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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강의 여러 동생 지천 중 가장 호기심이 가는 곳은

단연 '왕숙천(王宿川)'으로, 그 이름만으로도 오래된 역사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한자 이름 그대로 왕이 묵었다는 하

천이다. 왕숙천의 상류인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八夜里)

에서 태조 이성계가 여드레를 묵은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세조를 천변에 있는 광릉에 장사 지낸 후 왕이 잠든 곳이라

고 해서 왕숙천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왕숙천은 포천시 내촌면(內村面) 신팔리(薪八里) 수원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남양주시를 지나 구리

시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길이 37.34㎞의 하천이다. 지류로

용암천, 덕송천, 갈매천, 불암천, 사릉천, 용정천, 진건천, 오

남천, 금주천, 봉선사천, 양벌천, 암현천, 진목천 등 총 13개

를 아우르는 큰 하천으로 옛 부터 가뭄에도 물이 마르는 법

이 없었던 명당수로 알려져 있다.

광릉 수목원(국립수목원)으로 유명한 세조의 무덤 광릉

도 왕숙천 상류에 있고, 태조 이성계의 무덤을 포함하여 아

홉 기의 무덤이 있는 동구릉도 왕숙천 가까이에 있다. 가히

조선 왕들의 사연으로 가득한 왕들의 하천으로 불릴 만 한

곳이다.

왕숙천가에는 이렇게 광릉, 국립수목원, 봉선사, 동구릉

등 문화 관광지와 역사적인 유적지가 많은데다 강도 아닌

하천에 하중도(河中島)인 밤섬까지 있는 큰 강 못지않은 곳

이다. 요즘엔 이 하천가에 산책로 겸 자전거도로까지 생겨

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기에 더 없이 좋은 하천이 되었다.

왕들의 무덤에서 도심 속 사색의 공간이 된 동구릉

한강 자전거도로를 따라 달리다 왕숙천을 만나는 합수부

로 진입, 기분 좋게 페달을 밟으며 상류인 북쪽을 향해 달려

갔다. 하천의 하류 지역인 경기도 구리시를 지나는 왕숙천은

도시의 여느 강변처럼 잘 다듬어진 천변과 잘 가꾼 조경을

갖추었다. 하천변 뒤로 높다랗게 병풍처럼 둘러 쳐진 아파트

단지에 사는 주민들이 나와 산책을 하고 나무 그늘 밑에서 담

소를 나누며 여름을 나는 모습이 정겹다.

왕숙천은 필자가 사는 동네의 불광천이나 홍제천과는 다

르게 왕이 묵어갔다는 하천답게 강폭이 매우 넓은 하천이다.

하천 건너로 오가는 사람들이 개미 만하게 보일 정도. 하천

중간 중간에 쉬어가기 좋은 현대식 정자가 있어 좋다. 정자

그늘 안에서 잠시 쉬어가려는데 하천 공원으로 나들이 나온

남녀 대학생들이 집에서 만들어 가져온 음식을 먹다가 "같이

드실래요?"하며 나무젓가락을 주며 권했다.

낯선 이에게 곁을 내주며 먹거리를 나눠주는 우리의 풍습

하천여행기 9

왕릉과 섬, 동산을 품은 하천, 왕숙천

김 종 성 | 여행작가

(sunny2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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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과 문화 Vol. 10 No.3 ● 여름48 49

이 어른들만이 아니라 젊은이들에게도 남아있다는 게 놀랍

고 또 흐뭇했다. 한국 사람들의 매력은 겉으론 쑥스럽고 무

뚝뚝하게 보여도 속으로 따스한 인정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얘기를 나누며 후식으로 과일까지 잘 얻어먹고 함

께 단체 사진까지 찍었다.

왕숙천의 하류에 있는 명소 ‘왕들의 계곡’ 동구릉을 빼놓

을 수 없다.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왕릉이라는 뜻

으로, 고대 이집트 왕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카이로 근교의

‘왕들의 계곡’과 다를 바 없다. 합장과 쌍분을 포함해 열일곱

명의 왕과 왕비가 아홉 기의 능에 묻혀 있는, 조선 최대의 능

원이자 현대에 들어서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

었다. 58만평이나 되는 넓디넓은 동구릉은 조선의 초대 임금

인 태조 이성계부터 조선 말기의 24대 헌종까지 조선시대 9

대 왕과 왕비가 묻혀있는 집안묘역이다.

입구의 붉은 홍살문 밑을 지나면 무덤에 온 것이 실감이 나

면서 경건해지는 마음이 생긴다. 고목 소나무를 대표로 한

수목들이 울창한 멋진 숲길이 펼쳐져 있어서,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한 나무들 사이로 왕이 된 듯 여유롭게 거닐기 참 좋

다. 고목이 우거진 숲과 바위 한 점 보기 힘든 부드러운 능선,

마치 인공수로처럼 완만하면서도 작은 골짜기는 매우 보기

드문 지형이다. 아홉 기의 큰 무덤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어진

한적하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나무숲 길은 깊숙이 들어가면

갈수록 오래된 절집에 온 듯해 피안(彼岸, 이승의 번뇌에서

해탈함)의 세계마저 느끼게 한다.

홍살문부터 왕릉까지 이어진 돌로 만든 참도를 걸어 들어

가는 순간 1400년대의 조선 초 시대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참도는 죽은 조상들이 걷는 신도와 임금이 오

가는 어도의 두 길로 나누어져 있는 것도 이채로웠다. 높고

커다란 능 안에는 거기에 누운 왕과 왕비 개인의 삶뿐만이

아닌, 시대에 같이 존재한 나라 온 백성의 운명과 삶의 이야

기도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동구릉의 휴무는 매

주 월요일이며 입장료는 천원이다.

왕숙천의 넓은 하류 길엔 구리시의 높은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조선 최대의 능원이자 현대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동구릉

하천변 나무 그늘 아래서 담소를 나누며 피서를 하고 있는 주민들

시민들에게 도심 속의 청량한 산책 공간이 된 동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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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 입은 백로들이 왕처럼 모여 있는 하천

왕숙천의 지류 가운데 하나인 사릉천을 만나는 곳을 지나

면서 자전거도로는 한쪽으로 작아지고 갈대, 물억새 밭과 습

지가 나타난다. 아마 왕숙천의 옛 모습이 이랬을 것 같은 원

시적이고 자연적인 풍경이다. 며칠 전 내린 국지성 호우에 먹

을거리가 많아져서인지 찬거리 사냥을 나온 백로들이 흔히

보였다. 새하얀 옷을 입은 크고 작은 여러 마리의 백로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그 옛날 조선왕들의 가족들이 왕숙천

을 산책하는 것처럼 보여 이채로웠다.

불어난 하천가엔 백로들 외에도 인근 동네의 낚시꾼들이

알록달록한 파라솔을 세워놓고 하천가에 앉아서 저마다 찌

를 주시하고 있다. 낚시꾼 아저씨 곁에 있는 어망을 슬쩍 보

니 어마어마한 크기의 잉어가 운 나쁘게 잡혀 억울하다는

듯 눈을 껌벅거리는 게 불쌍해 풀어주고 싶었다. 이어서 상

상도 못한 사람들이 하천변에 출현했다. 바지, 챙 모자, 텐

트까지 온통 개구리 무늬로 깔 맞춤을 한 모습이 영화에서

나 보았던 스나이퍼(sniper : 저격수) 같아 흥미롭게 쳐다보

니 중장년의 아저씨들이 손에 든 건 낚싯대가 아니라 둔중

한 카메라다.

영어로 사진 찍는 걸 'shooting'이라고 표현하던데 딱 그 모

양새다. 카메라에 달린 커다란 망원 렌즈마저 개구리 무늬로

색칠을 했다. 취미로 사진을 찍는 분들이 웬만한 사진기자나

직업 사진가보다 더 한 것이, 30도가 넘은 무더운 날씨에 땡

볕 아래의 일인용 텐트 안으로 각자 들어간다. 텐트 속에서

은신을 한 채 하천가에 서있는 백로, 왜가리, 해오라기가 물

고기를 잡아먹는 결정적 순간을 가까이에서 사진에 담기 위

해서란다. 취미 이상의 대단한 열정이 느껴져 아저씨들을 다

시 보게 되었다. 취미든 직업이든 저런 열정과 몰입의 대상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이들이다.

왕숙천은 자전거도로 말고 위쪽에 둑방길이 있다. 비포장

길이지만 느릿느릿 정겹게 흘러가는 하천을 굽어보며 천천

아저씨들이 한가로이 낚시를 하는 너른 왕숙천의 풍경이 푸근하다. 하천의 백로들이 마치 하얀 옷을 갖춰 입고 나온 왕들의 가족 같다.

낚시꾼에게 운 나쁘게 잡힌 팔뚝보다 큰 왕숙천의 잉어들 무더위에도 하천의 조류와 물고기 사진을 찍고 있는 대단한 사진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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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내달렸다. 둑길가에는 가축의 도축장이 있는가 하면 목

청 좋은 닭을 키우는 집들도 보이고 담 밑에 도라지꽃, 백일

홍 등의 예쁜 꽃들과 옥수수, 호박 등이 자라는 작고 낮은 집

들이 있어 어디 멀리 시골에 여행을 온 것 같았다.

섬과 동산, 아이들을 품은 하천

무더운 여름 날씨지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밟을수록 시

원한 강바람이 더위와 열기를 식혀준다. '자전거 여행' 책을

쓸 정도로 자전거 타기를 즐기는 김훈 작가는 자신의 애마에

'풍륜'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그도 자전거를 타

면서 맞는 바람의 시원함과 상쾌함에 푹 빠졌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왕숙천은 길 위로 멀리 푸른 산들이 펼쳐져 있고, 천

변엔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들이 많으며, 하얀 옷을 차려

입은 백로들이 많이 보여 더욱 시원하게 느껴진다.

중간 중간 하천 위를 지나는 다리 밑에는 반가운 모래톱이

보이고, 동네 주민들이 나와 그물질을 하는가 하면 아이들은

물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웃통을 벗은 할아버지들이 모래톱

위에서 장기를 두면서 피서를 하고 있었다. 상류 쪽으로 올

라갈수록 푸근한 강변의 풍경이 반겨주어 필자도 물가에 들

어가 손발을 담그며 쉬어가기 좋았다.

하천변에서 오래전부터 영업을 했다는 ‘임송 캠프장’(캠핑

장의 예전 이름)에 들어가 물통을 채우고 얼마 후 생각지도

못한 것이 나타났는데 그건 바로 '밤섬'. 한강의 하중도(河中

島) 밤섬은 들어 보았지만 왕숙천에도 밤섬이 있었다니. 다

남양주시를 지나는 왕숙천변엔 작은 텃밭들이 많아 시골에 온 것 같다. 장마 때 경기도 가평에서 떠내려 왔다는 흥미로운 ‘알동산’

유원지, 골프장이 들어섰을 정도로 컸던 왕숙천의 하중도, 밤섬 왕숙천엔 동네 꼬마 녀석들의 여름 풀장도 있다.

하천물이 깨끗해 더위도 피하고 수렵도 하는 주민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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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점이 있다면 한강의 밤섬은 무인도지만 왕숙천의 밤섬은

예전부터 시민들이 놀러오는 유원지가 있었다. 얼마 전에 골

프장으로 바꾸어 운영을 하다가 현재는 아무것도 없는 상

태다. 하천에 떠있는 섬을 보니 참 새롭고 섬을 품은 왕숙천

이 다시 보였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재잘거림이 들려와 고개

를 돌렸더니 글쎄 동네 개구쟁이들이 팬티만 입고 한 곳으로

몰려가고 있다. 그곳은 비가 내린 후 생긴 왕숙천의 물웅덩

이로 다이빙도 할 수 있는 천혜의 아이들용 풀장이다. 수영

복도 없이 바로 옷을 벗고 뛰어드는 녀석들을 보니 웃음이 나

고 내 어릴 적 그때로 순간 이동한 것 같다. 자기들 다이빙 하

는 사진을 찍으라며 차례로 돌 위로 올라서더니 나름대로 개

발한 포즈로 물속에 뛰어 내린다. 그 와중에 안경을 물속에

잃어버린 놈, 신발 한 짝이 없어졌다며 잠수하는 놈...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엄마의 눈을 부라리게 만드는 것도 어쩜 그리

국민학교 시절 친구들과 똑같은지 신기할 정도다.

알고 보니 이곳은 왕숙천의 숨겨진 작은 섬 ‘알동산’이었

다. 안내 게시판에 써있는 알동산의 발생 유래가 재미있다.

옛날 큰 장마로 인해 불어난 물로 경기도 가평에서 알동산

이 떠내려 왔다는 것이다. 당시 가평관원이 매년 이곳까지

찾아와 세금을 받아갔다고 한다. 아이들은 물놀이하며 뛰놀

수 있게 아담하고, 어른들은 나무 그늘 아래서 망중한을 즐

길 수 있는 천혜의 섬이었다. 몇 발짝 오르면 되는 동산 꼭대

기에서 보이는 하천의 풍경은 더욱 정겹다. 왕숙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를 곳이다.

왕숙천 상류에 있는 남양주시 진접읍 동네에 들어서자 하

천은 계속 이어지나 아쉽게도 보행길이나 자전거도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왕숙천가의 또 다른 왕릉인 광

릉과 광릉 수목원(혹은 국립수목원)과 봉선사라는 사찰로

길이 이어져 있다.

봉선사(奉先寺)는 이름 자체가 ‘선왕을 모시는 절’라는 의

미이다. 광릉의 원찰이 되면서 봉선사는 사세가 크게 확장되

었는데,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사

세가 위축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요즘 같은 여름날 너른 마당

에 피어난 연꽃이 장관이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광릉은

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와 왕비 정휘왕후의 능이 있는 곳이

다. 광릉은 다른 능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아주 울창한 수림

을 자랑하는 곳이다. 입구에서 약 300m 가량 이어지는 멋진

숲길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한여름에도 시원한 청량감이 느

껴지는 숲길을 걸으며 여름날의 왕숙천 여행을 마무리 했다.

‘선왕을 모신다’는 의미의 오래된 사찰, 봉선사의 명물 연꽃

입구에서부터 울창한 숲길이 이어지는 ‘광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