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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 December 2016 31 30 Chindia plus 굴원(屈原·BC 339~278)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의 정치가이자 문학가였다. 그는 회왕(懷王) 때 좌도(左徒)·삼려대부(三閭大夫) 등의 벼슬을 거 치면서 과감한 개혁 정치를 주장하다가 옛 귀족 들과의 갈등으로 유배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 후 복직했으나 경양왕(頃襄王) 때 반대파의 모함 으로 다시 유배당해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멱라 수(汨羅水)에 투신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생몰 연대도 정확하지 않고 굴원의 행적에 대 해서도 완벽한 정보가 없다. 심지어 굴원의 실재 여부를 의심하는 학자도 있다. 그럼에도 그가 북 방의 현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시경』과 쌍 벽을 이루는 남방 낭만주의 문학의 정화인 『초 사(楚辭)』의 대표 작가라는 사실에 대부분의 학 자가 동의한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작품 중 몇몇은 그의 작 품이 아니라는 의혹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어부사』도 그중 하나다. 『어부사』가 후대 에 미친 막강한 영향력을 감안할 때 이러한 의혹 은 순전히 ‘학문적 호기심 차원의 의혹’에 지나 지 않는다고 하겠다. 이제 작품을 살펴보자. 굴원이 쫓겨나 강변에서 노닐고 못가를 거닐며 시 를 읊조리는데 안색이 초췌하고 몰골이 여위었다.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닙니까?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굴원이 말했다.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 홀로 맑았고 뭇사람 이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어, 이 때문에 쫓 겨났다오.” 어부가 말했다. “성인(聖人)은 사물에 막히거나 얽매이지 않고 세 상 흐르는 대로 변할 줄 압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혼탁하거든 어찌하여 그대도 진흙탕을 휘저어 흙탕 물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또 뭇사람이 모두 취했 거든 어찌하여 그대도 술지게미를 먹고 마지막 탁 한 술까지 마시지 않았습니까? 무엇 때문에 깊이 생 각하고 고상하게 행동해 스스로 쫓겨나게 했습니 까?” 굴원이 말했다. “내가 들으니,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떨고 새로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의 먼 지를 떤다고 하는데, 어찌 이 깨끗한 몸으로 외부의 더러운 것을 받을 수 있겠소? 차라리 소상강 강물에 뛰어들어 물고기 배 속에 나를 장사 지낼지언정 어 찌 하얀 이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 소?” 어부가 빙그레 웃고 뱃전을 두드리며 “창랑(滄浪) 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면 되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면 되지”라 노래하고 떠나가서 다시는 함께 말을 나누지 못했다. 세속적 욕망을 버린 은자(隱者)의 삶 이 작품은 가상의 어부와 굴원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 등장하는 어부는 고기를 잡는 단순한 어부가 아니고 혼탁한 현실을 벗어나 세 속적 욕망을 버리고 사는 은자(隱者)다. 중국은 물 론이고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어부가’나 조선조 이현보(李賢輔)의 『어부사』 ,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에 나오는 어부도 실제 어부가 아 니고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다. 모두 굴원의 『어부사』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굴원 이래로 어부가 ‘은자의 상징’이 된 것이다. 세상 이치를 꿰뚫고 있는 어부가 짐짓 굴원에 게 ‘세상이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세상과 맞추어 가면서 살아가라’고 충고하지만 굴원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의 깨끗함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이 글에서 어부가 굴원에게 충고한 “사물에 막히거나 얽매이지 않 고 세상 흐르는 대로 변할 줄 안다(不凝滯於物 能 與世推移)”는 말은 후세에 널리 인용되는 구절 이다. 특히 ‘여세추이(與世推移)’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해서 살아가는 태도를 지칭하는 4자성어로 굳어졌다.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만 홀로 맑았고 뭇사람이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擧 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는 구절도 지조 를 지키는 고결한 선비의 자세를 나타내는 경구 가 됐다. 어부가 떠나면서 불렀다는 노래를 일명 ‘창 랑가(滄浪歌)’라 하는데 이 역시 굴원의 『어부 사』 본뜻과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에게 인용됐 다. 조선 중기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인 김일손 (金馹孫)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 면 되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면 된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 吾足)”는 창랑가의 문구를 따 자신의 호를 ‘탁영 (濯纓)’이라 했다. 창랑의 물이 맑다는 것은 세상 이 맑다는 것인데, 그는 갓끈을 씻어도 좋을 만큼 당시를 태평성대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 자광(柳子光) 등이 일으킨 무오사화로 억울한 희 생물이 되고 말았다. 정치적 이상 실현 못해 멱라수 투신 『어부사』를 포함한 굴원의 『초사』는 이후 중국 문학의 모든 장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시경』이나 이백, 두보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결코 유학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지만 후대 유가(儒家)들은 굴원의 애 국 충절 정신을 기려 『초사』를 높이 평가했다. 유학사상의 큰 봉우리인 주자(朱子)는 『초사집 주(楚辭集註)』를 편찬하기까지 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이소(離騷) 』는 ‘이소경(離騷經)’이 라 하여 경전의 반열에 올리고 충신들의 교과서 로 삼았다. 굴원은 진(秦)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초나라 수도 영( )을 함락시키자 더 이상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없음을 알고 몸에 돌을 매달아 멱라수에 투신하고 말았다. 『어부사』에서 “차 라리 물고기 배 속에 나를 장사 지내겠다”고 말한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그는 끝내 ‘여세추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날이 음력 5월 5일이기 때문에 중국 의 남방 지역, 특히 대만에서는 이날을 ‘시인절’ 로 정해 그의 애국 충절을 기리고 있다. 이날 종려 잎에 찹쌀을 싼 ‘쭝쯔(綜子)’란 떡을 만들어 강물 에 던지는 풍속이 있는데, 이는 물고기가 쭝쯔를 먹고 굴원의 시체를 뜯지 말라는 뜻이라 한다. 또 이날 벌이는 용선(龍船) 경주도 사람들이 굴원의 시체를 찾기 위해 배를 타고 강을 수색한 데서 유 래했다고 한다. 쭝쯔와 용선 경주는 지금도 행해 지는 민간 풍속이다. Life & Culture | 중국 명문장 ② 굴원의 ‘어부사(漁父辭)’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 [email protected]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만 홀로 맑아서” 고결한 선비의 자세, 굴원 ‘어부사’ 중국 명문장 ② 굴원의 ‘어부사(漁父辭)’ | Life & Culture (屈原) (漁父辭) imagetoday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만 홀로 맑아서” 고결한 선비의 자세 ... · 2016. 12. 5. · 찌 하얀 이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쓸 수 ... 굴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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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ember / December 2016 3130 Chindia plus

    굴원(屈原·BC 339~278)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의 정치가이자 문학가였다. 그는 회왕(懷王) 때

    좌도(左徒)·삼려대부(三閭大夫) 등의 벼슬을 거

    치면서 과감한 개혁 정치를 주장하다가 옛 귀족

    들과의 갈등으로 유배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

    후 복직했으나 경양왕(頃襄王) 때 반대파의 모함

    으로 다시 유배당해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멱라

    수(汨羅水)에 투신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생몰 연대도 정확하지 않고 굴원의 행적에 대

    해서도 완벽한 정보가 없다. 심지어 굴원의 실재

    여부를 의심하는 학자도 있다. 그럼에도 그가 북

    방의 현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시경』과 쌍

    벽을 이루는 남방 낭만주의 문학의 정화인 『초

    사(楚辭)』의 대표 작가라는 사실에 대부분의 학

    자가 동의한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작품 중 몇몇은 그의 작

    품이 아니라는 의혹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어부사』도 그중 하나다. 『어부사』가 후대

    에 미친 막강한 영향력을 감안할 때 이러한 의혹

    은 순전히 ‘학문적 호기심 차원의 의혹’에 지나

    지 않는다고 하겠다. 이제 작품을 살펴보자.

    굴원이 쫓겨나 강변에서 노닐고 못가를 거닐며 시

    를 읊조리는데 안색이 초췌하고 몰골이 여위었다.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닙니까?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굴원이 말했다.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 홀로 맑았고 뭇사람

    이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어, 이 때문에 쫓

    겨났다오.”

    어부가 말했다.

    “성인(聖人)은 사물에 막히거나 얽매이지 않고 세

    상 흐르는 대로 변할 줄 압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혼탁하거든 어찌하여 그대도 진흙탕을 휘저어 흙탕

    물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또 뭇사람이 모두 취했

    거든 어찌하여 그대도 술지게미를 먹고 마지막 탁

    한 술까지 마시지 않았습니까? 무엇 때문에 깊이 생

    각하고 고상하게 행동해 스스로 쫓겨나게 했습니

    까?”

    굴원이 말했다.

    “내가 들으니,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떨고 새로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의 먼

    지를 떤다고 하는데, 어찌 이 깨끗한 몸으로 외부의

    더러운 것을 받을 수 있겠소? 차라리 소상강 강물에

    뛰어들어 물고기 배 속에 나를 장사 지낼지언정 어

    찌 하얀 이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

    소?”

    어부가 빙그레 웃고 뱃전을 두드리며 “창랑(滄浪)

    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면 되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면 되지”라 노래하고 떠나가서

    다시는 함께 말을 나누지 못했다.

    세속적 욕망을 버린 은자(隱者)의 삶

    이 작품은 가상의 어부와 굴원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 등장하는 어부는 고기를 잡는

    단순한 어부가 아니고 혼탁한 현실을 벗어나 세

    속적 욕망을 버리고 사는 은자(隱者)다. 중국은 물

    론이고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어부가’나 조선조

    이현보(李賢輔)의 『어부사』,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에 나오는 어부도 실제 어부가 아

    니고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다. 모두

    굴원의 『어부사』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굴원

    이래로 어부가 ‘은자의 상징’이 된 것이다.

    세상 이치를 꿰뚫고 있는 어부가 짐짓 굴원에

    게 ‘세상이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세상과 맞추어 가면서 살아가라’고 충고하지만

    굴원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의 깨끗함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이 글에서 어부가

    굴원에게 충고한 “사물에 막히거나 얽매이지 않

    고 세상 흐르는 대로 변할 줄 안다(不凝滯於物 能

    與世推移)”는 말은 후세에 널리 인용되는 구절

    이다.

    특히 ‘여세추이(與世推移)’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해서 살아가는 태도를 지칭하는 4자성어로

    굳어졌다.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만 홀로 맑았고

    뭇사람이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擧

    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는 구절도 지조

    를 지키는 고결한 선비의 자세를 나타내는 경구

    가 됐다.

    어부가 떠나면서 불렀다는 노래를 일명 ‘창

    랑가(滄浪歌)’라 하는데 이 역시 굴원의 『어부

    사』 본뜻과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에게 인용됐

    다. 조선 중기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인 김일손

    (金馹孫)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

    면 되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면 된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

    吾足)”는 창랑가의 문구를 따 자신의 호를 ‘탁영

    (濯纓)’이라 했다. 창랑의 물이 맑다는 것은 세상

    이 맑다는 것인데, 그는 갓끈을 씻어도 좋을 만큼

    당시를 태평성대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

    자광(柳子光) 등이 일으킨 무오사화로 억울한 희

    생물이 되고 말았다.

    정치적 이상 실현 못해 멱라수 투신

    『어부사』를 포함한 굴원의 『초사』는 이후

    중국 문학의 모든 장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시경』이나 이백, 두보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결코 유학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지만 후대 유가(儒家)들은 굴원의 애

    국 충절 정신을 기려 『초사』를 높이 평가했다.

    유학사상의 큰 봉우리인 주자(朱子)는 『초사집

    주(楚辭集註)』를 편찬하기까지 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이소(離騷) 』는 ‘이소경(離騷經)’이

    라 하여 경전의 반열에 올리고 충신들의 교과서

    로 삼았다.

    굴원은 진(秦)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초나라

    수도 영(郢)을 함락시키자 더 이상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없음을 알고 몸에 돌을 매달아

    멱라수에 투신하고 말았다. 『어부사』에서 “차

    라리 물고기 배 속에 나를 장사 지내겠다”고 말한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그는 끝내 ‘여세추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날이 음력 5월 5일이기 때문에 중국

    의 남방 지역, 특히 대만에서는 이날을 ‘시인절’

    로 정해 그의 애국 충절을 기리고 있다. 이날 종려

    잎에 찹쌀을 싼 ‘쭝쯔(綜子)’란 떡을 만들어 강물

    에 던지는 풍속이 있는데, 이는 물고기가 쭝쯔를

    먹고 굴원의 시체를 뜯지 말라는 뜻이라 한다. 또

    이날 벌이는 용선(龍船) 경주도 사람들이 굴원의

    시체를 찾기 위해 배를 타고 강을 수색한 데서 유

    래했다고 한다. 쭝쯔와 용선 경주는 지금도 행해

    지는 민간 풍속이다.

    Life & Culture | 중국 명문장 ② 굴원의 ‘어부사(漁父辭)’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

    [email protected]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만 홀로 맑아서”

    고결한 선비의 자세, 굴원 ‘어부사’

    중국 명문장 ② 굴원의 ‘어부사(漁父辭)’ | Life & Culture

    (屈原) (漁父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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