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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422-9번지 3층 [email protected] 02-6401-0514 37 기획기사 - 비폭력 직접행동의 장벽들 우리의 행동은 왜 정당한가 직접행동의 훼방꾼, 일반교통방해와 업무방해 비폭력 직접행동 무죄 사례 살펴보기 평화수감자 양윤모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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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422-9번지 3층 [email protected] 02-6401-0514

37

기획기사 - 비폭력 직접행동의 장벽들

우리의 행동은 왜 정당한가

직접행동의 훼방꾼, 일반교통방해와 업무방해

비폭력 직접행동 무죄 사례 살펴보기

평화수감자 양윤모

Page 2: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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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전쟁없는세상 37호 소식지

차례

소식지를 내며 Editorial 1

평화주의자 노트 Essay

게임과 평화 2

일상에서 만나는 훈련주의 8

사회운동 설계하기 - 제주해군기지 건설저지운동 편 13

다녀왔습니다 Experience

“미안해요 베트남” - 한국군 민간인 학살지역 위령제 참가기

22

기획기사 Special

인트로 31

우리의 행동은 왜 정당한가 32

직접행동의 훼방꾼, 일반교통방해와 업무방해 39

비폭력 직접행동 무죄사례 살펴보기 46

평화수감자 양윤모 52

리뷰-책&영화 Review-Book&Movie

우리가 전쟁에 대해 ‘겨우’ 이야기 할 수 있는 몇 가지 것들 57

겁쟁이가 나쁜가요? 67

기획연재 Series

전쟁 기업에 저항하라 73

가람이의 좌충우돌 세상읽기 18화 76

나름의 바다 건너 일기 77

효웅의 꾸잉꾸잉 82

재정보고 Report

후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90

Page 3: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발행처: 전쟁없는세상발행일: 2013년 5월 1일제호: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연락처: 02-6401-0514주소: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422-9번지 3층 (121-230)http://www.withoutwar.org [email protected]

인쇄기획 한울타리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2동 137-69(130-062)연락처 02-924-9641,2 팩스 02-927-5104

평화수감자들한테 편지 써 주세요!

병역거부 수감자들입니다

최기원경기도 여주우체국 사서함 30호 457번 (469-800) - 여주교도소

유윤종(공현)서울시 금천우체국 사서함 165호 489번 (153-600) - 서울남부교도소

강정에서 제주해군기지 저지활동을 하다가 수감된 분들입니다

양윤모제주시 오라2동 161번지 301번 (690-162) - 제주교도소

김영재제주시 오라2동 161번지 435번 (690-162) - 제주교도소

Page 4: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1소식지를 내며

소식지를 내며

용석 |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 + 병역거부팀

전쟁없는세상에 운영위원회 새 얼굴이 들어왔습니다. 지우와 숲이

아.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다고요? 이번 소식지 평화주의자 노트를

보면 이 사람들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최소 1년 동안 전쟁없

는세상의 운영위원으로 맹활약을 할 두 사람을 지켜봐 주세요!

요새 파업하는 노동자들에게 천문학적인 금액의 손해배상을 청구

하는 것으로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는데, 평화

활동가들 처지도 다르지 않습니다.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도 제주해

군기지 반대와 관련한 직접행동들로 재판이 여러 건 잡혀있습니다.

평화 운동을 가로막는 벌금 폭탄, 비폭력 직접행동의 정당성과 함께

정부가 벌금폭탄으로 평화활동가들을 위축시키려는 것이 뭐가 문제

인지를 기획기사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기획 연재에 실렸던 난영 님의 그림이 이번 호부터는 뒷표지로 옮

겨갑니다. 무려 컬러로 된 그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획 연재에는

새로운 꼭지가 생겼습니다. 요새 국민연금 공단을 상대로 확산탄 생

산 기업에 투자를 철회하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무기제로팀이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이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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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화주의자 노트

게임과 평화

지우 |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 + 피망팀

게임의 폭력성 논란이 한창이다. 폭력적인 게임이 사람의 폭력성을

유발하는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인기 있는 게

임의 대부분이 때리고 부수고 죽이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인,

즉 폭력적이거나 자본주의적인 게임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종

종 이런 게임들을 즐겨도 괜찮은 건지 고민에 빠지곤 한다.

게다가 그중 다수는 현실의 구체적 부조리를 철저히 왜곡하고 은

폐한다. 전쟁과 자본증식에 따르는 민간인의 희생이나 피착취계급의

고통은 게임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로 간주되어 추상화되거나 삭제된

다. 제작자나 사용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현상의 멋지고 그럴듯한 일

면만이 강조되고 미화된다. 마틴 월러스(Martin Wallace)는 19세기

영국 콘월 지방의 광업을 다룬 보드게임 ‘티너스 트레일(Tinners’

Trail)’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Page 6: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3평화주의자 노트

아무리 복잡한 규칙을 갖추었더라도 게임은 현실의 추상화이다.

이 게임도 예외가 아니어서 많은 ‘역사’를 빼버려야 했다. 대표적

인 예로는 다이너마이트의 사용과 갱내 승강기1의 발명, 광산 폐

쇄에 따른 대량의 실업이 있다.

그렇다고 이런 매체를 규제하거나 검열하는 데에는 반대한다. 전쟁

을 미화하는 영화를 막는다고 전쟁을 다룬 영화를 모조리 금지하여

반전(反戰)영화까지 못 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위 음란물을

규제한다고 성기 노출이나 섹스의 묘사를 일괄적으로 금지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목적의 정당성을 떠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함으

로써 수단의 정당성을 결여한 방법이다.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잠시 화제를 돌려 내가 좋아하는 보드게임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

다. 보드게임이란 컴퓨터게임과 달리 놀이판과 말 등 물리적인 도구

로 진행되는 놀이를 말한다. 바둑이나 윷놀이도 보드게임의 일종이

다.

보드게임 역시 전쟁과 돈벌이를 소재로 한 것이 많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보드게임은 컴퓨터게임에 비해 대체로 덜 폭력적이고 덜 자본

주의적이다. 보드게임이 비교적 ‘점잖은’ 사람들의 취미이기 때문인

1 1919년 레반트(Levant) 광산에서 노후한 갱내 승강기(man engine)가 붕괴되어 광부 31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있었다. 그 밖에도 1846년 이스트휠로즈(East Wheal Rose)에서 침수로 39명이 익사하는 등 콘월 지역에서만 여러 번의 광산 사고가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만 매년 1,000명 이상이 광산 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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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얼굴을 맞대고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하는 놀이이기 때문

인지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한번 예시를 들어보자.

독점을 뜻하는 ‘모노폴리(Monopoly)’라는 게임을 들어봤을 것이

다. 아마 한국에서 안 해 본 사람이 드물 ‘부루마불’의 원조이자 모

든 현대 보드게임의 시조격인 게임이다. 하지만 ‘모노폴리’의 전신

이 토지사유제를 비판하는 정치적 목적의 게임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리지 매기(Lizzie Magie)는 자본주의적 독점의 폐해와 헨

리 조지의 토지공개념 사상을 알리고자 ‘지주 게임(The Landlord’

s Game)’을 만들었다. 결국 원제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게임이 상

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둬 보드게임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것은 아

이러니다.

그러나 이 예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고, 오늘날 상용화된 게

임의 대다수가 이렇게 대놓고 ‘이념적’이지는 않다. 그럼 실제로 요

즘 보드게이머들 사이에 인기 있는 게임들을 살펴보자. 다음에 소개

지주게임 모노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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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평화주의자 노트

할 것은 2013년 현재 보드게임긱(boardgamegeek.com) 커뮤니티에

서 순위 1~3위를 달리고 있는 게임들이다.

‘황혼의 투쟁(Twilight Struggle)’은 20세기 중후반의 미소 냉전

을 배경으로 한다. 탱크나 보병, 전투기 따위는 나오지 않지만 정치공

작과 쿠데타 기도 등을 통한 양국의 패권 다툼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게임이 진행되는 와중에 미소 간의 갈등이 지나치게 고조되어 핵전쟁

이 일어나면 게임은 즉시 한쪽의 패배로 끝난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핵무기를 먼저 사용한 쪽이 아니라 핵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쪽이 패

배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이 북쪽 정부의 “먼저 핵단추 눌러도

책임 없다”는 태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쓰루 디 에이지스(Through the Ages)’는 특유의 중독성으로 악

명(?) 높은 컴퓨터게임 ‘문명(Civilization)’의 보드게임 판이라고 할

만하다. 역사적으로 문명의 발전에서 문화, 정치, 과학 등과 더불어

군사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컴퓨터게임 ‘문

명’이 사실상 전쟁 게임이라고 봐도 무색한 데 반해, ‘쓰루 디 에이

지스’의 제작자는 유달리 평화를 강조한다.

게임 시스템 자체가 싸움이 공격자보다 방어자에게 유리하게 설계

되어 있다. 제작자들은 아예 “쓰루 디 에이지스는 침략에 관한 게임

이 아니”며 “무력을 통해 게임에서 승리하기는 어렵다”고 밝힌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은 게임에서 여전히 중요한 요소인데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전쟁의 위협이 있는 한 군사를 소홀히 할

Page 9: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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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배려해서 제작

자는 게임에서 침략과 전쟁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평화적인 변형

규칙’까지 마련해놓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인 ‘아그리콜라(Agricola)’는

상품도 없고 화폐도 없는 전(前)자본주의적인 자급자족적 농촌생활을

소재로 한다. 분쟁이나 권모술수의 요소가 없음은 물론이다. 보기 드

물게 그야말로 평화적이고 전원적인 테마의 게임이다. 척박한 환경에

서 먹고 살기가 워낙 팍팍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다지 평화적이지만

도 않지만 말이다.

그 밖에 처음부터 플레이어 간의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공생을 목

표로 하는 게임도 있다. 일례로 ‘팬데믹(Pandemic)’에서는 플레이

어들이 질병 전문가가 되어 치명적인 전염병으로부터 세계를 구한다.

소박한 농장을 가꾸는 게임 ‘아그리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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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평화주의자 노트

‘플래시 포인트(Flash Point)’에서는 소방관이 되어 화재를 진압하

고 사람들을 구출한다. 최근에는 독일의 어린이 과학잡지 게오리노

(GEOlino)가 세계 최초의 ‘녹는’ 보드게임 ‘멜트다운(Meltdown)’

을 개발했다. 플레이어들이 북극곰 가족이 되어 얼음이 녹기 전에 안

전한 곳으로 가는 게 목적인 협력게임이다.

어쩌면 방금 소개한 게임들에 반영된 시각도 ‘진정한 평화’와는 다

소 거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만하면 진일보한 것이 아닌

가 생각한다. 어쨌든 내가 보드게임에서 발견한 것은 ‘작은 희망’이

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할지 모르지만 취미와 문화가 우리의 평

화를 옹호하고, 신념과 재미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양립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이런 평화적인 놀이 문화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문화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의 자발적이고 의식적

인 노력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취미를 가진 사람의 대개가 그러하듯 나 역시 언젠가는 취미의 소

비자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자가 되어 정말 나만의 게임을 만들

고픈 욕심이 있다. 여기에 내가 생각하는 평화의 관점까지 담을 수 있

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래서 틈틈이 게임을 만들고 있는데 마음만

앞서 5부작까지 구상만 해놓았을 뿐 아직 구색을 갖춘 것은 별로 없

다. 솔직히 ‘자본(Das Kapital)’ 같은 제목의 게임이 나올 수 있을지

나 의문이지만, 언젠가 이 게임들이 빛을 볼 수 있길 바란다.

Page 11: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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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주의자 노트

일상에서 만나는 훈련주의

“하나 둘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우렁찬 목소리로 구호에 발을 맞춰 무리의 사람들이 뛰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큰 소리에 깜짝 놀라고 보니 방금 전 체육대학 앞에

줄을 맞추어 서 있던 체대생들이다. 남학생들이 앞에 서서 가고 여학

생들도 질세라 구호를 외치면서 뜀박질을 한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으레 체대에 입학한 학생들은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달리기 훈련을

한다. 마치 군대에서 구보를 하는 듯한 훈련이 진행되며 이는 체대 내

의 기강, 소위 ‘군기’를 잡기 위해 하는 거라고들 한다. 군대도 아니

고 체대에서 이런 것을 왜 할까, 체대에 왜 군기가 필요할까, 라는 생

각을 하며 걸어가는데 체대생 들이 내가 가는 길을 가로질러가서 잠

시 멈춰서야 했다. 횡단보도에서 달리는 행렬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뒤에서 들리는 학생의 목소리 “멋있다~”

숲이아 |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 + 피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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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평화주의자 노트

학교에서 마주친 이 당황스러움은 사실 익숙한 것이었다. 군대가

아닌 곳도 군대 같은, 징병제 때문에 대부분의 남성들이 군대에 가야

하고, 많은 인구가 군대에 다녀온지라 군대문화에 익숙하며, 남자들

이 모이는 곳이면 군대 다녀온 이야기가 회자되는 이 한국이라는 나

라에 살고 있는 이상 “군대스러움”이란 전혀 낯설기만 한 것은 아니

다.

그러고 보니 대학생활 초창기, 구보라는 말을 생애 처음 들었던 때

는 학교 실습기간이었다. 전공 특성상 일주일 동안 실습하는 과목이

있는데 그 실습 기간 내내 오전이 되면 기상을 하고 체조를 한 뒤 실

습장 주변을 구령에 따라 구호를 외치며 달려야 했다. 으레 구령을 외

치는 사람은 군필자 남성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전공 분위기에 적응

을 잘 못하는 것이 뭐가 문제인지 잘 몰랐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면

바로 군대 같아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며칠 전 대학친구를 만나 이야기하며 같이 대학 다니던 시절(지금

으로부터 무려 6~7년 전) 이야기를 나누며 전공 분위기가 군대 같아

서 힘들었던 것 같다고 말하니 친구는 이제 알았느냐는 듯이 맞장구

를 쳤다. 학생들을 다 모아놓고 폭탄주를 제조해서 대접을 돌리는 교

수님이 있었고 그때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을 때 안 마시면 안 될

것 같던 무겁고 우중충한 분위기가 아직도 기억에 난다. 권위자의 명

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고 명령을 거스르거나 다른 생각을 가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사회. 그것이 군대고 군대가 복제된 학교로 느껴

졌다.

Page 13: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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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평화’를 주제로 작년 9월부터 진행되고 있는 <평화책 읽

기 모임>에서 박노자의 『씩씩한 남자 만들기』를 읽었다. 저자는 한

국 사회의 근대 남성성이 체현되는 과정을 그린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규율화되어 있고 군사화된 육체다. 박노자에 따르면 한국에서 남자는

학력자본의 소유자이자 경제능력의 소유자인데, 후자인 경제 우선론

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을 훈련주의로 본다. 그의 말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체대나 전공 실습

과정에서의 훈련은 책 제목대로 ‘씩씩한 남자 만들기’가 아니었나 싶

다.

그런데 잠깐, 나는 남자는 아니고 생물학적 여성인데?

뭔가 이상하다. 나는 왜 남자가 되어야 했을까. 그리고 여성은 왜

남성이 되기를 때때로 강요받는가. 이런 고민은 시민운동의 영역에서

활동했을 때의 경험들과도 맞닿아 있다. 운동 단체를 경험하면서 알

게 된 것은 시민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립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는 사실이었다.

단체에서 활동을 할 때 접한 잊혀지지 않는 문장이 있는데 그것은

활동가에 남자, 여자가 어디 있느냐고 생각했었다는 말이었다. 그 말

이 이상하게 머리 속에 박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활동가에

남자, 여자가 어디 있냐”는 말이 “활동가는 남자다”라는 말이라는 것

을 알았다. 활동가는 남자고 체대생도 남자고 시민도 남자다. 군대식

위계화된 질서를 강요당해야 하고 아랫사람들은 무조건 권위에 복종

Page 14: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11평화주의자 노트

해야 하며 권위 있는 사람이 권위 없는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이 용인

되는 사회는 분명 좋은 사회는 아니라 생각한다. 사회를 바꾸겠다고

운동하는 시민운동영역에서도 남성이 되기를 강요받는 여성뿐 아니

라 남성들조차 남성들 사이의 권력구조에 맞추어 살아가느라 피곤해

지기 쉬운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서 훈련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남성 중심적인 사회

에서 생물학적인 여성으로 태어난 나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또

젠더 이분법은 어떻게 뛰어넘어야 할까, 군사화된 한국사회-심지어

학교마저도-에서 살아가는 나는 군대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하는 것들이 요즘 나의 고민 주제이다. 일일이 답을 내릴 수 없는 질

문들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이런 고민에 답하기 위해 젠더와 평화를 주제로 하는 평화책 읽기

모임에서 꾸준히 책을 읽어나가고 있다. 전쟁없는세상의 활동에 더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된 것도 함께 답을 찾아갈 사람들을 만나고 싶

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일상에 속속들이 전쟁준비, 훈련,

규율은 계속되고 있다. 때론 한국에서 발을 딛고 사는 것, 군대가 복

제된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지뢰밭을 걷는 것 같지만 아슬아슬해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외롭지는 않을 것 같다.

올해부터 학교를 다시 다니며 책임활동가로 전쟁없는세상의 활동

을 함께하게 되었다. 앞으로가 기대되고 평화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

Page 15: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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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가 주어져서 기쁜 마음으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반군사

주의를 내걸고 있는 전쟁없는세상에서 활동을 하게 되어 참 좋다.

Page 16: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13평화주의자 노트

평화주의자 노트

1. 운동설계워크숍

전쟁없는세상은 작년 3월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 WRI)의 안드레아스 스펙(Andreas Speck)과 함께

‘운동설계워크숍(Movement Building Workshop)’을 진행했다. 이

워크숍은 병역거부 운동 10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체복무

제도 도입이 좌초되고 우리 운동이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기획되

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절차,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이 다 실행되었

으나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고 평가되었던 대체복무제도

도입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활동가들 모두가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

게 다시 시작할 것인가에 대한 피로도가 누적되어 있었다.

오리 | 전쟁없는세상 사무국 + 피망팀

사회운동 설계하기 - 제주해군기지 건설저지운동 편

Page 17: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14

운동설계워크숍은 1980년대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빌 모이어(Bill Moyer)가 개발한 ‘활동계획짜기(Movement Action

Plan, MAP)’ 툴을 이용해 진행하였다. 이 툴은 성공적인 운동의 여

덟 가지 단계와 활동가들의 네 가지 역할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사

회운동에 대한 일곱 가지 전략적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첫째, 사

회운동은 과거에 강력함이 입증되었고, 미래에도 강력할 것이다. 둘

째, 사회운동은 사회의 중심에 있다. 셋째, 진짜 문제는 “사회정의”

VS “기득권”이다. 넷째, 사회운동의 대전략은 참여민주주의를 증진

시키는 것이다. 다섯째, 사회운동의 목표 대상은 일반 시민들이다. 여

섯째, 사회운동의 성공은 장기적 과정이지 단순한 일회적 사건이 아

니다. 일곱째, 사회운동은 비폭력적이어야 한다.

이 전략적 가정을 기반으로 활동계획짜기 툴은 사회운동을 여덟 단

작년 3월에 진행한 운동설계워크숍

Page 18: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15평화주의자 노트

계로 나눈다. 1단계,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기,

2단계, 기존 절차의 실패를 드러내는 시기, 3단계, 사람들이 듣기 시

작하고 작은 시민불복종 행동들이 조직되어 문제를 극적으로 보여주

는 시기, 4단계, 어떤 특정한 계기를 통해 운동이 확산되는 시기, 5단

계, 운동에 사람들의 참여가 줄어드는 침체기, 6단계, 사회의 다수가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시기, 7단계, 운동

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인식되는 시기, 8단계, 그 성공을 강화하고

다른 투쟁으로 이동하는 시기.

이 여덟 단계에서 활동가들은 수많은 일을 한다. 이를 분류하면 크

게 4가지 역할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역할, 반항아. 이들은 사회운

동하면 저절로 떠올려지는 사람들로 비폭력직접행동이나 공개적인

반대선언 등을 통해 사회 문제를 정치적 의제에 올려놓는 사람이다.

주로 운동의 시작 단계에서 큰 역할을 한다. 두 번째 역할, 개혁가.

이들은 주로 기존 절차의 실패를 보여주거나 대안적인 해결방안을 마

련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 역할, 시민. 말 그대로 시위나 행동에 참

여하는 다수의 대중들이다. 네 번째 역할, 주도자. 이들은 모든 운동

의 중심에서 역할을 하는 사람들(활동가들)로 사회 구성원들을 교육

하고 조직하며 장기 전략을 세우는 역할을 한다.

물론 사회운동은 복잡한 현상이기 때문에 이 툴을 그대로 따라가거

나 꼭 맞게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운동의 단계와 활동가의

Page 19: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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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을 확인하는 것이 성공을 인식하고 미래를 발전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도 이 툴에 맞춰 스스로의 상황을 진단하고

운동의 전체 단계에서 우리가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지, 이 교착상태

를 뚫고 나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각자는 활동가들의 네 가지 역

할 중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등을 토론하면서 좀 더 긴 안목을

갖게 되었고 다시 길을 걸을 힘을 낼 수 있었다.

나는 모든 사회운동 그룹에서 한 번쯤은 이 툴을 가지고 운동설계

워크숍을 해보길 권하고 싶다. 특히 전쟁없는세상과 같은 난관에 봉

착한 그룹이면 더욱 효과를 볼 것이다. 전쟁없는세상의 계간 평화잡

지 ‘전쟁없는세상’ 이번 호에서는 이 툴을 이용해 제주 해군기지 반

사회운동의 여덟 단계와 활동가들의 네 가지 역할

Page 20: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17평화주의자 노트

대운동에 대해 분석을 해보도록 하겠다. 이 분석은 공식적으로 이 운

동 관련한 어떤 조직에서도 논의된 바 없는 개인적인 생각임을 먼저

밝히며 참여연대 이태호 사무처장과 평화군축센터 김희순 팀장의 도

움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적어둔다.

2. 제주 해군기지 반대운동의 단계들

정부가 제주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계획을 세운 시기는 1993년

김영삼 정부 때부터이다. 이후 2002년 화순지역에 해군기지 건설계

획을 발표하고 같은 해 말 화순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계획을 유보하

기로 결정한다. 2005년 화순 해군기지 재추진 계획이 발표되고 주민

들이 또다시 거세게 반발하자 그 해 여름부터는 위미 지역이 후보로

슬금슬금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그 해 말 주민 동의 후 추진

이 전제된 예산이 국회 예결위를 통과하게 되었다. 화순과 위미 지역

주민들이 주민총회를 개최해 해군기지 건설 반대 입장을 공식적으로

결정하고 크게 반발하는 중 2007년 봄, 강정마을회가 해군기지 유치

신청서를 제출하게 된다. (이 과정은 제주 자치정부가 개입, 지역 주

민들을 매수, 회유하고 민주적 절차를 깡그리 무시했기 때문에 가능

한 것이었다. 2007년 8월 강정마을회 총회에서 94%의 지역 주민들

이 압도적으로 반대를 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여기까지, 2002

년 화순 해군기지 반대운동, 2005년 위미 해군기지 반대운동부터 강

Page 21: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18

정마을이 최종적으로 해군기지 건설지역으로 발표되기까지의 시기를

우리는 활동계획짜기의 여덟 단계 중 제 1단계로 볼 수 있다. 정부는

한국의 국가안보를 위해 제주도에 꼭 군사기지가 필요함을 내세웠지

만 지역 주민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가 본격적으로

예산집행이나 공사착수 등을 실행하지 않은 시기여서 많은 대중들이

문제점을 인식한 것은 아니고 전 사회적으로도 공론화되기 이전이다.

두 번째 시기는 2007년 강정마을의 반대운동이 시작되고 2009년

도지사 소환운동까지의 시기로 볼 수 있다. 정부와 해군 측에서는 민

군복합항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 문제의 본질을 감추려 하였고

2009년 초 국방군사시설실시계획 승인에 이어 국방부, 국토부, 제주

도가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건설 협약서를 체결하기에 이른다. 많은

제주 시민사회단체들이 이에 대한 대응 활동을 시작하고 우리가 전문

가가 되어 연구하고 문제를 발견해가면서 기존의 절차가 작동하지 않

음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9년 5월, 제주도지사 주민

소환운동을 시작해 2009년 8월 26일 투표를 진행했으나 유효투표수

를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세 번째 운동의 조건이 성숙되는 시기는 주민소환운동 이후 2011

년 말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한편으론 주민소환운동의 실패와

2010년 조건부 수용론을 둘러싸고 지역운동이 조금은 침체기에 접어

들었으나 최성희, 김종일, 송강호, 생명평화결사 등의 개별활동가들

Page 22: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19평화주의자 노트

과 사회단체들이 육지에서부터 결합하기 시작하면서 운동의 기운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

서 2011년 5월 제주해군기지건설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가 결성

되었고 2011년 한 해 동안 전국에서 많은 방문자들이 삼삼오오 강정

마을을 다녀갔다. 많은 사람들이 강정마을 주민들을 만나고 강정마을

의 빼어난 풍광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은 점점 고

조되었다. 이 시기 강정마을은 이러한 방문자들이 걸어놓은 갖가지

현수막들로 마을 전체가 물들었다. 또 2011년 말 국회에서 해군기지

예산이 전액 삭감되면서 운동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네 번째 시기는 2012년 한 해로 볼 수 있겠다. 2012년 초 정부는

본격적으로 구럼비 발파를 시작하며 건설작업에 착수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정으로 몰려와 현재 상황 및 정책이 보편적 가치에 위배

됨을 다양한 불복종 행동을 통해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2012년 한

해는 강정 해군기지 운동이 각종 포탈검색어 1위를 차지하면서 가장

활발히 최고조에 달했을 때이다.

다섯 번째 시기는 2012년 말 대선에서 해군기지를 찬성하던 후보

가 당선되고 2013년 해군기지 예산이 삭감 없이 전액 통과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2012년 다양한 불복종 행위들에 관한 재판이 본격적으

로 시작되고 3억 원 가량의 벌금 폭탄과 반복되는 연행과 구속에 시

달리면서 활동가들이 좌절, 절망, 탈진 등의 감정에 시달리고 있다.

Page 23: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20

운동의 규모도 줄어들고 권력자들이 변하지 않았음을 새삼스레 깨닫

는 시기이다.

제주의 해군기지 반대운동은 현재 5단계의 어디쯤에 존재한다. 해

군기지 공사도 현재 굉장히 많이 진척된 상태로 하루가 다르게 달라

지는 강정마을의 풍광을 바라보는 것도 우리를 무력감에 빠지게 한

다. 하지만 우리는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

지 않을 것이다. 현재 해군기지뿐만 아니라 공군기지, 미사일기지, 해

병대부대 등의 각종 군사시설들을 제주에 건설하고자 하는 논의가 진

행 중이다. 만약 정부의 계획대로 해군기지가 추진된다 할지라도 이

것이 끝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2014년 지방선거를 기

점으로 이 문제들이 다시 한 번 불거질 것으로 예상하며 오키나와, 하

와이 등 비슷한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다른 섬들과 연대하면서 제주

를 비무장평화의 섬으로 만들고자 하는 운동을 계획하고 있다.

활동가들은 이 운동의 각각의 단계에서 수많은 일을 해왔다. 전쟁

없는세상은 활동계획짜기 툴의 네 가지 활동가 유형에 따르면 반항아

의 역할을 주로 해왔다고 생각한다. 특히 제 4단계의 운동 시기 각종

직접행동들을 기획하고 주도하면서 문제를 언론화, 전국화 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또 전국대책회의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사회변혁의 주

도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작년부터는 매달 비폭력트레이닝

을 진행하면서 활동가들의 교육, 트레이닝, 조직화에도 힘쓰고 있다.

Page 24: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21평화주의자 노트

제주 해군기지 반대운동의 3주체인 강정마을회, 제주도 제주도 범도

민대책위, 전국대책회의는 개혁가와 주도자 역할을 하면서 기존 절차

의 실패를 보여주고 장기 전략을 세우는 역할을 한다.

새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부터 제주 해군기지에 대해 찬성의 입장을

보여 왔고 제주를 제2의 하와이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는 사

람이다. 현재 시작단계에 있는 해군기지 공사가 본격화되면 아마도

강정마을에 대한 회유와 협박을 동시에 제공하며 공사를 밀어붙일 것

이고 이 과정에서 주민과의 갈등, 주민 내부의 갈등도 점점 심화될 것

이다. 이미 해군기지는 돌이킬 수 없으며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졌

다는 반대세력의 주장이 커질 것이지만, 이에 맞서 해군기지가 끝이

아니라 제주에 공군기지 등의 다른 군사기지가 몰려오고 있으며 이것

이 우리의 보편적 가치에 위배되는 핵심적인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제주 지역에(또 한국 사회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라

는 것을 어떻게 잘 설득하고 운동을 만드느냐가 앞으로 우리에게 남

은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age 25: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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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미안해요, 베트남"-한국군 민간인 학살지역 위령제 참가기

조은 | 평화박물관 활동가

내가 일하는 평화박물관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

인 학살에 대한 사죄운동으로부터 만들어졌다. 1999년 9월, 한겨레

21에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들의 학살 의혹을 보도했고, 지

속적인 진상 규명과 사과촉구 활동을 위해 베트남 문제에 관심을 가

진 사회단체와 개인들이 모여 ‘베트남전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연대체에 위안부 할머니 두 분이 전쟁피해자를 위해 쓰

라며 기탁하신 돈을 기반으로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

다. 이후 평화박물관은 다양한 평화운동과 더불어 베트남에 대한 사

죄운동을 꾸준히 벌여왔다.

2012년 겨울, 평화박물관은 회원들과 함께 베트남 평화기행을 떠

났다. 그 길에서 하미 학살의 유일한 생존자 팜 티 호아 할머니를 만

Page 26: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23다녀왔습니다

났다. 다섯 명의 가족을 잃고 수류탄에 두 발목이 잘려 나간 할머니

앞에서 평화기행 참가자들은 울며 손을 잡아드리는 것 말고 할 수 있

는 게 없었다고 한다. 한국군에 의해 하미학살이 일어난 지 45년이

지났지만 한국 사람들은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다. 그 날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올해도 평화기행을 갔다. 3월 1일부터 7일까지 5

박 7일 일정으로 일본의 시민모임 KAJA의 회원, 평화박물관 회원,

평화박물관 상임이사인 한홍구 교수, 실무자인 나까지 총 30여 명이

하미 학살 45년 위령제에 참가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두 번째 평화기

행을 떠났다.

하미학살 위령제에 참가하기 전에 평화기행 일정 동안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다른 마을, 박물관들을 방문했다. ‘전쟁증적

박물관’에서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고엽제 피해

등 전쟁의 참상이 사진과 유물들로 적나라하게 전시되어 있고, 미군

전쟁증적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Page 27: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24

의 편에 가담해 그 전쟁에 참가했던 한국군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

다. 꽝아이성 ‘밀라이(선미)박물관’에서 전 세계에 베트남 전쟁의 더

러움을 폭로하는 반전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밀라이학살을 기록을

봤다. 학살과 관련한 자료를 보며 느낀 참담함을 몇 마디 글로 차마

적을 수가 없다.

“.. 아가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적(한국군)들이 우리를 폭탄구덩

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커서도 꼭 이 말을 기

억하거라...” 우리가 방문한 꽝아이성 빈호아 마을에 구전되어 불리

는 자장가다. 1966년 12월 한국군에 의해 빈호아 마을주민 430명이

학살당했다. 빈호아 마을에서 만난 학살의 생존자 도안응이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학살 당시 생후 6개월 된 아기였던 그는 총탄에 쓰러

진 어머니의 배 밑에 깔려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빗물에 흘러든 탄

약에 눈이 멀다. 살아남은 자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피투성이

아기가 죽은 어미의 빈 젖을 빨고 있었다고 한다. 도안응이아를 포함

해 빈호아 마을의 사람들은 한국군에 대한 처절한 증오가 담긴 자장

가를 듣고 자란다.

빈호아 마을에는 “하늘에 가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고 새

겨진 한국군 증오비도 서 있다. 평화기행 참가자들과 한국군 증오비

참배하고, 빈호아 초등학교에 방문해 아이들을 만났다. 전교생 400

명 중 54명이 민간인학살 희생자 직계 자녀들이다. 말은 통하지 않았

Page 28: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25다녀왔습니다

지만 아이들에게 선물을 건네주며 웃고 뛰어놀았다. 하지만 이 아이

들도 듣고 자랐을 증오가 담긴 자장가, 아이들이 커서 자녀들에게 들

려줄지 모르는 자장가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하미마을학살 45년 위령제

“이딴 거 필요 없어. 다 필요 없어! 우리 엄마 살려내!”

차마 빈손으로 갈 수 없어 준비한 선물이었지만 그녀는 선물을 받

지 않았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하염없이 울었다. 선물이 든 종

이백은 여전히 평화기행 참가자의 손에 들린 채 갈 곳을 잃었다. 곁에

있던 주민이 도닥였지만 그녀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모두 어찌해

야 할지 모르던 그 순간. KAJA의 김경남 선생님이 그녀에게 말없이

다가가 그녀를 꼬옥 안았

다. 그리고. 그 둘은, 같이

울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위령제의 사람들 모두 조

용히 울었다. 울음은 공명

했고, 사람도 비석도 하늘

도 땅도, 그 공간에 있는 모

든 존재가 우는 것만 같았다. 하미학살 위령제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 티 코아와 KAJA의 김경남 선생님

Page 29: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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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12일. 한 살에서 여든 여덟 살까지 모두 135명의 하미

마을 사람들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했다. 희생자는 주로 노인, 여성, 어

린 아이였다. 마을 사람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총을 쏘아 죽이고 매

장했다. 2012년 평화기행단이 만났던 하미마을의 팜 티 호아 할머니

또한 학살의 생존자다. 전쟁 당시 할머니는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로

자신의 가족을 모두 잃고 당신도 수류탄에 두 다리를 잃었다. 사건 당

시 마을을 떠나 있어 화를 면한 할머니의 큰 아드님은 전쟁 이후 농사

를 짓다 잘못 건드린 지뢰에 두 눈의 시력을 잃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학살당하거나 다치고, 고통 받은 사람들이 하미마을에는 너무나 많았

다.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100명이 넘는 사람이 학살을 당했으니 학살

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없었다.

마을에는 큰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2001년 한국 월남참전전우복

지회의 지원으로 건립된 하미 위령비다. 학살의 가해자인 한국 참전

군인들의 지원으로 세워지는 위령비는 건립 당시 대내외적으로 큰 관

심을 모았다. 하지만 위령비의 완공을 눈앞에 두고 학살 당시의 참상

을 생생하게 묘사한 비문에 대해 위령비 건립을 지원한 한국 참전군

인들이 반발을 했다. 비문 수정을 강하게 요구한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비문건립의 경제권은 한국 참전군인에게 있었다. 결국

학살의 참상을 담은 비문 위에 연꽃그림이 덮여졌다. 한국 참전군인

이 피해자들과 그들의 가족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대못을 박은 셈이다.

Page 30: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27다녀왔습니다

이 위령비 앞에서 위령제를 지냈다. 200여 명의 마을사람과 평화

기행단 30여 명이 한국군에 의해 희생당한 135명의 민간인을 추모하

는 45년 위령제에 참가했다. 지난 수십 년간 하미마을 사람들이 해마

다 위령제를 지내고 ‘따이한 제사’를 올려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희생자들을 추모했지만 그 동안 한국인들은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고 한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참여하게 된 하미학살 위령제였다. 한

국의 제사와는 다른 옷, 다른 형식이었지만 숙연한 분위기는 같았다.

절차에 맞춰 천천히 제사를 지내고, 사람들이 돌아가며 위령비 앞에

서 향을 피웠다. 나도 향을 들고 위령제 앞에 섰다. 마을에 세워진 위

령비의 전면에는 135명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출생년도

가 모두 새겨져 있다. 희생자 명단의 1968년 학살이 일어난 바로 그

해에 태어난 갓난아기들도 있다. 눈을 감고 향을 들어올린다. 내린다.

“1968년 음력 1월 24일 학살당한

135명의 동포들을 기리다”라고 시작

하는 비문은 지금 저렇게 연꽃 문양에

덮여 있다.

Page 31: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28

올린다. 내린다. 향을 향대에 꽂으며 위령비를 바라본다. 눈앞의 위령

비가 아득하다.

위령제가 끝나고 마을주민들이 준비해 온 음식을 다 같이 먹으며

음복연을 했다. 위령제 때의 엄숙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시끌벅적한

음복연이었지만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주민들이 준비한 음식을 맛

있게 먹는 것 외에 어떤 위로도 건네기 힘들었다. 옆 테이블에 위령제

중간에 선물을 건네다가 받지 않고 오열했던 주민이 있었다. 언제 울

었냐는 듯 화사하게 웃던 그녀는 그 자리에 있는 한국 참가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미안해. 안 울려고 하는데… 울어서 미안해”

그녀의 이름은 당 티 코아. 학살당시 세 살이었던 그녀는 한국군에 의

한 학살로 일곱 명의 가족을 다 잃고 홀로 남았다.

하미마을 위령제 이후 남은 일정을 어떻게 소화했는지 모르겠다.

머리를 둔탁한 것으로 맞은 느낌이 지워지질 않았다. 마음이 무겁고

하미 학살 45주기 위령제 _ 평화기행 한국 참가자들이 분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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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다녀왔습니다

몸은 아팠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책과 기사로 접했

을 때도 슬픈 기분이 들었지만 몸이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민간인 학

살마을을 방문하고 생존자분들을 직접 만났던 경험이 내 몸 어딘가에

아프게 각인됐다.

일본이 한국에 침략과 만행을 저질렀듯이 한국 또한 베트남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에게 사죄와 반성을 요

구하기 이전에 한국은 베트남 민간인학살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사

죄해야 한다. 하지만 베트남 학살사건이 한국에 공론화됐을 때 참전

군인은 학살사건을 보도한 한겨레 사옥에 쳐들어가 말 그대로 ‘쑥대

밭’을 만들었고, 한국 정부 또한 베트남 학살지역에 별다른 관심과

지원을 갖지 않았다. 시민들이 모금을 하고 슬퍼했지만, 시간이 지나

자 관심은 줄어들고 잊혔다. 나 또한 평화기행을 가기 전까지 잊고 있

었다.

잊힌 전쟁은 반복된다. 한국에서 베트남전쟁은 잊히지 않아야 한

다. 연꽃에 갇힌 비문이 다시 세상에 드러날 때까지 베트남 전쟁을 기

억해야 한다.

- 박치음 작곡 「미안해요 베트남」-

아름답게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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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마주선 곳은 서글픈 아시아의 전쟁터

우리는 가해자로 당신은 피해자로

역사의 그늘에 내일의 꿈을 던지고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베트남

어둠 속에서 당신이 흘린 눈물 자욱마다

어둠 속에서 우리가 남긴 부끄런 흔적마다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베트남

어떤 변명도 어떤 위로의 말로도

당신의 아픈 상처를 씻을 수 없다는 거 알아요

그러나 두 손 모아 진정 바라는 것은

상처의 깊은 골 따라 평화의 강물 흐르길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베트남

어둠 속에서 당신이 흘린 눈물 자욱마다

어둠 속에서 우리가 남긴 부끄런 흔적마다

미안해요 배트남 미안해요 베트남

* 베트남 평화기행은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의 구수정 선생님이 안내를 해주셨다. 구수정 선생님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을 밝히고 공론화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힘써왔다. 아맙 홈페이지(http://cafe.daum.net/doanhnhanxahoi)에 가면 베트남 민간인 학살지역과 관련한 많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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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기획기사 - 인트로

기획기사 - 인트로

Intro

전쟁없는세상은 해마다 병역거부자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꾸준

히 해왔다. 행사를 거듭하면서 전쟁을 지속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군사복무와 연결되어 있고

강요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병역거부운동을 전쟁을 준

비하는 일체의 행위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생각했다 강한 힘이 있

어야만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안보논리에 저항하고, 우리를 지키

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군사력과 무기가 필요하다며 끊임없이 전쟁

을 준비하는 것에 거부하는 우리 모두가 병역거부자인 셈이다.

작년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요구하

며 서울 도심에서 함께 자전거 행진을 벌였다. 그 외에도 해군기

지 건설의 부당함을 알리고 기지 건설을 막기 위한 여러 직접행동

을 준비하고 기획하고 실행했다. 그 과정에서 전쟁없는세상 활동

가를 비롯해 여러 평화활동가들이 연행되고 기소되어 재판을 받

고 있고, 벌금을 받거나 수감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이번 기획기사는 평화활동가들의 직접행동을 국가가 처벌로 일관

하는 것에 대해 다뤘다. 더 큰 범죄를 막고 예방하기 위한 우리의

행동이 왜 정당한지 알아보고, 우리의 저항행동을 옭아매는 법률

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해외에서 비슷한 행동에 대한 무죄를 받은

사례 소개했다.

Page 35: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32

기획기사

여옥 | 전쟁없는세상 사무국 + 병역거부팀

제주해군기지건설을 막기위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본격화된 것은

2011년부터이지만 이 싸움이 시작된 것은 훨씬더 오래되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동안 할 수 있는 거의 모

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이 잘못된 결정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훗날 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해군기지 건

설을 멈추어야 한다고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정책결정자들을 만나서

설득하고, 거리에서 시민들을 만나 서명을 받고, 신문광고를 내고, 토

론회를 기획하고, 문화제를 열고, 강정마을을 방문하는 평화비행기와

평화크루즈를 띄우고, 도보행진을 하고, 집회를 조직했다. 이러한 우

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강행이 되었고, 공사중단이 절박했던

활동가들은 공사의 진행을 직접 몸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은 왜 정당한가

Page 36: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33기획기사

우리의 행동들은 공무집행방해, 일반교통방해, 업무방해, 집시법 위

반, 재물손괴, 폭처법위반 등의 죄명이 붙어 재판이 진행 중이다. 현

재 제주해군기지 관련하여 진행되고 있는 형사재판은 50여건이 넘고

약 200여명이 3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벌금과 더불어 수감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제주해군기지를 막을 수밖에 없는 이유

제주도 최남단에 대규모 해군기지가 들어선다는 것은 평화의 섬인

으로 남아야할 제주도가 분쟁의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아시아의 군비경쟁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것

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이는 강정마을 주민들의 평화적인 생존의 권

리를 침해하는 것이자 제주도민, 대한민국 국민, 더 나아가 동아시아,

전 세계인 모두를 전쟁과 무력 갈등이라는 더 큰 위협에 빠트리는 심

각한 행위이다. 이미 여러 루트를 통해 드러났듯이 총체적인 설계오

류 문제, 해군기지의 미군시설 적용 문제, 일방적으로 강행하고있는

절차의 문제 역시 심각하다. 이런 비민주적이고 반평화적이며 헌법정

신에 위배되는 행위를 국가가 나서서 계속 하고있는 상황에서, 이에

저항하는 것은 이 문제의 당사자 중 한 사람으로서 불가피한 선택이

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이기 이전에 세계시민으로서, 제주도를 동북아의 화약고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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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평화지대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한반도와 동

북아의 평화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

은 부당한 결정, 부당한 절차, 폭력을 동원한 부당한 방법으로 건설되

고 있는 제주해군기지를 막는 것이었다. 정부의 잘못된 법이나 정책

에 저항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이기 때문에 평화적이고 비폭

력적인 방법으로 정당하게 반대의 뜻을 표명해왔다. 공사차량의 이동

을 막기위해 공사장 앞을 막아서고, 구럼비를 발파하는 화약의 이동

을 막기위해 화약고 앞을 봉쇄하고, 해군기지건설을 통해 이익을 얻

는 주 시공사 삼성물산 앞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해상공사를 하는 바

지선을 막기위해 카누를 타고서 바다에 들어가고, 방파제 제조에 사

용되는 케이슨의 이동을 막기위해 운반선 조종석을 점거하고, 구럼비

에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는 펜스에 구멍을 내거나 낙서를 하는 등의

비폭력 직접행동은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혼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

라 보다나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평화활동가

들이 고민한 최선의 방법이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범죄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비폭력 직접행동은 본래의 의미가 무시

된채 정치적인 맥락을 제외한 법률적인 사건이 되어 개별적인 행위의

준법성 여부만 평가되고 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해군기지공사가

정당한 것인지, 구럼비를 발파하는 화약의 이동경로가 정당했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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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기획기사

따져보지도 않고, 당일 도로를 점거해서 차량의 이동을 방해하는 행

위만을 문제삼아 기소하고, 삼성물산이 해군기지 건설을 통해 얻고있

는 부당한 이익이나 빠른 공사진행을 위해 벌이는 불법행위들과는 상

관없이 삼성물산 본사 앞에서 퍼포먼스를 한 활동가들이 삼성물산의

사유지에 들어갔는지의 여부만을 따져서 기소하고 벌금을 부과하는

것이 현실이다.

제주해군기지와 관련하여 정부와 경찰은 ‘엄정한 법집행’을 선

포하고 무리한 법적용을 하고있고, 법원은 이에 대해 견제하기보다는

부응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저항권을 행사하는 사

람들에게 행해지는 진압, 연행, 수사과정에서의 인권침해, 경찰이나

해군, 경비용역에 의한 폭력도 심각한 수준이다. 하지만 해군, 경찰,

정부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문제제기는 묵살되는 등 법은 편파적으

제주해군기지 공사를 위해 구럼비 발파를

시작한 2012년 3월, 주 시공사인 삼성물

산 앞에서 ‘피흘리는 구럼비’ 퍼포먼스를

했던 평화활동가들은 업무방해, 집시법위

반, 공동주거침입, 재물손괴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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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적용되고 있다. 부당하고 불법적인 공사의 진행을 막기위해 노력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책임을 활동가들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저항행위에 대한 불법성 여부만을 따져물어 과도하게

처벌하는 것은 적법할지는 몰라도 정당하지 못하다. 법이 누군가에게

는 유리하게, 누군가에게는 불리하게 적용되고 기본적인 권리마저 박

탈하는 것은 헌법정신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국제법에도 위배된다.

저항권이란 민주적 기본질서 또는 기본권보장의 체계를 위협하거

나 침해하는 공권력에 대하여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민주적, 법치주의

적 기본질서를 유지, 회복하고 기본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공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비상수단적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이 가지는 불가

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를 지닌 국가1가 헌법상 보

장된 평화적 생존권과 침략전쟁을 부인2하고 막아내기 위해 저항권을

행사하는 국민들의 행위를 합법과 불법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처벌해

도 되는 것일까. 거대권력의 불법과 편법에 항의하여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국민들을 혼란을 야기하고 불법을 자행하는 이들로 매도해

버려서는 안된다. 저항행위가 많으면 많을수록 단순히 개별법의 위반

여부로 처벌하는 것으로 끝낼게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할 수밖에 없

었던 이유나 그 행동을 통해 드러내려고 했던 의미 등에 주목하고 이

1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2 대한민국 헌법 제5조 제1항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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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기획기사

문제를 공론화시켜야 한다. 대규모 국책사업을 강행하고 있는 상황이

라면 더더욱 그럴 필요가 있다.

더 큰 범죄를 막기위한 저항행위

국가는 평화적 수단으로 국제 분쟁을 해결할 의무를 지니며, 전쟁

이 아니라 협력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고 모든 이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 이는 평범한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다. 평화롭게 살 권리는

전쟁과 폭력을 예방하고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정보를 접할 권리, 민

주적 의사결정을 위해 정확한 정보를 요구할 권리도 포함하며, 이는

국가로부터 보호받아야할 권리이다. 국가안보 앞에서 개인의 권리쯤

은 희생되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지켜내

야 하는 것이 바로 개인의 권리인 것이다. 정부의 의무불이행으로 국

민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이를 감시

하고 견제하고 저항할 권리가 있다. 어떻게보면 활동가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저항은 권리이기보단 의무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정부

의 잘못된 정책과 위법행위를 드러내는 것은 전쟁의 위협과 군비경쟁

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평화활동가들의 기본적인 활동이다. 군수산업

과 국책사업을 통해 이익을 얻기위해 위기를 조장하고 잘못된 정책을

부추기는 기업들 역시 감시와 견제의 대상이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국가와 사회의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활동가들

의 저항행위는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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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러한 저항행위에 대한 법적인 판단은 다르게 평가되어야

한다.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행위를 하는 주체에 대항해 정의와 평화

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저항하는 것은,

설사 실정법을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정당하다. 정당하다는 것은 합

법/불법의 이분법적인 잣대를 넘어 국책사업의 당사자이자 저행행위

의 주체자로서 우리가 겪고있는 심각하고 체계적인 인권침해를 구제

하고 보상하기 위한 주장이기도 하다. 평화활동가들은 이미 많은 재

판과 벌금으로 과도한 경제적인 탄압을 받고 있다.

정부든 기업이든 우리의 평화와 인권을 위협하고 전쟁과 무력갈등

의 위협을 부추기는 사업을 진행한다면 이에 대한 저항행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법을 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헌법정신을 실현

하기 위해서.

<참고>평화권원탁워크샵 자료집 <평화권의 국제적 논의와 한국에서의 수용 가능성>. 2012. 10. 19.강정마을 인권침해 조사보고서. 2012. 구럼비발파첫날건 항소이유서(제주지방법원 2013노28 양여옥, 이보라, 최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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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기획기사

기획기사

형법 제185조(일반교통방해) 육로, 수로 또는 교량을 손괴 또

는 불통하게 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교통을 방해한 자는 10년 이

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질문 하나. 다음 중 형법 제185조의 ‘일반교통

방해’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일까?

-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해고근로자 농성장 철거를 방해한 김씨

-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집단적으로 ‘버스타기 체험행사’를 진

행한 장애인들

- 2008년 촛불집회 때 집회관계자에게 무대차량을 빌려준 정씨

장현진 | 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직접행동의 훼방꾼,

일반교통방해와 업무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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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해군기지 공사장 앞에서 공사차량을 막은 고씨

- 희망버스에 참가했다가 부산에서 재판을 받은 이씨

- 제4차 희망버스에 참가했다 서울 동부지법에서 재판을 받은 유

- 아파트 후문 입구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놓아둔 박씨

정답은 ‘서울 동부지법에서 재판을 받은 유씨’이다. 같은 뜻을 지

니고 희망버스에 참가한 사람이라도 어느 지역에서 재판을 받는지,

어느 재판부가 담당하는지에 따라 유/무죄가 갈리고 벌금이 달라진

다. 동부지법은 경찰의 행진금지통보가 적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

반교통방해 혐의로 기소된 제4차 희망버스 참가자에게 무죄를 선고

했다.

형법상 일반교통방해죄는 도대체 왜?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적

용 대상과 범위가 천차만별이다.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주차한 박씨

처럼 정말 ‘교통을 방해’한 이에게 적용되기도 하지만 집회·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집시법(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대신, 또는 집시법

과 함께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시위 참가자에게 일반교통방

해죄를 일반화하여 적용하는 것은 2008년 촛불집회 이후 본격화되었

다.

원칙적으로 집회·시위에 관한 사안은 집시법에 의해 다뤄진다. 그

러나 집시법에 의하면 주로 집회의 주최자인 경우가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 않은 일반참가자의 경우는 제10조(옥외집회와 시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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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기획기사

금지 시간), 제11조(옥외집회와 시위의 금지 장소)를 위반하거나 제

12조(교통 소통을 위한 제한)에 따른 금지를 위반한 특정 경우에만

5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집시법

상 교통 소통 제한에 관련된 규정이 이미 존재하고 ‘도로에서 일어나

는 교통상의 모든 위험과 장해를 방지하고 제거하여 안전하고 원활한

교통을 확보함을 목적으로’하는 도로교통법에서도 도로의 통행과 관

련된 금지사항을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집회·시위 참가자에게 형법 제185조의 일반교통방해죄를 적용하

는 것일까?

집회·시위를 통제하고 싶어 하는 공권력의 입장에서 형법 제185

조는 효과적인 집회 통제 수단이 될 수 있다. 형사소송법에서는 50만

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경미한 사건에 대해서는 현행범 체포를

제한하고 있다. 그런데 ‘경미한 사건’에 해당하는 집시법이나 도로

교통법이 아닌 형법상의 일반교통방해죄를 적용하는 순간 경미한 사

건은 10년 이하의 징역을 받을 수도 있는 중범죄로 바뀌고 집회 참가

자들은 공권력에 의해 진압해야 마땅한 범죄자가 된다. 그렇기에 도

로를 행진하고 있는 집회참가자들을 현장에서 직접 연행하는 방식으

로 집회를 통제할 수 있게 되고 집회가 종료된 이후에도 참가자들을

기소하여 높은 벌금형으로 불이익을 줄 수 있다. 참가자들이 불이익

에 대해 항의하며 정식 재판을 청구하기에는 감당해야 하는 것이 너

무 많기에 정식재판은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일반시위참가자들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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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차별적 기소는 일반 시민으로 하여금 집회에 참가하는 것에 대

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도록 한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되며

집회·시위에 관한 권리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일반교통방해죄는 공권력에 의한 악의적 적용을 차치하고서라도,

법 자체에도 문제의 소지가 많다. 먼저 ‘기타 방법으로 교통을 방해

한 자’의 해석 문제이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기타’에 해당하는가?

앞에 ‘손괴·불통’이라는 용어가 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기타 방

법’에 어떤 행위가 포함될 것인지 명확하게 예측하기가 어렵다. 또,

일반교통방해죄가 적용된 사례에서 보아왔듯 그 적용범위가 광범위

할 수 있기에 자의적인 법적용이 가능해진다는 문제점이 있다. ‘기

타’를 확장해석한다면 검사는 수많은 사안 중 한둘을 골라 선별적으

로 기소할 수 있고, 판사는 수많은 확장해석을 판례로 축척해놓고 있

는 상황에서 이를 유죄로 할 수밖에 없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결국 최

종적 불이익은 시민들이 당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일반교통방해죄의 법정형은 그 상한이 매우 높고, 양형

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해당 법에서는 징역

형의 경우 1개월~10년의 징역, 벌금형의 경우 5만원~1500만원까

지 법정형의 범위가 광범위하게 규정되어 있다. 형법의 개별 범죄 중

에서 이처럼 형벌의 재량이 광범위한 조문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와 같은 광범위한 법정형은 사실상 법관에게 엄청난 양형재량을 부

과하고 있다. 그렇기에 앞서 제시한 사례와 같이 희망버스를 탔더라

Page 46: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43기획기사

도 몇 차 희망버스를 탔느냐, 어느 지역에서 기소되었느냐, 어느 재판

부에게서 재판을 받느냐에 따라 판결이 상이하다. 즉, ‘기타 방법’에

대한 구성요건의 모호함과 광범위한 양형재량이 결합하면 법관의 자

의적 판단에 근거한 판결이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다.

집회시위의 자유는 국민의 헌법상의 기본권이다. 집회와 시위는 정

치·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소수자들로 하

여금 의사표현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정치적 발언권을

지닌 다수자에게 집회시위에 관한 권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

다. 그러나 주류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알려지지 않았던 소수자들에

게 집회·시위는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세상에 요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집회와 시위에 관한 권리는 누구에게나 보

장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시민적·정치적 기본권이다. 그렇기에 집

회·시위에 관해서는 금지, 제한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보장’의 원칙으로 접근하는 것이 마땅하다. 특히나 집회·시위에 대

해 형사법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극히 일부 상황으로 제한되어야 한

다. 형사법은 가장 강력한 국가권력의 개입형태이므로 매우 신중하게

행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제주해군기지 반대활동을 하다 기소된 평화활동가들에게 일

반교통방해죄와 업무방해죄를 적용하여 기소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최소 2백만 원에서 많게는 7~8백만 원의 벌금이 부과되고 있

으며 정식재판을 청구하고 항소심으로 올라가도 벌금이 그다지 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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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지 않는다. 이는 ‘현행범 체포’를 통해 현장에서 집회·시위를 통

제하고 활동가들을 경제적으로 억압함으로써 활동을 위축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 적용은 다분히 우려스럽다. 집회 참가자는 어떠

한 행위가 일반교통방해죄 상의 범죄행위가 되는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으며 기소된 피의자는 자신이 어떤 벌금을 받게 될지 예상하기 어

렵다. 시민들은 법조문에 대한 예견가능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규면

을 내면화할 기준을 가지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소 모호한 법

조문은 법관에게 자의적 판단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일반교통방해죄

에 대한 이와 같은 문제제기는 꾸준히 존재해왔고, 촛불집회 이후 이

조항이 남용되거나 확대 적용되지 않도록 조문상의 ‘기타 방법’을

구체화하거나 삭제하는 개정방향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

임이 구체적 법 개정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일반교통방해죄를 살펴보며 도대체 도로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인간이

도로를 위해 존재하는가? 일반교통방해죄로 기소된 내용을 살펴보면

마치 차도를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상정하고 법을 기계적으로 적용

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겉으로 보기에 구성요건에 해당하면 무조건

처벌대상으로 상정하는 치안국가적 사고가 아니라 집회결사의 자유

라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이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강정마을 주

민들, 구럼비, 남방큰돌고래, 붉은발말똥게와 함께하고자 했던 평화

활동가들의 시민적·정치적 기본권이 도로보다는 먼저 고려대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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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기획기사

되어야 하지 않을까. 평화로운 제주에서 살 권리를 외친 활동가들에

대해 형법상 범죄의 형식적 구성요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정치적 기본권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법원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해

본다.

* 참고「일반교통방해죄와 집회시위에의 그 적용을 둘러싼 문제」, 형사법연구, 제21권제1호(통권 제38호), 한인섭. 2011.「집회·시위에 대한 형법 제185조(일반교통방해) 적용의 문제점」, 안암법학, 37권, 신은영, 2012.

전쟁없는세상

새 홈페이지 구경 오세요!

www.withoutwar.org

Page 49: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46

기획기사

나는 법률 전문가가 아니다. 때문에 권력의 부당함에 대해 불복종

할 수 있는 권리들이 헌법상 명시적인 조항이 없기 때문에 해석의 여

지가 분분 하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논

의되어 왔는지, 혹은 어떤 판례들이 존재하는지 상세히 알지는 못한

다. 어쨌든 딱히 생각나는 한국 사례가 없기도 하고 외국에서는 이러

한 행동들이 어떻게 법률적으로 취급되는지 소개하는 것도 의미있겠

다 싶어 최근 법원으로부터 자신들의 불복종 행동에 대해 무죄라는

판결을 이끌어 낸 영국의 사례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에서는 지난 3월 제주 강정마을을 방문했던 앤지 젤터(Angie

Zelter)와 그의 트라이던트 플라우쉐어(Trident Ploughshares) 동료

오리 | 전쟁없는세상 사무국 + 피망팀

비폭력 직접행동

무죄 사례 살펴보기

Page 50: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47기획기사

들이 1990년대 중반 인도네시아로 수출할 계획이던 호크기를 때려

부수고 무죄판결을 받았던 사례가 그나마 꽤 유명세를 탄 것 같다. 트

라이던트 플라우쉐어는 영국의 트라이던트 핵무기 시스템을 비폭력

적으로, 공개적으로, 평화적으로, 완전한 책임을 지고 무장 해제하기

위해 1998년에 영국에서 시작된 캠페인이다. 성서를 읽어본 사람이

라면 익숙할 이사야 구절에서 따온 ‘무기를 쟁기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이후에도 몇 차례 비슷한 행동에 대한 비슷한 선고

가 있었다. 아래 소개할 사례는 가장 최근 사례이다.

2009년 1월 17일 영국 브라이튼의 활동가들이 2008년 말 부터 시

작된 이스라엘의 캐스트레드(Cast Lead) 작전에 항의해 이스라엘로

무기를 만들어 수출하던 EDO/ITT 무기 공장을 부수고 들어가 수십

만 파운드 상당의 기물을 파손하였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상대

로 이와 같은 무력침공을 시도한 전력이 하도 많기 때문에 나를 비롯,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당시 상황을 좀 정리해 보겠다.

흔히 가자전쟁 혹은 가자학살로 불리는 이 작전은 2008년에서

2009년 겨울 3주 동안 가자지역에서 벌어졌던 무력분쟁을 지칭한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로켓공격 중단과 가자지역으

로 밀반입되는 무기들을 차단하겠다는 것을 공습의 이유로 내세웠으

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군사목표물 이외에도 팔레스타인의 정

치, 행정기구 및 가자와 라파같은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또한 공격하

여 국제사회의 높은 비난을 받았다. 또한 1월 3일부터는 지상군도 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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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하였는데 당시 이 작전의 보병사령관들은 공군, 해군, 포병대, 기

밀정보부대, 전투공병부대와의 협조에 필요한 전례 없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고 전해진다. 하마스도 이에 대응해 남부 이스라엘의 도심부에

로켓과 박격포 공격을 감행했고,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은 엄청난 사상

자 발생의 우려와 국제사회의 높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1월 18일 일방

적인 휴선을 선포하기 전까지 마지막 일주일간 가자지구에 대한 엄청

난 공격을 퍼부었다. 1166명에서 1417명의 팔레스타인 사망자와 13

명의 이스라엘 사망자(이 중 4명은 자기편의 공격에 의한 사망)를 낳

고 어처구니없는 전쟁은 마무리 되었다.

‘투하되는 모든 폭탄, 발사되는 모든 총알은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다. 그것이 어디든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는 모토로 2004년 출발한

스매쉬이도(Smash EDO www.smashedo.org.uk)는 EDO/ITT 해

체를 위한 캠페인이다. EDO/ITT는 원래 EDO MBM이라는 영국 브

케스트레드 작전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퍼포먼스(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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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튼 지역의 무기회사였는데 2008년부터는 미국 군사장비 및 정

보기술 회사 ITT Exelis가 소유하고 있다. 스매쉬이도의 활동가들은

EDO/ITT를 단순한 전쟁수혜자가 아닌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살육을

적극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주체로서 사고해왔다. EDO/ITT의 생

산품들과 EDO가 특허를 가지고 있는 부품들은 정밀유도탄 등 다양

한 무기제조에 사용되며, 특히 록히드마틴이 이스라엘에 판매하여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는 데 사용되는 F-35전투기의 유도장치는 바

로 EDO에서 생산된 것이다. 스매시이도는 2003년 전 세계 유래 없

는 대규모 반전시위에도 불구하고 발발한 이라크 전쟁을 보면서 퍼져

있던 이러한 저항방식의 무력감 속에서 결성되었다. 거기다 직접 팔

레스타인지역에서 ISM(International Solidarity Movement) 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돌아와 운동이 더욱 활기를 띌 수 있었다.

2008년 연말, 가자전쟁이 발생하고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자

레바논 카나학살에서 EDO/ITT의 책임을 묻는 스매쉬이도 활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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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매시이도의 6명의 활동가들이 사다리와 해머로 공장에 잠입해 하

루 종일 공장의 기계를 부쉈다. 스매시이도의 탄생 배경, 이들이 그간

불법적 전쟁을 끝내기 위해 했던 활동들을 본다면 이들의 이 행동은

논리적이고 일관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 행동을 결

행하기 전 미리 비디오를 녹화하였고 자신들의 행동의 정당성에 관해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남겼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EDO와 영국의 다른 많은 무기

산업도 이러한 전쟁 범죄를 지원하고 사주하였다. 우리가 벌인 행동

은 이 전쟁범죄를 방해 혹은 지연시키고 보다 큰 범죄를 예방하기 위

한 것이다. 전쟁과 무기들의 대량생산을 찬양하는 것은 이에 가담하

는 자들의 마음에 깃든 질병이다.”

이 직접행동 이후 6명의 활동가들은 250,000파운드(한화 4억 원)

상당의 기물파손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실제로 끼친 손해는 훨씬 어마

어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사무실 밖으로 컴퓨터

들을 죄다 던져버린 Raytheon 9 행동 같은 경우 350,000파운드 상

당의 기물파손 혐의로 기소되었었다). 이들 행동의 목표는 더 이상 이

공장에서 무기들이 생산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고 이 날의 행동

으로 EDO/ITT사는 얼마간 조업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받

았다고 한다.

2009년 5월, 9명의 활동가들은 ‘기물파손을 하기 위해 공모한

죄’로 법정에 섰다. 3명은 공장 밖에서 체포된 활동가들이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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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기획기사

활동가들이 주장한 이들 행동의 정당성은 “더 큰 범죄를 예방”하

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호크기를 부수고 기소되었던 트

라이던트 플라우쉐어의 용감한 4자매의 주장, 앞서 잠깐 언급했던

2008년 Raytheon 9 행동 때와도 비슷한 것이다. 7월 2일, 마침내 이

들은 앞서 무죄를 받았던 트라이던트 플라우쉐어, Raytheon 9의 활

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전원합의에 의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배심원

들은 특히 재판의 증인이 증언한 가자지구의 참상(2009년 가자시의

Al-Quds 병원에서 인권 자원활동을 했던 재판의 증인은 배심원들이

가자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포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배경설명

을 하였다)에 깊은 우려심을 표현했다고 한다.

무죄 판결을 받은 스매쉬이도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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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김영재 | 강정지킴이 + 제주교도소 수감 중

“자다가도 구럼비 바위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하루 고통스럽

지만 해군기지 건설 자체가 악법이라는 사실을 남겨야 한다는 각오로

단식에 임하고 있다. 1년 6개월 동안 무난히 지낸다는 것은 내가 범죄

를 저질렀다고 인정하는 것” (양윤모)

양윤모

-전 한국 영화평론가협회장, 스크린쿼터영화인대책위원회 집행위원

-해군기지 반대 투쟁 최초 법정 구속

-해군기지 반대 투쟁 사상 최다 수감(2010, 2011, 2012, 2013)

-1956년 제주 출생

평화수감자 양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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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기획기사

-2011년 옥중 포함 74일 이상의 항의 단식, 2012년 옥중 42일 이

상 항의 단식

-2013년 2월 1일, 해군기지 건설 저지활동 중 1년 6개월 실형 선고

로 법정 구속

-2013년 1월 31일부터 정부의 거짓 시뮬레이션 시현보고의 취소와

해군기지 백지화를 요구하며 52일간 단식.

아이 같은 웃음을 간직한 사람

풍부한 감성으로 늘 눈물짓던 사람

불의한 일을 지나치지 않는 사람

옳은 것을 위해 평생 쌓아온 안위를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

막걸리를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고

그리고 강정을, 구럼비를 좋아하는 사람

강정.

강정에서 제주해군기지 공사 저지활동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강정은

그 이름 하나만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질만큼 복잡한 마음을 가지게 되

는 곳입니다. 아직도 불법부당한 막가파식 해군기지가 건설되고 있고,

그 부당한 공사에 맞서 주민들과 소위 강정지킴이로 불리어지는 평화

활동가들이 하루 24시간 몸을 던져 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고 있고,

정당성 없는 이 공사를 강행하고자 연 10만 명 이상의 육지 경찰이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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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되어 국가 폭력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곳, 강정.

이 현장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눈에 띄는 백발의 한 사람이 있습니

다. 제주해군기지건설 반대 운동의 아픔이자 자신이 가두어짐으로 또

다시 희망이 되신 양윤모 선생님. 제주해군기지건설 반대 활동이 한창

이던 지난 여름, 그 분은 공사장 정문 앞에서 살다시피 하셨습니다. 오

랜 단식으로 몸이 불편하신 가운데에도 늘 공사장 정문 앞에서는 그

분의 변함없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반대 활동이 불붙어 수 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게 싸우던 때에도, 무자비한 공권력의 폭력이 매일매

일 일어나 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이 지쳐가던 그 때에도 양윤모 선생

님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묵묵히 공사 차량을 막아내셨습니다.

작년 10월부터 시작된 24시간 공사에 맞서 저지 활동을 하던 그 때,

그 치열하던 현장에서는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서 쪽잠을 자며 당신

의 아들, 딸만한 활동가들에게 항상 그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해주시

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양윤모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당신의 적극적

인 활동이 해군기지 반대 운동에 혹시나 누가 되지는 않을까 고민하시

던 모습, 잠시도 해군기지 공사 중단, 해군기지건설 백지화에 대한 고

민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시던 모습, 깨어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아마

쪽잠이 드신 그 잠깐의 꿈 속에서도 강정 앞바다를 그리고, 그 곳에서

인연을 맺었던 붉은발말똥게, 방풍초를 그리고, 구럼비를 그리셨을지

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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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기획기사

가끔씩 소액의 후원금이라도 들어온 날이면 어김없이 막걸리를 사

오라 하셔서 젊은 후배 활동가들과 잔을 기울이며 그들의 고민을 들어

주시고, 운동의 희망을 말씀하시던 마음 따뜻한 형이자, 믿음직한 삼

촌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주해군기지 반대 활동 과정에서 그 분의 생각은 늘 앞서가고 있었

고, 그래서 의도치 않은 오해도 많았고, 싫은 소리도 들으셨지만 뒤늦

게나마 돌이켜보면 그 분의 생각은 늘 한결같았고 다른 활동가들이 미

처 보지 못한 앞날을 이미 준비하고 계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럼비의 그 따뜻함이 좋아 강정에 머무르게 되셨다는 양윤모 선생

님은 그 따뜻한 구럼비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

하며 들어서게 될 해군기지 공사가 시작되자 생명과 평화 파괴의 현장

에서 당신의 양심에 따라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반대 활동의 최선봉으

로 뛰어드셨습니다. 그 후, 수 많은 공권력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꿋

꿋이 자리를 지키셨고 네 차례의 수감 생활 동안 불법적이고 반민주

적인 공사에 항의하면서 목숨을 건 옥중 단식을 두 차례나 펼치셨습니

다. 지금 이 시간도 수감 생활을 계속하시며 지난 4월 5일까지 60일에

가까운 세 번째 단식을 감행하며 그 갇힌 공간에서도 오직 이 야만적

인 공사를 막아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현장에 있는 주민들과 지킴이

들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어느 일이라도 자신의 일생을 걸고 그 일에

매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수십 년 간 쌓아왔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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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들을 내려놓으며 진실과 정의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더더욱 어

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양윤모 선생님은 수 십년간 영화 평론으로 쌓

아왔던 성과들을 진실과 정의, 평화를 위해 내려놓으시고 불법공사,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막아서는데 일생을 걸고 매진하고 계십니다.

비록 아직도 차가운 교도소 좁은 방에 갇혀 계시지만 이 시대를 살

아가는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모범이 되고 계신 양윤모 선생님께서 하

루빨리 강정으로 돌아오시길 기다립니다.

“하늘과 구럼비와 내가 이미 하나이므로,

구럼비의 파괴는 곧 나의 영과 닿아있다.

나의 단식을 멈추는 날이

바로 해군기지 공사가 중단의 그날이며,

이 땅 제주에서

군사기지가 완전히 철회되는

그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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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리뷰-서평

리뷰-서평

양똘 | 출판노동자 + 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우리가 전쟁에 대해 '겨우' 이야기할 수 있는 몇 가지 것들

―케빈 파워스, 《노란 새》를 읽고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곤혹스럽

다. 복잡한 것도, 싫은 것도 아니고 그

저 곤혹스럽다는 느낌이다. 그건 이 책

이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전쟁

그 자체를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

쟁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정말이지 곤

혹스럽고,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조금은 곤혹

스럽다. 하지만 해볼까 한다. 국내외 통

틀어 오랜만에 만난 빼어난 소설이다. 번역 상태가 곤혹스러운 걸 빼

면 자신 있게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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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작가 케빈 파워스는 “전쟁터는 어땠나?”라는 질문들에 답을 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작가는 2004년 이라크전 당시 17세로

이라크 모술과 탈 아파르 지역에서 포병으로 복무한 경험이 있다. 그

전에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시(詩)를 좋아하는 수줍은 소년이었던 걸

로 추정된다. 그런데 “네가 겪은 전쟁터는 어땠냐”는 물음에는 어떤

아름다운 시로도 답할 수 없었던가보다. 끓어오르는 이미지들을, 그

숱한 파편들을 정제되고 함축된 언어로 표현해낼 수가 없어서, 작가

는 처음으로 소설을 썼다.

전쟁을 겪은 이들이 소설을 쓰게 되는 것은 낯선 현상은 아니다. 우

리나라에도 1960년대 이른바 ‘전후소설’이라고 하는 작품들이 쏟아

져 나왔었다. 6.25전쟁 경험담을 써서 등단을 하고 오직 그 이야기들

만 쓰다가 자취를 감춘 작가들도 많을 것이다. 그 소설들은 솔직히 말

해 크게 재미있다고는 할 수 없다. 보통은 자기 경험의 한계에 갇히게

마련이고 어쨌든 서로 엇비슷하게, 하나같이 처절할 수밖에 없기 때

문이다. 하지만 그 소설들을 한창 읽던 시절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

던 것 같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쓰여지지

않으면 안 될 이야기들이 기어코 쓰여졌을 뿐이라고.

나는 지금 스물아홉. 전쟁을 겪어본 일이 없다. 앞으로도 없을지 모

르고, 단연코 없기를 바라며, 없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세상 모든 일

은 겪어본 사람이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마련이지만, 전쟁은 반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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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리뷰-서평

것 같다. 전쟁은 겪을수록 오히려 말하기 어려워지는 게 아닐까? 이

소설의 화자이자 작가의 자전적 인물인 바틀은 어느 순간 깨닫는다.

전쟁이 ‘하나의 커다란 농담’과도 같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하

려고 할수록 손을 벗어나며, 조리 있게 재구성하려 할수록 엉망이 된

다는 것을.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씨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그건 질문

도 아니라고, 난 생각했다. 그게 무슨 질문이란 말인가? 답이 없

는 질문에 어떻게 답한단 말인가? 그때 일어난 일들을, 단순한 사

실들을, 일어난 사건들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것은 일종의 배신

이 될 것 같았다.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일은 일어났다. 모든 것은 추락했다. (190쪽)

소년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어린 병사가 내장을 쏟아내고 죽어간

모습 앞에서, 바틀이 한 말은 이게 전부다. “뭐야, 씨발? 뭐냐고, 씨

발!” 난 이 대사가 역설적으로 전쟁에 대한 아주 정확한 촌평이라고

느꼈다. 말 그대로다. ‘씨발 뭐냐고’다.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왜 이렇게 죽어가야 하는지, 나는 왜 여기에 있는지, 왜 내 손에 총

이 들려 있고 내 몸에 피가 묻어 있는지, 왜 나만 아직 살아 있는지,

이 모든 죽음이 무엇을 위해서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것. 그렇지

만, 알 수 없지만, 이야기해야만 한다. 이게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내

가, 겪기 싫은 내가 말할 수 있는 전쟁의 본질적 특성이다. 이해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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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그래서 이야기가 되어야만 했던 이야

기. 이야기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오직 살고자 풀어놓는 이야

기.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소설은 전쟁터에 던져진 인간이 어떠한 식으로 살아남게 되는

지, 또는 그러지 못하게 되는지 잘 보여준다. 크게는 세 가지 인물 유

형이 있다. 화자인 바틀. 그보다 세 살 어린 전우 머프. 이 둘을 이끄

는 분대장 스털링. 독자는 만약 자기가 전쟁터에 던져진다면 셋 중 어

느 유형에 속하게 될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짐작은

실제를 맞닥뜨렸을 때 완전히 빗나갈 수도 있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

는 자신이 극한의 상황에서 끌려나올지 모르니까.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겠다.

먼저 스털링은 전형적인 ‘군인’에 가깝다. 마치 군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인물 같다. 어떤 경우에든 규율에 충실하며 심신이 강하고 적

을 ‘처리’하는 일에 막힘이 없다. 그렇다고 딱히 ‘비인간’적이라

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스털링에게는 ‘인간’‘비인간’의 개념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 목표가 있을 뿐이고 상황과 대응이 있을 뿐이다. 스털

링 같은 상관 밑에 있기 때문에 서투른 군인인 바틀과 머프도 그만큼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한편 머프는 셋 중에서 가장 심약한 인물이다. 아직 열여덟 풋풋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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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모습 그대로다. 전쟁터에 내던져진 마당에도 자기를 떠난 여

자친구 생각에 우울해하며, 하지만 그녀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아이

다. 머프의 어머니는 머프를 보내면서 바틀에게 ‘잘 부탁한다, 무사

히 집에 돌려보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바틀은 그 부탁이 말도

안 되는 것인 줄 잘 알면서도 그렇게 약속하고 마는 인물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스털링과 머프의 중간쯤인데, 그렇기 때문에 가장 괴로운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끝없이 흔들려야 하고, ‘그럼 내가 그

때 어떻게 했어야 하지?’라고 곱씹어야 하는. 아마 인류의 절반 이상

이 바틀과 같은 입장이지 않을까?

세 인물은 이처럼 서로 다르지만 전쟁터라는 거대한 부조리 속에서

는 하나 다를 바 없기도 하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지점이다. 전

쟁의 손아귀에서 인간은 너나없이 무력하다는 점.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내가 총에 맞지 않아 기뻤고, 지켜보는 우

리 모두 앞에서 그렇게 죽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슬프지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저

친구가 죽고 내가 죽지 않아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

나님. (158쪽)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이 죽어서 감사하다고 기도하는 것.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입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비윤리적인 생각이며, 그 기

도 자체가 신성모독일 터이다. 다른 이의 끔찍한 죽음을 앞에 두고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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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이유로든 ‘기뻐한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전쟁터고, 그렇다

면 얘기가 달라진다. 도처에 널린 죽음, 자연스러운 것으로서의 살육,

그 속에서 어떤 인간인들 온전히 타인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을까. 때

문에 ‘저 친구’의 죽음에 감사하는 기도는, 가장 자연스럽고 온당한

기도가 된다. 자기 대신 다른 친구를 죽게 하는 신이야말로 진정한 신

이다. 전쟁터에서라면, 확실히 그렇다.

이 소설에서 전쟁에 던져진 인간 존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들이 작전 중 마주치게 되는 ‘시체 폭탄’을 들

겠다. 머리통을 자르고 몸속에 폭탄을 넣어 버려둔 시체. 적이 가까이

오면 그대로 터지게 되며, 시신은 피부, 근육, 내장, 팔과 다리 조각

들로 산산이 흩어진다. 작가는 이러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남자는

본의 아니게 무기가 되었다.” 인간이 그냥 좀 더 잔인한 인간이 되거

나, 미친 인간이 되는 수준이 아니다. 인간이 ‘무기’가 되는 것. ‘본

의’가 아니게. 명령대로 작전을 수행했을 뿐인데, 어느새 무기가 되

어 있는 것.

돌아가지 못한 자

이 소설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앞서 바틀이 이렇게 말

한 대목이 있었잖은가. 이 일들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것은 ‘일종

의 배신’이 될 것 같다고. 2004년 9월에서 시작해 2003년, 2005년,

다시 2004년을 넘나들다가 끝으로 2009년까지, 장이 바뀔 때마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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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왔다 갔다 하며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내가 작가는 아

니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뭐 유별난 문학적 장치를 위해서 한 짓

이 아니라는 거다.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에 대한 배신? 바로 자기가 겪은 일에 대한 배신이다. 전

쟁을 겪은 자신과 거기서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배신. 전쟁을 온전

히, 되도록 온전히 복원하기 위해서는 ‘전쟁 후(後)’를 함께 이야기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쟁 중과 전쟁 후가, 전쟁터와 전쟁터가

아닌 곳이 ‘동시에’ 이야기되지 않으면 우리는 전쟁의 맨얼굴을 조금

도 마주할 수가 없다.

이 소설은 ‘미치겠다’거나 ‘슬퍼 죽겠다’고 직접 말하는 종류의 소

설은 아니다. 오히려 서술이 건조한 편이고 (번역의 방해를 이겨내고)

행간을 읽어내야만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쉽지 않지만 그렇게 노력하

다보면 어느 순간 훅 치받는 대목들이 있는데, 다음 대목도 그랬다.

바틀이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드디어 안전한 어머니 나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 품에 안겨 눈을 적실 때. 어머니가 바틀에게 “아, 존, 네가

이제 집에 돌아왔구나”라고 말하자, 바틀은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

다”고 한다. 집에 돌아왔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맙소사.

왜 전쟁과 전쟁 후를 한꺼번에, 번갈아 가며 얘기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 전쟁 ‘후’라는 것은 사실상 바틀에게 존

재하지 않았다. 풍요로운 땅 미국으로, 가족과 친구들이 반겨주는 고

향으로 돌아왔는데, 심지어 구국의 영웅으로 대접받는데, 바틀은 거

의 폐인이 되어버린다. 전쟁의 참혹한 기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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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채, 계속해서 전쟁을 살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자기는 인간들을 수

도 없이 죽이고 그 덕분에 돌아왔는데, 사람들은 바로 그 짓 때문에

그를 환영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바틀은 결국 ‘집’을 영영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전

쟁’만이 그의 ‘집’이 되었다. 어떻게 해도 떠날 수 없는 기억의 집.

전쟁에 참여했던 그 누구라도 사실은 전쟁을 떠나 온전히 귀향하지는

못한다. 죽었든 죽지 않았든 아무도 자기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거부, 또는 선택

책 얘기를 너무 오래 했으니, 잠깐 딴소리 좀 해볼까 싶다. 나는

2009년도에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음 보았다. 사실은 그 단어 자체

를 처음 들었다. 그때 나한테 와 닿은 단어는 ‘양심’보다는 ‘거부’

였다. 거부한 사람이구나. ‘거부’는 아무래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

나보다. 그 사람은 말이 많고 어딘가 붕 떠 보였을 뿐, 뭔가 ‘거부’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것저것 자꾸 들이

대고, 나서서 손에 넣을 것 같은 사람?

다시 책 얘기로 돌아오자면, 이 소설에는 ‘선택’이라는 단어가 꽤

여러 번 나온다. 아니, 몇 번 안 되는데 너무 강렬해서 자주 나온 것처

럼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길’ ‘대안’ ‘고민’이라는 단어도

나온다. 이건 선택과 이어지는 단어들이고, 전쟁과는 도무지 안 맞아

보이는 개념들이다. 무슨 다른 길? 대체 무슨 선택? 전쟁터에서 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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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오늘도 나 말고 동료가 죽은 걸 신에게 감사하

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었다는 걸까?

그렇다. 아마도 있었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군대에 ‘자원’했다는

점에서, 바틀은 상당한 정도의 ‘선택’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사람들

에게 놀림을 당하고 고등학교 식당과 복도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가끔

책과 시를 읽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호모자식이라 불리는 게 싫었고,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남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한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다. 바틀은 그래서 고통스럽고, 또 그래서 아직

도 살아 있다. ‘선택’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자기가 인간인 이상, 앞

으로도 ‘다른 길’에 대한 여지가 언제나 남아 있음을 알기 때문에.

머프는 ‘선택’을 하고 싶어 했다. 머프는 원하고 싶어 했다. 머프

는 내부에서 자라나는 무감각을 다른 무언가로 바꾸고 싶어 했다.

(...) 머프는 자신이 요구하지 않은 모든 것의 흩어진 잔해를 자신

의 의지로 밀어내고 균형을 잡았다는 하나의 기억을 가지고 싶어

했다. (210쪽)

심약한 머프가 전쟁터에서 이상한 단독 행동을 하기 시작했을 때,

다들 미쳤다고 했겠지만 바틀만은 그를 이해했다. 전쟁터에서마저도,

그 극한의 절대성 속에서도 기어이 ‘선택’을 하고 싶어 했고, 그게

무엇이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려고 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병역거부에 대해 잘 모른다. 앞서 이야기한 어느 양심적 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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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자 하나만 보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일종의 ‘선택’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만은 잘 알겠다. 그래서 몇 년 전의 나처럼 병역거부

에 대해 처음 들어보는 누군가에게 그 사람들을 한마디로 설명해줘

야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선택을 한 사람들’이라고. 아무도

다른 길이 있다는 걸 믿지 않을 때, 백이면 백 ‘어쩔 수 없다’고 말할

때, 기어코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 받아들여지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것이 가져올 결과와도 상관없이, 오롯한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길

을 선택했다고. 그 자유의지는 전쟁의 부조리함, 또는 불가피함, 또는

평화의 당위성, 그 모든 거대한 이념들보다 우선하는, 그것들의 까마

득한 위쪽에서 반짝거리는 별과도 같은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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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리뷰-영화평

리뷰-영화평

겁쟁이가 나쁜가요?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보고

용석 |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 + 병역거부팀

저녁을 많이 먹고 들어간 탓일까? 아니면 극장 안 공기가 안 좋았

거나, 유독 심하게 흔들리는 카메라의 시선 때문에 멀미가 난 건가?

영화를 보는 내내 속이 더부룩하고, 트림과 헛구역질이 났다. 극장 밖

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13회 인디다큐페스티발에

서 만난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내게 고통 그 자체였다.

영화는 병역거부자 현민이 감옥에 수감되기 직전 40여 일을 보여준

다. 현민은 사람들과 만나서 작별인사도 나누고 병역거부에 대해 이

야기도 하고,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행사를

한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엄마한테 짜증을 풀고, 할아버지에게 차마

병역거부한다 말할 수 없어서 외국에 나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안면

이 글은 미디어스 (www.mediaus.co.kr)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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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금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군대와 인생에 대한 설교

를 듣는다. 나 또한 병역거부자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좀 오만

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나는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를 책으로든, 영

화로든, 혹은 강연이라도 별로 듣고 싶지 않다. 수십 번 들어서 지겹

고 지루하다. 그래서 이 영화도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애인이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보게 되었다. 보는 내내 이리 힘이 들지는 몰랐다.

내 감옥 생활이 떠올랐다거나, 감옥 가기 전 힘든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 건 아니다. 두 번 다시 감옥에 가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다

른 병역거부자들에 비해 감옥 생활이 딱히 상처로 남지 않았다. 감옥

에 다녀와서 힘들어하는 병역거부자들도 여럿 있는데, 나는 병역거부

를 하고 감옥에 다녀온 경험에서, 지금 내가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힘

과 용기를 얻고 있다. 감옥 가기 전 과정도 다른 병역거부자들보다 힘

들지는 않았다. 병역거부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부모님을 설득

하는 일인데, 우리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내게 군대에 가라고 하지 않

으셨다. 감옥 가기 직전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며 보낸 시간도 내

겐 상처가 아니라 추억일 뿐이다.

영화를 보면서 힘들었던 건,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감정이 떠올라

서였다. 감옥 들어가기 직전 느꼈던 감정들, 얼른 지나가버리면 좋겠

는데 더디게만 흘러가는 시간을 대할 때의 마음. 아니 어쩌면 다가오

지 않으면, 이대로 영영 감옥가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들. 이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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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리뷰-영화평

저러지도 못하고, 수감을 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기다릴 수도 없는

그 답답함과 짜증. 그래서 수감된 뒤에는 오히려 마음 편해졌던 기억.

원치 않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던 그 시절 그 느낌이 되살아난 거

다.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그런 면에서 보자면, 병역거부

자들이 감옥 가기 직전에 느끼는 세세한 감정까지도 섬세하게 담아

낸, 잘 만든 다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병역거부자들이 감옥가기 직

전에 느끼는 감정을 잘 담아낸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아니

다. 다큐 영화로서 훌륭한 미덕은 될 수 있겠지만, 병역거부를 다룬

영화로서 이 영화의 탁월한 지점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다.

지금까지 나온 병역거부 관련 영화는, 극영화는 주로 여호와의 증

인이 주인공으로, 다큐 영화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정치적 병역거부자

들이 주인공으로 나왔다. 여호와의 증인은 주로 국가 폭력에 희생된

피해자이자, 종교적 신념을 지키는 신실한 젊은이들로 나왔고, 정치

적 병역거부자들 또한 군대를 거부하는 강한 신념의 소유자로 묘사되

었다.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며 병역거부를 선언한 강철민(당시 이등

병) 씨 이야기를 담은 ‘708호-이등병의 편지’ 정도가 예외였을 뿐

이다.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쪽이

나 지지하는 쪽 모두가 가지고 있는 병역거부에 대한 편견을 깨는 영

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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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폭력의 피해자, 혹은 국가 폭력에 맞서는 용감한 젊은이로서

병역거부자 이미지는 사실 우리 사회가 병역거부를 바라보는 시선

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병역거부자에 대한 인식은 크게 찬성과 반

대로 나뉘지만, 그 둘 다 병역거부자를 자신의 방식대로만 보려고 한

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병역거부자를 ‘겁쟁이, 비겁자, 매국노’ 같

은 이름으로 부르고, 찬성하는 사람들은 ‘국가 권력에 맞서는 신념

의 강자, 감옥도 불사하는 강한 의지’ 같은 수식어로 병역거부자를

설명한다. 나는 이 두 입장 모두 병역거부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왜곡

한다고 생각한다. 병역거부자들이 군대를 거부하고 감옥에 가는 것은

그 자체로 사실이다. 하지만 병역거부자들의 소견서를 살펴보면, 병

역거부자들은 강한 신념을 가진 투사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겁이

많고, 나약한 사람들이 많다.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

지만,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것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평화에 대한 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군대를 거부하고 감옥행도

마다 않는 용자가 아니라, 내 삶이 폭력과 가까워지고 폭력에 무뎌지

는 것이 두렵고 무서워서 군대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반대자들이 병역거부자를 부르는 이름, ‘겁쟁이,

매국노’야 말로 병역거부자를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반대자들이 말하는 정 반대 맥락에서 그렇다. 그들은 우리를 조롱하

려고 겁쟁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겁이 많기 때문에 폭력을 성찰할 수

있다 생각한다. 매국노라는 이름도 그렇다. 우리가 나라 팔아먹은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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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리뷰-영화평

국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애국자도 되고 싶지 않다. 권정생 선생이

시 ‘애국자가 없는 세상’에 쓴 거처럼 우리는 꽃을 사랑하고 연인

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더 많은 것을 사랑하고 살고 싶지, 국

가와 민족을 사랑하고 싶지는 않다.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의 주인공 현민도 마찬가지다. 게

다가 현민은 자기가 병역거부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

다. 영화에서는 짧게 편집되어 나오지만, 현민의 병역거부 선언 파티

에서 현민은 10장이나 되는 소견서를 한 시간에 걸쳐서 읽어 내려갔

다. 할 말이 많은 까닭도 있겠지만, 현민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명

확한 논리적인 근거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에 그가 강한 신념

의 소유자였다면, 자신의 신념대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투사였다

면, 왜 병역을 거부하는지 다른 사람에게 명확하게 설명하고 더 나아

가 병역거부를 함께 하자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병역거부자들에게 병

역거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투쟁 도구가 아니라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현민에게

병역거부는 논리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영역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면, 다른 이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가 필요하겠지만,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남들에게 논리로 설득할 필요는 없다. 현

민이 병역거부하는 까닭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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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내가 병역거부 할 때가 생각이 났다. 나는 병역거부운동 단체

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기 때문에 병역거부에 대한 질문에 현민보다는

세련되게 답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자들이 꼭 묻는 질문, “병역

거부를 결심하는 데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는 대답할 수

가 없었다. 특별한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라크 파병을 만난 이등

병 강철민이나, 촛불집회를 만난 전경 이길준처럼 특별한 계기가 있

는 병역거부자도 있지만, 대개는 나나 현민처럼 오랜 세월 고민 속에

서 내려진 결정이라 특별한 계기 같은 거는 없다. 오히려 병역거부가

내 삶의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병역거부자가 되는 일은 내게, 군대를

안 가고 감옥에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평생을 평화주의자로 살기 위

해 노력하겠다는 의미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 다시 떠오르기도 했지만,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병역거부를 선언할 당시, 평화주의자로 살

아가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결심했던 기억도 함께 떠올려주었다. 고

마울 따름이다. 병역거부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 영화를 사람

들이 접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만이라도 병역거부자들을 편견없이 바라봐주면 좋겠다. 우리

는 파렴치한도, 그렇다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힘센 전사도 아

니니까. 그저 폭력을 참을 수 없는 나약하고 겁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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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기획연재-전쟁 기업에 저항하라

기획연재-전쟁 기업에 저항하라

국민연금 확산탄 투자철회 캠페인 출범

2013년 4월 3일, 무기제로는 총 14개 단체와 함께 기자회견을 개최

하고 국민연금 확산탄 투자철회 캠페인을 출범시켰습니다. 이번 캠페

인은 비인도무기인 확산탄에 대한 각종 금융기관의 투자를 중단시키

고 또 동시에 확산탄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을 제고하려는 목적에서 기

획되었으며 다음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1) 국민연금이 한화, 풍산에 대한 투자를 철회한다.

2) 국민연금이 비인도무기 생산기업에 대한 투자 배제를 천명하는

윤리투자원칙을 제정한다

현재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금운용위원회 진영 위원장(보

박승호 | 무기제로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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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복지부장관)을 대상으로 한 탄원 캠페인(온라인/오프라인)이 진행되

고 있으며 매주 1회 국민연금 주요 지사 앞에서 시민들로부터 탄원 서

명을 받는 캠페인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총 8주간 진행되는 캠페인 일

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국민연금 확산탄 투자철회 순회 캠페인 일정

4 월 10 일(수) 11:30 ~ 1:00: 남북평화재단 (마포지사/공덕역)

4 월 17 일(수) 11:30 ~ 1:00: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구로금천지

사/가산디지털단지역)

4 월 24 일(수) 11:30 ~ 1:00: 개척자들(서초지사/양재역)

5 월 2 일(목) 11:30 ~ 1:00: 참여연대 (종로상담센터/종각역)

5 월 8 일(수) 11:30 ~ 1:00: 평통사 (종로중구지사/충무로역)

5 월 15 일(수) 11:30 ~ 1:00: 평화네트워크 (여의도 일대)

5 월 22 일(수) 11:30 ~ 1:00: (잠정)집중행동주간(여의도/청계천)

온라인 탄원 참여, 리플렛 및 탄원서 신청

아직 탄원에 참여하지 않은 분들은 무기제로 홈페이지(www.

wzero.org/disinvest)에서 온라인탄원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참고

로 유명한 탄원 사이트 아바즈에서도 현재 동일한 내용의 온라인 탄

원이 진행 중이며 2만 명 참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아바즈 탄원 참여: http://www.avaaz.org/kr/say_no_to_

cluster_bombs_b/

Page 78: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75기획연재-전쟁 기업에 저항하라

소속된 일터나 모임에서 이 캠페인을 소개하고 싶은 분들은 전쟁없

는세상 사무실에 와서 리플렛과 탄원서를 받아가실 수 있고, 혹시 우

편으로 자료를 받기 원한다면 [email protected]으로 메일을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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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가람이의 좌충우돌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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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기획연재-나름의 바다 건너 일기

하루살이

나름 | 전쟁없는세상 친구 + 스웨덴에서 공부하는 중

기획연재-나름의 바다 건너 일기

그녀가 뛴다. 필사적으로. 그는 걷는다. 여유롭게. 그녀의 숨소리는

너무나 절박하다. 어둠이 가득한 숲 속.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때문

에 그녀는 무조건 뛰어야 한다. 어둠을 덮어버릴 만큼 필사적인 속도

로.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 그러다 지친 그녀. 나무 뒤로 숨는다.

숨을 고른다. 그때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 이어지는 불빛. 그 조명 아

래 피투성이로 겁에 질린 그녀가 처음으로 비친다. 그래, 모든 것은

분명해졌다. 그녀는 피해자고 그는 살인자다. 그녀의 죽음은 그렇게

시작된다. 덴마크 드라마 <포브뤼델슨 (더 킬링)> 시즌 1의 첫 부분.

범죄 드라마 분야에서 톡특한 위치에 있는 이 작품은 스칸디나비아

를 넘어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그 인기는 주인공 형사로 나오

는 사라 룬드 덕분인 듯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지금 관심이 가는 대

목은 매회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사진이다. 인상적인 음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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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사진 속 인물은, 바로 피해자다. 그런데 그녀

는 첫 장면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연기를 하지 않는다(어쩌면 죽었기

때문에 당연한데, 아무튼 20회 중에 지금까지 본 9회까지는 그렇다).

나에게 이것은 죽음과 삶의 이어짐으로 다가온다. 거의 등장하지 않

는 이가 나머지 모든 인물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여기서 연

결고리의 핵심은 죽음이다.

감사하게

삶과 죽음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갑자기 엄청난 고뇌에 휩싸인 철

학자라도 된 기분이다. 물론 그런ㅂ 흉내를 내려고 이러는 것은 아니

다. 약 1년 전쯤, 나는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갑갑했다. 숨쉬

기가 힘들었다. 도저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걸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내가 어

떤 잘못을 해서, 그래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그래, 끝내자… 그런

데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미련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그래, 끝내는데, 끝내더라도 지

금 하고 있는 걸 하다가 끝내자. 어차피 죽을 거 이걸 하다가 죽자. 그

러면서 나는 ‘하루살이’를 떠올렸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오늘

하루만 생각하자. 오늘 하루만 살자. 내일은 생각하지 말자. 지금만

생각하자. 오늘 하루만…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 삶은 하

루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고, 그날 죽었다. 특히 저녁에는 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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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기획연재-나름의 바다 건너 일기

간 정도 달리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는데, 그러고 나면 정말 ‘죽

은’ 듯이 잘 수 있었다. 아이러니였다. 그렇게 날마다 죽다 보니 다

음 날 계속, 살아 있었다. 어쩌면 최대의 아이러니는, 지금껏 내가 살

아있고, 그래서 그 아이러니에 대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숨쉬는 게 고문이었던 그 시기가 지나가 주었을 때(나는 그 고비를

‘넘을’ 기력이 없었다. 대신 그 고비가 나를 불쌍히 여겨 ‘넘어가

준’ 것이라 생각한다) 난 그저 살아있는 게 감사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 주위를 둘러보면, 삶과 죽음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당장 마감일이라는 말이 그런 것 같다. 흔히 영어로 ‘데드

라인’이라고 하지 않던가. 죽음과 관련 있는 ‘데드’는 글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얼마 전, 구체적으로 자살을 고민하던 어떤 장소를 다시 찾

게 되었다. 일이 있어서 가게 되었는데 하필 그곳이 있는 그 지역이었

다. 뭐랄까 참… 담담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했다. 그 춥고 괴로

웠던 북유럽의 겨울. 그 겨울이 지나가 준 것에 다시 한 번 감사했다.

그리고 내 몸에게 많이 미안했다. 그때 받았던 스트레스는 정말 엄청

났다. 내 건강이 나빠지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

내 수명이 단축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이

공식적으로 마무리 된 뒤 나는 병원 여기저기에 신세를 져야만 했다.

생각하기 싫지만, 혹시 내가 나중에 암 같은 병에 걸리게 된다면, 그

원인은 아마 그때 받았던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다.

Page 83: 전쟁없는세상 소식지 37호(2013년 5월)

80

그렇다면

어떤 분들은 궁금해하실 것이다. ‘왜 이런 우울한 글을 내가 읽고

있어야 하나.’ 그렇다면 사과드린다. 나도 내가 왜 이런 글을 쓰고 있

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을 왠지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리

고 글 자체가 꼭 우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나만의 착각인

가). 스스로 어떤 정리 비슷한 게 필요하다고 느꼈다(물론 언제나 완

전한 정리란 있을 수 없다). 그런 순간들이 알게 모르게 있는 것 같다.

요즘 범죄 드라마에 관심이 많아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어둡

기로 소문난 스칸디나비아 드라마에. 새삼스러울 수 있지만, 거의 모

든 범죄 드라마의 공통점은 바로 누군가의 죽음에서 이야기가 시작된

다는 게 아닐까. 그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대부분 다른

이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그러면서 이어진다. 그런 뜻에서 삶과 죽음

은 분리되기가 힘든 것 같다. 좋은 의미에서든 그렇지 않은 의미에서

든.

[나름대로 스웨덴 소식]

# 올로프 팔메 총리 암살 27년 (스웨덴 국영라디오 국제: 2013. 3.

3)

스웨덴 경찰은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올로프 팔메 총리 암살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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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기획연재-나름의 바다 건너 일기

련해 새롭게 연락을 해왔다고 밝혔다. 경찰은 암살 사건 27년을 맞이

해 새로운 제보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전화를 개설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제보를 해왔고, 그 내용 중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다고 한다. 올로프 팔메는 1986년 2월 28일 암살당했고 이는 지금

까지 미제의 사건으로 남아있다. 2010년 스웨덴은 살인사건에 대한

25년 공소시효를 폐지했고 이에 따라 팔메 사건을 계속 조사할 수 있

도록 했다.

# 남성/여성이 아닌 다른 성을 뜻하는 단어 (스웨덴 일간지 <기피>:

2013. 3. 5)

스웨덴어로 남성을 지칭하는 대명사는 한(han)이고 여성을 지칭하

는 대명사는 혼(hon)이다. 아울러 남성/여성의 구분을 넘어서려는 노

력의 하나로 만들어진 또 다른 말이 있는데, 바로 헨(hen)이라는 단

어다. 그동안 계속 논란이 있었고 최근에는 스웨덴 의회에서 ‘헨’이

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이 단어를 공식 문서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이번에 새로 임명된 평등 관련 부처 장관이

토론과정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앞으로 ‘헨’과 관련된 논의가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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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기획연재-효웅의 뀨잉뀨잉

효웅 | 병역거부자

Q. 평화주의자인데, 정말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보

기 싫고 역겨운 사람이 있어요. 애증은 절대 아니고 그냥 증. 평화주

의자가 이래도 되나요?

A 아 니님 질문 공감묘. 나님도 비기 시른 사람이 있음. 이 모씨의

딸 모 용숙이라고 꼴도 비기시름. 애증이 아니라 그냥 증임. 나님도

질문하고 싶음. 나님도 이래뵈도 나름 평화주의자인데 이래도 되는

거임?! 암튼 니님 존재 파이팅. 암튼 질문은 템도 거지같고 방특 안타

고 와서 보스 탱킹도 제대로 못하는 탱커마냥 힐링 힐링거리는 이 시

대적 트렌드인 와타시와 손발이노 오글이 토글이 데쓰인 작금의 힐링

시대랑 연결시켜서 매우 시기젖절한 질문임. 잠깐 중늙은이로 변신!

모든 건 일체유심조라, 미워하고 사랑하는 건 니님 마음속에 있음.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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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기획연재-효웅의 뀨잉뀨잉

라서 미워하는 희로애락애오욕의 인간사 백팔번뇌를 버리고 오상아

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우리는 고집멸도와 팔정도를 거쳐 윤회를 초

월하여 극락왕생하는 아미타 부처가 될 수 있음. 부처란 니님 마음속

에 있음. 모든 미물엔 불성이 있는데 하물며 니님이 비기 시려하는 그

인간에게 불성이 없을 수 있음? 이렇게 말하면 재수있음, 없음? 다시

나님으로 변신 ㅋㅋ 암튼 요새 힐링이네 뭐네 김정은 1日1食하는 소

리하는데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하게 기기묘묘한 담론임.

힐링 물론 중요함. 누가 안 중요하댔음? 그러나 근본적 해결책일

순 없음. 88만원세대이고 3포세대 (취업, 결혼, 출산 포기)인 게 다

마음의 문제임?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도, 군대에서 스트레

스로 인해 무모증에 걸리고 자해하는 사람들도, 성폭행 당해도 보복

이 무서워 신고도 못하는 사람들도, 게이라고 아웃팅(산업화)당해서

대인기피증 걸린 사람들도, 군대라는 제도에 저항하다가 고문당하고

징역살이 한 사람들의 눈물과 회한들도 다 마음먹기에 달린 거임? 이

낸시랭 어깨에 얹은 코코샤넬아? 사회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

을 다 니님 마음으로 환원하는 건 눈가리고 아웅하면서 “밥이 없으면

빵을 먹으면 되지”라는 마리 앙뜨와네뜨 같은 발상임. 오만가지가 다

개인의 마음먹기에 달린 거라면 동북아시아의 평화도 전쟁 무기수출

도 미국의 총기문제도 기업범죄도 집속탄 확산탄 문제도 강정마을 구

럼비 바위 발파도 세대 간 착취도 생명윤리나 사형제도 안락사문제도

죄다 마음먹기에 달린 거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멍 때리는 논

리가 어딨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튼 나님이 볼 때 너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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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아리스토텔레스 삼단논법의 논증으로 재구성해보겠음.

평화주의자라면 꼴도 비기 시른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 (전제1)

근데 나님은 평화주의자다. (전제2)

∴ 나님은 꼴도 비기 시른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 (결론)

그런데 위 전제 1이 틀린 거임. 평화주의자라고 해서 속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는 고금을 통틀어 동서를 막론하고 들어

본 바가 없음. 평화주의자는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밀고 간이고

쓸개고 다 내빼주는 쪼다는 아님. 그건 그냥 보이스피싱 당하는 호갱

님이지 평화주의자가 아님. 사실.... 이건 비밀인데 나님도 평화주의

자임. 제대로 말하자면 츤데레임 . 낮에는 평화주의자이고 밤에는 짐

승남 (.....) 아니면 겉은 쌀쌀맞게 쏘아붙이는 칙릿소설의 주인공인

서울 깍쟁이인데, 속은 여린 감수성의 중2병걸린 문학소녀의 (.....)

근데 전제 2도 틀린 거 같음. 너님이 왜 평화주의자임?? ㅋㅋㅋㅋㅋ

ㅋㅋ 아하를 인천사는 촌년이라고 무시·멸시·등한시 하고 폄하·

비하하는 거 다 봤음. 물론 아하가 인천사는 건 사실이지만, 누군들

본인이 원해서 그렇게 전기도 안 들어오는 벽지산간 오지 깡촌에서

태어난 거겠슴?? 너님이 아하처럼 갯벌에서 게 잡아봤음? 안 잡아봤

으면 말을 마셈. 따라서 너님이 평화주의자가 아니라면 이런 논리가

성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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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기획연재-효웅의 뀨잉뀨잉

비기 싫은 사람도 사랑한다면 나님은 평화주의자일 것이다.

나님은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아하를 인천산다고 놀렸으므로)

∴ 나님은 비기 싫은 사람을 미워해도 된다.

ㅋㅋㅋ 따라서 니님은 니님이 평화주의자가 아님을 헤겔적으로 자

기-의식하는 순간, 니님은 도덕적 책무나 의무감, 초자아의 억압으

로부터 해방되어서 맘껏 남들의 신상을 털 수 있음. “난 자유에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니까요! 사르트르 말마따ㄸ나, 자유는 형

벌이자 저주받은 것이고, 타자는 지옥이니까요!”

그런데 평화주의가 무슨 도덕적 규율이나 규범을 내면화한 초자아

도 아니고, 무슨 준법정신도 아니고 어떤 행위를 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거임?? 그렇다면 평화주의는 또 다른 억압이 될 거임.

우리는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됨.

인간은 평화주의자이거나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만일 평화주의자라면,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만일 평화주의자가 아니래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 우리는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이런 딜레마를 탈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음. 우선 인간은 평

화주의자이거나 평화주의자가 아님? 인간은 이렇게 흑백논리로 이분

법적으로 나뉘어짐? ㄴㄴ 평화주의는 그걸 검사할 표지가 있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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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고 명확한 언어로서 천명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이며 동시에 누

구나 될 수 있고 왔다갔다 하는 거임. 그리고 평화주의자라면 사람을

미워해서도 안 됨?? 평화주의가 무슨 도덕적 성인군자들만 하는 결

벽증임? 평화주의가 규범화되고 도덕적 강제가 된다면 그렇다면 그

건 중세 수녀들의 계율이 될 뿐임. 그렇다면 반대 딜레마 스킬로 전광

석화! 세요나프레! 전사님 스킬이요! 우쭈쭈 우쭈쭈 맞불을 놓겠음.

인간은 평화주의자이거나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만일 평화주의자라도,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만일 평화주의자가 아니라면,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 우리는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물론 사람 미운 데는 이유가 없겠지만 그래도 되도록 사랑해야 함

ㅋㅋㅋ 평화주의자가 아니라고 여기서 열외 되거나 (하악 군사주의

적 용어;;;) 면책되는 것은 아닐 듯. 그래도 우리는 사람을 미워할 권

리가 있음.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고, 내가 너님이 꼴도 비기

시른 것처럼 사람이 밉고 싫은 건 인지상정임. 평화주의자는 사람도

아님? 감정도 없음? 로봇임? 평화주의자도 똑같은 사람임. 그건 어

떻게 마음으로 달랜다고 되는 것이 아님. 그렇게 억압한 마음은 정신

분석학적으로 다른 곳으로 전치됨. (아 물론 장자처럼 마누라가 죽어

도 춤추고 노래할 정도로 세상사 마음을 수양하여 道의 경지에 이르

거나 노자가 말한 상선약수처럼 물과 같이 낮은 곳에 임하면서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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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기획연재-효웅의 뀨잉뀨잉

과 합치되어 무위자연의 경지에 이른다면 스트레스 안받을 순 있음

ㅎㅎㅎ 근데 그런 만렙의 포쓰는 비추천;;;)

근데 내가 볼 때는 극단적인 증오는 극단적인 사랑이라고, 내가 볼

때 니님은 그님을 사랑하는 거 같음. 왜 그런 거 있잖음? 좋아하는 여

자애 있음 괜히 가서 시비 걸고 고무줄 놀이하는데 가서 끊어버리고

그런 거 ^^* 니님이 딱 그 증상임 ^^* 농담이고; 니님이 화가 나고 미

워하는 마음은 현상인데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고 다 이유가 있는

거임. 존재하는 모든 사실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충족이유율)라고 라

이프니츠가 그랬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남?

나님은 어떤 님이 꼴도 비기 시르다. (현상)

∴ 그님은 탐욕스럽기 때문이다, 그님은 위선적이기 때문이다, 그

님은 못생겼기 때문이다, 그님은 내 스타일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님은 나님보다 잘생겼기 때문이다, 그님은 나님한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등등 (가설들)

여러 가지 경쟁가설이 있음. 이 여러 경쟁가설들 중에서 ‘최선의

설명력’을 지닌 가설을 고르면 됨. 이를테면 ‘그님은 나님보다 잘생

겼기 때문이다’라는 가설이 니님이 그님을 싫어하는 현상에 대한 이

유라면, 그건 너, 바로 너, 니님 때문이므로 어쩔 수 없는 거임. 그런

데 ‘그님은 탐욕스럽기 때문이다’나 ‘그님은 위선적이기 때문이다’

가 니님의 마음속 천불에 대한 원인이라면, 그 원인은 그님한테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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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임. 따라서 너님은 죄가 없고 너님을 용서할 필요가 있음. 그래 안

그래 이 용서받지 못한 자야. 암튼 그님이 화를 제공한 장본인이라면,

그님의 어떤 점이 너님 화를 돋구었는지를 잘 정리해봐서 그냥 그렇

게 속으로 정리하던가 아님 화를 내게 한 원인을 없애버리면 됨 ㅋㅋ

ㅋㅋ 탐욕적 인간인듸 탐욕을 못부리 게 하던가 (개과천선시키던가

어떤 사회적 강제나 여론의 압박으로 ㅎㅎ) 위선을 폭로 하던가 가만

히 안 있겠다는 걸 보여주면 됨. 그럼 두다리 뻗고 잘 듯 ㅋㅋㅋㅋ 그

람시 말마따나, 권력이 강하다는 건 순응하기에 강한 거임. 긍듸 니님

이 역산업화당할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서 전략적으로 판단하길 바람.

그리고 그님을 오이꼭지 도려내듯이 산업화 시킬 때는 조심해야 함.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과 닮는다고 니체가 그랬음. 따라서 니체 님

하 말마따나 너님이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 볼 때 괴물도 너님의 심연

을 들여다 봄. 분노의 윤리학을 조절하지 못해서 초사이언으로 폭주

한다면, 너님은 그때 정당성도 잃고 같은 괴물이 되어있을 수도 있음.

복수는 나의것 키키킥 긍듸 그님을 징최하고 심판해도 바뀌지 않

을 거 같고 바꾸기 힘들 거 같으면 인과관계를 잘라버리면 됨. 그님

이 그러던 말던 너님은 거기에 휘말리지 않으면서도 그님의 버르장머

리를 고쳐놓으면 됨. 모든 감정은 그 원인을 고찰해서 설명될 수 있을

때 누그러진다는 견해는 내 견해이기 이전에 스피노자님하의 견해임.

물론 설명만 한다는 게 함정 ㅋㅋㅋ (힐링이랑 다른 게 없는건가? ㅋ

ㅋ신간 책 『눈물 닦고 스피노자』 춧현) 암튼 난 최선을 다했음 ㅋ

ㅋ 나머지는 니님 사정이지 남이사 내가 알빠야 쓰레빠야? 이 분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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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아?

암튼 결론 요약:

평화주의자라고 해서 속에서 천불이 일고 울화통이 터져도 쪼다마

냥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건중세 수녀 + 안동 유림들의 예법이다! 니

가 괴물을 들여다 볼 때 괴물도 너를 들여다 본다!

슬픔, 분노 등의 감정은 그 원인을 고찰해봐서 설명해보고 그 원인

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라! 그리고 이 모든 건 니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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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설란 하동기 하승우 한주훈 햄 홍수봉 홍수영 홍이 황명규 황예랑

2013년 2월1일 ~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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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적

나도 이런 그림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 곳에는 당신들의 그림자조차 드리우지 마십시오.

우리 어머니가 밥을 짓고 계세요.

우리 삼촌이 땀 흘려 일하고 계세요.

우리 할머니가 마당에 꽃을 많이 심으셨어요.

그러니까 여기에는 오지 마세요.

푸른 바다에 무서운 건물 그만 지으세요.

저 하늘엔 새들이 날아야 하고,

푸른 들판엔 소들이 풀 뜯고 놀아야 하니까

골프장도 송전탑도 그만 만들고 무서운 폭탄도 그만 뿌리세요.

우리를 탄압하지 마세요.

당신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적대하지 마세요.

당신의 신은 분명 잡초조차도 귀하게 여길 분일 거에요.

당신들은 여기에 그림자조차 드리우지 마세요.

우리의 빛을 받고

돌아가주세요...

2013.4.15. 어린이 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