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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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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Page 2: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Editorial 에디토리얼

여러 가지 1

CO note 병역거부자 활동수기

길수 병역거부 소견서 2

공현 병역거부 소견서 5

서른 살의 감옥 / 이태준 7

그냥 살고 싶어서요 / 이준규 10

주먹밥 / 날맹 12

꿈도 현실도 아닌 / 홍이 15

출소인사 / 조은 17

평화주의자들의 삶의 공동체를 생각한다 / 나동 21

Focus 시선집중

<병역거부운동 10년, 또다른 10년을 위하여> 외 25

Experience 참가후기

‘평화수감자의 날’행사후기 / 진냥 28

Special 기획기사

전쟁없는세상의 또다른 10년을 위하여 30

한국의 병역거부운동 10년을 돌아보며 36

연중기획 - 병역거부운동 뒷담화 3 42

Review 영화평․서평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영화평 45

<하이테크 전쟁> 서평 51

Series 기획연재

가람이의 좌충우돌 세상읽기 제14화 57

나름의 바다건너 일기 - 세상에서 가장 슬픈 칭찬 58

웅이 왓져여 뀨잉뀨잉 61

Essay 평화에세이

뉴욕시위대 / 정지훈 64

일상에서 전쟁에 길들여지고 있지는 않은지 / 명숙 69

인권은 교도소 담벼락을 넘지 못한다 / 김영익 72

Translation 번역

이집트의 병역거부자 : 마이켈 나빌 사나드 75

Report 재정보고

후원해주셔서 감사해요~ 77

33호 매체편집팀

조은

기획기사, 섭외, 편집

여옥

시선집중, 섭외, 편집

성민

기획기사, 서평, 섭외

아하

영화평, 섭외

하동기

섭외

가리

표지디자인

인쇄기획 | 한울타리130-062 서울동대문구 제기2동 137-69TEL : 924-9641,2 FAX : 927-5104

발행처 : 전쟁없는세상발행일 : 2012년 4월 19일제 호 :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3호 연락처 : 02-6401-0514주소 :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422-9번지 3층 (우) 121-230http://withoutwar.org | [email protected]

World WITHOUTWARNewsletter No.33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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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1

소식지 발행이 예상보다 두 달가량 늦어졌다. 기획기사도 틀어졌다. 모두 다 가카 때문이다!, 라고

핑계를 대고 싶지만 우리가 모자란 탓이다. 그렇다고 게으르진 않았다. 2, 3월 동안 병역거부운동 1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활동을 고민하는 간담회와 워크샵 준비, 강정마을 해군기지건설 반대운동으로 올인하

는 바람에 소식지가 뒤로 밀렸다고 구차한 변명을 당당하게 해본다.

3월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에게 다사다난한 달이었다. 구럼비 발파를 막으러 제주도를 수시로 들

락거렸고(필자는 가석방 기간이라는 핑계로 제주도 대신 홍대 술집만 들락거렸지만...), 서울에선 해군기

지 시공사인 삼성물산의 구럼비 발파에 항의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들의 취미는 ‘연행’으로 수렴됐고, 삼성 측에서 ‘깽값’으로 청구한 2400만원과 차후 밀려올 벌금들이 하나

둘 활동가들을 압박해오고 있다.

활발한 활동의 근저에는 지난 2월, 영국유학 1년 반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병역거부계의 이모 대모

오리의 귀환이 있다. 오리는 구라파의 신식운동비법을 수혈해 와 전없세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어줬다. 삼

성물산 앞에서 ‘나는 구럼비다’라는 문구가 쓰인 방진복을 입고 빨간 페인트를 뒤집어쓰는 퍼포먼스, 삼

성물산 건물을 백오십 여명의 활동가가 둘러싸는 ‘인간띠잇기’퍼포먼스는 석사 오리의 아이디어가 시발점

이었다. 앞으로도 돌아온 탕자, 오리의 활약을 기대한다.

기획기사 얘기를 잠깐 하자면, 원래 이번 소식지 기획기사는 ‘감옥인권’이었다. 한국에서 감옥인권

이 어떤 식으로 침해당해왔고 그것에 어떻게 투쟁해 왔는지 전반적인 흐름을 살피고, 병역거부자들이 감

옥에서 겪은 인권침해 사례, 채식권을 비롯해서 감옥인권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을 정리하는 글을 쓰려

고 했다. 하지만, 간담회와 워크샵 등에 올인하는 바람에 기획기사 준비가 미흡해졌다. 중요한 주제인데

스터디가 부족한 채 기획기사를 썼다가는 후회만 남을 것 같고 충실히 준비해서 쓰자니 소식지발행이 너

무 늦어질 것 같아서 결국 보류하기로 했다. 그 대신 병역거부운동 10년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평화운동

10년을 준비하는 목적으로 열었던 3월 간담회와 워크샵 이야기를 소식지에 싣는 방향으로 계획을 변경했

다. 덕분에 병역거부자 영익씨에게서 받은 감옥인권에 관한 ‘수기’를 기획기사 코너가 아니라 평화에세이

코너로 싣게 됐다. 영익씨에게 양해의 말을 전한다.

4월이다. 국회의원이 얼마나 물갈이될지 조동원의 말마따나 “저야 모르죠.”이지만(이 글을 쓰고 며

칠 뒤 총선이 끝났다.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정말 몰랐다), 적어도 전쟁없는세상의 구조와 활동방향은 대

폭 물갈이될 것 같다. 병역거부운동의 틀을 넘어 ‘평화운동’단체로서의 전쟁없는세상이 되려 한다. 소식지

에 실은 간담회와 워크샵 관련 글들이 그 흐름을 조금이나마 보여줄 수 있길 바란다. 사람은 굶고 쥐는

살찌는 하수상한 시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람도, 전쟁없는세상도 모두 다 잘 될 거라 믿는다.

Editorial

여러가지

조은 |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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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병역거부소견서 길수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인천구치소 수감 중

군은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민들이 군대의 무력을 용인하고 있

는 것은, 그것이 오직 시민의 안전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군의 지난 역

사를 돌이켜보면, 한국전쟁 준 민간인 학살, 전시성폭력, 성매매, 그리고 베트남 전쟁 중 학살과 성폭력,

또한 군사쿠데타와 80년 광주에서의 시민학살로 얼룩져 있습니다. 한국군은 이러한 오욕의 역사를 어

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한 노력이 있었다

면 이라크 파병은 없었을 것이며, 군 의문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군은 북한 등을 주적으로 상정

하고, 가상의 적에 대한 끊임없는 적개심을 조장하며, 국방력 증대의 논리를 장병들에게 주지시킵니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이 상명하복 질서에 적응하고,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서 소비하는 것은 바로 한국군

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가면 어떤 모습일지는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조직문화에 잘 적응하면서 군사훈련을 받고

국방안보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도 있고, 부당한 질서와 사람을 죽이는 훈련에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제가 후자이길 바라지만, 2년여의 시간 동안 자신이 요구받는 행동을 부당하게 여기며 실행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므로 조금씩 타협하며 저 자신을 변화시켜 스스로 편해지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 혹은 사회의 요구와 나의 입장을 타협하고 조정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일이

지만, 고립된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계급질서 하에서 이뤄지는 것에 제 선택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죽여야만 유지되는 군대는 나의 것, 나아가 시민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중학교 2년을 폭력의 공포와 폭력에 대항하지 않는 나에 대한 비겁함에 시달렸으며, 자살과 살

인을 고민하며 살았습니다. 그때 저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힘이 세고 권력

이 있는 학생에게 그렇지 못한 학생은 맞고 빼앗기고, 그럼으로써 위축되는 모습을 지겹도록 보아왔습

니다. 그런 불의를 지켜보기만 하고, 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 제 자신의 나약함에 괴로웠습니다. 저의 정

당한 문제제기가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시스템이 지금 우리 군에 존재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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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3

전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던 천안함 침몰보다 더 많은 군인이 자살하고 의문사합니다. 한두 해도 아니

고 매년 그러합니다. 전시도 아니고, 신생 군대도 아니고, 경제적 빈곤 때문에 힘겨운 국가의 나라가 아

님에도 그러합니다. 하물며 우리는 위의 조건 속에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군을 만들지를 고민해야 하

는데, 군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의 문제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서의 군대’의 정체성이 아니라, ‘전

시를 위해 강력함을 유지해야 하는 군대’라는 정체성 하에서 이뤄지는 군사훈련은 부정의하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저는 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폭력의 가해자 또한 되고 싶

지 않습니다. 그러나 군에 참여하게 되면, 상대방을 직접 조준해서 죽이는 훈련부터 간접적인 방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참여하며 언젠가는 실제 상황에서의 실행을 요구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이 적국 군인에게 한정된 살인일지라도, 적국 군인은 이 상황의 결정자가 아니며, 나와 같은 인간이

며 나와 같은 이유로 참여한 군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야

하는 곳이 군대입니다. 전쟁의 부정의함과 전시에서 살인 행위에 가담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구구절

절 말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 또한 전쟁을 바라지 않으며 군대가 전쟁을 위해서라

기보다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만 짚고 넘어

가자면, 불과 40년 전에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전쟁을 위해 존재했으며, 21세기 이라크에서 또한 그러하

였습니다.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의 희망과 달리 전쟁은 한국군과 매우 가깝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저는 군대가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군대를폐지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

는 것은 중요합니다. 핵무기, 화학 무기 등 대량살상무기의영구적폐기와연구 중지, 남북한 대치상황

에서 재래식무기의 제거와배치철수, 상호신뢰에 기반한 평화협정, 부와 자원의 편중과 그에따른독

점 현상 타개 등 무력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현재의 부정의한 상태가 개선되지 않는 한, 군대 폐지가

이뤄지기는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군대를 폐지하라’는 요구는 그것을 통해 평화의 조건을 만들자는

것이고, 또한 앞의 모순들을 해결하라는 외침입니다. 그러나 군대 폐지를 이루어질 수 없는 요구로만

여기는 태도로는, 군비축소와 신뢰에 기반한 안보체계는 만들어지기 어려울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국방부와 징병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더 강력한 군이 더 안전한 국가로 만든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강한 군의 모습에는 군 자신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국제질서와

외부 조건 속에서 군대가 정말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면, 우리가 내부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은

그 이유에 걸맞게 구성되어야 합니다. 사병은 적절한 의식주를 제공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인권에 대한 권리 또한 보호받아야 합니다. 과거 군이 자행하고 은폐되었던 사건들 또한 재조사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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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려고 물리력을 독점한 군이 그에

참여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하고, 군에 속하지 않은 시민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고민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곧군이 시민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헌법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해명해야 할 것은 병역거부자인 제가 아니라 한국군입니다. 현재와 같

은 상황이 지속되는 한, 저는 군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참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참여할 수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구합니다. 군사훈련 없이 의무를 다할 수 있는 대체복무제도를 요구합니다. 군사

훈련이 없는 대체복무제도를 유엔 권고와 사회적 합의에 따라 마련한다면, 그 형태가 위에서 말한 것

을 다소 벗어나더라도 군 변화의 긍정적 징후로써 받아들일 것입니다. 또한 이것의 마련에 시일이 걸

린다면, 제 나이가몇살이됐든 적절한 형태로 수행할 용의가 있으니처벌을미루기를 요구합니다.

길수 (전길수)2011.11.22 입영일, 병무청에 병역거부의사 전달

2011.12.01 경찰조사2011.12.14 검찰조사2012.01.30 심리공판

2012.02.15 선고공판, 징역 1년6월 선고, 법정구속현재 인천구치소 수감 중

후원카페 : http://cafe.daum.net/withgil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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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5

11월 18일, 할아버지 병환 등 때문에 대구에 있는 와중에, 수원에 제가 사는집에징집영장이 왔다

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19일에 대구에 온 애인이 영장을 전해줬습니다. 11월 29일

이 입영일이었지만, 입영하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병역거부를 한 것이지요. 병역거부를 한 이유,

예소위 '소견서'를 길게쓰고 싶진않습니다. 할 이야기가별로 없어서이기도 하고, 그간 제가너무 많

은 말로 사람들을 속여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속여 온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거나 후회하지는

않지만, 저 자신이 사람들을 속이는 일에슬슬지쳤거든요.

제가 대체 언제부터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되었는지 돌이켜보았습니다. 국가주의·전체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열다섯 살 즈음이었습니다. 모두 같은 옷을 강제로 입히고, 같은 머리모양을

강요하고, 개인을 무시하고획일적인 교육을 하는 학교생활에서부터 문제의식은 시작됐습니다. "사회(국

가)는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사회(국가)가 개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필요최소한의 것들뿐

이다. 내 자발성과 동의에 기초하지 않은 희생이나 애국을 강요하는 것은 이상하다. 우리는 국가의 부

속품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싹트면서, 이미 "군대"는막연한 두려움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박노자 씨의 책 등을 통해서 고등학교 때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청소년

인권운동을 열심히 하던 고3 때, 우연히 오정록 씨의 병역거부소견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 소견서의

문장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서 박혔습니다. 그 소견서가 뭐 특별히 미문으로 되어 있거나 한 건 아니었

을 것이고,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하고 군사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 명료하게 키워나가던 시기에

만난, 생생한 병역거부자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병역거부자들의 존재에 대해 안뒤로, 제 마음 속에는 항상 병역거부라는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그

선택지는 어느 순간 저에게 당연한 것, 징병검사에서 면제라도 받지 않는 이상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운

명처럼 자리 잡았습니다.(그리고 저는 징병검사에서 1급을 받아버렸지요) 병역특례나 해외봉사 같은 여

러 선택지들을 애써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런 많은 '대체복무'들도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고 또 나름의

특별한 기능이나 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뒤에는마음이멀어졌습니다.

저에게 병역거부는 단순히 윤리적 결단은 아닙니다. 저는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했던 이래로 항상

저를 활동가로 생각해왔습니다. 활동가란 단지 개인의 윤리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사회적인 활동, 정

치적인 실천을 하는 사람이지요. 병역거부 역시, 뭐그걸비록청소년인권운동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병역거부소견서- 가기싫어도가야만한다는현실을바꾸고싶습니다

공현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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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의 실천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우리 사회의 병역거부자 기록에 숫자 하나를 더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전쟁 훈련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수감됨으로써, 개인의 인권을 다양성을 더 존중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 우리 사회가 평화에

가까워지고 인간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일에 코딱지만큼의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 만나는 이들

에게 제가 병역거부자라고 말하면서,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군대와 군사주의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존재로 살고 싶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의 병역거부 소식을 듣고 병역거부소견서를 읽고 마음이

움직였듯이, 저의 실천이 다른누군가에게 다시 생각해볼기회가 되길 바라면서요.

뭐, 군대 가기싫어서 안 가는 것 맞습니다. 하지만좀더 정확히말하면, 군대에 가기싫은데 군대

를 가야만 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안 가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실 군대에 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군대에 가기 싫은 사람들, 적지 않을 테지요. 그런 분들에게도 저의, 그리고 우리들의 병역거부가 도움

이될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앞에 닥치고 보니, 병역거부는 제 삶에서는 제가 사회적 소수자가 되는 하나의 선택이기도 하다

는 생각이듭니다. 이는앞으로 제삶의 어떤 가능성들은 제한하고, 어떤 가능성들에 더집중하게 만드

는 선택이 되겠지요.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후회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이 길

을갈수밖에 없습니다. 병역거부는 제가 바라는 제 모습대로 살기 위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십년 이십

년삼십년 후에, 군대에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어떻게했노라고 이야기하고 싶을까, 그런 상상을 해

보면 역시 병역거부가 가장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군대에 복무하고 제대를 해서 살아가는 제 자

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이글을쓰면서 다른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춰봤습니다. 제가처음 만났던 병역거부소견

서, 오정록씨의 병역거부소견서에서 한 문장을 인용하면서끝내겠습니다.

"저는 운이좋다고 생각합니다. 입영영장보다 병역거부를먼저 만났기 때문입니다."

2011년 11월 30일

공현2011.11.29 입영일, 병무청에 병역거부의사 전달

2012.01.05 경찰조사2012.01.31 검찰조사

2012.03.14 첫 번째 심리공판2012.04.04 두 번째 심리공판

2012.04.25 선고공판 예정후원카페 : http://cafe.daum.net/gong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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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7

서른살의감옥

이태준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서울남부구치소 수감 중

2012년 2월. 이곳에 온지도 어느 덧 1년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는 서른 살의 태양을 보았다.

그래, ‘서른 살의감옥’이다. 스무 살과는 조금은 다른느낌이지만 역시 ‘시작’의 의미를 지닌 ‘서른’이란

나이와 ‘감옥’이라는 특수하고도 고립된 시공간이 붙어있다. 왠지 모를 아이러니가 느껴지는 묘한(?) 조

화(!) 이다.

혹자는 이곳에서 맞이한 서른이라 참 암울하거나 심란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정작 나는 그다

지 나쁠 것도 없다고 느끼지만 오히려 이곳에서 서른을 맞이하길 잘 했다고도 생각한다. 밖에 있었다

면 주변과 나 자신의 괜한 호들갑, 농담, 조급함에 묻혀 놓칠 수 있었을 ‘서른의 의미’를 홀로 속세와

떨어져 사는 징역에서는 꼭 붙잡고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징역에서 지난 1년간 보낸 시간들,

노력들을 바탕으로 ‘30대’라는삶의 한 터울을 자신감있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백하건데, 지난 1년간 이 안에서 조금 ‘독하게’ 살았다. ‘결코 취침시간 외에 자리에 눕거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리’ 하는 자신과의 약속을 바탕으로 한 순간도 허투루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으려 했

다. ‘묵언수행’, ‘내 친구는 이어플러그’라 할 만큼 사람들과의 교제(?)를 줄이고 책과 씨름하는 것에 치

중했다. 오랫동안 손대지 않았던 영어 공부에도 매진했다. 그렇게 공부하는 시간과 출역으로 작업하는

시간, 자는 시간을 빼고 남는 시간은 운동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의 징역은 이렇다 할 에피소드가

없다. 단조롭고 똑같은 타임테이블의 무한 반복이었을 뿐. 출역 시간 중간 중간 나는 자투리 시간에도

수시로 책을 펴거나 영어 어휘를 정리한 노트를 펴고 외우곤 했다. TV소리와 수다 소리로 떠들썩했던

방에서도 이어플러그 귀에 꽂고 한 구석에 앉아 늦게까지 공부, 또 공부. 매일 2-30분 씩 조깅에 다른

운동까지 1시간 씩 꾸준히 운동했다. ‘과자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온갖 군것질 거리가 있는 이 곳 환

경을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잘 이겨냈다. 스스로 내건 약속과 실천을 단 한 순간도 어기거나 미루지

않은 것, 그게내징역의 ‘독함’이었다.

왜 그래야했을까? 수감자들 중에도 옆에서 지켜보며 뭘그리 도도하게 구냐고 묻는 이들이 더러 있

었다. TV도 좀 보고 수다도 떨고 군것질도 하고 편이 있어도 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래야 했던 이유

는, 감옥에서의 시간을 ‘결사적 비약’의순간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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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내내 세상과 연대하는 운동에 몸담아왔다. 모든 것을 헌신하고자 노력했지만, 꼭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90%는 바쳤던 20대였다.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노력하고, 시행착오도 겪고 희

망과 성과에 기뻐하기도, 또 좌절과 한계에 힘들어하기도 하며 살았다. 그러다보니 서른에 가까워지고

‘내 인생의 감옥’을 처음(?) 맞이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수감이 거의 기정사실화 됐을 무렵, 지난 일

들을 반추해보았다. 괘나 분주히 움직이고 노력하고 많은 이들과 인연도 맺었지만 정작 내 자신이 가

장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아픔과 눈물을 제대로닦아주고치유했었는지를 평가해보면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아쉽고, 부끄러웠다. 선한 마음, 열심히 노력하는 것 이상의 뭔가가 더 필요한 것 같았고 내게는

그것이턱없이 부족하게느껴졌다.

나를처음 세상과연대하게 한 장애인들의삶. 인연맺기 학교와 장애인권투쟁을 하며차이가차별이

되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쌍용차 투쟁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싸움에서 보아

온 지독한 자본의 착취와 폭력에 분노했음에도 자신은 무력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나의 20대 중후반을

뒤흔들었던, 체제에 대한 일말의 낭만적 관념을 송두리째 뽑아(원문확인) 버렸던 용산 학살의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과 그 눈물들 앞에서 나는 내 분노와 문제의식을 더 너른 안목과 덕성을 바탕으로 희

망이될수 있는 운동으로 일궈내지 못했다.

징역의 시간 동안에도 내운동의 성지이자 고향이었던 포이동 266번지 공동체가허망한 화재로 사라

졌다. 그래도 사람이 남아있다는 희망이 있어 다시 공동체를 세우려는 꿈을 지금도 공권력과 자본이

짓밟고 법치의 이름으로 공갈·사기를 치고 있다. 내 스스로 그 현실과 기억 앞에서 나와 내 운동의 한

계를 깨고 새 지평으로 도약해야 했다. 의지와 마음을 넘어서 세상을 보다 깊이 있고 폭 녋게 이해하

고 해석할 수 있는 교양과 지적 성찰이 내게 턱없이 부족했다. 성정을 다스리고 보다 차분하고 의연한

인격을 갖추기 위한 ‘수양’이 필요했다. 격물치지, 성의, 정심, 수신. 감옥에서 한 시도 쉬지 않고 지향

하고 갈고 닦아야 할 덕목이었다. 그에 따른 계획과 목표를 세웠고 1년이 지난 지금 그 목표들을 다행

히초과달성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뿌듯하다거나 자랑스럽다거나 하는감정은, 없다. 정말이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던 것 뿐’

이라고 생각하며 안하거나 모자람이 있었다면 온전히 나의 나태함과 게으름 외에는 어떤 핑계거리도

없는 것이었다. 감옥이라는 고립과 나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시는 후원회 여러분들 덕택에 다른 걱정

없이 오로지 수양하고 매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둔한 머리로 인해 그간 읽고 익힌

것이 얼마나 두뇌에 남아활용가치가 있는 형태가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부족함만 더 크게느끼고 있을

뿐이다.

내가 이곳에서 연마한 실력과 수양은 세상의 독하고 차디찬 공기를 다시 마주하며 면역력을 높여야

진짜 의미 있는 것이 될게다. 그 시간동안 나도 가끔은 감기도 걸려 콜록대고 마음대로 일이 안 풀리

기도 해 속도 쓰리겠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보다 덤덤히 난관을 받아들이고 전보다 현명히 대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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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9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힘을얻게 된듯하다.

예수, 싯다르타, 레닌, 맑스 … 역사상 존재했던현자와 구원자들은 모두 서른즈음에 인생의큰뜻과

깨달음을 얻어 진정한 ‘시작’을 이루었다. 그들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나이건만 부족하나마 스스로에게

있어 ‘전환’은 이루지 않았나 한다. 조금은 다른 인간으로의, 인생으로의 전환. 전보다는 더 용기 있어

진 것 같고 좀 더 질기고 독해진 것 같다.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바른 자세로 책을 정독하는 습관의

중요성과 즐거움을 ‘온 몸으로’ 체득한 것. 거르지 않는 운동과 소식으로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는 것,

유혹을 이겨내고(불량식품과 TV!) 절제를 일상화하는 것, 한겨울에도 냉수마찰하고 고작 10분의 시간을

이용해 사람과 (그것도 간혹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하고 ‘급’ 가까워지는 법, 감옥에 들어와 있는 자식

으로서 부모님을 대면하며 안심시켜드리려 노력하고 의연해지는 것, 등등. 이 안에서 1년간 연마하고

얻은 덕성들이 참 많다. 그들로 인해 나는 나를 좀 더 비우고 가볍게 만들어 ‘인간의 바다’속에 더 자

연스럽게, 더 흔쾌히 몸을 내맡길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 모든 덕성과 전환들을 통해 앞으로의 삶과

운동이 보다 풍성하고 다채로운 빛깔을 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의 새로운

희망이 되었으면!

이제 슬슬마무리 지으려 한다. 가석방을 기준으로 생각해도출소가 아직 2개월은 남은 시점에, 위와

같은 일종의 ‘결산’과 같은 느낌의 글은 내가 봐도 너무 성급하다. 그래서 글을 쓰기에 앞서 펜대를 굴

리며 망설였지만 결국은 써버렸다. 이 글과 이 말들이 내 자신에 대해, 그리고 나를 보고 있는 사람들

에 대해 또 다른 약속과 고백이 되어 남은징역의 시간과출소 후의 바깥에서의삶에서도 게을러짐없

이 정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기 때문에 써서 내보이기도 했다. 약속과 책임이

헌신짝처럼 내팽겨쳐 지고 말 바꾸기와 겉치레만 판치는 시대에 살았던 내 청춘의 짧았던 징역이, 끝

까지 약속과책임을완수하는 것으로마무리되었음 한다. 오늘도, 내일도 정신번쩍차리고, 아잣!

2012년 2월, 추위가뒷걸음치기 시작할 무렵에

서울남부구치소에서, 태준.

이태준2010.11.09 입영일, 병무청에 병역거부의사 전달

2010.12.13 경찰조사 2010.12.30 검찰조사2011.01.28 심리공판

2011.02.23.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6월 선고, 법정구속현재 서울남부구치소 수감 중

후원클럽 : http://club.cyworld.com/tjsup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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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살고싶어서요 ”

이준규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대구구치소 수감 중

몸은 특별히 아픈 곳 없이 잘 지나가고 있다. 하루쯤 감기기운의 여지를 잠시 보이더니 금방 사라졌

고 5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감기 한번걸리지 않고 견뎌준내몸에감사를.

마치고3때 같다. 입시가 무의미하고왜 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대안을 몰랐다. 그래서 일단

대학 가겠다고잠을줄여가며 입시 공부했는데 운이좋은 건지 생존본능이몸을 지배한 건지 한번아

프지 않고 일 년을 지나왔다.

지금도 딱 그 느낌이다. 살겠다고 밥도 더 잘 챙기고 약도 챙겨먹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꼬박꼬박

챙기는 건뭔가 무섭다.

어쨌든 살아야겠는지...

예전에 ‘엑스페리먼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한 그룹은

죄수로 한 그룹은 교도관역할을 주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소재로 한영화였다.

이 실험의 결과는 널리 알려져 있듯 교도관 역할을 한 사람들이 죄수 역할을 한 사람을 폭행, 고문 등

의 비인간적 행위를 했고 그로 인해 계획했던 실험기간보다훨씬 빨리종료후, 은폐를 시도했다. 물론

내가 알고 있듯이드러나긴했지만.

이 영화를 볼 때 감옥이라는 공간에 대해 공포감을 느꼈다. 물론 고문을 당하거나 폭행을 당할 거

라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도 고문을 당하거나 폭행을 당하는 등의 심각한 일은 벌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영화에서처

럼누군가가 권력을 가진자로서 그 권력을 당연시하고 행사하고 싶어 하는 일들은 생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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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11

사생활에 대해 지나치게묻는다거나 불쾌한 장난, 농담을 하거나쉽게짜증을낸다거나...

조금의 따뜻한 물로 다툼이 벌어지고 720시간 중에 최대 1시간 27분만 아는 사람의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이런 상황을 더 심하게 하는 거겠지만.

단지 ‘생존’하지만은 않겠다고 이야기했었다.

최근에 방 사람이 새롭게 한 명 들어오면서 오랜만에 병역거부를 왜 했냐는 질문을 받았다. 방에

있는 나머지 한 명은 나의 병역거부는 호의적이고묻는 사람도 그리 공격적이지 않아서 이런저런 이야

기를마음껏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말을 해줄걸싶다.

“그냥살고 싶어서요.”

다들 ‘그냥살고 싶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어떻게가 남긴하겠지만.

2012. 2. 5

준규

이준규2011.05.02. 입영일에 병역거부선언

2011.06.13. 경찰조사2011.07.13. 심리공판

2011.09.14. 선고공판, 징역 1년6월 선고, 법정구속현재 대구구치소 수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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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밥

날맹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서울남부교도소 수감 중

나의 룸메이트 S는 요리를 잘 한다. 불(火)을 쓸 수 없으니 요리라고 하기엔 어색한 감도 있지만 이

제한된 환경에서 또 이것저것 만들어 먹는 곳이 징역이기도 하다. 사동 소지 일을 하면 뜨거운 물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어서 아무래도 뭔가 만들어 볼 여지가 있는 편이다. 예전 고척동 교도소

시절부터 소지를 해온 S의말에따르면새로 이사 온 이곳이 시설도 바뀌고감시카메라에도 바로 노출

이 되어 있어서 예전처럼 음식을 해먹기는 어려워졌단다. 그가 이번 주말에 만든 음식은 간장 닭찜과

주먹밥이었다. 애초에 계획에 없는 일이었는데, 내일 가석방으로 나가는 옆 방 형을 위해 만들어 보겠

다고했다.

내가 S를 좋아하는 건 음식 솜씨 때문은 아니다. 채식을 하는 나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주먹밥을 할 때도 그는 내밥을따로 빼서 만들어주었다. 차라리 아예기대를

접고 지내게 되는징역에서 이런배려를 한번씩 받고 나면 상대에 대한호감도가쑤욱올라가는 법이

다. 닭찜은 어차피 내가 안 먹는 거라 요리하는 옆에서 뭘 도와야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운 편

이다. 하지만 주먹밥은 뻔히 내 몫도 따로 있다는 걸 안 이상 그가 ‘사소간’에서 재료 준비를 하고 있

는데 나 혼자 방에서 책을 보거나 편지를 쓰고 있기가 눈치 보인다. 주말 오후엔 상을 펴놓고 뭔가 늘

하고 있는내모습을 잘 아는 그가 자긴먼저 나가서 일하고 있겠다고 나보고는 천천히 나오라고 일을

한다. 그렇다고 내가 그 말 곧이곧대로 방에서 계속 내 일을 한다면 예쁨 받지 못할 거란 정도의 감은

있다.

그런데 이번 주말엔 내가 스스로 계획해놓은 일 목록이 좀 많은 게 문제였다. 요리를 도우려면 천상

내 개인시간을 줄여야하는데 난 그게 아까운거다. 사실 따져보면 내가 잃는(다고 믿는)시간은 길어봐야

한 시간인데 말이다. 요리를 하겠단 그의 얘기를 들었을 땐 빽빽한 나의 계획표에서 줄어들 그 한 시

간이떠올라괜히 우울해졌다.

그러고 보면 요리를 할 테니 같이 좀 도와달라는 말을 달갑지 않아 한 나의 반응은 내가 평소에 싫

어하는 남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있으면 나도 같이 먹을 거면서 정작 그

음식을 만드는 일은 다른 누군가가 하겠거니 하는 나의 무의식이 보였다. 내겐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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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하거나 글을 쓰는 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어차피 먹을 거 혼자 고생하는 것보단 같이 만들고

나눠먹으면 서로 기분도 좋고 할 텐데, 난 뜬금없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징역살이’를 한

탄하면서 한편으론자주뭔가 하자는 그에게 애먼얄미움만 가진건 아닌지 모르겠다.

썩내키진않았지만 그렇다고 방에혼자 더앉아 있어봐야 신경쓰여집중도 안될것 같아 그를따

라 나도 일어설 채비를 갖췄다. 지난번에 주먹밥 만들 땐 소세지와 떡갈비를 썰어 넣느라 손이 많이

갔는데(다행히 내게 고기 칼질을 부탁하진 않았다) 이번엔 급하게 계획된 거라 미처 준비 못한 재료가

많았다. 밥은 그가 이미점심 때 라면스프, 참기름, 소금으로 간을 맞춰놓았고, 같이식사를 하는옆사

동 소지형이 얼마전 반찬으로 나왔던깻잎을미리 잘게썰어둔상태였다. (칼이 없는 이곳에선케익칼

을 대신 쓴다.) 그가 주먹밥 속에 들어갈 재료들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속에 들어갈 땅콩을 으깨고 또

김을 부수었다. 빻는 도구 역시 따로 없기에 보통 페트병에 물을 채워 뒤집어 쥐고선 뚜껑 부분으로

내려찍는다. 김은 그냥봉지채로 주물럭주물럭해서찢었다.

그런데김봉지를 만지작하다 보니 구멍이몇개 보였다. 취사장에서배식을 받을 때 이미구멍이 나

있었나 보다. 김가루가 구멍으로 새어나와 버리면 곤란한데 이를 어쩌나. 급한 대로 계속 주물럭 해보

았는데 구멍은 점점 커져 김도 더 많이 빠져나오려 했다. 김가루 크기가 충분히 작지 않으니 밥을 굴

려도김가루가 잘 묻히질 않았다. 지난번엔김을 잘 부쉈다고칭찬을 받았는데, 이번엔이렇게 되고 나

니 애초에 적당히돕는척만 하려던내마음에 오기가발동했다.

난감한 사이즈의김가루를 보고 잠시 고민하던 그가 내게도 위생장갑을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주

었다. 위생장감은 나름 ‘레어 아이템’이라서 ‘쉐프’이외에는끼어볼일이 거의 없다. 비닐장갑을끼고김

을 만지작하니 손쉽게 가루가 만들어졌다. 장갑을 낀 김에 나도 아예 밥까지 같이 만들까 물어보았다.

그가 흔쾌히 그러라고 답을 했다. 덩달아 옆 사동 여호와의 증인 소지 분도 비닐장갑을 끼고 밥을 같

이 만들기 시작했다. 서로 만든 모양에 대한 수다를떨면서말이다.

보조 일만 하다가 나도 직접 만드는걸해보니 기분이새로웠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에서순식간에 물

만난 고기가 된 듯했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활력에 오후 내내 찝찝했던 마음도 사라져버렸다.

밥을 떼어 속을 적당히 채운 뒤 둥글게 해서 김가루에 굴리는 것이 재미있기만 했다. 좀 전까지만 해

도 내 시간을 빼앗겼단 생각에 꿍해 있다가 이젠 기꺼이 즐기는 시간이 된 거다. 물론 이 일도 매일하

라면 못 하겠지만 (가사노동의 위대함이란!) 나의 이런 기분전환을 가능케한 것이 무얼까 문득 궁금해

졌다.

뻔한 말 같지만 내가 찾은 답은 “마음의 감옥”에 있었다. 나중에 보면 별 것 아닌건데 그 별 것 아

닌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내 기분은 그때그때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짜증이 나거나

우울해질 때 잠깐 빠져나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24시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도 없는 환경에서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하고 탓하는 건 스트레스만 늘릴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해 벌어지는 선물이라 믿으며 가볍게 한번 웃고 넘길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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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끊임없이 다짐하지만 보고 싶지 않은내바닥만 보게될때가 더 많았다.

다행히도 오늘은 나의밑바닥을 비교적빨리 알아차린날이었다. 나를 돌아볼수 있어서새삼흥미

롭고 유익했던 경험이었다. 이런 깨달음의 기회를 제공한 S가 갑자기 고마워졌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왜 자꾸 일거리를 만드나 싶어 얄미워 보이기만 했는데. 이렇게 쉬이 기분이 바뀌는 내가 우스워

보이기도했다. 이런내마음을 안다면 S는뭐라 생각을 할까.

주말내내뭘그렇게쓰냐고묻던 그에게 이글을 보여줄수 있을지 모르겠다. 단체 소식지에 보내는

글이라고 했더니 나중에 나오면 자기도 한번 보여 달라고 했다. 나중에 가서 진짜로 보여주게 되더라

도 부끄럽거나 민망하지 않게 그와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둘 다 자기표정을 잘 못 감추

는 편이라 종종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서로 말도 없이 한동안 냉랭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지

금처럼 다시 또 은근슬쩍농담을 던지고웃으며 지내다가각자출소할 때 잘헤어지면좋겠다.

자꾸 얄미운 사람들만 보이는 나의 성격과 깜냥은 아마 출소하기 전날까지도 그대로일 것 같다. 다

만, 해질녘 교도소 뒷산 너머의 노을도 쳐다보고 새벽에 일 나오면 아직 하늘에 떠 있는 달도 올려보

면서 마음 곱게 먹어야지 또 내게 주어진 선물을 지나치지 말아야지 다짐을 해본다. 다음번에 또 주먹

밥을 만들자고 하면 그땐훨씬더 기꺼운마음으로 그러자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2012. 1. 29.

서울남부교도소에서날맹

날맹 (문명진)2010.12.14 입영일, 국방부 앞에서 병역거부선언 기자회견

2011.01.07 경찰조사 2011.01.13 검찰조사

2011.03.30 선고공판, 징역 1년6월 선고2011.04.11 형 확정, 영등포교도소 수감

현재 서울남부교도소(구 영등포교도소) 수감 중후원 : http://cafe.daum.net/co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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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도현실도아닌

홍이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서울남부교도소 수감 중

서울구치소 생활이 조금넘어서 소식지를 받아보실쯤이면 두 달 가까이 지나있겠군요..!! 모두들 안

녕하신가요..?? _̂______ *̂

홍이는 여전히꿈과현실 사이에서 아슬아슬줄타기하는 중입니다. 매일밤불면증으로 고생하면서

자다 깨면 꿈속과는 다른 현실에 한없이 처지고, 오기 직전까지도 한 친구에게 스스로를 붙들 수 있기

바란다는 이야기를했는데 ‘여기서 난뭘하고 있나’라는 물음은끝이 없네요.

나름대로는처음 경험한 게 세번있었지요. 공군에 들어갔을 때 사이즈확인한다고처음 전투복을

입어봤던 기억, 입법부작위 위헌확인소송 기자회견 중에 참여연대 느티나무 홀에서 퍼런 옷을 입어보

던 기억, 그리고 법정 구속되어 구치소에 들어와미결옷으로갈아입던 기억.

이 셋의 기억이 하나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요?? 하나같이 그 “옷”을 집어들 때

손이떨리던 기억이 잊히지 않을 것 같아요. 꽤오랫동안...

쇼핑백 만드는 위탁공장에 출역을 나간지도 2주쯤 됐고요. (2월 중순이면 한 달 가량?) 30여 명 되

는 사람들 중에 신입이라고 화장실 청소랑 배식+설거지도 맡게 되었지요. 점심시간엔 정말 정신이 하

나도..!! 없어요...ㅜㅜ 뭘 해도 어설퍼서 쇼핑백 접는 것도 속도도 안 나고. 매일 매일의 할당량은 어떻

게채울지걱정입니다. ㅜㅜ

곽노현교육감이 며칠전에벌금으로출소했어요. 그걸보는 방 사람들 입에선 정말괴로울정도로

욕이튀어나오네요. 그와 함께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다양한 욕이 등장하구요. 옆에서 듣고 있자니 시의

회에서 함께 농성하던 친구들 얼굴이 막 떠올라서 소리도 못 내고 속으로 엉엉 울어버렸어요. 정말 사

람들이왜이렇게잔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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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조례”는곽노현교육감이 만들지도추진한 것도 아니고. 그 조례가 어떤 가치를담고 있는지

에 대해선 아무 고민도 없이 그저 세상이 시끄러울거란이유 하나로마구 욕하는 사람들틈에서 어떻

게 살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아요.

하지만 그래도 살아내야 하고- 울다가... 가끔은 웃다가, 그렇게 “살아지겠”지요. 이건 아마도 내가

살아내는 게 아니라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에 살아지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이런 상태로 어떤 공

부도 계획도 세울 여력이 없어서, 그저 나를 놓지만말자고, 함께했던 친구들과의 기억들만붙들고버

텨야 하지 않을까요... ㅠㅠ

따땃한 봄을, 친구를 기다려 봅니다. 근데 기다리기도 미안한 그런 날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안에서도 가능할까요?? 어떻게 가능할까요?? 날맹 님의 편지엔어딜 가도 “동지”

는 있더라고 했는데, 나에겐왜 보이지 않을까요?? 꿈도현실도 아닌 의식 속에서친구들의 편지가, 그

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너무나 아득해.. 읽기도답장하기도 어려워요. 미안해요... ㅠㅠ

2012. 1. 30.

홍이..^̂ *

홍이 (홍원석)2011.08.23. 입영일, 병무청에 병역거부의사 전달

2011.09.21. 경찰조사2011.10.12. 검찰조사2011.12.01. 심리공판

2011.12.22. 선고공판, 징역 1년6월 선고, 법정구속, 서울구치소 수감2012.03.09. 서울남부교도소로 이감

현재 서울남부교도소 수감 중후원클럽 : http://cafe.naver.com/hongsup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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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17

출소인사

조은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email protected]

1) 가석방 당일이다. 출소자는 오전 10시에 구치소 정문을 나서게 돼 있다. 이른 아침 스무 명 정도

의 재소자 무리가 ‘교화당’에 모인다. 평소에 종교집회가 열리는 교화당은 출소자 대기실을 겸한다. 밤

새 잠을 설쳐서 인지 재소자들의 눈이 새빨갛다. 같이 출소하는 ‘깜동기’들과 달뜬 마음으로 도란도란

수다를 나누며연락처를 주고받는다.

얼마안 있어 ‘영치’ 노역을 하는 재소자들이짐이 실린마차를끌고 교화당으로 들어와능숙한손

놀림으로 ‘속세의 옷’들을 원래의 주인에게 나눠준다. 수감과 동시에 빼앗긴 옷이다. 출소할 때 입으라

고 지인이 넣어준 ‘새 옷’을 입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수감당시 입고 들어 온 옷을 입는 이들도 있다.

몇 년 동안 영치창고에서 삭아 곰팡이가 흐드러지게 핀 옷을 입는 이도 있다. 교정 측에서 옷 관리를

엉망으로 했다고 투덜대지만 옷을 입는 이들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하다. 쥐가죽 같은 관복을 벗고 ‘핏’

이 살아있는 새 옷을 입는 이들의 모습은 세일러문 변신의 실사판이다. 박사장님 오늘 옷빨 좀 받으시

는데요. 어디 선이라도 보러 가시나 봐요. 아따 오늘 같은 날 부르쑤 좀 땡겨야 하지 않갔습니까, 캬하

하~. 다들 새신을 신고 하늘까지 폴짝 뛸 기세다. 노역을 하며 햇빛에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들과 형형

색색꼬까옷이 기묘하게 어울린다.

직원이 나와 신분확인을 한다. 가석방증명서에 지장을 찍고 그 동안 강제노역을 해서 모은 월급을

받는다. 현찰이담긴주황색 종이봉투는절그럭거리는 동전 때문에묵직하다. 1년넘게 일해서 모은돈

은 27만 8880원. 접견이나 운동을 한번할 때마다 100원씩 까이면서도(정말돈이차감된다.) 하루 800원

씩 꼬박꼬박 모은 돈이다. 일당 800원짜리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실감나는 시간이다. 돈봉투를 든 재소

자들은, 이돈으로종로 어디에빌딩을 살 거다 은행에넣어 이자 받아먹으며 살 거다, 농을친다.

9시 40분, 출소가 20분 남았다. 교도관이 재소자들의 짐을 살핀다. 수감생활 동안 몇 번이고 점검

당한 물건이기 때문에 대부분 건성으로 살핀다. 직원이 내 앞으로 다가와 고생했다며 눈웃음을 건네고

내 물건을 검사하기 시작한다. 대충 눈으로 훑는가 싶더니 짐가방에서 노트를 꺼낸다. 네 권의 노트에

는 그동안 보냈던 편지들의 개요와 일기, 자잘한메모들이 가득하다. 일기를펼치고읽기 시작한다.

읽는다.

읽는다.

계속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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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읽다가눈을떼고 고개를 든다. 교도관은 야릇한미소를띤채나에게말한다.

야, 너이거, 나가서책으로쓸거지?

느낌이 안좋다.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냥남들 다 쓰는 일기라고답한다. 내말을 무시하고 교도관

이 일기에 고개를 파묻고 다시 읽기 시작한다. 출소가 10분 남았다. 검사를 끝낸 재소자들이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교화당을 나간다. 그렇게 하나 둘 나가고 나니 나와 내 짐을 검사하는 교도관 둘만 남았

다. 초조해진다. 저, 슬슬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교도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묵묵히 일기

를읽는다.

5분이 남았다. 교도관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이거 반출불가능이야, 폐기해. 아니 왜요? 그냥 일기

잖아요. 일기가 문제될 게 있나요. 폐기할 수 없습니다. 너 여기에 쓰여 있는 한상렬 목사랑은 어떤 관

계야. 접견실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일기일 뿐이잖아요. 여기 생활은 왜 이렇게 자세히 썼어. 목적이 뭐

야. 너나가서뭔짓을 하려고, 엉?

교도관이 나를 심문한다.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지 오래다. 실랑이를 주고받는다. 10시가 훌쩍 넘

는다. 결국 가석방 대상자는 나 말고 모두 출소했다. 너 이 자식 안 되겠다, 이리 따라와! 교도관은 내

가석방이 취소될 거라고 조사가 필요하다며 나를 조사실로 끌고 가려한다. 정신이 번쩍 든다. 구치소

정문 밖에선 친구들과 가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만에 하나라도 가석방이 취소되면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 어머니는 충격을 받겠지 쓰러지시겠지, 싶은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해진다. 위기감이 몰려온다.

이건 아니다싶다. 노트를폐기할테니출소시켜주십시오. 교도관은 나를빤히 바라보더니, 내팔을잡아

끌어 조사실로 데려 간다. 가석방이 이렇게 깨지면 다시 가석방을 받긴 힘들다. 만기까지 4개월을꼼작

없이 더 살아야 한다. 그 동안 어머니께서 받을 상처를 생각하니끔찍한 기분이 든다. 출소직전에 이게

무슨일이지, 실감이 안 난다.

10시 40분, 결국 난 가석방으로출소했다. 핸드폰이 나를 구했다. 출소와 동시에출소자들에게 수감

때 압수한 핸드폰을 다 돌려줬는데 내 수번이 적힌 핸드폰이 하나가 남아있던 거다. 이상하게 여긴 교

정직원이 내가 일했던 곳으로 연락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나와 친분이 있던 직원들이 내가 어디

있는 지 수소문해서 나를 찾았고, 나를 끌고 갔던 교도관을 설득해서 나를 빼냈다. 일종의 신분보증(?)

을 해준 셈이다. 그 과정에서 결국 수감기록이 담긴 노트 네 권을 모두 빼앗겼다. 굴욕적이지만, 그 당

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가석방이 깨지지 않는 일이라 판단했다. 구치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

족을 생각하자니 무슨 협박이라도 받는 기분이었고, 어머니를 생각하니 어떻게든 나가야겠다는 생각만

절박했다.

구치소건물을 나오니 비가내리고 있었다. 정식출소시간을 한참넘은 시간. 나를 구출(?)해준 직원

이 우산을 들고 구치소정문까지 배웅해줬다. 일이 이렇게 돼 미안하다며 나가서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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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19

인사를 건넸다. 구치소 문 앞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포옹을 하며 재회의 기쁨을 나눴

다. 긴장이풀려서인지 눈물이 다 나왔다. 무난한 수감생활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출소당일 이런 일을

겪을줄은짐작도 못했다.

출소한 지 4개월이 지난 시점에 쓰는 글이지만, 내 손목을 잡아끌던 교도관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

억난다. 소름이 돋는다. 지금 생각하면 수감생활이 기록된 일기 때문에 가석방이 갑자기 깨지는 건 어

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당시 교도관이 ‘넌이제 가석방 깨진거야’라며 나를 구치소 복도 이

곳저곳으로끌고 다닐때 난 그가 정말그런 힘이 있는줄알았다. 난 그가 무서웠다. 출소소감으로즐

겁지 않은 얘기를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은 언젠가 한번 털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쓰고 나니 조

금은 후련하다. 그나저나 수감기록은 지금 생각해도너무 아깝다. 끙.

2) 1월 중순에 있던 일이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소환장을 받았냐는 전화다. 식은땀이 났다. 가

석방기간이라 몸을 사리고 있었건만 무슨 일이지, 짱구를 굴렸지만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소환장을

못받았다고 어떤 일이냐고 물으니, 작년 10월 내통장이 범죄에 이용됐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피해자는

수십명, 수천만원의 거래가 오갔단다. 용의자이니 수사를 받아야한다는말이다.

집회 건은 아니구나, 조금은 안도가 됐지만 역시나 불안했다. 한시바삐 나 또한 피해자라는 걸 알리

고 싶어서 경찰서로 찾아가겠다고 하니, 3시까지 서대문경찰청 수사2계 유기현 경장을 찾아오란다. 전

화를 받을 당시 2시 30분이었으니 30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다. 마침 전쟁없는세상 사무실로 회

의하러 가는 길이었고 이대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시간에 맞춰갈 수 있다...고 당장 가겠다고 말한 뒤,

서대문 경찰서로날아갔다. 회의시간도 상황을설명하면서늦췄다.

잘못한 건 없지만 가석방 기간이라는 상황이 묘한 긴장을 안겼다. 다시 경찰조사를 받으리라곤 상상

을 못했는데 이게뭔일인가, 싶었다. 경찰서에 도착해서 유기현경장을찾았다. 그런 사람,

없단다. 이름을 잘못 들었나? 걸려온 전화번호를 보여줬다. 경찰서 전화번호가,

아니란다. 음? 사이버수사대 경찰직원을 만나 자초지종을설명했다. 내가 받았던 경찰서 전화는...

보이스피싱이었다.

시간 안에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면 본인조회를 한답시고 이것저것 정보를 캐내려했을 거란다.

가끔 이런 일로 경찰서에 오는 민원인이 있다고 한다. 범죄자는 설마 내가 30분 안에 서대문경찰서를

방문할 수 있으리라곤 상상을 못했던 거다. 보이스피싱예방홍보책자를 받고 경찰서를 나왔다.

...%&$&#̂ @$

유기현경장,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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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출소한 지 네 달이 지났다. 작년 11월 30일에 ‘10시 40분’에 가석방으로 출소한 게 아직 생생한데

시간이 후루룩흘렀다. 두 달은 신세진분들을 찾아뵈며술을마셨고, 다른 두 달은 전쟁없는세상업무

와 새롭게 일하게 된 평화박물관 업무에 치이며 지냈다. 그 사이 사회인극단에 들어가 좋은 인연들과

연극도 하게 됐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kbs1라디오에서 병역거부 관련 인터뷰를 하기로 했는데 인터뷰

시작 10분 전에 김정일 사망사건이 터져서 인터뷰는 취소, 김정일 사망 특집뉴스로 대체된 적도 있고,

경찰을 사칭한 이에게 보이스피싱을 당한 적도 있다. 그래참 다사다난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4개월을 보내고 문득정신을 차려보니 가석방기간 끝났다. 자유의몸이다. 게다가

가석방이 끝난 다음날인 4월 1일은 평화운동단체인 평화박물관에서 상근활동가로 첫 출근하는 날이다.

평화박물관은 가석방기간 동안 인턴으로 일한 곳인데 운 좋게도 한 달 반 만에 정직원이 됐다. 평화교

육 분야를 담당하고 당장은 <어린이-청소년 평화도서 순회전시회>라는 프로그램을 맡게 됐다. 동화작

가, 아동문학평론가 등으로 구성된 선정위원들과 어린이 평화도서 100권, 청소년 평화도서 50권을 선정

하고 출판사에서 기증받아 전국에 있는 어린이 도서관-공부방 등에 순회전시회를 하는 좋은 프로그램

이다.

출소한 지 4개월. 평화운동을꾸준히 할 수 있는환경을얻었고, 소중한 인연들이 주변에 있다.

큰행운이다.

조은 (이조은)2010.06.15 입영일에 병역거부선언

2010.07.21 경찰조사2010.08.17 검찰조사2010.09.16 심리공판

2010.09.30 1심 선고공판, 징역 1년6월 선고, 법정구속, 서울구치소 수감2011.11.30 가석방 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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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21

평화주의자들의삶의공동체를생각한다

나동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email protected]

1.

강정 해군기지로 정신없던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다. 구럼비 폭파를막으려는 주민들과활동가들의 고

뇌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에 쌓이는 그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강제진압 동영상이 올라오

는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누르려다가도 올린 사람이 느낄 복잡한 감정을 생각하면 주저하게 된다. 그러

니 정작현장에서 그들이 보내는 하루하루는 어떨지 상상조차되지 않는다. (이글을쓰고 나서 소식지

가 나오기 전까지, 며칠 사이에 또 다시 쌍용자동차 해고자의 죽음이 들려온다. 혼자 있으면 하릴없이

가라앉고죄스러운 시간들.)

그러나 미안해하지 않으련다. 그렇게 미안해하면서 용산 때도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다가 끝내한 번

을 가지 못했다. 미안한 건 내가 추슬러야 할 감정이다. 정작 미안함은 어떤 힘도 보태지 못한다. 진심

으로 싸움이 승리하기를 바란다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희망을 말해야 한다. 촛

불시위 때도 그랬고, 김진숙 씨와 희망버스도 그랬고 이기는 싸움에서 배운 것은 한가지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할 때, 그 간절함이 자신의 생활 속에서 발현될 때 사람들은 함께 하고 감동하고 서

로 자신감을 얻고 앞으로 나아간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문제는 무거운 내

몸과마음, 현장과내일상을연결시키지 못하는 상상력의 한계, 전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쓸데

없는 고민.

2.

강정 해군기지 건설찬성론에는 경제와 안보담론이골고루버무려져 있다. 민군복합항이니관광미항

이니 하는 정부의 수사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라면, 해군이 실어 온 폭약으로 삼성과 대림이 발파를

하는 현실이 참모습이라 할 수 있다. 군사주의와 자본주의의 만남. 그건 이제 미국이나 유럽의 상황을

얘기할 때 등장하던 군산복합체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친구들이 매일 연행과 경찰폭력에 고

통받고 있는,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제주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런가하면 확산탄 피해 생존자로부터 듣는 고통과 희망의 언어라는 행사도 빼놓을 수 없다. 확산탄

의 주요 생산업체인 국내기업한화와풍산은앞으로 우리가 지속적으로싸워야 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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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마을에 한명숙이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잠깐. 그리고 신문에는 “해군기지 건설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유시민은 여전히말이 없다.

사람들은 이중적이다. 강제진압에 초점을 맞추면 MB를 욕하면서 어깨를 걸다가, 해군기지의 필요성

으로 넘어가면 어깨에 걸었던 손을 내린다. 대략 이 애매한 위치에는 무엇이 있는 것인지 구체적인 현

실로부터 배우게 되었다. 국가, 기업, 경찰, 군대가 한 편을 먹고 시민들에게 퍼트리는 국익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라크 파병 때부터 실체를 드러낸 국익과 군사주의의 만남은 이제 어디서나 대면해야 하는 괴물이

되었다. 자주 국방을 하려면 국민적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국민적 자

존심이 국익이라고 여기는 정서도 팽배하다. 그런데 그 자존심 때문에 팽개쳐지는 삶을 보라. 이제 자

신 있게말할 수 있다. 그건 국익도뭣도 아니고, 그냥탐욕과 폭력에 불과하다고.

3.

10년 동안 병역거부 운동을 하면서 우리는 국민감정이라는 막연한 상대와 싸워왔다. 법적인 근거는

완벽했고, 국제사회가검증해주었고, 역사적확신까지 생겼다. 그리고 이제 19대 국회에서는 대체복무제

가통과되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런 전망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모여 10년 후를 내다본다. 워크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구럼비 발파가 시작되고,

확산탄 관련 행사가 열리고, 때마침 선거국면이다. 이것들이 맞물리면서 고민이 계속된다. 한참을 계속

생각하면 무언가 아마득한 저편으로부터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는 무엇이 잡히기도 한다. 이제 우리의

싸움도뭔가좀더 구체적인 다음 단계로넘어가는느낌이 든다.

워크샵준비모임을 하면서 그느낌은 더확실해졌다. 이제 우리가 맞서야 할 대상은 국민감정이란막

연한 대상이 아니다. 그 막연함을 재생산하는 실체에 더 가까이 접근해가고 있으며 그럴수록 우리는

좀 더 정교해져야 한다. 평화운동도 나이를 먹고,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렇게 경험을 공유하면서 왠지

성장해간다는느낌이드는 요즘이다.

4.

작년 평화수감자의날행사에서 그런느낌을 받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 있다 나타난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행사에 3년 만에 나타난 건 나였다. 내가 문을 열고 나오자 하나의 세계는 원래부

터 거기 있었다. 누군가는 계속 감옥에 가고 누군가는 사무실을 지켰으며 누군가는 와신상담 자신을

다듬었다. 병역거부 운동은 그렇게 계속되었고 오랜만에 다시 그 친구들을 봤을 때, 복잡한 마음과 함

께무언가설레는느낌도 들었다.

한 사람의 삶의 무게는 그 자체로 온전한 우주의 무게를 지닌다. 평범한 사람의 우주가 태양계 크기

쯤 된다면 이 사람들의 우주는 안드로메다까지 끌어안을 크기가 될 것이라고, 문득 생각했다. 그 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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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23

로메다 속으로풍덩.

그리고 이어 학생인권조례농성장엘몇 차례다녀왔다. 거기서 우연히발언도 하게 되었다. 꼭내자

신에게 하는 이야기 같았다. 돌아와서 내내 그 농성장의 기운을 생각했다.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나고

그러면서 끝내 계속되는 질문은 하나.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밝은 모습으로 싸우게 하는가? 자신을 긍

정하는 에너지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그러면서 나는 계속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생각했다.

아아~친구들. 다시 만날수 있는 에너지를. 다시 만들어갈미래를.

5.

마무리는 다시 워크샵.

그래서 다시 미래를 생각한다. 함께 만들어갈 평화운동에 대해 고민한다. 대체복무제와 수감자 지원

을 중심에 두었던 운동은 자연스럽게 더 발전된 형태의 평화운동으로 나아갈 것이다. 준비모임 설문과

여러 차례 대화를 통해 확인했던 사람들은 그 점을 잘 알고 있고 다양한 욕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

는 그 이야기들을 경청하며 힘을얻고 그 속에서내가 하고 싶은 것들도 생각한다.

앞으로 10년 후에는 평화센터 같은 게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평화활동가들이 다양한 방식과 주제

로 자유롭게 모이고 흩어지면서 서로가 서로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 네트워크를 꿈꾼다. 그 때까지 할

일이 정말 많을 것이나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10년의 순환을 마무리하는 지금, 어쨌거나 그런 생각이

든다.

때마침 3월이면 이사. 이사와 동시에 평화밥상 모임을 시작하려 한다. 평화주의자들의 자유로운 수다

모임이다. 일단 장소가 협소한관계로작게 시작해보려 한다. 그리고출소한 병역거부자들과책을 만드

는작업도 해볼생각이다. 과거 양심수들의 기록은 우리와 어법이 많이 다르다. 그 동안출판한몇권

의 책은 병역거부자들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지 못한다. 시대를 먼저 고민하고 이끌어가는 도덕적 존

재로 그려지는 면도 있으나, 병역거부자들은 다들 너무 다르다. 때

로는 잉여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찌질하기도 하고 우리는 다 그냥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다. 그 목소리들을 담아보고 싶다. 책을 만드

는 작업을 기록인 동시에 우리 자신을 치유해가는 과정으로 삼고

싶다.

그리고 올해 대선에 평화주의자 유권자 모임을 해보려 한다. 이

부분은 여전히 고민이다. 정당에 들어가서 평화모임을 만들어 보는

것과 바깥에서 유권자 모임을 하는 것과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인지.

뭐 일단 뭐든 하고 보면 더 좋은 생각이 나오겠지. 요즘 한창 고민

중인 주제다.

한나라당 빼고, 나머지 정당은 전부 평화를 새 시대의 가치로 내

걸고 있다. 더 이상 평화를 각론으로 다루지 않는다. 한국사회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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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갈주요 강령으로 다룬다. 그러나 이상은 원대하나 구체적인 대안은 빈약하다. 총선에서는 항상 뒷

전으로 밀린다. 선거 과정에서 강정의 이야기를 담아달라고 말하지만, 대리자들은 다른 떡밥에만 관심

이 많다. 선거 시기마다 무언가를 대리해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내 고민을 얘기하는 그 자체가 선거가

되도록 만들고 싶다. 그것은 정당의 탓도 있지만, 우리의 부족함도 있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담론으로

서 평화는막연한 이상으로만 여겨진다. 구체적 전망을담은 평화주의가필요하다.

한편으로는 현실 정치에 대한 혐오가 그것을 부채질한 것은 아닐까 스스로 반성도 해본다. 누군가는

평화 정책을 만들고 실현시키고 제도를 바꾸고 정부나 국회에 개입해야 한다. 이것은 전문가의 역할이

다. 반면 사회구성원 입장에서는 누구나 정치에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평화 문제 역시도 그래야 한다.

민주주의는 계속 발전한다지만 군사 문제는 지나치게 소수의 판단과 결정에 이끌려 왔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럴수는 없다. 평화 문제는너무나 우리삶속깊숙이영향을미치고 있으며, 사람들도본능

적으로 그것을 깨닫고 있다. 선거에서도 대체복무제 뿐 아니라 군축, 탈핵, 군사주의 등등이 주된 쟁점

으로 떠오르게 해야 한다.(통합진보당 내에서 예비군 폐지를 두고도 논쟁이 되는 걸 보고 조금 놀라는

한 편, 역시 군사주의 문제는 참갈길이멀다는 생각이. 그런데 역으로 그러니까 자꾸무언가 하고 싶

어지는.)

낙선운동으로 시작된 유권자 운동은 노동운동을넘어 여성주의, 성소수자, 청소년, 장애인 등 다양한

부문으로 확산되었다. 반면 평화주의자들은 현실 정치에 개입할 통로를 잘 찾지 못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몫으로 생각했다. 평화운동과현실 정치의 교집합을찾지 못했다. 이제 그 간극을 채워보려는

노력을 해보려고 한다.

해군기지 반대투쟁과 이 고민은연결되어 있다. 투쟁의핵심 국면에서는 결국현실 정치세력의 개입

이너무절실하다. 죽쒀서 개준다는말을 이제 평화운동에서도 고민해야 할 거 같다. 한 입으로 두말

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물론그들의 입장을 변화시키고, 그들이투쟁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것도 주민들

과활동가들의 지난한투쟁의 결과임을 잘 안다. 나는 그들과 나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평화주의자들은

그 모든 곳에서 힘을발휘해야 한다. 현실 제도의 개혁조차평화주의자들의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

상상력에 힘을. 왠지 재밌는 한 해가될거 같다는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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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25

<병역거부운동 10년, 또다른 10년을 위하여> 외 여옥 | 전쟁없는세상 책임활동가 + [email protected]

2011년 평화수감자의날 행사

12월 1일은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 WRI)에서 정한 평화

수감자의 날(Prisoners for Peace Day)이고, 한국에서는 2003년부터 꾸준히 행사를 진행해오

고 있다. 올해 12월 1일에는 민가협 목요집회에

참석해서 평화수감자의 날과 병역거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전날 서울구치소에서

가석방 출소한 조은씨가 대표로 발언을 했고, 민가협 어머님들은 저희를 반겨주셨다. 12월 3일 토요일 저녁에는 "친해지길 바래"라는 이름

의 평화수감자의 날 기념행사가 진행되었다. 민중의집에 모인 약 5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병역

거부에 대해 알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

마당이 진행되었고, 병역거부자들과 활동가, 회원들의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WRI에서 발표한 전세계 평화

수감자 명단에 있는 사람들의 사연소개와 더불

어 응원과 지지의엽서를쓰는 시간도 가졌다.

제주해군기지 반대활동

제주해군기지건설과 관련해 구럼비 발파작업

이 시작되면서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그동안 서명운동과 현수막보내

기, 집회 및 문화제, 평화크루즈와 평화비행기

등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지만 본격적인 구럼비

발파를 앞두고 상황이 긴박해진만큼 이를 막기

위한 활동가들의 움직임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특히 비폭력직접행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단체

활동가들과 회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구럼비

발파를 저지하기 위한 행동에 돌입했고, 함께하지 못하는 많은 회원들이 제주행 비행기값 후원

으로 동참해주셨다. 구럼비 첫발파가 시작되기

직전에 다섯 명의 활동가가 내려가서 발파저지

를 위한 직접행동을 하다가 모두연행이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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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 다음 주에는 화약의 이동을 막기 위해 PVC 파이프를 이용한 화약고 봉쇄행동을 하다가 연

행되었으며, 3월 말에는 주 시공사인 서초동 삼

성물산 본사 앞에서 페인트 시위를 하다가 경찰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삼성물산 앞

인간띠잇기, 강정댄스 플래시몹 등 다양한 방식

으로 제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제주해군기지건설

을막기 위한 행동을펼치고 있다.

캄보디아 지뢰·확산탄금지운동 CCBL 활동가

들 방한

CCBL 활동가 데니스 콜런 수녀(Sr, Denise Coghlan), 송 코살(Song Kosal)이 한국을 방

문했다. 이들과 함께 지뢰 확산탄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을 환기하고, 한국이 이와 같

은 비인도 무기에 대한 국제적인 금지 추세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기 위한 여러 행사를 진행했

다. 3월 12일 월요일 저녁 홍대 가톨릭청년회관

니콜라오홀에서진행한 <캄보디아의 고통, 우리

의 미래> 강연회에는 백여 명의 사람들이 와서

지뢰와 확산탄의 문제와 이를 금지하기 위한 운

동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으며, 13일 화요일

오전 외교통상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정부가 지뢰, 집속탄금지협약에 가입할 것을 촉

구하였다. 점심때에는 관련 활동가의 간담회 자

리를 갖고 이 운동을 어떻게 연대하여 잘 펼쳐

나갈 것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였고, 저녁에는

<지학순정의평화기금>에서 수여하는 지학순정

의 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하였다. 여전히 안보문

제를 핑계로 대표적인 비인도 무기인 지뢰와 확

산탄을 계속 생산하고 수출하는 한국이 이 문제

의 심각성에 대해 조금이나마 책임을 느낄 수

있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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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27

병역거부운동 10년, 또 다른 10년을 위하여

2001년에 시작된 병역거부운동은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여전히 병역거부자들은 대체복무

의 기회 없이감옥에 가야하는현실이긴하지만, 병역거부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었고

나름의 변화를 만들어왔다. 앞으로 더 나은 병

역거부운동을 위해 지난 10년의 활동을 잘 정

리, 평가하고 이후 10년의 계획을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방한한 WRI 활동가들과 함

께 3월 21일에는 국회 앞에서 19대 국회에 대

체복무제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고 통합

진보당, 진보신당, 녹색당, 청년당의 비례대표후

보들이 직접 참석하여 발언하기도 하였다. 저녁에는 한국의 병역거부운동과 해외의 병역거부운

동사례를 나누는 공개간담회가 열렸으며, 22일과 24일에는 Movement-Building 워크샵이 이

틀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운동이 어느 지점에 와있는지 평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후의 활동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앞으로 지치지 않고 우리가 하고 싶은 운동을 어

떻게 해나갈지에 대한 고민을 나눔으로써, 이전

의 10년과는 또 다른, 새롭고활기찬 10년이펼

쳐질예정이다.

Page 30: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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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연말을불싸지른평화수감자의날,

“친해지길바래”

진냥 | 전쟁없는세상 회원 + [email protected]

원래 평화수감자의 날은 12월 1일이지만, ‘친해지길 바래’라는 이름의 2011년 모임은 주말을 노

린 3일에 열렸다. 새벽까지 연말 분위기를 냈던 그 날이 끝나고 한 한 달쯤 지나서였나? 조은씨

에게 연락이 와서 평화수감자의 날 후기를 써서 전없세 소식지에 기고해달라고 했다. “네네~”하

고 쌍콤하게 수락했는데 정작 마감일을 지키진 못했고 날짜는 까마득하게 지나 어느새 봄이 되

었다.

다시 후기를 적어달라는 연락이 왔는데 에휴.. 나이 탓인지 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사진을 보

고 쓰려고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의 사진 탭을 눌렀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사진 속에 있는 홍이와 길수씨의 모습에,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4월 12일) 있었던 선고공판에서 구속수감된 최기원씨의 모습에 한동안 너무 마음이 슬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슬픔이 사실 “친해지길 바래” 자리에서도 느껴졌었다. 이날의 주인공이었던 조은씨는 가석방

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던 경험담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이야기했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전과

만 합쳐도 몇 범이야?”라는 농담은 웃으며 들었지만 슬프기도 했다. 병역거부자들도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사람들도, 후원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모

두 밤새 웃고 떠들었다. 심지어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서 첫차를 타고 대구로 가던

썬이 기차역을 지나쳐서 3시간은 늦게

도착한 소식까지... 그야말로 연말분위기

를 깨알같이 내며 추억으로 채워 넣는

하루 밤이었다. 하지만 뭔가 몽실몽실 상

Page 31: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29

처들이 느껴졌고 사람들은 서로의 상처를 문지르고 바라봐주는 느낌이었다.

병역거부운동이 어찌됐든 간에 서울을 중심으로 움직여서 대구에 거주하는 나로서는 병역거부운

동을 하는 사람들을 그만큼 많이 본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편했다. 뭔가 지지부진하게 큰 한 방

을 터뜨리지 못하면서도 계속 잔잔한 애정어린 진행을 이어갔던 성민씨의 사회도, 전 세계의 평

화수감자들에게 엽서쓰기 순서를 마치 보험사 실적 경쟁처럼 느껴지게 하는 여옥도 편했다. 그

리고 재미있었다. 그날 처음만난 길수씨와는 세 시간은 넘게 둘이서 떠들었고 그다지 이야기를

나누어보지 못한 사람들과도 뭔가 어색하지 않았다. 이쯤되면 “친해지길 바래”는 성공한 것이겠

지.

아! 부정적인 영향도 있었다. 난 병역거부자들이 그렇게 그렇게 깨알같고 방정맞은지 몰랐다. ㅋ

ㅋ 맙소사. 끊이지 않는 그 드립력이라니... 이런 사람들이 기자회견과 피켓과 집회라는 모습으로

만 비춰지는 것은 사실 이 사회의 낭비다. 얼른 대체복무제가 도입되고 평화적인 세상이 와서

병역거부자들의 드립력이 만천하에 공개될 날이 왔으면 좋겠다. ㅋㅋ

Page 32: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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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email protected]

지난 3월은 바빴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문제

가 구럼비발파로 극단의 대립으로치달았고, 핵안보 정상회의라는 큰 안보 이슈 또한 있었다. 캄보디아의 지뢰·확산탄 활동가들의 방한으로각

종 강연과 기자회견, 면담 등의 일정을 소화하기

도 했다. 겉으론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전쟁없는

세상의 앞으로의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될 무브먼트 빌딩Movement Building 워크샵 또

한 3월의 우리를 가슴벅차게, 힘들게했던 일이

었다.

2012년, 또 다른 10년의 준비

오랫동안 전쟁없는세상(이하 전없세)과 함께 활

동을 해왔던 오리가 2월에 귀국하기로 결정되고

전없세와 오랫동안 연대를 해온 WRI의 활동가

안드레아스 스펙이 3월에 무브먼트 빌딩 워크샵

을 하러 한국에 오기로 결정이 되고부터 우리는

바빠졌다. 바빠진 만큼 활력이 돌았는데, 오랫동안 약간은 뜸해졌던 몇몇이 적극적인 활동의지

를 보여준 것도 발맞춰 일어난 일이다. 경험 많

은 한국, 외국의 활동가, 오랫동안 전없세를 운

영해온 활동가들, 운동 초기부터 함께했던 여러

운동주체들의 귀환, 새로운 활동의지를 밝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본

격적으로 논의하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1월 27일 신년회는 단순히 2012년의 시작을 기

념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2011년이 병역거부운

동 10년째였다면 2012년은 이제 새로운 10년을

시작하는 어떤 출발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함께지난 운동을 평가하며 서로가 갖고 있던 문제의

식들을 드러내고 그동안의 성과와 한계를 돌아

보고, 병역거부만이 아닌 반군사주의운동, 평화

주의 운동으로서의 우리의 운동 목표를 세워보

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욕구와 언어를 살피며

이로써 새로운 에너지와 구체적인 역할 설정 등

을 하는 것이 그 출발의 내용이었다. 우리는 그

신년회에서앞으로의 계획들을 공유했다.

어머나, 써놓고 보니 그 시작이너무도 웅대하고

Page 33: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31

아름다웠다. 논의하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막막했고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우린 몇

번의 모임을 가져보았고, 3월에 할 워크샵 이전

에 어느 정도의 평가작업과 내부의 문제의식을

구체화하는 사전워크샵을 갖기로 했다. 그렇게

하고 3월말 워크샵을 통해 운동의 구체적인 계

획을 세우고 결의를 다지기로했다.

몇 번에 걸친 사전 워크샵

2월 21일에 사전워크샵을 가졌다. 워크샵이 있

기 전에 병역거부운동을 내부에 대한 평가들에

대한 글을 작성해서 공유해봤고 그 안건들을 토

대로 13명이 회의에 참여해서 뜨거운 토론을 가

졌다. 내부적인 문제로는 운동에 대한 주체감과

책임감 부재, 평등하고 자율적인 구조의 한계, 여성활동가와 성별분업의 문제, 운동을 같이 하

는 사람들의 문화가 주로 지적이됐다. 무엇보다

대체복무제 도입이라는 틀을 넘어서자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구체적이고 분명한 새

로운 목표들을 서로, 또 함께 합의하지 못했다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서 병역거부자가발언

권을 과도하게 얻고, 병역거부자에게 운동에의

참여와 역할을 기대하게 됐고 이로 인해 전체적

인 운동도 대체복무제라는 한계에 머물렀다는

인식인 것이다. 병역거부자들은 단지 다양한 이

유로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이고 이들을 모두 평

화운동, 반군사주의운동의 주체로 볼 순 없으며

구체적 목표와 역할을 가진 평화운동의 주체들

이 생겨나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가됐다.

우리의 운동이 현실운동, 현실정치와의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도덕적 순결주의 운동으로 가지 않

느냐는 지적도 있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

게 우리의 생각을 알리고 현실적으로 합의하면

서 개선해나가는 노력이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

다는 것이다. 병역거부운동은 물론 당사자 운동

의 성격도 있지만, 당사자의 문제로 한정짓지 않

고 사회 전체의 문제로 언어화하고 제도화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대체복무제 도입에 있어서도 현실정치와 타협하

고 조율하는 것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이런 것은 평화운동이라기보다는 인권운동, 입법운동인데 누구보다도 병역거부자들도 이런

운동에 열심히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

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과 욕구를 좀 더 면밀하

게 파악해야 ‘우리’의 목표를 세울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에 세밀한 설문지를 작성하고 공유

하기로했다.

3월 8일 두 번째 사전 워크샵에서 이 설문 내용

을 공유했다. 설문은 서로가 비폭력·평화에 대해

갖고 있는 입장을 살피고, 활동가들이활동을 하

며느꼈던 전없세의 조직과 운동의 목표, 문제의

식등에 대한 생각, 그리고 병역거부자들의 수감

생활과 운동의 관계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이었

다. 열 명이 넘는 활동가 혹은 병역거부자들이

직접, 혹은 메일로 설문에 대한 답을 했고, 두번째 사전 워크샵에서는 이를 모두 함께 읽어보

고 질문이나 부연설명을 했다. 징병제에 대한 문

제제기, 일상속의 군사주의, 평화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평화운동에 대한 욕구가 높게 파악됐으

며 운동에 참여하는 개개인의 생각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3월 15일 세번째사전 워크샵에서는 지난 10년간의 활동을 대체복무제 입법, 병역거부운동, 반군사주의로 나누어서 그 동안의 활동과 성과와

한계에 대해서 정리해보았다. 또한 전없세의 운

Page 34: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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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활동 구조에 대해서, 병역거부자들이 지속적

으로 만나며 교류하고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쉽

고도 계속적으로 할 수 있는 평화 밥상, 비폭력

직접행동을 교육하고 활동할 수 있는 트레이닝

등의새로운 제안에 대해서얘기해보았다.

새로운 관점으로 운동을 분석했던

무브먼트 빌딩 워크샵

본격적인 무브먼트 빌딩 워크샵은 3월 22일(목)과 24일(토) 이틀에 걸쳐 이뤄졌다. 전쟁없는세

상 근처에 있는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20명정도

의 사람들이 함께 열띤 워크샵을벌였다. 워크샵

의 진행은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병역거부운

동을 조직한 경험이 있는 WRI의 안드레아스가

맡았다.

첫날엔 먼저 운동을 분석하는 틀에 대해서 설명

하는 발제가 있었다. 무브먼트 액션플랜

(Movement Action Plan)이라는 도구로서 사회

운동의 진행정도를 이해하고 활동가들에게 자신

감을 줄 수 있는 유용한 프로그램이라 한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사회운동은 강력하며 권력자들

이 갖고 있는 대중의 동의에 기반한 기득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결

과적으로 성공으로 가는 것이라는 전제를 기반

으로 사회운동을 여덟 가지 단계로 구분한다. 또운동에서 네 가지의 역할을 하는 활동가·단체들

이 존재하고, 이 네 가지 유형은 운동의 단계와

계획에따라 다양한 역할을담당한다고 본다. 운동의 단계와 단체·개인의 유형을 파악하는 것은

현재 운동이 어떤 성과를 냈고 무엇을 할 수 있

고 해야 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자세한 내용은 WRI홈페이지의 자료1)를 참고해

야 한다.

이 모델을 설명하면서 안드레아스가 강조한 것

은 사회 운동은 실질적으로 사회를 바꿔왔고 바

꿔가는 중요한 중심이며 사회운동은 참여와 민

주성, 비폭력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운동은 단기적인 이벤트가 아니며 아

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며 한국의 병역거

부운동은 10년 동안 많은 것을 해왔고 결코 좌

절하거나 침체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

했다.

사회운동의 네 가지 유형은 공개적으로 비폭력

직접행동 등을 통해 아니요!를 말하는 반항아와

기존절차의 실패를 보여주거나 대안적 해결책을

찾은 개혁가, 지지층을 형성하는 시민, 마지막으로 교육하고 설득하며 풀뿌리네트워크를 조직하

며 장기전술을 촉진하는 변화의 주체, 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했다. 안드레아스의 소개를 듣고 워

크샵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가 어떤 유

형인지 판단해서 정해진 위치에 서보았다. 각자의 위치에 대해서 설명해보며 서로의 특성을 이

해해보기도했다. 주로 시민과 변화의 주체가 많

이 나왔고, 반항아는 조금 있었으며, 개혁가 성

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단 한명 있었다. 각자의 위치에 대해서 설명해보며 서로의 특성을 이

1) http://wri-irg.org/node/14446

Page 35: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33

해해보았다. 전반적으로는 네 가지 유형이 골고

루 있고 서로 협력적인 것이 운동에 좋다고 하

는데...

개인별 유형을 파악한 후에는 소그룹으로 나뉘

어 병역거부운동의 단계를 진단해보고 운동의

성공으로 가는 과정 중 전없세와, 또 병역거부운

동을 함께 하는 단체들의 유형을 종이에 그려보

며 병역거부운동이처한 상황, 맺고 있는관계와

협력할 수 있는 자원들을확인해 보았다. 이어 소그룹에서 논의한 내용을 전체적으로 논

의해보았다. 사실 전없세의 많은 사람들은 대체

복무제의 코앞까지 가봤던 병역거부운동이 꽤

높은 단계에 와있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논의를 해보며, 특히 해외의 사례를 많이

경험해본 안드레아스의 의견을 들으며 우리의

진단은 달라졌다. 대체복무제가 생긴다는 게 현

재로써 확실치않고, 특히 민주통합당 등의 야당

이 다수당이 된다 해도 실제로 대체복무제가 도

입되기까진 많은 진통이 예상되며 타국의 사례

를 볼때 과도하게 길거나, 까다로운 대체복무제

가 생길수도 있다. 또한 대체복무제를 넘어서 병

역에 대한, 군대와징병제에 대한 거부가 지역에

서, 풀뿌리에서 확산이 된 것도 아니며 대중에

군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광범위하게 공유된 상

태도 아닌 것이다. 위에 설명한 MAP에 비춰볼

때 현재 병역거부운동은 기존 절차의 실패나 문

제를 보여주고 듣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조직해

새로운 단체나 시민불복종을 만들어나가는 기존

절차의 실패(2단계), 혹은 성숙(3단계)의 단계

즈음에 와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사회운동의 3단계의 특징들을 바탕으로 조건이 더 성숙하게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을 해보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됐다.다른 여러 단체나 운동 주체들과의 역할을 살펴

보는 것에서는 전없

세를 변화의 주체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이 전반적인 공감

대였다. 운동의 적

극적인 주체로서 조

직하고 교육하고 전

술을 세워가는 주체

로서 우리를 본 것

은 고무적이었으나, 병역거부운동을 주

체적으로 하는 곳이 전없세 뿐으로 고립된 것은

고민해볼지점이었다.

첫날 워크샵이 운동에 대한 평가와 진단이었다

면 이튿날 워크샵에서는 구성원들의 욕구를 파

악하고 우리 운동의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어 보

는 게 목적이었다. 먼저 우리가 해왔던, 하고 있

는, 또 하고 싶은활동들 전지 한 장에 자유롭게

써보았다. 생각나는 대로 다 썼는데순식간에 전

지 한 장이 꽉 찼다. 그 꽉 찬 내용들을 비슷한

영역으로 묶어 보았다. 이어서 참여자들에게 스

티커 세장씩을 나눠주고 자유롭게 자신의 관심

이 있는 영역에 붙이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우

리 운동의 네 가지 주제는 대체복무제 입법운동, 평화 교육 및 트레이닝, 대중활동, 다른 운동과

의 연계로 정해졌고 논의에 참여하고 활동하고

싶은 그룹으로 나눠져 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

인 계획을 세워봤다.

대체복무제 입법운동 팀에서는 총선 이후에 어

떻게 대체복무제를 발의할 국회의원들을 찾고

설득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이 논의를 끌어갈

동력을 만들지에 대해서 논의했다. 비교적 보수

적인 야당을 상대로 실제적으로 적용가능한 대

Page 36: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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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복무제 법안을 제의해 입법되도록 해야 한다

는 의견과 조금 더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안을

제시해 논의를 거쳐 적정선 수준에서 타협되도

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또한 병역거부자

들, 종교인들,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

을 통해서 입법발의를 촉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변수는 총선이고 구

체적인 전략은 이후에 논의될것이다.

다른 운동과의 연계를 논의한 그룹에서는 군복

무자, 군인부양가족들, 뒷바라지 하는 사람들과

의 연대와 군대를 통해 볼 수 있는 성역할을 재

고함으로써 이에 공감하는 단체 찾기, Q&A(Queer & Army)와 같은 프로그램들을 통

해 퀴어들의 군대에 대한 인식 재고, 군대와 관

련된 교육을 하는 대안교육, 평화교육 단체, 환경단체·기지단체등과 함께 기지 폐해 알리는 활

동, 무기 거부 네트워크 등의 아이디어가 나왔

다.

평화 교육 및 트레이닝 조에서는 본격적으로 평

화교육을 하기 보다는 일단 평화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먼저 양성하고 우리의 역량을 키

우는 프로그램들이 논의됐다. 탈군사주의, 비폭

력, 대안 안보 등을 주제로 교육자용 매뉴얼과

커리큘럼 등을 만들고 교육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팀을 꾸리고 방법론적인 측면과 이론 양

쪽으로 개발하여 이를 지역을 포함한 다양한 운

동 영역으로 확장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10월에 실제로 비폭력 트레이닝 지도자 교육과정

등이 구체적으로 언급됐다.

대중활동을 논의한 그룹에선 청년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활동을 주로 논의했다. 징병제와 군

대에 대한 근본적 문제점을 알려 근본적으로 사

회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을 목

표로 대안학교, 청소년 단체 등과 간담회 강연을

하고 커리큘럼이나 강의안을 개발할 필요가 있

다고 했다. 영상이나 만화책 등 보다 대중적인

전달 수단에 대한얘기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워크샵에 대해서 평가하며 각자의

느낌과 의지를 말하며 마무리 됐다. 전반적으로

막연했던 운동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이진 않지

만 자신의 욕구와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람이 많았다. 얘기를 하면서 새롭

게 관심과 의지가 생긴 사람도 꽤 있었다. 또한

대체복무제로 한정 지워지기 쉬웠던 병역거부를

다양한 다른 이슈로 확장할 수 있었던 전환점이

됐다. 활동을열심히 할게요 못할게요가 아닌 구

체적으로 어떤 방향의 활동을 어떠한 역할로 참

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게 됐다

는 것이 안드레아스가 소개해준 MAP의 효과였

다. 또한 운동의 전반적인 과정들에 대해서 역할

과 단계로 운동을 봄으로써 다른 주체들과 관계

Page 37: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35

를 맺고 활동 목표를 정하는데도 실질적인 도움

이될것이다.

지난 세 달간에걸친 일련의 모임들, 그리고 무

브먼트 빌딩 워크샵을 통해서 전없세는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됐다. 그동안 막연하게만 인지하고

있던 문제의식들을 다양한 과정을 통해서 공식

적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또한 지난 10년간의

운동을 돌아보고 평가하면서 여러 가지 한계를

봤지만, 동시에 많은 성과가 있었음을 확인한 것

이 하나의 격려가됐다.

MAP를통한 단계와 유형분석을통해서는 병역

거부운동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 전환의

계기가 됐다. 목표를 대체복무가 아닌 군대와징

병제에 대한 거부감, 저항으로 분명히 하고 우리

가 어디에 서있는지를 봄으로써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고 어떤 방식으로 활동해야 하는지가 분

명해졌다. 역할 분석을통해 우리와 관계를맺고

있는 주체들과 어떤 방식으로 연대해야 하는지

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됐고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어떠한 방향의 운동에 어떠한 역할로

참여할 수 있는지를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이어지는 길고 지루하지만 뜨거웠던 논의

등을 통해 병역거부운동에 함께할 사람들의 열

정과 욕구를 서로 확인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모

아 운동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성과일 것이다.

물론짧은 일정으로 인해, 게다가통역을 거치면

서 시간이 많이 부족해지면서 계획했던 것을 모

두마무리하진 못했다. 네 가지활동계획들에 대

한 구체적 논의들을 조금 더 논의하면서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목표로 다듬어가고 서로의

관심과 역량에 따라 역할과 책임을 나누는 작업

을 하지 못했다. 또한 사전워크샵에서 얘기됐던

전없세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조직과 운영, 소통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제기들은 해결되지

못한채로 남겨졌다. 전없세에서는 마무리되지 못한 부분들을 매듭짓

고 앞으로의 보다 구체적인 목표와 활동을 위해

서 후속 워크샵을 준비하고 있다. 병역거부운동

과 전쟁없는세상의 앞으로의 10년을 기대해 달

라. 또 참여해 달라. 이것은 일부 소수 활동가들

의 문제가 아니며 군대, 징병, 군사주의, 전쟁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모두의 문제이다. 서로의

역할과관심사가 조금씩 다를 뿐.

Page 38: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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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email protected]

* 한국에서 병역거부문제가 공론화 된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병역거부로 감옥에 가야하는

현실은 여전하지만, 병역거부운동은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만들어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지난 10년간의 병역거부운동을 돌아보며 성과와 한계를 평가하고, 오랜 시간 병

역거부운동을 해온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 WRI)의 경험을 나누

는 <병역거부운동 10년, 또 다른 10년을 위하여> 공개간담회를 3월 21일 저녁 7시에 환경

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열었다.

이 글은 간담회에서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조은이 “한국의 병역거부 10년을 돌아보며”라는

주제로 발제한 내용이다. 간담회의 영상자료 주소도 첨부한다. 앞선 성민의 글과 이 발제문

이 병역거부운동의 지난 10년간 흐름과 앞으로의 방향을 살피는 데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

<영상자료>

1. 한국의 병역거부운동 10년을 돌아보며 : 조은 (http://youtu.be/r5wETJnhP9o)

2.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둘러싼 법률적 논쟁 : 서기호 (http://youtu.be/1BMI1V8YKho)

3. 병역거부권의 이행 -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RI)의 90년 역사로부터 배운다

: 안드레아스 스펙 (http://youtu.be/xlO9joLfmwE)

4. 질의응답 (http://youtu.be/s1q_lMyvmqM)

들어가며

절친한 친구 분이 감옥에 있습니다. 제가 감옥

에 있을 때 후원회장을 해줬던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정치적 병역거부

자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매년 5~6명 정도 꾸준

히 나오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병역

거부자로 2001년 오태양 씨가 처음 등장했고 감

옥에 있는 제 친구는 딱 50번째 병역거부자였습

니다. 10년 동안 50명. 친구 한 명을 감옥에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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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37

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친구 하나가 감옥

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감옥

에 들어갔습니다. 일 년에도 몇 번씩 수십 번을,

참 많이 울고 웃었습니다. 물론 대부분 울고 싶

은 일들뿐이었고, 당사자의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었겠죠.

10년 동안 50명을 감옥에 보내는 것도 이렇게

힘든 일인데 만약, 여호와의 증인까지 포함하면

어떨까요. 여호와의 증인까지 포함하면, 일 년에

감옥에 가는 병역거부자는 5~6명이 아니라

700~800명입니다. 지난 60여 년 동안, 만 6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감옥을 갔다 왔습니다. 이들이,

이들의 가족이 흘렸을 눈물의 양, 고통의 양은

얼마였을까요.

병역거부운동이 시작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아무도 모르던 감옥행의 고통을 이제는 많은 사

람들이 공감합니다. 몇 차례 희망을 보기도 했습

니다. 하지만,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병역거부자

들은 여전히감옥을갑니다.

무죄판결을 받은 적도 있고, 정부에서 추진했

던 대체복무제를 보며 희망에 들떴던 적도 있습

니다. 운동초기에는 병역거부라는 말만 꺼내도

무시무시한 욕을 들었던 적도 있으나 이젠 대체

복무제에 대한 찬반이 엇비슷해질 정도로 ‘공감

의 확장’이라는 성과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여전

히, 병역거부자들은 감옥에 갑니다. 무죄판결은

항소심에서 뒤집혔고, 정부에서 추진했던 대체복

무제는 정권이 바뀌면서 전면무효화 됐습니다.

정도가 약해졌을 뿐이지 병역거부라는말을 꺼내

는 건 여전히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무언가 바

뀔듯바뀔듯하면서끝내제자리로 돌아오는느

낌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10년 동안 많은 것을

바꾼만큼벽에 부딪히고 지칠때도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10년간의 병역거부 운동

을 돌아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병역거부운동의

성과와 한계가 무엇인지 평가가 필요합니다. 앞

으로의 운동을 위해서, 이 자리는, 이 순간은 그

래서 소중합니다. 전쟁없는세상을 비롯한 병역거

부 연대회의의 활동을 돌아보고, 병역거부 운동

의 성과와 한계를 확인해보겠습니다. 지금 이 자

리가 병역거부운동을 정리하고 그치는 자리가

아니라, 앞으로의 병역거부운동, 평화운동을 위

해 재모색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병역

거부운동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다는 사실

을 나열하지는 않겠습니다. 앞으로의 방향을 위

해, 지금까지 병역거부운동을 통해서 어떤 성과

를 거둬왔는지,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를 공유하

는 자리가됐으면 합니다.

병역거부운동의 흐름

병역거부운동의 흐름을 정리하기 위해 먼저

병역거부운동단체인 <전쟁없는세상>의 활동을

되새김질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양심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비공개 모임을 통해 서로 고민을

주고받았던 병역거부자들과 지지자들은 2003년 5

월 15일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을 계기로 <전쟁없

는세상>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시

작된 <전쟁없는세상>은 병역거부운동을 중심으

로 점차 다양한 영역으로 활동을 넓혀왔습니다.

병역거부의 문제가 군대와 폭력, 인권, 평화, 양

심에 기인한 직접행동이었기 때문에 <전쟁없는

세상>의 활동이 확장되어 온 것은 어쩌면 당연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초기 병역거부운동은 평화주의의 의미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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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 모두 담지 못했습니다. 전하고픈 메시지는

많았지만 보류해야만 했습니다. 감옥행을 멈추는

것에 가장 운선순위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2~3명, 매년 700-800명의 젊은이가 구속되는 상

태에서 병역거부운동은 오랜 시간 가려져 온 인

권침해의 사실과 규모를 알리는 것에 집중했습

니다. 어떻게든 감옥행을 막는 것이 시급했습니

다. 그래서 초기 병역거부운동은 자유권획득을

위한 인권운동의 성향을띠었습니다.

병역거부운동 그룹은 ‘전쟁없는세상’을 주축으

로 10년 동안 기자회견, 간담회, 공청회, 대체복

무제 개정법 발의 등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가

는 걸 막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여왔습니다.

대중들을 상대로 다양한 캠페인을 벌여왔고 병

역거부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법부에서 두 번의 무죄판결이

나오고, 국가인권위원회의 대체복무허용권고를

받고, 유엔으로부터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구제

하라고 수차례 권고를 받아왔습니다. 노무현 정

부말기 국방부에서도 대체복무제가 추진되는 결

실까지 맺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서

그러한 흐름들은 모두 무시됐습니다. 대체복무도

입을 권고하는 소수의견이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헌법재판소에서 두 차례 병역법 처벌 합헌 판결

이 나오면서 논의가 가라앉았습니다. 앞으로의

대체복무제 입법운동에 대한 새로운 전기가 필

요한 시점입니다.

지난 10년간 병역거부운동에서는 대체복무제

도입이 중요하게 제기되긴 했지만,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한 활동만으로 병역거부의 의미를 한정

할 수는 없습니다. 대체복무제가 있는 징병제가

대체복무제가 없는징병제보다 좋은 것은 확실하

지만, 대체복무제가 있는 나라가 모두 평화롭다

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회의 군사주의가

강화되면서도 대체복무를허용할 수 있기 때문입

니다. 대체복무가 도입되고 안정화될수록 병역거

부자가 주장하는 군대에 대한 문제제기와 반전,

평화주의적 관점이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대체

복무제가 시행된 이후에도 양심의 자유를 넘어서

서 국가가 강제하는 징집과 전쟁, 군사주의에 저

항하는 적극적인활동을 통해 이를 극복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병역거부운동이 평화운

동으로 수렴되는 것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초기의 병역거부운동이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

기 위한 자유권 획득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후에

는 자유권 획득을 위한 대체복무제 도입 운동과

함께 반군사주의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평화운

동으로 바뀌어 갔다. 병역거부자 임재성에 따르

면, 그 과정에서 병역거부자들의 위치도 ‘구제의

대상’에서 ‘저항의 주체’로 바뀌어갔습니다. 병역

거부 선언이 이어질수록 병역거부자들은 대체복

무제에 대한 설명이나 개선 촉구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해 나갔습니다. 2006

년 이후 병역거부자들의 소견서에서는 초기 병

역거부자들의 소견서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대

체복무’라는 단어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구제해 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자

신의 고민과 생각을, 왜총을 들지 않는삶을 택

했는지 선언했습니다.

이런 변화의 한 예로 병역거부운동 연대체인

병역거부연대회의가 발간한 ‘병역거부 가이드북’

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병역거부 가이드북은,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어떤 절차를 통

해서 병역거부가 진행되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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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39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자입니다. 병역거

부자들이 감옥행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하게

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감옥에 가는 것을 구

제해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감옥행

에 준비하면서 자신이 지닌 평화주의를 적극적

으로말하는 저항의 운동으로 변해간셈입니다.

평화운동의 전개와 성과

병역거부자와 활동가들은 대체복무제 입법 운동

과 함께 다양한 평화운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이를테면, 전쟁과 군대, 군수산업의 부당함을 알

리고 저항하는 활동이 그것입니다. 2003년에는

이라크 파병 반대 활동에 집중했습니다. 인권단

체들과 함께 이라크 전쟁범죄에 대해 ‘전범민중

재판’을 진행했고, 정부의 이라크 파병 반대를

외치며 군대에서 병역거부한 강철민과 함께 이

라크 파병 반대 농성을 하기도 했습니다. 방위산

업 육성과 군비 증강을 촉진하기 위한 방위산업

전시회에 맞서 무기산업이 초래하는 분쟁과 국

비경쟁의 악순환에 주목하는 평화군축박람회에

도 참여하고, 군인권 개선을 위한 활동과 전․의

경제 폐지 운동에도 함께 했습니다. 2005년에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 이전 반대운동을 했고, 현재

는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평화단체들과 인권단체들이 함께 반전운동 일

환으로 이라크 전쟁범죄와 파병에 대한 ‘전범민

중 재판’을 기획, 실행했고, 방위산업 육성과 군

비 증강을 촉진하는 방위산업전시회에 맞서 무

기산업이 초래하는 분쟁과 국비경쟁의 악순환에

주목하는 평화군축박람회에도 참여했습니다. 우

회적인 병역거부운동으로서 군인권개선을 위한

활동, 전․의경제폐지운동도진행했습니다.

특히, 군수산업의 부당함을 알리고 저항하는

전쟁수혜자 감시운동도 중요한 평화운동이었습

니다. 전쟁수혜자 감시운동은 전쟁으로 이익을

얻은 자들, 전쟁대치국가에 무기를 팔아 막대한

이윤을 얻는 기업을 감시․견제하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무기산업을 감시하고 무기산업이 얼

마나 나쁜지 세상에 알리고 실제 무기산업이 위

축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병역거부운동은

다른 평화활동가들과 함께 ‘무기제로팀’이란 이

름으로 활동해왔습니다. 이렇듯 전쟁과 군대, 군

수 산업의 부당함을 알리고 저항하는 운동을 지

속해왔습니다.

또한, 병역거부자들을 비롯한 활동가들은 군사

주의를 비판하며 일상에서 군사주의를 알리고

저항하는 운동을 해왔습니다. 폭력을 가능케 하

고 정당화하는 핵심구조에는 군사주의와 국가주

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

장에서, 일상의 곳곳에서 우리는 군사주의와 국

가주의를 마주칩니다. 사회전반의 군사문화 재생

산구조와 일상 속의 군사주의/국가주의적 습성

들을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군사주

의와 국가주의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찾아내고, 성찰하고, 공부하고, 알려내는 활동을

통해 일상에서부터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운동을

해나가려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국기에 대한 맹세 반대운동, 국군

의 날 반대 캠페인, 밀리터리 패션쇼 등의 활동

이 그것입니다. 국가주의를 내면화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를 거부, 저항함으로서 우리 사

회에 만연한 국가주의를 폭로하려 했습니다. 국

군의 날에는 서울시내 한복판에 탱크와 무기들

이 자랑스레 활개 치는 것에 반대하며, 군사주의

의 폭력성과 국가안보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을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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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국군의 날 군사퍼레이

드를 반대하는 캠페인을 했습니다. 밀리터리룩과

같이 생활 속에 스며든 군사문화를 보여주려고

기획된 패션쇼 ‘밀리터리 인 더 시티’패션쇼를

통해 우리 일상에 군사주의가 얼마나 침투해 있

는지 고발하는 행사도열었습니다.

군사주의를 폭로하는 활동은 소식지 같은 매

체를 통해서, 문화제나 캠페인 같은 행동들로 비

정기적으로 이루어져왔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

지 못했던 것들을 제기한 의미는 있지만, 큰 계

획을 가지고 짜임새 있게 이슈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기에

대한 맹세라든지, 전범민중재판, 평화군축 박람

회처럼 다른 단체들과 연대해서 펼친 활동에서

도 나름의 역할을 해왔습니다만, 밀리터리 패션

쇼 같은 대중적인 행사는 더 넓게 더 많은 사

람들에게 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한계와 고민

이렇듯 그동안의 병역거부운동, 나아가 병역거

부운동이 지향한 평화운동의 면면을 살펴보면

나름의 보람과 함께 아쉬움이 남습니다. 활동과

함께 드러난 한계를 극복한 지점이 있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논쟁하고 해결해야 할 한계지점도

많습니다. 한계를 극복한 하나의 예는 병역거부

운동의 확장과 관련합니다. 초기 병역거부운동이

양심의 자유와 신체 구속을 반대하는 자유권 영

역에만 집중했다는 한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병

역거부자들을 비롯한 활동가들이 평화주의의 신

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직접적이고 비폭력적

인 평화운동을 지속하며 어느정도극복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운동의 주체에 대한 문제

가 생겨납니다. 자유권획득운동에서 평화운동으

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운동주체가 병역거부 그

룹에서 평화활동 그룹으로 확장된 부분이 생겼

습니다. 이때 활동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만 스스로를 운동의 주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

향이 생겨났습니다. 활동참여에 대한 동기를 찾

지 못하고 자신을 주변인이라고 판단한 평화운

동참여자들이 늘었고, 자연스럽게 평화운동의 동

력이 약화됐습니다. 그러면서 누가 지금 이 운동

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생겨났습니다.

주체에 대한 고민과 함께, 구조에 대한 고민도

생겨났습니다. 병역거부운동 그룹은 기본적으로

위계가 없는 수평적인 구조를 지향했습니다. 오

픈되어 있는 공간, 자율적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커뮤니티/네트워크적 성격을 지녔습니다. 자율에

기반 한 평등한관계, 활동을 추구한 건분명 긍

정적인 일이지만, 자율과 함께 ‘책임’도 따라와야

하는데 활동에 대한 ‘책임’부분이 미흡해지는 경

우가 생겼습니다. 자율성을 살리는 것과, 일을

고루 나누고 맡은 일에 대해 책임감을 강조하는

것이 미묘하게 어긋나서 부작용도 생겼습니다.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 활동에 대해 골고

루 책임이 져야하는데 일부활동가에게 일과 책

임이 몰리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소수 활동가에

게 일이 전임되다보니 그 활동가가 지치면 자연

스럽게 활동 동력이 저하되곤 했습니다. 평화운

동에 대한 역할과 책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병역거부운동에 있어서 성별분업에 대한 고민

도 오랜 문제였습니다. 지금은 덜하지만 남성 병

역거부자와 뒷바라지하는 여성활동가의 틀이 오

랫동안 지속됐고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돼 왔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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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병역거부자가 감옥을 가면 병역거부자의

애인이 후원회장으로 맡고 뒷바라지를 하는 경

향이 있었습니다. 이런 경향이 당연시됐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가야만하는 상황

이 안타깝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힘

들었지만, 이런 현상을 사적인 문제라고 치부를

하기에 많은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기에 사적이

라고만 치부하기에도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남성들이 여성의 감정노동을 통해 자

신의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문제, 여

성들이 끊임없이 뒷바라지 했던 역사의 문제가

얽혀있습니다. 더불어 감옥 가는 ‘대단한’ 병역거

부남성과 거기서 활동하는 ‘신기한’ 여성활동가

에 대한 이미지가 남아 있는 것도숙제입니다.

병역거부 운동 10년을 통해 쌓인 병역거부자

와 활동가들의 다양한 목소리, 에너지를 어떻게

공적인 언어로 풀어낼까에 대한 고민도 있습니

다. 이들은 군대, 국가, 자본은 물론 일상적인 행

동양식과 활동방식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예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런 고민들이 현실과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허무

주의, 염세주의적 경향 등 자폐적인 경향으로 귀

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평화운동에 참

여하는 이들의 고민을 운동의 언어로 승화시키

고 정치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

다. 이들의 목소리를 공적인 언어로 설명해낸다

면 그 자체가 병역거부 운동의 새로운 언어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그밖에, 대체복무제 도입하기 위해 운동역량을

다 동원했는데도 이명박 정부라는 뭘 해도 안

되는 절체절명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한 발

더 나아가기 어려워졌다는 점, 병역거부가 많이

공론화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논의

수준은 여전히 양심 비양심 수준에 머물러 있는

점, 병역에 대한 시민사회의 고민은 확대되고 있

지만 병역거부연대회의라는 거대한 조직체에서

실제 병역거부운동에 관심을 갖고 직접적인 활

동을 하는 건 전쟁없는세상 뿐이라는 점 등도

깊은 고민이필요한 지점입니다.

나가며

지금까지 병역거부운동이 어떻게 평화운동으

로 나아갔는지, 평화운동으로서의 병역거부운동

이 어떤 성과를 거뒀고 어떤 한계와 고민이 있

는지를 살펴봤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병역거부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대체복무제를 입법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이와 함께 전쟁과 군대,

군수산업의 부당함을 알리고 저항하는 활동, 일

상에서 군사주의에 저항하고 알리는 활동을 해

온점은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활동과정에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

제도 많이 생긴 것이 중요합니다. 운동주체에 대

한 고민, 자율과 책임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에 대한 고민, 활동에 참여하는 다양한 이들의

언어를 어떻게 활동의 힘으로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 성별분업에 대한 고민 등은 병역거부

운동 나아가 평화운동에서 앞으로 안고 가야 할

문제들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이룬 병역거부운

동의 성과를 인지하고, 그에 따른 한계와 고민지

점을 명확히 해나갈 때 비로소 병역거부운동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간담

회와, 22일(목)과 24일(토)에 진행되는 워크샵이

한계를극복하는 시발점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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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을 거부한 여성 - 쓰다만 이야기

아침 | 전쟁없는세상 회원 + [email protected]

나보고 병역거부 운동의 뒷담화를 써달란다. 나

만큼 잘 쓸 사람이 없다나? 그러기에 더 못쓰고 버

티다 원고마감 독촉을 하도 늦게 받아 아주 늦게서

야 글을 쓰기 시작한다. 무엇을 쓸까? 남자들 셋이

모이면 군대 얘기,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들 나오

듯이 병역거부자들이 모이면 수감생활 이야기, 수

감 중에 출역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걸 써볼까? 귀

를 파주고 싶을 만큼 남의 말 잘 안 듣고 똑같은

질문을 하는 친구 이야기를 해볼까? 아니면 회의

내내 무표정하게 있다가 어쩌다 이름을 부르거나

관심을 보이면 입꼬리를 올리는 친구 이야기를 해

볼까? 여성의 날이니 술값 낼 때 여자들은 빼놓자

고 했지만 기어코 내 돈은 내도록 한 친구 이야기

는 어떨까? 평화캠프 준비하는 이들의 반 정도가

한 학원에서 알바하느라 평화캠프 일정은 그 학원

의 일정을 먼저 고려하며 잡았었던 이야기를 해볼

까? 그러다가 제목을 뽑아놓고 맘에 들어 하다가

정작 어떤 글을 쓸지는 정해놓질 못했다. 글을 써

놓고 제목을 정하지 못해 버벅거리던 옛일이 사치

였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한국 사회에서 병역은 남성들만의 의무이자 특권

이라 여겨진 만큼 병역을 거부한 여성들이란 말 자

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모든 사회 구조는 구성원의 자의든 타의든, 의식하

든 의식하지 못하든 동의하에서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니 병역이란 여성들 역시 거부할 수 있는 대상

이 될 수 있으리라.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실명을 거론하

고 그들의 이야기를 쓰면 어쩔까하는 고민을 살짝

해본다.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두 권

이나 나왔으면 함께했던 여성들에 대한 책도 나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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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43

법하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이나

쓸 수 있는 글하고는 거리가 멀 테니 일단 패쓰.

일단 내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병역의 아주 큰

협조자였다. 어릴 적 꿈으로 군인을 적어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른들의 말은 진리였고 선생님들

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중요했던 때였다. 사회가

여성들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그들의 꿈을 가

로막는지 알지 못하던 때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군

인을 적고 그에 대해 선생님이 칭찬하는 걸 보고

나도 군인이 되겠다고 해봤을 뿐이었다. 4학년 때

늙으신 남자 담임선생님이 6.25 관련 교육을 하면

서 대한민국의 인구가 4천만이고 북한의 인구가 2

천만이니 국민 한명이 한명씩만 죽이고 자신도 죽

으면 나머지 2천만 명이 자유대한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들으면서 섬뜩했던

만큼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이야기였다. 5학년 학

기 초에 전학을 가서 뭔가 내 인상을 심어주고 싶

어서 저 이야기를 했다가 담임의 당황하고 슬퍼하

는 눈빛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다 커서까지 반찬

투정 하는 남동생이 군대에 다녀오면 사람 되지 않

을까 싶어 군대를 가라며 재촉을 했고 군대에서 보

내준 남동생의 옷을 받으며 동생을 영영 뺏긴 것만

같아 울어본 적도 있다. 사람이 되어 돌아올 줄 알

았던 남동생은 여자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으니

사람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지고 제대를 했다. 그리

고 삶이 고달파서 평화를 갈망하다가 함께 하게 된

평화단체는 병역거부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 병역거부자들과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이

들을 만나며 그들과 활동하면서 친해지고 강철민

농성과 이길준 농성을 함께하며 또 여행을 다녀오

며 소중한 친구들이 되었다.

내가 한 병역거부의 방식은 다음과 같다. 병역거부

자의 날이나 평화수감자의 날 행사들을 기획하거나

참여하기. 가끔 시간이 맞으면 기자회견이나 재판

이나 후원행사에 참여하기. 후원주점 등의 경우에

는 타고난 능력으로 티켓을 많이 팔아다주기도 했

다. 평화캠프 등을 기획하고 참여하면서 열심히 사

람들이랑 놀아주기도 했다. 술도 늦게까지 먹어주

었고 가끔 사주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것은 나의

귀한 시간과 노력과 재능에 대한 정당한 댓가로 벌

어들인 돈을 세상에 이롭게 하기위해 쓰고자 하는

것이지 내가 돈과 미모 빼면 시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참 강의를 하면서 가급적 병

역거부나 전쟁의 수혜자들에 대한 이야기나 강정마

을 등에 대한 이야기를 거부감 없이 전달하는 경우

도 있다.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도

하고 조언도 해준다. 가족들과의 소통문제는 특히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이나 요청은 적다. 최근에

는 하우스메이트에게 감사의 표시로 산 제빵기로

모임 때마다 빵을 구워가 나누어 먹기도 한다. 여

기까지가 내가 병역거부운동에 관여했던 사정과 나

의 병역거부 활동이다. 전쟁을 거부하는 활동이라

고 더 넓게 잡는다면 더 많은 일을 하고 있겠지만

일단 여기까지만!

병역을 거부한 여성들은 어쩌면 이 글을 읽을 만

한 독자라면 예상가능한 사람들만이 아닐 것이다.

평범하게 살줄 알았던 아들이 어느 날 군대 가기

싫다며 이야기를 꺼내고 그로인한 집안의 갈등을

주도하거나 지켜보거나 수습하기 위해 남몰래 마음

고생했을 어머니들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하

더라도 병역을 거부한 여성이라 볼 수 있다. 어떤

Page 46: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44

여성들은 병역거부자의 친구로, 애인으로, 선배로,

후배로, 지인으로 병역거부를 알게 되었다. 이들은

다른 남성들보다는 좀 더 우호적이고 넓은 아량으

로 후원행사 참가와 후원회 조직과 편지와 면회 등

을 담당해왔고 그들의 고민들, 표현하고자 하는 모

든 것들을 귀담아 들어주었다. 어떤 여성들은 병역

거부자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그들의 결정에 위안이 되고 도움이 되어주

었기 때문이다. 생일마다 챙겨주고 얘기도 잘도 들

어준다. 그녀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 그동안 주

목을 받아왔던 병역거부선언을 하고 수감이 되는

남성들의 일시적인 활동이 아니라 그녀들의 삶을

통해 이어져온 전쟁을 거부하는 그 모든 활동에 대

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전쟁없는세상을 후원해주세요>

전쟁없는세상은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소중한 후원들이 모여서 시작되었습니다. 대체복

무제 도입을 위한 활동,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들을 지원하는 활동,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사람들

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해왔습니다. 이제 병역거부운동과 함께 보다 다양한 평화운동을 해 나

가고자 합니다. 후원을 해주시면 병역거부에 대한 다양한 뉴스와 정보, 전쟁없는세상의 소식지

등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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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정보의 이용에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계좌이체를 하실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543001-01-305291 (예금주 양여옥)

-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http://www.withoutwar.org 를 참고하세요

Page 47: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45

We'll Meet Again -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 영화를 보고아하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email protected]

버펄슨 미공군기지의 리퍼사령관은 영국교환장

교 맨드레이크 대령에게 소련과의 전쟁을 선포

하면서 작전R(명령체계 마비시 사령관이 핵무기

사용결정권을 갖게하도록 한 작전)과 개인용 라

디오 수거를 명령한다. 작전 R을 명령받은 843폭

격부대의 콩 소령은 소련의 탄도 미사일 ICBM

기지에 핵무기를 투하하는 공습계획을 실행한다.

843폭격부대에 암호를 보낸 맨드레이크 대령은

라디오 수거 중 방송을 통해 현재 전쟁상황이

아님을 알게 된다. 맨드레이크 대령은 리퍼의 사

무실로 찾아가 명령을 거둘 것을 요구하지만 리

퍼는 맨드레이크를 자신의 사무실에 가둬놓고

자신이 작전R을 명령한 이유는 '소련 공산당이

미국의 순수한 정수(Purity Of Essence)를 불소

로 공산화하려는 음모'를 막기 위함이라고 말한

다. 한편 미국 대통령 머핀 머플리는 리퍼의 작

전R의 명령 사실을 알고 공격을 수행 중인 폭격

기를 불러들이기 위해 펜타곤에서 긴급참모회의

를연다. 하지만작전R을 수행 받은 폭격기는 리

퍼의 암호가 있어야만 폭격기와 통신가능하기

때문에 리퍼 사령관에게 연락을 취하지만, 버펄

슨 기지는 이미 리퍼에 의해 모든 통신이 두절

되어있다. 머플리는 인근 부대를 보내 버펄슨 기

지를 공격하여 리퍼에게서 암호를 알아오라 명

령하고, 소련 대사를 회의에 초대하여 드미트리

서기장과 통화를 하여 사건의 전말을 설명한다.

드미트리 서기관과 통화 중 소련이 미군의 핵공

격을 받을 경우 자폭하여 전세계를 방사능에 오

염시키는 둠스데이머신(Doom's day machine)을

개발하여 설치한 사실을 알게된다. 이 사실을 알

게 된 대통령은 서둘러 소련에게 843폭격부대의

위치 정보를 넘겨 소련의 미사일기지에 도달하

지 못하도록 폭격기를 공격하게 한다. 결국 버펄

슨 기지는 대통령이 보낸 부대에 의해 함락되고

리퍼는 자살을 한다. 맨드레이크는 리퍼가 강조

한 '순결한 정수'의 첫글자 조합 OPE가 암호임

을 알게되어 폭격받지 않은 폭격기들이 되돌아

오도록 하지만, 콩 소령이 속해있는 폭격기는 소

련의 폭격으로 통신장비가 고장나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한채 소련의 ICBM을 향한다. 이 폭격기

는 소련의 폭격에 의해 연료는 바닥나고 핵무기

투하장치는 고장나지만 콩 소령이 몸소 핵폭탄

에 걸터앉아 투하장치를 고쳐내고 결국 콩 소령

은 핵무기와 함께 ICBM에 떨어져서 작전R을 수

행해낸다. 둠스데이 머신이 작동하기 시작하자

스트레인지러브 박사는 인류를 보존할 방법으로

정치인과 과학자 그리고 컴퓨터로 엄선된 우수

한 인류 몇 십만 명이 살 수 있는 지하쉘터를

만들자고 하자고 제안해낸다. 정치인들을 비롯한

장군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스트레인지러

브 박사는 휠체어에서 일어나 걷고, 연쇄적인 핵

폭발로영화는끝난다.

1)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어떻게 난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나.(Dr.Strangelove: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 - 감독: 스탠리 큐브릭 / 제작년도: 1964 / 시간: 94분

Page 48: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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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외국 영화 중 제목이 가장 긴 영화

(부호를 제외한 알파벳 52자)로 1962년 쿠바 미

사일 위기 직후에 만들어졌다. 미-소 냉전체제

아래 핵무기를 둘러싼 블랙코미디로 이미 제작

된지 48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블랙

코미디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만큼 고전으로

자리잡은 터라 이미 훌륭한 영화평이 많을 것으

로 예상되지만, 핵안보정상회의다 제주해군기지

를 짓겠다는 둥 시국이 을씨년스러워서 몇 자

적어볼란다.

흔히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망상에 사로잡

힌 리퍼 사령관이 무단으로 작전R을 명령을 내

리고 폭격대는 명령을 수행. 대통령은 막으려 하

지만 결국 핵무기는 투하. 둠스데이머신이 작동

하여 전세계는 폭발한다'로 (어휘와 표현방식은

달라도 거의 비슷하게)요약하는데 이는 '반공주

의 전쟁광에 의한 핵폭발'로 의미가 좁혀진다고

본다. 물론 여기엔 냉전체제와 관료주의, 인류의

어리석음을 풍자한다는 설명이 덧붙지만 이런

식의 요약은 죄와 벌을 '한 가난한 젊은이의 노

파 살인극'으로 요약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

된다. 다시 영화를 정리하면서 보며, 왜 블랙코

미디로 불리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단 한번도

웃을 수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이 하

는 행동을 군인이라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따

라가면서 보니 모든게 당연하게 느껴졌었다. 콩

대령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 미 대통령이 리퍼사

령관의 암호를 알아내기 위해 미군기지에 미군

을 보내 총격전을 명령한 것을 당연하게 보고,

리퍼사령관은 그냥 미친놈이라고 느껴졌던 것이

다. 이 영화는 어렵지 않다. 다만 이상한 방식으

로 논리적이다. 이 영화의 진짜 코믹한 요소들은

배우들의 과장된 행동에 있는게 아니라, 아무리

펜타곤의 관료들이 막으려하지만 작전R과 둠스

데이머신이 작동하도록 만든 요소들에 있다. 관

료주의와 군사명령체계, 반공, 계급, 통제, 불신,

전쟁을 일으키는 불안, 핵무기는 냉전과 군대를

유지 시키는 기반이다. 하지만 843폭격부대가 소

련을 향해 공습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핵무기를

투하 시킬 때까지 이 기반은 전부 지뢰로 돌변

한다. 843폭격부대를 멈추게 하기 위해 선택한

해결책마다 기존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작용한

논리로 해결책의 발을 묶는다.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아무리 작전 R이지만 핵무기 공격을 사

전에 아무런 전시상황도 아니었는데 핵무기가

소련에 투하될 수 있었을까? 단순히 반공주의에

미친한 군지도자의 문제일까?

질문에 답하기 앞서 영화 속 공간을 살펴보려

한다. 일단 몇 장면 외에는 대부분 스튜디오 안

에서 촬영되었으며 인물들은 그 공간에 들어설

수는 있어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져있

다. 또한 인물의 공간 이동은 손으로 꼽을 수 있

을 만큼 적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공간적 특징

은 지나칠 만큼 폐쇄적이라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아마도 이를 통해 이화효과를 노리지 않았

나 싶다) 공간은 크게 843폭격대의 폭격기 내부,

버펄슨 미 공군기지와 펜타곤의 원탁회의실로

나눌 수 있으며 각 공간은 계급이 지배하고 있

다. 펜타곤엔 전략을 기획하는 장군과 대통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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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47

비롯한 차관들, 이들의 명령을 폭격대에 전달하

는 버펄슨 공군기지에는 대령과 사령관, 843폭격

대는 이들의 전략을 수행하는 사병과 소령, 843

폭격대는 핵무기를 장착한 채 소련의 사정권에

서 2시간 이내에서 24시간 경계를 선다는 점에

서 실질적으로 전쟁 명령을 수행하는 곳이다. 적

국으로 규정한 소련과 근거리에 있으며 자신들

이 타고 있는 비행기에 핵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어느 누구도 긴장하

지 않는다. 비행은 자동비행조정이 되고 조종사

는 플레이보이를 보거나 카드놀이 따위를 하면

서 한심하게 시간을 때우다가 작전R을 내린 순

간부터 갑자기 미 군가 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2)에 맞춰 (특히 카우보이 모자를

고쳐 쓴 콩소령은) 애국자로 돌변한다. 버펄슨

미 공군기지는 각종 첨단 군장비로 소련의 동태

를 살피고 폭격대를 관리하였지만, 리퍼 사령관

을 대통령이 파견한 군대로부터 지켜주는 요새

와 843폭격대가 국방한계선을 넘어 전쟁이 일어

날 수밖에 없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펜타곤 원탁회의실은 원래 기능은

폭격기와 기지에 내려질 전략을 논의하고 명령

을 군 권력을 행사하는 공간이지만, 작전R이 내

려지는 순간부터 권력을 모두 상실되었으며 작

전R을 해제함으로써 리퍼에게서 권력을 되찾아

오려한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속에서 둠스데이머신이 실행되는 과정은 '

머플리 대통령이 수락한 군 매커니즘을 이용하

여 작전R을 명령한 리퍼사령관과 이 명령에 충

실한 콩 소령의 합작품'이다. 리퍼 사령관은 군

논리에 충실히 미쳤다. 영화 속에서 이를 보여주

는 예로, 터거슨 장군은 펜타곤 회의에서 리퍼사

령관이 미쳤다는 것을 보류하려고, 오히려 그의

주장처럼 소련을 선제공격할 것을 지속적으로

제안한다. 또한 리퍼가 군인들에게 자신의 목적

을 관철하는 방식자체가 군이 유지되는 공포와

정보의 통제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이동이 거의 없으므로 다른 공

간의 인물들과 오로지 통신을 통해서만 소통이

가능한데, 그마저도 통보과 암호로만 명령을 주

고 받을 뿐이다.(물론 펜타곤에서 리퍼사령관에

게 암호를 묻기 위해 전화통화를 시도하지만 이

뤄지지 않고, 멘드레이크는 펜타곤에 암호를 전

달하러 전화하지만 연결이 쉽지 않으며 심지어

대화장면은 생략된다) 처음 작전R이 내려졌을때

맨드레이크 대령과 콩 소령은 처음엔 명령이 군

기강화를 위한 테스트로 의심하지만 곧 명령을

수행한다. 암호를 제외한 모든 통신이 차단된 콩

소령은 애국심에 벅차 사병들에게 연설을 하면

서 사기를 불어넣지만, 맨드레이크는 우연히 방

송을 통해 전시상황이 아님을 알고 리퍼에게 공

격 취소를 요구한다. 물론 리퍼의 협박에 불구하

고 강력히 명령을 거부하진 않고 비굴하고 끈질

기게 암호를 요구한다. 하지만 콩 소령은 이런

내용을 알턱이 없다. 작전R 이후로는 보안을 위

해 리퍼 사령관의 암호를 통해 통신할 수 있는

CRM114을 제외한 모든 통신은 차단되었으므로

2) 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 : http://www.youtube.com/watch?v=v8oF6Jd2R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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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소령이 비행기 안의 작전R에 따른 명령체계

를 기계적으로 척척 처리해 나가는게 우습고 어

리석게 느껴질진 몰라도 어색하게 느껴지진 않

는다. 만약 콩 소령이 리퍼 사령관이 주장하는 '

순수한 정수'의 이론을 듣거나 명령에 대한 구체

적인 이유와 설명, 최소한 라디오 방송을 들었더

라면 그가미치지 않고 이작전을 이행하였을까?

또한 버펄슨 기지의 군인들 역시 리퍼 사령관이

소련과의 전쟁을 선포하여 군인들에게 공포와

군인으로써 의무감을 심어주고 보안을 이유로

개인용 라디오를 압수하여 외부의 상황을 차단

하고 연설을 통해 명령내린 세 가지 원칙(1. 아

무도 믿지마라 2. 반경 180m이내로 접근하는 모

든 물질을 사격하라 3. 만일 의문이 생기거든 사

격 후 심문하라)에 의해 미 대통령이 보낸 아군

을 적군(소련)으로 착각해 총격전을 벌이는 웃기

도 안웃기도 뭐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게 단순히

영화적인 장치가 아니라 실제 냉전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공포

와 통제는 20세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21세기 최

첨단 IT통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서도 비록 영화에서와 같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방식은 아닐지라도 불온서적 금서목록과 정신교

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군대에서 자행되는

권력방식으로작용되고 있다.

이제 머플리 대통령. 좀 뜬금없어 보이긴 하겠

지만 원탁회의실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군복을

입거나 양복을 입고 있음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버펄슨 기지의 리퍼 사령관의 사무실을 들어온

미국군인이 영국대령인 맨드레이크에게 왜 양복

을 입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오늘날 남성들이

주로 입는 양복의 형태가 영국의 귀족 군복에서

유래하였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스탠리 큐브릭이

간단한 농담으로 머플리 대통령을 비롯한 정계

인사들 역시 군인의 일종이며 둠스데이머신 작

동에 있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이야기한

다. 그 단서를 이 영화의 원작소설 적색경보(흔

히 멸망까지 2시간) 제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소련과의 냉전상황을 대화나 평화적인 제

스쳐로 해결하기보다는 무력을 사용한다. 소위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 장착한 폭격기를 소

련에서 2시간 사정권 내에 24시간 정찰하도록

승인함으로 작전R이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내려

져도 전시상황으로 착각 가능한 공포를 조장하

였기 때문에 작전R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

식에 있어서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데, 시간의

촉박함을 이유로 자신의 군인들이 겪을 희생을

생각하지 않은채 CRM114 암호를 알고자버펄

슨 미 공군기지의 군인들을 사살했고, 소련에 폭

격대의 정보를 넘겨줘서 이들을 위험에 빠지도

록 하였다. 그는 세계종말을 막는다는 이유로 다

른 방법에 대한 고려 없이 몇십 명의 군인의 생

명쯤은 가볍게 여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일

까? 물론 수적으로 생각해보면 합리적이고 타당

하다. 하지만 터거슨 장군이 회의 중 '(소련) 2천

만의 희생이냐 (전세계) 1억 5천만의 희생'을 운

운하면서 소련의 보복공격이 들어오기 전에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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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49

선제공격을 제안하면서 내뱉은 대사를 머플리

대통령은 스스로 '대량학살'을 저지르는 '히틀러

같은 학살자'가 되고 싶지 않다며 대응한 점을

생각해보자. 정치인 머핀 머플리는 그 스스로 모

순을범한 것이다.

최후까지 정말 핵폭발을 막을 방법이 없던 것

일까? 영화의 후반부 30분에 도달하면 영화 전

반부가 주로 리퍼 사령관과 펜타곤 회의에 집중

된 것에 비해 폭격기 내부에 집중된다. 콩 소령

은 단 3자리 알파벳과 3자리 숫자 암호를 통해

그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소련은 악의 축, 소

련과의 전시상황)을 끝까지 믿었을 뿐이고 통신

기가 망가져 철수명령을 받아들일 방법이 없었

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여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폭격기는 소련의 공격

으로 기체 자체가 고장이 있었으며 고장으로 인

한 기름유출로 1차 목적지를 공격한다 할지라도

공격 이후 안전지대로 되돌아갈 순 없었으므로

공격을 감행하면 폭격기의 군인들이 위험에 빠

지고 명령을 실행하지 않고 되돌아간다면 폭격

기의 군인들을 포함한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콩 소령은미국인으로써의 자부심(카우보

이 모자)과 군인으로써의 긍지를 군가로 되새기

면서 공격을 감행한다. 이때 대원들의 위험과 핵

무기 공격을 가하는 가해자 공포를 그의 애국심

과 군인 정신으로 속이고 있으며, 그는 투하장치

를 핵폭탄에 걸터앉아 기어코 수리를 해내서 핵

폭탄과 함께떨어지게 된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교육받은 미군으로써의

자부심이 없었더라면 자신의 동료들의 목숨을

그토록 위험에 빠트릴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영

화 속에서 둠스데이머신이 작동하였을까? 하나

덧붙이자면 스텐리 큐브릭 감독의 치밀함이 돋

보이는 장치로 843부대의 폭격기 내부엔 지속적

으로흐르는 군가를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를 보면서 어디서 많이 들은 노래라는 생각이

들어 찾아해보니, 한국의 동요 '빙빙돌아라'의 원

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군가는 남북전

쟁 당시 북군의 군가인데 원곡이 Johnny I

hardly knew ye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Johnny I hardly knew ye3)는 아일랜드의 반전

가요로써 '19세기 초반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인

들을 동인도 회사 군대로 차출해가는 경우가 많

았는데 여기에 반대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청

자인 조니는 동인도 회사 군대로 차출되어 갔다

가 눈, 팔 하나 다리 하나, 그리고 고환까지 잃

고 돌아왔는데 화자가 제목에 나와 있듯이 청자

를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위키백과 참조) 전쟁의 비참함과 비인

간성을 고발하는 노래인데, 이 노래가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군악대장이었던 패트릭 길모어에

의해 조성과 박자, 가사를 바꿔서 군가로 사용하

게 된 것이 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이었다. 이처럼 겉으로 미군의 긍지를 높이

려고 하지만 결국 핵무기 폭발과 함께 죽음에

이르게 되는 미군들의 상황을 이보다 더 날카롭

고 간단하게 풍자한 영화는 아직 보진 못했다.

세계종말이 다가오자 그들에게 전쟁을 수행시키

는 관료들은 미-소를 불문하고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의 지하쉘터를 반기며 자신의 안위만을 생

각한다. 이미 이들의 생각 속에는 박사가 제시한

것처럼 세상엔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우수한 인

류와 위기시 배제가능한 덜 중요한 인류로 나뉘

3) Johnny I hardly knew ye : http://www.youtube.com/watch?v=t6bqTIQh1FI

Page 52: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50

어져 있고, 자신들은 전자라는 것에 동의하는 것

을 보여줌으로써 큐브릭은 전쟁을 이용하는 권

력자들의본질을끝까지밀어붙여풍자한다.

결국 군대 메커니즘을 유지시키는 요소들은

미-소 냉전체제를 생성하고 유지시켜서둠스데이

머신 작동으로 인한 핵폭발로 이르게 한다. 영화

첫 장면에서 둠스데이머신이 소개된 방식을 보

자. 흰 구름 위로 조금 올라온 산봉우리를 향해

비행하는 카메라 영상에 선전방송의 나레이션이

들린다. '북극 불모지 조코프 섬에서 소련이 은

밀히 둠스데이머신을 개발하고 있지만 정확한

기능은 아무도 모른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분명 화면은 단순히 구름 위

로 올라온 산봉우리에 불과할 것이고, 실제 카메

라는 그런 장면을 항공촬영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산 아래가 보이지 않고, 나레이

션의 둠스데이머신에 대한 설명으로 머릿속으로

둠스데이머신 연구기지를 혼자 상상하게 되지만,

결코 그렇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처럼 정

확한 의도와 실체를 덮어두었기에 불분명하지만

위험함이 분명한 존재를 설정해두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자신의 상상력으로 공포와 불안을 극

한으로 이끌고 가게된다. 둠스데이머신도작전R

도 일어나기 전까지는 상상하기 불가능한 공격

의 가능성을 마련해둠으로써 냉전체제에서 자신

들이 안전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 믿음은 작

전R과 둠스데이머신의 연쇄적인 핵폭발이 이뤄

진다.

앞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직후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당시 냉

전이 가속화되어 전쟁위기가 일촉측발의 상황이

었지만, 전쟁 중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전쟁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평화롭지 않다. 마치 폭격기

내부의 군인들이 야한 잡지나 보고 카드놀이를

하지만 폭격기를 떠날 수는 없는 것처럼. 말 뿐

인 핵안보정상회의와 북한의 로켓(혹은 미사일)

실험발사가 동시에 일어나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제주해군기지를 건설하려하지만, 지금도 밥

먹고 똥싸고 돈벌고 시험도 봐야하는 2012년. 봤

다면 다시 꺼내보고 안봤다면 찾아보기를 권하

는 영화이다. 영화가 끝날 땐 뭔가 기분이 찝찌

르름한 당신을 위해 핵폭발 영상과 발랄하고 상

큼하게 함께 베라 린의 'We'll Meet Again'으로

끝낸다. 스탠리 큐브릭은 핵폭발로 종말하는 세

상으로 영화를 보고난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우리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건낸다.

마지막으로, 내가 재미없게 써서 그렇지 정말

웃긴다.4)

4) 이 영화평 속의 음악에 대한 부분은 음악블로그 Musica Antiqua를 참고하였습니다.

http://antiqua.tistory.com/entry/dr-strange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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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51

하이테크전쟁 시대의 평화주의자 - <하이테크 전쟁>을 읽고성민 | 전쟁없는세상 매체편집팀 + [email protected]

로봇이 인간대신 싸운다면 병역을 거부할 필

요가 없어질까? 하이테크 전쟁은 아직 여전히

많은 인간을 필요로 하지만 기술진보는 점점 더

전쟁을 탈인간화한, 비인간화한 어떤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간다. 물론 파괴의 구체성과 비극

성은 더 치명적으로 변해가지만 말이다. 대체복

무제가 도입돼 몇몇의 병역이 면제되고, 징병제

가 폐지돼서 가고 싶은 사람만 군대에 간다면, 즉 더 이상 군대가 강요되지 않는다면 병역거부

운동의 목표는 달성되는 것인가? 우리의 목표가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어떤 것을 거부함으로써

전쟁에 반대할 수 있을까. 이것이 아마도 강요되

지 않는 병역 이후의 우리의 곤란함일 것이다. 이 곤란함은 하이테크전쟁의 시대에 더욱 심화

된다.

저자는 하이테크 전쟁의 다양한 풍경과 그

로 인한 문제, 로봇의 기원과 철학, 하이테크로

인해서 바뀌어가는 세상에 대해서 680쪽에 거쳐

서 얘기하고 있지만 심지어 로봇의 권리와 윤리

에 대해서는 말을 하면서도 우리의 이 곤란함에

대해서, 즉 전쟁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는 답

하지 않는다.

하이테크전쟁 시대에 달라지는 전쟁, 달라지는 삶

전쟁은 미래가 가장 먼저 현실이 되는 곳이

다. 공상과학, 즉 미래를 소재로 다룬 소설이나

영화들 중에 유독 전쟁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전쟁이 그만큼 흥미로운 주제이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주제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기도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이 전쟁에서 선도적으로 사용되

는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수많은 최첨단 과학

기술은 전장에서 제일 먼저 그 모습을 드러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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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또한 그렇다. 미래의 전쟁에 대해서 살펴보

는 것은 곧 우리의 미래를 그려보는 힌트가 된

다. 저자 또한 과학기술로 인해 단지 전쟁뿐이

아닌 미래의 삶 자체가 변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가령, 원자폭탄은 2차대전을 끝낼 무기로써

개발됐지만 원자력 기술의 발전은 곧 다른 나라

에도 확산됐고 냉전구도를 만들어냈다. 원자력은

전기를 만드는데도 쓰이고 있고 원전과 방사능

은 우리삶과 밀접하다. 원자폭탄을 발명한 사람

들은 이러한삶의 변화를예견했을까.

시대가 추구하는 인간상도 달라진다. 어쩌면그 시대의 모범적인 남성상은 가장 우수한 전사

의 요구조건일지도 모른다. 전사의 표준은 우람

하고 거친근육질 전사에서 화려한 기사도로, 또총과 대포 앞에서 냉철하고 침착한 제복 입은

신사로 변해왔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부대에서

똑같은 군복을 입고 하나의 부품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미래의 전사는, 혹은 남성상

은 아마도 컴퓨터 앞에 최대한 오래 앉아있을

수 있고 능숙하게 마우스와 리모컨을 다루는 사

람일 것이라고 말한다. 앗, 이건 오타쿠가 아닌

가? 부모들은 이제 더 이상 게임하는 자녀를 혼

내서는 안될 것이다. 미래의 우수한 병력자원일

테니.

우리는 게임기를 통해 전쟁연습을 하는 아이

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곤 하지만 그런 놀이문

화 자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미래의 반

영일지도 모른다. 편을갈라 막대기를 들고 전쟁

놀이를 하고 땅따먹기를 하던 아이들은 BB탄총을 쏘고 페인트 총을 쏘면서 놀았고, 이제는 컴

퓨터나 게임기 앞에서 조종간을 붙잡고 비행기

를 조종하고 미사일을 쏜다. 무인로봇을 조정하

는 원격 장치들은 실제로 게임과 매우 유사하다. 엑스박스나 플레이스테이션과 유사한 모양으로

일부러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미래의 전

쟁에 대해서 아직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상태이지

만 많은 아이들은 이미 미래의 전쟁에 대비한

훈련을 받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미국에서 성적

미달이지만 게임을 아주 잘하고 애국심이 투철

한 청년들이 군대에 동원되어 아프간 상공을 누

비는 무인기를 조정하고 있는 예가 소개되고 있

다.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용맹과

체력은 필요가 적어진다. 긴박한 전장에서 상사

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방식도 효율적이

지 않다. 머나먼 아프간 상공을 나는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은 미국 어딘가의 사무실에 앉아있

는 직원이며 상사의 말에 복종하기보다 여러 명

이 모여 데이터를 분석하고 보다 합리적인 공격

을 할 것이다. 장애인도, 노인도, 여성도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이제는 어렵지 않아진다. 우리는

이제 저 멀리 어딘가에 살고 있을 누군가를 쏘

고 나서 퇴근해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도 있다. 좋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왜오는 것일까. 하이테크전쟁은 누가왜 발명하

는 것일까.

하이테크 전쟁의 발명

인류 역사상 거의 모든 체제의 변화는 전쟁

을 통해서, 혹은 겪으며 이뤄졌다. 로마의 흥망

에 대해서, 근대의 발전에 대해서 정치경제적인

설명과 다양한 체제 내외적 문제들이 제기되지

만 그 어떤 나라도 스스로 문을닫진않았다. 세력 균형이든, 패권국가의 탄생이든 그 구체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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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53

결과는 군사적 우열을 통해 나타났다. 강력한 해

군을 바탕으로 유럽의 맹주가 되고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 식민지를 개척했던 네덜란드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도 세계 1,2차 대전을

통해 군사적 우위를 점한 미국에게 그 패권을

내준다. 현재 전 세계를 쥐었다 놓았다 하는 소

위 ‘헤게모니’는 미국에 있고 이를 떠받치는 힘

중에 하나가 강력한 군사적 우위임을 누구도 부

인할 수는 없다.

미국이 흔들리고 있다고들 말한다. 멀리 70년대의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또 누군가는 2003년의 이라크 전쟁을 그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2008년에 있었던 경기 침체, 그리고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미국의 재정적자 등으로 인해 경

제적인 붕괴가 예상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

다. 이윤율, 생산성 등 각종 어렵고 머리 아픈

경제 지표로 봤을 때 미국은 이미 몰락중이라고

들 한다. 여전히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가장 힘

이 센 나라인 건 팔 할이 군사력 때문일지도 모

르겠다. 하지만 그 군사력도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먼저, 전쟁의 비용이 올라가고 있다. 미국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때가 베트남 전쟁 때부

터라고 하는데 그 때 즈음해서 미국의 징병제가

폐지됐다(1973). 따라서 해외 파병 시 비용이

증가한다. 재정적자가 심해진 후로는 그 부담이

커지고 있다. 경제적 비용뿐 아니라 정치적 비용

도 포함된다. 코소보사태나 소말리아사태를 겪으

면서 미군의 사망이나 부상에 대한 부담이 커졌

다. 이건 비단 미국뿐이 아니라 유럽 등을 비롯

한 서구세계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로봇 무기나

원격 조정 무기는 현장에서 자국군의 인명피해

를 줄이고 아예 전쟁터로 보내지는 군인의 숫자

를줄인다.

9.11이후 두드러진 테러와의 전쟁도 미군의

새로운 과제다. 특정 국가의 정규군과 상대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숱한 민간인이 있는 도시 내

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 모르

고 누가 적군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작전을 펼쳐

야 한다. 이러한 양상을 국가 대 국가를 기본으

로 하는 근대전쟁이 해체되고 있다고 평가하기

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근대 초기에, 그러

니까 국가라는 체제가 자리 잡을 때 나타났던

현상과 비슷하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기존의 국

가체계가 붕괴되고 새로운 세계 질서가 나타날

징조라고도 한다. 어찌 됐든 전쟁의 양상은 변하

고 있고 이를 ‘새로운 전쟁’으로 규정하기도 한

다.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보통코소보 전쟁으로

삼는데 흥미롭게도 무인 정찰기가 처음으로 전

쟁에 투입된 것도 코소보 전쟁이다.1) 하이테크

전쟁과 테러와의 전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시사

점을 주는 지점이다. 9.11이후각종 로봇무기가

전장에 급속하게 많이 투입된 것도 그 연장선상

에 있다.

중국, 인도 등의 신흥 강국들의 부상도 미국

의 위협이다. 어마어마한 영토와 인구, 그리고

미국으로부터의 지리적 이점을 가진 이들은 주

요 갈등지역인 중동와 동아시아에서 지리적, 경

1) 신동아 2011년 9월호, 김영미역 [해외 이슈] F-22 몰아낸 ‘수호천사’ 미군 무인 항공기, 결혼식장에 미사일 쏘며

‘전쟁 포르노’ 찍었다.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1/08/19/201108190500028/201108190500028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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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적으로 가깝다. 이들의 영향력, 군사력은 커지

고 있으며 특히 중국은 강력한 정부의 힘을 바

탕으로 막대한 군사력을 정치적으로 손쉽게 동

원할 수도 있다. 미국이 이를 극복하고압도적인

우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고도자본의 집중과 첨

단 과학을통한 기술적 우위가필수적이다.

우려도 있다. 로봇과 관련한 과학기술에 대대

적인 투자가 이뤄지는데 그 비용만큼 효율적이

지 못할 수도 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데

는 엄청난 돈이 들어가지만 그 기술을 따라가는

데는 그다지 많은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특히원폭이나 재래식 무기는 거대한 자본이나 설비

가 필요하지만 중소형의 로봇무기들은 그렇지

않다. 해킹 등으로 무력화시키기도 쉽다. 최근이란과의 마찰이 커졌을 때 이란 상공에 있던

무인 정찰기가 해킹당해서 이란 정부가 빼앗은

무인정찰기를 공개하기도 했다. 알카에다 등의

테러집단에서 로봇 무기를 카피한다면. 아마 훨씬더 많은테러가손쉽게 일어날 것이다. 더 이

상 자살테러가 필요 없어질 지도 모르기 때문이

다. 로봇 무기의 사용으로 적대국의 반감이 더

커질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최근에 파키스탄등

에서 미군의 로봇 무기에 대한 반감으로 사람들

이 대규모 시위를벌이기도했다.

이와 같은 걱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군사정

책은 이미 미래무기를 중심으로 개편되고 있다. 엄청난 돈을 하이테크 무기의 연구와 개발에 쓰

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하이테크 전쟁’을 과학기

술의 발전에 따라 자연스레 ‘발생’하는 현상만으

로 볼 수는 없다. 미국의 필요에 의해 전략적으

로 육성되고발전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반드시 미국의 군사 정책과의 연계를 염두

에 두고읽어야 할 것이다.

책에서 소개하는 로봇 무기는 다음과 같은

종류로 나뉜다. 원력 조정 장치, 무인감시 장치, 자율 공격 장치. 이러한 로봇 무기들은 자국 군

의 희생과 비용을 줄일 것이며 전쟁을 벌일 때

수반되는 비용과 정치적 부담을 줄이게 만들 것

이다. 또한 인간과 달리 피로감을 느끼지 않고

단순 작업을 잘 수행하는 로봇의 특성상 테러와

의 전쟁을 대비하는데 도움을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로봇을 비롯한 군의 전반적인 기술 혁신으

로 적은 인구수와 지리적 불리함을 뒤집을 수

있는 기술 혁신은 중국을 비롯한 여타의 후발

국가들에 비해 미국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확

실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사실상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편인 하이테크전쟁의 성공

여부가 미국의 미래를 판가름 할 수도 있겠다. 성공할 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이는 이미 현재

진행형인 방향이며 한반도에 살아가는 우리의

미래와도큰관련이 있다.

여기서 이 책을 지은 피터 w 싱어가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피터 싱어(Peter Albert David Singer)와 다르다는 것을 언급해야겠다. 나부터

도 그렇고 내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하니 꽤 많은

사람들이 “아 그가 그런 책도 썼군요” 하고 우리

에게익숙한 윤리학자 피터싱어를 떠올렸다. 물론 그 피터 싱어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하이테

크 전쟁>을 쓴 피터w 싱어(이하 피터싱어로 쓴

다)는 우리가 무시할만한 저자는 아니다. 그는

세계 최고의 연구기관이자 미국의 양대 연구소

중 하나인 브루킹스연구소에서 방위부문을 맡고

있는 연구원이다. 브루킹스 연구소는 정치적으로

민주당 쪽의(민주통합당 말고 미국의 민주당) 입장을 갖고 있으며 저자 또한 오바마의 대선

캠프에서 국방부문을 담당했다고 하니 저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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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55

삼성 테크윈의 SGR-1. 2010년 7

월 한국의 최전방 전선에 배치된

무인공격기이다.

정치적 입장은 대충 짐작해볼 만하다. 이 책을

미국의 군사정책과 관련지어 읽어야 하는 또 하

나의 이유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에 앞서 두 권의 책을

썼다. 하나는 사설용병업체가 전쟁에 점점깊이

관여하는 현상을 파고든 <전쟁대행주식회

사>(Corporate Warriors: The Rise of the Privatized Military Industry, 2003)이며 다른

하나는 소년병문제를 다룬 <전쟁의 아이들>( Children at War, 2005)이다. 국가 대 국가가

시민권을 가진 성인의 군인들을 동원해 벌이는

총력전이라는 근대 전쟁이 변화하고 있는 양상

에 그의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앞선 저작들에서 전쟁의 주체로서 국가라는 전

통적인 틀이 무너지고 다양한 이해관계와 세력

들 간의 충돌로 변하는 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세계 군사의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의 연구원으

로서 그의 관심이 하이테크 전쟁으로 가리라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럽다.

하이테크 전쟁의 그림자

로봇무기는 결코 미국의 얘기만은 아니다. 한국은 이미 로봇무기산업에서 강력한 선도주자이

다. 로봇 무기 산업경쟁력으로 세계 3위를 자랑

하는 한국은 이미 이라크 전쟁 때 로봇 무기를

‘파병’하기도 했었다. 도담시스템이라는 군수산업

체가 개발한 이지스라는 무인 경계로봇이다. 자이툰 부대에서 실전 배치된 이후로도 여러 중동

국가에 이 무인경계로봇은 파견됐고 계속해서

그 성능을높이고 있다. 그리고 휴전선에도 무인

경계 공격기인 삼성테크윈의 SGR-1가 이미 실

전배치돼서 사용 중이다. 이처럼 한국에서도 로

봇무기가 이미 개발되고 사용되고 있는데도 불

구하고 이에 대

한 윤리적 논란

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저자도 문제로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다. 아직

은 경계감시 수

준이긴 하지만

인간의 제어를

벗어난 살상능력

을 가질 수 있는

로봇무기의 발전에 대해 아무런 감시나 토론이

없다는 것은꽤나 불안하고 위험한 일이다.

최근 위키리크스에서 공개돼서 충격을 준

영상이 있다. 미국의 원격 공격 무기들을 이용해

서 12명의 민간인을 살상한 영상이다. 살해된

사람 중에는 종군기자도 있었는데 그들이 들고

있는 카메라를 소총과 로켓포로 착각하고 공격

을 개시했다. 모든 판단과 공격은 모니터를 통해

서 이뤄졌으며 공개된 영상을 보면 이들이 마치

게임을 하듯이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난

사했음을 알 수 있다. 군대의 역사가 살인시의

심리적 거리와 물리적 거리를 높임으로서 인간

의 본능적 거부감과 죄책감을 완화해 온 것이라

는 심리학자의 분석을 참고 하면 원격공격무기

들은 이 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림으로서 ‘성공’적으로 살상력을 높일 것이다. 또한 인공지능을 갖

춘 로봇이 프로그램 오류나 여러 가지 변수로

인해 민간인이나 자국군을 살상한다면 그 책임

은누구에게 있을까. 책에서 여러 경우로 나눠서

설명은 하지만 아직은 속시원한답은 없다. 책임질 사람도 만들어놓지 못하고 살상력만 키워가

는 무책임성이 로봇 무기 개발에서 느껴진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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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시스템에서 개발한 이지

스1(aEgis 1). 5.56mm구경

소총이 장착가능하며 UAE공

군 및 미국 자문단에 경계범

위 및 주야간 영상이동물체

탐지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

라크 전쟁시 자이툰 부대에

서 실제 사용됐다.

로봇이 우리 편이라

면, 그건 정말 괜찮은

걸까?

또 머리 아픈 사례

가 있다. 얼마 전에

빈라덴이 사살돼서 화

제가 됐었는데 이 작

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로봇무기인

무인정찰기이다. 물론테러집단의 수장들을

죽이기 위해 수많은

오폭과 오인사격으로 인한 억울한 죽음이 있었

다고 하지만 이는 기술적으로, 전략적으로 개선

될 수 있는 요인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이 해결

돼서 우리가 원하는 사람만 골라서 죽일 수 있

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 주석궁까지 탱크를 몰고 가지 않아도 서울에 편

안히 앉아서 김정은을 겨눌 수 있을 때 우리는

이에 반대해야 할까, 찬성해야 할까.

하이테크 전쟁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저자는 인간이 전쟁에 열광하는 핵심적 이유

로 전쟁이 이끌어내는 강력한 정서와 전쟁에 대

한 극복 불가능성을 들었다. 저자의 이러한 이유

를 받아들이는 게 썩 편안하진 않지만 나 또한

전쟁이 인간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문제라

고 생각하고 있다. 숱한 사회 문제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군사주의에 대해관심을 갖는 이유도 그

만큼 우리 사회의 심층에서 전쟁이, 군사주의가

갖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전쟁

의 미래를 보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살아갈 세계

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떠한

변화가 전쟁에서, 국제 사회에서, 우리의 일상에

서 벌어질 것이다. 그 구체적인 면면은 우리는

알 수 없고 설사 그 모습이 주어진다 해도 우리

의 낡은 패러다임으로 인해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충실히 그 변화하는 길을 따

라가며 나무와 숲을 골고루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두꺼운 책을 가볍게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로봇무기라는 첨단 기술이 먼 미래

가 아니라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재라는 것이

피부에 깊숙이 와 닿을 것이다. 두꺼운 책의 미덕은 그 체험의깊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이테크 전쟁시대에 들어 전쟁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보다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움직임이

요구된다. 더 이상 전쟁은 당신을끌어들이지 않

으려 한다. 당신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당신의

손에서 멀어지고, 당신의 몸에서 멀어진다. 하지

만 더 잔인해지고 더 파괴적인 전쟁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그것은 언젠가는 우리 삶을 위협할 것

이다.

전쟁은 언제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해관

계를 위해 많은 사람들의 어떤 적대 감정을 동

원해서 이뤄져 왔다. 점점 더 돈과 권력층만의

의지만으로 이뤄져가는 하이테크 시대의 우리의

행동은 당연하게도 돈과 권력을 가진, 전쟁을 원

하고 결정하는 이들에게 집중돼야 한다. 하이테

크로 몰리는 고도 금융과 자본, 그러한 흐름을

관리하고 역할을 수행하는 정부와 기업에게 우

리는 보다 직접적으로 강력한 움직임을 벌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이테크 전쟁 시대에 하이테

크 평화주의자가 대처하는 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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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숨겼어? 앞을 못 본다는 거.” 그는 전쟁터에 나갔다가 눈을 잃었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소중한 목걸이를

구하려다. 그렇게 살아서 돌아온 그.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는 날. 첫 인사부터 행동 하나하나, 그는 빈틈

없이 연기를 한다. 전날 밤 연습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그의 눈이 보이지 않는

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묻는다. 왜, 숨겼냐고. 그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그를 바라보는 이의

눈동자는 눈물로 그윽하다. “미안해, 거의 완벽했는데. 해낼 수 있었는데…” “거의 속을 뻔 했어. 정말 잘했

어.” 잘했어… 이 상황에서 잘했다니. 얼마나 먹먹하고 따뜻한 말인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슬픈 칭찬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바로 영화 <클래식>에 나오는 대목. 이 장면에서 생각한다. 진심을 다한다는 것. 소중한 사람이

아파하지 않도록, 끝까지 진심을 다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칭찬’을 했던 이는, 나중에 어느 드라마(<연애

시대>)에서 이런 대사를 읊는다. “언젠가는 변하고 언젠가는 끝날지라도… 우리는 이 시간을 진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진심을 다하는 것

진심. 요즘 이 진심을 다한다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나에게 이 말은, 최선을 다한다는 것과는 다른 의

미다. 최선을 다하는 것과 진심을 다하는 것이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진심을 다하는 것이 훨씬 크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살아가다 보면 ‘결과에 상관없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라는

말을 듣곤 한다. 결과가 좋든 그렇지 않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

간, 이 말에는 결국 결과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더 구체적으로는 ‘좋은 결과’를 위해 사력을 다한다는 뜻이 포

함되어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가끔 스스로 최선을 다하자 라는 말을 하면서도 꺼림칙한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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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다가, 위에서처럼 ‘진심을 다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래, 바로 이

거구나 싶었다. 다시 말해, ‘최선을 다 한다’라는 말을 들으면 좋은 결과를 위해 뭔가 각박하게 몸부림치는, 저

결승선을 향해 결국에는 뭔가 억지로 끌려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뭔가 쥐어짜는, 그런. 이에 비해 ‘진심을

다 한다’라는 말은 꼭 각박할 필요가 없으면서도 잔잔하게, 그리고 애틋하면서도 깊게 뭔가를 끌어올리는 그런

모습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진심을 다하는 것으로의 전환. 뭔가, 위로가 된다고 해야 할까.

지난번에 논문으로 고생하는 이야기를 써서 이번에는 좀 더 다른, 그러면서도 밝은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

각했다. 뭔가 염치없이 사람들한테 징징대는 것 같아서(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저번 글을 읽고 염려와 격려의 말

씀을 해주신 분들이 있었는데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그리고 지금 이 시기에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알기에.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내가 제일 고민을 많이 하고 신경을 쓰는 문제

는 결국 이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또 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누구에게나 적어도 한 번쯤은 살아가면서

진심을 다하려고 했던 적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대상은 물론 다양할 것이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그 대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논문이라고 답할 것 같다. 그런데 사랑이 그러하듯, (어떤 분의 말을 빌리면)

더 많이 사랑하고 진심을 다하는 쪽이 상처를 받는 것 같다. 그 대상을 위해 포기해야 할 것도 많고 상처받을

일도 많다. 중요한 분과의 약속을 눈물을 머금고 취소하거나, 정해진 약속을 몇 개월 뒤로 미루기도 한다. 계단

을 오르다 갑자기 멈춰서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이제 숨을 그만 쉬었으면 하는 엄살도 부

려본다. 나의 행복과 고통을 관장하는 절대적 존재. 그게 지금은 논문이다.

스웨덴에서 지내면서 놓치고 있는 게 너무나 많다. 스웨덴어도 더 열심히 배우고 싶고, 학교 동아리 활동도

하고 싶고,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서 경험도 많이 하고. 아닌 게 아니라, 며칠 전에는 큰맘 먹고 어떤 동아리 비

슷한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스웨덴 맥락에서의 인종주의-문화다양성 관련해 매우 인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모임이다.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이 모임에 쏟

게 될 시간과 정성을 논문에 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녁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에 논문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불안했다. 그래서 이제는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이런 결심을 하면서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나라며 자책한다. 이게 다 내가 진심을 다하고 있는 대상,

논문 때문이다. 사실 난 저번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조금은 힘들지만 무난히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역시 알 수 없는 것인 듯하다. 쉽게 말해, 거의 끝나갈 무렵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 순

식간에 상황이 변하고 말았다. ‘왜 하필 나란 말인가,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누군가를 원망도 해보았지만,

결국 나 자신의 한계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존감과 자신감을 상실한 채 얼마 동안 붕 떠서

지냈다.

어떤 기도

그러면서 진심을 다하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됐다. 최선을 다하는 게 어렵다면, 진심을 다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종교는 없지만, 그래서 종교적 의미의 절대자를 향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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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만, 그냥 기도를 한다. 마침 내가 있는 지역에는 북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성당이

하나 있다. 그곳에는 유명한 천체 시계가 있는데, 날마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시간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오르

간 연주가 나오는, 신기하면서도 기특한 시계다. 그 시계가 울린 다음에는 간단한 미사가 시작되는데, 스웨덴어

도 모르면서 나는 뒷자리에 앉아 미사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함께한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그곳에 있는 사람

들이 모두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있는 것 같은 포근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촛불을 지그시 바라

보거나 저 높다란 성당의 천장을 한참 동안 응시하기도 한다. 어떤 때는 논문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냥 눈을 가만히 감고 있기도 한다(그리고 이건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그렇게 앉아 있으면 알게

모르게 스웨덴어 공부도 되는 것 같다). 미사의 마지막은 늘 오르간 연주나 플롯 연주로 장식되는데, 그 연주가

끝나면 나에게 힘과 용기를 달라며 진심으로 기도한 뒤 다시 연구실로 돌아온다. 종교적 의미는 아니지만, 어느

덧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상 중 하나, 곧 성스러운 의식이 되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날부터 지금

까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의 기도가 결국 응답을 받게 될까? (스웨덴어로 기도하면 더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름대로 스웨덴 소식]

# <삐삐> 인종주의 관련 논란 (스웨덴 영문뉴스 <로컬>: 2011. 11. 9)

한국에도 알려진 스웨덴의 동화 <삐삐>가 인종주의 논란에 휩싸였다. 독일의 어느 여성 신학자가 차

별반대 관련 학술회의에서 처음 제기를 했는데, 주인공 삐삐 자체가 인종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예를 들면, 책에 나오는 흑인 아이들은 백인 아이들과는 달리 문제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는 이야기다. 이밖에도 이 책에는 문제가 될만한 민감한 부분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1940년대에 쓴 이 동화는 한국에 <말괄량이 삐삐>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적이 있다.

# 스웨덴 경찰, 최루탄 사용 계획 (스웨덴 국영라디오 국제: 2012. 1. 29)

2012년 2월 1일부터 스웨덴 경찰이 야외에서 최루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스웨덴 경

찰은 문제가 될만한 건물이나 공간 안에서만 최루탄을 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시위자가 건물을 점

거한 채 집회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특정 공간 안이기 때문에 최루탄 사용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거리에서 하는 집회나 축구경기장에서의 상황 발생의 경우에도 최루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스웨덴 경찰은 규정이 바뀌더라도 국회 소속 감시기구의 비판을 의식해 최루

탄 사용에 신중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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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61

할리라예~ 뀨잉뀨잉이라예~ 따뜻따뜻한 군고구마랑 뀨잉뀨잉이 왓어요~ 이 씨지브이야!!!

겁내 올만이네요 ㅠㅁㅠ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 같은 뀨잉뀨잉이

너님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어느덧 연재한지 4달이 되어가네요 맞나? ㅋㅋ 참 감회가

지리네요.. 총각 고마워......복 받을껴.... 난 밤이 외로워....총각 얼마면 돼??

암튼 거시기 지금은 피시방에서 방파 놨는데 애들이 안 들어와서 기다리기 지루하네요. 이번에

많은 질문들을 페이스북 전쟁없는세상 클럽을 통해서 해주셨는데요.

다들 나름대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질문들이라서 고르기 힘들엇져여. 일부는 좀 낚시성

질문 같기도 했고... (이용숙 보고 있나?) 암튼 그중에서 종갓집 맏며느리의 심정으로, 후궁을 간

택하려는 대비마마의 심정으로 엄선하여 제 고민주제이기도 한 ‘노동’에 관해서 질문해주신 주제

에 대해서 상담을 하고자 합니다. 앗싸 3명만 들어오면 바로 게임 시작 ㅋㅋㅋ 제발 좀 들어와

라~~

노동에 대해 회의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기계처럼 일하며 사회에 잘 적응해간다

고 할까요? 노동에 대해서 다르게, 삐딱하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꿈적거리는 거라면 미동하는 거조차 귀차나 하는 웅이는 노동이 정말 귀찮고 하기 시르

다~~ 집에서 퍼질러 자는 거 완전 조으다~~ 기존의 맑스주의적 프레임에서는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건 인천공항에 배 들어오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왜

Q.Q.Q.

A.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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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신성한 거죠? 노동은 안할수록 좋은 거잖아요? 누구나 일하는 거보다는 저처럼 방학 때

머리를 20일정도 안 감고 집에서 콜라마시면서 밤에 컵라면 먹으면서 양말은 방에다 던져놓고

빨래는 아빠를 시키며 게임하는 걸 좋아 하지 않나요??

암튼 저는 게으름과 귀차니즘이야말로 신성하고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맑스의 사위였다는

폴 라파르그가 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책에 보면 고대와 중세에는 노동에 대해서 별로 신

성시되지 않았지만, 근대 이후로 자본주의 이념이 대두되면서 노동착취를 하기 위한 일환으로 노

동이 신성시되고 위대한 것으로 칭송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구요. 폴 라파르그는 노동자들과 사

회주의자들조차도 이러한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들조차도 따라서 노동을 신성시하는데 일

조했다고 하더라구요. 정작 맑스는 “누구나 학자도 되고 낚시도 하는” 그런 사회를 꿈꾸었다던데

좀 아이러니한 거 같아요. 한편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썼던 철학자 버드런트 러셀 역시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동이야말로 천박한 것이고, 중세에도 안식일을 꼭 지키라는 식으로 오히려 노동

보다는 정신과 사유를 더 위대한 걸로 칭송했다고 하더라구요.

역시 자본주의적인 시각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노동에 따른 가치를 지불하지 않고도 자

발적으로 복종해서 일을 더 하게 만들까, 하는 일환으로 노동이 신성시되고 찬양되었던 거죠. 따

라서 노동이 신성하다는 교조에서 벗어나서, 우리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과 그 권리를 말해야 한

다고 러셀과 라파르그는 한입으로 말하더라구요.

현대 사회는 흔히 <포스트 포드주의>사회, 그러니깐 노동유연화를 특징으로 하면서 비정규직을

양산하면서 “일하고 싶은데 (집에서) 놀게 만들고, 놀고 싶을 때는 일하게 만드는” 그런 모순적인

사회죠. 심지어 노동자들조차도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는 식으로 노동에 대한 신성시를

내면화한 채 스스로 스펙을 쌓으려고 발버둥치는, 역설적이게도 놀 권리와 일할 권리가 모두 박

탈당한 사회구요.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꿈꿨던 세상... 하루에 6시간만 일하는 세상은

언제쯤 올까요...

그런데 이런 숨 막히는 세상에서 조금이나마 우리의 게으를 권리를 지키려면 어째야 할까요?

시스템과 구조를 바꾸는 일 말고 개인적으로 놀이와 게으름을 스스로 발견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

각해요. 비록 찌질하게 먹고살기 힘들게 일하고 잇어도 마음만은 품위잇게 ㅋㅋㅋ 일을 할 때도

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예를 들어서 운동한다고 생각하고 하면 조금 나을꺼 같기도 해요. 노

동과 운동은 틀리다지만, 그나마 운동하는 셈 치면서 생각하고 을 한다면 조금 나을지도요 ㅋㅋ

그래도 전 예술이나 놀이가 힘든 세상에서 그나마 가뭄의 단비 같은 거라고 생각을 해요. 미적,

쾌락적 주체가 되도록 스스로 강구하면서 노는 모임이나 놀 공간을 찾는 거 참 좋은 거 같아요.

영화도 될 수 있고, 맛집 기행도 좋을 거 같고.... 니체도 그랬다잖아요. “진리란 추악하다. 우리

는 진리로 인해 멸망하지 않기 위해 예술을 지니고 있다”라고. 비록 일할 때는 고되거나 더러운

기분이 들 때도 있겠으나 놀 때 만큼은 귀족처럼 논다면, 그나마 우리는 우리의 존엄성을 지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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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63

서도 우리 자신을 칸트의 말처럼 “수단으로서만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할 수 있을 거에요. 일단

주체적으로 자기의 시관관리를 하면서 일과 휴식, 놀이를 조화롭게 배분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

연법적 천부인권인 <게으를 권리>를 지킬 수 있을 거에요. 저는 그 점에서 노자와 장자가 가장

위대한 사상가라고 생각해요. 골치 아픈 속세를 등지고 그냥 먹고 자고 농사지으면서 등 따숩고

배부른 게 최고라는 게으름뱅이의 철학.... 노자와 장자의 극단적 자유주의는 어떤 철학보다도 게

으름과 귀차니즘을 찬양하고 있죠. 공자가 주유열국을 하러 돌아다니는걸 보고서 노자는 혀를 끌

끌 찼죠. ‘뭐하러 저렇게 힘들게 돌아다닐까? 숨어서 나처럼 편하게 살면 좋을 것을’ 하고 말이

죠. 장자 역시 진흙탕을 노닐지언정 벼슬길에 나가지 않겠다며 그냥 노숙자처럼 미친년처럼 살다

가 갔죠. 거창한 행위보다는 걍 밥 먹고 물마시고 자고... 그런 게 행복이라고 본거죠.

“내 머리카락을 뽑아서 세상이 평화로와진 대도 내 그 짓만은 안 하리”라는 말이 노장철학에서

나왔을 정도걸랑요. 쿄쿄쿄 저도 정말이지 제 머리카락을 하나 뽑으면 통일이 되고 모든 고통 받

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환경오염도 사라지고 전쟁의 위협도 없어지며 불치병도 정복되고 온 인

류가 영원히 행복해진다고 하더라도 그 짓거리만은 안하고 싶어요.

암튼 너무나 일이 고되다면 딴 직장을 알아보거나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게 좋을 테지만 그렇

지 않고 그냥저냥 버틸 만 하다면.. 남의 돈 먹는 게 쉬운 줄 아니? 억울하면 돈벌어!! 얼른 가서

일해!!! 오빠 저 미쳤나봐요...암튼 결론은 저랑 좀 놀아 듀세여 ^ 3 ^

여러분의 질문을 기다립니다!병역거부에 대한 질문이나 평화운동에 대한 고민이 있다구요? 근데 상의할 사람

이 없다구요? 그렇다면 [email protected] 또는 [email protected]

로 질문을 보내주세요. 효웅님의 재미난 답변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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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뉴욕 시위대 The New York Protesters 정지훈 | 전쟁없는세상 친구 + 뉴욕 유학중 + [email protected]

작년 팔월부터 뉴욕에서 공부하며 지내고 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몇 달을 지

냈다. 타임스퀘어는 두 어 번 가봤고, 자유의 여신상은 아직 발치도 못봤다. 그 사이 몇 개의

시위와 집회들을 목격하고 참가했다. 미국 <타임>지는 2011년 '올해의 인물'로 시위대(The

Protester)를 선정했다. 그만큼 전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시위들이 줄을 이었다. 뉴욕도 예

외는 아니었다. 여기서 경험한 몇 가지 시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Just Say No To Ahma(dinner)jad"

2011년 9월 21일, 일군의 컬럼비아 학생들이 캠퍼스에 모였다. 이란의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Mahmoud Ahmadinejad) 대통령을 규탄하는 집회였다.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2005년 집

권 이후 이란 내 인권 상황을 악화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지속적인 비판을 받아 왔다. 하

지만 컬럼비아 학생들이 굳이 왜 학교에서 이란의 대통령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게 되었을까?

9월 10일 컬럼비아 학내 신문은 국제관계 학생모임인 Columbia International Relations

Council and Association (CIRCA)의 회원들이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아흐마디네

자드 대통령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곧 학내는 물론 미국 주요 언

론에 보도되어 다양한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컬럼비아 대학은 이미 2007년에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을 공식적으로 초청해 강연을 들은 바 있다. 당시에도 학내외 거센 비판에 휩싸였었으

며 강연 당일에는 캠퍼스에서 대규모 반대 집회가 열렸었다. 컬럼비아 대학은 이번 초청건은

공식적으로 학교와 무관하며 학생 집단에서 주최한 일일 뿐이라 해명했다. 9월 21일의 시위는

이러한 상황에서 컬럼비아 공동체가 자국 내 정치적 탄압과 인권 침해의 주동자인 아흐마디네

자드 대통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계획되었었다. 논

란이 불거지자 이란 측은 CIRCA 학생들과의 저녁 약속을 취소했다. 예정된 집회는 "Just 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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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65

P.e.a.c.e.E.s.s.a.yNo To Ahmadinejad"로 표여를 바꾼 채 진행됐다. 이란 대통령과의 저녁 만찬에는 대신 공공

정책대학원인 Columbia's School of International and Public Affairs (SIPA) 학생들이 참가했

다.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과 컬럼비아 학생들 간의 저녁 식사는 이후에도 꽤 오래간 학내의 찬반양

론이 이어졌다. 반대 시위대에 공감하는 이들은 해당 만남이 학문적으로 아무 도움이 되지 못

하며 비윤리적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지적인 의도에 따른 만남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

하지 말아야 한다며 이란 대통령과의 만남을 옹호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Occupy Wall Street 국제행동의 날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Occupy Wall Street, OWS) 운동은 2011년 9월 17일 뉴욕 맨해튼 남

쪽 금융가에 위치한 주커티 공원(Zuccotti Park)을 점거하며 시작됐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

으며 적나라하게 드러난 '1%의 인구'가 부를 독점하는 극단적인 경제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99%의 사람들'이란 구호가 여러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점거'라는 방식의 비폭력 직

접행동은 그 지속성을 잃지 않았고 미국 전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당시 막 시작한 학기에 적응하느라 급급했던 나는 이 사

실을 뒤늦게 알았다. 비행기도 아니고 전철만 타면 갈

수 있는 거리에서 시작한 시위였건만! 아쉬움이 컸다.

그러던 중 10월 15일 드디어 시위에 나갔다. 마침 국

제행동의 날이었다. 세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집

회가 벌어졌다. 뉴욕에서도 곳곳에서 집회가 열렸다.

나는 워싱턴 스퀘어 공원(Washington Square Park)에

우선 모였다. OWS와 연대하는 뉴욕 지역의 학생모임

의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대학생, 대학원생은

물론 교사들과 함께 온 고등학생들도 그 자리를 함께

했다. 그곳에 모인 학생들은 공부를 하기 위해 큰 빚

을 지어야 하는 상황과 이를 재생산하는 경제구조를

규탄하며 학생들이 월스트리트를 함께 '점거'해야만 한

다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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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유들로 99%의 깃발 아래 '점거'를 주장하고 있었다. 누구는 대다수 인구의 이해가 정치적 결

정에 반영되지 못하는 가운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정치적 대변인을 매수할 수 있는 현 상황

을 규탄하며, 누구는 대다수가 충분한 의료혜택을 보장받지 못하는 의료제도에 저항하여, 또

누구는 힘없는 사람들의 평화적 시위가 경찰에 의해 진압되는 상황에 항거하며 거리로 나섰

다. 시간이 지나며 각지에 모였던 집단들이 하나 둘 행진에 합류해 마지막에 타임스퀘어에 이

르렀을 때는 약 5천여 명의 시위대가 군집했었다. 시위대는 '세계의 중심'이라 자부하는 뉴욕

의 타임스퀘어를 몇 시간 동안 점거하며 '1%에 저항하는 99%'의 목소리를 힘껏 외쳤다. 그리

고 미국 전역에서 경찰의 퇴거 명령에 불응한 시위대 수백 명이 연행되었다.

같은 공부를 하는 주변에 OWS와 관련한 세 명의 인물이 있다. 우선, 앨리샤. 'Occupy Wall

Street: The Next Human Rights Movement?'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한 앨리샤는 인터넷을

통해 OWS 첫 날의 시위에서 경찰에 의해 위협을 당하는 시위대를 목격한 이후 꾸준히 현장

에 나가기 시작했다. 금융인들의 욕심이나 경제적 불평등 이전에, 평화적인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이들이 부당하게 공포에 떨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렇게 참가한 시위대 속에서

다양한 가치와 지향의 사람들과 함께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즈와 레일라.

이 둘은 OWS의 방향성이나 중요성에는 공감하며 인권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

을 찾다 학내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모으는 행사를 기획했다. 그 결과 앨리샤가 패널로 참

가한 'Occupy Wall Street: The Next Human Rights Movement?' 토론회를 열 수 있었다.

여기에는 앨리샤와 같은 OWS 시위 참가자들은 물론 제프리 삭스, 엘라자 바르칸 등 OWS에

의미를 부여하는 학자들의 목소리를 모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앨리

샤와 같은 직접 참여자는 물론 로즈나 레일라와 같은 이들의 노력에 의해 OWS 시위는 다양

한 관점과 방식으로 재생산되며 그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OWS는 현재 몇 차례의 강제 퇴거와 함께 겨울을 맞이하며 그 동력이 약해진 상태다. 예전만큼

다양한 집회가 기획되지도 못하고 참가도 저조하다. 대신 뉴욕 외 미국 여러 지역들에서 '점거

'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이들의 소식을 인터넷을 통해 꾸준히 전하고 간헐적으로 연대 집회를

기획함으로써 그 끈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1,000회차 수요집회 연대 시위

2011년 12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및 배상을 촉구하는 수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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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67

P.e.a.c.e.E.s.s.a.y회가 무려 1,000회차를 맞는 날이었다. 매주 수요일마다 빠짐없이 서울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이루어진 시위가 네 자릿수를 맞이하는 날이 왔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동안 '위안

부' 생존자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여생을 걸고 여전히 외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속히 배상하라고.

1,000회차 수요집회 뉴욕 연대시위는 맨해튼에 위치한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 열렸다. 뉴욕에 거

주하는 한인들과 몇몇 유학생들만이 참가한 조촐한 시위였다. 기껏해야 열 명 남짓한 인원이

었다. 경찰이 쳐 놓은 바리케이트 안에서 피켓을 들고 행진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지

를 건네며 '위안부' 문제와 일본 정부의 무대응에 대해 설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

게 지나갔지만 가끔씩 먼저 다가와 관심을 보이는 뉴욕 시민들도 있었다. 한 독일 여성은 일

본에서 살았었으며 '위안부'("Comfort women")문제에 잘 알고 있다며 지지와 격려를 보여 주

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는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범죄에 관한 엄격한 책임 규명이

며 여성인권에 대한 인류 보편이 문제다.

한 시간 가량의 시위는 빌딩 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 총영사관까지 들리도록 큰 함

성을 내지르며 마무리했다. '위안부' 문제가 결코 지나간 과거가 아니며, 현재도 그 일로 고통

받고 끊임없이 사과를 요구하는 이들이 있다는 외침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외쳐야 할 것을 외치는 것이 평화

나는 왜 시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일까. 아마 평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싶기 때

문일 것이다. 아니, 평화란 무엇이 아닌가에 대해 반박하고 싶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들은 시

위대를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사회 혼란을 불러오는 집단으로 취급하곤 한다. 일상을 어지럽히

고 생활을 불편하게 하는. 때론 폭력적이기까지 하여 평화를 해치는.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이

나 도로교통법으로 시위대를 엄정히 다스리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연행하는 것이 평화라고 생

각하기도 하는 것 같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OWS에서 촉발된 각종 '점거' 운동은 그 사회

적 파장 때문에 일정부분 용인되는 듯 보였지만 자세 히 들여다보면 경찰과 상시적으로 충돌

했다. 어떤 선을 넘는다고 판단되면 지체없이 연행했다. OWS 시위대가 뉴욕 브루클린 다리를

수 시간 동안 점거한 날은 700여 명이 동시에 연행되기도 했다. 교통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고 경찰의 경고를 무시하는 '점거' 행위는 당연히 법에 따라 엄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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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시위대가 왜 교통을 방해하면서까지 '점

거' 행위를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시위대를

조직하여 사회적 관심을 끌어내야만 하게 했는지. 그들이 외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공동체

의 구성원들이 시위에 따른 교통 혼잡에 짜증이 나는 딱 그 만큼씩 만이라도 시위대의 목소

리와 처지에 주목한다면, 그들을 그저 사회혼란을 야기하는 불순세력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

이다.

"움직이지 않는 사회, 의견이 대립하지 않는 사회를 평화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안은

별 기자의 말이다. 그렇다. 일방향적 질서와 소수자들의 의견을 묵살함으로써 이루어진 고요

한 평화는 사실상 평화를 가장한 기만일 뿐이다.

시위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방식이다. '점거'는 이를

더욱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한 대표적인 비폭력 직접행동이다. 그리고 시위대야말로 움직이지

않는 사회를 움직이게 하고, 일방적으로 고착된 주류 의견에 저항함으로써 기만적인 평화를

거부하는 이들이다. 나아가 이들의 목소리는 종종 시위대의 경계를 넘어 사회 각계의 주목을

끌어내고 때론 공명을 때론 불협화음을 일으킴으로써 사회의 움직임을 더욱 확장시키곤 한다.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에 대한 컬럼비아 대학 내 갈등이나 OWS에 의해 촉발된 경제 정의,

평등한 분배, 나아가 정치 개혁, 시민운동, 인권 의식 등에 대한 활발한 논의들이 그 예다. '위

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역시 일본정부의 지속적인 외면과 무응답 속에서도 그 꾸준

함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고 있다.

7-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독재 치하의 관리된 질서와 기만적인 평화에 저행했다. 그리고

2011년에는 가속화된 "아랍의 봄" 시위부터 뉴욕 발 OWS까지 또 다른 시위대가 세계를 뒤흔

들었다. 시위대야말로 굳어진 구조에 반발하며 다른 방식의 세계를 주장하는 이들이다. 이러

한 반박이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일어나지 않는 일도 아니다. 혼란스러워 보

일 수 있는 반박이야말로 사실상 평화로 가는 길이다. 고요하고 기만적인 평화의 위선을 벗겨

내는 일이다. 이를 위해선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 외쳐야 할 것을 외치고

들려야 할 것이 들리는 것이 중요하다. 뉴욕 시위대들은 현재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

로 기만적인 평화를 거부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시위대들 또한 그러하다.

Page 71: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69

P.e.a.c.e.E.s.s.a.y

일상에서 전쟁에 길들여지고 있지는 않은지- 전쟁과 평화의 이분법을 넘어 명숙 |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 [email protected]

작년 추석기간에 인도를 여행했다. 상임활동가가 쓸 수 있는 안식주를 이때 사용해 4주간 인도

에 머물렀다. 원래 계획 없이 여행을 하는 스타일이지만 첫 도착지는 정하는 편이다. 하지만

여행 떠나기 전날까지, 아니 당일까지 일을 마무리하느라 여행준비를 전혀 못한 채 인도여행

책 한권만 달랑 준비한 탓이어서 예정하지 않은 곳을 여행했다. 원래는 인도 북쪽에 있는 라

다크를 가려고 했으나 뉴델리역에서 만난 친절한(^ )̂ 삐끼에게 속아 파키스탄과 인접한 스리

나가르라는 지역으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한 다음날 델리에서 폭탄테러가 있어서 그의 말을

믿게 되었다.

총을 든 군인의 낯선 풍경

스리나가르가 위치한 곳이 해발 1700m의 고지대로, 이곳으로 가려면 북부로 넘어가는 곳에 위

치한 산맥들을 지나가야 한다. 그 높고 험준한 산에 좁게 깔린 비포장도로를 타고 가야해서

위험했다. 그래도 쉴 때마다 새벽안개에 젖은 빼어난 자연 풍광과 염소를 몰고 다니는 양치기

의 모습을 보면 보상이 될 만했다. 그런 중에도 데 특이하게 여겨진 것은 카슈미르지역으로

갈 때 국경이 아닌데도 여권검사를 다시 하는 일이었다. 4주간의 여행기간 동안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파키스탄과 접한 스리나가르 등 카슈미르 지역이나 중국과 인접한 라

다크 지역으로 갈 때는 꼭 국경지역을 통과하는 의례인 여권검사를 하였다. 아마도 여전히 하

나의 국가이지만 하나가 아닌 긴장과 갈등을 그대로 보여주는 형식이리라. 스리나가르로 들어

가기 전에 역시 여권검사를 하였고, 숙박예약이 되어있는지 확인했다. 낯선 것은 이러한 형식

에만 그치지 않았다. 스리나가르에 가까울수록 총을 멘 군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군부대

는 자주 보였고 지나가는 군인들도 많았다. 해서 여행책을 뒤적여보니 파키스탄과 접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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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으로 여전히 종교분쟁과 영토분쟁이 있는 곳으로 위험하니 여행을 자제해달라는 안내가 있었

다. 말로만 듣던 ‘분쟁지역의 분위기가 이런 것이구나’ 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한국에서 내가 접한 군복 입은 풍경은 대개가 예비군훈련이 한창일 때의 지하철역 근처에 모인

‘사람이 아닌 예비역’의 흐트러진 모습이거나 미군기지 근처나 이태원에서 군복 입은 미군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스리나가르에서 자주 보이는 총을 멘 군인의 모습은 더 낯설었고, 평화가

아닌 긴장, 갈등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또 종교갈등이라는 게, 영토분쟁이라는 게 이

렇게 무서운 것인가 싶었다.

폭력의 일상성을 강화하는 군인

그렇다고 한국이 평화로운 곳은 아니다. 여전히 미군 기지를 비롯한 군 기지를 확장하려고 하고,

군비를 증가하여 신무기를 도입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하지만 총을 든 군인이 도시 곳곳에 즐

비한 가시화된 긴장과 폭력이 주는 위압감은 없다. 언제든 군인에게 끌려갈 수 있다는 것이

주는 무게감은 다를 테니까. 실제 인도에서는 스리나가르만이 아니라 델리를 비롯한 여러 지

역에서 군인들이 지하철역과 기차역마다 있고 사람들은 일일이 검색대를 거쳐야하고, 쇼핑센

터와 같이 큰 건물에 갈 때도 역시 검문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보안 때문에 지하철역사

안에서 사진조차 찍지 못한다. (한번은 사진기를 꺼내자마자 군인인지 경찰인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러한 검색은 시민들에게도 귀찮은 일일 뿐 아니라 언제나 테러에 대비해야 하는

분위기, 언제든 테러가 일어날 수 있다는 무언의 암시 같은 것이다. 그러니 폭력, 군인이 사

용하는 국가폭력은 언제든 사용해도 되는 무언의 합의가 전제된 듯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긴장의 무게감은 금세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잠시 머무는 여행객인 나에게는 더

그러했다. 시장을 헤맨다든지, 달호수에서 보트를 타며 밤풍경을 즐긴다든지, 힌두사원이나 무

굴 정원을 구경하는 게 전부인 여행객의 일정이니까. 스리나가르에 있는 3일간의 여정에서

이내 군인들의 살벌한 풍경은 그리 ‘살벌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냥 사원을 들어갈 때 여군

들이 신체검사까지 하는 것,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것 정도만이 내가 경험한 군인들의 행

위였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면 이곳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이러한 군인의 모습이 어떻게 다가

올까? 아쉽게도 스리나가르에 사는 사람들하고는 이야기를 못했다. 하지만 4주간 여행하면서

만난 다른 지역 인도 사람들과 이러한 검문에 대해 얘기했을 때 그들은 테러에 대비하기 위

해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항시적인 긴장상태가 그들에게는 긴장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듯했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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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71

P.e.a.c.e.E.s.s.a.y에서 활동하는 평화주의자들은 어떻게 활동할지 궁금해졌다.

전쟁과 평화의 경계선이 모호해진 시대

근대의 전쟁과 다르게 현대의 전쟁은 국가가 국민을 가시적으로 총동원하여 치르는 전쟁이 아니

다. 더구나 국지전이 많고 지역 분쟁이 많다보니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고 전쟁의 반대가 평

화는 아니다. 국지전이 항상적으로 벌어지지 않더라도 테러대비라는 이름으로 전쟁분위기를

조성하고 무기를 확장하고 항상적인 긴장과 폭력, 전쟁가능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의 모

습에서 우리는 일상적 폭력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전쟁 같은 일상을 살고 있다. ‘전

쟁만 아니면 돼’라는 이름으로 일상적인 감시를 하고 군비를 확대하고 무기를 확대하는 것은

평화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지속적인 전쟁, 끝나지 않는 전쟁을 상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

는 은폐하는 것이다. 과연 인도에서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 일상적으로 북한에

대한 긴장을 높이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고 군사력을 증가해야한다는 논리가 공중파를 타

고 공공연하게 나오는 한국에서,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

전쟁과 평화의 경계선이 모호해진 시대에 우리가 진정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전쟁에 대한 근

본적 반대, 폭력에 대한 일관된 반대와 저항이 있어야 한다. 폭력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없이

는 평화란 언제나 먼 나라 이야기가 되고 평화로운 세상은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폭력에 근

본적 성찰과 일상적 저항, 그게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제주 강정

에서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싸우고 있는 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의 모습이 내 가슴을 더

아리게 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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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

인권은 교도소 담벼락을 넘지 못한다김영익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 [email protected]

나는 억세게 운 없는 병역거부자인지도 모른다. 대체로 병역거부자들은 1심에서 실형 선고를 받

고 구속되는데, 나는 재판도 받기 전에 사전 구속 영장이 나와서 덜커덕 구속돼 버렸으니 말이

다.

2009년 2월 말에 나는 사전 구속돼, 꼼짝없이 영등포구치소로 들어가야 했다. 느닷없는 구속이

어서 나는 감옥 내 생활에 대처할 태세가 아니었다. 즉, 얼빠진 상태였다. 구치소에 입소하자마

자 몸의 치부를 다 드러내는 신체검사를 받을 때, 나는 이게 굴욕적인 일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입소 첫날 들어가는 영등포구치소의 신입방은 징벌방과 나란히 있었다. 신입방과 마주

한 징벌방에서는 온갖 소리가 다 들렸다. 종일 징벌방 수용자와 교도관 사이의 다툼 소리, 괴

성 등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위축됐다. 나중에 나름 감옥 생활에 적응하고 나서야, 교정 당

국이 신입방과 징벌방을 한 사동에 둔 이유를 깨닫게 됐다. 이건 소위 ‘길들이기’를 위해서다.

입소 초반부터 징벌방의 ‘끔찍함’을 알아야, 앞으로 수용 생활하면서 교정 당국의 말을 고분고

분 잘 듣지 않겠는가.

영등포 구치소에서 일주일 정도 지나니 어느덧 적응이 됐다.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빵잽이’들의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소 내 현실에 대해 눈 여겨 보게 됐다. 구속노동자후원회

등에서 보내 준 감옥 인권 자료집을 읽고 공부하면서, 소 내에서 바꾸자고 제기해 볼 것도 알

게 됐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들어온 건, 목욕일에 운동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영등포구치소는

미결 수용자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목욕탕에서 목욕을 허용했다. 그런데 교도관 수가 부족하다

는 이유로 목욕일에는 실외 운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루 30분 햇볕 아래 설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다는 건 굉장히 짜증나는 일이다.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 보기로 마음먹었다. 사동 담당 교도관에게 인권위에 진정서

를 내려고 하니, 진정서 양식을 갖다 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교도관이 어쩔 줄 모르고 당황

해 했다. 인권위 진정 절차를 몰라서였다. 한참 전화를 돌리고 부산스럽게 알아보더니, 내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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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73

P.e.a.c.e.E.s.s.a.y지지에 진정 내용을 쓴 다음 봉투를 봉해서 내란다. 그래서 목요일 운동 금지와 더불어, 영등

포구치소 내에서 인권위 진정 등 기본적인 인권 교육이 없는 것 같다는 내용도 진정서에 함께

기재해 제출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서, 인권위 직원이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인권위 직원은 내

얘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니었다. 인권위에서 동일한 문제에 대해 수년 전에 개선하라고 권고를

냈고 당시 법무장관이 노력하겠다고 답한 적이 있으니, 내 진정을 취소하라고 찾아온 것이었

다. 그래서 내가 그때의 권고로 바뀐 게 있냐고 물으니, 그 직원은 바뀐 게 없다고 답했다. 인

권위 권고를 수년이 지나도록 법무부가 실제로 이행하지 않았다면 약속 이행을 재촉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으나, 그 직원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나도 진정을 취소하라는 인권위

직원의 권유를 거절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결국 국가기관이고, 관료적인 일 처리 방식 등 분

명한 한계가 있다는 걸 절감한 순간이었다.

TV와 서신

5월에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했다. 내 기억으론 그 날이 토요일이었다. 오전에 어머니가 면회 오

셔서 나갔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는데, 사동 전체가 술렁거렸다. 면회나 친한 교도관 등을 통

해 이미 소문이 돈 것이었다. 다들 이게 어찌된 일이냐며, 정오에 보여 줄 뉴스를 기다렸다.

(당시 교정 당국은 평일에는 저녁 8시 뉴스를, 주말에는 12시 정오 뉴스를 보여 줬다.) 그런데

정오에 뉴스가 나오지 않고, 엉뚱하게 전국노래자랑이 TV에 나왔다. 교정 당국에서 뉴스를 차

단한 것이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수용자들이 불만을 품은 건 당연했다. 우리 방에 있던 한

수용자는 “아, 우리는 국민도 아니냐. 전직 대통령이 죽었는데 소식도 못 듣게 하는 게 말이

되냐” 하며 화를 냈다. 우리 사동에 있는 수용자들 모두 같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소

식을 <한겨레> 등 언론에 기고했고, 인권위에 진정도 냈다. <한겨레>의 ‘왜냐면’에 이 글이 실

렸고, 그래서 관구계장이 나를 찾아와 상당히 신경질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권위

진정은 수개월 후 또 각하됐다.

그리고 이 일은 내게 불이익을 줬다. 1심에서 실형을 받고, 나는 영등포구치소 당국에 출력을

신청했다. 어머니가 영등포구치소에 있어야 면회 오기 쉽지 않겠냐고 권해서였다. 그러나 출력

신청은 거절됐다. 집시법으로 벌금형 받은 전력이 있어서 어렵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앞서 내가 신문에 기고한 이상 영등포구치소 당국은 내가 조용히 교도소로 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2010년 8월 화성직업훈련교도소로 이감됐다. 교도소에서 나는 세탁장으로 출력을 나갔

다. 막 문을 연 신설 교도소여서 시설은 영등포구치소에 비해 정말 좋았다. ‘세탁장’ 일도 거의

없어서, 대체로 나는 작업장 책상에 앉아 책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운 좋게도 같은 교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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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E.s.s.a.y에 병역거부자인 은국 씨가 와서 운동장이나 출력장 등에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러저

러하게 토론도 하고 좋았다. 게다가 은국 씨는 교도소 내 인권 개선에 엄청 열의가 넘쳐서, 온

갖 문제에 면담 신청과 진정 등을 내서 교도소 당국을 아연 긴장케 했다.

그러다 2010년 4월 무렵, 나와 은국 씨 모두를 화나게 한 일이 터졌다. 구속노동자후원회에서

매달 우리에게 소식지와 서신을 보내주곤 했는데, 어느 날 이게 석연치 않은 이유로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교도소 당국이 서신 검열을 하고 우리에게 전달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

인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교도소에서 조용히 지내던 나도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은국

씨와 상의해 두 사람의 명의로 담당 과장 면담을 신청했다. 구속노동자후원회에도 편지로 이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다음 날 담당 과장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인즉슨 다른 기관에서 구

속노동자후원회의 서신 내용에 문제가 있으니 차단하라는 공문이 와서 그리 조처했다는 것이

다. 무슨 기관인지는 끝내 답해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미 행정 조처한 게 있어서, 되돌리기

어려우니 이해해 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나 나와 은국 씨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우리는 편지를 읽기라도 해야겠다고 버텼다. 한참 실랑이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는 그 다음날 편지의 복사본을 사무실에서 읽어 볼 수 있었다. 서신 내용은 간단했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 감옥 내 인권도 많이 후퇴하고 있어 문제라는 거였다. 겨우 이 정도 내용도 못 보

게 차단하려 했다니, 기가 막혔다.

감옥과 인권

누가 뭐래도 감옥은 억압의 장소다. 따라서 ‘민주화한 덕분에 요즘 감옥 많이 좋아졌다’ 하는 얘

기는 ‘요즘처럼 편한 군대가 무슨 군대냐’ 하는 어른들의 말만큼이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바

깥세상에서도 국가인권위 등에게서 도움을 받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감옥은 그 어려움이 몇 배

가 된다. 아무도 ‘죄수’들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다. 그 때문에 세상의 가장 밑바닥 공간

인 감옥에 사는 사람들은 새로운 기회를 얻지 못한다. 통제와 억압 속에 수형자가 ‘교정’될 것

이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몽상이지 않을까.

인권이 교도소 담벼락을 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만큼 계속 시도하고 또 시

도해야 할 일이다. 그간 양심수들이 담벼락 안쪽에서, 인권 활동가들이 담벼락 바깥에서 싸워

서 바꾼 것 또한 적지 않다. 따라서 오늘도 우리는 바위에 달걀을 계속 부딪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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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75

이집트의 병역거부자 : 마이켈 나빌 사나드

이집트의 첫 번째 병역거부자인 마이켈 나빌 사나드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집트 군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

다는 이유로 수감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감옥에서 오랜시간 단식투쟁을 이어갔고, 최근 이집트혁명 1주년

을 맞아 사면되었습니다. 다음의 글들을 중심으로 내용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gypt: first conscientious

objector> http://wri-irg.org/node/11637, <EGYPT: War Resisters' International welcomes the

overdue release in Cairo of pacifist blogger Maikel Nabil> http://wri-irg.org/node/14479

번역 - 상우, 정리 - 여옥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공개선언한 마이켈 나빌 사나드Maikel Nabil

Sanad는 2010년 10월 22일 군에 입대해야 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집트 헌법 제58조에 따르면, "조국과 그 영토의 수호는 신성한 의무이고, 징집은 법에 따라 의

무적으로 시행된다." 병역은 1980년에 제정된 병역 및 사회복무법에 의해 규제된다. 이 법에 따

르면 병역의무는 모든 18세 이상 이집트 남성에게 의무적으로 부과되고, 사회복무의 의무는 이

법에 명시된 규정에 따라 모든 18세 이상 이집트인 남성과 여성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진다.

이집트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이켈은 여러 차례 이집트 군 당국에 편

지를 보내 자신의 병역거부권 인정과 비군사적인 사회복무 허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학생군

사대학교에서 복무할 것을 통보하는 최종서한을 받았다.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평화주의자로서, 무기를 들거나 군사조직과 그와 유사한 조직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징집은 나의 양심에 반합니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나는 나의 양심에

반해 행동하길 원치 않습니다. 나는 또한 지역 내의 군비경쟁과 여러 투쟁, 피비린내의 장기판

위에 선 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의무소집 되어 자국이 존재할 권리를 위해 방어하는 젊은 이

스라엘인에게 총을 겨누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가 쓴 병역거부 선언서에는 "나는 거부하는 것이지, 기피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병무청과 군

사안보청, 정보부가 다 알고 있는, 신분증에 기재된 주소에 살고 있으며, 이 주소는 내가 국방부

와 국무총리, 상·하의원장들과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도 적혀있습니다. 나는 어디에도

숨어있지 않으므로 이집트 경찰은 어디서든 나를 체포할 수 있습니다. 법원출두요청을 받는다면

언제든 출두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라고 밝히고 있다.

2011년 3월 29일 구금된에 마이켈은 4월 군사법정에서 하원의회(People's Assembly)와 슈라위

원회(Shura Council)를 비롯하여 여타 정부 및 군사, 사법당국에 대한 모독과 제102조 허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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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유포를 이유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판결은 무효처리 되었으나 12월에 다시 군사법정

에서 새롭게 열린 재판에서 그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집트 군부비판을 억압하려는 시도로 행해진 302일간의 부당한 구금 뒤에 그는 2012년 1월 21

일 석방이 발표되고 1월 24일에 마침내 집행되었다. 이는 이집트 혁명 1주년을 기념해 이루어진

일반 사면의 일부로, 지난해 군사법정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2000여명 가까이 되는 수감자들의

석방과 함께 이루어졌다. 유투브와 WRI 웹페이지에 올려진 석방 후 소견발표 동영상에서 마이켈

은 대다수의 석방된 수감자들의 경우처럼 이 "사면" 자체를 거부한다. 이들의 구금은 표현의 자

유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였고, 이집트군이 혁명 이후에도 권력 남용을 계속 하고 있다는 반-군

부 비판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2011년 8월 23일 그는 감옥에서 단식투쟁에 돌입하여 주스와 우유만 섭취하기 시작했는데, 이

는 군부의 부당한 재판과 항소 늦장처리, 다른 사건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의 사건에 대한 차별대

우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WRI는 석방캠페인을 펼쳐왔고, 최근 그의 석방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WRI는 "사면

대신 그의 재판과 선고가 무효로 선언되어야 할 것이고, 마이켈이 사상과 표현, 신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서 그에게 어떠한 법적인 결과가 초래되어서도 안될 것"이라고 밝히면

서 "앞으로 이러한 자유가 마이켈과 이집트인 모두에게 보장되길 희망하지만, 이는 군부통치의

종식을 통해서만 가능해질 것이며, 마이켈의 사건은 군부통치가 자유와 인권에 대치된다는 사실

을 확인해주고 있고, 우리는 최고군사위원회가 더 이상 어떠한 지체 없이 모든 권력을 시민들에

게 이양할 것을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마이켈 나빌Maikel Nabil은 2009년 4월 페이스북에서 처음 조직된 "반-징병제"운동이라고 불리

는 단체의 일원이다. 20-30명가량의 적극적 회원을 둔 이 단체의 주요 의제는 징병제 폐지와

지원병제도로의 대체이며, 시리아에 있는 비슷한 단체와도 교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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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쟁 없 는 세 상 소 식 지 3 3 호 77

전쟁없는세상을 후원해주신 분들가람강돌강민정강성준강소연강은애강지유강진선고동주고동환

고태경고희라괭이눈구종우권순욱권인숙권혁기김경숙김명섭김미선

김미현김민경김민영김박가온김반지김범준김보미김선미김선옥김선영

김성민김세윤김송이김수용김수정김숙희김영수김영준김영환김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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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연정박남식박승호박아름박용희박정경수박조건형박준성박지선박철

박태하방강수배사은백선희백지숙보라서범석설순일송명관송병채송준

수하시와신기현신순영신유아신은재신희권아침아키오양제열여문정

여옥여은여지우염창근오정록우경환우완우성섭우지연위양자유은정

유현미유희원유희정윤민순윤종윤지환은국은종복은혜와평화교회

이계삼이덕현이비함이상길이선아이선영이선옥이선정이선화이세현

이승규이연희이영롱이용석이은주이준규이현우이희진인정환임성환

임재성임태훈장기정장대환장미희장성희장정혜장현진장희원전기화

정은정정주열정혁정현채정혜윤조명래조서연조원영조은조정의민

주관수주창언지은진진진현호진흙참새채승우최민아최지선편설란

하동기하승우한주훈햄현민홍성훈홍세은홍수봉홍수영황명규황예랑

총 수입 총 지출 이월금 총계(수입-지출+이월금)9,862,340 11,071,277 7,156,911 5,947,974

>>전쟁없는세상 재정보고 (2011년 11월 1일~ 2012년 3월 31일)

자세한 수입과 지출 내역은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 운영실 ‘재정보고’ 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후원인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Page 80: 전쟁없는세상소식지 33호(2012년 4월)

:: 전길수 : 인천구치소에 수감재판 중이던 전길수는 2월 15일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어 인천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 김영준 : 의정부교도소에서 출소의정부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김영준은 2월 29일 가석방으로 출소했습니다.

:: 홍이(홍원석) : 서울남부교도소로 이감 2011년 12월 22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홍이는 3월 9일 서울남부교도소로 이감갔습니다.

:: 최기원 : 서울구치소에 수감재판 중이던 최기원은 4월 12일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 공현(유윤종): 재판 중2011년 11월 29일이 입영일이었던 공현은 4월 25일 선고공판을 앞두고 있습니다.

:: 현재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들의 주소

안지환_ 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5호 530번 (153-600)이태준_ 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4호 2164번 (153-600)강상우_ 경기도 여주우체국 사서함 30호 1011번 (469-800)문명진_ 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5호 837번 (153-600)이준규_ 대구시 수성우체국 사서함 48호 1038번 (706-600)홍원석_ 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5호 1121번 (153-600)전길수_ 인천시 남구 남인천우체국 사서함 343호 1298번 (405-600)최기원_ 경기도 군포우체국 사서함 20호 1346번 (435-600)

서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