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1 201606 2016년 6월호 통권 237호 민족문제연구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 토지조사사업 시론 · 2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에 부쳐 초점 · 5 동학에서 사월혁명에 이르는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기념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헌법정신〉 심포지엄 열려 사진으로 보는 연구소 소사 · 8 역사정의를 갈망하는 회원들의 대동한마당, 회원수련회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 15 6·10만세운동의 총지휘자 권오설 열전 친일파 · 21 ‘미스터 간도특설대’ 김찬규 아니 김백일 돌려보기 ·26 이런 ‘반공주의자’ 펄 벅 경희대는 왜 신흥무관학교 흔적과 뿌리를 없앴을까 기증자료소개 · 36 식민지 비망록 · 37 근대사의 현장마다 단골로 등장했던 어느 일본인 순사의 일생

201606 - 민족문제연구소 · 2016. 6. 16. · 1 201606 2016년 6월호 통권 237호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Upload
    others

  • View
    2

  • Download
    0

Embed Size (px)

Citation preview

  • 1

    2016062016년 6월호 통권 237호

    민족문제연구소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

    민 족 문 제 연 구 소 회 보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 토지조사사업

    시론 · 2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에 부쳐

    초점 · 5동학에서 사월혁명에 이르는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기념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헌법정신〉 심포지엄 열려

    사진으로 보는 연구소 소사 · 8역사정의를 갈망하는 회원들의 대동한마당, 회원수련회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 156·10만세운동의 총지휘자 권오설

    열전 친일파 · 21‘미스터 간도특설대’ 김찬규 아니 김백일

    돌려보기 ·26이런 ‘반공주의자’ 펄 벅

    경희대는 왜 신흥무관학교 흔적과 뿌리를 없앴을까

    기증자료소개 · 36

    식민지 비망록 · 37근대사의 현장마다 단골로 등장했던 어느 일본인 순사의 일생

  •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2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 토지조사사업

    임시토지조사국 사무원 및 기술원 양성소 졸업생 사진, 1910년대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고자 행정·측량 분야의 전문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했다.

    전라남도 영암지역의 토지조사 관련 문서, 19111911년 작성된 전라남도 영암군 곤일종면 학송리의 토지조사 관련 문서이다. 토지소유자는 대부분 목포와 해남에 거주하는 일본인 대지주들을 비롯한 부재지주였다.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 1

    일제는 강제병합 직후 식민지 재정기반 확충과 수탈을 위한 토대 구축에 착수했다. 그

    핵심 사업이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일제는 개항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지질 조사 등 사전

    준비를 해왔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에는 일본인 기사를 초빙해 측량기술을 가르치

    면서 전면적인 지적조사에 대비했다.

    한편 일본인 지주·자본가에 의한 토지매수는 통감부의 묵인과 방조 아래 조직적으로 추

    진되었다.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과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 1908년 「토지가옥소

    유권증명규칙」을 제정해 한국 내 일본인 토지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했다. 이어 1910년 3월

    토지조사국을 개설했고 병합 후인 10월 조선총독부 내에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해 본격

    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시작했다.

    1910년 9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2,400여 만 원의 경비를 들여 전국적으로 시행된 토

    지조사사업의 핵심은 토지소유권·토지가격·지형지모(地形地貌) 조사였다. 토지소유권

    조사는 각 필지별 토지소유권 및 경계를 사정(査定)하여 토지등기제도를 확립하기 위

    한 기초 장부를 만드는 것이고, 토지가격조사는 전국의 땅값을 조사하여 지세(地稅)부

    과를 위한 표준을 만드는 것이며, 지형·지모조사는 전국적으로 지형도를 작성하는 사

    업이었다.

    그러나 토지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고 신고 기

    간도 매우 짧았다. 방법을 몰라 기한 내에 신고하지 못한 농민이 많았고 구한국정부·왕실

    소유(역둔토·궁장토)를 포함한 공전(公田) 100만 여 정보는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지주들은 큰 혜택을 보아 식민지지주제가 정착하게 된 반면 실질

    적으로 토지를 경작해 왔던 다수의 농민들은 영세 소작민 또는 화전민·임금노동자로 전

    락하였고,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하는 유랑 행렬이 이어졌다. 조선총독부는 전 국토

    의 40%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하게 되어 한국 내 최대의 지주로 자리매김했으

    며 재정수입 또한 크게 늘어났다.

    조선총독부는 이 토지의 일부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 지주들에게 무상

    또는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일제는 근대적 토지제도의 확립과 생산력 증진을 토지조사사

    업의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식민지 재정정책의 토대와 수탈 구조를 확립하기 위

    한 것이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식민통치를 위한 경제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 [ 시론 ]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에 부쳐

    조 민 평화재단 평화교육원 원장 / 전(前) 통일연구원 부원장

    역사 앞에 선 미국 대통령

    오바마(B. 0bama) 미국 대통령이 일본 히로시마(廣島)를 방

    문하여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지난 5월 27일 오바마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원폭 희생자 위령비 앞에 흰 카네이션 화환을 바쳤

    다. 1945년 8월 6일 미군 폭격기가 히로시마 상공에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투하한 지 71년 만에 처음으로 현직 미국

    대통령이 그날 희생자들을 위해 묵념했다.

    임기 말을 앞둔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많은 관심과 기대를 자아냈다. 한일

    간 과거사와 위안부 문제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히로시마 방문은 동

    아시아 역사의 엉킨 실타래의 한 가닥을 푸는 희망의 메시지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식민

    지 피억압 민족의 고통과 희생을 헤아리고 침략과 야만의 과거를 성찰하면서, ‘전쟁없는

    세계’와 평화의 메시지를 보냈더라면 하는 큰 아쉬움을 남겼다.

    오바마 대통령은 약 17분간의 연설에서 "우리는 10만 명 이상의 일본인 남성과 여성, 아

    이들, 수천 명의 한국인, 십여 명의 미국인 포로들을 애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인

    원폭 피해자 숫자가 실제로는 2~3만 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오바마

    는 '수천 명'이라고 언급해 논란을 빚었다. 더욱이 원폭 희생자들의 위령비에 헌화했지만

    바로 그곳에서 불과 150m 떨어진 한국인 위령비는 찾지 않았다. 한국인 희생자는 일본

    이 감추고 싶어 하는 ‘숨겨진 피해자’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인 원폭 희생자들의 존

    재를 언급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그의 역사의식과 진정성의 한계를 엿보게 하

    는 대목이다.

    일본은 전범국가다. 그럼에도 일본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이웃 아시아 국가들에 대

    2 201606

  • 한 침략과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인정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종전 후 침략국 일

    본을 곧장 응징하지 않고 오히려 껴안은 데에서 비롯된다. 태평양 전쟁 승전국 미국은 ‘도

    쿄재판’(1946.5~1948.11)에서 전쟁 책임을 강하게 묻지 않았다. 이런 ‘솜 망치 식’ 재판으

    로 당시 전범들은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자위(自衛)를 위한 전쟁이었다’며 전

    쟁 책임을 회피했고, 그 후 이러한 ‘자위론’에 기반한 책임회피론이 역사 교육의 기본 방

    향이 되었다.

    그 결과 대개의 일본인은 그야말로 가해자임을 완전히 잊고 거꾸로 된 인식인 전쟁 피

    해자 의식을 갖게 되었고, 특히 원폭 문제에서 피해자 의식의 결정판을 보여 주고 있다.

    영리한 정치인 아베(安倍) 총리는 오바마의 히로시마 이벤트를 계기로 ‘피해자 코스프레’

    를 연출했다.

    오바마의 유산(legacy)과 대중(對中) 포위 전략

    미국 최대의 동맹국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부흥했다. 한반도에 포연(砲煙)이 자욱하던

    1951년 9월 미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양국은 동맹 관계에 들어

    섰다. 미국은 한국전쟁으로 본격화된 냉전에서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를 견제하

    는 전략적 파트너로 일본을 일으켜 세웠다. 소련은 사라졌고 중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 미국은 중국을 포위․압박하기 위해 일본과 더욱 굳게 손잡고, 우리 한국을 끌어들

    이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임 중 외교적 유산(legacy)으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미

    국-쿠바 국교정상화, 이란 핵개발 중단 등을 내세운다. 미국의 경제 및 안보전략의 핵심

    은 ‘아시아 재균형 정책’으로, 이는 대중 전략으로 나타난다. 오바마는 히로시마를 찾기 전

    에 먼저 하노이를 방문하였다. TPP 12개 가입국 중 하나인 베트남에 협정 이행을 강도 높

    게 촉구하는 한편 베트남 무기 금수 조치를 해제했다. 그동안 중국 포위전략의 일환으로

    동남아 국가들을 끌어들이던 중 하노이를 찾아 그의 외유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히로시마 이벤트와 오바마의 자기기만

    오바마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그는 지난 2009년 4월 5일 프라하 연설에

    3

  • 4 201606

    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선언하고 그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사실 그때까지 평화에 대

    한 특별한 공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핵무기를 없애겠다는 선언만으로 노

    벨 평화상을 받았으니 ‘후불 약속’ 형태로 선(先)지급된 상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약속

    을 지키지 않았다.

    북한 비핵화는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로 포장된 사실상의 ‘전략적 무대책’으로 실

    패하고 말았다. 오바마의 미국이 ‘핵무기 없는 세계’를 진정으로 추구했더라면 북한의 핵

    보유 의지는 꺾일 수 있었고, 핵개발은 미뤄지거나 포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북한의

    핵보유는 결코 용인될 수 없지만, 오바마의 핵감축에 대한 뻥튀기와 무책임한 말은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했던 그는 미국의 억지력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핵탄두의 지속적인 현대화를 추진해왔고 핵무기체계 고도화를 위한 미국 국방예

    산의 엄청난 증액을 보장했다.

    변한 것은 핵군축이 아닌 핵능력 강화였다. 오바마는 스스로를 속이고 세상을 속였

    다. 오바마가 백악관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를 방문한 것은 그의 빈말에

    대한 스스로의 자기변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베가 피해자 의식의 자위행위에 도

    취되어 있듯이, 오바마의 히로시마 이벤트는 스스로 위로하고 싶은 자기기만 행위에 불

    과했다.

    우리는 더 이상 세계사의 피동적 존재로 머물 수는 없다. 이제 패권국가의 ‘갑(甲)질’

    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반도의 주인인 우리가 우리 운명의 주인이 되는 길은 통일뿐이다.

    북한 비핵화는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로 포장된 사실상의 ‘전략적 무대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오바마의 미국이 ‘핵무기 없는 세계’를 진정으로 추구했더라면 북한의 핵보유 의지는 꺾일

    수 있었고, 핵개발은 미뤄지거나 포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북한의 핵보유는 결코 용인될 수

    없지만, 오바마의 핵감축에 대한 뻥튀기와 무책임한 말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 5

    동학에서 사월혁명에 이르는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지난 5월 17일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근현대사기념관의 개관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지역 주민과 박원순 서울시장, 박겸수 강북구청장 등 정관계 인사들과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이화 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장 외 다수의 내빈이 참석하였다. 박원순 서울시

    장은 이곳에서 많은 교육이 이루어져 민족의식을 가지면 사회가 바로 설 것으로 기대하며, 기념관 소장 유물이 많아지면 박물관을 추가 건립하자는 의사를 밝혔다. 임헌영 소장은 축사에서 현 정부의 국정교과서 편찬 문제를 지적하며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역사를 온몸으로 배울 것을 강조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동학농민운동부터 4․19혁명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3개 공간으로 나누어 있다. A관에서는 조선 민중이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한 과정을 보여준다. B관은 영상존으로 4·19혁명을 겪은 주인공이 식민지시기와 해방공간을 살아온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영상기록으로 보여준다. C관에서는 해방정국을 통해 민주공화국으로 재건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과 50년대 민주화 운동을 거쳐 4·19혁명이 일어난 과정을 전시하였다. 또한 개관 기념 특별전으로 기념관 인근에 묘역이 있는 시대의 선구자로 ‘초대(初代)’ 길을 걸은 이준 열사, 이시영 초대 부통령,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신익희 제헌국회부의장을 주제로 한 시대의 선구자들, 역사에 디딤돌을 놓다가 9월 18일(일)까지 전시된다.

    개관 기념 특별행사의 하나로 지난 24일에는 서울 강북구 신일중학교 대강당에서 관내 12개 중학교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올바른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역사 골든벨’이 개최됐다. 그리고 6월 2일에는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헌법정신’을 주제로 기념 심포지엄이 열렸다.

    개관 이후 근현대사기념관에는 인근 지역 주민과 학생들의 방문과 관람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강북구 내 학교장단을 시작으로 강북구 도시관리공단, 서울시 건축위원회의 단체관람이 있었으며, 미아초등학교와 우이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과 헬렌켈러의 집·프란치스코의 집에서 다녀갔다. 인근 초·중등학교의 방문이 많은 만큼 관람 대상의 수준별 해설과 장애인을 위한 시설 보완을 검토하고 있다.

    초점

  • 6 201606

    향후 기념관에서는 청소년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창의적 체험 교육 활동을 경험하게 하고 자율학기제에 따른 학교 교육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평생 학습 추세에 맞춘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자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국 근현대사 시민 역사 강좌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이다. 현재 전시 해설은 전화 예약을 우선으로 10

    인 이상의 단체관람의 경우에 진행하고 있으나 앞으로 자원봉사자를 중심으로 전시 해설 전문 인력을 양성할 계획이다. 근현대사기념관은 시민과 함께 하는 근현대사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서 역할을 다할 것이다. (관람문의: 02-903-7580)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사 최인담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기념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헌법정신〉 심포지엄 열려

    지난 6월 2일 연구소와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공동 주최하고 강북구청이 후원한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헌법정신〉 심포지엄이 덕성여대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이 심포지엄은 5월 17일 문을 연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출범을 기념해 열린 학술행사다. 위탁운영기관으로

    지정된 우리 연구소는 동학농민운동부터 4월혁명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실물자료・사진자료・영상 등을 통해 기념관을 독립정신과 민주주의를 지키고 가꿔나가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심포지엄은 1,2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정요근 덕성여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1부는 이원복 덕성여대 총장의 환영사를 시작으로 오헌필 덕성여대 인문과학대학장과 임헌영 연구소장의 주최측 인사말,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격려사,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기조발제 순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기조발제를 통해 “독립운동의 지향성과 이념이 대한민국 헌법정신으로 이어졌다”는데 초점을 맞추어 이날 심포지엄의 의의와 큰 방향을 제시했다. 이만열 전 위원장은 특히 제헌헌법 제1조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고 제헌헌법의 균등사회 실현을 위한 방안도 삼균주의에 기초한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 토대가 되었으며, 현행헌법의 전문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분명히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 7

    심포지엄의 메인행사인 2부에서는 3개 주제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1주제 ‘초기 독립운동과 민주공화주의의 태동’의 발표자인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19세기 민주, 공화의 개념이 등장한 이래 민주와 공화는 동일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졌고, 국망 이후에는 민주공화주의가 임시정부 수립 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의 이념 또는 신념으로 확산되면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민주공화제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밝혔다. 2주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념적 지향’을 발표한 이준식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관장은 최근 뉴라이트가 ‘건국강령’을 왜곡 해석하고 일방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향한 이념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준식 관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 당시 민주주의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시대적 추세였고 나아가 임시정부가 지향한 것은 민주, 평등, 자유였으며 이것이 제헌헌법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뉴라이트와 보수정권이 주장하는 임시정부의 자유민주주의 지향은 역사적 허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마지막 3주제 ‘제헌헌법에 나타난 평등권의 역사적 연원’의 발표자로 나선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는 대한민국의 이념적 토대는 독립운동세력이 끈질기게 추구해 왔던 공화주의와 평등주의 이념이었음을 강조하고, 이는 대한민국이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탄생한 독립국가로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무엇보다도 중시했던 것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주제발표 후에는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좌장), 박수현 연구소 연구실장, 이나미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연구위원, 박찬승 한양대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한 가운데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토론은 민주와 공화, 공화주의와 공화제, 인민과 민중 등 개념문제와 발표자들이 소략하게 다룬 부분이나 보완해야 할 사항 등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정신의 핵심이 민주공화주의이고 그 근원이 독립운동에서 비롯되었다는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이날 심포지엄은 최근의 학술행사로서는 보기 드물게 약 200여 명의 많은 청중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 박수현 연구실장

    내 손안의 친일인명사전

  • 8 201606

    역사정의를 갈망하는 회원들의 대동한마당, 회원수련회

    매년 여름이면 전국의 회원님들이 기다리는 행사는 단연 여름수련회입니다. 연초에 열리는 정기총회는 예결산 통과, 사업보고와 사업계획 발표 등 좀 딱딱한 분위기라면 수련회는 1박 2일 동안 참가자 모두 한마음 한몸이 되어 신명 넘치는 대동 한마당을 펼칩니다. 작년에는 메르스 때문에 수련회를 전격 취소했는데 적지 않은 회원님들이 여름이 아닌 가을수련회라도 열자고 하실 정도였지요.

    재작년 동학혁명 120주년을 맞아 전북 김제에서 열린 수련회에는 연구소 수련회 역사상 가장 많은 약 350명이 참가했는데 올해 제천 수련회에는 과연 몇 분이 오실지 자못 궁금합니다.

    연구소의 첫 수련회는 1995년 속리산 화양계곡에서 약 6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수련회에는 당시 광복회 경기도지부장으로 4년 후에 연구소 이사장으로 취임하게 되는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과 노동은 당시 목원대 음대 교수를 초청해 독립정신과 친일음악에 대한 강연도 들었습니다. 연구소 회원들의 학구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대동 한마당에 앞서 이이화, 서중석, 이찬근, 김동명 교수 등 역사, 경제, 정치 등 각 분야 전문가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 순서를 넣곤 했습니다. 그날 강연 주제는 밤새도록 이어지는 뒤풀이의 좋은 안주감이 되지요.

    사진으로 보는 연구소 소사 ·13

    2014년 여름수련회

  • 9

    여름수련회다 보니 집행부 입장에서는 항상 날씨가 가장 걱정입니다. 그래서 1박 2일 기간 중 빗방울이 조금이라도 내리면 천문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비난(?)을 듣곤 합니다. 수련회 이튿날은 그 지역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답사하곤 하는데 2006년 대전 산내골과 2008년 경산 코발트 광산처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집단 학살지를 답사했을 때가 많은 회원들에게 두고두고 깊은 인상이 남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간은 회원들이 정성껏 가꾼 충주연수원에서 진행했는데 매년 참가자들의 증가로 2012년부터는 넉넉한 숙박시설을 갖춘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또한 2012년부터는 연구소와 자매결연 단체인 큰들문화예술센터의 모든 단원들이 수련회에 참가하여 마당극과 뒤풀이 대동놀이를 전담해 주면서 질적으로도 한층 세련된 수련회가 되고 있습니다.

    끝으로 수련회 장소 결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해당 지부 또는 지회의 유치 의지입니다. 올해 제천 수련회 역시 오래전부터 제천단양지회에서 수련회 유치를 위한 꾸준한 로비(?)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직업, 지역, 나이는 다르지만 전국에 친일청산과 역사정의를 갈망하는 회원들이 이렇게 많음을 체감하면서 초면이라도 금세 동지가 되는 여름수련회는 분명 회원들에게는 강한 중독성 있는 행사입니다. 벌써부터 팔도에서 모인 역사독립군들이 외치는 ‘친일파 청산’의 함성이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2001년 여름수련회

    2000년 여름수련회

  • 10 201606

    단신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상임대표 이희자)는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아 천안 국립 망향의 동산에서 제6회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합동 추모제를 가졌다. 망향의 동상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자를 비롯한 해외동포들을 위한 추모시설이다.

    ▪ 서울중앙지검 조사2부(부장검사 정희원)는 5월 9일 박정희혈서조작설을 유포하는 등 연구소를 비방한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를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당초 무혐의 처분을 내렸지만 연구소가 낸 재정신청을 재판부가 이유있다고 받아들임에 따라 불가피하게 기소절차를 밟게 된 것이다. ▪ 일제 전범기업 후지코시 한국 2차소송 2차 심리가 5

    월 11일 서울 중앙지법에서 열렸다. ▪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은 5월 12일 강동시민연대 초청

    으로 ‘5‧18민주화운동의 의의’를 주제로 강연했다. 19일에는 광명 역사교사 아카데미에서, 24일에는 현대자동차 노조 아산지회에서, 26일에는 양산시 공무원 노조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강연했다. ▪ 한일과거청산네트워크는 5월 13일 1박 2일 일정으로

    천안 아힘나 평화학교에서 운영위원회와 워크숍을 개최했다. ▪ 임헌영 소장과 운영위원장단 그리고 연구소 실‧국장으

    로 꾸려진 집행위원회 회의가 5월 13일 연구소에서 개최되어 연구소 현안 등을 논의했다.▪ 지난 해 4월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세상에서 가장

    슬픈 도전’ 행사를 도왔고, 올해 2월에는 소녀상 지키기 플래시몹을 연출한 권성민 PD가 5월 13일 대법원에서

    MBC의 해고가 무효라는 확정 판결을 받았다. 권 PD는 2014년 5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자사인 MBC의 보도 내용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정직 6개월’ 징계를 받았다. 이후 비제작부서로 발령을 받은 후 ‘예능국 이야기’라는 제목의 만화를 통해 자신의 처지를 ‘유배’에 비유하는 등 회사의 조처를 비판했다가 해고를 당한 바 있다. ▪ 이준식 연구위원은 5월 18일 민주노총 대전본부 간부

    들을 대상으로 ‘한국노동운동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주제로 강연했다. ▪ 김민철 책임연구원은 5월 19일 전남 강진에서 열린 국

    사편찬위원회 지역사 워크숍에서 「식민권력의 촌락지배와 성전면의 ‘정책부락’」을 주제로 발표했다. ▪ 포럼 ‘진실과정의’(사무국 민족문제연구소)는 5월 20

    일 경희대 청운관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진단한다」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열었다. ▪ 용산구는 5월 20일부터 효창원 의열사를 상시 개방하

    기로 결정했다. 의열사는 김구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독립운동가 7분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990년 건립됐으나 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문을 닫아뒀다. 이번 개방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회원의 20년간에 걸친 숨은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방학진 사무국장은 5월 21일 양평 몽양기념관에서 열

    린 ‘탄신 130주년 기념 몽양 여운형의 날’ 행사에 근현대사기념관 홍보 부스를 운영했다. 홍보 부스는 이동수 만화가와 김호룡 캘리그라퍼가 행사에 참가한 어린이와 시민들에게 캐리커처와 즉석 캘리그라피를 써주어 많은 호응을 받았다.

  • 11

    ▪ 임헌영 소장은 5월 22일부터 30일까지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주선으로 시카고에서 뉴올리언스에 이르는 미국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 전남 강진 늦봄문익환학교 고등과정 2학년생인 이누

    리, 김강토 군이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연구소에서 인턴 활동을 했다. 늦봄문익환학교는 매년 ‘진로 맛보기’라는 이름으로 진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 내일여는역사재단(이사장 조광)이 시행하는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이 5월 24일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렸다. 올해의 수령자는 조건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교수로 군속의 강제동원 실태 파악과 전시 총동원체제 연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선정됐다. 연구소에서는 조세열 사무총장과 이준식 연구위원, 김승은 자료실장이 참석했다.▪ 강만길 지도위원,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신

    용옥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상임이사는 5월 25일 근현대사기념관을 둘러보고 기념관의 발전방향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이 자리에는 이준식 기념관 관장, 윤봉석 학예실장, 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 김승은 자료실장이 함께 했다. ▪ 박중기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명예의

    장이 5월 27일 제11회 임창순상을 수상했다. 박중기 명예의장은 고등학생 때부터 사회과학 공부모임인 암장을 꾸려 활동했다. 이후 4·19혁명의 열린 공간에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등에서 활동했으며, 1차 인혁당 사건 등에 연루되어 여러차례 옥고를 치뤘다. 현재는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 자문위원,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 민가협양심수후원회 지도위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고문, 4·9통일평화재단 이사, 통일뉴스 후원회장 등을 맡아 활동하고 있으며 우리 연구소에도 오랫동안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주고 있다. 2006년에 제정된 임창순상은 청명 임창순 선생이 평생 추구했던 평등·자

    유·인권의 실현과 평화·통일의 촉진에 학술 또는 실천으로 기여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수여하고 있다. 우리 연구소도 2012년에 제7회 임창순상을 수상한 바 있다. 시상식에는 조세열 사무총장과 방학진 사무국장이 참석해 축하를 드렸다.

    ▪ 연구소는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관람 및 애국지사 묘역 참배 행사를 5월 28일 기념관 일대에서 진행했다. 이 날 참석한 약 30여 명의 회원들은 기념관 전시물들을 둘러본 뒤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인 이명룡 선생의 묘소를 시작으로 신익희, 이준, 김병로, 이시영, 광복군 합동묘, 유림, 김창숙 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이날 탐방은 김시업 성균관대 명예교수(전 심산사상연구회장)와 박은석 강북문화원 사무국장이 맡아 진행했다.

    ▪ 황희두 청년문화포럼 회장과 국도형 (주)넛지스토리 대표가 5월 30일 연구소 방문했다. 이들은 현재 네이버 TV캐스트 열린사람들(tvcast.naver.com/peopleopener) 등을 운영하고 있는 청년 문화활동가들로 앞으로 연구소와 협력 방안을 모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 안산시흥지부(지부장 신대광)는 5월 4일 사할린동포 정착마을인 안산시 사동 고향마을아파트에서 ‘제7회 어버이날 한마당 나눔 잔치’를 진행했다. 고향마을아파

    지부지회 소식

  • 12 201606

    트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귀환한 사할린 동포 약 700명이 거주하고 있는 최대 규모의 정착지이다. 안산 시흥지부는 첫회부터 지역의 여러 단체들과 함께 이 행사를 주도적으로 진행해 오고 있으며 향후 이곳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대상으로 구술사업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 안성지회(준)는 5월 10일 안성 공도도서관에서 방학진 사무국장을 초청해 ‘문화로 본 일제잔재’를 주제로 대중강연회를 열었다.▪ 아산지회(지회장 이재윤) 홍남화 회원을 비롯해 김정

    만 회원, 홍성표 회원, 방학진 사무국장은 5월 11일 충남 아산 둔포면 신항리에 있는 친일파 윤웅렬, 윤치호의 불망비 3기를 현지 조사했다. 둔포면은 해평 윤씨의 세거지로 예전에는 소금을 매매하는 곳이어서 소금배들이 많이 드나들면서 해운이 발달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아산지회는 향후 비석 옆에 윤웅렬, 윤치호의 친일행적을 담은 안내문을 설치할 계획이다.

    ▪ 대전지부(지부장 이순옥)를 비롯해 우리겨레하나되기대전충남운동본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대전충남연합, 연기사랑청년회 등이 참여하고 있는 자주통일비 보존위원회는 5월 15일 중부대학(충남 금산군 추부면) 뒷산인 만인산 태봉 자락에 모여 자주통일비 건립 14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자주통일비는 지난 2003년 5월, 정효순(91) 범민련 고문이 개인재산을 털어 건립한 것으로 앞면에는 ‘민족자주통일비’를 음각하고, 뒷면에는 ‘7·4 남북공동성명 중 조국통일 3대 원칙’과 ‘6·15 남북공동선언문 중 5개 항’이 새겨져 있다.

    5월 20일에는 대전 대흥동 다온밥상식당에서 월례회를 갖고 6월 6일 김창룡 묘 이장 촉구대회 준비와 6·15 대전통일마라톤대회 홍보 부스 운영 등을 논의했다.

    ▪ 경북북부지부(지부장 최창옥)은 5월 16일 영주 육림숯불촌식당에서 월례 모임을 갖고 제천에서 열릴 여름수련회에 많은 회원들이 참가키로 했다. 이날 모임에는 최 지부장을 비롯해 15명의 회원이 참석했다.

    ▪ 서울강서양천지부(지부장 박건)는 5월 18일 오목교역 부근 나주곰탕에서 지부 모임을 가졌다.▪ 인천지부(지부장 이민우)는 인천지역 시민단체들과 함

    께 인천 동구에서 열리는 ‘화도진 축제’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 재현행사는 체결 장소부터 역사왜곡이라 비판하며 5월 20일 별도로 인천 중구 다비웨딩스튜디오 앞마당(제물량로 232번길 23)에서 불평등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 역사바로알기 한마당’ 행사를 진행했다. 또 ‘노무현대통령 서거 7주기 인천시민추모위원회’에 참여해 5월 23일 부평구청 7층 대회의실에서 거

  • 13

    행된 추모행사에 참석했다.이민우 지부장은 5월 30일 인천YWCA에서 열린 ‘한국사교과서 국정화저지를 위한 인천시민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해 “시민사회에서 서명운동하는 것도 좋지만 올해부터라도 역사 바로 알리기 운동 등 더 강력한 시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견해를 밝혔다. ▪ 충남지부(지부장 최종진)는 5월 20일과 21일 충남 홍

    성군청과 용봉산 자락에서 열린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3차 유해발굴 보고대회 및 안치식을 지원했다.▪ 부산지부(지부장 박

    기호)는 5월 21일 여수 순천지역으로 춘계역사탐방을 다녀왔다. 안내는 주철희 박사(전 전남동부지부장)가 맡았다. 또한 지부는 경남고 안에 있는 친일파 안용백 흉상 철거 운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세종지회 준비모임이 5월 26일 세종시 아름동 황제

    참숯고기집에서 열렸다. 이날 모임은 가명현 회원(온빛초 교장)을 비롯해 10여명의 회원이 참석했으며 최요식 회원을 임시총무로 선출해 지회 창립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 천안지회(지회장 전훈진)는 5월 26일 천안 청당동 외양간식당에서 전훈진 지회장을 비롯해 이용길(전 천안민주단체협의회 의장), 현종갑, 전혜리 회원 그리고 방학진 사무국장이 모여 가칭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 준비모임을 가졌다. 이날 회의에서는 임종국 선생을 천안에서 생전에 여러 차례 뵙고 지도를 받은 이용길 전 의장을 추진위원장으로 내정했으며 11월 12일 임종국 선생 기일 전에 제막을 목표로 조형물을 제작

    키로 했다. 조형물 제작은 ‘평화의 소녀상’ 작가인 김운성 김서경 부부가 맡기로 했으며 건립비용은 시민 모금으로 충당키로 했다. 천안지회는 4월 하순부터 천안시민을 대상으로 임종국 선생을 알리는 홍보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 대구지부(지부장 오홍석)는 5월 28일 지부 회원들과 함께 경주로 역사탐방을 다녀왔다. ▪ 광주지부(지부장 김순흥)는 5월 23일 무진중학교를

    시작으로 ‘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이야기’와 ‘항일음악회와 역사전시회’를 진행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추진되고 있는 이번 행사에서 전시회는 20개교 음악회는 15개교에서 개최된다. 5월 23일 무진중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장휘국 광주교육감도 참석해 이 행사에 대한 높은 기대감을 표시했다. 장 교육감은 축사에서 “친일 항일음악의 진상을 자연스럽게 비교하면서 느끼는 이번 행사가 독립의 의미를 되새기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어 의미가 크다”면서 “이번 음악회와 전시회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정신을 배우고, 현재를 살아가는 학생들이 어떤 역사인식을 가져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김순흥 지부장은 “학생이 꼭 알아야 하는 역사이야기를 알리고자 순회음악회를 하게됐다”며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워 올바른 사관을 가진 학생들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서울중부지부(지부장 최무희)는 매주 금요일 오후6시부터 8시까지 2시간동안 경복궁역 3번출구에서 한국

  • 14 201606

    사교과서국정화 반대와 한일 '위안부' 협상 무효를 위한 서명을 받고 있다. 특히 최무희 지부장을 비롯해 김경숙 윤재희 회원 등이 많은 노고를 하고 있다.

    ▪ 〈통일뉴스〉에 만평을 연재하고 있는 이진석 회원이 4월 9일부터 새롭게 ‘만화 항일무장투쟁사’를 연재 중이다. 제1화 ‘날아다니는 홍범도’를 시작으로 현재 ‘봉오동 전투’까지 총 5화까지 볼 수 있다. www.tongilnews.com▪ 노무현을 추모하는 당진사람들 대표인 한광희 회원은

    5월 28일 당진버스터미널에서 ‘5월, 당진시민문화제’를 개최하며 광주민주화운동 및 친일문인 패널 등을 함께 전시했다.▪ 성악가인 광주지부 정찬경 회원은 5월 21일 광주 노

    대동 물빛공원에서 5·18을 주제로 제73회 광장음악회를 개최했다. ▪ 수원지부 김규홍 회원이 5월 18일 모친상을 당하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서울동부지부 황영선 회원이 5월 23일 모친상을 당하

    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전직 교사로 서울동부지부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여러 차례 성금을 냈던 남미선 회원이 작년 10월 투병 중 5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이 남긴 뜻에 따라 부군의 명의로 연구소에 대한 후원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서울동부교육청 장학사인 김해용 회원이 5월 20일 연

    구소 방문해 상근자들과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 5월 29일로 19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전남동부지부

    김광진 회원이 더불어함께연구소 설립을 준비 중이다. 이 연구소는 청년정치인 양성 프로그램을 비롯해 문화, 예술 등의 사업으로 창의력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주)대성투어 대표인 정준호 회원이 5월 30일부터 강

    병원(더민주, 은평을) 국회의원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정 회원은 오랫동안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를 비롯한 연구소 역사기행에 많은 도움을 준 바 있다.

    ▪ 현재 연구소 법인 차량으로 운영 중인 카니발은 2004년 4월 천안 노인원 회원이 1,500만원을 그리고 익명의 회원이 500만원을 보태어 마련한 것입니다. 카니발 차량은 연구소 각종 행사는 물론 4·9통일평화재단, 양심수후원회, 경희대총민주동문회, 사월혁명회 등 차량이 없는 여러 단체 행사에도 수시로 이용되며 전국을 누볐습니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 주요 부분의 이상이 발생하면서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여 만 12년 2개월 만에 폐차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연구소의 든든한 발이 되어준 카니발 차량을 폐차하면서 이 지면을 빌어 노인원 회원과 익명의 회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김진주 회원이 5월

    10일 찹쌀모나카 3박스를 연구소로 보내주셨습니다.▪ 신희숙 회원이 5월

    25일 멜론 2박스를 연구소로 보내주셨습니다.

    회원동정고맙습니다

  • 15

    해방70년 특별기획

    6·10만세운동의 총지휘자 권오설

    박광종 선임연구원

    사회주의 진영에서 권오설을 중심으로 거사 준비

    6·10만세운동을 최초로 기획한 것은 상해의 조선공산당 임시연락부의 김단야와 김찬 등이었다. 이들은 당초 1926년 5월 1일 노동절을 기해 전국적인 기념시위를 벌이고자 기획했으나 4월 25일 순종이 승하하자 계획을 수정해 순종의 인산일을 거사일로 삼아 3·1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5월 1일 김단야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이 중국 안동에서 만나 다음과 같이 투쟁방침을 결정하였다.

    첫째로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의 혁명분자를 망라하여 ‘대한독립당’을 조직할 것, 둘째로 대한독립당은 우선 6월 10일을 기하여 대시위 운동을 실행할 것. 셋째는 시위운동의 방법은 장례행렬이 지나는 연도에 시위대를 분산 배치하였다가 격고문 및 전단을 살포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할 것 등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권오설은 5월 2일 개최된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6·10만세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이하 투쟁지도부) 총지휘자에 선임되었다. 권오설은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인 박민영·이지탁과 함께 투쟁지도부를 결성한 후, 천도교 구파와 제휴하였다. 권오설은 6·10만세운동을 위한 실무작업에 착수하여 천도교청년동맹을 지도하던 박래원과 경성인쇄직공조합 간부 민창식 등과 함께 격문을 인쇄하고 지방과의 연락망을 구축했다. 박래원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방조직과 천도교 교구, 천도교 잡지인 개벽 지사 등을 통해 전국 58개 도시에 연락망을 완성했다. 또한 권오설은 고려공산청년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조직하여 동회 간부인 연희전문학생 이병립을 유인물 살포 책임자로 선정했으며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현장투쟁 지도부를 결성했다.

    이렇듯 만세운동에 대한 준비는 6월 초까진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상해에서 6월 1일경에 보내기로 했던 자금이 도착되지 않아 전단 발송과 배포 등 구체적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종로경찰서는 경북경찰부로부터 일본 오사카에서 대량으로 중국 위조지폐를 만든 범인이 서울에 잠입하였다는 연락을 받고서 도렴동 50번지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16

  • 16 201606

    이동규의 집을 수색하던 중 위조지폐와 함께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내용의 격문 한 장을 발견하였다. 6월 6일 종로경찰서는 격문의 출처를 탐문하여 천도교 진영의 박래원, 인쇄업자 백명천, 고려공산청년회의 권오설(6월 7일 체포), 박민영 등을 체포하고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인사들에 대해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권오설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온 조선공산당의 거사 계획은 발각되었고 거사일 4일을 남겨두고 만세시위는 좌절되는 듯싶었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전개된 학생들의 시위

    투쟁지도부가 모두 검거되자 그간 권오설의 지휘를 받아온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들은 학생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의 재건에 노력하면서, 이병립의 지도하에 격문인쇄와 선전작업을 벌였고 박두종·이선호 등이 각 지역의 선전선동책임을 맡았다. 이들은 태극기 200장과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30장을 제작하는 한편 이병립이 기초한 격문 1만 장을 인쇄하였다. 또 이때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이동환·박용규·곽대형·김재문·황정환 등을 중심으로 하는 중동고보·중앙고보 학생들과 접촉하면서 만세시위에 대해 구체적인 협의를 했다.

    일제는 인산일인 6월 10일을 앞두고 다른 거사 계획을 포착하기 위해 사상단체· 종교단체·학교를 대대적으로 검속하였고 서울 요충지에서 검문검색도 강화하였다. 인산일에는 1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는 등 모든 경찰력과 군사력을 서울 인근에 집결시켰다.

    6·10만세운동 순종장례운구장면

  • 17

    장례가 통과하는 연도에는 30만여 명이 운집하고 있었는데,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고보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오전 8시 반 종로3가의 만세시위를 신호탄으로 하여 모두 여덟 곳-종로3가 단성사 앞, 관수교 부근, 경성사범학교 앞, 훈련원 재전 부근, 동대문 부인병원 앞, 창신동 채석장 입구, 신설동 고무회사 앞, 동대문 밖 동묘 앞-에서 일어났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 무렵까지 계속하여 일어났는데 500~6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격문을 군중에게 뿌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동대문 앞 시위현장에서는 일본 기마병의 말발굽에 치거나 밀려서 쓰러진 사람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었고, 7~80여 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날 만세현장에서 체포된 학생만 210여 명에 달하였다.

    6·10만세운동은 투쟁지도부의 보안상 실수로 지도부 대부분이 검거되어 전면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으나, 사회주의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의 협력관계가 모색되었고 학생들의 주체적 역량이 강화되어 이후 민족운동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문화정치’라는 가면 속에 가려진 일제의 폭력성이 백일하에 드러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권오설의 생애

    권오설은 1897년 11월 안동 권씨 집성촌인 경상북도 안동군 충천면 가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친이 운영하는 한학서숙에서 배우다가 남명학교, 동화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1918년 광주에 내려가 전라남도 도청 고용원으로 근무하였다. 이 무렵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6개월의 옥고를 겪었다고 한다. 1919년 말 안동으로 돌아온 그는 교육운동과 청년운동에 힘쓰다가 1922년 동향 출신의 사회운동가 김재봉·이준태를 만나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1923년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하며 농민운동에 진력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총회에 풍산소작인회 대표로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 중앙총국(꼬르뷰로) 국내

    부에 가입하여 노농총야체이카 책임자가 되었다. 12월 남부지방을 돌며 조선노농총동맹 가맹단체 활성화와 단체 가입 촉구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각지의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를 지도하였다. 1925년 2월 김재봉·김단야·박헌영 등과 조선공산당 창당을 결의하고 동년 4월 조선공산당과 그 산하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가 창설되자 고려공산청년회 조직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해 말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임되어 상해의 조선공산

    권오설 1928년 2월 17일 서대문형무소 수감 기록사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18 201606

    당 임시연락부에서 들어오는 자금을 관리하며 조직을 총괄하였다.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어 조선공산당 당칙을 기초하고 고려공산청년회 회칙을 작성하였다. 이 무렵 6·10만세운동 투쟁위원회 총지휘자로 선임되었던 것이다.

    권오설은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6·10만세운동 기획과 조선공산당 재건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심문 과정에서 조선공산당의 실체가 드러나자, 일본경찰은 권오설과 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강달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간부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다. 권오설은 다른 피의자들과 함께 고문을 자행한 종로경찰서 미와(三輪和三郞) 고등계 주임경부 등을 고소했다. 이 경찰 고소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신문지상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고문추방운동까지 전개되었으나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권오설은 1928년 8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신장염으로 서대문형무소 중병감(重病監)에서 치료를 받은 이래로 줄곧 독방에서 위장병, 신경통, 척수염 등을 앓다가 결국 1930년 4월 17일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4월 19일 신간회 경성지회 회관으로 옮겼다가 고향인 안동 가일마을로 운구되어 풍천면 가곡리 공동묘지에 봉분도 올리지 못한 채 평장(平葬)으로 묻혔다. 일제의 강압으로 그의 장례는 사회장이나 문중장으로 치러지지 못하고 가족들만으로 쓸쓸하게 치뤄졌다고 한다.

    서당 훈장이었던 그의 아버지 권술조는 85절구로 된 장문의 제문을 지어 고문의 후유증으로 차디찬 감방에서 맞이한 아들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애통하게 절규하고 있다.

    6·10만세운동 재판을 보도한 기사. 조선일보 1926.11.3.

  • 19

    이튿날 새벽이 밝을 무렵 수의가 대략 갖추어져 장차 염한 것을 고치려고 관 뚜껑을 열어보니 단정한 모습은 변함없이 잠자는 것 같았으며, 금니도 번쩍였다. 고문한 흔적은 검은 점을 이루었으니 이 모두가 독을 쓴 자국이었다. ...... 다음 입관을 하려고 목수에게 관을 만들게 하려는데 이를 하지 못하게 하여 할 수가 없었다. 저들은 어찌하여 손님의 출입을 금지하고,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하였을까?

    권오설, 6·10만세운동 총지휘자로 재조명되다

    권오설의 고향인 안동 가일마을은 일제 강점기에 많은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자를 배출하였다고 하여 ‘안동의 모스크바’라고 불리웠는데 그 발단은 권오설이었다. 권오설이 가일마을을 중심으로 농민·청년운동을 시작해 풍산소작인회를 통해 서울로 진출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권오설의 막내 동생 권오직뿐 아니라 가일마을 청년들이 사회운동에 발을 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권오직은 1925년 모스크바로 유학을 다녀와 사상범으로 옥고를 치렀고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의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권영식은 1920년 초기에 사회운동에 뛰어들어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임원으로 활동했고, 가일마을 8부자집의 권오상과 권오운은 6·10만세운동으로 구속되어 일제의 갖은 악형으로 요절했다.

    이렇듯 권오설은 가일마을 청년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커다란 역할을 했으나 그의 사후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혀 대표적인 기피 인물이 되었고, 그의 양자(권오직의 아들로 큰아버지에게 입양됨)는 가일마을에서 온갖 질시와 모멸을 받아 결국 훗

    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주위의 냉대로 인해 독립운동가 권오설에 대한 현창사업은커녕 그의 생가는 화재로 소실되어 콩밭으로 변했고 공동묘지에 자리한 그의 무덤도 우거진 잡초 속에 방치되어 왔다.

    권오설의 항일투쟁을 재조명하고 그를 현창하게 된 것은 2001년 ‘항일구국열사 권오설선생 기적비’ 설치부터다. 2001년초 당시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 조동걸 상지대 총장, 김희곤 안동대 교수를 중심으로 권오설선생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그해 11월 11일 가일마을 입구에 권오설선생 기적비를 건립했다. 여기에는 권오설이 1920년대 3대 민

    아버지 권술조가 쓴 권오설 제문(1930.4) ⓒ한국국학진흥원

  • 20 201606

    족운동으로 평가되는 ‘6·10만세운동의 총지휘자’로 재조명되고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이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다는 역사학계의 평가가 주요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3월 1일, 강창보, 구연흠, 김재봉 등 54명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는데 이때 권오설에게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권오설! 일제에 항거함에 있어 그 누구보다도 강인했고, 법정에서 조선의 독립 이유를 명쾌히 피력하였으며 서신을 통해 부모 형제에게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전했던 그다. 그의 의로운 항일정신이 이제라도 제대로 평가받고 그가 염원하던 자주독립국가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기대해본다.

  • 21

    열전 친일파·4

    1937년 7월 일제가 중국 화북지방을 침략하면서 중일전쟁이 일어난 지 1년 반 정도 된 1938년 12월 15일, 지금의 연변 지역의 백두산 동쪽 줄기에 있는 안도현 명월구에서 조선인으로 구성된 한 특수부대가 창설되어 제1기생 200명을 모아놓고 입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이름하여 간도조선인특설부대(통칭 간도특설대). 장교의 절반이 조선인 그리고 하사관과 지원병으로 구성된 사병 전원이 조선인인 만주국 최강의 특수부대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이 부대

    의 창설 요원으로서 송석하와 함께 핵심 역할을 하고, 일제가 패망한 후 이 부대가 해산될 때까지 일선 지휘관으로 있었던 김찬규가 있었다.

    해방 뒤인 6.25전쟁 전후 ‘천성이 야전지휘관 기질’ ‘체격이 건장하고 호탕한 장군’ ‘38도선을 최초로 돌파한 지휘관’ ‘흥남철수작전의 영웅’ 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었던 김백일(金白一)의 본명이 바로 김찬규(金爛奎, 金澤俊南 가네자와 도시미나미 1917~1951)이다. 때문에 김백일의 친일 행적은 간도특설대의 역사적 죄행과 떼어놓고 얘기할 수 없다.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이 노구교사건을 일으키면서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화력을 중국 화북에 집중시키기 위해 중일전쟁의 병참기지인 만주의 ‘치안’을 한시바삐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특히 조선인이 밀집한 간도 지역(동만지역)은 역사적으로 반일정서가 깊었고, 조선인이 중심이 된 중국공산당 하부조직이 많이 설립되어 있어서, 중국 동북지역(만주)에서 가장 먼저 항일유격대가 만들어지고 가장 활발하게 투쟁을 전개한 곳이었다.

    이 지역의 조선인 항일유격대는 만주만이 아니라 조만국경을 넘어 조선에까지 무장 출몰하여 일제로서는 매우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일제는 1936년에 ‘3년치안숙정계획’을 제정해 관동군, 만주군, 헌병, 특무, 경찰 등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동북지역의 모든 항일역량을 철저히 제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치안숙정계획은 간도지역에서는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제에 따르면, “간도성(間島省)은 80%이상의 주민이 조선민족이고 그들은 본래부터 일본군은 물

    ‘미스터 간도특설대’ 김찬규 아니 김백일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 22 201606

    론 중국인으로 편성한 만주국군에 대하여서도 합작하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 만약 일만군경(日満軍警)들이 출동하여 ‘토벌’을 하여도 비단 반만항일세력의 정보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격대방면에서는 늘 사전에 토벌대의 정보를 알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국군은 오히려 새로 조선인만으로 편성된 부대를 설립하여 정보수집임무를 맡게 하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일제는 재만조선인 항일투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탄압하기 위하여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탄생한 부대가 간도특설대였다.

    이 부대는 1937년 8월 간도성 성장(省長)으로 취임한 만주국 최고위급 조선인 친일파 중 하나인 이범익(창씨명 淸原范益)의 건의와 연길현특무기관장 겸 간도지구고문 오고에 노부오(小越信雄)의 공작에 의해 설립되었다.

    간도특설대 창설은 1938년 9월부터 본격화했다. 안도현치안대, 훈춘국경감시대, 연길현청년훈련소, 중앙육군훈련처(봉천)와 기타 만군부대에서 선발한 위관급 이상의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관 9명, 조선인 하사관 등이 중심이 되어 안도현(安圖縣) 명월구(明月溝)에서 정식으로 대대 규모의 특설대 창립 주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주비위원회는 연변 각지에 선전을 하는 한편, 시험에 자원 응시하는 형식을 통해 조선인 청년을 모집해, 1938년 12월 15일에 모두 200명을 모집하고 제1기병입대의식을 정식으로 거행하였다.

    이후 간도특설대는 매년 1기씩 7기까지 모집해 연 인원이 700여명에 이르렀다. 일명 ‘개잡이부대’로 불린 간도특설대는 부대창설에서 마지막 해산 때까지 ‘천황의 뜻’을 받들어 철저하게 일제의 사냥개 역할을 다했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을 위한 /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간도특설대 모집 기사. 매일신보 1938.12.14.

  • 23

    건군은 짧아도 /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 대화혼(大和魂)은 우리를 고무한다.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 「간도특설부대가」

    만주군 소속의 간도특설대는 일반 부대와는 활동방식이 달랐다. 동북항일연군등 다수의 항일조직은 군대, 관헌등의 단속과 집단주거 마을건설에 의해 주민과 격리된채 은신하면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간도특설대는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되었다(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했던 백선엽은 후일 이 경험을 살려 게릴라전에 관한 일본어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간도특설대의 활동은 그 활동 지역에 따라 연변지구에서의 활동(1938. 09 ~ 1943. 09), 열하성 유수림자 지구에서의 활동(1944. 02 ~ 1944. 07), 하북성 석갑진 지구에서의 활동(1944. 07~1945. 01), 하북성 사집진(司集鎭, 지금의 司各庄) 지구에서의 활동(1945. 01~1945. 08)으로 시기를 나눌 수 있다. 1943년까지는 주로 만주지역의 조선인 항일유격대나 동북항일연군이 주요 목표였다면, 그 이후는 중국 화북 일대에서 팔로군이 주 대상이었다.

    간도특설대는 항일무장부대를 대상으로 한 108회에 이르는 이른바 토벌전과 함께 민간인이나 부녀자에 대한 체포, 고문, 학살, 강간, 마을에 대한 방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1939년 7월 1일 특설부대는 천보산에서 항일연군과 교전하다 항일연군 전사 한 명이 희생되자, 전사의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내 통에다 담았다. 대사하전투에서 죽은 16명의 충혼비에 제사를 지내는데 올리려고 한 짓이다. 그런데 그것을 메고 가던 농부가 통조림인 줄 알고 훔쳐서 먹으려다 사람의 간이란 말을 듣고 질통을 버리고 도망을 쳤다고 한다.

    1941년 겨울에는 안도, 돈화, 화전 등 3개 현을 공격해 항일군 2명을 체포하였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도망을 치자 추적 체포하여 부대원을 명월구 공동묘지 앞에 집합시키고, 일본인 본부 부관이 군도로 머리를 베고 시체 옆에서 목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외 강간, 약탈, 방화, 임산부의 배 가르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일제 패망 후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 출신 대부분은 재빨리 국내로 도주했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 국군의 창설 핵심으로서 군조직의 중추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김찬규(김백일, 봉천군관학교 5기, 육군중장), 송석하(봉천군관학교 5기, 육군 소장), 신봉균(신현준으로 개명, 봉천군관학교 5기, 초대 해병대사령관), 김석범(봉천군관학교 5기, 제2대 해병대사령관), 백선엽(봉천군관학교 9기, 육군참모총장, 최초 육군대장) 등이 모두 간도특설대 장교 출신이다. 그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간도특설대에 복무하고 해산까지 책임졌던 인물이 김찬규(김백일)이니, 그야말로 ‘미스터 간도특설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만주국은 1943년 9월 훈5위 경운장을 수여해 충성을 치하했다. 그러면 간

  • 24 201606

    도특설대 이전의 행적과 해방 후 그의 화려한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여기에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있기 때문이다.

    김백일은 1917년 1월 30일 만주 연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명천에서 살다가,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만주 간도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용정(龍井)에서 은진중학(恩眞中學) 1학년을 수료하고 고학으로 서울의 보성중학(普成中學)을 졸업한 뒤 다시 만주로 돌아가 길림고급중학(吉林高級中學)을 마쳤다. 김백일을 미화하는 책에서는 할아버지의 권유로 ‘장차 광복과 건군에 이바지하기’로 결심하고 1932년 4월 봉천에 있던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입교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1937년 9월 제5기생으로 졸업한 후 같은 해 12월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해 제3군관구 보병 제15단(단:연대에 해당)에 배치되었다. 1938년 가을부터 봉천군관학교 4기생 강재호와 동기생인 신현준, 송석하 그리고 군의관인 마동악 등과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파견되면서 간도특설대 최일선 장교가 되었다.

    1945년 들어 간도특설대는 기동파견군(冀東派遣軍, 철석부대) 예하 독립보병대대(일명 철인부대)로서 사집진 일대에서 활동했다. 팔로군으로부터 일제 항복 소식을 전해듣고서야 김백일은 전 부대원과 열차로 금주(錦州)로 이동했다. 8월 26일 금주 교외에서 부대해산식에 참석한 그는 제1연 선임연장 자격으로 봉천으로 이동해 대원들을 해산시키고 자신은 고향인 명천으로 돌아갔다.

    북한에 들어간 김백일은 인민군 창설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껴 간도특설대 동료인 최남근, 백선엽 등과 월남했다. 북한의 핵심 인물인 김일성, 최현 등은 간도특설대와 총을 맞댄 동북항일연군의 지휘관들이었으니, 북에서는 살아남기 어려웠기 때문이리라.

    김백일이라는 이름은 김찬규가 월남하면서 개명한 것이다. 본인 말로는 ‘세상이 다 붉게 물들어도 나 혼자만은 반공에 입각해 청천백일과 같이 살겠다’는 의미로 이렇게 고쳤다고 한다. 친일의 범죄자가 반공애국투사로 변신하는 과정을 김백일 또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남한으로 내려 온 김백일은 1946년 2월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방경비대 제3연대 창설중대장으로 이리(익산)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1946년 10월 전라북도 이리에서 군 보급품을 처분하여 호화결혼식을 했다는 혐의를 받아 위기에 내몰렸다. 군 조사단은 이를 ‘좌익의 무고’로 처리했다. 그러나 정작 이를 문제 삼은 백인기 소대장은 ‘경처벌’만 받았고, 6.25때 국군장교로서 전사한, 좌익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고를 당했다는 김백일이 연대장 보직에서 해임되어 부연대장으로 강등되는 중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김백일은 다시 승승장구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의 14연대 내 좌익세력이 제주도 출병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국군 제5여단을 이끌고 현지에서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이어 그는 호남방면전투사령관 남지구사령관(1948.10.30.~11.30)을 거쳐 지

  • 25

    리산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1949.9.28.~1950.3.15.)으로서 좌익게릴라 소탕에 전력했다. 그런데 1949년 12월 25일부터 1950년 3월 15일까지 계엄령을 선포하고 거창, 산청 일대에서 전개된 ‘토벌작전’에서 좌익게릴라와 무관한 여성 16명, 50~70대 노인층 25명, 10대 및 10세 이하 14명 등이 군경의 의해 희생되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

    리위원회는 이 학살사건의 가해주체 및 가해의 지휘·명령계통의 책임자로서 김백일을 거론하고 있다.

    6.25가 발발하자 김백일은 제1군 군단장으로서 반격전에서 38선을 맨 먼저 돌파해 혜산진까지 진출하고, 1950년 겨울의 흥남철수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51년 3월 28일 제8군 사령부에서 회의를 마치고 양양(襄陽) 북방으로 진격중인 군단본부로 급거 비행기로 귀대하다가 탑승 비행기가 대관령 인근의 발왕산(發旺山)에 충돌함으로써 사망하였다.

    김백일은 죽어서 더 화려하게 부활했다. 국군 중장으로 추서되었고, 무공훈장 태극장을 수여받았으며,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장되었다. 1966년 6월 10일에 전라남도 장성군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상무대)에는 동상이 건립되고, 정문 입구의 길은 백일로로 명명되었고, 광주광역시 백일초등학교(옛 육군보병학교 사격장) 또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더구나 친일인명사전이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되었음에도, 2011년 5월 31일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와 함북6·25전적기념사업회는 지난 옛 거제포로수용소 자리의 흥남철수작전기념탑 옆에서 김백일 장군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흥남시에서 해상으로 철수할 때 김백일이 에드워드 알몬드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피난민 수송을 성공시켰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유엔군과 국군 10만 5천여명, 1만 7천대의 차량, 9만 1천명의 피난민을 철수시킨 이 대규모 철수작전의 주체는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 맥아더사령부에 있었고 김백일은 보조적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도 김백일의 단독 동상이 버젓이 세워지고 알몬드나 알몬드를 설득한 통역관 현봉학 박사는 오히려 변방에 밀려나 있다. 동상 명문을 통해 독립운동가의 손자이며 전쟁영웅이자 흥남철수작전 시 피난민의 은인으로서 김백일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거제 포로수용소에 있는 김백일 동상

  • 26 201606

    이런 ‘반공주의자’ 펄 벅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문학비평가

    한국과 중국에서 펄 벅(1892~1973)만큼 서운한 대접을 받는 유명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1972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방중 때 동행을 원했으나 거부당한 채 그 이듬해에 작고하고 말았다. 기독교 선교사에다 반공주의 작가라는 낙인 때문일 것이다. 이래서 문학기행 마지막 회에서는 정치활동을 통한 그의 참모습을 찾아보고자 한다.

    그는 1960년 11월 한국에 첫발을 디딘 이후 1969년까지 여덟 차례 걸쳐 오가며 경기도 부천에 펄벅재단을 설립(1967)했다. 이와는 별도로 부천의 펄벅기념관은 2000년 이희호 여사가 펄벅상을 받은 뒤 추진위원회를 발족, 2006년 개관한 문화공간이다. 기념관은 펄 벅의 생애와 문학을 조망할 수 있는 시설과 유품을 갖추고 여러 행사를 벌이고 있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에 반대

    백인 작가로는 한국 문제에 가장 진지한 관심을 가진데다 침략국 일본에 반대했던 그는 1962년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일본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존 케네디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쐐기를 박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 싸이전주(賽珍珠 혹은 珀尔 巴克)로 부르는 펄 벅의 아버지 앱살롬 사이던스트리커가 신앙에 몸 바치겠다는 캐롤린과 결혼, 중국에 간 것은 1880년이었다. 1천 여 선교사들이 활동했지만 신자는 1만 명도 못 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미국인에게 중국이란 이민금지법의 대상으로, 교활하고 알 수 없는, 매음굴과 아편 소굴이라는 혐오의 대상이었

    돌려보기·1

    중국 루산(여산)에 있는 펄 벅의 산장(왼쪽)과 내부에 전시된 작가의 자료들. @임헌영

  • 27

    다. 1830~40년대부터 미국 중서부 농촌 출신 신학대학 졸업생을 중국으로 집중 파견해온 선교활동이 실패한 이유를 이렇게 지적한다.

    “선교사의 설교는 이유 없는 공격이다. 그것은 유혹하고, 요구하고, 호통치고, 방해하고, 겁을 주려는 것 같다. (…) 당신이 결코 소망한 적이 없었던 결과들을 당신의 마음속에 이식하고, 그것들이 그 속에서 열매를 맺도록 내버려두는 것으로 끝난다.”(〈펄 벅 평전〉, 피터 콘 지음, 이한음 옮김, 은행나무 펴냄, 2004. 이하 인용 모두 이 책)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선교가 문화 파괴나 제국주의의 도구라는 목소리까지 공공연히 나왔다.

    중국에서 근무 중이던 선교사 부부가 일시 귀국,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펄 벅을 출산(1892년 6월26일), 석 달 만에 시장바구니에 아기를 담아 다시 근무지로 떠났다. 그러니 펄 벅은 생후 3개월부터 1934년 마흔두 살로 영구 귀국할 때까지 격변기 중국의 체험자였고, 귀국 뒤에는 일생 동안 중국을 위한 각종 로비와 민간 차원의 활동에 기여했다.

    그가 기독교 선교에 비판적인 자세로 돌아선 것은 보수적인 아버지의 선교활동 때문이었다. 소설 〈대지〉(1931)로 명성이 올라간 이듬해부터 그는 터놓고 중국 선교를 비판했다. 선교단을 ‘정신적 제국주의’로 호칭, 그들의 설교가 “모든 사유를 둔감하게 하며, 모든 현안을 혼란에 빠뜨리며, 따라서 중국 교회들은 위선자 무리를 만들어내고 있다”(앞 책, 258쪽)고 했다. 마침 중국에서 만났던 윌리엄 어니스트 호킹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의 〈다시 생각하는 선교〉(1932)가 널리 읽히면서 가열된 비판의 기운은 오히려 보수파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었다. 이단 재판설 등 온갖 위협을 가해 펄 벅은 선교사직을 사임(1933)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적 제국주의’ 선교 비판

    펄 벅이 중국 현대사와 정면으로 맞선 첫 사건은 국민당이 북벌 때 난징에 입성(1927), 100여 외국인들을 감금했을 때다. 그간 외국인 살해나 주택 파괴 등을 공산당의 책임으로만 알고 반공의식에 빠져 있던 그는 장제스를 난국을 타개할 유일한 인물로 여겼다. 불교를 버리고 개신교로 개종해서 14살 연하의 쑹메이링과 결혼한 장제스의 기회주의적 처세에는 냉소를 보내면서도 여전히 정치적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펄 벅은 제국주의에는 철저히 비판적이면서도 공산주의 역시 반대했다.

    펄 벅이 장제스의 실물을 직접 본 것은 1929년 6월1일 쑨원의 장례식(1925년 작고했으나 북벌 성공 뒤 이날 난징의 중산릉에 공식 안장)에서였다. 난징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이 여선교사에게 장제스의 크고 대담하고 쏘아보는 눈빛은 감동을 주었다.

  • 28 201606

    이듬해에 펄 벅은 입양녀 제니스를 난징의 힐크레스트학교 부설 유치원에 넣었는데, 그 반에 장제스의 심복 장관이자 손위 동서인 쿵샹시(부인은 쑹아이링)의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를 데려다주는 일은 쑹메이링이 맡았기에 펄 벅은 그녀가 나타나면 일으키는 요란스러움을 지켜보곤 했다.

    그토록 신뢰했던 장제스로부터 펄 벅이 등을 돌린 것은 영구 귀국(1934)한 후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난징이 허망하게 점령당하자 격분한 펄 벅은 국방비를 횡령 착복해 체이스은행에 빼돌린 중국 군벌의 부패가 이런 비극을 초래했다고 날을 세웠다. 이후 그는 중국을 지원하는 모든 활동에 적극 가담해, 미국으로 하여금 석유와 철강의 대일 수출 금지 여론 환기에도 앞장섰다. 펄 벅은 중립 그 자체가 일본을 도우는 행위라면서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적극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마침 에드거 스노와 님 웨일스가 중국에서 전개 중인 인더스코(Indusco)를 널리 전파해달라고 부탁해왔다. 농업용 장비와 군사용 장비를 공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이 운동은 항일전의 성패를 좌우했다. 중국 긴급 구호위원회 창립 위원장을 맡은 펄 벅은 저절로 세계적인 반전평화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흑인·여성해방운동으로 FBI 감시받아

    인도 독립을 얼버무리는 처칠의 외교술을 맹비난하면서 루스벨트에게 결코 영국의 식민정책을 묵인하지 말기를 당부했다. 흑인민권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의 전위대 역을 맡은 펄 벅에게 본능적으로 문학인을 싫어하는 후버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감시망은 점점 조여왔다. 펄 벅에게 씌워진 혐의는 “유명 공산주의자들, 공산주의 동조자들, 러시아 공산당 독재정책의 지지자와 옹호자”들의 편을 든다는 것이었다.

    펄 벅이 달갑잖게 여기는 쑹메이링이 신병 치료를 구실로 미국 워싱턴에 간 것은 1942년 11월이었다. 이듬해 5월까지 머물면서 쑹메이링은 몸에 짝 달라붙는 까만 중국 드레스로 치장하고서 상하합동의회에서 1시간 연설로 기립박수를 받았다. 백악관에 몇 주 머무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갖고 온 비단이불을 쓰는 등 까다로운 공주처럼 굴었다.

    그 직후 펄 벅은 백악관 만찬에 참석하여 쑹메이링이 비록 매력적이긴 하나 그 부부 누구도 민주주의자가 아니며, 국민당은 무능과 부패로 신망을 잃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펄 벅은 자신이 반공주의자이지만 중국 공산당의 토지개혁은 경이로우며 반대로 장제스의 정적 숙청은 스탈린과 닮았다고 비난하며, 중국 농민을 포용하는 유일한 정당은 공산당이라고 단언했다. 중국 현장을 보고 싶다는 루스벨트 영부인에게 펄 벅은 저우언라이를 꼭 만나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도 직성이 안 풀린 이 작가는 가장 영향력이 큰 잡지 〈라이프〉에다 ‘중국에 관한 경고’라는 글을 실어달라고 당부했다. 꼭 이 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미국 정계와

  • 29

    여론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지지 열기는 싸늘해져버렸다.

    장제스 국민당의 무능·부패 경고

    1944년 뉴욕의 쑨원 추모집회에서 펄 벅은 그의 부인 쑹칭링까지 추어올렸으나 장제스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중국 혁명의 이상은 쑹칭링을 통해 구현될 것이며 그녀야말로 중국 도덕의 중심이자 민주주의 희망의 상징이라면서, 동생 쑹메이링을 깔아뭉갰다. 이 연설도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실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펄 벅은 〈무르익어가고 있는 미국의 제국주의〉에서 연합국이 해방시킨 나라에 식민통치를 종식시키라는 주문과 함께, 아시아인은 유럽과 미국이 진보적인 정책을 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쟁취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1946년 3월5일 처칠은 미주리주 풀턴의 웨스트민스터대학 학위 수여식 연설 ‘평화의 원동력’에서 ‘철의 장막’이란 냉전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를 경멸했던 펄 벅은 즉각 “우리는 러시아 사람들을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다”면서 이 신형 ‘십자군 전쟁’을 비판하고 나섰다.

    펄 벅에 대한 비판이 이것으로 다 풀리진 않겠지만 이만한 양식의 반공주의자라면 용납될 법하지 않을까. ∷ 〈한겨레21〉 2016.5.27. 제 1113호)

    서울│중랑│이승재│성북│최규필│서대문│오수미 한요나│마포│남서진│용산│김기현 이영란│서초│이혜림│영등

    포│오상희 조수경│강서│이재경│금천│우재옥│관악│홍남균 경기│남양주│김광호 이소유(사수현) 이윤자│안양│

    김정호│광명│조윤호│수원│길덕영│안성│임세영 인천 안선홍 조혜성 강원 조은숙 충북 윤재원 세종 배선호 임지영

    (최요식) 차규석 천용기 충남 박은주 배진환 송재학(최기섭) 정민창(하상욱) 대전 백남우·이재용·이현준(이순옥) 경북

    도명호 배그람 배아람 울산 이성빈 부산 이병철 경남 권경엽 나경석 박건수 백정용 임완란 황은희 전북 김대승 광주 강

    주민 고효진 김광우·김진만·김형준·이용해(김순흥)

    5월의 신입회원 “손잡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 김광우 : 친일청산 • 김광호 : 늦게 가입해서 미안합니다. • 김기현 : 독립운동가 김문택 선생의 손자입

    니다 •김진만 :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 • 김형준 : 친일청산 • 나경석 : 일전에 한번 가입했다가

    사정상 탈퇴했었습니다. 다이빙벨을 보고서 억울하게 숨진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다가 무언가는 사회

    정의를 위해서 해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재가입하게 되었고 부디 우리 어린 아이들이 행복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안선홍 : 감사합니다. • 이승재 : 항상 응원합니다. • 이용해 : 친일청산 • 임

    지영 : 민족문제에 대한 활발한 활동을 기대합니다. • 조은숙 : 큰집 큰할아버님 조동원, 큰집 큰아버님

    조남구 그리고 우리 할아버님 조동철께서 모든 것을 다 바쳐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전남 강진에서 돌아가셨

    습니다. 또 할아버지는 인민위원회 간부셨답니다. 그러나 이 자랑스러운 얘기를 왜 쉬쉬했는지 최근에야 알게되었습니

    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억울함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물이 나고 벌떡 일어나게 됩니다.

    신입회원한마디

  • 30 201606

    경희대는 왜 신흥무관학교 흔적과 뿌리를 없앴을까

    김종철 한겨레 선임기자

    창학 105주년 신흥무관학교

    드러내 자랑할 수 없는 우리의 선배님, ‘속사포’

    딱 105년 전 6월10일 만주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됐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민족지사들이 만든 이 학교 출신들은 항일독립투쟁의 주역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이자 민족교육의 산실이라는 이 신흥무관학교의 빛나는 전통과 맥을 이어받은 대학교가 있다. 그러나 이 대학은 자랑스런 역사를 내세우기는커녕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인연을 끊기에 바쁘다. 서울 경희대학교에 관한 얘기다.

    독립투쟁을 그린 영화 〈암살〉은 지난해 7월 개봉돼 1200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았다. 한국 영화 사상 흥행순위에서 역대 7위다. 감독(최동훈)이 설명한 이 영화의 모티브는 신흥

    돌려보기·2

    경희대학교의 역사는 1911년 만주에 설립됐던 신흥무관학교에 직접적으로 닿아 있지만, 경희대학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서울 회기동에 있는 경희대학교의 모습으로, 왼쪽 앞 건물은 1956년 완공된 석조전 본관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 31

    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형제들이다. 실제로 영화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속사포’(배우 조진웅)가 생계형 독립군이라는 주요 배역으로 나왔다.

    영화에서처럼 신흥무관학교는 숱한 독립투사를 배출한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이다. 신흥무관학교가 없었다면 항일독립운동사는 찬란한 빛을 발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했던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부터 1920년 폐교될 때까지 만주에 있었던 학교다.

    창학으로 따지면 105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는 오래전에 존재했던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에도 엄연히 살아 있는 실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맥을 이은 대학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서울의 경희대학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신흥무관학교는 역사에만 존재할 뿐 이미 ‘사라진’ 존재다. 정작 경희대학교의 역사에서 신흥무관학교의 흔적과 뿌리를 없애고 지운 탓이다.

    해방까지 생존한 건 6형제 중 다섯째뿐

    경술국치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진 1910년 겨울, 이삿짐을 실은 마차를 끈 62명의 대가족이 압록강을 건넜다. 살기 힘들어 떠나는 유랑민이 아니라 대대로 문벌이 높은 삼한갑족으로 이름난 우당 이회영과 성재 이시영 등 6

    형제의 가솔들이었다. 이들은 전재산을 처분한 당시 돈 40만원(현재 시가로 600억원 상당)을 품에 안고 독립운동 기지를 찾아 나섰다. 우리 역사에서 사회 지도층이 보여준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서간도로 간 이들 형제는 현재 길림성인 유하현 삼원보에 자리를 잡았다. 이듬해 2월에는 경상도 안동 일대의 혁신 유림과 지사들인 석주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의 가족들이 합류했다. 이씨 형제들과 이상룡 등은 그해 5월 삼원보 대고산에 자치단체인 경학사를 설립했다. 대표인 사장에는 이상룡을 선출했다. 경학사는 이름 그대로 낮에는 논밭을 경작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들은 이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 설립에 나서 1911년 6월10일(음력 5월14일) 삼

    1911년 설립된 만주 신흥무관학교의 학생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 우당기념관 제공

  • 32 201606

    원보 추가가 마을의 한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강습소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중등과정 교육과 함께 군사과를 설치했다. 처음부터 독립투사를 키우겠다는 목표가 뚜렷했다. 신흥이라는 이름 역시 항일운동의 맥을 잇는 것이었다. 이회영 등이 참가했던 비밀항일단체 신민회(1907년)의 ‘신’에다가 나라를 부흥케 한다는 의미의 ‘흥’을 붙였다.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은 이동녕이 맡았다.

    망명지사들은 이후 좀더 안전한 독립기지를 물색한 끝에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정도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했고, 1912년 7월 이곳에서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했다. 1914년에는 신흥무관학교 교관들과 졸업생들이 중심이 돼 통화현 소백차에 백서농장을 만들었다. 단속을 피할 목

    적으로 농장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나, 실제로는 정예 용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이 넘치자, 유하현 고산자 부근으로 신흥무관학교 본부를 옮겼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의 압력으로 1920년 폐교될 때까지 약 3500명의 무관, 즉 독립투사들을 길러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있었던 주요한 항일투쟁의 주역이었다. 독립군이 최초로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뒀던 봉오동 전투(1920년),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맞서 싸워 대승했던 청산리 전투(1921년)의 주축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특히 청산리 전투에는 이청천, 김동삼이 이끄는 400여명의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졸업

    1947년 10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신흥학우단의 복원 모임을 한 뒤 성재 이시영(앞줄 가운데 흰옷 입은 이)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우당기념관 제공

    영화 ‘암살’ 모티브 신흥무관학교 독립기지 건설 위해 만주로 간 이회영·시영 6형제가 1911년 설립

    3500명 졸업생 독립운동에 투신 만주·연해주 일대 항일투쟁의 주역

    해방 후 창학 정신 계승한 신흥전문 6·25로 재정난 겪다 주인 바뀐 뒤 재단·학교명 차례로 변경돼

    ‘경희대’ 이름으로 성장했으나 “창학 정신 복원” 요구엔 모르쇠

  • 33

    생 무장부대)가 참전해 활약했다. 청산리 전투를 지휘했던 김좌진 장군도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신흥무관학교에서 공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열단을 이끌었던 석정 윤세주도 신흥무관학교 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