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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4년7월28일(월) 양 세 진박사 (소셜이노베이션그룹 대표) 충북여성장애인연대 2 철학하는 삶을 산다는 것, 인문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존재물음, 캐물음을 통해 영혼의 생기 있는 삶 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러한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정정도 물질적 조건과 환경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즉, 경제적인 토대가 어느정도 충족되지 않은 상태 에서 존재물음, 캐물음이 가능하겠는가? 그런점에서 철학하는 삶이란 여전히 부르주아지의 사치이고, 여유라 할 수 있지 않은가? 하루 하루 일상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게 존재물음과 캐물음은 솔직히 사치이고, 이상적 인 이야기인 것이 아닌가?

충북여성장애인연대 여성주의철학아카데미 7강_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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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여성장애인연대에서 8주동안 진행되고 있는 '여성주의 철학 아카데미' 7주차 강의자료입니다.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을 정리한 내용인데, 다양한 맥락에서 사유될 수 있는 내용이어서 오픈해서 공유합니다.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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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7월28일(월) !양 세 진박사

(소셜이노베이션그룹 대표)

충북여성장애인연대

2

철학하는 삶을 산다는 것, 인문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존재물음, 캐물음을 통해 영혼의 생기 있는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러한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정정도 물질적 조건과 환경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즉, 경제적인 토대가 어느정도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존재물음, 캐물음이 가능하겠는가? 그런점에서 철학하는 삶이란 여전히 부르주아지의 사치이고, 여유라 할 수 있지 않은가? 하루 하루 일상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존재물음과 캐물음은 솔직히 사치이고, 이상적인 이야기인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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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이노베이션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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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방식의 2가지 모습. !1.비본래적인 존재방식 : 그저 있음으로 존재함 2.본래적인 존재방식 : 아우톤에 따라 현사실적인 실존으로 존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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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이노베이션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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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방식의 2가지 모습. !1.비본래적인 존재방식 : 그저 있음으로 존재함 2.본래적인 존재방식(authentic being) : 아우톤에 따라 현사실적인 실존으로 존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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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에 태어난 레비나스는 ‘네 문화의 철학자’라 불린다. ①리투아니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히브리어 성경을 읽음 ②러시아 문학을 읽으면서 자람 ③독일 철학자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정통하였음 ④26세에 프랑스에 귀화한 뒤 프랑스 철학과 함께 함. 자신의 전기를 짧게 서술하는 자리에서 레비나스는 ‘나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나치 공포에 대한 체험과 그것에 대한 기억이 지배한다’고 쓰고 있다. 유대인 학살의 극치를 보여준 아우슈비치이후에 예술은 없다고 말한 아도르노와 같이 레비나스는 인간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전쟁에 대한 반발이 철학적 사유에 깊이 침잠하게 된다. 이 배경에서 보면 레비나스의 사유는 폭력과 인종주의의 뿌리를 노출시키고 ‘다르게 사유함’을 통해 이 악을 극복해보려는 치열한 노력이었다. 다르게 사유함은 나와 다른 이, 내가 아닌 이, 곧 타자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다른 사유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레비나스(1906~1995)

1995년12월25일,‘타인을 위한 존재’로 오신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 우리 모두가 타인을 위한 존재임을 증언하는 일을 자신의 철학적 소명으로 삼았던 레비나스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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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적인 존재방식(authentic being) : 아우톤에 따라 현사실적인 실존으로 존재함

그저 있음

주체(suj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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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subject, (라)subjectus) sub : 아래에서, 아래로부터 ject : 분사하다, 보내다 —>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이 나온다. 주체는 저 아래의 무의식이 분사되어 흘러나온 것이 생성되어진 것이다. 주체는 무의식으로부터 생성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포착되고 파악되고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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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적인 존재방식(authentic being) : 아우톤에 따라 현사실적인 실존으로 존재함

그저 있음

주체(sujet)sub: 아래에서, 아래로부터 jet: 분사하다, 보내다, 떠받들다 : 타자의 아래에서 타자를 떠 받들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주체이다. 따라서 주체성은 타자에 대한 책임만큼 구조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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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물음과 존재이해를 갖고 홀로 존재하는 하이데거적인 존재자를 극복하고 타자와 더불어 사귐을 갖고 윤리적 책임을 감당하고 있는 존재자가 진정한 주체임을 강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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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저편’이라는 플라톤의 말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을 넘어서는 이데아가 존재하는 존재자의 저편을 의미 했다면,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존재케 하는 존재의 의미를 밝혀내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존재의 저편’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고립된 ‘존재자’가 아니라 타자와 더불와 사귐을 갖고 있는 타자-주체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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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코기토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은 실체이자 본질로서 자리를 확보한 어떤 것으로서의 사유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사유가 본질이고 존재자체인 것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영원한 진리’에 대한 비인격적인 사유에 머물고 있다.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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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철학은 타인의 이타성 자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성립하게 하는 자유를 외면하고 있었다. 타인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그런 대화 속에 깃들여 있는 타인의 이타성을 과소평가해 왔는데, 타인과의 사귐과 대화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159~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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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자아, 자기가 아닌 것이다. 나는 강하지만 타인은 약하다. 타인은 가난한 자이며 ‘과부이고, 고아’이다. 질서가 아주 잘 잡히 자선을 발명한 것보다 더 큰 위선은 없다. 타인은 이방인, 적, 권력자이다. 본질적인 것은 타인은 그의 이타성 그 자체이다. 타자와의 상호주관적 관계는 무엇보다 비대칭적이다. 문명사회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는 상호성을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결과물이지 출발점이 아니다. 비대칭적 상호 주관성은 존재의 장소이다. 비대칭적 상호주관성 속에서 주체는 완전히 주체 자신이 된다.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161~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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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의 저편에 있는 타자는 동일한 현재 속에 자리할 수 없고, 동시적일 수 없으며, 나에게 표상될 수 없다. 타자를 위한 책임은 나의 관여나 결정 속에서 시작될 수 없다. 내가 처한 무한한 책임성은 나의 자유의 이편으로부터 온다. 타자를 위한 책음은 주관이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 자리하며, 그곳이 어디냐?라는 물음의 특권이 사라진 곳에 자리한다.

!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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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으로서 존재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 명령하는 현재를 초월하기 때문에 내가 무한을 추론할 수 없다. 내게 명령하는 무한은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원인이 아니며, 얼굴로 다가오는 타자로부터 시작하는 우회이다. 존재 저편에 타자가 있다는 것은 존재가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나로 하여금 이웃을 향한 움직임을 수행케 하는 출발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존재로부터 타자를 위한 나의 책임이 비롯된다.

!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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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정체성은 책임 회피의 불가능성과 타자의 짐을 짊어지는 것에 관련된다. 우리는 말하는 행위 주체로서 주체성,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주체성이 자아의 상처받기 쉬움으로, 양도할 수 없는 감성에로, 개념화할 수 없는 감성에로 거슬로 올라간다는 것을 수용하게 된다.

!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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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로부터 타자와 소통하는 관계로의 변화는 동일성의 파괴이며 이는 상처받기 쉬운 주체의 주체성이다. 타자를 위한 책임으로서 주체성은 어떤 수동성보다도 더 수종적인 수동성처럼 발생한다. 책임, 즉 이웃을 맡아야 할 책임인 응답은 이 같은 수동성 속에서, 주체성의 사심을 버림 속에서 공명을 일으킨다. 타자와의 말함으로서 소통은 노출, 표현, 솔직함, 성실성, 진실성, 고통 등 지불되는 말함이 아니라 발견되는 말함이며, 의미 부여의 말함이다.

!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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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해야 할 책임으로서 이웃의 방식은 얼굴이다. 이웃의 얼굴은 나에게 있어서 모든 자유로운 동의, 모든 협정과 계약에 선행하는 부인할 수 없는 책임이다.

!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 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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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떠 받들고 봉사하고 책임있게 응답해야 할 타자는 신뢰할만한가? 타자가 나를 폭력과 힘으로 억압하고 지배하려할 경우 나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한 상황속에서도 나를 타자에게 기꺼이 내어 맡기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그경우 인류가 폭력과 전쟁을 극복한 존재자가 되도록 열망했던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은 왜곡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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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타자성의 철학이 우리 안에 전면적으로 내면화되지 못한 상태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즉, 타자성의 철학이 일면적으로 혹은 다면적으로 내면화된 상태에서 가능한 물음이며, 이것은 물음에 대한 답을 통해서가 아니라 물음 자체를 넘어서 전면적으로 내면화하는 과정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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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존재하다’라는 동사의 새로운 울림이다. 존재-존재자의 근본적 구분. 그 유명한 존재론적 차이. ‘존재하다’라는 단어의 동사적 울림과 그 단어의 명사적 울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서양 철학사상은 존재를 존재자의 정초(토대이자 근본, 근거)로 이해하는 데서 성립한다.

!레비나스, [신, 죽음 그리고 시간], 180~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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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로서의 타자는 동일자와 어떠한 공통점도 가지지 않는다. 타자는 종합 안에서 자신을 사유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는 타자에 대한 동일자의 공경이다. 이 공경 속에서 우리는 윤리적 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윤리적 관계는 더 이상 존재론이나 존재 사유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레비나스, [신, 죽음 그리고 시간], 188~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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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는 타인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다. ‘이웃’이란 우선 이러한 관계의 우연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타인, 이웃은 최초로 온 자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타인에 대한 책임인 근접성이다. 이것은 사로잡히는 책임, 사로잡힘인 책임이다. 타인은 주체로서 나를 포위해서 나 자신과 나의 자아 모두를 볼모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볼모의 무조건성은 우리가 ‘먼저 하세요(after you, apres vous 아프레 부)’라는 단순한 양보의 말조차 할 수 없는 조건인 것이다.

!레비나스, [신, 죽음 그리고 시간], 205~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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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의 타자를 위한 존재 속에 주체성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닌 유일한 주체이다. 이것은 외부로부터는 식별될 수 없다. 이웃에게 소환됨의 정체성을 갖는 주체이며, 이웃이 머리를 기대는 이는 바로 이런 주체다. 따라서 그 주체의 정체성은 이 책임 앞에 회피할 수 없음으로 이루어진다.

!레비나스, [신, 죽음 그리고 시간], 235~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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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의 관계는 타자와의 결코 끝나지 않은 관계며, 모든 의무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고, 탕감할 수 있는 빚으로 흡수되지 않는 차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해 가능성은 이론적 앎이 아니다. 나는 실천적 행위로서 봉사의 관계 속에서 타자를 위해 있다. 타자에게 볼모가 되는 수동성으로서 주체성은 사실상 나의 모든 자리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나로서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이것은 자기 반성의 어떤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까지 스스로 고통받고 벌을 받는 데까지 이르는 수동성이다.

!레비나스, [신, 죽음 그리고 시간], 242~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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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 의함은 또한 타자를 위함이다. 타자의 잘못에 의해 고통받음 속에서 타자의 잘못을 위해 고통받음이 움튼다. 이것이 볼모로서의 주체성이다. 윤리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주체를 요구한다. 모든 것에 종속되는 주체, 명령의 모든 이해와 모든 들음에 복종하는 주체를 요구한다. 이것은 타율성에서 자율성으로의 전환이 있다. 이것이 무한이 스스로 지나가는 방식이다.

!레비나스, [신, 죽음 그리고 시간], 271~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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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를 한다는 것은 객관성이라는 이름하에 잊혀지기 쉽다. 철학함은 철저한 의식화를 통해 본질로 나아가는 것이며, 사물의 객관성을 넘어 존재의 의미를 밝힌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캐묻는 데 그치지 않고 ‘이것이 어떻게 이것인가, 이것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하는 것을 캐묻는 것이다.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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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물음(exetasis)이 없는 삶은 인간다운 삶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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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위한 책임은 ‘그저 있음’에서 벗어나는 것, 곧 무의미로부터의 탈출이다. ‘존재에서 존재자로’라는 책에서 그저 있음으로의 존재에서 타자를 위한 책임으로서 존재자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따라서 나는 타자에 대한 책임성, ‘타자에 대해 있음’이 존재의 소리를 잠재운다고 생각했다. 타자와의 관계성이 ‘그저 있음’에서 나를 구원한다고 보았다. 존재물음은 자기 안에 있음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관계있음으로 전환되었다.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6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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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있음으로서 ‘그저 있음’은 하이데거적인 표현으로 본래적인 실존이다. 그러나 ‘존재의 사건’ 그 자체로서 ‘홀로 있음’은 타자와의 사귐으로 전환되고, 그것은 존재론 너머에 있다. 본질의 저편에 위치한다.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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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자와 함께 사귄다는 것은 타자와의 나눔이고 공유적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의 있음의 기본관계는 타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죽음과의 관계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에는 타자와의 관계가 없다. 사람은 혼자 죽기 때문이다.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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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기토는 자신의 사유 속에서 태양과 하늘까지 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코기토가 품을 수 없는 것은 ‘무한’이라는 개념이다. 타자와의 사귐은 인식론적 앎과 같은 구조를 가질 수 없다. 앎이란 빛을 비추는 것과 같다. 밝혀진 것은 나에게 소유된다. 그러나 사귐이란 앎을 통하지 않고 있음에서 벗어나는 방식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주체의 자기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조이다.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75~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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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의 사귐은 중립적인 상호성이 아니다. 상호성이란 혼자들 사이의 거래일 뿐이다. 타자성은 앎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코기토의 자기 인식은 ‘같은 것과 같지 않은 것의 같아짐’이다. 그러나 타자와의 사귐으로서 타자성은 이중성을 소멸시키지 않는다. 타자와의 사귐은 감정이 여전히 둘로 있음이요, 타자는 철저히 다른 사람이다. 사귐은 타자성을 중립화하지 않고 타자성을 보존한다. 타자는 나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 것이 되거나 우리는 되는 대상이 아니다. 타자는 초월이고 무한이다.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8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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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존중하는 사회란, 개인의 자유에 바탕을 두는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사귐의 자유가 존재하는 사회이다. 타자를 위한 책임으로서 사귐이 바로 주체의 진정한 자유이며, 그러한 자유가 가능한 사회가 자유사회이다.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102~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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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같이 유한한 존재는 사귐에 대한 앎의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 초월과 무한으로서 타자에 대한 관계는 인식론적인 앎이 아니라, ‘욕망’이다.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 욕망은 자체의 결핍과 궁핍을 먹고 살며, 채워지면서 욕망은 더 증가한다. 욕망은 생각 이상으로 생각하는 생각과 같으며, 생각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는 생각과 같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118~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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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자에 대한 책임성을 주체성의 바탕을 이루는 제일 구조로 보았다. 책임성이란 타자에 대한 책임성이다. 내 문제가 아닌 것에 대한 책임성이요 얼핏 보면 나와 상관 없는 것에 대한 책임성이다. 서로 말하기 전에 서로 섬김이 있다. 타자의 얼굴이 뜻하는 것은 나에게 섬기도록 명령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타자의 종이 됨으로서 나는 주체가 된다. 모든 게 내 책임이다. 나의 책음으로부터 자유로운 타자는 아무도 없다.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다. 타자의 얼굴이 무한인 것처럼, 그 책임은 무한하다.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125~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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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에 대한 질문이나 의문? 내 삶에 실천적으로 적용하기 전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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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위한 책임. 무한한 책임. 여성주의 철학으로서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이 주는 의미와 메시지는 무엇인가?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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