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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련을 이렇게 붕괴시켰다 : 로버트 게이츠 (1/4) 현재 미국방장관은 로버트 게이츠입니다. 2006년 연말(정확히는 12월 18일)에 조지고 부시는 미대통령의 단짝이었던 럼스펠드의 후임자로 취임하였습니다. 이 양반 경력이 장난이 아닙니다. 냉전시대였던 1969년에 CIA에 들어가서 30년 가까운 세월 을 CIA에서 생활하다가 CIA 국장까지 지냈고, 퇴임 이후에는 Texas A&M 대학 총장을 하면 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게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즉, 영화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권력기관 최상부에서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뭉친 무개념 정보국 장이 아닌 사람입니다. 아래의 글은 이 분이 약 10여년 전에 적은 글인데, 주간동아에서 읽은 글이라고 기억됩니다. 내용이 읽을만 해서 옛날 홈페이지에 올렸었는데, 원체 관리도 하지 않 는 홈페이지고, 글 내용은 아까워서 블로그에 옮깁니다. ※ 원제는 From the Shadow이고, 음지에서(우리는 소련을 이렇게 붕괴시켰다)는 당시 번역 제목입니다. 이미지는 원래 홈페이지에 있던 것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고, 사진은 책을 스캔한 것입니 다. Robert M. Gates, Former director of the C.I.A.(Central Intelligency Agency) 헬싱키 협약에서 인권보호를 약속한 것이 소련 붕괴의 단초가 됐다 카터의 인권정책은 소련의 급소를 강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냉전시대의 미스터리, 교황 암살기도 사건 KAL 007사건은 냉전시기 최후의 위기 쫓고 쫓기는 CIA와 KGB의 스파이 전쟁 로버트 게이츠는... 로버트 게이츠 미 중앙정보부(ClA) 부장은 1969년 CIA에 발을 들여놓은 뒤 30여 년 동안 줄 곧 권력의 핵심에서 세계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닉슨 대통령시절 백악관과 첫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키신저가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회 의 자문위원이던 74년 백악관으로 스카우트 돼 냉전시대 미국의 對蘇 정책 수립에 관여했으 며 이후 백악관 내에서도 정확하고 예리한 분석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대통령이 바뀌어도 미국의 외교정책 기조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레이건 대통령이 민주당의 카터 대통령으 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았어도 카터 대통령의 對蘇 정책은 그대로 유지됐으며 그 결과 소련이 붕괴될 수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게이츠는 또 미국의 정책이 도출되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1983년 9월 대 한항공 격추사건 때 美행정부 내에서 국무부와 CIA간의 견해차를 비교적 솔직하게 서술했다. 당시 조지 슐츠 국무장관은 CIA가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정보를 숨기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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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우리는 소련을 이렇게 붕괴시켰다 로버트 게이츠

우리는 소련을 이렇게 붕괴시켰다 : 로버트 게이츠 (1/4)

현재 미국방장관은 로버트 게이츠입니다. 2006년 연말(정확히는 12월 18일)에 조지고 부시는 미대통령의 단짝이었던 럼스펠드의 후임자로 취임하였습니다.

이 양반 경력이 장난이 아닙니다. 냉전시대였던 1969년에 CIA에 들어가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CIA에서 생활하다가 CIA 국장까지 지냈고, 퇴임 이후에는 Texas A&M 대학 총장을 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게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즉, 영화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권력기관 최상부에서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뭉친 무개념 정보국장이 아닌 사람입니다. 아래의 글은 이 분이 약 10여년 전에 적은 글인데, 주간동아에서 읽은 글이라고 기억됩니다. 내용이 읽을만 해서 옛날 홈페이지에 올렸었는데, 원체 관리도 하지 않는 홈페이지고, 글 내용은 아까워서 블로그에 옮깁니다.

※ 원제는 From the Shadow이고, 음지에서(우리는 소련을 이렇게 붕괴시켰다)는 당시 번역 제목입니다. 이미지는 원래 홈페이지에 있던 것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고, 사진은 책을 스캔한 것입니다.

Robert M. Gates, Former director of the C.I.A.(Central Intelligency Agency)

헬싱키 협약에서 인권보호를 약속한 것이 소련 붕괴의 단초가 됐다 카터의 인권정책은 소련의 급소를 강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냉전시대의 미스터리, 교황 암살기도 사건 KAL 007사건은 냉전시기 최후의 위기 쫓고 쫓기는 CIA와 KGB의 스파이 전쟁

로버트 게이츠는...

로버트 게이츠 미 중앙정보부(ClA) 부장은 1969년 CIA에 발을 들여놓은 뒤 30여 년 동안 줄곧 권력의 핵심에서 세계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그는 닉슨 대통령시절 백악관과 첫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키신저가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회의 자문위원이던 74년 백악관으로 스카우트 돼 냉전시대 미국의 對蘇 정책 수립에 관여했으며 이후 백악관 내에서도 정확하고 예리한 분석가로서 명성을 날렸다.그는 이 책을 통해 대통령이 바뀌어도 미국의 외교정책 기조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레이건 대통령이 민주당의 카터 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았어도 카터 대통령의 對蘇 정책은 그대로 유지됐으며 그 결과 소련이 붕괴될 수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게이츠는 또 미국의 정책이 도출되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1983년 9월 대한항공 격추사건 때 美행정부 내에서 국무부와 CIA간의 견해차를 비교적 솔직하게 서술했다. 당시 조지 슐츠 국무장관은 CIA가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정보를 숨기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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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했었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 흥미롭다.이밖에도 게이츠는 이 책을 통해 교황과 크레믈린간의 비밀 접촉. CIA 부장과 KGB 의장의 비밀 회담. CIA와 KGB간에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스파이전을 자세하게 다루었다.美캔사스 州 출신인 게이츠는 인디애나大를 졸업하고 미공군에 입대, 군복무를 마친 뒤 ClA에 들어가 근무했고 1991년 11월부터 1993년 1월까지 CIA 부장을 지냈다.

제 1 부 : CIA의 위기 

대통령 6명 모셔

나는 린든 존슨부터 조지 부시까지 6명의 대통령을 모셨고 8명의 ClA 부장이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조지 부시 등 4명의 대통령 밑에서는 국가안보회의(NSC) 참모로 활동했다.

레이건 행정부 들어서는 CIA 차장을 지냈고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는 국가안보회의 부의장과 CIA 부장올 역임했다. 1969년 ClA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20여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세계 역사를 만들어내는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CIA는 대통령의 오른팔 역할을 했고 대통령 없이는 아무 힘도 쓸 수 없었다. 의회나 행정부의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CIA는 닉슨 대통령이 궁지에 몰리자 마찬가지 신세가 됐다. 닉슨의 약점이 CIA의 약점으로 나타났다. 닉슨이 보호해주지 못하고 포드가 보호해줄 수 없는 CIA는 발가벗겨졌다.

그전에도 ClA는 쿠바 침공 때 실수를 했다. 그러나 번번이 대통령이 막아줬다. 하지만 1973년 초 워터게이트 사건이 한창 진행중이고 베트남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렴 ClA는 비판적인 추적기사, 호전적인 의회, CIA를 싫어했던 대통령 등을 상대해야 했다.

 시련의 시작

시련은 1973년 초부터 닥쳤다. 前 CIA 요원이 CIA 장비를 이용, 한 정신과 의사의 사무실에 침입해 서류를 훔쳐간 게 신문에 나면서부터였다. 국방부 기밀을 언론에 흘렸던 데이비 엘스버그의 정신과 의사였다는 게 드러나면서 문제는 커졌다.

슐레진저와 월리엄 콜비 부장은 5월 9일 모든 현직 CIA 요원에게 과거 CIA의 탈법 또는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 아는 대로 진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죽을 쑨' 경우까지 포함해 693쪽이 나왔다. 나중에 이는 CIA의 가보(家寶)로 불렸다.

콜비 부장에 따르면 그 가보에는 '혼란 작전'이 포함돼 있었다. '혼란 작전'이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인물에 대한 미행, 정부 취재원을 캐내기 위한 언론인 미행, 워터게이트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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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파일 작성, 극비 의약품 실험, 카스트로 등에 대한 암살계획 등을 말한다. 그같은 내부 명령을 내리자마자 슐레진저는 국방장관으로 영전하고 콜비가 부장직을 승계했다.

콜비 부장에 대한 의회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의회는 '家寶'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러다 1974년 12월 18일 뉴욕타임스의 소이머 허쉬 기자가 콜비에게 전화를 걸어 '흔란 작전'에 대해 기사를 쓰겠다고 통보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콜비가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이 사실은 12월 22일 뉴욕타임스 1면 머릿기사로 보도됐고 정가를 강타했다. 1975년 1월 15일 '家寶'에 대한 청문회가 개최됐다. 청문회 기록이 공개되자 또 한차례 난리가 났다. 공개되지 않은 CIA의 탈법적 행태가 더 있다고들 생각한 것이었다.

결국 美상원은 정보수집과 관련된 정부 부처를 조사하는 위원회를 설치했고 프랭크 처치 상원의원을 위원장에 임명했다. 때마침 CBS 텔레비전의 저녁뉴스 시간에 방송된 CIA의 암살계획 프로그램으로 온 나라는 CIA 히스테리에 휩싸이게 된다.

1975년은 CIA 창설 이래 최악의 해였다. 베트남이 무너졌고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았다. 포르투갈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앙골라에서는 내전이 터졌다. 이밖에도 군축협상, 터키 문제 등이 계속 터지는데도 고위 관계자들은 연일 청문회에 불려다니며 조사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콜비 부장도 일주일에 수차례씩 의회를 오가며 증언해야 했다.

조사가 마무리될 무렵 CIA에 관한 것 중 스파이 요원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공개되지 않은 게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위원회의 조사 결과 'CIA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적법하게 움직였다'는 면죄부가 주어졌으나 이미지에는 큰 타격을 입었다.

언론에서는 CIA와 관련된 일이라면 확인도 없이 무조건 톱뉴스가 됐고 정치인들의 안주감이 됐다. 75년 12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리처드 월치 CIA 지국장의 암살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소련이 아직도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CIA의 필요성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ClA는 대통령의 오른팔이었고 대통령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의회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면 ClA의 행동반경도 함께 축소된다. 따라서 1975년 이후 언제부턴가 CIA는 대통령과 의회의 중간쯤에서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따르되 의회의 허락 없이는 잘 안 움직이는 조직으로 변모한 것이다. CIA 고위 관계자들은 이후부터 모양새는 이상하지만 대통령과 의회, 두 상관을 모시는 것을 당연시했다.

2007년 12월 13일 목요일우리는 소련을 이렇게 붕괴시켰다 : 로버트 게이츠 (1/4) 현재 미국방장관은 로버트 게이츠입니다. 2006년 연말(정확히는 12월 18일)에 조지고 부시는 미대통령의 단짝이었던 럼스펠드의 후임자로 취임하였습니다.

이 양반 경력이 장난이 아닙니다. 냉전시대였던 1969년에 CIA에 들어가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CIA에서 생활하다가 CIA 국장까지 지냈고, 퇴임 이후에는 Texas A&M 대학 총장을 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게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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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영화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권력기관 최상부에서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뭉친 무개념 정보국장이 아닌 사람입니다. 아래의 글은 이 분이 약 10여년 전에 적은 글인데, 주간동아에서 읽은 글이라고 기억됩니다. 내용이 읽을만 해서 옛날 홈페이지에 올렸었는데, 원체 관리도 하지 않는 홈페이지고, 글 내용은 아까워서 블로그에 옮깁니다.

※ 원제는 From the Shadow이고, 음지에서(우리는 소련을 이렇게 붕괴시켰다)는 당시 번역 제목입니다. 이미지는 원래 홈페이지에 있던 것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고, 사진은 책을 스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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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M. Gates, Former director of the C.I.A.(Central Intelligency Agency)

헬싱키 협약에서 인권보호를 약속한 것이 소련 붕괴의 단초가 됐다 카터의 인권정책은 소련의 급소를 강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냉전시대의 미스터리, 교황 암살기도 사건 KAL 007사건은 냉전시기 최후의 위기 쫓고 쫓기는 CIA와 KGB의 스파이 전쟁

로버트 게이츠는...

미 버지니아주 랭글리의 CIA본부, 백악관에서 13Km 거리다로버트 게이츠 미 중앙정보부(ClA) 부장은 1969년 CIA에 발을 들여놓은 뒤 30여 년 동안 줄곧 권력의 핵심에서 세계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그는 닉슨 대통령시절 백악관과 첫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키신저가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회의 자문위원이던 74년 백악관으로 스카우트 돼 냉전시대 미국의 對蘇 정책 수립에 관여했으며 이후 백악관 내에서도 정확하고 예리한 분석가로서 명성을 날렸다.그는 이 책을 통해 대통령이 바뀌어도 미국의 외교정책 기조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레이건 대통령이 민주당의 카터 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았어도 카터 대통령의 對蘇 정책은 그대로 유지됐으며 그 결과 소련이 붕괴될 수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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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츠는 또 미국의 정책이 도출되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1983년 9월 대한항공 격추사건 때 美행정부 내에서 국무부와 CIA간의 견해차를 비교적 솔직하게 서술했다. 당시 조지 슐츠 국무장관은 CIA가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정보를 숨기고 있다고 의심했었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 흥미롭다.이밖에도 게이츠는 이 책을 통해 교황과 크레믈린간의 비밀 접촉. CIA 부장과 KGB 의장의 비밀 회담. CIA와 KGB간에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스파이전을 자세하게 다루었다.美캔사스 州 출신인 게이츠는 인디애나大를 졸업하고 미공군에 입대, 군복무를 마친 뒤 ClA에 들어가 근무했고 1991년 11월부터 1993년 1월까지 CIA 부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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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 CIA의 위기 

대통령 6명 모셔

나는 린든 존슨부터 조지 부시까지 6명의 대통령을 모셨고 8명의 ClA 부장이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조지 부시 등 4명의 대통령 밑에서는 국가안보회의(NSC) 참모로 활동했다.

레이건 행정부 들어서는 CIA 차장을 지냈고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는 국가안보회의 부의장과 CIA 부장올 역임했다. 1969년 ClA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20여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세계 역사를 만들어내는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CIA는 대통령의 오른팔 역할을 했고 대통령 없이는 아무 힘도 쓸 수 없었다. 의회나 행정부의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CIA는 닉슨 대통령이 궁지에 몰리자 마찬가지 신세가 됐다. 닉슨의 약점이 CIA의 약점으로 나타났다. 닉슨이 보호해주지 못하고 포드가 보호해줄 수 없는 CIA는 발가벗겨졌다.

그전에도 ClA는 쿠바 침공 때 실수를 했다. 그러나 번번이 대통령이 막아줬다. 하지만 1973년 초 워터게이트 사건이 한창 진행중이고 베트남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렴 ClA는 비판적인 추적기사, 호전적인 의회, CIA를 싫어했던 대통령 등을 상대해야 했다.

 시련의 시작

Page 6: 우리는 소련을 이렇게 붕괴시켰다 로버트 게이츠

시련은 1973년 초부터 닥쳤다. 前 CIA 요원이 CIA 장비를 이용, 한 정신과 의사의 사무실에 침입해 서류를 훔쳐간 게 신문에 나면서부터였다. 국방부 기밀을 언론에 흘렸던 데이비 엘스버그의 정신과 의사였다는 게 드러나면서 문제는 커졌다.

슐레진저와 월리엄 콜비 부장은 5월 9일 모든 현직 CIA 요원에게 과거 CIA의 탈법 또는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 아는 대로 진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죽을 쑨' 경우까지 포함해 693쪽이 나왔다. 나중에 이는 CIA의 가보(家寶)로 불렸다.

콜비 부장에 따르면 그 가보에는 '혼란 작전'이 포함돼 있었다. '혼란 작전'이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인물에 대한 미행, 정부 취재원을 캐내기 위한 언론인 미행, 워터게이트 관련자 파일 작성, 극비 의약품 실험, 카스트로 등에 대한 암살계획 등을 말한다. 그같은 내부 명령을 내리자마자 슐레진저는 국방장관으로 영전하고 콜비가 부장직을 승계했다.

콜비 부장에 대한 의회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의회는 '家寶'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러다 1974년 12월 18일 뉴욕타임스의 소이머 허쉬 기자가 콜비에게 전화를 걸어 '흔란 작전'에 대해 기사를 쓰겠다고 통보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콜비가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이 사실은 12월 22일 뉴욕타임스 1면 머릿기사로 보도됐고 정가를 강타했다. 1975년 1월 15일 '家寶'에 대한 청문회가 개최됐다. 청문회 기록이 공개되자 또 한차례 난리가 났다. 공개되지 않은 CIA의 탈법적 행태가 더 있다고들 생각한 것이었다.

결국 美상원은 정보수집과 관련된 정부 부처를 조사하는 위원회를 설치했고 프랭크 처치 상원의원을 위원장에 임명했다. 때마침 CBS 텔레비전의 저녁뉴스 시간에 방송된 CIA의 암살계획 프로그램으로 온 나라는 CIA 히스테리에 휩싸이게 된다.

1975년은 CIA 창설 이래 최악의 해였다. 베트남이 무너졌고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았다. 포르투갈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앙골라에서는 내전이 터졌다. 이밖에도 군축협상, 터키 문제 등이 계속 터지는데도 고위 관계자들은 연일 청문회에 불려다니며 조사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콜비 부장도 일주일에 수차례씩 의회를 오가며 증언해야 했다.

조사가 마무리될 무렵 CIA에 관한 것 중 스파이 요원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공개되지 않은 게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위원회의 조사 결과 'CIA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적법하게 움직였다'는 면죄부가 주어졌으나 이미지에는 큰 타격을 입었다.

언론에서는 CIA와 관련된 일이라면 확인도 없이 무조건 톱뉴스가 됐고 정치인들의 안주감이 됐다. 75년 12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리처드 월치 CIA 지국장의 암살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소련이 아직도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CIA의 필요성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ClA는 대통령의 오른팔이었고 대통령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의회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면 ClA의 행동반경도 함께 축소된다. 따라서 1975년 이후 언제부턴가 CIA는 대통령과 의회의 중간쯤에서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따르되 의회의 허락 없이는 잘 안 움직이는 조직으로 변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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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고위 관계자들은 이후부터 모양새는 이상하지만 대통령과 의회, 두 상관을 모시는 것을 당연시했다.

 77년 백악관 지하 사무실로

나는 1976년 대통령 선거 이후 국가안보회의(NSC)에서 ClA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우선 지미 카터 당선자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새로운 진용이 갖춰질 것이고 기존 멤버들은 당연히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남이 떠밀어내기 전에 내가 스스로 떠나고 싶었다. 나는 3년 동안의 백악관 생활을 마치고 다시 ClA 로 돌아와 적응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데이비드 아론 NSC 부의장이 1977년 5월 5일 NSC로 다시 돌아오겠느냐는 제의를 했을 때 선선히 수락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브레진스키 NSC 의장과 아론 부의장은 취임과 동시에 NSC 운영 메커니즘을 알 만한 사람은 모두 해고해버려 일을 할 수 없다면서 불평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다음날 아론을 만났고 브레진스키와 잠시 대화를 나눈 뒤 나는 다시 백악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스텐스필드 터너 신임 CIA 부장이 반대했다.

브레진스키가 ClA를 제치고 대통령에게 직접 정보보고를 하는데 내가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같은 오해는 플렸고 나는 5월 23일 백악관 지하 사무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3명의 대통령 밑에서 4개의 사무실을 돌아가면서 사용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브레진스키와 아론에 대해 호감이 갔다. 두 사람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일하기에는 편했다. 브레진스키는 특히 비서, 경호원, 청소부 등 하급 직원들에 대해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일과 관계 없는 사람들에게 그는 신사였지만 일과 관련이 있는 한은 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터너 신임 ClA 부장은 브레진스키가 오전 6시 30분에 정보보고를 을린다는 대통령의 시간계획을 보고 발끈했다. 터너 국장은 대통령에 대한 정보 보고는 당연히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브래진스키는 터너의 요구가 당연하다고 옹수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대통령의 스케줄에 명시했던 6시 30분 보고를 '국가안보 브리핑'으로 고쳤다. 터너 부장이 낄 틈을 원천적으로 없애버린 것이다. 머리 좋은 독서광 카터

브레진스키는 매사 깔끔했고 정확했다. 그는 학자 시절 소련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고 전략적 접근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소련에 관한한 실용주의자였다. 평생 교수였던 그는 토론하기를 좋아했고 마치 테니스 게임에서 이기듯이 상대방을 이겨야 했다. 때론 이같은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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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 때문에 잘못 판단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민감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와 토론하기보다는 보고서를 만들어 을렸다. 보고서를 받아든 그는 토론할 때보다는 훨씬 더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가 카터 대통령의 안보팀에서 가장 실용주의적이고 객관적 판단 능력을 지닌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브레진스키가 키신저 前 국무장관과 라이벌 관계라고 하지만 나는 한번도 그런 사실을 느낄 수 없었다.

브레진스키와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간의 관계도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정기적으로 테니스를 치는 등 매우 원만한 편이었다. 소련에 대해서도 둘은 많은 부분에서 의견 일치를 보았다. 당연히 개인적인 감정도 좋았다. 하지만 권력과 야망과 영향력이라는 세속적인 문제 때문에 둘 사이는 달라 보였다. 특히 소련에 대한 접근법을 놓고 둘 사이에는 깊은 철학적 차이가 있었다.

밴스는 전략군축협상(SALT)이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브래진스키가 소련과의 마찰을 일으켜 모든 일을 그르치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 브레진스키는 군축협상은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입장이었다. 충돌해야 할 때는 충돌하고 대화할 때는 대화를 한다는 게 브레진스키의 생각이었다.

아론(NSC 부의장)은 브레진스키와는 판이한 사람이었다. 서류 정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같았고 또 그만큼 서류를 싫어했다. 성격도 불같았고 입이 험했다. 하루는 하도 욕을 해대니까 먼데일 부통령이 그의 사무실까지 와서 문을 쾅하고 닫아버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1년 비엔나에서였다. 키신저 NSC 의장과 함께 군축협상 대표로 참가할 때였다. 그는 복잡한 일을 단숨에 간단하게 요약하는 능력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소련에 대해서만큼은 강경파였다. 2년 반 동안 백악관에 있으면서 두 사람이 의견 충돌을 보인 때는 소모사 정권 말기 니카라과에 대해서 뿐이었다.

카터에 대해서는 잘 파악이 안됐다. 아마 IQ만으로 따진다면 카터를 따를 대통령이 없을 것이다. 그는 닉슨처럼 유머감각도 없었고 백악관 참모들에게도 매우 냉정했다. 카터 대통령은 의사 결정을 내릴 때마다 기본 사실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정들은 이상하게도 전체적으로는 정치적 알맹이도 없고 방향감각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1979년 카터 대통령과 인사를 하는 게이츠. 우측에 브레진스키가 보임. 그는 독서광이다. 브레진스키는 대통령에게 두꺼운 보고서를 들이밀면서도 늘 앞의 두서너 장만 보면 된다고 일렀지만 카터는 보고서 맨 끝부분의 오탈자까지 지적해낼 정도였다. 우리는 때로 그를 '미국 최고의 문법학자'라고 표현했다. 그 는 ClA의 '대통령 일일 보고서'에 부인 로잘린 여사의 이름 철자가 틀렸다는 것까지 지적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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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닉슨 대통령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그가 소련과 동반자 관계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혔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닉슨의 이런 정책이 소련 집권충에 대한 정통성을 국내외에 보여준다고 믿었다.

둘째, 닉슨과 키신저는 소련의 국내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당시 소련 외무장관이었던 그로미코는 "두 국가간의 사회구조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대화가 꼬인 적이 없었다"면서 "닉슨은 이론에서 벗어나 늘 실용적인 측면에서 대화하기를 즐겼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닉슨이 떠나고 나면서 미국의 정책은 바뀌기 시작했다.제 2 부 : 인권정책으로 촉발된 소련의 몰락 

소련 멸망은 헬싱키서 시작

소련은 유럽국가들로부터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 소련이 참여할 수 있도록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베를린 사태를 진전시킬 뿐만 아니라 인권문제가 담긴 헬싱키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선언문 3장에는 사람과 사고(思考)의 '자유통행'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는 순전히 유럽 국가들이 집어넣은 문구였다. CSCE 회의는 전후 미국과 소련이 유럽을 양분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1975년 포드 대통령은 헬싱키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헨리 잭슨 상원의원 등 보수파 인사들은 한결같이포드 대통령에게 불참할 것을 종용했다. 뉴욕 타임스 등 유수언론들도 사설을 통해 헬싱키 방문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포드의 측근들은 키신저가 대통령을 잘못 보좌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소련 제국의 쇠락은 바로 이 헬싱키 협약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빌 하이랜드 역시 "소련의 멸망은 헬싱키에서 시작됐다"고 단언했다. 바로 CSCE 회원국들이 소련 공산통치에 저항하는 불씨를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동구권 및 소련 내에서도 개혁을 표방하는 비정부 단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저항의 불씨는 몇개월 후 폴란드에서 폭발했고 결국 소련의 몰락을 가져왔다. CSCE의 인권문제로 제일 먼저 영향을 받은 나라는 폴란드였다. 레흐 바웬사는 1976년은 개혁에 불을 당긴 해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헬싱키 협약에 따라 '인권보호운동' 같은 단체들이 폴란드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 노동단체들도 영향을 받았다. 동독에서도 헬싱키 협약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CIA보고에 따르면 동독의 호네커 서기장이 국내 안정을 위해 보다 더 강력한 탄압정책을 펴야 한다고 소련에 밝혔다는 것이다. 특히 동독 반정부 인사들의 메시지가 서방언론에 집중 보도되고 있고 발언 내용이 동독 내로 파고 들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호네커는 또 헬싱키 협약에 자극받은 동독인들의 서독 이민 신청이 급증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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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의 헬싱키 방문

소련이 헬싱키 협약에서 인권보호를 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선 것은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적으로 크나큰 실수였다. 헬싱키 협약은 동구 유럽뿐만 아니라 소련 국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유태인과 지식인에서부터 소수민족과 기독교도 등까지도 들고 일어났다. 소련은 헬싱키 협약에 동의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이 자유를 누리도록 정당성을 부여하고 만 것이었다. CIA는 1977년 2월 18일 카터 신임 행정부측에 왜 소련이 인권 문제에 대해 민감한가에 대해 브리핑했다. 이 보고서에서 '소련은 서방국가들이 소련 등 동구 공산국가들의 인권문제를 부추겨 질서파괴를 꾀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쓰여져 있다. 포드의 헬싱키 방문은 협약에 도장을 찍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실수나 우연이 아니라 포드의 치밀한 계산에 따라 헬싱키 방문은 이루어졌다. 당시 포드의 헬싱키 방문을 비난했던 측근 인사, 언론인, 동구 유럽국의 후손들은 사태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련은 CSCE 참여를 간절히 바랐고 또 얻어냈다. 그러나 멸망의 덫에 스스로 빠진 것이었다. 포드는 정치적으로 큰 대가를 치르면서도 헬싱키에 참석했다. 낙선의 한 요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훗날 CSCE가 엄청난 국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카터는 대통령 유세 때부터 닉슨-포드-키신저의 현실주의 국제정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이들의 현실주의 정치는 중요한 원칙을 어겼다고 보았다. 카터는 인권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군축협상을 이끌어낼 것으로 믿었다. 1977년 2월 1일 카터가 도브리닌 소련 대사를 만났을 때도 "소련의 국내문제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대신 헬싱키 협약 등 지금까지 맺은 협약을 철저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소련이 헬싱키 협약에 서명한 것은 두 나라간에 인권문제를 의제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2월 중순 안드러이 사하로프 박사가 카터에게 자신의 역경을 기술한 편지를 띄웠다. 밴스, 브레진스키와 의논한 카터는 사하로 프에게 답장을 보냈다. 소련에서의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하로프의 노고에 깊온 사의를 표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련은 2월 말 카터가 사하로프에게 편지를 보낸 데 대해 불쾌한 감정을 나타냈다. 헬싱키 협약의 영향을 간파한 소련은 이 무렵 국내 반체제 인사에 대한 검거에 나섰다. 헬싱키 위치 그룹의 창립자인 유리 오르로프, 알렉산더 긴즈버그, 아나톨리 사란스키 등이 구속됐다. ClA는 헝가리 지도부로부터 소련 지도충이 반체제 인사들을 몹시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헝가리측에 따르면 소련 정권의 전복을 위해 미국이 의도적으로 인권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소련 지도층은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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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정책, 소련 정권에 흠집 내

인권 신장 정책 및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원조, 그리고 민족감정을 부추기는 정책은 소련 정권의 정통성에 큰 흠집을 냈다. 특히 취임 직후 브레진스키는 카터의 동의 아래 소련 정권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대대적인 정책을 수립했다. 카터는 소련 내에서 선전활동을 강화시키자는 브레진스 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ClA 및 행정부의 반대와 오랜 관료주의로 인해 정책이 실행에 옮겨지는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지금까지 동서 대결의 장이 동구유럽이나 소련 국내였던 적은 단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이념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정책이 마련됐다. 첫째, 반체재 인사들의 글이 널리 배포되도록 비밀 조직을 활성화시키자는 것. 둘째, 동구 유럽국 반체제 인사들이 책을 출판할 수 있도록 자금올 지원하자는 것. 셋째, 우크라이나에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책자들을 반입하고, 넷째, 서구 유럽에서 소련의 인권문제를 감시하는 단체에 대해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국무부와 국방부는 마지막 두 가지 방법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서구유럽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다 적발되면 곤란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이같은 정책은 그해 10월이 지나서도 서류로만 맴돌았다. 국무부와 ClA는 내부적으로 소련 국내에서의 비밀 활동에 대해 말이 많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ClA는 소련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이나 접촉은 유지하지 않고 있었다. 서방에서 출판된 반체제인사들의 글을 다시 소련으로 반입하는 작업은 계속했지만 소련 KGB가 반체제 인사들을 엄중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험 부담은 매우 컸다.

민족주의 문제를 부추기자는 제안에 대해 국무부는 비관적이었다. 예를 들어 중앙 아시아 소수 민족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레진스키는 민족문제를 부추기는 데 매우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국무부로 하여금 소련 내의 소수민족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한다을 대안을 제시했다. 1978년 6월 20일이었다. 국무부는 보고서를 통해 미국은 소련 소수민족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소련 소수 민족에 대한 정보 수집을 확대시키자고 역으로 제안했다. 특히 문제의 소수 민족에 대해서는 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거슬러 을라가야 한다고 밝혔다. 전형적인 국무부의 물귀신 작전이었다. 국무부는 소련의 민족문제에 대해 내부적으로 두가지 이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고 밝혔다. 우선 민족주의 문제는 소련의 국가 경제를 좀먹고 군사력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의 분할을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없는 국가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같은 현상은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권장할 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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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견해는 소련 정권이 내부적으로 민족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으며 이릴 경우 외부에서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브레진스키. 민족문제 정책화

국무부는 이밖에도 몇가지 문제를 추가로 제기했다. 민족문제는 소련뿐만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일부 동구 유럽 국가에서도 큰 골칫거리라는 것이다. 민족문제는 늘 폭력이 뒤따른다는 점을 국무부는 지적했다. 국무부는 또 해외에서의 민족문제가 미국 국내에 끼치는 영향에도 신경을 썼다. 이같은 국무부의 입장이 CIA 내부에서도 꽤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소련 내 민족문제를 부추기자는 비밀 공작은 카터 행정부 내내 탁상공론에 머물렀다. 결과론적으로는 소련 내 소수민족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그같은 비밀 공작은 필요없었던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브레진스키는 카터의 신임 아래 소련 내에서 민족문제를 부추겨 소련을 궁지에 몰아넣는 정책을 입안했다. 국무부와 CIA가 의도적으로 브레진스키의 발목을 잡았지만 동구 유럽 및 소련내 반체제 인사들에게 유입되는 반체제 서적들의 양은 늘어만 갔다.

브레진스키는 또 '미국의 소리' 라디오 방송을 통해 보다 광범위하게 소련 내 반체제 인사들에게 소식이 전달되도록 했다. 카터 대통령은 1977년 3월 22일 의회를 설득, 라디오 송신 장비 예산을 받아냈다. 브레진스키는 소련의 전파 방해를 극복할 수 있는 250Kw짜리 송신기 16개를 받아냈다. 라디오는 매우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망명 소련 반체제 인사였던 아드레이 아말리크는 1977년 "수백만 소련 시민들에게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라디오가 유일한 정보였다"면서 "반체제 인사들이 정보를 교환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고 밝힌적이 있었다" 브레진스키는 훗날 회고록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것은 정치적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헬싱키 협약 이후 인권 감시기구의 등장과 소련 반체제 인사들의 활성화로 인해 서방 언론은 이들 반체제 인사들의 글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면 미국 라디오 방송은 보도 내용을 다시 소련 내부로 방송했고 CIA는 대서특필된 글을 소련 내부로 비밀리에 반입, 반체제 인사들에게 배포했다. 서방국가로부터 반입되는 정보는 소련 국내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카터의 선전선동 정책과 비밀 공작은 소련 제국의 멸망을 촉진시켰다. 카터의 이념 전쟁은 후임자들에 의해 지속됐다. 카터는 사실 냉전의 기본 법칙을 바꾸어 놓았다. 카터는 트루먼 대통령 이후 처음으로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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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통해 소련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 시비를 걸었던 대통령이다. 소련이 가장 싫어했던 대통령이 카터가 아니었던가 싶다.

카터는 소련이 가장 싫어한 美대통령

카터의 인권정책이 미국내에서는 나약한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훗날 소련 반체제 인사들은 한결같이 카터의 인권정책을 높이 평가했으며 바로 그 같은 인권정책으로 민주투사들이 힘을 얻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카터의 정책은 동구유럽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인권 감시 기구들에게도 한가닥 희망이었다. 카터의 업적은 반체제 인사들이 서방국가로 탈출하면서 새삼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그 당시에는 재선 실패와 함께 묻혀지고 말았다. 헬싱키 협약과 카터의 인권정책, 그리고 카롤 보이틸라 추기경의 교황선출이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처음 두 가지는 보수파들 때문에 인정받지 못했다. 폴란드인이 교황에 선출된 게 폴란드와 소련을 바꾸어 놓으리라고 생각한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월터 리프먼은 "자기가 심은 나무의 그늘에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말했다. 포드와 카터는 인권문제를 통해 거대한 감옥이었던 소련을 무너뜨렸다. 1975년과 1978년 사이 이들은 소련을 파멸시키는 독버섯을 심어놓았던 것이다. 1975년부터 1978년사이 크레믈린은 아나톨리 사란스키를 CIA 첩자라며 구속하는 등 반체제 인사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크레믈린은 또 반체제 인사들의 글을 받아 서방 언론에 대서특필하는 미국 기자를 표적으로 삼았다. 1978년 6월 13일 KGB는 데이비 쉽플러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지국장에게 미끼를 던졌다. 소련 당국은 쉽플러에게 분실된 우편배달물이 있으니 인근 군부대에서 찾아가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낌새가 수상하다고 여긴 쉽플러는 군부대에 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KGB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27일 소련 당국은 볼티모어 선紙의 해롤드 파이퍼 기자와 뉴욕타임스 의 크랙 휘트니 기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다. KGB가 반체제 인사들을 구속하기 시작한 5월 17일 브레진스키는 스탠스필드 터너 CIA 부장을 통해 美 연방수사국(FBI)이 KGB 간부 요원 세 명을 구속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FBI는 이들 3명중 한 명에게만 외교면책권을 부여해 추방하고 나머지 두 명은 구속할 방침이었다. 5월20일 FBI는 발딕 엥게르와 루돌프 체르나예프를 간첩혐의로 체포했다. 이들은 FBI의 함정수사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이들은 FBI의 통제를 받고 있던 美 해군 장교가 군사기밀을 팔겠다고 접근하자 선뜻 받아들였다. 연방법원은 이들에게 각각 2백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걸었다. 지금까지 소련 간첩에게 내려진 최고 보석금은 1963년 50만 달러였으나 이마저 나중에는 10만 달러로 낮아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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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후 美 전문가들은 모스크바 주재 美대사관에 최첨단 도청장치가 설치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같은 날 소련 당국은 워싱턴 대사관을 통해 엥게르와 체르나예프의 구속에 대한 두 번째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화가 난 KGB

한편 소련 당국의 뻔뻔스러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 대사관측은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이 대사관 이웃집에 무단 침입했다면서 항의서한올 들이댔다. 美 통신 전문가들은 도청장치를 따라가다 이웃집에서 도청시스팀을 발견했던 것인데 소련은 오히려 적반하장이었다. 그러면서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미국측 도청장치가 발견됐어도 언론에 흘리지 않았으니 비숫한 조치를 취해주기 바란다는 요지를 덧붙였다. 그러나 1주일 뒤 소련의 美대사관 도청 사실은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KGB는 5월 말 모든 요원들에게 미국에 의한 KGB 간부 요원 3명의 구속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KGB의 지령은 모스크바 지국에도 떨어졌다. 협박과 명예 훼손을 통해 미국 시민을 괴롭히라는 것이었다. KGB가 단단히 화가 났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6월 9일 도브리닌 대사는 밴스와 회동해 보석금을 내리지 않으면 대대적인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이 법칙을 어겼다면서 만약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라면 반드시 맛을 보여주겠다고 공언했다. 3일 후 KGB는 약속대로 했다. 제이 크로포드라는 미국 사업가를 불법 환전한 혐의로 전격 구속해버렸다. 다음날 美 대사관은 이즈베스티야紙가 모스크바에서 미국의 스파이 활동을 보도한 데 대해 항의했다. 6월17일 도브리닌은 두 나라간에 찬바람이 불자 소환당했다. 소련은 7월 7일카터 대통령이 해군사관학교에서 한 연설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는 소련측에 "헙력 아니면 싸움을 택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소련은 카터 대통령이 브레진스키의 배후에서 反소련 무드를 조성한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특히 브레진스키가 중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터의 발언이 튀어나왔기 때문에 소련은 미국이 중국과 손잡고 소련을 따돌리려고 한다는 의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냉랭한 여름이 계속됐다.

스파이와 반체제 인사를 교환

6월 22일과 26일 사이에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이 벌어졌다. 밴스는 도브리닌을 만나 두 간첩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샤란스키 등 소련 반체제 인사들과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물론 소련 간첩을 소련 반체제 인사들과 교환하기는 처음이었다. 유리 안드로포프 KGB 의장이 7월 29일 외무성의 게오르기코르니옌코를 만난다는 사실이 CIA의 안테나에 포착됐다. 안드로포프는 인권문제가 내정간섭이라며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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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그는 스파이와 반체제 인사의 교환 협상 자체를 꺼렸다. 그 는 서방국가들의 요구를 한번 들어주기 시작하면 계속 악순환이 재연될것이라고 믿었다. 협상은 진전될 기미가 없었다. 그러자 브레진스키는 11월 8일 터너 부장과 함께 도브리닌이 언급했던 '행동 윤리 규범'에 대해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브레진스키는 양측 모두 외교관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만 첩보 활동을 허용한다는 생각을 해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ClA 내부에서는 반대 여론이 높았다. 한 베테랑 CIA 요원은 "잡히면 끝장인 줄 알았고 혹 잡히더라도 더 많은 정보를 실토하기 전에 그저 빨리 처형되기만을 바라는 게 순리였다"면서 "만약 행동 윤리 규범이 제정된다면 요원들은 잡히더라도 변호사부터 찾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질질 끌던 협상은 소련측이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1979년 4월 27일 소련 반체제 인사 5명이 뉴욕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동시에 엥게르와 체르나예프 역시 모스크바로 향했다. 엥게르와 체르나예프의 구속에서부터 반체제 인사들과 교환하기까지 근 1년이 소비됐다. 이미 냉랭했던 美蘇간의 관계는 이 기간 동안 더욱 악화됐다. 미국은 비록 샤란스키를 빼내오지는 못했지만 소련측에 충분한 메시지는 전달했다. CIA는 스파이 활동을 해준 첩자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ClA의 첩자였던 오고로드니크라는 스파이가 거의 처형될 뻔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또 사드린이라는 CIA 첩자는 비엔나에서 KGB에 의해 납치됐다가 죽음을 맞았다는 소식도 들었다. 사드린은 비엔나에서 KGB에 의해 납치돼 트렁크에 넣어졌다가 트렁크에서 숨이 막혀 죽었거나 마취제 급성 중독으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1978년 한 해는 양측 스파이 조직이 얼마나 양국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해였다. 그리고 또 소련은 美蘇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희생하고서라도 반체제 인사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정권 유지 차원에서…

소련경제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했던 서방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는 미국 정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국민은 정부를 불신했고 의회는 행정부를 못믿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제사정도 신통치 않았다. 카터가 대통령이 됐을 때 6%이던 인플레율은 4년 뒤 20%를 상회했고 경제 성장률은 저조했다. 70년대 말 경기 침체로 인해 국민들의 불만은 날로 고조됐고 대부분의 서구 민주주의 국가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반적인 경기침체는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쳐졌고 국민들의 불신은 날로 더해만 갔다. 소련의 국력이 날로 팽창하고 있을 때 이에 대적하는 카터, 대처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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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헬무트 슈미트 독일 총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 등 서구 지도자들의 손발은 제각각 놀았다. 유럽은 미국의 지도력을 기대했으나 카터로부터 그런 지도력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70년대 말 서방 국가들은 소련 내부의 문제에 대해 눈돌릴 틈이 없었다. 소련이 경제적으로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는 정도는 대부분 알고 있었다. 닉슨의 對蘇 정책 기조는 소련이 서방국가들의 경제적 지원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미국 지도자들은 소련의 심각한 경제난을 미국의 잣대로 평가했다. 1, 2차 석유파동 등으로 정신 못차리던 서방 지도자들은 소련의 구조적이고 내부 모순에 찬 경제 체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CIA는 이미 1950년대부터 소련 경제 구조의 문제점에 대해 분석 자료를 내놓았다. CIA는 또 70년대부터 소련의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생필품 부족 등에 따른 국민들의 불만사항, 희미해지는 이념 사상, 민족 분규 등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ClA는 1979년 8월 소련 소비자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으며 소련 정권은 80년대부터 심각한 경제 문제와 정치적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터너 부장 역시 1980년 "소련은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주고있다"면서 "브레즈네프의 지도력에도 한계가 올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소련과 그 추종 세력들은 마치 전세계를 집어 삼킬 것처럼 덤벼들었다. 베트남, 앙골라, 에티오피아, 모잠비크, 예멘, 리비아, 캄보디아, 니카라과, 그라나다, 쿠바, 아프가니스탄 등… 소련은 이들 국가들이 나중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리라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나는 역사가들과 정치인들이 소련의 붕괴와 냉전 종식에 있어서 지미 카터의 역할을 너무 과소평가했다고 본다. 카터는 냉전중 소련의 정통성을 공개적으로 문제삼은 첫 대통령이 었다. 카터의 인권정책은 동구권 및 소련 내 반체제 인사들에게 큰 정신적 도움을 주었고 소련 정권의 비도덕성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소련 지도부는 그 누구보다 더 인권 정책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카터의 인권정책은 후임자인 로널드 레이건이 크레믈린을 상대로 치명타를 날리는데 기본 골격을 제공했다.

카터의 공과

카터의 인권정책은 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공개적으로 동구 및 소련을 향한 심리전인 라디오 방송 프로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다. 그는 또 알렉산더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등 반체제 인사들의 글을 소련 국내로 밀반입하는 비밀 공작을 지원했다. 카터 행정부는 잊혀져 가는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책자를 배포함으로써 소련 내 소수민족의 민족 자긍심을 일깨워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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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섰다. 카터는 소련이 샤란스키와 긴즈버그를 재판에 회부하자 1차 경제봉쇄를 단행했고,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경제봉쇄를 대폭 확대했다. 카터는 비록 B-1 폭격기 생산 계획을 백지화 시켰지만 나토군의 현대화 계획과 퍼싱 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결정한 장본인이었다. 카터는 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횔씬 이전부터 제3세계 국가에서 소련에 대항하는 ClA의 공작활동을 재가했다. 비록 작은 시작이었지만 레이건 행정부가 의회의 승인과 협조를 받아 CIA의 공작활동을 확대 발전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럼 왜 카터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로 나오는 것일까. 우선 카터는 정책 결정이 신속하지 못했다.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뒤에야, 또는 내부 진통을 겪은 후에야 실행에 옮겨졌다. 그의 인권 정책 역시 소련을 파멸시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수립된 정책이라기보다는 이상주의에 밑바탕을 둔 정책이었던 것이다. 또 그의 대변인을 자처했던 밴스 국무장관은 군축협상에 너무 큰 비중을 둔 나머지 마치 소련에 끌려다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B-1 폭격기 등 관심이 집중됐던 차세대 무기 개발에 제동을 걸었던 게 부작용을 낳았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카터가 마치 親蘇 정책을 펼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냉전 이후에서부터 레이건 행정부까지 역대 대통령 중 카터는 소련과 가장 심각하게 충돌을 빚었던 대통령이었다. 소련 지도부는 카터야말로 수십년간 유지됐던 양국간 기본 원칙을 모두 무시해버리고 사사건건 싸움을 걸어온 지도자라고 여겼다. 크레믈린은 공화당의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섰지만 카터의 정책 기조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카터는 소련 제국의 가면을 벗겨낸 대통령이었고 소련의 약점을 과감하게 공략한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그의 업적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제 3 부 : 냉전의 최정점, 1983년 

개혁의 시기에 병든 지도자…

80년대 들어서 서방국가들의 경제 사정이 호전됐지만 소련의 경기 침체는 계속됐다. 그럼에도 군사력은 그대로 유지됐고 바로 이같은 구조적 모순점 때문에 점점 더 헤어날 수 없는 지경까지 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방국가들은 의욕에 넘치는 새로운 지도자들을 내세웠지만 소련은 아직껏 병들어 죽어가는 지도자가 병상 통치를 계속하고 있었다. 개혁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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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 병든 지도자는 치명적이었다. 80년대 초반 소련 지도부의 교체로 CIA는 인적 정보망이 부족했다. 브레즈네프의 마지막 2년 동안 소련 집권층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 암투에 대해서도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다. 우리는 브레즈네프의 지지 세력이 누군지는 알았으나 안드로포프의 세력이 어느 정도 강화됐는지는 좀처럼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안드로포프의 세력이 어느 정도 강화됐는지 좀처럼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안드로포프 KGB 의장의 지지 세력으로는 우스티노프 국방장관, 그로미코 외무장관, 고르바초프, 그리고리 로마노프, 그리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부패했던 레닌 그라드 공산당 서기장 등이 망라될 뿐이었다. 안드로포프는 브레즈네프가 죽기 전에 이미 브레즈네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1982년 초 공산당 이론가이자 막후 협상가였던 미하일 수슬로프가 사망하자 KGB는 브레즈네프의 최측근과 가족들의 비리 혐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KGB는 브레즈네프의 딸 갈리나부터 조사했다. 갈리나는 당시 '집시 소년 보리스'라는 별명을 가졌던 모스크바 가수와 내연의 관계에 있었고 문제는 이 '집시 소년 보리스'가 '모스크바 서커스'를 끼고 대규모 다이아몬드 밀수를 해왔다는 점이었다. 수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브레즈네프의 사위였던 KGB 제1부의장 세미온 즈비군 장군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소문에 의하면 그는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구속했던 '집시 소년 보리스' 역시 조사 첫날밤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질투심에 빠진 팔리나의 남편이 죽였든지 아니면 당국이 죽였든지 둘 중 하나였다.

내무부 차관으로 갈리나의 남편이자 브레즈네프의 사위였던 유리 추르바노프 장군 역시 해고당했다. 브레즈네프의 측근들도 조사를 받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누가 누구를 죽이고 누가 자살 했는지 (아니면 전혀 사실 무근일 수도 있지만) KGB는 서방 정보기관과 서방 기자들에게 이같은 소문을 고의적으로 흘렸다.

모스크바 한복판에 접근

브레즈네프는 사망 직전 콘스탄틴 체르넨코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으나 너무 일찍 죽는 바람에 실패했다. 반면 안드로포프는 1982년 우스티노프 국방장관과 군부 및 KGB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조직적 후원이 없었던 체르넨코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1982년 봄 이미 후계자는 결정된 상태였고 체르넨코 자신이 안드로포프를 추천했다는 정보가 입수됐었다. 1982년 8월 3일 빌 케이시 부장은 레이건 대통령에게 브레즈네프의 장기 집권에 따른 후유증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부터 나온 정보에 따르면 당시 소련 사회는 만연된 부패와 경제 침체, 강력 범죄 등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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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보 보고에 따르면 경찰국가였던 소련에서조차 도둑이 극성을 부린다고 했다. 고관대작이 참석한 한 연회장에서 밍크 코트 여섯벌이 없어지는 촌극도 빚어졌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또 고르키와 토글리아티 등에서 대규모 파업이 벌어졌지만 당국은 팔짱만 끼고 있었다. 포섭된 KGB 요원에 따르면, 당시 KGB 지도부 사이에서는 국가 기강을 바로 세워야한다는 생각이 팽배했다고 전했다. 1982년 11월 10일 브레즈네프는 사망했고 안드로포프가 후계자로 지명됐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슐츠 국무장관은 안드로포프를 매우 교활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말을 바꾼다는 것이었다. 부시 부통령과 만날 때는 부드럽던 사람이 독일 대표단에게는 협박조로 나왔다고 한다. 브레즈네프의 장례식 덕분에 ClA는 모스크바 한복판에 접근할 수 있었다. 15년 동안 KGB 의장을 지낸 안드로포프는 개혁을 원했지만 민주투사는 아니었다. 그의 개혁은 전체주의 국가의 통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있었다. 당시 대통령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나는 '안드로포프는 국가 기강확립과 국내 부패 척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이며 폴란드에서 처럼 결코 노동조합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때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은 안드로포프가 죽어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집권 15개월 동안, 특히 병상에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소련과 교황청의 비밀접촉

메흐메트 알리 아그카라는 인물이 1981년 5월 13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암살을 시도했다. 아그카의 배후에 소련이 있었는지, 불가리아 정부가 개입했는지, 또는 터키 극우주의자들이 자행했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에 싸여있다. 하지만 소련이 개입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황이 동구 유럽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는 소련의 정책과 정면으 로 충돌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특히 1978년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요한 바오로 2세가 고국인 폴란드로 금의환향, 폴란드 민족감정을 부추기고 자유노조를 지원했다는 게 소련의 시각이라는 것이다. 소련은 또 교황이 폴란드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 및 동구 유럽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는 지적이다. 이로 인해 동구 유럽의 몰락에 그치지 않고 소련 제국의 파멸로까지 이어질 지 모른다는 우려가 소련집권층에서 팽배했고 결과적으로 교황 암살을 배후 조종했다는 것이다. CIA 내부에서는 반대로 생각했다. 소련은 교황을 통해 동구권에서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 있다고 보고 1980년 가을부터 교황청과 비밀 대화 창구를 마련했다 . 이때는 폴란드 그다니스크에서 자유노조 문제가 폭발 일보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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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롤리 추기경이 연락관 역할을 했고 소련과의 비밀 대화는 교황이 직접 챙겼다. 여러 차례 비밀 대화를 통해 소련은 폴란드 자유노조가 자제하여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교황에게 요청했다. 소련은 교황에게 만약 상황이 악화되면 군사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점도 전달했다. 바티칸이 대화에 참여한 이유는 소련의 군사개입을 막아보자는 데 있었다. 교황은 소련의 군사개입이야말로 엄청난 사상자를 몰고 올 것이라고 믿었다. 교황은 당연히 자유노조 편이었지만 소련을 자극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1980년 11월 중순 교황과 카사롤리 추기경은 소련과의 대화가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했다. 적어도 소련의 군사개입을 막을 수 있었다고 보았다. 소련 역시 이탈리아 공산당과의 대화에서 폴란드 상황을 진전시키는 데 교회의 역할이 컸다고 말한 바 있다. 소련 지도부는 1980년 12월 초 폴란드에 대한 군사개입 원칙을 결정놓고도 망설이고 있을 때 바딤 자글라딘을 바티칸에 보내 "결코 군사개입을 원하지 않는다"고 교황에게 다시 한번 다짐했다. 교황도 이때부터 폴란드 최대의 적은 소련의 군사개입이 아니라 소련의 압력을 받고 내부 탄압에 나서는 폴란드 軍이었다는 판단을 내렸다. 암살 기도 수주 전 소련과 바티칸의 접촉 빈도는 눈에 띄게 잦아졌다. 바르샤바 조약군은 때마침 '소유즈 훈련' 중이었다. 교황은 1981년 3월 28일 두 시간 동안 바티칸 주재 소련 대사를 단독 접견했다. 이후 교황은 측근에게 폴란드에 대해 소련과 합의했다면서 폴란드 정부 고위 관계자가 4월 바티칸을 방문할 것이라고 밝혔다. 소련은 향후 6개월 동안 폴란드 침공을 연기하겠다고 교황에게 약속했다. 4월 19일부터 25일 사이 소련대사는 교황과 카사롤리 추기경과 세 차례 만나 폴란드 사태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고 있으니 교회가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사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카사롤리 추기경은 교황 역시 회동 결과에 대해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폴란드 자유노조, 정부, 군의 현대화를 촉구했다고 밝혔다.  

교황 암살 기도 사건의 배후

아그카의 암살 기도 이후에도 소련과 바티칸의 대화는 유지됐다. 카사롤리 추기경은 그 해 6월 폴란드 사태 진전을 위한 바티칸의 노력이 교황의 느린 회복으로 더뎌졌다고 밝혔다. 이는 교황만이 폴란드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소련은 오로지 교황하고만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양측간 대화는 폴란드군이 계엄을 선포한 1981년 12월까지 계속됐다. 암살 기도 사건에 대한 이탈리아 기관의 수사가 진행될 때 CIA는 정책 입안자들로부터 배후세력이 누구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그러나 배후세력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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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리아 수사기관으로 부터 넘겨받은 수사 자료는 허점 투성이였다. 나는 당시 케이시 부장에게 만약 소련이 교황 암살의 배후였다면 아그카는 완벽한 암살범이 아니었다고 보고했다. 케이시는 1982년 12월 20일 ClA 내부의 입장을 모아 슐츠, 와인버거, 클라크 에게 보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교황 암살 기도 사건은 한동안 CIA를 괴롭혔다. 왜 소련이 배후인데 입증을 못하느냐는 비난에서부터 일부에서는 CIA가 배후 아니냐는 모함까지 했다. 상원 청문회에서도 증언했지만 1985년까지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동서 유럽을 아무리 뒤져도 교황 암살의배후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케이시 부장은 속으로 소련이 배후였다고 이미 단정해놓은 상태였고 CIA가 입중을 못한다고 들들 볶았다. 1984년 겨을 불가리아와 소련이 개입했을지 모른다는 정보가 입수됐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소련이 붕괴됐지만 냉전시대 사건 중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유일한 케이스가 바로 교황 암살 미수 사건이다.

브레즈네프의 실수

1983년이야말로 美蘇 양국간에 오해와 불신으로 점철된 한 해였고 그로 인해 긴장감이 최고 조에 달했던 때였다. 美蘇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으나 소련 지도부가 미국의 정책에 위협을 느끼고있다는 점은 간파하지 못했다. 왜 간파하지 못했을까. 우리는 소련 지도부의 폐쇄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1983년 초부터 서방국가들은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고 눈부신 기술발전이 군사력에 쓰이기 시작하면서 소련 지도층의 불안은 가증됐다. 더군다나 소련은 미국이 경제적 부담도 없이 국방 예산을 급격히 늘렸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핵 선제 공격력을 강화시켜 주었다고 븐 것이다. 특히 서방 세계가 對공산권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고 과거와는 달리 군사력을 앞세우려 한다는 점이 크레믈린을 내내 괴롭혔다.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에 취임한 지 두 달 만에 병원에 입원했고 죽을 때까지 심각한 투병 생활을 해야 했다. 그의 와병은 소련의 개혁 시기를 늦췄고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한 것이었다. 소련 지도층은 혈기왕성한 서방국가 지도자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소련 망명자들은 우리들에게 소련 집권층이 서방 세계뿐만 아니라 국민들을 얼마나 두려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소련 지도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열등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브레즈네프가 70년대 저지른 중대 실수중 하나는 1977년 핵탄두 세 개짜리 SS-20 미사일을 유럽 전장(戰場)에 전진 배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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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는 1979년 소련과 핵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키로 결정했다. 나토는 소련이 SS-20 미사일을 철수하지 않는 한 1983년 11월까지 퍼싱-II 미사일을 배치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폴란드에 계엄이 선포되고 미소간 긴장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1982년 중거리 미사일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슐츠 국무장관은 퍼싱 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위해 유럽 각국으로부터 지지를 얻어내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을였다. 소련은 당연히 퍼싱 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저지하기 위해 비밀 공작에 돌입했고 CIA는 소련의 비밀 공작을 막는데 주력했다. 소련은 특히 80년대 초 유럽에 불어닥친 평화 운동에 침투해 퍼싱 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저지하고 소련의 의지대로 끌어가려고 했다. 소련은 핵 배치를 반대하는 단체들에게 자금 지원에서부터 조직 운영 능력, 전략 전술, 심리전 등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소련은 또 유럽 공산당을 동원, 지역 평화 운동 단체에 침투시키고 미군 문서와 정책 문서를 위조해 뿌리고 다녔다.

유럽 공산당은 제3당을 통해 독일, 네덜란드, 영국, 벨기에 등에서 퍼싱 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반대하는 공작을 벌였다. 동독 공산당은 독일 평화 운동 단체에 매달 2백만 달러씩 지원했다. 덴마크 정부는 1982년 3월 소련이 덴마크 공산당 총재와 덴마크-소련 친선단체를 통해 매년 10만 달러씩 덴마크 평화단체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적발해냈다. 이런 일은 즐비했다. 소련은 심지어 각 지역별 평화단체를 조종, 反美 및 反나토 분위기 조성을 꾀했다.

유럽평화 단체들의 자각

소련은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면서도 방어에 신경 썼다. 소련 정부는 1982년 가을 유럽 각 대사관에 소련의 미사일 배치와 관련해 反蘇 감정을 파악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소련은 1982년 5월 편지까지 위조할 정도였다. 소련은 헤이그 국무장관이 핵배치와 관련, 룬스 나토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위조해 벨기에와 네덜란드에 뿌렸다. 문제의 편지는 나토의 정책을 왜곡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서독 공산당은 정부가 수도 본에서 핵무기 이동과 관련, 본 시민들에게 경고한다는 내용을 담은 서류를 위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유럽 평화 단체들은 소련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고 이는 소련의 공작을 훨씬 어렵게 만들었다. 이들 평화 단체들은 反美 시위뿐만 아니라 反蘇 시위까지도 함께 벌이기 시작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CIA가 유럽의 평화단체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던 레이건 행정부의 보수파 인사들을 설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보수파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反美 시위는 소련의 조종으로 일어났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자생적으로 생겨난 단체이며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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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돌의 정서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소련의 온갖 방해에도 볼구하고 퍼싱-II 미사일은 1983년 11월 14일 영국에 배치됐고 곧이어 서독에도 퍼싱 미사일이 들어갔다. 소련은 SS-20 미사일을 전진 배치했다가 되레 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슈미트에 의해 시작돼 카터가 추진했고 레이건이 끝낸 중거리 미사일 배치는 美蘇간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키기에 이르렀다. 중거리 미사일 배치가 속속 진행되던 1983년 봄 레이건 대통령은 전국 목회자 협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소련을 '악마의 제국'으로 묘사해버렸다. 소련은 그동안 줄곧 동반자적 관계를 원했지만 카터가 인권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소련 집권층에 대한 정통성에 흠집이 갔고 레이건조차 '악마의 제국'으로 폄하해버리자 극도로 분노했다. 레이건은 2주 후 더 강한 '펀치'를 날렸다. 레이건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소련이 핵공격을 할 경우 발사와 동시에 적 미사일을 요격하는 전략방어안(SDI)을 발표해버렸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데도 레이건 추종 세력과 소련 지도부는 그같은 무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SDI는 소련의 악몽이었다. 미국의 기술과 자본, 운용 능력 등으로 SDI가 구축된다면 소련이 지난 25년동안 쌓아온 무기체계는 하루 아침에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었다. 소련이 미국에 대적하기 위해 신무기를 개발한다면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될 것이고 소련으로서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CIA는 레이건이 SDl를 발표하기 1년 전부터 타당성 조사를 벌였다. 소련은 이미 우주 프로그램을 통해 공격 미사일을 요격하는 무기 체계 개발을 연구하고 있었다. 소련은 또 유일하게 모스크바 주변에 미사일 요격 시스팀(ABM)을 갖추고 있는 나라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련은 전국에 광범위한 레이더 기지를 만들어 조기 경보망을 구축해놓고 있었다. 물론 군축협상에 위배되는 사항이었다. CIA는 이밖에도 소련이 레이저, 열 공학, 입자 빔, 전자파 등 첨단 기술을 군사 목적에 접목시키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특히 레이저 빔을 연구하기 위해 10여개의 연구소를 차려놓고 시험 사격장까지 마련해놓은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 같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발목을 잡는 것은 원격 조종장치 기술과 컴퓨터 기술의 낙후라는 사실도 첨부했다.

KAL기 격추, 냉전 막바지의 비극

SDI에 찬성했던 사람들은 SDI가 소련의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고 이 때문에 소련이 붕괴했다고 주장한다. 몰론 SDI가 소련 지도부를 괴롭힌 것은 사실이다. 미국이 처음으로 실현 가능한 군사 전략적 무기체계 개발에 나섰고 소련이 아무리 발버등쳐도 당시 경제상황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점을 소련 집권층은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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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개발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내 생각에는 소련 집권층이 SDI 자체를 무서워한 게 아니라 SDI라는 아이디어에 위협을 느꼈다고 본다. 즉 도저히 미국과 경쟁이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소련 지도부는 내부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느꼈고 한번 시작된 개혁온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진행됐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레이건의 '악마의 제국' 연설로 미국이 소련에 대한 핵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안드로포프는 결론지었고 양측간 긴장감은 더욱 더 고조됐다. 냉전 막바지에 일어난 최악의 비극은 1983년 9월 1일 소련 공군의 대한항공 격추 사건이었다. 소련 공군은 노선을 이탈해 소련 영공으로 들어온 비행기를 추적하다 SU-115기를 띄워 요격해버렸다. 소련 공군기의 민간 비행기 요격사건은 소련 정권의 무자비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美 정보기관들은 소련의 잔학성을 고발하는 증거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ClA는 공격하는 조종사와 지상 레이더 기지간의 대화 내용을 입수했다. 입수된 내용에는 비행물체에 대해 공격하라는 소련 공군의 명령, 명령을 접수했다는 조종사의 말과 목표물을 명중시켰다는 대화 내용 등을 수록하고 있었다. 슐츠 장관은 이같은 내용을 10시 45분 기자회견장에서 공개했다. 슐츠는 시간대별 대화기록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지만 분노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미국민이 느끼던 분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소련때문에 수백명의 죄없는 생명이 순식간에 바다 속으로 추락했고 미국민들은 그저 반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련 공군 조종사는 결과적으로 민간 비행기임을 알면서도 잔학하게 요격해버린 것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정보 기관들은 사건 일지를 재정리하면서 생각보다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ClA는 9월 2일 대통령 일일 보고서에서 '소련공군은 줄곧 美 RC-135 정찰기를 요격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실제 美 RC-135 정찰기가 소련의 미사일 시험을 정찰하기 위해 부근 지역에서 정찰 비행을 했다'고 밝혔다. 우리는 소련 공군이 적어도 한 시간동안 美 RC-135 정찰기를 추적하다 대한항공 비행기를 찾아냈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련 공군 조종사는 한 시간 뒤쯤 "눈으로 직접 목표 물체를 발견했다"고 보고했고 공격하기까지 14분 동안 비행물체 주변을 맴돌면서 "한때는 2Km까지 근접했다"고 추가 보고했다. 그는 이같은 대화 중에도 비행물체가 여객기라는 사실을 밝힌적은 없었다.

정보보고와 행정부 발표 간의 차이

같은 날 오후 대통령이 참석한 국가 안보회의에서 케이시 부장은 "요격지점에 정찰기가 없었으나 대한항공이 캄차카 반도 북동쪽으로 진입하면서 美정찰기와 대한항공을 혼동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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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법은 없다"고 밝혔다. 사실 ClA와 DIA는 소련 지상 레이더 기지가 오판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행정부의 구호는 알려진 진실과 상관없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9월 5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對국민 담화문에서 "조종사가 민간 여객기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고 단언했다. 이틀 후 진 커크 패트릭 유엔대사는 "소련이 애초부터 민간 여객기를 격추하려고 마음먹었고 또 요격해 무고한 269명을 살해한데다 거짓말까지 일삼고 있다"고 비난했다. 격추와 관련된 진실이 조금씩 언론에 새나오면서 정보기관에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비난이 정책 입안자들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1983년 10월 7일字 뉴욕타임스는 대통령과 슐츠가 정확한 정보보고 를 받지 못했다고 썼다. 즉 소련 조종사가 민간 여객기인 줄 모르고 요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CIA가 대통령과 슐츠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케이시 부장은 뉴욕타임스의 기사에 대해 심기가 불편했다. 고위직에 있는 동료들이 그 기사를 믿을 지 모른다는 점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10월 13일 슐츠와 와인버거, 클라크에게 '실제 정보 보고한 내용과 행정부가 발표한 내용 가운데 차이가 있을 지 모른다는 기사 내용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메모를 보냈다. 케이시는 메모에서 뉴욕타임스 기사 가운데 일부는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뉴욕타임스 기사에는 소련 조종사가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비행물체를 요격했다는 점과, 조종사가 민간 여객기인 줄 모르고 미사일을 발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그리고 소련 조종사가 姜 RC-135를 격추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면서 케이시는 뉴욕타임스 기사 내용이 나중에 밝혀진 게 아니라 사건 발생 직후 CIA 정보보고에 이미 포함됐었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케이시는 또 9월 2일 대통령 일일 보고서에서 소련 조종사가 민간 여객기인줄 모르고 요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했고 이같은 사실은 레이건 행정부에 24시간 이내에 이미 전달됐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일부 관계자들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사실대로 발표하지 않았고 일부는 우리를 믿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이같은 내용은 슐츠의 회고록에도 나와 있다. 슐츠는 소련 공군측의 실수였을지 모른다는 의견이 제시되자 자기 참모들에게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ClA가 그같은 해괴한 논리를 펴는데 대해 CIA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ClA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참모들에게 "CIA가 거짓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른다"고 말했다.

 

美蘇 무력충돌 우려 팽배

왜 ClA가 소련을 감싸고 돈다고 생각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케이시는 더군다나 초강경파였다. 그런 초강경파가 무엇 때문에 궁지에 몰린 소련을 도와주기 위해 소련 공군의 실수였을지 모른다는 발언을 했겠는가. 한 마디로 슐츠의 과민반응이 었다. CIA는 단순히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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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을 사실대로 보고했을 뿐이지 다른 의도는 없었다. 다만 우리가 보고한 진실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했다는 점은 있었지만.

85.11월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앞두고, 레이건 대통령에게 브리핑 1992년 러시아 정부는 83년 격추사건 당시 공산당 간부회의 대화기록을 공개했다. 여기서 우리는 우스티노프 국방장관 등이 모든 요격 절차가 적법했다고 주장한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도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미국이 소련을 야만국가로 몰아붙이자 이들 공산당 간부들은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면서 자위했다. 사건 발생 10년 뒤 유엔은 93년 6월 15일 소련 공군 조종사가 대한항공 여객기를 美 RC-135 정찰기로 오인, 요격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엔 조사보고서는 또 적어도 극동방어사령부의 고위 지휘관 2명이 요격 10분 전쯤에 비행물체가 여객기일지도 모른다고 문제 제기했다는 점도 포함했다. 사건 발생 후 행정부는 어떻게 사태를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슐츠는 마드리드에서 그로미코와 회담을 갖는 게 좋다고 주장했고 와인버거는 반대했다. 슐츠가 그로미코와의 회담에서 대한항공 사건과 인권문제만 회의 의제로 올리겠다고 하자 레이건은 슐츠의 손을 들어줬다. 슐츠와 그로미코 간 대화는 매우 날카롭게 진행됐다. 그로미코 는 회고록에서 '14명의 국무장관과 대화를 나눠 보았지만 가장 신경이 날카롭게 대립했던 때가 슐츠와의 회담이었다'고 술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국간 비밀 접촉이 시도됐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SDI, 대한항공 격추 사건, 퍼싱-II 미사일 유럽 배치, 소련의 군축협상 거부 등 일련의 사태로 양국간 긴장은 전후 최고조에 달했고 두 나라 간에 무력 충돌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실제 팽배했었다.

제 4 부 : CIA와 KGB의 치열한 첩보전 

브레즈네프가 2~3주만 더 살았다면

CIA는 안드로포프의 오른팔이었던 고르바초프가 급부상하는 것을 무척 반겼다.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과감성과 용기, 결단력 등 그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 때문에 그가 가졌던 과감성과 용기와 비전의 모순점도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우리는 일부 이슈에서 그를 과대평가하기 일쑤였고 반대로 다른 중요한 이슈에서 그를 과소평가했다. 그의 政敵들은 고르바초프의 신임이 두터웠던 야코프레프가 CIA의 첩자였다고 비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절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CIA의 첩자가 아니었던 게 너무나 다행스럽다. 이들은 너무도 훌륭하게 소련의 붕괴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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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에 대한 관심은 높았지만 그에 대해 환상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 그도 전형적인 공산당 간부였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스타프로폴에서 시작, 모스크바로 오기까지는 공산당 이념가 미하일 수슬로프와 유리 안드로포프 KGB 의장의 후원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1978년 농무부 장관으로 발탁된 지 1년 만에 공산당 간부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1980년 약관 49세에 공산당 최고간부회의의 정회원이 된다. 흐루시초프나 브레즈네프처럼 고르바초프도 집권하기까지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는 특히 1979년부터 4년여동안 농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4년 연속 흉작을 맞아 대규모로 식량을 수입해야 하는 등 소련 농업기반 붕괴의 장본이었는데도 무사했다. 사실 그는 1982년 11월 17일로 예정됐던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숙청될 것으로 여겨졌으나 위원회 소집 1주일 전 브레즈네프가 죽고 안드로포프가 권력을 승계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브레즈네프가 2~3주만 더 살았다면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CIA는 1985년 2월 5일 고르바초프가 체르넨코 서기장의 뒤를 이을 것으로 확신했다. 체르넨코의 후임으로는 고르바초프와 로마노프가 거론되고 있으며 고르바초프가 선두주자라고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고르바초프는 현실적이지만 외교 경험이 전무하며 기본 정책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유연한 이미지를 풍기는 정치인이라고 보고한 바 있다.

소련의 비밀 테러 공작

고르바초프는 창의력이 넘치고 활동적인 공산당이었지 혁명가는 아니었다. 고르바초프에게 아이디어는 풍부했지만 전략은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국내문제에 관한한 확고부동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레닌이 건설한 사회주의 국가야말로 지상 최고의 정치 기구라고 생각했고 7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현 집권층에 의해 왜곡됐다고 믿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조금만 손보면 소련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경제에 대한 그의 시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안드로포프의 정책을 밀고 나갔다. 부패척결, 알콜 추방, 공산당 재건이 그의 최우선 과제였다. 새로운 기술 개발을 경제난을 해결할 수 있는 요술 방망이라고 여겼다. 그는 집권하는 동안 자기 의도와는 반대로 훨씬 더 많은 부분의 소련 사회를 바꿔놓았다. 결코 원하지 않은 변화였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한번 해보고 안되면 조심스럽게 다른 방법을 적용해보고…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는 식이었다. 그는 점진적 개혁가였지 일순간에 모든 것을 바꾸는 혁명가는 아니었다. 자기를 최고의 권력자로 만들어준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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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우리는 소련이 駐서독 미군 병사들에 대해 테러 공격을 준비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소련에서 들어온 첩보에 따르면 KGB는 서독 미군 기지 주변에 병사들의 출입이 잦은 디스코텍이나 술집을 파악, 폭발물을 설치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CIA는 KGB가 노렸던 디스코텍이나 술집 14군데를 일일이 확인했다. 모두 미군병사들이나 나토군 병사들이 다니는 곳들뿐이었다. 케이시 부장은 소련이 2년 전부터 이같은 테러 공작을 준비해왔다는 보고서를 작성해 레이건 대통령, 부시 부통령, 슐츠, 와인버거 등에게 돌렸다. 당연히 백악관 강경파들은 고르바초프가 집권했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며 對蘇 강경론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간에 변화의 바람은 조금씩 일고 있었다. 특히 고르바초프의 정치 행태가 과거 소련 집권자들과는 달랐다. 또 고르바초프는 군축문제에 대해 레이건에게 수시로 편지를 띄웠다. 입장변화는 없었지만 대화를 희망한다는 것으로 비쳐졌다. 그해 5월 슐츠와 그로미코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나 11월 양국정상회담에 대해 협상했다. 7월 3일 제네바 양국 정상회담이 공식 발표되던 날 고르바초프는 그로미코를 셰바르드나제 조지아주 공산당 서기로 전격 교체한다고 발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CIA는 슐츠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셰바르드나제는 무서운 업무 추진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매우 용기있고 똑똑하며 창의력이 넘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밖에도 셰바르드나제는 매우 청렴한 공직자였다. 아무리 출세가도를 달려도 처음 살던 아파트에서 그대로 살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인물이었다. 아무튼 슐츠와 셰바르드나제는 그해 8월 처음 만나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정치적 견해는 달랐지만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CIA와 KGB의 '유치한' 대결

두 슈퍼 파워 간의 긴장감이 가시고 대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갔지만 정보 전쟁은 치열했다. 1985년에서 1986년 사이 KGB나 CIA 모두 상대방을 창피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비밀 공작을 벌였다. 일부는 매우 심각한 공작이었고 또 일부는 대학에서나 볼 수 있는 장난같은 공작들이었다. 소련은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유럽 배치에 반대하는 모임은 반드시 후원했다. 미국의 SDI를 무력화 시키려고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KGB는 유럽에서 슐츠, 케이시 또는 미군 고위 장성들의 서명을 위조한 서류를 만들어 우방국에 뿌리고 다녔고 아프리카에서는 CIA가 에이즈를 퍼뜨리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동남아에서는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 암살에 관여했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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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1985년 KGB의 최우선 과제는 간디 총리의 암살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제3세계에서는 미국이 갓난 아기를 납치, 미국으로 데려가 장기를 떼어낸다는 터무니없는 흑색선전을 만들어 유포하고 다녔다. 이같은 터무니 없는 소문들은 반미감정을 자아내기도 했고 소련이 붕괴된 오늘날에도 사실인 양 퍼지고 있다. 하지만 CIA도 바랐다. 포피엘리우스코 신부의 초상이 담긴 엽서 4만 장과 그의 강론을 담은 유인물을 폴란드로 밀반입했다. 포피엘리우스코 신부는 비밀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숨진 인물이었다. 교황도 나중에 이 유인물을 보고 매우 흐뭇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그 해 5월 폴란드와 벨기에 간에 열린 축구 시합에서 자유노조 시위를 주동했다. 심지어 폴란드 국영 TV에 3m 짜리 대형 플래카드가 보도될 정도였다. CIA는 또 나치 독일의 요아킴 본리벤트롭 외무장관이 1939년 9월 소련의 몰로토프 외상과 가진 회담에서 폴란드 분할에 사용한 지도를 극비리에 입수, 대량 축소 복사한 뒤 폴란드에 뿌렸다. 민족감정을 자극할 것은 물론이었다. CIA는 또 1985년 미소 정상 회담이 열린 제네바에서 고르바초프의 방문이 환영받지 못하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CIA는 제네바에서 反蘇 시위, 反蘇 회의, 反蘇 전시회 등이 열리도록 후원했다. 또 소련의 캄보디아에서의 역할을 공개해 여론의 주목올 받도록 했다. CIA는 이밖에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규탄하는 각종 시위와 회의, 전시회 등을 물밑 지원했다. 냉전의 역사를 바꾸어놓을 정도로 중대했던 공작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소련의 인권 탄압 문제를 부각시켜 국제여론을 환기시켰고 소련의 폴란드 침공가능성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공작마저 없었더라면 소련의 정책들은 영원히 베일에 가려졌을 것이다. CIA는 공개적으로도 소련에 대한 공작활동을 벌였다. 가장 대표적이었던 것은 소련이 1985년 일본과 서방국가들로부터 최첨단 기술을 훔친 사건을 언론에 대서특필토록 한 일이었다. CIA는 1981년부터 서방 정보기관들과 협조해 소련이 서방국가들로부터 최첨단 기술을 입수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2년여 동안 정보를 수집하던 중 정보원으로부터 연락이 두절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정보원은 소련 당국에 발각돼 처형됐다.

소련의 '기술 도둑질' 백서

서방 정보기관들은 소련의 '도둑질'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프랑스 정보기관은 1984년 12월 소련의 이같은 활동으로부터 서방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를 공개하자고 제의했다. CIA는 1985년 여름 소련의 '도둑질'에 대한 백서를 만들었고 조지 부시 부통령은 이를 들고 7월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을 찾아가 지지를 얻어냈다. 그해 9월 국무부와 국방부는 백서 5만 부를 전세계에 배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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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는 또 1985년 초 유엔 사무처에 파견나와 있는 8백명의 소련 국적 보유자를 일일이 추적하는 작업을 벌여 이들이 소련 외무부로 직접 보고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무리 민간인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소련 외무부, 정보부, 공산당 중앙당의 지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결국 유엔에서 자국 이익을 위해 일한 꼴이었다. 이들 중 약 25%가 KGB 요원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됐고 상당수가 KGB의 조종올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상원을 자극했고 의회도 5훨 비슷한 보고서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했지만 소련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고 KGB가 예전대로 공작을 하는 한 CIA 도 맞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데탕트가 무르익어도 냉전은 계속됐던 것이다. 소련 국적을 가진 유엔 사무처 인원 8백명을 놓고 CIA와 국무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방은 곤란했다. 소련에서 반드시 보복조치를 단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 소련에 있는 미국인보다 미국에 있는 소련인이 수적으로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추방 조치를 하게 되면 불리한 것은 미국쪽이었다.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의회와 국가안보회의였다. 케이시 부장은 슐츠가 안 움직인다고 사적으로 비난하면서도 또 슐츠를 전폭 지원하는 양다리 걸치기 작전을 쌨다. 케이시는 1985년 4월 26일 슐츠에게 "패트릭 리히 상원의원과 빌 코헨 상원의원이 8백명 문제에 대해 국무부에 문의했으나 시큰둥한 반응만 보였다며 나를 찾아왔다"는 메모를 보냈다. 즉 국무부가 비협조적이라면서 슐츠를 간접 비난한 것이었다. 그러나 케이시는 또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혀 그를 두둔하기도 했다. 대통령은 그해 8월 소련의 유엔 대표부 인원 270명을 이듬해 4월까지 170명으로 줄이는 방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국무부는 이같은 대통령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3월 7일까지 소련측에 통보하는 것을 질질 끌었다. CIA와 KGB가 대결하는 것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상대측에 첩자를 심어두는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ClA가 한 수 위인 것으로 생각했다. 비록 70년대 중반 젊은 CIA 요원 윌리암 캄필레스가 최첨단 인공위성 기술을 3천 달러를 받고 팔아먹은 사건이 있었지만 어쩌다 한번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85년 CIA도 꿈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 해 10월 美 연방수사국(FBI) 요원이 간첩혐의로 구속되더니 ClA 계약 근로자가 체코 정부에 비밀을 팔아먹은 혐의로 체포됐다. 그러나 가장 큰 사건은 존 워커 사건이었다. 미해군에 복무하던 워커는 17년 동안 해군의 암호체계를 소련측에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이는 美 해군의 일거수 일투족을 노출시키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무렵 소련은 ClA 내부에도 첩자를 만들어 놓았다. CIA의 소련 첩보활동의 실무 담당자였던 알드리치 에임즈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1994년 체포되기 전까지 1급 비밀을 소련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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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기는 바람에 CIA가 소련에 침투시킨 정보원 9명 이상이 발각돼 처형됐다. 이떄까지만 해도 CIA는 에임즈가 고급정보를 넘겼기 때문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특히ClA의 1급 정보원이었던 아돌프 톨카체프가 KGB에 의해 처형됐을 때도 KGB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몰랐다. 그는 소련의 항공우주 계획 및 각종 무기 개발 정보를 CIA측에 넘겨줬던 인물. 그의 신원이 발각되자마자 소련측은 모스크바 주재 美 대사관의 폴 스톰바우그도 추방했다.

 유르첸코의 망명

그러나 7월과 8월 서방 국가들도 '대어'를 낚았다. 그해 7월 영국정보부는 영국 주재 KGB 지국장이던 올레그 고르디에프스키를 모스크바에서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고르디에프스키는 1974년부터 영국 정보부의 정보원으로 있으면서 각종 소련 첩보 활동 사항을 넘겨줬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영국 KGB 지국장을 지내면서 의심받기 시작했고 급기야 모스크바로 소환됐다. 조사를 받고 집에서 대기하던 고르디에프 스키는 7월 19일 KGB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조깅복 차림으로 집을 나와 사라져 버렸다. 영국은 9월 12일 고르디에프스키의 망명을 발표했고 케이시 부장은 하루 전 이 사실을 레이건에게 보고했다. 8월에는 미국이 한 건 올렸다.KGB의 美 첩보활동 책임자였던 비탈리 유르첸코 장군이 로마에서 미국으로 망명해왔다. CIA가 그토록 바라던 것은 KGB의 고위 간부를 포섭하는 일이었다. 그래야 현재 진행중인 첩보 활동 사항을 적나라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르첸코는 KGB에서 장군으로 진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망명했던 터라 정보가 많았고 그만큼 이용가치가 높았다. CIA가 그토록 바라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케이시는 마치 어린애가 장난감을 손에 쥔 듯 좋아했다. 그는 유르첸코에 대한 조사 과정을 일일이 챙겼다. 그에 대한 조사 내용은 거의 일일 보고사항이 되다시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CIA가 한 건 올렸다는 것을 자랑하고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론에도 보도됐는데 아마도 케이시가 흘리지 알았나싶다. 당시 언론과 의회로부터 곤욕을 치르던 케이시 부장은 CIA 의 '한건'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모면해볼까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9월이 되면서 소련이 샴페인을 터뜨렸다. 유르첸코 조사과정에서 신원이 발각된 전직 ClA 요원이 FBI의 감시망을 피해 모스크바로 망명해버린 것이다. 1981년 ClA에 들어온 에드워드 리 하워드는 蘇 첩보 담당자로서 모스크바 파견에 앞서 각종 對蘇 첩보작전에 대해 교육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관문인 거짓말 탐지기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원인을 조사한 결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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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복용에다 폭음 경력 등 사생활에 문제가 많아 해고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앙심을 품고 KGB 측에 정보를 팔아먹은 것이다. 유르첸코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하워드의 이름이 떠오르자 FBI는 美 뉴멕시코주에 거주하는 하워드를 밀착 감시했다. 그러나 그는 CIA에서 배운 대로 FBI를 따돌리고 모스크바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부인에게 차를 운전하도록 하고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 하워드는 차에서 뛰어내리고 자기와 똑같은 복장을 입힌 마네킹을 조수석에 놓아 두었던 것. 이 모든 게 1분이 채 안 걸렸다.

하워드 사건이 가져온 파문

FBI는 두 사람이 계속 차를 타고 가는 줄 알고 뒤쫓다가 허탕을 치고 말았다. 하워드 때문에 對蘇 첩보활동은 완전히 문을 닫아야 할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워드 때문에 톨카체프가 처형됐는 줄 알았다. 하워드 사건은 국내적으로 ClA에게 많은 시련을 가져다 주었다. 보수파들은 CIA의 對간첩활동이 느슨하다면서 질타했다. 불행히도 하워드 사건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11월 2일 유르첸코의 재망명 사건이 일어났다. 조지타운에서 저녁식사를 위해 나갔던 유르첸코가 소련대사관으로 걸어들어가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왜 그가 망명했는지 의구심이 일었지만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또 11월 25일에는 국가안보국(NSA)에서 14년 동안 근무하다 1979년 은퇴했던 로날드 펠톤이라는 자가 소련측 정보원으로 활동하다 적발됐다. 유르첸코의 도움으로 그를 적발해냈지만 그는 그동안 가장 민감한 정보를 소련측에 제공했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을 망신시킨 워커, 하워드. 콜카체프. 유르첸코. 펠톤 등 이 외에도 사건은 꼬리를 물었다. 젊은 ClA 요원이었던 샤론 스크라네이지가 가나 정부에 고용됐던 남자친구에게 정보를 넘겨주다 적발됐다. 美해군 정보분석가였던 조나탄 폴라드는 이스라엘을 위해 간첩활동을 하다 발각됐다. 또 오랫동안 ClA 요원으로 활동했던 래리 우타이 친이 중국 공산당을 위해 스파이 활동한 것으로 드러나 처벌받았다. 1986년에도 대간첩작전은 계속됐지만 1985년 만큼이나 사건이 많았던 해도 없었다. 1986년 8월 23일 유엔에서 근무하던 소련 과학자 게나디 자하로프 박사가 FBI에 의해 구속됐다. 외교관 면책 특권을 갖고 있지 않았던 그는 FBI의 덫에 걸린 사례였다. KGB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정부와 관계 없는 미국시민을 구속할 계획이었다. KGB는 모스크바 주재 특파원이었던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誌 니콜라스 대니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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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를 표적으로 삼았다. 대니로프는 정보원과 접촉, 아프가니스탄과 관련된 소련의 정보를 넘겨받다가 붙잡혔다. 대니로프가 ClA의 첩보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를 걸어 강력하게 대니로프의 석방을 요구했다. 9월 12일 대니로프와 자하로프 박사는 결국 각자 대사관에서 석방됐고 자하로프 박사는 부인과 함께 미국 이민이 허용됐다. 그리고 10월 12~13일 두 나라는 아이슬랜드 레이캬비크에서 정상회담을 갖는다고 발표했다.

대니로프 기자의 역할

슐츠가 소련측과 협상을 주저하지 않은 이유는 CIA가 대니로프 기자 몰래 그를 첩보활동에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케이시 부장은 9월 8일 슐츠에게 CIA의 입장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ClA는 1981년 소련 전략 미사일의 배치도를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받았다. 너무나 소중한 정보였지만 누가 보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1985년 1월 22일 대니로프 기자는 1개월 전 만난 적이 있는 포템킨 신부라는 사람으로부터 뭔가를 보낸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1월 24일 우편물을 받아든 대니로프 기자가 겉봉투를 뜯어보았더니 또 다른 봉투에 美대사 앞으로 전달해달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美대사 앞으로 보내는 봉투 안의 내용물은 또 다시 CIA 국장 앞으로 돼 있었다. 그리고 이 겉봉투의 글씨는 1981년 글씨와 똑같았다. 대니로프 기자는 이 봉투를 대사관에 갖다 주었다. CIA 지국장은 누가 포템킨 신부를 통해 정보를 가져다 주는지 꼭 알아내려고 했다. 대니로프 기자와 두번째 만나면서 포템킨 신부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그리고 3월 23일 우리 요원이 우편물을 전달한 적이 있다는 포템킨 신부를 만났다. 우리는 포템킨 신부에게 제3의 인물에게 전달할 편지와 함께 연락처를 남겼다. 대니로프는 4월 초 포템킨 신부로부터 접선이 안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대사관 직원에게 이야기했다. 대니로프는 그러면서 공사에게 스파이 활동에 관여하기 싫다고 밝혔다. 4월 18일 모스크바에 있는 ClA 요원은 편지가 엉뚱한 사람에게 전달됐고 KGB측에 들어갔다고 전해왔다. 9월 9일 케이시는 슐츠와 상의한 후 소련 대사관 측에 대니로프의 무죄를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