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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건축, 창덕궁 학술연구 2011. 8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건축, 창덕궁 학술연구 · 2012. 5. 15. · 연구책임자: 이강근(한국건축역사학회 이사) 공동연구원: 이혜원(한국전통문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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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조선왕실의 건축, 창덕궁 학술연구 · 2012. 5. 15. · 연구책임자: 이강근(한국건축역사학회 이사) 공동연구원: 이혜원(한국전통문화학교

조선왕실의 건축 창덕궁 학술연구

2011 8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책임자 이강근(한국건축역사학회 이사)

공동연구원 이혜원(한국전통문화학교 강사)

공동연구원 이경미(한국건축역사학회 이사

공동연구원 안병찬(경주대학교 교수)

조선왕실의 건축 창덕궁 학술연구

2011 8

목차

Ⅰ 연구의 목적

Ⅱ 연구의 내용

1 창덕궁의 역사

가 조선전기

나 조선후기

다 근middot현대기

2 창덕궁 영역의 변천

가 조선전기 창덕궁의 영역

나 조선후기 창덕궁의 영역

다 근middot현대기 창덕궁의 영역

3 창덕궁의 배치와 특징

가 영역별 배치와 특징

나 내부 경계의 변천

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역 외곽의 변천

4 창덕궁 건물의 구조와 특징

가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인조 25년 1647)

나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인조 26년 1648)

다 『창덕궁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昌慶宮修理都監儀軌)』(효종 3년 1652)

라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효종8년 1657)

마 『집상전수개도감의궤(集祥殿修改都監儀軌)』(현종 9년 1668)

바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순조 3년 1803)

사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순조 34년 1834)

아 『인정전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철종 8년 1857)

5 창덕궁 건물의 단청과 특징

가 인정전의 단청

나 인정전 단청과 의궤

다 연구middot조사 방법

라 의궤 기록과 현존 단청안료의 비교 고찰

마 인정전 단청의 문양 특성

6 창덕궁 궁역 궁성 궁성문 궁장문 문로

가 궁역

나 궁성문과 궁장문

다 문로

lt부록gt

Ⅰ 연구의 목적

국립고궁박물관이 창덕궁을 주제로 한 전시를 앞둔 시점에서 창덕궁에 대한 기초 사료의

집성과 창덕궁 연구의 새로운 바탕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 연구 용역을 발주한 것으로 이해

하였다 창덕궁에 대한 이제까지의 연구에서도 사료의 검증을 통하여 창덕궁의 시간적 공간

적 변천 과정을 구명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조선전기까지의 창덕궁에 대해서는 조선왕조

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은 한정된 사료에 의지하여 원래의 모습을 추정해 왔지만 조

선후기의 창덕궁에 대해서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사료가 대거 남아있고 동궐도나

동궐도형과 같은 시각 자료 또한 남아 있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시공간적 변천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헌사료가 원문 상태로 소장처에만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구자의

접근이 어려웠고 그런 탓에 사료의 내용이 연구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였다 최근에 이르

러 관찬 사서나 의궤 같은 귀중한 사료는 물론 개인 문집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전자문서화

되어 인터넷상에서 검색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를 활용하여 창덕궁에 대한 이해 또한 확

대 심화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또 최근에 학계에 처음으로 종합 소개된 장서각 소

장 창덕궁 관련 도면 자료는 20세기 전반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자행된 창덕궁의 훼손

과 개조 과정을 담고 있어서 대한제국 멸망 이후의 변천상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렇듯 달라진 여건 아래서 창덕궁에 대한 기존의 콘텐츠를 능가하는 새로운 콘텐츠의 개

발과 구축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창덕궁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 전시에도 새로운 콘텐츠를

활용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동안 문화재청의 다대한 복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창덕

궁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으로 개조된 모습 위에 부분적인 복원이 이루어진 어정쩡

한 상태이다 창덕궁의 원형과 변형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Ⅱ 연구의 내용

1 창덕궁의 역사

가 조선 전기

1) 太宗代의 창건

(1) 離宮 건립의 동기

조선왕조의 수도 한성의 중심은 정궁인 경복궁이었으며 도성 안의 모든 시설은 경복궁

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배치되었다 新都의 경영을 맡았던 사람 가운데 아무도 한성 안에 궁

궐을 하나 더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태종이 한성 주변의 母岳과 한

성을 비교한 결과 한성으로 환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나서도 정궁인 경복궁

에 들어가지 않고 따로이 새로운 궁궐을 건설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 도성 안에 그

것도 정궁으로부터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lsquo離宮rsquo이란 미명하에 새로운 궁궐을 지은 태종의

숨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궁궐이 정치의 중심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궁궐 앞에 수많은 政廳과 官廳이 마

련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설은 물론 정궁 남쪽대로 좌우에 도열하는 것이 고대국가 이

래의 오랜 전통이다 그런데 이궁이라 하면 정궁에서의 정치를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 天災

地變으로 정궁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을 지속하기에는 백성들에게 미안한 경우 등에만 잠시

정궁을 피해 있기 위하여 즉 避宮하기 위하여 지은 궁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궁 앞에는 정

청이나 관청을 마련할 필요가 전혀 없다

정궁인 경복궁을 피하여 잠시 거처하기 위하여 새로운 궁을 지었다면 이는 이궁의 본래

용도에 합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피궁할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 왕실과 가

까운 관계에 있는 관료나 친인척의 집을 피궁 장소로 삼을 수는 있으나 이는 장구한 계책이

될 수 없으므로 어차피 이궁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시설이었다 그러나 이궁 건설 시기

를 하필이면 한성 환도 시점으로 정한 데는 특정한 이유가 있었다

즉 태종의 왕위 계승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던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태

종이 lsquo왕자의 난rsquo을 두 차례 겪고 겨우 왕위에 올랐을 때 수도는 개경이었다 혼란기의 정치

상황을 마무리하고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難題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경을 떠날 수밖에 없

었다 또 한성으로 환도하는 마당에 骨肉相殘의 비극이 얽힌 경복궁으로의 入宮을 피하려면

새로운 궁궐이 필요했다 이 시기에 집권 관료층의 관심을 천도와 새로운 궁궐 조성에로 돌

려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목적과 흉흉해진 민심을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하여 바로잡으려

는 정치적 의도도 작용하였다

그 결과 lsquo이궁rsquo이란 이름의 궁궐을 도성 안에 하나 더 지음으로써 왕권의 현실적 기반을

공간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단순히 피궁하기 위하여 이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이궁이 지어짐으로써 한성의 북반부는 이궁과 정궁 두 개의 궁궐이 각각 응봉

과 백악을 배경으로 위세를 갖추어 동서로 布陣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1405년에 이궁이 완

성되자 곧 1406년에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1411년에 명당수를 끌어들이고 御構를

팠으며 1412년에는 원래 있던 작은 누각을 헐고 경회루와 연못을 대규모로 조성하여 아름

다운 경관을 조성하여 중국 사신의 접대에 대비하도록 한 사실 등을 보더라도 태종이 경복

궁을 꺼려서 거처하지 않으려고 이궁을 지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태종이 왕권강화를 최대의 정치적 목적으로 삼아 외척세력과 공신세력마저 완전히 제거

한 다음 왕-의정부-육조의 國政體裁를 왕-육조의 直啓制로 전환시켜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

게 강화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에도

창덕궁 바로 곁에 수강궁을 짓고 거처하며 여전히 병권을 장악한 채 도성 안 여러 곳에 수

많은 이궁을 건설하였다는 사실은 창덕궁을 창건한 이유가 비단 경복궁이 싫어서만은 아니

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1)

(2) 창건 과정

창덕궁의 창건은 한성으로 환도할 것을 결정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맨 먼저 1404년

10월 6일에 당시의 향교동 응봉 자락 아래로 터를 정하고 이날로부터 공사에 착수하였다

lsquo離宮造成都監rsquo이 조직되고2) 도감의 우두머리인 提調 李稷의 설계와 감독 수많은 工匠군

인승려백성 등의 賦役 노동에 힘입어 착공된 지 1년만인 1405년 10월에 드디어 新宮이

낙성되었다 태종은 낙성되기 10여 일 전에 서둘러 개경으로부터 환도하여 領議政府使 趙浚

(1346~1405)의 집에 마물다가 10월 20일에 입궁하여 성대한 落成宴을 베풀었다 이때 낙성

된 건물은 왕 부부의 침전 일곽과 정전편전 등 외전 일곽뿐이었다 신궁에서 펼쳐질 새로

운 정치를 보좌할 관청들은 경복궁 앞에 지어져 있던 건물들을 수리하여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으며 1405년 8월에 관청 건물과 관원들의 주택을 수리하는 일에는 강원도와 충청도의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신궁에서 정치활동이 시작된 이후에도 공사는 계속되었다 즉 1406년에는 眞殿인 仁昭

殿(태조와 태조비 신의왕후의 신주를 모신 건물)과 佛堂을 후원 지역에 지었고3) 누각(廣延

樓) 1408년에는 연못 1411년에 정자(解溫亭 14년 6월에 愼獨齋로 개칭)가 조성되었는데

누각은 왕이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풀 수 있도록 휴식하거나 신하들과 연회를 열어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정자는 홀로 휴식과 사색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조성되었

또 1408년에는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비빈과 후궁들로 하여금 양잠의 중요성을 알도록

일깨우고 1410년에는 지형에 맞추어 소나무를 심어 궁원의 풍광을 아름답게 가꾸었다 1411

년에는 누각과 침실(세조 7년에 누각은 澄光樓 침실은 凝福亭玉華堂 등으로 명명됨)을 더

만들고 진선문밖에 돌다리를 조성하였다고 하며 1412년 5월에는 궐문인 돈화문을 세우고

1413년 1월에는 闕門 어귀에 下馬標木을 세워서 왕과 신하의 차별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같

은 시기에 종을 주조하여 궐문인 돈화문에 걸었다4)

이렇듯 왕궁의 체재를 갖추고 태종 5년 이후 중심적인 정치의 장으로서 역할을 다한 창

1) 태종은 태상왕과 상왕의 거처로 덕수궁과 인덕궁을 각각 지어 바쳤으며 아홉 곳의 이궁을 도성 안팎에 건설

하여 거처를 옮겨 가면서 살았다 이 가운데 避災를 위하여 지은 이궁은 餘慶坊本宮이었다(『서울 六百年

史』第一卷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 219~226쪽 참조)

2)『太宗實錄』권8 태종 4년 9월 辛亥條 성석린조준 등 집권 관료들이 lsquoldquo경복궁이 있는데 따로 이궁을 세우는

것은 불가하다rdquo고 반대하자 도감의 명칭을 lsquo宮闕修補都監rsquo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무마책이었을

뿐 이궁 조성 공사는 곧 강행되었다

3) 『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63 187~188쪽

4) 敦化門鐘銘은 1412년 9월에 변계량이 지었는데 『태종실록』에 게재되어 있으며『新增東國輿地勝覽』에 경

복궁광화문종명으로 잘못 소개되어 있다 이 점은『서울 六百年史』第一卷 210쪽 주 42)에서 金龍國이 일찍

이 지적해 놓았다

덕궁은 핵심적인 정치 장소인 인정전 일곽이 정치의 장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

유로 대대적으로 수리된다 이때는 태종이 세종에게 선양한 왕권 교체기인 1418년 6월부터

8월 사이에 해당되는데 부실공사로 회랑 일부가 무너지자 감독 책임자인 박자청이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때 공사를 담당한 목수 吳德海의 이름이 실록에 남아 전한다

(3) 창건 창덕궁의 건축적 성격

1405년 10월에 낙성된 건물의 구성과 규모는 『태종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5)

이 기사 내용을 토대로 창건 창덕궁의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왕실 일가의 생활공간인 內殿 일곽은 正寢廳과 좌우의 침전 등 3침전을 중앙에

두고 사방을 행랑으로 빙 둘러막은 中庭式 배치법을 따르고 있는데 정침청과 양 옆 침전

정침청과 남쪽 행랑 사이는 개방형 복도(穿廊)를 두어 연결하고 있다6) 北行廊이 11칸이고

東西行廊이 각 15칸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침전 일곽은 폭 11칸에 깊이 15칸인 縱深形 공간

형태를 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행랑의 쓰임새에 대해서는 북행랑과 접한 서행랑 부분

에 3칸 짜리 별실을 두고 동행랑에 樓와 庫를 각각 3칸씩 두었다고 하였을뿐 나머지 부분

의 용도는 밝히지 않았다 이밖에 침전 주변에는 수라간(왕과 왕비의 수라를 준비하던 곳)

司饔房 湯子洗手間 등이 마련되어서 왕실 일가의 사생활을 도울 수 있게 하였다

둘째 정치의 장인 治朝 구역은 正殿便殿報平廳 등으로 이루어졌다7) 이 가운데 정

전은 2층으로 쌓은 넓고(가로 63자 세로 33자) 높은(아래층 4자 1치 위층 3자 5치) 월대 위

에 세워졌으며8) 행랑으로 둘러싸인 정전 둘레의 마당 즉 朝廷은 폭이 크고 깊이가 얕은 횡

축형 공간형태(가로 156자 세로 117자)를 택하고 있었다 정전 앞 마당에서 행해지는 朝會

나 朝賀 등 대규모 儀禮를 생각할 때 또 品等에 따른 자리가 縱軸 방향으로 배열됨을 고려

할 때 창덕궁 정전 앞 조정은 쓰임새를 잘 고려한 형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창건된 지

13년만인 1418년에 정전 일곽을 모두 헐고 새로 짓는 개건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이때 정전은

원래 자리보다 국면이 조금 넓은 서쪽으로 옮겨 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9)

5)『太宗實錄』 卷 10 太宗 5年 5月 辛巳

6) 창건 당초 창덕궁의 침전 형식에 대하여 ldquo어간 3간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로 볼 수 있는 침전이 각 2간인

형식rdquo 즉 정면 7칸인 건물로 해석한 견해도 있다 (김동욱 「17세기 조선조 궁궐 內殿건물의 室內構成에 관

한 연구」『大韓建築學會論文集』1992년 10월호 88쪽) 세조 7년에 건물 이름을 명명할 때 침전을 兩儀殿

좌우 침실을 麗日殿과 淨月殿으로 정했다는 기사는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준다

7) 편전 이외에 보평청이 있었다고 하나 어디에 있었는지 그 역할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름은 무어라고 명

명되었는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편전이 朝啓廳으로 불리며 思政殿으로 명명

된 사실을 고려할 때 혹시 편전은 朝啓(상참의식이 끝난 뒤 계문할 관원들과 史官이 함께 편전 안에 들어가

俯伏하고 차례로 용건을 말하는 정규회의)할 때만 쓰이고 보평청은 常參(약식 조회로서 매일 대신중신중요

아문의 당상관승지사관 등이 副殿에서 常服 차림으로 왕을 朝謁하던 정규 행사)에만 쓰인 것이 아닐까 추측

된다

8) 정전 월대가 폭 63자 깊이 방향 33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월대의 형태는 경복궁 근정전 월대처럼

정전 주변을 고루 두른 형식이 아니라 현재의 창덕궁 인정전 월대와 같은 모습 즉 건물 앞쪽만 길게 내민 형

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9) 『昌德宮』 -한국전통건축 제2집- 대한건축사협회 1994 41쪽 및 『太宗實錄』 太宗 17년 윤5월 정묘조

태종 18년 6월 계사조 동년 7월 갑진계축을묘조 『世宗實錄』 世宗 즉위년 9월 정사경신조 등 참조 또

등고선이 표기되어 있는 창덕궁배치도 참조

셋째 정전과 편전으로 이루어진 치조 일곽 가까이에는 왕의 통치를 측근에서 보좌할

여러 관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낙성 당일의 기사에는 정전 동행랑에 자리잡은 승정원

청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어서10) 태종대에는 『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간행)에 실려

있는 몇몇 관청조차도 갖추어지지 않았던 것같다11) 승정원 이외에도 궐 안에 있어야 할 관

청은 많았을 테지만 대부분 경복궁에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불편하지만 관리들이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업무를 처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405년에 서둘러 낙성된 창덕궁에 태종이 줄곧 머물러 있게 되자 이후에는 누각(廣延

樓와 澄光樓)과 침실 및 연못을 조성하고 후원에 소나무를 심고 정자를 세우는 등 아름다

운 경관을 조성하였다 또 어구를 파서 물길을 끌어들여 정전 앞쪽에 돌다리를 놓았으며 돌

다리 앞쪽에 궐문을 세우고 그 어귀에는 下馬標木까지 세우는 등 정궁에 버금가는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궁으로 조성된 나머지 핵심 부분인 정전 일곽이 너무 좁

아서 정치 행사를 할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말년인 1418년에는 인정전 일곽을 모두 헐어

다시 짓는 대규모 공사를 벌여 정전 일곽마저 경복궁에 버금가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

었다 이후부터 이궁인 창덕궁에서도 정궁에서만 행해지던 국가적인 대사를 치를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2) 창건 이후 조선 전기의 변화

태종을 계승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른 세종은 인정전 개축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창덕궁으로 이어한다 그리하여 세종 즉위년(1418)에 인정전 일곽의 개건 공사가 완공

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은데 반하여 세종은 즉위후 3년이 되던

해부터 자주 경복궁에 이어하고 기존 궁전을 수리하는가 하면 왕 8년(1426)에는 집현전 문

신들에게 궁내의 문과 다리 이름을 명명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왕 9년(1427)부터는 경복궁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궐내 제반 시설을 수리신설해 나가면서 점차로 경복궁의 법궁 체재를

완비해 나갔다 이에 견주어 창덕궁에 거처한 10년 동안에 경연청집현전장서각射廳

(궁성 西墻內) 등을 창덕궁 안에 새로 짓는 데 그쳤다 창덕궁 침전의 前廊은 修文堂이라 불

리며 태종세종이 늘 거처하던 곳이었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한 단종(1452~1455)은 창덕궁에 대한 전반적인 수리공사를 단

행하는 한편 태종때 개건된 지 35년밖에 안된 인정전 일곽까지도 다시 고쳐 지었다12) 이밖

에도 廣延樓에 별실을 지어 피서용으로 삼기도 하였다

창덕궁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세조때(1455~1468)였다 세조는 5년(1459) 9월 5일에

10)『太宗實錄』 卷 10 太宗 5年 5月 辛巳조 承政院廳 3칸 동행랑 10칸 남행랑 4칸 북행랑 4칸 바깥행랑 5

칸 外樓 3칸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서행랑을 따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승정원청이 인정전 동행랑에 자

리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승정원의 위치를 인정전 동쪽으로 적

고 있다

11)『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승정원을 비롯하여 빈청홍문관내반원도총부세자시강원세자익위사동궁 등이 창덕

궁 내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빈청동궁세자시강원세자익위사 등은 成宗때 세워진 것이

12)『端宗實錄』 권6 端宗 元年 4월 甲寅조 참조

후원에 못을 파게 하고 그 근처에 閱武亭을 세웠던 것 같으며 열무정 부근에서 4곳의 샘물

을 찾아내었다13) 열무정의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인 정조때 그 자리에 奉謨堂을 세웠다

고 하며 봉모당이 주합루 서남쪽에 있었 던 점으로 보아 열무정과 네 우물이 있던 곳까지가

후원의 영역이었던 것같다14) 그러나 이 일을 시작으로 하여 왕 7년 11월 24일부터 궁역 확

장을 계획하고 8년 2월부터는 궁성확충공사를 시작하였다 새로 쌓은 궁성은 동쪽으로 성균

관과 경계를 같이 할만큼 엄청나게 확장되었는데 둘레 4600자 높이 25자의 성을 쌓기 위하

여 한성부 백성 19040명(119家를 1統으로 하여 160통이 편성됨)이 동원되었다 이때 궁장

근처에 있던 민가 73호가 철거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창덕궁 후원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도

세조때의 궁역 확장공사 덕택이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세조는 7년 12월 19일에 그동안 위치와 역할에 따라 호칭되어 오던 궁내 건물의 이

름은 다음과 같이 확정되었다 즉 朝啓廳은 宣政殿 後東別室은 昭德堂 後西別室은 寶慶堂

정전(침전을 內正殿이라고도 부름)은 兩儀殿 동침실은 麗日殿 서침실은 淨月殿 누각은 澄

光樓 동별실은 凝福亭 서별실은 玉華堂 澄光樓下는 光世殿 廣延殿 별실은 求賢殿이라 이

름지어졌다 다만 인정전인정문진선문돈화문 등 정전 일곽과 광연루해온정 등 누정

의 이름은 일찍부터 정해져 사용되었다

여기서 편전인 선정전 뒤에 별실 2채가 있었다는 사실 침전에는 침실이 좌우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 태종 11년에 조성된 누각과 침실이 징광루와 응복정옥화당광세전 등으로

이름지어진 건물이라는 점 구현전으로 명명된 광연루(광연전) 별실은 단종때 조성된 것이라

는 점 등을 새롭게 알 수 있다 위 건물 가운데 광연루 일대는 성종 17년(1486)에 春宮으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1476~1506)이 1483년에 세자로 책봉된 지 3년째

되는 해로서 경복궁에도 세조 8년에 지은 동궁이 있었으나 성종이 창덕궁에 머무르기 위하

여 동궁을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은 창덕궁 안에 賓廳인 匪躬堂을 지었고 창덕궁 옆에는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

한 昌慶宮에 수많은 전각과 당우를 비롯하여 승정원홍문관사옹원사복시도총부 등

관청을 갖추었다 성종이 재위 26년간 내내 창덕궁 대조전 전랑(修文堂)에 거처한 사실을 감

안하면 왜 창경궁을 治朝와 관청까지 갖춘 궁으로 조성했는지 짐작이 간다 왜냐하면 창덕

궁에는 궐내각사가 고루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15) 성종 초반에는 대왕대비 정희왕희

가 창덕궁 안에 內佛堂을 짓기도 하였으나 그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다 또 성종 6

년(1475) 8월에는 宮門 29개소에 서거정을 시켜 이름을 짓고 현판을 걸었는데 이는 세조 8

년(1462)에 궁역을 확장하면서 새로 쌓은 궁성에 낸 새 문에 그때까지 이름이 없었기 때문

이었다16)

13)『宮闕志』昌德宮誌 閱武亭條

14)『宮闕志』昌德宮誌 奉謨堂 條 참조 봉모당은 「東闕圖」에도 주합루 서남쪽에 그려져 있으나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구선원전 서쪽 규장각 바로 뒤쪽으로 옮겨졌다(「東闕圖形」 고종년간『宮闕志』 참조)

15) 『新增東國輿地勝覽』卷之一 京都 下 文職公署武職公署 조에 보면 조선전기의 궐내각사는 경복궁이나 창덕

궁창경궁에 중복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왕이 정사를 보는 궁궐 가까운 곳에 관리들이 출근하여 정

치를 보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3궁의 시설은 수시로 번갈아가며 활용되었다

16)『成宗實錄』권58 成宗 6년 8월 己亥 조 참조 여기에는 창덕궁 궁문 29개소의 이름과 경복궁 궁문 8개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조선전기에 일어난 변화상 가운데 주목해야 할 일은 연산군때 이루어졌다 침전인 대조전

前廊에 있던 수문당(태종세종성종의 거처)이 소실되자 ldquo대조전은 낮고 수문당이 높아

통기가 안된다rdquo고 하면서 이를 고쳐 짓고 이름도 熙政堂으로 개칭하였는데17) 이로부터 침전

가까이에 세워진 희정당이 편전의 역할을 분담했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8) 그밖에도 연

산군은 폭정을 거듭하던 재위 말년에 선정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을 수리하거나 단청을 새로

하였고 인정전과 선정전의 기와를 청와로 바꾸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거듭되는 궁궐 공사

도중인 왕 1년에 反正이 일어나 왕위에서 쫒겨나자 모든 공사는 중지되었다 명종 5년에는

인정전 북쪽에 흠경각을 짓기도 하였다19)

태종때 이궁으로 창건되어 꾸준히 시설을 보완해 갔던 창덕궁은 세조가 후원을 조성하고

궁역을 확장하면서 크게 달라졌다 더구나 성종이 재위기간 전체를 창덕궁에 거처하면서 동

쪽에 창경궁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보좌할 수 있도록 한 결과 창덕궁과 창경궁은 조선전기에

이미 하나의 궁궐처럼 사용되면서 경복궁을 대신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으로 세 궁궐이 모두 소실된 뒤 경복궁을 제외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이

재건되고 인경궁과 경희궁이 창건되었을 때 그 모범적 선례는 경복궁 대 창덕궁창경궁이

라는 조선전기의 쓰임새에서 찾아졌던 것이다

나 조선 후기

1) 宣祖光海君仁祖代의 재건

경복궁창덕궁창경궁 등 조선전기에 이룩된 궁궐건축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창덕

궁이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버렸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누구에

의해서 소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대개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 즉 ldquo왕실과 관료들이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고 남은 빈 궁궐을 왜적이 수도 한성에 입성하기도 전에 우리 백성

들이 궁중에 침입하여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보물을 약탈했다rdquo는 설을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宣祖實錄』은 물론이고 유성룡(1542~1607)의 『西崖集』등 당시의 기록에 이러

한 견해를 싣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위 설은 목격담이 아니고 남에게 전해 들은 것

을 사실인 양 적은 것에 불과하다

유성룡이 불탄 궁궐을 직접 목격한 시점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

인 계사년(1593) 4월 20일이었는데 이때 종묘는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너진 채였다 그

러나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인 1592년 5월 2에는 경복궁은 전혀 불타지 않은 채 주인

잃은 빈 궁궐의 허허로움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왜군이 한성을 점령하고 승전고를 울리던

때까지는 경복궁과 한성 그리고 백성들의 목숨은 부지되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왜군

17)『燕山君日記』 燕山君 2년 6월 己丑 同年 8월 癸巳 8월 丙申 條 참조

18) 金東旭 「朝鮮時代 昌德宮 熙政堂의 便殿 轉用에 대하여」『건축역사연구』 5 한국건축역사학회 1994 6

9~21쪽 참조

19)『宮闕志』昌德宮誌 欽敬閣 條와 萬壽殿 條 참조

은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고 한성마저 탈환당하는 패전이 거듭되자 퇴각하면서 종묘와 궁궐

을 비롯한 도성내 모든 시설을 방화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왜군을 따라 전쟁에 참여한 從軍僧 제타쿠(是琢)의 『朝鮮日記』에는 왜군의 한성 입성

직후에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경복궁이 전혀 화재

를 입지 않은 채 온전하게 남아 있었음이 분명하다 즉

ldquo 북산 아래 남향하여 紫宮(경복궁을 가리킴)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다

섯 발자국마다 樓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閣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

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

자 4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 그 한 가운데에는 돌을 다듬어서 포개어 담

을 쌓았는데 높이가 8자이고 4귀퉁이에 방향에 맞추어 4마리씩 16마리의 돌사자가 놓여 있

다 그 위에 紫宸淸凉 두 전당이 있다 기둥은 돌기둥인데 아래 위에 용을 조각하였다

지붕에는 유리 기와를 덮었는데 잇단 기와 줄마다 푸른 용같다 서까래는 梅檀 나무인데

서까래마다 한 개씩 풍경이 달렸다 채색한 들보와 붉은 발에는 금과 은을 펴 돌렸고 구슬

이 주렁주렁 달렸다 천장 사방 벽에는 五色八彩로 기린봉황공작鸞학용호랑이등이 그려져 있는데 계단 한 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丹鶴을 새긴 돌이

깔려 있다 여기가 바로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이다rdquo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20)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 경복궁은

불에 타기는커녕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질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어서

종군나온 왜승으로 하여금 놀라움과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여기 인용된 기사는 경

복궁에 관한 것이지만 창덕궁의 사정도 벼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란이 끝난 뒤 국가 재건에 착수한 조정은 종묘와 궁궐을 빠른 시일 안에 복구하지 않

으면 안되었다 선조 38년(1605)에야 시작된 복구공사는 경복궁 중건을 목표로 진행되었으

나 선조 39년에 李國弼이 경복궁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중수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을 시작

으로 하여21) 선조 40년 2월에 경복궁의 길흉화복을 적은 역대의 문서를 검토한 다음 공사

는 창덕궁 중건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22) 여기에 더하여 호대한 규모의 경복궁을 재

건하기에는 물력과 인력이 모두 부족한 전란 직후의 형편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조 41(1608년) 정월 전후에 시작된 창덕궁 중건 공사는 두 차례로 나누어 진행되었는

바 광해군이 즉위한 그 해(1608) 10월에 완료된 1차 공사에서는 중요 전각이 대체로 조성되

었다 다음에 선조의 위패를 종묘에 祔廟한 직후인 1610년 봄에 재개된 2차 중건 공사에서

는 앞서 마무리하지 못했던 各司廂庫 등을 짓고 築墻하고 鋪甎하는 일을 1610년 9월에 이

20) 『京城府史』 上卷 京城府 pp269~270

21)『宮闕志』昌德宮志 昌德宮 條

22)『宣祖實錄』 선조 40년 2월 13일 조 주28)과 동일

르러 마쳤다23)

이때 중건된 건축에 대해서는 ldquo옛 제도를 따라 복구하였다rdquo는 상투구만 전할 뿐 구체적

인 기록이 없으나 정전편전침전 일곽이 옛터에 근거하여 복원되고 별당이 신조되었으

며24) 후원에는 정자도 세워졌다 한편 광해군 5년(1613)에는 世宗의 예지가 담겨 있는 시설

로 여겨진 欽敬閣이 인정전 북쪽에 재건되었고 왕 6년에는 창경궁 문정문 앞에 보루각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건된 지 얼마 안지난 1623년의 인조반정때 광해군이 거처하고 있던 창덕궁에

들이닥친 반정군이 광해군을 수색하던 중 失火로 外殿 가운데 인전전도총부內藥房春

秋館都總府郎廳房丕承閣弘文館 등과 內殿의 壽靜堂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건물이 소

실되고 만다25) 성종때의 춘궁터(태종때의 광연루 구현전터)에 중건되어 있던 儲承殿(동궁)

도 이때 소실되었다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할 수 없이 경운궁 별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

다 이후 인조는 창경궁에 거처하던 중 李适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마저 불타자 慶德宮으로

이어하였는데 인조 10년에는 창덕궁으로 이어하기 위하여 남아 있는 몇몇 건물을 수리하였

다 그리하여 왕의 거처는 내약방 왕비의 거처는 도총부 편전은 춘추관 동궁은 도총부낭청

방이나 비승각 경연청은 홍문관을 수리하여 마련하였다26)

인경궁을 헐어다 궁궐을 중건한다는 구상은 1633년에 먼저 창경궁을 짓는 것으로 시작

되었다27) 그러나 1636년의 병자호란 이후에는 국력이 크게 위축되어 궁궐을 중건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이 바람에 창덕궁의 중건공사는 늦어져서 1647년(인조 25)에 가서야 5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중건되었고 인조는 이때에야 비로소 창덕궁으로 還御할 수 있었다 창덕궁의

중건공사도 광해군이 무리하게 창건해 놓은 仁慶宮을 헐어 옮겨 짓거나 그 자재를 이용하였

기 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복구가 가능하였다28) 1648년(인조 26)에는 동궁인 저승전도 중

건됨으로써 창덕궁 중건공사가 마무리되었다29)

이때 건물의 복구는 5개의 작업소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1所에서는 大造殿集祥堂

澄光樓玉華堂靜黙堂부속 행각과 월랑 2所에서는 熙政堂承明門內行閣내반원기

타 월랑 3所에서는 寶慶堂泰和堂昭德堂燒廚房 4所에서는 선정전과 월랑 5所인에서

는 인정전 동월랑승정원臺諫廳과 인정문과 남월랑 등을 복구하였는데 모두 735칸에 이

르는 대규모 移建 및 重建工事였음을 알 수 있다30) 이때 중건된 건물 가운데 징광루가 가

장 장려하였다고 하며31) 또 지금껏 보존되어 있는 건물은 宣政殿뿐인데 이 건물은 인경궁

23)『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3 122~125쪽 참조

24)『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 9월 丁未 條 참조

25)『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1963 127쪽 참조 또 『宮闕志』 昌德宮誌 壽靜殿 條

참조

26) 『仁祖實錄』 仁祖 10년 10월 辛卯 條 참조

27) 1633년의 창경궁 내전 중건 공사를 상세히 기록한 『昌慶宮修理所儀軌』가 남아 있다

28)『서울 六百年史 문화사적편』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95 61쪽 156~161쪽 및 金東旭 「仁祖廟의

昌慶宮昌德宮 造營」『문화재』 19호 1986 참조

29) 『宮闕志』와 『東國輿地備攷』 第一卷 京都 에서 창경궁에 소속시켜 정리하고 있다

30) 이때의 공사과정은 『昌德宮營建都監儀軌』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중건된 건물의 명칭 가운데 讌和

堂은 『인조실록』 인조 25년 11월 戊申 條에는 실려 있으나 이 의궤에는 빼져 있다

의 편전인 光政殿을 옮겨 지은에 것으로 주변 건물의 거듭된 화재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아

당시의 공포형식과 구조를 전하고 있다32)

위에서 살핀 것처럼 선조광해군인조대를 거치면서 조영된 창덕궁의 건축은 정전

편전침전 일곽과 별당이 대체로 조선전기의 유구에 근거하여 복원된 것이었으며 훗날

「東闕圖」(1828~1830년 제작)에 그대로 묘사된 것처럼 조선후기 창덕궁의 根幹을 이루게

되었다 다만 도총부홍문관대간청내약방내반원 등 조선전기에는 창덕궁에 두지 안

았던 관청들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는 조선전기에 세 궁에 나누어 설치되어 있었던 관청

의 상당수가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자 창덕궁 안에 새롭게 조성되었음을 가리킨다33) 사정은

다른 궁궐도 마찬가지여서 창덕궁에 설치되지 않은 많은 관청이 창경궁이나 경희궁에 설치

되었다 한편 인조반정때도 소실되지 않은 채 보존되었던 비승각은 조선전기에는 없었던 건

물로 광해군 재건시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후대의 문헌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서 존속 여

부를 알기 어렵다

反正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계속된 화재로 재위

10여 년 동안 경운궁이나 경덕궁에 거처하였다 그러나 창덕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왕 10년에는 일시적으로 창덕궁에 거처하기도 하였으나 말년인 왕 25년에 이르러서야 창덕

궁의 중건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후원의 경영에 몰두하여 왕 14년(1636)부터

왕 25년(1647)에 걸쳐 끊임없이 정자를 짓고 원림을 조성하였다 즉 1636년(인조 14)에 歎逝

亭(rarr 逍遙亭)雲影亭(rarr 太極亭)청의정과 玉流川 1640년에 聚奎亭 1642년에 翠微亭(현

종 5년 개수하고 觀德亭으로 고침) 1643년에 竹亭(rarr深秋亭) 1644년에 六面亭(rarr 尊德亭)

碧荷亭(숙종때 淸讌閣으로 고침) 1645년에 醉香亭(숙종 16년에 喜雨亭으로 개칭) 1646년에

팔각정 1647년에 聚勝亭(larr 樂民亭)觀豊閣 등이 차례로 조성되었다34) 인조가 이렇듯 후

원 경영에 몰두한 것은 병자호란으로 입은 치욕과 복잡한 심사를 달래기 위하여서가 아니었

을까 후대의 왕들도 인조가 경영한 원림에 와서 ldquo萬機를 다스리는 여가에 샘물과 흐르는

물을 보고 마음을 함양하곤 한다rdquo고 하면서 인조의 원림 조성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였

다35)

2) 孝宗~正祖代의 변화

17세기 전반에 창덕궁은 정궁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비록 재목이 부족하여

인경궁을 헐어다 짓기는 하였지만 정전편전침전궐내각사를 비롯하여 후원의 원림까지

갖춘 대규모 궁궐로 경영되었고 창경궁의 보조를 받으면서 부족함없이 조선왕조의 왕정을

31) 징광루는 청기와를 덮은 2층 건물로 「東闕圖」에 그려져 있고 「東闕圖形」에도 그려져 있는데 1917년

창덕궁 내전 화재때 소실된 뒤 복구되지 않았다

32)『창덕궁』-한국전통건축 제2집- 52쪽 및 『서울 六百年史 文化史蹟編』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95

156~161쪽 참조

33) 이때 재건된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궐문인 敦化門뿐이다

34) 이상의 내용은 『宮闕志』 昌德宮誌의 해당 항목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며 괄호 안의 이름은 뒷날 개칭된

것이다

35) 『宮闕志』 昌德宮誌 太極亭 條의 숙종 어제 「上林三亭記」 참조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창덕궁은 조선전기에 이궁으로 출발하였으나 17세기 중반부터는

정궁의 시설을 갖추고 실제로 정궁 역할을 수행해 나갔던 것이다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는

한 경복궁은 상징적인 정궁일뿐 창덕궁이 실질적인 정궁이었던 것이다

이제 17세기 후반 이후에 창덕궁에 추가된 건축은 大妃殿東宮殿眞殿御齋室(養志

堂 이문원 부근 대유재와 소유재)후원의 별당과 정자 정도였다 즉 효종 5년(1654)에 수

리한 壽靜堂(인조때 세워진 건물)은 숙종 1년에는 壽靜殿으로 격상되어 인조 계비 壯烈王后

(1624~1688)의 거처로 정해졌으며 효종 6년에는 또 장렬왕후를 위하여 옛 흠경각터에 萬壽

殿을 지었는데 이 건물 일곽은 얼마 안가서 숙종 13년(1687)의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말

았으며 이후 다시는 재건되지 못하였다36) 또 효종 7년(1656)에는 慶德宮 景和堂을 移建하

여 春輝殿이라 고쳤다가 숙종 21년(1695)에 璿源殿으로 개칭한 다음 御眞을 봉안하였다 효

종은 이밖에도 후원에 魚水堂 과 天香閣(왕 4년)을 지어서 인조대에 조성된 원림 사이에 새

로운 원림을 하나 더 추가하였다37) 현종 8년(1667)에는 효종비 仁宣王后(1618~1674)를 모

시기 위하여 경덕궁 集禧殿을 철거해다가 집상당 옛 터에 옮겨 놓고 集祥殿으로 개칭하였

다38)

숙종대에는 東宮 書筵處인 誠政閣이 지어지고 왕 14년에 천문관측소인 齊政閣이 새로

지어졌다 후원에는 왕 18년에 영화당 일곽과 애련정 일곽이 조성되고 왕 33년에는 애련정

북쪽에 滌惱堂을 건립하여 현종대에 경영된 어수당 일곽의 원림을 완결지었다 또 후원 곳

곳에 정자를 지었는데 왕 14년에는 淸心亭 왕 15년에는 靈鼉亭 왕 17년에는 凌虛亭을 차례

로 지어 나갔다 이리하여 숙종대의 원림 조성을 끝으로 창덕궁 후원은 주합루 구역을 제외

하고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숙종 30년(1704)에는 궁성 서북쪽 밖에 있

던 別隊營의 庫舍를 헐고 임진왜란때 대군을 파견하여 도와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신종을

享祀하기 위하여 大報壇 일곽을 건설하였다39) 영조대에는 30년(1754)의 선원전 수리를 비

롯하여 영조 15년(1739)의 香室 21년(1745)의 齋殿 25년의 대보단 중수와 전사청 악공청

재생소 신건 등 10여 년 간에 걸쳐 대보단을 새롭게 변모시켰다40) 이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는 영조가 재위 기간 대부분을 경희궁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대에는 즉위년에 후원 안 희정당 옆에 규장각과 서향각을 짓고 왕 5년

(1781)에는 규장각 학사들의 숙직처인 이문원을 도총부 자리에 설치하는 등 숙종대에는 궁

궐밖 종부시에 있었던 규장각을 궁궐 안으로 끌어들여 右文政治를 표방하며 왕권강화의 토

대를 마련하였다 왕 9년에는 이문원 근처에 서적 보관처인 東二樓를 새로 지었으며 선원전

36) 이때의 공사 보고서로 『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가 전한다

37) 어수당의 창건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효종이 지은 시가 남아 있고 인조대에는 이 건물이 없었기 때

문에 효종때 지어진 것으로 해석하였다(『宮闕志』 昌德宮誌 魚水堂 條 참조

38) 이때의 공사 보고서로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가 프랑스 군대에 의하여약탈된 『昌德宮修改廳儀

軌』가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이크로필름본이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김동욱

「17세기 조선조 궁궐 內殿건물의 室內構成에 관한 연구」『大韓建築學會論文集』 1992년 10월호 87쪽 주

4 참조)

39) 경봉각은 창경궁 동룡문 안에 있던 것을 정조 23년(1799)에 옮겨 온 것이다(『東國輿地備攷』 京都 宮殿

昌德宮 條 참조

40) 『宮闕志』 昌德宮 lsquo萬世誦恩rsquo 조 「皇壇齋殿小識」(1745년) 「大報壇重修後小識」(1749)

이나 皇壇(대보단)을 展拜할 때 왕이 齋宿하던 御齋室인 大酉齋와 小酉齋는 정조 19년에 창

건되었다 한편 정조 6년(1782)에는 고대하던 장남(文孝世子)을 얻은 것을 계기로 동궁이 신

하들로부터 하례를 받거나 그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重熙堂을 창건하였다41) 이 시기에 동궁

의 처소로 天地長男宮과 文華閣 일곽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42) 또 정조 9년에는 창경궁

자경전을 짓다가 남은 재목을 활용하여 이극문 안 옛 수강궁터에 壽康齋를 지었는데43) 이

건물은 순조 27년 익종의 대리청정시 별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44)

「東闕圖」에 표현되어 있으나 1833년에 영춘헌을 짓기 위하여 헐린 天地長男宮 일곽은

세자의 거처로 중희당 바로 옆에 있었다45) 그리하여 중희당 일대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

계 지역이면서 순조대에 세자 익종이 거처하고 공부하던 곳으로서 훗날 代理聽政(1827년~

1830년)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익종은 창덕궁 안에 待鍾軒演慶堂倚斗閤 일곽田舍

(1826년) 등 많은 시설을 경영하였다46) 특히 후원의 의두합과 연경당은 대리청정 시기에

전자는 독서처로 창건한 것이고47) 후자는 1828년에 珍藏閣 옛터에 進宴處로 사용하려고 특

별히 창건한 건물이다48) 당시 연경당의 모습은 「東闕圖」와 『慈慶殿進爵整禮儀軌』의 圖

說 「演慶堂圖」(1828년 2월)에 잘 묘사되어 있으며 이로써 주택 형식의 현존하는 연경당은

적어도 헌종대 이후에 새로 지어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49)

3) 순조대의 소실과 재건

조선후기 궁정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던 창덕궁은 「東闕圖」에 그

려진 것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앞 시기에는 소규모의 화재도 있어서 숙종 13년(1687)

에 춘휘전(숙종 21년에 수리후 선원전으로 개칭)만 남겨 두고 萬壽殿 일곽이 모두 소실되었

는데 이후 복구되지 못하여 「東闕圖」에도 빈 터로 그려져 있다 또 동궁인 저승전 일대가

영조 32년(1702)에 소실되었다

41) 중희당 일곽은 1891년에 헐려 다른 곳에 이건되었으며 그 자리는 현재 후원으로 가는 진입로로 변해 버렸

다 (고종년간 『宮闕志』) 자세한 것은 이 글 3절 창경궁 부분 참조

42) 이강근 「조선 후반기 건축의 대외교섭」『조선 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2007

43) 『正祖實錄』 20권 9년(1785 을사) 8월 27일(갑진) ldquo建壽康齋貳極門內 有古井焉 慈慶殿之營建 以餘礫

剩磚 峙井上爲假山 至是撤去而浚其井 建小齋以臨之 是地 太祖朝壽康宮舊基 在《輿地勝覽》 仍命其齋

曰壽康rdquo

44)『純祖實錄』28권 27년(1827 정해) 2월 9일(을묘) ldquo議政府 以王世子聽政節目 別單啓【一 聽政節目 依

傳敎 以乙未事例磨鍊 一 聽政處所正堂 以重熙堂爲之 別堂壽康齋爲之rdquo

45) 이강근 「조선 후반기 건축의 대외교섭」『조선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2008 pp - 천지장남궁

과 그 좌측의 문화각 일곽은 정조 연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46) 『宮闕志』 昌德宮誌 해당항목 참조

47) 『宮闕志』 昌德宮誌 倚斗閤 條에서는 익종이 세자 시절에 예전의 독서처를 改建하였다고 적고 있어서 수리

를 한 것쯤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1826년에 쓴 「翼宗御製 倚斗閤上樑文」의 존재로 이 건물이

1826년부터 1827년 사이에 새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48) 『東國輿地備攷』 京都 宮殿 昌慶宮 演慶堂條 참조 純祖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축을 당하여 마침 집이 이루

어졌으므로 연경이라 이름하였다고 설명되어 있으나 尊號儀禮를 거행할 장소로 창건된 것으로 해석해야 옳

다(이강근「東闕圖」『建築文化』 1997년 9월호)

49) 고종 2년의 수리가 현존 연경당의 모습으로 변경된 계기였을 것으로 해석한 글이 주목된다(김동욱 「고종

2년의 연경당 수리에 대해서」 『건축역사연구』 한국건축역사학회 2004 3)

그러나 연이은 화재로 궁궐이 온통 소실된 때는 단연 순조대였다 먼저 순조 3년(1403)

에 仁政殿이 소실되어 이듬해에 중건되었다50) 11년(1411)에는 인정전 서월랑의 藝文館이

소실되어 또 중건하였는데 이때 고래의 史籍이 모두 불타 버렸다 또 1824년에는 대비전인

景福殿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정말 큰 화재는 순조 33년 10월에 일어났다 이 화재로 안으로

는 대조전으로부터 밖으로는 희정당까지 모두 소실되었으니 그 피해는 놀라울 정도로 큰 것

이었다 다만 인정전과 선정전 일곽이 불에 타지 않은 채 보존되었다 1년만인 이듬해 9월에

모두 중건되었다

이때의 중건공사에 대해서는 『昌德宮營建都監儀軌』(1834)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儀軌圖로 그려진 건물의 모습이 「東闕圖」와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점으로 미루어 중건하

면서 약간의 수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51) 그러나 『궁궐지』에서는 ldquo모두 370여 칸이 중

건되었으며 옛 유구를 토대로 하되 間架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복원하였다rdquo고 적고 있다

이때 중건된 건물은 대조전희정당징광루경훈각옥화당융경헌흥복헌양심합克

齋齋정묵당內燒廚房外燒廚房 등이었다 『宮闕志』(高宗年刊)에서 보듯 적어도 건물만

큼은 原狀回復된 것으로 보인다 순조 말년에 창덕궁창경궁경희궁을 모두 복구하고 나

서 그것을 기념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엮은 책이 바로 위 책이다

순조대 대왕대비전으로는 경복전과 수정전이 있었다 이 가운데 수정전은 1794년 12월

8일 정조의 명으로 慈殿(英祖繼妃 貞純王后)에게 冊寶 慈宮(정조 생모 혜경궁)에게 冊印을

바치고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서 수리되었고52) 이때 건물 이름도 壽靜殿으로

격상되었다53) 1796년에는 원자(훗날의 순조)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기도 하였다54)

대왕대비 정순왕후(1745-1805)는 이후 수정전에 거처하였으며55) 정조 사후 5년 뒤인

1805년에 景福殿에서 승하하였다56) 이후 正祖妃 孝懿王后(1753-1821)가 수정전에서 거처하

였는데 1813년에 12월 13일 밤에 수정전 동행각에서 화재를 만났으며 다행히 불을 꺼서 수

정전은 무사했다57) 효의왕후는 1821년 3월에 창경궁 慈慶殿에서 승하하였다 이보다 5년 앞

50) 1804년의 공사 내역은『仁政殿營建都監儀軌』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51) 金東旭 『朝鮮後期 宮闕建築의 造營에 관한 硏究』 -純祖朝의 西闕東闕 造營에 대해서- 文化財硏究所

1990 및 안휘준 『옛 궁궐 그림』 대원사 1997 72~75쪽 참조

52)『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 lsquo수정전rsquo조에서는 1623년 인조반정때 대내에서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며

효종 5년(1654) 인조의 繼妃 莊烈王后를 위하여 고쳐 지었으며 을묘년부터 전으로 격상시켜 불렀다고 적혀

있다(ldquo孝宗五年甲午爲 莊烈王后改建 乙卯改稱殿rdquo) 여기서 을묘년은 정조 19년(1795)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

53)『일성록』정조 18년(1794년 갑인) 12월 18일(신미)

54)『일성록』정조 20년 10월 4일(병자) ldquo領議政 洪樂性曰翁主痘候聞極平順 今已出場不但 今番之欣喜 可占兆端

之吉慶矣 予曰果如卿言矣 予敎元子拜諸大臣亦拜 予曰今番痘憂慈宮獨貽勤勞下情不安 及今出場大加喜悅萬萬欣

幸矣 予於慈宮 經旬離側 今番初有也 元子則姑爲 入處于壽靜殿 予則今將還謁慈宮矣rdquo ldquo予乘軺軒 以出元子陪焉

由永肅門 拱辰門 入壽靜門 詣壽靜殿 元子仍留 予還出壽靜門 乘軺軒 由宜春門 靑陽門 宣明門 保定門 萬八門

還內rdquo

55)『內閣日曆』 순조 21년 7월 19일(丁卯) lsquo正宗大王孝懿王后誌文rsquo 또 『健陵誌狀續編』遷陵誌文[純宗二十一年

辛巳] ldquo二十八日己卯疾大漸 大臣閣臣入候臥內 王已不能語而 微微有玉音曰壽靜殿 卽貞純大妃所御殿 蓋聖意若

有仰告於 慈聖者也 遂昇遐于昌慶宮之迎春軒 春秋四十九 大喪之日 都人士庶顚仆哭踊深山rdquo

56) 창덕궁 내 大妃殿의 하나였던 경복전은 1824년에 화재로 소실된 뒤 중건되지 않았기에 「동궐도」에마저 터

로 표현되어 있다 1803년에 순조가 직접 지은 lsquo景福殿記rsquo에서 그리고 있듯이 동서남북으로 각각 拾翠軒 萬

寧門 愛蓮齋 松竹軒이 빙 둘러 연해 있었으며 울창한 소나무 숲과 연못의 연꽃이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그

런 곳이었다 『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 lsquo경복전rsquo 조

서 惠慶宮(1735-1815)은 1815년 12월에 창경궁 景春殿에서 승하하였다58) 1822년 12월에는

정조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嘉順宮(1770-1822)도 창덕궁 寶慶堂에서 서거하였다59) 순조

의 증조모 조모 모 생모가 차례로 돌아가셨으므로 1822년 12월 이후에 수정전을 비롯한

궐내의 여러 대비전은 텅 비게 되었다

4) 憲宗哲宗代의 변화

이후 헌종 헌종 13년(1847)에는 樂善堂 옛 터에 헌종의 침전인 樂善齋가 건립되었고 왕

14년에는 그 옆에 왕자 출산을 위하여 새로 맞아들인 경빈 김씨의 거처로 錫福軒을 지었다

석복헌 오른쪽에 연접해 있는 壽康齋는 정조 9년(1785)에 지은 건물인데 낙선재 창건시 대

폭 중수되어 대왕대비인 純祖妃 純元王后(1789~1857)의 거처로 삼았다60) 한편 1843년(헌종

9)에는 헌종비(孝顯王后 1828-1843)61) 1857년 12월에는 순조비(純元王后 1789-1857)62)

1878년에는 철종비(哲仁王后 1837-1878)가 승하하였으므로63) 궐내에는 익종비(神貞王后

1808-1890) 헌종 계비(孝定王后 1831-1903) 등 왕실 어른 두 분만이 살아 계셨다64) 1868

년 7월부터는 중건된 경복궁으로 왕실이 移御하자65) 창덕궁내 여러 전각의 쓰임새는 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창덕궁에는 19세기 전반기에 다음과 같은 闕內各司가 설치되어 있었다 즉 규장각이

문원승정원홍문관빈청(匪躬堂)예문관도총부내병조尙瑞院尙衣院司饔院

典設司典涓司太僕寺內班院侍講院翊衛司內醫院鑄字所 등 거의 모든 관청이 설

치되어 있었다 다만 내사복보루각 등은 창경궁 안에만 설치되었고 궁궐호위와 수비를 맡

은 군사시설이 창덕궁에 남소와 서소만 설치되고 동소와 북소는 창경궁에 설치되어 있는 점

57)『內閣日曆』순조 13년 12월 18일 ldquo壽靜殿行閣失火 夜初更失火 敎曰 宮城扈衛置之 夜一更 壽靜殿東行閣失

火救火後 大殿 王大妃殿 中宮殿 惠慶宮 嘉順宮 世子宮 口傳問安 答曰知道 金祖淳 沈象奎 南公轍 徐榮輔 李存

秀 金履喬 李魯益 李光文 鄭元容 朴宗薰 李龍秀 李鶴秀 進參rdquo 여기서 대전은 순조 왕대비전은 정조비 효의

왕후 혜경궁은 정조의 생모 가순궁은 순조의 생모임

58)『純祖實錄』 순조 15년 12월 15일 21년 3월 9일

59)『純祖實錄』순조 23년 계미(1823 도광 3) 2월 3일(계묘) 빈은 英宗 경인년 5월 8일에 탄생하였고 正宗 정

미년에 빈으로 선발 되었는데 殯號는 綬이고 宮號는 嘉順이다 지금 주상 전하 22년 壬午 12월 26일에 昌德

宮 寶慶堂에서 승하하니 향년 53세였다

60) 盧辰河李相海 「樂善齋一廓 建築의 造營에 관한 復元的 考察」『건축역사연구』 7호 건축역사학회 1995

43~70쪽 참조

61)『憲宗實錄』「총서」 ldquo妃는 孝顯王后 金氏【籍은 安東이다】이니 領敦寧府事 永興府院君 贈 領議政 金祖

根의 딸로 무자년【순종 28년이다】 3월 14일 계축에 탄강하여 정유년에 王妃로 책봉되었는데 계묘년 8월

25일 을축에 승하하니 춘추 16세였다 景陵에 장사하였다rdquo

62)『日省錄』철종 8년(1857) 12 월 17일(갑자) ldquo檢校提學臣金炳冀製進哀冊文曰維歲次丁巳八月己酉朔初四日壬

子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睿成弘定純元王后昇遐于昌德宮之養心閤移殯于歡慶殿以是年十二月戊申朔

十七日甲子將合祔于仁陵禮也rdquo

63)『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5년 무인(1878 광서 4) 5월 12일(신유) 대비전이 승하하여 擧哀한 뒤 대전 대왕

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약방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망극하다고 답하였다

64)『고종시대사』3집 1890년(淸 光緖 16年) 4月 17日(丙辰) 未時에 大王大妃 趙氏(翼宗妃)가 興福殿에서 昇遐

하다 신정왕후는 집옥재를 이건하기 전 해에 돌아가셨다

65)『국역 승정원일기』고종 5년 무진(1868 동치 7) 7월 2일(정축) 移御한 뒤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종친 의빈 약방 내각 정원 옥당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등으로 보아 두 궁은 하나의 궁궐처럼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이 두 궁을 합

쳐서 東闕로 부르게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昌德宮은 外朝와 治朝를 중심으로 하

되 왕과 왕비의 침전을 갖춘 궁으로 昌慶宮은 燕朝를 중심으로 하되 동궁과 대비전을 갖춘

궁으로 역할을 분담하면서 하나의 궁궐처럼 운용되었던 것이다 哲宗代에는 철종 5년(1854)

9월부터 8년 윤5월 사이에는 1804년에 중건된 인정전의 해체중수공사가 있었는데 공사 내

역은 『仁政殿重修儀軌』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3) 근middot현대기

(1) 1865년~1910년의 변화

선조~광해군대에 중건된 이래 250여 년 동안 조선왕조의 정궁으로 사용되던 창덕궁은

고종 초반에 경복궁이 중건되자 격하되어 본래의 이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창덕궁의 쓰임새가 하루 아침에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1873년과 1876년 두 차례에 걸쳐 큰 화재가 발생하자 1877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수리하

고 이어하게 된다 1891년에는 중희당을 비롯하여 수정전 영역의 별당이던 集玉齋와 協吉堂

을 경복궁 내로 옮겨지었다

집옥재는 경복궁 신무문 안쪽 가까이에 있는 벽돌조 건물이다 집옥재를 중심에 두고

향좌측에 2층 복도로 연결된 중층 八隅亭이 있고 향우측에는 또 중층 복도로 연결된 단층

맞배지붕 정면 5칸 규모의 協吉堂이 있다66) 이 가운데 집옥재와 협길당은 1881년에 창덕궁

咸寧殿(壽靜殿을 중건한 뒤 변경한 명칭)의 北別堂과 西別堂으로 세워진 건물이었는데 지어

진 지 10년 뒤인 1891년에 경복궁의 지금 자리로 함께 옮겨졌다 이 시기에 경복궁에서 일

어난 두 차례의 화재(1873년 4월과 1876 11월)등의 사유로 왕실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는 일

이 있었다 첫 번째 이어는 1873년 4월의 내전 지역 화재로 인하여67) 1873년 12월 20일에

있었는데 이때 창덕궁을 미리 수리하였다68)

그러나 1875년 2월에는 다시 경복궁으로 이어하였으며69) 1876년 4월에 경복궁 내전 중

건공사가 완료되었다70) 그러나 같은 해 11월에 다시 큰 화재로 경복궁 내전 일곽이 모두

66) 집옥재가 있는 영역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 지역으로 묶여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가 45년만인 2006년

9월 29일에 처음 민간에 개방되었다 출입금지 구역이던 시절에 두 차례 수리공사가 있었는데 1차는 1982년

의 보수공사(『集玉齋補修工事報告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2)이고 2차는 2005년의 수리공사(『集

玉齋修理調査報告書』 문화재청 2005 12)이다 2차 공사에 대한 조사보고서에는 집옥재의 연혁과 이건 이

유에 대한 견해가 서술되어 있어서 참조를 요한다

67) 『日省錄』고종 10년(1873) 12월 10일 (갑신) ldquo慈慶殿失火 巳時火起於純熙堂二十四間延燒錫趾室十二間慈慶

殿三十二間福安堂六間紫薇堂三十八間交泰殿三十六間複道二十八間行閣一百八十八間半合三百六十四間半rdquo

68)『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0년 계유(1873 동치 12) 12월 20일(갑오) 눈 ldquo창덕궁으로 移御한 뒤에 대전 대

왕대비전 왕대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의 2품 이상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

고 답하였다

69)『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2년 을해(1875 광서 1) 5월 28일(갑자) 비 ldquo이어한 뒤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

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종친 의빈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 2품 이상과 육조 대사간이 구전으로 문안하

니 알았다고 답하였다rdquo

70)『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3년(1876) 4월 1일 교태전 자경전 자미당 인지당 4건물을 짓는 데 공을 세운

소실되었으므로71) 1877년 3월에는 다시 창덕궁으로 이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창덕궁과

창경궁을 다시 수리하였다72) 이후 1885년에 경복궁으로 이어할 때까지73) 왕실은 창덕궁에

머물러 있었다 한편 1882년 6월에 경복궁으로 다시 이어하겠다는 전교가 있었으나 곧 철회

된 일이 있었다74) 같은 날 임오군란이 발발하고75) 1884년 12월 4일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자 왕실은 창덕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복궁 내전의 재건은 1888년이 되어서

야 겨우 완료되었으며76) 이 시기에 고종은 1873년에 창건된 乾淸宮 영역에 거처하면서 정

사에 임하였다

1881년(고종 18) 3월의 수정전 수리 공사는 경복궁 내전의 두 번째 화재로 촉발된 창덕

궁 이어로 왕실이 창덕궁에 머무르던 기간에 시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수정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여러 채의 별당을 짓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살아계신 두 대비와 관련

이 있는 것일까 적어도 명분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고종은 수정전 수리 공사를 지시하

는 자리에서 그 해가 생전에 수정전에 거처하셨던 정조비 효의왕후의 승하 60주년임을 상기

시키면서 슬픔을 견딜 수 없다고 하고 건릉에 예관을 보내 헌작례를 올리게 하였다77) 정조

대의 불행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수정전 일곽 증설 공사에 정조대의 정치를 흠모하는 고

종의 의도가 엿보인다78)

문제의 집옥재는 바로 이때 수정전(공사후 함녕전으로 개칭)의 北別堂으로 지어진 건물

이다 3월 1일 고종의 지시로 시작된 수정전 일곽 보수공사와 별당 신축공사는 그 해 11월

사람들에게 시상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때 중건 공사가 일단락된 듯하다

71) 『日省錄』 고종 13년(1876) 11월 4일(신유)

72)『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4년 정축(1877 광서 3) 3월 10일(병인) 낮에는 맑고 밤에는 비가 옴 또 무위

소의 말로 아뢰기를 ldquo창경궁을 수리하는 역사가 지금 이미 끝났으니 諸色工匠들을 모두 해산해 보내겠습니

다 감히 아룁니다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헌직이 호조의 말로 아뢰기를 ldquo창덕궁을 수리하는 역

사가 지금 이미 끝나서 제색 공장들을 모두 해산해 보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辰時 대가가 창덕궁으로 환어하였다

73)『국역 승정원일기』 고종 22년 을유(1885 광서 11) 1월 17일(정사) 맑음 ldquo移御한 후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의 2품 이상 관원 육조 당상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rdquo

74)『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9년 임오(1882 광서 8) 9월 29일(임자) 맑음 ldquo부교리 趙性鶴이 상소하기를 hellip

(중략)hellip 毓祥宮이 불탔지만 한 달이 넘도록 아직 영건하지 못하고 있고 경복궁으로 移御하라는 명을 비용을

아끼느라 어쩔 수 없이 還收하셨으니 우리 전하의 효도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통하시며 지은 지 오래된 곳을

떠나 새 궁궐로 가고자 하시는 마음이 얼마나 절박하겠습니까rdquo

75)『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9년 임오(1882 광서 8) 6월 5일(기미) 맑음 ldquo조병직에게 전교하기를 lsquo경복궁으

로 移御할 것이니 該房은 그리 알라 날짜는 이달 그믐 이전으로 가려서 들이라rsquo 하였다

76) 『日省錄』고종 25년 4월 12일(계사) ldquo重建所以交泰殿 康寧殿 麟趾堂 紫微堂上樑吉日今月十五日未時 推擇

上樑文製述官 書寫官別單書入啓rdquo

77)『고종실록』고종 18년 3월 1일(계해) ldquo지시하기를 lsquo이해 이달은 바로 정조비 孝懿王后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된다 지나간 옛날을 생각하면 슬픔을 어찌 견디겠는가 이달 9일 健陵의 酌獻禮는 大臣을 보내서 대

신 거행하도록 할 것이다rsquo라고 하였다 또 지시하기를 lsquo壽靜殿의 여러 곳을 수리하는 것과 새로 공사하는 것

은 본소로 하여금 거행하게 할 것이다rsquo 라고 하였다rdquo 『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8년 신사(1881 광서 7) 3

월 1일(계해) ldquo 송병서에게 전교하기를 lsquo壽靜殿 여러 곳의 重建과 營建을 본소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rsquo

하였다rdquo 무위소의 말로 아뢰기를 lsquo수정전 여러 곳의 중건과 영건에 대한 일을 본소에서 거행하라고 명하

셨습니다 역사를 시작할 길일을 일관 韓應翼으로 하여금 날을 택하게 하였더니 이번 3월 2일 시가 길하다

고 하였습니다 이날 이 시각에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rs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rdquo

78) 이태진 「大韓帝國 皇帝政과 民國 정치이념의 전개 -國旗 제정보급을 중심으로」『한국문화』 22 1997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pp 279-305에 「고종의 국기제정과 君民一體의 개념」이라는 제목

으로 재수록)

까지 진행되어 거의 모든 건물이 완공되었던 듯하나 11월 7일의 화재로 150칸 정도가 불타

버리고 말았다79) 이때 함녕전과 더불어 東別堂 南別堂은 소실되었으나 서별당인 協吉堂과

북별당인 集玉齋만은 소실되지 않았다80) 이후 1882년 6월초까지 진행되던 공사는 임오군란

발발로 중지되었고 1891년 3월 21일 이후 중건소가 주관한 함녕전 일곽 移建 공사에서 함

녕전 등 여러 건물은 어디론가 이건되었으며 1891년 7월에는 집옥재와 협길당도 경복궁으

로 이건되었다

1891년 3월의 함녕전 일곽 이건으로 시작된 이 시기 창덕궁 건물의 타 장소 이건은 담

당기구인 중건소를 설치하여 진행되었다 1891년 4월의 경복궁 계조당 개건 5월의 창덕궁

중희당 이건 7월의 경복궁 寶賢堂 改建과 집옥재 이건으로 이어지면서 6개월 이상 대규모

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료에 이건 장소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함녕전 중희당

등 창덕궁내 여러 건물이 어디로 이건되었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종 37년(광무 4 1900)에 비워 두었던81) 경운궁 선원전 제1실에 태조 고황제의 어진

을 새로 모사하여 봉안하게 되자82) 경복궁과 창덕궁의 선원전에도 태조 고황제 어진을 봉

안하기 위하여 새로 제1실을 증건하게 되었다83) 그 결과 창덕궁 선원전(현 구선원전)은 신

실 7실을 갖추고 정면 9칸 측면 4칸인 규모로 확장된 모습으로 확정되었다 이 시기 선원전

일곽의 평면 구성은 東闕圖形 에서 확인할 수 있84)

융희 1년(1907)에는 고종황제가 폐위당하여 경운궁(이때 덕수궁으로 개칭)에 거처하게

되자 창덕궁에서 純宗(1907-1910)이 즉위하였다 1908년에는 인정전 일곽을 크게 수리하면

서 進善門(광해군때 중건된 건물로 추정됨)을 철거하였다

(2) 1910년~1945년의 변화

1910년 8월 29일에 불법적으로 맺어진 한일합방 조약이 인정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리

하여 亡國과 함께 순종은 昌德宮殿下로 격하되었다 그 뒤로 왕실의 규모는 그럭저럭 유지

되지만 나라 잃은 왕조의 왕실과 궁궐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1907년부터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창덕궁의 개조 왜곡으로 인한 변형 훼손 과정은 우리 민족문화 전체를 말

살한 일제침략자들의 간악한 문화 파괴 행위의 시금석이다 장서각 소장 창덕궁 평면도 3종

을 바탕으로 이 시기 창덕궁 宮域의 단계적 변화 양상을 추적해 볼 수 있는데 이는 곧 창

덕궁의 파괴 과정이다

79)『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8년 신사(1881) 11월 8일(병신) 맑음 ldquo영건소가 아뢰기를 지난밤 화재 때 殿堂

과 行閣 150칸이 모조리 타 버렸습니다(후략)rdquo

80) 화재 다음 해인 고종 1년(1882) 3월 14일부터 6월까지 진행된 공사에서는 咸寧殿 衍福堂 正善堂 등 3채만

이 계속해서 언급되었을 뿐 협길당과 집옥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국역 승정원일기』 참조)

81)日省錄 광무 3년(1899) 11월 29일(임인) 高宗實錄 고종 36년(1899) 12월 31일(양력) 日省錄 광무 4

년(1900) 4월 3일(갑술) 관보 第一千五百六十四號 光武 四年 五月 三日 木曜 1 宮廷錄事 관보 第一

千五百六十五號 光武 四年 五月 四日 金曜 1 宮廷錄事

82) 高宗實錄 고종 37년 5월 18일(양력)

83) 高宗實錄 고종 37년 5년 22일(양력)

84) 이강근 「조선후기 선원전의 기능과 변천에 관한 연구」『강좌 미술사』35 2010 pp245-246

즉 1911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장서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形」

과 비교하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敦化門에서 仁政門에 이르는 행각이 없어졌고

그 자리에 宮內府廳舍가 생겼으며 ② 인정전 행각이 모두 개조되었고 후면에 대조전으로

연결되는 긴 행각이 생겨났다 ③ 선정전과 희정당 앞쪽에 있던 관청들이 모두 헐리고 선정

전과 희정당 사이에 사다리꼴 담이 생겼다 ④ 선정전 뒤 보경당 태화당 재덕당 영역이 없

어지고 그 자리에 lsquoㅍrsquo자형 건물이 생겼다 ⑤ 빈청을 지나 낙선재로 가는 길목에 있던 건물

은 모두 없어지고 길로 변하였다 이로 인하여 돈화문에서 곧장 후원으로 연결되는 신작로

와 창경궁으로 연결되는 신작로가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는 대체로 1907년부터 1909년 사이

에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같은 도면의 창경궁 영역에서는 植物本館(1909) 植物培養室

(1911) 博物本館(1911)이 신축되어 있어서 도면 작성시기는 1911년경으로 생각된다

또 1911년부터 1921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

形」과 비교하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돈화문 앞 차도가 확장되고 雲峴 쪽 신작로

가 연결되었다 ② 돈화문 안 오른쪽의 수문장청이 없어지고 왼쪽의 영군직소는 lsquo消防所rsquo로

바뀌고 금호문 밖의 건물은 경찰서로 바뀌었으며 금천교를 향해 왼쪽에는 헌병소가 생겼다

③ 檢書廳 內閣 奉謨堂으로 이루어진 奎章閣 영역은 내각 건물에 봉모당을 봉모당 건물에

譜閣을 설치한 이외의 주변건물은 모두 없어졌다 ④ 인정전 서행각 밖에 있던 政廳 玉堂

藥房 永依舍 등이 모두 없어지고 덜렁 창고 한 채가 생겼다 ⑤ 선원전 영역에서는 선원전

에 元璿源殿이라 쓰고 養志堂을 헐었다 ⑥ 선원전 이북의 숙경재 소주방 생물방 수라간

등 일곽을 모두 헐고 營繕倉庫(현존 의풍각) 木炭庫 醬油庫 등을 신설하였다 ⑦ 대보단을

헐고 관통하는 길을 냈으며 대보단 남쪽 궁장 밖 별도의 영역(北一營 자리)에 1921년에는

선원전과 懿孝殿을 덕수궁으로부터 移建하였다 ⑧ 1917년에 소실된 대조전 일곽을 1920년

에 경복궁 내전을 헐어다 재건한 모습이 그려져 있고 이때 새로 지은 生果房 주방 등이 대

조전 서쪽에 그려져 있다 또 뒤뜰에 嘉靖堂이 移建되어 있다 ⑨ 낙선재 일곽 남행각 밖의

모든 건물이 없어지고 낙선재에 현관이 수강재 옆 마당에 여러 창고가 창경궁과의 경계에

담이 신설되었다 ⑩ 이왕직청사 뒤에 창고가 신설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11년부터 1921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므로 도면 작성시기는 빨라야 1921년경으로 추정된다 또 이 도

면에는 종묘와 창경궁 사이를 가른 도로(1932년 개통)가 아직은 신설되지 않았으므로 1932

년 이전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1936년경에 작성된 장서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形」과 비교하

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돈화문 안쪽의 경우 소방서는 창고로 헌병소는 昌德宮支

署와 봉모당사무실로 경찰서는 舊 昌德宮警察署 등으로 바뀌어 있다 ② 元선원전 주변의

부속건물은 모두 헐렸다 ③ 희정당 오른쪽의 觀物軒에 lsquo緝熙rsquo라고 처음 적었다 이러한 변화

1는 1936까지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 3장의 장소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토대로

1907년 이후부터 1936년까지 창덕궁에서 일어난 변화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85)

이 가운데 가장 극심하게 파괴된 곳은 정전인 인정전 일원 편전인 선정전과 희정당 일원

85) 이강근 「장서각 소장 궁궐도면」 『건축역사연구』 63호 2009 4 pp 142-143

침전인 대조전 일원 등이었다 통치 기능이 마비되면서 1909년에는 궐내각사를 대신하여 이

를 통폐합할 의도로 일본식 2층 양옥인 궁내부청사가 돈화문 오른쪽 영역에 세워져 근본적

인 변화가 일어났다 후원 지역에는 숲 사이로 이리저리 낸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한편 1917년 겨울에는 대조전 서쪽에 붙어 있는 나인 갱의실에서 불이 나 순종과 순종

비가 급히 피신한 가운데 大造殿熙政堂景薰閣 등을 비롯하여 선정전 동쪽의 내전 일곽

이 대부분 불타버렸다 이때 내전에 보관되어 온 많은 보물과 역사 자료가 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의 화재는 放火로 추정된다 1917년은 순종이 폐위되고 나라를 빼앗긴 지 7년째

되는 해이며 경복궁에는 조선총독부청사 건립공사가 착공되어 일제의 혹독한 식민정치가

공고해지고 있었던 해이다 바로 이러한 때 왕의 침전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일어난 것은 왜

일까 의도적인 방화였을 가능성은 없는가 마지막 황궁이자 폐위당한 순종의 거처이기도

했던 창덕궁의 내전이 모두 소실되었으므로 순종 일가의 거처를 새로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

었다

1919년 1월에는 고종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로 인하여 31 독립만세가 거국적으로 일어

났으나 독립은 쟁취할 수 없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창덕궁의 중건이 미루어지다가

1920년에 이르러 중건에 관한 대책회의가 열렸는데 처음에는 700평 정도의 건물을 한옥에

서양식을 가미한 절충식으로 짓기로 하였으나 그 다음 회의에서는 경복궁의 내전을 헐어다

가 복원한다는 奇想天外한 방침이 정해졌고 그렇게 공사는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왕

직(李王職)을 시켜 경복궁 내전을 뜯어다가 창덕궁 내전을 복구하는 데 쓰도록 하는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경복궁에서 헐려 나간 건물은 交泰殿康寧殿동행각서행각延生

殿慶成殿延吉堂應趾堂欽敬閣含元殿萬慶殿興福殿 등이었다

그 결과 경복궁 내전은 완전히 훼손되고 3년간에 걸친 공사 끝에 창덕궁 내전 일곽 가

운데 대조전과 좌우 헌(흥복헌과 융경헌)희정당경훈각함원전 등이 변형된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대조전은 비교적 충실한 모습으로 재건된 반면 희정당은 규모가 대폭 확장되고

건물 앞쪽에 전에 없던 행각과 부속 건물이 첨가되었으며 평면 규모는 물론 기둥의 높이

변화 복도의 첨가 전면 부속건물의 돌출부 등은 전통적인 궁궐 건물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심지어 서양식 가구를 들여와서 입식생활에 맞도록 개조하였다 대청 좌우에는 벽화도 새로

조성하였다86) 대조전 서쪽으로 전에 없던 콘크리트 구조물이 지어져서 생과방(生果房) 복

도 등으로 쓰이게 된 것도 새로운 변화였다 경훈각은 징광루를 포함한 2층 건물이었으나

그 자리에 경복궁에서 옮겨 온 단층 건물인 만경전을 세움으로써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건

되었다 또 경훈각 오른쪽 마당 즉 대조전 뒤뜰에 있던 어정은 이때 메워진 듯하다

그런데 대조전은 경복궁 교태전 재목 희정당은 경복궁 강녕전 재목을 이용하여 재건된

반면 경훈각은 경복궁 만경전을 그대로 移建한 것이다 함원전은 경복궁 함원전을 이건한

것이 아니라 교태전의 동북 翼閣인 建順閣을 이건한 것인 듯한데 건물의 칸수와 기둥 간격

만 약간 변형되어 있다 대조전을 중건하면서 교태전 건물을 변형시켰기 때문이다87)

86) 이때 조성된 벽화의 미술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조은정 「1920년 창덕궁 벽화조성에 관한 연구」『미술사학

보』33 미술사학연구회 2009 참조

87) 장순용 앞 책 72쪽

경복궁 만경전은 원래 대비 침전인 자경전의 북쪽에 마련된 건물로 후궁 지역의 중심건

물이었는데 중건 당시의 사용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명칭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규모

와 평면형태로 보나 대비 침전일 가능성이 높다 경복궁을 중건하던 당시에는 익종비 神貞

王后(1808-1890) 헌종계비 孝定王后(1831-1903) 철종비 哲仁王后(1837-1878) 세 분이 모두

살아계셨으므로 대비의 침전도 세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가운데 慈慶殿이 신정왕후 興

福殿이 효정왕후의 거처였으므로 萬慶殿은 철인왕후의 거처로 마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만

경전 동쪽에는 內燒廚房인 建綺閤) 外燒廚房인 瑤光堂이 있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경전은 철인왕후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고종의 집무처로 빈번

하게 사용되었다88) 만경전 바로 북쪽에 있었던 만화당은 일찍이 1897년 5월 경운궁 중건시

에 경운궁으로 이건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그 남쪽에 있던 만경전마저 창덕궁으로 이건됨으

로써 경복궁 자경전 이북의 중요 내전은 모두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 『進饌儀軌』(1887 丁亥) 圖說編의 lsquo萬擎殿圖rsquo나 『朝鮮古蹟圖譜』十권(1930년간)의

사진을 통해서는 건물의 외형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현존 경훈각이 경복궁

만경전을 옮겨 원형 그대로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89)

1920년에 재건된 이후 대조전 일곽에서 살았던 순종 일가의 생활은 궁녀들의 증언을 통

하여 밝혀진 바가 있는데90) 그 가운데 당시 경훈각의 용도를 언급한 내용이 있어서 주목된

다 즉 ldquo순종 내외가 내전 중건뒤 이곳에서 생활한 햇수는 7년 남짓한데 왕비 윤씨(순정황

후)는 경훈각을 공부방 겸 쉬는 집으로 애용했다고 한다 종실 부인 2 3명과 김명길 상궁까

지 끼어서 가정교사를 앉히고 영어와 일본어도 배우고 피아노도 들여다 놓고 가끔 쳤다고

한다rdquo 그러나 1926년 순종황제 사후부터는 윤비의 거처가 낙선재로 바뀌면서 경훈각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한편 1921년에는 창덕궁 후원의 동북쪽에 덕수궁 선원전을 헐어다가 신실 12칸 형식의

정면 14칸 측면 4칸 규모의 璿源殿을 새로 지어 역대 제왕의 御眞을 옮겨 봉안하고 인정전

서쪽에 있던 원래의 선원전은 건물만 남겨 둔 채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때 덕수궁 안 서

북 영역에 있었던 순명효황후의 혼전인 懿孝殿도 함께 옮겨져 새 선원전 앞쪽에 세워졌

다91) 이리하여 조선왕조 역대 왕의 어진마저 궁궐 깊숙한 곳에 幽閉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26년 4월 25일에는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였으므로 궁궐의 주인은

더 이상 없게 되었으니 나라 잃은 지 16년만의 일이었다 일제 치하이기는 하지만 그 뒤로

창덕궁은 공원으로 전락되어 내외국인에게 관람이 허용되었고 이에 따라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하여 그 東西 行閣과 인정문 및 좌우 月廊이 전시장 용도로 개조되었다 이외 많은 전

88) 『승정원일기』 고종 22년(1885) 1월부터 고종 28년(1891) 9월 사이에 230여 차례 사용되었다

89) 만경전의 규모와 평면은 「北闕圖型」『宮闕志』 등에서 확인된다 즉 ldquo萬慶殿三十六間無翼工柱長十一尺樑

通二間九尺式前後退五尺五寸式 道里通七間九尺式 東西退五尺五寸式 東行閣十九間半間半五樑以南有咸春門以北

有寅陽門 南邊間墻一角門輔化門 西行閣十九間半間半五樑 以南有宜春門 以北有景成門 南行閣二十八間半間半五

樑 以東有廣宜門 以西有養化門 北行閣十八間 以東有協吉堂 以西有福熙堂 及平在門以西邊有rdquo

90) 김용숙 『朝鮮朝 宮中風俗 硏究』 일지사 1987 166-180쪽

91) 이강근 「창덕궁 의효전에 대한 연구」『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항산 안휘준교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

사회평론 2006 현재 의로전으로 잘못 부르고 있는 건물은 원래 명칭이 의효전이라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각들이 철거되고 각종 시설이 새로 만들어지게 되었으므로 창덕궁은 망국의 한을 담은 일개

관람장으로 변해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3) 광복 이후의 변화

광복 이후 50년이 지나서야 조선총독부청사가 헐리고 이어서 창덕궁이 복원되고 있다

게다가 1997년에는 조선왕조의 역사와 宮廷文化를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이라는 점을 인정

받아 유네스코에 의하여 lsquo世界文化遺産rsquo으로 지정되었다92) 이리하여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

의 야만성은 세계에 부각되고 뼈아픈 역사를 이겨내고 스스로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어

온 한국민족의 노력은 세계 문화민족들의 공감을 사게 되었다

현재 창덕궁에 남아 있는 건물과 그 건립 연대는 다음과 같다93) 敦化門(1607년)仁政

殿(1804년)仁政門(1745년)宣政殿(1647년)大造殿熙政堂含元殿景薰閣(이상은 1920

년 경복궁 내전 移建)嘉靖堂(1920년 무렵 덕수궁 가정당 移建)賓廳(현 御車庫)誠正閣

(정조년간)94)內醫院(성정각 부속건물로 1920년 무렵부터 내의원으로 사용됨)觀物軒(정조

7년 이전)95)舊璿源殿(1695년 현 유물보관창고)樂善齋(1847년)壽康齋(1785년)96) 錫福

軒(1848) 翠雲亭(1686년)閒靜堂(1917년 이후)上涼亭滿月門 承華樓三三窩七分序

(이상 정조 년간)新璿源殿(1921년)

92) 해방 이후 1970년부터 2005년까지 우리 정부에 의해서 시행된 보수공사의 내역에 대해서는 본 보고서 3장

참조

93) 단 1990년대에 문화재관리국에 의하여 시행된 복원 공사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6장 제5절을 참조하기 바

94) 『궁궐지』에 숙종이 지은 ldquo儆戒世子十箴及小序rdquo가 살려 있고 숙종실록 숙종 31년 2월 병자에 세자가 성정

각에 있다는 기사로 보아 숙종때 이미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옳다

95) 『正祖實錄』16권 7년(1783 계묘) 11월 26일(계축) 觀物軒에 나아가 抄啓文臣의 講經 시험을 거행하였다

96) 『正祖實錄』 20권 9년(1785 을사) 8월 27일(갑진) ldquo貳極門 안에 있던 오래된 우물 자리에 壽康齋를 세웠

다 慈慶殿을 營建할 때 남은 자갈과 벽돌을 우물 위에 쌓아 假山을 만들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를 철거하

고 그 우물을 파고는 小齋를 세워 내려다 보게 하였다 이곳은 太祖朝 壽康宮의 옛터로서 『輿地勝覽』에 기

재되어 있다 이어 그 齋를 壽康齋라고 이름을 지었다rdquo

2 창덕궁 영역의 변천

가 조선 전기 창덕궁의 영역 변천

1) 창덕궁 창건시의 위치와 규모

태종은 즉위 4년에 신하들과 종묘에서 점을 쳐서 태조가 처음 도읍을 세웠던 한양을 다

시 환도하여 법궁인 경복궁 이외에 궁궐을 짓도록 명하였다97) 이궁의 위치는 향교동의 동

쪽으로 정했다98) 향교동은 조선후기의 지도에 따르면 한성부 중부 경행방 교동계에 포함된

동으로 고려시대 한양 향교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99) 현재의 낙원동 271~283번지 일대이

며 창덕궁은 향교동의 동북쪽에 자리하였다 성종대에 편찬한『신증동국여지승람』에 창덕

궁은 ldquo北部 廣化坊에 있다rdquo고 하여 그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97) 『태종실록』 권8 태종 4년(1404) 10월 6일

98) 『태종실록』 권8 태종 4년(1404) 10월 6일 ldquo遂相地于鄕校洞東邊 rdquo

99) 유본예 『한경지략』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영인본 2000 284쪽

구분 경복궁101) 창덕궁102) 조선후기 창덕궁

연대 1395(태조 4) 1405(태종 5) (궁궐지)103)

내전 침전 연침7칸+이방(2+2)칸 청3칸+동서침전(2+2)칸대조전청3칸+동서온돌

(2+2)칸+퇴(1+1)칸

표 2-2gt 창건당시 창덕궁의 규모와 경복궁 규모 조선후기의 창덕궁 규모와 비교

그림 1gt「도성도」(여지도 1750~ 1757년 754times98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이궁의 공사가 진행중이던 태종 5년 왕은 궁궐 짓는 것을 보고 성산군(星山君) 이직(李

稷)과 함께 그 규모(規模)를 획정하였다100) 궁이 완성된 후에 기록한 규모는 총 287칸으로

이 중에서 내전이 195칸 외전에 92칸이다 이 기록에서는 주요전각의 경우 정면 칸수만 표

기한 것이다 태조 4년(1395) 준공된 경복궁과 비교하면 내전의 규모가 195칸으로 창덕궁이

더 많고(경복궁은 173칸) 외전은 경복궁이 212칸으로 창덕궁(92칸)의 2배가 넘는다 이는

창덕궁이 내전위주의 이궁이라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100) 『태종실록』 권9 태종 5년(1405) 2월 2일

구분 경복궁101) 창덕궁102) 조선후기 창덕궁

연대 1395(태조 4) 1405(태종 5) (궁궐지)103)

행랑

북천랑 7칸 북행랑 25

칸 남천랑 5칸

동소침 3칸 서소침 3칸

동서천랑 (2+2)칸

남천랑 6칸

동서소횡랑 (5+5)칸

북행랑 11칸

서별실 3칸

동서행랑 (15+15)칸

동루 3칸 상고 3칸

흥복헌 4칸

융경헌 3칸

동행각 6칸

서행각 6칸

남행각19칸

내전소계 173칸 195칸

외전

편전 - 3칸 선정전 3칸

보평청 5칸+이방(1+1) 3칸

정전 5칸 3칸 5칸

월대

동서폭 1125자

남북폭 50타

중계 깊이 15자

동서폭 639자

남북폭 33자

중층폭 5자

상월대

남북 폭 45자

하월대 165자

내정

남북(월대전면~정문)

178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3225(1125 +15

+15+80+80)자

남북( 월대전면~정문)

117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156자

남북( 월대전면~정문)

123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209자

행랑

북행랑 29칸

동행랑 28칸

서행랑 28칸

동행랑 17칸

서행랑 16칸

동행각 18칸

서행각 19칸

대문3칸

좌우행랑 (11+11)칸

3칸

좌우행랑 (9+9)칸

인정문 3칸

좌우행랑 (10+10)칸

외전소계 212칸 92칸

궐내각사 390칸

승정원청 3칸

동행랑 10칸

남행랑 4칸

북행랑 4칸 외행랑 5칸

외루 3칸

승정원 3칸 7량

동행각 125칸

서행각 12칸

남행각 5칸

당후 10칸

총 칸수 775칸 287칸 183825칸(대보단 포함)

2) 조선전기 창덕궁의 변천과정과 범위

(1) 제1기 태종대(太宗代)~세종대(世宗代)

창덕궁의 창건과 궁궐로서 형태를 갖추는 시기이다 태종대에 창덕궁을 지을 때에는 법

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현재보다 그 범위가 좁고 전각의 구성도 달랐다 창건당시에는

인정전 일곽의 외전과 내전으로 구성되었으며 인정전 외행랑과 진선문 금천교는 태종 11년

에104) 돈화문은 그 다음해에 완성되었다105) 태종은 이어서 편전을 넓게 고쳐 짓고(태종 15

101) 『태조실록』 태조 4년(1395) 9월 29일

102) 『태종실록』 태종 5년(1405) 10월 19일

103) 『궁궐지』에는 건물의 전체 칸수가 적혀 있으나 이 표에서는 경복궁과 창덕궁의 창건 기록과 같은 기준으

로 전각의 정면 칸수를 적음

104) 『태종실록』태종 11년(1411) 3월 18일

105) 『태종실록』태종 12년(1412) 5월 22일

년) 인정전을 확장하고 나서106)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세종은 즉위직후 상왕인 태종

을 위하여 창덕궁의 동남쪽에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즉 창덕궁의 외전 침전일곽과 나중

에 동궁과 창경궁이 되는 수강궁 일대의 틀이 태종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태종대에 시작한 인정전 확장과 외행각(인정문 남쪽) 조성은 세종 즉위 직후에 마무리

되었다 인정문 남쪽의 행랑은 특별한 용도로 쓰이지 않고 다만 정전 앞쪽의 영역에 경계를

짓는 역할이었다고 생각된다 창덕궁의 위상이 이궁이었으므로 외조의 각 기관이 외행랑에

들어서지 않았으며 행랑을 세우지 말고 도로 담장을 쌓으라는 지시107)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단종 즉위년에 인정전의 서까래와 보가 썩어 이를 수리하였다108) 인정전을 창건한 지

50년만으로 처음에는 수리를 한다고 하였으나 『단종실록』에 따르면 초석과 기둥 등 고치

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109)고 하여 수리라기보다는 개축하면서 좀 더 확장 한 것으로 보

인다

그림 2-2gt 태종~세종년간의 창덕궁범위

창덕궁의 창건(1405)

금천교(1411) 돈화문 건립(1412) 인정전 확장(1418)수강궁건립(1418)

106) 『태종실록』태종 18년(1418) 7월 7일

107) 『태종실록』 태종 1년(1401) 4월 12일 15일

108)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11월 17일

109) 『단종실록』 단종 1년(1453) 4월 27일

시기 내용 참고

태종 4년(1404) 106 향교동 동변에 이궁을 짓도록 하다

태종 5년(1405) 10 9 이궁완성

태종 6년(1406) 4 1 궁안에 광연루 지음

태종 6년(1406) 4 9 해온정 궁 동북 모퉁이에 지음

태종 11년(1411) 318 진선문 금천교

ldquo누각과 침실을 창덕궁에 짓고 진선문 밖에는 돌

다리를 놓았는데 공조판서 박자청을 시켜 그 역사

를 감독하게 하였다rdquo

인정전의 확장에 먼저

건립된 진선문의 위치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태종 11년(1411) 415 의정부 朝房을 진선문 밖에 짓도록 하였다

태종 12년(1412) 522 진선문 남쪽에 누문 5칸을 세우고 lsquo돈화문rsquo이라

태종 15년(1415) 128 편전을 넓게 고쳐지음

태종17년(1417)윤512 이조판서 박신이 인정전이 좁아 서쪽으로 당겨 다

시 짓도록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태종 18년(1418) 77 인정전을 고쳐짓다

태종 18년(1418) 910 인정전이 준공되었다

세종 즉위년(1418) 113 완성된 상왕전의 신궁을 壽康宮이라 하다

세종 1년(1419) 412 15

박자청이 상왕(태종)의 지시로 인정문 밖의 남행

랑을 비뚤게 지었으므로 하옥하고 헐어버리도록

하고 행랑대신 담장을 쌓도록 하다

단종 즉위년(1452) 1114 사헌부에서 인정전을 개축을 정지할 것을 청하다

단종 즉위년(1452) 1117 ldquo대신 등이 말하기를 lsquo인정전(仁政殿)의 서까래

[欀題]와 동량(棟梁) 이 썩었다rsquo 하는데 만약 창

덕궁에 거처하게 되면 정사를 볼 곳이 없어서 개

수(改修)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구지(舊址)이기 때

문에 조금 넓힐 뿐이다rdquo

인정전을 확장

단종 1년(1453) 427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창덕궁(昌德宮)을 처음에는 수보(修補)한다고 말하

였으나 지금 주춧돌 하나 기둥 하나도 고치지 아

니한 것이 없으며 인정전에 이르러서는 완전하고

튼튼하여 옛날 그대로 있는 것이 가한데 모두 철

거하여 고쳤으니 이름은 수보한다고 하고 모조리

새로 짓습니다 흥인문을 고치고 수문을 지음

단종 1년(1453) 55 인정전과 흥인문 수문의 역사를 마치도록 하다

표 2-3gt 제1기 태종~세종연간의 창덕궁 연표

(2) 제2기 世祖代~成宗代

창덕궁은 태종대에 형식적인 틀을 대부분 갖추었으며 주요 전각이 자리를 잡아 갔다

그 다음 단계로서 성종년간에 이르기까지 전각의 명칭을 정하고 영역을 확장하여 조선 후기

까지 유지되는 궁역 외곽선을 확보하게 된다 세조년간에 중심 전각들의 이름을 정했는데

조계청(朝啓廳)을 선정전(宣政殿) 선정전 뒤편의 동쪽 별실(後東別室)을 소덕당(昭德堂) 서

쪽 별실(後西別室)을 보경당(寶慶堂) (내전의)정전(正殿)을 양의전(兩儀殿) 동침실(東寢室)

을 여일전(麗日殿) 서침실(西寢室)을 정월전(淨月殿)이라 칭하고 누(樓)를 징광루(澄光樓)

동별실(東別室)을 응복정(凝福亭) 서별실(西別室)을 옥화당(玉華堂) 누하(樓下)는 광세전(光

世殿)middot광연전(廣延殿) 별실(別室)을 구현전(求賢殿)으로 하였다110) 이때 정한 선정전과 소덕

당 보경당 징광루 옥화당 등 대부분의 명칭은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양의전으로 이

그림 3gt 세조~성종년간 궁장의 확장과 창경궁

건설

세조 전각명칭 정함(1461)

세조 후원 동쪽궁장의 확장(1462~1463)

성종 창경궁의 창건(1584)

름 지은 정전(내전의 정전)은 세조대에

이전에 대조전(大造殿)으로 개칭하였

다111)

세조년간에는 후원의 영역을 확장

하였는데 즉위 8년에서 9년에 후원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쪽과 동북쪽의 담

장을 넓혀서 쌓으려 민가를 철거했으며

이때 넓힌 궁장은 성균관에 맞닿게 되

었다112) 당시 확정된 후원의 경계는 궁

의 동북쪽과 북쪽 그리고 동쪽으로 응

봉 주산의 내맥이 지나는 곳에 합친 것

이 되는 셈인데 궁의 후방 담장 경계는

세조대에 확정된 것이 그 이후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성종대에는 왕실의 구성원 중에서

여러명의 대비가 존재함에 따라 창덕궁

의 연조부분을 확장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창덕궁의 지형이 내전을 확장하

기에는 협소하여 창경궁을 조성하게 되

었다113) 성종 13년 창덕궁 수리를 논의

하는 자리에서 성종은 창덕궁을 수리할

필요가 없고 그 대신 수강궁을 수리하

라고 했다가114) 이듬해 창경궁을 짓도록 명하였다 성종 15년에 완공된115) 창경궁은 궐내각

사와 내전 후원을 창덕궁과 공유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경희궁을 서궐이라 하는데 대

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ldquo동궐rdquo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시기까지 외조는 승정원 빈

청 사옹원 내반원 정도가 확인된다

성종 6년에 창덕궁의 문 중에서 액호가 없던 것을 왕의 명으로 서거정이 짓게 되는데

이때 명명된 문 이름을 통해서 창경궁이 조영되기 이전 성종대의 창덕궁 궁역과 문의 기능

110)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1461) 12월 19일

111)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1467) 5월 17일 왕이 대조전에서 신하들과 이시애의 난을 토벌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는 그 직전까지도 양의전에서 논의하던 내용으로 이후 양의전이라는 전각명은 기록에 보이지

않고 같은 논의를 양의전 대신 대조전에서 하고 있어서 양의전과 대조전은 같은 전각이라고 추정된다 『宮闕

志』(K2-4363) 에 실린 양의전 관련내용은 다음과 같다 ldquo兩儀殿世祖七年壬午上御兩儀殿召承旨 金 從舜 謂曰

臺諫擇可言事言之人主得納諫之名 臺諫亦得獻替之譽矣[주國朝寶鑑]rdquo

112) 『세조실록』 세조 9년(1463) 2월 7일

113) 예종대 이전에는 왕비가 먼저 승하하여 왕실에 대비가 없었으나 예종대(예종은 즉위기간이 1년2개월로 짧

았다)에 정희왕후 성종 즉위 후에는 예종비 안순왕후와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가 생존한 상태로 갑자기 대

비가 세분이나 존재하게 되었다

114) 『성종실록』 성종 13년(1482) 12월 14일

115) 『성종실록』 성종 15년(1484) 9월 27일

시기 내용 참고

세조 7년(1461) 1219 창덕궁의 조계청(朝啓廳)을 선정전(宣政殿) 후동

별실(後東別室)을 소덕당(昭德堂) 후서별실(後西

別室)을 보경당(寶慶堂) 정전(正殿)을 양의전(兩儀

殿) 동침실(東寢室)을 여일전(麗日殿) 서침실(西

寢室)을 정월전(淨月殿)이라 칭하고 누(樓)를 징

광루(澄光樓) 동별실(東別室)을 응복정(凝福亭)

서별실(西別室)을 옥화당(玉華堂) 누하(樓下)는 광

세전(光世殿)middot광연전(廣延殿) 별실(別室)을 구현전

(求賢殿)이라 칭하도록 하라

세조 13년 5월 17일 대조

전 기사가 등장하므로 대조

전은 처음에 양의전이었다가

세조 13년 이전에 대조전으

로 개칭 된 것으로 보임

보경당은 왕이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거나 소견하는 장

소로 사용 왕의 거처 영조

탄생

세조 8년(1462) 130 후원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장을 넓혀서 쌓으려

민가를 철거하도록 하다

세조 9년(1463) 27 9 후원의 궁장을 넓히려고 동북동 북쪽의 인가를

철거 창덕궁의 궁장이 성균관에 맞닿음

성종 6년(1475) 8 23 액호가 없는 창덕궁의 문이름을 정함

성종 15년(1484) 9

27

창경궁 준공

연산군 11년~12년 후원에 서총대 건립

표 4gt 제2기 세조~성종년간의 창덕궁 연표

을 파악 할 수 있다 『성종실록』의 내용 중에서 외동장문으로 선인문(宣仁門)은 현재 창경

궁 홍화문 남쪽에 있는 문인데 세조 8년에 궁장 위치를 동쪽으로 물려 쌓은 것을 감안하면

성종대에 이름을 지은 선인문과 현재의 선인문 위치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창덕궁의 내동장문(內東墻門)은 건양문(建陽門)이라 하여 창덕궁과 당시 수강궁의 경

계에 내궁장이 있고 건양문으로 통행하여 그 경계의 구분이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서쪽의 궁장문으로는 요금문(曜金門) 서행랑문(西行廊門)은 금호문(金虎門)이 확인되며

후원의 북장문(北墻門)은 공진문(拱辰門) 외북장문(外北墻門)은 광지문(廣智門)116)이라 하였

다 현재공진문으로 경계지워지는 주합루 일대까지가 당시에 후원이었으며 그 북쪽(현재 옥

류천 일대의 북쪽)에 또 외궁장이 있었다 「도성대지도」(1764년경 제작 추정)에는 창덕궁

후원의 외궁장에 광지문이 표기되어 있으며 문 밖에는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의 초소인 광지

영(廣智營)이 있었다 연산군은 이 문을 지키는 영(營)에서 후원이 내려다 보인다고 하여 그

위치를 아래쪽으로 옮기게 하고 이쪽으로 사람들을 왕래하지 못하도록 했다117) 이 문의 이

름은 『승정원일기』에 광지영 서쪽에서 건무문 동쪽까지의 궁장을 수리하면서 건무문이라

고 칭하고 있어서118) 정조년간에 건무문(建武門)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에는 lsquo건무문rsquo이라고 적혀 있다

116) 『성종실록』 성종 6년(1475) 8월 23일 ldquo예문관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전교를 받들어 대궐의 문 중에

예전에 額號가 없는 것은 각기 2개의 이름을 扁額하여 아뢰니 임금이 낙점하기를 창덕궁 밖 東墻門은 宣仁

門 중간의 東墻門은 景陽門 新大門은 長春門 中大門은 宣明門 南夾門은 春興門 안 東墻門은 建陽門 북쪽

東墻門은 綺華門 廣延亭의 西岾門은 平昌門 南行廊門은 永和門 北行廊門은 永平門 內司僕南門은 雲錦門

外東山門은 延陽門 左夾門은 光範門 右夾門은 崇範門 南墻門은 丹鳳門 內西墻門은 宜秋門 左闥門은 肅章

門 兼司僕廳의 新大門은 延福門 內司饔의 上東門은 小春門 북문은 小東門 중궁의 差備門은 延禧門 承政院

의 南門은 延英門 서행랑문은 金虎門 外西墻門은 鎭金門 西墻門은 曜金門 後苑의 北墻門은 拱辰門 新北墻

門은 閶闔門 東墻門은 靑陽門 外北墻門은 廣智門 -후략-rdquo

117) 『연산군일기』 연산군 5년(1499) 2월 26일

118) 『승정원일기』 정조 8년 6월 22일

나 조선후기 창덕궁의 영역 변천

1) 제3기 임진왜란~영조대(英祖代)

세 번째 단계는 임진왜란 이후에서 영조년간까지 이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경복궁이 재건되지 못하고 창덕궁이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법궁으로서의 형

식을 갖추어 나가는 단계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한동안 전란을 수습하느라 종묘

와 궁궐을 복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조 39년(1606)에 경복궁 중건을 착수했으나 도중에 창

덕궁을 복구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119) 이 공사는 광해군 2년에 완료되었다120)

광해군년간의 창덕궁 복구는 광해군 1년(1609) 10월에 대략적인 공사가 완료되었고121)

광해군 2년(1610) 9월에 모든 공사가 끝난듯 공사에 참여한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의

도제조middot제조middot도청(都廳) 이하 공장(工匠) 등에게 시상을 하도록 했다122) 광해군대의 복구는

옛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법궁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을 완공하고도 이곳에 거처하지 않고 경운궁으로 이어했으며 재위 9년(1617) 부터는

인경궁과 경덕궁(후에 경희궁으로 개칭)을 건설하는123) 등 창덕궁에 별로 애착을 보이지 않

았다 광해군대에 경덕궁과 인경궁 건설시 침전은 창덕궁의 대조전을 모델로 삼아 크기와

규모를 같도록 하였다124)

임진왜란 후 재건된 창덕궁의 여러 전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조반정시 반정군에 의해

인정전과 수정당(壽靜堂)을 제외하고 내전의 전각이 대부분 소실된 것이다 소실된 전각들은

곧바로 복구되지 못하였으며 창경궁의 전각을 이용하다가 인조 25년(1647)에 이르러서야 내

전의 전각들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인조대에 인경궁과 경덕궁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복구공사를 위하여 건물을 헐어 그 부

재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광해군대에 창덕궁을 참조하여 건물의 규모를 정하였으므로 인경궁

의 건물 부재를 사용한 창덕궁 전각의 복구는 소실되기 이전과 큰 차이가 없는 형태가 되었

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인조 25년에 재건된 범위는 선정전 북쪽의 보경당과 태화당

소덕당을 포함하여 대조전 희정당 등의 내전 일곽이 이전의 모습대로 재건되었으며125) 그

외에도 인정전의 동월랑 남월랑 승정원 내궁방 내사옹원 외사옹원 숙장문 좌우행랑 인

정문 외행랑 선정전 선정전 북월랑 등 외전영역의 행랑과 궐내각사를 포함하고 있다126)

119) 『宮闕志』 昌德宮志

120) 『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1610) 9월 1일

121) 『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1609) 10월 16일

122) 『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1610) 9월 1일

123)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1617) 1월 18일

124)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1617) 6월 21일

125) 『인조실록』 인조 25년(1647) 11월 12일 ldquo상이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는데 수리할 적에 새로 세운 것도

많았다 모든 낭무(廊廡)가 일체 옛 제도와 같았고 大內에 大造殿middot宣政殿middot熙政堂middot靜默堂middot集祥堂middot寶慶堂middot玉華堂middot

泰和堂middot讌和堂과 澄光樓가 있는데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rdquo

이 때 재건된 전각은 대부분 순조대까지 유지되었으며 그 내용은 「동궐도」에 표현되어 있

인조년간에 특기할 만한 것은 후원에 많은 정자를 지어 창덕궁의 후원 깊숙한 곳에 왕

의 개인적인 휴식 공간이 조성된 것이다 인조 14년(1636)에는 후원의 제일 북쪽인 광지문

안쪽에 청의정과 태극정 소요정 취하정을 짓고 옥류천을 조성했다 인조 18년에는 취규정

을 지었으며 22년에는 존덕정을 지었다 당시 청나라에서 귀국한 소현세자에게 청나라의 궁

관(宮觀)을 물어 팔각형의 정자를 짓기도 했다127)

효종과 현종대에는 대비를 위한 전각이 추가되어 공간에 변화를 준것이 특징이다 효종

6년(1655) 인정전 서북쪽 흠경각옛터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를 위해 만수전을 지었다 자

의대비는 대조전 북서쪽 언덕에 있었던 수정당(壽靜堂)에 거처했으나 이곳이 좁고 협착하다

는 이유를 들어 만수전을 지은 것이다 수정당은 정조 18년(1794)에 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면

서 당(堂)에서 전(殿)으로 전각의 위상을 높여 수정전(壽靜殿)으로 개칭하였다 현종 8년

(1667)에는 대조전 북동쪽에 있던 집상당(集祥堂)을 고치면서 이름을 집상전으로 개칭하고

통명전에 거처하던 효종비 인선대비를 거처하도록 하였다 집상전은 세조대에도 집상당이라

는 전각명이 실록에 보이는데 인조대에 창덕궁을 재건할 때 이전의 모습과 제도대로 지었다

는 점과 이때에도 집상당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있던 전각으로 보인다

인정전 북서쪽은 원래는 각종 천문기기를 설치한 흠경각128)이 자리잡고 있어서 외전영

역에 속했으나 만수전과 내전관련 부속 건물들이 새로이 들어섬으로서 그 일대는 내전영역

으로 그 기능과 성격이 변화 하였다 만수전이 숙종대에 소실된129) 다음에도 그 자리에 계

속해서 대비의 거처인 경복전이 들어섰으며 주변의 부속 건물들은 영모당 수라간 등촉방

등의 기능을 가지고 유지되었다

숙종대에는 왕의 어진을 제작하여 선원전에 보관하고 이것을 경종과 영조대에 확장해

가면서 선원전일곽이 하나의 영역을 새롭게 형성하였다 선원전 자리는 원래 도총부로서 궐

내각사의 일부였으나 효종대에 그 자리에 춘휘전을 지었는데 이곳에 숙종의 어진을 보관하

였다 이후 보관할 어진의 수가 늘어나면서 영조대에 중수하였고 양지당 등 주변전각이 재

실과 선원전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

숙종년간에 또 하나의 변화는 후원의 북서쪽에 대보단을 창설한 것이다 대보(大報)란

126) 『昌德宮修理都監儀軌』(1647)

127) 『인조실록』 인조 24년(1646) 2월 4일 상이 八角亭을 後園에다 지었다 처음에 세자가 북경에서 돌아오

자 상이 청나라의 宮觀의 제도에 대하여 물었다 세자가 팔각정의 제도가 가장 묘하다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

기를 ldquo네가 그 모양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겠는가rdquo 하니 세자가 즉시 그려서 올리자 상이 매우 기뻐하여 그

정자를 후원에다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매우 기묘하였다

128) 흠경각은 세종대에 경복궁 사정전 서쪽에 있었으며 혼천의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후 선조가 영의정 이항

복에게 명하여 예전의 제도대로 만들도록 하였다 광해군 5년에서 8년까지 흠경각 건립에 대한 기사가 있는

데 이는 창덕궁에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효종년간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수전을 지으면서 혼천의가

손상되었는데 현종조에 들어와 좨주 宋浚吉이 흠경각의 옛 제도를 복구하도록 청하자 마침내 李敏哲에게 명

하여 蔡沈의 《書經集傳》에 조금 더하고 덜어서 혼천의의 형상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 제도는 안에 四游와

玉衡이 빠져 있고 또 白單環을 없앤 것이었다 숙종조에 들어와 이민철에게 명하여 예전 혼천의를 중수(重修)

하도록 하고 齊政閣을 창덕궁 熙政堂의 남쪽에 지어 봉안하였다(『國朝寶鑑』 제 60권 영조조 4 한국고전

종합 DB httpdbitkcorkr)

129) 『숙종실록』 숙종 13년(1687) 9월 2일

큰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임진왜란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神宗)에 제사 지내기

위한 시설이다 숙종 30년(1704) 별대영(別隊營)의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세웠다 후원

의 서쪽 담과 별대영의 동쪽 담 사이를 연결시켜 쌓고 후원의 담을 뚫어 문으로 만들어서

친제(親祭) 때 거둥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대보단으로 통하는 문은 창덕궁 후원의 동쪽문인

집춘문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130) 이렇게 명나라에 대한 신의를 강조했던 것은 당시 유행

했던 반청(反淸)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신위는 대보단 동쪽의 봉실에 모셨으며 서쪽의 경봉

각(敬奉閣)에는 중국 황제와 관련된 서적과 문서를 보관했다 단의 남쪽에 열천문과 공북문

을 두었고 동쪽에는 어재실인 만세송은(萬世誦恩)이 있다

숙종대에는 인조대 못지않게 후원에 다양한 형태의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여 주합루 북

쪽에서 옥류천까지 왕의 휴식처를 다양하게 마련했다

그림 4gt 인조~영조대의 전각조성

인조 25년(1647) 중건 효종대 만수전 춘휘전 건립

현종대 집상전 건립(순조대까지 유지) 숙종대 선원전 건립

130) 『숙종실록』 권40 숙종 30년(1704) 10월 3일 12월 21일

시기 내용 참고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창덕궁 소실

광해군 2년(1610) 9 창덕궁 중건

광해군 15년(1623) 3 12 인조반정시 인정전만 남고 모두 소실됨

인조 14년(1636) 후원에 옥류천과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지음

바위에 옥류천 세 글자를 새겼는데 인조의 어필이

『궁궐지(宮闕志)』

인조 18년 후원에 취규정(聚奎亭) 지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2년 후원에 존덕정 지음 연못이 있어 반원지라 하고

남쪽에 일영대를 두었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4년 후원에 희우정과 청양각 지음

인조 25년 후원에 낙민정과 관풍각(觀豊閣) 지음

서총대 동쪽 북쪽에 내농포가 있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5년(1647) 11 12 창덕궁 중건 모든 낭무(廊廡)가 일체 옛 제도와

같았고 대내에 대조전(大造殿)middot선정전(宣政殿)middot희

정당(熙政堂)middot정묵당(靜默堂)middot집상당(集祥堂)middot보경

당(寶慶堂)middot옥화당(玉華堂)middot태화당(泰和堂)middot연화당

(讌和堂)과 징광루(澄光樓)가 있는데 매우 웅장하

고 화려하였다

『昌德宮修理都監儀軌』

(1647)

효종 8년(1657) 4 2 만수전 춘휘전을 흠경각 옛터에 지음 『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

儀軌』(1657)

현종 8년(1667) 11 11 집상전을 짓도록 명하다 『集祥殿修改都監儀軌』

(1667)

숙종 13년(1687) 9 2 만수전 소실

숙종대에 만수전 터에 경복당을 짓고 이후 경종

2년 경복전으로 개칭

숙종 14년(1688) 청심정(淸心亭)을 지음 남쪽 뜰에 못을 파서 빙옥

지라 하고 정자 동쪽의 협곡에 홍예교를 놓음

『궁궐지(宮闕志)』

숙종 15년(1689) 관덕정 북쪽에 영타정(靈鼉亭)지음 불로문 밖 남

변 소실

『궁궐지(宮闕志)』

숙종 18년(1692) 애련정 연못 조성

영화당 개수

『궁궐지(宮闕志)』

숙종 21년(1695) 춘휘전을 선원(璿源)이라 이름을 고치고 어진을

봉안하였다

『궁궐지(宮闕志)』창덕

궁지 선원전조

숙종 39년(1713) 4 11 임금의 여용을 그려 뒤에 임금이 한 벌은 대내(大

內) 선원전(璿源殿)에 보관하라고 분부하였다

효종대에 지은 춘휘전을

선원전으로 전용

영조 30년(1754) 1 5 선원전 수리 7칸으로 증축

표 5gt 제3기 임진왜란~영조년간의 창덕궁 연표

2) 제4기 正祖代

정조대에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창덕궁에 활발한 건물의 조성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성

격의 전각이 들어섰다 그 결과 궁궐전체의 공간 구성에 변화가 불가피했으며 이는 이후 순

조와 헌종대의 창덕궁 공간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정조는 즉위년에서 즉위 5년까지 창덕궁내에 각종 시설들을 정비하고 첨가했는데 즉위

하자마자(1776년) 첫번째로 후원에 주합루를 세우도록 명하여 같은 해 9월 26일에 완공했다

주합루는 영화당 북쪽의 언덕에 자리 잡고 그 주변으로 봉모당 열고관과 개유와를 배치하

였고 주합루 서쪽에 이안각인 서향각을 배치하였다 주합루 일대의 건물들에는 영조의 어필

과 문집(봉모당) 중국서적(열고관 개유와)과 국내의 서책을 보관하였다 주합루는 이 일대

의 중심건물로 언덕위에서 당당한 위용으로 부용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이다 주합루 일

대가 조성됨으로써 영화당의 동쪽은 문무과 시험의 장소로서 기존의 기능을 수행하고 주

합루 일대는 왕권 강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변모하여 이 일대는 후원에서도 통치와 관련된

기능을 가진 영역이 되었다

즉위년 9월에 인정전 앞마당에 품계석을 설치하고 즉위 2년(1778) 선원전에 새로 동middot서

익각을 설치했으며131) 즉위 5년(1781)에는 주합루에 설치한 규장각의 관리들이 근무하는 공

간으로 이문원을 세웠다132) 이문원의 위치는 금호문 안쪽 선원전의 서쪽으로 원래 그 자리

에 있었던 도총부는 창경궁으로 옮겼다 이문원이 설치된 장소는 임진왜란 직후까지도 민가

가 있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즉 조선 후기에 창덕궁이 법궁으로 이용되면서 금천 서쪽은 증

가하는 궐내각사를 설치할 공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정조 6년(1782)에는 왕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중희당(重熙堂)을 신설했다133)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는 동궁으로 저승전과 시민당이 있었으나 저승전은 영조 32년 화재로 소실된

후 복구하지 않았고 시민당도 정조 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134) 처음에는 시민당을 복구하려

다가 이를 중지하고135) 시민당터와 내전영역의 중간정도 되는 지점에 세자를 위한 전각들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로서 동궁은 내전과 더욱 가까운 곳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헌종대에 편

찬한 『궁궐지(宮闕志)』에는 중희당 일곽을 창덕궁에 포함시키고 있다

131) 『정조실록』정조 2년(1778) 1월 15일

132) 『정조실록』정조 5년(1781) 3월 10일

133) 『宮闕志』창덕궁지 중희당조

134) 『정조실록』 정조 4년(1780) 7월 13일

135) 『정조실록』 정조 4년(1780) 8월 29일

그림 5gt 정조대의 전각조성

정조 9년(1785)에는 수강재를 건립했다136) 그 터가 수강궁의 옛터라고 하여 수강재

로 이름지었으며 세자궁의 정당인 시민당터의 북쪽에 위치하였다 정조가 상량문에서 밝

힌 수강재의 용도는 왕의 작은 서재로서 강학을 위한 집이었다137) 중희당과 수강재의

건립은 왕과 세자의 관계를 보다 밀접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건축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기 내용 참고

정조 즉위년(1776) 주합루 건립

정조 1년(1777) 9 6 인정전 품계석 설치

정조 2년(1778) 1 15 선원전 동 서익각 설치

정조 5년(1781) 3 10 금호문 안쪽에 이문원 설치

정조 6년 중희당 건립 『宮闕志』

정조 9년(1785) 8 27 수강재 건립

정조 17년(1793) 택수재를 고쳐서 부용정 개축 『홍재전서』제55권 잡저(雜著)2 부용정상량문

표 6gt 제4기 정조년간의 창덕궁 연표

3) 제5기 純祖代~高宗代

136) 『정조실록』 정조 9년(1785) 8월 27일

137) 『홍재전서(弘齋全書)』 제54권 잡저(雜著) 수강재상량문

순조대에는 여러 차례의 화재로 내전의 전각이 소실되고 다시 중건되었다 화재 전 후

의 모습은 「동궐도」와 고종대에 그려진 「동궐도형」에 반영되어 있다 「동궐도」는 화

재 이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만수전 자리에 있었던 경복전이 순조 24년(1824) 화재로 소실되자138) 그 자리에 다시

전각을 복구하지 않아서 「동궐도」에는 빈 터로 남아 있다 대조전일곽에 있었던 집상전은

순조 33년(1833) 내전 일곽의 전각에 화재가 났을 때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내전의 복구공

사에서 제외되어 그 이후에도 다시 지어지지 않았다 화재 후에도 대조전과 같은 내전의 중

심전각은 그대로 재건되는데 반하여 경복전이나 집상전과 같이 대비가 사용하던 전각이 복

구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왕실에 대비가 계시지 않았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순조대의 대비

전과 내전일곽에 화재가 날 당시는 영조비인 정순왕후와 정조비인 효의왕후는 승하한 뒤였

순조대에는 화재로 소실된 전각을 재건하는 건축활동은 많았지만 전각을 새로 짓거나

궁역을 확장한 일은 없었고 정조대에 이룩된 전각들이 대부분 유지되었다 효명세자 대리청

정기에 중희당일곽의 동궁전각이 활발하게 사용되었으며 내전일곽의 화재 후 재건과정에서

내전의 전각구성에 부분적인 변화를 가져온 정도이다

순조의 뒤를 이은 헌종대에는 동궁영역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정조대에 지은 수강재

에서 중희당 동쪽까지 비어 있던 곳에 낙선재를 지은 것이다 새로 맞이한 후궁 경빈 김씨

의 처소인 석복헌을 낙선재 동쪽에 이어서 짓고 순조비 순원왕후를 위해 수강재를 수리하

여 세 건물을 행각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건물군으로 만든 것이다 낙선재가 들어선 곳은 조

선후기에 동궁이 있었던 곳으로 수강재 동쪽에는 세자를 보좌하는 춘방과 계방 등이 있었으

며 낙선재 동쪽에는 정조대에 조성한 중희당 일곽이 자리하고 있었다 낙선재의 조영은 동

궁일대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면서 동궁을 보좌하는 곳과 동궁의 거처를 양분하며 동궁이 축

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종대에 들어서 경복궁이 중건되어 창덕궁은 조선후기 동안 누려왔던 법궁이라는 지위

를 다시 경복궁에 넘겨주게 되었다 창덕궁(동궐)과 경희궁(서궐)이라는 양궐체제의 중심은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경복궁은 중건이후에 잦은 화재로 인하여 왕이 창덕

궁으로 이어하는 기간이 많았다 고종대에 창덕궁의 영역과 전각변화의 특징은 창덕궁의 전

각을 경복궁으로 옮겨짓는 일이 빈번했다는 점이다 전각을 헐어낸 자리는 빈 공간으로 남

았으며 이는 「동궐도」와 「동궐도형」의 비교를 통해서 파악가능하다

고종 초기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시 사용빈도가 낮은 창경궁의 행각과 전각을 경복궁

으로 이건하기도 했다 창경궁의 자경전을 옮겨 경복궁의 자미당을 지은 것이 그 첫번째 이

다139) 고종 초기에 이건한 자경전과 1882년 이후 공사가 중지된 수정전(壽靜殿)이 「동궐도

형」에는 빈 터로 남아 있다 또한 「동궐도형」에 lsquo금무rsquo라고 씌어진 건물은 「동궐도형」

의 제작시기와 가까운 1890년대에 이건한 건물들이다

138) 『순조실록』 순조 24년(1824) 8월 24일

139) 『승정원일기』 고종 2년(1865) 10월 26일

시기 내용 참고

순조 3년(1803) 12월 13일 인정전 화재

순조 4년(1804) 12월 17일 인정전 중건

순조 11년(1811) 윤3월 6

향실(인정전 서행랑)과 예문관에 화재

순조 24년(1824) 8월 24일 경복전 화재 「동궐도」에는 터만 그

려져 있음

순조 33년(1833) 내전일곽의 화재

순조 34년(1834) 내전일곽의 전각 중건 영연합을 헐어 창경궁 영

춘헌을 복구

헌종 12년 낙선재 건립

고종 13~14년 창덕궁의 수리

고종 18년(1881) 7월 22일 수정전을 함녕전으로 바꾸고 동 서 남 북별당

공사를 시작하다

고종 28년(1891) 3월21일 함녕전(구 수정전)의 여러 전각을 경복궁으로 옮

겨짓다(집옥재 협길당)

고종 28년(1891) 5월 3일 중희당 이건

표 7gt 제5기 순조~고종년간의 창덕궁 연표

고종 18년(1881)에는 수정전(壽靜殿)을 수리하여 함녕전(咸寧殿)으로 전호를 바꾸고140)

주변에 부속건물을 짓는 공사를 했다 그러나 이 공사는 완공직전에 을미사변으로 중단되었

고141) 약 10년 후 경복궁의 집옥재와 협길당으로 이건되었다142) 집옥재의 이건공사와 같은

시기에 중희당도 이건하였는데143) 경복궁의 어느 전각으로 이건되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다

만 이 시기 경복궁에서 동궁의 전각인 계조당의 개건이 있었고 함화당 집경당 등의 공사가

연이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이 건물들에 중희당의 부재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대에 중희당을 어디론가 이건함으로써 창덕궁에서 동궁의 전각이 삼삼와와 승화루

만 남기고 사라지게 되어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 까지 중희당이 있던 곳은

빈 터로 남아있어 「동궐도」에서 볼 수 있는 동궁의 공간을 볼 수 없게 되었다

4) 제6기 대한제국 말기

갑신정변이후 고종이 경복궁으로 이어한 후에는 잠시 창덕궁에 이어했었던 것 외에 을

미사변 직후까지 경복궁에 주로 머물렀으며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다가 경운궁을 건설한 다음에는 경복궁이나 창덕궁 두 궁궐로 돌아가지 않았다 고종

31년(1894) 4월 2일에서 5월 23까지 약 두달여 정도 창덕궁에 이어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광

140)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7월22일 ldquo壽靜殿의 호는 咸寧으로 동별당의 호는 衍福으로 남별당의

호는 正善으로 하였으며helliprdquo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8월2일 무위소가 함녕전 서별당ㆍ북별당의 당

호 단자를 올렸는데 서별당은 協吉堂 북별당은 資順堂이었다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9월24일 營

建所가 咸寧殿 北別堂의 당호를 集玉齋로 품정하였다

141)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7월22일

142) 『승정원일기』 고종 28년(1891) 3월21일 ldquo咸寧殿의 여러 전각을 옮겨 건립하는 일을 重建所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rdquo(여기서 함녕전은 창덕궁의 수정전을 개칭한 전각을 말한다 후일 광무 1년(1897) 경운궁

건설당시 선덕전이라고 이름지었다가 함녕전으로 고친 경운궁의 침전과는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전각이

다)

143) 『고종실록』 고종 28년(1891) 5월 3일

무 4년(1900)에는 창덕궁 선원전에 태조의 어진을 모시면서 경복궁 선원전과 더불어 1실을

증건하는 공사를 했다

다 근현대기 창덕궁 영역의 변천

1) 제7기 일제강점기의 개조

1907년 7월 19일(양력) 고종이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한 직후

궁내부로 하여금 창덕궁의 수리를 명하고144) 같은 해 11월에 황후와 황태자를 데리고 이어

하였다145) 이로서 고종 31년(1894) 이후 13년 만에 창덕궁이 다시 주인을 찾게 되었다

순종이 이어하기 직전에 이루어진 수리에 관한 내용은 여러 장의 도면으로 남아 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도면은 총 96종으로 전체배치도 인정전일원의 수리 궁

내부 청사 대조전 일원 희정당과 선정전 일원 약방 내전일원의 신축건물 창고와 장유고

낙선재 일원 후원 등에 관한 도면이 있다 이들 도면은 1907년부터 진행된 창덕궁의 개조

철거 훼손 개축 신축에 관한 가장 실체적인 자료이다146)

그 중에서 전체 배치를 나타낸 것으로 1911년 1920년대 1930년대초 1936년 무렵의 도

면이 있어서 일제강점기 동안 창덕궁의 전체적인 변화에 대한 조감이 가능하다 1911년의

배치도를 살펴보면 인정전 좌우에 행각이 연결되어 있고 인정전 뒤쪽의 복도로 연결되어 선

정전 뒤를 지나 희정당 서측까지 연결된 변화를 볼 수 있다 또한 인정전 동쪽의 궐내각사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어 외곽의 행각만이 남아 있고 중희당이 있던 곳은 행각도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진선문 남쪽에 궁내부 청사가 들어서 있다 반면 대조전일곽과 희정당은 「동

궐도형」과 같은 외곽을 보이고 있어서 대조전 일곽은 큰 변형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원은 아직 조선시대의 도로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담장 또한 「동궐도

형」과 대조 결과 잘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1911년 까지는 부속건물들을 많이 헐어

내고 인정전과 선정전 일대를 개조하기는 했으나 어느 정도 원형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1921~1932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배치도는 후원의 도로가 변형되고 대조전과

희정당일곽이 다시 지어졌으며 창덕궁내의 담장과 행각이 철거되어 그 이전까지 성격이 뚜

렷이 구분되던 영역성이 파괴된 모습을 보여준다 1930년대초의 도면은 창경궁과 종묘 사이

에 율곡로를 개통한 후의 모습이다 낙선재 남쪽과 종묘 사이는 도로로 인하여 분리되었다

1936년경의 도면은 등고선이 표기되어 창덕궁의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도면이다 창덕궁의

건물 부분은 1921~1932년 사이의 도면과 큰 차이가 없으며 창경궁쪽에서 동물원과 식물원의

건물 증설이 확인된다

144)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10월 7일(양력)

145)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11월 13일(양력)

146) 이강근 「장석각 소장 근대 건축도면에 대하여」 『근대건축 도면집-해설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9년 15쪽

일제강점기에 편찬한 『조선고적도보』에는 원래 창덕궁의 전각이 회색으로 표기되고

당시 남아 있던 전각이 검게 표시되어 1920년대 전후의 전각과 담장의 잔존현황을 파악 할

수 있다 돈화문과 주변의 행각들 선원전과 그 일대의 숙경재 주방 이문원과 대유재 소유

재 인정전과 선정전 및 행각이 남아 있다 내전일곽의 건물도 1917년의 화재로 모두 소실되

어 희정당 동쪽에 있는 성정각 관물헌만 남았으며 낙선재 일곽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

고 있다

그림 6gt 1911년경(좌)과 1921~1932년(우)의 「창덕궁평면도」(1911년경 장서각)

그림 7gt「창덕궁배치도」(1907년의 배치상황+1920년 이후 잔존전각(『조선고적도보』)

2) 해방이후의 변화와 보수정비

해방이후에는 개별전각을 수리하는 것으로 유지되다가 1996년부터 일제강점기에 변형된

인정전 선정전 일대를 복원했으며 2000년부터는 규장각과 구(舊)선원전을 복원하면서 인정

전 서쪽의 궐내각사를 복원하여 조선시대 창덕궁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고 있다

유적명 연도 발굴기관 보고서 기간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발굴조사 1995

창덕궁 반도지 유적 昌德宮 半島

池 遺蹟2001

중앙문화재

연구원

《昌德宮 半島池 試掘

調査報告書》 2001시굴 010416~010519

창덕궁 반도지 유적 昌德宮 半島

池 遺蹟2002

중앙문화재

연구원

《昌德宮 半島池 補

修middot整備工事 竣工報告

書》 2002

발굴 020401~020616

창덕궁 금천교 주변 유적 昌德宮

錦川橋 周邊遺蹟2001

국립문화재

연구소- 발굴 010920~011115

창덕궁 금천교 주변 유적 昌德宮

錦川橋 周邊遺蹟2002

국립문화재

연구소

《창덕궁 금천교》

2002 발굴 020313~020423

창덕궁 상방지 昌德宮 尙房址 2002

명지대부설

한국건축문

화연구소

《昌德宮 尙房址 遺構

調査 報告書》 2002 발굴 020411~020704

표 8gt 창덕궁관련 발굴조사 내용

년도 공사내용 문서관리번호 보고서

1970 창덕궁부속가옥철거 -

1970 창덕궁 및 비원보수(사진) 박대통령 준공식 참석사진

1972 창덕궁보수도면 BA0122692 BA0122702

1973 창덕궁 현황 측량 실시 문화재청

1975 창덕궁 연경당별사 보수공사 BA0122725

1975 창덕궁 승화루 및 어친잠실 약방 보수공사 BA0122725

1976 창덕궁 보수공사(북행각수정당보호책설치축대보수) 문화재청

1976 창덕궁 돈화문 보수공사 문화재청

1976 창덕궁 보수 정화공사 문화재청

1978 창덕궁 반도지 조경공사 BA0806636

1978 창덕궁 낙선재 진입도로 공사 문화재청

1978 창덕궁보수정화공사 문화재청

1979 창덕궁반도지-옥류천간도로주변정화추가공사 BA0122735

1979 창덕궁 주차장 주변 정비공사 문화재청

1980 창덕궁 괘궁정 보수공사 CA0015037

1982 창덕궁 인정전 동서행각 안전진단의뢰 문화재청

1985 창덕궁선정전 및 취원정 보수공사 BA0122791

1985 창덕궁 담장 및 주변 지역 정비 CA0015402

1986 창덕궁 연와창고 보수 CA0022142

1989 창덕궁 가정당 보수공사 BA0073213

1989 창덕궁 의로전담장 보수공사 BA0073214

1989 창덕궁 대조전 부식기둥 인공수지 처리공사 BA0073215

1989 창덕궁 옥류천 어정 정비 문화재청

1990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824

1990 창덕궁 의로전 및 문간채 보수공사 CA0025835

1990 창덕궁 의풍각 보수공사 CA0025831

1990 창덕궁 청의정 승재정 농산정 보수공사 CA0025827 CA0025826

CA0025814

1990 창덕궁 대조전 보수공사 CA0025812

1990 창덕궁 단봉문주위 담장정비공사 CA0025811

1990 창덕궁 신선원전 문간채 보수공사 CA0025834

1990 창덕궁 부용정 보수공사 문화재청 비공개

1991 창덕궁 인정전행각 복원 BA0812994

1991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889

1991 창덕궁 폄우사 보수공사 CA0025888

1991 창덕궁 의로전 재실 보수공사 CA0025906

1992~1994 창덕궁 인정전 행각 복구공사 BA0813009 BA0813013

1992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978

1992~1993 창덕궁 구선원전 보수공사 실측설계 CA0025976(비공개)

1992 창덕궁 낙선재 정비 설계 정실측 CA0025941 CA0025942

1992 창덕궁 선정전일곽 실측 설계용역 문화재청

1992 창덕궁 반도지 및 존덕정 주변일곽 정밀실측 조사 문화재청

1992 창덕궁 옥류천과 주변 고건물 실측 조사 보고서 발간 문화재청

1992 창덕궁 연경당 및 주변 일곽 정밀 실측조사 문화재청

1992 보고서 창덕궁 원유복구 조경종비공사 완료 보고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의로전 재실 보수공사 CA0026052

1993 창덕궁 집희(관물헌) 보수공사 CA0026035

1993~1995 창덕궁 낙선재 정비공사 CA0026042

표 9gt 해방이후 창덕궁 건물 보수내용(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년도 공사내용 문서관리번호 보고서

1993 창덕궁 대조전 일곽 실측 설계 문화재청

1993 창덕궁 낙선재 후원 실측설계 및 보고서 발간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애련지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주합루 실측 설계 문화재청

1995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발굴조사 복원설계 BA0807969 BA0813061

1995 창덕궁 기오헌 의두각 보수공사 CA0026201

1995 창덕궁 서향각 실측 설계 및 보수설계 문화재청

1995 창덕궁 인정전 행각지 발굴조사보고서 CM00057506

1996 창덕궁 돈화문 정밀실측 CA0026307

1996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공사 CA0026267

1996 창덕궁 대조전 부속건물 보수공사 CA0026266

1996 창덕궁 서측 담장 보수공사 CA0026259

1996 창덕궁 연경당 사랑채 별채 보수공사 CA0026281 CA0026273

1997 창덕궁 돈화문 보수공사 CA0026328

1997 창덕궁 가정당 보수공사 CA0026347

1997 창덕궁 사정기비각 어수문 보수공사 CA0026348

1997 창덕궁 인정전 정밀실측 CA0026353

1997 창덕궁 희우루 문간채 약방 보수공사 CA0026337

1998 창덕궁 인정전 긴급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8 창덕궁 신선원전 실측 보수설계 문화재청

1999 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발굴조사 문화재청

1999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공사(4차) 문화재청

1999 창덕궁 대조전 부속건물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9 창덕궁 신선원전 실측 및 보수설계 문화재청

2000 창덕궁 제월광풍관 보수 및 조경공사 문화재청

2000~2005 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복원공사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복원

공사보고서

2000~2001 창덕궁 반도지 시굴조사계획 문화재청

2000 창덕궁 몽답정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경추문 보수공사 시행 문화재청

2001~2002 창덕궁 금천교주변 발굴조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침전행각 및 수라간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의로전 일곽 보수 문화재청

2001 창덕궁 금천교 실측 및 복원설계 용역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선향재 보수 설계용역 문화재청

2002 창덕궁 선향재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2 창덕궁 희정당 보수공사 창덕궁 희정당 실측 수리보고서

2002 창덕궁 상방구역 유구조사 건물복원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정자(상량정태극정능허정) 보수공사 창덕궁 정자 실측 수리보고서

2003 창덕궁 희정당 신관 보수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선정전 후원 석축 복원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의로전 일곽 및 경훈각 보수공사의로전 실측 수리보고서

경훈각 실측 수리보고서

2003 창덕궁내 정자 보수공사 (태극정) 문화재청

3 창덕궁의 배치와 특징

가 영역별 배치와 특징

1) 궐내 각사

궐내각사는 왕을 보좌하고 궐내의 일상과 의식을 위한 기관들이 위치한 영역이다 창덕

궁은 창건당시부터 이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경복궁처럼 궐내각사를 완전히 갖추고 있지

않았다 창건당시부터 조성된 부분은 인정전 동쪽부분으로 연영문 안에 승정원 내반원 궁

방 주원 등이 배치되었다 임진왜란후 경복궁이 소실되자 창덕궁이 법궁이 되면서 경복궁에

있던 상의원 내병조 등의 건물들이 창덕궁 내로 편입되었다147) 또한 인정전 서쪽으로 정

청 옥당 약방 이문원 등이 추가되었다 원래 이곳에 있었던 일부 기관(도총부 주자소 내

사복)은 창경궁으로 옮겨지기도 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이 궐내각사를 공유하는 형태를 취하

였다

2) 외전 영역

외전영역은 정치의 공간으로 왕과 관료가 공식적으로 조회를 하는 영역이다 크게는 정

전인 인정전 일곽과 편전인 선정전 영역으로 구분된다 배치의 특징은 경복궁이 남북 축선

상에 정전과 편전이 놓이는데 반하여 창덕궁은 인정전의 북쪽에 건물을 둘 만한 지형이 아

니므로 편전은 정전의 동쪽에 위치한다 편전에 이어서 내전영역도 그 동쪽에 위치하여 외

전rarr내전은 서rarr동쪽으로 배치되고 있다

3) 내전 영역

내전은 왕과 왕실 구성원의 생활공간이며 왕실의 여성구성원인 내명부의 의식공간이기

도 하다 대조전을 중심으로 주변의 집상전 수정전 만수전(후에 경복전) 등 대비전을 포함

하며 왕이 좀 더 편하게 신하들을 만날 수 있는 희정당과 희정당 동쪽의 성정각 관물헌 등

을 포함한다 그 외에 내전에는 왕실 귀중품과 생활에 관련된 물건들을 보관하는 건물과 생

활을 보조하는 기능을 가진 건물들이 중요전각 주변에 배치되었다 창덕궁에서 부족한 내전

의 전각은 창경궁 건설이후 창경궁에서 해소하였다

4) 동궁 영역

147) 『동국여지비고』제1권 京都 文職公署條

그림 8gt 조선후기 창덕궁의 영역 구분과 진입동선(「동궐도형」)

동궁은 세자궁이라고도 하며 왕세자의 거처이자 집무공간 강학공간이다 동궁은 세자의

재위 여부에 따라 그 존재가 결정되었으며 세자 책례를 통해 재위하게 될 경우 영역이 규정

되어 동궁으로 지칭되므로 시기에 따라 중심전각이 변하기도 하였다 세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에는 그 인식적 개념이 약화되어 동궁의 전각은 다른 용도로 전용되어 대비나 왕비가

사용하기도 했으며 왕이 임어하기도 했다

동궁은 현재 낙선재 일대의 남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궁의 정문은 창경궁의 선인

문 동룡문으로서 동쪽에서 진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임진왜란 이전에는 창덕궁의 동쪽경

계(건양문) 밖에 있었으며 창덕궁과 별개의 영역에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동궁의 정당

은 저승전이었으며 저승전이 소실되자 시민당을 사용했다 시민당이 정조 4년 화재로 소실

되자 이를 중건하려다 중지하고 내전에 좀 더 가까운 위치에 중희당을 세우고 이곳에서 세

자의 착봉례를 거행함으로서 정조대 이후에는 중희당이 동궁의 정당이 되었다 정조대에 조

성된 중희당 일곽은 중희당과 삼삼와 승화루 그리고 그 동쪽으로 세자를 위한 공간이 마련

되었다 이외에 세자를 보좌하는 곳으로 춘방과 계방이 있는데 이 건물들은 동룡문 안쪽 시

민당의 동쪽에 있었으며 중희당을 조영한 이후에도 그 위치는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순조

대에 효명세자가 이 중희당에서 대리청정을 했으며 효명세자 사후에 동궁은 그 주인을 다시

얻지 못했다 효명세자 사후 세자가 공부하며 거처했던 영연합의 천지장남지궁의 건물을 헐

어 창경궁의 영춘헌을 짓는데 사용하는 등 중희당 동쪽 언덕 위에 있었던 건물도 일부 사라

지게 되었다 이후 고종대에는 세자를 위해 경복궁의 계조당과 자선당 등의 동궁이 조성되

면서 창덕궁의 동궁은 그 의미를 잃어갔다고 할 수 있다

시민당이 소실되고 정조대에 중희당을 왕의 거처 공간에 보다 더 가까이 조성하면서

세자의 공간은 중희당이 중심이 되었다 시민당 주변에 정조가 수강재를 지으면서 조선초기

이래 동궁이 자리하던 곳은 점차 그 영역의 성격이 바뀌었으며 헌종대에 이곳에 낙선재를

지으면서 창덕궁에서 동궁의 공간적인 위치는 궁궐의 중심영역으로 이동했다고 할 수 있다

왕대 세자 책례일자 세자재위기간 책례장소 관례장소대리청정

장소

광해군 李祬(廢世子) 광해 2년 5월 11일 12년 10개월 인정전 시어소내청

인조 소현세자 인조 3년 1월 27일 20년 3개월 융정전(경덕궁) 경현당

봉림대군(효종) 인조 23년 9월 27일 3년 8개월 명정전 -

효종 현종 효종 2년 8월 28일 7년 9개월 인정전 세자궁

현종 숙종 현종 8년 1월 22일 7년 7개월 인정전 시민당

숙종 경종 숙종 16년 6월 16일 30년 인정전희정당 시민당 시민당

경종 영조 경종 1년 9월 27일 2년 11개월 인정전 -

영조 효장세자(진종) 영조 1년 3월 20일 3년 8개월 인정전 시민당

장헌세자(장조) 영조 12년 3월 20일 26년 2개월 인정전양정합 시민당 시민당

정조

정조 문효세자 정조 8년 8월 2일 1년 9개월 인정전중희당

순조 정조 24년 2월 2일 5개월 집복헌 바깥채집복헌 바

깥채

순조 효명세자(익종) 순조 12년 7월 6일 17년 10개월 인정전희정당 경현당 중희당

헌종 세자없음 - - - -

철종 세자없음 - - - -

고종 순종 고종 12년 2월 18일 32년 6개월 인정전 중희당

표 10gt 세자의 책례와 관례장소(창덕궁)

5) 진전 영역

선원전은 돌아가신 선왕과 선후의 영정을 봉안하던 건물로 조선전기에는 경복궁에 세워

져서 태조 태종 세종 세조 덕종 성종 중종의 어진을 모셨었다148)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의 선원전이 소실되었고 조선후기에 선원전이 다시 마련된 것은 숙종대였다

효종 8년(1657)에 만수전과 함께 지었던 춘희전에 숙종이 즉위 21년(1695)선원전이라 개명

하고 숙종의 어진을 봉안한데서149) 비롯되었다 춘휘전은 원래 만수전에 속한 건물로 빈전

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150) 효종대 건립당시 춘휘전의 주변건물은 서행각 3칸

148) 『명종실록』 권8 명종 3년 10월 10일

149) 『승정원일기』영조 30년 1월 11일 ldquohellip上曰 此殿本是春暉殿 而乙亥年(숙종 21년)奉安御眞後 改名璿源殿

矣helliprdquo

서월랑 7칸 북월랑 25칸반 남월랑 16칸 반 등의 행각과 월랑이 주변에 있었고 양지당 12

칸 양지당 남월랑 9칸과 주변에 문과 담장 판장 등이 있었다151) 그중에서 춘휘전의 서행

각 서월랑 북월랑은 「동궐도」나 「동궐도형」에서는 볼 수 없어서 선원전으로 용도가 변

하기 전에 주변 건물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원전의 영역은 선원전 서북쪽의 숙

경재와 양지당 선원전 남쪽의 영의사(永依舍) 서휘문(瑞暉門) 까지이다 영의사 남쪽의 약

방이나 옥당과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선원전으로의 출입은 인정전 남행랑 서쪽의 경광문-서휘문-양지당-선원전으로 가는 석

과 인정전 서쪽의 만안문을 통해 양지당을 거쳐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숙종이후 왕들은 생전에 자신의 어진을 제작하여 일정한 곳에 보관하였다가 사후에 부묘가

끝나면 어진을 선원전에 이봉하였다가 제사와 차례를 지낼때 꺼내서 걸어놓고 의례를 거행

하였다152)

숙종 사후 영조 1년(1725) 선원전을 중수하였으며153) 정조 2년(1778)에는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내전 전배실로 쓰던 동변실을 제2실로 개조하고 좌우 익각을 추가하였으

며154) 정조 사후에는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서변실을 개조하였다155) 그 결과 정

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확장되었는데 「동궐도」에 그려져 있는 모습이다

헌종 12년(1846)에 순조와 익종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제 4실과 5실을 증건하였으

며156) 철종 2년(1851) 다시 1실을 증건하여157) 신실이 6칸이 되었다 이후 광무 4년(1900)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서쪽으로 1칸을 증건하여 신실 7칸 좌우 퇴칸을 포함하여 정

면 9칸으로 확장되었다 원전 동쪽의 양지당(養志堂)은 어진의 이안처로 사용되었다

150) 『승정원일기』영조 30년 1월 11일 ldquohellip孝廟朝爲慈懿大妃 建此殿 爲他日殯殿之計helliprdquo

151)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1657)

152)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축』 동녘 2010년 479~483쪽 3 영건의궤에 기

록된 건축 2)진전 참조

153) 『궁궐지』 창덕궁지 「영묘어제선원전중수기병명」

154) 『승정원일기』정조 2년 1월 10일

155) 『승정원일기』순조 2년 7월 3일

156) 『헌종실록』 헌종 12년 8월 6일

157) 『일성록』철종 2년 5월 17일

그림 9gt 진전영역과 진입동선

6) 후원 영역

전각들이 배치된 영역의 북쪽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후원이다 지형은 전각영역보다 높

고 굴곡이 심한 편이다 후원영역은 성격에 따라 4개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흔히 후원

은 왕의 휴식공간만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전각영역이 통치와 의례 생활의 기능을 담고 있

듯이 후원 또한 통치 의례 휴식을 위한 기능에 따라 담장으로 공간이 구분되었다 창덕궁

의 경우 창경궁과 후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동궐도」에는 각 영역을 구분하는 담장이 표현

되어 있고 「동궐도형」도 이와 일치한다 창덕궁의 후원은 중앙이 높고 동middot서로 경사진 지

형적인 특징이 있는데 중앙의 능선에 의해 양쪽 공간의 성격이 완연히 다르다

능선의 동쪽에서 전각영역의 북쪽에 인접한 곳은 통치를 위한 공간으로 왕권의 상징적

공간인 주합루일대와 문middot무시험을 치루는 영화당과 춘당대일대 그 동쪽의 내농포가 있어서

국가의 근간인 농사를 살피는 장소를 마련하였다 통치영역의 북쪽은 왕의 개인적인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정자와 연못으로 꾸며졌다 이 영역의 중심공간은 옥류천 일대이다 능선의

서쪽은 북쪽으로 치우쳐서 대보단에 관련된 제례시설 산신단 신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남쪽은 중일각 등 군사훈련을 위한 장소가 마련되었다

그림 10gt 후원영역의 공간구분

나 내부경계의 변천

창덕궁과 창경궁은 lsquo동궐rsquo로 불리면서 하나의 궁궐로 인식되기도 했고 실제로 창덕궁의

을 사용할 경우 궁인들을 창덕궁에 모두 수용하기 어려워 그 처소는 창경궁을 활용하였

다158)

창덕궁의 안쪽 담장문(內東墻門)인 건양문(建陽門)이 성종대 이래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

계였다 내전은 통명전과 대조전일곽 사이에 두 겹의 담장이 있어서 구분이 명확하였으나

그 남쪽은 동궁영역의 전각이 변화함에 따라 별개의 궁역으로 취급되거나 창덕궁에 포함시

키기도 했고 창경궁에 속하기도 했다

『명종실록』에는 저승전을 창덕궁에 있는 것으로159) 했고 인조대 『저승전의궤』에는

저승전을 어느 쪽도 아닌 동궁으로만 언급했다 헌종대 편찬한 『宮闕志』에는 ldquo시민당터

(수강재 남쪽)에서 추경원(秋景苑)은 원래 창덕궁이다rdquo고 했으며 중희당 삼삼와 육우정을

「창덕궁지」에 포함시켜 서술했다 반면에 『동국여지비고』 『宮闕誌』에서는 중희당을

창경궁에 포함시켰다

현재는 자경전 북쪽 담장에서 춘당대까지 담장으로 되어 있고 그 북쪽은 철책으로 되어

있다 창덕궁과의 경계담장은 일제강점기에 구획된 것인 1936년의 배치도에 나타난 형태로

계속 유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즉 종묘 통행의 육교에서 낙선재동쪽 - 자경전 서쪽

담장 - 춘당대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담장이다 앞서 수강재의 동쪽에 창경원당시 동물사가

지어지면서 형성된 경계는 해방이후 창경궁과 창덕궁의 필지를 행정적으로 분리해서 각각의

지번을 부여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회복하는 1986년의 창경궁중

건에서도 그 경계는 조정되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여기에 율곡로를 가로질러 종묘로 통행할

수 있는 육교가 설치되면서 창경궁 쪽에서 접근하도록 경계가 설정된 것이다

후원 또한 대온실 주변에 식물원 부속 건물과 시설이 들어서면서 형성된 경계가 건물권역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조정 없이 유지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변화된 창경궁과 창덕궁

158) 『광해군일기』 2년(1610) 3월 26일 ldquo대저 昌德宮은 法宮과는 달리 殿閣이 많지 않고 간격이 협소하여

평상시 들어갈 때에도 항상 수용하기 어려워 宮人들은 나누어 昌慶宮으로 들어가곤 했다rdquo

159) 『명종실록』 명종 즉위년(1545) 7월 14일 ldquo更思之 則唯昌德宮東宮儲承殿爲當rdquo

그리고 후원의 경계는 창경원의 시설과 관련하여 설정된 경계였다

그림 11gt『궁궐지』의 창덕궁과 창경궁영역 서술 비교 「동궐도형」+『궁궐지』

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역 외곽의 변천160)

조선시대 창덕궁의 궁역은 세조대에 후원과 동쪽으로 궁장을 확장한 이래 계속 유지되

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이문원일대가 궁역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lsquo2 영역의 변천rsquo 참조)

일제강점기 초기는 비교적 조선후기 궁역이 유지되고 있는 시기이다 1912년 「지적원도」

에 의하면 창경궁과 창덕궁이 합하여 하나의 필지인 와룡동 2번지로 되어있다 2번지와 접

해 있는 와룡동 1번지는 집춘문의 호위를 담당하던 집춘영이 있던 자리이다 소유는 일제강

점기 당시 조선을 관리하는 관청인 lsquo이왕직rsquo으로 표기 되어있어서 왕실의 소유로 남아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지적도상에서 2번지는 창경궁과 창덕궁의 외궁장과 일치하거나 외궁장보다 약간 외곽에

범위가 잡혀 있는데 이는 궁장 바깥쪽의 경사가 급한 지역은 경사 아래쪽까지 지적에 포함

되었기 때문이다 궁장주변의 지적상황은 거의 변하지 않고 현재까지 유지되어 있다 후원의

북쪽은 임야로 이 부분도 이왕직의 소유로 되어 있다

1912년 이왕직 소유의 와룡동 12번지는 1917년부터 창덕궁 소유로 변경되었다 와룡동

2번지는 대지 면적이 6514743(197071평)으로 1912년부터 1929년까지 동일하다 창덕궁

소유로 추가된 대지는 창덕궁 돈화문 주변의 와룡동 3~6번지 원서동 1번지로서 원래 이 부

분도 와룡동 1번지의 집춘영이 있던 곳과 마찬가지로 창덕궁 정문의 숙위를 담당하던 남영

160) 문화재청 『창경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2010 173~182쪽 lsquo창경궁의 궁역변화rsquo를 참조하여 수정middot보완

이 주둔하던 곳이다

창경궁의 외곽궁역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1931년 원남동 사거리에서 창덕궁 돈화문쪽

으로 율곡로가 개설되면서 창경궁과 종묘사이가 단절되고 도로로 편입되어 창경궁 남쪽 궁

장과 마랑일곽이 훼손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하나의 지번아래 있었으나 해방이후 그때까지 창덕

궁 소유에 포함되어 있던 창경궁 영역이 세분화되어 창경궁 소유로 분리된다 1963년에 창

덕궁 영역(와룡동 2-71번지)과 창경궁 영역(와룡동 2-1 2-70번지)으로 나뉘었고 외곽부분이

추가되거나 축소되었다 과학관 부지가 지번이 분할된 것도 이때이다

궁역 외곽은 일제강점기와 해방이후 현재까지도 조선시대의 경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

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경운궁의 선원전을 대보단 남쪽에 이설하면서 창덕궁

의 궁역에 포함시켰고 율곡로를 개설하여 창경궁과 종묘사이를 분리한 것이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 직후

rarr조선시대 영역유지

일제강점기

rarr신선원전 돈화문좌우추가

(1932년 이후 율곡로 개설)

해방 후

rarr창덕궁과 창경궁 필지분할

신선원전 주변확장

북쪽 궁장 주변 필지 확보

현재

rarr돈화문 월대 복원

1912년 「지적원도」

(국가기록원 소장)

1929년「경성부地形明細圖」

(국립중앙도서관소장)

1977년「창덕궁재산목록」

(문화재청 소장)

2011 현재 지적도

표 12gt 창덕궁 궁역외곽의 변천

4 창덕궁 관련 의궤로 본 건물의 구조와 특징

가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인조 25년 1647년)

1) 공사 내용 분석

(1) 1647년(인조 25)의 창덕궁 수리공사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불에 탔던 창덕궁은 광해군 원년 중건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외전

의 인정전과 내전의 수정당(壽靜堂)만 남고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어서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마저 불에 타버리자 경덕궁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인조 11년(1633) 비교

적 덜 파괴된 창경궁을 먼저 복구하게 된다

계속 미루어지던 창덕궁 내전을 중건하게 된 계기는 창경궁에서 일어난 소현세자빈 강

씨의 역모와 저주사건이었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후 인조의 눈 밖에 났던 세자빈

강씨가 인조와 인조의 후궁인 조소용을 저주했다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소현세자와 관련

된 세력이 제거된 사건이었다 창경궁내 곳곳의 아궁이와 계단 아래에서 저주에 사용된 물

건들이 발견되었으며 흉물이 발견된 창경궁에 왕이 머물 수 없자 아직 복구되지 않은 창경

궁을 수리하여 이어하기로 하였다 소실된 지 25년 만에 이루어진 이때의 공사는 인조 11년

의 창경궁복구공사와 마찬가지로 광해군에 의해 영건되었던 인경궁을 헐어서 그 자재를 사

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때 복구된 주요건물은 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정묵당(靜黙堂) 집상당(集祥堂) 징광

루 등이다 내전의 경우 자재는 대부분 인경궁 것을 활용하였으나 초석은 원래의 것을 사용

하여 화재 이전의 규모대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대조전과 선정전 희정당의 상량 직후

세자의 처소인 저승전(儲承殿)을 옛 자리에 복구하기로 하였는데 저승전의 상량문은 『창덕

궁수리도감의궤』에 실었고 공사과정은 『저승전의궤』(1648)를 별도로 제작하였다

(2) 주요 공사 내용

의궤의 목록은 따로 없고 내용 속에서 항목을 구분해 서술하고 있다 서술순서는 공사

에 참여한 관리의 명단 6월 13일부터 시작하는 계사 계사질 끝에 공사비용과 남은 재물을

기록하였고 상량문(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저승전) 상량의 이문질 감결질 그리고 감결질

끝에 도감조비잡물질(都監措備雜物秩)을 적었다 다음으로 一所 二所 三所 四所 五所 노

야소(爐冶所) 별공작(別工作) 의궤사목(儀軌事目)이다

작업소별로 좌목을 따로 적고 별개의 의궤처럼 구성하였는데 『창경궁수리소의궤』

(1633)보다 더 상세하다 도감사목 다음에는 개기 정초 상량과 같은 주요 일정을 적었다

건물의 규모에 대한 묘사는 인경궁에서 철훼한 건물명과 칸수를 기록하고 철훼된 목재와 기

작업소 창덕궁 공사 전각(칸수) 인경궁 철훼 전각

1소 -대조전(45) 동서익실(온돌12칸) 동익각(6)

남월랑(285) 서익각(9) 서월랑(9)

-집상당(20) 행각(25)

-징광루(상하층40) 서월랑(10) 전행각(3)

-옥화당(105)

-정묵당(105) 西邊階上月廊(16) 飯色間(2)

외행각(3)

-慶壽殿(45) 동월랑(195) 남월랑

(225) 남행각(6) 동행각(3)

-慶寧殿남행랑(36) 동행랑(4) 서행

랑(13) 서행각(2)

-弘政殿(24)

-重暉堂(9) 소주방(75) 連付舍(1)

內帑庫(12) 酒茶房(85) 전행랑(2)

-正順堂동행랑(5) 남부사(1)

-光政殿남월랑(10) 십자각뒤 평행랑

(1)

-崇海堂행각(6) 북별당(20) 1칸문 4

2소 -熙政堂(15)

-영명문내행각(7)

-서월랑(23) 남월랑(6)

-누각(145)

-외남월랑(19)

-師傳廳(75)

-別監廳燈燭房(16)

-선화문협문(2)

-내반원(10)

-사전청 일칸문(1) 내반원 일칸문(1)

-외월랑(27)

-내반원남행랑(17)

-협양문(1) 동서협실(7)

-선례문(1) 동인문(1) 측간(1)

-和政堂(21) 행각(3) 서월랑(14) 남

월랑(18)

-延化門(6) 서외월랑(9)

-玉宸樓3東付舍(10)

-書士廳(16) 내반원(11) 행랑(13)

장방(20)

-승정원행랑(5) 빈청전랑(3) 水閣서

쪽月廊(2) 光政殿북월랑(7)

-會通門(1)

-端陽門(2)

-延祥門(1)

-沖黙堂(8) 행랑(7)

3소 -寶慶堂(3) 측15

-泰和堂(6) 남월랑(7) 동월랑(2) 북행각(1)

-昭德堂(4) 남월랑(5) 동월랑(11)

-燒廚房(5)

-小燒廚房서행각(10)

-中燒廚房(4칸 전퇴포함 6칸)

-下燒廚房(3칸 전퇴포함 4칸반)

-측간(4)

-窓差備(4)

-慶極堂(9)

-仁德堂(12) 서월랑(5)

-慶寧殿서월랑(4)

-福寧殿동월랑(6) 남행각(7) 서행각

(8)

-崇德堂동월랑(7)

-內帑庫 北邊半退(1)

-中政門밖북월랑(10) 외남월랑(20)

-尙衣院 衣襨房(6)

-경녕전수라간(5) 連付舍(1)

와의 수량을 각 건물별로 적지 않고 합하여 적었다 이때 조성된 전체 건물칸수는 817칸이

수리공역은 5개의 작업소로 나뉘어 이루어졌으며 작업소별 공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1소 침전인 대조전과 동서익실 월랑 집상당 징광루 옥화당 정묵당 및 주변월랑

2소 희정당과 주변월랑 소전청(所傳廳) 내반원(內班院) 및 주변월랑

3소 보경당 태화당 소덕당 및 주변월랑

4소 편전인 선정전과 주변월랑

5소 외전의 정전주변 월랑으로 인정전 동월랑 서월랑 승정원 대간청 인정문 외남월랑

-厢庫弓房(24)

-橉德堂동월랑(6)

-正順堂 앞厠間(6)

-與慶門(1) 一間門 5좌

4소 -선정전(9)

-북월랑(11)

-讌華堂(동온돌15 서온돌2 마루전퇴3) 集

陽門(1) 일각문(1)

-夜對廳서월랑(20)

-嚮明門(1)

-仁和門행각(7) 협문(1)

-동월랑(16) 내남월랑(11 돈례문)

-중행각(7) 외남월랑(14)

-외행각(3) 외행각동변(3)

-制義門 앞 일각문(1) 神佑門(1)

-光政殿(9) 내남월랑(5) 서월랑(8)

북월랑(11) 남월랑(5) 남행각(1)

동월랑(12) 內橫閣(1) 중행각(6)

외행각(12) 弘政殿북월랑(14) 弘

政門동월랑(7) 외남월랑(5) 中政門

남월랑(16) 外政門남월랑(6) 水閣

(4)

5소 -인정전동월랑(28) 남월랑(6)

-承政院(16)東廊(5)前廊(3)北間(1) 注書廳(9)

-臺諫廳(4)待接廳(2)승정원후랑(2)

-延英門(1) 東西挾廊(3)

-外司饔院(6) 端陽門(1)

-內弓房(14) 前廊(25)

-內司甕院(6) 司謁房(22)

-出入番內官廳(104)

-肅章門(6)

-王子問安廳(10 마루)

-인정문밖 남월랑(온돌1 마루6)

-빈청외랑(2) 精抄軍堡(2) 砲手軍堡(40)

-賓廳修粧 藥房修粧 傳漏軍堡(1)

-홍정문 외남월랑(26) 북월랑(7)

-승정원(28) 注書廳(4)

臺諫廳(6) 體元門월랑(10) 외사옹

원(34) 내사옹원樓廊(24) 弘政門

전후(6) 尙衣院樓廊(7) 六六門(1)

與慶門평월랑(6) 連付舍(2) 十字閣

後平廊(1)

당시 창덕궁 수리공사는 규모가 컸으므로 인경궁에서 많은 건물을 헐어냈다 이때 대부

분의 주요전각이 철거된 인경궁은 궁궐로서의 면모를 거의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창경궁

수리소의궤』와 더불어 이 의궤를 통하여 인경궁의 전각명칭과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의궤에는 철거된 건물을 건물별로 명시하지 않고 각 작업소 별로 일괄하여 기록하여 놓

았다 따라서 인조 11년의 창경궁공사와 같이 구체적으로 인경궁의 어느 건물이 창덕궁의

어느 건물로 이건하였는지 바로 대비되지는 않는다 다만 건물의 규모나 성격으로 보아 이

건관계가 드러나는 건물이 있다 창덕궁 수리의 경우 인경궁 건물의 이건에 있어서 일부는

동일한 규모의 이건도 있었으나 대개는 다른 규모의 건물로 변하였다 철거하는 인경궁의

전각은 칸수만 적고 창덕궁에 조성」되는 것은 각 전각의 바닥구조별(온돌과 마루 허칸)

칸수 천장의 구성과 마감을 밝혀 놓아서 궁궐내전의 내부 마감과 바닥구조에 대하여 많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 1647년 창덕궁 수리와 현상 비교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대조전 45칸

어칸 마루 3칸

4면 퇴마루 20칸

동서익실 전퇴석주온돌 12칸

동익각

남월랑

서익각

서월랑

6칸

28칸 반

9칸

9칸

마루5칸 온돌 3칸

마루12칸반 온돌 6칸

마루8칸반 온돌 3칸

마루 3칸

집상당 20칸

어칸마루 4칸

툇마루 14칸

온돌 2칸

행각 2칸반 마루

징광루 하층어칸마루 4칸

온돌 2칸

상층마루4칸 툇마

루12칸반

서월랑

전행각

10칸

3칸

마루 3칸 온돌 2칸

옥화당 10칸 반

마루7칸 온돌 3칸

정묵당 10칸 반

마루3칸반 온돌 3

西邊階上月廊 16칸 마루 6칸

飯色間 2칸

외행각 3칸

희정당 15칸 8

동서온돌 6칸

마루 9칸

영명문내행각 8칸 마루

서월랑 23칸 마루7칸반 온돌 4칸 허칸

11칸 반

남월랑 6칸 마루 2칸 온돌 2칸 허칸

2칸

누각 14칸반 8 상하층 마루

외남월랑 19칸 온돌 2칸 마루 12칸 허칸

3칸

師傳廳 7칸반 온돌 1칸반 마루 2칸

別監廳燈燭房 16칸 온돌 4칸 마루 7칸허칸 5

선화문 협문 2칸 포함

내반원 10칸 온돌 4칸 마루 6칸

사전청 1칸문 1

내반원 1칸문

외월랑 27칸 온돌 7칸 마루 11칸

허칸 7칸 문 2칸

내반원 남행랑 17칸 온돌 2칸 마루(퇴포함)13

칸 허칸 2칸

협양문 1칸 동서협실내 마루포함 7칸

선례문 1칸

이때 조성된 창덕궁의 내전일곽은 큰 변화 없이 순조대까지 유지되어 lt동궐도gt의 그림

과도 일치하고 있으나 1833년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다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동인문 1칸

측간 1칸

보경당 3칸 양면퇴 9칸

온돌 3칸 마루 6

태화당 6칸前退幷作平12칸

온돌 2칸 마루 문

1칸

태화당 남월랑

동월랑

북행각

7칸

2칸

1칸

昭德堂 4칸前退幷作平8칸

온돌 2칸 마루 허

간1칸

소덕당 남월랑

동월랑

5칸

11칸

소주방 5칸前退幷作

10칸

마루8칸반 온돌 1칸반

小燒廚房서행각 10칸 온돌3칸 마루 4칸 허칸2

칸 문 1칸

중소주방 4칸前退幷作

6칸

온돌 3칸 마루 3칸

하소주방 3칸前退幷作

4칸반

온돌 2칸 마루 2칸반

측간 4칸 마루 구비

窓差備 4칸 문 2칸반 마루 2칸

1칸문 5坐

선정전 9칸 북월랑 11칸 온돌 3칸 마루 5칸반

他庫1칸 건중문1칸 협문

반칸

華堂 동온돌 1칸반 서온

돌2칸 마루 전퇴 3

집양문

일각문

1칸

1칸

야대청이하서월랑

합당가幷

20칸 야대청 온돌 1칸 마루 2

합당가 4칸 마루3칸 허칸

1칸

인화문 행각 7칸

협문 1칸

동월랑 16칸 마루 4칸

동월랑 동변 5칸 온돌1칸 마루1칸 囗1칸

허칸 1칸

내남월랑 11칸 돈례문 1칸 동서 협문 1

칸 제의문 1칸 동변출입

문 1칸

중행각 7칸

외남월랑 14칸 선정문과 동서문 3칸

선전관청온돌1칸 마루2

칸 囗3칸

내관청온돌2칸 마루1칸

囗3칸

외행각 3칸

외행각 동변 3칸 온돌 1칸 마루 2칸

제의문 앞 1각문 1칸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神佑門 1칸

인정전일곽 동월랑 14間作平28

광문 1칸 온돌 1칸 마루

4칸

남월랑 6칸

승정원16칸동랑5

칸 전랑3칸 북간

1칸

25칸 온돌 4칸 마루 19칸

주서청 9칸 온돌1칸반 囗1칸 마루 6

칸반

외사옹원 6칸 동루 8칸 서루 8칸 공상

청 2칸 남랑 7칸

rarr온돌 1칸 마루 24칸

內宮房 7 間 作 平 1 4

동루 8칸 서루 8칸

내사옹원 6칸 동루 7칸 서루 2칸 평랑

1칸 남랑 1칸

출입번내관청 10칸 온돌 3칸 마루 4칸

숙장문전후통 6칸

왕자간안청 5 칸 作 平 1 0

마루

인정문밖 남월랑 8칸 온돌 1칸 마루 6칸

빈청외랑 2칸

精抄軍堡 2칸

砲手軍堡 4칸

傳漏軍堡 1칸

건물명 기사 사료

대조전

1461년(세조13) 내정전을 양의전이라 명명하고

대조전에서는 신하를 만났다고 함 따라서 이 시

기 대조전은 내정전과 다른 전각이었다고 추정

『세조실록』 세조7년 12월

19일 및 세조13년 5월 18

『연산군일기』에 태종 세종이 대조전에 거처하

고 성종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보임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8월 22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해 복구됨

1623년(인조원년) 인조반정시 소실된『인조실록』 인조원년 3월

15일

1647년(인조25) 인경궁 경수전을 뜯어 다시 지

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34) 전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 다시지음

(2) 대조전과 의궤

대조전은 창덕궁 내정전이다 가운데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서 온돌방을 갖춘 평면이며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이다 태종 세종이 이 건물에 거처했고 성종을 비롯한

여러 왕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실록에 보이므로161)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진

것으로 판단되지만 초기 기록에서는 양의전(兩儀殿)이라는 정전 이름이 별도로 나오고 있어

서 주의를 요한다 1461년(세조 7) 창덕궁의 주요 전각 이름을 지을 때 내정전은 양의전이라

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162) 세조 13년 5월의 실록에는 왕이 양의전 문에서 대신을 만났다는

기사와 함께 대조전에서도 신하들을 불러 명령을 내린 기사가 보인다163)

따라서 적어도 이 시기에는 양의전과 대조전이 각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후에 양의전은 실록 기사에서 나오지 않고 역대 왕들이 대조전에 거처한 기사만 보인다 임

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 창덕궁이 복구되면서 다시 지어졌다 인조반

정시 다시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25) 인경궁의 경수전慶壽殿 건물을 뜯어서 다시 지었다

이때의 공사 내용은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자세하다 이 때 경수전은 45칸이었다

고 하며 새로 지은 대조전 역시 45칸 규모였다 통상 건물 이름에 목숨 수자가 붙은 곳은

대비나 상왕의 거처를 나타내므로 인경궁의 경수전은 대비전으로 지었던 건물로 추측되며

이것을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중궁전으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다시 지어진 대조전은 180여

년이 지난 1833년(순조 33)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건물은 이듬해 바로 복구되었는데 소실

전의 규모로 지어졌다

1647년에 인경궁 경수전을 헐어서 지은 대조전은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의하

면 전체 45칸 가운데 어칸 마루 3칸에 천장은 봉반자이고 4면에 툇마루 20칸이 있고 기단

은 4단의 장대석으로 되었으며 동서 익실이 있는데 전퇴는 돌기둥 6개가 있고 온돌은 12칸

으로 천장은 지반자로 되었다고 하였다 또 정전 좌우에는 동익각 6칸과 서익각 9칸이 있고

남월랑 28칸반 서월랑 9칸이 있다고 하였다 또 대조전 동북쪽에는 집상당 20칸 서북쪽에

는 2층 누각인 징광루가 있다고 하였다

이 시기 대조전 모습은 lt동궐도gt에 그림으로 전한다 대조전은 가운데 3칸이 지붕이

좌우보다 높게 그려져 있고 3칸 부분 앞에는 월대가 마련되어 있다 월대는 3면에 계단이

있고 판장으로 가려져 있는 모습이다 월대를 둔 정청 3칸 좌우는 지붕이 한 단 낮게 되어

서 좌우 3칸씩 있는데 이 부분이 『창덕궁수리도감의궤』에서 말하는 동서 익실로 볼 수 있

다 또 동서익실 좌우로 행랑이 길게 이어져 있어서 동익각과 서익각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다 또한 동서익실은 건무 하부에 돌기둥이 그려져 있고 돌기둥 안쪽에 아궁이도 보인다 지

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형태이다

(3) 희정당과 의궤

161) 『연산군일기』 권17 연산군 2년 8월 22일

162)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 12월 19일

163)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 5월 17일

건물명 기사 사료

선정전

1405년(태종5) 조계청으로 창건『태종실록』 태종5년 10월 19

1461년(세조7) 건물명을 선정전으로 함『세조실록』 세조12년 12월

19일

1698년(광해군즉위) 소실된 것을 복구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 시 소실 『인조실록』 인조1년 3월 15

1647년(인조25) 인경궁의 광정전을 뜯어 이

건함『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00년(순조즉위) 정조의 혼전을 선정전으로

정함『(정조)혼전도감의궤』

20세기 초 창호를 유리창으로 고치고 외행각

을 철거함

1996년 lt동궐도gt 등을 근거로 원형 복구함

처음에는 명칭을 수문당(修文堂)이라 해서 왕의 학문소로 지어졌다가 연산군 때 희정당

으로 고쳤으며 뒤에 편전의 용도로 전용되었다 순종황제 때는 서양식 가구를 비치하고 사

신 접견 장소로 쓰였다 『연산군일기』에는 수문당이 대조전과 함께 성종이 거처하던 곳이

라는 설명이 나온다164) 이것이 수문당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이다 1496년(연산군 2) 6월

수문당이 화재가 나자 왕이 건물을 수리하도록 명하고 아울러 그 해 12월에는 건물 이름을

희정당으로 고치도록 했다고 한다165)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인조반정 때

다시 불에 탄 것을 1647년(인조 25) 인경궁의 전각을 철거해서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1833

년(순조 33) 화재로 불에 타고 이듬해 옛 모습대로 재건되었다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년)에는 당시 재건된 희정당의 규모를 15칸이라고 적었다

인경궁의 화정당 21칸을 이전했다고 했는데 규모에 차이가 있다 1834년 다시 지어진 희정

당은 이전과 동일한 규모였으며 그 평면 형태는 lt동궐도형gt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체는

15칸 규모이여 정면 5칸의 남쪽 5칸은 모두 마루이고 뒤는 중앙 3칸에 넓은 온돌방이 있고

뒤에 툇간이 있으며 좌우는 작은 방 2개가 중첩된 모습이다

(4) 선정전과 의궤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보던 곳이다 1647년(인조 25)에

다시 지어졌으며 지금 건물은 이 때 것이다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1405년(태종5) 창덕궁

이 창건될 때 조계청(朝啓廳)이란 이름으로 지어졌다가 1461년(세조 7) 선정전이란 이름을

얻었다166) 조계는 아침마다 신하들이 정사를 아뢴다는 뜻이며 선정은 정사와 가르침을 널

리 펼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1년) 재건되었으며 다

시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 때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 25) 재건하였다 지금 건물은 이때

164) 『연산군일기』 권15 연산군 2년 8월 19일

165) 『연산군일기』 권15 연산군 2년 8월 19일 및 동 권20 연산군 2년 12월 8일

166)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 12월 19일

다시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건립 시기로 보면 1608년경 다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광화

문 다름으로 창덕궁에서 오래된 건물이다 주변 행각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중문 주변

과 선정문 전면의 관청이 들어서 있던 부분은 편전의 용도가 달라짐에 따라 수시로 증축과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일제강점기 때 일반인의 관람 편의를 위해 개조한 상

태이다 고종 즉위 이후에는 선정전은 더 이상 본래의 용도로 쓰일 기회를 갖지 못하였

고 순종황제가 창덕궁에 돌아와서는 희정당에서 신하들을 접견하였으며 1917년 희정당이 화

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어진 후에도 희정당이 편전으로 쓰이고 선정전은 빈 건물이 되었

다 그런 덕분인지 선정전은 비교적 17세기초에 지어진 모습을 지금까지 잘 유지하고 있다

선정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장 눈에 띠는

특징은 지붕이 청기와로 덮여있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 안에 청기와를 덮은 건물이

선정전 외에도 징광루 등이 있었고 경복궁에도 있었지만 현재는 이 건물이 유일하다 현재

건물은 1647년(인조25)에 다시 지어진 것인데 이때는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지었던 인경궁

의 편전인 광정전(光政殿)을 뜯어서 그 재목으로 건물을 지었다 이때의 공사 과정은 『창덕

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자세하다 이 의궤에 의하면 광정전 9칸 건물의 기둥이나 보 공

포부재를 뜯어서 그대로 건물을 옮겨지었으며 기와 역시 광정전에 덮었던 청기와를 가져와

서 선정전에 덮었다고 하였다 인경궁은 광해군의 지시로 여러 건물에 청기와를 덮었는데

그 중 일부가 창덕궁에 살아남은 것이다

선정전과 그 주변 모습은 lt동궐도gt가 참고가 된다 lt동궐도gt에 의하면 선정전 건물은

세 단 정도의 장대석 기단 위에 놓여 있고 사방에 행각이 둘러쳐져 있어서 건물 앞에 작은

마당이 마련되어 있는 모습인데 특이한 점은 건물 앞으로 길게 행각이 뻗어서 마당을 좌우

로 나누고 있다 이 행각을 『궁궐지』에서는 lsquo복도각(複道閣)rsquo이라고 부른다 복도각은 기둥

과 지붕만 있고 벽은 개방되어 있는 모습이며 바닥은 돌이 깔려서 사람들이 비를 맞지 않고

출입문에서 편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선시대 빈전이나 혼전을

조성한 여러 의궤에서는 이 복도각을 중배설청(中排設廳)으로 부르고 있다 중배설청이란 빈

전이나 혼전에서 제례를 행할 때 음식을 진설하는 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lt동궐도gt에 그려

진 복도각은 선정전이 빈전이나 혼전으로 이용되었을 때 건물 앞에 배설청을 마련한 모습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배설청 모습은 lt동궐도gt에서는 창경궁의 문정전에서 확인

할 수 있고 경복궁의 태원전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lt동궐도gt에서는 선정전 주변에 행각이 둘러싼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특히 남쪽은

여러 겹으로 행각이 중첩되어 있다 이곳에는 대청 은대 상서성 당후 등이 있었는데 대청

은 대신들이 모이던 곳이고 은대는 승정원의 다른 이름이며 상서성은 관청이름 당후는 승

정원의 실무관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남쪽 행각에는 선정전에서 왕에게 계를 올리는 일과

관련한 관청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정전은 일제강점기 동안 창덕궁을 일반에 관람하면서 내부에 전시물을 두기도 하고

창문을 유리창으로 교체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996년 lt동궐도gt를 비롯한 옛 문헌에 따

라 건물을 본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그에 따라 사라졌던 복도각도 다시 세웠으며 창문도

고쳤다 다만 주변 행각은 변형된 채로 남아있는데 본래 선정전의 출입문인 선정문은 남쪽

의 두 번째 행각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 두 번째 행각은 복구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첫 번째 행각에 편의상 선정문 현판을 달아 놓았다

선정전에서는 과거 왕이 신하들과 어떤 형태로 접견을 하고 상참을 거행했는지를 확실

히 고증할 수 없는 상태이다 문헌에는 실내에 일월오악병풍이 있고 어좌가 있었다는 점을

전하고 있지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 그 형태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현재 선정전 실내에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한 집기류 등은 근거가 없는 불확실

한 것들이다

(5) 인정전 일곽과 의궤

창덕궁의 대문과 그에 딸린 사다리꼴 형태의 행각 이 문을 들어서면 비로소 창덕궁의

실질적인 내부인 대내大內로 들어서게 된다 『영접도감의궤』(광해군 2)에 명시한대로 창

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대내로 들어가는 대문(大門)이다 진선문의 좌우 행각 및 진선

문을 들어선 곳의 마당을 둘러싼 행각은 실록에서는 인정전 외행각으로 불렸다 외행각은

진선문과 마주보는 숙장문 좌우 행각까지 포함된다 북쪽은 인정문 좌우의 행각이 길게 뻗

는다 인정문 좌우 행각과 진선문 숙장문 주변 행각으로 둘러싸여서 사다리꼴의 마당이 이

루어진다

진선문의 창건에 대해서는 사료상에 명시된 것이 없지만 창덕궁이 창건될 때 함께 지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167) 창건 시에는 진선문이 창덕궁의 바깥 대문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정전 외행각이 세워진 것은 1418년(태종18)부터이며 이듬해 1409년(세종 1)에 완성

되었다 세종실록에는 박자청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터를 잘 살피지 않고 기둥을 세우고 보

를 올려 인정전에서 내려다보면 기둥이 바르지 않고 경사지게 보여 상왕이 화를 내고 자청

을 옥에 가두도록 하고 행각은 헐어버리도록 했다는 기사가 보인다168) 이후에 외행각이 어

떤 모습으로 고쳐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부분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광

해군 때 다시 복구되었으며 그 형태는 19세기 중엽에 제작된 lt동궐도gt나 20세기 초에 그린

lt동궐도형gt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초에 진선문이 철거되면서 외행각도 함께 철거되었

으며 1996년 진선문을 복구할 때 외행각도 복원되었다

조선시대 진선문이나 인정전 외행각 모습은 lt동궐도gt와 lt동궐도형gt을 통해서 추정해

볼 수 있다 두 자료에 나타난 외행각은 진선문에서 남북으로 행각이 이어지고 남쪽은 제5

칸에서 직각으로 꺾여서 남행각이 길게 이어지는 모습이며 남행각이 다시 북쪽으로 꺾이면

서 숙장문으로 연결된다

인정문은 남행랑의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인정문이 남향해 있다 장대석 2단의

높은 기단 위에 서 있다 계단은 중앙에 장식 없이 꾸며져 있다 경복궁의 근정문이 중층 누

167) 실록에 진선문 기사가 처음 나오는 것이 1409년(태종 9) 10월 기사인 것으로 미루어 1405년 창덕궁 창건

시부터 이 문이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태종실록』 권18 태종 9년 10월 1일 기사)

168) 『세종실록』 권3 세종 원년 4월 12일

각이고 중앙 계단 가운데 쌍으로 봉황을 새긴 답도를 둔 것에 비해 크게 격식을 낮추었다

지붕 용마루에는 인정전과 마찬가지로 이화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역시 1916년에 설치된 것

으로 보인다

인정문 행랑은 『태종실록』에 기록된 창건 시 규모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북쪽은

산을 등지고 있어 행랑을 두지 않고 동 서 남면에만 있으며 동서 행랑은 방이 두 줄로 된

복랑(復廊)이고 남행랑은 방이 한 열로만 된 단랑(單廊)이다

인정문은 1992년부터 96년 사이에 일제강점기 때 변형된 부분을 고쳤다 우선 인정전에서는

일제시기에 건물 동편에 행랑을 붙여놓았던 것을 lt동궐도gt 등을 참고해서 본래대로 행랑을

건물 후방으로 옮겼다 인정전 마당은 정원으로 꾸미는 등 훼손이 많았던 것을 품계석을 다

시 세우고 바닥 전체를 박석으로 깔았다 행랑과 인정문 역시 일제강점기 때 구조를 바꾸고

벽을 개조했던 것을 원형을 고증해서 복원했다 다만 인정전과 인정문 용마루에 설치한 이

화문양은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또 인정전 내부의 황색 커튼이나 바닥의 쪽마루 전

등 갓 등도 당시의 역사적 흔적을 그대로 둔다는 취지에서 그대로 두었다

나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인조 26년 1648)

1) 공사 내용 분석

인조 26년(1648)에 마무리된 창덕궁의 동궁처소인 저승전(儲承殿)을 수리한 내용이다

저승전의 위치는 『宮闕志』에 의하면 ldquo저승전은 건양문 밖에 있다 (원) 옛 구현전 광연전

의 터이다rdquo라고 되어 있으며 시민당의 북쪽 현재 낙선재의 서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원래 저승전의 터는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머물던 광연전 터로 성종때 세자가 거

처하는 춘궁으로 바꾸었다 저승전 일곽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때 중건되었으

며 인조반정으로 창덕궁 내전이 소실되면서 동궁의 처소도 대부분이 다시 소실되었다

인조 25년 창덕궁의 내전과 편전을 복구하는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던 8월 15일 도감

에서 당시 세자가 임시로 거처하는 곳에서 흉물이 발견되어 거처하기 어려우니 진행중인 창

덕궁 공사와 더불어 세자를 위하여 전(殿)하나와 당(堂)하나를 짓기를 청하였다 인경궁의

동궁을 헐어서 동궁의 수리가 시작되어 9월에는 입주(立柱) 상량이 이루어졌으나 창덕궁의

다른 수리공역이 끝난 후에도 저승전 공사는 지체되면서 동절기에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듬

에 2월에 다시 시작하여 4월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저승전 공역은 처음에는 창덕궁수리도감이 맡아 하였으나 인조 26년에 따로 도감이 설

치되었다 저승전 공역에서도 창경궁 창덕궁의 공사와 마찬가지로 인경궁의 일부 전각을 뜯

어 이용하였다 『저승전의궤』는 창덕궁의궤와 별도로 공사가 완료된 인조 26년(1648)에 작

성되었다 저승전 공역과 함께 창덕궁 공역의 잔여부분을 마무리 짓는 형식이 되었으며 이

에 따라 그 의궤서도 일정한 체제를 갖추지 않고 필요한 내용만을 정리하는데 그쳤다

목록은 없으며 내제의 처음에는 lsquo순치오년정월 일(順治五年正月 日) 저승전의궤rsquo다음에

작업소 건물구성(칸수) 공사내용

좌소

(左所)

인경궁 철훼

-承華殿(45)

동행각(4) 서행각(4) 서월랑(15) 남월랑(195) 북월랑

(4) 동행랑대문남변월랑(20) 북변월랑(9) 서변평월랑(4)

重暉堂 동월랑(13) 북월랑(50)

철훼

-儲承殿(28) 동온돌(6) 서온돌(6) 대청마루(16) 신조

동익각(1) 동행각(2) 동월랑(9)

바로 공사감역관의 조직(座目)을 적었다 이어서 전유재질(前遺在秩)도감무역질(都監貿易

秩)上下秩(품삯관련)철물타조질(鐵物打造秩)용여환하질(用餘雜物還下秩)각처이송질

(各處移送秩)을 적고 제목 없이 날짜순으로 계사(啓辭 상량문 상량의 포함)이문(移文)을

적고 그 뒤에 좌소(左所) 우소(右所) 및 외소(外所) 노야소의 항목을 두었다

lt전유재질(前遺在秩)gt lt도감무역질(都監貿易秩)gt에서는 전년의 공사에서 남은 자재와

금번 공사에 소용된 자재의 총량을 수록하였다 소용된 자재는 주로 철물 기와 단청재료

미장재료 등이다 lt上下秩(품삯관련)gt에는 장인과 인부들의 품삯 창경궁 각처 및 아문과

進修堂 전돌 까는데 들어간 전돌과 장인의 품삯을 적었다 lt각처이송질(各處移送秩)gt의 내

용은 남은 잡물을 홍제원과 문정전 수리에 사용하도록 이송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항목을 구분하지 않고 정해(丁亥 1647년) 8월 15일부터 무자(戊子 1648년) 4

월 12일까지의 계사(啓辭)를 날짜별로 적고 있다 중요공역의 일정을 보고하는 것으로 8월

16일 1소에서 개기를 시작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9월 15일 묘시(卯時)에 저승전의 定礎

午時에 立柱 未時에 上樑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9월 15일자에는 상량문과 상량의를 적었

다 여기에 수록된 상량문은 이에 앞선 창덕궁의 공사를 기록한 『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에 실린 저승전의 상량문을 다시 실었다 정초에서 상량 까지 같은 날에 했으나 공사

가 완전히 끝난 것은 다음해 윤3월 하순이었다

계사에 이어서 항목구분 없이 1647년 12월 14일에서 1648년 7월까지 도감과 각 관서 및

각 지방관찰사 사이에 자재의 조달과 수급에 대하여 오고간 문서를 날짜순으로 정리하였다

구체적으로 공사내용을 알 수 있는 부분으로 lt좌소(左所)gt lt우소(右所)gt 및 lt외소(外

所)gt lt노야소gt의 기록 방식은 각 작업소별로 감독관 명단 날짜별 공문서 조성전각의 명

칭과 규모 공사내용 소요자재(實入雜物秩) 공장명단(工匠秩)을 수록하였다 노야소 뒤에 저

승전 일곽 외에 1647년 창덕궁수리공사의 잔여 공사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잔여공사는

주로 문과 주요 전각의 벽체 단청 도회(미장)공사이다 마지막에는 역시 제조의 수결을 실

었다

인경궁 철훼는 좌소에서 맡아서 했으며 기록은 건물명과 칸수만 간단히 적었다 저승전

의 중건과 함께 신축한 건물은 낙선당 경극당 숭경당 취선당 손지각 및 익각과 주방이며

청음정 시민당 진수당 장경각이 수보되었다 시민당은 저승전의 남쪽에 있었으며 세자 서

연의 장소였다 진수당은 시민당의 북쪽 전각이며 손지각 역시 시민당에 부속되었던 건물이

고 장경각은 진수당의 동쪽에 있던 건물이다 즉 1648년『저승전의궤』에 기록된 공사의 범

위는 창덕궁의 동궁전 전체라 할 수 있다

남월랑(7) 남행각(1)

-敬極堂(10) 남월랑(7) 동월랑(75)

-樂善堂(5) 서행각(3) 남월랑(6)

-協祥門 麗景門 淸輝門 수보

-외남월랑(185) 資善門 淸陰亭(3칸) 측간 4칸

-霽陽門(1칸)

수보 개와 토벽

단청

우소

(右所)

-저승전 서익각(1칸) 북익각(1칸) 소주방 (6칸)

온돌(8) 마루(8) 차양판장 1좌 신조

내서월랑(7)

-기와 토벽 단청

개수

-일부 창호 신조

-嘉順門(1칸) -협문(25) 내남월랑(6칸) 북월랑(6칸)

-崇敬堂(45) -東付舍(3) 서행각(155)

-就善堂(105)

-靜勝門 1칸

-東樓(18) 서월랑(7)칸 남월랑(10)칸 외월랑(6)

외남월랑(18) 창차비(3)

司饔院(6)

供上廳(1) 機械木造作

嬪宮長房(6)+付舍(3) 朗和門(1) 差備廳(3)

炭庫(3) 機械木造作

외소

(外所)

遜志閣(7) 행각(19) 1칸문 1좌 小房(165) 1칸문 2좌

장방(13) 1칸문 4좌 별감방(6) 司鑰房(7) 水剌間(6)

大殿精抄軍廳(115) 貳문 1칸 북협문 1칸 泰亨門 1칸

목재 기와 석재

는 신조 창호는

일부 인경궁 철훼

재 사용

시민당 9칸 進修堂 12칸 기와 토벽 단청

개수 창호칠 개수

藏經閣 3칸 建陽門 중명문 기와보수

集英門 1칸 集賢門 1칸 단청보수

시강원 수보

종묘 담장 (중명문에서 司鑰房까지) 개축

大隱構 (遜志閣에서 內司僕寺까지)

정묵당등

수 보 와

개조질

정묵당 10칸 징광루 외서월랑 16칸 窓差備內 家 6칸 창차비

문 4칸 神佑門 4칸 熙仁門 1칸(개조) 肅章門 6칸 인정문 전

후 4칸 진선문 전후 4칸 壽靜堂외남월랑 3칸 서월랑 7칸(총

64칸)

砂壁 단청수보

선정전 인정전 선자귀

대조전 집상당 희정당 보경당 태화당 소덕당 선정문 협양

문 각처 연가 숙장문 인정문 진선문 돈화문 상하층

改塗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 저승전과 의궤

『저승전의궤』는 『창경궁수리소의궤』(1633)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이어서

인조년간에 복구된 창덕궁의 동궁 모습과 이때 철거된 인경궁의 동궁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세자가 거처하는 저승전을 중심으로 주변 전각의 면모를 알 수 있으며 바로

전에 완료된 창덕궁수리공역의 공사 마무리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건물명 기사 사료

돈화문

1412년(태종12) 진선문 남쪽에 누문

5칸 건립『태종실록』 태종12년 5월 22일

1413년(태종13) 문에 큰 종을 달다 『태종실록』 태종13년 1월 27일

1592년(선조25) 소실

1608년(광해즉위) 복구되다 『광해군일기』 광해군즉위년

1620년(광해군12) 문 앞 산대놀이를

중지시키다『광해군일기』 광해군12년 9월 3일

1676년(숙종2) 문 앞에서 과거 급제

가 문과2인 무관1만2천 7명이 파자교

까지 늘어서다

『숙종실록』 숙종2년 3월 24일

이 의궤의 각 작업소별 lt조성간각질(造成間閣秩)gt은 조성건물별로 칸수 바닥구조 천

장의 형태 난간 창호의 종류 등이 기록하고 건물별로 보수내용을 적었다 건물의 규모와

형태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창호의 형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저승전은 총 28칸

의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구성이었다 동온돌과 서온돌이 각 6간이고 중앙의 3칸이

고 대청이었다 저승전은 『宮闕志』의 기록에 의하면 영조년간의 화재로 소실된 뒤 중건되

지 않았기 때문에 lt동궐도gt lt동궐도형gt 등 후대의 그림 자료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없

다 따라서 이 의궤의 기록은 저승전의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2) 돈화문과 의궤

창덕궁의 정문이다 『영접도감의궤』(광해군 2)에 의하면 창덕궁의 출입문은 돈화문을

정문(正門) 진선문을 대문(大門) 인정문을 중문(中門)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정문은

창덕궁 외곽 담장인 궁장의 정식 출입문을 가리키며 정문을 들어서면 수직하는 군사들의

거처나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는 관청이 모두 포함된다 이에 반해 대문은 대내의 출입문으로

정전이나 편전 내전 영역의 출입문이 된다

1405년(태종 5) 이궁 창덕궁이 지어지고 나서 7년 후인 1412년(태종 12) 5월에 도성 내

에 행랑을 지으면서 창덕궁 진선문 남쪽에 누문 5간을 세워 lsquo돈화문rsquo이라 했으며 문 밖 좌우

행랑은 각 관청에 나누어 주고 조방朝房으로 만들었다고 『태종실록』에서 밝혔다169) 조방

은 궐에 들어가는 신하들이 의복을 갈아입고 대기하는 곳이다 1413년에는 문에 큰 종을 달

았다170)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복구되었다 이후에 화재나

훼손기사가 사서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초에 재건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다만 세부의 형상이나 구조짜임에서는 후대의 특징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후

대에 일부 개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돈화문은『궁궐지』에 의하면 창덕궁의 궁장에는 남쪽에 돈화문 단봉문(丹鳳門) 북쪽에

광지문(廣智門) 서북에 요금문(耀金門) 동쪽은 건양문(建陽門) 서문은 경추문(景秋門) 금

169)『태종실록』 권 23 태종 12년 5월 22일

170)『태종실록』 권 23 태종 13년 1월 27일

호문(金虎門)이 있다고 하였다 돈화문은 창덕궁 궁장의 서남모서리에 놓여있다 궁의 정문

이면서 위치가 궁장 모서리에 놓인 것은 창덕궁의 입지가 응봉에서 내려오는 경사진 지형

탓으로 보인다 돈화문은 왕이 궁을 드나들 때 이용되었으며 중국 사신 역시 이 문을 출입

하였다 또한 나라의 크고 작은 공식 행사가 있으면 그 행렬이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 예를

들어 궁 안에 모셨던 어진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다시 궁으로 돌아올 때는 이 문을 이용

했다 그러나 궐에 출입하는 신하들의 일상 출입은 이 문을 이용하지 않고 근처의 금호문을

사용했으며 이따금 단봉문을 이용했다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다 기둥 위뿐 아니라 그 사이에도 공포를 촘

촘히 배열한 다포형식이며 상부 지붕형태는 우진각이다 『궁궐지』에는 공포가 내7포 외 9

포이며 기둥 높이가 16척 앞뒤방향 칸의 길이가 각각 12척 조우 방향 칸의 길이가 가운데

칸은 17척 그 다음 칸이 15척 제일 바깥 칸이 125척이라고 하였다 돈화문은 처음 이궁으

로 지어졌기 때문에 경복궁처럼 외곽에 돌을 가지고 견고하게 궁성宮城을 쌓은 것이 아니고

흙과 돌을 가지고 궁장(宮墻)을 쌓았다

따라서 정문은 광화문처럼 석축을 쌓고 홍예문을 낸 것이 아니고 중층 누문 형태의 목

조건물을 세웠다 다만 광화문을 비롯해서 다른 궁궐 정문이 정면 3칸인데 비해 정면 5칸으

로 규모를 키웠다 5칸 가운데 좌우 2칸은 벽으로 막고 실제로 출입문은 3칸만 열었다 문은

세벌 이상의 장대석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세웠으며 세 개의 계단이 놓였다 기단 앞으로는

길게 단을 쌓은 월대를 마련했다 lt동궐도gt에 그려진 돈화문 모습을 보면 월대 중앙에는

왕이 출입할 때 이용하는 어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출입문 중 가운데 문 하나를 제외

하고 좌우의 출입문은 X자 형태로 막대로 막았다 이 그림으로 보면 평상시 돈화문은 일반

인의 사용을 제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대 남쪽에는 좌우에 말을 매어 두는데 쓰였

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틀이 있고 나무틀 앞에는 말에 오를 때 발을 딛는 디딤돌이 보인다

돈화문은 한 동안 월대를 비롯해서 기단이 아스팔트에 묻힌 상태로 유지되었다 언제

기단 하부를 아스팔트로 묻었는지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20세기 초에 창덕궁 안에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하면서 기단을 흙으로 메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돈화문 바

닥뿐 아니고 금천교의 위치도 바꾸고 진선문은 철거하였다 이렇게 변형된 돈화문은 1996년

기단을 제 모습으로 드러내고 월대도 복구하였다 그 사이 돈화문 앞 도로를 보수하면서 아

스팔트 층이 높아져 월대와 도로 사이에 1미터 이상의 단차이가 생겼다

(3) 시민당과 의궤

1847년(헌종13) 후사가 없었던 왕을 위해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들이면서 왕과 후궁이

함께 거처할 건물로 지었다171) 낙선재가 있던 일대는 본래 세자가 거처하며 신하들을 만나

던 동궁이 있었다 이곳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간 위치가 되며 창덕궁 동문인 건양문을 나

선 곳으로 영역으로 보면 창경궁에 속한 곳이었다 이곳에는 왕세자가 신하들을 접견하던

171) 낙선재 건립 경위에 대해서는 헌종 자신이 쓴 낙선재상량문과 수강재중수상량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헌종의 문집인 『원헌고元軒稿』 권1 낙선재상량문(1847년)과 수강재상량문(1848년) 참조

시민당(時敏堂)과 왕세자의 침소인 저승전(儲承殿)과 낙선당(樂善堂) 등이 있었다

1780년(정조4) 시민당이 화재로 소실된 후에 복구되지 않은 채 1782년(정조6) 새로 동

궁 처소로 희정당 가까운 곳에 중희당(重熙堂)이 지어지면서 빈곳이 되었다 이 일대는 조선

초기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으로 전한다 정조는 1785년(정조9) 이곳에 수강재를 지어 독

서처로 삼았다172) 한 동안 비어있던 이곳에 헌종 때 와서 낙선재를 지은 것이다 헌종이 경

빈 김씨와 낙선재에 거처한지 불과 2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빈집이 되었다가 고종

때에는 왕이 창덕궁에 머물 때 여기를 집무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즉 1884년(고종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창덕궁에 머물면서 낙선재에서 집무를 보고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1907년 이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나서 1917년 대조전

등이 모두 불에 타자 낙선재를 임시거처로 삼은 적도 있다 순종의 계비이며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한 동안 거처하였고 1963년 영친왕 이은이 환국한 후에는 부인 이방자여사와

함께 거처하였다 2009년에는 영친왕의 아들 이구(李玖)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혼전으로

이용되었다

다 『창덕궁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昌慶宮修理都監儀軌)』173)(효종 3년 1652

년)

1) 공사 내용 분석

효종 3년(1652) 1월부터 시작된 창덕궁 창경궁의 수리공역에 대한 내용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에 있는 건물의 온돌을 개수하고 전돌을 새로 깔며 흙을 교체하는 공사였다 인조 25

년에 있었던 창덕궁 수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주사건이 궁의 개수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

다 1651년(효종 2) 11월 인조의 후궁이었던 조귀인이 대내에 뼛가루와 무덤의 나무를 뿌리

고 흉물들을 각처에 묻어 대비와 대전 인평대군 등을 저주했다는 내용의 옥사가 있었는데

이 사건과 김자점의 역모사건이 연계되어 김자점 일파가 숙청되었다 효종은 이 사건을 마

무리 하고 곧바로 대비를 모시고 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며 창덕궁과 창경궁의 흙을 모두 긁

어내고 깨끗한 흙으로 채우도록 명한다174) 따라서 주요 전각의 온돌을 해체하고 전돌 교

체 전각 간의 어로에 흙을 새로 까는 것이 주된 공사였다

목차는 없으며 규장각 소장본은 앞부분의 편찬 년대와 공사감독 조직이 결락되어 알

수 없다 남아 있는 부분은 효종 3년 1월 15일의 도감사목으로 시작되는데 이후 4월 22일

까지의 lt계사gt 1월 8일부터 4월 15일 까지의 lt이문질gt 1월 15일에서 2월 10일 까지의

lt감결gt이 수록되었다 계사에 비하여 이문과 감결은 매우 소략하다 이어서 lt昌德 一所gt

lt昌德 二所gt lt昌慶 一所gt lt昌慶 二所gt lt굴토(掘土) 1소gt까지의 각 소(所)의 감역관 명

단과 작업내용에 대한 공문 자재목록 공장명단이 있다 끝 부분이 결락되어서 lt굴토(掘土)

172) 『정조실록』 권20 정조9년 8월 27일

173) 서울대학교 규장각(규14912)

174) 『효종실록』 효종 2년 12월 27일

작업소 건물 공사내용

창덕 1소 大造殿 동서익각 책방 集祥堂 澄光樓 玉華堂

壽靜堂 靜黙堂

온돌공사

희정당 承明門 내소주방

慶極門에서 建中門까지 어로

창덕 2소 太和堂 昭德堂 讌和堂 寶慶堂

책방

온돌사벽수리 방전다시 깔

景福堂 책방 온돌수리 단청

宣政殿 방전 박석

瑤華門에서 五雲門까지 어로 방전다시 깔기

齊政堂 온돌 방전 박석 淨土

도총부 책방 낭청방 온돌 방전 淨土

臨武門 湛露門 인경궁의 자재와 기와로 만듬

1소gt의 중간 정도까지 남아 있다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마이크로필름을 확인하면 그 뒷부분

은 lt굴토 이소gt lt노야소gt lt목물소gt lt토물소gt lt의궤 사목gt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이 공사에서 특이한 점은 일반 백성을 동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lt계사gt 1월 3일에 의하면 전국각지에서 2000명의 승군을 동원하여 훈련원과 인경궁 동관

왕묘에서 기거하면서 공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창덕궁에 새로 깔 흙은 쌍리문동에서 채취

하고 창경궁에 깔 흙은 남소문동에서 채취하였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이 공사는 인조 11년(1633)의 창경궁 수리와 인조 25(1647)년의 창덕궁 저승전 공역에서 수

리되었던 전각이 수리 대상이었다 이 의궤는 공사가 주로 바닥의 보수에 있었던 만큼 공사

규모도 적고 그 기술도 상세하지는 않으나 『창경궁수리소의궤』(1633)에서 언급되지 않았

던 창경궁 전각의 바닥구조가 언급되었다 공사의 성격이 건물의 실내 위주였기 때문에 현

상을 비교할 수 없다

당시 공사 범위였던 주요 건물은 앞에서 거론하였으므로 간단히 도총부만 살펴보기로

한다 도총부는 궁궐을 호위하는 기능을 맡던 관청으로 창덕궁 대문인 진선문 밖에 있었던

것을 1655년(효종6) 인정전 서쪽에 만수전을 지면서 창경궁으로 이전했고 이후 1781년(정조

5) 이문원이 들어섰다 lt동궐도gt에 묘사된 이문원 건물은 전면 5칸 측면 2칸반 정도이며

하부에 돌기둥을 세우고 가운데 3칸에 나무 사다리를 설치한 모습이다 이와 유사한 구조는

lt동궐도gt의 희정당 건물그림이나 현존하는 창경궁 숭문당에서도 볼 수 있다 대유재는 정

면 4칸 측면 2칸 건물이며 동쪽 끝 2칸은 물가에 면해서 제일 바깥쪽 돌기둥이 물속에 세

워진 모습이다 이 부분은 동이루(東二樓)라 불렀는데 1785년(정조9) 동이루를 지었다

라『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175)(효종8년 1657)

1) 공사 내용 분석

17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3572)

작업소 주요건물 부속건물 공사내용

1소 만수전

(4면퇴 포함36)

新材 眞彩 柱唐朱紅

井虹橋 동익각 밖

연지 서행각(4) 판장(11)

千慶樓 (4면퇴 포함 20) 新材 眞彩 柱唐朱紅

獻線閤 (전퇴포함 30) 일부구재사용 신재 진채

5량가(8) 외행각평루(3) 窓差備(7) 구재 및 신재사용 단청

洗踏房(6)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庫間(7) 長房(14) 司鑰房(4) 구재 및 신재 사용 단청

등촉방(7)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長房庫間(4) 舊 肅寧殿 서월랑을 수보 단청

외월랑(8)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만수전(萬壽殿)은 효종 8년 왕대비인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莊烈)왕후

조씨 1624~1688]를 위하여 창덕궁 인정전 뒤에 지은 전각이다 위치는 구 선원전의 북쪽이

다 이듬해 거듭되는 천재지변으로 1월 15일 공사를 멈추었다가 8월 4일 도감을 다시 설치

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공사는 11월 15일 다시 중지했다가 다음해(효종 8년 1657)에 1

월 16일 다시 시작하여 3월 26일 완공되었으며 4월 2일 대비가 이어하였다

이 만수전은 숙종 13년(1687) 9월에 불이 났으며 다시 복구되지 않았으며 자의대비는 통명

전으로 옮겼다 자의대비는 만수전에 불이 난 다음해인 1688년 (숙종 14년) 창경궁 내반원에

서 승하하였다

목록은 따로 없고 을미(1655년) 11월 17일 좌목과 도감사목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뒤에

는 11월 19일 날짜로 시작하는 계사에 해당하는 내용을 적었다 계사 뒤에는 예산의 수급과

품삯의 지급항목 및 실제 투입된 재료의 목록을 기록한 실입편을 두고 있다 그러나 따로

세부항목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모든 문서를 날짜순으로 적었다 그 다음에는 lt1소gt lt2

소gt lt3소gt lt외소gt lt부석소gt lt운석소gt lt외축장소gt lt노야소gt lt별공작gt의 순으로

싣고 맨 끝에 lt의궤사목gt을 실었다

각 작업소별로 별개의 의궤를 첨가시키는 형식으로 전체 의궤를 구성하였다 1소에서는

만수전 조성 2소에서는 춘휘전 조성 3소에서는 기타 서루와 월랑 등을 조성하는 것으로 나

누었다 이외에 작업종류에 따라 담장을 쌓는 외소 및 외축장소를 별도로 두었으며 돌 일을

담당하는 부석소와 운석소를 구분하였다 또 각종 철물을 만드는 노야소와 기계를 만드는

별공작소를 구분하였다

lt1소gt를 예를 들어 각 작업소별 서술방내용을 살펴보면 처음에 담당 관원들을 적고

lt수본질gt을 날짜순으로 적었으며 그 다음에 lt조성질gt에 건물의 규모 신구부재의 사용

과 기단마감단청 해당 건물의 실 구성(천장 마감과 온돌석 수량)을 적었다 그 다음에 목

재 석물 기와 단청 잡물 창호(창호채색잡물) 3개 작업소를 통틀어 단청한 것(通三所懸板

着添秩) 축장석물과 잡물의 실입을 구분하여 기록하고 lt공장질gt에 장인명단을 적었다

부재의 크기나 치목된 부재명칭이 언급되지는 않아서 건물의 칸수 정도를 파악하는 정도이

나 건물별로 창호의 종류와 창호단청 색깔 기단의 단수 등이 상세히 명시되어 있다

端和門 외행각(2) 신재

一間門(12처) 6칸 신조 6칸 구재

대문(5처) 3칸 신조 2칸 구재

外墻 水閣(3) 구재

2소 春暉殿

(4면퇴포함 20)

慶和堂을 철훼 이건 대보 1조

신재 眞彩

동변 화계(6층)

서행각(3) 서월랑(7) 북월랑(255) 신재

북월랑 앞 판장(9) 신조 眞彩

將酉庫 판장(5) 신조 단청

樑家(8) 구재

양지당 (전퇴포함 12) 신재 단청

북변 동산층각(2)

大一間門(2) 신조

중일간문(5) 3칸신조단청 2칸구재진채

箭泩門(4) 신조 단청

대문(1칸문) 내측간(3) 외측간(1) 구재

별감청(4) 구재

천경루 서측정원 井虹橋 裳朴石 신조

3소 서루월랑(전후퇴포함 76) 신재 구재 사용

상하층 내에 오토단청 나머지

는 단청

남루월랑(전퇴포함 45) 신재 단청

춘휘전남월랑(165) 신재 전면 진채 나머지 단청

양지당 남월랑(전퇴포함 9) 신재 단청

端暉門 1칸

춘휘전앞 小狹箭往門(1) 신재 진채단청

양지당앞 小狹門 1칸 문판과 문얼굴은 신재 나머지

는 구재

북수문 서변 1칸문 측간(3) 구재

lt築墻秩gt 서루월랑 서변 細墻 42칸(높이 8자)

泰秋門북수각~景秋門 內墻까지 50칸

측간동남 담장8칸(높이 9자)

대은구 5칸 중은구 7칸

외소 도총부당상대청 5칸 서영 19칸 炮手內入番營 4

칸반 景秋門수문장청 2칸 도총부 남변월랑 8칸

내군보 1칸 마영 2칸

동영 10칸 서영 8칸 남영7칸

합 25칸 철훼하여 사용

lt築墻秩gt 북장(경추문~북수각)48칸(높이 9자)

도총부 서장 20칸(높이 8자)

도총부 북장 7칸(높이 6장)

요금문 안 우물(깊이 10자)

2) 의궤와 만수전 건축의 비교

건물명 기사 사료

구 선 원

1656년(효종7) 도총부자리에 만수전 춘휘전

건립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

궤』

1687년(숙종13) 만수전소실『숙종실록』 숙종13년 9월

2일

1695년(숙종21) 춘휘전을 선원전으로 하고 숙

종어진을 봉안하다『궁궐지』

1778년(정조2) 영조 어진을 봉안하고 좌우 익

각을 첨설하다

『승정원일기』 정조2년 1

월 10일

1802년(순조2) 정조 어진을 봉안하다『승정원일기』순조2년 7월

3일

1846년(헌종12) 신실 2칸을 증축하여 순조 익

종 어진을 봉안하다

『헌종실록』 헌종12년 8월

6일

1851년(철종2) 신실 1칸 증축하여 헌종 어진

봉안

『일성록』 철종2년 5월 17

1900년(광무4) 서쪽 1칸을 증축하여 태조고황

제 어진을 봉안

『경복궁창덕궁제1실증건도

감의궤』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1655)에 만수전은 36간이고 사면에 퇴가 있으며 어칸3칸

에 동익각9칸 서익각 6칸이라고 하고 춘휘전은 20칸에 사면퇴가 있고 마루가 14칸 온돌이

6칸이라고 하였다 전체가 20칸이라고 하였으므로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추정되며 이

가운데 어칸의 마루는 천장에 봉황을 그린 봉반자이고 좌우 온돌방은 모란을 그린 목단반자

로 치장하였다고 하였다 만수전이 소실되고 춘휘전이 선원전으로 용도가 바뀌면서 건물규

모는 그대로 두고 실내를 어진을 봉안한 용도에 맞게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궁궐지』에 의하면 1695년(숙종21) 숙종이 어진 즉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춘휘전(春

煇殿)에 모시도록 하고 건물 이름을 선원전으로 했다고 하였다 춘휘전은 1656년(효종7) 효

종이 대왕대비 장렬왕후를 위해 인정전 서쪽 흠경각이 있던 곳에 지은 만수전의 부속 별당

건물이다 대비전은 정전의 동쪽에 짓는 것이 관례였으나 효종은 정전 동편에 마땅한 터가

없다는 이유로 정전 서쪽에 지었다 건립 때부터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던 만수전은 1687년

(숙종13)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이후 만수전 터에는 경복전이 들어서고 별당인 춘휘전은 한

동안 비어 있다가 이 때 숙종 어진을 봉안하는 영전으로 바뀌었다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에는 대비전인 만수전의 규모와 마루 온돌방 등의 실 구

성과 칸수 실내마감 단청종류 등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며 부속 건물에 대한 정보도 상세

하다 건물 뿐 아니라 연못 화계 담장 등 주변 조경시설의 조성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17세

기 중반 대비전의 구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만수전은 lt동궐도gt에도 남아 있지

않으며 춘휘전은 후에 선원전으로 용도가 변경되는 등 효종년간에 조성된 창덕궁의 일면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마 『집상전수개도감의궤(集祥殿修改都監儀軌)』(현종 9년 1668)

1) 공사 내용 분석

현종 8년(1667) 11월 창덕궁 인정전의 서북측에 집상전을 건축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

이다 집상전은 왕대비인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거처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대조전과

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북방향에 자리 잡았다 왕대비인 인선왕후는 왕대비전에 재변이

있어서 다른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현종은 대비를 위하여 전각 하나를 짓고자 하였다

lt동궐도gt에는 집상전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장방형의 긴 건물에 중앙부분 지붕이 좌우

측면보다 한단 높게 되어 있고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으로 대조전과 거의 같은 형식

이다 건물 왼편에는 남북방향으로 길게 행각이 놓여서 대조전 동편 행각과 연결되어 있다

이 자리에는 원래 인조년간에 지은 집상당이라는 20칸 규모의 별당 건물이 있었는데 집상당

을 헐고 새로 28칸 규모로 확장하여 대비전을 지은 것이다 현종 8년 11월 11일 집상전을

짓는 데 대한 전교를 내린다 단일 전각을 짓는 일이고 공사를 가급적 확대하지 않기 위하

여 경덕궁의 집희전(集禧殿)을 헐어 자재를 재사용 하는 등 공사의 규모가 크지 않으므로

공사를 주관하는 것을 수개청으로 하였다

제일 앞부분의 좌목은 결락되어 전체내용을 알 수 없다 그 뒤로 lt계사질gt lt이문질gt

lt감결지gt lt품목질gt lt수본질gt lt제색공장질gt로 구성되어 있다 lt계사질gt은 현종 8년 11

월 11일 왕이 자전을 위하여 전각을 지어야 할 것을 전교하는 것부터 이듬해 정월 17일까지

주요공정의 일정과 상량문 상량의 등 기사를 모았다 상량문은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이 지

었다 공사의 주관청은 수개청(修改廳)으로 정했다 기존의 건물을 허는 것은 11월 13일이고

입주와 상량은 12월 20일이었다 lt이문질gt은 주로 자재를 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는데

필요한 수레의 조달이나 새로 만들어야 하는 철물제작의 협조를 구하는 문서이다 lt감결

질gt은 사무에 필요한 각종 잡물조달과 현장의 관리에 대하여 각 관서에 명령하는 문서들이

다 감결 뒤에 여백이 있고 누락이 있는 듯 하고 lt殿額門號書寫官gt 과 이어서 각 공장과

화원 등에게 지급한 품삯 운송비 등을 종류별로로 적고 총 합을 적었다

lt품목질gt은 앞에 lsquo郎廳所掌rsquo이라고 하여 낭청의 소관업무임을 밝히고 있다 단청이나

건물을 다시 칠하는데 필요한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을 수개청 당상에게 올리는 내용이 주

를 이루고 있다 그 다음에 집희전에서 철거해 온 자재로 공사를 다 충당할 수 없으므로 부

족한 재목과 기와 등에 대해 조달처와 보충하는 자재 수량을 상세히 수록하였다 경덕궁의

집희전을 헐어 그 부재를 사용하고 부족한 것은 새로 목재를 들여와 치목하는데 들여오는

목재의 명칭은 원목의 형태이며 그 수량으로 보아 집희전 보다 규모와 형태면에서 확장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lt수본질gt은 앞에 lsquo監造官二員所掌rsquo이라고 명시하여 감조관의 소관업무임을 밝혔다 내

용은 철물을 위시하여 물건을 운반하는 썰매 돗자리 숫돌 등 자질구레한 물품의 조달이 주

를 이루고 역시 집희전에서 뜯어온 것으로 부족한 철물이나 기타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상세

히 나열하였다 품목질과 수본질에는 같은 해 공사가 있었던 영녕전 공사현장에서 쓰고 남

은 물건들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은 lt제색공장질gt로 공사에 참여한 분야의 장인을 나열하였다 화원과 각도의 화승

들이 먼저 나오고 목수 석수 冶匠 조각장 등 다양한 장인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단청을

위하여 화원 24명 화승이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원양도 등에서 50명이나 동원되었다

건물 비고 공사내용

집상전 좌우익실(온돌)포함 28칸

행각 11칸

鳳班子

신조

전면 처마 물통(溙桶) 설치

대조전 양상도회 수리 현판 골회 개칠 현판개도금

集祥殿 延秋門 延春門 景福門

日門 章華門 太極紋 正順門 長春

門 建昌門 通濟門 翠徽門 麗春門

萬春門 翠華門 浥翠門 玄武門

현판제작

2) 의궤와 집상전 건축의 비교

현종년간에 지은 집상전의 모습은 lt동궐도gt에서만 볼 수 있다 lt동궐도gt에 그림만 전

하고 있는 집상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의궤이다 집상저에 보이는 특징 가운데 지붕의

무량각 즉 용마루가 없는 점에 대해서는 이 곳이 왕이 주무시는 곳이므로 지붕에 왕을 상징

하는 용마루를 두지 않으려고 무량각으로 했다는 속설이 전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지어낸

이야기이다 창덕궁에는 대조전 외에도 집상전도 무량각 건물인데 집상전은 왕대비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무량각은 조선중기 경 중국의 영향으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의 격

식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남은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 창덕궁 대조전 창경궁 통명전이 무량각 건물이다 무량각으로 하기 위해

서는 지붕에 종도리를 두 개 설치하고 용마루에는 궁와弓瓦라는 둥글게 돌아간 기와를 따로

제작해서 설치하는 등 번거로운 공사과정이 따랐다

집상전을 짓는 부재를 충당하기 위해 철훼한 경덕궁 집희전에 대한 내용이 소략하여 그

구조나 규모에 대하여 알 수 없는 점이 아쉽다 또한 집상전의 구성에 대하여도 좌우 익실

이 있고 반자는 봉반자이며 행각이 있다는 점 외에는 앞선 창덕궁과 창경궁 관련 다른 의

궤와 달리 전각의 건축적 형태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새로 만드는 집상전 외에 주변 문들의 현판을 새로 제작하는데 『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 이후 내전 영역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으며 『만수전수리도감의궤』와

함께 대비전 조성에 대한 의궤로서 가치가 있다 lt동궐도gt에는 대조전 동북쪽에 대조전과

유사한 지붕형태를 갖춘 건물이 그려져 있고 집상전(集祥殿)이라는 편액이 묘사되어 있다

집상전은 집상당을 16년 수리하면서 당호를 고친 건물이다

바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순조 3년 1803)

건물명 기사 사료

인정전 1405년(태종5) 창덕궁 창건시 3칸으로 건립『태종실록』 태종5년 10월

19일

1) 공사 내용 분석

순조 3년(1803)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인정전을 순조 5년(1804) 4월에 재건한 기록이다

인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때 중건되었으며 인조대에 변란으로 창덕궁의

내전일곽이 대부분 소실된데 반하여 순조대까지 잘 남아 있었다 순조 3년 12월 13일 선정

전의 서쪽 행각에서 화재가 일어나 인정전이 불에 타버렸다 이 사건으로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물러난다는 하교를 내린다 바로 중건에 들어가 12월 27일 기초공사를 시작하였

으나 어수선한 정치상황과 천재지변으로 다음해인 1804년 3월 24일 공사에 소용되는 자재의

공급으로 인하여 민폐가 심하다는 김조순(金祖淳)의 상소로 잠시 중지했다가 4월 20일에 재

개한다

공사는 그해 12월에 마무리되었고 1804년 12월 27일 전의감(典醫監176))에 의궤청을 설

치하고 순조 5년(1805) 4월에 의궤를 편찬하였다 이때 중건된 인정전은 그 후 50년이 지난

철종 8년(1857)에 다시 보수하였다 1803년(순조 3) 12월 선정전 행각에서 불이 일어나면

서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져서 건물이 전소되었다177) 복구공사는 이듬해에 바로 착수되어

화재 후 만 1년만인 1804년(순조 4) 12월에 준공을 보았다178)

의궤 목록은 좌목(座目)middot시일(時日)middot도설(圖說)middot승전(承傳 부록으로 장주(章奏) 상량문

(上樑文) 의주(儀註) 반교문(頒敎文)이 있음)middot이문(移文)middot내관(來關) 품목(稟目 부록으로 식

례(式例)가 있음)middot감결(甘結)middot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middot인정전영건도감별

공작의궤(仁政殿營建都監別工作儀軌) 순이다

lt도설gt에는 인정전의 정면도와 부속물인 당가(唐家)middot오봉병(五峯屛)middot곡병(曲屛)middot당가천

장(唐家天掌)middot염우(廉隅)middot적첩(赤貼)middot허주(虛柱)middot유음(流音)middot초엽(草葉)middot연환청판(連環廳板)middot장

단청권(壯緞廳權)과 녹로(轆轤) 도설이 있다 인정전의 척량(殿宇尺量)을 소요된 재목(材木)

과 함께 상하층(上下層) 각 층별 공포(工踏) 상하층조장(上下層條粧) 당가규모(唐家尺

量) 좌탑척량(座榻尺量) 곡병척량(曲屛尺量)으로 구분하였는데 소요 부재의 치목된 명칭과

크기별 수량 길이 단면크기 목재의 원산지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도설편에 인정전 건물전체모습 오봉병 어좌(당가)의 세부 명칭과 형태 공사 시 큰 자

재를 옮기는데 썼던 운반기구인 녹노의 그림이 실렸다 큰 목재는 전라도 강원도 등 전국에

서 채취해 운반했으며 단청 안료는 경상도 장기현에서 구해오고 목수들도 서울은 물론 강원

도에서도 솜씨 좋은 사람들을 불러내서 지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2) 의궤와 인정전 건축의 비교

176) 典醫監은 의료행정과 의학교육을 관장하던 관청

177) 『순조실록』 권5 순조3년 12월 13일

178) 『순조실록』 권6 순조 4년 12월 17일

1418년(세종원) 정면 5칸으로 확장『세종실록』 태종원년 9월

10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

을 복구

1777년(정조1) 마당에 품계석 설치『정조실록』 정조1년 9월 6

1804년(순조14) 전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구됨

『순조실록』 순조4년 12월

17일

『인정전영건도감의궤』

1857년(철종8) 건물에 손상이 많아 해체하여

수리 석재도 대부분 교체 『인정전중수의궤』

1907년 순종 이어에 따라 내부 수리 『대한계년사』 수리 담당은

일본인 기사

1916년 지붕 용마루에 오얏꽃 장식 장서각 소장도면에 연대 명기

1996년 인정전 마당에 박석설치 및 행각 원

형복구

『인정전영건도감의궤』의 공사내용은 인정전 20칸과 내부 시설(당가 오봉병 등)을 다

루고 있다 『인정전영건도감의궤』에 의하면 건물 복구는 하부 월대는 기존 시설을 그대로

쓰고 목조부분만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1842년(헌종 8)에 와서 다시 한 차례 수리를

했다179)

조성내용 규모(척량) 형식

인정전 20칸 어칸 20자 변칸 각 15자 상하층 외7포 내 9포

당가 동서 145자 남북 1232자 하층 4각 상층 8각 내외 각 17포

오봉병 길이 1605자 폭 141자 두께 012자

좌탑동서 17자 남북 135자 높이 48자 난간

높이 065자 층교 난간 높이 09자

곡병

판평상 길이 72자 폭 6자 높이 05자

主壁길이 7자 폭 41자

좌우 협 각 길이 6자 폭 31자

사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순조 34년 1834)

1) 공사 내용 분석

창덕궁은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후 인조 25년(1647)에 중건하였는데 순조 33

년(1833) 10월 17일 밤 4경(四更)에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이 불에 탔고 징광루middot옥화당middot양

179) 『헌종실록』 권9 헌종 8년 윤5월 6일

주요전각 부속건물 공사내용

대조전(45칸)

水剌廚(1칸) 신조

養心閤 宣平門(25칸) 신조

隆慶軒 集祥門행각(26칸) 신조

興福軒 天香閣(20칸) 신조

내소주방 慶極門행각(255칸) 신조

凞政堂(15칸)克綏齋 복도각서행각(17칸) 신조

外燒廚房 및 서행각(35칸) 신조

澄光樓(20칸)

玉華堂(15칸) 신조

靜黙堂(10칸) 신조

행각(16칸)과 문(17칸) 신조

嚁輝門 좌우행각(5칸) 신조

建昌門(1칸) 小春門(1칸) 적묵당서협문(1칸) 협문(1칸) 내외소

주방문중문(1칸) 章華門(1칸) 통명문(1칸) 天廚門(1칸) 재덕당동

협문(2칸)

신조

옥화당이모끼중문(2칸) 嚁輝門이모끼중문(1칸) 會瑞門이모끼문(1

칸) 양심합동남이모끼문(1칸) 장순문이모끼문(1칸) 선례문이모끼

문(1칸)

신조

심합까지 연달아 탔다180) 대조전과 희정당은 보통 전각과는 다르니 계속되는 흉년에도 불

구하고 즉시 개건해야 한다는 왕의 하교에 따라 10월 26일 영건도감이 설치되었다 창덕궁

의 공사와 함께 3년여를 미루어 오던 창경궁의 환경전 일곽의 화재 복구와 함께 이루어졌으

나 영건도감은 창경궁 주자소에 각각 따로 설치되었다 의궤청은 호조 별례방에 의궤도감을

설치하여 1834년 10월에 『창경궁영건도감의궤』와 함께 의궤를 완성하였다

목록은 있으며 좌목(座目)middot각항시일(各項時日)middot도형(圖形)middot승전(承傳 上樑文儀註)middot물력

구획(物力區劃)middot이문(移文)middot내관(來關)middot품목(稟目 附式例)middot감결(甘結)middot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

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 순으로 『창경궁영건도감의궤』(1834)와 동일하다 도형에는 대조전

(大造殿) 징광루(澄光樓) 양심합(養心閤) 희정당(凞政堂)의 정면 그림이 있다

lt승전gt의 끝 부분에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의 상량문을 실었다 lt물력구획gt은 ldquo營建

物力區劃數rdquo라는 제목으로 각 지방과 아문별로 분담된 재정과 총액을 적었다 lt품목gt에는

lsquo各樣匠人一日工錢式rsquo lsquo諸色工匠等助役式rsquo 별간역이하 하급관리의 식례 목물가를 비롯한 각

종 물력을 자세히 적고 있다 lt실입gt은 『서궐영건도감의궤』 『창경궁영건도감의궤』와

같은 방식으로 각 건물별로 소용된 재료의 내역을 석재 재목 철물의 순서로 적었다 이를

통하여 공사내용을 소상히 알 수 있다

180) 『순조실록』 권33 순조 33년(1833 계사) 10월 17일

주요

전각부속건물

규모181)

(1647)

규모

(1834)

동궐

도형

석공

사목공사 비고

대조전

45칸 45칸 36칸

7량 어칸풍판 二翼工

세살청판분합 세만살단

분합

인조 25년대조전 45

칸-

어칸마루 3칸 4면

퇴마루 20칸 온돌

12칸

水剌間

(水剌廚)1칸 없음

맞배 3량

만살청판분합 8짝 만살

광창 8짝

lt동궐도gt와 거의 일

興福軒 6칸

20칸

175칸 5량 익공

淸香閣

(天香閣)

隆慶軒 9칸

26칸

6칸 익공추녀 2개- 鷄子多

里+하엽 25개

集祥門행각 22칸 lt동궐도gt와 lt동궐

도gt형이 다름

內燒廚房 255칸 196칸 5량 익공 만살청판분합

慶極門행각

澄光樓

마 루 4

온 돌 2

퇴12520칸 20칸

5량 중층 翼工

세살청판분합 만살청판

분합

고주 10개 대량 4개

종보 4개 추녀 8개

(중층)

複道閣 3칸 3량 方椽

玉華堂 105 15칸 15칸

맞배+팔작

익공

고주 8개 평주 18개

추녀 2개 대량 평

량 종량 퇴량

靜黙堂 105 10칸 10칸 5량 민도리 고주4개 추녀 2개

주요전각 부속건물 공사내용

대조전 홍판장 延春門 延秋門 판장문(1칸) 판장(7칸) 판장(1칸)

만춘헌 판장문(1칸) 융경헌 앞 판장(2칸) 문(반칸) 水剌間廚판장

(1칸) 양심합 동남 판장(1칸) 장순문판장(4칸) 재덕당판장(2칸)

신조

齊政閣과 서행각(34칸) 수보

구 소주방(10칸반) 수보

건물의 구성에 대한 설명은 칸수만 적고 있어서 17세기 의궤에 비하여 부족하지만 그

대신 각 건물에 사용된 부재는 수량과 함께 상세히 적었다

순조 33년 화재이전의 모습인 lt동궐도gt와 복구공사 후 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으며 이때

공사된 내용은 고종대 까지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lt동궐도형gt을 통하여 19세기의

창덕궁의 모습을 추론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81) 창덕궁수리도감의궤 (인조 25년 1647)

주요

전각부속건물

규모181)

(1647)

규모

(1834)

동궐

도형

석공

사목공사 비고

養心閤

25칸 235칸

5량 익공 모임지붕

세살청판분합 만살분합

고주7개 대량 7개

종량 15개 팔각주 9

개 추녀 1개

宣平門

外 燒 廚 房

및 서행각35칸 5량 일부 익공 추녀 1개

凞政堂

15 15칸 15칸

구조1고주

공포二翼工

입면세살청판분합세만

살청판분합

정면 5times측면 3

고주 4개 평주 16개

종보 4개 대주두 소

주두

複道閣

서행각17칸

克綏齋

5량 익공

세살청판분합

만살단분합 만살청판분

協陽門

嚁輝門 좌

우행각 5칸

同春門 연

(1) 1833년 창덕궁 화재의 범위

1833년 10월 17일 밤 四更에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이 불에 탔고 징광루middot옥화당middot양심

합까지 연달아 탔다 대신)과 각신들을 소견하였는데 영의정 이상황이 말하기를 ldquo궁중의

화재가 전후하여 서로 잇달아 일어난 것은 참으로 큰 재변이며 이번의 실화(失火)는 결코

심상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높게 쌓은 넓은 집이 결코 잠깐 사이에 불길이 번질 리가 없는

것이고 이미 숙직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또 제 시각에 순경(巡警)을 돌았다면 진작 발견하

지 못하고 불길이 이렇게까지 번지게 된 것은 과오의 여부를 논할 것 없이 반드시 이루어

진 까닭이 있을 것이니 끝까지 엄하게 추구(追究)하는 정사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dquo하

였다182) 이로 보면 당시 화재로 인해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 옥화당 양심합까지 불탔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을 중건한 공사가 바로 『창덕궁영건도감의궤』에 실린 것이다

당시 화재의 원인은 ldquo17일 밤 잠자던 중에 단양문(端陽門) 밖 위소(衛所)의 군사들이 떠

드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차비문 안에서 실화(失火)하였음을 알고는 불을 끄려고 급히

들어갔더니 장순문(莊順門)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몸을 밀치고 들어갔으

며 한편으로는 제정각(齊政閣)에서 수직하는 무감(武監)을 소리쳐 불렀으나 그사이에 불길

이 크게 일어나 이미 양심합(養心閤)에 연달아 번졌는데 실화의 원인은 전혀 알지 못합니

182) 『순조실록』 순조 33년 10월 17일

건물명 기사 사료

대조전

1461년(세조13) 내정전을 양의전이라 명명하고

대조전에서는 신하를 만났다고 함 따라서 이 시

기 대조전은 내정전과 다른 전각이었다고 추정

『세조실록』 세조7년 12월

19일 및 세조13년 5월 18

연산군일기에 태종 세종이 대조전에 거처하고

성종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보임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8월 22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해 복구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시 소실된『인조실록』 인조원년 3월

15일

1647년(인조25) 인경궁 경수전을 뜯어 다시 지

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34) 전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다rdquo183)라 한 것처럼 밝혀지지 않았다

1833년 화재로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 일곽의 건물들이 전소된다 이때 불탄 건물은

대조전과 주변행각 징광루와 주변건물 희정당과 주변행각이다 희정당과 대조전의 서쪽으

로는 행각들이 붙어 있어 불이 옮겨 붙기 쉬웠다 이 불로 소진된 건물을 중수한 내용이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이다 여기에 표기된 건물의 규모와 소요 부재로 추정한 건물의 양

식 등을 1647년 인조 때의 창덕궁 복구 시 조성된 내용 및 lt동궐도gt(1827~1833년) lt동궐

도gt형(1907년경)등과 비교하여 보았다

1833년의 화재 후 복구에 있어서 건물의 변경이 있었는가 1647년 『창덕궁수리도감의

궤』와 1834년 의궤의 건물 규모나 배치는 거의 유사하다 건물의 명칭에 있어서 인조대의

명칭과 lt동궐도gt는 차이를 보이지만 1834년 의궤와 lt동궐도gt의 건물명칭 및 문의 명칭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lt동궐도gt의 제작 시기는 1834년 4월 이전이 확실한 것으로 보이며(통

명전의 복구와 관련하여)lt동궐도gt가 만들어진 직후 화재가 났고 복구하면서 이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lt동궐도gt와 lt동궐도형gt에서 대조전 일곽의 차이는 무엇이며 언제 생겼는가 집상문

서쪽의 행각이 옥화당까지 길게 이어지던 것이 중간에 끊어지고 서쪽으로 더 증축되었다

집상전과 집상전동행각이 없어졌다 집상전은 화재 시 소실되었다는 기사가 전혀 없다 불이

서쪽으로 번진 것을 볼 때 피해가 없었을 수도 있다 집상전은 정조이후 기록이 보이지 않

는다 문의 명칭과 위치는 거의 일치하고 판장도 위치는 일치하나 수량이 차이를 보인다 그

러나 소실된 것을 복원하는 상황이므로 수량을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2) 대조전과 의궤

183) 『순조실록』 순조 33년 10월 18일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 다시 지음

대조전은 선정전의 동쪽 희정당의 북쪽에 있으며 건물 뒤로는 화계로 장식된 언덕이

있고 언덕 너머는 후원으로 연결된다 왕이 머무는 침소가 동온돌 왕비가 머무는 고이 서온

돌이다 궁궐의 행사가 있을 때 왕은 대조전에서 나와 선정전에서 의관을 갖추어 입고 여를

타고 행사장으로 이동하며 평상시에는 대조전에서 편복을 입고 희정당으로 나와 경연에 임

하였다 왕비는 정월초하루나 동짓날 당상관 이상의 관료 부인들을 대조전 앞마당에 부르고

하례를 받았다 이런 행사를 위해서 대조전 건물 앞에는 월대가 마련되어 있다 대조전은 내

전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신하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신하들

을 이곳까지 부르기도 하였다 1809년(순조 9)에는 마침 원자가 대조전에서 태어나자 아직

백일도 되기 전에 대신들이 대조전에 나아가 원자의 안녕을 기원하였다184)

1917년 소실되기 전의 대조전 모습은 사진자료도 남아있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의궤나 lt동궐도gt 등 시각자료를 통해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1917년에 와서 화재를

만나 1920년에 재건되었다 이때는 경복궁 교태전 건물을 헐어서 그 재목을 가지고 지었으

며 위치를 약간 동북쪽으로 옮기고 교태전의 후방 부속건물까지 함께 이축해서 이전과는 다

른 모습으로 지었다

lt동궐도gt에 그려진 대조전은 1833년의 화재로 사라지고 이듬해 1834년에 다시 지어졌

다 다시 지어진 건물형태는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 평면형태가 장서각에 도면으로

남아있다(『근대건축도면집』 2009에 수록) 도면에 의하면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5칸이며

가운데 3칸의 정청을 중심으로 좌우 9칸씩의 온돌방이 있고 사면에 퇴가 돌아가는 모습이어

서 기본적으로 1647년 재건된 건물규모와 일치한다 1834년의 창덕궁 재건과정을 기록한

『창덕궁영건도감의궤』(1834)에는 대조전의 전면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실려 있는데 지붕

이 중앙이 높고 좌우가 낮은 형태나 좌우 익실에 돌기둥이 그려져 있어서 재건된 대조전이

화재 이전과 동일한 모습임을 보여준다

한편 대조전의 실내에 대해서는 1802년(순조 2) 당시 선공감에 근무하던 이이순(李頤

淳)이 건물 수리에 앞서서 대조전 실내상황을 소상히 기록한 lsquo대조전수리시기사rsquo가 전하고

있어서 참고가 된다185)

lsquo대조전수리시기사rsquo에 의하면 당시 대조전의 실내에는 10점이 넘는 병풍이 각방의 벽을

장식하고 있었으며 그 중 정청 북쪽 벽에는 금종이로 테두리를 장식하고 일곱 학이 춤추는

그림이 있는 병풍이 걸려있고 그 앞에는 용상이 있어 그 위에 붓과 벼루 양로 등이 놓였으

며 동쪽 방에는 벽에 많은 병풍과 글씨가 쓰인 액자가 있고 서쪽 방은 작은 방이 장지로 나

뉘어져 있는데 북쪽은 큰 장이 놓여있고 바닥은 벽은 능화지로 덮이고 바닥은 기름 장판이

깔린 위에 채화석이 깔려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현재 궁중유물 중에는 십장

생 등을 그린 화려한 채색의 12폭 병풍이 있어서 이들 역시 실내에 설치된 것이 아닌가 하

는 추정을 하기도 하였다186)

184) 『순조실록』 권12 순조 9년 10월 29일

185) 『후계집』 권5 잡저 대조전 수리시 기사

건물명 기사 사료

희정당

1496년(연산군 2) 성종이 사용하던 수문당이

불이나자 수리하고 나서 건물명을 희정당으로

고침

『연산군일기』 연산군 2년

8월 19일

1608년(광해군즉위) 소실된 건물을 복구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시 소실『인조실록』 인조 원년 3

월 15일

1647년(인조 25) 인경궁 화정당을 뜯어 다시

지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 34) 전년 화재로 불에 탄 것을 다

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 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뜯어 다시 지음

20세기초에 작성된 궁궐지에는 대조전 규모는 36칸으로 적었다 lt동궐도형gt에도 건물규

모는 36칸이다 이전의 45칸과의 차이는 측면을 외부에 나타나는 툇간을 기준으로 세는지

아니면 내부 몸체의 주칸으로 세는지에 따른 차이로 판단된다 즉 측면 툇간을 기준으로 하

면 측면이 5칸이 되고 내부 몸체를 기준으로 하면 4칸이 되는데 그에 따라 측면이 5칸으로

또는 4칸으로 잡음에 따라 전체 규모를 다르게 기술한 결과이다

(3) 징광루(澄光樓)와 의궤

대조전 동북쪽에는 청기와를 덮은 2층 누각이 보이는데 징광루이다 가장 눈에 띠는 특

징은 지붕이 청기와로 덮여있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 안에 청기와를 덮은 건물이

선정전 외에도 징광루 등이 있었고 경복궁에도 있었다 징광루 역시 1647년(인조25) 인경궁

의 자재를 가지고 지은 것인데 청기와 역시 이 때 마련되었다 1917년 화재 때 징광루도 소

실되었으므로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의 징광루는 남아 있지 않다 1920년에 징광루가 있던

곳에는 경복궁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서 단층의 경훈각(景薰閣)으로 했다

(4) 희정당과 의궤

희정당은 1917년 소실된 뒤 다시 지어졌기 때문에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의 희정당은

남아 있지 않다 이후 1917년 대조전과 함께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 강녕전을 철거

해서 그 재목으로 다시 짓고 주변 행각도 크게 개조했다 특히 전면에 자동차로 입구까지

들어오도록 현관을 달아내어 본래의 건물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186) 이 12폭 병풍은 병풍 가운데 8각형의 공백이 있어서 이것이 일종의 불발기 창과 같이 실내에 설치되어 있

었덧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지만 병풍으로 제작된 점이나 크기 채색의 지나치게 화려한 점등을 고려할 때 특별

한 행사가 있을 때에 한정해서 설치하였고 평상시에는 설치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궁궐의 장

식그림』 국립고궁박물관 2007)

희정당은 침전인 대조전 앞에 남향해서 자리 잡았다 오른쪽으로는 행각을 통해서 선정

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당초의 건물 용도가 왕이 경전을 학습하는 학문소였으므로 아침에

일어나 침전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학문에 나아간다는 것을 상징하는 위치에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연산군 때 건물 이름을 희정당으로 고치면서 단순한 학문소 기능을 넘어서 정치의

장소로 바뀌었다고 짐작된다 편전이 격식을 차리고 정사를 논하는 곳이라고 한다면 학문소

는 편안한 자세로 격식에 매이지 않고 국정을 다룰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으다

유사한 사례는 경희궁의 흥정당에서 볼 수 있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지면서 처음부터 본래 편전에 해당하는 자정전이 혼전 등의 의

례공간으로 쓰고 흥정당이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희정당은 건물 형태가 상참과 같은

편전의 공식적인 의례를 거행하는데 부적한 것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상참 등은 선정전에

서 거행하고 일상적인 어전회의를 이곳에서 치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선정전이 정조의

혼전으로 활용되면서 희정당이 주로 편전의 용도를 대신하게 되었다 순종황제가 창덕궁으

로 이어한 이후에는 거의 모든 사신 접대는 이곳에서 치러졌다 이때는 건물 형태 자체가

완전히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lt동궐도gt에는 1917년 소실되기 이전의 희정당의 모습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단층 팔작지붕인데 특이한 부분은 건물 아래가 높은 돌기둥으로 받쳐

지고 바닥에서 건물로 오르기 위해서는 나무로 만든 네 개의 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안되도

록 한 모습이다 보통 궁궐의 건물은 기단을 두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일반적인데 희정

당은 그와 달리 지면에 돌로 맞은 바닥을 두고 그 위에 돌기둥을 여럿 세워서 바닥을 높이

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 것이다 전면의 돌기둥 안쪽은 비어 있는데 서쪽 끝에는 붉은 색으

로 필한 작은 네모난 부분이 일부 보인다 이 작은 네모난 부분은 온돌 바닥에 불을 넣기

위한 아궁이로 판단된다 또 동쪽 측면에는 반 칸 정도 벽을 달아내어 툇간을 만들고 이 툇

간으로 오르기 위한 별도의 나무계단도 그려 넣었다

19세기 중반 경희궁의 모습을 그린 서궐도안에 묘사된 흥정당 역시 희정당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인다 즉 흥정당 역시 바닥에 높은 돌기둥이 연속해 있고 높은 계단을 통해 실내

바닥에 오르도록 한 모습이다 창경궁의 숭문당은 그림이 아니고 건물 자체로 유사한 상황

을 보여준다 숭문당 역시 왕의 경연 장소로 지어진 창경궁의 학문소 건물이다 이 건물의

후면은 역시 돌기둥이 연속해 있고 그 위에 목조건물이 올라서 있다 또 돌기둥 안쪽은 툇

간 폭 만큼 비어있고 그 안쪽에 온돌에 불을 넣을 수 있는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다 희정당

의 그림과 동일한 구조인 셈이다 결국 창경궁 숭문당 경희궁 흥정당 그리고 창덕궁 희정

당 세 건물은 모두 동일한 형식의 건축이며 세 건물은 왕의 학문소의 기능과 연관을 가진

건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희정당은 19세기부터는 선정전을 대신해서 왕이 대신들과 국사를 논하는 편전으로 쓰였

다 이 때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희정당의 어느 부분에 왕이 임하고 대신들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궁금한 사항이다 과거 선정전이 편전일 때는 왕의 위치는 건물 북쪽 중앙이 놓

이고 그 앞 좌우로 나누어 대신들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희정당에서는 남쪽은

5칸의 마루가 있고 안쪽은 중앙 3칸에 넓은 온돌방이 있고 좌우에 작은 방이 2칸씩 있는 모

습이다 바닥이 마루와 온돌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왕이나 신하들이 모두 방석을 놓고 앉아

서 어전회의를 했다고 짐작은 되지만 과연 어느 위치에 누가 어떻게 자리를 잡았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희정당 건물 밖 동남쪽에는 네모난 연못이 있다 본래는 왕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나

서 머리를 식힐 수 있도록 꾸민 못으로 짐작되는데 후에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이 연못이 어

떤 기능을 가지게 되었을지는 짐작이 잘 가지 않는다

1917년 11월 대조전과 희정당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때는 순종황제가 창덕궁에 거처

하고 있을 때였으며 대조전은 순종이 거처하던 침전이고 희정당은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견

하는 집무실이었다 서둘러 건물 복구가 시작되었는데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러 그 재목으로

대조전을 짓고 강녕전을 헐어 희정당을 짓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공사는 3년이 걸려 1920년

에 완성되었다 새로 지어진 희정당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어졌다 정면 11칸 측

면 5칸으로 규모를 크게 키웠으며 건물 좌우로 행각이 뻗어있고 다시 남쪽으로 출입문을 갖

춘 남행각이 들어섰다 또한 출입문에는 지붕이 돌출되고 기둥 2개가 돌출한 지붕을 받치는

현관부분을 달아내었다

이렇게 해서 자동차로 현관 앞까지 진입하여 그대로 행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

다 이 과정에서 연못을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건물 동쪽 경사지에는 난방을 위해서 보일러

시설을 설치했다 또한 정전 및 행각의 창문도 서양식의 창문으로 교체되었다 대청 좌우 상

부벽면에는 대형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희정당에는 청나라에 유학하여 그림공부를 한 당대

의 이름난 화가 김규진이 「해금강총석정절경」과 「내금강만물초승경」을 그렸다 또 실내

에는 서양에서 수입해 온 탁자와 의자 등을 비치하였다 이 그림이나 가구들은 지금도 실내

에 잘 남아있다

아 『인정전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철종 8년 1857)

1) 공사 내용 분석

1857년(哲宗 8)에 昌德宮 正殿인 仁政殿을 重修한 기록이다 目錄은 座目middot時日middot圖說middot承傳

(附 奏啓 上樑文 儀註)middot移文middot來關middot甘結middot財用(附 式例)middot實入middot賞典middot工匠middot儀軌 순이다 座目에는

監董堂上 金炳冀 郎廳 趙冕鎬 別看役 姜彛五 등 5인 監董牌將 趙命燁 등 4인 看役牌將 金

再興 등 3인 畵師牌將 爐冶所牌將 등의 성명이 적혀 있다 圖說에 仁政殿 唐家 五峯屛圖

등과 轆轤圖가 있고 소요 材木들의 수효 및 尺量이 나와 있다

1854년 5월 25일 영의정 김좌근이 인정전의 중수를 발의하여 9월 23일 치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 25일 정역했다가 1857년 5월 26일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윤5월 6일에

야 중수를 마쳤다 중수도감이나 청을 별도로 두지 않고 호조에서 직접 영건을 맡았으며 의

궤 또한 호조에서 바로 1857년 윤5월 20일에 착수 12월 25일에 완성하였다

목록은 좌목(座目)middot시일(時日)middot도설(圖說)middot승전(承傳 附 奏啓 上樑文 儀註)middot이문(移文)내관(middot

來關)middot감결(甘結)middot재용(財用 附 式例)middot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 순이다

도설에는 인정전의 정면도와 부속물인 당가(唐家)middot오봉병(五峯屛)middot곡병(曲屛)middot당가천장(唐家

天掌)middot염우(廉隅)middot적첩(赤貼)middot허주(虛柱)middot유음(流音)middot초엽(草葉)middot연환청판(連環廳板)middot장단청권

(壯緞廳權)과 녹로(轆轤)의 도설이 있다 인정전의 척량(殿宇尺量)을 상하층(上下層) 각

층별 공포(工踏) 상하층조장(上下層條粧) 당가규모(唐家尺量) 좌탑척량(座榻尺量) 곡병척

량(曲屛尺量)으로 구분하였는데 소요 부재의 명칭과 크기별 수량 길이 단면크기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인정전 관련 두 의궤의 목록의 차이는 『인정전중수의궤』에는 lt품목gt항목이 빠져 있

고 lt재용gt 항목이 추가되어 있다 lt재용gt은 예산과 수급처를 적은 항목으로 앞선 『인정

전영건도감의궤』에서는 lt실입gt부분에 기록된 내용이다

2) 의궤와 인정전 건축의 비교

인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남향해서 건물을 세웠다 월대는 표면을 다듬은 화강석으로

마무리하고 했다 상부에 돌난간을 돌리고 난간 기둥에 짐승조각을 새긴 경복궁 근정전 기

단에 비하면 높이도 낮고 장식도 적지만 궁궐 정전의 간결하면서 위엄 있는 단의 모습을 잘

갖추었다 남쪽 중앙 하월대와 상월대 계단에는 왕의 가마가 지나가는 봉황을 조각한 답도

(踏道)를 두었다 하월대 전면 모서리에는 화재시를 대비해 물을 담아두는 청동 드므가 놓여

있다 본래 상월대에는 의식을 거행할 때 향을 피우는 향로가 놓여 져야 하지만 지금은 남

아있지 않다

상월대 북쪽으로 낮은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정전이 올라서 있다 정전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 정전과 마찬가지로 정면5칸 측면 4칸 규모이다 다만 기둥 간격에서는 근정전 보

다 조금 작아서 전체적으로는 근정전보다 면적이 약간 작다 기둥 위에는 전형적인 19세기

초의 내4출목 외3출목 다포식 공포를 짰다 지붕은 근정전과 같이 중층으로 꾸몄는데 창경

궁이나 경희궁 정전이 단층인 것과 구별된다 실내는 가운데 후면에 어좌를 꾸몄다 어좌는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당가(唐家)로 표기했는데 3면에 계단을 두고 당가 위에는 일월오악을

그린 병풍을 놓고 그 앞에 낮은 병픙인 곡병(曲屛)을 놓고 왕이 앉는 어좌를 두었다 내부는

상하층이 열린 구조이고 천장은 상층 지붕에만 설치되었기 때문에 높은 실내를 이루었다

천장에는 구름 사이로 두 마리 봉황이 나는 모습을 채색으로 그려 넣었다 출입문은 전면

어칸과 후면 어칸에만 있고 나머지는 하루에 머름을 댄 빗살로 된 분합문이 달렸다 창문

역시 황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에 회를 높

게 바른 양성을 하여 지붕의 격식을 높였다 조선후기 궁궐 정전의 본보기이며 건축적으로

도 가장 격식을 갖춘 중층 다포식의 전형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부분적으로 서양식 근대

문물이 가미된 건축물이다

『인정전중수의궤』는 1857년(철종8) 인정전을 부분적으로 수리한 내용이다 의궤의 인

정전 척량을 비교하여 보면 철종 8년의 수리공사는 1805년에 지은 인정전의 규모와 구성을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부재는 기존의 부재를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건된 지 약 50년 후에 수리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로서 영건시의 의궤(『인정전영건

도감의궤』)와 중수의궤 그리고 이때 보수한 건물이 현존하는 귀중한 사례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순조 5년 『인정전영건도감의궤』의 내용과 서술순서와 내용이 거의 일치하지만 일

부 부재의 크기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인정전 고주 중에서 귀고주 4개의 굵기를

보면 순조 3년 중건시보다 2치 더 큰 것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도리 창방 대보 등 기타

부재는 1805년에 지은 인정전과 같은 규모로 되어 있다

이때의 수리는 일부부재를 교체하고 단청을 손보는 등 건물의 형식은 변화가 없었던 것

으로 보인다 이후 인정전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1908년에 내부바닥과 창호를 일부

서양식으로 고치는 변화가 있었으나 상부공포 및 가구 건물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

었다

5 창덕궁 인정전 단청의 특성

가 인정전의 단청

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왕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lt사진1gt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지었지만 임진왜

란 때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에 복구되었다 이후 순조 3년(1803)

다시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중건하였는데 철종 7년(1856)에 크게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로 화강석 박석을 깐 2중 월

대 위에 세워져 있다

건물 내부는 아래위로 탁 트였는데 후면 가운데 고주 사이 뒤쪽으로 어좌를 마련하고 곡

병과 日月五嶽屛을 갖춘 용상을 설치하였다 천정은 가운데를 한 단 높여 감실 천정을 마련

하고 봉황 두 마리를 그려 넣었다 이 건물은 경복궁과 덕수궁 등 3대 궁궐의 정전과 양식

을 같이 하고 있으나 명정전과는 다르고 근정전과는 시기 수법상 앞서고 있어 가장 표본이

되는 것이다

단청은 건물 외부는 근래들어 수차례 부분적으로 새로 칠한 것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과거

의 상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외부단청이 겉보기로는 강한 색조에

생경한 느낌이 드는 반면 내부단청은 장중하지만 낡은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건물 내부의

어좌와 용상 일월오악병 등은 근래 새로 제작한 것이며 기둥의 석간주 가칠도 최근에 새로

칠한 것이다

lt사진17gt 창덕궁 인정전의 내부 모습

나 인정전 단청과 의궤

의궤란 국가나 왕실에서 주도한 건축공사의 시말을 정확히 기록하여 후세에 남길 목적으

로 편찬된 문헌을 말한다 창덕궁에 대한 의궤는 모두 9건으로 현존하는 궁궐 영건 관련 의

궤 가운데 반이 넘는다 이 가운데 창덕궁내 현존하는 건물과 관련된 영건의궤 중에서 단청

공사와 관련된 의궤는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 순조 5) 『인정전

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1857 철종 8)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

(1834) 『경복궁 창덕궁선원전일실증건도감의궤』(1900) 등 4종이 있다

의궤의 내용 중에서 단청과 관련된 것은 대체로 공사에 사용된 안료의 명칭과 사용량 정

도로 정보가 국한되어 있다 기록을 통해 당시에 사용한 안료별 명칭과 색상 품질특성 입

수경위와 원산지 등을 알 수 있지만 채색방법 작업 진행상황 등에 대해서는 상세히 파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당시 단청공사의 전모나 현존하는 건물의 단청안료를 이해하

는데 가장 확실한 길잡이가 된다 특히 인정전의 경우 단청공사를 38일 만에 완성했다거나

뇌록 주토 정분 등은 사용량과 공납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인정전과 직결된 『인정전영건도감의궤』와 『인정전중수의궤』의 단청관련

기록을 조사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다

다 연구조사 방법

우선 2008년 실시한 인정전의 내부 단청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 결과를 재정리 하였다 당

시 조사 항목은 색상별 색도 측정 현미경 촬영 안료 성분분석 등이었다 내부 단청이 주

대상이었지만 건물이 중층이라서 실내의 높이가 너무 높아 다양한 부분에 대한 조사가 불가

능하였고 그래서 접근이 가능한 부재이면서 단청이 잘 남아있는 퇴량[들보]와 익공 한 부분

을 조사한 것이다lt사진2gt

조사한 자료를 종합하여 사용된 안료의 이름과 채색 특성을 밝혀 낸 다음 그 결과를 2종

의 의궤에 등장하는 안료명과 비교 확인해보았다

lt사진2gt 인정전 들보의 단청조사

라 의궤 기록과 현존 단청안료의 비교 고찰

1) 의궤의 안료 종류와 그 특성

인정전 의궤 2종의 실입질 물목(物目)을 통해서 단청작업에 사용된 재료의 대강을 파악

할 수 있다 특히 색재료는 20여 종의 다양한 안료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lt표1gt

현대 단청공사 보다 더 다양한 종류의 안료가 쓰였던 것이다 현재 이들 안료의 정체를 모

두 명확하게 확인해 내기는 불가능하지만 기록된 명칭을 통해 그 대강을 색상별로 묶어보면

적색 황색 녹색 청색 그리고 흑백으로 파악할 수 있고 같은 색상이라도 몇 가지 종류의

안료를 혼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용된 안료의 명칭을 통해 안료의 산지와 품질 특성

색상의 채도 차이 등을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도 있었고 광물성 안료만이 아니라 식물성

염료로 생각되는 편연지와 석자황도 함께 사용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안료별로 사용된 양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어떤 안료가 어떤 목적에 활용되었

는지 안료별 계량 단위차이를 통해 재료의 상태도 짐작이 가능하다 가칠 즉 바탕칠에 사용

된 뇌록과 석간주의 양이 가장 많았고 흰색인 정분과 진분도 다량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들

안료는 斗(말)로 계량하였고 뇌록 가칠에 280斗 석간주 가칠에는 황주주토 113斗를 비롯해

편연지와 당주홍 석간주가 함께 사용되었다 특히 흰색 안료로써 정분이 300斗 다량 사용되

었는데 용도는 흰색 재료 뿐만 아니라 가칠안료와 혼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부분의 안료는 무게로 계량하였는데 분말이라는 재료에 적합한 단위가 된다 무게를 근

(斤) 량(兩) 전(錢) 분(分)까지 정확히 기록하였다 이밖에 편연지는 장(張)으로 계량해서

낮장[片]으로 계산이 가능한 안료로 파악되었고 금박은 묶음[束]으로 액체인 송유는 사발

(沙鉢) 단위로 기록했다

50여년의 시기 차이가 있는 두 종의 의궤기록을 비교해 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

로 안료의 종류와 가짓수 그리고 사용한 양까지 비슷한 점을 알 수 있다 1856년 인정전 중

수시 단청공사는 완전히 새로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50여 년 후 단청재료에서 가장 큰 변

화가 있었던 점이 황주주토로 가칠한 부분이 석간주로 대체된 것이다 당시 황주주토의 수

급이 어렵게 되자 석간주로 대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주홍과 왜주홍 당황단 등은 주홍 황단이라는 안료 이름에 접두사를 붙여서 수입처 또

는 원산지를 나타낸 예도 있다 당은 중국을 왜는 일본을 포함한 동남아산으로 보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磻)과 상(常)의 의미는 불분명하다 접두어로 석(石)을 붙인 점은

재료가 광물이라는 뜻이겠지만 가공하지 않은 원석이라는 의미도 내포된 것 같다 예를 들

어 웅황(雄黃 orpiment)은 석황으로도 불리는 데 화산지대에서 많이 산출되는 것으로 알려

져 있다 화학식은 As2S3 황화비소이다 반면 자황(雌黃 gamboge)은 식물성 천연수지로 알

려져 있다 동황(同黃)으로도 불린다 천연광물인 웅황에 석자를 붙인 것은 원석이라는 표현

일 수 있으며 자황에 석자를 붙인 이유는 불명이다

한편 양(洋) 자가 붙은 안료는 대체로 서양 수입품이라는 의미가 있다 여하튼 1857년 인

정전중수의궤에 등장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19세기 중반까지는 서양에서 제조

한 인공안료는 아직 수입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의궤문헌

색상

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 仁政殿重修儀軌(1857)비고(안료광물명)

안료명 사용량 안료명 사용량

적색계열

石磵朱 28斤 石澗朱 602斤 산화철 Iron Oxide

黃州朱土 113斗 산화철 Iron Oxide

片臙脂 1211張半 片臙脂 1467片

唐朱紅 208斤 4兩 唐朱紅 148斤 朱砂 cinnabar()

磻朱紅 264斤 鉛丹 Red Lead()

倭朱紅 4斤

황색계열

唐黃丹 230斤 3兩 3錢 唐黃丹 231斤 14兩 黃丹

常黃丹 90斤 11兩 常黃丹 2斤

石雄黃 2斤 1兩 5錢 雄黃(石黃) As2S3

石紫黃 12斤 以上 石紫黃 17斤 Gamboge()

同黃 47斤 1兩 5分 同黃 36斤 Gamboge()

녹색계열

磊碌 280斗 磊碌 200斗 磊碌石 Ceradonite

石碌 23斤 5兩 石碌 15斤 孔雀石 Malachite

荷葉 268근 8兩 5錢 荷葉 256斤 짙은 녹색

三碌 338斤 三碌 396斤 8兩 연한 녹색

청색계열

靑花 115斤

二靑 44斤 12兩 7錢 4分 二靑 43斤

三靑 66斤 3兩 三靑 43斤

흰색계열丁粉 300斗 丁粉

154斗 9升 2合

5勺정분

(Calcite CaCO3)

眞粉 276斤 4兩 眞粉 229斤 연백(Lead White) 2PbCO3middotPb(OH)2

흑색[墨] 松煙 먹()

금박 金箔 46束 4貼 7張 金箔 59束

금속 白銅 13兩

전색제 阿膠 583斤 阿膠 700斤

기 타 松油 257沙鉢

lt표27gt 인정전 儀軌에 등장하는 단청물목의 안료명과 사용량

2) 현존하는 인정전 단청에서 확인된 안료와 전색제

의궤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인정전의 단청에는 20여 종의 안료가 사용되었다 현존하는 인

정전 단청을 조사한 결과를 이용해 의궤에 등장한 안료의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lt표2gt 그

결과 적색계열의 안료에서는 석간주와 황토를 황색계열에서는 황단 웅황 등 기록에 등장한

안료 대신 새롭게 황토를 확인했으며 녹색계열에서는 뇌록과 석록을 찾을 수 있었다

청색계열은 그 존재를 밝혀내지 못했다 다른 안료에 비해 사용량도 적어 모로단청 이외

의 부분이나 기물 중요 건물부재 등의 채색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흰색의 경

우 다량의 정분과 함께 지당(地堂 TiO2) 백토를 확인했지만 진분은 찾을 수 없었다 금박

위치 색상명 근사색

색차(lab)

실체현미경박편현미경

(x200)화학성분 안료화학조성

L a b

기둥 석간주 3479 1801 1358

C 2640

Si 2216

Fe 1487

O 1288

Ca Na Mg

Al Cl K

정분 CaCO3

석간주황토Fe2O3

백토

Al2O3middotSiO2middot4H2O

문턱 뇌록 4229 -141 1087

Ca 3756

Ti 2173

O 1306

C 865

Fe Mg Al

Si Cl

정분 CaCO3

지당 TiO2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들보 백색 6415 225 1669

C 3387

Si 2116

Fe 1356

K 1131

O 1032

Ca Ti Mg

Al S Cl

정분 CaCO3

황토 Fe2O3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지당 TiO2

문틀

(우측)황색 5078 741 2749

Fe 9634

O 270

Ca K

황토 Fe2O3

정분 CaCO3

익공 하엽 4468 -863 879

Cu 7980

Cl 1603

O 225

Ca S

석록CuCO3Cu(OH)2

정분 CaCO3

lt표2gt 인정전 단청의 색상별 과학적 분석표

과 백동 또한 확인이 불가능했다 금박은 단청의 선에 특별하게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

의궤에 기록된 안료 중에서 현재 확인된 것은 석간주와 주토 뇌록 석록 정분 등 몇 가

지 종류밖에 없다 그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안료는 사실 우리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

는 안료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아직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조사한 지점이 들보의 모

로단청 한 곳이라는 것도 한계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앞으로 고대 안료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과 함께 조사 대상을 넓혀서 진행한다면 대부분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믿어진다

이들 안료는 전통 전색제인 아교(阿膠)와 섞어 채색을 하였으며 단청 후 표면에는 기름을

발라 내구성을 높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정전의 경우 송유[松精油 terpentine]를 이러

한 용도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건물의 경우 관련 의궤를 통해 확인한 결과 명유

(明油)와 법유(法油)가 활용되었다 이들 유기물질의 사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습득한 시

료를 퓨리에변환 적외선분광분석기(FT-IR)로 분석하였지만 전색제로 아교가 사용된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들보 육색 5174 1326 1006

Si 2175

Fe 1847

C 1566

Ca 1397

O 1230

Mg Al K

정분 CaCO3

석간주Fe2O3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익공 하엽 4334 -830 1322

Cu 2939

Si 2938

Fe 1241

O 979

K 823

C Mg Al

석록CuCO3Cu(OH)2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안병찬 등 『궁궐채색기술 특성규명 연구 보고서』국립문화재연구소(2008) 81쪽의 ltTable 23gt을

보완함

3) 단청 공사와 재료 수급 내용

인정전 영건시 상하층 건물의 단청 공사가 1804년 11월 6일에 시작되어 12월 13일에 끝났

음을 알 수 있다 공사기간이 38일로 상당히 짧았고 특히 늦가을에서 초겨울사이에 진행되

어 채색작업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1804년 10월 서울의 화사

(畵師)만으로 감당하기에는 인정전 단청공사의 규모가 너무 커 강원도 경기도 총융청 등에

서 화사를 구해 보낼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청공사에 동원된 인원이 총 몇 명인

지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각종 재료의 수급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황주주토는 황해감영에 상납을 지시하였고 뇌록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상감영에 상납을

명했다 단청용 붓을 만드는데 쓸 집돼지털 200근을 평안도 황해도 개성부 등에 나누어 정

했고 아교 제작에 필요한 쇠가죽 70장을 수원부 개성부 관주부에 나누어 정한 기록도 보

인다 다량의 주토와 뇌록안료는 물론 단청 채색에 필요한 다량의 붓과 아교도 중요 물목이

었는데 이들은 완제품 보다는 원료상태를 공출해 작업 현장에서 직접 제조 가공하여 활

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창덕궁영건도감의궤』에는 1833년 11월의 내관으로 황해도에 분정된 法油 丁粉

正鐵 强鐵 石灰 등을 고을별로 책임을 적은 기록도 있다 이 가운데 정분 300말을 장연에

배정한 내용 강원도에 분정된 法油 松煙 生葛 木賊 楡皮 등의 고을별 할당량을 적고 이

가운데 송연은 金城 淮陽 金化 平康 寧越 平昌 旌善 등 고을에 분정하였으며 느릅나무

껍질인 유피는 橫城 洪川 麟蹄 狼川 寧越 平昌 旌善 등지에 분정하였다는 내용 그리고

집돼지털 50근을 평안도내 여러 고을에 분정한 내용도 담고 있다

마 인정전 단청의 문양 특성

인정전 단청은 부재별로 다양한 문양이 활용되고 있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모로단청을 들

목과 창방 평방 등의 머리초를 대표 예로 들어 간략히 기술한다

대체로 연화병머리초를 기본으로 삼고 원연화병머리초를 변형으로 활용했다 즉 창방을

연화병머리초로 하고 그 위의 평방은 원연화병머리초로 변화를 주었다 휘도 부재별로 차이

를 두었는데 대들보의 휘는 복잡하고 화려한 바자휘로lt사진3gt 창방과 평방은 그보다 단순

한 인휘로 통일해 표현했다 휘의 색은 적 청 황 석간주를 2빛으로 전개하다가 뇌록바탕에

양록실 황실 먹실로 마감해 밝고 장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러한 연화병머리초 문양은 창덕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의 단청에 빠짐없이 활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해 내전을 겸한 침전으로 대조전(보물 제

816호) 편전(便殿)인 희정당은 물론 궁내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던 건물인 구선원전(보

물 제817호)과 신선원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lt사진4 5gt 즉 창덕궁 인정전의 연화병머리

초는 왕실을 상징하는 단청문양인 것이다

lt사진3gt 인정전 대들보의 연화병머리초 바자휘 단청

lt사진4gt 대조전 창방의 연화병머리초직휘 단청

lt사진5gt 희정당 창방의 연화병머리초직휘 단청(현대)

이상과 같이 창덕궁의 단청 특성을 인정전 단청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인정전은 창덕

궁의 정전으로 가장 중요한 건물이면서 단청을 포함한 공사 내역을 기록한 의궤도 2종이나

되어 과거 단청을 연구하는 데 문헌기록도 잘 남아있다 또한 인정전의 내부 단청은 현존하

는 궁궐단청 중 가장 오래된 것 가운데 하나로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인정전을 중심으로 창덕궁 단청을 논하고자 한 이유는

가 두 종의 인정전 관련 의궤를 통해 과거 단청공사 기록을 잘 파악할 수 있다

나 인정전 내부 단청은 현존하는 궁궐 단청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 일부분 수리 개칠이 되었지만 과거 단청이 잘 남아 있다

라 인정전 단청의 안료를 과학적으로 조사한 자료가 있어서 비교가 가능하다는 점

등이다

의궤의 내용과 현존하는 단청의 안료와 공사내역을 비교한 결과

가 의궤의 기록에 따르면 20종이 넘는 다양한 안료가 사용된 반면 현존 단청에서는 겨

우 5종의 안료가 확인되었다 확인되지 않은 안료는 당주홍 왜주홍 당황단 석자황 등 그

정체가 확실치 않은 안료들이다 특히 청색은 청화를 비롯해 이청과 삼청인데 이들 청색은

육안으로도 확인이 불가능했다 앞으로 이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나 인정전의 단청 공사는 1804년 11월 6일에 시작되어 12월 13일에 끝나 공사기간이 38

일로 상당히 짧았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진행되어 작업에 상당

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 단청안료 중 무엇보다 중요하고 다량 소요되는 가칠안료로서 황주주토는 황해감영에

서 뇌록은 경상감영에서 공납을 받았으며 붓의 재료인 되지털과 아교 제작에 필요한 쇠가

죽 등을 원료상태로 지방의 도와 부에서 나누어 공출한 기록도 확인하였다

라 50여년의 사이를 두고 벌인 두차례의 인정전 단청공사에서 가장 큰 색재료의 변화는

붉은색에서 일어났는데 최초에는 황주주토를 사용했던 가칠이 보수공사 시 석간주가칠로 교

체된 점이다

마 인정전의 대표적인 모로단청 문양은 연화병머리초인데 이 문양은 대조전과 희정당은

물론 선원전 등 창덕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에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로 요약된다

단청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의외로 미지의 상태로 남아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연구 관점이 전통 문양에만 편중되어 있고 재료와 기술연구에는 근거가 부족하

여 체계적이지 못한 경향이 있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있는 단청자료를 과학적

으로 조사하면서 고문헌 기록과 비교 검토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시급히 보완해

야 할 점은 현존하는 단청자료를 함부로 벗겨내고 재시공하지 않는 일이다

lt참고문헌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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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창덕궁 궁역 궁성 궁성문 궁장문 문로

가 궁역

1) 조선 전기

『세조실록』 27권 8년(1462) 1월 30일(을축)

처음에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의 후원(後苑)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쪽 원장(垣墻)을 넓혀서 쌓으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공 제조(繕工提調)에게 명하여 그 기지(基址)를 살펴서 정하게 하니 주위의 둘레가 모두 4

천 2백 척(尺)이고 그 안에 인가(人家)가 모두 73채였다 명하여 2월까지 모두 철거(撤去)하게 하고 그 집

주인에게 3년 동안 복호(復戶)하여 주고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그들이 원(願)하는 바에 따라 빈 땅을 절

급(折給)하게 하였다

『세조실록』30권 9년(1463) 2월 7일(병인)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창덕궁(昌德宮)에 거둥하여 궁장(宮墻)을 보고 기지(基址)를 넓게 쌓도록 하였

다 이 앞서 궁장을 넓히고자 하여 궁(宮) 동북동(東北洞)의 인가(人家)를 철거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또 북

쪽 고개 밑의 인가 58구(區)를 철거하니 주위(周圍)가 무릇 4천 척(尺)이었다 행 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

院事) 김개(金漑)middot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이석형(李石亨)middot한성부 윤(漢城府尹) 권반(權攀)middot공조 참판 이연손

(李延孫)middot인순부 윤(仁順府尹) 황효원(黃孝源)을 제조(提調)로 삼고 군기 판사(軍器判事) 황신(黃愼)middot사복 판

사(司僕判事) 박서창(朴徐昌)middot군기 부정(軍器副正) 한치의(韓致義)middot공조 정랑(工曹正郞) 성율(成慄)middot한성 소윤

(漢城少尹) 신승선(愼承善)middot선공 주부(繕工注簿) 강치(姜致)를 낭관(郞官)으로 삼아 도성 방리인(都城坊里人)

을 다 징발하여 통(統)을 나누어 쌓으니 1백 19가(家)로서 1통(統)을 삼고 1통(統)이 쌓은 것이 25척(尺)이

었다 통(統)은 대개 1백 60이고 통(統)마다 모두 직질(職秩)이 높은 인원(人員)으로서 주관하게 하여 오늘

부터 역사를 시작하였는데 전교하기를 ldquo동쪽 고개[東岾]도 또한 이 주산(主山)의 내맥(來脈)이다 성 밖에

있게 되면 마땅하지 못하니 다시 넓히도록 하라rdquo 하니 이에 또 4백 척(尺)을 물리었다

『세조실록』30권 9년(1463) 2월 9일(무진)

좌의정 권남(權擥)이 아뢰기를 ldquo성균관 반수(成均館泮水)는 청컨대 신축(新築)하는 궁장(宮墻) 안에 넣지 말

게 하소서rdquo 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어서(御書)를 보이기를 ldquo뭇사람이 옳지 않다고 하는 일을 내 어

찌 하며 백성을 수고롭게 하여 원망을 취하는 역사를 내 어찌 일으키겠는가 궁성(宮城)의 역사는 부득이함

이 있어서 세상이 예로부터 서로 이어 왔으니 지난해 이어(移御)한 일 같은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선왕(先

王)이 수궁(數宮)을 설치한 소이(所以)이며 제경(諸京)을 설치한 뜻[意]이다 창덕궁(昌德宮)은 동산[苑]이

협애(狹隘)하니 후세의 인주(人主)로 유람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어 반드시 크게 토목(土木)을 일으킨다면

존망(存亡)의 형세를 입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런 연고로 음양(陰陽)을 인하여 장구(長久)한 방술

[術]을 삼아서 잠깐 수고롭더라도 길이 편안케 할 뿐이다 반수(泮水)가 동산[苑]에 들어오는 것은 의논한

바가 아니니 하나의 고(苽)6057) 를 소민(小民)에게서 빼앗는 것도 불가하거든 하물며 선사(先師)에게서

반수(泮水)를 약탈하겠느냐 또 반수(泮水)란 3면(三面)이 물로 둘러싸인 것이지 내[川]가 흐르는 것이 아니

다 고례(古禮)에 lsquo때를 따라 손익(損益)하지 않음이 없다rsquo 하였는데도 구구(區區)하게 외모(外貌)로써 한다

면 보름새 베[緦]를 살피는 것이다 만약에 반수(泮水)를 폐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내가 마땅히 유생(儒

生)으로 하여금 스스로 파게 할 것이다 어찌 나의 적개심(敵愾心) 있는 장졸(將卒)로 하여금 토목에 피로하

게 하겠느냐rdquo 하고 이어서 술자리를 베풀고 권남(權擥)에게 의롱(衣籠) 1사(事) 호피(虎皮)middot표피(豹皮)middot큰

녹비(鹿皮) 각 1장(張)을 여섯 승지(承旨)에게는 큰 녹비(鹿皮) 1장씩을 내려 주었다

『연산군일기』 51권 9년(1503 계해 명 홍치(弘治) 16년) 11월 12일(을해) 4번째기사

병조 판서 강귀손(姜龜孫)과 공조 판서 정미수(鄭眉壽) 등이 돈화문 동쪽에서 단봉문(丹鳳門)까지의 궁장 밑

인가 20여 곳을 적어서 아뢰기를 ldquo법을 범하고 지은 집을 전번 적간(摘奸)할 때 미처 적어 올리지 못하였

으니 철거하게 하소서rdquo 하니 그대로 좇았다

『연산군일기』 51권 9년(1503 계해 명 홍치(弘治) 16년) 11월 13일(병자) 7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타락산(駝駱山) 밑 조영철(趙永哲) 등 27인의 집을 철거하고 요금문(曜金門) 밖의 김명철(金命

哲) 등 49인의 집과 돈화문에서 단봉문(丹鳳門) 밖까지의 박막동(朴莫同) 등 24인의 집도 함께 철거하라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62권 12년(1506 병인 명 정덕(正德) 1년) 6월 22일(경오) 3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창덕궁의 성을 경복궁의 성에 의해 쌓고 돈화문을 다시 짓되 높고 크게 하며 또 하마비(下馬

碑) 모퉁이에 문을 내라rdquo 하였다

2) 조선 후기

『광해군일기』 158권 12년(1620 경신 명 만력(萬曆) 48년) 11월 15일(무자) 3번째기사

전교하였다 ldquo거둥 때 치는 엄고(嚴鼓)가 다 깨지고 몸통도 작고 하여 보기에 너무 볼품이 없다 평상시처럼

종을 빨리 주조하여 돈화문(敦化門) 위에다 매달아두라 그리고 거둥 때 쓰는 엄고도 급히 다시 만들어 쓰도

록 하라 이를 해조로 하여금 각별히 거행하게 하라rdquo

『효종실록』 9권 3년(1652) 10월 28일(병인)

상이 병조에 하교하여 도방군(到防軍) 1백 50인을 내어 궁장(宮墻)의 나무를 베게 하고 또 공조middot한성부에

명하여 내시와 함께 궁장을 순심(巡審)하여 더 쌓고 궁장 밖 여염집의 담이나 지붕이 궁장에 잇닿은 것을

모두 헐게 하였다 이때 변괴가 날마다 나타나서 인심이 어수선하므로 상이 신변을 걱정하여 이 조처가 있

었는데 도하(都下)가 이 때문에 놀랐다

『효종실록』 15권 6년(1655) 11월 23일(계묘)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ldquo수리하는 일에 대해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요금문(耀金門) 안의 지형이 몹시 비좁다 궁장(宮墻)의 안에는 모름지기 내장(內墻)이 있어야

하고 내장의 안에는 모름지기 층루(層樓)를 세워야 하는데 누각이 내장에 들어서고 나면 전연 남는 땅이 없

을 것이니 이것도 또한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두 담장의 사이가 1장(丈) 남짓도 안 되니 순라가 왕래하

자면 어떻게 통행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도랑을 안으로 들이어 따로 궁장을 그 밖에 쌓아야만 순라가 왕

래하는 길이 들어설 수 있고 체모나 형세가 마땅함을 얻을 것이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rdquo 하니 부제학 김

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ldquo궁성(宮城)의 옛 제도를 넓히기는 어려울 듯합니다rdquo 하고 호조 판서 허적(許

積)이 아뢰기를 ldquo순라의 길이 단지 담장 하나를 사이로 두고 있다는 것도 또한 몹시 온당치 못한 일입니

다rdquo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ldquo나의 뜻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경들과 가부를

상의하려는 것이다rdquo하니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ldquo외부 사람의 말소리가 필시 궁안에 들릴 테

니 일이 몹시 난처합니다 그러나 익희의 말도 또한 유념해야 합니다rdquo하고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

뢰기를 ldquo지금 비록 넓히려 한다 하더라도 요금문으로부터 홍문관에 이르기까지 곡장(曲墻)의 제도를 사용한

다면 민가를 철거하는 것이 많은 양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rdquo 하였다 상이 설계도를 가져다가 보았는데

심지원이 아뢰기를 ldquo신이 일찍이 2백 60 70십 칸의 재력(財力)을 헤아려 보았는데 도합 재목이 1만여 조

(條)가 들어 3천 석의 쌀과 4백 동의 포(布)를 써야 하니 공역이 너무 방대해서 일이 몹시 우려할 만합니

다 칸수를 줄여서 비용을 절약하고 민폐를 더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rdquo 하고 익희가 아뢰기를 ldquo대신의 말

을 부디 유념하소서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공역이 어찌 여기에 이르겠는가rdquo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ldquo흠경각(欽敬閣)도 철거할 것입니까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철거하여 그 목재와 기와를 쓰고 총부(摠府)의

목재와 기와는 도로 총부에 주는 것이 좋겠다rdquo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ldquo총부와 옥당을 옮길 장소가 없습

니다rdquo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상의원은 창경궁 안으로 옮기고 옥당과 총부를 상의원 근처에다가 옮겨 짓는

것이 타당할 것같다rdquo 하였다

나 궁성문 궁장문

1) 궁성문

(1) 조선전기의 궁성문

① 돈화문

『태종실록』 23권 12년 5월 22일(을사)

도성(都城) 좌우의 행랑(行廊)이 완성되었다 궐문(闕門)에서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까지 행랑이 4백 72

간이고 진선문(進善門) 남쪽에 누문(樓門) 5간을 세워서 돈화문(敦化門)이라고 이름하였다 의정부에서

창덕궁(昌德宮) 문 밖의 행랑을 각사(各司)에 나누어 주어 조방(朝房)으로 만들 것을 청하고 또 아뢰었다

ldquo금년 가을에 행랑(行廊)을 수리하고 장식하는 일과 창고(倉庫)를 조성(造成)하는 등의 일에 유수(遊手)승도

(僧徒)와 대장(隊長)대부(隊副)로 하여금 역사에 나오게 하소서rdquo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24권 12년(1412 임진 명 영락(永樂) 10년) 9월 15일(정유) 2번째기사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돈화문(敦化門) 누각의 종명(鐘銘)을 짓게 하였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ldquo금상(今上) 13년 겨울 10월 일에 유사(攸司)에 명하여 종(鍾)을 주조하여 궁문(宮門)

에 달게 하시니 대개 고제(古制)를 따름이라 공덕을 새기고 또 군신(郡臣)의 조회하는 기회를 엄하게 하는

까닭이 됩니다 위대하도다 생각하건대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이미 훈덕

(勳德)이 높으심에 인심(人心)이 날로 돌아와 붙었으나 참소[讒]를 얽어대는 말이 비등하여 화란의 조짐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마침 제릉(齊陵) 곁에서 여막을 사시다가 일이 급함을 듣고 곧 오시

어 기미(幾微)에 응해 제재하시고 드디어 훈친(勳親)이 창의(倡義)하여 추대함으로써 대업(大業)을 세우셨습

니다 그 뒤 간신(奸臣)이 다시 난(亂)을 꾸미는 자 있었으나 우리 전하께서 즉시 평정하여 사직(社稷)을 안

전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아버이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시니 덕이 이보다 더 성함이 없고 나라를

열고 사직을 정하시니 공이 이보다 큼이 없으므로 진실로 종(鍾)과 정(鼎)에 명(銘)을 새겨 만세에 보이심이

마땅합니다 즉위하신 이래 하늘을 공경하고 대국을 섬기시어 다시 제명(帝命)을 받으심으로써 조상의 공훈

을 빛나게 하시고 성학(聖學)이 계속하여 밝음에 지극하여서 다스림이 융성함에 이르렀습니다 신종(愼終)과

보본(報本)하는 정성과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기르시는 어지심에 이르러서는 상경(常經)을 세우고 강기(綱

紀)를 펴신 넓은 규모와 큰 책략이 모두 다 백왕(百王) 위에서 높이 나왔습니다 이제 또 특명으로 종을 달

게 하심으로써 새벽과 밤의 한계를 엄히 하시니 자강불식(自彊不息)하고 서정(庶政)에 부지런히 힘쓰심으로

써 만세의 태평(太平)에 기초를 잡으신 까닭이 지극하고 유택(流澤)이 길고 해를 지남이 오래이기에 마땅히

이 종(鍾)과 같이 한없이 내려갈 것은 틀림없습니다 아 성하도다 또 그 꾀를 내고 힘을 바쳐 공훈의 맹세

에 참가한 사람들도 모두 뒤에다 새겨 이를 불후(不朽)에 전함이 옳겠기에 신(臣) 변계량(卞季良)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명을 지웁니다rdquo

명(銘)은 이러하였다

ldquo빛나도다 성조(聖祖)시여 동토(東土)에 강생하여 하늘의 경명(景命)을 받아 처음으로 큰 복을 열으셨도

다 예전 고려 말년에 정사가 흩어지고 백성이 유리(流離)하매 하늘이 우리님의 덕을 돌보아 인심(人心)이

돌아왔으나 이때에 참소하는 사특한 무리가 그 뭇사람의 마음을 좀먹어 우리를 모략함이 너무 급하매 화란

이 아침저녁으로 임박하였도다 효도롭다 성자(聖子)여 묘막에서 오시어 신기(神機)를 결정하니 진실로 어

려움이 형통하여 해가 솟아 오르듯 넓게 통하며 크게 빛났도다 이어서 얼아(孽芽)가 돋아 틈을 타서 위태함

에 다달았으나 하늘이 태조에게 후(厚)하여 그 후손을 창성하게 하시고 우리님에 이르러 저 여러 악당을 쓰

러뜨리니 여러 어진이가 꾀를 합하고 좌우에서 도우니 인륜이 크게 펴지고 종사(宗社)가 길고 오래리라

다시 높은 공을 세움은 실로 우리님이시나 공이 높되 차지 않고 덕이 성하되 차지 않으니 천감(天鑑)이 매

우 밝아 보우(保佑)를 이에 아뢰었도다 제명(帝命)이 거듭 이르니 용위(龍位)를 받음이 이대로다 금보(金

寶)는 빛나고 크기가 말[斗] 같도다 천총(天寵)이 잦으심은 전고에 으뜸이라 내 서울로 돌아와서 조무(祖

武)를 잘 잇고 조심조심 효성하여 끝까지 어김 없이 기강을 세우시니 모든 법도 밝아졌도다 신야(晨夜)를

엄히 하여 이 종을 매달으니 백사(百司)가 직에 힘써 감히 어김이 없고 면면(綿綿)한 종묘middot사직 천지같이

길고도 오래리라 내 절하고 명을 지어 무강(無彊)에 보이노라rdquo 호조 판서 한상경(韓尙敬)에게 명하여 이를

쓰게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ldquo공신으로 맹세를 위반한 자는 청컨대 그 이름을 삭제하게 하소서rdquo 하

니 임금이 ldquo역대(歷代) 공신의 선악(善惡)은 모두 전하니 비록 삭제하지 않더라도 가하다rdquo 하였다 정부에

서 맹약을 위반한 자의 명단을 모두 써서 다시 청하니 임금이 ldquo정도전(鄭道傳)middot장지화(張志和)middot심효생(沈孝

生)middot이근(李懃)middot신극례(辛克禮) 같은 자는 마땅히 모두 기록하게 하라rdquo 하였다

정부에서 또 ldquo종정(鍾鼎)에다 이름을 새기는 것은 만세(萬世)에 밝게 보이심이니 충성과 간사함이 서로

섞여서는 특히 불가한데 그 중에서도 신극례는 녹권(錄券)을 거두지 않았으니 혹시 아울러 기록함이 옳겠

습니다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25권 13년(1413 계사 명 영락(永樂) 11년) 1월 27일(정미) 2번째기사

큰 종[大鐘]을 주조하여 완성하였다 애초에 제도(諸道)의 주철(鑄鐵) 1만 5천 근(斤)을 거두어 주조하게 하

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자청(朴子靑)이 대장(隊長) 1천명으로 경성에 실어 들여오니 상호군 현귀명(玄貴

命)에게 명하여 내온(內醞)을 내려 주어 위로하고는 이를 돈화문(敦化門)에 매달았다

(2) 조선후기의 궁성문

『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지

남문은 돈화문 단봉문 북문은 광지문 서북문은 요금문 동문은 건양문 서문은 경추문 금호문이고 궁내에

어구교가 있다

『한경지략』

창덕궁 칠문은 광해군 원년 중건

돈화문 큰 북(인경 파루) 사헌부 관리만 출입

단봉문 돈화문 남우

건양문 동문-창경궁 통행

금호문 서문 현판(성임의 글씨) 대부분 관리 출입 입직 주서가 개폐 확인

경추문 더 서쪽문 늘 잠금 대장이 군사 동원시에만 염

요금문 더 서쪽문 현판(성종때 신자건의 글씨)

공북문 서북문 안쪽에 대보단 원래 신이천 박의 집터

2) 궁장문

(1) 조선 전기의 궁장문

『태종실록』 33권 17년 1월 9일(병신)

지신사 조말생(趙末生) 등에게 명하여 향(香)을 받들고 먼저 종묘(宗廟)에 나아가게 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말하기를 ldquo전조(前朝)의 임금들은 즉위한 뒤로 친사(親祀)함이 한두 번에 불과했으므로 종묘에 나아갈 때를

당하면 반드시 성례(盛禮)를 갖추었지만 나는 세사(歲事)로써 상례(常禮)를 삼고자 한다 무엇을 반드시 저

렇게 번거롭게 하여야 하겠는가 제삿날을 당하여 청재(淸齋)한 근신(近臣)을 거느리고 사잇길로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하고 이내 명하여 종묘의 북장(北墻)에다 작은 문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말생

에게 명하여 그 문으로 먼저 가게 하였다

『성종실록』 58권 6년(1475 을미 명 성화(成化) 11년) 8월 23일(기해) 7번째기사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서거정(徐居正)이 전교(傳敎)를 받들어 대궐의 문 중에 예전에 액호(額號)가 없

는 것은 각기 2개의 이름을 편액(扁額)하여 아뢰니 임금이 낙점(落點)하기를 창덕궁(昌德宮) 밖 동장문(東

墻門)은 선인문(宣仁門) 중간의 동장문(東墻門)은 경양문(景陽門) 신대문(新大門)은 장춘문(長春門) 중대문

(中大門)은 선명문(宣明門) 남협문(南夾門)은 춘흥문(春興門) 안 동장문(東墻門)은 건양문(建陽門) 북쪽 동

장문(東墻門)은 기화문(綺華門) 광연정(廣延亭)의 서참문(西岾門)은 평창문(平昌門) 남행랑문(南行廊門)은

영화문(永和門) 북행랑문(北行廊門)은 영평문(永平門) 내사복 남문(內司僕南門)은 운금문(雲錦門) 외동산문

(外東山門)은 연양문(延陽門) 좌협문(左夾門)은 광범문(光範門) 우협문(右夾門)은 숭범문(崇範門) 남장문(南

墻門)은 단봉문(丹鳳門) 내서장문(內西墻門)은 의추문(宜秋門) 좌달문(左闥門)은 숙장문(肅章門) 겸사복청

(兼司僕廳)의 신대문(新大門)은 연복문(延福門) 내사옹(內司饔)의 상동문(上東門)은 소춘문(小春門) 북문(北

門)은 소동문(小東門) 중궁(中宮)의 차비문(差備門)은 연희문(延禧門) 승정원(承政院)의 남문(南門)은 연영문

(延英門) 서행랑문(西行廊門)은 금호문(金虎門) 외서장문(外西墻門)은 진금문(鎭金門) 서장문(西墻門)은 요

금문(曜金門) 후원(後苑)의 북장문(北墻門)은 공진문(拱辰門) 신북장문(新北墻門)은 창합문(閶闔門) 동장문

(東墻門)은 청양문(靑陽門) 외북장문(外北墻門)은 광지문(廣智門) 경복궁(景福宮)의 다와지문(多臥只門)은

망춘문(望春門) 옛 동궁(東宮)의 남문(南門)은 동양문(東陽門) 동장문(東墻門)은 소화문(昭華門) 남장문(南

墻門)은 소휘문(昭暉門) 동장자문(東障子門)은 요의문(曜儀門) 남행랑문(南行廊門)은 금란문(金鑾門) 후원

(後苑)의 사복문(司僕門)은 상원문(上苑門) 북성문(北城門)은 신무문(神武門)으로 하였다

(2) 조선후기의 궁장문

3) 궁성문과 궁장문의 개폐 숙위 감문

『세종실록』 31권 8년 2월 27일(신묘)

병조에서 계하기를 ldquo궁성(宮城)을 순찰하는데 다만 별순총제(別巡摠制)로 하여금 초경(初更)에만 돌아보게

하고 있으니 실로 타당하지 못합니다 바라옵건대 사면에서 모두 방패(防牌)로 하여금 번을 서게 하고 중국

의 제도에 의하여 흔드는 목탁을 만들어서 밤마다 남문에서 번을 든 호군(護軍)이 증명을 본조에서 받아

인정(人停) 후부터 파루를 칠 때까지 방패 두 사람이 목탁을 울리면서 남에서 동으로 동에서 북으로 북에

서 서로 차례차례로 전해 주어서 다시 남문에 들여놓으며 첫번에 목탁을 울린 자가 동에 도착할 만한 때에

또 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목탁을 주어 먼저와 같이 빙빙 돌아서 끊일 사이 없게 하며 방패가 만일 시각

을 지체하고 전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논죄(論罪)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32권 8년(1426 병오 명 선덕(宣德) 1년) 6월 14일(병자) 5번째기사

병조에 전지하기를 ldquo앞으로는 인정(人停) 후와 파루(罷漏) 전에 궁성문을 열고 닫을 일이 있으면 입직한 병

조 당상관과 도진무와 승전색(承傳色)의 주서(注書)와 사약(司鑰) 일동(一同)이 열고 닫게 하라rdquo 하였다

『세종실록』 63권 16년(1434 갑인 명 선덕(宣德) 9년) 1월 15일(계사) 9번째기사

병조에 전지하기를 ldquo강무(講武)로 거둥했을 때 밤을 당하여 궁문의 개폐(開閉)는 한결같이 중궁의 명령에

의해 하라rdquo 하였다

『세종실록』 100권 25년(1443 계해 명 정통(正統) 8년) 6월 19일(임인) 3번째기사

병조에서 아뢰기를 ldquo궁성문(宮城門)을 만약 인정(人定) 후와 파루(罷漏) 전에 열고 닫을 때에는 입직한 병조

당상(堂上)middot도진무(都鎭撫)middot승전색(承傳色)middot주서(注書)만이 열고 닫을 수 있다고 일찍이 전지가 있었습니다

삼가 상고하니 당(唐) 고조(高祖) 때에 궁전문과 성문에는 교어부(交魚符)와 순어부(巡魚符)를 두고 좌우상

(左右廂)에는 개문부(開門符)와 폐문부(閉門符)를 두었는데 좌부(左符)는 궐내(闕內)에 바치고 우부(右符)는

감문(監門)에 두었으며 중종(中宗) 때에는 궁전(宮殿)middot황성(皇城)middot경성(京城) 금원문(禁苑門) 좌우 내외를 신

칙하고서 각각 교어부 한 짝 순어부 한 짝씩을 주고 좌상(左廂)에는 개문어부(開門魚符) 한 짝을 우상에는

폐문어부(閉門魚符) 한 짝을 주었는데 모두 우부는 감문에 교부하여서 무시(無時)로 여닫는 데 이를 쓰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성문에는 벌써부터 개문부(開門符)를 만들어서 상직(上職)하는 호군(護軍)이 매일 궐

내에서 받아 합부(合符)하고서 문을 여닫습니다 금성문은 관계가 더욱 중한데 부(符)를 험증(驗證)하는 일

도 없이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실로 미편합니다 또 도진무와 병조 당상 등이 일제히 모인 다음에 문을 여는

까닭으로 시간에 맞추여야 할 일은 반드시 늦어지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궁성문도 또한 옛 제도에 의해서

교어부 한짝을 만들어서 왼쪽은 궐내에 들이고 오른쪽은 상서사(尙瑞司)에 갈무리하였다가 입직(入直)하는

중추원(中樞院) 당상과 각 위(衛)의 절제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진무 한 사람을 거느리고 매일 대궐에서 받

아서 영추문(迎秋門)에 숙직하며 만약 제 시각이 아닌 때에 여닫을 일이 있으면 승정색(承傳色) 관자(官者)

가 명을 받들어 왼쪽을 가지고 주서(注書)middot사약(司鑰)과 함께 감문(監門)의 숙직하는 곳에서 오른쪽과 맞추어

본 다음에 문을 열게 하는 것으로써 항구(恒久)한 법식(法式)으로 삼으소서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실록』 2권 1년(1470 경인 명 성화(成化) 6년) 1월 8일(정해) 9번째기사

도총부(都摠府)에 전교(傳敎)하기를 ldquo지금 이후부터는 대궐 안의 밤 순라(巡邏)는 위장(衛將)으로 하여금 행

하게 하는데 북쪽은 동소(東所)middot서소(西所)middot북소(北所)의 위장(衛將)으로 남쪽은 남소(南所)의 위장(衛將)과

응양위장(鷹揚衛將)middot내금위 장(內禁衛將)으로 시각[更]을 나누어 번갈아 돌아다니게 하라rdquo 하였다

『성종실록』 125권 12년(1481 신축 명 성화(成化) 17년) 1월 12일(정해) 6번째기사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ldquo대궐문을 여닫는 데에 요금문(曜金門)과 금호문(金虎門)은 도총부 낭청(都摠

府郞廳) 1명 겸사복(兼司僕) 1명 중궁 사약(中宮司鑰) 1명이 관장하며 돈화문(敦化門)middot단봉문(丹鳳門)middot평창

문(平昌門)은 주서(注書) 1명 겸사복 1명 대전 사약(大殿司鑰) 1명이 관장하고 선인문(宣仁門) 밖의 사옹

문(司饔門)middot청양문(靑陽門)은 선전관(宣傳官) 1명 겸사복 1명 왕대비전 사약 1명이 관장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rdquo 하니 전교하기를 ldquo가하다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5월 13일(정유) 3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궐 안에 입직하는 군사가 너무 많아서 매우 어지럽다 내금위(內禁衛)middot선전관(宣傳官) 따위는

밖에 나갈 수 없으나 충찬위(忠贊衛)middot충순위(忠順衛)middot별시위(別侍衛) 따위는 돈화문(敦化門) 밖 좌우편 장랑

(長廊)에 입직하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6월 19일(임신) 5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군기(軍器)는 대궐 곁의 가까운 곳에 두어서 뜻밖의 일에 대하여야 하니 남은 돈화문(敦化門)

밖 서는 요금문(耀金門) 밖에 따로 집을 지어서 군기시(軍器寺)에 둔 것을 수를 헤아려서 나누어 두라rdquo 하

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6월 23일(병자) 2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동middot서 금표(禁標) 중에서 동이 더욱 막힌 것이 없으니 이계동(李季仝)으로 하여금 다시 살펴서

물려 쌓게 하며 돈화문(敦化門) 밖 좌우 행랑(行廊) 곁에 가까운 인가(人家)를 모두 철거시키고 행랑을 따라

담을 쌓아 군영(軍營)의 하마비(下馬碑)를 한계로 삼고 궐문(闕門)을 두는 것이 어떠한가 큰일을 이루고자

하거늘 어찌 많이 철거하는 것을 꺼리랴rdquo 하였다 이때부터 성안의 인심이 들끊어 혹 거짓 전하는 말이

lsquo성안에 사는 사람을 모조리 쫓아내고 숭인문(崇仁門)middot돈의문(敦義門)을 궐문으로 삼으므로 오래 편안할 계

책이 없다rs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61권 12년(1506 병인 명 정덕(正德) 1년) 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궁금(宮禁)은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매양 수위하는 데 있어 마땅히 변을 당했을

때와 같이하여 각문을 수직하는 군사를 60명을 더 정하고 항상 갑옷을 입게 하라 수문장은 또 심지가 순근

(純謹)한 자로 수를 늘려서 입직하게 하라 단봉문(丹鳳門)middot금호문(金虎門) 등은 돈화문(敦化門)의 예에 따라

창middot칼 등의 물건을 모두 가지게 하되 칼날이 대궐로 향하지 말게 할 것과 가마를 시위하는 충철위middot보려대

로 입시한 자는 칼을 차지 못하게 할 것과 입직한 사람도 또한 대궐을 향하여 활시위를 잡아당기지 못하게

하는 일은 이미 금령(禁令)이 있었으니 앞으로는 거듭 밝혀 엄하게 금하라rdquo 하였다

『광해군일기』 103권 8년(1616 병진 명 만력(萬曆) 44년) 5월 13일(임오) 10번째기사

정원이 아뢰기를 ldquo전 황해 감사 윤조원(尹調元)을 잡아 올 일로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내보내기 위하여 궐문

및 외문(外門)을 유문(留門)해야 합니다 개문 표신(開門標信)과 돈화문(敦化門) 부험(符驗) 및 밀갑(密匣)을

출급하소서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만기요람』 군정편 2(軍政編二) 훈련도감(訓鍊都監) 궁장 밖의 순라(宮墻外巡邏)

인조 6년 무진(1628년)에 규례를 정하였다 초경 남영(南營)의 초관(哨官)이 입직한 마병 20명을 거느리고

두 바퀴를 순행한다 3경 광지영의 초관이 입직한 군졸 20명을 거느리고 두 바퀴를 순행한다 또 별순라(別

巡邏)가 있는데 영종 9년 계축(1733년)에 규례를 정하였다 장교 1명과 졸병 5명이 초경부터 날이 샐 때까

지 순행하며 집춘문 북쪽ㆍ상수문(上水門) 서쪽에서 공북문까지에 이르는데 별기대 1명과 광지영(廣智營)

입직군 5명 또 따로 기패관 1명과 별무사 1명을 정하여 경을 나누어 도순(都巡) 감독한다 장관이 또 감찰

한다 초일과 종일에는 북영에 입직한 파총이 중일에는 당상장관이 언제나 파루(罷漏)친 뒤에 모두 입직군

5명을 거느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구역내를 감찰한다

『영조실록』 3권 1년(1725 을사 청 옹정(雍正) 3년) 2월 20일(무자) 5번째기사

주강에서 민진원이 노은동 서원의 면세를 최진한이 금군의 수직을 논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중략- 무신(武臣) 최진한(崔鎭漢)이 진달하기를 ldquo궁성(宮城) 안에 입직(入

直)하는 군병(軍兵) 수직(守直)하는 사환(使喚) 이외에는 군병을 단속하고 훈국(訓局)의 2백 명을 금호문(金

虎門)과 홍화문(弘化門) 두 문에 나누어 수직하며 금위(禁衛) 1백 명을 건양문(建陽門)에 입직하고 금려(禁

旅) 1백 명은 인정전(仁政殿) 대정(大庭) 아래에 입직하게 해야 합니다 훈군(訓軍)은 안에서 입직함이 중하

니 매달 세 차례씩 해영(該營)에서 습진(習陣)할 때 내어 쓰지 말며 금위군 및 금려는 해영에서 습진할 때

표신(標信)을 제거하고 내어 써 매달 세 차례 신지(信地)인 금위를 공허하게 만들며 향군(鄕軍)은 생소(生

疎)하니 습진에 내어 쓰는 것도 한 방도일 듯합니다 그러나 금려에 이르러서는 군법(軍法)에 익숙함이 훈졸

(訓卒)에게 뒤지지 않으며 대정(大庭)에 직숙하는 것이 훈졸(訓卒)의 직소(直所)에 비할 것이 아닌데도 매번

내어 써 숙위(宿衛)를 중히 여기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신(將臣) 신여철(申汝哲)이 죽을 때 소신

(小臣)이 가서 보았더니 신여철이 말하기를 lsquo입직하는 금군은 내어 쓰는 것이 부당할 듯하여 내가 계달(啓

達)하여 변통하려고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으니 젊은 무변(武弁)은 이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rsquo라고 하였습니

다rdquo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효종(孝宗) 때 비로소 금군(禁軍)을 설치하였으니 뜻이 있는 바가 있는 것이

다 금위군(禁衛軍)을 내어 쓰지 않을 수 없으나 금군은 습진(習陣)할 때 내어 쓰지 말라는 뜻을 병조로 하

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rdquo 하니 병조에서 청하기를 ldquo최진한의 말에 따라 시행하소서rdquo 하니 그대로 따랐

다 또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후략---

『영조실록』 10권 2년(1726 병오 청 옹정(雍正) 4년) 11월 2일(경인) 2번째기사

임금이 대조전(大造殿)인 곧 창덕궁으로 환어(還御)하였다 병조에서 홍화문(弘化門)은 그전처럼 도로 닫아버

리고 돈화문(敦化門)의 표신(標信)에 따라 여닫되 건양문(建陽門)에는 입직(入直)하는 군사를 차출하고 동룡

문(銅龍門)도 파수(把守)를 해야 하는 뜻으로 아뢰니 윤허하였다

『정조실록』 4권 1년(1777 정유 청 건륭(乾隆) 42년) 11월 17일(기묘) 1번째기사

하교하기를 ldquo숙위 대장(宿衛大將)이 이미 대궐 안 각 곳의 숙위를 도맡게 되었으니 그 관할(管轄)하는 방도

에 있어서 마땅히 서로 유지(維持)해 가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안으로는 위장(衛將)middot부장(部將)middot금군 도감(禁

軍都監)의 군병(軍兵)middot각 문의 수문장(守門將)middot국별장(局別將)과 밖으로는 궁궐 담장 밖에 삼영(三營)에서 입

직(入直)한 순라(巡邏)들이 날마다 사고 유무를 숙위 대장에게 신보(申報)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군사의 체

대(替代)도 또한 마땅히 통괄(統括)하게 될 것이니 위장middot부장middot내삼청(內三廳)middot금군(禁軍)과 금호문(金虎門)middot홍

화문(弘化門)middot건양문(建陽門) 장관(將官)의 군병(軍兵) 및 국별장(局別將)middot유청군(有廳軍) 등은 3일 마다 체대

한 단자(單子)를 숙위소(宿衛所)에 내야 하고 숙위소에서는 해방(該房)에 보내어 봉입(捧入)하게 해야 한다

또 도총부(都摠府)와 병조는 소속 관사들과는 다름이 있어서 또한 서로가 통지(通知)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

이니 순검(巡檢)하는 등 일로 숙위소에서 거행하는 일과 관계되는 것 같은 것은 숙위 대장에게 문이(文移)

해야 함을 현저한 격식(格式)으로 삼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정조실록』 17권 8년(1784 갑진 청 건륭(乾隆) 49년) 5월 22일(병자) 2번째기사

병조에서 감문 절목(監門節目)을 올렸다 이 날에 내사복(內司僕)의 소동문(小東門)이 저절로 열려 병조

에서 아뢰니 하교하기를 ldquo문고리는 넓고 자물쇠는 작은 소치이지 다른 간사한 정(情)은 없을 듯하나 일이

숙위(宿衛)의 분군(分軍)하는 것이 효잡(淆雜)스런 것과 관계되니 특별히 병조 판서를 추고하라rdquo 하고 병

조에 명하여 절목을 만들라고 명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ldquo옛날에는 좌직(坐直)3719) 하는 승지가 합문에서 조석으로 문안하였기 때문에 저녁 문안 후 자물쇠를

청하여 문을 닫고 아침 문안 때 열쇠를 청하여 문을 열었다 근래에는 이 규정이 없어졌으니 마땅히 즉시

참조하여 획일적인 규식을 정하라 지금부터는 열쇠 내주는 것을 좌직하는 승지가 전담하여 보관하고 자물

쇠를 연 후에는 해방 승지(該房承旨)가 주관하여 관장하되 마땅히 수리해야 하는데도 수리하지 않으면 해당

승지를 의금부에 내려서 중히 감죄하고 주서(注書)와 총랑(摠郞)middot선전관(宣傳官)middot사약(司鑰) 가운데서 해당

문을 관리하는 사람 역시 유사(攸司)로 하여금 감단(勘斷)하라

병조에서 순검하면서 자물쇠를 확인하는 것은 본디 직장(職掌)이니 건양문(建陽門) 동서를 경계로 하여

수문장(守門將)과 위장(衛將)과 함께 같은 죄를 주고 만일 파손된 곳이 있으면 즉시 와서 고해야 하며 색승

지(色承旨)가 수리하는 한 조항은 신시(申時) 이전은 해방(該房)에서 관장하고 신시 이후에는 좌직(坐直) 하

위(下位)가 관장하는 것으로 정식(定式)하여 신명하라 이후로 성문middot궐문의 자물쇠는 호조 낭관이 감독해 만

들어서 판서가 구검(句檢)하는 것을 일체 절목으로 만들어 계하하라 이렇게 정식하면 도총부 낭관이 돈화

문(敦化門)을 관리하는 것은 아주 의미가 없으니 선전관이 돈화문을 관리하고 도총부 낭관은 통화문(通化

門)과 선인문(宣仁門)을 관리하라rdquo

하였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 1 각문(各門)의 개폐(開閉)는 옛날 예대로 승정원이 주관한다 자물쇠를 잠근 후

에 열쇠는 좌직(坐直) 하위(下位)가 친히 받아서 사(司)에 보관한다 그 출납은 자물쇠를 연후에 자물쇠와 열

쇠를 해방 승지가 친히 받아서 보관하고 신시(申時) 이후에는 상직(上直) 하위 승지에게 전해 보관하게 한

다 1 각문의 관할은 건양문(建陽門) 동서를 경계로 한다 서쪽은 서middot남 양소(兩所)에서 분장하는데 병조의

담당이다 동쪽은 동middot북 양소에서 분장하는데 도총부 담당이다 수문장은 각기 그 부근에 가는데 소남문(小

南門)은 단봉문(丹鳳門) 수문장이 겸관(兼官)하고 소동문(小東門)은 선인문(宣仁門) 수문장이 겸관하는데 만

일 섬가지 않은 일이 있으면 엄법으로 감처(勘處)한다 1 각문의 자물쇠에 만일 파손되어 고쳐야 할 곳이

있으면 해당 문의 수문장이 해소(該所) 부장(部將)을 안동(眼同)하여 각각 그 자내(字內)에 가서 고하면 병

조나 혹은 도총부의 낭청이 친히 가서 살피어 승정원에 고하는데 고치는 절차는 신시 이전에는 해방에서

관장하고 신시 이후에는 좌직 승지가 관장한다 1 각문을 개폐할 때 감약(監鑰)은 돈화문(敦化門) 요금문

(曜金門) 단봉문(丹鳳門)은 선전관이 금호문(金虎門)은 주서(注書)가 홍화문(弘化門) 선인문(宣仁門) 통화

문(通化門)은 도총부 낭청이 담당하되 각 해당 문의 수문장 및 담당 사약(司鑰)이 안동하여 거행한다 1 병

조 낭청 및 도총부 낭청이 야순(夜巡)할 때 각문의 자물쇠는 그 내자(字內)에 따라서 해당 수문장을 안동하

여 살피되 소동문(小東門) 소남문(小南門)도 일체로 조검(昭檢)한다 1 각처 수문(水門)의 중대한 열쇠를

해소에 보관하는 것은 일이 매우 미안하니 남수각(南水閣) 수문(水門)은 돈화문 수문장이 겸관하고 북수각

(北水閣) 수문은 요금문 수문장이 겸관하여 파손된 곳의 수리와 조검(照檢) 때살피는 등의 절차는 다른 문

의 예에 의해서 시행한다 1 성문과 대궐문을 잠그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니 지금을 시작으로 해서 자물쇠

를 수리할 때에는 호조 낭청이 몸소 감조(監造)하고 판서가 구검(句檢)한다 1 각문을 나누어 담당시키는

것이 비록 건양문 동서를 경계로 삼았으나 병조는 이미 궐내 각처를 관할하는 처지이니 경계를 정하였다 하

여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며 건양문 동쪽 역시 총괄하여 검찰해야 한다】

『정조실록』 27권 13년(1789 기유 청 건륭(乾隆) 54년) 1월 19일(병자) 3번째기사

승정원이 병조 당상관의 당직 교체 일로 인하여 금호문(金虎門) 출입 표신을 내줄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ldquo대궐 안의 각문을 유문(留門)하였을 때 조정 신료가 드나들지 못할 문은 원래 없는 것이다 체통이 막중한

대신과 대신(臺臣)의 체통이 근래 궁인(宮人)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하는 요금(曜金)middot통화(通化) 두 문도 구

애되지 않고 출입하였던 사실을 《당후일기(堂后日記)》를 보면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몇

해 전부터 막중한 대궐문을 마치 각 부서에서 나누어 맡은 것처럼 돈화문(敦化門)은 대간에 금호문은 조신

(朝臣)에 단봉문(丹鳳門)은 중관(中官)에 선인문(宣仁門)은 사복시(司僕寺)에 각각 소속되어 마치 서로 어겨

서는 안 될 무슨 정해진 한계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유문하고 있을 때라도 열려 있는 문을

놔두고서 유문 표신을 따로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종전에도 누차 신칙했지만 끝내 고칠 줄을 모르

니 당해 승지를 파직하고 앞으로는 유문할 때 뿐만 아니라 아침과 낮에 공사로 들어올 때에도 따로 출입하

는 문을 정하지 말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순종실록』 2권 1년(1908 무신 대한 융희(隆熙) 2년) 4월 1일(양력) 4번째기사

포달(布達) 제2호 〈창덕궁 정문을 개폐 통행을 제한하는 규정〔昌德宮正門開閉通行定制限〕〉을 공포하였

다 문로

- 왕비 책봉 의식과 문로

『성종실록』 123권 11년(1480 경자 명 성화(成化) 16년) 11월 8일(갑신) 1번째기사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니 백관(百官)이 사배(四拜)를 마쳤다 임금이 왕비를 책봉(冊封)하고 교명

(敎命)middot책보(冊寶)middot명복(命服)을 정사(正使)인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부사(副使)인 호조 판서(戶曹判

書) 이철견(李鐵堅)에게 주어 인정문(仁政門)을 경유하니 고취(鼓吹)가 앞에서 인도하는데 다음은 교명(敎

命)이고 다음은 옥책(玉冊)이고 다음은 보(寶)이고 다음은 의장(儀仗)이었다 사자(使者)가 수행하여 선정문

(宣政門) 밖 막차(幕次)에 이르니 왕비가 선정전(宣政殿) 월랑(月廊)의 배위(拜位)에 나아가 교명(敎命)middot책보

(冊寶)middot명복(命服)을 받았는데 그 교명에 이르기를 -후략-

- 선정전의 정문 돈례문

『명종실록』 27권 16년(1561 신유 명 가정(嘉靖) 40년) 4월 8일(정유) 1번째기사

밤에 돈례문(敦禮門)【선정전(宣政殿)의 어문(御門)이다】 및 어둑(御纛)에 벼락이 쳤다【내일 상참(常參)이

있어 어문(御門)에 내다 세워 놓았는데 문선(門扇)과 둑간(纛竿)이 벼락에 맞아 부러졌다】

- 발인시 왕과 재궁의 문로

『연산군일기』 3권 1년(1495 을묘 명 홍치(弘治) 8년) 2월 8일(임술) 4번째기사

빈전 도감(殯殿都監)이 아뢰기를 ldquo재궁(梓宮)이 동가(動駕)할 적에 전하께서 돈화문(敦化門) 안에서 지송(祗

送)하셔야 하는데 전하께서 만약 재궁을 수행하여 빈청(賓廳) 앞을 경유하시어 진선문(進善門) 밖으로 나가

신다면 잡인(雜人)이 요란스러울 뿐더러 길도 협착하니 전하께서 도보(徒步)하시기도 역시 어렵습니다 만

약 권도(權道)를 따라 먼저 막차(幕次)에 나아가시기로 하면 전하께서 조전(祖奠)을 행하신 다음에 소교(小

轎)를 타시고 인화문(仁和門)을 벗어나 인정전(仁政殿) 앞을 경유하여 먼저 돈화문 안으로 나가시면 되는데

돈화문 안도 역시 협착하니 마땅히 막차(幕次)를 진선문(進善門) 동편에 마련하고 서쪽을 향하여 지송(祗送)

하셔야 옳겠습니다 또 우제(虞祭)를 행한 뒤에 대비(大妃)께서 진향(進香)하시는 것은 예문이나 전례에 없습

니다 이극돈(李克墩)middot성현(成俔) 등의 뜻은 하현궁(下玄宮)하고 흙으로 절반쯤 메우고 제주(題主)하고 한낮

에 우제(虞祭)를 지내므로 절차가 매우 많고 반혼(返魂)이 이를지 늦을지 그것도 또한 알 수 없으니 그날

우제 뒤에 대비께서 진향(進香)하기는 진실로 어려울 것인데 만약 대비의 망극하신 정을 따르기로 한다면

반혼한 뒤에 대비께서 혼전(魂殿)에 나아가 조석 상식할 때를 기다려서 나와 보시는 것이 어떨까 하였고 윤

효손(尹孝孫)의 뜻에는 이런 것이 예문에 실리지 않았으니 우제 후에 대비의 진향은 수시로 행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rdquo 하였다

- 세자 책봉후 경유해야 할 문로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 청 순치(順治) 2년) 9월 19일(정묘) 2번째기사

예조가 아뢰기를 ldquo세자가 책봉을 받은 다음 건양문(建陽門)을 경유하여 곧장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가서

는 안 되고 홍화문(弘化門) 앞 바른 길을 경유하되 여련(輿輦)과 의장(儀仗)을 갖추어 성 안 사서(士庶)들로

하여금 충분히 보게 한 다음에 돈화문(敦化門)을【 곧 창덕궁의 정문(正門)이다】 거쳐 들어가는 것이 타당

할 듯합니다rdquo 하니 답하기를 ldquo궐내(闕內)로부터 직접 동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rdquo 하였다 책

례 도감이 또 이 일로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 발인시 왕의 문로

『현종실록』 즉위년(1659 기해 청 순치(順治) 16년) 10월 28일(을묘) 1번째기사

대행 대왕의 재궁(梓宮)을 발인(發靷)하였다 자시(子時)에 견전례(遣奠禮)를 행하였는데 인시(寅時)에

내전에서 약방에 죽력(竹瀝)과 생강즙을 구해 들이도록 하였다 이 때 좌상 심지원이 총호사로서 인화문(仁

和門)에 있었는데 중사(中使)를 통해 자전이 너무 슬퍼한 나머지 기절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아뢰기를

ldquo발인할 시각이 이미 박두했는데 삼가 듣건대 자전께서 편찮으시다 하니 잠시 시각을 물리소서rdquo 하니 상

이 따랐다

얼마 뒤에 지원이 또 아뢰기를 ldquo자전께서 이와 같으니 교외에 거동하시는 일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됩니

다 뭇 의논도 모두 전하께서 궐문 밖에서 배사(拜辭)함이 마땅하다고들 합니다 모름지기 빨리 하교하셔야

만 일을 분부하고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자전의 기후(氣候)가 조금 차도가 있는

듯하니 발인하는 시각은 그대로 하라rdquo 하였다

파루(罷漏) 후에 재궁(梓宮)을 받들어 대여(大轝)에 올리고 이어 출발하였다 상이 소여(小轝)를 타고 인

화문(仁和門)으로 나왔는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인정문(仁政門) 밖에 이르러 상이 여(轝)에서 내려 연(輦)

을 탔는데 백관은 모두 걸어서 수행하였다 흥인문(興仁門)을 나와 동관왕묘(東關王廟) 뒤쪽 노제(路祭) 지

내는 곳에 이르러 대여를 악차(幄次)에 봉안하였는데 상도 연에서 내려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의정부와 충

훈부가 노제를 끝마치자 대여가 출발하였다 상이 막차에서 나와 봉사위(奉辭位)로 나아가 동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통곡하며 가슴을 쳤다 대여가 멀어지자 상이 환궁하였다

- 즉위식 의례 설행 문로

『숙종실록』 1권 즉위년(1674 갑인 청 강희(康熙) 13년) 8월 23일(갑인) 1번째기사

왕세자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중략- 이날 성복(成服)을 마치고 왕세자가 관면(冠冕)과 길

복(吉服)을 갖추고 규(圭)를 쥐고 여차(廬次)40) 로부터 걸어가면서 곡(哭)하였다 내시(內侍) 2인이 좌우(左

右)에 끼고 보호하여 선정전(宣政殿) 동쪽 뜰에 나아가 빈전(殯殿)을 향하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섬돌

에 올라가 전내(殿內)의 향안(香案) 앞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는 내려와 그전 자리로 돌아와서 또 네 번

절하고 동쪽 행랑의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왕세자가 선정문(宣政門)으로부터 걸어 나와서 연영

문(延英門)을 따라 가서 숙장문(肅章門)을 나와서 인정문(仁政門)에 이르니 승지와 사관(史官)이 따라 나갔

다 왕세자가 서쪽을 향하여 어좌(御座) 앞에 서서 차마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슬피 울기를 그

치지 아니하였다 승지와 예조 판서가 서로 잇달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를 권하였다 삼공(三公)이 도승지

와 더불어 나아가 왕세자를 부축하면서 번갈아 극진히 말하였다 왕세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우니 이 날

뜰에 있던 백관(百官)과 군병(軍兵)으로서 목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세자

가 어좌(御座)에 오르니 백관들이 사배(四拜)하고 의식대로 산호(山呼)하였다 예를 마치자 사왕(嗣王)이 인

정문(仁政門)으로부터 인정전(仁政殿)에 올라가 인화문(仁和門)으로 들어와서 여차(廬次)로 돌아왔는데 우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 즉위식 의례 설행 문로

『영조실록』 1권 즉위년(1724 갑진 청 옹정(雍正) 2년) 8월 30일(경자) 1번째기사

경종 대왕(景宗大王) 4년【청(淸)나라 옹정(雍正) 2년이다】 8월 을미(乙未)【25일이다】에 경종 대왕이

창경궁(昌慶宮)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昇遐)하였다 그 후 6일째 되는 날인 경자6) 오시(午時)에 왕세제

(王世弟)가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원상(院相)middot승지(承旨)middot사관(史官)은 조복

(朝服) 차림으로 돈례문(敦禮門) 밖 서정(西庭)에 동쪽을 향하여 앉고 홍문관(弘文館)은 승정원(承政院)의 다

음에 앉고 시강원(侍講院)은 동정(東庭)에 서쪽을 향하여 앉고 익위사(翊衛司)는 시강원의 다음에 앉고 병

조(兵曹)middot도총부(都摠府)는 융복(戎服) 차림으로 동쪽middot서쪽에 앉아서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왕세제(王世弟)가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차(廬次)에서 나오니 좌통례(左通禮)가 왕세제를 인도하여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빈전(殯殿)에 나아가 서계(西階)를 거쳐 욕위(褥位)에 올라갔다

찬의(贊儀)가 큰 소리로 lsquo배(拜) 궤(跪)rsquo 하고 선창(先唱)하니 좌통례(左通禮)가 낮은 소리로 lsquo궤(跪)하

소서rsquo 하고 고하기를 ldquo사왕(嗣王)은 보위(寶位)를 받으소서rdquo 하였다 상향례(上香禮)를 마치고 왕세제(王世

弟)가 내려와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막차에서 나와 걸어서 돈례문(敦禮門)의 동쪽 협문(夾門)

을 지나 동계(東階)로 내려가 연영문(延英門)을 거쳐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꺾어 숙장문(肅章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나가서 북쪽으로 꺾어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 밖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 그 곳 한복판

에 어좌(御座)를 설치하였는데 왕세제가 어좌에 올라가니 백관(百官)이 네 번 절하고 lsquo천세(千歲)rsquo 하고 호

창(呼唱)하였다

임금이 어좌에서 내려와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들어가 인정전(仁政殿) 정로(正路)를 거

쳐 인정전에 올라갔다 임금이 여차(廬次)로 돌아와 면복(冕服)을 벗고 최복(衰服)을 다시 입었다 이보다 4

일 전에 예조(禮曹)에서 사위(嗣位)하는 절목(節目)을 올렸는데 왕세제가 영지(令旨)를 내려 돌려주게 하였

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하루 세 번씩 도로 올렸으며 승정원(承政院)middot사헌부(司憲府)middot

사간원(司諫院)middot홍문관(弘文館)에서도 번갈아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성복(成服)하

는 날에 이르러 외부 의식이 이미 마련된 다음에 원상(院相) 이광좌(李光佐)가 여차(廬次) 앞에 이르러 면복

(冕服)으로 갈아입기를 간청하였으나 왕세제가 눈물을 흘리며 점침(苫枕)에 엎드려서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

였다 이광좌가 왕대비전(王大妃殿)과 왕비전(王妃殿)의 승전색(承傳色)을 불러 구전(口傳)으로 내전(內殿)에

서 나아가도록 계청(啓請)하니 왕대비전과 왕비전에서 언문 교지(諺文敎旨)를 내려 나아가도록 권유하였다

그제서야 왕세제가 남여(籃輿)를 물리치고 걸어서 어좌(御座) 앞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울부짖으며 어좌

에 오르지 않고 말하기를 ldquo내가 옛날에 여기에서 영고(寧考)를 모셨었는데 지금 무슨 마음으로 어좌에 오를

수 있겠는가rdquo 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이광좌 등이 누누이 간청하니 한참 후에 등극(登極)

하였다 정시(正時)가 되니 예조(禮曹)에서 비로소 사시(巳時)가 되었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오시(午時)에

이르러 마침내 즉위(卽位)하고 혜순 자경 왕대비(惠順自敬王大妃) 김씨(金氏)를 높여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왕비(王妃) 어씨(魚氏)를 왕대비(王大妃)로 빈(嬪) 서씨(徐氏)를 왕비(王妃)로 삼고 마침내 인정문(仁政門)에

서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였는데 이르기를 ldquo왕은 말하노라 -후략-

- 대보단에 거둥하여 망위례를 거행할 때의 문로

『영조실록』 61권 21년(1745 을축 청 건륭(乾隆) 10년) 3월 9일(신사) 2번째기사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망위례(望位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영화당

(映花堂)에서 승여(乘輿)를 타고 나왔는데 산선(繖扇)과 시위(侍衛)를 평상시의 의례대로 하였다 조종문(朝

宗門) 밖에 이르러 승여에서 내려 막차(幕次)로 들어 갔다가 얼마 후 다시 나와 승여에서 내려 조종문으로

들어가면서 명하기를 ldquo오위장(五衛將) 이하 당하(堂下) 시위는 모두 삼문(三門) 밖에서 뒤떨어지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중문(中門) 밖에 이르러 임금이 규(圭)를 잡고 동문(東門)을 거쳐 판위(版位)로 들어가 사배례(四拜

禮)를 행하고 동유문(東壝門)으로 들어가 동폐(東陛)를 거쳐 봉심(奉審)하고 다시 판위에 돌아와 희생(犧牲)

을 친히 살폈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황단(皇壇)에 성우(騂牛)를 쓰는 것이 무슨 뜻을 취한 것인가rdquo 하니 승지 오수채(吳

遂采)가 말하기를 ldquo황조(皇朝)에서 화덕(火德)을 숭상했기 때문에 성우를 쓴 것입니다rdquo 하였다 임금이 향

악차(香幄次)에 나아가 대축(大祝)에게 명하여 향축궤(香祝櫃)를 내오게 하고 친히 살폈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향악차가 만약 눈과 비를 맞으면 습기에 젖기가 쉬우니 지금 이후에는 향축을 신실(神室) 안으로 봉안해야

한다rdquo 하고 인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기를 명하였다

- 선정전 어진을 영희전으로 이봉할 때의 문로

『영조실록』 67권 24년(1748 무진 청 건륭(乾隆) 13년) 2월 25일(기묘) 4번째기사

선정전(宣政殿)의 영정(影幀)을 영희전(永禧殿)으로 이안(移安)할 때 전하가 수가(隨駕)하여 출궁(出宮)middot환궁

(還宮)하는 의식은 이러하다【선정전 망전례(望殿禮)와 봉심(奉審) 및 영희전 망전례와 봉심에 대한 의주(儀

註)도 아울러 붙인다】 기일에 앞서 액정서(掖庭署)에서 선정전 동쪽 뜰 아래와 돈례문(敦禮門) 밖 길 동쪽

에다 서쪽을 향하여 소차(小次)를 설치한다 왕세자의 위차는 연영문(延英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하의 망전례(望殿禮) 위차는 전정(殿庭)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자의 위차는

전하의 판위 뒤에 남쪽 가까운 데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의(典儀)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위차를 선

정문 밖에 설치하는데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하고 모두 매 등급마다 위차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쪽

을 향하게 한다 또 전하의 소차를 영희전 대문 안에 설치하고 망전례의 위차는 재전(齋殿) 정문 안에다 동

쪽에 가깝게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위차를 재전의 문밖에 설치하는데 동서

(東西)로 나누어 위차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쪽을 향하게 한다 또 영정을 임시로 봉안할 대차(大次)를 영희

전 신문(神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는데 악차(幄次)는 대차 안에 설치한다【신탑(神榻)을

설치한다】 전하의 입위(立位)는 대차 앞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자가 지영(祗迎)하는 위

차는 흥화문(興化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그날 초엄(初嚴)을 치면 병조에서 제위(諸衛)

를 정돈하여 노부(鹵簿)와 의장(儀仗)을 건명문(建明門) 밖에서 의주(儀註)대로 진설하며 장악원(掌樂院)에서

경현당(景賢堂) 뜰 남쪽 가까이에 북쪽을 향하여 헌현(軒懸)한다【출궁(出宮)할 때에는 진설만 하고 연주하

지않으며 환궁(還宮)할 때는 음악을 연주한다】 종친과 문무 백관은 모두 조방(朝房)에 모여서 각기 흑단령

(黑團領)을 입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은 연(輦)을 숭현문(崇賢門) 밖에다 대고 여(輿)를 합문(閤門) 밖에다

댄다 이엄(二嚴)을 치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모두 흥화문(興化門) 밖에 있는 시립위(侍立位)로 나아간다 왕

세자가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서 여(輿)를 타고 흥화문 밖으로 나아가 위차로 들어가면

여러 호위하는 관원들은 각기 해당되는 옷을 입고 모두 합문 밖으로 나아가 기다린다 좌통례가 합문 밖으

로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이 되었음을 계청한다 삼엄(三嚴)을 쳐서 북소리가 그치면 내외(內外)의 문을

열며 좌통례가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뢴다 전하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나가며 산선(산

扇)middot시위(侍衛)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좌통례가 앞에서 인도하고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이 보(寶)를 받들고

앞서서 간다【연(輦)에 타기를 기다려 보(寶)를 말에다 싣는다】 어가(御駕)가 숭현문 밖에 이르러 좌통례

가 꿇어앉아 여(輿)에서 내려 연(輦)을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려 연을 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한다 어가(御駕)가 움직이면【고취(鼓吹)는 진설만하고 연주하지 않는다】 좌통례middot우통례

가 앞에서 인도하고 찬의(贊儀) 2인이 통례의 앞에 있는데 장위(仗衛)와 도종(導從)은 보통의 의례와 같다

어가가 흥화문 밖에 이르면 왕세자가 위차에서 나와 몸을 굽히는데 지나가고 나면 평신하고 이어 연(輦)을

타고 어가를 따른다 어가가 시신(侍臣)들의 상마소(上馬所)에 이르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어가가 조금 머물

러 시신들로 하여금 말을 타게 할 것을 계청하고 뒤이어 시신들에게 말을 타라고 외친다 찬의가 전창(傳唱)

하여 시신들이 모두 말을 타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한다 어가가 움직이면 종친과 문무 백

관이 몸을 굽혀 지영(祗迎)하고 왕세자가 이를 적에도 몸을 굽히는데 지나가고 나면 평신하며 순차에 따라

시위한다 어가가 창덕궁 돈화문 밖에 있는 시신의 하마소(下馬所)에 이르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어가가 조금

머물러 시신들로 하여금 말에서 내리게 할 것을 계청하는데 시위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하면 돈화문 동협(東夾)을 거쳐 들어간다 어가가 숙장문(肅章門) 밖 강련소(降輦所)에 이

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연에서 내려 여를 탄다 좌통례

가 앞에서 인도하여 선정문 밖 강여소(降輿所)에 이르러【시신은 이에 물러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

(輿)에서 내릴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린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돈례문(敦禮門) 밖에

이르러 소차(小次)로 들어가면【돈화문에서 돈례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협(東夾)을 경유하는데 이 뒤도 이

와 같다】 산선과 시위는 선정문 밖에 정지한다 왕세자가 창덕궁 돈화문 밖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려 여

(輿)를 타고 서협(西夾)을 거쳐 들어가는데 연영문 밖에 이르러 여에서 내려 소차로 들어간다【돈화문에서

돈례문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서협(西夾)을 경유한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해엄(解嚴)할 것을 계청하면 병조

에서 전교(傳敎)를 받들어 의장(儀仗)을 푼다 인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인도하는데 그대로 흑단령을 갖추

고 선정문 밖 위차로 들어간다 왕세자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위차로 들어가면 좌통례가 소차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소차에서 나올 것을 계청한다 전하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나오면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망전례(望殿禮)의 위차에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선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할 것을 아뢰면 전하가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하고 왕세자도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하고 일어나 평신하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도 같다【찬의도 같다】 끝나고 나면 인의

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나누어 인도하여 나온다 전하가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왕세자도 따라 들어가는데

영정을 봉심할 때에는 승지middot사관middot궁관과 도감 당상 각 1원(員)이 시입(侍入)한다【통례와 상례는 계단 아래

에 정지한다】 봉심을 마치고 나면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도로 소차로 들어가고 왕세자도 따라

나와서 소차로 들어간다 영정을 장축(粧軸)할 때 전하가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승지middot사관과 도감의 당상(堂

上)middot도청(都廳)이 함께 흑단령 차림으로 시입(侍入)하는데 장축을 봉심하고 표제(標題)를 첩부(貼付)하고서

끝낸다 첨배(瞻拜)할 때에는 도감 당상과 종친middot의빈middot문무관 정2품 이상이 함께 흑단령 차림으로 선정문 밖

의 위차로 들어가며 전하와 왕세자도 이어서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전정(殿庭)의 판위(版位)로 나아가는

데 의주(儀註)대로 행례(行禮)한다【첨배의(瞻拜儀)에 기재되어있다】 이를 끝마치고 나면 전하는 소차로

들어가고 왕세자는 그날로 환궁하는데 의주대로 한다【왕세자 환궁의에 기재되어 있다】 다음날 동가(動

駕)를 고하는 제사를 지낼 때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이 먼저 위차로 나아가면 전하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판위로 들어가 의주대로 행례(行禮)한다【동가(動駕)를 고하는 제사를 친행하는 의주(儀註)에 기재되어 있

다】 이를 끝마치고 나서 영정 1본을 안의 진전(眞殿)에 봉안한 뒤에 전하가 도로 소차로 들어간다 선정전

의 영정을 영희전에 봉안할 때에는 초엄(初嚴)이 치면 병조에서 장위(仗衛)middot노부(鹵簿)를 진선문(進善門) 밖

에 진설하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은 연(輦)을 진선문 밖에다 대고 여(輿)를 인정전(仁政殿) 동쪽 뜰 아래에

다 댄다 이엄(二嚴)을 치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각기 조복(朝服)을 입고【4품 이상은 조복을 입고 5품이하

는 흑단령을 입는다】 돈화문 밖의 시립위(侍立位)로 나아가며 여러 호위하는 관원들도 함께 인화문(仁和

門) 밖으로 나아가 기다리는데 좌통례가 소차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임을 계청한다 삼엄(三嚴)

을 쳐서 북소리가 그치면 내외의 문을 여는데 좌통례가 꿇어앉아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뢰면 전하가 면복을

갖추고 나온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

가 그 규를 잡는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대축(大祝)이 영정궤(影幀櫃)

를 신여(神輿)에 봉안하고서 인화문을 경유하여 나온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걸어서 신여를 따

라 인정전 월대(月臺) 위에 이르러 대축이 영정을 신련(神輦)에 봉안하고【고취(鼓吹)를 울린다】 인정문

(仁政門)을 경유하여 나온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인정전 동쪽 뜰 밑에 있는 승여소(乘輿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圭)를 놓고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그 규를

받는다 좌통례가 여를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를 타며 인정문 동협(東夾)을 경유하여 진선문 동협 밖

승련소(乘輦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려 연을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려 연을

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가 규를 잡

는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하고 산선(繖扇)middot시위(侍衛)는 보통의 의례와 같게 한다 대가(大

駕)가 돈화문 동협(東夾)을 거쳐 나아가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은 신련(神輦)이 이르면 몸을 굽혔다가 지나

가면 평신하고 대가가 이르면 몸을 굽혔다가 지나가면 평신한 다음 순차에 따라 시위한다 대가가 영희전

(永禧殿) 대문 밖 강련소(降輦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를 놓고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받는다 -영희전 부분 후략-

- 대보단에 향을 친히 전하는 문로

『영조실록』 26년 3월 5일 (무신) 원본1054책탈초본57책(56) 1750년 乾隆(淸高宗) 15

乾隆十五年庚午三月初五日辰時 上具冕服 出御映花堂前庭親傳香繖扇侍衛如常儀行都

承旨南泰良 左承旨李普昱 右承旨洪益三 左副承旨李益輔 右副承旨趙載敏 記事官南鶴老middot崔

台衡middot李宜哲middot金聖佑入侍益三奉進香祝上塡祝着押如禮 仍展覽祝文而敎曰 此乃常用祝文

乎 益三曰 然矣上曰 都承旨進來泰良進伏上曰 祝文中神考毅廟等字 似皆上行書之

而今皆不上之矣泰良曰 有太祖第一位 故壓尊而不得上矣上曰 永禧殿祝文亦如此例乎 頃

日親享時 魚錫胤爲大祝 必知之矣仍命錫胤進來下詢錫胤曰 臣於倉卒中 未能詳細記得

矣上祗傳香祝益三跪奉以出 安于香亭上以步輦 由集成門入齋室 少頃 由朝宗門詣版位

行望位禮 由冽泉升壇奉審 仍省器 又於冽泉門外省牲訖 還入齋室諸臣遂退出

- 대행왕비의 발인시 왕의 문로

『영조실록』 89권 33년(1757 정축 청 건륭(乾隆) 22년) 6월 3일(계해) 1번째기사

대행 왕비의 발인(發靷)에 임금이 단양문(端陽門) 밖에 나아가 대여(大轝)를 바라보며 곡(哭)하고 인해서 대

여를 따라 숙장문(肅章門) 밖에 나아가 두 번 절한 다음 곡하면서 전송하고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적체(敵體)의 의리는 매우 중대한 것이다 지금 내가 최복(衰服)을 입었으므로 대궐 안에서 곡하

며 전송하였지만 평상시의 경우는 대궐 밖에서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뜻을 《상례보편(喪禮補編)》에다

기재하도록 하고 또 정축년에 처음으로 시행한 까닭을 주석(註釋)으로 달도록 하라rdquo 하였다

- 선원전과 경복전 봉심 문로

『승정원일기』 영조 36년 3월 17일(임술) 원본1179책탈초본65책 (1720) 1760년 乾隆

(淸高宗) 25년

李永暉 以戶曹言啓曰 傳敎內景福殿與月郞 及眞殿及報春門外齋室 戶工曹堂上 每於季春奉審 可以修補者修補

墻垣頹圮處 椽木腐朽處 待守直中官所報 該曹草記 郞廳監蕫 卽爲修補 而事係正殿 則堂郞眼同擧行 於義本宮

亦依此例擧行事 命下矣參議臣金選慶 與正郞鄭一祥 工曹參判臣朴相德 正郞臣金鍾卨 進詣奉審 則於義本宮 姑

無修改處 而景福殿西邊芳春門一隻下莫只破傷 憶昔樓北邊椽木一箇 要家南邊椽木三箇 椽含一箇 平交臺一箇腐傷

蓋瓦脫落 西月廊椽木一箇腐傷 窓差備要家椽木一箇 永慕堂南行閣抹樓二間 同歸機一 廳板一立腐傷 之介一隻獨

窓一隻 無廣窓一隻破傷 南墻一間蓋瓦脫落 司鑰房抹樓歸機一箇腐傷 廳板一立 無土壁一面崩頹 四面墻垣 四間蓋

瓦庫庫脫落 別監房椽木十八箇 朴工二立腐破 獨窓二隻 之介二隻無 西邊墻垣三間崩頹 兩墻間墻垣十二間 蓋瓦庫

庫脫落 五間蓋瓦全無 報春門齋室椽木九箇 椽含一箇 平交臺一箇腐傷 仰土庫庫剝落 內外土壁剝落 萬福門外中間

傾側 朴工一立 倍防一箇 龍脂板二腐傷 蓋瓦脫落 東南墻六間蓋瓦庫庫脫落 齋室前行閣五間退 五間內二間退五間

頹壓 而材瓦全無 餘存三間材木腐傷 蓋瓦折半脫落 西南墻五間蓋瓦庫庫脫落 故分付各該司 使之修改 而亦令本曹

郞廳 監蕫擧行 何如 傳曰 允

- 황단 친제할 때 문로

『승정원일기』 영조 45년 8월 15일(갑자) 원본1295책탈초본72책(1010)1769년 乾隆(淸

高宗) 34년

己丑八月十五日寅時 上詣昌德宮入侍時 行都承旨金應淳 左承旨尹東昇 右承旨閔弘烈 左副承旨朴弼逵

右副承旨徐命善 同副承旨洪述海 假注書崔命麟middot尹弼秉 記事官鄭弘德middot李福徽 以次隨駕訖上具翼善冠middot衮龍

袍 以乘輿 出通陽門middot延和門外 降輿乘輦 藥房都提調金陽澤 提調韓光會 持湯劑進伏訖陽澤曰 夜間聖體

若何 上曰 一樣矣上進湯劑 命召香室守僕 驪陽府院君閔 海豐府夫人李氏middot恩城府夫人宋氏middot豐昌府夫人趙

氏middot慶恩府院君金middot嘉林府夫人趙氏 贈領議政崔 贈貞敬夫人洪氏 一體致祭事 分付上入昌德宮於進善門外降輦

以步輦 入進善門下 問于金應淳曰 彗星光芒及尾之長短 比前何如 應淳曰 光芒則似減 而尾迹則一樣矣上

曰 其退速 則漸値太陽而消散乎 應淳曰 妖不勝德 自然消滅矣下敎曰 吏middot戶房 兵middot刑房 依前相煥出駕

前下敎 上入萬安門 辰時 上以步輿 由追慕堂北墻外 詣奉審 金應淳啓曰 通禮未卽待令 推考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又傳曰 當日內行禮 百官行禮 置之上降輿于皇壇外 步入冽泉門神室前 行四拜禮 由東階

上 奉審神室 又上皇壇 奉審四隅而降 步履强健 挾侍落後 諸臣莫不瞻仰慶忭上還出冽泉門 奉審齋室 乘

步輦 還至金化門北西向四間閣前住輿 命尹東昇 讀御製懸板 至年月日 工曹參判金致仁奉敎書上曰 不覺其

間年數之多矣 命書記上至金化門內 命承旨知入 門名及右墻內三間閣 爲何閣 承旨還奏曰 門名金化 閣則

故中日廳矣上曰 予爲摠管時 由此門入直事如昨 居然爲幾年乎 上 至弘化門內乘輿鼓吹 下敎曰 毓祥宮歷

臨時 前後廂軍 道上留駐出駕前下敎 又下敎曰 禮房承旨 靈壽閣奉審以奏出駕前下敎 又下敎曰 禮房承旨

馳往養正齋 奉審以來出駕前下敎 又下敎曰 還宮時刻 待下敎 單子置之出駕前下敎 承旨閔弘烈奉審後復

命上詣毓祥宮內 住步輦 命入皇壇回駕時 御製承旨讀訖讀書以下 上 出毓祥宮入侍時下敎曰 後日擧動

時 雲劍依例望入出駕前下敎 上命應淳 書御製時 上曰 予今日行步 無甚艱澁 奉審皇壇時 中官落後矣應

淳曰 此非但心存誠敬之工 亦可觀 勝於前日矣金陽澤進前問候後 進湯劑酉時 上還宮於延和門外降輦陽

澤曰 動駕之餘 聖體若何 上曰 一樣矣進湯劑訖 上還宮後 諸臣以次退出

- 선원전 어진을 영희전으로 이봉할 때의 문로

『정조실록』 6권 2년(1778 무술 청 건륭(乾隆) 43년) 7월 11일(무술) 1번째기사

영종(英宗)의 어진(御眞)을 영희전 제5실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선화문(宣化門)으로 나아가서 선원전(璿源殿)에 들어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도로 만안

문(萬安門) 밖의 소차(小次)에 나아가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선원전의 제2실로 올라 나아가 갑자년1366)

의 어진(御眞)인 면복본(冕服本)을 신여(神轝)에 봉안하고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 어진을 받들어 신탑(神

榻) 위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탑전(榻前)에 나아가 손수 받들어 편 다음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도로 소

차에 나아가 원유관에 강사포를 고쳐 입고 양지당에 나아가 어진궤(御眞櫃)를 신여(神轝)에 봉안하니 도감

(都監)의 당상과 낭청이 신여를 모시고 만안문으로 나아가 신련(神輦)에 옮겨 봉안하고 인정문(仁政門)을 거

쳐 나갔다 임금이 걸어서 인정전 월대(月臺) 아래에 나아가 여(輿)를 타고 인정문을 나가서 여에서 내려 연

(輦)을 탔다 돈화문(敦化門)을 거쳐 영희전에 나아가 홍살문 밖에서 연에서 내려 여를 탔다 재전(齋殿)에

들어가서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신문(神門) 밖에 나아가 사배례를 행하였다 전(殿) 안으로 나아가니 김

상철(金尙喆) 등이 어진을 제5실에 봉안하였다 작헌례를 행하고 환궁(還宮)하였다 도감의 당상과 낭청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으며 대축(大祝) 윤숙(尹塾)middot이진형(李鎭衡)에게는 가자(加資)하였다 이조에서 윤

숙은 준직(準職)을 거치지 않았다고 아뢰었으나 특별히 가자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 선원전 전배 문로

『승정원일기』 정조 13년 12월 28일 (기묘) 원본1670책탈초본88책 (3132) 1789년 乾

隆(淸高宗) 54년

己酉十二月二十八日卯時 上詣眞殿展拜入侍時 行左承旨洪明浩 右承旨趙衍德 左副承旨曺遠振 右副承

旨申耆 同副承旨洪仁浩 假注書沈能迪middot洪樂游 記注官趙慶遠middot金鳳顯 檢校直閣李晩秀 待敎金祖淳 以次侍

立上具翼善冠middot衮龍袍 乘輿 出協陽門 由肅章門middot仁政門 至萬安門降輿 入眞殿展拜後 上曰 簾帳修改所入

戶工判 領率該色郞廳及工匠等 入侍 可也賤臣承命出傳 與戶曹判書金履素 工曹判書邊得讓 戶曹正郞李周

憲 偕入訖上曰 禮判望筒 卽爲擬入 待下批先進參後 謝恩之意 分付 可也賤臣承命出傳上曰 禮判牌

去來催促 使之卽爲進參 可也賤臣承命出 與禮曹判書徐有隣 偕入訖命仁浩書傳敎曰 歲前當展拜 而除夕

齋宿相値 今日眞殿修改 日勢差早 當由便道 展拜景慕宮 該房知悉修改罷後 上出萬安門 乘輿 由仁政門middot

肅章門middot建陽門middot銅龍門middot景光門 出弘化門 入逌瞻門 至齋室降輿上曰 都提調middot提調 先詣文禧廟之意 傳諭 可

也賤臣承命出傳上曰 文禧廟歷臨出駕前下敎 上展拜訖乘輿 出逌瞻門 入弘化門 由景光門middot銅龍門middot建

陽門middot肅章門middot進善門 出敦化門 由備邊司middot觀象監峴 至文禧廟 降輿 入廟 行奠酌礼訖仍詣儀嬪廟行奠酌禮後

乘輿 出廟門 由觀象監峴middot備邊司 至敦化門 下標信解嚴 由進善門middot肅章門middot協陽門 入宣化門 還內

- 관풍각에 간경하러 거둥하는 문로

『승정원일기』 순조 11년 윤3월 14일(임진) 원본1996책탈초본105책(2121) 1811년 嘉

慶(淸仁宗) 16년

辛未閏三月十四日午時 上御觀豐閣看耕時 諸承旨及入直玉堂middot閣臣同爲入侍時 行都承旨洪義浩 右副承旨申

絅 同副承旨徐俊輔 假注書朴來謙middot洪羲祖 記注官金初燮 記事官朴齊聞 直提學洪奭周 應敎李志淵 修撰徐長

輔 以次進伏訖 上曰 今日看耕 故使之入侍矣 上曰 農圃擧行 斯速爲之 上曰 闕外入直文蔭 昨日試

取 闕內入直文臣 前旣應製 而闕內入直蔭官 姑未應製矣 闕內入直蔭官 凡幾司乎 義浩曰 尙瑞院middot尙衣院middot

司饔院middot典設司矣 上命書傳敎曰 闕內入直文臣 前已應製 而蔭官不爲應製 今日適因入侍 使之同爲待令上

曰 試官則閣臣及同副承旨middot上番玉堂middot下番翰林爲之上乘肩輿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隨後 仍由石渠門middot魚水堂middot

淸防閣middot珍藏閣middot尊德亭前路 入望春亭 御天香閣 少頃 命入侍 諸臣以次進伏訖 上曰 應製蔭官已待令乎

義浩曰 姑未及來待 而檢書官亦是入直蔭官 使之同爲待令 何如 上可之 上曰 應製人催促入來 可也 來

謙承命出去 上曰 公事待令乎 義浩曰 待于靑陽門外矣 上曰 懸題紙 磨墨器 持入 可也 賤臣承命出

來 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少退 仍爲隨後 上乘肩輿 出望春亭 還由暎花堂前路middot宜春門middot芙蓉亭邊拱辰門middot集成

門 御籠山亭 少頃 命入侍 以次進伏訖 上曰 應製人已來待 則使之入來 試官亦下筵 無唱行禮 可也

奭周middot俊輔middot志淵middot齊聞 下筵行禮 還上進伏 上命書御題五言絶句觀豐春耕 押春 限午時 俊輔承書 齊聞立傳

司謁 司謁跪受懸題 上曰 第三人誰也 義浩曰 司饔主簿金照矣 上曰 吏文學官出身乎 義浩曰 然矣

上曰 有文名乎 義浩曰 善於文而尤工於詞律矣 上曰 第一第二第四人皆誰也 義浩曰 尙瑞直長金昊淳 尙

衣直長金義友 檢書官柳本藝矣 上曰 公事持入 可也 來謙承命出去 持入 上曰 讀之 俊輔讀公事訖

傳挾侍以上 上下前入公事敎曰 都承旨middot同副承旨輪回讀奏 義浩middot俊輔讀公事訖 上曰 應製人幾皆製之 則以

次呈券 而上番兼史爲收券官 司謁爲衛軍樣擧行 可也 上曰 科次爲之 奭周曰 當取幾人耶 上曰 取一

人 奭周曰 一券不書臣謹封 違格拔去矣 上曰 違格則推考乎 奭周曰 文臣製述則有外違罷職之規 而應製

則無推考之例矣 奭周書三下於一券 俊輔坼名讀奏 上命書傳敎曰 禁直蔭官應製優等 司饔院主簿金照 奎

章全韻中板部賜給 上曰 向來禁直文臣應製 以大小板分等賜給 蔭官亦欲區別 故書下中板 而若無中板 則

以印紙之長廣闊狹區別 好矣 昨日闕外入直文蔭應製 有兒馬帖之賞 冊子之賞 勝於馬帖乎 義浩曰 馬帖則

重於冊子 而領受者之榮光 冊子勝於馬帖矣 左副承旨申溆 宗廟middot景慕宮奉審摘奸後入來 進前奏曰 臣承命馳

詣宗廟尊所 奉審無頉 祭物middot祭器middot祭井 看審精潔 諸執事middot進排官 摘奸無頉 仍詣景慕宮尊所 奉審無頉 祭物middot

祭器middot祭井 看審精潔 諸執事middot進排官 摘奸無頉矣 上曰 移御時 王大妃殿middot惠慶宮middot嘉順宮陪從官過祗迎所時

馬上鞠躬 中宮殿middot元子陪從官過祗迎所時 下馬事 預爲知委 可也 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隨後 到暎花堂 當宣

飯也 上乘肩輿 由望春middot尊德亭前路middot集春門內麓middot觀豐閣前路 御暎花堂 諸臣待于丹楓亭 少選 以司謁宣

飯訖 上乘朱軒 由靑陽門middot永淸門middot賓陽門middot涵仁亭前路middot重春門middot小宙合樓前路 至熙政堂 上命退 諸臣以次退

- 왕세자가 성균관 입학하러 가는 길과 문

『순조실록』 20권 17년(1817 정축 청 가경(嘉慶) 22년) 3월 11일(갑인) 1번째기사

왕세자가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고 이어 입학례를 행하였다【세자가 쌍동계(雙童髻)middot공정책(空

頂幘)middot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수레에 올라 이극문(貳極門)을 나서 홍화문(弘化門)에 이르러 동협문(東挾門)

으로 해서 나와 수레에서 내려 연(輦)을 바꾸어 타고 관현(館峴)을 거쳐 문묘의 동문 밖에 이르러 연에서 내

려 편차(便次)에 들었다 작헌례를 행할 때가 되자 세자가 학생복으로 갈아입고 편차에서 나오니 겸보덕(兼

輔德)이 앞에서 인도하여 문묘의 동문으로 들어가 자리에 나아가 사배(四拜)하고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갔

다 이윽고 동계(東階)로 해서 올라 신위(神位) 앞에 나아가 삼상향(三上香)하고 잔을 잡고 헌작(獻爵)하였다

다음에는 사성위(四聖位)에 나아가 상향하고 헌작하기를 처음처럼 하였다 (-중략-) 박사가 글을 읽자 세자

도 따라 읽고 박사가 글 뜻을 해석하였다 해석이 끝나자 집사가 서안과 책을 치웠다 보덕이 세자를 인도하

여 서계로 내려와 편차에 들러 공정책과 곤룡포로 갈아입고 연에 올라 관현을 경유하여 홍화문에 이르러 연

에서 내려 수레로 바꾸어 타고 동협문으로 들어와 동룡문(銅龍門)을 지나 이극문으로 들어와 대내(大內)에

들어갔다】

- 경연관과 서연관의 대내 출입 문로 연영문과 동룡문

『순조실록』 21권 18년(1818 무인 청 가경(嘉慶) 23년) 9월 10일(을사) 1번째기사

차대하였다 우의정 남공철이 아뢰기를 ldquo오늘날의 많고 많은 일 중에서 왕세자가 학문의

성취를 먼저 힘쓰는 것보다 급한 일이 없습니다 언행(言行)으로 감화시키는 데서는 숙유(宿

儒)가 가장 좋으며 바르게 기르고 훈도하는 방도에도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

에는 경연관(經筵官)을 경서에 밝고 행실이 스스로 수양된 사람으로써 가까이서부터 초선

(抄選)한 다음 서연관(書筵官)도 그대로 겸하도록 계하(啓下)해서 연영문(延英門)과 동룡문

(銅龍門)의 강석(講席)을 드나들게 한다면 매우 좋겠습니다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주합루와 연경당에 봉안한 어진을 경모궁과 경우궁으로 각각 옮길 때의 문로

『일성록』 헌종 3년(1837) 양력 4월 17일 갑자

강 純宗大王 翼宗大王御眞自宙合樓 演慶堂移安于景慕宮望廟樓 景祐宮 誠一軒時親行祗送

목 初次移安時至卯時 時原任閣臣分承史以下 原任提學 沈象奎 朴宗薰 提學 趙寅永 原任提學 鄭元容 提學 徐

有榘 原任直提學 金鏴 檢校直提學 徐憙淳 直提學 朴永元 原任直閣 徐俊輔 李光文 李嘉愚 金鼎集 吳取善 原

任待敎 李憲瑋 檢校待敎 金興根 趙斗淳 原任待敎 金英淳 檢校待敎 金學性 分承旨 張敎根 徐念淳 趙秉憲 金

東健 分注書 金始淵 洪在龍 史官 申錫愚 徐耆淳 具朝服分詣宙合樓 演慶堂前庭行禮訖閣臣奉純宗大王影幀樻子

安於轝戊辰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 閣臣奉翼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丙戌圖寫一本予具遠遊冠 絳紗袍自內詣宙合樓

神轝奉審乘輿出宜春門詣演慶堂 神轝奉審陞詣堂內奉審後乘輿出金馬門至月覲門內入小次純宗大王影幀神轝將至

予出次祗送翼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祗送訖乘輿還內純宗大王 翼宗大王 神轝以次由月覲門自內詣景慕宮望廟樓戶

外閣臣以次奉出影幀樻子如儀奉安後閣臣以下行禮退出 再次移安時至午時 閣臣奉純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戊辰

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 閣臣奉翼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丙戌圖寫二本庚寅圖寫一本予具遠遊冠 絳紗袍乘輿出拱辰

門至曜金門內入小次純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出次祗送翼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祗送訖乘輿還內純宗大王 翼宗大

王 神轝以次由曜金門自內詣景祐宮 誠一軒戶外閣臣以次奉出影幀樻子如儀奉安後閣臣以下行禮退出奎章閣啓言

純宗大王 御眞戊辰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翼宗大王御眞丙戌圖寫一本奉安于景慕宮望廟樓純宗大王 御眞戊辰圖寫

一本庚寅圖寫一本翼宗大王御眞丙戌圖寫二本庚寅圖寫一本奉安于景祐宮 誠一軒兩廟御製各一件同爲奉安

- 창덕궁에서 종묘에 전알하러 가는 문로

『일성록』 고종 31(1894)년 양력 3월 2일 기묘

강 詣宗廟展謁

목 具翼善冠 袞龍袍乘輿出太和宮門至宗廟 北墻門降輿入齋室展謁時至改具冕服乘輿至東神門降輿詣版位行禮

陞詣第一室奉審次詣各室奉審如儀訖出西神門入永寧殿東神門詣版位行禮陞詣第一室奉審次詣各室奉審如儀

訖還出東神門乘輿至南神門降輿步過還乘輿入齋室少頃出次乘輿出北墻門至長樂門還內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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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政院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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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典通編』(1785)

『國朝五禮儀』(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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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官通考』(1788)

『新增東國輿地勝覽』

『東國輿地備攷』

『東輿備考』(1863)

『增補文獻備考』

『萬機要覽』

『宮闕誌』(憲宗年刊)

『宮闕志』(純宗年刊)

『景福宮middot昌德宮內上樑文』

「東闕圖」

「東闕圖形」

『時敏堂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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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德宮昌慶宮修理都監儀軌』(효종 3 1652)

『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효종8 1657)

『集祥殿修改都監儀軌』(현종 9 1668)

『昌德宮營建都監儀軌』(순조 34 1834)

『仁政殿營建都監儀軌』(순조 3 1803)

『仁政殿重修儀軌』(철종 8 1857)

『(景福宮middot昌德宮璿源殿第一室)增建都監儀軌』(광무 4 1900)

『慈慶殿進爵整禮儀軌』(순조 27 1827)

『英祖middot莊祖文集』

『英祖文集補遺』

『正祖文集(弘齋全書)』

『純祖文集(純齋稿)』

『翼宗文集』

『憲宗(元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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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심우경 「동궐도에 나타난 식재 현황 및 특징 분석」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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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하middot이상해 「낙선재 일곽 건축의 조영에 관한 복원적 연구」 『건축역사연구』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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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성 「조선시대 궁궐에 있어서 제례의식공간의 궁원구성과 식재에 관한 연구 - 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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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권 2호 한국전통조경학회 1996

백지성 「창덕궁 후원 어수당구역의 공간구성과 식재에 대하여-동궐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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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경 「우리 전통조경의 특징과 배경」 『한국전통조경학회지』 23권 1호 한국전통

조경학회 2005

심우경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선호한 조경식물과 조경문화」 『한국실학연구』 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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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근 「조선 전반기 궁궐건축의 형식과 의미에 관한 연구」『강좌 미술사』3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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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근 「조선왕조의 궁궐과 정치」『미술사학』22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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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근 「조선 후반기 건축의 對中 교섭」『조선 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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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20세기 조선 궁궐의 건축적 변형과정」『향토 서울』제60호 서울특별시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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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미 「The screen of the Five peaks of the Chosun Dynasty」『조선왕실의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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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학 「창덕궁 후원의 경관에 관한 소고- 정조의 상림십경을 중심으로」 『한국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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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현 「창경궁 정비 계획 연구-실외 환경개선을 중심으로」 『청주대학교 산업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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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정 「1920년 창덕궁 벽화조성에 관한 연구」『미술사학보』33 미술사학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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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5호 통권235호 대한건축학회 2008

조재모middot손성기 「동궐도에 묘사된 가변시설과 궁궐의 공간 운영」『대한건축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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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모 「영middot정조대 국가의례 재정비와 궁궐건축」『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21권

12호 2005 12

조재모 「조하 의례동선과 궁궐 정전의 건축형식」『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26권

2호 2010 2

조재모middot경세진 「합문을 통해 본 조선시대 궁궐의 내외 개념」『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

획계』 25권 12호 2009 12

조재모심우갑 「英middot正祖代의 王室私廟 建立과 影響」 『대한건축학회논문집』 18권7호

대한건축학회 2002

주남철 「효명세자 영건기록에 관한 연구」『대한건축학회논문집』21 대한건축학회

2005

한동수 「궁궐의 창호 변화에 대한 연구」『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논문

집』 2008년 11월

한동수 「개화기 이후 궁궐 창호의 변화에 관한 연구」『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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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수 「창경궁 환경전 복원계획 연구보고서」『건축역사연구』 제12권 3호 2003 9

한동수middot권미주 외 「일제강점기 이후 창덕궁 후원 연구사」『건축역사연구』15 한국건

축역사학회 2006

홍석주 「광해군대의 궁궐영건에 관한 연구」『건축역사연구』 8권 4호 1999 12

홍석주 「의궤가 전하는 궁궐건축의 진실」『건축역사연구』41 2005년 3월

홍순민 「조선후기 관원의 궁궐 출입과 국정윤영」『역사비평』76 역사문제연구소

2006

황정연 「조선시대 궁중 書畵收藏에 대한 연구」『서지학연구』제32집 2005

4 학위청구논문

경세진 「閤門을 통해 본 朝鮮時代 宮闕의 內外槪念」 경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

논문 2010

권행가 「고종 황제의 초상 -근대 시각매체의 유입과 어진의 변용 과정」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5

김동현 「연암 박지원(1737-1805)의 건축관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

논문 2002

김은경 「昌德宮 大造殿 群鶴圖 臨模硏究」 한성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6

김지현 「일제강점기 창덕궁 희정당의 변형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

위청구논문 2006

노진하 「樂善齋 一廓의 造營背景과 건축특성」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1995

도영주 「勤政殿과 仁政殿의 건축기법 비교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

논문 2002

명세나 「조선시대 오봉병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7

박희용 「창덕궁 정전영역의 구성과 운영」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8

배한선 「연경당 낙선재 운현궁의 건축 특성 연구 궁궐 침전 상류 주택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과학기술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3

손성기 「lt동궐도gt에 묘사된 가변시설과 궁궐의 공간운영」 경북대학교 석사학위청구논

문 2009

신귀정 「창덕궁 동궁의 공간구조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0

우동선 「창덕궁의 변천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1991

윤대길 「朝鮮時代 宮闕內殿에 관한 硏究 朝鮮時代 宮闕內殿에 관한 硏究」 고려대학교

석사학위청구논문 1990

윤도경 「창덕궁 부용지 일원의 위치와 공간구성 특성」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3

윤 정 「18세기 국왕의 lsquo문치rsquo 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7

윤정현 「조선시대 궁궐 중심공간의 구조와 변화」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0

이강근 「경복궁에 관한 건축사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설 한국학대학원 석사학

위청구논문 1984

이만희 「창경궁 내전권역 공간구성에 대한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

문 2010

이민아 「孝明世子middot憲宗代 宮闕 營建의 정치사적 意義」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

논문 2007

이보경 「창덕궁 규장각의 입지 특성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1

이정국 「15세기 궁궐 정전 영역의 내부공간 이용방식에 관한 연구」『건축역사연구』

13 한국건축역사학회 2004

이정섭 「창덕궁내 亭middot榭middot堂middot齋의 주련 조사현황」『문화재』17 문화재관리국 1984

이혜원 「경복궁 중건이후 전각구성의 변화」 경기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9

이효석 「조선시대 세자의 궁궐 공간 사용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5

장영기 「조선시대 궁궐 편전의 성격과 체재 변화」『조선시대사학보』48 조선시대사

학회 2009

정은경 「조선후기 궁궐 정침에 대한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5

조옥연 「조선 궁궐의 동조 건축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8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3

조재모 「창덕궁의 성장과정과 배치특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

논문 1997

조진동 「창덕궁의 공간 경계요소에 관한 연구 담middot행각middot문의 유형과 디자인 특성을 중

심으로」 동국대학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6

최경자 「창덕궁 선원전-西闕內各司 권역의 건축형식과 공간특성」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0

최기영 「조선시대 궁중의례에서 사용된 차일의 기능과 특성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

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9

한경희 「舊韓末 宮闕建築 內部意匠에 관한 硏究 西歐式要素의 영향을 中心으로」 이화

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1977

한주성 「조선후기 궁궐건축의 행각 구성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1999

홍선기 「조선시대궁궐의 공간구조에 관한 연구 경복궁 창덕궁 경희궁을 대상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1991

홍순민 「조선왕조 궁궐 경영과 lsquo양궐체제rsquo의 변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

문 1996

황준원 「조선시대 궁궐내 길례middot흉례의식 공간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

위청구논문 2004

5 도록middot도면집 고려대학교박물관 『조선시대 기록화의 세계』 2001

고려대학교박물관 『명품도록』 2008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안내도록』 2007

국립고궁박물관 『궁궐의 장식그림』 2009

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 아름다운 덕을 펼치다』 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북궐도형』 2006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소장유리건판1 - 궁궐』 2009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향연과 의례』 2009

『꼬레아 에 꼬레아니(사진해설판)』(이돈수middot이순우 지음) 하늘재 2009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宮中遺物圖錄』 1986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동궐도』 1991

문화재청 『日本 宮內廳所藏 昌德宮寫眞帖』 창덕궁관리소 2006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육백년 1405-2005』 2005

서울역사박물관 『도성대지도』 2004

서울대학교박물관 『고궁전사집첩』

영남대학교박물관 『한국의 옛 지도』 1915

예술의 전당 『서울 600년 고궁의 현판』 1994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상 하 서문당 1986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6

『사진으로 본 백년 전의 한국』(김원모middot정성길 엮음) 가톨릭출판사 1997

『서울 풍광』 -서양인이 만든 근대 존기 한국 이미지Ⅰ- 청년사 2009

『유리원판(창덕궁)』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총독부 『朝鮮古蹟圖譜』十 1930

『日本之朝鮮』(정성길 편 이민원 감수 『일제가 강점한 조선』 한국영상문화사 2006)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조선왕실의 책』 2002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실의 행사그림과 옛지도』 200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장서각 명품선』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근대건축도면집』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근대건축 도면집-해설편』 2009

6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최후의 진전 창덕궁 신선원전』 2010

국립문화재연구소 『창덕궁 금천교 발굴조사보고서』 2002

김귀곤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원유 생태조사보고서(수목 및 식생중심) 1990

문화공보부 『창덕궁 重建報告書』 1987

문화재관리국 『조선조왕국 중요건축물지정조사서(Ⅰ)』 1984 12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仁政殿 실측조사보고서』 1998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舊 璿源殿 실측조사보고서』 1992

문화재청 『창덕궁 新璿源殿 수리보고서』 2001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인정전 일곽복원공사 기초조사에 의한 설계설명서』 1992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仁政澱 行閣址 발굴조사보고서』 1995

문화재청 『창덕궁 仁政殿 行閣 중건공사보고서』 1999

문화재청 『창덕궁 奎章閣 舊璿源殿 권역 발굴조사보고서』 2000

문화재청 『창덕궁 半島池 보수 정비공사 준공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상방지 유구조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熙政堂 수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middot종묘원유 조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정자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3

문화재청 『창덕궁 희정당 신관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3

문화재청 『창덕궁 경훈각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4

문화재청창덕궁관리소 『창덕궁 승화루 및 일곽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5

문화재청 『창덕궁 懿老殿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4

문화재청 『창덕궁 인정문 정밀실측조사보고서』 2010

문화재청 『창경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2010

김동욱 『조선후기 궁궐건축의 조영에 관한 연구』 국립문화재연구소 1990

안병찬이강근 외 『궁궐채색기술 특성규명 연구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전상운 『창덕궁 어차 수리 복원 보고서』 2004

중앙문화재연구원 『창덕궁 반도지 시굴조사보고서』 2001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함원전 보수공사』 2005

웹 사이트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httpsjwhistorygokr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e-kyujanggaksnuackr

한국고전종합 DB httpdbitkcorkr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httpyoksaaksackr

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

문화유산에게 소심하게 말걸기 httpwwwcyworldcomangayo

Page 2: 조선왕실의 건축, 창덕궁 학술연구 · 2012. 5. 15. · 연구책임자: 이강근(한국건축역사학회 이사) 공동연구원: 이혜원(한국전통문화학교

연구책임자 이강근(한국건축역사학회 이사)

공동연구원 이혜원(한국전통문화학교 강사)

공동연구원 이경미(한국건축역사학회 이사

공동연구원 안병찬(경주대학교 교수)

조선왕실의 건축 창덕궁 학술연구

2011 8

목차

Ⅰ 연구의 목적

Ⅱ 연구의 내용

1 창덕궁의 역사

가 조선전기

나 조선후기

다 근middot현대기

2 창덕궁 영역의 변천

가 조선전기 창덕궁의 영역

나 조선후기 창덕궁의 영역

다 근middot현대기 창덕궁의 영역

3 창덕궁의 배치와 특징

가 영역별 배치와 특징

나 내부 경계의 변천

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역 외곽의 변천

4 창덕궁 건물의 구조와 특징

가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인조 25년 1647)

나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인조 26년 1648)

다 『창덕궁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昌慶宮修理都監儀軌)』(효종 3년 1652)

라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효종8년 1657)

마 『집상전수개도감의궤(集祥殿修改都監儀軌)』(현종 9년 1668)

바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순조 3년 1803)

사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순조 34년 1834)

아 『인정전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철종 8년 1857)

5 창덕궁 건물의 단청과 특징

가 인정전의 단청

나 인정전 단청과 의궤

다 연구middot조사 방법

라 의궤 기록과 현존 단청안료의 비교 고찰

마 인정전 단청의 문양 특성

6 창덕궁 궁역 궁성 궁성문 궁장문 문로

가 궁역

나 궁성문과 궁장문

다 문로

lt부록gt

Ⅰ 연구의 목적

국립고궁박물관이 창덕궁을 주제로 한 전시를 앞둔 시점에서 창덕궁에 대한 기초 사료의

집성과 창덕궁 연구의 새로운 바탕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 연구 용역을 발주한 것으로 이해

하였다 창덕궁에 대한 이제까지의 연구에서도 사료의 검증을 통하여 창덕궁의 시간적 공간

적 변천 과정을 구명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조선전기까지의 창덕궁에 대해서는 조선왕조

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은 한정된 사료에 의지하여 원래의 모습을 추정해 왔지만 조

선후기의 창덕궁에 대해서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사료가 대거 남아있고 동궐도나

동궐도형과 같은 시각 자료 또한 남아 있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시공간적 변천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헌사료가 원문 상태로 소장처에만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구자의

접근이 어려웠고 그런 탓에 사료의 내용이 연구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였다 최근에 이르

러 관찬 사서나 의궤 같은 귀중한 사료는 물론 개인 문집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전자문서화

되어 인터넷상에서 검색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를 활용하여 창덕궁에 대한 이해 또한 확

대 심화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또 최근에 학계에 처음으로 종합 소개된 장서각 소

장 창덕궁 관련 도면 자료는 20세기 전반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자행된 창덕궁의 훼손

과 개조 과정을 담고 있어서 대한제국 멸망 이후의 변천상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렇듯 달라진 여건 아래서 창덕궁에 대한 기존의 콘텐츠를 능가하는 새로운 콘텐츠의 개

발과 구축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창덕궁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 전시에도 새로운 콘텐츠를

활용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동안 문화재청의 다대한 복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창덕

궁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으로 개조된 모습 위에 부분적인 복원이 이루어진 어정쩡

한 상태이다 창덕궁의 원형과 변형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Ⅱ 연구의 내용

1 창덕궁의 역사

가 조선 전기

1) 太宗代의 창건

(1) 離宮 건립의 동기

조선왕조의 수도 한성의 중심은 정궁인 경복궁이었으며 도성 안의 모든 시설은 경복궁

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배치되었다 新都의 경영을 맡았던 사람 가운데 아무도 한성 안에 궁

궐을 하나 더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태종이 한성 주변의 母岳과 한

성을 비교한 결과 한성으로 환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나서도 정궁인 경복궁

에 들어가지 않고 따로이 새로운 궁궐을 건설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 도성 안에 그

것도 정궁으로부터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lsquo離宮rsquo이란 미명하에 새로운 궁궐을 지은 태종의

숨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궁궐이 정치의 중심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궁궐 앞에 수많은 政廳과 官廳이 마

련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설은 물론 정궁 남쪽대로 좌우에 도열하는 것이 고대국가 이

래의 오랜 전통이다 그런데 이궁이라 하면 정궁에서의 정치를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 天災

地變으로 정궁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을 지속하기에는 백성들에게 미안한 경우 등에만 잠시

정궁을 피해 있기 위하여 즉 避宮하기 위하여 지은 궁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궁 앞에는 정

청이나 관청을 마련할 필요가 전혀 없다

정궁인 경복궁을 피하여 잠시 거처하기 위하여 새로운 궁을 지었다면 이는 이궁의 본래

용도에 합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피궁할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 왕실과 가

까운 관계에 있는 관료나 친인척의 집을 피궁 장소로 삼을 수는 있으나 이는 장구한 계책이

될 수 없으므로 어차피 이궁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시설이었다 그러나 이궁 건설 시기

를 하필이면 한성 환도 시점으로 정한 데는 특정한 이유가 있었다

즉 태종의 왕위 계승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던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태

종이 lsquo왕자의 난rsquo을 두 차례 겪고 겨우 왕위에 올랐을 때 수도는 개경이었다 혼란기의 정치

상황을 마무리하고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難題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경을 떠날 수밖에 없

었다 또 한성으로 환도하는 마당에 骨肉相殘의 비극이 얽힌 경복궁으로의 入宮을 피하려면

새로운 궁궐이 필요했다 이 시기에 집권 관료층의 관심을 천도와 새로운 궁궐 조성에로 돌

려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목적과 흉흉해진 민심을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하여 바로잡으려

는 정치적 의도도 작용하였다

그 결과 lsquo이궁rsquo이란 이름의 궁궐을 도성 안에 하나 더 지음으로써 왕권의 현실적 기반을

공간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단순히 피궁하기 위하여 이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이궁이 지어짐으로써 한성의 북반부는 이궁과 정궁 두 개의 궁궐이 각각 응봉

과 백악을 배경으로 위세를 갖추어 동서로 布陣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1405년에 이궁이 완

성되자 곧 1406년에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1411년에 명당수를 끌어들이고 御構를

팠으며 1412년에는 원래 있던 작은 누각을 헐고 경회루와 연못을 대규모로 조성하여 아름

다운 경관을 조성하여 중국 사신의 접대에 대비하도록 한 사실 등을 보더라도 태종이 경복

궁을 꺼려서 거처하지 않으려고 이궁을 지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태종이 왕권강화를 최대의 정치적 목적으로 삼아 외척세력과 공신세력마저 완전히 제거

한 다음 왕-의정부-육조의 國政體裁를 왕-육조의 直啓制로 전환시켜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

게 강화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에도

창덕궁 바로 곁에 수강궁을 짓고 거처하며 여전히 병권을 장악한 채 도성 안 여러 곳에 수

많은 이궁을 건설하였다는 사실은 창덕궁을 창건한 이유가 비단 경복궁이 싫어서만은 아니

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1)

(2) 창건 과정

창덕궁의 창건은 한성으로 환도할 것을 결정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맨 먼저 1404년

10월 6일에 당시의 향교동 응봉 자락 아래로 터를 정하고 이날로부터 공사에 착수하였다

lsquo離宮造成都監rsquo이 조직되고2) 도감의 우두머리인 提調 李稷의 설계와 감독 수많은 工匠군

인승려백성 등의 賦役 노동에 힘입어 착공된 지 1년만인 1405년 10월에 드디어 新宮이

낙성되었다 태종은 낙성되기 10여 일 전에 서둘러 개경으로부터 환도하여 領議政府使 趙浚

(1346~1405)의 집에 마물다가 10월 20일에 입궁하여 성대한 落成宴을 베풀었다 이때 낙성

된 건물은 왕 부부의 침전 일곽과 정전편전 등 외전 일곽뿐이었다 신궁에서 펼쳐질 새로

운 정치를 보좌할 관청들은 경복궁 앞에 지어져 있던 건물들을 수리하여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으며 1405년 8월에 관청 건물과 관원들의 주택을 수리하는 일에는 강원도와 충청도의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신궁에서 정치활동이 시작된 이후에도 공사는 계속되었다 즉 1406년에는 眞殿인 仁昭

殿(태조와 태조비 신의왕후의 신주를 모신 건물)과 佛堂을 후원 지역에 지었고3) 누각(廣延

樓) 1408년에는 연못 1411년에 정자(解溫亭 14년 6월에 愼獨齋로 개칭)가 조성되었는데

누각은 왕이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풀 수 있도록 휴식하거나 신하들과 연회를 열어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정자는 홀로 휴식과 사색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조성되었

또 1408년에는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비빈과 후궁들로 하여금 양잠의 중요성을 알도록

일깨우고 1410년에는 지형에 맞추어 소나무를 심어 궁원의 풍광을 아름답게 가꾸었다 1411

년에는 누각과 침실(세조 7년에 누각은 澄光樓 침실은 凝福亭玉華堂 등으로 명명됨)을 더

만들고 진선문밖에 돌다리를 조성하였다고 하며 1412년 5월에는 궐문인 돈화문을 세우고

1413년 1월에는 闕門 어귀에 下馬標木을 세워서 왕과 신하의 차별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같

은 시기에 종을 주조하여 궐문인 돈화문에 걸었다4)

이렇듯 왕궁의 체재를 갖추고 태종 5년 이후 중심적인 정치의 장으로서 역할을 다한 창

1) 태종은 태상왕과 상왕의 거처로 덕수궁과 인덕궁을 각각 지어 바쳤으며 아홉 곳의 이궁을 도성 안팎에 건설

하여 거처를 옮겨 가면서 살았다 이 가운데 避災를 위하여 지은 이궁은 餘慶坊本宮이었다(『서울 六百年

史』第一卷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 219~226쪽 참조)

2)『太宗實錄』권8 태종 4년 9월 辛亥條 성석린조준 등 집권 관료들이 lsquoldquo경복궁이 있는데 따로 이궁을 세우는

것은 불가하다rdquo고 반대하자 도감의 명칭을 lsquo宮闕修補都監rsquo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무마책이었을

뿐 이궁 조성 공사는 곧 강행되었다

3) 『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63 187~188쪽

4) 敦化門鐘銘은 1412년 9월에 변계량이 지었는데 『태종실록』에 게재되어 있으며『新增東國輿地勝覽』에 경

복궁광화문종명으로 잘못 소개되어 있다 이 점은『서울 六百年史』第一卷 210쪽 주 42)에서 金龍國이 일찍

이 지적해 놓았다

덕궁은 핵심적인 정치 장소인 인정전 일곽이 정치의 장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

유로 대대적으로 수리된다 이때는 태종이 세종에게 선양한 왕권 교체기인 1418년 6월부터

8월 사이에 해당되는데 부실공사로 회랑 일부가 무너지자 감독 책임자인 박자청이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때 공사를 담당한 목수 吳德海의 이름이 실록에 남아 전한다

(3) 창건 창덕궁의 건축적 성격

1405년 10월에 낙성된 건물의 구성과 규모는 『태종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5)

이 기사 내용을 토대로 창건 창덕궁의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왕실 일가의 생활공간인 內殿 일곽은 正寢廳과 좌우의 침전 등 3침전을 중앙에

두고 사방을 행랑으로 빙 둘러막은 中庭式 배치법을 따르고 있는데 정침청과 양 옆 침전

정침청과 남쪽 행랑 사이는 개방형 복도(穿廊)를 두어 연결하고 있다6) 北行廊이 11칸이고

東西行廊이 각 15칸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침전 일곽은 폭 11칸에 깊이 15칸인 縱深形 공간

형태를 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행랑의 쓰임새에 대해서는 북행랑과 접한 서행랑 부분

에 3칸 짜리 별실을 두고 동행랑에 樓와 庫를 각각 3칸씩 두었다고 하였을뿐 나머지 부분

의 용도는 밝히지 않았다 이밖에 침전 주변에는 수라간(왕과 왕비의 수라를 준비하던 곳)

司饔房 湯子洗手間 등이 마련되어서 왕실 일가의 사생활을 도울 수 있게 하였다

둘째 정치의 장인 治朝 구역은 正殿便殿報平廳 등으로 이루어졌다7) 이 가운데 정

전은 2층으로 쌓은 넓고(가로 63자 세로 33자) 높은(아래층 4자 1치 위층 3자 5치) 월대 위

에 세워졌으며8) 행랑으로 둘러싸인 정전 둘레의 마당 즉 朝廷은 폭이 크고 깊이가 얕은 횡

축형 공간형태(가로 156자 세로 117자)를 택하고 있었다 정전 앞 마당에서 행해지는 朝會

나 朝賀 등 대규모 儀禮를 생각할 때 또 品等에 따른 자리가 縱軸 방향으로 배열됨을 고려

할 때 창덕궁 정전 앞 조정은 쓰임새를 잘 고려한 형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창건된 지

13년만인 1418년에 정전 일곽을 모두 헐고 새로 짓는 개건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이때 정전은

원래 자리보다 국면이 조금 넓은 서쪽으로 옮겨 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9)

5)『太宗實錄』 卷 10 太宗 5年 5月 辛巳

6) 창건 당초 창덕궁의 침전 형식에 대하여 ldquo어간 3간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로 볼 수 있는 침전이 각 2간인

형식rdquo 즉 정면 7칸인 건물로 해석한 견해도 있다 (김동욱 「17세기 조선조 궁궐 內殿건물의 室內構成에 관

한 연구」『大韓建築學會論文集』1992년 10월호 88쪽) 세조 7년에 건물 이름을 명명할 때 침전을 兩儀殿

좌우 침실을 麗日殿과 淨月殿으로 정했다는 기사는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준다

7) 편전 이외에 보평청이 있었다고 하나 어디에 있었는지 그 역할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름은 무어라고 명

명되었는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편전이 朝啓廳으로 불리며 思政殿으로 명명

된 사실을 고려할 때 혹시 편전은 朝啓(상참의식이 끝난 뒤 계문할 관원들과 史官이 함께 편전 안에 들어가

俯伏하고 차례로 용건을 말하는 정규회의)할 때만 쓰이고 보평청은 常參(약식 조회로서 매일 대신중신중요

아문의 당상관승지사관 등이 副殿에서 常服 차림으로 왕을 朝謁하던 정규 행사)에만 쓰인 것이 아닐까 추측

된다

8) 정전 월대가 폭 63자 깊이 방향 33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월대의 형태는 경복궁 근정전 월대처럼

정전 주변을 고루 두른 형식이 아니라 현재의 창덕궁 인정전 월대와 같은 모습 즉 건물 앞쪽만 길게 내민 형

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9) 『昌德宮』 -한국전통건축 제2집- 대한건축사협회 1994 41쪽 및 『太宗實錄』 太宗 17년 윤5월 정묘조

태종 18년 6월 계사조 동년 7월 갑진계축을묘조 『世宗實錄』 世宗 즉위년 9월 정사경신조 등 참조 또

등고선이 표기되어 있는 창덕궁배치도 참조

셋째 정전과 편전으로 이루어진 치조 일곽 가까이에는 왕의 통치를 측근에서 보좌할

여러 관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낙성 당일의 기사에는 정전 동행랑에 자리잡은 승정원

청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어서10) 태종대에는 『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간행)에 실려

있는 몇몇 관청조차도 갖추어지지 않았던 것같다11) 승정원 이외에도 궐 안에 있어야 할 관

청은 많았을 테지만 대부분 경복궁에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불편하지만 관리들이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업무를 처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405년에 서둘러 낙성된 창덕궁에 태종이 줄곧 머물러 있게 되자 이후에는 누각(廣延

樓와 澄光樓)과 침실 및 연못을 조성하고 후원에 소나무를 심고 정자를 세우는 등 아름다

운 경관을 조성하였다 또 어구를 파서 물길을 끌어들여 정전 앞쪽에 돌다리를 놓았으며 돌

다리 앞쪽에 궐문을 세우고 그 어귀에는 下馬標木까지 세우는 등 정궁에 버금가는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궁으로 조성된 나머지 핵심 부분인 정전 일곽이 너무 좁

아서 정치 행사를 할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말년인 1418년에는 인정전 일곽을 모두 헐어

다시 짓는 대규모 공사를 벌여 정전 일곽마저 경복궁에 버금가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

었다 이후부터 이궁인 창덕궁에서도 정궁에서만 행해지던 국가적인 대사를 치를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2) 창건 이후 조선 전기의 변화

태종을 계승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른 세종은 인정전 개축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창덕궁으로 이어한다 그리하여 세종 즉위년(1418)에 인정전 일곽의 개건 공사가 완공

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은데 반하여 세종은 즉위후 3년이 되던

해부터 자주 경복궁에 이어하고 기존 궁전을 수리하는가 하면 왕 8년(1426)에는 집현전 문

신들에게 궁내의 문과 다리 이름을 명명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왕 9년(1427)부터는 경복궁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궐내 제반 시설을 수리신설해 나가면서 점차로 경복궁의 법궁 체재를

완비해 나갔다 이에 견주어 창덕궁에 거처한 10년 동안에 경연청집현전장서각射廳

(궁성 西墻內) 등을 창덕궁 안에 새로 짓는 데 그쳤다 창덕궁 침전의 前廊은 修文堂이라 불

리며 태종세종이 늘 거처하던 곳이었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한 단종(1452~1455)은 창덕궁에 대한 전반적인 수리공사를 단

행하는 한편 태종때 개건된 지 35년밖에 안된 인정전 일곽까지도 다시 고쳐 지었다12) 이밖

에도 廣延樓에 별실을 지어 피서용으로 삼기도 하였다

창덕궁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세조때(1455~1468)였다 세조는 5년(1459) 9월 5일에

10)『太宗實錄』 卷 10 太宗 5年 5月 辛巳조 承政院廳 3칸 동행랑 10칸 남행랑 4칸 북행랑 4칸 바깥행랑 5

칸 外樓 3칸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서행랑을 따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승정원청이 인정전 동행랑에 자

리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승정원의 위치를 인정전 동쪽으로 적

고 있다

11)『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승정원을 비롯하여 빈청홍문관내반원도총부세자시강원세자익위사동궁 등이 창덕

궁 내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빈청동궁세자시강원세자익위사 등은 成宗때 세워진 것이

12)『端宗實錄』 권6 端宗 元年 4월 甲寅조 참조

후원에 못을 파게 하고 그 근처에 閱武亭을 세웠던 것 같으며 열무정 부근에서 4곳의 샘물

을 찾아내었다13) 열무정의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인 정조때 그 자리에 奉謨堂을 세웠다

고 하며 봉모당이 주합루 서남쪽에 있었 던 점으로 보아 열무정과 네 우물이 있던 곳까지가

후원의 영역이었던 것같다14) 그러나 이 일을 시작으로 하여 왕 7년 11월 24일부터 궁역 확

장을 계획하고 8년 2월부터는 궁성확충공사를 시작하였다 새로 쌓은 궁성은 동쪽으로 성균

관과 경계를 같이 할만큼 엄청나게 확장되었는데 둘레 4600자 높이 25자의 성을 쌓기 위하

여 한성부 백성 19040명(119家를 1統으로 하여 160통이 편성됨)이 동원되었다 이때 궁장

근처에 있던 민가 73호가 철거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창덕궁 후원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도

세조때의 궁역 확장공사 덕택이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세조는 7년 12월 19일에 그동안 위치와 역할에 따라 호칭되어 오던 궁내 건물의 이

름은 다음과 같이 확정되었다 즉 朝啓廳은 宣政殿 後東別室은 昭德堂 後西別室은 寶慶堂

정전(침전을 內正殿이라고도 부름)은 兩儀殿 동침실은 麗日殿 서침실은 淨月殿 누각은 澄

光樓 동별실은 凝福亭 서별실은 玉華堂 澄光樓下는 光世殿 廣延殿 별실은 求賢殿이라 이

름지어졌다 다만 인정전인정문진선문돈화문 등 정전 일곽과 광연루해온정 등 누정

의 이름은 일찍부터 정해져 사용되었다

여기서 편전인 선정전 뒤에 별실 2채가 있었다는 사실 침전에는 침실이 좌우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 태종 11년에 조성된 누각과 침실이 징광루와 응복정옥화당광세전 등으로

이름지어진 건물이라는 점 구현전으로 명명된 광연루(광연전) 별실은 단종때 조성된 것이라

는 점 등을 새롭게 알 수 있다 위 건물 가운데 광연루 일대는 성종 17년(1486)에 春宮으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1476~1506)이 1483년에 세자로 책봉된 지 3년째

되는 해로서 경복궁에도 세조 8년에 지은 동궁이 있었으나 성종이 창덕궁에 머무르기 위하

여 동궁을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은 창덕궁 안에 賓廳인 匪躬堂을 지었고 창덕궁 옆에는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

한 昌慶宮에 수많은 전각과 당우를 비롯하여 승정원홍문관사옹원사복시도총부 등

관청을 갖추었다 성종이 재위 26년간 내내 창덕궁 대조전 전랑(修文堂)에 거처한 사실을 감

안하면 왜 창경궁을 治朝와 관청까지 갖춘 궁으로 조성했는지 짐작이 간다 왜냐하면 창덕

궁에는 궐내각사가 고루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15) 성종 초반에는 대왕대비 정희왕희

가 창덕궁 안에 內佛堂을 짓기도 하였으나 그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다 또 성종 6

년(1475) 8월에는 宮門 29개소에 서거정을 시켜 이름을 짓고 현판을 걸었는데 이는 세조 8

년(1462)에 궁역을 확장하면서 새로 쌓은 궁성에 낸 새 문에 그때까지 이름이 없었기 때문

이었다16)

13)『宮闕志』昌德宮誌 閱武亭條

14)『宮闕志』昌德宮誌 奉謨堂 條 참조 봉모당은 「東闕圖」에도 주합루 서남쪽에 그려져 있으나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구선원전 서쪽 규장각 바로 뒤쪽으로 옮겨졌다(「東闕圖形」 고종년간『宮闕志』 참조)

15) 『新增東國輿地勝覽』卷之一 京都 下 文職公署武職公署 조에 보면 조선전기의 궐내각사는 경복궁이나 창덕

궁창경궁에 중복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왕이 정사를 보는 궁궐 가까운 곳에 관리들이 출근하여 정

치를 보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3궁의 시설은 수시로 번갈아가며 활용되었다

16)『成宗實錄』권58 成宗 6년 8월 己亥 조 참조 여기에는 창덕궁 궁문 29개소의 이름과 경복궁 궁문 8개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조선전기에 일어난 변화상 가운데 주목해야 할 일은 연산군때 이루어졌다 침전인 대조전

前廊에 있던 수문당(태종세종성종의 거처)이 소실되자 ldquo대조전은 낮고 수문당이 높아

통기가 안된다rdquo고 하면서 이를 고쳐 짓고 이름도 熙政堂으로 개칭하였는데17) 이로부터 침전

가까이에 세워진 희정당이 편전의 역할을 분담했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8) 그밖에도 연

산군은 폭정을 거듭하던 재위 말년에 선정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을 수리하거나 단청을 새로

하였고 인정전과 선정전의 기와를 청와로 바꾸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거듭되는 궁궐 공사

도중인 왕 1년에 反正이 일어나 왕위에서 쫒겨나자 모든 공사는 중지되었다 명종 5년에는

인정전 북쪽에 흠경각을 짓기도 하였다19)

태종때 이궁으로 창건되어 꾸준히 시설을 보완해 갔던 창덕궁은 세조가 후원을 조성하고

궁역을 확장하면서 크게 달라졌다 더구나 성종이 재위기간 전체를 창덕궁에 거처하면서 동

쪽에 창경궁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보좌할 수 있도록 한 결과 창덕궁과 창경궁은 조선전기에

이미 하나의 궁궐처럼 사용되면서 경복궁을 대신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으로 세 궁궐이 모두 소실된 뒤 경복궁을 제외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이

재건되고 인경궁과 경희궁이 창건되었을 때 그 모범적 선례는 경복궁 대 창덕궁창경궁이

라는 조선전기의 쓰임새에서 찾아졌던 것이다

나 조선 후기

1) 宣祖光海君仁祖代의 재건

경복궁창덕궁창경궁 등 조선전기에 이룩된 궁궐건축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창덕

궁이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버렸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누구에

의해서 소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대개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 즉 ldquo왕실과 관료들이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고 남은 빈 궁궐을 왜적이 수도 한성에 입성하기도 전에 우리 백성

들이 궁중에 침입하여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보물을 약탈했다rdquo는 설을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宣祖實錄』은 물론이고 유성룡(1542~1607)의 『西崖集』등 당시의 기록에 이러

한 견해를 싣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위 설은 목격담이 아니고 남에게 전해 들은 것

을 사실인 양 적은 것에 불과하다

유성룡이 불탄 궁궐을 직접 목격한 시점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

인 계사년(1593) 4월 20일이었는데 이때 종묘는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너진 채였다 그

러나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인 1592년 5월 2에는 경복궁은 전혀 불타지 않은 채 주인

잃은 빈 궁궐의 허허로움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왜군이 한성을 점령하고 승전고를 울리던

때까지는 경복궁과 한성 그리고 백성들의 목숨은 부지되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왜군

17)『燕山君日記』 燕山君 2년 6월 己丑 同年 8월 癸巳 8월 丙申 條 참조

18) 金東旭 「朝鮮時代 昌德宮 熙政堂의 便殿 轉用에 대하여」『건축역사연구』 5 한국건축역사학회 1994 6

9~21쪽 참조

19)『宮闕志』昌德宮誌 欽敬閣 條와 萬壽殿 條 참조

은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고 한성마저 탈환당하는 패전이 거듭되자 퇴각하면서 종묘와 궁궐

을 비롯한 도성내 모든 시설을 방화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왜군을 따라 전쟁에 참여한 從軍僧 제타쿠(是琢)의 『朝鮮日記』에는 왜군의 한성 입성

직후에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경복궁이 전혀 화재

를 입지 않은 채 온전하게 남아 있었음이 분명하다 즉

ldquo 북산 아래 남향하여 紫宮(경복궁을 가리킴)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다

섯 발자국마다 樓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閣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

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

자 4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 그 한 가운데에는 돌을 다듬어서 포개어 담

을 쌓았는데 높이가 8자이고 4귀퉁이에 방향에 맞추어 4마리씩 16마리의 돌사자가 놓여 있

다 그 위에 紫宸淸凉 두 전당이 있다 기둥은 돌기둥인데 아래 위에 용을 조각하였다

지붕에는 유리 기와를 덮었는데 잇단 기와 줄마다 푸른 용같다 서까래는 梅檀 나무인데

서까래마다 한 개씩 풍경이 달렸다 채색한 들보와 붉은 발에는 금과 은을 펴 돌렸고 구슬

이 주렁주렁 달렸다 천장 사방 벽에는 五色八彩로 기린봉황공작鸞학용호랑이등이 그려져 있는데 계단 한 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丹鶴을 새긴 돌이

깔려 있다 여기가 바로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이다rdquo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20)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 경복궁은

불에 타기는커녕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질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어서

종군나온 왜승으로 하여금 놀라움과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여기 인용된 기사는 경

복궁에 관한 것이지만 창덕궁의 사정도 벼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란이 끝난 뒤 국가 재건에 착수한 조정은 종묘와 궁궐을 빠른 시일 안에 복구하지 않

으면 안되었다 선조 38년(1605)에야 시작된 복구공사는 경복궁 중건을 목표로 진행되었으

나 선조 39년에 李國弼이 경복궁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중수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을 시작

으로 하여21) 선조 40년 2월에 경복궁의 길흉화복을 적은 역대의 문서를 검토한 다음 공사

는 창덕궁 중건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22) 여기에 더하여 호대한 규모의 경복궁을 재

건하기에는 물력과 인력이 모두 부족한 전란 직후의 형편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조 41(1608년) 정월 전후에 시작된 창덕궁 중건 공사는 두 차례로 나누어 진행되었는

바 광해군이 즉위한 그 해(1608) 10월에 완료된 1차 공사에서는 중요 전각이 대체로 조성되

었다 다음에 선조의 위패를 종묘에 祔廟한 직후인 1610년 봄에 재개된 2차 중건 공사에서

는 앞서 마무리하지 못했던 各司廂庫 등을 짓고 築墻하고 鋪甎하는 일을 1610년 9월에 이

20) 『京城府史』 上卷 京城府 pp269~270

21)『宮闕志』昌德宮志 昌德宮 條

22)『宣祖實錄』 선조 40년 2월 13일 조 주28)과 동일

르러 마쳤다23)

이때 중건된 건축에 대해서는 ldquo옛 제도를 따라 복구하였다rdquo는 상투구만 전할 뿐 구체적

인 기록이 없으나 정전편전침전 일곽이 옛터에 근거하여 복원되고 별당이 신조되었으

며24) 후원에는 정자도 세워졌다 한편 광해군 5년(1613)에는 世宗의 예지가 담겨 있는 시설

로 여겨진 欽敬閣이 인정전 북쪽에 재건되었고 왕 6년에는 창경궁 문정문 앞에 보루각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건된 지 얼마 안지난 1623년의 인조반정때 광해군이 거처하고 있던 창덕궁에

들이닥친 반정군이 광해군을 수색하던 중 失火로 外殿 가운데 인전전도총부內藥房春

秋館都總府郎廳房丕承閣弘文館 등과 內殿의 壽靜堂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건물이 소

실되고 만다25) 성종때의 춘궁터(태종때의 광연루 구현전터)에 중건되어 있던 儲承殿(동궁)

도 이때 소실되었다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할 수 없이 경운궁 별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

다 이후 인조는 창경궁에 거처하던 중 李适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마저 불타자 慶德宮으로

이어하였는데 인조 10년에는 창덕궁으로 이어하기 위하여 남아 있는 몇몇 건물을 수리하였

다 그리하여 왕의 거처는 내약방 왕비의 거처는 도총부 편전은 춘추관 동궁은 도총부낭청

방이나 비승각 경연청은 홍문관을 수리하여 마련하였다26)

인경궁을 헐어다 궁궐을 중건한다는 구상은 1633년에 먼저 창경궁을 짓는 것으로 시작

되었다27) 그러나 1636년의 병자호란 이후에는 국력이 크게 위축되어 궁궐을 중건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이 바람에 창덕궁의 중건공사는 늦어져서 1647년(인조 25)에 가서야 5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중건되었고 인조는 이때에야 비로소 창덕궁으로 還御할 수 있었다 창덕궁의

중건공사도 광해군이 무리하게 창건해 놓은 仁慶宮을 헐어 옮겨 짓거나 그 자재를 이용하였

기 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복구가 가능하였다28) 1648년(인조 26)에는 동궁인 저승전도 중

건됨으로써 창덕궁 중건공사가 마무리되었다29)

이때 건물의 복구는 5개의 작업소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1所에서는 大造殿集祥堂

澄光樓玉華堂靜黙堂부속 행각과 월랑 2所에서는 熙政堂承明門內行閣내반원기

타 월랑 3所에서는 寶慶堂泰和堂昭德堂燒廚房 4所에서는 선정전과 월랑 5所인에서

는 인정전 동월랑승정원臺諫廳과 인정문과 남월랑 등을 복구하였는데 모두 735칸에 이

르는 대규모 移建 및 重建工事였음을 알 수 있다30) 이때 중건된 건물 가운데 징광루가 가

장 장려하였다고 하며31) 또 지금껏 보존되어 있는 건물은 宣政殿뿐인데 이 건물은 인경궁

23)『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3 122~125쪽 참조

24)『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 9월 丁未 條 참조

25)『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1963 127쪽 참조 또 『宮闕志』 昌德宮誌 壽靜殿 條

참조

26) 『仁祖實錄』 仁祖 10년 10월 辛卯 條 참조

27) 1633년의 창경궁 내전 중건 공사를 상세히 기록한 『昌慶宮修理所儀軌』가 남아 있다

28)『서울 六百年史 문화사적편』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95 61쪽 156~161쪽 및 金東旭 「仁祖廟의

昌慶宮昌德宮 造營」『문화재』 19호 1986 참조

29) 『宮闕志』와 『東國輿地備攷』 第一卷 京都 에서 창경궁에 소속시켜 정리하고 있다

30) 이때의 공사과정은 『昌德宮營建都監儀軌』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중건된 건물의 명칭 가운데 讌和

堂은 『인조실록』 인조 25년 11월 戊申 條에는 실려 있으나 이 의궤에는 빼져 있다

의 편전인 光政殿을 옮겨 지은에 것으로 주변 건물의 거듭된 화재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아

당시의 공포형식과 구조를 전하고 있다32)

위에서 살핀 것처럼 선조광해군인조대를 거치면서 조영된 창덕궁의 건축은 정전

편전침전 일곽과 별당이 대체로 조선전기의 유구에 근거하여 복원된 것이었으며 훗날

「東闕圖」(1828~1830년 제작)에 그대로 묘사된 것처럼 조선후기 창덕궁의 根幹을 이루게

되었다 다만 도총부홍문관대간청내약방내반원 등 조선전기에는 창덕궁에 두지 안

았던 관청들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는 조선전기에 세 궁에 나누어 설치되어 있었던 관청

의 상당수가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자 창덕궁 안에 새롭게 조성되었음을 가리킨다33) 사정은

다른 궁궐도 마찬가지여서 창덕궁에 설치되지 않은 많은 관청이 창경궁이나 경희궁에 설치

되었다 한편 인조반정때도 소실되지 않은 채 보존되었던 비승각은 조선전기에는 없었던 건

물로 광해군 재건시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후대의 문헌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서 존속 여

부를 알기 어렵다

反正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계속된 화재로 재위

10여 년 동안 경운궁이나 경덕궁에 거처하였다 그러나 창덕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왕 10년에는 일시적으로 창덕궁에 거처하기도 하였으나 말년인 왕 25년에 이르러서야 창덕

궁의 중건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후원의 경영에 몰두하여 왕 14년(1636)부터

왕 25년(1647)에 걸쳐 끊임없이 정자를 짓고 원림을 조성하였다 즉 1636년(인조 14)에 歎逝

亭(rarr 逍遙亭)雲影亭(rarr 太極亭)청의정과 玉流川 1640년에 聚奎亭 1642년에 翠微亭(현

종 5년 개수하고 觀德亭으로 고침) 1643년에 竹亭(rarr深秋亭) 1644년에 六面亭(rarr 尊德亭)

碧荷亭(숙종때 淸讌閣으로 고침) 1645년에 醉香亭(숙종 16년에 喜雨亭으로 개칭) 1646년에

팔각정 1647년에 聚勝亭(larr 樂民亭)觀豊閣 등이 차례로 조성되었다34) 인조가 이렇듯 후

원 경영에 몰두한 것은 병자호란으로 입은 치욕과 복잡한 심사를 달래기 위하여서가 아니었

을까 후대의 왕들도 인조가 경영한 원림에 와서 ldquo萬機를 다스리는 여가에 샘물과 흐르는

물을 보고 마음을 함양하곤 한다rdquo고 하면서 인조의 원림 조성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였

다35)

2) 孝宗~正祖代의 변화

17세기 전반에 창덕궁은 정궁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비록 재목이 부족하여

인경궁을 헐어다 짓기는 하였지만 정전편전침전궐내각사를 비롯하여 후원의 원림까지

갖춘 대규모 궁궐로 경영되었고 창경궁의 보조를 받으면서 부족함없이 조선왕조의 왕정을

31) 징광루는 청기와를 덮은 2층 건물로 「東闕圖」에 그려져 있고 「東闕圖形」에도 그려져 있는데 1917년

창덕궁 내전 화재때 소실된 뒤 복구되지 않았다

32)『창덕궁』-한국전통건축 제2집- 52쪽 및 『서울 六百年史 文化史蹟編』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95

156~161쪽 참조

33) 이때 재건된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궐문인 敦化門뿐이다

34) 이상의 내용은 『宮闕志』 昌德宮誌의 해당 항목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며 괄호 안의 이름은 뒷날 개칭된

것이다

35) 『宮闕志』 昌德宮誌 太極亭 條의 숙종 어제 「上林三亭記」 참조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창덕궁은 조선전기에 이궁으로 출발하였으나 17세기 중반부터는

정궁의 시설을 갖추고 실제로 정궁 역할을 수행해 나갔던 것이다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는

한 경복궁은 상징적인 정궁일뿐 창덕궁이 실질적인 정궁이었던 것이다

이제 17세기 후반 이후에 창덕궁에 추가된 건축은 大妃殿東宮殿眞殿御齋室(養志

堂 이문원 부근 대유재와 소유재)후원의 별당과 정자 정도였다 즉 효종 5년(1654)에 수

리한 壽靜堂(인조때 세워진 건물)은 숙종 1년에는 壽靜殿으로 격상되어 인조 계비 壯烈王后

(1624~1688)의 거처로 정해졌으며 효종 6년에는 또 장렬왕후를 위하여 옛 흠경각터에 萬壽

殿을 지었는데 이 건물 일곽은 얼마 안가서 숙종 13년(1687)의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말

았으며 이후 다시는 재건되지 못하였다36) 또 효종 7년(1656)에는 慶德宮 景和堂을 移建하

여 春輝殿이라 고쳤다가 숙종 21년(1695)에 璿源殿으로 개칭한 다음 御眞을 봉안하였다 효

종은 이밖에도 후원에 魚水堂 과 天香閣(왕 4년)을 지어서 인조대에 조성된 원림 사이에 새

로운 원림을 하나 더 추가하였다37) 현종 8년(1667)에는 효종비 仁宣王后(1618~1674)를 모

시기 위하여 경덕궁 集禧殿을 철거해다가 집상당 옛 터에 옮겨 놓고 集祥殿으로 개칭하였

다38)

숙종대에는 東宮 書筵處인 誠政閣이 지어지고 왕 14년에 천문관측소인 齊政閣이 새로

지어졌다 후원에는 왕 18년에 영화당 일곽과 애련정 일곽이 조성되고 왕 33년에는 애련정

북쪽에 滌惱堂을 건립하여 현종대에 경영된 어수당 일곽의 원림을 완결지었다 또 후원 곳

곳에 정자를 지었는데 왕 14년에는 淸心亭 왕 15년에는 靈鼉亭 왕 17년에는 凌虛亭을 차례

로 지어 나갔다 이리하여 숙종대의 원림 조성을 끝으로 창덕궁 후원은 주합루 구역을 제외

하고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숙종 30년(1704)에는 궁성 서북쪽 밖에 있

던 別隊營의 庫舍를 헐고 임진왜란때 대군을 파견하여 도와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신종을

享祀하기 위하여 大報壇 일곽을 건설하였다39) 영조대에는 30년(1754)의 선원전 수리를 비

롯하여 영조 15년(1739)의 香室 21년(1745)의 齋殿 25년의 대보단 중수와 전사청 악공청

재생소 신건 등 10여 년 간에 걸쳐 대보단을 새롭게 변모시켰다40) 이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는 영조가 재위 기간 대부분을 경희궁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대에는 즉위년에 후원 안 희정당 옆에 규장각과 서향각을 짓고 왕 5년

(1781)에는 규장각 학사들의 숙직처인 이문원을 도총부 자리에 설치하는 등 숙종대에는 궁

궐밖 종부시에 있었던 규장각을 궁궐 안으로 끌어들여 右文政治를 표방하며 왕권강화의 토

대를 마련하였다 왕 9년에는 이문원 근처에 서적 보관처인 東二樓를 새로 지었으며 선원전

36) 이때의 공사 보고서로 『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가 전한다

37) 어수당의 창건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효종이 지은 시가 남아 있고 인조대에는 이 건물이 없었기 때

문에 효종때 지어진 것으로 해석하였다(『宮闕志』 昌德宮誌 魚水堂 條 참조

38) 이때의 공사 보고서로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가 프랑스 군대에 의하여약탈된 『昌德宮修改廳儀

軌』가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이크로필름본이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김동욱

「17세기 조선조 궁궐 內殿건물의 室內構成에 관한 연구」『大韓建築學會論文集』 1992년 10월호 87쪽 주

4 참조)

39) 경봉각은 창경궁 동룡문 안에 있던 것을 정조 23년(1799)에 옮겨 온 것이다(『東國輿地備攷』 京都 宮殿

昌德宮 條 참조

40) 『宮闕志』 昌德宮 lsquo萬世誦恩rsquo 조 「皇壇齋殿小識」(1745년) 「大報壇重修後小識」(1749)

이나 皇壇(대보단)을 展拜할 때 왕이 齋宿하던 御齋室인 大酉齋와 小酉齋는 정조 19년에 창

건되었다 한편 정조 6년(1782)에는 고대하던 장남(文孝世子)을 얻은 것을 계기로 동궁이 신

하들로부터 하례를 받거나 그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重熙堂을 창건하였다41) 이 시기에 동궁

의 처소로 天地長男宮과 文華閣 일곽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42) 또 정조 9년에는 창경궁

자경전을 짓다가 남은 재목을 활용하여 이극문 안 옛 수강궁터에 壽康齋를 지었는데43) 이

건물은 순조 27년 익종의 대리청정시 별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44)

「東闕圖」에 표현되어 있으나 1833년에 영춘헌을 짓기 위하여 헐린 天地長男宮 일곽은

세자의 거처로 중희당 바로 옆에 있었다45) 그리하여 중희당 일대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

계 지역이면서 순조대에 세자 익종이 거처하고 공부하던 곳으로서 훗날 代理聽政(1827년~

1830년)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익종은 창덕궁 안에 待鍾軒演慶堂倚斗閤 일곽田舍

(1826년) 등 많은 시설을 경영하였다46) 특히 후원의 의두합과 연경당은 대리청정 시기에

전자는 독서처로 창건한 것이고47) 후자는 1828년에 珍藏閣 옛터에 進宴處로 사용하려고 특

별히 창건한 건물이다48) 당시 연경당의 모습은 「東闕圖」와 『慈慶殿進爵整禮儀軌』의 圖

說 「演慶堂圖」(1828년 2월)에 잘 묘사되어 있으며 이로써 주택 형식의 현존하는 연경당은

적어도 헌종대 이후에 새로 지어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49)

3) 순조대의 소실과 재건

조선후기 궁정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던 창덕궁은 「東闕圖」에 그

려진 것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앞 시기에는 소규모의 화재도 있어서 숙종 13년(1687)

에 춘휘전(숙종 21년에 수리후 선원전으로 개칭)만 남겨 두고 萬壽殿 일곽이 모두 소실되었

는데 이후 복구되지 못하여 「東闕圖」에도 빈 터로 그려져 있다 또 동궁인 저승전 일대가

영조 32년(1702)에 소실되었다

41) 중희당 일곽은 1891년에 헐려 다른 곳에 이건되었으며 그 자리는 현재 후원으로 가는 진입로로 변해 버렸

다 (고종년간 『宮闕志』) 자세한 것은 이 글 3절 창경궁 부분 참조

42) 이강근 「조선 후반기 건축의 대외교섭」『조선 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2007

43) 『正祖實錄』 20권 9년(1785 을사) 8월 27일(갑진) ldquo建壽康齋貳極門內 有古井焉 慈慶殿之營建 以餘礫

剩磚 峙井上爲假山 至是撤去而浚其井 建小齋以臨之 是地 太祖朝壽康宮舊基 在《輿地勝覽》 仍命其齋

曰壽康rdquo

44)『純祖實錄』28권 27년(1827 정해) 2월 9일(을묘) ldquo議政府 以王世子聽政節目 別單啓【一 聽政節目 依

傳敎 以乙未事例磨鍊 一 聽政處所正堂 以重熙堂爲之 別堂壽康齋爲之rdquo

45) 이강근 「조선 후반기 건축의 대외교섭」『조선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2008 pp - 천지장남궁

과 그 좌측의 문화각 일곽은 정조 연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46) 『宮闕志』 昌德宮誌 해당항목 참조

47) 『宮闕志』 昌德宮誌 倚斗閤 條에서는 익종이 세자 시절에 예전의 독서처를 改建하였다고 적고 있어서 수리

를 한 것쯤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1826년에 쓴 「翼宗御製 倚斗閤上樑文」의 존재로 이 건물이

1826년부터 1827년 사이에 새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48) 『東國輿地備攷』 京都 宮殿 昌慶宮 演慶堂條 참조 純祖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축을 당하여 마침 집이 이루

어졌으므로 연경이라 이름하였다고 설명되어 있으나 尊號儀禮를 거행할 장소로 창건된 것으로 해석해야 옳

다(이강근「東闕圖」『建築文化』 1997년 9월호)

49) 고종 2년의 수리가 현존 연경당의 모습으로 변경된 계기였을 것으로 해석한 글이 주목된다(김동욱 「고종

2년의 연경당 수리에 대해서」 『건축역사연구』 한국건축역사학회 2004 3)

그러나 연이은 화재로 궁궐이 온통 소실된 때는 단연 순조대였다 먼저 순조 3년(1403)

에 仁政殿이 소실되어 이듬해에 중건되었다50) 11년(1411)에는 인정전 서월랑의 藝文館이

소실되어 또 중건하였는데 이때 고래의 史籍이 모두 불타 버렸다 또 1824년에는 대비전인

景福殿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정말 큰 화재는 순조 33년 10월에 일어났다 이 화재로 안으로

는 대조전으로부터 밖으로는 희정당까지 모두 소실되었으니 그 피해는 놀라울 정도로 큰 것

이었다 다만 인정전과 선정전 일곽이 불에 타지 않은 채 보존되었다 1년만인 이듬해 9월에

모두 중건되었다

이때의 중건공사에 대해서는 『昌德宮營建都監儀軌』(1834)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儀軌圖로 그려진 건물의 모습이 「東闕圖」와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점으로 미루어 중건하

면서 약간의 수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51) 그러나 『궁궐지』에서는 ldquo모두 370여 칸이 중

건되었으며 옛 유구를 토대로 하되 間架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복원하였다rdquo고 적고 있다

이때 중건된 건물은 대조전희정당징광루경훈각옥화당융경헌흥복헌양심합克

齋齋정묵당內燒廚房外燒廚房 등이었다 『宮闕志』(高宗年刊)에서 보듯 적어도 건물만

큼은 原狀回復된 것으로 보인다 순조 말년에 창덕궁창경궁경희궁을 모두 복구하고 나

서 그것을 기념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엮은 책이 바로 위 책이다

순조대 대왕대비전으로는 경복전과 수정전이 있었다 이 가운데 수정전은 1794년 12월

8일 정조의 명으로 慈殿(英祖繼妃 貞純王后)에게 冊寶 慈宮(정조 생모 혜경궁)에게 冊印을

바치고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서 수리되었고52) 이때 건물 이름도 壽靜殿으로

격상되었다53) 1796년에는 원자(훗날의 순조)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기도 하였다54)

대왕대비 정순왕후(1745-1805)는 이후 수정전에 거처하였으며55) 정조 사후 5년 뒤인

1805년에 景福殿에서 승하하였다56) 이후 正祖妃 孝懿王后(1753-1821)가 수정전에서 거처하

였는데 1813년에 12월 13일 밤에 수정전 동행각에서 화재를 만났으며 다행히 불을 꺼서 수

정전은 무사했다57) 효의왕후는 1821년 3월에 창경궁 慈慶殿에서 승하하였다 이보다 5년 앞

50) 1804년의 공사 내역은『仁政殿營建都監儀軌』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51) 金東旭 『朝鮮後期 宮闕建築의 造營에 관한 硏究』 -純祖朝의 西闕東闕 造營에 대해서- 文化財硏究所

1990 및 안휘준 『옛 궁궐 그림』 대원사 1997 72~75쪽 참조

52)『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 lsquo수정전rsquo조에서는 1623년 인조반정때 대내에서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며

효종 5년(1654) 인조의 繼妃 莊烈王后를 위하여 고쳐 지었으며 을묘년부터 전으로 격상시켜 불렀다고 적혀

있다(ldquo孝宗五年甲午爲 莊烈王后改建 乙卯改稱殿rdquo) 여기서 을묘년은 정조 19년(1795)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

53)『일성록』정조 18년(1794년 갑인) 12월 18일(신미)

54)『일성록』정조 20년 10월 4일(병자) ldquo領議政 洪樂性曰翁主痘候聞極平順 今已出場不但 今番之欣喜 可占兆端

之吉慶矣 予曰果如卿言矣 予敎元子拜諸大臣亦拜 予曰今番痘憂慈宮獨貽勤勞下情不安 及今出場大加喜悅萬萬欣

幸矣 予於慈宮 經旬離側 今番初有也 元子則姑爲 入處于壽靜殿 予則今將還謁慈宮矣rdquo ldquo予乘軺軒 以出元子陪焉

由永肅門 拱辰門 入壽靜門 詣壽靜殿 元子仍留 予還出壽靜門 乘軺軒 由宜春門 靑陽門 宣明門 保定門 萬八門

還內rdquo

55)『內閣日曆』 순조 21년 7월 19일(丁卯) lsquo正宗大王孝懿王后誌文rsquo 또 『健陵誌狀續編』遷陵誌文[純宗二十一年

辛巳] ldquo二十八日己卯疾大漸 大臣閣臣入候臥內 王已不能語而 微微有玉音曰壽靜殿 卽貞純大妃所御殿 蓋聖意若

有仰告於 慈聖者也 遂昇遐于昌慶宮之迎春軒 春秋四十九 大喪之日 都人士庶顚仆哭踊深山rdquo

56) 창덕궁 내 大妃殿의 하나였던 경복전은 1824년에 화재로 소실된 뒤 중건되지 않았기에 「동궐도」에마저 터

로 표현되어 있다 1803년에 순조가 직접 지은 lsquo景福殿記rsquo에서 그리고 있듯이 동서남북으로 각각 拾翠軒 萬

寧門 愛蓮齋 松竹軒이 빙 둘러 연해 있었으며 울창한 소나무 숲과 연못의 연꽃이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그

런 곳이었다 『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 lsquo경복전rsquo 조

서 惠慶宮(1735-1815)은 1815년 12월에 창경궁 景春殿에서 승하하였다58) 1822년 12월에는

정조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嘉順宮(1770-1822)도 창덕궁 寶慶堂에서 서거하였다59) 순조

의 증조모 조모 모 생모가 차례로 돌아가셨으므로 1822년 12월 이후에 수정전을 비롯한

궐내의 여러 대비전은 텅 비게 되었다

4) 憲宗哲宗代의 변화

이후 헌종 헌종 13년(1847)에는 樂善堂 옛 터에 헌종의 침전인 樂善齋가 건립되었고 왕

14년에는 그 옆에 왕자 출산을 위하여 새로 맞아들인 경빈 김씨의 거처로 錫福軒을 지었다

석복헌 오른쪽에 연접해 있는 壽康齋는 정조 9년(1785)에 지은 건물인데 낙선재 창건시 대

폭 중수되어 대왕대비인 純祖妃 純元王后(1789~1857)의 거처로 삼았다60) 한편 1843년(헌종

9)에는 헌종비(孝顯王后 1828-1843)61) 1857년 12월에는 순조비(純元王后 1789-1857)62)

1878년에는 철종비(哲仁王后 1837-1878)가 승하하였으므로63) 궐내에는 익종비(神貞王后

1808-1890) 헌종 계비(孝定王后 1831-1903) 등 왕실 어른 두 분만이 살아 계셨다64) 1868

년 7월부터는 중건된 경복궁으로 왕실이 移御하자65) 창덕궁내 여러 전각의 쓰임새는 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창덕궁에는 19세기 전반기에 다음과 같은 闕內各司가 설치되어 있었다 즉 규장각이

문원승정원홍문관빈청(匪躬堂)예문관도총부내병조尙瑞院尙衣院司饔院

典設司典涓司太僕寺內班院侍講院翊衛司內醫院鑄字所 등 거의 모든 관청이 설

치되어 있었다 다만 내사복보루각 등은 창경궁 안에만 설치되었고 궁궐호위와 수비를 맡

은 군사시설이 창덕궁에 남소와 서소만 설치되고 동소와 북소는 창경궁에 설치되어 있는 점

57)『內閣日曆』순조 13년 12월 18일 ldquo壽靜殿行閣失火 夜初更失火 敎曰 宮城扈衛置之 夜一更 壽靜殿東行閣失

火救火後 大殿 王大妃殿 中宮殿 惠慶宮 嘉順宮 世子宮 口傳問安 答曰知道 金祖淳 沈象奎 南公轍 徐榮輔 李存

秀 金履喬 李魯益 李光文 鄭元容 朴宗薰 李龍秀 李鶴秀 進參rdquo 여기서 대전은 순조 왕대비전은 정조비 효의

왕후 혜경궁은 정조의 생모 가순궁은 순조의 생모임

58)『純祖實錄』 순조 15년 12월 15일 21년 3월 9일

59)『純祖實錄』순조 23년 계미(1823 도광 3) 2월 3일(계묘) 빈은 英宗 경인년 5월 8일에 탄생하였고 正宗 정

미년에 빈으로 선발 되었는데 殯號는 綬이고 宮號는 嘉順이다 지금 주상 전하 22년 壬午 12월 26일에 昌德

宮 寶慶堂에서 승하하니 향년 53세였다

60) 盧辰河李相海 「樂善齋一廓 建築의 造營에 관한 復元的 考察」『건축역사연구』 7호 건축역사학회 1995

43~70쪽 참조

61)『憲宗實錄』「총서」 ldquo妃는 孝顯王后 金氏【籍은 安東이다】이니 領敦寧府事 永興府院君 贈 領議政 金祖

根의 딸로 무자년【순종 28년이다】 3월 14일 계축에 탄강하여 정유년에 王妃로 책봉되었는데 계묘년 8월

25일 을축에 승하하니 춘추 16세였다 景陵에 장사하였다rdquo

62)『日省錄』철종 8년(1857) 12 월 17일(갑자) ldquo檢校提學臣金炳冀製進哀冊文曰維歲次丁巳八月己酉朔初四日壬

子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睿成弘定純元王后昇遐于昌德宮之養心閤移殯于歡慶殿以是年十二月戊申朔

十七日甲子將合祔于仁陵禮也rdquo

63)『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5년 무인(1878 광서 4) 5월 12일(신유) 대비전이 승하하여 擧哀한 뒤 대전 대왕

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약방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망극하다고 답하였다

64)『고종시대사』3집 1890년(淸 光緖 16年) 4月 17日(丙辰) 未時에 大王大妃 趙氏(翼宗妃)가 興福殿에서 昇遐

하다 신정왕후는 집옥재를 이건하기 전 해에 돌아가셨다

65)『국역 승정원일기』고종 5년 무진(1868 동치 7) 7월 2일(정축) 移御한 뒤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종친 의빈 약방 내각 정원 옥당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등으로 보아 두 궁은 하나의 궁궐처럼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이 두 궁을 합

쳐서 東闕로 부르게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昌德宮은 外朝와 治朝를 중심으로 하

되 왕과 왕비의 침전을 갖춘 궁으로 昌慶宮은 燕朝를 중심으로 하되 동궁과 대비전을 갖춘

궁으로 역할을 분담하면서 하나의 궁궐처럼 운용되었던 것이다 哲宗代에는 철종 5년(1854)

9월부터 8년 윤5월 사이에는 1804년에 중건된 인정전의 해체중수공사가 있었는데 공사 내

역은 『仁政殿重修儀軌』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3) 근middot현대기

(1) 1865년~1910년의 변화

선조~광해군대에 중건된 이래 250여 년 동안 조선왕조의 정궁으로 사용되던 창덕궁은

고종 초반에 경복궁이 중건되자 격하되어 본래의 이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창덕궁의 쓰임새가 하루 아침에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1873년과 1876년 두 차례에 걸쳐 큰 화재가 발생하자 1877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수리하

고 이어하게 된다 1891년에는 중희당을 비롯하여 수정전 영역의 별당이던 集玉齋와 協吉堂

을 경복궁 내로 옮겨지었다

집옥재는 경복궁 신무문 안쪽 가까이에 있는 벽돌조 건물이다 집옥재를 중심에 두고

향좌측에 2층 복도로 연결된 중층 八隅亭이 있고 향우측에는 또 중층 복도로 연결된 단층

맞배지붕 정면 5칸 규모의 協吉堂이 있다66) 이 가운데 집옥재와 협길당은 1881년에 창덕궁

咸寧殿(壽靜殿을 중건한 뒤 변경한 명칭)의 北別堂과 西別堂으로 세워진 건물이었는데 지어

진 지 10년 뒤인 1891년에 경복궁의 지금 자리로 함께 옮겨졌다 이 시기에 경복궁에서 일

어난 두 차례의 화재(1873년 4월과 1876 11월)등의 사유로 왕실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는 일

이 있었다 첫 번째 이어는 1873년 4월의 내전 지역 화재로 인하여67) 1873년 12월 20일에

있었는데 이때 창덕궁을 미리 수리하였다68)

그러나 1875년 2월에는 다시 경복궁으로 이어하였으며69) 1876년 4월에 경복궁 내전 중

건공사가 완료되었다70) 그러나 같은 해 11월에 다시 큰 화재로 경복궁 내전 일곽이 모두

66) 집옥재가 있는 영역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 지역으로 묶여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가 45년만인 2006년

9월 29일에 처음 민간에 개방되었다 출입금지 구역이던 시절에 두 차례 수리공사가 있었는데 1차는 1982년

의 보수공사(『集玉齋補修工事報告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2)이고 2차는 2005년의 수리공사(『集

玉齋修理調査報告書』 문화재청 2005 12)이다 2차 공사에 대한 조사보고서에는 집옥재의 연혁과 이건 이

유에 대한 견해가 서술되어 있어서 참조를 요한다

67) 『日省錄』고종 10년(1873) 12월 10일 (갑신) ldquo慈慶殿失火 巳時火起於純熙堂二十四間延燒錫趾室十二間慈慶

殿三十二間福安堂六間紫薇堂三十八間交泰殿三十六間複道二十八間行閣一百八十八間半合三百六十四間半rdquo

68)『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0년 계유(1873 동치 12) 12월 20일(갑오) 눈 ldquo창덕궁으로 移御한 뒤에 대전 대

왕대비전 왕대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의 2품 이상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

고 답하였다

69)『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2년 을해(1875 광서 1) 5월 28일(갑자) 비 ldquo이어한 뒤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

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종친 의빈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 2품 이상과 육조 대사간이 구전으로 문안하

니 알았다고 답하였다rdquo

70)『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3년(1876) 4월 1일 교태전 자경전 자미당 인지당 4건물을 짓는 데 공을 세운

소실되었으므로71) 1877년 3월에는 다시 창덕궁으로 이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창덕궁과

창경궁을 다시 수리하였다72) 이후 1885년에 경복궁으로 이어할 때까지73) 왕실은 창덕궁에

머물러 있었다 한편 1882년 6월에 경복궁으로 다시 이어하겠다는 전교가 있었으나 곧 철회

된 일이 있었다74) 같은 날 임오군란이 발발하고75) 1884년 12월 4일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자 왕실은 창덕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복궁 내전의 재건은 1888년이 되어서

야 겨우 완료되었으며76) 이 시기에 고종은 1873년에 창건된 乾淸宮 영역에 거처하면서 정

사에 임하였다

1881년(고종 18) 3월의 수정전 수리 공사는 경복궁 내전의 두 번째 화재로 촉발된 창덕

궁 이어로 왕실이 창덕궁에 머무르던 기간에 시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수정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여러 채의 별당을 짓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살아계신 두 대비와 관련

이 있는 것일까 적어도 명분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고종은 수정전 수리 공사를 지시하

는 자리에서 그 해가 생전에 수정전에 거처하셨던 정조비 효의왕후의 승하 60주년임을 상기

시키면서 슬픔을 견딜 수 없다고 하고 건릉에 예관을 보내 헌작례를 올리게 하였다77) 정조

대의 불행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수정전 일곽 증설 공사에 정조대의 정치를 흠모하는 고

종의 의도가 엿보인다78)

문제의 집옥재는 바로 이때 수정전(공사후 함녕전으로 개칭)의 北別堂으로 지어진 건물

이다 3월 1일 고종의 지시로 시작된 수정전 일곽 보수공사와 별당 신축공사는 그 해 11월

사람들에게 시상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때 중건 공사가 일단락된 듯하다

71) 『日省錄』 고종 13년(1876) 11월 4일(신유)

72)『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4년 정축(1877 광서 3) 3월 10일(병인) 낮에는 맑고 밤에는 비가 옴 또 무위

소의 말로 아뢰기를 ldquo창경궁을 수리하는 역사가 지금 이미 끝났으니 諸色工匠들을 모두 해산해 보내겠습니

다 감히 아룁니다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헌직이 호조의 말로 아뢰기를 ldquo창덕궁을 수리하는 역

사가 지금 이미 끝나서 제색 공장들을 모두 해산해 보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辰時 대가가 창덕궁으로 환어하였다

73)『국역 승정원일기』 고종 22년 을유(1885 광서 11) 1월 17일(정사) 맑음 ldquo移御한 후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의 2품 이상 관원 육조 당상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rdquo

74)『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9년 임오(1882 광서 8) 9월 29일(임자) 맑음 ldquo부교리 趙性鶴이 상소하기를 hellip

(중략)hellip 毓祥宮이 불탔지만 한 달이 넘도록 아직 영건하지 못하고 있고 경복궁으로 移御하라는 명을 비용을

아끼느라 어쩔 수 없이 還收하셨으니 우리 전하의 효도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통하시며 지은 지 오래된 곳을

떠나 새 궁궐로 가고자 하시는 마음이 얼마나 절박하겠습니까rdquo

75)『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9년 임오(1882 광서 8) 6월 5일(기미) 맑음 ldquo조병직에게 전교하기를 lsquo경복궁으

로 移御할 것이니 該房은 그리 알라 날짜는 이달 그믐 이전으로 가려서 들이라rsquo 하였다

76) 『日省錄』고종 25년 4월 12일(계사) ldquo重建所以交泰殿 康寧殿 麟趾堂 紫微堂上樑吉日今月十五日未時 推擇

上樑文製述官 書寫官別單書入啓rdquo

77)『고종실록』고종 18년 3월 1일(계해) ldquo지시하기를 lsquo이해 이달은 바로 정조비 孝懿王后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된다 지나간 옛날을 생각하면 슬픔을 어찌 견디겠는가 이달 9일 健陵의 酌獻禮는 大臣을 보내서 대

신 거행하도록 할 것이다rsquo라고 하였다 또 지시하기를 lsquo壽靜殿의 여러 곳을 수리하는 것과 새로 공사하는 것

은 본소로 하여금 거행하게 할 것이다rsquo 라고 하였다rdquo 『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8년 신사(1881 광서 7) 3

월 1일(계해) ldquo 송병서에게 전교하기를 lsquo壽靜殿 여러 곳의 重建과 營建을 본소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rsquo

하였다rdquo 무위소의 말로 아뢰기를 lsquo수정전 여러 곳의 중건과 영건에 대한 일을 본소에서 거행하라고 명하

셨습니다 역사를 시작할 길일을 일관 韓應翼으로 하여금 날을 택하게 하였더니 이번 3월 2일 시가 길하다

고 하였습니다 이날 이 시각에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rs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rdquo

78) 이태진 「大韓帝國 皇帝政과 民國 정치이념의 전개 -國旗 제정보급을 중심으로」『한국문화』 22 1997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pp 279-305에 「고종의 국기제정과 君民一體의 개념」이라는 제목

으로 재수록)

까지 진행되어 거의 모든 건물이 완공되었던 듯하나 11월 7일의 화재로 150칸 정도가 불타

버리고 말았다79) 이때 함녕전과 더불어 東別堂 南別堂은 소실되었으나 서별당인 協吉堂과

북별당인 集玉齋만은 소실되지 않았다80) 이후 1882년 6월초까지 진행되던 공사는 임오군란

발발로 중지되었고 1891년 3월 21일 이후 중건소가 주관한 함녕전 일곽 移建 공사에서 함

녕전 등 여러 건물은 어디론가 이건되었으며 1891년 7월에는 집옥재와 협길당도 경복궁으

로 이건되었다

1891년 3월의 함녕전 일곽 이건으로 시작된 이 시기 창덕궁 건물의 타 장소 이건은 담

당기구인 중건소를 설치하여 진행되었다 1891년 4월의 경복궁 계조당 개건 5월의 창덕궁

중희당 이건 7월의 경복궁 寶賢堂 改建과 집옥재 이건으로 이어지면서 6개월 이상 대규모

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료에 이건 장소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함녕전 중희당

등 창덕궁내 여러 건물이 어디로 이건되었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종 37년(광무 4 1900)에 비워 두었던81) 경운궁 선원전 제1실에 태조 고황제의 어진

을 새로 모사하여 봉안하게 되자82) 경복궁과 창덕궁의 선원전에도 태조 고황제 어진을 봉

안하기 위하여 새로 제1실을 증건하게 되었다83) 그 결과 창덕궁 선원전(현 구선원전)은 신

실 7실을 갖추고 정면 9칸 측면 4칸인 규모로 확장된 모습으로 확정되었다 이 시기 선원전

일곽의 평면 구성은 東闕圖形 에서 확인할 수 있84)

융희 1년(1907)에는 고종황제가 폐위당하여 경운궁(이때 덕수궁으로 개칭)에 거처하게

되자 창덕궁에서 純宗(1907-1910)이 즉위하였다 1908년에는 인정전 일곽을 크게 수리하면

서 進善門(광해군때 중건된 건물로 추정됨)을 철거하였다

(2) 1910년~1945년의 변화

1910년 8월 29일에 불법적으로 맺어진 한일합방 조약이 인정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리

하여 亡國과 함께 순종은 昌德宮殿下로 격하되었다 그 뒤로 왕실의 규모는 그럭저럭 유지

되지만 나라 잃은 왕조의 왕실과 궁궐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1907년부터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창덕궁의 개조 왜곡으로 인한 변형 훼손 과정은 우리 민족문화 전체를 말

살한 일제침략자들의 간악한 문화 파괴 행위의 시금석이다 장서각 소장 창덕궁 평면도 3종

을 바탕으로 이 시기 창덕궁 宮域의 단계적 변화 양상을 추적해 볼 수 있는데 이는 곧 창

덕궁의 파괴 과정이다

79)『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8년 신사(1881) 11월 8일(병신) 맑음 ldquo영건소가 아뢰기를 지난밤 화재 때 殿堂

과 行閣 150칸이 모조리 타 버렸습니다(후략)rdquo

80) 화재 다음 해인 고종 1년(1882) 3월 14일부터 6월까지 진행된 공사에서는 咸寧殿 衍福堂 正善堂 등 3채만

이 계속해서 언급되었을 뿐 협길당과 집옥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국역 승정원일기』 참조)

81)日省錄 광무 3년(1899) 11월 29일(임인) 高宗實錄 고종 36년(1899) 12월 31일(양력) 日省錄 광무 4

년(1900) 4월 3일(갑술) 관보 第一千五百六十四號 光武 四年 五月 三日 木曜 1 宮廷錄事 관보 第一

千五百六十五號 光武 四年 五月 四日 金曜 1 宮廷錄事

82) 高宗實錄 고종 37년 5월 18일(양력)

83) 高宗實錄 고종 37년 5년 22일(양력)

84) 이강근 「조선후기 선원전의 기능과 변천에 관한 연구」『강좌 미술사』35 2010 pp245-246

즉 1911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장서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形」

과 비교하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敦化門에서 仁政門에 이르는 행각이 없어졌고

그 자리에 宮內府廳舍가 생겼으며 ② 인정전 행각이 모두 개조되었고 후면에 대조전으로

연결되는 긴 행각이 생겨났다 ③ 선정전과 희정당 앞쪽에 있던 관청들이 모두 헐리고 선정

전과 희정당 사이에 사다리꼴 담이 생겼다 ④ 선정전 뒤 보경당 태화당 재덕당 영역이 없

어지고 그 자리에 lsquoㅍrsquo자형 건물이 생겼다 ⑤ 빈청을 지나 낙선재로 가는 길목에 있던 건물

은 모두 없어지고 길로 변하였다 이로 인하여 돈화문에서 곧장 후원으로 연결되는 신작로

와 창경궁으로 연결되는 신작로가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는 대체로 1907년부터 1909년 사이

에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같은 도면의 창경궁 영역에서는 植物本館(1909) 植物培養室

(1911) 博物本館(1911)이 신축되어 있어서 도면 작성시기는 1911년경으로 생각된다

또 1911년부터 1921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

形」과 비교하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돈화문 앞 차도가 확장되고 雲峴 쪽 신작로

가 연결되었다 ② 돈화문 안 오른쪽의 수문장청이 없어지고 왼쪽의 영군직소는 lsquo消防所rsquo로

바뀌고 금호문 밖의 건물은 경찰서로 바뀌었으며 금천교를 향해 왼쪽에는 헌병소가 생겼다

③ 檢書廳 內閣 奉謨堂으로 이루어진 奎章閣 영역은 내각 건물에 봉모당을 봉모당 건물에

譜閣을 설치한 이외의 주변건물은 모두 없어졌다 ④ 인정전 서행각 밖에 있던 政廳 玉堂

藥房 永依舍 등이 모두 없어지고 덜렁 창고 한 채가 생겼다 ⑤ 선원전 영역에서는 선원전

에 元璿源殿이라 쓰고 養志堂을 헐었다 ⑥ 선원전 이북의 숙경재 소주방 생물방 수라간

등 일곽을 모두 헐고 營繕倉庫(현존 의풍각) 木炭庫 醬油庫 등을 신설하였다 ⑦ 대보단을

헐고 관통하는 길을 냈으며 대보단 남쪽 궁장 밖 별도의 영역(北一營 자리)에 1921년에는

선원전과 懿孝殿을 덕수궁으로부터 移建하였다 ⑧ 1917년에 소실된 대조전 일곽을 1920년

에 경복궁 내전을 헐어다 재건한 모습이 그려져 있고 이때 새로 지은 生果房 주방 등이 대

조전 서쪽에 그려져 있다 또 뒤뜰에 嘉靖堂이 移建되어 있다 ⑨ 낙선재 일곽 남행각 밖의

모든 건물이 없어지고 낙선재에 현관이 수강재 옆 마당에 여러 창고가 창경궁과의 경계에

담이 신설되었다 ⑩ 이왕직청사 뒤에 창고가 신설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11년부터 1921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므로 도면 작성시기는 빨라야 1921년경으로 추정된다 또 이 도

면에는 종묘와 창경궁 사이를 가른 도로(1932년 개통)가 아직은 신설되지 않았으므로 1932

년 이전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1936년경에 작성된 장서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形」과 비교하

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돈화문 안쪽의 경우 소방서는 창고로 헌병소는 昌德宮支

署와 봉모당사무실로 경찰서는 舊 昌德宮警察署 등으로 바뀌어 있다 ② 元선원전 주변의

부속건물은 모두 헐렸다 ③ 희정당 오른쪽의 觀物軒에 lsquo緝熙rsquo라고 처음 적었다 이러한 변화

1는 1936까지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 3장의 장소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토대로

1907년 이후부터 1936년까지 창덕궁에서 일어난 변화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85)

이 가운데 가장 극심하게 파괴된 곳은 정전인 인정전 일원 편전인 선정전과 희정당 일원

85) 이강근 「장서각 소장 궁궐도면」 『건축역사연구』 63호 2009 4 pp 142-143

침전인 대조전 일원 등이었다 통치 기능이 마비되면서 1909년에는 궐내각사를 대신하여 이

를 통폐합할 의도로 일본식 2층 양옥인 궁내부청사가 돈화문 오른쪽 영역에 세워져 근본적

인 변화가 일어났다 후원 지역에는 숲 사이로 이리저리 낸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한편 1917년 겨울에는 대조전 서쪽에 붙어 있는 나인 갱의실에서 불이 나 순종과 순종

비가 급히 피신한 가운데 大造殿熙政堂景薰閣 등을 비롯하여 선정전 동쪽의 내전 일곽

이 대부분 불타버렸다 이때 내전에 보관되어 온 많은 보물과 역사 자료가 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의 화재는 放火로 추정된다 1917년은 순종이 폐위되고 나라를 빼앗긴 지 7년째

되는 해이며 경복궁에는 조선총독부청사 건립공사가 착공되어 일제의 혹독한 식민정치가

공고해지고 있었던 해이다 바로 이러한 때 왕의 침전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일어난 것은 왜

일까 의도적인 방화였을 가능성은 없는가 마지막 황궁이자 폐위당한 순종의 거처이기도

했던 창덕궁의 내전이 모두 소실되었으므로 순종 일가의 거처를 새로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

었다

1919년 1월에는 고종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로 인하여 31 독립만세가 거국적으로 일어

났으나 독립은 쟁취할 수 없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창덕궁의 중건이 미루어지다가

1920년에 이르러 중건에 관한 대책회의가 열렸는데 처음에는 700평 정도의 건물을 한옥에

서양식을 가미한 절충식으로 짓기로 하였으나 그 다음 회의에서는 경복궁의 내전을 헐어다

가 복원한다는 奇想天外한 방침이 정해졌고 그렇게 공사는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왕

직(李王職)을 시켜 경복궁 내전을 뜯어다가 창덕궁 내전을 복구하는 데 쓰도록 하는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경복궁에서 헐려 나간 건물은 交泰殿康寧殿동행각서행각延生

殿慶成殿延吉堂應趾堂欽敬閣含元殿萬慶殿興福殿 등이었다

그 결과 경복궁 내전은 완전히 훼손되고 3년간에 걸친 공사 끝에 창덕궁 내전 일곽 가

운데 대조전과 좌우 헌(흥복헌과 융경헌)희정당경훈각함원전 등이 변형된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대조전은 비교적 충실한 모습으로 재건된 반면 희정당은 규모가 대폭 확장되고

건물 앞쪽에 전에 없던 행각과 부속 건물이 첨가되었으며 평면 규모는 물론 기둥의 높이

변화 복도의 첨가 전면 부속건물의 돌출부 등은 전통적인 궁궐 건물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심지어 서양식 가구를 들여와서 입식생활에 맞도록 개조하였다 대청 좌우에는 벽화도 새로

조성하였다86) 대조전 서쪽으로 전에 없던 콘크리트 구조물이 지어져서 생과방(生果房) 복

도 등으로 쓰이게 된 것도 새로운 변화였다 경훈각은 징광루를 포함한 2층 건물이었으나

그 자리에 경복궁에서 옮겨 온 단층 건물인 만경전을 세움으로써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건

되었다 또 경훈각 오른쪽 마당 즉 대조전 뒤뜰에 있던 어정은 이때 메워진 듯하다

그런데 대조전은 경복궁 교태전 재목 희정당은 경복궁 강녕전 재목을 이용하여 재건된

반면 경훈각은 경복궁 만경전을 그대로 移建한 것이다 함원전은 경복궁 함원전을 이건한

것이 아니라 교태전의 동북 翼閣인 建順閣을 이건한 것인 듯한데 건물의 칸수와 기둥 간격

만 약간 변형되어 있다 대조전을 중건하면서 교태전 건물을 변형시켰기 때문이다87)

86) 이때 조성된 벽화의 미술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조은정 「1920년 창덕궁 벽화조성에 관한 연구」『미술사학

보』33 미술사학연구회 2009 참조

87) 장순용 앞 책 72쪽

경복궁 만경전은 원래 대비 침전인 자경전의 북쪽에 마련된 건물로 후궁 지역의 중심건

물이었는데 중건 당시의 사용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명칭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규모

와 평면형태로 보나 대비 침전일 가능성이 높다 경복궁을 중건하던 당시에는 익종비 神貞

王后(1808-1890) 헌종계비 孝定王后(1831-1903) 철종비 哲仁王后(1837-1878) 세 분이 모두

살아계셨으므로 대비의 침전도 세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가운데 慈慶殿이 신정왕후 興

福殿이 효정왕후의 거처였으므로 萬慶殿은 철인왕후의 거처로 마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만

경전 동쪽에는 內燒廚房인 建綺閤) 外燒廚房인 瑤光堂이 있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경전은 철인왕후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고종의 집무처로 빈번

하게 사용되었다88) 만경전 바로 북쪽에 있었던 만화당은 일찍이 1897년 5월 경운궁 중건시

에 경운궁으로 이건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그 남쪽에 있던 만경전마저 창덕궁으로 이건됨으

로써 경복궁 자경전 이북의 중요 내전은 모두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 『進饌儀軌』(1887 丁亥) 圖說編의 lsquo萬擎殿圖rsquo나 『朝鮮古蹟圖譜』十권(1930년간)의

사진을 통해서는 건물의 외형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현존 경훈각이 경복궁

만경전을 옮겨 원형 그대로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89)

1920년에 재건된 이후 대조전 일곽에서 살았던 순종 일가의 생활은 궁녀들의 증언을 통

하여 밝혀진 바가 있는데90) 그 가운데 당시 경훈각의 용도를 언급한 내용이 있어서 주목된

다 즉 ldquo순종 내외가 내전 중건뒤 이곳에서 생활한 햇수는 7년 남짓한데 왕비 윤씨(순정황

후)는 경훈각을 공부방 겸 쉬는 집으로 애용했다고 한다 종실 부인 2 3명과 김명길 상궁까

지 끼어서 가정교사를 앉히고 영어와 일본어도 배우고 피아노도 들여다 놓고 가끔 쳤다고

한다rdquo 그러나 1926년 순종황제 사후부터는 윤비의 거처가 낙선재로 바뀌면서 경훈각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한편 1921년에는 창덕궁 후원의 동북쪽에 덕수궁 선원전을 헐어다가 신실 12칸 형식의

정면 14칸 측면 4칸 규모의 璿源殿을 새로 지어 역대 제왕의 御眞을 옮겨 봉안하고 인정전

서쪽에 있던 원래의 선원전은 건물만 남겨 둔 채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때 덕수궁 안 서

북 영역에 있었던 순명효황후의 혼전인 懿孝殿도 함께 옮겨져 새 선원전 앞쪽에 세워졌

다91) 이리하여 조선왕조 역대 왕의 어진마저 궁궐 깊숙한 곳에 幽閉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26년 4월 25일에는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였으므로 궁궐의 주인은

더 이상 없게 되었으니 나라 잃은 지 16년만의 일이었다 일제 치하이기는 하지만 그 뒤로

창덕궁은 공원으로 전락되어 내외국인에게 관람이 허용되었고 이에 따라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하여 그 東西 行閣과 인정문 및 좌우 月廊이 전시장 용도로 개조되었다 이외 많은 전

88) 『승정원일기』 고종 22년(1885) 1월부터 고종 28년(1891) 9월 사이에 230여 차례 사용되었다

89) 만경전의 규모와 평면은 「北闕圖型」『宮闕志』 등에서 확인된다 즉 ldquo萬慶殿三十六間無翼工柱長十一尺樑

通二間九尺式前後退五尺五寸式 道里通七間九尺式 東西退五尺五寸式 東行閣十九間半間半五樑以南有咸春門以北

有寅陽門 南邊間墻一角門輔化門 西行閣十九間半間半五樑 以南有宜春門 以北有景成門 南行閣二十八間半間半五

樑 以東有廣宜門 以西有養化門 北行閣十八間 以東有協吉堂 以西有福熙堂 及平在門以西邊有rdquo

90) 김용숙 『朝鮮朝 宮中風俗 硏究』 일지사 1987 166-180쪽

91) 이강근 「창덕궁 의효전에 대한 연구」『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항산 안휘준교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

사회평론 2006 현재 의로전으로 잘못 부르고 있는 건물은 원래 명칭이 의효전이라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각들이 철거되고 각종 시설이 새로 만들어지게 되었으므로 창덕궁은 망국의 한을 담은 일개

관람장으로 변해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3) 광복 이후의 변화

광복 이후 50년이 지나서야 조선총독부청사가 헐리고 이어서 창덕궁이 복원되고 있다

게다가 1997년에는 조선왕조의 역사와 宮廷文化를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이라는 점을 인정

받아 유네스코에 의하여 lsquo世界文化遺産rsquo으로 지정되었다92) 이리하여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

의 야만성은 세계에 부각되고 뼈아픈 역사를 이겨내고 스스로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어

온 한국민족의 노력은 세계 문화민족들의 공감을 사게 되었다

현재 창덕궁에 남아 있는 건물과 그 건립 연대는 다음과 같다93) 敦化門(1607년)仁政

殿(1804년)仁政門(1745년)宣政殿(1647년)大造殿熙政堂含元殿景薰閣(이상은 1920

년 경복궁 내전 移建)嘉靖堂(1920년 무렵 덕수궁 가정당 移建)賓廳(현 御車庫)誠正閣

(정조년간)94)內醫院(성정각 부속건물로 1920년 무렵부터 내의원으로 사용됨)觀物軒(정조

7년 이전)95)舊璿源殿(1695년 현 유물보관창고)樂善齋(1847년)壽康齋(1785년)96) 錫福

軒(1848) 翠雲亭(1686년)閒靜堂(1917년 이후)上涼亭滿月門 承華樓三三窩七分序

(이상 정조 년간)新璿源殿(1921년)

92) 해방 이후 1970년부터 2005년까지 우리 정부에 의해서 시행된 보수공사의 내역에 대해서는 본 보고서 3장

참조

93) 단 1990년대에 문화재관리국에 의하여 시행된 복원 공사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6장 제5절을 참조하기 바

94) 『궁궐지』에 숙종이 지은 ldquo儆戒世子十箴及小序rdquo가 살려 있고 숙종실록 숙종 31년 2월 병자에 세자가 성정

각에 있다는 기사로 보아 숙종때 이미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옳다

95) 『正祖實錄』16권 7년(1783 계묘) 11월 26일(계축) 觀物軒에 나아가 抄啓文臣의 講經 시험을 거행하였다

96) 『正祖實錄』 20권 9년(1785 을사) 8월 27일(갑진) ldquo貳極門 안에 있던 오래된 우물 자리에 壽康齋를 세웠

다 慈慶殿을 營建할 때 남은 자갈과 벽돌을 우물 위에 쌓아 假山을 만들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를 철거하

고 그 우물을 파고는 小齋를 세워 내려다 보게 하였다 이곳은 太祖朝 壽康宮의 옛터로서 『輿地勝覽』에 기

재되어 있다 이어 그 齋를 壽康齋라고 이름을 지었다rdquo

2 창덕궁 영역의 변천

가 조선 전기 창덕궁의 영역 변천

1) 창덕궁 창건시의 위치와 규모

태종은 즉위 4년에 신하들과 종묘에서 점을 쳐서 태조가 처음 도읍을 세웠던 한양을 다

시 환도하여 법궁인 경복궁 이외에 궁궐을 짓도록 명하였다97) 이궁의 위치는 향교동의 동

쪽으로 정했다98) 향교동은 조선후기의 지도에 따르면 한성부 중부 경행방 교동계에 포함된

동으로 고려시대 한양 향교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99) 현재의 낙원동 271~283번지 일대이

며 창덕궁은 향교동의 동북쪽에 자리하였다 성종대에 편찬한『신증동국여지승람』에 창덕

궁은 ldquo北部 廣化坊에 있다rdquo고 하여 그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97) 『태종실록』 권8 태종 4년(1404) 10월 6일

98) 『태종실록』 권8 태종 4년(1404) 10월 6일 ldquo遂相地于鄕校洞東邊 rdquo

99) 유본예 『한경지략』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영인본 2000 284쪽

구분 경복궁101) 창덕궁102) 조선후기 창덕궁

연대 1395(태조 4) 1405(태종 5) (궁궐지)103)

내전 침전 연침7칸+이방(2+2)칸 청3칸+동서침전(2+2)칸대조전청3칸+동서온돌

(2+2)칸+퇴(1+1)칸

표 2-2gt 창건당시 창덕궁의 규모와 경복궁 규모 조선후기의 창덕궁 규모와 비교

그림 1gt「도성도」(여지도 1750~ 1757년 754times98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이궁의 공사가 진행중이던 태종 5년 왕은 궁궐 짓는 것을 보고 성산군(星山君) 이직(李

稷)과 함께 그 규모(規模)를 획정하였다100) 궁이 완성된 후에 기록한 규모는 총 287칸으로

이 중에서 내전이 195칸 외전에 92칸이다 이 기록에서는 주요전각의 경우 정면 칸수만 표

기한 것이다 태조 4년(1395) 준공된 경복궁과 비교하면 내전의 규모가 195칸으로 창덕궁이

더 많고(경복궁은 173칸) 외전은 경복궁이 212칸으로 창덕궁(92칸)의 2배가 넘는다 이는

창덕궁이 내전위주의 이궁이라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100) 『태종실록』 권9 태종 5년(1405) 2월 2일

구분 경복궁101) 창덕궁102) 조선후기 창덕궁

연대 1395(태조 4) 1405(태종 5) (궁궐지)103)

행랑

북천랑 7칸 북행랑 25

칸 남천랑 5칸

동소침 3칸 서소침 3칸

동서천랑 (2+2)칸

남천랑 6칸

동서소횡랑 (5+5)칸

북행랑 11칸

서별실 3칸

동서행랑 (15+15)칸

동루 3칸 상고 3칸

흥복헌 4칸

융경헌 3칸

동행각 6칸

서행각 6칸

남행각19칸

내전소계 173칸 195칸

외전

편전 - 3칸 선정전 3칸

보평청 5칸+이방(1+1) 3칸

정전 5칸 3칸 5칸

월대

동서폭 1125자

남북폭 50타

중계 깊이 15자

동서폭 639자

남북폭 33자

중층폭 5자

상월대

남북 폭 45자

하월대 165자

내정

남북(월대전면~정문)

178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3225(1125 +15

+15+80+80)자

남북( 월대전면~정문)

117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156자

남북( 월대전면~정문)

123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209자

행랑

북행랑 29칸

동행랑 28칸

서행랑 28칸

동행랑 17칸

서행랑 16칸

동행각 18칸

서행각 19칸

대문3칸

좌우행랑 (11+11)칸

3칸

좌우행랑 (9+9)칸

인정문 3칸

좌우행랑 (10+10)칸

외전소계 212칸 92칸

궐내각사 390칸

승정원청 3칸

동행랑 10칸

남행랑 4칸

북행랑 4칸 외행랑 5칸

외루 3칸

승정원 3칸 7량

동행각 125칸

서행각 12칸

남행각 5칸

당후 10칸

총 칸수 775칸 287칸 183825칸(대보단 포함)

2) 조선전기 창덕궁의 변천과정과 범위

(1) 제1기 태종대(太宗代)~세종대(世宗代)

창덕궁의 창건과 궁궐로서 형태를 갖추는 시기이다 태종대에 창덕궁을 지을 때에는 법

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현재보다 그 범위가 좁고 전각의 구성도 달랐다 창건당시에는

인정전 일곽의 외전과 내전으로 구성되었으며 인정전 외행랑과 진선문 금천교는 태종 11년

에104) 돈화문은 그 다음해에 완성되었다105) 태종은 이어서 편전을 넓게 고쳐 짓고(태종 15

101) 『태조실록』 태조 4년(1395) 9월 29일

102) 『태종실록』 태종 5년(1405) 10월 19일

103) 『궁궐지』에는 건물의 전체 칸수가 적혀 있으나 이 표에서는 경복궁과 창덕궁의 창건 기록과 같은 기준으

로 전각의 정면 칸수를 적음

104) 『태종실록』태종 11년(1411) 3월 18일

105) 『태종실록』태종 12년(1412) 5월 22일

년) 인정전을 확장하고 나서106)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세종은 즉위직후 상왕인 태종

을 위하여 창덕궁의 동남쪽에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즉 창덕궁의 외전 침전일곽과 나중

에 동궁과 창경궁이 되는 수강궁 일대의 틀이 태종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태종대에 시작한 인정전 확장과 외행각(인정문 남쪽) 조성은 세종 즉위 직후에 마무리

되었다 인정문 남쪽의 행랑은 특별한 용도로 쓰이지 않고 다만 정전 앞쪽의 영역에 경계를

짓는 역할이었다고 생각된다 창덕궁의 위상이 이궁이었으므로 외조의 각 기관이 외행랑에

들어서지 않았으며 행랑을 세우지 말고 도로 담장을 쌓으라는 지시107)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단종 즉위년에 인정전의 서까래와 보가 썩어 이를 수리하였다108) 인정전을 창건한 지

50년만으로 처음에는 수리를 한다고 하였으나 『단종실록』에 따르면 초석과 기둥 등 고치

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109)고 하여 수리라기보다는 개축하면서 좀 더 확장 한 것으로 보

인다

그림 2-2gt 태종~세종년간의 창덕궁범위

창덕궁의 창건(1405)

금천교(1411) 돈화문 건립(1412) 인정전 확장(1418)수강궁건립(1418)

106) 『태종실록』태종 18년(1418) 7월 7일

107) 『태종실록』 태종 1년(1401) 4월 12일 15일

108)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11월 17일

109) 『단종실록』 단종 1년(1453) 4월 27일

시기 내용 참고

태종 4년(1404) 106 향교동 동변에 이궁을 짓도록 하다

태종 5년(1405) 10 9 이궁완성

태종 6년(1406) 4 1 궁안에 광연루 지음

태종 6년(1406) 4 9 해온정 궁 동북 모퉁이에 지음

태종 11년(1411) 318 진선문 금천교

ldquo누각과 침실을 창덕궁에 짓고 진선문 밖에는 돌

다리를 놓았는데 공조판서 박자청을 시켜 그 역사

를 감독하게 하였다rdquo

인정전의 확장에 먼저

건립된 진선문의 위치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태종 11년(1411) 415 의정부 朝房을 진선문 밖에 짓도록 하였다

태종 12년(1412) 522 진선문 남쪽에 누문 5칸을 세우고 lsquo돈화문rsquo이라

태종 15년(1415) 128 편전을 넓게 고쳐지음

태종17년(1417)윤512 이조판서 박신이 인정전이 좁아 서쪽으로 당겨 다

시 짓도록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태종 18년(1418) 77 인정전을 고쳐짓다

태종 18년(1418) 910 인정전이 준공되었다

세종 즉위년(1418) 113 완성된 상왕전의 신궁을 壽康宮이라 하다

세종 1년(1419) 412 15

박자청이 상왕(태종)의 지시로 인정문 밖의 남행

랑을 비뚤게 지었으므로 하옥하고 헐어버리도록

하고 행랑대신 담장을 쌓도록 하다

단종 즉위년(1452) 1114 사헌부에서 인정전을 개축을 정지할 것을 청하다

단종 즉위년(1452) 1117 ldquo대신 등이 말하기를 lsquo인정전(仁政殿)의 서까래

[欀題]와 동량(棟梁) 이 썩었다rsquo 하는데 만약 창

덕궁에 거처하게 되면 정사를 볼 곳이 없어서 개

수(改修)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구지(舊址)이기 때

문에 조금 넓힐 뿐이다rdquo

인정전을 확장

단종 1년(1453) 427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창덕궁(昌德宮)을 처음에는 수보(修補)한다고 말하

였으나 지금 주춧돌 하나 기둥 하나도 고치지 아

니한 것이 없으며 인정전에 이르러서는 완전하고

튼튼하여 옛날 그대로 있는 것이 가한데 모두 철

거하여 고쳤으니 이름은 수보한다고 하고 모조리

새로 짓습니다 흥인문을 고치고 수문을 지음

단종 1년(1453) 55 인정전과 흥인문 수문의 역사를 마치도록 하다

표 2-3gt 제1기 태종~세종연간의 창덕궁 연표

(2) 제2기 世祖代~成宗代

창덕궁은 태종대에 형식적인 틀을 대부분 갖추었으며 주요 전각이 자리를 잡아 갔다

그 다음 단계로서 성종년간에 이르기까지 전각의 명칭을 정하고 영역을 확장하여 조선 후기

까지 유지되는 궁역 외곽선을 확보하게 된다 세조년간에 중심 전각들의 이름을 정했는데

조계청(朝啓廳)을 선정전(宣政殿) 선정전 뒤편의 동쪽 별실(後東別室)을 소덕당(昭德堂) 서

쪽 별실(後西別室)을 보경당(寶慶堂) (내전의)정전(正殿)을 양의전(兩儀殿) 동침실(東寢室)

을 여일전(麗日殿) 서침실(西寢室)을 정월전(淨月殿)이라 칭하고 누(樓)를 징광루(澄光樓)

동별실(東別室)을 응복정(凝福亭) 서별실(西別室)을 옥화당(玉華堂) 누하(樓下)는 광세전(光

世殿)middot광연전(廣延殿) 별실(別室)을 구현전(求賢殿)으로 하였다110) 이때 정한 선정전과 소덕

당 보경당 징광루 옥화당 등 대부분의 명칭은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양의전으로 이

그림 3gt 세조~성종년간 궁장의 확장과 창경궁

건설

세조 전각명칭 정함(1461)

세조 후원 동쪽궁장의 확장(1462~1463)

성종 창경궁의 창건(1584)

름 지은 정전(내전의 정전)은 세조대에

이전에 대조전(大造殿)으로 개칭하였

다111)

세조년간에는 후원의 영역을 확장

하였는데 즉위 8년에서 9년에 후원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쪽과 동북쪽의 담

장을 넓혀서 쌓으려 민가를 철거했으며

이때 넓힌 궁장은 성균관에 맞닿게 되

었다112) 당시 확정된 후원의 경계는 궁

의 동북쪽과 북쪽 그리고 동쪽으로 응

봉 주산의 내맥이 지나는 곳에 합친 것

이 되는 셈인데 궁의 후방 담장 경계는

세조대에 확정된 것이 그 이후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성종대에는 왕실의 구성원 중에서

여러명의 대비가 존재함에 따라 창덕궁

의 연조부분을 확장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창덕궁의 지형이 내전을 확장하

기에는 협소하여 창경궁을 조성하게 되

었다113) 성종 13년 창덕궁 수리를 논의

하는 자리에서 성종은 창덕궁을 수리할

필요가 없고 그 대신 수강궁을 수리하

라고 했다가114) 이듬해 창경궁을 짓도록 명하였다 성종 15년에 완공된115) 창경궁은 궐내각

사와 내전 후원을 창덕궁과 공유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경희궁을 서궐이라 하는데 대

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ldquo동궐rdquo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시기까지 외조는 승정원 빈

청 사옹원 내반원 정도가 확인된다

성종 6년에 창덕궁의 문 중에서 액호가 없던 것을 왕의 명으로 서거정이 짓게 되는데

이때 명명된 문 이름을 통해서 창경궁이 조영되기 이전 성종대의 창덕궁 궁역과 문의 기능

110)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1461) 12월 19일

111)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1467) 5월 17일 왕이 대조전에서 신하들과 이시애의 난을 토벌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는 그 직전까지도 양의전에서 논의하던 내용으로 이후 양의전이라는 전각명은 기록에 보이지

않고 같은 논의를 양의전 대신 대조전에서 하고 있어서 양의전과 대조전은 같은 전각이라고 추정된다 『宮闕

志』(K2-4363) 에 실린 양의전 관련내용은 다음과 같다 ldquo兩儀殿世祖七年壬午上御兩儀殿召承旨 金 從舜 謂曰

臺諫擇可言事言之人主得納諫之名 臺諫亦得獻替之譽矣[주國朝寶鑑]rdquo

112) 『세조실록』 세조 9년(1463) 2월 7일

113) 예종대 이전에는 왕비가 먼저 승하하여 왕실에 대비가 없었으나 예종대(예종은 즉위기간이 1년2개월로 짧

았다)에 정희왕후 성종 즉위 후에는 예종비 안순왕후와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가 생존한 상태로 갑자기 대

비가 세분이나 존재하게 되었다

114) 『성종실록』 성종 13년(1482) 12월 14일

115) 『성종실록』 성종 15년(1484) 9월 27일

시기 내용 참고

세조 7년(1461) 1219 창덕궁의 조계청(朝啓廳)을 선정전(宣政殿) 후동

별실(後東別室)을 소덕당(昭德堂) 후서별실(後西

別室)을 보경당(寶慶堂) 정전(正殿)을 양의전(兩儀

殿) 동침실(東寢室)을 여일전(麗日殿) 서침실(西

寢室)을 정월전(淨月殿)이라 칭하고 누(樓)를 징

광루(澄光樓) 동별실(東別室)을 응복정(凝福亭)

서별실(西別室)을 옥화당(玉華堂) 누하(樓下)는 광

세전(光世殿)middot광연전(廣延殿) 별실(別室)을 구현전

(求賢殿)이라 칭하도록 하라

세조 13년 5월 17일 대조

전 기사가 등장하므로 대조

전은 처음에 양의전이었다가

세조 13년 이전에 대조전으

로 개칭 된 것으로 보임

보경당은 왕이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거나 소견하는 장

소로 사용 왕의 거처 영조

탄생

세조 8년(1462) 130 후원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장을 넓혀서 쌓으려

민가를 철거하도록 하다

세조 9년(1463) 27 9 후원의 궁장을 넓히려고 동북동 북쪽의 인가를

철거 창덕궁의 궁장이 성균관에 맞닿음

성종 6년(1475) 8 23 액호가 없는 창덕궁의 문이름을 정함

성종 15년(1484) 9

27

창경궁 준공

연산군 11년~12년 후원에 서총대 건립

표 4gt 제2기 세조~성종년간의 창덕궁 연표

을 파악 할 수 있다 『성종실록』의 내용 중에서 외동장문으로 선인문(宣仁門)은 현재 창경

궁 홍화문 남쪽에 있는 문인데 세조 8년에 궁장 위치를 동쪽으로 물려 쌓은 것을 감안하면

성종대에 이름을 지은 선인문과 현재의 선인문 위치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창덕궁의 내동장문(內東墻門)은 건양문(建陽門)이라 하여 창덕궁과 당시 수강궁의 경

계에 내궁장이 있고 건양문으로 통행하여 그 경계의 구분이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서쪽의 궁장문으로는 요금문(曜金門) 서행랑문(西行廊門)은 금호문(金虎門)이 확인되며

후원의 북장문(北墻門)은 공진문(拱辰門) 외북장문(外北墻門)은 광지문(廣智門)116)이라 하였

다 현재공진문으로 경계지워지는 주합루 일대까지가 당시에 후원이었으며 그 북쪽(현재 옥

류천 일대의 북쪽)에 또 외궁장이 있었다 「도성대지도」(1764년경 제작 추정)에는 창덕궁

후원의 외궁장에 광지문이 표기되어 있으며 문 밖에는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의 초소인 광지

영(廣智營)이 있었다 연산군은 이 문을 지키는 영(營)에서 후원이 내려다 보인다고 하여 그

위치를 아래쪽으로 옮기게 하고 이쪽으로 사람들을 왕래하지 못하도록 했다117) 이 문의 이

름은 『승정원일기』에 광지영 서쪽에서 건무문 동쪽까지의 궁장을 수리하면서 건무문이라

고 칭하고 있어서118) 정조년간에 건무문(建武門)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에는 lsquo건무문rsquo이라고 적혀 있다

116) 『성종실록』 성종 6년(1475) 8월 23일 ldquo예문관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전교를 받들어 대궐의 문 중에

예전에 額號가 없는 것은 각기 2개의 이름을 扁額하여 아뢰니 임금이 낙점하기를 창덕궁 밖 東墻門은 宣仁

門 중간의 東墻門은 景陽門 新大門은 長春門 中大門은 宣明門 南夾門은 春興門 안 東墻門은 建陽門 북쪽

東墻門은 綺華門 廣延亭의 西岾門은 平昌門 南行廊門은 永和門 北行廊門은 永平門 內司僕南門은 雲錦門

外東山門은 延陽門 左夾門은 光範門 右夾門은 崇範門 南墻門은 丹鳳門 內西墻門은 宜秋門 左闥門은 肅章

門 兼司僕廳의 新大門은 延福門 內司饔의 上東門은 小春門 북문은 小東門 중궁의 差備門은 延禧門 承政院

의 南門은 延英門 서행랑문은 金虎門 外西墻門은 鎭金門 西墻門은 曜金門 後苑의 北墻門은 拱辰門 新北墻

門은 閶闔門 東墻門은 靑陽門 外北墻門은 廣智門 -후략-rdquo

117) 『연산군일기』 연산군 5년(1499) 2월 26일

118) 『승정원일기』 정조 8년 6월 22일

나 조선후기 창덕궁의 영역 변천

1) 제3기 임진왜란~영조대(英祖代)

세 번째 단계는 임진왜란 이후에서 영조년간까지 이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경복궁이 재건되지 못하고 창덕궁이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법궁으로서의 형

식을 갖추어 나가는 단계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한동안 전란을 수습하느라 종묘

와 궁궐을 복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조 39년(1606)에 경복궁 중건을 착수했으나 도중에 창

덕궁을 복구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119) 이 공사는 광해군 2년에 완료되었다120)

광해군년간의 창덕궁 복구는 광해군 1년(1609) 10월에 대략적인 공사가 완료되었고121)

광해군 2년(1610) 9월에 모든 공사가 끝난듯 공사에 참여한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의

도제조middot제조middot도청(都廳) 이하 공장(工匠) 등에게 시상을 하도록 했다122) 광해군대의 복구는

옛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법궁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을 완공하고도 이곳에 거처하지 않고 경운궁으로 이어했으며 재위 9년(1617) 부터는

인경궁과 경덕궁(후에 경희궁으로 개칭)을 건설하는123) 등 창덕궁에 별로 애착을 보이지 않

았다 광해군대에 경덕궁과 인경궁 건설시 침전은 창덕궁의 대조전을 모델로 삼아 크기와

규모를 같도록 하였다124)

임진왜란 후 재건된 창덕궁의 여러 전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조반정시 반정군에 의해

인정전과 수정당(壽靜堂)을 제외하고 내전의 전각이 대부분 소실된 것이다 소실된 전각들은

곧바로 복구되지 못하였으며 창경궁의 전각을 이용하다가 인조 25년(1647)에 이르러서야 내

전의 전각들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인조대에 인경궁과 경덕궁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복구공사를 위하여 건물을 헐어 그 부

재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광해군대에 창덕궁을 참조하여 건물의 규모를 정하였으므로 인경궁

의 건물 부재를 사용한 창덕궁 전각의 복구는 소실되기 이전과 큰 차이가 없는 형태가 되었

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인조 25년에 재건된 범위는 선정전 북쪽의 보경당과 태화당

소덕당을 포함하여 대조전 희정당 등의 내전 일곽이 이전의 모습대로 재건되었으며125) 그

외에도 인정전의 동월랑 남월랑 승정원 내궁방 내사옹원 외사옹원 숙장문 좌우행랑 인

정문 외행랑 선정전 선정전 북월랑 등 외전영역의 행랑과 궐내각사를 포함하고 있다126)

119) 『宮闕志』 昌德宮志

120) 『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1610) 9월 1일

121) 『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1609) 10월 16일

122) 『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1610) 9월 1일

123)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1617) 1월 18일

124)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1617) 6월 21일

125) 『인조실록』 인조 25년(1647) 11월 12일 ldquo상이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는데 수리할 적에 새로 세운 것도

많았다 모든 낭무(廊廡)가 일체 옛 제도와 같았고 大內에 大造殿middot宣政殿middot熙政堂middot靜默堂middot集祥堂middot寶慶堂middot玉華堂middot

泰和堂middot讌和堂과 澄光樓가 있는데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rdquo

이 때 재건된 전각은 대부분 순조대까지 유지되었으며 그 내용은 「동궐도」에 표현되어 있

인조년간에 특기할 만한 것은 후원에 많은 정자를 지어 창덕궁의 후원 깊숙한 곳에 왕

의 개인적인 휴식 공간이 조성된 것이다 인조 14년(1636)에는 후원의 제일 북쪽인 광지문

안쪽에 청의정과 태극정 소요정 취하정을 짓고 옥류천을 조성했다 인조 18년에는 취규정

을 지었으며 22년에는 존덕정을 지었다 당시 청나라에서 귀국한 소현세자에게 청나라의 궁

관(宮觀)을 물어 팔각형의 정자를 짓기도 했다127)

효종과 현종대에는 대비를 위한 전각이 추가되어 공간에 변화를 준것이 특징이다 효종

6년(1655) 인정전 서북쪽 흠경각옛터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를 위해 만수전을 지었다 자

의대비는 대조전 북서쪽 언덕에 있었던 수정당(壽靜堂)에 거처했으나 이곳이 좁고 협착하다

는 이유를 들어 만수전을 지은 것이다 수정당은 정조 18년(1794)에 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면

서 당(堂)에서 전(殿)으로 전각의 위상을 높여 수정전(壽靜殿)으로 개칭하였다 현종 8년

(1667)에는 대조전 북동쪽에 있던 집상당(集祥堂)을 고치면서 이름을 집상전으로 개칭하고

통명전에 거처하던 효종비 인선대비를 거처하도록 하였다 집상전은 세조대에도 집상당이라

는 전각명이 실록에 보이는데 인조대에 창덕궁을 재건할 때 이전의 모습과 제도대로 지었다

는 점과 이때에도 집상당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있던 전각으로 보인다

인정전 북서쪽은 원래는 각종 천문기기를 설치한 흠경각128)이 자리잡고 있어서 외전영

역에 속했으나 만수전과 내전관련 부속 건물들이 새로이 들어섬으로서 그 일대는 내전영역

으로 그 기능과 성격이 변화 하였다 만수전이 숙종대에 소실된129) 다음에도 그 자리에 계

속해서 대비의 거처인 경복전이 들어섰으며 주변의 부속 건물들은 영모당 수라간 등촉방

등의 기능을 가지고 유지되었다

숙종대에는 왕의 어진을 제작하여 선원전에 보관하고 이것을 경종과 영조대에 확장해

가면서 선원전일곽이 하나의 영역을 새롭게 형성하였다 선원전 자리는 원래 도총부로서 궐

내각사의 일부였으나 효종대에 그 자리에 춘휘전을 지었는데 이곳에 숙종의 어진을 보관하

였다 이후 보관할 어진의 수가 늘어나면서 영조대에 중수하였고 양지당 등 주변전각이 재

실과 선원전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

숙종년간에 또 하나의 변화는 후원의 북서쪽에 대보단을 창설한 것이다 대보(大報)란

126) 『昌德宮修理都監儀軌』(1647)

127) 『인조실록』 인조 24년(1646) 2월 4일 상이 八角亭을 後園에다 지었다 처음에 세자가 북경에서 돌아오

자 상이 청나라의 宮觀의 제도에 대하여 물었다 세자가 팔각정의 제도가 가장 묘하다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

기를 ldquo네가 그 모양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겠는가rdquo 하니 세자가 즉시 그려서 올리자 상이 매우 기뻐하여 그

정자를 후원에다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매우 기묘하였다

128) 흠경각은 세종대에 경복궁 사정전 서쪽에 있었으며 혼천의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후 선조가 영의정 이항

복에게 명하여 예전의 제도대로 만들도록 하였다 광해군 5년에서 8년까지 흠경각 건립에 대한 기사가 있는

데 이는 창덕궁에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효종년간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수전을 지으면서 혼천의가

손상되었는데 현종조에 들어와 좨주 宋浚吉이 흠경각의 옛 제도를 복구하도록 청하자 마침내 李敏哲에게 명

하여 蔡沈의 《書經集傳》에 조금 더하고 덜어서 혼천의의 형상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 제도는 안에 四游와

玉衡이 빠져 있고 또 白單環을 없앤 것이었다 숙종조에 들어와 이민철에게 명하여 예전 혼천의를 중수(重修)

하도록 하고 齊政閣을 창덕궁 熙政堂의 남쪽에 지어 봉안하였다(『國朝寶鑑』 제 60권 영조조 4 한국고전

종합 DB httpdbitkcorkr)

129) 『숙종실록』 숙종 13년(1687) 9월 2일

큰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임진왜란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神宗)에 제사 지내기

위한 시설이다 숙종 30년(1704) 별대영(別隊營)의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세웠다 후원

의 서쪽 담과 별대영의 동쪽 담 사이를 연결시켜 쌓고 후원의 담을 뚫어 문으로 만들어서

친제(親祭) 때 거둥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대보단으로 통하는 문은 창덕궁 후원의 동쪽문인

집춘문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130) 이렇게 명나라에 대한 신의를 강조했던 것은 당시 유행

했던 반청(反淸)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신위는 대보단 동쪽의 봉실에 모셨으며 서쪽의 경봉

각(敬奉閣)에는 중국 황제와 관련된 서적과 문서를 보관했다 단의 남쪽에 열천문과 공북문

을 두었고 동쪽에는 어재실인 만세송은(萬世誦恩)이 있다

숙종대에는 인조대 못지않게 후원에 다양한 형태의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여 주합루 북

쪽에서 옥류천까지 왕의 휴식처를 다양하게 마련했다

그림 4gt 인조~영조대의 전각조성

인조 25년(1647) 중건 효종대 만수전 춘휘전 건립

현종대 집상전 건립(순조대까지 유지) 숙종대 선원전 건립

130) 『숙종실록』 권40 숙종 30년(1704) 10월 3일 12월 21일

시기 내용 참고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창덕궁 소실

광해군 2년(1610) 9 창덕궁 중건

광해군 15년(1623) 3 12 인조반정시 인정전만 남고 모두 소실됨

인조 14년(1636) 후원에 옥류천과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지음

바위에 옥류천 세 글자를 새겼는데 인조의 어필이

『궁궐지(宮闕志)』

인조 18년 후원에 취규정(聚奎亭) 지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2년 후원에 존덕정 지음 연못이 있어 반원지라 하고

남쪽에 일영대를 두었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4년 후원에 희우정과 청양각 지음

인조 25년 후원에 낙민정과 관풍각(觀豊閣) 지음

서총대 동쪽 북쪽에 내농포가 있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5년(1647) 11 12 창덕궁 중건 모든 낭무(廊廡)가 일체 옛 제도와

같았고 대내에 대조전(大造殿)middot선정전(宣政殿)middot희

정당(熙政堂)middot정묵당(靜默堂)middot집상당(集祥堂)middot보경

당(寶慶堂)middot옥화당(玉華堂)middot태화당(泰和堂)middot연화당

(讌和堂)과 징광루(澄光樓)가 있는데 매우 웅장하

고 화려하였다

『昌德宮修理都監儀軌』

(1647)

효종 8년(1657) 4 2 만수전 춘휘전을 흠경각 옛터에 지음 『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

儀軌』(1657)

현종 8년(1667) 11 11 집상전을 짓도록 명하다 『集祥殿修改都監儀軌』

(1667)

숙종 13년(1687) 9 2 만수전 소실

숙종대에 만수전 터에 경복당을 짓고 이후 경종

2년 경복전으로 개칭

숙종 14년(1688) 청심정(淸心亭)을 지음 남쪽 뜰에 못을 파서 빙옥

지라 하고 정자 동쪽의 협곡에 홍예교를 놓음

『궁궐지(宮闕志)』

숙종 15년(1689) 관덕정 북쪽에 영타정(靈鼉亭)지음 불로문 밖 남

변 소실

『궁궐지(宮闕志)』

숙종 18년(1692) 애련정 연못 조성

영화당 개수

『궁궐지(宮闕志)』

숙종 21년(1695) 춘휘전을 선원(璿源)이라 이름을 고치고 어진을

봉안하였다

『궁궐지(宮闕志)』창덕

궁지 선원전조

숙종 39년(1713) 4 11 임금의 여용을 그려 뒤에 임금이 한 벌은 대내(大

內) 선원전(璿源殿)에 보관하라고 분부하였다

효종대에 지은 춘휘전을

선원전으로 전용

영조 30년(1754) 1 5 선원전 수리 7칸으로 증축

표 5gt 제3기 임진왜란~영조년간의 창덕궁 연표

2) 제4기 正祖代

정조대에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창덕궁에 활발한 건물의 조성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성

격의 전각이 들어섰다 그 결과 궁궐전체의 공간 구성에 변화가 불가피했으며 이는 이후 순

조와 헌종대의 창덕궁 공간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정조는 즉위년에서 즉위 5년까지 창덕궁내에 각종 시설들을 정비하고 첨가했는데 즉위

하자마자(1776년) 첫번째로 후원에 주합루를 세우도록 명하여 같은 해 9월 26일에 완공했다

주합루는 영화당 북쪽의 언덕에 자리 잡고 그 주변으로 봉모당 열고관과 개유와를 배치하

였고 주합루 서쪽에 이안각인 서향각을 배치하였다 주합루 일대의 건물들에는 영조의 어필

과 문집(봉모당) 중국서적(열고관 개유와)과 국내의 서책을 보관하였다 주합루는 이 일대

의 중심건물로 언덕위에서 당당한 위용으로 부용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이다 주합루 일

대가 조성됨으로써 영화당의 동쪽은 문무과 시험의 장소로서 기존의 기능을 수행하고 주

합루 일대는 왕권 강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변모하여 이 일대는 후원에서도 통치와 관련된

기능을 가진 영역이 되었다

즉위년 9월에 인정전 앞마당에 품계석을 설치하고 즉위 2년(1778) 선원전에 새로 동middot서

익각을 설치했으며131) 즉위 5년(1781)에는 주합루에 설치한 규장각의 관리들이 근무하는 공

간으로 이문원을 세웠다132) 이문원의 위치는 금호문 안쪽 선원전의 서쪽으로 원래 그 자리

에 있었던 도총부는 창경궁으로 옮겼다 이문원이 설치된 장소는 임진왜란 직후까지도 민가

가 있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즉 조선 후기에 창덕궁이 법궁으로 이용되면서 금천 서쪽은 증

가하는 궐내각사를 설치할 공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정조 6년(1782)에는 왕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중희당(重熙堂)을 신설했다133)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는 동궁으로 저승전과 시민당이 있었으나 저승전은 영조 32년 화재로 소실된

후 복구하지 않았고 시민당도 정조 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134) 처음에는 시민당을 복구하려

다가 이를 중지하고135) 시민당터와 내전영역의 중간정도 되는 지점에 세자를 위한 전각들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로서 동궁은 내전과 더욱 가까운 곳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헌종대에 편

찬한 『궁궐지(宮闕志)』에는 중희당 일곽을 창덕궁에 포함시키고 있다

131) 『정조실록』정조 2년(1778) 1월 15일

132) 『정조실록』정조 5년(1781) 3월 10일

133) 『宮闕志』창덕궁지 중희당조

134) 『정조실록』 정조 4년(1780) 7월 13일

135) 『정조실록』 정조 4년(1780) 8월 29일

그림 5gt 정조대의 전각조성

정조 9년(1785)에는 수강재를 건립했다136) 그 터가 수강궁의 옛터라고 하여 수강재

로 이름지었으며 세자궁의 정당인 시민당터의 북쪽에 위치하였다 정조가 상량문에서 밝

힌 수강재의 용도는 왕의 작은 서재로서 강학을 위한 집이었다137) 중희당과 수강재의

건립은 왕과 세자의 관계를 보다 밀접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건축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기 내용 참고

정조 즉위년(1776) 주합루 건립

정조 1년(1777) 9 6 인정전 품계석 설치

정조 2년(1778) 1 15 선원전 동 서익각 설치

정조 5년(1781) 3 10 금호문 안쪽에 이문원 설치

정조 6년 중희당 건립 『宮闕志』

정조 9년(1785) 8 27 수강재 건립

정조 17년(1793) 택수재를 고쳐서 부용정 개축 『홍재전서』제55권 잡저(雜著)2 부용정상량문

표 6gt 제4기 정조년간의 창덕궁 연표

3) 제5기 純祖代~高宗代

136) 『정조실록』 정조 9년(1785) 8월 27일

137) 『홍재전서(弘齋全書)』 제54권 잡저(雜著) 수강재상량문

순조대에는 여러 차례의 화재로 내전의 전각이 소실되고 다시 중건되었다 화재 전 후

의 모습은 「동궐도」와 고종대에 그려진 「동궐도형」에 반영되어 있다 「동궐도」는 화

재 이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만수전 자리에 있었던 경복전이 순조 24년(1824) 화재로 소실되자138) 그 자리에 다시

전각을 복구하지 않아서 「동궐도」에는 빈 터로 남아 있다 대조전일곽에 있었던 집상전은

순조 33년(1833) 내전 일곽의 전각에 화재가 났을 때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내전의 복구공

사에서 제외되어 그 이후에도 다시 지어지지 않았다 화재 후에도 대조전과 같은 내전의 중

심전각은 그대로 재건되는데 반하여 경복전이나 집상전과 같이 대비가 사용하던 전각이 복

구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왕실에 대비가 계시지 않았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순조대의 대비

전과 내전일곽에 화재가 날 당시는 영조비인 정순왕후와 정조비인 효의왕후는 승하한 뒤였

순조대에는 화재로 소실된 전각을 재건하는 건축활동은 많았지만 전각을 새로 짓거나

궁역을 확장한 일은 없었고 정조대에 이룩된 전각들이 대부분 유지되었다 효명세자 대리청

정기에 중희당일곽의 동궁전각이 활발하게 사용되었으며 내전일곽의 화재 후 재건과정에서

내전의 전각구성에 부분적인 변화를 가져온 정도이다

순조의 뒤를 이은 헌종대에는 동궁영역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정조대에 지은 수강재

에서 중희당 동쪽까지 비어 있던 곳에 낙선재를 지은 것이다 새로 맞이한 후궁 경빈 김씨

의 처소인 석복헌을 낙선재 동쪽에 이어서 짓고 순조비 순원왕후를 위해 수강재를 수리하

여 세 건물을 행각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건물군으로 만든 것이다 낙선재가 들어선 곳은 조

선후기에 동궁이 있었던 곳으로 수강재 동쪽에는 세자를 보좌하는 춘방과 계방 등이 있었으

며 낙선재 동쪽에는 정조대에 조성한 중희당 일곽이 자리하고 있었다 낙선재의 조영은 동

궁일대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면서 동궁을 보좌하는 곳과 동궁의 거처를 양분하며 동궁이 축

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종대에 들어서 경복궁이 중건되어 창덕궁은 조선후기 동안 누려왔던 법궁이라는 지위

를 다시 경복궁에 넘겨주게 되었다 창덕궁(동궐)과 경희궁(서궐)이라는 양궐체제의 중심은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경복궁은 중건이후에 잦은 화재로 인하여 왕이 창덕

궁으로 이어하는 기간이 많았다 고종대에 창덕궁의 영역과 전각변화의 특징은 창덕궁의 전

각을 경복궁으로 옮겨짓는 일이 빈번했다는 점이다 전각을 헐어낸 자리는 빈 공간으로 남

았으며 이는 「동궐도」와 「동궐도형」의 비교를 통해서 파악가능하다

고종 초기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시 사용빈도가 낮은 창경궁의 행각과 전각을 경복궁

으로 이건하기도 했다 창경궁의 자경전을 옮겨 경복궁의 자미당을 지은 것이 그 첫번째 이

다139) 고종 초기에 이건한 자경전과 1882년 이후 공사가 중지된 수정전(壽靜殿)이 「동궐도

형」에는 빈 터로 남아 있다 또한 「동궐도형」에 lsquo금무rsquo라고 씌어진 건물은 「동궐도형」

의 제작시기와 가까운 1890년대에 이건한 건물들이다

138) 『순조실록』 순조 24년(1824) 8월 24일

139) 『승정원일기』 고종 2년(1865) 10월 26일

시기 내용 참고

순조 3년(1803) 12월 13일 인정전 화재

순조 4년(1804) 12월 17일 인정전 중건

순조 11년(1811) 윤3월 6

향실(인정전 서행랑)과 예문관에 화재

순조 24년(1824) 8월 24일 경복전 화재 「동궐도」에는 터만 그

려져 있음

순조 33년(1833) 내전일곽의 화재

순조 34년(1834) 내전일곽의 전각 중건 영연합을 헐어 창경궁 영

춘헌을 복구

헌종 12년 낙선재 건립

고종 13~14년 창덕궁의 수리

고종 18년(1881) 7월 22일 수정전을 함녕전으로 바꾸고 동 서 남 북별당

공사를 시작하다

고종 28년(1891) 3월21일 함녕전(구 수정전)의 여러 전각을 경복궁으로 옮

겨짓다(집옥재 협길당)

고종 28년(1891) 5월 3일 중희당 이건

표 7gt 제5기 순조~고종년간의 창덕궁 연표

고종 18년(1881)에는 수정전(壽靜殿)을 수리하여 함녕전(咸寧殿)으로 전호를 바꾸고140)

주변에 부속건물을 짓는 공사를 했다 그러나 이 공사는 완공직전에 을미사변으로 중단되었

고141) 약 10년 후 경복궁의 집옥재와 협길당으로 이건되었다142) 집옥재의 이건공사와 같은

시기에 중희당도 이건하였는데143) 경복궁의 어느 전각으로 이건되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다

만 이 시기 경복궁에서 동궁의 전각인 계조당의 개건이 있었고 함화당 집경당 등의 공사가

연이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이 건물들에 중희당의 부재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대에 중희당을 어디론가 이건함으로써 창덕궁에서 동궁의 전각이 삼삼와와 승화루

만 남기고 사라지게 되어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 까지 중희당이 있던 곳은

빈 터로 남아있어 「동궐도」에서 볼 수 있는 동궁의 공간을 볼 수 없게 되었다

4) 제6기 대한제국 말기

갑신정변이후 고종이 경복궁으로 이어한 후에는 잠시 창덕궁에 이어했었던 것 외에 을

미사변 직후까지 경복궁에 주로 머물렀으며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다가 경운궁을 건설한 다음에는 경복궁이나 창덕궁 두 궁궐로 돌아가지 않았다 고종

31년(1894) 4월 2일에서 5월 23까지 약 두달여 정도 창덕궁에 이어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광

140)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7월22일 ldquo壽靜殿의 호는 咸寧으로 동별당의 호는 衍福으로 남별당의

호는 正善으로 하였으며helliprdquo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8월2일 무위소가 함녕전 서별당ㆍ북별당의 당

호 단자를 올렸는데 서별당은 協吉堂 북별당은 資順堂이었다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9월24일 營

建所가 咸寧殿 北別堂의 당호를 集玉齋로 품정하였다

141)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7월22일

142) 『승정원일기』 고종 28년(1891) 3월21일 ldquo咸寧殿의 여러 전각을 옮겨 건립하는 일을 重建所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rdquo(여기서 함녕전은 창덕궁의 수정전을 개칭한 전각을 말한다 후일 광무 1년(1897) 경운궁

건설당시 선덕전이라고 이름지었다가 함녕전으로 고친 경운궁의 침전과는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전각이

다)

143) 『고종실록』 고종 28년(1891) 5월 3일

무 4년(1900)에는 창덕궁 선원전에 태조의 어진을 모시면서 경복궁 선원전과 더불어 1실을

증건하는 공사를 했다

다 근현대기 창덕궁 영역의 변천

1) 제7기 일제강점기의 개조

1907년 7월 19일(양력) 고종이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한 직후

궁내부로 하여금 창덕궁의 수리를 명하고144) 같은 해 11월에 황후와 황태자를 데리고 이어

하였다145) 이로서 고종 31년(1894) 이후 13년 만에 창덕궁이 다시 주인을 찾게 되었다

순종이 이어하기 직전에 이루어진 수리에 관한 내용은 여러 장의 도면으로 남아 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도면은 총 96종으로 전체배치도 인정전일원의 수리 궁

내부 청사 대조전 일원 희정당과 선정전 일원 약방 내전일원의 신축건물 창고와 장유고

낙선재 일원 후원 등에 관한 도면이 있다 이들 도면은 1907년부터 진행된 창덕궁의 개조

철거 훼손 개축 신축에 관한 가장 실체적인 자료이다146)

그 중에서 전체 배치를 나타낸 것으로 1911년 1920년대 1930년대초 1936년 무렵의 도

면이 있어서 일제강점기 동안 창덕궁의 전체적인 변화에 대한 조감이 가능하다 1911년의

배치도를 살펴보면 인정전 좌우에 행각이 연결되어 있고 인정전 뒤쪽의 복도로 연결되어 선

정전 뒤를 지나 희정당 서측까지 연결된 변화를 볼 수 있다 또한 인정전 동쪽의 궐내각사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어 외곽의 행각만이 남아 있고 중희당이 있던 곳은 행각도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진선문 남쪽에 궁내부 청사가 들어서 있다 반면 대조전일곽과 희정당은 「동

궐도형」과 같은 외곽을 보이고 있어서 대조전 일곽은 큰 변형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원은 아직 조선시대의 도로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담장 또한 「동궐도

형」과 대조 결과 잘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1911년 까지는 부속건물들을 많이 헐어

내고 인정전과 선정전 일대를 개조하기는 했으나 어느 정도 원형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1921~1932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배치도는 후원의 도로가 변형되고 대조전과

희정당일곽이 다시 지어졌으며 창덕궁내의 담장과 행각이 철거되어 그 이전까지 성격이 뚜

렷이 구분되던 영역성이 파괴된 모습을 보여준다 1930년대초의 도면은 창경궁과 종묘 사이

에 율곡로를 개통한 후의 모습이다 낙선재 남쪽과 종묘 사이는 도로로 인하여 분리되었다

1936년경의 도면은 등고선이 표기되어 창덕궁의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도면이다 창덕궁의

건물 부분은 1921~1932년 사이의 도면과 큰 차이가 없으며 창경궁쪽에서 동물원과 식물원의

건물 증설이 확인된다

144)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10월 7일(양력)

145)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11월 13일(양력)

146) 이강근 「장석각 소장 근대 건축도면에 대하여」 『근대건축 도면집-해설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9년 15쪽

일제강점기에 편찬한 『조선고적도보』에는 원래 창덕궁의 전각이 회색으로 표기되고

당시 남아 있던 전각이 검게 표시되어 1920년대 전후의 전각과 담장의 잔존현황을 파악 할

수 있다 돈화문과 주변의 행각들 선원전과 그 일대의 숙경재 주방 이문원과 대유재 소유

재 인정전과 선정전 및 행각이 남아 있다 내전일곽의 건물도 1917년의 화재로 모두 소실되

어 희정당 동쪽에 있는 성정각 관물헌만 남았으며 낙선재 일곽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

고 있다

그림 6gt 1911년경(좌)과 1921~1932년(우)의 「창덕궁평면도」(1911년경 장서각)

그림 7gt「창덕궁배치도」(1907년의 배치상황+1920년 이후 잔존전각(『조선고적도보』)

2) 해방이후의 변화와 보수정비

해방이후에는 개별전각을 수리하는 것으로 유지되다가 1996년부터 일제강점기에 변형된

인정전 선정전 일대를 복원했으며 2000년부터는 규장각과 구(舊)선원전을 복원하면서 인정

전 서쪽의 궐내각사를 복원하여 조선시대 창덕궁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고 있다

유적명 연도 발굴기관 보고서 기간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발굴조사 1995

창덕궁 반도지 유적 昌德宮 半島

池 遺蹟2001

중앙문화재

연구원

《昌德宮 半島池 試掘

調査報告書》 2001시굴 010416~010519

창덕궁 반도지 유적 昌德宮 半島

池 遺蹟2002

중앙문화재

연구원

《昌德宮 半島池 補

修middot整備工事 竣工報告

書》 2002

발굴 020401~020616

창덕궁 금천교 주변 유적 昌德宮

錦川橋 周邊遺蹟2001

국립문화재

연구소- 발굴 010920~011115

창덕궁 금천교 주변 유적 昌德宮

錦川橋 周邊遺蹟2002

국립문화재

연구소

《창덕궁 금천교》

2002 발굴 020313~020423

창덕궁 상방지 昌德宮 尙房址 2002

명지대부설

한국건축문

화연구소

《昌德宮 尙房址 遺構

調査 報告書》 2002 발굴 020411~020704

표 8gt 창덕궁관련 발굴조사 내용

년도 공사내용 문서관리번호 보고서

1970 창덕궁부속가옥철거 -

1970 창덕궁 및 비원보수(사진) 박대통령 준공식 참석사진

1972 창덕궁보수도면 BA0122692 BA0122702

1973 창덕궁 현황 측량 실시 문화재청

1975 창덕궁 연경당별사 보수공사 BA0122725

1975 창덕궁 승화루 및 어친잠실 약방 보수공사 BA0122725

1976 창덕궁 보수공사(북행각수정당보호책설치축대보수) 문화재청

1976 창덕궁 돈화문 보수공사 문화재청

1976 창덕궁 보수 정화공사 문화재청

1978 창덕궁 반도지 조경공사 BA0806636

1978 창덕궁 낙선재 진입도로 공사 문화재청

1978 창덕궁보수정화공사 문화재청

1979 창덕궁반도지-옥류천간도로주변정화추가공사 BA0122735

1979 창덕궁 주차장 주변 정비공사 문화재청

1980 창덕궁 괘궁정 보수공사 CA0015037

1982 창덕궁 인정전 동서행각 안전진단의뢰 문화재청

1985 창덕궁선정전 및 취원정 보수공사 BA0122791

1985 창덕궁 담장 및 주변 지역 정비 CA0015402

1986 창덕궁 연와창고 보수 CA0022142

1989 창덕궁 가정당 보수공사 BA0073213

1989 창덕궁 의로전담장 보수공사 BA0073214

1989 창덕궁 대조전 부식기둥 인공수지 처리공사 BA0073215

1989 창덕궁 옥류천 어정 정비 문화재청

1990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824

1990 창덕궁 의로전 및 문간채 보수공사 CA0025835

1990 창덕궁 의풍각 보수공사 CA0025831

1990 창덕궁 청의정 승재정 농산정 보수공사 CA0025827 CA0025826

CA0025814

1990 창덕궁 대조전 보수공사 CA0025812

1990 창덕궁 단봉문주위 담장정비공사 CA0025811

1990 창덕궁 신선원전 문간채 보수공사 CA0025834

1990 창덕궁 부용정 보수공사 문화재청 비공개

1991 창덕궁 인정전행각 복원 BA0812994

1991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889

1991 창덕궁 폄우사 보수공사 CA0025888

1991 창덕궁 의로전 재실 보수공사 CA0025906

1992~1994 창덕궁 인정전 행각 복구공사 BA0813009 BA0813013

1992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978

1992~1993 창덕궁 구선원전 보수공사 실측설계 CA0025976(비공개)

1992 창덕궁 낙선재 정비 설계 정실측 CA0025941 CA0025942

1992 창덕궁 선정전일곽 실측 설계용역 문화재청

1992 창덕궁 반도지 및 존덕정 주변일곽 정밀실측 조사 문화재청

1992 창덕궁 옥류천과 주변 고건물 실측 조사 보고서 발간 문화재청

1992 창덕궁 연경당 및 주변 일곽 정밀 실측조사 문화재청

1992 보고서 창덕궁 원유복구 조경종비공사 완료 보고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의로전 재실 보수공사 CA0026052

1993 창덕궁 집희(관물헌) 보수공사 CA0026035

1993~1995 창덕궁 낙선재 정비공사 CA0026042

표 9gt 해방이후 창덕궁 건물 보수내용(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년도 공사내용 문서관리번호 보고서

1993 창덕궁 대조전 일곽 실측 설계 문화재청

1993 창덕궁 낙선재 후원 실측설계 및 보고서 발간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애련지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주합루 실측 설계 문화재청

1995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발굴조사 복원설계 BA0807969 BA0813061

1995 창덕궁 기오헌 의두각 보수공사 CA0026201

1995 창덕궁 서향각 실측 설계 및 보수설계 문화재청

1995 창덕궁 인정전 행각지 발굴조사보고서 CM00057506

1996 창덕궁 돈화문 정밀실측 CA0026307

1996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공사 CA0026267

1996 창덕궁 대조전 부속건물 보수공사 CA0026266

1996 창덕궁 서측 담장 보수공사 CA0026259

1996 창덕궁 연경당 사랑채 별채 보수공사 CA0026281 CA0026273

1997 창덕궁 돈화문 보수공사 CA0026328

1997 창덕궁 가정당 보수공사 CA0026347

1997 창덕궁 사정기비각 어수문 보수공사 CA0026348

1997 창덕궁 인정전 정밀실측 CA0026353

1997 창덕궁 희우루 문간채 약방 보수공사 CA0026337

1998 창덕궁 인정전 긴급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8 창덕궁 신선원전 실측 보수설계 문화재청

1999 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발굴조사 문화재청

1999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공사(4차) 문화재청

1999 창덕궁 대조전 부속건물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9 창덕궁 신선원전 실측 및 보수설계 문화재청

2000 창덕궁 제월광풍관 보수 및 조경공사 문화재청

2000~2005 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복원공사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복원

공사보고서

2000~2001 창덕궁 반도지 시굴조사계획 문화재청

2000 창덕궁 몽답정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경추문 보수공사 시행 문화재청

2001~2002 창덕궁 금천교주변 발굴조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침전행각 및 수라간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의로전 일곽 보수 문화재청

2001 창덕궁 금천교 실측 및 복원설계 용역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선향재 보수 설계용역 문화재청

2002 창덕궁 선향재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2 창덕궁 희정당 보수공사 창덕궁 희정당 실측 수리보고서

2002 창덕궁 상방구역 유구조사 건물복원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정자(상량정태극정능허정) 보수공사 창덕궁 정자 실측 수리보고서

2003 창덕궁 희정당 신관 보수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선정전 후원 석축 복원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의로전 일곽 및 경훈각 보수공사의로전 실측 수리보고서

경훈각 실측 수리보고서

2003 창덕궁내 정자 보수공사 (태극정) 문화재청

3 창덕궁의 배치와 특징

가 영역별 배치와 특징

1) 궐내 각사

궐내각사는 왕을 보좌하고 궐내의 일상과 의식을 위한 기관들이 위치한 영역이다 창덕

궁은 창건당시부터 이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경복궁처럼 궐내각사를 완전히 갖추고 있지

않았다 창건당시부터 조성된 부분은 인정전 동쪽부분으로 연영문 안에 승정원 내반원 궁

방 주원 등이 배치되었다 임진왜란후 경복궁이 소실되자 창덕궁이 법궁이 되면서 경복궁에

있던 상의원 내병조 등의 건물들이 창덕궁 내로 편입되었다147) 또한 인정전 서쪽으로 정

청 옥당 약방 이문원 등이 추가되었다 원래 이곳에 있었던 일부 기관(도총부 주자소 내

사복)은 창경궁으로 옮겨지기도 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이 궐내각사를 공유하는 형태를 취하

였다

2) 외전 영역

외전영역은 정치의 공간으로 왕과 관료가 공식적으로 조회를 하는 영역이다 크게는 정

전인 인정전 일곽과 편전인 선정전 영역으로 구분된다 배치의 특징은 경복궁이 남북 축선

상에 정전과 편전이 놓이는데 반하여 창덕궁은 인정전의 북쪽에 건물을 둘 만한 지형이 아

니므로 편전은 정전의 동쪽에 위치한다 편전에 이어서 내전영역도 그 동쪽에 위치하여 외

전rarr내전은 서rarr동쪽으로 배치되고 있다

3) 내전 영역

내전은 왕과 왕실 구성원의 생활공간이며 왕실의 여성구성원인 내명부의 의식공간이기

도 하다 대조전을 중심으로 주변의 집상전 수정전 만수전(후에 경복전) 등 대비전을 포함

하며 왕이 좀 더 편하게 신하들을 만날 수 있는 희정당과 희정당 동쪽의 성정각 관물헌 등

을 포함한다 그 외에 내전에는 왕실 귀중품과 생활에 관련된 물건들을 보관하는 건물과 생

활을 보조하는 기능을 가진 건물들이 중요전각 주변에 배치되었다 창덕궁에서 부족한 내전

의 전각은 창경궁 건설이후 창경궁에서 해소하였다

4) 동궁 영역

147) 『동국여지비고』제1권 京都 文職公署條

그림 8gt 조선후기 창덕궁의 영역 구분과 진입동선(「동궐도형」)

동궁은 세자궁이라고도 하며 왕세자의 거처이자 집무공간 강학공간이다 동궁은 세자의

재위 여부에 따라 그 존재가 결정되었으며 세자 책례를 통해 재위하게 될 경우 영역이 규정

되어 동궁으로 지칭되므로 시기에 따라 중심전각이 변하기도 하였다 세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에는 그 인식적 개념이 약화되어 동궁의 전각은 다른 용도로 전용되어 대비나 왕비가

사용하기도 했으며 왕이 임어하기도 했다

동궁은 현재 낙선재 일대의 남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궁의 정문은 창경궁의 선인

문 동룡문으로서 동쪽에서 진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임진왜란 이전에는 창덕궁의 동쪽경

계(건양문) 밖에 있었으며 창덕궁과 별개의 영역에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동궁의 정당

은 저승전이었으며 저승전이 소실되자 시민당을 사용했다 시민당이 정조 4년 화재로 소실

되자 이를 중건하려다 중지하고 내전에 좀 더 가까운 위치에 중희당을 세우고 이곳에서 세

자의 착봉례를 거행함으로서 정조대 이후에는 중희당이 동궁의 정당이 되었다 정조대에 조

성된 중희당 일곽은 중희당과 삼삼와 승화루 그리고 그 동쪽으로 세자를 위한 공간이 마련

되었다 이외에 세자를 보좌하는 곳으로 춘방과 계방이 있는데 이 건물들은 동룡문 안쪽 시

민당의 동쪽에 있었으며 중희당을 조영한 이후에도 그 위치는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순조

대에 효명세자가 이 중희당에서 대리청정을 했으며 효명세자 사후에 동궁은 그 주인을 다시

얻지 못했다 효명세자 사후 세자가 공부하며 거처했던 영연합의 천지장남지궁의 건물을 헐

어 창경궁의 영춘헌을 짓는데 사용하는 등 중희당 동쪽 언덕 위에 있었던 건물도 일부 사라

지게 되었다 이후 고종대에는 세자를 위해 경복궁의 계조당과 자선당 등의 동궁이 조성되

면서 창덕궁의 동궁은 그 의미를 잃어갔다고 할 수 있다

시민당이 소실되고 정조대에 중희당을 왕의 거처 공간에 보다 더 가까이 조성하면서

세자의 공간은 중희당이 중심이 되었다 시민당 주변에 정조가 수강재를 지으면서 조선초기

이래 동궁이 자리하던 곳은 점차 그 영역의 성격이 바뀌었으며 헌종대에 이곳에 낙선재를

지으면서 창덕궁에서 동궁의 공간적인 위치는 궁궐의 중심영역으로 이동했다고 할 수 있다

왕대 세자 책례일자 세자재위기간 책례장소 관례장소대리청정

장소

광해군 李祬(廢世子) 광해 2년 5월 11일 12년 10개월 인정전 시어소내청

인조 소현세자 인조 3년 1월 27일 20년 3개월 융정전(경덕궁) 경현당

봉림대군(효종) 인조 23년 9월 27일 3년 8개월 명정전 -

효종 현종 효종 2년 8월 28일 7년 9개월 인정전 세자궁

현종 숙종 현종 8년 1월 22일 7년 7개월 인정전 시민당

숙종 경종 숙종 16년 6월 16일 30년 인정전희정당 시민당 시민당

경종 영조 경종 1년 9월 27일 2년 11개월 인정전 -

영조 효장세자(진종) 영조 1년 3월 20일 3년 8개월 인정전 시민당

장헌세자(장조) 영조 12년 3월 20일 26년 2개월 인정전양정합 시민당 시민당

정조

정조 문효세자 정조 8년 8월 2일 1년 9개월 인정전중희당

순조 정조 24년 2월 2일 5개월 집복헌 바깥채집복헌 바

깥채

순조 효명세자(익종) 순조 12년 7월 6일 17년 10개월 인정전희정당 경현당 중희당

헌종 세자없음 - - - -

철종 세자없음 - - - -

고종 순종 고종 12년 2월 18일 32년 6개월 인정전 중희당

표 10gt 세자의 책례와 관례장소(창덕궁)

5) 진전 영역

선원전은 돌아가신 선왕과 선후의 영정을 봉안하던 건물로 조선전기에는 경복궁에 세워

져서 태조 태종 세종 세조 덕종 성종 중종의 어진을 모셨었다148)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의 선원전이 소실되었고 조선후기에 선원전이 다시 마련된 것은 숙종대였다

효종 8년(1657)에 만수전과 함께 지었던 춘희전에 숙종이 즉위 21년(1695)선원전이라 개명

하고 숙종의 어진을 봉안한데서149) 비롯되었다 춘휘전은 원래 만수전에 속한 건물로 빈전

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150) 효종대 건립당시 춘휘전의 주변건물은 서행각 3칸

148) 『명종실록』 권8 명종 3년 10월 10일

149) 『승정원일기』영조 30년 1월 11일 ldquohellip上曰 此殿本是春暉殿 而乙亥年(숙종 21년)奉安御眞後 改名璿源殿

矣helliprdquo

서월랑 7칸 북월랑 25칸반 남월랑 16칸 반 등의 행각과 월랑이 주변에 있었고 양지당 12

칸 양지당 남월랑 9칸과 주변에 문과 담장 판장 등이 있었다151) 그중에서 춘휘전의 서행

각 서월랑 북월랑은 「동궐도」나 「동궐도형」에서는 볼 수 없어서 선원전으로 용도가 변

하기 전에 주변 건물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원전의 영역은 선원전 서북쪽의 숙

경재와 양지당 선원전 남쪽의 영의사(永依舍) 서휘문(瑞暉門) 까지이다 영의사 남쪽의 약

방이나 옥당과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선원전으로의 출입은 인정전 남행랑 서쪽의 경광문-서휘문-양지당-선원전으로 가는 석

과 인정전 서쪽의 만안문을 통해 양지당을 거쳐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숙종이후 왕들은 생전에 자신의 어진을 제작하여 일정한 곳에 보관하였다가 사후에 부묘가

끝나면 어진을 선원전에 이봉하였다가 제사와 차례를 지낼때 꺼내서 걸어놓고 의례를 거행

하였다152)

숙종 사후 영조 1년(1725) 선원전을 중수하였으며153) 정조 2년(1778)에는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내전 전배실로 쓰던 동변실을 제2실로 개조하고 좌우 익각을 추가하였으

며154) 정조 사후에는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서변실을 개조하였다155) 그 결과 정

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확장되었는데 「동궐도」에 그려져 있는 모습이다

헌종 12년(1846)에 순조와 익종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제 4실과 5실을 증건하였으

며156) 철종 2년(1851) 다시 1실을 증건하여157) 신실이 6칸이 되었다 이후 광무 4년(1900)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서쪽으로 1칸을 증건하여 신실 7칸 좌우 퇴칸을 포함하여 정

면 9칸으로 확장되었다 원전 동쪽의 양지당(養志堂)은 어진의 이안처로 사용되었다

150) 『승정원일기』영조 30년 1월 11일 ldquohellip孝廟朝爲慈懿大妃 建此殿 爲他日殯殿之計helliprdquo

151)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1657)

152)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축』 동녘 2010년 479~483쪽 3 영건의궤에 기

록된 건축 2)진전 참조

153) 『궁궐지』 창덕궁지 「영묘어제선원전중수기병명」

154) 『승정원일기』정조 2년 1월 10일

155) 『승정원일기』순조 2년 7월 3일

156) 『헌종실록』 헌종 12년 8월 6일

157) 『일성록』철종 2년 5월 17일

그림 9gt 진전영역과 진입동선

6) 후원 영역

전각들이 배치된 영역의 북쪽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후원이다 지형은 전각영역보다 높

고 굴곡이 심한 편이다 후원영역은 성격에 따라 4개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흔히 후원

은 왕의 휴식공간만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전각영역이 통치와 의례 생활의 기능을 담고 있

듯이 후원 또한 통치 의례 휴식을 위한 기능에 따라 담장으로 공간이 구분되었다 창덕궁

의 경우 창경궁과 후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동궐도」에는 각 영역을 구분하는 담장이 표현

되어 있고 「동궐도형」도 이와 일치한다 창덕궁의 후원은 중앙이 높고 동middot서로 경사진 지

형적인 특징이 있는데 중앙의 능선에 의해 양쪽 공간의 성격이 완연히 다르다

능선의 동쪽에서 전각영역의 북쪽에 인접한 곳은 통치를 위한 공간으로 왕권의 상징적

공간인 주합루일대와 문middot무시험을 치루는 영화당과 춘당대일대 그 동쪽의 내농포가 있어서

국가의 근간인 농사를 살피는 장소를 마련하였다 통치영역의 북쪽은 왕의 개인적인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정자와 연못으로 꾸며졌다 이 영역의 중심공간은 옥류천 일대이다 능선의

서쪽은 북쪽으로 치우쳐서 대보단에 관련된 제례시설 산신단 신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남쪽은 중일각 등 군사훈련을 위한 장소가 마련되었다

그림 10gt 후원영역의 공간구분

나 내부경계의 변천

창덕궁과 창경궁은 lsquo동궐rsquo로 불리면서 하나의 궁궐로 인식되기도 했고 실제로 창덕궁의

을 사용할 경우 궁인들을 창덕궁에 모두 수용하기 어려워 그 처소는 창경궁을 활용하였

다158)

창덕궁의 안쪽 담장문(內東墻門)인 건양문(建陽門)이 성종대 이래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

계였다 내전은 통명전과 대조전일곽 사이에 두 겹의 담장이 있어서 구분이 명확하였으나

그 남쪽은 동궁영역의 전각이 변화함에 따라 별개의 궁역으로 취급되거나 창덕궁에 포함시

키기도 했고 창경궁에 속하기도 했다

『명종실록』에는 저승전을 창덕궁에 있는 것으로159) 했고 인조대 『저승전의궤』에는

저승전을 어느 쪽도 아닌 동궁으로만 언급했다 헌종대 편찬한 『宮闕志』에는 ldquo시민당터

(수강재 남쪽)에서 추경원(秋景苑)은 원래 창덕궁이다rdquo고 했으며 중희당 삼삼와 육우정을

「창덕궁지」에 포함시켜 서술했다 반면에 『동국여지비고』 『宮闕誌』에서는 중희당을

창경궁에 포함시켰다

현재는 자경전 북쪽 담장에서 춘당대까지 담장으로 되어 있고 그 북쪽은 철책으로 되어

있다 창덕궁과의 경계담장은 일제강점기에 구획된 것인 1936년의 배치도에 나타난 형태로

계속 유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즉 종묘 통행의 육교에서 낙선재동쪽 - 자경전 서쪽

담장 - 춘당대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담장이다 앞서 수강재의 동쪽에 창경원당시 동물사가

지어지면서 형성된 경계는 해방이후 창경궁과 창덕궁의 필지를 행정적으로 분리해서 각각의

지번을 부여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회복하는 1986년의 창경궁중

건에서도 그 경계는 조정되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여기에 율곡로를 가로질러 종묘로 통행할

수 있는 육교가 설치되면서 창경궁 쪽에서 접근하도록 경계가 설정된 것이다

후원 또한 대온실 주변에 식물원 부속 건물과 시설이 들어서면서 형성된 경계가 건물권역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조정 없이 유지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변화된 창경궁과 창덕궁

158) 『광해군일기』 2년(1610) 3월 26일 ldquo대저 昌德宮은 法宮과는 달리 殿閣이 많지 않고 간격이 협소하여

평상시 들어갈 때에도 항상 수용하기 어려워 宮人들은 나누어 昌慶宮으로 들어가곤 했다rdquo

159) 『명종실록』 명종 즉위년(1545) 7월 14일 ldquo更思之 則唯昌德宮東宮儲承殿爲當rdquo

그리고 후원의 경계는 창경원의 시설과 관련하여 설정된 경계였다

그림 11gt『궁궐지』의 창덕궁과 창경궁영역 서술 비교 「동궐도형」+『궁궐지』

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역 외곽의 변천160)

조선시대 창덕궁의 궁역은 세조대에 후원과 동쪽으로 궁장을 확장한 이래 계속 유지되

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이문원일대가 궁역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lsquo2 영역의 변천rsquo 참조)

일제강점기 초기는 비교적 조선후기 궁역이 유지되고 있는 시기이다 1912년 「지적원도」

에 의하면 창경궁과 창덕궁이 합하여 하나의 필지인 와룡동 2번지로 되어있다 2번지와 접

해 있는 와룡동 1번지는 집춘문의 호위를 담당하던 집춘영이 있던 자리이다 소유는 일제강

점기 당시 조선을 관리하는 관청인 lsquo이왕직rsquo으로 표기 되어있어서 왕실의 소유로 남아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지적도상에서 2번지는 창경궁과 창덕궁의 외궁장과 일치하거나 외궁장보다 약간 외곽에

범위가 잡혀 있는데 이는 궁장 바깥쪽의 경사가 급한 지역은 경사 아래쪽까지 지적에 포함

되었기 때문이다 궁장주변의 지적상황은 거의 변하지 않고 현재까지 유지되어 있다 후원의

북쪽은 임야로 이 부분도 이왕직의 소유로 되어 있다

1912년 이왕직 소유의 와룡동 12번지는 1917년부터 창덕궁 소유로 변경되었다 와룡동

2번지는 대지 면적이 6514743(197071평)으로 1912년부터 1929년까지 동일하다 창덕궁

소유로 추가된 대지는 창덕궁 돈화문 주변의 와룡동 3~6번지 원서동 1번지로서 원래 이 부

분도 와룡동 1번지의 집춘영이 있던 곳과 마찬가지로 창덕궁 정문의 숙위를 담당하던 남영

160) 문화재청 『창경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2010 173~182쪽 lsquo창경궁의 궁역변화rsquo를 참조하여 수정middot보완

이 주둔하던 곳이다

창경궁의 외곽궁역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1931년 원남동 사거리에서 창덕궁 돈화문쪽

으로 율곡로가 개설되면서 창경궁과 종묘사이가 단절되고 도로로 편입되어 창경궁 남쪽 궁

장과 마랑일곽이 훼손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하나의 지번아래 있었으나 해방이후 그때까지 창덕

궁 소유에 포함되어 있던 창경궁 영역이 세분화되어 창경궁 소유로 분리된다 1963년에 창

덕궁 영역(와룡동 2-71번지)과 창경궁 영역(와룡동 2-1 2-70번지)으로 나뉘었고 외곽부분이

추가되거나 축소되었다 과학관 부지가 지번이 분할된 것도 이때이다

궁역 외곽은 일제강점기와 해방이후 현재까지도 조선시대의 경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

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경운궁의 선원전을 대보단 남쪽에 이설하면서 창덕궁

의 궁역에 포함시켰고 율곡로를 개설하여 창경궁과 종묘사이를 분리한 것이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 직후

rarr조선시대 영역유지

일제강점기

rarr신선원전 돈화문좌우추가

(1932년 이후 율곡로 개설)

해방 후

rarr창덕궁과 창경궁 필지분할

신선원전 주변확장

북쪽 궁장 주변 필지 확보

현재

rarr돈화문 월대 복원

1912년 「지적원도」

(국가기록원 소장)

1929년「경성부地形明細圖」

(국립중앙도서관소장)

1977년「창덕궁재산목록」

(문화재청 소장)

2011 현재 지적도

표 12gt 창덕궁 궁역외곽의 변천

4 창덕궁 관련 의궤로 본 건물의 구조와 특징

가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인조 25년 1647년)

1) 공사 내용 분석

(1) 1647년(인조 25)의 창덕궁 수리공사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불에 탔던 창덕궁은 광해군 원년 중건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외전

의 인정전과 내전의 수정당(壽靜堂)만 남고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어서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마저 불에 타버리자 경덕궁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인조 11년(1633) 비교

적 덜 파괴된 창경궁을 먼저 복구하게 된다

계속 미루어지던 창덕궁 내전을 중건하게 된 계기는 창경궁에서 일어난 소현세자빈 강

씨의 역모와 저주사건이었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후 인조의 눈 밖에 났던 세자빈

강씨가 인조와 인조의 후궁인 조소용을 저주했다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소현세자와 관련

된 세력이 제거된 사건이었다 창경궁내 곳곳의 아궁이와 계단 아래에서 저주에 사용된 물

건들이 발견되었으며 흉물이 발견된 창경궁에 왕이 머물 수 없자 아직 복구되지 않은 창경

궁을 수리하여 이어하기로 하였다 소실된 지 25년 만에 이루어진 이때의 공사는 인조 11년

의 창경궁복구공사와 마찬가지로 광해군에 의해 영건되었던 인경궁을 헐어서 그 자재를 사

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때 복구된 주요건물은 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정묵당(靜黙堂) 집상당(集祥堂) 징광

루 등이다 내전의 경우 자재는 대부분 인경궁 것을 활용하였으나 초석은 원래의 것을 사용

하여 화재 이전의 규모대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대조전과 선정전 희정당의 상량 직후

세자의 처소인 저승전(儲承殿)을 옛 자리에 복구하기로 하였는데 저승전의 상량문은 『창덕

궁수리도감의궤』에 실었고 공사과정은 『저승전의궤』(1648)를 별도로 제작하였다

(2) 주요 공사 내용

의궤의 목록은 따로 없고 내용 속에서 항목을 구분해 서술하고 있다 서술순서는 공사

에 참여한 관리의 명단 6월 13일부터 시작하는 계사 계사질 끝에 공사비용과 남은 재물을

기록하였고 상량문(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저승전) 상량의 이문질 감결질 그리고 감결질

끝에 도감조비잡물질(都監措備雜物秩)을 적었다 다음으로 一所 二所 三所 四所 五所 노

야소(爐冶所) 별공작(別工作) 의궤사목(儀軌事目)이다

작업소별로 좌목을 따로 적고 별개의 의궤처럼 구성하였는데 『창경궁수리소의궤』

(1633)보다 더 상세하다 도감사목 다음에는 개기 정초 상량과 같은 주요 일정을 적었다

건물의 규모에 대한 묘사는 인경궁에서 철훼한 건물명과 칸수를 기록하고 철훼된 목재와 기

작업소 창덕궁 공사 전각(칸수) 인경궁 철훼 전각

1소 -대조전(45) 동서익실(온돌12칸) 동익각(6)

남월랑(285) 서익각(9) 서월랑(9)

-집상당(20) 행각(25)

-징광루(상하층40) 서월랑(10) 전행각(3)

-옥화당(105)

-정묵당(105) 西邊階上月廊(16) 飯色間(2)

외행각(3)

-慶壽殿(45) 동월랑(195) 남월랑

(225) 남행각(6) 동행각(3)

-慶寧殿남행랑(36) 동행랑(4) 서행

랑(13) 서행각(2)

-弘政殿(24)

-重暉堂(9) 소주방(75) 連付舍(1)

內帑庫(12) 酒茶房(85) 전행랑(2)

-正順堂동행랑(5) 남부사(1)

-光政殿남월랑(10) 십자각뒤 평행랑

(1)

-崇海堂행각(6) 북별당(20) 1칸문 4

2소 -熙政堂(15)

-영명문내행각(7)

-서월랑(23) 남월랑(6)

-누각(145)

-외남월랑(19)

-師傳廳(75)

-別監廳燈燭房(16)

-선화문협문(2)

-내반원(10)

-사전청 일칸문(1) 내반원 일칸문(1)

-외월랑(27)

-내반원남행랑(17)

-협양문(1) 동서협실(7)

-선례문(1) 동인문(1) 측간(1)

-和政堂(21) 행각(3) 서월랑(14) 남

월랑(18)

-延化門(6) 서외월랑(9)

-玉宸樓3東付舍(10)

-書士廳(16) 내반원(11) 행랑(13)

장방(20)

-승정원행랑(5) 빈청전랑(3) 水閣서

쪽月廊(2) 光政殿북월랑(7)

-會通門(1)

-端陽門(2)

-延祥門(1)

-沖黙堂(8) 행랑(7)

3소 -寶慶堂(3) 측15

-泰和堂(6) 남월랑(7) 동월랑(2) 북행각(1)

-昭德堂(4) 남월랑(5) 동월랑(11)

-燒廚房(5)

-小燒廚房서행각(10)

-中燒廚房(4칸 전퇴포함 6칸)

-下燒廚房(3칸 전퇴포함 4칸반)

-측간(4)

-窓差備(4)

-慶極堂(9)

-仁德堂(12) 서월랑(5)

-慶寧殿서월랑(4)

-福寧殿동월랑(6) 남행각(7) 서행각

(8)

-崇德堂동월랑(7)

-內帑庫 北邊半退(1)

-中政門밖북월랑(10) 외남월랑(20)

-尙衣院 衣襨房(6)

-경녕전수라간(5) 連付舍(1)

와의 수량을 각 건물별로 적지 않고 합하여 적었다 이때 조성된 전체 건물칸수는 817칸이

수리공역은 5개의 작업소로 나뉘어 이루어졌으며 작업소별 공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1소 침전인 대조전과 동서익실 월랑 집상당 징광루 옥화당 정묵당 및 주변월랑

2소 희정당과 주변월랑 소전청(所傳廳) 내반원(內班院) 및 주변월랑

3소 보경당 태화당 소덕당 및 주변월랑

4소 편전인 선정전과 주변월랑

5소 외전의 정전주변 월랑으로 인정전 동월랑 서월랑 승정원 대간청 인정문 외남월랑

-厢庫弓房(24)

-橉德堂동월랑(6)

-正順堂 앞厠間(6)

-與慶門(1) 一間門 5좌

4소 -선정전(9)

-북월랑(11)

-讌華堂(동온돌15 서온돌2 마루전퇴3) 集

陽門(1) 일각문(1)

-夜對廳서월랑(20)

-嚮明門(1)

-仁和門행각(7) 협문(1)

-동월랑(16) 내남월랑(11 돈례문)

-중행각(7) 외남월랑(14)

-외행각(3) 외행각동변(3)

-制義門 앞 일각문(1) 神佑門(1)

-光政殿(9) 내남월랑(5) 서월랑(8)

북월랑(11) 남월랑(5) 남행각(1)

동월랑(12) 內橫閣(1) 중행각(6)

외행각(12) 弘政殿북월랑(14) 弘

政門동월랑(7) 외남월랑(5) 中政門

남월랑(16) 外政門남월랑(6) 水閣

(4)

5소 -인정전동월랑(28) 남월랑(6)

-承政院(16)東廊(5)前廊(3)北間(1) 注書廳(9)

-臺諫廳(4)待接廳(2)승정원후랑(2)

-延英門(1) 東西挾廊(3)

-外司饔院(6) 端陽門(1)

-內弓房(14) 前廊(25)

-內司甕院(6) 司謁房(22)

-出入番內官廳(104)

-肅章門(6)

-王子問安廳(10 마루)

-인정문밖 남월랑(온돌1 마루6)

-빈청외랑(2) 精抄軍堡(2) 砲手軍堡(40)

-賓廳修粧 藥房修粧 傳漏軍堡(1)

-홍정문 외남월랑(26) 북월랑(7)

-승정원(28) 注書廳(4)

臺諫廳(6) 體元門월랑(10) 외사옹

원(34) 내사옹원樓廊(24) 弘政門

전후(6) 尙衣院樓廊(7) 六六門(1)

與慶門평월랑(6) 連付舍(2) 十字閣

後平廊(1)

당시 창덕궁 수리공사는 규모가 컸으므로 인경궁에서 많은 건물을 헐어냈다 이때 대부

분의 주요전각이 철거된 인경궁은 궁궐로서의 면모를 거의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창경궁

수리소의궤』와 더불어 이 의궤를 통하여 인경궁의 전각명칭과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의궤에는 철거된 건물을 건물별로 명시하지 않고 각 작업소 별로 일괄하여 기록하여 놓

았다 따라서 인조 11년의 창경궁공사와 같이 구체적으로 인경궁의 어느 건물이 창덕궁의

어느 건물로 이건하였는지 바로 대비되지는 않는다 다만 건물의 규모나 성격으로 보아 이

건관계가 드러나는 건물이 있다 창덕궁 수리의 경우 인경궁 건물의 이건에 있어서 일부는

동일한 규모의 이건도 있었으나 대개는 다른 규모의 건물로 변하였다 철거하는 인경궁의

전각은 칸수만 적고 창덕궁에 조성」되는 것은 각 전각의 바닥구조별(온돌과 마루 허칸)

칸수 천장의 구성과 마감을 밝혀 놓아서 궁궐내전의 내부 마감과 바닥구조에 대하여 많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 1647년 창덕궁 수리와 현상 비교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대조전 45칸

어칸 마루 3칸

4면 퇴마루 20칸

동서익실 전퇴석주온돌 12칸

동익각

남월랑

서익각

서월랑

6칸

28칸 반

9칸

9칸

마루5칸 온돌 3칸

마루12칸반 온돌 6칸

마루8칸반 온돌 3칸

마루 3칸

집상당 20칸

어칸마루 4칸

툇마루 14칸

온돌 2칸

행각 2칸반 마루

징광루 하층어칸마루 4칸

온돌 2칸

상층마루4칸 툇마

루12칸반

서월랑

전행각

10칸

3칸

마루 3칸 온돌 2칸

옥화당 10칸 반

마루7칸 온돌 3칸

정묵당 10칸 반

마루3칸반 온돌 3

西邊階上月廊 16칸 마루 6칸

飯色間 2칸

외행각 3칸

희정당 15칸 8

동서온돌 6칸

마루 9칸

영명문내행각 8칸 마루

서월랑 23칸 마루7칸반 온돌 4칸 허칸

11칸 반

남월랑 6칸 마루 2칸 온돌 2칸 허칸

2칸

누각 14칸반 8 상하층 마루

외남월랑 19칸 온돌 2칸 마루 12칸 허칸

3칸

師傳廳 7칸반 온돌 1칸반 마루 2칸

別監廳燈燭房 16칸 온돌 4칸 마루 7칸허칸 5

선화문 협문 2칸 포함

내반원 10칸 온돌 4칸 마루 6칸

사전청 1칸문 1

내반원 1칸문

외월랑 27칸 온돌 7칸 마루 11칸

허칸 7칸 문 2칸

내반원 남행랑 17칸 온돌 2칸 마루(퇴포함)13

칸 허칸 2칸

협양문 1칸 동서협실내 마루포함 7칸

선례문 1칸

이때 조성된 창덕궁의 내전일곽은 큰 변화 없이 순조대까지 유지되어 lt동궐도gt의 그림

과도 일치하고 있으나 1833년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다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동인문 1칸

측간 1칸

보경당 3칸 양면퇴 9칸

온돌 3칸 마루 6

태화당 6칸前退幷作平12칸

온돌 2칸 마루 문

1칸

태화당 남월랑

동월랑

북행각

7칸

2칸

1칸

昭德堂 4칸前退幷作平8칸

온돌 2칸 마루 허

간1칸

소덕당 남월랑

동월랑

5칸

11칸

소주방 5칸前退幷作

10칸

마루8칸반 온돌 1칸반

小燒廚房서행각 10칸 온돌3칸 마루 4칸 허칸2

칸 문 1칸

중소주방 4칸前退幷作

6칸

온돌 3칸 마루 3칸

하소주방 3칸前退幷作

4칸반

온돌 2칸 마루 2칸반

측간 4칸 마루 구비

窓差備 4칸 문 2칸반 마루 2칸

1칸문 5坐

선정전 9칸 북월랑 11칸 온돌 3칸 마루 5칸반

他庫1칸 건중문1칸 협문

반칸

華堂 동온돌 1칸반 서온

돌2칸 마루 전퇴 3

집양문

일각문

1칸

1칸

야대청이하서월랑

합당가幷

20칸 야대청 온돌 1칸 마루 2

합당가 4칸 마루3칸 허칸

1칸

인화문 행각 7칸

협문 1칸

동월랑 16칸 마루 4칸

동월랑 동변 5칸 온돌1칸 마루1칸 囗1칸

허칸 1칸

내남월랑 11칸 돈례문 1칸 동서 협문 1

칸 제의문 1칸 동변출입

문 1칸

중행각 7칸

외남월랑 14칸 선정문과 동서문 3칸

선전관청온돌1칸 마루2

칸 囗3칸

내관청온돌2칸 마루1칸

囗3칸

외행각 3칸

외행각 동변 3칸 온돌 1칸 마루 2칸

제의문 앞 1각문 1칸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神佑門 1칸

인정전일곽 동월랑 14間作平28

광문 1칸 온돌 1칸 마루

4칸

남월랑 6칸

승정원16칸동랑5

칸 전랑3칸 북간

1칸

25칸 온돌 4칸 마루 19칸

주서청 9칸 온돌1칸반 囗1칸 마루 6

칸반

외사옹원 6칸 동루 8칸 서루 8칸 공상

청 2칸 남랑 7칸

rarr온돌 1칸 마루 24칸

內宮房 7 間 作 平 1 4

동루 8칸 서루 8칸

내사옹원 6칸 동루 7칸 서루 2칸 평랑

1칸 남랑 1칸

출입번내관청 10칸 온돌 3칸 마루 4칸

숙장문전후통 6칸

왕자간안청 5 칸 作 平 1 0

마루

인정문밖 남월랑 8칸 온돌 1칸 마루 6칸

빈청외랑 2칸

精抄軍堡 2칸

砲手軍堡 4칸

傳漏軍堡 1칸

건물명 기사 사료

대조전

1461년(세조13) 내정전을 양의전이라 명명하고

대조전에서는 신하를 만났다고 함 따라서 이 시

기 대조전은 내정전과 다른 전각이었다고 추정

『세조실록』 세조7년 12월

19일 및 세조13년 5월 18

『연산군일기』에 태종 세종이 대조전에 거처하

고 성종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보임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8월 22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해 복구됨

1623년(인조원년) 인조반정시 소실된『인조실록』 인조원년 3월

15일

1647년(인조25) 인경궁 경수전을 뜯어 다시 지

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34) 전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 다시지음

(2) 대조전과 의궤

대조전은 창덕궁 내정전이다 가운데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서 온돌방을 갖춘 평면이며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이다 태종 세종이 이 건물에 거처했고 성종을 비롯한

여러 왕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실록에 보이므로161)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진

것으로 판단되지만 초기 기록에서는 양의전(兩儀殿)이라는 정전 이름이 별도로 나오고 있어

서 주의를 요한다 1461년(세조 7) 창덕궁의 주요 전각 이름을 지을 때 내정전은 양의전이라

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162) 세조 13년 5월의 실록에는 왕이 양의전 문에서 대신을 만났다는

기사와 함께 대조전에서도 신하들을 불러 명령을 내린 기사가 보인다163)

따라서 적어도 이 시기에는 양의전과 대조전이 각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후에 양의전은 실록 기사에서 나오지 않고 역대 왕들이 대조전에 거처한 기사만 보인다 임

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 창덕궁이 복구되면서 다시 지어졌다 인조반

정시 다시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25) 인경궁의 경수전慶壽殿 건물을 뜯어서 다시 지었다

이때의 공사 내용은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자세하다 이 때 경수전은 45칸이었다

고 하며 새로 지은 대조전 역시 45칸 규모였다 통상 건물 이름에 목숨 수자가 붙은 곳은

대비나 상왕의 거처를 나타내므로 인경궁의 경수전은 대비전으로 지었던 건물로 추측되며

이것을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중궁전으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다시 지어진 대조전은 180여

년이 지난 1833년(순조 33)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건물은 이듬해 바로 복구되었는데 소실

전의 규모로 지어졌다

1647년에 인경궁 경수전을 헐어서 지은 대조전은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의하

면 전체 45칸 가운데 어칸 마루 3칸에 천장은 봉반자이고 4면에 툇마루 20칸이 있고 기단

은 4단의 장대석으로 되었으며 동서 익실이 있는데 전퇴는 돌기둥 6개가 있고 온돌은 12칸

으로 천장은 지반자로 되었다고 하였다 또 정전 좌우에는 동익각 6칸과 서익각 9칸이 있고

남월랑 28칸반 서월랑 9칸이 있다고 하였다 또 대조전 동북쪽에는 집상당 20칸 서북쪽에

는 2층 누각인 징광루가 있다고 하였다

이 시기 대조전 모습은 lt동궐도gt에 그림으로 전한다 대조전은 가운데 3칸이 지붕이

좌우보다 높게 그려져 있고 3칸 부분 앞에는 월대가 마련되어 있다 월대는 3면에 계단이

있고 판장으로 가려져 있는 모습이다 월대를 둔 정청 3칸 좌우는 지붕이 한 단 낮게 되어

서 좌우 3칸씩 있는데 이 부분이 『창덕궁수리도감의궤』에서 말하는 동서 익실로 볼 수 있

다 또 동서익실 좌우로 행랑이 길게 이어져 있어서 동익각과 서익각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다 또한 동서익실은 건무 하부에 돌기둥이 그려져 있고 돌기둥 안쪽에 아궁이도 보인다 지

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형태이다

(3) 희정당과 의궤

161) 『연산군일기』 권17 연산군 2년 8월 22일

162)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 12월 19일

163)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 5월 17일

건물명 기사 사료

선정전

1405년(태종5) 조계청으로 창건『태종실록』 태종5년 10월 19

1461년(세조7) 건물명을 선정전으로 함『세조실록』 세조12년 12월

19일

1698년(광해군즉위) 소실된 것을 복구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 시 소실 『인조실록』 인조1년 3월 15

1647년(인조25) 인경궁의 광정전을 뜯어 이

건함『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00년(순조즉위) 정조의 혼전을 선정전으로

정함『(정조)혼전도감의궤』

20세기 초 창호를 유리창으로 고치고 외행각

을 철거함

1996년 lt동궐도gt 등을 근거로 원형 복구함

처음에는 명칭을 수문당(修文堂)이라 해서 왕의 학문소로 지어졌다가 연산군 때 희정당

으로 고쳤으며 뒤에 편전의 용도로 전용되었다 순종황제 때는 서양식 가구를 비치하고 사

신 접견 장소로 쓰였다 『연산군일기』에는 수문당이 대조전과 함께 성종이 거처하던 곳이

라는 설명이 나온다164) 이것이 수문당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이다 1496년(연산군 2) 6월

수문당이 화재가 나자 왕이 건물을 수리하도록 명하고 아울러 그 해 12월에는 건물 이름을

희정당으로 고치도록 했다고 한다165)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인조반정 때

다시 불에 탄 것을 1647년(인조 25) 인경궁의 전각을 철거해서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1833

년(순조 33) 화재로 불에 타고 이듬해 옛 모습대로 재건되었다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년)에는 당시 재건된 희정당의 규모를 15칸이라고 적었다

인경궁의 화정당 21칸을 이전했다고 했는데 규모에 차이가 있다 1834년 다시 지어진 희정

당은 이전과 동일한 규모였으며 그 평면 형태는 lt동궐도형gt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체는

15칸 규모이여 정면 5칸의 남쪽 5칸은 모두 마루이고 뒤는 중앙 3칸에 넓은 온돌방이 있고

뒤에 툇간이 있으며 좌우는 작은 방 2개가 중첩된 모습이다

(4) 선정전과 의궤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보던 곳이다 1647년(인조 25)에

다시 지어졌으며 지금 건물은 이 때 것이다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1405년(태종5) 창덕궁

이 창건될 때 조계청(朝啓廳)이란 이름으로 지어졌다가 1461년(세조 7) 선정전이란 이름을

얻었다166) 조계는 아침마다 신하들이 정사를 아뢴다는 뜻이며 선정은 정사와 가르침을 널

리 펼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1년) 재건되었으며 다

시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 때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 25) 재건하였다 지금 건물은 이때

164) 『연산군일기』 권15 연산군 2년 8월 19일

165) 『연산군일기』 권15 연산군 2년 8월 19일 및 동 권20 연산군 2년 12월 8일

166)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 12월 19일

다시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건립 시기로 보면 1608년경 다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광화

문 다름으로 창덕궁에서 오래된 건물이다 주변 행각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중문 주변

과 선정문 전면의 관청이 들어서 있던 부분은 편전의 용도가 달라짐에 따라 수시로 증축과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일제강점기 때 일반인의 관람 편의를 위해 개조한 상

태이다 고종 즉위 이후에는 선정전은 더 이상 본래의 용도로 쓰일 기회를 갖지 못하였

고 순종황제가 창덕궁에 돌아와서는 희정당에서 신하들을 접견하였으며 1917년 희정당이 화

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어진 후에도 희정당이 편전으로 쓰이고 선정전은 빈 건물이 되었

다 그런 덕분인지 선정전은 비교적 17세기초에 지어진 모습을 지금까지 잘 유지하고 있다

선정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장 눈에 띠는

특징은 지붕이 청기와로 덮여있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 안에 청기와를 덮은 건물이

선정전 외에도 징광루 등이 있었고 경복궁에도 있었지만 현재는 이 건물이 유일하다 현재

건물은 1647년(인조25)에 다시 지어진 것인데 이때는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지었던 인경궁

의 편전인 광정전(光政殿)을 뜯어서 그 재목으로 건물을 지었다 이때의 공사 과정은 『창덕

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자세하다 이 의궤에 의하면 광정전 9칸 건물의 기둥이나 보 공

포부재를 뜯어서 그대로 건물을 옮겨지었으며 기와 역시 광정전에 덮었던 청기와를 가져와

서 선정전에 덮었다고 하였다 인경궁은 광해군의 지시로 여러 건물에 청기와를 덮었는데

그 중 일부가 창덕궁에 살아남은 것이다

선정전과 그 주변 모습은 lt동궐도gt가 참고가 된다 lt동궐도gt에 의하면 선정전 건물은

세 단 정도의 장대석 기단 위에 놓여 있고 사방에 행각이 둘러쳐져 있어서 건물 앞에 작은

마당이 마련되어 있는 모습인데 특이한 점은 건물 앞으로 길게 행각이 뻗어서 마당을 좌우

로 나누고 있다 이 행각을 『궁궐지』에서는 lsquo복도각(複道閣)rsquo이라고 부른다 복도각은 기둥

과 지붕만 있고 벽은 개방되어 있는 모습이며 바닥은 돌이 깔려서 사람들이 비를 맞지 않고

출입문에서 편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선시대 빈전이나 혼전을

조성한 여러 의궤에서는 이 복도각을 중배설청(中排設廳)으로 부르고 있다 중배설청이란 빈

전이나 혼전에서 제례를 행할 때 음식을 진설하는 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lt동궐도gt에 그려

진 복도각은 선정전이 빈전이나 혼전으로 이용되었을 때 건물 앞에 배설청을 마련한 모습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배설청 모습은 lt동궐도gt에서는 창경궁의 문정전에서 확인

할 수 있고 경복궁의 태원전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lt동궐도gt에서는 선정전 주변에 행각이 둘러싼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특히 남쪽은

여러 겹으로 행각이 중첩되어 있다 이곳에는 대청 은대 상서성 당후 등이 있었는데 대청

은 대신들이 모이던 곳이고 은대는 승정원의 다른 이름이며 상서성은 관청이름 당후는 승

정원의 실무관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남쪽 행각에는 선정전에서 왕에게 계를 올리는 일과

관련한 관청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정전은 일제강점기 동안 창덕궁을 일반에 관람하면서 내부에 전시물을 두기도 하고

창문을 유리창으로 교체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996년 lt동궐도gt를 비롯한 옛 문헌에 따

라 건물을 본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그에 따라 사라졌던 복도각도 다시 세웠으며 창문도

고쳤다 다만 주변 행각은 변형된 채로 남아있는데 본래 선정전의 출입문인 선정문은 남쪽

의 두 번째 행각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 두 번째 행각은 복구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첫 번째 행각에 편의상 선정문 현판을 달아 놓았다

선정전에서는 과거 왕이 신하들과 어떤 형태로 접견을 하고 상참을 거행했는지를 확실

히 고증할 수 없는 상태이다 문헌에는 실내에 일월오악병풍이 있고 어좌가 있었다는 점을

전하고 있지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 그 형태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현재 선정전 실내에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한 집기류 등은 근거가 없는 불확실

한 것들이다

(5) 인정전 일곽과 의궤

창덕궁의 대문과 그에 딸린 사다리꼴 형태의 행각 이 문을 들어서면 비로소 창덕궁의

실질적인 내부인 대내大內로 들어서게 된다 『영접도감의궤』(광해군 2)에 명시한대로 창

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대내로 들어가는 대문(大門)이다 진선문의 좌우 행각 및 진선

문을 들어선 곳의 마당을 둘러싼 행각은 실록에서는 인정전 외행각으로 불렸다 외행각은

진선문과 마주보는 숙장문 좌우 행각까지 포함된다 북쪽은 인정문 좌우의 행각이 길게 뻗

는다 인정문 좌우 행각과 진선문 숙장문 주변 행각으로 둘러싸여서 사다리꼴의 마당이 이

루어진다

진선문의 창건에 대해서는 사료상에 명시된 것이 없지만 창덕궁이 창건될 때 함께 지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167) 창건 시에는 진선문이 창덕궁의 바깥 대문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정전 외행각이 세워진 것은 1418년(태종18)부터이며 이듬해 1409년(세종 1)에 완성

되었다 세종실록에는 박자청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터를 잘 살피지 않고 기둥을 세우고 보

를 올려 인정전에서 내려다보면 기둥이 바르지 않고 경사지게 보여 상왕이 화를 내고 자청

을 옥에 가두도록 하고 행각은 헐어버리도록 했다는 기사가 보인다168) 이후에 외행각이 어

떤 모습으로 고쳐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부분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광

해군 때 다시 복구되었으며 그 형태는 19세기 중엽에 제작된 lt동궐도gt나 20세기 초에 그린

lt동궐도형gt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초에 진선문이 철거되면서 외행각도 함께 철거되었

으며 1996년 진선문을 복구할 때 외행각도 복원되었다

조선시대 진선문이나 인정전 외행각 모습은 lt동궐도gt와 lt동궐도형gt을 통해서 추정해

볼 수 있다 두 자료에 나타난 외행각은 진선문에서 남북으로 행각이 이어지고 남쪽은 제5

칸에서 직각으로 꺾여서 남행각이 길게 이어지는 모습이며 남행각이 다시 북쪽으로 꺾이면

서 숙장문으로 연결된다

인정문은 남행랑의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인정문이 남향해 있다 장대석 2단의

높은 기단 위에 서 있다 계단은 중앙에 장식 없이 꾸며져 있다 경복궁의 근정문이 중층 누

167) 실록에 진선문 기사가 처음 나오는 것이 1409년(태종 9) 10월 기사인 것으로 미루어 1405년 창덕궁 창건

시부터 이 문이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태종실록』 권18 태종 9년 10월 1일 기사)

168) 『세종실록』 권3 세종 원년 4월 12일

각이고 중앙 계단 가운데 쌍으로 봉황을 새긴 답도를 둔 것에 비해 크게 격식을 낮추었다

지붕 용마루에는 인정전과 마찬가지로 이화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역시 1916년에 설치된 것

으로 보인다

인정문 행랑은 『태종실록』에 기록된 창건 시 규모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북쪽은

산을 등지고 있어 행랑을 두지 않고 동 서 남면에만 있으며 동서 행랑은 방이 두 줄로 된

복랑(復廊)이고 남행랑은 방이 한 열로만 된 단랑(單廊)이다

인정문은 1992년부터 96년 사이에 일제강점기 때 변형된 부분을 고쳤다 우선 인정전에서는

일제시기에 건물 동편에 행랑을 붙여놓았던 것을 lt동궐도gt 등을 참고해서 본래대로 행랑을

건물 후방으로 옮겼다 인정전 마당은 정원으로 꾸미는 등 훼손이 많았던 것을 품계석을 다

시 세우고 바닥 전체를 박석으로 깔았다 행랑과 인정문 역시 일제강점기 때 구조를 바꾸고

벽을 개조했던 것을 원형을 고증해서 복원했다 다만 인정전과 인정문 용마루에 설치한 이

화문양은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또 인정전 내부의 황색 커튼이나 바닥의 쪽마루 전

등 갓 등도 당시의 역사적 흔적을 그대로 둔다는 취지에서 그대로 두었다

나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인조 26년 1648)

1) 공사 내용 분석

인조 26년(1648)에 마무리된 창덕궁의 동궁처소인 저승전(儲承殿)을 수리한 내용이다

저승전의 위치는 『宮闕志』에 의하면 ldquo저승전은 건양문 밖에 있다 (원) 옛 구현전 광연전

의 터이다rdquo라고 되어 있으며 시민당의 북쪽 현재 낙선재의 서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원래 저승전의 터는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머물던 광연전 터로 성종때 세자가 거

처하는 춘궁으로 바꾸었다 저승전 일곽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때 중건되었으

며 인조반정으로 창덕궁 내전이 소실되면서 동궁의 처소도 대부분이 다시 소실되었다

인조 25년 창덕궁의 내전과 편전을 복구하는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던 8월 15일 도감

에서 당시 세자가 임시로 거처하는 곳에서 흉물이 발견되어 거처하기 어려우니 진행중인 창

덕궁 공사와 더불어 세자를 위하여 전(殿)하나와 당(堂)하나를 짓기를 청하였다 인경궁의

동궁을 헐어서 동궁의 수리가 시작되어 9월에는 입주(立柱) 상량이 이루어졌으나 창덕궁의

다른 수리공역이 끝난 후에도 저승전 공사는 지체되면서 동절기에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듬

에 2월에 다시 시작하여 4월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저승전 공역은 처음에는 창덕궁수리도감이 맡아 하였으나 인조 26년에 따로 도감이 설

치되었다 저승전 공역에서도 창경궁 창덕궁의 공사와 마찬가지로 인경궁의 일부 전각을 뜯

어 이용하였다 『저승전의궤』는 창덕궁의궤와 별도로 공사가 완료된 인조 26년(1648)에 작

성되었다 저승전 공역과 함께 창덕궁 공역의 잔여부분을 마무리 짓는 형식이 되었으며 이

에 따라 그 의궤서도 일정한 체제를 갖추지 않고 필요한 내용만을 정리하는데 그쳤다

목록은 없으며 내제의 처음에는 lsquo순치오년정월 일(順治五年正月 日) 저승전의궤rsquo다음에

작업소 건물구성(칸수) 공사내용

좌소

(左所)

인경궁 철훼

-承華殿(45)

동행각(4) 서행각(4) 서월랑(15) 남월랑(195) 북월랑

(4) 동행랑대문남변월랑(20) 북변월랑(9) 서변평월랑(4)

重暉堂 동월랑(13) 북월랑(50)

철훼

-儲承殿(28) 동온돌(6) 서온돌(6) 대청마루(16) 신조

동익각(1) 동행각(2) 동월랑(9)

바로 공사감역관의 조직(座目)을 적었다 이어서 전유재질(前遺在秩)도감무역질(都監貿易

秩)上下秩(품삯관련)철물타조질(鐵物打造秩)용여환하질(用餘雜物還下秩)각처이송질

(各處移送秩)을 적고 제목 없이 날짜순으로 계사(啓辭 상량문 상량의 포함)이문(移文)을

적고 그 뒤에 좌소(左所) 우소(右所) 및 외소(外所) 노야소의 항목을 두었다

lt전유재질(前遺在秩)gt lt도감무역질(都監貿易秩)gt에서는 전년의 공사에서 남은 자재와

금번 공사에 소용된 자재의 총량을 수록하였다 소용된 자재는 주로 철물 기와 단청재료

미장재료 등이다 lt上下秩(품삯관련)gt에는 장인과 인부들의 품삯 창경궁 각처 및 아문과

進修堂 전돌 까는데 들어간 전돌과 장인의 품삯을 적었다 lt각처이송질(各處移送秩)gt의 내

용은 남은 잡물을 홍제원과 문정전 수리에 사용하도록 이송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항목을 구분하지 않고 정해(丁亥 1647년) 8월 15일부터 무자(戊子 1648년) 4

월 12일까지의 계사(啓辭)를 날짜별로 적고 있다 중요공역의 일정을 보고하는 것으로 8월

16일 1소에서 개기를 시작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9월 15일 묘시(卯時)에 저승전의 定礎

午時에 立柱 未時에 上樑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9월 15일자에는 상량문과 상량의를 적었

다 여기에 수록된 상량문은 이에 앞선 창덕궁의 공사를 기록한 『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에 실린 저승전의 상량문을 다시 실었다 정초에서 상량 까지 같은 날에 했으나 공사

가 완전히 끝난 것은 다음해 윤3월 하순이었다

계사에 이어서 항목구분 없이 1647년 12월 14일에서 1648년 7월까지 도감과 각 관서 및

각 지방관찰사 사이에 자재의 조달과 수급에 대하여 오고간 문서를 날짜순으로 정리하였다

구체적으로 공사내용을 알 수 있는 부분으로 lt좌소(左所)gt lt우소(右所)gt 및 lt외소(外

所)gt lt노야소gt의 기록 방식은 각 작업소별로 감독관 명단 날짜별 공문서 조성전각의 명

칭과 규모 공사내용 소요자재(實入雜物秩) 공장명단(工匠秩)을 수록하였다 노야소 뒤에 저

승전 일곽 외에 1647년 창덕궁수리공사의 잔여 공사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잔여공사는

주로 문과 주요 전각의 벽체 단청 도회(미장)공사이다 마지막에는 역시 제조의 수결을 실

었다

인경궁 철훼는 좌소에서 맡아서 했으며 기록은 건물명과 칸수만 간단히 적었다 저승전

의 중건과 함께 신축한 건물은 낙선당 경극당 숭경당 취선당 손지각 및 익각과 주방이며

청음정 시민당 진수당 장경각이 수보되었다 시민당은 저승전의 남쪽에 있었으며 세자 서

연의 장소였다 진수당은 시민당의 북쪽 전각이며 손지각 역시 시민당에 부속되었던 건물이

고 장경각은 진수당의 동쪽에 있던 건물이다 즉 1648년『저승전의궤』에 기록된 공사의 범

위는 창덕궁의 동궁전 전체라 할 수 있다

남월랑(7) 남행각(1)

-敬極堂(10) 남월랑(7) 동월랑(75)

-樂善堂(5) 서행각(3) 남월랑(6)

-協祥門 麗景門 淸輝門 수보

-외남월랑(185) 資善門 淸陰亭(3칸) 측간 4칸

-霽陽門(1칸)

수보 개와 토벽

단청

우소

(右所)

-저승전 서익각(1칸) 북익각(1칸) 소주방 (6칸)

온돌(8) 마루(8) 차양판장 1좌 신조

내서월랑(7)

-기와 토벽 단청

개수

-일부 창호 신조

-嘉順門(1칸) -협문(25) 내남월랑(6칸) 북월랑(6칸)

-崇敬堂(45) -東付舍(3) 서행각(155)

-就善堂(105)

-靜勝門 1칸

-東樓(18) 서월랑(7)칸 남월랑(10)칸 외월랑(6)

외남월랑(18) 창차비(3)

司饔院(6)

供上廳(1) 機械木造作

嬪宮長房(6)+付舍(3) 朗和門(1) 差備廳(3)

炭庫(3) 機械木造作

외소

(外所)

遜志閣(7) 행각(19) 1칸문 1좌 小房(165) 1칸문 2좌

장방(13) 1칸문 4좌 별감방(6) 司鑰房(7) 水剌間(6)

大殿精抄軍廳(115) 貳문 1칸 북협문 1칸 泰亨門 1칸

목재 기와 석재

는 신조 창호는

일부 인경궁 철훼

재 사용

시민당 9칸 進修堂 12칸 기와 토벽 단청

개수 창호칠 개수

藏經閣 3칸 建陽門 중명문 기와보수

集英門 1칸 集賢門 1칸 단청보수

시강원 수보

종묘 담장 (중명문에서 司鑰房까지) 개축

大隱構 (遜志閣에서 內司僕寺까지)

정묵당등

수 보 와

개조질

정묵당 10칸 징광루 외서월랑 16칸 窓差備內 家 6칸 창차비

문 4칸 神佑門 4칸 熙仁門 1칸(개조) 肅章門 6칸 인정문 전

후 4칸 진선문 전후 4칸 壽靜堂외남월랑 3칸 서월랑 7칸(총

64칸)

砂壁 단청수보

선정전 인정전 선자귀

대조전 집상당 희정당 보경당 태화당 소덕당 선정문 협양

문 각처 연가 숙장문 인정문 진선문 돈화문 상하층

改塗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 저승전과 의궤

『저승전의궤』는 『창경궁수리소의궤』(1633)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이어서

인조년간에 복구된 창덕궁의 동궁 모습과 이때 철거된 인경궁의 동궁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세자가 거처하는 저승전을 중심으로 주변 전각의 면모를 알 수 있으며 바로

전에 완료된 창덕궁수리공역의 공사 마무리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건물명 기사 사료

돈화문

1412년(태종12) 진선문 남쪽에 누문

5칸 건립『태종실록』 태종12년 5월 22일

1413년(태종13) 문에 큰 종을 달다 『태종실록』 태종13년 1월 27일

1592년(선조25) 소실

1608년(광해즉위) 복구되다 『광해군일기』 광해군즉위년

1620년(광해군12) 문 앞 산대놀이를

중지시키다『광해군일기』 광해군12년 9월 3일

1676년(숙종2) 문 앞에서 과거 급제

가 문과2인 무관1만2천 7명이 파자교

까지 늘어서다

『숙종실록』 숙종2년 3월 24일

이 의궤의 각 작업소별 lt조성간각질(造成間閣秩)gt은 조성건물별로 칸수 바닥구조 천

장의 형태 난간 창호의 종류 등이 기록하고 건물별로 보수내용을 적었다 건물의 규모와

형태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창호의 형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저승전은 총 28칸

의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구성이었다 동온돌과 서온돌이 각 6간이고 중앙의 3칸이

고 대청이었다 저승전은 『宮闕志』의 기록에 의하면 영조년간의 화재로 소실된 뒤 중건되

지 않았기 때문에 lt동궐도gt lt동궐도형gt 등 후대의 그림 자료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없

다 따라서 이 의궤의 기록은 저승전의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2) 돈화문과 의궤

창덕궁의 정문이다 『영접도감의궤』(광해군 2)에 의하면 창덕궁의 출입문은 돈화문을

정문(正門) 진선문을 대문(大門) 인정문을 중문(中門)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정문은

창덕궁 외곽 담장인 궁장의 정식 출입문을 가리키며 정문을 들어서면 수직하는 군사들의

거처나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는 관청이 모두 포함된다 이에 반해 대문은 대내의 출입문으로

정전이나 편전 내전 영역의 출입문이 된다

1405년(태종 5) 이궁 창덕궁이 지어지고 나서 7년 후인 1412년(태종 12) 5월에 도성 내

에 행랑을 지으면서 창덕궁 진선문 남쪽에 누문 5간을 세워 lsquo돈화문rsquo이라 했으며 문 밖 좌우

행랑은 각 관청에 나누어 주고 조방朝房으로 만들었다고 『태종실록』에서 밝혔다169) 조방

은 궐에 들어가는 신하들이 의복을 갈아입고 대기하는 곳이다 1413년에는 문에 큰 종을 달

았다170)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복구되었다 이후에 화재나

훼손기사가 사서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초에 재건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다만 세부의 형상이나 구조짜임에서는 후대의 특징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후

대에 일부 개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돈화문은『궁궐지』에 의하면 창덕궁의 궁장에는 남쪽에 돈화문 단봉문(丹鳳門) 북쪽에

광지문(廣智門) 서북에 요금문(耀金門) 동쪽은 건양문(建陽門) 서문은 경추문(景秋門) 금

169)『태종실록』 권 23 태종 12년 5월 22일

170)『태종실록』 권 23 태종 13년 1월 27일

호문(金虎門)이 있다고 하였다 돈화문은 창덕궁 궁장의 서남모서리에 놓여있다 궁의 정문

이면서 위치가 궁장 모서리에 놓인 것은 창덕궁의 입지가 응봉에서 내려오는 경사진 지형

탓으로 보인다 돈화문은 왕이 궁을 드나들 때 이용되었으며 중국 사신 역시 이 문을 출입

하였다 또한 나라의 크고 작은 공식 행사가 있으면 그 행렬이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 예를

들어 궁 안에 모셨던 어진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다시 궁으로 돌아올 때는 이 문을 이용

했다 그러나 궐에 출입하는 신하들의 일상 출입은 이 문을 이용하지 않고 근처의 금호문을

사용했으며 이따금 단봉문을 이용했다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다 기둥 위뿐 아니라 그 사이에도 공포를 촘

촘히 배열한 다포형식이며 상부 지붕형태는 우진각이다 『궁궐지』에는 공포가 내7포 외 9

포이며 기둥 높이가 16척 앞뒤방향 칸의 길이가 각각 12척 조우 방향 칸의 길이가 가운데

칸은 17척 그 다음 칸이 15척 제일 바깥 칸이 125척이라고 하였다 돈화문은 처음 이궁으

로 지어졌기 때문에 경복궁처럼 외곽에 돌을 가지고 견고하게 궁성宮城을 쌓은 것이 아니고

흙과 돌을 가지고 궁장(宮墻)을 쌓았다

따라서 정문은 광화문처럼 석축을 쌓고 홍예문을 낸 것이 아니고 중층 누문 형태의 목

조건물을 세웠다 다만 광화문을 비롯해서 다른 궁궐 정문이 정면 3칸인데 비해 정면 5칸으

로 규모를 키웠다 5칸 가운데 좌우 2칸은 벽으로 막고 실제로 출입문은 3칸만 열었다 문은

세벌 이상의 장대석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세웠으며 세 개의 계단이 놓였다 기단 앞으로는

길게 단을 쌓은 월대를 마련했다 lt동궐도gt에 그려진 돈화문 모습을 보면 월대 중앙에는

왕이 출입할 때 이용하는 어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출입문 중 가운데 문 하나를 제외

하고 좌우의 출입문은 X자 형태로 막대로 막았다 이 그림으로 보면 평상시 돈화문은 일반

인의 사용을 제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대 남쪽에는 좌우에 말을 매어 두는데 쓰였

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틀이 있고 나무틀 앞에는 말에 오를 때 발을 딛는 디딤돌이 보인다

돈화문은 한 동안 월대를 비롯해서 기단이 아스팔트에 묻힌 상태로 유지되었다 언제

기단 하부를 아스팔트로 묻었는지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20세기 초에 창덕궁 안에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하면서 기단을 흙으로 메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돈화문 바

닥뿐 아니고 금천교의 위치도 바꾸고 진선문은 철거하였다 이렇게 변형된 돈화문은 1996년

기단을 제 모습으로 드러내고 월대도 복구하였다 그 사이 돈화문 앞 도로를 보수하면서 아

스팔트 층이 높아져 월대와 도로 사이에 1미터 이상의 단차이가 생겼다

(3) 시민당과 의궤

1847년(헌종13) 후사가 없었던 왕을 위해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들이면서 왕과 후궁이

함께 거처할 건물로 지었다171) 낙선재가 있던 일대는 본래 세자가 거처하며 신하들을 만나

던 동궁이 있었다 이곳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간 위치가 되며 창덕궁 동문인 건양문을 나

선 곳으로 영역으로 보면 창경궁에 속한 곳이었다 이곳에는 왕세자가 신하들을 접견하던

171) 낙선재 건립 경위에 대해서는 헌종 자신이 쓴 낙선재상량문과 수강재중수상량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헌종의 문집인 『원헌고元軒稿』 권1 낙선재상량문(1847년)과 수강재상량문(1848년) 참조

시민당(時敏堂)과 왕세자의 침소인 저승전(儲承殿)과 낙선당(樂善堂) 등이 있었다

1780년(정조4) 시민당이 화재로 소실된 후에 복구되지 않은 채 1782년(정조6) 새로 동

궁 처소로 희정당 가까운 곳에 중희당(重熙堂)이 지어지면서 빈곳이 되었다 이 일대는 조선

초기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으로 전한다 정조는 1785년(정조9) 이곳에 수강재를 지어 독

서처로 삼았다172) 한 동안 비어있던 이곳에 헌종 때 와서 낙선재를 지은 것이다 헌종이 경

빈 김씨와 낙선재에 거처한지 불과 2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빈집이 되었다가 고종

때에는 왕이 창덕궁에 머물 때 여기를 집무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즉 1884년(고종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창덕궁에 머물면서 낙선재에서 집무를 보고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1907년 이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나서 1917년 대조전

등이 모두 불에 타자 낙선재를 임시거처로 삼은 적도 있다 순종의 계비이며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한 동안 거처하였고 1963년 영친왕 이은이 환국한 후에는 부인 이방자여사와

함께 거처하였다 2009년에는 영친왕의 아들 이구(李玖)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혼전으로

이용되었다

다 『창덕궁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昌慶宮修理都監儀軌)』173)(효종 3년 1652

년)

1) 공사 내용 분석

효종 3년(1652) 1월부터 시작된 창덕궁 창경궁의 수리공역에 대한 내용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에 있는 건물의 온돌을 개수하고 전돌을 새로 깔며 흙을 교체하는 공사였다 인조 25

년에 있었던 창덕궁 수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주사건이 궁의 개수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

다 1651년(효종 2) 11월 인조의 후궁이었던 조귀인이 대내에 뼛가루와 무덤의 나무를 뿌리

고 흉물들을 각처에 묻어 대비와 대전 인평대군 등을 저주했다는 내용의 옥사가 있었는데

이 사건과 김자점의 역모사건이 연계되어 김자점 일파가 숙청되었다 효종은 이 사건을 마

무리 하고 곧바로 대비를 모시고 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며 창덕궁과 창경궁의 흙을 모두 긁

어내고 깨끗한 흙으로 채우도록 명한다174) 따라서 주요 전각의 온돌을 해체하고 전돌 교

체 전각 간의 어로에 흙을 새로 까는 것이 주된 공사였다

목차는 없으며 규장각 소장본은 앞부분의 편찬 년대와 공사감독 조직이 결락되어 알

수 없다 남아 있는 부분은 효종 3년 1월 15일의 도감사목으로 시작되는데 이후 4월 22일

까지의 lt계사gt 1월 8일부터 4월 15일 까지의 lt이문질gt 1월 15일에서 2월 10일 까지의

lt감결gt이 수록되었다 계사에 비하여 이문과 감결은 매우 소략하다 이어서 lt昌德 一所gt

lt昌德 二所gt lt昌慶 一所gt lt昌慶 二所gt lt굴토(掘土) 1소gt까지의 각 소(所)의 감역관 명

단과 작업내용에 대한 공문 자재목록 공장명단이 있다 끝 부분이 결락되어서 lt굴토(掘土)

172) 『정조실록』 권20 정조9년 8월 27일

173) 서울대학교 규장각(규14912)

174) 『효종실록』 효종 2년 12월 27일

작업소 건물 공사내용

창덕 1소 大造殿 동서익각 책방 集祥堂 澄光樓 玉華堂

壽靜堂 靜黙堂

온돌공사

희정당 承明門 내소주방

慶極門에서 建中門까지 어로

창덕 2소 太和堂 昭德堂 讌和堂 寶慶堂

책방

온돌사벽수리 방전다시 깔

景福堂 책방 온돌수리 단청

宣政殿 방전 박석

瑤華門에서 五雲門까지 어로 방전다시 깔기

齊政堂 온돌 방전 박석 淨土

도총부 책방 낭청방 온돌 방전 淨土

臨武門 湛露門 인경궁의 자재와 기와로 만듬

1소gt의 중간 정도까지 남아 있다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마이크로필름을 확인하면 그 뒷부분

은 lt굴토 이소gt lt노야소gt lt목물소gt lt토물소gt lt의궤 사목gt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이 공사에서 특이한 점은 일반 백성을 동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lt계사gt 1월 3일에 의하면 전국각지에서 2000명의 승군을 동원하여 훈련원과 인경궁 동관

왕묘에서 기거하면서 공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창덕궁에 새로 깔 흙은 쌍리문동에서 채취

하고 창경궁에 깔 흙은 남소문동에서 채취하였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이 공사는 인조 11년(1633)의 창경궁 수리와 인조 25(1647)년의 창덕궁 저승전 공역에서 수

리되었던 전각이 수리 대상이었다 이 의궤는 공사가 주로 바닥의 보수에 있었던 만큼 공사

규모도 적고 그 기술도 상세하지는 않으나 『창경궁수리소의궤』(1633)에서 언급되지 않았

던 창경궁 전각의 바닥구조가 언급되었다 공사의 성격이 건물의 실내 위주였기 때문에 현

상을 비교할 수 없다

당시 공사 범위였던 주요 건물은 앞에서 거론하였으므로 간단히 도총부만 살펴보기로

한다 도총부는 궁궐을 호위하는 기능을 맡던 관청으로 창덕궁 대문인 진선문 밖에 있었던

것을 1655년(효종6) 인정전 서쪽에 만수전을 지면서 창경궁으로 이전했고 이후 1781년(정조

5) 이문원이 들어섰다 lt동궐도gt에 묘사된 이문원 건물은 전면 5칸 측면 2칸반 정도이며

하부에 돌기둥을 세우고 가운데 3칸에 나무 사다리를 설치한 모습이다 이와 유사한 구조는

lt동궐도gt의 희정당 건물그림이나 현존하는 창경궁 숭문당에서도 볼 수 있다 대유재는 정

면 4칸 측면 2칸 건물이며 동쪽 끝 2칸은 물가에 면해서 제일 바깥쪽 돌기둥이 물속에 세

워진 모습이다 이 부분은 동이루(東二樓)라 불렀는데 1785년(정조9) 동이루를 지었다

라『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175)(효종8년 1657)

1) 공사 내용 분석

17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3572)

작업소 주요건물 부속건물 공사내용

1소 만수전

(4면퇴 포함36)

新材 眞彩 柱唐朱紅

井虹橋 동익각 밖

연지 서행각(4) 판장(11)

千慶樓 (4면퇴 포함 20) 新材 眞彩 柱唐朱紅

獻線閤 (전퇴포함 30) 일부구재사용 신재 진채

5량가(8) 외행각평루(3) 窓差備(7) 구재 및 신재사용 단청

洗踏房(6)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庫間(7) 長房(14) 司鑰房(4) 구재 및 신재 사용 단청

등촉방(7)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長房庫間(4) 舊 肅寧殿 서월랑을 수보 단청

외월랑(8)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만수전(萬壽殿)은 효종 8년 왕대비인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莊烈)왕후

조씨 1624~1688]를 위하여 창덕궁 인정전 뒤에 지은 전각이다 위치는 구 선원전의 북쪽이

다 이듬해 거듭되는 천재지변으로 1월 15일 공사를 멈추었다가 8월 4일 도감을 다시 설치

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공사는 11월 15일 다시 중지했다가 다음해(효종 8년 1657)에 1

월 16일 다시 시작하여 3월 26일 완공되었으며 4월 2일 대비가 이어하였다

이 만수전은 숙종 13년(1687) 9월에 불이 났으며 다시 복구되지 않았으며 자의대비는 통명

전으로 옮겼다 자의대비는 만수전에 불이 난 다음해인 1688년 (숙종 14년) 창경궁 내반원에

서 승하하였다

목록은 따로 없고 을미(1655년) 11월 17일 좌목과 도감사목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뒤에

는 11월 19일 날짜로 시작하는 계사에 해당하는 내용을 적었다 계사 뒤에는 예산의 수급과

품삯의 지급항목 및 실제 투입된 재료의 목록을 기록한 실입편을 두고 있다 그러나 따로

세부항목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모든 문서를 날짜순으로 적었다 그 다음에는 lt1소gt lt2

소gt lt3소gt lt외소gt lt부석소gt lt운석소gt lt외축장소gt lt노야소gt lt별공작gt의 순으로

싣고 맨 끝에 lt의궤사목gt을 실었다

각 작업소별로 별개의 의궤를 첨가시키는 형식으로 전체 의궤를 구성하였다 1소에서는

만수전 조성 2소에서는 춘휘전 조성 3소에서는 기타 서루와 월랑 등을 조성하는 것으로 나

누었다 이외에 작업종류에 따라 담장을 쌓는 외소 및 외축장소를 별도로 두었으며 돌 일을

담당하는 부석소와 운석소를 구분하였다 또 각종 철물을 만드는 노야소와 기계를 만드는

별공작소를 구분하였다

lt1소gt를 예를 들어 각 작업소별 서술방내용을 살펴보면 처음에 담당 관원들을 적고

lt수본질gt을 날짜순으로 적었으며 그 다음에 lt조성질gt에 건물의 규모 신구부재의 사용

과 기단마감단청 해당 건물의 실 구성(천장 마감과 온돌석 수량)을 적었다 그 다음에 목

재 석물 기와 단청 잡물 창호(창호채색잡물) 3개 작업소를 통틀어 단청한 것(通三所懸板

着添秩) 축장석물과 잡물의 실입을 구분하여 기록하고 lt공장질gt에 장인명단을 적었다

부재의 크기나 치목된 부재명칭이 언급되지는 않아서 건물의 칸수 정도를 파악하는 정도이

나 건물별로 창호의 종류와 창호단청 색깔 기단의 단수 등이 상세히 명시되어 있다

端和門 외행각(2) 신재

一間門(12처) 6칸 신조 6칸 구재

대문(5처) 3칸 신조 2칸 구재

外墻 水閣(3) 구재

2소 春暉殿

(4면퇴포함 20)

慶和堂을 철훼 이건 대보 1조

신재 眞彩

동변 화계(6층)

서행각(3) 서월랑(7) 북월랑(255) 신재

북월랑 앞 판장(9) 신조 眞彩

將酉庫 판장(5) 신조 단청

樑家(8) 구재

양지당 (전퇴포함 12) 신재 단청

북변 동산층각(2)

大一間門(2) 신조

중일간문(5) 3칸신조단청 2칸구재진채

箭泩門(4) 신조 단청

대문(1칸문) 내측간(3) 외측간(1) 구재

별감청(4) 구재

천경루 서측정원 井虹橋 裳朴石 신조

3소 서루월랑(전후퇴포함 76) 신재 구재 사용

상하층 내에 오토단청 나머지

는 단청

남루월랑(전퇴포함 45) 신재 단청

춘휘전남월랑(165) 신재 전면 진채 나머지 단청

양지당 남월랑(전퇴포함 9) 신재 단청

端暉門 1칸

춘휘전앞 小狹箭往門(1) 신재 진채단청

양지당앞 小狹門 1칸 문판과 문얼굴은 신재 나머지

는 구재

북수문 서변 1칸문 측간(3) 구재

lt築墻秩gt 서루월랑 서변 細墻 42칸(높이 8자)

泰秋門북수각~景秋門 內墻까지 50칸

측간동남 담장8칸(높이 9자)

대은구 5칸 중은구 7칸

외소 도총부당상대청 5칸 서영 19칸 炮手內入番營 4

칸반 景秋門수문장청 2칸 도총부 남변월랑 8칸

내군보 1칸 마영 2칸

동영 10칸 서영 8칸 남영7칸

합 25칸 철훼하여 사용

lt築墻秩gt 북장(경추문~북수각)48칸(높이 9자)

도총부 서장 20칸(높이 8자)

도총부 북장 7칸(높이 6장)

요금문 안 우물(깊이 10자)

2) 의궤와 만수전 건축의 비교

건물명 기사 사료

구 선 원

1656년(효종7) 도총부자리에 만수전 춘휘전

건립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

궤』

1687년(숙종13) 만수전소실『숙종실록』 숙종13년 9월

2일

1695년(숙종21) 춘휘전을 선원전으로 하고 숙

종어진을 봉안하다『궁궐지』

1778년(정조2) 영조 어진을 봉안하고 좌우 익

각을 첨설하다

『승정원일기』 정조2년 1

월 10일

1802년(순조2) 정조 어진을 봉안하다『승정원일기』순조2년 7월

3일

1846년(헌종12) 신실 2칸을 증축하여 순조 익

종 어진을 봉안하다

『헌종실록』 헌종12년 8월

6일

1851년(철종2) 신실 1칸 증축하여 헌종 어진

봉안

『일성록』 철종2년 5월 17

1900년(광무4) 서쪽 1칸을 증축하여 태조고황

제 어진을 봉안

『경복궁창덕궁제1실증건도

감의궤』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1655)에 만수전은 36간이고 사면에 퇴가 있으며 어칸3칸

에 동익각9칸 서익각 6칸이라고 하고 춘휘전은 20칸에 사면퇴가 있고 마루가 14칸 온돌이

6칸이라고 하였다 전체가 20칸이라고 하였으므로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추정되며 이

가운데 어칸의 마루는 천장에 봉황을 그린 봉반자이고 좌우 온돌방은 모란을 그린 목단반자

로 치장하였다고 하였다 만수전이 소실되고 춘휘전이 선원전으로 용도가 바뀌면서 건물규

모는 그대로 두고 실내를 어진을 봉안한 용도에 맞게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궁궐지』에 의하면 1695년(숙종21) 숙종이 어진 즉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춘휘전(春

煇殿)에 모시도록 하고 건물 이름을 선원전으로 했다고 하였다 춘휘전은 1656년(효종7) 효

종이 대왕대비 장렬왕후를 위해 인정전 서쪽 흠경각이 있던 곳에 지은 만수전의 부속 별당

건물이다 대비전은 정전의 동쪽에 짓는 것이 관례였으나 효종은 정전 동편에 마땅한 터가

없다는 이유로 정전 서쪽에 지었다 건립 때부터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던 만수전은 1687년

(숙종13)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이후 만수전 터에는 경복전이 들어서고 별당인 춘휘전은 한

동안 비어 있다가 이 때 숙종 어진을 봉안하는 영전으로 바뀌었다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에는 대비전인 만수전의 규모와 마루 온돌방 등의 실 구

성과 칸수 실내마감 단청종류 등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며 부속 건물에 대한 정보도 상세

하다 건물 뿐 아니라 연못 화계 담장 등 주변 조경시설의 조성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17세

기 중반 대비전의 구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만수전은 lt동궐도gt에도 남아 있지

않으며 춘휘전은 후에 선원전으로 용도가 변경되는 등 효종년간에 조성된 창덕궁의 일면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마 『집상전수개도감의궤(集祥殿修改都監儀軌)』(현종 9년 1668)

1) 공사 내용 분석

현종 8년(1667) 11월 창덕궁 인정전의 서북측에 집상전을 건축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

이다 집상전은 왕대비인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거처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대조전과

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북방향에 자리 잡았다 왕대비인 인선왕후는 왕대비전에 재변이

있어서 다른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현종은 대비를 위하여 전각 하나를 짓고자 하였다

lt동궐도gt에는 집상전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장방형의 긴 건물에 중앙부분 지붕이 좌우

측면보다 한단 높게 되어 있고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으로 대조전과 거의 같은 형식

이다 건물 왼편에는 남북방향으로 길게 행각이 놓여서 대조전 동편 행각과 연결되어 있다

이 자리에는 원래 인조년간에 지은 집상당이라는 20칸 규모의 별당 건물이 있었는데 집상당

을 헐고 새로 28칸 규모로 확장하여 대비전을 지은 것이다 현종 8년 11월 11일 집상전을

짓는 데 대한 전교를 내린다 단일 전각을 짓는 일이고 공사를 가급적 확대하지 않기 위하

여 경덕궁의 집희전(集禧殿)을 헐어 자재를 재사용 하는 등 공사의 규모가 크지 않으므로

공사를 주관하는 것을 수개청으로 하였다

제일 앞부분의 좌목은 결락되어 전체내용을 알 수 없다 그 뒤로 lt계사질gt lt이문질gt

lt감결지gt lt품목질gt lt수본질gt lt제색공장질gt로 구성되어 있다 lt계사질gt은 현종 8년 11

월 11일 왕이 자전을 위하여 전각을 지어야 할 것을 전교하는 것부터 이듬해 정월 17일까지

주요공정의 일정과 상량문 상량의 등 기사를 모았다 상량문은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이 지

었다 공사의 주관청은 수개청(修改廳)으로 정했다 기존의 건물을 허는 것은 11월 13일이고

입주와 상량은 12월 20일이었다 lt이문질gt은 주로 자재를 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는데

필요한 수레의 조달이나 새로 만들어야 하는 철물제작의 협조를 구하는 문서이다 lt감결

질gt은 사무에 필요한 각종 잡물조달과 현장의 관리에 대하여 각 관서에 명령하는 문서들이

다 감결 뒤에 여백이 있고 누락이 있는 듯 하고 lt殿額門號書寫官gt 과 이어서 각 공장과

화원 등에게 지급한 품삯 운송비 등을 종류별로로 적고 총 합을 적었다

lt품목질gt은 앞에 lsquo郎廳所掌rsquo이라고 하여 낭청의 소관업무임을 밝히고 있다 단청이나

건물을 다시 칠하는데 필요한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을 수개청 당상에게 올리는 내용이 주

를 이루고 있다 그 다음에 집희전에서 철거해 온 자재로 공사를 다 충당할 수 없으므로 부

족한 재목과 기와 등에 대해 조달처와 보충하는 자재 수량을 상세히 수록하였다 경덕궁의

집희전을 헐어 그 부재를 사용하고 부족한 것은 새로 목재를 들여와 치목하는데 들여오는

목재의 명칭은 원목의 형태이며 그 수량으로 보아 집희전 보다 규모와 형태면에서 확장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lt수본질gt은 앞에 lsquo監造官二員所掌rsquo이라고 명시하여 감조관의 소관업무임을 밝혔다 내

용은 철물을 위시하여 물건을 운반하는 썰매 돗자리 숫돌 등 자질구레한 물품의 조달이 주

를 이루고 역시 집희전에서 뜯어온 것으로 부족한 철물이나 기타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상세

히 나열하였다 품목질과 수본질에는 같은 해 공사가 있었던 영녕전 공사현장에서 쓰고 남

은 물건들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은 lt제색공장질gt로 공사에 참여한 분야의 장인을 나열하였다 화원과 각도의 화승

들이 먼저 나오고 목수 석수 冶匠 조각장 등 다양한 장인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단청을

위하여 화원 24명 화승이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원양도 등에서 50명이나 동원되었다

건물 비고 공사내용

집상전 좌우익실(온돌)포함 28칸

행각 11칸

鳳班子

신조

전면 처마 물통(溙桶) 설치

대조전 양상도회 수리 현판 골회 개칠 현판개도금

集祥殿 延秋門 延春門 景福門

日門 章華門 太極紋 正順門 長春

門 建昌門 通濟門 翠徽門 麗春門

萬春門 翠華門 浥翠門 玄武門

현판제작

2) 의궤와 집상전 건축의 비교

현종년간에 지은 집상전의 모습은 lt동궐도gt에서만 볼 수 있다 lt동궐도gt에 그림만 전

하고 있는 집상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의궤이다 집상저에 보이는 특징 가운데 지붕의

무량각 즉 용마루가 없는 점에 대해서는 이 곳이 왕이 주무시는 곳이므로 지붕에 왕을 상징

하는 용마루를 두지 않으려고 무량각으로 했다는 속설이 전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지어낸

이야기이다 창덕궁에는 대조전 외에도 집상전도 무량각 건물인데 집상전은 왕대비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무량각은 조선중기 경 중국의 영향으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의 격

식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남은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 창덕궁 대조전 창경궁 통명전이 무량각 건물이다 무량각으로 하기 위해

서는 지붕에 종도리를 두 개 설치하고 용마루에는 궁와弓瓦라는 둥글게 돌아간 기와를 따로

제작해서 설치하는 등 번거로운 공사과정이 따랐다

집상전을 짓는 부재를 충당하기 위해 철훼한 경덕궁 집희전에 대한 내용이 소략하여 그

구조나 규모에 대하여 알 수 없는 점이 아쉽다 또한 집상전의 구성에 대하여도 좌우 익실

이 있고 반자는 봉반자이며 행각이 있다는 점 외에는 앞선 창덕궁과 창경궁 관련 다른 의

궤와 달리 전각의 건축적 형태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새로 만드는 집상전 외에 주변 문들의 현판을 새로 제작하는데 『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 이후 내전 영역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으며 『만수전수리도감의궤』와

함께 대비전 조성에 대한 의궤로서 가치가 있다 lt동궐도gt에는 대조전 동북쪽에 대조전과

유사한 지붕형태를 갖춘 건물이 그려져 있고 집상전(集祥殿)이라는 편액이 묘사되어 있다

집상전은 집상당을 16년 수리하면서 당호를 고친 건물이다

바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순조 3년 1803)

건물명 기사 사료

인정전 1405년(태종5) 창덕궁 창건시 3칸으로 건립『태종실록』 태종5년 10월

19일

1) 공사 내용 분석

순조 3년(1803)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인정전을 순조 5년(1804) 4월에 재건한 기록이다

인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때 중건되었으며 인조대에 변란으로 창덕궁의

내전일곽이 대부분 소실된데 반하여 순조대까지 잘 남아 있었다 순조 3년 12월 13일 선정

전의 서쪽 행각에서 화재가 일어나 인정전이 불에 타버렸다 이 사건으로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물러난다는 하교를 내린다 바로 중건에 들어가 12월 27일 기초공사를 시작하였

으나 어수선한 정치상황과 천재지변으로 다음해인 1804년 3월 24일 공사에 소용되는 자재의

공급으로 인하여 민폐가 심하다는 김조순(金祖淳)의 상소로 잠시 중지했다가 4월 20일에 재

개한다

공사는 그해 12월에 마무리되었고 1804년 12월 27일 전의감(典醫監176))에 의궤청을 설

치하고 순조 5년(1805) 4월에 의궤를 편찬하였다 이때 중건된 인정전은 그 후 50년이 지난

철종 8년(1857)에 다시 보수하였다 1803년(순조 3) 12월 선정전 행각에서 불이 일어나면

서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져서 건물이 전소되었다177) 복구공사는 이듬해에 바로 착수되어

화재 후 만 1년만인 1804년(순조 4) 12월에 준공을 보았다178)

의궤 목록은 좌목(座目)middot시일(時日)middot도설(圖說)middot승전(承傳 부록으로 장주(章奏) 상량문

(上樑文) 의주(儀註) 반교문(頒敎文)이 있음)middot이문(移文)middot내관(來關) 품목(稟目 부록으로 식

례(式例)가 있음)middot감결(甘結)middot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middot인정전영건도감별

공작의궤(仁政殿營建都監別工作儀軌) 순이다

lt도설gt에는 인정전의 정면도와 부속물인 당가(唐家)middot오봉병(五峯屛)middot곡병(曲屛)middot당가천

장(唐家天掌)middot염우(廉隅)middot적첩(赤貼)middot허주(虛柱)middot유음(流音)middot초엽(草葉)middot연환청판(連環廳板)middot장

단청권(壯緞廳權)과 녹로(轆轤) 도설이 있다 인정전의 척량(殿宇尺量)을 소요된 재목(材木)

과 함께 상하층(上下層) 각 층별 공포(工踏) 상하층조장(上下層條粧) 당가규모(唐家尺

量) 좌탑척량(座榻尺量) 곡병척량(曲屛尺量)으로 구분하였는데 소요 부재의 치목된 명칭과

크기별 수량 길이 단면크기 목재의 원산지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도설편에 인정전 건물전체모습 오봉병 어좌(당가)의 세부 명칭과 형태 공사 시 큰 자

재를 옮기는데 썼던 운반기구인 녹노의 그림이 실렸다 큰 목재는 전라도 강원도 등 전국에

서 채취해 운반했으며 단청 안료는 경상도 장기현에서 구해오고 목수들도 서울은 물론 강원

도에서도 솜씨 좋은 사람들을 불러내서 지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2) 의궤와 인정전 건축의 비교

176) 典醫監은 의료행정과 의학교육을 관장하던 관청

177) 『순조실록』 권5 순조3년 12월 13일

178) 『순조실록』 권6 순조 4년 12월 17일

1418년(세종원) 정면 5칸으로 확장『세종실록』 태종원년 9월

10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

을 복구

1777년(정조1) 마당에 품계석 설치『정조실록』 정조1년 9월 6

1804년(순조14) 전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구됨

『순조실록』 순조4년 12월

17일

『인정전영건도감의궤』

1857년(철종8) 건물에 손상이 많아 해체하여

수리 석재도 대부분 교체 『인정전중수의궤』

1907년 순종 이어에 따라 내부 수리 『대한계년사』 수리 담당은

일본인 기사

1916년 지붕 용마루에 오얏꽃 장식 장서각 소장도면에 연대 명기

1996년 인정전 마당에 박석설치 및 행각 원

형복구

『인정전영건도감의궤』의 공사내용은 인정전 20칸과 내부 시설(당가 오봉병 등)을 다

루고 있다 『인정전영건도감의궤』에 의하면 건물 복구는 하부 월대는 기존 시설을 그대로

쓰고 목조부분만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1842년(헌종 8)에 와서 다시 한 차례 수리를

했다179)

조성내용 규모(척량) 형식

인정전 20칸 어칸 20자 변칸 각 15자 상하층 외7포 내 9포

당가 동서 145자 남북 1232자 하층 4각 상층 8각 내외 각 17포

오봉병 길이 1605자 폭 141자 두께 012자

좌탑동서 17자 남북 135자 높이 48자 난간

높이 065자 층교 난간 높이 09자

곡병

판평상 길이 72자 폭 6자 높이 05자

主壁길이 7자 폭 41자

좌우 협 각 길이 6자 폭 31자

사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순조 34년 1834)

1) 공사 내용 분석

창덕궁은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후 인조 25년(1647)에 중건하였는데 순조 33

년(1833) 10월 17일 밤 4경(四更)에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이 불에 탔고 징광루middot옥화당middot양

179) 『헌종실록』 권9 헌종 8년 윤5월 6일

주요전각 부속건물 공사내용

대조전(45칸)

水剌廚(1칸) 신조

養心閤 宣平門(25칸) 신조

隆慶軒 集祥門행각(26칸) 신조

興福軒 天香閣(20칸) 신조

내소주방 慶極門행각(255칸) 신조

凞政堂(15칸)克綏齋 복도각서행각(17칸) 신조

外燒廚房 및 서행각(35칸) 신조

澄光樓(20칸)

玉華堂(15칸) 신조

靜黙堂(10칸) 신조

행각(16칸)과 문(17칸) 신조

嚁輝門 좌우행각(5칸) 신조

建昌門(1칸) 小春門(1칸) 적묵당서협문(1칸) 협문(1칸) 내외소

주방문중문(1칸) 章華門(1칸) 통명문(1칸) 天廚門(1칸) 재덕당동

협문(2칸)

신조

옥화당이모끼중문(2칸) 嚁輝門이모끼중문(1칸) 會瑞門이모끼문(1

칸) 양심합동남이모끼문(1칸) 장순문이모끼문(1칸) 선례문이모끼

문(1칸)

신조

심합까지 연달아 탔다180) 대조전과 희정당은 보통 전각과는 다르니 계속되는 흉년에도 불

구하고 즉시 개건해야 한다는 왕의 하교에 따라 10월 26일 영건도감이 설치되었다 창덕궁

의 공사와 함께 3년여를 미루어 오던 창경궁의 환경전 일곽의 화재 복구와 함께 이루어졌으

나 영건도감은 창경궁 주자소에 각각 따로 설치되었다 의궤청은 호조 별례방에 의궤도감을

설치하여 1834년 10월에 『창경궁영건도감의궤』와 함께 의궤를 완성하였다

목록은 있으며 좌목(座目)middot각항시일(各項時日)middot도형(圖形)middot승전(承傳 上樑文儀註)middot물력

구획(物力區劃)middot이문(移文)middot내관(來關)middot품목(稟目 附式例)middot감결(甘結)middot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

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 순으로 『창경궁영건도감의궤』(1834)와 동일하다 도형에는 대조전

(大造殿) 징광루(澄光樓) 양심합(養心閤) 희정당(凞政堂)의 정면 그림이 있다

lt승전gt의 끝 부분에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의 상량문을 실었다 lt물력구획gt은 ldquo營建

物力區劃數rdquo라는 제목으로 각 지방과 아문별로 분담된 재정과 총액을 적었다 lt품목gt에는

lsquo各樣匠人一日工錢式rsquo lsquo諸色工匠等助役式rsquo 별간역이하 하급관리의 식례 목물가를 비롯한 각

종 물력을 자세히 적고 있다 lt실입gt은 『서궐영건도감의궤』 『창경궁영건도감의궤』와

같은 방식으로 각 건물별로 소용된 재료의 내역을 석재 재목 철물의 순서로 적었다 이를

통하여 공사내용을 소상히 알 수 있다

180) 『순조실록』 권33 순조 33년(1833 계사) 10월 17일

주요

전각부속건물

규모181)

(1647)

규모

(1834)

동궐

도형

석공

사목공사 비고

대조전

45칸 45칸 36칸

7량 어칸풍판 二翼工

세살청판분합 세만살단

분합

인조 25년대조전 45

칸-

어칸마루 3칸 4면

퇴마루 20칸 온돌

12칸

水剌間

(水剌廚)1칸 없음

맞배 3량

만살청판분합 8짝 만살

광창 8짝

lt동궐도gt와 거의 일

興福軒 6칸

20칸

175칸 5량 익공

淸香閣

(天香閣)

隆慶軒 9칸

26칸

6칸 익공추녀 2개- 鷄子多

里+하엽 25개

集祥門행각 22칸 lt동궐도gt와 lt동궐

도gt형이 다름

內燒廚房 255칸 196칸 5량 익공 만살청판분합

慶極門행각

澄光樓

마 루 4

온 돌 2

퇴12520칸 20칸

5량 중층 翼工

세살청판분합 만살청판

분합

고주 10개 대량 4개

종보 4개 추녀 8개

(중층)

複道閣 3칸 3량 方椽

玉華堂 105 15칸 15칸

맞배+팔작

익공

고주 8개 평주 18개

추녀 2개 대량 평

량 종량 퇴량

靜黙堂 105 10칸 10칸 5량 민도리 고주4개 추녀 2개

주요전각 부속건물 공사내용

대조전 홍판장 延春門 延秋門 판장문(1칸) 판장(7칸) 판장(1칸)

만춘헌 판장문(1칸) 융경헌 앞 판장(2칸) 문(반칸) 水剌間廚판장

(1칸) 양심합 동남 판장(1칸) 장순문판장(4칸) 재덕당판장(2칸)

신조

齊政閣과 서행각(34칸) 수보

구 소주방(10칸반) 수보

건물의 구성에 대한 설명은 칸수만 적고 있어서 17세기 의궤에 비하여 부족하지만 그

대신 각 건물에 사용된 부재는 수량과 함께 상세히 적었다

순조 33년 화재이전의 모습인 lt동궐도gt와 복구공사 후 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으며 이때

공사된 내용은 고종대 까지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lt동궐도형gt을 통하여 19세기의

창덕궁의 모습을 추론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81) 창덕궁수리도감의궤 (인조 25년 1647)

주요

전각부속건물

규모181)

(1647)

규모

(1834)

동궐

도형

석공

사목공사 비고

養心閤

25칸 235칸

5량 익공 모임지붕

세살청판분합 만살분합

고주7개 대량 7개

종량 15개 팔각주 9

개 추녀 1개

宣平門

外 燒 廚 房

및 서행각35칸 5량 일부 익공 추녀 1개

凞政堂

15 15칸 15칸

구조1고주

공포二翼工

입면세살청판분합세만

살청판분합

정면 5times측면 3

고주 4개 평주 16개

종보 4개 대주두 소

주두

複道閣

서행각17칸

克綏齋

5량 익공

세살청판분합

만살단분합 만살청판분

協陽門

嚁輝門 좌

우행각 5칸

同春門 연

(1) 1833년 창덕궁 화재의 범위

1833년 10월 17일 밤 四更에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이 불에 탔고 징광루middot옥화당middot양심

합까지 연달아 탔다 대신)과 각신들을 소견하였는데 영의정 이상황이 말하기를 ldquo궁중의

화재가 전후하여 서로 잇달아 일어난 것은 참으로 큰 재변이며 이번의 실화(失火)는 결코

심상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높게 쌓은 넓은 집이 결코 잠깐 사이에 불길이 번질 리가 없는

것이고 이미 숙직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또 제 시각에 순경(巡警)을 돌았다면 진작 발견하

지 못하고 불길이 이렇게까지 번지게 된 것은 과오의 여부를 논할 것 없이 반드시 이루어

진 까닭이 있을 것이니 끝까지 엄하게 추구(追究)하는 정사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dquo하

였다182) 이로 보면 당시 화재로 인해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 옥화당 양심합까지 불탔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을 중건한 공사가 바로 『창덕궁영건도감의궤』에 실린 것이다

당시 화재의 원인은 ldquo17일 밤 잠자던 중에 단양문(端陽門) 밖 위소(衛所)의 군사들이 떠

드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차비문 안에서 실화(失火)하였음을 알고는 불을 끄려고 급히

들어갔더니 장순문(莊順門)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몸을 밀치고 들어갔으

며 한편으로는 제정각(齊政閣)에서 수직하는 무감(武監)을 소리쳐 불렀으나 그사이에 불길

이 크게 일어나 이미 양심합(養心閤)에 연달아 번졌는데 실화의 원인은 전혀 알지 못합니

182) 『순조실록』 순조 33년 10월 17일

건물명 기사 사료

대조전

1461년(세조13) 내정전을 양의전이라 명명하고

대조전에서는 신하를 만났다고 함 따라서 이 시

기 대조전은 내정전과 다른 전각이었다고 추정

『세조실록』 세조7년 12월

19일 및 세조13년 5월 18

연산군일기에 태종 세종이 대조전에 거처하고

성종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보임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8월 22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해 복구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시 소실된『인조실록』 인조원년 3월

15일

1647년(인조25) 인경궁 경수전을 뜯어 다시 지

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34) 전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다rdquo183)라 한 것처럼 밝혀지지 않았다

1833년 화재로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 일곽의 건물들이 전소된다 이때 불탄 건물은

대조전과 주변행각 징광루와 주변건물 희정당과 주변행각이다 희정당과 대조전의 서쪽으

로는 행각들이 붙어 있어 불이 옮겨 붙기 쉬웠다 이 불로 소진된 건물을 중수한 내용이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이다 여기에 표기된 건물의 규모와 소요 부재로 추정한 건물의 양

식 등을 1647년 인조 때의 창덕궁 복구 시 조성된 내용 및 lt동궐도gt(1827~1833년) lt동궐

도gt형(1907년경)등과 비교하여 보았다

1833년의 화재 후 복구에 있어서 건물의 변경이 있었는가 1647년 『창덕궁수리도감의

궤』와 1834년 의궤의 건물 규모나 배치는 거의 유사하다 건물의 명칭에 있어서 인조대의

명칭과 lt동궐도gt는 차이를 보이지만 1834년 의궤와 lt동궐도gt의 건물명칭 및 문의 명칭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lt동궐도gt의 제작 시기는 1834년 4월 이전이 확실한 것으로 보이며(통

명전의 복구와 관련하여)lt동궐도gt가 만들어진 직후 화재가 났고 복구하면서 이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lt동궐도gt와 lt동궐도형gt에서 대조전 일곽의 차이는 무엇이며 언제 생겼는가 집상문

서쪽의 행각이 옥화당까지 길게 이어지던 것이 중간에 끊어지고 서쪽으로 더 증축되었다

집상전과 집상전동행각이 없어졌다 집상전은 화재 시 소실되었다는 기사가 전혀 없다 불이

서쪽으로 번진 것을 볼 때 피해가 없었을 수도 있다 집상전은 정조이후 기록이 보이지 않

는다 문의 명칭과 위치는 거의 일치하고 판장도 위치는 일치하나 수량이 차이를 보인다 그

러나 소실된 것을 복원하는 상황이므로 수량을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2) 대조전과 의궤

183) 『순조실록』 순조 33년 10월 18일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 다시 지음

대조전은 선정전의 동쪽 희정당의 북쪽에 있으며 건물 뒤로는 화계로 장식된 언덕이

있고 언덕 너머는 후원으로 연결된다 왕이 머무는 침소가 동온돌 왕비가 머무는 고이 서온

돌이다 궁궐의 행사가 있을 때 왕은 대조전에서 나와 선정전에서 의관을 갖추어 입고 여를

타고 행사장으로 이동하며 평상시에는 대조전에서 편복을 입고 희정당으로 나와 경연에 임

하였다 왕비는 정월초하루나 동짓날 당상관 이상의 관료 부인들을 대조전 앞마당에 부르고

하례를 받았다 이런 행사를 위해서 대조전 건물 앞에는 월대가 마련되어 있다 대조전은 내

전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신하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신하들

을 이곳까지 부르기도 하였다 1809년(순조 9)에는 마침 원자가 대조전에서 태어나자 아직

백일도 되기 전에 대신들이 대조전에 나아가 원자의 안녕을 기원하였다184)

1917년 소실되기 전의 대조전 모습은 사진자료도 남아있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의궤나 lt동궐도gt 등 시각자료를 통해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1917년에 와서 화재를

만나 1920년에 재건되었다 이때는 경복궁 교태전 건물을 헐어서 그 재목을 가지고 지었으

며 위치를 약간 동북쪽으로 옮기고 교태전의 후방 부속건물까지 함께 이축해서 이전과는 다

른 모습으로 지었다

lt동궐도gt에 그려진 대조전은 1833년의 화재로 사라지고 이듬해 1834년에 다시 지어졌

다 다시 지어진 건물형태는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 평면형태가 장서각에 도면으로

남아있다(『근대건축도면집』 2009에 수록) 도면에 의하면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5칸이며

가운데 3칸의 정청을 중심으로 좌우 9칸씩의 온돌방이 있고 사면에 퇴가 돌아가는 모습이어

서 기본적으로 1647년 재건된 건물규모와 일치한다 1834년의 창덕궁 재건과정을 기록한

『창덕궁영건도감의궤』(1834)에는 대조전의 전면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실려 있는데 지붕

이 중앙이 높고 좌우가 낮은 형태나 좌우 익실에 돌기둥이 그려져 있어서 재건된 대조전이

화재 이전과 동일한 모습임을 보여준다

한편 대조전의 실내에 대해서는 1802년(순조 2) 당시 선공감에 근무하던 이이순(李頤

淳)이 건물 수리에 앞서서 대조전 실내상황을 소상히 기록한 lsquo대조전수리시기사rsquo가 전하고

있어서 참고가 된다185)

lsquo대조전수리시기사rsquo에 의하면 당시 대조전의 실내에는 10점이 넘는 병풍이 각방의 벽을

장식하고 있었으며 그 중 정청 북쪽 벽에는 금종이로 테두리를 장식하고 일곱 학이 춤추는

그림이 있는 병풍이 걸려있고 그 앞에는 용상이 있어 그 위에 붓과 벼루 양로 등이 놓였으

며 동쪽 방에는 벽에 많은 병풍과 글씨가 쓰인 액자가 있고 서쪽 방은 작은 방이 장지로 나

뉘어져 있는데 북쪽은 큰 장이 놓여있고 바닥은 벽은 능화지로 덮이고 바닥은 기름 장판이

깔린 위에 채화석이 깔려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현재 궁중유물 중에는 십장

생 등을 그린 화려한 채색의 12폭 병풍이 있어서 이들 역시 실내에 설치된 것이 아닌가 하

는 추정을 하기도 하였다186)

184) 『순조실록』 권12 순조 9년 10월 29일

185) 『후계집』 권5 잡저 대조전 수리시 기사

건물명 기사 사료

희정당

1496년(연산군 2) 성종이 사용하던 수문당이

불이나자 수리하고 나서 건물명을 희정당으로

고침

『연산군일기』 연산군 2년

8월 19일

1608년(광해군즉위) 소실된 건물을 복구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시 소실『인조실록』 인조 원년 3

월 15일

1647년(인조 25) 인경궁 화정당을 뜯어 다시

지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 34) 전년 화재로 불에 탄 것을 다

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 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뜯어 다시 지음

20세기초에 작성된 궁궐지에는 대조전 규모는 36칸으로 적었다 lt동궐도형gt에도 건물규

모는 36칸이다 이전의 45칸과의 차이는 측면을 외부에 나타나는 툇간을 기준으로 세는지

아니면 내부 몸체의 주칸으로 세는지에 따른 차이로 판단된다 즉 측면 툇간을 기준으로 하

면 측면이 5칸이 되고 내부 몸체를 기준으로 하면 4칸이 되는데 그에 따라 측면이 5칸으로

또는 4칸으로 잡음에 따라 전체 규모를 다르게 기술한 결과이다

(3) 징광루(澄光樓)와 의궤

대조전 동북쪽에는 청기와를 덮은 2층 누각이 보이는데 징광루이다 가장 눈에 띠는 특

징은 지붕이 청기와로 덮여있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 안에 청기와를 덮은 건물이

선정전 외에도 징광루 등이 있었고 경복궁에도 있었다 징광루 역시 1647년(인조25) 인경궁

의 자재를 가지고 지은 것인데 청기와 역시 이 때 마련되었다 1917년 화재 때 징광루도 소

실되었으므로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의 징광루는 남아 있지 않다 1920년에 징광루가 있던

곳에는 경복궁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서 단층의 경훈각(景薰閣)으로 했다

(4) 희정당과 의궤

희정당은 1917년 소실된 뒤 다시 지어졌기 때문에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의 희정당은

남아 있지 않다 이후 1917년 대조전과 함께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 강녕전을 철거

해서 그 재목으로 다시 짓고 주변 행각도 크게 개조했다 특히 전면에 자동차로 입구까지

들어오도록 현관을 달아내어 본래의 건물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186) 이 12폭 병풍은 병풍 가운데 8각형의 공백이 있어서 이것이 일종의 불발기 창과 같이 실내에 설치되어 있

었덧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지만 병풍으로 제작된 점이나 크기 채색의 지나치게 화려한 점등을 고려할 때 특별

한 행사가 있을 때에 한정해서 설치하였고 평상시에는 설치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궁궐의 장

식그림』 국립고궁박물관 2007)

희정당은 침전인 대조전 앞에 남향해서 자리 잡았다 오른쪽으로는 행각을 통해서 선정

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당초의 건물 용도가 왕이 경전을 학습하는 학문소였으므로 아침에

일어나 침전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학문에 나아간다는 것을 상징하는 위치에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연산군 때 건물 이름을 희정당으로 고치면서 단순한 학문소 기능을 넘어서 정치의

장소로 바뀌었다고 짐작된다 편전이 격식을 차리고 정사를 논하는 곳이라고 한다면 학문소

는 편안한 자세로 격식에 매이지 않고 국정을 다룰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으다

유사한 사례는 경희궁의 흥정당에서 볼 수 있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지면서 처음부터 본래 편전에 해당하는 자정전이 혼전 등의 의

례공간으로 쓰고 흥정당이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희정당은 건물 형태가 상참과 같은

편전의 공식적인 의례를 거행하는데 부적한 것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상참 등은 선정전에

서 거행하고 일상적인 어전회의를 이곳에서 치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선정전이 정조의

혼전으로 활용되면서 희정당이 주로 편전의 용도를 대신하게 되었다 순종황제가 창덕궁으

로 이어한 이후에는 거의 모든 사신 접대는 이곳에서 치러졌다 이때는 건물 형태 자체가

완전히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lt동궐도gt에는 1917년 소실되기 이전의 희정당의 모습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단층 팔작지붕인데 특이한 부분은 건물 아래가 높은 돌기둥으로 받쳐

지고 바닥에서 건물로 오르기 위해서는 나무로 만든 네 개의 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안되도

록 한 모습이다 보통 궁궐의 건물은 기단을 두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일반적인데 희정

당은 그와 달리 지면에 돌로 맞은 바닥을 두고 그 위에 돌기둥을 여럿 세워서 바닥을 높이

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 것이다 전면의 돌기둥 안쪽은 비어 있는데 서쪽 끝에는 붉은 색으

로 필한 작은 네모난 부분이 일부 보인다 이 작은 네모난 부분은 온돌 바닥에 불을 넣기

위한 아궁이로 판단된다 또 동쪽 측면에는 반 칸 정도 벽을 달아내어 툇간을 만들고 이 툇

간으로 오르기 위한 별도의 나무계단도 그려 넣었다

19세기 중반 경희궁의 모습을 그린 서궐도안에 묘사된 흥정당 역시 희정당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인다 즉 흥정당 역시 바닥에 높은 돌기둥이 연속해 있고 높은 계단을 통해 실내

바닥에 오르도록 한 모습이다 창경궁의 숭문당은 그림이 아니고 건물 자체로 유사한 상황

을 보여준다 숭문당 역시 왕의 경연 장소로 지어진 창경궁의 학문소 건물이다 이 건물의

후면은 역시 돌기둥이 연속해 있고 그 위에 목조건물이 올라서 있다 또 돌기둥 안쪽은 툇

간 폭 만큼 비어있고 그 안쪽에 온돌에 불을 넣을 수 있는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다 희정당

의 그림과 동일한 구조인 셈이다 결국 창경궁 숭문당 경희궁 흥정당 그리고 창덕궁 희정

당 세 건물은 모두 동일한 형식의 건축이며 세 건물은 왕의 학문소의 기능과 연관을 가진

건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희정당은 19세기부터는 선정전을 대신해서 왕이 대신들과 국사를 논하는 편전으로 쓰였

다 이 때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희정당의 어느 부분에 왕이 임하고 대신들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궁금한 사항이다 과거 선정전이 편전일 때는 왕의 위치는 건물 북쪽 중앙이 놓

이고 그 앞 좌우로 나누어 대신들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희정당에서는 남쪽은

5칸의 마루가 있고 안쪽은 중앙 3칸에 넓은 온돌방이 있고 좌우에 작은 방이 2칸씩 있는 모

습이다 바닥이 마루와 온돌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왕이나 신하들이 모두 방석을 놓고 앉아

서 어전회의를 했다고 짐작은 되지만 과연 어느 위치에 누가 어떻게 자리를 잡았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희정당 건물 밖 동남쪽에는 네모난 연못이 있다 본래는 왕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나

서 머리를 식힐 수 있도록 꾸민 못으로 짐작되는데 후에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이 연못이 어

떤 기능을 가지게 되었을지는 짐작이 잘 가지 않는다

1917년 11월 대조전과 희정당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때는 순종황제가 창덕궁에 거처

하고 있을 때였으며 대조전은 순종이 거처하던 침전이고 희정당은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견

하는 집무실이었다 서둘러 건물 복구가 시작되었는데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러 그 재목으로

대조전을 짓고 강녕전을 헐어 희정당을 짓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공사는 3년이 걸려 1920년

에 완성되었다 새로 지어진 희정당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어졌다 정면 11칸 측

면 5칸으로 규모를 크게 키웠으며 건물 좌우로 행각이 뻗어있고 다시 남쪽으로 출입문을 갖

춘 남행각이 들어섰다 또한 출입문에는 지붕이 돌출되고 기둥 2개가 돌출한 지붕을 받치는

현관부분을 달아내었다

이렇게 해서 자동차로 현관 앞까지 진입하여 그대로 행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

다 이 과정에서 연못을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건물 동쪽 경사지에는 난방을 위해서 보일러

시설을 설치했다 또한 정전 및 행각의 창문도 서양식의 창문으로 교체되었다 대청 좌우 상

부벽면에는 대형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희정당에는 청나라에 유학하여 그림공부를 한 당대

의 이름난 화가 김규진이 「해금강총석정절경」과 「내금강만물초승경」을 그렸다 또 실내

에는 서양에서 수입해 온 탁자와 의자 등을 비치하였다 이 그림이나 가구들은 지금도 실내

에 잘 남아있다

아 『인정전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철종 8년 1857)

1) 공사 내용 분석

1857년(哲宗 8)에 昌德宮 正殿인 仁政殿을 重修한 기록이다 目錄은 座目middot時日middot圖說middot承傳

(附 奏啓 上樑文 儀註)middot移文middot來關middot甘結middot財用(附 式例)middot實入middot賞典middot工匠middot儀軌 순이다 座目에는

監董堂上 金炳冀 郎廳 趙冕鎬 別看役 姜彛五 등 5인 監董牌將 趙命燁 등 4인 看役牌將 金

再興 등 3인 畵師牌將 爐冶所牌將 등의 성명이 적혀 있다 圖說에 仁政殿 唐家 五峯屛圖

등과 轆轤圖가 있고 소요 材木들의 수효 및 尺量이 나와 있다

1854년 5월 25일 영의정 김좌근이 인정전의 중수를 발의하여 9월 23일 치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 25일 정역했다가 1857년 5월 26일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윤5월 6일에

야 중수를 마쳤다 중수도감이나 청을 별도로 두지 않고 호조에서 직접 영건을 맡았으며 의

궤 또한 호조에서 바로 1857년 윤5월 20일에 착수 12월 25일에 완성하였다

목록은 좌목(座目)middot시일(時日)middot도설(圖說)middot승전(承傳 附 奏啓 上樑文 儀註)middot이문(移文)내관(middot

來關)middot감결(甘結)middot재용(財用 附 式例)middot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 순이다

도설에는 인정전의 정면도와 부속물인 당가(唐家)middot오봉병(五峯屛)middot곡병(曲屛)middot당가천장(唐家

天掌)middot염우(廉隅)middot적첩(赤貼)middot허주(虛柱)middot유음(流音)middot초엽(草葉)middot연환청판(連環廳板)middot장단청권

(壯緞廳權)과 녹로(轆轤)의 도설이 있다 인정전의 척량(殿宇尺量)을 상하층(上下層) 각

층별 공포(工踏) 상하층조장(上下層條粧) 당가규모(唐家尺量) 좌탑척량(座榻尺量) 곡병척

량(曲屛尺量)으로 구분하였는데 소요 부재의 명칭과 크기별 수량 길이 단면크기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인정전 관련 두 의궤의 목록의 차이는 『인정전중수의궤』에는 lt품목gt항목이 빠져 있

고 lt재용gt 항목이 추가되어 있다 lt재용gt은 예산과 수급처를 적은 항목으로 앞선 『인정

전영건도감의궤』에서는 lt실입gt부분에 기록된 내용이다

2) 의궤와 인정전 건축의 비교

인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남향해서 건물을 세웠다 월대는 표면을 다듬은 화강석으로

마무리하고 했다 상부에 돌난간을 돌리고 난간 기둥에 짐승조각을 새긴 경복궁 근정전 기

단에 비하면 높이도 낮고 장식도 적지만 궁궐 정전의 간결하면서 위엄 있는 단의 모습을 잘

갖추었다 남쪽 중앙 하월대와 상월대 계단에는 왕의 가마가 지나가는 봉황을 조각한 답도

(踏道)를 두었다 하월대 전면 모서리에는 화재시를 대비해 물을 담아두는 청동 드므가 놓여

있다 본래 상월대에는 의식을 거행할 때 향을 피우는 향로가 놓여 져야 하지만 지금은 남

아있지 않다

상월대 북쪽으로 낮은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정전이 올라서 있다 정전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 정전과 마찬가지로 정면5칸 측면 4칸 규모이다 다만 기둥 간격에서는 근정전 보

다 조금 작아서 전체적으로는 근정전보다 면적이 약간 작다 기둥 위에는 전형적인 19세기

초의 내4출목 외3출목 다포식 공포를 짰다 지붕은 근정전과 같이 중층으로 꾸몄는데 창경

궁이나 경희궁 정전이 단층인 것과 구별된다 실내는 가운데 후면에 어좌를 꾸몄다 어좌는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당가(唐家)로 표기했는데 3면에 계단을 두고 당가 위에는 일월오악을

그린 병풍을 놓고 그 앞에 낮은 병픙인 곡병(曲屛)을 놓고 왕이 앉는 어좌를 두었다 내부는

상하층이 열린 구조이고 천장은 상층 지붕에만 설치되었기 때문에 높은 실내를 이루었다

천장에는 구름 사이로 두 마리 봉황이 나는 모습을 채색으로 그려 넣었다 출입문은 전면

어칸과 후면 어칸에만 있고 나머지는 하루에 머름을 댄 빗살로 된 분합문이 달렸다 창문

역시 황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에 회를 높

게 바른 양성을 하여 지붕의 격식을 높였다 조선후기 궁궐 정전의 본보기이며 건축적으로

도 가장 격식을 갖춘 중층 다포식의 전형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부분적으로 서양식 근대

문물이 가미된 건축물이다

『인정전중수의궤』는 1857년(철종8) 인정전을 부분적으로 수리한 내용이다 의궤의 인

정전 척량을 비교하여 보면 철종 8년의 수리공사는 1805년에 지은 인정전의 규모와 구성을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부재는 기존의 부재를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건된 지 약 50년 후에 수리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로서 영건시의 의궤(『인정전영건

도감의궤』)와 중수의궤 그리고 이때 보수한 건물이 현존하는 귀중한 사례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순조 5년 『인정전영건도감의궤』의 내용과 서술순서와 내용이 거의 일치하지만 일

부 부재의 크기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인정전 고주 중에서 귀고주 4개의 굵기를

보면 순조 3년 중건시보다 2치 더 큰 것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도리 창방 대보 등 기타

부재는 1805년에 지은 인정전과 같은 규모로 되어 있다

이때의 수리는 일부부재를 교체하고 단청을 손보는 등 건물의 형식은 변화가 없었던 것

으로 보인다 이후 인정전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1908년에 내부바닥과 창호를 일부

서양식으로 고치는 변화가 있었으나 상부공포 및 가구 건물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

었다

5 창덕궁 인정전 단청의 특성

가 인정전의 단청

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왕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lt사진1gt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지었지만 임진왜

란 때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에 복구되었다 이후 순조 3년(1803)

다시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중건하였는데 철종 7년(1856)에 크게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로 화강석 박석을 깐 2중 월

대 위에 세워져 있다

건물 내부는 아래위로 탁 트였는데 후면 가운데 고주 사이 뒤쪽으로 어좌를 마련하고 곡

병과 日月五嶽屛을 갖춘 용상을 설치하였다 천정은 가운데를 한 단 높여 감실 천정을 마련

하고 봉황 두 마리를 그려 넣었다 이 건물은 경복궁과 덕수궁 등 3대 궁궐의 정전과 양식

을 같이 하고 있으나 명정전과는 다르고 근정전과는 시기 수법상 앞서고 있어 가장 표본이

되는 것이다

단청은 건물 외부는 근래들어 수차례 부분적으로 새로 칠한 것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과거

의 상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외부단청이 겉보기로는 강한 색조에

생경한 느낌이 드는 반면 내부단청은 장중하지만 낡은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건물 내부의

어좌와 용상 일월오악병 등은 근래 새로 제작한 것이며 기둥의 석간주 가칠도 최근에 새로

칠한 것이다

lt사진17gt 창덕궁 인정전의 내부 모습

나 인정전 단청과 의궤

의궤란 국가나 왕실에서 주도한 건축공사의 시말을 정확히 기록하여 후세에 남길 목적으

로 편찬된 문헌을 말한다 창덕궁에 대한 의궤는 모두 9건으로 현존하는 궁궐 영건 관련 의

궤 가운데 반이 넘는다 이 가운데 창덕궁내 현존하는 건물과 관련된 영건의궤 중에서 단청

공사와 관련된 의궤는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 순조 5) 『인정전

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1857 철종 8)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

(1834) 『경복궁 창덕궁선원전일실증건도감의궤』(1900) 등 4종이 있다

의궤의 내용 중에서 단청과 관련된 것은 대체로 공사에 사용된 안료의 명칭과 사용량 정

도로 정보가 국한되어 있다 기록을 통해 당시에 사용한 안료별 명칭과 색상 품질특성 입

수경위와 원산지 등을 알 수 있지만 채색방법 작업 진행상황 등에 대해서는 상세히 파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당시 단청공사의 전모나 현존하는 건물의 단청안료를 이해하

는데 가장 확실한 길잡이가 된다 특히 인정전의 경우 단청공사를 38일 만에 완성했다거나

뇌록 주토 정분 등은 사용량과 공납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인정전과 직결된 『인정전영건도감의궤』와 『인정전중수의궤』의 단청관련

기록을 조사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다

다 연구조사 방법

우선 2008년 실시한 인정전의 내부 단청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 결과를 재정리 하였다 당

시 조사 항목은 색상별 색도 측정 현미경 촬영 안료 성분분석 등이었다 내부 단청이 주

대상이었지만 건물이 중층이라서 실내의 높이가 너무 높아 다양한 부분에 대한 조사가 불가

능하였고 그래서 접근이 가능한 부재이면서 단청이 잘 남아있는 퇴량[들보]와 익공 한 부분

을 조사한 것이다lt사진2gt

조사한 자료를 종합하여 사용된 안료의 이름과 채색 특성을 밝혀 낸 다음 그 결과를 2종

의 의궤에 등장하는 안료명과 비교 확인해보았다

lt사진2gt 인정전 들보의 단청조사

라 의궤 기록과 현존 단청안료의 비교 고찰

1) 의궤의 안료 종류와 그 특성

인정전 의궤 2종의 실입질 물목(物目)을 통해서 단청작업에 사용된 재료의 대강을 파악

할 수 있다 특히 색재료는 20여 종의 다양한 안료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lt표1gt

현대 단청공사 보다 더 다양한 종류의 안료가 쓰였던 것이다 현재 이들 안료의 정체를 모

두 명확하게 확인해 내기는 불가능하지만 기록된 명칭을 통해 그 대강을 색상별로 묶어보면

적색 황색 녹색 청색 그리고 흑백으로 파악할 수 있고 같은 색상이라도 몇 가지 종류의

안료를 혼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용된 안료의 명칭을 통해 안료의 산지와 품질 특성

색상의 채도 차이 등을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도 있었고 광물성 안료만이 아니라 식물성

염료로 생각되는 편연지와 석자황도 함께 사용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안료별로 사용된 양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어떤 안료가 어떤 목적에 활용되었

는지 안료별 계량 단위차이를 통해 재료의 상태도 짐작이 가능하다 가칠 즉 바탕칠에 사용

된 뇌록과 석간주의 양이 가장 많았고 흰색인 정분과 진분도 다량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들

안료는 斗(말)로 계량하였고 뇌록 가칠에 280斗 석간주 가칠에는 황주주토 113斗를 비롯해

편연지와 당주홍 석간주가 함께 사용되었다 특히 흰색 안료로써 정분이 300斗 다량 사용되

었는데 용도는 흰색 재료 뿐만 아니라 가칠안료와 혼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부분의 안료는 무게로 계량하였는데 분말이라는 재료에 적합한 단위가 된다 무게를 근

(斤) 량(兩) 전(錢) 분(分)까지 정확히 기록하였다 이밖에 편연지는 장(張)으로 계량해서

낮장[片]으로 계산이 가능한 안료로 파악되었고 금박은 묶음[束]으로 액체인 송유는 사발

(沙鉢) 단위로 기록했다

50여년의 시기 차이가 있는 두 종의 의궤기록을 비교해 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

로 안료의 종류와 가짓수 그리고 사용한 양까지 비슷한 점을 알 수 있다 1856년 인정전 중

수시 단청공사는 완전히 새로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50여 년 후 단청재료에서 가장 큰 변

화가 있었던 점이 황주주토로 가칠한 부분이 석간주로 대체된 것이다 당시 황주주토의 수

급이 어렵게 되자 석간주로 대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주홍과 왜주홍 당황단 등은 주홍 황단이라는 안료 이름에 접두사를 붙여서 수입처 또

는 원산지를 나타낸 예도 있다 당은 중국을 왜는 일본을 포함한 동남아산으로 보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磻)과 상(常)의 의미는 불분명하다 접두어로 석(石)을 붙인 점은

재료가 광물이라는 뜻이겠지만 가공하지 않은 원석이라는 의미도 내포된 것 같다 예를 들

어 웅황(雄黃 orpiment)은 석황으로도 불리는 데 화산지대에서 많이 산출되는 것으로 알려

져 있다 화학식은 As2S3 황화비소이다 반면 자황(雌黃 gamboge)은 식물성 천연수지로 알

려져 있다 동황(同黃)으로도 불린다 천연광물인 웅황에 석자를 붙인 것은 원석이라는 표현

일 수 있으며 자황에 석자를 붙인 이유는 불명이다

한편 양(洋) 자가 붙은 안료는 대체로 서양 수입품이라는 의미가 있다 여하튼 1857년 인

정전중수의궤에 등장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19세기 중반까지는 서양에서 제조

한 인공안료는 아직 수입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의궤문헌

색상

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 仁政殿重修儀軌(1857)비고(안료광물명)

안료명 사용량 안료명 사용량

적색계열

石磵朱 28斤 石澗朱 602斤 산화철 Iron Oxide

黃州朱土 113斗 산화철 Iron Oxide

片臙脂 1211張半 片臙脂 1467片

唐朱紅 208斤 4兩 唐朱紅 148斤 朱砂 cinnabar()

磻朱紅 264斤 鉛丹 Red Lead()

倭朱紅 4斤

황색계열

唐黃丹 230斤 3兩 3錢 唐黃丹 231斤 14兩 黃丹

常黃丹 90斤 11兩 常黃丹 2斤

石雄黃 2斤 1兩 5錢 雄黃(石黃) As2S3

石紫黃 12斤 以上 石紫黃 17斤 Gamboge()

同黃 47斤 1兩 5分 同黃 36斤 Gamboge()

녹색계열

磊碌 280斗 磊碌 200斗 磊碌石 Ceradonite

石碌 23斤 5兩 石碌 15斤 孔雀石 Malachite

荷葉 268근 8兩 5錢 荷葉 256斤 짙은 녹색

三碌 338斤 三碌 396斤 8兩 연한 녹색

청색계열

靑花 115斤

二靑 44斤 12兩 7錢 4分 二靑 43斤

三靑 66斤 3兩 三靑 43斤

흰색계열丁粉 300斗 丁粉

154斗 9升 2合

5勺정분

(Calcite CaCO3)

眞粉 276斤 4兩 眞粉 229斤 연백(Lead White) 2PbCO3middotPb(OH)2

흑색[墨] 松煙 먹()

금박 金箔 46束 4貼 7張 金箔 59束

금속 白銅 13兩

전색제 阿膠 583斤 阿膠 700斤

기 타 松油 257沙鉢

lt표27gt 인정전 儀軌에 등장하는 단청물목의 안료명과 사용량

2) 현존하는 인정전 단청에서 확인된 안료와 전색제

의궤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인정전의 단청에는 20여 종의 안료가 사용되었다 현존하는 인

정전 단청을 조사한 결과를 이용해 의궤에 등장한 안료의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lt표2gt 그

결과 적색계열의 안료에서는 석간주와 황토를 황색계열에서는 황단 웅황 등 기록에 등장한

안료 대신 새롭게 황토를 확인했으며 녹색계열에서는 뇌록과 석록을 찾을 수 있었다

청색계열은 그 존재를 밝혀내지 못했다 다른 안료에 비해 사용량도 적어 모로단청 이외

의 부분이나 기물 중요 건물부재 등의 채색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흰색의 경

우 다량의 정분과 함께 지당(地堂 TiO2) 백토를 확인했지만 진분은 찾을 수 없었다 금박

위치 색상명 근사색

색차(lab)

실체현미경박편현미경

(x200)화학성분 안료화학조성

L a b

기둥 석간주 3479 1801 1358

C 2640

Si 2216

Fe 1487

O 1288

Ca Na Mg

Al Cl K

정분 CaCO3

석간주황토Fe2O3

백토

Al2O3middotSiO2middot4H2O

문턱 뇌록 4229 -141 1087

Ca 3756

Ti 2173

O 1306

C 865

Fe Mg Al

Si Cl

정분 CaCO3

지당 TiO2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들보 백색 6415 225 1669

C 3387

Si 2116

Fe 1356

K 1131

O 1032

Ca Ti Mg

Al S Cl

정분 CaCO3

황토 Fe2O3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지당 TiO2

문틀

(우측)황색 5078 741 2749

Fe 9634

O 270

Ca K

황토 Fe2O3

정분 CaCO3

익공 하엽 4468 -863 879

Cu 7980

Cl 1603

O 225

Ca S

석록CuCO3Cu(OH)2

정분 CaCO3

lt표2gt 인정전 단청의 색상별 과학적 분석표

과 백동 또한 확인이 불가능했다 금박은 단청의 선에 특별하게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

의궤에 기록된 안료 중에서 현재 확인된 것은 석간주와 주토 뇌록 석록 정분 등 몇 가

지 종류밖에 없다 그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안료는 사실 우리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

는 안료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아직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조사한 지점이 들보의 모

로단청 한 곳이라는 것도 한계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앞으로 고대 안료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과 함께 조사 대상을 넓혀서 진행한다면 대부분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믿어진다

이들 안료는 전통 전색제인 아교(阿膠)와 섞어 채색을 하였으며 단청 후 표면에는 기름을

발라 내구성을 높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정전의 경우 송유[松精油 terpentine]를 이러

한 용도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건물의 경우 관련 의궤를 통해 확인한 결과 명유

(明油)와 법유(法油)가 활용되었다 이들 유기물질의 사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습득한 시

료를 퓨리에변환 적외선분광분석기(FT-IR)로 분석하였지만 전색제로 아교가 사용된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들보 육색 5174 1326 1006

Si 2175

Fe 1847

C 1566

Ca 1397

O 1230

Mg Al K

정분 CaCO3

석간주Fe2O3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익공 하엽 4334 -830 1322

Cu 2939

Si 2938

Fe 1241

O 979

K 823

C Mg Al

석록CuCO3Cu(OH)2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안병찬 등 『궁궐채색기술 특성규명 연구 보고서』국립문화재연구소(2008) 81쪽의 ltTable 23gt을

보완함

3) 단청 공사와 재료 수급 내용

인정전 영건시 상하층 건물의 단청 공사가 1804년 11월 6일에 시작되어 12월 13일에 끝났

음을 알 수 있다 공사기간이 38일로 상당히 짧았고 특히 늦가을에서 초겨울사이에 진행되

어 채색작업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1804년 10월 서울의 화사

(畵師)만으로 감당하기에는 인정전 단청공사의 규모가 너무 커 강원도 경기도 총융청 등에

서 화사를 구해 보낼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청공사에 동원된 인원이 총 몇 명인

지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각종 재료의 수급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황주주토는 황해감영에 상납을 지시하였고 뇌록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상감영에 상납을

명했다 단청용 붓을 만드는데 쓸 집돼지털 200근을 평안도 황해도 개성부 등에 나누어 정

했고 아교 제작에 필요한 쇠가죽 70장을 수원부 개성부 관주부에 나누어 정한 기록도 보

인다 다량의 주토와 뇌록안료는 물론 단청 채색에 필요한 다량의 붓과 아교도 중요 물목이

었는데 이들은 완제품 보다는 원료상태를 공출해 작업 현장에서 직접 제조 가공하여 활

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창덕궁영건도감의궤』에는 1833년 11월의 내관으로 황해도에 분정된 法油 丁粉

正鐵 强鐵 石灰 등을 고을별로 책임을 적은 기록도 있다 이 가운데 정분 300말을 장연에

배정한 내용 강원도에 분정된 法油 松煙 生葛 木賊 楡皮 등의 고을별 할당량을 적고 이

가운데 송연은 金城 淮陽 金化 平康 寧越 平昌 旌善 등 고을에 분정하였으며 느릅나무

껍질인 유피는 橫城 洪川 麟蹄 狼川 寧越 平昌 旌善 등지에 분정하였다는 내용 그리고

집돼지털 50근을 평안도내 여러 고을에 분정한 내용도 담고 있다

마 인정전 단청의 문양 특성

인정전 단청은 부재별로 다양한 문양이 활용되고 있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모로단청을 들

목과 창방 평방 등의 머리초를 대표 예로 들어 간략히 기술한다

대체로 연화병머리초를 기본으로 삼고 원연화병머리초를 변형으로 활용했다 즉 창방을

연화병머리초로 하고 그 위의 평방은 원연화병머리초로 변화를 주었다 휘도 부재별로 차이

를 두었는데 대들보의 휘는 복잡하고 화려한 바자휘로lt사진3gt 창방과 평방은 그보다 단순

한 인휘로 통일해 표현했다 휘의 색은 적 청 황 석간주를 2빛으로 전개하다가 뇌록바탕에

양록실 황실 먹실로 마감해 밝고 장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러한 연화병머리초 문양은 창덕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의 단청에 빠짐없이 활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해 내전을 겸한 침전으로 대조전(보물 제

816호) 편전(便殿)인 희정당은 물론 궁내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던 건물인 구선원전(보

물 제817호)과 신선원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lt사진4 5gt 즉 창덕궁 인정전의 연화병머리

초는 왕실을 상징하는 단청문양인 것이다

lt사진3gt 인정전 대들보의 연화병머리초 바자휘 단청

lt사진4gt 대조전 창방의 연화병머리초직휘 단청

lt사진5gt 희정당 창방의 연화병머리초직휘 단청(현대)

이상과 같이 창덕궁의 단청 특성을 인정전 단청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인정전은 창덕

궁의 정전으로 가장 중요한 건물이면서 단청을 포함한 공사 내역을 기록한 의궤도 2종이나

되어 과거 단청을 연구하는 데 문헌기록도 잘 남아있다 또한 인정전의 내부 단청은 현존하

는 궁궐단청 중 가장 오래된 것 가운데 하나로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인정전을 중심으로 창덕궁 단청을 논하고자 한 이유는

가 두 종의 인정전 관련 의궤를 통해 과거 단청공사 기록을 잘 파악할 수 있다

나 인정전 내부 단청은 현존하는 궁궐 단청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 일부분 수리 개칠이 되었지만 과거 단청이 잘 남아 있다

라 인정전 단청의 안료를 과학적으로 조사한 자료가 있어서 비교가 가능하다는 점

등이다

의궤의 내용과 현존하는 단청의 안료와 공사내역을 비교한 결과

가 의궤의 기록에 따르면 20종이 넘는 다양한 안료가 사용된 반면 현존 단청에서는 겨

우 5종의 안료가 확인되었다 확인되지 않은 안료는 당주홍 왜주홍 당황단 석자황 등 그

정체가 확실치 않은 안료들이다 특히 청색은 청화를 비롯해 이청과 삼청인데 이들 청색은

육안으로도 확인이 불가능했다 앞으로 이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나 인정전의 단청 공사는 1804년 11월 6일에 시작되어 12월 13일에 끝나 공사기간이 38

일로 상당히 짧았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진행되어 작업에 상당

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 단청안료 중 무엇보다 중요하고 다량 소요되는 가칠안료로서 황주주토는 황해감영에

서 뇌록은 경상감영에서 공납을 받았으며 붓의 재료인 되지털과 아교 제작에 필요한 쇠가

죽 등을 원료상태로 지방의 도와 부에서 나누어 공출한 기록도 확인하였다

라 50여년의 사이를 두고 벌인 두차례의 인정전 단청공사에서 가장 큰 색재료의 변화는

붉은색에서 일어났는데 최초에는 황주주토를 사용했던 가칠이 보수공사 시 석간주가칠로 교

체된 점이다

마 인정전의 대표적인 모로단청 문양은 연화병머리초인데 이 문양은 대조전과 희정당은

물론 선원전 등 창덕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에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로 요약된다

단청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의외로 미지의 상태로 남아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연구 관점이 전통 문양에만 편중되어 있고 재료와 기술연구에는 근거가 부족하

여 체계적이지 못한 경향이 있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있는 단청자료를 과학적

으로 조사하면서 고문헌 기록과 비교 검토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시급히 보완해

야 할 점은 현존하는 단청자료를 함부로 벗겨내고 재시공하지 않는 일이다

lt참고문헌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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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仁政殿重修儀軌(1857)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6 창덕궁 궁역 궁성 궁성문 궁장문 문로

가 궁역

1) 조선 전기

『세조실록』 27권 8년(1462) 1월 30일(을축)

처음에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의 후원(後苑)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쪽 원장(垣墻)을 넓혀서 쌓으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공 제조(繕工提調)에게 명하여 그 기지(基址)를 살펴서 정하게 하니 주위의 둘레가 모두 4

천 2백 척(尺)이고 그 안에 인가(人家)가 모두 73채였다 명하여 2월까지 모두 철거(撤去)하게 하고 그 집

주인에게 3년 동안 복호(復戶)하여 주고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그들이 원(願)하는 바에 따라 빈 땅을 절

급(折給)하게 하였다

『세조실록』30권 9년(1463) 2월 7일(병인)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창덕궁(昌德宮)에 거둥하여 궁장(宮墻)을 보고 기지(基址)를 넓게 쌓도록 하였

다 이 앞서 궁장을 넓히고자 하여 궁(宮) 동북동(東北洞)의 인가(人家)를 철거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또 북

쪽 고개 밑의 인가 58구(區)를 철거하니 주위(周圍)가 무릇 4천 척(尺)이었다 행 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

院事) 김개(金漑)middot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이석형(李石亨)middot한성부 윤(漢城府尹) 권반(權攀)middot공조 참판 이연손

(李延孫)middot인순부 윤(仁順府尹) 황효원(黃孝源)을 제조(提調)로 삼고 군기 판사(軍器判事) 황신(黃愼)middot사복 판

사(司僕判事) 박서창(朴徐昌)middot군기 부정(軍器副正) 한치의(韓致義)middot공조 정랑(工曹正郞) 성율(成慄)middot한성 소윤

(漢城少尹) 신승선(愼承善)middot선공 주부(繕工注簿) 강치(姜致)를 낭관(郞官)으로 삼아 도성 방리인(都城坊里人)

을 다 징발하여 통(統)을 나누어 쌓으니 1백 19가(家)로서 1통(統)을 삼고 1통(統)이 쌓은 것이 25척(尺)이

었다 통(統)은 대개 1백 60이고 통(統)마다 모두 직질(職秩)이 높은 인원(人員)으로서 주관하게 하여 오늘

부터 역사를 시작하였는데 전교하기를 ldquo동쪽 고개[東岾]도 또한 이 주산(主山)의 내맥(來脈)이다 성 밖에

있게 되면 마땅하지 못하니 다시 넓히도록 하라rdquo 하니 이에 또 4백 척(尺)을 물리었다

『세조실록』30권 9년(1463) 2월 9일(무진)

좌의정 권남(權擥)이 아뢰기를 ldquo성균관 반수(成均館泮水)는 청컨대 신축(新築)하는 궁장(宮墻) 안에 넣지 말

게 하소서rdquo 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어서(御書)를 보이기를 ldquo뭇사람이 옳지 않다고 하는 일을 내 어

찌 하며 백성을 수고롭게 하여 원망을 취하는 역사를 내 어찌 일으키겠는가 궁성(宮城)의 역사는 부득이함

이 있어서 세상이 예로부터 서로 이어 왔으니 지난해 이어(移御)한 일 같은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선왕(先

王)이 수궁(數宮)을 설치한 소이(所以)이며 제경(諸京)을 설치한 뜻[意]이다 창덕궁(昌德宮)은 동산[苑]이

협애(狹隘)하니 후세의 인주(人主)로 유람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어 반드시 크게 토목(土木)을 일으킨다면

존망(存亡)의 형세를 입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런 연고로 음양(陰陽)을 인하여 장구(長久)한 방술

[術]을 삼아서 잠깐 수고롭더라도 길이 편안케 할 뿐이다 반수(泮水)가 동산[苑]에 들어오는 것은 의논한

바가 아니니 하나의 고(苽)6057) 를 소민(小民)에게서 빼앗는 것도 불가하거든 하물며 선사(先師)에게서

반수(泮水)를 약탈하겠느냐 또 반수(泮水)란 3면(三面)이 물로 둘러싸인 것이지 내[川]가 흐르는 것이 아니

다 고례(古禮)에 lsquo때를 따라 손익(損益)하지 않음이 없다rsquo 하였는데도 구구(區區)하게 외모(外貌)로써 한다

면 보름새 베[緦]를 살피는 것이다 만약에 반수(泮水)를 폐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내가 마땅히 유생(儒

生)으로 하여금 스스로 파게 할 것이다 어찌 나의 적개심(敵愾心) 있는 장졸(將卒)로 하여금 토목에 피로하

게 하겠느냐rdquo 하고 이어서 술자리를 베풀고 권남(權擥)에게 의롱(衣籠) 1사(事) 호피(虎皮)middot표피(豹皮)middot큰

녹비(鹿皮) 각 1장(張)을 여섯 승지(承旨)에게는 큰 녹비(鹿皮) 1장씩을 내려 주었다

『연산군일기』 51권 9년(1503 계해 명 홍치(弘治) 16년) 11월 12일(을해) 4번째기사

병조 판서 강귀손(姜龜孫)과 공조 판서 정미수(鄭眉壽) 등이 돈화문 동쪽에서 단봉문(丹鳳門)까지의 궁장 밑

인가 20여 곳을 적어서 아뢰기를 ldquo법을 범하고 지은 집을 전번 적간(摘奸)할 때 미처 적어 올리지 못하였

으니 철거하게 하소서rdquo 하니 그대로 좇았다

『연산군일기』 51권 9년(1503 계해 명 홍치(弘治) 16년) 11월 13일(병자) 7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타락산(駝駱山) 밑 조영철(趙永哲) 등 27인의 집을 철거하고 요금문(曜金門) 밖의 김명철(金命

哲) 등 49인의 집과 돈화문에서 단봉문(丹鳳門) 밖까지의 박막동(朴莫同) 등 24인의 집도 함께 철거하라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62권 12년(1506 병인 명 정덕(正德) 1년) 6월 22일(경오) 3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창덕궁의 성을 경복궁의 성에 의해 쌓고 돈화문을 다시 짓되 높고 크게 하며 또 하마비(下馬

碑) 모퉁이에 문을 내라rdquo 하였다

2) 조선 후기

『광해군일기』 158권 12년(1620 경신 명 만력(萬曆) 48년) 11월 15일(무자) 3번째기사

전교하였다 ldquo거둥 때 치는 엄고(嚴鼓)가 다 깨지고 몸통도 작고 하여 보기에 너무 볼품이 없다 평상시처럼

종을 빨리 주조하여 돈화문(敦化門) 위에다 매달아두라 그리고 거둥 때 쓰는 엄고도 급히 다시 만들어 쓰도

록 하라 이를 해조로 하여금 각별히 거행하게 하라rdquo

『효종실록』 9권 3년(1652) 10월 28일(병인)

상이 병조에 하교하여 도방군(到防軍) 1백 50인을 내어 궁장(宮墻)의 나무를 베게 하고 또 공조middot한성부에

명하여 내시와 함께 궁장을 순심(巡審)하여 더 쌓고 궁장 밖 여염집의 담이나 지붕이 궁장에 잇닿은 것을

모두 헐게 하였다 이때 변괴가 날마다 나타나서 인심이 어수선하므로 상이 신변을 걱정하여 이 조처가 있

었는데 도하(都下)가 이 때문에 놀랐다

『효종실록』 15권 6년(1655) 11월 23일(계묘)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ldquo수리하는 일에 대해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요금문(耀金門) 안의 지형이 몹시 비좁다 궁장(宮墻)의 안에는 모름지기 내장(內墻)이 있어야

하고 내장의 안에는 모름지기 층루(層樓)를 세워야 하는데 누각이 내장에 들어서고 나면 전연 남는 땅이 없

을 것이니 이것도 또한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두 담장의 사이가 1장(丈) 남짓도 안 되니 순라가 왕래하

자면 어떻게 통행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도랑을 안으로 들이어 따로 궁장을 그 밖에 쌓아야만 순라가 왕

래하는 길이 들어설 수 있고 체모나 형세가 마땅함을 얻을 것이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rdquo 하니 부제학 김

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ldquo궁성(宮城)의 옛 제도를 넓히기는 어려울 듯합니다rdquo 하고 호조 판서 허적(許

積)이 아뢰기를 ldquo순라의 길이 단지 담장 하나를 사이로 두고 있다는 것도 또한 몹시 온당치 못한 일입니

다rdquo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ldquo나의 뜻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경들과 가부를

상의하려는 것이다rdquo하니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ldquo외부 사람의 말소리가 필시 궁안에 들릴 테

니 일이 몹시 난처합니다 그러나 익희의 말도 또한 유념해야 합니다rdquo하고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

뢰기를 ldquo지금 비록 넓히려 한다 하더라도 요금문으로부터 홍문관에 이르기까지 곡장(曲墻)의 제도를 사용한

다면 민가를 철거하는 것이 많은 양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rdquo 하였다 상이 설계도를 가져다가 보았는데

심지원이 아뢰기를 ldquo신이 일찍이 2백 60 70십 칸의 재력(財力)을 헤아려 보았는데 도합 재목이 1만여 조

(條)가 들어 3천 석의 쌀과 4백 동의 포(布)를 써야 하니 공역이 너무 방대해서 일이 몹시 우려할 만합니

다 칸수를 줄여서 비용을 절약하고 민폐를 더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rdquo 하고 익희가 아뢰기를 ldquo대신의 말

을 부디 유념하소서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공역이 어찌 여기에 이르겠는가rdquo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ldquo흠경각(欽敬閣)도 철거할 것입니까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철거하여 그 목재와 기와를 쓰고 총부(摠府)의

목재와 기와는 도로 총부에 주는 것이 좋겠다rdquo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ldquo총부와 옥당을 옮길 장소가 없습

니다rdquo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상의원은 창경궁 안으로 옮기고 옥당과 총부를 상의원 근처에다가 옮겨 짓는

것이 타당할 것같다rdquo 하였다

나 궁성문 궁장문

1) 궁성문

(1) 조선전기의 궁성문

① 돈화문

『태종실록』 23권 12년 5월 22일(을사)

도성(都城) 좌우의 행랑(行廊)이 완성되었다 궐문(闕門)에서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까지 행랑이 4백 72

간이고 진선문(進善門) 남쪽에 누문(樓門) 5간을 세워서 돈화문(敦化門)이라고 이름하였다 의정부에서

창덕궁(昌德宮) 문 밖의 행랑을 각사(各司)에 나누어 주어 조방(朝房)으로 만들 것을 청하고 또 아뢰었다

ldquo금년 가을에 행랑(行廊)을 수리하고 장식하는 일과 창고(倉庫)를 조성(造成)하는 등의 일에 유수(遊手)승도

(僧徒)와 대장(隊長)대부(隊副)로 하여금 역사에 나오게 하소서rdquo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24권 12년(1412 임진 명 영락(永樂) 10년) 9월 15일(정유) 2번째기사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돈화문(敦化門) 누각의 종명(鐘銘)을 짓게 하였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ldquo금상(今上) 13년 겨울 10월 일에 유사(攸司)에 명하여 종(鍾)을 주조하여 궁문(宮門)

에 달게 하시니 대개 고제(古制)를 따름이라 공덕을 새기고 또 군신(郡臣)의 조회하는 기회를 엄하게 하는

까닭이 됩니다 위대하도다 생각하건대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이미 훈덕

(勳德)이 높으심에 인심(人心)이 날로 돌아와 붙었으나 참소[讒]를 얽어대는 말이 비등하여 화란의 조짐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마침 제릉(齊陵) 곁에서 여막을 사시다가 일이 급함을 듣고 곧 오시

어 기미(幾微)에 응해 제재하시고 드디어 훈친(勳親)이 창의(倡義)하여 추대함으로써 대업(大業)을 세우셨습

니다 그 뒤 간신(奸臣)이 다시 난(亂)을 꾸미는 자 있었으나 우리 전하께서 즉시 평정하여 사직(社稷)을 안

전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아버이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시니 덕이 이보다 더 성함이 없고 나라를

열고 사직을 정하시니 공이 이보다 큼이 없으므로 진실로 종(鍾)과 정(鼎)에 명(銘)을 새겨 만세에 보이심이

마땅합니다 즉위하신 이래 하늘을 공경하고 대국을 섬기시어 다시 제명(帝命)을 받으심으로써 조상의 공훈

을 빛나게 하시고 성학(聖學)이 계속하여 밝음에 지극하여서 다스림이 융성함에 이르렀습니다 신종(愼終)과

보본(報本)하는 정성과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기르시는 어지심에 이르러서는 상경(常經)을 세우고 강기(綱

紀)를 펴신 넓은 규모와 큰 책략이 모두 다 백왕(百王) 위에서 높이 나왔습니다 이제 또 특명으로 종을 달

게 하심으로써 새벽과 밤의 한계를 엄히 하시니 자강불식(自彊不息)하고 서정(庶政)에 부지런히 힘쓰심으로

써 만세의 태평(太平)에 기초를 잡으신 까닭이 지극하고 유택(流澤)이 길고 해를 지남이 오래이기에 마땅히

이 종(鍾)과 같이 한없이 내려갈 것은 틀림없습니다 아 성하도다 또 그 꾀를 내고 힘을 바쳐 공훈의 맹세

에 참가한 사람들도 모두 뒤에다 새겨 이를 불후(不朽)에 전함이 옳겠기에 신(臣) 변계량(卞季良)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명을 지웁니다rdquo

명(銘)은 이러하였다

ldquo빛나도다 성조(聖祖)시여 동토(東土)에 강생하여 하늘의 경명(景命)을 받아 처음으로 큰 복을 열으셨도

다 예전 고려 말년에 정사가 흩어지고 백성이 유리(流離)하매 하늘이 우리님의 덕을 돌보아 인심(人心)이

돌아왔으나 이때에 참소하는 사특한 무리가 그 뭇사람의 마음을 좀먹어 우리를 모략함이 너무 급하매 화란

이 아침저녁으로 임박하였도다 효도롭다 성자(聖子)여 묘막에서 오시어 신기(神機)를 결정하니 진실로 어

려움이 형통하여 해가 솟아 오르듯 넓게 통하며 크게 빛났도다 이어서 얼아(孽芽)가 돋아 틈을 타서 위태함

에 다달았으나 하늘이 태조에게 후(厚)하여 그 후손을 창성하게 하시고 우리님에 이르러 저 여러 악당을 쓰

러뜨리니 여러 어진이가 꾀를 합하고 좌우에서 도우니 인륜이 크게 펴지고 종사(宗社)가 길고 오래리라

다시 높은 공을 세움은 실로 우리님이시나 공이 높되 차지 않고 덕이 성하되 차지 않으니 천감(天鑑)이 매

우 밝아 보우(保佑)를 이에 아뢰었도다 제명(帝命)이 거듭 이르니 용위(龍位)를 받음이 이대로다 금보(金

寶)는 빛나고 크기가 말[斗] 같도다 천총(天寵)이 잦으심은 전고에 으뜸이라 내 서울로 돌아와서 조무(祖

武)를 잘 잇고 조심조심 효성하여 끝까지 어김 없이 기강을 세우시니 모든 법도 밝아졌도다 신야(晨夜)를

엄히 하여 이 종을 매달으니 백사(百司)가 직에 힘써 감히 어김이 없고 면면(綿綿)한 종묘middot사직 천지같이

길고도 오래리라 내 절하고 명을 지어 무강(無彊)에 보이노라rdquo 호조 판서 한상경(韓尙敬)에게 명하여 이를

쓰게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ldquo공신으로 맹세를 위반한 자는 청컨대 그 이름을 삭제하게 하소서rdquo 하

니 임금이 ldquo역대(歷代) 공신의 선악(善惡)은 모두 전하니 비록 삭제하지 않더라도 가하다rdquo 하였다 정부에

서 맹약을 위반한 자의 명단을 모두 써서 다시 청하니 임금이 ldquo정도전(鄭道傳)middot장지화(張志和)middot심효생(沈孝

生)middot이근(李懃)middot신극례(辛克禮) 같은 자는 마땅히 모두 기록하게 하라rdquo 하였다

정부에서 또 ldquo종정(鍾鼎)에다 이름을 새기는 것은 만세(萬世)에 밝게 보이심이니 충성과 간사함이 서로

섞여서는 특히 불가한데 그 중에서도 신극례는 녹권(錄券)을 거두지 않았으니 혹시 아울러 기록함이 옳겠

습니다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25권 13년(1413 계사 명 영락(永樂) 11년) 1월 27일(정미) 2번째기사

큰 종[大鐘]을 주조하여 완성하였다 애초에 제도(諸道)의 주철(鑄鐵) 1만 5천 근(斤)을 거두어 주조하게 하

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자청(朴子靑)이 대장(隊長) 1천명으로 경성에 실어 들여오니 상호군 현귀명(玄貴

命)에게 명하여 내온(內醞)을 내려 주어 위로하고는 이를 돈화문(敦化門)에 매달았다

(2) 조선후기의 궁성문

『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지

남문은 돈화문 단봉문 북문은 광지문 서북문은 요금문 동문은 건양문 서문은 경추문 금호문이고 궁내에

어구교가 있다

『한경지략』

창덕궁 칠문은 광해군 원년 중건

돈화문 큰 북(인경 파루) 사헌부 관리만 출입

단봉문 돈화문 남우

건양문 동문-창경궁 통행

금호문 서문 현판(성임의 글씨) 대부분 관리 출입 입직 주서가 개폐 확인

경추문 더 서쪽문 늘 잠금 대장이 군사 동원시에만 염

요금문 더 서쪽문 현판(성종때 신자건의 글씨)

공북문 서북문 안쪽에 대보단 원래 신이천 박의 집터

2) 궁장문

(1) 조선 전기의 궁장문

『태종실록』 33권 17년 1월 9일(병신)

지신사 조말생(趙末生) 등에게 명하여 향(香)을 받들고 먼저 종묘(宗廟)에 나아가게 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말하기를 ldquo전조(前朝)의 임금들은 즉위한 뒤로 친사(親祀)함이 한두 번에 불과했으므로 종묘에 나아갈 때를

당하면 반드시 성례(盛禮)를 갖추었지만 나는 세사(歲事)로써 상례(常禮)를 삼고자 한다 무엇을 반드시 저

렇게 번거롭게 하여야 하겠는가 제삿날을 당하여 청재(淸齋)한 근신(近臣)을 거느리고 사잇길로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하고 이내 명하여 종묘의 북장(北墻)에다 작은 문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말생

에게 명하여 그 문으로 먼저 가게 하였다

『성종실록』 58권 6년(1475 을미 명 성화(成化) 11년) 8월 23일(기해) 7번째기사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서거정(徐居正)이 전교(傳敎)를 받들어 대궐의 문 중에 예전에 액호(額號)가 없

는 것은 각기 2개의 이름을 편액(扁額)하여 아뢰니 임금이 낙점(落點)하기를 창덕궁(昌德宮) 밖 동장문(東

墻門)은 선인문(宣仁門) 중간의 동장문(東墻門)은 경양문(景陽門) 신대문(新大門)은 장춘문(長春門) 중대문

(中大門)은 선명문(宣明門) 남협문(南夾門)은 춘흥문(春興門) 안 동장문(東墻門)은 건양문(建陽門) 북쪽 동

장문(東墻門)은 기화문(綺華門) 광연정(廣延亭)의 서참문(西岾門)은 평창문(平昌門) 남행랑문(南行廊門)은

영화문(永和門) 북행랑문(北行廊門)은 영평문(永平門) 내사복 남문(內司僕南門)은 운금문(雲錦門) 외동산문

(外東山門)은 연양문(延陽門) 좌협문(左夾門)은 광범문(光範門) 우협문(右夾門)은 숭범문(崇範門) 남장문(南

墻門)은 단봉문(丹鳳門) 내서장문(內西墻門)은 의추문(宜秋門) 좌달문(左闥門)은 숙장문(肅章門) 겸사복청

(兼司僕廳)의 신대문(新大門)은 연복문(延福門) 내사옹(內司饔)의 상동문(上東門)은 소춘문(小春門) 북문(北

門)은 소동문(小東門) 중궁(中宮)의 차비문(差備門)은 연희문(延禧門) 승정원(承政院)의 남문(南門)은 연영문

(延英門) 서행랑문(西行廊門)은 금호문(金虎門) 외서장문(外西墻門)은 진금문(鎭金門) 서장문(西墻門)은 요

금문(曜金門) 후원(後苑)의 북장문(北墻門)은 공진문(拱辰門) 신북장문(新北墻門)은 창합문(閶闔門) 동장문

(東墻門)은 청양문(靑陽門) 외북장문(外北墻門)은 광지문(廣智門) 경복궁(景福宮)의 다와지문(多臥只門)은

망춘문(望春門) 옛 동궁(東宮)의 남문(南門)은 동양문(東陽門) 동장문(東墻門)은 소화문(昭華門) 남장문(南

墻門)은 소휘문(昭暉門) 동장자문(東障子門)은 요의문(曜儀門) 남행랑문(南行廊門)은 금란문(金鑾門) 후원

(後苑)의 사복문(司僕門)은 상원문(上苑門) 북성문(北城門)은 신무문(神武門)으로 하였다

(2) 조선후기의 궁장문

3) 궁성문과 궁장문의 개폐 숙위 감문

『세종실록』 31권 8년 2월 27일(신묘)

병조에서 계하기를 ldquo궁성(宮城)을 순찰하는데 다만 별순총제(別巡摠制)로 하여금 초경(初更)에만 돌아보게

하고 있으니 실로 타당하지 못합니다 바라옵건대 사면에서 모두 방패(防牌)로 하여금 번을 서게 하고 중국

의 제도에 의하여 흔드는 목탁을 만들어서 밤마다 남문에서 번을 든 호군(護軍)이 증명을 본조에서 받아

인정(人停) 후부터 파루를 칠 때까지 방패 두 사람이 목탁을 울리면서 남에서 동으로 동에서 북으로 북에

서 서로 차례차례로 전해 주어서 다시 남문에 들여놓으며 첫번에 목탁을 울린 자가 동에 도착할 만한 때에

또 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목탁을 주어 먼저와 같이 빙빙 돌아서 끊일 사이 없게 하며 방패가 만일 시각

을 지체하고 전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논죄(論罪)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32권 8년(1426 병오 명 선덕(宣德) 1년) 6월 14일(병자) 5번째기사

병조에 전지하기를 ldquo앞으로는 인정(人停) 후와 파루(罷漏) 전에 궁성문을 열고 닫을 일이 있으면 입직한 병

조 당상관과 도진무와 승전색(承傳色)의 주서(注書)와 사약(司鑰) 일동(一同)이 열고 닫게 하라rdquo 하였다

『세종실록』 63권 16년(1434 갑인 명 선덕(宣德) 9년) 1월 15일(계사) 9번째기사

병조에 전지하기를 ldquo강무(講武)로 거둥했을 때 밤을 당하여 궁문의 개폐(開閉)는 한결같이 중궁의 명령에

의해 하라rdquo 하였다

『세종실록』 100권 25년(1443 계해 명 정통(正統) 8년) 6월 19일(임인) 3번째기사

병조에서 아뢰기를 ldquo궁성문(宮城門)을 만약 인정(人定) 후와 파루(罷漏) 전에 열고 닫을 때에는 입직한 병조

당상(堂上)middot도진무(都鎭撫)middot승전색(承傳色)middot주서(注書)만이 열고 닫을 수 있다고 일찍이 전지가 있었습니다

삼가 상고하니 당(唐) 고조(高祖) 때에 궁전문과 성문에는 교어부(交魚符)와 순어부(巡魚符)를 두고 좌우상

(左右廂)에는 개문부(開門符)와 폐문부(閉門符)를 두었는데 좌부(左符)는 궐내(闕內)에 바치고 우부(右符)는

감문(監門)에 두었으며 중종(中宗) 때에는 궁전(宮殿)middot황성(皇城)middot경성(京城) 금원문(禁苑門) 좌우 내외를 신

칙하고서 각각 교어부 한 짝 순어부 한 짝씩을 주고 좌상(左廂)에는 개문어부(開門魚符) 한 짝을 우상에는

폐문어부(閉門魚符) 한 짝을 주었는데 모두 우부는 감문에 교부하여서 무시(無時)로 여닫는 데 이를 쓰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성문에는 벌써부터 개문부(開門符)를 만들어서 상직(上職)하는 호군(護軍)이 매일 궐

내에서 받아 합부(合符)하고서 문을 여닫습니다 금성문은 관계가 더욱 중한데 부(符)를 험증(驗證)하는 일

도 없이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실로 미편합니다 또 도진무와 병조 당상 등이 일제히 모인 다음에 문을 여는

까닭으로 시간에 맞추여야 할 일은 반드시 늦어지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궁성문도 또한 옛 제도에 의해서

교어부 한짝을 만들어서 왼쪽은 궐내에 들이고 오른쪽은 상서사(尙瑞司)에 갈무리하였다가 입직(入直)하는

중추원(中樞院) 당상과 각 위(衛)의 절제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진무 한 사람을 거느리고 매일 대궐에서 받

아서 영추문(迎秋門)에 숙직하며 만약 제 시각이 아닌 때에 여닫을 일이 있으면 승정색(承傳色) 관자(官者)

가 명을 받들어 왼쪽을 가지고 주서(注書)middot사약(司鑰)과 함께 감문(監門)의 숙직하는 곳에서 오른쪽과 맞추어

본 다음에 문을 열게 하는 것으로써 항구(恒久)한 법식(法式)으로 삼으소서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실록』 2권 1년(1470 경인 명 성화(成化) 6년) 1월 8일(정해) 9번째기사

도총부(都摠府)에 전교(傳敎)하기를 ldquo지금 이후부터는 대궐 안의 밤 순라(巡邏)는 위장(衛將)으로 하여금 행

하게 하는데 북쪽은 동소(東所)middot서소(西所)middot북소(北所)의 위장(衛將)으로 남쪽은 남소(南所)의 위장(衛將)과

응양위장(鷹揚衛將)middot내금위 장(內禁衛將)으로 시각[更]을 나누어 번갈아 돌아다니게 하라rdquo 하였다

『성종실록』 125권 12년(1481 신축 명 성화(成化) 17년) 1월 12일(정해) 6번째기사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ldquo대궐문을 여닫는 데에 요금문(曜金門)과 금호문(金虎門)은 도총부 낭청(都摠

府郞廳) 1명 겸사복(兼司僕) 1명 중궁 사약(中宮司鑰) 1명이 관장하며 돈화문(敦化門)middot단봉문(丹鳳門)middot평창

문(平昌門)은 주서(注書) 1명 겸사복 1명 대전 사약(大殿司鑰) 1명이 관장하고 선인문(宣仁門) 밖의 사옹

문(司饔門)middot청양문(靑陽門)은 선전관(宣傳官) 1명 겸사복 1명 왕대비전 사약 1명이 관장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rdquo 하니 전교하기를 ldquo가하다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5월 13일(정유) 3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궐 안에 입직하는 군사가 너무 많아서 매우 어지럽다 내금위(內禁衛)middot선전관(宣傳官) 따위는

밖에 나갈 수 없으나 충찬위(忠贊衛)middot충순위(忠順衛)middot별시위(別侍衛) 따위는 돈화문(敦化門) 밖 좌우편 장랑

(長廊)에 입직하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6월 19일(임신) 5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군기(軍器)는 대궐 곁의 가까운 곳에 두어서 뜻밖의 일에 대하여야 하니 남은 돈화문(敦化門)

밖 서는 요금문(耀金門) 밖에 따로 집을 지어서 군기시(軍器寺)에 둔 것을 수를 헤아려서 나누어 두라rdquo 하

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6월 23일(병자) 2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동middot서 금표(禁標) 중에서 동이 더욱 막힌 것이 없으니 이계동(李季仝)으로 하여금 다시 살펴서

물려 쌓게 하며 돈화문(敦化門) 밖 좌우 행랑(行廊) 곁에 가까운 인가(人家)를 모두 철거시키고 행랑을 따라

담을 쌓아 군영(軍營)의 하마비(下馬碑)를 한계로 삼고 궐문(闕門)을 두는 것이 어떠한가 큰일을 이루고자

하거늘 어찌 많이 철거하는 것을 꺼리랴rdquo 하였다 이때부터 성안의 인심이 들끊어 혹 거짓 전하는 말이

lsquo성안에 사는 사람을 모조리 쫓아내고 숭인문(崇仁門)middot돈의문(敦義門)을 궐문으로 삼으므로 오래 편안할 계

책이 없다rs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61권 12년(1506 병인 명 정덕(正德) 1년) 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궁금(宮禁)은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매양 수위하는 데 있어 마땅히 변을 당했을

때와 같이하여 각문을 수직하는 군사를 60명을 더 정하고 항상 갑옷을 입게 하라 수문장은 또 심지가 순근

(純謹)한 자로 수를 늘려서 입직하게 하라 단봉문(丹鳳門)middot금호문(金虎門) 등은 돈화문(敦化門)의 예에 따라

창middot칼 등의 물건을 모두 가지게 하되 칼날이 대궐로 향하지 말게 할 것과 가마를 시위하는 충철위middot보려대

로 입시한 자는 칼을 차지 못하게 할 것과 입직한 사람도 또한 대궐을 향하여 활시위를 잡아당기지 못하게

하는 일은 이미 금령(禁令)이 있었으니 앞으로는 거듭 밝혀 엄하게 금하라rdquo 하였다

『광해군일기』 103권 8년(1616 병진 명 만력(萬曆) 44년) 5월 13일(임오) 10번째기사

정원이 아뢰기를 ldquo전 황해 감사 윤조원(尹調元)을 잡아 올 일로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내보내기 위하여 궐문

및 외문(外門)을 유문(留門)해야 합니다 개문 표신(開門標信)과 돈화문(敦化門) 부험(符驗) 및 밀갑(密匣)을

출급하소서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만기요람』 군정편 2(軍政編二) 훈련도감(訓鍊都監) 궁장 밖의 순라(宮墻外巡邏)

인조 6년 무진(1628년)에 규례를 정하였다 초경 남영(南營)의 초관(哨官)이 입직한 마병 20명을 거느리고

두 바퀴를 순행한다 3경 광지영의 초관이 입직한 군졸 20명을 거느리고 두 바퀴를 순행한다 또 별순라(別

巡邏)가 있는데 영종 9년 계축(1733년)에 규례를 정하였다 장교 1명과 졸병 5명이 초경부터 날이 샐 때까

지 순행하며 집춘문 북쪽ㆍ상수문(上水門) 서쪽에서 공북문까지에 이르는데 별기대 1명과 광지영(廣智營)

입직군 5명 또 따로 기패관 1명과 별무사 1명을 정하여 경을 나누어 도순(都巡) 감독한다 장관이 또 감찰

한다 초일과 종일에는 북영에 입직한 파총이 중일에는 당상장관이 언제나 파루(罷漏)친 뒤에 모두 입직군

5명을 거느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구역내를 감찰한다

『영조실록』 3권 1년(1725 을사 청 옹정(雍正) 3년) 2월 20일(무자) 5번째기사

주강에서 민진원이 노은동 서원의 면세를 최진한이 금군의 수직을 논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중략- 무신(武臣) 최진한(崔鎭漢)이 진달하기를 ldquo궁성(宮城) 안에 입직(入

直)하는 군병(軍兵) 수직(守直)하는 사환(使喚) 이외에는 군병을 단속하고 훈국(訓局)의 2백 명을 금호문(金

虎門)과 홍화문(弘化門) 두 문에 나누어 수직하며 금위(禁衛) 1백 명을 건양문(建陽門)에 입직하고 금려(禁

旅) 1백 명은 인정전(仁政殿) 대정(大庭) 아래에 입직하게 해야 합니다 훈군(訓軍)은 안에서 입직함이 중하

니 매달 세 차례씩 해영(該營)에서 습진(習陣)할 때 내어 쓰지 말며 금위군 및 금려는 해영에서 습진할 때

표신(標信)을 제거하고 내어 써 매달 세 차례 신지(信地)인 금위를 공허하게 만들며 향군(鄕軍)은 생소(生

疎)하니 습진에 내어 쓰는 것도 한 방도일 듯합니다 그러나 금려에 이르러서는 군법(軍法)에 익숙함이 훈졸

(訓卒)에게 뒤지지 않으며 대정(大庭)에 직숙하는 것이 훈졸(訓卒)의 직소(直所)에 비할 것이 아닌데도 매번

내어 써 숙위(宿衛)를 중히 여기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신(將臣) 신여철(申汝哲)이 죽을 때 소신

(小臣)이 가서 보았더니 신여철이 말하기를 lsquo입직하는 금군은 내어 쓰는 것이 부당할 듯하여 내가 계달(啓

達)하여 변통하려고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으니 젊은 무변(武弁)은 이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rsquo라고 하였습니

다rdquo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효종(孝宗) 때 비로소 금군(禁軍)을 설치하였으니 뜻이 있는 바가 있는 것이

다 금위군(禁衛軍)을 내어 쓰지 않을 수 없으나 금군은 습진(習陣)할 때 내어 쓰지 말라는 뜻을 병조로 하

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rdquo 하니 병조에서 청하기를 ldquo최진한의 말에 따라 시행하소서rdquo 하니 그대로 따랐

다 또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후략---

『영조실록』 10권 2년(1726 병오 청 옹정(雍正) 4년) 11월 2일(경인) 2번째기사

임금이 대조전(大造殿)인 곧 창덕궁으로 환어(還御)하였다 병조에서 홍화문(弘化門)은 그전처럼 도로 닫아버

리고 돈화문(敦化門)의 표신(標信)에 따라 여닫되 건양문(建陽門)에는 입직(入直)하는 군사를 차출하고 동룡

문(銅龍門)도 파수(把守)를 해야 하는 뜻으로 아뢰니 윤허하였다

『정조실록』 4권 1년(1777 정유 청 건륭(乾隆) 42년) 11월 17일(기묘) 1번째기사

하교하기를 ldquo숙위 대장(宿衛大將)이 이미 대궐 안 각 곳의 숙위를 도맡게 되었으니 그 관할(管轄)하는 방도

에 있어서 마땅히 서로 유지(維持)해 가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안으로는 위장(衛將)middot부장(部將)middot금군 도감(禁

軍都監)의 군병(軍兵)middot각 문의 수문장(守門將)middot국별장(局別將)과 밖으로는 궁궐 담장 밖에 삼영(三營)에서 입

직(入直)한 순라(巡邏)들이 날마다 사고 유무를 숙위 대장에게 신보(申報)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군사의 체

대(替代)도 또한 마땅히 통괄(統括)하게 될 것이니 위장middot부장middot내삼청(內三廳)middot금군(禁軍)과 금호문(金虎門)middot홍

화문(弘化門)middot건양문(建陽門) 장관(將官)의 군병(軍兵) 및 국별장(局別將)middot유청군(有廳軍) 등은 3일 마다 체대

한 단자(單子)를 숙위소(宿衛所)에 내야 하고 숙위소에서는 해방(該房)에 보내어 봉입(捧入)하게 해야 한다

또 도총부(都摠府)와 병조는 소속 관사들과는 다름이 있어서 또한 서로가 통지(通知)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

이니 순검(巡檢)하는 등 일로 숙위소에서 거행하는 일과 관계되는 것 같은 것은 숙위 대장에게 문이(文移)

해야 함을 현저한 격식(格式)으로 삼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정조실록』 17권 8년(1784 갑진 청 건륭(乾隆) 49년) 5월 22일(병자) 2번째기사

병조에서 감문 절목(監門節目)을 올렸다 이 날에 내사복(內司僕)의 소동문(小東門)이 저절로 열려 병조

에서 아뢰니 하교하기를 ldquo문고리는 넓고 자물쇠는 작은 소치이지 다른 간사한 정(情)은 없을 듯하나 일이

숙위(宿衛)의 분군(分軍)하는 것이 효잡(淆雜)스런 것과 관계되니 특별히 병조 판서를 추고하라rdquo 하고 병

조에 명하여 절목을 만들라고 명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ldquo옛날에는 좌직(坐直)3719) 하는 승지가 합문에서 조석으로 문안하였기 때문에 저녁 문안 후 자물쇠를

청하여 문을 닫고 아침 문안 때 열쇠를 청하여 문을 열었다 근래에는 이 규정이 없어졌으니 마땅히 즉시

참조하여 획일적인 규식을 정하라 지금부터는 열쇠 내주는 것을 좌직하는 승지가 전담하여 보관하고 자물

쇠를 연 후에는 해방 승지(該房承旨)가 주관하여 관장하되 마땅히 수리해야 하는데도 수리하지 않으면 해당

승지를 의금부에 내려서 중히 감죄하고 주서(注書)와 총랑(摠郞)middot선전관(宣傳官)middot사약(司鑰) 가운데서 해당

문을 관리하는 사람 역시 유사(攸司)로 하여금 감단(勘斷)하라

병조에서 순검하면서 자물쇠를 확인하는 것은 본디 직장(職掌)이니 건양문(建陽門) 동서를 경계로 하여

수문장(守門將)과 위장(衛將)과 함께 같은 죄를 주고 만일 파손된 곳이 있으면 즉시 와서 고해야 하며 색승

지(色承旨)가 수리하는 한 조항은 신시(申時) 이전은 해방(該房)에서 관장하고 신시 이후에는 좌직(坐直) 하

위(下位)가 관장하는 것으로 정식(定式)하여 신명하라 이후로 성문middot궐문의 자물쇠는 호조 낭관이 감독해 만

들어서 판서가 구검(句檢)하는 것을 일체 절목으로 만들어 계하하라 이렇게 정식하면 도총부 낭관이 돈화

문(敦化門)을 관리하는 것은 아주 의미가 없으니 선전관이 돈화문을 관리하고 도총부 낭관은 통화문(通化

門)과 선인문(宣仁門)을 관리하라rdquo

하였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 1 각문(各門)의 개폐(開閉)는 옛날 예대로 승정원이 주관한다 자물쇠를 잠근 후

에 열쇠는 좌직(坐直) 하위(下位)가 친히 받아서 사(司)에 보관한다 그 출납은 자물쇠를 연후에 자물쇠와 열

쇠를 해방 승지가 친히 받아서 보관하고 신시(申時) 이후에는 상직(上直) 하위 승지에게 전해 보관하게 한

다 1 각문의 관할은 건양문(建陽門) 동서를 경계로 한다 서쪽은 서middot남 양소(兩所)에서 분장하는데 병조의

담당이다 동쪽은 동middot북 양소에서 분장하는데 도총부 담당이다 수문장은 각기 그 부근에 가는데 소남문(小

南門)은 단봉문(丹鳳門) 수문장이 겸관(兼官)하고 소동문(小東門)은 선인문(宣仁門) 수문장이 겸관하는데 만

일 섬가지 않은 일이 있으면 엄법으로 감처(勘處)한다 1 각문의 자물쇠에 만일 파손되어 고쳐야 할 곳이

있으면 해당 문의 수문장이 해소(該所) 부장(部將)을 안동(眼同)하여 각각 그 자내(字內)에 가서 고하면 병

조나 혹은 도총부의 낭청이 친히 가서 살피어 승정원에 고하는데 고치는 절차는 신시 이전에는 해방에서

관장하고 신시 이후에는 좌직 승지가 관장한다 1 각문을 개폐할 때 감약(監鑰)은 돈화문(敦化門) 요금문

(曜金門) 단봉문(丹鳳門)은 선전관이 금호문(金虎門)은 주서(注書)가 홍화문(弘化門) 선인문(宣仁門) 통화

문(通化門)은 도총부 낭청이 담당하되 각 해당 문의 수문장 및 담당 사약(司鑰)이 안동하여 거행한다 1 병

조 낭청 및 도총부 낭청이 야순(夜巡)할 때 각문의 자물쇠는 그 내자(字內)에 따라서 해당 수문장을 안동하

여 살피되 소동문(小東門) 소남문(小南門)도 일체로 조검(昭檢)한다 1 각처 수문(水門)의 중대한 열쇠를

해소에 보관하는 것은 일이 매우 미안하니 남수각(南水閣) 수문(水門)은 돈화문 수문장이 겸관하고 북수각

(北水閣) 수문은 요금문 수문장이 겸관하여 파손된 곳의 수리와 조검(照檢) 때살피는 등의 절차는 다른 문

의 예에 의해서 시행한다 1 성문과 대궐문을 잠그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니 지금을 시작으로 해서 자물쇠

를 수리할 때에는 호조 낭청이 몸소 감조(監造)하고 판서가 구검(句檢)한다 1 각문을 나누어 담당시키는

것이 비록 건양문 동서를 경계로 삼았으나 병조는 이미 궐내 각처를 관할하는 처지이니 경계를 정하였다 하

여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며 건양문 동쪽 역시 총괄하여 검찰해야 한다】

『정조실록』 27권 13년(1789 기유 청 건륭(乾隆) 54년) 1월 19일(병자) 3번째기사

승정원이 병조 당상관의 당직 교체 일로 인하여 금호문(金虎門) 출입 표신을 내줄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ldquo대궐 안의 각문을 유문(留門)하였을 때 조정 신료가 드나들지 못할 문은 원래 없는 것이다 체통이 막중한

대신과 대신(臺臣)의 체통이 근래 궁인(宮人)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하는 요금(曜金)middot통화(通化) 두 문도 구

애되지 않고 출입하였던 사실을 《당후일기(堂后日記)》를 보면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몇

해 전부터 막중한 대궐문을 마치 각 부서에서 나누어 맡은 것처럼 돈화문(敦化門)은 대간에 금호문은 조신

(朝臣)에 단봉문(丹鳳門)은 중관(中官)에 선인문(宣仁門)은 사복시(司僕寺)에 각각 소속되어 마치 서로 어겨

서는 안 될 무슨 정해진 한계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유문하고 있을 때라도 열려 있는 문을

놔두고서 유문 표신을 따로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종전에도 누차 신칙했지만 끝내 고칠 줄을 모르

니 당해 승지를 파직하고 앞으로는 유문할 때 뿐만 아니라 아침과 낮에 공사로 들어올 때에도 따로 출입하

는 문을 정하지 말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순종실록』 2권 1년(1908 무신 대한 융희(隆熙) 2년) 4월 1일(양력) 4번째기사

포달(布達) 제2호 〈창덕궁 정문을 개폐 통행을 제한하는 규정〔昌德宮正門開閉通行定制限〕〉을 공포하였

다 문로

- 왕비 책봉 의식과 문로

『성종실록』 123권 11년(1480 경자 명 성화(成化) 16년) 11월 8일(갑신) 1번째기사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니 백관(百官)이 사배(四拜)를 마쳤다 임금이 왕비를 책봉(冊封)하고 교명

(敎命)middot책보(冊寶)middot명복(命服)을 정사(正使)인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부사(副使)인 호조 판서(戶曹判

書) 이철견(李鐵堅)에게 주어 인정문(仁政門)을 경유하니 고취(鼓吹)가 앞에서 인도하는데 다음은 교명(敎

命)이고 다음은 옥책(玉冊)이고 다음은 보(寶)이고 다음은 의장(儀仗)이었다 사자(使者)가 수행하여 선정문

(宣政門) 밖 막차(幕次)에 이르니 왕비가 선정전(宣政殿) 월랑(月廊)의 배위(拜位)에 나아가 교명(敎命)middot책보

(冊寶)middot명복(命服)을 받았는데 그 교명에 이르기를 -후략-

- 선정전의 정문 돈례문

『명종실록』 27권 16년(1561 신유 명 가정(嘉靖) 40년) 4월 8일(정유) 1번째기사

밤에 돈례문(敦禮門)【선정전(宣政殿)의 어문(御門)이다】 및 어둑(御纛)에 벼락이 쳤다【내일 상참(常參)이

있어 어문(御門)에 내다 세워 놓았는데 문선(門扇)과 둑간(纛竿)이 벼락에 맞아 부러졌다】

- 발인시 왕과 재궁의 문로

『연산군일기』 3권 1년(1495 을묘 명 홍치(弘治) 8년) 2월 8일(임술) 4번째기사

빈전 도감(殯殿都監)이 아뢰기를 ldquo재궁(梓宮)이 동가(動駕)할 적에 전하께서 돈화문(敦化門) 안에서 지송(祗

送)하셔야 하는데 전하께서 만약 재궁을 수행하여 빈청(賓廳) 앞을 경유하시어 진선문(進善門) 밖으로 나가

신다면 잡인(雜人)이 요란스러울 뿐더러 길도 협착하니 전하께서 도보(徒步)하시기도 역시 어렵습니다 만

약 권도(權道)를 따라 먼저 막차(幕次)에 나아가시기로 하면 전하께서 조전(祖奠)을 행하신 다음에 소교(小

轎)를 타시고 인화문(仁和門)을 벗어나 인정전(仁政殿) 앞을 경유하여 먼저 돈화문 안으로 나가시면 되는데

돈화문 안도 역시 협착하니 마땅히 막차(幕次)를 진선문(進善門) 동편에 마련하고 서쪽을 향하여 지송(祗送)

하셔야 옳겠습니다 또 우제(虞祭)를 행한 뒤에 대비(大妃)께서 진향(進香)하시는 것은 예문이나 전례에 없습

니다 이극돈(李克墩)middot성현(成俔) 등의 뜻은 하현궁(下玄宮)하고 흙으로 절반쯤 메우고 제주(題主)하고 한낮

에 우제(虞祭)를 지내므로 절차가 매우 많고 반혼(返魂)이 이를지 늦을지 그것도 또한 알 수 없으니 그날

우제 뒤에 대비께서 진향(進香)하기는 진실로 어려울 것인데 만약 대비의 망극하신 정을 따르기로 한다면

반혼한 뒤에 대비께서 혼전(魂殿)에 나아가 조석 상식할 때를 기다려서 나와 보시는 것이 어떨까 하였고 윤

효손(尹孝孫)의 뜻에는 이런 것이 예문에 실리지 않았으니 우제 후에 대비의 진향은 수시로 행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rdquo 하였다

- 세자 책봉후 경유해야 할 문로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 청 순치(順治) 2년) 9월 19일(정묘) 2번째기사

예조가 아뢰기를 ldquo세자가 책봉을 받은 다음 건양문(建陽門)을 경유하여 곧장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가서

는 안 되고 홍화문(弘化門) 앞 바른 길을 경유하되 여련(輿輦)과 의장(儀仗)을 갖추어 성 안 사서(士庶)들로

하여금 충분히 보게 한 다음에 돈화문(敦化門)을【 곧 창덕궁의 정문(正門)이다】 거쳐 들어가는 것이 타당

할 듯합니다rdquo 하니 답하기를 ldquo궐내(闕內)로부터 직접 동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rdquo 하였다 책

례 도감이 또 이 일로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 발인시 왕의 문로

『현종실록』 즉위년(1659 기해 청 순치(順治) 16년) 10월 28일(을묘) 1번째기사

대행 대왕의 재궁(梓宮)을 발인(發靷)하였다 자시(子時)에 견전례(遣奠禮)를 행하였는데 인시(寅時)에

내전에서 약방에 죽력(竹瀝)과 생강즙을 구해 들이도록 하였다 이 때 좌상 심지원이 총호사로서 인화문(仁

和門)에 있었는데 중사(中使)를 통해 자전이 너무 슬퍼한 나머지 기절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아뢰기를

ldquo발인할 시각이 이미 박두했는데 삼가 듣건대 자전께서 편찮으시다 하니 잠시 시각을 물리소서rdquo 하니 상

이 따랐다

얼마 뒤에 지원이 또 아뢰기를 ldquo자전께서 이와 같으니 교외에 거동하시는 일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됩니

다 뭇 의논도 모두 전하께서 궐문 밖에서 배사(拜辭)함이 마땅하다고들 합니다 모름지기 빨리 하교하셔야

만 일을 분부하고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자전의 기후(氣候)가 조금 차도가 있는

듯하니 발인하는 시각은 그대로 하라rdquo 하였다

파루(罷漏) 후에 재궁(梓宮)을 받들어 대여(大轝)에 올리고 이어 출발하였다 상이 소여(小轝)를 타고 인

화문(仁和門)으로 나왔는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인정문(仁政門) 밖에 이르러 상이 여(轝)에서 내려 연(輦)

을 탔는데 백관은 모두 걸어서 수행하였다 흥인문(興仁門)을 나와 동관왕묘(東關王廟) 뒤쪽 노제(路祭) 지

내는 곳에 이르러 대여를 악차(幄次)에 봉안하였는데 상도 연에서 내려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의정부와 충

훈부가 노제를 끝마치자 대여가 출발하였다 상이 막차에서 나와 봉사위(奉辭位)로 나아가 동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통곡하며 가슴을 쳤다 대여가 멀어지자 상이 환궁하였다

- 즉위식 의례 설행 문로

『숙종실록』 1권 즉위년(1674 갑인 청 강희(康熙) 13년) 8월 23일(갑인) 1번째기사

왕세자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중략- 이날 성복(成服)을 마치고 왕세자가 관면(冠冕)과 길

복(吉服)을 갖추고 규(圭)를 쥐고 여차(廬次)40) 로부터 걸어가면서 곡(哭)하였다 내시(內侍) 2인이 좌우(左

右)에 끼고 보호하여 선정전(宣政殿) 동쪽 뜰에 나아가 빈전(殯殿)을 향하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섬돌

에 올라가 전내(殿內)의 향안(香案) 앞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는 내려와 그전 자리로 돌아와서 또 네 번

절하고 동쪽 행랑의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왕세자가 선정문(宣政門)으로부터 걸어 나와서 연영

문(延英門)을 따라 가서 숙장문(肅章門)을 나와서 인정문(仁政門)에 이르니 승지와 사관(史官)이 따라 나갔

다 왕세자가 서쪽을 향하여 어좌(御座) 앞에 서서 차마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슬피 울기를 그

치지 아니하였다 승지와 예조 판서가 서로 잇달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를 권하였다 삼공(三公)이 도승지

와 더불어 나아가 왕세자를 부축하면서 번갈아 극진히 말하였다 왕세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우니 이 날

뜰에 있던 백관(百官)과 군병(軍兵)으로서 목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세자

가 어좌(御座)에 오르니 백관들이 사배(四拜)하고 의식대로 산호(山呼)하였다 예를 마치자 사왕(嗣王)이 인

정문(仁政門)으로부터 인정전(仁政殿)에 올라가 인화문(仁和門)으로 들어와서 여차(廬次)로 돌아왔는데 우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 즉위식 의례 설행 문로

『영조실록』 1권 즉위년(1724 갑진 청 옹정(雍正) 2년) 8월 30일(경자) 1번째기사

경종 대왕(景宗大王) 4년【청(淸)나라 옹정(雍正) 2년이다】 8월 을미(乙未)【25일이다】에 경종 대왕이

창경궁(昌慶宮)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昇遐)하였다 그 후 6일째 되는 날인 경자6) 오시(午時)에 왕세제

(王世弟)가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원상(院相)middot승지(承旨)middot사관(史官)은 조복

(朝服) 차림으로 돈례문(敦禮門) 밖 서정(西庭)에 동쪽을 향하여 앉고 홍문관(弘文館)은 승정원(承政院)의 다

음에 앉고 시강원(侍講院)은 동정(東庭)에 서쪽을 향하여 앉고 익위사(翊衛司)는 시강원의 다음에 앉고 병

조(兵曹)middot도총부(都摠府)는 융복(戎服) 차림으로 동쪽middot서쪽에 앉아서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왕세제(王世弟)가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차(廬次)에서 나오니 좌통례(左通禮)가 왕세제를 인도하여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빈전(殯殿)에 나아가 서계(西階)를 거쳐 욕위(褥位)에 올라갔다

찬의(贊儀)가 큰 소리로 lsquo배(拜) 궤(跪)rsquo 하고 선창(先唱)하니 좌통례(左通禮)가 낮은 소리로 lsquo궤(跪)하

소서rsquo 하고 고하기를 ldquo사왕(嗣王)은 보위(寶位)를 받으소서rdquo 하였다 상향례(上香禮)를 마치고 왕세제(王世

弟)가 내려와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막차에서 나와 걸어서 돈례문(敦禮門)의 동쪽 협문(夾門)

을 지나 동계(東階)로 내려가 연영문(延英門)을 거쳐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꺾어 숙장문(肅章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나가서 북쪽으로 꺾어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 밖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 그 곳 한복판

에 어좌(御座)를 설치하였는데 왕세제가 어좌에 올라가니 백관(百官)이 네 번 절하고 lsquo천세(千歲)rsquo 하고 호

창(呼唱)하였다

임금이 어좌에서 내려와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들어가 인정전(仁政殿) 정로(正路)를 거

쳐 인정전에 올라갔다 임금이 여차(廬次)로 돌아와 면복(冕服)을 벗고 최복(衰服)을 다시 입었다 이보다 4

일 전에 예조(禮曹)에서 사위(嗣位)하는 절목(節目)을 올렸는데 왕세제가 영지(令旨)를 내려 돌려주게 하였

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하루 세 번씩 도로 올렸으며 승정원(承政院)middot사헌부(司憲府)middot

사간원(司諫院)middot홍문관(弘文館)에서도 번갈아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성복(成服)하

는 날에 이르러 외부 의식이 이미 마련된 다음에 원상(院相) 이광좌(李光佐)가 여차(廬次) 앞에 이르러 면복

(冕服)으로 갈아입기를 간청하였으나 왕세제가 눈물을 흘리며 점침(苫枕)에 엎드려서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

였다 이광좌가 왕대비전(王大妃殿)과 왕비전(王妃殿)의 승전색(承傳色)을 불러 구전(口傳)으로 내전(內殿)에

서 나아가도록 계청(啓請)하니 왕대비전과 왕비전에서 언문 교지(諺文敎旨)를 내려 나아가도록 권유하였다

그제서야 왕세제가 남여(籃輿)를 물리치고 걸어서 어좌(御座) 앞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울부짖으며 어좌

에 오르지 않고 말하기를 ldquo내가 옛날에 여기에서 영고(寧考)를 모셨었는데 지금 무슨 마음으로 어좌에 오를

수 있겠는가rdquo 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이광좌 등이 누누이 간청하니 한참 후에 등극(登極)

하였다 정시(正時)가 되니 예조(禮曹)에서 비로소 사시(巳時)가 되었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오시(午時)에

이르러 마침내 즉위(卽位)하고 혜순 자경 왕대비(惠順自敬王大妃) 김씨(金氏)를 높여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왕비(王妃) 어씨(魚氏)를 왕대비(王大妃)로 빈(嬪) 서씨(徐氏)를 왕비(王妃)로 삼고 마침내 인정문(仁政門)에

서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였는데 이르기를 ldquo왕은 말하노라 -후략-

- 대보단에 거둥하여 망위례를 거행할 때의 문로

『영조실록』 61권 21년(1745 을축 청 건륭(乾隆) 10년) 3월 9일(신사) 2번째기사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망위례(望位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영화당

(映花堂)에서 승여(乘輿)를 타고 나왔는데 산선(繖扇)과 시위(侍衛)를 평상시의 의례대로 하였다 조종문(朝

宗門) 밖에 이르러 승여에서 내려 막차(幕次)로 들어 갔다가 얼마 후 다시 나와 승여에서 내려 조종문으로

들어가면서 명하기를 ldquo오위장(五衛將) 이하 당하(堂下) 시위는 모두 삼문(三門) 밖에서 뒤떨어지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중문(中門) 밖에 이르러 임금이 규(圭)를 잡고 동문(東門)을 거쳐 판위(版位)로 들어가 사배례(四拜

禮)를 행하고 동유문(東壝門)으로 들어가 동폐(東陛)를 거쳐 봉심(奉審)하고 다시 판위에 돌아와 희생(犧牲)

을 친히 살폈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황단(皇壇)에 성우(騂牛)를 쓰는 것이 무슨 뜻을 취한 것인가rdquo 하니 승지 오수채(吳

遂采)가 말하기를 ldquo황조(皇朝)에서 화덕(火德)을 숭상했기 때문에 성우를 쓴 것입니다rdquo 하였다 임금이 향

악차(香幄次)에 나아가 대축(大祝)에게 명하여 향축궤(香祝櫃)를 내오게 하고 친히 살폈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향악차가 만약 눈과 비를 맞으면 습기에 젖기가 쉬우니 지금 이후에는 향축을 신실(神室) 안으로 봉안해야

한다rdquo 하고 인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기를 명하였다

- 선정전 어진을 영희전으로 이봉할 때의 문로

『영조실록』 67권 24년(1748 무진 청 건륭(乾隆) 13년) 2월 25일(기묘) 4번째기사

선정전(宣政殿)의 영정(影幀)을 영희전(永禧殿)으로 이안(移安)할 때 전하가 수가(隨駕)하여 출궁(出宮)middot환궁

(還宮)하는 의식은 이러하다【선정전 망전례(望殿禮)와 봉심(奉審) 및 영희전 망전례와 봉심에 대한 의주(儀

註)도 아울러 붙인다】 기일에 앞서 액정서(掖庭署)에서 선정전 동쪽 뜰 아래와 돈례문(敦禮門) 밖 길 동쪽

에다 서쪽을 향하여 소차(小次)를 설치한다 왕세자의 위차는 연영문(延英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하의 망전례(望殿禮) 위차는 전정(殿庭)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자의 위차는

전하의 판위 뒤에 남쪽 가까운 데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의(典儀)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위차를 선

정문 밖에 설치하는데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하고 모두 매 등급마다 위차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쪽

을 향하게 한다 또 전하의 소차를 영희전 대문 안에 설치하고 망전례의 위차는 재전(齋殿) 정문 안에다 동

쪽에 가깝게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위차를 재전의 문밖에 설치하는데 동서

(東西)로 나누어 위차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쪽을 향하게 한다 또 영정을 임시로 봉안할 대차(大次)를 영희

전 신문(神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는데 악차(幄次)는 대차 안에 설치한다【신탑(神榻)을

설치한다】 전하의 입위(立位)는 대차 앞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자가 지영(祗迎)하는 위

차는 흥화문(興化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그날 초엄(初嚴)을 치면 병조에서 제위(諸衛)

를 정돈하여 노부(鹵簿)와 의장(儀仗)을 건명문(建明門) 밖에서 의주(儀註)대로 진설하며 장악원(掌樂院)에서

경현당(景賢堂) 뜰 남쪽 가까이에 북쪽을 향하여 헌현(軒懸)한다【출궁(出宮)할 때에는 진설만 하고 연주하

지않으며 환궁(還宮)할 때는 음악을 연주한다】 종친과 문무 백관은 모두 조방(朝房)에 모여서 각기 흑단령

(黑團領)을 입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은 연(輦)을 숭현문(崇賢門) 밖에다 대고 여(輿)를 합문(閤門) 밖에다

댄다 이엄(二嚴)을 치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모두 흥화문(興化門) 밖에 있는 시립위(侍立位)로 나아간다 왕

세자가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서 여(輿)를 타고 흥화문 밖으로 나아가 위차로 들어가면

여러 호위하는 관원들은 각기 해당되는 옷을 입고 모두 합문 밖으로 나아가 기다린다 좌통례가 합문 밖으

로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이 되었음을 계청한다 삼엄(三嚴)을 쳐서 북소리가 그치면 내외(內外)의 문을

열며 좌통례가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뢴다 전하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나가며 산선(산

扇)middot시위(侍衛)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좌통례가 앞에서 인도하고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이 보(寶)를 받들고

앞서서 간다【연(輦)에 타기를 기다려 보(寶)를 말에다 싣는다】 어가(御駕)가 숭현문 밖에 이르러 좌통례

가 꿇어앉아 여(輿)에서 내려 연(輦)을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려 연을 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한다 어가(御駕)가 움직이면【고취(鼓吹)는 진설만하고 연주하지 않는다】 좌통례middot우통례

가 앞에서 인도하고 찬의(贊儀) 2인이 통례의 앞에 있는데 장위(仗衛)와 도종(導從)은 보통의 의례와 같다

어가가 흥화문 밖에 이르면 왕세자가 위차에서 나와 몸을 굽히는데 지나가고 나면 평신하고 이어 연(輦)을

타고 어가를 따른다 어가가 시신(侍臣)들의 상마소(上馬所)에 이르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어가가 조금 머물

러 시신들로 하여금 말을 타게 할 것을 계청하고 뒤이어 시신들에게 말을 타라고 외친다 찬의가 전창(傳唱)

하여 시신들이 모두 말을 타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한다 어가가 움직이면 종친과 문무 백

관이 몸을 굽혀 지영(祗迎)하고 왕세자가 이를 적에도 몸을 굽히는데 지나가고 나면 평신하며 순차에 따라

시위한다 어가가 창덕궁 돈화문 밖에 있는 시신의 하마소(下馬所)에 이르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어가가 조금

머물러 시신들로 하여금 말에서 내리게 할 것을 계청하는데 시위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하면 돈화문 동협(東夾)을 거쳐 들어간다 어가가 숙장문(肅章門) 밖 강련소(降輦所)에 이

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연에서 내려 여를 탄다 좌통례

가 앞에서 인도하여 선정문 밖 강여소(降輿所)에 이르러【시신은 이에 물러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

(輿)에서 내릴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린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돈례문(敦禮門) 밖에

이르러 소차(小次)로 들어가면【돈화문에서 돈례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협(東夾)을 경유하는데 이 뒤도 이

와 같다】 산선과 시위는 선정문 밖에 정지한다 왕세자가 창덕궁 돈화문 밖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려 여

(輿)를 타고 서협(西夾)을 거쳐 들어가는데 연영문 밖에 이르러 여에서 내려 소차로 들어간다【돈화문에서

돈례문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서협(西夾)을 경유한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해엄(解嚴)할 것을 계청하면 병조

에서 전교(傳敎)를 받들어 의장(儀仗)을 푼다 인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인도하는데 그대로 흑단령을 갖추

고 선정문 밖 위차로 들어간다 왕세자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위차로 들어가면 좌통례가 소차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소차에서 나올 것을 계청한다 전하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나오면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망전례(望殿禮)의 위차에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선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할 것을 아뢰면 전하가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하고 왕세자도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하고 일어나 평신하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도 같다【찬의도 같다】 끝나고 나면 인의

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나누어 인도하여 나온다 전하가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왕세자도 따라 들어가는데

영정을 봉심할 때에는 승지middot사관middot궁관과 도감 당상 각 1원(員)이 시입(侍入)한다【통례와 상례는 계단 아래

에 정지한다】 봉심을 마치고 나면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도로 소차로 들어가고 왕세자도 따라

나와서 소차로 들어간다 영정을 장축(粧軸)할 때 전하가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승지middot사관과 도감의 당상(堂

上)middot도청(都廳)이 함께 흑단령 차림으로 시입(侍入)하는데 장축을 봉심하고 표제(標題)를 첩부(貼付)하고서

끝낸다 첨배(瞻拜)할 때에는 도감 당상과 종친middot의빈middot문무관 정2품 이상이 함께 흑단령 차림으로 선정문 밖

의 위차로 들어가며 전하와 왕세자도 이어서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전정(殿庭)의 판위(版位)로 나아가는

데 의주(儀註)대로 행례(行禮)한다【첨배의(瞻拜儀)에 기재되어있다】 이를 끝마치고 나면 전하는 소차로

들어가고 왕세자는 그날로 환궁하는데 의주대로 한다【왕세자 환궁의에 기재되어 있다】 다음날 동가(動

駕)를 고하는 제사를 지낼 때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이 먼저 위차로 나아가면 전하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판위로 들어가 의주대로 행례(行禮)한다【동가(動駕)를 고하는 제사를 친행하는 의주(儀註)에 기재되어 있

다】 이를 끝마치고 나서 영정 1본을 안의 진전(眞殿)에 봉안한 뒤에 전하가 도로 소차로 들어간다 선정전

의 영정을 영희전에 봉안할 때에는 초엄(初嚴)이 치면 병조에서 장위(仗衛)middot노부(鹵簿)를 진선문(進善門) 밖

에 진설하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은 연(輦)을 진선문 밖에다 대고 여(輿)를 인정전(仁政殿) 동쪽 뜰 아래에

다 댄다 이엄(二嚴)을 치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각기 조복(朝服)을 입고【4품 이상은 조복을 입고 5품이하

는 흑단령을 입는다】 돈화문 밖의 시립위(侍立位)로 나아가며 여러 호위하는 관원들도 함께 인화문(仁和

門) 밖으로 나아가 기다리는데 좌통례가 소차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임을 계청한다 삼엄(三嚴)

을 쳐서 북소리가 그치면 내외의 문을 여는데 좌통례가 꿇어앉아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뢰면 전하가 면복을

갖추고 나온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

가 그 규를 잡는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대축(大祝)이 영정궤(影幀櫃)

를 신여(神輿)에 봉안하고서 인화문을 경유하여 나온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걸어서 신여를 따

라 인정전 월대(月臺) 위에 이르러 대축이 영정을 신련(神輦)에 봉안하고【고취(鼓吹)를 울린다】 인정문

(仁政門)을 경유하여 나온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인정전 동쪽 뜰 밑에 있는 승여소(乘輿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圭)를 놓고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그 규를

받는다 좌통례가 여를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를 타며 인정문 동협(東夾)을 경유하여 진선문 동협 밖

승련소(乘輦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려 연을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려 연을

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가 규를 잡

는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하고 산선(繖扇)middot시위(侍衛)는 보통의 의례와 같게 한다 대가(大

駕)가 돈화문 동협(東夾)을 거쳐 나아가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은 신련(神輦)이 이르면 몸을 굽혔다가 지나

가면 평신하고 대가가 이르면 몸을 굽혔다가 지나가면 평신한 다음 순차에 따라 시위한다 대가가 영희전

(永禧殿) 대문 밖 강련소(降輦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를 놓고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받는다 -영희전 부분 후략-

- 대보단에 향을 친히 전하는 문로

『영조실록』 26년 3월 5일 (무신) 원본1054책탈초본57책(56) 1750년 乾隆(淸高宗) 15

乾隆十五年庚午三月初五日辰時 上具冕服 出御映花堂前庭親傳香繖扇侍衛如常儀行都

承旨南泰良 左承旨李普昱 右承旨洪益三 左副承旨李益輔 右副承旨趙載敏 記事官南鶴老middot崔

台衡middot李宜哲middot金聖佑入侍益三奉進香祝上塡祝着押如禮 仍展覽祝文而敎曰 此乃常用祝文

乎 益三曰 然矣上曰 都承旨進來泰良進伏上曰 祝文中神考毅廟等字 似皆上行書之

而今皆不上之矣泰良曰 有太祖第一位 故壓尊而不得上矣上曰 永禧殿祝文亦如此例乎 頃

日親享時 魚錫胤爲大祝 必知之矣仍命錫胤進來下詢錫胤曰 臣於倉卒中 未能詳細記得

矣上祗傳香祝益三跪奉以出 安于香亭上以步輦 由集成門入齋室 少頃 由朝宗門詣版位

行望位禮 由冽泉升壇奉審 仍省器 又於冽泉門外省牲訖 還入齋室諸臣遂退出

- 대행왕비의 발인시 왕의 문로

『영조실록』 89권 33년(1757 정축 청 건륭(乾隆) 22년) 6월 3일(계해) 1번째기사

대행 왕비의 발인(發靷)에 임금이 단양문(端陽門) 밖에 나아가 대여(大轝)를 바라보며 곡(哭)하고 인해서 대

여를 따라 숙장문(肅章門) 밖에 나아가 두 번 절한 다음 곡하면서 전송하고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적체(敵體)의 의리는 매우 중대한 것이다 지금 내가 최복(衰服)을 입었으므로 대궐 안에서 곡하

며 전송하였지만 평상시의 경우는 대궐 밖에서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뜻을 《상례보편(喪禮補編)》에다

기재하도록 하고 또 정축년에 처음으로 시행한 까닭을 주석(註釋)으로 달도록 하라rdquo 하였다

- 선원전과 경복전 봉심 문로

『승정원일기』 영조 36년 3월 17일(임술) 원본1179책탈초본65책 (1720) 1760년 乾隆

(淸高宗) 25년

李永暉 以戶曹言啓曰 傳敎內景福殿與月郞 及眞殿及報春門外齋室 戶工曹堂上 每於季春奉審 可以修補者修補

墻垣頹圮處 椽木腐朽處 待守直中官所報 該曹草記 郞廳監蕫 卽爲修補 而事係正殿 則堂郞眼同擧行 於義本宮

亦依此例擧行事 命下矣參議臣金選慶 與正郞鄭一祥 工曹參判臣朴相德 正郞臣金鍾卨 進詣奉審 則於義本宮 姑

無修改處 而景福殿西邊芳春門一隻下莫只破傷 憶昔樓北邊椽木一箇 要家南邊椽木三箇 椽含一箇 平交臺一箇腐傷

蓋瓦脫落 西月廊椽木一箇腐傷 窓差備要家椽木一箇 永慕堂南行閣抹樓二間 同歸機一 廳板一立腐傷 之介一隻獨

窓一隻 無廣窓一隻破傷 南墻一間蓋瓦脫落 司鑰房抹樓歸機一箇腐傷 廳板一立 無土壁一面崩頹 四面墻垣 四間蓋

瓦庫庫脫落 別監房椽木十八箇 朴工二立腐破 獨窓二隻 之介二隻無 西邊墻垣三間崩頹 兩墻間墻垣十二間 蓋瓦庫

庫脫落 五間蓋瓦全無 報春門齋室椽木九箇 椽含一箇 平交臺一箇腐傷 仰土庫庫剝落 內外土壁剝落 萬福門外中間

傾側 朴工一立 倍防一箇 龍脂板二腐傷 蓋瓦脫落 東南墻六間蓋瓦庫庫脫落 齋室前行閣五間退 五間內二間退五間

頹壓 而材瓦全無 餘存三間材木腐傷 蓋瓦折半脫落 西南墻五間蓋瓦庫庫脫落 故分付各該司 使之修改 而亦令本曹

郞廳 監蕫擧行 何如 傳曰 允

- 황단 친제할 때 문로

『승정원일기』 영조 45년 8월 15일(갑자) 원본1295책탈초본72책(1010)1769년 乾隆(淸

高宗) 34년

己丑八月十五日寅時 上詣昌德宮入侍時 行都承旨金應淳 左承旨尹東昇 右承旨閔弘烈 左副承旨朴弼逵

右副承旨徐命善 同副承旨洪述海 假注書崔命麟middot尹弼秉 記事官鄭弘德middot李福徽 以次隨駕訖上具翼善冠middot衮龍

袍 以乘輿 出通陽門middot延和門外 降輿乘輦 藥房都提調金陽澤 提調韓光會 持湯劑進伏訖陽澤曰 夜間聖體

若何 上曰 一樣矣上進湯劑 命召香室守僕 驪陽府院君閔 海豐府夫人李氏middot恩城府夫人宋氏middot豐昌府夫人趙

氏middot慶恩府院君金middot嘉林府夫人趙氏 贈領議政崔 贈貞敬夫人洪氏 一體致祭事 分付上入昌德宮於進善門外降輦

以步輦 入進善門下 問于金應淳曰 彗星光芒及尾之長短 比前何如 應淳曰 光芒則似減 而尾迹則一樣矣上

曰 其退速 則漸値太陽而消散乎 應淳曰 妖不勝德 自然消滅矣下敎曰 吏middot戶房 兵middot刑房 依前相煥出駕

前下敎 上入萬安門 辰時 上以步輿 由追慕堂北墻外 詣奉審 金應淳啓曰 通禮未卽待令 推考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又傳曰 當日內行禮 百官行禮 置之上降輿于皇壇外 步入冽泉門神室前 行四拜禮 由東階

上 奉審神室 又上皇壇 奉審四隅而降 步履强健 挾侍落後 諸臣莫不瞻仰慶忭上還出冽泉門 奉審齋室 乘

步輦 還至金化門北西向四間閣前住輿 命尹東昇 讀御製懸板 至年月日 工曹參判金致仁奉敎書上曰 不覺其

間年數之多矣 命書記上至金化門內 命承旨知入 門名及右墻內三間閣 爲何閣 承旨還奏曰 門名金化 閣則

故中日廳矣上曰 予爲摠管時 由此門入直事如昨 居然爲幾年乎 上 至弘化門內乘輿鼓吹 下敎曰 毓祥宮歷

臨時 前後廂軍 道上留駐出駕前下敎 又下敎曰 禮房承旨 靈壽閣奉審以奏出駕前下敎 又下敎曰 禮房承旨

馳往養正齋 奉審以來出駕前下敎 又下敎曰 還宮時刻 待下敎 單子置之出駕前下敎 承旨閔弘烈奉審後復

命上詣毓祥宮內 住步輦 命入皇壇回駕時 御製承旨讀訖讀書以下 上 出毓祥宮入侍時下敎曰 後日擧動

時 雲劍依例望入出駕前下敎 上命應淳 書御製時 上曰 予今日行步 無甚艱澁 奉審皇壇時 中官落後矣應

淳曰 此非但心存誠敬之工 亦可觀 勝於前日矣金陽澤進前問候後 進湯劑酉時 上還宮於延和門外降輦陽

澤曰 動駕之餘 聖體若何 上曰 一樣矣進湯劑訖 上還宮後 諸臣以次退出

- 선원전 어진을 영희전으로 이봉할 때의 문로

『정조실록』 6권 2년(1778 무술 청 건륭(乾隆) 43년) 7월 11일(무술) 1번째기사

영종(英宗)의 어진(御眞)을 영희전 제5실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선화문(宣化門)으로 나아가서 선원전(璿源殿)에 들어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도로 만안

문(萬安門) 밖의 소차(小次)에 나아가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선원전의 제2실로 올라 나아가 갑자년1366)

의 어진(御眞)인 면복본(冕服本)을 신여(神轝)에 봉안하고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 어진을 받들어 신탑(神

榻) 위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탑전(榻前)에 나아가 손수 받들어 편 다음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도로 소

차에 나아가 원유관에 강사포를 고쳐 입고 양지당에 나아가 어진궤(御眞櫃)를 신여(神轝)에 봉안하니 도감

(都監)의 당상과 낭청이 신여를 모시고 만안문으로 나아가 신련(神輦)에 옮겨 봉안하고 인정문(仁政門)을 거

쳐 나갔다 임금이 걸어서 인정전 월대(月臺) 아래에 나아가 여(輿)를 타고 인정문을 나가서 여에서 내려 연

(輦)을 탔다 돈화문(敦化門)을 거쳐 영희전에 나아가 홍살문 밖에서 연에서 내려 여를 탔다 재전(齋殿)에

들어가서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신문(神門) 밖에 나아가 사배례를 행하였다 전(殿) 안으로 나아가니 김

상철(金尙喆) 등이 어진을 제5실에 봉안하였다 작헌례를 행하고 환궁(還宮)하였다 도감의 당상과 낭청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으며 대축(大祝) 윤숙(尹塾)middot이진형(李鎭衡)에게는 가자(加資)하였다 이조에서 윤

숙은 준직(準職)을 거치지 않았다고 아뢰었으나 특별히 가자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 선원전 전배 문로

『승정원일기』 정조 13년 12월 28일 (기묘) 원본1670책탈초본88책 (3132) 1789년 乾

隆(淸高宗) 54년

己酉十二月二十八日卯時 上詣眞殿展拜入侍時 行左承旨洪明浩 右承旨趙衍德 左副承旨曺遠振 右副承

旨申耆 同副承旨洪仁浩 假注書沈能迪middot洪樂游 記注官趙慶遠middot金鳳顯 檢校直閣李晩秀 待敎金祖淳 以次侍

立上具翼善冠middot衮龍袍 乘輿 出協陽門 由肅章門middot仁政門 至萬安門降輿 入眞殿展拜後 上曰 簾帳修改所入

戶工判 領率該色郞廳及工匠等 入侍 可也賤臣承命出傳 與戶曹判書金履素 工曹判書邊得讓 戶曹正郞李周

憲 偕入訖上曰 禮判望筒 卽爲擬入 待下批先進參後 謝恩之意 分付 可也賤臣承命出傳上曰 禮判牌

去來催促 使之卽爲進參 可也賤臣承命出 與禮曹判書徐有隣 偕入訖命仁浩書傳敎曰 歲前當展拜 而除夕

齋宿相値 今日眞殿修改 日勢差早 當由便道 展拜景慕宮 該房知悉修改罷後 上出萬安門 乘輿 由仁政門middot

肅章門middot建陽門middot銅龍門middot景光門 出弘化門 入逌瞻門 至齋室降輿上曰 都提調middot提調 先詣文禧廟之意 傳諭 可

也賤臣承命出傳上曰 文禧廟歷臨出駕前下敎 上展拜訖乘輿 出逌瞻門 入弘化門 由景光門middot銅龍門middot建

陽門middot肅章門middot進善門 出敦化門 由備邊司middot觀象監峴 至文禧廟 降輿 入廟 行奠酌礼訖仍詣儀嬪廟行奠酌禮後

乘輿 出廟門 由觀象監峴middot備邊司 至敦化門 下標信解嚴 由進善門middot肅章門middot協陽門 入宣化門 還內

- 관풍각에 간경하러 거둥하는 문로

『승정원일기』 순조 11년 윤3월 14일(임진) 원본1996책탈초본105책(2121) 1811년 嘉

慶(淸仁宗) 16년

辛未閏三月十四日午時 上御觀豐閣看耕時 諸承旨及入直玉堂middot閣臣同爲入侍時 行都承旨洪義浩 右副承旨申

絅 同副承旨徐俊輔 假注書朴來謙middot洪羲祖 記注官金初燮 記事官朴齊聞 直提學洪奭周 應敎李志淵 修撰徐長

輔 以次進伏訖 上曰 今日看耕 故使之入侍矣 上曰 農圃擧行 斯速爲之 上曰 闕外入直文蔭 昨日試

取 闕內入直文臣 前旣應製 而闕內入直蔭官 姑未應製矣 闕內入直蔭官 凡幾司乎 義浩曰 尙瑞院middot尙衣院middot

司饔院middot典設司矣 上命書傳敎曰 闕內入直文臣 前已應製 而蔭官不爲應製 今日適因入侍 使之同爲待令上

曰 試官則閣臣及同副承旨middot上番玉堂middot下番翰林爲之上乘肩輿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隨後 仍由石渠門middot魚水堂middot

淸防閣middot珍藏閣middot尊德亭前路 入望春亭 御天香閣 少頃 命入侍 諸臣以次進伏訖 上曰 應製蔭官已待令乎

義浩曰 姑未及來待 而檢書官亦是入直蔭官 使之同爲待令 何如 上可之 上曰 應製人催促入來 可也 來

謙承命出去 上曰 公事待令乎 義浩曰 待于靑陽門外矣 上曰 懸題紙 磨墨器 持入 可也 賤臣承命出

來 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少退 仍爲隨後 上乘肩輿 出望春亭 還由暎花堂前路middot宜春門middot芙蓉亭邊拱辰門middot集成

門 御籠山亭 少頃 命入侍 以次進伏訖 上曰 應製人已來待 則使之入來 試官亦下筵 無唱行禮 可也

奭周middot俊輔middot志淵middot齊聞 下筵行禮 還上進伏 上命書御題五言絶句觀豐春耕 押春 限午時 俊輔承書 齊聞立傳

司謁 司謁跪受懸題 上曰 第三人誰也 義浩曰 司饔主簿金照矣 上曰 吏文學官出身乎 義浩曰 然矣

上曰 有文名乎 義浩曰 善於文而尤工於詞律矣 上曰 第一第二第四人皆誰也 義浩曰 尙瑞直長金昊淳 尙

衣直長金義友 檢書官柳本藝矣 上曰 公事持入 可也 來謙承命出去 持入 上曰 讀之 俊輔讀公事訖

傳挾侍以上 上下前入公事敎曰 都承旨middot同副承旨輪回讀奏 義浩middot俊輔讀公事訖 上曰 應製人幾皆製之 則以

次呈券 而上番兼史爲收券官 司謁爲衛軍樣擧行 可也 上曰 科次爲之 奭周曰 當取幾人耶 上曰 取一

人 奭周曰 一券不書臣謹封 違格拔去矣 上曰 違格則推考乎 奭周曰 文臣製述則有外違罷職之規 而應製

則無推考之例矣 奭周書三下於一券 俊輔坼名讀奏 上命書傳敎曰 禁直蔭官應製優等 司饔院主簿金照 奎

章全韻中板部賜給 上曰 向來禁直文臣應製 以大小板分等賜給 蔭官亦欲區別 故書下中板 而若無中板 則

以印紙之長廣闊狹區別 好矣 昨日闕外入直文蔭應製 有兒馬帖之賞 冊子之賞 勝於馬帖乎 義浩曰 馬帖則

重於冊子 而領受者之榮光 冊子勝於馬帖矣 左副承旨申溆 宗廟middot景慕宮奉審摘奸後入來 進前奏曰 臣承命馳

詣宗廟尊所 奉審無頉 祭物middot祭器middot祭井 看審精潔 諸執事middot進排官 摘奸無頉 仍詣景慕宮尊所 奉審無頉 祭物middot

祭器middot祭井 看審精潔 諸執事middot進排官 摘奸無頉矣 上曰 移御時 王大妃殿middot惠慶宮middot嘉順宮陪從官過祗迎所時

馬上鞠躬 中宮殿middot元子陪從官過祗迎所時 下馬事 預爲知委 可也 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隨後 到暎花堂 當宣

飯也 上乘肩輿 由望春middot尊德亭前路middot集春門內麓middot觀豐閣前路 御暎花堂 諸臣待于丹楓亭 少選 以司謁宣

飯訖 上乘朱軒 由靑陽門middot永淸門middot賓陽門middot涵仁亭前路middot重春門middot小宙合樓前路 至熙政堂 上命退 諸臣以次退

- 왕세자가 성균관 입학하러 가는 길과 문

『순조실록』 20권 17년(1817 정축 청 가경(嘉慶) 22년) 3월 11일(갑인) 1번째기사

왕세자가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고 이어 입학례를 행하였다【세자가 쌍동계(雙童髻)middot공정책(空

頂幘)middot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수레에 올라 이극문(貳極門)을 나서 홍화문(弘化門)에 이르러 동협문(東挾門)

으로 해서 나와 수레에서 내려 연(輦)을 바꾸어 타고 관현(館峴)을 거쳐 문묘의 동문 밖에 이르러 연에서 내

려 편차(便次)에 들었다 작헌례를 행할 때가 되자 세자가 학생복으로 갈아입고 편차에서 나오니 겸보덕(兼

輔德)이 앞에서 인도하여 문묘의 동문으로 들어가 자리에 나아가 사배(四拜)하고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갔

다 이윽고 동계(東階)로 해서 올라 신위(神位) 앞에 나아가 삼상향(三上香)하고 잔을 잡고 헌작(獻爵)하였다

다음에는 사성위(四聖位)에 나아가 상향하고 헌작하기를 처음처럼 하였다 (-중략-) 박사가 글을 읽자 세자

도 따라 읽고 박사가 글 뜻을 해석하였다 해석이 끝나자 집사가 서안과 책을 치웠다 보덕이 세자를 인도하

여 서계로 내려와 편차에 들러 공정책과 곤룡포로 갈아입고 연에 올라 관현을 경유하여 홍화문에 이르러 연

에서 내려 수레로 바꾸어 타고 동협문으로 들어와 동룡문(銅龍門)을 지나 이극문으로 들어와 대내(大內)에

들어갔다】

- 경연관과 서연관의 대내 출입 문로 연영문과 동룡문

『순조실록』 21권 18년(1818 무인 청 가경(嘉慶) 23년) 9월 10일(을사) 1번째기사

차대하였다 우의정 남공철이 아뢰기를 ldquo오늘날의 많고 많은 일 중에서 왕세자가 학문의

성취를 먼저 힘쓰는 것보다 급한 일이 없습니다 언행(言行)으로 감화시키는 데서는 숙유(宿

儒)가 가장 좋으며 바르게 기르고 훈도하는 방도에도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

에는 경연관(經筵官)을 경서에 밝고 행실이 스스로 수양된 사람으로써 가까이서부터 초선

(抄選)한 다음 서연관(書筵官)도 그대로 겸하도록 계하(啓下)해서 연영문(延英門)과 동룡문

(銅龍門)의 강석(講席)을 드나들게 한다면 매우 좋겠습니다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주합루와 연경당에 봉안한 어진을 경모궁과 경우궁으로 각각 옮길 때의 문로

『일성록』 헌종 3년(1837) 양력 4월 17일 갑자

강 純宗大王 翼宗大王御眞自宙合樓 演慶堂移安于景慕宮望廟樓 景祐宮 誠一軒時親行祗送

목 初次移安時至卯時 時原任閣臣分承史以下 原任提學 沈象奎 朴宗薰 提學 趙寅永 原任提學 鄭元容 提學 徐

有榘 原任直提學 金鏴 檢校直提學 徐憙淳 直提學 朴永元 原任直閣 徐俊輔 李光文 李嘉愚 金鼎集 吳取善 原

任待敎 李憲瑋 檢校待敎 金興根 趙斗淳 原任待敎 金英淳 檢校待敎 金學性 分承旨 張敎根 徐念淳 趙秉憲 金

東健 分注書 金始淵 洪在龍 史官 申錫愚 徐耆淳 具朝服分詣宙合樓 演慶堂前庭行禮訖閣臣奉純宗大王影幀樻子

安於轝戊辰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 閣臣奉翼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丙戌圖寫一本予具遠遊冠 絳紗袍自內詣宙合樓

神轝奉審乘輿出宜春門詣演慶堂 神轝奉審陞詣堂內奉審後乘輿出金馬門至月覲門內入小次純宗大王影幀神轝將至

予出次祗送翼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祗送訖乘輿還內純宗大王 翼宗大王 神轝以次由月覲門自內詣景慕宮望廟樓戶

外閣臣以次奉出影幀樻子如儀奉安後閣臣以下行禮退出 再次移安時至午時 閣臣奉純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戊辰

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 閣臣奉翼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丙戌圖寫二本庚寅圖寫一本予具遠遊冠 絳紗袍乘輿出拱辰

門至曜金門內入小次純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出次祗送翼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祗送訖乘輿還內純宗大王 翼宗大

王 神轝以次由曜金門自內詣景祐宮 誠一軒戶外閣臣以次奉出影幀樻子如儀奉安後閣臣以下行禮退出奎章閣啓言

純宗大王 御眞戊辰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翼宗大王御眞丙戌圖寫一本奉安于景慕宮望廟樓純宗大王 御眞戊辰圖寫

一本庚寅圖寫一本翼宗大王御眞丙戌圖寫二本庚寅圖寫一本奉安于景祐宮 誠一軒兩廟御製各一件同爲奉安

- 창덕궁에서 종묘에 전알하러 가는 문로

『일성록』 고종 31(1894)년 양력 3월 2일 기묘

강 詣宗廟展謁

목 具翼善冠 袞龍袍乘輿出太和宮門至宗廟 北墻門降輿入齋室展謁時至改具冕服乘輿至東神門降輿詣版位行禮

陞詣第一室奉審次詣各室奉審如儀訖出西神門入永寧殿東神門詣版位行禮陞詣第一室奉審次詣各室奉審如儀

訖還出東神門乘輿至南神門降輿步過還乘輿入齋室少頃出次乘輿出北墻門至長樂門還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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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2010

권행가 「고종 황제의 초상 -근대 시각매체의 유입과 어진의 변용 과정」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5

김동현 「연암 박지원(1737-1805)의 건축관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

논문 2002

김은경 「昌德宮 大造殿 群鶴圖 臨模硏究」 한성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6

김지현 「일제강점기 창덕궁 희정당의 변형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

위청구논문 2006

노진하 「樂善齋 一廓의 造營背景과 건축특성」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1995

도영주 「勤政殿과 仁政殿의 건축기법 비교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

논문 2002

명세나 「조선시대 오봉병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7

박희용 「창덕궁 정전영역의 구성과 운영」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8

배한선 「연경당 낙선재 운현궁의 건축 특성 연구 궁궐 침전 상류 주택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과학기술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3

손성기 「lt동궐도gt에 묘사된 가변시설과 궁궐의 공간운영」 경북대학교 석사학위청구논

문 2009

신귀정 「창덕궁 동궁의 공간구조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0

우동선 「창덕궁의 변천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1991

윤대길 「朝鮮時代 宮闕內殿에 관한 硏究 朝鮮時代 宮闕內殿에 관한 硏究」 고려대학교

석사학위청구논문 1990

윤도경 「창덕궁 부용지 일원의 위치와 공간구성 특성」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3

윤 정 「18세기 국왕의 lsquo문치rsquo 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7

윤정현 「조선시대 궁궐 중심공간의 구조와 변화」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0

이강근 「경복궁에 관한 건축사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설 한국학대학원 석사학

위청구논문 1984

이만희 「창경궁 내전권역 공간구성에 대한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

문 2010

이민아 「孝明世子middot憲宗代 宮闕 營建의 정치사적 意義」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

논문 2007

이보경 「창덕궁 규장각의 입지 특성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1

이정국 「15세기 궁궐 정전 영역의 내부공간 이용방식에 관한 연구」『건축역사연구』

13 한국건축역사학회 2004

이정섭 「창덕궁내 亭middot榭middot堂middot齋의 주련 조사현황」『문화재』17 문화재관리국 1984

이혜원 「경복궁 중건이후 전각구성의 변화」 경기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9

이효석 「조선시대 세자의 궁궐 공간 사용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5

장영기 「조선시대 궁궐 편전의 성격과 체재 변화」『조선시대사학보』48 조선시대사

학회 2009

정은경 「조선후기 궁궐 정침에 대한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5

조옥연 「조선 궁궐의 동조 건축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8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3

조재모 「창덕궁의 성장과정과 배치특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

논문 1997

조진동 「창덕궁의 공간 경계요소에 관한 연구 담middot행각middot문의 유형과 디자인 특성을 중

심으로」 동국대학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6

최경자 「창덕궁 선원전-西闕內各司 권역의 건축형식과 공간특성」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0

최기영 「조선시대 궁중의례에서 사용된 차일의 기능과 특성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

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9

한경희 「舊韓末 宮闕建築 內部意匠에 관한 硏究 西歐式要素의 영향을 中心으로」 이화

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1977

한주성 「조선후기 궁궐건축의 행각 구성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1999

홍선기 「조선시대궁궐의 공간구조에 관한 연구 경복궁 창덕궁 경희궁을 대상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1991

홍순민 「조선왕조 궁궐 경영과 lsquo양궐체제rsquo의 변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

문 1996

황준원 「조선시대 궁궐내 길례middot흉례의식 공간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

위청구논문 2004

5 도록middot도면집 고려대학교박물관 『조선시대 기록화의 세계』 2001

고려대학교박물관 『명품도록』 2008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안내도록』 2007

국립고궁박물관 『궁궐의 장식그림』 2009

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 아름다운 덕을 펼치다』 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북궐도형』 2006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소장유리건판1 - 궁궐』 2009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향연과 의례』 2009

『꼬레아 에 꼬레아니(사진해설판)』(이돈수middot이순우 지음) 하늘재 2009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宮中遺物圖錄』 1986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동궐도』 1991

문화재청 『日本 宮內廳所藏 昌德宮寫眞帖』 창덕궁관리소 2006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육백년 1405-2005』 2005

서울역사박물관 『도성대지도』 2004

서울대학교박물관 『고궁전사집첩』

영남대학교박물관 『한국의 옛 지도』 1915

예술의 전당 『서울 600년 고궁의 현판』 1994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상 하 서문당 1986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6

『사진으로 본 백년 전의 한국』(김원모middot정성길 엮음) 가톨릭출판사 1997

『서울 풍광』 -서양인이 만든 근대 존기 한국 이미지Ⅰ- 청년사 2009

『유리원판(창덕궁)』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총독부 『朝鮮古蹟圖譜』十 1930

『日本之朝鮮』(정성길 편 이민원 감수 『일제가 강점한 조선』 한국영상문화사 2006)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조선왕실의 책』 2002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실의 행사그림과 옛지도』 200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장서각 명품선』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근대건축도면집』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근대건축 도면집-해설편』 2009

6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최후의 진전 창덕궁 신선원전』 2010

국립문화재연구소 『창덕궁 금천교 발굴조사보고서』 2002

김귀곤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원유 생태조사보고서(수목 및 식생중심) 1990

문화공보부 『창덕궁 重建報告書』 1987

문화재관리국 『조선조왕국 중요건축물지정조사서(Ⅰ)』 1984 12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仁政殿 실측조사보고서』 1998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舊 璿源殿 실측조사보고서』 1992

문화재청 『창덕궁 新璿源殿 수리보고서』 2001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인정전 일곽복원공사 기초조사에 의한 설계설명서』 1992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仁政澱 行閣址 발굴조사보고서』 1995

문화재청 『창덕궁 仁政殿 行閣 중건공사보고서』 1999

문화재청 『창덕궁 奎章閣 舊璿源殿 권역 발굴조사보고서』 2000

문화재청 『창덕궁 半島池 보수 정비공사 준공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상방지 유구조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熙政堂 수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middot종묘원유 조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정자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3

문화재청 『창덕궁 희정당 신관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3

문화재청 『창덕궁 경훈각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4

문화재청창덕궁관리소 『창덕궁 승화루 및 일곽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5

문화재청 『창덕궁 懿老殿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4

문화재청 『창덕궁 인정문 정밀실측조사보고서』 2010

문화재청 『창경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2010

김동욱 『조선후기 궁궐건축의 조영에 관한 연구』 국립문화재연구소 1990

안병찬이강근 외 『궁궐채색기술 특성규명 연구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전상운 『창덕궁 어차 수리 복원 보고서』 2004

중앙문화재연구원 『창덕궁 반도지 시굴조사보고서』 2001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함원전 보수공사』 2005

웹 사이트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httpsjwhistorygokr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e-kyujanggaksnuackr

한국고전종합 DB httpdbitkcorkr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httpyoksaaksackr

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

문화유산에게 소심하게 말걸기 httpwwwcyworldcomangayo

Page 3: 조선왕실의 건축, 창덕궁 학술연구 · 2012. 5. 15. · 연구책임자: 이강근(한국건축역사학회 이사) 공동연구원: 이혜원(한국전통문화학교

목차

Ⅰ 연구의 목적

Ⅱ 연구의 내용

1 창덕궁의 역사

가 조선전기

나 조선후기

다 근middot현대기

2 창덕궁 영역의 변천

가 조선전기 창덕궁의 영역

나 조선후기 창덕궁의 영역

다 근middot현대기 창덕궁의 영역

3 창덕궁의 배치와 특징

가 영역별 배치와 특징

나 내부 경계의 변천

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역 외곽의 변천

4 창덕궁 건물의 구조와 특징

가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인조 25년 1647)

나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인조 26년 1648)

다 『창덕궁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昌慶宮修理都監儀軌)』(효종 3년 1652)

라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효종8년 1657)

마 『집상전수개도감의궤(集祥殿修改都監儀軌)』(현종 9년 1668)

바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순조 3년 1803)

사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순조 34년 1834)

아 『인정전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철종 8년 1857)

5 창덕궁 건물의 단청과 특징

가 인정전의 단청

나 인정전 단청과 의궤

다 연구middot조사 방법

라 의궤 기록과 현존 단청안료의 비교 고찰

마 인정전 단청의 문양 특성

6 창덕궁 궁역 궁성 궁성문 궁장문 문로

가 궁역

나 궁성문과 궁장문

다 문로

lt부록gt

Ⅰ 연구의 목적

국립고궁박물관이 창덕궁을 주제로 한 전시를 앞둔 시점에서 창덕궁에 대한 기초 사료의

집성과 창덕궁 연구의 새로운 바탕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 연구 용역을 발주한 것으로 이해

하였다 창덕궁에 대한 이제까지의 연구에서도 사료의 검증을 통하여 창덕궁의 시간적 공간

적 변천 과정을 구명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조선전기까지의 창덕궁에 대해서는 조선왕조

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은 한정된 사료에 의지하여 원래의 모습을 추정해 왔지만 조

선후기의 창덕궁에 대해서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사료가 대거 남아있고 동궐도나

동궐도형과 같은 시각 자료 또한 남아 있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시공간적 변천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헌사료가 원문 상태로 소장처에만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구자의

접근이 어려웠고 그런 탓에 사료의 내용이 연구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였다 최근에 이르

러 관찬 사서나 의궤 같은 귀중한 사료는 물론 개인 문집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전자문서화

되어 인터넷상에서 검색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를 활용하여 창덕궁에 대한 이해 또한 확

대 심화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또 최근에 학계에 처음으로 종합 소개된 장서각 소

장 창덕궁 관련 도면 자료는 20세기 전반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자행된 창덕궁의 훼손

과 개조 과정을 담고 있어서 대한제국 멸망 이후의 변천상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렇듯 달라진 여건 아래서 창덕궁에 대한 기존의 콘텐츠를 능가하는 새로운 콘텐츠의 개

발과 구축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창덕궁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 전시에도 새로운 콘텐츠를

활용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동안 문화재청의 다대한 복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창덕

궁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으로 개조된 모습 위에 부분적인 복원이 이루어진 어정쩡

한 상태이다 창덕궁의 원형과 변형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Ⅱ 연구의 내용

1 창덕궁의 역사

가 조선 전기

1) 太宗代의 창건

(1) 離宮 건립의 동기

조선왕조의 수도 한성의 중심은 정궁인 경복궁이었으며 도성 안의 모든 시설은 경복궁

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배치되었다 新都의 경영을 맡았던 사람 가운데 아무도 한성 안에 궁

궐을 하나 더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태종이 한성 주변의 母岳과 한

성을 비교한 결과 한성으로 환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나서도 정궁인 경복궁

에 들어가지 않고 따로이 새로운 궁궐을 건설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 도성 안에 그

것도 정궁으로부터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lsquo離宮rsquo이란 미명하에 새로운 궁궐을 지은 태종의

숨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궁궐이 정치의 중심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궁궐 앞에 수많은 政廳과 官廳이 마

련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설은 물론 정궁 남쪽대로 좌우에 도열하는 것이 고대국가 이

래의 오랜 전통이다 그런데 이궁이라 하면 정궁에서의 정치를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 天災

地變으로 정궁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을 지속하기에는 백성들에게 미안한 경우 등에만 잠시

정궁을 피해 있기 위하여 즉 避宮하기 위하여 지은 궁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궁 앞에는 정

청이나 관청을 마련할 필요가 전혀 없다

정궁인 경복궁을 피하여 잠시 거처하기 위하여 새로운 궁을 지었다면 이는 이궁의 본래

용도에 합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피궁할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 왕실과 가

까운 관계에 있는 관료나 친인척의 집을 피궁 장소로 삼을 수는 있으나 이는 장구한 계책이

될 수 없으므로 어차피 이궁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시설이었다 그러나 이궁 건설 시기

를 하필이면 한성 환도 시점으로 정한 데는 특정한 이유가 있었다

즉 태종의 왕위 계승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던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태

종이 lsquo왕자의 난rsquo을 두 차례 겪고 겨우 왕위에 올랐을 때 수도는 개경이었다 혼란기의 정치

상황을 마무리하고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難題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경을 떠날 수밖에 없

었다 또 한성으로 환도하는 마당에 骨肉相殘의 비극이 얽힌 경복궁으로의 入宮을 피하려면

새로운 궁궐이 필요했다 이 시기에 집권 관료층의 관심을 천도와 새로운 궁궐 조성에로 돌

려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목적과 흉흉해진 민심을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하여 바로잡으려

는 정치적 의도도 작용하였다

그 결과 lsquo이궁rsquo이란 이름의 궁궐을 도성 안에 하나 더 지음으로써 왕권의 현실적 기반을

공간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단순히 피궁하기 위하여 이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이궁이 지어짐으로써 한성의 북반부는 이궁과 정궁 두 개의 궁궐이 각각 응봉

과 백악을 배경으로 위세를 갖추어 동서로 布陣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1405년에 이궁이 완

성되자 곧 1406년에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1411년에 명당수를 끌어들이고 御構를

팠으며 1412년에는 원래 있던 작은 누각을 헐고 경회루와 연못을 대규모로 조성하여 아름

다운 경관을 조성하여 중국 사신의 접대에 대비하도록 한 사실 등을 보더라도 태종이 경복

궁을 꺼려서 거처하지 않으려고 이궁을 지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태종이 왕권강화를 최대의 정치적 목적으로 삼아 외척세력과 공신세력마저 완전히 제거

한 다음 왕-의정부-육조의 國政體裁를 왕-육조의 直啓制로 전환시켜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

게 강화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에도

창덕궁 바로 곁에 수강궁을 짓고 거처하며 여전히 병권을 장악한 채 도성 안 여러 곳에 수

많은 이궁을 건설하였다는 사실은 창덕궁을 창건한 이유가 비단 경복궁이 싫어서만은 아니

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1)

(2) 창건 과정

창덕궁의 창건은 한성으로 환도할 것을 결정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맨 먼저 1404년

10월 6일에 당시의 향교동 응봉 자락 아래로 터를 정하고 이날로부터 공사에 착수하였다

lsquo離宮造成都監rsquo이 조직되고2) 도감의 우두머리인 提調 李稷의 설계와 감독 수많은 工匠군

인승려백성 등의 賦役 노동에 힘입어 착공된 지 1년만인 1405년 10월에 드디어 新宮이

낙성되었다 태종은 낙성되기 10여 일 전에 서둘러 개경으로부터 환도하여 領議政府使 趙浚

(1346~1405)의 집에 마물다가 10월 20일에 입궁하여 성대한 落成宴을 베풀었다 이때 낙성

된 건물은 왕 부부의 침전 일곽과 정전편전 등 외전 일곽뿐이었다 신궁에서 펼쳐질 새로

운 정치를 보좌할 관청들은 경복궁 앞에 지어져 있던 건물들을 수리하여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으며 1405년 8월에 관청 건물과 관원들의 주택을 수리하는 일에는 강원도와 충청도의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신궁에서 정치활동이 시작된 이후에도 공사는 계속되었다 즉 1406년에는 眞殿인 仁昭

殿(태조와 태조비 신의왕후의 신주를 모신 건물)과 佛堂을 후원 지역에 지었고3) 누각(廣延

樓) 1408년에는 연못 1411년에 정자(解溫亭 14년 6월에 愼獨齋로 개칭)가 조성되었는데

누각은 왕이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풀 수 있도록 휴식하거나 신하들과 연회를 열어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정자는 홀로 휴식과 사색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조성되었

또 1408년에는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비빈과 후궁들로 하여금 양잠의 중요성을 알도록

일깨우고 1410년에는 지형에 맞추어 소나무를 심어 궁원의 풍광을 아름답게 가꾸었다 1411

년에는 누각과 침실(세조 7년에 누각은 澄光樓 침실은 凝福亭玉華堂 등으로 명명됨)을 더

만들고 진선문밖에 돌다리를 조성하였다고 하며 1412년 5월에는 궐문인 돈화문을 세우고

1413년 1월에는 闕門 어귀에 下馬標木을 세워서 왕과 신하의 차별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같

은 시기에 종을 주조하여 궐문인 돈화문에 걸었다4)

이렇듯 왕궁의 체재를 갖추고 태종 5년 이후 중심적인 정치의 장으로서 역할을 다한 창

1) 태종은 태상왕과 상왕의 거처로 덕수궁과 인덕궁을 각각 지어 바쳤으며 아홉 곳의 이궁을 도성 안팎에 건설

하여 거처를 옮겨 가면서 살았다 이 가운데 避災를 위하여 지은 이궁은 餘慶坊本宮이었다(『서울 六百年

史』第一卷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 219~226쪽 참조)

2)『太宗實錄』권8 태종 4년 9월 辛亥條 성석린조준 등 집권 관료들이 lsquoldquo경복궁이 있는데 따로 이궁을 세우는

것은 불가하다rdquo고 반대하자 도감의 명칭을 lsquo宮闕修補都監rsquo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무마책이었을

뿐 이궁 조성 공사는 곧 강행되었다

3) 『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63 187~188쪽

4) 敦化門鐘銘은 1412년 9월에 변계량이 지었는데 『태종실록』에 게재되어 있으며『新增東國輿地勝覽』에 경

복궁광화문종명으로 잘못 소개되어 있다 이 점은『서울 六百年史』第一卷 210쪽 주 42)에서 金龍國이 일찍

이 지적해 놓았다

덕궁은 핵심적인 정치 장소인 인정전 일곽이 정치의 장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

유로 대대적으로 수리된다 이때는 태종이 세종에게 선양한 왕권 교체기인 1418년 6월부터

8월 사이에 해당되는데 부실공사로 회랑 일부가 무너지자 감독 책임자인 박자청이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때 공사를 담당한 목수 吳德海의 이름이 실록에 남아 전한다

(3) 창건 창덕궁의 건축적 성격

1405년 10월에 낙성된 건물의 구성과 규모는 『태종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5)

이 기사 내용을 토대로 창건 창덕궁의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왕실 일가의 생활공간인 內殿 일곽은 正寢廳과 좌우의 침전 등 3침전을 중앙에

두고 사방을 행랑으로 빙 둘러막은 中庭式 배치법을 따르고 있는데 정침청과 양 옆 침전

정침청과 남쪽 행랑 사이는 개방형 복도(穿廊)를 두어 연결하고 있다6) 北行廊이 11칸이고

東西行廊이 각 15칸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침전 일곽은 폭 11칸에 깊이 15칸인 縱深形 공간

형태를 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행랑의 쓰임새에 대해서는 북행랑과 접한 서행랑 부분

에 3칸 짜리 별실을 두고 동행랑에 樓와 庫를 각각 3칸씩 두었다고 하였을뿐 나머지 부분

의 용도는 밝히지 않았다 이밖에 침전 주변에는 수라간(왕과 왕비의 수라를 준비하던 곳)

司饔房 湯子洗手間 등이 마련되어서 왕실 일가의 사생활을 도울 수 있게 하였다

둘째 정치의 장인 治朝 구역은 正殿便殿報平廳 등으로 이루어졌다7) 이 가운데 정

전은 2층으로 쌓은 넓고(가로 63자 세로 33자) 높은(아래층 4자 1치 위층 3자 5치) 월대 위

에 세워졌으며8) 행랑으로 둘러싸인 정전 둘레의 마당 즉 朝廷은 폭이 크고 깊이가 얕은 횡

축형 공간형태(가로 156자 세로 117자)를 택하고 있었다 정전 앞 마당에서 행해지는 朝會

나 朝賀 등 대규모 儀禮를 생각할 때 또 品等에 따른 자리가 縱軸 방향으로 배열됨을 고려

할 때 창덕궁 정전 앞 조정은 쓰임새를 잘 고려한 형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창건된 지

13년만인 1418년에 정전 일곽을 모두 헐고 새로 짓는 개건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이때 정전은

원래 자리보다 국면이 조금 넓은 서쪽으로 옮겨 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9)

5)『太宗實錄』 卷 10 太宗 5年 5月 辛巳

6) 창건 당초 창덕궁의 침전 형식에 대하여 ldquo어간 3간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로 볼 수 있는 침전이 각 2간인

형식rdquo 즉 정면 7칸인 건물로 해석한 견해도 있다 (김동욱 「17세기 조선조 궁궐 內殿건물의 室內構成에 관

한 연구」『大韓建築學會論文集』1992년 10월호 88쪽) 세조 7년에 건물 이름을 명명할 때 침전을 兩儀殿

좌우 침실을 麗日殿과 淨月殿으로 정했다는 기사는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준다

7) 편전 이외에 보평청이 있었다고 하나 어디에 있었는지 그 역할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름은 무어라고 명

명되었는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편전이 朝啓廳으로 불리며 思政殿으로 명명

된 사실을 고려할 때 혹시 편전은 朝啓(상참의식이 끝난 뒤 계문할 관원들과 史官이 함께 편전 안에 들어가

俯伏하고 차례로 용건을 말하는 정규회의)할 때만 쓰이고 보평청은 常參(약식 조회로서 매일 대신중신중요

아문의 당상관승지사관 등이 副殿에서 常服 차림으로 왕을 朝謁하던 정규 행사)에만 쓰인 것이 아닐까 추측

된다

8) 정전 월대가 폭 63자 깊이 방향 33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월대의 형태는 경복궁 근정전 월대처럼

정전 주변을 고루 두른 형식이 아니라 현재의 창덕궁 인정전 월대와 같은 모습 즉 건물 앞쪽만 길게 내민 형

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9) 『昌德宮』 -한국전통건축 제2집- 대한건축사협회 1994 41쪽 및 『太宗實錄』 太宗 17년 윤5월 정묘조

태종 18년 6월 계사조 동년 7월 갑진계축을묘조 『世宗實錄』 世宗 즉위년 9월 정사경신조 등 참조 또

등고선이 표기되어 있는 창덕궁배치도 참조

셋째 정전과 편전으로 이루어진 치조 일곽 가까이에는 왕의 통치를 측근에서 보좌할

여러 관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낙성 당일의 기사에는 정전 동행랑에 자리잡은 승정원

청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어서10) 태종대에는 『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간행)에 실려

있는 몇몇 관청조차도 갖추어지지 않았던 것같다11) 승정원 이외에도 궐 안에 있어야 할 관

청은 많았을 테지만 대부분 경복궁에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불편하지만 관리들이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업무를 처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405년에 서둘러 낙성된 창덕궁에 태종이 줄곧 머물러 있게 되자 이후에는 누각(廣延

樓와 澄光樓)과 침실 및 연못을 조성하고 후원에 소나무를 심고 정자를 세우는 등 아름다

운 경관을 조성하였다 또 어구를 파서 물길을 끌어들여 정전 앞쪽에 돌다리를 놓았으며 돌

다리 앞쪽에 궐문을 세우고 그 어귀에는 下馬標木까지 세우는 등 정궁에 버금가는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궁으로 조성된 나머지 핵심 부분인 정전 일곽이 너무 좁

아서 정치 행사를 할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말년인 1418년에는 인정전 일곽을 모두 헐어

다시 짓는 대규모 공사를 벌여 정전 일곽마저 경복궁에 버금가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

었다 이후부터 이궁인 창덕궁에서도 정궁에서만 행해지던 국가적인 대사를 치를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2) 창건 이후 조선 전기의 변화

태종을 계승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른 세종은 인정전 개축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창덕궁으로 이어한다 그리하여 세종 즉위년(1418)에 인정전 일곽의 개건 공사가 완공

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은데 반하여 세종은 즉위후 3년이 되던

해부터 자주 경복궁에 이어하고 기존 궁전을 수리하는가 하면 왕 8년(1426)에는 집현전 문

신들에게 궁내의 문과 다리 이름을 명명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왕 9년(1427)부터는 경복궁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궐내 제반 시설을 수리신설해 나가면서 점차로 경복궁의 법궁 체재를

완비해 나갔다 이에 견주어 창덕궁에 거처한 10년 동안에 경연청집현전장서각射廳

(궁성 西墻內) 등을 창덕궁 안에 새로 짓는 데 그쳤다 창덕궁 침전의 前廊은 修文堂이라 불

리며 태종세종이 늘 거처하던 곳이었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한 단종(1452~1455)은 창덕궁에 대한 전반적인 수리공사를 단

행하는 한편 태종때 개건된 지 35년밖에 안된 인정전 일곽까지도 다시 고쳐 지었다12) 이밖

에도 廣延樓에 별실을 지어 피서용으로 삼기도 하였다

창덕궁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세조때(1455~1468)였다 세조는 5년(1459) 9월 5일에

10)『太宗實錄』 卷 10 太宗 5年 5月 辛巳조 承政院廳 3칸 동행랑 10칸 남행랑 4칸 북행랑 4칸 바깥행랑 5

칸 外樓 3칸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서행랑을 따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승정원청이 인정전 동행랑에 자

리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승정원의 위치를 인정전 동쪽으로 적

고 있다

11)『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승정원을 비롯하여 빈청홍문관내반원도총부세자시강원세자익위사동궁 등이 창덕

궁 내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빈청동궁세자시강원세자익위사 등은 成宗때 세워진 것이

12)『端宗實錄』 권6 端宗 元年 4월 甲寅조 참조

후원에 못을 파게 하고 그 근처에 閱武亭을 세웠던 것 같으며 열무정 부근에서 4곳의 샘물

을 찾아내었다13) 열무정의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인 정조때 그 자리에 奉謨堂을 세웠다

고 하며 봉모당이 주합루 서남쪽에 있었 던 점으로 보아 열무정과 네 우물이 있던 곳까지가

후원의 영역이었던 것같다14) 그러나 이 일을 시작으로 하여 왕 7년 11월 24일부터 궁역 확

장을 계획하고 8년 2월부터는 궁성확충공사를 시작하였다 새로 쌓은 궁성은 동쪽으로 성균

관과 경계를 같이 할만큼 엄청나게 확장되었는데 둘레 4600자 높이 25자의 성을 쌓기 위하

여 한성부 백성 19040명(119家를 1統으로 하여 160통이 편성됨)이 동원되었다 이때 궁장

근처에 있던 민가 73호가 철거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창덕궁 후원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도

세조때의 궁역 확장공사 덕택이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세조는 7년 12월 19일에 그동안 위치와 역할에 따라 호칭되어 오던 궁내 건물의 이

름은 다음과 같이 확정되었다 즉 朝啓廳은 宣政殿 後東別室은 昭德堂 後西別室은 寶慶堂

정전(침전을 內正殿이라고도 부름)은 兩儀殿 동침실은 麗日殿 서침실은 淨月殿 누각은 澄

光樓 동별실은 凝福亭 서별실은 玉華堂 澄光樓下는 光世殿 廣延殿 별실은 求賢殿이라 이

름지어졌다 다만 인정전인정문진선문돈화문 등 정전 일곽과 광연루해온정 등 누정

의 이름은 일찍부터 정해져 사용되었다

여기서 편전인 선정전 뒤에 별실 2채가 있었다는 사실 침전에는 침실이 좌우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 태종 11년에 조성된 누각과 침실이 징광루와 응복정옥화당광세전 등으로

이름지어진 건물이라는 점 구현전으로 명명된 광연루(광연전) 별실은 단종때 조성된 것이라

는 점 등을 새롭게 알 수 있다 위 건물 가운데 광연루 일대는 성종 17년(1486)에 春宮으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1476~1506)이 1483년에 세자로 책봉된 지 3년째

되는 해로서 경복궁에도 세조 8년에 지은 동궁이 있었으나 성종이 창덕궁에 머무르기 위하

여 동궁을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은 창덕궁 안에 賓廳인 匪躬堂을 지었고 창덕궁 옆에는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

한 昌慶宮에 수많은 전각과 당우를 비롯하여 승정원홍문관사옹원사복시도총부 등

관청을 갖추었다 성종이 재위 26년간 내내 창덕궁 대조전 전랑(修文堂)에 거처한 사실을 감

안하면 왜 창경궁을 治朝와 관청까지 갖춘 궁으로 조성했는지 짐작이 간다 왜냐하면 창덕

궁에는 궐내각사가 고루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15) 성종 초반에는 대왕대비 정희왕희

가 창덕궁 안에 內佛堂을 짓기도 하였으나 그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다 또 성종 6

년(1475) 8월에는 宮門 29개소에 서거정을 시켜 이름을 짓고 현판을 걸었는데 이는 세조 8

년(1462)에 궁역을 확장하면서 새로 쌓은 궁성에 낸 새 문에 그때까지 이름이 없었기 때문

이었다16)

13)『宮闕志』昌德宮誌 閱武亭條

14)『宮闕志』昌德宮誌 奉謨堂 條 참조 봉모당은 「東闕圖」에도 주합루 서남쪽에 그려져 있으나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구선원전 서쪽 규장각 바로 뒤쪽으로 옮겨졌다(「東闕圖形」 고종년간『宮闕志』 참조)

15) 『新增東國輿地勝覽』卷之一 京都 下 文職公署武職公署 조에 보면 조선전기의 궐내각사는 경복궁이나 창덕

궁창경궁에 중복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왕이 정사를 보는 궁궐 가까운 곳에 관리들이 출근하여 정

치를 보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3궁의 시설은 수시로 번갈아가며 활용되었다

16)『成宗實錄』권58 成宗 6년 8월 己亥 조 참조 여기에는 창덕궁 궁문 29개소의 이름과 경복궁 궁문 8개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조선전기에 일어난 변화상 가운데 주목해야 할 일은 연산군때 이루어졌다 침전인 대조전

前廊에 있던 수문당(태종세종성종의 거처)이 소실되자 ldquo대조전은 낮고 수문당이 높아

통기가 안된다rdquo고 하면서 이를 고쳐 짓고 이름도 熙政堂으로 개칭하였는데17) 이로부터 침전

가까이에 세워진 희정당이 편전의 역할을 분담했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8) 그밖에도 연

산군은 폭정을 거듭하던 재위 말년에 선정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을 수리하거나 단청을 새로

하였고 인정전과 선정전의 기와를 청와로 바꾸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거듭되는 궁궐 공사

도중인 왕 1년에 反正이 일어나 왕위에서 쫒겨나자 모든 공사는 중지되었다 명종 5년에는

인정전 북쪽에 흠경각을 짓기도 하였다19)

태종때 이궁으로 창건되어 꾸준히 시설을 보완해 갔던 창덕궁은 세조가 후원을 조성하고

궁역을 확장하면서 크게 달라졌다 더구나 성종이 재위기간 전체를 창덕궁에 거처하면서 동

쪽에 창경궁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보좌할 수 있도록 한 결과 창덕궁과 창경궁은 조선전기에

이미 하나의 궁궐처럼 사용되면서 경복궁을 대신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으로 세 궁궐이 모두 소실된 뒤 경복궁을 제외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이

재건되고 인경궁과 경희궁이 창건되었을 때 그 모범적 선례는 경복궁 대 창덕궁창경궁이

라는 조선전기의 쓰임새에서 찾아졌던 것이다

나 조선 후기

1) 宣祖光海君仁祖代의 재건

경복궁창덕궁창경궁 등 조선전기에 이룩된 궁궐건축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창덕

궁이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버렸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누구에

의해서 소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대개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 즉 ldquo왕실과 관료들이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고 남은 빈 궁궐을 왜적이 수도 한성에 입성하기도 전에 우리 백성

들이 궁중에 침입하여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보물을 약탈했다rdquo는 설을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宣祖實錄』은 물론이고 유성룡(1542~1607)의 『西崖集』등 당시의 기록에 이러

한 견해를 싣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위 설은 목격담이 아니고 남에게 전해 들은 것

을 사실인 양 적은 것에 불과하다

유성룡이 불탄 궁궐을 직접 목격한 시점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

인 계사년(1593) 4월 20일이었는데 이때 종묘는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너진 채였다 그

러나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인 1592년 5월 2에는 경복궁은 전혀 불타지 않은 채 주인

잃은 빈 궁궐의 허허로움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왜군이 한성을 점령하고 승전고를 울리던

때까지는 경복궁과 한성 그리고 백성들의 목숨은 부지되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왜군

17)『燕山君日記』 燕山君 2년 6월 己丑 同年 8월 癸巳 8월 丙申 條 참조

18) 金東旭 「朝鮮時代 昌德宮 熙政堂의 便殿 轉用에 대하여」『건축역사연구』 5 한국건축역사학회 1994 6

9~21쪽 참조

19)『宮闕志』昌德宮誌 欽敬閣 條와 萬壽殿 條 참조

은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고 한성마저 탈환당하는 패전이 거듭되자 퇴각하면서 종묘와 궁궐

을 비롯한 도성내 모든 시설을 방화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왜군을 따라 전쟁에 참여한 從軍僧 제타쿠(是琢)의 『朝鮮日記』에는 왜군의 한성 입성

직후에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경복궁이 전혀 화재

를 입지 않은 채 온전하게 남아 있었음이 분명하다 즉

ldquo 북산 아래 남향하여 紫宮(경복궁을 가리킴)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다

섯 발자국마다 樓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閣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

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

자 4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 그 한 가운데에는 돌을 다듬어서 포개어 담

을 쌓았는데 높이가 8자이고 4귀퉁이에 방향에 맞추어 4마리씩 16마리의 돌사자가 놓여 있

다 그 위에 紫宸淸凉 두 전당이 있다 기둥은 돌기둥인데 아래 위에 용을 조각하였다

지붕에는 유리 기와를 덮었는데 잇단 기와 줄마다 푸른 용같다 서까래는 梅檀 나무인데

서까래마다 한 개씩 풍경이 달렸다 채색한 들보와 붉은 발에는 금과 은을 펴 돌렸고 구슬

이 주렁주렁 달렸다 천장 사방 벽에는 五色八彩로 기린봉황공작鸞학용호랑이등이 그려져 있는데 계단 한 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丹鶴을 새긴 돌이

깔려 있다 여기가 바로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이다rdquo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20)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 경복궁은

불에 타기는커녕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질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어서

종군나온 왜승으로 하여금 놀라움과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여기 인용된 기사는 경

복궁에 관한 것이지만 창덕궁의 사정도 벼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란이 끝난 뒤 국가 재건에 착수한 조정은 종묘와 궁궐을 빠른 시일 안에 복구하지 않

으면 안되었다 선조 38년(1605)에야 시작된 복구공사는 경복궁 중건을 목표로 진행되었으

나 선조 39년에 李國弼이 경복궁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중수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을 시작

으로 하여21) 선조 40년 2월에 경복궁의 길흉화복을 적은 역대의 문서를 검토한 다음 공사

는 창덕궁 중건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22) 여기에 더하여 호대한 규모의 경복궁을 재

건하기에는 물력과 인력이 모두 부족한 전란 직후의 형편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조 41(1608년) 정월 전후에 시작된 창덕궁 중건 공사는 두 차례로 나누어 진행되었는

바 광해군이 즉위한 그 해(1608) 10월에 완료된 1차 공사에서는 중요 전각이 대체로 조성되

었다 다음에 선조의 위패를 종묘에 祔廟한 직후인 1610년 봄에 재개된 2차 중건 공사에서

는 앞서 마무리하지 못했던 各司廂庫 등을 짓고 築墻하고 鋪甎하는 일을 1610년 9월에 이

20) 『京城府史』 上卷 京城府 pp269~270

21)『宮闕志』昌德宮志 昌德宮 條

22)『宣祖實錄』 선조 40년 2월 13일 조 주28)과 동일

르러 마쳤다23)

이때 중건된 건축에 대해서는 ldquo옛 제도를 따라 복구하였다rdquo는 상투구만 전할 뿐 구체적

인 기록이 없으나 정전편전침전 일곽이 옛터에 근거하여 복원되고 별당이 신조되었으

며24) 후원에는 정자도 세워졌다 한편 광해군 5년(1613)에는 世宗의 예지가 담겨 있는 시설

로 여겨진 欽敬閣이 인정전 북쪽에 재건되었고 왕 6년에는 창경궁 문정문 앞에 보루각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건된 지 얼마 안지난 1623년의 인조반정때 광해군이 거처하고 있던 창덕궁에

들이닥친 반정군이 광해군을 수색하던 중 失火로 外殿 가운데 인전전도총부內藥房春

秋館都總府郎廳房丕承閣弘文館 등과 內殿의 壽靜堂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건물이 소

실되고 만다25) 성종때의 춘궁터(태종때의 광연루 구현전터)에 중건되어 있던 儲承殿(동궁)

도 이때 소실되었다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할 수 없이 경운궁 별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

다 이후 인조는 창경궁에 거처하던 중 李适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마저 불타자 慶德宮으로

이어하였는데 인조 10년에는 창덕궁으로 이어하기 위하여 남아 있는 몇몇 건물을 수리하였

다 그리하여 왕의 거처는 내약방 왕비의 거처는 도총부 편전은 춘추관 동궁은 도총부낭청

방이나 비승각 경연청은 홍문관을 수리하여 마련하였다26)

인경궁을 헐어다 궁궐을 중건한다는 구상은 1633년에 먼저 창경궁을 짓는 것으로 시작

되었다27) 그러나 1636년의 병자호란 이후에는 국력이 크게 위축되어 궁궐을 중건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이 바람에 창덕궁의 중건공사는 늦어져서 1647년(인조 25)에 가서야 5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중건되었고 인조는 이때에야 비로소 창덕궁으로 還御할 수 있었다 창덕궁의

중건공사도 광해군이 무리하게 창건해 놓은 仁慶宮을 헐어 옮겨 짓거나 그 자재를 이용하였

기 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복구가 가능하였다28) 1648년(인조 26)에는 동궁인 저승전도 중

건됨으로써 창덕궁 중건공사가 마무리되었다29)

이때 건물의 복구는 5개의 작업소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1所에서는 大造殿集祥堂

澄光樓玉華堂靜黙堂부속 행각과 월랑 2所에서는 熙政堂承明門內行閣내반원기

타 월랑 3所에서는 寶慶堂泰和堂昭德堂燒廚房 4所에서는 선정전과 월랑 5所인에서

는 인정전 동월랑승정원臺諫廳과 인정문과 남월랑 등을 복구하였는데 모두 735칸에 이

르는 대규모 移建 및 重建工事였음을 알 수 있다30) 이때 중건된 건물 가운데 징광루가 가

장 장려하였다고 하며31) 또 지금껏 보존되어 있는 건물은 宣政殿뿐인데 이 건물은 인경궁

23)『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3 122~125쪽 참조

24)『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 9월 丁未 條 참조

25)『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1963 127쪽 참조 또 『宮闕志』 昌德宮誌 壽靜殿 條

참조

26) 『仁祖實錄』 仁祖 10년 10월 辛卯 條 참조

27) 1633년의 창경궁 내전 중건 공사를 상세히 기록한 『昌慶宮修理所儀軌』가 남아 있다

28)『서울 六百年史 문화사적편』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95 61쪽 156~161쪽 및 金東旭 「仁祖廟의

昌慶宮昌德宮 造營」『문화재』 19호 1986 참조

29) 『宮闕志』와 『東國輿地備攷』 第一卷 京都 에서 창경궁에 소속시켜 정리하고 있다

30) 이때의 공사과정은 『昌德宮營建都監儀軌』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중건된 건물의 명칭 가운데 讌和

堂은 『인조실록』 인조 25년 11월 戊申 條에는 실려 있으나 이 의궤에는 빼져 있다

의 편전인 光政殿을 옮겨 지은에 것으로 주변 건물의 거듭된 화재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아

당시의 공포형식과 구조를 전하고 있다32)

위에서 살핀 것처럼 선조광해군인조대를 거치면서 조영된 창덕궁의 건축은 정전

편전침전 일곽과 별당이 대체로 조선전기의 유구에 근거하여 복원된 것이었으며 훗날

「東闕圖」(1828~1830년 제작)에 그대로 묘사된 것처럼 조선후기 창덕궁의 根幹을 이루게

되었다 다만 도총부홍문관대간청내약방내반원 등 조선전기에는 창덕궁에 두지 안

았던 관청들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는 조선전기에 세 궁에 나누어 설치되어 있었던 관청

의 상당수가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자 창덕궁 안에 새롭게 조성되었음을 가리킨다33) 사정은

다른 궁궐도 마찬가지여서 창덕궁에 설치되지 않은 많은 관청이 창경궁이나 경희궁에 설치

되었다 한편 인조반정때도 소실되지 않은 채 보존되었던 비승각은 조선전기에는 없었던 건

물로 광해군 재건시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후대의 문헌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서 존속 여

부를 알기 어렵다

反正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계속된 화재로 재위

10여 년 동안 경운궁이나 경덕궁에 거처하였다 그러나 창덕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왕 10년에는 일시적으로 창덕궁에 거처하기도 하였으나 말년인 왕 25년에 이르러서야 창덕

궁의 중건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후원의 경영에 몰두하여 왕 14년(1636)부터

왕 25년(1647)에 걸쳐 끊임없이 정자를 짓고 원림을 조성하였다 즉 1636년(인조 14)에 歎逝

亭(rarr 逍遙亭)雲影亭(rarr 太極亭)청의정과 玉流川 1640년에 聚奎亭 1642년에 翠微亭(현

종 5년 개수하고 觀德亭으로 고침) 1643년에 竹亭(rarr深秋亭) 1644년에 六面亭(rarr 尊德亭)

碧荷亭(숙종때 淸讌閣으로 고침) 1645년에 醉香亭(숙종 16년에 喜雨亭으로 개칭) 1646년에

팔각정 1647년에 聚勝亭(larr 樂民亭)觀豊閣 등이 차례로 조성되었다34) 인조가 이렇듯 후

원 경영에 몰두한 것은 병자호란으로 입은 치욕과 복잡한 심사를 달래기 위하여서가 아니었

을까 후대의 왕들도 인조가 경영한 원림에 와서 ldquo萬機를 다스리는 여가에 샘물과 흐르는

물을 보고 마음을 함양하곤 한다rdquo고 하면서 인조의 원림 조성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였

다35)

2) 孝宗~正祖代의 변화

17세기 전반에 창덕궁은 정궁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비록 재목이 부족하여

인경궁을 헐어다 짓기는 하였지만 정전편전침전궐내각사를 비롯하여 후원의 원림까지

갖춘 대규모 궁궐로 경영되었고 창경궁의 보조를 받으면서 부족함없이 조선왕조의 왕정을

31) 징광루는 청기와를 덮은 2층 건물로 「東闕圖」에 그려져 있고 「東闕圖形」에도 그려져 있는데 1917년

창덕궁 내전 화재때 소실된 뒤 복구되지 않았다

32)『창덕궁』-한국전통건축 제2집- 52쪽 및 『서울 六百年史 文化史蹟編』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95

156~161쪽 참조

33) 이때 재건된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궐문인 敦化門뿐이다

34) 이상의 내용은 『宮闕志』 昌德宮誌의 해당 항목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며 괄호 안의 이름은 뒷날 개칭된

것이다

35) 『宮闕志』 昌德宮誌 太極亭 條의 숙종 어제 「上林三亭記」 참조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창덕궁은 조선전기에 이궁으로 출발하였으나 17세기 중반부터는

정궁의 시설을 갖추고 실제로 정궁 역할을 수행해 나갔던 것이다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는

한 경복궁은 상징적인 정궁일뿐 창덕궁이 실질적인 정궁이었던 것이다

이제 17세기 후반 이후에 창덕궁에 추가된 건축은 大妃殿東宮殿眞殿御齋室(養志

堂 이문원 부근 대유재와 소유재)후원의 별당과 정자 정도였다 즉 효종 5년(1654)에 수

리한 壽靜堂(인조때 세워진 건물)은 숙종 1년에는 壽靜殿으로 격상되어 인조 계비 壯烈王后

(1624~1688)의 거처로 정해졌으며 효종 6년에는 또 장렬왕후를 위하여 옛 흠경각터에 萬壽

殿을 지었는데 이 건물 일곽은 얼마 안가서 숙종 13년(1687)의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말

았으며 이후 다시는 재건되지 못하였다36) 또 효종 7년(1656)에는 慶德宮 景和堂을 移建하

여 春輝殿이라 고쳤다가 숙종 21년(1695)에 璿源殿으로 개칭한 다음 御眞을 봉안하였다 효

종은 이밖에도 후원에 魚水堂 과 天香閣(왕 4년)을 지어서 인조대에 조성된 원림 사이에 새

로운 원림을 하나 더 추가하였다37) 현종 8년(1667)에는 효종비 仁宣王后(1618~1674)를 모

시기 위하여 경덕궁 集禧殿을 철거해다가 집상당 옛 터에 옮겨 놓고 集祥殿으로 개칭하였

다38)

숙종대에는 東宮 書筵處인 誠政閣이 지어지고 왕 14년에 천문관측소인 齊政閣이 새로

지어졌다 후원에는 왕 18년에 영화당 일곽과 애련정 일곽이 조성되고 왕 33년에는 애련정

북쪽에 滌惱堂을 건립하여 현종대에 경영된 어수당 일곽의 원림을 완결지었다 또 후원 곳

곳에 정자를 지었는데 왕 14년에는 淸心亭 왕 15년에는 靈鼉亭 왕 17년에는 凌虛亭을 차례

로 지어 나갔다 이리하여 숙종대의 원림 조성을 끝으로 창덕궁 후원은 주합루 구역을 제외

하고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숙종 30년(1704)에는 궁성 서북쪽 밖에 있

던 別隊營의 庫舍를 헐고 임진왜란때 대군을 파견하여 도와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신종을

享祀하기 위하여 大報壇 일곽을 건설하였다39) 영조대에는 30년(1754)의 선원전 수리를 비

롯하여 영조 15년(1739)의 香室 21년(1745)의 齋殿 25년의 대보단 중수와 전사청 악공청

재생소 신건 등 10여 년 간에 걸쳐 대보단을 새롭게 변모시켰다40) 이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는 영조가 재위 기간 대부분을 경희궁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대에는 즉위년에 후원 안 희정당 옆에 규장각과 서향각을 짓고 왕 5년

(1781)에는 규장각 학사들의 숙직처인 이문원을 도총부 자리에 설치하는 등 숙종대에는 궁

궐밖 종부시에 있었던 규장각을 궁궐 안으로 끌어들여 右文政治를 표방하며 왕권강화의 토

대를 마련하였다 왕 9년에는 이문원 근처에 서적 보관처인 東二樓를 새로 지었으며 선원전

36) 이때의 공사 보고서로 『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가 전한다

37) 어수당의 창건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효종이 지은 시가 남아 있고 인조대에는 이 건물이 없었기 때

문에 효종때 지어진 것으로 해석하였다(『宮闕志』 昌德宮誌 魚水堂 條 참조

38) 이때의 공사 보고서로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가 프랑스 군대에 의하여약탈된 『昌德宮修改廳儀

軌』가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이크로필름본이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김동욱

「17세기 조선조 궁궐 內殿건물의 室內構成에 관한 연구」『大韓建築學會論文集』 1992년 10월호 87쪽 주

4 참조)

39) 경봉각은 창경궁 동룡문 안에 있던 것을 정조 23년(1799)에 옮겨 온 것이다(『東國輿地備攷』 京都 宮殿

昌德宮 條 참조

40) 『宮闕志』 昌德宮 lsquo萬世誦恩rsquo 조 「皇壇齋殿小識」(1745년) 「大報壇重修後小識」(1749)

이나 皇壇(대보단)을 展拜할 때 왕이 齋宿하던 御齋室인 大酉齋와 小酉齋는 정조 19년에 창

건되었다 한편 정조 6년(1782)에는 고대하던 장남(文孝世子)을 얻은 것을 계기로 동궁이 신

하들로부터 하례를 받거나 그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重熙堂을 창건하였다41) 이 시기에 동궁

의 처소로 天地長男宮과 文華閣 일곽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42) 또 정조 9년에는 창경궁

자경전을 짓다가 남은 재목을 활용하여 이극문 안 옛 수강궁터에 壽康齋를 지었는데43) 이

건물은 순조 27년 익종의 대리청정시 별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44)

「東闕圖」에 표현되어 있으나 1833년에 영춘헌을 짓기 위하여 헐린 天地長男宮 일곽은

세자의 거처로 중희당 바로 옆에 있었다45) 그리하여 중희당 일대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

계 지역이면서 순조대에 세자 익종이 거처하고 공부하던 곳으로서 훗날 代理聽政(1827년~

1830년)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익종은 창덕궁 안에 待鍾軒演慶堂倚斗閤 일곽田舍

(1826년) 등 많은 시설을 경영하였다46) 특히 후원의 의두합과 연경당은 대리청정 시기에

전자는 독서처로 창건한 것이고47) 후자는 1828년에 珍藏閣 옛터에 進宴處로 사용하려고 특

별히 창건한 건물이다48) 당시 연경당의 모습은 「東闕圖」와 『慈慶殿進爵整禮儀軌』의 圖

說 「演慶堂圖」(1828년 2월)에 잘 묘사되어 있으며 이로써 주택 형식의 현존하는 연경당은

적어도 헌종대 이후에 새로 지어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49)

3) 순조대의 소실과 재건

조선후기 궁정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던 창덕궁은 「東闕圖」에 그

려진 것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앞 시기에는 소규모의 화재도 있어서 숙종 13년(1687)

에 춘휘전(숙종 21년에 수리후 선원전으로 개칭)만 남겨 두고 萬壽殿 일곽이 모두 소실되었

는데 이후 복구되지 못하여 「東闕圖」에도 빈 터로 그려져 있다 또 동궁인 저승전 일대가

영조 32년(1702)에 소실되었다

41) 중희당 일곽은 1891년에 헐려 다른 곳에 이건되었으며 그 자리는 현재 후원으로 가는 진입로로 변해 버렸

다 (고종년간 『宮闕志』) 자세한 것은 이 글 3절 창경궁 부분 참조

42) 이강근 「조선 후반기 건축의 대외교섭」『조선 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2007

43) 『正祖實錄』 20권 9년(1785 을사) 8월 27일(갑진) ldquo建壽康齋貳極門內 有古井焉 慈慶殿之營建 以餘礫

剩磚 峙井上爲假山 至是撤去而浚其井 建小齋以臨之 是地 太祖朝壽康宮舊基 在《輿地勝覽》 仍命其齋

曰壽康rdquo

44)『純祖實錄』28권 27년(1827 정해) 2월 9일(을묘) ldquo議政府 以王世子聽政節目 別單啓【一 聽政節目 依

傳敎 以乙未事例磨鍊 一 聽政處所正堂 以重熙堂爲之 別堂壽康齋爲之rdquo

45) 이강근 「조선 후반기 건축의 대외교섭」『조선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2008 pp - 천지장남궁

과 그 좌측의 문화각 일곽은 정조 연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46) 『宮闕志』 昌德宮誌 해당항목 참조

47) 『宮闕志』 昌德宮誌 倚斗閤 條에서는 익종이 세자 시절에 예전의 독서처를 改建하였다고 적고 있어서 수리

를 한 것쯤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1826년에 쓴 「翼宗御製 倚斗閤上樑文」의 존재로 이 건물이

1826년부터 1827년 사이에 새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48) 『東國輿地備攷』 京都 宮殿 昌慶宮 演慶堂條 참조 純祖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축을 당하여 마침 집이 이루

어졌으므로 연경이라 이름하였다고 설명되어 있으나 尊號儀禮를 거행할 장소로 창건된 것으로 해석해야 옳

다(이강근「東闕圖」『建築文化』 1997년 9월호)

49) 고종 2년의 수리가 현존 연경당의 모습으로 변경된 계기였을 것으로 해석한 글이 주목된다(김동욱 「고종

2년의 연경당 수리에 대해서」 『건축역사연구』 한국건축역사학회 2004 3)

그러나 연이은 화재로 궁궐이 온통 소실된 때는 단연 순조대였다 먼저 순조 3년(1403)

에 仁政殿이 소실되어 이듬해에 중건되었다50) 11년(1411)에는 인정전 서월랑의 藝文館이

소실되어 또 중건하였는데 이때 고래의 史籍이 모두 불타 버렸다 또 1824년에는 대비전인

景福殿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정말 큰 화재는 순조 33년 10월에 일어났다 이 화재로 안으로

는 대조전으로부터 밖으로는 희정당까지 모두 소실되었으니 그 피해는 놀라울 정도로 큰 것

이었다 다만 인정전과 선정전 일곽이 불에 타지 않은 채 보존되었다 1년만인 이듬해 9월에

모두 중건되었다

이때의 중건공사에 대해서는 『昌德宮營建都監儀軌』(1834)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儀軌圖로 그려진 건물의 모습이 「東闕圖」와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점으로 미루어 중건하

면서 약간의 수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51) 그러나 『궁궐지』에서는 ldquo모두 370여 칸이 중

건되었으며 옛 유구를 토대로 하되 間架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복원하였다rdquo고 적고 있다

이때 중건된 건물은 대조전희정당징광루경훈각옥화당융경헌흥복헌양심합克

齋齋정묵당內燒廚房外燒廚房 등이었다 『宮闕志』(高宗年刊)에서 보듯 적어도 건물만

큼은 原狀回復된 것으로 보인다 순조 말년에 창덕궁창경궁경희궁을 모두 복구하고 나

서 그것을 기념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엮은 책이 바로 위 책이다

순조대 대왕대비전으로는 경복전과 수정전이 있었다 이 가운데 수정전은 1794년 12월

8일 정조의 명으로 慈殿(英祖繼妃 貞純王后)에게 冊寶 慈宮(정조 생모 혜경궁)에게 冊印을

바치고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서 수리되었고52) 이때 건물 이름도 壽靜殿으로

격상되었다53) 1796년에는 원자(훗날의 순조)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기도 하였다54)

대왕대비 정순왕후(1745-1805)는 이후 수정전에 거처하였으며55) 정조 사후 5년 뒤인

1805년에 景福殿에서 승하하였다56) 이후 正祖妃 孝懿王后(1753-1821)가 수정전에서 거처하

였는데 1813년에 12월 13일 밤에 수정전 동행각에서 화재를 만났으며 다행히 불을 꺼서 수

정전은 무사했다57) 효의왕후는 1821년 3월에 창경궁 慈慶殿에서 승하하였다 이보다 5년 앞

50) 1804년의 공사 내역은『仁政殿營建都監儀軌』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51) 金東旭 『朝鮮後期 宮闕建築의 造營에 관한 硏究』 -純祖朝의 西闕東闕 造營에 대해서- 文化財硏究所

1990 및 안휘준 『옛 궁궐 그림』 대원사 1997 72~75쪽 참조

52)『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 lsquo수정전rsquo조에서는 1623년 인조반정때 대내에서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며

효종 5년(1654) 인조의 繼妃 莊烈王后를 위하여 고쳐 지었으며 을묘년부터 전으로 격상시켜 불렀다고 적혀

있다(ldquo孝宗五年甲午爲 莊烈王后改建 乙卯改稱殿rdquo) 여기서 을묘년은 정조 19년(1795)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

53)『일성록』정조 18년(1794년 갑인) 12월 18일(신미)

54)『일성록』정조 20년 10월 4일(병자) ldquo領議政 洪樂性曰翁主痘候聞極平順 今已出場不但 今番之欣喜 可占兆端

之吉慶矣 予曰果如卿言矣 予敎元子拜諸大臣亦拜 予曰今番痘憂慈宮獨貽勤勞下情不安 及今出場大加喜悅萬萬欣

幸矣 予於慈宮 經旬離側 今番初有也 元子則姑爲 入處于壽靜殿 予則今將還謁慈宮矣rdquo ldquo予乘軺軒 以出元子陪焉

由永肅門 拱辰門 入壽靜門 詣壽靜殿 元子仍留 予還出壽靜門 乘軺軒 由宜春門 靑陽門 宣明門 保定門 萬八門

還內rdquo

55)『內閣日曆』 순조 21년 7월 19일(丁卯) lsquo正宗大王孝懿王后誌文rsquo 또 『健陵誌狀續編』遷陵誌文[純宗二十一年

辛巳] ldquo二十八日己卯疾大漸 大臣閣臣入候臥內 王已不能語而 微微有玉音曰壽靜殿 卽貞純大妃所御殿 蓋聖意若

有仰告於 慈聖者也 遂昇遐于昌慶宮之迎春軒 春秋四十九 大喪之日 都人士庶顚仆哭踊深山rdquo

56) 창덕궁 내 大妃殿의 하나였던 경복전은 1824년에 화재로 소실된 뒤 중건되지 않았기에 「동궐도」에마저 터

로 표현되어 있다 1803년에 순조가 직접 지은 lsquo景福殿記rsquo에서 그리고 있듯이 동서남북으로 각각 拾翠軒 萬

寧門 愛蓮齋 松竹軒이 빙 둘러 연해 있었으며 울창한 소나무 숲과 연못의 연꽃이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그

런 곳이었다 『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 lsquo경복전rsquo 조

서 惠慶宮(1735-1815)은 1815년 12월에 창경궁 景春殿에서 승하하였다58) 1822년 12월에는

정조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嘉順宮(1770-1822)도 창덕궁 寶慶堂에서 서거하였다59) 순조

의 증조모 조모 모 생모가 차례로 돌아가셨으므로 1822년 12월 이후에 수정전을 비롯한

궐내의 여러 대비전은 텅 비게 되었다

4) 憲宗哲宗代의 변화

이후 헌종 헌종 13년(1847)에는 樂善堂 옛 터에 헌종의 침전인 樂善齋가 건립되었고 왕

14년에는 그 옆에 왕자 출산을 위하여 새로 맞아들인 경빈 김씨의 거처로 錫福軒을 지었다

석복헌 오른쪽에 연접해 있는 壽康齋는 정조 9년(1785)에 지은 건물인데 낙선재 창건시 대

폭 중수되어 대왕대비인 純祖妃 純元王后(1789~1857)의 거처로 삼았다60) 한편 1843년(헌종

9)에는 헌종비(孝顯王后 1828-1843)61) 1857년 12월에는 순조비(純元王后 1789-1857)62)

1878년에는 철종비(哲仁王后 1837-1878)가 승하하였으므로63) 궐내에는 익종비(神貞王后

1808-1890) 헌종 계비(孝定王后 1831-1903) 등 왕실 어른 두 분만이 살아 계셨다64) 1868

년 7월부터는 중건된 경복궁으로 왕실이 移御하자65) 창덕궁내 여러 전각의 쓰임새는 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창덕궁에는 19세기 전반기에 다음과 같은 闕內各司가 설치되어 있었다 즉 규장각이

문원승정원홍문관빈청(匪躬堂)예문관도총부내병조尙瑞院尙衣院司饔院

典設司典涓司太僕寺內班院侍講院翊衛司內醫院鑄字所 등 거의 모든 관청이 설

치되어 있었다 다만 내사복보루각 등은 창경궁 안에만 설치되었고 궁궐호위와 수비를 맡

은 군사시설이 창덕궁에 남소와 서소만 설치되고 동소와 북소는 창경궁에 설치되어 있는 점

57)『內閣日曆』순조 13년 12월 18일 ldquo壽靜殿行閣失火 夜初更失火 敎曰 宮城扈衛置之 夜一更 壽靜殿東行閣失

火救火後 大殿 王大妃殿 中宮殿 惠慶宮 嘉順宮 世子宮 口傳問安 答曰知道 金祖淳 沈象奎 南公轍 徐榮輔 李存

秀 金履喬 李魯益 李光文 鄭元容 朴宗薰 李龍秀 李鶴秀 進參rdquo 여기서 대전은 순조 왕대비전은 정조비 효의

왕후 혜경궁은 정조의 생모 가순궁은 순조의 생모임

58)『純祖實錄』 순조 15년 12월 15일 21년 3월 9일

59)『純祖實錄』순조 23년 계미(1823 도광 3) 2월 3일(계묘) 빈은 英宗 경인년 5월 8일에 탄생하였고 正宗 정

미년에 빈으로 선발 되었는데 殯號는 綬이고 宮號는 嘉順이다 지금 주상 전하 22년 壬午 12월 26일에 昌德

宮 寶慶堂에서 승하하니 향년 53세였다

60) 盧辰河李相海 「樂善齋一廓 建築의 造營에 관한 復元的 考察」『건축역사연구』 7호 건축역사학회 1995

43~70쪽 참조

61)『憲宗實錄』「총서」 ldquo妃는 孝顯王后 金氏【籍은 安東이다】이니 領敦寧府事 永興府院君 贈 領議政 金祖

根의 딸로 무자년【순종 28년이다】 3월 14일 계축에 탄강하여 정유년에 王妃로 책봉되었는데 계묘년 8월

25일 을축에 승하하니 춘추 16세였다 景陵에 장사하였다rdquo

62)『日省錄』철종 8년(1857) 12 월 17일(갑자) ldquo檢校提學臣金炳冀製進哀冊文曰維歲次丁巳八月己酉朔初四日壬

子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睿成弘定純元王后昇遐于昌德宮之養心閤移殯于歡慶殿以是年十二月戊申朔

十七日甲子將合祔于仁陵禮也rdquo

63)『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5년 무인(1878 광서 4) 5월 12일(신유) 대비전이 승하하여 擧哀한 뒤 대전 대왕

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약방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망극하다고 답하였다

64)『고종시대사』3집 1890년(淸 光緖 16年) 4月 17日(丙辰) 未時에 大王大妃 趙氏(翼宗妃)가 興福殿에서 昇遐

하다 신정왕후는 집옥재를 이건하기 전 해에 돌아가셨다

65)『국역 승정원일기』고종 5년 무진(1868 동치 7) 7월 2일(정축) 移御한 뒤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종친 의빈 약방 내각 정원 옥당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등으로 보아 두 궁은 하나의 궁궐처럼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이 두 궁을 합

쳐서 東闕로 부르게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昌德宮은 外朝와 治朝를 중심으로 하

되 왕과 왕비의 침전을 갖춘 궁으로 昌慶宮은 燕朝를 중심으로 하되 동궁과 대비전을 갖춘

궁으로 역할을 분담하면서 하나의 궁궐처럼 운용되었던 것이다 哲宗代에는 철종 5년(1854)

9월부터 8년 윤5월 사이에는 1804년에 중건된 인정전의 해체중수공사가 있었는데 공사 내

역은 『仁政殿重修儀軌』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3) 근middot현대기

(1) 1865년~1910년의 변화

선조~광해군대에 중건된 이래 250여 년 동안 조선왕조의 정궁으로 사용되던 창덕궁은

고종 초반에 경복궁이 중건되자 격하되어 본래의 이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창덕궁의 쓰임새가 하루 아침에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1873년과 1876년 두 차례에 걸쳐 큰 화재가 발생하자 1877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수리하

고 이어하게 된다 1891년에는 중희당을 비롯하여 수정전 영역의 별당이던 集玉齋와 協吉堂

을 경복궁 내로 옮겨지었다

집옥재는 경복궁 신무문 안쪽 가까이에 있는 벽돌조 건물이다 집옥재를 중심에 두고

향좌측에 2층 복도로 연결된 중층 八隅亭이 있고 향우측에는 또 중층 복도로 연결된 단층

맞배지붕 정면 5칸 규모의 協吉堂이 있다66) 이 가운데 집옥재와 협길당은 1881년에 창덕궁

咸寧殿(壽靜殿을 중건한 뒤 변경한 명칭)의 北別堂과 西別堂으로 세워진 건물이었는데 지어

진 지 10년 뒤인 1891년에 경복궁의 지금 자리로 함께 옮겨졌다 이 시기에 경복궁에서 일

어난 두 차례의 화재(1873년 4월과 1876 11월)등의 사유로 왕실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는 일

이 있었다 첫 번째 이어는 1873년 4월의 내전 지역 화재로 인하여67) 1873년 12월 20일에

있었는데 이때 창덕궁을 미리 수리하였다68)

그러나 1875년 2월에는 다시 경복궁으로 이어하였으며69) 1876년 4월에 경복궁 내전 중

건공사가 완료되었다70) 그러나 같은 해 11월에 다시 큰 화재로 경복궁 내전 일곽이 모두

66) 집옥재가 있는 영역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 지역으로 묶여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가 45년만인 2006년

9월 29일에 처음 민간에 개방되었다 출입금지 구역이던 시절에 두 차례 수리공사가 있었는데 1차는 1982년

의 보수공사(『集玉齋補修工事報告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2)이고 2차는 2005년의 수리공사(『集

玉齋修理調査報告書』 문화재청 2005 12)이다 2차 공사에 대한 조사보고서에는 집옥재의 연혁과 이건 이

유에 대한 견해가 서술되어 있어서 참조를 요한다

67) 『日省錄』고종 10년(1873) 12월 10일 (갑신) ldquo慈慶殿失火 巳時火起於純熙堂二十四間延燒錫趾室十二間慈慶

殿三十二間福安堂六間紫薇堂三十八間交泰殿三十六間複道二十八間行閣一百八十八間半合三百六十四間半rdquo

68)『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0년 계유(1873 동치 12) 12월 20일(갑오) 눈 ldquo창덕궁으로 移御한 뒤에 대전 대

왕대비전 왕대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의 2품 이상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

고 답하였다

69)『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2년 을해(1875 광서 1) 5월 28일(갑자) 비 ldquo이어한 뒤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

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종친 의빈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 2품 이상과 육조 대사간이 구전으로 문안하

니 알았다고 답하였다rdquo

70)『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3년(1876) 4월 1일 교태전 자경전 자미당 인지당 4건물을 짓는 데 공을 세운

소실되었으므로71) 1877년 3월에는 다시 창덕궁으로 이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창덕궁과

창경궁을 다시 수리하였다72) 이후 1885년에 경복궁으로 이어할 때까지73) 왕실은 창덕궁에

머물러 있었다 한편 1882년 6월에 경복궁으로 다시 이어하겠다는 전교가 있었으나 곧 철회

된 일이 있었다74) 같은 날 임오군란이 발발하고75) 1884년 12월 4일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자 왕실은 창덕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복궁 내전의 재건은 1888년이 되어서

야 겨우 완료되었으며76) 이 시기에 고종은 1873년에 창건된 乾淸宮 영역에 거처하면서 정

사에 임하였다

1881년(고종 18) 3월의 수정전 수리 공사는 경복궁 내전의 두 번째 화재로 촉발된 창덕

궁 이어로 왕실이 창덕궁에 머무르던 기간에 시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수정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여러 채의 별당을 짓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살아계신 두 대비와 관련

이 있는 것일까 적어도 명분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고종은 수정전 수리 공사를 지시하

는 자리에서 그 해가 생전에 수정전에 거처하셨던 정조비 효의왕후의 승하 60주년임을 상기

시키면서 슬픔을 견딜 수 없다고 하고 건릉에 예관을 보내 헌작례를 올리게 하였다77) 정조

대의 불행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수정전 일곽 증설 공사에 정조대의 정치를 흠모하는 고

종의 의도가 엿보인다78)

문제의 집옥재는 바로 이때 수정전(공사후 함녕전으로 개칭)의 北別堂으로 지어진 건물

이다 3월 1일 고종의 지시로 시작된 수정전 일곽 보수공사와 별당 신축공사는 그 해 11월

사람들에게 시상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때 중건 공사가 일단락된 듯하다

71) 『日省錄』 고종 13년(1876) 11월 4일(신유)

72)『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4년 정축(1877 광서 3) 3월 10일(병인) 낮에는 맑고 밤에는 비가 옴 또 무위

소의 말로 아뢰기를 ldquo창경궁을 수리하는 역사가 지금 이미 끝났으니 諸色工匠들을 모두 해산해 보내겠습니

다 감히 아룁니다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헌직이 호조의 말로 아뢰기를 ldquo창덕궁을 수리하는 역

사가 지금 이미 끝나서 제색 공장들을 모두 해산해 보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辰時 대가가 창덕궁으로 환어하였다

73)『국역 승정원일기』 고종 22년 을유(1885 광서 11) 1월 17일(정사) 맑음 ldquo移御한 후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의 2품 이상 관원 육조 당상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rdquo

74)『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9년 임오(1882 광서 8) 9월 29일(임자) 맑음 ldquo부교리 趙性鶴이 상소하기를 hellip

(중략)hellip 毓祥宮이 불탔지만 한 달이 넘도록 아직 영건하지 못하고 있고 경복궁으로 移御하라는 명을 비용을

아끼느라 어쩔 수 없이 還收하셨으니 우리 전하의 효도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통하시며 지은 지 오래된 곳을

떠나 새 궁궐로 가고자 하시는 마음이 얼마나 절박하겠습니까rdquo

75)『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9년 임오(1882 광서 8) 6월 5일(기미) 맑음 ldquo조병직에게 전교하기를 lsquo경복궁으

로 移御할 것이니 該房은 그리 알라 날짜는 이달 그믐 이전으로 가려서 들이라rsquo 하였다

76) 『日省錄』고종 25년 4월 12일(계사) ldquo重建所以交泰殿 康寧殿 麟趾堂 紫微堂上樑吉日今月十五日未時 推擇

上樑文製述官 書寫官別單書入啓rdquo

77)『고종실록』고종 18년 3월 1일(계해) ldquo지시하기를 lsquo이해 이달은 바로 정조비 孝懿王后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된다 지나간 옛날을 생각하면 슬픔을 어찌 견디겠는가 이달 9일 健陵의 酌獻禮는 大臣을 보내서 대

신 거행하도록 할 것이다rsquo라고 하였다 또 지시하기를 lsquo壽靜殿의 여러 곳을 수리하는 것과 새로 공사하는 것

은 본소로 하여금 거행하게 할 것이다rsquo 라고 하였다rdquo 『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8년 신사(1881 광서 7) 3

월 1일(계해) ldquo 송병서에게 전교하기를 lsquo壽靜殿 여러 곳의 重建과 營建을 본소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rsquo

하였다rdquo 무위소의 말로 아뢰기를 lsquo수정전 여러 곳의 중건과 영건에 대한 일을 본소에서 거행하라고 명하

셨습니다 역사를 시작할 길일을 일관 韓應翼으로 하여금 날을 택하게 하였더니 이번 3월 2일 시가 길하다

고 하였습니다 이날 이 시각에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rs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rdquo

78) 이태진 「大韓帝國 皇帝政과 民國 정치이념의 전개 -國旗 제정보급을 중심으로」『한국문화』 22 1997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pp 279-305에 「고종의 국기제정과 君民一體의 개념」이라는 제목

으로 재수록)

까지 진행되어 거의 모든 건물이 완공되었던 듯하나 11월 7일의 화재로 150칸 정도가 불타

버리고 말았다79) 이때 함녕전과 더불어 東別堂 南別堂은 소실되었으나 서별당인 協吉堂과

북별당인 集玉齋만은 소실되지 않았다80) 이후 1882년 6월초까지 진행되던 공사는 임오군란

발발로 중지되었고 1891년 3월 21일 이후 중건소가 주관한 함녕전 일곽 移建 공사에서 함

녕전 등 여러 건물은 어디론가 이건되었으며 1891년 7월에는 집옥재와 협길당도 경복궁으

로 이건되었다

1891년 3월의 함녕전 일곽 이건으로 시작된 이 시기 창덕궁 건물의 타 장소 이건은 담

당기구인 중건소를 설치하여 진행되었다 1891년 4월의 경복궁 계조당 개건 5월의 창덕궁

중희당 이건 7월의 경복궁 寶賢堂 改建과 집옥재 이건으로 이어지면서 6개월 이상 대규모

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료에 이건 장소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함녕전 중희당

등 창덕궁내 여러 건물이 어디로 이건되었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종 37년(광무 4 1900)에 비워 두었던81) 경운궁 선원전 제1실에 태조 고황제의 어진

을 새로 모사하여 봉안하게 되자82) 경복궁과 창덕궁의 선원전에도 태조 고황제 어진을 봉

안하기 위하여 새로 제1실을 증건하게 되었다83) 그 결과 창덕궁 선원전(현 구선원전)은 신

실 7실을 갖추고 정면 9칸 측면 4칸인 규모로 확장된 모습으로 확정되었다 이 시기 선원전

일곽의 평면 구성은 東闕圖形 에서 확인할 수 있84)

융희 1년(1907)에는 고종황제가 폐위당하여 경운궁(이때 덕수궁으로 개칭)에 거처하게

되자 창덕궁에서 純宗(1907-1910)이 즉위하였다 1908년에는 인정전 일곽을 크게 수리하면

서 進善門(광해군때 중건된 건물로 추정됨)을 철거하였다

(2) 1910년~1945년의 변화

1910년 8월 29일에 불법적으로 맺어진 한일합방 조약이 인정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리

하여 亡國과 함께 순종은 昌德宮殿下로 격하되었다 그 뒤로 왕실의 규모는 그럭저럭 유지

되지만 나라 잃은 왕조의 왕실과 궁궐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1907년부터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창덕궁의 개조 왜곡으로 인한 변형 훼손 과정은 우리 민족문화 전체를 말

살한 일제침략자들의 간악한 문화 파괴 행위의 시금석이다 장서각 소장 창덕궁 평면도 3종

을 바탕으로 이 시기 창덕궁 宮域의 단계적 변화 양상을 추적해 볼 수 있는데 이는 곧 창

덕궁의 파괴 과정이다

79)『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8년 신사(1881) 11월 8일(병신) 맑음 ldquo영건소가 아뢰기를 지난밤 화재 때 殿堂

과 行閣 150칸이 모조리 타 버렸습니다(후략)rdquo

80) 화재 다음 해인 고종 1년(1882) 3월 14일부터 6월까지 진행된 공사에서는 咸寧殿 衍福堂 正善堂 등 3채만

이 계속해서 언급되었을 뿐 협길당과 집옥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국역 승정원일기』 참조)

81)日省錄 광무 3년(1899) 11월 29일(임인) 高宗實錄 고종 36년(1899) 12월 31일(양력) 日省錄 광무 4

년(1900) 4월 3일(갑술) 관보 第一千五百六十四號 光武 四年 五月 三日 木曜 1 宮廷錄事 관보 第一

千五百六十五號 光武 四年 五月 四日 金曜 1 宮廷錄事

82) 高宗實錄 고종 37년 5월 18일(양력)

83) 高宗實錄 고종 37년 5년 22일(양력)

84) 이강근 「조선후기 선원전의 기능과 변천에 관한 연구」『강좌 미술사』35 2010 pp245-246

즉 1911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장서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形」

과 비교하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敦化門에서 仁政門에 이르는 행각이 없어졌고

그 자리에 宮內府廳舍가 생겼으며 ② 인정전 행각이 모두 개조되었고 후면에 대조전으로

연결되는 긴 행각이 생겨났다 ③ 선정전과 희정당 앞쪽에 있던 관청들이 모두 헐리고 선정

전과 희정당 사이에 사다리꼴 담이 생겼다 ④ 선정전 뒤 보경당 태화당 재덕당 영역이 없

어지고 그 자리에 lsquoㅍrsquo자형 건물이 생겼다 ⑤ 빈청을 지나 낙선재로 가는 길목에 있던 건물

은 모두 없어지고 길로 변하였다 이로 인하여 돈화문에서 곧장 후원으로 연결되는 신작로

와 창경궁으로 연결되는 신작로가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는 대체로 1907년부터 1909년 사이

에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같은 도면의 창경궁 영역에서는 植物本館(1909) 植物培養室

(1911) 博物本館(1911)이 신축되어 있어서 도면 작성시기는 1911년경으로 생각된다

또 1911년부터 1921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

形」과 비교하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돈화문 앞 차도가 확장되고 雲峴 쪽 신작로

가 연결되었다 ② 돈화문 안 오른쪽의 수문장청이 없어지고 왼쪽의 영군직소는 lsquo消防所rsquo로

바뀌고 금호문 밖의 건물은 경찰서로 바뀌었으며 금천교를 향해 왼쪽에는 헌병소가 생겼다

③ 檢書廳 內閣 奉謨堂으로 이루어진 奎章閣 영역은 내각 건물에 봉모당을 봉모당 건물에

譜閣을 설치한 이외의 주변건물은 모두 없어졌다 ④ 인정전 서행각 밖에 있던 政廳 玉堂

藥房 永依舍 등이 모두 없어지고 덜렁 창고 한 채가 생겼다 ⑤ 선원전 영역에서는 선원전

에 元璿源殿이라 쓰고 養志堂을 헐었다 ⑥ 선원전 이북의 숙경재 소주방 생물방 수라간

등 일곽을 모두 헐고 營繕倉庫(현존 의풍각) 木炭庫 醬油庫 등을 신설하였다 ⑦ 대보단을

헐고 관통하는 길을 냈으며 대보단 남쪽 궁장 밖 별도의 영역(北一營 자리)에 1921년에는

선원전과 懿孝殿을 덕수궁으로부터 移建하였다 ⑧ 1917년에 소실된 대조전 일곽을 1920년

에 경복궁 내전을 헐어다 재건한 모습이 그려져 있고 이때 새로 지은 生果房 주방 등이 대

조전 서쪽에 그려져 있다 또 뒤뜰에 嘉靖堂이 移建되어 있다 ⑨ 낙선재 일곽 남행각 밖의

모든 건물이 없어지고 낙선재에 현관이 수강재 옆 마당에 여러 창고가 창경궁과의 경계에

담이 신설되었다 ⑩ 이왕직청사 뒤에 창고가 신설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11년부터 1921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므로 도면 작성시기는 빨라야 1921년경으로 추정된다 또 이 도

면에는 종묘와 창경궁 사이를 가른 도로(1932년 개통)가 아직은 신설되지 않았으므로 1932

년 이전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1936년경에 작성된 장서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形」과 비교하

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돈화문 안쪽의 경우 소방서는 창고로 헌병소는 昌德宮支

署와 봉모당사무실로 경찰서는 舊 昌德宮警察署 등으로 바뀌어 있다 ② 元선원전 주변의

부속건물은 모두 헐렸다 ③ 희정당 오른쪽의 觀物軒에 lsquo緝熙rsquo라고 처음 적었다 이러한 변화

1는 1936까지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 3장의 장소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토대로

1907년 이후부터 1936년까지 창덕궁에서 일어난 변화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85)

이 가운데 가장 극심하게 파괴된 곳은 정전인 인정전 일원 편전인 선정전과 희정당 일원

85) 이강근 「장서각 소장 궁궐도면」 『건축역사연구』 63호 2009 4 pp 142-143

침전인 대조전 일원 등이었다 통치 기능이 마비되면서 1909년에는 궐내각사를 대신하여 이

를 통폐합할 의도로 일본식 2층 양옥인 궁내부청사가 돈화문 오른쪽 영역에 세워져 근본적

인 변화가 일어났다 후원 지역에는 숲 사이로 이리저리 낸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한편 1917년 겨울에는 대조전 서쪽에 붙어 있는 나인 갱의실에서 불이 나 순종과 순종

비가 급히 피신한 가운데 大造殿熙政堂景薰閣 등을 비롯하여 선정전 동쪽의 내전 일곽

이 대부분 불타버렸다 이때 내전에 보관되어 온 많은 보물과 역사 자료가 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의 화재는 放火로 추정된다 1917년은 순종이 폐위되고 나라를 빼앗긴 지 7년째

되는 해이며 경복궁에는 조선총독부청사 건립공사가 착공되어 일제의 혹독한 식민정치가

공고해지고 있었던 해이다 바로 이러한 때 왕의 침전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일어난 것은 왜

일까 의도적인 방화였을 가능성은 없는가 마지막 황궁이자 폐위당한 순종의 거처이기도

했던 창덕궁의 내전이 모두 소실되었으므로 순종 일가의 거처를 새로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

었다

1919년 1월에는 고종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로 인하여 31 독립만세가 거국적으로 일어

났으나 독립은 쟁취할 수 없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창덕궁의 중건이 미루어지다가

1920년에 이르러 중건에 관한 대책회의가 열렸는데 처음에는 700평 정도의 건물을 한옥에

서양식을 가미한 절충식으로 짓기로 하였으나 그 다음 회의에서는 경복궁의 내전을 헐어다

가 복원한다는 奇想天外한 방침이 정해졌고 그렇게 공사는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왕

직(李王職)을 시켜 경복궁 내전을 뜯어다가 창덕궁 내전을 복구하는 데 쓰도록 하는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경복궁에서 헐려 나간 건물은 交泰殿康寧殿동행각서행각延生

殿慶成殿延吉堂應趾堂欽敬閣含元殿萬慶殿興福殿 등이었다

그 결과 경복궁 내전은 완전히 훼손되고 3년간에 걸친 공사 끝에 창덕궁 내전 일곽 가

운데 대조전과 좌우 헌(흥복헌과 융경헌)희정당경훈각함원전 등이 변형된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대조전은 비교적 충실한 모습으로 재건된 반면 희정당은 규모가 대폭 확장되고

건물 앞쪽에 전에 없던 행각과 부속 건물이 첨가되었으며 평면 규모는 물론 기둥의 높이

변화 복도의 첨가 전면 부속건물의 돌출부 등은 전통적인 궁궐 건물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심지어 서양식 가구를 들여와서 입식생활에 맞도록 개조하였다 대청 좌우에는 벽화도 새로

조성하였다86) 대조전 서쪽으로 전에 없던 콘크리트 구조물이 지어져서 생과방(生果房) 복

도 등으로 쓰이게 된 것도 새로운 변화였다 경훈각은 징광루를 포함한 2층 건물이었으나

그 자리에 경복궁에서 옮겨 온 단층 건물인 만경전을 세움으로써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건

되었다 또 경훈각 오른쪽 마당 즉 대조전 뒤뜰에 있던 어정은 이때 메워진 듯하다

그런데 대조전은 경복궁 교태전 재목 희정당은 경복궁 강녕전 재목을 이용하여 재건된

반면 경훈각은 경복궁 만경전을 그대로 移建한 것이다 함원전은 경복궁 함원전을 이건한

것이 아니라 교태전의 동북 翼閣인 建順閣을 이건한 것인 듯한데 건물의 칸수와 기둥 간격

만 약간 변형되어 있다 대조전을 중건하면서 교태전 건물을 변형시켰기 때문이다87)

86) 이때 조성된 벽화의 미술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조은정 「1920년 창덕궁 벽화조성에 관한 연구」『미술사학

보』33 미술사학연구회 2009 참조

87) 장순용 앞 책 72쪽

경복궁 만경전은 원래 대비 침전인 자경전의 북쪽에 마련된 건물로 후궁 지역의 중심건

물이었는데 중건 당시의 사용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명칭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규모

와 평면형태로 보나 대비 침전일 가능성이 높다 경복궁을 중건하던 당시에는 익종비 神貞

王后(1808-1890) 헌종계비 孝定王后(1831-1903) 철종비 哲仁王后(1837-1878) 세 분이 모두

살아계셨으므로 대비의 침전도 세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가운데 慈慶殿이 신정왕후 興

福殿이 효정왕후의 거처였으므로 萬慶殿은 철인왕후의 거처로 마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만

경전 동쪽에는 內燒廚房인 建綺閤) 外燒廚房인 瑤光堂이 있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경전은 철인왕후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고종의 집무처로 빈번

하게 사용되었다88) 만경전 바로 북쪽에 있었던 만화당은 일찍이 1897년 5월 경운궁 중건시

에 경운궁으로 이건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그 남쪽에 있던 만경전마저 창덕궁으로 이건됨으

로써 경복궁 자경전 이북의 중요 내전은 모두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 『進饌儀軌』(1887 丁亥) 圖說編의 lsquo萬擎殿圖rsquo나 『朝鮮古蹟圖譜』十권(1930년간)의

사진을 통해서는 건물의 외형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현존 경훈각이 경복궁

만경전을 옮겨 원형 그대로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89)

1920년에 재건된 이후 대조전 일곽에서 살았던 순종 일가의 생활은 궁녀들의 증언을 통

하여 밝혀진 바가 있는데90) 그 가운데 당시 경훈각의 용도를 언급한 내용이 있어서 주목된

다 즉 ldquo순종 내외가 내전 중건뒤 이곳에서 생활한 햇수는 7년 남짓한데 왕비 윤씨(순정황

후)는 경훈각을 공부방 겸 쉬는 집으로 애용했다고 한다 종실 부인 2 3명과 김명길 상궁까

지 끼어서 가정교사를 앉히고 영어와 일본어도 배우고 피아노도 들여다 놓고 가끔 쳤다고

한다rdquo 그러나 1926년 순종황제 사후부터는 윤비의 거처가 낙선재로 바뀌면서 경훈각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한편 1921년에는 창덕궁 후원의 동북쪽에 덕수궁 선원전을 헐어다가 신실 12칸 형식의

정면 14칸 측면 4칸 규모의 璿源殿을 새로 지어 역대 제왕의 御眞을 옮겨 봉안하고 인정전

서쪽에 있던 원래의 선원전은 건물만 남겨 둔 채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때 덕수궁 안 서

북 영역에 있었던 순명효황후의 혼전인 懿孝殿도 함께 옮겨져 새 선원전 앞쪽에 세워졌

다91) 이리하여 조선왕조 역대 왕의 어진마저 궁궐 깊숙한 곳에 幽閉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26년 4월 25일에는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였으므로 궁궐의 주인은

더 이상 없게 되었으니 나라 잃은 지 16년만의 일이었다 일제 치하이기는 하지만 그 뒤로

창덕궁은 공원으로 전락되어 내외국인에게 관람이 허용되었고 이에 따라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하여 그 東西 行閣과 인정문 및 좌우 月廊이 전시장 용도로 개조되었다 이외 많은 전

88) 『승정원일기』 고종 22년(1885) 1월부터 고종 28년(1891) 9월 사이에 230여 차례 사용되었다

89) 만경전의 규모와 평면은 「北闕圖型」『宮闕志』 등에서 확인된다 즉 ldquo萬慶殿三十六間無翼工柱長十一尺樑

通二間九尺式前後退五尺五寸式 道里通七間九尺式 東西退五尺五寸式 東行閣十九間半間半五樑以南有咸春門以北

有寅陽門 南邊間墻一角門輔化門 西行閣十九間半間半五樑 以南有宜春門 以北有景成門 南行閣二十八間半間半五

樑 以東有廣宜門 以西有養化門 北行閣十八間 以東有協吉堂 以西有福熙堂 及平在門以西邊有rdquo

90) 김용숙 『朝鮮朝 宮中風俗 硏究』 일지사 1987 166-180쪽

91) 이강근 「창덕궁 의효전에 대한 연구」『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항산 안휘준교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

사회평론 2006 현재 의로전으로 잘못 부르고 있는 건물은 원래 명칭이 의효전이라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각들이 철거되고 각종 시설이 새로 만들어지게 되었으므로 창덕궁은 망국의 한을 담은 일개

관람장으로 변해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3) 광복 이후의 변화

광복 이후 50년이 지나서야 조선총독부청사가 헐리고 이어서 창덕궁이 복원되고 있다

게다가 1997년에는 조선왕조의 역사와 宮廷文化를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이라는 점을 인정

받아 유네스코에 의하여 lsquo世界文化遺産rsquo으로 지정되었다92) 이리하여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

의 야만성은 세계에 부각되고 뼈아픈 역사를 이겨내고 스스로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어

온 한국민족의 노력은 세계 문화민족들의 공감을 사게 되었다

현재 창덕궁에 남아 있는 건물과 그 건립 연대는 다음과 같다93) 敦化門(1607년)仁政

殿(1804년)仁政門(1745년)宣政殿(1647년)大造殿熙政堂含元殿景薰閣(이상은 1920

년 경복궁 내전 移建)嘉靖堂(1920년 무렵 덕수궁 가정당 移建)賓廳(현 御車庫)誠正閣

(정조년간)94)內醫院(성정각 부속건물로 1920년 무렵부터 내의원으로 사용됨)觀物軒(정조

7년 이전)95)舊璿源殿(1695년 현 유물보관창고)樂善齋(1847년)壽康齋(1785년)96) 錫福

軒(1848) 翠雲亭(1686년)閒靜堂(1917년 이후)上涼亭滿月門 承華樓三三窩七分序

(이상 정조 년간)新璿源殿(1921년)

92) 해방 이후 1970년부터 2005년까지 우리 정부에 의해서 시행된 보수공사의 내역에 대해서는 본 보고서 3장

참조

93) 단 1990년대에 문화재관리국에 의하여 시행된 복원 공사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6장 제5절을 참조하기 바

94) 『궁궐지』에 숙종이 지은 ldquo儆戒世子十箴及小序rdquo가 살려 있고 숙종실록 숙종 31년 2월 병자에 세자가 성정

각에 있다는 기사로 보아 숙종때 이미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옳다

95) 『正祖實錄』16권 7년(1783 계묘) 11월 26일(계축) 觀物軒에 나아가 抄啓文臣의 講經 시험을 거행하였다

96) 『正祖實錄』 20권 9년(1785 을사) 8월 27일(갑진) ldquo貳極門 안에 있던 오래된 우물 자리에 壽康齋를 세웠

다 慈慶殿을 營建할 때 남은 자갈과 벽돌을 우물 위에 쌓아 假山을 만들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를 철거하

고 그 우물을 파고는 小齋를 세워 내려다 보게 하였다 이곳은 太祖朝 壽康宮의 옛터로서 『輿地勝覽』에 기

재되어 있다 이어 그 齋를 壽康齋라고 이름을 지었다rdquo

2 창덕궁 영역의 변천

가 조선 전기 창덕궁의 영역 변천

1) 창덕궁 창건시의 위치와 규모

태종은 즉위 4년에 신하들과 종묘에서 점을 쳐서 태조가 처음 도읍을 세웠던 한양을 다

시 환도하여 법궁인 경복궁 이외에 궁궐을 짓도록 명하였다97) 이궁의 위치는 향교동의 동

쪽으로 정했다98) 향교동은 조선후기의 지도에 따르면 한성부 중부 경행방 교동계에 포함된

동으로 고려시대 한양 향교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99) 현재의 낙원동 271~283번지 일대이

며 창덕궁은 향교동의 동북쪽에 자리하였다 성종대에 편찬한『신증동국여지승람』에 창덕

궁은 ldquo北部 廣化坊에 있다rdquo고 하여 그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97) 『태종실록』 권8 태종 4년(1404) 10월 6일

98) 『태종실록』 권8 태종 4년(1404) 10월 6일 ldquo遂相地于鄕校洞東邊 rdquo

99) 유본예 『한경지략』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영인본 2000 284쪽

구분 경복궁101) 창덕궁102) 조선후기 창덕궁

연대 1395(태조 4) 1405(태종 5) (궁궐지)103)

내전 침전 연침7칸+이방(2+2)칸 청3칸+동서침전(2+2)칸대조전청3칸+동서온돌

(2+2)칸+퇴(1+1)칸

표 2-2gt 창건당시 창덕궁의 규모와 경복궁 규모 조선후기의 창덕궁 규모와 비교

그림 1gt「도성도」(여지도 1750~ 1757년 754times98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이궁의 공사가 진행중이던 태종 5년 왕은 궁궐 짓는 것을 보고 성산군(星山君) 이직(李

稷)과 함께 그 규모(規模)를 획정하였다100) 궁이 완성된 후에 기록한 규모는 총 287칸으로

이 중에서 내전이 195칸 외전에 92칸이다 이 기록에서는 주요전각의 경우 정면 칸수만 표

기한 것이다 태조 4년(1395) 준공된 경복궁과 비교하면 내전의 규모가 195칸으로 창덕궁이

더 많고(경복궁은 173칸) 외전은 경복궁이 212칸으로 창덕궁(92칸)의 2배가 넘는다 이는

창덕궁이 내전위주의 이궁이라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100) 『태종실록』 권9 태종 5년(1405) 2월 2일

구분 경복궁101) 창덕궁102) 조선후기 창덕궁

연대 1395(태조 4) 1405(태종 5) (궁궐지)103)

행랑

북천랑 7칸 북행랑 25

칸 남천랑 5칸

동소침 3칸 서소침 3칸

동서천랑 (2+2)칸

남천랑 6칸

동서소횡랑 (5+5)칸

북행랑 11칸

서별실 3칸

동서행랑 (15+15)칸

동루 3칸 상고 3칸

흥복헌 4칸

융경헌 3칸

동행각 6칸

서행각 6칸

남행각19칸

내전소계 173칸 195칸

외전

편전 - 3칸 선정전 3칸

보평청 5칸+이방(1+1) 3칸

정전 5칸 3칸 5칸

월대

동서폭 1125자

남북폭 50타

중계 깊이 15자

동서폭 639자

남북폭 33자

중층폭 5자

상월대

남북 폭 45자

하월대 165자

내정

남북(월대전면~정문)

178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3225(1125 +15

+15+80+80)자

남북( 월대전면~정문)

117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156자

남북( 월대전면~정문)

123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209자

행랑

북행랑 29칸

동행랑 28칸

서행랑 28칸

동행랑 17칸

서행랑 16칸

동행각 18칸

서행각 19칸

대문3칸

좌우행랑 (11+11)칸

3칸

좌우행랑 (9+9)칸

인정문 3칸

좌우행랑 (10+10)칸

외전소계 212칸 92칸

궐내각사 390칸

승정원청 3칸

동행랑 10칸

남행랑 4칸

북행랑 4칸 외행랑 5칸

외루 3칸

승정원 3칸 7량

동행각 125칸

서행각 12칸

남행각 5칸

당후 10칸

총 칸수 775칸 287칸 183825칸(대보단 포함)

2) 조선전기 창덕궁의 변천과정과 범위

(1) 제1기 태종대(太宗代)~세종대(世宗代)

창덕궁의 창건과 궁궐로서 형태를 갖추는 시기이다 태종대에 창덕궁을 지을 때에는 법

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현재보다 그 범위가 좁고 전각의 구성도 달랐다 창건당시에는

인정전 일곽의 외전과 내전으로 구성되었으며 인정전 외행랑과 진선문 금천교는 태종 11년

에104) 돈화문은 그 다음해에 완성되었다105) 태종은 이어서 편전을 넓게 고쳐 짓고(태종 15

101) 『태조실록』 태조 4년(1395) 9월 29일

102) 『태종실록』 태종 5년(1405) 10월 19일

103) 『궁궐지』에는 건물의 전체 칸수가 적혀 있으나 이 표에서는 경복궁과 창덕궁의 창건 기록과 같은 기준으

로 전각의 정면 칸수를 적음

104) 『태종실록』태종 11년(1411) 3월 18일

105) 『태종실록』태종 12년(1412) 5월 22일

년) 인정전을 확장하고 나서106)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세종은 즉위직후 상왕인 태종

을 위하여 창덕궁의 동남쪽에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즉 창덕궁의 외전 침전일곽과 나중

에 동궁과 창경궁이 되는 수강궁 일대의 틀이 태종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태종대에 시작한 인정전 확장과 외행각(인정문 남쪽) 조성은 세종 즉위 직후에 마무리

되었다 인정문 남쪽의 행랑은 특별한 용도로 쓰이지 않고 다만 정전 앞쪽의 영역에 경계를

짓는 역할이었다고 생각된다 창덕궁의 위상이 이궁이었으므로 외조의 각 기관이 외행랑에

들어서지 않았으며 행랑을 세우지 말고 도로 담장을 쌓으라는 지시107)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단종 즉위년에 인정전의 서까래와 보가 썩어 이를 수리하였다108) 인정전을 창건한 지

50년만으로 처음에는 수리를 한다고 하였으나 『단종실록』에 따르면 초석과 기둥 등 고치

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109)고 하여 수리라기보다는 개축하면서 좀 더 확장 한 것으로 보

인다

그림 2-2gt 태종~세종년간의 창덕궁범위

창덕궁의 창건(1405)

금천교(1411) 돈화문 건립(1412) 인정전 확장(1418)수강궁건립(1418)

106) 『태종실록』태종 18년(1418) 7월 7일

107) 『태종실록』 태종 1년(1401) 4월 12일 15일

108)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11월 17일

109) 『단종실록』 단종 1년(1453) 4월 27일

시기 내용 참고

태종 4년(1404) 106 향교동 동변에 이궁을 짓도록 하다

태종 5년(1405) 10 9 이궁완성

태종 6년(1406) 4 1 궁안에 광연루 지음

태종 6년(1406) 4 9 해온정 궁 동북 모퉁이에 지음

태종 11년(1411) 318 진선문 금천교

ldquo누각과 침실을 창덕궁에 짓고 진선문 밖에는 돌

다리를 놓았는데 공조판서 박자청을 시켜 그 역사

를 감독하게 하였다rdquo

인정전의 확장에 먼저

건립된 진선문의 위치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태종 11년(1411) 415 의정부 朝房을 진선문 밖에 짓도록 하였다

태종 12년(1412) 522 진선문 남쪽에 누문 5칸을 세우고 lsquo돈화문rsquo이라

태종 15년(1415) 128 편전을 넓게 고쳐지음

태종17년(1417)윤512 이조판서 박신이 인정전이 좁아 서쪽으로 당겨 다

시 짓도록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태종 18년(1418) 77 인정전을 고쳐짓다

태종 18년(1418) 910 인정전이 준공되었다

세종 즉위년(1418) 113 완성된 상왕전의 신궁을 壽康宮이라 하다

세종 1년(1419) 412 15

박자청이 상왕(태종)의 지시로 인정문 밖의 남행

랑을 비뚤게 지었으므로 하옥하고 헐어버리도록

하고 행랑대신 담장을 쌓도록 하다

단종 즉위년(1452) 1114 사헌부에서 인정전을 개축을 정지할 것을 청하다

단종 즉위년(1452) 1117 ldquo대신 등이 말하기를 lsquo인정전(仁政殿)의 서까래

[欀題]와 동량(棟梁) 이 썩었다rsquo 하는데 만약 창

덕궁에 거처하게 되면 정사를 볼 곳이 없어서 개

수(改修)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구지(舊址)이기 때

문에 조금 넓힐 뿐이다rdquo

인정전을 확장

단종 1년(1453) 427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창덕궁(昌德宮)을 처음에는 수보(修補)한다고 말하

였으나 지금 주춧돌 하나 기둥 하나도 고치지 아

니한 것이 없으며 인정전에 이르러서는 완전하고

튼튼하여 옛날 그대로 있는 것이 가한데 모두 철

거하여 고쳤으니 이름은 수보한다고 하고 모조리

새로 짓습니다 흥인문을 고치고 수문을 지음

단종 1년(1453) 55 인정전과 흥인문 수문의 역사를 마치도록 하다

표 2-3gt 제1기 태종~세종연간의 창덕궁 연표

(2) 제2기 世祖代~成宗代

창덕궁은 태종대에 형식적인 틀을 대부분 갖추었으며 주요 전각이 자리를 잡아 갔다

그 다음 단계로서 성종년간에 이르기까지 전각의 명칭을 정하고 영역을 확장하여 조선 후기

까지 유지되는 궁역 외곽선을 확보하게 된다 세조년간에 중심 전각들의 이름을 정했는데

조계청(朝啓廳)을 선정전(宣政殿) 선정전 뒤편의 동쪽 별실(後東別室)을 소덕당(昭德堂) 서

쪽 별실(後西別室)을 보경당(寶慶堂) (내전의)정전(正殿)을 양의전(兩儀殿) 동침실(東寢室)

을 여일전(麗日殿) 서침실(西寢室)을 정월전(淨月殿)이라 칭하고 누(樓)를 징광루(澄光樓)

동별실(東別室)을 응복정(凝福亭) 서별실(西別室)을 옥화당(玉華堂) 누하(樓下)는 광세전(光

世殿)middot광연전(廣延殿) 별실(別室)을 구현전(求賢殿)으로 하였다110) 이때 정한 선정전과 소덕

당 보경당 징광루 옥화당 등 대부분의 명칭은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양의전으로 이

그림 3gt 세조~성종년간 궁장의 확장과 창경궁

건설

세조 전각명칭 정함(1461)

세조 후원 동쪽궁장의 확장(1462~1463)

성종 창경궁의 창건(1584)

름 지은 정전(내전의 정전)은 세조대에

이전에 대조전(大造殿)으로 개칭하였

다111)

세조년간에는 후원의 영역을 확장

하였는데 즉위 8년에서 9년에 후원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쪽과 동북쪽의 담

장을 넓혀서 쌓으려 민가를 철거했으며

이때 넓힌 궁장은 성균관에 맞닿게 되

었다112) 당시 확정된 후원의 경계는 궁

의 동북쪽과 북쪽 그리고 동쪽으로 응

봉 주산의 내맥이 지나는 곳에 합친 것

이 되는 셈인데 궁의 후방 담장 경계는

세조대에 확정된 것이 그 이후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성종대에는 왕실의 구성원 중에서

여러명의 대비가 존재함에 따라 창덕궁

의 연조부분을 확장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창덕궁의 지형이 내전을 확장하

기에는 협소하여 창경궁을 조성하게 되

었다113) 성종 13년 창덕궁 수리를 논의

하는 자리에서 성종은 창덕궁을 수리할

필요가 없고 그 대신 수강궁을 수리하

라고 했다가114) 이듬해 창경궁을 짓도록 명하였다 성종 15년에 완공된115) 창경궁은 궐내각

사와 내전 후원을 창덕궁과 공유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경희궁을 서궐이라 하는데 대

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ldquo동궐rdquo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시기까지 외조는 승정원 빈

청 사옹원 내반원 정도가 확인된다

성종 6년에 창덕궁의 문 중에서 액호가 없던 것을 왕의 명으로 서거정이 짓게 되는데

이때 명명된 문 이름을 통해서 창경궁이 조영되기 이전 성종대의 창덕궁 궁역과 문의 기능

110)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1461) 12월 19일

111)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1467) 5월 17일 왕이 대조전에서 신하들과 이시애의 난을 토벌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는 그 직전까지도 양의전에서 논의하던 내용으로 이후 양의전이라는 전각명은 기록에 보이지

않고 같은 논의를 양의전 대신 대조전에서 하고 있어서 양의전과 대조전은 같은 전각이라고 추정된다 『宮闕

志』(K2-4363) 에 실린 양의전 관련내용은 다음과 같다 ldquo兩儀殿世祖七年壬午上御兩儀殿召承旨 金 從舜 謂曰

臺諫擇可言事言之人主得納諫之名 臺諫亦得獻替之譽矣[주國朝寶鑑]rdquo

112) 『세조실록』 세조 9년(1463) 2월 7일

113) 예종대 이전에는 왕비가 먼저 승하하여 왕실에 대비가 없었으나 예종대(예종은 즉위기간이 1년2개월로 짧

았다)에 정희왕후 성종 즉위 후에는 예종비 안순왕후와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가 생존한 상태로 갑자기 대

비가 세분이나 존재하게 되었다

114) 『성종실록』 성종 13년(1482) 12월 14일

115) 『성종실록』 성종 15년(1484) 9월 27일

시기 내용 참고

세조 7년(1461) 1219 창덕궁의 조계청(朝啓廳)을 선정전(宣政殿) 후동

별실(後東別室)을 소덕당(昭德堂) 후서별실(後西

別室)을 보경당(寶慶堂) 정전(正殿)을 양의전(兩儀

殿) 동침실(東寢室)을 여일전(麗日殿) 서침실(西

寢室)을 정월전(淨月殿)이라 칭하고 누(樓)를 징

광루(澄光樓) 동별실(東別室)을 응복정(凝福亭)

서별실(西別室)을 옥화당(玉華堂) 누하(樓下)는 광

세전(光世殿)middot광연전(廣延殿) 별실(別室)을 구현전

(求賢殿)이라 칭하도록 하라

세조 13년 5월 17일 대조

전 기사가 등장하므로 대조

전은 처음에 양의전이었다가

세조 13년 이전에 대조전으

로 개칭 된 것으로 보임

보경당은 왕이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거나 소견하는 장

소로 사용 왕의 거처 영조

탄생

세조 8년(1462) 130 후원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장을 넓혀서 쌓으려

민가를 철거하도록 하다

세조 9년(1463) 27 9 후원의 궁장을 넓히려고 동북동 북쪽의 인가를

철거 창덕궁의 궁장이 성균관에 맞닿음

성종 6년(1475) 8 23 액호가 없는 창덕궁의 문이름을 정함

성종 15년(1484) 9

27

창경궁 준공

연산군 11년~12년 후원에 서총대 건립

표 4gt 제2기 세조~성종년간의 창덕궁 연표

을 파악 할 수 있다 『성종실록』의 내용 중에서 외동장문으로 선인문(宣仁門)은 현재 창경

궁 홍화문 남쪽에 있는 문인데 세조 8년에 궁장 위치를 동쪽으로 물려 쌓은 것을 감안하면

성종대에 이름을 지은 선인문과 현재의 선인문 위치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창덕궁의 내동장문(內東墻門)은 건양문(建陽門)이라 하여 창덕궁과 당시 수강궁의 경

계에 내궁장이 있고 건양문으로 통행하여 그 경계의 구분이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서쪽의 궁장문으로는 요금문(曜金門) 서행랑문(西行廊門)은 금호문(金虎門)이 확인되며

후원의 북장문(北墻門)은 공진문(拱辰門) 외북장문(外北墻門)은 광지문(廣智門)116)이라 하였

다 현재공진문으로 경계지워지는 주합루 일대까지가 당시에 후원이었으며 그 북쪽(현재 옥

류천 일대의 북쪽)에 또 외궁장이 있었다 「도성대지도」(1764년경 제작 추정)에는 창덕궁

후원의 외궁장에 광지문이 표기되어 있으며 문 밖에는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의 초소인 광지

영(廣智營)이 있었다 연산군은 이 문을 지키는 영(營)에서 후원이 내려다 보인다고 하여 그

위치를 아래쪽으로 옮기게 하고 이쪽으로 사람들을 왕래하지 못하도록 했다117) 이 문의 이

름은 『승정원일기』에 광지영 서쪽에서 건무문 동쪽까지의 궁장을 수리하면서 건무문이라

고 칭하고 있어서118) 정조년간에 건무문(建武門)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에는 lsquo건무문rsquo이라고 적혀 있다

116) 『성종실록』 성종 6년(1475) 8월 23일 ldquo예문관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전교를 받들어 대궐의 문 중에

예전에 額號가 없는 것은 각기 2개의 이름을 扁額하여 아뢰니 임금이 낙점하기를 창덕궁 밖 東墻門은 宣仁

門 중간의 東墻門은 景陽門 新大門은 長春門 中大門은 宣明門 南夾門은 春興門 안 東墻門은 建陽門 북쪽

東墻門은 綺華門 廣延亭의 西岾門은 平昌門 南行廊門은 永和門 北行廊門은 永平門 內司僕南門은 雲錦門

外東山門은 延陽門 左夾門은 光範門 右夾門은 崇範門 南墻門은 丹鳳門 內西墻門은 宜秋門 左闥門은 肅章

門 兼司僕廳의 新大門은 延福門 內司饔의 上東門은 小春門 북문은 小東門 중궁의 差備門은 延禧門 承政院

의 南門은 延英門 서행랑문은 金虎門 外西墻門은 鎭金門 西墻門은 曜金門 後苑의 北墻門은 拱辰門 新北墻

門은 閶闔門 東墻門은 靑陽門 外北墻門은 廣智門 -후략-rdquo

117) 『연산군일기』 연산군 5년(1499) 2월 26일

118) 『승정원일기』 정조 8년 6월 22일

나 조선후기 창덕궁의 영역 변천

1) 제3기 임진왜란~영조대(英祖代)

세 번째 단계는 임진왜란 이후에서 영조년간까지 이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경복궁이 재건되지 못하고 창덕궁이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법궁으로서의 형

식을 갖추어 나가는 단계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한동안 전란을 수습하느라 종묘

와 궁궐을 복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조 39년(1606)에 경복궁 중건을 착수했으나 도중에 창

덕궁을 복구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119) 이 공사는 광해군 2년에 완료되었다120)

광해군년간의 창덕궁 복구는 광해군 1년(1609) 10월에 대략적인 공사가 완료되었고121)

광해군 2년(1610) 9월에 모든 공사가 끝난듯 공사에 참여한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의

도제조middot제조middot도청(都廳) 이하 공장(工匠) 등에게 시상을 하도록 했다122) 광해군대의 복구는

옛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법궁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을 완공하고도 이곳에 거처하지 않고 경운궁으로 이어했으며 재위 9년(1617) 부터는

인경궁과 경덕궁(후에 경희궁으로 개칭)을 건설하는123) 등 창덕궁에 별로 애착을 보이지 않

았다 광해군대에 경덕궁과 인경궁 건설시 침전은 창덕궁의 대조전을 모델로 삼아 크기와

규모를 같도록 하였다124)

임진왜란 후 재건된 창덕궁의 여러 전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조반정시 반정군에 의해

인정전과 수정당(壽靜堂)을 제외하고 내전의 전각이 대부분 소실된 것이다 소실된 전각들은

곧바로 복구되지 못하였으며 창경궁의 전각을 이용하다가 인조 25년(1647)에 이르러서야 내

전의 전각들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인조대에 인경궁과 경덕궁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복구공사를 위하여 건물을 헐어 그 부

재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광해군대에 창덕궁을 참조하여 건물의 규모를 정하였으므로 인경궁

의 건물 부재를 사용한 창덕궁 전각의 복구는 소실되기 이전과 큰 차이가 없는 형태가 되었

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인조 25년에 재건된 범위는 선정전 북쪽의 보경당과 태화당

소덕당을 포함하여 대조전 희정당 등의 내전 일곽이 이전의 모습대로 재건되었으며125) 그

외에도 인정전의 동월랑 남월랑 승정원 내궁방 내사옹원 외사옹원 숙장문 좌우행랑 인

정문 외행랑 선정전 선정전 북월랑 등 외전영역의 행랑과 궐내각사를 포함하고 있다126)

119) 『宮闕志』 昌德宮志

120) 『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1610) 9월 1일

121) 『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1609) 10월 16일

122) 『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1610) 9월 1일

123)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1617) 1월 18일

124)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1617) 6월 21일

125) 『인조실록』 인조 25년(1647) 11월 12일 ldquo상이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는데 수리할 적에 새로 세운 것도

많았다 모든 낭무(廊廡)가 일체 옛 제도와 같았고 大內에 大造殿middot宣政殿middot熙政堂middot靜默堂middot集祥堂middot寶慶堂middot玉華堂middot

泰和堂middot讌和堂과 澄光樓가 있는데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rdquo

이 때 재건된 전각은 대부분 순조대까지 유지되었으며 그 내용은 「동궐도」에 표현되어 있

인조년간에 특기할 만한 것은 후원에 많은 정자를 지어 창덕궁의 후원 깊숙한 곳에 왕

의 개인적인 휴식 공간이 조성된 것이다 인조 14년(1636)에는 후원의 제일 북쪽인 광지문

안쪽에 청의정과 태극정 소요정 취하정을 짓고 옥류천을 조성했다 인조 18년에는 취규정

을 지었으며 22년에는 존덕정을 지었다 당시 청나라에서 귀국한 소현세자에게 청나라의 궁

관(宮觀)을 물어 팔각형의 정자를 짓기도 했다127)

효종과 현종대에는 대비를 위한 전각이 추가되어 공간에 변화를 준것이 특징이다 효종

6년(1655) 인정전 서북쪽 흠경각옛터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를 위해 만수전을 지었다 자

의대비는 대조전 북서쪽 언덕에 있었던 수정당(壽靜堂)에 거처했으나 이곳이 좁고 협착하다

는 이유를 들어 만수전을 지은 것이다 수정당은 정조 18년(1794)에 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면

서 당(堂)에서 전(殿)으로 전각의 위상을 높여 수정전(壽靜殿)으로 개칭하였다 현종 8년

(1667)에는 대조전 북동쪽에 있던 집상당(集祥堂)을 고치면서 이름을 집상전으로 개칭하고

통명전에 거처하던 효종비 인선대비를 거처하도록 하였다 집상전은 세조대에도 집상당이라

는 전각명이 실록에 보이는데 인조대에 창덕궁을 재건할 때 이전의 모습과 제도대로 지었다

는 점과 이때에도 집상당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있던 전각으로 보인다

인정전 북서쪽은 원래는 각종 천문기기를 설치한 흠경각128)이 자리잡고 있어서 외전영

역에 속했으나 만수전과 내전관련 부속 건물들이 새로이 들어섬으로서 그 일대는 내전영역

으로 그 기능과 성격이 변화 하였다 만수전이 숙종대에 소실된129) 다음에도 그 자리에 계

속해서 대비의 거처인 경복전이 들어섰으며 주변의 부속 건물들은 영모당 수라간 등촉방

등의 기능을 가지고 유지되었다

숙종대에는 왕의 어진을 제작하여 선원전에 보관하고 이것을 경종과 영조대에 확장해

가면서 선원전일곽이 하나의 영역을 새롭게 형성하였다 선원전 자리는 원래 도총부로서 궐

내각사의 일부였으나 효종대에 그 자리에 춘휘전을 지었는데 이곳에 숙종의 어진을 보관하

였다 이후 보관할 어진의 수가 늘어나면서 영조대에 중수하였고 양지당 등 주변전각이 재

실과 선원전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

숙종년간에 또 하나의 변화는 후원의 북서쪽에 대보단을 창설한 것이다 대보(大報)란

126) 『昌德宮修理都監儀軌』(1647)

127) 『인조실록』 인조 24년(1646) 2월 4일 상이 八角亭을 後園에다 지었다 처음에 세자가 북경에서 돌아오

자 상이 청나라의 宮觀의 제도에 대하여 물었다 세자가 팔각정의 제도가 가장 묘하다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

기를 ldquo네가 그 모양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겠는가rdquo 하니 세자가 즉시 그려서 올리자 상이 매우 기뻐하여 그

정자를 후원에다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매우 기묘하였다

128) 흠경각은 세종대에 경복궁 사정전 서쪽에 있었으며 혼천의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후 선조가 영의정 이항

복에게 명하여 예전의 제도대로 만들도록 하였다 광해군 5년에서 8년까지 흠경각 건립에 대한 기사가 있는

데 이는 창덕궁에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효종년간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수전을 지으면서 혼천의가

손상되었는데 현종조에 들어와 좨주 宋浚吉이 흠경각의 옛 제도를 복구하도록 청하자 마침내 李敏哲에게 명

하여 蔡沈의 《書經集傳》에 조금 더하고 덜어서 혼천의의 형상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 제도는 안에 四游와

玉衡이 빠져 있고 또 白單環을 없앤 것이었다 숙종조에 들어와 이민철에게 명하여 예전 혼천의를 중수(重修)

하도록 하고 齊政閣을 창덕궁 熙政堂의 남쪽에 지어 봉안하였다(『國朝寶鑑』 제 60권 영조조 4 한국고전

종합 DB httpdbitkcorkr)

129) 『숙종실록』 숙종 13년(1687) 9월 2일

큰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임진왜란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神宗)에 제사 지내기

위한 시설이다 숙종 30년(1704) 별대영(別隊營)의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세웠다 후원

의 서쪽 담과 별대영의 동쪽 담 사이를 연결시켜 쌓고 후원의 담을 뚫어 문으로 만들어서

친제(親祭) 때 거둥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대보단으로 통하는 문은 창덕궁 후원의 동쪽문인

집춘문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130) 이렇게 명나라에 대한 신의를 강조했던 것은 당시 유행

했던 반청(反淸)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신위는 대보단 동쪽의 봉실에 모셨으며 서쪽의 경봉

각(敬奉閣)에는 중국 황제와 관련된 서적과 문서를 보관했다 단의 남쪽에 열천문과 공북문

을 두었고 동쪽에는 어재실인 만세송은(萬世誦恩)이 있다

숙종대에는 인조대 못지않게 후원에 다양한 형태의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여 주합루 북

쪽에서 옥류천까지 왕의 휴식처를 다양하게 마련했다

그림 4gt 인조~영조대의 전각조성

인조 25년(1647) 중건 효종대 만수전 춘휘전 건립

현종대 집상전 건립(순조대까지 유지) 숙종대 선원전 건립

130) 『숙종실록』 권40 숙종 30년(1704) 10월 3일 12월 21일

시기 내용 참고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창덕궁 소실

광해군 2년(1610) 9 창덕궁 중건

광해군 15년(1623) 3 12 인조반정시 인정전만 남고 모두 소실됨

인조 14년(1636) 후원에 옥류천과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지음

바위에 옥류천 세 글자를 새겼는데 인조의 어필이

『궁궐지(宮闕志)』

인조 18년 후원에 취규정(聚奎亭) 지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2년 후원에 존덕정 지음 연못이 있어 반원지라 하고

남쪽에 일영대를 두었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4년 후원에 희우정과 청양각 지음

인조 25년 후원에 낙민정과 관풍각(觀豊閣) 지음

서총대 동쪽 북쪽에 내농포가 있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5년(1647) 11 12 창덕궁 중건 모든 낭무(廊廡)가 일체 옛 제도와

같았고 대내에 대조전(大造殿)middot선정전(宣政殿)middot희

정당(熙政堂)middot정묵당(靜默堂)middot집상당(集祥堂)middot보경

당(寶慶堂)middot옥화당(玉華堂)middot태화당(泰和堂)middot연화당

(讌和堂)과 징광루(澄光樓)가 있는데 매우 웅장하

고 화려하였다

『昌德宮修理都監儀軌』

(1647)

효종 8년(1657) 4 2 만수전 춘휘전을 흠경각 옛터에 지음 『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

儀軌』(1657)

현종 8년(1667) 11 11 집상전을 짓도록 명하다 『集祥殿修改都監儀軌』

(1667)

숙종 13년(1687) 9 2 만수전 소실

숙종대에 만수전 터에 경복당을 짓고 이후 경종

2년 경복전으로 개칭

숙종 14년(1688) 청심정(淸心亭)을 지음 남쪽 뜰에 못을 파서 빙옥

지라 하고 정자 동쪽의 협곡에 홍예교를 놓음

『궁궐지(宮闕志)』

숙종 15년(1689) 관덕정 북쪽에 영타정(靈鼉亭)지음 불로문 밖 남

변 소실

『궁궐지(宮闕志)』

숙종 18년(1692) 애련정 연못 조성

영화당 개수

『궁궐지(宮闕志)』

숙종 21년(1695) 춘휘전을 선원(璿源)이라 이름을 고치고 어진을

봉안하였다

『궁궐지(宮闕志)』창덕

궁지 선원전조

숙종 39년(1713) 4 11 임금의 여용을 그려 뒤에 임금이 한 벌은 대내(大

內) 선원전(璿源殿)에 보관하라고 분부하였다

효종대에 지은 춘휘전을

선원전으로 전용

영조 30년(1754) 1 5 선원전 수리 7칸으로 증축

표 5gt 제3기 임진왜란~영조년간의 창덕궁 연표

2) 제4기 正祖代

정조대에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창덕궁에 활발한 건물의 조성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성

격의 전각이 들어섰다 그 결과 궁궐전체의 공간 구성에 변화가 불가피했으며 이는 이후 순

조와 헌종대의 창덕궁 공간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정조는 즉위년에서 즉위 5년까지 창덕궁내에 각종 시설들을 정비하고 첨가했는데 즉위

하자마자(1776년) 첫번째로 후원에 주합루를 세우도록 명하여 같은 해 9월 26일에 완공했다

주합루는 영화당 북쪽의 언덕에 자리 잡고 그 주변으로 봉모당 열고관과 개유와를 배치하

였고 주합루 서쪽에 이안각인 서향각을 배치하였다 주합루 일대의 건물들에는 영조의 어필

과 문집(봉모당) 중국서적(열고관 개유와)과 국내의 서책을 보관하였다 주합루는 이 일대

의 중심건물로 언덕위에서 당당한 위용으로 부용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이다 주합루 일

대가 조성됨으로써 영화당의 동쪽은 문무과 시험의 장소로서 기존의 기능을 수행하고 주

합루 일대는 왕권 강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변모하여 이 일대는 후원에서도 통치와 관련된

기능을 가진 영역이 되었다

즉위년 9월에 인정전 앞마당에 품계석을 설치하고 즉위 2년(1778) 선원전에 새로 동middot서

익각을 설치했으며131) 즉위 5년(1781)에는 주합루에 설치한 규장각의 관리들이 근무하는 공

간으로 이문원을 세웠다132) 이문원의 위치는 금호문 안쪽 선원전의 서쪽으로 원래 그 자리

에 있었던 도총부는 창경궁으로 옮겼다 이문원이 설치된 장소는 임진왜란 직후까지도 민가

가 있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즉 조선 후기에 창덕궁이 법궁으로 이용되면서 금천 서쪽은 증

가하는 궐내각사를 설치할 공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정조 6년(1782)에는 왕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중희당(重熙堂)을 신설했다133)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는 동궁으로 저승전과 시민당이 있었으나 저승전은 영조 32년 화재로 소실된

후 복구하지 않았고 시민당도 정조 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134) 처음에는 시민당을 복구하려

다가 이를 중지하고135) 시민당터와 내전영역의 중간정도 되는 지점에 세자를 위한 전각들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로서 동궁은 내전과 더욱 가까운 곳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헌종대에 편

찬한 『궁궐지(宮闕志)』에는 중희당 일곽을 창덕궁에 포함시키고 있다

131) 『정조실록』정조 2년(1778) 1월 15일

132) 『정조실록』정조 5년(1781) 3월 10일

133) 『宮闕志』창덕궁지 중희당조

134) 『정조실록』 정조 4년(1780) 7월 13일

135) 『정조실록』 정조 4년(1780) 8월 29일

그림 5gt 정조대의 전각조성

정조 9년(1785)에는 수강재를 건립했다136) 그 터가 수강궁의 옛터라고 하여 수강재

로 이름지었으며 세자궁의 정당인 시민당터의 북쪽에 위치하였다 정조가 상량문에서 밝

힌 수강재의 용도는 왕의 작은 서재로서 강학을 위한 집이었다137) 중희당과 수강재의

건립은 왕과 세자의 관계를 보다 밀접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건축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기 내용 참고

정조 즉위년(1776) 주합루 건립

정조 1년(1777) 9 6 인정전 품계석 설치

정조 2년(1778) 1 15 선원전 동 서익각 설치

정조 5년(1781) 3 10 금호문 안쪽에 이문원 설치

정조 6년 중희당 건립 『宮闕志』

정조 9년(1785) 8 27 수강재 건립

정조 17년(1793) 택수재를 고쳐서 부용정 개축 『홍재전서』제55권 잡저(雜著)2 부용정상량문

표 6gt 제4기 정조년간의 창덕궁 연표

3) 제5기 純祖代~高宗代

136) 『정조실록』 정조 9년(1785) 8월 27일

137) 『홍재전서(弘齋全書)』 제54권 잡저(雜著) 수강재상량문

순조대에는 여러 차례의 화재로 내전의 전각이 소실되고 다시 중건되었다 화재 전 후

의 모습은 「동궐도」와 고종대에 그려진 「동궐도형」에 반영되어 있다 「동궐도」는 화

재 이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만수전 자리에 있었던 경복전이 순조 24년(1824) 화재로 소실되자138) 그 자리에 다시

전각을 복구하지 않아서 「동궐도」에는 빈 터로 남아 있다 대조전일곽에 있었던 집상전은

순조 33년(1833) 내전 일곽의 전각에 화재가 났을 때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내전의 복구공

사에서 제외되어 그 이후에도 다시 지어지지 않았다 화재 후에도 대조전과 같은 내전의 중

심전각은 그대로 재건되는데 반하여 경복전이나 집상전과 같이 대비가 사용하던 전각이 복

구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왕실에 대비가 계시지 않았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순조대의 대비

전과 내전일곽에 화재가 날 당시는 영조비인 정순왕후와 정조비인 효의왕후는 승하한 뒤였

순조대에는 화재로 소실된 전각을 재건하는 건축활동은 많았지만 전각을 새로 짓거나

궁역을 확장한 일은 없었고 정조대에 이룩된 전각들이 대부분 유지되었다 효명세자 대리청

정기에 중희당일곽의 동궁전각이 활발하게 사용되었으며 내전일곽의 화재 후 재건과정에서

내전의 전각구성에 부분적인 변화를 가져온 정도이다

순조의 뒤를 이은 헌종대에는 동궁영역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정조대에 지은 수강재

에서 중희당 동쪽까지 비어 있던 곳에 낙선재를 지은 것이다 새로 맞이한 후궁 경빈 김씨

의 처소인 석복헌을 낙선재 동쪽에 이어서 짓고 순조비 순원왕후를 위해 수강재를 수리하

여 세 건물을 행각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건물군으로 만든 것이다 낙선재가 들어선 곳은 조

선후기에 동궁이 있었던 곳으로 수강재 동쪽에는 세자를 보좌하는 춘방과 계방 등이 있었으

며 낙선재 동쪽에는 정조대에 조성한 중희당 일곽이 자리하고 있었다 낙선재의 조영은 동

궁일대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면서 동궁을 보좌하는 곳과 동궁의 거처를 양분하며 동궁이 축

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종대에 들어서 경복궁이 중건되어 창덕궁은 조선후기 동안 누려왔던 법궁이라는 지위

를 다시 경복궁에 넘겨주게 되었다 창덕궁(동궐)과 경희궁(서궐)이라는 양궐체제의 중심은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경복궁은 중건이후에 잦은 화재로 인하여 왕이 창덕

궁으로 이어하는 기간이 많았다 고종대에 창덕궁의 영역과 전각변화의 특징은 창덕궁의 전

각을 경복궁으로 옮겨짓는 일이 빈번했다는 점이다 전각을 헐어낸 자리는 빈 공간으로 남

았으며 이는 「동궐도」와 「동궐도형」의 비교를 통해서 파악가능하다

고종 초기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시 사용빈도가 낮은 창경궁의 행각과 전각을 경복궁

으로 이건하기도 했다 창경궁의 자경전을 옮겨 경복궁의 자미당을 지은 것이 그 첫번째 이

다139) 고종 초기에 이건한 자경전과 1882년 이후 공사가 중지된 수정전(壽靜殿)이 「동궐도

형」에는 빈 터로 남아 있다 또한 「동궐도형」에 lsquo금무rsquo라고 씌어진 건물은 「동궐도형」

의 제작시기와 가까운 1890년대에 이건한 건물들이다

138) 『순조실록』 순조 24년(1824) 8월 24일

139) 『승정원일기』 고종 2년(1865) 10월 26일

시기 내용 참고

순조 3년(1803) 12월 13일 인정전 화재

순조 4년(1804) 12월 17일 인정전 중건

순조 11년(1811) 윤3월 6

향실(인정전 서행랑)과 예문관에 화재

순조 24년(1824) 8월 24일 경복전 화재 「동궐도」에는 터만 그

려져 있음

순조 33년(1833) 내전일곽의 화재

순조 34년(1834) 내전일곽의 전각 중건 영연합을 헐어 창경궁 영

춘헌을 복구

헌종 12년 낙선재 건립

고종 13~14년 창덕궁의 수리

고종 18년(1881) 7월 22일 수정전을 함녕전으로 바꾸고 동 서 남 북별당

공사를 시작하다

고종 28년(1891) 3월21일 함녕전(구 수정전)의 여러 전각을 경복궁으로 옮

겨짓다(집옥재 협길당)

고종 28년(1891) 5월 3일 중희당 이건

표 7gt 제5기 순조~고종년간의 창덕궁 연표

고종 18년(1881)에는 수정전(壽靜殿)을 수리하여 함녕전(咸寧殿)으로 전호를 바꾸고140)

주변에 부속건물을 짓는 공사를 했다 그러나 이 공사는 완공직전에 을미사변으로 중단되었

고141) 약 10년 후 경복궁의 집옥재와 협길당으로 이건되었다142) 집옥재의 이건공사와 같은

시기에 중희당도 이건하였는데143) 경복궁의 어느 전각으로 이건되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다

만 이 시기 경복궁에서 동궁의 전각인 계조당의 개건이 있었고 함화당 집경당 등의 공사가

연이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이 건물들에 중희당의 부재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대에 중희당을 어디론가 이건함으로써 창덕궁에서 동궁의 전각이 삼삼와와 승화루

만 남기고 사라지게 되어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 까지 중희당이 있던 곳은

빈 터로 남아있어 「동궐도」에서 볼 수 있는 동궁의 공간을 볼 수 없게 되었다

4) 제6기 대한제국 말기

갑신정변이후 고종이 경복궁으로 이어한 후에는 잠시 창덕궁에 이어했었던 것 외에 을

미사변 직후까지 경복궁에 주로 머물렀으며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다가 경운궁을 건설한 다음에는 경복궁이나 창덕궁 두 궁궐로 돌아가지 않았다 고종

31년(1894) 4월 2일에서 5월 23까지 약 두달여 정도 창덕궁에 이어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광

140)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7월22일 ldquo壽靜殿의 호는 咸寧으로 동별당의 호는 衍福으로 남별당의

호는 正善으로 하였으며helliprdquo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8월2일 무위소가 함녕전 서별당ㆍ북별당의 당

호 단자를 올렸는데 서별당은 協吉堂 북별당은 資順堂이었다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9월24일 營

建所가 咸寧殿 北別堂의 당호를 集玉齋로 품정하였다

141)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7월22일

142) 『승정원일기』 고종 28년(1891) 3월21일 ldquo咸寧殿의 여러 전각을 옮겨 건립하는 일을 重建所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rdquo(여기서 함녕전은 창덕궁의 수정전을 개칭한 전각을 말한다 후일 광무 1년(1897) 경운궁

건설당시 선덕전이라고 이름지었다가 함녕전으로 고친 경운궁의 침전과는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전각이

다)

143) 『고종실록』 고종 28년(1891) 5월 3일

무 4년(1900)에는 창덕궁 선원전에 태조의 어진을 모시면서 경복궁 선원전과 더불어 1실을

증건하는 공사를 했다

다 근현대기 창덕궁 영역의 변천

1) 제7기 일제강점기의 개조

1907년 7월 19일(양력) 고종이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한 직후

궁내부로 하여금 창덕궁의 수리를 명하고144) 같은 해 11월에 황후와 황태자를 데리고 이어

하였다145) 이로서 고종 31년(1894) 이후 13년 만에 창덕궁이 다시 주인을 찾게 되었다

순종이 이어하기 직전에 이루어진 수리에 관한 내용은 여러 장의 도면으로 남아 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도면은 총 96종으로 전체배치도 인정전일원의 수리 궁

내부 청사 대조전 일원 희정당과 선정전 일원 약방 내전일원의 신축건물 창고와 장유고

낙선재 일원 후원 등에 관한 도면이 있다 이들 도면은 1907년부터 진행된 창덕궁의 개조

철거 훼손 개축 신축에 관한 가장 실체적인 자료이다146)

그 중에서 전체 배치를 나타낸 것으로 1911년 1920년대 1930년대초 1936년 무렵의 도

면이 있어서 일제강점기 동안 창덕궁의 전체적인 변화에 대한 조감이 가능하다 1911년의

배치도를 살펴보면 인정전 좌우에 행각이 연결되어 있고 인정전 뒤쪽의 복도로 연결되어 선

정전 뒤를 지나 희정당 서측까지 연결된 변화를 볼 수 있다 또한 인정전 동쪽의 궐내각사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어 외곽의 행각만이 남아 있고 중희당이 있던 곳은 행각도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진선문 남쪽에 궁내부 청사가 들어서 있다 반면 대조전일곽과 희정당은 「동

궐도형」과 같은 외곽을 보이고 있어서 대조전 일곽은 큰 변형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원은 아직 조선시대의 도로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담장 또한 「동궐도

형」과 대조 결과 잘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1911년 까지는 부속건물들을 많이 헐어

내고 인정전과 선정전 일대를 개조하기는 했으나 어느 정도 원형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1921~1932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배치도는 후원의 도로가 변형되고 대조전과

희정당일곽이 다시 지어졌으며 창덕궁내의 담장과 행각이 철거되어 그 이전까지 성격이 뚜

렷이 구분되던 영역성이 파괴된 모습을 보여준다 1930년대초의 도면은 창경궁과 종묘 사이

에 율곡로를 개통한 후의 모습이다 낙선재 남쪽과 종묘 사이는 도로로 인하여 분리되었다

1936년경의 도면은 등고선이 표기되어 창덕궁의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도면이다 창덕궁의

건물 부분은 1921~1932년 사이의 도면과 큰 차이가 없으며 창경궁쪽에서 동물원과 식물원의

건물 증설이 확인된다

144)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10월 7일(양력)

145)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11월 13일(양력)

146) 이강근 「장석각 소장 근대 건축도면에 대하여」 『근대건축 도면집-해설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9년 15쪽

일제강점기에 편찬한 『조선고적도보』에는 원래 창덕궁의 전각이 회색으로 표기되고

당시 남아 있던 전각이 검게 표시되어 1920년대 전후의 전각과 담장의 잔존현황을 파악 할

수 있다 돈화문과 주변의 행각들 선원전과 그 일대의 숙경재 주방 이문원과 대유재 소유

재 인정전과 선정전 및 행각이 남아 있다 내전일곽의 건물도 1917년의 화재로 모두 소실되

어 희정당 동쪽에 있는 성정각 관물헌만 남았으며 낙선재 일곽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

고 있다

그림 6gt 1911년경(좌)과 1921~1932년(우)의 「창덕궁평면도」(1911년경 장서각)

그림 7gt「창덕궁배치도」(1907년의 배치상황+1920년 이후 잔존전각(『조선고적도보』)

2) 해방이후의 변화와 보수정비

해방이후에는 개별전각을 수리하는 것으로 유지되다가 1996년부터 일제강점기에 변형된

인정전 선정전 일대를 복원했으며 2000년부터는 규장각과 구(舊)선원전을 복원하면서 인정

전 서쪽의 궐내각사를 복원하여 조선시대 창덕궁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고 있다

유적명 연도 발굴기관 보고서 기간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발굴조사 1995

창덕궁 반도지 유적 昌德宮 半島

池 遺蹟2001

중앙문화재

연구원

《昌德宮 半島池 試掘

調査報告書》 2001시굴 010416~010519

창덕궁 반도지 유적 昌德宮 半島

池 遺蹟2002

중앙문화재

연구원

《昌德宮 半島池 補

修middot整備工事 竣工報告

書》 2002

발굴 020401~020616

창덕궁 금천교 주변 유적 昌德宮

錦川橋 周邊遺蹟2001

국립문화재

연구소- 발굴 010920~011115

창덕궁 금천교 주변 유적 昌德宮

錦川橋 周邊遺蹟2002

국립문화재

연구소

《창덕궁 금천교》

2002 발굴 020313~020423

창덕궁 상방지 昌德宮 尙房址 2002

명지대부설

한국건축문

화연구소

《昌德宮 尙房址 遺構

調査 報告書》 2002 발굴 020411~020704

표 8gt 창덕궁관련 발굴조사 내용

년도 공사내용 문서관리번호 보고서

1970 창덕궁부속가옥철거 -

1970 창덕궁 및 비원보수(사진) 박대통령 준공식 참석사진

1972 창덕궁보수도면 BA0122692 BA0122702

1973 창덕궁 현황 측량 실시 문화재청

1975 창덕궁 연경당별사 보수공사 BA0122725

1975 창덕궁 승화루 및 어친잠실 약방 보수공사 BA0122725

1976 창덕궁 보수공사(북행각수정당보호책설치축대보수) 문화재청

1976 창덕궁 돈화문 보수공사 문화재청

1976 창덕궁 보수 정화공사 문화재청

1978 창덕궁 반도지 조경공사 BA0806636

1978 창덕궁 낙선재 진입도로 공사 문화재청

1978 창덕궁보수정화공사 문화재청

1979 창덕궁반도지-옥류천간도로주변정화추가공사 BA0122735

1979 창덕궁 주차장 주변 정비공사 문화재청

1980 창덕궁 괘궁정 보수공사 CA0015037

1982 창덕궁 인정전 동서행각 안전진단의뢰 문화재청

1985 창덕궁선정전 및 취원정 보수공사 BA0122791

1985 창덕궁 담장 및 주변 지역 정비 CA0015402

1986 창덕궁 연와창고 보수 CA0022142

1989 창덕궁 가정당 보수공사 BA0073213

1989 창덕궁 의로전담장 보수공사 BA0073214

1989 창덕궁 대조전 부식기둥 인공수지 처리공사 BA0073215

1989 창덕궁 옥류천 어정 정비 문화재청

1990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824

1990 창덕궁 의로전 및 문간채 보수공사 CA0025835

1990 창덕궁 의풍각 보수공사 CA0025831

1990 창덕궁 청의정 승재정 농산정 보수공사 CA0025827 CA0025826

CA0025814

1990 창덕궁 대조전 보수공사 CA0025812

1990 창덕궁 단봉문주위 담장정비공사 CA0025811

1990 창덕궁 신선원전 문간채 보수공사 CA0025834

1990 창덕궁 부용정 보수공사 문화재청 비공개

1991 창덕궁 인정전행각 복원 BA0812994

1991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889

1991 창덕궁 폄우사 보수공사 CA0025888

1991 창덕궁 의로전 재실 보수공사 CA0025906

1992~1994 창덕궁 인정전 행각 복구공사 BA0813009 BA0813013

1992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978

1992~1993 창덕궁 구선원전 보수공사 실측설계 CA0025976(비공개)

1992 창덕궁 낙선재 정비 설계 정실측 CA0025941 CA0025942

1992 창덕궁 선정전일곽 실측 설계용역 문화재청

1992 창덕궁 반도지 및 존덕정 주변일곽 정밀실측 조사 문화재청

1992 창덕궁 옥류천과 주변 고건물 실측 조사 보고서 발간 문화재청

1992 창덕궁 연경당 및 주변 일곽 정밀 실측조사 문화재청

1992 보고서 창덕궁 원유복구 조경종비공사 완료 보고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의로전 재실 보수공사 CA0026052

1993 창덕궁 집희(관물헌) 보수공사 CA0026035

1993~1995 창덕궁 낙선재 정비공사 CA0026042

표 9gt 해방이후 창덕궁 건물 보수내용(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년도 공사내용 문서관리번호 보고서

1993 창덕궁 대조전 일곽 실측 설계 문화재청

1993 창덕궁 낙선재 후원 실측설계 및 보고서 발간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애련지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주합루 실측 설계 문화재청

1995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발굴조사 복원설계 BA0807969 BA0813061

1995 창덕궁 기오헌 의두각 보수공사 CA0026201

1995 창덕궁 서향각 실측 설계 및 보수설계 문화재청

1995 창덕궁 인정전 행각지 발굴조사보고서 CM00057506

1996 창덕궁 돈화문 정밀실측 CA0026307

1996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공사 CA0026267

1996 창덕궁 대조전 부속건물 보수공사 CA0026266

1996 창덕궁 서측 담장 보수공사 CA0026259

1996 창덕궁 연경당 사랑채 별채 보수공사 CA0026281 CA0026273

1997 창덕궁 돈화문 보수공사 CA0026328

1997 창덕궁 가정당 보수공사 CA0026347

1997 창덕궁 사정기비각 어수문 보수공사 CA0026348

1997 창덕궁 인정전 정밀실측 CA0026353

1997 창덕궁 희우루 문간채 약방 보수공사 CA0026337

1998 창덕궁 인정전 긴급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8 창덕궁 신선원전 실측 보수설계 문화재청

1999 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발굴조사 문화재청

1999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공사(4차) 문화재청

1999 창덕궁 대조전 부속건물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9 창덕궁 신선원전 실측 및 보수설계 문화재청

2000 창덕궁 제월광풍관 보수 및 조경공사 문화재청

2000~2005 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복원공사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복원

공사보고서

2000~2001 창덕궁 반도지 시굴조사계획 문화재청

2000 창덕궁 몽답정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경추문 보수공사 시행 문화재청

2001~2002 창덕궁 금천교주변 발굴조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침전행각 및 수라간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의로전 일곽 보수 문화재청

2001 창덕궁 금천교 실측 및 복원설계 용역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선향재 보수 설계용역 문화재청

2002 창덕궁 선향재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2 창덕궁 희정당 보수공사 창덕궁 희정당 실측 수리보고서

2002 창덕궁 상방구역 유구조사 건물복원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정자(상량정태극정능허정) 보수공사 창덕궁 정자 실측 수리보고서

2003 창덕궁 희정당 신관 보수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선정전 후원 석축 복원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의로전 일곽 및 경훈각 보수공사의로전 실측 수리보고서

경훈각 실측 수리보고서

2003 창덕궁내 정자 보수공사 (태극정) 문화재청

3 창덕궁의 배치와 특징

가 영역별 배치와 특징

1) 궐내 각사

궐내각사는 왕을 보좌하고 궐내의 일상과 의식을 위한 기관들이 위치한 영역이다 창덕

궁은 창건당시부터 이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경복궁처럼 궐내각사를 완전히 갖추고 있지

않았다 창건당시부터 조성된 부분은 인정전 동쪽부분으로 연영문 안에 승정원 내반원 궁

방 주원 등이 배치되었다 임진왜란후 경복궁이 소실되자 창덕궁이 법궁이 되면서 경복궁에

있던 상의원 내병조 등의 건물들이 창덕궁 내로 편입되었다147) 또한 인정전 서쪽으로 정

청 옥당 약방 이문원 등이 추가되었다 원래 이곳에 있었던 일부 기관(도총부 주자소 내

사복)은 창경궁으로 옮겨지기도 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이 궐내각사를 공유하는 형태를 취하

였다

2) 외전 영역

외전영역은 정치의 공간으로 왕과 관료가 공식적으로 조회를 하는 영역이다 크게는 정

전인 인정전 일곽과 편전인 선정전 영역으로 구분된다 배치의 특징은 경복궁이 남북 축선

상에 정전과 편전이 놓이는데 반하여 창덕궁은 인정전의 북쪽에 건물을 둘 만한 지형이 아

니므로 편전은 정전의 동쪽에 위치한다 편전에 이어서 내전영역도 그 동쪽에 위치하여 외

전rarr내전은 서rarr동쪽으로 배치되고 있다

3) 내전 영역

내전은 왕과 왕실 구성원의 생활공간이며 왕실의 여성구성원인 내명부의 의식공간이기

도 하다 대조전을 중심으로 주변의 집상전 수정전 만수전(후에 경복전) 등 대비전을 포함

하며 왕이 좀 더 편하게 신하들을 만날 수 있는 희정당과 희정당 동쪽의 성정각 관물헌 등

을 포함한다 그 외에 내전에는 왕실 귀중품과 생활에 관련된 물건들을 보관하는 건물과 생

활을 보조하는 기능을 가진 건물들이 중요전각 주변에 배치되었다 창덕궁에서 부족한 내전

의 전각은 창경궁 건설이후 창경궁에서 해소하였다

4) 동궁 영역

147) 『동국여지비고』제1권 京都 文職公署條

그림 8gt 조선후기 창덕궁의 영역 구분과 진입동선(「동궐도형」)

동궁은 세자궁이라고도 하며 왕세자의 거처이자 집무공간 강학공간이다 동궁은 세자의

재위 여부에 따라 그 존재가 결정되었으며 세자 책례를 통해 재위하게 될 경우 영역이 규정

되어 동궁으로 지칭되므로 시기에 따라 중심전각이 변하기도 하였다 세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에는 그 인식적 개념이 약화되어 동궁의 전각은 다른 용도로 전용되어 대비나 왕비가

사용하기도 했으며 왕이 임어하기도 했다

동궁은 현재 낙선재 일대의 남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궁의 정문은 창경궁의 선인

문 동룡문으로서 동쪽에서 진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임진왜란 이전에는 창덕궁의 동쪽경

계(건양문) 밖에 있었으며 창덕궁과 별개의 영역에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동궁의 정당

은 저승전이었으며 저승전이 소실되자 시민당을 사용했다 시민당이 정조 4년 화재로 소실

되자 이를 중건하려다 중지하고 내전에 좀 더 가까운 위치에 중희당을 세우고 이곳에서 세

자의 착봉례를 거행함으로서 정조대 이후에는 중희당이 동궁의 정당이 되었다 정조대에 조

성된 중희당 일곽은 중희당과 삼삼와 승화루 그리고 그 동쪽으로 세자를 위한 공간이 마련

되었다 이외에 세자를 보좌하는 곳으로 춘방과 계방이 있는데 이 건물들은 동룡문 안쪽 시

민당의 동쪽에 있었으며 중희당을 조영한 이후에도 그 위치는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순조

대에 효명세자가 이 중희당에서 대리청정을 했으며 효명세자 사후에 동궁은 그 주인을 다시

얻지 못했다 효명세자 사후 세자가 공부하며 거처했던 영연합의 천지장남지궁의 건물을 헐

어 창경궁의 영춘헌을 짓는데 사용하는 등 중희당 동쪽 언덕 위에 있었던 건물도 일부 사라

지게 되었다 이후 고종대에는 세자를 위해 경복궁의 계조당과 자선당 등의 동궁이 조성되

면서 창덕궁의 동궁은 그 의미를 잃어갔다고 할 수 있다

시민당이 소실되고 정조대에 중희당을 왕의 거처 공간에 보다 더 가까이 조성하면서

세자의 공간은 중희당이 중심이 되었다 시민당 주변에 정조가 수강재를 지으면서 조선초기

이래 동궁이 자리하던 곳은 점차 그 영역의 성격이 바뀌었으며 헌종대에 이곳에 낙선재를

지으면서 창덕궁에서 동궁의 공간적인 위치는 궁궐의 중심영역으로 이동했다고 할 수 있다

왕대 세자 책례일자 세자재위기간 책례장소 관례장소대리청정

장소

광해군 李祬(廢世子) 광해 2년 5월 11일 12년 10개월 인정전 시어소내청

인조 소현세자 인조 3년 1월 27일 20년 3개월 융정전(경덕궁) 경현당

봉림대군(효종) 인조 23년 9월 27일 3년 8개월 명정전 -

효종 현종 효종 2년 8월 28일 7년 9개월 인정전 세자궁

현종 숙종 현종 8년 1월 22일 7년 7개월 인정전 시민당

숙종 경종 숙종 16년 6월 16일 30년 인정전희정당 시민당 시민당

경종 영조 경종 1년 9월 27일 2년 11개월 인정전 -

영조 효장세자(진종) 영조 1년 3월 20일 3년 8개월 인정전 시민당

장헌세자(장조) 영조 12년 3월 20일 26년 2개월 인정전양정합 시민당 시민당

정조

정조 문효세자 정조 8년 8월 2일 1년 9개월 인정전중희당

순조 정조 24년 2월 2일 5개월 집복헌 바깥채집복헌 바

깥채

순조 효명세자(익종) 순조 12년 7월 6일 17년 10개월 인정전희정당 경현당 중희당

헌종 세자없음 - - - -

철종 세자없음 - - - -

고종 순종 고종 12년 2월 18일 32년 6개월 인정전 중희당

표 10gt 세자의 책례와 관례장소(창덕궁)

5) 진전 영역

선원전은 돌아가신 선왕과 선후의 영정을 봉안하던 건물로 조선전기에는 경복궁에 세워

져서 태조 태종 세종 세조 덕종 성종 중종의 어진을 모셨었다148)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의 선원전이 소실되었고 조선후기에 선원전이 다시 마련된 것은 숙종대였다

효종 8년(1657)에 만수전과 함께 지었던 춘희전에 숙종이 즉위 21년(1695)선원전이라 개명

하고 숙종의 어진을 봉안한데서149) 비롯되었다 춘휘전은 원래 만수전에 속한 건물로 빈전

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150) 효종대 건립당시 춘휘전의 주변건물은 서행각 3칸

148) 『명종실록』 권8 명종 3년 10월 10일

149) 『승정원일기』영조 30년 1월 11일 ldquohellip上曰 此殿本是春暉殿 而乙亥年(숙종 21년)奉安御眞後 改名璿源殿

矣helliprdquo

서월랑 7칸 북월랑 25칸반 남월랑 16칸 반 등의 행각과 월랑이 주변에 있었고 양지당 12

칸 양지당 남월랑 9칸과 주변에 문과 담장 판장 등이 있었다151) 그중에서 춘휘전의 서행

각 서월랑 북월랑은 「동궐도」나 「동궐도형」에서는 볼 수 없어서 선원전으로 용도가 변

하기 전에 주변 건물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원전의 영역은 선원전 서북쪽의 숙

경재와 양지당 선원전 남쪽의 영의사(永依舍) 서휘문(瑞暉門) 까지이다 영의사 남쪽의 약

방이나 옥당과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선원전으로의 출입은 인정전 남행랑 서쪽의 경광문-서휘문-양지당-선원전으로 가는 석

과 인정전 서쪽의 만안문을 통해 양지당을 거쳐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숙종이후 왕들은 생전에 자신의 어진을 제작하여 일정한 곳에 보관하였다가 사후에 부묘가

끝나면 어진을 선원전에 이봉하였다가 제사와 차례를 지낼때 꺼내서 걸어놓고 의례를 거행

하였다152)

숙종 사후 영조 1년(1725) 선원전을 중수하였으며153) 정조 2년(1778)에는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내전 전배실로 쓰던 동변실을 제2실로 개조하고 좌우 익각을 추가하였으

며154) 정조 사후에는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서변실을 개조하였다155) 그 결과 정

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확장되었는데 「동궐도」에 그려져 있는 모습이다

헌종 12년(1846)에 순조와 익종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제 4실과 5실을 증건하였으

며156) 철종 2년(1851) 다시 1실을 증건하여157) 신실이 6칸이 되었다 이후 광무 4년(1900)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서쪽으로 1칸을 증건하여 신실 7칸 좌우 퇴칸을 포함하여 정

면 9칸으로 확장되었다 원전 동쪽의 양지당(養志堂)은 어진의 이안처로 사용되었다

150) 『승정원일기』영조 30년 1월 11일 ldquohellip孝廟朝爲慈懿大妃 建此殿 爲他日殯殿之計helliprdquo

151)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1657)

152)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축』 동녘 2010년 479~483쪽 3 영건의궤에 기

록된 건축 2)진전 참조

153) 『궁궐지』 창덕궁지 「영묘어제선원전중수기병명」

154) 『승정원일기』정조 2년 1월 10일

155) 『승정원일기』순조 2년 7월 3일

156) 『헌종실록』 헌종 12년 8월 6일

157) 『일성록』철종 2년 5월 17일

그림 9gt 진전영역과 진입동선

6) 후원 영역

전각들이 배치된 영역의 북쪽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후원이다 지형은 전각영역보다 높

고 굴곡이 심한 편이다 후원영역은 성격에 따라 4개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흔히 후원

은 왕의 휴식공간만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전각영역이 통치와 의례 생활의 기능을 담고 있

듯이 후원 또한 통치 의례 휴식을 위한 기능에 따라 담장으로 공간이 구분되었다 창덕궁

의 경우 창경궁과 후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동궐도」에는 각 영역을 구분하는 담장이 표현

되어 있고 「동궐도형」도 이와 일치한다 창덕궁의 후원은 중앙이 높고 동middot서로 경사진 지

형적인 특징이 있는데 중앙의 능선에 의해 양쪽 공간의 성격이 완연히 다르다

능선의 동쪽에서 전각영역의 북쪽에 인접한 곳은 통치를 위한 공간으로 왕권의 상징적

공간인 주합루일대와 문middot무시험을 치루는 영화당과 춘당대일대 그 동쪽의 내농포가 있어서

국가의 근간인 농사를 살피는 장소를 마련하였다 통치영역의 북쪽은 왕의 개인적인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정자와 연못으로 꾸며졌다 이 영역의 중심공간은 옥류천 일대이다 능선의

서쪽은 북쪽으로 치우쳐서 대보단에 관련된 제례시설 산신단 신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남쪽은 중일각 등 군사훈련을 위한 장소가 마련되었다

그림 10gt 후원영역의 공간구분

나 내부경계의 변천

창덕궁과 창경궁은 lsquo동궐rsquo로 불리면서 하나의 궁궐로 인식되기도 했고 실제로 창덕궁의

을 사용할 경우 궁인들을 창덕궁에 모두 수용하기 어려워 그 처소는 창경궁을 활용하였

다158)

창덕궁의 안쪽 담장문(內東墻門)인 건양문(建陽門)이 성종대 이래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

계였다 내전은 통명전과 대조전일곽 사이에 두 겹의 담장이 있어서 구분이 명확하였으나

그 남쪽은 동궁영역의 전각이 변화함에 따라 별개의 궁역으로 취급되거나 창덕궁에 포함시

키기도 했고 창경궁에 속하기도 했다

『명종실록』에는 저승전을 창덕궁에 있는 것으로159) 했고 인조대 『저승전의궤』에는

저승전을 어느 쪽도 아닌 동궁으로만 언급했다 헌종대 편찬한 『宮闕志』에는 ldquo시민당터

(수강재 남쪽)에서 추경원(秋景苑)은 원래 창덕궁이다rdquo고 했으며 중희당 삼삼와 육우정을

「창덕궁지」에 포함시켜 서술했다 반면에 『동국여지비고』 『宮闕誌』에서는 중희당을

창경궁에 포함시켰다

현재는 자경전 북쪽 담장에서 춘당대까지 담장으로 되어 있고 그 북쪽은 철책으로 되어

있다 창덕궁과의 경계담장은 일제강점기에 구획된 것인 1936년의 배치도에 나타난 형태로

계속 유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즉 종묘 통행의 육교에서 낙선재동쪽 - 자경전 서쪽

담장 - 춘당대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담장이다 앞서 수강재의 동쪽에 창경원당시 동물사가

지어지면서 형성된 경계는 해방이후 창경궁과 창덕궁의 필지를 행정적으로 분리해서 각각의

지번을 부여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회복하는 1986년의 창경궁중

건에서도 그 경계는 조정되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여기에 율곡로를 가로질러 종묘로 통행할

수 있는 육교가 설치되면서 창경궁 쪽에서 접근하도록 경계가 설정된 것이다

후원 또한 대온실 주변에 식물원 부속 건물과 시설이 들어서면서 형성된 경계가 건물권역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조정 없이 유지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변화된 창경궁과 창덕궁

158) 『광해군일기』 2년(1610) 3월 26일 ldquo대저 昌德宮은 法宮과는 달리 殿閣이 많지 않고 간격이 협소하여

평상시 들어갈 때에도 항상 수용하기 어려워 宮人들은 나누어 昌慶宮으로 들어가곤 했다rdquo

159) 『명종실록』 명종 즉위년(1545) 7월 14일 ldquo更思之 則唯昌德宮東宮儲承殿爲當rdquo

그리고 후원의 경계는 창경원의 시설과 관련하여 설정된 경계였다

그림 11gt『궁궐지』의 창덕궁과 창경궁영역 서술 비교 「동궐도형」+『궁궐지』

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역 외곽의 변천160)

조선시대 창덕궁의 궁역은 세조대에 후원과 동쪽으로 궁장을 확장한 이래 계속 유지되

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이문원일대가 궁역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lsquo2 영역의 변천rsquo 참조)

일제강점기 초기는 비교적 조선후기 궁역이 유지되고 있는 시기이다 1912년 「지적원도」

에 의하면 창경궁과 창덕궁이 합하여 하나의 필지인 와룡동 2번지로 되어있다 2번지와 접

해 있는 와룡동 1번지는 집춘문의 호위를 담당하던 집춘영이 있던 자리이다 소유는 일제강

점기 당시 조선을 관리하는 관청인 lsquo이왕직rsquo으로 표기 되어있어서 왕실의 소유로 남아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지적도상에서 2번지는 창경궁과 창덕궁의 외궁장과 일치하거나 외궁장보다 약간 외곽에

범위가 잡혀 있는데 이는 궁장 바깥쪽의 경사가 급한 지역은 경사 아래쪽까지 지적에 포함

되었기 때문이다 궁장주변의 지적상황은 거의 변하지 않고 현재까지 유지되어 있다 후원의

북쪽은 임야로 이 부분도 이왕직의 소유로 되어 있다

1912년 이왕직 소유의 와룡동 12번지는 1917년부터 창덕궁 소유로 변경되었다 와룡동

2번지는 대지 면적이 6514743(197071평)으로 1912년부터 1929년까지 동일하다 창덕궁

소유로 추가된 대지는 창덕궁 돈화문 주변의 와룡동 3~6번지 원서동 1번지로서 원래 이 부

분도 와룡동 1번지의 집춘영이 있던 곳과 마찬가지로 창덕궁 정문의 숙위를 담당하던 남영

160) 문화재청 『창경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2010 173~182쪽 lsquo창경궁의 궁역변화rsquo를 참조하여 수정middot보완

이 주둔하던 곳이다

창경궁의 외곽궁역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1931년 원남동 사거리에서 창덕궁 돈화문쪽

으로 율곡로가 개설되면서 창경궁과 종묘사이가 단절되고 도로로 편입되어 창경궁 남쪽 궁

장과 마랑일곽이 훼손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하나의 지번아래 있었으나 해방이후 그때까지 창덕

궁 소유에 포함되어 있던 창경궁 영역이 세분화되어 창경궁 소유로 분리된다 1963년에 창

덕궁 영역(와룡동 2-71번지)과 창경궁 영역(와룡동 2-1 2-70번지)으로 나뉘었고 외곽부분이

추가되거나 축소되었다 과학관 부지가 지번이 분할된 것도 이때이다

궁역 외곽은 일제강점기와 해방이후 현재까지도 조선시대의 경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

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경운궁의 선원전을 대보단 남쪽에 이설하면서 창덕궁

의 궁역에 포함시켰고 율곡로를 개설하여 창경궁과 종묘사이를 분리한 것이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 직후

rarr조선시대 영역유지

일제강점기

rarr신선원전 돈화문좌우추가

(1932년 이후 율곡로 개설)

해방 후

rarr창덕궁과 창경궁 필지분할

신선원전 주변확장

북쪽 궁장 주변 필지 확보

현재

rarr돈화문 월대 복원

1912년 「지적원도」

(국가기록원 소장)

1929년「경성부地形明細圖」

(국립중앙도서관소장)

1977년「창덕궁재산목록」

(문화재청 소장)

2011 현재 지적도

표 12gt 창덕궁 궁역외곽의 변천

4 창덕궁 관련 의궤로 본 건물의 구조와 특징

가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인조 25년 1647년)

1) 공사 내용 분석

(1) 1647년(인조 25)의 창덕궁 수리공사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불에 탔던 창덕궁은 광해군 원년 중건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외전

의 인정전과 내전의 수정당(壽靜堂)만 남고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어서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마저 불에 타버리자 경덕궁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인조 11년(1633) 비교

적 덜 파괴된 창경궁을 먼저 복구하게 된다

계속 미루어지던 창덕궁 내전을 중건하게 된 계기는 창경궁에서 일어난 소현세자빈 강

씨의 역모와 저주사건이었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후 인조의 눈 밖에 났던 세자빈

강씨가 인조와 인조의 후궁인 조소용을 저주했다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소현세자와 관련

된 세력이 제거된 사건이었다 창경궁내 곳곳의 아궁이와 계단 아래에서 저주에 사용된 물

건들이 발견되었으며 흉물이 발견된 창경궁에 왕이 머물 수 없자 아직 복구되지 않은 창경

궁을 수리하여 이어하기로 하였다 소실된 지 25년 만에 이루어진 이때의 공사는 인조 11년

의 창경궁복구공사와 마찬가지로 광해군에 의해 영건되었던 인경궁을 헐어서 그 자재를 사

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때 복구된 주요건물은 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정묵당(靜黙堂) 집상당(集祥堂) 징광

루 등이다 내전의 경우 자재는 대부분 인경궁 것을 활용하였으나 초석은 원래의 것을 사용

하여 화재 이전의 규모대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대조전과 선정전 희정당의 상량 직후

세자의 처소인 저승전(儲承殿)을 옛 자리에 복구하기로 하였는데 저승전의 상량문은 『창덕

궁수리도감의궤』에 실었고 공사과정은 『저승전의궤』(1648)를 별도로 제작하였다

(2) 주요 공사 내용

의궤의 목록은 따로 없고 내용 속에서 항목을 구분해 서술하고 있다 서술순서는 공사

에 참여한 관리의 명단 6월 13일부터 시작하는 계사 계사질 끝에 공사비용과 남은 재물을

기록하였고 상량문(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저승전) 상량의 이문질 감결질 그리고 감결질

끝에 도감조비잡물질(都監措備雜物秩)을 적었다 다음으로 一所 二所 三所 四所 五所 노

야소(爐冶所) 별공작(別工作) 의궤사목(儀軌事目)이다

작업소별로 좌목을 따로 적고 별개의 의궤처럼 구성하였는데 『창경궁수리소의궤』

(1633)보다 더 상세하다 도감사목 다음에는 개기 정초 상량과 같은 주요 일정을 적었다

건물의 규모에 대한 묘사는 인경궁에서 철훼한 건물명과 칸수를 기록하고 철훼된 목재와 기

작업소 창덕궁 공사 전각(칸수) 인경궁 철훼 전각

1소 -대조전(45) 동서익실(온돌12칸) 동익각(6)

남월랑(285) 서익각(9) 서월랑(9)

-집상당(20) 행각(25)

-징광루(상하층40) 서월랑(10) 전행각(3)

-옥화당(105)

-정묵당(105) 西邊階上月廊(16) 飯色間(2)

외행각(3)

-慶壽殿(45) 동월랑(195) 남월랑

(225) 남행각(6) 동행각(3)

-慶寧殿남행랑(36) 동행랑(4) 서행

랑(13) 서행각(2)

-弘政殿(24)

-重暉堂(9) 소주방(75) 連付舍(1)

內帑庫(12) 酒茶房(85) 전행랑(2)

-正順堂동행랑(5) 남부사(1)

-光政殿남월랑(10) 십자각뒤 평행랑

(1)

-崇海堂행각(6) 북별당(20) 1칸문 4

2소 -熙政堂(15)

-영명문내행각(7)

-서월랑(23) 남월랑(6)

-누각(145)

-외남월랑(19)

-師傳廳(75)

-別監廳燈燭房(16)

-선화문협문(2)

-내반원(10)

-사전청 일칸문(1) 내반원 일칸문(1)

-외월랑(27)

-내반원남행랑(17)

-협양문(1) 동서협실(7)

-선례문(1) 동인문(1) 측간(1)

-和政堂(21) 행각(3) 서월랑(14) 남

월랑(18)

-延化門(6) 서외월랑(9)

-玉宸樓3東付舍(10)

-書士廳(16) 내반원(11) 행랑(13)

장방(20)

-승정원행랑(5) 빈청전랑(3) 水閣서

쪽月廊(2) 光政殿북월랑(7)

-會通門(1)

-端陽門(2)

-延祥門(1)

-沖黙堂(8) 행랑(7)

3소 -寶慶堂(3) 측15

-泰和堂(6) 남월랑(7) 동월랑(2) 북행각(1)

-昭德堂(4) 남월랑(5) 동월랑(11)

-燒廚房(5)

-小燒廚房서행각(10)

-中燒廚房(4칸 전퇴포함 6칸)

-下燒廚房(3칸 전퇴포함 4칸반)

-측간(4)

-窓差備(4)

-慶極堂(9)

-仁德堂(12) 서월랑(5)

-慶寧殿서월랑(4)

-福寧殿동월랑(6) 남행각(7) 서행각

(8)

-崇德堂동월랑(7)

-內帑庫 北邊半退(1)

-中政門밖북월랑(10) 외남월랑(20)

-尙衣院 衣襨房(6)

-경녕전수라간(5) 連付舍(1)

와의 수량을 각 건물별로 적지 않고 합하여 적었다 이때 조성된 전체 건물칸수는 817칸이

수리공역은 5개의 작업소로 나뉘어 이루어졌으며 작업소별 공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1소 침전인 대조전과 동서익실 월랑 집상당 징광루 옥화당 정묵당 및 주변월랑

2소 희정당과 주변월랑 소전청(所傳廳) 내반원(內班院) 및 주변월랑

3소 보경당 태화당 소덕당 및 주변월랑

4소 편전인 선정전과 주변월랑

5소 외전의 정전주변 월랑으로 인정전 동월랑 서월랑 승정원 대간청 인정문 외남월랑

-厢庫弓房(24)

-橉德堂동월랑(6)

-正順堂 앞厠間(6)

-與慶門(1) 一間門 5좌

4소 -선정전(9)

-북월랑(11)

-讌華堂(동온돌15 서온돌2 마루전퇴3) 集

陽門(1) 일각문(1)

-夜對廳서월랑(20)

-嚮明門(1)

-仁和門행각(7) 협문(1)

-동월랑(16) 내남월랑(11 돈례문)

-중행각(7) 외남월랑(14)

-외행각(3) 외행각동변(3)

-制義門 앞 일각문(1) 神佑門(1)

-光政殿(9) 내남월랑(5) 서월랑(8)

북월랑(11) 남월랑(5) 남행각(1)

동월랑(12) 內橫閣(1) 중행각(6)

외행각(12) 弘政殿북월랑(14) 弘

政門동월랑(7) 외남월랑(5) 中政門

남월랑(16) 外政門남월랑(6) 水閣

(4)

5소 -인정전동월랑(28) 남월랑(6)

-承政院(16)東廊(5)前廊(3)北間(1) 注書廳(9)

-臺諫廳(4)待接廳(2)승정원후랑(2)

-延英門(1) 東西挾廊(3)

-外司饔院(6) 端陽門(1)

-內弓房(14) 前廊(25)

-內司甕院(6) 司謁房(22)

-出入番內官廳(104)

-肅章門(6)

-王子問安廳(10 마루)

-인정문밖 남월랑(온돌1 마루6)

-빈청외랑(2) 精抄軍堡(2) 砲手軍堡(40)

-賓廳修粧 藥房修粧 傳漏軍堡(1)

-홍정문 외남월랑(26) 북월랑(7)

-승정원(28) 注書廳(4)

臺諫廳(6) 體元門월랑(10) 외사옹

원(34) 내사옹원樓廊(24) 弘政門

전후(6) 尙衣院樓廊(7) 六六門(1)

與慶門평월랑(6) 連付舍(2) 十字閣

後平廊(1)

당시 창덕궁 수리공사는 규모가 컸으므로 인경궁에서 많은 건물을 헐어냈다 이때 대부

분의 주요전각이 철거된 인경궁은 궁궐로서의 면모를 거의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창경궁

수리소의궤』와 더불어 이 의궤를 통하여 인경궁의 전각명칭과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의궤에는 철거된 건물을 건물별로 명시하지 않고 각 작업소 별로 일괄하여 기록하여 놓

았다 따라서 인조 11년의 창경궁공사와 같이 구체적으로 인경궁의 어느 건물이 창덕궁의

어느 건물로 이건하였는지 바로 대비되지는 않는다 다만 건물의 규모나 성격으로 보아 이

건관계가 드러나는 건물이 있다 창덕궁 수리의 경우 인경궁 건물의 이건에 있어서 일부는

동일한 규모의 이건도 있었으나 대개는 다른 규모의 건물로 변하였다 철거하는 인경궁의

전각은 칸수만 적고 창덕궁에 조성」되는 것은 각 전각의 바닥구조별(온돌과 마루 허칸)

칸수 천장의 구성과 마감을 밝혀 놓아서 궁궐내전의 내부 마감과 바닥구조에 대하여 많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 1647년 창덕궁 수리와 현상 비교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대조전 45칸

어칸 마루 3칸

4면 퇴마루 20칸

동서익실 전퇴석주온돌 12칸

동익각

남월랑

서익각

서월랑

6칸

28칸 반

9칸

9칸

마루5칸 온돌 3칸

마루12칸반 온돌 6칸

마루8칸반 온돌 3칸

마루 3칸

집상당 20칸

어칸마루 4칸

툇마루 14칸

온돌 2칸

행각 2칸반 마루

징광루 하층어칸마루 4칸

온돌 2칸

상층마루4칸 툇마

루12칸반

서월랑

전행각

10칸

3칸

마루 3칸 온돌 2칸

옥화당 10칸 반

마루7칸 온돌 3칸

정묵당 10칸 반

마루3칸반 온돌 3

西邊階上月廊 16칸 마루 6칸

飯色間 2칸

외행각 3칸

희정당 15칸 8

동서온돌 6칸

마루 9칸

영명문내행각 8칸 마루

서월랑 23칸 마루7칸반 온돌 4칸 허칸

11칸 반

남월랑 6칸 마루 2칸 온돌 2칸 허칸

2칸

누각 14칸반 8 상하층 마루

외남월랑 19칸 온돌 2칸 마루 12칸 허칸

3칸

師傳廳 7칸반 온돌 1칸반 마루 2칸

別監廳燈燭房 16칸 온돌 4칸 마루 7칸허칸 5

선화문 협문 2칸 포함

내반원 10칸 온돌 4칸 마루 6칸

사전청 1칸문 1

내반원 1칸문

외월랑 27칸 온돌 7칸 마루 11칸

허칸 7칸 문 2칸

내반원 남행랑 17칸 온돌 2칸 마루(퇴포함)13

칸 허칸 2칸

협양문 1칸 동서협실내 마루포함 7칸

선례문 1칸

이때 조성된 창덕궁의 내전일곽은 큰 변화 없이 순조대까지 유지되어 lt동궐도gt의 그림

과도 일치하고 있으나 1833년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다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동인문 1칸

측간 1칸

보경당 3칸 양면퇴 9칸

온돌 3칸 마루 6

태화당 6칸前退幷作平12칸

온돌 2칸 마루 문

1칸

태화당 남월랑

동월랑

북행각

7칸

2칸

1칸

昭德堂 4칸前退幷作平8칸

온돌 2칸 마루 허

간1칸

소덕당 남월랑

동월랑

5칸

11칸

소주방 5칸前退幷作

10칸

마루8칸반 온돌 1칸반

小燒廚房서행각 10칸 온돌3칸 마루 4칸 허칸2

칸 문 1칸

중소주방 4칸前退幷作

6칸

온돌 3칸 마루 3칸

하소주방 3칸前退幷作

4칸반

온돌 2칸 마루 2칸반

측간 4칸 마루 구비

窓差備 4칸 문 2칸반 마루 2칸

1칸문 5坐

선정전 9칸 북월랑 11칸 온돌 3칸 마루 5칸반

他庫1칸 건중문1칸 협문

반칸

華堂 동온돌 1칸반 서온

돌2칸 마루 전퇴 3

집양문

일각문

1칸

1칸

야대청이하서월랑

합당가幷

20칸 야대청 온돌 1칸 마루 2

합당가 4칸 마루3칸 허칸

1칸

인화문 행각 7칸

협문 1칸

동월랑 16칸 마루 4칸

동월랑 동변 5칸 온돌1칸 마루1칸 囗1칸

허칸 1칸

내남월랑 11칸 돈례문 1칸 동서 협문 1

칸 제의문 1칸 동변출입

문 1칸

중행각 7칸

외남월랑 14칸 선정문과 동서문 3칸

선전관청온돌1칸 마루2

칸 囗3칸

내관청온돌2칸 마루1칸

囗3칸

외행각 3칸

외행각 동변 3칸 온돌 1칸 마루 2칸

제의문 앞 1각문 1칸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神佑門 1칸

인정전일곽 동월랑 14間作平28

광문 1칸 온돌 1칸 마루

4칸

남월랑 6칸

승정원16칸동랑5

칸 전랑3칸 북간

1칸

25칸 온돌 4칸 마루 19칸

주서청 9칸 온돌1칸반 囗1칸 마루 6

칸반

외사옹원 6칸 동루 8칸 서루 8칸 공상

청 2칸 남랑 7칸

rarr온돌 1칸 마루 24칸

內宮房 7 間 作 平 1 4

동루 8칸 서루 8칸

내사옹원 6칸 동루 7칸 서루 2칸 평랑

1칸 남랑 1칸

출입번내관청 10칸 온돌 3칸 마루 4칸

숙장문전후통 6칸

왕자간안청 5 칸 作 平 1 0

마루

인정문밖 남월랑 8칸 온돌 1칸 마루 6칸

빈청외랑 2칸

精抄軍堡 2칸

砲手軍堡 4칸

傳漏軍堡 1칸

건물명 기사 사료

대조전

1461년(세조13) 내정전을 양의전이라 명명하고

대조전에서는 신하를 만났다고 함 따라서 이 시

기 대조전은 내정전과 다른 전각이었다고 추정

『세조실록』 세조7년 12월

19일 및 세조13년 5월 18

『연산군일기』에 태종 세종이 대조전에 거처하

고 성종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보임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8월 22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해 복구됨

1623년(인조원년) 인조반정시 소실된『인조실록』 인조원년 3월

15일

1647년(인조25) 인경궁 경수전을 뜯어 다시 지

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34) 전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 다시지음

(2) 대조전과 의궤

대조전은 창덕궁 내정전이다 가운데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서 온돌방을 갖춘 평면이며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이다 태종 세종이 이 건물에 거처했고 성종을 비롯한

여러 왕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실록에 보이므로161)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진

것으로 판단되지만 초기 기록에서는 양의전(兩儀殿)이라는 정전 이름이 별도로 나오고 있어

서 주의를 요한다 1461년(세조 7) 창덕궁의 주요 전각 이름을 지을 때 내정전은 양의전이라

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162) 세조 13년 5월의 실록에는 왕이 양의전 문에서 대신을 만났다는

기사와 함께 대조전에서도 신하들을 불러 명령을 내린 기사가 보인다163)

따라서 적어도 이 시기에는 양의전과 대조전이 각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후에 양의전은 실록 기사에서 나오지 않고 역대 왕들이 대조전에 거처한 기사만 보인다 임

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 창덕궁이 복구되면서 다시 지어졌다 인조반

정시 다시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25) 인경궁의 경수전慶壽殿 건물을 뜯어서 다시 지었다

이때의 공사 내용은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자세하다 이 때 경수전은 45칸이었다

고 하며 새로 지은 대조전 역시 45칸 규모였다 통상 건물 이름에 목숨 수자가 붙은 곳은

대비나 상왕의 거처를 나타내므로 인경궁의 경수전은 대비전으로 지었던 건물로 추측되며

이것을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중궁전으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다시 지어진 대조전은 180여

년이 지난 1833년(순조 33)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건물은 이듬해 바로 복구되었는데 소실

전의 규모로 지어졌다

1647년에 인경궁 경수전을 헐어서 지은 대조전은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의하

면 전체 45칸 가운데 어칸 마루 3칸에 천장은 봉반자이고 4면에 툇마루 20칸이 있고 기단

은 4단의 장대석으로 되었으며 동서 익실이 있는데 전퇴는 돌기둥 6개가 있고 온돌은 12칸

으로 천장은 지반자로 되었다고 하였다 또 정전 좌우에는 동익각 6칸과 서익각 9칸이 있고

남월랑 28칸반 서월랑 9칸이 있다고 하였다 또 대조전 동북쪽에는 집상당 20칸 서북쪽에

는 2층 누각인 징광루가 있다고 하였다

이 시기 대조전 모습은 lt동궐도gt에 그림으로 전한다 대조전은 가운데 3칸이 지붕이

좌우보다 높게 그려져 있고 3칸 부분 앞에는 월대가 마련되어 있다 월대는 3면에 계단이

있고 판장으로 가려져 있는 모습이다 월대를 둔 정청 3칸 좌우는 지붕이 한 단 낮게 되어

서 좌우 3칸씩 있는데 이 부분이 『창덕궁수리도감의궤』에서 말하는 동서 익실로 볼 수 있

다 또 동서익실 좌우로 행랑이 길게 이어져 있어서 동익각과 서익각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다 또한 동서익실은 건무 하부에 돌기둥이 그려져 있고 돌기둥 안쪽에 아궁이도 보인다 지

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형태이다

(3) 희정당과 의궤

161) 『연산군일기』 권17 연산군 2년 8월 22일

162)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 12월 19일

163)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 5월 17일

건물명 기사 사료

선정전

1405년(태종5) 조계청으로 창건『태종실록』 태종5년 10월 19

1461년(세조7) 건물명을 선정전으로 함『세조실록』 세조12년 12월

19일

1698년(광해군즉위) 소실된 것을 복구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 시 소실 『인조실록』 인조1년 3월 15

1647년(인조25) 인경궁의 광정전을 뜯어 이

건함『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00년(순조즉위) 정조의 혼전을 선정전으로

정함『(정조)혼전도감의궤』

20세기 초 창호를 유리창으로 고치고 외행각

을 철거함

1996년 lt동궐도gt 등을 근거로 원형 복구함

처음에는 명칭을 수문당(修文堂)이라 해서 왕의 학문소로 지어졌다가 연산군 때 희정당

으로 고쳤으며 뒤에 편전의 용도로 전용되었다 순종황제 때는 서양식 가구를 비치하고 사

신 접견 장소로 쓰였다 『연산군일기』에는 수문당이 대조전과 함께 성종이 거처하던 곳이

라는 설명이 나온다164) 이것이 수문당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이다 1496년(연산군 2) 6월

수문당이 화재가 나자 왕이 건물을 수리하도록 명하고 아울러 그 해 12월에는 건물 이름을

희정당으로 고치도록 했다고 한다165)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인조반정 때

다시 불에 탄 것을 1647년(인조 25) 인경궁의 전각을 철거해서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1833

년(순조 33) 화재로 불에 타고 이듬해 옛 모습대로 재건되었다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년)에는 당시 재건된 희정당의 규모를 15칸이라고 적었다

인경궁의 화정당 21칸을 이전했다고 했는데 규모에 차이가 있다 1834년 다시 지어진 희정

당은 이전과 동일한 규모였으며 그 평면 형태는 lt동궐도형gt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체는

15칸 규모이여 정면 5칸의 남쪽 5칸은 모두 마루이고 뒤는 중앙 3칸에 넓은 온돌방이 있고

뒤에 툇간이 있으며 좌우는 작은 방 2개가 중첩된 모습이다

(4) 선정전과 의궤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보던 곳이다 1647년(인조 25)에

다시 지어졌으며 지금 건물은 이 때 것이다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1405년(태종5) 창덕궁

이 창건될 때 조계청(朝啓廳)이란 이름으로 지어졌다가 1461년(세조 7) 선정전이란 이름을

얻었다166) 조계는 아침마다 신하들이 정사를 아뢴다는 뜻이며 선정은 정사와 가르침을 널

리 펼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1년) 재건되었으며 다

시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 때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 25) 재건하였다 지금 건물은 이때

164) 『연산군일기』 권15 연산군 2년 8월 19일

165) 『연산군일기』 권15 연산군 2년 8월 19일 및 동 권20 연산군 2년 12월 8일

166)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 12월 19일

다시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건립 시기로 보면 1608년경 다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광화

문 다름으로 창덕궁에서 오래된 건물이다 주변 행각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중문 주변

과 선정문 전면의 관청이 들어서 있던 부분은 편전의 용도가 달라짐에 따라 수시로 증축과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일제강점기 때 일반인의 관람 편의를 위해 개조한 상

태이다 고종 즉위 이후에는 선정전은 더 이상 본래의 용도로 쓰일 기회를 갖지 못하였

고 순종황제가 창덕궁에 돌아와서는 희정당에서 신하들을 접견하였으며 1917년 희정당이 화

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어진 후에도 희정당이 편전으로 쓰이고 선정전은 빈 건물이 되었

다 그런 덕분인지 선정전은 비교적 17세기초에 지어진 모습을 지금까지 잘 유지하고 있다

선정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장 눈에 띠는

특징은 지붕이 청기와로 덮여있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 안에 청기와를 덮은 건물이

선정전 외에도 징광루 등이 있었고 경복궁에도 있었지만 현재는 이 건물이 유일하다 현재

건물은 1647년(인조25)에 다시 지어진 것인데 이때는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지었던 인경궁

의 편전인 광정전(光政殿)을 뜯어서 그 재목으로 건물을 지었다 이때의 공사 과정은 『창덕

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자세하다 이 의궤에 의하면 광정전 9칸 건물의 기둥이나 보 공

포부재를 뜯어서 그대로 건물을 옮겨지었으며 기와 역시 광정전에 덮었던 청기와를 가져와

서 선정전에 덮었다고 하였다 인경궁은 광해군의 지시로 여러 건물에 청기와를 덮었는데

그 중 일부가 창덕궁에 살아남은 것이다

선정전과 그 주변 모습은 lt동궐도gt가 참고가 된다 lt동궐도gt에 의하면 선정전 건물은

세 단 정도의 장대석 기단 위에 놓여 있고 사방에 행각이 둘러쳐져 있어서 건물 앞에 작은

마당이 마련되어 있는 모습인데 특이한 점은 건물 앞으로 길게 행각이 뻗어서 마당을 좌우

로 나누고 있다 이 행각을 『궁궐지』에서는 lsquo복도각(複道閣)rsquo이라고 부른다 복도각은 기둥

과 지붕만 있고 벽은 개방되어 있는 모습이며 바닥은 돌이 깔려서 사람들이 비를 맞지 않고

출입문에서 편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선시대 빈전이나 혼전을

조성한 여러 의궤에서는 이 복도각을 중배설청(中排設廳)으로 부르고 있다 중배설청이란 빈

전이나 혼전에서 제례를 행할 때 음식을 진설하는 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lt동궐도gt에 그려

진 복도각은 선정전이 빈전이나 혼전으로 이용되었을 때 건물 앞에 배설청을 마련한 모습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배설청 모습은 lt동궐도gt에서는 창경궁의 문정전에서 확인

할 수 있고 경복궁의 태원전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lt동궐도gt에서는 선정전 주변에 행각이 둘러싼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특히 남쪽은

여러 겹으로 행각이 중첩되어 있다 이곳에는 대청 은대 상서성 당후 등이 있었는데 대청

은 대신들이 모이던 곳이고 은대는 승정원의 다른 이름이며 상서성은 관청이름 당후는 승

정원의 실무관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남쪽 행각에는 선정전에서 왕에게 계를 올리는 일과

관련한 관청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정전은 일제강점기 동안 창덕궁을 일반에 관람하면서 내부에 전시물을 두기도 하고

창문을 유리창으로 교체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996년 lt동궐도gt를 비롯한 옛 문헌에 따

라 건물을 본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그에 따라 사라졌던 복도각도 다시 세웠으며 창문도

고쳤다 다만 주변 행각은 변형된 채로 남아있는데 본래 선정전의 출입문인 선정문은 남쪽

의 두 번째 행각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 두 번째 행각은 복구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첫 번째 행각에 편의상 선정문 현판을 달아 놓았다

선정전에서는 과거 왕이 신하들과 어떤 형태로 접견을 하고 상참을 거행했는지를 확실

히 고증할 수 없는 상태이다 문헌에는 실내에 일월오악병풍이 있고 어좌가 있었다는 점을

전하고 있지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 그 형태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현재 선정전 실내에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한 집기류 등은 근거가 없는 불확실

한 것들이다

(5) 인정전 일곽과 의궤

창덕궁의 대문과 그에 딸린 사다리꼴 형태의 행각 이 문을 들어서면 비로소 창덕궁의

실질적인 내부인 대내大內로 들어서게 된다 『영접도감의궤』(광해군 2)에 명시한대로 창

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대내로 들어가는 대문(大門)이다 진선문의 좌우 행각 및 진선

문을 들어선 곳의 마당을 둘러싼 행각은 실록에서는 인정전 외행각으로 불렸다 외행각은

진선문과 마주보는 숙장문 좌우 행각까지 포함된다 북쪽은 인정문 좌우의 행각이 길게 뻗

는다 인정문 좌우 행각과 진선문 숙장문 주변 행각으로 둘러싸여서 사다리꼴의 마당이 이

루어진다

진선문의 창건에 대해서는 사료상에 명시된 것이 없지만 창덕궁이 창건될 때 함께 지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167) 창건 시에는 진선문이 창덕궁의 바깥 대문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정전 외행각이 세워진 것은 1418년(태종18)부터이며 이듬해 1409년(세종 1)에 완성

되었다 세종실록에는 박자청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터를 잘 살피지 않고 기둥을 세우고 보

를 올려 인정전에서 내려다보면 기둥이 바르지 않고 경사지게 보여 상왕이 화를 내고 자청

을 옥에 가두도록 하고 행각은 헐어버리도록 했다는 기사가 보인다168) 이후에 외행각이 어

떤 모습으로 고쳐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부분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광

해군 때 다시 복구되었으며 그 형태는 19세기 중엽에 제작된 lt동궐도gt나 20세기 초에 그린

lt동궐도형gt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초에 진선문이 철거되면서 외행각도 함께 철거되었

으며 1996년 진선문을 복구할 때 외행각도 복원되었다

조선시대 진선문이나 인정전 외행각 모습은 lt동궐도gt와 lt동궐도형gt을 통해서 추정해

볼 수 있다 두 자료에 나타난 외행각은 진선문에서 남북으로 행각이 이어지고 남쪽은 제5

칸에서 직각으로 꺾여서 남행각이 길게 이어지는 모습이며 남행각이 다시 북쪽으로 꺾이면

서 숙장문으로 연결된다

인정문은 남행랑의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인정문이 남향해 있다 장대석 2단의

높은 기단 위에 서 있다 계단은 중앙에 장식 없이 꾸며져 있다 경복궁의 근정문이 중층 누

167) 실록에 진선문 기사가 처음 나오는 것이 1409년(태종 9) 10월 기사인 것으로 미루어 1405년 창덕궁 창건

시부터 이 문이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태종실록』 권18 태종 9년 10월 1일 기사)

168) 『세종실록』 권3 세종 원년 4월 12일

각이고 중앙 계단 가운데 쌍으로 봉황을 새긴 답도를 둔 것에 비해 크게 격식을 낮추었다

지붕 용마루에는 인정전과 마찬가지로 이화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역시 1916년에 설치된 것

으로 보인다

인정문 행랑은 『태종실록』에 기록된 창건 시 규모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북쪽은

산을 등지고 있어 행랑을 두지 않고 동 서 남면에만 있으며 동서 행랑은 방이 두 줄로 된

복랑(復廊)이고 남행랑은 방이 한 열로만 된 단랑(單廊)이다

인정문은 1992년부터 96년 사이에 일제강점기 때 변형된 부분을 고쳤다 우선 인정전에서는

일제시기에 건물 동편에 행랑을 붙여놓았던 것을 lt동궐도gt 등을 참고해서 본래대로 행랑을

건물 후방으로 옮겼다 인정전 마당은 정원으로 꾸미는 등 훼손이 많았던 것을 품계석을 다

시 세우고 바닥 전체를 박석으로 깔았다 행랑과 인정문 역시 일제강점기 때 구조를 바꾸고

벽을 개조했던 것을 원형을 고증해서 복원했다 다만 인정전과 인정문 용마루에 설치한 이

화문양은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또 인정전 내부의 황색 커튼이나 바닥의 쪽마루 전

등 갓 등도 당시의 역사적 흔적을 그대로 둔다는 취지에서 그대로 두었다

나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인조 26년 1648)

1) 공사 내용 분석

인조 26년(1648)에 마무리된 창덕궁의 동궁처소인 저승전(儲承殿)을 수리한 내용이다

저승전의 위치는 『宮闕志』에 의하면 ldquo저승전은 건양문 밖에 있다 (원) 옛 구현전 광연전

의 터이다rdquo라고 되어 있으며 시민당의 북쪽 현재 낙선재의 서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원래 저승전의 터는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머물던 광연전 터로 성종때 세자가 거

처하는 춘궁으로 바꾸었다 저승전 일곽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때 중건되었으

며 인조반정으로 창덕궁 내전이 소실되면서 동궁의 처소도 대부분이 다시 소실되었다

인조 25년 창덕궁의 내전과 편전을 복구하는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던 8월 15일 도감

에서 당시 세자가 임시로 거처하는 곳에서 흉물이 발견되어 거처하기 어려우니 진행중인 창

덕궁 공사와 더불어 세자를 위하여 전(殿)하나와 당(堂)하나를 짓기를 청하였다 인경궁의

동궁을 헐어서 동궁의 수리가 시작되어 9월에는 입주(立柱) 상량이 이루어졌으나 창덕궁의

다른 수리공역이 끝난 후에도 저승전 공사는 지체되면서 동절기에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듬

에 2월에 다시 시작하여 4월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저승전 공역은 처음에는 창덕궁수리도감이 맡아 하였으나 인조 26년에 따로 도감이 설

치되었다 저승전 공역에서도 창경궁 창덕궁의 공사와 마찬가지로 인경궁의 일부 전각을 뜯

어 이용하였다 『저승전의궤』는 창덕궁의궤와 별도로 공사가 완료된 인조 26년(1648)에 작

성되었다 저승전 공역과 함께 창덕궁 공역의 잔여부분을 마무리 짓는 형식이 되었으며 이

에 따라 그 의궤서도 일정한 체제를 갖추지 않고 필요한 내용만을 정리하는데 그쳤다

목록은 없으며 내제의 처음에는 lsquo순치오년정월 일(順治五年正月 日) 저승전의궤rsquo다음에

작업소 건물구성(칸수) 공사내용

좌소

(左所)

인경궁 철훼

-承華殿(45)

동행각(4) 서행각(4) 서월랑(15) 남월랑(195) 북월랑

(4) 동행랑대문남변월랑(20) 북변월랑(9) 서변평월랑(4)

重暉堂 동월랑(13) 북월랑(50)

철훼

-儲承殿(28) 동온돌(6) 서온돌(6) 대청마루(16) 신조

동익각(1) 동행각(2) 동월랑(9)

바로 공사감역관의 조직(座目)을 적었다 이어서 전유재질(前遺在秩)도감무역질(都監貿易

秩)上下秩(품삯관련)철물타조질(鐵物打造秩)용여환하질(用餘雜物還下秩)각처이송질

(各處移送秩)을 적고 제목 없이 날짜순으로 계사(啓辭 상량문 상량의 포함)이문(移文)을

적고 그 뒤에 좌소(左所) 우소(右所) 및 외소(外所) 노야소의 항목을 두었다

lt전유재질(前遺在秩)gt lt도감무역질(都監貿易秩)gt에서는 전년의 공사에서 남은 자재와

금번 공사에 소용된 자재의 총량을 수록하였다 소용된 자재는 주로 철물 기와 단청재료

미장재료 등이다 lt上下秩(품삯관련)gt에는 장인과 인부들의 품삯 창경궁 각처 및 아문과

進修堂 전돌 까는데 들어간 전돌과 장인의 품삯을 적었다 lt각처이송질(各處移送秩)gt의 내

용은 남은 잡물을 홍제원과 문정전 수리에 사용하도록 이송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항목을 구분하지 않고 정해(丁亥 1647년) 8월 15일부터 무자(戊子 1648년) 4

월 12일까지의 계사(啓辭)를 날짜별로 적고 있다 중요공역의 일정을 보고하는 것으로 8월

16일 1소에서 개기를 시작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9월 15일 묘시(卯時)에 저승전의 定礎

午時에 立柱 未時에 上樑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9월 15일자에는 상량문과 상량의를 적었

다 여기에 수록된 상량문은 이에 앞선 창덕궁의 공사를 기록한 『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에 실린 저승전의 상량문을 다시 실었다 정초에서 상량 까지 같은 날에 했으나 공사

가 완전히 끝난 것은 다음해 윤3월 하순이었다

계사에 이어서 항목구분 없이 1647년 12월 14일에서 1648년 7월까지 도감과 각 관서 및

각 지방관찰사 사이에 자재의 조달과 수급에 대하여 오고간 문서를 날짜순으로 정리하였다

구체적으로 공사내용을 알 수 있는 부분으로 lt좌소(左所)gt lt우소(右所)gt 및 lt외소(外

所)gt lt노야소gt의 기록 방식은 각 작업소별로 감독관 명단 날짜별 공문서 조성전각의 명

칭과 규모 공사내용 소요자재(實入雜物秩) 공장명단(工匠秩)을 수록하였다 노야소 뒤에 저

승전 일곽 외에 1647년 창덕궁수리공사의 잔여 공사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잔여공사는

주로 문과 주요 전각의 벽체 단청 도회(미장)공사이다 마지막에는 역시 제조의 수결을 실

었다

인경궁 철훼는 좌소에서 맡아서 했으며 기록은 건물명과 칸수만 간단히 적었다 저승전

의 중건과 함께 신축한 건물은 낙선당 경극당 숭경당 취선당 손지각 및 익각과 주방이며

청음정 시민당 진수당 장경각이 수보되었다 시민당은 저승전의 남쪽에 있었으며 세자 서

연의 장소였다 진수당은 시민당의 북쪽 전각이며 손지각 역시 시민당에 부속되었던 건물이

고 장경각은 진수당의 동쪽에 있던 건물이다 즉 1648년『저승전의궤』에 기록된 공사의 범

위는 창덕궁의 동궁전 전체라 할 수 있다

남월랑(7) 남행각(1)

-敬極堂(10) 남월랑(7) 동월랑(75)

-樂善堂(5) 서행각(3) 남월랑(6)

-協祥門 麗景門 淸輝門 수보

-외남월랑(185) 資善門 淸陰亭(3칸) 측간 4칸

-霽陽門(1칸)

수보 개와 토벽

단청

우소

(右所)

-저승전 서익각(1칸) 북익각(1칸) 소주방 (6칸)

온돌(8) 마루(8) 차양판장 1좌 신조

내서월랑(7)

-기와 토벽 단청

개수

-일부 창호 신조

-嘉順門(1칸) -협문(25) 내남월랑(6칸) 북월랑(6칸)

-崇敬堂(45) -東付舍(3) 서행각(155)

-就善堂(105)

-靜勝門 1칸

-東樓(18) 서월랑(7)칸 남월랑(10)칸 외월랑(6)

외남월랑(18) 창차비(3)

司饔院(6)

供上廳(1) 機械木造作

嬪宮長房(6)+付舍(3) 朗和門(1) 差備廳(3)

炭庫(3) 機械木造作

외소

(外所)

遜志閣(7) 행각(19) 1칸문 1좌 小房(165) 1칸문 2좌

장방(13) 1칸문 4좌 별감방(6) 司鑰房(7) 水剌間(6)

大殿精抄軍廳(115) 貳문 1칸 북협문 1칸 泰亨門 1칸

목재 기와 석재

는 신조 창호는

일부 인경궁 철훼

재 사용

시민당 9칸 進修堂 12칸 기와 토벽 단청

개수 창호칠 개수

藏經閣 3칸 建陽門 중명문 기와보수

集英門 1칸 集賢門 1칸 단청보수

시강원 수보

종묘 담장 (중명문에서 司鑰房까지) 개축

大隱構 (遜志閣에서 內司僕寺까지)

정묵당등

수 보 와

개조질

정묵당 10칸 징광루 외서월랑 16칸 窓差備內 家 6칸 창차비

문 4칸 神佑門 4칸 熙仁門 1칸(개조) 肅章門 6칸 인정문 전

후 4칸 진선문 전후 4칸 壽靜堂외남월랑 3칸 서월랑 7칸(총

64칸)

砂壁 단청수보

선정전 인정전 선자귀

대조전 집상당 희정당 보경당 태화당 소덕당 선정문 협양

문 각처 연가 숙장문 인정문 진선문 돈화문 상하층

改塗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 저승전과 의궤

『저승전의궤』는 『창경궁수리소의궤』(1633)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이어서

인조년간에 복구된 창덕궁의 동궁 모습과 이때 철거된 인경궁의 동궁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세자가 거처하는 저승전을 중심으로 주변 전각의 면모를 알 수 있으며 바로

전에 완료된 창덕궁수리공역의 공사 마무리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건물명 기사 사료

돈화문

1412년(태종12) 진선문 남쪽에 누문

5칸 건립『태종실록』 태종12년 5월 22일

1413년(태종13) 문에 큰 종을 달다 『태종실록』 태종13년 1월 27일

1592년(선조25) 소실

1608년(광해즉위) 복구되다 『광해군일기』 광해군즉위년

1620년(광해군12) 문 앞 산대놀이를

중지시키다『광해군일기』 광해군12년 9월 3일

1676년(숙종2) 문 앞에서 과거 급제

가 문과2인 무관1만2천 7명이 파자교

까지 늘어서다

『숙종실록』 숙종2년 3월 24일

이 의궤의 각 작업소별 lt조성간각질(造成間閣秩)gt은 조성건물별로 칸수 바닥구조 천

장의 형태 난간 창호의 종류 등이 기록하고 건물별로 보수내용을 적었다 건물의 규모와

형태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창호의 형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저승전은 총 28칸

의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구성이었다 동온돌과 서온돌이 각 6간이고 중앙의 3칸이

고 대청이었다 저승전은 『宮闕志』의 기록에 의하면 영조년간의 화재로 소실된 뒤 중건되

지 않았기 때문에 lt동궐도gt lt동궐도형gt 등 후대의 그림 자료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없

다 따라서 이 의궤의 기록은 저승전의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2) 돈화문과 의궤

창덕궁의 정문이다 『영접도감의궤』(광해군 2)에 의하면 창덕궁의 출입문은 돈화문을

정문(正門) 진선문을 대문(大門) 인정문을 중문(中門)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정문은

창덕궁 외곽 담장인 궁장의 정식 출입문을 가리키며 정문을 들어서면 수직하는 군사들의

거처나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는 관청이 모두 포함된다 이에 반해 대문은 대내의 출입문으로

정전이나 편전 내전 영역의 출입문이 된다

1405년(태종 5) 이궁 창덕궁이 지어지고 나서 7년 후인 1412년(태종 12) 5월에 도성 내

에 행랑을 지으면서 창덕궁 진선문 남쪽에 누문 5간을 세워 lsquo돈화문rsquo이라 했으며 문 밖 좌우

행랑은 각 관청에 나누어 주고 조방朝房으로 만들었다고 『태종실록』에서 밝혔다169) 조방

은 궐에 들어가는 신하들이 의복을 갈아입고 대기하는 곳이다 1413년에는 문에 큰 종을 달

았다170)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복구되었다 이후에 화재나

훼손기사가 사서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초에 재건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다만 세부의 형상이나 구조짜임에서는 후대의 특징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후

대에 일부 개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돈화문은『궁궐지』에 의하면 창덕궁의 궁장에는 남쪽에 돈화문 단봉문(丹鳳門) 북쪽에

광지문(廣智門) 서북에 요금문(耀金門) 동쪽은 건양문(建陽門) 서문은 경추문(景秋門) 금

169)『태종실록』 권 23 태종 12년 5월 22일

170)『태종실록』 권 23 태종 13년 1월 27일

호문(金虎門)이 있다고 하였다 돈화문은 창덕궁 궁장의 서남모서리에 놓여있다 궁의 정문

이면서 위치가 궁장 모서리에 놓인 것은 창덕궁의 입지가 응봉에서 내려오는 경사진 지형

탓으로 보인다 돈화문은 왕이 궁을 드나들 때 이용되었으며 중국 사신 역시 이 문을 출입

하였다 또한 나라의 크고 작은 공식 행사가 있으면 그 행렬이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 예를

들어 궁 안에 모셨던 어진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다시 궁으로 돌아올 때는 이 문을 이용

했다 그러나 궐에 출입하는 신하들의 일상 출입은 이 문을 이용하지 않고 근처의 금호문을

사용했으며 이따금 단봉문을 이용했다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다 기둥 위뿐 아니라 그 사이에도 공포를 촘

촘히 배열한 다포형식이며 상부 지붕형태는 우진각이다 『궁궐지』에는 공포가 내7포 외 9

포이며 기둥 높이가 16척 앞뒤방향 칸의 길이가 각각 12척 조우 방향 칸의 길이가 가운데

칸은 17척 그 다음 칸이 15척 제일 바깥 칸이 125척이라고 하였다 돈화문은 처음 이궁으

로 지어졌기 때문에 경복궁처럼 외곽에 돌을 가지고 견고하게 궁성宮城을 쌓은 것이 아니고

흙과 돌을 가지고 궁장(宮墻)을 쌓았다

따라서 정문은 광화문처럼 석축을 쌓고 홍예문을 낸 것이 아니고 중층 누문 형태의 목

조건물을 세웠다 다만 광화문을 비롯해서 다른 궁궐 정문이 정면 3칸인데 비해 정면 5칸으

로 규모를 키웠다 5칸 가운데 좌우 2칸은 벽으로 막고 실제로 출입문은 3칸만 열었다 문은

세벌 이상의 장대석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세웠으며 세 개의 계단이 놓였다 기단 앞으로는

길게 단을 쌓은 월대를 마련했다 lt동궐도gt에 그려진 돈화문 모습을 보면 월대 중앙에는

왕이 출입할 때 이용하는 어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출입문 중 가운데 문 하나를 제외

하고 좌우의 출입문은 X자 형태로 막대로 막았다 이 그림으로 보면 평상시 돈화문은 일반

인의 사용을 제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대 남쪽에는 좌우에 말을 매어 두는데 쓰였

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틀이 있고 나무틀 앞에는 말에 오를 때 발을 딛는 디딤돌이 보인다

돈화문은 한 동안 월대를 비롯해서 기단이 아스팔트에 묻힌 상태로 유지되었다 언제

기단 하부를 아스팔트로 묻었는지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20세기 초에 창덕궁 안에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하면서 기단을 흙으로 메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돈화문 바

닥뿐 아니고 금천교의 위치도 바꾸고 진선문은 철거하였다 이렇게 변형된 돈화문은 1996년

기단을 제 모습으로 드러내고 월대도 복구하였다 그 사이 돈화문 앞 도로를 보수하면서 아

스팔트 층이 높아져 월대와 도로 사이에 1미터 이상의 단차이가 생겼다

(3) 시민당과 의궤

1847년(헌종13) 후사가 없었던 왕을 위해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들이면서 왕과 후궁이

함께 거처할 건물로 지었다171) 낙선재가 있던 일대는 본래 세자가 거처하며 신하들을 만나

던 동궁이 있었다 이곳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간 위치가 되며 창덕궁 동문인 건양문을 나

선 곳으로 영역으로 보면 창경궁에 속한 곳이었다 이곳에는 왕세자가 신하들을 접견하던

171) 낙선재 건립 경위에 대해서는 헌종 자신이 쓴 낙선재상량문과 수강재중수상량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헌종의 문집인 『원헌고元軒稿』 권1 낙선재상량문(1847년)과 수강재상량문(1848년) 참조

시민당(時敏堂)과 왕세자의 침소인 저승전(儲承殿)과 낙선당(樂善堂) 등이 있었다

1780년(정조4) 시민당이 화재로 소실된 후에 복구되지 않은 채 1782년(정조6) 새로 동

궁 처소로 희정당 가까운 곳에 중희당(重熙堂)이 지어지면서 빈곳이 되었다 이 일대는 조선

초기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으로 전한다 정조는 1785년(정조9) 이곳에 수강재를 지어 독

서처로 삼았다172) 한 동안 비어있던 이곳에 헌종 때 와서 낙선재를 지은 것이다 헌종이 경

빈 김씨와 낙선재에 거처한지 불과 2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빈집이 되었다가 고종

때에는 왕이 창덕궁에 머물 때 여기를 집무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즉 1884년(고종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창덕궁에 머물면서 낙선재에서 집무를 보고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1907년 이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나서 1917년 대조전

등이 모두 불에 타자 낙선재를 임시거처로 삼은 적도 있다 순종의 계비이며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한 동안 거처하였고 1963년 영친왕 이은이 환국한 후에는 부인 이방자여사와

함께 거처하였다 2009년에는 영친왕의 아들 이구(李玖)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혼전으로

이용되었다

다 『창덕궁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昌慶宮修理都監儀軌)』173)(효종 3년 1652

년)

1) 공사 내용 분석

효종 3년(1652) 1월부터 시작된 창덕궁 창경궁의 수리공역에 대한 내용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에 있는 건물의 온돌을 개수하고 전돌을 새로 깔며 흙을 교체하는 공사였다 인조 25

년에 있었던 창덕궁 수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주사건이 궁의 개수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

다 1651년(효종 2) 11월 인조의 후궁이었던 조귀인이 대내에 뼛가루와 무덤의 나무를 뿌리

고 흉물들을 각처에 묻어 대비와 대전 인평대군 등을 저주했다는 내용의 옥사가 있었는데

이 사건과 김자점의 역모사건이 연계되어 김자점 일파가 숙청되었다 효종은 이 사건을 마

무리 하고 곧바로 대비를 모시고 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며 창덕궁과 창경궁의 흙을 모두 긁

어내고 깨끗한 흙으로 채우도록 명한다174) 따라서 주요 전각의 온돌을 해체하고 전돌 교

체 전각 간의 어로에 흙을 새로 까는 것이 주된 공사였다

목차는 없으며 규장각 소장본은 앞부분의 편찬 년대와 공사감독 조직이 결락되어 알

수 없다 남아 있는 부분은 효종 3년 1월 15일의 도감사목으로 시작되는데 이후 4월 22일

까지의 lt계사gt 1월 8일부터 4월 15일 까지의 lt이문질gt 1월 15일에서 2월 10일 까지의

lt감결gt이 수록되었다 계사에 비하여 이문과 감결은 매우 소략하다 이어서 lt昌德 一所gt

lt昌德 二所gt lt昌慶 一所gt lt昌慶 二所gt lt굴토(掘土) 1소gt까지의 각 소(所)의 감역관 명

단과 작업내용에 대한 공문 자재목록 공장명단이 있다 끝 부분이 결락되어서 lt굴토(掘土)

172) 『정조실록』 권20 정조9년 8월 27일

173) 서울대학교 규장각(규14912)

174) 『효종실록』 효종 2년 12월 27일

작업소 건물 공사내용

창덕 1소 大造殿 동서익각 책방 集祥堂 澄光樓 玉華堂

壽靜堂 靜黙堂

온돌공사

희정당 承明門 내소주방

慶極門에서 建中門까지 어로

창덕 2소 太和堂 昭德堂 讌和堂 寶慶堂

책방

온돌사벽수리 방전다시 깔

景福堂 책방 온돌수리 단청

宣政殿 방전 박석

瑤華門에서 五雲門까지 어로 방전다시 깔기

齊政堂 온돌 방전 박석 淨土

도총부 책방 낭청방 온돌 방전 淨土

臨武門 湛露門 인경궁의 자재와 기와로 만듬

1소gt의 중간 정도까지 남아 있다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마이크로필름을 확인하면 그 뒷부분

은 lt굴토 이소gt lt노야소gt lt목물소gt lt토물소gt lt의궤 사목gt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이 공사에서 특이한 점은 일반 백성을 동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lt계사gt 1월 3일에 의하면 전국각지에서 2000명의 승군을 동원하여 훈련원과 인경궁 동관

왕묘에서 기거하면서 공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창덕궁에 새로 깔 흙은 쌍리문동에서 채취

하고 창경궁에 깔 흙은 남소문동에서 채취하였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이 공사는 인조 11년(1633)의 창경궁 수리와 인조 25(1647)년의 창덕궁 저승전 공역에서 수

리되었던 전각이 수리 대상이었다 이 의궤는 공사가 주로 바닥의 보수에 있었던 만큼 공사

규모도 적고 그 기술도 상세하지는 않으나 『창경궁수리소의궤』(1633)에서 언급되지 않았

던 창경궁 전각의 바닥구조가 언급되었다 공사의 성격이 건물의 실내 위주였기 때문에 현

상을 비교할 수 없다

당시 공사 범위였던 주요 건물은 앞에서 거론하였으므로 간단히 도총부만 살펴보기로

한다 도총부는 궁궐을 호위하는 기능을 맡던 관청으로 창덕궁 대문인 진선문 밖에 있었던

것을 1655년(효종6) 인정전 서쪽에 만수전을 지면서 창경궁으로 이전했고 이후 1781년(정조

5) 이문원이 들어섰다 lt동궐도gt에 묘사된 이문원 건물은 전면 5칸 측면 2칸반 정도이며

하부에 돌기둥을 세우고 가운데 3칸에 나무 사다리를 설치한 모습이다 이와 유사한 구조는

lt동궐도gt의 희정당 건물그림이나 현존하는 창경궁 숭문당에서도 볼 수 있다 대유재는 정

면 4칸 측면 2칸 건물이며 동쪽 끝 2칸은 물가에 면해서 제일 바깥쪽 돌기둥이 물속에 세

워진 모습이다 이 부분은 동이루(東二樓)라 불렀는데 1785년(정조9) 동이루를 지었다

라『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175)(효종8년 1657)

1) 공사 내용 분석

17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3572)

작업소 주요건물 부속건물 공사내용

1소 만수전

(4면퇴 포함36)

新材 眞彩 柱唐朱紅

井虹橋 동익각 밖

연지 서행각(4) 판장(11)

千慶樓 (4면퇴 포함 20) 新材 眞彩 柱唐朱紅

獻線閤 (전퇴포함 30) 일부구재사용 신재 진채

5량가(8) 외행각평루(3) 窓差備(7) 구재 및 신재사용 단청

洗踏房(6)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庫間(7) 長房(14) 司鑰房(4) 구재 및 신재 사용 단청

등촉방(7)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長房庫間(4) 舊 肅寧殿 서월랑을 수보 단청

외월랑(8)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만수전(萬壽殿)은 효종 8년 왕대비인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莊烈)왕후

조씨 1624~1688]를 위하여 창덕궁 인정전 뒤에 지은 전각이다 위치는 구 선원전의 북쪽이

다 이듬해 거듭되는 천재지변으로 1월 15일 공사를 멈추었다가 8월 4일 도감을 다시 설치

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공사는 11월 15일 다시 중지했다가 다음해(효종 8년 1657)에 1

월 16일 다시 시작하여 3월 26일 완공되었으며 4월 2일 대비가 이어하였다

이 만수전은 숙종 13년(1687) 9월에 불이 났으며 다시 복구되지 않았으며 자의대비는 통명

전으로 옮겼다 자의대비는 만수전에 불이 난 다음해인 1688년 (숙종 14년) 창경궁 내반원에

서 승하하였다

목록은 따로 없고 을미(1655년) 11월 17일 좌목과 도감사목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뒤에

는 11월 19일 날짜로 시작하는 계사에 해당하는 내용을 적었다 계사 뒤에는 예산의 수급과

품삯의 지급항목 및 실제 투입된 재료의 목록을 기록한 실입편을 두고 있다 그러나 따로

세부항목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모든 문서를 날짜순으로 적었다 그 다음에는 lt1소gt lt2

소gt lt3소gt lt외소gt lt부석소gt lt운석소gt lt외축장소gt lt노야소gt lt별공작gt의 순으로

싣고 맨 끝에 lt의궤사목gt을 실었다

각 작업소별로 별개의 의궤를 첨가시키는 형식으로 전체 의궤를 구성하였다 1소에서는

만수전 조성 2소에서는 춘휘전 조성 3소에서는 기타 서루와 월랑 등을 조성하는 것으로 나

누었다 이외에 작업종류에 따라 담장을 쌓는 외소 및 외축장소를 별도로 두었으며 돌 일을

담당하는 부석소와 운석소를 구분하였다 또 각종 철물을 만드는 노야소와 기계를 만드는

별공작소를 구분하였다

lt1소gt를 예를 들어 각 작업소별 서술방내용을 살펴보면 처음에 담당 관원들을 적고

lt수본질gt을 날짜순으로 적었으며 그 다음에 lt조성질gt에 건물의 규모 신구부재의 사용

과 기단마감단청 해당 건물의 실 구성(천장 마감과 온돌석 수량)을 적었다 그 다음에 목

재 석물 기와 단청 잡물 창호(창호채색잡물) 3개 작업소를 통틀어 단청한 것(通三所懸板

着添秩) 축장석물과 잡물의 실입을 구분하여 기록하고 lt공장질gt에 장인명단을 적었다

부재의 크기나 치목된 부재명칭이 언급되지는 않아서 건물의 칸수 정도를 파악하는 정도이

나 건물별로 창호의 종류와 창호단청 색깔 기단의 단수 등이 상세히 명시되어 있다

端和門 외행각(2) 신재

一間門(12처) 6칸 신조 6칸 구재

대문(5처) 3칸 신조 2칸 구재

外墻 水閣(3) 구재

2소 春暉殿

(4면퇴포함 20)

慶和堂을 철훼 이건 대보 1조

신재 眞彩

동변 화계(6층)

서행각(3) 서월랑(7) 북월랑(255) 신재

북월랑 앞 판장(9) 신조 眞彩

將酉庫 판장(5) 신조 단청

樑家(8) 구재

양지당 (전퇴포함 12) 신재 단청

북변 동산층각(2)

大一間門(2) 신조

중일간문(5) 3칸신조단청 2칸구재진채

箭泩門(4) 신조 단청

대문(1칸문) 내측간(3) 외측간(1) 구재

별감청(4) 구재

천경루 서측정원 井虹橋 裳朴石 신조

3소 서루월랑(전후퇴포함 76) 신재 구재 사용

상하층 내에 오토단청 나머지

는 단청

남루월랑(전퇴포함 45) 신재 단청

춘휘전남월랑(165) 신재 전면 진채 나머지 단청

양지당 남월랑(전퇴포함 9) 신재 단청

端暉門 1칸

춘휘전앞 小狹箭往門(1) 신재 진채단청

양지당앞 小狹門 1칸 문판과 문얼굴은 신재 나머지

는 구재

북수문 서변 1칸문 측간(3) 구재

lt築墻秩gt 서루월랑 서변 細墻 42칸(높이 8자)

泰秋門북수각~景秋門 內墻까지 50칸

측간동남 담장8칸(높이 9자)

대은구 5칸 중은구 7칸

외소 도총부당상대청 5칸 서영 19칸 炮手內入番營 4

칸반 景秋門수문장청 2칸 도총부 남변월랑 8칸

내군보 1칸 마영 2칸

동영 10칸 서영 8칸 남영7칸

합 25칸 철훼하여 사용

lt築墻秩gt 북장(경추문~북수각)48칸(높이 9자)

도총부 서장 20칸(높이 8자)

도총부 북장 7칸(높이 6장)

요금문 안 우물(깊이 10자)

2) 의궤와 만수전 건축의 비교

건물명 기사 사료

구 선 원

1656년(효종7) 도총부자리에 만수전 춘휘전

건립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

궤』

1687년(숙종13) 만수전소실『숙종실록』 숙종13년 9월

2일

1695년(숙종21) 춘휘전을 선원전으로 하고 숙

종어진을 봉안하다『궁궐지』

1778년(정조2) 영조 어진을 봉안하고 좌우 익

각을 첨설하다

『승정원일기』 정조2년 1

월 10일

1802년(순조2) 정조 어진을 봉안하다『승정원일기』순조2년 7월

3일

1846년(헌종12) 신실 2칸을 증축하여 순조 익

종 어진을 봉안하다

『헌종실록』 헌종12년 8월

6일

1851년(철종2) 신실 1칸 증축하여 헌종 어진

봉안

『일성록』 철종2년 5월 17

1900년(광무4) 서쪽 1칸을 증축하여 태조고황

제 어진을 봉안

『경복궁창덕궁제1실증건도

감의궤』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1655)에 만수전은 36간이고 사면에 퇴가 있으며 어칸3칸

에 동익각9칸 서익각 6칸이라고 하고 춘휘전은 20칸에 사면퇴가 있고 마루가 14칸 온돌이

6칸이라고 하였다 전체가 20칸이라고 하였으므로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추정되며 이

가운데 어칸의 마루는 천장에 봉황을 그린 봉반자이고 좌우 온돌방은 모란을 그린 목단반자

로 치장하였다고 하였다 만수전이 소실되고 춘휘전이 선원전으로 용도가 바뀌면서 건물규

모는 그대로 두고 실내를 어진을 봉안한 용도에 맞게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궁궐지』에 의하면 1695년(숙종21) 숙종이 어진 즉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춘휘전(春

煇殿)에 모시도록 하고 건물 이름을 선원전으로 했다고 하였다 춘휘전은 1656년(효종7) 효

종이 대왕대비 장렬왕후를 위해 인정전 서쪽 흠경각이 있던 곳에 지은 만수전의 부속 별당

건물이다 대비전은 정전의 동쪽에 짓는 것이 관례였으나 효종은 정전 동편에 마땅한 터가

없다는 이유로 정전 서쪽에 지었다 건립 때부터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던 만수전은 1687년

(숙종13)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이후 만수전 터에는 경복전이 들어서고 별당인 춘휘전은 한

동안 비어 있다가 이 때 숙종 어진을 봉안하는 영전으로 바뀌었다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에는 대비전인 만수전의 규모와 마루 온돌방 등의 실 구

성과 칸수 실내마감 단청종류 등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며 부속 건물에 대한 정보도 상세

하다 건물 뿐 아니라 연못 화계 담장 등 주변 조경시설의 조성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17세

기 중반 대비전의 구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만수전은 lt동궐도gt에도 남아 있지

않으며 춘휘전은 후에 선원전으로 용도가 변경되는 등 효종년간에 조성된 창덕궁의 일면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마 『집상전수개도감의궤(集祥殿修改都監儀軌)』(현종 9년 1668)

1) 공사 내용 분석

현종 8년(1667) 11월 창덕궁 인정전의 서북측에 집상전을 건축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

이다 집상전은 왕대비인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거처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대조전과

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북방향에 자리 잡았다 왕대비인 인선왕후는 왕대비전에 재변이

있어서 다른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현종은 대비를 위하여 전각 하나를 짓고자 하였다

lt동궐도gt에는 집상전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장방형의 긴 건물에 중앙부분 지붕이 좌우

측면보다 한단 높게 되어 있고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으로 대조전과 거의 같은 형식

이다 건물 왼편에는 남북방향으로 길게 행각이 놓여서 대조전 동편 행각과 연결되어 있다

이 자리에는 원래 인조년간에 지은 집상당이라는 20칸 규모의 별당 건물이 있었는데 집상당

을 헐고 새로 28칸 규모로 확장하여 대비전을 지은 것이다 현종 8년 11월 11일 집상전을

짓는 데 대한 전교를 내린다 단일 전각을 짓는 일이고 공사를 가급적 확대하지 않기 위하

여 경덕궁의 집희전(集禧殿)을 헐어 자재를 재사용 하는 등 공사의 규모가 크지 않으므로

공사를 주관하는 것을 수개청으로 하였다

제일 앞부분의 좌목은 결락되어 전체내용을 알 수 없다 그 뒤로 lt계사질gt lt이문질gt

lt감결지gt lt품목질gt lt수본질gt lt제색공장질gt로 구성되어 있다 lt계사질gt은 현종 8년 11

월 11일 왕이 자전을 위하여 전각을 지어야 할 것을 전교하는 것부터 이듬해 정월 17일까지

주요공정의 일정과 상량문 상량의 등 기사를 모았다 상량문은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이 지

었다 공사의 주관청은 수개청(修改廳)으로 정했다 기존의 건물을 허는 것은 11월 13일이고

입주와 상량은 12월 20일이었다 lt이문질gt은 주로 자재를 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는데

필요한 수레의 조달이나 새로 만들어야 하는 철물제작의 협조를 구하는 문서이다 lt감결

질gt은 사무에 필요한 각종 잡물조달과 현장의 관리에 대하여 각 관서에 명령하는 문서들이

다 감결 뒤에 여백이 있고 누락이 있는 듯 하고 lt殿額門號書寫官gt 과 이어서 각 공장과

화원 등에게 지급한 품삯 운송비 등을 종류별로로 적고 총 합을 적었다

lt품목질gt은 앞에 lsquo郎廳所掌rsquo이라고 하여 낭청의 소관업무임을 밝히고 있다 단청이나

건물을 다시 칠하는데 필요한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을 수개청 당상에게 올리는 내용이 주

를 이루고 있다 그 다음에 집희전에서 철거해 온 자재로 공사를 다 충당할 수 없으므로 부

족한 재목과 기와 등에 대해 조달처와 보충하는 자재 수량을 상세히 수록하였다 경덕궁의

집희전을 헐어 그 부재를 사용하고 부족한 것은 새로 목재를 들여와 치목하는데 들여오는

목재의 명칭은 원목의 형태이며 그 수량으로 보아 집희전 보다 규모와 형태면에서 확장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lt수본질gt은 앞에 lsquo監造官二員所掌rsquo이라고 명시하여 감조관의 소관업무임을 밝혔다 내

용은 철물을 위시하여 물건을 운반하는 썰매 돗자리 숫돌 등 자질구레한 물품의 조달이 주

를 이루고 역시 집희전에서 뜯어온 것으로 부족한 철물이나 기타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상세

히 나열하였다 품목질과 수본질에는 같은 해 공사가 있었던 영녕전 공사현장에서 쓰고 남

은 물건들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은 lt제색공장질gt로 공사에 참여한 분야의 장인을 나열하였다 화원과 각도의 화승

들이 먼저 나오고 목수 석수 冶匠 조각장 등 다양한 장인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단청을

위하여 화원 24명 화승이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원양도 등에서 50명이나 동원되었다

건물 비고 공사내용

집상전 좌우익실(온돌)포함 28칸

행각 11칸

鳳班子

신조

전면 처마 물통(溙桶) 설치

대조전 양상도회 수리 현판 골회 개칠 현판개도금

集祥殿 延秋門 延春門 景福門

日門 章華門 太極紋 正順門 長春

門 建昌門 通濟門 翠徽門 麗春門

萬春門 翠華門 浥翠門 玄武門

현판제작

2) 의궤와 집상전 건축의 비교

현종년간에 지은 집상전의 모습은 lt동궐도gt에서만 볼 수 있다 lt동궐도gt에 그림만 전

하고 있는 집상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의궤이다 집상저에 보이는 특징 가운데 지붕의

무량각 즉 용마루가 없는 점에 대해서는 이 곳이 왕이 주무시는 곳이므로 지붕에 왕을 상징

하는 용마루를 두지 않으려고 무량각으로 했다는 속설이 전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지어낸

이야기이다 창덕궁에는 대조전 외에도 집상전도 무량각 건물인데 집상전은 왕대비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무량각은 조선중기 경 중국의 영향으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의 격

식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남은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 창덕궁 대조전 창경궁 통명전이 무량각 건물이다 무량각으로 하기 위해

서는 지붕에 종도리를 두 개 설치하고 용마루에는 궁와弓瓦라는 둥글게 돌아간 기와를 따로

제작해서 설치하는 등 번거로운 공사과정이 따랐다

집상전을 짓는 부재를 충당하기 위해 철훼한 경덕궁 집희전에 대한 내용이 소략하여 그

구조나 규모에 대하여 알 수 없는 점이 아쉽다 또한 집상전의 구성에 대하여도 좌우 익실

이 있고 반자는 봉반자이며 행각이 있다는 점 외에는 앞선 창덕궁과 창경궁 관련 다른 의

궤와 달리 전각의 건축적 형태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새로 만드는 집상전 외에 주변 문들의 현판을 새로 제작하는데 『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 이후 내전 영역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으며 『만수전수리도감의궤』와

함께 대비전 조성에 대한 의궤로서 가치가 있다 lt동궐도gt에는 대조전 동북쪽에 대조전과

유사한 지붕형태를 갖춘 건물이 그려져 있고 집상전(集祥殿)이라는 편액이 묘사되어 있다

집상전은 집상당을 16년 수리하면서 당호를 고친 건물이다

바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순조 3년 1803)

건물명 기사 사료

인정전 1405년(태종5) 창덕궁 창건시 3칸으로 건립『태종실록』 태종5년 10월

19일

1) 공사 내용 분석

순조 3년(1803)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인정전을 순조 5년(1804) 4월에 재건한 기록이다

인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때 중건되었으며 인조대에 변란으로 창덕궁의

내전일곽이 대부분 소실된데 반하여 순조대까지 잘 남아 있었다 순조 3년 12월 13일 선정

전의 서쪽 행각에서 화재가 일어나 인정전이 불에 타버렸다 이 사건으로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물러난다는 하교를 내린다 바로 중건에 들어가 12월 27일 기초공사를 시작하였

으나 어수선한 정치상황과 천재지변으로 다음해인 1804년 3월 24일 공사에 소용되는 자재의

공급으로 인하여 민폐가 심하다는 김조순(金祖淳)의 상소로 잠시 중지했다가 4월 20일에 재

개한다

공사는 그해 12월에 마무리되었고 1804년 12월 27일 전의감(典醫監176))에 의궤청을 설

치하고 순조 5년(1805) 4월에 의궤를 편찬하였다 이때 중건된 인정전은 그 후 50년이 지난

철종 8년(1857)에 다시 보수하였다 1803년(순조 3) 12월 선정전 행각에서 불이 일어나면

서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져서 건물이 전소되었다177) 복구공사는 이듬해에 바로 착수되어

화재 후 만 1년만인 1804년(순조 4) 12월에 준공을 보았다178)

의궤 목록은 좌목(座目)middot시일(時日)middot도설(圖說)middot승전(承傳 부록으로 장주(章奏) 상량문

(上樑文) 의주(儀註) 반교문(頒敎文)이 있음)middot이문(移文)middot내관(來關) 품목(稟目 부록으로 식

례(式例)가 있음)middot감결(甘結)middot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middot인정전영건도감별

공작의궤(仁政殿營建都監別工作儀軌) 순이다

lt도설gt에는 인정전의 정면도와 부속물인 당가(唐家)middot오봉병(五峯屛)middot곡병(曲屛)middot당가천

장(唐家天掌)middot염우(廉隅)middot적첩(赤貼)middot허주(虛柱)middot유음(流音)middot초엽(草葉)middot연환청판(連環廳板)middot장

단청권(壯緞廳權)과 녹로(轆轤) 도설이 있다 인정전의 척량(殿宇尺量)을 소요된 재목(材木)

과 함께 상하층(上下層) 각 층별 공포(工踏) 상하층조장(上下層條粧) 당가규모(唐家尺

量) 좌탑척량(座榻尺量) 곡병척량(曲屛尺量)으로 구분하였는데 소요 부재의 치목된 명칭과

크기별 수량 길이 단면크기 목재의 원산지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도설편에 인정전 건물전체모습 오봉병 어좌(당가)의 세부 명칭과 형태 공사 시 큰 자

재를 옮기는데 썼던 운반기구인 녹노의 그림이 실렸다 큰 목재는 전라도 강원도 등 전국에

서 채취해 운반했으며 단청 안료는 경상도 장기현에서 구해오고 목수들도 서울은 물론 강원

도에서도 솜씨 좋은 사람들을 불러내서 지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2) 의궤와 인정전 건축의 비교

176) 典醫監은 의료행정과 의학교육을 관장하던 관청

177) 『순조실록』 권5 순조3년 12월 13일

178) 『순조실록』 권6 순조 4년 12월 17일

1418년(세종원) 정면 5칸으로 확장『세종실록』 태종원년 9월

10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

을 복구

1777년(정조1) 마당에 품계석 설치『정조실록』 정조1년 9월 6

1804년(순조14) 전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구됨

『순조실록』 순조4년 12월

17일

『인정전영건도감의궤』

1857년(철종8) 건물에 손상이 많아 해체하여

수리 석재도 대부분 교체 『인정전중수의궤』

1907년 순종 이어에 따라 내부 수리 『대한계년사』 수리 담당은

일본인 기사

1916년 지붕 용마루에 오얏꽃 장식 장서각 소장도면에 연대 명기

1996년 인정전 마당에 박석설치 및 행각 원

형복구

『인정전영건도감의궤』의 공사내용은 인정전 20칸과 내부 시설(당가 오봉병 등)을 다

루고 있다 『인정전영건도감의궤』에 의하면 건물 복구는 하부 월대는 기존 시설을 그대로

쓰고 목조부분만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1842년(헌종 8)에 와서 다시 한 차례 수리를

했다179)

조성내용 규모(척량) 형식

인정전 20칸 어칸 20자 변칸 각 15자 상하층 외7포 내 9포

당가 동서 145자 남북 1232자 하층 4각 상층 8각 내외 각 17포

오봉병 길이 1605자 폭 141자 두께 012자

좌탑동서 17자 남북 135자 높이 48자 난간

높이 065자 층교 난간 높이 09자

곡병

판평상 길이 72자 폭 6자 높이 05자

主壁길이 7자 폭 41자

좌우 협 각 길이 6자 폭 31자

사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순조 34년 1834)

1) 공사 내용 분석

창덕궁은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후 인조 25년(1647)에 중건하였는데 순조 33

년(1833) 10월 17일 밤 4경(四更)에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이 불에 탔고 징광루middot옥화당middot양

179) 『헌종실록』 권9 헌종 8년 윤5월 6일

주요전각 부속건물 공사내용

대조전(45칸)

水剌廚(1칸) 신조

養心閤 宣平門(25칸) 신조

隆慶軒 集祥門행각(26칸) 신조

興福軒 天香閣(20칸) 신조

내소주방 慶極門행각(255칸) 신조

凞政堂(15칸)克綏齋 복도각서행각(17칸) 신조

外燒廚房 및 서행각(35칸) 신조

澄光樓(20칸)

玉華堂(15칸) 신조

靜黙堂(10칸) 신조

행각(16칸)과 문(17칸) 신조

嚁輝門 좌우행각(5칸) 신조

建昌門(1칸) 小春門(1칸) 적묵당서협문(1칸) 협문(1칸) 내외소

주방문중문(1칸) 章華門(1칸) 통명문(1칸) 天廚門(1칸) 재덕당동

협문(2칸)

신조

옥화당이모끼중문(2칸) 嚁輝門이모끼중문(1칸) 會瑞門이모끼문(1

칸) 양심합동남이모끼문(1칸) 장순문이모끼문(1칸) 선례문이모끼

문(1칸)

신조

심합까지 연달아 탔다180) 대조전과 희정당은 보통 전각과는 다르니 계속되는 흉년에도 불

구하고 즉시 개건해야 한다는 왕의 하교에 따라 10월 26일 영건도감이 설치되었다 창덕궁

의 공사와 함께 3년여를 미루어 오던 창경궁의 환경전 일곽의 화재 복구와 함께 이루어졌으

나 영건도감은 창경궁 주자소에 각각 따로 설치되었다 의궤청은 호조 별례방에 의궤도감을

설치하여 1834년 10월에 『창경궁영건도감의궤』와 함께 의궤를 완성하였다

목록은 있으며 좌목(座目)middot각항시일(各項時日)middot도형(圖形)middot승전(承傳 上樑文儀註)middot물력

구획(物力區劃)middot이문(移文)middot내관(來關)middot품목(稟目 附式例)middot감결(甘結)middot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

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 순으로 『창경궁영건도감의궤』(1834)와 동일하다 도형에는 대조전

(大造殿) 징광루(澄光樓) 양심합(養心閤) 희정당(凞政堂)의 정면 그림이 있다

lt승전gt의 끝 부분에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의 상량문을 실었다 lt물력구획gt은 ldquo營建

物力區劃數rdquo라는 제목으로 각 지방과 아문별로 분담된 재정과 총액을 적었다 lt품목gt에는

lsquo各樣匠人一日工錢式rsquo lsquo諸色工匠等助役式rsquo 별간역이하 하급관리의 식례 목물가를 비롯한 각

종 물력을 자세히 적고 있다 lt실입gt은 『서궐영건도감의궤』 『창경궁영건도감의궤』와

같은 방식으로 각 건물별로 소용된 재료의 내역을 석재 재목 철물의 순서로 적었다 이를

통하여 공사내용을 소상히 알 수 있다

180) 『순조실록』 권33 순조 33년(1833 계사) 10월 17일

주요

전각부속건물

규모181)

(1647)

규모

(1834)

동궐

도형

석공

사목공사 비고

대조전

45칸 45칸 36칸

7량 어칸풍판 二翼工

세살청판분합 세만살단

분합

인조 25년대조전 45

칸-

어칸마루 3칸 4면

퇴마루 20칸 온돌

12칸

水剌間

(水剌廚)1칸 없음

맞배 3량

만살청판분합 8짝 만살

광창 8짝

lt동궐도gt와 거의 일

興福軒 6칸

20칸

175칸 5량 익공

淸香閣

(天香閣)

隆慶軒 9칸

26칸

6칸 익공추녀 2개- 鷄子多

里+하엽 25개

集祥門행각 22칸 lt동궐도gt와 lt동궐

도gt형이 다름

內燒廚房 255칸 196칸 5량 익공 만살청판분합

慶極門행각

澄光樓

마 루 4

온 돌 2

퇴12520칸 20칸

5량 중층 翼工

세살청판분합 만살청판

분합

고주 10개 대량 4개

종보 4개 추녀 8개

(중층)

複道閣 3칸 3량 方椽

玉華堂 105 15칸 15칸

맞배+팔작

익공

고주 8개 평주 18개

추녀 2개 대량 평

량 종량 퇴량

靜黙堂 105 10칸 10칸 5량 민도리 고주4개 추녀 2개

주요전각 부속건물 공사내용

대조전 홍판장 延春門 延秋門 판장문(1칸) 판장(7칸) 판장(1칸)

만춘헌 판장문(1칸) 융경헌 앞 판장(2칸) 문(반칸) 水剌間廚판장

(1칸) 양심합 동남 판장(1칸) 장순문판장(4칸) 재덕당판장(2칸)

신조

齊政閣과 서행각(34칸) 수보

구 소주방(10칸반) 수보

건물의 구성에 대한 설명은 칸수만 적고 있어서 17세기 의궤에 비하여 부족하지만 그

대신 각 건물에 사용된 부재는 수량과 함께 상세히 적었다

순조 33년 화재이전의 모습인 lt동궐도gt와 복구공사 후 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으며 이때

공사된 내용은 고종대 까지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lt동궐도형gt을 통하여 19세기의

창덕궁의 모습을 추론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81) 창덕궁수리도감의궤 (인조 25년 1647)

주요

전각부속건물

규모181)

(1647)

규모

(1834)

동궐

도형

석공

사목공사 비고

養心閤

25칸 235칸

5량 익공 모임지붕

세살청판분합 만살분합

고주7개 대량 7개

종량 15개 팔각주 9

개 추녀 1개

宣平門

外 燒 廚 房

및 서행각35칸 5량 일부 익공 추녀 1개

凞政堂

15 15칸 15칸

구조1고주

공포二翼工

입면세살청판분합세만

살청판분합

정면 5times측면 3

고주 4개 평주 16개

종보 4개 대주두 소

주두

複道閣

서행각17칸

克綏齋

5량 익공

세살청판분합

만살단분합 만살청판분

協陽門

嚁輝門 좌

우행각 5칸

同春門 연

(1) 1833년 창덕궁 화재의 범위

1833년 10월 17일 밤 四更에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이 불에 탔고 징광루middot옥화당middot양심

합까지 연달아 탔다 대신)과 각신들을 소견하였는데 영의정 이상황이 말하기를 ldquo궁중의

화재가 전후하여 서로 잇달아 일어난 것은 참으로 큰 재변이며 이번의 실화(失火)는 결코

심상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높게 쌓은 넓은 집이 결코 잠깐 사이에 불길이 번질 리가 없는

것이고 이미 숙직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또 제 시각에 순경(巡警)을 돌았다면 진작 발견하

지 못하고 불길이 이렇게까지 번지게 된 것은 과오의 여부를 논할 것 없이 반드시 이루어

진 까닭이 있을 것이니 끝까지 엄하게 추구(追究)하는 정사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dquo하

였다182) 이로 보면 당시 화재로 인해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 옥화당 양심합까지 불탔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을 중건한 공사가 바로 『창덕궁영건도감의궤』에 실린 것이다

당시 화재의 원인은 ldquo17일 밤 잠자던 중에 단양문(端陽門) 밖 위소(衛所)의 군사들이 떠

드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차비문 안에서 실화(失火)하였음을 알고는 불을 끄려고 급히

들어갔더니 장순문(莊順門)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몸을 밀치고 들어갔으

며 한편으로는 제정각(齊政閣)에서 수직하는 무감(武監)을 소리쳐 불렀으나 그사이에 불길

이 크게 일어나 이미 양심합(養心閤)에 연달아 번졌는데 실화의 원인은 전혀 알지 못합니

182) 『순조실록』 순조 33년 10월 17일

건물명 기사 사료

대조전

1461년(세조13) 내정전을 양의전이라 명명하고

대조전에서는 신하를 만났다고 함 따라서 이 시

기 대조전은 내정전과 다른 전각이었다고 추정

『세조실록』 세조7년 12월

19일 및 세조13년 5월 18

연산군일기에 태종 세종이 대조전에 거처하고

성종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보임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8월 22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해 복구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시 소실된『인조실록』 인조원년 3월

15일

1647년(인조25) 인경궁 경수전을 뜯어 다시 지

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34) 전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다rdquo183)라 한 것처럼 밝혀지지 않았다

1833년 화재로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 일곽의 건물들이 전소된다 이때 불탄 건물은

대조전과 주변행각 징광루와 주변건물 희정당과 주변행각이다 희정당과 대조전의 서쪽으

로는 행각들이 붙어 있어 불이 옮겨 붙기 쉬웠다 이 불로 소진된 건물을 중수한 내용이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이다 여기에 표기된 건물의 규모와 소요 부재로 추정한 건물의 양

식 등을 1647년 인조 때의 창덕궁 복구 시 조성된 내용 및 lt동궐도gt(1827~1833년) lt동궐

도gt형(1907년경)등과 비교하여 보았다

1833년의 화재 후 복구에 있어서 건물의 변경이 있었는가 1647년 『창덕궁수리도감의

궤』와 1834년 의궤의 건물 규모나 배치는 거의 유사하다 건물의 명칭에 있어서 인조대의

명칭과 lt동궐도gt는 차이를 보이지만 1834년 의궤와 lt동궐도gt의 건물명칭 및 문의 명칭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lt동궐도gt의 제작 시기는 1834년 4월 이전이 확실한 것으로 보이며(통

명전의 복구와 관련하여)lt동궐도gt가 만들어진 직후 화재가 났고 복구하면서 이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lt동궐도gt와 lt동궐도형gt에서 대조전 일곽의 차이는 무엇이며 언제 생겼는가 집상문

서쪽의 행각이 옥화당까지 길게 이어지던 것이 중간에 끊어지고 서쪽으로 더 증축되었다

집상전과 집상전동행각이 없어졌다 집상전은 화재 시 소실되었다는 기사가 전혀 없다 불이

서쪽으로 번진 것을 볼 때 피해가 없었을 수도 있다 집상전은 정조이후 기록이 보이지 않

는다 문의 명칭과 위치는 거의 일치하고 판장도 위치는 일치하나 수량이 차이를 보인다 그

러나 소실된 것을 복원하는 상황이므로 수량을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2) 대조전과 의궤

183) 『순조실록』 순조 33년 10월 18일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 다시 지음

대조전은 선정전의 동쪽 희정당의 북쪽에 있으며 건물 뒤로는 화계로 장식된 언덕이

있고 언덕 너머는 후원으로 연결된다 왕이 머무는 침소가 동온돌 왕비가 머무는 고이 서온

돌이다 궁궐의 행사가 있을 때 왕은 대조전에서 나와 선정전에서 의관을 갖추어 입고 여를

타고 행사장으로 이동하며 평상시에는 대조전에서 편복을 입고 희정당으로 나와 경연에 임

하였다 왕비는 정월초하루나 동짓날 당상관 이상의 관료 부인들을 대조전 앞마당에 부르고

하례를 받았다 이런 행사를 위해서 대조전 건물 앞에는 월대가 마련되어 있다 대조전은 내

전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신하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신하들

을 이곳까지 부르기도 하였다 1809년(순조 9)에는 마침 원자가 대조전에서 태어나자 아직

백일도 되기 전에 대신들이 대조전에 나아가 원자의 안녕을 기원하였다184)

1917년 소실되기 전의 대조전 모습은 사진자료도 남아있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의궤나 lt동궐도gt 등 시각자료를 통해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1917년에 와서 화재를

만나 1920년에 재건되었다 이때는 경복궁 교태전 건물을 헐어서 그 재목을 가지고 지었으

며 위치를 약간 동북쪽으로 옮기고 교태전의 후방 부속건물까지 함께 이축해서 이전과는 다

른 모습으로 지었다

lt동궐도gt에 그려진 대조전은 1833년의 화재로 사라지고 이듬해 1834년에 다시 지어졌

다 다시 지어진 건물형태는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 평면형태가 장서각에 도면으로

남아있다(『근대건축도면집』 2009에 수록) 도면에 의하면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5칸이며

가운데 3칸의 정청을 중심으로 좌우 9칸씩의 온돌방이 있고 사면에 퇴가 돌아가는 모습이어

서 기본적으로 1647년 재건된 건물규모와 일치한다 1834년의 창덕궁 재건과정을 기록한

『창덕궁영건도감의궤』(1834)에는 대조전의 전면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실려 있는데 지붕

이 중앙이 높고 좌우가 낮은 형태나 좌우 익실에 돌기둥이 그려져 있어서 재건된 대조전이

화재 이전과 동일한 모습임을 보여준다

한편 대조전의 실내에 대해서는 1802년(순조 2) 당시 선공감에 근무하던 이이순(李頤

淳)이 건물 수리에 앞서서 대조전 실내상황을 소상히 기록한 lsquo대조전수리시기사rsquo가 전하고

있어서 참고가 된다185)

lsquo대조전수리시기사rsquo에 의하면 당시 대조전의 실내에는 10점이 넘는 병풍이 각방의 벽을

장식하고 있었으며 그 중 정청 북쪽 벽에는 금종이로 테두리를 장식하고 일곱 학이 춤추는

그림이 있는 병풍이 걸려있고 그 앞에는 용상이 있어 그 위에 붓과 벼루 양로 등이 놓였으

며 동쪽 방에는 벽에 많은 병풍과 글씨가 쓰인 액자가 있고 서쪽 방은 작은 방이 장지로 나

뉘어져 있는데 북쪽은 큰 장이 놓여있고 바닥은 벽은 능화지로 덮이고 바닥은 기름 장판이

깔린 위에 채화석이 깔려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현재 궁중유물 중에는 십장

생 등을 그린 화려한 채색의 12폭 병풍이 있어서 이들 역시 실내에 설치된 것이 아닌가 하

는 추정을 하기도 하였다186)

184) 『순조실록』 권12 순조 9년 10월 29일

185) 『후계집』 권5 잡저 대조전 수리시 기사

건물명 기사 사료

희정당

1496년(연산군 2) 성종이 사용하던 수문당이

불이나자 수리하고 나서 건물명을 희정당으로

고침

『연산군일기』 연산군 2년

8월 19일

1608년(광해군즉위) 소실된 건물을 복구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시 소실『인조실록』 인조 원년 3

월 15일

1647년(인조 25) 인경궁 화정당을 뜯어 다시

지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 34) 전년 화재로 불에 탄 것을 다

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 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뜯어 다시 지음

20세기초에 작성된 궁궐지에는 대조전 규모는 36칸으로 적었다 lt동궐도형gt에도 건물규

모는 36칸이다 이전의 45칸과의 차이는 측면을 외부에 나타나는 툇간을 기준으로 세는지

아니면 내부 몸체의 주칸으로 세는지에 따른 차이로 판단된다 즉 측면 툇간을 기준으로 하

면 측면이 5칸이 되고 내부 몸체를 기준으로 하면 4칸이 되는데 그에 따라 측면이 5칸으로

또는 4칸으로 잡음에 따라 전체 규모를 다르게 기술한 결과이다

(3) 징광루(澄光樓)와 의궤

대조전 동북쪽에는 청기와를 덮은 2층 누각이 보이는데 징광루이다 가장 눈에 띠는 특

징은 지붕이 청기와로 덮여있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 안에 청기와를 덮은 건물이

선정전 외에도 징광루 등이 있었고 경복궁에도 있었다 징광루 역시 1647년(인조25) 인경궁

의 자재를 가지고 지은 것인데 청기와 역시 이 때 마련되었다 1917년 화재 때 징광루도 소

실되었으므로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의 징광루는 남아 있지 않다 1920년에 징광루가 있던

곳에는 경복궁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서 단층의 경훈각(景薰閣)으로 했다

(4) 희정당과 의궤

희정당은 1917년 소실된 뒤 다시 지어졌기 때문에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의 희정당은

남아 있지 않다 이후 1917년 대조전과 함께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 강녕전을 철거

해서 그 재목으로 다시 짓고 주변 행각도 크게 개조했다 특히 전면에 자동차로 입구까지

들어오도록 현관을 달아내어 본래의 건물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186) 이 12폭 병풍은 병풍 가운데 8각형의 공백이 있어서 이것이 일종의 불발기 창과 같이 실내에 설치되어 있

었덧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지만 병풍으로 제작된 점이나 크기 채색의 지나치게 화려한 점등을 고려할 때 특별

한 행사가 있을 때에 한정해서 설치하였고 평상시에는 설치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궁궐의 장

식그림』 국립고궁박물관 2007)

희정당은 침전인 대조전 앞에 남향해서 자리 잡았다 오른쪽으로는 행각을 통해서 선정

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당초의 건물 용도가 왕이 경전을 학습하는 학문소였으므로 아침에

일어나 침전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학문에 나아간다는 것을 상징하는 위치에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연산군 때 건물 이름을 희정당으로 고치면서 단순한 학문소 기능을 넘어서 정치의

장소로 바뀌었다고 짐작된다 편전이 격식을 차리고 정사를 논하는 곳이라고 한다면 학문소

는 편안한 자세로 격식에 매이지 않고 국정을 다룰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으다

유사한 사례는 경희궁의 흥정당에서 볼 수 있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지면서 처음부터 본래 편전에 해당하는 자정전이 혼전 등의 의

례공간으로 쓰고 흥정당이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희정당은 건물 형태가 상참과 같은

편전의 공식적인 의례를 거행하는데 부적한 것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상참 등은 선정전에

서 거행하고 일상적인 어전회의를 이곳에서 치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선정전이 정조의

혼전으로 활용되면서 희정당이 주로 편전의 용도를 대신하게 되었다 순종황제가 창덕궁으

로 이어한 이후에는 거의 모든 사신 접대는 이곳에서 치러졌다 이때는 건물 형태 자체가

완전히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lt동궐도gt에는 1917년 소실되기 이전의 희정당의 모습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단층 팔작지붕인데 특이한 부분은 건물 아래가 높은 돌기둥으로 받쳐

지고 바닥에서 건물로 오르기 위해서는 나무로 만든 네 개의 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안되도

록 한 모습이다 보통 궁궐의 건물은 기단을 두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일반적인데 희정

당은 그와 달리 지면에 돌로 맞은 바닥을 두고 그 위에 돌기둥을 여럿 세워서 바닥을 높이

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 것이다 전면의 돌기둥 안쪽은 비어 있는데 서쪽 끝에는 붉은 색으

로 필한 작은 네모난 부분이 일부 보인다 이 작은 네모난 부분은 온돌 바닥에 불을 넣기

위한 아궁이로 판단된다 또 동쪽 측면에는 반 칸 정도 벽을 달아내어 툇간을 만들고 이 툇

간으로 오르기 위한 별도의 나무계단도 그려 넣었다

19세기 중반 경희궁의 모습을 그린 서궐도안에 묘사된 흥정당 역시 희정당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인다 즉 흥정당 역시 바닥에 높은 돌기둥이 연속해 있고 높은 계단을 통해 실내

바닥에 오르도록 한 모습이다 창경궁의 숭문당은 그림이 아니고 건물 자체로 유사한 상황

을 보여준다 숭문당 역시 왕의 경연 장소로 지어진 창경궁의 학문소 건물이다 이 건물의

후면은 역시 돌기둥이 연속해 있고 그 위에 목조건물이 올라서 있다 또 돌기둥 안쪽은 툇

간 폭 만큼 비어있고 그 안쪽에 온돌에 불을 넣을 수 있는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다 희정당

의 그림과 동일한 구조인 셈이다 결국 창경궁 숭문당 경희궁 흥정당 그리고 창덕궁 희정

당 세 건물은 모두 동일한 형식의 건축이며 세 건물은 왕의 학문소의 기능과 연관을 가진

건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희정당은 19세기부터는 선정전을 대신해서 왕이 대신들과 국사를 논하는 편전으로 쓰였

다 이 때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희정당의 어느 부분에 왕이 임하고 대신들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궁금한 사항이다 과거 선정전이 편전일 때는 왕의 위치는 건물 북쪽 중앙이 놓

이고 그 앞 좌우로 나누어 대신들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희정당에서는 남쪽은

5칸의 마루가 있고 안쪽은 중앙 3칸에 넓은 온돌방이 있고 좌우에 작은 방이 2칸씩 있는 모

습이다 바닥이 마루와 온돌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왕이나 신하들이 모두 방석을 놓고 앉아

서 어전회의를 했다고 짐작은 되지만 과연 어느 위치에 누가 어떻게 자리를 잡았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희정당 건물 밖 동남쪽에는 네모난 연못이 있다 본래는 왕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나

서 머리를 식힐 수 있도록 꾸민 못으로 짐작되는데 후에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이 연못이 어

떤 기능을 가지게 되었을지는 짐작이 잘 가지 않는다

1917년 11월 대조전과 희정당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때는 순종황제가 창덕궁에 거처

하고 있을 때였으며 대조전은 순종이 거처하던 침전이고 희정당은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견

하는 집무실이었다 서둘러 건물 복구가 시작되었는데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러 그 재목으로

대조전을 짓고 강녕전을 헐어 희정당을 짓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공사는 3년이 걸려 1920년

에 완성되었다 새로 지어진 희정당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어졌다 정면 11칸 측

면 5칸으로 규모를 크게 키웠으며 건물 좌우로 행각이 뻗어있고 다시 남쪽으로 출입문을 갖

춘 남행각이 들어섰다 또한 출입문에는 지붕이 돌출되고 기둥 2개가 돌출한 지붕을 받치는

현관부분을 달아내었다

이렇게 해서 자동차로 현관 앞까지 진입하여 그대로 행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

다 이 과정에서 연못을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건물 동쪽 경사지에는 난방을 위해서 보일러

시설을 설치했다 또한 정전 및 행각의 창문도 서양식의 창문으로 교체되었다 대청 좌우 상

부벽면에는 대형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희정당에는 청나라에 유학하여 그림공부를 한 당대

의 이름난 화가 김규진이 「해금강총석정절경」과 「내금강만물초승경」을 그렸다 또 실내

에는 서양에서 수입해 온 탁자와 의자 등을 비치하였다 이 그림이나 가구들은 지금도 실내

에 잘 남아있다

아 『인정전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철종 8년 1857)

1) 공사 내용 분석

1857년(哲宗 8)에 昌德宮 正殿인 仁政殿을 重修한 기록이다 目錄은 座目middot時日middot圖說middot承傳

(附 奏啓 上樑文 儀註)middot移文middot來關middot甘結middot財用(附 式例)middot實入middot賞典middot工匠middot儀軌 순이다 座目에는

監董堂上 金炳冀 郎廳 趙冕鎬 別看役 姜彛五 등 5인 監董牌將 趙命燁 등 4인 看役牌將 金

再興 등 3인 畵師牌將 爐冶所牌將 등의 성명이 적혀 있다 圖說에 仁政殿 唐家 五峯屛圖

등과 轆轤圖가 있고 소요 材木들의 수효 및 尺量이 나와 있다

1854년 5월 25일 영의정 김좌근이 인정전의 중수를 발의하여 9월 23일 치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 25일 정역했다가 1857년 5월 26일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윤5월 6일에

야 중수를 마쳤다 중수도감이나 청을 별도로 두지 않고 호조에서 직접 영건을 맡았으며 의

궤 또한 호조에서 바로 1857년 윤5월 20일에 착수 12월 25일에 완성하였다

목록은 좌목(座目)middot시일(時日)middot도설(圖說)middot승전(承傳 附 奏啓 上樑文 儀註)middot이문(移文)내관(middot

來關)middot감결(甘結)middot재용(財用 附 式例)middot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 순이다

도설에는 인정전의 정면도와 부속물인 당가(唐家)middot오봉병(五峯屛)middot곡병(曲屛)middot당가천장(唐家

天掌)middot염우(廉隅)middot적첩(赤貼)middot허주(虛柱)middot유음(流音)middot초엽(草葉)middot연환청판(連環廳板)middot장단청권

(壯緞廳權)과 녹로(轆轤)의 도설이 있다 인정전의 척량(殿宇尺量)을 상하층(上下層) 각

층별 공포(工踏) 상하층조장(上下層條粧) 당가규모(唐家尺量) 좌탑척량(座榻尺量) 곡병척

량(曲屛尺量)으로 구분하였는데 소요 부재의 명칭과 크기별 수량 길이 단면크기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인정전 관련 두 의궤의 목록의 차이는 『인정전중수의궤』에는 lt품목gt항목이 빠져 있

고 lt재용gt 항목이 추가되어 있다 lt재용gt은 예산과 수급처를 적은 항목으로 앞선 『인정

전영건도감의궤』에서는 lt실입gt부분에 기록된 내용이다

2) 의궤와 인정전 건축의 비교

인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남향해서 건물을 세웠다 월대는 표면을 다듬은 화강석으로

마무리하고 했다 상부에 돌난간을 돌리고 난간 기둥에 짐승조각을 새긴 경복궁 근정전 기

단에 비하면 높이도 낮고 장식도 적지만 궁궐 정전의 간결하면서 위엄 있는 단의 모습을 잘

갖추었다 남쪽 중앙 하월대와 상월대 계단에는 왕의 가마가 지나가는 봉황을 조각한 답도

(踏道)를 두었다 하월대 전면 모서리에는 화재시를 대비해 물을 담아두는 청동 드므가 놓여

있다 본래 상월대에는 의식을 거행할 때 향을 피우는 향로가 놓여 져야 하지만 지금은 남

아있지 않다

상월대 북쪽으로 낮은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정전이 올라서 있다 정전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 정전과 마찬가지로 정면5칸 측면 4칸 규모이다 다만 기둥 간격에서는 근정전 보

다 조금 작아서 전체적으로는 근정전보다 면적이 약간 작다 기둥 위에는 전형적인 19세기

초의 내4출목 외3출목 다포식 공포를 짰다 지붕은 근정전과 같이 중층으로 꾸몄는데 창경

궁이나 경희궁 정전이 단층인 것과 구별된다 실내는 가운데 후면에 어좌를 꾸몄다 어좌는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당가(唐家)로 표기했는데 3면에 계단을 두고 당가 위에는 일월오악을

그린 병풍을 놓고 그 앞에 낮은 병픙인 곡병(曲屛)을 놓고 왕이 앉는 어좌를 두었다 내부는

상하층이 열린 구조이고 천장은 상층 지붕에만 설치되었기 때문에 높은 실내를 이루었다

천장에는 구름 사이로 두 마리 봉황이 나는 모습을 채색으로 그려 넣었다 출입문은 전면

어칸과 후면 어칸에만 있고 나머지는 하루에 머름을 댄 빗살로 된 분합문이 달렸다 창문

역시 황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에 회를 높

게 바른 양성을 하여 지붕의 격식을 높였다 조선후기 궁궐 정전의 본보기이며 건축적으로

도 가장 격식을 갖춘 중층 다포식의 전형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부분적으로 서양식 근대

문물이 가미된 건축물이다

『인정전중수의궤』는 1857년(철종8) 인정전을 부분적으로 수리한 내용이다 의궤의 인

정전 척량을 비교하여 보면 철종 8년의 수리공사는 1805년에 지은 인정전의 규모와 구성을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부재는 기존의 부재를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건된 지 약 50년 후에 수리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로서 영건시의 의궤(『인정전영건

도감의궤』)와 중수의궤 그리고 이때 보수한 건물이 현존하는 귀중한 사례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순조 5년 『인정전영건도감의궤』의 내용과 서술순서와 내용이 거의 일치하지만 일

부 부재의 크기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인정전 고주 중에서 귀고주 4개의 굵기를

보면 순조 3년 중건시보다 2치 더 큰 것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도리 창방 대보 등 기타

부재는 1805년에 지은 인정전과 같은 규모로 되어 있다

이때의 수리는 일부부재를 교체하고 단청을 손보는 등 건물의 형식은 변화가 없었던 것

으로 보인다 이후 인정전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1908년에 내부바닥과 창호를 일부

서양식으로 고치는 변화가 있었으나 상부공포 및 가구 건물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

었다

5 창덕궁 인정전 단청의 특성

가 인정전의 단청

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왕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lt사진1gt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지었지만 임진왜

란 때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에 복구되었다 이후 순조 3년(1803)

다시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중건하였는데 철종 7년(1856)에 크게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로 화강석 박석을 깐 2중 월

대 위에 세워져 있다

건물 내부는 아래위로 탁 트였는데 후면 가운데 고주 사이 뒤쪽으로 어좌를 마련하고 곡

병과 日月五嶽屛을 갖춘 용상을 설치하였다 천정은 가운데를 한 단 높여 감실 천정을 마련

하고 봉황 두 마리를 그려 넣었다 이 건물은 경복궁과 덕수궁 등 3대 궁궐의 정전과 양식

을 같이 하고 있으나 명정전과는 다르고 근정전과는 시기 수법상 앞서고 있어 가장 표본이

되는 것이다

단청은 건물 외부는 근래들어 수차례 부분적으로 새로 칠한 것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과거

의 상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외부단청이 겉보기로는 강한 색조에

생경한 느낌이 드는 반면 내부단청은 장중하지만 낡은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건물 내부의

어좌와 용상 일월오악병 등은 근래 새로 제작한 것이며 기둥의 석간주 가칠도 최근에 새로

칠한 것이다

lt사진17gt 창덕궁 인정전의 내부 모습

나 인정전 단청과 의궤

의궤란 국가나 왕실에서 주도한 건축공사의 시말을 정확히 기록하여 후세에 남길 목적으

로 편찬된 문헌을 말한다 창덕궁에 대한 의궤는 모두 9건으로 현존하는 궁궐 영건 관련 의

궤 가운데 반이 넘는다 이 가운데 창덕궁내 현존하는 건물과 관련된 영건의궤 중에서 단청

공사와 관련된 의궤는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 순조 5) 『인정전

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1857 철종 8)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

(1834) 『경복궁 창덕궁선원전일실증건도감의궤』(1900) 등 4종이 있다

의궤의 내용 중에서 단청과 관련된 것은 대체로 공사에 사용된 안료의 명칭과 사용량 정

도로 정보가 국한되어 있다 기록을 통해 당시에 사용한 안료별 명칭과 색상 품질특성 입

수경위와 원산지 등을 알 수 있지만 채색방법 작업 진행상황 등에 대해서는 상세히 파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당시 단청공사의 전모나 현존하는 건물의 단청안료를 이해하

는데 가장 확실한 길잡이가 된다 특히 인정전의 경우 단청공사를 38일 만에 완성했다거나

뇌록 주토 정분 등은 사용량과 공납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인정전과 직결된 『인정전영건도감의궤』와 『인정전중수의궤』의 단청관련

기록을 조사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다

다 연구조사 방법

우선 2008년 실시한 인정전의 내부 단청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 결과를 재정리 하였다 당

시 조사 항목은 색상별 색도 측정 현미경 촬영 안료 성분분석 등이었다 내부 단청이 주

대상이었지만 건물이 중층이라서 실내의 높이가 너무 높아 다양한 부분에 대한 조사가 불가

능하였고 그래서 접근이 가능한 부재이면서 단청이 잘 남아있는 퇴량[들보]와 익공 한 부분

을 조사한 것이다lt사진2gt

조사한 자료를 종합하여 사용된 안료의 이름과 채색 특성을 밝혀 낸 다음 그 결과를 2종

의 의궤에 등장하는 안료명과 비교 확인해보았다

lt사진2gt 인정전 들보의 단청조사

라 의궤 기록과 현존 단청안료의 비교 고찰

1) 의궤의 안료 종류와 그 특성

인정전 의궤 2종의 실입질 물목(物目)을 통해서 단청작업에 사용된 재료의 대강을 파악

할 수 있다 특히 색재료는 20여 종의 다양한 안료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lt표1gt

현대 단청공사 보다 더 다양한 종류의 안료가 쓰였던 것이다 현재 이들 안료의 정체를 모

두 명확하게 확인해 내기는 불가능하지만 기록된 명칭을 통해 그 대강을 색상별로 묶어보면

적색 황색 녹색 청색 그리고 흑백으로 파악할 수 있고 같은 색상이라도 몇 가지 종류의

안료를 혼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용된 안료의 명칭을 통해 안료의 산지와 품질 특성

색상의 채도 차이 등을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도 있었고 광물성 안료만이 아니라 식물성

염료로 생각되는 편연지와 석자황도 함께 사용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안료별로 사용된 양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어떤 안료가 어떤 목적에 활용되었

는지 안료별 계량 단위차이를 통해 재료의 상태도 짐작이 가능하다 가칠 즉 바탕칠에 사용

된 뇌록과 석간주의 양이 가장 많았고 흰색인 정분과 진분도 다량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들

안료는 斗(말)로 계량하였고 뇌록 가칠에 280斗 석간주 가칠에는 황주주토 113斗를 비롯해

편연지와 당주홍 석간주가 함께 사용되었다 특히 흰색 안료로써 정분이 300斗 다량 사용되

었는데 용도는 흰색 재료 뿐만 아니라 가칠안료와 혼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부분의 안료는 무게로 계량하였는데 분말이라는 재료에 적합한 단위가 된다 무게를 근

(斤) 량(兩) 전(錢) 분(分)까지 정확히 기록하였다 이밖에 편연지는 장(張)으로 계량해서

낮장[片]으로 계산이 가능한 안료로 파악되었고 금박은 묶음[束]으로 액체인 송유는 사발

(沙鉢) 단위로 기록했다

50여년의 시기 차이가 있는 두 종의 의궤기록을 비교해 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

로 안료의 종류와 가짓수 그리고 사용한 양까지 비슷한 점을 알 수 있다 1856년 인정전 중

수시 단청공사는 완전히 새로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50여 년 후 단청재료에서 가장 큰 변

화가 있었던 점이 황주주토로 가칠한 부분이 석간주로 대체된 것이다 당시 황주주토의 수

급이 어렵게 되자 석간주로 대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주홍과 왜주홍 당황단 등은 주홍 황단이라는 안료 이름에 접두사를 붙여서 수입처 또

는 원산지를 나타낸 예도 있다 당은 중국을 왜는 일본을 포함한 동남아산으로 보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磻)과 상(常)의 의미는 불분명하다 접두어로 석(石)을 붙인 점은

재료가 광물이라는 뜻이겠지만 가공하지 않은 원석이라는 의미도 내포된 것 같다 예를 들

어 웅황(雄黃 orpiment)은 석황으로도 불리는 데 화산지대에서 많이 산출되는 것으로 알려

져 있다 화학식은 As2S3 황화비소이다 반면 자황(雌黃 gamboge)은 식물성 천연수지로 알

려져 있다 동황(同黃)으로도 불린다 천연광물인 웅황에 석자를 붙인 것은 원석이라는 표현

일 수 있으며 자황에 석자를 붙인 이유는 불명이다

한편 양(洋) 자가 붙은 안료는 대체로 서양 수입품이라는 의미가 있다 여하튼 1857년 인

정전중수의궤에 등장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19세기 중반까지는 서양에서 제조

한 인공안료는 아직 수입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의궤문헌

색상

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 仁政殿重修儀軌(1857)비고(안료광물명)

안료명 사용량 안료명 사용량

적색계열

石磵朱 28斤 石澗朱 602斤 산화철 Iron Oxide

黃州朱土 113斗 산화철 Iron Oxide

片臙脂 1211張半 片臙脂 1467片

唐朱紅 208斤 4兩 唐朱紅 148斤 朱砂 cinnabar()

磻朱紅 264斤 鉛丹 Red Lead()

倭朱紅 4斤

황색계열

唐黃丹 230斤 3兩 3錢 唐黃丹 231斤 14兩 黃丹

常黃丹 90斤 11兩 常黃丹 2斤

石雄黃 2斤 1兩 5錢 雄黃(石黃) As2S3

石紫黃 12斤 以上 石紫黃 17斤 Gamboge()

同黃 47斤 1兩 5分 同黃 36斤 Gamboge()

녹색계열

磊碌 280斗 磊碌 200斗 磊碌石 Ceradonite

石碌 23斤 5兩 石碌 15斤 孔雀石 Malachite

荷葉 268근 8兩 5錢 荷葉 256斤 짙은 녹색

三碌 338斤 三碌 396斤 8兩 연한 녹색

청색계열

靑花 115斤

二靑 44斤 12兩 7錢 4分 二靑 43斤

三靑 66斤 3兩 三靑 43斤

흰색계열丁粉 300斗 丁粉

154斗 9升 2合

5勺정분

(Calcite CaCO3)

眞粉 276斤 4兩 眞粉 229斤 연백(Lead White) 2PbCO3middotPb(OH)2

흑색[墨] 松煙 먹()

금박 金箔 46束 4貼 7張 金箔 59束

금속 白銅 13兩

전색제 阿膠 583斤 阿膠 700斤

기 타 松油 257沙鉢

lt표27gt 인정전 儀軌에 등장하는 단청물목의 안료명과 사용량

2) 현존하는 인정전 단청에서 확인된 안료와 전색제

의궤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인정전의 단청에는 20여 종의 안료가 사용되었다 현존하는 인

정전 단청을 조사한 결과를 이용해 의궤에 등장한 안료의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lt표2gt 그

결과 적색계열의 안료에서는 석간주와 황토를 황색계열에서는 황단 웅황 등 기록에 등장한

안료 대신 새롭게 황토를 확인했으며 녹색계열에서는 뇌록과 석록을 찾을 수 있었다

청색계열은 그 존재를 밝혀내지 못했다 다른 안료에 비해 사용량도 적어 모로단청 이외

의 부분이나 기물 중요 건물부재 등의 채색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흰색의 경

우 다량의 정분과 함께 지당(地堂 TiO2) 백토를 확인했지만 진분은 찾을 수 없었다 금박

위치 색상명 근사색

색차(lab)

실체현미경박편현미경

(x200)화학성분 안료화학조성

L a b

기둥 석간주 3479 1801 1358

C 2640

Si 2216

Fe 1487

O 1288

Ca Na Mg

Al Cl K

정분 CaCO3

석간주황토Fe2O3

백토

Al2O3middotSiO2middot4H2O

문턱 뇌록 4229 -141 1087

Ca 3756

Ti 2173

O 1306

C 865

Fe Mg Al

Si Cl

정분 CaCO3

지당 TiO2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들보 백색 6415 225 1669

C 3387

Si 2116

Fe 1356

K 1131

O 1032

Ca Ti Mg

Al S Cl

정분 CaCO3

황토 Fe2O3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지당 TiO2

문틀

(우측)황색 5078 741 2749

Fe 9634

O 270

Ca K

황토 Fe2O3

정분 CaCO3

익공 하엽 4468 -863 879

Cu 7980

Cl 1603

O 225

Ca S

석록CuCO3Cu(OH)2

정분 CaCO3

lt표2gt 인정전 단청의 색상별 과학적 분석표

과 백동 또한 확인이 불가능했다 금박은 단청의 선에 특별하게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

의궤에 기록된 안료 중에서 현재 확인된 것은 석간주와 주토 뇌록 석록 정분 등 몇 가

지 종류밖에 없다 그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안료는 사실 우리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

는 안료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아직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조사한 지점이 들보의 모

로단청 한 곳이라는 것도 한계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앞으로 고대 안료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과 함께 조사 대상을 넓혀서 진행한다면 대부분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믿어진다

이들 안료는 전통 전색제인 아교(阿膠)와 섞어 채색을 하였으며 단청 후 표면에는 기름을

발라 내구성을 높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정전의 경우 송유[松精油 terpentine]를 이러

한 용도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건물의 경우 관련 의궤를 통해 확인한 결과 명유

(明油)와 법유(法油)가 활용되었다 이들 유기물질의 사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습득한 시

료를 퓨리에변환 적외선분광분석기(FT-IR)로 분석하였지만 전색제로 아교가 사용된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들보 육색 5174 1326 1006

Si 2175

Fe 1847

C 1566

Ca 1397

O 1230

Mg Al K

정분 CaCO3

석간주Fe2O3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익공 하엽 4334 -830 1322

Cu 2939

Si 2938

Fe 1241

O 979

K 823

C Mg Al

석록CuCO3Cu(OH)2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안병찬 등 『궁궐채색기술 특성규명 연구 보고서』국립문화재연구소(2008) 81쪽의 ltTable 23gt을

보완함

3) 단청 공사와 재료 수급 내용

인정전 영건시 상하층 건물의 단청 공사가 1804년 11월 6일에 시작되어 12월 13일에 끝났

음을 알 수 있다 공사기간이 38일로 상당히 짧았고 특히 늦가을에서 초겨울사이에 진행되

어 채색작업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1804년 10월 서울의 화사

(畵師)만으로 감당하기에는 인정전 단청공사의 규모가 너무 커 강원도 경기도 총융청 등에

서 화사를 구해 보낼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청공사에 동원된 인원이 총 몇 명인

지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각종 재료의 수급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황주주토는 황해감영에 상납을 지시하였고 뇌록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상감영에 상납을

명했다 단청용 붓을 만드는데 쓸 집돼지털 200근을 평안도 황해도 개성부 등에 나누어 정

했고 아교 제작에 필요한 쇠가죽 70장을 수원부 개성부 관주부에 나누어 정한 기록도 보

인다 다량의 주토와 뇌록안료는 물론 단청 채색에 필요한 다량의 붓과 아교도 중요 물목이

었는데 이들은 완제품 보다는 원료상태를 공출해 작업 현장에서 직접 제조 가공하여 활

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창덕궁영건도감의궤』에는 1833년 11월의 내관으로 황해도에 분정된 法油 丁粉

正鐵 强鐵 石灰 등을 고을별로 책임을 적은 기록도 있다 이 가운데 정분 300말을 장연에

배정한 내용 강원도에 분정된 法油 松煙 生葛 木賊 楡皮 등의 고을별 할당량을 적고 이

가운데 송연은 金城 淮陽 金化 平康 寧越 平昌 旌善 등 고을에 분정하였으며 느릅나무

껍질인 유피는 橫城 洪川 麟蹄 狼川 寧越 平昌 旌善 등지에 분정하였다는 내용 그리고

집돼지털 50근을 평안도내 여러 고을에 분정한 내용도 담고 있다

마 인정전 단청의 문양 특성

인정전 단청은 부재별로 다양한 문양이 활용되고 있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모로단청을 들

목과 창방 평방 등의 머리초를 대표 예로 들어 간략히 기술한다

대체로 연화병머리초를 기본으로 삼고 원연화병머리초를 변형으로 활용했다 즉 창방을

연화병머리초로 하고 그 위의 평방은 원연화병머리초로 변화를 주었다 휘도 부재별로 차이

를 두었는데 대들보의 휘는 복잡하고 화려한 바자휘로lt사진3gt 창방과 평방은 그보다 단순

한 인휘로 통일해 표현했다 휘의 색은 적 청 황 석간주를 2빛으로 전개하다가 뇌록바탕에

양록실 황실 먹실로 마감해 밝고 장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러한 연화병머리초 문양은 창덕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의 단청에 빠짐없이 활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해 내전을 겸한 침전으로 대조전(보물 제

816호) 편전(便殿)인 희정당은 물론 궁내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던 건물인 구선원전(보

물 제817호)과 신선원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lt사진4 5gt 즉 창덕궁 인정전의 연화병머리

초는 왕실을 상징하는 단청문양인 것이다

lt사진3gt 인정전 대들보의 연화병머리초 바자휘 단청

lt사진4gt 대조전 창방의 연화병머리초직휘 단청

lt사진5gt 희정당 창방의 연화병머리초직휘 단청(현대)

이상과 같이 창덕궁의 단청 특성을 인정전 단청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인정전은 창덕

궁의 정전으로 가장 중요한 건물이면서 단청을 포함한 공사 내역을 기록한 의궤도 2종이나

되어 과거 단청을 연구하는 데 문헌기록도 잘 남아있다 또한 인정전의 내부 단청은 현존하

는 궁궐단청 중 가장 오래된 것 가운데 하나로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인정전을 중심으로 창덕궁 단청을 논하고자 한 이유는

가 두 종의 인정전 관련 의궤를 통해 과거 단청공사 기록을 잘 파악할 수 있다

나 인정전 내부 단청은 현존하는 궁궐 단청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 일부분 수리 개칠이 되었지만 과거 단청이 잘 남아 있다

라 인정전 단청의 안료를 과학적으로 조사한 자료가 있어서 비교가 가능하다는 점

등이다

의궤의 내용과 현존하는 단청의 안료와 공사내역을 비교한 결과

가 의궤의 기록에 따르면 20종이 넘는 다양한 안료가 사용된 반면 현존 단청에서는 겨

우 5종의 안료가 확인되었다 확인되지 않은 안료는 당주홍 왜주홍 당황단 석자황 등 그

정체가 확실치 않은 안료들이다 특히 청색은 청화를 비롯해 이청과 삼청인데 이들 청색은

육안으로도 확인이 불가능했다 앞으로 이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나 인정전의 단청 공사는 1804년 11월 6일에 시작되어 12월 13일에 끝나 공사기간이 38

일로 상당히 짧았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진행되어 작업에 상당

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 단청안료 중 무엇보다 중요하고 다량 소요되는 가칠안료로서 황주주토는 황해감영에

서 뇌록은 경상감영에서 공납을 받았으며 붓의 재료인 되지털과 아교 제작에 필요한 쇠가

죽 등을 원료상태로 지방의 도와 부에서 나누어 공출한 기록도 확인하였다

라 50여년의 사이를 두고 벌인 두차례의 인정전 단청공사에서 가장 큰 색재료의 변화는

붉은색에서 일어났는데 최초에는 황주주토를 사용했던 가칠이 보수공사 시 석간주가칠로 교

체된 점이다

마 인정전의 대표적인 모로단청 문양은 연화병머리초인데 이 문양은 대조전과 희정당은

물론 선원전 등 창덕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에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로 요약된다

단청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의외로 미지의 상태로 남아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연구 관점이 전통 문양에만 편중되어 있고 재료와 기술연구에는 근거가 부족하

여 체계적이지 못한 경향이 있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있는 단청자료를 과학적

으로 조사하면서 고문헌 기록과 비교 검토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시급히 보완해

야 할 점은 현존하는 단청자료를 함부로 벗겨내고 재시공하지 않는 일이다

lt참고문헌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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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仁政殿重修儀軌(1857)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6 창덕궁 궁역 궁성 궁성문 궁장문 문로

가 궁역

1) 조선 전기

『세조실록』 27권 8년(1462) 1월 30일(을축)

처음에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의 후원(後苑)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쪽 원장(垣墻)을 넓혀서 쌓으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공 제조(繕工提調)에게 명하여 그 기지(基址)를 살펴서 정하게 하니 주위의 둘레가 모두 4

천 2백 척(尺)이고 그 안에 인가(人家)가 모두 73채였다 명하여 2월까지 모두 철거(撤去)하게 하고 그 집

주인에게 3년 동안 복호(復戶)하여 주고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그들이 원(願)하는 바에 따라 빈 땅을 절

급(折給)하게 하였다

『세조실록』30권 9년(1463) 2월 7일(병인)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창덕궁(昌德宮)에 거둥하여 궁장(宮墻)을 보고 기지(基址)를 넓게 쌓도록 하였

다 이 앞서 궁장을 넓히고자 하여 궁(宮) 동북동(東北洞)의 인가(人家)를 철거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또 북

쪽 고개 밑의 인가 58구(區)를 철거하니 주위(周圍)가 무릇 4천 척(尺)이었다 행 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

院事) 김개(金漑)middot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이석형(李石亨)middot한성부 윤(漢城府尹) 권반(權攀)middot공조 참판 이연손

(李延孫)middot인순부 윤(仁順府尹) 황효원(黃孝源)을 제조(提調)로 삼고 군기 판사(軍器判事) 황신(黃愼)middot사복 판

사(司僕判事) 박서창(朴徐昌)middot군기 부정(軍器副正) 한치의(韓致義)middot공조 정랑(工曹正郞) 성율(成慄)middot한성 소윤

(漢城少尹) 신승선(愼承善)middot선공 주부(繕工注簿) 강치(姜致)를 낭관(郞官)으로 삼아 도성 방리인(都城坊里人)

을 다 징발하여 통(統)을 나누어 쌓으니 1백 19가(家)로서 1통(統)을 삼고 1통(統)이 쌓은 것이 25척(尺)이

었다 통(統)은 대개 1백 60이고 통(統)마다 모두 직질(職秩)이 높은 인원(人員)으로서 주관하게 하여 오늘

부터 역사를 시작하였는데 전교하기를 ldquo동쪽 고개[東岾]도 또한 이 주산(主山)의 내맥(來脈)이다 성 밖에

있게 되면 마땅하지 못하니 다시 넓히도록 하라rdquo 하니 이에 또 4백 척(尺)을 물리었다

『세조실록』30권 9년(1463) 2월 9일(무진)

좌의정 권남(權擥)이 아뢰기를 ldquo성균관 반수(成均館泮水)는 청컨대 신축(新築)하는 궁장(宮墻) 안에 넣지 말

게 하소서rdquo 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어서(御書)를 보이기를 ldquo뭇사람이 옳지 않다고 하는 일을 내 어

찌 하며 백성을 수고롭게 하여 원망을 취하는 역사를 내 어찌 일으키겠는가 궁성(宮城)의 역사는 부득이함

이 있어서 세상이 예로부터 서로 이어 왔으니 지난해 이어(移御)한 일 같은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선왕(先

王)이 수궁(數宮)을 설치한 소이(所以)이며 제경(諸京)을 설치한 뜻[意]이다 창덕궁(昌德宮)은 동산[苑]이

협애(狹隘)하니 후세의 인주(人主)로 유람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어 반드시 크게 토목(土木)을 일으킨다면

존망(存亡)의 형세를 입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런 연고로 음양(陰陽)을 인하여 장구(長久)한 방술

[術]을 삼아서 잠깐 수고롭더라도 길이 편안케 할 뿐이다 반수(泮水)가 동산[苑]에 들어오는 것은 의논한

바가 아니니 하나의 고(苽)6057) 를 소민(小民)에게서 빼앗는 것도 불가하거든 하물며 선사(先師)에게서

반수(泮水)를 약탈하겠느냐 또 반수(泮水)란 3면(三面)이 물로 둘러싸인 것이지 내[川]가 흐르는 것이 아니

다 고례(古禮)에 lsquo때를 따라 손익(損益)하지 않음이 없다rsquo 하였는데도 구구(區區)하게 외모(外貌)로써 한다

면 보름새 베[緦]를 살피는 것이다 만약에 반수(泮水)를 폐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내가 마땅히 유생(儒

生)으로 하여금 스스로 파게 할 것이다 어찌 나의 적개심(敵愾心) 있는 장졸(將卒)로 하여금 토목에 피로하

게 하겠느냐rdquo 하고 이어서 술자리를 베풀고 권남(權擥)에게 의롱(衣籠) 1사(事) 호피(虎皮)middot표피(豹皮)middot큰

녹비(鹿皮) 각 1장(張)을 여섯 승지(承旨)에게는 큰 녹비(鹿皮) 1장씩을 내려 주었다

『연산군일기』 51권 9년(1503 계해 명 홍치(弘治) 16년) 11월 12일(을해) 4번째기사

병조 판서 강귀손(姜龜孫)과 공조 판서 정미수(鄭眉壽) 등이 돈화문 동쪽에서 단봉문(丹鳳門)까지의 궁장 밑

인가 20여 곳을 적어서 아뢰기를 ldquo법을 범하고 지은 집을 전번 적간(摘奸)할 때 미처 적어 올리지 못하였

으니 철거하게 하소서rdquo 하니 그대로 좇았다

『연산군일기』 51권 9년(1503 계해 명 홍치(弘治) 16년) 11월 13일(병자) 7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타락산(駝駱山) 밑 조영철(趙永哲) 등 27인의 집을 철거하고 요금문(曜金門) 밖의 김명철(金命

哲) 등 49인의 집과 돈화문에서 단봉문(丹鳳門) 밖까지의 박막동(朴莫同) 등 24인의 집도 함께 철거하라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62권 12년(1506 병인 명 정덕(正德) 1년) 6월 22일(경오) 3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창덕궁의 성을 경복궁의 성에 의해 쌓고 돈화문을 다시 짓되 높고 크게 하며 또 하마비(下馬

碑) 모퉁이에 문을 내라rdquo 하였다

2) 조선 후기

『광해군일기』 158권 12년(1620 경신 명 만력(萬曆) 48년) 11월 15일(무자) 3번째기사

전교하였다 ldquo거둥 때 치는 엄고(嚴鼓)가 다 깨지고 몸통도 작고 하여 보기에 너무 볼품이 없다 평상시처럼

종을 빨리 주조하여 돈화문(敦化門) 위에다 매달아두라 그리고 거둥 때 쓰는 엄고도 급히 다시 만들어 쓰도

록 하라 이를 해조로 하여금 각별히 거행하게 하라rdquo

『효종실록』 9권 3년(1652) 10월 28일(병인)

상이 병조에 하교하여 도방군(到防軍) 1백 50인을 내어 궁장(宮墻)의 나무를 베게 하고 또 공조middot한성부에

명하여 내시와 함께 궁장을 순심(巡審)하여 더 쌓고 궁장 밖 여염집의 담이나 지붕이 궁장에 잇닿은 것을

모두 헐게 하였다 이때 변괴가 날마다 나타나서 인심이 어수선하므로 상이 신변을 걱정하여 이 조처가 있

었는데 도하(都下)가 이 때문에 놀랐다

『효종실록』 15권 6년(1655) 11월 23일(계묘)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ldquo수리하는 일에 대해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요금문(耀金門) 안의 지형이 몹시 비좁다 궁장(宮墻)의 안에는 모름지기 내장(內墻)이 있어야

하고 내장의 안에는 모름지기 층루(層樓)를 세워야 하는데 누각이 내장에 들어서고 나면 전연 남는 땅이 없

을 것이니 이것도 또한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두 담장의 사이가 1장(丈) 남짓도 안 되니 순라가 왕래하

자면 어떻게 통행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도랑을 안으로 들이어 따로 궁장을 그 밖에 쌓아야만 순라가 왕

래하는 길이 들어설 수 있고 체모나 형세가 마땅함을 얻을 것이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rdquo 하니 부제학 김

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ldquo궁성(宮城)의 옛 제도를 넓히기는 어려울 듯합니다rdquo 하고 호조 판서 허적(許

積)이 아뢰기를 ldquo순라의 길이 단지 담장 하나를 사이로 두고 있다는 것도 또한 몹시 온당치 못한 일입니

다rdquo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ldquo나의 뜻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경들과 가부를

상의하려는 것이다rdquo하니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ldquo외부 사람의 말소리가 필시 궁안에 들릴 테

니 일이 몹시 난처합니다 그러나 익희의 말도 또한 유념해야 합니다rdquo하고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

뢰기를 ldquo지금 비록 넓히려 한다 하더라도 요금문으로부터 홍문관에 이르기까지 곡장(曲墻)의 제도를 사용한

다면 민가를 철거하는 것이 많은 양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rdquo 하였다 상이 설계도를 가져다가 보았는데

심지원이 아뢰기를 ldquo신이 일찍이 2백 60 70십 칸의 재력(財力)을 헤아려 보았는데 도합 재목이 1만여 조

(條)가 들어 3천 석의 쌀과 4백 동의 포(布)를 써야 하니 공역이 너무 방대해서 일이 몹시 우려할 만합니

다 칸수를 줄여서 비용을 절약하고 민폐를 더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rdquo 하고 익희가 아뢰기를 ldquo대신의 말

을 부디 유념하소서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공역이 어찌 여기에 이르겠는가rdquo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ldquo흠경각(欽敬閣)도 철거할 것입니까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철거하여 그 목재와 기와를 쓰고 총부(摠府)의

목재와 기와는 도로 총부에 주는 것이 좋겠다rdquo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ldquo총부와 옥당을 옮길 장소가 없습

니다rdquo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상의원은 창경궁 안으로 옮기고 옥당과 총부를 상의원 근처에다가 옮겨 짓는

것이 타당할 것같다rdquo 하였다

나 궁성문 궁장문

1) 궁성문

(1) 조선전기의 궁성문

① 돈화문

『태종실록』 23권 12년 5월 22일(을사)

도성(都城) 좌우의 행랑(行廊)이 완성되었다 궐문(闕門)에서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까지 행랑이 4백 72

간이고 진선문(進善門) 남쪽에 누문(樓門) 5간을 세워서 돈화문(敦化門)이라고 이름하였다 의정부에서

창덕궁(昌德宮) 문 밖의 행랑을 각사(各司)에 나누어 주어 조방(朝房)으로 만들 것을 청하고 또 아뢰었다

ldquo금년 가을에 행랑(行廊)을 수리하고 장식하는 일과 창고(倉庫)를 조성(造成)하는 등의 일에 유수(遊手)승도

(僧徒)와 대장(隊長)대부(隊副)로 하여금 역사에 나오게 하소서rdquo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24권 12년(1412 임진 명 영락(永樂) 10년) 9월 15일(정유) 2번째기사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돈화문(敦化門) 누각의 종명(鐘銘)을 짓게 하였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ldquo금상(今上) 13년 겨울 10월 일에 유사(攸司)에 명하여 종(鍾)을 주조하여 궁문(宮門)

에 달게 하시니 대개 고제(古制)를 따름이라 공덕을 새기고 또 군신(郡臣)의 조회하는 기회를 엄하게 하는

까닭이 됩니다 위대하도다 생각하건대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이미 훈덕

(勳德)이 높으심에 인심(人心)이 날로 돌아와 붙었으나 참소[讒]를 얽어대는 말이 비등하여 화란의 조짐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마침 제릉(齊陵) 곁에서 여막을 사시다가 일이 급함을 듣고 곧 오시

어 기미(幾微)에 응해 제재하시고 드디어 훈친(勳親)이 창의(倡義)하여 추대함으로써 대업(大業)을 세우셨습

니다 그 뒤 간신(奸臣)이 다시 난(亂)을 꾸미는 자 있었으나 우리 전하께서 즉시 평정하여 사직(社稷)을 안

전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아버이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시니 덕이 이보다 더 성함이 없고 나라를

열고 사직을 정하시니 공이 이보다 큼이 없으므로 진실로 종(鍾)과 정(鼎)에 명(銘)을 새겨 만세에 보이심이

마땅합니다 즉위하신 이래 하늘을 공경하고 대국을 섬기시어 다시 제명(帝命)을 받으심으로써 조상의 공훈

을 빛나게 하시고 성학(聖學)이 계속하여 밝음에 지극하여서 다스림이 융성함에 이르렀습니다 신종(愼終)과

보본(報本)하는 정성과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기르시는 어지심에 이르러서는 상경(常經)을 세우고 강기(綱

紀)를 펴신 넓은 규모와 큰 책략이 모두 다 백왕(百王) 위에서 높이 나왔습니다 이제 또 특명으로 종을 달

게 하심으로써 새벽과 밤의 한계를 엄히 하시니 자강불식(自彊不息)하고 서정(庶政)에 부지런히 힘쓰심으로

써 만세의 태평(太平)에 기초를 잡으신 까닭이 지극하고 유택(流澤)이 길고 해를 지남이 오래이기에 마땅히

이 종(鍾)과 같이 한없이 내려갈 것은 틀림없습니다 아 성하도다 또 그 꾀를 내고 힘을 바쳐 공훈의 맹세

에 참가한 사람들도 모두 뒤에다 새겨 이를 불후(不朽)에 전함이 옳겠기에 신(臣) 변계량(卞季良)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명을 지웁니다rdquo

명(銘)은 이러하였다

ldquo빛나도다 성조(聖祖)시여 동토(東土)에 강생하여 하늘의 경명(景命)을 받아 처음으로 큰 복을 열으셨도

다 예전 고려 말년에 정사가 흩어지고 백성이 유리(流離)하매 하늘이 우리님의 덕을 돌보아 인심(人心)이

돌아왔으나 이때에 참소하는 사특한 무리가 그 뭇사람의 마음을 좀먹어 우리를 모략함이 너무 급하매 화란

이 아침저녁으로 임박하였도다 효도롭다 성자(聖子)여 묘막에서 오시어 신기(神機)를 결정하니 진실로 어

려움이 형통하여 해가 솟아 오르듯 넓게 통하며 크게 빛났도다 이어서 얼아(孽芽)가 돋아 틈을 타서 위태함

에 다달았으나 하늘이 태조에게 후(厚)하여 그 후손을 창성하게 하시고 우리님에 이르러 저 여러 악당을 쓰

러뜨리니 여러 어진이가 꾀를 합하고 좌우에서 도우니 인륜이 크게 펴지고 종사(宗社)가 길고 오래리라

다시 높은 공을 세움은 실로 우리님이시나 공이 높되 차지 않고 덕이 성하되 차지 않으니 천감(天鑑)이 매

우 밝아 보우(保佑)를 이에 아뢰었도다 제명(帝命)이 거듭 이르니 용위(龍位)를 받음이 이대로다 금보(金

寶)는 빛나고 크기가 말[斗] 같도다 천총(天寵)이 잦으심은 전고에 으뜸이라 내 서울로 돌아와서 조무(祖

武)를 잘 잇고 조심조심 효성하여 끝까지 어김 없이 기강을 세우시니 모든 법도 밝아졌도다 신야(晨夜)를

엄히 하여 이 종을 매달으니 백사(百司)가 직에 힘써 감히 어김이 없고 면면(綿綿)한 종묘middot사직 천지같이

길고도 오래리라 내 절하고 명을 지어 무강(無彊)에 보이노라rdquo 호조 판서 한상경(韓尙敬)에게 명하여 이를

쓰게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ldquo공신으로 맹세를 위반한 자는 청컨대 그 이름을 삭제하게 하소서rdquo 하

니 임금이 ldquo역대(歷代) 공신의 선악(善惡)은 모두 전하니 비록 삭제하지 않더라도 가하다rdquo 하였다 정부에

서 맹약을 위반한 자의 명단을 모두 써서 다시 청하니 임금이 ldquo정도전(鄭道傳)middot장지화(張志和)middot심효생(沈孝

生)middot이근(李懃)middot신극례(辛克禮) 같은 자는 마땅히 모두 기록하게 하라rdquo 하였다

정부에서 또 ldquo종정(鍾鼎)에다 이름을 새기는 것은 만세(萬世)에 밝게 보이심이니 충성과 간사함이 서로

섞여서는 특히 불가한데 그 중에서도 신극례는 녹권(錄券)을 거두지 않았으니 혹시 아울러 기록함이 옳겠

습니다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25권 13년(1413 계사 명 영락(永樂) 11년) 1월 27일(정미) 2번째기사

큰 종[大鐘]을 주조하여 완성하였다 애초에 제도(諸道)의 주철(鑄鐵) 1만 5천 근(斤)을 거두어 주조하게 하

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자청(朴子靑)이 대장(隊長) 1천명으로 경성에 실어 들여오니 상호군 현귀명(玄貴

命)에게 명하여 내온(內醞)을 내려 주어 위로하고는 이를 돈화문(敦化門)에 매달았다

(2) 조선후기의 궁성문

『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지

남문은 돈화문 단봉문 북문은 광지문 서북문은 요금문 동문은 건양문 서문은 경추문 금호문이고 궁내에

어구교가 있다

『한경지략』

창덕궁 칠문은 광해군 원년 중건

돈화문 큰 북(인경 파루) 사헌부 관리만 출입

단봉문 돈화문 남우

건양문 동문-창경궁 통행

금호문 서문 현판(성임의 글씨) 대부분 관리 출입 입직 주서가 개폐 확인

경추문 더 서쪽문 늘 잠금 대장이 군사 동원시에만 염

요금문 더 서쪽문 현판(성종때 신자건의 글씨)

공북문 서북문 안쪽에 대보단 원래 신이천 박의 집터

2) 궁장문

(1) 조선 전기의 궁장문

『태종실록』 33권 17년 1월 9일(병신)

지신사 조말생(趙末生) 등에게 명하여 향(香)을 받들고 먼저 종묘(宗廟)에 나아가게 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말하기를 ldquo전조(前朝)의 임금들은 즉위한 뒤로 친사(親祀)함이 한두 번에 불과했으므로 종묘에 나아갈 때를

당하면 반드시 성례(盛禮)를 갖추었지만 나는 세사(歲事)로써 상례(常禮)를 삼고자 한다 무엇을 반드시 저

렇게 번거롭게 하여야 하겠는가 제삿날을 당하여 청재(淸齋)한 근신(近臣)을 거느리고 사잇길로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하고 이내 명하여 종묘의 북장(北墻)에다 작은 문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말생

에게 명하여 그 문으로 먼저 가게 하였다

『성종실록』 58권 6년(1475 을미 명 성화(成化) 11년) 8월 23일(기해) 7번째기사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서거정(徐居正)이 전교(傳敎)를 받들어 대궐의 문 중에 예전에 액호(額號)가 없

는 것은 각기 2개의 이름을 편액(扁額)하여 아뢰니 임금이 낙점(落點)하기를 창덕궁(昌德宮) 밖 동장문(東

墻門)은 선인문(宣仁門) 중간의 동장문(東墻門)은 경양문(景陽門) 신대문(新大門)은 장춘문(長春門) 중대문

(中大門)은 선명문(宣明門) 남협문(南夾門)은 춘흥문(春興門) 안 동장문(東墻門)은 건양문(建陽門) 북쪽 동

장문(東墻門)은 기화문(綺華門) 광연정(廣延亭)의 서참문(西岾門)은 평창문(平昌門) 남행랑문(南行廊門)은

영화문(永和門) 북행랑문(北行廊門)은 영평문(永平門) 내사복 남문(內司僕南門)은 운금문(雲錦門) 외동산문

(外東山門)은 연양문(延陽門) 좌협문(左夾門)은 광범문(光範門) 우협문(右夾門)은 숭범문(崇範門) 남장문(南

墻門)은 단봉문(丹鳳門) 내서장문(內西墻門)은 의추문(宜秋門) 좌달문(左闥門)은 숙장문(肅章門) 겸사복청

(兼司僕廳)의 신대문(新大門)은 연복문(延福門) 내사옹(內司饔)의 상동문(上東門)은 소춘문(小春門) 북문(北

門)은 소동문(小東門) 중궁(中宮)의 차비문(差備門)은 연희문(延禧門) 승정원(承政院)의 남문(南門)은 연영문

(延英門) 서행랑문(西行廊門)은 금호문(金虎門) 외서장문(外西墻門)은 진금문(鎭金門) 서장문(西墻門)은 요

금문(曜金門) 후원(後苑)의 북장문(北墻門)은 공진문(拱辰門) 신북장문(新北墻門)은 창합문(閶闔門) 동장문

(東墻門)은 청양문(靑陽門) 외북장문(外北墻門)은 광지문(廣智門) 경복궁(景福宮)의 다와지문(多臥只門)은

망춘문(望春門) 옛 동궁(東宮)의 남문(南門)은 동양문(東陽門) 동장문(東墻門)은 소화문(昭華門) 남장문(南

墻門)은 소휘문(昭暉門) 동장자문(東障子門)은 요의문(曜儀門) 남행랑문(南行廊門)은 금란문(金鑾門) 후원

(後苑)의 사복문(司僕門)은 상원문(上苑門) 북성문(北城門)은 신무문(神武門)으로 하였다

(2) 조선후기의 궁장문

3) 궁성문과 궁장문의 개폐 숙위 감문

『세종실록』 31권 8년 2월 27일(신묘)

병조에서 계하기를 ldquo궁성(宮城)을 순찰하는데 다만 별순총제(別巡摠制)로 하여금 초경(初更)에만 돌아보게

하고 있으니 실로 타당하지 못합니다 바라옵건대 사면에서 모두 방패(防牌)로 하여금 번을 서게 하고 중국

의 제도에 의하여 흔드는 목탁을 만들어서 밤마다 남문에서 번을 든 호군(護軍)이 증명을 본조에서 받아

인정(人停) 후부터 파루를 칠 때까지 방패 두 사람이 목탁을 울리면서 남에서 동으로 동에서 북으로 북에

서 서로 차례차례로 전해 주어서 다시 남문에 들여놓으며 첫번에 목탁을 울린 자가 동에 도착할 만한 때에

또 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목탁을 주어 먼저와 같이 빙빙 돌아서 끊일 사이 없게 하며 방패가 만일 시각

을 지체하고 전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논죄(論罪)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32권 8년(1426 병오 명 선덕(宣德) 1년) 6월 14일(병자) 5번째기사

병조에 전지하기를 ldquo앞으로는 인정(人停) 후와 파루(罷漏) 전에 궁성문을 열고 닫을 일이 있으면 입직한 병

조 당상관과 도진무와 승전색(承傳色)의 주서(注書)와 사약(司鑰) 일동(一同)이 열고 닫게 하라rdquo 하였다

『세종실록』 63권 16년(1434 갑인 명 선덕(宣德) 9년) 1월 15일(계사) 9번째기사

병조에 전지하기를 ldquo강무(講武)로 거둥했을 때 밤을 당하여 궁문의 개폐(開閉)는 한결같이 중궁의 명령에

의해 하라rdquo 하였다

『세종실록』 100권 25년(1443 계해 명 정통(正統) 8년) 6월 19일(임인) 3번째기사

병조에서 아뢰기를 ldquo궁성문(宮城門)을 만약 인정(人定) 후와 파루(罷漏) 전에 열고 닫을 때에는 입직한 병조

당상(堂上)middot도진무(都鎭撫)middot승전색(承傳色)middot주서(注書)만이 열고 닫을 수 있다고 일찍이 전지가 있었습니다

삼가 상고하니 당(唐) 고조(高祖) 때에 궁전문과 성문에는 교어부(交魚符)와 순어부(巡魚符)를 두고 좌우상

(左右廂)에는 개문부(開門符)와 폐문부(閉門符)를 두었는데 좌부(左符)는 궐내(闕內)에 바치고 우부(右符)는

감문(監門)에 두었으며 중종(中宗) 때에는 궁전(宮殿)middot황성(皇城)middot경성(京城) 금원문(禁苑門) 좌우 내외를 신

칙하고서 각각 교어부 한 짝 순어부 한 짝씩을 주고 좌상(左廂)에는 개문어부(開門魚符) 한 짝을 우상에는

폐문어부(閉門魚符) 한 짝을 주었는데 모두 우부는 감문에 교부하여서 무시(無時)로 여닫는 데 이를 쓰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성문에는 벌써부터 개문부(開門符)를 만들어서 상직(上職)하는 호군(護軍)이 매일 궐

내에서 받아 합부(合符)하고서 문을 여닫습니다 금성문은 관계가 더욱 중한데 부(符)를 험증(驗證)하는 일

도 없이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실로 미편합니다 또 도진무와 병조 당상 등이 일제히 모인 다음에 문을 여는

까닭으로 시간에 맞추여야 할 일은 반드시 늦어지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궁성문도 또한 옛 제도에 의해서

교어부 한짝을 만들어서 왼쪽은 궐내에 들이고 오른쪽은 상서사(尙瑞司)에 갈무리하였다가 입직(入直)하는

중추원(中樞院) 당상과 각 위(衛)의 절제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진무 한 사람을 거느리고 매일 대궐에서 받

아서 영추문(迎秋門)에 숙직하며 만약 제 시각이 아닌 때에 여닫을 일이 있으면 승정색(承傳色) 관자(官者)

가 명을 받들어 왼쪽을 가지고 주서(注書)middot사약(司鑰)과 함께 감문(監門)의 숙직하는 곳에서 오른쪽과 맞추어

본 다음에 문을 열게 하는 것으로써 항구(恒久)한 법식(法式)으로 삼으소서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실록』 2권 1년(1470 경인 명 성화(成化) 6년) 1월 8일(정해) 9번째기사

도총부(都摠府)에 전교(傳敎)하기를 ldquo지금 이후부터는 대궐 안의 밤 순라(巡邏)는 위장(衛將)으로 하여금 행

하게 하는데 북쪽은 동소(東所)middot서소(西所)middot북소(北所)의 위장(衛將)으로 남쪽은 남소(南所)의 위장(衛將)과

응양위장(鷹揚衛將)middot내금위 장(內禁衛將)으로 시각[更]을 나누어 번갈아 돌아다니게 하라rdquo 하였다

『성종실록』 125권 12년(1481 신축 명 성화(成化) 17년) 1월 12일(정해) 6번째기사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ldquo대궐문을 여닫는 데에 요금문(曜金門)과 금호문(金虎門)은 도총부 낭청(都摠

府郞廳) 1명 겸사복(兼司僕) 1명 중궁 사약(中宮司鑰) 1명이 관장하며 돈화문(敦化門)middot단봉문(丹鳳門)middot평창

문(平昌門)은 주서(注書) 1명 겸사복 1명 대전 사약(大殿司鑰) 1명이 관장하고 선인문(宣仁門) 밖의 사옹

문(司饔門)middot청양문(靑陽門)은 선전관(宣傳官) 1명 겸사복 1명 왕대비전 사약 1명이 관장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rdquo 하니 전교하기를 ldquo가하다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5월 13일(정유) 3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궐 안에 입직하는 군사가 너무 많아서 매우 어지럽다 내금위(內禁衛)middot선전관(宣傳官) 따위는

밖에 나갈 수 없으나 충찬위(忠贊衛)middot충순위(忠順衛)middot별시위(別侍衛) 따위는 돈화문(敦化門) 밖 좌우편 장랑

(長廊)에 입직하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6월 19일(임신) 5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군기(軍器)는 대궐 곁의 가까운 곳에 두어서 뜻밖의 일에 대하여야 하니 남은 돈화문(敦化門)

밖 서는 요금문(耀金門) 밖에 따로 집을 지어서 군기시(軍器寺)에 둔 것을 수를 헤아려서 나누어 두라rdquo 하

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6월 23일(병자) 2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동middot서 금표(禁標) 중에서 동이 더욱 막힌 것이 없으니 이계동(李季仝)으로 하여금 다시 살펴서

물려 쌓게 하며 돈화문(敦化門) 밖 좌우 행랑(行廊) 곁에 가까운 인가(人家)를 모두 철거시키고 행랑을 따라

담을 쌓아 군영(軍營)의 하마비(下馬碑)를 한계로 삼고 궐문(闕門)을 두는 것이 어떠한가 큰일을 이루고자

하거늘 어찌 많이 철거하는 것을 꺼리랴rdquo 하였다 이때부터 성안의 인심이 들끊어 혹 거짓 전하는 말이

lsquo성안에 사는 사람을 모조리 쫓아내고 숭인문(崇仁門)middot돈의문(敦義門)을 궐문으로 삼으므로 오래 편안할 계

책이 없다rs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61권 12년(1506 병인 명 정덕(正德) 1년) 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궁금(宮禁)은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매양 수위하는 데 있어 마땅히 변을 당했을

때와 같이하여 각문을 수직하는 군사를 60명을 더 정하고 항상 갑옷을 입게 하라 수문장은 또 심지가 순근

(純謹)한 자로 수를 늘려서 입직하게 하라 단봉문(丹鳳門)middot금호문(金虎門) 등은 돈화문(敦化門)의 예에 따라

창middot칼 등의 물건을 모두 가지게 하되 칼날이 대궐로 향하지 말게 할 것과 가마를 시위하는 충철위middot보려대

로 입시한 자는 칼을 차지 못하게 할 것과 입직한 사람도 또한 대궐을 향하여 활시위를 잡아당기지 못하게

하는 일은 이미 금령(禁令)이 있었으니 앞으로는 거듭 밝혀 엄하게 금하라rdquo 하였다

『광해군일기』 103권 8년(1616 병진 명 만력(萬曆) 44년) 5월 13일(임오) 10번째기사

정원이 아뢰기를 ldquo전 황해 감사 윤조원(尹調元)을 잡아 올 일로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내보내기 위하여 궐문

및 외문(外門)을 유문(留門)해야 합니다 개문 표신(開門標信)과 돈화문(敦化門) 부험(符驗) 및 밀갑(密匣)을

출급하소서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만기요람』 군정편 2(軍政編二) 훈련도감(訓鍊都監) 궁장 밖의 순라(宮墻外巡邏)

인조 6년 무진(1628년)에 규례를 정하였다 초경 남영(南營)의 초관(哨官)이 입직한 마병 20명을 거느리고

두 바퀴를 순행한다 3경 광지영의 초관이 입직한 군졸 20명을 거느리고 두 바퀴를 순행한다 또 별순라(別

巡邏)가 있는데 영종 9년 계축(1733년)에 규례를 정하였다 장교 1명과 졸병 5명이 초경부터 날이 샐 때까

지 순행하며 집춘문 북쪽ㆍ상수문(上水門) 서쪽에서 공북문까지에 이르는데 별기대 1명과 광지영(廣智營)

입직군 5명 또 따로 기패관 1명과 별무사 1명을 정하여 경을 나누어 도순(都巡) 감독한다 장관이 또 감찰

한다 초일과 종일에는 북영에 입직한 파총이 중일에는 당상장관이 언제나 파루(罷漏)친 뒤에 모두 입직군

5명을 거느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구역내를 감찰한다

『영조실록』 3권 1년(1725 을사 청 옹정(雍正) 3년) 2월 20일(무자) 5번째기사

주강에서 민진원이 노은동 서원의 면세를 최진한이 금군의 수직을 논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중략- 무신(武臣) 최진한(崔鎭漢)이 진달하기를 ldquo궁성(宮城) 안에 입직(入

直)하는 군병(軍兵) 수직(守直)하는 사환(使喚) 이외에는 군병을 단속하고 훈국(訓局)의 2백 명을 금호문(金

虎門)과 홍화문(弘化門) 두 문에 나누어 수직하며 금위(禁衛) 1백 명을 건양문(建陽門)에 입직하고 금려(禁

旅) 1백 명은 인정전(仁政殿) 대정(大庭) 아래에 입직하게 해야 합니다 훈군(訓軍)은 안에서 입직함이 중하

니 매달 세 차례씩 해영(該營)에서 습진(習陣)할 때 내어 쓰지 말며 금위군 및 금려는 해영에서 습진할 때

표신(標信)을 제거하고 내어 써 매달 세 차례 신지(信地)인 금위를 공허하게 만들며 향군(鄕軍)은 생소(生

疎)하니 습진에 내어 쓰는 것도 한 방도일 듯합니다 그러나 금려에 이르러서는 군법(軍法)에 익숙함이 훈졸

(訓卒)에게 뒤지지 않으며 대정(大庭)에 직숙하는 것이 훈졸(訓卒)의 직소(直所)에 비할 것이 아닌데도 매번

내어 써 숙위(宿衛)를 중히 여기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신(將臣) 신여철(申汝哲)이 죽을 때 소신

(小臣)이 가서 보았더니 신여철이 말하기를 lsquo입직하는 금군은 내어 쓰는 것이 부당할 듯하여 내가 계달(啓

達)하여 변통하려고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으니 젊은 무변(武弁)은 이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rsquo라고 하였습니

다rdquo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효종(孝宗) 때 비로소 금군(禁軍)을 설치하였으니 뜻이 있는 바가 있는 것이

다 금위군(禁衛軍)을 내어 쓰지 않을 수 없으나 금군은 습진(習陣)할 때 내어 쓰지 말라는 뜻을 병조로 하

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rdquo 하니 병조에서 청하기를 ldquo최진한의 말에 따라 시행하소서rdquo 하니 그대로 따랐

다 또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후략---

『영조실록』 10권 2년(1726 병오 청 옹정(雍正) 4년) 11월 2일(경인) 2번째기사

임금이 대조전(大造殿)인 곧 창덕궁으로 환어(還御)하였다 병조에서 홍화문(弘化門)은 그전처럼 도로 닫아버

리고 돈화문(敦化門)의 표신(標信)에 따라 여닫되 건양문(建陽門)에는 입직(入直)하는 군사를 차출하고 동룡

문(銅龍門)도 파수(把守)를 해야 하는 뜻으로 아뢰니 윤허하였다

『정조실록』 4권 1년(1777 정유 청 건륭(乾隆) 42년) 11월 17일(기묘) 1번째기사

하교하기를 ldquo숙위 대장(宿衛大將)이 이미 대궐 안 각 곳의 숙위를 도맡게 되었으니 그 관할(管轄)하는 방도

에 있어서 마땅히 서로 유지(維持)해 가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안으로는 위장(衛將)middot부장(部將)middot금군 도감(禁

軍都監)의 군병(軍兵)middot각 문의 수문장(守門將)middot국별장(局別將)과 밖으로는 궁궐 담장 밖에 삼영(三營)에서 입

직(入直)한 순라(巡邏)들이 날마다 사고 유무를 숙위 대장에게 신보(申報)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군사의 체

대(替代)도 또한 마땅히 통괄(統括)하게 될 것이니 위장middot부장middot내삼청(內三廳)middot금군(禁軍)과 금호문(金虎門)middot홍

화문(弘化門)middot건양문(建陽門) 장관(將官)의 군병(軍兵) 및 국별장(局別將)middot유청군(有廳軍) 등은 3일 마다 체대

한 단자(單子)를 숙위소(宿衛所)에 내야 하고 숙위소에서는 해방(該房)에 보내어 봉입(捧入)하게 해야 한다

또 도총부(都摠府)와 병조는 소속 관사들과는 다름이 있어서 또한 서로가 통지(通知)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

이니 순검(巡檢)하는 등 일로 숙위소에서 거행하는 일과 관계되는 것 같은 것은 숙위 대장에게 문이(文移)

해야 함을 현저한 격식(格式)으로 삼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정조실록』 17권 8년(1784 갑진 청 건륭(乾隆) 49년) 5월 22일(병자) 2번째기사

병조에서 감문 절목(監門節目)을 올렸다 이 날에 내사복(內司僕)의 소동문(小東門)이 저절로 열려 병조

에서 아뢰니 하교하기를 ldquo문고리는 넓고 자물쇠는 작은 소치이지 다른 간사한 정(情)은 없을 듯하나 일이

숙위(宿衛)의 분군(分軍)하는 것이 효잡(淆雜)스런 것과 관계되니 특별히 병조 판서를 추고하라rdquo 하고 병

조에 명하여 절목을 만들라고 명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ldquo옛날에는 좌직(坐直)3719) 하는 승지가 합문에서 조석으로 문안하였기 때문에 저녁 문안 후 자물쇠를

청하여 문을 닫고 아침 문안 때 열쇠를 청하여 문을 열었다 근래에는 이 규정이 없어졌으니 마땅히 즉시

참조하여 획일적인 규식을 정하라 지금부터는 열쇠 내주는 것을 좌직하는 승지가 전담하여 보관하고 자물

쇠를 연 후에는 해방 승지(該房承旨)가 주관하여 관장하되 마땅히 수리해야 하는데도 수리하지 않으면 해당

승지를 의금부에 내려서 중히 감죄하고 주서(注書)와 총랑(摠郞)middot선전관(宣傳官)middot사약(司鑰) 가운데서 해당

문을 관리하는 사람 역시 유사(攸司)로 하여금 감단(勘斷)하라

병조에서 순검하면서 자물쇠를 확인하는 것은 본디 직장(職掌)이니 건양문(建陽門) 동서를 경계로 하여

수문장(守門將)과 위장(衛將)과 함께 같은 죄를 주고 만일 파손된 곳이 있으면 즉시 와서 고해야 하며 색승

지(色承旨)가 수리하는 한 조항은 신시(申時) 이전은 해방(該房)에서 관장하고 신시 이후에는 좌직(坐直) 하

위(下位)가 관장하는 것으로 정식(定式)하여 신명하라 이후로 성문middot궐문의 자물쇠는 호조 낭관이 감독해 만

들어서 판서가 구검(句檢)하는 것을 일체 절목으로 만들어 계하하라 이렇게 정식하면 도총부 낭관이 돈화

문(敦化門)을 관리하는 것은 아주 의미가 없으니 선전관이 돈화문을 관리하고 도총부 낭관은 통화문(通化

門)과 선인문(宣仁門)을 관리하라rdquo

하였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 1 각문(各門)의 개폐(開閉)는 옛날 예대로 승정원이 주관한다 자물쇠를 잠근 후

에 열쇠는 좌직(坐直) 하위(下位)가 친히 받아서 사(司)에 보관한다 그 출납은 자물쇠를 연후에 자물쇠와 열

쇠를 해방 승지가 친히 받아서 보관하고 신시(申時) 이후에는 상직(上直) 하위 승지에게 전해 보관하게 한

다 1 각문의 관할은 건양문(建陽門) 동서를 경계로 한다 서쪽은 서middot남 양소(兩所)에서 분장하는데 병조의

담당이다 동쪽은 동middot북 양소에서 분장하는데 도총부 담당이다 수문장은 각기 그 부근에 가는데 소남문(小

南門)은 단봉문(丹鳳門) 수문장이 겸관(兼官)하고 소동문(小東門)은 선인문(宣仁門) 수문장이 겸관하는데 만

일 섬가지 않은 일이 있으면 엄법으로 감처(勘處)한다 1 각문의 자물쇠에 만일 파손되어 고쳐야 할 곳이

있으면 해당 문의 수문장이 해소(該所) 부장(部將)을 안동(眼同)하여 각각 그 자내(字內)에 가서 고하면 병

조나 혹은 도총부의 낭청이 친히 가서 살피어 승정원에 고하는데 고치는 절차는 신시 이전에는 해방에서

관장하고 신시 이후에는 좌직 승지가 관장한다 1 각문을 개폐할 때 감약(監鑰)은 돈화문(敦化門) 요금문

(曜金門) 단봉문(丹鳳門)은 선전관이 금호문(金虎門)은 주서(注書)가 홍화문(弘化門) 선인문(宣仁門) 통화

문(通化門)은 도총부 낭청이 담당하되 각 해당 문의 수문장 및 담당 사약(司鑰)이 안동하여 거행한다 1 병

조 낭청 및 도총부 낭청이 야순(夜巡)할 때 각문의 자물쇠는 그 내자(字內)에 따라서 해당 수문장을 안동하

여 살피되 소동문(小東門) 소남문(小南門)도 일체로 조검(昭檢)한다 1 각처 수문(水門)의 중대한 열쇠를

해소에 보관하는 것은 일이 매우 미안하니 남수각(南水閣) 수문(水門)은 돈화문 수문장이 겸관하고 북수각

(北水閣) 수문은 요금문 수문장이 겸관하여 파손된 곳의 수리와 조검(照檢) 때살피는 등의 절차는 다른 문

의 예에 의해서 시행한다 1 성문과 대궐문을 잠그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니 지금을 시작으로 해서 자물쇠

를 수리할 때에는 호조 낭청이 몸소 감조(監造)하고 판서가 구검(句檢)한다 1 각문을 나누어 담당시키는

것이 비록 건양문 동서를 경계로 삼았으나 병조는 이미 궐내 각처를 관할하는 처지이니 경계를 정하였다 하

여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며 건양문 동쪽 역시 총괄하여 검찰해야 한다】

『정조실록』 27권 13년(1789 기유 청 건륭(乾隆) 54년) 1월 19일(병자) 3번째기사

승정원이 병조 당상관의 당직 교체 일로 인하여 금호문(金虎門) 출입 표신을 내줄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ldquo대궐 안의 각문을 유문(留門)하였을 때 조정 신료가 드나들지 못할 문은 원래 없는 것이다 체통이 막중한

대신과 대신(臺臣)의 체통이 근래 궁인(宮人)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하는 요금(曜金)middot통화(通化) 두 문도 구

애되지 않고 출입하였던 사실을 《당후일기(堂后日記)》를 보면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몇

해 전부터 막중한 대궐문을 마치 각 부서에서 나누어 맡은 것처럼 돈화문(敦化門)은 대간에 금호문은 조신

(朝臣)에 단봉문(丹鳳門)은 중관(中官)에 선인문(宣仁門)은 사복시(司僕寺)에 각각 소속되어 마치 서로 어겨

서는 안 될 무슨 정해진 한계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유문하고 있을 때라도 열려 있는 문을

놔두고서 유문 표신을 따로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종전에도 누차 신칙했지만 끝내 고칠 줄을 모르

니 당해 승지를 파직하고 앞으로는 유문할 때 뿐만 아니라 아침과 낮에 공사로 들어올 때에도 따로 출입하

는 문을 정하지 말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순종실록』 2권 1년(1908 무신 대한 융희(隆熙) 2년) 4월 1일(양력) 4번째기사

포달(布達) 제2호 〈창덕궁 정문을 개폐 통행을 제한하는 규정〔昌德宮正門開閉通行定制限〕〉을 공포하였

다 문로

- 왕비 책봉 의식과 문로

『성종실록』 123권 11년(1480 경자 명 성화(成化) 16년) 11월 8일(갑신) 1번째기사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니 백관(百官)이 사배(四拜)를 마쳤다 임금이 왕비를 책봉(冊封)하고 교명

(敎命)middot책보(冊寶)middot명복(命服)을 정사(正使)인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부사(副使)인 호조 판서(戶曹判

書) 이철견(李鐵堅)에게 주어 인정문(仁政門)을 경유하니 고취(鼓吹)가 앞에서 인도하는데 다음은 교명(敎

命)이고 다음은 옥책(玉冊)이고 다음은 보(寶)이고 다음은 의장(儀仗)이었다 사자(使者)가 수행하여 선정문

(宣政門) 밖 막차(幕次)에 이르니 왕비가 선정전(宣政殿) 월랑(月廊)의 배위(拜位)에 나아가 교명(敎命)middot책보

(冊寶)middot명복(命服)을 받았는데 그 교명에 이르기를 -후략-

- 선정전의 정문 돈례문

『명종실록』 27권 16년(1561 신유 명 가정(嘉靖) 40년) 4월 8일(정유) 1번째기사

밤에 돈례문(敦禮門)【선정전(宣政殿)의 어문(御門)이다】 및 어둑(御纛)에 벼락이 쳤다【내일 상참(常參)이

있어 어문(御門)에 내다 세워 놓았는데 문선(門扇)과 둑간(纛竿)이 벼락에 맞아 부러졌다】

- 발인시 왕과 재궁의 문로

『연산군일기』 3권 1년(1495 을묘 명 홍치(弘治) 8년) 2월 8일(임술) 4번째기사

빈전 도감(殯殿都監)이 아뢰기를 ldquo재궁(梓宮)이 동가(動駕)할 적에 전하께서 돈화문(敦化門) 안에서 지송(祗

送)하셔야 하는데 전하께서 만약 재궁을 수행하여 빈청(賓廳) 앞을 경유하시어 진선문(進善門) 밖으로 나가

신다면 잡인(雜人)이 요란스러울 뿐더러 길도 협착하니 전하께서 도보(徒步)하시기도 역시 어렵습니다 만

약 권도(權道)를 따라 먼저 막차(幕次)에 나아가시기로 하면 전하께서 조전(祖奠)을 행하신 다음에 소교(小

轎)를 타시고 인화문(仁和門)을 벗어나 인정전(仁政殿) 앞을 경유하여 먼저 돈화문 안으로 나가시면 되는데

돈화문 안도 역시 협착하니 마땅히 막차(幕次)를 진선문(進善門) 동편에 마련하고 서쪽을 향하여 지송(祗送)

하셔야 옳겠습니다 또 우제(虞祭)를 행한 뒤에 대비(大妃)께서 진향(進香)하시는 것은 예문이나 전례에 없습

니다 이극돈(李克墩)middot성현(成俔) 등의 뜻은 하현궁(下玄宮)하고 흙으로 절반쯤 메우고 제주(題主)하고 한낮

에 우제(虞祭)를 지내므로 절차가 매우 많고 반혼(返魂)이 이를지 늦을지 그것도 또한 알 수 없으니 그날

우제 뒤에 대비께서 진향(進香)하기는 진실로 어려울 것인데 만약 대비의 망극하신 정을 따르기로 한다면

반혼한 뒤에 대비께서 혼전(魂殿)에 나아가 조석 상식할 때를 기다려서 나와 보시는 것이 어떨까 하였고 윤

효손(尹孝孫)의 뜻에는 이런 것이 예문에 실리지 않았으니 우제 후에 대비의 진향은 수시로 행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rdquo 하였다

- 세자 책봉후 경유해야 할 문로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 청 순치(順治) 2년) 9월 19일(정묘) 2번째기사

예조가 아뢰기를 ldquo세자가 책봉을 받은 다음 건양문(建陽門)을 경유하여 곧장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가서

는 안 되고 홍화문(弘化門) 앞 바른 길을 경유하되 여련(輿輦)과 의장(儀仗)을 갖추어 성 안 사서(士庶)들로

하여금 충분히 보게 한 다음에 돈화문(敦化門)을【 곧 창덕궁의 정문(正門)이다】 거쳐 들어가는 것이 타당

할 듯합니다rdquo 하니 답하기를 ldquo궐내(闕內)로부터 직접 동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rdquo 하였다 책

례 도감이 또 이 일로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 발인시 왕의 문로

『현종실록』 즉위년(1659 기해 청 순치(順治) 16년) 10월 28일(을묘) 1번째기사

대행 대왕의 재궁(梓宮)을 발인(發靷)하였다 자시(子時)에 견전례(遣奠禮)를 행하였는데 인시(寅時)에

내전에서 약방에 죽력(竹瀝)과 생강즙을 구해 들이도록 하였다 이 때 좌상 심지원이 총호사로서 인화문(仁

和門)에 있었는데 중사(中使)를 통해 자전이 너무 슬퍼한 나머지 기절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아뢰기를

ldquo발인할 시각이 이미 박두했는데 삼가 듣건대 자전께서 편찮으시다 하니 잠시 시각을 물리소서rdquo 하니 상

이 따랐다

얼마 뒤에 지원이 또 아뢰기를 ldquo자전께서 이와 같으니 교외에 거동하시는 일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됩니

다 뭇 의논도 모두 전하께서 궐문 밖에서 배사(拜辭)함이 마땅하다고들 합니다 모름지기 빨리 하교하셔야

만 일을 분부하고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자전의 기후(氣候)가 조금 차도가 있는

듯하니 발인하는 시각은 그대로 하라rdquo 하였다

파루(罷漏) 후에 재궁(梓宮)을 받들어 대여(大轝)에 올리고 이어 출발하였다 상이 소여(小轝)를 타고 인

화문(仁和門)으로 나왔는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인정문(仁政門) 밖에 이르러 상이 여(轝)에서 내려 연(輦)

을 탔는데 백관은 모두 걸어서 수행하였다 흥인문(興仁門)을 나와 동관왕묘(東關王廟) 뒤쪽 노제(路祭) 지

내는 곳에 이르러 대여를 악차(幄次)에 봉안하였는데 상도 연에서 내려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의정부와 충

훈부가 노제를 끝마치자 대여가 출발하였다 상이 막차에서 나와 봉사위(奉辭位)로 나아가 동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통곡하며 가슴을 쳤다 대여가 멀어지자 상이 환궁하였다

- 즉위식 의례 설행 문로

『숙종실록』 1권 즉위년(1674 갑인 청 강희(康熙) 13년) 8월 23일(갑인) 1번째기사

왕세자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중략- 이날 성복(成服)을 마치고 왕세자가 관면(冠冕)과 길

복(吉服)을 갖추고 규(圭)를 쥐고 여차(廬次)40) 로부터 걸어가면서 곡(哭)하였다 내시(內侍) 2인이 좌우(左

右)에 끼고 보호하여 선정전(宣政殿) 동쪽 뜰에 나아가 빈전(殯殿)을 향하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섬돌

에 올라가 전내(殿內)의 향안(香案) 앞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는 내려와 그전 자리로 돌아와서 또 네 번

절하고 동쪽 행랑의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왕세자가 선정문(宣政門)으로부터 걸어 나와서 연영

문(延英門)을 따라 가서 숙장문(肅章門)을 나와서 인정문(仁政門)에 이르니 승지와 사관(史官)이 따라 나갔

다 왕세자가 서쪽을 향하여 어좌(御座) 앞에 서서 차마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슬피 울기를 그

치지 아니하였다 승지와 예조 판서가 서로 잇달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를 권하였다 삼공(三公)이 도승지

와 더불어 나아가 왕세자를 부축하면서 번갈아 극진히 말하였다 왕세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우니 이 날

뜰에 있던 백관(百官)과 군병(軍兵)으로서 목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세자

가 어좌(御座)에 오르니 백관들이 사배(四拜)하고 의식대로 산호(山呼)하였다 예를 마치자 사왕(嗣王)이 인

정문(仁政門)으로부터 인정전(仁政殿)에 올라가 인화문(仁和門)으로 들어와서 여차(廬次)로 돌아왔는데 우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 즉위식 의례 설행 문로

『영조실록』 1권 즉위년(1724 갑진 청 옹정(雍正) 2년) 8월 30일(경자) 1번째기사

경종 대왕(景宗大王) 4년【청(淸)나라 옹정(雍正) 2년이다】 8월 을미(乙未)【25일이다】에 경종 대왕이

창경궁(昌慶宮)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昇遐)하였다 그 후 6일째 되는 날인 경자6) 오시(午時)에 왕세제

(王世弟)가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원상(院相)middot승지(承旨)middot사관(史官)은 조복

(朝服) 차림으로 돈례문(敦禮門) 밖 서정(西庭)에 동쪽을 향하여 앉고 홍문관(弘文館)은 승정원(承政院)의 다

음에 앉고 시강원(侍講院)은 동정(東庭)에 서쪽을 향하여 앉고 익위사(翊衛司)는 시강원의 다음에 앉고 병

조(兵曹)middot도총부(都摠府)는 융복(戎服) 차림으로 동쪽middot서쪽에 앉아서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왕세제(王世弟)가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차(廬次)에서 나오니 좌통례(左通禮)가 왕세제를 인도하여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빈전(殯殿)에 나아가 서계(西階)를 거쳐 욕위(褥位)에 올라갔다

찬의(贊儀)가 큰 소리로 lsquo배(拜) 궤(跪)rsquo 하고 선창(先唱)하니 좌통례(左通禮)가 낮은 소리로 lsquo궤(跪)하

소서rsquo 하고 고하기를 ldquo사왕(嗣王)은 보위(寶位)를 받으소서rdquo 하였다 상향례(上香禮)를 마치고 왕세제(王世

弟)가 내려와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막차에서 나와 걸어서 돈례문(敦禮門)의 동쪽 협문(夾門)

을 지나 동계(東階)로 내려가 연영문(延英門)을 거쳐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꺾어 숙장문(肅章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나가서 북쪽으로 꺾어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 밖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 그 곳 한복판

에 어좌(御座)를 설치하였는데 왕세제가 어좌에 올라가니 백관(百官)이 네 번 절하고 lsquo천세(千歲)rsquo 하고 호

창(呼唱)하였다

임금이 어좌에서 내려와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들어가 인정전(仁政殿) 정로(正路)를 거

쳐 인정전에 올라갔다 임금이 여차(廬次)로 돌아와 면복(冕服)을 벗고 최복(衰服)을 다시 입었다 이보다 4

일 전에 예조(禮曹)에서 사위(嗣位)하는 절목(節目)을 올렸는데 왕세제가 영지(令旨)를 내려 돌려주게 하였

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하루 세 번씩 도로 올렸으며 승정원(承政院)middot사헌부(司憲府)middot

사간원(司諫院)middot홍문관(弘文館)에서도 번갈아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성복(成服)하

는 날에 이르러 외부 의식이 이미 마련된 다음에 원상(院相) 이광좌(李光佐)가 여차(廬次) 앞에 이르러 면복

(冕服)으로 갈아입기를 간청하였으나 왕세제가 눈물을 흘리며 점침(苫枕)에 엎드려서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

였다 이광좌가 왕대비전(王大妃殿)과 왕비전(王妃殿)의 승전색(承傳色)을 불러 구전(口傳)으로 내전(內殿)에

서 나아가도록 계청(啓請)하니 왕대비전과 왕비전에서 언문 교지(諺文敎旨)를 내려 나아가도록 권유하였다

그제서야 왕세제가 남여(籃輿)를 물리치고 걸어서 어좌(御座) 앞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울부짖으며 어좌

에 오르지 않고 말하기를 ldquo내가 옛날에 여기에서 영고(寧考)를 모셨었는데 지금 무슨 마음으로 어좌에 오를

수 있겠는가rdquo 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이광좌 등이 누누이 간청하니 한참 후에 등극(登極)

하였다 정시(正時)가 되니 예조(禮曹)에서 비로소 사시(巳時)가 되었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오시(午時)에

이르러 마침내 즉위(卽位)하고 혜순 자경 왕대비(惠順自敬王大妃) 김씨(金氏)를 높여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왕비(王妃) 어씨(魚氏)를 왕대비(王大妃)로 빈(嬪) 서씨(徐氏)를 왕비(王妃)로 삼고 마침내 인정문(仁政門)에

서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였는데 이르기를 ldquo왕은 말하노라 -후략-

- 대보단에 거둥하여 망위례를 거행할 때의 문로

『영조실록』 61권 21년(1745 을축 청 건륭(乾隆) 10년) 3월 9일(신사) 2번째기사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망위례(望位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영화당

(映花堂)에서 승여(乘輿)를 타고 나왔는데 산선(繖扇)과 시위(侍衛)를 평상시의 의례대로 하였다 조종문(朝

宗門) 밖에 이르러 승여에서 내려 막차(幕次)로 들어 갔다가 얼마 후 다시 나와 승여에서 내려 조종문으로

들어가면서 명하기를 ldquo오위장(五衛將) 이하 당하(堂下) 시위는 모두 삼문(三門) 밖에서 뒤떨어지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중문(中門) 밖에 이르러 임금이 규(圭)를 잡고 동문(東門)을 거쳐 판위(版位)로 들어가 사배례(四拜

禮)를 행하고 동유문(東壝門)으로 들어가 동폐(東陛)를 거쳐 봉심(奉審)하고 다시 판위에 돌아와 희생(犧牲)

을 친히 살폈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황단(皇壇)에 성우(騂牛)를 쓰는 것이 무슨 뜻을 취한 것인가rdquo 하니 승지 오수채(吳

遂采)가 말하기를 ldquo황조(皇朝)에서 화덕(火德)을 숭상했기 때문에 성우를 쓴 것입니다rdquo 하였다 임금이 향

악차(香幄次)에 나아가 대축(大祝)에게 명하여 향축궤(香祝櫃)를 내오게 하고 친히 살폈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향악차가 만약 눈과 비를 맞으면 습기에 젖기가 쉬우니 지금 이후에는 향축을 신실(神室) 안으로 봉안해야

한다rdquo 하고 인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기를 명하였다

- 선정전 어진을 영희전으로 이봉할 때의 문로

『영조실록』 67권 24년(1748 무진 청 건륭(乾隆) 13년) 2월 25일(기묘) 4번째기사

선정전(宣政殿)의 영정(影幀)을 영희전(永禧殿)으로 이안(移安)할 때 전하가 수가(隨駕)하여 출궁(出宮)middot환궁

(還宮)하는 의식은 이러하다【선정전 망전례(望殿禮)와 봉심(奉審) 및 영희전 망전례와 봉심에 대한 의주(儀

註)도 아울러 붙인다】 기일에 앞서 액정서(掖庭署)에서 선정전 동쪽 뜰 아래와 돈례문(敦禮門) 밖 길 동쪽

에다 서쪽을 향하여 소차(小次)를 설치한다 왕세자의 위차는 연영문(延英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하의 망전례(望殿禮) 위차는 전정(殿庭)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자의 위차는

전하의 판위 뒤에 남쪽 가까운 데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의(典儀)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위차를 선

정문 밖에 설치하는데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하고 모두 매 등급마다 위차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쪽

을 향하게 한다 또 전하의 소차를 영희전 대문 안에 설치하고 망전례의 위차는 재전(齋殿) 정문 안에다 동

쪽에 가깝게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위차를 재전의 문밖에 설치하는데 동서

(東西)로 나누어 위차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쪽을 향하게 한다 또 영정을 임시로 봉안할 대차(大次)를 영희

전 신문(神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는데 악차(幄次)는 대차 안에 설치한다【신탑(神榻)을

설치한다】 전하의 입위(立位)는 대차 앞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자가 지영(祗迎)하는 위

차는 흥화문(興化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그날 초엄(初嚴)을 치면 병조에서 제위(諸衛)

를 정돈하여 노부(鹵簿)와 의장(儀仗)을 건명문(建明門) 밖에서 의주(儀註)대로 진설하며 장악원(掌樂院)에서

경현당(景賢堂) 뜰 남쪽 가까이에 북쪽을 향하여 헌현(軒懸)한다【출궁(出宮)할 때에는 진설만 하고 연주하

지않으며 환궁(還宮)할 때는 음악을 연주한다】 종친과 문무 백관은 모두 조방(朝房)에 모여서 각기 흑단령

(黑團領)을 입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은 연(輦)을 숭현문(崇賢門) 밖에다 대고 여(輿)를 합문(閤門) 밖에다

댄다 이엄(二嚴)을 치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모두 흥화문(興化門) 밖에 있는 시립위(侍立位)로 나아간다 왕

세자가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서 여(輿)를 타고 흥화문 밖으로 나아가 위차로 들어가면

여러 호위하는 관원들은 각기 해당되는 옷을 입고 모두 합문 밖으로 나아가 기다린다 좌통례가 합문 밖으

로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이 되었음을 계청한다 삼엄(三嚴)을 쳐서 북소리가 그치면 내외(內外)의 문을

열며 좌통례가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뢴다 전하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나가며 산선(산

扇)middot시위(侍衛)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좌통례가 앞에서 인도하고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이 보(寶)를 받들고

앞서서 간다【연(輦)에 타기를 기다려 보(寶)를 말에다 싣는다】 어가(御駕)가 숭현문 밖에 이르러 좌통례

가 꿇어앉아 여(輿)에서 내려 연(輦)을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려 연을 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한다 어가(御駕)가 움직이면【고취(鼓吹)는 진설만하고 연주하지 않는다】 좌통례middot우통례

가 앞에서 인도하고 찬의(贊儀) 2인이 통례의 앞에 있는데 장위(仗衛)와 도종(導從)은 보통의 의례와 같다

어가가 흥화문 밖에 이르면 왕세자가 위차에서 나와 몸을 굽히는데 지나가고 나면 평신하고 이어 연(輦)을

타고 어가를 따른다 어가가 시신(侍臣)들의 상마소(上馬所)에 이르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어가가 조금 머물

러 시신들로 하여금 말을 타게 할 것을 계청하고 뒤이어 시신들에게 말을 타라고 외친다 찬의가 전창(傳唱)

하여 시신들이 모두 말을 타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한다 어가가 움직이면 종친과 문무 백

관이 몸을 굽혀 지영(祗迎)하고 왕세자가 이를 적에도 몸을 굽히는데 지나가고 나면 평신하며 순차에 따라

시위한다 어가가 창덕궁 돈화문 밖에 있는 시신의 하마소(下馬所)에 이르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어가가 조금

머물러 시신들로 하여금 말에서 내리게 할 것을 계청하는데 시위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하면 돈화문 동협(東夾)을 거쳐 들어간다 어가가 숙장문(肅章門) 밖 강련소(降輦所)에 이

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연에서 내려 여를 탄다 좌통례

가 앞에서 인도하여 선정문 밖 강여소(降輿所)에 이르러【시신은 이에 물러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

(輿)에서 내릴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린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돈례문(敦禮門) 밖에

이르러 소차(小次)로 들어가면【돈화문에서 돈례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협(東夾)을 경유하는데 이 뒤도 이

와 같다】 산선과 시위는 선정문 밖에 정지한다 왕세자가 창덕궁 돈화문 밖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려 여

(輿)를 타고 서협(西夾)을 거쳐 들어가는데 연영문 밖에 이르러 여에서 내려 소차로 들어간다【돈화문에서

돈례문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서협(西夾)을 경유한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해엄(解嚴)할 것을 계청하면 병조

에서 전교(傳敎)를 받들어 의장(儀仗)을 푼다 인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인도하는데 그대로 흑단령을 갖추

고 선정문 밖 위차로 들어간다 왕세자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위차로 들어가면 좌통례가 소차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소차에서 나올 것을 계청한다 전하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나오면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망전례(望殿禮)의 위차에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선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할 것을 아뢰면 전하가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하고 왕세자도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하고 일어나 평신하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도 같다【찬의도 같다】 끝나고 나면 인의

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나누어 인도하여 나온다 전하가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왕세자도 따라 들어가는데

영정을 봉심할 때에는 승지middot사관middot궁관과 도감 당상 각 1원(員)이 시입(侍入)한다【통례와 상례는 계단 아래

에 정지한다】 봉심을 마치고 나면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도로 소차로 들어가고 왕세자도 따라

나와서 소차로 들어간다 영정을 장축(粧軸)할 때 전하가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승지middot사관과 도감의 당상(堂

上)middot도청(都廳)이 함께 흑단령 차림으로 시입(侍入)하는데 장축을 봉심하고 표제(標題)를 첩부(貼付)하고서

끝낸다 첨배(瞻拜)할 때에는 도감 당상과 종친middot의빈middot문무관 정2품 이상이 함께 흑단령 차림으로 선정문 밖

의 위차로 들어가며 전하와 왕세자도 이어서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전정(殿庭)의 판위(版位)로 나아가는

데 의주(儀註)대로 행례(行禮)한다【첨배의(瞻拜儀)에 기재되어있다】 이를 끝마치고 나면 전하는 소차로

들어가고 왕세자는 그날로 환궁하는데 의주대로 한다【왕세자 환궁의에 기재되어 있다】 다음날 동가(動

駕)를 고하는 제사를 지낼 때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이 먼저 위차로 나아가면 전하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판위로 들어가 의주대로 행례(行禮)한다【동가(動駕)를 고하는 제사를 친행하는 의주(儀註)에 기재되어 있

다】 이를 끝마치고 나서 영정 1본을 안의 진전(眞殿)에 봉안한 뒤에 전하가 도로 소차로 들어간다 선정전

의 영정을 영희전에 봉안할 때에는 초엄(初嚴)이 치면 병조에서 장위(仗衛)middot노부(鹵簿)를 진선문(進善門) 밖

에 진설하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은 연(輦)을 진선문 밖에다 대고 여(輿)를 인정전(仁政殿) 동쪽 뜰 아래에

다 댄다 이엄(二嚴)을 치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각기 조복(朝服)을 입고【4품 이상은 조복을 입고 5품이하

는 흑단령을 입는다】 돈화문 밖의 시립위(侍立位)로 나아가며 여러 호위하는 관원들도 함께 인화문(仁和

門) 밖으로 나아가 기다리는데 좌통례가 소차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임을 계청한다 삼엄(三嚴)

을 쳐서 북소리가 그치면 내외의 문을 여는데 좌통례가 꿇어앉아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뢰면 전하가 면복을

갖추고 나온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

가 그 규를 잡는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대축(大祝)이 영정궤(影幀櫃)

를 신여(神輿)에 봉안하고서 인화문을 경유하여 나온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걸어서 신여를 따

라 인정전 월대(月臺) 위에 이르러 대축이 영정을 신련(神輦)에 봉안하고【고취(鼓吹)를 울린다】 인정문

(仁政門)을 경유하여 나온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인정전 동쪽 뜰 밑에 있는 승여소(乘輿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圭)를 놓고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그 규를

받는다 좌통례가 여를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를 타며 인정문 동협(東夾)을 경유하여 진선문 동협 밖

승련소(乘輦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려 연을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려 연을

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가 규를 잡

는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하고 산선(繖扇)middot시위(侍衛)는 보통의 의례와 같게 한다 대가(大

駕)가 돈화문 동협(東夾)을 거쳐 나아가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은 신련(神輦)이 이르면 몸을 굽혔다가 지나

가면 평신하고 대가가 이르면 몸을 굽혔다가 지나가면 평신한 다음 순차에 따라 시위한다 대가가 영희전

(永禧殿) 대문 밖 강련소(降輦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를 놓고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받는다 -영희전 부분 후략-

- 대보단에 향을 친히 전하는 문로

『영조실록』 26년 3월 5일 (무신) 원본1054책탈초본57책(56) 1750년 乾隆(淸高宗) 15

乾隆十五年庚午三月初五日辰時 上具冕服 出御映花堂前庭親傳香繖扇侍衛如常儀行都

承旨南泰良 左承旨李普昱 右承旨洪益三 左副承旨李益輔 右副承旨趙載敏 記事官南鶴老middot崔

台衡middot李宜哲middot金聖佑入侍益三奉進香祝上塡祝着押如禮 仍展覽祝文而敎曰 此乃常用祝文

乎 益三曰 然矣上曰 都承旨進來泰良進伏上曰 祝文中神考毅廟等字 似皆上行書之

而今皆不上之矣泰良曰 有太祖第一位 故壓尊而不得上矣上曰 永禧殿祝文亦如此例乎 頃

日親享時 魚錫胤爲大祝 必知之矣仍命錫胤進來下詢錫胤曰 臣於倉卒中 未能詳細記得

矣上祗傳香祝益三跪奉以出 安于香亭上以步輦 由集成門入齋室 少頃 由朝宗門詣版位

行望位禮 由冽泉升壇奉審 仍省器 又於冽泉門外省牲訖 還入齋室諸臣遂退出

- 대행왕비의 발인시 왕의 문로

『영조실록』 89권 33년(1757 정축 청 건륭(乾隆) 22년) 6월 3일(계해) 1번째기사

대행 왕비의 발인(發靷)에 임금이 단양문(端陽門) 밖에 나아가 대여(大轝)를 바라보며 곡(哭)하고 인해서 대

여를 따라 숙장문(肅章門) 밖에 나아가 두 번 절한 다음 곡하면서 전송하고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적체(敵體)의 의리는 매우 중대한 것이다 지금 내가 최복(衰服)을 입었으므로 대궐 안에서 곡하

며 전송하였지만 평상시의 경우는 대궐 밖에서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뜻을 《상례보편(喪禮補編)》에다

기재하도록 하고 또 정축년에 처음으로 시행한 까닭을 주석(註釋)으로 달도록 하라rdquo 하였다

- 선원전과 경복전 봉심 문로

『승정원일기』 영조 36년 3월 17일(임술) 원본1179책탈초본65책 (1720) 1760년 乾隆

(淸高宗) 25년

李永暉 以戶曹言啓曰 傳敎內景福殿與月郞 及眞殿及報春門外齋室 戶工曹堂上 每於季春奉審 可以修補者修補

墻垣頹圮處 椽木腐朽處 待守直中官所報 該曹草記 郞廳監蕫 卽爲修補 而事係正殿 則堂郞眼同擧行 於義本宮

亦依此例擧行事 命下矣參議臣金選慶 與正郞鄭一祥 工曹參判臣朴相德 正郞臣金鍾卨 進詣奉審 則於義本宮 姑

無修改處 而景福殿西邊芳春門一隻下莫只破傷 憶昔樓北邊椽木一箇 要家南邊椽木三箇 椽含一箇 平交臺一箇腐傷

蓋瓦脫落 西月廊椽木一箇腐傷 窓差備要家椽木一箇 永慕堂南行閣抹樓二間 同歸機一 廳板一立腐傷 之介一隻獨

窓一隻 無廣窓一隻破傷 南墻一間蓋瓦脫落 司鑰房抹樓歸機一箇腐傷 廳板一立 無土壁一面崩頹 四面墻垣 四間蓋

瓦庫庫脫落 別監房椽木十八箇 朴工二立腐破 獨窓二隻 之介二隻無 西邊墻垣三間崩頹 兩墻間墻垣十二間 蓋瓦庫

庫脫落 五間蓋瓦全無 報春門齋室椽木九箇 椽含一箇 平交臺一箇腐傷 仰土庫庫剝落 內外土壁剝落 萬福門外中間

傾側 朴工一立 倍防一箇 龍脂板二腐傷 蓋瓦脫落 東南墻六間蓋瓦庫庫脫落 齋室前行閣五間退 五間內二間退五間

頹壓 而材瓦全無 餘存三間材木腐傷 蓋瓦折半脫落 西南墻五間蓋瓦庫庫脫落 故分付各該司 使之修改 而亦令本曹

郞廳 監蕫擧行 何如 傳曰 允

- 황단 친제할 때 문로

『승정원일기』 영조 45년 8월 15일(갑자) 원본1295책탈초본72책(1010)1769년 乾隆(淸

高宗) 34년

己丑八月十五日寅時 上詣昌德宮入侍時 行都承旨金應淳 左承旨尹東昇 右承旨閔弘烈 左副承旨朴弼逵

右副承旨徐命善 同副承旨洪述海 假注書崔命麟middot尹弼秉 記事官鄭弘德middot李福徽 以次隨駕訖上具翼善冠middot衮龍

袍 以乘輿 出通陽門middot延和門外 降輿乘輦 藥房都提調金陽澤 提調韓光會 持湯劑進伏訖陽澤曰 夜間聖體

若何 上曰 一樣矣上進湯劑 命召香室守僕 驪陽府院君閔 海豐府夫人李氏middot恩城府夫人宋氏middot豐昌府夫人趙

氏middot慶恩府院君金middot嘉林府夫人趙氏 贈領議政崔 贈貞敬夫人洪氏 一體致祭事 分付上入昌德宮於進善門外降輦

以步輦 入進善門下 問于金應淳曰 彗星光芒及尾之長短 比前何如 應淳曰 光芒則似減 而尾迹則一樣矣上

曰 其退速 則漸値太陽而消散乎 應淳曰 妖不勝德 自然消滅矣下敎曰 吏middot戶房 兵middot刑房 依前相煥出駕

前下敎 上入萬安門 辰時 上以步輿 由追慕堂北墻外 詣奉審 金應淳啓曰 通禮未卽待令 推考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又傳曰 當日內行禮 百官行禮 置之上降輿于皇壇外 步入冽泉門神室前 行四拜禮 由東階

上 奉審神室 又上皇壇 奉審四隅而降 步履强健 挾侍落後 諸臣莫不瞻仰慶忭上還出冽泉門 奉審齋室 乘

步輦 還至金化門北西向四間閣前住輿 命尹東昇 讀御製懸板 至年月日 工曹參判金致仁奉敎書上曰 不覺其

間年數之多矣 命書記上至金化門內 命承旨知入 門名及右墻內三間閣 爲何閣 承旨還奏曰 門名金化 閣則

故中日廳矣上曰 予爲摠管時 由此門入直事如昨 居然爲幾年乎 上 至弘化門內乘輿鼓吹 下敎曰 毓祥宮歷

臨時 前後廂軍 道上留駐出駕前下敎 又下敎曰 禮房承旨 靈壽閣奉審以奏出駕前下敎 又下敎曰 禮房承旨

馳往養正齋 奉審以來出駕前下敎 又下敎曰 還宮時刻 待下敎 單子置之出駕前下敎 承旨閔弘烈奉審後復

命上詣毓祥宮內 住步輦 命入皇壇回駕時 御製承旨讀訖讀書以下 上 出毓祥宮入侍時下敎曰 後日擧動

時 雲劍依例望入出駕前下敎 上命應淳 書御製時 上曰 予今日行步 無甚艱澁 奉審皇壇時 中官落後矣應

淳曰 此非但心存誠敬之工 亦可觀 勝於前日矣金陽澤進前問候後 進湯劑酉時 上還宮於延和門外降輦陽

澤曰 動駕之餘 聖體若何 上曰 一樣矣進湯劑訖 上還宮後 諸臣以次退出

- 선원전 어진을 영희전으로 이봉할 때의 문로

『정조실록』 6권 2년(1778 무술 청 건륭(乾隆) 43년) 7월 11일(무술) 1번째기사

영종(英宗)의 어진(御眞)을 영희전 제5실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선화문(宣化門)으로 나아가서 선원전(璿源殿)에 들어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도로 만안

문(萬安門) 밖의 소차(小次)에 나아가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선원전의 제2실로 올라 나아가 갑자년1366)

의 어진(御眞)인 면복본(冕服本)을 신여(神轝)에 봉안하고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 어진을 받들어 신탑(神

榻) 위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탑전(榻前)에 나아가 손수 받들어 편 다음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도로 소

차에 나아가 원유관에 강사포를 고쳐 입고 양지당에 나아가 어진궤(御眞櫃)를 신여(神轝)에 봉안하니 도감

(都監)의 당상과 낭청이 신여를 모시고 만안문으로 나아가 신련(神輦)에 옮겨 봉안하고 인정문(仁政門)을 거

쳐 나갔다 임금이 걸어서 인정전 월대(月臺) 아래에 나아가 여(輿)를 타고 인정문을 나가서 여에서 내려 연

(輦)을 탔다 돈화문(敦化門)을 거쳐 영희전에 나아가 홍살문 밖에서 연에서 내려 여를 탔다 재전(齋殿)에

들어가서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신문(神門) 밖에 나아가 사배례를 행하였다 전(殿) 안으로 나아가니 김

상철(金尙喆) 등이 어진을 제5실에 봉안하였다 작헌례를 행하고 환궁(還宮)하였다 도감의 당상과 낭청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으며 대축(大祝) 윤숙(尹塾)middot이진형(李鎭衡)에게는 가자(加資)하였다 이조에서 윤

숙은 준직(準職)을 거치지 않았다고 아뢰었으나 특별히 가자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 선원전 전배 문로

『승정원일기』 정조 13년 12월 28일 (기묘) 원본1670책탈초본88책 (3132) 1789년 乾

隆(淸高宗) 54년

己酉十二月二十八日卯時 上詣眞殿展拜入侍時 行左承旨洪明浩 右承旨趙衍德 左副承旨曺遠振 右副承

旨申耆 同副承旨洪仁浩 假注書沈能迪middot洪樂游 記注官趙慶遠middot金鳳顯 檢校直閣李晩秀 待敎金祖淳 以次侍

立上具翼善冠middot衮龍袍 乘輿 出協陽門 由肅章門middot仁政門 至萬安門降輿 入眞殿展拜後 上曰 簾帳修改所入

戶工判 領率該色郞廳及工匠等 入侍 可也賤臣承命出傳 與戶曹判書金履素 工曹判書邊得讓 戶曹正郞李周

憲 偕入訖上曰 禮判望筒 卽爲擬入 待下批先進參後 謝恩之意 分付 可也賤臣承命出傳上曰 禮判牌

去來催促 使之卽爲進參 可也賤臣承命出 與禮曹判書徐有隣 偕入訖命仁浩書傳敎曰 歲前當展拜 而除夕

齋宿相値 今日眞殿修改 日勢差早 當由便道 展拜景慕宮 該房知悉修改罷後 上出萬安門 乘輿 由仁政門middot

肅章門middot建陽門middot銅龍門middot景光門 出弘化門 入逌瞻門 至齋室降輿上曰 都提調middot提調 先詣文禧廟之意 傳諭 可

也賤臣承命出傳上曰 文禧廟歷臨出駕前下敎 上展拜訖乘輿 出逌瞻門 入弘化門 由景光門middot銅龍門middot建

陽門middot肅章門middot進善門 出敦化門 由備邊司middot觀象監峴 至文禧廟 降輿 入廟 行奠酌礼訖仍詣儀嬪廟行奠酌禮後

乘輿 出廟門 由觀象監峴middot備邊司 至敦化門 下標信解嚴 由進善門middot肅章門middot協陽門 入宣化門 還內

- 관풍각에 간경하러 거둥하는 문로

『승정원일기』 순조 11년 윤3월 14일(임진) 원본1996책탈초본105책(2121) 1811년 嘉

慶(淸仁宗) 16년

辛未閏三月十四日午時 上御觀豐閣看耕時 諸承旨及入直玉堂middot閣臣同爲入侍時 行都承旨洪義浩 右副承旨申

絅 同副承旨徐俊輔 假注書朴來謙middot洪羲祖 記注官金初燮 記事官朴齊聞 直提學洪奭周 應敎李志淵 修撰徐長

輔 以次進伏訖 上曰 今日看耕 故使之入侍矣 上曰 農圃擧行 斯速爲之 上曰 闕外入直文蔭 昨日試

取 闕內入直文臣 前旣應製 而闕內入直蔭官 姑未應製矣 闕內入直蔭官 凡幾司乎 義浩曰 尙瑞院middot尙衣院middot

司饔院middot典設司矣 上命書傳敎曰 闕內入直文臣 前已應製 而蔭官不爲應製 今日適因入侍 使之同爲待令上

曰 試官則閣臣及同副承旨middot上番玉堂middot下番翰林爲之上乘肩輿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隨後 仍由石渠門middot魚水堂middot

淸防閣middot珍藏閣middot尊德亭前路 入望春亭 御天香閣 少頃 命入侍 諸臣以次進伏訖 上曰 應製蔭官已待令乎

義浩曰 姑未及來待 而檢書官亦是入直蔭官 使之同爲待令 何如 上可之 上曰 應製人催促入來 可也 來

謙承命出去 上曰 公事待令乎 義浩曰 待于靑陽門外矣 上曰 懸題紙 磨墨器 持入 可也 賤臣承命出

來 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少退 仍爲隨後 上乘肩輿 出望春亭 還由暎花堂前路middot宜春門middot芙蓉亭邊拱辰門middot集成

門 御籠山亭 少頃 命入侍 以次進伏訖 上曰 應製人已來待 則使之入來 試官亦下筵 無唱行禮 可也

奭周middot俊輔middot志淵middot齊聞 下筵行禮 還上進伏 上命書御題五言絶句觀豐春耕 押春 限午時 俊輔承書 齊聞立傳

司謁 司謁跪受懸題 上曰 第三人誰也 義浩曰 司饔主簿金照矣 上曰 吏文學官出身乎 義浩曰 然矣

上曰 有文名乎 義浩曰 善於文而尤工於詞律矣 上曰 第一第二第四人皆誰也 義浩曰 尙瑞直長金昊淳 尙

衣直長金義友 檢書官柳本藝矣 上曰 公事持入 可也 來謙承命出去 持入 上曰 讀之 俊輔讀公事訖

傳挾侍以上 上下前入公事敎曰 都承旨middot同副承旨輪回讀奏 義浩middot俊輔讀公事訖 上曰 應製人幾皆製之 則以

次呈券 而上番兼史爲收券官 司謁爲衛軍樣擧行 可也 上曰 科次爲之 奭周曰 當取幾人耶 上曰 取一

人 奭周曰 一券不書臣謹封 違格拔去矣 上曰 違格則推考乎 奭周曰 文臣製述則有外違罷職之規 而應製

則無推考之例矣 奭周書三下於一券 俊輔坼名讀奏 上命書傳敎曰 禁直蔭官應製優等 司饔院主簿金照 奎

章全韻中板部賜給 上曰 向來禁直文臣應製 以大小板分等賜給 蔭官亦欲區別 故書下中板 而若無中板 則

以印紙之長廣闊狹區別 好矣 昨日闕外入直文蔭應製 有兒馬帖之賞 冊子之賞 勝於馬帖乎 義浩曰 馬帖則

重於冊子 而領受者之榮光 冊子勝於馬帖矣 左副承旨申溆 宗廟middot景慕宮奉審摘奸後入來 進前奏曰 臣承命馳

詣宗廟尊所 奉審無頉 祭物middot祭器middot祭井 看審精潔 諸執事middot進排官 摘奸無頉 仍詣景慕宮尊所 奉審無頉 祭物middot

祭器middot祭井 看審精潔 諸執事middot進排官 摘奸無頉矣 上曰 移御時 王大妃殿middot惠慶宮middot嘉順宮陪從官過祗迎所時

馬上鞠躬 中宮殿middot元子陪從官過祗迎所時 下馬事 預爲知委 可也 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隨後 到暎花堂 當宣

飯也 上乘肩輿 由望春middot尊德亭前路middot集春門內麓middot觀豐閣前路 御暎花堂 諸臣待于丹楓亭 少選 以司謁宣

飯訖 上乘朱軒 由靑陽門middot永淸門middot賓陽門middot涵仁亭前路middot重春門middot小宙合樓前路 至熙政堂 上命退 諸臣以次退

- 왕세자가 성균관 입학하러 가는 길과 문

『순조실록』 20권 17년(1817 정축 청 가경(嘉慶) 22년) 3월 11일(갑인) 1번째기사

왕세자가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고 이어 입학례를 행하였다【세자가 쌍동계(雙童髻)middot공정책(空

頂幘)middot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수레에 올라 이극문(貳極門)을 나서 홍화문(弘化門)에 이르러 동협문(東挾門)

으로 해서 나와 수레에서 내려 연(輦)을 바꾸어 타고 관현(館峴)을 거쳐 문묘의 동문 밖에 이르러 연에서 내

려 편차(便次)에 들었다 작헌례를 행할 때가 되자 세자가 학생복으로 갈아입고 편차에서 나오니 겸보덕(兼

輔德)이 앞에서 인도하여 문묘의 동문으로 들어가 자리에 나아가 사배(四拜)하고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갔

다 이윽고 동계(東階)로 해서 올라 신위(神位) 앞에 나아가 삼상향(三上香)하고 잔을 잡고 헌작(獻爵)하였다

다음에는 사성위(四聖位)에 나아가 상향하고 헌작하기를 처음처럼 하였다 (-중략-) 박사가 글을 읽자 세자

도 따라 읽고 박사가 글 뜻을 해석하였다 해석이 끝나자 집사가 서안과 책을 치웠다 보덕이 세자를 인도하

여 서계로 내려와 편차에 들러 공정책과 곤룡포로 갈아입고 연에 올라 관현을 경유하여 홍화문에 이르러 연

에서 내려 수레로 바꾸어 타고 동협문으로 들어와 동룡문(銅龍門)을 지나 이극문으로 들어와 대내(大內)에

들어갔다】

- 경연관과 서연관의 대내 출입 문로 연영문과 동룡문

『순조실록』 21권 18년(1818 무인 청 가경(嘉慶) 23년) 9월 10일(을사) 1번째기사

차대하였다 우의정 남공철이 아뢰기를 ldquo오늘날의 많고 많은 일 중에서 왕세자가 학문의

성취를 먼저 힘쓰는 것보다 급한 일이 없습니다 언행(言行)으로 감화시키는 데서는 숙유(宿

儒)가 가장 좋으며 바르게 기르고 훈도하는 방도에도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

에는 경연관(經筵官)을 경서에 밝고 행실이 스스로 수양된 사람으로써 가까이서부터 초선

(抄選)한 다음 서연관(書筵官)도 그대로 겸하도록 계하(啓下)해서 연영문(延英門)과 동룡문

(銅龍門)의 강석(講席)을 드나들게 한다면 매우 좋겠습니다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주합루와 연경당에 봉안한 어진을 경모궁과 경우궁으로 각각 옮길 때의 문로

『일성록』 헌종 3년(1837) 양력 4월 17일 갑자

강 純宗大王 翼宗大王御眞自宙合樓 演慶堂移安于景慕宮望廟樓 景祐宮 誠一軒時親行祗送

목 初次移安時至卯時 時原任閣臣分承史以下 原任提學 沈象奎 朴宗薰 提學 趙寅永 原任提學 鄭元容 提學 徐

有榘 原任直提學 金鏴 檢校直提學 徐憙淳 直提學 朴永元 原任直閣 徐俊輔 李光文 李嘉愚 金鼎集 吳取善 原

任待敎 李憲瑋 檢校待敎 金興根 趙斗淳 原任待敎 金英淳 檢校待敎 金學性 分承旨 張敎根 徐念淳 趙秉憲 金

東健 分注書 金始淵 洪在龍 史官 申錫愚 徐耆淳 具朝服分詣宙合樓 演慶堂前庭行禮訖閣臣奉純宗大王影幀樻子

安於轝戊辰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 閣臣奉翼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丙戌圖寫一本予具遠遊冠 絳紗袍自內詣宙合樓

神轝奉審乘輿出宜春門詣演慶堂 神轝奉審陞詣堂內奉審後乘輿出金馬門至月覲門內入小次純宗大王影幀神轝將至

予出次祗送翼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祗送訖乘輿還內純宗大王 翼宗大王 神轝以次由月覲門自內詣景慕宮望廟樓戶

外閣臣以次奉出影幀樻子如儀奉安後閣臣以下行禮退出 再次移安時至午時 閣臣奉純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戊辰

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 閣臣奉翼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丙戌圖寫二本庚寅圖寫一本予具遠遊冠 絳紗袍乘輿出拱辰

門至曜金門內入小次純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出次祗送翼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祗送訖乘輿還內純宗大王 翼宗大

王 神轝以次由曜金門自內詣景祐宮 誠一軒戶外閣臣以次奉出影幀樻子如儀奉安後閣臣以下行禮退出奎章閣啓言

純宗大王 御眞戊辰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翼宗大王御眞丙戌圖寫一本奉安于景慕宮望廟樓純宗大王 御眞戊辰圖寫

一本庚寅圖寫一本翼宗大王御眞丙戌圖寫二本庚寅圖寫一本奉安于景祐宮 誠一軒兩廟御製各一件同爲奉安

- 창덕궁에서 종묘에 전알하러 가는 문로

『일성록』 고종 31(1894)년 양력 3월 2일 기묘

강 詣宗廟展謁

목 具翼善冠 袞龍袍乘輿出太和宮門至宗廟 北墻門降輿入齋室展謁時至改具冕服乘輿至東神門降輿詣版位行禮

陞詣第一室奉審次詣各室奉審如儀訖出西神門入永寧殿東神門詣版位行禮陞詣第一室奉審次詣各室奉審如儀

訖還出東神門乘輿至南神門降輿步過還乘輿入齋室少頃出次乘輿出北墻門至長樂門還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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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朝鮮古蹟圖譜』十 1930

『日本之朝鮮』(정성길 편 이민원 감수 『일제가 강점한 조선』 한국영상문화사 2006)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조선왕실의 책』 2002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실의 행사그림과 옛지도』 200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장서각 명품선』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근대건축도면집』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근대건축 도면집-해설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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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재연구소 『창덕궁 금천교 발굴조사보고서』 2002

김귀곤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원유 생태조사보고서(수목 및 식생중심) 1990

문화공보부 『창덕궁 重建報告書』 1987

문화재관리국 『조선조왕국 중요건축물지정조사서(Ⅰ)』 198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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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창덕궁 新璿源殿 수리보고서』 2001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인정전 일곽복원공사 기초조사에 의한 설계설명서』 1992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仁政澱 行閣址 발굴조사보고서』 1995

문화재청 『창덕궁 仁政殿 行閣 중건공사보고서』 1999

문화재청 『창덕궁 奎章閣 舊璿源殿 권역 발굴조사보고서』 2000

문화재청 『창덕궁 半島池 보수 정비공사 준공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상방지 유구조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熙政堂 수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middot종묘원유 조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정자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3

문화재청 『창덕궁 희정당 신관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3

문화재청 『창덕궁 경훈각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4

문화재청창덕궁관리소 『창덕궁 승화루 및 일곽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5

문화재청 『창덕궁 懿老殿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4

문화재청 『창덕궁 인정문 정밀실측조사보고서』 2010

문화재청 『창경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2010

김동욱 『조선후기 궁궐건축의 조영에 관한 연구』 국립문화재연구소 1990

안병찬이강근 외 『궁궐채색기술 특성규명 연구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전상운 『창덕궁 어차 수리 복원 보고서』 2004

중앙문화재연구원 『창덕궁 반도지 시굴조사보고서』 2001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함원전 보수공사』 2005

웹 사이트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httpsjwhistorygokr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e-kyujanggaksnuackr

한국고전종합 DB httpdbitkcorkr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httpyoksaaksackr

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

문화유산에게 소심하게 말걸기 httpwwwcyworldcomangayo

Page 4: 조선왕실의 건축, 창덕궁 학술연구 · 2012. 5. 15. · 연구책임자: 이강근(한국건축역사학회 이사) 공동연구원: 이혜원(한국전통문화학교

마 인정전 단청의 문양 특성

6 창덕궁 궁역 궁성 궁성문 궁장문 문로

가 궁역

나 궁성문과 궁장문

다 문로

lt부록gt

Ⅰ 연구의 목적

국립고궁박물관이 창덕궁을 주제로 한 전시를 앞둔 시점에서 창덕궁에 대한 기초 사료의

집성과 창덕궁 연구의 새로운 바탕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 연구 용역을 발주한 것으로 이해

하였다 창덕궁에 대한 이제까지의 연구에서도 사료의 검증을 통하여 창덕궁의 시간적 공간

적 변천 과정을 구명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조선전기까지의 창덕궁에 대해서는 조선왕조

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은 한정된 사료에 의지하여 원래의 모습을 추정해 왔지만 조

선후기의 창덕궁에 대해서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사료가 대거 남아있고 동궐도나

동궐도형과 같은 시각 자료 또한 남아 있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시공간적 변천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헌사료가 원문 상태로 소장처에만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구자의

접근이 어려웠고 그런 탓에 사료의 내용이 연구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였다 최근에 이르

러 관찬 사서나 의궤 같은 귀중한 사료는 물론 개인 문집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전자문서화

되어 인터넷상에서 검색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를 활용하여 창덕궁에 대한 이해 또한 확

대 심화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또 최근에 학계에 처음으로 종합 소개된 장서각 소

장 창덕궁 관련 도면 자료는 20세기 전반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자행된 창덕궁의 훼손

과 개조 과정을 담고 있어서 대한제국 멸망 이후의 변천상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렇듯 달라진 여건 아래서 창덕궁에 대한 기존의 콘텐츠를 능가하는 새로운 콘텐츠의 개

발과 구축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창덕궁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 전시에도 새로운 콘텐츠를

활용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동안 문화재청의 다대한 복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창덕

궁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으로 개조된 모습 위에 부분적인 복원이 이루어진 어정쩡

한 상태이다 창덕궁의 원형과 변형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Ⅱ 연구의 내용

1 창덕궁의 역사

가 조선 전기

1) 太宗代의 창건

(1) 離宮 건립의 동기

조선왕조의 수도 한성의 중심은 정궁인 경복궁이었으며 도성 안의 모든 시설은 경복궁

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배치되었다 新都의 경영을 맡았던 사람 가운데 아무도 한성 안에 궁

궐을 하나 더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태종이 한성 주변의 母岳과 한

성을 비교한 결과 한성으로 환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나서도 정궁인 경복궁

에 들어가지 않고 따로이 새로운 궁궐을 건설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 도성 안에 그

것도 정궁으로부터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lsquo離宮rsquo이란 미명하에 새로운 궁궐을 지은 태종의

숨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궁궐이 정치의 중심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궁궐 앞에 수많은 政廳과 官廳이 마

련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설은 물론 정궁 남쪽대로 좌우에 도열하는 것이 고대국가 이

래의 오랜 전통이다 그런데 이궁이라 하면 정궁에서의 정치를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 天災

地變으로 정궁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을 지속하기에는 백성들에게 미안한 경우 등에만 잠시

정궁을 피해 있기 위하여 즉 避宮하기 위하여 지은 궁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궁 앞에는 정

청이나 관청을 마련할 필요가 전혀 없다

정궁인 경복궁을 피하여 잠시 거처하기 위하여 새로운 궁을 지었다면 이는 이궁의 본래

용도에 합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피궁할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 왕실과 가

까운 관계에 있는 관료나 친인척의 집을 피궁 장소로 삼을 수는 있으나 이는 장구한 계책이

될 수 없으므로 어차피 이궁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시설이었다 그러나 이궁 건설 시기

를 하필이면 한성 환도 시점으로 정한 데는 특정한 이유가 있었다

즉 태종의 왕위 계승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던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태

종이 lsquo왕자의 난rsquo을 두 차례 겪고 겨우 왕위에 올랐을 때 수도는 개경이었다 혼란기의 정치

상황을 마무리하고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難題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경을 떠날 수밖에 없

었다 또 한성으로 환도하는 마당에 骨肉相殘의 비극이 얽힌 경복궁으로의 入宮을 피하려면

새로운 궁궐이 필요했다 이 시기에 집권 관료층의 관심을 천도와 새로운 궁궐 조성에로 돌

려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목적과 흉흉해진 민심을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하여 바로잡으려

는 정치적 의도도 작용하였다

그 결과 lsquo이궁rsquo이란 이름의 궁궐을 도성 안에 하나 더 지음으로써 왕권의 현실적 기반을

공간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단순히 피궁하기 위하여 이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이궁이 지어짐으로써 한성의 북반부는 이궁과 정궁 두 개의 궁궐이 각각 응봉

과 백악을 배경으로 위세를 갖추어 동서로 布陣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1405년에 이궁이 완

성되자 곧 1406년에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1411년에 명당수를 끌어들이고 御構를

팠으며 1412년에는 원래 있던 작은 누각을 헐고 경회루와 연못을 대규모로 조성하여 아름

다운 경관을 조성하여 중국 사신의 접대에 대비하도록 한 사실 등을 보더라도 태종이 경복

궁을 꺼려서 거처하지 않으려고 이궁을 지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태종이 왕권강화를 최대의 정치적 목적으로 삼아 외척세력과 공신세력마저 완전히 제거

한 다음 왕-의정부-육조의 國政體裁를 왕-육조의 直啓制로 전환시켜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

게 강화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에도

창덕궁 바로 곁에 수강궁을 짓고 거처하며 여전히 병권을 장악한 채 도성 안 여러 곳에 수

많은 이궁을 건설하였다는 사실은 창덕궁을 창건한 이유가 비단 경복궁이 싫어서만은 아니

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1)

(2) 창건 과정

창덕궁의 창건은 한성으로 환도할 것을 결정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맨 먼저 1404년

10월 6일에 당시의 향교동 응봉 자락 아래로 터를 정하고 이날로부터 공사에 착수하였다

lsquo離宮造成都監rsquo이 조직되고2) 도감의 우두머리인 提調 李稷의 설계와 감독 수많은 工匠군

인승려백성 등의 賦役 노동에 힘입어 착공된 지 1년만인 1405년 10월에 드디어 新宮이

낙성되었다 태종은 낙성되기 10여 일 전에 서둘러 개경으로부터 환도하여 領議政府使 趙浚

(1346~1405)의 집에 마물다가 10월 20일에 입궁하여 성대한 落成宴을 베풀었다 이때 낙성

된 건물은 왕 부부의 침전 일곽과 정전편전 등 외전 일곽뿐이었다 신궁에서 펼쳐질 새로

운 정치를 보좌할 관청들은 경복궁 앞에 지어져 있던 건물들을 수리하여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으며 1405년 8월에 관청 건물과 관원들의 주택을 수리하는 일에는 강원도와 충청도의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신궁에서 정치활동이 시작된 이후에도 공사는 계속되었다 즉 1406년에는 眞殿인 仁昭

殿(태조와 태조비 신의왕후의 신주를 모신 건물)과 佛堂을 후원 지역에 지었고3) 누각(廣延

樓) 1408년에는 연못 1411년에 정자(解溫亭 14년 6월에 愼獨齋로 개칭)가 조성되었는데

누각은 왕이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풀 수 있도록 휴식하거나 신하들과 연회를 열어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정자는 홀로 휴식과 사색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조성되었

또 1408년에는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비빈과 후궁들로 하여금 양잠의 중요성을 알도록

일깨우고 1410년에는 지형에 맞추어 소나무를 심어 궁원의 풍광을 아름답게 가꾸었다 1411

년에는 누각과 침실(세조 7년에 누각은 澄光樓 침실은 凝福亭玉華堂 등으로 명명됨)을 더

만들고 진선문밖에 돌다리를 조성하였다고 하며 1412년 5월에는 궐문인 돈화문을 세우고

1413년 1월에는 闕門 어귀에 下馬標木을 세워서 왕과 신하의 차별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같

은 시기에 종을 주조하여 궐문인 돈화문에 걸었다4)

이렇듯 왕궁의 체재를 갖추고 태종 5년 이후 중심적인 정치의 장으로서 역할을 다한 창

1) 태종은 태상왕과 상왕의 거처로 덕수궁과 인덕궁을 각각 지어 바쳤으며 아홉 곳의 이궁을 도성 안팎에 건설

하여 거처를 옮겨 가면서 살았다 이 가운데 避災를 위하여 지은 이궁은 餘慶坊本宮이었다(『서울 六百年

史』第一卷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 219~226쪽 참조)

2)『太宗實錄』권8 태종 4년 9월 辛亥條 성석린조준 등 집권 관료들이 lsquoldquo경복궁이 있는데 따로 이궁을 세우는

것은 불가하다rdquo고 반대하자 도감의 명칭을 lsquo宮闕修補都監rsquo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무마책이었을

뿐 이궁 조성 공사는 곧 강행되었다

3) 『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63 187~188쪽

4) 敦化門鐘銘은 1412년 9월에 변계량이 지었는데 『태종실록』에 게재되어 있으며『新增東國輿地勝覽』에 경

복궁광화문종명으로 잘못 소개되어 있다 이 점은『서울 六百年史』第一卷 210쪽 주 42)에서 金龍國이 일찍

이 지적해 놓았다

덕궁은 핵심적인 정치 장소인 인정전 일곽이 정치의 장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

유로 대대적으로 수리된다 이때는 태종이 세종에게 선양한 왕권 교체기인 1418년 6월부터

8월 사이에 해당되는데 부실공사로 회랑 일부가 무너지자 감독 책임자인 박자청이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때 공사를 담당한 목수 吳德海의 이름이 실록에 남아 전한다

(3) 창건 창덕궁의 건축적 성격

1405년 10월에 낙성된 건물의 구성과 규모는 『태종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5)

이 기사 내용을 토대로 창건 창덕궁의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왕실 일가의 생활공간인 內殿 일곽은 正寢廳과 좌우의 침전 등 3침전을 중앙에

두고 사방을 행랑으로 빙 둘러막은 中庭式 배치법을 따르고 있는데 정침청과 양 옆 침전

정침청과 남쪽 행랑 사이는 개방형 복도(穿廊)를 두어 연결하고 있다6) 北行廊이 11칸이고

東西行廊이 각 15칸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침전 일곽은 폭 11칸에 깊이 15칸인 縱深形 공간

형태를 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행랑의 쓰임새에 대해서는 북행랑과 접한 서행랑 부분

에 3칸 짜리 별실을 두고 동행랑에 樓와 庫를 각각 3칸씩 두었다고 하였을뿐 나머지 부분

의 용도는 밝히지 않았다 이밖에 침전 주변에는 수라간(왕과 왕비의 수라를 준비하던 곳)

司饔房 湯子洗手間 등이 마련되어서 왕실 일가의 사생활을 도울 수 있게 하였다

둘째 정치의 장인 治朝 구역은 正殿便殿報平廳 등으로 이루어졌다7) 이 가운데 정

전은 2층으로 쌓은 넓고(가로 63자 세로 33자) 높은(아래층 4자 1치 위층 3자 5치) 월대 위

에 세워졌으며8) 행랑으로 둘러싸인 정전 둘레의 마당 즉 朝廷은 폭이 크고 깊이가 얕은 횡

축형 공간형태(가로 156자 세로 117자)를 택하고 있었다 정전 앞 마당에서 행해지는 朝會

나 朝賀 등 대규모 儀禮를 생각할 때 또 品等에 따른 자리가 縱軸 방향으로 배열됨을 고려

할 때 창덕궁 정전 앞 조정은 쓰임새를 잘 고려한 형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창건된 지

13년만인 1418년에 정전 일곽을 모두 헐고 새로 짓는 개건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이때 정전은

원래 자리보다 국면이 조금 넓은 서쪽으로 옮겨 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9)

5)『太宗實錄』 卷 10 太宗 5年 5月 辛巳

6) 창건 당초 창덕궁의 침전 형식에 대하여 ldquo어간 3간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로 볼 수 있는 침전이 각 2간인

형식rdquo 즉 정면 7칸인 건물로 해석한 견해도 있다 (김동욱 「17세기 조선조 궁궐 內殿건물의 室內構成에 관

한 연구」『大韓建築學會論文集』1992년 10월호 88쪽) 세조 7년에 건물 이름을 명명할 때 침전을 兩儀殿

좌우 침실을 麗日殿과 淨月殿으로 정했다는 기사는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준다

7) 편전 이외에 보평청이 있었다고 하나 어디에 있었는지 그 역할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름은 무어라고 명

명되었는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편전이 朝啓廳으로 불리며 思政殿으로 명명

된 사실을 고려할 때 혹시 편전은 朝啓(상참의식이 끝난 뒤 계문할 관원들과 史官이 함께 편전 안에 들어가

俯伏하고 차례로 용건을 말하는 정규회의)할 때만 쓰이고 보평청은 常參(약식 조회로서 매일 대신중신중요

아문의 당상관승지사관 등이 副殿에서 常服 차림으로 왕을 朝謁하던 정규 행사)에만 쓰인 것이 아닐까 추측

된다

8) 정전 월대가 폭 63자 깊이 방향 33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월대의 형태는 경복궁 근정전 월대처럼

정전 주변을 고루 두른 형식이 아니라 현재의 창덕궁 인정전 월대와 같은 모습 즉 건물 앞쪽만 길게 내민 형

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9) 『昌德宮』 -한국전통건축 제2집- 대한건축사협회 1994 41쪽 및 『太宗實錄』 太宗 17년 윤5월 정묘조

태종 18년 6월 계사조 동년 7월 갑진계축을묘조 『世宗實錄』 世宗 즉위년 9월 정사경신조 등 참조 또

등고선이 표기되어 있는 창덕궁배치도 참조

셋째 정전과 편전으로 이루어진 치조 일곽 가까이에는 왕의 통치를 측근에서 보좌할

여러 관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낙성 당일의 기사에는 정전 동행랑에 자리잡은 승정원

청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어서10) 태종대에는 『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간행)에 실려

있는 몇몇 관청조차도 갖추어지지 않았던 것같다11) 승정원 이외에도 궐 안에 있어야 할 관

청은 많았을 테지만 대부분 경복궁에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불편하지만 관리들이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업무를 처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405년에 서둘러 낙성된 창덕궁에 태종이 줄곧 머물러 있게 되자 이후에는 누각(廣延

樓와 澄光樓)과 침실 및 연못을 조성하고 후원에 소나무를 심고 정자를 세우는 등 아름다

운 경관을 조성하였다 또 어구를 파서 물길을 끌어들여 정전 앞쪽에 돌다리를 놓았으며 돌

다리 앞쪽에 궐문을 세우고 그 어귀에는 下馬標木까지 세우는 등 정궁에 버금가는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궁으로 조성된 나머지 핵심 부분인 정전 일곽이 너무 좁

아서 정치 행사를 할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말년인 1418년에는 인정전 일곽을 모두 헐어

다시 짓는 대규모 공사를 벌여 정전 일곽마저 경복궁에 버금가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

었다 이후부터 이궁인 창덕궁에서도 정궁에서만 행해지던 국가적인 대사를 치를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2) 창건 이후 조선 전기의 변화

태종을 계승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른 세종은 인정전 개축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창덕궁으로 이어한다 그리하여 세종 즉위년(1418)에 인정전 일곽의 개건 공사가 완공

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은데 반하여 세종은 즉위후 3년이 되던

해부터 자주 경복궁에 이어하고 기존 궁전을 수리하는가 하면 왕 8년(1426)에는 집현전 문

신들에게 궁내의 문과 다리 이름을 명명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왕 9년(1427)부터는 경복궁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궐내 제반 시설을 수리신설해 나가면서 점차로 경복궁의 법궁 체재를

완비해 나갔다 이에 견주어 창덕궁에 거처한 10년 동안에 경연청집현전장서각射廳

(궁성 西墻內) 등을 창덕궁 안에 새로 짓는 데 그쳤다 창덕궁 침전의 前廊은 修文堂이라 불

리며 태종세종이 늘 거처하던 곳이었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한 단종(1452~1455)은 창덕궁에 대한 전반적인 수리공사를 단

행하는 한편 태종때 개건된 지 35년밖에 안된 인정전 일곽까지도 다시 고쳐 지었다12) 이밖

에도 廣延樓에 별실을 지어 피서용으로 삼기도 하였다

창덕궁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세조때(1455~1468)였다 세조는 5년(1459) 9월 5일에

10)『太宗實錄』 卷 10 太宗 5年 5月 辛巳조 承政院廳 3칸 동행랑 10칸 남행랑 4칸 북행랑 4칸 바깥행랑 5

칸 外樓 3칸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서행랑을 따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승정원청이 인정전 동행랑에 자

리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승정원의 위치를 인정전 동쪽으로 적

고 있다

11)『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승정원을 비롯하여 빈청홍문관내반원도총부세자시강원세자익위사동궁 등이 창덕

궁 내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빈청동궁세자시강원세자익위사 등은 成宗때 세워진 것이

12)『端宗實錄』 권6 端宗 元年 4월 甲寅조 참조

후원에 못을 파게 하고 그 근처에 閱武亭을 세웠던 것 같으며 열무정 부근에서 4곳의 샘물

을 찾아내었다13) 열무정의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인 정조때 그 자리에 奉謨堂을 세웠다

고 하며 봉모당이 주합루 서남쪽에 있었 던 점으로 보아 열무정과 네 우물이 있던 곳까지가

후원의 영역이었던 것같다14) 그러나 이 일을 시작으로 하여 왕 7년 11월 24일부터 궁역 확

장을 계획하고 8년 2월부터는 궁성확충공사를 시작하였다 새로 쌓은 궁성은 동쪽으로 성균

관과 경계를 같이 할만큼 엄청나게 확장되었는데 둘레 4600자 높이 25자의 성을 쌓기 위하

여 한성부 백성 19040명(119家를 1統으로 하여 160통이 편성됨)이 동원되었다 이때 궁장

근처에 있던 민가 73호가 철거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창덕궁 후원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도

세조때의 궁역 확장공사 덕택이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세조는 7년 12월 19일에 그동안 위치와 역할에 따라 호칭되어 오던 궁내 건물의 이

름은 다음과 같이 확정되었다 즉 朝啓廳은 宣政殿 後東別室은 昭德堂 後西別室은 寶慶堂

정전(침전을 內正殿이라고도 부름)은 兩儀殿 동침실은 麗日殿 서침실은 淨月殿 누각은 澄

光樓 동별실은 凝福亭 서별실은 玉華堂 澄光樓下는 光世殿 廣延殿 별실은 求賢殿이라 이

름지어졌다 다만 인정전인정문진선문돈화문 등 정전 일곽과 광연루해온정 등 누정

의 이름은 일찍부터 정해져 사용되었다

여기서 편전인 선정전 뒤에 별실 2채가 있었다는 사실 침전에는 침실이 좌우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 태종 11년에 조성된 누각과 침실이 징광루와 응복정옥화당광세전 등으로

이름지어진 건물이라는 점 구현전으로 명명된 광연루(광연전) 별실은 단종때 조성된 것이라

는 점 등을 새롭게 알 수 있다 위 건물 가운데 광연루 일대는 성종 17년(1486)에 春宮으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1476~1506)이 1483년에 세자로 책봉된 지 3년째

되는 해로서 경복궁에도 세조 8년에 지은 동궁이 있었으나 성종이 창덕궁에 머무르기 위하

여 동궁을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은 창덕궁 안에 賓廳인 匪躬堂을 지었고 창덕궁 옆에는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

한 昌慶宮에 수많은 전각과 당우를 비롯하여 승정원홍문관사옹원사복시도총부 등

관청을 갖추었다 성종이 재위 26년간 내내 창덕궁 대조전 전랑(修文堂)에 거처한 사실을 감

안하면 왜 창경궁을 治朝와 관청까지 갖춘 궁으로 조성했는지 짐작이 간다 왜냐하면 창덕

궁에는 궐내각사가 고루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15) 성종 초반에는 대왕대비 정희왕희

가 창덕궁 안에 內佛堂을 짓기도 하였으나 그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다 또 성종 6

년(1475) 8월에는 宮門 29개소에 서거정을 시켜 이름을 짓고 현판을 걸었는데 이는 세조 8

년(1462)에 궁역을 확장하면서 새로 쌓은 궁성에 낸 새 문에 그때까지 이름이 없었기 때문

이었다16)

13)『宮闕志』昌德宮誌 閱武亭條

14)『宮闕志』昌德宮誌 奉謨堂 條 참조 봉모당은 「東闕圖」에도 주합루 서남쪽에 그려져 있으나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구선원전 서쪽 규장각 바로 뒤쪽으로 옮겨졌다(「東闕圖形」 고종년간『宮闕志』 참조)

15) 『新增東國輿地勝覽』卷之一 京都 下 文職公署武職公署 조에 보면 조선전기의 궐내각사는 경복궁이나 창덕

궁창경궁에 중복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왕이 정사를 보는 궁궐 가까운 곳에 관리들이 출근하여 정

치를 보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3궁의 시설은 수시로 번갈아가며 활용되었다

16)『成宗實錄』권58 成宗 6년 8월 己亥 조 참조 여기에는 창덕궁 궁문 29개소의 이름과 경복궁 궁문 8개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조선전기에 일어난 변화상 가운데 주목해야 할 일은 연산군때 이루어졌다 침전인 대조전

前廊에 있던 수문당(태종세종성종의 거처)이 소실되자 ldquo대조전은 낮고 수문당이 높아

통기가 안된다rdquo고 하면서 이를 고쳐 짓고 이름도 熙政堂으로 개칭하였는데17) 이로부터 침전

가까이에 세워진 희정당이 편전의 역할을 분담했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8) 그밖에도 연

산군은 폭정을 거듭하던 재위 말년에 선정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을 수리하거나 단청을 새로

하였고 인정전과 선정전의 기와를 청와로 바꾸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거듭되는 궁궐 공사

도중인 왕 1년에 反正이 일어나 왕위에서 쫒겨나자 모든 공사는 중지되었다 명종 5년에는

인정전 북쪽에 흠경각을 짓기도 하였다19)

태종때 이궁으로 창건되어 꾸준히 시설을 보완해 갔던 창덕궁은 세조가 후원을 조성하고

궁역을 확장하면서 크게 달라졌다 더구나 성종이 재위기간 전체를 창덕궁에 거처하면서 동

쪽에 창경궁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보좌할 수 있도록 한 결과 창덕궁과 창경궁은 조선전기에

이미 하나의 궁궐처럼 사용되면서 경복궁을 대신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으로 세 궁궐이 모두 소실된 뒤 경복궁을 제외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이

재건되고 인경궁과 경희궁이 창건되었을 때 그 모범적 선례는 경복궁 대 창덕궁창경궁이

라는 조선전기의 쓰임새에서 찾아졌던 것이다

나 조선 후기

1) 宣祖光海君仁祖代의 재건

경복궁창덕궁창경궁 등 조선전기에 이룩된 궁궐건축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창덕

궁이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버렸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누구에

의해서 소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대개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 즉 ldquo왕실과 관료들이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고 남은 빈 궁궐을 왜적이 수도 한성에 입성하기도 전에 우리 백성

들이 궁중에 침입하여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보물을 약탈했다rdquo는 설을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宣祖實錄』은 물론이고 유성룡(1542~1607)의 『西崖集』등 당시의 기록에 이러

한 견해를 싣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위 설은 목격담이 아니고 남에게 전해 들은 것

을 사실인 양 적은 것에 불과하다

유성룡이 불탄 궁궐을 직접 목격한 시점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

인 계사년(1593) 4월 20일이었는데 이때 종묘는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너진 채였다 그

러나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인 1592년 5월 2에는 경복궁은 전혀 불타지 않은 채 주인

잃은 빈 궁궐의 허허로움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왜군이 한성을 점령하고 승전고를 울리던

때까지는 경복궁과 한성 그리고 백성들의 목숨은 부지되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왜군

17)『燕山君日記』 燕山君 2년 6월 己丑 同年 8월 癸巳 8월 丙申 條 참조

18) 金東旭 「朝鮮時代 昌德宮 熙政堂의 便殿 轉用에 대하여」『건축역사연구』 5 한국건축역사학회 1994 6

9~21쪽 참조

19)『宮闕志』昌德宮誌 欽敬閣 條와 萬壽殿 條 참조

은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고 한성마저 탈환당하는 패전이 거듭되자 퇴각하면서 종묘와 궁궐

을 비롯한 도성내 모든 시설을 방화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왜군을 따라 전쟁에 참여한 從軍僧 제타쿠(是琢)의 『朝鮮日記』에는 왜군의 한성 입성

직후에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경복궁이 전혀 화재

를 입지 않은 채 온전하게 남아 있었음이 분명하다 즉

ldquo 북산 아래 남향하여 紫宮(경복궁을 가리킴)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다

섯 발자국마다 樓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閣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

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

자 4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 그 한 가운데에는 돌을 다듬어서 포개어 담

을 쌓았는데 높이가 8자이고 4귀퉁이에 방향에 맞추어 4마리씩 16마리의 돌사자가 놓여 있

다 그 위에 紫宸淸凉 두 전당이 있다 기둥은 돌기둥인데 아래 위에 용을 조각하였다

지붕에는 유리 기와를 덮었는데 잇단 기와 줄마다 푸른 용같다 서까래는 梅檀 나무인데

서까래마다 한 개씩 풍경이 달렸다 채색한 들보와 붉은 발에는 금과 은을 펴 돌렸고 구슬

이 주렁주렁 달렸다 천장 사방 벽에는 五色八彩로 기린봉황공작鸞학용호랑이등이 그려져 있는데 계단 한 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丹鶴을 새긴 돌이

깔려 있다 여기가 바로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이다rdquo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20)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 경복궁은

불에 타기는커녕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질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어서

종군나온 왜승으로 하여금 놀라움과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여기 인용된 기사는 경

복궁에 관한 것이지만 창덕궁의 사정도 벼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란이 끝난 뒤 국가 재건에 착수한 조정은 종묘와 궁궐을 빠른 시일 안에 복구하지 않

으면 안되었다 선조 38년(1605)에야 시작된 복구공사는 경복궁 중건을 목표로 진행되었으

나 선조 39년에 李國弼이 경복궁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중수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을 시작

으로 하여21) 선조 40년 2월에 경복궁의 길흉화복을 적은 역대의 문서를 검토한 다음 공사

는 창덕궁 중건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22) 여기에 더하여 호대한 규모의 경복궁을 재

건하기에는 물력과 인력이 모두 부족한 전란 직후의 형편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조 41(1608년) 정월 전후에 시작된 창덕궁 중건 공사는 두 차례로 나누어 진행되었는

바 광해군이 즉위한 그 해(1608) 10월에 완료된 1차 공사에서는 중요 전각이 대체로 조성되

었다 다음에 선조의 위패를 종묘에 祔廟한 직후인 1610년 봄에 재개된 2차 중건 공사에서

는 앞서 마무리하지 못했던 各司廂庫 등을 짓고 築墻하고 鋪甎하는 일을 1610년 9월에 이

20) 『京城府史』 上卷 京城府 pp269~270

21)『宮闕志』昌德宮志 昌德宮 條

22)『宣祖實錄』 선조 40년 2월 13일 조 주28)과 동일

르러 마쳤다23)

이때 중건된 건축에 대해서는 ldquo옛 제도를 따라 복구하였다rdquo는 상투구만 전할 뿐 구체적

인 기록이 없으나 정전편전침전 일곽이 옛터에 근거하여 복원되고 별당이 신조되었으

며24) 후원에는 정자도 세워졌다 한편 광해군 5년(1613)에는 世宗의 예지가 담겨 있는 시설

로 여겨진 欽敬閣이 인정전 북쪽에 재건되었고 왕 6년에는 창경궁 문정문 앞에 보루각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건된 지 얼마 안지난 1623년의 인조반정때 광해군이 거처하고 있던 창덕궁에

들이닥친 반정군이 광해군을 수색하던 중 失火로 外殿 가운데 인전전도총부內藥房春

秋館都總府郎廳房丕承閣弘文館 등과 內殿의 壽靜堂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건물이 소

실되고 만다25) 성종때의 춘궁터(태종때의 광연루 구현전터)에 중건되어 있던 儲承殿(동궁)

도 이때 소실되었다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할 수 없이 경운궁 별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

다 이후 인조는 창경궁에 거처하던 중 李适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마저 불타자 慶德宮으로

이어하였는데 인조 10년에는 창덕궁으로 이어하기 위하여 남아 있는 몇몇 건물을 수리하였

다 그리하여 왕의 거처는 내약방 왕비의 거처는 도총부 편전은 춘추관 동궁은 도총부낭청

방이나 비승각 경연청은 홍문관을 수리하여 마련하였다26)

인경궁을 헐어다 궁궐을 중건한다는 구상은 1633년에 먼저 창경궁을 짓는 것으로 시작

되었다27) 그러나 1636년의 병자호란 이후에는 국력이 크게 위축되어 궁궐을 중건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이 바람에 창덕궁의 중건공사는 늦어져서 1647년(인조 25)에 가서야 5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중건되었고 인조는 이때에야 비로소 창덕궁으로 還御할 수 있었다 창덕궁의

중건공사도 광해군이 무리하게 창건해 놓은 仁慶宮을 헐어 옮겨 짓거나 그 자재를 이용하였

기 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복구가 가능하였다28) 1648년(인조 26)에는 동궁인 저승전도 중

건됨으로써 창덕궁 중건공사가 마무리되었다29)

이때 건물의 복구는 5개의 작업소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1所에서는 大造殿集祥堂

澄光樓玉華堂靜黙堂부속 행각과 월랑 2所에서는 熙政堂承明門內行閣내반원기

타 월랑 3所에서는 寶慶堂泰和堂昭德堂燒廚房 4所에서는 선정전과 월랑 5所인에서

는 인정전 동월랑승정원臺諫廳과 인정문과 남월랑 등을 복구하였는데 모두 735칸에 이

르는 대규모 移建 및 重建工事였음을 알 수 있다30) 이때 중건된 건물 가운데 징광루가 가

장 장려하였다고 하며31) 또 지금껏 보존되어 있는 건물은 宣政殿뿐인데 이 건물은 인경궁

23)『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3 122~125쪽 참조

24)『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 9월 丁未 條 참조

25)『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1963 127쪽 참조 또 『宮闕志』 昌德宮誌 壽靜殿 條

참조

26) 『仁祖實錄』 仁祖 10년 10월 辛卯 條 참조

27) 1633년의 창경궁 내전 중건 공사를 상세히 기록한 『昌慶宮修理所儀軌』가 남아 있다

28)『서울 六百年史 문화사적편』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95 61쪽 156~161쪽 및 金東旭 「仁祖廟의

昌慶宮昌德宮 造營」『문화재』 19호 1986 참조

29) 『宮闕志』와 『東國輿地備攷』 第一卷 京都 에서 창경궁에 소속시켜 정리하고 있다

30) 이때의 공사과정은 『昌德宮營建都監儀軌』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중건된 건물의 명칭 가운데 讌和

堂은 『인조실록』 인조 25년 11월 戊申 條에는 실려 있으나 이 의궤에는 빼져 있다

의 편전인 光政殿을 옮겨 지은에 것으로 주변 건물의 거듭된 화재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아

당시의 공포형식과 구조를 전하고 있다32)

위에서 살핀 것처럼 선조광해군인조대를 거치면서 조영된 창덕궁의 건축은 정전

편전침전 일곽과 별당이 대체로 조선전기의 유구에 근거하여 복원된 것이었으며 훗날

「東闕圖」(1828~1830년 제작)에 그대로 묘사된 것처럼 조선후기 창덕궁의 根幹을 이루게

되었다 다만 도총부홍문관대간청내약방내반원 등 조선전기에는 창덕궁에 두지 안

았던 관청들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는 조선전기에 세 궁에 나누어 설치되어 있었던 관청

의 상당수가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자 창덕궁 안에 새롭게 조성되었음을 가리킨다33) 사정은

다른 궁궐도 마찬가지여서 창덕궁에 설치되지 않은 많은 관청이 창경궁이나 경희궁에 설치

되었다 한편 인조반정때도 소실되지 않은 채 보존되었던 비승각은 조선전기에는 없었던 건

물로 광해군 재건시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후대의 문헌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서 존속 여

부를 알기 어렵다

反正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계속된 화재로 재위

10여 년 동안 경운궁이나 경덕궁에 거처하였다 그러나 창덕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왕 10년에는 일시적으로 창덕궁에 거처하기도 하였으나 말년인 왕 25년에 이르러서야 창덕

궁의 중건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후원의 경영에 몰두하여 왕 14년(1636)부터

왕 25년(1647)에 걸쳐 끊임없이 정자를 짓고 원림을 조성하였다 즉 1636년(인조 14)에 歎逝

亭(rarr 逍遙亭)雲影亭(rarr 太極亭)청의정과 玉流川 1640년에 聚奎亭 1642년에 翠微亭(현

종 5년 개수하고 觀德亭으로 고침) 1643년에 竹亭(rarr深秋亭) 1644년에 六面亭(rarr 尊德亭)

碧荷亭(숙종때 淸讌閣으로 고침) 1645년에 醉香亭(숙종 16년에 喜雨亭으로 개칭) 1646년에

팔각정 1647년에 聚勝亭(larr 樂民亭)觀豊閣 등이 차례로 조성되었다34) 인조가 이렇듯 후

원 경영에 몰두한 것은 병자호란으로 입은 치욕과 복잡한 심사를 달래기 위하여서가 아니었

을까 후대의 왕들도 인조가 경영한 원림에 와서 ldquo萬機를 다스리는 여가에 샘물과 흐르는

물을 보고 마음을 함양하곤 한다rdquo고 하면서 인조의 원림 조성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였

다35)

2) 孝宗~正祖代의 변화

17세기 전반에 창덕궁은 정궁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비록 재목이 부족하여

인경궁을 헐어다 짓기는 하였지만 정전편전침전궐내각사를 비롯하여 후원의 원림까지

갖춘 대규모 궁궐로 경영되었고 창경궁의 보조를 받으면서 부족함없이 조선왕조의 왕정을

31) 징광루는 청기와를 덮은 2층 건물로 「東闕圖」에 그려져 있고 「東闕圖形」에도 그려져 있는데 1917년

창덕궁 내전 화재때 소실된 뒤 복구되지 않았다

32)『창덕궁』-한국전통건축 제2집- 52쪽 및 『서울 六百年史 文化史蹟編』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95

156~161쪽 참조

33) 이때 재건된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궐문인 敦化門뿐이다

34) 이상의 내용은 『宮闕志』 昌德宮誌의 해당 항목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며 괄호 안의 이름은 뒷날 개칭된

것이다

35) 『宮闕志』 昌德宮誌 太極亭 條의 숙종 어제 「上林三亭記」 참조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창덕궁은 조선전기에 이궁으로 출발하였으나 17세기 중반부터는

정궁의 시설을 갖추고 실제로 정궁 역할을 수행해 나갔던 것이다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는

한 경복궁은 상징적인 정궁일뿐 창덕궁이 실질적인 정궁이었던 것이다

이제 17세기 후반 이후에 창덕궁에 추가된 건축은 大妃殿東宮殿眞殿御齋室(養志

堂 이문원 부근 대유재와 소유재)후원의 별당과 정자 정도였다 즉 효종 5년(1654)에 수

리한 壽靜堂(인조때 세워진 건물)은 숙종 1년에는 壽靜殿으로 격상되어 인조 계비 壯烈王后

(1624~1688)의 거처로 정해졌으며 효종 6년에는 또 장렬왕후를 위하여 옛 흠경각터에 萬壽

殿을 지었는데 이 건물 일곽은 얼마 안가서 숙종 13년(1687)의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말

았으며 이후 다시는 재건되지 못하였다36) 또 효종 7년(1656)에는 慶德宮 景和堂을 移建하

여 春輝殿이라 고쳤다가 숙종 21년(1695)에 璿源殿으로 개칭한 다음 御眞을 봉안하였다 효

종은 이밖에도 후원에 魚水堂 과 天香閣(왕 4년)을 지어서 인조대에 조성된 원림 사이에 새

로운 원림을 하나 더 추가하였다37) 현종 8년(1667)에는 효종비 仁宣王后(1618~1674)를 모

시기 위하여 경덕궁 集禧殿을 철거해다가 집상당 옛 터에 옮겨 놓고 集祥殿으로 개칭하였

다38)

숙종대에는 東宮 書筵處인 誠政閣이 지어지고 왕 14년에 천문관측소인 齊政閣이 새로

지어졌다 후원에는 왕 18년에 영화당 일곽과 애련정 일곽이 조성되고 왕 33년에는 애련정

북쪽에 滌惱堂을 건립하여 현종대에 경영된 어수당 일곽의 원림을 완결지었다 또 후원 곳

곳에 정자를 지었는데 왕 14년에는 淸心亭 왕 15년에는 靈鼉亭 왕 17년에는 凌虛亭을 차례

로 지어 나갔다 이리하여 숙종대의 원림 조성을 끝으로 창덕궁 후원은 주합루 구역을 제외

하고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숙종 30년(1704)에는 궁성 서북쪽 밖에 있

던 別隊營의 庫舍를 헐고 임진왜란때 대군을 파견하여 도와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신종을

享祀하기 위하여 大報壇 일곽을 건설하였다39) 영조대에는 30년(1754)의 선원전 수리를 비

롯하여 영조 15년(1739)의 香室 21년(1745)의 齋殿 25년의 대보단 중수와 전사청 악공청

재생소 신건 등 10여 년 간에 걸쳐 대보단을 새롭게 변모시켰다40) 이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는 영조가 재위 기간 대부분을 경희궁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대에는 즉위년에 후원 안 희정당 옆에 규장각과 서향각을 짓고 왕 5년

(1781)에는 규장각 학사들의 숙직처인 이문원을 도총부 자리에 설치하는 등 숙종대에는 궁

궐밖 종부시에 있었던 규장각을 궁궐 안으로 끌어들여 右文政治를 표방하며 왕권강화의 토

대를 마련하였다 왕 9년에는 이문원 근처에 서적 보관처인 東二樓를 새로 지었으며 선원전

36) 이때의 공사 보고서로 『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가 전한다

37) 어수당의 창건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효종이 지은 시가 남아 있고 인조대에는 이 건물이 없었기 때

문에 효종때 지어진 것으로 해석하였다(『宮闕志』 昌德宮誌 魚水堂 條 참조

38) 이때의 공사 보고서로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가 프랑스 군대에 의하여약탈된 『昌德宮修改廳儀

軌』가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이크로필름본이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김동욱

「17세기 조선조 궁궐 內殿건물의 室內構成에 관한 연구」『大韓建築學會論文集』 1992년 10월호 87쪽 주

4 참조)

39) 경봉각은 창경궁 동룡문 안에 있던 것을 정조 23년(1799)에 옮겨 온 것이다(『東國輿地備攷』 京都 宮殿

昌德宮 條 참조

40) 『宮闕志』 昌德宮 lsquo萬世誦恩rsquo 조 「皇壇齋殿小識」(1745년) 「大報壇重修後小識」(1749)

이나 皇壇(대보단)을 展拜할 때 왕이 齋宿하던 御齋室인 大酉齋와 小酉齋는 정조 19년에 창

건되었다 한편 정조 6년(1782)에는 고대하던 장남(文孝世子)을 얻은 것을 계기로 동궁이 신

하들로부터 하례를 받거나 그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重熙堂을 창건하였다41) 이 시기에 동궁

의 처소로 天地長男宮과 文華閣 일곽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42) 또 정조 9년에는 창경궁

자경전을 짓다가 남은 재목을 활용하여 이극문 안 옛 수강궁터에 壽康齋를 지었는데43) 이

건물은 순조 27년 익종의 대리청정시 별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44)

「東闕圖」에 표현되어 있으나 1833년에 영춘헌을 짓기 위하여 헐린 天地長男宮 일곽은

세자의 거처로 중희당 바로 옆에 있었다45) 그리하여 중희당 일대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

계 지역이면서 순조대에 세자 익종이 거처하고 공부하던 곳으로서 훗날 代理聽政(1827년~

1830년)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익종은 창덕궁 안에 待鍾軒演慶堂倚斗閤 일곽田舍

(1826년) 등 많은 시설을 경영하였다46) 특히 후원의 의두합과 연경당은 대리청정 시기에

전자는 독서처로 창건한 것이고47) 후자는 1828년에 珍藏閣 옛터에 進宴處로 사용하려고 특

별히 창건한 건물이다48) 당시 연경당의 모습은 「東闕圖」와 『慈慶殿進爵整禮儀軌』의 圖

說 「演慶堂圖」(1828년 2월)에 잘 묘사되어 있으며 이로써 주택 형식의 현존하는 연경당은

적어도 헌종대 이후에 새로 지어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49)

3) 순조대의 소실과 재건

조선후기 궁정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던 창덕궁은 「東闕圖」에 그

려진 것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앞 시기에는 소규모의 화재도 있어서 숙종 13년(1687)

에 춘휘전(숙종 21년에 수리후 선원전으로 개칭)만 남겨 두고 萬壽殿 일곽이 모두 소실되었

는데 이후 복구되지 못하여 「東闕圖」에도 빈 터로 그려져 있다 또 동궁인 저승전 일대가

영조 32년(1702)에 소실되었다

41) 중희당 일곽은 1891년에 헐려 다른 곳에 이건되었으며 그 자리는 현재 후원으로 가는 진입로로 변해 버렸

다 (고종년간 『宮闕志』) 자세한 것은 이 글 3절 창경궁 부분 참조

42) 이강근 「조선 후반기 건축의 대외교섭」『조선 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2007

43) 『正祖實錄』 20권 9년(1785 을사) 8월 27일(갑진) ldquo建壽康齋貳極門內 有古井焉 慈慶殿之營建 以餘礫

剩磚 峙井上爲假山 至是撤去而浚其井 建小齋以臨之 是地 太祖朝壽康宮舊基 在《輿地勝覽》 仍命其齋

曰壽康rdquo

44)『純祖實錄』28권 27년(1827 정해) 2월 9일(을묘) ldquo議政府 以王世子聽政節目 別單啓【一 聽政節目 依

傳敎 以乙未事例磨鍊 一 聽政處所正堂 以重熙堂爲之 別堂壽康齋爲之rdquo

45) 이강근 「조선 후반기 건축의 대외교섭」『조선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2008 pp - 천지장남궁

과 그 좌측의 문화각 일곽은 정조 연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46) 『宮闕志』 昌德宮誌 해당항목 참조

47) 『宮闕志』 昌德宮誌 倚斗閤 條에서는 익종이 세자 시절에 예전의 독서처를 改建하였다고 적고 있어서 수리

를 한 것쯤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1826년에 쓴 「翼宗御製 倚斗閤上樑文」의 존재로 이 건물이

1826년부터 1827년 사이에 새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48) 『東國輿地備攷』 京都 宮殿 昌慶宮 演慶堂條 참조 純祖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축을 당하여 마침 집이 이루

어졌으므로 연경이라 이름하였다고 설명되어 있으나 尊號儀禮를 거행할 장소로 창건된 것으로 해석해야 옳

다(이강근「東闕圖」『建築文化』 1997년 9월호)

49) 고종 2년의 수리가 현존 연경당의 모습으로 변경된 계기였을 것으로 해석한 글이 주목된다(김동욱 「고종

2년의 연경당 수리에 대해서」 『건축역사연구』 한국건축역사학회 2004 3)

그러나 연이은 화재로 궁궐이 온통 소실된 때는 단연 순조대였다 먼저 순조 3년(1403)

에 仁政殿이 소실되어 이듬해에 중건되었다50) 11년(1411)에는 인정전 서월랑의 藝文館이

소실되어 또 중건하였는데 이때 고래의 史籍이 모두 불타 버렸다 또 1824년에는 대비전인

景福殿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정말 큰 화재는 순조 33년 10월에 일어났다 이 화재로 안으로

는 대조전으로부터 밖으로는 희정당까지 모두 소실되었으니 그 피해는 놀라울 정도로 큰 것

이었다 다만 인정전과 선정전 일곽이 불에 타지 않은 채 보존되었다 1년만인 이듬해 9월에

모두 중건되었다

이때의 중건공사에 대해서는 『昌德宮營建都監儀軌』(1834)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儀軌圖로 그려진 건물의 모습이 「東闕圖」와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점으로 미루어 중건하

면서 약간의 수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51) 그러나 『궁궐지』에서는 ldquo모두 370여 칸이 중

건되었으며 옛 유구를 토대로 하되 間架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복원하였다rdquo고 적고 있다

이때 중건된 건물은 대조전희정당징광루경훈각옥화당융경헌흥복헌양심합克

齋齋정묵당內燒廚房外燒廚房 등이었다 『宮闕志』(高宗年刊)에서 보듯 적어도 건물만

큼은 原狀回復된 것으로 보인다 순조 말년에 창덕궁창경궁경희궁을 모두 복구하고 나

서 그것을 기념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엮은 책이 바로 위 책이다

순조대 대왕대비전으로는 경복전과 수정전이 있었다 이 가운데 수정전은 1794년 12월

8일 정조의 명으로 慈殿(英祖繼妃 貞純王后)에게 冊寶 慈宮(정조 생모 혜경궁)에게 冊印을

바치고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서 수리되었고52) 이때 건물 이름도 壽靜殿으로

격상되었다53) 1796년에는 원자(훗날의 순조)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기도 하였다54)

대왕대비 정순왕후(1745-1805)는 이후 수정전에 거처하였으며55) 정조 사후 5년 뒤인

1805년에 景福殿에서 승하하였다56) 이후 正祖妃 孝懿王后(1753-1821)가 수정전에서 거처하

였는데 1813년에 12월 13일 밤에 수정전 동행각에서 화재를 만났으며 다행히 불을 꺼서 수

정전은 무사했다57) 효의왕후는 1821년 3월에 창경궁 慈慶殿에서 승하하였다 이보다 5년 앞

50) 1804년의 공사 내역은『仁政殿營建都監儀軌』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51) 金東旭 『朝鮮後期 宮闕建築의 造營에 관한 硏究』 -純祖朝의 西闕東闕 造營에 대해서- 文化財硏究所

1990 및 안휘준 『옛 궁궐 그림』 대원사 1997 72~75쪽 참조

52)『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 lsquo수정전rsquo조에서는 1623년 인조반정때 대내에서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며

효종 5년(1654) 인조의 繼妃 莊烈王后를 위하여 고쳐 지었으며 을묘년부터 전으로 격상시켜 불렀다고 적혀

있다(ldquo孝宗五年甲午爲 莊烈王后改建 乙卯改稱殿rdquo) 여기서 을묘년은 정조 19년(1795)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

53)『일성록』정조 18년(1794년 갑인) 12월 18일(신미)

54)『일성록』정조 20년 10월 4일(병자) ldquo領議政 洪樂性曰翁主痘候聞極平順 今已出場不但 今番之欣喜 可占兆端

之吉慶矣 予曰果如卿言矣 予敎元子拜諸大臣亦拜 予曰今番痘憂慈宮獨貽勤勞下情不安 及今出場大加喜悅萬萬欣

幸矣 予於慈宮 經旬離側 今番初有也 元子則姑爲 入處于壽靜殿 予則今將還謁慈宮矣rdquo ldquo予乘軺軒 以出元子陪焉

由永肅門 拱辰門 入壽靜門 詣壽靜殿 元子仍留 予還出壽靜門 乘軺軒 由宜春門 靑陽門 宣明門 保定門 萬八門

還內rdquo

55)『內閣日曆』 순조 21년 7월 19일(丁卯) lsquo正宗大王孝懿王后誌文rsquo 또 『健陵誌狀續編』遷陵誌文[純宗二十一年

辛巳] ldquo二十八日己卯疾大漸 大臣閣臣入候臥內 王已不能語而 微微有玉音曰壽靜殿 卽貞純大妃所御殿 蓋聖意若

有仰告於 慈聖者也 遂昇遐于昌慶宮之迎春軒 春秋四十九 大喪之日 都人士庶顚仆哭踊深山rdquo

56) 창덕궁 내 大妃殿의 하나였던 경복전은 1824년에 화재로 소실된 뒤 중건되지 않았기에 「동궐도」에마저 터

로 표현되어 있다 1803년에 순조가 직접 지은 lsquo景福殿記rsquo에서 그리고 있듯이 동서남북으로 각각 拾翠軒 萬

寧門 愛蓮齋 松竹軒이 빙 둘러 연해 있었으며 울창한 소나무 숲과 연못의 연꽃이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그

런 곳이었다 『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 lsquo경복전rsquo 조

서 惠慶宮(1735-1815)은 1815년 12월에 창경궁 景春殿에서 승하하였다58) 1822년 12월에는

정조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嘉順宮(1770-1822)도 창덕궁 寶慶堂에서 서거하였다59) 순조

의 증조모 조모 모 생모가 차례로 돌아가셨으므로 1822년 12월 이후에 수정전을 비롯한

궐내의 여러 대비전은 텅 비게 되었다

4) 憲宗哲宗代의 변화

이후 헌종 헌종 13년(1847)에는 樂善堂 옛 터에 헌종의 침전인 樂善齋가 건립되었고 왕

14년에는 그 옆에 왕자 출산을 위하여 새로 맞아들인 경빈 김씨의 거처로 錫福軒을 지었다

석복헌 오른쪽에 연접해 있는 壽康齋는 정조 9년(1785)에 지은 건물인데 낙선재 창건시 대

폭 중수되어 대왕대비인 純祖妃 純元王后(1789~1857)의 거처로 삼았다60) 한편 1843년(헌종

9)에는 헌종비(孝顯王后 1828-1843)61) 1857년 12월에는 순조비(純元王后 1789-1857)62)

1878년에는 철종비(哲仁王后 1837-1878)가 승하하였으므로63) 궐내에는 익종비(神貞王后

1808-1890) 헌종 계비(孝定王后 1831-1903) 등 왕실 어른 두 분만이 살아 계셨다64) 1868

년 7월부터는 중건된 경복궁으로 왕실이 移御하자65) 창덕궁내 여러 전각의 쓰임새는 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창덕궁에는 19세기 전반기에 다음과 같은 闕內各司가 설치되어 있었다 즉 규장각이

문원승정원홍문관빈청(匪躬堂)예문관도총부내병조尙瑞院尙衣院司饔院

典設司典涓司太僕寺內班院侍講院翊衛司內醫院鑄字所 등 거의 모든 관청이 설

치되어 있었다 다만 내사복보루각 등은 창경궁 안에만 설치되었고 궁궐호위와 수비를 맡

은 군사시설이 창덕궁에 남소와 서소만 설치되고 동소와 북소는 창경궁에 설치되어 있는 점

57)『內閣日曆』순조 13년 12월 18일 ldquo壽靜殿行閣失火 夜初更失火 敎曰 宮城扈衛置之 夜一更 壽靜殿東行閣失

火救火後 大殿 王大妃殿 中宮殿 惠慶宮 嘉順宮 世子宮 口傳問安 答曰知道 金祖淳 沈象奎 南公轍 徐榮輔 李存

秀 金履喬 李魯益 李光文 鄭元容 朴宗薰 李龍秀 李鶴秀 進參rdquo 여기서 대전은 순조 왕대비전은 정조비 효의

왕후 혜경궁은 정조의 생모 가순궁은 순조의 생모임

58)『純祖實錄』 순조 15년 12월 15일 21년 3월 9일

59)『純祖實錄』순조 23년 계미(1823 도광 3) 2월 3일(계묘) 빈은 英宗 경인년 5월 8일에 탄생하였고 正宗 정

미년에 빈으로 선발 되었는데 殯號는 綬이고 宮號는 嘉順이다 지금 주상 전하 22년 壬午 12월 26일에 昌德

宮 寶慶堂에서 승하하니 향년 53세였다

60) 盧辰河李相海 「樂善齋一廓 建築의 造營에 관한 復元的 考察」『건축역사연구』 7호 건축역사학회 1995

43~70쪽 참조

61)『憲宗實錄』「총서」 ldquo妃는 孝顯王后 金氏【籍은 安東이다】이니 領敦寧府事 永興府院君 贈 領議政 金祖

根의 딸로 무자년【순종 28년이다】 3월 14일 계축에 탄강하여 정유년에 王妃로 책봉되었는데 계묘년 8월

25일 을축에 승하하니 춘추 16세였다 景陵에 장사하였다rdquo

62)『日省錄』철종 8년(1857) 12 월 17일(갑자) ldquo檢校提學臣金炳冀製進哀冊文曰維歲次丁巳八月己酉朔初四日壬

子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睿成弘定純元王后昇遐于昌德宮之養心閤移殯于歡慶殿以是年十二月戊申朔

十七日甲子將合祔于仁陵禮也rdquo

63)『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5년 무인(1878 광서 4) 5월 12일(신유) 대비전이 승하하여 擧哀한 뒤 대전 대왕

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약방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망극하다고 답하였다

64)『고종시대사』3집 1890년(淸 光緖 16年) 4月 17日(丙辰) 未時에 大王大妃 趙氏(翼宗妃)가 興福殿에서 昇遐

하다 신정왕후는 집옥재를 이건하기 전 해에 돌아가셨다

65)『국역 승정원일기』고종 5년 무진(1868 동치 7) 7월 2일(정축) 移御한 뒤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종친 의빈 약방 내각 정원 옥당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등으로 보아 두 궁은 하나의 궁궐처럼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이 두 궁을 합

쳐서 東闕로 부르게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昌德宮은 外朝와 治朝를 중심으로 하

되 왕과 왕비의 침전을 갖춘 궁으로 昌慶宮은 燕朝를 중심으로 하되 동궁과 대비전을 갖춘

궁으로 역할을 분담하면서 하나의 궁궐처럼 운용되었던 것이다 哲宗代에는 철종 5년(1854)

9월부터 8년 윤5월 사이에는 1804년에 중건된 인정전의 해체중수공사가 있었는데 공사 내

역은 『仁政殿重修儀軌』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3) 근middot현대기

(1) 1865년~1910년의 변화

선조~광해군대에 중건된 이래 250여 년 동안 조선왕조의 정궁으로 사용되던 창덕궁은

고종 초반에 경복궁이 중건되자 격하되어 본래의 이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창덕궁의 쓰임새가 하루 아침에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1873년과 1876년 두 차례에 걸쳐 큰 화재가 발생하자 1877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수리하

고 이어하게 된다 1891년에는 중희당을 비롯하여 수정전 영역의 별당이던 集玉齋와 協吉堂

을 경복궁 내로 옮겨지었다

집옥재는 경복궁 신무문 안쪽 가까이에 있는 벽돌조 건물이다 집옥재를 중심에 두고

향좌측에 2층 복도로 연결된 중층 八隅亭이 있고 향우측에는 또 중층 복도로 연결된 단층

맞배지붕 정면 5칸 규모의 協吉堂이 있다66) 이 가운데 집옥재와 협길당은 1881년에 창덕궁

咸寧殿(壽靜殿을 중건한 뒤 변경한 명칭)의 北別堂과 西別堂으로 세워진 건물이었는데 지어

진 지 10년 뒤인 1891년에 경복궁의 지금 자리로 함께 옮겨졌다 이 시기에 경복궁에서 일

어난 두 차례의 화재(1873년 4월과 1876 11월)등의 사유로 왕실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는 일

이 있었다 첫 번째 이어는 1873년 4월의 내전 지역 화재로 인하여67) 1873년 12월 20일에

있었는데 이때 창덕궁을 미리 수리하였다68)

그러나 1875년 2월에는 다시 경복궁으로 이어하였으며69) 1876년 4월에 경복궁 내전 중

건공사가 완료되었다70) 그러나 같은 해 11월에 다시 큰 화재로 경복궁 내전 일곽이 모두

66) 집옥재가 있는 영역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 지역으로 묶여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가 45년만인 2006년

9월 29일에 처음 민간에 개방되었다 출입금지 구역이던 시절에 두 차례 수리공사가 있었는데 1차는 1982년

의 보수공사(『集玉齋補修工事報告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2)이고 2차는 2005년의 수리공사(『集

玉齋修理調査報告書』 문화재청 2005 12)이다 2차 공사에 대한 조사보고서에는 집옥재의 연혁과 이건 이

유에 대한 견해가 서술되어 있어서 참조를 요한다

67) 『日省錄』고종 10년(1873) 12월 10일 (갑신) ldquo慈慶殿失火 巳時火起於純熙堂二十四間延燒錫趾室十二間慈慶

殿三十二間福安堂六間紫薇堂三十八間交泰殿三十六間複道二十八間行閣一百八十八間半合三百六十四間半rdquo

68)『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0년 계유(1873 동치 12) 12월 20일(갑오) 눈 ldquo창덕궁으로 移御한 뒤에 대전 대

왕대비전 왕대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의 2품 이상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

고 답하였다

69)『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2년 을해(1875 광서 1) 5월 28일(갑자) 비 ldquo이어한 뒤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

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종친 의빈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 2품 이상과 육조 대사간이 구전으로 문안하

니 알았다고 답하였다rdquo

70)『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3년(1876) 4월 1일 교태전 자경전 자미당 인지당 4건물을 짓는 데 공을 세운

소실되었으므로71) 1877년 3월에는 다시 창덕궁으로 이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창덕궁과

창경궁을 다시 수리하였다72) 이후 1885년에 경복궁으로 이어할 때까지73) 왕실은 창덕궁에

머물러 있었다 한편 1882년 6월에 경복궁으로 다시 이어하겠다는 전교가 있었으나 곧 철회

된 일이 있었다74) 같은 날 임오군란이 발발하고75) 1884년 12월 4일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자 왕실은 창덕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복궁 내전의 재건은 1888년이 되어서

야 겨우 완료되었으며76) 이 시기에 고종은 1873년에 창건된 乾淸宮 영역에 거처하면서 정

사에 임하였다

1881년(고종 18) 3월의 수정전 수리 공사는 경복궁 내전의 두 번째 화재로 촉발된 창덕

궁 이어로 왕실이 창덕궁에 머무르던 기간에 시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수정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여러 채의 별당을 짓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살아계신 두 대비와 관련

이 있는 것일까 적어도 명분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고종은 수정전 수리 공사를 지시하

는 자리에서 그 해가 생전에 수정전에 거처하셨던 정조비 효의왕후의 승하 60주년임을 상기

시키면서 슬픔을 견딜 수 없다고 하고 건릉에 예관을 보내 헌작례를 올리게 하였다77) 정조

대의 불행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수정전 일곽 증설 공사에 정조대의 정치를 흠모하는 고

종의 의도가 엿보인다78)

문제의 집옥재는 바로 이때 수정전(공사후 함녕전으로 개칭)의 北別堂으로 지어진 건물

이다 3월 1일 고종의 지시로 시작된 수정전 일곽 보수공사와 별당 신축공사는 그 해 11월

사람들에게 시상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때 중건 공사가 일단락된 듯하다

71) 『日省錄』 고종 13년(1876) 11월 4일(신유)

72)『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4년 정축(1877 광서 3) 3월 10일(병인) 낮에는 맑고 밤에는 비가 옴 또 무위

소의 말로 아뢰기를 ldquo창경궁을 수리하는 역사가 지금 이미 끝났으니 諸色工匠들을 모두 해산해 보내겠습니

다 감히 아룁니다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헌직이 호조의 말로 아뢰기를 ldquo창덕궁을 수리하는 역

사가 지금 이미 끝나서 제색 공장들을 모두 해산해 보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辰時 대가가 창덕궁으로 환어하였다

73)『국역 승정원일기』 고종 22년 을유(1885 광서 11) 1월 17일(정사) 맑음 ldquo移御한 후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의 2품 이상 관원 육조 당상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rdquo

74)『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9년 임오(1882 광서 8) 9월 29일(임자) 맑음 ldquo부교리 趙性鶴이 상소하기를 hellip

(중략)hellip 毓祥宮이 불탔지만 한 달이 넘도록 아직 영건하지 못하고 있고 경복궁으로 移御하라는 명을 비용을

아끼느라 어쩔 수 없이 還收하셨으니 우리 전하의 효도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통하시며 지은 지 오래된 곳을

떠나 새 궁궐로 가고자 하시는 마음이 얼마나 절박하겠습니까rdquo

75)『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9년 임오(1882 광서 8) 6월 5일(기미) 맑음 ldquo조병직에게 전교하기를 lsquo경복궁으

로 移御할 것이니 該房은 그리 알라 날짜는 이달 그믐 이전으로 가려서 들이라rsquo 하였다

76) 『日省錄』고종 25년 4월 12일(계사) ldquo重建所以交泰殿 康寧殿 麟趾堂 紫微堂上樑吉日今月十五日未時 推擇

上樑文製述官 書寫官別單書入啓rdquo

77)『고종실록』고종 18년 3월 1일(계해) ldquo지시하기를 lsquo이해 이달은 바로 정조비 孝懿王后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된다 지나간 옛날을 생각하면 슬픔을 어찌 견디겠는가 이달 9일 健陵의 酌獻禮는 大臣을 보내서 대

신 거행하도록 할 것이다rsquo라고 하였다 또 지시하기를 lsquo壽靜殿의 여러 곳을 수리하는 것과 새로 공사하는 것

은 본소로 하여금 거행하게 할 것이다rsquo 라고 하였다rdquo 『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8년 신사(1881 광서 7) 3

월 1일(계해) ldquo 송병서에게 전교하기를 lsquo壽靜殿 여러 곳의 重建과 營建을 본소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rsquo

하였다rdquo 무위소의 말로 아뢰기를 lsquo수정전 여러 곳의 중건과 영건에 대한 일을 본소에서 거행하라고 명하

셨습니다 역사를 시작할 길일을 일관 韓應翼으로 하여금 날을 택하게 하였더니 이번 3월 2일 시가 길하다

고 하였습니다 이날 이 시각에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rs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rdquo

78) 이태진 「大韓帝國 皇帝政과 民國 정치이념의 전개 -國旗 제정보급을 중심으로」『한국문화』 22 1997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pp 279-305에 「고종의 국기제정과 君民一體의 개념」이라는 제목

으로 재수록)

까지 진행되어 거의 모든 건물이 완공되었던 듯하나 11월 7일의 화재로 150칸 정도가 불타

버리고 말았다79) 이때 함녕전과 더불어 東別堂 南別堂은 소실되었으나 서별당인 協吉堂과

북별당인 集玉齋만은 소실되지 않았다80) 이후 1882년 6월초까지 진행되던 공사는 임오군란

발발로 중지되었고 1891년 3월 21일 이후 중건소가 주관한 함녕전 일곽 移建 공사에서 함

녕전 등 여러 건물은 어디론가 이건되었으며 1891년 7월에는 집옥재와 협길당도 경복궁으

로 이건되었다

1891년 3월의 함녕전 일곽 이건으로 시작된 이 시기 창덕궁 건물의 타 장소 이건은 담

당기구인 중건소를 설치하여 진행되었다 1891년 4월의 경복궁 계조당 개건 5월의 창덕궁

중희당 이건 7월의 경복궁 寶賢堂 改建과 집옥재 이건으로 이어지면서 6개월 이상 대규모

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료에 이건 장소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함녕전 중희당

등 창덕궁내 여러 건물이 어디로 이건되었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종 37년(광무 4 1900)에 비워 두었던81) 경운궁 선원전 제1실에 태조 고황제의 어진

을 새로 모사하여 봉안하게 되자82) 경복궁과 창덕궁의 선원전에도 태조 고황제 어진을 봉

안하기 위하여 새로 제1실을 증건하게 되었다83) 그 결과 창덕궁 선원전(현 구선원전)은 신

실 7실을 갖추고 정면 9칸 측면 4칸인 규모로 확장된 모습으로 확정되었다 이 시기 선원전

일곽의 평면 구성은 東闕圖形 에서 확인할 수 있84)

융희 1년(1907)에는 고종황제가 폐위당하여 경운궁(이때 덕수궁으로 개칭)에 거처하게

되자 창덕궁에서 純宗(1907-1910)이 즉위하였다 1908년에는 인정전 일곽을 크게 수리하면

서 進善門(광해군때 중건된 건물로 추정됨)을 철거하였다

(2) 1910년~1945년의 변화

1910년 8월 29일에 불법적으로 맺어진 한일합방 조약이 인정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리

하여 亡國과 함께 순종은 昌德宮殿下로 격하되었다 그 뒤로 왕실의 규모는 그럭저럭 유지

되지만 나라 잃은 왕조의 왕실과 궁궐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1907년부터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창덕궁의 개조 왜곡으로 인한 변형 훼손 과정은 우리 민족문화 전체를 말

살한 일제침략자들의 간악한 문화 파괴 행위의 시금석이다 장서각 소장 창덕궁 평면도 3종

을 바탕으로 이 시기 창덕궁 宮域의 단계적 변화 양상을 추적해 볼 수 있는데 이는 곧 창

덕궁의 파괴 과정이다

79)『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8년 신사(1881) 11월 8일(병신) 맑음 ldquo영건소가 아뢰기를 지난밤 화재 때 殿堂

과 行閣 150칸이 모조리 타 버렸습니다(후략)rdquo

80) 화재 다음 해인 고종 1년(1882) 3월 14일부터 6월까지 진행된 공사에서는 咸寧殿 衍福堂 正善堂 등 3채만

이 계속해서 언급되었을 뿐 협길당과 집옥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국역 승정원일기』 참조)

81)日省錄 광무 3년(1899) 11월 29일(임인) 高宗實錄 고종 36년(1899) 12월 31일(양력) 日省錄 광무 4

년(1900) 4월 3일(갑술) 관보 第一千五百六十四號 光武 四年 五月 三日 木曜 1 宮廷錄事 관보 第一

千五百六十五號 光武 四年 五月 四日 金曜 1 宮廷錄事

82) 高宗實錄 고종 37년 5월 18일(양력)

83) 高宗實錄 고종 37년 5년 22일(양력)

84) 이강근 「조선후기 선원전의 기능과 변천에 관한 연구」『강좌 미술사』35 2010 pp245-246

즉 1911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장서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形」

과 비교하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敦化門에서 仁政門에 이르는 행각이 없어졌고

그 자리에 宮內府廳舍가 생겼으며 ② 인정전 행각이 모두 개조되었고 후면에 대조전으로

연결되는 긴 행각이 생겨났다 ③ 선정전과 희정당 앞쪽에 있던 관청들이 모두 헐리고 선정

전과 희정당 사이에 사다리꼴 담이 생겼다 ④ 선정전 뒤 보경당 태화당 재덕당 영역이 없

어지고 그 자리에 lsquoㅍrsquo자형 건물이 생겼다 ⑤ 빈청을 지나 낙선재로 가는 길목에 있던 건물

은 모두 없어지고 길로 변하였다 이로 인하여 돈화문에서 곧장 후원으로 연결되는 신작로

와 창경궁으로 연결되는 신작로가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는 대체로 1907년부터 1909년 사이

에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같은 도면의 창경궁 영역에서는 植物本館(1909) 植物培養室

(1911) 博物本館(1911)이 신축되어 있어서 도면 작성시기는 1911년경으로 생각된다

또 1911년부터 1921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

形」과 비교하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돈화문 앞 차도가 확장되고 雲峴 쪽 신작로

가 연결되었다 ② 돈화문 안 오른쪽의 수문장청이 없어지고 왼쪽의 영군직소는 lsquo消防所rsquo로

바뀌고 금호문 밖의 건물은 경찰서로 바뀌었으며 금천교를 향해 왼쪽에는 헌병소가 생겼다

③ 檢書廳 內閣 奉謨堂으로 이루어진 奎章閣 영역은 내각 건물에 봉모당을 봉모당 건물에

譜閣을 설치한 이외의 주변건물은 모두 없어졌다 ④ 인정전 서행각 밖에 있던 政廳 玉堂

藥房 永依舍 등이 모두 없어지고 덜렁 창고 한 채가 생겼다 ⑤ 선원전 영역에서는 선원전

에 元璿源殿이라 쓰고 養志堂을 헐었다 ⑥ 선원전 이북의 숙경재 소주방 생물방 수라간

등 일곽을 모두 헐고 營繕倉庫(현존 의풍각) 木炭庫 醬油庫 등을 신설하였다 ⑦ 대보단을

헐고 관통하는 길을 냈으며 대보단 남쪽 궁장 밖 별도의 영역(北一營 자리)에 1921년에는

선원전과 懿孝殿을 덕수궁으로부터 移建하였다 ⑧ 1917년에 소실된 대조전 일곽을 1920년

에 경복궁 내전을 헐어다 재건한 모습이 그려져 있고 이때 새로 지은 生果房 주방 등이 대

조전 서쪽에 그려져 있다 또 뒤뜰에 嘉靖堂이 移建되어 있다 ⑨ 낙선재 일곽 남행각 밖의

모든 건물이 없어지고 낙선재에 현관이 수강재 옆 마당에 여러 창고가 창경궁과의 경계에

담이 신설되었다 ⑩ 이왕직청사 뒤에 창고가 신설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11년부터 1921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므로 도면 작성시기는 빨라야 1921년경으로 추정된다 또 이 도

면에는 종묘와 창경궁 사이를 가른 도로(1932년 개통)가 아직은 신설되지 않았으므로 1932

년 이전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1936년경에 작성된 장서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形」과 비교하

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돈화문 안쪽의 경우 소방서는 창고로 헌병소는 昌德宮支

署와 봉모당사무실로 경찰서는 舊 昌德宮警察署 등으로 바뀌어 있다 ② 元선원전 주변의

부속건물은 모두 헐렸다 ③ 희정당 오른쪽의 觀物軒에 lsquo緝熙rsquo라고 처음 적었다 이러한 변화

1는 1936까지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 3장의 장소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토대로

1907년 이후부터 1936년까지 창덕궁에서 일어난 변화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85)

이 가운데 가장 극심하게 파괴된 곳은 정전인 인정전 일원 편전인 선정전과 희정당 일원

85) 이강근 「장서각 소장 궁궐도면」 『건축역사연구』 63호 2009 4 pp 142-143

침전인 대조전 일원 등이었다 통치 기능이 마비되면서 1909년에는 궐내각사를 대신하여 이

를 통폐합할 의도로 일본식 2층 양옥인 궁내부청사가 돈화문 오른쪽 영역에 세워져 근본적

인 변화가 일어났다 후원 지역에는 숲 사이로 이리저리 낸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한편 1917년 겨울에는 대조전 서쪽에 붙어 있는 나인 갱의실에서 불이 나 순종과 순종

비가 급히 피신한 가운데 大造殿熙政堂景薰閣 등을 비롯하여 선정전 동쪽의 내전 일곽

이 대부분 불타버렸다 이때 내전에 보관되어 온 많은 보물과 역사 자료가 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의 화재는 放火로 추정된다 1917년은 순종이 폐위되고 나라를 빼앗긴 지 7년째

되는 해이며 경복궁에는 조선총독부청사 건립공사가 착공되어 일제의 혹독한 식민정치가

공고해지고 있었던 해이다 바로 이러한 때 왕의 침전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일어난 것은 왜

일까 의도적인 방화였을 가능성은 없는가 마지막 황궁이자 폐위당한 순종의 거처이기도

했던 창덕궁의 내전이 모두 소실되었으므로 순종 일가의 거처를 새로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

었다

1919년 1월에는 고종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로 인하여 31 독립만세가 거국적으로 일어

났으나 독립은 쟁취할 수 없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창덕궁의 중건이 미루어지다가

1920년에 이르러 중건에 관한 대책회의가 열렸는데 처음에는 700평 정도의 건물을 한옥에

서양식을 가미한 절충식으로 짓기로 하였으나 그 다음 회의에서는 경복궁의 내전을 헐어다

가 복원한다는 奇想天外한 방침이 정해졌고 그렇게 공사는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왕

직(李王職)을 시켜 경복궁 내전을 뜯어다가 창덕궁 내전을 복구하는 데 쓰도록 하는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경복궁에서 헐려 나간 건물은 交泰殿康寧殿동행각서행각延生

殿慶成殿延吉堂應趾堂欽敬閣含元殿萬慶殿興福殿 등이었다

그 결과 경복궁 내전은 완전히 훼손되고 3년간에 걸친 공사 끝에 창덕궁 내전 일곽 가

운데 대조전과 좌우 헌(흥복헌과 융경헌)희정당경훈각함원전 등이 변형된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대조전은 비교적 충실한 모습으로 재건된 반면 희정당은 규모가 대폭 확장되고

건물 앞쪽에 전에 없던 행각과 부속 건물이 첨가되었으며 평면 규모는 물론 기둥의 높이

변화 복도의 첨가 전면 부속건물의 돌출부 등은 전통적인 궁궐 건물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심지어 서양식 가구를 들여와서 입식생활에 맞도록 개조하였다 대청 좌우에는 벽화도 새로

조성하였다86) 대조전 서쪽으로 전에 없던 콘크리트 구조물이 지어져서 생과방(生果房) 복

도 등으로 쓰이게 된 것도 새로운 변화였다 경훈각은 징광루를 포함한 2층 건물이었으나

그 자리에 경복궁에서 옮겨 온 단층 건물인 만경전을 세움으로써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건

되었다 또 경훈각 오른쪽 마당 즉 대조전 뒤뜰에 있던 어정은 이때 메워진 듯하다

그런데 대조전은 경복궁 교태전 재목 희정당은 경복궁 강녕전 재목을 이용하여 재건된

반면 경훈각은 경복궁 만경전을 그대로 移建한 것이다 함원전은 경복궁 함원전을 이건한

것이 아니라 교태전의 동북 翼閣인 建順閣을 이건한 것인 듯한데 건물의 칸수와 기둥 간격

만 약간 변형되어 있다 대조전을 중건하면서 교태전 건물을 변형시켰기 때문이다87)

86) 이때 조성된 벽화의 미술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조은정 「1920년 창덕궁 벽화조성에 관한 연구」『미술사학

보』33 미술사학연구회 2009 참조

87) 장순용 앞 책 72쪽

경복궁 만경전은 원래 대비 침전인 자경전의 북쪽에 마련된 건물로 후궁 지역의 중심건

물이었는데 중건 당시의 사용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명칭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규모

와 평면형태로 보나 대비 침전일 가능성이 높다 경복궁을 중건하던 당시에는 익종비 神貞

王后(1808-1890) 헌종계비 孝定王后(1831-1903) 철종비 哲仁王后(1837-1878) 세 분이 모두

살아계셨으므로 대비의 침전도 세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가운데 慈慶殿이 신정왕후 興

福殿이 효정왕후의 거처였으므로 萬慶殿은 철인왕후의 거처로 마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만

경전 동쪽에는 內燒廚房인 建綺閤) 外燒廚房인 瑤光堂이 있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경전은 철인왕후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고종의 집무처로 빈번

하게 사용되었다88) 만경전 바로 북쪽에 있었던 만화당은 일찍이 1897년 5월 경운궁 중건시

에 경운궁으로 이건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그 남쪽에 있던 만경전마저 창덕궁으로 이건됨으

로써 경복궁 자경전 이북의 중요 내전은 모두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 『進饌儀軌』(1887 丁亥) 圖說編의 lsquo萬擎殿圖rsquo나 『朝鮮古蹟圖譜』十권(1930년간)의

사진을 통해서는 건물의 외형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현존 경훈각이 경복궁

만경전을 옮겨 원형 그대로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89)

1920년에 재건된 이후 대조전 일곽에서 살았던 순종 일가의 생활은 궁녀들의 증언을 통

하여 밝혀진 바가 있는데90) 그 가운데 당시 경훈각의 용도를 언급한 내용이 있어서 주목된

다 즉 ldquo순종 내외가 내전 중건뒤 이곳에서 생활한 햇수는 7년 남짓한데 왕비 윤씨(순정황

후)는 경훈각을 공부방 겸 쉬는 집으로 애용했다고 한다 종실 부인 2 3명과 김명길 상궁까

지 끼어서 가정교사를 앉히고 영어와 일본어도 배우고 피아노도 들여다 놓고 가끔 쳤다고

한다rdquo 그러나 1926년 순종황제 사후부터는 윤비의 거처가 낙선재로 바뀌면서 경훈각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한편 1921년에는 창덕궁 후원의 동북쪽에 덕수궁 선원전을 헐어다가 신실 12칸 형식의

정면 14칸 측면 4칸 규모의 璿源殿을 새로 지어 역대 제왕의 御眞을 옮겨 봉안하고 인정전

서쪽에 있던 원래의 선원전은 건물만 남겨 둔 채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때 덕수궁 안 서

북 영역에 있었던 순명효황후의 혼전인 懿孝殿도 함께 옮겨져 새 선원전 앞쪽에 세워졌

다91) 이리하여 조선왕조 역대 왕의 어진마저 궁궐 깊숙한 곳에 幽閉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26년 4월 25일에는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였으므로 궁궐의 주인은

더 이상 없게 되었으니 나라 잃은 지 16년만의 일이었다 일제 치하이기는 하지만 그 뒤로

창덕궁은 공원으로 전락되어 내외국인에게 관람이 허용되었고 이에 따라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하여 그 東西 行閣과 인정문 및 좌우 月廊이 전시장 용도로 개조되었다 이외 많은 전

88) 『승정원일기』 고종 22년(1885) 1월부터 고종 28년(1891) 9월 사이에 230여 차례 사용되었다

89) 만경전의 규모와 평면은 「北闕圖型」『宮闕志』 등에서 확인된다 즉 ldquo萬慶殿三十六間無翼工柱長十一尺樑

通二間九尺式前後退五尺五寸式 道里通七間九尺式 東西退五尺五寸式 東行閣十九間半間半五樑以南有咸春門以北

有寅陽門 南邊間墻一角門輔化門 西行閣十九間半間半五樑 以南有宜春門 以北有景成門 南行閣二十八間半間半五

樑 以東有廣宜門 以西有養化門 北行閣十八間 以東有協吉堂 以西有福熙堂 及平在門以西邊有rdquo

90) 김용숙 『朝鮮朝 宮中風俗 硏究』 일지사 1987 166-180쪽

91) 이강근 「창덕궁 의효전에 대한 연구」『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항산 안휘준교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

사회평론 2006 현재 의로전으로 잘못 부르고 있는 건물은 원래 명칭이 의효전이라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각들이 철거되고 각종 시설이 새로 만들어지게 되었으므로 창덕궁은 망국의 한을 담은 일개

관람장으로 변해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3) 광복 이후의 변화

광복 이후 50년이 지나서야 조선총독부청사가 헐리고 이어서 창덕궁이 복원되고 있다

게다가 1997년에는 조선왕조의 역사와 宮廷文化를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이라는 점을 인정

받아 유네스코에 의하여 lsquo世界文化遺産rsquo으로 지정되었다92) 이리하여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

의 야만성은 세계에 부각되고 뼈아픈 역사를 이겨내고 스스로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어

온 한국민족의 노력은 세계 문화민족들의 공감을 사게 되었다

현재 창덕궁에 남아 있는 건물과 그 건립 연대는 다음과 같다93) 敦化門(1607년)仁政

殿(1804년)仁政門(1745년)宣政殿(1647년)大造殿熙政堂含元殿景薰閣(이상은 1920

년 경복궁 내전 移建)嘉靖堂(1920년 무렵 덕수궁 가정당 移建)賓廳(현 御車庫)誠正閣

(정조년간)94)內醫院(성정각 부속건물로 1920년 무렵부터 내의원으로 사용됨)觀物軒(정조

7년 이전)95)舊璿源殿(1695년 현 유물보관창고)樂善齋(1847년)壽康齋(1785년)96) 錫福

軒(1848) 翠雲亭(1686년)閒靜堂(1917년 이후)上涼亭滿月門 承華樓三三窩七分序

(이상 정조 년간)新璿源殿(1921년)

92) 해방 이후 1970년부터 2005년까지 우리 정부에 의해서 시행된 보수공사의 내역에 대해서는 본 보고서 3장

참조

93) 단 1990년대에 문화재관리국에 의하여 시행된 복원 공사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6장 제5절을 참조하기 바

94) 『궁궐지』에 숙종이 지은 ldquo儆戒世子十箴及小序rdquo가 살려 있고 숙종실록 숙종 31년 2월 병자에 세자가 성정

각에 있다는 기사로 보아 숙종때 이미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옳다

95) 『正祖實錄』16권 7년(1783 계묘) 11월 26일(계축) 觀物軒에 나아가 抄啓文臣의 講經 시험을 거행하였다

96) 『正祖實錄』 20권 9년(1785 을사) 8월 27일(갑진) ldquo貳極門 안에 있던 오래된 우물 자리에 壽康齋를 세웠

다 慈慶殿을 營建할 때 남은 자갈과 벽돌을 우물 위에 쌓아 假山을 만들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를 철거하

고 그 우물을 파고는 小齋를 세워 내려다 보게 하였다 이곳은 太祖朝 壽康宮의 옛터로서 『輿地勝覽』에 기

재되어 있다 이어 그 齋를 壽康齋라고 이름을 지었다rdquo

2 창덕궁 영역의 변천

가 조선 전기 창덕궁의 영역 변천

1) 창덕궁 창건시의 위치와 규모

태종은 즉위 4년에 신하들과 종묘에서 점을 쳐서 태조가 처음 도읍을 세웠던 한양을 다

시 환도하여 법궁인 경복궁 이외에 궁궐을 짓도록 명하였다97) 이궁의 위치는 향교동의 동

쪽으로 정했다98) 향교동은 조선후기의 지도에 따르면 한성부 중부 경행방 교동계에 포함된

동으로 고려시대 한양 향교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99) 현재의 낙원동 271~283번지 일대이

며 창덕궁은 향교동의 동북쪽에 자리하였다 성종대에 편찬한『신증동국여지승람』에 창덕

궁은 ldquo北部 廣化坊에 있다rdquo고 하여 그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97) 『태종실록』 권8 태종 4년(1404) 10월 6일

98) 『태종실록』 권8 태종 4년(1404) 10월 6일 ldquo遂相地于鄕校洞東邊 rdquo

99) 유본예 『한경지략』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영인본 2000 284쪽

구분 경복궁101) 창덕궁102) 조선후기 창덕궁

연대 1395(태조 4) 1405(태종 5) (궁궐지)103)

내전 침전 연침7칸+이방(2+2)칸 청3칸+동서침전(2+2)칸대조전청3칸+동서온돌

(2+2)칸+퇴(1+1)칸

표 2-2gt 창건당시 창덕궁의 규모와 경복궁 규모 조선후기의 창덕궁 규모와 비교

그림 1gt「도성도」(여지도 1750~ 1757년 754times98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이궁의 공사가 진행중이던 태종 5년 왕은 궁궐 짓는 것을 보고 성산군(星山君) 이직(李

稷)과 함께 그 규모(規模)를 획정하였다100) 궁이 완성된 후에 기록한 규모는 총 287칸으로

이 중에서 내전이 195칸 외전에 92칸이다 이 기록에서는 주요전각의 경우 정면 칸수만 표

기한 것이다 태조 4년(1395) 준공된 경복궁과 비교하면 내전의 규모가 195칸으로 창덕궁이

더 많고(경복궁은 173칸) 외전은 경복궁이 212칸으로 창덕궁(92칸)의 2배가 넘는다 이는

창덕궁이 내전위주의 이궁이라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100) 『태종실록』 권9 태종 5년(1405) 2월 2일

구분 경복궁101) 창덕궁102) 조선후기 창덕궁

연대 1395(태조 4) 1405(태종 5) (궁궐지)103)

행랑

북천랑 7칸 북행랑 25

칸 남천랑 5칸

동소침 3칸 서소침 3칸

동서천랑 (2+2)칸

남천랑 6칸

동서소횡랑 (5+5)칸

북행랑 11칸

서별실 3칸

동서행랑 (15+15)칸

동루 3칸 상고 3칸

흥복헌 4칸

융경헌 3칸

동행각 6칸

서행각 6칸

남행각19칸

내전소계 173칸 195칸

외전

편전 - 3칸 선정전 3칸

보평청 5칸+이방(1+1) 3칸

정전 5칸 3칸 5칸

월대

동서폭 1125자

남북폭 50타

중계 깊이 15자

동서폭 639자

남북폭 33자

중층폭 5자

상월대

남북 폭 45자

하월대 165자

내정

남북(월대전면~정문)

178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3225(1125 +15

+15+80+80)자

남북( 월대전면~정문)

117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156자

남북( 월대전면~정문)

123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209자

행랑

북행랑 29칸

동행랑 28칸

서행랑 28칸

동행랑 17칸

서행랑 16칸

동행각 18칸

서행각 19칸

대문3칸

좌우행랑 (11+11)칸

3칸

좌우행랑 (9+9)칸

인정문 3칸

좌우행랑 (10+10)칸

외전소계 212칸 92칸

궐내각사 390칸

승정원청 3칸

동행랑 10칸

남행랑 4칸

북행랑 4칸 외행랑 5칸

외루 3칸

승정원 3칸 7량

동행각 125칸

서행각 12칸

남행각 5칸

당후 10칸

총 칸수 775칸 287칸 183825칸(대보단 포함)

2) 조선전기 창덕궁의 변천과정과 범위

(1) 제1기 태종대(太宗代)~세종대(世宗代)

창덕궁의 창건과 궁궐로서 형태를 갖추는 시기이다 태종대에 창덕궁을 지을 때에는 법

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현재보다 그 범위가 좁고 전각의 구성도 달랐다 창건당시에는

인정전 일곽의 외전과 내전으로 구성되었으며 인정전 외행랑과 진선문 금천교는 태종 11년

에104) 돈화문은 그 다음해에 완성되었다105) 태종은 이어서 편전을 넓게 고쳐 짓고(태종 15

101) 『태조실록』 태조 4년(1395) 9월 29일

102) 『태종실록』 태종 5년(1405) 10월 19일

103) 『궁궐지』에는 건물의 전체 칸수가 적혀 있으나 이 표에서는 경복궁과 창덕궁의 창건 기록과 같은 기준으

로 전각의 정면 칸수를 적음

104) 『태종실록』태종 11년(1411) 3월 18일

105) 『태종실록』태종 12년(1412) 5월 22일

년) 인정전을 확장하고 나서106)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세종은 즉위직후 상왕인 태종

을 위하여 창덕궁의 동남쪽에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즉 창덕궁의 외전 침전일곽과 나중

에 동궁과 창경궁이 되는 수강궁 일대의 틀이 태종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태종대에 시작한 인정전 확장과 외행각(인정문 남쪽) 조성은 세종 즉위 직후에 마무리

되었다 인정문 남쪽의 행랑은 특별한 용도로 쓰이지 않고 다만 정전 앞쪽의 영역에 경계를

짓는 역할이었다고 생각된다 창덕궁의 위상이 이궁이었으므로 외조의 각 기관이 외행랑에

들어서지 않았으며 행랑을 세우지 말고 도로 담장을 쌓으라는 지시107)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단종 즉위년에 인정전의 서까래와 보가 썩어 이를 수리하였다108) 인정전을 창건한 지

50년만으로 처음에는 수리를 한다고 하였으나 『단종실록』에 따르면 초석과 기둥 등 고치

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109)고 하여 수리라기보다는 개축하면서 좀 더 확장 한 것으로 보

인다

그림 2-2gt 태종~세종년간의 창덕궁범위

창덕궁의 창건(1405)

금천교(1411) 돈화문 건립(1412) 인정전 확장(1418)수강궁건립(1418)

106) 『태종실록』태종 18년(1418) 7월 7일

107) 『태종실록』 태종 1년(1401) 4월 12일 15일

108)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11월 17일

109) 『단종실록』 단종 1년(1453) 4월 27일

시기 내용 참고

태종 4년(1404) 106 향교동 동변에 이궁을 짓도록 하다

태종 5년(1405) 10 9 이궁완성

태종 6년(1406) 4 1 궁안에 광연루 지음

태종 6년(1406) 4 9 해온정 궁 동북 모퉁이에 지음

태종 11년(1411) 318 진선문 금천교

ldquo누각과 침실을 창덕궁에 짓고 진선문 밖에는 돌

다리를 놓았는데 공조판서 박자청을 시켜 그 역사

를 감독하게 하였다rdquo

인정전의 확장에 먼저

건립된 진선문의 위치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태종 11년(1411) 415 의정부 朝房을 진선문 밖에 짓도록 하였다

태종 12년(1412) 522 진선문 남쪽에 누문 5칸을 세우고 lsquo돈화문rsquo이라

태종 15년(1415) 128 편전을 넓게 고쳐지음

태종17년(1417)윤512 이조판서 박신이 인정전이 좁아 서쪽으로 당겨 다

시 짓도록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태종 18년(1418) 77 인정전을 고쳐짓다

태종 18년(1418) 910 인정전이 준공되었다

세종 즉위년(1418) 113 완성된 상왕전의 신궁을 壽康宮이라 하다

세종 1년(1419) 412 15

박자청이 상왕(태종)의 지시로 인정문 밖의 남행

랑을 비뚤게 지었으므로 하옥하고 헐어버리도록

하고 행랑대신 담장을 쌓도록 하다

단종 즉위년(1452) 1114 사헌부에서 인정전을 개축을 정지할 것을 청하다

단종 즉위년(1452) 1117 ldquo대신 등이 말하기를 lsquo인정전(仁政殿)의 서까래

[欀題]와 동량(棟梁) 이 썩었다rsquo 하는데 만약 창

덕궁에 거처하게 되면 정사를 볼 곳이 없어서 개

수(改修)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구지(舊址)이기 때

문에 조금 넓힐 뿐이다rdquo

인정전을 확장

단종 1년(1453) 427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창덕궁(昌德宮)을 처음에는 수보(修補)한다고 말하

였으나 지금 주춧돌 하나 기둥 하나도 고치지 아

니한 것이 없으며 인정전에 이르러서는 완전하고

튼튼하여 옛날 그대로 있는 것이 가한데 모두 철

거하여 고쳤으니 이름은 수보한다고 하고 모조리

새로 짓습니다 흥인문을 고치고 수문을 지음

단종 1년(1453) 55 인정전과 흥인문 수문의 역사를 마치도록 하다

표 2-3gt 제1기 태종~세종연간의 창덕궁 연표

(2) 제2기 世祖代~成宗代

창덕궁은 태종대에 형식적인 틀을 대부분 갖추었으며 주요 전각이 자리를 잡아 갔다

그 다음 단계로서 성종년간에 이르기까지 전각의 명칭을 정하고 영역을 확장하여 조선 후기

까지 유지되는 궁역 외곽선을 확보하게 된다 세조년간에 중심 전각들의 이름을 정했는데

조계청(朝啓廳)을 선정전(宣政殿) 선정전 뒤편의 동쪽 별실(後東別室)을 소덕당(昭德堂) 서

쪽 별실(後西別室)을 보경당(寶慶堂) (내전의)정전(正殿)을 양의전(兩儀殿) 동침실(東寢室)

을 여일전(麗日殿) 서침실(西寢室)을 정월전(淨月殿)이라 칭하고 누(樓)를 징광루(澄光樓)

동별실(東別室)을 응복정(凝福亭) 서별실(西別室)을 옥화당(玉華堂) 누하(樓下)는 광세전(光

世殿)middot광연전(廣延殿) 별실(別室)을 구현전(求賢殿)으로 하였다110) 이때 정한 선정전과 소덕

당 보경당 징광루 옥화당 등 대부분의 명칭은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양의전으로 이

그림 3gt 세조~성종년간 궁장의 확장과 창경궁

건설

세조 전각명칭 정함(1461)

세조 후원 동쪽궁장의 확장(1462~1463)

성종 창경궁의 창건(1584)

름 지은 정전(내전의 정전)은 세조대에

이전에 대조전(大造殿)으로 개칭하였

다111)

세조년간에는 후원의 영역을 확장

하였는데 즉위 8년에서 9년에 후원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쪽과 동북쪽의 담

장을 넓혀서 쌓으려 민가를 철거했으며

이때 넓힌 궁장은 성균관에 맞닿게 되

었다112) 당시 확정된 후원의 경계는 궁

의 동북쪽과 북쪽 그리고 동쪽으로 응

봉 주산의 내맥이 지나는 곳에 합친 것

이 되는 셈인데 궁의 후방 담장 경계는

세조대에 확정된 것이 그 이후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성종대에는 왕실의 구성원 중에서

여러명의 대비가 존재함에 따라 창덕궁

의 연조부분을 확장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창덕궁의 지형이 내전을 확장하

기에는 협소하여 창경궁을 조성하게 되

었다113) 성종 13년 창덕궁 수리를 논의

하는 자리에서 성종은 창덕궁을 수리할

필요가 없고 그 대신 수강궁을 수리하

라고 했다가114) 이듬해 창경궁을 짓도록 명하였다 성종 15년에 완공된115) 창경궁은 궐내각

사와 내전 후원을 창덕궁과 공유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경희궁을 서궐이라 하는데 대

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ldquo동궐rdquo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시기까지 외조는 승정원 빈

청 사옹원 내반원 정도가 확인된다

성종 6년에 창덕궁의 문 중에서 액호가 없던 것을 왕의 명으로 서거정이 짓게 되는데

이때 명명된 문 이름을 통해서 창경궁이 조영되기 이전 성종대의 창덕궁 궁역과 문의 기능

110)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1461) 12월 19일

111)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1467) 5월 17일 왕이 대조전에서 신하들과 이시애의 난을 토벌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는 그 직전까지도 양의전에서 논의하던 내용으로 이후 양의전이라는 전각명은 기록에 보이지

않고 같은 논의를 양의전 대신 대조전에서 하고 있어서 양의전과 대조전은 같은 전각이라고 추정된다 『宮闕

志』(K2-4363) 에 실린 양의전 관련내용은 다음과 같다 ldquo兩儀殿世祖七年壬午上御兩儀殿召承旨 金 從舜 謂曰

臺諫擇可言事言之人主得納諫之名 臺諫亦得獻替之譽矣[주國朝寶鑑]rdquo

112) 『세조실록』 세조 9년(1463) 2월 7일

113) 예종대 이전에는 왕비가 먼저 승하하여 왕실에 대비가 없었으나 예종대(예종은 즉위기간이 1년2개월로 짧

았다)에 정희왕후 성종 즉위 후에는 예종비 안순왕후와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가 생존한 상태로 갑자기 대

비가 세분이나 존재하게 되었다

114) 『성종실록』 성종 13년(1482) 12월 14일

115) 『성종실록』 성종 15년(1484) 9월 27일

시기 내용 참고

세조 7년(1461) 1219 창덕궁의 조계청(朝啓廳)을 선정전(宣政殿) 후동

별실(後東別室)을 소덕당(昭德堂) 후서별실(後西

別室)을 보경당(寶慶堂) 정전(正殿)을 양의전(兩儀

殿) 동침실(東寢室)을 여일전(麗日殿) 서침실(西

寢室)을 정월전(淨月殿)이라 칭하고 누(樓)를 징

광루(澄光樓) 동별실(東別室)을 응복정(凝福亭)

서별실(西別室)을 옥화당(玉華堂) 누하(樓下)는 광

세전(光世殿)middot광연전(廣延殿) 별실(別室)을 구현전

(求賢殿)이라 칭하도록 하라

세조 13년 5월 17일 대조

전 기사가 등장하므로 대조

전은 처음에 양의전이었다가

세조 13년 이전에 대조전으

로 개칭 된 것으로 보임

보경당은 왕이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거나 소견하는 장

소로 사용 왕의 거처 영조

탄생

세조 8년(1462) 130 후원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장을 넓혀서 쌓으려

민가를 철거하도록 하다

세조 9년(1463) 27 9 후원의 궁장을 넓히려고 동북동 북쪽의 인가를

철거 창덕궁의 궁장이 성균관에 맞닿음

성종 6년(1475) 8 23 액호가 없는 창덕궁의 문이름을 정함

성종 15년(1484) 9

27

창경궁 준공

연산군 11년~12년 후원에 서총대 건립

표 4gt 제2기 세조~성종년간의 창덕궁 연표

을 파악 할 수 있다 『성종실록』의 내용 중에서 외동장문으로 선인문(宣仁門)은 현재 창경

궁 홍화문 남쪽에 있는 문인데 세조 8년에 궁장 위치를 동쪽으로 물려 쌓은 것을 감안하면

성종대에 이름을 지은 선인문과 현재의 선인문 위치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창덕궁의 내동장문(內東墻門)은 건양문(建陽門)이라 하여 창덕궁과 당시 수강궁의 경

계에 내궁장이 있고 건양문으로 통행하여 그 경계의 구분이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서쪽의 궁장문으로는 요금문(曜金門) 서행랑문(西行廊門)은 금호문(金虎門)이 확인되며

후원의 북장문(北墻門)은 공진문(拱辰門) 외북장문(外北墻門)은 광지문(廣智門)116)이라 하였

다 현재공진문으로 경계지워지는 주합루 일대까지가 당시에 후원이었으며 그 북쪽(현재 옥

류천 일대의 북쪽)에 또 외궁장이 있었다 「도성대지도」(1764년경 제작 추정)에는 창덕궁

후원의 외궁장에 광지문이 표기되어 있으며 문 밖에는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의 초소인 광지

영(廣智營)이 있었다 연산군은 이 문을 지키는 영(營)에서 후원이 내려다 보인다고 하여 그

위치를 아래쪽으로 옮기게 하고 이쪽으로 사람들을 왕래하지 못하도록 했다117) 이 문의 이

름은 『승정원일기』에 광지영 서쪽에서 건무문 동쪽까지의 궁장을 수리하면서 건무문이라

고 칭하고 있어서118) 정조년간에 건무문(建武門)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에는 lsquo건무문rsquo이라고 적혀 있다

116) 『성종실록』 성종 6년(1475) 8월 23일 ldquo예문관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전교를 받들어 대궐의 문 중에

예전에 額號가 없는 것은 각기 2개의 이름을 扁額하여 아뢰니 임금이 낙점하기를 창덕궁 밖 東墻門은 宣仁

門 중간의 東墻門은 景陽門 新大門은 長春門 中大門은 宣明門 南夾門은 春興門 안 東墻門은 建陽門 북쪽

東墻門은 綺華門 廣延亭의 西岾門은 平昌門 南行廊門은 永和門 北行廊門은 永平門 內司僕南門은 雲錦門

外東山門은 延陽門 左夾門은 光範門 右夾門은 崇範門 南墻門은 丹鳳門 內西墻門은 宜秋門 左闥門은 肅章

門 兼司僕廳의 新大門은 延福門 內司饔의 上東門은 小春門 북문은 小東門 중궁의 差備門은 延禧門 承政院

의 南門은 延英門 서행랑문은 金虎門 外西墻門은 鎭金門 西墻門은 曜金門 後苑의 北墻門은 拱辰門 新北墻

門은 閶闔門 東墻門은 靑陽門 外北墻門은 廣智門 -후략-rdquo

117) 『연산군일기』 연산군 5년(1499) 2월 26일

118) 『승정원일기』 정조 8년 6월 22일

나 조선후기 창덕궁의 영역 변천

1) 제3기 임진왜란~영조대(英祖代)

세 번째 단계는 임진왜란 이후에서 영조년간까지 이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경복궁이 재건되지 못하고 창덕궁이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법궁으로서의 형

식을 갖추어 나가는 단계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한동안 전란을 수습하느라 종묘

와 궁궐을 복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조 39년(1606)에 경복궁 중건을 착수했으나 도중에 창

덕궁을 복구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119) 이 공사는 광해군 2년에 완료되었다120)

광해군년간의 창덕궁 복구는 광해군 1년(1609) 10월에 대략적인 공사가 완료되었고121)

광해군 2년(1610) 9월에 모든 공사가 끝난듯 공사에 참여한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의

도제조middot제조middot도청(都廳) 이하 공장(工匠) 등에게 시상을 하도록 했다122) 광해군대의 복구는

옛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법궁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을 완공하고도 이곳에 거처하지 않고 경운궁으로 이어했으며 재위 9년(1617) 부터는

인경궁과 경덕궁(후에 경희궁으로 개칭)을 건설하는123) 등 창덕궁에 별로 애착을 보이지 않

았다 광해군대에 경덕궁과 인경궁 건설시 침전은 창덕궁의 대조전을 모델로 삼아 크기와

규모를 같도록 하였다124)

임진왜란 후 재건된 창덕궁의 여러 전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조반정시 반정군에 의해

인정전과 수정당(壽靜堂)을 제외하고 내전의 전각이 대부분 소실된 것이다 소실된 전각들은

곧바로 복구되지 못하였으며 창경궁의 전각을 이용하다가 인조 25년(1647)에 이르러서야 내

전의 전각들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인조대에 인경궁과 경덕궁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복구공사를 위하여 건물을 헐어 그 부

재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광해군대에 창덕궁을 참조하여 건물의 규모를 정하였으므로 인경궁

의 건물 부재를 사용한 창덕궁 전각의 복구는 소실되기 이전과 큰 차이가 없는 형태가 되었

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인조 25년에 재건된 범위는 선정전 북쪽의 보경당과 태화당

소덕당을 포함하여 대조전 희정당 등의 내전 일곽이 이전의 모습대로 재건되었으며125) 그

외에도 인정전의 동월랑 남월랑 승정원 내궁방 내사옹원 외사옹원 숙장문 좌우행랑 인

정문 외행랑 선정전 선정전 북월랑 등 외전영역의 행랑과 궐내각사를 포함하고 있다126)

119) 『宮闕志』 昌德宮志

120) 『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1610) 9월 1일

121) 『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1609) 10월 16일

122) 『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1610) 9월 1일

123)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1617) 1월 18일

124)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1617) 6월 21일

125) 『인조실록』 인조 25년(1647) 11월 12일 ldquo상이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는데 수리할 적에 새로 세운 것도

많았다 모든 낭무(廊廡)가 일체 옛 제도와 같았고 大內에 大造殿middot宣政殿middot熙政堂middot靜默堂middot集祥堂middot寶慶堂middot玉華堂middot

泰和堂middot讌和堂과 澄光樓가 있는데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rdquo

이 때 재건된 전각은 대부분 순조대까지 유지되었으며 그 내용은 「동궐도」에 표현되어 있

인조년간에 특기할 만한 것은 후원에 많은 정자를 지어 창덕궁의 후원 깊숙한 곳에 왕

의 개인적인 휴식 공간이 조성된 것이다 인조 14년(1636)에는 후원의 제일 북쪽인 광지문

안쪽에 청의정과 태극정 소요정 취하정을 짓고 옥류천을 조성했다 인조 18년에는 취규정

을 지었으며 22년에는 존덕정을 지었다 당시 청나라에서 귀국한 소현세자에게 청나라의 궁

관(宮觀)을 물어 팔각형의 정자를 짓기도 했다127)

효종과 현종대에는 대비를 위한 전각이 추가되어 공간에 변화를 준것이 특징이다 효종

6년(1655) 인정전 서북쪽 흠경각옛터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를 위해 만수전을 지었다 자

의대비는 대조전 북서쪽 언덕에 있었던 수정당(壽靜堂)에 거처했으나 이곳이 좁고 협착하다

는 이유를 들어 만수전을 지은 것이다 수정당은 정조 18년(1794)에 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면

서 당(堂)에서 전(殿)으로 전각의 위상을 높여 수정전(壽靜殿)으로 개칭하였다 현종 8년

(1667)에는 대조전 북동쪽에 있던 집상당(集祥堂)을 고치면서 이름을 집상전으로 개칭하고

통명전에 거처하던 효종비 인선대비를 거처하도록 하였다 집상전은 세조대에도 집상당이라

는 전각명이 실록에 보이는데 인조대에 창덕궁을 재건할 때 이전의 모습과 제도대로 지었다

는 점과 이때에도 집상당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있던 전각으로 보인다

인정전 북서쪽은 원래는 각종 천문기기를 설치한 흠경각128)이 자리잡고 있어서 외전영

역에 속했으나 만수전과 내전관련 부속 건물들이 새로이 들어섬으로서 그 일대는 내전영역

으로 그 기능과 성격이 변화 하였다 만수전이 숙종대에 소실된129) 다음에도 그 자리에 계

속해서 대비의 거처인 경복전이 들어섰으며 주변의 부속 건물들은 영모당 수라간 등촉방

등의 기능을 가지고 유지되었다

숙종대에는 왕의 어진을 제작하여 선원전에 보관하고 이것을 경종과 영조대에 확장해

가면서 선원전일곽이 하나의 영역을 새롭게 형성하였다 선원전 자리는 원래 도총부로서 궐

내각사의 일부였으나 효종대에 그 자리에 춘휘전을 지었는데 이곳에 숙종의 어진을 보관하

였다 이후 보관할 어진의 수가 늘어나면서 영조대에 중수하였고 양지당 등 주변전각이 재

실과 선원전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

숙종년간에 또 하나의 변화는 후원의 북서쪽에 대보단을 창설한 것이다 대보(大報)란

126) 『昌德宮修理都監儀軌』(1647)

127) 『인조실록』 인조 24년(1646) 2월 4일 상이 八角亭을 後園에다 지었다 처음에 세자가 북경에서 돌아오

자 상이 청나라의 宮觀의 제도에 대하여 물었다 세자가 팔각정의 제도가 가장 묘하다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

기를 ldquo네가 그 모양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겠는가rdquo 하니 세자가 즉시 그려서 올리자 상이 매우 기뻐하여 그

정자를 후원에다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매우 기묘하였다

128) 흠경각은 세종대에 경복궁 사정전 서쪽에 있었으며 혼천의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후 선조가 영의정 이항

복에게 명하여 예전의 제도대로 만들도록 하였다 광해군 5년에서 8년까지 흠경각 건립에 대한 기사가 있는

데 이는 창덕궁에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효종년간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수전을 지으면서 혼천의가

손상되었는데 현종조에 들어와 좨주 宋浚吉이 흠경각의 옛 제도를 복구하도록 청하자 마침내 李敏哲에게 명

하여 蔡沈의 《書經集傳》에 조금 더하고 덜어서 혼천의의 형상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 제도는 안에 四游와

玉衡이 빠져 있고 또 白單環을 없앤 것이었다 숙종조에 들어와 이민철에게 명하여 예전 혼천의를 중수(重修)

하도록 하고 齊政閣을 창덕궁 熙政堂의 남쪽에 지어 봉안하였다(『國朝寶鑑』 제 60권 영조조 4 한국고전

종합 DB httpdbitkcorkr)

129) 『숙종실록』 숙종 13년(1687) 9월 2일

큰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임진왜란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神宗)에 제사 지내기

위한 시설이다 숙종 30년(1704) 별대영(別隊營)의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세웠다 후원

의 서쪽 담과 별대영의 동쪽 담 사이를 연결시켜 쌓고 후원의 담을 뚫어 문으로 만들어서

친제(親祭) 때 거둥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대보단으로 통하는 문은 창덕궁 후원의 동쪽문인

집춘문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130) 이렇게 명나라에 대한 신의를 강조했던 것은 당시 유행

했던 반청(反淸)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신위는 대보단 동쪽의 봉실에 모셨으며 서쪽의 경봉

각(敬奉閣)에는 중국 황제와 관련된 서적과 문서를 보관했다 단의 남쪽에 열천문과 공북문

을 두었고 동쪽에는 어재실인 만세송은(萬世誦恩)이 있다

숙종대에는 인조대 못지않게 후원에 다양한 형태의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여 주합루 북

쪽에서 옥류천까지 왕의 휴식처를 다양하게 마련했다

그림 4gt 인조~영조대의 전각조성

인조 25년(1647) 중건 효종대 만수전 춘휘전 건립

현종대 집상전 건립(순조대까지 유지) 숙종대 선원전 건립

130) 『숙종실록』 권40 숙종 30년(1704) 10월 3일 12월 21일

시기 내용 참고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창덕궁 소실

광해군 2년(1610) 9 창덕궁 중건

광해군 15년(1623) 3 12 인조반정시 인정전만 남고 모두 소실됨

인조 14년(1636) 후원에 옥류천과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지음

바위에 옥류천 세 글자를 새겼는데 인조의 어필이

『궁궐지(宮闕志)』

인조 18년 후원에 취규정(聚奎亭) 지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2년 후원에 존덕정 지음 연못이 있어 반원지라 하고

남쪽에 일영대를 두었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4년 후원에 희우정과 청양각 지음

인조 25년 후원에 낙민정과 관풍각(觀豊閣) 지음

서총대 동쪽 북쪽에 내농포가 있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5년(1647) 11 12 창덕궁 중건 모든 낭무(廊廡)가 일체 옛 제도와

같았고 대내에 대조전(大造殿)middot선정전(宣政殿)middot희

정당(熙政堂)middot정묵당(靜默堂)middot집상당(集祥堂)middot보경

당(寶慶堂)middot옥화당(玉華堂)middot태화당(泰和堂)middot연화당

(讌和堂)과 징광루(澄光樓)가 있는데 매우 웅장하

고 화려하였다

『昌德宮修理都監儀軌』

(1647)

효종 8년(1657) 4 2 만수전 춘휘전을 흠경각 옛터에 지음 『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

儀軌』(1657)

현종 8년(1667) 11 11 집상전을 짓도록 명하다 『集祥殿修改都監儀軌』

(1667)

숙종 13년(1687) 9 2 만수전 소실

숙종대에 만수전 터에 경복당을 짓고 이후 경종

2년 경복전으로 개칭

숙종 14년(1688) 청심정(淸心亭)을 지음 남쪽 뜰에 못을 파서 빙옥

지라 하고 정자 동쪽의 협곡에 홍예교를 놓음

『궁궐지(宮闕志)』

숙종 15년(1689) 관덕정 북쪽에 영타정(靈鼉亭)지음 불로문 밖 남

변 소실

『궁궐지(宮闕志)』

숙종 18년(1692) 애련정 연못 조성

영화당 개수

『궁궐지(宮闕志)』

숙종 21년(1695) 춘휘전을 선원(璿源)이라 이름을 고치고 어진을

봉안하였다

『궁궐지(宮闕志)』창덕

궁지 선원전조

숙종 39년(1713) 4 11 임금의 여용을 그려 뒤에 임금이 한 벌은 대내(大

內) 선원전(璿源殿)에 보관하라고 분부하였다

효종대에 지은 춘휘전을

선원전으로 전용

영조 30년(1754) 1 5 선원전 수리 7칸으로 증축

표 5gt 제3기 임진왜란~영조년간의 창덕궁 연표

2) 제4기 正祖代

정조대에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창덕궁에 활발한 건물의 조성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성

격의 전각이 들어섰다 그 결과 궁궐전체의 공간 구성에 변화가 불가피했으며 이는 이후 순

조와 헌종대의 창덕궁 공간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정조는 즉위년에서 즉위 5년까지 창덕궁내에 각종 시설들을 정비하고 첨가했는데 즉위

하자마자(1776년) 첫번째로 후원에 주합루를 세우도록 명하여 같은 해 9월 26일에 완공했다

주합루는 영화당 북쪽의 언덕에 자리 잡고 그 주변으로 봉모당 열고관과 개유와를 배치하

였고 주합루 서쪽에 이안각인 서향각을 배치하였다 주합루 일대의 건물들에는 영조의 어필

과 문집(봉모당) 중국서적(열고관 개유와)과 국내의 서책을 보관하였다 주합루는 이 일대

의 중심건물로 언덕위에서 당당한 위용으로 부용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이다 주합루 일

대가 조성됨으로써 영화당의 동쪽은 문무과 시험의 장소로서 기존의 기능을 수행하고 주

합루 일대는 왕권 강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변모하여 이 일대는 후원에서도 통치와 관련된

기능을 가진 영역이 되었다

즉위년 9월에 인정전 앞마당에 품계석을 설치하고 즉위 2년(1778) 선원전에 새로 동middot서

익각을 설치했으며131) 즉위 5년(1781)에는 주합루에 설치한 규장각의 관리들이 근무하는 공

간으로 이문원을 세웠다132) 이문원의 위치는 금호문 안쪽 선원전의 서쪽으로 원래 그 자리

에 있었던 도총부는 창경궁으로 옮겼다 이문원이 설치된 장소는 임진왜란 직후까지도 민가

가 있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즉 조선 후기에 창덕궁이 법궁으로 이용되면서 금천 서쪽은 증

가하는 궐내각사를 설치할 공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정조 6년(1782)에는 왕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중희당(重熙堂)을 신설했다133)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는 동궁으로 저승전과 시민당이 있었으나 저승전은 영조 32년 화재로 소실된

후 복구하지 않았고 시민당도 정조 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134) 처음에는 시민당을 복구하려

다가 이를 중지하고135) 시민당터와 내전영역의 중간정도 되는 지점에 세자를 위한 전각들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로서 동궁은 내전과 더욱 가까운 곳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헌종대에 편

찬한 『궁궐지(宮闕志)』에는 중희당 일곽을 창덕궁에 포함시키고 있다

131) 『정조실록』정조 2년(1778) 1월 15일

132) 『정조실록』정조 5년(1781) 3월 10일

133) 『宮闕志』창덕궁지 중희당조

134) 『정조실록』 정조 4년(1780) 7월 13일

135) 『정조실록』 정조 4년(1780) 8월 29일

그림 5gt 정조대의 전각조성

정조 9년(1785)에는 수강재를 건립했다136) 그 터가 수강궁의 옛터라고 하여 수강재

로 이름지었으며 세자궁의 정당인 시민당터의 북쪽에 위치하였다 정조가 상량문에서 밝

힌 수강재의 용도는 왕의 작은 서재로서 강학을 위한 집이었다137) 중희당과 수강재의

건립은 왕과 세자의 관계를 보다 밀접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건축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기 내용 참고

정조 즉위년(1776) 주합루 건립

정조 1년(1777) 9 6 인정전 품계석 설치

정조 2년(1778) 1 15 선원전 동 서익각 설치

정조 5년(1781) 3 10 금호문 안쪽에 이문원 설치

정조 6년 중희당 건립 『宮闕志』

정조 9년(1785) 8 27 수강재 건립

정조 17년(1793) 택수재를 고쳐서 부용정 개축 『홍재전서』제55권 잡저(雜著)2 부용정상량문

표 6gt 제4기 정조년간의 창덕궁 연표

3) 제5기 純祖代~高宗代

136) 『정조실록』 정조 9년(1785) 8월 27일

137) 『홍재전서(弘齋全書)』 제54권 잡저(雜著) 수강재상량문

순조대에는 여러 차례의 화재로 내전의 전각이 소실되고 다시 중건되었다 화재 전 후

의 모습은 「동궐도」와 고종대에 그려진 「동궐도형」에 반영되어 있다 「동궐도」는 화

재 이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만수전 자리에 있었던 경복전이 순조 24년(1824) 화재로 소실되자138) 그 자리에 다시

전각을 복구하지 않아서 「동궐도」에는 빈 터로 남아 있다 대조전일곽에 있었던 집상전은

순조 33년(1833) 내전 일곽의 전각에 화재가 났을 때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내전의 복구공

사에서 제외되어 그 이후에도 다시 지어지지 않았다 화재 후에도 대조전과 같은 내전의 중

심전각은 그대로 재건되는데 반하여 경복전이나 집상전과 같이 대비가 사용하던 전각이 복

구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왕실에 대비가 계시지 않았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순조대의 대비

전과 내전일곽에 화재가 날 당시는 영조비인 정순왕후와 정조비인 효의왕후는 승하한 뒤였

순조대에는 화재로 소실된 전각을 재건하는 건축활동은 많았지만 전각을 새로 짓거나

궁역을 확장한 일은 없었고 정조대에 이룩된 전각들이 대부분 유지되었다 효명세자 대리청

정기에 중희당일곽의 동궁전각이 활발하게 사용되었으며 내전일곽의 화재 후 재건과정에서

내전의 전각구성에 부분적인 변화를 가져온 정도이다

순조의 뒤를 이은 헌종대에는 동궁영역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정조대에 지은 수강재

에서 중희당 동쪽까지 비어 있던 곳에 낙선재를 지은 것이다 새로 맞이한 후궁 경빈 김씨

의 처소인 석복헌을 낙선재 동쪽에 이어서 짓고 순조비 순원왕후를 위해 수강재를 수리하

여 세 건물을 행각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건물군으로 만든 것이다 낙선재가 들어선 곳은 조

선후기에 동궁이 있었던 곳으로 수강재 동쪽에는 세자를 보좌하는 춘방과 계방 등이 있었으

며 낙선재 동쪽에는 정조대에 조성한 중희당 일곽이 자리하고 있었다 낙선재의 조영은 동

궁일대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면서 동궁을 보좌하는 곳과 동궁의 거처를 양분하며 동궁이 축

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종대에 들어서 경복궁이 중건되어 창덕궁은 조선후기 동안 누려왔던 법궁이라는 지위

를 다시 경복궁에 넘겨주게 되었다 창덕궁(동궐)과 경희궁(서궐)이라는 양궐체제의 중심은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경복궁은 중건이후에 잦은 화재로 인하여 왕이 창덕

궁으로 이어하는 기간이 많았다 고종대에 창덕궁의 영역과 전각변화의 특징은 창덕궁의 전

각을 경복궁으로 옮겨짓는 일이 빈번했다는 점이다 전각을 헐어낸 자리는 빈 공간으로 남

았으며 이는 「동궐도」와 「동궐도형」의 비교를 통해서 파악가능하다

고종 초기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시 사용빈도가 낮은 창경궁의 행각과 전각을 경복궁

으로 이건하기도 했다 창경궁의 자경전을 옮겨 경복궁의 자미당을 지은 것이 그 첫번째 이

다139) 고종 초기에 이건한 자경전과 1882년 이후 공사가 중지된 수정전(壽靜殿)이 「동궐도

형」에는 빈 터로 남아 있다 또한 「동궐도형」에 lsquo금무rsquo라고 씌어진 건물은 「동궐도형」

의 제작시기와 가까운 1890년대에 이건한 건물들이다

138) 『순조실록』 순조 24년(1824) 8월 24일

139) 『승정원일기』 고종 2년(1865) 10월 26일

시기 내용 참고

순조 3년(1803) 12월 13일 인정전 화재

순조 4년(1804) 12월 17일 인정전 중건

순조 11년(1811) 윤3월 6

향실(인정전 서행랑)과 예문관에 화재

순조 24년(1824) 8월 24일 경복전 화재 「동궐도」에는 터만 그

려져 있음

순조 33년(1833) 내전일곽의 화재

순조 34년(1834) 내전일곽의 전각 중건 영연합을 헐어 창경궁 영

춘헌을 복구

헌종 12년 낙선재 건립

고종 13~14년 창덕궁의 수리

고종 18년(1881) 7월 22일 수정전을 함녕전으로 바꾸고 동 서 남 북별당

공사를 시작하다

고종 28년(1891) 3월21일 함녕전(구 수정전)의 여러 전각을 경복궁으로 옮

겨짓다(집옥재 협길당)

고종 28년(1891) 5월 3일 중희당 이건

표 7gt 제5기 순조~고종년간의 창덕궁 연표

고종 18년(1881)에는 수정전(壽靜殿)을 수리하여 함녕전(咸寧殿)으로 전호를 바꾸고140)

주변에 부속건물을 짓는 공사를 했다 그러나 이 공사는 완공직전에 을미사변으로 중단되었

고141) 약 10년 후 경복궁의 집옥재와 협길당으로 이건되었다142) 집옥재의 이건공사와 같은

시기에 중희당도 이건하였는데143) 경복궁의 어느 전각으로 이건되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다

만 이 시기 경복궁에서 동궁의 전각인 계조당의 개건이 있었고 함화당 집경당 등의 공사가

연이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이 건물들에 중희당의 부재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대에 중희당을 어디론가 이건함으로써 창덕궁에서 동궁의 전각이 삼삼와와 승화루

만 남기고 사라지게 되어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 까지 중희당이 있던 곳은

빈 터로 남아있어 「동궐도」에서 볼 수 있는 동궁의 공간을 볼 수 없게 되었다

4) 제6기 대한제국 말기

갑신정변이후 고종이 경복궁으로 이어한 후에는 잠시 창덕궁에 이어했었던 것 외에 을

미사변 직후까지 경복궁에 주로 머물렀으며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다가 경운궁을 건설한 다음에는 경복궁이나 창덕궁 두 궁궐로 돌아가지 않았다 고종

31년(1894) 4월 2일에서 5월 23까지 약 두달여 정도 창덕궁에 이어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광

140)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7월22일 ldquo壽靜殿의 호는 咸寧으로 동별당의 호는 衍福으로 남별당의

호는 正善으로 하였으며helliprdquo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8월2일 무위소가 함녕전 서별당ㆍ북별당의 당

호 단자를 올렸는데 서별당은 協吉堂 북별당은 資順堂이었다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9월24일 營

建所가 咸寧殿 北別堂의 당호를 集玉齋로 품정하였다

141)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7월22일

142) 『승정원일기』 고종 28년(1891) 3월21일 ldquo咸寧殿의 여러 전각을 옮겨 건립하는 일을 重建所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rdquo(여기서 함녕전은 창덕궁의 수정전을 개칭한 전각을 말한다 후일 광무 1년(1897) 경운궁

건설당시 선덕전이라고 이름지었다가 함녕전으로 고친 경운궁의 침전과는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전각이

다)

143) 『고종실록』 고종 28년(1891) 5월 3일

무 4년(1900)에는 창덕궁 선원전에 태조의 어진을 모시면서 경복궁 선원전과 더불어 1실을

증건하는 공사를 했다

다 근현대기 창덕궁 영역의 변천

1) 제7기 일제강점기의 개조

1907년 7월 19일(양력) 고종이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한 직후

궁내부로 하여금 창덕궁의 수리를 명하고144) 같은 해 11월에 황후와 황태자를 데리고 이어

하였다145) 이로서 고종 31년(1894) 이후 13년 만에 창덕궁이 다시 주인을 찾게 되었다

순종이 이어하기 직전에 이루어진 수리에 관한 내용은 여러 장의 도면으로 남아 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도면은 총 96종으로 전체배치도 인정전일원의 수리 궁

내부 청사 대조전 일원 희정당과 선정전 일원 약방 내전일원의 신축건물 창고와 장유고

낙선재 일원 후원 등에 관한 도면이 있다 이들 도면은 1907년부터 진행된 창덕궁의 개조

철거 훼손 개축 신축에 관한 가장 실체적인 자료이다146)

그 중에서 전체 배치를 나타낸 것으로 1911년 1920년대 1930년대초 1936년 무렵의 도

면이 있어서 일제강점기 동안 창덕궁의 전체적인 변화에 대한 조감이 가능하다 1911년의

배치도를 살펴보면 인정전 좌우에 행각이 연결되어 있고 인정전 뒤쪽의 복도로 연결되어 선

정전 뒤를 지나 희정당 서측까지 연결된 변화를 볼 수 있다 또한 인정전 동쪽의 궐내각사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어 외곽의 행각만이 남아 있고 중희당이 있던 곳은 행각도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진선문 남쪽에 궁내부 청사가 들어서 있다 반면 대조전일곽과 희정당은 「동

궐도형」과 같은 외곽을 보이고 있어서 대조전 일곽은 큰 변형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원은 아직 조선시대의 도로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담장 또한 「동궐도

형」과 대조 결과 잘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1911년 까지는 부속건물들을 많이 헐어

내고 인정전과 선정전 일대를 개조하기는 했으나 어느 정도 원형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1921~1932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배치도는 후원의 도로가 변형되고 대조전과

희정당일곽이 다시 지어졌으며 창덕궁내의 담장과 행각이 철거되어 그 이전까지 성격이 뚜

렷이 구분되던 영역성이 파괴된 모습을 보여준다 1930년대초의 도면은 창경궁과 종묘 사이

에 율곡로를 개통한 후의 모습이다 낙선재 남쪽과 종묘 사이는 도로로 인하여 분리되었다

1936년경의 도면은 등고선이 표기되어 창덕궁의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도면이다 창덕궁의

건물 부분은 1921~1932년 사이의 도면과 큰 차이가 없으며 창경궁쪽에서 동물원과 식물원의

건물 증설이 확인된다

144)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10월 7일(양력)

145)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11월 13일(양력)

146) 이강근 「장석각 소장 근대 건축도면에 대하여」 『근대건축 도면집-해설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9년 15쪽

일제강점기에 편찬한 『조선고적도보』에는 원래 창덕궁의 전각이 회색으로 표기되고

당시 남아 있던 전각이 검게 표시되어 1920년대 전후의 전각과 담장의 잔존현황을 파악 할

수 있다 돈화문과 주변의 행각들 선원전과 그 일대의 숙경재 주방 이문원과 대유재 소유

재 인정전과 선정전 및 행각이 남아 있다 내전일곽의 건물도 1917년의 화재로 모두 소실되

어 희정당 동쪽에 있는 성정각 관물헌만 남았으며 낙선재 일곽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

고 있다

그림 6gt 1911년경(좌)과 1921~1932년(우)의 「창덕궁평면도」(1911년경 장서각)

그림 7gt「창덕궁배치도」(1907년의 배치상황+1920년 이후 잔존전각(『조선고적도보』)

2) 해방이후의 변화와 보수정비

해방이후에는 개별전각을 수리하는 것으로 유지되다가 1996년부터 일제강점기에 변형된

인정전 선정전 일대를 복원했으며 2000년부터는 규장각과 구(舊)선원전을 복원하면서 인정

전 서쪽의 궐내각사를 복원하여 조선시대 창덕궁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고 있다

유적명 연도 발굴기관 보고서 기간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발굴조사 1995

창덕궁 반도지 유적 昌德宮 半島

池 遺蹟2001

중앙문화재

연구원

《昌德宮 半島池 試掘

調査報告書》 2001시굴 010416~010519

창덕궁 반도지 유적 昌德宮 半島

池 遺蹟2002

중앙문화재

연구원

《昌德宮 半島池 補

修middot整備工事 竣工報告

書》 2002

발굴 020401~020616

창덕궁 금천교 주변 유적 昌德宮

錦川橋 周邊遺蹟2001

국립문화재

연구소- 발굴 010920~011115

창덕궁 금천교 주변 유적 昌德宮

錦川橋 周邊遺蹟2002

국립문화재

연구소

《창덕궁 금천교》

2002 발굴 020313~020423

창덕궁 상방지 昌德宮 尙房址 2002

명지대부설

한국건축문

화연구소

《昌德宮 尙房址 遺構

調査 報告書》 2002 발굴 020411~020704

표 8gt 창덕궁관련 발굴조사 내용

년도 공사내용 문서관리번호 보고서

1970 창덕궁부속가옥철거 -

1970 창덕궁 및 비원보수(사진) 박대통령 준공식 참석사진

1972 창덕궁보수도면 BA0122692 BA0122702

1973 창덕궁 현황 측량 실시 문화재청

1975 창덕궁 연경당별사 보수공사 BA0122725

1975 창덕궁 승화루 및 어친잠실 약방 보수공사 BA0122725

1976 창덕궁 보수공사(북행각수정당보호책설치축대보수) 문화재청

1976 창덕궁 돈화문 보수공사 문화재청

1976 창덕궁 보수 정화공사 문화재청

1978 창덕궁 반도지 조경공사 BA0806636

1978 창덕궁 낙선재 진입도로 공사 문화재청

1978 창덕궁보수정화공사 문화재청

1979 창덕궁반도지-옥류천간도로주변정화추가공사 BA0122735

1979 창덕궁 주차장 주변 정비공사 문화재청

1980 창덕궁 괘궁정 보수공사 CA0015037

1982 창덕궁 인정전 동서행각 안전진단의뢰 문화재청

1985 창덕궁선정전 및 취원정 보수공사 BA0122791

1985 창덕궁 담장 및 주변 지역 정비 CA0015402

1986 창덕궁 연와창고 보수 CA0022142

1989 창덕궁 가정당 보수공사 BA0073213

1989 창덕궁 의로전담장 보수공사 BA0073214

1989 창덕궁 대조전 부식기둥 인공수지 처리공사 BA0073215

1989 창덕궁 옥류천 어정 정비 문화재청

1990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824

1990 창덕궁 의로전 및 문간채 보수공사 CA0025835

1990 창덕궁 의풍각 보수공사 CA0025831

1990 창덕궁 청의정 승재정 농산정 보수공사 CA0025827 CA0025826

CA0025814

1990 창덕궁 대조전 보수공사 CA0025812

1990 창덕궁 단봉문주위 담장정비공사 CA0025811

1990 창덕궁 신선원전 문간채 보수공사 CA0025834

1990 창덕궁 부용정 보수공사 문화재청 비공개

1991 창덕궁 인정전행각 복원 BA0812994

1991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889

1991 창덕궁 폄우사 보수공사 CA0025888

1991 창덕궁 의로전 재실 보수공사 CA0025906

1992~1994 창덕궁 인정전 행각 복구공사 BA0813009 BA0813013

1992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978

1992~1993 창덕궁 구선원전 보수공사 실측설계 CA0025976(비공개)

1992 창덕궁 낙선재 정비 설계 정실측 CA0025941 CA0025942

1992 창덕궁 선정전일곽 실측 설계용역 문화재청

1992 창덕궁 반도지 및 존덕정 주변일곽 정밀실측 조사 문화재청

1992 창덕궁 옥류천과 주변 고건물 실측 조사 보고서 발간 문화재청

1992 창덕궁 연경당 및 주변 일곽 정밀 실측조사 문화재청

1992 보고서 창덕궁 원유복구 조경종비공사 완료 보고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의로전 재실 보수공사 CA0026052

1993 창덕궁 집희(관물헌) 보수공사 CA0026035

1993~1995 창덕궁 낙선재 정비공사 CA0026042

표 9gt 해방이후 창덕궁 건물 보수내용(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년도 공사내용 문서관리번호 보고서

1993 창덕궁 대조전 일곽 실측 설계 문화재청

1993 창덕궁 낙선재 후원 실측설계 및 보고서 발간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애련지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주합루 실측 설계 문화재청

1995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발굴조사 복원설계 BA0807969 BA0813061

1995 창덕궁 기오헌 의두각 보수공사 CA0026201

1995 창덕궁 서향각 실측 설계 및 보수설계 문화재청

1995 창덕궁 인정전 행각지 발굴조사보고서 CM00057506

1996 창덕궁 돈화문 정밀실측 CA0026307

1996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공사 CA0026267

1996 창덕궁 대조전 부속건물 보수공사 CA0026266

1996 창덕궁 서측 담장 보수공사 CA0026259

1996 창덕궁 연경당 사랑채 별채 보수공사 CA0026281 CA0026273

1997 창덕궁 돈화문 보수공사 CA0026328

1997 창덕궁 가정당 보수공사 CA0026347

1997 창덕궁 사정기비각 어수문 보수공사 CA0026348

1997 창덕궁 인정전 정밀실측 CA0026353

1997 창덕궁 희우루 문간채 약방 보수공사 CA0026337

1998 창덕궁 인정전 긴급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8 창덕궁 신선원전 실측 보수설계 문화재청

1999 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발굴조사 문화재청

1999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공사(4차) 문화재청

1999 창덕궁 대조전 부속건물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9 창덕궁 신선원전 실측 및 보수설계 문화재청

2000 창덕궁 제월광풍관 보수 및 조경공사 문화재청

2000~2005 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복원공사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복원

공사보고서

2000~2001 창덕궁 반도지 시굴조사계획 문화재청

2000 창덕궁 몽답정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경추문 보수공사 시행 문화재청

2001~2002 창덕궁 금천교주변 발굴조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침전행각 및 수라간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의로전 일곽 보수 문화재청

2001 창덕궁 금천교 실측 및 복원설계 용역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선향재 보수 설계용역 문화재청

2002 창덕궁 선향재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2 창덕궁 희정당 보수공사 창덕궁 희정당 실측 수리보고서

2002 창덕궁 상방구역 유구조사 건물복원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정자(상량정태극정능허정) 보수공사 창덕궁 정자 실측 수리보고서

2003 창덕궁 희정당 신관 보수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선정전 후원 석축 복원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의로전 일곽 및 경훈각 보수공사의로전 실측 수리보고서

경훈각 실측 수리보고서

2003 창덕궁내 정자 보수공사 (태극정) 문화재청

3 창덕궁의 배치와 특징

가 영역별 배치와 특징

1) 궐내 각사

궐내각사는 왕을 보좌하고 궐내의 일상과 의식을 위한 기관들이 위치한 영역이다 창덕

궁은 창건당시부터 이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경복궁처럼 궐내각사를 완전히 갖추고 있지

않았다 창건당시부터 조성된 부분은 인정전 동쪽부분으로 연영문 안에 승정원 내반원 궁

방 주원 등이 배치되었다 임진왜란후 경복궁이 소실되자 창덕궁이 법궁이 되면서 경복궁에

있던 상의원 내병조 등의 건물들이 창덕궁 내로 편입되었다147) 또한 인정전 서쪽으로 정

청 옥당 약방 이문원 등이 추가되었다 원래 이곳에 있었던 일부 기관(도총부 주자소 내

사복)은 창경궁으로 옮겨지기도 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이 궐내각사를 공유하는 형태를 취하

였다

2) 외전 영역

외전영역은 정치의 공간으로 왕과 관료가 공식적으로 조회를 하는 영역이다 크게는 정

전인 인정전 일곽과 편전인 선정전 영역으로 구분된다 배치의 특징은 경복궁이 남북 축선

상에 정전과 편전이 놓이는데 반하여 창덕궁은 인정전의 북쪽에 건물을 둘 만한 지형이 아

니므로 편전은 정전의 동쪽에 위치한다 편전에 이어서 내전영역도 그 동쪽에 위치하여 외

전rarr내전은 서rarr동쪽으로 배치되고 있다

3) 내전 영역

내전은 왕과 왕실 구성원의 생활공간이며 왕실의 여성구성원인 내명부의 의식공간이기

도 하다 대조전을 중심으로 주변의 집상전 수정전 만수전(후에 경복전) 등 대비전을 포함

하며 왕이 좀 더 편하게 신하들을 만날 수 있는 희정당과 희정당 동쪽의 성정각 관물헌 등

을 포함한다 그 외에 내전에는 왕실 귀중품과 생활에 관련된 물건들을 보관하는 건물과 생

활을 보조하는 기능을 가진 건물들이 중요전각 주변에 배치되었다 창덕궁에서 부족한 내전

의 전각은 창경궁 건설이후 창경궁에서 해소하였다

4) 동궁 영역

147) 『동국여지비고』제1권 京都 文職公署條

그림 8gt 조선후기 창덕궁의 영역 구분과 진입동선(「동궐도형」)

동궁은 세자궁이라고도 하며 왕세자의 거처이자 집무공간 강학공간이다 동궁은 세자의

재위 여부에 따라 그 존재가 결정되었으며 세자 책례를 통해 재위하게 될 경우 영역이 규정

되어 동궁으로 지칭되므로 시기에 따라 중심전각이 변하기도 하였다 세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에는 그 인식적 개념이 약화되어 동궁의 전각은 다른 용도로 전용되어 대비나 왕비가

사용하기도 했으며 왕이 임어하기도 했다

동궁은 현재 낙선재 일대의 남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궁의 정문은 창경궁의 선인

문 동룡문으로서 동쪽에서 진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임진왜란 이전에는 창덕궁의 동쪽경

계(건양문) 밖에 있었으며 창덕궁과 별개의 영역에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동궁의 정당

은 저승전이었으며 저승전이 소실되자 시민당을 사용했다 시민당이 정조 4년 화재로 소실

되자 이를 중건하려다 중지하고 내전에 좀 더 가까운 위치에 중희당을 세우고 이곳에서 세

자의 착봉례를 거행함으로서 정조대 이후에는 중희당이 동궁의 정당이 되었다 정조대에 조

성된 중희당 일곽은 중희당과 삼삼와 승화루 그리고 그 동쪽으로 세자를 위한 공간이 마련

되었다 이외에 세자를 보좌하는 곳으로 춘방과 계방이 있는데 이 건물들은 동룡문 안쪽 시

민당의 동쪽에 있었으며 중희당을 조영한 이후에도 그 위치는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순조

대에 효명세자가 이 중희당에서 대리청정을 했으며 효명세자 사후에 동궁은 그 주인을 다시

얻지 못했다 효명세자 사후 세자가 공부하며 거처했던 영연합의 천지장남지궁의 건물을 헐

어 창경궁의 영춘헌을 짓는데 사용하는 등 중희당 동쪽 언덕 위에 있었던 건물도 일부 사라

지게 되었다 이후 고종대에는 세자를 위해 경복궁의 계조당과 자선당 등의 동궁이 조성되

면서 창덕궁의 동궁은 그 의미를 잃어갔다고 할 수 있다

시민당이 소실되고 정조대에 중희당을 왕의 거처 공간에 보다 더 가까이 조성하면서

세자의 공간은 중희당이 중심이 되었다 시민당 주변에 정조가 수강재를 지으면서 조선초기

이래 동궁이 자리하던 곳은 점차 그 영역의 성격이 바뀌었으며 헌종대에 이곳에 낙선재를

지으면서 창덕궁에서 동궁의 공간적인 위치는 궁궐의 중심영역으로 이동했다고 할 수 있다

왕대 세자 책례일자 세자재위기간 책례장소 관례장소대리청정

장소

광해군 李祬(廢世子) 광해 2년 5월 11일 12년 10개월 인정전 시어소내청

인조 소현세자 인조 3년 1월 27일 20년 3개월 융정전(경덕궁) 경현당

봉림대군(효종) 인조 23년 9월 27일 3년 8개월 명정전 -

효종 현종 효종 2년 8월 28일 7년 9개월 인정전 세자궁

현종 숙종 현종 8년 1월 22일 7년 7개월 인정전 시민당

숙종 경종 숙종 16년 6월 16일 30년 인정전희정당 시민당 시민당

경종 영조 경종 1년 9월 27일 2년 11개월 인정전 -

영조 효장세자(진종) 영조 1년 3월 20일 3년 8개월 인정전 시민당

장헌세자(장조) 영조 12년 3월 20일 26년 2개월 인정전양정합 시민당 시민당

정조

정조 문효세자 정조 8년 8월 2일 1년 9개월 인정전중희당

순조 정조 24년 2월 2일 5개월 집복헌 바깥채집복헌 바

깥채

순조 효명세자(익종) 순조 12년 7월 6일 17년 10개월 인정전희정당 경현당 중희당

헌종 세자없음 - - - -

철종 세자없음 - - - -

고종 순종 고종 12년 2월 18일 32년 6개월 인정전 중희당

표 10gt 세자의 책례와 관례장소(창덕궁)

5) 진전 영역

선원전은 돌아가신 선왕과 선후의 영정을 봉안하던 건물로 조선전기에는 경복궁에 세워

져서 태조 태종 세종 세조 덕종 성종 중종의 어진을 모셨었다148)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의 선원전이 소실되었고 조선후기에 선원전이 다시 마련된 것은 숙종대였다

효종 8년(1657)에 만수전과 함께 지었던 춘희전에 숙종이 즉위 21년(1695)선원전이라 개명

하고 숙종의 어진을 봉안한데서149) 비롯되었다 춘휘전은 원래 만수전에 속한 건물로 빈전

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150) 효종대 건립당시 춘휘전의 주변건물은 서행각 3칸

148) 『명종실록』 권8 명종 3년 10월 10일

149) 『승정원일기』영조 30년 1월 11일 ldquohellip上曰 此殿本是春暉殿 而乙亥年(숙종 21년)奉安御眞後 改名璿源殿

矣helliprdquo

서월랑 7칸 북월랑 25칸반 남월랑 16칸 반 등의 행각과 월랑이 주변에 있었고 양지당 12

칸 양지당 남월랑 9칸과 주변에 문과 담장 판장 등이 있었다151) 그중에서 춘휘전의 서행

각 서월랑 북월랑은 「동궐도」나 「동궐도형」에서는 볼 수 없어서 선원전으로 용도가 변

하기 전에 주변 건물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원전의 영역은 선원전 서북쪽의 숙

경재와 양지당 선원전 남쪽의 영의사(永依舍) 서휘문(瑞暉門) 까지이다 영의사 남쪽의 약

방이나 옥당과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선원전으로의 출입은 인정전 남행랑 서쪽의 경광문-서휘문-양지당-선원전으로 가는 석

과 인정전 서쪽의 만안문을 통해 양지당을 거쳐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숙종이후 왕들은 생전에 자신의 어진을 제작하여 일정한 곳에 보관하였다가 사후에 부묘가

끝나면 어진을 선원전에 이봉하였다가 제사와 차례를 지낼때 꺼내서 걸어놓고 의례를 거행

하였다152)

숙종 사후 영조 1년(1725) 선원전을 중수하였으며153) 정조 2년(1778)에는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내전 전배실로 쓰던 동변실을 제2실로 개조하고 좌우 익각을 추가하였으

며154) 정조 사후에는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서변실을 개조하였다155) 그 결과 정

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확장되었는데 「동궐도」에 그려져 있는 모습이다

헌종 12년(1846)에 순조와 익종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제 4실과 5실을 증건하였으

며156) 철종 2년(1851) 다시 1실을 증건하여157) 신실이 6칸이 되었다 이후 광무 4년(1900)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서쪽으로 1칸을 증건하여 신실 7칸 좌우 퇴칸을 포함하여 정

면 9칸으로 확장되었다 원전 동쪽의 양지당(養志堂)은 어진의 이안처로 사용되었다

150) 『승정원일기』영조 30년 1월 11일 ldquohellip孝廟朝爲慈懿大妃 建此殿 爲他日殯殿之計helliprdquo

151)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1657)

152)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축』 동녘 2010년 479~483쪽 3 영건의궤에 기

록된 건축 2)진전 참조

153) 『궁궐지』 창덕궁지 「영묘어제선원전중수기병명」

154) 『승정원일기』정조 2년 1월 10일

155) 『승정원일기』순조 2년 7월 3일

156) 『헌종실록』 헌종 12년 8월 6일

157) 『일성록』철종 2년 5월 17일

그림 9gt 진전영역과 진입동선

6) 후원 영역

전각들이 배치된 영역의 북쪽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후원이다 지형은 전각영역보다 높

고 굴곡이 심한 편이다 후원영역은 성격에 따라 4개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흔히 후원

은 왕의 휴식공간만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전각영역이 통치와 의례 생활의 기능을 담고 있

듯이 후원 또한 통치 의례 휴식을 위한 기능에 따라 담장으로 공간이 구분되었다 창덕궁

의 경우 창경궁과 후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동궐도」에는 각 영역을 구분하는 담장이 표현

되어 있고 「동궐도형」도 이와 일치한다 창덕궁의 후원은 중앙이 높고 동middot서로 경사진 지

형적인 특징이 있는데 중앙의 능선에 의해 양쪽 공간의 성격이 완연히 다르다

능선의 동쪽에서 전각영역의 북쪽에 인접한 곳은 통치를 위한 공간으로 왕권의 상징적

공간인 주합루일대와 문middot무시험을 치루는 영화당과 춘당대일대 그 동쪽의 내농포가 있어서

국가의 근간인 농사를 살피는 장소를 마련하였다 통치영역의 북쪽은 왕의 개인적인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정자와 연못으로 꾸며졌다 이 영역의 중심공간은 옥류천 일대이다 능선의

서쪽은 북쪽으로 치우쳐서 대보단에 관련된 제례시설 산신단 신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남쪽은 중일각 등 군사훈련을 위한 장소가 마련되었다

그림 10gt 후원영역의 공간구분

나 내부경계의 변천

창덕궁과 창경궁은 lsquo동궐rsquo로 불리면서 하나의 궁궐로 인식되기도 했고 실제로 창덕궁의

을 사용할 경우 궁인들을 창덕궁에 모두 수용하기 어려워 그 처소는 창경궁을 활용하였

다158)

창덕궁의 안쪽 담장문(內東墻門)인 건양문(建陽門)이 성종대 이래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

계였다 내전은 통명전과 대조전일곽 사이에 두 겹의 담장이 있어서 구분이 명확하였으나

그 남쪽은 동궁영역의 전각이 변화함에 따라 별개의 궁역으로 취급되거나 창덕궁에 포함시

키기도 했고 창경궁에 속하기도 했다

『명종실록』에는 저승전을 창덕궁에 있는 것으로159) 했고 인조대 『저승전의궤』에는

저승전을 어느 쪽도 아닌 동궁으로만 언급했다 헌종대 편찬한 『宮闕志』에는 ldquo시민당터

(수강재 남쪽)에서 추경원(秋景苑)은 원래 창덕궁이다rdquo고 했으며 중희당 삼삼와 육우정을

「창덕궁지」에 포함시켜 서술했다 반면에 『동국여지비고』 『宮闕誌』에서는 중희당을

창경궁에 포함시켰다

현재는 자경전 북쪽 담장에서 춘당대까지 담장으로 되어 있고 그 북쪽은 철책으로 되어

있다 창덕궁과의 경계담장은 일제강점기에 구획된 것인 1936년의 배치도에 나타난 형태로

계속 유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즉 종묘 통행의 육교에서 낙선재동쪽 - 자경전 서쪽

담장 - 춘당대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담장이다 앞서 수강재의 동쪽에 창경원당시 동물사가

지어지면서 형성된 경계는 해방이후 창경궁과 창덕궁의 필지를 행정적으로 분리해서 각각의

지번을 부여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회복하는 1986년의 창경궁중

건에서도 그 경계는 조정되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여기에 율곡로를 가로질러 종묘로 통행할

수 있는 육교가 설치되면서 창경궁 쪽에서 접근하도록 경계가 설정된 것이다

후원 또한 대온실 주변에 식물원 부속 건물과 시설이 들어서면서 형성된 경계가 건물권역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조정 없이 유지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변화된 창경궁과 창덕궁

158) 『광해군일기』 2년(1610) 3월 26일 ldquo대저 昌德宮은 法宮과는 달리 殿閣이 많지 않고 간격이 협소하여

평상시 들어갈 때에도 항상 수용하기 어려워 宮人들은 나누어 昌慶宮으로 들어가곤 했다rdquo

159) 『명종실록』 명종 즉위년(1545) 7월 14일 ldquo更思之 則唯昌德宮東宮儲承殿爲當rdquo

그리고 후원의 경계는 창경원의 시설과 관련하여 설정된 경계였다

그림 11gt『궁궐지』의 창덕궁과 창경궁영역 서술 비교 「동궐도형」+『궁궐지』

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역 외곽의 변천160)

조선시대 창덕궁의 궁역은 세조대에 후원과 동쪽으로 궁장을 확장한 이래 계속 유지되

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이문원일대가 궁역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lsquo2 영역의 변천rsquo 참조)

일제강점기 초기는 비교적 조선후기 궁역이 유지되고 있는 시기이다 1912년 「지적원도」

에 의하면 창경궁과 창덕궁이 합하여 하나의 필지인 와룡동 2번지로 되어있다 2번지와 접

해 있는 와룡동 1번지는 집춘문의 호위를 담당하던 집춘영이 있던 자리이다 소유는 일제강

점기 당시 조선을 관리하는 관청인 lsquo이왕직rsquo으로 표기 되어있어서 왕실의 소유로 남아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지적도상에서 2번지는 창경궁과 창덕궁의 외궁장과 일치하거나 외궁장보다 약간 외곽에

범위가 잡혀 있는데 이는 궁장 바깥쪽의 경사가 급한 지역은 경사 아래쪽까지 지적에 포함

되었기 때문이다 궁장주변의 지적상황은 거의 변하지 않고 현재까지 유지되어 있다 후원의

북쪽은 임야로 이 부분도 이왕직의 소유로 되어 있다

1912년 이왕직 소유의 와룡동 12번지는 1917년부터 창덕궁 소유로 변경되었다 와룡동

2번지는 대지 면적이 6514743(197071평)으로 1912년부터 1929년까지 동일하다 창덕궁

소유로 추가된 대지는 창덕궁 돈화문 주변의 와룡동 3~6번지 원서동 1번지로서 원래 이 부

분도 와룡동 1번지의 집춘영이 있던 곳과 마찬가지로 창덕궁 정문의 숙위를 담당하던 남영

160) 문화재청 『창경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2010 173~182쪽 lsquo창경궁의 궁역변화rsquo를 참조하여 수정middot보완

이 주둔하던 곳이다

창경궁의 외곽궁역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1931년 원남동 사거리에서 창덕궁 돈화문쪽

으로 율곡로가 개설되면서 창경궁과 종묘사이가 단절되고 도로로 편입되어 창경궁 남쪽 궁

장과 마랑일곽이 훼손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하나의 지번아래 있었으나 해방이후 그때까지 창덕

궁 소유에 포함되어 있던 창경궁 영역이 세분화되어 창경궁 소유로 분리된다 1963년에 창

덕궁 영역(와룡동 2-71번지)과 창경궁 영역(와룡동 2-1 2-70번지)으로 나뉘었고 외곽부분이

추가되거나 축소되었다 과학관 부지가 지번이 분할된 것도 이때이다

궁역 외곽은 일제강점기와 해방이후 현재까지도 조선시대의 경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

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경운궁의 선원전을 대보단 남쪽에 이설하면서 창덕궁

의 궁역에 포함시켰고 율곡로를 개설하여 창경궁과 종묘사이를 분리한 것이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 직후

rarr조선시대 영역유지

일제강점기

rarr신선원전 돈화문좌우추가

(1932년 이후 율곡로 개설)

해방 후

rarr창덕궁과 창경궁 필지분할

신선원전 주변확장

북쪽 궁장 주변 필지 확보

현재

rarr돈화문 월대 복원

1912년 「지적원도」

(국가기록원 소장)

1929년「경성부地形明細圖」

(국립중앙도서관소장)

1977년「창덕궁재산목록」

(문화재청 소장)

2011 현재 지적도

표 12gt 창덕궁 궁역외곽의 변천

4 창덕궁 관련 의궤로 본 건물의 구조와 특징

가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인조 25년 1647년)

1) 공사 내용 분석

(1) 1647년(인조 25)의 창덕궁 수리공사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불에 탔던 창덕궁은 광해군 원년 중건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외전

의 인정전과 내전의 수정당(壽靜堂)만 남고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어서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마저 불에 타버리자 경덕궁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인조 11년(1633) 비교

적 덜 파괴된 창경궁을 먼저 복구하게 된다

계속 미루어지던 창덕궁 내전을 중건하게 된 계기는 창경궁에서 일어난 소현세자빈 강

씨의 역모와 저주사건이었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후 인조의 눈 밖에 났던 세자빈

강씨가 인조와 인조의 후궁인 조소용을 저주했다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소현세자와 관련

된 세력이 제거된 사건이었다 창경궁내 곳곳의 아궁이와 계단 아래에서 저주에 사용된 물

건들이 발견되었으며 흉물이 발견된 창경궁에 왕이 머물 수 없자 아직 복구되지 않은 창경

궁을 수리하여 이어하기로 하였다 소실된 지 25년 만에 이루어진 이때의 공사는 인조 11년

의 창경궁복구공사와 마찬가지로 광해군에 의해 영건되었던 인경궁을 헐어서 그 자재를 사

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때 복구된 주요건물은 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정묵당(靜黙堂) 집상당(集祥堂) 징광

루 등이다 내전의 경우 자재는 대부분 인경궁 것을 활용하였으나 초석은 원래의 것을 사용

하여 화재 이전의 규모대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대조전과 선정전 희정당의 상량 직후

세자의 처소인 저승전(儲承殿)을 옛 자리에 복구하기로 하였는데 저승전의 상량문은 『창덕

궁수리도감의궤』에 실었고 공사과정은 『저승전의궤』(1648)를 별도로 제작하였다

(2) 주요 공사 내용

의궤의 목록은 따로 없고 내용 속에서 항목을 구분해 서술하고 있다 서술순서는 공사

에 참여한 관리의 명단 6월 13일부터 시작하는 계사 계사질 끝에 공사비용과 남은 재물을

기록하였고 상량문(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저승전) 상량의 이문질 감결질 그리고 감결질

끝에 도감조비잡물질(都監措備雜物秩)을 적었다 다음으로 一所 二所 三所 四所 五所 노

야소(爐冶所) 별공작(別工作) 의궤사목(儀軌事目)이다

작업소별로 좌목을 따로 적고 별개의 의궤처럼 구성하였는데 『창경궁수리소의궤』

(1633)보다 더 상세하다 도감사목 다음에는 개기 정초 상량과 같은 주요 일정을 적었다

건물의 규모에 대한 묘사는 인경궁에서 철훼한 건물명과 칸수를 기록하고 철훼된 목재와 기

작업소 창덕궁 공사 전각(칸수) 인경궁 철훼 전각

1소 -대조전(45) 동서익실(온돌12칸) 동익각(6)

남월랑(285) 서익각(9) 서월랑(9)

-집상당(20) 행각(25)

-징광루(상하층40) 서월랑(10) 전행각(3)

-옥화당(105)

-정묵당(105) 西邊階上月廊(16) 飯色間(2)

외행각(3)

-慶壽殿(45) 동월랑(195) 남월랑

(225) 남행각(6) 동행각(3)

-慶寧殿남행랑(36) 동행랑(4) 서행

랑(13) 서행각(2)

-弘政殿(24)

-重暉堂(9) 소주방(75) 連付舍(1)

內帑庫(12) 酒茶房(85) 전행랑(2)

-正順堂동행랑(5) 남부사(1)

-光政殿남월랑(10) 십자각뒤 평행랑

(1)

-崇海堂행각(6) 북별당(20) 1칸문 4

2소 -熙政堂(15)

-영명문내행각(7)

-서월랑(23) 남월랑(6)

-누각(145)

-외남월랑(19)

-師傳廳(75)

-別監廳燈燭房(16)

-선화문협문(2)

-내반원(10)

-사전청 일칸문(1) 내반원 일칸문(1)

-외월랑(27)

-내반원남행랑(17)

-협양문(1) 동서협실(7)

-선례문(1) 동인문(1) 측간(1)

-和政堂(21) 행각(3) 서월랑(14) 남

월랑(18)

-延化門(6) 서외월랑(9)

-玉宸樓3東付舍(10)

-書士廳(16) 내반원(11) 행랑(13)

장방(20)

-승정원행랑(5) 빈청전랑(3) 水閣서

쪽月廊(2) 光政殿북월랑(7)

-會通門(1)

-端陽門(2)

-延祥門(1)

-沖黙堂(8) 행랑(7)

3소 -寶慶堂(3) 측15

-泰和堂(6) 남월랑(7) 동월랑(2) 북행각(1)

-昭德堂(4) 남월랑(5) 동월랑(11)

-燒廚房(5)

-小燒廚房서행각(10)

-中燒廚房(4칸 전퇴포함 6칸)

-下燒廚房(3칸 전퇴포함 4칸반)

-측간(4)

-窓差備(4)

-慶極堂(9)

-仁德堂(12) 서월랑(5)

-慶寧殿서월랑(4)

-福寧殿동월랑(6) 남행각(7) 서행각

(8)

-崇德堂동월랑(7)

-內帑庫 北邊半退(1)

-中政門밖북월랑(10) 외남월랑(20)

-尙衣院 衣襨房(6)

-경녕전수라간(5) 連付舍(1)

와의 수량을 각 건물별로 적지 않고 합하여 적었다 이때 조성된 전체 건물칸수는 817칸이

수리공역은 5개의 작업소로 나뉘어 이루어졌으며 작업소별 공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1소 침전인 대조전과 동서익실 월랑 집상당 징광루 옥화당 정묵당 및 주변월랑

2소 희정당과 주변월랑 소전청(所傳廳) 내반원(內班院) 및 주변월랑

3소 보경당 태화당 소덕당 및 주변월랑

4소 편전인 선정전과 주변월랑

5소 외전의 정전주변 월랑으로 인정전 동월랑 서월랑 승정원 대간청 인정문 외남월랑

-厢庫弓房(24)

-橉德堂동월랑(6)

-正順堂 앞厠間(6)

-與慶門(1) 一間門 5좌

4소 -선정전(9)

-북월랑(11)

-讌華堂(동온돌15 서온돌2 마루전퇴3) 集

陽門(1) 일각문(1)

-夜對廳서월랑(20)

-嚮明門(1)

-仁和門행각(7) 협문(1)

-동월랑(16) 내남월랑(11 돈례문)

-중행각(7) 외남월랑(14)

-외행각(3) 외행각동변(3)

-制義門 앞 일각문(1) 神佑門(1)

-光政殿(9) 내남월랑(5) 서월랑(8)

북월랑(11) 남월랑(5) 남행각(1)

동월랑(12) 內橫閣(1) 중행각(6)

외행각(12) 弘政殿북월랑(14) 弘

政門동월랑(7) 외남월랑(5) 中政門

남월랑(16) 外政門남월랑(6) 水閣

(4)

5소 -인정전동월랑(28) 남월랑(6)

-承政院(16)東廊(5)前廊(3)北間(1) 注書廳(9)

-臺諫廳(4)待接廳(2)승정원후랑(2)

-延英門(1) 東西挾廊(3)

-外司饔院(6) 端陽門(1)

-內弓房(14) 前廊(25)

-內司甕院(6) 司謁房(22)

-出入番內官廳(104)

-肅章門(6)

-王子問安廳(10 마루)

-인정문밖 남월랑(온돌1 마루6)

-빈청외랑(2) 精抄軍堡(2) 砲手軍堡(40)

-賓廳修粧 藥房修粧 傳漏軍堡(1)

-홍정문 외남월랑(26) 북월랑(7)

-승정원(28) 注書廳(4)

臺諫廳(6) 體元門월랑(10) 외사옹

원(34) 내사옹원樓廊(24) 弘政門

전후(6) 尙衣院樓廊(7) 六六門(1)

與慶門평월랑(6) 連付舍(2) 十字閣

後平廊(1)

당시 창덕궁 수리공사는 규모가 컸으므로 인경궁에서 많은 건물을 헐어냈다 이때 대부

분의 주요전각이 철거된 인경궁은 궁궐로서의 면모를 거의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창경궁

수리소의궤』와 더불어 이 의궤를 통하여 인경궁의 전각명칭과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의궤에는 철거된 건물을 건물별로 명시하지 않고 각 작업소 별로 일괄하여 기록하여 놓

았다 따라서 인조 11년의 창경궁공사와 같이 구체적으로 인경궁의 어느 건물이 창덕궁의

어느 건물로 이건하였는지 바로 대비되지는 않는다 다만 건물의 규모나 성격으로 보아 이

건관계가 드러나는 건물이 있다 창덕궁 수리의 경우 인경궁 건물의 이건에 있어서 일부는

동일한 규모의 이건도 있었으나 대개는 다른 규모의 건물로 변하였다 철거하는 인경궁의

전각은 칸수만 적고 창덕궁에 조성」되는 것은 각 전각의 바닥구조별(온돌과 마루 허칸)

칸수 천장의 구성과 마감을 밝혀 놓아서 궁궐내전의 내부 마감과 바닥구조에 대하여 많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 1647년 창덕궁 수리와 현상 비교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대조전 45칸

어칸 마루 3칸

4면 퇴마루 20칸

동서익실 전퇴석주온돌 12칸

동익각

남월랑

서익각

서월랑

6칸

28칸 반

9칸

9칸

마루5칸 온돌 3칸

마루12칸반 온돌 6칸

마루8칸반 온돌 3칸

마루 3칸

집상당 20칸

어칸마루 4칸

툇마루 14칸

온돌 2칸

행각 2칸반 마루

징광루 하층어칸마루 4칸

온돌 2칸

상층마루4칸 툇마

루12칸반

서월랑

전행각

10칸

3칸

마루 3칸 온돌 2칸

옥화당 10칸 반

마루7칸 온돌 3칸

정묵당 10칸 반

마루3칸반 온돌 3

西邊階上月廊 16칸 마루 6칸

飯色間 2칸

외행각 3칸

희정당 15칸 8

동서온돌 6칸

마루 9칸

영명문내행각 8칸 마루

서월랑 23칸 마루7칸반 온돌 4칸 허칸

11칸 반

남월랑 6칸 마루 2칸 온돌 2칸 허칸

2칸

누각 14칸반 8 상하층 마루

외남월랑 19칸 온돌 2칸 마루 12칸 허칸

3칸

師傳廳 7칸반 온돌 1칸반 마루 2칸

別監廳燈燭房 16칸 온돌 4칸 마루 7칸허칸 5

선화문 협문 2칸 포함

내반원 10칸 온돌 4칸 마루 6칸

사전청 1칸문 1

내반원 1칸문

외월랑 27칸 온돌 7칸 마루 11칸

허칸 7칸 문 2칸

내반원 남행랑 17칸 온돌 2칸 마루(퇴포함)13

칸 허칸 2칸

협양문 1칸 동서협실내 마루포함 7칸

선례문 1칸

이때 조성된 창덕궁의 내전일곽은 큰 변화 없이 순조대까지 유지되어 lt동궐도gt의 그림

과도 일치하고 있으나 1833년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다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동인문 1칸

측간 1칸

보경당 3칸 양면퇴 9칸

온돌 3칸 마루 6

태화당 6칸前退幷作平12칸

온돌 2칸 마루 문

1칸

태화당 남월랑

동월랑

북행각

7칸

2칸

1칸

昭德堂 4칸前退幷作平8칸

온돌 2칸 마루 허

간1칸

소덕당 남월랑

동월랑

5칸

11칸

소주방 5칸前退幷作

10칸

마루8칸반 온돌 1칸반

小燒廚房서행각 10칸 온돌3칸 마루 4칸 허칸2

칸 문 1칸

중소주방 4칸前退幷作

6칸

온돌 3칸 마루 3칸

하소주방 3칸前退幷作

4칸반

온돌 2칸 마루 2칸반

측간 4칸 마루 구비

窓差備 4칸 문 2칸반 마루 2칸

1칸문 5坐

선정전 9칸 북월랑 11칸 온돌 3칸 마루 5칸반

他庫1칸 건중문1칸 협문

반칸

華堂 동온돌 1칸반 서온

돌2칸 마루 전퇴 3

집양문

일각문

1칸

1칸

야대청이하서월랑

합당가幷

20칸 야대청 온돌 1칸 마루 2

합당가 4칸 마루3칸 허칸

1칸

인화문 행각 7칸

협문 1칸

동월랑 16칸 마루 4칸

동월랑 동변 5칸 온돌1칸 마루1칸 囗1칸

허칸 1칸

내남월랑 11칸 돈례문 1칸 동서 협문 1

칸 제의문 1칸 동변출입

문 1칸

중행각 7칸

외남월랑 14칸 선정문과 동서문 3칸

선전관청온돌1칸 마루2

칸 囗3칸

내관청온돌2칸 마루1칸

囗3칸

외행각 3칸

외행각 동변 3칸 온돌 1칸 마루 2칸

제의문 앞 1각문 1칸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神佑門 1칸

인정전일곽 동월랑 14間作平28

광문 1칸 온돌 1칸 마루

4칸

남월랑 6칸

승정원16칸동랑5

칸 전랑3칸 북간

1칸

25칸 온돌 4칸 마루 19칸

주서청 9칸 온돌1칸반 囗1칸 마루 6

칸반

외사옹원 6칸 동루 8칸 서루 8칸 공상

청 2칸 남랑 7칸

rarr온돌 1칸 마루 24칸

內宮房 7 間 作 平 1 4

동루 8칸 서루 8칸

내사옹원 6칸 동루 7칸 서루 2칸 평랑

1칸 남랑 1칸

출입번내관청 10칸 온돌 3칸 마루 4칸

숙장문전후통 6칸

왕자간안청 5 칸 作 平 1 0

마루

인정문밖 남월랑 8칸 온돌 1칸 마루 6칸

빈청외랑 2칸

精抄軍堡 2칸

砲手軍堡 4칸

傳漏軍堡 1칸

건물명 기사 사료

대조전

1461년(세조13) 내정전을 양의전이라 명명하고

대조전에서는 신하를 만났다고 함 따라서 이 시

기 대조전은 내정전과 다른 전각이었다고 추정

『세조실록』 세조7년 12월

19일 및 세조13년 5월 18

『연산군일기』에 태종 세종이 대조전에 거처하

고 성종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보임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8월 22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해 복구됨

1623년(인조원년) 인조반정시 소실된『인조실록』 인조원년 3월

15일

1647년(인조25) 인경궁 경수전을 뜯어 다시 지

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34) 전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 다시지음

(2) 대조전과 의궤

대조전은 창덕궁 내정전이다 가운데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서 온돌방을 갖춘 평면이며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이다 태종 세종이 이 건물에 거처했고 성종을 비롯한

여러 왕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실록에 보이므로161)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진

것으로 판단되지만 초기 기록에서는 양의전(兩儀殿)이라는 정전 이름이 별도로 나오고 있어

서 주의를 요한다 1461년(세조 7) 창덕궁의 주요 전각 이름을 지을 때 내정전은 양의전이라

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162) 세조 13년 5월의 실록에는 왕이 양의전 문에서 대신을 만났다는

기사와 함께 대조전에서도 신하들을 불러 명령을 내린 기사가 보인다163)

따라서 적어도 이 시기에는 양의전과 대조전이 각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후에 양의전은 실록 기사에서 나오지 않고 역대 왕들이 대조전에 거처한 기사만 보인다 임

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 창덕궁이 복구되면서 다시 지어졌다 인조반

정시 다시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25) 인경궁의 경수전慶壽殿 건물을 뜯어서 다시 지었다

이때의 공사 내용은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자세하다 이 때 경수전은 45칸이었다

고 하며 새로 지은 대조전 역시 45칸 규모였다 통상 건물 이름에 목숨 수자가 붙은 곳은

대비나 상왕의 거처를 나타내므로 인경궁의 경수전은 대비전으로 지었던 건물로 추측되며

이것을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중궁전으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다시 지어진 대조전은 180여

년이 지난 1833년(순조 33)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건물은 이듬해 바로 복구되었는데 소실

전의 규모로 지어졌다

1647년에 인경궁 경수전을 헐어서 지은 대조전은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의하

면 전체 45칸 가운데 어칸 마루 3칸에 천장은 봉반자이고 4면에 툇마루 20칸이 있고 기단

은 4단의 장대석으로 되었으며 동서 익실이 있는데 전퇴는 돌기둥 6개가 있고 온돌은 12칸

으로 천장은 지반자로 되었다고 하였다 또 정전 좌우에는 동익각 6칸과 서익각 9칸이 있고

남월랑 28칸반 서월랑 9칸이 있다고 하였다 또 대조전 동북쪽에는 집상당 20칸 서북쪽에

는 2층 누각인 징광루가 있다고 하였다

이 시기 대조전 모습은 lt동궐도gt에 그림으로 전한다 대조전은 가운데 3칸이 지붕이

좌우보다 높게 그려져 있고 3칸 부분 앞에는 월대가 마련되어 있다 월대는 3면에 계단이

있고 판장으로 가려져 있는 모습이다 월대를 둔 정청 3칸 좌우는 지붕이 한 단 낮게 되어

서 좌우 3칸씩 있는데 이 부분이 『창덕궁수리도감의궤』에서 말하는 동서 익실로 볼 수 있

다 또 동서익실 좌우로 행랑이 길게 이어져 있어서 동익각과 서익각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다 또한 동서익실은 건무 하부에 돌기둥이 그려져 있고 돌기둥 안쪽에 아궁이도 보인다 지

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형태이다

(3) 희정당과 의궤

161) 『연산군일기』 권17 연산군 2년 8월 22일

162)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 12월 19일

163)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 5월 17일

건물명 기사 사료

선정전

1405년(태종5) 조계청으로 창건『태종실록』 태종5년 10월 19

1461년(세조7) 건물명을 선정전으로 함『세조실록』 세조12년 12월

19일

1698년(광해군즉위) 소실된 것을 복구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 시 소실 『인조실록』 인조1년 3월 15

1647년(인조25) 인경궁의 광정전을 뜯어 이

건함『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00년(순조즉위) 정조의 혼전을 선정전으로

정함『(정조)혼전도감의궤』

20세기 초 창호를 유리창으로 고치고 외행각

을 철거함

1996년 lt동궐도gt 등을 근거로 원형 복구함

처음에는 명칭을 수문당(修文堂)이라 해서 왕의 학문소로 지어졌다가 연산군 때 희정당

으로 고쳤으며 뒤에 편전의 용도로 전용되었다 순종황제 때는 서양식 가구를 비치하고 사

신 접견 장소로 쓰였다 『연산군일기』에는 수문당이 대조전과 함께 성종이 거처하던 곳이

라는 설명이 나온다164) 이것이 수문당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이다 1496년(연산군 2) 6월

수문당이 화재가 나자 왕이 건물을 수리하도록 명하고 아울러 그 해 12월에는 건물 이름을

희정당으로 고치도록 했다고 한다165)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인조반정 때

다시 불에 탄 것을 1647년(인조 25) 인경궁의 전각을 철거해서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1833

년(순조 33) 화재로 불에 타고 이듬해 옛 모습대로 재건되었다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년)에는 당시 재건된 희정당의 규모를 15칸이라고 적었다

인경궁의 화정당 21칸을 이전했다고 했는데 규모에 차이가 있다 1834년 다시 지어진 희정

당은 이전과 동일한 규모였으며 그 평면 형태는 lt동궐도형gt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체는

15칸 규모이여 정면 5칸의 남쪽 5칸은 모두 마루이고 뒤는 중앙 3칸에 넓은 온돌방이 있고

뒤에 툇간이 있으며 좌우는 작은 방 2개가 중첩된 모습이다

(4) 선정전과 의궤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보던 곳이다 1647년(인조 25)에

다시 지어졌으며 지금 건물은 이 때 것이다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1405년(태종5) 창덕궁

이 창건될 때 조계청(朝啓廳)이란 이름으로 지어졌다가 1461년(세조 7) 선정전이란 이름을

얻었다166) 조계는 아침마다 신하들이 정사를 아뢴다는 뜻이며 선정은 정사와 가르침을 널

리 펼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1년) 재건되었으며 다

시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 때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 25) 재건하였다 지금 건물은 이때

164) 『연산군일기』 권15 연산군 2년 8월 19일

165) 『연산군일기』 권15 연산군 2년 8월 19일 및 동 권20 연산군 2년 12월 8일

166)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 12월 19일

다시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건립 시기로 보면 1608년경 다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광화

문 다름으로 창덕궁에서 오래된 건물이다 주변 행각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중문 주변

과 선정문 전면의 관청이 들어서 있던 부분은 편전의 용도가 달라짐에 따라 수시로 증축과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일제강점기 때 일반인의 관람 편의를 위해 개조한 상

태이다 고종 즉위 이후에는 선정전은 더 이상 본래의 용도로 쓰일 기회를 갖지 못하였

고 순종황제가 창덕궁에 돌아와서는 희정당에서 신하들을 접견하였으며 1917년 희정당이 화

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어진 후에도 희정당이 편전으로 쓰이고 선정전은 빈 건물이 되었

다 그런 덕분인지 선정전은 비교적 17세기초에 지어진 모습을 지금까지 잘 유지하고 있다

선정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장 눈에 띠는

특징은 지붕이 청기와로 덮여있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 안에 청기와를 덮은 건물이

선정전 외에도 징광루 등이 있었고 경복궁에도 있었지만 현재는 이 건물이 유일하다 현재

건물은 1647년(인조25)에 다시 지어진 것인데 이때는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지었던 인경궁

의 편전인 광정전(光政殿)을 뜯어서 그 재목으로 건물을 지었다 이때의 공사 과정은 『창덕

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자세하다 이 의궤에 의하면 광정전 9칸 건물의 기둥이나 보 공

포부재를 뜯어서 그대로 건물을 옮겨지었으며 기와 역시 광정전에 덮었던 청기와를 가져와

서 선정전에 덮었다고 하였다 인경궁은 광해군의 지시로 여러 건물에 청기와를 덮었는데

그 중 일부가 창덕궁에 살아남은 것이다

선정전과 그 주변 모습은 lt동궐도gt가 참고가 된다 lt동궐도gt에 의하면 선정전 건물은

세 단 정도의 장대석 기단 위에 놓여 있고 사방에 행각이 둘러쳐져 있어서 건물 앞에 작은

마당이 마련되어 있는 모습인데 특이한 점은 건물 앞으로 길게 행각이 뻗어서 마당을 좌우

로 나누고 있다 이 행각을 『궁궐지』에서는 lsquo복도각(複道閣)rsquo이라고 부른다 복도각은 기둥

과 지붕만 있고 벽은 개방되어 있는 모습이며 바닥은 돌이 깔려서 사람들이 비를 맞지 않고

출입문에서 편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선시대 빈전이나 혼전을

조성한 여러 의궤에서는 이 복도각을 중배설청(中排設廳)으로 부르고 있다 중배설청이란 빈

전이나 혼전에서 제례를 행할 때 음식을 진설하는 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lt동궐도gt에 그려

진 복도각은 선정전이 빈전이나 혼전으로 이용되었을 때 건물 앞에 배설청을 마련한 모습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배설청 모습은 lt동궐도gt에서는 창경궁의 문정전에서 확인

할 수 있고 경복궁의 태원전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lt동궐도gt에서는 선정전 주변에 행각이 둘러싼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특히 남쪽은

여러 겹으로 행각이 중첩되어 있다 이곳에는 대청 은대 상서성 당후 등이 있었는데 대청

은 대신들이 모이던 곳이고 은대는 승정원의 다른 이름이며 상서성은 관청이름 당후는 승

정원의 실무관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남쪽 행각에는 선정전에서 왕에게 계를 올리는 일과

관련한 관청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정전은 일제강점기 동안 창덕궁을 일반에 관람하면서 내부에 전시물을 두기도 하고

창문을 유리창으로 교체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996년 lt동궐도gt를 비롯한 옛 문헌에 따

라 건물을 본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그에 따라 사라졌던 복도각도 다시 세웠으며 창문도

고쳤다 다만 주변 행각은 변형된 채로 남아있는데 본래 선정전의 출입문인 선정문은 남쪽

의 두 번째 행각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 두 번째 행각은 복구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첫 번째 행각에 편의상 선정문 현판을 달아 놓았다

선정전에서는 과거 왕이 신하들과 어떤 형태로 접견을 하고 상참을 거행했는지를 확실

히 고증할 수 없는 상태이다 문헌에는 실내에 일월오악병풍이 있고 어좌가 있었다는 점을

전하고 있지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 그 형태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현재 선정전 실내에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한 집기류 등은 근거가 없는 불확실

한 것들이다

(5) 인정전 일곽과 의궤

창덕궁의 대문과 그에 딸린 사다리꼴 형태의 행각 이 문을 들어서면 비로소 창덕궁의

실질적인 내부인 대내大內로 들어서게 된다 『영접도감의궤』(광해군 2)에 명시한대로 창

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대내로 들어가는 대문(大門)이다 진선문의 좌우 행각 및 진선

문을 들어선 곳의 마당을 둘러싼 행각은 실록에서는 인정전 외행각으로 불렸다 외행각은

진선문과 마주보는 숙장문 좌우 행각까지 포함된다 북쪽은 인정문 좌우의 행각이 길게 뻗

는다 인정문 좌우 행각과 진선문 숙장문 주변 행각으로 둘러싸여서 사다리꼴의 마당이 이

루어진다

진선문의 창건에 대해서는 사료상에 명시된 것이 없지만 창덕궁이 창건될 때 함께 지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167) 창건 시에는 진선문이 창덕궁의 바깥 대문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정전 외행각이 세워진 것은 1418년(태종18)부터이며 이듬해 1409년(세종 1)에 완성

되었다 세종실록에는 박자청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터를 잘 살피지 않고 기둥을 세우고 보

를 올려 인정전에서 내려다보면 기둥이 바르지 않고 경사지게 보여 상왕이 화를 내고 자청

을 옥에 가두도록 하고 행각은 헐어버리도록 했다는 기사가 보인다168) 이후에 외행각이 어

떤 모습으로 고쳐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부분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광

해군 때 다시 복구되었으며 그 형태는 19세기 중엽에 제작된 lt동궐도gt나 20세기 초에 그린

lt동궐도형gt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초에 진선문이 철거되면서 외행각도 함께 철거되었

으며 1996년 진선문을 복구할 때 외행각도 복원되었다

조선시대 진선문이나 인정전 외행각 모습은 lt동궐도gt와 lt동궐도형gt을 통해서 추정해

볼 수 있다 두 자료에 나타난 외행각은 진선문에서 남북으로 행각이 이어지고 남쪽은 제5

칸에서 직각으로 꺾여서 남행각이 길게 이어지는 모습이며 남행각이 다시 북쪽으로 꺾이면

서 숙장문으로 연결된다

인정문은 남행랑의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인정문이 남향해 있다 장대석 2단의

높은 기단 위에 서 있다 계단은 중앙에 장식 없이 꾸며져 있다 경복궁의 근정문이 중층 누

167) 실록에 진선문 기사가 처음 나오는 것이 1409년(태종 9) 10월 기사인 것으로 미루어 1405년 창덕궁 창건

시부터 이 문이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태종실록』 권18 태종 9년 10월 1일 기사)

168) 『세종실록』 권3 세종 원년 4월 12일

각이고 중앙 계단 가운데 쌍으로 봉황을 새긴 답도를 둔 것에 비해 크게 격식을 낮추었다

지붕 용마루에는 인정전과 마찬가지로 이화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역시 1916년에 설치된 것

으로 보인다

인정문 행랑은 『태종실록』에 기록된 창건 시 규모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북쪽은

산을 등지고 있어 행랑을 두지 않고 동 서 남면에만 있으며 동서 행랑은 방이 두 줄로 된

복랑(復廊)이고 남행랑은 방이 한 열로만 된 단랑(單廊)이다

인정문은 1992년부터 96년 사이에 일제강점기 때 변형된 부분을 고쳤다 우선 인정전에서는

일제시기에 건물 동편에 행랑을 붙여놓았던 것을 lt동궐도gt 등을 참고해서 본래대로 행랑을

건물 후방으로 옮겼다 인정전 마당은 정원으로 꾸미는 등 훼손이 많았던 것을 품계석을 다

시 세우고 바닥 전체를 박석으로 깔았다 행랑과 인정문 역시 일제강점기 때 구조를 바꾸고

벽을 개조했던 것을 원형을 고증해서 복원했다 다만 인정전과 인정문 용마루에 설치한 이

화문양은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또 인정전 내부의 황색 커튼이나 바닥의 쪽마루 전

등 갓 등도 당시의 역사적 흔적을 그대로 둔다는 취지에서 그대로 두었다

나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인조 26년 1648)

1) 공사 내용 분석

인조 26년(1648)에 마무리된 창덕궁의 동궁처소인 저승전(儲承殿)을 수리한 내용이다

저승전의 위치는 『宮闕志』에 의하면 ldquo저승전은 건양문 밖에 있다 (원) 옛 구현전 광연전

의 터이다rdquo라고 되어 있으며 시민당의 북쪽 현재 낙선재의 서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원래 저승전의 터는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머물던 광연전 터로 성종때 세자가 거

처하는 춘궁으로 바꾸었다 저승전 일곽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때 중건되었으

며 인조반정으로 창덕궁 내전이 소실되면서 동궁의 처소도 대부분이 다시 소실되었다

인조 25년 창덕궁의 내전과 편전을 복구하는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던 8월 15일 도감

에서 당시 세자가 임시로 거처하는 곳에서 흉물이 발견되어 거처하기 어려우니 진행중인 창

덕궁 공사와 더불어 세자를 위하여 전(殿)하나와 당(堂)하나를 짓기를 청하였다 인경궁의

동궁을 헐어서 동궁의 수리가 시작되어 9월에는 입주(立柱) 상량이 이루어졌으나 창덕궁의

다른 수리공역이 끝난 후에도 저승전 공사는 지체되면서 동절기에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듬

에 2월에 다시 시작하여 4월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저승전 공역은 처음에는 창덕궁수리도감이 맡아 하였으나 인조 26년에 따로 도감이 설

치되었다 저승전 공역에서도 창경궁 창덕궁의 공사와 마찬가지로 인경궁의 일부 전각을 뜯

어 이용하였다 『저승전의궤』는 창덕궁의궤와 별도로 공사가 완료된 인조 26년(1648)에 작

성되었다 저승전 공역과 함께 창덕궁 공역의 잔여부분을 마무리 짓는 형식이 되었으며 이

에 따라 그 의궤서도 일정한 체제를 갖추지 않고 필요한 내용만을 정리하는데 그쳤다

목록은 없으며 내제의 처음에는 lsquo순치오년정월 일(順治五年正月 日) 저승전의궤rsquo다음에

작업소 건물구성(칸수) 공사내용

좌소

(左所)

인경궁 철훼

-承華殿(45)

동행각(4) 서행각(4) 서월랑(15) 남월랑(195) 북월랑

(4) 동행랑대문남변월랑(20) 북변월랑(9) 서변평월랑(4)

重暉堂 동월랑(13) 북월랑(50)

철훼

-儲承殿(28) 동온돌(6) 서온돌(6) 대청마루(16) 신조

동익각(1) 동행각(2) 동월랑(9)

바로 공사감역관의 조직(座目)을 적었다 이어서 전유재질(前遺在秩)도감무역질(都監貿易

秩)上下秩(품삯관련)철물타조질(鐵物打造秩)용여환하질(用餘雜物還下秩)각처이송질

(各處移送秩)을 적고 제목 없이 날짜순으로 계사(啓辭 상량문 상량의 포함)이문(移文)을

적고 그 뒤에 좌소(左所) 우소(右所) 및 외소(外所) 노야소의 항목을 두었다

lt전유재질(前遺在秩)gt lt도감무역질(都監貿易秩)gt에서는 전년의 공사에서 남은 자재와

금번 공사에 소용된 자재의 총량을 수록하였다 소용된 자재는 주로 철물 기와 단청재료

미장재료 등이다 lt上下秩(품삯관련)gt에는 장인과 인부들의 품삯 창경궁 각처 및 아문과

進修堂 전돌 까는데 들어간 전돌과 장인의 품삯을 적었다 lt각처이송질(各處移送秩)gt의 내

용은 남은 잡물을 홍제원과 문정전 수리에 사용하도록 이송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항목을 구분하지 않고 정해(丁亥 1647년) 8월 15일부터 무자(戊子 1648년) 4

월 12일까지의 계사(啓辭)를 날짜별로 적고 있다 중요공역의 일정을 보고하는 것으로 8월

16일 1소에서 개기를 시작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9월 15일 묘시(卯時)에 저승전의 定礎

午時에 立柱 未時에 上樑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9월 15일자에는 상량문과 상량의를 적었

다 여기에 수록된 상량문은 이에 앞선 창덕궁의 공사를 기록한 『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에 실린 저승전의 상량문을 다시 실었다 정초에서 상량 까지 같은 날에 했으나 공사

가 완전히 끝난 것은 다음해 윤3월 하순이었다

계사에 이어서 항목구분 없이 1647년 12월 14일에서 1648년 7월까지 도감과 각 관서 및

각 지방관찰사 사이에 자재의 조달과 수급에 대하여 오고간 문서를 날짜순으로 정리하였다

구체적으로 공사내용을 알 수 있는 부분으로 lt좌소(左所)gt lt우소(右所)gt 및 lt외소(外

所)gt lt노야소gt의 기록 방식은 각 작업소별로 감독관 명단 날짜별 공문서 조성전각의 명

칭과 규모 공사내용 소요자재(實入雜物秩) 공장명단(工匠秩)을 수록하였다 노야소 뒤에 저

승전 일곽 외에 1647년 창덕궁수리공사의 잔여 공사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잔여공사는

주로 문과 주요 전각의 벽체 단청 도회(미장)공사이다 마지막에는 역시 제조의 수결을 실

었다

인경궁 철훼는 좌소에서 맡아서 했으며 기록은 건물명과 칸수만 간단히 적었다 저승전

의 중건과 함께 신축한 건물은 낙선당 경극당 숭경당 취선당 손지각 및 익각과 주방이며

청음정 시민당 진수당 장경각이 수보되었다 시민당은 저승전의 남쪽에 있었으며 세자 서

연의 장소였다 진수당은 시민당의 북쪽 전각이며 손지각 역시 시민당에 부속되었던 건물이

고 장경각은 진수당의 동쪽에 있던 건물이다 즉 1648년『저승전의궤』에 기록된 공사의 범

위는 창덕궁의 동궁전 전체라 할 수 있다

남월랑(7) 남행각(1)

-敬極堂(10) 남월랑(7) 동월랑(75)

-樂善堂(5) 서행각(3) 남월랑(6)

-協祥門 麗景門 淸輝門 수보

-외남월랑(185) 資善門 淸陰亭(3칸) 측간 4칸

-霽陽門(1칸)

수보 개와 토벽

단청

우소

(右所)

-저승전 서익각(1칸) 북익각(1칸) 소주방 (6칸)

온돌(8) 마루(8) 차양판장 1좌 신조

내서월랑(7)

-기와 토벽 단청

개수

-일부 창호 신조

-嘉順門(1칸) -협문(25) 내남월랑(6칸) 북월랑(6칸)

-崇敬堂(45) -東付舍(3) 서행각(155)

-就善堂(105)

-靜勝門 1칸

-東樓(18) 서월랑(7)칸 남월랑(10)칸 외월랑(6)

외남월랑(18) 창차비(3)

司饔院(6)

供上廳(1) 機械木造作

嬪宮長房(6)+付舍(3) 朗和門(1) 差備廳(3)

炭庫(3) 機械木造作

외소

(外所)

遜志閣(7) 행각(19) 1칸문 1좌 小房(165) 1칸문 2좌

장방(13) 1칸문 4좌 별감방(6) 司鑰房(7) 水剌間(6)

大殿精抄軍廳(115) 貳문 1칸 북협문 1칸 泰亨門 1칸

목재 기와 석재

는 신조 창호는

일부 인경궁 철훼

재 사용

시민당 9칸 進修堂 12칸 기와 토벽 단청

개수 창호칠 개수

藏經閣 3칸 建陽門 중명문 기와보수

集英門 1칸 集賢門 1칸 단청보수

시강원 수보

종묘 담장 (중명문에서 司鑰房까지) 개축

大隱構 (遜志閣에서 內司僕寺까지)

정묵당등

수 보 와

개조질

정묵당 10칸 징광루 외서월랑 16칸 窓差備內 家 6칸 창차비

문 4칸 神佑門 4칸 熙仁門 1칸(개조) 肅章門 6칸 인정문 전

후 4칸 진선문 전후 4칸 壽靜堂외남월랑 3칸 서월랑 7칸(총

64칸)

砂壁 단청수보

선정전 인정전 선자귀

대조전 집상당 희정당 보경당 태화당 소덕당 선정문 협양

문 각처 연가 숙장문 인정문 진선문 돈화문 상하층

改塗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 저승전과 의궤

『저승전의궤』는 『창경궁수리소의궤』(1633)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이어서

인조년간에 복구된 창덕궁의 동궁 모습과 이때 철거된 인경궁의 동궁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세자가 거처하는 저승전을 중심으로 주변 전각의 면모를 알 수 있으며 바로

전에 완료된 창덕궁수리공역의 공사 마무리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건물명 기사 사료

돈화문

1412년(태종12) 진선문 남쪽에 누문

5칸 건립『태종실록』 태종12년 5월 22일

1413년(태종13) 문에 큰 종을 달다 『태종실록』 태종13년 1월 27일

1592년(선조25) 소실

1608년(광해즉위) 복구되다 『광해군일기』 광해군즉위년

1620년(광해군12) 문 앞 산대놀이를

중지시키다『광해군일기』 광해군12년 9월 3일

1676년(숙종2) 문 앞에서 과거 급제

가 문과2인 무관1만2천 7명이 파자교

까지 늘어서다

『숙종실록』 숙종2년 3월 24일

이 의궤의 각 작업소별 lt조성간각질(造成間閣秩)gt은 조성건물별로 칸수 바닥구조 천

장의 형태 난간 창호의 종류 등이 기록하고 건물별로 보수내용을 적었다 건물의 규모와

형태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창호의 형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저승전은 총 28칸

의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구성이었다 동온돌과 서온돌이 각 6간이고 중앙의 3칸이

고 대청이었다 저승전은 『宮闕志』의 기록에 의하면 영조년간의 화재로 소실된 뒤 중건되

지 않았기 때문에 lt동궐도gt lt동궐도형gt 등 후대의 그림 자료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없

다 따라서 이 의궤의 기록은 저승전의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2) 돈화문과 의궤

창덕궁의 정문이다 『영접도감의궤』(광해군 2)에 의하면 창덕궁의 출입문은 돈화문을

정문(正門) 진선문을 대문(大門) 인정문을 중문(中門)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정문은

창덕궁 외곽 담장인 궁장의 정식 출입문을 가리키며 정문을 들어서면 수직하는 군사들의

거처나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는 관청이 모두 포함된다 이에 반해 대문은 대내의 출입문으로

정전이나 편전 내전 영역의 출입문이 된다

1405년(태종 5) 이궁 창덕궁이 지어지고 나서 7년 후인 1412년(태종 12) 5월에 도성 내

에 행랑을 지으면서 창덕궁 진선문 남쪽에 누문 5간을 세워 lsquo돈화문rsquo이라 했으며 문 밖 좌우

행랑은 각 관청에 나누어 주고 조방朝房으로 만들었다고 『태종실록』에서 밝혔다169) 조방

은 궐에 들어가는 신하들이 의복을 갈아입고 대기하는 곳이다 1413년에는 문에 큰 종을 달

았다170)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복구되었다 이후에 화재나

훼손기사가 사서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초에 재건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다만 세부의 형상이나 구조짜임에서는 후대의 특징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후

대에 일부 개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돈화문은『궁궐지』에 의하면 창덕궁의 궁장에는 남쪽에 돈화문 단봉문(丹鳳門) 북쪽에

광지문(廣智門) 서북에 요금문(耀金門) 동쪽은 건양문(建陽門) 서문은 경추문(景秋門) 금

169)『태종실록』 권 23 태종 12년 5월 22일

170)『태종실록』 권 23 태종 13년 1월 27일

호문(金虎門)이 있다고 하였다 돈화문은 창덕궁 궁장의 서남모서리에 놓여있다 궁의 정문

이면서 위치가 궁장 모서리에 놓인 것은 창덕궁의 입지가 응봉에서 내려오는 경사진 지형

탓으로 보인다 돈화문은 왕이 궁을 드나들 때 이용되었으며 중국 사신 역시 이 문을 출입

하였다 또한 나라의 크고 작은 공식 행사가 있으면 그 행렬이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 예를

들어 궁 안에 모셨던 어진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다시 궁으로 돌아올 때는 이 문을 이용

했다 그러나 궐에 출입하는 신하들의 일상 출입은 이 문을 이용하지 않고 근처의 금호문을

사용했으며 이따금 단봉문을 이용했다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다 기둥 위뿐 아니라 그 사이에도 공포를 촘

촘히 배열한 다포형식이며 상부 지붕형태는 우진각이다 『궁궐지』에는 공포가 내7포 외 9

포이며 기둥 높이가 16척 앞뒤방향 칸의 길이가 각각 12척 조우 방향 칸의 길이가 가운데

칸은 17척 그 다음 칸이 15척 제일 바깥 칸이 125척이라고 하였다 돈화문은 처음 이궁으

로 지어졌기 때문에 경복궁처럼 외곽에 돌을 가지고 견고하게 궁성宮城을 쌓은 것이 아니고

흙과 돌을 가지고 궁장(宮墻)을 쌓았다

따라서 정문은 광화문처럼 석축을 쌓고 홍예문을 낸 것이 아니고 중층 누문 형태의 목

조건물을 세웠다 다만 광화문을 비롯해서 다른 궁궐 정문이 정면 3칸인데 비해 정면 5칸으

로 규모를 키웠다 5칸 가운데 좌우 2칸은 벽으로 막고 실제로 출입문은 3칸만 열었다 문은

세벌 이상의 장대석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세웠으며 세 개의 계단이 놓였다 기단 앞으로는

길게 단을 쌓은 월대를 마련했다 lt동궐도gt에 그려진 돈화문 모습을 보면 월대 중앙에는

왕이 출입할 때 이용하는 어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출입문 중 가운데 문 하나를 제외

하고 좌우의 출입문은 X자 형태로 막대로 막았다 이 그림으로 보면 평상시 돈화문은 일반

인의 사용을 제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대 남쪽에는 좌우에 말을 매어 두는데 쓰였

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틀이 있고 나무틀 앞에는 말에 오를 때 발을 딛는 디딤돌이 보인다

돈화문은 한 동안 월대를 비롯해서 기단이 아스팔트에 묻힌 상태로 유지되었다 언제

기단 하부를 아스팔트로 묻었는지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20세기 초에 창덕궁 안에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하면서 기단을 흙으로 메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돈화문 바

닥뿐 아니고 금천교의 위치도 바꾸고 진선문은 철거하였다 이렇게 변형된 돈화문은 1996년

기단을 제 모습으로 드러내고 월대도 복구하였다 그 사이 돈화문 앞 도로를 보수하면서 아

스팔트 층이 높아져 월대와 도로 사이에 1미터 이상의 단차이가 생겼다

(3) 시민당과 의궤

1847년(헌종13) 후사가 없었던 왕을 위해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들이면서 왕과 후궁이

함께 거처할 건물로 지었다171) 낙선재가 있던 일대는 본래 세자가 거처하며 신하들을 만나

던 동궁이 있었다 이곳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간 위치가 되며 창덕궁 동문인 건양문을 나

선 곳으로 영역으로 보면 창경궁에 속한 곳이었다 이곳에는 왕세자가 신하들을 접견하던

171) 낙선재 건립 경위에 대해서는 헌종 자신이 쓴 낙선재상량문과 수강재중수상량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헌종의 문집인 『원헌고元軒稿』 권1 낙선재상량문(1847년)과 수강재상량문(1848년) 참조

시민당(時敏堂)과 왕세자의 침소인 저승전(儲承殿)과 낙선당(樂善堂) 등이 있었다

1780년(정조4) 시민당이 화재로 소실된 후에 복구되지 않은 채 1782년(정조6) 새로 동

궁 처소로 희정당 가까운 곳에 중희당(重熙堂)이 지어지면서 빈곳이 되었다 이 일대는 조선

초기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으로 전한다 정조는 1785년(정조9) 이곳에 수강재를 지어 독

서처로 삼았다172) 한 동안 비어있던 이곳에 헌종 때 와서 낙선재를 지은 것이다 헌종이 경

빈 김씨와 낙선재에 거처한지 불과 2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빈집이 되었다가 고종

때에는 왕이 창덕궁에 머물 때 여기를 집무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즉 1884년(고종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창덕궁에 머물면서 낙선재에서 집무를 보고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1907년 이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나서 1917년 대조전

등이 모두 불에 타자 낙선재를 임시거처로 삼은 적도 있다 순종의 계비이며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한 동안 거처하였고 1963년 영친왕 이은이 환국한 후에는 부인 이방자여사와

함께 거처하였다 2009년에는 영친왕의 아들 이구(李玖)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혼전으로

이용되었다

다 『창덕궁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昌慶宮修理都監儀軌)』173)(효종 3년 1652

년)

1) 공사 내용 분석

효종 3년(1652) 1월부터 시작된 창덕궁 창경궁의 수리공역에 대한 내용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에 있는 건물의 온돌을 개수하고 전돌을 새로 깔며 흙을 교체하는 공사였다 인조 25

년에 있었던 창덕궁 수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주사건이 궁의 개수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

다 1651년(효종 2) 11월 인조의 후궁이었던 조귀인이 대내에 뼛가루와 무덤의 나무를 뿌리

고 흉물들을 각처에 묻어 대비와 대전 인평대군 등을 저주했다는 내용의 옥사가 있었는데

이 사건과 김자점의 역모사건이 연계되어 김자점 일파가 숙청되었다 효종은 이 사건을 마

무리 하고 곧바로 대비를 모시고 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며 창덕궁과 창경궁의 흙을 모두 긁

어내고 깨끗한 흙으로 채우도록 명한다174) 따라서 주요 전각의 온돌을 해체하고 전돌 교

체 전각 간의 어로에 흙을 새로 까는 것이 주된 공사였다

목차는 없으며 규장각 소장본은 앞부분의 편찬 년대와 공사감독 조직이 결락되어 알

수 없다 남아 있는 부분은 효종 3년 1월 15일의 도감사목으로 시작되는데 이후 4월 22일

까지의 lt계사gt 1월 8일부터 4월 15일 까지의 lt이문질gt 1월 15일에서 2월 10일 까지의

lt감결gt이 수록되었다 계사에 비하여 이문과 감결은 매우 소략하다 이어서 lt昌德 一所gt

lt昌德 二所gt lt昌慶 一所gt lt昌慶 二所gt lt굴토(掘土) 1소gt까지의 각 소(所)의 감역관 명

단과 작업내용에 대한 공문 자재목록 공장명단이 있다 끝 부분이 결락되어서 lt굴토(掘土)

172) 『정조실록』 권20 정조9년 8월 27일

173) 서울대학교 규장각(규14912)

174) 『효종실록』 효종 2년 12월 27일

작업소 건물 공사내용

창덕 1소 大造殿 동서익각 책방 集祥堂 澄光樓 玉華堂

壽靜堂 靜黙堂

온돌공사

희정당 承明門 내소주방

慶極門에서 建中門까지 어로

창덕 2소 太和堂 昭德堂 讌和堂 寶慶堂

책방

온돌사벽수리 방전다시 깔

景福堂 책방 온돌수리 단청

宣政殿 방전 박석

瑤華門에서 五雲門까지 어로 방전다시 깔기

齊政堂 온돌 방전 박석 淨土

도총부 책방 낭청방 온돌 방전 淨土

臨武門 湛露門 인경궁의 자재와 기와로 만듬

1소gt의 중간 정도까지 남아 있다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마이크로필름을 확인하면 그 뒷부분

은 lt굴토 이소gt lt노야소gt lt목물소gt lt토물소gt lt의궤 사목gt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이 공사에서 특이한 점은 일반 백성을 동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lt계사gt 1월 3일에 의하면 전국각지에서 2000명의 승군을 동원하여 훈련원과 인경궁 동관

왕묘에서 기거하면서 공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창덕궁에 새로 깔 흙은 쌍리문동에서 채취

하고 창경궁에 깔 흙은 남소문동에서 채취하였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이 공사는 인조 11년(1633)의 창경궁 수리와 인조 25(1647)년의 창덕궁 저승전 공역에서 수

리되었던 전각이 수리 대상이었다 이 의궤는 공사가 주로 바닥의 보수에 있었던 만큼 공사

규모도 적고 그 기술도 상세하지는 않으나 『창경궁수리소의궤』(1633)에서 언급되지 않았

던 창경궁 전각의 바닥구조가 언급되었다 공사의 성격이 건물의 실내 위주였기 때문에 현

상을 비교할 수 없다

당시 공사 범위였던 주요 건물은 앞에서 거론하였으므로 간단히 도총부만 살펴보기로

한다 도총부는 궁궐을 호위하는 기능을 맡던 관청으로 창덕궁 대문인 진선문 밖에 있었던

것을 1655년(효종6) 인정전 서쪽에 만수전을 지면서 창경궁으로 이전했고 이후 1781년(정조

5) 이문원이 들어섰다 lt동궐도gt에 묘사된 이문원 건물은 전면 5칸 측면 2칸반 정도이며

하부에 돌기둥을 세우고 가운데 3칸에 나무 사다리를 설치한 모습이다 이와 유사한 구조는

lt동궐도gt의 희정당 건물그림이나 현존하는 창경궁 숭문당에서도 볼 수 있다 대유재는 정

면 4칸 측면 2칸 건물이며 동쪽 끝 2칸은 물가에 면해서 제일 바깥쪽 돌기둥이 물속에 세

워진 모습이다 이 부분은 동이루(東二樓)라 불렀는데 1785년(정조9) 동이루를 지었다

라『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175)(효종8년 1657)

1) 공사 내용 분석

17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3572)

작업소 주요건물 부속건물 공사내용

1소 만수전

(4면퇴 포함36)

新材 眞彩 柱唐朱紅

井虹橋 동익각 밖

연지 서행각(4) 판장(11)

千慶樓 (4면퇴 포함 20) 新材 眞彩 柱唐朱紅

獻線閤 (전퇴포함 30) 일부구재사용 신재 진채

5량가(8) 외행각평루(3) 窓差備(7) 구재 및 신재사용 단청

洗踏房(6)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庫間(7) 長房(14) 司鑰房(4) 구재 및 신재 사용 단청

등촉방(7)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長房庫間(4) 舊 肅寧殿 서월랑을 수보 단청

외월랑(8)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만수전(萬壽殿)은 효종 8년 왕대비인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莊烈)왕후

조씨 1624~1688]를 위하여 창덕궁 인정전 뒤에 지은 전각이다 위치는 구 선원전의 북쪽이

다 이듬해 거듭되는 천재지변으로 1월 15일 공사를 멈추었다가 8월 4일 도감을 다시 설치

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공사는 11월 15일 다시 중지했다가 다음해(효종 8년 1657)에 1

월 16일 다시 시작하여 3월 26일 완공되었으며 4월 2일 대비가 이어하였다

이 만수전은 숙종 13년(1687) 9월에 불이 났으며 다시 복구되지 않았으며 자의대비는 통명

전으로 옮겼다 자의대비는 만수전에 불이 난 다음해인 1688년 (숙종 14년) 창경궁 내반원에

서 승하하였다

목록은 따로 없고 을미(1655년) 11월 17일 좌목과 도감사목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뒤에

는 11월 19일 날짜로 시작하는 계사에 해당하는 내용을 적었다 계사 뒤에는 예산의 수급과

품삯의 지급항목 및 실제 투입된 재료의 목록을 기록한 실입편을 두고 있다 그러나 따로

세부항목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모든 문서를 날짜순으로 적었다 그 다음에는 lt1소gt lt2

소gt lt3소gt lt외소gt lt부석소gt lt운석소gt lt외축장소gt lt노야소gt lt별공작gt의 순으로

싣고 맨 끝에 lt의궤사목gt을 실었다

각 작업소별로 별개의 의궤를 첨가시키는 형식으로 전체 의궤를 구성하였다 1소에서는

만수전 조성 2소에서는 춘휘전 조성 3소에서는 기타 서루와 월랑 등을 조성하는 것으로 나

누었다 이외에 작업종류에 따라 담장을 쌓는 외소 및 외축장소를 별도로 두었으며 돌 일을

담당하는 부석소와 운석소를 구분하였다 또 각종 철물을 만드는 노야소와 기계를 만드는

별공작소를 구분하였다

lt1소gt를 예를 들어 각 작업소별 서술방내용을 살펴보면 처음에 담당 관원들을 적고

lt수본질gt을 날짜순으로 적었으며 그 다음에 lt조성질gt에 건물의 규모 신구부재의 사용

과 기단마감단청 해당 건물의 실 구성(천장 마감과 온돌석 수량)을 적었다 그 다음에 목

재 석물 기와 단청 잡물 창호(창호채색잡물) 3개 작업소를 통틀어 단청한 것(通三所懸板

着添秩) 축장석물과 잡물의 실입을 구분하여 기록하고 lt공장질gt에 장인명단을 적었다

부재의 크기나 치목된 부재명칭이 언급되지는 않아서 건물의 칸수 정도를 파악하는 정도이

나 건물별로 창호의 종류와 창호단청 색깔 기단의 단수 등이 상세히 명시되어 있다

端和門 외행각(2) 신재

一間門(12처) 6칸 신조 6칸 구재

대문(5처) 3칸 신조 2칸 구재

外墻 水閣(3) 구재

2소 春暉殿

(4면퇴포함 20)

慶和堂을 철훼 이건 대보 1조

신재 眞彩

동변 화계(6층)

서행각(3) 서월랑(7) 북월랑(255) 신재

북월랑 앞 판장(9) 신조 眞彩

將酉庫 판장(5) 신조 단청

樑家(8) 구재

양지당 (전퇴포함 12) 신재 단청

북변 동산층각(2)

大一間門(2) 신조

중일간문(5) 3칸신조단청 2칸구재진채

箭泩門(4) 신조 단청

대문(1칸문) 내측간(3) 외측간(1) 구재

별감청(4) 구재

천경루 서측정원 井虹橋 裳朴石 신조

3소 서루월랑(전후퇴포함 76) 신재 구재 사용

상하층 내에 오토단청 나머지

는 단청

남루월랑(전퇴포함 45) 신재 단청

춘휘전남월랑(165) 신재 전면 진채 나머지 단청

양지당 남월랑(전퇴포함 9) 신재 단청

端暉門 1칸

춘휘전앞 小狹箭往門(1) 신재 진채단청

양지당앞 小狹門 1칸 문판과 문얼굴은 신재 나머지

는 구재

북수문 서변 1칸문 측간(3) 구재

lt築墻秩gt 서루월랑 서변 細墻 42칸(높이 8자)

泰秋門북수각~景秋門 內墻까지 50칸

측간동남 담장8칸(높이 9자)

대은구 5칸 중은구 7칸

외소 도총부당상대청 5칸 서영 19칸 炮手內入番營 4

칸반 景秋門수문장청 2칸 도총부 남변월랑 8칸

내군보 1칸 마영 2칸

동영 10칸 서영 8칸 남영7칸

합 25칸 철훼하여 사용

lt築墻秩gt 북장(경추문~북수각)48칸(높이 9자)

도총부 서장 20칸(높이 8자)

도총부 북장 7칸(높이 6장)

요금문 안 우물(깊이 10자)

2) 의궤와 만수전 건축의 비교

건물명 기사 사료

구 선 원

1656년(효종7) 도총부자리에 만수전 춘휘전

건립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

궤』

1687년(숙종13) 만수전소실『숙종실록』 숙종13년 9월

2일

1695년(숙종21) 춘휘전을 선원전으로 하고 숙

종어진을 봉안하다『궁궐지』

1778년(정조2) 영조 어진을 봉안하고 좌우 익

각을 첨설하다

『승정원일기』 정조2년 1

월 10일

1802년(순조2) 정조 어진을 봉안하다『승정원일기』순조2년 7월

3일

1846년(헌종12) 신실 2칸을 증축하여 순조 익

종 어진을 봉안하다

『헌종실록』 헌종12년 8월

6일

1851년(철종2) 신실 1칸 증축하여 헌종 어진

봉안

『일성록』 철종2년 5월 17

1900년(광무4) 서쪽 1칸을 증축하여 태조고황

제 어진을 봉안

『경복궁창덕궁제1실증건도

감의궤』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1655)에 만수전은 36간이고 사면에 퇴가 있으며 어칸3칸

에 동익각9칸 서익각 6칸이라고 하고 춘휘전은 20칸에 사면퇴가 있고 마루가 14칸 온돌이

6칸이라고 하였다 전체가 20칸이라고 하였으므로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추정되며 이

가운데 어칸의 마루는 천장에 봉황을 그린 봉반자이고 좌우 온돌방은 모란을 그린 목단반자

로 치장하였다고 하였다 만수전이 소실되고 춘휘전이 선원전으로 용도가 바뀌면서 건물규

모는 그대로 두고 실내를 어진을 봉안한 용도에 맞게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궁궐지』에 의하면 1695년(숙종21) 숙종이 어진 즉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춘휘전(春

煇殿)에 모시도록 하고 건물 이름을 선원전으로 했다고 하였다 춘휘전은 1656년(효종7) 효

종이 대왕대비 장렬왕후를 위해 인정전 서쪽 흠경각이 있던 곳에 지은 만수전의 부속 별당

건물이다 대비전은 정전의 동쪽에 짓는 것이 관례였으나 효종은 정전 동편에 마땅한 터가

없다는 이유로 정전 서쪽에 지었다 건립 때부터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던 만수전은 1687년

(숙종13)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이후 만수전 터에는 경복전이 들어서고 별당인 춘휘전은 한

동안 비어 있다가 이 때 숙종 어진을 봉안하는 영전으로 바뀌었다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에는 대비전인 만수전의 규모와 마루 온돌방 등의 실 구

성과 칸수 실내마감 단청종류 등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며 부속 건물에 대한 정보도 상세

하다 건물 뿐 아니라 연못 화계 담장 등 주변 조경시설의 조성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17세

기 중반 대비전의 구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만수전은 lt동궐도gt에도 남아 있지

않으며 춘휘전은 후에 선원전으로 용도가 변경되는 등 효종년간에 조성된 창덕궁의 일면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마 『집상전수개도감의궤(集祥殿修改都監儀軌)』(현종 9년 1668)

1) 공사 내용 분석

현종 8년(1667) 11월 창덕궁 인정전의 서북측에 집상전을 건축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

이다 집상전은 왕대비인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거처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대조전과

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북방향에 자리 잡았다 왕대비인 인선왕후는 왕대비전에 재변이

있어서 다른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현종은 대비를 위하여 전각 하나를 짓고자 하였다

lt동궐도gt에는 집상전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장방형의 긴 건물에 중앙부분 지붕이 좌우

측면보다 한단 높게 되어 있고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으로 대조전과 거의 같은 형식

이다 건물 왼편에는 남북방향으로 길게 행각이 놓여서 대조전 동편 행각과 연결되어 있다

이 자리에는 원래 인조년간에 지은 집상당이라는 20칸 규모의 별당 건물이 있었는데 집상당

을 헐고 새로 28칸 규모로 확장하여 대비전을 지은 것이다 현종 8년 11월 11일 집상전을

짓는 데 대한 전교를 내린다 단일 전각을 짓는 일이고 공사를 가급적 확대하지 않기 위하

여 경덕궁의 집희전(集禧殿)을 헐어 자재를 재사용 하는 등 공사의 규모가 크지 않으므로

공사를 주관하는 것을 수개청으로 하였다

제일 앞부분의 좌목은 결락되어 전체내용을 알 수 없다 그 뒤로 lt계사질gt lt이문질gt

lt감결지gt lt품목질gt lt수본질gt lt제색공장질gt로 구성되어 있다 lt계사질gt은 현종 8년 11

월 11일 왕이 자전을 위하여 전각을 지어야 할 것을 전교하는 것부터 이듬해 정월 17일까지

주요공정의 일정과 상량문 상량의 등 기사를 모았다 상량문은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이 지

었다 공사의 주관청은 수개청(修改廳)으로 정했다 기존의 건물을 허는 것은 11월 13일이고

입주와 상량은 12월 20일이었다 lt이문질gt은 주로 자재를 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는데

필요한 수레의 조달이나 새로 만들어야 하는 철물제작의 협조를 구하는 문서이다 lt감결

질gt은 사무에 필요한 각종 잡물조달과 현장의 관리에 대하여 각 관서에 명령하는 문서들이

다 감결 뒤에 여백이 있고 누락이 있는 듯 하고 lt殿額門號書寫官gt 과 이어서 각 공장과

화원 등에게 지급한 품삯 운송비 등을 종류별로로 적고 총 합을 적었다

lt품목질gt은 앞에 lsquo郎廳所掌rsquo이라고 하여 낭청의 소관업무임을 밝히고 있다 단청이나

건물을 다시 칠하는데 필요한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을 수개청 당상에게 올리는 내용이 주

를 이루고 있다 그 다음에 집희전에서 철거해 온 자재로 공사를 다 충당할 수 없으므로 부

족한 재목과 기와 등에 대해 조달처와 보충하는 자재 수량을 상세히 수록하였다 경덕궁의

집희전을 헐어 그 부재를 사용하고 부족한 것은 새로 목재를 들여와 치목하는데 들여오는

목재의 명칭은 원목의 형태이며 그 수량으로 보아 집희전 보다 규모와 형태면에서 확장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lt수본질gt은 앞에 lsquo監造官二員所掌rsquo이라고 명시하여 감조관의 소관업무임을 밝혔다 내

용은 철물을 위시하여 물건을 운반하는 썰매 돗자리 숫돌 등 자질구레한 물품의 조달이 주

를 이루고 역시 집희전에서 뜯어온 것으로 부족한 철물이나 기타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상세

히 나열하였다 품목질과 수본질에는 같은 해 공사가 있었던 영녕전 공사현장에서 쓰고 남

은 물건들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은 lt제색공장질gt로 공사에 참여한 분야의 장인을 나열하였다 화원과 각도의 화승

들이 먼저 나오고 목수 석수 冶匠 조각장 등 다양한 장인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단청을

위하여 화원 24명 화승이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원양도 등에서 50명이나 동원되었다

건물 비고 공사내용

집상전 좌우익실(온돌)포함 28칸

행각 11칸

鳳班子

신조

전면 처마 물통(溙桶) 설치

대조전 양상도회 수리 현판 골회 개칠 현판개도금

集祥殿 延秋門 延春門 景福門

日門 章華門 太極紋 正順門 長春

門 建昌門 通濟門 翠徽門 麗春門

萬春門 翠華門 浥翠門 玄武門

현판제작

2) 의궤와 집상전 건축의 비교

현종년간에 지은 집상전의 모습은 lt동궐도gt에서만 볼 수 있다 lt동궐도gt에 그림만 전

하고 있는 집상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의궤이다 집상저에 보이는 특징 가운데 지붕의

무량각 즉 용마루가 없는 점에 대해서는 이 곳이 왕이 주무시는 곳이므로 지붕에 왕을 상징

하는 용마루를 두지 않으려고 무량각으로 했다는 속설이 전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지어낸

이야기이다 창덕궁에는 대조전 외에도 집상전도 무량각 건물인데 집상전은 왕대비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무량각은 조선중기 경 중국의 영향으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의 격

식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남은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 창덕궁 대조전 창경궁 통명전이 무량각 건물이다 무량각으로 하기 위해

서는 지붕에 종도리를 두 개 설치하고 용마루에는 궁와弓瓦라는 둥글게 돌아간 기와를 따로

제작해서 설치하는 등 번거로운 공사과정이 따랐다

집상전을 짓는 부재를 충당하기 위해 철훼한 경덕궁 집희전에 대한 내용이 소략하여 그

구조나 규모에 대하여 알 수 없는 점이 아쉽다 또한 집상전의 구성에 대하여도 좌우 익실

이 있고 반자는 봉반자이며 행각이 있다는 점 외에는 앞선 창덕궁과 창경궁 관련 다른 의

궤와 달리 전각의 건축적 형태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새로 만드는 집상전 외에 주변 문들의 현판을 새로 제작하는데 『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 이후 내전 영역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으며 『만수전수리도감의궤』와

함께 대비전 조성에 대한 의궤로서 가치가 있다 lt동궐도gt에는 대조전 동북쪽에 대조전과

유사한 지붕형태를 갖춘 건물이 그려져 있고 집상전(集祥殿)이라는 편액이 묘사되어 있다

집상전은 집상당을 16년 수리하면서 당호를 고친 건물이다

바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순조 3년 1803)

건물명 기사 사료

인정전 1405년(태종5) 창덕궁 창건시 3칸으로 건립『태종실록』 태종5년 10월

19일

1) 공사 내용 분석

순조 3년(1803)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인정전을 순조 5년(1804) 4월에 재건한 기록이다

인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때 중건되었으며 인조대에 변란으로 창덕궁의

내전일곽이 대부분 소실된데 반하여 순조대까지 잘 남아 있었다 순조 3년 12월 13일 선정

전의 서쪽 행각에서 화재가 일어나 인정전이 불에 타버렸다 이 사건으로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물러난다는 하교를 내린다 바로 중건에 들어가 12월 27일 기초공사를 시작하였

으나 어수선한 정치상황과 천재지변으로 다음해인 1804년 3월 24일 공사에 소용되는 자재의

공급으로 인하여 민폐가 심하다는 김조순(金祖淳)의 상소로 잠시 중지했다가 4월 20일에 재

개한다

공사는 그해 12월에 마무리되었고 1804년 12월 27일 전의감(典醫監176))에 의궤청을 설

치하고 순조 5년(1805) 4월에 의궤를 편찬하였다 이때 중건된 인정전은 그 후 50년이 지난

철종 8년(1857)에 다시 보수하였다 1803년(순조 3) 12월 선정전 행각에서 불이 일어나면

서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져서 건물이 전소되었다177) 복구공사는 이듬해에 바로 착수되어

화재 후 만 1년만인 1804년(순조 4) 12월에 준공을 보았다178)

의궤 목록은 좌목(座目)middot시일(時日)middot도설(圖說)middot승전(承傳 부록으로 장주(章奏) 상량문

(上樑文) 의주(儀註) 반교문(頒敎文)이 있음)middot이문(移文)middot내관(來關) 품목(稟目 부록으로 식

례(式例)가 있음)middot감결(甘結)middot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middot인정전영건도감별

공작의궤(仁政殿營建都監別工作儀軌) 순이다

lt도설gt에는 인정전의 정면도와 부속물인 당가(唐家)middot오봉병(五峯屛)middot곡병(曲屛)middot당가천

장(唐家天掌)middot염우(廉隅)middot적첩(赤貼)middot허주(虛柱)middot유음(流音)middot초엽(草葉)middot연환청판(連環廳板)middot장

단청권(壯緞廳權)과 녹로(轆轤) 도설이 있다 인정전의 척량(殿宇尺量)을 소요된 재목(材木)

과 함께 상하층(上下層) 각 층별 공포(工踏) 상하층조장(上下層條粧) 당가규모(唐家尺

量) 좌탑척량(座榻尺量) 곡병척량(曲屛尺量)으로 구분하였는데 소요 부재의 치목된 명칭과

크기별 수량 길이 단면크기 목재의 원산지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도설편에 인정전 건물전체모습 오봉병 어좌(당가)의 세부 명칭과 형태 공사 시 큰 자

재를 옮기는데 썼던 운반기구인 녹노의 그림이 실렸다 큰 목재는 전라도 강원도 등 전국에

서 채취해 운반했으며 단청 안료는 경상도 장기현에서 구해오고 목수들도 서울은 물론 강원

도에서도 솜씨 좋은 사람들을 불러내서 지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2) 의궤와 인정전 건축의 비교

176) 典醫監은 의료행정과 의학교육을 관장하던 관청

177) 『순조실록』 권5 순조3년 12월 13일

178) 『순조실록』 권6 순조 4년 12월 17일

1418년(세종원) 정면 5칸으로 확장『세종실록』 태종원년 9월

10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

을 복구

1777년(정조1) 마당에 품계석 설치『정조실록』 정조1년 9월 6

1804년(순조14) 전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구됨

『순조실록』 순조4년 12월

17일

『인정전영건도감의궤』

1857년(철종8) 건물에 손상이 많아 해체하여

수리 석재도 대부분 교체 『인정전중수의궤』

1907년 순종 이어에 따라 내부 수리 『대한계년사』 수리 담당은

일본인 기사

1916년 지붕 용마루에 오얏꽃 장식 장서각 소장도면에 연대 명기

1996년 인정전 마당에 박석설치 및 행각 원

형복구

『인정전영건도감의궤』의 공사내용은 인정전 20칸과 내부 시설(당가 오봉병 등)을 다

루고 있다 『인정전영건도감의궤』에 의하면 건물 복구는 하부 월대는 기존 시설을 그대로

쓰고 목조부분만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1842년(헌종 8)에 와서 다시 한 차례 수리를

했다179)

조성내용 규모(척량) 형식

인정전 20칸 어칸 20자 변칸 각 15자 상하층 외7포 내 9포

당가 동서 145자 남북 1232자 하층 4각 상층 8각 내외 각 17포

오봉병 길이 1605자 폭 141자 두께 012자

좌탑동서 17자 남북 135자 높이 48자 난간

높이 065자 층교 난간 높이 09자

곡병

판평상 길이 72자 폭 6자 높이 05자

主壁길이 7자 폭 41자

좌우 협 각 길이 6자 폭 31자

사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순조 34년 1834)

1) 공사 내용 분석

창덕궁은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후 인조 25년(1647)에 중건하였는데 순조 33

년(1833) 10월 17일 밤 4경(四更)에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이 불에 탔고 징광루middot옥화당middot양

179) 『헌종실록』 권9 헌종 8년 윤5월 6일

주요전각 부속건물 공사내용

대조전(45칸)

水剌廚(1칸) 신조

養心閤 宣平門(25칸) 신조

隆慶軒 集祥門행각(26칸) 신조

興福軒 天香閣(20칸) 신조

내소주방 慶極門행각(255칸) 신조

凞政堂(15칸)克綏齋 복도각서행각(17칸) 신조

外燒廚房 및 서행각(35칸) 신조

澄光樓(20칸)

玉華堂(15칸) 신조

靜黙堂(10칸) 신조

행각(16칸)과 문(17칸) 신조

嚁輝門 좌우행각(5칸) 신조

建昌門(1칸) 小春門(1칸) 적묵당서협문(1칸) 협문(1칸) 내외소

주방문중문(1칸) 章華門(1칸) 통명문(1칸) 天廚門(1칸) 재덕당동

협문(2칸)

신조

옥화당이모끼중문(2칸) 嚁輝門이모끼중문(1칸) 會瑞門이모끼문(1

칸) 양심합동남이모끼문(1칸) 장순문이모끼문(1칸) 선례문이모끼

문(1칸)

신조

심합까지 연달아 탔다180) 대조전과 희정당은 보통 전각과는 다르니 계속되는 흉년에도 불

구하고 즉시 개건해야 한다는 왕의 하교에 따라 10월 26일 영건도감이 설치되었다 창덕궁

의 공사와 함께 3년여를 미루어 오던 창경궁의 환경전 일곽의 화재 복구와 함께 이루어졌으

나 영건도감은 창경궁 주자소에 각각 따로 설치되었다 의궤청은 호조 별례방에 의궤도감을

설치하여 1834년 10월에 『창경궁영건도감의궤』와 함께 의궤를 완성하였다

목록은 있으며 좌목(座目)middot각항시일(各項時日)middot도형(圖形)middot승전(承傳 上樑文儀註)middot물력

구획(物力區劃)middot이문(移文)middot내관(來關)middot품목(稟目 附式例)middot감결(甘結)middot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

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 순으로 『창경궁영건도감의궤』(1834)와 동일하다 도형에는 대조전

(大造殿) 징광루(澄光樓) 양심합(養心閤) 희정당(凞政堂)의 정면 그림이 있다

lt승전gt의 끝 부분에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의 상량문을 실었다 lt물력구획gt은 ldquo營建

物力區劃數rdquo라는 제목으로 각 지방과 아문별로 분담된 재정과 총액을 적었다 lt품목gt에는

lsquo各樣匠人一日工錢式rsquo lsquo諸色工匠等助役式rsquo 별간역이하 하급관리의 식례 목물가를 비롯한 각

종 물력을 자세히 적고 있다 lt실입gt은 『서궐영건도감의궤』 『창경궁영건도감의궤』와

같은 방식으로 각 건물별로 소용된 재료의 내역을 석재 재목 철물의 순서로 적었다 이를

통하여 공사내용을 소상히 알 수 있다

180) 『순조실록』 권33 순조 33년(1833 계사) 10월 17일

주요

전각부속건물

규모181)

(1647)

규모

(1834)

동궐

도형

석공

사목공사 비고

대조전

45칸 45칸 36칸

7량 어칸풍판 二翼工

세살청판분합 세만살단

분합

인조 25년대조전 45

칸-

어칸마루 3칸 4면

퇴마루 20칸 온돌

12칸

水剌間

(水剌廚)1칸 없음

맞배 3량

만살청판분합 8짝 만살

광창 8짝

lt동궐도gt와 거의 일

興福軒 6칸

20칸

175칸 5량 익공

淸香閣

(天香閣)

隆慶軒 9칸

26칸

6칸 익공추녀 2개- 鷄子多

里+하엽 25개

集祥門행각 22칸 lt동궐도gt와 lt동궐

도gt형이 다름

內燒廚房 255칸 196칸 5량 익공 만살청판분합

慶極門행각

澄光樓

마 루 4

온 돌 2

퇴12520칸 20칸

5량 중층 翼工

세살청판분합 만살청판

분합

고주 10개 대량 4개

종보 4개 추녀 8개

(중층)

複道閣 3칸 3량 方椽

玉華堂 105 15칸 15칸

맞배+팔작

익공

고주 8개 평주 18개

추녀 2개 대량 평

량 종량 퇴량

靜黙堂 105 10칸 10칸 5량 민도리 고주4개 추녀 2개

주요전각 부속건물 공사내용

대조전 홍판장 延春門 延秋門 판장문(1칸) 판장(7칸) 판장(1칸)

만춘헌 판장문(1칸) 융경헌 앞 판장(2칸) 문(반칸) 水剌間廚판장

(1칸) 양심합 동남 판장(1칸) 장순문판장(4칸) 재덕당판장(2칸)

신조

齊政閣과 서행각(34칸) 수보

구 소주방(10칸반) 수보

건물의 구성에 대한 설명은 칸수만 적고 있어서 17세기 의궤에 비하여 부족하지만 그

대신 각 건물에 사용된 부재는 수량과 함께 상세히 적었다

순조 33년 화재이전의 모습인 lt동궐도gt와 복구공사 후 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으며 이때

공사된 내용은 고종대 까지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lt동궐도형gt을 통하여 19세기의

창덕궁의 모습을 추론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81) 창덕궁수리도감의궤 (인조 25년 1647)

주요

전각부속건물

규모181)

(1647)

규모

(1834)

동궐

도형

석공

사목공사 비고

養心閤

25칸 235칸

5량 익공 모임지붕

세살청판분합 만살분합

고주7개 대량 7개

종량 15개 팔각주 9

개 추녀 1개

宣平門

外 燒 廚 房

및 서행각35칸 5량 일부 익공 추녀 1개

凞政堂

15 15칸 15칸

구조1고주

공포二翼工

입면세살청판분합세만

살청판분합

정면 5times측면 3

고주 4개 평주 16개

종보 4개 대주두 소

주두

複道閣

서행각17칸

克綏齋

5량 익공

세살청판분합

만살단분합 만살청판분

協陽門

嚁輝門 좌

우행각 5칸

同春門 연

(1) 1833년 창덕궁 화재의 범위

1833년 10월 17일 밤 四更에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이 불에 탔고 징광루middot옥화당middot양심

합까지 연달아 탔다 대신)과 각신들을 소견하였는데 영의정 이상황이 말하기를 ldquo궁중의

화재가 전후하여 서로 잇달아 일어난 것은 참으로 큰 재변이며 이번의 실화(失火)는 결코

심상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높게 쌓은 넓은 집이 결코 잠깐 사이에 불길이 번질 리가 없는

것이고 이미 숙직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또 제 시각에 순경(巡警)을 돌았다면 진작 발견하

지 못하고 불길이 이렇게까지 번지게 된 것은 과오의 여부를 논할 것 없이 반드시 이루어

진 까닭이 있을 것이니 끝까지 엄하게 추구(追究)하는 정사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dquo하

였다182) 이로 보면 당시 화재로 인해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 옥화당 양심합까지 불탔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을 중건한 공사가 바로 『창덕궁영건도감의궤』에 실린 것이다

당시 화재의 원인은 ldquo17일 밤 잠자던 중에 단양문(端陽門) 밖 위소(衛所)의 군사들이 떠

드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차비문 안에서 실화(失火)하였음을 알고는 불을 끄려고 급히

들어갔더니 장순문(莊順門)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몸을 밀치고 들어갔으

며 한편으로는 제정각(齊政閣)에서 수직하는 무감(武監)을 소리쳐 불렀으나 그사이에 불길

이 크게 일어나 이미 양심합(養心閤)에 연달아 번졌는데 실화의 원인은 전혀 알지 못합니

182) 『순조실록』 순조 33년 10월 17일

건물명 기사 사료

대조전

1461년(세조13) 내정전을 양의전이라 명명하고

대조전에서는 신하를 만났다고 함 따라서 이 시

기 대조전은 내정전과 다른 전각이었다고 추정

『세조실록』 세조7년 12월

19일 및 세조13년 5월 18

연산군일기에 태종 세종이 대조전에 거처하고

성종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보임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8월 22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해 복구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시 소실된『인조실록』 인조원년 3월

15일

1647년(인조25) 인경궁 경수전을 뜯어 다시 지

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34) 전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다rdquo183)라 한 것처럼 밝혀지지 않았다

1833년 화재로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 일곽의 건물들이 전소된다 이때 불탄 건물은

대조전과 주변행각 징광루와 주변건물 희정당과 주변행각이다 희정당과 대조전의 서쪽으

로는 행각들이 붙어 있어 불이 옮겨 붙기 쉬웠다 이 불로 소진된 건물을 중수한 내용이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이다 여기에 표기된 건물의 규모와 소요 부재로 추정한 건물의 양

식 등을 1647년 인조 때의 창덕궁 복구 시 조성된 내용 및 lt동궐도gt(1827~1833년) lt동궐

도gt형(1907년경)등과 비교하여 보았다

1833년의 화재 후 복구에 있어서 건물의 변경이 있었는가 1647년 『창덕궁수리도감의

궤』와 1834년 의궤의 건물 규모나 배치는 거의 유사하다 건물의 명칭에 있어서 인조대의

명칭과 lt동궐도gt는 차이를 보이지만 1834년 의궤와 lt동궐도gt의 건물명칭 및 문의 명칭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lt동궐도gt의 제작 시기는 1834년 4월 이전이 확실한 것으로 보이며(통

명전의 복구와 관련하여)lt동궐도gt가 만들어진 직후 화재가 났고 복구하면서 이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lt동궐도gt와 lt동궐도형gt에서 대조전 일곽의 차이는 무엇이며 언제 생겼는가 집상문

서쪽의 행각이 옥화당까지 길게 이어지던 것이 중간에 끊어지고 서쪽으로 더 증축되었다

집상전과 집상전동행각이 없어졌다 집상전은 화재 시 소실되었다는 기사가 전혀 없다 불이

서쪽으로 번진 것을 볼 때 피해가 없었을 수도 있다 집상전은 정조이후 기록이 보이지 않

는다 문의 명칭과 위치는 거의 일치하고 판장도 위치는 일치하나 수량이 차이를 보인다 그

러나 소실된 것을 복원하는 상황이므로 수량을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2) 대조전과 의궤

183) 『순조실록』 순조 33년 10월 18일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 다시 지음

대조전은 선정전의 동쪽 희정당의 북쪽에 있으며 건물 뒤로는 화계로 장식된 언덕이

있고 언덕 너머는 후원으로 연결된다 왕이 머무는 침소가 동온돌 왕비가 머무는 고이 서온

돌이다 궁궐의 행사가 있을 때 왕은 대조전에서 나와 선정전에서 의관을 갖추어 입고 여를

타고 행사장으로 이동하며 평상시에는 대조전에서 편복을 입고 희정당으로 나와 경연에 임

하였다 왕비는 정월초하루나 동짓날 당상관 이상의 관료 부인들을 대조전 앞마당에 부르고

하례를 받았다 이런 행사를 위해서 대조전 건물 앞에는 월대가 마련되어 있다 대조전은 내

전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신하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신하들

을 이곳까지 부르기도 하였다 1809년(순조 9)에는 마침 원자가 대조전에서 태어나자 아직

백일도 되기 전에 대신들이 대조전에 나아가 원자의 안녕을 기원하였다184)

1917년 소실되기 전의 대조전 모습은 사진자료도 남아있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의궤나 lt동궐도gt 등 시각자료를 통해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1917년에 와서 화재를

만나 1920년에 재건되었다 이때는 경복궁 교태전 건물을 헐어서 그 재목을 가지고 지었으

며 위치를 약간 동북쪽으로 옮기고 교태전의 후방 부속건물까지 함께 이축해서 이전과는 다

른 모습으로 지었다

lt동궐도gt에 그려진 대조전은 1833년의 화재로 사라지고 이듬해 1834년에 다시 지어졌

다 다시 지어진 건물형태는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 평면형태가 장서각에 도면으로

남아있다(『근대건축도면집』 2009에 수록) 도면에 의하면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5칸이며

가운데 3칸의 정청을 중심으로 좌우 9칸씩의 온돌방이 있고 사면에 퇴가 돌아가는 모습이어

서 기본적으로 1647년 재건된 건물규모와 일치한다 1834년의 창덕궁 재건과정을 기록한

『창덕궁영건도감의궤』(1834)에는 대조전의 전면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실려 있는데 지붕

이 중앙이 높고 좌우가 낮은 형태나 좌우 익실에 돌기둥이 그려져 있어서 재건된 대조전이

화재 이전과 동일한 모습임을 보여준다

한편 대조전의 실내에 대해서는 1802년(순조 2) 당시 선공감에 근무하던 이이순(李頤

淳)이 건물 수리에 앞서서 대조전 실내상황을 소상히 기록한 lsquo대조전수리시기사rsquo가 전하고

있어서 참고가 된다185)

lsquo대조전수리시기사rsquo에 의하면 당시 대조전의 실내에는 10점이 넘는 병풍이 각방의 벽을

장식하고 있었으며 그 중 정청 북쪽 벽에는 금종이로 테두리를 장식하고 일곱 학이 춤추는

그림이 있는 병풍이 걸려있고 그 앞에는 용상이 있어 그 위에 붓과 벼루 양로 등이 놓였으

며 동쪽 방에는 벽에 많은 병풍과 글씨가 쓰인 액자가 있고 서쪽 방은 작은 방이 장지로 나

뉘어져 있는데 북쪽은 큰 장이 놓여있고 바닥은 벽은 능화지로 덮이고 바닥은 기름 장판이

깔린 위에 채화석이 깔려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현재 궁중유물 중에는 십장

생 등을 그린 화려한 채색의 12폭 병풍이 있어서 이들 역시 실내에 설치된 것이 아닌가 하

는 추정을 하기도 하였다186)

184) 『순조실록』 권12 순조 9년 10월 29일

185) 『후계집』 권5 잡저 대조전 수리시 기사

건물명 기사 사료

희정당

1496년(연산군 2) 성종이 사용하던 수문당이

불이나자 수리하고 나서 건물명을 희정당으로

고침

『연산군일기』 연산군 2년

8월 19일

1608년(광해군즉위) 소실된 건물을 복구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시 소실『인조실록』 인조 원년 3

월 15일

1647년(인조 25) 인경궁 화정당을 뜯어 다시

지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 34) 전년 화재로 불에 탄 것을 다

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 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뜯어 다시 지음

20세기초에 작성된 궁궐지에는 대조전 규모는 36칸으로 적었다 lt동궐도형gt에도 건물규

모는 36칸이다 이전의 45칸과의 차이는 측면을 외부에 나타나는 툇간을 기준으로 세는지

아니면 내부 몸체의 주칸으로 세는지에 따른 차이로 판단된다 즉 측면 툇간을 기준으로 하

면 측면이 5칸이 되고 내부 몸체를 기준으로 하면 4칸이 되는데 그에 따라 측면이 5칸으로

또는 4칸으로 잡음에 따라 전체 규모를 다르게 기술한 결과이다

(3) 징광루(澄光樓)와 의궤

대조전 동북쪽에는 청기와를 덮은 2층 누각이 보이는데 징광루이다 가장 눈에 띠는 특

징은 지붕이 청기와로 덮여있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 안에 청기와를 덮은 건물이

선정전 외에도 징광루 등이 있었고 경복궁에도 있었다 징광루 역시 1647년(인조25) 인경궁

의 자재를 가지고 지은 것인데 청기와 역시 이 때 마련되었다 1917년 화재 때 징광루도 소

실되었으므로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의 징광루는 남아 있지 않다 1920년에 징광루가 있던

곳에는 경복궁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서 단층의 경훈각(景薰閣)으로 했다

(4) 희정당과 의궤

희정당은 1917년 소실된 뒤 다시 지어졌기 때문에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의 희정당은

남아 있지 않다 이후 1917년 대조전과 함께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 강녕전을 철거

해서 그 재목으로 다시 짓고 주변 행각도 크게 개조했다 특히 전면에 자동차로 입구까지

들어오도록 현관을 달아내어 본래의 건물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186) 이 12폭 병풍은 병풍 가운데 8각형의 공백이 있어서 이것이 일종의 불발기 창과 같이 실내에 설치되어 있

었덧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지만 병풍으로 제작된 점이나 크기 채색의 지나치게 화려한 점등을 고려할 때 특별

한 행사가 있을 때에 한정해서 설치하였고 평상시에는 설치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궁궐의 장

식그림』 국립고궁박물관 2007)

희정당은 침전인 대조전 앞에 남향해서 자리 잡았다 오른쪽으로는 행각을 통해서 선정

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당초의 건물 용도가 왕이 경전을 학습하는 학문소였으므로 아침에

일어나 침전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학문에 나아간다는 것을 상징하는 위치에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연산군 때 건물 이름을 희정당으로 고치면서 단순한 학문소 기능을 넘어서 정치의

장소로 바뀌었다고 짐작된다 편전이 격식을 차리고 정사를 논하는 곳이라고 한다면 학문소

는 편안한 자세로 격식에 매이지 않고 국정을 다룰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으다

유사한 사례는 경희궁의 흥정당에서 볼 수 있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지면서 처음부터 본래 편전에 해당하는 자정전이 혼전 등의 의

례공간으로 쓰고 흥정당이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희정당은 건물 형태가 상참과 같은

편전의 공식적인 의례를 거행하는데 부적한 것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상참 등은 선정전에

서 거행하고 일상적인 어전회의를 이곳에서 치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선정전이 정조의

혼전으로 활용되면서 희정당이 주로 편전의 용도를 대신하게 되었다 순종황제가 창덕궁으

로 이어한 이후에는 거의 모든 사신 접대는 이곳에서 치러졌다 이때는 건물 형태 자체가

완전히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lt동궐도gt에는 1917년 소실되기 이전의 희정당의 모습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단층 팔작지붕인데 특이한 부분은 건물 아래가 높은 돌기둥으로 받쳐

지고 바닥에서 건물로 오르기 위해서는 나무로 만든 네 개의 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안되도

록 한 모습이다 보통 궁궐의 건물은 기단을 두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일반적인데 희정

당은 그와 달리 지면에 돌로 맞은 바닥을 두고 그 위에 돌기둥을 여럿 세워서 바닥을 높이

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 것이다 전면의 돌기둥 안쪽은 비어 있는데 서쪽 끝에는 붉은 색으

로 필한 작은 네모난 부분이 일부 보인다 이 작은 네모난 부분은 온돌 바닥에 불을 넣기

위한 아궁이로 판단된다 또 동쪽 측면에는 반 칸 정도 벽을 달아내어 툇간을 만들고 이 툇

간으로 오르기 위한 별도의 나무계단도 그려 넣었다

19세기 중반 경희궁의 모습을 그린 서궐도안에 묘사된 흥정당 역시 희정당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인다 즉 흥정당 역시 바닥에 높은 돌기둥이 연속해 있고 높은 계단을 통해 실내

바닥에 오르도록 한 모습이다 창경궁의 숭문당은 그림이 아니고 건물 자체로 유사한 상황

을 보여준다 숭문당 역시 왕의 경연 장소로 지어진 창경궁의 학문소 건물이다 이 건물의

후면은 역시 돌기둥이 연속해 있고 그 위에 목조건물이 올라서 있다 또 돌기둥 안쪽은 툇

간 폭 만큼 비어있고 그 안쪽에 온돌에 불을 넣을 수 있는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다 희정당

의 그림과 동일한 구조인 셈이다 결국 창경궁 숭문당 경희궁 흥정당 그리고 창덕궁 희정

당 세 건물은 모두 동일한 형식의 건축이며 세 건물은 왕의 학문소의 기능과 연관을 가진

건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희정당은 19세기부터는 선정전을 대신해서 왕이 대신들과 국사를 논하는 편전으로 쓰였

다 이 때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희정당의 어느 부분에 왕이 임하고 대신들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궁금한 사항이다 과거 선정전이 편전일 때는 왕의 위치는 건물 북쪽 중앙이 놓

이고 그 앞 좌우로 나누어 대신들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희정당에서는 남쪽은

5칸의 마루가 있고 안쪽은 중앙 3칸에 넓은 온돌방이 있고 좌우에 작은 방이 2칸씩 있는 모

습이다 바닥이 마루와 온돌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왕이나 신하들이 모두 방석을 놓고 앉아

서 어전회의를 했다고 짐작은 되지만 과연 어느 위치에 누가 어떻게 자리를 잡았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희정당 건물 밖 동남쪽에는 네모난 연못이 있다 본래는 왕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나

서 머리를 식힐 수 있도록 꾸민 못으로 짐작되는데 후에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이 연못이 어

떤 기능을 가지게 되었을지는 짐작이 잘 가지 않는다

1917년 11월 대조전과 희정당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때는 순종황제가 창덕궁에 거처

하고 있을 때였으며 대조전은 순종이 거처하던 침전이고 희정당은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견

하는 집무실이었다 서둘러 건물 복구가 시작되었는데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러 그 재목으로

대조전을 짓고 강녕전을 헐어 희정당을 짓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공사는 3년이 걸려 1920년

에 완성되었다 새로 지어진 희정당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어졌다 정면 11칸 측

면 5칸으로 규모를 크게 키웠으며 건물 좌우로 행각이 뻗어있고 다시 남쪽으로 출입문을 갖

춘 남행각이 들어섰다 또한 출입문에는 지붕이 돌출되고 기둥 2개가 돌출한 지붕을 받치는

현관부분을 달아내었다

이렇게 해서 자동차로 현관 앞까지 진입하여 그대로 행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

다 이 과정에서 연못을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건물 동쪽 경사지에는 난방을 위해서 보일러

시설을 설치했다 또한 정전 및 행각의 창문도 서양식의 창문으로 교체되었다 대청 좌우 상

부벽면에는 대형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희정당에는 청나라에 유학하여 그림공부를 한 당대

의 이름난 화가 김규진이 「해금강총석정절경」과 「내금강만물초승경」을 그렸다 또 실내

에는 서양에서 수입해 온 탁자와 의자 등을 비치하였다 이 그림이나 가구들은 지금도 실내

에 잘 남아있다

아 『인정전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철종 8년 1857)

1) 공사 내용 분석

1857년(哲宗 8)에 昌德宮 正殿인 仁政殿을 重修한 기록이다 目錄은 座目middot時日middot圖說middot承傳

(附 奏啓 上樑文 儀註)middot移文middot來關middot甘結middot財用(附 式例)middot實入middot賞典middot工匠middot儀軌 순이다 座目에는

監董堂上 金炳冀 郎廳 趙冕鎬 別看役 姜彛五 등 5인 監董牌將 趙命燁 등 4인 看役牌將 金

再興 등 3인 畵師牌將 爐冶所牌將 등의 성명이 적혀 있다 圖說에 仁政殿 唐家 五峯屛圖

등과 轆轤圖가 있고 소요 材木들의 수효 및 尺量이 나와 있다

1854년 5월 25일 영의정 김좌근이 인정전의 중수를 발의하여 9월 23일 치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 25일 정역했다가 1857년 5월 26일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윤5월 6일에

야 중수를 마쳤다 중수도감이나 청을 별도로 두지 않고 호조에서 직접 영건을 맡았으며 의

궤 또한 호조에서 바로 1857년 윤5월 20일에 착수 12월 25일에 완성하였다

목록은 좌목(座目)middot시일(時日)middot도설(圖說)middot승전(承傳 附 奏啓 上樑文 儀註)middot이문(移文)내관(middot

來關)middot감결(甘結)middot재용(財用 附 式例)middot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 순이다

도설에는 인정전의 정면도와 부속물인 당가(唐家)middot오봉병(五峯屛)middot곡병(曲屛)middot당가천장(唐家

天掌)middot염우(廉隅)middot적첩(赤貼)middot허주(虛柱)middot유음(流音)middot초엽(草葉)middot연환청판(連環廳板)middot장단청권

(壯緞廳權)과 녹로(轆轤)의 도설이 있다 인정전의 척량(殿宇尺量)을 상하층(上下層) 각

층별 공포(工踏) 상하층조장(上下層條粧) 당가규모(唐家尺量) 좌탑척량(座榻尺量) 곡병척

량(曲屛尺量)으로 구분하였는데 소요 부재의 명칭과 크기별 수량 길이 단면크기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인정전 관련 두 의궤의 목록의 차이는 『인정전중수의궤』에는 lt품목gt항목이 빠져 있

고 lt재용gt 항목이 추가되어 있다 lt재용gt은 예산과 수급처를 적은 항목으로 앞선 『인정

전영건도감의궤』에서는 lt실입gt부분에 기록된 내용이다

2) 의궤와 인정전 건축의 비교

인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남향해서 건물을 세웠다 월대는 표면을 다듬은 화강석으로

마무리하고 했다 상부에 돌난간을 돌리고 난간 기둥에 짐승조각을 새긴 경복궁 근정전 기

단에 비하면 높이도 낮고 장식도 적지만 궁궐 정전의 간결하면서 위엄 있는 단의 모습을 잘

갖추었다 남쪽 중앙 하월대와 상월대 계단에는 왕의 가마가 지나가는 봉황을 조각한 답도

(踏道)를 두었다 하월대 전면 모서리에는 화재시를 대비해 물을 담아두는 청동 드므가 놓여

있다 본래 상월대에는 의식을 거행할 때 향을 피우는 향로가 놓여 져야 하지만 지금은 남

아있지 않다

상월대 북쪽으로 낮은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정전이 올라서 있다 정전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 정전과 마찬가지로 정면5칸 측면 4칸 규모이다 다만 기둥 간격에서는 근정전 보

다 조금 작아서 전체적으로는 근정전보다 면적이 약간 작다 기둥 위에는 전형적인 19세기

초의 내4출목 외3출목 다포식 공포를 짰다 지붕은 근정전과 같이 중층으로 꾸몄는데 창경

궁이나 경희궁 정전이 단층인 것과 구별된다 실내는 가운데 후면에 어좌를 꾸몄다 어좌는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당가(唐家)로 표기했는데 3면에 계단을 두고 당가 위에는 일월오악을

그린 병풍을 놓고 그 앞에 낮은 병픙인 곡병(曲屛)을 놓고 왕이 앉는 어좌를 두었다 내부는

상하층이 열린 구조이고 천장은 상층 지붕에만 설치되었기 때문에 높은 실내를 이루었다

천장에는 구름 사이로 두 마리 봉황이 나는 모습을 채색으로 그려 넣었다 출입문은 전면

어칸과 후면 어칸에만 있고 나머지는 하루에 머름을 댄 빗살로 된 분합문이 달렸다 창문

역시 황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에 회를 높

게 바른 양성을 하여 지붕의 격식을 높였다 조선후기 궁궐 정전의 본보기이며 건축적으로

도 가장 격식을 갖춘 중층 다포식의 전형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부분적으로 서양식 근대

문물이 가미된 건축물이다

『인정전중수의궤』는 1857년(철종8) 인정전을 부분적으로 수리한 내용이다 의궤의 인

정전 척량을 비교하여 보면 철종 8년의 수리공사는 1805년에 지은 인정전의 규모와 구성을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부재는 기존의 부재를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건된 지 약 50년 후에 수리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로서 영건시의 의궤(『인정전영건

도감의궤』)와 중수의궤 그리고 이때 보수한 건물이 현존하는 귀중한 사례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순조 5년 『인정전영건도감의궤』의 내용과 서술순서와 내용이 거의 일치하지만 일

부 부재의 크기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인정전 고주 중에서 귀고주 4개의 굵기를

보면 순조 3년 중건시보다 2치 더 큰 것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도리 창방 대보 등 기타

부재는 1805년에 지은 인정전과 같은 규모로 되어 있다

이때의 수리는 일부부재를 교체하고 단청을 손보는 등 건물의 형식은 변화가 없었던 것

으로 보인다 이후 인정전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1908년에 내부바닥과 창호를 일부

서양식으로 고치는 변화가 있었으나 상부공포 및 가구 건물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

었다

5 창덕궁 인정전 단청의 특성

가 인정전의 단청

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왕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lt사진1gt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지었지만 임진왜

란 때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에 복구되었다 이후 순조 3년(1803)

다시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중건하였는데 철종 7년(1856)에 크게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로 화강석 박석을 깐 2중 월

대 위에 세워져 있다

건물 내부는 아래위로 탁 트였는데 후면 가운데 고주 사이 뒤쪽으로 어좌를 마련하고 곡

병과 日月五嶽屛을 갖춘 용상을 설치하였다 천정은 가운데를 한 단 높여 감실 천정을 마련

하고 봉황 두 마리를 그려 넣었다 이 건물은 경복궁과 덕수궁 등 3대 궁궐의 정전과 양식

을 같이 하고 있으나 명정전과는 다르고 근정전과는 시기 수법상 앞서고 있어 가장 표본이

되는 것이다

단청은 건물 외부는 근래들어 수차례 부분적으로 새로 칠한 것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과거

의 상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외부단청이 겉보기로는 강한 색조에

생경한 느낌이 드는 반면 내부단청은 장중하지만 낡은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건물 내부의

어좌와 용상 일월오악병 등은 근래 새로 제작한 것이며 기둥의 석간주 가칠도 최근에 새로

칠한 것이다

lt사진17gt 창덕궁 인정전의 내부 모습

나 인정전 단청과 의궤

의궤란 국가나 왕실에서 주도한 건축공사의 시말을 정확히 기록하여 후세에 남길 목적으

로 편찬된 문헌을 말한다 창덕궁에 대한 의궤는 모두 9건으로 현존하는 궁궐 영건 관련 의

궤 가운데 반이 넘는다 이 가운데 창덕궁내 현존하는 건물과 관련된 영건의궤 중에서 단청

공사와 관련된 의궤는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 순조 5) 『인정전

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1857 철종 8)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

(1834) 『경복궁 창덕궁선원전일실증건도감의궤』(1900) 등 4종이 있다

의궤의 내용 중에서 단청과 관련된 것은 대체로 공사에 사용된 안료의 명칭과 사용량 정

도로 정보가 국한되어 있다 기록을 통해 당시에 사용한 안료별 명칭과 색상 품질특성 입

수경위와 원산지 등을 알 수 있지만 채색방법 작업 진행상황 등에 대해서는 상세히 파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당시 단청공사의 전모나 현존하는 건물의 단청안료를 이해하

는데 가장 확실한 길잡이가 된다 특히 인정전의 경우 단청공사를 38일 만에 완성했다거나

뇌록 주토 정분 등은 사용량과 공납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인정전과 직결된 『인정전영건도감의궤』와 『인정전중수의궤』의 단청관련

기록을 조사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다

다 연구조사 방법

우선 2008년 실시한 인정전의 내부 단청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 결과를 재정리 하였다 당

시 조사 항목은 색상별 색도 측정 현미경 촬영 안료 성분분석 등이었다 내부 단청이 주

대상이었지만 건물이 중층이라서 실내의 높이가 너무 높아 다양한 부분에 대한 조사가 불가

능하였고 그래서 접근이 가능한 부재이면서 단청이 잘 남아있는 퇴량[들보]와 익공 한 부분

을 조사한 것이다lt사진2gt

조사한 자료를 종합하여 사용된 안료의 이름과 채색 특성을 밝혀 낸 다음 그 결과를 2종

의 의궤에 등장하는 안료명과 비교 확인해보았다

lt사진2gt 인정전 들보의 단청조사

라 의궤 기록과 현존 단청안료의 비교 고찰

1) 의궤의 안료 종류와 그 특성

인정전 의궤 2종의 실입질 물목(物目)을 통해서 단청작업에 사용된 재료의 대강을 파악

할 수 있다 특히 색재료는 20여 종의 다양한 안료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lt표1gt

현대 단청공사 보다 더 다양한 종류의 안료가 쓰였던 것이다 현재 이들 안료의 정체를 모

두 명확하게 확인해 내기는 불가능하지만 기록된 명칭을 통해 그 대강을 색상별로 묶어보면

적색 황색 녹색 청색 그리고 흑백으로 파악할 수 있고 같은 색상이라도 몇 가지 종류의

안료를 혼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용된 안료의 명칭을 통해 안료의 산지와 품질 특성

색상의 채도 차이 등을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도 있었고 광물성 안료만이 아니라 식물성

염료로 생각되는 편연지와 석자황도 함께 사용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안료별로 사용된 양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어떤 안료가 어떤 목적에 활용되었

는지 안료별 계량 단위차이를 통해 재료의 상태도 짐작이 가능하다 가칠 즉 바탕칠에 사용

된 뇌록과 석간주의 양이 가장 많았고 흰색인 정분과 진분도 다량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들

안료는 斗(말)로 계량하였고 뇌록 가칠에 280斗 석간주 가칠에는 황주주토 113斗를 비롯해

편연지와 당주홍 석간주가 함께 사용되었다 특히 흰색 안료로써 정분이 300斗 다량 사용되

었는데 용도는 흰색 재료 뿐만 아니라 가칠안료와 혼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부분의 안료는 무게로 계량하였는데 분말이라는 재료에 적합한 단위가 된다 무게를 근

(斤) 량(兩) 전(錢) 분(分)까지 정확히 기록하였다 이밖에 편연지는 장(張)으로 계량해서

낮장[片]으로 계산이 가능한 안료로 파악되었고 금박은 묶음[束]으로 액체인 송유는 사발

(沙鉢) 단위로 기록했다

50여년의 시기 차이가 있는 두 종의 의궤기록을 비교해 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

로 안료의 종류와 가짓수 그리고 사용한 양까지 비슷한 점을 알 수 있다 1856년 인정전 중

수시 단청공사는 완전히 새로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50여 년 후 단청재료에서 가장 큰 변

화가 있었던 점이 황주주토로 가칠한 부분이 석간주로 대체된 것이다 당시 황주주토의 수

급이 어렵게 되자 석간주로 대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주홍과 왜주홍 당황단 등은 주홍 황단이라는 안료 이름에 접두사를 붙여서 수입처 또

는 원산지를 나타낸 예도 있다 당은 중국을 왜는 일본을 포함한 동남아산으로 보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磻)과 상(常)의 의미는 불분명하다 접두어로 석(石)을 붙인 점은

재료가 광물이라는 뜻이겠지만 가공하지 않은 원석이라는 의미도 내포된 것 같다 예를 들

어 웅황(雄黃 orpiment)은 석황으로도 불리는 데 화산지대에서 많이 산출되는 것으로 알려

져 있다 화학식은 As2S3 황화비소이다 반면 자황(雌黃 gamboge)은 식물성 천연수지로 알

려져 있다 동황(同黃)으로도 불린다 천연광물인 웅황에 석자를 붙인 것은 원석이라는 표현

일 수 있으며 자황에 석자를 붙인 이유는 불명이다

한편 양(洋) 자가 붙은 안료는 대체로 서양 수입품이라는 의미가 있다 여하튼 1857년 인

정전중수의궤에 등장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19세기 중반까지는 서양에서 제조

한 인공안료는 아직 수입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의궤문헌

색상

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 仁政殿重修儀軌(1857)비고(안료광물명)

안료명 사용량 안료명 사용량

적색계열

石磵朱 28斤 石澗朱 602斤 산화철 Iron Oxide

黃州朱土 113斗 산화철 Iron Oxide

片臙脂 1211張半 片臙脂 1467片

唐朱紅 208斤 4兩 唐朱紅 148斤 朱砂 cinnabar()

磻朱紅 264斤 鉛丹 Red Lead()

倭朱紅 4斤

황색계열

唐黃丹 230斤 3兩 3錢 唐黃丹 231斤 14兩 黃丹

常黃丹 90斤 11兩 常黃丹 2斤

石雄黃 2斤 1兩 5錢 雄黃(石黃) As2S3

石紫黃 12斤 以上 石紫黃 17斤 Gamboge()

同黃 47斤 1兩 5分 同黃 36斤 Gamboge()

녹색계열

磊碌 280斗 磊碌 200斗 磊碌石 Ceradonite

石碌 23斤 5兩 石碌 15斤 孔雀石 Malachite

荷葉 268근 8兩 5錢 荷葉 256斤 짙은 녹색

三碌 338斤 三碌 396斤 8兩 연한 녹색

청색계열

靑花 115斤

二靑 44斤 12兩 7錢 4分 二靑 43斤

三靑 66斤 3兩 三靑 43斤

흰색계열丁粉 300斗 丁粉

154斗 9升 2合

5勺정분

(Calcite CaCO3)

眞粉 276斤 4兩 眞粉 229斤 연백(Lead White) 2PbCO3middotPb(OH)2

흑색[墨] 松煙 먹()

금박 金箔 46束 4貼 7張 金箔 59束

금속 白銅 13兩

전색제 阿膠 583斤 阿膠 700斤

기 타 松油 257沙鉢

lt표27gt 인정전 儀軌에 등장하는 단청물목의 안료명과 사용량

2) 현존하는 인정전 단청에서 확인된 안료와 전색제

의궤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인정전의 단청에는 20여 종의 안료가 사용되었다 현존하는 인

정전 단청을 조사한 결과를 이용해 의궤에 등장한 안료의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lt표2gt 그

결과 적색계열의 안료에서는 석간주와 황토를 황색계열에서는 황단 웅황 등 기록에 등장한

안료 대신 새롭게 황토를 확인했으며 녹색계열에서는 뇌록과 석록을 찾을 수 있었다

청색계열은 그 존재를 밝혀내지 못했다 다른 안료에 비해 사용량도 적어 모로단청 이외

의 부분이나 기물 중요 건물부재 등의 채색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흰색의 경

우 다량의 정분과 함께 지당(地堂 TiO2) 백토를 확인했지만 진분은 찾을 수 없었다 금박

위치 색상명 근사색

색차(lab)

실체현미경박편현미경

(x200)화학성분 안료화학조성

L a b

기둥 석간주 3479 1801 1358

C 2640

Si 2216

Fe 1487

O 1288

Ca Na Mg

Al Cl K

정분 CaCO3

석간주황토Fe2O3

백토

Al2O3middotSiO2middot4H2O

문턱 뇌록 4229 -141 1087

Ca 3756

Ti 2173

O 1306

C 865

Fe Mg Al

Si Cl

정분 CaCO3

지당 TiO2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들보 백색 6415 225 1669

C 3387

Si 2116

Fe 1356

K 1131

O 1032

Ca Ti Mg

Al S Cl

정분 CaCO3

황토 Fe2O3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지당 TiO2

문틀

(우측)황색 5078 741 2749

Fe 9634

O 270

Ca K

황토 Fe2O3

정분 CaCO3

익공 하엽 4468 -863 879

Cu 7980

Cl 1603

O 225

Ca S

석록CuCO3Cu(OH)2

정분 CaCO3

lt표2gt 인정전 단청의 색상별 과학적 분석표

과 백동 또한 확인이 불가능했다 금박은 단청의 선에 특별하게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

의궤에 기록된 안료 중에서 현재 확인된 것은 석간주와 주토 뇌록 석록 정분 등 몇 가

지 종류밖에 없다 그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안료는 사실 우리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

는 안료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아직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조사한 지점이 들보의 모

로단청 한 곳이라는 것도 한계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앞으로 고대 안료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과 함께 조사 대상을 넓혀서 진행한다면 대부분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믿어진다

이들 안료는 전통 전색제인 아교(阿膠)와 섞어 채색을 하였으며 단청 후 표면에는 기름을

발라 내구성을 높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정전의 경우 송유[松精油 terpentine]를 이러

한 용도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건물의 경우 관련 의궤를 통해 확인한 결과 명유

(明油)와 법유(法油)가 활용되었다 이들 유기물질의 사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습득한 시

료를 퓨리에변환 적외선분광분석기(FT-IR)로 분석하였지만 전색제로 아교가 사용된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들보 육색 5174 1326 1006

Si 2175

Fe 1847

C 1566

Ca 1397

O 1230

Mg Al K

정분 CaCO3

석간주Fe2O3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익공 하엽 4334 -830 1322

Cu 2939

Si 2938

Fe 1241

O 979

K 823

C Mg Al

석록CuCO3Cu(OH)2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안병찬 등 『궁궐채색기술 특성규명 연구 보고서』국립문화재연구소(2008) 81쪽의 ltTable 23gt을

보완함

3) 단청 공사와 재료 수급 내용

인정전 영건시 상하층 건물의 단청 공사가 1804년 11월 6일에 시작되어 12월 13일에 끝났

음을 알 수 있다 공사기간이 38일로 상당히 짧았고 특히 늦가을에서 초겨울사이에 진행되

어 채색작업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1804년 10월 서울의 화사

(畵師)만으로 감당하기에는 인정전 단청공사의 규모가 너무 커 강원도 경기도 총융청 등에

서 화사를 구해 보낼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청공사에 동원된 인원이 총 몇 명인

지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각종 재료의 수급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황주주토는 황해감영에 상납을 지시하였고 뇌록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상감영에 상납을

명했다 단청용 붓을 만드는데 쓸 집돼지털 200근을 평안도 황해도 개성부 등에 나누어 정

했고 아교 제작에 필요한 쇠가죽 70장을 수원부 개성부 관주부에 나누어 정한 기록도 보

인다 다량의 주토와 뇌록안료는 물론 단청 채색에 필요한 다량의 붓과 아교도 중요 물목이

었는데 이들은 완제품 보다는 원료상태를 공출해 작업 현장에서 직접 제조 가공하여 활

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창덕궁영건도감의궤』에는 1833년 11월의 내관으로 황해도에 분정된 法油 丁粉

正鐵 强鐵 石灰 등을 고을별로 책임을 적은 기록도 있다 이 가운데 정분 300말을 장연에

배정한 내용 강원도에 분정된 法油 松煙 生葛 木賊 楡皮 등의 고을별 할당량을 적고 이

가운데 송연은 金城 淮陽 金化 平康 寧越 平昌 旌善 등 고을에 분정하였으며 느릅나무

껍질인 유피는 橫城 洪川 麟蹄 狼川 寧越 平昌 旌善 등지에 분정하였다는 내용 그리고

집돼지털 50근을 평안도내 여러 고을에 분정한 내용도 담고 있다

마 인정전 단청의 문양 특성

인정전 단청은 부재별로 다양한 문양이 활용되고 있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모로단청을 들

목과 창방 평방 등의 머리초를 대표 예로 들어 간략히 기술한다

대체로 연화병머리초를 기본으로 삼고 원연화병머리초를 변형으로 활용했다 즉 창방을

연화병머리초로 하고 그 위의 평방은 원연화병머리초로 변화를 주었다 휘도 부재별로 차이

를 두었는데 대들보의 휘는 복잡하고 화려한 바자휘로lt사진3gt 창방과 평방은 그보다 단순

한 인휘로 통일해 표현했다 휘의 색은 적 청 황 석간주를 2빛으로 전개하다가 뇌록바탕에

양록실 황실 먹실로 마감해 밝고 장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러한 연화병머리초 문양은 창덕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의 단청에 빠짐없이 활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해 내전을 겸한 침전으로 대조전(보물 제

816호) 편전(便殿)인 희정당은 물론 궁내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던 건물인 구선원전(보

물 제817호)과 신선원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lt사진4 5gt 즉 창덕궁 인정전의 연화병머리

초는 왕실을 상징하는 단청문양인 것이다

lt사진3gt 인정전 대들보의 연화병머리초 바자휘 단청

lt사진4gt 대조전 창방의 연화병머리초직휘 단청

lt사진5gt 희정당 창방의 연화병머리초직휘 단청(현대)

이상과 같이 창덕궁의 단청 특성을 인정전 단청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인정전은 창덕

궁의 정전으로 가장 중요한 건물이면서 단청을 포함한 공사 내역을 기록한 의궤도 2종이나

되어 과거 단청을 연구하는 데 문헌기록도 잘 남아있다 또한 인정전의 내부 단청은 현존하

는 궁궐단청 중 가장 오래된 것 가운데 하나로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인정전을 중심으로 창덕궁 단청을 논하고자 한 이유는

가 두 종의 인정전 관련 의궤를 통해 과거 단청공사 기록을 잘 파악할 수 있다

나 인정전 내부 단청은 현존하는 궁궐 단청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 일부분 수리 개칠이 되었지만 과거 단청이 잘 남아 있다

라 인정전 단청의 안료를 과학적으로 조사한 자료가 있어서 비교가 가능하다는 점

등이다

의궤의 내용과 현존하는 단청의 안료와 공사내역을 비교한 결과

가 의궤의 기록에 따르면 20종이 넘는 다양한 안료가 사용된 반면 현존 단청에서는 겨

우 5종의 안료가 확인되었다 확인되지 않은 안료는 당주홍 왜주홍 당황단 석자황 등 그

정체가 확실치 않은 안료들이다 특히 청색은 청화를 비롯해 이청과 삼청인데 이들 청색은

육안으로도 확인이 불가능했다 앞으로 이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나 인정전의 단청 공사는 1804년 11월 6일에 시작되어 12월 13일에 끝나 공사기간이 38

일로 상당히 짧았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진행되어 작업에 상당

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 단청안료 중 무엇보다 중요하고 다량 소요되는 가칠안료로서 황주주토는 황해감영에

서 뇌록은 경상감영에서 공납을 받았으며 붓의 재료인 되지털과 아교 제작에 필요한 쇠가

죽 등을 원료상태로 지방의 도와 부에서 나누어 공출한 기록도 확인하였다

라 50여년의 사이를 두고 벌인 두차례의 인정전 단청공사에서 가장 큰 색재료의 변화는

붉은색에서 일어났는데 최초에는 황주주토를 사용했던 가칠이 보수공사 시 석간주가칠로 교

체된 점이다

마 인정전의 대표적인 모로단청 문양은 연화병머리초인데 이 문양은 대조전과 희정당은

물론 선원전 등 창덕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에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로 요약된다

단청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의외로 미지의 상태로 남아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연구 관점이 전통 문양에만 편중되어 있고 재료와 기술연구에는 근거가 부족하

여 체계적이지 못한 경향이 있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있는 단청자료를 과학적

으로 조사하면서 고문헌 기록과 비교 검토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시급히 보완해

야 할 점은 현존하는 단청자료를 함부로 벗겨내고 재시공하지 않는 일이다

lt참고문헌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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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강근 『한국의 궁궐』 대원사 1991

7 안병찬이강근 외 『궁궐채색기술 특성규명 연구 보고서』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8 안병찬 「진파리 제1호분과 제4호분 벽화안료의 특성 비교조사 보고」『남북공동 고구려

벽화고분 보존연구보고서』국립문화재연구소middot남북역사학자협의회 2007

9 안병찬홍종욱 「고구려 고분벽화의 안료분석」『고구려 벽화고분 보존실태 조사 보고

서』 남북역사학자협의회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10 조남철 외 「경복궁 근정전 단청안료의 성분분석」 「보존과학연구 22집」 국립문화재

연구소 2001

11 김동욱 「장기면 뇌성산의 뇌록 탐사기-단청의 본래 바탕색을 찾아서」『건축역사연

구』 제4권 2호 (사)한국건축역사학회 1995

12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丹靑에 關한 硏究』 1975 12

〔사료〕

『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仁政殿重修儀軌(1857)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6 창덕궁 궁역 궁성 궁성문 궁장문 문로

가 궁역

1) 조선 전기

『세조실록』 27권 8년(1462) 1월 30일(을축)

처음에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의 후원(後苑)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쪽 원장(垣墻)을 넓혀서 쌓으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공 제조(繕工提調)에게 명하여 그 기지(基址)를 살펴서 정하게 하니 주위의 둘레가 모두 4

천 2백 척(尺)이고 그 안에 인가(人家)가 모두 73채였다 명하여 2월까지 모두 철거(撤去)하게 하고 그 집

주인에게 3년 동안 복호(復戶)하여 주고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그들이 원(願)하는 바에 따라 빈 땅을 절

급(折給)하게 하였다

『세조실록』30권 9년(1463) 2월 7일(병인)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창덕궁(昌德宮)에 거둥하여 궁장(宮墻)을 보고 기지(基址)를 넓게 쌓도록 하였

다 이 앞서 궁장을 넓히고자 하여 궁(宮) 동북동(東北洞)의 인가(人家)를 철거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또 북

쪽 고개 밑의 인가 58구(區)를 철거하니 주위(周圍)가 무릇 4천 척(尺)이었다 행 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

院事) 김개(金漑)middot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이석형(李石亨)middot한성부 윤(漢城府尹) 권반(權攀)middot공조 참판 이연손

(李延孫)middot인순부 윤(仁順府尹) 황효원(黃孝源)을 제조(提調)로 삼고 군기 판사(軍器判事) 황신(黃愼)middot사복 판

사(司僕判事) 박서창(朴徐昌)middot군기 부정(軍器副正) 한치의(韓致義)middot공조 정랑(工曹正郞) 성율(成慄)middot한성 소윤

(漢城少尹) 신승선(愼承善)middot선공 주부(繕工注簿) 강치(姜致)를 낭관(郞官)으로 삼아 도성 방리인(都城坊里人)

을 다 징발하여 통(統)을 나누어 쌓으니 1백 19가(家)로서 1통(統)을 삼고 1통(統)이 쌓은 것이 25척(尺)이

었다 통(統)은 대개 1백 60이고 통(統)마다 모두 직질(職秩)이 높은 인원(人員)으로서 주관하게 하여 오늘

부터 역사를 시작하였는데 전교하기를 ldquo동쪽 고개[東岾]도 또한 이 주산(主山)의 내맥(來脈)이다 성 밖에

있게 되면 마땅하지 못하니 다시 넓히도록 하라rdquo 하니 이에 또 4백 척(尺)을 물리었다

『세조실록』30권 9년(1463) 2월 9일(무진)

좌의정 권남(權擥)이 아뢰기를 ldquo성균관 반수(成均館泮水)는 청컨대 신축(新築)하는 궁장(宮墻) 안에 넣지 말

게 하소서rdquo 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어서(御書)를 보이기를 ldquo뭇사람이 옳지 않다고 하는 일을 내 어

찌 하며 백성을 수고롭게 하여 원망을 취하는 역사를 내 어찌 일으키겠는가 궁성(宮城)의 역사는 부득이함

이 있어서 세상이 예로부터 서로 이어 왔으니 지난해 이어(移御)한 일 같은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선왕(先

王)이 수궁(數宮)을 설치한 소이(所以)이며 제경(諸京)을 설치한 뜻[意]이다 창덕궁(昌德宮)은 동산[苑]이

협애(狹隘)하니 후세의 인주(人主)로 유람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어 반드시 크게 토목(土木)을 일으킨다면

존망(存亡)의 형세를 입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런 연고로 음양(陰陽)을 인하여 장구(長久)한 방술

[術]을 삼아서 잠깐 수고롭더라도 길이 편안케 할 뿐이다 반수(泮水)가 동산[苑]에 들어오는 것은 의논한

바가 아니니 하나의 고(苽)6057) 를 소민(小民)에게서 빼앗는 것도 불가하거든 하물며 선사(先師)에게서

반수(泮水)를 약탈하겠느냐 또 반수(泮水)란 3면(三面)이 물로 둘러싸인 것이지 내[川]가 흐르는 것이 아니

다 고례(古禮)에 lsquo때를 따라 손익(損益)하지 않음이 없다rsquo 하였는데도 구구(區區)하게 외모(外貌)로써 한다

면 보름새 베[緦]를 살피는 것이다 만약에 반수(泮水)를 폐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내가 마땅히 유생(儒

生)으로 하여금 스스로 파게 할 것이다 어찌 나의 적개심(敵愾心) 있는 장졸(將卒)로 하여금 토목에 피로하

게 하겠느냐rdquo 하고 이어서 술자리를 베풀고 권남(權擥)에게 의롱(衣籠) 1사(事) 호피(虎皮)middot표피(豹皮)middot큰

녹비(鹿皮) 각 1장(張)을 여섯 승지(承旨)에게는 큰 녹비(鹿皮) 1장씩을 내려 주었다

『연산군일기』 51권 9년(1503 계해 명 홍치(弘治) 16년) 11월 12일(을해) 4번째기사

병조 판서 강귀손(姜龜孫)과 공조 판서 정미수(鄭眉壽) 등이 돈화문 동쪽에서 단봉문(丹鳳門)까지의 궁장 밑

인가 20여 곳을 적어서 아뢰기를 ldquo법을 범하고 지은 집을 전번 적간(摘奸)할 때 미처 적어 올리지 못하였

으니 철거하게 하소서rdquo 하니 그대로 좇았다

『연산군일기』 51권 9년(1503 계해 명 홍치(弘治) 16년) 11월 13일(병자) 7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타락산(駝駱山) 밑 조영철(趙永哲) 등 27인의 집을 철거하고 요금문(曜金門) 밖의 김명철(金命

哲) 등 49인의 집과 돈화문에서 단봉문(丹鳳門) 밖까지의 박막동(朴莫同) 등 24인의 집도 함께 철거하라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62권 12년(1506 병인 명 정덕(正德) 1년) 6월 22일(경오) 3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창덕궁의 성을 경복궁의 성에 의해 쌓고 돈화문을 다시 짓되 높고 크게 하며 또 하마비(下馬

碑) 모퉁이에 문을 내라rdquo 하였다

2) 조선 후기

『광해군일기』 158권 12년(1620 경신 명 만력(萬曆) 48년) 11월 15일(무자) 3번째기사

전교하였다 ldquo거둥 때 치는 엄고(嚴鼓)가 다 깨지고 몸통도 작고 하여 보기에 너무 볼품이 없다 평상시처럼

종을 빨리 주조하여 돈화문(敦化門) 위에다 매달아두라 그리고 거둥 때 쓰는 엄고도 급히 다시 만들어 쓰도

록 하라 이를 해조로 하여금 각별히 거행하게 하라rdquo

『효종실록』 9권 3년(1652) 10월 28일(병인)

상이 병조에 하교하여 도방군(到防軍) 1백 50인을 내어 궁장(宮墻)의 나무를 베게 하고 또 공조middot한성부에

명하여 내시와 함께 궁장을 순심(巡審)하여 더 쌓고 궁장 밖 여염집의 담이나 지붕이 궁장에 잇닿은 것을

모두 헐게 하였다 이때 변괴가 날마다 나타나서 인심이 어수선하므로 상이 신변을 걱정하여 이 조처가 있

었는데 도하(都下)가 이 때문에 놀랐다

『효종실록』 15권 6년(1655) 11월 23일(계묘)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ldquo수리하는 일에 대해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요금문(耀金門) 안의 지형이 몹시 비좁다 궁장(宮墻)의 안에는 모름지기 내장(內墻)이 있어야

하고 내장의 안에는 모름지기 층루(層樓)를 세워야 하는데 누각이 내장에 들어서고 나면 전연 남는 땅이 없

을 것이니 이것도 또한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두 담장의 사이가 1장(丈) 남짓도 안 되니 순라가 왕래하

자면 어떻게 통행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도랑을 안으로 들이어 따로 궁장을 그 밖에 쌓아야만 순라가 왕

래하는 길이 들어설 수 있고 체모나 형세가 마땅함을 얻을 것이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rdquo 하니 부제학 김

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ldquo궁성(宮城)의 옛 제도를 넓히기는 어려울 듯합니다rdquo 하고 호조 판서 허적(許

積)이 아뢰기를 ldquo순라의 길이 단지 담장 하나를 사이로 두고 있다는 것도 또한 몹시 온당치 못한 일입니

다rdquo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ldquo나의 뜻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경들과 가부를

상의하려는 것이다rdquo하니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ldquo외부 사람의 말소리가 필시 궁안에 들릴 테

니 일이 몹시 난처합니다 그러나 익희의 말도 또한 유념해야 합니다rdquo하고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

뢰기를 ldquo지금 비록 넓히려 한다 하더라도 요금문으로부터 홍문관에 이르기까지 곡장(曲墻)의 제도를 사용한

다면 민가를 철거하는 것이 많은 양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rdquo 하였다 상이 설계도를 가져다가 보았는데

심지원이 아뢰기를 ldquo신이 일찍이 2백 60 70십 칸의 재력(財力)을 헤아려 보았는데 도합 재목이 1만여 조

(條)가 들어 3천 석의 쌀과 4백 동의 포(布)를 써야 하니 공역이 너무 방대해서 일이 몹시 우려할 만합니

다 칸수를 줄여서 비용을 절약하고 민폐를 더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rdquo 하고 익희가 아뢰기를 ldquo대신의 말

을 부디 유념하소서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공역이 어찌 여기에 이르겠는가rdquo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ldquo흠경각(欽敬閣)도 철거할 것입니까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철거하여 그 목재와 기와를 쓰고 총부(摠府)의

목재와 기와는 도로 총부에 주는 것이 좋겠다rdquo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ldquo총부와 옥당을 옮길 장소가 없습

니다rdquo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상의원은 창경궁 안으로 옮기고 옥당과 총부를 상의원 근처에다가 옮겨 짓는

것이 타당할 것같다rdquo 하였다

나 궁성문 궁장문

1) 궁성문

(1) 조선전기의 궁성문

① 돈화문

『태종실록』 23권 12년 5월 22일(을사)

도성(都城) 좌우의 행랑(行廊)이 완성되었다 궐문(闕門)에서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까지 행랑이 4백 72

간이고 진선문(進善門) 남쪽에 누문(樓門) 5간을 세워서 돈화문(敦化門)이라고 이름하였다 의정부에서

창덕궁(昌德宮) 문 밖의 행랑을 각사(各司)에 나누어 주어 조방(朝房)으로 만들 것을 청하고 또 아뢰었다

ldquo금년 가을에 행랑(行廊)을 수리하고 장식하는 일과 창고(倉庫)를 조성(造成)하는 등의 일에 유수(遊手)승도

(僧徒)와 대장(隊長)대부(隊副)로 하여금 역사에 나오게 하소서rdquo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24권 12년(1412 임진 명 영락(永樂) 10년) 9월 15일(정유) 2번째기사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돈화문(敦化門) 누각의 종명(鐘銘)을 짓게 하였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ldquo금상(今上) 13년 겨울 10월 일에 유사(攸司)에 명하여 종(鍾)을 주조하여 궁문(宮門)

에 달게 하시니 대개 고제(古制)를 따름이라 공덕을 새기고 또 군신(郡臣)의 조회하는 기회를 엄하게 하는

까닭이 됩니다 위대하도다 생각하건대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이미 훈덕

(勳德)이 높으심에 인심(人心)이 날로 돌아와 붙었으나 참소[讒]를 얽어대는 말이 비등하여 화란의 조짐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마침 제릉(齊陵) 곁에서 여막을 사시다가 일이 급함을 듣고 곧 오시

어 기미(幾微)에 응해 제재하시고 드디어 훈친(勳親)이 창의(倡義)하여 추대함으로써 대업(大業)을 세우셨습

니다 그 뒤 간신(奸臣)이 다시 난(亂)을 꾸미는 자 있었으나 우리 전하께서 즉시 평정하여 사직(社稷)을 안

전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아버이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시니 덕이 이보다 더 성함이 없고 나라를

열고 사직을 정하시니 공이 이보다 큼이 없으므로 진실로 종(鍾)과 정(鼎)에 명(銘)을 새겨 만세에 보이심이

마땅합니다 즉위하신 이래 하늘을 공경하고 대국을 섬기시어 다시 제명(帝命)을 받으심으로써 조상의 공훈

을 빛나게 하시고 성학(聖學)이 계속하여 밝음에 지극하여서 다스림이 융성함에 이르렀습니다 신종(愼終)과

보본(報本)하는 정성과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기르시는 어지심에 이르러서는 상경(常經)을 세우고 강기(綱

紀)를 펴신 넓은 규모와 큰 책략이 모두 다 백왕(百王) 위에서 높이 나왔습니다 이제 또 특명으로 종을 달

게 하심으로써 새벽과 밤의 한계를 엄히 하시니 자강불식(自彊不息)하고 서정(庶政)에 부지런히 힘쓰심으로

써 만세의 태평(太平)에 기초를 잡으신 까닭이 지극하고 유택(流澤)이 길고 해를 지남이 오래이기에 마땅히

이 종(鍾)과 같이 한없이 내려갈 것은 틀림없습니다 아 성하도다 또 그 꾀를 내고 힘을 바쳐 공훈의 맹세

에 참가한 사람들도 모두 뒤에다 새겨 이를 불후(不朽)에 전함이 옳겠기에 신(臣) 변계량(卞季良)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명을 지웁니다rdquo

명(銘)은 이러하였다

ldquo빛나도다 성조(聖祖)시여 동토(東土)에 강생하여 하늘의 경명(景命)을 받아 처음으로 큰 복을 열으셨도

다 예전 고려 말년에 정사가 흩어지고 백성이 유리(流離)하매 하늘이 우리님의 덕을 돌보아 인심(人心)이

돌아왔으나 이때에 참소하는 사특한 무리가 그 뭇사람의 마음을 좀먹어 우리를 모략함이 너무 급하매 화란

이 아침저녁으로 임박하였도다 효도롭다 성자(聖子)여 묘막에서 오시어 신기(神機)를 결정하니 진실로 어

려움이 형통하여 해가 솟아 오르듯 넓게 통하며 크게 빛났도다 이어서 얼아(孽芽)가 돋아 틈을 타서 위태함

에 다달았으나 하늘이 태조에게 후(厚)하여 그 후손을 창성하게 하시고 우리님에 이르러 저 여러 악당을 쓰

러뜨리니 여러 어진이가 꾀를 합하고 좌우에서 도우니 인륜이 크게 펴지고 종사(宗社)가 길고 오래리라

다시 높은 공을 세움은 실로 우리님이시나 공이 높되 차지 않고 덕이 성하되 차지 않으니 천감(天鑑)이 매

우 밝아 보우(保佑)를 이에 아뢰었도다 제명(帝命)이 거듭 이르니 용위(龍位)를 받음이 이대로다 금보(金

寶)는 빛나고 크기가 말[斗] 같도다 천총(天寵)이 잦으심은 전고에 으뜸이라 내 서울로 돌아와서 조무(祖

武)를 잘 잇고 조심조심 효성하여 끝까지 어김 없이 기강을 세우시니 모든 법도 밝아졌도다 신야(晨夜)를

엄히 하여 이 종을 매달으니 백사(百司)가 직에 힘써 감히 어김이 없고 면면(綿綿)한 종묘middot사직 천지같이

길고도 오래리라 내 절하고 명을 지어 무강(無彊)에 보이노라rdquo 호조 판서 한상경(韓尙敬)에게 명하여 이를

쓰게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ldquo공신으로 맹세를 위반한 자는 청컨대 그 이름을 삭제하게 하소서rdquo 하

니 임금이 ldquo역대(歷代) 공신의 선악(善惡)은 모두 전하니 비록 삭제하지 않더라도 가하다rdquo 하였다 정부에

서 맹약을 위반한 자의 명단을 모두 써서 다시 청하니 임금이 ldquo정도전(鄭道傳)middot장지화(張志和)middot심효생(沈孝

生)middot이근(李懃)middot신극례(辛克禮) 같은 자는 마땅히 모두 기록하게 하라rdquo 하였다

정부에서 또 ldquo종정(鍾鼎)에다 이름을 새기는 것은 만세(萬世)에 밝게 보이심이니 충성과 간사함이 서로

섞여서는 특히 불가한데 그 중에서도 신극례는 녹권(錄券)을 거두지 않았으니 혹시 아울러 기록함이 옳겠

습니다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25권 13년(1413 계사 명 영락(永樂) 11년) 1월 27일(정미) 2번째기사

큰 종[大鐘]을 주조하여 완성하였다 애초에 제도(諸道)의 주철(鑄鐵) 1만 5천 근(斤)을 거두어 주조하게 하

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자청(朴子靑)이 대장(隊長) 1천명으로 경성에 실어 들여오니 상호군 현귀명(玄貴

命)에게 명하여 내온(內醞)을 내려 주어 위로하고는 이를 돈화문(敦化門)에 매달았다

(2) 조선후기의 궁성문

『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지

남문은 돈화문 단봉문 북문은 광지문 서북문은 요금문 동문은 건양문 서문은 경추문 금호문이고 궁내에

어구교가 있다

『한경지략』

창덕궁 칠문은 광해군 원년 중건

돈화문 큰 북(인경 파루) 사헌부 관리만 출입

단봉문 돈화문 남우

건양문 동문-창경궁 통행

금호문 서문 현판(성임의 글씨) 대부분 관리 출입 입직 주서가 개폐 확인

경추문 더 서쪽문 늘 잠금 대장이 군사 동원시에만 염

요금문 더 서쪽문 현판(성종때 신자건의 글씨)

공북문 서북문 안쪽에 대보단 원래 신이천 박의 집터

2) 궁장문

(1) 조선 전기의 궁장문

『태종실록』 33권 17년 1월 9일(병신)

지신사 조말생(趙末生) 등에게 명하여 향(香)을 받들고 먼저 종묘(宗廟)에 나아가게 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말하기를 ldquo전조(前朝)의 임금들은 즉위한 뒤로 친사(親祀)함이 한두 번에 불과했으므로 종묘에 나아갈 때를

당하면 반드시 성례(盛禮)를 갖추었지만 나는 세사(歲事)로써 상례(常禮)를 삼고자 한다 무엇을 반드시 저

렇게 번거롭게 하여야 하겠는가 제삿날을 당하여 청재(淸齋)한 근신(近臣)을 거느리고 사잇길로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하고 이내 명하여 종묘의 북장(北墻)에다 작은 문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말생

에게 명하여 그 문으로 먼저 가게 하였다

『성종실록』 58권 6년(1475 을미 명 성화(成化) 11년) 8월 23일(기해) 7번째기사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서거정(徐居正)이 전교(傳敎)를 받들어 대궐의 문 중에 예전에 액호(額號)가 없

는 것은 각기 2개의 이름을 편액(扁額)하여 아뢰니 임금이 낙점(落點)하기를 창덕궁(昌德宮) 밖 동장문(東

墻門)은 선인문(宣仁門) 중간의 동장문(東墻門)은 경양문(景陽門) 신대문(新大門)은 장춘문(長春門) 중대문

(中大門)은 선명문(宣明門) 남협문(南夾門)은 춘흥문(春興門) 안 동장문(東墻門)은 건양문(建陽門) 북쪽 동

장문(東墻門)은 기화문(綺華門) 광연정(廣延亭)의 서참문(西岾門)은 평창문(平昌門) 남행랑문(南行廊門)은

영화문(永和門) 북행랑문(北行廊門)은 영평문(永平門) 내사복 남문(內司僕南門)은 운금문(雲錦門) 외동산문

(外東山門)은 연양문(延陽門) 좌협문(左夾門)은 광범문(光範門) 우협문(右夾門)은 숭범문(崇範門) 남장문(南

墻門)은 단봉문(丹鳳門) 내서장문(內西墻門)은 의추문(宜秋門) 좌달문(左闥門)은 숙장문(肅章門) 겸사복청

(兼司僕廳)의 신대문(新大門)은 연복문(延福門) 내사옹(內司饔)의 상동문(上東門)은 소춘문(小春門) 북문(北

門)은 소동문(小東門) 중궁(中宮)의 차비문(差備門)은 연희문(延禧門) 승정원(承政院)의 남문(南門)은 연영문

(延英門) 서행랑문(西行廊門)은 금호문(金虎門) 외서장문(外西墻門)은 진금문(鎭金門) 서장문(西墻門)은 요

금문(曜金門) 후원(後苑)의 북장문(北墻門)은 공진문(拱辰門) 신북장문(新北墻門)은 창합문(閶闔門) 동장문

(東墻門)은 청양문(靑陽門) 외북장문(外北墻門)은 광지문(廣智門) 경복궁(景福宮)의 다와지문(多臥只門)은

망춘문(望春門) 옛 동궁(東宮)의 남문(南門)은 동양문(東陽門) 동장문(東墻門)은 소화문(昭華門) 남장문(南

墻門)은 소휘문(昭暉門) 동장자문(東障子門)은 요의문(曜儀門) 남행랑문(南行廊門)은 금란문(金鑾門) 후원

(後苑)의 사복문(司僕門)은 상원문(上苑門) 북성문(北城門)은 신무문(神武門)으로 하였다

(2) 조선후기의 궁장문

3) 궁성문과 궁장문의 개폐 숙위 감문

『세종실록』 31권 8년 2월 27일(신묘)

병조에서 계하기를 ldquo궁성(宮城)을 순찰하는데 다만 별순총제(別巡摠制)로 하여금 초경(初更)에만 돌아보게

하고 있으니 실로 타당하지 못합니다 바라옵건대 사면에서 모두 방패(防牌)로 하여금 번을 서게 하고 중국

의 제도에 의하여 흔드는 목탁을 만들어서 밤마다 남문에서 번을 든 호군(護軍)이 증명을 본조에서 받아

인정(人停) 후부터 파루를 칠 때까지 방패 두 사람이 목탁을 울리면서 남에서 동으로 동에서 북으로 북에

서 서로 차례차례로 전해 주어서 다시 남문에 들여놓으며 첫번에 목탁을 울린 자가 동에 도착할 만한 때에

또 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목탁을 주어 먼저와 같이 빙빙 돌아서 끊일 사이 없게 하며 방패가 만일 시각

을 지체하고 전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논죄(論罪)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32권 8년(1426 병오 명 선덕(宣德) 1년) 6월 14일(병자) 5번째기사

병조에 전지하기를 ldquo앞으로는 인정(人停) 후와 파루(罷漏) 전에 궁성문을 열고 닫을 일이 있으면 입직한 병

조 당상관과 도진무와 승전색(承傳色)의 주서(注書)와 사약(司鑰) 일동(一同)이 열고 닫게 하라rdquo 하였다

『세종실록』 63권 16년(1434 갑인 명 선덕(宣德) 9년) 1월 15일(계사) 9번째기사

병조에 전지하기를 ldquo강무(講武)로 거둥했을 때 밤을 당하여 궁문의 개폐(開閉)는 한결같이 중궁의 명령에

의해 하라rdquo 하였다

『세종실록』 100권 25년(1443 계해 명 정통(正統) 8년) 6월 19일(임인) 3번째기사

병조에서 아뢰기를 ldquo궁성문(宮城門)을 만약 인정(人定) 후와 파루(罷漏) 전에 열고 닫을 때에는 입직한 병조

당상(堂上)middot도진무(都鎭撫)middot승전색(承傳色)middot주서(注書)만이 열고 닫을 수 있다고 일찍이 전지가 있었습니다

삼가 상고하니 당(唐) 고조(高祖) 때에 궁전문과 성문에는 교어부(交魚符)와 순어부(巡魚符)를 두고 좌우상

(左右廂)에는 개문부(開門符)와 폐문부(閉門符)를 두었는데 좌부(左符)는 궐내(闕內)에 바치고 우부(右符)는

감문(監門)에 두었으며 중종(中宗) 때에는 궁전(宮殿)middot황성(皇城)middot경성(京城) 금원문(禁苑門) 좌우 내외를 신

칙하고서 각각 교어부 한 짝 순어부 한 짝씩을 주고 좌상(左廂)에는 개문어부(開門魚符) 한 짝을 우상에는

폐문어부(閉門魚符) 한 짝을 주었는데 모두 우부는 감문에 교부하여서 무시(無時)로 여닫는 데 이를 쓰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성문에는 벌써부터 개문부(開門符)를 만들어서 상직(上職)하는 호군(護軍)이 매일 궐

내에서 받아 합부(合符)하고서 문을 여닫습니다 금성문은 관계가 더욱 중한데 부(符)를 험증(驗證)하는 일

도 없이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실로 미편합니다 또 도진무와 병조 당상 등이 일제히 모인 다음에 문을 여는

까닭으로 시간에 맞추여야 할 일은 반드시 늦어지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궁성문도 또한 옛 제도에 의해서

교어부 한짝을 만들어서 왼쪽은 궐내에 들이고 오른쪽은 상서사(尙瑞司)에 갈무리하였다가 입직(入直)하는

중추원(中樞院) 당상과 각 위(衛)의 절제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진무 한 사람을 거느리고 매일 대궐에서 받

아서 영추문(迎秋門)에 숙직하며 만약 제 시각이 아닌 때에 여닫을 일이 있으면 승정색(承傳色) 관자(官者)

가 명을 받들어 왼쪽을 가지고 주서(注書)middot사약(司鑰)과 함께 감문(監門)의 숙직하는 곳에서 오른쪽과 맞추어

본 다음에 문을 열게 하는 것으로써 항구(恒久)한 법식(法式)으로 삼으소서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실록』 2권 1년(1470 경인 명 성화(成化) 6년) 1월 8일(정해) 9번째기사

도총부(都摠府)에 전교(傳敎)하기를 ldquo지금 이후부터는 대궐 안의 밤 순라(巡邏)는 위장(衛將)으로 하여금 행

하게 하는데 북쪽은 동소(東所)middot서소(西所)middot북소(北所)의 위장(衛將)으로 남쪽은 남소(南所)의 위장(衛將)과

응양위장(鷹揚衛將)middot내금위 장(內禁衛將)으로 시각[更]을 나누어 번갈아 돌아다니게 하라rdquo 하였다

『성종실록』 125권 12년(1481 신축 명 성화(成化) 17년) 1월 12일(정해) 6번째기사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ldquo대궐문을 여닫는 데에 요금문(曜金門)과 금호문(金虎門)은 도총부 낭청(都摠

府郞廳) 1명 겸사복(兼司僕) 1명 중궁 사약(中宮司鑰) 1명이 관장하며 돈화문(敦化門)middot단봉문(丹鳳門)middot평창

문(平昌門)은 주서(注書) 1명 겸사복 1명 대전 사약(大殿司鑰) 1명이 관장하고 선인문(宣仁門) 밖의 사옹

문(司饔門)middot청양문(靑陽門)은 선전관(宣傳官) 1명 겸사복 1명 왕대비전 사약 1명이 관장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rdquo 하니 전교하기를 ldquo가하다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5월 13일(정유) 3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궐 안에 입직하는 군사가 너무 많아서 매우 어지럽다 내금위(內禁衛)middot선전관(宣傳官) 따위는

밖에 나갈 수 없으나 충찬위(忠贊衛)middot충순위(忠順衛)middot별시위(別侍衛) 따위는 돈화문(敦化門) 밖 좌우편 장랑

(長廊)에 입직하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6월 19일(임신) 5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군기(軍器)는 대궐 곁의 가까운 곳에 두어서 뜻밖의 일에 대하여야 하니 남은 돈화문(敦化門)

밖 서는 요금문(耀金門) 밖에 따로 집을 지어서 군기시(軍器寺)에 둔 것을 수를 헤아려서 나누어 두라rdquo 하

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6월 23일(병자) 2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동middot서 금표(禁標) 중에서 동이 더욱 막힌 것이 없으니 이계동(李季仝)으로 하여금 다시 살펴서

물려 쌓게 하며 돈화문(敦化門) 밖 좌우 행랑(行廊) 곁에 가까운 인가(人家)를 모두 철거시키고 행랑을 따라

담을 쌓아 군영(軍營)의 하마비(下馬碑)를 한계로 삼고 궐문(闕門)을 두는 것이 어떠한가 큰일을 이루고자

하거늘 어찌 많이 철거하는 것을 꺼리랴rdquo 하였다 이때부터 성안의 인심이 들끊어 혹 거짓 전하는 말이

lsquo성안에 사는 사람을 모조리 쫓아내고 숭인문(崇仁門)middot돈의문(敦義門)을 궐문으로 삼으므로 오래 편안할 계

책이 없다rs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61권 12년(1506 병인 명 정덕(正德) 1년) 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궁금(宮禁)은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매양 수위하는 데 있어 마땅히 변을 당했을

때와 같이하여 각문을 수직하는 군사를 60명을 더 정하고 항상 갑옷을 입게 하라 수문장은 또 심지가 순근

(純謹)한 자로 수를 늘려서 입직하게 하라 단봉문(丹鳳門)middot금호문(金虎門) 등은 돈화문(敦化門)의 예에 따라

창middot칼 등의 물건을 모두 가지게 하되 칼날이 대궐로 향하지 말게 할 것과 가마를 시위하는 충철위middot보려대

로 입시한 자는 칼을 차지 못하게 할 것과 입직한 사람도 또한 대궐을 향하여 활시위를 잡아당기지 못하게

하는 일은 이미 금령(禁令)이 있었으니 앞으로는 거듭 밝혀 엄하게 금하라rdquo 하였다

『광해군일기』 103권 8년(1616 병진 명 만력(萬曆) 44년) 5월 13일(임오) 10번째기사

정원이 아뢰기를 ldquo전 황해 감사 윤조원(尹調元)을 잡아 올 일로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내보내기 위하여 궐문

및 외문(外門)을 유문(留門)해야 합니다 개문 표신(開門標信)과 돈화문(敦化門) 부험(符驗) 및 밀갑(密匣)을

출급하소서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만기요람』 군정편 2(軍政編二) 훈련도감(訓鍊都監) 궁장 밖의 순라(宮墻外巡邏)

인조 6년 무진(1628년)에 규례를 정하였다 초경 남영(南營)의 초관(哨官)이 입직한 마병 20명을 거느리고

두 바퀴를 순행한다 3경 광지영의 초관이 입직한 군졸 20명을 거느리고 두 바퀴를 순행한다 또 별순라(別

巡邏)가 있는데 영종 9년 계축(1733년)에 규례를 정하였다 장교 1명과 졸병 5명이 초경부터 날이 샐 때까

지 순행하며 집춘문 북쪽ㆍ상수문(上水門) 서쪽에서 공북문까지에 이르는데 별기대 1명과 광지영(廣智營)

입직군 5명 또 따로 기패관 1명과 별무사 1명을 정하여 경을 나누어 도순(都巡) 감독한다 장관이 또 감찰

한다 초일과 종일에는 북영에 입직한 파총이 중일에는 당상장관이 언제나 파루(罷漏)친 뒤에 모두 입직군

5명을 거느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구역내를 감찰한다

『영조실록』 3권 1년(1725 을사 청 옹정(雍正) 3년) 2월 20일(무자) 5번째기사

주강에서 민진원이 노은동 서원의 면세를 최진한이 금군의 수직을 논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중략- 무신(武臣) 최진한(崔鎭漢)이 진달하기를 ldquo궁성(宮城) 안에 입직(入

直)하는 군병(軍兵) 수직(守直)하는 사환(使喚) 이외에는 군병을 단속하고 훈국(訓局)의 2백 명을 금호문(金

虎門)과 홍화문(弘化門) 두 문에 나누어 수직하며 금위(禁衛) 1백 명을 건양문(建陽門)에 입직하고 금려(禁

旅) 1백 명은 인정전(仁政殿) 대정(大庭) 아래에 입직하게 해야 합니다 훈군(訓軍)은 안에서 입직함이 중하

니 매달 세 차례씩 해영(該營)에서 습진(習陣)할 때 내어 쓰지 말며 금위군 및 금려는 해영에서 습진할 때

표신(標信)을 제거하고 내어 써 매달 세 차례 신지(信地)인 금위를 공허하게 만들며 향군(鄕軍)은 생소(生

疎)하니 습진에 내어 쓰는 것도 한 방도일 듯합니다 그러나 금려에 이르러서는 군법(軍法)에 익숙함이 훈졸

(訓卒)에게 뒤지지 않으며 대정(大庭)에 직숙하는 것이 훈졸(訓卒)의 직소(直所)에 비할 것이 아닌데도 매번

내어 써 숙위(宿衛)를 중히 여기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신(將臣) 신여철(申汝哲)이 죽을 때 소신

(小臣)이 가서 보았더니 신여철이 말하기를 lsquo입직하는 금군은 내어 쓰는 것이 부당할 듯하여 내가 계달(啓

達)하여 변통하려고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으니 젊은 무변(武弁)은 이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rsquo라고 하였습니

다rdquo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효종(孝宗) 때 비로소 금군(禁軍)을 설치하였으니 뜻이 있는 바가 있는 것이

다 금위군(禁衛軍)을 내어 쓰지 않을 수 없으나 금군은 습진(習陣)할 때 내어 쓰지 말라는 뜻을 병조로 하

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rdquo 하니 병조에서 청하기를 ldquo최진한의 말에 따라 시행하소서rdquo 하니 그대로 따랐

다 또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후략---

『영조실록』 10권 2년(1726 병오 청 옹정(雍正) 4년) 11월 2일(경인) 2번째기사

임금이 대조전(大造殿)인 곧 창덕궁으로 환어(還御)하였다 병조에서 홍화문(弘化門)은 그전처럼 도로 닫아버

리고 돈화문(敦化門)의 표신(標信)에 따라 여닫되 건양문(建陽門)에는 입직(入直)하는 군사를 차출하고 동룡

문(銅龍門)도 파수(把守)를 해야 하는 뜻으로 아뢰니 윤허하였다

『정조실록』 4권 1년(1777 정유 청 건륭(乾隆) 42년) 11월 17일(기묘) 1번째기사

하교하기를 ldquo숙위 대장(宿衛大將)이 이미 대궐 안 각 곳의 숙위를 도맡게 되었으니 그 관할(管轄)하는 방도

에 있어서 마땅히 서로 유지(維持)해 가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안으로는 위장(衛將)middot부장(部將)middot금군 도감(禁

軍都監)의 군병(軍兵)middot각 문의 수문장(守門將)middot국별장(局別將)과 밖으로는 궁궐 담장 밖에 삼영(三營)에서 입

직(入直)한 순라(巡邏)들이 날마다 사고 유무를 숙위 대장에게 신보(申報)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군사의 체

대(替代)도 또한 마땅히 통괄(統括)하게 될 것이니 위장middot부장middot내삼청(內三廳)middot금군(禁軍)과 금호문(金虎門)middot홍

화문(弘化門)middot건양문(建陽門) 장관(將官)의 군병(軍兵) 및 국별장(局別將)middot유청군(有廳軍) 등은 3일 마다 체대

한 단자(單子)를 숙위소(宿衛所)에 내야 하고 숙위소에서는 해방(該房)에 보내어 봉입(捧入)하게 해야 한다

또 도총부(都摠府)와 병조는 소속 관사들과는 다름이 있어서 또한 서로가 통지(通知)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

이니 순검(巡檢)하는 등 일로 숙위소에서 거행하는 일과 관계되는 것 같은 것은 숙위 대장에게 문이(文移)

해야 함을 현저한 격식(格式)으로 삼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정조실록』 17권 8년(1784 갑진 청 건륭(乾隆) 49년) 5월 22일(병자) 2번째기사

병조에서 감문 절목(監門節目)을 올렸다 이 날에 내사복(內司僕)의 소동문(小東門)이 저절로 열려 병조

에서 아뢰니 하교하기를 ldquo문고리는 넓고 자물쇠는 작은 소치이지 다른 간사한 정(情)은 없을 듯하나 일이

숙위(宿衛)의 분군(分軍)하는 것이 효잡(淆雜)스런 것과 관계되니 특별히 병조 판서를 추고하라rdquo 하고 병

조에 명하여 절목을 만들라고 명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ldquo옛날에는 좌직(坐直)3719) 하는 승지가 합문에서 조석으로 문안하였기 때문에 저녁 문안 후 자물쇠를

청하여 문을 닫고 아침 문안 때 열쇠를 청하여 문을 열었다 근래에는 이 규정이 없어졌으니 마땅히 즉시

참조하여 획일적인 규식을 정하라 지금부터는 열쇠 내주는 것을 좌직하는 승지가 전담하여 보관하고 자물

쇠를 연 후에는 해방 승지(該房承旨)가 주관하여 관장하되 마땅히 수리해야 하는데도 수리하지 않으면 해당

승지를 의금부에 내려서 중히 감죄하고 주서(注書)와 총랑(摠郞)middot선전관(宣傳官)middot사약(司鑰) 가운데서 해당

문을 관리하는 사람 역시 유사(攸司)로 하여금 감단(勘斷)하라

병조에서 순검하면서 자물쇠를 확인하는 것은 본디 직장(職掌)이니 건양문(建陽門) 동서를 경계로 하여

수문장(守門將)과 위장(衛將)과 함께 같은 죄를 주고 만일 파손된 곳이 있으면 즉시 와서 고해야 하며 색승

지(色承旨)가 수리하는 한 조항은 신시(申時) 이전은 해방(該房)에서 관장하고 신시 이후에는 좌직(坐直) 하

위(下位)가 관장하는 것으로 정식(定式)하여 신명하라 이후로 성문middot궐문의 자물쇠는 호조 낭관이 감독해 만

들어서 판서가 구검(句檢)하는 것을 일체 절목으로 만들어 계하하라 이렇게 정식하면 도총부 낭관이 돈화

문(敦化門)을 관리하는 것은 아주 의미가 없으니 선전관이 돈화문을 관리하고 도총부 낭관은 통화문(通化

門)과 선인문(宣仁門)을 관리하라rdquo

하였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 1 각문(各門)의 개폐(開閉)는 옛날 예대로 승정원이 주관한다 자물쇠를 잠근 후

에 열쇠는 좌직(坐直) 하위(下位)가 친히 받아서 사(司)에 보관한다 그 출납은 자물쇠를 연후에 자물쇠와 열

쇠를 해방 승지가 친히 받아서 보관하고 신시(申時) 이후에는 상직(上直) 하위 승지에게 전해 보관하게 한

다 1 각문의 관할은 건양문(建陽門) 동서를 경계로 한다 서쪽은 서middot남 양소(兩所)에서 분장하는데 병조의

담당이다 동쪽은 동middot북 양소에서 분장하는데 도총부 담당이다 수문장은 각기 그 부근에 가는데 소남문(小

南門)은 단봉문(丹鳳門) 수문장이 겸관(兼官)하고 소동문(小東門)은 선인문(宣仁門) 수문장이 겸관하는데 만

일 섬가지 않은 일이 있으면 엄법으로 감처(勘處)한다 1 각문의 자물쇠에 만일 파손되어 고쳐야 할 곳이

있으면 해당 문의 수문장이 해소(該所) 부장(部將)을 안동(眼同)하여 각각 그 자내(字內)에 가서 고하면 병

조나 혹은 도총부의 낭청이 친히 가서 살피어 승정원에 고하는데 고치는 절차는 신시 이전에는 해방에서

관장하고 신시 이후에는 좌직 승지가 관장한다 1 각문을 개폐할 때 감약(監鑰)은 돈화문(敦化門) 요금문

(曜金門) 단봉문(丹鳳門)은 선전관이 금호문(金虎門)은 주서(注書)가 홍화문(弘化門) 선인문(宣仁門) 통화

문(通化門)은 도총부 낭청이 담당하되 각 해당 문의 수문장 및 담당 사약(司鑰)이 안동하여 거행한다 1 병

조 낭청 및 도총부 낭청이 야순(夜巡)할 때 각문의 자물쇠는 그 내자(字內)에 따라서 해당 수문장을 안동하

여 살피되 소동문(小東門) 소남문(小南門)도 일체로 조검(昭檢)한다 1 각처 수문(水門)의 중대한 열쇠를

해소에 보관하는 것은 일이 매우 미안하니 남수각(南水閣) 수문(水門)은 돈화문 수문장이 겸관하고 북수각

(北水閣) 수문은 요금문 수문장이 겸관하여 파손된 곳의 수리와 조검(照檢) 때살피는 등의 절차는 다른 문

의 예에 의해서 시행한다 1 성문과 대궐문을 잠그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니 지금을 시작으로 해서 자물쇠

를 수리할 때에는 호조 낭청이 몸소 감조(監造)하고 판서가 구검(句檢)한다 1 각문을 나누어 담당시키는

것이 비록 건양문 동서를 경계로 삼았으나 병조는 이미 궐내 각처를 관할하는 처지이니 경계를 정하였다 하

여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며 건양문 동쪽 역시 총괄하여 검찰해야 한다】

『정조실록』 27권 13년(1789 기유 청 건륭(乾隆) 54년) 1월 19일(병자) 3번째기사

승정원이 병조 당상관의 당직 교체 일로 인하여 금호문(金虎門) 출입 표신을 내줄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ldquo대궐 안의 각문을 유문(留門)하였을 때 조정 신료가 드나들지 못할 문은 원래 없는 것이다 체통이 막중한

대신과 대신(臺臣)의 체통이 근래 궁인(宮人)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하는 요금(曜金)middot통화(通化) 두 문도 구

애되지 않고 출입하였던 사실을 《당후일기(堂后日記)》를 보면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몇

해 전부터 막중한 대궐문을 마치 각 부서에서 나누어 맡은 것처럼 돈화문(敦化門)은 대간에 금호문은 조신

(朝臣)에 단봉문(丹鳳門)은 중관(中官)에 선인문(宣仁門)은 사복시(司僕寺)에 각각 소속되어 마치 서로 어겨

서는 안 될 무슨 정해진 한계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유문하고 있을 때라도 열려 있는 문을

놔두고서 유문 표신을 따로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종전에도 누차 신칙했지만 끝내 고칠 줄을 모르

니 당해 승지를 파직하고 앞으로는 유문할 때 뿐만 아니라 아침과 낮에 공사로 들어올 때에도 따로 출입하

는 문을 정하지 말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순종실록』 2권 1년(1908 무신 대한 융희(隆熙) 2년) 4월 1일(양력) 4번째기사

포달(布達) 제2호 〈창덕궁 정문을 개폐 통행을 제한하는 규정〔昌德宮正門開閉通行定制限〕〉을 공포하였

다 문로

- 왕비 책봉 의식과 문로

『성종실록』 123권 11년(1480 경자 명 성화(成化) 16년) 11월 8일(갑신) 1번째기사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니 백관(百官)이 사배(四拜)를 마쳤다 임금이 왕비를 책봉(冊封)하고 교명

(敎命)middot책보(冊寶)middot명복(命服)을 정사(正使)인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부사(副使)인 호조 판서(戶曹判

書) 이철견(李鐵堅)에게 주어 인정문(仁政門)을 경유하니 고취(鼓吹)가 앞에서 인도하는데 다음은 교명(敎

命)이고 다음은 옥책(玉冊)이고 다음은 보(寶)이고 다음은 의장(儀仗)이었다 사자(使者)가 수행하여 선정문

(宣政門) 밖 막차(幕次)에 이르니 왕비가 선정전(宣政殿) 월랑(月廊)의 배위(拜位)에 나아가 교명(敎命)middot책보

(冊寶)middot명복(命服)을 받았는데 그 교명에 이르기를 -후략-

- 선정전의 정문 돈례문

『명종실록』 27권 16년(1561 신유 명 가정(嘉靖) 40년) 4월 8일(정유) 1번째기사

밤에 돈례문(敦禮門)【선정전(宣政殿)의 어문(御門)이다】 및 어둑(御纛)에 벼락이 쳤다【내일 상참(常參)이

있어 어문(御門)에 내다 세워 놓았는데 문선(門扇)과 둑간(纛竿)이 벼락에 맞아 부러졌다】

- 발인시 왕과 재궁의 문로

『연산군일기』 3권 1년(1495 을묘 명 홍치(弘治) 8년) 2월 8일(임술) 4번째기사

빈전 도감(殯殿都監)이 아뢰기를 ldquo재궁(梓宮)이 동가(動駕)할 적에 전하께서 돈화문(敦化門) 안에서 지송(祗

送)하셔야 하는데 전하께서 만약 재궁을 수행하여 빈청(賓廳) 앞을 경유하시어 진선문(進善門) 밖으로 나가

신다면 잡인(雜人)이 요란스러울 뿐더러 길도 협착하니 전하께서 도보(徒步)하시기도 역시 어렵습니다 만

약 권도(權道)를 따라 먼저 막차(幕次)에 나아가시기로 하면 전하께서 조전(祖奠)을 행하신 다음에 소교(小

轎)를 타시고 인화문(仁和門)을 벗어나 인정전(仁政殿) 앞을 경유하여 먼저 돈화문 안으로 나가시면 되는데

돈화문 안도 역시 협착하니 마땅히 막차(幕次)를 진선문(進善門) 동편에 마련하고 서쪽을 향하여 지송(祗送)

하셔야 옳겠습니다 또 우제(虞祭)를 행한 뒤에 대비(大妃)께서 진향(進香)하시는 것은 예문이나 전례에 없습

니다 이극돈(李克墩)middot성현(成俔) 등의 뜻은 하현궁(下玄宮)하고 흙으로 절반쯤 메우고 제주(題主)하고 한낮

에 우제(虞祭)를 지내므로 절차가 매우 많고 반혼(返魂)이 이를지 늦을지 그것도 또한 알 수 없으니 그날

우제 뒤에 대비께서 진향(進香)하기는 진실로 어려울 것인데 만약 대비의 망극하신 정을 따르기로 한다면

반혼한 뒤에 대비께서 혼전(魂殿)에 나아가 조석 상식할 때를 기다려서 나와 보시는 것이 어떨까 하였고 윤

효손(尹孝孫)의 뜻에는 이런 것이 예문에 실리지 않았으니 우제 후에 대비의 진향은 수시로 행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rdquo 하였다

- 세자 책봉후 경유해야 할 문로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 청 순치(順治) 2년) 9월 19일(정묘) 2번째기사

예조가 아뢰기를 ldquo세자가 책봉을 받은 다음 건양문(建陽門)을 경유하여 곧장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가서

는 안 되고 홍화문(弘化門) 앞 바른 길을 경유하되 여련(輿輦)과 의장(儀仗)을 갖추어 성 안 사서(士庶)들로

하여금 충분히 보게 한 다음에 돈화문(敦化門)을【 곧 창덕궁의 정문(正門)이다】 거쳐 들어가는 것이 타당

할 듯합니다rdquo 하니 답하기를 ldquo궐내(闕內)로부터 직접 동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rdquo 하였다 책

례 도감이 또 이 일로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 발인시 왕의 문로

『현종실록』 즉위년(1659 기해 청 순치(順治) 16년) 10월 28일(을묘) 1번째기사

대행 대왕의 재궁(梓宮)을 발인(發靷)하였다 자시(子時)에 견전례(遣奠禮)를 행하였는데 인시(寅時)에

내전에서 약방에 죽력(竹瀝)과 생강즙을 구해 들이도록 하였다 이 때 좌상 심지원이 총호사로서 인화문(仁

和門)에 있었는데 중사(中使)를 통해 자전이 너무 슬퍼한 나머지 기절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아뢰기를

ldquo발인할 시각이 이미 박두했는데 삼가 듣건대 자전께서 편찮으시다 하니 잠시 시각을 물리소서rdquo 하니 상

이 따랐다

얼마 뒤에 지원이 또 아뢰기를 ldquo자전께서 이와 같으니 교외에 거동하시는 일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됩니

다 뭇 의논도 모두 전하께서 궐문 밖에서 배사(拜辭)함이 마땅하다고들 합니다 모름지기 빨리 하교하셔야

만 일을 분부하고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자전의 기후(氣候)가 조금 차도가 있는

듯하니 발인하는 시각은 그대로 하라rdquo 하였다

파루(罷漏) 후에 재궁(梓宮)을 받들어 대여(大轝)에 올리고 이어 출발하였다 상이 소여(小轝)를 타고 인

화문(仁和門)으로 나왔는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인정문(仁政門) 밖에 이르러 상이 여(轝)에서 내려 연(輦)

을 탔는데 백관은 모두 걸어서 수행하였다 흥인문(興仁門)을 나와 동관왕묘(東關王廟) 뒤쪽 노제(路祭) 지

내는 곳에 이르러 대여를 악차(幄次)에 봉안하였는데 상도 연에서 내려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의정부와 충

훈부가 노제를 끝마치자 대여가 출발하였다 상이 막차에서 나와 봉사위(奉辭位)로 나아가 동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통곡하며 가슴을 쳤다 대여가 멀어지자 상이 환궁하였다

- 즉위식 의례 설행 문로

『숙종실록』 1권 즉위년(1674 갑인 청 강희(康熙) 13년) 8월 23일(갑인) 1번째기사

왕세자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중략- 이날 성복(成服)을 마치고 왕세자가 관면(冠冕)과 길

복(吉服)을 갖추고 규(圭)를 쥐고 여차(廬次)40) 로부터 걸어가면서 곡(哭)하였다 내시(內侍) 2인이 좌우(左

右)에 끼고 보호하여 선정전(宣政殿) 동쪽 뜰에 나아가 빈전(殯殿)을 향하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섬돌

에 올라가 전내(殿內)의 향안(香案) 앞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는 내려와 그전 자리로 돌아와서 또 네 번

절하고 동쪽 행랑의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왕세자가 선정문(宣政門)으로부터 걸어 나와서 연영

문(延英門)을 따라 가서 숙장문(肅章門)을 나와서 인정문(仁政門)에 이르니 승지와 사관(史官)이 따라 나갔

다 왕세자가 서쪽을 향하여 어좌(御座) 앞에 서서 차마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슬피 울기를 그

치지 아니하였다 승지와 예조 판서가 서로 잇달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를 권하였다 삼공(三公)이 도승지

와 더불어 나아가 왕세자를 부축하면서 번갈아 극진히 말하였다 왕세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우니 이 날

뜰에 있던 백관(百官)과 군병(軍兵)으로서 목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세자

가 어좌(御座)에 오르니 백관들이 사배(四拜)하고 의식대로 산호(山呼)하였다 예를 마치자 사왕(嗣王)이 인

정문(仁政門)으로부터 인정전(仁政殿)에 올라가 인화문(仁和門)으로 들어와서 여차(廬次)로 돌아왔는데 우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 즉위식 의례 설행 문로

『영조실록』 1권 즉위년(1724 갑진 청 옹정(雍正) 2년) 8월 30일(경자) 1번째기사

경종 대왕(景宗大王) 4년【청(淸)나라 옹정(雍正) 2년이다】 8월 을미(乙未)【25일이다】에 경종 대왕이

창경궁(昌慶宮)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昇遐)하였다 그 후 6일째 되는 날인 경자6) 오시(午時)에 왕세제

(王世弟)가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원상(院相)middot승지(承旨)middot사관(史官)은 조복

(朝服) 차림으로 돈례문(敦禮門) 밖 서정(西庭)에 동쪽을 향하여 앉고 홍문관(弘文館)은 승정원(承政院)의 다

음에 앉고 시강원(侍講院)은 동정(東庭)에 서쪽을 향하여 앉고 익위사(翊衛司)는 시강원의 다음에 앉고 병

조(兵曹)middot도총부(都摠府)는 융복(戎服) 차림으로 동쪽middot서쪽에 앉아서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왕세제(王世弟)가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차(廬次)에서 나오니 좌통례(左通禮)가 왕세제를 인도하여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빈전(殯殿)에 나아가 서계(西階)를 거쳐 욕위(褥位)에 올라갔다

찬의(贊儀)가 큰 소리로 lsquo배(拜) 궤(跪)rsquo 하고 선창(先唱)하니 좌통례(左通禮)가 낮은 소리로 lsquo궤(跪)하

소서rsquo 하고 고하기를 ldquo사왕(嗣王)은 보위(寶位)를 받으소서rdquo 하였다 상향례(上香禮)를 마치고 왕세제(王世

弟)가 내려와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막차에서 나와 걸어서 돈례문(敦禮門)의 동쪽 협문(夾門)

을 지나 동계(東階)로 내려가 연영문(延英門)을 거쳐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꺾어 숙장문(肅章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나가서 북쪽으로 꺾어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 밖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 그 곳 한복판

에 어좌(御座)를 설치하였는데 왕세제가 어좌에 올라가니 백관(百官)이 네 번 절하고 lsquo천세(千歲)rsquo 하고 호

창(呼唱)하였다

임금이 어좌에서 내려와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들어가 인정전(仁政殿) 정로(正路)를 거

쳐 인정전에 올라갔다 임금이 여차(廬次)로 돌아와 면복(冕服)을 벗고 최복(衰服)을 다시 입었다 이보다 4

일 전에 예조(禮曹)에서 사위(嗣位)하는 절목(節目)을 올렸는데 왕세제가 영지(令旨)를 내려 돌려주게 하였

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하루 세 번씩 도로 올렸으며 승정원(承政院)middot사헌부(司憲府)middot

사간원(司諫院)middot홍문관(弘文館)에서도 번갈아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성복(成服)하

는 날에 이르러 외부 의식이 이미 마련된 다음에 원상(院相) 이광좌(李光佐)가 여차(廬次) 앞에 이르러 면복

(冕服)으로 갈아입기를 간청하였으나 왕세제가 눈물을 흘리며 점침(苫枕)에 엎드려서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

였다 이광좌가 왕대비전(王大妃殿)과 왕비전(王妃殿)의 승전색(承傳色)을 불러 구전(口傳)으로 내전(內殿)에

서 나아가도록 계청(啓請)하니 왕대비전과 왕비전에서 언문 교지(諺文敎旨)를 내려 나아가도록 권유하였다

그제서야 왕세제가 남여(籃輿)를 물리치고 걸어서 어좌(御座) 앞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울부짖으며 어좌

에 오르지 않고 말하기를 ldquo내가 옛날에 여기에서 영고(寧考)를 모셨었는데 지금 무슨 마음으로 어좌에 오를

수 있겠는가rdquo 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이광좌 등이 누누이 간청하니 한참 후에 등극(登極)

하였다 정시(正時)가 되니 예조(禮曹)에서 비로소 사시(巳時)가 되었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오시(午時)에

이르러 마침내 즉위(卽位)하고 혜순 자경 왕대비(惠順自敬王大妃) 김씨(金氏)를 높여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왕비(王妃) 어씨(魚氏)를 왕대비(王大妃)로 빈(嬪) 서씨(徐氏)를 왕비(王妃)로 삼고 마침내 인정문(仁政門)에

서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였는데 이르기를 ldquo왕은 말하노라 -후략-

- 대보단에 거둥하여 망위례를 거행할 때의 문로

『영조실록』 61권 21년(1745 을축 청 건륭(乾隆) 10년) 3월 9일(신사) 2번째기사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망위례(望位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영화당

(映花堂)에서 승여(乘輿)를 타고 나왔는데 산선(繖扇)과 시위(侍衛)를 평상시의 의례대로 하였다 조종문(朝

宗門) 밖에 이르러 승여에서 내려 막차(幕次)로 들어 갔다가 얼마 후 다시 나와 승여에서 내려 조종문으로

들어가면서 명하기를 ldquo오위장(五衛將) 이하 당하(堂下) 시위는 모두 삼문(三門) 밖에서 뒤떨어지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중문(中門) 밖에 이르러 임금이 규(圭)를 잡고 동문(東門)을 거쳐 판위(版位)로 들어가 사배례(四拜

禮)를 행하고 동유문(東壝門)으로 들어가 동폐(東陛)를 거쳐 봉심(奉審)하고 다시 판위에 돌아와 희생(犧牲)

을 친히 살폈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황단(皇壇)에 성우(騂牛)를 쓰는 것이 무슨 뜻을 취한 것인가rdquo 하니 승지 오수채(吳

遂采)가 말하기를 ldquo황조(皇朝)에서 화덕(火德)을 숭상했기 때문에 성우를 쓴 것입니다rdquo 하였다 임금이 향

악차(香幄次)에 나아가 대축(大祝)에게 명하여 향축궤(香祝櫃)를 내오게 하고 친히 살폈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향악차가 만약 눈과 비를 맞으면 습기에 젖기가 쉬우니 지금 이후에는 향축을 신실(神室) 안으로 봉안해야

한다rdquo 하고 인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기를 명하였다

- 선정전 어진을 영희전으로 이봉할 때의 문로

『영조실록』 67권 24년(1748 무진 청 건륭(乾隆) 13년) 2월 25일(기묘) 4번째기사

선정전(宣政殿)의 영정(影幀)을 영희전(永禧殿)으로 이안(移安)할 때 전하가 수가(隨駕)하여 출궁(出宮)middot환궁

(還宮)하는 의식은 이러하다【선정전 망전례(望殿禮)와 봉심(奉審) 및 영희전 망전례와 봉심에 대한 의주(儀

註)도 아울러 붙인다】 기일에 앞서 액정서(掖庭署)에서 선정전 동쪽 뜰 아래와 돈례문(敦禮門) 밖 길 동쪽

에다 서쪽을 향하여 소차(小次)를 설치한다 왕세자의 위차는 연영문(延英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하의 망전례(望殿禮) 위차는 전정(殿庭)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자의 위차는

전하의 판위 뒤에 남쪽 가까운 데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의(典儀)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위차를 선

정문 밖에 설치하는데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하고 모두 매 등급마다 위차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쪽

을 향하게 한다 또 전하의 소차를 영희전 대문 안에 설치하고 망전례의 위차는 재전(齋殿) 정문 안에다 동

쪽에 가깝게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위차를 재전의 문밖에 설치하는데 동서

(東西)로 나누어 위차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쪽을 향하게 한다 또 영정을 임시로 봉안할 대차(大次)를 영희

전 신문(神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는데 악차(幄次)는 대차 안에 설치한다【신탑(神榻)을

설치한다】 전하의 입위(立位)는 대차 앞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자가 지영(祗迎)하는 위

차는 흥화문(興化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그날 초엄(初嚴)을 치면 병조에서 제위(諸衛)

를 정돈하여 노부(鹵簿)와 의장(儀仗)을 건명문(建明門) 밖에서 의주(儀註)대로 진설하며 장악원(掌樂院)에서

경현당(景賢堂) 뜰 남쪽 가까이에 북쪽을 향하여 헌현(軒懸)한다【출궁(出宮)할 때에는 진설만 하고 연주하

지않으며 환궁(還宮)할 때는 음악을 연주한다】 종친과 문무 백관은 모두 조방(朝房)에 모여서 각기 흑단령

(黑團領)을 입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은 연(輦)을 숭현문(崇賢門) 밖에다 대고 여(輿)를 합문(閤門) 밖에다

댄다 이엄(二嚴)을 치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모두 흥화문(興化門) 밖에 있는 시립위(侍立位)로 나아간다 왕

세자가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서 여(輿)를 타고 흥화문 밖으로 나아가 위차로 들어가면

여러 호위하는 관원들은 각기 해당되는 옷을 입고 모두 합문 밖으로 나아가 기다린다 좌통례가 합문 밖으

로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이 되었음을 계청한다 삼엄(三嚴)을 쳐서 북소리가 그치면 내외(內外)의 문을

열며 좌통례가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뢴다 전하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나가며 산선(산

扇)middot시위(侍衛)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좌통례가 앞에서 인도하고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이 보(寶)를 받들고

앞서서 간다【연(輦)에 타기를 기다려 보(寶)를 말에다 싣는다】 어가(御駕)가 숭현문 밖에 이르러 좌통례

가 꿇어앉아 여(輿)에서 내려 연(輦)을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려 연을 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한다 어가(御駕)가 움직이면【고취(鼓吹)는 진설만하고 연주하지 않는다】 좌통례middot우통례

가 앞에서 인도하고 찬의(贊儀) 2인이 통례의 앞에 있는데 장위(仗衛)와 도종(導從)은 보통의 의례와 같다

어가가 흥화문 밖에 이르면 왕세자가 위차에서 나와 몸을 굽히는데 지나가고 나면 평신하고 이어 연(輦)을

타고 어가를 따른다 어가가 시신(侍臣)들의 상마소(上馬所)에 이르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어가가 조금 머물

러 시신들로 하여금 말을 타게 할 것을 계청하고 뒤이어 시신들에게 말을 타라고 외친다 찬의가 전창(傳唱)

하여 시신들이 모두 말을 타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한다 어가가 움직이면 종친과 문무 백

관이 몸을 굽혀 지영(祗迎)하고 왕세자가 이를 적에도 몸을 굽히는데 지나가고 나면 평신하며 순차에 따라

시위한다 어가가 창덕궁 돈화문 밖에 있는 시신의 하마소(下馬所)에 이르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어가가 조금

머물러 시신들로 하여금 말에서 내리게 할 것을 계청하는데 시위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하면 돈화문 동협(東夾)을 거쳐 들어간다 어가가 숙장문(肅章門) 밖 강련소(降輦所)에 이

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연에서 내려 여를 탄다 좌통례

가 앞에서 인도하여 선정문 밖 강여소(降輿所)에 이르러【시신은 이에 물러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

(輿)에서 내릴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린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돈례문(敦禮門) 밖에

이르러 소차(小次)로 들어가면【돈화문에서 돈례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협(東夾)을 경유하는데 이 뒤도 이

와 같다】 산선과 시위는 선정문 밖에 정지한다 왕세자가 창덕궁 돈화문 밖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려 여

(輿)를 타고 서협(西夾)을 거쳐 들어가는데 연영문 밖에 이르러 여에서 내려 소차로 들어간다【돈화문에서

돈례문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서협(西夾)을 경유한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해엄(解嚴)할 것을 계청하면 병조

에서 전교(傳敎)를 받들어 의장(儀仗)을 푼다 인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인도하는데 그대로 흑단령을 갖추

고 선정문 밖 위차로 들어간다 왕세자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위차로 들어가면 좌통례가 소차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소차에서 나올 것을 계청한다 전하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나오면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망전례(望殿禮)의 위차에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선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할 것을 아뢰면 전하가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하고 왕세자도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하고 일어나 평신하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도 같다【찬의도 같다】 끝나고 나면 인의

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나누어 인도하여 나온다 전하가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왕세자도 따라 들어가는데

영정을 봉심할 때에는 승지middot사관middot궁관과 도감 당상 각 1원(員)이 시입(侍入)한다【통례와 상례는 계단 아래

에 정지한다】 봉심을 마치고 나면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도로 소차로 들어가고 왕세자도 따라

나와서 소차로 들어간다 영정을 장축(粧軸)할 때 전하가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승지middot사관과 도감의 당상(堂

上)middot도청(都廳)이 함께 흑단령 차림으로 시입(侍入)하는데 장축을 봉심하고 표제(標題)를 첩부(貼付)하고서

끝낸다 첨배(瞻拜)할 때에는 도감 당상과 종친middot의빈middot문무관 정2품 이상이 함께 흑단령 차림으로 선정문 밖

의 위차로 들어가며 전하와 왕세자도 이어서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전정(殿庭)의 판위(版位)로 나아가는

데 의주(儀註)대로 행례(行禮)한다【첨배의(瞻拜儀)에 기재되어있다】 이를 끝마치고 나면 전하는 소차로

들어가고 왕세자는 그날로 환궁하는데 의주대로 한다【왕세자 환궁의에 기재되어 있다】 다음날 동가(動

駕)를 고하는 제사를 지낼 때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이 먼저 위차로 나아가면 전하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판위로 들어가 의주대로 행례(行禮)한다【동가(動駕)를 고하는 제사를 친행하는 의주(儀註)에 기재되어 있

다】 이를 끝마치고 나서 영정 1본을 안의 진전(眞殿)에 봉안한 뒤에 전하가 도로 소차로 들어간다 선정전

의 영정을 영희전에 봉안할 때에는 초엄(初嚴)이 치면 병조에서 장위(仗衛)middot노부(鹵簿)를 진선문(進善門) 밖

에 진설하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은 연(輦)을 진선문 밖에다 대고 여(輿)를 인정전(仁政殿) 동쪽 뜰 아래에

다 댄다 이엄(二嚴)을 치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각기 조복(朝服)을 입고【4품 이상은 조복을 입고 5품이하

는 흑단령을 입는다】 돈화문 밖의 시립위(侍立位)로 나아가며 여러 호위하는 관원들도 함께 인화문(仁和

門) 밖으로 나아가 기다리는데 좌통례가 소차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임을 계청한다 삼엄(三嚴)

을 쳐서 북소리가 그치면 내외의 문을 여는데 좌통례가 꿇어앉아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뢰면 전하가 면복을

갖추고 나온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

가 그 규를 잡는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대축(大祝)이 영정궤(影幀櫃)

를 신여(神輿)에 봉안하고서 인화문을 경유하여 나온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걸어서 신여를 따

라 인정전 월대(月臺) 위에 이르러 대축이 영정을 신련(神輦)에 봉안하고【고취(鼓吹)를 울린다】 인정문

(仁政門)을 경유하여 나온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인정전 동쪽 뜰 밑에 있는 승여소(乘輿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圭)를 놓고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그 규를

받는다 좌통례가 여를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를 타며 인정문 동협(東夾)을 경유하여 진선문 동협 밖

승련소(乘輦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려 연을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려 연을

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가 규를 잡

는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하고 산선(繖扇)middot시위(侍衛)는 보통의 의례와 같게 한다 대가(大

駕)가 돈화문 동협(東夾)을 거쳐 나아가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은 신련(神輦)이 이르면 몸을 굽혔다가 지나

가면 평신하고 대가가 이르면 몸을 굽혔다가 지나가면 평신한 다음 순차에 따라 시위한다 대가가 영희전

(永禧殿) 대문 밖 강련소(降輦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를 놓고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받는다 -영희전 부분 후략-

- 대보단에 향을 친히 전하는 문로

『영조실록』 26년 3월 5일 (무신) 원본1054책탈초본57책(56) 1750년 乾隆(淸高宗) 15

乾隆十五年庚午三月初五日辰時 上具冕服 出御映花堂前庭親傳香繖扇侍衛如常儀行都

承旨南泰良 左承旨李普昱 右承旨洪益三 左副承旨李益輔 右副承旨趙載敏 記事官南鶴老middot崔

台衡middot李宜哲middot金聖佑入侍益三奉進香祝上塡祝着押如禮 仍展覽祝文而敎曰 此乃常用祝文

乎 益三曰 然矣上曰 都承旨進來泰良進伏上曰 祝文中神考毅廟等字 似皆上行書之

而今皆不上之矣泰良曰 有太祖第一位 故壓尊而不得上矣上曰 永禧殿祝文亦如此例乎 頃

日親享時 魚錫胤爲大祝 必知之矣仍命錫胤進來下詢錫胤曰 臣於倉卒中 未能詳細記得

矣上祗傳香祝益三跪奉以出 安于香亭上以步輦 由集成門入齋室 少頃 由朝宗門詣版位

行望位禮 由冽泉升壇奉審 仍省器 又於冽泉門外省牲訖 還入齋室諸臣遂退出

- 대행왕비의 발인시 왕의 문로

『영조실록』 89권 33년(1757 정축 청 건륭(乾隆) 22년) 6월 3일(계해) 1번째기사

대행 왕비의 발인(發靷)에 임금이 단양문(端陽門) 밖에 나아가 대여(大轝)를 바라보며 곡(哭)하고 인해서 대

여를 따라 숙장문(肅章門) 밖에 나아가 두 번 절한 다음 곡하면서 전송하고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적체(敵體)의 의리는 매우 중대한 것이다 지금 내가 최복(衰服)을 입었으므로 대궐 안에서 곡하

며 전송하였지만 평상시의 경우는 대궐 밖에서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뜻을 《상례보편(喪禮補編)》에다

기재하도록 하고 또 정축년에 처음으로 시행한 까닭을 주석(註釋)으로 달도록 하라rdquo 하였다

- 선원전과 경복전 봉심 문로

『승정원일기』 영조 36년 3월 17일(임술) 원본1179책탈초본65책 (1720) 1760년 乾隆

(淸高宗) 25년

李永暉 以戶曹言啓曰 傳敎內景福殿與月郞 及眞殿及報春門外齋室 戶工曹堂上 每於季春奉審 可以修補者修補

墻垣頹圮處 椽木腐朽處 待守直中官所報 該曹草記 郞廳監蕫 卽爲修補 而事係正殿 則堂郞眼同擧行 於義本宮

亦依此例擧行事 命下矣參議臣金選慶 與正郞鄭一祥 工曹參判臣朴相德 正郞臣金鍾卨 進詣奉審 則於義本宮 姑

無修改處 而景福殿西邊芳春門一隻下莫只破傷 憶昔樓北邊椽木一箇 要家南邊椽木三箇 椽含一箇 平交臺一箇腐傷

蓋瓦脫落 西月廊椽木一箇腐傷 窓差備要家椽木一箇 永慕堂南行閣抹樓二間 同歸機一 廳板一立腐傷 之介一隻獨

窓一隻 無廣窓一隻破傷 南墻一間蓋瓦脫落 司鑰房抹樓歸機一箇腐傷 廳板一立 無土壁一面崩頹 四面墻垣 四間蓋

瓦庫庫脫落 別監房椽木十八箇 朴工二立腐破 獨窓二隻 之介二隻無 西邊墻垣三間崩頹 兩墻間墻垣十二間 蓋瓦庫

庫脫落 五間蓋瓦全無 報春門齋室椽木九箇 椽含一箇 平交臺一箇腐傷 仰土庫庫剝落 內外土壁剝落 萬福門外中間

傾側 朴工一立 倍防一箇 龍脂板二腐傷 蓋瓦脫落 東南墻六間蓋瓦庫庫脫落 齋室前行閣五間退 五間內二間退五間

頹壓 而材瓦全無 餘存三間材木腐傷 蓋瓦折半脫落 西南墻五間蓋瓦庫庫脫落 故分付各該司 使之修改 而亦令本曹

郞廳 監蕫擧行 何如 傳曰 允

- 황단 친제할 때 문로

『승정원일기』 영조 45년 8월 15일(갑자) 원본1295책탈초본72책(1010)1769년 乾隆(淸

高宗) 34년

己丑八月十五日寅時 上詣昌德宮入侍時 行都承旨金應淳 左承旨尹東昇 右承旨閔弘烈 左副承旨朴弼逵

右副承旨徐命善 同副承旨洪述海 假注書崔命麟middot尹弼秉 記事官鄭弘德middot李福徽 以次隨駕訖上具翼善冠middot衮龍

袍 以乘輿 出通陽門middot延和門外 降輿乘輦 藥房都提調金陽澤 提調韓光會 持湯劑進伏訖陽澤曰 夜間聖體

若何 上曰 一樣矣上進湯劑 命召香室守僕 驪陽府院君閔 海豐府夫人李氏middot恩城府夫人宋氏middot豐昌府夫人趙

氏middot慶恩府院君金middot嘉林府夫人趙氏 贈領議政崔 贈貞敬夫人洪氏 一體致祭事 分付上入昌德宮於進善門外降輦

以步輦 入進善門下 問于金應淳曰 彗星光芒及尾之長短 比前何如 應淳曰 光芒則似減 而尾迹則一樣矣上

曰 其退速 則漸値太陽而消散乎 應淳曰 妖不勝德 自然消滅矣下敎曰 吏middot戶房 兵middot刑房 依前相煥出駕

前下敎 上入萬安門 辰時 上以步輿 由追慕堂北墻外 詣奉審 金應淳啓曰 通禮未卽待令 推考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又傳曰 當日內行禮 百官行禮 置之上降輿于皇壇外 步入冽泉門神室前 行四拜禮 由東階

上 奉審神室 又上皇壇 奉審四隅而降 步履强健 挾侍落後 諸臣莫不瞻仰慶忭上還出冽泉門 奉審齋室 乘

步輦 還至金化門北西向四間閣前住輿 命尹東昇 讀御製懸板 至年月日 工曹參判金致仁奉敎書上曰 不覺其

間年數之多矣 命書記上至金化門內 命承旨知入 門名及右墻內三間閣 爲何閣 承旨還奏曰 門名金化 閣則

故中日廳矣上曰 予爲摠管時 由此門入直事如昨 居然爲幾年乎 上 至弘化門內乘輿鼓吹 下敎曰 毓祥宮歷

臨時 前後廂軍 道上留駐出駕前下敎 又下敎曰 禮房承旨 靈壽閣奉審以奏出駕前下敎 又下敎曰 禮房承旨

馳往養正齋 奉審以來出駕前下敎 又下敎曰 還宮時刻 待下敎 單子置之出駕前下敎 承旨閔弘烈奉審後復

命上詣毓祥宮內 住步輦 命入皇壇回駕時 御製承旨讀訖讀書以下 上 出毓祥宮入侍時下敎曰 後日擧動

時 雲劍依例望入出駕前下敎 上命應淳 書御製時 上曰 予今日行步 無甚艱澁 奉審皇壇時 中官落後矣應

淳曰 此非但心存誠敬之工 亦可觀 勝於前日矣金陽澤進前問候後 進湯劑酉時 上還宮於延和門外降輦陽

澤曰 動駕之餘 聖體若何 上曰 一樣矣進湯劑訖 上還宮後 諸臣以次退出

- 선원전 어진을 영희전으로 이봉할 때의 문로

『정조실록』 6권 2년(1778 무술 청 건륭(乾隆) 43년) 7월 11일(무술) 1번째기사

영종(英宗)의 어진(御眞)을 영희전 제5실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선화문(宣化門)으로 나아가서 선원전(璿源殿)에 들어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도로 만안

문(萬安門) 밖의 소차(小次)에 나아가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선원전의 제2실로 올라 나아가 갑자년1366)

의 어진(御眞)인 면복본(冕服本)을 신여(神轝)에 봉안하고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 어진을 받들어 신탑(神

榻) 위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탑전(榻前)에 나아가 손수 받들어 편 다음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도로 소

차에 나아가 원유관에 강사포를 고쳐 입고 양지당에 나아가 어진궤(御眞櫃)를 신여(神轝)에 봉안하니 도감

(都監)의 당상과 낭청이 신여를 모시고 만안문으로 나아가 신련(神輦)에 옮겨 봉안하고 인정문(仁政門)을 거

쳐 나갔다 임금이 걸어서 인정전 월대(月臺) 아래에 나아가 여(輿)를 타고 인정문을 나가서 여에서 내려 연

(輦)을 탔다 돈화문(敦化門)을 거쳐 영희전에 나아가 홍살문 밖에서 연에서 내려 여를 탔다 재전(齋殿)에

들어가서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신문(神門) 밖에 나아가 사배례를 행하였다 전(殿) 안으로 나아가니 김

상철(金尙喆) 등이 어진을 제5실에 봉안하였다 작헌례를 행하고 환궁(還宮)하였다 도감의 당상과 낭청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으며 대축(大祝) 윤숙(尹塾)middot이진형(李鎭衡)에게는 가자(加資)하였다 이조에서 윤

숙은 준직(準職)을 거치지 않았다고 아뢰었으나 특별히 가자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 선원전 전배 문로

『승정원일기』 정조 13년 12월 28일 (기묘) 원본1670책탈초본88책 (3132) 1789년 乾

隆(淸高宗) 54년

己酉十二月二十八日卯時 上詣眞殿展拜入侍時 行左承旨洪明浩 右承旨趙衍德 左副承旨曺遠振 右副承

旨申耆 同副承旨洪仁浩 假注書沈能迪middot洪樂游 記注官趙慶遠middot金鳳顯 檢校直閣李晩秀 待敎金祖淳 以次侍

立上具翼善冠middot衮龍袍 乘輿 出協陽門 由肅章門middot仁政門 至萬安門降輿 入眞殿展拜後 上曰 簾帳修改所入

戶工判 領率該色郞廳及工匠等 入侍 可也賤臣承命出傳 與戶曹判書金履素 工曹判書邊得讓 戶曹正郞李周

憲 偕入訖上曰 禮判望筒 卽爲擬入 待下批先進參後 謝恩之意 分付 可也賤臣承命出傳上曰 禮判牌

去來催促 使之卽爲進參 可也賤臣承命出 與禮曹判書徐有隣 偕入訖命仁浩書傳敎曰 歲前當展拜 而除夕

齋宿相値 今日眞殿修改 日勢差早 當由便道 展拜景慕宮 該房知悉修改罷後 上出萬安門 乘輿 由仁政門middot

肅章門middot建陽門middot銅龍門middot景光門 出弘化門 入逌瞻門 至齋室降輿上曰 都提調middot提調 先詣文禧廟之意 傳諭 可

也賤臣承命出傳上曰 文禧廟歷臨出駕前下敎 上展拜訖乘輿 出逌瞻門 入弘化門 由景光門middot銅龍門middot建

陽門middot肅章門middot進善門 出敦化門 由備邊司middot觀象監峴 至文禧廟 降輿 入廟 行奠酌礼訖仍詣儀嬪廟行奠酌禮後

乘輿 出廟門 由觀象監峴middot備邊司 至敦化門 下標信解嚴 由進善門middot肅章門middot協陽門 入宣化門 還內

- 관풍각에 간경하러 거둥하는 문로

『승정원일기』 순조 11년 윤3월 14일(임진) 원본1996책탈초본105책(2121) 1811년 嘉

慶(淸仁宗) 16년

辛未閏三月十四日午時 上御觀豐閣看耕時 諸承旨及入直玉堂middot閣臣同爲入侍時 行都承旨洪義浩 右副承旨申

絅 同副承旨徐俊輔 假注書朴來謙middot洪羲祖 記注官金初燮 記事官朴齊聞 直提學洪奭周 應敎李志淵 修撰徐長

輔 以次進伏訖 上曰 今日看耕 故使之入侍矣 上曰 農圃擧行 斯速爲之 上曰 闕外入直文蔭 昨日試

取 闕內入直文臣 前旣應製 而闕內入直蔭官 姑未應製矣 闕內入直蔭官 凡幾司乎 義浩曰 尙瑞院middot尙衣院middot

司饔院middot典設司矣 上命書傳敎曰 闕內入直文臣 前已應製 而蔭官不爲應製 今日適因入侍 使之同爲待令上

曰 試官則閣臣及同副承旨middot上番玉堂middot下番翰林爲之上乘肩輿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隨後 仍由石渠門middot魚水堂middot

淸防閣middot珍藏閣middot尊德亭前路 入望春亭 御天香閣 少頃 命入侍 諸臣以次進伏訖 上曰 應製蔭官已待令乎

義浩曰 姑未及來待 而檢書官亦是入直蔭官 使之同爲待令 何如 上可之 上曰 應製人催促入來 可也 來

謙承命出去 上曰 公事待令乎 義浩曰 待于靑陽門外矣 上曰 懸題紙 磨墨器 持入 可也 賤臣承命出

來 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少退 仍爲隨後 上乘肩輿 出望春亭 還由暎花堂前路middot宜春門middot芙蓉亭邊拱辰門middot集成

門 御籠山亭 少頃 命入侍 以次進伏訖 上曰 應製人已來待 則使之入來 試官亦下筵 無唱行禮 可也

奭周middot俊輔middot志淵middot齊聞 下筵行禮 還上進伏 上命書御題五言絶句觀豐春耕 押春 限午時 俊輔承書 齊聞立傳

司謁 司謁跪受懸題 上曰 第三人誰也 義浩曰 司饔主簿金照矣 上曰 吏文學官出身乎 義浩曰 然矣

上曰 有文名乎 義浩曰 善於文而尤工於詞律矣 上曰 第一第二第四人皆誰也 義浩曰 尙瑞直長金昊淳 尙

衣直長金義友 檢書官柳本藝矣 上曰 公事持入 可也 來謙承命出去 持入 上曰 讀之 俊輔讀公事訖

傳挾侍以上 上下前入公事敎曰 都承旨middot同副承旨輪回讀奏 義浩middot俊輔讀公事訖 上曰 應製人幾皆製之 則以

次呈券 而上番兼史爲收券官 司謁爲衛軍樣擧行 可也 上曰 科次爲之 奭周曰 當取幾人耶 上曰 取一

人 奭周曰 一券不書臣謹封 違格拔去矣 上曰 違格則推考乎 奭周曰 文臣製述則有外違罷職之規 而應製

則無推考之例矣 奭周書三下於一券 俊輔坼名讀奏 上命書傳敎曰 禁直蔭官應製優等 司饔院主簿金照 奎

章全韻中板部賜給 上曰 向來禁直文臣應製 以大小板分等賜給 蔭官亦欲區別 故書下中板 而若無中板 則

以印紙之長廣闊狹區別 好矣 昨日闕外入直文蔭應製 有兒馬帖之賞 冊子之賞 勝於馬帖乎 義浩曰 馬帖則

重於冊子 而領受者之榮光 冊子勝於馬帖矣 左副承旨申溆 宗廟middot景慕宮奉審摘奸後入來 進前奏曰 臣承命馳

詣宗廟尊所 奉審無頉 祭物middot祭器middot祭井 看審精潔 諸執事middot進排官 摘奸無頉 仍詣景慕宮尊所 奉審無頉 祭物middot

祭器middot祭井 看審精潔 諸執事middot進排官 摘奸無頉矣 上曰 移御時 王大妃殿middot惠慶宮middot嘉順宮陪從官過祗迎所時

馬上鞠躬 中宮殿middot元子陪從官過祗迎所時 下馬事 預爲知委 可也 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隨後 到暎花堂 當宣

飯也 上乘肩輿 由望春middot尊德亭前路middot集春門內麓middot觀豐閣前路 御暎花堂 諸臣待于丹楓亭 少選 以司謁宣

飯訖 上乘朱軒 由靑陽門middot永淸門middot賓陽門middot涵仁亭前路middot重春門middot小宙合樓前路 至熙政堂 上命退 諸臣以次退

- 왕세자가 성균관 입학하러 가는 길과 문

『순조실록』 20권 17년(1817 정축 청 가경(嘉慶) 22년) 3월 11일(갑인) 1번째기사

왕세자가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고 이어 입학례를 행하였다【세자가 쌍동계(雙童髻)middot공정책(空

頂幘)middot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수레에 올라 이극문(貳極門)을 나서 홍화문(弘化門)에 이르러 동협문(東挾門)

으로 해서 나와 수레에서 내려 연(輦)을 바꾸어 타고 관현(館峴)을 거쳐 문묘의 동문 밖에 이르러 연에서 내

려 편차(便次)에 들었다 작헌례를 행할 때가 되자 세자가 학생복으로 갈아입고 편차에서 나오니 겸보덕(兼

輔德)이 앞에서 인도하여 문묘의 동문으로 들어가 자리에 나아가 사배(四拜)하고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갔

다 이윽고 동계(東階)로 해서 올라 신위(神位) 앞에 나아가 삼상향(三上香)하고 잔을 잡고 헌작(獻爵)하였다

다음에는 사성위(四聖位)에 나아가 상향하고 헌작하기를 처음처럼 하였다 (-중략-) 박사가 글을 읽자 세자

도 따라 읽고 박사가 글 뜻을 해석하였다 해석이 끝나자 집사가 서안과 책을 치웠다 보덕이 세자를 인도하

여 서계로 내려와 편차에 들러 공정책과 곤룡포로 갈아입고 연에 올라 관현을 경유하여 홍화문에 이르러 연

에서 내려 수레로 바꾸어 타고 동협문으로 들어와 동룡문(銅龍門)을 지나 이극문으로 들어와 대내(大內)에

들어갔다】

- 경연관과 서연관의 대내 출입 문로 연영문과 동룡문

『순조실록』 21권 18년(1818 무인 청 가경(嘉慶) 23년) 9월 10일(을사) 1번째기사

차대하였다 우의정 남공철이 아뢰기를 ldquo오늘날의 많고 많은 일 중에서 왕세자가 학문의

성취를 먼저 힘쓰는 것보다 급한 일이 없습니다 언행(言行)으로 감화시키는 데서는 숙유(宿

儒)가 가장 좋으며 바르게 기르고 훈도하는 방도에도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

에는 경연관(經筵官)을 경서에 밝고 행실이 스스로 수양된 사람으로써 가까이서부터 초선

(抄選)한 다음 서연관(書筵官)도 그대로 겸하도록 계하(啓下)해서 연영문(延英門)과 동룡문

(銅龍門)의 강석(講席)을 드나들게 한다면 매우 좋겠습니다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주합루와 연경당에 봉안한 어진을 경모궁과 경우궁으로 각각 옮길 때의 문로

『일성록』 헌종 3년(1837) 양력 4월 17일 갑자

강 純宗大王 翼宗大王御眞自宙合樓 演慶堂移安于景慕宮望廟樓 景祐宮 誠一軒時親行祗送

목 初次移安時至卯時 時原任閣臣分承史以下 原任提學 沈象奎 朴宗薰 提學 趙寅永 原任提學 鄭元容 提學 徐

有榘 原任直提學 金鏴 檢校直提學 徐憙淳 直提學 朴永元 原任直閣 徐俊輔 李光文 李嘉愚 金鼎集 吳取善 原

任待敎 李憲瑋 檢校待敎 金興根 趙斗淳 原任待敎 金英淳 檢校待敎 金學性 分承旨 張敎根 徐念淳 趙秉憲 金

東健 分注書 金始淵 洪在龍 史官 申錫愚 徐耆淳 具朝服分詣宙合樓 演慶堂前庭行禮訖閣臣奉純宗大王影幀樻子

安於轝戊辰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 閣臣奉翼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丙戌圖寫一本予具遠遊冠 絳紗袍自內詣宙合樓

神轝奉審乘輿出宜春門詣演慶堂 神轝奉審陞詣堂內奉審後乘輿出金馬門至月覲門內入小次純宗大王影幀神轝將至

予出次祗送翼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祗送訖乘輿還內純宗大王 翼宗大王 神轝以次由月覲門自內詣景慕宮望廟樓戶

外閣臣以次奉出影幀樻子如儀奉安後閣臣以下行禮退出 再次移安時至午時 閣臣奉純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戊辰

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 閣臣奉翼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丙戌圖寫二本庚寅圖寫一本予具遠遊冠 絳紗袍乘輿出拱辰

門至曜金門內入小次純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出次祗送翼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祗送訖乘輿還內純宗大王 翼宗大

王 神轝以次由曜金門自內詣景祐宮 誠一軒戶外閣臣以次奉出影幀樻子如儀奉安後閣臣以下行禮退出奎章閣啓言

純宗大王 御眞戊辰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翼宗大王御眞丙戌圖寫一本奉安于景慕宮望廟樓純宗大王 御眞戊辰圖寫

一本庚寅圖寫一本翼宗大王御眞丙戌圖寫二本庚寅圖寫一本奉安于景祐宮 誠一軒兩廟御製各一件同爲奉安

- 창덕궁에서 종묘에 전알하러 가는 문로

『일성록』 고종 31(1894)년 양력 3월 2일 기묘

강 詣宗廟展謁

목 具翼善冠 袞龍袍乘輿出太和宮門至宗廟 北墻門降輿入齋室展謁時至改具冕服乘輿至東神門降輿詣版位行禮

陞詣第一室奉審次詣各室奉審如儀訖出西神門入永寧殿東神門詣版位行禮陞詣第一室奉審次詣各室奉審如儀

訖還出東神門乘輿至南神門降輿步過還乘輿入齋室少頃出次乘輿出北墻門至長樂門還內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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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政院日記』

『日省錄』

『各司謄錄』

『國朝寶鑑』

『經國大典』

『大典通編』(1785)

『國朝五禮儀』(1474)

『國朝五禮序例』(1474)

『春官通考』(1788)

『新增東國輿地勝覽』

『東國輿地備攷』

『東輿備考』(1863)

『增補文獻備考』

『萬機要覽』

『宮闕誌』(憲宗年刊)

『宮闕志』(純宗年刊)

『景福宮middot昌德宮內上樑文』

「東闕圖」

「東闕圖形」

『時敏堂圖』

『古地圖帖』

『昌德宮修理都監儀軌』(인조 25 1647)

『儲承殿儀軌』(인조 26 1648)

『昌德宮昌慶宮修理都監儀軌』(효종 3 1652)

『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효종8 1657)

『集祥殿修改都監儀軌』(현종 9 1668)

『昌德宮營建都監儀軌』(순조 34 1834)

『仁政殿營建都監儀軌』(순조 3 1803)

『仁政殿重修儀軌』(철종 8 1857)

『(景福宮middot昌德宮璿源殿第一室)增建都監儀軌』(광무 4 1900)

『慈慶殿進爵整禮儀軌』(순조 27 1827)

『英祖middot莊祖文集』

『英祖文集補遺』

『正祖文集(弘齋全書)』

『純祖文集(純齋稿)』

『翼宗文集』

『憲宗(元憲稿)』

『middot哲宗文集(中齋稿)』

『高宗(珠淵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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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주 「勤政殿과 仁政殿의 건축기법 비교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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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세나 「조선시대 오봉병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7

박희용 「창덕궁 정전영역의 구성과 운영」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8

배한선 「연경당 낙선재 운현궁의 건축 특성 연구 궁궐 침전 상류 주택과의 비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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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기 「lt동궐도gt에 묘사된 가변시설과 궁궐의 공간운영」 경북대학교 석사학위청구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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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논문 2003

윤 정 「18세기 국왕의 lsquo문치rsquo 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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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 「조선시대 궁궐 중심공간의 구조와 변화」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0

이강근 「경복궁에 관한 건축사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설 한국학대학원 석사학

위청구논문 1984

이만희 「창경궁 내전권역 공간구성에 대한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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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아 「孝明世子middot憲宗代 宮闕 營建의 정치사적 意義」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

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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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한국건축역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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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원 「경복궁 중건이후 전각구성의 변화」 경기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9

이효석 「조선시대 세자의 궁궐 공간 사용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5

장영기 「조선시대 궁궐 편전의 성격과 체재 변화」『조선시대사학보』48 조선시대사

학회 2009

정은경 「조선후기 궁궐 정침에 대한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5

조옥연 「조선 궁궐의 동조 건축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8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2003

조재모 「창덕궁의 성장과정과 배치특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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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동 「창덕궁의 공간 경계요소에 관한 연구 담middot행각middot문의 유형과 디자인 특성을 중

심으로」 동국대학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6

최경자 「창덕궁 선원전-西闕內各司 권역의 건축형식과 공간특성」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0

최기영 「조선시대 궁중의례에서 사용된 차일의 기능과 특성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

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9

한경희 「舊韓末 宮闕建築 內部意匠에 관한 硏究 西歐式要素의 영향을 中心으로」 이화

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1977

한주성 「조선후기 궁궐건축의 행각 구성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1999

홍선기 「조선시대궁궐의 공간구조에 관한 연구 경복궁 창덕궁 경희궁을 대상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1991

홍순민 「조선왕조 궁궐 경영과 lsquo양궐체제rsquo의 변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

문 1996

황준원 「조선시대 궁궐내 길례middot흉례의식 공간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

위청구논문 2004

5 도록middot도면집 고려대학교박물관 『조선시대 기록화의 세계』 2001

고려대학교박물관 『명품도록』 2008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안내도록』 2007

국립고궁박물관 『궁궐의 장식그림』 2009

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 아름다운 덕을 펼치다』 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북궐도형』 2006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소장유리건판1 - 궁궐』 2009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향연과 의례』 2009

『꼬레아 에 꼬레아니(사진해설판)』(이돈수middot이순우 지음) 하늘재 2009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宮中遺物圖錄』 1986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동궐도』 1991

문화재청 『日本 宮內廳所藏 昌德宮寫眞帖』 창덕궁관리소 2006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육백년 1405-2005』 2005

서울역사박물관 『도성대지도』 2004

서울대학교박물관 『고궁전사집첩』

영남대학교박물관 『한국의 옛 지도』 1915

예술의 전당 『서울 600년 고궁의 현판』 1994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상 하 서문당 1986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6

『사진으로 본 백년 전의 한국』(김원모middot정성길 엮음) 가톨릭출판사 1997

『서울 풍광』 -서양인이 만든 근대 존기 한국 이미지Ⅰ- 청년사 2009

『유리원판(창덕궁)』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총독부 『朝鮮古蹟圖譜』十 1930

『日本之朝鮮』(정성길 편 이민원 감수 『일제가 강점한 조선』 한국영상문화사 2006)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조선왕실의 책』 2002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실의 행사그림과 옛지도』 200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장서각 명품선』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근대건축도면집』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근대건축 도면집-해설편』 2009

6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최후의 진전 창덕궁 신선원전』 2010

국립문화재연구소 『창덕궁 금천교 발굴조사보고서』 2002

김귀곤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원유 생태조사보고서(수목 및 식생중심) 1990

문화공보부 『창덕궁 重建報告書』 1987

문화재관리국 『조선조왕국 중요건축물지정조사서(Ⅰ)』 1984 12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仁政殿 실측조사보고서』 1998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舊 璿源殿 실측조사보고서』 1992

문화재청 『창덕궁 新璿源殿 수리보고서』 2001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인정전 일곽복원공사 기초조사에 의한 설계설명서』 1992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仁政澱 行閣址 발굴조사보고서』 1995

문화재청 『창덕궁 仁政殿 行閣 중건공사보고서』 1999

문화재청 『창덕궁 奎章閣 舊璿源殿 권역 발굴조사보고서』 2000

문화재청 『창덕궁 半島池 보수 정비공사 준공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상방지 유구조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熙政堂 수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middot종묘원유 조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정자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3

문화재청 『창덕궁 희정당 신관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3

문화재청 『창덕궁 경훈각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4

문화재청창덕궁관리소 『창덕궁 승화루 및 일곽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5

문화재청 『창덕궁 懿老殿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4

문화재청 『창덕궁 인정문 정밀실측조사보고서』 2010

문화재청 『창경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2010

김동욱 『조선후기 궁궐건축의 조영에 관한 연구』 국립문화재연구소 1990

안병찬이강근 외 『궁궐채색기술 특성규명 연구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전상운 『창덕궁 어차 수리 복원 보고서』 2004

중앙문화재연구원 『창덕궁 반도지 시굴조사보고서』 2001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함원전 보수공사』 2005

웹 사이트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httpsjwhistorygokr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e-kyujanggaksnuackr

한국고전종합 DB httpdbitkcorkr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httpyoksaaksackr

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

문화유산에게 소심하게 말걸기 httpwwwcyworldcomangayo

Page 5: 조선왕실의 건축, 창덕궁 학술연구 · 2012. 5. 15. · 연구책임자: 이강근(한국건축역사학회 이사) 공동연구원: 이혜원(한국전통문화학교

Ⅰ 연구의 목적

국립고궁박물관이 창덕궁을 주제로 한 전시를 앞둔 시점에서 창덕궁에 대한 기초 사료의

집성과 창덕궁 연구의 새로운 바탕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 연구 용역을 발주한 것으로 이해

하였다 창덕궁에 대한 이제까지의 연구에서도 사료의 검증을 통하여 창덕궁의 시간적 공간

적 변천 과정을 구명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조선전기까지의 창덕궁에 대해서는 조선왕조

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은 한정된 사료에 의지하여 원래의 모습을 추정해 왔지만 조

선후기의 창덕궁에 대해서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사료가 대거 남아있고 동궐도나

동궐도형과 같은 시각 자료 또한 남아 있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시공간적 변천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헌사료가 원문 상태로 소장처에만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구자의

접근이 어려웠고 그런 탓에 사료의 내용이 연구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였다 최근에 이르

러 관찬 사서나 의궤 같은 귀중한 사료는 물론 개인 문집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전자문서화

되어 인터넷상에서 검색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이를 활용하여 창덕궁에 대한 이해 또한 확

대 심화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또 최근에 학계에 처음으로 종합 소개된 장서각 소

장 창덕궁 관련 도면 자료는 20세기 전반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자행된 창덕궁의 훼손

과 개조 과정을 담고 있어서 대한제국 멸망 이후의 변천상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렇듯 달라진 여건 아래서 창덕궁에 대한 기존의 콘텐츠를 능가하는 새로운 콘텐츠의 개

발과 구축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창덕궁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 전시에도 새로운 콘텐츠를

활용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동안 문화재청의 다대한 복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창덕

궁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으로 개조된 모습 위에 부분적인 복원이 이루어진 어정쩡

한 상태이다 창덕궁의 원형과 변형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Ⅱ 연구의 내용

1 창덕궁의 역사

가 조선 전기

1) 太宗代의 창건

(1) 離宮 건립의 동기

조선왕조의 수도 한성의 중심은 정궁인 경복궁이었으며 도성 안의 모든 시설은 경복궁

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배치되었다 新都의 경영을 맡았던 사람 가운데 아무도 한성 안에 궁

궐을 하나 더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태종이 한성 주변의 母岳과 한

성을 비교한 결과 한성으로 환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나서도 정궁인 경복궁

에 들어가지 않고 따로이 새로운 궁궐을 건설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 도성 안에 그

것도 정궁으로부터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lsquo離宮rsquo이란 미명하에 새로운 궁궐을 지은 태종의

숨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궁궐이 정치의 중심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궁궐 앞에 수많은 政廳과 官廳이 마

련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설은 물론 정궁 남쪽대로 좌우에 도열하는 것이 고대국가 이

래의 오랜 전통이다 그런데 이궁이라 하면 정궁에서의 정치를 수행하기 어려운 경우 天災

地變으로 정궁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을 지속하기에는 백성들에게 미안한 경우 등에만 잠시

정궁을 피해 있기 위하여 즉 避宮하기 위하여 지은 궁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궁 앞에는 정

청이나 관청을 마련할 필요가 전혀 없다

정궁인 경복궁을 피하여 잠시 거처하기 위하여 새로운 궁을 지었다면 이는 이궁의 본래

용도에 합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피궁할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경우 왕실과 가

까운 관계에 있는 관료나 친인척의 집을 피궁 장소로 삼을 수는 있으나 이는 장구한 계책이

될 수 없으므로 어차피 이궁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시설이었다 그러나 이궁 건설 시기

를 하필이면 한성 환도 시점으로 정한 데는 특정한 이유가 있었다

즉 태종의 왕위 계승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던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태

종이 lsquo왕자의 난rsquo을 두 차례 겪고 겨우 왕위에 올랐을 때 수도는 개경이었다 혼란기의 정치

상황을 마무리하고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難題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경을 떠날 수밖에 없

었다 또 한성으로 환도하는 마당에 骨肉相殘의 비극이 얽힌 경복궁으로의 入宮을 피하려면

새로운 궁궐이 필요했다 이 시기에 집권 관료층의 관심을 천도와 새로운 궁궐 조성에로 돌

려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목적과 흉흉해진 민심을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하여 바로잡으려

는 정치적 의도도 작용하였다

그 결과 lsquo이궁rsquo이란 이름의 궁궐을 도성 안에 하나 더 지음으로써 왕권의 현실적 기반을

공간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단순히 피궁하기 위하여 이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이궁이 지어짐으로써 한성의 북반부는 이궁과 정궁 두 개의 궁궐이 각각 응봉

과 백악을 배경으로 위세를 갖추어 동서로 布陣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1405년에 이궁이 완

성되자 곧 1406년에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1411년에 명당수를 끌어들이고 御構를

팠으며 1412년에는 원래 있던 작은 누각을 헐고 경회루와 연못을 대규모로 조성하여 아름

다운 경관을 조성하여 중국 사신의 접대에 대비하도록 한 사실 등을 보더라도 태종이 경복

궁을 꺼려서 거처하지 않으려고 이궁을 지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태종이 왕권강화를 최대의 정치적 목적으로 삼아 외척세력과 공신세력마저 완전히 제거

한 다음 왕-의정부-육조의 國政體裁를 왕-육조의 直啓制로 전환시켜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

게 강화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에도

창덕궁 바로 곁에 수강궁을 짓고 거처하며 여전히 병권을 장악한 채 도성 안 여러 곳에 수

많은 이궁을 건설하였다는 사실은 창덕궁을 창건한 이유가 비단 경복궁이 싫어서만은 아니

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1)

(2) 창건 과정

창덕궁의 창건은 한성으로 환도할 것을 결정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맨 먼저 1404년

10월 6일에 당시의 향교동 응봉 자락 아래로 터를 정하고 이날로부터 공사에 착수하였다

lsquo離宮造成都監rsquo이 조직되고2) 도감의 우두머리인 提調 李稷의 설계와 감독 수많은 工匠군

인승려백성 등의 賦役 노동에 힘입어 착공된 지 1년만인 1405년 10월에 드디어 新宮이

낙성되었다 태종은 낙성되기 10여 일 전에 서둘러 개경으로부터 환도하여 領議政府使 趙浚

(1346~1405)의 집에 마물다가 10월 20일에 입궁하여 성대한 落成宴을 베풀었다 이때 낙성

된 건물은 왕 부부의 침전 일곽과 정전편전 등 외전 일곽뿐이었다 신궁에서 펼쳐질 새로

운 정치를 보좌할 관청들은 경복궁 앞에 지어져 있던 건물들을 수리하여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으며 1405년 8월에 관청 건물과 관원들의 주택을 수리하는 일에는 강원도와 충청도의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신궁에서 정치활동이 시작된 이후에도 공사는 계속되었다 즉 1406년에는 眞殿인 仁昭

殿(태조와 태조비 신의왕후의 신주를 모신 건물)과 佛堂을 후원 지역에 지었고3) 누각(廣延

樓) 1408년에는 연못 1411년에 정자(解溫亭 14년 6월에 愼獨齋로 개칭)가 조성되었는데

누각은 왕이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풀 수 있도록 휴식하거나 신하들과 연회를 열어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정자는 홀로 휴식과 사색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조성되었

또 1408년에는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비빈과 후궁들로 하여금 양잠의 중요성을 알도록

일깨우고 1410년에는 지형에 맞추어 소나무를 심어 궁원의 풍광을 아름답게 가꾸었다 1411

년에는 누각과 침실(세조 7년에 누각은 澄光樓 침실은 凝福亭玉華堂 등으로 명명됨)을 더

만들고 진선문밖에 돌다리를 조성하였다고 하며 1412년 5월에는 궐문인 돈화문을 세우고

1413년 1월에는 闕門 어귀에 下馬標木을 세워서 왕과 신하의 차별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같

은 시기에 종을 주조하여 궐문인 돈화문에 걸었다4)

이렇듯 왕궁의 체재를 갖추고 태종 5년 이후 중심적인 정치의 장으로서 역할을 다한 창

1) 태종은 태상왕과 상왕의 거처로 덕수궁과 인덕궁을 각각 지어 바쳤으며 아홉 곳의 이궁을 도성 안팎에 건설

하여 거처를 옮겨 가면서 살았다 이 가운데 避災를 위하여 지은 이궁은 餘慶坊本宮이었다(『서울 六百年

史』第一卷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 219~226쪽 참조)

2)『太宗實錄』권8 태종 4년 9월 辛亥條 성석린조준 등 집권 관료들이 lsquoldquo경복궁이 있는데 따로 이궁을 세우는

것은 불가하다rdquo고 반대하자 도감의 명칭을 lsquo宮闕修補都監rsquo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무마책이었을

뿐 이궁 조성 공사는 곧 강행되었다

3) 『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63 187~188쪽

4) 敦化門鐘銘은 1412년 9월에 변계량이 지었는데 『태종실록』에 게재되어 있으며『新增東國輿地勝覽』에 경

복궁광화문종명으로 잘못 소개되어 있다 이 점은『서울 六百年史』第一卷 210쪽 주 42)에서 金龍國이 일찍

이 지적해 놓았다

덕궁은 핵심적인 정치 장소인 인정전 일곽이 정치의 장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

유로 대대적으로 수리된다 이때는 태종이 세종에게 선양한 왕권 교체기인 1418년 6월부터

8월 사이에 해당되는데 부실공사로 회랑 일부가 무너지자 감독 책임자인 박자청이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때 공사를 담당한 목수 吳德海의 이름이 실록에 남아 전한다

(3) 창건 창덕궁의 건축적 성격

1405년 10월에 낙성된 건물의 구성과 규모는 『태종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5)

이 기사 내용을 토대로 창건 창덕궁의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왕실 일가의 생활공간인 內殿 일곽은 正寢廳과 좌우의 침전 등 3침전을 중앙에

두고 사방을 행랑으로 빙 둘러막은 中庭式 배치법을 따르고 있는데 정침청과 양 옆 침전

정침청과 남쪽 행랑 사이는 개방형 복도(穿廊)를 두어 연결하고 있다6) 北行廊이 11칸이고

東西行廊이 각 15칸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침전 일곽은 폭 11칸에 깊이 15칸인 縱深形 공간

형태를 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행랑의 쓰임새에 대해서는 북행랑과 접한 서행랑 부분

에 3칸 짜리 별실을 두고 동행랑에 樓와 庫를 각각 3칸씩 두었다고 하였을뿐 나머지 부분

의 용도는 밝히지 않았다 이밖에 침전 주변에는 수라간(왕과 왕비의 수라를 준비하던 곳)

司饔房 湯子洗手間 등이 마련되어서 왕실 일가의 사생활을 도울 수 있게 하였다

둘째 정치의 장인 治朝 구역은 正殿便殿報平廳 등으로 이루어졌다7) 이 가운데 정

전은 2층으로 쌓은 넓고(가로 63자 세로 33자) 높은(아래층 4자 1치 위층 3자 5치) 월대 위

에 세워졌으며8) 행랑으로 둘러싸인 정전 둘레의 마당 즉 朝廷은 폭이 크고 깊이가 얕은 횡

축형 공간형태(가로 156자 세로 117자)를 택하고 있었다 정전 앞 마당에서 행해지는 朝會

나 朝賀 등 대규모 儀禮를 생각할 때 또 品等에 따른 자리가 縱軸 방향으로 배열됨을 고려

할 때 창덕궁 정전 앞 조정은 쓰임새를 잘 고려한 형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창건된 지

13년만인 1418년에 정전 일곽을 모두 헐고 새로 짓는 개건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이때 정전은

원래 자리보다 국면이 조금 넓은 서쪽으로 옮겨 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9)

5)『太宗實錄』 卷 10 太宗 5年 5月 辛巳

6) 창건 당초 창덕궁의 침전 형식에 대하여 ldquo어간 3간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로 볼 수 있는 침전이 각 2간인

형식rdquo 즉 정면 7칸인 건물로 해석한 견해도 있다 (김동욱 「17세기 조선조 궁궐 內殿건물의 室內構成에 관

한 연구」『大韓建築學會論文集』1992년 10월호 88쪽) 세조 7년에 건물 이름을 명명할 때 침전을 兩儀殿

좌우 침실을 麗日殿과 淨月殿으로 정했다는 기사는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준다

7) 편전 이외에 보평청이 있었다고 하나 어디에 있었는지 그 역할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름은 무어라고 명

명되었는지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편전이 朝啓廳으로 불리며 思政殿으로 명명

된 사실을 고려할 때 혹시 편전은 朝啓(상참의식이 끝난 뒤 계문할 관원들과 史官이 함께 편전 안에 들어가

俯伏하고 차례로 용건을 말하는 정규회의)할 때만 쓰이고 보평청은 常參(약식 조회로서 매일 대신중신중요

아문의 당상관승지사관 등이 副殿에서 常服 차림으로 왕을 朝謁하던 정규 행사)에만 쓰인 것이 아닐까 추측

된다

8) 정전 월대가 폭 63자 깊이 방향 33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월대의 형태는 경복궁 근정전 월대처럼

정전 주변을 고루 두른 형식이 아니라 현재의 창덕궁 인정전 월대와 같은 모습 즉 건물 앞쪽만 길게 내민 형

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9) 『昌德宮』 -한국전통건축 제2집- 대한건축사협회 1994 41쪽 및 『太宗實錄』 太宗 17년 윤5월 정묘조

태종 18년 6월 계사조 동년 7월 갑진계축을묘조 『世宗實錄』 世宗 즉위년 9월 정사경신조 등 참조 또

등고선이 표기되어 있는 창덕궁배치도 참조

셋째 정전과 편전으로 이루어진 치조 일곽 가까이에는 왕의 통치를 측근에서 보좌할

여러 관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낙성 당일의 기사에는 정전 동행랑에 자리잡은 승정원

청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어서10) 태종대에는 『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간행)에 실려

있는 몇몇 관청조차도 갖추어지지 않았던 것같다11) 승정원 이외에도 궐 안에 있어야 할 관

청은 많았을 테지만 대부분 경복궁에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불편하지만 관리들이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업무를 처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405년에 서둘러 낙성된 창덕궁에 태종이 줄곧 머물러 있게 되자 이후에는 누각(廣延

樓와 澄光樓)과 침실 및 연못을 조성하고 후원에 소나무를 심고 정자를 세우는 등 아름다

운 경관을 조성하였다 또 어구를 파서 물길을 끌어들여 정전 앞쪽에 돌다리를 놓았으며 돌

다리 앞쪽에 궐문을 세우고 그 어귀에는 下馬標木까지 세우는 등 정궁에 버금가는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궁으로 조성된 나머지 핵심 부분인 정전 일곽이 너무 좁

아서 정치 행사를 할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말년인 1418년에는 인정전 일곽을 모두 헐어

다시 짓는 대규모 공사를 벌여 정전 일곽마저 경복궁에 버금가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

었다 이후부터 이궁인 창덕궁에서도 정궁에서만 행해지던 국가적인 대사를 치를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2) 창건 이후 조선 전기의 변화

태종을 계승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른 세종은 인정전 개축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창덕궁으로 이어한다 그리하여 세종 즉위년(1418)에 인정전 일곽의 개건 공사가 완공

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은데 반하여 세종은 즉위후 3년이 되던

해부터 자주 경복궁에 이어하고 기존 궁전을 수리하는가 하면 왕 8년(1426)에는 집현전 문

신들에게 궁내의 문과 다리 이름을 명명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왕 9년(1427)부터는 경복궁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궐내 제반 시설을 수리신설해 나가면서 점차로 경복궁의 법궁 체재를

완비해 나갔다 이에 견주어 창덕궁에 거처한 10년 동안에 경연청집현전장서각射廳

(궁성 西墻內) 등을 창덕궁 안에 새로 짓는 데 그쳤다 창덕궁 침전의 前廊은 修文堂이라 불

리며 태종세종이 늘 거처하던 곳이었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한 단종(1452~1455)은 창덕궁에 대한 전반적인 수리공사를 단

행하는 한편 태종때 개건된 지 35년밖에 안된 인정전 일곽까지도 다시 고쳐 지었다12) 이밖

에도 廣延樓에 별실을 지어 피서용으로 삼기도 하였다

창덕궁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세조때(1455~1468)였다 세조는 5년(1459) 9월 5일에

10)『太宗實錄』 卷 10 太宗 5年 5月 辛巳조 承政院廳 3칸 동행랑 10칸 남행랑 4칸 북행랑 4칸 바깥행랑 5

칸 外樓 3칸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서행랑을 따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승정원청이 인정전 동행랑에 자

리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승정원의 위치를 인정전 동쪽으로 적

고 있다

11)『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승정원을 비롯하여 빈청홍문관내반원도총부세자시강원세자익위사동궁 등이 창덕

궁 내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빈청동궁세자시강원세자익위사 등은 成宗때 세워진 것이

12)『端宗實錄』 권6 端宗 元年 4월 甲寅조 참조

후원에 못을 파게 하고 그 근처에 閱武亭을 세웠던 것 같으며 열무정 부근에서 4곳의 샘물

을 찾아내었다13) 열무정의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인 정조때 그 자리에 奉謨堂을 세웠다

고 하며 봉모당이 주합루 서남쪽에 있었 던 점으로 보아 열무정과 네 우물이 있던 곳까지가

후원의 영역이었던 것같다14) 그러나 이 일을 시작으로 하여 왕 7년 11월 24일부터 궁역 확

장을 계획하고 8년 2월부터는 궁성확충공사를 시작하였다 새로 쌓은 궁성은 동쪽으로 성균

관과 경계를 같이 할만큼 엄청나게 확장되었는데 둘레 4600자 높이 25자의 성을 쌓기 위하

여 한성부 백성 19040명(119家를 1統으로 하여 160통이 편성됨)이 동원되었다 이때 궁장

근처에 있던 민가 73호가 철거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창덕궁 후원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도

세조때의 궁역 확장공사 덕택이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세조는 7년 12월 19일에 그동안 위치와 역할에 따라 호칭되어 오던 궁내 건물의 이

름은 다음과 같이 확정되었다 즉 朝啓廳은 宣政殿 後東別室은 昭德堂 後西別室은 寶慶堂

정전(침전을 內正殿이라고도 부름)은 兩儀殿 동침실은 麗日殿 서침실은 淨月殿 누각은 澄

光樓 동별실은 凝福亭 서별실은 玉華堂 澄光樓下는 光世殿 廣延殿 별실은 求賢殿이라 이

름지어졌다 다만 인정전인정문진선문돈화문 등 정전 일곽과 광연루해온정 등 누정

의 이름은 일찍부터 정해져 사용되었다

여기서 편전인 선정전 뒤에 별실 2채가 있었다는 사실 침전에는 침실이 좌우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 태종 11년에 조성된 누각과 침실이 징광루와 응복정옥화당광세전 등으로

이름지어진 건물이라는 점 구현전으로 명명된 광연루(광연전) 별실은 단종때 조성된 것이라

는 점 등을 새롭게 알 수 있다 위 건물 가운데 광연루 일대는 성종 17년(1486)에 春宮으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1476~1506)이 1483년에 세자로 책봉된 지 3년째

되는 해로서 경복궁에도 세조 8년에 지은 동궁이 있었으나 성종이 창덕궁에 머무르기 위하

여 동궁을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은 창덕궁 안에 賓廳인 匪躬堂을 지었고 창덕궁 옆에는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

한 昌慶宮에 수많은 전각과 당우를 비롯하여 승정원홍문관사옹원사복시도총부 등

관청을 갖추었다 성종이 재위 26년간 내내 창덕궁 대조전 전랑(修文堂)에 거처한 사실을 감

안하면 왜 창경궁을 治朝와 관청까지 갖춘 궁으로 조성했는지 짐작이 간다 왜냐하면 창덕

궁에는 궐내각사가 고루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15) 성종 초반에는 대왕대비 정희왕희

가 창덕궁 안에 內佛堂을 짓기도 하였으나 그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다 또 성종 6

년(1475) 8월에는 宮門 29개소에 서거정을 시켜 이름을 짓고 현판을 걸었는데 이는 세조 8

년(1462)에 궁역을 확장하면서 새로 쌓은 궁성에 낸 새 문에 그때까지 이름이 없었기 때문

이었다16)

13)『宮闕志』昌德宮誌 閱武亭條

14)『宮闕志』昌德宮誌 奉謨堂 條 참조 봉모당은 「東闕圖」에도 주합루 서남쪽에 그려져 있으나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구선원전 서쪽 규장각 바로 뒤쪽으로 옮겨졌다(「東闕圖形」 고종년간『宮闕志』 참조)

15) 『新增東國輿地勝覽』卷之一 京都 下 文職公署武職公署 조에 보면 조선전기의 궐내각사는 경복궁이나 창덕

궁창경궁에 중복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왕이 정사를 보는 궁궐 가까운 곳에 관리들이 출근하여 정

치를 보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3궁의 시설은 수시로 번갈아가며 활용되었다

16)『成宗實錄』권58 成宗 6년 8월 己亥 조 참조 여기에는 창덕궁 궁문 29개소의 이름과 경복궁 궁문 8개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조선전기에 일어난 변화상 가운데 주목해야 할 일은 연산군때 이루어졌다 침전인 대조전

前廊에 있던 수문당(태종세종성종의 거처)이 소실되자 ldquo대조전은 낮고 수문당이 높아

통기가 안된다rdquo고 하면서 이를 고쳐 짓고 이름도 熙政堂으로 개칭하였는데17) 이로부터 침전

가까이에 세워진 희정당이 편전의 역할을 분담했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8) 그밖에도 연

산군은 폭정을 거듭하던 재위 말년에 선정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을 수리하거나 단청을 새로

하였고 인정전과 선정전의 기와를 청와로 바꾸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거듭되는 궁궐 공사

도중인 왕 1년에 反正이 일어나 왕위에서 쫒겨나자 모든 공사는 중지되었다 명종 5년에는

인정전 북쪽에 흠경각을 짓기도 하였다19)

태종때 이궁으로 창건되어 꾸준히 시설을 보완해 갔던 창덕궁은 세조가 후원을 조성하고

궁역을 확장하면서 크게 달라졌다 더구나 성종이 재위기간 전체를 창덕궁에 거처하면서 동

쪽에 창경궁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보좌할 수 있도록 한 결과 창덕궁과 창경궁은 조선전기에

이미 하나의 궁궐처럼 사용되면서 경복궁을 대신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으로 세 궁궐이 모두 소실된 뒤 경복궁을 제외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이

재건되고 인경궁과 경희궁이 창건되었을 때 그 모범적 선례는 경복궁 대 창덕궁창경궁이

라는 조선전기의 쓰임새에서 찾아졌던 것이다

나 조선 후기

1) 宣祖光海君仁祖代의 재건

경복궁창덕궁창경궁 등 조선전기에 이룩된 궁궐건축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창덕

궁이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버렸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누구에

의해서 소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대개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 즉 ldquo왕실과 관료들이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고 남은 빈 궁궐을 왜적이 수도 한성에 입성하기도 전에 우리 백성

들이 궁중에 침입하여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보물을 약탈했다rdquo는 설을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宣祖實錄』은 물론이고 유성룡(1542~1607)의 『西崖集』등 당시의 기록에 이러

한 견해를 싣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위 설은 목격담이 아니고 남에게 전해 들은 것

을 사실인 양 적은 것에 불과하다

유성룡이 불탄 궁궐을 직접 목격한 시점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

인 계사년(1593) 4월 20일이었는데 이때 종묘는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너진 채였다 그

러나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인 1592년 5월 2에는 경복궁은 전혀 불타지 않은 채 주인

잃은 빈 궁궐의 허허로움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왜군이 한성을 점령하고 승전고를 울리던

때까지는 경복궁과 한성 그리고 백성들의 목숨은 부지되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왜군

17)『燕山君日記』 燕山君 2년 6월 己丑 同年 8월 癸巳 8월 丙申 條 참조

18) 金東旭 「朝鮮時代 昌德宮 熙政堂의 便殿 轉用에 대하여」『건축역사연구』 5 한국건축역사학회 1994 6

9~21쪽 참조

19)『宮闕志』昌德宮誌 欽敬閣 條와 萬壽殿 條 참조

은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고 한성마저 탈환당하는 패전이 거듭되자 퇴각하면서 종묘와 궁궐

을 비롯한 도성내 모든 시설을 방화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왜군을 따라 전쟁에 참여한 從軍僧 제타쿠(是琢)의 『朝鮮日記』에는 왜군의 한성 입성

직후에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경복궁이 전혀 화재

를 입지 않은 채 온전하게 남아 있었음이 분명하다 즉

ldquo 북산 아래 남향하여 紫宮(경복궁을 가리킴)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다

섯 발자국마다 樓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閣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

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

자 4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 그 한 가운데에는 돌을 다듬어서 포개어 담

을 쌓았는데 높이가 8자이고 4귀퉁이에 방향에 맞추어 4마리씩 16마리의 돌사자가 놓여 있

다 그 위에 紫宸淸凉 두 전당이 있다 기둥은 돌기둥인데 아래 위에 용을 조각하였다

지붕에는 유리 기와를 덮었는데 잇단 기와 줄마다 푸른 용같다 서까래는 梅檀 나무인데

서까래마다 한 개씩 풍경이 달렸다 채색한 들보와 붉은 발에는 금과 은을 펴 돌렸고 구슬

이 주렁주렁 달렸다 천장 사방 벽에는 五色八彩로 기린봉황공작鸞학용호랑이등이 그려져 있는데 계단 한 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丹鶴을 새긴 돌이

깔려 있다 여기가 바로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이다rdquo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20)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 경복궁은

불에 타기는커녕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질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어서

종군나온 왜승으로 하여금 놀라움과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여기 인용된 기사는 경

복궁에 관한 것이지만 창덕궁의 사정도 벼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란이 끝난 뒤 국가 재건에 착수한 조정은 종묘와 궁궐을 빠른 시일 안에 복구하지 않

으면 안되었다 선조 38년(1605)에야 시작된 복구공사는 경복궁 중건을 목표로 진행되었으

나 선조 39년에 李國弼이 경복궁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중수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을 시작

으로 하여21) 선조 40년 2월에 경복궁의 길흉화복을 적은 역대의 문서를 검토한 다음 공사

는 창덕궁 중건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22) 여기에 더하여 호대한 규모의 경복궁을 재

건하기에는 물력과 인력이 모두 부족한 전란 직후의 형편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조 41(1608년) 정월 전후에 시작된 창덕궁 중건 공사는 두 차례로 나누어 진행되었는

바 광해군이 즉위한 그 해(1608) 10월에 완료된 1차 공사에서는 중요 전각이 대체로 조성되

었다 다음에 선조의 위패를 종묘에 祔廟한 직후인 1610년 봄에 재개된 2차 중건 공사에서

는 앞서 마무리하지 못했던 各司廂庫 등을 짓고 築墻하고 鋪甎하는 일을 1610년 9월에 이

20) 『京城府史』 上卷 京城府 pp269~270

21)『宮闕志』昌德宮志 昌德宮 條

22)『宣祖實錄』 선조 40년 2월 13일 조 주28)과 동일

르러 마쳤다23)

이때 중건된 건축에 대해서는 ldquo옛 제도를 따라 복구하였다rdquo는 상투구만 전할 뿐 구체적

인 기록이 없으나 정전편전침전 일곽이 옛터에 근거하여 복원되고 별당이 신조되었으

며24) 후원에는 정자도 세워졌다 한편 광해군 5년(1613)에는 世宗의 예지가 담겨 있는 시설

로 여겨진 欽敬閣이 인정전 북쪽에 재건되었고 왕 6년에는 창경궁 문정문 앞에 보루각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건된 지 얼마 안지난 1623년의 인조반정때 광해군이 거처하고 있던 창덕궁에

들이닥친 반정군이 광해군을 수색하던 중 失火로 外殿 가운데 인전전도총부內藥房春

秋館都總府郎廳房丕承閣弘文館 등과 內殿의 壽靜堂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건물이 소

실되고 만다25) 성종때의 춘궁터(태종때의 광연루 구현전터)에 중건되어 있던 儲承殿(동궁)

도 이때 소실되었다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할 수 없이 경운궁 별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

다 이후 인조는 창경궁에 거처하던 중 李适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마저 불타자 慶德宮으로

이어하였는데 인조 10년에는 창덕궁으로 이어하기 위하여 남아 있는 몇몇 건물을 수리하였

다 그리하여 왕의 거처는 내약방 왕비의 거처는 도총부 편전은 춘추관 동궁은 도총부낭청

방이나 비승각 경연청은 홍문관을 수리하여 마련하였다26)

인경궁을 헐어다 궁궐을 중건한다는 구상은 1633년에 먼저 창경궁을 짓는 것으로 시작

되었다27) 그러나 1636년의 병자호란 이후에는 국력이 크게 위축되어 궁궐을 중건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이 바람에 창덕궁의 중건공사는 늦어져서 1647년(인조 25)에 가서야 5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중건되었고 인조는 이때에야 비로소 창덕궁으로 還御할 수 있었다 창덕궁의

중건공사도 광해군이 무리하게 창건해 놓은 仁慶宮을 헐어 옮겨 짓거나 그 자재를 이용하였

기 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복구가 가능하였다28) 1648년(인조 26)에는 동궁인 저승전도 중

건됨으로써 창덕궁 중건공사가 마무리되었다29)

이때 건물의 복구는 5개의 작업소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1所에서는 大造殿集祥堂

澄光樓玉華堂靜黙堂부속 행각과 월랑 2所에서는 熙政堂承明門內行閣내반원기

타 월랑 3所에서는 寶慶堂泰和堂昭德堂燒廚房 4所에서는 선정전과 월랑 5所인에서

는 인정전 동월랑승정원臺諫廳과 인정문과 남월랑 등을 복구하였는데 모두 735칸에 이

르는 대규모 移建 및 重建工事였음을 알 수 있다30) 이때 중건된 건물 가운데 징광루가 가

장 장려하였다고 하며31) 또 지금껏 보존되어 있는 건물은 宣政殿뿐인데 이 건물은 인경궁

23)『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3 122~125쪽 참조

24)『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 9월 丁未 條 참조

25)『서울特別市史 古蹟篇』 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1963 127쪽 참조 또 『宮闕志』 昌德宮誌 壽靜殿 條

참조

26) 『仁祖實錄』 仁祖 10년 10월 辛卯 條 참조

27) 1633년의 창경궁 내전 중건 공사를 상세히 기록한 『昌慶宮修理所儀軌』가 남아 있다

28)『서울 六百年史 문화사적편』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95 61쪽 156~161쪽 및 金東旭 「仁祖廟의

昌慶宮昌德宮 造營」『문화재』 19호 1986 참조

29) 『宮闕志』와 『東國輿地備攷』 第一卷 京都 에서 창경궁에 소속시켜 정리하고 있다

30) 이때의 공사과정은 『昌德宮營建都監儀軌』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중건된 건물의 명칭 가운데 讌和

堂은 『인조실록』 인조 25년 11월 戊申 條에는 실려 있으나 이 의궤에는 빼져 있다

의 편전인 光政殿을 옮겨 지은에 것으로 주변 건물의 거듭된 화재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아

당시의 공포형식과 구조를 전하고 있다32)

위에서 살핀 것처럼 선조광해군인조대를 거치면서 조영된 창덕궁의 건축은 정전

편전침전 일곽과 별당이 대체로 조선전기의 유구에 근거하여 복원된 것이었으며 훗날

「東闕圖」(1828~1830년 제작)에 그대로 묘사된 것처럼 조선후기 창덕궁의 根幹을 이루게

되었다 다만 도총부홍문관대간청내약방내반원 등 조선전기에는 창덕궁에 두지 안

았던 관청들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이는 조선전기에 세 궁에 나누어 설치되어 있었던 관청

의 상당수가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자 창덕궁 안에 새롭게 조성되었음을 가리킨다33) 사정은

다른 궁궐도 마찬가지여서 창덕궁에 설치되지 않은 많은 관청이 창경궁이나 경희궁에 설치

되었다 한편 인조반정때도 소실되지 않은 채 보존되었던 비승각은 조선전기에는 없었던 건

물로 광해군 재건시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후대의 문헌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서 존속 여

부를 알기 어렵다

反正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계속된 화재로 재위

10여 년 동안 경운궁이나 경덕궁에 거처하였다 그러나 창덕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왕 10년에는 일시적으로 창덕궁에 거처하기도 하였으나 말년인 왕 25년에 이르러서야 창덕

궁의 중건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후원의 경영에 몰두하여 왕 14년(1636)부터

왕 25년(1647)에 걸쳐 끊임없이 정자를 짓고 원림을 조성하였다 즉 1636년(인조 14)에 歎逝

亭(rarr 逍遙亭)雲影亭(rarr 太極亭)청의정과 玉流川 1640년에 聚奎亭 1642년에 翠微亭(현

종 5년 개수하고 觀德亭으로 고침) 1643년에 竹亭(rarr深秋亭) 1644년에 六面亭(rarr 尊德亭)

碧荷亭(숙종때 淸讌閣으로 고침) 1645년에 醉香亭(숙종 16년에 喜雨亭으로 개칭) 1646년에

팔각정 1647년에 聚勝亭(larr 樂民亭)觀豊閣 등이 차례로 조성되었다34) 인조가 이렇듯 후

원 경영에 몰두한 것은 병자호란으로 입은 치욕과 복잡한 심사를 달래기 위하여서가 아니었

을까 후대의 왕들도 인조가 경영한 원림에 와서 ldquo萬機를 다스리는 여가에 샘물과 흐르는

물을 보고 마음을 함양하곤 한다rdquo고 하면서 인조의 원림 조성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였

다35)

2) 孝宗~正祖代의 변화

17세기 전반에 창덕궁은 정궁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비록 재목이 부족하여

인경궁을 헐어다 짓기는 하였지만 정전편전침전궐내각사를 비롯하여 후원의 원림까지

갖춘 대규모 궁궐로 경영되었고 창경궁의 보조를 받으면서 부족함없이 조선왕조의 왕정을

31) 징광루는 청기와를 덮은 2층 건물로 「東闕圖」에 그려져 있고 「東闕圖形」에도 그려져 있는데 1917년

창덕궁 내전 화재때 소실된 뒤 복구되지 않았다

32)『창덕궁』-한국전통건축 제2집- 52쪽 및 『서울 六百年史 文化史蹟編』 서울特別市史편찬위원회 1995

156~161쪽 참조

33) 이때 재건된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궐문인 敦化門뿐이다

34) 이상의 내용은 『宮闕志』 昌德宮誌의 해당 항목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며 괄호 안의 이름은 뒷날 개칭된

것이다

35) 『宮闕志』 昌德宮誌 太極亭 條의 숙종 어제 「上林三亭記」 참조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창덕궁은 조선전기에 이궁으로 출발하였으나 17세기 중반부터는

정궁의 시설을 갖추고 실제로 정궁 역할을 수행해 나갔던 것이다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는

한 경복궁은 상징적인 정궁일뿐 창덕궁이 실질적인 정궁이었던 것이다

이제 17세기 후반 이후에 창덕궁에 추가된 건축은 大妃殿東宮殿眞殿御齋室(養志

堂 이문원 부근 대유재와 소유재)후원의 별당과 정자 정도였다 즉 효종 5년(1654)에 수

리한 壽靜堂(인조때 세워진 건물)은 숙종 1년에는 壽靜殿으로 격상되어 인조 계비 壯烈王后

(1624~1688)의 거처로 정해졌으며 효종 6년에는 또 장렬왕후를 위하여 옛 흠경각터에 萬壽

殿을 지었는데 이 건물 일곽은 얼마 안가서 숙종 13년(1687)의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말

았으며 이후 다시는 재건되지 못하였다36) 또 효종 7년(1656)에는 慶德宮 景和堂을 移建하

여 春輝殿이라 고쳤다가 숙종 21년(1695)에 璿源殿으로 개칭한 다음 御眞을 봉안하였다 효

종은 이밖에도 후원에 魚水堂 과 天香閣(왕 4년)을 지어서 인조대에 조성된 원림 사이에 새

로운 원림을 하나 더 추가하였다37) 현종 8년(1667)에는 효종비 仁宣王后(1618~1674)를 모

시기 위하여 경덕궁 集禧殿을 철거해다가 집상당 옛 터에 옮겨 놓고 集祥殿으로 개칭하였

다38)

숙종대에는 東宮 書筵處인 誠政閣이 지어지고 왕 14년에 천문관측소인 齊政閣이 새로

지어졌다 후원에는 왕 18년에 영화당 일곽과 애련정 일곽이 조성되고 왕 33년에는 애련정

북쪽에 滌惱堂을 건립하여 현종대에 경영된 어수당 일곽의 원림을 완결지었다 또 후원 곳

곳에 정자를 지었는데 왕 14년에는 淸心亭 왕 15년에는 靈鼉亭 왕 17년에는 凌虛亭을 차례

로 지어 나갔다 이리하여 숙종대의 원림 조성을 끝으로 창덕궁 후원은 주합루 구역을 제외

하고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숙종 30년(1704)에는 궁성 서북쪽 밖에 있

던 別隊營의 庫舍를 헐고 임진왜란때 대군을 파견하여 도와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신종을

享祀하기 위하여 大報壇 일곽을 건설하였다39) 영조대에는 30년(1754)의 선원전 수리를 비

롯하여 영조 15년(1739)의 香室 21년(1745)의 齋殿 25년의 대보단 중수와 전사청 악공청

재생소 신건 등 10여 년 간에 걸쳐 대보단을 새롭게 변모시켰다40) 이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는 영조가 재위 기간 대부분을 경희궁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대에는 즉위년에 후원 안 희정당 옆에 규장각과 서향각을 짓고 왕 5년

(1781)에는 규장각 학사들의 숙직처인 이문원을 도총부 자리에 설치하는 등 숙종대에는 궁

궐밖 종부시에 있었던 규장각을 궁궐 안으로 끌어들여 右文政治를 표방하며 왕권강화의 토

대를 마련하였다 왕 9년에는 이문원 근처에 서적 보관처인 東二樓를 새로 지었으며 선원전

36) 이때의 공사 보고서로 『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가 전한다

37) 어수당의 창건 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효종이 지은 시가 남아 있고 인조대에는 이 건물이 없었기 때

문에 효종때 지어진 것으로 해석하였다(『宮闕志』 昌德宮誌 魚水堂 條 참조

38) 이때의 공사 보고서로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가 프랑스 군대에 의하여약탈된 『昌德宮修改廳儀

軌』가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이크로필름본이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김동욱

「17세기 조선조 궁궐 內殿건물의 室內構成에 관한 연구」『大韓建築學會論文集』 1992년 10월호 87쪽 주

4 참조)

39) 경봉각은 창경궁 동룡문 안에 있던 것을 정조 23년(1799)에 옮겨 온 것이다(『東國輿地備攷』 京都 宮殿

昌德宮 條 참조

40) 『宮闕志』 昌德宮 lsquo萬世誦恩rsquo 조 「皇壇齋殿小識」(1745년) 「大報壇重修後小識」(1749)

이나 皇壇(대보단)을 展拜할 때 왕이 齋宿하던 御齋室인 大酉齋와 小酉齋는 정조 19년에 창

건되었다 한편 정조 6년(1782)에는 고대하던 장남(文孝世子)을 얻은 것을 계기로 동궁이 신

하들로부터 하례를 받거나 그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重熙堂을 창건하였다41) 이 시기에 동궁

의 처소로 天地長男宮과 文華閣 일곽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42) 또 정조 9년에는 창경궁

자경전을 짓다가 남은 재목을 활용하여 이극문 안 옛 수강궁터에 壽康齋를 지었는데43) 이

건물은 순조 27년 익종의 대리청정시 별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44)

「東闕圖」에 표현되어 있으나 1833년에 영춘헌을 짓기 위하여 헐린 天地長男宮 일곽은

세자의 거처로 중희당 바로 옆에 있었다45) 그리하여 중희당 일대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

계 지역이면서 순조대에 세자 익종이 거처하고 공부하던 곳으로서 훗날 代理聽政(1827년~

1830년)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익종은 창덕궁 안에 待鍾軒演慶堂倚斗閤 일곽田舍

(1826년) 등 많은 시설을 경영하였다46) 특히 후원의 의두합과 연경당은 대리청정 시기에

전자는 독서처로 창건한 것이고47) 후자는 1828년에 珍藏閣 옛터에 進宴處로 사용하려고 특

별히 창건한 건물이다48) 당시 연경당의 모습은 「東闕圖」와 『慈慶殿進爵整禮儀軌』의 圖

說 「演慶堂圖」(1828년 2월)에 잘 묘사되어 있으며 이로써 주택 형식의 현존하는 연경당은

적어도 헌종대 이후에 새로 지어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49)

3) 순조대의 소실과 재건

조선후기 궁정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던 창덕궁은 「東闕圖」에 그

려진 것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앞 시기에는 소규모의 화재도 있어서 숙종 13년(1687)

에 춘휘전(숙종 21년에 수리후 선원전으로 개칭)만 남겨 두고 萬壽殿 일곽이 모두 소실되었

는데 이후 복구되지 못하여 「東闕圖」에도 빈 터로 그려져 있다 또 동궁인 저승전 일대가

영조 32년(1702)에 소실되었다

41) 중희당 일곽은 1891년에 헐려 다른 곳에 이건되었으며 그 자리는 현재 후원으로 가는 진입로로 변해 버렸

다 (고종년간 『宮闕志』) 자세한 것은 이 글 3절 창경궁 부분 참조

42) 이강근 「조선 후반기 건축의 대외교섭」『조선 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2007

43) 『正祖實錄』 20권 9년(1785 을사) 8월 27일(갑진) ldquo建壽康齋貳極門內 有古井焉 慈慶殿之營建 以餘礫

剩磚 峙井上爲假山 至是撤去而浚其井 建小齋以臨之 是地 太祖朝壽康宮舊基 在《輿地勝覽》 仍命其齋

曰壽康rdquo

44)『純祖實錄』28권 27년(1827 정해) 2월 9일(을묘) ldquo議政府 以王世子聽政節目 別單啓【一 聽政節目 依

傳敎 以乙未事例磨鍊 一 聽政處所正堂 以重熙堂爲之 別堂壽康齋爲之rdquo

45) 이강근 「조선 후반기 건축의 대외교섭」『조선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2008 pp - 천지장남궁

과 그 좌측의 문화각 일곽은 정조 연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46) 『宮闕志』 昌德宮誌 해당항목 참조

47) 『宮闕志』 昌德宮誌 倚斗閤 條에서는 익종이 세자 시절에 예전의 독서처를 改建하였다고 적고 있어서 수리

를 한 것쯤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1826년에 쓴 「翼宗御製 倚斗閤上樑文」의 존재로 이 건물이

1826년부터 1827년 사이에 새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48) 『東國輿地備攷』 京都 宮殿 昌慶宮 演慶堂條 참조 純祖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축을 당하여 마침 집이 이루

어졌으므로 연경이라 이름하였다고 설명되어 있으나 尊號儀禮를 거행할 장소로 창건된 것으로 해석해야 옳

다(이강근「東闕圖」『建築文化』 1997년 9월호)

49) 고종 2년의 수리가 현존 연경당의 모습으로 변경된 계기였을 것으로 해석한 글이 주목된다(김동욱 「고종

2년의 연경당 수리에 대해서」 『건축역사연구』 한국건축역사학회 2004 3)

그러나 연이은 화재로 궁궐이 온통 소실된 때는 단연 순조대였다 먼저 순조 3년(1403)

에 仁政殿이 소실되어 이듬해에 중건되었다50) 11년(1411)에는 인정전 서월랑의 藝文館이

소실되어 또 중건하였는데 이때 고래의 史籍이 모두 불타 버렸다 또 1824년에는 대비전인

景福殿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정말 큰 화재는 순조 33년 10월에 일어났다 이 화재로 안으로

는 대조전으로부터 밖으로는 희정당까지 모두 소실되었으니 그 피해는 놀라울 정도로 큰 것

이었다 다만 인정전과 선정전 일곽이 불에 타지 않은 채 보존되었다 1년만인 이듬해 9월에

모두 중건되었다

이때의 중건공사에 대해서는 『昌德宮營建都監儀軌』(1834)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儀軌圖로 그려진 건물의 모습이 「東闕圖」와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점으로 미루어 중건하

면서 약간의 수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51) 그러나 『궁궐지』에서는 ldquo모두 370여 칸이 중

건되었으며 옛 유구를 토대로 하되 間架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복원하였다rdquo고 적고 있다

이때 중건된 건물은 대조전희정당징광루경훈각옥화당융경헌흥복헌양심합克

齋齋정묵당內燒廚房外燒廚房 등이었다 『宮闕志』(高宗年刊)에서 보듯 적어도 건물만

큼은 原狀回復된 것으로 보인다 순조 말년에 창덕궁창경궁경희궁을 모두 복구하고 나

서 그것을 기념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엮은 책이 바로 위 책이다

순조대 대왕대비전으로는 경복전과 수정전이 있었다 이 가운데 수정전은 1794년 12월

8일 정조의 명으로 慈殿(英祖繼妃 貞純王后)에게 冊寶 慈宮(정조 생모 혜경궁)에게 冊印을

바치고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서 수리되었고52) 이때 건물 이름도 壽靜殿으로

격상되었다53) 1796년에는 원자(훗날의 순조)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기도 하였다54)

대왕대비 정순왕후(1745-1805)는 이후 수정전에 거처하였으며55) 정조 사후 5년 뒤인

1805년에 景福殿에서 승하하였다56) 이후 正祖妃 孝懿王后(1753-1821)가 수정전에서 거처하

였는데 1813년에 12월 13일 밤에 수정전 동행각에서 화재를 만났으며 다행히 불을 꺼서 수

정전은 무사했다57) 효의왕후는 1821년 3월에 창경궁 慈慶殿에서 승하하였다 이보다 5년 앞

50) 1804년의 공사 내역은『仁政殿營建都監儀軌』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51) 金東旭 『朝鮮後期 宮闕建築의 造營에 관한 硏究』 -純祖朝의 西闕東闕 造營에 대해서- 文化財硏究所

1990 및 안휘준 『옛 궁궐 그림』 대원사 1997 72~75쪽 참조

52)『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 lsquo수정전rsquo조에서는 1623년 인조반정때 대내에서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며

효종 5년(1654) 인조의 繼妃 莊烈王后를 위하여 고쳐 지었으며 을묘년부터 전으로 격상시켜 불렀다고 적혀

있다(ldquo孝宗五年甲午爲 莊烈王后改建 乙卯改稱殿rdquo) 여기서 을묘년은 정조 19년(1795)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

53)『일성록』정조 18년(1794년 갑인) 12월 18일(신미)

54)『일성록』정조 20년 10월 4일(병자) ldquo領議政 洪樂性曰翁主痘候聞極平順 今已出場不但 今番之欣喜 可占兆端

之吉慶矣 予曰果如卿言矣 予敎元子拜諸大臣亦拜 予曰今番痘憂慈宮獨貽勤勞下情不安 及今出場大加喜悅萬萬欣

幸矣 予於慈宮 經旬離側 今番初有也 元子則姑爲 入處于壽靜殿 予則今將還謁慈宮矣rdquo ldquo予乘軺軒 以出元子陪焉

由永肅門 拱辰門 入壽靜門 詣壽靜殿 元子仍留 予還出壽靜門 乘軺軒 由宜春門 靑陽門 宣明門 保定門 萬八門

還內rdquo

55)『內閣日曆』 순조 21년 7월 19일(丁卯) lsquo正宗大王孝懿王后誌文rsquo 또 『健陵誌狀續編』遷陵誌文[純宗二十一年

辛巳] ldquo二十八日己卯疾大漸 大臣閣臣入候臥內 王已不能語而 微微有玉音曰壽靜殿 卽貞純大妃所御殿 蓋聖意若

有仰告於 慈聖者也 遂昇遐于昌慶宮之迎春軒 春秋四十九 大喪之日 都人士庶顚仆哭踊深山rdquo

56) 창덕궁 내 大妃殿의 하나였던 경복전은 1824년에 화재로 소실된 뒤 중건되지 않았기에 「동궐도」에마저 터

로 표현되어 있다 1803년에 순조가 직접 지은 lsquo景福殿記rsquo에서 그리고 있듯이 동서남북으로 각각 拾翠軒 萬

寧門 愛蓮齋 松竹軒이 빙 둘러 연해 있었으며 울창한 소나무 숲과 연못의 연꽃이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그

런 곳이었다 『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 lsquo경복전rsquo 조

서 惠慶宮(1735-1815)은 1815년 12월에 창경궁 景春殿에서 승하하였다58) 1822년 12월에는

정조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嘉順宮(1770-1822)도 창덕궁 寶慶堂에서 서거하였다59) 순조

의 증조모 조모 모 생모가 차례로 돌아가셨으므로 1822년 12월 이후에 수정전을 비롯한

궐내의 여러 대비전은 텅 비게 되었다

4) 憲宗哲宗代의 변화

이후 헌종 헌종 13년(1847)에는 樂善堂 옛 터에 헌종의 침전인 樂善齋가 건립되었고 왕

14년에는 그 옆에 왕자 출산을 위하여 새로 맞아들인 경빈 김씨의 거처로 錫福軒을 지었다

석복헌 오른쪽에 연접해 있는 壽康齋는 정조 9년(1785)에 지은 건물인데 낙선재 창건시 대

폭 중수되어 대왕대비인 純祖妃 純元王后(1789~1857)의 거처로 삼았다60) 한편 1843년(헌종

9)에는 헌종비(孝顯王后 1828-1843)61) 1857년 12월에는 순조비(純元王后 1789-1857)62)

1878년에는 철종비(哲仁王后 1837-1878)가 승하하였으므로63) 궐내에는 익종비(神貞王后

1808-1890) 헌종 계비(孝定王后 1831-1903) 등 왕실 어른 두 분만이 살아 계셨다64) 1868

년 7월부터는 중건된 경복궁으로 왕실이 移御하자65) 창덕궁내 여러 전각의 쓰임새는 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창덕궁에는 19세기 전반기에 다음과 같은 闕內各司가 설치되어 있었다 즉 규장각이

문원승정원홍문관빈청(匪躬堂)예문관도총부내병조尙瑞院尙衣院司饔院

典設司典涓司太僕寺內班院侍講院翊衛司內醫院鑄字所 등 거의 모든 관청이 설

치되어 있었다 다만 내사복보루각 등은 창경궁 안에만 설치되었고 궁궐호위와 수비를 맡

은 군사시설이 창덕궁에 남소와 서소만 설치되고 동소와 북소는 창경궁에 설치되어 있는 점

57)『內閣日曆』순조 13년 12월 18일 ldquo壽靜殿行閣失火 夜初更失火 敎曰 宮城扈衛置之 夜一更 壽靜殿東行閣失

火救火後 大殿 王大妃殿 中宮殿 惠慶宮 嘉順宮 世子宮 口傳問安 答曰知道 金祖淳 沈象奎 南公轍 徐榮輔 李存

秀 金履喬 李魯益 李光文 鄭元容 朴宗薰 李龍秀 李鶴秀 進參rdquo 여기서 대전은 순조 왕대비전은 정조비 효의

왕후 혜경궁은 정조의 생모 가순궁은 순조의 생모임

58)『純祖實錄』 순조 15년 12월 15일 21년 3월 9일

59)『純祖實錄』순조 23년 계미(1823 도광 3) 2월 3일(계묘) 빈은 英宗 경인년 5월 8일에 탄생하였고 正宗 정

미년에 빈으로 선발 되었는데 殯號는 綬이고 宮號는 嘉順이다 지금 주상 전하 22년 壬午 12월 26일에 昌德

宮 寶慶堂에서 승하하니 향년 53세였다

60) 盧辰河李相海 「樂善齋一廓 建築의 造營에 관한 復元的 考察」『건축역사연구』 7호 건축역사학회 1995

43~70쪽 참조

61)『憲宗實錄』「총서」 ldquo妃는 孝顯王后 金氏【籍은 安東이다】이니 領敦寧府事 永興府院君 贈 領議政 金祖

根의 딸로 무자년【순종 28년이다】 3월 14일 계축에 탄강하여 정유년에 王妃로 책봉되었는데 계묘년 8월

25일 을축에 승하하니 춘추 16세였다 景陵에 장사하였다rdquo

62)『日省錄』철종 8년(1857) 12 월 17일(갑자) ldquo檢校提學臣金炳冀製進哀冊文曰維歲次丁巳八月己酉朔初四日壬

子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睿成弘定純元王后昇遐于昌德宮之養心閤移殯于歡慶殿以是年十二月戊申朔

十七日甲子將合祔于仁陵禮也rdquo

63)『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5년 무인(1878 광서 4) 5월 12일(신유) 대비전이 승하하여 擧哀한 뒤 대전 대왕

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약방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망극하다고 답하였다

64)『고종시대사』3집 1890년(淸 光緖 16年) 4月 17日(丙辰) 未時에 大王大妃 趙氏(翼宗妃)가 興福殿에서 昇遐

하다 신정왕후는 집옥재를 이건하기 전 해에 돌아가셨다

65)『국역 승정원일기』고종 5년 무진(1868 동치 7) 7월 2일(정축) 移御한 뒤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종친 의빈 약방 내각 정원 옥당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등으로 보아 두 궁은 하나의 궁궐처럼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이 두 궁을 합

쳐서 東闕로 부르게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昌德宮은 外朝와 治朝를 중심으로 하

되 왕과 왕비의 침전을 갖춘 궁으로 昌慶宮은 燕朝를 중심으로 하되 동궁과 대비전을 갖춘

궁으로 역할을 분담하면서 하나의 궁궐처럼 운용되었던 것이다 哲宗代에는 철종 5년(1854)

9월부터 8년 윤5월 사이에는 1804년에 중건된 인정전의 해체중수공사가 있었는데 공사 내

역은 『仁政殿重修儀軌』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3) 근middot현대기

(1) 1865년~1910년의 변화

선조~광해군대에 중건된 이래 250여 년 동안 조선왕조의 정궁으로 사용되던 창덕궁은

고종 초반에 경복궁이 중건되자 격하되어 본래의 이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창덕궁의 쓰임새가 하루 아침에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1873년과 1876년 두 차례에 걸쳐 큰 화재가 발생하자 1877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수리하

고 이어하게 된다 1891년에는 중희당을 비롯하여 수정전 영역의 별당이던 集玉齋와 協吉堂

을 경복궁 내로 옮겨지었다

집옥재는 경복궁 신무문 안쪽 가까이에 있는 벽돌조 건물이다 집옥재를 중심에 두고

향좌측에 2층 복도로 연결된 중층 八隅亭이 있고 향우측에는 또 중층 복도로 연결된 단층

맞배지붕 정면 5칸 규모의 協吉堂이 있다66) 이 가운데 집옥재와 협길당은 1881년에 창덕궁

咸寧殿(壽靜殿을 중건한 뒤 변경한 명칭)의 北別堂과 西別堂으로 세워진 건물이었는데 지어

진 지 10년 뒤인 1891년에 경복궁의 지금 자리로 함께 옮겨졌다 이 시기에 경복궁에서 일

어난 두 차례의 화재(1873년 4월과 1876 11월)등의 사유로 왕실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는 일

이 있었다 첫 번째 이어는 1873년 4월의 내전 지역 화재로 인하여67) 1873년 12월 20일에

있었는데 이때 창덕궁을 미리 수리하였다68)

그러나 1875년 2월에는 다시 경복궁으로 이어하였으며69) 1876년 4월에 경복궁 내전 중

건공사가 완료되었다70) 그러나 같은 해 11월에 다시 큰 화재로 경복궁 내전 일곽이 모두

66) 집옥재가 있는 영역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 지역으로 묶여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가 45년만인 2006년

9월 29일에 처음 민간에 개방되었다 출입금지 구역이던 시절에 두 차례 수리공사가 있었는데 1차는 1982년

의 보수공사(『集玉齋補修工事報告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2)이고 2차는 2005년의 수리공사(『集

玉齋修理調査報告書』 문화재청 2005 12)이다 2차 공사에 대한 조사보고서에는 집옥재의 연혁과 이건 이

유에 대한 견해가 서술되어 있어서 참조를 요한다

67) 『日省錄』고종 10년(1873) 12월 10일 (갑신) ldquo慈慶殿失火 巳時火起於純熙堂二十四間延燒錫趾室十二間慈慶

殿三十二間福安堂六間紫薇堂三十八間交泰殿三十六間複道二十八間行閣一百八十八間半合三百六十四間半rdquo

68)『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0년 계유(1873 동치 12) 12월 20일(갑오) 눈 ldquo창덕궁으로 移御한 뒤에 대전 대

왕대비전 왕대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의 2품 이상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

고 답하였다

69)『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2년 을해(1875 광서 1) 5월 28일(갑자) 비 ldquo이어한 뒤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

비전 대비전 중궁전에 종친 의빈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 2품 이상과 육조 대사간이 구전으로 문안하

니 알았다고 답하였다rdquo

70)『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3년(1876) 4월 1일 교태전 자경전 자미당 인지당 4건물을 짓는 데 공을 세운

소실되었으므로71) 1877년 3월에는 다시 창덕궁으로 이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창덕궁과

창경궁을 다시 수리하였다72) 이후 1885년에 경복궁으로 이어할 때까지73) 왕실은 창덕궁에

머물러 있었다 한편 1882년 6월에 경복궁으로 다시 이어하겠다는 전교가 있었으나 곧 철회

된 일이 있었다74) 같은 날 임오군란이 발발하고75) 1884년 12월 4일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자 왕실은 창덕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복궁 내전의 재건은 1888년이 되어서

야 겨우 완료되었으며76) 이 시기에 고종은 1873년에 창건된 乾淸宮 영역에 거처하면서 정

사에 임하였다

1881년(고종 18) 3월의 수정전 수리 공사는 경복궁 내전의 두 번째 화재로 촉발된 창덕

궁 이어로 왕실이 창덕궁에 머무르던 기간에 시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수정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여러 채의 별당을 짓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살아계신 두 대비와 관련

이 있는 것일까 적어도 명분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고종은 수정전 수리 공사를 지시하

는 자리에서 그 해가 생전에 수정전에 거처하셨던 정조비 효의왕후의 승하 60주년임을 상기

시키면서 슬픔을 견딜 수 없다고 하고 건릉에 예관을 보내 헌작례를 올리게 하였다77) 정조

대의 불행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수정전 일곽 증설 공사에 정조대의 정치를 흠모하는 고

종의 의도가 엿보인다78)

문제의 집옥재는 바로 이때 수정전(공사후 함녕전으로 개칭)의 北別堂으로 지어진 건물

이다 3월 1일 고종의 지시로 시작된 수정전 일곽 보수공사와 별당 신축공사는 그 해 11월

사람들에게 시상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때 중건 공사가 일단락된 듯하다

71) 『日省錄』 고종 13년(1876) 11월 4일(신유)

72)『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4년 정축(1877 광서 3) 3월 10일(병인) 낮에는 맑고 밤에는 비가 옴 또 무위

소의 말로 아뢰기를 ldquo창경궁을 수리하는 역사가 지금 이미 끝났으니 諸色工匠들을 모두 해산해 보내겠습니

다 감히 아룁니다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헌직이 호조의 말로 아뢰기를 ldquo창덕궁을 수리하는 역

사가 지금 이미 끝나서 제색 공장들을 모두 해산해 보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辰時 대가가 창덕궁으로 환어하였다

73)『국역 승정원일기』 고종 22년 을유(1885 광서 11) 1월 17일(정사) 맑음 ldquo移御한 후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약방 내각 정원 옥당 조정의 2품 이상 관원 육조 당상이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rdquo

74)『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9년 임오(1882 광서 8) 9월 29일(임자) 맑음 ldquo부교리 趙性鶴이 상소하기를 hellip

(중략)hellip 毓祥宮이 불탔지만 한 달이 넘도록 아직 영건하지 못하고 있고 경복궁으로 移御하라는 명을 비용을

아끼느라 어쩔 수 없이 還收하셨으니 우리 전하의 효도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통하시며 지은 지 오래된 곳을

떠나 새 궁궐로 가고자 하시는 마음이 얼마나 절박하겠습니까rdquo

75)『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9년 임오(1882 광서 8) 6월 5일(기미) 맑음 ldquo조병직에게 전교하기를 lsquo경복궁으

로 移御할 것이니 該房은 그리 알라 날짜는 이달 그믐 이전으로 가려서 들이라rsquo 하였다

76) 『日省錄』고종 25년 4월 12일(계사) ldquo重建所以交泰殿 康寧殿 麟趾堂 紫微堂上樑吉日今月十五日未時 推擇

上樑文製述官 書寫官別單書入啓rdquo

77)『고종실록』고종 18년 3월 1일(계해) ldquo지시하기를 lsquo이해 이달은 바로 정조비 孝懿王后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된다 지나간 옛날을 생각하면 슬픔을 어찌 견디겠는가 이달 9일 健陵의 酌獻禮는 大臣을 보내서 대

신 거행하도록 할 것이다rsquo라고 하였다 또 지시하기를 lsquo壽靜殿의 여러 곳을 수리하는 것과 새로 공사하는 것

은 본소로 하여금 거행하게 할 것이다rsquo 라고 하였다rdquo 『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8년 신사(1881 광서 7) 3

월 1일(계해) ldquo 송병서에게 전교하기를 lsquo壽靜殿 여러 곳의 重建과 營建을 본소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rsquo

하였다rdquo 무위소의 말로 아뢰기를 lsquo수정전 여러 곳의 중건과 영건에 대한 일을 본소에서 거행하라고 명하

셨습니다 역사를 시작할 길일을 일관 韓應翼으로 하여금 날을 택하게 하였더니 이번 3월 2일 시가 길하다

고 하였습니다 이날 이 시각에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rs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rdquo

78) 이태진 「大韓帝國 皇帝政과 民國 정치이념의 전개 -國旗 제정보급을 중심으로」『한국문화』 22 1997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pp 279-305에 「고종의 국기제정과 君民一體의 개념」이라는 제목

으로 재수록)

까지 진행되어 거의 모든 건물이 완공되었던 듯하나 11월 7일의 화재로 150칸 정도가 불타

버리고 말았다79) 이때 함녕전과 더불어 東別堂 南別堂은 소실되었으나 서별당인 協吉堂과

북별당인 集玉齋만은 소실되지 않았다80) 이후 1882년 6월초까지 진행되던 공사는 임오군란

발발로 중지되었고 1891년 3월 21일 이후 중건소가 주관한 함녕전 일곽 移建 공사에서 함

녕전 등 여러 건물은 어디론가 이건되었으며 1891년 7월에는 집옥재와 협길당도 경복궁으

로 이건되었다

1891년 3월의 함녕전 일곽 이건으로 시작된 이 시기 창덕궁 건물의 타 장소 이건은 담

당기구인 중건소를 설치하여 진행되었다 1891년 4월의 경복궁 계조당 개건 5월의 창덕궁

중희당 이건 7월의 경복궁 寶賢堂 改建과 집옥재 이건으로 이어지면서 6개월 이상 대규모

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료에 이건 장소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함녕전 중희당

등 창덕궁내 여러 건물이 어디로 이건되었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종 37년(광무 4 1900)에 비워 두었던81) 경운궁 선원전 제1실에 태조 고황제의 어진

을 새로 모사하여 봉안하게 되자82) 경복궁과 창덕궁의 선원전에도 태조 고황제 어진을 봉

안하기 위하여 새로 제1실을 증건하게 되었다83) 그 결과 창덕궁 선원전(현 구선원전)은 신

실 7실을 갖추고 정면 9칸 측면 4칸인 규모로 확장된 모습으로 확정되었다 이 시기 선원전

일곽의 평면 구성은 東闕圖形 에서 확인할 수 있84)

융희 1년(1907)에는 고종황제가 폐위당하여 경운궁(이때 덕수궁으로 개칭)에 거처하게

되자 창덕궁에서 純宗(1907-1910)이 즉위하였다 1908년에는 인정전 일곽을 크게 수리하면

서 進善門(광해군때 중건된 건물로 추정됨)을 철거하였다

(2) 1910년~1945년의 변화

1910년 8월 29일에 불법적으로 맺어진 한일합방 조약이 인정전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리

하여 亡國과 함께 순종은 昌德宮殿下로 격하되었다 그 뒤로 왕실의 규모는 그럭저럭 유지

되지만 나라 잃은 왕조의 왕실과 궁궐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1907년부터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창덕궁의 개조 왜곡으로 인한 변형 훼손 과정은 우리 민족문화 전체를 말

살한 일제침략자들의 간악한 문화 파괴 행위의 시금석이다 장서각 소장 창덕궁 평면도 3종

을 바탕으로 이 시기 창덕궁 宮域의 단계적 변화 양상을 추적해 볼 수 있는데 이는 곧 창

덕궁의 파괴 과정이다

79)『국역 승정원일기』고종 18년 신사(1881) 11월 8일(병신) 맑음 ldquo영건소가 아뢰기를 지난밤 화재 때 殿堂

과 行閣 150칸이 모조리 타 버렸습니다(후략)rdquo

80) 화재 다음 해인 고종 1년(1882) 3월 14일부터 6월까지 진행된 공사에서는 咸寧殿 衍福堂 正善堂 등 3채만

이 계속해서 언급되었을 뿐 협길당과 집옥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국역 승정원일기』 참조)

81)日省錄 광무 3년(1899) 11월 29일(임인) 高宗實錄 고종 36년(1899) 12월 31일(양력) 日省錄 광무 4

년(1900) 4월 3일(갑술) 관보 第一千五百六十四號 光武 四年 五月 三日 木曜 1 宮廷錄事 관보 第一

千五百六十五號 光武 四年 五月 四日 金曜 1 宮廷錄事

82) 高宗實錄 고종 37년 5월 18일(양력)

83) 高宗實錄 고종 37년 5년 22일(양력)

84) 이강근 「조선후기 선원전의 기능과 변천에 관한 연구」『강좌 미술사』35 2010 pp245-246

즉 1911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장서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形」

과 비교하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敦化門에서 仁政門에 이르는 행각이 없어졌고

그 자리에 宮內府廳舍가 생겼으며 ② 인정전 행각이 모두 개조되었고 후면에 대조전으로

연결되는 긴 행각이 생겨났다 ③ 선정전과 희정당 앞쪽에 있던 관청들이 모두 헐리고 선정

전과 희정당 사이에 사다리꼴 담이 생겼다 ④ 선정전 뒤 보경당 태화당 재덕당 영역이 없

어지고 그 자리에 lsquoㅍrsquo자형 건물이 생겼다 ⑤ 빈청을 지나 낙선재로 가는 길목에 있던 건물

은 모두 없어지고 길로 변하였다 이로 인하여 돈화문에서 곧장 후원으로 연결되는 신작로

와 창경궁으로 연결되는 신작로가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는 대체로 1907년부터 1909년 사이

에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같은 도면의 창경궁 영역에서는 植物本館(1909) 植物培養室

(1911) 博物本館(1911)이 신축되어 있어서 도면 작성시기는 1911년경으로 생각된다

또 1911년부터 1921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

形」과 비교하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돈화문 앞 차도가 확장되고 雲峴 쪽 신작로

가 연결되었다 ② 돈화문 안 오른쪽의 수문장청이 없어지고 왼쪽의 영군직소는 lsquo消防所rsquo로

바뀌고 금호문 밖의 건물은 경찰서로 바뀌었으며 금천교를 향해 왼쪽에는 헌병소가 생겼다

③ 檢書廳 內閣 奉謨堂으로 이루어진 奎章閣 영역은 내각 건물에 봉모당을 봉모당 건물에

譜閣을 설치한 이외의 주변건물은 모두 없어졌다 ④ 인정전 서행각 밖에 있던 政廳 玉堂

藥房 永依舍 등이 모두 없어지고 덜렁 창고 한 채가 생겼다 ⑤ 선원전 영역에서는 선원전

에 元璿源殿이라 쓰고 養志堂을 헐었다 ⑥ 선원전 이북의 숙경재 소주방 생물방 수라간

등 일곽을 모두 헐고 營繕倉庫(현존 의풍각) 木炭庫 醬油庫 등을 신설하였다 ⑦ 대보단을

헐고 관통하는 길을 냈으며 대보단 남쪽 궁장 밖 별도의 영역(北一營 자리)에 1921년에는

선원전과 懿孝殿을 덕수궁으로부터 移建하였다 ⑧ 1917년에 소실된 대조전 일곽을 1920년

에 경복궁 내전을 헐어다 재건한 모습이 그려져 있고 이때 새로 지은 生果房 주방 등이 대

조전 서쪽에 그려져 있다 또 뒤뜰에 嘉靖堂이 移建되어 있다 ⑨ 낙선재 일곽 남행각 밖의

모든 건물이 없어지고 낙선재에 현관이 수강재 옆 마당에 여러 창고가 창경궁과의 경계에

담이 신설되었다 ⑩ 이왕직청사 뒤에 창고가 신설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11년부터 1921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므로 도면 작성시기는 빨라야 1921년경으로 추정된다 또 이 도

면에는 종묘와 창경궁 사이를 가른 도로(1932년 개통)가 아직은 신설되지 않았으므로 1932

년 이전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1936년경에 작성된 장서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東闕圖形」과 비교하

여 영역별 변화상을 살펴보면 ① 돈화문 안쪽의 경우 소방서는 창고로 헌병소는 昌德宮支

署와 봉모당사무실로 경찰서는 舊 昌德宮警察署 등으로 바뀌어 있다 ② 元선원전 주변의

부속건물은 모두 헐렸다 ③ 희정당 오른쪽의 觀物軒에 lsquo緝熙rsquo라고 처음 적었다 이러한 변화

1는 1936까지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 3장의 장소각 소장 창덕궁평면도를 토대로

1907년 이후부터 1936년까지 창덕궁에서 일어난 변화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85)

이 가운데 가장 극심하게 파괴된 곳은 정전인 인정전 일원 편전인 선정전과 희정당 일원

85) 이강근 「장서각 소장 궁궐도면」 『건축역사연구』 63호 2009 4 pp 142-143

침전인 대조전 일원 등이었다 통치 기능이 마비되면서 1909년에는 궐내각사를 대신하여 이

를 통폐합할 의도로 일본식 2층 양옥인 궁내부청사가 돈화문 오른쪽 영역에 세워져 근본적

인 변화가 일어났다 후원 지역에는 숲 사이로 이리저리 낸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한편 1917년 겨울에는 대조전 서쪽에 붙어 있는 나인 갱의실에서 불이 나 순종과 순종

비가 급히 피신한 가운데 大造殿熙政堂景薰閣 등을 비롯하여 선정전 동쪽의 내전 일곽

이 대부분 불타버렸다 이때 내전에 보관되어 온 많은 보물과 역사 자료가 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의 화재는 放火로 추정된다 1917년은 순종이 폐위되고 나라를 빼앗긴 지 7년째

되는 해이며 경복궁에는 조선총독부청사 건립공사가 착공되어 일제의 혹독한 식민정치가

공고해지고 있었던 해이다 바로 이러한 때 왕의 침전에서 원인모를 화재가 일어난 것은 왜

일까 의도적인 방화였을 가능성은 없는가 마지막 황궁이자 폐위당한 순종의 거처이기도

했던 창덕궁의 내전이 모두 소실되었으므로 순종 일가의 거처를 새로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

었다

1919년 1월에는 고종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로 인하여 31 독립만세가 거국적으로 일어

났으나 독립은 쟁취할 수 없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창덕궁의 중건이 미루어지다가

1920년에 이르러 중건에 관한 대책회의가 열렸는데 처음에는 700평 정도의 건물을 한옥에

서양식을 가미한 절충식으로 짓기로 하였으나 그 다음 회의에서는 경복궁의 내전을 헐어다

가 복원한다는 奇想天外한 방침이 정해졌고 그렇게 공사는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왕

직(李王職)을 시켜 경복궁 내전을 뜯어다가 창덕궁 내전을 복구하는 데 쓰도록 하는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경복궁에서 헐려 나간 건물은 交泰殿康寧殿동행각서행각延生

殿慶成殿延吉堂應趾堂欽敬閣含元殿萬慶殿興福殿 등이었다

그 결과 경복궁 내전은 완전히 훼손되고 3년간에 걸친 공사 끝에 창덕궁 내전 일곽 가

운데 대조전과 좌우 헌(흥복헌과 융경헌)희정당경훈각함원전 등이 변형된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대조전은 비교적 충실한 모습으로 재건된 반면 희정당은 규모가 대폭 확장되고

건물 앞쪽에 전에 없던 행각과 부속 건물이 첨가되었으며 평면 규모는 물론 기둥의 높이

변화 복도의 첨가 전면 부속건물의 돌출부 등은 전통적인 궁궐 건물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심지어 서양식 가구를 들여와서 입식생활에 맞도록 개조하였다 대청 좌우에는 벽화도 새로

조성하였다86) 대조전 서쪽으로 전에 없던 콘크리트 구조물이 지어져서 생과방(生果房) 복

도 등으로 쓰이게 된 것도 새로운 변화였다 경훈각은 징광루를 포함한 2층 건물이었으나

그 자리에 경복궁에서 옮겨 온 단층 건물인 만경전을 세움으로써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건

되었다 또 경훈각 오른쪽 마당 즉 대조전 뒤뜰에 있던 어정은 이때 메워진 듯하다

그런데 대조전은 경복궁 교태전 재목 희정당은 경복궁 강녕전 재목을 이용하여 재건된

반면 경훈각은 경복궁 만경전을 그대로 移建한 것이다 함원전은 경복궁 함원전을 이건한

것이 아니라 교태전의 동북 翼閣인 建順閣을 이건한 것인 듯한데 건물의 칸수와 기둥 간격

만 약간 변형되어 있다 대조전을 중건하면서 교태전 건물을 변형시켰기 때문이다87)

86) 이때 조성된 벽화의 미술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조은정 「1920년 창덕궁 벽화조성에 관한 연구」『미술사학

보』33 미술사학연구회 2009 참조

87) 장순용 앞 책 72쪽

경복궁 만경전은 원래 대비 침전인 자경전의 북쪽에 마련된 건물로 후궁 지역의 중심건

물이었는데 중건 당시의 사용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명칭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규모

와 평면형태로 보나 대비 침전일 가능성이 높다 경복궁을 중건하던 당시에는 익종비 神貞

王后(1808-1890) 헌종계비 孝定王后(1831-1903) 철종비 哲仁王后(1837-1878) 세 분이 모두

살아계셨으므로 대비의 침전도 세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가운데 慈慶殿이 신정왕후 興

福殿이 효정왕후의 거처였으므로 萬慶殿은 철인왕후의 거처로 마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만

경전 동쪽에는 內燒廚房인 建綺閤) 外燒廚房인 瑤光堂이 있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경전은 철인왕후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고종의 집무처로 빈번

하게 사용되었다88) 만경전 바로 북쪽에 있었던 만화당은 일찍이 1897년 5월 경운궁 중건시

에 경운궁으로 이건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그 남쪽에 있던 만경전마저 창덕궁으로 이건됨으

로써 경복궁 자경전 이북의 중요 내전은 모두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 『進饌儀軌』(1887 丁亥) 圖說編의 lsquo萬擎殿圖rsquo나 『朝鮮古蹟圖譜』十권(1930년간)의

사진을 통해서는 건물의 외형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현존 경훈각이 경복궁

만경전을 옮겨 원형 그대로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89)

1920년에 재건된 이후 대조전 일곽에서 살았던 순종 일가의 생활은 궁녀들의 증언을 통

하여 밝혀진 바가 있는데90) 그 가운데 당시 경훈각의 용도를 언급한 내용이 있어서 주목된

다 즉 ldquo순종 내외가 내전 중건뒤 이곳에서 생활한 햇수는 7년 남짓한데 왕비 윤씨(순정황

후)는 경훈각을 공부방 겸 쉬는 집으로 애용했다고 한다 종실 부인 2 3명과 김명길 상궁까

지 끼어서 가정교사를 앉히고 영어와 일본어도 배우고 피아노도 들여다 놓고 가끔 쳤다고

한다rdquo 그러나 1926년 순종황제 사후부터는 윤비의 거처가 낙선재로 바뀌면서 경훈각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한편 1921년에는 창덕궁 후원의 동북쪽에 덕수궁 선원전을 헐어다가 신실 12칸 형식의

정면 14칸 측면 4칸 규모의 璿源殿을 새로 지어 역대 제왕의 御眞을 옮겨 봉안하고 인정전

서쪽에 있던 원래의 선원전은 건물만 남겨 둔 채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때 덕수궁 안 서

북 영역에 있었던 순명효황후의 혼전인 懿孝殿도 함께 옮겨져 새 선원전 앞쪽에 세워졌

다91) 이리하여 조선왕조 역대 왕의 어진마저 궁궐 깊숙한 곳에 幽閉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26년 4월 25일에는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였으므로 궁궐의 주인은

더 이상 없게 되었으니 나라 잃은 지 16년만의 일이었다 일제 치하이기는 하지만 그 뒤로

창덕궁은 공원으로 전락되어 내외국인에게 관람이 허용되었고 이에 따라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하여 그 東西 行閣과 인정문 및 좌우 月廊이 전시장 용도로 개조되었다 이외 많은 전

88) 『승정원일기』 고종 22년(1885) 1월부터 고종 28년(1891) 9월 사이에 230여 차례 사용되었다

89) 만경전의 규모와 평면은 「北闕圖型」『宮闕志』 등에서 확인된다 즉 ldquo萬慶殿三十六間無翼工柱長十一尺樑

通二間九尺式前後退五尺五寸式 道里通七間九尺式 東西退五尺五寸式 東行閣十九間半間半五樑以南有咸春門以北

有寅陽門 南邊間墻一角門輔化門 西行閣十九間半間半五樑 以南有宜春門 以北有景成門 南行閣二十八間半間半五

樑 以東有廣宜門 以西有養化門 北行閣十八間 以東有協吉堂 以西有福熙堂 及平在門以西邊有rdquo

90) 김용숙 『朝鮮朝 宮中風俗 硏究』 일지사 1987 166-180쪽

91) 이강근 「창덕궁 의효전에 대한 연구」『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항산 안휘준교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

사회평론 2006 현재 의로전으로 잘못 부르고 있는 건물은 원래 명칭이 의효전이라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각들이 철거되고 각종 시설이 새로 만들어지게 되었으므로 창덕궁은 망국의 한을 담은 일개

관람장으로 변해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3) 광복 이후의 변화

광복 이후 50년이 지나서야 조선총독부청사가 헐리고 이어서 창덕궁이 복원되고 있다

게다가 1997년에는 조선왕조의 역사와 宮廷文化를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이라는 점을 인정

받아 유네스코에 의하여 lsquo世界文化遺産rsquo으로 지정되었다92) 이리하여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

의 야만성은 세계에 부각되고 뼈아픈 역사를 이겨내고 스스로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어

온 한국민족의 노력은 세계 문화민족들의 공감을 사게 되었다

현재 창덕궁에 남아 있는 건물과 그 건립 연대는 다음과 같다93) 敦化門(1607년)仁政

殿(1804년)仁政門(1745년)宣政殿(1647년)大造殿熙政堂含元殿景薰閣(이상은 1920

년 경복궁 내전 移建)嘉靖堂(1920년 무렵 덕수궁 가정당 移建)賓廳(현 御車庫)誠正閣

(정조년간)94)內醫院(성정각 부속건물로 1920년 무렵부터 내의원으로 사용됨)觀物軒(정조

7년 이전)95)舊璿源殿(1695년 현 유물보관창고)樂善齋(1847년)壽康齋(1785년)96) 錫福

軒(1848) 翠雲亭(1686년)閒靜堂(1917년 이후)上涼亭滿月門 承華樓三三窩七分序

(이상 정조 년간)新璿源殿(1921년)

92) 해방 이후 1970년부터 2005년까지 우리 정부에 의해서 시행된 보수공사의 내역에 대해서는 본 보고서 3장

참조

93) 단 1990년대에 문화재관리국에 의하여 시행된 복원 공사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6장 제5절을 참조하기 바

94) 『궁궐지』에 숙종이 지은 ldquo儆戒世子十箴及小序rdquo가 살려 있고 숙종실록 숙종 31년 2월 병자에 세자가 성정

각에 있다는 기사로 보아 숙종때 이미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옳다

95) 『正祖實錄』16권 7년(1783 계묘) 11월 26일(계축) 觀物軒에 나아가 抄啓文臣의 講經 시험을 거행하였다

96) 『正祖實錄』 20권 9년(1785 을사) 8월 27일(갑진) ldquo貳極門 안에 있던 오래된 우물 자리에 壽康齋를 세웠

다 慈慶殿을 營建할 때 남은 자갈과 벽돌을 우물 위에 쌓아 假山을 만들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를 철거하

고 그 우물을 파고는 小齋를 세워 내려다 보게 하였다 이곳은 太祖朝 壽康宮의 옛터로서 『輿地勝覽』에 기

재되어 있다 이어 그 齋를 壽康齋라고 이름을 지었다rdquo

2 창덕궁 영역의 변천

가 조선 전기 창덕궁의 영역 변천

1) 창덕궁 창건시의 위치와 규모

태종은 즉위 4년에 신하들과 종묘에서 점을 쳐서 태조가 처음 도읍을 세웠던 한양을 다

시 환도하여 법궁인 경복궁 이외에 궁궐을 짓도록 명하였다97) 이궁의 위치는 향교동의 동

쪽으로 정했다98) 향교동은 조선후기의 지도에 따르면 한성부 중부 경행방 교동계에 포함된

동으로 고려시대 한양 향교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99) 현재의 낙원동 271~283번지 일대이

며 창덕궁은 향교동의 동북쪽에 자리하였다 성종대에 편찬한『신증동국여지승람』에 창덕

궁은 ldquo北部 廣化坊에 있다rdquo고 하여 그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97) 『태종실록』 권8 태종 4년(1404) 10월 6일

98) 『태종실록』 권8 태종 4년(1404) 10월 6일 ldquo遂相地于鄕校洞東邊 rdquo

99) 유본예 『한경지략』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영인본 2000 284쪽

구분 경복궁101) 창덕궁102) 조선후기 창덕궁

연대 1395(태조 4) 1405(태종 5) (궁궐지)103)

내전 침전 연침7칸+이방(2+2)칸 청3칸+동서침전(2+2)칸대조전청3칸+동서온돌

(2+2)칸+퇴(1+1)칸

표 2-2gt 창건당시 창덕궁의 규모와 경복궁 규모 조선후기의 창덕궁 규모와 비교

그림 1gt「도성도」(여지도 1750~ 1757년 754times98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이궁의 공사가 진행중이던 태종 5년 왕은 궁궐 짓는 것을 보고 성산군(星山君) 이직(李

稷)과 함께 그 규모(規模)를 획정하였다100) 궁이 완성된 후에 기록한 규모는 총 287칸으로

이 중에서 내전이 195칸 외전에 92칸이다 이 기록에서는 주요전각의 경우 정면 칸수만 표

기한 것이다 태조 4년(1395) 준공된 경복궁과 비교하면 내전의 규모가 195칸으로 창덕궁이

더 많고(경복궁은 173칸) 외전은 경복궁이 212칸으로 창덕궁(92칸)의 2배가 넘는다 이는

창덕궁이 내전위주의 이궁이라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100) 『태종실록』 권9 태종 5년(1405) 2월 2일

구분 경복궁101) 창덕궁102) 조선후기 창덕궁

연대 1395(태조 4) 1405(태종 5) (궁궐지)103)

행랑

북천랑 7칸 북행랑 25

칸 남천랑 5칸

동소침 3칸 서소침 3칸

동서천랑 (2+2)칸

남천랑 6칸

동서소횡랑 (5+5)칸

북행랑 11칸

서별실 3칸

동서행랑 (15+15)칸

동루 3칸 상고 3칸

흥복헌 4칸

융경헌 3칸

동행각 6칸

서행각 6칸

남행각19칸

내전소계 173칸 195칸

외전

편전 - 3칸 선정전 3칸

보평청 5칸+이방(1+1) 3칸

정전 5칸 3칸 5칸

월대

동서폭 1125자

남북폭 50타

중계 깊이 15자

동서폭 639자

남북폭 33자

중층폭 5자

상월대

남북 폭 45자

하월대 165자

내정

남북(월대전면~정문)

178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3225(1125 +15

+15+80+80)자

남북( 월대전면~정문)

117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156자

남북( 월대전면~정문)

123자

동서(동행랑~서행랑 내

폭) 209자

행랑

북행랑 29칸

동행랑 28칸

서행랑 28칸

동행랑 17칸

서행랑 16칸

동행각 18칸

서행각 19칸

대문3칸

좌우행랑 (11+11)칸

3칸

좌우행랑 (9+9)칸

인정문 3칸

좌우행랑 (10+10)칸

외전소계 212칸 92칸

궐내각사 390칸

승정원청 3칸

동행랑 10칸

남행랑 4칸

북행랑 4칸 외행랑 5칸

외루 3칸

승정원 3칸 7량

동행각 125칸

서행각 12칸

남행각 5칸

당후 10칸

총 칸수 775칸 287칸 183825칸(대보단 포함)

2) 조선전기 창덕궁의 변천과정과 범위

(1) 제1기 태종대(太宗代)~세종대(世宗代)

창덕궁의 창건과 궁궐로서 형태를 갖추는 시기이다 태종대에 창덕궁을 지을 때에는 법

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현재보다 그 범위가 좁고 전각의 구성도 달랐다 창건당시에는

인정전 일곽의 외전과 내전으로 구성되었으며 인정전 외행랑과 진선문 금천교는 태종 11년

에104) 돈화문은 그 다음해에 완성되었다105) 태종은 이어서 편전을 넓게 고쳐 짓고(태종 15

101) 『태조실록』 태조 4년(1395) 9월 29일

102) 『태종실록』 태종 5년(1405) 10월 19일

103) 『궁궐지』에는 건물의 전체 칸수가 적혀 있으나 이 표에서는 경복궁과 창덕궁의 창건 기록과 같은 기준으

로 전각의 정면 칸수를 적음

104) 『태종실록』태종 11년(1411) 3월 18일

105) 『태종실록』태종 12년(1412) 5월 22일

년) 인정전을 확장하고 나서106)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세종은 즉위직후 상왕인 태종

을 위하여 창덕궁의 동남쪽에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즉 창덕궁의 외전 침전일곽과 나중

에 동궁과 창경궁이 되는 수강궁 일대의 틀이 태종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태종대에 시작한 인정전 확장과 외행각(인정문 남쪽) 조성은 세종 즉위 직후에 마무리

되었다 인정문 남쪽의 행랑은 특별한 용도로 쓰이지 않고 다만 정전 앞쪽의 영역에 경계를

짓는 역할이었다고 생각된다 창덕궁의 위상이 이궁이었으므로 외조의 각 기관이 외행랑에

들어서지 않았으며 행랑을 세우지 말고 도로 담장을 쌓으라는 지시107)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단종 즉위년에 인정전의 서까래와 보가 썩어 이를 수리하였다108) 인정전을 창건한 지

50년만으로 처음에는 수리를 한다고 하였으나 『단종실록』에 따르면 초석과 기둥 등 고치

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109)고 하여 수리라기보다는 개축하면서 좀 더 확장 한 것으로 보

인다

그림 2-2gt 태종~세종년간의 창덕궁범위

창덕궁의 창건(1405)

금천교(1411) 돈화문 건립(1412) 인정전 확장(1418)수강궁건립(1418)

106) 『태종실록』태종 18년(1418) 7월 7일

107) 『태종실록』 태종 1년(1401) 4월 12일 15일

108)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11월 17일

109) 『단종실록』 단종 1년(1453) 4월 27일

시기 내용 참고

태종 4년(1404) 106 향교동 동변에 이궁을 짓도록 하다

태종 5년(1405) 10 9 이궁완성

태종 6년(1406) 4 1 궁안에 광연루 지음

태종 6년(1406) 4 9 해온정 궁 동북 모퉁이에 지음

태종 11년(1411) 318 진선문 금천교

ldquo누각과 침실을 창덕궁에 짓고 진선문 밖에는 돌

다리를 놓았는데 공조판서 박자청을 시켜 그 역사

를 감독하게 하였다rdquo

인정전의 확장에 먼저

건립된 진선문의 위치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태종 11년(1411) 415 의정부 朝房을 진선문 밖에 짓도록 하였다

태종 12년(1412) 522 진선문 남쪽에 누문 5칸을 세우고 lsquo돈화문rsquo이라

태종 15년(1415) 128 편전을 넓게 고쳐지음

태종17년(1417)윤512 이조판서 박신이 인정전이 좁아 서쪽으로 당겨 다

시 짓도록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태종 18년(1418) 77 인정전을 고쳐짓다

태종 18년(1418) 910 인정전이 준공되었다

세종 즉위년(1418) 113 완성된 상왕전의 신궁을 壽康宮이라 하다

세종 1년(1419) 412 15

박자청이 상왕(태종)의 지시로 인정문 밖의 남행

랑을 비뚤게 지었으므로 하옥하고 헐어버리도록

하고 행랑대신 담장을 쌓도록 하다

단종 즉위년(1452) 1114 사헌부에서 인정전을 개축을 정지할 것을 청하다

단종 즉위년(1452) 1117 ldquo대신 등이 말하기를 lsquo인정전(仁政殿)의 서까래

[欀題]와 동량(棟梁) 이 썩었다rsquo 하는데 만약 창

덕궁에 거처하게 되면 정사를 볼 곳이 없어서 개

수(改修)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구지(舊址)이기 때

문에 조금 넓힐 뿐이다rdquo

인정전을 확장

단종 1년(1453) 427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창덕궁(昌德宮)을 처음에는 수보(修補)한다고 말하

였으나 지금 주춧돌 하나 기둥 하나도 고치지 아

니한 것이 없으며 인정전에 이르러서는 완전하고

튼튼하여 옛날 그대로 있는 것이 가한데 모두 철

거하여 고쳤으니 이름은 수보한다고 하고 모조리

새로 짓습니다 흥인문을 고치고 수문을 지음

단종 1년(1453) 55 인정전과 흥인문 수문의 역사를 마치도록 하다

표 2-3gt 제1기 태종~세종연간의 창덕궁 연표

(2) 제2기 世祖代~成宗代

창덕궁은 태종대에 형식적인 틀을 대부분 갖추었으며 주요 전각이 자리를 잡아 갔다

그 다음 단계로서 성종년간에 이르기까지 전각의 명칭을 정하고 영역을 확장하여 조선 후기

까지 유지되는 궁역 외곽선을 확보하게 된다 세조년간에 중심 전각들의 이름을 정했는데

조계청(朝啓廳)을 선정전(宣政殿) 선정전 뒤편의 동쪽 별실(後東別室)을 소덕당(昭德堂) 서

쪽 별실(後西別室)을 보경당(寶慶堂) (내전의)정전(正殿)을 양의전(兩儀殿) 동침실(東寢室)

을 여일전(麗日殿) 서침실(西寢室)을 정월전(淨月殿)이라 칭하고 누(樓)를 징광루(澄光樓)

동별실(東別室)을 응복정(凝福亭) 서별실(西別室)을 옥화당(玉華堂) 누하(樓下)는 광세전(光

世殿)middot광연전(廣延殿) 별실(別室)을 구현전(求賢殿)으로 하였다110) 이때 정한 선정전과 소덕

당 보경당 징광루 옥화당 등 대부분의 명칭은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양의전으로 이

그림 3gt 세조~성종년간 궁장의 확장과 창경궁

건설

세조 전각명칭 정함(1461)

세조 후원 동쪽궁장의 확장(1462~1463)

성종 창경궁의 창건(1584)

름 지은 정전(내전의 정전)은 세조대에

이전에 대조전(大造殿)으로 개칭하였

다111)

세조년간에는 후원의 영역을 확장

하였는데 즉위 8년에서 9년에 후원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쪽과 동북쪽의 담

장을 넓혀서 쌓으려 민가를 철거했으며

이때 넓힌 궁장은 성균관에 맞닿게 되

었다112) 당시 확정된 후원의 경계는 궁

의 동북쪽과 북쪽 그리고 동쪽으로 응

봉 주산의 내맥이 지나는 곳에 합친 것

이 되는 셈인데 궁의 후방 담장 경계는

세조대에 확정된 것이 그 이후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성종대에는 왕실의 구성원 중에서

여러명의 대비가 존재함에 따라 창덕궁

의 연조부분을 확장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창덕궁의 지형이 내전을 확장하

기에는 협소하여 창경궁을 조성하게 되

었다113) 성종 13년 창덕궁 수리를 논의

하는 자리에서 성종은 창덕궁을 수리할

필요가 없고 그 대신 수강궁을 수리하

라고 했다가114) 이듬해 창경궁을 짓도록 명하였다 성종 15년에 완공된115) 창경궁은 궐내각

사와 내전 후원을 창덕궁과 공유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경희궁을 서궐이라 하는데 대

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ldquo동궐rdquo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시기까지 외조는 승정원 빈

청 사옹원 내반원 정도가 확인된다

성종 6년에 창덕궁의 문 중에서 액호가 없던 것을 왕의 명으로 서거정이 짓게 되는데

이때 명명된 문 이름을 통해서 창경궁이 조영되기 이전 성종대의 창덕궁 궁역과 문의 기능

110)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1461) 12월 19일

111)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1467) 5월 17일 왕이 대조전에서 신하들과 이시애의 난을 토벌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는 그 직전까지도 양의전에서 논의하던 내용으로 이후 양의전이라는 전각명은 기록에 보이지

않고 같은 논의를 양의전 대신 대조전에서 하고 있어서 양의전과 대조전은 같은 전각이라고 추정된다 『宮闕

志』(K2-4363) 에 실린 양의전 관련내용은 다음과 같다 ldquo兩儀殿世祖七年壬午上御兩儀殿召承旨 金 從舜 謂曰

臺諫擇可言事言之人主得納諫之名 臺諫亦得獻替之譽矣[주國朝寶鑑]rdquo

112) 『세조실록』 세조 9년(1463) 2월 7일

113) 예종대 이전에는 왕비가 먼저 승하하여 왕실에 대비가 없었으나 예종대(예종은 즉위기간이 1년2개월로 짧

았다)에 정희왕후 성종 즉위 후에는 예종비 안순왕후와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가 생존한 상태로 갑자기 대

비가 세분이나 존재하게 되었다

114) 『성종실록』 성종 13년(1482) 12월 14일

115) 『성종실록』 성종 15년(1484) 9월 27일

시기 내용 참고

세조 7년(1461) 1219 창덕궁의 조계청(朝啓廳)을 선정전(宣政殿) 후동

별실(後東別室)을 소덕당(昭德堂) 후서별실(後西

別室)을 보경당(寶慶堂) 정전(正殿)을 양의전(兩儀

殿) 동침실(東寢室)을 여일전(麗日殿) 서침실(西

寢室)을 정월전(淨月殿)이라 칭하고 누(樓)를 징

광루(澄光樓) 동별실(東別室)을 응복정(凝福亭)

서별실(西別室)을 옥화당(玉華堂) 누하(樓下)는 광

세전(光世殿)middot광연전(廣延殿) 별실(別室)을 구현전

(求賢殿)이라 칭하도록 하라

세조 13년 5월 17일 대조

전 기사가 등장하므로 대조

전은 처음에 양의전이었다가

세조 13년 이전에 대조전으

로 개칭 된 것으로 보임

보경당은 왕이 신하들에게

술을 내리거나 소견하는 장

소로 사용 왕의 거처 영조

탄생

세조 8년(1462) 130 후원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장을 넓혀서 쌓으려

민가를 철거하도록 하다

세조 9년(1463) 27 9 후원의 궁장을 넓히려고 동북동 북쪽의 인가를

철거 창덕궁의 궁장이 성균관에 맞닿음

성종 6년(1475) 8 23 액호가 없는 창덕궁의 문이름을 정함

성종 15년(1484) 9

27

창경궁 준공

연산군 11년~12년 후원에 서총대 건립

표 4gt 제2기 세조~성종년간의 창덕궁 연표

을 파악 할 수 있다 『성종실록』의 내용 중에서 외동장문으로 선인문(宣仁門)은 현재 창경

궁 홍화문 남쪽에 있는 문인데 세조 8년에 궁장 위치를 동쪽으로 물려 쌓은 것을 감안하면

성종대에 이름을 지은 선인문과 현재의 선인문 위치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창덕궁의 내동장문(內東墻門)은 건양문(建陽門)이라 하여 창덕궁과 당시 수강궁의 경

계에 내궁장이 있고 건양문으로 통행하여 그 경계의 구분이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서쪽의 궁장문으로는 요금문(曜金門) 서행랑문(西行廊門)은 금호문(金虎門)이 확인되며

후원의 북장문(北墻門)은 공진문(拱辰門) 외북장문(外北墻門)은 광지문(廣智門)116)이라 하였

다 현재공진문으로 경계지워지는 주합루 일대까지가 당시에 후원이었으며 그 북쪽(현재 옥

류천 일대의 북쪽)에 또 외궁장이 있었다 「도성대지도」(1764년경 제작 추정)에는 창덕궁

후원의 외궁장에 광지문이 표기되어 있으며 문 밖에는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의 초소인 광지

영(廣智營)이 있었다 연산군은 이 문을 지키는 영(營)에서 후원이 내려다 보인다고 하여 그

위치를 아래쪽으로 옮기게 하고 이쪽으로 사람들을 왕래하지 못하도록 했다117) 이 문의 이

름은 『승정원일기』에 광지영 서쪽에서 건무문 동쪽까지의 궁장을 수리하면서 건무문이라

고 칭하고 있어서118) 정조년간에 건무문(建武門)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에는 lsquo건무문rsquo이라고 적혀 있다

116) 『성종실록』 성종 6년(1475) 8월 23일 ldquo예문관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전교를 받들어 대궐의 문 중에

예전에 額號가 없는 것은 각기 2개의 이름을 扁額하여 아뢰니 임금이 낙점하기를 창덕궁 밖 東墻門은 宣仁

門 중간의 東墻門은 景陽門 新大門은 長春門 中大門은 宣明門 南夾門은 春興門 안 東墻門은 建陽門 북쪽

東墻門은 綺華門 廣延亭의 西岾門은 平昌門 南行廊門은 永和門 北行廊門은 永平門 內司僕南門은 雲錦門

外東山門은 延陽門 左夾門은 光範門 右夾門은 崇範門 南墻門은 丹鳳門 內西墻門은 宜秋門 左闥門은 肅章

門 兼司僕廳의 新大門은 延福門 內司饔의 上東門은 小春門 북문은 小東門 중궁의 差備門은 延禧門 承政院

의 南門은 延英門 서행랑문은 金虎門 外西墻門은 鎭金門 西墻門은 曜金門 後苑의 北墻門은 拱辰門 新北墻

門은 閶闔門 東墻門은 靑陽門 外北墻門은 廣智門 -후략-rdquo

117) 『연산군일기』 연산군 5년(1499) 2월 26일

118) 『승정원일기』 정조 8년 6월 22일

나 조선후기 창덕궁의 영역 변천

1) 제3기 임진왜란~영조대(英祖代)

세 번째 단계는 임진왜란 이후에서 영조년간까지 이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경복궁이 재건되지 못하고 창덕궁이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법궁으로서의 형

식을 갖추어 나가는 단계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한동안 전란을 수습하느라 종묘

와 궁궐을 복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조 39년(1606)에 경복궁 중건을 착수했으나 도중에 창

덕궁을 복구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119) 이 공사는 광해군 2년에 완료되었다120)

광해군년간의 창덕궁 복구는 광해군 1년(1609) 10월에 대략적인 공사가 완료되었고121)

광해군 2년(1610) 9월에 모든 공사가 끝난듯 공사에 참여한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의

도제조middot제조middot도청(都廳) 이하 공장(工匠) 등에게 시상을 하도록 했다122) 광해군대의 복구는

옛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법궁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을 완공하고도 이곳에 거처하지 않고 경운궁으로 이어했으며 재위 9년(1617) 부터는

인경궁과 경덕궁(후에 경희궁으로 개칭)을 건설하는123) 등 창덕궁에 별로 애착을 보이지 않

았다 광해군대에 경덕궁과 인경궁 건설시 침전은 창덕궁의 대조전을 모델로 삼아 크기와

규모를 같도록 하였다124)

임진왜란 후 재건된 창덕궁의 여러 전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조반정시 반정군에 의해

인정전과 수정당(壽靜堂)을 제외하고 내전의 전각이 대부분 소실된 것이다 소실된 전각들은

곧바로 복구되지 못하였으며 창경궁의 전각을 이용하다가 인조 25년(1647)에 이르러서야 내

전의 전각들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인조대에 인경궁과 경덕궁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복구공사를 위하여 건물을 헐어 그 부

재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광해군대에 창덕궁을 참조하여 건물의 규모를 정하였으므로 인경궁

의 건물 부재를 사용한 창덕궁 전각의 복구는 소실되기 이전과 큰 차이가 없는 형태가 되었

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인조 25년에 재건된 범위는 선정전 북쪽의 보경당과 태화당

소덕당을 포함하여 대조전 희정당 등의 내전 일곽이 이전의 모습대로 재건되었으며125) 그

외에도 인정전의 동월랑 남월랑 승정원 내궁방 내사옹원 외사옹원 숙장문 좌우행랑 인

정문 외행랑 선정전 선정전 북월랑 등 외전영역의 행랑과 궐내각사를 포함하고 있다126)

119) 『宮闕志』 昌德宮志

120) 『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1610) 9월 1일

121) 『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1609) 10월 16일

122) 『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1610) 9월 1일

123)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1617) 1월 18일

124)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1617) 6월 21일

125) 『인조실록』 인조 25년(1647) 11월 12일 ldquo상이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는데 수리할 적에 새로 세운 것도

많았다 모든 낭무(廊廡)가 일체 옛 제도와 같았고 大內에 大造殿middot宣政殿middot熙政堂middot靜默堂middot集祥堂middot寶慶堂middot玉華堂middot

泰和堂middot讌和堂과 澄光樓가 있는데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rdquo

이 때 재건된 전각은 대부분 순조대까지 유지되었으며 그 내용은 「동궐도」에 표현되어 있

인조년간에 특기할 만한 것은 후원에 많은 정자를 지어 창덕궁의 후원 깊숙한 곳에 왕

의 개인적인 휴식 공간이 조성된 것이다 인조 14년(1636)에는 후원의 제일 북쪽인 광지문

안쪽에 청의정과 태극정 소요정 취하정을 짓고 옥류천을 조성했다 인조 18년에는 취규정

을 지었으며 22년에는 존덕정을 지었다 당시 청나라에서 귀국한 소현세자에게 청나라의 궁

관(宮觀)을 물어 팔각형의 정자를 짓기도 했다127)

효종과 현종대에는 대비를 위한 전각이 추가되어 공간에 변화를 준것이 특징이다 효종

6년(1655) 인정전 서북쪽 흠경각옛터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를 위해 만수전을 지었다 자

의대비는 대조전 북서쪽 언덕에 있었던 수정당(壽靜堂)에 거처했으나 이곳이 좁고 협착하다

는 이유를 들어 만수전을 지은 것이다 수정당은 정조 18년(1794)에 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면

서 당(堂)에서 전(殿)으로 전각의 위상을 높여 수정전(壽靜殿)으로 개칭하였다 현종 8년

(1667)에는 대조전 북동쪽에 있던 집상당(集祥堂)을 고치면서 이름을 집상전으로 개칭하고

통명전에 거처하던 효종비 인선대비를 거처하도록 하였다 집상전은 세조대에도 집상당이라

는 전각명이 실록에 보이는데 인조대에 창덕궁을 재건할 때 이전의 모습과 제도대로 지었다

는 점과 이때에도 집상당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있던 전각으로 보인다

인정전 북서쪽은 원래는 각종 천문기기를 설치한 흠경각128)이 자리잡고 있어서 외전영

역에 속했으나 만수전과 내전관련 부속 건물들이 새로이 들어섬으로서 그 일대는 내전영역

으로 그 기능과 성격이 변화 하였다 만수전이 숙종대에 소실된129) 다음에도 그 자리에 계

속해서 대비의 거처인 경복전이 들어섰으며 주변의 부속 건물들은 영모당 수라간 등촉방

등의 기능을 가지고 유지되었다

숙종대에는 왕의 어진을 제작하여 선원전에 보관하고 이것을 경종과 영조대에 확장해

가면서 선원전일곽이 하나의 영역을 새롭게 형성하였다 선원전 자리는 원래 도총부로서 궐

내각사의 일부였으나 효종대에 그 자리에 춘휘전을 지었는데 이곳에 숙종의 어진을 보관하

였다 이후 보관할 어진의 수가 늘어나면서 영조대에 중수하였고 양지당 등 주변전각이 재

실과 선원전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

숙종년간에 또 하나의 변화는 후원의 북서쪽에 대보단을 창설한 것이다 대보(大報)란

126) 『昌德宮修理都監儀軌』(1647)

127) 『인조실록』 인조 24년(1646) 2월 4일 상이 八角亭을 後園에다 지었다 처음에 세자가 북경에서 돌아오

자 상이 청나라의 宮觀의 제도에 대하여 물었다 세자가 팔각정의 제도가 가장 묘하다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

기를 ldquo네가 그 모양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겠는가rdquo 하니 세자가 즉시 그려서 올리자 상이 매우 기뻐하여 그

정자를 후원에다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매우 기묘하였다

128) 흠경각은 세종대에 경복궁 사정전 서쪽에 있었으며 혼천의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후 선조가 영의정 이항

복에게 명하여 예전의 제도대로 만들도록 하였다 광해군 5년에서 8년까지 흠경각 건립에 대한 기사가 있는

데 이는 창덕궁에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효종년간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수전을 지으면서 혼천의가

손상되었는데 현종조에 들어와 좨주 宋浚吉이 흠경각의 옛 제도를 복구하도록 청하자 마침내 李敏哲에게 명

하여 蔡沈의 《書經集傳》에 조금 더하고 덜어서 혼천의의 형상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 제도는 안에 四游와

玉衡이 빠져 있고 또 白單環을 없앤 것이었다 숙종조에 들어와 이민철에게 명하여 예전 혼천의를 중수(重修)

하도록 하고 齊政閣을 창덕궁 熙政堂의 남쪽에 지어 봉안하였다(『國朝寶鑑』 제 60권 영조조 4 한국고전

종합 DB httpdbitkcorkr)

129) 『숙종실록』 숙종 13년(1687) 9월 2일

큰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임진왜란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神宗)에 제사 지내기

위한 시설이다 숙종 30년(1704) 별대영(別隊營)의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세웠다 후원

의 서쪽 담과 별대영의 동쪽 담 사이를 연결시켜 쌓고 후원의 담을 뚫어 문으로 만들어서

친제(親祭) 때 거둥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대보단으로 통하는 문은 창덕궁 후원의 동쪽문인

집춘문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130) 이렇게 명나라에 대한 신의를 강조했던 것은 당시 유행

했던 반청(反淸)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신위는 대보단 동쪽의 봉실에 모셨으며 서쪽의 경봉

각(敬奉閣)에는 중국 황제와 관련된 서적과 문서를 보관했다 단의 남쪽에 열천문과 공북문

을 두었고 동쪽에는 어재실인 만세송은(萬世誦恩)이 있다

숙종대에는 인조대 못지않게 후원에 다양한 형태의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여 주합루 북

쪽에서 옥류천까지 왕의 휴식처를 다양하게 마련했다

그림 4gt 인조~영조대의 전각조성

인조 25년(1647) 중건 효종대 만수전 춘휘전 건립

현종대 집상전 건립(순조대까지 유지) 숙종대 선원전 건립

130) 『숙종실록』 권40 숙종 30년(1704) 10월 3일 12월 21일

시기 내용 참고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창덕궁 소실

광해군 2년(1610) 9 창덕궁 중건

광해군 15년(1623) 3 12 인조반정시 인정전만 남고 모두 소실됨

인조 14년(1636) 후원에 옥류천과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지음

바위에 옥류천 세 글자를 새겼는데 인조의 어필이

『궁궐지(宮闕志)』

인조 18년 후원에 취규정(聚奎亭) 지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2년 후원에 존덕정 지음 연못이 있어 반원지라 하고

남쪽에 일영대를 두었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4년 후원에 희우정과 청양각 지음

인조 25년 후원에 낙민정과 관풍각(觀豊閣) 지음

서총대 동쪽 북쪽에 내농포가 있음

『궁궐지(宮闕志)』

인조 25년(1647) 11 12 창덕궁 중건 모든 낭무(廊廡)가 일체 옛 제도와

같았고 대내에 대조전(大造殿)middot선정전(宣政殿)middot희

정당(熙政堂)middot정묵당(靜默堂)middot집상당(集祥堂)middot보경

당(寶慶堂)middot옥화당(玉華堂)middot태화당(泰和堂)middot연화당

(讌和堂)과 징광루(澄光樓)가 있는데 매우 웅장하

고 화려하였다

『昌德宮修理都監儀軌』

(1647)

효종 8년(1657) 4 2 만수전 춘휘전을 흠경각 옛터에 지음 『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

儀軌』(1657)

현종 8년(1667) 11 11 집상전을 짓도록 명하다 『集祥殿修改都監儀軌』

(1667)

숙종 13년(1687) 9 2 만수전 소실

숙종대에 만수전 터에 경복당을 짓고 이후 경종

2년 경복전으로 개칭

숙종 14년(1688) 청심정(淸心亭)을 지음 남쪽 뜰에 못을 파서 빙옥

지라 하고 정자 동쪽의 협곡에 홍예교를 놓음

『궁궐지(宮闕志)』

숙종 15년(1689) 관덕정 북쪽에 영타정(靈鼉亭)지음 불로문 밖 남

변 소실

『궁궐지(宮闕志)』

숙종 18년(1692) 애련정 연못 조성

영화당 개수

『궁궐지(宮闕志)』

숙종 21년(1695) 춘휘전을 선원(璿源)이라 이름을 고치고 어진을

봉안하였다

『궁궐지(宮闕志)』창덕

궁지 선원전조

숙종 39년(1713) 4 11 임금의 여용을 그려 뒤에 임금이 한 벌은 대내(大

內) 선원전(璿源殿)에 보관하라고 분부하였다

효종대에 지은 춘휘전을

선원전으로 전용

영조 30년(1754) 1 5 선원전 수리 7칸으로 증축

표 5gt 제3기 임진왜란~영조년간의 창덕궁 연표

2) 제4기 正祖代

정조대에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창덕궁에 활발한 건물의 조성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성

격의 전각이 들어섰다 그 결과 궁궐전체의 공간 구성에 변화가 불가피했으며 이는 이후 순

조와 헌종대의 창덕궁 공간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정조는 즉위년에서 즉위 5년까지 창덕궁내에 각종 시설들을 정비하고 첨가했는데 즉위

하자마자(1776년) 첫번째로 후원에 주합루를 세우도록 명하여 같은 해 9월 26일에 완공했다

주합루는 영화당 북쪽의 언덕에 자리 잡고 그 주변으로 봉모당 열고관과 개유와를 배치하

였고 주합루 서쪽에 이안각인 서향각을 배치하였다 주합루 일대의 건물들에는 영조의 어필

과 문집(봉모당) 중국서적(열고관 개유와)과 국내의 서책을 보관하였다 주합루는 이 일대

의 중심건물로 언덕위에서 당당한 위용으로 부용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이다 주합루 일

대가 조성됨으로써 영화당의 동쪽은 문무과 시험의 장소로서 기존의 기능을 수행하고 주

합루 일대는 왕권 강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변모하여 이 일대는 후원에서도 통치와 관련된

기능을 가진 영역이 되었다

즉위년 9월에 인정전 앞마당에 품계석을 설치하고 즉위 2년(1778) 선원전에 새로 동middot서

익각을 설치했으며131) 즉위 5년(1781)에는 주합루에 설치한 규장각의 관리들이 근무하는 공

간으로 이문원을 세웠다132) 이문원의 위치는 금호문 안쪽 선원전의 서쪽으로 원래 그 자리

에 있었던 도총부는 창경궁으로 옮겼다 이문원이 설치된 장소는 임진왜란 직후까지도 민가

가 있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즉 조선 후기에 창덕궁이 법궁으로 이용되면서 금천 서쪽은 증

가하는 궐내각사를 설치할 공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정조 6년(1782)에는 왕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중희당(重熙堂)을 신설했다133)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는 동궁으로 저승전과 시민당이 있었으나 저승전은 영조 32년 화재로 소실된

후 복구하지 않았고 시민당도 정조 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134) 처음에는 시민당을 복구하려

다가 이를 중지하고135) 시민당터와 내전영역의 중간정도 되는 지점에 세자를 위한 전각들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로서 동궁은 내전과 더욱 가까운 곳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헌종대에 편

찬한 『궁궐지(宮闕志)』에는 중희당 일곽을 창덕궁에 포함시키고 있다

131) 『정조실록』정조 2년(1778) 1월 15일

132) 『정조실록』정조 5년(1781) 3월 10일

133) 『宮闕志』창덕궁지 중희당조

134) 『정조실록』 정조 4년(1780) 7월 13일

135) 『정조실록』 정조 4년(1780) 8월 29일

그림 5gt 정조대의 전각조성

정조 9년(1785)에는 수강재를 건립했다136) 그 터가 수강궁의 옛터라고 하여 수강재

로 이름지었으며 세자궁의 정당인 시민당터의 북쪽에 위치하였다 정조가 상량문에서 밝

힌 수강재의 용도는 왕의 작은 서재로서 강학을 위한 집이었다137) 중희당과 수강재의

건립은 왕과 세자의 관계를 보다 밀접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건축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기 내용 참고

정조 즉위년(1776) 주합루 건립

정조 1년(1777) 9 6 인정전 품계석 설치

정조 2년(1778) 1 15 선원전 동 서익각 설치

정조 5년(1781) 3 10 금호문 안쪽에 이문원 설치

정조 6년 중희당 건립 『宮闕志』

정조 9년(1785) 8 27 수강재 건립

정조 17년(1793) 택수재를 고쳐서 부용정 개축 『홍재전서』제55권 잡저(雜著)2 부용정상량문

표 6gt 제4기 정조년간의 창덕궁 연표

3) 제5기 純祖代~高宗代

136) 『정조실록』 정조 9년(1785) 8월 27일

137) 『홍재전서(弘齋全書)』 제54권 잡저(雜著) 수강재상량문

순조대에는 여러 차례의 화재로 내전의 전각이 소실되고 다시 중건되었다 화재 전 후

의 모습은 「동궐도」와 고종대에 그려진 「동궐도형」에 반영되어 있다 「동궐도」는 화

재 이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만수전 자리에 있었던 경복전이 순조 24년(1824) 화재로 소실되자138) 그 자리에 다시

전각을 복구하지 않아서 「동궐도」에는 빈 터로 남아 있다 대조전일곽에 있었던 집상전은

순조 33년(1833) 내전 일곽의 전각에 화재가 났을 때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내전의 복구공

사에서 제외되어 그 이후에도 다시 지어지지 않았다 화재 후에도 대조전과 같은 내전의 중

심전각은 그대로 재건되는데 반하여 경복전이나 집상전과 같이 대비가 사용하던 전각이 복

구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왕실에 대비가 계시지 않았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순조대의 대비

전과 내전일곽에 화재가 날 당시는 영조비인 정순왕후와 정조비인 효의왕후는 승하한 뒤였

순조대에는 화재로 소실된 전각을 재건하는 건축활동은 많았지만 전각을 새로 짓거나

궁역을 확장한 일은 없었고 정조대에 이룩된 전각들이 대부분 유지되었다 효명세자 대리청

정기에 중희당일곽의 동궁전각이 활발하게 사용되었으며 내전일곽의 화재 후 재건과정에서

내전의 전각구성에 부분적인 변화를 가져온 정도이다

순조의 뒤를 이은 헌종대에는 동궁영역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정조대에 지은 수강재

에서 중희당 동쪽까지 비어 있던 곳에 낙선재를 지은 것이다 새로 맞이한 후궁 경빈 김씨

의 처소인 석복헌을 낙선재 동쪽에 이어서 짓고 순조비 순원왕후를 위해 수강재를 수리하

여 세 건물을 행각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건물군으로 만든 것이다 낙선재가 들어선 곳은 조

선후기에 동궁이 있었던 곳으로 수강재 동쪽에는 세자를 보좌하는 춘방과 계방 등이 있었으

며 낙선재 동쪽에는 정조대에 조성한 중희당 일곽이 자리하고 있었다 낙선재의 조영은 동

궁일대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면서 동궁을 보좌하는 곳과 동궁의 거처를 양분하며 동궁이 축

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종대에 들어서 경복궁이 중건되어 창덕궁은 조선후기 동안 누려왔던 법궁이라는 지위

를 다시 경복궁에 넘겨주게 되었다 창덕궁(동궐)과 경희궁(서궐)이라는 양궐체제의 중심은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경복궁은 중건이후에 잦은 화재로 인하여 왕이 창덕

궁으로 이어하는 기간이 많았다 고종대에 창덕궁의 영역과 전각변화의 특징은 창덕궁의 전

각을 경복궁으로 옮겨짓는 일이 빈번했다는 점이다 전각을 헐어낸 자리는 빈 공간으로 남

았으며 이는 「동궐도」와 「동궐도형」의 비교를 통해서 파악가능하다

고종 초기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시 사용빈도가 낮은 창경궁의 행각과 전각을 경복궁

으로 이건하기도 했다 창경궁의 자경전을 옮겨 경복궁의 자미당을 지은 것이 그 첫번째 이

다139) 고종 초기에 이건한 자경전과 1882년 이후 공사가 중지된 수정전(壽靜殿)이 「동궐도

형」에는 빈 터로 남아 있다 또한 「동궐도형」에 lsquo금무rsquo라고 씌어진 건물은 「동궐도형」

의 제작시기와 가까운 1890년대에 이건한 건물들이다

138) 『순조실록』 순조 24년(1824) 8월 24일

139) 『승정원일기』 고종 2년(1865) 10월 26일

시기 내용 참고

순조 3년(1803) 12월 13일 인정전 화재

순조 4년(1804) 12월 17일 인정전 중건

순조 11년(1811) 윤3월 6

향실(인정전 서행랑)과 예문관에 화재

순조 24년(1824) 8월 24일 경복전 화재 「동궐도」에는 터만 그

려져 있음

순조 33년(1833) 내전일곽의 화재

순조 34년(1834) 내전일곽의 전각 중건 영연합을 헐어 창경궁 영

춘헌을 복구

헌종 12년 낙선재 건립

고종 13~14년 창덕궁의 수리

고종 18년(1881) 7월 22일 수정전을 함녕전으로 바꾸고 동 서 남 북별당

공사를 시작하다

고종 28년(1891) 3월21일 함녕전(구 수정전)의 여러 전각을 경복궁으로 옮

겨짓다(집옥재 협길당)

고종 28년(1891) 5월 3일 중희당 이건

표 7gt 제5기 순조~고종년간의 창덕궁 연표

고종 18년(1881)에는 수정전(壽靜殿)을 수리하여 함녕전(咸寧殿)으로 전호를 바꾸고140)

주변에 부속건물을 짓는 공사를 했다 그러나 이 공사는 완공직전에 을미사변으로 중단되었

고141) 약 10년 후 경복궁의 집옥재와 협길당으로 이건되었다142) 집옥재의 이건공사와 같은

시기에 중희당도 이건하였는데143) 경복궁의 어느 전각으로 이건되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다

만 이 시기 경복궁에서 동궁의 전각인 계조당의 개건이 있었고 함화당 집경당 등의 공사가

연이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이 건물들에 중희당의 부재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대에 중희당을 어디론가 이건함으로써 창덕궁에서 동궁의 전각이 삼삼와와 승화루

만 남기고 사라지게 되어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 까지 중희당이 있던 곳은

빈 터로 남아있어 「동궐도」에서 볼 수 있는 동궁의 공간을 볼 수 없게 되었다

4) 제6기 대한제국 말기

갑신정변이후 고종이 경복궁으로 이어한 후에는 잠시 창덕궁에 이어했었던 것 외에 을

미사변 직후까지 경복궁에 주로 머물렀으며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다가 경운궁을 건설한 다음에는 경복궁이나 창덕궁 두 궁궐로 돌아가지 않았다 고종

31년(1894) 4월 2일에서 5월 23까지 약 두달여 정도 창덕궁에 이어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광

140)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7월22일 ldquo壽靜殿의 호는 咸寧으로 동별당의 호는 衍福으로 남별당의

호는 正善으로 하였으며helliprdquo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8월2일 무위소가 함녕전 서별당ㆍ북별당의 당

호 단자를 올렸는데 서별당은 協吉堂 북별당은 資順堂이었다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9월24일 營

建所가 咸寧殿 北別堂의 당호를 集玉齋로 품정하였다

141)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 7월22일

142) 『승정원일기』 고종 28년(1891) 3월21일 ldquo咸寧殿의 여러 전각을 옮겨 건립하는 일을 重建所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rdquo(여기서 함녕전은 창덕궁의 수정전을 개칭한 전각을 말한다 후일 광무 1년(1897) 경운궁

건설당시 선덕전이라고 이름지었다가 함녕전으로 고친 경운궁의 침전과는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전각이

다)

143) 『고종실록』 고종 28년(1891) 5월 3일

무 4년(1900)에는 창덕궁 선원전에 태조의 어진을 모시면서 경복궁 선원전과 더불어 1실을

증건하는 공사를 했다

다 근현대기 창덕궁 영역의 변천

1) 제7기 일제강점기의 개조

1907년 7월 19일(양력) 고종이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한 직후

궁내부로 하여금 창덕궁의 수리를 명하고144) 같은 해 11월에 황후와 황태자를 데리고 이어

하였다145) 이로서 고종 31년(1894) 이후 13년 만에 창덕궁이 다시 주인을 찾게 되었다

순종이 이어하기 직전에 이루어진 수리에 관한 내용은 여러 장의 도면으로 남아 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도면은 총 96종으로 전체배치도 인정전일원의 수리 궁

내부 청사 대조전 일원 희정당과 선정전 일원 약방 내전일원의 신축건물 창고와 장유고

낙선재 일원 후원 등에 관한 도면이 있다 이들 도면은 1907년부터 진행된 창덕궁의 개조

철거 훼손 개축 신축에 관한 가장 실체적인 자료이다146)

그 중에서 전체 배치를 나타낸 것으로 1911년 1920년대 1930년대초 1936년 무렵의 도

면이 있어서 일제강점기 동안 창덕궁의 전체적인 변화에 대한 조감이 가능하다 1911년의

배치도를 살펴보면 인정전 좌우에 행각이 연결되어 있고 인정전 뒤쪽의 복도로 연결되어 선

정전 뒤를 지나 희정당 서측까지 연결된 변화를 볼 수 있다 또한 인정전 동쪽의 궐내각사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어 외곽의 행각만이 남아 있고 중희당이 있던 곳은 행각도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진선문 남쪽에 궁내부 청사가 들어서 있다 반면 대조전일곽과 희정당은 「동

궐도형」과 같은 외곽을 보이고 있어서 대조전 일곽은 큰 변형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원은 아직 조선시대의 도로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담장 또한 「동궐도

형」과 대조 결과 잘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1911년 까지는 부속건물들을 많이 헐어

내고 인정전과 선정전 일대를 개조하기는 했으나 어느 정도 원형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1921~1932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배치도는 후원의 도로가 변형되고 대조전과

희정당일곽이 다시 지어졌으며 창덕궁내의 담장과 행각이 철거되어 그 이전까지 성격이 뚜

렷이 구분되던 영역성이 파괴된 모습을 보여준다 1930년대초의 도면은 창경궁과 종묘 사이

에 율곡로를 개통한 후의 모습이다 낙선재 남쪽과 종묘 사이는 도로로 인하여 분리되었다

1936년경의 도면은 등고선이 표기되어 창덕궁의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도면이다 창덕궁의

건물 부분은 1921~1932년 사이의 도면과 큰 차이가 없으며 창경궁쪽에서 동물원과 식물원의

건물 증설이 확인된다

144)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10월 7일(양력)

145)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11월 13일(양력)

146) 이강근 「장석각 소장 근대 건축도면에 대하여」 『근대건축 도면집-해설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9년 15쪽

일제강점기에 편찬한 『조선고적도보』에는 원래 창덕궁의 전각이 회색으로 표기되고

당시 남아 있던 전각이 검게 표시되어 1920년대 전후의 전각과 담장의 잔존현황을 파악 할

수 있다 돈화문과 주변의 행각들 선원전과 그 일대의 숙경재 주방 이문원과 대유재 소유

재 인정전과 선정전 및 행각이 남아 있다 내전일곽의 건물도 1917년의 화재로 모두 소실되

어 희정당 동쪽에 있는 성정각 관물헌만 남았으며 낙선재 일곽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

고 있다

그림 6gt 1911년경(좌)과 1921~1932년(우)의 「창덕궁평면도」(1911년경 장서각)

그림 7gt「창덕궁배치도」(1907년의 배치상황+1920년 이후 잔존전각(『조선고적도보』)

2) 해방이후의 변화와 보수정비

해방이후에는 개별전각을 수리하는 것으로 유지되다가 1996년부터 일제강점기에 변형된

인정전 선정전 일대를 복원했으며 2000년부터는 규장각과 구(舊)선원전을 복원하면서 인정

전 서쪽의 궐내각사를 복원하여 조선시대 창덕궁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고 있다

유적명 연도 발굴기관 보고서 기간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발굴조사 1995

창덕궁 반도지 유적 昌德宮 半島

池 遺蹟2001

중앙문화재

연구원

《昌德宮 半島池 試掘

調査報告書》 2001시굴 010416~010519

창덕궁 반도지 유적 昌德宮 半島

池 遺蹟2002

중앙문화재

연구원

《昌德宮 半島池 補

修middot整備工事 竣工報告

書》 2002

발굴 020401~020616

창덕궁 금천교 주변 유적 昌德宮

錦川橋 周邊遺蹟2001

국립문화재

연구소- 발굴 010920~011115

창덕궁 금천교 주변 유적 昌德宮

錦川橋 周邊遺蹟2002

국립문화재

연구소

《창덕궁 금천교》

2002 발굴 020313~020423

창덕궁 상방지 昌德宮 尙房址 2002

명지대부설

한국건축문

화연구소

《昌德宮 尙房址 遺構

調査 報告書》 2002 발굴 020411~020704

표 8gt 창덕궁관련 발굴조사 내용

년도 공사내용 문서관리번호 보고서

1970 창덕궁부속가옥철거 -

1970 창덕궁 및 비원보수(사진) 박대통령 준공식 참석사진

1972 창덕궁보수도면 BA0122692 BA0122702

1973 창덕궁 현황 측량 실시 문화재청

1975 창덕궁 연경당별사 보수공사 BA0122725

1975 창덕궁 승화루 및 어친잠실 약방 보수공사 BA0122725

1976 창덕궁 보수공사(북행각수정당보호책설치축대보수) 문화재청

1976 창덕궁 돈화문 보수공사 문화재청

1976 창덕궁 보수 정화공사 문화재청

1978 창덕궁 반도지 조경공사 BA0806636

1978 창덕궁 낙선재 진입도로 공사 문화재청

1978 창덕궁보수정화공사 문화재청

1979 창덕궁반도지-옥류천간도로주변정화추가공사 BA0122735

1979 창덕궁 주차장 주변 정비공사 문화재청

1980 창덕궁 괘궁정 보수공사 CA0015037

1982 창덕궁 인정전 동서행각 안전진단의뢰 문화재청

1985 창덕궁선정전 및 취원정 보수공사 BA0122791

1985 창덕궁 담장 및 주변 지역 정비 CA0015402

1986 창덕궁 연와창고 보수 CA0022142

1989 창덕궁 가정당 보수공사 BA0073213

1989 창덕궁 의로전담장 보수공사 BA0073214

1989 창덕궁 대조전 부식기둥 인공수지 처리공사 BA0073215

1989 창덕궁 옥류천 어정 정비 문화재청

1990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824

1990 창덕궁 의로전 및 문간채 보수공사 CA0025835

1990 창덕궁 의풍각 보수공사 CA0025831

1990 창덕궁 청의정 승재정 농산정 보수공사 CA0025827 CA0025826

CA0025814

1990 창덕궁 대조전 보수공사 CA0025812

1990 창덕궁 단봉문주위 담장정비공사 CA0025811

1990 창덕궁 신선원전 문간채 보수공사 CA0025834

1990 창덕궁 부용정 보수공사 문화재청 비공개

1991 창덕궁 인정전행각 복원 BA0812994

1991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889

1991 창덕궁 폄우사 보수공사 CA0025888

1991 창덕궁 의로전 재실 보수공사 CA0025906

1992~1994 창덕궁 인정전 행각 복구공사 BA0813009 BA0813013

1992 창덕궁 연경당 행랑채 보수공사 CA0025978

1992~1993 창덕궁 구선원전 보수공사 실측설계 CA0025976(비공개)

1992 창덕궁 낙선재 정비 설계 정실측 CA0025941 CA0025942

1992 창덕궁 선정전일곽 실측 설계용역 문화재청

1992 창덕궁 반도지 및 존덕정 주변일곽 정밀실측 조사 문화재청

1992 창덕궁 옥류천과 주변 고건물 실측 조사 보고서 발간 문화재청

1992 창덕궁 연경당 및 주변 일곽 정밀 실측조사 문화재청

1992 보고서 창덕궁 원유복구 조경종비공사 완료 보고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의로전 재실 보수공사 CA0026052

1993 창덕궁 집희(관물헌) 보수공사 CA0026035

1993~1995 창덕궁 낙선재 정비공사 CA0026042

표 9gt 해방이후 창덕궁 건물 보수내용(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년도 공사내용 문서관리번호 보고서

1993 창덕궁 대조전 일곽 실측 설계 문화재청

1993 창덕궁 낙선재 후원 실측설계 및 보고서 발간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애련지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3 창덕궁 주합루 실측 설계 문화재청

1995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발굴조사 복원설계 BA0807969 BA0813061

1995 창덕궁 기오헌 의두각 보수공사 CA0026201

1995 창덕궁 서향각 실측 설계 및 보수설계 문화재청

1995 창덕궁 인정전 행각지 발굴조사보고서 CM00057506

1996 창덕궁 돈화문 정밀실측 CA0026307

1996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공사 CA0026267

1996 창덕궁 대조전 부속건물 보수공사 CA0026266

1996 창덕궁 서측 담장 보수공사 CA0026259

1996 창덕궁 연경당 사랑채 별채 보수공사 CA0026281 CA0026273

1997 창덕궁 돈화문 보수공사 CA0026328

1997 창덕궁 가정당 보수공사 CA0026347

1997 창덕궁 사정기비각 어수문 보수공사 CA0026348

1997 창덕궁 인정전 정밀실측 CA0026353

1997 창덕궁 희우루 문간채 약방 보수공사 CA0026337

1998 창덕궁 인정전 긴급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8 창덕궁 신선원전 실측 보수설계 문화재청

1999 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발굴조사 문화재청

1999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공사(4차) 문화재청

1999 창덕궁 대조전 부속건물 보수공사 문화재청

1999 창덕궁 신선원전 실측 및 보수설계 문화재청

2000 창덕궁 제월광풍관 보수 및 조경공사 문화재청

2000~2005 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복원공사창덕궁 규장각 구선원전권역 복원

공사보고서

2000~2001 창덕궁 반도지 시굴조사계획 문화재청

2000 창덕궁 몽답정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경추문 보수공사 시행 문화재청

2001~2002 창덕궁 금천교주변 발굴조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침전행각 및 수라간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의로전 일곽 보수 문화재청

2001 창덕궁 금천교 실측 및 복원설계 용역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인정전 외행각 복원정비 문화재청

2001 창덕궁 선향재 보수 설계용역 문화재청

2002 창덕궁 선향재 보수공사 문화재청

2002 창덕궁 희정당 보수공사 창덕궁 희정당 실측 수리보고서

2002 창덕궁 상방구역 유구조사 건물복원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정자(상량정태극정능허정) 보수공사 창덕궁 정자 실측 수리보고서

2003 창덕궁 희정당 신관 보수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선정전 후원 석축 복원 문화재청

2003 창덕궁 의로전 일곽 및 경훈각 보수공사의로전 실측 수리보고서

경훈각 실측 수리보고서

2003 창덕궁내 정자 보수공사 (태극정) 문화재청

3 창덕궁의 배치와 특징

가 영역별 배치와 특징

1) 궐내 각사

궐내각사는 왕을 보좌하고 궐내의 일상과 의식을 위한 기관들이 위치한 영역이다 창덕

궁은 창건당시부터 이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경복궁처럼 궐내각사를 완전히 갖추고 있지

않았다 창건당시부터 조성된 부분은 인정전 동쪽부분으로 연영문 안에 승정원 내반원 궁

방 주원 등이 배치되었다 임진왜란후 경복궁이 소실되자 창덕궁이 법궁이 되면서 경복궁에

있던 상의원 내병조 등의 건물들이 창덕궁 내로 편입되었다147) 또한 인정전 서쪽으로 정

청 옥당 약방 이문원 등이 추가되었다 원래 이곳에 있었던 일부 기관(도총부 주자소 내

사복)은 창경궁으로 옮겨지기도 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이 궐내각사를 공유하는 형태를 취하

였다

2) 외전 영역

외전영역은 정치의 공간으로 왕과 관료가 공식적으로 조회를 하는 영역이다 크게는 정

전인 인정전 일곽과 편전인 선정전 영역으로 구분된다 배치의 특징은 경복궁이 남북 축선

상에 정전과 편전이 놓이는데 반하여 창덕궁은 인정전의 북쪽에 건물을 둘 만한 지형이 아

니므로 편전은 정전의 동쪽에 위치한다 편전에 이어서 내전영역도 그 동쪽에 위치하여 외

전rarr내전은 서rarr동쪽으로 배치되고 있다

3) 내전 영역

내전은 왕과 왕실 구성원의 생활공간이며 왕실의 여성구성원인 내명부의 의식공간이기

도 하다 대조전을 중심으로 주변의 집상전 수정전 만수전(후에 경복전) 등 대비전을 포함

하며 왕이 좀 더 편하게 신하들을 만날 수 있는 희정당과 희정당 동쪽의 성정각 관물헌 등

을 포함한다 그 외에 내전에는 왕실 귀중품과 생활에 관련된 물건들을 보관하는 건물과 생

활을 보조하는 기능을 가진 건물들이 중요전각 주변에 배치되었다 창덕궁에서 부족한 내전

의 전각은 창경궁 건설이후 창경궁에서 해소하였다

4) 동궁 영역

147) 『동국여지비고』제1권 京都 文職公署條

그림 8gt 조선후기 창덕궁의 영역 구분과 진입동선(「동궐도형」)

동궁은 세자궁이라고도 하며 왕세자의 거처이자 집무공간 강학공간이다 동궁은 세자의

재위 여부에 따라 그 존재가 결정되었으며 세자 책례를 통해 재위하게 될 경우 영역이 규정

되어 동궁으로 지칭되므로 시기에 따라 중심전각이 변하기도 하였다 세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에는 그 인식적 개념이 약화되어 동궁의 전각은 다른 용도로 전용되어 대비나 왕비가

사용하기도 했으며 왕이 임어하기도 했다

동궁은 현재 낙선재 일대의 남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궁의 정문은 창경궁의 선인

문 동룡문으로서 동쪽에서 진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임진왜란 이전에는 창덕궁의 동쪽경

계(건양문) 밖에 있었으며 창덕궁과 별개의 영역에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동궁의 정당

은 저승전이었으며 저승전이 소실되자 시민당을 사용했다 시민당이 정조 4년 화재로 소실

되자 이를 중건하려다 중지하고 내전에 좀 더 가까운 위치에 중희당을 세우고 이곳에서 세

자의 착봉례를 거행함으로서 정조대 이후에는 중희당이 동궁의 정당이 되었다 정조대에 조

성된 중희당 일곽은 중희당과 삼삼와 승화루 그리고 그 동쪽으로 세자를 위한 공간이 마련

되었다 이외에 세자를 보좌하는 곳으로 춘방과 계방이 있는데 이 건물들은 동룡문 안쪽 시

민당의 동쪽에 있었으며 중희당을 조영한 이후에도 그 위치는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순조

대에 효명세자가 이 중희당에서 대리청정을 했으며 효명세자 사후에 동궁은 그 주인을 다시

얻지 못했다 효명세자 사후 세자가 공부하며 거처했던 영연합의 천지장남지궁의 건물을 헐

어 창경궁의 영춘헌을 짓는데 사용하는 등 중희당 동쪽 언덕 위에 있었던 건물도 일부 사라

지게 되었다 이후 고종대에는 세자를 위해 경복궁의 계조당과 자선당 등의 동궁이 조성되

면서 창덕궁의 동궁은 그 의미를 잃어갔다고 할 수 있다

시민당이 소실되고 정조대에 중희당을 왕의 거처 공간에 보다 더 가까이 조성하면서

세자의 공간은 중희당이 중심이 되었다 시민당 주변에 정조가 수강재를 지으면서 조선초기

이래 동궁이 자리하던 곳은 점차 그 영역의 성격이 바뀌었으며 헌종대에 이곳에 낙선재를

지으면서 창덕궁에서 동궁의 공간적인 위치는 궁궐의 중심영역으로 이동했다고 할 수 있다

왕대 세자 책례일자 세자재위기간 책례장소 관례장소대리청정

장소

광해군 李祬(廢世子) 광해 2년 5월 11일 12년 10개월 인정전 시어소내청

인조 소현세자 인조 3년 1월 27일 20년 3개월 융정전(경덕궁) 경현당

봉림대군(효종) 인조 23년 9월 27일 3년 8개월 명정전 -

효종 현종 효종 2년 8월 28일 7년 9개월 인정전 세자궁

현종 숙종 현종 8년 1월 22일 7년 7개월 인정전 시민당

숙종 경종 숙종 16년 6월 16일 30년 인정전희정당 시민당 시민당

경종 영조 경종 1년 9월 27일 2년 11개월 인정전 -

영조 효장세자(진종) 영조 1년 3월 20일 3년 8개월 인정전 시민당

장헌세자(장조) 영조 12년 3월 20일 26년 2개월 인정전양정합 시민당 시민당

정조

정조 문효세자 정조 8년 8월 2일 1년 9개월 인정전중희당

순조 정조 24년 2월 2일 5개월 집복헌 바깥채집복헌 바

깥채

순조 효명세자(익종) 순조 12년 7월 6일 17년 10개월 인정전희정당 경현당 중희당

헌종 세자없음 - - - -

철종 세자없음 - - - -

고종 순종 고종 12년 2월 18일 32년 6개월 인정전 중희당

표 10gt 세자의 책례와 관례장소(창덕궁)

5) 진전 영역

선원전은 돌아가신 선왕과 선후의 영정을 봉안하던 건물로 조선전기에는 경복궁에 세워

져서 태조 태종 세종 세조 덕종 성종 중종의 어진을 모셨었다148)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의 선원전이 소실되었고 조선후기에 선원전이 다시 마련된 것은 숙종대였다

효종 8년(1657)에 만수전과 함께 지었던 춘희전에 숙종이 즉위 21년(1695)선원전이라 개명

하고 숙종의 어진을 봉안한데서149) 비롯되었다 춘휘전은 원래 만수전에 속한 건물로 빈전

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150) 효종대 건립당시 춘휘전의 주변건물은 서행각 3칸

148) 『명종실록』 권8 명종 3년 10월 10일

149) 『승정원일기』영조 30년 1월 11일 ldquohellip上曰 此殿本是春暉殿 而乙亥年(숙종 21년)奉安御眞後 改名璿源殿

矣helliprdquo

서월랑 7칸 북월랑 25칸반 남월랑 16칸 반 등의 행각과 월랑이 주변에 있었고 양지당 12

칸 양지당 남월랑 9칸과 주변에 문과 담장 판장 등이 있었다151) 그중에서 춘휘전의 서행

각 서월랑 북월랑은 「동궐도」나 「동궐도형」에서는 볼 수 없어서 선원전으로 용도가 변

하기 전에 주변 건물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원전의 영역은 선원전 서북쪽의 숙

경재와 양지당 선원전 남쪽의 영의사(永依舍) 서휘문(瑞暉門) 까지이다 영의사 남쪽의 약

방이나 옥당과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선원전으로의 출입은 인정전 남행랑 서쪽의 경광문-서휘문-양지당-선원전으로 가는 석

과 인정전 서쪽의 만안문을 통해 양지당을 거쳐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숙종이후 왕들은 생전에 자신의 어진을 제작하여 일정한 곳에 보관하였다가 사후에 부묘가

끝나면 어진을 선원전에 이봉하였다가 제사와 차례를 지낼때 꺼내서 걸어놓고 의례를 거행

하였다152)

숙종 사후 영조 1년(1725) 선원전을 중수하였으며153) 정조 2년(1778)에는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내전 전배실로 쓰던 동변실을 제2실로 개조하고 좌우 익각을 추가하였으

며154) 정조 사후에는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서변실을 개조하였다155) 그 결과 정

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확장되었는데 「동궐도」에 그려져 있는 모습이다

헌종 12년(1846)에 순조와 익종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제 4실과 5실을 증건하였으

며156) 철종 2년(1851) 다시 1실을 증건하여157) 신실이 6칸이 되었다 이후 광무 4년(1900)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서쪽으로 1칸을 증건하여 신실 7칸 좌우 퇴칸을 포함하여 정

면 9칸으로 확장되었다 원전 동쪽의 양지당(養志堂)은 어진의 이안처로 사용되었다

150) 『승정원일기』영조 30년 1월 11일 ldquohellip孝廟朝爲慈懿大妃 建此殿 爲他日殯殿之計helliprdquo

151)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1657)

152)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축』 동녘 2010년 479~483쪽 3 영건의궤에 기

록된 건축 2)진전 참조

153) 『궁궐지』 창덕궁지 「영묘어제선원전중수기병명」

154) 『승정원일기』정조 2년 1월 10일

155) 『승정원일기』순조 2년 7월 3일

156) 『헌종실록』 헌종 12년 8월 6일

157) 『일성록』철종 2년 5월 17일

그림 9gt 진전영역과 진입동선

6) 후원 영역

전각들이 배치된 영역의 북쪽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후원이다 지형은 전각영역보다 높

고 굴곡이 심한 편이다 후원영역은 성격에 따라 4개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흔히 후원

은 왕의 휴식공간만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전각영역이 통치와 의례 생활의 기능을 담고 있

듯이 후원 또한 통치 의례 휴식을 위한 기능에 따라 담장으로 공간이 구분되었다 창덕궁

의 경우 창경궁과 후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동궐도」에는 각 영역을 구분하는 담장이 표현

되어 있고 「동궐도형」도 이와 일치한다 창덕궁의 후원은 중앙이 높고 동middot서로 경사진 지

형적인 특징이 있는데 중앙의 능선에 의해 양쪽 공간의 성격이 완연히 다르다

능선의 동쪽에서 전각영역의 북쪽에 인접한 곳은 통치를 위한 공간으로 왕권의 상징적

공간인 주합루일대와 문middot무시험을 치루는 영화당과 춘당대일대 그 동쪽의 내농포가 있어서

국가의 근간인 농사를 살피는 장소를 마련하였다 통치영역의 북쪽은 왕의 개인적인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정자와 연못으로 꾸며졌다 이 영역의 중심공간은 옥류천 일대이다 능선의

서쪽은 북쪽으로 치우쳐서 대보단에 관련된 제례시설 산신단 신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남쪽은 중일각 등 군사훈련을 위한 장소가 마련되었다

그림 10gt 후원영역의 공간구분

나 내부경계의 변천

창덕궁과 창경궁은 lsquo동궐rsquo로 불리면서 하나의 궁궐로 인식되기도 했고 실제로 창덕궁의

을 사용할 경우 궁인들을 창덕궁에 모두 수용하기 어려워 그 처소는 창경궁을 활용하였

다158)

창덕궁의 안쪽 담장문(內東墻門)인 건양문(建陽門)이 성종대 이래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

계였다 내전은 통명전과 대조전일곽 사이에 두 겹의 담장이 있어서 구분이 명확하였으나

그 남쪽은 동궁영역의 전각이 변화함에 따라 별개의 궁역으로 취급되거나 창덕궁에 포함시

키기도 했고 창경궁에 속하기도 했다

『명종실록』에는 저승전을 창덕궁에 있는 것으로159) 했고 인조대 『저승전의궤』에는

저승전을 어느 쪽도 아닌 동궁으로만 언급했다 헌종대 편찬한 『宮闕志』에는 ldquo시민당터

(수강재 남쪽)에서 추경원(秋景苑)은 원래 창덕궁이다rdquo고 했으며 중희당 삼삼와 육우정을

「창덕궁지」에 포함시켜 서술했다 반면에 『동국여지비고』 『宮闕誌』에서는 중희당을

창경궁에 포함시켰다

현재는 자경전 북쪽 담장에서 춘당대까지 담장으로 되어 있고 그 북쪽은 철책으로 되어

있다 창덕궁과의 경계담장은 일제강점기에 구획된 것인 1936년의 배치도에 나타난 형태로

계속 유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즉 종묘 통행의 육교에서 낙선재동쪽 - 자경전 서쪽

담장 - 춘당대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담장이다 앞서 수강재의 동쪽에 창경원당시 동물사가

지어지면서 형성된 경계는 해방이후 창경궁과 창덕궁의 필지를 행정적으로 분리해서 각각의

지번을 부여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회복하는 1986년의 창경궁중

건에서도 그 경계는 조정되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여기에 율곡로를 가로질러 종묘로 통행할

수 있는 육교가 설치되면서 창경궁 쪽에서 접근하도록 경계가 설정된 것이다

후원 또한 대온실 주변에 식물원 부속 건물과 시설이 들어서면서 형성된 경계가 건물권역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조정 없이 유지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변화된 창경궁과 창덕궁

158) 『광해군일기』 2년(1610) 3월 26일 ldquo대저 昌德宮은 法宮과는 달리 殿閣이 많지 않고 간격이 협소하여

평상시 들어갈 때에도 항상 수용하기 어려워 宮人들은 나누어 昌慶宮으로 들어가곤 했다rdquo

159) 『명종실록』 명종 즉위년(1545) 7월 14일 ldquo更思之 則唯昌德宮東宮儲承殿爲當rdquo

그리고 후원의 경계는 창경원의 시설과 관련하여 설정된 경계였다

그림 11gt『궁궐지』의 창덕궁과 창경궁영역 서술 비교 「동궐도형」+『궁궐지』

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역 외곽의 변천160)

조선시대 창덕궁의 궁역은 세조대에 후원과 동쪽으로 궁장을 확장한 이래 계속 유지되

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이문원일대가 궁역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lsquo2 영역의 변천rsquo 참조)

일제강점기 초기는 비교적 조선후기 궁역이 유지되고 있는 시기이다 1912년 「지적원도」

에 의하면 창경궁과 창덕궁이 합하여 하나의 필지인 와룡동 2번지로 되어있다 2번지와 접

해 있는 와룡동 1번지는 집춘문의 호위를 담당하던 집춘영이 있던 자리이다 소유는 일제강

점기 당시 조선을 관리하는 관청인 lsquo이왕직rsquo으로 표기 되어있어서 왕실의 소유로 남아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지적도상에서 2번지는 창경궁과 창덕궁의 외궁장과 일치하거나 외궁장보다 약간 외곽에

범위가 잡혀 있는데 이는 궁장 바깥쪽의 경사가 급한 지역은 경사 아래쪽까지 지적에 포함

되었기 때문이다 궁장주변의 지적상황은 거의 변하지 않고 현재까지 유지되어 있다 후원의

북쪽은 임야로 이 부분도 이왕직의 소유로 되어 있다

1912년 이왕직 소유의 와룡동 12번지는 1917년부터 창덕궁 소유로 변경되었다 와룡동

2번지는 대지 면적이 6514743(197071평)으로 1912년부터 1929년까지 동일하다 창덕궁

소유로 추가된 대지는 창덕궁 돈화문 주변의 와룡동 3~6번지 원서동 1번지로서 원래 이 부

분도 와룡동 1번지의 집춘영이 있던 곳과 마찬가지로 창덕궁 정문의 숙위를 담당하던 남영

160) 문화재청 『창경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2010 173~182쪽 lsquo창경궁의 궁역변화rsquo를 참조하여 수정middot보완

이 주둔하던 곳이다

창경궁의 외곽궁역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1931년 원남동 사거리에서 창덕궁 돈화문쪽

으로 율곡로가 개설되면서 창경궁과 종묘사이가 단절되고 도로로 편입되어 창경궁 남쪽 궁

장과 마랑일곽이 훼손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하나의 지번아래 있었으나 해방이후 그때까지 창덕

궁 소유에 포함되어 있던 창경궁 영역이 세분화되어 창경궁 소유로 분리된다 1963년에 창

덕궁 영역(와룡동 2-71번지)과 창경궁 영역(와룡동 2-1 2-70번지)으로 나뉘었고 외곽부분이

추가되거나 축소되었다 과학관 부지가 지번이 분할된 것도 이때이다

궁역 외곽은 일제강점기와 해방이후 현재까지도 조선시대의 경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

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경운궁의 선원전을 대보단 남쪽에 이설하면서 창덕궁

의 궁역에 포함시켰고 율곡로를 개설하여 창경궁과 종묘사이를 분리한 것이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 직후

rarr조선시대 영역유지

일제강점기

rarr신선원전 돈화문좌우추가

(1932년 이후 율곡로 개설)

해방 후

rarr창덕궁과 창경궁 필지분할

신선원전 주변확장

북쪽 궁장 주변 필지 확보

현재

rarr돈화문 월대 복원

1912년 「지적원도」

(국가기록원 소장)

1929년「경성부地形明細圖」

(국립중앙도서관소장)

1977년「창덕궁재산목록」

(문화재청 소장)

2011 현재 지적도

표 12gt 창덕궁 궁역외곽의 변천

4 창덕궁 관련 의궤로 본 건물의 구조와 특징

가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인조 25년 1647년)

1) 공사 내용 분석

(1) 1647년(인조 25)의 창덕궁 수리공사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불에 탔던 창덕궁은 광해군 원년 중건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외전

의 인정전과 내전의 수정당(壽靜堂)만 남고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어서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마저 불에 타버리자 경덕궁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인조 11년(1633) 비교

적 덜 파괴된 창경궁을 먼저 복구하게 된다

계속 미루어지던 창덕궁 내전을 중건하게 된 계기는 창경궁에서 일어난 소현세자빈 강

씨의 역모와 저주사건이었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후 인조의 눈 밖에 났던 세자빈

강씨가 인조와 인조의 후궁인 조소용을 저주했다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소현세자와 관련

된 세력이 제거된 사건이었다 창경궁내 곳곳의 아궁이와 계단 아래에서 저주에 사용된 물

건들이 발견되었으며 흉물이 발견된 창경궁에 왕이 머물 수 없자 아직 복구되지 않은 창경

궁을 수리하여 이어하기로 하였다 소실된 지 25년 만에 이루어진 이때의 공사는 인조 11년

의 창경궁복구공사와 마찬가지로 광해군에 의해 영건되었던 인경궁을 헐어서 그 자재를 사

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때 복구된 주요건물은 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정묵당(靜黙堂) 집상당(集祥堂) 징광

루 등이다 내전의 경우 자재는 대부분 인경궁 것을 활용하였으나 초석은 원래의 것을 사용

하여 화재 이전의 규모대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대조전과 선정전 희정당의 상량 직후

세자의 처소인 저승전(儲承殿)을 옛 자리에 복구하기로 하였는데 저승전의 상량문은 『창덕

궁수리도감의궤』에 실었고 공사과정은 『저승전의궤』(1648)를 별도로 제작하였다

(2) 주요 공사 내용

의궤의 목록은 따로 없고 내용 속에서 항목을 구분해 서술하고 있다 서술순서는 공사

에 참여한 관리의 명단 6월 13일부터 시작하는 계사 계사질 끝에 공사비용과 남은 재물을

기록하였고 상량문(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저승전) 상량의 이문질 감결질 그리고 감결질

끝에 도감조비잡물질(都監措備雜物秩)을 적었다 다음으로 一所 二所 三所 四所 五所 노

야소(爐冶所) 별공작(別工作) 의궤사목(儀軌事目)이다

작업소별로 좌목을 따로 적고 별개의 의궤처럼 구성하였는데 『창경궁수리소의궤』

(1633)보다 더 상세하다 도감사목 다음에는 개기 정초 상량과 같은 주요 일정을 적었다

건물의 규모에 대한 묘사는 인경궁에서 철훼한 건물명과 칸수를 기록하고 철훼된 목재와 기

작업소 창덕궁 공사 전각(칸수) 인경궁 철훼 전각

1소 -대조전(45) 동서익실(온돌12칸) 동익각(6)

남월랑(285) 서익각(9) 서월랑(9)

-집상당(20) 행각(25)

-징광루(상하층40) 서월랑(10) 전행각(3)

-옥화당(105)

-정묵당(105) 西邊階上月廊(16) 飯色間(2)

외행각(3)

-慶壽殿(45) 동월랑(195) 남월랑

(225) 남행각(6) 동행각(3)

-慶寧殿남행랑(36) 동행랑(4) 서행

랑(13) 서행각(2)

-弘政殿(24)

-重暉堂(9) 소주방(75) 連付舍(1)

內帑庫(12) 酒茶房(85) 전행랑(2)

-正順堂동행랑(5) 남부사(1)

-光政殿남월랑(10) 십자각뒤 평행랑

(1)

-崇海堂행각(6) 북별당(20) 1칸문 4

2소 -熙政堂(15)

-영명문내행각(7)

-서월랑(23) 남월랑(6)

-누각(145)

-외남월랑(19)

-師傳廳(75)

-別監廳燈燭房(16)

-선화문협문(2)

-내반원(10)

-사전청 일칸문(1) 내반원 일칸문(1)

-외월랑(27)

-내반원남행랑(17)

-협양문(1) 동서협실(7)

-선례문(1) 동인문(1) 측간(1)

-和政堂(21) 행각(3) 서월랑(14) 남

월랑(18)

-延化門(6) 서외월랑(9)

-玉宸樓3東付舍(10)

-書士廳(16) 내반원(11) 행랑(13)

장방(20)

-승정원행랑(5) 빈청전랑(3) 水閣서

쪽月廊(2) 光政殿북월랑(7)

-會通門(1)

-端陽門(2)

-延祥門(1)

-沖黙堂(8) 행랑(7)

3소 -寶慶堂(3) 측15

-泰和堂(6) 남월랑(7) 동월랑(2) 북행각(1)

-昭德堂(4) 남월랑(5) 동월랑(11)

-燒廚房(5)

-小燒廚房서행각(10)

-中燒廚房(4칸 전퇴포함 6칸)

-下燒廚房(3칸 전퇴포함 4칸반)

-측간(4)

-窓差備(4)

-慶極堂(9)

-仁德堂(12) 서월랑(5)

-慶寧殿서월랑(4)

-福寧殿동월랑(6) 남행각(7) 서행각

(8)

-崇德堂동월랑(7)

-內帑庫 北邊半退(1)

-中政門밖북월랑(10) 외남월랑(20)

-尙衣院 衣襨房(6)

-경녕전수라간(5) 連付舍(1)

와의 수량을 각 건물별로 적지 않고 합하여 적었다 이때 조성된 전체 건물칸수는 817칸이

수리공역은 5개의 작업소로 나뉘어 이루어졌으며 작업소별 공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1소 침전인 대조전과 동서익실 월랑 집상당 징광루 옥화당 정묵당 및 주변월랑

2소 희정당과 주변월랑 소전청(所傳廳) 내반원(內班院) 및 주변월랑

3소 보경당 태화당 소덕당 및 주변월랑

4소 편전인 선정전과 주변월랑

5소 외전의 정전주변 월랑으로 인정전 동월랑 서월랑 승정원 대간청 인정문 외남월랑

-厢庫弓房(24)

-橉德堂동월랑(6)

-正順堂 앞厠間(6)

-與慶門(1) 一間門 5좌

4소 -선정전(9)

-북월랑(11)

-讌華堂(동온돌15 서온돌2 마루전퇴3) 集

陽門(1) 일각문(1)

-夜對廳서월랑(20)

-嚮明門(1)

-仁和門행각(7) 협문(1)

-동월랑(16) 내남월랑(11 돈례문)

-중행각(7) 외남월랑(14)

-외행각(3) 외행각동변(3)

-制義門 앞 일각문(1) 神佑門(1)

-光政殿(9) 내남월랑(5) 서월랑(8)

북월랑(11) 남월랑(5) 남행각(1)

동월랑(12) 內橫閣(1) 중행각(6)

외행각(12) 弘政殿북월랑(14) 弘

政門동월랑(7) 외남월랑(5) 中政門

남월랑(16) 外政門남월랑(6) 水閣

(4)

5소 -인정전동월랑(28) 남월랑(6)

-承政院(16)東廊(5)前廊(3)北間(1) 注書廳(9)

-臺諫廳(4)待接廳(2)승정원후랑(2)

-延英門(1) 東西挾廊(3)

-外司饔院(6) 端陽門(1)

-內弓房(14) 前廊(25)

-內司甕院(6) 司謁房(22)

-出入番內官廳(104)

-肅章門(6)

-王子問安廳(10 마루)

-인정문밖 남월랑(온돌1 마루6)

-빈청외랑(2) 精抄軍堡(2) 砲手軍堡(40)

-賓廳修粧 藥房修粧 傳漏軍堡(1)

-홍정문 외남월랑(26) 북월랑(7)

-승정원(28) 注書廳(4)

臺諫廳(6) 體元門월랑(10) 외사옹

원(34) 내사옹원樓廊(24) 弘政門

전후(6) 尙衣院樓廊(7) 六六門(1)

與慶門평월랑(6) 連付舍(2) 十字閣

後平廊(1)

당시 창덕궁 수리공사는 규모가 컸으므로 인경궁에서 많은 건물을 헐어냈다 이때 대부

분의 주요전각이 철거된 인경궁은 궁궐로서의 면모를 거의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창경궁

수리소의궤』와 더불어 이 의궤를 통하여 인경궁의 전각명칭과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의궤에는 철거된 건물을 건물별로 명시하지 않고 각 작업소 별로 일괄하여 기록하여 놓

았다 따라서 인조 11년의 창경궁공사와 같이 구체적으로 인경궁의 어느 건물이 창덕궁의

어느 건물로 이건하였는지 바로 대비되지는 않는다 다만 건물의 규모나 성격으로 보아 이

건관계가 드러나는 건물이 있다 창덕궁 수리의 경우 인경궁 건물의 이건에 있어서 일부는

동일한 규모의 이건도 있었으나 대개는 다른 규모의 건물로 변하였다 철거하는 인경궁의

전각은 칸수만 적고 창덕궁에 조성」되는 것은 각 전각의 바닥구조별(온돌과 마루 허칸)

칸수 천장의 구성과 마감을 밝혀 놓아서 궁궐내전의 내부 마감과 바닥구조에 대하여 많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 1647년 창덕궁 수리와 현상 비교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대조전 45칸

어칸 마루 3칸

4면 퇴마루 20칸

동서익실 전퇴석주온돌 12칸

동익각

남월랑

서익각

서월랑

6칸

28칸 반

9칸

9칸

마루5칸 온돌 3칸

마루12칸반 온돌 6칸

마루8칸반 온돌 3칸

마루 3칸

집상당 20칸

어칸마루 4칸

툇마루 14칸

온돌 2칸

행각 2칸반 마루

징광루 하층어칸마루 4칸

온돌 2칸

상층마루4칸 툇마

루12칸반

서월랑

전행각

10칸

3칸

마루 3칸 온돌 2칸

옥화당 10칸 반

마루7칸 온돌 3칸

정묵당 10칸 반

마루3칸반 온돌 3

西邊階上月廊 16칸 마루 6칸

飯色間 2칸

외행각 3칸

희정당 15칸 8

동서온돌 6칸

마루 9칸

영명문내행각 8칸 마루

서월랑 23칸 마루7칸반 온돌 4칸 허칸

11칸 반

남월랑 6칸 마루 2칸 온돌 2칸 허칸

2칸

누각 14칸반 8 상하층 마루

외남월랑 19칸 온돌 2칸 마루 12칸 허칸

3칸

師傳廳 7칸반 온돌 1칸반 마루 2칸

別監廳燈燭房 16칸 온돌 4칸 마루 7칸허칸 5

선화문 협문 2칸 포함

내반원 10칸 온돌 4칸 마루 6칸

사전청 1칸문 1

내반원 1칸문

외월랑 27칸 온돌 7칸 마루 11칸

허칸 7칸 문 2칸

내반원 남행랑 17칸 온돌 2칸 마루(퇴포함)13

칸 허칸 2칸

협양문 1칸 동서협실내 마루포함 7칸

선례문 1칸

이때 조성된 창덕궁의 내전일곽은 큰 변화 없이 순조대까지 유지되어 lt동궐도gt의 그림

과도 일치하고 있으나 1833년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다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동인문 1칸

측간 1칸

보경당 3칸 양면퇴 9칸

온돌 3칸 마루 6

태화당 6칸前退幷作平12칸

온돌 2칸 마루 문

1칸

태화당 남월랑

동월랑

북행각

7칸

2칸

1칸

昭德堂 4칸前退幷作平8칸

온돌 2칸 마루 허

간1칸

소덕당 남월랑

동월랑

5칸

11칸

소주방 5칸前退幷作

10칸

마루8칸반 온돌 1칸반

小燒廚房서행각 10칸 온돌3칸 마루 4칸 허칸2

칸 문 1칸

중소주방 4칸前退幷作

6칸

온돌 3칸 마루 3칸

하소주방 3칸前退幷作

4칸반

온돌 2칸 마루 2칸반

측간 4칸 마루 구비

窓差備 4칸 문 2칸반 마루 2칸

1칸문 5坐

선정전 9칸 북월랑 11칸 온돌 3칸 마루 5칸반

他庫1칸 건중문1칸 협문

반칸

華堂 동온돌 1칸반 서온

돌2칸 마루 전퇴 3

집양문

일각문

1칸

1칸

야대청이하서월랑

합당가幷

20칸 야대청 온돌 1칸 마루 2

합당가 4칸 마루3칸 허칸

1칸

인화문 행각 7칸

협문 1칸

동월랑 16칸 마루 4칸

동월랑 동변 5칸 온돌1칸 마루1칸 囗1칸

허칸 1칸

내남월랑 11칸 돈례문 1칸 동서 협문 1

칸 제의문 1칸 동변출입

문 1칸

중행각 7칸

외남월랑 14칸 선정문과 동서문 3칸

선전관청온돌1칸 마루2

칸 囗3칸

내관청온돌2칸 마루1칸

囗3칸

외행각 3칸

외행각 동변 3칸 온돌 1칸 마루 2칸

제의문 앞 1각문 1칸

주요전각 규모 부속건물 규모 비고

神佑門 1칸

인정전일곽 동월랑 14間作平28

광문 1칸 온돌 1칸 마루

4칸

남월랑 6칸

승정원16칸동랑5

칸 전랑3칸 북간

1칸

25칸 온돌 4칸 마루 19칸

주서청 9칸 온돌1칸반 囗1칸 마루 6

칸반

외사옹원 6칸 동루 8칸 서루 8칸 공상

청 2칸 남랑 7칸

rarr온돌 1칸 마루 24칸

內宮房 7 間 作 平 1 4

동루 8칸 서루 8칸

내사옹원 6칸 동루 7칸 서루 2칸 평랑

1칸 남랑 1칸

출입번내관청 10칸 온돌 3칸 마루 4칸

숙장문전후통 6칸

왕자간안청 5 칸 作 平 1 0

마루

인정문밖 남월랑 8칸 온돌 1칸 마루 6칸

빈청외랑 2칸

精抄軍堡 2칸

砲手軍堡 4칸

傳漏軍堡 1칸

건물명 기사 사료

대조전

1461년(세조13) 내정전을 양의전이라 명명하고

대조전에서는 신하를 만났다고 함 따라서 이 시

기 대조전은 내정전과 다른 전각이었다고 추정

『세조실록』 세조7년 12월

19일 및 세조13년 5월 18

『연산군일기』에 태종 세종이 대조전에 거처하

고 성종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보임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8월 22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해 복구됨

1623년(인조원년) 인조반정시 소실된『인조실록』 인조원년 3월

15일

1647년(인조25) 인경궁 경수전을 뜯어 다시 지

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34) 전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 다시지음

(2) 대조전과 의궤

대조전은 창덕궁 내정전이다 가운데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서 온돌방을 갖춘 평면이며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이다 태종 세종이 이 건물에 거처했고 성종을 비롯한

여러 왕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실록에 보이므로161)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진

것으로 판단되지만 초기 기록에서는 양의전(兩儀殿)이라는 정전 이름이 별도로 나오고 있어

서 주의를 요한다 1461년(세조 7) 창덕궁의 주요 전각 이름을 지을 때 내정전은 양의전이라

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162) 세조 13년 5월의 실록에는 왕이 양의전 문에서 대신을 만났다는

기사와 함께 대조전에서도 신하들을 불러 명령을 내린 기사가 보인다163)

따라서 적어도 이 시기에는 양의전과 대조전이 각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후에 양의전은 실록 기사에서 나오지 않고 역대 왕들이 대조전에 거처한 기사만 보인다 임

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 창덕궁이 복구되면서 다시 지어졌다 인조반

정시 다시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25) 인경궁의 경수전慶壽殿 건물을 뜯어서 다시 지었다

이때의 공사 내용은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자세하다 이 때 경수전은 45칸이었다

고 하며 새로 지은 대조전 역시 45칸 규모였다 통상 건물 이름에 목숨 수자가 붙은 곳은

대비나 상왕의 거처를 나타내므로 인경궁의 경수전은 대비전으로 지었던 건물로 추측되며

이것을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중궁전으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다시 지어진 대조전은 180여

년이 지난 1833년(순조 33)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건물은 이듬해 바로 복구되었는데 소실

전의 규모로 지어졌다

1647년에 인경궁 경수전을 헐어서 지은 대조전은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의하

면 전체 45칸 가운데 어칸 마루 3칸에 천장은 봉반자이고 4면에 툇마루 20칸이 있고 기단

은 4단의 장대석으로 되었으며 동서 익실이 있는데 전퇴는 돌기둥 6개가 있고 온돌은 12칸

으로 천장은 지반자로 되었다고 하였다 또 정전 좌우에는 동익각 6칸과 서익각 9칸이 있고

남월랑 28칸반 서월랑 9칸이 있다고 하였다 또 대조전 동북쪽에는 집상당 20칸 서북쪽에

는 2층 누각인 징광루가 있다고 하였다

이 시기 대조전 모습은 lt동궐도gt에 그림으로 전한다 대조전은 가운데 3칸이 지붕이

좌우보다 높게 그려져 있고 3칸 부분 앞에는 월대가 마련되어 있다 월대는 3면에 계단이

있고 판장으로 가려져 있는 모습이다 월대를 둔 정청 3칸 좌우는 지붕이 한 단 낮게 되어

서 좌우 3칸씩 있는데 이 부분이 『창덕궁수리도감의궤』에서 말하는 동서 익실로 볼 수 있

다 또 동서익실 좌우로 행랑이 길게 이어져 있어서 동익각과 서익각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다 또한 동서익실은 건무 하부에 돌기둥이 그려져 있고 돌기둥 안쪽에 아궁이도 보인다 지

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형태이다

(3) 희정당과 의궤

161) 『연산군일기』 권17 연산군 2년 8월 22일

162)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 12월 19일

163)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 5월 17일

건물명 기사 사료

선정전

1405년(태종5) 조계청으로 창건『태종실록』 태종5년 10월 19

1461년(세조7) 건물명을 선정전으로 함『세조실록』 세조12년 12월

19일

1698년(광해군즉위) 소실된 것을 복구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 시 소실 『인조실록』 인조1년 3월 15

1647년(인조25) 인경궁의 광정전을 뜯어 이

건함『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00년(순조즉위) 정조의 혼전을 선정전으로

정함『(정조)혼전도감의궤』

20세기 초 창호를 유리창으로 고치고 외행각

을 철거함

1996년 lt동궐도gt 등을 근거로 원형 복구함

처음에는 명칭을 수문당(修文堂)이라 해서 왕의 학문소로 지어졌다가 연산군 때 희정당

으로 고쳤으며 뒤에 편전의 용도로 전용되었다 순종황제 때는 서양식 가구를 비치하고 사

신 접견 장소로 쓰였다 『연산군일기』에는 수문당이 대조전과 함께 성종이 거처하던 곳이

라는 설명이 나온다164) 이것이 수문당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이다 1496년(연산군 2) 6월

수문당이 화재가 나자 왕이 건물을 수리하도록 명하고 아울러 그 해 12월에는 건물 이름을

희정당으로 고치도록 했다고 한다165)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인조반정 때

다시 불에 탄 것을 1647년(인조 25) 인경궁의 전각을 철거해서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1833

년(순조 33) 화재로 불에 타고 이듬해 옛 모습대로 재건되었다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년)에는 당시 재건된 희정당의 규모를 15칸이라고 적었다

인경궁의 화정당 21칸을 이전했다고 했는데 규모에 차이가 있다 1834년 다시 지어진 희정

당은 이전과 동일한 규모였으며 그 평면 형태는 lt동궐도형gt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체는

15칸 규모이여 정면 5칸의 남쪽 5칸은 모두 마루이고 뒤는 중앙 3칸에 넓은 온돌방이 있고

뒤에 툇간이 있으며 좌우는 작은 방 2개가 중첩된 모습이다

(4) 선정전과 의궤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보던 곳이다 1647년(인조 25)에

다시 지어졌으며 지금 건물은 이 때 것이다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1405년(태종5) 창덕궁

이 창건될 때 조계청(朝啓廳)이란 이름으로 지어졌다가 1461년(세조 7) 선정전이란 이름을

얻었다166) 조계는 아침마다 신하들이 정사를 아뢴다는 뜻이며 선정은 정사와 가르침을 널

리 펼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1년) 재건되었으며 다

시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 때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 25) 재건하였다 지금 건물은 이때

164) 『연산군일기』 권15 연산군 2년 8월 19일

165) 『연산군일기』 권15 연산군 2년 8월 19일 및 동 권20 연산군 2년 12월 8일

166) 『세조실록』 권26 세조 7년 12월 19일

다시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건립 시기로 보면 1608년경 다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광화

문 다름으로 창덕궁에서 오래된 건물이다 주변 행각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중문 주변

과 선정문 전면의 관청이 들어서 있던 부분은 편전의 용도가 달라짐에 따라 수시로 증축과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일제강점기 때 일반인의 관람 편의를 위해 개조한 상

태이다 고종 즉위 이후에는 선정전은 더 이상 본래의 용도로 쓰일 기회를 갖지 못하였

고 순종황제가 창덕궁에 돌아와서는 희정당에서 신하들을 접견하였으며 1917년 희정당이 화

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어진 후에도 희정당이 편전으로 쓰이고 선정전은 빈 건물이 되었

다 그런 덕분인지 선정전은 비교적 17세기초에 지어진 모습을 지금까지 잘 유지하고 있다

선정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장 눈에 띠는

특징은 지붕이 청기와로 덮여있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 안에 청기와를 덮은 건물이

선정전 외에도 징광루 등이 있었고 경복궁에도 있었지만 현재는 이 건물이 유일하다 현재

건물은 1647년(인조25)에 다시 지어진 것인데 이때는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지었던 인경궁

의 편전인 광정전(光政殿)을 뜯어서 그 재목으로 건물을 지었다 이때의 공사 과정은 『창덕

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자세하다 이 의궤에 의하면 광정전 9칸 건물의 기둥이나 보 공

포부재를 뜯어서 그대로 건물을 옮겨지었으며 기와 역시 광정전에 덮었던 청기와를 가져와

서 선정전에 덮었다고 하였다 인경궁은 광해군의 지시로 여러 건물에 청기와를 덮었는데

그 중 일부가 창덕궁에 살아남은 것이다

선정전과 그 주변 모습은 lt동궐도gt가 참고가 된다 lt동궐도gt에 의하면 선정전 건물은

세 단 정도의 장대석 기단 위에 놓여 있고 사방에 행각이 둘러쳐져 있어서 건물 앞에 작은

마당이 마련되어 있는 모습인데 특이한 점은 건물 앞으로 길게 행각이 뻗어서 마당을 좌우

로 나누고 있다 이 행각을 『궁궐지』에서는 lsquo복도각(複道閣)rsquo이라고 부른다 복도각은 기둥

과 지붕만 있고 벽은 개방되어 있는 모습이며 바닥은 돌이 깔려서 사람들이 비를 맞지 않고

출입문에서 편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선시대 빈전이나 혼전을

조성한 여러 의궤에서는 이 복도각을 중배설청(中排設廳)으로 부르고 있다 중배설청이란 빈

전이나 혼전에서 제례를 행할 때 음식을 진설하는 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lt동궐도gt에 그려

진 복도각은 선정전이 빈전이나 혼전으로 이용되었을 때 건물 앞에 배설청을 마련한 모습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배설청 모습은 lt동궐도gt에서는 창경궁의 문정전에서 확인

할 수 있고 경복궁의 태원전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lt동궐도gt에서는 선정전 주변에 행각이 둘러싼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특히 남쪽은

여러 겹으로 행각이 중첩되어 있다 이곳에는 대청 은대 상서성 당후 등이 있었는데 대청

은 대신들이 모이던 곳이고 은대는 승정원의 다른 이름이며 상서성은 관청이름 당후는 승

정원의 실무관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남쪽 행각에는 선정전에서 왕에게 계를 올리는 일과

관련한 관청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정전은 일제강점기 동안 창덕궁을 일반에 관람하면서 내부에 전시물을 두기도 하고

창문을 유리창으로 교체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996년 lt동궐도gt를 비롯한 옛 문헌에 따

라 건물을 본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그에 따라 사라졌던 복도각도 다시 세웠으며 창문도

고쳤다 다만 주변 행각은 변형된 채로 남아있는데 본래 선정전의 출입문인 선정문은 남쪽

의 두 번째 행각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 두 번째 행각은 복구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첫 번째 행각에 편의상 선정문 현판을 달아 놓았다

선정전에서는 과거 왕이 신하들과 어떤 형태로 접견을 하고 상참을 거행했는지를 확실

히 고증할 수 없는 상태이다 문헌에는 실내에 일월오악병풍이 있고 어좌가 있었다는 점을

전하고 있지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 그 형태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현재 선정전 실내에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한 집기류 등은 근거가 없는 불확실

한 것들이다

(5) 인정전 일곽과 의궤

창덕궁의 대문과 그에 딸린 사다리꼴 형태의 행각 이 문을 들어서면 비로소 창덕궁의

실질적인 내부인 대내大內로 들어서게 된다 『영접도감의궤』(광해군 2)에 명시한대로 창

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대내로 들어가는 대문(大門)이다 진선문의 좌우 행각 및 진선

문을 들어선 곳의 마당을 둘러싼 행각은 실록에서는 인정전 외행각으로 불렸다 외행각은

진선문과 마주보는 숙장문 좌우 행각까지 포함된다 북쪽은 인정문 좌우의 행각이 길게 뻗

는다 인정문 좌우 행각과 진선문 숙장문 주변 행각으로 둘러싸여서 사다리꼴의 마당이 이

루어진다

진선문의 창건에 대해서는 사료상에 명시된 것이 없지만 창덕궁이 창건될 때 함께 지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167) 창건 시에는 진선문이 창덕궁의 바깥 대문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정전 외행각이 세워진 것은 1418년(태종18)부터이며 이듬해 1409년(세종 1)에 완성

되었다 세종실록에는 박자청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터를 잘 살피지 않고 기둥을 세우고 보

를 올려 인정전에서 내려다보면 기둥이 바르지 않고 경사지게 보여 상왕이 화를 내고 자청

을 옥에 가두도록 하고 행각은 헐어버리도록 했다는 기사가 보인다168) 이후에 외행각이 어

떤 모습으로 고쳐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부분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광

해군 때 다시 복구되었으며 그 형태는 19세기 중엽에 제작된 lt동궐도gt나 20세기 초에 그린

lt동궐도형gt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초에 진선문이 철거되면서 외행각도 함께 철거되었

으며 1996년 진선문을 복구할 때 외행각도 복원되었다

조선시대 진선문이나 인정전 외행각 모습은 lt동궐도gt와 lt동궐도형gt을 통해서 추정해

볼 수 있다 두 자료에 나타난 외행각은 진선문에서 남북으로 행각이 이어지고 남쪽은 제5

칸에서 직각으로 꺾여서 남행각이 길게 이어지는 모습이며 남행각이 다시 북쪽으로 꺾이면

서 숙장문으로 연결된다

인정문은 남행랑의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인정문이 남향해 있다 장대석 2단의

높은 기단 위에 서 있다 계단은 중앙에 장식 없이 꾸며져 있다 경복궁의 근정문이 중층 누

167) 실록에 진선문 기사가 처음 나오는 것이 1409년(태종 9) 10월 기사인 것으로 미루어 1405년 창덕궁 창건

시부터 이 문이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태종실록』 권18 태종 9년 10월 1일 기사)

168) 『세종실록』 권3 세종 원년 4월 12일

각이고 중앙 계단 가운데 쌍으로 봉황을 새긴 답도를 둔 것에 비해 크게 격식을 낮추었다

지붕 용마루에는 인정전과 마찬가지로 이화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역시 1916년에 설치된 것

으로 보인다

인정문 행랑은 『태종실록』에 기록된 창건 시 규모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북쪽은

산을 등지고 있어 행랑을 두지 않고 동 서 남면에만 있으며 동서 행랑은 방이 두 줄로 된

복랑(復廊)이고 남행랑은 방이 한 열로만 된 단랑(單廊)이다

인정문은 1992년부터 96년 사이에 일제강점기 때 변형된 부분을 고쳤다 우선 인정전에서는

일제시기에 건물 동편에 행랑을 붙여놓았던 것을 lt동궐도gt 등을 참고해서 본래대로 행랑을

건물 후방으로 옮겼다 인정전 마당은 정원으로 꾸미는 등 훼손이 많았던 것을 품계석을 다

시 세우고 바닥 전체를 박석으로 깔았다 행랑과 인정문 역시 일제강점기 때 구조를 바꾸고

벽을 개조했던 것을 원형을 고증해서 복원했다 다만 인정전과 인정문 용마루에 설치한 이

화문양은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또 인정전 내부의 황색 커튼이나 바닥의 쪽마루 전

등 갓 등도 당시의 역사적 흔적을 그대로 둔다는 취지에서 그대로 두었다

나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인조 26년 1648)

1) 공사 내용 분석

인조 26년(1648)에 마무리된 창덕궁의 동궁처소인 저승전(儲承殿)을 수리한 내용이다

저승전의 위치는 『宮闕志』에 의하면 ldquo저승전은 건양문 밖에 있다 (원) 옛 구현전 광연전

의 터이다rdquo라고 되어 있으며 시민당의 북쪽 현재 낙선재의 서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원래 저승전의 터는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머물던 광연전 터로 성종때 세자가 거

처하는 춘궁으로 바꾸었다 저승전 일곽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때 중건되었으

며 인조반정으로 창덕궁 내전이 소실되면서 동궁의 처소도 대부분이 다시 소실되었다

인조 25년 창덕궁의 내전과 편전을 복구하는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던 8월 15일 도감

에서 당시 세자가 임시로 거처하는 곳에서 흉물이 발견되어 거처하기 어려우니 진행중인 창

덕궁 공사와 더불어 세자를 위하여 전(殿)하나와 당(堂)하나를 짓기를 청하였다 인경궁의

동궁을 헐어서 동궁의 수리가 시작되어 9월에는 입주(立柱) 상량이 이루어졌으나 창덕궁의

다른 수리공역이 끝난 후에도 저승전 공사는 지체되면서 동절기에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듬

에 2월에 다시 시작하여 4월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저승전 공역은 처음에는 창덕궁수리도감이 맡아 하였으나 인조 26년에 따로 도감이 설

치되었다 저승전 공역에서도 창경궁 창덕궁의 공사와 마찬가지로 인경궁의 일부 전각을 뜯

어 이용하였다 『저승전의궤』는 창덕궁의궤와 별도로 공사가 완료된 인조 26년(1648)에 작

성되었다 저승전 공역과 함께 창덕궁 공역의 잔여부분을 마무리 짓는 형식이 되었으며 이

에 따라 그 의궤서도 일정한 체제를 갖추지 않고 필요한 내용만을 정리하는데 그쳤다

목록은 없으며 내제의 처음에는 lsquo순치오년정월 일(順治五年正月 日) 저승전의궤rsquo다음에

작업소 건물구성(칸수) 공사내용

좌소

(左所)

인경궁 철훼

-承華殿(45)

동행각(4) 서행각(4) 서월랑(15) 남월랑(195) 북월랑

(4) 동행랑대문남변월랑(20) 북변월랑(9) 서변평월랑(4)

重暉堂 동월랑(13) 북월랑(50)

철훼

-儲承殿(28) 동온돌(6) 서온돌(6) 대청마루(16) 신조

동익각(1) 동행각(2) 동월랑(9)

바로 공사감역관의 조직(座目)을 적었다 이어서 전유재질(前遺在秩)도감무역질(都監貿易

秩)上下秩(품삯관련)철물타조질(鐵物打造秩)용여환하질(用餘雜物還下秩)각처이송질

(各處移送秩)을 적고 제목 없이 날짜순으로 계사(啓辭 상량문 상량의 포함)이문(移文)을

적고 그 뒤에 좌소(左所) 우소(右所) 및 외소(外所) 노야소의 항목을 두었다

lt전유재질(前遺在秩)gt lt도감무역질(都監貿易秩)gt에서는 전년의 공사에서 남은 자재와

금번 공사에 소용된 자재의 총량을 수록하였다 소용된 자재는 주로 철물 기와 단청재료

미장재료 등이다 lt上下秩(품삯관련)gt에는 장인과 인부들의 품삯 창경궁 각처 및 아문과

進修堂 전돌 까는데 들어간 전돌과 장인의 품삯을 적었다 lt각처이송질(各處移送秩)gt의 내

용은 남은 잡물을 홍제원과 문정전 수리에 사용하도록 이송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항목을 구분하지 않고 정해(丁亥 1647년) 8월 15일부터 무자(戊子 1648년) 4

월 12일까지의 계사(啓辭)를 날짜별로 적고 있다 중요공역의 일정을 보고하는 것으로 8월

16일 1소에서 개기를 시작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9월 15일 묘시(卯時)에 저승전의 定礎

午時에 立柱 未時에 上樑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9월 15일자에는 상량문과 상량의를 적었

다 여기에 수록된 상량문은 이에 앞선 창덕궁의 공사를 기록한 『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에 실린 저승전의 상량문을 다시 실었다 정초에서 상량 까지 같은 날에 했으나 공사

가 완전히 끝난 것은 다음해 윤3월 하순이었다

계사에 이어서 항목구분 없이 1647년 12월 14일에서 1648년 7월까지 도감과 각 관서 및

각 지방관찰사 사이에 자재의 조달과 수급에 대하여 오고간 문서를 날짜순으로 정리하였다

구체적으로 공사내용을 알 수 있는 부분으로 lt좌소(左所)gt lt우소(右所)gt 및 lt외소(外

所)gt lt노야소gt의 기록 방식은 각 작업소별로 감독관 명단 날짜별 공문서 조성전각의 명

칭과 규모 공사내용 소요자재(實入雜物秩) 공장명단(工匠秩)을 수록하였다 노야소 뒤에 저

승전 일곽 외에 1647년 창덕궁수리공사의 잔여 공사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잔여공사는

주로 문과 주요 전각의 벽체 단청 도회(미장)공사이다 마지막에는 역시 제조의 수결을 실

었다

인경궁 철훼는 좌소에서 맡아서 했으며 기록은 건물명과 칸수만 간단히 적었다 저승전

의 중건과 함께 신축한 건물은 낙선당 경극당 숭경당 취선당 손지각 및 익각과 주방이며

청음정 시민당 진수당 장경각이 수보되었다 시민당은 저승전의 남쪽에 있었으며 세자 서

연의 장소였다 진수당은 시민당의 북쪽 전각이며 손지각 역시 시민당에 부속되었던 건물이

고 장경각은 진수당의 동쪽에 있던 건물이다 즉 1648년『저승전의궤』에 기록된 공사의 범

위는 창덕궁의 동궁전 전체라 할 수 있다

남월랑(7) 남행각(1)

-敬極堂(10) 남월랑(7) 동월랑(75)

-樂善堂(5) 서행각(3) 남월랑(6)

-協祥門 麗景門 淸輝門 수보

-외남월랑(185) 資善門 淸陰亭(3칸) 측간 4칸

-霽陽門(1칸)

수보 개와 토벽

단청

우소

(右所)

-저승전 서익각(1칸) 북익각(1칸) 소주방 (6칸)

온돌(8) 마루(8) 차양판장 1좌 신조

내서월랑(7)

-기와 토벽 단청

개수

-일부 창호 신조

-嘉順門(1칸) -협문(25) 내남월랑(6칸) 북월랑(6칸)

-崇敬堂(45) -東付舍(3) 서행각(155)

-就善堂(105)

-靜勝門 1칸

-東樓(18) 서월랑(7)칸 남월랑(10)칸 외월랑(6)

외남월랑(18) 창차비(3)

司饔院(6)

供上廳(1) 機械木造作

嬪宮長房(6)+付舍(3) 朗和門(1) 差備廳(3)

炭庫(3) 機械木造作

외소

(外所)

遜志閣(7) 행각(19) 1칸문 1좌 小房(165) 1칸문 2좌

장방(13) 1칸문 4좌 별감방(6) 司鑰房(7) 水剌間(6)

大殿精抄軍廳(115) 貳문 1칸 북협문 1칸 泰亨門 1칸

목재 기와 석재

는 신조 창호는

일부 인경궁 철훼

재 사용

시민당 9칸 進修堂 12칸 기와 토벽 단청

개수 창호칠 개수

藏經閣 3칸 建陽門 중명문 기와보수

集英門 1칸 集賢門 1칸 단청보수

시강원 수보

종묘 담장 (중명문에서 司鑰房까지) 개축

大隱構 (遜志閣에서 內司僕寺까지)

정묵당등

수 보 와

개조질

정묵당 10칸 징광루 외서월랑 16칸 窓差備內 家 6칸 창차비

문 4칸 神佑門 4칸 熙仁門 1칸(개조) 肅章門 6칸 인정문 전

후 4칸 진선문 전후 4칸 壽靜堂외남월랑 3칸 서월랑 7칸(총

64칸)

砂壁 단청수보

선정전 인정전 선자귀

대조전 집상당 희정당 보경당 태화당 소덕당 선정문 협양

문 각처 연가 숙장문 인정문 진선문 돈화문 상하층

改塗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 저승전과 의궤

『저승전의궤』는 『창경궁수리소의궤』(1633) 『창덕궁수리도감의궤』(1647)에 이어서

인조년간에 복구된 창덕궁의 동궁 모습과 이때 철거된 인경궁의 동궁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세자가 거처하는 저승전을 중심으로 주변 전각의 면모를 알 수 있으며 바로

전에 완료된 창덕궁수리공역의 공사 마무리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건물명 기사 사료

돈화문

1412년(태종12) 진선문 남쪽에 누문

5칸 건립『태종실록』 태종12년 5월 22일

1413년(태종13) 문에 큰 종을 달다 『태종실록』 태종13년 1월 27일

1592년(선조25) 소실

1608년(광해즉위) 복구되다 『광해군일기』 광해군즉위년

1620년(광해군12) 문 앞 산대놀이를

중지시키다『광해군일기』 광해군12년 9월 3일

1676년(숙종2) 문 앞에서 과거 급제

가 문과2인 무관1만2천 7명이 파자교

까지 늘어서다

『숙종실록』 숙종2년 3월 24일

이 의궤의 각 작업소별 lt조성간각질(造成間閣秩)gt은 조성건물별로 칸수 바닥구조 천

장의 형태 난간 창호의 종류 등이 기록하고 건물별로 보수내용을 적었다 건물의 규모와

형태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창호의 형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저승전은 총 28칸

의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구성이었다 동온돌과 서온돌이 각 6간이고 중앙의 3칸이

고 대청이었다 저승전은 『宮闕志』의 기록에 의하면 영조년간의 화재로 소실된 뒤 중건되

지 않았기 때문에 lt동궐도gt lt동궐도형gt 등 후대의 그림 자료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없

다 따라서 이 의궤의 기록은 저승전의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2) 돈화문과 의궤

창덕궁의 정문이다 『영접도감의궤』(광해군 2)에 의하면 창덕궁의 출입문은 돈화문을

정문(正門) 진선문을 대문(大門) 인정문을 중문(中門)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정문은

창덕궁 외곽 담장인 궁장의 정식 출입문을 가리키며 정문을 들어서면 수직하는 군사들의

거처나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는 관청이 모두 포함된다 이에 반해 대문은 대내의 출입문으로

정전이나 편전 내전 영역의 출입문이 된다

1405년(태종 5) 이궁 창덕궁이 지어지고 나서 7년 후인 1412년(태종 12) 5월에 도성 내

에 행랑을 지으면서 창덕궁 진선문 남쪽에 누문 5간을 세워 lsquo돈화문rsquo이라 했으며 문 밖 좌우

행랑은 각 관청에 나누어 주고 조방朝房으로 만들었다고 『태종실록』에서 밝혔다169) 조방

은 궐에 들어가는 신하들이 의복을 갈아입고 대기하는 곳이다 1413년에는 문에 큰 종을 달

았다170)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복구되었다 이후에 화재나

훼손기사가 사서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초에 재건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다만 세부의 형상이나 구조짜임에서는 후대의 특징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후

대에 일부 개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돈화문은『궁궐지』에 의하면 창덕궁의 궁장에는 남쪽에 돈화문 단봉문(丹鳳門) 북쪽에

광지문(廣智門) 서북에 요금문(耀金門) 동쪽은 건양문(建陽門) 서문은 경추문(景秋門) 금

169)『태종실록』 권 23 태종 12년 5월 22일

170)『태종실록』 권 23 태종 13년 1월 27일

호문(金虎門)이 있다고 하였다 돈화문은 창덕궁 궁장의 서남모서리에 놓여있다 궁의 정문

이면서 위치가 궁장 모서리에 놓인 것은 창덕궁의 입지가 응봉에서 내려오는 경사진 지형

탓으로 보인다 돈화문은 왕이 궁을 드나들 때 이용되었으며 중국 사신 역시 이 문을 출입

하였다 또한 나라의 크고 작은 공식 행사가 있으면 그 행렬이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 예를

들어 궁 안에 모셨던 어진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다시 궁으로 돌아올 때는 이 문을 이용

했다 그러나 궐에 출입하는 신하들의 일상 출입은 이 문을 이용하지 않고 근처의 금호문을

사용했으며 이따금 단봉문을 이용했다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다 기둥 위뿐 아니라 그 사이에도 공포를 촘

촘히 배열한 다포형식이며 상부 지붕형태는 우진각이다 『궁궐지』에는 공포가 내7포 외 9

포이며 기둥 높이가 16척 앞뒤방향 칸의 길이가 각각 12척 조우 방향 칸의 길이가 가운데

칸은 17척 그 다음 칸이 15척 제일 바깥 칸이 125척이라고 하였다 돈화문은 처음 이궁으

로 지어졌기 때문에 경복궁처럼 외곽에 돌을 가지고 견고하게 궁성宮城을 쌓은 것이 아니고

흙과 돌을 가지고 궁장(宮墻)을 쌓았다

따라서 정문은 광화문처럼 석축을 쌓고 홍예문을 낸 것이 아니고 중층 누문 형태의 목

조건물을 세웠다 다만 광화문을 비롯해서 다른 궁궐 정문이 정면 3칸인데 비해 정면 5칸으

로 규모를 키웠다 5칸 가운데 좌우 2칸은 벽으로 막고 실제로 출입문은 3칸만 열었다 문은

세벌 이상의 장대석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세웠으며 세 개의 계단이 놓였다 기단 앞으로는

길게 단을 쌓은 월대를 마련했다 lt동궐도gt에 그려진 돈화문 모습을 보면 월대 중앙에는

왕이 출입할 때 이용하는 어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출입문 중 가운데 문 하나를 제외

하고 좌우의 출입문은 X자 형태로 막대로 막았다 이 그림으로 보면 평상시 돈화문은 일반

인의 사용을 제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대 남쪽에는 좌우에 말을 매어 두는데 쓰였

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틀이 있고 나무틀 앞에는 말에 오를 때 발을 딛는 디딤돌이 보인다

돈화문은 한 동안 월대를 비롯해서 기단이 아스팔트에 묻힌 상태로 유지되었다 언제

기단 하부를 아스팔트로 묻었는지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20세기 초에 창덕궁 안에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하면서 기단을 흙으로 메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돈화문 바

닥뿐 아니고 금천교의 위치도 바꾸고 진선문은 철거하였다 이렇게 변형된 돈화문은 1996년

기단을 제 모습으로 드러내고 월대도 복구하였다 그 사이 돈화문 앞 도로를 보수하면서 아

스팔트 층이 높아져 월대와 도로 사이에 1미터 이상의 단차이가 생겼다

(3) 시민당과 의궤

1847년(헌종13) 후사가 없었던 왕을 위해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들이면서 왕과 후궁이

함께 거처할 건물로 지었다171) 낙선재가 있던 일대는 본래 세자가 거처하며 신하들을 만나

던 동궁이 있었다 이곳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간 위치가 되며 창덕궁 동문인 건양문을 나

선 곳으로 영역으로 보면 창경궁에 속한 곳이었다 이곳에는 왕세자가 신하들을 접견하던

171) 낙선재 건립 경위에 대해서는 헌종 자신이 쓴 낙선재상량문과 수강재중수상량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헌종의 문집인 『원헌고元軒稿』 권1 낙선재상량문(1847년)과 수강재상량문(1848년) 참조

시민당(時敏堂)과 왕세자의 침소인 저승전(儲承殿)과 낙선당(樂善堂) 등이 있었다

1780년(정조4) 시민당이 화재로 소실된 후에 복구되지 않은 채 1782년(정조6) 새로 동

궁 처소로 희정당 가까운 곳에 중희당(重熙堂)이 지어지면서 빈곳이 되었다 이 일대는 조선

초기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으로 전한다 정조는 1785년(정조9) 이곳에 수강재를 지어 독

서처로 삼았다172) 한 동안 비어있던 이곳에 헌종 때 와서 낙선재를 지은 것이다 헌종이 경

빈 김씨와 낙선재에 거처한지 불과 2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빈집이 되었다가 고종

때에는 왕이 창덕궁에 머물 때 여기를 집무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즉 1884년(고종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창덕궁에 머물면서 낙선재에서 집무를 보고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1907년 이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나서 1917년 대조전

등이 모두 불에 타자 낙선재를 임시거처로 삼은 적도 있다 순종의 계비이며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한 동안 거처하였고 1963년 영친왕 이은이 환국한 후에는 부인 이방자여사와

함께 거처하였다 2009년에는 영친왕의 아들 이구(李玖)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혼전으로

이용되었다

다 『창덕궁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昌慶宮修理都監儀軌)』173)(효종 3년 1652

년)

1) 공사 내용 분석

효종 3년(1652) 1월부터 시작된 창덕궁 창경궁의 수리공역에 대한 내용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에 있는 건물의 온돌을 개수하고 전돌을 새로 깔며 흙을 교체하는 공사였다 인조 25

년에 있었던 창덕궁 수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주사건이 궁의 개수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

다 1651년(효종 2) 11월 인조의 후궁이었던 조귀인이 대내에 뼛가루와 무덤의 나무를 뿌리

고 흉물들을 각처에 묻어 대비와 대전 인평대군 등을 저주했다는 내용의 옥사가 있었는데

이 사건과 김자점의 역모사건이 연계되어 김자점 일파가 숙청되었다 효종은 이 사건을 마

무리 하고 곧바로 대비를 모시고 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며 창덕궁과 창경궁의 흙을 모두 긁

어내고 깨끗한 흙으로 채우도록 명한다174) 따라서 주요 전각의 온돌을 해체하고 전돌 교

체 전각 간의 어로에 흙을 새로 까는 것이 주된 공사였다

목차는 없으며 규장각 소장본은 앞부분의 편찬 년대와 공사감독 조직이 결락되어 알

수 없다 남아 있는 부분은 효종 3년 1월 15일의 도감사목으로 시작되는데 이후 4월 22일

까지의 lt계사gt 1월 8일부터 4월 15일 까지의 lt이문질gt 1월 15일에서 2월 10일 까지의

lt감결gt이 수록되었다 계사에 비하여 이문과 감결은 매우 소략하다 이어서 lt昌德 一所gt

lt昌德 二所gt lt昌慶 一所gt lt昌慶 二所gt lt굴토(掘土) 1소gt까지의 각 소(所)의 감역관 명

단과 작업내용에 대한 공문 자재목록 공장명단이 있다 끝 부분이 결락되어서 lt굴토(掘土)

172) 『정조실록』 권20 정조9년 8월 27일

173) 서울대학교 규장각(규14912)

174) 『효종실록』 효종 2년 12월 27일

작업소 건물 공사내용

창덕 1소 大造殿 동서익각 책방 集祥堂 澄光樓 玉華堂

壽靜堂 靜黙堂

온돌공사

희정당 承明門 내소주방

慶極門에서 建中門까지 어로

창덕 2소 太和堂 昭德堂 讌和堂 寶慶堂

책방

온돌사벽수리 방전다시 깔

景福堂 책방 온돌수리 단청

宣政殿 방전 박석

瑤華門에서 五雲門까지 어로 방전다시 깔기

齊政堂 온돌 방전 박석 淨土

도총부 책방 낭청방 온돌 방전 淨土

臨武門 湛露門 인경궁의 자재와 기와로 만듬

1소gt의 중간 정도까지 남아 있다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마이크로필름을 확인하면 그 뒷부분

은 lt굴토 이소gt lt노야소gt lt목물소gt lt토물소gt lt의궤 사목gt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이 공사에서 특이한 점은 일반 백성을 동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lt계사gt 1월 3일에 의하면 전국각지에서 2000명의 승군을 동원하여 훈련원과 인경궁 동관

왕묘에서 기거하면서 공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창덕궁에 새로 깔 흙은 쌍리문동에서 채취

하고 창경궁에 깔 흙은 남소문동에서 채취하였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이 공사는 인조 11년(1633)의 창경궁 수리와 인조 25(1647)년의 창덕궁 저승전 공역에서 수

리되었던 전각이 수리 대상이었다 이 의궤는 공사가 주로 바닥의 보수에 있었던 만큼 공사

규모도 적고 그 기술도 상세하지는 않으나 『창경궁수리소의궤』(1633)에서 언급되지 않았

던 창경궁 전각의 바닥구조가 언급되었다 공사의 성격이 건물의 실내 위주였기 때문에 현

상을 비교할 수 없다

당시 공사 범위였던 주요 건물은 앞에서 거론하였으므로 간단히 도총부만 살펴보기로

한다 도총부는 궁궐을 호위하는 기능을 맡던 관청으로 창덕궁 대문인 진선문 밖에 있었던

것을 1655년(효종6) 인정전 서쪽에 만수전을 지면서 창경궁으로 이전했고 이후 1781년(정조

5) 이문원이 들어섰다 lt동궐도gt에 묘사된 이문원 건물은 전면 5칸 측면 2칸반 정도이며

하부에 돌기둥을 세우고 가운데 3칸에 나무 사다리를 설치한 모습이다 이와 유사한 구조는

lt동궐도gt의 희정당 건물그림이나 현존하는 창경궁 숭문당에서도 볼 수 있다 대유재는 정

면 4칸 측면 2칸 건물이며 동쪽 끝 2칸은 물가에 면해서 제일 바깥쪽 돌기둥이 물속에 세

워진 모습이다 이 부분은 동이루(東二樓)라 불렀는데 1785년(정조9) 동이루를 지었다

라『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昌德宮萬壽殿修理都監儀軌)』175)(효종8년 1657)

1) 공사 내용 분석

17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3572)

작업소 주요건물 부속건물 공사내용

1소 만수전

(4면퇴 포함36)

新材 眞彩 柱唐朱紅

井虹橋 동익각 밖

연지 서행각(4) 판장(11)

千慶樓 (4면퇴 포함 20) 新材 眞彩 柱唐朱紅

獻線閤 (전퇴포함 30) 일부구재사용 신재 진채

5량가(8) 외행각평루(3) 窓差備(7) 구재 및 신재사용 단청

洗踏房(6)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庫間(7) 長房(14) 司鑰房(4) 구재 및 신재 사용 단청

등촉방(7)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長房庫間(4) 舊 肅寧殿 서월랑을 수보 단청

외월랑(8) 舊 承文院을 수보 단청

만수전(萬壽殿)은 효종 8년 왕대비인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莊烈)왕후

조씨 1624~1688]를 위하여 창덕궁 인정전 뒤에 지은 전각이다 위치는 구 선원전의 북쪽이

다 이듬해 거듭되는 천재지변으로 1월 15일 공사를 멈추었다가 8월 4일 도감을 다시 설치

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공사는 11월 15일 다시 중지했다가 다음해(효종 8년 1657)에 1

월 16일 다시 시작하여 3월 26일 완공되었으며 4월 2일 대비가 이어하였다

이 만수전은 숙종 13년(1687) 9월에 불이 났으며 다시 복구되지 않았으며 자의대비는 통명

전으로 옮겼다 자의대비는 만수전에 불이 난 다음해인 1688년 (숙종 14년) 창경궁 내반원에

서 승하하였다

목록은 따로 없고 을미(1655년) 11월 17일 좌목과 도감사목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뒤에

는 11월 19일 날짜로 시작하는 계사에 해당하는 내용을 적었다 계사 뒤에는 예산의 수급과

품삯의 지급항목 및 실제 투입된 재료의 목록을 기록한 실입편을 두고 있다 그러나 따로

세부항목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모든 문서를 날짜순으로 적었다 그 다음에는 lt1소gt lt2

소gt lt3소gt lt외소gt lt부석소gt lt운석소gt lt외축장소gt lt노야소gt lt별공작gt의 순으로

싣고 맨 끝에 lt의궤사목gt을 실었다

각 작업소별로 별개의 의궤를 첨가시키는 형식으로 전체 의궤를 구성하였다 1소에서는

만수전 조성 2소에서는 춘휘전 조성 3소에서는 기타 서루와 월랑 등을 조성하는 것으로 나

누었다 이외에 작업종류에 따라 담장을 쌓는 외소 및 외축장소를 별도로 두었으며 돌 일을

담당하는 부석소와 운석소를 구분하였다 또 각종 철물을 만드는 노야소와 기계를 만드는

별공작소를 구분하였다

lt1소gt를 예를 들어 각 작업소별 서술방내용을 살펴보면 처음에 담당 관원들을 적고

lt수본질gt을 날짜순으로 적었으며 그 다음에 lt조성질gt에 건물의 규모 신구부재의 사용

과 기단마감단청 해당 건물의 실 구성(천장 마감과 온돌석 수량)을 적었다 그 다음에 목

재 석물 기와 단청 잡물 창호(창호채색잡물) 3개 작업소를 통틀어 단청한 것(通三所懸板

着添秩) 축장석물과 잡물의 실입을 구분하여 기록하고 lt공장질gt에 장인명단을 적었다

부재의 크기나 치목된 부재명칭이 언급되지는 않아서 건물의 칸수 정도를 파악하는 정도이

나 건물별로 창호의 종류와 창호단청 색깔 기단의 단수 등이 상세히 명시되어 있다

端和門 외행각(2) 신재

一間門(12처) 6칸 신조 6칸 구재

대문(5처) 3칸 신조 2칸 구재

外墻 水閣(3) 구재

2소 春暉殿

(4면퇴포함 20)

慶和堂을 철훼 이건 대보 1조

신재 眞彩

동변 화계(6층)

서행각(3) 서월랑(7) 북월랑(255) 신재

북월랑 앞 판장(9) 신조 眞彩

將酉庫 판장(5) 신조 단청

樑家(8) 구재

양지당 (전퇴포함 12) 신재 단청

북변 동산층각(2)

大一間門(2) 신조

중일간문(5) 3칸신조단청 2칸구재진채

箭泩門(4) 신조 단청

대문(1칸문) 내측간(3) 외측간(1) 구재

별감청(4) 구재

천경루 서측정원 井虹橋 裳朴石 신조

3소 서루월랑(전후퇴포함 76) 신재 구재 사용

상하층 내에 오토단청 나머지

는 단청

남루월랑(전퇴포함 45) 신재 단청

춘휘전남월랑(165) 신재 전면 진채 나머지 단청

양지당 남월랑(전퇴포함 9) 신재 단청

端暉門 1칸

춘휘전앞 小狹箭往門(1) 신재 진채단청

양지당앞 小狹門 1칸 문판과 문얼굴은 신재 나머지

는 구재

북수문 서변 1칸문 측간(3) 구재

lt築墻秩gt 서루월랑 서변 細墻 42칸(높이 8자)

泰秋門북수각~景秋門 內墻까지 50칸

측간동남 담장8칸(높이 9자)

대은구 5칸 중은구 7칸

외소 도총부당상대청 5칸 서영 19칸 炮手內入番營 4

칸반 景秋門수문장청 2칸 도총부 남변월랑 8칸

내군보 1칸 마영 2칸

동영 10칸 서영 8칸 남영7칸

합 25칸 철훼하여 사용

lt築墻秩gt 북장(경추문~북수각)48칸(높이 9자)

도총부 서장 20칸(높이 8자)

도총부 북장 7칸(높이 6장)

요금문 안 우물(깊이 10자)

2) 의궤와 만수전 건축의 비교

건물명 기사 사료

구 선 원

1656년(효종7) 도총부자리에 만수전 춘휘전

건립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

궤』

1687년(숙종13) 만수전소실『숙종실록』 숙종13년 9월

2일

1695년(숙종21) 춘휘전을 선원전으로 하고 숙

종어진을 봉안하다『궁궐지』

1778년(정조2) 영조 어진을 봉안하고 좌우 익

각을 첨설하다

『승정원일기』 정조2년 1

월 10일

1802년(순조2) 정조 어진을 봉안하다『승정원일기』순조2년 7월

3일

1846년(헌종12) 신실 2칸을 증축하여 순조 익

종 어진을 봉안하다

『헌종실록』 헌종12년 8월

6일

1851년(철종2) 신실 1칸 증축하여 헌종 어진

봉안

『일성록』 철종2년 5월 17

1900년(광무4) 서쪽 1칸을 증축하여 태조고황

제 어진을 봉안

『경복궁창덕궁제1실증건도

감의궤』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1655)에 만수전은 36간이고 사면에 퇴가 있으며 어칸3칸

에 동익각9칸 서익각 6칸이라고 하고 춘휘전은 20칸에 사면퇴가 있고 마루가 14칸 온돌이

6칸이라고 하였다 전체가 20칸이라고 하였으므로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추정되며 이

가운데 어칸의 마루는 천장에 봉황을 그린 봉반자이고 좌우 온돌방은 모란을 그린 목단반자

로 치장하였다고 하였다 만수전이 소실되고 춘휘전이 선원전으로 용도가 바뀌면서 건물규

모는 그대로 두고 실내를 어진을 봉안한 용도에 맞게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궁궐지』에 의하면 1695년(숙종21) 숙종이 어진 즉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춘휘전(春

煇殿)에 모시도록 하고 건물 이름을 선원전으로 했다고 하였다 춘휘전은 1656년(효종7) 효

종이 대왕대비 장렬왕후를 위해 인정전 서쪽 흠경각이 있던 곳에 지은 만수전의 부속 별당

건물이다 대비전은 정전의 동쪽에 짓는 것이 관례였으나 효종은 정전 동편에 마땅한 터가

없다는 이유로 정전 서쪽에 지었다 건립 때부터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던 만수전은 1687년

(숙종13)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이후 만수전 터에는 경복전이 들어서고 별당인 춘휘전은 한

동안 비어 있다가 이 때 숙종 어진을 봉안하는 영전으로 바뀌었다

『창덕궁만수전수리도감의궤』에는 대비전인 만수전의 규모와 마루 온돌방 등의 실 구

성과 칸수 실내마감 단청종류 등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며 부속 건물에 대한 정보도 상세

하다 건물 뿐 아니라 연못 화계 담장 등 주변 조경시설의 조성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17세

기 중반 대비전의 구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만수전은 lt동궐도gt에도 남아 있지

않으며 춘휘전은 후에 선원전으로 용도가 변경되는 등 효종년간에 조성된 창덕궁의 일면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마 『집상전수개도감의궤(集祥殿修改都監儀軌)』(현종 9년 1668)

1) 공사 내용 분석

현종 8년(1667) 11월 창덕궁 인정전의 서북측에 집상전을 건축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

이다 집상전은 왕대비인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거처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대조전과

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북방향에 자리 잡았다 왕대비인 인선왕후는 왕대비전에 재변이

있어서 다른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현종은 대비를 위하여 전각 하나를 짓고자 하였다

lt동궐도gt에는 집상전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장방형의 긴 건물에 중앙부분 지붕이 좌우

측면보다 한단 높게 되어 있고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으로 대조전과 거의 같은 형식

이다 건물 왼편에는 남북방향으로 길게 행각이 놓여서 대조전 동편 행각과 연결되어 있다

이 자리에는 원래 인조년간에 지은 집상당이라는 20칸 규모의 별당 건물이 있었는데 집상당

을 헐고 새로 28칸 규모로 확장하여 대비전을 지은 것이다 현종 8년 11월 11일 집상전을

짓는 데 대한 전교를 내린다 단일 전각을 짓는 일이고 공사를 가급적 확대하지 않기 위하

여 경덕궁의 집희전(集禧殿)을 헐어 자재를 재사용 하는 등 공사의 규모가 크지 않으므로

공사를 주관하는 것을 수개청으로 하였다

제일 앞부분의 좌목은 결락되어 전체내용을 알 수 없다 그 뒤로 lt계사질gt lt이문질gt

lt감결지gt lt품목질gt lt수본질gt lt제색공장질gt로 구성되어 있다 lt계사질gt은 현종 8년 11

월 11일 왕이 자전을 위하여 전각을 지어야 할 것을 전교하는 것부터 이듬해 정월 17일까지

주요공정의 일정과 상량문 상량의 등 기사를 모았다 상량문은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이 지

었다 공사의 주관청은 수개청(修改廳)으로 정했다 기존의 건물을 허는 것은 11월 13일이고

입주와 상량은 12월 20일이었다 lt이문질gt은 주로 자재를 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는데

필요한 수레의 조달이나 새로 만들어야 하는 철물제작의 협조를 구하는 문서이다 lt감결

질gt은 사무에 필요한 각종 잡물조달과 현장의 관리에 대하여 각 관서에 명령하는 문서들이

다 감결 뒤에 여백이 있고 누락이 있는 듯 하고 lt殿額門號書寫官gt 과 이어서 각 공장과

화원 등에게 지급한 품삯 운송비 등을 종류별로로 적고 총 합을 적었다

lt품목질gt은 앞에 lsquo郎廳所掌rsquo이라고 하여 낭청의 소관업무임을 밝히고 있다 단청이나

건물을 다시 칠하는데 필요한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을 수개청 당상에게 올리는 내용이 주

를 이루고 있다 그 다음에 집희전에서 철거해 온 자재로 공사를 다 충당할 수 없으므로 부

족한 재목과 기와 등에 대해 조달처와 보충하는 자재 수량을 상세히 수록하였다 경덕궁의

집희전을 헐어 그 부재를 사용하고 부족한 것은 새로 목재를 들여와 치목하는데 들여오는

목재의 명칭은 원목의 형태이며 그 수량으로 보아 집희전 보다 규모와 형태면에서 확장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lt수본질gt은 앞에 lsquo監造官二員所掌rsquo이라고 명시하여 감조관의 소관업무임을 밝혔다 내

용은 철물을 위시하여 물건을 운반하는 썰매 돗자리 숫돌 등 자질구레한 물품의 조달이 주

를 이루고 역시 집희전에서 뜯어온 것으로 부족한 철물이나 기타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상세

히 나열하였다 품목질과 수본질에는 같은 해 공사가 있었던 영녕전 공사현장에서 쓰고 남

은 물건들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은 lt제색공장질gt로 공사에 참여한 분야의 장인을 나열하였다 화원과 각도의 화승

들이 먼저 나오고 목수 석수 冶匠 조각장 등 다양한 장인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단청을

위하여 화원 24명 화승이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원양도 등에서 50명이나 동원되었다

건물 비고 공사내용

집상전 좌우익실(온돌)포함 28칸

행각 11칸

鳳班子

신조

전면 처마 물통(溙桶) 설치

대조전 양상도회 수리 현판 골회 개칠 현판개도금

集祥殿 延秋門 延春門 景福門

日門 章華門 太極紋 正順門 長春

門 建昌門 通濟門 翠徽門 麗春門

萬春門 翠華門 浥翠門 玄武門

현판제작

2) 의궤와 집상전 건축의 비교

현종년간에 지은 집상전의 모습은 lt동궐도gt에서만 볼 수 있다 lt동궐도gt에 그림만 전

하고 있는 집상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의궤이다 집상저에 보이는 특징 가운데 지붕의

무량각 즉 용마루가 없는 점에 대해서는 이 곳이 왕이 주무시는 곳이므로 지붕에 왕을 상징

하는 용마루를 두지 않으려고 무량각으로 했다는 속설이 전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지어낸

이야기이다 창덕궁에는 대조전 외에도 집상전도 무량각 건물인데 집상전은 왕대비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무량각은 조선중기 경 중국의 영향으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의 격

식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남은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 창덕궁 대조전 창경궁 통명전이 무량각 건물이다 무량각으로 하기 위해

서는 지붕에 종도리를 두 개 설치하고 용마루에는 궁와弓瓦라는 둥글게 돌아간 기와를 따로

제작해서 설치하는 등 번거로운 공사과정이 따랐다

집상전을 짓는 부재를 충당하기 위해 철훼한 경덕궁 집희전에 대한 내용이 소략하여 그

구조나 규모에 대하여 알 수 없는 점이 아쉽다 또한 집상전의 구성에 대하여도 좌우 익실

이 있고 반자는 봉반자이며 행각이 있다는 점 외에는 앞선 창덕궁과 창경궁 관련 다른 의

궤와 달리 전각의 건축적 형태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새로 만드는 집상전 외에 주변 문들의 현판을 새로 제작하는데 『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 이후 내전 영역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으며 『만수전수리도감의궤』와

함께 대비전 조성에 대한 의궤로서 가치가 있다 lt동궐도gt에는 대조전 동북쪽에 대조전과

유사한 지붕형태를 갖춘 건물이 그려져 있고 집상전(集祥殿)이라는 편액이 묘사되어 있다

집상전은 집상당을 16년 수리하면서 당호를 고친 건물이다

바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순조 3년 1803)

건물명 기사 사료

인정전 1405년(태종5) 창덕궁 창건시 3칸으로 건립『태종실록』 태종5년 10월

19일

1) 공사 내용 분석

순조 3년(1803)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인정전을 순조 5년(1804) 4월에 재건한 기록이다

인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때 중건되었으며 인조대에 변란으로 창덕궁의

내전일곽이 대부분 소실된데 반하여 순조대까지 잘 남아 있었다 순조 3년 12월 13일 선정

전의 서쪽 행각에서 화재가 일어나 인정전이 불에 타버렸다 이 사건으로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물러난다는 하교를 내린다 바로 중건에 들어가 12월 27일 기초공사를 시작하였

으나 어수선한 정치상황과 천재지변으로 다음해인 1804년 3월 24일 공사에 소용되는 자재의

공급으로 인하여 민폐가 심하다는 김조순(金祖淳)의 상소로 잠시 중지했다가 4월 20일에 재

개한다

공사는 그해 12월에 마무리되었고 1804년 12월 27일 전의감(典醫監176))에 의궤청을 설

치하고 순조 5년(1805) 4월에 의궤를 편찬하였다 이때 중건된 인정전은 그 후 50년이 지난

철종 8년(1857)에 다시 보수하였다 1803년(순조 3) 12월 선정전 행각에서 불이 일어나면

서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져서 건물이 전소되었다177) 복구공사는 이듬해에 바로 착수되어

화재 후 만 1년만인 1804년(순조 4) 12월에 준공을 보았다178)

의궤 목록은 좌목(座目)middot시일(時日)middot도설(圖說)middot승전(承傳 부록으로 장주(章奏) 상량문

(上樑文) 의주(儀註) 반교문(頒敎文)이 있음)middot이문(移文)middot내관(來關) 품목(稟目 부록으로 식

례(式例)가 있음)middot감결(甘結)middot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middot인정전영건도감별

공작의궤(仁政殿營建都監別工作儀軌) 순이다

lt도설gt에는 인정전의 정면도와 부속물인 당가(唐家)middot오봉병(五峯屛)middot곡병(曲屛)middot당가천

장(唐家天掌)middot염우(廉隅)middot적첩(赤貼)middot허주(虛柱)middot유음(流音)middot초엽(草葉)middot연환청판(連環廳板)middot장

단청권(壯緞廳權)과 녹로(轆轤) 도설이 있다 인정전의 척량(殿宇尺量)을 소요된 재목(材木)

과 함께 상하층(上下層) 각 층별 공포(工踏) 상하층조장(上下層條粧) 당가규모(唐家尺

量) 좌탑척량(座榻尺量) 곡병척량(曲屛尺量)으로 구분하였는데 소요 부재의 치목된 명칭과

크기별 수량 길이 단면크기 목재의 원산지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도설편에 인정전 건물전체모습 오봉병 어좌(당가)의 세부 명칭과 형태 공사 시 큰 자

재를 옮기는데 썼던 운반기구인 녹노의 그림이 실렸다 큰 목재는 전라도 강원도 등 전국에

서 채취해 운반했으며 단청 안료는 경상도 장기현에서 구해오고 목수들도 서울은 물론 강원

도에서도 솜씨 좋은 사람들을 불러내서 지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2) 의궤와 인정전 건축의 비교

176) 典醫監은 의료행정과 의학교육을 관장하던 관청

177) 『순조실록』 권5 순조3년 12월 13일

178) 『순조실록』 권6 순조 4년 12월 17일

1418년(세종원) 정면 5칸으로 확장『세종실록』 태종원년 9월

10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

을 복구

1777년(정조1) 마당에 품계석 설치『정조실록』 정조1년 9월 6

1804년(순조14) 전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구됨

『순조실록』 순조4년 12월

17일

『인정전영건도감의궤』

1857년(철종8) 건물에 손상이 많아 해체하여

수리 석재도 대부분 교체 『인정전중수의궤』

1907년 순종 이어에 따라 내부 수리 『대한계년사』 수리 담당은

일본인 기사

1916년 지붕 용마루에 오얏꽃 장식 장서각 소장도면에 연대 명기

1996년 인정전 마당에 박석설치 및 행각 원

형복구

『인정전영건도감의궤』의 공사내용은 인정전 20칸과 내부 시설(당가 오봉병 등)을 다

루고 있다 『인정전영건도감의궤』에 의하면 건물 복구는 하부 월대는 기존 시설을 그대로

쓰고 목조부분만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1842년(헌종 8)에 와서 다시 한 차례 수리를

했다179)

조성내용 규모(척량) 형식

인정전 20칸 어칸 20자 변칸 각 15자 상하층 외7포 내 9포

당가 동서 145자 남북 1232자 하층 4각 상층 8각 내외 각 17포

오봉병 길이 1605자 폭 141자 두께 012자

좌탑동서 17자 남북 135자 높이 48자 난간

높이 065자 층교 난간 높이 09자

곡병

판평상 길이 72자 폭 6자 높이 05자

主壁길이 7자 폭 41자

좌우 협 각 길이 6자 폭 31자

사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순조 34년 1834)

1) 공사 내용 분석

창덕궁은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후 인조 25년(1647)에 중건하였는데 순조 33

년(1833) 10월 17일 밤 4경(四更)에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이 불에 탔고 징광루middot옥화당middot양

179) 『헌종실록』 권9 헌종 8년 윤5월 6일

주요전각 부속건물 공사내용

대조전(45칸)

水剌廚(1칸) 신조

養心閤 宣平門(25칸) 신조

隆慶軒 集祥門행각(26칸) 신조

興福軒 天香閣(20칸) 신조

내소주방 慶極門행각(255칸) 신조

凞政堂(15칸)克綏齋 복도각서행각(17칸) 신조

外燒廚房 및 서행각(35칸) 신조

澄光樓(20칸)

玉華堂(15칸) 신조

靜黙堂(10칸) 신조

행각(16칸)과 문(17칸) 신조

嚁輝門 좌우행각(5칸) 신조

建昌門(1칸) 小春門(1칸) 적묵당서협문(1칸) 협문(1칸) 내외소

주방문중문(1칸) 章華門(1칸) 통명문(1칸) 天廚門(1칸) 재덕당동

협문(2칸)

신조

옥화당이모끼중문(2칸) 嚁輝門이모끼중문(1칸) 會瑞門이모끼문(1

칸) 양심합동남이모끼문(1칸) 장순문이모끼문(1칸) 선례문이모끼

문(1칸)

신조

심합까지 연달아 탔다180) 대조전과 희정당은 보통 전각과는 다르니 계속되는 흉년에도 불

구하고 즉시 개건해야 한다는 왕의 하교에 따라 10월 26일 영건도감이 설치되었다 창덕궁

의 공사와 함께 3년여를 미루어 오던 창경궁의 환경전 일곽의 화재 복구와 함께 이루어졌으

나 영건도감은 창경궁 주자소에 각각 따로 설치되었다 의궤청은 호조 별례방에 의궤도감을

설치하여 1834년 10월에 『창경궁영건도감의궤』와 함께 의궤를 완성하였다

목록은 있으며 좌목(座目)middot각항시일(各項時日)middot도형(圖形)middot승전(承傳 上樑文儀註)middot물력

구획(物力區劃)middot이문(移文)middot내관(來關)middot품목(稟目 附式例)middot감결(甘結)middot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

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 순으로 『창경궁영건도감의궤』(1834)와 동일하다 도형에는 대조전

(大造殿) 징광루(澄光樓) 양심합(養心閤) 희정당(凞政堂)의 정면 그림이 있다

lt승전gt의 끝 부분에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의 상량문을 실었다 lt물력구획gt은 ldquo營建

物力區劃數rdquo라는 제목으로 각 지방과 아문별로 분담된 재정과 총액을 적었다 lt품목gt에는

lsquo各樣匠人一日工錢式rsquo lsquo諸色工匠等助役式rsquo 별간역이하 하급관리의 식례 목물가를 비롯한 각

종 물력을 자세히 적고 있다 lt실입gt은 『서궐영건도감의궤』 『창경궁영건도감의궤』와

같은 방식으로 각 건물별로 소용된 재료의 내역을 석재 재목 철물의 순서로 적었다 이를

통하여 공사내용을 소상히 알 수 있다

180) 『순조실록』 권33 순조 33년(1833 계사) 10월 17일

주요

전각부속건물

규모181)

(1647)

규모

(1834)

동궐

도형

석공

사목공사 비고

대조전

45칸 45칸 36칸

7량 어칸풍판 二翼工

세살청판분합 세만살단

분합

인조 25년대조전 45

칸-

어칸마루 3칸 4면

퇴마루 20칸 온돌

12칸

水剌間

(水剌廚)1칸 없음

맞배 3량

만살청판분합 8짝 만살

광창 8짝

lt동궐도gt와 거의 일

興福軒 6칸

20칸

175칸 5량 익공

淸香閣

(天香閣)

隆慶軒 9칸

26칸

6칸 익공추녀 2개- 鷄子多

里+하엽 25개

集祥門행각 22칸 lt동궐도gt와 lt동궐

도gt형이 다름

內燒廚房 255칸 196칸 5량 익공 만살청판분합

慶極門행각

澄光樓

마 루 4

온 돌 2

퇴12520칸 20칸

5량 중층 翼工

세살청판분합 만살청판

분합

고주 10개 대량 4개

종보 4개 추녀 8개

(중층)

複道閣 3칸 3량 方椽

玉華堂 105 15칸 15칸

맞배+팔작

익공

고주 8개 평주 18개

추녀 2개 대량 평

량 종량 퇴량

靜黙堂 105 10칸 10칸 5량 민도리 고주4개 추녀 2개

주요전각 부속건물 공사내용

대조전 홍판장 延春門 延秋門 판장문(1칸) 판장(7칸) 판장(1칸)

만춘헌 판장문(1칸) 융경헌 앞 판장(2칸) 문(반칸) 水剌間廚판장

(1칸) 양심합 동남 판장(1칸) 장순문판장(4칸) 재덕당판장(2칸)

신조

齊政閣과 서행각(34칸) 수보

구 소주방(10칸반) 수보

건물의 구성에 대한 설명은 칸수만 적고 있어서 17세기 의궤에 비하여 부족하지만 그

대신 각 건물에 사용된 부재는 수량과 함께 상세히 적었다

순조 33년 화재이전의 모습인 lt동궐도gt와 복구공사 후 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으며 이때

공사된 내용은 고종대 까지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lt동궐도형gt을 통하여 19세기의

창덕궁의 모습을 추론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2) 의궤와 건축의 비교

181) 창덕궁수리도감의궤 (인조 25년 1647)

주요

전각부속건물

규모181)

(1647)

규모

(1834)

동궐

도형

석공

사목공사 비고

養心閤

25칸 235칸

5량 익공 모임지붕

세살청판분합 만살분합

고주7개 대량 7개

종량 15개 팔각주 9

개 추녀 1개

宣平門

外 燒 廚 房

및 서행각35칸 5량 일부 익공 추녀 1개

凞政堂

15 15칸 15칸

구조1고주

공포二翼工

입면세살청판분합세만

살청판분합

정면 5times측면 3

고주 4개 평주 16개

종보 4개 대주두 소

주두

複道閣

서행각17칸

克綏齋

5량 익공

세살청판분합

만살단분합 만살청판분

協陽門

嚁輝門 좌

우행각 5칸

同春門 연

(1) 1833년 창덕궁 화재의 범위

1833년 10월 17일 밤 四更에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이 불에 탔고 징광루middot옥화당middot양심

합까지 연달아 탔다 대신)과 각신들을 소견하였는데 영의정 이상황이 말하기를 ldquo궁중의

화재가 전후하여 서로 잇달아 일어난 것은 참으로 큰 재변이며 이번의 실화(失火)는 결코

심상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높게 쌓은 넓은 집이 결코 잠깐 사이에 불길이 번질 리가 없는

것이고 이미 숙직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또 제 시각에 순경(巡警)을 돌았다면 진작 발견하

지 못하고 불길이 이렇게까지 번지게 된 것은 과오의 여부를 논할 것 없이 반드시 이루어

진 까닭이 있을 것이니 끝까지 엄하게 추구(追究)하는 정사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dquo하

였다182) 이로 보면 당시 화재로 인해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 옥화당 양심합까지 불탔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을 중건한 공사가 바로 『창덕궁영건도감의궤』에 실린 것이다

당시 화재의 원인은 ldquo17일 밤 잠자던 중에 단양문(端陽門) 밖 위소(衛所)의 군사들이 떠

드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차비문 안에서 실화(失火)하였음을 알고는 불을 끄려고 급히

들어갔더니 장순문(莊順門)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몸을 밀치고 들어갔으

며 한편으로는 제정각(齊政閣)에서 수직하는 무감(武監)을 소리쳐 불렀으나 그사이에 불길

이 크게 일어나 이미 양심합(養心閤)에 연달아 번졌는데 실화의 원인은 전혀 알지 못합니

182) 『순조실록』 순조 33년 10월 17일

건물명 기사 사료

대조전

1461년(세조13) 내정전을 양의전이라 명명하고

대조전에서는 신하를 만났다고 함 따라서 이 시

기 대조전은 내정전과 다른 전각이었다고 추정

『세조실록』 세조7년 12월

19일 및 세조13년 5월 18

연산군일기에 태종 세종이 대조전에 거처하고

성종이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보임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8월 22일

1608년(광해군즉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해 복구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시 소실된『인조실록』 인조원년 3월

15일

1647년(인조25) 인경궁 경수전을 뜯어 다시 지

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34) 전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다rdquo183)라 한 것처럼 밝혀지지 않았다

1833년 화재로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 일곽의 건물들이 전소된다 이때 불탄 건물은

대조전과 주변행각 징광루와 주변건물 희정당과 주변행각이다 희정당과 대조전의 서쪽으

로는 행각들이 붙어 있어 불이 옮겨 붙기 쉬웠다 이 불로 소진된 건물을 중수한 내용이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이다 여기에 표기된 건물의 규모와 소요 부재로 추정한 건물의 양

식 등을 1647년 인조 때의 창덕궁 복구 시 조성된 내용 및 lt동궐도gt(1827~1833년) lt동궐

도gt형(1907년경)등과 비교하여 보았다

1833년의 화재 후 복구에 있어서 건물의 변경이 있었는가 1647년 『창덕궁수리도감의

궤』와 1834년 의궤의 건물 규모나 배치는 거의 유사하다 건물의 명칭에 있어서 인조대의

명칭과 lt동궐도gt는 차이를 보이지만 1834년 의궤와 lt동궐도gt의 건물명칭 및 문의 명칭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lt동궐도gt의 제작 시기는 1834년 4월 이전이 확실한 것으로 보이며(통

명전의 복구와 관련하여)lt동궐도gt가 만들어진 직후 화재가 났고 복구하면서 이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lt동궐도gt와 lt동궐도형gt에서 대조전 일곽의 차이는 무엇이며 언제 생겼는가 집상문

서쪽의 행각이 옥화당까지 길게 이어지던 것이 중간에 끊어지고 서쪽으로 더 증축되었다

집상전과 집상전동행각이 없어졌다 집상전은 화재 시 소실되었다는 기사가 전혀 없다 불이

서쪽으로 번진 것을 볼 때 피해가 없었을 수도 있다 집상전은 정조이후 기록이 보이지 않

는다 문의 명칭과 위치는 거의 일치하고 판장도 위치는 일치하나 수량이 차이를 보인다 그

러나 소실된 것을 복원하는 상황이므로 수량을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2) 대조전과 의궤

183) 『순조실록』 순조 33년 10월 18일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 다시 지음

대조전은 선정전의 동쪽 희정당의 북쪽에 있으며 건물 뒤로는 화계로 장식된 언덕이

있고 언덕 너머는 후원으로 연결된다 왕이 머무는 침소가 동온돌 왕비가 머무는 고이 서온

돌이다 궁궐의 행사가 있을 때 왕은 대조전에서 나와 선정전에서 의관을 갖추어 입고 여를

타고 행사장으로 이동하며 평상시에는 대조전에서 편복을 입고 희정당으로 나와 경연에 임

하였다 왕비는 정월초하루나 동짓날 당상관 이상의 관료 부인들을 대조전 앞마당에 부르고

하례를 받았다 이런 행사를 위해서 대조전 건물 앞에는 월대가 마련되어 있다 대조전은 내

전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신하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신하들

을 이곳까지 부르기도 하였다 1809년(순조 9)에는 마침 원자가 대조전에서 태어나자 아직

백일도 되기 전에 대신들이 대조전에 나아가 원자의 안녕을 기원하였다184)

1917년 소실되기 전의 대조전 모습은 사진자료도 남아있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의궤나 lt동궐도gt 등 시각자료를 통해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다시 1917년에 와서 화재를

만나 1920년에 재건되었다 이때는 경복궁 교태전 건물을 헐어서 그 재목을 가지고 지었으

며 위치를 약간 동북쪽으로 옮기고 교태전의 후방 부속건물까지 함께 이축해서 이전과는 다

른 모습으로 지었다

lt동궐도gt에 그려진 대조전은 1833년의 화재로 사라지고 이듬해 1834년에 다시 지어졌

다 다시 지어진 건물형태는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 평면형태가 장서각에 도면으로

남아있다(『근대건축도면집』 2009에 수록) 도면에 의하면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5칸이며

가운데 3칸의 정청을 중심으로 좌우 9칸씩의 온돌방이 있고 사면에 퇴가 돌아가는 모습이어

서 기본적으로 1647년 재건된 건물규모와 일치한다 1834년의 창덕궁 재건과정을 기록한

『창덕궁영건도감의궤』(1834)에는 대조전의 전면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실려 있는데 지붕

이 중앙이 높고 좌우가 낮은 형태나 좌우 익실에 돌기둥이 그려져 있어서 재건된 대조전이

화재 이전과 동일한 모습임을 보여준다

한편 대조전의 실내에 대해서는 1802년(순조 2) 당시 선공감에 근무하던 이이순(李頤

淳)이 건물 수리에 앞서서 대조전 실내상황을 소상히 기록한 lsquo대조전수리시기사rsquo가 전하고

있어서 참고가 된다185)

lsquo대조전수리시기사rsquo에 의하면 당시 대조전의 실내에는 10점이 넘는 병풍이 각방의 벽을

장식하고 있었으며 그 중 정청 북쪽 벽에는 금종이로 테두리를 장식하고 일곱 학이 춤추는

그림이 있는 병풍이 걸려있고 그 앞에는 용상이 있어 그 위에 붓과 벼루 양로 등이 놓였으

며 동쪽 방에는 벽에 많은 병풍과 글씨가 쓰인 액자가 있고 서쪽 방은 작은 방이 장지로 나

뉘어져 있는데 북쪽은 큰 장이 놓여있고 바닥은 벽은 능화지로 덮이고 바닥은 기름 장판이

깔린 위에 채화석이 깔려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현재 궁중유물 중에는 십장

생 등을 그린 화려한 채색의 12폭 병풍이 있어서 이들 역시 실내에 설치된 것이 아닌가 하

는 추정을 하기도 하였다186)

184) 『순조실록』 권12 순조 9년 10월 29일

185) 『후계집』 권5 잡저 대조전 수리시 기사

건물명 기사 사료

희정당

1496년(연산군 2) 성종이 사용하던 수문당이

불이나자 수리하고 나서 건물명을 희정당으로

고침

『연산군일기』 연산군 2년

8월 19일

1608년(광해군즉위) 소실된 건물을 복구함

1623년(인조원) 인조반정시 소실『인조실록』 인조 원년 3

월 15일

1647년(인조 25) 인경궁 화정당을 뜯어 다시

지음『창덕궁수리도감의궤』

1834년(순조 34) 전년 화재로 불에 탄 것을 다

시 지음

『순조실록』 순조 34년 12

월 17일

『창덕궁영건도감의궤』

1917년 화재로 소실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뜯어 다시 지음

20세기초에 작성된 궁궐지에는 대조전 규모는 36칸으로 적었다 lt동궐도형gt에도 건물규

모는 36칸이다 이전의 45칸과의 차이는 측면을 외부에 나타나는 툇간을 기준으로 세는지

아니면 내부 몸체의 주칸으로 세는지에 따른 차이로 판단된다 즉 측면 툇간을 기준으로 하

면 측면이 5칸이 되고 내부 몸체를 기준으로 하면 4칸이 되는데 그에 따라 측면이 5칸으로

또는 4칸으로 잡음에 따라 전체 규모를 다르게 기술한 결과이다

(3) 징광루(澄光樓)와 의궤

대조전 동북쪽에는 청기와를 덮은 2층 누각이 보이는데 징광루이다 가장 눈에 띠는 특

징은 지붕이 청기와로 덮여있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 안에 청기와를 덮은 건물이

선정전 외에도 징광루 등이 있었고 경복궁에도 있었다 징광루 역시 1647년(인조25) 인경궁

의 자재를 가지고 지은 것인데 청기와 역시 이 때 마련되었다 1917년 화재 때 징광루도 소

실되었으므로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의 징광루는 남아 있지 않다 1920년에 징광루가 있던

곳에는 경복궁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서 단층의 경훈각(景薰閣)으로 했다

(4) 희정당과 의궤

희정당은 1917년 소실된 뒤 다시 지어졌기 때문에 『창덕궁영건도감의궤』의 희정당은

남아 있지 않다 이후 1917년 대조전과 함께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 강녕전을 철거

해서 그 재목으로 다시 짓고 주변 행각도 크게 개조했다 특히 전면에 자동차로 입구까지

들어오도록 현관을 달아내어 본래의 건물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186) 이 12폭 병풍은 병풍 가운데 8각형의 공백이 있어서 이것이 일종의 불발기 창과 같이 실내에 설치되어 있

었덧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지만 병풍으로 제작된 점이나 크기 채색의 지나치게 화려한 점등을 고려할 때 특별

한 행사가 있을 때에 한정해서 설치하였고 평상시에는 설치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궁궐의 장

식그림』 국립고궁박물관 2007)

희정당은 침전인 대조전 앞에 남향해서 자리 잡았다 오른쪽으로는 행각을 통해서 선정

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당초의 건물 용도가 왕이 경전을 학습하는 학문소였으므로 아침에

일어나 침전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학문에 나아간다는 것을 상징하는 위치에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연산군 때 건물 이름을 희정당으로 고치면서 단순한 학문소 기능을 넘어서 정치의

장소로 바뀌었다고 짐작된다 편전이 격식을 차리고 정사를 논하는 곳이라고 한다면 학문소

는 편안한 자세로 격식에 매이지 않고 국정을 다룰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으다

유사한 사례는 경희궁의 흥정당에서 볼 수 있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지면서 처음부터 본래 편전에 해당하는 자정전이 혼전 등의 의

례공간으로 쓰고 흥정당이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희정당은 건물 형태가 상참과 같은

편전의 공식적인 의례를 거행하는데 부적한 것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상참 등은 선정전에

서 거행하고 일상적인 어전회의를 이곳에서 치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선정전이 정조의

혼전으로 활용되면서 희정당이 주로 편전의 용도를 대신하게 되었다 순종황제가 창덕궁으

로 이어한 이후에는 거의 모든 사신 접대는 이곳에서 치러졌다 이때는 건물 형태 자체가

완전히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lt동궐도gt에는 1917년 소실되기 이전의 희정당의 모습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단층 팔작지붕인데 특이한 부분은 건물 아래가 높은 돌기둥으로 받쳐

지고 바닥에서 건물로 오르기 위해서는 나무로 만든 네 개의 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안되도

록 한 모습이다 보통 궁궐의 건물은 기단을 두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일반적인데 희정

당은 그와 달리 지면에 돌로 맞은 바닥을 두고 그 위에 돌기둥을 여럿 세워서 바닥을 높이

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 것이다 전면의 돌기둥 안쪽은 비어 있는데 서쪽 끝에는 붉은 색으

로 필한 작은 네모난 부분이 일부 보인다 이 작은 네모난 부분은 온돌 바닥에 불을 넣기

위한 아궁이로 판단된다 또 동쪽 측면에는 반 칸 정도 벽을 달아내어 툇간을 만들고 이 툇

간으로 오르기 위한 별도의 나무계단도 그려 넣었다

19세기 중반 경희궁의 모습을 그린 서궐도안에 묘사된 흥정당 역시 희정당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인다 즉 흥정당 역시 바닥에 높은 돌기둥이 연속해 있고 높은 계단을 통해 실내

바닥에 오르도록 한 모습이다 창경궁의 숭문당은 그림이 아니고 건물 자체로 유사한 상황

을 보여준다 숭문당 역시 왕의 경연 장소로 지어진 창경궁의 학문소 건물이다 이 건물의

후면은 역시 돌기둥이 연속해 있고 그 위에 목조건물이 올라서 있다 또 돌기둥 안쪽은 툇

간 폭 만큼 비어있고 그 안쪽에 온돌에 불을 넣을 수 있는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다 희정당

의 그림과 동일한 구조인 셈이다 결국 창경궁 숭문당 경희궁 흥정당 그리고 창덕궁 희정

당 세 건물은 모두 동일한 형식의 건축이며 세 건물은 왕의 학문소의 기능과 연관을 가진

건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희정당은 19세기부터는 선정전을 대신해서 왕이 대신들과 국사를 논하는 편전으로 쓰였

다 이 때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희정당의 어느 부분에 왕이 임하고 대신들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궁금한 사항이다 과거 선정전이 편전일 때는 왕의 위치는 건물 북쪽 중앙이 놓

이고 그 앞 좌우로 나누어 대신들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희정당에서는 남쪽은

5칸의 마루가 있고 안쪽은 중앙 3칸에 넓은 온돌방이 있고 좌우에 작은 방이 2칸씩 있는 모

습이다 바닥이 마루와 온돌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왕이나 신하들이 모두 방석을 놓고 앉아

서 어전회의를 했다고 짐작은 되지만 과연 어느 위치에 누가 어떻게 자리를 잡았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희정당 건물 밖 동남쪽에는 네모난 연못이 있다 본래는 왕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나

서 머리를 식힐 수 있도록 꾸민 못으로 짐작되는데 후에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이 연못이 어

떤 기능을 가지게 되었을지는 짐작이 잘 가지 않는다

1917년 11월 대조전과 희정당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때는 순종황제가 창덕궁에 거처

하고 있을 때였으며 대조전은 순종이 거처하던 침전이고 희정당은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견

하는 집무실이었다 서둘러 건물 복구가 시작되었는데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러 그 재목으로

대조전을 짓고 강녕전을 헐어 희정당을 짓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공사는 3년이 걸려 1920년

에 완성되었다 새로 지어진 희정당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어졌다 정면 11칸 측

면 5칸으로 규모를 크게 키웠으며 건물 좌우로 행각이 뻗어있고 다시 남쪽으로 출입문을 갖

춘 남행각이 들어섰다 또한 출입문에는 지붕이 돌출되고 기둥 2개가 돌출한 지붕을 받치는

현관부분을 달아내었다

이렇게 해서 자동차로 현관 앞까지 진입하여 그대로 행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

다 이 과정에서 연못을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건물 동쪽 경사지에는 난방을 위해서 보일러

시설을 설치했다 또한 정전 및 행각의 창문도 서양식의 창문으로 교체되었다 대청 좌우 상

부벽면에는 대형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희정당에는 청나라에 유학하여 그림공부를 한 당대

의 이름난 화가 김규진이 「해금강총석정절경」과 「내금강만물초승경」을 그렸다 또 실내

에는 서양에서 수입해 온 탁자와 의자 등을 비치하였다 이 그림이나 가구들은 지금도 실내

에 잘 남아있다

아 『인정전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철종 8년 1857)

1) 공사 내용 분석

1857년(哲宗 8)에 昌德宮 正殿인 仁政殿을 重修한 기록이다 目錄은 座目middot時日middot圖說middot承傳

(附 奏啓 上樑文 儀註)middot移文middot來關middot甘結middot財用(附 式例)middot實入middot賞典middot工匠middot儀軌 순이다 座目에는

監董堂上 金炳冀 郎廳 趙冕鎬 別看役 姜彛五 등 5인 監董牌將 趙命燁 등 4인 看役牌將 金

再興 등 3인 畵師牌將 爐冶所牌將 등의 성명이 적혀 있다 圖說에 仁政殿 唐家 五峯屛圖

등과 轆轤圖가 있고 소요 材木들의 수효 및 尺量이 나와 있다

1854년 5월 25일 영의정 김좌근이 인정전의 중수를 발의하여 9월 23일 치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 25일 정역했다가 1857년 5월 26일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윤5월 6일에

야 중수를 마쳤다 중수도감이나 청을 별도로 두지 않고 호조에서 직접 영건을 맡았으며 의

궤 또한 호조에서 바로 1857년 윤5월 20일에 착수 12월 25일에 완성하였다

목록은 좌목(座目)middot시일(時日)middot도설(圖說)middot승전(承傳 附 奏啓 上樑文 儀註)middot이문(移文)내관(middot

來關)middot감결(甘結)middot재용(財用 附 式例)middot실입(實入)middot상전(賞典)middot공장(工匠)middot의궤(儀軌) 순이다

도설에는 인정전의 정면도와 부속물인 당가(唐家)middot오봉병(五峯屛)middot곡병(曲屛)middot당가천장(唐家

天掌)middot염우(廉隅)middot적첩(赤貼)middot허주(虛柱)middot유음(流音)middot초엽(草葉)middot연환청판(連環廳板)middot장단청권

(壯緞廳權)과 녹로(轆轤)의 도설이 있다 인정전의 척량(殿宇尺量)을 상하층(上下層) 각

층별 공포(工踏) 상하층조장(上下層條粧) 당가규모(唐家尺量) 좌탑척량(座榻尺量) 곡병척

량(曲屛尺量)으로 구분하였는데 소요 부재의 명칭과 크기별 수량 길이 단면크기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인정전 관련 두 의궤의 목록의 차이는 『인정전중수의궤』에는 lt품목gt항목이 빠져 있

고 lt재용gt 항목이 추가되어 있다 lt재용gt은 예산과 수급처를 적은 항목으로 앞선 『인정

전영건도감의궤』에서는 lt실입gt부분에 기록된 내용이다

2) 의궤와 인정전 건축의 비교

인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남향해서 건물을 세웠다 월대는 표면을 다듬은 화강석으로

마무리하고 했다 상부에 돌난간을 돌리고 난간 기둥에 짐승조각을 새긴 경복궁 근정전 기

단에 비하면 높이도 낮고 장식도 적지만 궁궐 정전의 간결하면서 위엄 있는 단의 모습을 잘

갖추었다 남쪽 중앙 하월대와 상월대 계단에는 왕의 가마가 지나가는 봉황을 조각한 답도

(踏道)를 두었다 하월대 전면 모서리에는 화재시를 대비해 물을 담아두는 청동 드므가 놓여

있다 본래 상월대에는 의식을 거행할 때 향을 피우는 향로가 놓여 져야 하지만 지금은 남

아있지 않다

상월대 북쪽으로 낮은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정전이 올라서 있다 정전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 정전과 마찬가지로 정면5칸 측면 4칸 규모이다 다만 기둥 간격에서는 근정전 보

다 조금 작아서 전체적으로는 근정전보다 면적이 약간 작다 기둥 위에는 전형적인 19세기

초의 내4출목 외3출목 다포식 공포를 짰다 지붕은 근정전과 같이 중층으로 꾸몄는데 창경

궁이나 경희궁 정전이 단층인 것과 구별된다 실내는 가운데 후면에 어좌를 꾸몄다 어좌는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당가(唐家)로 표기했는데 3면에 계단을 두고 당가 위에는 일월오악을

그린 병풍을 놓고 그 앞에 낮은 병픙인 곡병(曲屛)을 놓고 왕이 앉는 어좌를 두었다 내부는

상하층이 열린 구조이고 천장은 상층 지붕에만 설치되었기 때문에 높은 실내를 이루었다

천장에는 구름 사이로 두 마리 봉황이 나는 모습을 채색으로 그려 넣었다 출입문은 전면

어칸과 후면 어칸에만 있고 나머지는 하루에 머름을 댄 빗살로 된 분합문이 달렸다 창문

역시 황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에 회를 높

게 바른 양성을 하여 지붕의 격식을 높였다 조선후기 궁궐 정전의 본보기이며 건축적으로

도 가장 격식을 갖춘 중층 다포식의 전형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부분적으로 서양식 근대

문물이 가미된 건축물이다

『인정전중수의궤』는 1857년(철종8) 인정전을 부분적으로 수리한 내용이다 의궤의 인

정전 척량을 비교하여 보면 철종 8년의 수리공사는 1805년에 지은 인정전의 규모와 구성을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부재는 기존의 부재를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건된 지 약 50년 후에 수리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로서 영건시의 의궤(『인정전영건

도감의궤』)와 중수의궤 그리고 이때 보수한 건물이 현존하는 귀중한 사례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순조 5년 『인정전영건도감의궤』의 내용과 서술순서와 내용이 거의 일치하지만 일

부 부재의 크기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인정전 고주 중에서 귀고주 4개의 굵기를

보면 순조 3년 중건시보다 2치 더 큰 것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도리 창방 대보 등 기타

부재는 1805년에 지은 인정전과 같은 규모로 되어 있다

이때의 수리는 일부부재를 교체하고 단청을 손보는 등 건물의 형식은 변화가 없었던 것

으로 보인다 이후 인정전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1908년에 내부바닥과 창호를 일부

서양식으로 고치는 변화가 있었으나 상부공포 및 가구 건물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

었다

5 창덕궁 인정전 단청의 특성

가 인정전의 단청

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왕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lt사진1gt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지었지만 임진왜

란 때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에 복구되었다 이후 순조 3년(1803)

다시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중건하였는데 철종 7년(1856)에 크게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로 화강석 박석을 깐 2중 월

대 위에 세워져 있다

건물 내부는 아래위로 탁 트였는데 후면 가운데 고주 사이 뒤쪽으로 어좌를 마련하고 곡

병과 日月五嶽屛을 갖춘 용상을 설치하였다 천정은 가운데를 한 단 높여 감실 천정을 마련

하고 봉황 두 마리를 그려 넣었다 이 건물은 경복궁과 덕수궁 등 3대 궁궐의 정전과 양식

을 같이 하고 있으나 명정전과는 다르고 근정전과는 시기 수법상 앞서고 있어 가장 표본이

되는 것이다

단청은 건물 외부는 근래들어 수차례 부분적으로 새로 칠한 것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과거

의 상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외부단청이 겉보기로는 강한 색조에

생경한 느낌이 드는 반면 내부단청은 장중하지만 낡은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건물 내부의

어좌와 용상 일월오악병 등은 근래 새로 제작한 것이며 기둥의 석간주 가칠도 최근에 새로

칠한 것이다

lt사진17gt 창덕궁 인정전의 내부 모습

나 인정전 단청과 의궤

의궤란 국가나 왕실에서 주도한 건축공사의 시말을 정확히 기록하여 후세에 남길 목적으

로 편찬된 문헌을 말한다 창덕궁에 대한 의궤는 모두 9건으로 현존하는 궁궐 영건 관련 의

궤 가운데 반이 넘는다 이 가운데 창덕궁내 현존하는 건물과 관련된 영건의궤 중에서 단청

공사와 관련된 의궤는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 순조 5) 『인정전

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1857 철종 8)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

(1834) 『경복궁 창덕궁선원전일실증건도감의궤』(1900) 등 4종이 있다

의궤의 내용 중에서 단청과 관련된 것은 대체로 공사에 사용된 안료의 명칭과 사용량 정

도로 정보가 국한되어 있다 기록을 통해 당시에 사용한 안료별 명칭과 색상 품질특성 입

수경위와 원산지 등을 알 수 있지만 채색방법 작업 진행상황 등에 대해서는 상세히 파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당시 단청공사의 전모나 현존하는 건물의 단청안료를 이해하

는데 가장 확실한 길잡이가 된다 특히 인정전의 경우 단청공사를 38일 만에 완성했다거나

뇌록 주토 정분 등은 사용량과 공납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인정전과 직결된 『인정전영건도감의궤』와 『인정전중수의궤』의 단청관련

기록을 조사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다

다 연구조사 방법

우선 2008년 실시한 인정전의 내부 단청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 결과를 재정리 하였다 당

시 조사 항목은 색상별 색도 측정 현미경 촬영 안료 성분분석 등이었다 내부 단청이 주

대상이었지만 건물이 중층이라서 실내의 높이가 너무 높아 다양한 부분에 대한 조사가 불가

능하였고 그래서 접근이 가능한 부재이면서 단청이 잘 남아있는 퇴량[들보]와 익공 한 부분

을 조사한 것이다lt사진2gt

조사한 자료를 종합하여 사용된 안료의 이름과 채색 특성을 밝혀 낸 다음 그 결과를 2종

의 의궤에 등장하는 안료명과 비교 확인해보았다

lt사진2gt 인정전 들보의 단청조사

라 의궤 기록과 현존 단청안료의 비교 고찰

1) 의궤의 안료 종류와 그 특성

인정전 의궤 2종의 실입질 물목(物目)을 통해서 단청작업에 사용된 재료의 대강을 파악

할 수 있다 특히 색재료는 20여 종의 다양한 안료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lt표1gt

현대 단청공사 보다 더 다양한 종류의 안료가 쓰였던 것이다 현재 이들 안료의 정체를 모

두 명확하게 확인해 내기는 불가능하지만 기록된 명칭을 통해 그 대강을 색상별로 묶어보면

적색 황색 녹색 청색 그리고 흑백으로 파악할 수 있고 같은 색상이라도 몇 가지 종류의

안료를 혼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용된 안료의 명칭을 통해 안료의 산지와 품질 특성

색상의 채도 차이 등을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도 있었고 광물성 안료만이 아니라 식물성

염료로 생각되는 편연지와 석자황도 함께 사용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안료별로 사용된 양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어떤 안료가 어떤 목적에 활용되었

는지 안료별 계량 단위차이를 통해 재료의 상태도 짐작이 가능하다 가칠 즉 바탕칠에 사용

된 뇌록과 석간주의 양이 가장 많았고 흰색인 정분과 진분도 다량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들

안료는 斗(말)로 계량하였고 뇌록 가칠에 280斗 석간주 가칠에는 황주주토 113斗를 비롯해

편연지와 당주홍 석간주가 함께 사용되었다 특히 흰색 안료로써 정분이 300斗 다량 사용되

었는데 용도는 흰색 재료 뿐만 아니라 가칠안료와 혼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부분의 안료는 무게로 계량하였는데 분말이라는 재료에 적합한 단위가 된다 무게를 근

(斤) 량(兩) 전(錢) 분(分)까지 정확히 기록하였다 이밖에 편연지는 장(張)으로 계량해서

낮장[片]으로 계산이 가능한 안료로 파악되었고 금박은 묶음[束]으로 액체인 송유는 사발

(沙鉢) 단위로 기록했다

50여년의 시기 차이가 있는 두 종의 의궤기록을 비교해 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

로 안료의 종류와 가짓수 그리고 사용한 양까지 비슷한 점을 알 수 있다 1856년 인정전 중

수시 단청공사는 완전히 새로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50여 년 후 단청재료에서 가장 큰 변

화가 있었던 점이 황주주토로 가칠한 부분이 석간주로 대체된 것이다 당시 황주주토의 수

급이 어렵게 되자 석간주로 대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주홍과 왜주홍 당황단 등은 주홍 황단이라는 안료 이름에 접두사를 붙여서 수입처 또

는 원산지를 나타낸 예도 있다 당은 중국을 왜는 일본을 포함한 동남아산으로 보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磻)과 상(常)의 의미는 불분명하다 접두어로 석(石)을 붙인 점은

재료가 광물이라는 뜻이겠지만 가공하지 않은 원석이라는 의미도 내포된 것 같다 예를 들

어 웅황(雄黃 orpiment)은 석황으로도 불리는 데 화산지대에서 많이 산출되는 것으로 알려

져 있다 화학식은 As2S3 황화비소이다 반면 자황(雌黃 gamboge)은 식물성 천연수지로 알

려져 있다 동황(同黃)으로도 불린다 천연광물인 웅황에 석자를 붙인 것은 원석이라는 표현

일 수 있으며 자황에 석자를 붙인 이유는 불명이다

한편 양(洋) 자가 붙은 안료는 대체로 서양 수입품이라는 의미가 있다 여하튼 1857년 인

정전중수의궤에 등장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19세기 중반까지는 서양에서 제조

한 인공안료는 아직 수입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의궤문헌

색상

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 仁政殿重修儀軌(1857)비고(안료광물명)

안료명 사용량 안료명 사용량

적색계열

石磵朱 28斤 石澗朱 602斤 산화철 Iron Oxide

黃州朱土 113斗 산화철 Iron Oxide

片臙脂 1211張半 片臙脂 1467片

唐朱紅 208斤 4兩 唐朱紅 148斤 朱砂 cinnabar()

磻朱紅 264斤 鉛丹 Red Lead()

倭朱紅 4斤

황색계열

唐黃丹 230斤 3兩 3錢 唐黃丹 231斤 14兩 黃丹

常黃丹 90斤 11兩 常黃丹 2斤

石雄黃 2斤 1兩 5錢 雄黃(石黃) As2S3

石紫黃 12斤 以上 石紫黃 17斤 Gamboge()

同黃 47斤 1兩 5分 同黃 36斤 Gamboge()

녹색계열

磊碌 280斗 磊碌 200斗 磊碌石 Ceradonite

石碌 23斤 5兩 石碌 15斤 孔雀石 Malachite

荷葉 268근 8兩 5錢 荷葉 256斤 짙은 녹색

三碌 338斤 三碌 396斤 8兩 연한 녹색

청색계열

靑花 115斤

二靑 44斤 12兩 7錢 4分 二靑 43斤

三靑 66斤 3兩 三靑 43斤

흰색계열丁粉 300斗 丁粉

154斗 9升 2合

5勺정분

(Calcite CaCO3)

眞粉 276斤 4兩 眞粉 229斤 연백(Lead White) 2PbCO3middotPb(OH)2

흑색[墨] 松煙 먹()

금박 金箔 46束 4貼 7張 金箔 59束

금속 白銅 13兩

전색제 阿膠 583斤 阿膠 700斤

기 타 松油 257沙鉢

lt표27gt 인정전 儀軌에 등장하는 단청물목의 안료명과 사용량

2) 현존하는 인정전 단청에서 확인된 안료와 전색제

의궤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인정전의 단청에는 20여 종의 안료가 사용되었다 현존하는 인

정전 단청을 조사한 결과를 이용해 의궤에 등장한 안료의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lt표2gt 그

결과 적색계열의 안료에서는 석간주와 황토를 황색계열에서는 황단 웅황 등 기록에 등장한

안료 대신 새롭게 황토를 확인했으며 녹색계열에서는 뇌록과 석록을 찾을 수 있었다

청색계열은 그 존재를 밝혀내지 못했다 다른 안료에 비해 사용량도 적어 모로단청 이외

의 부분이나 기물 중요 건물부재 등의 채색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흰색의 경

우 다량의 정분과 함께 지당(地堂 TiO2) 백토를 확인했지만 진분은 찾을 수 없었다 금박

위치 색상명 근사색

색차(lab)

실체현미경박편현미경

(x200)화학성분 안료화학조성

L a b

기둥 석간주 3479 1801 1358

C 2640

Si 2216

Fe 1487

O 1288

Ca Na Mg

Al Cl K

정분 CaCO3

석간주황토Fe2O3

백토

Al2O3middotSiO2middot4H2O

문턱 뇌록 4229 -141 1087

Ca 3756

Ti 2173

O 1306

C 865

Fe Mg Al

Si Cl

정분 CaCO3

지당 TiO2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들보 백색 6415 225 1669

C 3387

Si 2116

Fe 1356

K 1131

O 1032

Ca Ti Mg

Al S Cl

정분 CaCO3

황토 Fe2O3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지당 TiO2

문틀

(우측)황색 5078 741 2749

Fe 9634

O 270

Ca K

황토 Fe2O3

정분 CaCO3

익공 하엽 4468 -863 879

Cu 7980

Cl 1603

O 225

Ca S

석록CuCO3Cu(OH)2

정분 CaCO3

lt표2gt 인정전 단청의 색상별 과학적 분석표

과 백동 또한 확인이 불가능했다 금박은 단청의 선에 특별하게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

의궤에 기록된 안료 중에서 현재 확인된 것은 석간주와 주토 뇌록 석록 정분 등 몇 가

지 종류밖에 없다 그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안료는 사실 우리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

는 안료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아직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조사한 지점이 들보의 모

로단청 한 곳이라는 것도 한계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앞으로 고대 안료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과 함께 조사 대상을 넓혀서 진행한다면 대부분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믿어진다

이들 안료는 전통 전색제인 아교(阿膠)와 섞어 채색을 하였으며 단청 후 표면에는 기름을

발라 내구성을 높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정전의 경우 송유[松精油 terpentine]를 이러

한 용도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건물의 경우 관련 의궤를 통해 확인한 결과 명유

(明油)와 법유(法油)가 활용되었다 이들 유기물질의 사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습득한 시

료를 퓨리에변환 적외선분광분석기(FT-IR)로 분석하였지만 전색제로 아교가 사용된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들보 육색 5174 1326 1006

Si 2175

Fe 1847

C 1566

Ca 1397

O 1230

Mg Al K

정분 CaCO3

석간주Fe2O3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익공 하엽 4334 -830 1322

Cu 2939

Si 2938

Fe 1241

O 979

K 823

C Mg Al

석록CuCO3Cu(OH)2

뇌록

K(MgFe2+)(Fe3+Al)

Si4O10(OH)2

안병찬 등 『궁궐채색기술 특성규명 연구 보고서』국립문화재연구소(2008) 81쪽의 ltTable 23gt을

보완함

3) 단청 공사와 재료 수급 내용

인정전 영건시 상하층 건물의 단청 공사가 1804년 11월 6일에 시작되어 12월 13일에 끝났

음을 알 수 있다 공사기간이 38일로 상당히 짧았고 특히 늦가을에서 초겨울사이에 진행되

어 채색작업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1804년 10월 서울의 화사

(畵師)만으로 감당하기에는 인정전 단청공사의 규모가 너무 커 강원도 경기도 총융청 등에

서 화사를 구해 보낼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청공사에 동원된 인원이 총 몇 명인

지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각종 재료의 수급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황주주토는 황해감영에 상납을 지시하였고 뇌록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상감영에 상납을

명했다 단청용 붓을 만드는데 쓸 집돼지털 200근을 평안도 황해도 개성부 등에 나누어 정

했고 아교 제작에 필요한 쇠가죽 70장을 수원부 개성부 관주부에 나누어 정한 기록도 보

인다 다량의 주토와 뇌록안료는 물론 단청 채색에 필요한 다량의 붓과 아교도 중요 물목이

었는데 이들은 완제품 보다는 원료상태를 공출해 작업 현장에서 직접 제조 가공하여 활

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창덕궁영건도감의궤』에는 1833년 11월의 내관으로 황해도에 분정된 法油 丁粉

正鐵 强鐵 石灰 등을 고을별로 책임을 적은 기록도 있다 이 가운데 정분 300말을 장연에

배정한 내용 강원도에 분정된 法油 松煙 生葛 木賊 楡皮 등의 고을별 할당량을 적고 이

가운데 송연은 金城 淮陽 金化 平康 寧越 平昌 旌善 등 고을에 분정하였으며 느릅나무

껍질인 유피는 橫城 洪川 麟蹄 狼川 寧越 平昌 旌善 등지에 분정하였다는 내용 그리고

집돼지털 50근을 평안도내 여러 고을에 분정한 내용도 담고 있다

마 인정전 단청의 문양 특성

인정전 단청은 부재별로 다양한 문양이 활용되고 있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모로단청을 들

목과 창방 평방 등의 머리초를 대표 예로 들어 간략히 기술한다

대체로 연화병머리초를 기본으로 삼고 원연화병머리초를 변형으로 활용했다 즉 창방을

연화병머리초로 하고 그 위의 평방은 원연화병머리초로 변화를 주었다 휘도 부재별로 차이

를 두었는데 대들보의 휘는 복잡하고 화려한 바자휘로lt사진3gt 창방과 평방은 그보다 단순

한 인휘로 통일해 표현했다 휘의 색은 적 청 황 석간주를 2빛으로 전개하다가 뇌록바탕에

양록실 황실 먹실로 마감해 밝고 장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러한 연화병머리초 문양은 창덕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의 단청에 빠짐없이 활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해 내전을 겸한 침전으로 대조전(보물 제

816호) 편전(便殿)인 희정당은 물론 궁내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던 건물인 구선원전(보

물 제817호)과 신선원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lt사진4 5gt 즉 창덕궁 인정전의 연화병머리

초는 왕실을 상징하는 단청문양인 것이다

lt사진3gt 인정전 대들보의 연화병머리초 바자휘 단청

lt사진4gt 대조전 창방의 연화병머리초직휘 단청

lt사진5gt 희정당 창방의 연화병머리초직휘 단청(현대)

이상과 같이 창덕궁의 단청 특성을 인정전 단청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인정전은 창덕

궁의 정전으로 가장 중요한 건물이면서 단청을 포함한 공사 내역을 기록한 의궤도 2종이나

되어 과거 단청을 연구하는 데 문헌기록도 잘 남아있다 또한 인정전의 내부 단청은 현존하

는 궁궐단청 중 가장 오래된 것 가운데 하나로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인정전을 중심으로 창덕궁 단청을 논하고자 한 이유는

가 두 종의 인정전 관련 의궤를 통해 과거 단청공사 기록을 잘 파악할 수 있다

나 인정전 내부 단청은 현존하는 궁궐 단청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 일부분 수리 개칠이 되었지만 과거 단청이 잘 남아 있다

라 인정전 단청의 안료를 과학적으로 조사한 자료가 있어서 비교가 가능하다는 점

등이다

의궤의 내용과 현존하는 단청의 안료와 공사내역을 비교한 결과

가 의궤의 기록에 따르면 20종이 넘는 다양한 안료가 사용된 반면 현존 단청에서는 겨

우 5종의 안료가 확인되었다 확인되지 않은 안료는 당주홍 왜주홍 당황단 석자황 등 그

정체가 확실치 않은 안료들이다 특히 청색은 청화를 비롯해 이청과 삼청인데 이들 청색은

육안으로도 확인이 불가능했다 앞으로 이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나 인정전의 단청 공사는 1804년 11월 6일에 시작되어 12월 13일에 끝나 공사기간이 38

일로 상당히 짧았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진행되어 작업에 상당

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 단청안료 중 무엇보다 중요하고 다량 소요되는 가칠안료로서 황주주토는 황해감영에

서 뇌록은 경상감영에서 공납을 받았으며 붓의 재료인 되지털과 아교 제작에 필요한 쇠가

죽 등을 원료상태로 지방의 도와 부에서 나누어 공출한 기록도 확인하였다

라 50여년의 사이를 두고 벌인 두차례의 인정전 단청공사에서 가장 큰 색재료의 변화는

붉은색에서 일어났는데 최초에는 황주주토를 사용했던 가칠이 보수공사 시 석간주가칠로 교

체된 점이다

마 인정전의 대표적인 모로단청 문양은 연화병머리초인데 이 문양은 대조전과 희정당은

물론 선원전 등 창덕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에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로 요약된다

단청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의외로 미지의 상태로 남아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연구 관점이 전통 문양에만 편중되어 있고 재료와 기술연구에는 근거가 부족하

여 체계적이지 못한 경향이 있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있는 단청자료를 과학적

으로 조사하면서 고문헌 기록과 비교 검토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시급히 보완해

야 할 점은 현존하는 단청자료를 함부로 벗겨내고 재시공하지 않는 일이다

lt참고문헌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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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仁政殿營建都監儀軌(1805)『仁政殿重修儀軌(1857)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6 창덕궁 궁역 궁성 궁성문 궁장문 문로

가 궁역

1) 조선 전기

『세조실록』 27권 8년(1462) 1월 30일(을축)

처음에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의 후원(後苑)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쪽 원장(垣墻)을 넓혀서 쌓으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공 제조(繕工提調)에게 명하여 그 기지(基址)를 살펴서 정하게 하니 주위의 둘레가 모두 4

천 2백 척(尺)이고 그 안에 인가(人家)가 모두 73채였다 명하여 2월까지 모두 철거(撤去)하게 하고 그 집

주인에게 3년 동안 복호(復戶)하여 주고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그들이 원(願)하는 바에 따라 빈 땅을 절

급(折給)하게 하였다

『세조실록』30권 9년(1463) 2월 7일(병인)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창덕궁(昌德宮)에 거둥하여 궁장(宮墻)을 보고 기지(基址)를 넓게 쌓도록 하였

다 이 앞서 궁장을 넓히고자 하여 궁(宮) 동북동(東北洞)의 인가(人家)를 철거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또 북

쪽 고개 밑의 인가 58구(區)를 철거하니 주위(周圍)가 무릇 4천 척(尺)이었다 행 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

院事) 김개(金漑)middot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이석형(李石亨)middot한성부 윤(漢城府尹) 권반(權攀)middot공조 참판 이연손

(李延孫)middot인순부 윤(仁順府尹) 황효원(黃孝源)을 제조(提調)로 삼고 군기 판사(軍器判事) 황신(黃愼)middot사복 판

사(司僕判事) 박서창(朴徐昌)middot군기 부정(軍器副正) 한치의(韓致義)middot공조 정랑(工曹正郞) 성율(成慄)middot한성 소윤

(漢城少尹) 신승선(愼承善)middot선공 주부(繕工注簿) 강치(姜致)를 낭관(郞官)으로 삼아 도성 방리인(都城坊里人)

을 다 징발하여 통(統)을 나누어 쌓으니 1백 19가(家)로서 1통(統)을 삼고 1통(統)이 쌓은 것이 25척(尺)이

었다 통(統)은 대개 1백 60이고 통(統)마다 모두 직질(職秩)이 높은 인원(人員)으로서 주관하게 하여 오늘

부터 역사를 시작하였는데 전교하기를 ldquo동쪽 고개[東岾]도 또한 이 주산(主山)의 내맥(來脈)이다 성 밖에

있게 되면 마땅하지 못하니 다시 넓히도록 하라rdquo 하니 이에 또 4백 척(尺)을 물리었다

『세조실록』30권 9년(1463) 2월 9일(무진)

좌의정 권남(權擥)이 아뢰기를 ldquo성균관 반수(成均館泮水)는 청컨대 신축(新築)하는 궁장(宮墻) 안에 넣지 말

게 하소서rdquo 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어서(御書)를 보이기를 ldquo뭇사람이 옳지 않다고 하는 일을 내 어

찌 하며 백성을 수고롭게 하여 원망을 취하는 역사를 내 어찌 일으키겠는가 궁성(宮城)의 역사는 부득이함

이 있어서 세상이 예로부터 서로 이어 왔으니 지난해 이어(移御)한 일 같은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선왕(先

王)이 수궁(數宮)을 설치한 소이(所以)이며 제경(諸京)을 설치한 뜻[意]이다 창덕궁(昌德宮)은 동산[苑]이

협애(狹隘)하니 후세의 인주(人主)로 유람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어 반드시 크게 토목(土木)을 일으킨다면

존망(存亡)의 형세를 입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런 연고로 음양(陰陽)을 인하여 장구(長久)한 방술

[術]을 삼아서 잠깐 수고롭더라도 길이 편안케 할 뿐이다 반수(泮水)가 동산[苑]에 들어오는 것은 의논한

바가 아니니 하나의 고(苽)6057) 를 소민(小民)에게서 빼앗는 것도 불가하거든 하물며 선사(先師)에게서

반수(泮水)를 약탈하겠느냐 또 반수(泮水)란 3면(三面)이 물로 둘러싸인 것이지 내[川]가 흐르는 것이 아니

다 고례(古禮)에 lsquo때를 따라 손익(損益)하지 않음이 없다rsquo 하였는데도 구구(區區)하게 외모(外貌)로써 한다

면 보름새 베[緦]를 살피는 것이다 만약에 반수(泮水)를 폐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내가 마땅히 유생(儒

生)으로 하여금 스스로 파게 할 것이다 어찌 나의 적개심(敵愾心) 있는 장졸(將卒)로 하여금 토목에 피로하

게 하겠느냐rdquo 하고 이어서 술자리를 베풀고 권남(權擥)에게 의롱(衣籠) 1사(事) 호피(虎皮)middot표피(豹皮)middot큰

녹비(鹿皮) 각 1장(張)을 여섯 승지(承旨)에게는 큰 녹비(鹿皮) 1장씩을 내려 주었다

『연산군일기』 51권 9년(1503 계해 명 홍치(弘治) 16년) 11월 12일(을해) 4번째기사

병조 판서 강귀손(姜龜孫)과 공조 판서 정미수(鄭眉壽) 등이 돈화문 동쪽에서 단봉문(丹鳳門)까지의 궁장 밑

인가 20여 곳을 적어서 아뢰기를 ldquo법을 범하고 지은 집을 전번 적간(摘奸)할 때 미처 적어 올리지 못하였

으니 철거하게 하소서rdquo 하니 그대로 좇았다

『연산군일기』 51권 9년(1503 계해 명 홍치(弘治) 16년) 11월 13일(병자) 7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타락산(駝駱山) 밑 조영철(趙永哲) 등 27인의 집을 철거하고 요금문(曜金門) 밖의 김명철(金命

哲) 등 49인의 집과 돈화문에서 단봉문(丹鳳門) 밖까지의 박막동(朴莫同) 등 24인의 집도 함께 철거하라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62권 12년(1506 병인 명 정덕(正德) 1년) 6월 22일(경오) 3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창덕궁의 성을 경복궁의 성에 의해 쌓고 돈화문을 다시 짓되 높고 크게 하며 또 하마비(下馬

碑) 모퉁이에 문을 내라rdquo 하였다

2) 조선 후기

『광해군일기』 158권 12년(1620 경신 명 만력(萬曆) 48년) 11월 15일(무자) 3번째기사

전교하였다 ldquo거둥 때 치는 엄고(嚴鼓)가 다 깨지고 몸통도 작고 하여 보기에 너무 볼품이 없다 평상시처럼

종을 빨리 주조하여 돈화문(敦化門) 위에다 매달아두라 그리고 거둥 때 쓰는 엄고도 급히 다시 만들어 쓰도

록 하라 이를 해조로 하여금 각별히 거행하게 하라rdquo

『효종실록』 9권 3년(1652) 10월 28일(병인)

상이 병조에 하교하여 도방군(到防軍) 1백 50인을 내어 궁장(宮墻)의 나무를 베게 하고 또 공조middot한성부에

명하여 내시와 함께 궁장을 순심(巡審)하여 더 쌓고 궁장 밖 여염집의 담이나 지붕이 궁장에 잇닿은 것을

모두 헐게 하였다 이때 변괴가 날마다 나타나서 인심이 어수선하므로 상이 신변을 걱정하여 이 조처가 있

었는데 도하(都下)가 이 때문에 놀랐다

『효종실록』 15권 6년(1655) 11월 23일(계묘)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ldquo수리하는 일에 대해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요금문(耀金門) 안의 지형이 몹시 비좁다 궁장(宮墻)의 안에는 모름지기 내장(內墻)이 있어야

하고 내장의 안에는 모름지기 층루(層樓)를 세워야 하는데 누각이 내장에 들어서고 나면 전연 남는 땅이 없

을 것이니 이것도 또한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두 담장의 사이가 1장(丈) 남짓도 안 되니 순라가 왕래하

자면 어떻게 통행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도랑을 안으로 들이어 따로 궁장을 그 밖에 쌓아야만 순라가 왕

래하는 길이 들어설 수 있고 체모나 형세가 마땅함을 얻을 것이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rdquo 하니 부제학 김

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ldquo궁성(宮城)의 옛 제도를 넓히기는 어려울 듯합니다rdquo 하고 호조 판서 허적(許

積)이 아뢰기를 ldquo순라의 길이 단지 담장 하나를 사이로 두고 있다는 것도 또한 몹시 온당치 못한 일입니

다rdquo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ldquo나의 뜻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경들과 가부를

상의하려는 것이다rdquo하니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ldquo외부 사람의 말소리가 필시 궁안에 들릴 테

니 일이 몹시 난처합니다 그러나 익희의 말도 또한 유념해야 합니다rdquo하고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

뢰기를 ldquo지금 비록 넓히려 한다 하더라도 요금문으로부터 홍문관에 이르기까지 곡장(曲墻)의 제도를 사용한

다면 민가를 철거하는 것이 많은 양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rdquo 하였다 상이 설계도를 가져다가 보았는데

심지원이 아뢰기를 ldquo신이 일찍이 2백 60 70십 칸의 재력(財力)을 헤아려 보았는데 도합 재목이 1만여 조

(條)가 들어 3천 석의 쌀과 4백 동의 포(布)를 써야 하니 공역이 너무 방대해서 일이 몹시 우려할 만합니

다 칸수를 줄여서 비용을 절약하고 민폐를 더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rdquo 하고 익희가 아뢰기를 ldquo대신의 말

을 부디 유념하소서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공역이 어찌 여기에 이르겠는가rdquo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ldquo흠경각(欽敬閣)도 철거할 것입니까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철거하여 그 목재와 기와를 쓰고 총부(摠府)의

목재와 기와는 도로 총부에 주는 것이 좋겠다rdquo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ldquo총부와 옥당을 옮길 장소가 없습

니다rdquo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상의원은 창경궁 안으로 옮기고 옥당과 총부를 상의원 근처에다가 옮겨 짓는

것이 타당할 것같다rdquo 하였다

나 궁성문 궁장문

1) 궁성문

(1) 조선전기의 궁성문

① 돈화문

『태종실록』 23권 12년 5월 22일(을사)

도성(都城) 좌우의 행랑(行廊)이 완성되었다 궐문(闕門)에서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까지 행랑이 4백 72

간이고 진선문(進善門) 남쪽에 누문(樓門) 5간을 세워서 돈화문(敦化門)이라고 이름하였다 의정부에서

창덕궁(昌德宮) 문 밖의 행랑을 각사(各司)에 나누어 주어 조방(朝房)으로 만들 것을 청하고 또 아뢰었다

ldquo금년 가을에 행랑(行廊)을 수리하고 장식하는 일과 창고(倉庫)를 조성(造成)하는 등의 일에 유수(遊手)승도

(僧徒)와 대장(隊長)대부(隊副)로 하여금 역사에 나오게 하소서rdquo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24권 12년(1412 임진 명 영락(永樂) 10년) 9월 15일(정유) 2번째기사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돈화문(敦化門) 누각의 종명(鐘銘)을 짓게 하였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ldquo금상(今上) 13년 겨울 10월 일에 유사(攸司)에 명하여 종(鍾)을 주조하여 궁문(宮門)

에 달게 하시니 대개 고제(古制)를 따름이라 공덕을 새기고 또 군신(郡臣)의 조회하는 기회를 엄하게 하는

까닭이 됩니다 위대하도다 생각하건대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이미 훈덕

(勳德)이 높으심에 인심(人心)이 날로 돌아와 붙었으나 참소[讒]를 얽어대는 말이 비등하여 화란의 조짐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마침 제릉(齊陵) 곁에서 여막을 사시다가 일이 급함을 듣고 곧 오시

어 기미(幾微)에 응해 제재하시고 드디어 훈친(勳親)이 창의(倡義)하여 추대함으로써 대업(大業)을 세우셨습

니다 그 뒤 간신(奸臣)이 다시 난(亂)을 꾸미는 자 있었으나 우리 전하께서 즉시 평정하여 사직(社稷)을 안

전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아버이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시니 덕이 이보다 더 성함이 없고 나라를

열고 사직을 정하시니 공이 이보다 큼이 없으므로 진실로 종(鍾)과 정(鼎)에 명(銘)을 새겨 만세에 보이심이

마땅합니다 즉위하신 이래 하늘을 공경하고 대국을 섬기시어 다시 제명(帝命)을 받으심으로써 조상의 공훈

을 빛나게 하시고 성학(聖學)이 계속하여 밝음에 지극하여서 다스림이 융성함에 이르렀습니다 신종(愼終)과

보본(報本)하는 정성과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기르시는 어지심에 이르러서는 상경(常經)을 세우고 강기(綱

紀)를 펴신 넓은 규모와 큰 책략이 모두 다 백왕(百王) 위에서 높이 나왔습니다 이제 또 특명으로 종을 달

게 하심으로써 새벽과 밤의 한계를 엄히 하시니 자강불식(自彊不息)하고 서정(庶政)에 부지런히 힘쓰심으로

써 만세의 태평(太平)에 기초를 잡으신 까닭이 지극하고 유택(流澤)이 길고 해를 지남이 오래이기에 마땅히

이 종(鍾)과 같이 한없이 내려갈 것은 틀림없습니다 아 성하도다 또 그 꾀를 내고 힘을 바쳐 공훈의 맹세

에 참가한 사람들도 모두 뒤에다 새겨 이를 불후(不朽)에 전함이 옳겠기에 신(臣) 변계량(卞季良)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명을 지웁니다rdquo

명(銘)은 이러하였다

ldquo빛나도다 성조(聖祖)시여 동토(東土)에 강생하여 하늘의 경명(景命)을 받아 처음으로 큰 복을 열으셨도

다 예전 고려 말년에 정사가 흩어지고 백성이 유리(流離)하매 하늘이 우리님의 덕을 돌보아 인심(人心)이

돌아왔으나 이때에 참소하는 사특한 무리가 그 뭇사람의 마음을 좀먹어 우리를 모략함이 너무 급하매 화란

이 아침저녁으로 임박하였도다 효도롭다 성자(聖子)여 묘막에서 오시어 신기(神機)를 결정하니 진실로 어

려움이 형통하여 해가 솟아 오르듯 넓게 통하며 크게 빛났도다 이어서 얼아(孽芽)가 돋아 틈을 타서 위태함

에 다달았으나 하늘이 태조에게 후(厚)하여 그 후손을 창성하게 하시고 우리님에 이르러 저 여러 악당을 쓰

러뜨리니 여러 어진이가 꾀를 합하고 좌우에서 도우니 인륜이 크게 펴지고 종사(宗社)가 길고 오래리라

다시 높은 공을 세움은 실로 우리님이시나 공이 높되 차지 않고 덕이 성하되 차지 않으니 천감(天鑑)이 매

우 밝아 보우(保佑)를 이에 아뢰었도다 제명(帝命)이 거듭 이르니 용위(龍位)를 받음이 이대로다 금보(金

寶)는 빛나고 크기가 말[斗] 같도다 천총(天寵)이 잦으심은 전고에 으뜸이라 내 서울로 돌아와서 조무(祖

武)를 잘 잇고 조심조심 효성하여 끝까지 어김 없이 기강을 세우시니 모든 법도 밝아졌도다 신야(晨夜)를

엄히 하여 이 종을 매달으니 백사(百司)가 직에 힘써 감히 어김이 없고 면면(綿綿)한 종묘middot사직 천지같이

길고도 오래리라 내 절하고 명을 지어 무강(無彊)에 보이노라rdquo 호조 판서 한상경(韓尙敬)에게 명하여 이를

쓰게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ldquo공신으로 맹세를 위반한 자는 청컨대 그 이름을 삭제하게 하소서rdquo 하

니 임금이 ldquo역대(歷代) 공신의 선악(善惡)은 모두 전하니 비록 삭제하지 않더라도 가하다rdquo 하였다 정부에

서 맹약을 위반한 자의 명단을 모두 써서 다시 청하니 임금이 ldquo정도전(鄭道傳)middot장지화(張志和)middot심효생(沈孝

生)middot이근(李懃)middot신극례(辛克禮) 같은 자는 마땅히 모두 기록하게 하라rdquo 하였다

정부에서 또 ldquo종정(鍾鼎)에다 이름을 새기는 것은 만세(萬世)에 밝게 보이심이니 충성과 간사함이 서로

섞여서는 특히 불가한데 그 중에서도 신극례는 녹권(錄券)을 거두지 않았으니 혹시 아울러 기록함이 옳겠

습니다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25권 13년(1413 계사 명 영락(永樂) 11년) 1월 27일(정미) 2번째기사

큰 종[大鐘]을 주조하여 완성하였다 애초에 제도(諸道)의 주철(鑄鐵) 1만 5천 근(斤)을 거두어 주조하게 하

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자청(朴子靑)이 대장(隊長) 1천명으로 경성에 실어 들여오니 상호군 현귀명(玄貴

命)에게 명하여 내온(內醞)을 내려 주어 위로하고는 이를 돈화문(敦化門)에 매달았다

(2) 조선후기의 궁성문

『궁궐지(헌종년간)』 창덕궁지

남문은 돈화문 단봉문 북문은 광지문 서북문은 요금문 동문은 건양문 서문은 경추문 금호문이고 궁내에

어구교가 있다

『한경지략』

창덕궁 칠문은 광해군 원년 중건

돈화문 큰 북(인경 파루) 사헌부 관리만 출입

단봉문 돈화문 남우

건양문 동문-창경궁 통행

금호문 서문 현판(성임의 글씨) 대부분 관리 출입 입직 주서가 개폐 확인

경추문 더 서쪽문 늘 잠금 대장이 군사 동원시에만 염

요금문 더 서쪽문 현판(성종때 신자건의 글씨)

공북문 서북문 안쪽에 대보단 원래 신이천 박의 집터

2) 궁장문

(1) 조선 전기의 궁장문

『태종실록』 33권 17년 1월 9일(병신)

지신사 조말생(趙末生) 등에게 명하여 향(香)을 받들고 먼저 종묘(宗廟)에 나아가게 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말하기를 ldquo전조(前朝)의 임금들은 즉위한 뒤로 친사(親祀)함이 한두 번에 불과했으므로 종묘에 나아갈 때를

당하면 반드시 성례(盛禮)를 갖추었지만 나는 세사(歲事)로써 상례(常禮)를 삼고자 한다 무엇을 반드시 저

렇게 번거롭게 하여야 하겠는가 제삿날을 당하여 청재(淸齋)한 근신(近臣)을 거느리고 사잇길로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하고 이내 명하여 종묘의 북장(北墻)에다 작은 문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말생

에게 명하여 그 문으로 먼저 가게 하였다

『성종실록』 58권 6년(1475 을미 명 성화(成化) 11년) 8월 23일(기해) 7번째기사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서거정(徐居正)이 전교(傳敎)를 받들어 대궐의 문 중에 예전에 액호(額號)가 없

는 것은 각기 2개의 이름을 편액(扁額)하여 아뢰니 임금이 낙점(落點)하기를 창덕궁(昌德宮) 밖 동장문(東

墻門)은 선인문(宣仁門) 중간의 동장문(東墻門)은 경양문(景陽門) 신대문(新大門)은 장춘문(長春門) 중대문

(中大門)은 선명문(宣明門) 남협문(南夾門)은 춘흥문(春興門) 안 동장문(東墻門)은 건양문(建陽門) 북쪽 동

장문(東墻門)은 기화문(綺華門) 광연정(廣延亭)의 서참문(西岾門)은 평창문(平昌門) 남행랑문(南行廊門)은

영화문(永和門) 북행랑문(北行廊門)은 영평문(永平門) 내사복 남문(內司僕南門)은 운금문(雲錦門) 외동산문

(外東山門)은 연양문(延陽門) 좌협문(左夾門)은 광범문(光範門) 우협문(右夾門)은 숭범문(崇範門) 남장문(南

墻門)은 단봉문(丹鳳門) 내서장문(內西墻門)은 의추문(宜秋門) 좌달문(左闥門)은 숙장문(肅章門) 겸사복청

(兼司僕廳)의 신대문(新大門)은 연복문(延福門) 내사옹(內司饔)의 상동문(上東門)은 소춘문(小春門) 북문(北

門)은 소동문(小東門) 중궁(中宮)의 차비문(差備門)은 연희문(延禧門) 승정원(承政院)의 남문(南門)은 연영문

(延英門) 서행랑문(西行廊門)은 금호문(金虎門) 외서장문(外西墻門)은 진금문(鎭金門) 서장문(西墻門)은 요

금문(曜金門) 후원(後苑)의 북장문(北墻門)은 공진문(拱辰門) 신북장문(新北墻門)은 창합문(閶闔門) 동장문

(東墻門)은 청양문(靑陽門) 외북장문(外北墻門)은 광지문(廣智門) 경복궁(景福宮)의 다와지문(多臥只門)은

망춘문(望春門) 옛 동궁(東宮)의 남문(南門)은 동양문(東陽門) 동장문(東墻門)은 소화문(昭華門) 남장문(南

墻門)은 소휘문(昭暉門) 동장자문(東障子門)은 요의문(曜儀門) 남행랑문(南行廊門)은 금란문(金鑾門) 후원

(後苑)의 사복문(司僕門)은 상원문(上苑門) 북성문(北城門)은 신무문(神武門)으로 하였다

(2) 조선후기의 궁장문

3) 궁성문과 궁장문의 개폐 숙위 감문

『세종실록』 31권 8년 2월 27일(신묘)

병조에서 계하기를 ldquo궁성(宮城)을 순찰하는데 다만 별순총제(別巡摠制)로 하여금 초경(初更)에만 돌아보게

하고 있으니 실로 타당하지 못합니다 바라옵건대 사면에서 모두 방패(防牌)로 하여금 번을 서게 하고 중국

의 제도에 의하여 흔드는 목탁을 만들어서 밤마다 남문에서 번을 든 호군(護軍)이 증명을 본조에서 받아

인정(人停) 후부터 파루를 칠 때까지 방패 두 사람이 목탁을 울리면서 남에서 동으로 동에서 북으로 북에

서 서로 차례차례로 전해 주어서 다시 남문에 들여놓으며 첫번에 목탁을 울린 자가 동에 도착할 만한 때에

또 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목탁을 주어 먼저와 같이 빙빙 돌아서 끊일 사이 없게 하며 방패가 만일 시각

을 지체하고 전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논죄(論罪)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32권 8년(1426 병오 명 선덕(宣德) 1년) 6월 14일(병자) 5번째기사

병조에 전지하기를 ldquo앞으로는 인정(人停) 후와 파루(罷漏) 전에 궁성문을 열고 닫을 일이 있으면 입직한 병

조 당상관과 도진무와 승전색(承傳色)의 주서(注書)와 사약(司鑰) 일동(一同)이 열고 닫게 하라rdquo 하였다

『세종실록』 63권 16년(1434 갑인 명 선덕(宣德) 9년) 1월 15일(계사) 9번째기사

병조에 전지하기를 ldquo강무(講武)로 거둥했을 때 밤을 당하여 궁문의 개폐(開閉)는 한결같이 중궁의 명령에

의해 하라rdquo 하였다

『세종실록』 100권 25년(1443 계해 명 정통(正統) 8년) 6월 19일(임인) 3번째기사

병조에서 아뢰기를 ldquo궁성문(宮城門)을 만약 인정(人定) 후와 파루(罷漏) 전에 열고 닫을 때에는 입직한 병조

당상(堂上)middot도진무(都鎭撫)middot승전색(承傳色)middot주서(注書)만이 열고 닫을 수 있다고 일찍이 전지가 있었습니다

삼가 상고하니 당(唐) 고조(高祖) 때에 궁전문과 성문에는 교어부(交魚符)와 순어부(巡魚符)를 두고 좌우상

(左右廂)에는 개문부(開門符)와 폐문부(閉門符)를 두었는데 좌부(左符)는 궐내(闕內)에 바치고 우부(右符)는

감문(監門)에 두었으며 중종(中宗) 때에는 궁전(宮殿)middot황성(皇城)middot경성(京城) 금원문(禁苑門) 좌우 내외를 신

칙하고서 각각 교어부 한 짝 순어부 한 짝씩을 주고 좌상(左廂)에는 개문어부(開門魚符) 한 짝을 우상에는

폐문어부(閉門魚符) 한 짝을 주었는데 모두 우부는 감문에 교부하여서 무시(無時)로 여닫는 데 이를 쓰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성문에는 벌써부터 개문부(開門符)를 만들어서 상직(上職)하는 호군(護軍)이 매일 궐

내에서 받아 합부(合符)하고서 문을 여닫습니다 금성문은 관계가 더욱 중한데 부(符)를 험증(驗證)하는 일

도 없이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실로 미편합니다 또 도진무와 병조 당상 등이 일제히 모인 다음에 문을 여는

까닭으로 시간에 맞추여야 할 일은 반드시 늦어지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궁성문도 또한 옛 제도에 의해서

교어부 한짝을 만들어서 왼쪽은 궐내에 들이고 오른쪽은 상서사(尙瑞司)에 갈무리하였다가 입직(入直)하는

중추원(中樞院) 당상과 각 위(衛)의 절제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진무 한 사람을 거느리고 매일 대궐에서 받

아서 영추문(迎秋門)에 숙직하며 만약 제 시각이 아닌 때에 여닫을 일이 있으면 승정색(承傳色) 관자(官者)

가 명을 받들어 왼쪽을 가지고 주서(注書)middot사약(司鑰)과 함께 감문(監門)의 숙직하는 곳에서 오른쪽과 맞추어

본 다음에 문을 열게 하는 것으로써 항구(恒久)한 법식(法式)으로 삼으소서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실록』 2권 1년(1470 경인 명 성화(成化) 6년) 1월 8일(정해) 9번째기사

도총부(都摠府)에 전교(傳敎)하기를 ldquo지금 이후부터는 대궐 안의 밤 순라(巡邏)는 위장(衛將)으로 하여금 행

하게 하는데 북쪽은 동소(東所)middot서소(西所)middot북소(北所)의 위장(衛將)으로 남쪽은 남소(南所)의 위장(衛將)과

응양위장(鷹揚衛將)middot내금위 장(內禁衛將)으로 시각[更]을 나누어 번갈아 돌아다니게 하라rdquo 하였다

『성종실록』 125권 12년(1481 신축 명 성화(成化) 17년) 1월 12일(정해) 6번째기사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ldquo대궐문을 여닫는 데에 요금문(曜金門)과 금호문(金虎門)은 도총부 낭청(都摠

府郞廳) 1명 겸사복(兼司僕) 1명 중궁 사약(中宮司鑰) 1명이 관장하며 돈화문(敦化門)middot단봉문(丹鳳門)middot평창

문(平昌門)은 주서(注書) 1명 겸사복 1명 대전 사약(大殿司鑰) 1명이 관장하고 선인문(宣仁門) 밖의 사옹

문(司饔門)middot청양문(靑陽門)은 선전관(宣傳官) 1명 겸사복 1명 왕대비전 사약 1명이 관장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rdquo 하니 전교하기를 ldquo가하다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5월 13일(정유) 3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궐 안에 입직하는 군사가 너무 많아서 매우 어지럽다 내금위(內禁衛)middot선전관(宣傳官) 따위는

밖에 나갈 수 없으나 충찬위(忠贊衛)middot충순위(忠順衛)middot별시위(別侍衛) 따위는 돈화문(敦化門) 밖 좌우편 장랑

(長廊)에 입직하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6월 19일(임신) 5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군기(軍器)는 대궐 곁의 가까운 곳에 두어서 뜻밖의 일에 대하여야 하니 남은 돈화문(敦化門)

밖 서는 요금문(耀金門) 밖에 따로 집을 지어서 군기시(軍器寺)에 둔 것을 수를 헤아려서 나누어 두라rdquo 하

였다

『연산군일기』 58권 11년(1505 을축 명 홍치(弘治) 18년) 6월 23일(병자) 2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동middot서 금표(禁標) 중에서 동이 더욱 막힌 것이 없으니 이계동(李季仝)으로 하여금 다시 살펴서

물려 쌓게 하며 돈화문(敦化門) 밖 좌우 행랑(行廊) 곁에 가까운 인가(人家)를 모두 철거시키고 행랑을 따라

담을 쌓아 군영(軍營)의 하마비(下馬碑)를 한계로 삼고 궐문(闕門)을 두는 것이 어떠한가 큰일을 이루고자

하거늘 어찌 많이 철거하는 것을 꺼리랴rdquo 하였다 이때부터 성안의 인심이 들끊어 혹 거짓 전하는 말이

lsquo성안에 사는 사람을 모조리 쫓아내고 숭인문(崇仁門)middot돈의문(敦義門)을 궐문으로 삼으므로 오래 편안할 계

책이 없다rsquo 하였다

『연산군일기』 61권 12년(1506 병인 명 정덕(正德) 1년) 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

전교하기를 ldquo궁금(宮禁)은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매양 수위하는 데 있어 마땅히 변을 당했을

때와 같이하여 각문을 수직하는 군사를 60명을 더 정하고 항상 갑옷을 입게 하라 수문장은 또 심지가 순근

(純謹)한 자로 수를 늘려서 입직하게 하라 단봉문(丹鳳門)middot금호문(金虎門) 등은 돈화문(敦化門)의 예에 따라

창middot칼 등의 물건을 모두 가지게 하되 칼날이 대궐로 향하지 말게 할 것과 가마를 시위하는 충철위middot보려대

로 입시한 자는 칼을 차지 못하게 할 것과 입직한 사람도 또한 대궐을 향하여 활시위를 잡아당기지 못하게

하는 일은 이미 금령(禁令)이 있었으니 앞으로는 거듭 밝혀 엄하게 금하라rdquo 하였다

『광해군일기』 103권 8년(1616 병진 명 만력(萬曆) 44년) 5월 13일(임오) 10번째기사

정원이 아뢰기를 ldquo전 황해 감사 윤조원(尹調元)을 잡아 올 일로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내보내기 위하여 궐문

및 외문(外門)을 유문(留門)해야 합니다 개문 표신(開門標信)과 돈화문(敦化門) 부험(符驗) 및 밀갑(密匣)을

출급하소서rdquo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만기요람』 군정편 2(軍政編二) 훈련도감(訓鍊都監) 궁장 밖의 순라(宮墻外巡邏)

인조 6년 무진(1628년)에 규례를 정하였다 초경 남영(南營)의 초관(哨官)이 입직한 마병 20명을 거느리고

두 바퀴를 순행한다 3경 광지영의 초관이 입직한 군졸 20명을 거느리고 두 바퀴를 순행한다 또 별순라(別

巡邏)가 있는데 영종 9년 계축(1733년)에 규례를 정하였다 장교 1명과 졸병 5명이 초경부터 날이 샐 때까

지 순행하며 집춘문 북쪽ㆍ상수문(上水門) 서쪽에서 공북문까지에 이르는데 별기대 1명과 광지영(廣智營)

입직군 5명 또 따로 기패관 1명과 별무사 1명을 정하여 경을 나누어 도순(都巡) 감독한다 장관이 또 감찰

한다 초일과 종일에는 북영에 입직한 파총이 중일에는 당상장관이 언제나 파루(罷漏)친 뒤에 모두 입직군

5명을 거느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구역내를 감찰한다

『영조실록』 3권 1년(1725 을사 청 옹정(雍正) 3년) 2월 20일(무자) 5번째기사

주강에서 민진원이 노은동 서원의 면세를 최진한이 금군의 수직을 논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중략- 무신(武臣) 최진한(崔鎭漢)이 진달하기를 ldquo궁성(宮城) 안에 입직(入

直)하는 군병(軍兵) 수직(守直)하는 사환(使喚) 이외에는 군병을 단속하고 훈국(訓局)의 2백 명을 금호문(金

虎門)과 홍화문(弘化門) 두 문에 나누어 수직하며 금위(禁衛) 1백 명을 건양문(建陽門)에 입직하고 금려(禁

旅) 1백 명은 인정전(仁政殿) 대정(大庭) 아래에 입직하게 해야 합니다 훈군(訓軍)은 안에서 입직함이 중하

니 매달 세 차례씩 해영(該營)에서 습진(習陣)할 때 내어 쓰지 말며 금위군 및 금려는 해영에서 습진할 때

표신(標信)을 제거하고 내어 써 매달 세 차례 신지(信地)인 금위를 공허하게 만들며 향군(鄕軍)은 생소(生

疎)하니 습진에 내어 쓰는 것도 한 방도일 듯합니다 그러나 금려에 이르러서는 군법(軍法)에 익숙함이 훈졸

(訓卒)에게 뒤지지 않으며 대정(大庭)에 직숙하는 것이 훈졸(訓卒)의 직소(直所)에 비할 것이 아닌데도 매번

내어 써 숙위(宿衛)를 중히 여기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신(將臣) 신여철(申汝哲)이 죽을 때 소신

(小臣)이 가서 보았더니 신여철이 말하기를 lsquo입직하는 금군은 내어 쓰는 것이 부당할 듯하여 내가 계달(啓

達)하여 변통하려고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으니 젊은 무변(武弁)은 이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rsquo라고 하였습니

다rdquo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효종(孝宗) 때 비로소 금군(禁軍)을 설치하였으니 뜻이 있는 바가 있는 것이

다 금위군(禁衛軍)을 내어 쓰지 않을 수 없으나 금군은 습진(習陣)할 때 내어 쓰지 말라는 뜻을 병조로 하

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rdquo 하니 병조에서 청하기를 ldquo최진한의 말에 따라 시행하소서rdquo 하니 그대로 따랐

다 또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후략---

『영조실록』 10권 2년(1726 병오 청 옹정(雍正) 4년) 11월 2일(경인) 2번째기사

임금이 대조전(大造殿)인 곧 창덕궁으로 환어(還御)하였다 병조에서 홍화문(弘化門)은 그전처럼 도로 닫아버

리고 돈화문(敦化門)의 표신(標信)에 따라 여닫되 건양문(建陽門)에는 입직(入直)하는 군사를 차출하고 동룡

문(銅龍門)도 파수(把守)를 해야 하는 뜻으로 아뢰니 윤허하였다

『정조실록』 4권 1년(1777 정유 청 건륭(乾隆) 42년) 11월 17일(기묘) 1번째기사

하교하기를 ldquo숙위 대장(宿衛大將)이 이미 대궐 안 각 곳의 숙위를 도맡게 되었으니 그 관할(管轄)하는 방도

에 있어서 마땅히 서로 유지(維持)해 가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안으로는 위장(衛將)middot부장(部將)middot금군 도감(禁

軍都監)의 군병(軍兵)middot각 문의 수문장(守門將)middot국별장(局別將)과 밖으로는 궁궐 담장 밖에 삼영(三營)에서 입

직(入直)한 순라(巡邏)들이 날마다 사고 유무를 숙위 대장에게 신보(申報)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군사의 체

대(替代)도 또한 마땅히 통괄(統括)하게 될 것이니 위장middot부장middot내삼청(內三廳)middot금군(禁軍)과 금호문(金虎門)middot홍

화문(弘化門)middot건양문(建陽門) 장관(將官)의 군병(軍兵) 및 국별장(局別將)middot유청군(有廳軍) 등은 3일 마다 체대

한 단자(單子)를 숙위소(宿衛所)에 내야 하고 숙위소에서는 해방(該房)에 보내어 봉입(捧入)하게 해야 한다

또 도총부(都摠府)와 병조는 소속 관사들과는 다름이 있어서 또한 서로가 통지(通知)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

이니 순검(巡檢)하는 등 일로 숙위소에서 거행하는 일과 관계되는 것 같은 것은 숙위 대장에게 문이(文移)

해야 함을 현저한 격식(格式)으로 삼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정조실록』 17권 8년(1784 갑진 청 건륭(乾隆) 49년) 5월 22일(병자) 2번째기사

병조에서 감문 절목(監門節目)을 올렸다 이 날에 내사복(內司僕)의 소동문(小東門)이 저절로 열려 병조

에서 아뢰니 하교하기를 ldquo문고리는 넓고 자물쇠는 작은 소치이지 다른 간사한 정(情)은 없을 듯하나 일이

숙위(宿衛)의 분군(分軍)하는 것이 효잡(淆雜)스런 것과 관계되니 특별히 병조 판서를 추고하라rdquo 하고 병

조에 명하여 절목을 만들라고 명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ldquo옛날에는 좌직(坐直)3719) 하는 승지가 합문에서 조석으로 문안하였기 때문에 저녁 문안 후 자물쇠를

청하여 문을 닫고 아침 문안 때 열쇠를 청하여 문을 열었다 근래에는 이 규정이 없어졌으니 마땅히 즉시

참조하여 획일적인 규식을 정하라 지금부터는 열쇠 내주는 것을 좌직하는 승지가 전담하여 보관하고 자물

쇠를 연 후에는 해방 승지(該房承旨)가 주관하여 관장하되 마땅히 수리해야 하는데도 수리하지 않으면 해당

승지를 의금부에 내려서 중히 감죄하고 주서(注書)와 총랑(摠郞)middot선전관(宣傳官)middot사약(司鑰) 가운데서 해당

문을 관리하는 사람 역시 유사(攸司)로 하여금 감단(勘斷)하라

병조에서 순검하면서 자물쇠를 확인하는 것은 본디 직장(職掌)이니 건양문(建陽門) 동서를 경계로 하여

수문장(守門將)과 위장(衛將)과 함께 같은 죄를 주고 만일 파손된 곳이 있으면 즉시 와서 고해야 하며 색승

지(色承旨)가 수리하는 한 조항은 신시(申時) 이전은 해방(該房)에서 관장하고 신시 이후에는 좌직(坐直) 하

위(下位)가 관장하는 것으로 정식(定式)하여 신명하라 이후로 성문middot궐문의 자물쇠는 호조 낭관이 감독해 만

들어서 판서가 구검(句檢)하는 것을 일체 절목으로 만들어 계하하라 이렇게 정식하면 도총부 낭관이 돈화

문(敦化門)을 관리하는 것은 아주 의미가 없으니 선전관이 돈화문을 관리하고 도총부 낭관은 통화문(通化

門)과 선인문(宣仁門)을 관리하라rdquo

하였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 1 각문(各門)의 개폐(開閉)는 옛날 예대로 승정원이 주관한다 자물쇠를 잠근 후

에 열쇠는 좌직(坐直) 하위(下位)가 친히 받아서 사(司)에 보관한다 그 출납은 자물쇠를 연후에 자물쇠와 열

쇠를 해방 승지가 친히 받아서 보관하고 신시(申時) 이후에는 상직(上直) 하위 승지에게 전해 보관하게 한

다 1 각문의 관할은 건양문(建陽門) 동서를 경계로 한다 서쪽은 서middot남 양소(兩所)에서 분장하는데 병조의

담당이다 동쪽은 동middot북 양소에서 분장하는데 도총부 담당이다 수문장은 각기 그 부근에 가는데 소남문(小

南門)은 단봉문(丹鳳門) 수문장이 겸관(兼官)하고 소동문(小東門)은 선인문(宣仁門) 수문장이 겸관하는데 만

일 섬가지 않은 일이 있으면 엄법으로 감처(勘處)한다 1 각문의 자물쇠에 만일 파손되어 고쳐야 할 곳이

있으면 해당 문의 수문장이 해소(該所) 부장(部將)을 안동(眼同)하여 각각 그 자내(字內)에 가서 고하면 병

조나 혹은 도총부의 낭청이 친히 가서 살피어 승정원에 고하는데 고치는 절차는 신시 이전에는 해방에서

관장하고 신시 이후에는 좌직 승지가 관장한다 1 각문을 개폐할 때 감약(監鑰)은 돈화문(敦化門) 요금문

(曜金門) 단봉문(丹鳳門)은 선전관이 금호문(金虎門)은 주서(注書)가 홍화문(弘化門) 선인문(宣仁門) 통화

문(通化門)은 도총부 낭청이 담당하되 각 해당 문의 수문장 및 담당 사약(司鑰)이 안동하여 거행한다 1 병

조 낭청 및 도총부 낭청이 야순(夜巡)할 때 각문의 자물쇠는 그 내자(字內)에 따라서 해당 수문장을 안동하

여 살피되 소동문(小東門) 소남문(小南門)도 일체로 조검(昭檢)한다 1 각처 수문(水門)의 중대한 열쇠를

해소에 보관하는 것은 일이 매우 미안하니 남수각(南水閣) 수문(水門)은 돈화문 수문장이 겸관하고 북수각

(北水閣) 수문은 요금문 수문장이 겸관하여 파손된 곳의 수리와 조검(照檢) 때살피는 등의 절차는 다른 문

의 예에 의해서 시행한다 1 성문과 대궐문을 잠그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니 지금을 시작으로 해서 자물쇠

를 수리할 때에는 호조 낭청이 몸소 감조(監造)하고 판서가 구검(句檢)한다 1 각문을 나누어 담당시키는

것이 비록 건양문 동서를 경계로 삼았으나 병조는 이미 궐내 각처를 관할하는 처지이니 경계를 정하였다 하

여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며 건양문 동쪽 역시 총괄하여 검찰해야 한다】

『정조실록』 27권 13년(1789 기유 청 건륭(乾隆) 54년) 1월 19일(병자) 3번째기사

승정원이 병조 당상관의 당직 교체 일로 인하여 금호문(金虎門) 출입 표신을 내줄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ldquo대궐 안의 각문을 유문(留門)하였을 때 조정 신료가 드나들지 못할 문은 원래 없는 것이다 체통이 막중한

대신과 대신(臺臣)의 체통이 근래 궁인(宮人)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하는 요금(曜金)middot통화(通化) 두 문도 구

애되지 않고 출입하였던 사실을 《당후일기(堂后日記)》를 보면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몇

해 전부터 막중한 대궐문을 마치 각 부서에서 나누어 맡은 것처럼 돈화문(敦化門)은 대간에 금호문은 조신

(朝臣)에 단봉문(丹鳳門)은 중관(中官)에 선인문(宣仁門)은 사복시(司僕寺)에 각각 소속되어 마치 서로 어겨

서는 안 될 무슨 정해진 한계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유문하고 있을 때라도 열려 있는 문을

놔두고서 유문 표신을 따로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종전에도 누차 신칙했지만 끝내 고칠 줄을 모르

니 당해 승지를 파직하고 앞으로는 유문할 때 뿐만 아니라 아침과 낮에 공사로 들어올 때에도 따로 출입하

는 문을 정하지 말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순종실록』 2권 1년(1908 무신 대한 융희(隆熙) 2년) 4월 1일(양력) 4번째기사

포달(布達) 제2호 〈창덕궁 정문을 개폐 통행을 제한하는 규정〔昌德宮正門開閉通行定制限〕〉을 공포하였

다 문로

- 왕비 책봉 의식과 문로

『성종실록』 123권 11년(1480 경자 명 성화(成化) 16년) 11월 8일(갑신) 1번째기사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니 백관(百官)이 사배(四拜)를 마쳤다 임금이 왕비를 책봉(冊封)하고 교명

(敎命)middot책보(冊寶)middot명복(命服)을 정사(正使)인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부사(副使)인 호조 판서(戶曹判

書) 이철견(李鐵堅)에게 주어 인정문(仁政門)을 경유하니 고취(鼓吹)가 앞에서 인도하는데 다음은 교명(敎

命)이고 다음은 옥책(玉冊)이고 다음은 보(寶)이고 다음은 의장(儀仗)이었다 사자(使者)가 수행하여 선정문

(宣政門) 밖 막차(幕次)에 이르니 왕비가 선정전(宣政殿) 월랑(月廊)의 배위(拜位)에 나아가 교명(敎命)middot책보

(冊寶)middot명복(命服)을 받았는데 그 교명에 이르기를 -후략-

- 선정전의 정문 돈례문

『명종실록』 27권 16년(1561 신유 명 가정(嘉靖) 40년) 4월 8일(정유) 1번째기사

밤에 돈례문(敦禮門)【선정전(宣政殿)의 어문(御門)이다】 및 어둑(御纛)에 벼락이 쳤다【내일 상참(常參)이

있어 어문(御門)에 내다 세워 놓았는데 문선(門扇)과 둑간(纛竿)이 벼락에 맞아 부러졌다】

- 발인시 왕과 재궁의 문로

『연산군일기』 3권 1년(1495 을묘 명 홍치(弘治) 8년) 2월 8일(임술) 4번째기사

빈전 도감(殯殿都監)이 아뢰기를 ldquo재궁(梓宮)이 동가(動駕)할 적에 전하께서 돈화문(敦化門) 안에서 지송(祗

送)하셔야 하는데 전하께서 만약 재궁을 수행하여 빈청(賓廳) 앞을 경유하시어 진선문(進善門) 밖으로 나가

신다면 잡인(雜人)이 요란스러울 뿐더러 길도 협착하니 전하께서 도보(徒步)하시기도 역시 어렵습니다 만

약 권도(權道)를 따라 먼저 막차(幕次)에 나아가시기로 하면 전하께서 조전(祖奠)을 행하신 다음에 소교(小

轎)를 타시고 인화문(仁和門)을 벗어나 인정전(仁政殿) 앞을 경유하여 먼저 돈화문 안으로 나가시면 되는데

돈화문 안도 역시 협착하니 마땅히 막차(幕次)를 진선문(進善門) 동편에 마련하고 서쪽을 향하여 지송(祗送)

하셔야 옳겠습니다 또 우제(虞祭)를 행한 뒤에 대비(大妃)께서 진향(進香)하시는 것은 예문이나 전례에 없습

니다 이극돈(李克墩)middot성현(成俔) 등의 뜻은 하현궁(下玄宮)하고 흙으로 절반쯤 메우고 제주(題主)하고 한낮

에 우제(虞祭)를 지내므로 절차가 매우 많고 반혼(返魂)이 이를지 늦을지 그것도 또한 알 수 없으니 그날

우제 뒤에 대비께서 진향(進香)하기는 진실로 어려울 것인데 만약 대비의 망극하신 정을 따르기로 한다면

반혼한 뒤에 대비께서 혼전(魂殿)에 나아가 조석 상식할 때를 기다려서 나와 보시는 것이 어떨까 하였고 윤

효손(尹孝孫)의 뜻에는 이런 것이 예문에 실리지 않았으니 우제 후에 대비의 진향은 수시로 행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rdquo 하였다

- 세자 책봉후 경유해야 할 문로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 청 순치(順治) 2년) 9월 19일(정묘) 2번째기사

예조가 아뢰기를 ldquo세자가 책봉을 받은 다음 건양문(建陽門)을 경유하여 곧장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가서

는 안 되고 홍화문(弘化門) 앞 바른 길을 경유하되 여련(輿輦)과 의장(儀仗)을 갖추어 성 안 사서(士庶)들로

하여금 충분히 보게 한 다음에 돈화문(敦化門)을【 곧 창덕궁의 정문(正門)이다】 거쳐 들어가는 것이 타당

할 듯합니다rdquo 하니 답하기를 ldquo궐내(闕內)로부터 직접 동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rdquo 하였다 책

례 도감이 또 이 일로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 발인시 왕의 문로

『현종실록』 즉위년(1659 기해 청 순치(順治) 16년) 10월 28일(을묘) 1번째기사

대행 대왕의 재궁(梓宮)을 발인(發靷)하였다 자시(子時)에 견전례(遣奠禮)를 행하였는데 인시(寅時)에

내전에서 약방에 죽력(竹瀝)과 생강즙을 구해 들이도록 하였다 이 때 좌상 심지원이 총호사로서 인화문(仁

和門)에 있었는데 중사(中使)를 통해 자전이 너무 슬퍼한 나머지 기절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아뢰기를

ldquo발인할 시각이 이미 박두했는데 삼가 듣건대 자전께서 편찮으시다 하니 잠시 시각을 물리소서rdquo 하니 상

이 따랐다

얼마 뒤에 지원이 또 아뢰기를 ldquo자전께서 이와 같으니 교외에 거동하시는 일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됩니

다 뭇 의논도 모두 전하께서 궐문 밖에서 배사(拜辭)함이 마땅하다고들 합니다 모름지기 빨리 하교하셔야

만 일을 분부하고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rdquo 하니 상이 이르기를 ldquo자전의 기후(氣候)가 조금 차도가 있는

듯하니 발인하는 시각은 그대로 하라rdquo 하였다

파루(罷漏) 후에 재궁(梓宮)을 받들어 대여(大轝)에 올리고 이어 출발하였다 상이 소여(小轝)를 타고 인

화문(仁和門)으로 나왔는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인정문(仁政門) 밖에 이르러 상이 여(轝)에서 내려 연(輦)

을 탔는데 백관은 모두 걸어서 수행하였다 흥인문(興仁門)을 나와 동관왕묘(東關王廟) 뒤쪽 노제(路祭) 지

내는 곳에 이르러 대여를 악차(幄次)에 봉안하였는데 상도 연에서 내려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의정부와 충

훈부가 노제를 끝마치자 대여가 출발하였다 상이 막차에서 나와 봉사위(奉辭位)로 나아가 동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통곡하며 가슴을 쳤다 대여가 멀어지자 상이 환궁하였다

- 즉위식 의례 설행 문로

『숙종실록』 1권 즉위년(1674 갑인 청 강희(康熙) 13년) 8월 23일(갑인) 1번째기사

왕세자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중략- 이날 성복(成服)을 마치고 왕세자가 관면(冠冕)과 길

복(吉服)을 갖추고 규(圭)를 쥐고 여차(廬次)40) 로부터 걸어가면서 곡(哭)하였다 내시(內侍) 2인이 좌우(左

右)에 끼고 보호하여 선정전(宣政殿) 동쪽 뜰에 나아가 빈전(殯殿)을 향하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섬돌

에 올라가 전내(殿內)의 향안(香案) 앞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는 내려와 그전 자리로 돌아와서 또 네 번

절하고 동쪽 행랑의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왕세자가 선정문(宣政門)으로부터 걸어 나와서 연영

문(延英門)을 따라 가서 숙장문(肅章門)을 나와서 인정문(仁政門)에 이르니 승지와 사관(史官)이 따라 나갔

다 왕세자가 서쪽을 향하여 어좌(御座) 앞에 서서 차마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슬피 울기를 그

치지 아니하였다 승지와 예조 판서가 서로 잇달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를 권하였다 삼공(三公)이 도승지

와 더불어 나아가 왕세자를 부축하면서 번갈아 극진히 말하였다 왕세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우니 이 날

뜰에 있던 백관(百官)과 군병(軍兵)으로서 목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세자

가 어좌(御座)에 오르니 백관들이 사배(四拜)하고 의식대로 산호(山呼)하였다 예를 마치자 사왕(嗣王)이 인

정문(仁政門)으로부터 인정전(仁政殿)에 올라가 인화문(仁和門)으로 들어와서 여차(廬次)로 돌아왔는데 우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 즉위식 의례 설행 문로

『영조실록』 1권 즉위년(1724 갑진 청 옹정(雍正) 2년) 8월 30일(경자) 1번째기사

경종 대왕(景宗大王) 4년【청(淸)나라 옹정(雍正) 2년이다】 8월 을미(乙未)【25일이다】에 경종 대왕이

창경궁(昌慶宮)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昇遐)하였다 그 후 6일째 되는 날인 경자6) 오시(午時)에 왕세제

(王世弟)가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원상(院相)middot승지(承旨)middot사관(史官)은 조복

(朝服) 차림으로 돈례문(敦禮門) 밖 서정(西庭)에 동쪽을 향하여 앉고 홍문관(弘文館)은 승정원(承政院)의 다

음에 앉고 시강원(侍講院)은 동정(東庭)에 서쪽을 향하여 앉고 익위사(翊衛司)는 시강원의 다음에 앉고 병

조(兵曹)middot도총부(都摠府)는 융복(戎服) 차림으로 동쪽middot서쪽에 앉아서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왕세제(王世弟)가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冕服) 차림으로 여차(廬次)에서 나오니 좌통례(左通禮)가 왕세제를 인도하여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빈전(殯殿)에 나아가 서계(西階)를 거쳐 욕위(褥位)에 올라갔다

찬의(贊儀)가 큰 소리로 lsquo배(拜) 궤(跪)rsquo 하고 선창(先唱)하니 좌통례(左通禮)가 낮은 소리로 lsquo궤(跪)하

소서rsquo 하고 고하기를 ldquo사왕(嗣王)은 보위(寶位)를 받으소서rdquo 하였다 상향례(上香禮)를 마치고 왕세제(王世

弟)가 내려와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막차에서 나와 걸어서 돈례문(敦禮門)의 동쪽 협문(夾門)

을 지나 동계(東階)로 내려가 연영문(延英門)을 거쳐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꺾어 숙장문(肅章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나가서 북쪽으로 꺾어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 밖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 그 곳 한복판

에 어좌(御座)를 설치하였는데 왕세제가 어좌에 올라가니 백관(百官)이 네 번 절하고 lsquo천세(千歲)rsquo 하고 호

창(呼唱)하였다

임금이 어좌에서 내려와 인정문(仁政門)의 동쪽 협문(夾門)으로 들어가 인정전(仁政殿) 정로(正路)를 거

쳐 인정전에 올라갔다 임금이 여차(廬次)로 돌아와 면복(冕服)을 벗고 최복(衰服)을 다시 입었다 이보다 4

일 전에 예조(禮曹)에서 사위(嗣位)하는 절목(節目)을 올렸는데 왕세제가 영지(令旨)를 내려 돌려주게 하였

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하루 세 번씩 도로 올렸으며 승정원(承政院)middot사헌부(司憲府)middot

사간원(司諫院)middot홍문관(弘文館)에서도 번갈아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성복(成服)하

는 날에 이르러 외부 의식이 이미 마련된 다음에 원상(院相) 이광좌(李光佐)가 여차(廬次) 앞에 이르러 면복

(冕服)으로 갈아입기를 간청하였으나 왕세제가 눈물을 흘리며 점침(苫枕)에 엎드려서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

였다 이광좌가 왕대비전(王大妃殿)과 왕비전(王妃殿)의 승전색(承傳色)을 불러 구전(口傳)으로 내전(內殿)에

서 나아가도록 계청(啓請)하니 왕대비전과 왕비전에서 언문 교지(諺文敎旨)를 내려 나아가도록 권유하였다

그제서야 왕세제가 남여(籃輿)를 물리치고 걸어서 어좌(御座) 앞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울부짖으며 어좌

에 오르지 않고 말하기를 ldquo내가 옛날에 여기에서 영고(寧考)를 모셨었는데 지금 무슨 마음으로 어좌에 오를

수 있겠는가rdquo 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이광좌 등이 누누이 간청하니 한참 후에 등극(登極)

하였다 정시(正時)가 되니 예조(禮曹)에서 비로소 사시(巳時)가 되었다고 계하(啓下)하였다 오시(午時)에

이르러 마침내 즉위(卽位)하고 혜순 자경 왕대비(惠順自敬王大妃) 김씨(金氏)를 높여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왕비(王妃) 어씨(魚氏)를 왕대비(王大妃)로 빈(嬪) 서씨(徐氏)를 왕비(王妃)로 삼고 마침내 인정문(仁政門)에

서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였는데 이르기를 ldquo왕은 말하노라 -후략-

- 대보단에 거둥하여 망위례를 거행할 때의 문로

『영조실록』 61권 21년(1745 을축 청 건륭(乾隆) 10년) 3월 9일(신사) 2번째기사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망위례(望位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영화당

(映花堂)에서 승여(乘輿)를 타고 나왔는데 산선(繖扇)과 시위(侍衛)를 평상시의 의례대로 하였다 조종문(朝

宗門) 밖에 이르러 승여에서 내려 막차(幕次)로 들어 갔다가 얼마 후 다시 나와 승여에서 내려 조종문으로

들어가면서 명하기를 ldquo오위장(五衛將) 이하 당하(堂下) 시위는 모두 삼문(三門) 밖에서 뒤떨어지도록 하라rdquo

하였다 중문(中門) 밖에 이르러 임금이 규(圭)를 잡고 동문(東門)을 거쳐 판위(版位)로 들어가 사배례(四拜

禮)를 행하고 동유문(東壝門)으로 들어가 동폐(東陛)를 거쳐 봉심(奉審)하고 다시 판위에 돌아와 희생(犧牲)

을 친히 살폈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황단(皇壇)에 성우(騂牛)를 쓰는 것이 무슨 뜻을 취한 것인가rdquo 하니 승지 오수채(吳

遂采)가 말하기를 ldquo황조(皇朝)에서 화덕(火德)을 숭상했기 때문에 성우를 쓴 것입니다rdquo 하였다 임금이 향

악차(香幄次)에 나아가 대축(大祝)에게 명하여 향축궤(香祝櫃)를 내오게 하고 친히 살폈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향악차가 만약 눈과 비를 맞으면 습기에 젖기가 쉬우니 지금 이후에는 향축을 신실(神室) 안으로 봉안해야

한다rdquo 하고 인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기를 명하였다

- 선정전 어진을 영희전으로 이봉할 때의 문로

『영조실록』 67권 24년(1748 무진 청 건륭(乾隆) 13년) 2월 25일(기묘) 4번째기사

선정전(宣政殿)의 영정(影幀)을 영희전(永禧殿)으로 이안(移安)할 때 전하가 수가(隨駕)하여 출궁(出宮)middot환궁

(還宮)하는 의식은 이러하다【선정전 망전례(望殿禮)와 봉심(奉審) 및 영희전 망전례와 봉심에 대한 의주(儀

註)도 아울러 붙인다】 기일에 앞서 액정서(掖庭署)에서 선정전 동쪽 뜰 아래와 돈례문(敦禮門) 밖 길 동쪽

에다 서쪽을 향하여 소차(小次)를 설치한다 왕세자의 위차는 연영문(延英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하의 망전례(望殿禮) 위차는 전정(殿庭)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자의 위차는

전하의 판위 뒤에 남쪽 가까운 데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의(典儀)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위차를 선

정문 밖에 설치하는데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하고 모두 매 등급마다 위차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쪽

을 향하게 한다 또 전하의 소차를 영희전 대문 안에 설치하고 망전례의 위차는 재전(齋殿) 정문 안에다 동

쪽에 가깝게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전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위차를 재전의 문밖에 설치하는데 동서

(東西)로 나누어 위차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쪽을 향하게 한다 또 영정을 임시로 봉안할 대차(大次)를 영희

전 신문(神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는데 악차(幄次)는 대차 안에 설치한다【신탑(神榻)을

설치한다】 전하의 입위(立位)는 대차 앞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왕세자가 지영(祗迎)하는 위

차는 흥화문(興化門) 밖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그날 초엄(初嚴)을 치면 병조에서 제위(諸衛)

를 정돈하여 노부(鹵簿)와 의장(儀仗)을 건명문(建明門) 밖에서 의주(儀註)대로 진설하며 장악원(掌樂院)에서

경현당(景賢堂) 뜰 남쪽 가까이에 북쪽을 향하여 헌현(軒懸)한다【출궁(出宮)할 때에는 진설만 하고 연주하

지않으며 환궁(還宮)할 때는 음악을 연주한다】 종친과 문무 백관은 모두 조방(朝房)에 모여서 각기 흑단령

(黑團領)을 입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은 연(輦)을 숭현문(崇賢門) 밖에다 대고 여(輿)를 합문(閤門) 밖에다

댄다 이엄(二嚴)을 치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모두 흥화문(興化門) 밖에 있는 시립위(侍立位)로 나아간다 왕

세자가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서 여(輿)를 타고 흥화문 밖으로 나아가 위차로 들어가면

여러 호위하는 관원들은 각기 해당되는 옷을 입고 모두 합문 밖으로 나아가 기다린다 좌통례가 합문 밖으

로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이 되었음을 계청한다 삼엄(三嚴)을 쳐서 북소리가 그치면 내외(內外)의 문을

열며 좌통례가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뢴다 전하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나가며 산선(산

扇)middot시위(侍衛)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좌통례가 앞에서 인도하고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이 보(寶)를 받들고

앞서서 간다【연(輦)에 타기를 기다려 보(寶)를 말에다 싣는다】 어가(御駕)가 숭현문 밖에 이르러 좌통례

가 꿇어앉아 여(輿)에서 내려 연(輦)을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려 연을 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한다 어가(御駕)가 움직이면【고취(鼓吹)는 진설만하고 연주하지 않는다】 좌통례middot우통례

가 앞에서 인도하고 찬의(贊儀) 2인이 통례의 앞에 있는데 장위(仗衛)와 도종(導從)은 보통의 의례와 같다

어가가 흥화문 밖에 이르면 왕세자가 위차에서 나와 몸을 굽히는데 지나가고 나면 평신하고 이어 연(輦)을

타고 어가를 따른다 어가가 시신(侍臣)들의 상마소(上馬所)에 이르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어가가 조금 머물

러 시신들로 하여금 말을 타게 할 것을 계청하고 뒤이어 시신들에게 말을 타라고 외친다 찬의가 전창(傳唱)

하여 시신들이 모두 말을 타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한다 어가가 움직이면 종친과 문무 백

관이 몸을 굽혀 지영(祗迎)하고 왕세자가 이를 적에도 몸을 굽히는데 지나가고 나면 평신하며 순차에 따라

시위한다 어가가 창덕궁 돈화문 밖에 있는 시신의 하마소(下馬所)에 이르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어가가 조금

머물러 시신들로 하여금 말에서 내리게 할 것을 계청하는데 시위는 보통의 의례와 같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하면 돈화문 동협(東夾)을 거쳐 들어간다 어가가 숙장문(肅章門) 밖 강련소(降輦所)에 이

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연에서 내려 여를 탄다 좌통례

가 앞에서 인도하여 선정문 밖 강여소(降輿所)에 이르러【시신은 이에 물러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

(輿)에서 내릴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린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돈례문(敦禮門) 밖에

이르러 소차(小次)로 들어가면【돈화문에서 돈례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협(東夾)을 경유하는데 이 뒤도 이

와 같다】 산선과 시위는 선정문 밖에 정지한다 왕세자가 창덕궁 돈화문 밖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려 여

(輿)를 타고 서협(西夾)을 거쳐 들어가는데 연영문 밖에 이르러 여에서 내려 소차로 들어간다【돈화문에서

돈례문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서협(西夾)을 경유한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해엄(解嚴)할 것을 계청하면 병조

에서 전교(傳敎)를 받들어 의장(儀仗)을 푼다 인의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인도하는데 그대로 흑단령을 갖추

고 선정문 밖 위차로 들어간다 왕세자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위차로 들어가면 좌통례가 소차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소차에서 나올 것을 계청한다 전하가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나오면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망전례(望殿禮)의 위차에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선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할 것을 아뢰면 전하가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한 다음 일어나 평신하고 왕세자도

몸을 굽히고 네 번 절하고 일어나 평신하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도 같다【찬의도 같다】 끝나고 나면 인의

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나누어 인도하여 나온다 전하가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왕세자도 따라 들어가는데

영정을 봉심할 때에는 승지middot사관middot궁관과 도감 당상 각 1원(員)이 시입(侍入)한다【통례와 상례는 계단 아래

에 정지한다】 봉심을 마치고 나면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도로 소차로 들어가고 왕세자도 따라

나와서 소차로 들어간다 영정을 장축(粧軸)할 때 전하가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승지middot사관과 도감의 당상(堂

上)middot도청(都廳)이 함께 흑단령 차림으로 시입(侍入)하는데 장축을 봉심하고 표제(標題)를 첩부(貼付)하고서

끝낸다 첨배(瞻拜)할 때에는 도감 당상과 종친middot의빈middot문무관 정2품 이상이 함께 흑단령 차림으로 선정문 밖

의 위차로 들어가며 전하와 왕세자도 이어서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전정(殿庭)의 판위(版位)로 나아가는

데 의주(儀註)대로 행례(行禮)한다【첨배의(瞻拜儀)에 기재되어있다】 이를 끝마치고 나면 전하는 소차로

들어가고 왕세자는 그날로 환궁하는데 의주대로 한다【왕세자 환궁의에 기재되어 있다】 다음날 동가(動

駕)를 고하는 제사를 지낼 때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이 먼저 위차로 나아가면 전하가 면복(冕服)을 갖추고

판위로 들어가 의주대로 행례(行禮)한다【동가(動駕)를 고하는 제사를 친행하는 의주(儀註)에 기재되어 있

다】 이를 끝마치고 나서 영정 1본을 안의 진전(眞殿)에 봉안한 뒤에 전하가 도로 소차로 들어간다 선정전

의 영정을 영희전에 봉안할 때에는 초엄(初嚴)이 치면 병조에서 장위(仗衛)middot노부(鹵簿)를 진선문(進善門) 밖

에 진설하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은 연(輦)을 진선문 밖에다 대고 여(輿)를 인정전(仁政殿) 동쪽 뜰 아래에

다 댄다 이엄(二嚴)을 치면 종친과 문무 백관이 각기 조복(朝服)을 입고【4품 이상은 조복을 입고 5품이하

는 흑단령을 입는다】 돈화문 밖의 시립위(侍立位)로 나아가며 여러 호위하는 관원들도 함께 인화문(仁和

門) 밖으로 나아가 기다리는데 좌통례가 소차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임을 계청한다 삼엄(三嚴)

을 쳐서 북소리가 그치면 내외의 문을 여는데 좌통례가 꿇어앉아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뢰면 전하가 면복을

갖추고 나온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

가 그 규를 잡는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전내(殿內)로 들어가면 대축(大祝)이 영정궤(影幀櫃)

를 신여(神輿)에 봉안하고서 인화문을 경유하여 나온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걸어서 신여를 따

라 인정전 월대(月臺) 위에 이르러 대축이 영정을 신련(神輦)에 봉안하고【고취(鼓吹)를 울린다】 인정문

(仁政門)을 경유하여 나온다 좌통례middot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인정전 동쪽 뜰 밑에 있는 승여소(乘輿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圭)를 놓고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그 규를

받는다 좌통례가 여를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를 타며 인정문 동협(東夾)을 경유하여 진선문 동협 밖

승련소(乘輦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려 연을 탈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려 연을

탄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가 규를 잡

는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출발할 것을 계청하고 산선(繖扇)middot시위(侍衛)는 보통의 의례와 같게 한다 대가(大

駕)가 돈화문 동협(東夾)을 거쳐 나아가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은 신련(神輦)이 이르면 몸을 굽혔다가 지나

가면 평신하고 대가가 이르면 몸을 굽혔다가 지나가면 평신한 다음 순차에 따라 시위한다 대가가 영희전

(永禧殿) 대문 밖 강련소(降輦所)에 이르러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를 놓고

근시가 꿇어앉아 규를 받는다 -영희전 부분 후략-

- 대보단에 향을 친히 전하는 문로

『영조실록』 26년 3월 5일 (무신) 원본1054책탈초본57책(56) 1750년 乾隆(淸高宗) 15

乾隆十五年庚午三月初五日辰時 上具冕服 出御映花堂前庭親傳香繖扇侍衛如常儀行都

承旨南泰良 左承旨李普昱 右承旨洪益三 左副承旨李益輔 右副承旨趙載敏 記事官南鶴老middot崔

台衡middot李宜哲middot金聖佑入侍益三奉進香祝上塡祝着押如禮 仍展覽祝文而敎曰 此乃常用祝文

乎 益三曰 然矣上曰 都承旨進來泰良進伏上曰 祝文中神考毅廟等字 似皆上行書之

而今皆不上之矣泰良曰 有太祖第一位 故壓尊而不得上矣上曰 永禧殿祝文亦如此例乎 頃

日親享時 魚錫胤爲大祝 必知之矣仍命錫胤進來下詢錫胤曰 臣於倉卒中 未能詳細記得

矣上祗傳香祝益三跪奉以出 安于香亭上以步輦 由集成門入齋室 少頃 由朝宗門詣版位

行望位禮 由冽泉升壇奉審 仍省器 又於冽泉門外省牲訖 還入齋室諸臣遂退出

- 대행왕비의 발인시 왕의 문로

『영조실록』 89권 33년(1757 정축 청 건륭(乾隆) 22년) 6월 3일(계해) 1번째기사

대행 왕비의 발인(發靷)에 임금이 단양문(端陽門) 밖에 나아가 대여(大轝)를 바라보며 곡(哭)하고 인해서 대

여를 따라 숙장문(肅章門) 밖에 나아가 두 번 절한 다음 곡하면서 전송하고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ldquo적체(敵體)의 의리는 매우 중대한 것이다 지금 내가 최복(衰服)을 입었으므로 대궐 안에서 곡하

며 전송하였지만 평상시의 경우는 대궐 밖에서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뜻을 《상례보편(喪禮補編)》에다

기재하도록 하고 또 정축년에 처음으로 시행한 까닭을 주석(註釋)으로 달도록 하라rdquo 하였다

- 선원전과 경복전 봉심 문로

『승정원일기』 영조 36년 3월 17일(임술) 원본1179책탈초본65책 (1720) 1760년 乾隆

(淸高宗) 25년

李永暉 以戶曹言啓曰 傳敎內景福殿與月郞 及眞殿及報春門外齋室 戶工曹堂上 每於季春奉審 可以修補者修補

墻垣頹圮處 椽木腐朽處 待守直中官所報 該曹草記 郞廳監蕫 卽爲修補 而事係正殿 則堂郞眼同擧行 於義本宮

亦依此例擧行事 命下矣參議臣金選慶 與正郞鄭一祥 工曹參判臣朴相德 正郞臣金鍾卨 進詣奉審 則於義本宮 姑

無修改處 而景福殿西邊芳春門一隻下莫只破傷 憶昔樓北邊椽木一箇 要家南邊椽木三箇 椽含一箇 平交臺一箇腐傷

蓋瓦脫落 西月廊椽木一箇腐傷 窓差備要家椽木一箇 永慕堂南行閣抹樓二間 同歸機一 廳板一立腐傷 之介一隻獨

窓一隻 無廣窓一隻破傷 南墻一間蓋瓦脫落 司鑰房抹樓歸機一箇腐傷 廳板一立 無土壁一面崩頹 四面墻垣 四間蓋

瓦庫庫脫落 別監房椽木十八箇 朴工二立腐破 獨窓二隻 之介二隻無 西邊墻垣三間崩頹 兩墻間墻垣十二間 蓋瓦庫

庫脫落 五間蓋瓦全無 報春門齋室椽木九箇 椽含一箇 平交臺一箇腐傷 仰土庫庫剝落 內外土壁剝落 萬福門外中間

傾側 朴工一立 倍防一箇 龍脂板二腐傷 蓋瓦脫落 東南墻六間蓋瓦庫庫脫落 齋室前行閣五間退 五間內二間退五間

頹壓 而材瓦全無 餘存三間材木腐傷 蓋瓦折半脫落 西南墻五間蓋瓦庫庫脫落 故分付各該司 使之修改 而亦令本曹

郞廳 監蕫擧行 何如 傳曰 允

- 황단 친제할 때 문로

『승정원일기』 영조 45년 8월 15일(갑자) 원본1295책탈초본72책(1010)1769년 乾隆(淸

高宗) 34년

己丑八月十五日寅時 上詣昌德宮入侍時 行都承旨金應淳 左承旨尹東昇 右承旨閔弘烈 左副承旨朴弼逵

右副承旨徐命善 同副承旨洪述海 假注書崔命麟middot尹弼秉 記事官鄭弘德middot李福徽 以次隨駕訖上具翼善冠middot衮龍

袍 以乘輿 出通陽門middot延和門外 降輿乘輦 藥房都提調金陽澤 提調韓光會 持湯劑進伏訖陽澤曰 夜間聖體

若何 上曰 一樣矣上進湯劑 命召香室守僕 驪陽府院君閔 海豐府夫人李氏middot恩城府夫人宋氏middot豐昌府夫人趙

氏middot慶恩府院君金middot嘉林府夫人趙氏 贈領議政崔 贈貞敬夫人洪氏 一體致祭事 分付上入昌德宮於進善門外降輦

以步輦 入進善門下 問于金應淳曰 彗星光芒及尾之長短 比前何如 應淳曰 光芒則似減 而尾迹則一樣矣上

曰 其退速 則漸値太陽而消散乎 應淳曰 妖不勝德 自然消滅矣下敎曰 吏middot戶房 兵middot刑房 依前相煥出駕

前下敎 上入萬安門 辰時 上以步輿 由追慕堂北墻外 詣奉審 金應淳啓曰 通禮未卽待令 推考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又傳曰 當日內行禮 百官行禮 置之上降輿于皇壇外 步入冽泉門神室前 行四拜禮 由東階

上 奉審神室 又上皇壇 奉審四隅而降 步履强健 挾侍落後 諸臣莫不瞻仰慶忭上還出冽泉門 奉審齋室 乘

步輦 還至金化門北西向四間閣前住輿 命尹東昇 讀御製懸板 至年月日 工曹參判金致仁奉敎書上曰 不覺其

間年數之多矣 命書記上至金化門內 命承旨知入 門名及右墻內三間閣 爲何閣 承旨還奏曰 門名金化 閣則

故中日廳矣上曰 予爲摠管時 由此門入直事如昨 居然爲幾年乎 上 至弘化門內乘輿鼓吹 下敎曰 毓祥宮歷

臨時 前後廂軍 道上留駐出駕前下敎 又下敎曰 禮房承旨 靈壽閣奉審以奏出駕前下敎 又下敎曰 禮房承旨

馳往養正齋 奉審以來出駕前下敎 又下敎曰 還宮時刻 待下敎 單子置之出駕前下敎 承旨閔弘烈奉審後復

命上詣毓祥宮內 住步輦 命入皇壇回駕時 御製承旨讀訖讀書以下 上 出毓祥宮入侍時下敎曰 後日擧動

時 雲劍依例望入出駕前下敎 上命應淳 書御製時 上曰 予今日行步 無甚艱澁 奉審皇壇時 中官落後矣應

淳曰 此非但心存誠敬之工 亦可觀 勝於前日矣金陽澤進前問候後 進湯劑酉時 上還宮於延和門外降輦陽

澤曰 動駕之餘 聖體若何 上曰 一樣矣進湯劑訖 上還宮後 諸臣以次退出

- 선원전 어진을 영희전으로 이봉할 때의 문로

『정조실록』 6권 2년(1778 무술 청 건륭(乾隆) 43년) 7월 11일(무술) 1번째기사

영종(英宗)의 어진(御眞)을 영희전 제5실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선화문(宣化門)으로 나아가서 선원전(璿源殿)에 들어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도로 만안

문(萬安門) 밖의 소차(小次)에 나아가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선원전의 제2실로 올라 나아가 갑자년1366)

의 어진(御眞)인 면복본(冕服本)을 신여(神轝)에 봉안하고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 어진을 받들어 신탑(神

榻) 위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탑전(榻前)에 나아가 손수 받들어 편 다음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도로 소

차에 나아가 원유관에 강사포를 고쳐 입고 양지당에 나아가 어진궤(御眞櫃)를 신여(神轝)에 봉안하니 도감

(都監)의 당상과 낭청이 신여를 모시고 만안문으로 나아가 신련(神輦)에 옮겨 봉안하고 인정문(仁政門)을 거

쳐 나갔다 임금이 걸어서 인정전 월대(月臺) 아래에 나아가 여(輿)를 타고 인정문을 나가서 여에서 내려 연

(輦)을 탔다 돈화문(敦化門)을 거쳐 영희전에 나아가 홍살문 밖에서 연에서 내려 여를 탔다 재전(齋殿)에

들어가서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신문(神門) 밖에 나아가 사배례를 행하였다 전(殿) 안으로 나아가니 김

상철(金尙喆) 등이 어진을 제5실에 봉안하였다 작헌례를 행하고 환궁(還宮)하였다 도감의 당상과 낭청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으며 대축(大祝) 윤숙(尹塾)middot이진형(李鎭衡)에게는 가자(加資)하였다 이조에서 윤

숙은 준직(準職)을 거치지 않았다고 아뢰었으나 특별히 가자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 선원전 전배 문로

『승정원일기』 정조 13년 12월 28일 (기묘) 원본1670책탈초본88책 (3132) 1789년 乾

隆(淸高宗) 54년

己酉十二月二十八日卯時 上詣眞殿展拜入侍時 行左承旨洪明浩 右承旨趙衍德 左副承旨曺遠振 右副承

旨申耆 同副承旨洪仁浩 假注書沈能迪middot洪樂游 記注官趙慶遠middot金鳳顯 檢校直閣李晩秀 待敎金祖淳 以次侍

立上具翼善冠middot衮龍袍 乘輿 出協陽門 由肅章門middot仁政門 至萬安門降輿 入眞殿展拜後 上曰 簾帳修改所入

戶工判 領率該色郞廳及工匠等 入侍 可也賤臣承命出傳 與戶曹判書金履素 工曹判書邊得讓 戶曹正郞李周

憲 偕入訖上曰 禮判望筒 卽爲擬入 待下批先進參後 謝恩之意 分付 可也賤臣承命出傳上曰 禮判牌

去來催促 使之卽爲進參 可也賤臣承命出 與禮曹判書徐有隣 偕入訖命仁浩書傳敎曰 歲前當展拜 而除夕

齋宿相値 今日眞殿修改 日勢差早 當由便道 展拜景慕宮 該房知悉修改罷後 上出萬安門 乘輿 由仁政門middot

肅章門middot建陽門middot銅龍門middot景光門 出弘化門 入逌瞻門 至齋室降輿上曰 都提調middot提調 先詣文禧廟之意 傳諭 可

也賤臣承命出傳上曰 文禧廟歷臨出駕前下敎 上展拜訖乘輿 出逌瞻門 入弘化門 由景光門middot銅龍門middot建

陽門middot肅章門middot進善門 出敦化門 由備邊司middot觀象監峴 至文禧廟 降輿 入廟 行奠酌礼訖仍詣儀嬪廟行奠酌禮後

乘輿 出廟門 由觀象監峴middot備邊司 至敦化門 下標信解嚴 由進善門middot肅章門middot協陽門 入宣化門 還內

- 관풍각에 간경하러 거둥하는 문로

『승정원일기』 순조 11년 윤3월 14일(임진) 원본1996책탈초본105책(2121) 1811년 嘉

慶(淸仁宗) 16년

辛未閏三月十四日午時 上御觀豐閣看耕時 諸承旨及入直玉堂middot閣臣同爲入侍時 行都承旨洪義浩 右副承旨申

絅 同副承旨徐俊輔 假注書朴來謙middot洪羲祖 記注官金初燮 記事官朴齊聞 直提學洪奭周 應敎李志淵 修撰徐長

輔 以次進伏訖 上曰 今日看耕 故使之入侍矣 上曰 農圃擧行 斯速爲之 上曰 闕外入直文蔭 昨日試

取 闕內入直文臣 前旣應製 而闕內入直蔭官 姑未應製矣 闕內入直蔭官 凡幾司乎 義浩曰 尙瑞院middot尙衣院middot

司饔院middot典設司矣 上命書傳敎曰 闕內入直文臣 前已應製 而蔭官不爲應製 今日適因入侍 使之同爲待令上

曰 試官則閣臣及同副承旨middot上番玉堂middot下番翰林爲之上乘肩輿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隨後 仍由石渠門middot魚水堂middot

淸防閣middot珍藏閣middot尊德亭前路 入望春亭 御天香閣 少頃 命入侍 諸臣以次進伏訖 上曰 應製蔭官已待令乎

義浩曰 姑未及來待 而檢書官亦是入直蔭官 使之同爲待令 何如 上可之 上曰 應製人催促入來 可也 來

謙承命出去 上曰 公事待令乎 義浩曰 待于靑陽門外矣 上曰 懸題紙 磨墨器 持入 可也 賤臣承命出

來 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少退 仍爲隨後 上乘肩輿 出望春亭 還由暎花堂前路middot宜春門middot芙蓉亭邊拱辰門middot集成

門 御籠山亭 少頃 命入侍 以次進伏訖 上曰 應製人已來待 則使之入來 試官亦下筵 無唱行禮 可也

奭周middot俊輔middot志淵middot齊聞 下筵行禮 還上進伏 上命書御題五言絶句觀豐春耕 押春 限午時 俊輔承書 齊聞立傳

司謁 司謁跪受懸題 上曰 第三人誰也 義浩曰 司饔主簿金照矣 上曰 吏文學官出身乎 義浩曰 然矣

上曰 有文名乎 義浩曰 善於文而尤工於詞律矣 上曰 第一第二第四人皆誰也 義浩曰 尙瑞直長金昊淳 尙

衣直長金義友 檢書官柳本藝矣 上曰 公事持入 可也 來謙承命出去 持入 上曰 讀之 俊輔讀公事訖

傳挾侍以上 上下前入公事敎曰 都承旨middot同副承旨輪回讀奏 義浩middot俊輔讀公事訖 上曰 應製人幾皆製之 則以

次呈券 而上番兼史爲收券官 司謁爲衛軍樣擧行 可也 上曰 科次爲之 奭周曰 當取幾人耶 上曰 取一

人 奭周曰 一券不書臣謹封 違格拔去矣 上曰 違格則推考乎 奭周曰 文臣製述則有外違罷職之規 而應製

則無推考之例矣 奭周書三下於一券 俊輔坼名讀奏 上命書傳敎曰 禁直蔭官應製優等 司饔院主簿金照 奎

章全韻中板部賜給 上曰 向來禁直文臣應製 以大小板分等賜給 蔭官亦欲區別 故書下中板 而若無中板 則

以印紙之長廣闊狹區別 好矣 昨日闕外入直文蔭應製 有兒馬帖之賞 冊子之賞 勝於馬帖乎 義浩曰 馬帖則

重於冊子 而領受者之榮光 冊子勝於馬帖矣 左副承旨申溆 宗廟middot景慕宮奉審摘奸後入來 進前奏曰 臣承命馳

詣宗廟尊所 奉審無頉 祭物middot祭器middot祭井 看審精潔 諸執事middot進排官 摘奸無頉 仍詣景慕宮尊所 奉審無頉 祭物middot

祭器middot祭井 看審精潔 諸執事middot進排官 摘奸無頉矣 上曰 移御時 王大妃殿middot惠慶宮middot嘉順宮陪從官過祗迎所時

馬上鞠躬 中宮殿middot元子陪從官過祗迎所時 下馬事 預爲知委 可也 上曰 承史middot閣臣middot玉堂隨後 到暎花堂 當宣

飯也 上乘肩輿 由望春middot尊德亭前路middot集春門內麓middot觀豐閣前路 御暎花堂 諸臣待于丹楓亭 少選 以司謁宣

飯訖 上乘朱軒 由靑陽門middot永淸門middot賓陽門middot涵仁亭前路middot重春門middot小宙合樓前路 至熙政堂 上命退 諸臣以次退

- 왕세자가 성균관 입학하러 가는 길과 문

『순조실록』 20권 17년(1817 정축 청 가경(嘉慶) 22년) 3월 11일(갑인) 1번째기사

왕세자가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고 이어 입학례를 행하였다【세자가 쌍동계(雙童髻)middot공정책(空

頂幘)middot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수레에 올라 이극문(貳極門)을 나서 홍화문(弘化門)에 이르러 동협문(東挾門)

으로 해서 나와 수레에서 내려 연(輦)을 바꾸어 타고 관현(館峴)을 거쳐 문묘의 동문 밖에 이르러 연에서 내

려 편차(便次)에 들었다 작헌례를 행할 때가 되자 세자가 학생복으로 갈아입고 편차에서 나오니 겸보덕(兼

輔德)이 앞에서 인도하여 문묘의 동문으로 들어가 자리에 나아가 사배(四拜)하고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갔

다 이윽고 동계(東階)로 해서 올라 신위(神位) 앞에 나아가 삼상향(三上香)하고 잔을 잡고 헌작(獻爵)하였다

다음에는 사성위(四聖位)에 나아가 상향하고 헌작하기를 처음처럼 하였다 (-중략-) 박사가 글을 읽자 세자

도 따라 읽고 박사가 글 뜻을 해석하였다 해석이 끝나자 집사가 서안과 책을 치웠다 보덕이 세자를 인도하

여 서계로 내려와 편차에 들러 공정책과 곤룡포로 갈아입고 연에 올라 관현을 경유하여 홍화문에 이르러 연

에서 내려 수레로 바꾸어 타고 동협문으로 들어와 동룡문(銅龍門)을 지나 이극문으로 들어와 대내(大內)에

들어갔다】

- 경연관과 서연관의 대내 출입 문로 연영문과 동룡문

『순조실록』 21권 18년(1818 무인 청 가경(嘉慶) 23년) 9월 10일(을사) 1번째기사

차대하였다 우의정 남공철이 아뢰기를 ldquo오늘날의 많고 많은 일 중에서 왕세자가 학문의

성취를 먼저 힘쓰는 것보다 급한 일이 없습니다 언행(言行)으로 감화시키는 데서는 숙유(宿

儒)가 가장 좋으며 바르게 기르고 훈도하는 방도에도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

에는 경연관(經筵官)을 경서에 밝고 행실이 스스로 수양된 사람으로써 가까이서부터 초선

(抄選)한 다음 서연관(書筵官)도 그대로 겸하도록 계하(啓下)해서 연영문(延英門)과 동룡문

(銅龍門)의 강석(講席)을 드나들게 한다면 매우 좋겠습니다rdquo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주합루와 연경당에 봉안한 어진을 경모궁과 경우궁으로 각각 옮길 때의 문로

『일성록』 헌종 3년(1837) 양력 4월 17일 갑자

강 純宗大王 翼宗大王御眞自宙合樓 演慶堂移安于景慕宮望廟樓 景祐宮 誠一軒時親行祗送

목 初次移安時至卯時 時原任閣臣分承史以下 原任提學 沈象奎 朴宗薰 提學 趙寅永 原任提學 鄭元容 提學 徐

有榘 原任直提學 金鏴 檢校直提學 徐憙淳 直提學 朴永元 原任直閣 徐俊輔 李光文 李嘉愚 金鼎集 吳取善 原

任待敎 李憲瑋 檢校待敎 金興根 趙斗淳 原任待敎 金英淳 檢校待敎 金學性 分承旨 張敎根 徐念淳 趙秉憲 金

東健 分注書 金始淵 洪在龍 史官 申錫愚 徐耆淳 具朝服分詣宙合樓 演慶堂前庭行禮訖閣臣奉純宗大王影幀樻子

安於轝戊辰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 閣臣奉翼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丙戌圖寫一本予具遠遊冠 絳紗袍自內詣宙合樓

神轝奉審乘輿出宜春門詣演慶堂 神轝奉審陞詣堂內奉審後乘輿出金馬門至月覲門內入小次純宗大王影幀神轝將至

予出次祗送翼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祗送訖乘輿還內純宗大王 翼宗大王 神轝以次由月覲門自內詣景慕宮望廟樓戶

外閣臣以次奉出影幀樻子如儀奉安後閣臣以下行禮退出 再次移安時至午時 閣臣奉純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戊辰

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 閣臣奉翼宗大王影幀樻子安於轝丙戌圖寫二本庚寅圖寫一本予具遠遊冠 絳紗袍乘輿出拱辰

門至曜金門內入小次純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出次祗送翼宗大王影幀神轝將至予祗送訖乘輿還內純宗大王 翼宗大

王 神轝以次由曜金門自內詣景祐宮 誠一軒戶外閣臣以次奉出影幀樻子如儀奉安後閣臣以下行禮退出奎章閣啓言

純宗大王 御眞戊辰圖寫一本庚寅圖寫一本翼宗大王御眞丙戌圖寫一本奉安于景慕宮望廟樓純宗大王 御眞戊辰圖寫

一本庚寅圖寫一本翼宗大王御眞丙戌圖寫二本庚寅圖寫一本奉安于景祐宮 誠一軒兩廟御製各一件同爲奉安

- 창덕궁에서 종묘에 전알하러 가는 문로

『일성록』 고종 31(1894)년 양력 3월 2일 기묘

강 詣宗廟展謁

목 具翼善冠 袞龍袍乘輿出太和宮門至宗廟 北墻門降輿入齋室展謁時至改具冕服乘輿至東神門降輿詣版位行禮

陞詣第一室奉審次詣各室奉審如儀訖出西神門入永寧殿東神門詣版位行禮陞詣第一室奉審次詣各室奉審如儀

訖還出東神門乘輿至南神門降輿步過還乘輿入齋室少頃出次乘輿出北墻門至長樂門還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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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용 「창덕궁 정전영역의 구성과 운영」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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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동 「창덕궁의 공간 경계요소에 관한 연구 담middot행각middot문의 유형과 디자인 특성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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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선기 「조선시대궁궐의 공간구조에 관한 연구 경복궁 창덕궁 경희궁을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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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민 「조선왕조 궁궐 경영과 lsquo양궐체제rsquo의 변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청구논

문 1996

황준원 「조선시대 궁궐내 길례middot흉례의식 공간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

위청구논문 2004

5 도록middot도면집 고려대학교박물관 『조선시대 기록화의 세계』 2001

고려대학교박물관 『명품도록』 2008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안내도록』 2007

국립고궁박물관 『궁궐의 장식그림』 2009

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 아름다운 덕을 펼치다』 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북궐도형』 2006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소장유리건판1 - 궁궐』 2009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향연과 의례』 2009

『꼬레아 에 꼬레아니(사진해설판)』(이돈수middot이순우 지음) 하늘재 2009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宮中遺物圖錄』 1986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동궐도』 1991

문화재청 『日本 宮內廳所藏 昌德宮寫眞帖』 창덕궁관리소 2006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육백년 1405-2005』 2005

서울역사박물관 『도성대지도』 2004

서울대학교박물관 『고궁전사집첩』

영남대학교박물관 『한국의 옛 지도』 1915

예술의 전당 『서울 600년 고궁의 현판』 1994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상 하 서문당 1986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6

『사진으로 본 백년 전의 한국』(김원모middot정성길 엮음) 가톨릭출판사 1997

『서울 풍광』 -서양인이 만든 근대 존기 한국 이미지Ⅰ- 청년사 2009

『유리원판(창덕궁)』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총독부 『朝鮮古蹟圖譜』十 1930

『日本之朝鮮』(정성길 편 이민원 감수 『일제가 강점한 조선』 한국영상문화사 2006)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조선왕실의 책』 2002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실의 행사그림과 옛지도』 200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장서각 명품선』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근대건축도면집』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근대건축 도면집-해설편』 2009

6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최후의 진전 창덕궁 신선원전』 2010

국립문화재연구소 『창덕궁 금천교 발굴조사보고서』 2002

김귀곤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원유 생태조사보고서(수목 및 식생중심) 1990

문화공보부 『창덕궁 重建報告書』 1987

문화재관리국 『조선조왕국 중요건축물지정조사서(Ⅰ)』 1984 12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仁政殿 실측조사보고서』 1998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舊 璿源殿 실측조사보고서』 1992

문화재청 『창덕궁 新璿源殿 수리보고서』 2001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인정전 일곽복원공사 기초조사에 의한 설계설명서』 1992

문화재관리국 『창덕궁 仁政澱 行閣址 발굴조사보고서』 1995

문화재청 『창덕궁 仁政殿 行閣 중건공사보고서』 1999

문화재청 『창덕궁 奎章閣 舊璿源殿 권역 발굴조사보고서』 2000

문화재청 『창덕궁 半島池 보수 정비공사 준공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상방지 유구조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熙政堂 수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middot종묘원유 조사보고서』 2002

문화재청 『창덕궁 정자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3

문화재청 『창덕궁 희정당 신관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3

문화재청 『창덕궁 경훈각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4

문화재청창덕궁관리소 『창덕궁 승화루 및 일곽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5

문화재청 『창덕궁 懿老殿 실측middot수리보고서』 2004

문화재청 『창덕궁 인정문 정밀실측조사보고서』 2010

문화재청 『창경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2010

김동욱 『조선후기 궁궐건축의 조영에 관한 연구』 국립문화재연구소 1990

안병찬이강근 외 『궁궐채색기술 특성규명 연구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전상운 『창덕궁 어차 수리 복원 보고서』 2004

중앙문화재연구원 『창덕궁 반도지 시굴조사보고서』 2001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함원전 보수공사』 2005

웹 사이트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httpsjwhistorygokr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e-kyujanggaksnuackr

한국고전종합 DB httpdbitkcorkr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httpyoksaaksackr

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

문화유산에게 소심하게 말걸기 httpwwwcyworldcomanga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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