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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韓國中東學會, 2013, x-xx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1) 박 찬 기 ** ◁ 목 차 ▷ Ⅰ. 서론 Ⅱ. 갈등 해소 연구의 변천 과정 Ⅲ. 분석의 틀 Ⅳ. 레바논 갈등의 근원과 전개과정 1. 건국 이후부터 내전까지 2. 타이프 협정부터 도하협정까지 3. 2009년 총선부터 현재까지 Ⅴ.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 1. 진실규명위원회(Truth Commission)의 설치 필요성 2. 정의 구현의 필요성 3. 가해자를 용서하는 관용의 필요성 4. 적극적인 평화의 길 모색 방안 ⅤI. 결론 참고문헌 * 본 논문은 2009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연구임 (NRF-2009-32A-B00020). 그리고 본 논문의 구성과 내용에 관하여 건설적인 조언을 해주신 익 명의 세 분 심사위원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kames1979.or.kr/cont/105/tab1_file/2013063401... · 2013. 9. 28. · France. This system, as Arend Lijphart predicted i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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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韓國中東學會, 2013, x-xx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1)

    박 찬 기 **

    ◁ 목 차 ▷

    Ⅰ. 서론

    Ⅱ. 갈등 해소 연구의 변천 과정

    Ⅲ. 분석의 틀

    Ⅳ. 레바논 갈등의 근원과 전개과정

    1. 건국 이후부터 내전까지

    2. 타이프 협정부터 도하협정까지

    3. 2009년 총선부터 현재까지

    Ⅴ.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

    1. 진실규명위원회(Truth Commission)의 설치 필요성

    2. 정의 구현의 필요성

    3. 가해자를 용서하는 관용의 필요성

    4. 적극적인 평화의 길 모색 방안

    ⅤI. 결론

    참고문헌

    * 본 논문은 2009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연구임

    (NRF-2009-32A-B00020). 그리고 본 논문의 구성과 내용에 관하여 건설적인 조언을 해주신 익

    명의 세 분 심사위원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 2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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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Study on the Reconciliation of the

    Lebanese Internal Conflict

    Park, Chan-Ki

    Myongji University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Lebanese conflict

    reconciliation processes since the end of the second civil war in 1990

    and to find out ways in which to promote the processes better to

    achieve positive peace. Reconciliation is as important as the termination

    of physical violence because without true reconciliation, conflict can

    erupt at any time. As a result, reconciliation is considered an important

    topic in the field of conflict resolution. According to the general theory

    of reconciliation, the conflict reconciliation process begins with the

    formation of a truth committee to clarify what occurred during the period

    of the civil war and to determine the victims and perpetrators.

    Depending on the findings of the committee, justice should be served.

    The perpetrators are supposed to be punished, and the victims should be

    compensated. Subsequently, the perpetrators make apologies for their

    criminal acts in public, and the victims then offer them forgiveness. In

    accordance with these processes, the perpetrators and the victims can

    establish a new relationship to achieve peace.

    In Lebanon, however, this general process of reconciliation was

    totally ignored because the current political leaders were the

    perpetrators in the civil war. Being afraid of punishment, the Lebanese

    government, which was composed of these leaders, proclaimed a general

  •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3 -

    amnesty for the all perpetrators and have induced a collective amnesia

    about the civil war. Due to the lack of true reconciliation, conflict in the

    Lebanese society is increasing every day.

    The main cause for the internal conflict in Lebanon is the political

    system of consociational democracy, which divides political power

    according to religious sects: the president for the Moronites, the prime

    minister for the Sunnis, and the speaker of the parliament for the Shias.

    This system began in 1943 when Lebanon achieved independence from

    France. This system, as Arend Lijphart predicted in the 1960s, had been

    outdated for Lebanon several decades ago, and the Taif Agreement was

    the perfect opportunity to adopt a true democratic system. The Lebanese

    political leaders are, however, clinging to power, and they have

    reintroduced the consociational system. As a result, the Lebanese

    government is not interested in true national reconciliation and also lacks

    the ability to achieve it. Therefore, Lebanese reconciliation should be

    approached with civil society groups and NGOs in order to achieve

    positive peace.

    ※ Key Words : Lebanon, Conflict Reconciliation, Truth

    Commission,Justice, Apology, Forgiveness, Civil

    Society Groups, NGO, Consociational Democracy

  • 4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 4 -

    I. 서론

    현재 레바논은 사회 전반에 갈등이 높아지고 있어 최악의 경우 또 다른 내전

    으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치권은 3/14 그룹과 3/7그룹으로 양분되

    었고, 대외관계에서는 친미 반미그룹, 시리아 내전에서는 바샤르 알-아사드

    (Bashar al-Assad)정부 지원파와 반군 지원파로 양분돼 있다. 북부 트리폴리

    (Tripoli) 지역 또한 시리아 반군을 지지지하는 순니파와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

    하는 알라와이트(Alawite)파 간의 유혈충돌이 계속되고 있으며, 남부 시돈

    (Sidon) 지역에서는 살라피스트(Salafist) 알-아시르(Ahmad al-Assir) 지지파

    와 헤즈볼라 간의 불화가 심화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알-아시르는 헤즈볼라대

    원이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하는 것에 반발하여 본인이 직접 시리아 반군 기지

    를 방문하였으며(Now Lebanon, May 1, 2013), 추종자들에게 반군을 지원하

    라고 충동질하고 있다.1) 헤즈볼라는 전투대원들을 시리아 국내로 파견하여 노

    골적으로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전사한 헤즈볼라대원

    들의 시신이 계속 레바논으로 돌아오고 있다(Daily Star, February 18, 2013).

    뿐만 아니라 100만 명이 넘는 시리아 난민이 국경 지역에 유입되고 있으며 최

    근엔 시리아 정부군 폭격기가 동북부 국경지대의 레바논 영토를 포격한 사건

    이 발생하기도 했다. 즉, 레바논은 내외적인 원인 때문에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빠른 기간 안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레바논은 또다시 내전에 빠

    져들 가능성이 높다.

    레바논에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종파만 18개다. 게다가 이들 각 종파조차도

    내분되어 있다. 마론파는 사미르 좌좌(Samir Geagea)가 이끄는 3/14그룹에 속

    하는 레바논민병대(Lebanese Forces)와 미셀 아운(Michel Aoun)이 이끄는

    3/8그룹에 속하는 자유애국운동당(Free Patriotic Movement)으로 양분되어

    있으며, 쉬아파도 헤즈볼라 지지자와 아말(Amal) 지지자로 분열되어 있다. 순

    니파 또한 온건파와 급진파인 살라피스트파로 양분되어 있으며, 드루즈(Druze)

    1) 트리폴리 지역의 살라피스트 살렘 알-라페이(Salem al-Rafei)이는 시리아 반군을 지원해야 된다

    는 파트와(Fatwa)를 발행하였으며 그의 대원 한 명이 벌써 시리아에서 전사하였다(Now Lebanon, May 9, 2013).

  •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5 -

    또한 왈리드 쥼불라트(Walid Jumblatt)가 이끄는 진보사회주의자당

    (Progressive Socialist Party)과 탈랄 아르스란(Talal Arslan)이 수장인 레바

    논민주당(Lebanese Democratic Party)으로 분열되어 있다. 즉, 갈라진 종파

    안에서 같은 종파는 또 하부그룹으로 분열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레바논화

    (Lebanonization)’라는 단어는 이 같이 분열된 국가를 일컫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돌이켜보면, 레바논은 1943년 독립과 함께 권력분점형 민주주의

    (consociational democracy)를 채택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치, 경제발전

    을 이룩해서 주변국의 부러움을 독차지했다. 레바논을 중동의 스위스, 수도 베

    이루트를 중동의 파리로 부르는 것은 레바논에 대한 주변국의 부러운 시선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정부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자 이 같

    은 권력분점형 정치체제는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첫 번째 증후가 1958년의 제

    1차 내전이었다. 이는 이집트 나세르(Gamal Abdel Nasser)대통령의 아랍민족

    주의를 추종하는 세력과 친서방세력 간의 충돌인데 미군이 개입해 빨리 수습되

    었다(박찬기 2008, 200). 그 결과 권력분점형 정치체제는 유지할 수 있었다. 하

    지만, 1975년의 내전은 이 체제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행히

    1989년 타이프협정(Taif Agreement)으로 이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레바논의

    권력분점형 민주주의는 더 이상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아렌트 레이

    프하트(Arend Lijphart)가 예언했던 것처럼 레바논의 권력분점형 민주주의가

    수명을 다한 것이다(Lijphart 1969, 218-219).

    타이프협정은 수명이 다한 권력분점형 정치체제를 폐기하고 일반적인 다수

    결 민주주의를 도입할 절호의 기회이였지만, 정치 지도자들이 본인들의 정치권

    력과 종파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이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내전 후 중앙정부가 극도로 취약해지면서 국민화해를 이끌어내지 못하였기에

    현재까지 사회 전반에 있어서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내전은 끝났지만

    통합된 국가가 되기에는 아직도 멀고도 험한 길이 기다리고 있다. 즉, 소극적인

    평화(negative peace)는 달성했지만 적극적인 평화(positive peace)는 달성하

    지 못하고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갈등 해소 이론 중 화해방법론을 동원하여 레바논 제2차

  • 6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 6 -

    내전 후 대국민화해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이에 관한 적절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있다.

    II. 갈등 해소 연구의 변천 과정

    갈등(葛藤)은 한자어로 칡(葛)과 등나무(藤)가 서로 뒤얽혀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영문표기의 갈등(conflict)은 "com〔together〕와 fligere〔to strike)"의

    합성어로 서로 부딪치거나 마찰이 일어나는 상황을 의미한다.2) 동﹡서양의 두 단어가 의미상 차이가 약간 있지만 종합해서 서로 간에 대립되는 주장이나 이해

    관계로 인하여 충돌이 일어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은 인류 역사

    와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며, 그 해결책도 그때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갈등 해소가 학문적으로 이론화되기 시작한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좀 더 정확히는 1919년 영국 웨일즈의 사업가 겸 의회 의원(Member of

    Parliament)이던 데이비스(David Davies)가 대전 기간에 희생된 학생들을 기

    념하기 위하여 웨일즈대학(University College of Wales)에 국제관계론

    (International Relations) 학과를 설립하면서 부터다. 그 후 다른 유럽 지역과

    미국 등지에 유사 학과가 설립되면서 전쟁방지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 하게 되

    었다. 특히 미국 카네기재단의 국제평화연구소와 독일의 평화연구 아카데미가

    1930년에 설립되었으며, 다음 해 프랑스 리옹대학교(University of Lyons)에

    평화연구소가 설립되면서 당시 국제사회의 갈등 해소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생

    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

    고 1945년에는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되는 상황까지 되었다. 그 결과 제2차 세

    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갈등을 연구하려는 관심이 더욱더 높아졌다.

    미-소 냉전 기간에는 미국 여러 대학교에서 갈등 연구가 활성화되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미시간대학교다. 이 대학교 경제학 교수 볼딩

    (Kenneth Boulding)은 수학자겸 생물학자인 라포포트(Anatol Rapoport), 사회

    2) 제주평화연구원(Jeju Peace Institute)의 home page의 “갈등 관리의 이론적 배경과 주요 내용”을

    참조하였음,

  •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7 -

    심리학자인 켈먼(Herbert Kelman), 사회학자인 엔겔(Robert Angell) 등과 함

    께 갈등해소저널(Journal of Conflict Resolution)을 1957년 창간했으며, 2년

    뒤에 동 대학교에 갈등해소연구센터를 설립하였다. 이들 연구는 당연히 전쟁을

    예방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이들은 당시 진행되고 있던 행태주의 운동

    (Behavioral Movement)의 영향을 받아 여러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영역의

    자료를 수집한 후 분석하여 조기에 갈등수위를 경고하고 전쟁을 사전에 예방한

    다는 과학적인 연구를 지향하였다.3)

    한편 이 당시 북부유럽에서도 갈등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대

    표적인 학자가 요한 갈퉁(Johan Galtung)이다. 초기의 갈등 해소 이론가들과

    같이 갈퉁도 여러 분야의 학문을 접한 학자이다. 그는 철학, 사회학 및 수학을

    공부하였으며, 1958년에는 컬럼비아대학교 사회학과의 방문교수로 근무하였

    다. 1960년 노르웨이로 귀국하여 오슬로대학교에 국제평화연구소를 설립하여

    갈등 해소 연구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게 되었으며, 1964년에는 평화연구학술지

    (Journal of Peace Research)의 초대 편집장이 되었다. 이 당시 북유럽 지역

    에는 이러한 연구가 활성화되고 있었고, 여러 연구소도 세워지고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연구소는 1966년에 설립된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와 1969년에 설

    립된 핀란드의 탐페레평화연구소(Tampere Peace Research Institute)이다.

    당시 미국과 북유럽에서 갈등 해소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 되고 있었는데

    현재까지 요한 갈퉁을 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공헌자로 간주하는 것은 그의

    연구내용이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갈등 해소 연구자들이 국가 간

    의 전쟁예방에 중점을 두고 있을 때 갈퉁은 근본적인 갈등 해소 문제에 더욱더

    집중하였다. 특히 미국학자들이 국가 간의 실질적인 마찰을 줄이는 방법에 치중

    하고 있을 때 갈퉁은 근본적인 갈등의 원인 해소에 연구의 핵심을 두고 있었다.

    그는 평화를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와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로

    양분해 전자를 단순히 직접적인 폭력행사가 없는 상황으로, 후자는 이러한 상황

    3) 행태주의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사회과학자들이 전장에서 당시 사회과학 교육의 한계

    점을 인식한 후 전후 대학교에 복귀하여 사회과학도 과학다워야 한다고 부르짖은 학문적 개혁 운

    동이다. 그 세부적 내용은 사회현상 연구에서 연구자 개인 가치관의 배제, 통계분석법 도입 및 설

    명력이 있는 새로운 변수들의 도입 등이다. 즉, 이것은 현재의 사회과학의 모태가 된 운동이다

    (Gunnell 1983, 10-18).

  • 8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 8 -

    뿐만 아니라 구조적 및 문화적인 폭력상황을 극복한 단계로 규정하였다. 즉, 소

    극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연구자들은 단순히 전쟁, 특히 핵전쟁을 예방하고 평화

    를 추구하는 최소주의자(minimalist)로 본다면 갈퉁은 이들보다 한 단계 더 앞

    서서 적극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최대주의자(maximalist)로 볼 수 있다

    (Ramsbotham et al. 2005, 41). 그는 근본적인 사회 갈등을 해소하는 것을 간

    과하고 단순히 표면상 드러난 전쟁을 종식하는데 치중하면 이는 미래에 더 큰

    폭력행위의 씨앗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연구영역은 단순히 국가

    간의 전쟁을 넘어서 통치자와 피통치자, 남성과 여성, 서구와 비서구문화, 인간

    과 자연관계 등 거의 전 영역에서 조화와 평화를 찾는 광범위한 분야를 포함하

    고 있다. 냉전종식 후 갈등 해소에 관한 연구가 국내적인 갈등 문제 해결에 더

    중점을 두게 되면서 이러한 그의 연구가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4)

    1991년 소련연방의 해체 이후 그간 누적되었던 내적 불만이 표출되면서

    여러 지역에서 인종 및 종교 간의 갈등이 비화되면서 내전으로 이어진 곳이 많

    았다. 특히 소련연방 내의 소수민족들의 분리운동, 발칸반도 분쟁 그리고 서남

    아시아 및 아프리카 지역 등에서 발생한 국내적 갈등의 증가는 냉전 기간의 주

    연구 과제였던 핵전쟁이나 국가 간의 전쟁에서 벗어나 국내의 갈등에 대한 연

    구가 활발해지는 계기를 조성하였다(Licklider 1995, 681-690; Zartman

    1995; Rothchild 1997; Bannon and Collier 2003; Fearon and Laitin 2003,

    75-90; Paris 2004; Collier and Sambanis 2005; Hampson and Aall 2005;

    Kalyvas 2006). 특히 1994년 미국의 클린턴행정부는 부통령 알 고어(Al Gore)

    의 책임 하에 ‘실패한 국가 특별위원회(State Failure Task Force)'를 설치하여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국가를 먼저 예측하여 지원함으로써 국제적인 혼란을 줄

    이고자 시도하였다.5) 즉, 이 위원회는 장기간의 냉전 후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

    4) 갈퉁의 이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갈등이 모순, 태도, 행동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

    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순은 두 당사자 간에 실질적이든 가상적이든 서로의 이익이 공존할

    수 없다고 믿는 상황이다. 태도는 두 당사자 간에 이와 같은 모순으로 인하여 쌍방에 대한 불안,

    염려, 증오 등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이 악화될 경우에는 폭력적인 행동, 즉, 위협,

    강압 또는 파괴적인 공격행태를 띠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갈등에는 이

    러한 세 가지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다. 갈등적인 태도나 행동이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경우

    를 잠재적(구조적)갈등 상황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조건이 갖추어지기만 하면 본

    격적인 갈등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즉, 그는 갈등의 역동성을 주장하고 있다.

    5) 본 대책위원회는 학자, 자료수집 전문가, 통계 전문가 등 대규모 연구진으로 구성되었으며 127개

  •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9 -

    에서 국제적인 혼란을 줄이기 위한 조기경보체제를 운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

    들어졌다. 통계적으로 보면 1945년 이후 유엔평화유지군을 파견한 경우가 55

    회인데 이 중 42회(76%)가 동구공산권이 붕괴된 1989년 이후이다(Dobbins et

    al. 2003, xiv-xv).

    냉전 기간에 국제적 갈등 연구로 명성을 떨쳤던 홀스티(Kalevi J. Holsti)

    도 1996년에 주장하기를, “이제 20세기 후반의 전쟁은 외교정책이나, 안보, 국

    가의 명예 등에 관한 것이 아니고 국가정체성, 통치, 국가와 그 안의 단체들과

    커뮤니티의 관계다”라고 주장하였다(Holsti 1996). 이와 같이 냉전 기간에는 거

    의 간과되었던 국내적인 요인들이 국제관계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것이 주

    연구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추세에 맞추어 갈등 연구에서는 “새로운 전쟁(new

    war),” “작은 전쟁(small war),” “내전(civil war),” “인종 간 전쟁(ethnic

    war)” 등의 용어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아자르(Edward

    Azar)의 갈등 해소 이론이 재조명되었다.6)

    아자르는 갈등 해소의 근본적인 문제로 습관과 선택을 중시해 갈등유형을

    다음과 같이 5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대립적 스타일: 서로가 본인의 이익만

    을 중시하는 경우. 2. 양보적 스타일: 쌍방의 이익을 중시하는 경우. 3. 회피적

    스타일: 쌍방의 이익을 낮게 보는 경우. 4. 절충적 스타일: 균형감 있게 생각하

    는 스타일. 5. 문제 해결 스타일: 쌍방의 이익을 우선 고려하면서 창의적으로 문

    제를 해결하려는 스타일 등이다. 이중 대부분의 갈등상황은 대립적인 스타일이

    어서 쌍방이 큰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등 해소의 근본적

    국가를 연구대상으로 정했다. 특히 1955년부터 국가의 실패원인을 31개의 주 변수로 연구했다. 주

    요 독립변수는 유아사망률, 민주화, 의회의 효율성 등이고, 종속변수로는 인종말살정책, 급속한 정

    권교체, 혁명 및 내전 등이다(King and Zeng 2001, 623-658; 박찬기 2007, 230).

    6) 에드워드 아자르는 1938년 레바논에서 출생하였으며 대학원에서 국제정치를 연구하기 위하여 미

    국으로 오게 되었다. 그는 1969년 스탠포드대학교(Stanford University)에서 국제정치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노스 케롤리나대학교(North Carolina University)에 갈등과 평화연구 데이터뱅

    크(Conflict and Peace Research Data Bank)를 설립하면서 일찍부터 그는 국제분쟁뿐만 아니라

    국내적인 갈등 요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의 모국 레바논의 고질화된 국내 갈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Ramsbotham et al. 2005, 84). 이러한 그의 연구는 하버드대학교의 갈등문

    제연구소와 연결되면서 더욱더 탄력을 받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 버

    튼과 메릴랜드대학교에 국제개발과 갈등관리센터를 설립하면서 국내 갈등 문제에 대한 연구에 더

    욱더 치중하게 되었다. 그 후 버튼이 조지메이슨대학교(George Mason University)로 이적하였지

    만 그는 1991년 사망할 때까지 메릴랜드대학교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 10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 10 -

    인 시작은 제로섬(zero-sum), 즉 영합게임이 아니라 비영합(non-zero-sum)게

    임임을 주지하고 쌍방의 필요를 충족하는 윈-윈(win-win) 전략으로 풀어가야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III. 분석의 틀

    내적 갈등이 장기화, 고질화한 국가의 특성을 보면, 부족, 인종, 종파, 지역

    간의 갈등으로 사회가 매우 심하게 분열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결과

    이러한 국가들은 사회가 파당, 파편화 되면서 국가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

    다. 이 경우 중앙정부는 붕괴되거나 무기력해지고 그 결과 각 그룹 간의 불신과

    적대감이 증가하며, 자신들의 정체성과 안위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면서 상대

    방에 대한 나쁜 선입관이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최근에 폭력적인 갈등

    이 있었을 경우 더욱더 악화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같은 그룹 간의 결속력이 증

    가하고 각 그룹의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 충성심이 증가하는 반면, 상대

    방에 대한 적대감은 증폭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멀리 떨어

    진 그룹이 아니라 매우 가까운 이웃, 같은 지역 주민, 심지어는 바로 옆집에 사

    는 사람들 간에 일어나고 있다(Lederach 2006, 11-12).

    이러한 갈등은 사회가 수평, 수직으로 분열된 사회일수록 그 농도가 더 짙

    다(Khoury 2008, 162). 그 결과 국가통합이나 정책수립을 위한 의견수렴이 어

    려워지고 있으며 국가의 힘이 분산되는 것이다. 또한 갈등의 악순환이 계속되면

    서 사회는 정체되고 서로의 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 갈등이 장

    기화된 국가에 대한 국제기구나 제3자가 개입하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UN헌장이나 국제기구의 정관도 대부분 이들 단체가 국내 갈등에 참여하는 것

    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Lederach 2006, 15). 그러므로 탈냉전시대에 국내

    갈등이 증가하고 있지만 이에 대처하는 방식이나 해결방법에서 시대적인 괴리

    감을 느끼는 것 또한 당연하다. 이러한 와중에 내적 갈등은 증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피해는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내부 갈등이 장

  •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11 -

    기화된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갈등 해소 방안으로 ‘갈등 화해’ 방법이 대두되고

    있다.

    내부 갈등이 장기화된 국가의 해결방법은 제3국이나 국제기구 등이 공식적

    으로 간여하는 제1트랙의 방법보다는 개인이나, 해당 국가의 사회단체와 국제

    적 NGO 등이 비공식적으로 관여하는 소위 제2트랙의 방법이 더 효율적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Pruitt and Kim 2004, 211). 이러한 갈등이 장기화된 국

    가는 현재 물리적인 폭력행사는 중단되었다 하더라도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갈

    등 요인들이 해소되지 않았기에 언제 또 갈등이 분출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

    러므로 이러한 내부 갈등을 화해(reconciliation)하는 것이 적극적인 평화를 이

    끌어내는 지름길이다.

    갈등 당사자 간에 화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수단과 방법이 있고 그 내용도 매

    우 다양할 수 있지만, 다음의 두 가지 항목은 공통적이다. 첫째, 화해가 이루어

    지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한

    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희생자에 대한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둘째, 갈등 당

    사자 간에 과거의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한 반성과 사과 및 이를 용서함으로써

    서로 간에 새로운 인간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즉, 화해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

    는 장소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적극적인 평화를 모색하는 것이 화해의 궁

    극적 목표이다(Jeong 2005, 155-158, Ramsbotham et al. 2005, 231-237).

    과거의 폭력적인 갈등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대표적인 수단이 진실규명위원

    회(Truth Commission)를 구성하는 것이다.7) 진실규명위원회의 궁극적 목표는

    과거의 잘잘못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배상과 보상을 함으로써 과거를

    접고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국가통합을 이루는 것에 있다. 이러한 과업을 달성

    하기 위하여 진실규명위원회는 청문회를 실시하여 과거에 행해진 참혹한 상황

    에 대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규명하여야 한다. 희생자와 가해자의 확인과 고문,

    살인, 행불자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확인 작업을 통해 왜곡되

    7) 1974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약 24개의 진실규명위원회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아르헨티나, 칠레,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남아공 등이다. 이러한 진실규명위원회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국가통합을 달성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으나 소수의 경우에는 아프리카의 부룬디

    (Brundi)와 같이 갈등당사자 간의 불협화음으로 진실규명위원회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해체된 경우도 있다(Jeong 2005, 174).

  • 12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 12 -

    었거나 과장 또는 축소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야 한다. 또한 희생자들이 과거

    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소명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주어

    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희생자들의 심리적인 상처에 대한 치료에 힘씀

    으로써 이들의 화와 분통함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 이러한 증언들

    을 확인하여 공식 기록으로 채택하고 이에 대한 전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하도

    록 해야 한다.

    진실규명위원회의 결정에 따라서 다음 단계인 정의 구현이 시작되는 것이다.

    가해자의 처벌, 희생자에 대한 보상,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저지른 국가 기관들,

    특히 군, 경찰, 정보기관의 개혁이 수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규명위원회

    는 과거와 같은 불행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적, 체제적 개선방향을 제시

    하여야 한다. 즉, 진실규명위원회는 실질적인 법집행기관이라기 보다는 더 광의

    의 목표인 국가통합과 사회의 화해를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기반 위에 가해자에 대한 희생자의 용서, 이들에 대한 법적인 사면 등

    이 이루어질 수 있다. 가해자에 대한 용서란 뼈저린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

    리는 것이거나 또는 부당한 사건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복수심을

    제거하는 것이다(Pruitt and Kim 2004, 220). 이러한 용서를 통해 가해자뿐만

    아니라 희생자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용서는 희생자가 아무런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가해자를 용서하는 방법과, 어떠한 조건하에서 가해자를 용서

    하는 방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쌍방의 관계 정상화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고, 가해자에게 잘못된 선입관을 심어줄 수 있으며 희생

    자의 심리적 약점을 노출시킬 수 있기에 과거와 같은 사건이 재발하는 계기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정한 조건하에서 희생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다. 즉, 가해자가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하며 희생자에게 적당한 보상이 이루어진 후에 용서가 따르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이다.

    화해의 마지막 단계가 바로 적극적인 평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앞에서 본 세

    가지의 화해조건이 과거사건에 대한 것이라면 적극적인 평화의 모색은 미래를

    향한 것이다. 내전과 같은 폭력적인 갈등을 겪은 국가는 그 상처가 깊기에 갈등

    당사자 간에 새로운 인간관계의 설정과 국가통합을 이루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

  •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13 -

    른다. 즉, 화해 자체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화해를 하지 않을 경우 한

    발도 미래를 향하여 전진할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장기

    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화해밖에

    없다.

    IV. 레바논 갈등의 근원과 전개과정

    1. 건국 이후부터 내전까지

    1975년 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레바논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이

    루었다. 뿐만 아니라 레바논은 중동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로서도 자리매김

    을 했다. 그러나 1990년까지 15년간의 내전을 겪으면서 레바논은 이러한 호칭

    이 무색할 정도로 동족상잔의 길을 걸었으며 경제가 붕괴되고 대부분의 사회

    기간시설이 파괴되었다. 또한 장기간의 내전으로 많은 수의 국민이 고국을 떠나

    게 되었다. 그 결과 타국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레바논의 붕괴 원인에 관한 연구

    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Salibi 1988, O'Ballance 1998, Rubin 2009). 표면상

    으로는 평화와 안정을 누리는 것 같았지만 그 내면에서는 갈등이 장기간 누적

    되어 왔으며 이것이 1975년에 내전이라는 형태로 폭발하였다. 그러면 무엇이

    레바논을 이러한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레바논의 건국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레바논은 제2차 세

    계대전 기간인 1943년 프랑스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하면서 종파별로 권력을

    분배하는 국민협약(National Pact)을 체결하였다. 즉, 대통령직은 마론파, 총리

    직은 순니파, 의회 의장직은 쉬아파에게 할당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권력 분배

    는 국민투표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대통령이던 기독교 마론파의 알-쿠리

    (Beshara al-Khoury)와 순니파 수상인 알-솔(Riyad al-Solh) 간의 구두합의

    에 의하여 이루어졌다(Salibi 1999, 187; Saadeh 2007, 14-15, 박찬기 2012a,

  • 14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 14 -

    4). 이들의 협상은 그 당시 프랑스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서두르기 위한

    한 방편이었지 이러한 제도를 영구적으로 지속할 계획은 아니었다(Kerr 2006,

    20). 또한 그간 마론파에 위축됐던 알-솔 수상은 독립 후 마론파가 순니파에게

    그들과 동등한 대우를 보장한다면 시리아와 통합을 포기하고 마론파에 협조하

    겠다고 한 것이다. 즉, 여러 종파로 분리된 그 당시 레바논의 현실을 감안하여

    독립을 앞당기기 위한 방편으로 권력분점형(consociational model) 정치제도를

    선택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권력분점형 정치체제를 레바논 지도자들이 자신의 정치, 경제

    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영구화한 것이다. 레바논의 권력분점형 정치제도는

    다양한 종파가 존재하는 사회를 통합하고 조화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만 많은 문제도 수반하게 된다. 가장 두드러진 문제는 유연성이 부족하고 중앙

    정부의 효율성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즉. 사회의 변화에 따른 국가조직의 개편

    을 저해하기에 정치체제가 경직되고 적응력이 둔화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초기의 권력분점형 정치제도는 다수 국민들이 원하던 제도가 아

    니라 소수의 정치 지도자에 의하여 임의적으로 결정된 사항이다. 그 당시 절대

    다수의 무슬림과 많은 기독교인은 시리아와 통합된 단일 국가를 원하고 있었으

    나 알-쿠리대통령은 마론파의 권력을 최대화하고자 하였고, 알-솔은 순니파의

    권리를 보장받는 조건에서 양자가 종파 간의 권력분배에 합의한 것이다. 그러므

    로 권력분점형 정치체제는 다수 국민의 의사에 반할 뿐만 아니라 마론파와 순

    니파의 입장을 대변할 뿐 쉬아파와 기타 소수 종파의 이익은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8) 이러한 태생적인 결함을 가진 권력분점형 정치체제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유발하게 되었고 이것이 폭발한 것이 1958년의 제1차 내전이다,9)

    8) 그 당시 레바논에서 인정된 종파는 17개로 다음과 같다. 순니, 쉬아, 알라와이트, 드루즈 등 4개의

    이슬람 종파와 아시리아 기독교, 시리아 천주교, 시리아 정교, 칼데아(Chaldeans) 천주교, 마론파,

    로마 천주교, 그리스 천주교, 그리스 정교, 아르메니안 천주교, 아르메니안 정교, 복음주의 및 기타

    소수 기독교 종파를 하나로 하여 총 12개의 기독교 종파와 레바논 유대인 등 전체 17개 종파이다.

    1990년 제2차 내전 종결 후 콥트 종파가 추가되면서 현재 총 18개의 공식적인 종파가 있다

    (Norton 2007, 11-12; 박찬기 2012a, 11).

    9) 1958년 레바논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내전을 겪었다. 마론파 대통령 샤몽(Camille Nemr

    Chamoun)이 친 서방정책을 표방하고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재선을 꾀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범

    아랍민족주의 세력이 국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 당시는 범아랍민족주

    의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로 같은 해 이집트와 시리아는 합병하여 UAR(United Arab Republic)을

  •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15 -

    그러나 제1차 내전은 아랍민족주의의 영향력이 지배적인 원인이었고 내부

    갈등의 영향력은 비교적 미비한 편이었다. 또한 냉전이 고조되던 시기이기에 미

    국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조속하게 마무리되었다. 문제는 1975년의 제2차 내전

    이다. 권력분점형제도로 인한 내부 갈등이 누적되어 폭발한 것이다.

    권력분점형 정치체제는 근본적으로 유연성이 부족하기에 사회경제적 변화와

    외부세력의 영향에 대응하기에 문제점이 많다. 여러 종파로 구성된 레바논 같은

    국가는 중앙정부의 힘이 약하기에 최소한의 정부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권력

    분점형이 적당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기본적인 정부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최

    소한의 응집력 있는 정부가 또한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가 권력분점형

    의 태생적인 딜레마이다(Hudson 1988, 224-239).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면

    서 그동안 누적되었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체제의 개혁에 대

    한 요구가 급증하였으나 권력분점형 정치체제의 유연성의 결여로 이러한 요구

    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내면에 그간 각 종파 간의 상이한 인구증가와 비

    교적 온건하던 소수 종파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되면서 이들의 정치의

    식을 고취시키는 민중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10) 독립 당시는 마론파가 여

    러 기독교 종파를 대표하였고 이슬람 종파에서는 순니파가 대표 격이었다. 그러

    건설하였고, 이라크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파이잘(Faisal bin Hussein)이 건국한 하쉬미트

    (Hashimite)왕국이 붕괴되었다. 이 내전을 종식하기 위하여 미군 1만 5,000명이 수도 베이루트에

    상륙했다(박찬기 2008, 200).

    10) 이러한 민중운동의 대표적인 사례가 무사 알-사드르(Musa al-Sadr)에 의한 쉬아인들의 정치의

    식고취 운동이다. 무사는 1928년 이란의 꼼(Qum)에서 쉬아성직자(Ayatollah Sadr al-Din

    al-Sadr)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 중등학교를 고향에서 마치고 그는 테헤란 법정대학(Faculty of

    Law and Political Economy)에서 수학하였으나 부친의 권유로 이슬람율법을 공부하는 것으로 변

    경하였다. 그 결과 귀향하여 이웃에 있는 종교학교에서 수학했으나 1953년 부친의 사망 이후 다음

    해에 이라크의 나자프(Najaf)로 이동하여 알-학킴(Muhsin al-Hakim)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는

    1957년 처음으로 그의 조상(고조부가 레바논 출신)의 모국인 레바논을 방문하였다. 1958년 남부

    레바논 티이르(Tyre)의 쉬아성직자(al-Sayyid Abd al-Husain Sharaf al-Din)가 사망하자 그 고장

    쉬아인들로부터 그를 대신하기 위하여 초청을 받았다. 그 결과 그는 1959년에 티이르로 이주하게

    되었다. 무사는 그 당시 쉬아인들의 열악한 생활 환경을 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민중운동을

    시작하면서 청년들을 위한 직업훈련원도 설립하였다. 특히 쉬아파의 종교행사인 아슈라(ashura)를 활성화하여 그들의 소속감과 정체성 확립에 적극 노력하였다. 1967년에는 쉬아파 출신 국회의원들

    을 중심으로 ‘쉬아최고위원회(Supreme Shia Council)'를 창설하였으며, 1973년에는 '피억압자들의

    운동(harakat al-mahrumin: Movement of the Deprived)'을 전개하였다. 내전 초기인 1975년 7월에는 쉬아인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쉬아민병대인 아말(AMAL: afwaj al-muqawama al-lubnaniya)을 결성하였다(Ajami 1986; 박찬기 2008, 210-213).

  • 16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 16 -

    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기타 기독교 종파에서도 마론파의 독주를 염려하게 되었

    고, 이슬람 종파에서도 드루즈파나 쉬아파에서는 기존의 순니파가 이들을 대표

    해온 데 대하여 불만이 고조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각 종파 간의 갈등이 표면

    화되는 과정에서 1970년 9월(Black September) 요르단에서 유입된 팔레스타

    인 게릴라들이 이러한 갈등의 가속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레바논은 1975년

    장기간의 내전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당시 레바논의 중앙정부가 제대로 기능만 하였다면 내전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75-76년의 상황은 처음 사소한 마찰에서 시작하여 점차

    악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1975년 4월 13일 베이루트의 한 교회 주변에

    서 기독교 팔랑헤대원과 팔레스타인 민병대 간의 마찰로 팔레스타인인 1명과 3

    명의 팔랑헤대원이 사망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이 15년간의 내전의 시발점이다

    (O'Ballance 1998, 1-2). 중앙정부가 적극 노력만 했어도 초기에 충분히 진압

    할 수 있는 문제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당시 레바논 중앙정부는 그러한

    능력조차 없을 정도로 취약하였다. 이와 같은 무정부상태는 각 종파의 지도자들

    이 그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종파원들을 선동하고 무력행사를

    자행할 수 있는 충분한 정치적인 공간을 부여하였다. 1975년의 레바논 내전은

    권력분점형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내전 초기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특히 마론파와 순니파의 갈등이었으나 시

    간이 경과하면서 기독교와 무슬림의 각 하부 종파 간에도 전투가 진행되었다

    (O'Ballance 1998, 61-97). 갈등이 악화되면서 종파중심의 민병대 활동이 더

    욱더 가속화되고 중앙정부의 붕괴와 인종청소식의 전투행위는 각 종파를 더욱

    더 밀집시켰다. 그 결과 종파를 떠나서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기에

    종파주의는 더욱더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15년간의 내전으로 약 17만 명이 사

    망하고 30만 명이상이 부상을 당하였다. 더욱이 내전 기간인 1978년과 1982년

    두 차례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레바논침공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향후 레바

    논정국의 핵심이 된 헤즈볼라가 1982년 창설되었다(Saad-Ghorayeb 2002,

    Hamzeh 2004, 박찬기 2008, 215-222).

    레바논 내전 종식 협정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아랍연맹의 적극적

    인 중재와 시리아, 프랑스 및 미국의 협조 하에 1989년 9월 30일 사우디아라비

  •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17 -

    아의 휴양도시인 타이프(Taif)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의 지원 하에 1975년 내전

    시작 후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레바논의회 의원 62명이 모여 협의한 결과 다음

    달 10월 22일 내전 종식에 합의했다.11) 15년간의 레바논 내전을 종식하는 이

    협정을 이곳의 이름을 따서 타이프협정(Taif Agreement/Document of

    National Understanding)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문제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레바논 내전의 근본적인 원인이 권력분점형 정치체제 때문인데 타이프협정에서

    이 제도를 타파하지 못하고 이를 다시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레바

    논은 불행하게도 고질적인 정치, 사회, 경제적 갈등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

    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2. 타이프협정부터 도하협정까지

    타이프협정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과 부정적인 입장이 혼재한다. 긍정적

    인 입장을 취하는 자들은 타이프협정이 그간 인구수에 비하여 비교적 소외되었

    던 종파, 특히 쉬아파의 의석을 증가하면서 이들의 정치적인 불만을 해소하였다

    는 주장이다(Kerr 2006, 161). 그러나 부정적인 자들은 타이프협정이 의석 수

    정으로 그간 누적되었던 정치적인 불만을 해소시켰다고 하지만, 이는 현실과 차

    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레바논의 근본적인 문제인 종파 간 권력분점제도를 재

    도입한 것은 국가통합을 위한 중요한 기회를 상실했다는 주장이다((Makdisi

    2004, 80-83). 이러한 타이프협정은 1985년 12월 레바논민병대(Lebanese

    Forces), 왈리드 쥼불라트(Walid Jumblatt)가 이끄는 진보사회주의자당

    (Progressive Socialist Party), 나비 베리(Nabih Berri)의 아말(Amal) 간의 3

    자 협정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Kerr 2006, 150-151).

    타이프협정에서 가장 권한이 증가한 단체는 쉬아파이다. 아래〈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쉬아파는 타이프협정으로 인하여 의회에서 8석의 증가로 총 27

    11) 내전 전인 1972년의 총선에서 선출된 총 99명의 의회 의원 중 이때까지 생존한 의원이 62명이

    었음(Krayem 2012, 8), http://ddc.aub.edu.lb/projects/pspa/conflict-resolution.html(Search:

    2013.3.19).

  • 18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 18 -

    석이 되면서 순니파와 동등한 지위에 올랐다. 이에 비하여 마론파는 오직 4석의

    증가뿐이다. 이러한 3종파의 의석 배분은 그간의 각 종파의 인구증감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정확한 통계에 의한 것이 아니다. 레바논은 전 세계

    적으로 특이하게 1932년의 공식적인 인구통계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는 각

    종파들이 인구증감에 대한 정치적 불이익을 두려워하여 공식적인 인구조사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바논의 인구통계는 엄밀한 기준에서는 모두 추

    측에 불과하다. 각 종파 간의 출생신고 수, 취학인구, 사망자, 이민자 등을 참고

    하여 측정하고 있다.12) 이러한 기준에 준하면 마론파와 순니파의 인구가 감소

    하였으며 이에 반하여 쉬아파가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

    또한 정확한 통계는 아니다. 그러므로 타이프협정이 그간의 인구증가비례에 따

    라 의석을 배분하였다고 하지만 이러한 배분 또한 시간이 경과하면 또다시 정

    치적인 불만을 가지고 올 것이다.

    타이프협정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본 종파가 마론파이다. 비록 의석은 4석이

    증가하였지만 마론파에 할당된 대통령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었다. 대통령은 이

    제 더 이상 국군통수권자가 아니고, 의회해산권도 없으며, 수상을 임명하고 해

    임할 권한도 상실했다. 이러한 권한이 모두 내각위원회로 이관되었다. 그 결과

    순니파가 차지하는 총리의 권한이 대폭 증가한 것이다. 즉, 레바논 대통령은 이

    제는 내각과 의회의 중재자 정도의 권한에 머물게 되었다. 이러한 타이프협정에

    마론파가 합의한 것은 그들이 결과적으로 내전에서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며,

    12) 물론 공식적인 인구통계가 없기에 정확한 인구수를 알기에는 불가능하지만, 출생신고, 취학학생,

    사망자 등의 통계로 볼 때에 무슬림이 60%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다(Farha 2009,

    87-88. 박찬기 2012a, 16). 그러므로 타이프협정은 현실적인 인구 구성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또

    한, 마론파가 차지하는 의회 의석이 타이프협정으로 인하여 기존의 30석에서 34석으로 증가하였

    다. 마론파는 독립 당시에 가장 인구수가 많았으나 그간 해외이주 및 저출산으로 인하여 현재 순

    니파나 쉬아파보다 적은 수인데도 불구하고 최대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 레바논에서 쉬아

    파가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신빙성이 있다. 한편 최근의 Statistics

    Lebanon(베이루트 소재 연구기관) 자료에 준하면 레바논 총인구 약 408만 명 중 무슬림이 약

    59%로 이 중 순니파와 쉬아파 인구가 각각 27%이고 드루즈가 5%이며, 기독교는 총 41%이다. 이

    중 마론파가 21%, 그리스 정교가 8%, 그리스 천주교가 5%이며 나머지는 기타 소수 기독교 종파

    가 차지하고 있다(http://en.wikipedia.org/wiki/Demographics_of_Lebanon, Search: 2013.4.23).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타이프협정은 과거의 종파주의를 그대로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레바논 정

    치불안의 근본적인 원인인 인구수에 비례하지 않은 불평등한 의석을 분배한 것이고, 이는 미래에

    또 다른 정치적 불안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19 -

    종파 내전 전 의석타이프협정 후

    의석증감

    기독교 종파

    마론파 30 34 +4

    그리스정교 11 14 +3

    그리스천주교 6 8 +2

    아르메니안정교 4 5 +1

    아르메니안천주교 1 1 0

    프로테스탄트 1 1 0

    소수기독교 1 1 0

    소계 54 64 10

    이슬람 종파

    순니 20 27 +7

    쉬아 19 27 +8

    드루즈 6 8 -2

    알라위 2 +2

    소계 45 64 +19

    합계 99 128 +29

    시간이 지체될수록 협상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즉, 타이프협정

    은 내전이라는 폭력적인 갈등을 관리(conflict management)하는 수준이지 진

    정한 갈등 화해의 방법은 되지 못하였으며 미래에 또 다른 갈등을 조장하는 원

    인을 제공하고 있다.

    〈표-1〉레바논 의회 종파별 의석 배분현황

    자료출처: Kerr 2006, 161; 박찬기 2012a, 15.

    1990년 내전 종식 후 레바논은 1992년 총선을 실시하여 의회와 내각을 갖

    추고 전후 복구사업에 전념하였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라피크 하리리(Fafik Hariri)가 수상(재임 기간: 1992-1998, 2000-2004)으로

    취임하면서 그의 건설회사가 앞장서서 내전으로 파괴된 베이루트 중심가를 빠

  • 20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 20 -

    른 속도로 재건하였다. 이와 같이 평화와 안정이 정착되는 것 같았으나 2005년

    2월 14일 하리리가 암살되면서 레바논에서는 또다시 앞을 내다보기 힘든 정치

    적 불안이 시작되었다.13) 암살사건 직후 하리리의 지지 세력은 암살배후로 시

    리아의 바샤르(Bashar al-Assad)정권을 지목하면서 대규모 반시리아 궐기대회

    를 거행하였다. 이에 반하여 헤즈볼라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은 3월 8일 친시

    리아 궐기대회를 거행하면서 맞불을 놓았다. 이에 분개하여 3월 14일 베이루트

    에서 백만 명이 넘는 반시리아 시민이 시위에 가담하면서 그의 암살에 대한 진

    상파악을 촉구하고 나아가 시리아군의 철수와 레바논의 주권회복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양대 세력이 곧 3/8그룹, 3/14그룹으로 명명되면서 향후 레바논

    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다. 특히 3/14그룹의 지도자는 암살된 라피크 하

    리리의 아들 사아드 하리리(Saad Hariri)였으며 그는 2009년 수상의 자리에 올

    랐다.

    또한 4월 UN안보리에서는 하리리 암살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만

    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와 같이 국내﹡외적인 압력이 높아가자 시리아는 1976년부터 레바논에 주둔하면서 실질적인 통치세력으로 군림하여온 시리아군의 철

    수를 단행하였다. 그 결과 4월 27일 레바논국민들은 30년 가까이 레바논에 주

    둔하였던 시리아군의 철수를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백

    향목 혁명(Cedar Revolution)’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2006년 7월에는 이스라엘과 헤즈볼라간의 전쟁이 34일간 이어 지면

    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초래했다. 전쟁의 원인은 명목상으로는 이스라

    엘이 헤즈볼라가 납치한 2명의 이스라엘병사를 구하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변수들이 연관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2000년 레바논 남부에서 철수하였

    으나 헤즈볼라는 이곳에서 계속적으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스

    라엘은 헤즈볼라의 군사력이 더 이상 증가하기 전에 그들의 전투능력을 파괴

    하기를 원했다.14) 그러나 전쟁결과는 예상과는 차이가 많았다. 이스라엘이 한

    13) 2011년 6월 30일 UN레바논특별법원의 검사가 동 법원의 판사에게 제출한 기소장에 준하면 전

    수상 라피크 하리리의 암살에 4명의 헤즈볼라대원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중 가장 주목할 인물이

    무스타파(Mustafa Badreddine, 50세)이다. 무스타파는 2008년 시리아에서 암살된 헤즈볼라 작전

    사령관 이마드 무그니예(Imad Mughniyeh)의 처남으로 현재 헤즈볼라 작전사령관이다. 현재 추측

    에 의하면 무스타파가 암살계획을 총지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머지 3명은 Salim Ayyash, Asad

    Sabra, Hasan Ainessi 이다(Daily Star, June 30; 박찬기 2012b, 116).

  •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21 -

    달이 넘게 폭격을 하고 지상군까지 투입했지만 헤즈볼라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로케트포(Katyusha rockets)로 북부이스라엘을 공격하였다. 국제

    적인 압력에 의하여 이 전쟁은 34일 만에 종결되었지만 승자는 이스라엘이 아

    니라 헤즈볼라였다.15) 헤즈볼라는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공격에도 굴복하지 않

    고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한 결과 레바논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전 이슬람

    세계에서 위상이 높아졌다. 이에 반하여 이스라엘과 미국의 위상이 하락하고 이

    란의 영향력이 더욱더 증가하는 조건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건을 활용하

    여 헤즈볼라는 국내에서 기존의 영향력을 더욱더 증가하고자 친서방, 친사우디

    아라비아 편인 순니파 출신인 푸아드 시니오라(Fouad Siniora)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2007년 1월 23일 총파업을 선포해 정국이 또다시 불안하게 되었다.

    이 같은 불안한 정국이 2008년 5월 헤즈볼라와 레바논정부 간의 준 내전상

    태로 폭발하였으며, 1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었다(Daily Star, May 9,

    2008). 시작은 헤즈볼라가 지지하는 노동조합의 파업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다

    른 이유들이 있었다. 2008년 5월 6일 레바논정부는 헤즈볼라의 통신시설과 베

    이루트공항에 설치된 헤즈볼라 감시카메라를 폐쇄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베

    이루트공항 경비대 책임자인 헤즈볼라 지지자 슈콰이르(Colonel Wafiq

    Shuqayr)대령을 해고하였다. 이러한 시리오라정부의 일련의 조치를 헤즈볼라

    는 이들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대정부 무력행사를 감행하게 되었다.16)

    14) 미국도 국제테러단체로 지명되어 있는 헤즈볼라조직의 파괴를 원했고 이를 통하여 레바논에서

    이란의 영향력을 일축하기를 원했다. 또한 이란의 무기와 자금으로 무장한 헤즈볼라의 능력을 테

    스트하기 위한 저의도 있었다. 2000년 이스라엘군이 남부 레바논에서 철수한 이후에도 헤즈볼라

    는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그곳에서 계속 이스라엘과 투쟁을 하였다. 또한 헤즈볼라는 이란과 시

    리아로부터 무기와 자금을 계속적으로 지원받아 왔으며 남부 지역에서는 그들의 기지를 요새화하

    였다. 이와 같이 헤즈볼라의 세력이 증가하자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들의 세력이 확장되기 전에

    소탕작전을 결심하였다.

    15) 이 전쟁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득보다 실이 컸으며 국제적으로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반면 헤

    즈볼라는 대이스라엘항쟁의 표본이 되었으며 그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전 이슬람세계에서 위상

    이 한층 고조되었다 (Cordesman 2007, 박찬기 2012b, 105-107).

    16) 헤즈볼라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대이스라엘무력투쟁 단체이다. 그러므로 무력투쟁을 성공

    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서는 비밀이 보장되는 통신시스템이 필수적이다. 레바논의 일반적인 통신

    시스템을 사용할 경우 도청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2009년 헤즈볼라대원인 후세인 하이더

    (Hussein Hayder: 당시 헤즈볼라 대외담당국장, 현 의회 의원인 Nawaf al-Musawi의 보좌관)와의

    인터뷰에서, 자체통신시스템의 중요성에 대하여 질문하였을 때 그는 그것은 군사작전에서 가장 상

    식적인 조건이라고 답했다. 자체통신시스템도 도청될 수 있는데 누가 일반통신시설을 이용하여 무

    력투쟁을 전개하겠는가? 라고 응답하였다. 그러므로 레바논정부가 헤즈볼라의 자체통신시설을 파

  • 22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 22 -

    그 결과 2008년 5월 8일 헤즈볼라대원들이 순니파의 주거주지인 서부베이루트

    를 점령하였다. 3/14그룹의 대표자인 사아드 하리리17)의 정당(al-Mustaqbal

    Party)사무실이 점령당했으며 이 정당이 운영하는 TV 및 라디오(al-Sharq) 방

    송국도 폐쇄되었고, 정당의 기관지(al-Mustaqbal)를 발행하는 빌딩도 불태워졌

    다. 뿐만 아니라 하므라(Hamra) 지역에 있는 사아드 하리리와 드루즈파의 지도

    자 왈리드 쥼불라트(Walid Jumblatt)의 주거지가 포위당하면서 베이루트는 내

    전상황을 방불케 하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서부베이루트뿐만 아니라 드루즈

    파의 주거주지인 슈프(Chouf)산악지대와 알레이(Aley) 지역에서도 헤즈볼라대

    원과 드루즈민병대 간에 마찰이 있었다. 다행히 헤즈볼라, 아말 및 드루즈 지도

    자들의 협상으로 많은 희생자 없이 시태가 수습되었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

    큰 전투로 이어질 뻔했다(Alami 2010).

    이 같이 상황이 악화되자 2008년 5월 20일 카타르의 중재로 도하(Doha)에

    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 협상의 결과는 공석인 대통령의 선출, 연합내각 구성,

    2009년 의회선거를 위한 선거법 개정 등이었다. 그 결과 2008년 5월 25일 레

    바논의 군사령관 미셸 술레이만(Michel Suleiman)이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

    되었으며 시니오라(Fouad Siniora) 수상이 유임되면서 연립내각을 구성하게 되

    었다. 도하협정에 의하여 그 당시 야당세력을 구성하는 헤즈볼라, 아말 및 자유

    애국운동당(Free Patriotic Movement)이 내각의 30석 중 11석을 차지하게 되

    었다. 즉, 야당이 중요한 내각의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1/3이상의 내각의석을

    확보한 것이다. 이 결과 도하협정에서 가장 실리를 챙긴 단체가 야당세력, 특히

    헤즈볼라이다. 그 이유는 헤즈볼라를 포함한 야당세력이 내각의 2/3 이상의 찬

    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국가중대사에 거부권행사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찬기 외 2009, 24). 즉, 그간의 끈질긴 대정부투쟁으로 헤즈볼라를 비롯한

    괴하는 것은 헤즈볼라의 대이스라엘무력투쟁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박찬기 외 2011,

    43).

    17) 사아드 하리리는 암살된 전 수상 라피크 하리리와 그의 이라크 출신 전처 사이에서 1970년 4월

    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를 졸업한 뒤 그의 부친이 설립한 중동 최대건설

    회사인 사우디아라비아 소재 오게르(Oger)의 경영을 담당하면서 사업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주로

    사우디에 거주하였으며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2005년 부친이 암살되면서 레바논의

    반시리아 백향목혁명을 이끌었으며 2005년 총선에서 의석을 가장 많이 차지한 3/14그룹의 지도자

    로 부상했다. 사아드 하리리는 시리아 명문가의 여성과 결혼하였으며 그의 취미는 쿠바 시가를 즐

    기고 오토바이(Harley-Davidson)를 타는 것이다.

  •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23 -

    야당은 결국 그들이 원했던 국정전반에 걸친 거부권을 획득하면서 레바논정국

    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헤즈볼라의 무력투쟁에는 많은

    후유증이 수반되었다. 쉬아파를 제외한 레바논의 대부분의 국민들은 헤즈볼라

    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으며 그들의 무기도 결국은 대이스라엘투쟁뿐만 아니라

    자국 국민들에게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많은 순니파 무슬

    림의 헤즈볼라에 대한 악감이 증가하게 되었으며, 헤즈볼라의 무장해제에 대한

    여론이 급증하게 되었다.

    3. 2009년 총선부터 현재까지

    이러한 정국 하에서 2009년 총선이 가까워지면서 헤즈볼라를 중심으로 한

    야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뉴스가 많이 이어졌으나 결과는 여당인 3/14그룹의 승

    리였다.18) 총 의석으로 보면 2005년의 총선결과와 매우 비슷하다. 2005년에는

    3/14그룹이 69석, 야당인 3/8그룹이 57석 그리고 무소속이 2석이었다. 이번 선

    거에서는 3/14그룹이 71석으로 2005년보다 2석 증가하였고, 3/8그룹은 57석

    으로 2005년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번선거에서 3/14그룹에 소속된 정당수가

    많아졌으며, 특히 무소속후보가 15석을 차지하였다. 즉, 사아드 하리리(Saad

    18) 그러면 왜 야당이 총선에서 패배하였을까? 야당이 서방국가들의 위협에 못 이겨서 승리를 포기

    한 것인가? 아니면 레바논 국민이 헤즈볼라가 이끄는 야당이 승리할 경우 경제적인 고통을 감내할

    수 없어서 여당후보에게 투표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여러 답변이 있을 수 있다. 우선, 헤

    즈볼라를 연구하는 아말 사아드-고라예브(Amal Saad-Ghorayeb)는 헤즈볼라가 고의로 총선승리

    를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Christian Science Monitor, June 7, 2009; New York Times, June 9, 2009). 그 이유는 헤즈볼라가 승리할 경우 서방국가들이 반헤즈볼라정책을 추진할 것이고, 최악의 경우 하마스의 전철을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헤즈볼라가 정권을 잡

    아도 레바논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에, 야당으로 있으면서 자체 영향력을 증

    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필자가 2010년 2월 헤즈볼라 대

    외담당국장, 아마르 알-무사위(Ammar al-Musawi)와 인터뷰한 결과에서 나온 그의 주장은 이와

    상반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레바논은 18개 종파로 구성된 국가이고 각 종파는 각자의 주거지와

    지지자를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론파와 순니파는 레바논에서 가장 오래된 기득권자들이기

    에 야당이 승리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수많은 해외거주 기독교인들

    이 총선에서 투표하기 위하여 귀국하였다고 주장하였다(총선을 위하여 일시 귀국한 해외거주 레바

    논인이 약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즉, 야당이 승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고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는 주장이다(박찬기 외 2011, 48).

  • 24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 24 -

    Hariri)가 이끄는 3/14그룹이 비록 승리했지만 이 그룹의 결속력이 약화되는 것

    을 짐작할 수 있다.

    총선 이후 헤즈볼라를 중심으로 한 야당의 계속된 내각구성 방해공작으로 레

    바논정부는 장기간 표류상태에 있었다. 내각구성에 있어서 야당의 가장 큰 관심

    사는 헤즈볼라의 무장유지를 보장받는 것, 전 수상 라피크 하리리 암살사건을

    수사하는 레바논특별법원에 대한 지원 중단 및 야당의 거부권 유지 등이었다.

    특히 나스랄라는 ‘의회 다수가 국민 다수는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

    의 주장은 야당이 비록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전체 투표수

    로 보면 여당보다 약 10만 표를 더 받은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Daily Star,

    June 10, 2009). 또한 그는 레바논특별법원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기획한 것이

    기에 비합법적이고 주권침해라는 것이며. 거부권은 도하협정에서 타결된 것이

    기에 존속되어야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 중 가장 심각한 문제가 거부권이었

    다. 여당에서는 이번 정부에서는 야당에 거부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절대적이었다. 그 이유는 도하협정 이후 야당의 거부권 때문에 정국이 계속 불

    안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치국면을 돌파하고자 사우디아라비아가 나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Abdullah)국왕은 2005년 취임 후 처음으로 2009년 10월 7일 시리아를

    방문하여 레바논 문제에 대하여 시리아대통령과 회담을 하였다. 이러한 외적

    인 지원 덕분에 총선 후 4개월만인 11월 9일 내각이 구성되었다.19) 그러나

    2011년 1월 12일 헤즈볼라를 포함한 야당소속 각료 10명과 대통령지명 각료 1

    명 등 총 11명의 각료가 사임하면서 레바논의 연합정부가 14개월 만에 붕괴되

    었다. 이들의 사임 이유는 사아드 하리리총리가 UN이 중심이 된 레바논특별법

    원(Special Tribunal for Lebanon: STL)을 계속 지원할 뿐만 아니라 수사에

    협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헤즈볼라를 비롯한 야당은 그동안 계속적으로 레바

    19) 내각 구성은 초기에 협의한 것과 같이 15-10-5석 방식이었다. 여당이 15석, 야당이 10석, 대통

    령이 추천하는 5석으로 구성되었다. 야당에서는 아운의 FPM가 5석, 헤즈볼라 2석 그리고 아말이

    3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적극적인 야당 편은 아니지만 드루즈(Druze)파의 왈리드 쥼불라트가 이끄

    는 PSP(Progressive Socialist Party)도 내각의 3석을 차지했다. 문제가 되었던 통신부장관에는

    FPM소속인 차르벨 나하스(Charbel Nahhas: 그리스천주교)가 임명되었으며 아운장군의 사위 바실

    (마론파))은 자원부장관(Minister of Energy)에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총선 후 135일 만에 많은

    유여곡절을 겪은 후 연합내각이 겨우 구성되었다.

  •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25 -

    논특별법원이 주권침해이며 불법이기에 이 법원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야 된다

    고 주장하여 왔다.20) 그러므로 이러한 연합정부의 붕괴는 어느 정도 예측되어

    왔다

    2011년 1월 17일 UN레바논특별법원의 검사 다니엘 벨레마레(Daniel

    Bellemare)가 라피크 하리리 암살에 대한 수사결과를 상기 법원의 판사에게 전

    달하자 헤즈볼라와 아말대원을 중심으로 한 야당세력이 베이루트 시내에서 집

    단 시위에 돌입하면서 레바논은 또다시 내전이 시작되는 것과 같은 공포분위기

    에 휩싸였다.21) 내각탈퇴와 이러한 집단시위가 소위 말하는 ‘헤즈볼라의 쿠데

    타’이다.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이제는 더 이상 여당과 타협이 없

    으며 헤즈볼라대원들의 집단시위는 하나의 작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사아드 하리리가 재차 수상이 되면 내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러한 시위로 정국이 불안한 가운데 야당에서 지지하

    는 친 시리아계의 순니파 출신 나지브 미카티(Najib Mikati) 내각이 6월 13일

    출범하였다.22) 3/14그룹은 이번 내각에 불참하게 되었음으로 헤즈볼라를 비롯

    한 야당이 중심이 된 내각이 구성된 것이다. 이로써 2011년 1월부터 시작된 헤

    20) 이러한 주장도 일리가 있다. 레바논 국내에서 전 총리가 암살당했으므로 레바논 검찰과 법원에서

    수사와 재판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내정 간섭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레

    바논 국가와 중앙정부가 취약하고, 암살 초기에는 시리정부가 개입되었다는 주장이 거의 확고하였

    기에 레바논 검찰 자체의 수사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기에 UN이 개입한 것이다. 비록 헤즈볼

    라대원이 암살을 주도하였다 하여도 시리아가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레바논에서는 2004-2008년 기간에 정치인, 언론인, 군인 및 정보요인을 상대로 12건의 암살의도

    사건이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54명이 사망하고 335명이 부상했다. 이들 암살사건의 대부분이 현

    재까지 수사가 완료되지 않고 있다(Daily Star, January 21, 2011).

    21) 1월 18일 새벽 3시부터 수많은 헤즈볼라대원들이 검정유니폼을 입고 수십 명씩 그룹을 지어 베

    이루트 서부 와 중심가를 점령하면서 레바논 국민들은 또다시 내전이 임박했다는 공포감에 젖어들

    었다. 비록 무기는 소지하지 않았지만 검정유니폼에 무전기를 휴대한 수많은 헤즈볼라대원들을 본

    국민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많은 시민들이 출근을 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했으며, 학생

    들이 조기 귀가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다행히 무력충돌은 없었지만 레바논은 또다시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었다(Daily Star, January 19, 20: Now Lebanon, January 20, 2011).

    22) Najib Mikati는 1955년 생으로 1980년 American University of Beirut에서 MBA를 수여받았

    으며 하버드대학교의 여름 계절 학기를 수료했다. 그는 내전 기간인 1982년 통신회사인

    Investcom을 그의 동생, 타하(Taha)와 함께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2006년 이 회사를 남아공의

    MTN그룹에 $5,5billion(약6조 1,500억원)에 매각했다. 2005년 2월 라피크 하리리 암살 이후 4월

    에서부터 7월까지 3개월간 임시총리를 지냈다. 현재 Najib Mikati의 MI그룹은 시리아에서 휴대전

    화 통신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남아공회사의 주식을 단일주주로서는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Young 2011).

  • 26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 26 -

    즈볼라의 레바논내각 장악이 완료된 것이다.

    그러나 3/14그룹의 불참으로 미카티 내각은 처음부터 국정을 수행하기에 문

    제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압력으로 헤즈볼라가 주장하던 대로 UN레

    바논특별법원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수도 없는 처지이었다. 또한 2011년 3월부

    터 시작된 시리아 내전으로 인하여 레바논 정국은 시리아정부 지원파와 시리아

    반군 지원파로 양분되게 되었다. 특히 헤즈볼라대원들의 시리아 내전 참여는 레

    바논의 안보에 중대한 위협을 초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각은 6월 16일로

    예정되어 있는 총선에 적용할 선거법에 대한 타협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미카티수상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13년 3월 22일 사임하게 되었

    다.23)

    현재 탐맘 살람(Tammam Salam)이 수상내정자로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

    고 있다.24) 그러나 내각의 성격과 총선에 적용할 선거법 개정안 등을 두고 양대

    진영이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어서 진통이 예상된다. 선거법 개정합의 시일이

    만료되는 5월 19일까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6월 20일로 임기가 완료

    되는 현 의원들의 임기를 연장하든지, 아니면 2009년과 같이 1960년대의 선거

    법으로 총선을 치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Daily Star, May 18,

    2013). 내각구성과 선거법 개정 문제에 시리아사태까지 겹치면서 레바논정국은

    또다시 혼미해지고 있다.

    V.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

    23) 미카티수상은 이전에도 두 번 사임의사를 밝혔다. 처음은 2011년 11월 내각에서 UN레바논특별

    법원에 대한 지원 결정이 지체될 때이고, 두 번째는 2012년 가을 경찰정보국장이 자동차 폭탄테러

    로 사망할 때이었다. 이번에 사임한 이유 중 다른 이유는 그와 동향인 트리폴리 출신 순니파 경찰

    총장(Maj. Gen. Ashraf al-Rifi)의 임기연장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New York Times, March 22, 2013).

    24) 탐맘 살람은 현재 68세로 레바논의 유력한 정치가문의 후손이다. 그의 조부는 오스만제국 시절

    의회 의원이었으며, 부친(Saeb Salam)은 1952년부터 1973년 기간에 6번 수상을 역임하였다. 그

    또한 1996년 의회에 진출하였으며, 2008년에는 시니오라내각에서 문화부장관을 역임하였으며

    2009년 총선에서 재선되었다(Christian Science Monitor, April 6, 2013).

  •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27 -

    1. 진실규명위원회(Truth Commission)의 설치 필요성

    레바논은 국토의 크기는 작지만 18개의 공식 종파가 모인 국가이다. 이들 각

    종파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정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국외에 지지 세력

    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웃한 이스라엘, 시리아 등과도 많은 갈등을 겪어왔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 거주하는 4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난민은 이러한 복잡

    하고 불안한 국내정세를 더욱더 악화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잡한 문제

    를 잠재우고 국가를 통합하기 위하여서는 국내 갈등의 화해가 시급하게 대두되

    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바논은 내전이 종식된 지 23년이 되었지만 화해를 이

    루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내적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타이프협정에서 결정한 모

    든 민병대의 해체와 무장해제가 종식되지 않았으며, 종파 간 권력분점제도를 완

    화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2005년 전 수상 하리리

    암살사건의 진상도 파악되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 사아드 하리리는 수상에서 물

    러난 후 2년이 넘게 신변의 안전을 염려하여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고 있다. 북

    부도시 트리폴리에서는 시리아의 바샤르정권을 지지하는 알라위파와 시리아 반

    군을 지지하는 순니파 간의 무력투쟁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남부 시돈에서는

    순니파 살라피스트 알-아시르의 추종세력이 헤즈볼라조직과 갈등을 겪고 있

    다. 더욱이 헤즈볼라는 시리아 국경 지역의 쉬아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바

    샤르 정부군을 지원하고 있으며 시리아 반군은 쉬아인 거주 지역에 로켓을 쏘

    고 있다. 그야말로 레바논은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정국이 계속되고 있다. 그

    러므로 이러한 위기의 상황을 벗어나고 진정한 국가통합과 적극적인 평화를 달

    성하기 위하여 가장 시급한 것이 국민화해이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국민화해를 달성하기 위한 첫 걸음이 과거, 특히 15년간

    의 내전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다. 과거와 대면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진실을 규명하지 않고는 미래를 향하여 한 발

    도 나아갈 수 없다. 1992년 남아공이 아파타이트(Apartheid)정책을 끝내고 진

    실/화해위원회를 결성하여 과거 백인통치시대의 잔혹사와 직면한 것이 국가통

  • 28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 28 -

    합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레바논은 아직까지 내전에 대한

    진실규명위원회(Truth Commission)가 구성되지 않았다. 이러한 과거의 직시를

    외면하는 것은 내전의 당사자들이 그들이 자행한 살인, 납치, 고문 등의 범죄행

    위가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People's Peacemaking

    Perspectives: Lebanon May 2012, 3). 그 결과 레바논은 내전에 대한 진실규

    명위원회 설립 대신 1991년 8월 26일 내전 당사자에 대한 전면적인 사면을 실

    시하였다(O'Ballance 1998, 213).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수많은 사상자와 3

    만 명 이상이 납치되는 등 대규모의 참사를 초래한 내전에 대한 진실 규명 노력

    이 없었다는 것은 전후 국가통합에 결정적인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다

    시 기억하고 싶지 않는 과거를 의도적으로 망각하려는 것도 과거와의 단절의

    한 수단(Jeong 2005, 157)이 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화해의 첫 걸음

    은 될 수 없다.

    과거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정의를 구현하고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그간의 고통과 희생에 대한 상처를 치료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가는 첫 걸

    음이지만, 또한 과거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들이 재발하지 않도록 잘못된 제도

    를 개선하고 그에 대한 방지책을 설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레바논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러한 제도의 개선이나 근본적인 문제의 해

    결에는 관심이 없고 그들의 정치적인 권력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는 것이 증명

    되고 있다. 그 결과 전후 트로이카(대통령, 수상, 의회 의장)는 권력을 사유화했

    고 경제적인 이익과 그들의 종파 결속에 더 많은 에너지를 집중했다. 특히 라피

    크 하리리는 내전 후 1992년 10월부터 장기간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정책의 최

    우선순위를 전 국민의 화해에 두었어야하는데 그는 오직 전후복구사업에 집중

    하면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라피크 하리리는 내전 기간 국내에 있지 않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업가로

    성장하였다. 타이프협정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하리리가

    정치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그 결과 수상이 될 수 있었다. 하리리는 레바논

    의 정치개혁은 타리프협정에서 벌써 이루어졌기에 더 이상의 개혁은 필요하지

    않으며, 단지 서로 협력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하였다

    (Krayem 1998, 16). 하리리 내각은 이원화되어 있었다. 수상을 중심으로 한 내

  • 레바논의 내적 갈등 화해 방안에 관한 연구

    - 29 -

    전 기간에 외국에 체류하던 경제 관료와 민병대 및 기존의 친시리아 정치인들

    로 구성된 각료들이었다. 하리리 그룹은 재정부와 중앙은행을 장악하면서 새로

    운 경제엘리트를 중심으로 국가재건사업에 집중하였다. 이러한 재건사업은 재

    건위원회(Council of Development and Reconstruction: CDR)가 중심이 되었

    으며 실제적인 공사는 벡탤사(International Bechtel Co.)와 하리리 집안과 연

    계된 솔리데레(Solidere)사 등이 주관하고 재원은 GCC 국가 등 외부재원이 동

    원되었다. 10년에 걸친 총공사비 $11.5 billion이 소요되는 대대적인 재건사업

    이었지만 국민통합을 위한 노력은 매우 미비했다. 베이루트중심가, 특히 네즈메

    광장 근처의 재건사업은 훌륭한 성과이지만, 이러한 사업이 오히려 빈부격차를

    더 벌리고, 기존 정치세력들이 이익을 챙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재건사업은 하

    리리그룹, 남부재건(Council of South Lebanon)은 의회 의장인 나비 베리, 이

    재민 및 난민 담당은 난민장관인 드루즈의 왈리드 쥼불라트 등이 수장이었다.

    이들의 재건사업은 서로가 협력하고 종합적인 계획 하에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독립적인 차원에서 이루어 졌다. 즉, 전후복구사업이라 하지만 과거와 같

    은 권력분점형식으로 각 파당 간에 이권이 나누어진 사업이었다. 그 결과 레바

    논은 외형적으로는 전후복구가 이루어진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국민화해에 대

    하여서는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과거의 잘못된 일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책임질 사람 없이 그냥 집단적 망각(collective amnesia)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이다.

    2006년 3월 레바논의회는 당면한 국가중대사를 논의하기 위하여 거국적인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이를 “국민 토론회(National Dialogue)”라 명명하였다.

    이 토론회의 의제를 보면, 대통령 선출, 헤즈볼라 무장해제, 시리아와의 관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만 있을 뿐 국민화해에 관한 것은 주 의제로 다루지도 않

    고 있다(Bloch-Jørgensen et al. 2006, 36-38).

    2013년 4월 12일 베이루트 시내 중심지인 순교자광장(Martyrs' Square)에

    서는 내전 시작 38주년(1975년 4월 13일)을 맞이하여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주목적은 현재까지도 행방이 묘연한 약 17,000명의 실종자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내전 동안의 범죄에 대한 일반사면이 벌써 이루어졌기에 처

    벌에 대한 염려 없이 실종자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하여 진상

  • 30 韓國中東學會論叢 第34-1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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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밝히자는 의도였다. 특히 이날에는 베이루트 메트로폴리스 시네마(Beirut's

    Metropolis Cinema)가 제작한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Nights)"의 상영이

    있었다(Daily Star, April 13, 2013). 이 영상물은 내전 당시 레바논민병대의 고

    위 간부가 15세의 아들의 행방을 몰라 수십 년을 잠 못 이룬 어머니에게 진상

    을 털어놓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내전이 끝난 지 2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수많은

    부모형제가 실종된 가족의 행방을 몰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의 요구는 가해자를 처벌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실종자의 행방을 알고자 하

    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에 대한 진상규명이 없이는 대국민화해가 이루어질 수

    없다. 이제라도 레바논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여 내전 기간에 일어

    난 일들의 진실을 규명하여야 한다.

    2. 정의 구현의 필요성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레바논은 내전 종식 후 과거사에 대한 진실규명위원회

    를 거치지 않고 1991년 모든 무장단체 지도자와 대원에 대하여 전면적인 사면

    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전면적인 사면법은 실은 내전 기간에 범죄를 자행한 현

    레바논 정부와 의회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법이다. 이러한 사면법이 없

    었으면 이들은 현재 자리에 있지 못할 사람들이다. 이러한 급조된 사면법은 그

    당시 레바논의 정치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내전에서 뚜렷한 승자가 없기에 누가

    누구에게 정의를 구현하느냐가 불명확했으며, 모든 그룹이 내전에 참여하였기

    에 이들 모두를 재판에 회부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내분을 겪은 국가의 정의 구현 사례를 연구해 보면 레바논의 정의 구현 방법

    을 찾을 수 있다. 정의 구현의 대표적인 사례로 인종 분리통치 이후의 남아공을

    들 수 있다. 남아공은 아파타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