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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지식인과 중국문제 고야스 노부쿠니 특집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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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지식인과 중국문제

    고야스 노부쿠니

    특집

    시론

  • 일본 지식인과 중국 문제

    153

    “우리는중국과의관계에서본질적인이웃관계를만들어오지않았다.경제적관

    계를아무리심화시킨들일본과중국의관계는본질적으로냉담한관계이다.왜

    그럴까?중국문제에관한고찰은바로이물음에서부터시작되어야한다.역사를

    거슬러올라가는나의고찰도이물음에서시작되었다.”나는이말을본론말미

    어딘가에적어두었다.그러나지금그것을굳이이논문의‘머리말’로삼고자한

    다.일본은중국과왜본질적인관계를맺지못하고있는것일까?나는이글에서

    역사를통해이문제를살펴보고자한다.

    1. 중국의 ‘이국’(異國)화

    근세일본의국학자모토오리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1)의저작가운데

    『나오비노미타마』(直毘霊)가있다.이것은노리나가의주저『고지키덴』(古事記

    伝)의서문으로쓰인글이다.이『나오비노미타마』에는“이편은도(道)라는것에

    관한논의이다”라는부제가붙어있다.노리나가가여기에서말한‘논의’라는것

    은유가적교설로서의‘신도’(神道)를일본고유의‘신의길’(神の道)로되돌리기

    위한논의(논쟁)를의미한다.다만,여기에서노리나가등이일본고유의‘신의길’

    을처음으로말하기전까지‘신도’란유교적교의로구성된‘유가신도’로서존재

    * 지은이│고야스 노부쿠니(子安宣邦) 1933년생. 가나가와현 출신. 도쿄대학 졸업. 오사카대학 명예교수. 전공은 일본사상사론. 담론에 대한 고고학적 방법론에 영향을 받아 모토오리 노리나가,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1776∼1843), 후쿠자와 유키치 등에 관한 사상사적 검토를 행해 왔고, 근래에는 야스쿠니신사문제

    와 중일관계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등 폭넓은 사상사적 논의를 행하고 있다. 저서에 『「事件」としての徂徠学』, 『本居宣長』, 『漢字論 — 不可避の他者』, 『方法としての江戸 — 日本思想史と批判的視座』, 『「アジア」はどう語られてきたか — 近代日本のオリエンタリズム』(이승연 옮김,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 역사비평사, 2003), 『国家と祭祀』(김석근 옮김, 『일본의 야스쿠니, 야스쿠니의 일본』, 산해, 2005), 『福沢諭吉「文明論之概略」精読』(김석근 옮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 역사비평사, 2007), 『日本ナショナリズムの解読』(송석원 옮김, 『일본 내셔널리즘 해부』, 그린비, 2011)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지은이의 홈페이지는 http://homepage1.nifty.com/koyasu/

    1)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에도시대의 국학자, 문헌학자, 의사. 자택 스즈노야(鈴屋)에서 문인들을 모아 강의하여 스즈노야노

    우시(鈴屋大人)라고도 불렸다. 당시 해독불가 상태였던 『고지키』(古事記)의 해설에 성공해 『고지키덴』을 썼다. — 옮긴이

  • 일본비평 6호154

    특집시론

    하고있었다는사실에주의해야한다.‘신도’는유교나불교의교의적조력을얻

    고서야비로소교설의지위에설수있었다.따라서‘신도’가‘유가신도’라는것을

    그누구도의심하지않았다.야마자키안사이(山崎闇斎,1618~1682)2)가주자학

    자이면서동시에스이카신도(垂加神道)의개창자라는것에누구도의심을품지

    않았다.거기에이의를제기한이가노리나가이다.그는『고지키』,『니혼쇼키』(日

    本書紀)의신화를통해일본고유의‘신의길’의존재를말하려했다.이를위해서

    는‘유가신도’에대한,또는신도의교의적인기초를이루고있었던유교그자체

    에대한해체적비판을수행해야했다.노리나가는악의적인매도라고도할수있

    는‘가라고코로’(漢意)라는말로유가교설의‘이국성’을철저히폭로했다.일본의

    ‘신의길’을존립시키기위해서는유교를‘이국’적사유로매도하여추방하는언

    어작업이필요했던것이다.이것이『나오비노미타마』에서의‘도라는것에관한

    논의’이다.중국을‘이국’(異國),즉자신인‘일본’과구별되는타자로삼아야비로

    소문화적으로도‘고유의일본’이존재하게되는것이다.3)

    노리나가는‘고유의일본’을발견했다.이것은동시에그가‘이국’으로서의

    ‘중국’을발견했다는것을의미한다.일본지식인이‘중국’을언급하기시작한것

    은18세기노리나가등국학자들의언설에서부터이다.이때‘중국’이란자기(일

    본)와다른것으로변별되는타자로서의중국이다.이타자로서의‘중국’이라는

    의식은근대이후에도특히문화와언어에짙게드리워진다.그것은일본의‘한

    자’(漢字)관에서가장잘드러난다.4)한자를배제하면일본어라는문자언어역시

    성립하지않는다.한자는가장중요한언어적계기이다.그럼에도불구하고‘한’

    (漢)의문자라는타자성의표식을계속부여받아온것이다.

    여기서하나더덧붙이고싶은것이있다.이『나오비노미타마』라는‘도’(道)

    2) 야마자키 안사이는 에도시대 초기의 주자학자이자 신도가이다. 인간의 마음(心神)은 곧 천신(天神)과 동일한 근원을 갖

    기에 동일하다는 사상을 폈고, 이에 근거하여 자신의 심신을 자택의 사당에 모셨다. 신사의 명칭은 스이카신사(垂加神

    社)이다. —옮긴이

    3) 나의 노리나가 해석에 관해서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岩波現代文庫, 2001)와 『노리나가학 강의』(『宣長学講

    義』, 東京 : 岩波書店, 2006)를 참조.

    4) 『한자론 —피할 수 없는 타자』(『漢字論 —不可避の他者』, 東京 : 岩波書店, 2003)를 참조.

  • 일본 지식인과 중국 문제

    155

    의논의는‘와분’(和文)으로쓰여져있다는점이다.5)우리가지금사용하고있는

    한자가나혼용체(漢字かな交じり文)라는문자언어로서의일본어가메이지시대

    에성립하기전까지,논쟁등의이론적전개와주장을기술하는문장은한문이

    었다.와분은가사나수필,일기,서간을쓸때사용했다.그런데노리나가는새삼

    『나오비노미타마』를와분으로썼던것이다.이와분이란우리내부의‘한’(漢)을

    이질적인것으로변별하고바깥으로밀어냄으로써고유의‘일본’을발견한것임

    을말해주는문장이다.국학적이라고불리는일본문은바로여기에서성립했던

    것이다.

    2. 정체(停滯)된 중국

    일본의위정자와식자들이중국에관심을갖게된데에는19세기동아시아에내

    습한서구의충격이계기가되었다.중국에대한관심은서양에대한관심이기도

    했다.1840년아편전쟁과중국의패배는바쿠후(幕府)말기일본에큰충격을안

    겨주었다.그것은이중의충격이었다.첫번째충격은군사력으로대표되는구미

    의국력이가져온충격이었다.두번째충격은그군사력에속절없이무너진대국

    청의실상이가져온충격이었다.이충격을심각한위기의식으로받아들였던것

    이조슈번(長州藩)의젊은개혁가들이었다.당시동아시아국제정세에가장예민

    했던조슈번이마침내일본의근대혁명에서중심적인역할을부여받게된다.

    메이지유신이라는일본의근대혁명이이루어지고나서일본의지식인들은

    중국을어떻게바라보기시작했을까?후쿠자와유키치(福沢諭吉,1835~1901)

    의『문명론의개략』(文明論之概略)은메이지8년(1875)에간행되었다.『문명론

    의개략』은근대일본의여명기에문명론적인일본의설계를명시적으로제시한

    책이다.그명시적인설계란근대일본이어디에위치하여자신을문명국가로만

    들어가야할것인지,이때어떤골격과토대를갖추어야할것인지에대해명백

    한설계적지침을제시한것을말한다.나는후쿠자와의사후백주년이었던2001

    5) 와분은 와고(和語)를 주로 하여, 특히 히라가나로 쓰여진 문장. 헤이안(平安)시대의 와카(和歌), 모노가타리(物語), 일기

    (日記) 등에서 보이는 문장을 말한다. —옮긴이

  • 일본비평 6호156

    특집시론

    년에그책을재해석하는작업을시작했다.후쿠자와의설계의어떤점이그후의

    일본에서실현되었고혹은실현되지않았는가?또는근대일본은후쿠자와의설

    계를뛰어넘어그것과는다른어떤것을실현했던것인가?후쿠자와의설계와근

    대일본의역사를대조해보는일은나에게매우뜻깊은작업이었다.6)

    후쿠자와는근대여명기일본에서의논의가‘문명을본위’로이루어져야한

    다고말한다.즉,‘문명·문명화’를기준또는목표로하여논의가구성되어야한

    다는것이다.이때그‘문명’이란이념형으로서의서양근대문명이다.후쿠자와의

    문명론이짊어진영광이란서양근대에자리한문명화의설계를최선의설계로

    삼아이를처음으로일본국민에게제시한점에있다.이런의미에서후쿠자와는

    근대일본의아버지로서일본의지폐를장식하고있는것이다.

    그런데후쿠자와는“문명은짝이있는말”이라고한다.그것은느림과빠름,

    가벼움과무거움처럼서로대응되는짝을가진말이라는것이다.단적으로말하

    자면,‘문명’이란‘야만’에반대되는말이라는것이다.‘문명’을‘진보’의동의어라

    고한다면그것은‘정체’또는‘퇴보’를반대개념으로하는셈이된다.이처럼문명

    사회의성립에관한후쿠자와의문명사적서술은반문명적인정체된사회를일

    방적으로서술해가는것으로귀착된다.바꾸어말하면,후쿠자와는‘동양적정

    체’라는개념으로이른바전제적제국으로서의중국을그려냈던것이다.후쿠자

    와의서술은헤겔의역사철학에서그원형을찾을수있는‘동양적정체’의이미

    지를되풀이하는것일수밖에없었다.그렇다고해서후쿠자와의문명사적서술

    이헤겔의역사철학의영향아래에있었다는것은아니다.오히려헤겔의역사철

    학은유럽의문명성립사를원형적으로대표하고있을따름이다.어쨌든후쿠자

    와의문명론은사회적진보와변화를억누르는일원적인전제적지배상태그대

    로정체된제국이라는중국의이미지를처음으로일본인의눈앞에제시했던것

    이다.

    6) 子安宣邦, 『福沢諭吉「文明論之概略」精読』(東京 : 岩波現代文庫, 2005)를 참조.

  • 일본 지식인과 중국 문제

    157

    진시황제가백가쟁명이라는세상의논쟁의기운을일소한이래,천하는다시독

    재에의한전제정치로귀착되었다.왕조는바뀌어도사회의존재방식에는변함

    이없다.최고의권위와최강의권력이한명의천자에집중되어세상을지배한

    다.이전일적지배제도에가장유용한것이공맹의도(유교)였기에오로지그것

    만을세상에전했던것이다.(『문명론의개략』제2장)

    이글을읽으면후쿠자와의전제적중국론은천황제국가론에대한암시적

    은유가아닐까라는생각도든다.신성(神聖)천황을받들어모시는메이지국가

    는기본적으로전제적제국인중국과아무런차이가없지않은가?더구나중국에

    는왕조의교체가있지만일본에서는일계(一系)의천황이여전히존재하고있

    다.후쿠자와의문명론이미토학(水戸学)의국체론이나복고적천황친정론(天皇

    親政論)에대한대항의식을가지고있었다는점을생각해보면,전제적중국론이

    천황제국가론을암시적으로은유하고있었을가능성을부정할수없다.그러나

    그논의는후쿠자와론에서다룰문제이다.여기서는근대여명기의일본인들이

    제법이른시기부터후쿠자와가그려낸정체된전제적제국으로서의중국이미

    지의영향하에있었다는점을언급해두고자한다.

    그런데전제적제국으로서의중국의정체성을말하는후쿠자와의문명

    론은기조(FrançoisP.G.Guizot,1787~1874)의『유럽문명사』(Histoiredela

    civilisationenEurope,1828)와버클(HenryT.Buckle,1821~1862)의『영국문명

    사』(HistoryofCivilizationinEngland,1857~1861)를전제로한일종의‘번역의

    언어’로이루어져있다.나는이점에관해여기서부정적으로말할생각은없다.

    오히려후쿠자와가‘번역의언어’를통해서양근대문명에입각한근대일본의문

    화적문자언어를창출했다는점을이야기하고자한다.일찍이노리나가의국학

    적와분은‘한’(漢)을‘일본’과다른것으로변별하고배제했다.이제서양에터잡

    은후쿠자와의‘번역의언어’는정체된‘지나’(支那)를기술하여그것을문명적

    진보의반대이미지로재구성해간다.후쿠자와의이러한‘번역의언어’야말로근

    대일본의정통언어였다.그것은근대일본지식인의언어이기도했다.7)

  • 일본비평 6호158

    특집시론

    3. ‘동아’의 세계

    근대국가로의이행에성공한일본은동아시아에서의문명적중심의위치를자기

    쪽으로끌어당겼다.나는10년전,세기전환의시기에‘동아’라는지역적호칭에

    관해고찰해본적이있었다.‘동아’라는지역적호칭의성립과동아시아에서의

    문명적중심의이동은긴밀한관계를맺고있다.

    중국을중심으로하여이제껏만몽(滿蒙)이라불렸던중국동북부,한반도,

    일본열도,나아가류큐에서타이완을잇는도서지역,그리고월남이라불렸던베

    트남에이르는지역이‘동아·동아시아’로불리고,이지역에서의문화가‘동아문

    화권’으로회자된다.그러나‘동아’나‘동아문화권’이라는말은과연원래부터있

    었던말일까?『겐카이』(『言海』,1891)8)를보더라도,‘동양’이라는어휘는있어도

    ‘동아’는없다.‘동아’는비교적최근에생겨난용어이다.나는앞에서이지역을

    설명하면서‘중국을중심으로하여’라는표현을썼는데,‘동아’의세계란원래중

    국을중심으로한정치적·문화적세계이다.정치적으로는중화제국에책봉관계

    로포섭된세계이고,문화적으로는중국문화권또는한자문화권이라불리는세

    계이다.그래서중국에서는‘동아’라는호칭이생겨나지않는다.하물며‘동아문

    화권’을말할일은더더욱없다.따라서‘동아’또는‘동아문화권’은중국의주변에

    서기존의‘중화적세계’를부정하고전유하는표현이다.다시말하면,이지역에

    서의문명적중심이중국에서일본으로넘어왔다는것을강렬하게의식했던근

    대일본에서나온표현인것이다.따라서‘동아적세계’란일본제국과함께성립

    한것이라고할수있다.9)

    이‘동아’라는지역개념이새롭게이념성을띠고선전되기시작했던것이쇼

    와(昭和)의중일전쟁시기였던것이다.

    7) 국제적 관계, 동서의 문명론적 관계 속에서의 근대 일본의 민족주의적 국가 성립은 지극히 언어론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8) 메이지시대에 오쓰키 후미히코(大槻文彦, 1847~1928)가 편집한 일본어사전으로서, 일본 최초의 근대적 일본어사전이

    다.—옮긴이

    9) ‘동아’라는 지역개념의 성립에 관해서는 「昭和日本 ‘東亜’の概念」(『‘アジア’はどう語られてきたか』, 東京 : 藤原書店, 2003)을 참조하라.

  • 일본 지식인과 중국 문제

    159

    4. 중일전쟁과 ‘동아’의 이념

    중일전쟁은중국과일본사이에서발생한‘사변’이아니라,일본이중국대륙에전

    면적으로군사개입을한‘전쟁’이었다.쇼와16년(1941),태평양전쟁이일어나려

    던무렵,그러니까중일전쟁이4년째로접어든바로그해에중국본토에투입되

    어있었던일본육군의총병력수는약138만이었다고한다.이수는육군의총동

    원수의65%에달하는것이었다.10)그럼에도불구하고일본은중국대륙에대한

    이대규모군사개입을전쟁이라부르지않고‘지나사변’이라고불러왔던것이다.

    일본이중국을명시적으로제국주의적야심의대상으로삼았던것은러일전

    쟁(1904~5)이후이다.일본은한국을강제로병합(1910)하여만주로의진출을

    위한교두보를구축했다.경제공황과함께시작된쇼와일본은안팎의폐색상황

    을타개하기위해만주사변(1931)으로돌진했다.이사변을계획하고수행한것

    은관동군청년장교들이었다.이후쇼와일본은몇차례의쿠데타를거쳐군부파

    시즘의양상을강화해갔다.그리하여1937년7월7일의루거우차오(蘆溝橋)에

    서의발포사건이정부의불확대방침에도불구하고중국본토에서의전면적전쟁

    으로전개되어갔던것이다.일본측이‘지나사변’(支那事変)이라고부른이전쟁

    은어떤의미에서든정당성이결여된전쟁이었다.100만이넘는병사들은전쟁

    의이유도목적도종착점도알지못한채중국대륙의전장으로끌려갔던것이다.

    ‘전쟁’이라부르지않았던이전쟁의목적을고노에후미마로(近衛文麿,

    1891~1945)수상은“제국이희구하는바는동아영원의평화를확보할수있는

    신질서를건설하는데에있다”(「동아신질서성명」,1938.11)는말로표현했다.고

    노에가말한‘동아신질서의건설’이라는전쟁목적은기성사실로서의제국주의적

    전쟁에사후적으로덧붙인정당화의논리이다.물론,이시기에‘신질서의건설’

    을말한데에는전쟁의종결까지포함한정치전략적인의도도반영되어있었다.

    어쨌든‘동아신질서의건설’이라는전쟁목적의이념화와그구체화의구상은정

    권담당자고노에를뒷받침한정치집단인쇼와연구회(昭和研究会)11)에모인지

    10) 纐纈厚, 『日本は支那をみくびりたり—日中戦争とは何だったのか』, 東京 : 同時代社, 2009.11) 쇼와연구회는 1933년에 설립된 고노에 후미마로의 정책연구단체이다. 1940년 11월에 폐지되었다. 단, 정식으로 발족

  • 일본비평 6호160

    특집시론

    식인들에의해제출된것이었다.그지식인이란정치학자로야마마사미치(蝋山

    政道,1895~1980),철학자미키기요시(三木清,1897~1945)등을말한다.나아

    가공산주의자였던오자키호쓰미(尾崎秀実,1901~1944)나현대중국을가장정

    확히파악하고있었던저널리스트다치바나시라키(橘樸,1881~1945)등이이들

    을지원했다.

    전쟁이수행되고있었던지역에서의신질서의형성이란,전쟁당사국이전쟁

    목적으로늘제창한슬로건이었을것이다.쇼와10년대일본을대표하는뛰어난

    지식인들이중국대륙에서의이유없는전쟁에이유를덧붙이는작업,혹은‘불의’

    의전쟁에서무리하게‘정의’의의미를찾아내는작업을수행하고있었던것이다.

    그들은중국에서의전쟁을‘동아’에서의신질서형성을위한전쟁으로규정하고

    그신질서가구현될구성체를‘동아협동체’라부르고있었다.‘동아’란바로일본

    이중국을중심으로한지역을재구성하기위해제출한지정학적개념이었다.이

    점은틀림없는사실이다.정치학자는‘동아협동체’를제1차세계대전이후영미

    적세계질서의재편성이라는세계적정치과정속에위치시켰고,철학자는유럽

    중심적세계사의전환이라는역사철학적인의미를거기에부여했다.

    그러나중일전쟁기일본논단을풍미한이‘동아협동체’론에는본질적인아

    포리아가포함되어있었다.그것은‘민족주의’라는아포리아이다.중국에서의일

    본의전쟁수행이중국의민족의식을폭넓게각성시켰고중국민족이라는항일

    주체를만들어낸다.12)나는몇년전국회도서관에서중일전쟁기잡지목차에서

    ‘동아협동체’론을찾다가의외의사실을발견했다.일본지식인이‘지나사변’의

    의의를분식(粉飾)하던논설,즉‘동아협동체’론을게재한그잡지에후스(胡適,

    1891~1962)의「항일전의의의」(『文藝春秋』1938.1)가실려있고,마오쩌둥(毛

    澤東,1893~1976)의「지구전의의의」(『改造』1938.10)가실려있었던것이다.

    후스는거기에서항일전을통해중국은민족적통일을달성하고있다고주장했

    고,마오쩌둥은항일전의정의가전국적단결을불러일으켜승리가확실해졌다

    수속이 취해진 것은 1936년 11월이다. 주재자는 고토 류노스케(後藤隆之助, 1888~1984)였다.—옮긴이

    12) 이것을 당시의 중국정세론이나 동아공동체론 속에서 분명히 지적했던 것이 바로 오자키 호쓰미였다.

  • 일본 지식인과 중국 문제

    161

    고말하고있다.쇼와13년(1938)이라면중일전쟁이시작되어(1937.7)난징공략

    (12월)의소식을듣고국민이환호했던바로그이듬해이다.이시기일본의잡지

    는이전쟁을통해항전주체로서의중국민족이분명히등장하고있다는것을알

    리고있었던것이다.잡지편집자의식견이이시기까지는그나마겨우겨우지면

    에나타날수있었던것일까?그러나그들의식견과노력을통해겨우알려질수

    있었던‘중일전쟁의사실’,즉항전주체로서의중국민족이분명히존재한다는사

    실은극히소수를제외하고는일본지식인일반의주의를끌지는못했다.

    항일전을통해형성된중국의민족주의에주의를기울였던것은공산주의자

    였던오자키호쓰미와아시아주의자인다치바나시라키등극히소수의지식인

    들이었다.그리고중국공산당이지도하는반제·반봉건투쟁을거치면서중국인

    민의강고한민족주의전선이성립하고있다는점을인식하고있었던이들역시

    이소수의사람들뿐이었다.

    5. 중일전쟁은 끝났는가?

    중국이란쇼와일본의문제였다.쇼와일본의국가적운명,즉국가가어디로나아

    갈지그역사적귀추를궁극적으로규정하는것은중국문제였다.쇼와10년대에

    는중국문제가중일전쟁이라는최악의군사적전개를보이기에이르렀다.그것

    은어떤이유도아무런비전도찾아볼수없는전쟁이었다.일본은중국대륙에서

    본격적인군사적전개를수행했지만군부도정부도그리고국민도그것을‘사변’

    이라불렀을뿐,‘전쟁’이라고하지않았다.이‘지나사변’이라는전쟁은단기전이

    라는기대를저버리고장기화되어말그대로진흙탕으로빠져들었다.중국대륙

    에서군사적으로한계에부딪힌이사태속에서일본은1941년12월8일,미국과

    영국을상대로전쟁을개시했다.미국과영국을상대로한이개전을통해중국대

    륙에서의일본의모호한,이유도없는전쟁은새삼정당화되었다.이개전을통해

    중국과의전쟁을정당화했던것은단지정부나군부만이아니었다.국민도그랬

    다.이제까지사람들을눌러왔던답답한기분은이개전으로한결밝아졌다.당

    시아홉살의소년이었던나는라디오에서개전소식이흘러나왔던그아침의,주

  • 일본비평 6호162

    특집시론

    위를감돌았던그이상한흥분을여전히생생하게기억하고있다.

    철학자시다쇼조(信太正三,1914~1972)는교토대학철학과를졸업하고곧

    바로소집되어중국전선에던져졌다.쇼와16년(1941)봄이었다.그해12월,시

    다는전투훈련중부상당해바오딩(保定)의육군병원에입원했다.당시미영을

    상대로한개전의소식이육군병원에전해졌다.이소식이전해지자“병원전체가

    이상한흥분으로달아올랐고”,병실의한부상병은“해냈어!”라고미친듯이부

    르짖었다고한다.13)중국대륙에서전쟁에종사하고있던병사들이미영과의개전

    소식을듣고환호했던것이다.“해냈어!”라고미친듯이부르짖었다는것은기묘

    하기까지하다.그건그만큼그들이대륙에서종사하고있던그전쟁자체가매우

    복잡한심사를불러일으키고있었음을말해준다.전선의병사도후방의국민도

    1941년12월의그날,이제정말‘전쟁다운전쟁’이시작되었다고느꼈던것이다.

    중국과의‘전쟁’은계속‘사변’이라는가짜이름으로불렸다.말하자면중일전쟁

    은국민의의식표면으로나오지못한채여전히감춰진‘전쟁’이었던것이다.

    그리고1945년의종전(終戰)도일본과그국민에게태평양전쟁의패전이었

    지중국대륙에서의패전은아니었다.누구나일본은미국에게패한것이라고생

    각했다.사실,미국은히로시마와나가사키에원자폭탄을투하했고일본의거의

    모든도시를불태웠으며일본을점령했고또전후처리도주관했다.그결과,‘전

    쟁’의결착은국가로서도국민의의식속에서도오로지미국과의사이에서만이

    루어졌다.일본의패전이라는것이실상중국대륙에서벌어진진흙탕전쟁에서

    의패배이기도했다는점을정부도국민도외면하려했다.‘전쟁’이라고불린적

    없었던중국대륙에서의전쟁은태평양전쟁의패전에의해결착되어버린것이

    다.그러나그것은미일간의결착이었을따름이지중일간의결착이었던것은아

    니다.

    일본의패전과동시에격화된중국내전과인민중국의성립이후벌어진한

    국전쟁으로인해일본과중국간에진정한의미의결착은유보되었다.전후의중

    13) 信太正三, 『私の戦争体験記』, 東京 : 理想社, 1968.

  • 일본 지식인과 중국 문제

    163

    일관계는오랫동안결착이유보된상태로지속되었다.1972년의중일국교회복

    도본질적인결착이이루어지지않은채,또는결착을시도하려고도하지않은

    채,양국간관계의회복에만급급했다.그결과,일본과중국사이에는오로지경

    제적인상호관계만이깊고넓게진전되어왔던것이다.

    6. 일본과 중국의 냉담한 관계

    중일간의본질적인결착이이루어지려면,과거의역사인식과의관련속에서앞

    으로아시아의평화를어떻게확립할것인가라는문제에대해합의가도출되어

    야할것이다.14)우리는이웃중국과어떻게아시아의평화를확보해갈것인가?

    이것이헤이세이(平成)일본의평화의운명과연관된본질적인문제라할것이다.

    그러나일본은,그리고중국역시이본질적인문제를외면한채,다시말해아시

    아에서의평화라는상호의국가적운명과관련된본질적인문제를외면한채,오

    로지경제적인상호관계를심화시키는데에만몰두하고있다.이미정치군사적

    으로대국이된중국은21세기현재세계굴지의경제대국으로등장하고있다.

    그중국을눈앞에둔채우리는쩔쩔매고있다.이대국중국은아시아의평화를

    함께실현해갈이웃이될수있을까?우리는현재이웃중국의정치적현상에관

    해심각한위구심을가지고있다.그위구심이란민중적요구를국가의정치과정

    에매개하는민주적회로를완전히차단하고체제변혁에의가능성을공산당이

    외의다른세력에게는전혀허용하지않는일당독재의국가적정치상황에대한

    것이다.중국의그러한정치상황이중국의미래만이아니라우리동아시아의미

    래도위태롭게할수있다는것,이러한점을솔직하게털어놓을수있는관계를

    우리는중국과의관계속에서만들어오지못했다.15)그것은어쩌면우리가중국

    과의본질적인결착을이루어내지못해온탓일지도모른다.중국과의관계에서

    14) 나는 이 합의가 있어야 중일 간의 본질적인 우호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15) 2010년 10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류샤오보(劉曉波, 1955~ )를 비롯하여 중국에서의 공민적 권리를 요구하는 인사들

    에 대한 중국의 공산당정부의 탄압에 일본정부는 전혀 항의하지 않는다. 정부만이 아니다. 일본의 대다수 지식인과 연

    구자들은 이 문제에 침묵하고 있다. 류샤오보 문제와 관련된 나의 발언은 『天安門事件から‘08憲章’へ』(東京 : 藤原書店, 2009)를 참조.

  • 일본비평 6호164

    특집시론

    우리는본질적인이웃관계를만들어오지않은것이다.경제적관계를아무리심

    화시킨들일본과중국의관계는본질적으로냉담한관계이다.왜그럴까?중국문

    제에관한고찰은바로이물음에서부터시작되어야한다.역사를거슬러올라가

    는나의고찰도이물음에서시작되었다.

    서양의선진문명국가에기초를둔근대일본의국가건설은중국을정체된

    아시아속에위치시키는것이기도했다.청일전쟁과러일전쟁을거쳐,아시아에

    서하나의제국을형성해간일본은중국을제국주의적인야심의대상으로삼아

    왔다.중일전쟁은제국일본과중국간의근대관계사에서최악의귀결이었다.이

    중일전쟁에다다른일본근대사의과정속에서중일관계의미래에결부될수있

    을,희망이라부를수있을만한무언가를과연우리는발견할수없는것일까?우

    리에게이과정일체는‘마이너스의유산’으로서만의미를갖는것일까?두말할

    필요도없이,‘마이너스’를‘마이너스’로인식하는것은매우중요한일이다.그러

    나나는그과정에서부족하나마우리의희망을이어갈수있는이들의족적을

    찾아낼수있다고생각한다.다시말하면,신해혁명(1911)으로부터시작된중국

    근대화의과정에서그어려움과고통을함께하고자했던일본인들의족적이다.

    ‘함께한다’는것은중국의변혁의고난을함께하는것인동시에,그변혁을일본

    의변혁으로삼아함께한다는것을의미한다.나는이렇듯중국과일본의변혁을

    함께한이들을좋은의미에서‘아시아주의자’라고부르고자한다.기타잇키(北一

    輝,1883~1937),다치바나시라키,오자키호쓰미등이바로그런이들이다.16)

    7. 전후 일본과 중국

    전후일본에는친중국파라부를수있을지식인들이많지않은가,그들이야말로

    일본과중국사이의본질적인관계를구축하기위한초석을이룬사람들이지않

    았는가등,힐문이라고도할만한목소리가내귀에도들린다.중국연구자다케

    우치요시미(竹内好,1910~1977)로대표되는친중국파지식인들은냉전하미

    16) 내가 쇼와이데올로기연구회에서 발표하고 잡지 『현대사상』(現代思想)에 연재(2011. 9~ )하고 있는 「중국론을 읽는다」

    (中国論を読む)는 이런 인물들의 족적을 밝혀 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 일본 지식인과 중국 문제

    165

    일관계를기축으로하는전후일본의국가전략을비판하며대안적인길을제시

    해왔다.인민중국의승인및아시아각민족들과의연대로이루어진,아시아민족

    주의라칭할만한길이바로그것이다.특히마오쩌둥의신민주주의적혁명과그

    성과로성립된‘인민중국’의전면적승인을특징으로하는다케우치의중국관은

    전후일본의중국연구자를비롯한혁신파지식인들사이에서널리공유되었다.

    그것은그들의세계인식,역사인식에지대한영향을미쳤다.17)마오쩌둥의혁명

    과인민중국에의강력한지지에기반한이중국관은전후일본에서의‘인민중국

    의특권화’를불러왔다고생각한다.‘인민중국’은그들의세계인식,역사인식에서

    기축으로서특권화되어갔던것이다.그렇다면이‘인민중국의특권화’는일본과

    중국이본질적인관계를구축하는데에과연긍정적인의미를가졌던것일까?나

    는이점에대해매우회의적이다.전후의냉전구조로인해일본의혁신파지식인

    들사이에서강조된‘인민중국의특권화’는지금도여전히계속되고있다.21세

    기로접어든현재,이‘인민중국의특권화’는하나의당이지배하는국가관료주

    도의자본주의대국인중국을타성적으로승인하도록이끄는것일뿐이라고생

    각한다.그것은일본과중국이본질적인관계를맺는데에오히려방해가되고,

    본질적인관계를맺어서해소해야할허위와억압의사태를은폐한다.따라서그

    것은내가20세기중일관계사에서계승해야할것으로발견한‘아시아주의’와는

    완전히다르다.내가말한‘아시아주의’는일본과중국이자기혁신을함께함으로

    써찾아가는진정한연대이다.일본과중국의본질적관계는바로이연대에있다

    고할수있다.

    17) ‘탈아입구’(脫亞入欧)가 문명화된 근대 일본의 핵심축이라고 한다면 다케우치 요시미의 ‘중국주의’는 이에 대항하는 이

    단적 축을 구성한다. ‘그 어떤 것도 아닌 일본’이라는 자기부정적인 낭만파적 반어의 속성을 지닌 다케우치의 ‘중국주의’

    적 비판은 전후 50년대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近代の超克’とは何か』(東京 : 靑土社, 2008) 참조.

    * 이 글의 원문은 일본어로 작성되었으며 김인수(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서울대 일본연구소 HK연구보조원)가 번역하였다.

    [특집시론] 일본지식인과 중국문제1. 중국의 ‘이국’(異國)화2. 정체(停滯)된 중국3. ‘동아’의 세계4. 중일전쟁과 ‘동아’의 이념5. 중일전쟁은 끝났는가?6. 일본과 중국의 냉담한 관계7. 전후 일본과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