과 헌신,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이 전

제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동반하였지만, 이를 상쇄

할 수 있는 새로운 성과도출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활사업의

이념 또는 가치지향에 대한 사회적 지지기반을 확충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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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근로연계복지제도로서의 자활사업은 정부의 재정적 지원의 대가로 일종

의 통제를 수용해야 했다. 그것은 2000년 10월 자활사업의 전국화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활사업은 새로운 사회

적 경제 원칙에 기초한 일자리 창출사업이라는 점에서 기존 복지제도 하에서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즉, 정해진 지침에 따라 재정지원을 하는 복지제

도와 달리, 지원금의 활용방식 등에 있어 사업실시기관의 자율성이 매우 중요했

던 것이다. 하지만 정부지원금은 이러한 자율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는 자

활사업이 투자와 손실 등의 문제에 있어 전략적 선택이 힘들었다는 것을 의미한

다.

그럼에도 자활사업은 다른 어떤 복지사업보다 비판성이 강했던 사업이라는 점

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다소 완곡하게 표현하면, 지난 수십 년간 각종 복지기관

이 보였던 정부에 대한 순응적 태도와 비교할 때, 자활후견기관은 정부의 결정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던 매우 보기 드문 민간단체 중 하나였다. 실제로 제도도입

초기과정에서의 밀월기가 끝나고, 자활사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는 시점

에서 자활후견기관은 거의 3년간 보건복지부와 첨예하게 대치하였다. 물론 이 문

제와 관련해서 자활후견기관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싸움에만 열중했다는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자활후견기관이 상당부분 과

거의 시민운동 및 빈민운동의 비판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

도 하다.

둘째, 제도화 초기국면에서 자활사업이 직면했던 또 다른 문제는 이 사업에 참

여하는 근로빈곤층의 전혀 다른 특성이었다. 이는 기존의 생산공동체 운동이나

시범사업기 자활사업이 지역 저소득층 실직자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하고 있었다

면, 제도화 이후의 자활사업에는 비자발적인 사유로 자활사업을 선택하게 된 참

여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로 정

부의 조건부과에 따라 자활사업에 참여할 사람들과 자활근로 및 공동체 창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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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해야 하는 새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초기 자활후견기관의 의지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이들과 더불어 일

하는 과정을 통해 이들이 스스로 빈곤에서 벗어날 강한 의지를 형성하게 될 것이

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지난 10년간 자활사업 참여자의 특성과 자발성에 관한 많은 쟁점토론이 있었다.

그 토론의 핵심은 자활사업 참여자들과 더불어 빈곤탈출과 연대라는 두 가지 목

표를 달성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한편에서는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라는

특성이 근로활동을 기피하려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비판적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들 수급자에게서 강한 자활의지와 노력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견 차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지난 10년간 자활후견기관의 노력여하에 따라 수급자들이 탈수급과 탈빈

곤이라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전반적으로 자활사업 참여자의

자발적 근로의지가 약하고, 탈수급 및 탈빈곤 성과가 낮은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

도, 자활후견기관이라는 지원주체의 헌신이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셋째, 자활사업은 근로연계복지제도의 하나라는 점에서 정부와 사회가 기대하

는 성과를 산출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이 문제를 보

는 관점 또한 상이할 수 있다. 한편에서는 정부사업에 참여하는 행위자체가 이러

한 조건을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자활후

견기관이 이러한 성과평가를 거부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

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사업시행초기 성급한 평가를 통해 자활사업이 가져

야 할 유연성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는 현실적으로 연구자들에게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던 비판이었다. 자활사업의 성과를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과

정에서 눈에 드러나지 않는 많은 노력들은 위축되고, 가시화시킬 수 있는 단기성

과에 치우치게 되는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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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는 현실화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성과가 미약했던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초기의 자활사업은

참여자들의 노동시장 진입을 촉진하는 문제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부 자활사업의 역할이었지, 보건복지부 자활사업의 역할은 아니라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었다. 더욱이 자활사업 참여자를 취업대상자와 비취업대상자로 구분

하는 순간, 자활후견기관의 자활사업은 단기적으로 취업성과를 내기보다 장기적

인 교육과 훈련 그리고 직장체험과 창업을 통해 성과를 산출하겠다는 방향이 설

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자활후견기관의 이러한 기대와 노력이 성과평가라

는 잣대 앞에서 빠르게 잠식되어 왔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자활사업의 경제적 자립이라는 성과를 중시하지 않는 경향도 발견

되었다. 이는 다분히 자활사업이 사회적 경제로서 갖는 특성을 주목하기보다, 근

로연계복지제도로서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의 도덕적 해이를 예방하는 기능에

주목하는 입장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의 특징은 자활사업이 실제로 취

업이나 경제적 자립이라는 성과를 내지 않더라도 그것은 수급자들이 미취업상태

로 급여를 받는 문제점을 예방하는 강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자활사업은 그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다소 비판적

관점에서 보면’ 자활사업 내부에서 성과평가에 대한 거부감을 확산시키고, 보다

헌신적인 노력을 우회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자활사업은 근로연계복지제도로서 많은 제약을 감수하며 제도화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 수년간의 밀월기간을 거쳐 다양한 문제가 드러

나는 갈등국면으로 이어졌다. 이는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

지만 이 기간 중 자활사업은 비영리민간부문의 자발성과 유연성에 기초한 새로운

실험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굳히는 경험을 하였다. 즉, 현재와 같은 방식의 사업에

서 벗어나 사회적 경제를 강화하는 실험을 해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반면

교사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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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활사업 제도화 초기단계의 특징

자활사업은 제도화 초기단계에서 사회적 경제로의 이행에 비교적 개방된 측면

이 있었다. 그것은 제도화 초기단계의 제도적 환경과 인적구성이 갖는 독특한 성

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도 도입 초기, 자활사업은 생산적 복지를 대표하는

정책 중 하나였으며, 사회적으로 그것이 가져 올 긍정적 성과에 대한 관심이 지

대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미국 근로연계복지가 갖는 복지통제형 접근

방식 외에도 사회적 경제의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이 함께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이

다. 달리 표현하면, 자활공동체는 제도화 이전에 존재했던 <자활지원센터>의 생산

공동체 이념이 자활지원제도에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개방성

에는 자활지원제도의 초기설계과정에 참여했던 집단의 인적구성의 특수성, 이후

제도정착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보건복지부 자활지원단(이후 자활지원

과)의 인적구성의 특수성 또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

에서 당시는 제도적 환경과 제도설계의 추동세력, 그리고 제도화의 행정주체가

자활사업의 다양한 지향성에 열려 있었던 것이다.

1) 삶의 질 향상 기획단과 자활사업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자활사업은 김영삼 정부 하에서 청와대와 보건사회연

구원 그리고 빈민운동가들의 공동의 논의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자활사업의 제

도화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시행령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모습과 가장 유

사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국민의 정부 하에서 청와대의 위원회

조직 중 하나였던 <삶의 질 향상기획단>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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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자활사업의 제도화 초기단계, 즉 1999년 중반부터 2000

년 10월까지의 기간 중 제도화 과정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첫째,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과정에서 S신부의 역할과 B박사의 역할이 매우 중

요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기초생활보장제도에 자활사업이 포함

되게 된 이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근로능력자에 대한

소득보장을 하는 대신, 도덕적 해이를 예방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필요로 했고, S

신부는 기존 자활지원센터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법조문에 반영할 수 있었던 것

이다. 이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 자체에는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

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활사업과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관계에 대

한 충분한 고려를 하지 못했다는 단점 또한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자

활사업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계하는 책임을 맡았던 B박사의 역할에도 주목할 필

요가 있다. 그는 제도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조율하는 가장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삶의 질 향상기획단을 중심으로 구성된 <자활연구모임>의 역할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연구모임은 당시 K박사가 주도적으로 이끌던 연구모임이었다. 더 엄

밀하게 말해서 자활사업 자체를 연구하기 위한 모임은 아니었다. 당시 이 모임에

는 이후 자활사업과 관련한 주요한 연구자와 실천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기 연구자들은 거의 1년간 매주 1회의 연구모임을 갖고, 제3섹터와 실업대

책 그리고 자활사업 문제 등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모임

에서 논의되었던 많은 주제들이 2010년 현재 대부분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연대금고>에 대한 연구는 사회연대은행과 같은 마이크로크레디트의 설립으

로 실현되었고, 제3섹터를 통한 일자리 창출전략은 이후 자활근로사업과 자활공

동체 사업, 그리고 사회적기업육성법으로 실현되었다.

2) 노동부와 복지부의 힘겨루기

Page 36: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 71 -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고 시행령이 마련되는 시점까지 자활사업의 미래

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노동부와 복지부 간의 논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근로빈곤층 문제에 대한 중장기 정책대응방향 및 구체적인 추진전략을 둘

러싼 논의를 지칭하는 것이다. 물론 노동부와 복지부가 자활사업을 둘러싸고 이

른바 기득권 경쟁을 벌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외국의

경우에도 어떤 국가는 노동부가 근로연계복지사업을 주도하고, 어떤 국가는 복지

부가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근로연계복지사업이 복지제도와 고용서

비스를 결합한 것이라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 전 단계에서는 근로빈곤층에 대한 실업부조와 공

공부조의 선택을 둘러싼 논의가 전개되었다. 이는 주로 노동연구원과 보건사회연

구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1999년 시점에는 대량실업이 발생하고 그에

따른 신속한 대책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권 보장이라는 강한 명분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업부조보다는 공공부조, 즉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제도

화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논의가 2010년 현

재 시점에서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배경에는 기초생활보장제도

의 낮은 근로유인효과를 제고하고,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기 때문이다.

둘째, 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고 시행령이 마련되는 시점(1999년 9월~2000년 1

월)사이에 자활사업 참여대상자에 대한 역할분담이 논의되었다. 이 시기에 노동부

와 복지부는 각각 TFT를 구성하여 미취업수급자를 취업대상과 비취업대상으로

구분하는 방안을 선택하게 된다. 이 시기에 웃지 못 할 일화 중 하나는 행정데이

터가 얼마나 취약했으며, 그것을 통한 정책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이었는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활사업이 시행되기 위해서는 미취업수급자의 규모가 정

확하게 파악되었어야 하는데, 당시 발표되지 않았으나 내부적으로 참고하고 있던

데이터에 따르면, 미취업수급자는 약 2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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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와 복지부는 각각 10만명의 수급자를 나누어 지원하는 것으로 합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 수급자들의 취업상태는 데이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2000년

10월 파악된 미취업수급자 규모는 약 10만명으로 나타나고, 그 중에서도 실제 자

활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수급자 규모는 6만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노동부

와 복지부의 역할분담이 사실상 무의미해 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노동부

는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적절한 지원대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노동부 자활

사업 참여자 규모는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현재 약 2천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

는 초기 약 1000억원에 달하던 사업예산이 거의 1/5수준으로 감소하는 결과로 이

어졌다. 더욱이 초기 사회복지행정전달체계는 인력부족과 업무과중으로 시달리고

있어, 근로능력이 있는 미취업자에 대한 상담을 내실화하기 힘들었다. 그 결과,

노동부와 복지부는 자활사업 수행에 있어 긴밀한 협조를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지부의 자활사업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3) 복지부 자활사업의 성장

각 부처의 자활사업 중 복지부의 자활사업은 사회적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

을 뿐 아니라, 지난 수년간 지속적으로 사업규모를 유지해 온 사업이라는 점에서

좀 더 비중 있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복지부 자활사업 시행초기 자활지

원단(이후 자활지원과)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여기서 자

활지원과의 역할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시기에 정부부처와 자활후견기관 그리고

연구자 사이에 일종의 밀월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자활사업이 제도화되고 복지부와 노동부의 지원체계가 구축된 이후, 자활사업

을 둘러싼 각종 논의는 부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시기에 노동부와

복지부는 각기 자활지원단을 두고 있었으며, 복지부의 자활지원단은 2001년 하반

기 자활지원과로 정식조직이 되게 된다. 그리고 부처를 중심으로 자활사업의 발

전방향과 추진전략이 수립되게 된다. 그 중에서도 복지부가 자활사업의 주무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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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

였다는 점에서 자활지원단은 자활사업의 기본골격을 수립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자활사업은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

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음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당시의 자활사업 제

도화 과정을 설명하기로 하겠다.

첫째, 제도화 초기의 자활사업은 각종 프로그램을 하나의 발전경로로 설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활사업 참여자가 <사회적응프로그램 → 자활근로사업 → 자활

공동체사업/취업>으로 이어진다는 일종의 발전경로를 제시하고 있었음을 의미한

다. 물론 그것은 정책방향에 대한 흐름도이며,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

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방향이 하나의 지침으로 구체화되면서, 하나의 발전경로에

따라 모든 사업이 획일적으로 운영되는 문제점을 나타내게 된다. 그것은 다양한

경로의 존재를 무시하고 각종 정책이 하나의 경로로 단선적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복지부 자활지원단은 당시 비영리민간단체 대부분이 자활사업에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자활후견기관을 지정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더욱 심각

한 문제는 자활사업 참여자에게 어떠한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도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활지원단은 전국적으로 성장잠재력이 있

는 사업을 선정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5대 표준화사업>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사업에 대해서도 상반된 평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사업의

탄생가능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가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

적으로 프로그램을 설계할 능력과 여력이 없던 당시의 자활후견기관에게 프로그

램 개발과 관련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는 평가 또한 가능하다. 분명한 것

은 당시 공공근로 민간위탁사업 중 상대적으로 사업성장 잠재력이 큰 5개 사업을

선정하였고, 전국의 자활후견기관이 이들 사업을 기간사업으로 선택하여 주력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자활사업의 성과는 이후 다양한 논쟁의 대상

이 되지만, 거시적으로 5대 표준화 사업은 단기간에 사업량을 확대시키는 과정에

- 74 -

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4) 복지부 자활사업의 정체(停滯)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강한 규정성이 자활사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

는 점과 관련해서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 당시 제도화 과정에서 강하게 반영되지

는 않았지만 이후 사업시행 과정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던 비판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 K신부를 중심으로 강하게 제기되었다. 즉, 자활사업이 제도화되는 경우, 그

것이 갖는 헌신성과 자발성 등이 현저하게 약화될 개연성이 있다는 우려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구자들은 제도시행 1년이 경과하면서부터 자활사업의

성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복지부 또한

2002년경부터 지속적으로 그러한 문제점을 보완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하지

만 점차 자활사업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이 지침변경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강화되었고, 이는 이후 자활사업을 구조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하며, 2010년 현재까지 이어지는 기초생활보장제도 개편논쟁의 시발점을 형

성하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복지부 자활사업에 대한 문제제기와 개편노력 그

리고 구조적 한계에 따라 기초생활보장제도 개편논의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에 대

해 간략하게 설명하기로 하겠다.

첫째, 자활사업은 시행 1년차에 많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 자활후견

기관 또한 강한 열의를 갖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 복지부의 자활지원단 또한 자

활후견기관 등과 매우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인프

라가 취약하며 지침 등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지 않은 측면은 있지만, 이후의 어느

때보다 사업여건이 우호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 자활사업은 제도설계

단계에서 기대했던 성과를 도출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조건부수급자라는 복지수급자의 특성과 정부지침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는 사업의 경직성, 그리고 시장경쟁이 주는 압박감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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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러한 문제점이 나타나면서 복지부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미시

적 개선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한 노력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립준비적

립금제도>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보충급여방식이 근로소득공제 없이 시행되면

서, 자활근로사업 참여 수급자에게 수익을 배분하는 경우, 수급자격을 상실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우회하기 위해서는 배분된 수익

금이 급여산정소득에서 제외되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방안의 하나로 자

립준비적립금제도가 실시된다. 이는 당시 자활사업에 오랜 기간 관여해 왔던 L교

수의 아이디어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에 설립될 마이크로크레디

트나 최근 논의되고 있는 자산형성지원제도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이 제

도는 자활근로사업에서 발생하는 수익금을 자활사업 참여자 이름으로 적립하고,

창업을 하는 시점에 창업자금의 형태로 대출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제도는 자

활사업이 자유롭게 수익을 창출, 배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나왔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제도도입 후 8년이 경과한 현재 상황에

는 또 하나의 제도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셋째, 자활사업의 활성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장애물에 대한 미시적 제

도개선 노력이 있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전반적인 사업 활성화와 성과도출에 큰

영향을 미지치 못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활사업의 기본구조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본격화되게 된다. 그것은 초기에는 자활사업을 기초생활보장제

도에서 분리하여 보다 유연한 지원사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기초생활보장제도와의 분리를 위한 논쟁과정에서 개편논쟁은 기초생활보장제도를

개별급여체계 또는 욕구별 급여체계로 개편하는 방안으로 확산되게 된다. 이 문

제와 관련해서 최초의 연구결과는 2002년에 3명의 연구자가 집필했던 자활지원제

도 개편방안 연구였다.

넷째, 자활사업의 효과적인 작동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연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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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서는 자활사업의 성과를 평가하려는 시도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점진

적으로 성과평가는 매우 비판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다소 과장된 측

면도 있어 이후 자활사업에 대한 지원확대에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리

고 자활사업의 성과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자활사업 및 자활후견기관사업에 대한

평가로 표출되게 된다. 그것은 이후 자활후견기관 사업에 대한 규모별 차등지원

제도를 도입하는 계기가 된다.

3. 자활사업 제도화 초기의 사회적 경제

자활사업은 제도화 이전단계에 이미 사회적 경제로서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생산공동체가 일종의 사회적 협동조합 또는 사회적기업이라는 점에서 그

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자활후견기관을 통해 상당부분 계승되었다. 물론

자활후견기관이 빠르게 증가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경향성이 약화된 측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1~2년간 자활사업 내부에서 사회적 경제를 강화

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생겨나고 있음을 감안하면, 자활사업, 특히 자활후견기관

내부에는 사회적 경제의 씨앗이 배태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1) 자활후견기관의 성장과 변화

자활사업은 노동부의 취업지원사업이 급격하게 약화됨에 따라 복지부 자활사업

을 중심으로 모든 논의가 전개되기에 이르고, 자활후견기관(현 ‘지역자활센터’)의

역할이 주목받게 된다. 그리고 이는 이후 자활사업 논의의 핵심 축을 이루게 된

다. 자활후견기관은 단기간에 매우 빠른 속도로 지정되었으며, 전국의 기초자치단

체를 포괄하는 유일무이한 조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활후견기관의 선정은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진행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먼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조건부과규정에 따라 미취업 수급자에게 취업기회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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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하기 위해서는 공급기관을 빠르게 확충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별도의 민간취업기관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

서 일차적인 과제였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자활후견기관 선정과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 복지사업자에 대한 선호가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취업지원을 위해서는 일자리 창출경험을 가진 단체들을 선호하였음을 의미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외환위기 이후 실업문제에 대응해 왔던 민간단체

들이 대거 자활사업에 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약 100여개의 자활후견기관을

지정한 이후, 그 자원이 고갈되면서 기존 복지사업자들이 대량으로 유입되게 되

었다.

자활후견기관의 확대는 우리 복지제도의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

로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단종의 복지기관 확충속도로는 단기간에 가

장 큰 규모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20개 기관에서 242개 기관으로 확대되는데

불과 4년이 소요되었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단기간의 확대는

임금수준과 각종 지원체계가 취약하다는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이후

다음과 같은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

첫째, 정부의 보조금과 관련한 갈등이다. 자활사업 실시 이후 자활후견기관에

대한 정부의 지원금이 약 4년간 동결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자활후견기관에서

일하는 실무자들의 임금 또한 동결되어 있었다. 이는 자활사업에 대한 초기의 열

의를 상당부분 감퇴시키는 영향을 미쳤고, 사회복지분야의 실무자들이 자활후견

기관을 기피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이 시기 중 자활후견기관

실무자들의 이직률은 매우 높게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자활후

견기관의 사업성과가 상당 부분 지원금의 동결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업성과를 도출하기 위한 추동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자활후견기관과 자활지원과의 밀월관계가 끝나고 갈등이 본격화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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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둘째, 자활후견기관과 자활지원과의 갈등은 성과평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

환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그것은 사업에 대한 성과평가를 토대로 지원규모

를 차등화 하는 방식이 자리 잡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물론 이 문제와 관련해

서는 다양한 비판적 평가가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연구자들은 자활후견기관

에 대한 차등지원방식이 사업역량을 약화시켜 이후의 사업개선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와는 다른 형태로 자활후견기관 지원체계와

성과를 연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L교수와 N박사는 이 문제와 관련

해서 자활후견기관에 대한 지원방안을 현재의 정액지원방식에서 인건비와 운영비

를 분리함으로써 사업량 증가에 따라 실무인력을 탄력적으로 변화시키는 방식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자활후견기관으로부터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그것은 이러한 지원방안 개편이 종사자의 고용불안을 심화시킬 수 있다

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후 자활후견기관은 <급여동결 → 민관갈등 → 성과평가 도입>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사업의 추동력을 확보하고, 성과를 제고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

했다. 그것은 오히려 사업의 전반적인 정체로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실무

자의 잦은 이직률, 사업운영방식의 형식화, 사회적 경제에 대한 마인드 약화를 의

미한다. 첫째, 실무자의 잦은 이직률은 낮은 급여와 힘든 업무와 관련이 있다. 하

지만 이 문제는 보다 종합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낮은 급여도 문제지만, 정

부 사업지침이 공고화되어 유연한 사업운영이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사회운

동가의 이탈을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다른 차원에서 실무자들 중 많은 사

람들이 자활사업에서의 힘든 업무를 기피하고 사무직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둘째, 사업운영방식의 형식화 문제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자활사업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면서 나타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

과제고를 위한 실험보다 안정적인 사업관리가 자활후견기관의 사업수행기조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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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되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셋째, 사업의 형식화는 사회적 경제를 위한 다

양한 모색을 어렵게 만든 측면이 있다. 그것은 자활후견기관이 자활공동체를 구

축하는 과정에서 성과평가를 위해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 형식적인 공동체를 구성

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자활사업 속의 사회적 경제

자활사업 제도화의 초기단계에서 사업의 양적 확대는 다양한 이해관계 당사자

를 생성하며 점진적으로 좁은 공간을 확장시키는 토대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자

활사업 제도화 이전단계에 잠재되어 있던 다양한 형태의 사업들이 독자적인 영역

을 구축하는 단계에 접어들도록 인도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마이크로

크레디트기관의 성장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기업육성법의 제정을 통해, 그

리고 사회서비스부문 일자리 창출을 통해, 사회적 경제를 구성하는 주요 부문이

생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구성요소는 최근 우리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자활사업은 사회적 경제를 본격화하고 제도화하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것은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자활공동체는 사회적 기업에 다름

아니다. 최근 사회적기업육성법이 제정됨에 따라 사회적으로는 그것이 자활사업

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소 억지주장이기는 하지만, 자활사업이 수

급자 중심사업이라면, 사회적기업은 미취업빈곤층 중심의 사업이라는 것이 그것

이다. 하지만 실제로 자활공동체는 사회적기업의 한 형태였던 것이다. 참고로

2004년경 자활공동체를 사회적기업 또는 자활지원기업으로 개명하려던 시도가 있

었다. 둘째, 자활사업은 지역기반형 일자리 창출사업이라는 점이다. 이는 자활사

업이 미취업빈곤층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지역사회 취약계층에게는 다양한

사회서비스를 공급하는 형태로 이미 사회적 경제에 기반한 사업방식을 취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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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활사업에 대한 성과평가지표 중에 지역사회에 대한 기

여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사업시행 10년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자활후견기관은 이미 사회적 경제의 구성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셋째, 자활사업은 초기부터 마이크로크레디트 혹은 신용협동조합의 설립

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는 앞서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자립준비적립금제도는 마

이크로크레디트나 자산형성지원제도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자립준비적립

금을 토대로 신용협동조합과 같은 별도의 금융조직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도화 초기단계에서는 별도의 금융조직을 설치할 정도로 사업규

모가 크지 않았으며, 이는 이후 마이크로크레디트라는 조직의 설립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자활사업, 특히 자활후견기관을 중심으로 하는 각종 사업에서 사회적

경제의 잠재적 특성은 이후 사업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자활후

견기관들은 자활사업의 정체에 고민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기업 그리고 사회적 경

제로의 변신을 하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 사회적 기업 중 많

은 기업이 자활공동체가 발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자활사업이 사회적기업

을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최근에

는 사회적 기업을 넘어 사회적 경제를 고민하는 조직이라는 점 또한 지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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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결 : 다시 사회적 경제의 길로

제도화 초기단계의 자활사업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생산공동체 운동 또는 사

회적 경제 운동이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했던 자활사업이 제도화과정에서 양

적 성장과 침체를 경험하며 다시 사회적 경제로 돌아오는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제도화 이전 사회적 경제 운동이 주목하지 못했던 소중한

경험을 축적시키게 된다. 그것은 사회적 경제로서 자활사업을 지탱했던 자발성과

창의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비영리민간부문(Non-Profit Sector) 또는 제3섹터(The

Third Sector)의 토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은 자활사업이 복지제도와의 연계, 즉 근로연계복지

제도와의 관련성 하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과거 자활사업,

특히 적어도 시범사업기 이전의 자활사업은 복지제도와 별다른 관계없이 발전해

왔다. 하지만 실제로 근로빈곤층 대부분은 복지제도를 통한 지원을 필요로 한다.

이 점에서 보면, 제도화 단계의 자활사업은 사회적 경제의 실험과 복지제도의 개

편이라는 두 가지 문제가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략적 판단을 가능

하게 했던 것이다.

- 82 -

제4장

자활사업의 정착 단계 : 제도적 정형화와 다양한 모색

김정원 | 자활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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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제도 개편과 사회적 경제 실험의 두 과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자활사업이 포함되면서 지역자활센터47)는 대규모로, 그

리고 급속도로 확산되어 정부 복지정책의 대표적인 인프라의 하나로 자리 잡는다.

이처럼 양적인 변화는 질적 변화를 동반한다. 자율성은 약화되고 제도화 이전에

가졌던 문제의식은 제도와 결합하면서 변화한다. 지역자활센터의 구성 또한 단일

한 가치와 규범을 수용하는 조직이라고 보기에는 이념적 스펙트럼이 너무 넓었다.

2005년 이후는 자활사업이 정착기에 들어선 시기라 평가할 수 있다. 어느덧 자

활사업은 한국의 근로연계복지를 상징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서 자활사업에 대

한 평가를 바탕으로 다양한 관련 제도가 파생되고 있다. 또한 자활사업의 문제점

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적 대안이 끊임없이 모색되고 등장한다. 이런 점은 자활사

업이 한국의 복지 제도의 개편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활사업은 우리 사회가 이제 본격적으로 사회적 경제를 고민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고 그와 관련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물적 기반 또한 다른 집단

들에 비해 훨씬 양호하다. 그런 의미에서 자활사업은 복지제도의 개편과 사회적

경제의 실험이라는 두 문제를 결합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는다.

4장에서는 이런 상황들을 점검해본다.

47) 지역자활센터는 자활지원센터 → 자활후견기관 → 지역자활센터로 명칭의 변화를 겪었다. 지역

자활센터라는 명칭은 2006년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개정되면서 적용되었다. 4장은 2005년

부터 2009년까지를 다루기 때문에 자활후견기관에서 지역자활센터로 명칭 변경이 변경된 시기

이다. 다만, 현재 명칭이 지역자활센터이기 때문에 4장에서는 전체적으로 지역자활센터라는 명

칭을 사용한다.

- 84 -

1. 제도의 정착

1) 전달체계의 확장 및 제도의 변화

① 전달체계 확장에 대한 문제 제기

현재 전국의 지역자활센터는 모두 242개로 지역자활센터가 존재하지 않는 기초

자치단체는 19개에 불과하다. 심지어 7개 기초자치단체에는 3개의 지역자활센터

가 존재하기도 한다. 이처럼 많은 지역자활센터가 존재하지만, 한편으로는 자활사

업의 전달체계가 오랫동안 지역자활센터에만 국한됨으로써 자활사업의 종합적 발

전이 더디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계속되었다. 또한 자활사업 자체의 제도적 취약

함도 제도 시행 초기부터 계속 지적되어 왔다. 2003년에 시범사업으로 시작했던

노동부의 사회적일자리창출사업이나 2004년에 시작된 노인일자리사업 등은 어찌

보면 자활사업이 감당하지 못하는 집단에 대한 추가적인 지원책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는 대략 2003년경부터 자활사업의 효과적 수행을

위해 지역자활센터 외의 다른 인프라가 확충되어야 함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

이런 문제 제기의 일환이 지역자활센터-광역자활센터-중앙자활센터의 삼각 체계였

다. 이런 문제 제기는 2004년에 복지부와 노동부,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한국노동

연구원이 공동으로 수행한 <자활정책․지원제도 개선방안 연구>에 반영되었고,

2004년 광역자활센터 시범사업은 문제 제기의 일부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② 규모별 예산지원제도의 실시

2005년 들어 정부는 지역자활센터에 대한 규모별예산지원제도를 실시했다. 사

업 규모에 따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률적인 지원을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정부

내부의 지속적인 문제 제기가 반영된 것이다. 이후 지역자활센터는 확대형-표준형

-기본형-소규모형으로 구분되어 운영보조금이 지원되고 있다. 한편, 2005년 들어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는 ‘자활정책정상화투쟁’을 전개했다. 시발점은 정부에 의한

Page 43: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 85 -

2006년도 지역자활센터 운영보조금의 감액 책정 계획이었다. 한국지역자활센터협

회는 2005년 8월 17일부터 12월 2일에 이르기까지 농성을 병행한 투쟁을 하면서

빈민자활 정책 일반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시도했다. 예산삭감 계획을 무력화시키

고 운영보조금의 증액 외에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으나 지역자활센터들의 조직된

힘으로 사회적 이슈를 이끌어낸 것은 평가할 부분이었다.

③ 자활급여법의 시도와 실패

2005년부터 정부는 자활급여법의 제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2006년까지 이를

추진했으나 결국은 2006년 12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개정에 그치고 말았다. 당

시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는 지역순회 설명회를 갖는 등 자활급여법의 제정에 적

극 개입했다. 자활급여법 제정을 통해 자활사업의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아쉽게도 자활급여법의 제정은 뒤로 미뤄졌으나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개정을 통해 중앙자활센터의 설치가 제도화된 것은 하나의 성과였다.

④ 지역-광역-중앙자활의 삼각체계 정립

개정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근거로 (재)중앙자활센터가 2008년에 출범했다.

한편, 정부는 2004년 이후 4년만인 2008년에 경기, 인천, 대구 외에 강원, 전북, 부

산에 광역자활센터를 지정해 모두 6개의 광역자활센터가 활동하게 되었다. 중앙

자활센터는 지역자활센터와 함께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명시된 인프라이지만 광

역자활센터는 시범사업이라는 제약이 있다. 그럼에도 지역자활센터-광역자활센터-

중앙자활센터의 삼각체계가 어느 정도 자리잡힌 셈이다. 다만, 아직까지 이 기관

들이 서로의 역할에 대한 합의가 미흡한 실정이다. 중앙자활센터나 광역자활센터

는 지역자활센터에 대한 지원 조직이어야 하나 일부 광역자활센터를 제외하고는

지역자활센터들에게 이러한 인식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중앙자활센터도 지역

자활센터에 대한 지원 조직이 아니라 평가 기관으로서의 인식이 강하게 자리매김

- 86 -

되고 있다. 따라서 정부 및 지역-광역-중앙자활 간의 지속적 논의를 통해서 유기

적인 협력 시스템을 갖추어야 할 과제가 이들 간에 놓여있다.

⑤ 고용과 성과에 대한 관심의 확대

2007년에 노동부는 ‘고용취약계층을 위한 맞춤형 고용지원서비스 사업’을 시행

했다. 이 사업은 2009년에 이르러 ‘저소득층취업패키지지원사업’으로 바뀌어 계속

되었다. 전국적으로 100여 곳에서 시행되었다. 복지부도 이와 유사한 사업을 2009

년부터 진행하였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시범사업으로 실시하는 ‘성과관리형

자활시범사업’이다. 두 사업은 주무부처가 다르지만 참여대상에서 큰 차이가 없고

목표도 취업을 강조하는 등 유사하다.

한편, 2008년에 복지부는 ‘자활복지선진화프로젝트’를 제시하면서 자활정책의

전환을 예고했다. 전체적으로 기존의 자활정책이 가지고 있는 성과와 한계를 인

정하고 경쟁을 기조로 한 성과의 촉진을 표명했으며, 취업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

리고 이의 일환으로 성과관리형 자활시범사업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지역자

활센터와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는 성과관리형 자활시범사업에 정부의 역량이 집

중되면서 자칫 이 사업이 자활사업의 중심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며 이에 반대했

다.

그러나 성과관리형 자활시범사업은 2009년에 경기와 부산에서 시행되었고, 2010

년에는 전북과 인천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광역자활센터를 중심으로 진행했던

2009년과는 달리 2010년에는 광역자활센터와 영리기업의 파트너십을 통해 진행할

예정이다. 역시 이의 일환으로 2009년에 정부는 ‘일을 통한 탈수급․탈빈곤 대책

자립촉진지원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TF를 구성해서 운영하는 등 정책 전반에 걸

친 변화가 곳곳에서 감지되는 실정이다.

한편, 2009년에는 자활인큐베이팅 시범사업이 운영되기도 했다. 자활인큐베이팅

시업은 길게는 2004년부터 서울의 일부 지역자활센터들에서 실험적으로 운영되던

Page 44: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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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활근로사업이다. 인큐베이터로서의 의미를 갖는 자활근로사업단의 운영을 통해

서 자활사업 참여자들이 자신의 자활 경로를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자

는 취지로 운영되었었다. 지속적인 문제 제기와 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속에서

정부는 2009년에 시범사업으로 이를 실시했다.

⑥ 청소년자활지원관의 정체

2장에서 살펴봤듯이 청소년자활지원관은 빈곤의 되물림을 예방하기 위한 취지

로 청소년의 자립․자활을 지원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어찌 보면 자활사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부 부처 내에서 정

책적 위상은 낮았고 지역자활센터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은 미흡했다. 1997년에 10

개가 지정되었고, 그로부터 4년 후인 2001년에 추가로 10개가 지정되어 20개에 이

르렀다. 그리고 또 4년 후인 2005년에 8개가 추가 지정되어 현재는 모두 28개이

다. 이후 청소년자활지원관의 추가 지정은 더 이상 없어 빈곤 청소년의 자활을

지원하는 인프라는 여전히 아쉬운 형편이다. 그나마 이명박 정부 들어 청소년자

활지원관은 사회복지시설 중 통폐합 대상에 포함되어 미래가 불투명한 실정이다.

2) 관련 제도의 확대

① 마이크로크레디트

자활사업이 진행되면서 도입된 빈곤층 지원제도로는 마이크로크레디트

(microcredit), 근로장려세제, 저소득층 자산형성지원프로그램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먼저 자활사업과 관련을 맺은 것은 마이크로크레디트이다. 국내에서

마이크로크레디트는 신나는조합이 2000년에, 사회연대은행이 2002년에 각각

출범하면서 민간 부문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사회연대은행은 자활

공동체에 대한 지원을 사회연대은행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중요한 지점으로

설정했었다.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장이 사회연대은행의 이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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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부는 2005년부터 마이크로크레디트 프로그램을 자활사업에 도입하

기 시작했다. 그 해 11월부터 실시된 자활공동체 창업자금 지원사업이 그것이

다. 자활공동체 창업자금은 복지부가 매년 20억원을 조성해서 민간 마이크로

크레디트 기관인 신나는조합과 사회연대은행에 위탁을 해 자활공동체에 대출

해주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표 4-1> 자활공동체 창업자금 지원사업 내용분류 내 용

지원대상 기초수급자 1/3 이상이 참여하고 시장․군수․구청장의 융자추천을 받은 자활공동체지원조건 지원금리 연 2%(고정금리)

지원내용○ 자활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다음 중 한 가지를 지원  1. 공동체 전세점포 임대자금 : 5천만원 이내   ※ 1천만원 범위 내에서 창업․운영자금으로 사용가능  2. 공동체 창업․운영자금 : 2천만원 이내   ※ 설비비(시설보수, 인테리어, 기계설치 등), 상품구입비, 홍보비, 운영자금 등

지원기간 5년상환방법 1년 거치, 4년 원리금 균등분할 상환(13차월부터 매월 25일 이내 납부)

이후 정부는 2007년 6월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

을 공포하면서 시행령 제17조에 마이크로크레디트에 의한 자금대여 근거를

마련했다. 정부 차원의 마이크로크레디트 운영에 대한 제도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2008년에 이르면, 여당인 한나라당이 본격적으로 마이크로크레디트의

법제화를 추진하기 시작한다. 또한 복지부의 지원 하에 민간 조직들이 컨소시

엄을 구성해 ‘마이크로크레디트 전문가 양성과정’을 운영하기도 했다. 서울,

대전, 강원, 부산, 전북, 전남에서 진행된 이 교육에서 배출된 인력은 모두

199명에 이르렀다.

2009년에 복지부는 기존의 자활공동체창업자금지원사업을 ‘희망키움뱅크’로

Page 45: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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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하고 예산도 330억원으로 증액하는 한편, 대상을 개인에게까지 확장하는

등 마이크로크레디트의 확장을 도모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기존의 휴먼예

금관리재단을 미소금융재단으로 재편하고 향후 10년간 2조원을 조성해 정부

주도하의 마이크로크레디트를 본격적으로 운영할 계획을 밝혀 복지부의 마이

크로크레디트 사업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② 근로장려세제

한국에서 근로장려세제의 기원은 자활장려금이다. 자활장려금은 보충급여를

기본 원리로 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수급자들의 근로의욕 감퇴를 에방하

기 위해 근로소득의 일정 비율을 공제해 지원하는 제도이다. 공제율은 30%48)

이며, 대상은 직업재활사업 참여 장애인 수급자, 자활근로 및 자활공동체 참

여 수급자, 학생이다.

근로장려세제는 2008년부터 실시되었다. 근로장려세제는 저소득 근로빈곤층

에 대한 근로유인 및 탈빈곤 정책 방안 필요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제도이

다. 2004년의 <자활정책․지원제도 개선방안 연구>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표 4-2> 근로장려세제 내용분류 내 용

지원대상 연소득(부부합산)이 1700만원 미만이고, 재산합계액이 1억 미만이며, 18세 미만 자녀를 2인 이상 부양하는 무주택 가구

지원내용연소득 800만원 이하는 소득의 15%연소득 800만원~1200만원은 120만원연소득 1200만원~1700만원은 (1700만원-근로소득)×24%

자료: www.eitc.go.kr

③ 저소득층 자산형성지원프로그램

저소득층 자산형성지원프로그램은 소득보장 프로그램의 한계를 보완하기

48) 2005년부터 공제율이 30%였으며, 그 이전에는 (근로소득-20만원)×30%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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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방안으로 저소득층의 자산 형성 지원을 통해 장기적인 자활․자립을 도

모하는 프로그램이다. 복지부는 2006년에 TFT를 구성해서 제도의 도입을 추

진하기 시작해 2009년에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함께 경기, 인천, 부산, 전북에

서 시범사업을 진행했다. 자치단체별로는 서울시가 2007년에 희망플러스통장

을 통해 이 제도를 실시해왔다.

Page 46: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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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회적 기업의 등장과 사회서비스의 확대

1) 사회적 기업의 등장과 자활사업

한국에서 사회적 기업은 2007년부터 시행된 사회적기업육성법에 기반한다. 노

동부가 주무부처이며, 정부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조직들을 사회적 기업으로 인

증하고 조세감면, 인력지원, 컨설팅 제공, 시설․운영비에 대한 대부 등의 지원을

한다. 2009년 9월 현재 정부가 인증한 사회적 기업은 모두 251개이다.

한국에서 사회적 기업의 역사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활사업에서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자활사업을 기반으로 한 조직인 자활공동체는 종종 학술 논문이나

정부 및 시민사회의 정책 속에서 사회적 기업으로 표현되었다. 일찍이 김대중 정

부가 펴낸 <공동체와 함께 하는 자활지원>에는 각국의 자활기업이 소개되었는데,

이 기업들이 바로 사회적 기업이다. 2005년에 정선희가 펴낸 <한국의 사회적 기

업>에는 모두 12개의 사회적 기업이 소개되었는데, 이 중 10개가 자활공동체였으

며, 나머지 2개도 지역자활센터 또는 지역자활센터를 운영하는 모법인에서 조직

한 사회적 기업이었다. 역시 2005년에 펴낸 한상진의 <시장과 국가를 넘어서-사회

적 기업을 통한 자활의 전망>도 자활공동체를 사회적 기업 모델에 근거해 운영

상황을 살펴보고 전망을 제시했었다.

지역자활센터와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의 노력은 좀 더 직접적이었다. 지역자활

센터들은 자활근로사업단이나 자활공동체의 운영 속에서 사회적 기업의 내용을

담아내려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사회적 기업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 토론회나 세미나를 조직하기도 했다.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의 부설조직

이었던 자활정보센터는 영문 이름을 ‘social enterprise development agency’로 정

하는 등 출발부터 사회적 기업을 조직하고 지원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표명했다.

자활정보센터는 지속적으로 사회적 기업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설파했다. 특히

2005년부터 착수된 정부의 사회적 기업의 제도화를 위한 시도에 적극 개입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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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흐름 시민사회진영의 대응 및 흐름§ 2005. 3. 노동부 ‘사회적일자리T/F'를 구성,

법 제정 방향 논의 § 2005. 8. 한나라당 사회적기업지원법 입법

추진 준비

§ 2005년 8. 31 사회적일자리 및 사회적기업 관련 시민사회단체 대책회의 개최(참석단체 : 자활후견기관협의회, YMCA, 여성노동자회,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 장애인중심기업협회, 아름다운가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 사회연대은행, 사회적기업지원센터, 자활정보센터, 노동자협동조합연합회, 시니어클럽 협회, (주)컴윈, (주)함께일하는세상, 우렁각시, 가정관리사협회, 미래자원, 사람과 환경)

§ 2005. 12. 한나라당 진영의원, ‘사회적기업의설립 및 육성에 관한법률안’ 대표 발의

§ 2006. 3. 열린우리당 우원식 의원, ‘사회적

기업지원법안’ 대표 발의(당정협의를 통해 법률 제정 방향 논의 및 의원 입법 형식 협의)

§ 2006. 3. 시민사회단체, 법안의 문제점 검토 및 의견 제출

§ 2006.4. 국회, ‘사회적기업의설립및육성에관한법률안 및 사회적기업지원법안에 관한 공청회’ 개최

§ 2006. 4. 19 국회공청회에 ‘사회적기업 제정 대책 회의’ 의 입장을 개진

§ 2006. 5. 노동부, 지원 내용 마련을 위한 후속 과제 수행(노동연구원)

§ 2006. 5. 3 1차 관련단체 대표자 회의 개최 -사회적기업법 제정에 대한 공동대응을 결의함. -사회적기업법 제정이라는 현안에 국한하지 않고 포괄적인 활동

을 수행할 수 있는 연대체 결성을 결의함. 이에 회의 명칭은 ‘(가칭)사회적기업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로 정함

§ 2006. 6.30 ‘사회적기업 발전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발족(나눔의집협의회, 대한YWCA연합회, 사회적기업지원센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전국실업단체연대, 한국노동자협동조합연합회, 한국시니어클럽협회,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인력개발센터연합, 한국의료생협연대, 한국자활후견기관협회, 한국YMCA총연맹, 환경정의)

-첫 번째 사업으로 연대회의의 사회적기업법을 준비해 발의하기로 함

-연대회의 차원의 법안 마련(8월 공청회 개최 예정) § 2006. 8. 24 ‘시민사회단체, 우리 사회의 현실에 맞는 사회적

기업 육성과 지원을 위한 법률 제정 촉구’ 공청회 개최§ 2006. 12. 8 사회적기업육성법 제정§ 2007. 4. 2~4. 21 사회적기업육성법 시행령,

시행규칙 제정 입법 예고자료 : 문보경(2007)에서 인용.

* 굵은 글씨는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 및 부설기구와 자활공동체임.

<표 4-3> 사회적기업 육성법을 둘러싼 정부 및 시민사회의 흐름

제 제기를 했으며, 각종 워크북 및 사례보고서를 펴냈다. 2008년에는 유럽의 사회

적 경제를 분석한 『The Third Sector In Europe』을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복

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을 하기도 했다.

Page 47: 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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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활정보센터뿐 아니라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의 자체적 노력도 상당했다. 2005

년부터 시작된 사회적 기업과 관련한 시민사회진영의 조직적 대처에 적극 참여했

으며, 2006년경에는 복지부에 사회적 기업과 관련한 법을 만들 것을 제안하기도

했었다. 당시 지역자활센터들은 자활공동체를 좀 더 규모화하고 기업에 준하는

형식을 갖춰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을 사회적 기업으로 구상했었다. 사회적기업

육성법의 시행을 앞두고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 차원에서 사회적 기업 모델에 대

한 현장 교육 작업을 실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 기업이라는 조직적 실체를 만들어

내기 위한 지역자활센터와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의 노력이다. 가령, 대표적인 사

회적 기업 중 하나로 자활사업을 모태로 하는 (주)컴윈은 컴퓨터를 재활용하는 사

회적 기업이다. 시흥과 안산의 지역자활센터가 컨소시엄으로 구성한 (주)컴윈은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의 주도적인 노력 속에서 전국의 각 지역자활센터와 협력

시스템을 구축해 폐컴퓨터를 확보했다. 이와 더불어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는 삼

성전자와 ‘소형폐가전재활용협약’을 맺어 컴윈을 지원했다. 또한 한국지역자활센

터협회의 부설기관인 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지역자활센터 간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의 적극적인 지원

으로 탄생한 사회적 기업으로는 이밖에 폐자원재활용 사회적 기업인 (주)에코그린

과 청소분야의 사회적 기업인 (주)함께일하는세상이 있다. 사회적 기업인 한국자

활중앙물류는 집수리 분야의 자활공동체들이 연계해서 집수리 분야의 물류 사업

을 조직하는 활동이 기반이 되어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했다. (사)부산돌봄사회서

비스센터는 부산의 지역자활센터들이 연계해 조직한 광역자활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기업이다. 청주의 사회적 기업인 ‘삶과 환경’과 ‘미래ENT’는 지역 내 각

급 시민조직과 연계해 탄생했다. 일부 사회적 기업들은 지역자활센터-지자체-기업

의 3자협력모델을 기반으로 하기도 한다. (유)나눔푸드, 행복나눔푸드와 같이 SK

의 ‘행복을 나누는 도시락’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기업들이 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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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자활센터 사회적 기업 계 비고

서울

서울중구 행복도시락 1서울구로삶터 나눔돌봄센터 1

서울노원 행복도시락 사랑의 손맛 1서울관악 푸른환경코리아, 나눔공동체, CNH종합건설 3서울송파 (유)행복케더링 1

한국자활중앙물류 1 집수리 공동체가 모태

광주광주서구 행복을 나누는 도시락, 빛고을 건설 2광주동구 희망자원 1

광주북구동신 자미푸드 1광주북구일터 드림박스 1

대전 대전대덕 (유)행복한 밥상, (주)어울림 2대전서구 (주)플러스 1

부산 (사)부산돌봄사회서비스센터 1 부산 광역자활공동체인천 인천동구 행복을 나누는 도시락 1

인천중구 (주)청소사랑 1

강원정선 정선재활용센터 1강릉 희망공간사업단, (유)나눔, 사랑의 도시락,

(유)두레건축 4횡성 열린재가사회서비스센터, (유)늘푸른 환경, 3

사회적 기업은 단순히 가치 있는 활동을 하는 기업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적

가치를 갖는 활동을 해야 하지만, 조직 과정도 사회적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운

영 과정도 사회적이어야 한다. 지역자활센터와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는 한국에서

사회적 기업을 제기했고, 직접적인 조직화를 위한 실천을 선도했으며, 모델이 되

는 사례들을 조직해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자활사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기업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2009년 9월 현재 정부로부터 인증을 받은 사회적 기업은 모두 251개이다. 이

중 자활공동체나 자활근로사업단에서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한 사례는 모두 61개

로 전체 사회적 기업의 24.3%를 차지한다. 지역자활센터를 운영하는 모법인에서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받은 사례를 포함하면 더 많다

<표 4-4> 2009년 9월 현재 자활사업이 모태가 된 인증 사회적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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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자원동해 (유)늘푸른 환경 1삼척 (유)해맑은 환경 1

속초반야 (유)에스씨 환경 1영월 늘푸른 환경 1

경기

구리 에코그린 1 컨소시엄시흥작은자리 함께일하는 세상, 컴윈, 아름다운집 3 컴윈은 컨소시엄

수원희망 짜로사랑 1수원우만 조이비전 1부천나눔 (주)행복도시락, 나눔과 돌봄 2

경남 창원 경남고용복지센터, 늘푸른자원 2거창 (주)거창돌봄지원센터 1

경북 성주 (주)늘품테크 1문경 (주)행복한 일터 1

전남 여수 사람과 공간, 맑은여수환경 2

전북전주 전주노인간병지원센터, 전주주거복지센터, 공

동체나눔환경 3전주덕진 사람과 환경 1

진안 나눔푸드 1남원 새벽영농조합 1

충북

청주 삶과 환경 1 컨소시엄청원 휴먼케어, 미래ENT, 월화수크린 3충주 두레환경 1제천 (주)휴먼디엔씨 1진천 진천군주거복지센터 1

제주 제주수눌음 행복나눔푸드, 크린서비스 보금자리 2계 61

자료 : 자활정책연구소(2009)에서 인용.

현재 정부의 사회적 기업 관련한 정책이 사회적 기업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는 견해가 차츰 높아져가고 있다. 정부의 주도성이 강하고 많은

사회적 기업들이 시민사회의 협력적 결과물로 등장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기업이 직접 사회적 기업을 조직하는 경향마저 나타난다. 사회적 기업

을 준비하는 조직들도 대부분 사회적 가치의 실현보다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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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 크다. 이런 상황은 사회적 기업의 실험과 역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탓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에서 사회적 기업의 미래가 밝다고 하기에는 아

쉬운 부분이 많다.

<표 4-5> 자활공동체와 사회적 기업의 비교사회적 기업 자활공동체

정의취약계층에게 사회서비스 또는 일자리를 제공하여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등의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판매 등 영업활동을 수행하는 기업

2인 이상의 수급자 또는 저소득층이 상호․협력하여, 조합 또는 공동사업자의 형태로 탈빈곤을 위한 자활사업을 운영하는 업체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한 자활공동체 요건을 갖추고 보장기관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인정공동체

주무부처 노동부 복지부법적근거 사회적기업육성법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도 출발시기 2007년 2000년제도절차 노동부의 認證 시군구청장의 認定

운영시스템

기업형태 제약 없음 법인이나 비영리조직으로 제약설립목적 경제적 자립 일자리 창출, 사회서비스 제공 등 운영특성 공동사업자 조직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이윤분배 제약 없음 제약의사결정 1인 1표 주의 조직 형태에 부합하는 의결권 부여

지원시스템

․ 일부 지자체 지원 조례 제정․ 권역별 지원기관 운영․ 경영컨설팅/회계프로그램 설치 및 사용비 지원․ 각종 세제 지원․ 부지구입비, 시설비, 점포임대에 필요한 초기자금 융자․ 인건비지원(3인 이내 최대 2년까지 월 150만원 인건비 지원)․ 사회적일자리 사업 지원

․ 지역자활센터의 자활공동체 설립 및 운영 지원․ 창업 후 최대 1년간 수급자에 한해 시장진입형 자활근로 임금 지원

기타 ․ 사회적 기업가 아카데미 지원․ 사회적 기업 홈페이지 운영․ 각종 언론 보도․ 정부 주도의 각종 홍보 활동(홍보대사 임명, 블로그 기자단 운영)

개수 2009년 9월 현재 251개 2008년 11월 30일 현재 1,005개자료 : 문보경(2009), 자활정책연구소(2009) 참조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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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자활사업의 측면에서 본다면, 현재의 자활사업단과 자활공동체들을 반

드시 인증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해야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념형(ideal type)으

로서 사회적 기업이 갖는 의미는 크기 때문에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내용을 갖는

노력은 중요하다.

2) 사회서비스의 확대와 자활사업

① 노무현 정부 중반 이후의 사회서비스 확대

한국에서 사회서비스(social service) 사업으로 불리는 영역은 엄밀히 말하면 사

회서비스로 규정하기에는 다소 모호하다. 표준산업분류를 기준으로 하자면, 공공

행정, 국방 및 사회보장 행정이나 오락문화운동서비스, 사업서비스업도 사회서비

스에 포함할 수 있다.

표준산업분류 사회서비스 해당 직종(예시)N. 공공행정, 국방 및 사회보장 행정

사법 및 공공질서 행정(법원, 검찰, 교도기관, 경찰, 소방 등), 사회보장 행정 등 서비스업

분류상

사회서비스O. 교육서비스업 교육기관(유아․초중등․고등), 특수학교, 직업훈련 사

P. 보건 및 사회복지사업 의료(병원, 의원 등), 복지시설(노인, 아동 등)R. 기타 공공, 수리, 개인서비스업 하수․폐기물 처리, 개인 간병인 등

Q. 오락문화운동서비스 도서관, 박물관, 사적지, 식물원, 동물원 등일부 포함

S. 가사서비스업 가사도우미(가정탁아, 세탁부 등)M. 사업서비스업 고용알선, 경비, 사업장 청소, 사무지원 등출처 : 사람입국일자리위원회(2006)에서 인용.

<그림 4-1> 사회서비스 일자리 비교

사회서비스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

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임기 중반 이후 사회서비스를 일종의 ‘선제적 투자’로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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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고 국가 발전의 중요한 동력으로 상정했었다. 이런 인식 속에서 정부 각 부

처별로 사회서비스 부문의 일자리 창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표 4-6> 노무현 정부 사회서비스 일자리 총괄

부처일자리 효과(명)

’07년 과제 숫자

재정소요 및 일자리 규모’05년 ’06년 ’07년

예산 인력 예산 인력 예산 인력노동 13,450 7 258 3,910 517 6,000 799 13,450복지 262,430 38 632 60,775 7,362 189,047 10,552 262,430여성 33,612 9 244 10,301 258 7,946 1,708 33,612교육 5,634 6 89 2,356 128 3,401 361 5,634문화 3,710 6 184 2,687 284 3,400 337 3,710산림 32,249 9 235 2,000 378 3,373 1,803 32,249환경 500 1 64 480 71 483 76 500

청소년 1,450 3 27 499 101 1,050 139 1,450경찰 2,350 5 0 0 0 0 302 2,350

해양수산 110 1 - - 13 110문화재 36 1 - - 4 36

계 355,531 93 1,733 83,008 9,099 214,700 16,094 355,531 출처 : 사람입국 일자리위원회(2006) 참조 구성.

한편, 정부는 사회서비스의 확대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특히 돌봄(care) 영역

을 중심으로 바우처(vaoucher) 방식으로 사회서비스를 공급하려는 모색을 한다.

바로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 사업과 노인장기요양

보험제도이다.49) 오랫동안 ‘국가책임 최소화’와 ‘가족책임 최대화’에 입각해있던

한국의 사회복지에서 비록 바우처 방식이라는 시장적 기제를 적용하기는 했지만

사회서비스의 확대 공급이 이뤄진 것이다.

② 사회서비스 확대와 지역자활센터의 역할

49) 노인장기요양보험은 명시적 바우처는 아니지만, 수급자에게 욕구평가등급에 따라 사용할 수 있

는 이용한도금액이 주어지고, 그 한도 내에서 이용하는 서비스 실적에 따라 해당 서비스기관에

게 비용이 보상되는 방식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암묵적 바우처 방식으로 볼 수 있다(석재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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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보면, 자활사업은 돌봄 영역에서 사회서비스가 확대 공급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자활사업의 성과와 경험이 사회서비

스의 확대 공급에서 중요한 기반으로 작용했다.

지역자활센터들은 초창기부터 돌봄 영역의 서비스 공급에 중요한 비중을 두었

다. 이른바 5대 표준화 사업 중 하나가 간병사업이었고, 사실상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이었다. 간병사업은 병원 간병과 재가 간병으로 구분된다. 병원 간병은 대도

시를 비롯해 일정 규모 이상의 도시 지역에서 주를 이루며, 소도시나 농산어촌지

역에서는 재가 간병이 주를 이룬다. 병원 간병은 수익 창출을 통해 자활공동체

등의 독립 사업체를 지향하는 사업과 기초생활보장수급자들에 대한 무료 간병을

하는 사업으로 구분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 축적된 성과와 경험은 사회서비스의

확대 공급에 큰 기여를 했고 정책적․사회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2001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우정사업본부의 무의탁 환자 무료간병 사

업은 돌봄 부분에서 자활사업의 성과와 경험을 인정받아 시작한 외부 기관과의

연계 사업의 초기 사례이다. 2004년부터는 복권기금을 재정으로 하는 가사간병도

우미파견사업이 시작되는데, 당시 사업의 대부분을 지역자활센터들이 수행했다.

2005년에는 SK의 재정적 지원을 바탕으로 하는 장애통합교육보조원사업이 시작

되었다. 2006년에는 삼성생명과의 협약으로 비추미산모사랑봉사단이 조직되었으

며, 국립의료원과 무료간병 도우미 파견 약정을 체결하고 간병인을 파견했다. 또

한 돌봄분야 사회서비스의 첫 바우처 사업인 산모신생아도우미 사업을 2006년에

전국적으로 지역자활센터들이 수행했다. 2007년에는 노동부의 사회적 일자리 사

업으로 보호자 없는 병동에 간병인을 파견하는 사업이 시작되어 2009년까지 계속

되었다. 게다가 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사업과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실시를 앞

두고 진행된 시범사업은 지역자활센터들이 참여했었다. 결국 그간 지역자활센터

의 돌봄서비스 공급 활동이 돌봄 영역의 사회서비스에 대한 정부 정책 형성에 중

요한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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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역자활센터와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는 사업 수행을 통한 서비스 공급

외에도 내적으로 다양한 모색을 도모했다. 바로 서비스 공급자들의 조직화, 질 좋

은 서비스 공급을 위한 인프라 보충, 정부 정책에 대한 대응이 그것이다.

<표 4-7> 2005년 이후 사회서비스에 대한 지역자활센터의 주요 대응연도 내용2005 장애통합교육보조원사업 협약

연구보고서 <자활간병인력의 안정적 일자리 확보 전략> 발간

2006

산모신생아도우미 지원사업을 위한 인력현황 조사 시행산모신생아도우미 바우처 사업 시행국립의료원 무료간병 도우미 파견 약정 체결자활간병사업 과제와 대응방안 마련을 위한 워크숍 비추미산모사랑 봉사단 사업 시행노인수발보험추진단 조직사회서비스 분야 직할사업단 운영

2007보호자없는 병동 등 전문간병인 파견사업(노동부 사회적일자리 광역형)사회서비스 시장화 저지를 위한 공대위 참여연구보고서 <자활영역의 가사․간병사업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발간장애통합교육보조원사업 전국 워크숍

2008 돌봄영역사업 총괄을 목표로 사회서비스총괄본부 설치 장애통합교육보조원사업단 행복미래사회서비스센터로 전환

2009 돌봄사회서비스 현안과 과제점검을 위한 워크숍 사회서비스선도사업인 (주)온케어에 168개점 가맹

우선 지역자활센터의 자활사업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간병 영역에서 조직화를

위한 시도가 꾸준히 모색되었었다. 간병 네트워크가 꾸준히 운영되면서

5,000~6,000여명에 이르는 전국의 자활 간병인들이 매년 모이는 행사가 진행되었

었다. 2004년부터는 (사)한국간병인협회가 추진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재정적인 문

제, 운영 시스템의 문제 등이 난관으로 작용하면서 전국적인 조직화에는 실패했

다. 2005년의 시범사업 실시를 앞두고는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 내에 ‘노인장기요

양제도 사업 추진단’이 결성되어 운영되었다. 2004년에 정부로부터 지정된 중앙가

사간병교육센터와 호남가사간병교육센터는 가사간병도우미에 대한 교육과 함께

자활 간병사업의 발전을 위한 각종 지원을 수행했다. 2006년에는 한국지역자활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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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협회 차원에서 사회서비스 분야의 직할사업단을 운영했는데, 이 활동은 2008년

에 사회서비스총괄본부로 개편된다. 또한 산모신생아도우미지원사업을 위한 인력

현황을 조사하고, 자활간병사업 과제와 대응방안 마련을 위한 워크숍을 연 것도

2006년이었다. 2005년과 2007년에는 자활정보센터에서 연구보고서50)를 발간했다.

2007년에는 ‘사회서비스 시장화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 한국지역자활센터

협회가 참가해 사회서비스의 시장화 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한편, 자활사업을 통해서 사회서비스 부문의 일자리 창출에 대한 가능성을 타

진한 정부는 돌봄 영역에서 사회서비스를 크게 확대한다. 2007년에는 금융기관

선정과 정보시스템의 구축, 그리고 전담기관인 사회서비스관리원을 설립하고 이

미 진행 중이던 산모․신생아도우미 사업을 비롯해 노인돌보미 사업과 장애인활

동보조인 사업을 바우처 방식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2008년부터는 2005년부터

시범사업으로 진행하던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를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였으며,

복권기금으로 운영되던 가사간병도우미파견사업을 바우처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한편, 2007년에는 여성부 소관이던 아이돌보미 사업을 2008년부터 보건복지가족

부 소관으로 돌렸다. 이런 와중에 2007년에는 사회서비스 사업을 자활사업의 개

편 방향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지역자활센터라는 조직이 갖는 인프라와 그간의

경험 및 성과를 반영한 정책 모색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모색에 그치고 말았다.

정부는 2008년에 사회서비스선도사업을 통해 사회서비스 분야를 기업형 산업으

로 육성할 의도를 밝혔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 중 하나가 ‘(주)온케어’이다. 애초

에는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가 참여하려 했으나 정부에서는 중앙자활센터를 수행

기관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지역자활센터들의 가맹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정부

와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 중앙자활센터가 협의를 통해 2009년에 변모를 모색

했다. ‘경영진 교체’, ‘지역자활센터 중심의 프랜차이징’, ‘가맹점에 지분의

50) 연구보고서는 모두 중앙가사간병교육센터의 용역을 의뢰받아 수행되었다. 류만희 외(2005)와

류만희 외(200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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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이상 귀속’ 등이 그것이다. 그 결과 2009년 6월 현재 168개점이 가맹될

정도로 급속히 궤도에 올랐다. 아직까지는 ‘바우처 사업’이 주를 이루나 정부

의 지원이 끝나는 2010년 9월부터는 병원 간병도 사업 운영이 가능하리라 보

여진다.

전체적으로 정부의 사회서비스 확대 공급에서 자활사업이 큰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반적인 정부의 정책 흐름이 자활사업에 유리하게 작용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폭넓은 인프라와 사업 경험 및 성과가 제도를 기획하고 판단하고

점검하는 데는 큰 기여를 할 수 있지만 이것이 제도 운영을 위한 논의 참여와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제도의 형성 과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

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돌봄 영역의 사회서비스 공급이 매우 취약하던 한

국에서 지역자활센터들의 활동은 돌봄의 내용을 확산시키고, 제도화하고 일자리

로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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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활 내부의 다양한 모색

1) 기업사회공헌과의 연계

① 한국에서 기업사회공헌의 변화

한국에서 기업사회공헌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이후로 비교적 최

근의 일이다. 물론 1990년대 이전에도 기업사회공헌이라 부를 활동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와는 양상이 많이 달랐다. 1950~60년대에는 소수

의 기업가가 자선적 동기로 장학재단 형식의 활동을 전개하는 정도였고, 1970~80

년대에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이나 국가적 재난 시 성금을 내는 준조세 성격의 비

자발적 기업기부가 주를 이루었다. 물론 1980년대 이후에는 기업이 출연한 재단

의 설립이 증가하고 사업 양상도 다변화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러

한 활동조차도 재산 상속 및 증여를 의도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다.

1990년대부터 한국은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시민사회의 성장이 눈에 두드러지

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기업에 대한 시민사회의 비판도 좀 더 성숙해지는데, 이

의 일환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이슈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민주화는 기업에

게도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데, 정경유착 및 준조세적 성격의 강제적 기부금 관

행의 약화이다. 물론 세계화라는 거시환경의 변화는 개별 기업의 경영 환경에도

변화를 주어 기업 역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90년대 후반의 외환위기는 한국에서 기업 사회공헌활동

의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1990년부터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일부 대기업들의 독

립적인 사회공헌조직의 체계화는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더욱 발전한다. 특히 주목

할 것은 기업 사회공헌활동을 경영전략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

다. 이런 인식은 단순히 재정적 지원자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국가

또는 시민사회와 직접적인 연계를 통한 활동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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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점 근 거 제도적 공신력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명시된 사업과 조직조직 시스템 전국의 거의 모든 기초자치단체에 있어 전국적인 사업의 조직이 가능

협회-지부-기관으로 이어진 유기적 구조생산 활동 실행력을 갖추고 있어 단순 기부가 아닌 가시적인 생산 활동의 조직 가능경험 2001년의 우정사업본부 지원 무의탁환자 무료간병부터 축적된 경험

② 기업사회공헌과의 연계에서 자활사업이 갖는 강점

자활사업은 초기부터 기업과의 연계를 주목했었다. 자활사업을 이끌어 낸 빈민

운동진영이 처음 관계를 맺으려 했던 것은 정부가 아니라 대기업이었다. 이 시도

가 무산된 후 빈민운동진영이 정부와 관계를 맺고 국가 정책 영역에서 출발한 것

이 시범 자활사업이다. 이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지역자활센터를 전국적인 인

프라로 변모시켰다. 이는 지역자활센터가 전국적으로 사업을 조직할만한 인력과

실행력을 갖춘 조직임을 의미했다. 시민사회 내 조직으로서 정부의 정책을 수행

하면서 전국적인 사업을 조직할만한 인력과 실행력을 갖춘 조직이라는 점은 단순

기부 방식을 탈피하는 추세인 기업 사회공헌활동의 흐름에 부합하는 강점이었다.

이 강점은 간병을 비롯한 사회서비스 영역과 집수리 영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기

업연계를 낳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뤄진 기업 사회공헌활동과의 연

계는 축적된 경험과 성과를 바탕으로 지속재생산 되었다.

<표 4-8> 자활이 갖는 기업사회공헌과의 연계 활동의 강점

③ 2005년 이후 자활사업과 기업 사회공헌

2005년 이후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의 기업 사회공헌활동과의 연계 상황을 보면,

<표 4-9>와 같다. 기업 사회공헌활동과의 연계 내용은 주로 사회서비스와 집수리

분야가 주를 이룬다. 이 중 사랑의집고치기 사업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한국지

역자활센터협회가 협약을 체결해 수행한 사업이다.51) 전국적으로 운영되는 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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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업단의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체계적인 운영과 집

수리 자활사업단의 사업 강화에 서로 도움이 되었다.

<표 4-9> 2005년 이후 기업사회공헌과의 연계연도 내 용 연계

2005소형폐가전 재활용 협약 체결장애통합교육보조원사업 협약 체결사랑의집고치기 사업 위탁무의탁 환자 무료간병

삼성전자SK, 보건복지부사회복지공동모금회우정사업본부

2006비추미산모사랑 봉사단 사업 시행빈곤아동 주거환경 개선 결연사업 협약 체결무의탁 환자 무료간병

복지부, 삼성생명 복지부,한국토지공사우정사업본부

2007저소득층 주거환경개선사업 협약2007 맞춤형 보금자리 가꾸기 협약무의탁 환자 무료간병

대한주택보증한국토지공사 우정사업본부

2008건강한 일자리 만들기와 자활사업지원을 위한 협약희망의 디딤돌-요양보호사 양성사업, 기능사 양성사업무의탁 환자 무료간병

대한생명산은사랑나눔재단우정사업본부

2009 무의탁 환자 무료간병 우정사업본부

장애통합교육보조원사업은 애초에 성동지역자활센터와 SK의 협력으로 시작한

사업이다. 2005년에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복지부-SK의 협약으로 전국적인 사업으

로 변모했다. 이른바 NPO-정부-기업의 3자 협력 모델의 선도적인 모델 운영으로

평가받는다. 2009년까지 시행된 비추미산모사랑 봉사단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뿐

만 아니라 이 사업들은 이후 사회서비스 사업의 확대 운영에도 단초로서 역할을

했다. 특히 장애통합교육보조원사업은 전국사업이 종료된 후 장애통합교육보조원

을 비롯한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활동할 인력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의 창출로 이어

졌다. 행복미래사회서비스센터가 그것이다.

2006년의 빈곤아동 주거환경 개선 결연사업과 2007년의 저소득층 주거환경개선

51)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비영리조직이므로 기업사회공헌활동에 포함시키기 어려우나 외부와의 재

정적 연계라는 의미로 인해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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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과 맞춤형 보금자리 가꾸기 협약은 집수리 자활사업단의 사업 강화에 기여를

했다. 최근 집수리 분야에서 기업 사회공헌활동과의 연계는 지역자활센터의 집수

리사업을 기반으로 조직된 (사)주거복지협회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기업 사회공헌활동은 분야별로 다소 다른 의미가 나타난다. 사회서비스 분야의

사업들은 돌봄서비스의 공급과 여성의 일자리 창출을 동시에 달성하는 의미가 강

하다. 반면, 집수리 분야의 사업들은 주거복지서비스의 공급과 기존의 집수리 자

활사업단의 사업 강화에 기여하는 의미가 강하다. 한편, 2008년부터 계속되고 있

는 희망의 디딤돌 사업은 인적 자본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는 의미가 강하다.

한편, 2008년에 이뤄진 ‘건강한 일자리 만들기와 자활사업지원을 위한 협약’은

포괄적인 목적이 제시되어 시민조직과 기업 사회공헌활동의 연계에서 새로운 시

도였다.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는 사회서비스선도기업인 ‘(주)온케어’에 대한 투자,

자활공제협동조합 조직, 자활정책연구소 운영에 이 기금을 활용하였다.

2) 주민자치조직의 확대

① 주민자치조직의 조직 형태

자활사업은 가난한 주민들의 경제공동체를 구현하고자 하는 목표에서 출발했

다. 당시 추구했던 상은 생산공동체였다. 시범사업 시기에 자활사업이 협동조합운

동으로 자기 위상을 설립한 것은 생산공동체운동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우리 역

사에서는 오랫동안 서민들의 자구적인 경제공동체 조직의 경험이 있어왔다. 두레

나 계가 그것이다. 두레가 생산 공동체에 가깝다면, 계는 신용과 친목의 공동체에

가깝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경제공동체인 두레나 계는 점차 사라

져가는 추세이지만, 자활사업의 현장에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경제공동체가 재탄

생하고 있다.

생산공동체를 원형으로 삼는 자활공동체가 제도적 지향 속에서 많은 한계를 가

지고 있는 반면에, 최근 확대되고 있는 주민자치조직은 자율적인 생활안전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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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 -

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은 대개 상조회나 주민금고로 나타난다. 상조회는

대체로 자활사업 참여자들이 회비를 갹출해 상호부조를 목표로 운영되며, 주민금

고는 자활사업 참여자들이 출자를 해서 운영한다. 출자자 중 일정한 자격이 되는

이들에게는 대출도 이뤄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활사업단에 투자를 하는 기관도

있다. 지역자활센터들은 주민금고가 조직되는 과정에 개입을 한다. 그러나 일단

주민금고가 출범하면 여러 이사 중 하나가 되거나 실무를 담당하는 선에서 그치

고 자활사업 참여자들이 운영을 한다. 상조회도 일부 이런 방식으로 운영된다.

상조회가 상호부조와 친목에 주안점을 두는데 반해, 주민금고는 출자와 예금,

그리고 대출을 통해 스스로 금융을 조직해 이용하는 기회를 창출한다. 그런 의미

에서 좀 더 진전된 생활안전망이라 할 수 있다. 주민금고는 대체로 참여 주민들

에 대한 교육과 상당 기간의 교감을 바탕으로 운영에 동의가 이뤄지고 바자회 등

을 통해 종자돈을 마련한 후 회원 가입자들로부터 출자를 받는다. 이렇게 해서

마련된 운영기금은 주로 대출에 활용된다. 출자금은 주민금고 탈퇴 시에 돌려주

며, 운영기금은 지역자활센터의 주거래 금융기관에 주로 예치된다. 경우에 따라서

는 자활사업 참여 주민 외의 지역 주민들이 조합원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런 경우는 대체로 후원의 측면에서 참여하므로 대출에 제약을 받는다. 대출이

자는 무이자이거나 연 4% 안팎으로 매우 저렴하다(자활정책연구소, 2009). 대출은

주로 50~200만원이다.

② 주민자치조직의 현황

박미란(2007)에 의하면, 자활 내부에서 주민자치조직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주민금고는 2005년 이후 증가세가 가파르다.

현재까지는 주민자치조직을 지역자활센터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해서 운영한다.

그러나 2009년부터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는 전국적인 차원에서 주민자치조직의

조직화를 기획하고 가난한 주민들의 자율적인 경제공동체 확산을 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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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자활공제협동조합’의 조직화이다.

<표 4-10> 2007년 현재 각 주민자치조직 설립년도설립년도 센터수*

1999 12000 12001 -2002 22003 42004 42005 52006 72007 9

33 자료 : 박미란(2007)에서 인용.

<표 4-11> 2007년 현재 주민금고 지역 센터명 조합명 설립년도 대출금액 이자율

경기 성남만남 - 2008년 예정 - 연 3%(범위 내 대출은 1%)서울 광진 늘푸른협동조합 2007 - 연 3%경기 시흥작은자리 한마음협동조합 2007 12,700,000원 연 3%(범위 내 대출은 1%)전북 익산원광 함께나눔금고 2007 5,000,000원 연 5%강원 삼척 한우리협동조합 2006 28,750,000원 연 9%강원 춘천 하나된우리조합 2005 57,900,000원 연 4%서울 성동 아침을여는협동조합 2005 23,220,000원 연 3%(범위 내 대출은 1%)전북 익산 희망세상협동조합 2005 39,500,000원 연 5%강원 횡성 반딧불협동조합 2004 157,540,000원 연 4%경남 사천 사천 나눔의 금고 2003 66,300,000원 연 3%강원 원주 누리협동조합 2002 12,000,000원 연 4%자료 : 박미란(2007) 참조 구성.

자활공제협동조합의 필요성은 2000년대 초반부터 있어왔다. 시작은 국내의 대

표적인 빈민공동체인 복음자리 공동체 조직화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경험이 있던

김영준 전 협회장때부터였다. 문제 제기는 두 가지에서 나왔다. 하나는 실리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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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로 자활사업 참여자나 종사자들의 각종 상해(傷害)에 대한 대처이다. 또 하나

는 공동체로서의 내용성을 갖는 조직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이념적 이유에서였다.

지속적인 문제 제기 속에서 2006년에는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의 총회에서 자활공

제협동조합을 위한 현황조사를 하기로 결의하고 2007년에 자활정보센터에 의한

조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2007년 12월에 자활정보센터가 출간한 <주민자치조직(신

용조합, 상조회) 현황>에 따르면 주민자치조직이 2007년 현재 44개소에 이르고 있

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상조회는 약 33개이며 신용조합52)은 11개소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는 2008년 제 7차 정기이사회에서 자활공제

협동조합 추진계획안을 내놓았고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2009년 들어서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는 추진단을 구성하고 세 차례에 걸쳐 자

활공제협동조합 포럼을 열었으며, 네 차례에 걸쳐 자활공제협동조합 아카데미를

조직해서 자활공제협동조합의 리더를 양성하고 자활공제협동조합에 대한 인식 확

산을 도모했다. 또한 각 지부 단위로 설명회를 조직해서 자활공제협동조합에 대

한 관심을 확대하고 있다.

원주의 밝음 신협, 시흥의 복음자리 신협, 서울의 논골 신협 등은 각각 조직된

시기와 지역은 다르지만 가난한 이들의 경제공동체를 조직하고자 하는 목표 속에

서 조직되었고, 가난한 이들의 버팀목으로 자리매김한 대표적인 신협이다. 자활공

제협동조합도 자활사업 참여자들과 자활사업 종사자들의 경제공동체로서 자리매

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3) 각종 대안경제의 조직화

① 자활의 대안경제에 대한 관심과 담론 차원의 모색

자활사업은 애초에 대안경제를 목표로 했다. 생산․나눔․협동이 이념으로 표

방되는 점이나, 자활공동체라는 이름, 그리고 그동안 추구했던 사회적 일자리나

52) 주민금고를 지칭함. 단, 각 지역자활센터들은 신용협동조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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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기업은 이를 말해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대안경제라는 개념의 추상 수준

이 매우 높은데서 알 수 있듯이 실제 현장에서 사업을 조직해 나갈 때 대안 경제

의 추구는 쉽지 않았다.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조직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다는 것은 정부의 통제와 관리를 허용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 추구라는 측면에서는 제약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대안 경제의 조직화를 위한 지역자활센터들의 노력은 계속 되었다.

한국사회포럼은 2000년대 들어 진보진영의 의제를 종합적으로 점검하고 각 집

단의 상호 소통을 목적으로 해마다 열리는 대규모 행사이다. 이 중 2006년의 한

국사회포럼에는 ‘대안경제운동으로서 사회적 일자리의 현황과 전망 : 환경․주

거․돌봄노동을 중심으로’라는 섹션이 마련되었다. 발표된 사례들은 대부분 자활

사업이었다.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는 2008년 정기총회에서 자활의 가치가 ‘대안경

제’의 틀에 있을 때 실현됨을 제기했다. 자활사업이 애초 대안경제의 추구 속에서

나왔음을 고려할 때 새삼스러운 제기일 수도 있었으나 자활사업의 가치를 거듭

확인하는 의미가 있는 시도였다. 2009년에는 대안경제를 모색하는 시민조직들과

함께 ‘경제위기와 民의 대안’이라는 토론회를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가 공동 주최

하기도 했다. 2009년 2차 자활포럼인 ‘자활사업과 커뮤니티비즈니스’도 대안경제

조직으로 평가받는 커뮤니티비즈니스에서 자활사업의 발전적인 경로를 모색하고

자 하는 취지였다.

또한 2006년에는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 차원에서 ‘지역화’가 주요 사업으로 거

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을만들기 네트워크’와 같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대

안 운동 조직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실, 자활사업은 출발이 지역의 빈곤 문제를

빈곤층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였다. 따라

서 ‘지역화’는 자활사업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어야 했으나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이후 지역화를 중요한 문제 해결 방식으로 인식하는 경향은 크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2006년을 기점으로 지역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차츰 확산되기 시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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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특히 2009년 들어서는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 차원에서 지역화를 위한 구

체적 실천 작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2009년 제1차 자활포럼의 주제를 ‘자활사업과

지역화’로 잡아 지역자활센터들의 문제의식을 고양시켰으며, 이후 자활정보센터의

후속 기관인 자활정책연구소 차원의 지역화전략 수립을 위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몇몇 기관들로부터 공모를 받아 사회투자지원재단과 함께 해당 지역에서 지역화

전략 수립을 공동 기획으로 시작하기도 했다.

② 대안경제조직의 조직화

담론 차원에서의 모색 외에도 일부 업종에서는 사업단의 직접적인 조직화를 통

한 대안경제의 추구가 꾸준히 모색되었다. 가령, 실패로 돌아갔지만 (사)한국간병

인협회의 추진은 대안적인 경제조직을 구성해 돌봄 서비스 영역에서 새로운 가능

성을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간병 영역은 실패했지만 전통적으로 자활사업이 활성

화되었던 그밖의 영역에서는 대안경제를 표방하는 조직들이 등장했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사)재활용대안기업연합회’이다. 폐자원을 재활용하는

자활사업단들 간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사)재활용대안기업연합회는 초기부

터 전략적으로 추동이 된 조직이다. 지역자활센터들 중에서도 실업운동조직을 모

법인으로 하는 기관들이 주가 되었으며, 상호 활발한 교류는 조직이 태동된 자산

으로 작용했다.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 차원에서도 활발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2005년에 재활용사회적기업연합회를 구성했으며, 2006년에는 (사)재활용사

회적기업연합회로 전환하고 2008년에 (사)재활용대안기업연합회로 전환했다. 2009

년 9월 현재 16개 업체가 가입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에 주거복지센터협의회 준비회가 설립되면서 모습을 드러낸 집수리 영역

의 (사)주거복지협회도 대표적인 대안경제 표방 조직이다. 집수리 영역은 현물주

거급여사업으로 인해 사업적 기반이 다소 안정되어 있었다. 여기에 기업 사회공

헌활동과의 연계도 활발했었다. 자활사업단의 숫자도 많았고 사업단들 간의 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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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도 활발했었다. 자활공동체가 가장 많은 업종이 집수리 영역이기도 했다. 지

역자활센터의 활동가들은 이런 점을 활용해서 집수리 영역을 통해서 빈곤층의 주

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적인 모색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 결과 탄생한 개념

이 ‘주거복지’ 또는 ‘에너지복지’라는 개념이다. 정책적인 모색 뿐 아니라 조직적

인 결사의 노력도 꾸준히 해왔다. 그 결과가 2004년에 설립된 주거복지센터협의

회 준비회이다. 주거복지센터협의회 준비회는 이후 집수리자활공동체협회와 집수

리자활공동체연대를 거쳐 2009년 이후 (사)주거복지협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

고 있다.

2009년 3월에는 청소 영역에서 ‘청소대안기업연합회’가 발족했다. 18개 업체가

가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청소대안기업연합회도 그 시작은 청소 영역 자활사업

단들 간의 네트워크였다. 그러나 청소 영역 자활사업단들 간의 네트워크의 활동

이 부진해지고, 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와의 협력이 잘 이뤄지지 않으면서 자활공

동체인 ‘함께일하는세상’이 주도가 되어 결성되었다.

과거 지역자활센터들 간의 사업단 네트워크는 매우 활발했었으나 최근 들어 약

화된 것처럼 보인다. 자활사업이 갖는 제도적인 한계가 사업단들 간의 네트워크

보다는 개별 지역자활센터들의 지역 내 활동에 더 초점을 두게 하였다는 현장의

평가이다. 그러나 이처럼 대안경제조직들이 각 영역에서 조직되고 있는 것은 사

업단 네트워크가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됨을 의미한다. 이 조직들에 가입한 업체

들은 대개 자활공동체들이며, 상당수는 인증 사회적 기업이기도 하다. 아직 한국

에는 대안경제를 지향하거나 운영의 내용으로 구성하는 기업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자활사업을 기반으로 하는 이 조직들의 탄생은 대안경제의 조직화에

서 의미 있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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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결 : 자활사업의 미래는 우리사회 변화의 시금석

2005년 이후는 자활사업이 정착기에 들어선 시기라 평가할 수 있다. 시범 사업

시기의 문제의식만을 강조하기에는 제도 환경과 내적 구성이 너무 변화한 가운데

정형화된 사업 운영이 자리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관련 전달체계나 제도

가 확장되어 지역자활센터 외에 중앙자활센터의 출범, 광역자활센터의 확대, 마이

크로크레디트의 확산, 근로장려세제 및 저소득층 자산형성지원프로그램의 실시가

이뤄졌다. 그러나 규모별 예산지원제도가 실시되어 개별 지역자활센터들은 정형

화된 틀 내에서의 성과 달성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활사업의

발전을 위해 시도되었던 자활급여법은 결국 제정되지 못하고 연기된다. 그런 가

운데 정부는 어느덧 고용을 강조하는 자활사업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성과를 강조

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들은 제도적인 측면에서 좀 더 효과적으로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정형화로만 특징지을 수는 없다. 사회적기업육성법의 제정

및 시행과 사회서비스의 확대가 이뤄진 시기이다. 물론 이런 상황은 자활사업에

서의 선도적인 문제 제기와 실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역자활센터들은 사회적

기업과 사회서비스 영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지역자활센터들은

자활사업 참여자들을 조직해 주민자치조직들을 결성하는 시도를 확대해나가고 있

으며, 자활사업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대안경제조직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지역자

활센터의 경험과 역량은 이를 활용하고자 하는 기업 사회공헌활동과 꾸준히 연계

되어오기도 했다.

결국 자활사업은 복지제도의 개편과 사회적 경제의 실험이라는 두 문제를 결합

해야 하는 어느 지점에 서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

는 새로운 환경과 과제 안에 자활사업이 놓여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활

사업의 미래는 우리 사회의 변화에서 중요한 시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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