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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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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들출판사

Page 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차 례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론 7

황돈형 삼위일체의 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33

이은주 계시현상과 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계시이해에

대한고찰 73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만유재신론 101

박도웅 피어리스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의미 133

이오갑 한국교회, 문제가 무엇인가? -한국교회에 대한

조직신학적 반성과 대안 163

김영선 예언과 신유은사에대한신학적 이해 187

박성규 신학의과제와 설교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17

한국조직신학회회칙 253

한국조직신학회편집위원회편집규정 256

한국조직신학회편집위원회투고규정 259

한국조직신학회편집위원회심사규정 267

한국조직신학회연구윤리규정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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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론1)

정홍열(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교수)

I. 여는말

성례전의 실시는 예수님의 모범과 명령에 근거한 것으로 그리스도교

의 출발부터 구원과 직결되어 강조되어 왔다. 바울도 그리스도인의 삶

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세례를 통해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으로 가르쳤고(롬 6장) 성례전의 실시는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드러

내는 가장 핵심적인 의식이요 교리였다. 초기 교부들 사이에서도 성례

전의 실시는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중요한 의식과 구원에 필수적인 요

소로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터툴리아누스나 암브로시우스 등도 모두 성

례전에 관한글을남겼다.

그러나 성례전의 이론적 체계를 완성한 사람은 단연 아우구스티누스

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표징인 성례전이라는 상

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ty

Vol. 25

Chung, Hong Yul Augustine’s Doctrine of Sacraments

Hwang, Don Hyung A Hermeneutical Meaning of the Filioque for the Truth

of the Trinitarian Revelation in the Korean Situation

Lee, Eun Joo Revelation and Horizon: Jean-Luc Marion’s Non-

Ontological Hermeneutics of Revelation

Youn, Chul Ho Classical Theism and Panentheism

Park, Do Woong Theological Meaning of ‘Poverty’ in Pieris’ Theology

Lee, O kab What is the problem of Korean Churches?

Kim, Young Seon Theological Understanding on the Gift of Prophecy and

Healing

Park, Seoung Gyu Identität der Aufgabe von Theologie und Predigt bei

Karl Barth

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7-32

1) 이 논문은 원래 한국조직신학회 기획시리즈1『교회론』의“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

과 함께 구상되었던 글이었으나 분량 관계상 나누어서 따로 기술되었으므로 이 글과

함께 필자의 졸고“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을 읽는다면 독자는 그의 교회론과 성례

전론을더 잘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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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원론을 대변한다. 물질적인 것은 보이고 사라지지만, 영적인 것은

그와반대로 변하지 않는특성을 가진다. 영적인 것은시간의 흐름에 따

라 등장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영적인 것은 영원의 차원에서 변하지

않는 유효성을 가진다. 신약성경의 표징(semeion) 역시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를 구분하는 표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배

경은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종말론적 성격이다. 몸과 영의 구분의 한 가

운데에는 인간이 아니라 전체인간과 세상을 종말론적구원으로 이끌어

가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결정적 구원행동이 있다. 표징(semeion)의

특성은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조합이 아니라 창조로부터 구원의

통일 안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구원의 기본적 사실은 죄

로 인해타락한 인간이 다시금 영적으로 상승해 나갈수 있는하나님의

구원사역이다. 첫 사람 아담은 변화하는 표징(signum)을 변화하지 않는

실재(res)의 자리로 욕심스럽게 차지하려 한 그것이 바로 그의 범죄함

이었으며 이로써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규정된 질서로부터 벗어나 표

징의 종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을 인간으로 보내심으로 범죄

한 인간으로 하여금 바른길로인도받을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의 영원

하신 말씀이 인간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이 거룩한 표징이 실행됨에 따

라 인간의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2)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신

플라톤주의적 형이상학과 신약성경적 표징이론에 근거한 종말론적 배

경 사이의 긴장이 그의성례전론의출발점을이루고 있다.3) 이로써 아우

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이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또한 성경의

구원의 진리와의 접촉점을만들어 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징적 행위 내지 의식과 우리의 구원이 실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

해서 신플라톤주의의 이론을 통해 설명해 주었다. 여기에서 그는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과 그 사물이 표현하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실재(res)

의 관계에 대해 표징(signum)이론으로 설명함으로 성례와 구원의 은혜

사이의 성례전의 신학적 근거를 구비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아우구스

티누스는 당시의 도나티스트들과의 논쟁에서 핵심 주제였던 성례의 효

력에 대해서도 후대의 교회에서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객관적인 답을

제시해 주었다.

당시의 성례전에 관련된 논쟁은 성례를 베푸는 자와 받는자의자격,

세례 이후의 범죄로 인한효력의 상실가능성 등이 제기되면서 이는자

연히 교회의 문제와 직결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례공동체인 교

회 안에는 세례를 받은자와받을자, 성찬에 참여할 자와 참여한 자 그

리고 그런 사람들로서 배교에 넘어진 자와 이긴 자들이 함께 공존함으

로 자연히 성례의 효력이 논쟁의 핵심주제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는교

회를 분열로 내몰 수도 있는 강한 폭발력을 지닌 갈등 요소였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교회를 살리면서성례의 효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답을제시함으로성례전의완성과 교회론의정립에 결정적 공헌

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글에서 그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노고의 흔

적을따라가면서그의성례전의중심사상을확인할 것이다.

I I. 아우구스티누스의표징론

아우구스티누스의 표징이론은 비교적 그의 초기 저작에서부터 등장

한다. 그의 초기 저작중 하나인『교사론』(De magistro)과 또 다른 작품

인『그리스도교 교육에 관하여』(De doctrina christina) 등에서 그는 신

플라톤주의의 이원론을 통해서 성례라고 부르는 사물들에 대한 표징론

을 전개한다. 신플라톤주의적 이원론은 물질과 영, 몸과 영, 시간과 영원

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론 9

2 ) Alexadre Ganoczy, Einfuehrung in die Katholische Sakramentlehre ( D a r m s t a d 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91), 17.

3) Josef Finkenzeller, Die Lehre von den Sakramenten im allgemsinen von der Schrift

bis zur Scholastik, Handbuch der Dogmengeschichte, Bd. I V (Freiburg: Herder,

1980),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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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말(언어)은 인간의 표징중 가장두드러진위치를 차지한다.6)

이제 표징과 실재를 구체적으로 성례전에 적용하여 보면서 이 부분

을 정리하고자 한다. 세례와 성찬은 하나님의 은혜의 실재에 대한 거룩

한 표징으로서 자신의 표징에 있어 이중구조를 가진다. 물질적 요소와

그것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구성된다. 세례와 성찬의 말씀성은 결국 양

자를 동시에 고상하게 만든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성례는 신적인

실재에 속한,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특별한 종류의 표징이다. 그는 성례

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세례와 성찬이 주님의 몸과 피를 상

징하듯이, 주님과 사도적 교훈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바와 같이 우

리가 보기에도 매우 고상하면서도 순결한 것으로 우리에게 많은 표징

대신에 단순한 표징을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쉽게 시행할 수 있도록

하셨다. 누구든지 이것을 받으면, 이 성례전이 무엇과 관련되는지를 깨

닫고 이해하게끔 했으며 이로써 육체에 갇히지 않고 영적인 자유를 숭

상하게 한다.”7)

2. 성례와말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성례와 말씀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먼저

아우구스티누스는여러가지표징중에서도말씀을 가장주도적인 것으

로 인정했다. 그에게 말씀이가장영향력 있는표징인 이유는 말씀안에

서 표현된 실재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기 자신에 관해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구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지적인 실재로, 또 표징

앞에 현존하는 현실로,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현실로 나타낸다.8) 사실

과의 관련성과 계시의 기능 그리고 의미에 근접성 등이 말씀에게 부여

되므로 다른 어떤 표징보다 말씀은 더 우월하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은

1. 표징과실재(signum et res)

아우구스티누스는표징에 대해보이는 현상 밖에서 자기 자신으로부

터 다른것을의식하게해 주는사물이라고정의한다.4) 표징과 그것으로

표현된 것(실재)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렇다면 표징과 실재의 차이

는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이 세상의 모든 이론은 궁극적으로 실재와 표징을

대상으로 삼으며 그 가운데 실재는 표징을 통해 학습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실재와 표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분을 설정한다. 고유한 의

미에서 실재는 다른것에의해 표현되는 것이아니라 분명히 자기 자신

에 의해지시된다. 그와달리표징은 직접적으로자기자신이 아닌어떤

것으로 표현됨으로 특징된다. 만일 아우구스티누스가 표징을 실재로 말

한다면, 그런 경우에는 표징이 자기 자신이 아닌 특정한 실재에 해당되

기 때문이다. 표징이란 자신의 개념에 상응하는 실재로서 다른 것을 지

시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지시한다. 이를 요약하면 표징은 상징하는

실재(signum est res significans)이다. 그러나 그 표징을 사용하는 사람

이 표징의 외적 현상에 고정되어 머물러 있지않고 표징을 통해표현된

실재(res significata)가 가리키는 것에 머무는 한 의미와 뜻을 가질 수

있는것이다.5)

아우구스티누스는 표징의 종류를 자연적 표징(signa naturalis)과 부

여된 표징(signa data)으로 나눈다. 자연적 표징이란 의도 없이 의식된

의지 없이자기 자신외부의 것으로 인식되게하는 것으로 불 가까이에

있는 연기나 움직이는 물체의 발자국과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

와 달리부여된 표징은 의식된, 의도된 것으로 다양한 내용에 대한감정

의 운동, 느낌, 인식 등을 가리킨다. 주로 인간이 개발한 많은 표기가 여

기에 해당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말(언어, verbum)로 보아야 할 것

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론 11

4) Augustinus, De doctrina christiana, 3.9.13.

5) Augustinus, De doctrina christiana, 2.1.1.

6) Augustinus, De doctrina christiana, 2.3.4.

7) Augustinus, De doctrina christiana, 3.9.13.

8) Augustinus, De magistro, 10.33.

Page 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사실 모든 표징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실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실재가 이미 표징인 것은 아니다. 표징에 대응하는 단어는 실재이

지만, 표징에 부여되는 유사성이나 모양은 표징에 의해 숨겨진 현실을

보여주고 표현한다는 사실안에존재한다. 성물(elementum)에 주어지는

말씀은 마침내 성례전적 표징 안에서 능력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거

룩한 표징 안에서 표현되는 성례전의 실재는 무엇인가? 성례전의 현실,

즉 성례전이 의미하는 바, 표징으로 나타내는 바는 은혜나 하나님의 본

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즉 그리스도의 인간되심과 십자가

에서의 죽음, 부활 승천 안에서 실현된 구속의 사역이다. 성례전은 직접

성례에 주어진 은혜를 가리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특별한 비밀, 즉 은혜

의 원천이신그리스도를나타낸다.13)

성례전 안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고 상징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로고스의 성육신은 그리스도교

의 모든 다른 표징과 관련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강력한 표징이다.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의 신비가 달리 없다. 그의 육체는 하나님이 드

러내시기도하고동시에 감추시기도하는성례전이다. 신성의 성례전(표

징)이기도 하고 인성의 성례전(표징)이기도 한 이 성례전에 구약과 신

약의 모든 성례전이 연결된다. 성육신하시고 고난당하시고, 부활과 승천

에서 구원을 성취하셨고, 성례전의 표징의 실재를 구원의 행동의 중심

으로설명하시는 역사적 그리스도가성례전 안에계시고 역사하신다.

성례전의 유일한 실재는 전적인 그리스도로서, 즉 머리부터몸까지의

그리스도시다.14) 그러므로 성례전은 불변하는 구원의 계속과 영원한 하

나님의 사랑의 계명을 설명해 주는말씀으로서효력을 가진다.

성례와 말씀의 두 번째 관계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에 있어서

물, 떡, 포도주를 통해 거행되는 의식뿐 아니라 그 의식을 구성하는 말

씀의 역할에 주목한다. 성례에서 선포되는 말씀으로서의 제정사

전체 표징의 세계에서 가장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표징으

로서의 말씀은 최고의 영적인 본성에 해당되며 존재의 더 높은 차원으

로부터 자신이 온다고 보기때문이다.9)

아우구스티누스가표징중에서 말씀의 주도적인위치를 인식한 결과,

그는 다시 말씀과 성례의 관계에 대해 주목한다. 왜냐하면 성례자체가

하나의 표징으로서 이 거룩한 표징을 말씀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착상

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 자체를 하나님

의 구원의 경륜을 나타내는 표징으로서 가시적인 말씀(verba visibilia)

으로 본다. 무엇보다도 사고를 가장 의미 있게 잘 표현할 수 있는 표징

은 말씀(verbum)이다. 이때 성례를 말씀으로 부르는 것은 성례 자체를

하나의 거룩한 표징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각을 통한 경우와 같

이 성례전은 시각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에 이르는 길을 추구한다.10) 존

재론적으로 볼 때 성례전의 표징은 중간세계를 표현하는데, 신체적인-

자연적인 존재와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의 세계 사이를 서술한다.

그런 점에서 거룩한 표징인 성례전에서도하나님의구원의 경륜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위치를 가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의

미에서 성례전을 가시적인 말씀11)이라고 소개했다. 이에 해당되는 예를

세례와 성찬의 경우를 통해설명하면, 세례에 사용되는물과그 물을통

해 표현되는 내적 씻음의 관계와 성찬의 빵을 구성하는 수많은 알갱이

들과 이것으로 표현되는그리스도의 몸의수많은 지체들 사이의 관계로

부터 우리는 바로성례전이 지시하는 바인 정결케 하고의롭게 하고연

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아우구

스티누스는 그의 플라톤적 관념론적 사고에도 불구하고 성례전적 현실

주의를 인정받게된다.12)

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론 13

9) Ganoczy, Einfuehrung in die Katholische Sakramentlehre (1991), 16.

10) Augustinus, De vera religione, 17.33.

11) Augustinus, Contra Faustum, 19.16.

12) Ganoczy, Einfuehrung in die Katholische Sakramentlehre (1991), 17-18.

13) Finkenzeller, Die Lehre von den Sakramenten (1980), 44.

14) Ibid., 45.

Page 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존재론은 자연스레 가치론적 명령, 즉 윤리적 당위성으로 전개해 나간

다. 이로부터 등장한 것이 사용과 향유의 개념이다. 영적이고 초시간적

인 것은향유의 대상이 되는 반면시간적이고 물질적인 것은사용의 대

상이 된다. 그 때문에 인간은 반드시 두 영역을 구분해야 하며 사용은

향유를 향해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사용은 표징과 연결되고 향

유는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물질세계는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오

직 자신과 전적으로 다른 영적인 것을향해 그 자취를 따라가는 것으로

유지해야 하며 끊임없이 이를 기억해야 한다.16) 이를 알기 쉽게 표현하

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향유의 대상이신 반면에 이 세상은 우리가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단지 사용할 대상일 뿐이다. 향유는 사랑에 관

련되고 사용은 삶에 필수적인 것으로 가치있는 사랑의 대상추구에 관

련된다.17)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유하기 위해 이 세상을 사용할 뿐

이고, 사랑을 추구하는 과정이 곧 삶인 것이다. 삶 자체가 목적이 아니

라 하나님을 위해삶을사용하는 것이다. 우상숭배 역시표징을 통해실

재로 나아가지 못하고 표징에 머물러 표징을 실재로 만든 것이다. 이렇

듯 사용할 대상과 향유할 대상을 혼동함으로 인간의 범죄와 죄악의 역

사가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아담의 역사와 인간이 되신 영원

한 말씀의 역사를 대비시킨다. 아담이 범한 죄, 즉 원죄는 변화하는 표

징을 변화하지 않는 실재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로써 아담은 하나님

이 세우진 질서를 떠나표징의 종이되었다. 아담은 사용물을 글자그대

로 향유물로 전도시켰고 잘못된 방향으로 초월운동을 추구했다. 이러한

전도는 로고스(말씀)의 인간되심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통해 회

심하게 됨으로 회복될 수 있다.18)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이제 만일 우리가 유일하게 우리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아

(consecratio)는 떡과 포도주 그리고 물을 글자 그대로 성물로 만드는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에서 성례와 말씀의 둘째 기능을 보게 된다. 아우

구스티누스는 세례와 성찬식에서 오직 말씀을 통해 떡과 포도주가 그리

스도의 몸으로 된다고 가르친다. 비로소 제정의 말씀을 통해 떡과 포도

주는 성례전적 방식으로 고양된다. 이 말씀은 결코 일상적인 말이 아니

라 회상을 통해 거룩해진 말씀이며, 상징을 지시하는 말씀으로서 신앙의

말씀이며, 그 말씀 이면에는 교회 안에서 살아 계신 성령의 역사하시는

능력의 말씀이다. 성물을 성례전으로 만드는 말씀은 성경으로부터 가져

온 주님의 말씀으로서 이는한편으로는 성례전에 능력을 부여해 주며다

른 한편으로는성례에참여하는자에게신앙을 일깨워 주는말씀이다.15)

성례전의 말씀 가운데 교회의 신앙이 선포된다. 자신의 생각과 의사

를 나타내는 말이 성례전을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이 표

현되므로 그 말씀이 능력의 말씀이 된다. 말씀안에서 우리는 사라질 껍

데기와 교회의 신앙의 말씀에 임하는 불변하는 영적인 의미를 지닌 영

원히 남을 가치를 구분한다. 성례의 말씀은 곧 신앙의 말씀이므로 아우

구스티누스는 세례를 종종 신앙의 성례라고 부른다. 같은 이유로 그는

신앙을 고백하고 준비하는 세례문답 예비자들에게 이 신앙에 따라 살

것을요구한다.

결론적으로 성례전은 우리에게 전달되고자 하는 감춰진 현실을 전달

해 주는 도구다. 성령께서 우리를 보이는 상징(성물)과 들리는 상징(말

씀)을 통해보이지 않는현실로 이끌어 주신다. 그런의미에서 성례전은

표징이면서동시에 감춰진 거룩한 실재이다.

3. 사용과향유(uti et frui)

신플라톤적 관념론의 영향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존재하는 것

은 서로다른두 부분이 모여존재하게 된다고 생각하면서, 이러한 그의

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론 15

15) Ibid., 43.

16) Ganoczy, Einfuehrung in die Katholische Sakramentlehre (1991), 16-17.

17) Augustinus, De doctrina christiana, 1.4.4.

18) Ganoczy, Einfuehrung in die Katholische Sakramentlehre (1991), 17.

Page 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1. 세례

도나티스트운동의발단은 교회가 박해받을당시 자신의 신앙을 부인

했던 사제가 베푼 세례의 유효성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도

나투스는 이를 부인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이미 키프리아누스 당

시부터 아프리카 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입장이었다. 교부시대 교회에는

이단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가 다시교회로 돌아오는 신자들을 처리하

는 문제로 고민하였다. 과연 이들이 이단 교회에서 받았던 세례를 인정

해 줄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교회와 동방의 교회들

은 세례를 다시 베푼 반면,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들은 복귀의 의

식만으로 대신하고 세례를 다시 베풀지는 않았다. 사실 이 문제로 키프

리아누스와 당시의 로마 감독인 스테판1세는 논쟁을 벌였다. 스테판1

세는 칙령을 발표하길,“만일 누군가 이단으로부터 너희 교회로 돌아오

려 한다면, 그에게 안수함으로 회개를 허락하는 전통 이외의 새로운 의

식을 실시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키프리아누스는 이와 달리 아

프리카 교회의 중지를 모은 아그립피누스 회의(A.D. 218-222)의 결정

을 따라세례를 다시베풀었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이단에서 베푼세례

의 효력에 대한의문이 자리잡고있다. 키프리아누스자신도 재세례 자

체에 대해 반대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단으로부터 돌아온 자들에게 세

례를 다시베푼이유는 이단에서 받은세례는 세례가 아니라는 판단때

문이었다. 그는 이단의 교회는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단에

서 받은세례는 그 효력을 인정받지못했다. 그가세례의 유일회성을부

인한것이아니라 이단의 세례를 세례로 인정하지않은것이다.20)

이러한 키프리아누스의 신학적 입장은 그대로 도나티스트들에게 전

수되었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과제였다. 키프

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도나티스트들은 교회를 성도의 교제로 보았고

버지의 나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사용할 수밖에 없

으나 즐겨서는 안 된다. 이로써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보이는 것을 통해 보게 된다. 이는 육적이고 시간적

인 것으로부터영적이고영원한 것을추수하는것이다.”19)

I I I. 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논쟁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죄의 용서이다. 이는

구원이라는 말의 내면적 실체에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

해서는 죄를 용서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죄를

용서받게 되는가? 다시 말해서 구원을 얻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에 대

한 가장 대표적인 답이 바로성례전이고 특히세례와 성찬이 이에해당

된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방편으로

성례를 준비하셨고 이를 교회를 통해 시행되도록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이 과제를 거룩한 한 개인에게 위임하신 것이아니라 교회 전체에 위탁

하셨다. 그런 까닭에 성례전론과 교회론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불가분

리의 관계이다. 이제 이로부터 다음의 질문이 등장하게 된다. 세례는 누

가 주는가? 교회인가? 아니면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삼위

일체하나님 자신인가?

또 세례를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거룩함에 따라 세례의 효력이 좌우

되는가? 그리고 그 세례의 효력은 언제까지 지속되는가? 이런 질문들은

아우구스티누스 당시 도나티스트와의 논쟁 속에서 당시의 교회가 당면

한 질문들이었다. 이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본질을 유지하

면서 세례의 특성을 보존하는모범적 답변을 제시하기에이르렀고 이제

우리는 그의말에귀 기울여 보기로한다.

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론 17

19) Augustinus, De doctrina christiana, 1.4.4.

20) Burkhard Neunheuser, Tauf und Firmung, Handbuch der Dogmengeschichte Bd.

IV. 2, (Freiburg: Herder, 1983), 56-57.

Page 1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의 주장으로부터 두 가지 중요한 사상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전수된다.

첫째는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로서 이로 인해 교회의 거룩성이

손상 받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성례의 효력은 사람에 의해 좌우되

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거룩성과 보편성을

함께볼 수 있게된 것이고 성례의 객관적 효력을 인식하게된 것이다.

먼저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를 순수한 흠 없는 성도들의 무리로 보

지 않고 죄인들과 성도들이 함께 모여 구성하는 모임으로 보았다. 그리

고 이 사실이 교회의 본질과 현실에 속하는 것이고 이로 인해 결코 교

회의 거룩성이 훼손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성경의 근거로 그는마태복음13장 38절의 세상의 밭의비유와 큰

집의 비유를 제시했다. 만일 죄인들을 교회로부터 모두 몰아내야 한다

면 교회는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교회와 거룩

한 교회의 통합인식은 이제 성례수여자로서의 교회에 대한새로운 이

해로나아가게된다.23)

아우구스티누스는세례 의식을 시행함에 있어서 보이는 표징에 해당

하는 예식의 집례자와 보이지 않는 실재에 해당하는 세례의 내적 작용

을 구분한다. 세례 예식은 교회를 대표하는 사제에 의해 거행되지만 그

실제 효력은 내적 작용에 의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궁극적인 세례의 수여자는 보이는 사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의 수여가 교회의 의해,

교회의 수여자에의해어떻게든 의존되는 교회론적작용으론본 키프리

아누스나 도나티스트와 달리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으로 보았다. 당시

파르메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고 주장하며 성례전

에 있어서 수여자의 역할을 강조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한 입장

을 수용하면서도 오히려 그 논지를 극복해 나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점에서 가시적 교회는 흠 없는거룩한 자들의무리여야했다. 이단

에 가담하거나 배교에 참여했던 자들이 받은 세례가 효력을 주장할 수

없었던 것은그들은 합법적인교회로부터세례를 받지않았기 때문이었

다. 이런 이유로 도나티스트들은 이단 교회가 베푼 세례의 효력을 인정

하지 않고 이단으로부터 돌아온 신자들에 대해 다시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오직흠 없는사제만이 유효한 세례를 베풀수 있다고 도나티스

트들은 주장했다. 이제 도나티스트들의 주장은 이단이나 배교자가 베푼

세례 논쟁을 뛰어넘어 가톨릭 교회의 세례까지 부인하게 되었다. 왜냐

하면 가톨릭 교회는 죄인들과함께 모인공동체이고 그 감독들 역시죄

인이거나 죄인들과 함께 하는 성례공동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21) 이런

이유로도나티스트들은가톨릭 교회가 베푼세례도 인정하지 않기에 이

르렀고 당연히 재세례를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입장은 도

나티스트 내부에서도 갈등을 일으켜서 도나티스트였지만 그들과 다른

주장을 전개했던티코니우스와같은인물이 등장하게 되었고 그는아우

구스티누스에게중요한 신학적 영향을주기도 했다.

티코니우스에 의하면 성례는 우선 교회의 삶의 표현이며 세례는 죄

로부터의 첫째 부활이다.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세례 받은 백성과

세례 받지않은백성이다. 그는또 다시세례받은백성을 세 부류로 나

누는데,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근접한 성도들, 분리주의자들과 잘못된 형

제들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티코니우스는 잘못된 형제들에

대한 평가이다. 그는 그들이 비난받아야 할 삶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성례의 효력에 손상을 입히지는 않는다고 보았다.22) 티코니우스

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론 19

21) Augustinus, De baptismo, 1.11.15.에서아우구스티누스는도나티스트들의주장을다

음과 같이 소개한다:“우리들(도나티스트)의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은 성령

께서 교회밖에서는 죄를용서하시는사역을 행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들의교회

가 그리스도의 교회이므로 너희(가톨릭 교회)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오직 하나의 유일한 교회, 즉 나의 비둘기만이 교회이고 유일한 어머니 교회만이 있

다.”이들의 주장을 보면키프리아누스의교회론을 자신들의 교회에 배타적으로 적용

한 것을확인할 수 있으면서동시에이는가톨릭 교회에대한부인으로나타난다.

22) Neunheuser, Tauf und Firmung (1983), 62.

23) 아우구스티누스의교회이해에 대해서는 필자의 졸고“아우구스티누스의교회론”을 참

고하시오. 『교회론』, 한국조직신학회편(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43-65.

Page 1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체로의 편입을 가리키는 의미있는작용으로인식되었기에 세례를 베푸

는 자나받는 자 모두에게 엄격한 거룩성이 요구되었고 이에못 미치는

경우 당연히 세례의 효력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와 달리세례를 눈 앞에서 시행되는 외적인 의식과 그 내면에서작용

하는효력으로 구분하여 외적인 의식에 참여하는 수여자나 수세자의도

덕적 자질에 상관없이 비가시적 방법으로, 천상의 샘으로부터 복음의

성례전의 신비한 형태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했다.27)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는사도들에의해그리스도의 이름으

로 주어진 세례와 이단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어진 세례 사

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 이유는 세례의

외적인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실재는 달라서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세례의 봉사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한다. 봉사자는 단지 가시적 예식을 집례할 뿐 은혜는 하

나님 자신만이 주신다고 주장한 셈이다.28) 이로써 세례의 효력은 인간

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 근거하게 되므로 그 효력의 객관적

기초를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술을 덧붙인다면,

교회규범(regula ecclesiastica)이 지켜지는 곳에서 세례는 어디든지 유

효하게 집례될 수 있음을 인정했다. 이로써 이단 문제와 평신도가 세례

주는문제등이해결된다.29)

마지막으로 세례의 효력에 관련하여 지워지지 않는 표지(character

indelebilis)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미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아프리카

의 반도나티스트 진영에서는 세례의 객관적 효력을 주장해 왔다. 이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워지지 않는 표지(character indelebilis)와 황제의

인장(imperatoris signa)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용어는 세례의 반복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보냄을 받았던 유다의 사역과, 스스로 자신들이 설

교했던 바를실천하지 못했던 선지자들의활동에 주목하면서 그들의설

교를 들은 자들의 가슴에서 일어났던 하나님의 사역을 제시한다. 이로

써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지만 그 사람을 넘어서 스스로 일하심을 주장

했던 것이다.24) 세례의 효력을 일으키는 작용은 교회의 감독이 아니라

교회의 공간으로부터 자유롭게 인식되는 교회의 생명의 본질적 원리이

신 삼위일체하나님에상응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다음과 같이말한다:

“그리스도의 세례가 설령 부정함으로 베풀어진다 해도 복음의 말씀을

통해 거룩하게 되며 이를 행하는 사람들이 더럽다 해도 세례의 거룩함

은 더러워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세례를 올바로 사용하셔서,

즉 잘못사용되는부분을 제거하심으로 성례전을 구원을 위해 사용하신

다.”25)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교회의 중보자적역할을 인정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수여자의신앙이 불충분한곳에서도하나님 자신이 은혜

를 주실 수 있으며 그 이유로 그런 곳에서도 세례가 시행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세례를 베푸는 일이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사실에주

목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의 수여자가 그리스도 자신임을 더 분

명하게 주장하면서 극단적으로 교회를 대표하는 사역자들의 기능을 부

정하는 언급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세례의 고유하고 궁극적인 수여자

는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시기 위해 세례의

전권을 사역자들에게위임하신것은아니었다.”26)

세례의 궁극적인 수여자가 교회의 감독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혹은

그리스도 자신이라면 이로부터 세례의 유효성에 대한논쟁은 결정적 전

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도나티스트들에게 세례는 거룩한 성도들의 공동

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론 21

24) Walter Simonis, Ecclesia visibilis et invisibilis (Frankfurt: Joseph Knecht, 1970),

105.

25) Augustinus, De baptismo, 3.10.15.

26) Neunheuser, Tauf und Firmung (1983), 66.에서 재인용, in Tractatus in Ioannis

evangelium 5. 6. 11.

27) Augustinus, De baptismo, 4.12.18.

28) Simonis, Ecclesia visibilis et invisibilis (1970), 107.

29) Neunheuser, Tauf und Firmung (1983), 69. 이에 대한 답은 이단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나평신도가 세례를주는문제는위기상황에서는인정받을수 있다고 봄.

Page 1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2. 성만찬

아우구스티누스가세례 논쟁에서 그 강조점을교회라는 현장보다 유

효성에 두었다면, 반대로 성찬 논쟁에서는 교회라는 현장에 무게 중심

을 놓는다. 여기서 교회의 현장이라는 말은 다시 정확하게 말하면, 성찬

참여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교회의 일치(unitas)를 향한 사랑(caritas)

에 강조점을 둔다는 말이다.32)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론과 마찬가지로

성찬론에서도 교회론적 전제를 가지고 성찬론을 다룬다. 성찬이 거행되

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의인과 악인이 섞여있는 혼합된 몸이

다. 교회가 혼합된 교회라는 사실은 성찬식에서 의인과 악인이 동일한

제단에 함께 참여한다는 현실을 드러낸다. 이점으로부터 성찬의 효력이

교회론적배경속에서 다시제기된다.

앞서단순하게 악인이나 의인이라 지칭했지만 더 정확하게 설명하면

이단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든지 정통교회에서세례를 받았든지 간에모

두 악한생활에 빠진 자들과 반대로 경건한 생활에 힘쓰는 의로운 성도

들이 함께 모여든 성찬대에서 과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

는 것이어떤 결과를 낳는가? 라는문제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고민

하면서 다음과 같은답을제시한다.

먼저아우구스티누스는이 문제를 종말론적으로 해결한다. 현재 그리

스도의 몸은 서로 섞여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마치 타작마당과 같아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있다. 따라서 교회 앞에 서 있는 제단을 향

해 많은악인들도 성도들과함께다가온다. 우리가 먹고마셔야 되는것

을 악인들도 스스럼 없이먹고마신다. 이에대해우리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것을먹고마신다는이유로 노할필요가 없다. 그들은 내세에서영

원한 멸망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은 그들에게 인내하심

을 보이시나 그러나 그들은 결코 지성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곳

수 없는 유일회적 유효성을 가리키는 말로 가축에게 주인의 인장을 화

인으로 찍는 것과 군인에게 인장(nota militaris)을 찍어주는 것과 같이

그 성격을 비교한 것이다. 이처럼 표지는 외적으로 눈에 띄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 밖에서 성령이 내적으로 능력을 불어 넣지 않으

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그래서 교회 안에서만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세례를 외적인 표지와 함께 성령께서 교회를 향해 내적으로 작용하는

사건으로 본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가 교회 밖에서는 효력을 상실한다

고 생각했다.30) 여기에서 소위이단의 세례와 분리주의자의 세례의 효력

문제가 대두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이 두 주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을 다소 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진술을 통해 확인되

는 바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이단의 세례보다 분리주의자의 세

례는 더 부정적인 것으로 판단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단이 교회 안에

머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크게신뢰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아

우구스티누스가세례의 효력의 객관성을논할때 극단적인경우이긴하

지만 이단의 세례도 인정받는다고 진술하는 반면,31) 분리주의자는 그리

스도의 몸을 나누는 자로서 당연히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을 상징하는

세례를 부정하기에그 효력을 인정하지않는다는 결론을 얻게된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에

편입되는 사건이며 이를 통해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

가 되는 구원받는 삶의 결정적 계기인 것이다. 따라서 세례에서는 그리

스도의 몸으로 부르시는 그리스도와 성령과 하나님 아버지의 주도적인

사역이 강조되면서 그리스도의 몸과의 일체됨이 상실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은 유지된다고 보았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이단보다 분리주의자가

더 교회에 피해를주는자들로 평가받게된다.

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론 23

30) Kurt Flasch, Augustin Einfuehrung in sein Denken (Stuttgart: Reclam, 1994), 161.

31) Augustinus, De baptismo, 5.20.28. 6.8.12. 32) Simonis, Ecclesia visibilis et invisibilis (1970), 110.

Page 1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러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단과 분리주의자들에게도 동시에 적용

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이단과 분리주의자

들이 설령동일한 성찬에 참여해 떡과포도주를 받아먹을수 있다 해도

그들은 성찬이 보여주는 평화의 끈에 연결되지 못한다. 빵은 일치를 말

하지만 그들은 분리를 구하기 때문에 성찬이 증거하는 것과 배치되는

것을 받는다. 그들은 교회 안이 아닌 교회 밖을 얻게 되며 성찬의 실재

가 아닌표지를 얻는다. 그들은 그렇게 먹고마심으로영생을 얻는대신

심판을 받는다. 성찬은 지혜롭고 경건한 자에게는 가까이 있으나 교만

하고미련한 자에게는멀리떠나있다.35)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찬은 신자들의 매일의 양식이라고 생각했고 신

자들은 이를육에따라가 아닌영에따라공급받는다고말한다. 그는성

찬론안에있는표지와 실재, 안과밖의대립이 내세에서지양될 것이라

는 점을잘 인식하면서성찬의 완성이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육적인 것

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 결과 성찬과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을

연결시킴으로 성찬에 합당한 삶의모습을 강조하면서 이전의 세례의 효

력에서 보여주었던 다소 극단적인 객관성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감

을 유지했다.

3. 유아세례

비록 성경이 유아세례를 시행할 것을 분명하게 명령하고 있지는 않

지만, 성경의 중심 사상의 빛에서 볼 때, 유아세례는 정당한 것으로 받

아들여져 왔다. 이 주제에 대해서도 역시 우리는 많은 부분을 아우구스

티누스로부터 배우게 된다. 교회가 유아세례를 시행함에 있어서 유아

스스로 신앙고백을할 수 없다는 점이항상걸림돌이 되어왔다.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과연 정당한 것일

은 예수그리스도가우리를 위해먼저들어가신곳이다. 머리가 먼저들

어가고 다른지체들이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갈 것이다.33) 아우구스티누스

는 여기서 눈에 보이는 제단과 보이지 않는 지성소를 구분하며 악인은

눈에 보이는 제단에 다가오는 것 같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지성소로는

악인들이 들어올 수 없는 반면,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들어가시고 참된

신자들이 따라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설명함으로 단지 눈에 보이는 떡

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영생에 대한 약속이 될 수 없음을 주장

한다.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특유의 사용과 향유의 개념을 통해 악인과

의인의 성찬의 참여의결과를 구분한다. 그는“이는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

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0-

51)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성례전적 먹고 마심”과“참된 먹고

마심”을 구분한다. 성례전적 먹고 마심이란 단지 성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입으로 먹고 마시는 것으로 사용에 해당되는 행위인 반면에,

참된 먹고 마심은 단지 입으로만 먹고 마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의 지체가 되어먹고마시는 것을뜻한다. 이는향유의 의미로서그리스

도의 지체가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성찬과 함께 약속하신“내가 그

안에그가내 안에머무는 것”을 포함하기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와

의 즐김(향유)은 단지 입으로만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

고 마시는 것이며 그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례전적으로 먹고

마시기만 하는 악인들에게는 성례의 유익이 주어지기는커녕 도리어 더

엄격한 심판을 받게 된다. 단지 정통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서 끝까지

견딘다고 스스로 위로할지라도 타락한 생활을 하거나 방탕과 사치한 삶

을 사는 자들에게는 성찬의 유익이 결코주어지지 않고그 대신심판을

받을뿐이다.34)

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론 25

35) Simonis, Ecclesia visibilis et invisibilis (1970), 113.

33) Simonis, Ecclesia visibilis et invisibilis (1970), 111.

34) Augustinus, Civitate Dei, 21.25.

Page 1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의 은혜가 주어졌다. (그러나) 생후 여덟째 날에 할례를 받은 이삭은 믿

음의의의인증을 먼저받았고 아버지의믿음을 본받아 나갈때, 믿음이

자라나는 가운데 의가 뒤따라 왔다. 믿음의 인증(할례)이 어린 시절에

먼저 있었듯이, 세례 받은 아이들에게서도 중생의 세례가 선행하고 그

아이가 그리스도교신앙에 잘 붙어있는 가운데 그 마음에 회심을 좇을

때, 그 몸 안에 신비가 앞서 나간다. 강도에게 있어서 세례 성례전을 결

여함으로 누릴 수 없었던 은사를 전능자의 은혜로 보완했듯이, 이것은

교만이나 멸시가 아니라 위급 상황에서 결여되었던 것이기에, 어린이에

게 있어서도 세례 받은 후 믿음을 부인하고자 하는 의도 없이 단지 마

음의 의를 믿거나 입술의 구원을 고백할 수 없는 나이에 사망할 경우,

동일한 전능자의 은혜를 추가로 받게 된다(롬 10:10). 그러므로 유아 대

신 다른 이가 믿음을 고백한다면, 그로 인해 성례전을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해도 이것은 당연히 유효한 것이다. 왜냐하면 유아 자신은 대답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대답할 수 있는 어린이 대신에 다른

이가 대답한다면, 이것은 전자와 달리 유효하지 않다. 이에 대해 복음서

에 언급한 바와 같이, 다음을 읽는 이 모두가 당연히 놀랄 것이다:“그

가 다 컸으니 자기자신에 관하여 말할것입니다”(요 9:21).37)

앞에서 본 바처럼,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유아세례는 본질적으로 문제

되지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묻기를“어린아이들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

야 할까요? 신앙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그들도 믿나요?”아우구스티

누스는 그들도 신앙을 가진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신앙의 성

례전을 가지고 있고회심의 성례를 가짐으로주님께로 돌아왔다고 보았

기 때문이다.38) 그는 유아세례라고 해서 결코 신앙이 결여된 의식이 아

님을 강조한다. 유아의 부모든지 아니면 유아를 세례의 자리로 데리고

오는대부모든지신앙은 반드시 어머니 교회를 통해고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세례는 신앙의 성례이고 신앙의 표지로서 신앙을

까?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런 질문에 수없이 직면하면서 이에 대한 답변

을 제시하기에이른다.

아우구스티누스는비록 짧지만 유아세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그의

세례론(De baptismo)에서 분명하게 밝힌다. 그리고 이 내용은 그 이후

교회사를 통해유아세례에 관한다양한 논쟁에서언제나 신학적 지침서

의 역할을 해주게 된다. 먼저 그는 전체 교회가 아직 마음으로 의에 이

르지 못하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이 세례받는전

통에 대해서 확고한 지지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근거를 십자

가상에서 자신의 고백의 말을 눈물과 함께 드렸던 강도처럼 정식의 세

례는 아니지만 이미 신비의 예식에 참여했던 사례를 떠올린다. 그렇지

않고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그도후에 세례를 받았을 것이라고설명한

다.36)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재의 상태를 미루어 장래의 상태를

예상하는 논리를 전개한다. 즉 정식 세례를 받지 못하였으나 그의 신앙

은 후에 세례로 이어지기에 손색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

이다.

이어지는아우구스티누스의논리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전 이미

그의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를의롭게 여기셨기에할례보다 마음

의 믿음의 선행성에 주목한다. 아브라함이 먼저 마음으로 믿었고 그 믿

음에 대한 표지로 하나님께서 할례를 베푸셨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아직 마음으로 믿지 않은 유아들에게 할례를 베풀라는 명령을 주셨

을까?

모세의 아들의 경우를 보면, 그가아직 어미품에있을 때, 천사가 알

려주길 할례를 받지 않으면 화가 임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할례를 받자

그 화가 피해 갔다(출 4:24-26). 아브라함의 경우 믿음의 의가 선행하

고 이어서 할례가 믿음의 의에 대한 인증으로 덧붙여지는 것처럼, 고넬

료 집의 모든 식구가 성령의 은사에 의해 성화의 은혜를 누린 후, 세례

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론 27

36) Augustinus, De baptismo, 4.23.30.

37) Augustinus, De baptismo, 4.24.31.

38) Flasch, Augustin Einfuehrung in sein Denken (1994), 161-162.

Page 1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주제어

성례전, 표징과 실재, 세례, 성만찬, 유아세례

(Sacraments, Sign and Reality, Baptism, Eucharist, Infant baptism.)

접 수 일 2009년 11월 11일

심사(수정일) 2009년 12월 05일

게재확정일 2009년 12월 15일

완성시켜 준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 받을 유아가 신앙의

비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한, 완성된 신앙보다 신앙의 완성화에 더

주목하는경향을 나타낸다.39)

I V. 맺는말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서방 신학자들이 성례전론에 대한 관심을 나

타내어 터툴리아누스와 옵타투스 그리고 암브로시우스 또 도나티스트

였던 티코니우스 등이 모두 성례전에 관한 중요한 글을 남겼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을 종합하여 그리스도교의 성례전론을 집대성한 사람은 아

우구스티누스였다. 그의 사상은 마치 모든 강물이 한 데로 흘러들어오

는 바다와 같아서 그를 통해 그보다 앞선 신학자들과 심지어 신플라톤

주의적 사상까지도 융합되어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사상의 일면을 표징론과 세례론그리고 성찬론에서

살펴보았다. 그가 제시했던 신학적 견해는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물

론 루터와 칼빈에게까지 계승되어 그리스도교의 성찬론의 근간을 이루

게 되었다. 하나님의 주도성과 교회의 중재자적 역할 그리고 신자들의

책임등을적절히 조절하면서그가추구했던 성례전론은단지 그리스도

교 신학의 하나의 각론일 뿐만 아니라 전체 신학이 참고해야할 중요한

신학적 원리들을 담고 있는 보배와 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그의 성례전

론으로부터 교회가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시

며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배우게 된다. 성례전의 가치가 많

이 상실된 이 시대에 그의성례전 신학이 교회와 신자들의 거룩한 삶을

새롭게 살릴수 있는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론 29

39) Finkenzeller, Die Lehre von den Sakramenten (1980), 43.

Page 1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ugustine’s Doctrine of Sacraments

Chung, Hong Yul

Professor

Asia United Theological University

Yangpyung, Korea

The present article deals with the doctrine of Augustine’s

Sacraments. Augustine is often considered as one who have completed

the doctrine of sacraments within the Christian Theology. Two

contributions are attributed to him, of which one is the inquiry of

relationship between ‘sign’ and ‘reality’ and the other an objective

evidencing of the efficacy of the sacraments. It follows then that the

present article attempts to work on the Augustine’s sacraments also

dividing them into two parts: the polemics in Augustine’s symbolism

and sacraments.

Augustine’s dispute on the issue of sacraments was with Donatists,

who viewed the church as a communio sanctorum, i.e., a fellowship of

saints. Accordingly, they argued for an extreme stance that a church

deprived of holiness is not a church at all. This was a frontal attack

against the contemporary catholic church. Thus they did not recognize

catholic church as the Church, naturally along with her sacraments.

However, the church acknowledged by Augustine was one where

both the sinner and righteous were gathered, and he concluded that

such does not impair the holiness of the church. He argued that the

holiness of the church does not depend on the morality of the saints

but on God alone. This argument on the counting of the holiness of the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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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vitate Dei. Muenchen: DTV,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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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rift bis zur Scholastik. Handbuch der Dogmengeschichte, 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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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sch, Kurt. Augustin Einfuehrung in sein Denken. Stuttgart: Reclam,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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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 IV. 2, Freiburg: Herder, 1983.

Simonis, Walter. Ecclesia visibilis et invisibilis. F r a n k f u rt: Joseph Knecht,

1970.

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성례전론 31

Page 1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삼위일체의계시적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한국적 신학의가능성을위해

황돈형(서울중앙신학교교수)

I. 기독교의정체성-무엇이문제인가?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들은 자신들의 동일성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위 환경과의 적응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속적인 변화를 경험

하여 왔다. 특히 다른 문화나 종교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서로 간에 영

향을 주고 받던 모습들이 확인되고 있다.1)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종교

에 대한 연구는 그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분명하게 종교적 언어가

시대적인 문화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으며2) 더욱이 문화적 틀의 변화

가운데 종교적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구되어 왔음을 밝히고 있

다.3) 그럼으로 종교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와 문화

church on God naturally led to an equal application upon the polemics

on the efficacy of the sacraments. Augustine viewed that the efficacy

of baptism also did not depend on the moral status of either the

presider or receiver but only on God. Likewise, he argued that the

efficacy of the Eucharist also did not depend on the participants. But

he also taught that the unworthy participants are not under grace but

wrath. He criticized that the separatists are the ones who are damaging

the Eucharist, especially as it relates to the incorporation into the body

of Christ.

Augustine also argues for the legitimacy of the infant baptism on

the basis of Old Testament circumcision. He gives a special attention

on the fact that Isaac’s circumcision anteceded his faith growth after

his father Abraham’s faith.

Through the doctrine of Augustine’s Sacraments, we learn

systematically not only about the sacraments but also about what is

the Church, how the salvation is realized, who is God and what is to

be a human.

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33-72

1 ) Clark H. Pinnock, A Wideness in God’s Mercy: The Finality of Jesus Christ in a

World of Religions (Grand Rapids: Zondervan, 1992), 85-106.

2) Serene Jones and Paul Lakeland ed., Constructive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5), 20.

3) Hans Jauss Robert, “Toward an Aestheistic of Reception,” tr. T. Bahti, Theory and

History of Literature 2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2), 3-45.

Page 1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신관을 통해 기독교의 정체성을 형상화하는 것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6) 즉, 삼위일체적 신앙고백은 초기부터 기독교적 입교 의식

인 세례식과성찬식과연관되어 기독교의 정체성을나타내는신앙의 전

통으로서인정되어왔던것이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기를 거치면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

신관이 하나님의내재적 존재를 서술하는 교리로 점차예수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기독교 구원 신앙과는 무관한 것처

럼 보이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20세기 초 Barth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

원의 사건에서 알려지는 삼위일체적 계시를 강조함으로써 다시금 기독

교의 정체성을 위한 삼위일체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8) 그리고

다양한 교파와 교회들의 연합체인 WCC(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 기독

교 일치의 근원적 형식으로서삼위일체에 대한신앙고백이 강조되기시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또한 다른 종교와 관계성 가운

데 자신을 이해하려는 종교적 관용의 자세가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

인다.4)

기독교 역시 역사적으로다양한 문화와 종교적 전통들과의만남을 거

쳐 왔다. 종교학적 차원에서 볼 때 기독교의기원을 나타내는 성현(聖現:

Hierophany)의 특성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기독교는

예수가 전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주장하는 것으로 유대교적인 유

일신교의 한 종파인가? 아니면 지혜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

는 헬레니즘적 신비종교와 연관된 초자연적 구원종교의 한 형태인가?

이러한 질문과 함께 기독교 형성의 역사적 과정을 볼 때 기독교는 유대

적 뿌리와 연관되어 생겨난 헬레니즘적 형상화를 이룬 종교로서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고교회적 형태로부터 회중 중심적 교회 형태와

오순절적 모습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되는 모습 가운데 있는 기독교의 동일성은 무엇인가? 또한 앞으로

도 계속있을 수밖에 없는다양한 문화와 종교상호간의대화중에서 유

지해야 할 기독교의 근본적 정체성을나타낼수 있는것은무엇인가?

이러한 기독교적 정체성과 연속성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의 관계성에서부터 밝혀지는 역사적 예수의 특성을 분명하게 나타

낼 수 있는 신앙과 또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의 실천적 차원에서 행해

지는 기도와 예배 등과 같은 종교적 전통에서 대답될 수 있는 것이다.5)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예수의 존재에 대한기독교적 해석으로서 삼위일체

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35

6) Christofer Frey, Dogmatik (Gütersloh: Gütersloh Verl., 1993), 170-171. 또한 삼위일

체 신관의 형성의 근원적 이유를 역사적 과정에서 유대교와의 연관성에 설명한 것으

로서한스큉/이종한옮김, 『그리스도교』(왜관: 분도출판사, 2002) 참조.

7 ) Bruce D. Marshall, Trinity and Truth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24-49. 특히 43-44. 초기 기독교의 세례식과 성찬식이 삼위일체 신앙에 의하

여 규정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Franz Courth, Trinität. In der Schrift und Patristik,

Handbuch der Dogmengeschichte (Freiburg, Basel, Wien: Herder 1988), 31-39.

8) Christoph Schwöbel. “The Renaissance of Trinitarian Theology; Reasons, Problems

and Tasks,” Christopf Schwöbel ed., Trinitarian Theology Today (Edinburgh: T&T

Clark Ltd, 1995), 2-3. F. Schleiermacher가 삼위일체 교리를 신앙 경험의 인간적 상

황을 다루는 교리와 상관없다고 배척하였지만 새롭게Barth는 기독교의 정체성이 삼

위일체론에 의해서 가능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Rahner와 Lossky

에게서 확장되어 표현되면서 정통주의자로부터 여성신학, 해방신학자들을 포함하여

최근의대부분의신학자들에게도같은소리를 들을수 있다.

9) 이형기,“동방정교회와 세계개혁교회연맹의 신학적인 대화,”『삼위일체론의 역사』(서

울: 대한기독교서회, 2008), 629-632. 1948년 제1차 WCC 암스텔담 총회에서는 복음

을 바탕으로 한 기독론 중심의 헌장이 제시되었고 이후1961년 뉴델리 회의에서동방

교회의 요청에 따라서 삼위일체적 형태의WCC 교리헌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관심은더욱확대되어1975년 나이로비회의에서는복음과 삼위일체를 중심으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를 연구하였다. 그리하여1981년 이후로 니케아신조를연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역사적 상황의 변화와 연관되어서 새로운 해석학

적 과제를부여받게 되는가를살피고 있다.

4) Alan Race, Christians and Religious Pluralism: Patterns in the Christian Theology

of Religions (Maryknoll, N.Y.: Orbis, 1982) 참조. 그리고 위와달리 종말론적 차원에

서 기독교의 진리 주장은 그 자체로 관용을 요구한다는 입장으로 볼프하르트 판넨베

르크/김균진 외 옮김, 『현대문화 속에서의신학』(서울: 아카넷, 2001), 209-211.

5) Anthony C. Thiselton, the Hermeneutics of Doctrine (Michigan: Eerdmans, 2007),

452.

Page 1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고 있는것이다.13)

물론 교회의 법적인 차원에서는 양자의 화합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방침들이 있어 왔다. 먼저, 동방지역에 속한 그리스 카톨릭 교회에서는

1973년에 filioque를 생략하였으며14) 그리고 고 카톨릭(Old Catholic) 교

회는 1975년 최종적으로chambésy 회의에서 filioque를 불필요하다고

하였다.15) 또한 성공회도 그 filioque의 신학적 의미에 대하여 인정을 하

지만 1976년Zagorsk에서의 동방교회와의 만남 가운데filioque를 삭제

하기로 하였다.1 6 ) 그리고 비슷한 경우로서1 9 7 8년과 1 9 7 9년에 있던

Klingenthal 회의에서filioque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

터 나오시는성령이라는 문구에서아버지는늘 아들의 아버지라는 차원

에서 filioque가 없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17) 이후WCC 회원교회들은

개신교를 포함하여1981년 이후로 원래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381년)에 쓰인 대로 성령의 발현에 대하여 filioque를 생략한 사도적

신앙고백을하는것을권고하고있다.18)

위와 같은 방침들에도 불구하고 논자는 오늘날 기독교적 신앙의 정

체성을 표현하는 삼위일체를 논하고자 할 때 filioque가 내포하는 가능

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새롭게 파악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동방교회

는 filioque가 없어져야 기독교의 정체성이 밝혀진다고 하고서방교회의

일원에서는filioque를 원래 있었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있어

작한 것이다.9)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도filioque에 대한 동, 서방 교회

의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는 과제와 연관되어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기

독교의 정체성을나타내는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역사가운데 성령

의 발현을 서술하는filioque와 관련하여1504년 동방, 서방 교회의 분

열의 요건이었던 것이다.10) 비록 1962년 동방, 서방 교회의 대표가 서로

화해하고 양자가서로 참된교회로서 인정하였지만성령의 발현에 대한

상이한 이해는 현재에도 계속되는 것이다.11) 그리하여 아버지의 인격12)

을 하나님의존재의 근원으로이해하는 동방교회의 삼위일체적전통과

신적 본질의 근원적 통일성 가운데 세 인격의 차이를 강조하는 서방교

회의 전통을 따르는 양자 간에 있어서 상충되는 이해가 지금도 계속되

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 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37

구하여1991년“하나의 신앙고백(Confessing One Faith)”을 발표하게 되었다. 세계교

회협의회/이형기 옮김, 『하나의신앙고백』(서울: 장로교출판사, 1996) 참조.

1 0 ) 테드 피터스/이세형 옮김, 『삼위일체 하나님』(서울: 컨콜디아사, 2007) 106-1 1 3 .

filioque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 고찰과 현대적인 상황이 소개된다. Peters의 생각은

filioque가 교회법적인 차원에서는 문제가 있지만 신학적 의미에서는 받아들일수 있

다고 보고 있다. 최초의filioque 때문에 발생한 동, 서방의 분열은Photius를 따르는

동방 신학자들과Ignatius를 지지하였던Nicolaus 교황 시에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후

에는Humbert가 레오9세의 이름으로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filioque를 사용하지 않

는다는 것을 이유로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파문장을 놓고 감으로써 동, 서방 교회의

분열이 일어났다. 그 이후에 동, 서방 교회의단합과 통일에 대한여러 번의시도들은

filioque 문제와연관되어있었다.

1 1 ) L, Viscker, hrsg., Geist Gottes Geist Christi. Ökumenische Überlegungen zur

Filioque-Kontroverse (Frankfurt: 1981) 참조.

12) 현재삼위일체 되신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분의 고유한 존재를 표현할 때 위격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한 분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한 하나님이시고 아들로서

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성령으로서 한 하나님으로서 그 모든 것을 함께 하시는 분

이시라는 것과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로서 함께하시는 하나님

( )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정적이고 종속적인 관계

를 표현하는 단어로서 생각된다. 그리하여 본 논자는 위격보다는 인격으로서 표현하

는 것이 기독교가 경험한 교리사적 근거와 더욱 일치하는 것이라고 사료되어 이렇게

표현한다. 이에대하여Catherine Mowry LaCugna, God for Us (New York: Harper-

Collins Pub., 1991), Chapter. 8 Persons in communion 참조. 인격에 대한 철학적 변

환의강조에대하여특히 255.

13) 피터스, 『삼위일체하나님』(2007), 122.

14) Yves M. J. Congar,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Vol. I I I, tr. by David Smith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83), 206.

15) Ibid., 196.

16) Ibid., 196, 198 후주18번 참조.

17) 위르겐 몰트만/김균진옮김, 『생명의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407-408.

18) 그러나 모든교회가 이를 따르고 있는 것은아니다. 왜냐하면filioque가 서방의 신학

을 위한 근본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Wolf-Dieter Haus-

schild, “Nicäno-Konstantinopolitianisches Glaubensbekenntnis,” 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 Bd. X X I V (Berlin, New York: Walter de Gruyter, 1994), 454.

Page 2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을 교회의 근간으로 확실하게 나타낼 수 있는 방식으로 아들과 아버지

와 동일본질( )이심을 강조하였던 것이다.19)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근본적 통찰은 교회내에서 반복되는갈등 속에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의 결정에서확고하게되었다고볼 수 있다.20)

니케아 회의의 결정이 혼란을 가져오게 된 이유는 먼저

단어가 가진 배경 때문이다. 원래 이 단어는 영지주의자들에 의해서 사

용되었고 또한 269년 안디옥 회의에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적 입장을

정죄할 때 적용된 단어였다.21) 물론 니케아 회의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

는 방식은 사벨리우스의양태론을규정하는경우와는 달리하나님의신

성을 분명히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 계신 세 분으로서 파악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신성의 근원과 통일

성의 근원으로서 그리고 아들의 신성은 비록 아직 정확하게 아버지와

서 생략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의미를 보존하자는취지의발언이 끊

이지않고있는것이다. 그뿐아니라 삼위일체론이본래하나님 자신안

에 이루어지는 내재적인 삶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으로써 성령의 현실을 분명하

게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때 filioque의 중요성이 무시될 수 없는 것이

다. 그리하여논자는 먼저 filioque 문제의 전제가 되었던 것으로 니케아

신조의 호모우시오스( )의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왜냐하면

filioque의 문제는 삼위일체되신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본질을 의미하는

호모우시오스 신앙고백과 연관되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filioque가 최초로 서방교회에서 사용되는 과정에서 동방교회와 관련된

발생하는 상이점 등을살펴보겠다. 그리고 난 뒤 현 상황에서 한국적 신

학을 이루는 방식과 연관되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

하여밝히고자한다.

I I. 삼위일체론의미형성의핵심적용어이해; 와

filioque

1. 삼위일체론이지니는구원의의미형성과정에있어

의 이해

삼위일체 교리의 근본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인간의 역

사 가운데 드러난 유일한 의미에서의 완전한 하나님 자신의 사건으로서

이해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삼위일체 신앙의 의미를 분명하게

나타내고자 할 때 교리사를 보면 먼저는 단어로 인해 문제

가 발생하였고 후에는 f i l i o q u e로 문제가 등장하였다. 니케아 공의회

(325년)는 예수의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고백하는 삼위일체 신앙고백

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39

19) Wolfhart Pannenberg, Systematische Theologie Bd. I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8), 298ff.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는 삼위일체적 신앙의 근본적 의미는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에서 보인다. 즉 Athanasius가 아버지는 아들 없이 아버지인 적

이 없다는 주장과 아들과 성령의 신성을 주장하고자 한 것이 세 신성을 통해서 단일

신적인 신성을 밝힌다는 의미가 아니었고 아들과 성령의 신성을 통해서만 참다운 하

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기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바로 아들의 신성을 강

조하는 를 통해서 명백하게드러난것이다.

20) 단어 자체가 지니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그 단어를 통해서 의미하고자

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철저한 동일성의 강조는 아타나시우스의 해석으로부터 그 중

요성을 잃지않았다. 그리하여비록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그 단어를 쓰지않았다

고 할지라도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주장함으로써 니케아 공의

회의 결정을 확정짓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Courth, Trinität In der Schrift und

Patristik (1988), 110-126.

21) Walter Kasper, Der Gott Jesu Christi (Mainz: Matthias-Grünewald-Verlag, 1982),

314. 사벨리우스주의를Barth의 신학을 염두에 두면서 비판하고자 한 것으로는 위르

겐 몰트만/김균진 옮김,『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165-169. 아리우스가 주장한 것이 종속론적 일신론과 같은 것이라면 사벨리우스의

입장을 정리하여 그에 있어서 문제는(주체나 양태로서)신성의 일자가 모든 것을 흡

수하고있는일신론이라는것을강조한다.

Page 2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서는 substantia로 번역될 수 있어 동방교회의 세 의 강조

는 서방에서는 삼신론을 의미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반면 세 인격적 구

분을 나타내는 라틴어의persona는 그리스어로 으로서 연

극에서의 역할(가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한 실체

(substantia)이시고 세 인격(personae)이라고 표현한 것(una substantia

tres personae)은 동방교회의입장에서는 하나님의세 인격의 실체적구

분을무시하는일종의 단일신론적양태론으로오해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셋째로 철학적 배경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동방교회는 철학

적으로 신플라톤주의의 방식을 따르면서도 동시에 차이를 두고자 하였

다.27) 그리하여 신플라톤주의와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신성의 원리적 기

원을 인격적으로 강조하고자 하였다.28) 이것은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철

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단어로서 표현을 금하도

록 요구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부정하고 새로운 해결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

으로서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전제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를 아

버지중심의 인격적 차원에서아들이 아버지의 의지에 따르는 일치로서

Origen을 따르는 종속론적인입장이 더욱강조되었던것이다.29)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아들 사이의 내재적 출생을 서술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창조물과

다르게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파악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

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

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의 전적인 동일성을 로 표현하였던

것이다.22) 그러나 의 단어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양태론

적 의미로 인식되었던 것이다.23) 그리하여 가 의미하는 바가

아버지와 아들이 결국 단일한 한 분이라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한

분 하나님으로서아버지와 아들로서 구체적인인격적 실체가 어떻게 동

일본질로서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정확하게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

고 있던것이다.

둘째 이와 더불어 동, 서방 교회의 사용하는 언어적 차이도 문제를

심화시켰다.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이해하고자 할

때 당시 동방에서는 본질을 의미하는 단어가 본질( )과 인격적 실

체( ) 사이의 정확한 언어적 구분을 하지 않고사용되었기에

동일본질은 단일한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었다.24) 그리하여

는 동방사람에게는아버지와아들 사이의 인격적 실체를 부

정하는 양태론적 주장으로이해될 수 있었다.25) 그리하여동방교회는 세

인격을 명확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세 를 강조(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실체를 분명하게 주장함)하였다.26) 그러나 이 단어는 서방에

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41

22) Ibid., 315. 그리고 Courth, Trinität In der Schrift und Patristik (1988), 115. 그 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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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 J. Tixeront, History of Dogmas Vol. I I (Westminster: Christian Classics, Inc.,

1984), 37.

24) Ibid., 36.

25) Ibid., 38-42. Ancyra의 주교Marcellus가 의 양태론적특징을 나타낸 대

표적인물로정죄된다.

26) Courth, Trinität In der Schrift und Patristik (1988), 118. 341년 안디옥 회의에서는

니케아의 결정을 오리겐의 삼위일체적 이해와 연관시켜 아버지, 아들, 성령의 -

를 강조하기도하였다.

27) 볼프하르트판넨베르크/정용섭 옮김, 『신학과철학』(서울: 한들출판사, 2001), 54-58.

2 8 ) Leo Scheffczyk, “Uneingelöste Traditionen der Trinitätslehre,” Trinität. Akteulle

Perspektiven der Theologie, hrsg., Wilhelm Breuning (Freiburg, Basel, Wien:

Herder, 1984), 52-56. Justin에게서부터 발견되는 방식으로 그는 의지적으로 아버지

로부터 logos가 등장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성격은Clement나 Origen에게서도 찾아

지며 다만 서방의 신학자로서Tertullian은 신적본질을 근거로 아들과 성령의 삼위성

을 말하고 있으며Hyppolyt도 역시 신성 안에는 삼위성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

러면서도Scheffczyk의 강조점은 초기 교부들 역시 근본적으로 한 분 하나님 안에는

근본적으로 세 인격의 실재를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우스주의와의

가장 분명한차이였으며니케아회의와콘스탄티노플회의의의미라고설명하고 있다.

29) 서원모,“4세기삼위일체 논쟁의 전개”(2008), 83-95. 341년, 334년에확정된 안디옥

회의의결정사항과351년 시르미움회의의 결정사항에서드러난다.

Page 2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찬이 구원의 확증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가 이제

아버지와 아들뿐 아니라 성령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가운데 그가하나님의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하

신 하나님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을 고백하는데

사용되었던 신학적 언어이고35) 이와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의 동일본

질로서 성령의 현재 가운데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삼위일체되신하나님에대한신학적 이해가능성을드러낼 수

있는 언어였다.36)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이해의 가능성은 이제 성령의

현존을 삼위일체의 구원에서 이해하는filioque에서보다분명하게 드러

난 것으로 볼 수 있는것이다.

2. 콘스탄티노플신조의성령론적이해의해석으로서filioque와

그 한계

1) 콘스탄티노플신조와 와의연관성

단어로 분열현상을 보이던 동, 서방 교회는 위에서 언급

했던 것처럼 성령의 신성에 대한 신앙고백과 함께 새로운 의견의 일치

를 이루게 되었다. 동방 교회에는 단어에 대한 배격에 힘입

어 성령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자들(Pneumatomachoi: 성령의 신성

을 훼손하는자들)이 새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중아에티오스와그의제

자 유노미오스(안디옥 교회)들이있었다. 이로써 동방교회는 아타나시우

적 삶 가운데 삼위일체적으로계시된 하나님의통일성을나타내는 것으

로 이해할 수 있기까지여러가지문제를해결해야했던것이다.30)

그리하여 우선 의 의미가 양태론적 입장과 다름을 나타

내기 위해서 아타나시우스는 이 단어가 아버지와 아들‘두 분’의 신성

이 같다는 의미라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의 의미의

강조점은 하나의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 인격이신 참된 신성의통

일성을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31) 이와 연관되어 의 의미가

와 구별되어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정의

될 수 있었다. 우선바질은 는 세 인격들 가운데 공통적인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는 개별적이고 고유한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규정지었다. 이후에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와

person을 같은 개념으로서 서로 상호 이해될 수 있다고 밝혔다.32) 그리

고 이러한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의 주장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를 기점으로 신학의 언어적 규칙으로 적용되었다.33)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은 동일한 신성을 지니신 한 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으로서 하나의 본질( : substantia)과 세 실체적 존재( ;

subsistentiae)로 존재하신다고 표현하게 되었다.34) 동시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사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 교회는 삼위일체 신앙고백이

철학적인 언어가 아니라 구원론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확인했

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세례와 성

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43

30) Ibid., 83-111.

31) Athanasius, Oratinones tres contra Arianos, 1. 15, 28; 2. 34, 38; 3, 4, 15, 36; 4. 2

그리고Ad Serapionem, 1, 2, 14, 28; 2. 2 그리고 또한Contra Gentes, 2, 35. 아타나시

우스의 공로에 대하여베른하르트로제/구영철옮김,『기독교교리사』(서울: 컨콜디아

사, 1998), 80-82.

32) Courth, Trinität (1988), 171-172.

33) Ibid., 173.

34) Conciliorum oecumenicorum Decreta (ed. J. Alberigo u. a.), 24. (Der Gott Jesu

Christi, 316. 각주 135에서재인용).

35) Thomas F. Torrance, The Christian Doctrine of God, One Being Three Persons

(Edingburgh: T&T Clark, 1997), 124.

3 6 ) Ingolt U. Dalferth, “The Eschatological Roots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Trinitarian Theology Today (1995), 167.

Page 2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다고 주장한 것이다.41) 다시 말해서 이렇게 니케아 회의 결정사항이 다

시금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통해서 확인되면서 동방과 서방은 삼위일체

되신 한 분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일치된 이해에 도달하면서 성령론적

차원에서 동일본질의 의미를 확대하였던 것이다. 즉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구원이 지니는 궁극적 의미가 성령의 사역가운데 구체적으

로 실현됨을나타내는것이다.

2) filioque를 통한콘스탄티노플신조의 이해가능성

콘스탄티노플 회의 이후 구원의 모든 근거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존

재 자체에 있음을 밝히면서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

한 과제가 되었다. 즉, 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일본질로서 한 분 하나님

이시라는 이해와 더불어 세 분의구분에 대한이해가 시급한 요구가 된

것이다. 이것은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본

질적 존재( :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차적 의미의 )와 실

체적 존재( :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차적 의미의 )에 대

한 단어적 구분과 더불어 밝혀질 수 있었다.42) 그리하여 이제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본질이라는 표현 대신에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세

실체적 존재의 구분을 강조하면서 이 세 인격의 실체적 구분가운데 한

분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게 되었다.43) 그러나 이 때 동방과 서방은 서로

간에있어서 성령이 아버지와아들과 함께동일본질이시라는것의 이해

방식에 차이를 나타내게되었다. 즉 동방은 세 인격의 구분가운데 특별

히 아버지로부터 아들과 성령이 나오신다는 역동적인 이해를 발전시켜

스와 서방 교회와 같이 새롭게 아버지와 아들의 신성뿐 아니라 성령도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

리하여 안디옥 교회로부터 발생하고 있는동방교회의 성령론에대한분

열적 이해를 해결하고자 동방교회 주교들을 중심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서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37) 이 회의에는 서방의 주교 없이동방 지역의

주교들만이 참석하였고 또한 이 회의의 법령도 동방지역에만 공포되었

다. 그러면서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는 니케아 신앙고백을 다시금 확

증하며 그와 동시에 성령의 신성을 분명하게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38)

그리하여 경륜적 의미에서 성령을 주가 되시며 생명의 시여자이심을밝

힌 것 이외에도내재적으로 삼위일체의 내적인 관계에서성령을 아버지

와 아들과 함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고 또한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분( )이라고 묘사하였다.39) 이러한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의 중요성은382년 로마 교황이었던 다마수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고40) 또한451년 켈케돈 공의회를 통해서 에큐메니칼

한 공의회로 인정된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가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을 하나님의구원으로서

보장하기 위해서 예수의 인격적 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존재에 근거를

둔 것임을 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였다면 이제콘스탄티노플

회의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구원이 현실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45

37) 서원모, “4세기삼위일체논쟁의전개”(2008), 112-113.

38) Wolf-Dieter Hausschild, “Nicäno-Konstantinopolitianisches Glaubensbekenntnis,”

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 Bd. X X I V, 444-449.

39) Ibid., 451-452. 성령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바실의 입장을 따르면서도 그 신적인 성

격을 나타내는 단어적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나찌안쥬스의 그레고리

는 성령의 신성을 보다 교리적 표현하기 위해서 라는 단어의 사용을 주

장하고 있었다. 또한그의 Oratio에서그는성령을 하나님으로묘사하고있는것이다.

(Orationes, 41, 6) F. Courth, Trinität (1988), 174, 각주 62에서재인용.

40) J. Neuner SJ and J. Dupuis SJ ed., The Christian Faith (Glasgow: Collins, 1982),

100-101.

41) Courth, Trinität (1988), 124-125.

42) LaCugna, God For Us (1991), 57-59, 66-68.

4 3 ) Ludger Oeing-Hanhoff, “Trinitarische Ontologie und Metaphysik der Person,”

Trinität (1984), 144-145.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삼위일체론적 존재론이 실

체적존재론에갖는새로운의미인 것이다.

Page 2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의해서 이루어졌다. 보에티우스는 인격(persona)개념을 본성적으로 이

성적이며 개체적이고 실체적인 것(persona est rationalis naturae

indivisua substantia)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레온티오스는 예수 그리스

도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적인 본성은 그 자체로 실체를 지니지 않고

( ) 신적인 실체 안에서 인간성이 실체가 된다( -

)는 이해를 밝혔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밝혀지는 인간

성은 로고스의 실체의 특성으로서“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실재

한다는 이해에 도달한 것으로서 인격과 실체( ) 개념이 동일

시 된 것이다.49) 그리고 이러한 개념적 이해는 동방과 서방이 함께 인정

하고 있는 553년 제2 콘스탄티노플 회의(제5차 보편공의회)에서 분명

하게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하나의 본성

( ; natura)이거나 한 본질( ; substantia)이거나 하나의 힘과

능력이신 동일본질이신( ; consubstantiae) 삼위일체로서 세

실체들( ; subsistentiae)이거나 혹 세 인격들( ;

personae) 가운데 계신 한 신성”50)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즉 이것은 동

방에서 서방의 삼위일체 이해에 있어서 인격 개념이 단지 관계가 아니

며 그 자체로 고유성을지니는 실체적 요소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고 서

방은동방이 강조하는실체적 요소가 언제나 근본적으로관계성 가운데

위치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방에서 걱정하였던 것

처럼 서방의 인격 개념이 단지 상황적 관계에 따라서 변화하는 형태(양

태론적 입장)가 아니라는것을인정한 것이라고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381년 이래로 동방과 서방이 상호간의 차이를 인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인격이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 됨으로

써 아버지께서 아들을 출생하시고 또한 아버지로부터 성령이 발현하신

다는 것이다.44) 그러나 이와 달리서방은 아버지와 아들, 성령의 세 분의

존재를 하나의 본질을 지니신 한 분 하나님의 내적인 관계로서 이해하

였던 것이다.45)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의 결정은 서방에서는 교황 다마

수스가 표현한 것처럼 한 본질에 세 인격(una substantia, tres presonae)

으로 계신 하나님이라는 이해를 따라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46) 하나님

은 본질적으로한 분이라는 것과이 하나님은언제나 세 인격들 가운데

실재한다고설명하게되었던 것이다.47)

이렇게 삼위일체론 논쟁의 핵심적 문제가 구원의 행위를 이루신 것

이 완전한 하나님이라는것을밝히는 차원에서정리되면서다시금 문제

가 되는 것은 서방의 하나의 본질 안에 내재적으로 관계로서 이해되는

persona 개념이 동방의 가 지시하는 아버지 중심의, 아버지

와 아들, 아버지와 성령의 역동적이고 고유한 실체적 존재이해와 어떻

게 연관되는가?48)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쟁은 결국 persona 개념 정

리를위한복잡하고긴 역사를 나타낸다. 그 중에서도동방과 서방이 서

로 일치할 수 있는개념의 정리가 보에티우스와비잔츠의레온티오스에

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47

4 4 ) John D. Zizioulas, “The Doctrine of The Holy Trinity: The Significance of the

Cappadocian Contribution,” Trinitarian Theology Today (1995), 44ff. 그리고

Joseph T. Leinhard, SJ, “Ousia and Hypostasis: The Cappadocian Settlement and

the Theology of ‘One Hypostasis,’” S. T. Davis, D. Kendall, SJ, G O’collins, SJ,

ed., The Trinity. An Interdisciplinary Symposium on the Trin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99ff. 또한 같은 책 Sarah Coakley, “‘Persons’ in the

‘Social’ Doctrine of the Trinity: A Critique of Current Analytic Discussion,” 123ff.

45) William P. Alston, “Substance and the Trinity,” The Trinity (1999), 186-189.

46) H. Denzinger-A. Schönmetzer, 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

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Freiburg, 1965), 144.

47) Kasper, Der Gott Jesu Christi (1992), 316.

48) 삼위일체 이해에 있어서 인격개념에 대한 논의는 황돈형,『바르트와 포스트모던』(서

울: 한들출판사, 2004) I I장 삼위일체론에있어서인격개념의 형성과의미참조.

49) Kasper, Der Gott Jesu Christi (1992), 317.

50) H. Denzinger-A. Schönmetzer, Enchiridion Symbolorum (1965), 421. 여기서는“아

버지, 아들 성령은 하나의 본성( ; natura)이거나 한 본질( ; substantia)이

거나 하나의 힘과 능력이신 동일본질이신( ; consubstantiae) 삼위일체로

서 세 실체들( ; subsistentiae)이거나 혹 세 인격들( ; per-

sonae) 가운데계신한 신성에게기도하는것이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는파문을당할

지어다”라고정리하고있다.

Page 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와 같이또한성령의 신성을 아들의 신성과 함께 구성적인 관계로 파

악하고자 했던 동방교부들은 대표적으로 에피파니우스와 알렉산드리아

의 키릴 그리고 닛사의 그레고리, 막스무스 그리고 요한 다마스쿠스등

을 말할 수 있다. 이들이 비록 filioque를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서방에

서 사용되고있던filioque의 표현을 아버지로부터‘아들을통하여’성령

이 나오신다는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아버지와 성령의

관계를 이해함에있어서‘아들을통한’사상은 고대동방의 교부들에의

하여도 주장된 것으로서 이들 역시 성령의 인격을 아버지와 아들의 연

관성을 통해말하고 있었던 것이다.53)

3) 삼위일체의구원을 논할때 필요한 filioque의 해석학적가능성

이러한 동, 서방의 사상적 차이 가운데 드러난 filioque의 가능성에

대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교회 안에서 성례와 함께 역사적인

실재로서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는 것에서 이해되어야 했다. 즉 구원

의 현실을 이루는 주체자로서 성령의 신성을 밝히려는 사고도 예수 그

리스도의 구원과 연관된 가운데 이루어져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역

사적 현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현실임을

드러내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성령의 신성이 드러나야만 했던 것이

다.54) 성령의 신성은 한 마디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의연관성에

식하면서도 상호간의 인정을 중시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차이 가운데 드러난 동, 서방의 고유한 이해를 긍정함에 있어서 서방에

서는 성령의 신성을 표현하였던“아버지로부터나오시는분”(

)이라는 표현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본질

적 동일성을 전제하는 방식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방

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 서로 다른 실체적인 분이시라는

것을중시하는 차원에서세 인격간의 관계를 낳으시는 아버지와낳아지

신 아들, 숨 쉬는 아버지와 발현하는 성령의 실체적 관계로서 표현하고

자 하였다면, 이제 서방에서는 이것을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근본적인

동일본질의상호연관적인 관계 가운데 서로의 상대적인특성을 통해서

존재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상대적인

만큼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는 것이고 이때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동

일한 영이시기에성령은 아버지와아들의 공동적 관계의영으로서 아버

지와 아들의 공동의 영이시라고 보았던 것이다.51)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

의 신성의 출현은 아버지와 동시에 아들이 함께계심으로써 이루어진다

고 보았다. 그런의미에서 성령은 아버지와 그리고 아들로부터(filioque)

나오신다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흔적은 서방에서 일찍부터 발견될 수 있는데 힐라리

우스가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오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3 8 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있을 무렵 암브로우스는‘ S p i r i t u s

quoque Sanctus, cum procedit a Patre et Filio’ 라는 문형을 쓰고 있었

다. 이 후에 어거스틴은 성령이 아버지의 영이시고 아들의 영으로서 성

령의 신성을 고백함에 있어서 filioque를 명백하게 사용하고 있었다.52)

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 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49

51) 이러한 해석은 힐러리우스에게서 시작되고 이것을 발전시킨 어거스틴에게서 체계화

된 것이다. 이에대하여Hilary of Poitiers, De Trinitate, I I: 29, 그리고 Augustine, De

Trinitate, VI: 10, 11, V: 14. 15, X V: 24, 45-48. 참조

5 2 ) Yves M. J. Congar,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Vol. I I I, tr., David Smith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83), 50.

53) Ibid., 29-43. 에피파니우스는 동일본질이라는 단어 자체가 숫자적으로 하나를 나타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수의 존재의 하나의 본질을 뜻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

다(Epiphanius, Anchoratus, 6, 8; Haereses, 57, 10) 그리고Alexandria의 Cyril은 그

의 요한복음 주석(In Joannis Evangelium)에서 그리고 닛사의 그레고리는De Spiritu

Sancto, 3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이 서로의 존재 구성요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

리고 무엇보다도filioque를‘아들을 통하여’로서 이해하였던 막스무스는 동방교회가

서방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외에 또한 Courth, Trinität

(1988), 130-131. 참조.

5 4 ) Leo Scheffczyk, “Uneingelöste Traditionen der Trinitätslehre,” Trinität. A k t e u l l e

Perspektiven der Theologie (1982), 52. 이러한 입장에서볼 때Barth가Kirchliche

Page 2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인격의 고유성 보다는 신적본질의 단일성으로부터 삼위일체를 생각하

려고 하였던 방식은57) 그 차이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 서방

의 사상적 흐름의 차이는 한 분 하나님이 세 인격 가운데 신적 동일성

을 지닌다는 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정착되기 시작

하였고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준것이바로 filioque였던것이다. 한 마디

로 말해서 서방에서는filioque란 단어가 세 인격의 실질적인 동일성을

보여주는 명백한 단어가 되는것이었고동방에서는세 인격의 고유성에

있어서 혼란을 가져오는단어가 되고있었던 것이다.

3. filioque의 역사적전개과정에서의상반된해석들

1) filioque 사용의 역사적 갈등과정

filioque가 서방에서 확실하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포함되

어 사용되는 경우는 9세기부터이다. 전에 지적하였듯이 서방교회에서

filioque가 분명하게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등장하는 확실한 사상적 기반은 어거스틴으로부터 출발한다.58) 그 후에

프랑스Gallien에 위-아타나시우스 신조로 알려진 고백문서(Quicum-

que)에도 filioque를 고백하고 있었다.59) 그리고 Rekkared왕의 주도 하

서 밝혀져야 할 과제가 있으며 이것은 삼위일체의 내재적 질서의 문제

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해석되어야만했던것이다.55)

그러나 filioque와 둘러싼 동방과 서방의 이해 방식은 아쉽게도 이러

한 이해를 보여주지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앞에서 논한것과같이하나

님의 존재자체안에하나님의행위의 가능성을포함시켰지만하나님의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종말론적으로 밝혀져야

한다는 차원과 달리 여전히 당시 철학적 분위기를 따라서 존재론적 실

재론에 사로잡혀있었다고볼 수 있다. 즉 동방과 서방모두가 철학적인

방식으로하나님의 존재를 세 인격의 실체를 중심적으로보든지 아니면

세 인격의 근원적인 본질을 중심적으로 성령의 신성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편차는 지리적이고 문화적으로 분리된

상태와 정치적 갈등상태 속에서는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동방과 서방이 신앙적 일치 가운데 상호 인정하는 분위기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점차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결국 동방

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방식으로이해된 신 플라톤적 입장과 스토아철

학과의 통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자유를 보장하는 세 실체의

인격적(의지적 행위) 고유성으로부터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해하려

고 하여 신성의 근원으로서 아버지의 인격의 고유성으로부터 삼위일체

의 신성을 이해하는것과56) 이와반면에 서방이 어거스틴을정점으로세

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51

Dogmatik I V/3에서 성령의 사역을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론적 사신을 전하는 가운데

예수를 승리자로서 드러내는 것과Pannenberg가 Systematische Theologie I.에서 삼

위일체를 근원적인 방식으로만 보는 것이아니고 종말론적 방식으로 밝힌 것이중요

하다고 할 수 있다. Moltmann은 성령의 종말론적 사역을 창조의 영역과 연관시키면

서 자신이 강조하였던 종말론적특성이세상안에내재화된 행위로해석되고있다.

55) 현대신학자들이 종말론의 특성을어떤방식으로 전개시켜 가고있는가 하는 각자의

경향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filioque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게된다. 그리고 이것은 종말론이 어떠한 종말론인가를나타낼 수 있는기준

으로서 작용할수 있을것이다.

56) LaCugna, God For Us (1991), 59. 동방의 교부들은 관계개념을 이해할 때 스토아식

으로이해함으로써관계가 존재와직접적으로연관되는것으로 보지않았다. 즉 관계

를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설정될 수 있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관계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방식으로 이해함으로써 관계와 존재가 서로

관여되고있었던 것이다.

57) D. M. Mackinnon, “The Relation of the Doctrines of the Incarnation and the

Trinity,” ed., Richard W. Mackenney, Creation and Christ and Culture (Edinburgh:

T. & T. Clark Ltd, 1976), 100. 또한 Courth, Trinität (1988), 165.

58) Augustinus, De Trinitate, I V, 19-21, V, 11, 12, 14.

59) J. Neuner SJ and J. Dupuis SJ ed., The Christian Faith (1982), 11-12. 니케아 회의

의 전통적 신앙의 대표자로서 알려진 아타나시우스가 저자로 알려짐으로써 서방의

신학에서는막대한영향력을가지고 있었다.

Page 2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로 대립적인 형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서방은filioque의 사용

을 정당화하여 하인리히2세의 즉위식에filioque를 첨가한Credo를 찬

송하였고1014년 교황 베네딕트8세에 의해서filioque가 서방교회의 예

전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동방교회와 다른 신앙고

백을 가지게 된 서방교회 추기경Humbert가 1054년에 동방교회가 fil-

ioque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방교회를 파문하였다.63) 그리하여

이제 filioque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자신들의 신앙의 정당성을 주장

할 때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filioque를 통

해서 논의되어야 할 신학적 차원이 사라지고 대신에 교회의 신앙 형태

에 대한법적인 정당성의문제가정면으로 떠오르기시작한것이다.64)

2) filioque에 대한서방교회의 입장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filioque의 사용에 있어서 서방교회가

filioque를 주장한 까닭은 삼위일체의 동일본질 의미를 성령론적 진술

로 확장하여 이해하는 가운데 아들의 신성을 무시하였던 아리우스주의

를 배격하기 위해서 발생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성령의 신성의

근거를 고백하고자 할 때 삼위일체내의관계성을 통해서 설명함으로써

아들의 신성과 함께성령의 신성을 명확하게표현하려는것이었다는점

이다. 즉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본질

에 589년 제3차 Toledo 회의에서 스페인 지역의 아리안주의를 물리치

기 위해서 성자의 신성을 포함시킨 filioque를 고백하지않는성령의 신

성의 고백은 기독교의 구원과 상관없는 것으로서 선포되었다.60) 그 후

Charlemagne 대제는 계속해서filioque를 프랑스와 영국그리고 스페인

전역에서 사용하도록 지지하였으며61) 그리하여796/797년 Friaul에 열렸

던 회의에서filioque가 콘스탄티노플신조에 포함되는 일이발생했든지

아니면 807년 전에Aachener 예식문에 filioque가 콘스탄티노플신조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갈등의 시작은 807년/808년에 예

루살렘 성탄절 예배에서서방의 수도사들이 동방의 수도사들과함께니

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고백할 때 서방의 수도사들이filioque를 고

백할 때 발생하였다. 동방의 수도사들은filioque를 콘스탄티노플 신조

에 첨가하여고백하는 것을부당한 것으로 간주하고서방의 수도사들을

고발하였던 것이다.62) 그리고 이러한 갈등이 명확하게 해소되지 않은상

태에서 동방과 서방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만드는 경우가Photius의

콘스탄티노플 주교 수임 사건과 관련되어 발생되었다. 포티우스는 867

년 서방교회가filioque를 사용하는 것을 삼위일체 내에 아버지이신 하

나의 유일한 근원 대신에 두 근원을 끌어드리는 잘못된 것으로 고발하

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제 동방과 서방이filioque를 통해서 서로가 자신

들의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방식으로filioque를 해석하기 시작하였고 서

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53

60) Courth, Trinität (1988), 128-129. 아리안 주의를 배격하고 아들이 아버지와의 본질

의 동일성 가운데 성령의 발현에관여되어 있음을 밝히고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있어서 아들과성령의 관계를 밝히고있었다.

61) Dennis Ngien, Apologetic for Filioque in Medieval Theology (Milton Keynes:

Paternoster Press, 2005), 22.

62) Wolf-Dieter Hausschild, “Nicäno-Konstantinopolitianisches Glaubensbekenntnis,”

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 Bd. X X I V, 453. 이러한 갈등은 809년까지 계속되

었는데 그때까지도 서방교회의 대표인 교황Leo I I I은 Charlemagne대제와 달리 콘스

탄티노플 신조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Leo I I I는 오히려 라틴어와 그

리스어로콘스탄티노플신조그대로를판을만들어 베드로성당에두게되었다.

63) Ibid.

64) filioque를 받아들이는 오늘날의 가톨릭 입장에서는 교회법적인 차원에서는 오히려

동방교회의 이해를 구하고 있다. 그리하여Yves Congar도 I believe in Holy Spirit

vol. I I I(1983), 451에서filioque의 삭제에 동의하고 독일 개신교와 카톨릭 공동의 연

구(Die ökumenische Bedeutung der ersten Konzils von Konstantinople(381):

Glaubensbekenntnis und Kirchengemeinschaft, hrsg., v. K. Lehmann un. W.

Pannenberg, 120-125, 특히122. Nr. 2), 3)에서filioque를 삭제하는 것이 교회의 일

치를 나타내는 사랑 행동으로서 적합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는 filioque의

의미가이단적이거나잘못된것이기에삭제를 해야한다는것이아님을밝히고 있다.

Page 2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서 아들로부터(a Patre Filioque tangquam ab uno principio)” 나오신다

고 강조한다. 즉 서방교회의 filioque에 대한 이해는 아쉽게도 동방교회

가 강조하고 있던 아버지, 아들, 성령의 역동적 관계성을 충분히 고려하

지 않았으며하나의 고정된 신적 본질을 강조한 삼위일체유형으로서만

확정되어있는것이다.68)

3) filioque에 대한동방교회의거부

동방에서는Photius 이후로 filioque가 거부된다. 즉 동방교회가 이제

는 서방의 입장을 자신들의 견해에 대한 보충이 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즉 Photius 이전까지 동방

의 교부들의사상적 방식은 직선적 연속성 가운데 아버지⇒아들⇒성령

의 구조를 이해하고 있었고 이것은 성령이 아들의 존재를 통하여 신성

의 유일한 근원이신아버지로부터나오신다는구조였다. 그러나 Photius

로부터 이러한 구조는 포기되고 그 대신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 관계와

또 아버지로부터성령이 나오시는병렬적인관계의 이중적인방식의 구

조를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69) Photius는 Mystagogia Spiritus Sancti

에서 filioque를 삽입한 것이 우선 교회적으로 공동의 신앙고백을 깨뜨

리는 것이라고 비난하며둘째로filioque가 아버지의 단일통치를 위반하

게 만드는 것으로 결국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명확한 구분을 상실하

게 만듦으로써 내재적인 아버지, 아들, 성령의 존재를 혼돈하게 만든다

는 것이다.70) 그는성령이 아들로부터 나오신다면마치그것은 아버지⇒

아들⇒손자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주장하는 중

에 기인하여성령의 신성이라는 것이분명해지며 동시에 아버지를 통해

서 신성을 확인받는 아들과 성령간의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도

록 하기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성령이 서로 다른 관계에서만

평행적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인 동일본질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동시적으로 함께 설명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낳아진 분이시고 성령도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분이시지만 또 다른아들이 아니라는것을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성령은 아버지와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분이라고 표현함

으로써 아들이 아버지와 다른 분이신 것처럼 이제 성령도 아버지와 다

른 분이시고 동시에 아들과도 다른 분이시라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65) 이로써filioque는 서방교회의 특정한 사상적 구조 가운데 니

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근본 의미를 지키기 위한 의도였음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66)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동방교회와의 갈등을 겪으며

서방교회의 입장으로서 형성된다. 특히 B a r i공회의( 1 0 9 8 )를 거쳐

Anselm의 De Processione Spiritus Sancti를 통해서 서방의 입장이 분

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성령의 신성은 존재론적 유비를 통해 파악된

하나의 본질을 지니신 완전한 한 분 하나님의 내적으로 대립된 관계성

을 통일적으로 완성하는 분이다. 즉, 성령이 나오시는 곳은(procedendo)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곳, 신성의 본질이 하나로서 나타나는 곳

에서 나오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적 일치

성이 고백되고 성령이 아버지로부터나오신다면 이제성령이 성자의 동

일한 본질로부터 동시적으로 나오시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

다.67) 그리하여 그는“성령이 하나의 원리이신 아버지로부터 그런 한에

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55

65) J. Neuner SJ and J. Dupuis SJ ed., The Christian Faith (1982), 103-104.

66) R. Haugh, Photius and the Carolingians: The Trinitarian Controversy ( B e l m o n t :

Nordland, 1975), 35.

67) Anselmus, Processione Spiritus Sacncti, c. 9. 손은실,“중세의 삼위일체론,”『삼위일

체론의 역사』(2008), 282. 각주67 재인용.

68) Courth, Trinität (1988), 133-134.

69) Congar,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vol. I I I (1983), 58.

7 0 ) J. P. Migne ed., Patrologia Graeca (Paris, 1857-1866), 102, 263-3 9 1에 M y s t a-

gogia Spiritus Sancti가 있으며 여기서는(Mystagogia, 20, 62) 참조(F. Courth,

Tnitität(1988), 132, 각주 99, 101에서재인용).

Page 2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방교회의 입장은 구원의 근거로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밝힘에 있어서 점점 구원의 경륜과 분리된 채로 성령의 신성

을 밝히려고 하면서 결국은 내재적 차원에서의 신적 근원의 단일성의

원리가 모든 것을 규정하는 논리적 원칙이 되어버린 것이다.74)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에서부터 이해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성령이 예수에게 임할 때부터 성령은 예수를

나타내고자하였으며또한 온 세상을 구원할영으로서 오신다고 할지라

도 온 세상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오시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에서 성령의 신성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고

할 때 아버지를 특별하게 자신의 아버지로서 부르신 분은 바로 아들이

었다는 것을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예수그리스도가하

나님을 아버지로호칭한 것이성령에 의해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이미 성령이 그 자체안에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을 포함할 수 있어야

만 가능한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가 단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함으

로써자신을 하나님의아들로서 인식한것이아니라 전통적으로 주장하

는 바와같이 그가바로 성자의 인격안에서 성령으로성육신한 것이기

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성령이 아버

지로부터 나온다고 했을때 아버지라는명칭은 철저하게아들과 관련되

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엄격하게 아버지가 아들 없이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성령과 아들의 신성이

맺는관계성에대한방향을 제시하는것이다.

요한 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분의 상관성이 명확하게 파악될 수

있기위해서는 신성의 단일한 근원이신 아버지의 단일통치를 확고하게

하며71) 아버지로부터의 아들의 관계, 그리고 또 한 번 아버지로부터 성

령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72) 그리고 이것이Photius

이래로 동방교회의 핵심적인 주장이 된다.73) 그러나 비록 동방교회가 성

령의 신성의 근원을 세 인격 가운데 계신 한 분 하나님의 방식으로 추

구하고자 하였지만 이것은 근본적인 사건의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드러난 삼위일체적 계시의 의미를 전제함으로써만 가능했던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신성을 지

니신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성령이 아들이신 예수 그

리스도의 구원을 교회의 성례전을 통하여 실현하시는 분이시라고 믿고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명백한 구원

의 경험을 중심으로 성령의 신성을 고백할 수 있었고 그를 통해서 아버

지, 아들, 성령의 한 분 하나님의영원한 내적인 삶에대하여 말할수 있

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57

7 1 ) P h o t i u s , On the Mystogogy of the Holy Spirit (Astoria: New York: Studien

Publications, 1983), 71-72, 51-52. 여기서Photius는 요한15장 26절 해석을 주석하

면서“아버지로부터”성령이 오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이에 비하여Augustine은

요한20장 22절과 연관시키면서 예수가 성령을 받으라고 숨을 쉬신다는 것은 성령이

또한아들로부터나오신다는것을의미한다고주석하고 있다. 피터스,『삼위일체하나

님』(2007), 108-109에서재인용.

72) Congar, I believe in Holy Spirit, vol. I I I(1983), 73-74. Photius 이래로 동방교회는

서방교회가 주장하는 본질로부터의각 각의 세 인격의 이해가 불충분하다고믿고 있

었다. 이것은 두 가지점에서 오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 첫째는, 서방의 입장이 단

지 인격을 본성으로부터 추론되는 것이 아니라 각개의 개별적인 관계성(a subsistent

relationship)으로부터 이해된다는 것을 파악하지 않은 것이며 또한 둘째로, 일찍이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은 각각의 개별적인 인격을 이해하기 앞서서 동일본질을 강조하

였다는 것과 함께 반대로 서방 역시 아버지의 근원적인 통치를 강조하고 있었다는

것을무시한것이다.

73) F. Kattenbusch, “Photius,” Real-Enzyklopädie X V(1904) 374-393, 388. Vladimir

Lossky, The Mystical Theology of the Eastern Church (Londdon: James Clarke,

1957), 58.

74) 경륜적 하나님의 구원과 내재적인 초월적 하나님의 존재를 구분짓게 되는것은 인간

의 정신과 연관시켜서 삼위일체를 밝히려던 서방교회보다 동방교회에서더욱분명하

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LaCugna, God For Us (1991), 70-73. 동방교회가

filioque를 부인하고자 함으로써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에 비하여 지니는 개념적이고

논리적 차원에서의 종속론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Kevin Giles, Jesus and the Father

(Grand Rapids: Zondervan, 2006), 157.

Page 3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인격은 자신의 개별적인 존재를 가능케 하

는 세 존재의 공동적 관계성으로부터 파악되는 것이다. 세 존재의 인격

의 핵심은ekstasis로서 정의된다.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인격들이 구

체화될 수 있는것은 오히려 세 인격이 근본적으로 상호연관적 존재이

기 때문인 것이다.77) 이제 하나님의 세 인격의 실체적인 의미는 단지 개

별화되고 차이가 있다는 것을 넘어서 가장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 상호

침투적이고상호내재적인존재를 실현하는 것에서 발견된다.

동방교회에서는 삼위일체의 인격적 존재를 할 때 중요한 것은 세 인

격의동시적 실체성을나타내고 있으면서도언제나 아버지의인격을 신

성의 근원으로서 강조해 왔다. 그러나 1991년의 동방교회 지도자들과

개혁교회의결정사항에는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이해에 대한새로운 방

향을제시하고 있다.78) 그것은 동방교회도 단지 아버지의 우월성을 신적

존재의 근원으로서 우선시할수 없다고 개혁교회와함께고백하였던것

이었다.

이에 따르면 이제 아버지만이 신성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세 인격의 공동적 근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자연스러운것이 되는것

I I I. filioque의 해석학적가능성과한국적신학의가능성

1. filioque를 페리코리시스( )의 관점으로이해하는

가능성

filioque에 대한 논의는 동, 서방교회의 분열 이후 핵심적 주제로 다

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일치를 추구하는 회의로서1274년에 있었던 리용

회의와1438-1439년에있었던 플로렌스 회의가 있었다.75) 두 회의의 결

정이 동, 서방교회의 일치는 가져오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fil-

ioque를 새롭게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를 보여준다. 새롭게 등장한 논의

의 가능성은 바로 하나님의 내재적 삶의 통일적인 연관성을 언급한 것

이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세 인격의 근원적 관계이외에 자기표현과

인격의 상호성을 나타내는 상호 내재와 상호침투의 역동적인 행위( -

)를 통해서 밝혀지는세 인격상호간의 이다.76)

이러한 인격의 상호적 역동성을 파악할 때 우리는 현대 동방교회의 입

장이인격에 대한새로운 면을강조하고있다는 것을발견하게된다. 즉

이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실체개념에 따라개별적인 것에대한강조

를 통해인격을 이해함으로써양태론적 흔적을 제거하고자하였다면이

제는 인격의 실체적인 것을하나님 본질의근원적 통일성으로부터파악

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59

75) Courth, Trinität (1988), 134-135. 리용의 회의는 filioque의 의미를 수용하면서1) 성

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오신다. 2) 아버지와 아들은 두 근원이 아니다. 두 가지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동방의 황제의 동의였지 동방교회의 합의는 아니었다. 그

이후 플로렌스회의에서는성령의 발현에 있어서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관계성이 함께

구성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나오신다는의미로 해석되었다. 그리고filioque는 동방에강요되지 않았다. 그

러나두 가지회의의결정들은동방교회로부터받아들여지지않았다.

7 6 ) T. F. Torrance, The Christian Doctrine of God, One Being and Three Persons

(Edinburgh: T&T Clark, 1997), 170-171. 이 단어가 쓰인 경위와 특히 이것이John

of Damascus의 De fide orthodoxa , 18 그리고 1, 11에서 지금처럼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받게되었음을밝히고 있다.

77) J. D. Zizioulas, Being as Communion (Crestwood, N. Y.: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85), 42.

78) Giles, Jesus and the Father (2006), 158. 1991년 동방교회의 대표자들과 개혁주의

신학자들과의 만남에서 동방교회의 대표자들은 Arche나 Monarchia를 아버지에 속

한 것으로 보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세 인격에 공통적인 것으로 표현하였다. 다

음은 Orthodox/Reformed Commission이 M o n a r c h i a에 대하여 결정한 본문이다.

“The perfect simplicity and individuality of God in his Triune Being mean that the

A r c h e ( ) or Monarchia ( ) cannot be limited to one Person, as

Gregory the Theologian pointed out. While there are inviolable distinctions within

the Holy Trinity, this does not detract from the truth that the whole Being of God

belongs to all of them as it belongs to each of them, and thus does not detract from

the truth that the Monarchy is One and indivisible, the Trinity in Unity and the

Unity in Trinity.” Theological Dialogue between Orthodox and Reformed

Churches, vol. 2, ‘Significant Features, a Common Reflection on the Agreed

Statement’. ch. 7, 231.

Page 3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인 영으로서 아들에게 머물면서 아들을 세우고 또한 아들 안에서 하나

님의 인격적인 지혜를 발견하고 지혜의 영이 된다. 그리하여 성령은 아

들 안에서 머물지 않고하나님 아버지에게 아들을 나타냄으로써아버지

를 나타내고 동시에 자신을 나타낸다는 것이다.82) 이러한 새로운 해석

가운데 동방교회가 표현하고자 하는바는하나님의내재적 삶의순환적

일치를 통해서 성령의 근원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시적인 신적 인

격 가운데 놓이게 된 것을강조하고있는것이다.83)

그러나 이와 같이 에 말하는 것은 filioque의 필요성

을 전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상호 순환적인 삶을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세 인격의 순환적 삶의 질서가 말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인 것이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순환

적인 관계성은 임의적으로 반복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

에 이러한 순환적 삶의 인격적 관계의 순서를 제시하는 것이 필수적이

라고 본다. 그리하여 동방교회의 입장과 또한 동방교회의 입장을 전적

으로 지지하는 몰트만도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의 순환적 일치가 우연하

고 임의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도록 묘사하고 있다.84) 이렇게 하기 위해

서는 어쩔수 없이하나님의 내재적 삶의질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사실에 따라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이해

되는것은예수 그리스도께서자신을 아버지의 아들로서이해하는 가운

데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 성령의 존칭이 하나님 자신

의 내재적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게될 때 자연히 예수그리스도의 계시

를 따라서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의 삶이 파악되게 되는 것이다. 삼

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상호 침

투와 상호내재의관계성을 통해서 이해됨으로써세 인격의 상호적인근

원적 일치성이 보다 더 분명하게 밝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서 성령의 나오심에 대하여 말할때 자연스럽게아버지와동일본질이신

아들이 함께 관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로써 동방

과 서방이 filioque를 해석할 때 만났던 가장 큰 문제점인 신성의 근원

이 유일하게 아버지의 인격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동방과 서방이 함께 filioque를 인정할 수 있는 방식이 -

를 통해서 발견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79) 물론이것은 아버

지와 아들을 통한성령의 발현 이외에오히려 아버지와 성령을 통한아

들의 탄생까지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근 동방교회의 P a u l

Evdokimov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낳아질 때 성령으로부터아들의 존

재를 받는다는 의미에서 Spirituque를 말하면서 동시에 성령이 아버지

로부터 나오실 때 아들로부터 나오신다고ex Patre Filioque를 말하고

있다.80) 즉, 아버지와아들, 성령세 인격은 서로가 서로에게상호호환적

인 역동성 가운데 아버지를 출발로 하는 방식으로 아들과 성령이 서로

에게 구성적인 요소가 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

향에서 또한 S. Verkhovsky도 강조하고 있기를 가 fil-

ioque에 대한 동방의 해석으로서‘아들을 통하여’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81) 성령은 아들에게 보내진 아버지의 인격적

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61

79) 몰트만,『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1982), 217-224, 그리고 또한 몰트만,『생명의

영』(1996), 407-411. 몰트만은 동방교회의 입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며 filioque의

문제를 근원적 삼위일체의 형태로 제한시키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신학적 반론을 제

시한다(410). 그러나 이것은 filioque가 지니는 동일본질의이해가운데예수그리스도

의 역사적 구원 사건의 연속 가운데 드러나는 성령론적 진술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이유를 무시한것이다.

80) P. Evdokimov, L’Esprit Saint dans la tradition orthodoxe (Bibl. CEcum., 10) (Pris,

1960), 71-72, 77, 78. (Yves M. J. Congar, I believe in Holy Spirit, vol. I I I, 78, 후주

13. 재인용)

81) S. verkhovsky, Istina (1950), 206-207(Yves Congar, I believe in Holy Spirit, vol.

I I I, 75. 재인용)

82) Yves M. J. Congar, I believe in Holy Spirit, Vol. I I I(1983), 75-76. 몰트만도 이러한

입장을그대로 받아들이고있는것을 발견하게된다. 몰트만, 『생명의영』(1996), 409.

8 3 )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1982), 211-212. 몰트만, 『생명의 영』( 1 9 9 6 ) ,

410.

84) Ibid., 214. 또한몰트만, 『생명의영』(1996), 395-396, 406, 410.

Page 3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추구하였던 구원의 명백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filioque가 단지 교회의 분리를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동방교회

와 서방교회가 서로의 사상적 차이가 지니는 고백의 표현의 차이를 인

정하지 않고자신의 입장을 따라서 하나의 형식만을강조하다가 파생된

문제라고 보인다. 그러나 교회일치가 filioque를 삽입하지않은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와 filioque를 삽입한 신조의 서로 다른 본문 때문에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점으로서 교회의 일치

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유일한 대상으로서‘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때문인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단 하나의 절대적인 교회만이 있는 것처럼 유일한 형식을 요구하는 것

을 포기해야 함을지시한다. 우리는 지금서로다른교회의 형태를 취하

고 있으며 서로 다른 교회들 가운데서 진지하게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해야 하는것이다.86) 그리하여 서로 다르게 표현된 신앙고

백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분명하게 나타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고백이 교회

의 참된정체성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그 의미는 단지어귀의 문제가 아

니라 근본적 신앙의 고백적 차원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적인

어구는 그러한 신앙의 가능성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볼 때 filioque가 한국적 상황에서 신앙을 위해 갖는 해

석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서방교회가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덧붙였던

filioque의 해석학적 문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새로운 상황에 드러나

는 구체적인신앙고백의 가능성에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서로 다른 교회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고백되는 가운

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한 분 하나님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용납하면서 서로

위일체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

르는 삶의 과정이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밝

혀지며 바로 이 계시적 역사를 통해 성령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는 종말론적인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세상과 하나

님 사이의 일치에도 연관된다. 이로써 삼위일체적 삶의 의미가 분명하

게 알려지는것은철저하게 아들과의 연관성을통해서라는것을인정해

야 한다. 이것은 동방교회나몰트만이염려하고있는것 같은성령의 아

들에 대한 종속론적 이해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생명의 영으

로서 세상을 위한 근원적 역할을 제한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

려 성령이 아들을 통해서 철저하게 이 세상의 구원의 영으로서 창조의

영이며 세상을 위한 영이시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러한 사실은 가 하나님의 내재적 삶의 과정으로서 의미

가 있기 위해서는 당연히 의미적 차원의filioque가 인정되어야 함을나

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삼위일체의 내적 삶의 과정에 있어서 성

령의 종말론적 삶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filioque의 중요성이 분명해

지는것이다.85)

2. filioque가 지니는한국적신학을위한해석학적가능성

이제까지filioque에 대한 논의를 살펴본 것처럼 filioque는 어떤 이

단적인 사설에 의한 논쟁이 아니었다. 오히려filioque의 의도는 니케아-

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63

85) 피터스,『삼위일체 하나님』(2007), 112. 그리고 또한 동방교회 신학의 제한점에 대하

여 Congar, I believe in Holy Spirit, Vol. I I I (1983), 76. 동방교회에서는삼위일체 삶

의 순환적 과정이palamas적 전통에 따라서 본질적인 것과 능력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삼위일체의 내재적 순환 자체를 삼위일체 하나님

의 내재적인 차원에 제한되어 있는것으로 보고있으며 경륜적 차원에서는 본질적인

것과 다른하나님의 세상에 대한영향력으로서나타나는 것이된다. 그리하여 삼위일

체와 세상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등장

한 하나님의인격적 실재를나타내 주지못하고있다. 86)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 V. 1,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93), 764.

Page 3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되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종말론적 사태를 역사적

차원에서 인격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둘째, filioque를 통한

삼위일체의 해석적 과제로서의 한국적 신학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성령

의 역사가운데 종말론적으로한국적 지평에서 이루어짐을 밝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적 삶과 역사의 의미가 예수 그리

스도를 통해서 발견되기까지신앙의 의미는 아직 완성된 것이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filioque를 중시하는 한국의 신학은 한국의 교회를 위

한 신학으로서 교회가 단지 세상적인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근

본적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있도록

하는 비판적인 신학이어야 한다. 한국교회는filioque를 함께 고백함으

로써 한국적 신학이 지니는 고유성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기독

교적근원성을함께나타낼 수 있는것이다.

IV. 나가는글-종말론적하나님의구원을말하는성령론적

진술로서의filioque

filioque가 성령의 근원을 설명하는 차원에서 등장하였다는 것은 분

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성령 하나님의 내재적인 차원만 설명되는

것이 아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지평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루시는 성령 사역의 연속성을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다

시 말해서 filioque를 통해서 우선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

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 사역을

이루시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filioque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

재를근본적으로예수그리스도의역사가운데 드러난 구원의 종말론적

존재방식으로서 이해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삼위일체의 모든

인격은 근본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이해되도록 하는것

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종말론적 방식으로 예

의 삶과문화속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고성령으로알려지신 하나님의

목소리가 더욱풍성한 다양성을 통해서 전파되도록노력해야 하는것이

다.87) 이런 관점에서filioque를 긍정한다는 것은 교리적 한계를 넘어서

성령의 다양하고 놀라운 구원의 풍성함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

령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가져오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현실을

각각의 현실에 분명하게 드러내는것이filioque의 한국적 가능성이라고

말할수 있다. 한국적 상황과 문화가운데 그리스도가이루신 구원의 현

실을 창조하는 성령의 능력가운데 책임적인 신앙고백을이루어내는것

이 filioque를 고백하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신앙의 고백은 그리

스도를 한국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한국의 삶과 문화 가운데

성령의 능력을 통해 가장분명한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나타낼 수 있

도록만드는 창조적인신앙의 사건이되는것이다.

이제 filioque의 해석학적 의미를 통해서 한국적 신학의 사고를 전개

하는데 다음과 같은 점을 배울 수 있다. 첫째, 한국적 상황에서 성령을

말하는 것은임의적인 세상의 영으로서가아니라 교회가 고백하고있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성령이 이루시는 다양한 영역의 구원을 발견하는 것과 함

께 시작한다. 그리하여 개인의 구원과 사회 구원 그리고 생태계의 구원

을 이루는 포괄적인구원을 밝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성령안에서 계시

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65

87)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서로를 비난하기보다는이제는 서로의 공동의 이해를원래의

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이루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L. Scheffczyk나 B. Schultze는 서방교회에 있어서 filioque가 지니는 중요

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특히H. J. Marx는 동방교회에 서방교회의 입장을 이해하여

줄 것을 바라고 있다. 그는 동방교회가 서방교회의 동의 없이 니케아 신조를 정의하

고 선포한 콘스탄티노플의신조가 보편적인 신조가 된 것에 대하여 서방교회의 입장

이 filioque를 삽입하는 것으로 후에 표현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H.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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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통해 이해된다. 이제 성령은 교회의 성례

전적 현실 가운데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다양한 방식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분이신 것이다. 그럼으로써filioque

는 성령께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상호 연관성 가운데 종말론적

구원을 현실적으로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

고 이런 관점에서filioque는 성령의 기독론적 관계를 드러내며 기독교

의 정체성을 분명하게표현하는것이라고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filioque는 삼위일체적 삶의 순환을 통해 계시하시

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사랑을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내는 성령의 사역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filioque가 지니는 이런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를 볼 때 fil-

ioque는 오늘날 한국의 상황가운데 한국인을 위한하나님의 구원의미

래를 밝히는 중요한 고백으로서 기독교의정체성을보존하는 중요한 교

리적진술이 되는것이다. 그리고 또한동시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그

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개방된 하나님의 창조적 미래를 향한 것으로 파

악되는 한국적 신학이드러날 수 있는것이다.

주제어

필리오케, 호모우시오스, 인격, 실체, 페리코레시스

(Filioque, homoousios, Person, Substance, Perichoresis)

접 수 일 2009년 11월 20일

심사(수정일) 2009년 12월 05일

게재확정일 2009년 12월 15일

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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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69

Page 3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Nicean understanding of the trinitarian God. Therefore, in spite of the

difference of the paradigm of the describing the relationship of the

essence of God with the three persons of God, it is quite necessary to

see the divinity of the Holy Spirit in the connection with the Son of

God who is revealed through the historical person, Jesus of Nazareth.

This confirms the soteriological work of the trinitarian God in the

church and, moreover, the eschatological perspective of the saving

reality of the trinitarian God. The continuity of the Necea Creed and

Constantinople Creed affords us a possibility that we can interpret the

filioque interpolation of the west church into the Constantinople Creed

as the complete interpretation of Constantinople Creed.

In the sight of the historical development after the admit of the

Constantinople Creed as the ecumenical Creed it is noticed that the

east and west church try to reach to the agreement about the meaning

of trinitarian personality of God. It means that the deity of the Holy

Spirit can be understood basically in the reciprocal relationship with

the Son of God in western Situation. And this did not contradict the

eastern viewpoint of the relations between the tree persons of God

which designate God the Father as the ultimate ground of the deity.

With the conflict case of Photius, the understanding of the divinity of

the Holy Spirit is basically divided. From that moment, filioque has

been no longer acceptable for the eastern church.

In recent time, the contemporary theologians, for the unity of the

church, propose that the understanding of the divine

Life can include the different assertions about the procession of the

Holy Spirit by east and west churches. But the life of

trinitarian God must be organized through the event of Jesus Christ, if

it is not fallen out of the soteriological standpoint. It means that the

filioque understanding as the expression of the correspondence

between the immanent trinity and economic trinity is also important to

constitute the ordering of divine life in itself.

A Hermeneutical Meaning of the Filioque for theTruth of the Trinitarian Revelation in the Korean

Situation

Hwang, Don Hyung

Professor

Seoul Central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It is important for the christianity to have the same confession

about the trinitarian God. By confessing the same trinitarian creed, the

identity of the christianity can be insisted among the religious mixture

phenomena through contact with various cultures and religions. But

unfortunately, the different perspective of the procession of the Holy

Spirit with the relation of God the Father caused to split christianity

into two parts, namely Roman-Catholic and Orthodoxy that have

characterized two different spiritualities from one another.

In this situation, first, it is the purpose of this thesis to recognize the

hermeneutical meaning of the “filioque” interpolated in the

Constantinople Creed in the context of the establishing the trinitarian

Creed. And secondly, through this consideration, it is the aim to

disclose a hermeneutical possibility of the ‘filioque’ for the Korean

Theology.

Already it is known that the filioque is through the On the one

hand, it is certain that the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the trinitarian

God can be fully recognized by the expression of the of

the Nicea Creed. On the another hand, the Constantinople Creed is to

be understood as the creed that is constituted in the continuity of the

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황돈형, 삼위일체의계시적 진리를위한필리오케(filioque)의 해석학적의미 71

Page 3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계시현상과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계시이해에대한고찰

이은주(장로회신학대학교강사)

I. 글을시작하며

기독교 신학 전통에서‘보이는 것으로서의 계시(R/revelation in the

visible form)’는‘예언자적 말씀으로서의 계시’에 비하여 생소한 분야

였다.‘보이는 것으로서의 계시’는 세계내적 현상소여(the given phe-

nomenon)를 신적 계시의 한 요소로 본다는 것이다. 계시의 개념은 기

독교 신학을 탄생시킨 모태이고, 계시에 대한 해석은, 그것이 언어적 기

표를통한것이건 보이는 현상을 통한것이건, 신학에서 가장중요한 역

할을한다. 이 시대의 신학적 위기의 본질은 아마도 세계현상 경험의 모

호함을 전통적인 신학적 인과론(aetiology)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즉 신학적 해석의 토대 붕괴와 관계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세태 자체로’(turn to the things themselves) 돌아가자는 서구

현상학은 현상의 소여를 형이상학의 충분논리율의 토대로부터 분리시

키는 운동이었고, 이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해석의 틀들이 마련

되었다. 이러한 철학사조와 함께, 20세기 신학 또한 상관관계에 기초한

The possibility of korean theology, on the one hand, to be a

particular theology and, on the other hand, to be a universal theology,

must be disputed on this result that the filioque is not to be ignored for

the confession of the trinitarian God and can support the concrete

theological work in a certain context. With a word, it is within the

meaning of filioque that korean theology can find its soteriological

ground and also its own particular form for the korean situation.

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73-100

Page 3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바라보는것을의미한다. 이 논의의 초점은 그가제기하는다음의 두 가

지 질문과 관계되어 있다. 첫째는 현상학 전통이 제시하는 환원 방법론

내에서 계시론 논의가 가능한가 하는 질문과, 둘째는 계시현상과 지평

간의관계에 대한질문이다.3) 기존의 현상학적방법론의문제가 계시현

상의소외를 일으켰다는 논제로 마리온은 자신의 현상성의 신학화를체

계화하고 있다. 마리온의 현상학적 계시이해 논의의 초점이 되는 위의

두 질문들은‘환원 주체(the I)’와‘해석지평(the horizon)’의 조건성에

현상가능성을 제한했던 현상학적방법론에대한 그의문제의식의 표명

이며새로운 틀을통하여 계시현상의 가능성에 접근하고자 하는의지를

드러내고있다.

‘보이는 것으로서의 계시’에 대한 신학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저자는 이 논문에서 계시현상과 지평간의 관계에 대한 마리온 사상의

본질을 밝히고, 계시현상이 조건성에 제한되지 않는 새로운 해석학적

틀인‘직관의 포화현상(the saturated phenomenon) 이론을 고찰해 보고

자 한다. 계시의 가능성과 지평과의 관계라는 주제에 대해 저자는 다음

과 같은 과정으로 논의를 이끌고자 한다. 첫째,‘개념적 우상’비판이라

는 제목 하에, 마리온이 어떻게 후기 형이상학의 문제점을 신학적 입장

에서 비판하고 있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둘째, 훗설과 하이데거의 현상

학이계시가능성을 현상의 조건성 안으로 제한시킴으로써현상학 내에

서 계시소외의 원인이 되었다는 마리온의 분석과 비판을‘현상학과 계

시가능성’이라는 제목 하에 살펴보겠다. 셋째,‘직관의 포화현상과 역

설’이라는 제목 하에, 기존 현상학의 지향적이고 존재론적인 지평의 틀

을 극복하려는 마리온의‘직관의 포화현상’개념과 계시현상을 해석하는

‘역설’(para-dox)의 구조에 대해고찰하고자한다.

실존론적이고 해석학적인 신학의 가능성을 열어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계시현상’을 나타내는 세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부족을 체험

한다. 본 논문에서 저자는 이러한 신학적 현실에서‘보이는 것으로서의

계시’에 대한 신학 이론을 제안한 현상학적 신학자 장-뤽 마리온

(Jean-Luc Marion, 1946-)의 계시이해를소개하고자한다.

그는현상학의신학적 전환을 시도한 카톨릭 신학자로서, 탈근대주의

시대정신이 형이상학 해체라는 방법을 통해 무신론적 경향으로 치닫고

있는 사상적 흐름의 모든 주제들에 대해서 새로운 해체의 내용과 방식

을 제안하며 도전한다. 트레이시는 마리온이 시도하는 해체의 방향에

대해 한마디로 근대주의적 기독교 사상의 산물인‘이성과 계시간의 상

관관계(correlational models)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1)

즉 신에 대한 질문의 폐기(nullification of God as a question)와 함께

계시의 가능성을 인간 이성의 지평 안으로 제한시키는 방법론과 이에

따른 계시 소외가 근대 신학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마리온은‘있는 그대

로의 신’과 계시에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탈근대 신학의 가능성을‘현

상성 해석’에 대한 자신의 독창적 방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의 두

번째 현상학 저서인『선물(Etant donné)』에서 그는‘현상성의 신학화’

(Théologisation de la Phénoménalité)라는 주제로 현상학과 신학간의

새로운 대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2) 지금까지 현상성에 대한 해석학

적 논의의 방향이 주체 지향적 환원(훗설), 존재론적 환원(하이데거), 윤

리로의 환원(레비나스), 또는해체론적환원(데리다) 등의방법론으로발

전해 온 것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대응으로서 현상성의 신학화는, 계시

론적 해석학의 입장에서‘현상성의 질서’를 신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은주, 계시현상과 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계시이해에대한고찰 75

1) David Tracy, “Forward to God without Being,” in Jean-Luc Marion, God without

Being, trans. Thomas A. Carls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x-xi.

2 ) Marion, Being Given: Toward a Phenomenology of Givenness, trans. Jeffrey L.

Kosky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2), 243.

3 ) Marion, “The Possible and Revelation,” in The Visible and the Revealed, t r a n s .

Christina Gschwandtner (N.Y.: Fordham University Press, 2008) 참조.

Page 3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철학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의 핵심은‘신에 대한 탈-우상적 접근( a

non-idolatrous face of the divine)’ 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두 권의초기신학저작안에서‘신적 거리(the divine distance)’

개념을 그 답으로 제시하고있다.

마리온은 형이상학을‘개념적 우상(conceptual idol)’으로 이해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을 존재망각의 철학(The oblivion of Being)

으로 이해한 것에 대한 마리온의 신학적 답변이다.‘개념적 우상’이란

인간의 정신이 포착한‘개념’을 신과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데카르

트에대한그의 저술들에서도밝히고 있듯이 마리온은 형이상학에 대한

정의에 있어 일정 부분 하이데거의 방법론을 따라간다. 하지만 실제로

형이상학이 해체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하이데거가 말한‘존재망각의

역사’가 아니라 신과 세계(인간)를 동일시하는 문제, 즉‘신과 세계간의

거리(distance) 상실’의 측면이라고 마리온은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은 세계존재자에 관한 일반학과 초월존재자에 관한 특수학문

의 결합으로 구성된 철학분야이다. 하나의 철학적 원리로 이 두 가지서

로 상이한 영역을 연결시키는 철학 방식이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대 형이상학의 방법론이다. 그 원리가 이성, 존재, 또는 인과 등 어떤

것일지라도 형이상학 방법론에서의 철학적 신은 이러한 내재적인-인

간 경험의 지평이나 자아론적으로 이해 가능한-철학 원리에 종속되었

다. 이러한 형이상학 전통에서의 철학적 신을 마리온은 개념적 우상이

라고 정의하며, 이것을 해체하는것을 탈-우상적 신학의 수립을 위한수

단으로 사용한다.6)

하지만 마리온의 개념적 우상 비판은 근대 형이상학의 역사에만 한

I I. 개념적우상비판

마리온은 데카르트에 대한 연구로 철학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4)

데카르트의 존재-신학(onto-theo-logy)에 대한비판적 작업과정 중에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신학 저작을 선보이는데, 이것이『우상과 거리』

(L’idole et la distance: cinq etudes, 1977)이다. 이 작업을 통하여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 그리고 레비나스 등의 탈근대주의 사상가들이 제시하

는 형이상학 극복의 과제에 대해 마리온은 신학적 입장에 서서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1982년 자신의 두 번째 신학적 저서『존재 사유 없이

신에게』(Dieu sans l’être)를 발표했다. 이 두 권의 초기 신학 연구 안에

서 그는 근대 이후 계속 구성되어온‘철학적 신’의 개념적 우상성의 문

제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탈근대주의 과제에 대해서 그의 신학적, 철학

적 관점들은 일종의 양비론적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이다. 즉, 근대 형이상학 전

통의 해체를 추진함과 동시에, 후기 형이상학의 탈근대주의적 존재론에

대한 비판을 함께 시도한다는 것이다. 근대 형이상학 전통의 해체는 데

카르트로부터 시작된‘자아론적 존재신학 구성’( e g o-logical consti-

tution of onto-theo-logies)의 역사 비판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5) 그

리고 니체로부터 시작된 탈신학적인 해체주의에 대해 우상의 존속이라

는 논제로 비판한다. 이렇게 두 방향으로 진행되는 그의 근대, 탈근대

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은주, 계시현상과 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계시이해에 대한고찰 77

4) 장-뤽 마리온의 데카르트에 관해 출판된 저술로는 다음의 글들이 있다. Sur l’onto-

logie grise de Descartes (Paris: Vrin, 1975, 1981); Sur la théologie blanche de

Descartes (Paris: P.U.F., 1981); Sur le prisme métaphysique de Descartes. Constitu-

tion et limites de l’onto-théologie dans lad pensée cartésienne (Paris: P.U.F., 1986);

Questions Cartesiennes. Méthode et métaphysique (Paris, P.U.F., 1991); Questions

cartésiennes, Vol 2: L’ego et Dieu (Paris: P.U.F., 1996).

5) 이에 대해서는마리온의 데카르트 연구서 중의 하나인 다음의 글을참조하라. Marion,

On Descartes’ Metaphysical Prism: the Constitution and the Limits of Onto-theo-

logy in Cartesian Thought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9).

6) 개념적 우상(conceptual idol)으로서의형이상학분석및 비판은마리온의 다음의영문

으로 번역된 글들을 참조하라. Marion, God Without Being: Hors-Texte, t r a n s .

Thomas A. Carlson (Chicago: The Chicago University Press, 1991), chapter 1;

Marion, The Idol and Distance: Five Studies, trans. Thomas A. Carlson (New York:

Fordham, 2001), 1-26.

Page 4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lethiology) 토대 위에 세우는 것을 말한다.9 ) 둘째, 존재를 현재성

(presence)과 현실태(actuality)로 보는 것을 부정하며, 존재의 임시성

( t e m p o r a l i t y )과 가능성( p o s s i b i l i t y )에 대한 철학화를 의미한다. 셋째,

‘알려지지 않은 차이(unknown difference)’를 드러내는 존재의 자비로

운 현현(the auto-unconcealment of Being)에 대한철학화를통해 전통

적 형이상학을극복하고자하는것이다.

이처럼 하이데거가‘신없이사유하기’를 제안한 근본적인 이유는 인

과론의 사유구조에 매여 있는 철학을 존재-현현으로서의 진리를 발견

하는 사유체계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의도와 관계된다. 또한 하이데거는

철학과 신학간의 관계에 대해서 철학적 존재론의 우위성을 말한다. 즉,

신학을 실재(ontic)에 관한 학문으로 제한하고, 신학적 개념들을 철학적

존재론에 의해 교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한 것이다.10) 틸리히, 불트

만, 라너 등의 실존주의 신학자들이‘인간의 부름과 신적 응답(human

call and divine response)’ 의 상관관계 신학을 제안했던 것은, 철학과

신학간의 관계에 대한하이데거 방법이 신학에 직접적으로 적용된 것이

었다. 이러한 입장과는 상반된 방향으로 마리온은‘있는 그대로의 신’에

게 가까이 가기 위해‘존재 사유 없이 신에게’를 제안했다. 철학적 존재

론에 종속된 신학이 아니라, 즉 실존의 경험지평위에 나타나는 존재의

스크린을 통해우회적으로 이해하는 신이아닌신 그대로에게접근하는

신학의 길을열자는 제안이다.

‘존재 사유없이’신학함의길을가야한다는것은마리온에겐다음의

정된것은아니다. 그의초기두 신학저작은 근대적 형태의 형이상학에

대한 직접적인비판을 위한 것이아니라 오히려 니체에서 비롯된 신 죽

음의 사상이 내포하고 있는‘제이의 우상’(the second idolatry)을 비판

하기 위한것이다. 탈형이상학, 탈신학 운동이 지속적으로‘제이의우상’

을 창조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초기 신학 저작들에서 우리는 니체

와 하이데거의 사상이 신과 세계간의‘거리’(distance)에 대한 고려 없

이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개념적 신들을(the more divine gods) 재생산

해내고 있는지 볼 수 있다.7)

『존재 사유 없이 신에게』는 마리온의 신학 저작 중에서 가장 큰 영향

을 준 작품이며 또한 많은 논쟁을 불러온 글이기도 하다. 이 저서에서

마리온은 더욱 구체적으로하이데거의‘존재차이론’(the ontological dif-

ference)이‘우상’을 빚는 스크린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분석하며, 사

랑이라는‘성상’(icon) 메타포를 통해 새로운 신학의 방법을 제안한다.8)

다시 말해 근대 형이상학의 문제가 신과 세계간의 동일성의 원리를 그

대로 신에 관한 담론에 적용하는 것이라면, 후기 형이상학에서도 이러한

‘우상성’이 더 심화된 형태로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리온의

슬로건인‘존재 사유 없이 신에게’(God without Being-God)가 추구하

는 탈-존재론적 신학 운동이다. 하지만 존재 사유를 통하지 않고‘있는

그대로의 신’을 이해하려는 가능성에 대해 많은 철학자들이 마리온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마리온의 대응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이 장에서는 먼저 마리온의 탈-존재론적 슬로건이 제시

하는‘선-지평(anterior horizon)’의 부정에 대한이유를 살펴보겠다. 그

러려면 하이데거의철학체계에대한간단한 이해가 필요하다.

‘신 없이 사유하기’(godless thinking)라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

석학은 첫째, 인과의 구조에 얽혀있는 존재이해(aetiology based on

ratio, sufficiency, logos, etc)를 초기 그리스의 플라톤적인 존재이해

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은주, 계시현상과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계시이해에대한고찰 79

7) Marion, Idol and Distance (2001), chapter 1.

8) Marion, God Without Being (1991), 37-49.

9) Caputo는 Heidegger와 Aquinas의 존재이해를 각각 aetiology(인과론적 세계관)와

alethiology(진리발견론적세계관)의 관점으로 비교하며, Heidegger의 존재망각의 역

사 극복을 위한 존재론적 철학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본래적 의미를 잃게 된 철학적

존재론을 진리발견을 위한 존재론으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시도라고 분석한다. John

D. Caputo, Heidegger and Aquinas: An Essay on Overcoming Metaphysics (N.Y.:

Fordham University Press, 1982) 참조.

10) Martin Heidegger, “Phenomenology and Theology,” in Pathmarks, trans. William

McNeil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41-53 참조.

Page 4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족시키는 개념적 신을 만들게 되고, 그러므로 신에 대한 국소화(local-

ization)를 초래한다고 볼 수 있다. 철학사적으로 관점주의는 윤리적 신

의 죽음이라는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이유는 전통적 신의 개념이

사라진 그 자리에 인간이 욕망하는‘가능성(possibility)’의 옷을 입은

새로운 신들이 들어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서 새로운 신은 계

속해서 이전의 신을 대체하며 탄생되었다고 마리온은 분석한다.14) 니체

의‘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나 하이데거의‘내속된 존재-질문에의

몰아적(ecstatic subject toward Being)’ 관점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로부터 새로운 신들이 표명되는 지평을 열었다”고

마리온은 말한다.15) 길게늘어선 우상들의 행진처럼 전통의 신이 사라진

공간에, 인간의 관점이 새롭게 빚어낸 우상들이 신의 이름으로 등장했

다는것이다.

I I I. 현상학과계시의가능성

지금까지 신학자로서의 마리온이 어떻게 개념적 우상을 비판하였는

지 보았고, 이 장에서는‘있는 그대로의 신’을 계시현상에 대한 논의를

통해 접근하는 현상학자로서의 그의 사상을 보고자 한다.“가능성과 계

시(The Possible and Revelation)”16)와“직관의 포화현상(The Saturated

Phenomenon)”에서마리온은현상학적 환원에 대한훗설과 하이데거의

방법론이 계시현상을 어떻게 소외시키고 제한시키는지를 고찰하며, 현

두 가지 비판적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첫째는‘있는 그대로의 신’과

의 소통을 존재론적 선-지평이 가로막는다는 점에 대해 신학적으로 이

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이 단일한 철학 원리를 세계와

신이해 양자모두에게 적용함으로써신을개념적 틀에 종속시키거나이

틀을 보충해주는 역할로 이해한 것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세계성(the world’s worldliness)을 토대하는‘존재차이론’이라는 선-지

평이 신을 종속시키는 방법론이 지닌 우상성의 측면을 환기시키는 것이

다. 이것을‘존재의 스크린’이라는 주제를 통해 마리온은 설명한다.11) 존

재 개념이 신보다 앞설때 신의 자기-표명의 가능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

고, 존재라는 앞선 지평이 신을 투사하는 스크린이 될 때 신에 대한 우

상화는 피할 수 없게된다. 이러할 때 신은인간 실존의 존재-질문(의미

에 대한물음)의 틀 안에서만스스로를 표명할 수 있게되는것이다.

다음으로 마리온의‘관점주의(perspectivism)’에 대한 문제의식을 함

께 살펴보고자 한다. 관점이란 무엇인가? 마리온에 의하면 관점의 역할

은 우리의 시선이 어떤 대상을 명료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 돕는인식의

장치이다. 예를 들어 특정 관점으로 우리의‘경험’을 해석할 때, 넘쳐나

는 경험(excess)은 관점이라는 필터에 의해 걸러져서, 인식하고자 하는

시선에 투명하게(transparent)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이라는 필터를 통과

한 경험은 마치진공의 중간영역으로 흡수되는것처럼 명료하고단순해

진다고 한다.12) 지평이 일으키는 문제를 위에서는 이것의‘앞서는(ante-

rior to)’ 특징으로부터 진단했다면, 관점주의의 문제는 투명한 이해를 지

향하는 인간의 시선이 대상을 끝없이 관통한 결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

게 된 것(the real void of reality)에 있다고 마리온은 진단한다.13) 관점주

의는 인간의 시선이 세계를 투명하게 보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이를 만

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은주, 계시현상과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계시이해에 대한고찰 81

11) Marion, God Without Being(1991), 40-41 참조.

12) Marion, The Crossing of the Visible, trans. James K. Smith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4), 2-3 참조.

13) Ibid.

14) Marion, God without Being (1991), 58-59, 64.

15) Ibid., 58.

16) 이글이 최초로 발표된 곳은 다음과 같다. P. J. M. van Tongeren et al., eds. Eros and

Eris: Contributions to a Hermeneutical Phenomenology, Liber amicorum for

Adriaan Peperzak, Phaenomenologica, no. 127 (Dordrecht: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2), 217-232. 이 글에서 마리온은최초로 자신의 현상학이론인‘직관

의 포화현상(saturating/ saturated phenomenon)’에 대해소개한다.

Page 4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 사라지게 된다고 마리온은 파악한다.20) 형이상학의 역사속에서 신적

계시는 합리주의를 뒷받침하는 토대(the ground)의 역할로 축소되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의식 외의 다른 내용은 표명할 수 없게 되

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함께‘형이상학의 붕괴’라는 시대정신이 계시

현상에 대한 논의를 이성이 제약하는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

는지에 대해 마리온은 주목한다. 구체적으로는 현상학의 방법론이 계시

를 다루는 종교현상학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줄 수 있는지의 논의를

말한다. 그 가능성의 첫째 요소는 훗설의‘세태 자체로’의 목표가 형이

상학의‘충분논리율(sufficient reason)’의 토대로부터 현상 이해를 이탈

시킴으로써 계시현상 이해에 대한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음에 있

다. 훗설은 전통 형이상학적 합리주의에 제한되었던 현상 개념을‘세태

자체로’의 원리를 통해 확대시켰다. 즉 직관(intuition)이 지향적 의식

(intention)에게 증여하는 것에만 특권을 부여한다는 방식으로 현상 자

체의 권리를 확인했다. 이것이 훗설 원리의 첫 번째 항목이다. 현상소여

밖에 외적인 해석 토대를 설정하는 것을 훗설이 거부했음을 의미한다.

즉, 현상에 자기증여(it gives itself)의 특권을 부여하여, 외적인 권위가

현상을 선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훗설의 현상학적

원리는 현상 직관의 소여가 인식의 유일한 원천이 되며, 주어진 직관의

한계안에서만 오직대상을 인식하고자하는방법론적 전환이라고마리

온은설명한다.21)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훗설의 위와 같은‘지향적 환원(intentional

reduction)’이 현상소여를‘의식지향성’의 틀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마리온은 문제 삼는다. 이것은 칸트의‘가능성’과‘현상성’간의

관계 논리에 대한 그의 비판과 마찬가지로, 자기증여의 절대적이며 무

상학과‘계시 가능성’관계에관한논제를 소개한다.17)

근대 철학사에서 종교철학은 언제나 근대 철학이 전제하는‘가능성’

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마리온은 본다. 이것은‘가능성’의

개념에 대한 칸트의 정의와 관계되어 있다. 칸트는 그의 형이상학 방법

론에서‘가능성’과‘현상’간의관계에 대해“경험의 형식적 조건성, 즉 직

관이 개념의 논리형식성에 부합하는 것을 가능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라고 정의했다.18) 논리형식으로 특징되는 경험의 조건성에 그 경험이 부

합되는가의 측면에서 가능성을 정의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정의는 범주

적, 논리형식적인 개념의 형성 가능성이 경험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그

개념가능성이 현상 가능성을 우선하게 됨을 말한다. 칸트의 이러한 가능

성에 대한 이해는 개념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이므로, 현상이 일어나

게 되는 가능성은 언제나 형식적 조건(the formal conditions)에 종속되

게 된다고 마리온은 분석한다. 또한 이 같은 가능성에 대한 정의 내에서

개념적 사고의 틀인 형태론적 범주(the categories of modality)는 현상

가능성을 인식가능성의범주로환원시킨다.19)

일반적인 현상 가능성에 대한 칸트의 정의는 종교철학의 대상인 계

시현상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칸트 이후 종교현상의 가

능성은 언제나 인식가능성의 범주를 넘어선다는 이유로 철학적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아니면 인식 조건의 틀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즉‘이성의범위안’에서라는 칸트의 전제나, 정신을 개념의 표명과 동일

시하는 헤겔의 전제는‘계시현상’을 보편적 윤리나 개념의 표명을 가지

는 것으로 다루곤 했다. 이와 같은‘가능성’에 대한 제한으로 말미암아

계시현상이 철학적 개념 또는 윤리 항목과 동일시될 때 계시현상 자체

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은주, 계시현상과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계시이해에대한고찰 83

17) Marion, “The Possible and Revelation” (2001), 1-17.

18) 이 내용은 마리온이 자신의 글 “The Saturated Phenomenon”에서 칸트의 Kritik der

reinen Vernunft, A218/B265, A220/B267, 그리고 A219/B266을 인용한 것이다.

1 9 ) Marion, “The Saturated Phenomenon,” in Phenomenology and the “Theological

Turn”: The French Debate, Dominique Janicaud, et al. (New York: Fordham Uni-

versity Press, 2000), 177-178.

20) Marion, “The Possible and Revelation” (2008), 3.

21) Husserl, Ideen I, §24, Hua. I I I. Marion, “The Saturated Phenomenon,” 180에서재인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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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비판하는 것이고, 다음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현상학이 어떻게

‘세태자체로’의 원리를 벗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존재 현상(the phe-

nomenon of Being)이 어떻게 현상의 내재적 자기증여(immanent order

of phenomenality) 원리로부터이탈해있는지를 규명하는것이다.25)

『존재와 시간』서문에서 하이데거는 훗설의 현상학을 존재론의 방법

론으로 사용함을 밝히고 있다.26) 하이데거에 의해서‘보이지 않는 대상’

에게까지 현상학의 범위가 넓어졌음에 마리온은 주목한다.‘세태 자체

로’의 원리를 하이데거는‘최대 현현, 최대 존재(as much appearing, so

much being)’로 이해한다. 훗설이 의식의 지향적 환원으로 한정지었던

현상 개념을‘보이지 않는 것(concealed Being)’으로까지 확대시켜 존

재론을 현상학에 관계시켰다는것이다. 여기서‘보이지 않는 것’이란 현

상을 드러나게 하는 하나의 토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을 보이지 않

는 것의‘표징(indication)’의 개념을 통해서 하이데거는 현상학에 인입

시켰다. 나타난 현상을 나타나지 않는 존재와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방

식으로 하이데거는 현상학을 존재에 관한 해석학으로 규정했고, 현상화

되지 않는 존재가 현상(unfolding of beings)을 준다는 현상성 원리를

‘사건(Ereignis)’ 개념을 통하여 발전시켰다.27)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

는 존재차이론이다. 하이데거의 방법론적 전환이 종교계시의 영역 또한

‘현상성’안으로 인입될 수 있는 합법칙적인 길을 마련했다고 마리온은

우선 평한다. 달리말하면 지향적대상에 대한의식 경험의 측면에서(훗

조건적인 현상 가능성에 훗설의 현상학이 도달했는가에 대한 마리온의

문제의식이다.22) 마리온은훗설이 현상가능성을 완전히 여는데 실패했다

고 본다. 그 원인은 훗설이 현상이 주는 직관의 절대성 위에 현상성(현

상의 질서)을 두지 않고가능성에 관한 또 다른 두 가지 조건들에 현상

성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훗설 현상학 원리의 두 번째 세 번째

항목과 관련되어있다. 두 번째항목이 말하는 것은 직관이 자기증여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관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훗설

의 직관에 대한 이해와 관계된다. 세 번째 항목은, 이처럼 증여의 한계

를 지닌 직관은 인식 가능성(객관성, 중요성, 또는 본질에 관한 지향)에

스스로를 맞추어 증여하기 위하여 언제나 지평의 테두리 안에서만 자신

을 드러낸다는 것이다.23) 이러한 항목들은“지향성이 직관을 능가한다”

는 훗설의 생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현상이 증여하는 직관이 지향

성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의식의 산경험(Erlebnis)에 직관을 환원

시켜야 하고, 주체의 지평에 직관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훗설의 현상학은직관의 무조건적증여 가능성에 도달하지못하게 되었

다. 마리온은 훗설의 직관의 결핍(the shortage of intuition)이라는 입장

에 대한 대응으로‘제삼의 환원 방법(the third reduction)을 만들게 되

고,“직관이 지향성을 능가한다”는 원리에 근거해‘직관의 포화현상(the

saturated phenomenon)’ 개념을 제안한다.24) 다음장에서 직관의 포화현

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훗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 방법론에 대한마리온의 비판적 고찰을 좀 더 상세히 살펴 보려

한다.

하이데거에대한비판적 분석을 마리온의 거의모든저서들에서보게

되는데, 이것을 분류해 보면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앞

장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신학적 입장에서 하이데거 철학의‘제이의 우

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은주, 계시현상과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계시이해에대한고찰 85

22) Marion, “The Saturated Phenomenon”(2000), 181.

23) Ibid., 181-182.

24) Ibid., 185-194.

2 5 ) 마리온의 현상학에 관계된 작품들은 다음을 보라. Réduction et donation:

Recherches sur Husserl, Heidegger et la phenomenology (Paris: PUF, 1989;

English, Reduction and Givenness, 1998); Étant donné: Essai d’une phenomeno-

logy de la donation (Paris: PUF, 1997; English, Being Given, 2002); De surcroît:

Études sur les phénomènes saturés (Paris: PUF, 2001; English, In Excess, 2002).

2 6 ) Martin Heidegger, Being and Time, trans. Joan Stambaugh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6), sections 27-39 참조.

2 7 ) Heidegger, On Time and Being: A Translation of Zur Sache des Denkens, t r a n s .

Joan Stambaugh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72), 18-19 참조.

Page 4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에서 보면 오히려 이해에 대한‘무력감’을 느끼게 된다.“이와 같은 상

황에서(직관의) 초과(excess)로 인해서이던 결핍(deficiency)으로 인해

서이던 유한한 주체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들을 의식의 산경험에 새길

수 없게된다”라고 마리온은 말한다.30) 또한일반적 현상을 측정하는 방

식(common phenomenon)으로는 계시와 대화할 수 없다. 역설과 비동

일성의 주어짐이아니라면 계시자체는 필요없어지기 때문이라고 마리

온은 설명한다.‘계시현상’은 산경험의 가능성을 여러 측면-초과, 실망,

예측불가능성 등-에서 초월하기 때문에 계시된 것이 경험의 범주 안으

로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향적인 환원의 방식으로 계시

에 접근한다면 계시자체의 특수성이 깨어지거나계시현상이사라져 버

리게된다는 것이다.

훗설과 하이데거의현상학이 지금까지신학에 적용되어 왔으나, 마리

온은 그들의 환원 방법이 계시현상 수용의 적절한 도구가 아니라고 본

다. 불트만이 그의 실존론적 해석학에서‘계시’를 산경험의 지평으로 환

원시킬 때 예수 사건이 지금 나에게 적용되는 의미로 축소된다는 예를

그는 들었다. 불트만의 환원에 따르면 예수는 단지 계시자로 보내어진

것으로 그의 계시 내용이 제한되고, 예수가 무엇을 계시했는가에 대해

서 우리의 산경험은텅 빈 내용만을인식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실존론적 관점에서는“계시는 믿음의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계시된 것은 없다”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고 마리온은 파악한다.31)‘계

시된 것(the revealed)’이 산경험으로 환원되어 버리면 그 내용은 불분

명해지고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리온은 불트만의 산경험으

로의 환원이‘비신화화’라는 해석학적 틀을만들게 되었고, 이것은 계시

의 초월성을내재적인산경험으로환원시킨 방법론의 결과라고본다.32)

하이데거의 실존으로의 환원의 방법은 존재질문의 지평을 현상 해석

설) 그리고‘표징’의 측면에서(하이데거), 계시현상 또한 현상학의 대상

이 되었다는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학 영역의 확대를 통해더 많은

소여성에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시 개념을 다루는 데 있어 여전히

현상학내에 어려움이 내재해 있다고 마리온은 본다. 그는 이를 계시현

상의 특수성과 기존의 환원 방법론간의 부적합성의 문제로 본다. 그리

고 이 부적합성의원인을 현상학의‘주체 환원’의 문제에서찾고있다.

훗설에게 현상은‘산경험’으로 환원되며, 의식에 의해 경험되지 않는

것은 현상성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하이데거에게 현상은

실존(Dasein)의 영역으로 환원되었다. 또한 훗설의 산경험은 하이데거

의‘적응(attunement)’ 개념과 대응되는데, 이는세계내적 존재인 실존에

게 부여된 존재론적 해석의 특권을 의미한다.28) 하지만 이 실존이 베푸

는(이해)가능성 속에서, 어떠한 현상도 실존의 존재질문과 관련되지 않

을 때는해석학적중요성에서 제외된다는문제를 안고있다. 만일‘주체

(산경험이나 실존의 질문)’로 현상을 환원한다면, 현상이 주는 내용이

지향성이나 존재질문과 다를때는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주체 환원에 대한 마리온의 비판의 핵심이다. 그의 문제의식은 주체의

경험을 위한 조건이 현상 자신의 증여 가능성보다 우선시될 때‘현상소

외(alienated phenomenon)’가 일어난다는 데 있다. 주체가 의도하는 지

평으로 현상이 환원될 때 현상의 자기증여 내용은 소외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 환원의 방법이 계시 현상을 다루는 데에 부적합한 원인을

계시현상의 특수한 증여방식을 통해서 살펴보고자한다.

“계시는 이것을 대면하는 자의 기대를 저버림으로써만 그리고 인식

의 유비를 능가하는방식으로써 주어짐을생각해야 한다”고 계시현상의

특수성에 대해 마리온은 표현한다.”29) 계시현상은 주체의 구성가능성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주체는 어떠한 내용으로도 계시현상에 적절히 대

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계시현상을 경험한 주체는 인식 가능성의 측면

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은주, 계시현상과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계시이해에대한고찰 87

28) Heidegger, Being and Time, sections 29, 340-346을 참조하라.

29) Marion, “The Possible and Revelation” (2008), 9.

30) Ibid.

31) Ibid.

32) Ibid., 9-10.

Page 4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의 문제, 즉 한계와 선-지평의 전제 위에 전체, 거룩함, 그리고 신성의

본질이 맞추어지는구조때문이다.

훗설의 지향적 주체는 하이데거의 실존의 이름으로대체되었고, 인간

의 세계내적 존재라는 실존에 부여된 특권적 주체성은 갈수록 더 급진

적으로 채택되어 왔다. 지금까지 다양한 지평 환원의 방법들이 나타났

다-예를 들면 객관성(훗설), 존재(하이데거), 윤리(레비나스), 또는 살의

몸(메를로 퐁티) 등이다. 비록 그들의 지평환원이 신학과의 대화에 열려

있는 것이라 해도, 계시현상을 직접적으로 다루는데 적절한 구조는 아

니라고 마리온은 본다. 그리고 현상과 계시 관계를 제대로 수립하기 위

해선 기존의 현상학이 선-지평 위에 계시를 조건화한 것으로부터 신학

은 이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이렇게 현상학 전통을 비판하면서도 마리온이 현상학과 신학간

의 결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여전히 현상학을 제일

철학(the first philosophy)의 위치에 두고 있다.36) 그가 추구하는 것은

계시 현상을 적절히 수용하는 하나의 현상학 방법, 즉 계시의 무조건적

인 표명을 가능케 하는현상학적 길을찾는 것이지 현상학과 신학의 대

화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마리온은 계시 현상이 지평을 인정

해야 하는지 아니면 거부해야 하는지의 선택을 넘어선 제삼의 방법을

찾고 있다. 지금까지 함께 살펴본 것처럼, 계시와 지평간의 관계는 큰

딜레마를 안고 있다. 계시가 지평을 인정한다면 계시의 가능성은 축소

되고, 어떠한 지평도 승인하지 않는다면 계시는 이해할 길이 없다는 것

이다. 이제, 지평을 경유하지 않고는 계시현상을 받을 수 없다는 일반적

인 사실과, 자신의 무조건적 증여 가능성을 위해 선-지평에 도전할 수

밖에 없는계시현상의 특수성 사이에 놓인모순을 어떻게 해결할수 있

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도달했다. 이 질문에 대해 마리온은 지향성을

초과하고 예측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 증여되는 계시현상을 인정하면

을 위해사용하는 것을 말한다.33) 존재론을 통해신에 관한질문을 다룰

때, 신은 여러 존재자들(ontic beings) 중에 최상의 한 존재로 다루어지

게 되고, 신의자기표명의 가능성은 언제나존재론에의해종속적인형

태로결정나게된다. 존재가 알려주는진리가 신적 존재자의 진리표명

을 우선적으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오직 존재의 진리로부터 거룩함

의 본질은 사유된다. 그리고 오직 거룩함의 본질로부터 신성의 본질은

사유되고, 사유된 신성의 본질로부터 신이 무엇을 표명하는지가 사유되

며 말해질 수 있다”라고 마리온은 지적한다.34) 신에 관한 언어가 신으로

부터 직접 표명되지 못하고 중개자의 역할을 하는‘존재에 관한 사유

(Seinsdenken)’를 통해 표명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가 지배하는 영역

하에 위치한 신은, 존재의 지평이측정해주는 표명의 공간 밖에서는 자

신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지평에 의해 제한된 신적 계시의 문

제이다.35)‘있는 그대로의 신’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의 실패가 이렇게

훗설의 주체 환원또는 하이데거식의 선-지평 환원 구조로부터 기인하

는 것이라고 마리온은 본다.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하이데거의 존재

론적 해석학이‘제이의우상’으로 여겨지는 이유도 바로이러한 해석학

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은주, 계시현상과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계시이해에대한고찰 89

33) 마리온의 첫 번째 현상학 저술인『환원과 소여』에서 훗설과 하이데거의 환원의 방법

론을 각각‘지향적 환원’과‘존재론적 환원’으로 명명하며 이러한 환원의 방식들이

현상학의 고유한 목표인‘세태 자체로’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Marion, Reduction and Givenness: Investigations of Husserl,

Heidegger, and Phenomenology, trans. Thomas A. Carlson (Evanston: North-

western University Press, 1998).

33) Marion, “The Possible and Revelation” (2008), 10.

35)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환원방법은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라너의 신학

을 마리온은 부분적으로 비판하는데, 그 주된 논점은 라너가 하이데거의 방법론을 신

학적으로 극대화시켜‘존재론적 기독론’(transcendental Christology)을 구성한 것에

집중되어 있다. 존재론적 그리스도론이무엇을계시했는가의질문에 그리스도는신의

자유로운 은혜를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기보다 유한한 존재의 초월적 조건성을 표명

하는 자로 환원되었다고 마리온은 평가한다. Marion, “The Possible and Revelation”

(2008), 11-12 참조.

3 6 ) Marion, In Excess: Studies of Saturated Phenomena, trans. Robyn Horner and

Vincent Berraud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1), 13-23.

Page 4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계시는 주체의 지평을 초과하는 것을증여하기 때문에 계시현상은 항상

‘역설’로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40) 질적으로 양적으로 주체의 지향성

을 초과하는 지평을 제공하는 계시현상은 수용 주체가 이해를 위해 설

정한테두리에역설과 혼란의 형태로 나타난다.“우리는 이와같은포화

현상이 자신으로부터시작해서 스스로 나타나는 것과다른어떤전제적

인 조건에 종속되지 않는 것을‘계시’라고 부른다”라고 하며, 계시에 대

한 이 정의가 현상성에 관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가장 완결된 형태라고

그는 주장한다.41) 그리고 이러한 직관 초과를 제한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역-방법론( c o u n t e r-m e t h o d )으로‘최대 환원, 최대 소여(as much

reduction, as much givenness)’를 제안한다.42) 여기서‘최대 환원’이 기

능하는 것은선-지평의 파기, 즉 주체의 구성가능성으로환원하던 기존

의 방법론의 역-방법으로 주체를 소여(givenness)로 환원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인‘최대 소여’는 지평에 제한되지 않는 직관 소여가

주체에게일어남을의미한다.

이와 같은 계시현상과 지평의 부딪힘은 다음의 두 가지가능성을 성

취한다. 첫째, 계시현상이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자기 표명을 하게

된다. 계시현상이 지평의 조건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초

과 증여를 통하여 주체의 지평에 자신의 역설을 새기는 것이다. 둘째,

주체가 갖고 있는 선- 지평 자신에게로 문제의식을 돌리게 하는 것이

다.43) 주체는 계시현상을 하나의 대상(object or being)으로 구성하는데

실패하고, 현상과 주체간의 비등가성(inadequation)을 실제로 경험하게

된다고 마리온은 설명한다.44)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성의

서, 계시현상 자체가 역으로 스스로의 지평을 주체에게 준다는 이론을

통해서 답하고 있다.37) 이것이 그의‘직관의 포화현상(the saturated phe-

nomenon)’ 이론이다.

I V. 직관의포화현상과역설

마리온은‘직관의 포화현상’이라는 새로운 틀로 계시현상에 관한 이

해를 시도하고 있다.“가능성과 계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계시와 지

평간의 관계를 설명한다.

“계시는 스스로를 지평 안에서 명시하는데 그 방법은 오직 지평을 포화

시킴을 통해서이다…이를 통해 하나의 지평은 후험적으로 얻어지는 것

이고…표명된 지평의 강도(strength)와 범위(scope)는 현상적 지평 (또

는 선험적 지평)의 한계들 안으로 오직 선험적 지평에 혼란을 야기하며

들어간다. 각각의 현상들은 서로 협력 또는 방해하는데, 마치 서로 각각

의 틀 안에서 교차되거나, 반사되거나, 상호작용 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은 계시의 무질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지평과

연관해서볼 때 계시의대체불가능성을의미하는것이다.”38)

마리온에 따르면 수용자의 선-지평과 만날 때 계시현상은 주체에게

혼란을 일으키는데, 왜냐하면 넘쳐나는 포화현상이 주체가 지닌 단일

지평의 한계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평과 계시 간에 일어나는

혼란에 대해 그는‘역설(para-dox)’이라는 해석학적 틀로 설명한다.39)

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은주, 계시현상과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계시이해에대한고찰 91

40) para-양쪽, 이상, 이외, 부정, 불규칙; doxotaton-진리.

41) Marion, “The Saturated Phenomena” (2000), 213.

42) Marion, Being Given (2002), 14-18 참조.

43) Marion, “The Saturated Phenomenon” (2000), 184 참조.

4 4 ) 마리온은 주관적인 나타냄(l’apparatre subjectif)은 객관적으로 나타낸 것( l ’ a p -

paraissant objectif)과 동의어라는형이상학과기존현상학의전제를부정한다.

37) Marion, “The Saturated Phenomenon” (2000), 195.

38) Marion, “The Possible and Revelation” (2008), 15-16.

39) Marion, Being Given (2002), 235; “If an actual revelation must, can, or could have

been given in phenomenal apparition, it could have, can, or will be able to do so

only by giving itself according to the type of the paradox par excellence.”

Page 4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과정에서‘주어진 자’에 대한철학화가이루어져야함을강조한다.

역설로 다가오는 신적 계시와 이것이 주는 진리에 접근하는 길로 마

리온은‘끝없는 해석학(the endless hermeneutics)’ 작업을 제안한다.47)

끝없는 해석학이 계시현상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

다. 첫째, 계시현상에 의해 주어지는 진리는 지향성을 통해 얻어지는 개

념적 구성으로는 인식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존재나

본질과 같은자아의 지향성에상응하는현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는데 있다. 개념과 직관간의 등가(adequation)로서 이해되었던 전통적

진리 개념이 진리를 얻는데 언제나 실패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

래서 이러한 마리온의 방법론은 전통적 의미의 부정의 신학(apophasis)

과는 큰 차이가 있다.‘끝없는 해석학’은 신적 자기 계시의 초과 곧, 선

물의 탁월성에 상응하는 방법으로써, 주어진 것의 모든 면에 있는 각각

의 진리들을 보는 것이고, 또한 각각의 진리들이 서로 충돌하는 지평을

안고 있음을 인정하며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 마리온의

제삼의 명명 방식과 관계된다.48)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의 이분법을 극복

한, 즉 부정을 부정하는 긍정(via eminentia )의 방법으로 신적 부름에

성실하게응답하는길인것이다.

둘째, 계시현상은 측정할 수 없는 지평들을 우리에게 수여하는데, 마

리온은 이것을‘부름(The call)’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계시현상은 신적

부름이라는것이다. 또한부름의 익명성을 강조한다.49) 어떤내용을 계시

하는부름인지그 이름을 선험적으로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

되는 계시의 자기 증여 과정에서 수용자는 부름에 서서히 응답함을 통

해서 부름의 정체를 확인해 간다고 한다. 이러한 익명성과 무한성을 지

닌 계시현상에성실히 응답하는것이‘끝없는해석학’의 과제이다.

실패가 주체에게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irregardable), 견딜 수 없는(unbearable),

그리고 무조건적인(unconditioned) 직관의 포화현상은 계시현상이 가지

는 초과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결핍을 뜻하는 것은아니기 때문

이다.45)

이처럼 역설적인 계시현상은 우리의 인식을 위한 조건들에 스스로를

일치시키지 않음을통해, 우리에게불가능한 경험곧, 역-경험(counter-

experience)을 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현상은 경험되지만 상호소

통의 경험조건을넘어 불현듯 오기때문에 계시현상의 수여자는이것을

실망스러운 경험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계시현상의 측정할

수 없는 증여를 받은 주체가 자신의 무능력과 유한함을 확인하게 된다

는 것이다. 직관의 포화현상과 구성주체 사이의 이와 같은 역전 현상을

마리온은 당혹(interloqué)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당혹은 계시현상과 주

체간의 우선성의역전이 이루어질때 주체가 겪게 되는구성불가능함에

대한 어려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계시현상은 주체

가 구성하고자 하는 의도를 배반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주체 자신의

정체성이 이러한 계시현상에 의해서 구성되는 자(adonné)임을 경험하

게 만든다. 계시현상을 통해구성된 목격자로서의‘나’는 여전히 진리에

대해 궁구하는 자로 남지만 더 이상 형이상학 전통이 말하는 진리의

‘생산자’는 될 수 없다고 마리온은 말한다.46)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 포

화현상 이론과 함께 마리온은 데카르트 이후 지속된‘초월 자아’에 대

한 철학적 신념과 맞서며, 여격(dative)의‘현상자아(adonné),’ 즉 현상화

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은주, 계시현상과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계시이해에대한고찰 93

45) 마리온은 이것을 ‘desertification’ 그리고 ‘disappointment’의 경험이라고 부른다. 그

러나 경험의 사막화와실망은 현상의초과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핍으로 말미암은 것

이 아니라고 한다. Marion & Richard Kearney, “Hermeneutics of Revelation,” in

After God: Richard Kearney and the Religious Turn in Continental Philosophy, ed.

John Panteleimon Manoussakis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6), 319

참조.

46) Marion, “The Saturated Phenomenon” (2000), 211.

4 7 )‘끝없는 해석학’(The Endless Hermeneutics)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Marion, In Excess: Studies of Saturated Phenomena (2001), chapter 5.

48) Ibid., chapter 6.

49) Marion, Being Given (2002), 96-98.

Page 4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정해야 한다고 마리온은 주장한다. 여기서 거리를‘두개의 입장’(d i-

stance)’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는상호간의 소통이 실제로는 거리-

즉, 차이를 인지할 수 있는 서로간의 시선의 거리-를 통해서만 가능하

다는것이다. 다시말하면 거리로 인한인식의 한계는 거리에 의한이해

에 이르게 한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개념적 우상이 우리의 시선에서

거리를 없애는 기능을 한다면 사랑의 성상(icon)은 거리를 통해 우리의

시선을 확대시킴으로 무한의 진리를 보게 하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신

적 계시현상은 무한의 진리로 우리를 이끄는 신의 자유로운 사랑의 선

물인 것이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과와 역설로 계시된 선물들에

끝없는 해석학으로접근해야함을함께보았다.

둘째, 인간의 이성은 동일시에 근거한 자아론적 이해의 틀을 벗어날

때 오히려‘타자’의 부름을 더욱분명히 들을 수 있다. 자아론적인 이해

는‘나’를 이해시키기 위한‘존재’의 틀을 이성이 만들고, 그 틀 안에서

‘타자성’을‘동일성’으로 환원시키는 인식론의 방법이라고 저자는 해석

한다. 비록 하이데거에 의해 기존의 동일성에 근거한 존재론이‘알려지

지 않은 차이(unknown difference)’의 존재론으로 전환되었지만, 이것

이 여전히‘사유’와‘존재’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과, 그리고 존재-질

문이라는 실존자의 해석학적 권위를‘계시현상’의 무조건적 가능성보다

우위에 둔다는 점을 마리온은 비판했다. 그는 먼저 사유의 유한성을 먼

저 인정할 때 주어지는‘타자성’의 발견을 계시현상 이해에 더 적합한

형태로 제안한다. 다음은 서구 철학 전통의‘사유’중심의 해석학에‘현

상을보이게 함’이라는과제를 제안한다.

셋째, 존재론적인 선-지평을 폐기할 때 계시현상이 주는 진리의 다의

성과 차별성에 오히려 더 분명하게 다가갈 수 있다고 마리온은 주장한

다. 이것은 많은 하이데거주의자들이 해석 고리 없이는 이해도 없다고

하는 입장에 상반된 견해이다. 마리온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주된 이유

는, 선-지평안으로 계시현상이 흡수되어 들어갈 때 계시현상의 계시된

것(the revealed)은 실제로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으로 선-지

셋째, 계시현상이 주는진리는 소환(summon), 놀라움(surprise), 대담

(interlocution), 사실성( f a c t i c i t y )의 특징을 갖는‘역-진리( c o u n t e r -

truth)’로 나타난다고 한다. 역-진리 앞에서‘끝없는 해석학’은 어떠한

신적 소환이 있는가에 대해, 인간 지평의 협소함에 대해, 유예된 응답에

대해, 그리고 계시현상이 주는 환원 불가능한 사실성에 대해 응답하는

것을 말한다. 세계내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역-경험의 모호한 현상들은

신의 부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신적 자기 계시의 넘치는 초과성으

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마리온은 설명한다. 또한 계시현상의 소외는 계

시된 내용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이에 상응하는 수용주

체의 개념의 결핍으로 기인함을 그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서 계시현상

이 주는 진리는 예측할 수 없었던, 초과의 어떤 것, 그리고 우리가 눈으

로 목격해야할 세계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것이며, 또한세계를 바라

보는신의시선을 드러내는것이다.

V. 글을맺으며

본 논문을 통해서 우리는 마리온의 현상학적 계시 논의가 계시의 자

기표명의 가능성을 기존현상학 전통의‘환원 주체와 지평’중심의 해석

학 틀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집중되어 있음을 보았다. 또한 근대신학

이 계시현상 가능성과 인간적 소통 가능성 간의 갈등을‘인간의 부름과

신의 응답’구조에서 해명하려한 것에 대해 그는‘신의 계시(부름)와 인

간의응답’의 역전구조로 바꾸고자한 것임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여기

서 지평이라는틀이 이해를 위한도구를 의미한다고 할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지평을 넘은계시소여가 계시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의질문을 던

지게된다. 결론적으로이 질문에 대한마리온의생각을 세 가지지점에

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신에 관한인간의 사유에는 거리로 말미암은 한계가 있음을 인

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은주, 계시현상과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 계시이해에대한고찰 95

Page 4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접 수 일 2009년 11월 22일

심사(수정일) 2009년 12월 07일

게재확정일 2009년 12월 15일

참고문헌

Marion, Jean-Luc. “The Possible and Revelation.” The Visible and the

Revealed. Translated by Christina Gschwandtner.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8.

. The Visible and the Revealed. Translated by Christina Gschwandtner.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8.

. The Crossing of the Visible. Translated by James K. Smith.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4.

. Being Given: Toward a Phenomenology of Givenness. Translated by

Jeffrey L. Kosky.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2.

. In Excess: Studies of Saturated Phenomena. Translated by Robyn

Horner, et al.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1.

. The Idol and Distance: Five Studies. Translated by Thomas A Carlson.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1.

. “The Saturated Phenomenon.” Phenomenology and the “Theological

Turn”: The French Debate. Dominique Janicaud, et al.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0.

. On Descartes’ Metaphysical Prism: the Constitution and the Limits of

O n t o-t h e o-logy in Cartesian Thought. Translated by Jeffrey L.

Kosky.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1999.

. Reduction and Givenness: Investigations of Husserl, Heidegger, and

Phenomenology. Translated by Thomas A Carlson.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8.

. God without Being: Hors-Texte. Translated by Thomas A Carls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평이사라질 때만계시표명이 오히려 더욱분명하게일어나고, 계시자

체가 제공하는지평을 수용 주체가 받을수 있게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다. 계시현상의 익명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이렇게 익

명성으로 부름을 이해하는 것은‘제도화 된 해석구조(institutionalized

structure of response)’로 계시현상이 환원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해석학

적 장치이다.

신에 관한‘무경험의 경험(experience of non-experience)’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 한다. 예측할 수 없으며, 인간적 기

대를 빗나가거나 초월하는 많은 세계 현상의 한가운데에서 신학은 더

이상 전통적인 인과론 방식으로 이를 해석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계시라는 이름으로 세계 현상은 많은 진리를 우

리에게 선물로 주고 있음을 마리온은 분명히 말한다. 이 시대가 신학에

부여한 과제는 세계현상을 통해 주시는 신의 계시를 어떻게 설명할 것

인가에 있다. 이 질문에 대해 마리온은 친절한 답변을 던져주진 않았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존재론의틀에종속되어 있는신학을 신의자유로운

계시 표명을 발견하는 신학(heuristic hermeneutics)으로 되돌릴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무한’에 속한 신적 진리의 계시는 인간적 지평인

존재에 제한될 수 없는 신적 사랑을 세계와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라

고 그는 말한다. 신적 사랑의 계시는 지금(now) 여기(here) 우리의 현상

경험 안에 넘치도록 주어져 있음을 확인시키며, 계시에 이르는 길로서

그는 주체 환원과 존재론적 지평을 넘어서는 새로운 신학적 해석학을

우리에게제안한다.

주제어

계시, 장-뤽 마리온, 직관의 포화현상, 역설, 초과

(revelation, Jean-Luc Marion, The Saturated Phenomenon, Paradox,

Excess)

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은주, 계시현상과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계시 이해에대한고찰 97

Page 5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Revelation and Horizon:Jean-Luc Marion’s Non-Ontological

Hermeneutics of Revelation

Lee, Eun Joo

Lecturer

Presbyterian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This paper centers on Jean-Luc Marion’s phenomenological

hermeneutics of revelation within three significant subjects Marion

addresses in his comprehensible theological and phenomenological

works: conceptual idol, the possibility of revelation, and the saturated

phenomenon. Throughout the argument this paper develops, we have

examined that Marion takes seriously the perpetual reconstitution of

the idolatrous face of the divine without recourse to the divine

distance and as-s u c h-ness. Central to Marion’s project to overcome

such the idolatry is to phenomenologically re-examine the relation-

ship between the unconditional possibility of revelation and the previ-

ous phenomenological methods which subject revelation to anterior

horizons and the transcendental I’s constituting privilege.

In doing this, Marion criticizes the Husserlian and Heideggerian

reductions while they reduce the manifestation of phenomenon to the

anteriority of beingness and objectness. Especially Marion calls into

question Heidegger’s ontology as the second idolatry when it

preconditions the scope of divine revelation anteriorly from Dasein’s

question of Being. Marion makes a claim that it is possible to phe-

Marion, Jean-Luc and Keaarney, Richard. “Hermeneutics of Revelation.”

After God: Richard Kearney and the Religious Turn in Continental

Philosophy. Edited by Panteleimon Manoussakis.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2006.

Caputo, John D. Heidegger and Aquinas: An Essay on Overcoming Meta-

physics.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82.

Heidegger, Martin. “Phenomenology and Theology.” Pathmarks. T r a n s l a t e d

by William McNeil.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 On Time and Being: A Translation of Zur Sache des Denkens. Trans-

lated by Joan Stambaugh.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72.

. Being and Time: A Translation of Sein und Zeit. Translated by Joan

Stam Augh.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6.

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은주, 계시현상과지평: 마리온의탈존재론적계시이해에대한고찰 99

Page 5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고전적유신론과만유재신론

윤철호(장로회신학대학교교수)

I. 서론

이 글에서는 고전적 유신론과 만유재신론의 주요 내용들을 비교함으

로써 바람직한 만유재신론적 비전에 대한 전망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고

전적 유신론이란 서구의 헬레니즘 시대의 고대 교회에서 형성되고 그

이후의 서구 교회의 역사 속에서 계승된 신학전통 속에 나타나는 전통

적인 신관을 지칭한다. 고대교회의 신학자들은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

의 초자연적 계시를 보다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의도적

또는 비의도적으로 플라톤, 플로티누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의사상적 틀과개념을 전유하여고전적 유신론을발전시켰다.1)

nomenologically draw on the divine revelation out of its alienation, if

one brackets reversely the I ’ s autarchic status and horizontal

localization. This is done by the third reduction, which brackets the I

as a constituting subject in order to make the givenness of the

phenomenon manifest itself without conditions. The third reduction

opens a path to access to an unconditioned possibility of revelation in

the light of intuitive excess.

A new method proposed as such is called “the saturated phe-

nomenon,” with which Marion attempts to account for the divine

revelation in terms of para-dox and interloqué. His main contention is

that if we bring ourselves to the given phenomena themselves as

reveena themthey can constitute us as the saturated phenomena to the

exte sawhere we experience ‘interloqué’ instead of equivalence bet-

ween hthan cone br and reveena th. What turatMarionian alternative

catches accht of principally remains in two key as the st i(a)o key as

the st i(reverses the modern constitutieen hthan divine revelation as

the hthan call and divine responaltstructure based on the ontological

question, into han divine call and hthan responaltstructure based on

the divine excess. (b) With regard to han question of what tue revealed

reveals, Marion emphasizes the anonyivty of han divine revelation

since it dne tn tets own horizon a posteriori. Marion proposes the”.

(less hermeneutics” as an d propriate method to access to the para-

doxical and excessive donations of divine revelation in the visible

form.

1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101-132

1) 쿠퍼에 따르면 고전적 유신론은 서방교회에서는 어거스틴, 안셀름, 아퀴나스, 스코투스

에 의해 형성되어 종교개혁 이후의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계승되었으

며, 동방교회에서는크리소스톰, 바실, 니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저스의그레고리 등에 의

해 형성, 계승되었다. John W. Cooper, Panentheism: The Other God of the Philoso-

phers: From Plato to the Presen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6), 14.

Page 5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 글에서는 고전적 유신론과 만유재신론을 비교하고 바람직한 만유

재신론적 비전의 전망을 모색하기위한과정으로서다음과 같은주제들

을 순서대로 다룰 것이다. 먼저2장에서는 만유재신론의 정의와 유형들

을 소개하고, 3장에서는 하나님의 본질(본성)과 실존, 창조, 하나님의 불

변성과 가변성, 일방적 관계와 상호적 관계,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 신정론, 무한자 하나님과유한자 세계: 인

간(정신)/몸 유비와 같은 주제들을 중심으로 고전적 유신론과 만유재신

론의 주요 논점들에 관해서 고찰하고, 4장에서는 만유재신론의 성서적

근거를 밝히고, 5장에서는 수정된 고전적 유신론의 두 유형을 소개한

후에, 6장에서는결론으로글을마무리할것이다.

I I. 만유재신론의정의와유형들

만유재신론은 문자 그대로“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계심”을 믿는 신

론이다. 하나님과 세계는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며 하나님은 세계를 초월

한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세계

안에 현존한다. 이 개념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따르면,“하나님의 존재

는 전 우주를 포괄하며 전 우주 안에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모든 부분

은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는 우주 이상이며 우주

에 의해 다 소진되지 않는다.”3) 만유재신론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시간

성, 독립성과 의존성,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되,

하나님과 세계의 사이의 상호적 관계성과 이 관계성 안에서의하나님의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의 초월성, 자기 충족성, 영원성, 독립성, 불변

성, 무감정적인 고통 불가능성을 강조한다. 여기서는 절대적 이원론의

관점에서 창조자 하나님과 창조세계, 영원과 시간, 무한자와 유한자를

철저하게 분리시킨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기 이전과 아울러 이후에

도 영원 속에서 자존적(自存的)이고 자기 충족적인 분으로 영원히 홀로

존재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영원 전에 이미 세계와 인간의 미래를 단지

가능태로서가 아니라 현실태로서 미리 아시고 예정한다. 영원 속에 계

신 하나님은시간속에참여하지않으며, 세계의 인과율과같은자연질

서에 종속되지 않으며,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거나 변화를

경험하지않는다.

근대에 들어 고전적 유신론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양자역학,

생물학, 천체물리학 등의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독립적, 자기 완

결적, 정적, 실체론적 실재관과 이에기초한 영(정신)-물질(육체) 이원론

이 붕괴되고, 모든 실재의 관계적, 시간적(temporal), 역동적 본성에 대

한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전통적인 실체론적, 정적 유신론은 쇠퇴하고

관계론적, 역동적 유신론이 발전되었다. 이러한 관계론적, 역동적 유신론

의 발전은 철학적으로19세기의 헤겔과 쉘링, 그리고20세기의 샤르뎅,

화이트헤드와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만유재신론은

바로 실체론적, 정적 고전적 유신론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발전된 관

계론적, 역동적 유신론이다.‘만유재신론(panentheism)’이란 용어는19

세기에 독일의 칼 크라우제(Karl Krause, 1781-1832)가 자신의 신관을

고전적 유신론(theism)과 범신론(pantheism)과 구별하기 위해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1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만유재신론 103

2 ) Karl Krause, Vorlesungen über die Grundwahrheiten der Wissenschaft ( G ö t t i n g e n ,

1829), 484. Karl Krause, The Ideal of Humanity and Universal Federation ( D a s

Urbild der Menschheit), trans. W. Hastie (Edinburgh: T&T Clark, 1900). 이 용어를

널리 퍼뜨린 신학자는 2 0세기 중반의 미국의 찰스 하숀(Charles Hartshorne)이다.

Charles Hartshorne, The Divine Relativity: A Social Conception of Go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48). Charles Hartshorne and William Reese, “Introduction:

The Standpoint of Panentheism,” Philosophers Speak of Go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3).

3 ) F. L. Cross and E. A. Livingstone, eds.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3rd e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1213.

Page 5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안에 있다”는 말을 관계적 또는 실존적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 두 모

델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이 두 모델에 있어서 하나님은 재신론

피조물을 자신의 몸으로 갖는 인간(또는 정신)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

나님과 세계의 만유 재신론적 관계는“전체(인간)와 부분(몸)의 관계이

자 동시에 매우 밀접한 상호관계안에있는유기체적 공생의 관계이다.

네 번째는 자발적 만유재신론과자연적 만유재신론의 구별이다. 어떤

만유재신론자들은 세계가 하나님에게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신플라톤

주의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연적으로“넘쳐흘러서”낮은 차원의 존재를

유출한다. 하숀은 하나님이 모종의 세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

면에 다른 만유재신론자들은 창조자 하나님의 자유를 긍정하며 세계의

필연성을 부정한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클레이톤은 제외)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창조를 긍정함과 동시에 세계가 하나님에게 불가피하다고 주

장한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자유와 불가피성이 양립 가

능하다고 논증한다. 즉 창조는 본성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자유

로운표현이지만, 이와동시에 사랑할 대상이 없이는 사랑할 수 없기때

문에본성이 사랑이신하나님이 하나님 되기위해서는창조가 불가피하

다는것이다.

다섯 번째로 피조물의 자유가 하나님께 영향을 줄 수 있느냐 없느냐

에 따라 고전적 만유재신론과 현대적 만유재신론이 구별된다. 플로티누

스 이래고전적 만유재신론자들은이를부정하고 신적결정론을 주장하

는 반면, 현대의 대부분의 만유재신론자들은 이를 긍정하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의상호적인관계성을주장한다.

이 글에서 전제또는 추구하는 만유재신론은명시적인 것과암시적인

것을 포괄하며, 인격적 모델을 중요시 하되 비인격적 모델도 포함하며,

관계적 모델을 중심으로 하되 부분-전체 모델도 비판적으로 전유하며,

자발적 모델을 받아들이고 자연적 모델을 거부하되 양립주의 입장을 수

용할 것이며, 고전적인 신적 결정론의 모델을 비판하고 현대적인 상호적

관계성의 모델을 지지하되전자를후자의관점에서 재해석할것이다.

가변성, 감정적인고통가능성을중요시한다.

만유재신론이란 모두가 동의하는 하나의 통일된 정의 안에 포괄될

수 있는 획일적 개념은 아니다. 만유재신론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다양

한 견해들이 존재한다. 쿠퍼는 만유재신론의 종류를 각기 두 대구적(對

句的) 개념으로 구성된 다섯 가지 범주로 분류한다.4) 이 다섯 가지 범주

는 ①명시적이냐 암시적이냐, ②인격적이냐 비인격적이냐, ③부분-전

체 도식이냐 관계적이냐, ④자발적이냐, 자연적이냐, ⑤고전적(신적 결

정론)이냐, 현대적(상호적)이냐하는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명시적 만유재신론자와 암시적 만유재신론자가 구별

된다. 전자는 자신이 스스로 만유재신론자임을 인정하는 경우이며, 전자

는 이 용어가 생기기 이전의 사상가들이나 또는 자신은 스스로 만유재

신론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제로 만유재신론자의 범주에 포함되는

사상가들이다. 쿠퍼에 따르면, 하숀이나 몰트만은 명시적 만유재신론자

에 속하는 반면, 플로티누스, 니콜라스 쿠사, 헤겔, 슐라이에르마허, 쉘링,

화이트헤드, 틸리히, 판넨베르그 폴킹혼 등은 암시적 만유재신론자에 속

한다. 이 가운데 특히 판넨베르그와 폴킹혼은 만유재신론을 비판하지만

실제로는만유재신론적신관을 보여주는학자들이다.

두 번째는 인격적 만유재신론과 비인격적 존재의 근거(Ground-of-

being) 만유재신론의 구별이다. 쉘링, 샤르뎅, 부버, 하숀, 몰트만 등에 있

어서 하나님은 인격이며 인격적 관계를 위해 창조한다. 특히 몰트만에

게 있어서 인격적 만유재신론은 삼위일체를 위한 기초이다. 반면, 플로

티누스, 피히테, 틸리히, 류터등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격 또는 인격들의

공동체의근거, 궁극적 원인, 원천, 힘이지만그 자체는 인격이 아니다.

세 번째는“하나님 안에 있다”는 말과“하나님에 참여한다”는 말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어떤 만유재신론자들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전체와 부분의 관계로 이해하는 반면, 다른 만유재신론자들은“하나님

1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만유재신론 105

4) Cooper, Panentheism: The Other God of the Philosophers (2006), 27-30.

Page 5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고전적 유신론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계 창조와 관계없이

완전히 현실적이다.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경세적 삼위일체의 존재유무

와는 관계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우리의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극미하게”(infinitesimally slightly) 다른

삶이 될지는 모르지만, 완전한 삶을 갖는다.8)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기

로 선택하였기때문에, 존재론적 삼위일체는경세적 삼위일체이다.

만유재신론도 하나님의 자존성을 부인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를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로 이해한다.9) 특히 클레이턴은 성서에 기

초하여 창조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이었음을 강조한다.10) 그러나 또

한 많은 만유재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단지 임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사랑의 본성에 의한것임을 강조함으로써창조안에서 하나님의

의지적 자유와 본성적 필연성을조화시키고자한다.

고전적 유신론과 달리 만유재신론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

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내재성을 중요시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현실적 실존을 세계 안의 내재성과 연결시킨다. 하나님의 초월적 본성

은 세계와의 관계성 안에서의 내재적 실존과 동일한 것도 아니지만 분

리된 것도 아니다. 만유재신론은 본질적 존재인 내재적 삼위일체의 현

실적 실존에 대한 사변보다는 세계와 더불어 존재하는 현실적 실존인

경세적 삼위일체에 관심을 집중한다. 하나님의 창조의 선택이“신적 삶

의 무한한 현실성”과 비교할 때“대수롭지 않은”것이거나“극미한 것”

이라는 쿠퍼의 주장은 영지주의의가현론적 사고와 유사하다.

만유재신론적 삼위일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실존은 존재론적으로 세

계와 관계되기 때문에, 창조세계와 관계없는 삼위일체의 완전한 현실성

이란 상상하기 어렵다. 라너의 규정을 빌려 말하자면, 내재적 삼위일체

I I I. 고전적유신론과만유재신론5)

1. 하나님의본질(본성)과 실존, 창조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의 자존성(自存性, aseity)과 자기 충족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자신 이외의 그 무엇도 필요로 하거나 의지하지 않

는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든지 하지 않든지 절대적으로, 영원히, 그

리고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세계 창조는 많은 가능성

들 가운데에서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

며, 하나님의 본성에 의해 수반되는 것도 아니다. 쿠퍼에 따르면, 하나님

의 존재론적독립성의 중요한 함의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진정

으로아가페적인것으로 만든다는데 있다.6)

하나님은 창조세계와 관계없이도 완전한 삶을 갖는다. 고전적 유신론

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과 현실적 실존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다. 자

신의 본질적 속성과 자유로운 선택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전 삶은 영원

히 그리고 완전히 현실적이다. 쿠퍼에 따르면,“하나님은 우리의 세계뿐

아니라 모든 가능한 세계를 무한히 초월하기 때문에, 창조에 관한 하나

님의 영원한 선택이 하나님의 실존에 초래하는 차이는 신적 삶의 무한

한 현실성과 비교할 때 존재론적으로대수롭지 않다(inconsequential).”7)

그처럼 위대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사랑하고 구원하기로 선택하

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은혜이다. 왜냐하면 존재론적으로 세계는 사실상

하나님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현실적 초자

연적 실존은 세계 안의 하나님의 내재를 무한히 초월하기 때문에 초월

성과내재성 사이의 존재론적균형에 관해말하는 것은무의미하다.

1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 만유재신론 107

5) 이글에서소개되는 고전적 유신론은오늘날의 고전적 유신론자인 존 쿠퍼의『만유재신

론: 철학자들의다른신』의 결론부분인14장에나타난 내용에기초한 것이다.

6) Ibid., 325.

7) Ibid., 328.

8) Ibid., 329.

9) 이 점에있어서이 글에서 제시하는만유재신론은과정사상의 만유재신론과구별된다.

10) Philip Clayton, God and Contemporary Science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97), 17-21.

Page 5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의 시간 속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현실적

실존은 세계와의상호관계 속에서 끊임없이새롭게 생성되는새로운 현

실태에 상응하는 새로운 인식과 변화를 경험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는 결코 자신의 영원한 본질과 목적이 변화됨 없

이 타자와의 관계성 안에있는현실적 실존 속에서 타자에 의해서 영향

을 받고변화되는것을허용하는자유이다.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이 피조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없다고 주

장한다. 하나님은 인과적 과정에 의해 피조물로부터 주어진 영향에 의

해 감정을 느끼지도 않으며 또한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지도 않는다. 쿠

퍼에 따르면, 영원한 하나님은 내가 내일 밤 나의 아내에게 할 말로 인

해 기뻐하거나 화를 낼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알고

허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쁨과 화는 인간의 감정처럼 나의 말을 들

음으로써 야기되는 감정이 아니다.13)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의지에 따

라 세계의 상황 안에있는피조물들에 응답하고 그것들과상호작용하는

사건들을 가져오심으로서 응답하고 상호작용한다. 그러나 쿠퍼의 고전

적 유신론은피조물에의해초래되는 인과율로 인하여 하나님이 감정을

갖게됨을부인한다.

만유재신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는 일

방적, 비인격적 관계이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적인 대

화적, 인격적 관계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세계의 미래의 현실성이 영

원 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

한 의미에서의 상호적이고 대화적인 관계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예정 안에서의 비인과적인 상호적 관계란 모순적 개념이다. 진

정한 상호적, 인격적 관계란 영향을 줄뿐만 아니라 영향을 받는 관계이

는 경세적 삼위일체이며, 경세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다. 따라

서 내재적 삼위일체의 완전한 존재론적 현실성은 하나님의존재안으로

세계를 통합시키는 경세적 삼위일체에 적어도 부분적으로 의존한다. 다

시 말하면, 영원 속에서의 하나님의 본질적 본성은 시간 속에서의 내재

적 실존을 신적존재의본유적인구성요소로포함한다.

2. 하나님의불변성과가변성, 일방적관계와상호적관계

고전적 유신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불변성에 관한 견해는 두 가지가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하나님에게 있어서 본질과 실존은 완전히 동

일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는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며 불변적

이다. 하나님 안에는 자유나 우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

의 고전적 유신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본성은 불변적이지만 주권적

자유가 하나님의 본성의 일부이다. 하나님은 창조하거나 창조하지 않을

수 있는 영원한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무한한 지혜와 선에 따라

자신이 선택한 것을 창조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아무런 선택

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영원한 선택에 대하여 신실하기 때문

에, 하나님의 의지는 불변적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자유는 또한 하나님

의 본질/본성과 실존 사이의 구별을 수반한다.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

의 삶 안에우연성의요소가 있다는것을인정하지만, 그 우연성은 시간

적 변화에 대한 참여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따라서 하나님의 불

변적본성과 의지와 모순되지않는다고주장한다.11)

반면에 만유재신론은 고전적 유신론처럼 하나님의 불변성을 고수하

지 않고 하나님의 실존을 세계와의 상호적인 관계성 안에서 이해한다.

물론 하나님의 실존의 목적과 유형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12)

1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만유재신론 109

11) Cooper, Panentheism: The Other God of the Philosophers (2006), 327.

12)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님의 자존성, 필연성, 무한성, 완전성, 영원성을 의미하며, 하나

님의본성은 사랑, 자유, 지혜, 거룩성, 신실성을의미한다. 이와같은하나님의 본질

과본성은불변적이다.

13) Ibid., 332. 쿠퍼의 또 다른 예에 따르면,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고 나의 병을 고

치신다. 하나님은 모든 영원부터 이 결과를 알며 의도하신다. 그러나 나의 치유는 참

으로하나님의직접적현존, 행동, 내 기도에 대한들으심과 응답의결과이다. 331.

Page 5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존의 내재로 변화시킨다. 그러나 세계는 철저하게 하나님과 구별된다.

공간, 시간, 우주적 에너지, 우주적 질서는 신적 존재 또는 힘의 부분이

나 측면이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조건, 차원, 현실

적 실존의 양태이다. 그러나 쿠퍼는 창조세계의 모든 공간, 시간, 실재,

사건이 직접적으로 하나님 안에 현존하며, 하나님은 그것들을 유지하고

인도하는 섭리자로서 그것들 안에 현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

다.“고전적 유신론에 있어서 바로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초월적이기 때

문에 하나님은 창조 세계 안에절대적으로 내재, 즉 비제약적으로 편재

(omnipresent)할 수 있다.”16)

고전적 유신론에서는 세계의 시간성이 하나님의 영원성 안에 있기

때문에 세계가 하나님 안에 내재한다고 말한다면, 만유재신론에서는 하

나님의 영원성이세계의 시간성에참여함으로써하나님이 세계속에내

재한다고 말한다. 물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철

폐된다. 왜냐하면 종말에는 시간이 영원에 의해 변화되어 영원 안으로

통합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유재신론에 있어서 창조세계의 시간, 공간,

원초적인 우주적 에너지는 하나님과 구별되는피조물 또는작품이자동

시에하나님의 실존적 현실성이 표현되고 실현되는존재론적구성적 의

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이 광대한 존재임에도 불

구하고, 시공간과 인과율과 같은 세계의 존재론적 구조 안에 참여하여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현실화시킨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본질

적으로 시공간과인과율과 같은세계의 존재론적 구조에 종속된다는것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상호적인 관계를 위하여 무한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유한한 세계의 존재론적 구조에 적합하도록 스스로를

제한시켰다는것을의미한다.

만유재신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편재는 절대적인 비제약적 내재를 의

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인격적 상호적 관계성이 부재하기

다. 일방적으로 타자에게 영향을 주기만 하고 받지는 않는 하나님은 사

랑의하나님이 아니다. 사랑은 영향을 주는것일뿐 아니라 영향을 수용

하는것이다. 자녀의 고통에 의해영향을 받지않는부모의 사랑이란것

이 가능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의 죄와고통에 공감적(sympathetic)으로 동참하고 그것을 대신걸머지

고 고난당함으로써 인간을 구원하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다. 본회퍼는

말했다. “오직 고통당하는하나님만이 인간을 도우실 수 있다.”14)

3. 하나님의초월성과내재성

고전적 유신론에 있어서 하나님은 영원성, 즉 초월의 영역에 존재한

다. 전통적으로 영원은 시작, 연속성, 끝이 없이 지속되는 신적 삶의 완

전성으로 이해되어 왔다. 영원은 계열적 연속성(succession)이 없는 무

한한 신적 삶의 지속적, 동시적 현존이다. 계열적 연속성은 유한한 세계

의 존재들이 질서화 되는 방식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원한 지식과 의

지에 따라 창조된 현실적 세계에 있어서 사건들은 시간적 연속성 안에

서 발생한다. 쿠퍼에 따르면 시간이란 가능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영

원한 지식의 계열화(serialization)이지 영원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시간이 직접적으로 하나님 안에 내재함을 의미한다. 따라

서 그는 하나님은 사물의 발생을 관찰함으로써 인식하지도 않으며, 모

험을 감수하지도 않으며,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하여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지도않는다고주장한다.15)

쿠퍼의 고전적 유신론에 따르면 자신이 창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영원히 아신다는 의미에서 모든존재는 가능한 존재로서 영원

히 하나님 안에 내재한다. 세계창조는 가능적 실존의 내재를 현실적 실

1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만유재신론 111

16) Ibid., 330.

14) Dietrich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71), 361.

15) Cooper, Panentheism: The Other God of the Philosophers (2006), 331.

Page 5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로운 선택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이해 가능한 설명이 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세계 안의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의도시며,“내

가 자유롭게 선택하는것이하나님이미리예정한 것의일부”라면, 피조

물을결코진정한 자유를 가졌다고할 수 없다. 이러한 예정론에의하면

결국세계의 죄와악도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안에있는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에대한궁극적 원인과 책임은 하나님에게있다.

만유재신론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와 인간의 선택을 영원 전부터

미리 결정하는 일방적인 예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과의 상

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세계를 설득하고 감화함으로써 세계와

인간을 인도하는 무한한 사랑과 지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

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주셨으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자유의지에 의해 잘못 선택한 행동에 대하여 스

스로책임져야한다. 인간이 행한죄악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것이아

니라, 악마적 유혹이 거스르기 어려운 인과적 힘으로 작용했다고 하더

라고결국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의한것이며, 따라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인간자신이 져야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한 예정 안에서 이미 결정된 세계의 미래에 대

한 지식 안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현재의 선택에

거스르기 힘든 운명적 힘으로 작용하는 모든 과거에 현실화된 자유와

가능성의 빛 안에서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지혜로 미래에 현실화될 모

든 자유와 가능성을 가장 광범위하고도 정확하게 예지하시며, 설득하고

감화하며 기다리는 무한한 사랑으로 세계와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이목

적하는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목적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영원 전에 예정된 필연적

숙명에 의해서가아니라 하나님의무한한 지혜와 사랑에 의해서 보증된

다. 왜냐하면 무한한 지혜와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며 하나님을 믿는다

는 것은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의 능력을 믿는것

이기때문이다.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온 우주에 힘의 장(field)이나 기(氣)처럼보편

적으로 편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

의 편재는 단지 우주에 충만한 기처럼 비인격적인 공간적 채움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응답과의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의 상대적 또

는 비례적(proportional) 내재를 의미한다. 절대적 내재는 오직 만유재신

론적비전이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마지막 날, 즉 하나님이모든것의모

든 것이 되시고 온 우주에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에서실현될 것이다.

4. 하나님의섭리와인간의자유

쿠퍼에 따르면 고전적 유신론은 여러 가능성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이 모

든 영원으로부터모든 가능한 세계들 안에서의모든가능한 피조물들을

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것들을 창조하고 유지하기 위한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기 때문이다.17) 내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은 하나

님이 미리 예정한 것의 일부이기 때문에 영원부터 하나님에게 알려져

있다. 따라서 내가 그것을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쿠퍼는 그것은

하나님의 지식과 의지가 내가 다르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무시한다

는 의미에서“인과적으로 필연적이거나 결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

한다.18) 하나님은 내 행동의 궁극적 원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가

그 속에서 선택하고 행동하는 세계를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는 (하나님의예정과 일치되게) 자유롭게선택하고 행동하는 주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인간의 자유를 동시에 긍정하는 이

와 같은 쿠퍼의 논증은 이율배반적이다. 그것은 어떻게 인간의 행동이

신적 예정에 의한 필연성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자유의지에 따른 자유

1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만유재신론 113

17) Ibid., 325.

18) Ibid., 333.

Page 5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계심

을 의심치 않는다.

이와 같은 고전적 유신론의 논리는 신정론의 물음에 대한 이해 가능

한 답변이 될 수 없다. 넘쳐나는 이 세계의 엄청난 악과 고통과 슬픔과

비극을 조금이나마 체험적으로 경험하고 고뇌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얼마든지 막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선

을 위해 악을 예정하고 허용한다는 고전적 유신론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신정론의 문제는 단지 성서의 특정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해

결할수 있는문제가아니다. 만일하나님이구원받는사람의 수에만족

하실 때까지 재림을 미루신다면, 지금까지의 세계의 역사적 현실을 바

라볼 때 그때까지 악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멸망당할 사람은 얼마나 더

욱 많이넘쳐나겠는가?

만유재신론도 하나님이 선한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믿는다. 만유재신

론에 있어서 죄는 존재론적 필연성에 의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예정

에 의한 것도 아니다. 죄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죄에대하여 책임을 져야하는 이유이다. 한편, 죄와 악은

구별될 필요가 있다. 악은 무고한 인간을 고통에 몰아넣는 자연적 재앙

을 포함하는 모든 파괴적 힘을 의미한다. 과연 지진이나 해일과 같은 자

연적 악도 인간의 죄의 결과인가? 모든 악(특히자연적 악)을 인간의 죄

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쿠퍼는“많은 어거스틴주의자들이 자연의

과정에서의 폭력과 동물의 죽음(왜 인간이 아니고 동물의 죽음인가?)이

타락의 결과가 아니고 선한창조의 일부임을 인정한다”고 했는데,20) 그렇

다면 이것은 창조세계 안에 존재론적인 불완전성 또는 모호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의 우주론과 진화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자연적 악은 창조세계의 본래적 불안정성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죄보다 선행한다.21) 그리고 인간의 죄도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지

5. 신정론

고전적 유신론에 있어서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은 왜

악을 허용하며 세계의 고통을 감소시키기위해서 초자연적행동을 하시

지 않는가? 어거스틴의 고전적 유신론에 있어서 죄와악의 기원은 존재

론적 불가피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 즉 그것들은 세계의 근본적인 구조

안에서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우연한 것이

다. 그러나 죄와 악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허용되었기 때문에 불가피

하다. 어거스틴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은 선한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천

사와 인간의 불순종에 의해 악이 생겨났다. 이 불순종은 영원부터 하나

님이 알고허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인과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쿠퍼는“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불가피하게현실화된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이 현

실화한죄와악에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19)

고전적 유신론에 따르면 타락의 기원이 존재론적으로 창조와 구별되

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도 자연적 과정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

자연적 은혜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세계의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마침

내 세계를 구원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더 큰 선을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알지못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허용하는 수많은 무서운 재난과

불의한 악이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더 큰 선과부합하며 또한그 큰 선

을 이루어내는지아신다.

하나님에게 초자연적인 전능이 있다면, 왜 하나님은 더 자주 개입하

거나종말을 앞당기지 않는가? 쿠퍼의 대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오직성

서로부터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타락한 세계를 유지하기로

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이 구원받는 사람의 수에 만족하실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1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만유재신론 115

19) Ibid., 335.

20) Ibid., 341.

21) 오늘날의 우주론과진화론에 따르면, 우주는 140억 년 전에빅뱅과더불어시작되었

Page 5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와 악을극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것을믿는다. 하나님 나라는 종

국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만유의 주로서 온 세계에 충만하게 임재하

시고 세계의 시간과 공간과 우주적 에너지와 질서를 변혁시켜 영원한

하나님 나라안으로 통합시킴으로써완성될 것이다.

6. 무한자하나님과유한자세계: 인간(정신)/몸 유비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무한하기 때문에 그 무엇도 하나님 외부에 존

재할수 없다. 왜냐하면만일그 무엇이 하나님 외부에 존재한다면 하나

님은 그것에 의해 제한을 받게 될 것이고 더 이상 무한자가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유한한 실재와 상대적인 무한자(수(數),

시간, 공간 등)는 절대적인 무한자인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한다. 무한자

와 유한자의 관계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전체와 부분

은 상호 내재적이다. 즉 부분은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부분 안에 있다.

부분은 전체를 떠나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전체는 부분을 전체의 구성

요소로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이와 같은 전

체와부분의 관계는 만유재신론을위한논리적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쿠퍼는 고전적 유신론의 관점에서 모든 존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명제를 이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만유

재신론은 무한자를 존재론적 내재성(in-ness)의 관점에서 이해하지만,

고전적 유신론은 무한자를 하나님의 자발적 내재성의 관점에서 이해한

다.“모든 상대적무한자와유한자의실존은 하나님이현실화시킬 수 있

는 가능성으로서 하나님의 지식과 능력 안에 내재한다. 만일 하나님이

그것들을 현실화시킨다면 그것들은(하나님 안에 존재론적으로 내재하

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전능, 전지, 동시적 현존(concur-

rent presence)에 내재하는것이다.”22)

만 동시에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론적 불완전성과도 무관치 않다. 인간이

처음부터 완전한 존재였다면결코죄를짓지않았을것이다.

만유재신론에 있어서 하나님은 세계와 인간의 미래의 운명을 영원

전부터 미리 예정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유한하지만 진정한 주체성

과 자유를 주심으로써 미래의가능성의 현실화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하셨다. 하나님의‘예정’과‘허용’은 구별될 필요가 있다.‘예정’은 영원

전부터 세계와 인간의 미래의 운명을 미리 결정하는 것인 반면,‘허용’

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자신의 행동과 운명을 선택하도록

용인하는 것이다. 전자는 고전적 유신론의 개념이고 후자는 만유재신론

의 개념이다. 하나님의 허용은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자기 제한을 의미

한다.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의예정이 아니라 허용에 의한것이다.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식도 일방적인 예정이 아니라

인격적인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다.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일방적이거나 강제적인 힘이 아니라 설득하고 감화하고 기다리

는 사랑의 능력이다. 사랑은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힘을 독점하지 않

고 타자에게 힘을 부여해 준다. 사랑은 결코 타자를 일방적으로 지배하

거나 결정하는 힘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죄에

대한 심판의 형벌을 인간에게 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죄를 대신 지

고 심판을 당하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의 이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힘이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불가항력적인”은혜의 능력이

다. 이 은혜의 능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이 인간과 세

계를구원하는하나님의전능하신능력이다(고전 1:18).

만유재신론은 사랑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육신과 구속사

역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창조적 변혁과 화해를 통하여 세계의 모든죄

1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만유재신론 117

으며, 지금도 팽창의 과정, 즉 지속적인 창조의 과정에 있다. 지구는45억 년 전에 생

겨났으며,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이 땅에 출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4-5만 년

전이다. 22) Ibid., 339.

Page 6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과 다른 인간의 관계의 유비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무한자인 하나님의

외부에 유한자인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전제하는이원론적유비가 된

다는 것이다. 무한자인 하나님을 유한화시키는 이원론적 세계관은 일원

론적 또는 상대적 이원론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인간(정신)/몸 유비 못

지않게 심각한 문제점을안고있다.

유비란 본래 그 안에 일의적(univocal) 의미와 다의적(multivocal)

의미, 유비적 요소와 비유비적요소, 긍정과 부정을 함께내포하는 은유

의 일종이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적절한 유비가 존재할 뿐 절대적으

로 적절한 유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이

해하기 위해서 여러 유형의 유비 또는 은유의 모델들이 필요한 이유이

다. 인간(정신)/몸 유비는 고전적 유신론의 이원론적 세계관의 문제점

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세계를 유기체적이고 상호적인 관계성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대안적 모델이다. 그러나 이 모델은 상대적 적

절성을 지닌 하나의 모델일 뿐이지 그 자체가 절대적으로 적절한 모델

은 아니다.25)

I V. 만유재신론의성서적근거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고 영으로 세계 안에 현존

하며, 세계와 인간의 역사에 동참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그 역사를

이끌어 종국적으로 완성하시는 분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고전적 유신론

에서와 같이순수 현실태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처럼자기 완

결적이고 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 참여하고 함께 동행

이와같은 설명은 그 의미가 모호하다. 쿠퍼는 하나님의 세계내재가

존재론적 내재가 아니라 자발적 내재라고 주장하면서,“만일 하나님이

그것들(모든 상대적 무한자와 유한자의 실존)을 현실화시킨다면 그것들

은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전능, 전지, 동시적 현존(concurrent presence)

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존재론적 내재와 자발적 내

재는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다. 유한자인 세계의 존재 자체가 무한자

인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기제한 또는 자기수축(짐줌)에 의해 하나님 자

신 안에생겨난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며, 창조세계 안에의 하나님의 내

재는 하나님의 자유로운존재방식의 변증법적과정을 구성하는한 계기

가 되기때문에 그것은 자유로운것임과 동시에 존재론적인것이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만유재신론자들은인

간(정신)과 몸의 유비를 사용한다.23) 이 유비는 몇 가지 한계점을 지니

고 있다. 그 중에하나는 이 유비가 무로부터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초월적 주권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세계

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즉각적으로 아시는데 반해서 인간의 정

신은자신의 몸의극히일부만을의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쿠퍼는 이 유비에 나타나는 비유비(非類比)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나의 정신/몸 자아는 다른 정신/몸 자아와 나의 외부의 사물들과 관계

하는 반면, 만유재신론의 하나님은 인간처럼 자신의 정신과 몸의 외부

에 있는 세계와 관계하지 못하고 오직내적으로 자신의 몸과이상적 가

능성과 관계한다고 비판한다.24) 그러나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한 인간

1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만유재신론 119

23) 인간(정신)과 몸의 유비에 있어서, 하나님이 인간 전체로 이해된다면 하나님과 세계

의 관계는 유기체적 일원론에기초한 전체(하나님)와 부분(세계)의 관계가 되며, 하나

님이 정신으로 이해된다면 하나님(정신)과 세계(몸)의 관계는 유기체적인 상대적 이

원론에 기초한 상호적인관계가 된다.

24) Ibid., 338-339. 쿠퍼는 정신과 몸의 유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보여준다. 정신과 몸

의 유비는 본래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 인간과 다른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한 인

간 안에서의정신과 몸의유기체적관계를표현하는유비이다.

25) 하나님의 몸으로서의 세계에 관해서는Sallie McFague, The Body of God: An Eco-

logical Theology (Mineapolis: Fortress Press, 1993), 그리고 은유이론에 관해서는

그녀의Metaphorical Theology: Models of God in Religious Language ( P h i l a-

delphia: Fortress Press, 1982), 특히14-29를 참고하라.

Page 6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 빈 공간인 자궁으로부터 새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여인의 모습

은 자기 수축 또는 자기 제한을 통하여 자신 안에 생겨난 빈 공간, 즉

무(nihil)로부터 세계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모습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은창조의 모델에서는하나님과세계가 절대적 이원론의 관계가

아닌존재론적유비의 관계에 있다.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역사가 되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

스도안에서 육체적 인간이 되셨다. 즉 하나님은세계와 인간의 역사안

에 체화된(embody) 모습으로 현존하는임마누엘하나님이 되셨다. 신약

성서 안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뿐 아니라 그를통하여 인간과 온 세계

에 임재하심을 증언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아버지 안에있는것 같이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 17:21).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표준새번역개정판)”(행 17:28).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교회를 통한예수 그리스

도와 만물의 종말론적인 관계를 머리와 몸의 비유를 통하여 표현한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

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충만이니라”(엡 1:22-23). 이 구절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자

신의몸인교회를 통하여 만물안에충만하게임재한다. 바울은 또한만

유 안에 충만한 하나님의 현존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도래

하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을 예언한다.“만

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

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

서 만유안에계시려하심이라”(고전 15:28).

하는 관계적이고 역동적인 존재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물질적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영적 존재가 아니라, 이 물질적 세계 안으로 들어오셔서

세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고통을 경험할 수 없는 무감동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가 당하는 고통을 함께 경험하며 아파하는 공감적 사랑을 통해서 우리

를 구원하는 하나님이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을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과 유사한 방식으로

느끼고 응답하고 행동하는 분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때로는 후회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때로는 질투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공감적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

며,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 즉 헤세드의 하나님이다. 구약성서에서하

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을 맺음으로서 그들과의 상호적인 관계성

안으로 들어오신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

호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

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시기도 한다.26) 하지만

변함이 없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언제나 약속하신 바를신실하게지키신다.

성서는 여러곳에서 하나님의 세계 또는 인간의 창조를 여인의 출산

에 비유하여 표현한다.27) 이 구절들은 만유재신론의 짐줌 이론을 위한

성서적 근거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 안에 있

1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만유재신론 121

26) 예를 들면,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병들어 죽게 된 그의 생명

을 십 오년연장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히스기야가 죽게 될 것도하나님의 말

씀에 의한 것이었고(“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왕하 20:1), 그가 살게 될 것도 하나

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다(“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왕하

20:6).

27)“오직 주께서 나를모태에서 나오게하시고 내 어머니의젖을먹을때에의지하게하

셨나이다”(시 22:9).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내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렘 1:4). 이 외에 사 46:3-4; 렘 20:14-18; 욥 10:18-19; 31:

13-15 등.

Page 6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다는 고전적 유신론의 입장을 고수한다. 하나님은 시간적 세계에 대

한 관찰을 통해인식하지도 않고, 인간과 함께하는모험처럼 역사를 운

행하지도 않으며, 놀라움을 감수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시간적으로 예

지, 예정하며, 세계를 향한 자신의 계획 안에서 만물과 동행한다. 그러므

로 이 유형의 유신론은고전적 유신론처럼 하나님의절대주권과 섭리를

확고하게 유지하고자 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피조물에 응답할 수도 있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

원한(또는 영구한) 예지와 예정 안에서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시간적 응

답이 하나님이 피조물에 의해 인과적으로 영향 받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극적 수정주의 유형의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과 세계의 철저한

구별은 유지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면에서 시간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

적 질서 안에 참여함으로써 인과적인 영향과 제한을 받는다는 것을 인

정한다. 하나님은 관계적일 뿐 아니라 상호 관계적이다. 하나님은 시간,

공간, 에너지, 그리고 자연 질서를 통해 관계를 맺으며, 피조물의 행동을

경험함으로써 인식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고통을 보고 공감적인

(sympathetic) 감정을 갖는다.

‘열린’또는‘자유의지’유신론도 이 유형의유신론에속한다고할 수

있다. 피조물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미래는 열려 있다. 하나님

도 피조물이 미래에 무엇을 하게될지미리예정하거나알지못한다. 다

시 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미리 구체적으로 계획할 수 없다. 하나님은 시간, 공간, 인과성에

참여하기때문에 그것들에의해제한을 받는다.30)

V. 수정된고전적유신론

고전적 유신론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 유신론의 하나님은 불변적인

영원의 영역에서의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에 가변적인 세계의 시간과 공

간의 범주 안으로 들어올 수 없으며, 또한 가능태가 없는 순수 현실태

(actus purus)이기 때문에 세계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적인 관계

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타자로부터 결코 영향을 받을 수도 없고 변

화를 수용할 수도 없는 하나님이 변화무쌍한 세계의 역사 안으로 들어

와 그 변화의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

러므로 성서적 신앙과 철학적 합리성의 관점둘 다에있어서, 고전적 유

신론의 수정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어느 정도까지 수정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고전적 유신론에 대한 수정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

다. 하나는 소극적 유형이며 다른하나는 적극적 유형이다.

소극적 수정주의 유형의 고전적 유신론은 고전적 신학을 수정하여

하나님이 시간에 참여함을 말하고자 한다. 리차드 스윈번( R i c h a r d

Swinburne)은 하나님이 시간성 안에 참여함을 긍정한다.28) 윌리엄 크레

이그(William Lane Craig)는 하나님 자신은 본래적으로 영원하지만 세

계를 창조한 이래 시간적으로 변화한다고 주장하며, 니콜라스 월터스톨

프(Nicholas Wolterstorff)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본래적으로

영원(eternal)하지 않고 영구(everlasting)하며, 따라서 시작과 끝, 또는

피조물적시간의 제한이 없는시간성을소유한다고주장한다.29)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이 시간에 참여함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하여

시간적 세계에 의존하거나,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제한을 받지 않

1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만유재신론 123

28) Richard Swinburne, The Coherence of Theis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그리고 The Christian Go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2 9 ) Gregory Ganssle, ed., God and Time: Four Views (Downers Grove, I L: Inter-

Varsity, 2001). 쿠퍼는 기본적으로 고전적 유신론자이나 이 소극적 수정주의 유형에

는 동조한다. Cooper, Panentheism: The Other God of the Philosophers (2006), 343.

30)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열린 또는자유의지 유신론의 논의에 관해

서는 Richard Rice, The Openness of God: The Relationship between Divine Fore-

knowledge and Human Free Will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1980, 개정

판 Minneapolis: Bethany House, 1985), William Hasker, God, Time, and Know-

ledge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89), Clark Pinnock 외 The Open-

Page 6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불가변적, 무고통적, 결정론적, 실체론적 신개념을 고수하는 전통적인 형

태의 고전적 유신론은 오늘날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하나님이 시간

에 참여함에도 불구하고 그로인하여 시간적 세계에 의존하거나 그것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소극적 수정주의 고전적 유신론도 하

나님과 세계의 인격적, 상호적 관계성을 적절히 표현하기에 충분치 않

다. 반면에, 하나님은영원전에일방적으로 예정하지않고, 세계의 시간,

공간, 인과성에 참여하고 세계와의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영향을 수용

한다는 적극적 수정주의 유신론은 만유재신론과의 일부 차이점에도 불

구하고 좋은신학적 동반자가 될 수 있다.

만유재신론은 근본적으로 관계론적 신관이다. 만유재신론은 하나님

의 실존을 세계와의 상호적인 관계성 안에서 이해한다. 물론 하나님은

자존적이며 스스로 충만한 영광 중에 계신다. 하나님에게는 내적인 결

핍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충만한 영광 그 자체이다. 하나님은 충

만한 영광 가운데 자유로우시다. 하나님은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어떤

필연성에 종속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어떤 외적 필연성이 아닌 순수

한 내적 필연성 즉 자유로운 사랑 안에서 세계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에 있어서 내적 필연성과 자유는 조화되며 일치한다. 무한

자이신 하나님의“밖”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세계창조는 하나

님의“밖”에 세계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다.“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란 하나님 자신의 자기제한 또는 자기수축(짐줌)에 의해 하나

님 자신안에생겨난 무로부터의창조를의미한다.

만유재신론에있어서 라너의 명제는 기본적으로 정당하다. 즉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세적 삼위일체이며, 경세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

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세적 삼위일체로 환원된다는

것을의미하는 것이아니라 내재적 삼위일체의 완전한 존재론적 현실성

이 세계를 자신 안으로통합시키는경세적 삼위일체에 적어도 부분적으

로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

(내재적 삼위일체)은 세계 속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시간적 실존(경세적

적극적 수정주의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 인과적 질서 안에서 전개되는 상호적인 관계로 이해한

다는 점에서 만유재신론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이 두 신관 사이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전자는 전통적인 실체론적 존재론

을 고수하는반면 후자는 관계론적 존재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가 본유적으로 자기충족적, 독립적 실체로서의 하

나님 자신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이차적, 우연적이 관계로 간주될 뿐만

아니라, 비록 하나님이 세계와의 관계를 자신의 이야기의 일부로 선택

하였음에도불구하고 그 관계가 하나님의실체적인존재의 정체성에본

유적이고 구성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이 신관은

여전히 고전적 유신론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존재가 단지자기충족적이고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세계와의상호적

인 관계성 안에서 구성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이와 같은 관계론적 신

관은만유재신론적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신관의 경계는 때로 분명치 않을수 있다. 즉 자유의지

유신론 안에도 하나님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는 내재적 측

면이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견해가 있고, 만유재신론 안

에서도 하나님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초월적 측면

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견해가 있기 때문에 이 두 신관의 경계는

다소유동적이다.

V I. 결론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전적으로 초월적, 독립적, 자기 충족적, 정적,

1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만유재신론 125

ness of God: A Biblical Challenge to the Traditional Understanding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4), David Basinger, The Case for Freewill

The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등을참고하라.

Page 6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사랑의 힘의 불가항력성을 의미한다.“오직 은혜”(sola gratia)란 인간이

전적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인 사랑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표현한다.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영원 전에 예정된 필연적 숙명에 의해서가 아니

라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의 힘에의해서 보증된다. 이 무한한 지

혜와 사랑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것을의미한다.

만유재신론에 있어서 무한자 하나님과 유한자 세계의 관계는 인간

(정신)/몸 유비 또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인간

(정신)/몸 유비는 창조주 하나님의 초월성을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약점

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적 유신론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유기체적이고 상호적인 관계성 안에서 하나님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대안적 모델을 제공해 준다. 전체와 부분은 상호 내재적

이다. 그러나 전체와 부분으로서의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이해는 단순

히 공시적 차원이 아니라 통시적 차원에서의 해석학적 과업을 요구한

다. 하나님과 세계의 시간적 역사 속에서 관계에 있어서 부분과 전체는

해석학적 순환관계에 있다. 역사의 도상에서 모든 부분들의 의미는 아

직 감추어져 있다. 역사의 전체성의 완전한 의미는 종말론적 미래에 온

전히 드러날 것이다. 한편, 역사의 전체성은 역사의 모든 부분들로 구성

된다. 종말론적 완성은 역사의 과정을 폐기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종말

에 완성되는 역사의 전체성의 의미는 부분의 총합을 초월한다. 종말론

적 미래는 과거와 현재를 인도하며 변혁시키며 완성한다. 그리하여 마

지막 때에 시간은 영원의 침투에 의해 질적으로 변화되며 동시에 영원

속으로 고양, 통합된다.31)

역사의 전체성의 종국적 의미로서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

삼위일체)을 신적 존재의 본유적인 한 요소로서 포함한다. 따라서 창조

세계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피조물이지만 동시에 내재적 삼위일체의 경

세적 현실성이 실현되는 장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세계의 가변적인

시간성 안에 참여하여 자신의 경세적 실존을 현실화시켜 나가신다. 시

간은영원에, 세계는 하나님께유의미하다.

사랑, 지혜, 거룩성으로서의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은 영원히 불변한

다. 하지만 시간적 세계와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경세적 실존은 새로

운 경험과 변화를 수반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상호적, 인격적 관계란 영

향을 줄 뿐만 아니라 영향을 수용하는 것이며,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의

본질이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영향을 수용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사

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 전부터 세계와 인간의 미래의

운명을 미리 결정하는‘예정’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

스로 자신의 행동과 운명을 선택하도록 하는‘허용’을 전제한다. 이

‘허용’은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자기제한에 의한것이다. 인간은 하나

님으로부터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유한하지만 진정한 자유를

‘허용’받았으며, 따라서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

님 앞에서의 인간의 책임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용하신 자유를

전제로한다.

자신에게 허용된 자유의 잘못된 사용, 즉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도 일방적인 예정이 아니라 인격적인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구원의 역사는 세계의 미래를 영원

전부터 예정하는 일방적 지배력이 아니라 무한한 지혜안에서 설득하고

감화하는 사랑의 힘에 의한 것이다.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일방적이거나 강제적인 힘이 아니라 설득하고 감화하고 기다리

는 사랑의 능력이다. 예수그리스도의십자가 안에나타난이 사랑의 능

력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전능이다(고전1:18). 하나님의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의 힘에 의한 예정

을 의미한다.“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able grace)란 이 무한한 지혜와

1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만유재신론 127

31) 판넨베르그가말한바와 같이, 역사와 종말, 부분과 전체의해석학적 순환관계를위한

해석학적 원리는 종말론적 미래의 역사적 선취로서의 예수 그리스도(특히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Page 6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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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nock, Clark. ed. The Openness of God: A Biblical Challenge to the

Traditional Understanding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4.

서 만유의 주로서 온 세계에 충만하게 임재하시고 세계의 시간과 공간

과 우주적 에너지와 질서를 변화시켜 그 나라 안으로 통합시키는 종말

론적 미래에 완성될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의 영원한 현실성 속에서의

존재론적 본질과 세계의 역사속의 현실적 실존이 온전히 하나가 될 것

이다. 하나님께서모든것의모든것이되시고 온 우주에 충만하게 임재

하시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때에 만유재신론적 비전도

완성될 것이다.“만물이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

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안에계시려 하심이라”(고전15:28).

주제어

고전적 유신론, 만유재신론, 초월성, 내재성, 관계성

Classical Theism, Panentheism, Transcendence, Immanence,

Relationality

접 수 일 2009년 10월 26일

심사(수정일) 2009년 12월 04일

게재확정일 2009년 12월 15일

1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만유재신론 129

Page 6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Classical Theism and Panentheism

Youn, Chul Ho

Professor

Presbyterian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The aim of this article is to grope for the prospect of the desirable

panentheistic vision by comparing the main points of panentheism

with those of classical theism.

Classical theism is the mainstream doctrine of God in the Christian

tradition. It was formed in the ancient Hellenistic influenced by the

ideas of Greek philosophers such as Plato, Plotinus and Aristotle, and

has been worked out and carried on in the western theological

tradition. Classical Theism asserts that God is transcendent, self-

sufficient, eternal, and immutable. It also emphasizes the apathy and

the impassivity of God. In the dualistic point of view, classical theism

separates God, the Creator, and the world created.

Panentheism, the term devised by Karl C, F. Krause, says that God

is present in “All” while being transcendent at the same time.

Panentheism emphasizes the intimat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the world. God gives human beings the freedom to choose among the

possibilities, which is the prerequisite of responsibilities. The power

of God is neither one-sided nor compulsory but persuasive and

patient. It is the power of love, which is nothing other than God. This

view can be maintained on the basis of biblical proofs, too. One of the

useful analogies which well explains the panentheistic relationship

Rice, Richard. The Openness of God: The Relationship between Divine

Foreknowledge and Human Free Will.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1980, 2nd ed. Minneapolis: Bethany House, 1985.

Swinburne, Richard. The Coherence of Theis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 The Christian Go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1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윤철호, 고전적 유신론과 만유재신론 131

Page 6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피어리스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의미

박도웅(감리교신학대학교강사)

I. 들어가는말

21세기를 맞으며 인류가 소망했던 풍요하고평화로운시대는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들려오는 전쟁과 갈등은 이전 세

기와다를바 없고오히려 더 장기화되고강렬해지는 면도보인다. 지난

해 말 미국 금융자본의 무분별한 욕망의 좌절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경

제위기도 아직까지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지구적 차원

에서 진행되는 정치 경제 문화적 위기 때마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

은 위기의 요인에는 수동적으로 연관되면서 위기의 결과에는 주동적으

로 참여해야 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차 세계대전 이

후 이룩한 외형적인 정치적 독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구 제국의 영

향권안에거하는 아시아의 각국의 상황을 다시한번확인하게 된다. 정

치경제적 위상과 영향력이 약화되기는했지만 여전히 세계유일의 초강

대국으로 존재하는 미국과 그에 맞설만한 유일한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의 경쟁 속에서 세계는 평화의 길이 아닌더욱심각한 갈등과 대립

between God and the world is the mind/body model. It’s an alternative

model to overcome the dualistic world-view of classical theism and to

contribute to understanding the organic relationship of God and the

world, though this analogia has a weak point to maintain the trans-

cendence of God as creator. So the hermeneutic task is required.

Classical theism in the traditional form has many differences from

panentheism, yet the actively revised classical theism, which admits

the participation of God into time and world, and recognizes the

mutual relationship between them can be a good theological

companion and dialogical partner with panentheism.

1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133-162

Page 6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다음으로 성서와 다른 제3세계 신학자들이 보는 가난에 대한 관점을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어리스 신학에서 가난이 갖는 신

학적 의미를 살피면서 아시아 신학의 근거가 되는 아시아의 실재로서

가난이 여전히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신학적 주제이며 동시에 과제임

을 밝히고자한다.

I I. 아시아의빈곤현실

1. 아시아의가난에대한질문

필자는2008년 4월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마친후 지도교수인 아리아

라자(Wesley S. Ariarajah) 박사와 두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었다. 아

리아라자 교수는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학에 헌신했고, 1997년 이래미국 Drew 대학교에서 에큐메니

칼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활동적인 신학자이다.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

이 진정한 아시아 교회가 되기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해야 것인지에 지

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필자는 지도교수와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21세기에도 여전히 빈곤과 가난한 사람들이 아시아의 실재가 되고 아

시아 신학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지를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평생을 에큐메니칼 운동의 현장과 아

시아 신학 강의로 살아온 노 교수는 가난이 아시아에서 여전히 현실적

인 문제이고 신학적인 주제라고 확실하게 대답해 주셨다. 한국이나 일

본 등 아시아에 속한 몇몇 나라에서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져 빈곤

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지만여전히 절대적 빈곤을 극복하지 못한아

시아 국가들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덧붙여 한국도 국가적

인 경제력은 높을 수 있지만 내적인 소득불평등의 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일 것이라는 날카로운지적을 잊지않았다.

의 시대로 회귀하는 듯하다. 서구와 아시아를 대표하는 두 강대국의 대

결 구도 속에서 제3세계, 특별히 아시아 국가들은 정치적 객체로 전락

하여 스스로의 운명을 남의 손에 내맡겨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계속

되는것이아닌지 심각하게묻게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시아의 교회와 신학이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방

향과 내용을 추구하고 발견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와 이를 위한 노

력은여전한 정당성을갖는다. 이를위해아시아 교회와 신학은 지난세

기 던져졌던 진지한 물음과 요청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며 응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시아의 고유한 신학적 관점의 성립과 발전에 대

한 물음과 요청이었고 동시에 아시아 상황에 기초한 진정한 아시아 신

학의수립과 발전에 대한요구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요청을 제기한 대

표적인 신학자는 알로이스 피어리스(Aloysius Pieris)이다. 피어리스는

스리랑카의 예수회 사제이며 신학자로 세계 신학계에서 아시아의 목소

리를 가장 분명하게 내고 있는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아시아의

실재( r e a l i t y )로‘가난’( P o v e r t y )과‘종교성’( r e l i g i o s i t y )을 제시하였다.1 )

그는어떠한 신학이든진정한 아시아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아시아의실재에서출발해야한다고 강력하게주장하고있다.

본 연구는 피어리스의 신학을 중심으로21세기를 상징하는 문화와

부의풍요함 속에서‘가난’문제가 여전히아시아 신학의 출발점이 되어

야 하는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

한 작업이21세기 아시아의정치 경제상황 속에서 여전히 유효한 신학

적 응답이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피어리스의 가난에 대한 이해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하여 먼저 아시아와 한국의 빈곤 현황을 살펴보고,

1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도웅, 피어리스 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 의미 135

1) Aloysius Pieris, An Asian Theology of Liberation (New York: Orbis Books, 1990);

알로이스피어리스/성염옮김,『아시아의 해방신학』(왜관: 분도출판사, 1988)의 전체적

인 주제와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한글 번역서가 전체적으로 피어리스의 원서를 잘 옮

기고있지만90년판과 조금 다른부분이 있어 그러한 부분은 원서의 내용을 인용하고

영어로 각주를 달았다.

Page 6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적으로는1천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매년5세 이전에 죽고 있다. 3600

만 명의 성인과2백만 명의어린이들이HIV/AIDS에 감염되어 있고 말

라리아, 결핵을 비롯한 질병이 빈곤층의 생명을 위협하고 개도국의 발

전을 억제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10억 4천만 명이 안전한 식수를 이

용하지못하고있다….2)

통계에 의하면 아시아 지역 인구의60%에 달하는 사람들이 하루2

달러 미만의 소득으로 극빈한 삶을 꾸려가고 있다. 또한 세계 최고속도

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인도의 경우 극빈 인구수는 오히려 증가

하고 있다는 통계도 볼 수 있다. 인도의 빈곤 보고계획에 관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10억이 넘는 사람들이 빈곤에 시달리는데 이들의 삼분의

이가아시아에살고있다.3)

2009년 10월 26일열린“아시아의 빈곤과 한국교회의 과제”(Poverty

in Asia and the Task of Korean Christianity)에서 발표한 벨린다 하반

(Belinda Haban)의 발제 역시아시아의 빈곤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시빈민 문제활동가로 필리핀에서 활동하고있는하반은 세계적인빈

곤 현황과 함께 필리핀의 빈곤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4) 800

만 명이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인구의3분의1 이상이 하루에1달러 미

만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인구의40%가 평균 255달러의 일 년 생활비

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5백만 명의 어린이가 취학하지 못하고 있

고, 매일93명의신생아가적절한 처치를받지못하고 숨지고 있다는 것

이다. 이는 필리핀만의 특별한 상황이 아니다. 태국에는 전체 인구의

필자가 이러한 질문을 했던 이유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가난의 문제

가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가난이 중요한 신학적

주제인 것은분명하지만새로운 세기에 그보다 더 긴급한 주제들-예를

들어환경과 생명, 성적평등등-로 신학적 관심과 수고를 기울여야하

지 않겠는가 하는 물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리아라자 박사의 지적

대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서 가난은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이

고, 때문에 아시아의 교회와 신학은 이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이 문제에서 아시아의 고유한 신학과 교회적 실천의 방향

성이 세워져야 할 것이라고 보인다. 여전히 미국을 포함한 제1세계의

경제 위기가 곧바로 제3세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추구하는 경제발전이 그 속도에 맞는 경제

정의와 함께나아가고있기않기때문이다.

2. 아시아의빈곤현실

아직도‘가난’이 아시아에서 중요한 신학적 주제라고 할 때 그 이유

와 현상에 대한 관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해마다10월 17일은

유엔이 정한“세계 빈곤퇴치의 날”이다. 이 날을맞아183개 사회단체들

이 연합으로 발표한 성명서에서 전하고 있는 세계의 빈곤 현상은 아직

도 참담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기에 해당하는 아시아 국가들도

상당하리라생각한다.

오늘날 전 세계 인구60억 중에10억 인은하루에 1달러 미만의 절대적

빈곤에시달리고있으며 해마다8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빈곤으로죽

어가고 있다. 1억 4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

고 여성들은 태어날 때부터 성적 불평등이라는 불이익을 받고 있다. 매

년 임신 출산 과정에서50만 명 이상의 여성이 그리고3백여 만 명의

아동이 사망하고 있다. 개도국에서는 열 명 중 한 명이 그리고 전 세계

1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도웅, 피어리스 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 의미 137

2) 2007년도세계빈곤퇴치의날을맞아183개 단체들이연합으로 발표한 성명서. 1993년

유엔총회에서 결정된 세계빈곤퇴치의 날은 각국 정부와 비정부기구들이 빈곤을 철폐

하기 위한 행동을 강화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2000년 유엔총회는2015년까지

의 밀레니엄개발목표(MDG)를 정해절대빈곤과 기아를없애자는결의를 하였다.

3)“아시아; 그리스도교언론인 아시아빈곤문제심각성 제기”, 아시아가톨릭 뉴스, 2008.

5. 28 기사.

4) Belinda D. Haban, “Poverty in the eyes of the Philippine Urban Poor,” 「아시아의 빈

곤과한국교회의과제」강연회자료집, 6-8.

Page 7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분석에 따르면, 거주주택을 포함한 자산총액의 경우 상위 10%가 전체

의 53.3%를 차지하고 있다(이하2007년 기준). 거주주택을 제외하면 상

위 10%가 전체 자산총액의74.8%를 차지하는 자산 소유의 심각한 불

평등을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1970년대 한국의 빈곤층 연구에서는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여

파로인한이농현상과도시빈민층의 확대와 이들의 주변화 등이중요한

대상이었다. 이들은21세기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의 빈곤층으로 자리하

고 있다. 2005년 한국빈곤사회연대에서개최한 포럼에서정책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빈곤층은700만 명에달하는 것으로 추산

되고 있다. 이 발표에는 정부의 통계가 소개되고 있는데, 보건복지부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최저생계비 이하의 절대빈곤층을 포함하여 최

저생계비의120% 미만 소득을 올리는 차상위계층이716만 명에달한다

는 것이다. 이러한 빈곤층 규모는 전체 인구의15%에 해당하는 수치이

며, 2005년까지 정부가 통상적으로추산한460만 명보다250만 명이많

은 수치이다. 이는 한국 인구를4,905만 명으로 볼 때 7명 중 1명이 빈

곤층에 해당한다는결론이다.7)

이들과 함께 새롭게 빈민층에 편입하는사람들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전반에 걸쳐있는비정규직 노동자들과외국인 노동자들이 그들이

다. 현재 정부에서 파악하고 있는 합법적인 신분의 외국인 노동자는

2008년 1월 기준531,133명이다.8) 그러나 불법체류 노동자들을 포함하

면 이보다 훨씬많을것이고, 이들의 임금수준과경제적 지위는 매우열

악하다고 볼 수 있다.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2009년 3월 현재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현황은 남자402만 명, 여자439만 명이다.9) 이들 역시

21.4%인 1,410만 명이 빈곤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인도네

시아에서도 45.2%의 인구, 즉 1억 명 이상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고, 베

트남32.9%, 캄보디아50.5%, 그리고 라오스62.3%의 인구가 빈곤상태

라는보고를 볼 수 있다.5)

이것이 오늘날 아시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난의 현실이고 이 현실

은 우리 시대아시아 신학이 기초로 삼고출발해야 하는아시아의 실재

가 되는것이다.

3. 한국의빈곤현실

그렇다면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아마 대다수 한국인들은 아시아의

빈곤층에 자기가 소속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지난40여 년간

이룩한 한국 경제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한국이 절대적 빈곤층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에 따른 부작용들도 만

만치 않아 보인다. 1960-70년대 개발독재 시절 권력의 후원을 업은 재

벌들의 출현은 열악한 경제를단기간에 끌어올리는데일정한 역할을 했

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전히 빈곤의 악순환 속에 내몰

린 도시노동자들과 농민들, 소규모 상인들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다. 경

제 지표와 소득 총액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성장의 수혜에서 늘 소외되

어온 빈곤계층은21세기들어서도여전히 열악한 통계지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부의기형적인 소유이다. 상위10%의 부자가 우리

나라 전체 자산총액(거주 주택제외)의 74.8%를 차지고 있다는 지극히

불건전한 경제구조가 한국사회에 존재하고 있다.6) 이러한 자산 양극화

는 자연스럽게 소득 양극화를 초래하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이 의원의

1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도웅, 피어리스 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 의미 139

5) 박번순, “동아시아의빈곤문제와시민사회의연대,”참여연대, 아시아포럼자료.

6)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 21일 한국노동연구원의‘노동 패널’(2000년-2007년, 통상

표본 5,000가구) 조사에 대한분석결과.

7) 빈곤사회연대 정책위원회,“한국의 빈곤현황과 쟁점들”, 이 조사는 보건복지부가 한국

보건사회연구원에 의뢰해 통계청 조사에서 빠진1인 가구, 농어촌가구, 자영업자 등을

포함해 3만 가구를 표본조사한 결과이다.

8) 출입국 외국인정책본부자료.

9) 조계완, “남성은일하고 여성은애쓴다?”한겨레21, 781호, 2009. 10. 19자, 28.

Page 7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시편의가난한 이들은 거의절망적인사회상황앞에서 시선을 하나님께

돌려 애원의 기도를 바친다. 그들은“하나님께서가엾은 몸 한을 풀어주

시고 없는 이들 편들어주심을 알기 때문”(시편 140:13)이다. …야훼는

이스라엘의 해방자로“잔인무도한 착취자들의 손에서”빈자들을 구출한

다(시편71:4). 가난한 이를 감옥에서 해방하는 그분은“복수의 하나님”

이다(시편142:8; 68:7 참조).11)

구약의 하나님을 가난한 자들의 해방자로 이해할 때에 구약성서를

가난한 자들을 위한권리와 외침과 기쁨으로읽을수 있다. 서인석은율

법서를 읽으면서하나님께서주시는 해방과 자유를 가난한 사람들이누

리는 권리라고 보았다. 이 해방의 기초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다. 그

는 하나님의자비가 가난한 자들을 해방하는동력이라고보았다.

자비로운 하느님은 압박받는 자의 호소를 들어주고 그에게 겉옷을 돌려

줄 것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체험으로 하느님이 구체적으로 압박받

는 자를구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빈자는 인간적으로

불쌍한 자가아니다. 하느님 자비의‘특권층’은 빈자들이기때문이다.12)

더 나아가 그는 출애굽기22장에 나오는 과부와 고아에 대한 학대

금지 조항을 언급하면서 약자와 빈자에 대한 학대는 곧 야훼 하나님을

학대하는 것과같다고 보았으며 이것은 이스라엘이출애굽 사건을 통해

얻은교훈이며확신이라고보았다.13)

율법이 가난한 자들을 해방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이었다면 예

언서는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을 대변할 사람들(예언자

들)을 통해 주시는 경고와 위로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사야는 가

난한이들을 억압하고착취하는 약탈자들에게하나님의심판이 있을것

고용 불안정성과낮은 임금으로 인하여 가난을 체험하고있는계층이라

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은 아시아에서 절대적 빈곤을 벗어난 몇 나라에 속한다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난은 절대적인 동시에 또한 상대적이다. 오히

려 상대적인 소외와 박탈감이 더욱 큰 고통을 가져올 것이다. 때문에

가난은 경제적인 주제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적인 주제로 다루어야 하

며, 때문에 한국교회와 신학이 여전히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야 할 내용

이다.

I I I. 성서의관점

1. 구약성서의가난이해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체성을 발견해가는 과

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전해주고 있다. 구약성서는 가난과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서인석의『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이러한 구약의 정신을 분명하

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서인석 신부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세 부

분으로 분류하면서 이를 가난한 이들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는 율법서

를“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로 보았고, 예언서를“가난한 사람들의 외침”

으로 들었으며, 성문서를“가난한 사람들의 기쁨”으로 읽고 있다.10) 이러

한 해석을 통하여 구약성서의 전체적인 주제를“하나님의 외침과 가난

한 자들의 해방”이라고 본다.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해방자의 모습

으로 다가오신다. 서 신부는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그들을 도

우며해방하는하나님의모습을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1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도웅, 피어리스 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 의미 141

10) 서인석, 『성서의 가난한사람들』(왜관: 분도출판사, 1979), 59.

11) 앞의책, 191, 194.

12) 앞의책, 69-70.

13) 앞의책, 73.

Page 7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

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2:5)라며 부자들을

공박하고있다.

서남동 역시 신약성서가 어떻게 가난을 이해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

고 있다.16) 그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가난이라는 말이 희랍어로‘절대적

가난’을 뜻하는‘ptochos’와‘상대적 가난’을 뜻하는 ‘penes’ 두 가지로

사용되고 있음을 먼저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절대적 가난을 뜻하는

ptochos가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주체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킬 때 더 많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17) 그는 신약성서에서

ptochos를 사용할 때는 가난한 자의 사회적, 경제적 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마태복음5장 3절에 등장하는“마음이 가난한 자”역시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였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

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와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생각할 때 대단히

충격적인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의 공생애 활동, 즉 예수운동을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운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남동은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이 된 예

수운동에 두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첫 단계는 팔레스타인을 무대로 극

빈자들과 함께 한 사역이고, 두 번째 단계는 바울 서신이 등장하는‘A.

D. 50년 이후 교회의 설립과정이다. 복음서의 무대가 되는 첫 단계에서

p t o c h o s’가 쓰였다면 두 번째 단계에 등장하는 복음의 담지자는

‘penes’, 곧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들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차이는 있

지만 결론적으로 예수운동의 참여자들과 계승자들은 부자가 아닌 가난

한 이들이었다. 이것은 예수운동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며 그들에게

이어진운동이었다는것을보여준다.18)

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고(사 10:1-3), 미가는 분배정의를 행하지

않고악행을 행하는 이들의 죄악을 고발하고있다(미 3:1-3).

이러한 해석을 통하여 우리는 구약성서가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보

는지알 수 있다. 구약성서가전하는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고통에 관

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며 그들에게 해방을 약속하며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에게심판이 있음을 경고하는정의의 하나님이다.

2. 신약성서의가난이해

이제 신약성서에 나타난 가난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신약

성서의 가난이해는 민중신학자들의연구에서찾아볼 수 있다.

신약학자 안병무는예수를 따랐던 무리를 지칭하는 희랍어 단어오클

로스(ochlos)에 주목하면서 마가복음 저자의 의도에 관심을 보이고 있

다. 마가복음은 칠십인역에서 무려 2천 회나 사용된 라오스(laos) 대신

오클로스를36회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마가의 의도적인 선택

이라는 것이다.14) 안병무는 오클로스를 당시 사회에서 소외되고 외면당

하던 죄인들, 세리들, 병자들로 정의한다. 이들은 모두 죄와 관련되어 당

시 유대인들에게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었다. 마가가 이들을 예수를 따른

무리로 전하는 것은 예수운동의 성격과 관련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가 이들을 받아들이고 옹호하는 데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는 것

과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했다는 것이다.15) 이는 구약성서를 가

난한자들을위한하나님의 자비로운약속으로보는관점과 일치한다.

예수운동의 담지자들이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자의식이 나타난 성경

본문을 통해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가난에 대한이해를 엿볼수 있다. 누

가복음에서 예수는“너희가난한 자는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

희 것임이요”(6:20)라고 선언하고, 야고보는“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1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도웅, 피어리스 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 의미 143

14) 안병무, “예수와 오클로스,”『민중과한국신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1), 87.

15) 앞의책, 91.

1 6 ) 참조. 서남동, “빈곤의 사회학과 빈곤의 신학,”『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

1983.

17) 앞의책, 398-399.

18) 앞의책, 400.

Page 7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로 제시하고 정착시켰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 구띠에레즈

(Gustavo Gutierrez)는 가난이 다의적(多義的)인 용어라고 본다.19) 가난

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가난이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모호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구띠에레즈는 두 가지로 가난을 구분하는데

“물질적 가난”과“정신적 가난”이다. 먼저“물질적 빈곤”은“인간생활을

영위하기에 필요한 경제적 재화의 결핍”을 가리킨다.20) 그는 물질적 빈

곤이단순하게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는것이아니라 집단적이고 구조적

으로 발생하고, 또한 물질적 문화적 빈곤과 집단적 투쟁적 빈곤과 연관

된다고 보았다. 물질적 가난과 구별되는“정신적 가난”(spiritual pover-

ty) 역시 구띠에레즈에 따르면 모호한 개념이다. 정신적 가난은 세상의

재물에 대해 초연한 자세로 이해할 수 있는데, 물질적 재화를 못 가진

사람뿐 아니라 물질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거기에 애착을 갖지 않는 사

람이라면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이해한

다. 구띠에레즈는 이러한 개념이 오히려 예수의 복음을 모호하게 만들

고 혼란시켰다고 본다. 정신적 가난이라는 개념은 말장난에 불과하며

사람들을우롱하는것이라고반박한다.

복음서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속된 전하며 두 가지 표현을 모두

등장하고 있다. 마태는 정신적 가난을 의미하는“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 누가는 문자 그대로“가난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쓰고있다. 해방신학은 이 두 가지다른표현을 해석하는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구띠에레즈는 마태의 표현은 그대로 인정하면서 누가의

표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

라의 소유자라는 복을주는 것은“현세의 가난한 현실을 인내하면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가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읽을 때에“가난한 사람들을 인간답지 못하게 가로막는 착취와

이러한 연구는 신약성서가 가난과 가난한 이들을 보는 관점을 잘 보

여주고 있다. 가난한 자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부르고 품고 함께 해갔던

예수운동의 성격과 전개과정을 볼 때 신약성서의 관점 역시 구약의 관

점과크게다르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의미에서복음서에나

타난예수의첫 번째설교가 이사야61장 1-2절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

는 바가크다.

주님의영이 내게내리셨다.

주께서내게 기름을부으셔서,

가난한사람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게하셨다.

주께서나를 보내셔서,

포로된사람들에게자유를,

눈먼사람들에게다시보게함을 선포하고,

억눌린사람들을풀어주고,

주의은혜의 해를선포하게하셨다(누가복음4:6-9, 표준새번역).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 속에서 가난과 병은 죄와 관련된 결과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예수운동과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말을 통해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소유자들이며 예수를 통해 약속한 복의

담지자들이라는 것을 밝혔으니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명적인 관점

으로의 전환이라볼 수 있다.

IV. 제3세계의신학적응답

1. 해방신학의가난이해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의 가장 큰 공로는 가난을 신학의 중심 주

1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도웅, 피어리스 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 의미 145

19) 구스타보 구띠에레즈/성염옮김, 『해방신학』(왜관: 분도출판사, 1977), 363.

20) 앞의책, 364.

Page 7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신학은 가난을 없애는 모든 기술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

러나 우리는 신학을 통해서 절대로 가난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우리가 어떻게 가난의 문제를 다루는지에 따라 우리와 하

나님의 관계가 설정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에 적극적으

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정치가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모든 기독교

인들이정의와평등의 문제에관심을 가져야합니다.26)

가난을 보는 관점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설정된다는 대목에서

더욱깊어진 해방신학의가난에 대한영적인 성숙을 느낄수 있다.

2. 민중신학의가난이해

민중신학은 민중을 신학적 주체로서 뿐 아니라 역사적 주체로 인정

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발견에서 출발했다. 역사적으로 억압받

고 눌려왔던 한국 민중들을 역사의 주체요 하나님의 약속과 선택의 담

지자라는 고백을 하면서 발전해왔다. 더 나아가 성서를 민중의 눈으로

읽었고, 예수를 민중과 동일화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3세대에 이르는

동안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지만 민중이 역사의 주체이며 하나님 나

라의 주인공이라는 신념과 고백은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민중신학의

출발과 중심이 되는 민중이 누구인가? 안병무는 민중을 개념화하는 것

을 거부하고 있다. 민중을 설명하면개념이 되고, 개념이 성립하면 실체

와 유리된다는 것이 안병무의 주장27)은 타당하다. 민중이 누구인지 설

명하고 정의하는 순간 범주화가 이루어지고 민중의 실체는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빈곤의 제거 작업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21) 가난한 사

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누가4:7-8)가 이

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나라를 소유하고만들어갈것이라고 선언

하는것이다.22)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은 가난은 물질적 혹은 실제적 가난이며, 이

는“인간 존재들에게 책임있는 자유행사에 의해 형성되는 경제적, 사회

적, 정치적 상황들과 구조의결과”라고본다.23) 때문에신앙적, 신학적 관

점에서 가난은“악의 표징을 드러내주는 상태, 견뎌주어서는 안 되는상

태, 싸워서 타파해야 할 악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배치되는한에서 사회적 범죄로 간주되어야한다”24)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에 따라 그리스도교인들과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

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교회적

선택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1)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 속에

동화하고, 2) 가난한 사람들 자신의 문제를 의식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

로 자기 문제로 삼고, 3) 가난한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 한다.25) 이러한

관점에서해방신학자들의전투적 실천이 이해될 수 있을것이다.

가난에 대한 해방신학의 관심은 여전히 강력하고 더 깊어지고 있다.

구띠에레즈는2003년 미국인문학회의정식회원으로추천된 후에가진

인터뷰에서 여전히 가난에 대한 신학적 관심이 중요하다고 진술하고

있다.

1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도웅, 피어리스 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 의미 147

21) 앞의책, 376.

22) 해방신학이 주장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우선적 선택에 대해서는 홀리

오 로이스/김수복 옮김,『해방신학의 구조와 논리』(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8)를 참

조하라. 이 책에서 로이스는 가난의 개념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해방신학적 정의를

깊이있게보여주고있다.

23) 로이스, 『해방신학의구조와논리』(1988), 340.

24) 앞의책, 341.

25) 앞의책, 353.

26) Daniel Hartnett, “Remembering the Poor: An Interview with Gustavo Gutierrez,”

America 188/3 (February 2003), 김상근 옮김,“해방신학의시대는 가고 이제는 오순

절 시대인가?”에서 재인용, 김창락 박사 고희기념 논집 출판위원회 편,『다마스쿠스

길목에서의에대해묻다』(서울: 지성과실천사, 2006), 141-142.

27)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5), 27.

Page 7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와 같이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수혜자로 축복하고 또 하나님 나라

에 실질적으로 초대받은 사람들로 제시하는 민중 속에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있었음을알 수 있다. 민중신학 역시가난한 사람들에대한하

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초청을 제기하고있는것이다.

V. 피어리스신학에서가난의의미

지금까지 성서에 나타난 가난 이해와 해방신학, 민중신학에 있어서

가난을 보는 눈을 간략하게 살펴 보았다. 이러한 관점과 많은유사점이

있지만 한편으로아시아 신학의 고유한 관점을 주장하고발전시키고있

는 피어리스의 관점에서 가난이 오늘 아시아에서, 특별히 그리스도교

교회와 신학안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기로하자.

1. 피어리스신학의출발

알로이스 피어리스(Aloysius Pieris)는 1934년 스리랑카 암피티야에

서 태어난 예수회 사제이며 신학자이다. 인도 셈바가누르에서 철학석사

(1959),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신학석사(1966), 베니스 음악원에서 고대

음악으로 석사(1964)학위를 받았고, 1972년 스리랑카의 비디요다야 대

학교에서 그리스도인으로는 최초의 불교철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2년 이래 세계적인 학자로 활동하면서 특별히 아시아의 특

수한 상황에 기초한 아시아의 신학, 아시아의 교회를 주장하고 있다. 앞

서 진술한 바와 같이 그는 아시아의 실재(reality)로 가난과 종교심을

말하고 있다. 모든 신학이 자기의 시대와 공동체의 범주를 반영하고 있

는 것처럼 아시아 신학도 아시아의 역사와 그곳에 드러난 실재를 반영

할 때에진정한(authentic) 아시아 신학이 될 수 있는것이다.

피어리스는 아시아 교회를 말하면서“아시아있는 교회”(Churches in

그러나 민중을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민중을 설명

하는 것은 필요할 작업이다. 때문에 안병무는 성서에 나타난 민중을 설

명하기 위하여 예수가 축복했던 이들을 예로든다. 바로“가난하고, 굶주

리고, 슬피 우는 사람들”이다.28) 이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권력에 의

해 억눌린 사람들이다. 안병무는 예수 당시의 가난한 자, 약한 자, 병자

들이 당시의 민중이라고하면서 이들이 가난하고 병들고 억눌린 이유는

다양하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원인을 묻지 않고 영접하고 함께 살며 그

들의 편이 되었다고 본다.29) 가난이 민중이 되는 직접적인 조건이라고

볼 수는없지만 민중속에는 언제나 그 시대에 소외되고 억울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도 민중의 한 부분

이었음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민중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넓은 범주

이고그 속에가난한 사람들을포함한다고할 것이다.

서남동은 누가복음14장에 나오는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비유를

사용하여 민중을 설명한다.30) 어떤사람이 잔치를 열고사람들을 초대했

으나 모두못 간다고 하자하인을 시켜길에다니는 사람들을 데려온다

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주인은 종들에게 이렇게 말한다.“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지체에 장애가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저는사람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누가14:21) 여

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받는 사람들의 면면이 나타난다. 먼저 초

대받은 이들은 당시의 유대인들로 기득권자들이라 할 수 있다. 기득권

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으로 인해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때, 하

나님은 새로운 사람들을 초청하는데, 거리에서 쉽게 만날수 있는“가난

하고, 천대받고, 종살이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소유권

을 약속받은 민중이라고 할 때, 민중 속에는 언제나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포함되어있다.

1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도웅, 피어리스 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 의미 149

28) 안병무, 『역사와 해석』(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8), 208.

29) 앞의책, 210.

30)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1983), 231.

Page 7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학생이 물었다.“교수님은어디에서돈이나셨어요?”피어리스는학생에

게“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대답하였고, 대답하는 순간곧바로 자기의 대

답이 틀린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피어리스는 자기의 대답에 대해 학생

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제인 자기에게

돈을 주고그에게 주지않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과연정당한 것인가

계속물어야 했다. 이 두 가지경험과 물음을 통하여 피어리스는자신이

살고 있는 아시아의 상황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진술하

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만약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이시라면 가난한 사람

들에게 먼저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35) 이것이‘가난’

과‘종교심’이라는 아시아의 실재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피어리스 신학

의 출발점이되었다.

2. 해방의조건으로서가난

피어리스가 가난을 종교심과 함께 아시아의 실재(Reality)라는 분명

한 인식하게 된 동기는 앞에서 설명하였다. 그러한 경험에서 자신을 둘

러싼현실을 보기시작한 피어리스는 스리랑카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

에서 가난이 아주 일상적인 조건이며, 이러한 가난에 대해 말하지 않는

신학은 아시아 신학의 가장근본적인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보게된다. 진정한 아시아 신학이 되기위해서 먼저아시아의 실재와 만

나야 하는 것이다. 또한 가난은 아시아와 제3세계를 연결하는 가장 중

요한 고리이고, 가난이라는 공통의 실재적 상황에 응답하는 방식이 해

방이다. 먼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이 가난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

뤘고 교회와 신학자들의 실천으로 발전시켜갔다. 해방신학자들의 가난

에 대한 인식과 가난을 배출해내는 불의한 구조에 대한 저항은 해방의

관점으로 이루어지고 발전되었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이해하는 해방은

Asia)와“아시아의 교회”(Churches of Asia)를 구별하였다.31) 이는 그의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지형적인 의미에서 아시아에 있는

교회를 아시아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진정한 아시아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교회, 즉 아시아의 실재에서 출발하고 아시아

의 상황 속에서 아시아인들에게 들려질 수 있는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이 아시아의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회론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한

조건으로 아시아의 실재와 맞닿는 교회와신학을 강력하게제안하고있

다.32) 그는 가난을 아시아의 실재 중 하나로 제시하면서 이로부터 시작

할 것을주장한다.

피어리스는 가난에 대한 두 가지 경험에서 자신의 신학이 출발했다

고 밝히고 있다.33) 첫 번째 경험은 스리랑카 콜롬보의 빈민굴을 찾았을

때 받은 충격이었고, 두 번째는 자신의 학생에게 받은 질문에서였다. 피

어리스는1960년대 자신이 지도하던 대학생들과 함께 찾았던 콜롬보의

빈민굴에서 절대적 빈곤의 실상을 보았다. 거기에서 그는 가난이, 절대

적 빈곤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34) 두 번째 신학

적 충격은 한 가난한 학생과의 대화에서였다. 맑스주의에 심취했다가

나중에 정부군에서 살해당한 한 가난한 학생이 있었다. 겨우 차비와 책

값만을 쓸 수 있던이 학생은 하루에 차 한 잔이식사의 전부였다. 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늦게까지 학교에 있다가 돌아가면서 가족들을

위해 빵을 하나 사가곤 했다. 도시의 빵 값이 자기 동네보다 싸기 때문

이었다. 어느 날 피어리스는 이 학생에게 점심을 사겠다고 제의하자 그

1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도웅, 피어리스 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의미 151

31) 피어리스, 『아시아의해방신학』(1988), 71-72.

32) 앞의 책, 89-98. 여기에서 피어리스는 아시아 교회들이 아시아의 가난과 종교심에서

깊이 관련하여 출발해야 한다는 표현으로 아시아의 종교심과 아시아의 가난에 세례

를 받아야 한다고말하고있는데, 이는뒤에서 다시두 개의세례에서설명할것이다.

33) Aloysius Pieris, “Two Encounters in My Theological Journey,” Frontiers in Asian

Chrstian Theology (New York: Orbis Books, 1994), 141-146.

34) Ibid., 144. 35) Ibid., 146.

Page 7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를 더 정확하게 밝히면 사회-정치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는이러한 내용을 다음과같은도표로 정리하였다.38)

극 차원 심리적 (개인적) 차원 사회학적 (정치적) 차원

예속하는 미신, 의식주의, 교조주 종교가 억압적기존체계를 정당화

종교심 의, 초월주의, (마니케 하려는경향 = 종교가맘몬또는 반신

이즘,단성론등) (反神)을 섬기려는경향, 상업주의

죄(=맘몬, 반신, tanha, 근본적 사회개혁(예를들어 아시아에

해방하는 착취하려는본능들)로 서 일어난 독립운동)에 대해종교가

종교심 부터의 내적해방 지니고 있는동기유발및 조직상의

잠재력

강요된 가난은인격체의 맘몬의 노예들에의해서 민족들이

예속하는 존엄성을훼손한다(소외) 예속되는것이곧 가난(=가난식민

가난 지화 및 다국적기업체들을통해서

자행되는상속권박탈, 소유권 박탈

등)

맘몬으로부터내면적해 인간사회를 맘몬또는“조직화된죄”

해방하는 방 (동양종교들이강조하 로부터해방시키는정치자발적전략

가난 는) 정신적 해독제로서의 으로서의자발적가난

적 가난

표에서 피어리스가제시하고있는것처럼, 가난의 두 차원, 즉 예속하

는 가난과 해방하는 가난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 피어리스가 가난을 어

떻게이해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가난은 바로다

음에서 살펴볼“강요된 가난”과“자발적 가난”으로 나타난다. 피어리스

는 가난의 예속적 성격과 해방적 성격을 구분함으로서 각각에 대한 신

학적, 실천적 응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가난이 아시

아 상황에서 억압적 기제로 작용하고 있는지 해방적 기제로 작용하고

정치 경제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영성의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

이며 방향이다. 여기에는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공헌이 지대하다.

많은 제3세계 신학자들이 해방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크리스토퍼 로랜드(Christopher Rowland)는 해방신학의 그러한 공로를

인정하며,“지난 30년간 일어난 신학계에서 일어난 사건 중 가장 중대

한 신학운동의하나”라고평가하였다.36)

피어리스 역시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피어리스는

가난과 함께아시아의 종교심을해방에 관련시키고 있다. 그의 주저『아

시아의 해방신학』의 1, 2부는“가난과 해방”,“종교와 해방”이라는 제목

으로 이루어져 있다. 피어리스는 아시아 신학은 제3세계와 아시아라는

두 범주를 모두오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난이라는 매개와 함께아

시아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실재인 아시아의 다양한 종교심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실재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긴밀

한 관계이고진정한 아시아 신학을 하려는 신학자들이 반드시 다루어야

할 내용이라는것이피어리스의일관된 입장이다.37)

그러나 가난을 아시아의 실재로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정리

되는것은아니다. 오히려 가난에 대한보다세밀한 관찰과 이해가 필요

하다고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회의 역사와 신학들이가난에 대한관점

을 갖고 있는데, 크게 분류하면 때로는 가난을 저주하거나 죄와 게으름

에 대한 결과로 보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의 축복으로 보기도 하였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들이 어떤 면에서는 상호충돌하기도 하

기 때문이다. 피어리스는이 부분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깊은연구를 보

여주고 있다. 이러한 전승들과 해석들이 종교와 가난을 아울러 각각 부

정적역할과 적극적 역할이 있다는 것을밝히고 있다. 그는이 역할들은

상호보완적 차원과 사회학적 차원, 심리학적 차원을 있다고 보면서, 이

1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도웅, 피어리스 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 의미 153

38) 피어리스, 『아시아의해방신학』(1988), 74-76.

3 6 ) Christopher Rowland,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Liberation Theology

(London: Cambridge Press, 1999), xiii.

37) Pieris, An Asian Theology of Liberation (1990), 69.

Page 7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을 어리석은 부자로 만드는 소유욕이라는 것이다. 맘몬은 인간이 부리

고 동시에 인간을 부리는 존재이다.41) 예수 자신도 특별한 지도자로 세

워주겠다는 맘몬의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 시험을 통과한다. 당시의 많

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와 대립적인 자리에 서게된 이유가 바로이

러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그 시험을 통과하면서 이스라엘에 필

요한 지도자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맘몬과 타협하는 인물이 아니라

야훼의 고난받는종이라는것을전하는 것이다.42)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

서 이르시되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

을 받는것이니라(누가16:14-15).

맘몬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은 해방의 씨앗이 되는 자발적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결단은 예수가 보여준

것처럼 맘몬의 유혹을 거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투쟁에나서겠다

는 결단이다. 피어리스는 이 대목에서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

고 싸운 것만이 아니라 그 자신 가난해지셨다고 주장한다. 이제 예수를

따르는 개인과 교회모두예수께서가난하셨던 것처럼 가난해지려는새

로운 동기와 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43) 이것이 해방의 씨앗

이 되는자발적인가난의 길이다.

이제피어리스가 말하는 강요된 가난의 원인과 극복방안을 보자. 강

요된 가난은 한 사회 속에서 누군가 다른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부를

독점하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 피어리스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연관성을 설명하고 있다(누가 16:19-

25). 나사로가 죽을 정도로 굶주렸다면 그것은 부자의 소유욕 때문이었

있는지 이러한 성격에대한이해에 따라달라질 것이다.

3. 두 가지가난

피어리스도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과 마찬가지로 물질적 가난, 곧

강요된 가난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향

한 억압과 폭력이기 때문이다. 다만 남미 해방신학이 가난을 과학적인

개념으로 세분하고 있는데 반해피어리스는 단순하게 두 종류로 분류한

다. 단순한 분류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구별(dis-

cernment)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자발적 가난(Voluntary poverty)”과

“강요된 가난”(forced poverty)이다. 피어리스는 전자를 가리켜 해방의

씨앗이며 후자는 죄악의 열매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39) 그는자발적

가난의 보편적 실천으로 통하여 강요된 가난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보았다. 즉, 강요된 가난, 불의한 구조에서 결과된 물

질적 가난을 제거할 수 있는 힘은 예수운동에서 나타난 것처럼 예수님

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서는 것이다. 피어리스는 예수운동의 가

장 큰 장애물과대적은 예수당시나 오늘이나맘몬이라고보고있다. 그

는 예수의 복음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이신 압바와 맘몬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이라고 보았다.40) 그 때문에 예수의 지상에서의 선교 사명

의 전체적인특징을 하나님과의 부단한 친밀해지며맘몬을 부단히 배격

하는 삶이라고 보았다.“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며”(마태6:24),

“제자가 되려면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태 19:21)는

예수의 명령을 통해 이 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아시아 교회

가 가져야 할 관점을 보여주고있다.

피어리스는 성서를 통해 맘몬이 돈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발견하고 있다. 맘몬은 우리 내부에서 움직이는 교활한 세력이요, 사람

1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도웅, 피어리스 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 의미 155

41) 앞의책, 38.

42) 앞의책, 39.

43) 앞의책, 41.

39) 앞의책, 46.

40) 앞의책, 37.

Page 7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자기를 내어준 희생의 세례라는 것이다.47) 이 두

번째 세례는 세례 요한보다 더욱 치열하게 가난하게 살아간 예수의 생

애를 가장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경건한 가난뱅

이”들과의 수동적 연대를 넘어 하나님의 대적자인 맘몬과 대항하는 강

력한방식으로골고다의길을가신것이다.

피어리스는 예수의 성전정화 사건을 보면서 예수의 분노의 가장 큰

동기로 돈이 종교를 부패시키는 것으로 보는데(요한 2:13-17), 이것이

예수의 예언자적 사명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예언자적 사명은“가난한

사람들의 사명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는 사명이고, 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사명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명”48)이라고 보았다. 즉 예수의

예언자적 사명이 완성된 곳이 십자가이고, 이것을 예수의 두 번째 세례

로 보았다.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두 번째 세례는 이방인까지도 하나

님의 아들로 인정한(마가 15:39) 사건이었다. 이로서 십자가는 예수가

자기의 복음을 설교하기 위해 지불한 대가였을 뿐 아니라 그의 제자가

되려는 모든이들이 반드시 치러야 할 조건이되었다.

피어리스는 갈릴리와 골고다의 사건을 예수가 받은두 번의 세례, 곧

이중 세례라고 해석하면서 이를 아시아의 실재와 연결한다. 즉, 아시아

의 교회와 신학도 아시아 종교심의요단강과아시아 가난의 갈보리에서

두 번 세례를 받을 때에진정한 아시아의 교회(Churches of Asia)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V I. 결론: 가난이문제가아니라면?

지금까지 피어리스의 가난 이해를 살펴 보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을 것이다. 그 부자 개인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 소수가 많은

재화를 소유하고 그것을 나누기를 거부함으로 나타나는 결과인 것이다.

때문에 피어리스는 형제자매에게 강요된 가난은 죄악이라고 보고 있

다.44) 피어리스의설명을 들어보자.

이렇게 어떤 형제나 자매에게 강요된 가난은 하나의 죄악이다. 그 가난

을 벗겨주는일이예수께서부자들 문 앞에지워주신짐이다. 다시말해

서, 풍요한 사람들은 가난해지라고, 가난해져서 주변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만들라고 부름 받는다. 따라서 부는 그것이 축적될 때에 죄악이다.

대다수가 주리는 마당에 소수가 다 먹어치운다면빵도“주님의몸과 피

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고전11:21-27). …만약 누가 가난하

다면 다른 누가 더 차지했거나 물려받았기 때문이며, 더 가진 이 몫은

가난한사람들에게주어지기전까지는도둑질한물건으로남는다.45)

피어리스는 가난을 자발적인 것과강요된 것으로 보았다. 두 가지모

두 아시아의실재임이 틀림없지만그리스도 교회가 선택해야할 가난은

분명해 보인다. 해방의 씨앗으로서의 자발적 가난은 통해 예수운동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특별히 가난한 아시아에 확장해야하

는 사명을일깨워주고있다고 할 것이다.

4. 예수의이중세례

피어리스는 아시아의 가난은 두 가지로 설명하면서 또 다른 중요한

신학적 제안을 밝히고 있다. 바로 아시아의 가난의 갈보리에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세례를 두 단계로 보았다. 첫 번째

세례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받은 예언자로서예수의 정체성을밝

혀준 종교심의 세례였다면,46) 두 번째세례는 골고다 십자가상에서받은

1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도웅, 피어리스 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 의미 157

44) 앞의책, 46.

45) 앞의책, 46-47.

46) 앞의 책, 89.

47) 앞의책, 94.

48) 앞의책, 95.

Page 8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찾는 추구(God-search)와 인간을 위한 관심

(human concern)이 합쳐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아시아인으로 그리

스도를 따르는 구체적인삶의모습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시아

의 가난한 신앙인들과 경건한 가난을 말하면서 그의 신학이 건강성을

잃지않는이유라 할 것이다.

이러한 피어리스의 신학은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큰 숙제를 남겨준

다. 물질적 풍요와 성장을 향해 끝없이 경쟁하며 달려가는 한국교회와

신학이 얼마나 가난에 대해 관심하며 또한 예수를 따라가는“자발적 가

난”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을 지울 수 없다.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면무엇이 문제겠는가? 한국사회와한국의 대형교회들에서 가난

이 문제가 되지않을수도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남아있다. 분배의

문제이고 경제정의의 문제가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교회를 향한

구띠에레즈의고백이 더욱큰 울림으로다가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특징은 한 마디로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너무 현격하다는 것입니다. 양심적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저는 옛날에

이런 실정인지 정말 몰랐습니다’라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

난의이유에 대해서잘 알고있고, 그것이 지속되는 이유에대해서도잘

알고있습니다. 가난의문제가 아예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치부될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난이 단순한 운명의 장난이 아님을 잘 알

고 있습니다. 가난은 결국정의롭지않음을 의미합니다.51)

주제어

피어리스, 아시아, 가난, 종교심, 민중신학

(Pieris, Asia, poverty, religiousness, Minjung theology)

성서의 입장과 남미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입장을 함께 살펴 보았다.

아시아의 일원으로 한국교회와 신학이 아시아의 현실과 거기에서 출발

하는 신학함에 동참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갖고 있다고 할 때 피어리

스의 신학은 우리에게 여전히 신학적으로 유의미한 관점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인다. 짧은 연구를 통해 얻은 몇 가지 결론들을 나누는 것으

로 피어리스 신학이21세기 한국교회와 신학에 주는 의미들을 정리하

고자한다.

첫째로, 피어리스는 아시아의 실재(reality)를 제시함으로 아시아 신

학과 교회가 기준으로 삼고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었다. 그가 제시한“가

난”(poverty)과“종교심”(religiousness)은 여전히 아시아를 다른 지역과

구별하는 고유한 기준으로 유효하다. 이 기준에서 아시아 교회가 더 이

상“아시아에 있는 교회”가 아닌“아시아의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하면

아시아의신학도 마찬가지일것이다.

두 번째로, 피어리스는 가난의 실제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을 구분

하고 교회의 영적인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자발적 가난을 통하여 강

요된 가난에 대한극복이 가능하며 이 과정을 통해 예수를 따르는 진정

한 영성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피어리스는“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의 가난이 우리를 충동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기울이는하나님

의 관심을 곧 우리의 사명으로 삼는 정도에 달려 있다”49)고 알려주고

있다. 가난의 문제는 그 자체로 완결적인 것이아니라 가난에 대한하나

님의 관심에 참여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것이다.

세 번째로, 피어리스는 가난에 대한 아시아 교회와 신학의 궁극적인

지향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는“참다운 영성은

자기초월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자기부정을 통해 자기완성으로 나아가

는데 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하다”50)고 하면서 그리스도인

1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도웅, 피어리스 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 의미 159

49) 앞의책, 52.

50) 앞의책, 27. 51) 구띠에레즈, 『해방신학』(1977),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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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logical Meaning of ‘Poverty’ in Pieris’ Theology

Park, Do Woong

Lecturer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Seoul, Korea

Aloysius Pieris has been well known as a representative theologian

of Asian Liberation Theology. He has eagerly tried to build an

“authentic Asian theology” based on the Asian realities and context as

he has showed in his representative work, “An Asian Theology of

L i b e r a t i o n.” He is also the founder and director of Tulana Research

Center in Kalaniya, Sri Lanka for doing Asian theology. He points out

that Asian people and churches are in the context of people with a

long time history of authentic religiousness and crushing poverty. In

that sense, Pieris insists strongly that theological reflection in Asia

must take poverty and religiousness together as its starting point.

접 수 일 2009년 11월 02일

심사(수정일) 2009년 12월 07일

게재확정일 2009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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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도웅, 피어리스 신학에서‘가난’이 갖는신학적 의미 161

Page 8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교회, 문제가무엇인가?한국교회에대한조직신학적반성과대안

이오갑(그리스도대학교교수)

I. 들어가는말

한국의 개신교회는 위기를 맞고 있다. 사회에서는 개신교에 대한 비

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고, 교회 내부에서도 자책과

자성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환자에 비유하자면, 한국교회는 중병에

걸린상태라고할 수 있다. 그 증세는 매우다양하게 나타나고있다.

가장피부에 와 닿는 것이, 사회에서나 온라인상에서흔히 접하는 극

단적인 반(反)개신교 풍조의 성행이다. 개신교에 관계된 기사만 나오면,

꼭 부정적인 내용이 아니더라도, 댓글에서“기독교”가 아닌“X독교”라고

부르며 지극히 감정적이고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진다. 뿐만 아니라 안

티 기독교 운동이 집단화되고 조직화되어서, 기독교에 반대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기독교를‘박멸’하겠다고 나선 지 오래이다. 안티 기독교

운동을 일방적이고 감정적인 비난으로 치부해서 무시할 수도 있지만,

왜 그런운동들이성행하는지를 생각하는 자기성찰과 반성의계기로 삼

을 필요가 있다.

In this essay, especially, I focused on Pieris’ theological view about

“poverty” for our understanding of poverty in Korean context as well

as that of Asia today. To clarify Pieris’ theology, I briefly researched

the biblical view of poverty and view of Latin America Liberation

Theology and Minjung Theology about the same topic. In the Bible,

the poor has been consistently considered God’s beloved people and

sons and daughters both in the Old and New Testaments. Especially,

in the New Testament, Jesus promised them a blessing of having the

kingdom of heaven. While Matthew expressed the “poor in spirit”(Mt

5:3), Luke “the poor”(Lk 6:20). Then, I reviewed Latin America

Liberation Theology and Minjung Theology in terms of poverty. Both

started from the poor and oppressed people’s context in Latin America

and Korea. Therefore, both are deeply interested in people or

M i n j u n g’s socio-political and economic context and their liberation.

In both theologies, the poor has been considered the subject of

struggle for liberation (Latin America Liberation Theology) and

history (Minjung Theology).

Pieris suggests to see poverty in two ways: forced and voluntary.

He believes that the former is the result of oppression and evil power

while the latter is the seed of liberation. He strongly insists that the

Asian churches should be the churches of Asia not in Asia through

seeing poverty as their reality. In his theology the voluntary poverty

can work as a liberative way to defeat the forced poverty and the

power of Mammon. To build and find an authentic Asian theology and

view of poverty, we also should recognize the poor context of Asia as

a reality for doing theology in present Asia and Korea.

1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163-185

Page 8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성장의 둔화와 감소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독교

만이 구원을 주고 축복을 준다는 믿음을 심어주려는 수많은 전도와 집

회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기독교를“없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을무엇을 말해주는가?

결국한국기독교의 문제는 기술이나 방법이나 행동이나 삶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 정신, 또는 신학의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무엇인가

를 못해서가 아니라‘정신’이 없어서 문제이다. 한국교회의 위기가 심화

되어온 지난80년대부터 신학계에서는근본적인 정신과 신앙의 문제를

다루는 조직신학이 관심사에서 멀어지고, 목회학이나 선교학, 상담학 같

은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분야들이 부각되어 온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실천신학이 불필요하거나 현재 한국교회 문제의 원인이라

는 말이아니다. 그것역시필요하고한국교회에크게기여하는것도사

실이지만, 기독교의 근본적인 신앙과 교리가 도외시되면, 그 어떤 여러

가지 좋은 시도들과 기획들도 별다른 힘이 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문

제를가중시킬수도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다(삼

상 16:7). 그는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신다(삼상15:22). 즉 올바른 마음

과 생각에서 나오는 예배나 행위가 아니라면,“기뻐하지 않으시고”오히

려“가증히”여기시는 분이다(사 1:13). 예수도“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 7:17)고 했다. 나무가

나쁜데 좋은열매를 바랄수 없다. 즉 열매로써나무를 어떻게 할 수 있

는 것이 아니다. 좋은 나무를 심는 일, 좋은 나무가 되는 일이 중요하다.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선행이선한사람을 만들지 못하나 선한사람은

선한 일을 한다. 그리고 악한 행위가 악한 사람을 만들지 못하나 악한

사람은 악한일을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어떤선행이 있기 전에먼저

본질, 혹은 사람 자체가 선해야 한다.”3) 종교개혁 당시인1536년 스파이

한국교회의 병적인 증상으로서 또 하나 대표적인 것은 양적 성장의

정체, 혹은 감소이다. 개신교는 전도도 잘 되지 않고, 된다고 해도 들어

오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이 더 많다. 그 점은 이미 수년전부터 지적

된 것이지만, 급기야 통계청에서 발표한 2005년 인구주택조사에서개신

교인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즉 개신교는 지난10년

동안14만 4천명이 줄어들었고, 반면에 가톨릭은2백19만 5천 명이 증가

해서교세가74%나 늘었다는것이다.1)

사실개신교만큼 가장열심히 전도하고, 교회성장에 몰두하는 종교도

없다. 수많은 인원과 시간, 재정을 들여서 전도와 교세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가장 보잘것없는, 심지어는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전도를 하지 않는 것 같고, 교회 성장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은 가톨릭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역설은 무엇을 말하

고 있는가?

그 같은 의문을 바탕으로, 개신교의 성장 문제를 가톨릭과 비교해서

살펴보는 흥미있는포럼이 개최된 바 있다. 그 포럼에 참여한 가톨릭의

오경환 신부는 가톨릭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요인으로“가톨릭의

결속력과 청렴성, 정의와 인권활동, 조상제사와 장례예식에 대한 유연한

태도, 타종교에대한열린태도”등을 지적했다. 한편개신교측에서 발표

한 박영신 교수는“개신교가 세속적인 시장논리에 빠져서 세상과 하나

가 된 현실, 즉 세상의 성공기준과 교회의성공기준이 같고, 세상의 복

과 교회의 복이 같고, 세상의 신과 교회의 신이 같아진 세속주의”를 지

적하면서“교회가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을강조했다.2)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문제를 기술적이거나 피상

적으로 보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점이다. 교회의 이미지 문제나 성

장의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성장’을 가장 강조하고 현재도

성장에 관한 각종 연구와 세미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한국교회에서

1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오갑,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한국교회에대한조직신학적반성과 대안 165

1)「기독교연합신문」, 2006년 12월10일.

2)「교회연합신문」, 2006년 12월 10일. 3) 마틴루터/지원용 옮김, 『종교개혁3대 논문』(서울: 컨콜디아사, 1997), 322.

Page 8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신론과 인간론, 기독론, 성령론, 신앙론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그 내용을 재점검하고, 재해석 또는 재수립할 필요가 있

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한국교회의 현재의 위기와 가장 직접

적인관계를 가진다고생각되는 교회론과 구원론 그리고 종말론만을보

고자 한다. 그리고 그 교리들이 왜 한국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인지를살펴본다.

I I. 교회란무엇인가?

문제를풀어나가기위해서 일단교회가 무엇인지를살펴본다.

교회는 에클레시아라는 희랍어에서 기원한다. 희랍에서 정치적인 집

회 등의 이유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에클레시아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 회중을 의미한다. 교회 역시 기본적으로는 모인 사람들,

즉 회중이 교회이다. 이 교회의 회중성이 중요하다. 예수도“두, 세 사람

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에 나도 함께 있을 것이라”(마 18:20)고

했는데, 역시‘모임’을 강조한 말씀이다.“신약성서에서 에클레시아는 결

코 어떤 제도로서가 아니라 배타적으로 사람들의 하나의 공동체로서, 예

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세워진 삶(생활)으로서, 성령의 사귐과 그리

스도의사귐(koinonia pneumatos et koinonia christu)으로표현된다.”6)

이것은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즉 교회는“사람

들”이라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는 일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 칼뱅의 용어로“선택받은 모든 사람들”7)이라는 점

어 의회에서 각 영지들에게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작센주

에서 개신교회를 확립해야 했던 루터는 먼저 당시 교회의 실태를 살펴

보았다. 그때 교회들은 미신에 사로 잡혀 있고, 목사들도 형편 없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착수했던 것이 유명한“대”,“소 교리문답”을 작성하

는 일이었다.4) 즉 먼저 교회가 믿는 진리, 신앙이 무엇인지를 확고히 했

던 것이다. 장 칼뱅이 파렐의 요청을 받고쥬네브 종교개혁에 가담한 이

후 제일 먼저 했던일도“교리문답”과“신앙고백”,“신앙지침”등을 만드

는 일이었다.5) 즉 신앙의 내용, 교리, 즉 신학을 분명히 하는 일이 급선

무였던 것이다. 신학이 제대로 서면, 그에 따라 예배나 봉사나 선교나

기타모든활동들이제대로 수행될 수 있지만, 신학이 잘못되면그 모든

것들이 잘못된다. 정신이 잘못된 사람에게 좋은 삶을 기대할 수 없다.

그의 정신을 바로 잡는 일이 우선적이듯, 교회의 문제에 있어서도 먼저

교회의 정신을 이루는 신학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특히

개신교는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교회의 바탕이 되는신학, 정신또는본

질을바로세우는 것 외의다른방법을 알고있지못하다.

그래서 문제를 신학에서 찾아야 하고, 신학을 점검하고 바르게 세우

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우

선 교회와 그리고 교회가 담지하고 있는 진리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

명히‘다시’알아야 한다. 즉 교회가 과연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또는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지를 재인식하며, 동시에 교회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

기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와 신학의 본질적인 면들을 인식하

고, 확고히 하는 일이야말로, 현재의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기본

적이며 확실하고빠른길이라고할 수 있다.

그렇다면한국교회의문제들을 보면서, 우리가 신학과 교리에서 되살

리고, 강조해야 하는것들이 무엇인가? 그것은 신학의 거의모든부분과

1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오갑,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한국교회에대한조직신학적반성과 대안 167

4) 조르쥬카잘리스/이오갑옮김, 『루터와고백교회』(서울: 솔로몬, 1995), 218.

5) B. Cottret, Calvin (Paris: Payot, 1998), 137-138.

6) E. Brunner, La Doctrine Chrétienne de l’Eglise, de la Foi et de l’Achè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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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J.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étienne(1536), in Ioh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I, Ed. par G. Baum, E Cunitz, E. Reuss (Brunschwig: Schwets-

chke et Filium, 1863), 72.

Page 8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것과 마찬가지로사람을 사랑하기를 원하신

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으로산다는 것은동시에인간중심으로사는것

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

을 듣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섬

기며, 사람들을중심에 모시고 사랑하는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의 사명은 사람들을 위하는 데 있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교회는 예수 이후의, 예수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르와지

는“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다. 그러나 도래한 것은 교회

였다”고 말했다.8) 그 말은예수와 예수이후의 공동체인교회사이의 연

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적으로 시사해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메시지의 중심으로 삼고 있었던 예수와 결과적으로 도래한 교회공동체

사이에는 연속적인 것과불연속적인 것이함께공존하고있다는 의미이

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는 분명히 아니다. 예수는 교회

를 상정하고 설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의 선포와 하나님 나라 운동

의 결과로써 지상에는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교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고, 예수가 이 세상에 가져오려고 했던 것에 주목하며, 그

것을 해석하며 그것을 선포한다. 그래서 예수의 운동과 교회의 운동은

전혀 다른 것만은 아니다. 교회는 예수의 뒤를 잇고, 예수가 하려고 했

던 것을 하며, 예수의 선포를 선포한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와의 연속성

을 가지는 예수의 공동체, 그러나예수이후의 공동체이다.

교회가 예수 이후의 예수 공동체라는 정의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말

해주기도한다. 즉 교회는 예수의 선포와 예수의 관심과 예수의 삶을따

르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예수가 했으며, 하고

자 했던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볼프강 후버는 말했다.“교회는 구

원을제공하고구원을 수납하는 활동을 통해서이루어진다.”9) 그런데 구

이 전제된다. 어쨌든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사람들이 있으면 존

재한다. 엄격히 말하면 사람들만 있으면 교회이다. 제도나 행정이나 돈

이나 건물이나 시설이나 그런 것들은 부가적인 것이고, 이차적인 것들

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관심은 사람들이 되

어야한다. 사람들이목적이 되어야 한다는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교회의 관심사가 사람들이라

고 해도, 사람의“숫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의 숫자는 그다지 중요

하지 않다. 그냥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할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

여도 그건 한 사람, 한 사람들일 뿐이다. 숫자는 그 사람에 대한 목적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목적 때문에 고려되는 사항이다. 그 목적이란 교회의

규모와 외형이다. 외형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각 개인들은 외형을 달

성하기 위한, 즉 전체를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사람이 희생되는 것

이다. 한 때 교회에서 무분별하게 총동원주일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동

원하려고 하는일이많았다. 그러나 사람은 어떤다른목적에 의해동원

되는수단이 되어서는안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목적이 된다는 말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사람의 생

명, 사람의 마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말이다. 교회는 이‘사람 중

심성’을 분명히 하지않으면 그 자체의 본질로부터멀어진다.

흔히 인간중심주의를 신중심주의와 대립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신중심성과인간중심성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신본주의

와 인본주의를 대립적으로 놓는사람들은신중심이되어야 한다면서인

간과 인간성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영적이고, 초월적인 면에 닫

혀 있는, 즉 자신을 넘어서는 타자에 대해 폐쇄적인 자기중심적 인본주

의는 신본주의와 대립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신

본주의는 인본주의와 대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인간을

위하는 것이고, 인간을 위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위하는 존재이다. 그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은 항상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위한다. 하나님

1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오갑,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한국교회에대한조직신학적반성과 대안 169

8) A. Loisy, L’Evangile et l’Eglise (Paris: A. Picard et fils, 1902), 111.

Page 8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해 존재할 때에만 교회이다.”11)

한국교회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교회가 사람들을 도외시한 채, 자

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고, 자신의 성공과 영광과 영화만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 심지어는 교회가 사람들을 자신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

시켜서, 교회가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위하게 만들어놓고있는 데 있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교회에봉사하게

하고, 사람들이 교회를 충성하게하고, 사람들이 교회에‘순종’하게하는

것, 그것이 목회이고, 그것을 잘 하는 것이 목회를 잘 하는 것이고, 그것

을 배워주는 것이 각종 목회 세미나들 아닌가? 교회는 사람들을 위하

고,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사랑

하고 있다. 누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사랑하는 것이 아니

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하게 된다.

현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숱한 반감들, 반대 운동들

은 그런이유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우선교회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존재하는지

를 정확히파악하고, 그 교회론 위에다 자신의 예배와 친교와 봉사와 선

교와 삶의 모든것을 다시 세워 나가야 한다. 그것은 교회는 자신을 위

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세상의 사람들을 위한 존재이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살고, 그들을 위해 일한다는 자기정체성을 확고

히 세우는 일과 다름 아니다. 예수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와서 세상 사람들을 위해 희생했듯이, 교회 역시 자신을 추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추구하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

는“예수 이후의 예수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론과 그리고 교회를 세워야

하는것이다.

원이란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다. 예수는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고 세상에 들어왔다. 예수는 고통과 절망 가운

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했다. 그들을 자신의 처한 상태로부터 끄집

어냈고,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과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예

수는 병자들, 귀신들린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 삶의질

곡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 절망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구원하고자했던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역시 예수의 공동체로서, 예수가 여기 없는 지금, 그

예수의 일을 이어받고 있다. 그것이 일차적인 교회의 존재이유이고, 사

명이다. 즉 교회의 목적은‘죽어가는 사람들’더 줄여서‘사람들’에게있

다. 교회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교회가 교회 자신을 위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은 어디까지나 교회가 사람들을 위하고, 사람들을 위해 구원하는 일과

합치될 때만정당화될수 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지상의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표상되었다. 그래서

지상의 교회는 천상의 그리스도의 왕권을 가지고 있으며, 반영하고 있

으며, 대리하고 있는 영광과 승리의 공동체이다. 그런 관점에서 외형적

교회의 영화와 치장이 정당화될 수 있다. 즉 교회가 자신을 위할 수 있

다.10) 그러나 그것도 역시 동시대의‘사람들’을 위하는 일과 충돌되지

않을 때만 인정될 수 있다. 동시대의 사람들을 위하고, 그들을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과 무관하거나, 또는 그것과 충돌하는 방식으

로 교회가‘자신’을 추구하는 것은 교회의 존재이유를 상실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경우든지, 동시대의 사람들을 위

하고, 그들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 일에 우선

적이고 집중적인노력을 경주해야 하는것이다.“교회는 오직남들을 위

1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오갑,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한국교회에 대한조직신학적반성과 대안 171

9) 볼프강후버/이신건 옮김, 『교회』(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37.

10) Cf. 위의 책, 33-34. 후버는 이 점을“헤르마스의 목자”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매개로 세상에 대한교회의선재성 또는자존성으로써설명한다.

11) 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München, 1970, 415, 위의 책, 126 재인

용.

Page 8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설교하지만, 현재 모인 사람들의 상황과 조건에 따른 해석과 적용, 구체

적인제시가 없이그렇게 하지않는다.

구원은 인간의 모든 실제적인 부분들과 관계되지만 동시에 전인적

(total)이고 통전적(integral)이다. 즉 구원은 단지 육적인 구원뿐만 아니

라 영적인 구원이고, 상황으로부터의 구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와 근

본에 관계된 구원이다. 즉 구원은 인간 전체를 포괄한다. 인간은 그 전

체가 문제가 없고 평안해야 행복하지, 한두 군데라도 고통스러운 부분

이 있으면, 그 부분만 아니라 그 사람 전체가 고통한다. 충치가 생겨서

통증이 오면 치아만이 아니라 머리끝 발끝까지 아픈 것과 같은 이치이

다. 영적으로 건강해도 육체적으로 온갖 질병에 시달리면, 반대로 육체

가 튼튼해도 마음이나 영혼이 망가져 있으면 그 삶이 온전할 수 없다.

그래서 구원은 그 모든 부분을 포함한 신체적이고, 인격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더 나가서 구원은 그런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이고, 자

연적이면, 우주적인 차원을 갖는다. 그 이유에서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인간 전체와 인간이 속한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전체적이고 통전적인

구원이라는것이다.

교회는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고백한다. 즉 구

원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그 구원 행위에 참

여하고, 어떤 몫을 담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체적이고 통전적

이지만, 교회가 거기서 맡은 몫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여러 제도와 도구들을 사용하신다. 국가나 경제나 과학이나 기

술, 스포츠도 그런도구들 중의 하나이다. 법원이나 학교나 병원, 체육관

들도 훌륭한 구원의 도구들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인간의 구원에서 무

엇을맡았는가? 즉 교회에 맡겨진 구원의 몫은무엇인가?

원칙적으로 그것은 인간의‘영(프쉬케)’의 문제이다. 교회는 인간의

영적인 구원을 관심하고, 영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

경제나 정치나 육체적인 안녕의 문제가 아니다. 자크 엘륄이 기독교의

구원을 철저하게 개인적인 영역에 제한시켰던 것도같은 이유이다.12) 교

I I I. 구원론

그렇다면교회가 선포하고, 그것을 위해존재하는사람들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아는것은 매우중요하다. 왜냐하면구원을 잘못 생각

하면, 사람들을 생명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 병원과 나쁜 병원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좋은 교회와 나쁜 교회

가 있을 수 있고, 좋은 의사와 나쁜 의사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좋은

목사와 나쁜목사가 있을수 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

람들을 제대로 치료하느냐 못하느냐, 다시 말해서, 사람들을 그들의 병

으로부터 바르게 구해 내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료란 것이 무엇인지, 혹은 구원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 목표를 향해제대로 된 처방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구원에

대한올바른 이해와 확신을 갖는것은매우중요하다.

희랍어에서 구원(소테리아)이란 구제를 의미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사람을 그가 처한 곤경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다. 배고픈 이에게는 빵

을 주는 것이 구원이고, 암에 걸린 이에게는 암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

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풀려나는 것이 구원이고, 탈주자들에게

는 안식처를 얻는 것이 구원이다. 그처럼 구원이란 구체적이고 실제적

이다. 이런 구체성, 혹은 현실성이 없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이라고

할 수 없다.

구원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각 사람들에게 다 다르

게 나타날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인간이라는 점에서,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고통과 죽음과 같은 보편적인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라는 면이 있지만, 그것도 역시“지금 여기서”사람들이 겪는 구체적이

고 개별적인 악을 대신하거나, 그것과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구원은

항상 구체적이고, 상황적이고,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된

다. 교회는 바로 그 시대의, 그 시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부름 받고,

그 일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보편적인 구원, 영원한 구원을 말하고

1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오갑,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한국교회에대한조직신학적반성과 대안 173

Page 8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앉히기도 한다. 그런 모든 것들이 죄이다. 그런데 그런 죄는 인간을 불

안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의 평화를 깨뜨

리기도 한다. 인간의 질병과고통과 불화와 분리와 분쟁과 그 모든악한

것들이 근원적으로는 그런 죄로부터 기인된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그런

죄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 그런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죄로부터자유를 얻는것이다.

구원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듯, 죄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시대마

다 달라질 수 있고,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명

예가 죄이고,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돈이 죄이고, 어떤 사람에게 있어

서는 태만이나 무관심이 죄이고,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식이 죄이

고,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신념이 죄일 수 있다. 그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바르고 건강하게 세우지 못하는 것, 그를 타자를

향해 열고 타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 그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 그 자유로써 사랑하며 살고

용서와 화해와 일치를 이뤄가며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죄이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거기서 벗어나게 하는 그 일을 교회

는 담당하고있는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고 있는가? 과연 교회

에게 맡겨진 구원의 사명을 알고, 담당하고 있는가? 한국 사람들에게서

구원은 무엇인가? 오늘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배금주의 또는 물신주의

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으로인해하나님의형상을 잃고참된삶을상실

해가고 있다. 오늘 우리의 구원은 그런 풍조, 그런 죄로부터의 자유를

가져오고, 살고,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물질만능주의, 상업주의,

물량주의, 외형주의, 발전, 성장, 성공의 신화…그런 것들은 오늘 우리

한국인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죄들이다. 사람들은 거기서 참된

영성과 인간성을 잃고, 무의미하게 무가치하게 살아 간다. 한국 교회는

현재이 문제와 대결하고있다. 일제의 압제하에서는민족의 독립이 문

제였고, 군부독재 하에서는 민주화가 문제였다면, 현재 21세기 고도의

회는 경제는 기업에게, 정치는 정당에게, 건강은 병원에게 속했다는 것

을 알고, 그 질서에 순응한다. 신정정치 시대에는 교회가 정치나 경제나

인간삶의모든부분에 간여하고감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민주사

회에서는 더 이상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은 종교의 독

선이고 오만이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교회는 정치나 경제, 사회의 영역

의 독립성을 존중한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는 있다. 정치나 경제 등이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어서, 국민들의 삶이 위협받고 고통받을 때, 그

리고 교회가 시급하게 나서야 한다고 양심적으로 판단될 때, 교회는 거

기에 대해 발언하고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교회는 겸손하게 사회의 권

한과해결능력을 믿고국민들과함께인내하고 기다려야할 것이다.

교회가 사람들의 영적인 구원을 담당한다는 것은 곧 사람들의 정신

적인 문제, 사람들의 존재와 삶의 중심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

다. 사람들이 중심이 바르게 서고, 정신이 편안하고, 삶이 선하게 이루어

지는 것, 그것이 영적인 구원 혹은평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

을 바르게 서지 못하게 하고, 정신을 불안하거나 혼란스럽거나 왜곡되

게 하는것, 또한선하고 뜻있는 삶을방해하는 것이많다. 그런것들때

문에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하고 참된 영적인 평화에 이르지 못한다. 그

런 것들을 다른 말로하면‘죄’라고할 수 있다. 그 죄로부터 떠나야, 사

람은구원을 얻을수 있는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은 언제나“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죄는 전통적

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나 교만, 우상숭배 등의 용어로 표현되어

왔다. 죄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멋대로 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듣고 싶은 말만 듣거나, 하고 싶은 일

만 하고, 자기를 신적으로 격상시키기도 하고, 우상을 하나님의 자리에

1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오갑,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한국교회에대한 조직신학적반성과 대안 175

12) 쟈크 엘룰/김점옥 옮김,『인터뷰에 의한 쟈크 엘룰 사상입문』(서울: 솔로몬, 1994),

31, 35. Cf. 이오갑,“자크엘륄의 종교와 기독교,”『자끄엘륄 사상입문-현대문명 비

판과새로운기독교』(서울: 다산글방, 2003), 127, 256.

Page 8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사모하고 소망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애착을

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권세와 유혹은 매우 강하고 끈질긴

것이어서, 그리스도인이라고해도 그것을 끊고 이겨내기 힘들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눈을 하늘에 두어야 한다. 이 세상을 넘어서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것을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날마다 하늘의 것을 사

모할 때 세상적인 욕심과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집착을 끊을 수 있는 것

이다.

과거에는 하나님의나라를 사모하고, 그 나라를 소망하라고설교하는

것이 도피주의적 신앙을 조장하는 것으로 비판받을 수 있었다. 가령, 일

제시대에 민중들이 현실의 암담함과 고통을“잊으려고”(또는“잊게 하

려고”) 관심을 이 세상으로부터 저 세상으로 옮기는 도피주의적 신앙

형태가 만연했었다.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교회가 불의한 권력과 결탁하

여 민중들의 관심을 저 세상으로 돌려놓음으로써, 민중의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힘을 약화시키는 종교를“인민의 아편”이라고 비판했던 것도

같은맥락에서이해된다.

그러나 지금은, 특히 한국사회에서는초월적이고 저 세상적인 신앙을

강조해야 할 때이다. 그것은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이 세상의 것들에 집

착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것을

넘어서는 높고, 영원하고, 궁극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폐쇄적인

세계관 속에갇혀있기때문이다. 하나님의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

니다. 하나님은 돈이 아니며, 부자가 된다고 해서 진정하고 행복한 삶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유가 존재를 대신하지 않는다. 섹스가 사랑의

전부가 아니다. 자리에 앉는다고 해서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위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물이 되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행복해지는 것도 돈이나 힘으로 된다고 믿는다.

그들은 섹스는 아는데 사랑은 모른다. 그들은 지위나 직급은 알지만 인

물은 모른다. 그들은 돈은 아는데 삶은 모른다. 그들은 넘어서는 것에

대해 닫혀있다. 복잡한 것을 견디지 못하고, 계속해서 쉽고 단순한 것

물질문명 사회를 살고 있는한국사회의 문제는 바로물신주의에매몰된

인간성의 문제이다. 한국교회는 그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 구원을 선

포하고, 그 구원을 살아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교

회는그 존재의 이유나 의미를 상실하고말 것이다.

한국교회는 물질, 돈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 그것은 돈을

더 가짐으로써 얻는 돈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

국교회는 과연 스스로 그런 구원을 외칠만 한가? 교회 자신이 돈과 물

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까지 한국교회의 성장과 성공은

거의 물량적인 것에 집중되어 왔다. 교회 자체가 건물과 교인숫자와 헌

금액수, 수양관, 묘지, 자동차…그런데 몰두해왔고, 그것이 목회라고 생

각해 오지는 않았던가?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배척을

받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도 더 세상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거기에 몰입하는 교회를 세상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한국교회가 세상의 구원이 되고, 출구가 되고,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를 버리고, 영적이고 내면적이

며 또한 초월적인 구원을 강조하고 추구해나가야하는 것 외에달리방

법이 없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영적이고 영원한 것으로의 이

행, 그것이 곧 한국교회의 구원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다음의

종말론으로이어지는주제이기도하다.

I V. 종말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칼뱅이

말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자신이 속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명상

해야 한다.13)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명상하는 것은그 나라를

1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오갑,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한국교회에대한조직신학적반성과대안 177

13) J.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étienne, I I I (Genève: Labor et Fides, 1957),

9/1.

Page 9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그들은 언제나 세상을 떠나면서 산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길을 향

해 문밖을 나서는 나그네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그런 종말론적 실존의

회복이야 말로 그들의 삶을 진취적이고 역동적이며, 변혁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런 종말론적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비로소 인류를

이 세상적인것에끊임없이가두어 놓으려는문명의 덫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종말론의 이해가 너무불충분하고 타성적이다. 한

국교회의 종말론은 묵시문학적 미래의 종말론을 거의 벗어나지 못한다.

예수가 재림하고, 휴거가 있고, 이 세상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

으로 없어질 것들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것들을 대수롭지 않게여기면서 아주쉽게빠져든다. 단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몇 가지표지들은 유의하라! 그런 몇 가지 것

들만 유의하고 따른다면, 그 외의 모든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영성, 세상의 트렌드…그 모두를 이용하고, 향유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종말론은 세상을 벗어나게 한다. 다른 말로 세상을

버리게 만든다. 한국교회는 세상의‘죄성’세상의‘악마성’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 것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

나 자끄 엘륄의 말대로, 세상은 영적 실체이다.15) 즉 고유명사를 가지고

있는“사탄”이란 뜻이다. 예수는 세상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속한 세상의 끝도 알고있었다. 그것은‘죽음’이다.“좁은 문으로 들어가

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니

라”(마 7:13-14).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말하는“거룩(카도쉬)”도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

속으로 빠져든다. 현대인의초상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이런상황에서 교회는 종말론적 지평에 서야 한다. 다른 말로세상을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불트만이“탈세상화(démondanisation)”라고 했

던 것이다.“탈세상화”는 이 세상의 그런모든풍조들, 그리고 그것의 일

부였던 과거의 자신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저 세상의 도래에 자신을 개방하고거기에 참여함으로

써 세상의 모든 것, 그리고 세상 전체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다. 그런 식

으로 교회는 세상과 거리를 취한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저 세상

을, 그리고 저 세상으로써 산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고, 세상으

로부터 자유롭다.14) 교회는 이 세상과 구별되어 살고, 세상을 넘어서서

산다. 동시에 저 세상적인 것을 이 세상 안으로 들여온다. 교회는 이곳

에 살면서동시에 저곳에 산다. 그런교회와 교회의 삶은자연스럽게이

세상에 대한심판이된다. 그는영원한 것을이곳에 가져와서 이곳을 상

대화한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심판이다. 저 세상적인 것으로써, 이 세상

적인 것에 대해서, 영원한 것으로써 유한한 것에 대해, 불가시적인 것으

로써 가시적인 것에 대해, 영적인 것으로써 육적인 것에 대해“아니오”

를 말하는 일이다. 즉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저 세상의 현실

을, 즉 종말론적현실을 살아가는것이다.

종말론은 위기의식을 조장해서 사람들을 교회에 더 매달리게 하는

도구가 아님은 물론이다. 종말론은 신화적인 세계 속에서나 가능했던

시효만료된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가장문명이 발달한 현대세계에 더

욱 필요한 교리이고 신앙이다. 그것은 인간 삶의 영성을 회복시켜 준다.

문화와 문명을 비판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새 문명을 창조하는 초월성

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넘어서서 사는사람들이다.

1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오갑,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한국교회에대한조직신학적반성과대안 179

1 4 ) R. Bultmann, Foi et compréhension, I, L’Historicité de l’homme et la révélation

(Paris: Seuil, 1968), 455 등. Cf. 이오갑,“루돌프 불트만의 실존적 종말론,”『하나님

나라, 그 해석과 실천』, 황성규 박사 정년은퇴기념 논문집(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0), 462-463.

15) 자크 엘륄/번역위원회 옮김,『뒤틀려진 기독교』(안양: 대장간, 1990), 13, 17. Cf. 이오

갑,“현대문명 속에서의 혁명과 기독교,”『자끄 엘륄 사상입문-현대문명비판과 새로

운 기독교』(서울: 다산글방, 2003), 79-80.

Page 9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조에 갇혀 있는 교회가 구원을 얻는 길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으로부터

참된교회로 인정받는길이아닐수 없다.

V. 결론에대신해서

교회가 완전할 수는 없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여러 가지 것들이 다 드러난다. 다른 말로, 여러 종류의 사람

들이 다 함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지는 문제점들을 교회가 그대로

가지고 있는것이다. 종교개혁 당시교회를“순수한집단”으로간주해서,

기존의 교회로부터 분리하고자 했던 종파들이 있었다. 그러나 루터나

칼뱅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혼합된 집단(corpus mixtum)”으

로 보았다.16) 교회 안에 죄가 없어야 하고, 불순한 것이 없어야 하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럴수 없다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해도그 자신

의 의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

문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죄와죄의 욕구 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

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고, 죄의 유혹과 위험

에 노출되어 있지않은것이아니다. 그들이 의인인 것은용서받았기때

문이고, 실제로는 죄인이다. 루터가 그리스도인을“의인이며 동시에 죄

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고 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고, 한국교회도역시 그렇다. 불완전하고, 오류로 얼룩져

있고, 심하게 말하자면 문제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문제 있는

교회를 개탄하고, 비난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가고, 어떻게 좋게만들어나가느냐가중요한 것이다.

교회가 문제투성이라고 해도, 교회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 산다. 교회

는 하나님의 용서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그 선

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율법적인 의와 위선으로 빠져드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거룩”또는“성결”은 다름 아닌 세상의 많은 사

람들과 달리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구별된 삶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

은 다르다. 다른 길을 간다. 다른 삶, 다른 세상을 산다. 즉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을 살며, 차안에서 피안을 살며, 현재에서 미래를 사는 종말론적

실존이다. 거룩이 구약시대에 율법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표현되었

던 관계로, 아직도 그것을 외면적인 또는 행위적인 구별로써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은 바리새적인 거룩, 유대교적인 거룩의 잔재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거룩은 목록표에 기재될 수 있는 행위에 있지 않

다. 거룩은 규범을 지키는 일이아니다. 거룩은 탈세상화와 다름 아니다.

그것은 그 삶의 중심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사탄을 떠나 하나님에

게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의 삶과

행위는 그것이 무엇이든지“거룩할 수 없다.”즉 행위만 거룩한 것은기

독교적으로는 의미가 없다. 거룩은 종말론적 삶의“이주(移住)”, 중심의

이전(移轉)에서충만하고완전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교회는 종말론, 종말론적실존으로서의 자기이해를 가지고 있는

가? 현재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거기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기가 매우 어렵다. 교회 안에 만연한 세속주의, 물질주의, 배금주의

는 교회가 세상을 넘어서는“탈세상”의 종말론적 삶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는 세상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단짝

이 되어 있다. 교회는 세상보다 더 세상이 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행위

나 하는 일에 있어서는 세상과 구별되지만, 그 중심인 영성과 가치관에

있어서는 구별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습관이나 행위나 복장이나 태도

에 있어서는 거룩한 것 같지만, 그 삶의 중심, 존재에 있어서는“거룩”하

지 않다. 그런 거룩은 사이비 탈세상화, 사이비 종말론의 증거일 뿐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종말론에 대한 참된 이해와 회복이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을 떠나저 세상을 살아가는진정한 탈세상화의감행, 종말론적결

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가치, 세상의 정신, 세상의 풍

1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오갑,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한국교회에대한조직신학적반성과 대안 181

16) Cf. J.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étienne, IV, 1/7.

Page 9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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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적인 사랑과 은총을 믿고 이해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하나님

을 사랑하게 된다.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또한 하나님을 알고 싶

어 하고, 그의 뜻을 따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문제는 한국교회가 하나

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있느냐 아니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찾아 나가느

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결국 본질적으로 신앙의 문제이고, 신앙으로서 추구되는 이해, 즉 신

학의 문제이다. 실천이나 방법이나 기술들은 거기에 따라오는 문제들이

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계시하신 은혜로운 하나

님을 다시 믿고,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과 진리를 언제나 다시 찾아 나

가고알아나가는 과정에 들어서는 것이중요하고 또 필요하다. 즉 진리

안에서 참 자유와 구원을 얻으려는 구도자가 되는것, 구도자의삶을사

는 것이다. 그런 삶으로써, 한국교회는 바른 신학, 바른 정신, 바른 영성

을 얻을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서 한국교회가 참된 교회, 참된 구원과

참된종말론적공동체로갱신될 수 있다고 믿는다.

주제어

한국교회의문제점들, 교회, 구원론, 종말론

(Problems of Korean Church, Church, Soteriology, Eschatology)

접 수 일 2009년 07월 29일

심사(수정일) 2009년 12월 07일

게재확정일 2009년 12월 15일

1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오갑,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한국교회에대한조직신학적반성과 대안 183

Page 9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christians loss more and more the image of God and their true life.

The concept of today’s salvation surely consist freedom from such

tendency. Korean Churches must save human lifes than money and

material things. They must give up their desire to the worldly and

secular values in order to become a salvation, a way out and an

alternative of the human life. It means that they also have to re search

and find the inner transcendant and inner spirituality.

For the Korean Churches, i t is t ime to emphasize on the

transcendant and eschatological faith, because they ignore the eternal,

ultimate things that pass over the present world. Their closed worldly

view demands a rediscovery of the eschatology. The Churches have to

escape from the world and must give up all of the worldly things.

They must open and participate to the coming Kingdom of God, New

Heaven and New Earth. We hope to see a renewal Korean Churches in

such eschatological faith and life.

What is the problem of Korean Churches?

Lee, O kab

Professor

Korea Christian University

Seoul, Korea

What is the problem of Korean Protestant Churches? I think it is

not the practice nor the life but the theology itself. The Korean

churches have a problem not because doing not well every thing but

because they don’t have a spirit. So it is necessary to find the problem

first in the theology and then try to solve and reform it.

Looking at the problem, what we have to consider and emphasize

on the theology? This theses examines Ecclesiology, Soteriology and

Eschatology that, I think, have immediate answer and solution to the

problem of Korean Churches.

Taking no account of human beings, Korean Churches aim

themselves. They spent their whole effort in pursuit of their own

success, glory and flourish. They talk loving human beings but love

themselves. The Church is meant to be the loving human beings, not

being for itself. Therefore it loves human beings, lives and works for

them. The Korean churches must have such identity and true love of

human beings.

Korean churches’ view of salvation is also an important matter.

They are captured in many cases by mammonism or commercialism,

so that they give the absolute importance to material and quantitative

growth. It means a loss of Church itself. In this situation, the korean

1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이오갑,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한국교회에대한조직신학적반성과 대안 185

Page 9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예언과신유의은사에대한신학적이해

김영선(협성대학교 교수)

Ⅰ. 서론

성경의 은사목록1)에 나타난 다양한 은사들을 체계적으로 일관성 있

게 이해하는 일은쉬운일이아닐것이다. 몇몇학자들이은사들의 본질

과 속성을 따라 은사들을 구별하여 은사에 대한 어떤 이해를 찾아보고

자 하였다. 존 윌블드(John T. Walvoord)는 은사들을 항구적인 은사와

임시적인 은사로 구분하였고, 데이비드 피처스(David Pytches)는 계시

의 은사, 능력의 은사, 전달의 은사로 구분하였고, 리차드 개핀(Richard

B. Gaffin)은 말씀 은사와 행위 은사로 구분하였다. 은사들에 대한 구분

이 이처럼 다르게 나타나는 까닭은 은사를 이해하는 신학적 안목이 다

양하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리차드 개핀의구분법을따라말씀은사가

운데 예언의 은사를 행위은사가운데 신유의 은사를 각각 선정하여 이

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도모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자 한다. 본 논문은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187-215

1) 은사목록이라 함은 고린도전서7:7; 12:4, 8-10, 28, 로마서12:6-8; 에베소서4:11-12

등에기록된 은사들을말한다.

Page 9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해한다.2) 리차드 개핀은 이렇게 단언한다.“예언은 이미 존재하는 영

감된 본문내지구전의 해석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감된 일차적인 하나

님의말씀”3)이다.

신구약 성경도 이러한 이해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

은 그들의 말을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했다(민 22:8; 신 18:18-

20; 렘 1:9; 겔 2:7 등). 따라서 예언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

께 순종하는 것이고, 불순종하는것은하나님께불순종하는 것이었다(신

18:19; 삼상8:7; 왕상20:36 등).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록하며, 성경에 기록되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

을 예언자라 하지 않고 사도라 하였다.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구약시대

의 예언자에 준한 사람들이었지만(고전2:13; 고후 13:3; 갈 1:8-9, 11-

12; 살후 12:13; 4:8, 15; 벧후 3:2), 그들은 자신을 예언자라하지 않고,

언제나 사도라 하였다(롬 1:1; 고전1:1; 9:1-2; 고후1:1; 11:12-13; 12:

11-12; 갈 1:1; 엡 1:1; 벧전1:1; 벧후1:1; 3:2 등).4) 이 같은성경의 진술

들을 통하여 우리는 예언은 계시의 속성을 가진 계시의 은사라고 말할

수 있을것이다.

2. 예언은하나님의말씀이아닌사람의말이다

예언을 영감된 일차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개핀과는 다르

게 그루뎀(Wayne Grudem)은 예언을“미래를 알아 맞힘”이나“주님께

서 주신 말씀을 선언함”이라고 정의하기보다는“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마음에 주신것을말함”5)이라고 정의하고자한다. 그루뎀이이렇게 보는

까닭은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일상생활에서 예언자란 말은 그저

모든 은사들을 고찰하기 보다는 은사론 논쟁의 핵심에 서있는 은사들

가운데 예언과 신유의 은사에 대한고찰로 그 범위를제한하고자한다.

예언은 하나님의 메시지를전달하는 특별한 능력이다. 예언은 사회정

의 수립과 개혁을 위해 사회악을 고발하기도 하고 미래의 일들을 예고

(豫告)하기도 한다. 예언은 바르게이해되어야한다. 예언에 대한그릇된

이해는 예언하는당사자는 물론교회에도많은환란과 어려움을가져다

줄 수 있다. 예언에 대한 왜곡 못지않게 곡해되고 있는 은사는 신유의

은사라 할 수 있다. 신유의 은사가 잘못 이해되고 그로 인해 오용될 때

개인인 물론 교회 역시 많은 타격을 받게 된다. 자칭 신유의 은사를 받

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개인 기도처나

개인 제단을 만들어 놓고신유 사역을 전업으로 하여많은 물의를 일으

킨 일들도 있다. 특히 이단들또는 신흥종교에서 이 같은경우를 볼 수

가 있다. 본 글은 이런 측면을 의식하고 예언과 신유의 은사에 대한 성

경적, 신학적인 이해를 고찰하고, 이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와 자세 또는

지침을 제언하고자한다.

I I. 예언의속성

1. 예언은계시의속성이있다

예언은 계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다음의 성경 말씀으로 증

거가 된다.“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

21). 예언의 필연적 특징 중의 하나는 예언의 계시성이라 할 수 있다.

개핀(Richard B. Gaffin, Jr)은 예언을 계시로 본다. 개핀이 예언을 계시

로 보는 까닭은“예언은 성령의 역사에서 나온 영감된 것”이기 때문이

다. 따라서 그는“예언자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해당하는 것으로

1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김영선, 예언과 신유의은사에 대한신학적 이해 189

2) 리차드 개핀/권성수 옮김, 『성령은사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88.

3) 앞의책, 72.

4)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Nottingham: IVP, 2007), 1050.

5) Ibid., 1050.

Page 9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이처럼 예언은“초자연적으로 보이는 계시라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참 예언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짓 예언

자들도 마귀의 영향력 아래예언할 수 있기때문이다.”12)

3. 예언은가르침과다르다

신약성경의 모든예언은 성령의 즉각적인 역사, 즉 하나님이 주신계

시에 근거한다(cf. 행 11:28; 21:4, 10-11; 눅 7:39; 23:63-64; 요 4:19;

11:51).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 없이 예언은 존재할 수 없다. 그

러나가르침은예언과 같이계시에 그 존재의 근거를 두지않고, 성경에

두고있다. 가르침은 그 전하는 메시지가 본문에 대한해석과 적용을 포

함한 성경의 본문에 대한 의식적인 사고의 결과(롬 16:17; 딤후2:2; 3:

10)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예언은 그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갑자

기 전하는 자의 마음에 주신 어떤 것에 대한 보고라 할 수 있다.13) 또한

예언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을 통해 특정한 회중에게 주어지는

특정한 말씀인 반면에 가르침의 존재 근거인 성경 말씀은 장소와 시간

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다.14) 따라서 우리는“예언은 권

위에 있어 가르침보다 열등하며, 교회에서의 예언은 언제나 성경의 권

위 있는 가르침 아래 있다”15)고 말해도 좋다. 일반적으로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자라는 의미보다는 외적인 영향력(일종의 영적

인 영향력)에 근거해서 말하는 자,”6) 즉“신적인 권위라는 의미가 함축

되지않은채 그저대변인 정도를 의미”7)했기때문이다.

개핀이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데 반하여 그루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이며 또한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

씀과 동등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언은 불완전하고 우리가

온전히 순종하거나신뢰할 수 없는내용을담고있기때문이다.8) 브루스

요컴(Bruce Yocum)은 이와 연관하여 이렇게 말한다.“우리가 말씀을

직접 받든지 아니면 메시지의느낌을 받든지 간에 예언은 불순할 수 있

다. 왜냐하면우리의 생각이나사상이 우리가 받은메시지에섞일수 있

기 때문이다.”9)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예언은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예언

자, 즉 인간의 말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그루뎀이 지적한대로 예언은 하

나님께서 촉구하신 것을 교회의 회중에게 알리는 것이다. 또한 예언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가 예언자의 말로 보고될 때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언은 예언자 자신의 말로 보고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이렇

게 볼 때 예언속에는 말하는 사람의 나름대로의 이해나 해석도 포함될

수 있다.10)“예언은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생각, 혹은 사람이 하나님께

로부터 왔음을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의식 속에 심어주신 생각일

수 있다. 또한그 생각은 한 개인의 평소의 생각과 전혀다른 생각일 수

도 있고, 생생함이나 긴박감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왔다는 확실한 느낌을 갖게만들수도있다.”11)

1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김영선, 예언과 신유의은사에 대한신학적 이해 191

6) Ibid., 1050.

7) Ibid., 1051.

8) Ibid., 1055.

9) Bruce Yocum, Prophecy: exercising the prophetic gifts of the Spirit in the church

today (Ann Arbor, Mich: Word of Life, 1976), 79. Ibid., 1055에서재인용.

10) Ibid., 1057.

11) Ibid., 1056.

12) Ibid., 1057. 따라서 우리는 예언의 은사를 수행할 때에 다음과 같은 그루뎀 말에 귀

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만일 하나님께서 마음에 어떤 생각을 주셨으며 그것을 회중

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주님께서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을 주신 것 같다”든

지 아니면,“주님께서 … 을 보여 주시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없다. 물론 그 말이“주님께서말씀하셨다”는 말보다 강하고 확실하게들리지 않지만,

만일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께로부터온 것이라면 성령께서는 그것을 들어야 할 사람

들의마음속에알아들을수 있도록 큰 능력으로역사하실것이다.”Ibid., 1056.

13) Ibid., 1058.

1 4 ) Michael Green, To Corinth with love: Paul’s message to the troubled church at

Corinth and its relevance to Christians today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82), 75.

Page 9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수 있도록 지도해야할 것이다.18)

5. 예언은목적이있다

성경은 예언은 다음과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첫

째로 사람과 교회의 덕을 세우게 한다(고전14:4). 둘째로 믿지 않는 사

람들에게 확신을 주는 징표의 역할을 한다(고전14:24-25). 셋째로“모

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한다(고전 14:

31). 이 외에도 민족과 국가의 재앙과 패망에 대한 경고(렘 1:10; 18:7-

8)와 미래에 일어날일에대한예고를 위한목적이 있다.19)

오늘날 예언의 목적을 벗어나 예언의 은사를 오용내지 남용하여 마

치 점쟁이들처럼 남의 신수를 점쳐주는 일을 상습적으로 하는 많은 수

의 사람들이있다. 예언의 은사가 교회의 덕을세우는 데 사용되어야함

에도불구하고 어떤사람들은예언을 개인의 탐욕이나 영달의 수단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에 혼란과 어려움을 가

져다 준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 목적을 따라 잘 사용해야

할 것이다.20)

성경만큼의 권위를 갖지 않는다. 심지어 예언은 초대교회 당시의 성경

공부보다도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경우를 신약성경에서도찾아볼 수

있다(행 21:4, 10-11; 살전 5 : 1 9-21; 고전 1 4 : 2 9-3 8 ) .1 6 ) 이처럼 예언은

그 존재 근거와 말씀의 권위 면에서 가르침과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

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

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또한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으로부

터의 주관적인 메시지를추구하는것이 신약성경에나타난 예언의 우선

적인 기능이 아니었음을 명심하고, 예언보다 성경 및 성경의 가르침을

더욱 강조하고 거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교훈과 지혜를 더 사모해야 할

것이다.17)

4. 예언은누구나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그리고“예언하기를 사모”(고전14:1, 39)하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하나

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예언할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

하고있는것이다. 예언은 어느특정한 사람또는제한된 사람들예컨대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나 언변이 좋은 사람들, 또는 목사나 장로

와 같은 어떤 특정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 또는 오순절교단 같은 어떤

특정 교단이나 그룹 그리고 지역의 사람들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사람

들이 참여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예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특별히 바울은 우리가“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

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였다(고전14:5). 특히 예언은 사람에게 말

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덕을세운다(고

전 14:3-4). 그런 까닭에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언의 은사가 잘 활용될

1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김영선, 예언과 신유의은사에 대한신학적 이해 193

15)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58.

16) Ibid., 1052.

17) Ibid., 1059.

18) 그루뎀은 예언의 은사에 대한 개방과 예언의 은사의 활용에 대한 기회 확대를 이렇

게 우회적으로언급한다.“예언의 은사를 활용할 수 있는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자가 아니라 방관자인 상황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예언의 은사에 대한개방이 교회생활에서의 위험한 불

균형, 우리가 지나치게 지적이고 객관적이고 편협하게 교리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균형을시정하는데도움이 될 수 있지않을까?”Ibid., 1060.

19) 데이비드 피치스, 『능력은사』(1991), 117.

20) 조용기, 『성령론』(서울: 영산출판사, 1978), 239-240.

Page 9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르치고 있다. 첫째,“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29절), 둘째,“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하던자는잠

잠할 것”(30절), 셋째,“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

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예언을 할 것”(31절). 그리고 예언을 하는

사람은 항상 완전하게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할 것(32절)을 명

하였다. 33절은 아예“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화평

의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다. 이 모든 성경말씀들은 교회에서 수행되

는 모든예언에는어떤질서가 있음을 말해주고있다.

데이비드 피치스(David Pytches)는 예언의 질서에 대해서 몇 가지

지혜를 제안하고있다. 그 중 핵심적인제안들을다음과 같이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예언은 차서를 따라 해야 한다. 물론 예언은 한 모임에서 둘

또는 셋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무질서하게 중부남방으로 예언을 말하면

예언의 진정성 여부를 알 수 없다. 우리는“예언의 진정성 여부가 불확

실한 경우주님이 그것을 확인해 주실때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한

다.”23) 둘째, 예언은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다. 즉

예언은 기도나 찬양을 할 때 받을 수도 있고, 노래, 시, 산문, 연극, 또는

이것들 가운데 몇 개가결합된 형태로 나타날 수도있다. 예언은간단하

게 나타날 수도 있고24) 또는 조용하게 또는 큰 소리로 나타날 수 있다.

요란스럽게 떠벌이는 것은 물론 아니다. 셋째 너무 감정에 사로잡힌 상

태에서 예언을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너무 감정에 사로잡힌 상태

에서 예언할 경우 오히려 역작용을 불러일으키게 된다.25)“예언의 말씀

을 이상한 목소리로전할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그것을 불

신해서도 안 된다. 그러한 현상은 불안정한 감정으로 인해 흔히 일어나

I I I. 예언은사자의바람직한자세

어떻게 오용됨이 없이 예언의 은사를 권장할 수 있을까? 어떻게 예

언의 은사의 남용을 규제할 수 있을까? 교회에서예언을 권장하고 규제

하기위해서 우리는 여러측면에서 고려해야할 바가있다.

1. 예언은성경의가르침에따라수행되어야한다

예언의 은사가 교회에서 수행되어 질 때 명심해야 할 사항은 예언하

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예언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14:

29-36). 교회에서 예언을 할 때, 예언을 말하는 자는 자신이 모임을 주

관하여 자신의 명성을 나타내거나 자신이 주목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된

다. 또한 너무 흥분하거나 극적인 감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또한 교

회도예언을 멸시하지말고, 그 예언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것인지 헤

아려야 한다(살전5:20-21).21)“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살아 계

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근원으로서의 성경의 가치와 소중함

을 더욱강조해야 한다.”특히예언의 은사가 교회에서사용될 때,“예언

의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예배 때마다 그 절정이 예언의 말씀이기

를 기대하기보다는, 기쁨과 기대와 즐거움에 대한 우리의 초점이 성경

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 있어야 함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

다.”다시 말하면“예언을 통한 빈번한 인도하심을 구하기보다는 우리의

삶에필요한 지침은 성경에서발견되어야함을강조해야한다.”22)

2. 예언은질서를따라수행되어야한다

고린도전서14장 29-33절은예언이질서를 따라수행되어야함을가

1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김영선, 예언과 신유의 은사에 대한신학적 이해 195

21)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61.

22) Ibid., 1061.

23) 피치스, 『능력은사』(1991), 118.

24) 예언의 말씀이 매우 간단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학 1:13의“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와 같은 말씀은 매우 짧으면서도 얼마나 큰 위

안을주는말씀인가!”앞의책, 120.

25) 앞의책, 119.

Page 9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지 능력이다. 데이비드 피치스에 의하면 영분별의 은사는 다양한 목적

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첫째, 영분별의 은사는 사람들을 구원

하는 사역에 사용된다. 둘째, 영분별의 은사는 악령의 정체를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행 13:10). 셋째, 영분별의은사는 신자들의 실족원인을 밝

혀내는 데 사용된다(마 15:16; 16:23). 넷째, 영분별의 은사는 모든 능력

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할 불의의 모든 속임수를

밝혀내는 데 사용된다. 다섯째, 영분별의 은사는 어떤 사람 안에 있는

선한 영을분별하는데 사용된다(요 1:47). 여섯째, 영분별의 은사는 어떤

다른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분별하는데 사용된다.29)

교회는 예언을 다 믿지 말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주의

깊게 분별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예언의 은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

배드리기 위하여 함께 모였을 때(고전 14:23)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예언이 나타날 때 교회는 예언을 주의 깊게 분변함으로써(고전 14:29)

는 것이기 때문이다.”26) 마지막으로 예언을 받은즉시 반드시 예언할 필

요는 없다.“예언을 위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그 은사를 반드시 즉

석에서 사용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예언은 다른 기회에 적절하

게 사용될 수도있다.”27)

3. 예언은사랑을따라겸손한자세로수행되어야한다

모든 은사 수행에 있어서 사랑은 언제나 그 동기와 목적이 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13장 2절은 이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내가 예언하

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사랑이 없으면 내가아무것도아니요.”예언하는 자가가장

근본적으로 취할 자세는 사랑이다. 따라서 예언의 은사는 사랑으로 수

행되어야 한다.“사랑은 이 은사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상호의존적인 연대관계를 형성시켜 준다.”28)“사랑은 오

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

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고전 13:4-5) 아니한다.

이런 사랑의 속성은 은사자를 겸손함으로 이끈다. 따라서 예언의 은사

자는항상매우겸손한 자세로 예언을 말해야 할 것이다.

4. 예언은주의깊게분별되어야한다

방언의 은사가 통역의 은사와 짝을 이루는 것과 같이 예언의 은사는

영분별의 은사와 짝을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분별의은사는 하나

님으로부터오는계시적 은사로서교인들의 어떤말이나 행동의 배후에

서 역사하고 있는영의 정체를 분별하기 위해하나님이 주시는 영적감

1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김영선, 예언과 신유의은사에 대한신학적 이해 197

26) 앞의책, 121.

27) 앞의책, 119.

28) 앞의책, 126.

29) 앞의 책, 129. 데이비드 피치스는 영분별을 위한 징후를 이렇게 제시한다. 귀신들린

사람의 경우:“그 사람에 관한 어떤 사실을 폭로하는 단어가 그 얼굴 위에 나타난다.

그 사람의 본래의 얼굴에 겹쳐서 제2의 얼굴(늙고 쭈글쭈글한 얼굴)이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그 사람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또는 음울한 말들은 그에게 고통

을 주는 악령이 들려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 사람의 신체 일부에 가령 불길한 동

물의 모습 같은 것이 겹쳐서 보인다”(앞의 책, 130-131). 성령을 받은 사람의 경우:

“머리 위에 불꽃 또는 혀같이 생긴 광채가 나타나거나, 머리둘레에 후광이 나타나거

나, 몸 전체를둘러싸고 광채가 서리는 경우가 있다. 주의를 집중한 가운데 사역을 행

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어떤 사람에게 임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육체적인

현상들을 분별해 내게 된다. 일반적으로 눈꺼풀이 저절로 떨리는 현상, 목을 타고 혈

기가 치솟아 오르는 현상, 몸이흔들리거나 떨리는 현상, 울거나 웃는 현상등이그것

이다”(앞의 책, 131-132).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으로 계시해 주시는 것들은

모두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롬 8:28)(앞의 책, 132), “사람들

의 판단을 통해 확실하게 입증되기 전까지는, 결코 그 사람에게 그가 악령이 들렸다

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앞의 책, 132). “악령의 실체가 외부로 드러났을 경우, 우리

는 즉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것이 떠날 것을 명하여야 한다”(앞의 책, 132). 악령

을 쫓아내는“사역을 행할 때에는 악령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제압하여야 하며, 그

결과를교회지도자들에게보고해야한다”(앞의책, 133).

Page 10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 V. 신유의의미와속성

신유(divine healing)는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질병31)이나 허약

함을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즉 의술을 사용하지 않고오로지 믿음에 의

하여 병을 치유하는 것을 뜻한다.3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유는 하나님

에 의한 치료, 즉 성령의 역사에 의한 치유라는 점이다. 신유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이 치유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나

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출 23:25).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3).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말 4:2). 이와 같은 말씀에서 우리는 신유의 능력은 모두 하

나님으로부터나오는 것임을 인식하게된다.

신유의 사역은 예수의 핵심사역 중의 하나였다(마 4:23-25). 예수는

그의12제자는 물론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유의 사역을 위임하셨다.

성경 말씀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막 16:17-

18).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약 5:15).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만이 위대한 영성

가만이 신유의 사역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비록 우리가 성숙하지

도, 온전하지도, 거룩하지도 못한 존재라 할지라도 치유의 사역을 우리

에게 위임하셨다(눅 9:1-6; 10:1-12). 그 예를 고린도 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초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취했던 행동은 가히 충격적일 정도

그것이 오도(誤導)된 인간들에 의한 것인지를 밝혀내야 한다. 성경은 이

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사랑하는 자들아 영을다 믿지말고오

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

왔음이니라”(요한 I서 4:1). 또한“믿음에서떠나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

의 가르침을”(딤전4:1) 좆는사람도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마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교회는 모든 예언에 대하여

영분별의은사를 행사해야 한다(고전14:29; 요일4:1-6).

구약의 선지자 미가야도 400여 명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거짓 영에

의한 예언이라고 단정지었다(왕상22장). 예수도 베드로의 행보를 분별

하였다. 마태복음16장에서 베드로는“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

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라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베드로

의 신앙고백이 베드로의 생각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계시해 주신 것임을 밝혀주었다. 또 다른 곳에서 베드로가“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결코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라고말

하자 예수는 베드로가 사람의 영으로 말하는 것을 보시고,“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23절)라고 꾸짖으셨

다. 베드로도요술쟁이시몬의 정체를 분별하여“내가보니너는악독이

가득하며불의에 매인바가 되었다”(행 8:23)고 말하였다.

교회에서 나타나는 예언은 영 분별을 통해서 그 예언이 사단에 의한

것인지 분변되어야 한다. 사단에 의한 예언은 교회에 큰 물의를 일으킬

수 있다. 조용기 목사의 영분별 은사체험은 우리에게많은것을시사해

주고 있다. 어떤 자매의“그 예언하는 모습이 요망스럽고 방정맞을 뿐

아니라 비둘기 같이 유순하고 사랑과 평안함이 없이 냉정하고 불안을

조성하며 파괴적이었다.…아무리 보아도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라는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 열매가 성령의 열매 같지가 않았다.

그 결과로 나는 하나님께 매달려 진부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영들 분별하는 은사를 나타내 주셔서 그 자매 속에 있는

영이더러운 영인것을분명히 묵시중에보여주셨다.”30)

1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김영선, 예언과신유의은사에 대한신학적 이해 199

30) 앞의책, 220-221.

31) 신유의 은사는 육체적 질병의 치유만이 아니라 정신적 치유도 포함되어야 한다.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67. 신유는질병과 죽음부터의 구원그리고

귀신으로부터의 구원(마 8:25; 막 3:4)만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에서의 구원을 의미하

기도한다(마1:21; 행 2:40).

32) 김창용,『나에게도 은사가 있는가?』(서울: 도서출판 영문, 2003), 208-209; 피치스,

『능력은사』(1991), 171을 보라.

Page 10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V. 질병의원인과치유방법

1. 질병의원인

인간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다주는 질병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

까? 인간에게 질병은 왜 나타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질병의 원인에 대해살펴볼 필요가 있을것이다. 원론적

으로질병의 원인은 인간의 타락, 즉 인간의 죄의결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결과는 인간

에게 질병과 죽음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죄의 결과로 인해 인류는 끊임없이 전쟁, 기근, 가난 등

을 겪게 된다. 이로 인해 인간은 질병에 걸리게 된다. 따라서 인간에게

발생하는 질병의 원인은 인간의 부주의와 잘못된 생활태도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들의 불규칙적인 생활, 과격한 주초, 과식과 과

로 등에 의한 무질서한 생활이 병을 불러오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질병의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람들의 범죄의 결과에 의해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신 28:15, 21; 요 5:14).36)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이나전혀 무기력

한 사람들에게 닥쳐오는 질병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는 없

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일 4:8). 대부분의 질병은 우리가

범하는 죄로 인해 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 다 인간의 죄로 인

해서 온다고 할 수는 없다. 때로는 인간의 죄와 상관없이 올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요한복음9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가로되 랍

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

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것이아니라 그에게서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하심이니

로 사악하고 심각한 결함들을 지니고 있어서 결코 칭찬받을 수 없었

다.33) 그러나 그러한 행동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영적인 성숙이 하나님의 사역을 위

한 필수적 전제조건이 아니었기때문이다.34)

모든 사역과 은사가 그러하듯이 신유의 은사도 목적이 있다. 궁극적

인 목적은 사람의 전인적 구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루뎀

(Wayne Grudem)은 이를 세분화시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표적의 역할을 한다. 둘째, 병든 사람들과 고

난 중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의 속성을 나타낸다. 셋째, 사역을

방해하는 질병을 제거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봉사할 수 있게 해 준

다. 넷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 능력, 지혜, 임재의

실제적인 증거를 보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35)

2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김영선, 예언과 신유의은사에 대한신학적 이해 201

33) 고전6:9-10; 10:21; 11:17-18, 21, 27 등을보라.

34) 피치스,『능력은사』(1991), 252. 신유의 은사는 신자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것이

다. 그러나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그치료의 능력이 자신으로부터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나오는것임을 명심해야한다. 조용기, 『성령론』(1978), 247.

35)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64. 데이비드 피치스는치유은사의 목적을

이렇게 말한다.“1) 어떤 사람이 온전해 지는 과정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2) 병세를

치유하거나 완화시킴으로써 육체적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3) 영혼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4) 감정을 순화시키기 위하여, 5) 성령께서 행하시는 치유사역에 관하여

이미 알고 있는 교인들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6)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땅 위

에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징표를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

기 위해서, 7) 하나님께영광을 돌리기위하여.”피치스, 『능력은사』(1991), 172-173. 36) 김창용, 『나에게도은사가있는가?』(2003), 228.

Page 10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기도할 것을 권하면서 병든 자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의 기도라고 했다.

이는 병든 자의 믿음이 아니라 장로들의 믿음을 의미한다.39) 치유 사역

에 있어서믿음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경우를 성경여러곳에

서 찾아 볼 수 있다. 소경 바디매오의 치유(마 20:29-34, 막 10:46-52,

눅 18:35-43), 백부장의 하인의 치유(마 8:5-13),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의 치유(막 5:21-34), 그리고 귀먹은 반벙어리의 치유(막 7:

31-37)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치유를 위해서는 최소한도 병자를 데리

고 온 사람(들)의 믿음이나 신유 사역을 행하는 사람(들)의 믿음, 또는

기도를 받는 병자 자신(들)의 믿음 중에 어느 한 쪽의 믿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40)

치유 사역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는 믿음의 기도이다. 기

도 외에 다른 능력으로는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막 9:29). 믿음의 기도

는 치료의 능력이 있다(약 5:16). 따라서 우리가 치유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옳은 일이다(약 4:2).41) 물론 우리가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예수가 병자들에게 품었

던 사랑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병을치유해 주신다.42)

라”(요 9:1-3).37) 또한죄의결과와사람의 부주의 외에도 사단의 역사로

질병이 나타나기도한다(행 10:38).

2. 질병의치유방법

인간의 질병은 하나님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다.

오히려 하나님은 병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병을 치료하시는 분이다. 병

을 치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병은 받아들여

지는 것이 아니라 치유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치유방법은 일반

적으로 다음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안수로 치료하는 방법(눅

4:40; 막 7:32; 막 16:17-18), 둘째, 믿음의 기도를 통한 치유방법(마 8:5;

9:29; 막 5:34; 7:24), 셋째, 말씀과 명령을 통한 치유방법(막 5:8; 눅 17:

14; 요 4:50; 5:8; 11:43), 넷째, 매개체를 통한치유방법(막 7:33; 요 9:6-

7)이다.38)

첫째로 예수나 제자들이 치유를 위해 사용한 방법은 경우마다 다르

지만, 가장 자주 사용된 방법은 안수이다. 예수는 각색 병으로 앓는 자

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으시며 병을 고치셨다(눅 4:40). 또한 병 고침을

구하는 사람들은 그냥 기도해 달라고 하지 않고“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마 9:18)라고 청한 것을 보아, 예수가 병을 고치실 때 가장

자주사용하신방법은 안수였다고볼 수 있다(눅 5:13; 행 28:8; 막 6:2).

둘째로 예수는 치유의 과정에서 믿음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때로는

병든 자의 믿음을(눅 8:48; 17:19), 때로는 치유를 위해 병든 자를 데리

고 온 사람의 믿음을 강조하였다. 야고보서5: 15절에서는 장로들에게

2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김영선, 예언과 신유의은사에 대한신학적 이해 203

37) 모두병들어야 한다.”앞의책, 229.

3 8 ) 앞의 책, 216-217. 치유 사역의 실제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는 피치스, 『능력은사』

(1991), 173-185를 보라. 특히 치유 사역자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들, 치유사역이 행

하여지기 전, 치유사역이행하여지고있는동안, 치유사역이 행하여진후에임하는 징

조나징후에대해서는 앞의책, 173-174를 보라.

3 9 )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65. 이런 예들을막 2:5; 마 15:28; 6:13;

17:20 등에서찾아볼 수 있다.

40) 피치스,『능력은사』(1991), 288. 가령기도를 받는환자에게 믿음이 없다하더라도, 사

역이끝날 무렵에는그가믿음을 가질수 있도록세심한 노력을기울여야한다.

41) 피치스는 사람들이 병든 사람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이유로 세 가지를 말

한다. 1) “그릇된 세계관: 어떤 사람들은 지극히 합리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

에,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방법에 의해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

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2) 능력에 대한 체험의 부족: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삼을 경우에는 결코 능력을 체험할 수 없다. 3) 모범적인 사례의 부재: 대부분

의 사람들은 치유사역에 참여코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효과적인 치유사

역의사례에접하지 못하고있다.”앞의책, 235-236.

42)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66. 피치스는 질병의 치유사역을 위한 지침

을 다음과 같이제시한다. 1) 성령께서임하여주시기를간구한 후, 기도를 받는사람

Page 10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교회에서 신유의 은사를 받은사람들은의학과 의술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환자들은 의사가 아니라 장로들에게 보내졌고 이들은 의

학적 지식이나 약 그리고 약초에 전혀의존하지 않고기름을 바르고 기

도하였다.44) 이것은 신앙의 기도를 의미한다.45)

V I. 치유은사자의바람직한자세와태도

1. 약의사용에대한태도

치유 사역에 있어서 약이나 의술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 치유 은사

자는 약과 의술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하나님이 약으로

사용될 수 있는 물질들을 이 땅에 창조하셨다. 약도 하나님이“매우 좋

았더라”(창 1:31)고 하신 창조 세계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한다.“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이로다”(시 24:1)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

는 감사함으로기꺼이 약을사용해야한다. 약이있는데도약 사용을 거

부하는 것은 그릇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눅 4:12). 성전

에서 내려오는 일상적이 방법이 있는데, 뛰어 내려 기적 행하기를 요구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는“병든 사람으로 하여금 약

을 복용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적절한 음식과 운동, 규칙적

인 생활 등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필요한 활동들을 권유

하여야 한다.”46)

우리가 약을 사용할 경우우리는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약을 더욱 효

과 있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한다(왕하20:7; 딤전5:23). 그러나 적

당한약도 없고약이듣지않을 경우도 종종 있을것이다. 이 때 우리는

셋째로 예수는 말씀을 통해서 질병을 고치셨다. 이 같은 예들을 우리

는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는 귀신들려 밤낮 무덤 또는

산에서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는 사람에게“더러운 귀신

아 그 사람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여 그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셨다(막

5:1-20). 또한 문둥병자 10명에게“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

라”는 말씀으로 그들의 문둥병을 고치셨다(눅 17:11-19). 이 외에도 예

수님은 말씀으로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요 4:43-54)과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고(요 5:5-9), 말씀으로 죽은 마르다의오라비 나사로를 살리셨다

(요 11:17-44). 이처럼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여러 각색 질병들을 치유

하였다.

넷째로 예수님의 제자들은“많은 병인들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다”

(막 6:13). 야고보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기름을 바르며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약 5:14-15). 그러나 기름을 바르는 것은 의학적인 것

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며 성령의 능력의 상징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

냐하면 기름은 모든 질병에 사용되는 약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43) 초대

2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김영선, 예언과 신유의은사에 대한신학적 이해 205

에게그분을 영접할 것을권유한다. 2) 병든 신체위에손을얹고(불가능할경우환자

자신의 손을 얹게 하는 등) 치유를 위해 기도한다. 3) 질병 자체에 대하여“떠나갈지

어다”혹은“낫게 될 지어다”라는 말로 명령을 한다. 4)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는 그

당사자에 의해직접 체험되는것이다. 따라서 치유의 징조가 확실하게 나타나기전까

지는 결코“당신은 치유되었습니다”라는 말을 해서는안 된다. 병세가 호전되었을 경

우에는 환자 스스로가 그것을 알게 되기 마련이다”(피치스,『능력은사』(1991), 287).

5) “성령께서 더 이상능력으로역사하지 않는다고판단될 경우에는사역을 끝맺도록

한다. 이때 환자에게는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전부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기도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되면 다시 한번 찾아와서 기도를 받으라고 권유한다”

(앞의 책, 287). 어떤 경우에는 치유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때도 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니라(막 16:18)라는 말 속에 일정한 과정을 거쳐 완전한 치유가 이

루어질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맥너트의 체험도 이 경

우에 해당 되는 것으로 본다. Francis Mcnutt, The Power to Heal (Avs Maria Press,

1977), 47-55.

43)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65. 구약에서 기름은 성령의 능력의 상징으

로 언급되곤한다(출 29:7; 삼상16:13; 시 45:7).

44) 기름외에도“진흙”(요9:6-7)과“침”(막 9:6-7)도 사용되었다.

45) 사무엘 챠드윅/한모길옮김, 『성령을 믿느냐』(서울: 성광문화사, 1976), 174.

46) 피치스, 『능력은사』(1991), 289.

Page 10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다.50) 신유 은사자 아넷트 캅스는 이렇게 고백하였다.“몇 해 동안 사역

을 하면서 나를 통해 신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많이 보았지만, 나

자신의 치료를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믿고 구해야만

했다. 나 자신이 병에걸려힘들게 지내는 동안에도다른사람들은 나를

통해 치료받은 경우가 허다했다. 나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

이 하나님의말씀을 믿고구해야 했던것이다.”51)

신유 은사자들은 치료를 위해 고집스러울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학적인 치료를 거부한다. 우리는 이들의 태도가 옳은 자세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아프면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먼저 병 낫기를 위

해 기도해야 하고 그 다음 약을 사용하거나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한

다. 이사야38장에서 보듯이 히스기야왕의병 치료사건에서 보듯이 이

사야는“한 뭉치 무화과를 취하여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사 28:

21)고 하였다. 마태복음9장 21절에서도“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병든자에게 라야쓸데있느니라”고 하였다. 이처럼 성경은 의사의

치료 역시 하나님의 뜻에 해당하는 것임을 분명히 증거한다. 따라서“우

리는 아플 때 기도해야 한다. 또한 훌륭한 의사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도우리는 하나님의완전하신뜻을신뢰해야만한다.”52)

2. 병이치유되지않았을경우의자세

인간의 모든 병은 다 치유 받을 수 있을까? 예수는 자기에게 찾아오

는 사람들의 모든 병을 치유해 주었다(마 4:24; 8:16; 막 1:32; 눅 6:18-

19; 요 5:2-3). 하나님은 현대 의학이 불치의 병으로 판단한 병을 고치

실 수 있고 또한 고치신다. 이 같은 사실은 교회 역사 속에서 발견되고

하나님이 그 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병이 위급하

지 않은 경우에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

는 기회를 원해서, 아니면 의술에 의존함으로써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위해서, 혹은일부약들이 가지고 있는부작용을피하기 위해서 약

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마음을 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

러한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선택적인 문제라

고 보는것이옳을듯하다.”47)

우리는 신유 은사자들의 왜곡된 치유신학으로 인해 고귀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사건들을 듣게 된다.『구약 예언서 개론』(An Introduction to

the Ole Testament Prophets)48)을 저술한 침례교 목사 호바트 프리먼

(Hobart Freeman)과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의 누이인 루스 카터 스

태플턴(Ruth Carter Stapleton) 그리고 아넷트 캅스(Annette Capps)의

예가 그렇다. 프리먼은1960년대 중반에 신유의 기적에 매료되어 하나

님이 자신의 소아마비를 치료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은사주의에 빠

진 프리먼은 현대의술이 고대 마술과사교에서 나온것으로 믿고 의학

적인치료를 경멸하였다. 그는의사의 치료를 받는것은곧 마귀의 세력

에 빠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의학적 치료를 받으면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을 가지고 있었지만 프리먼의 가르침을 따랐다가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프리먼은 기소당해10년간 교도소 생

활을 하였고, 1984년 12월 8일 다리 종양 합병증에 의한 폐와 심장 질

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병은 현대의학으로 치료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그의잘못된 신유신학 때문에 그 자신은 물론 다른사람들까지죽

음을 당하게 하였다.49) 카터 스태플턴도 신유 은사자였는 데 그녀의 신

념 때문에 암 치료를 거부하다가결국그 병 때문에1983년에사망하였

2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김영선, 예언과 신유의 은사에 대한신학적 이해 207

47)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65.

48) Hobart Freeman,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Prophets (Chicago: Moody,

1969).

49) 존 맥아더/생명의샘편집부옮김, 『은사』I I(서울: 생명의 샘, 2008), 77-78.

50) 앞의책, 79.

5 1 ) Annette Capps, Reverse the Curse in Your Body and Emotions (Broken Arrow,

Okla: Annette Capps Ministries, 1987), 91-92.

52) 맥아더, 『은사』I I(2008), 119.

Page 10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것을 하나님의 은사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께 그 가시

(질병)를 위해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응답

되지 않았다. 그것은 바울이 의심을 했거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었

다. 그것은 바울의 연약한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분하게 드러

나고 그의 능력이 완전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바울이 교만

하거나 자부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바울

은 자신의 가시가 은사임을 알았다. 바울은 그 가시가자기로 하여금 자

고하지 못하게 하려고, 즉 주 앞에 겸손하게 하기 위해 자신 안에 두신

것임을 깨달았다(고후12:7).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12:9)고 말씀

하셨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의 가시를 통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

시고 또한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심을 보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가시가 하나님 은혜가 그에게 임하는 통로임을 인정하였다. 그

래서 바울은 자신의 가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58) 시편 기자

도“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

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라고 말했다. 시편 기자의

고백과 바울의 경험에서보듯이 우리가 병 고침을 위해서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고쳐 주지 않기로 했다면, 우리는 바울처럼 범사에

감사하고(살전5:18)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더 가

까이 나아가게 하고 주님의 뜻에대한순종을 더욱 견고케 하실것임을

인식해야한다.

3. 겸손히행하며교회에복종하는자세

“치유사역에는 자기가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고 있다는 자만심이 따

있다.53)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불치병을 다 고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전12:9).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뜻을 따라 병을 고치신다(요

9:3-5). 때로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치유를 허락하지 않

으시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병의 치유를 위한 기도가 모두 다

응답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54) 이런 경우 우리는“하나님을 사랑

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이루는 것”(롬 8:28)임을기억해야한다.

신유 은사자들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으라고 권했다가 아

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병든 자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생각

해야만 한다.55) 우리는 오늘날도 하나님은 자주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시며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으면 고침 받을가능성이 얼마든지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

히 임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신자들은 치유를

경험하기도하지만 아직도 지속적으로 병을겪어야 하고결국은 죽음도

거쳐야 한다는 것을말할수 있어야 한다.56)

우리는 어떤 사람의 병이 치유되지 않았을 때 그 사람이 믿음이 부

족하다고 또는 숨기고 있는 어떤 죄가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경우에 고린도후서12장 7-12절에 나타난 바울의 경험이 도

움이될 수 있을것이다. 아는바와같이바울에게는질병으로 간주되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57) 바울이 처음에 자기가시를 느꼈을 때, 그는그

2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김영선, 예언과 신유의은사에 대한신학적 이해 209

53) 사도 시대 이후 성경에 나타난 신유를 포함한 기적들은 중단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를 역임한Benjamin B. Warfield 등) 신유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도계속 중단없이이어지고 있다. 교회사에서 치유의 은사를 행사한 주요

인물을 위해서는피치스, 『능력은사』(1991), 238-239를 보라.

54)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67.

55) Ibid., 1067.

56) Ibid., 1067.

57) 바울에게 있어서“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신약해석에 있어서 난제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어떤 종류의 질병이거나 육체적 또는 정신적 고통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58) 존 쾨니히/고종혁 옮김,『성서적 관점에서 본 교회를 세우는 은사』(서울: 성광문화사,

2007), 194-195.

Page 10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V I I. 결론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말이며, 성경의 가르침과

같이 동급으로 취급될 수 없고,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제한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것

이다. 예언은 사람과 교회의 덕을 세우고 불신자들에게 확신을 주는 징

표의역할을 하는등의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예언은 사랑과 겸손

한 자세를 가지고 성경의 가르침을따라수행되어야한다. 또한그 수행

되는 예언은 영분별에 의하여 성령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사단에 의한

것인지 분변되어야한다.

인간의 죄의결과로 발생한 질병은 치유되어야 한다. 병의 치유를 위

해서 우리는 안수, 믿음의 기도, 말씀, 기름 바르는 방법 등을 사용할 수

있다. 신유 은사자는 약과 의술도 하나님이 주신 치유 방법이기 때문에

배제하지말아야 한다. 또한모든병이치유되지않는다는것을알고바

울의 가시 신학과 같은 대처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신유의 은사도

예언의 은사와 같이 겸손한 자세와 교회에 복종하는 자세를 가지고 수

행되어야한다.

예언과 치유 은사는 교회 성장의 힘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에

서의 예언과 치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가장 자연스럽게 보

여 주는 사역이 되며,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이 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

러나고,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성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병은 치

유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의 사역을 통해 들려져야 한다. 오

늘도 하나님은 예언과 치유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신

다.

르기 쉬우며,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

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고, 순간순간 회개하

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59) 피치스는 이에 대한 한 사건을

소개해 주고 있다.“제프리스(Welshaman Stephen Jeffreys)는 놀라운

치유사역을행하였으며, 수천명의사람들(특히류마치스성관절염 환자

들)이 그의사역을 통해축복을 받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열린한

대규모 집회에서 역시 수백 명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자 그

는 의기양양한나머지“온세상이 내 발 밑에있도다”라고 선언했다. 여

기서 그의사역은 끝나고 말았다. 그는 병이 들어 결국 죽고 말았다. 그

것도류마치스성관절염으로!”60)

치유 사역자는 자기 자신을 늘 돌아보며 겸손한 자세로 은사를 사용

해야 한다.“자기 스스로 온전한 존재가 못되면서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

려고 하는 것은 극히 모순된 처사가 아닐 수 없다.”61) 이와 관련하여 예

수는 이렇게 가르치셨다.“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4-5). 따라서 치유 사역자는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성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광을 나타내기 위해 은사를 겸손히 행사하며,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고,

교회 지도자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 치유 사역자들은 그들의 사역의

오용과 남용을 막기 위해서도 교회 지도자의 가르침과 지시에 순종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교회 전체의 사역이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그들의 치유 사역은 교회의 인준을 통해 그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다. 그리고 때로 그들의 사역이 잘못되었을 경우, 교회는 권위를 가지

고 같은잘못이 계속해서 일어나지않도록 지도할 수 있을것이다.62)

2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김영선, 예언과 신유의은사에 대한신학적이해 211

59) 피치스, 『능력은사』(1991), 184.

60) 앞의책, 184-185.

61) 앞의책, 255.

62) 앞의 책, 254-255. 치유의 은사를 받았음이 분명히 입증될 때 교회는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권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

해 주는것이지혜로운처사일것이다. Grudem, Systematic Theology (2007), 1067.

Page 10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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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cum, Bruce. Prophecy: exercising the prophetic gifts of the Spirit in the

church today. Ann Arbor, Mich: Word of Life, 1976.

주제어

예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예언 은사자의 바람직한 자세, 질병의 원인, 치

유 방법, 치유은사자의바람직한자세

(gift of prophecy, gift of healing, speaker’s good posture on

prophecy, causes of illness, method of healing, good posture of those

who have gift of healing)

접 수 일 2009년 07월 26일

심사(수정일) 2009년 08월 26일

게재확정일 2009년 12월 15일

2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김영선, 예언과신유의은사에 대한신학적 이해 213

Page 10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and medical practice is the way of cure given by God. Fourth, we

must also prepare the theology of replacement as like Paul’s thorn

theology with knowing that no all illness is cured. Fifth, the gift of

healing must be carried such as the gift of prophecy with mind of

humility and obeying the church leader.

In conclusion all of discussion in this article are summarized and

expects that the gift of prophecy and healing can be power for the

church growth because the mission of prophecy and healing show not

only Jesus Christ’s presence unartificially and a sign for unbeliever

indicating that God is alive but also the glory of God and opportunity

for growing our faith and sanctification. This day God has been

building his kingdom by the mission of prophecy and healing.

Theological Understanding on the Gift of Prophecy and Healing

Kim, Young Seon

Professor

Hyupsung University

Whasung, Korea

This article discusses characters of prophecy and speaker’s good

posture on prophecy in the field of prophecy and meaning and

attributes of healing, causes and method of illness, good posture of

those who have gift of healing in the field of healing each of which

represents the word-charismata and deed-charismata.

The first part examines that the prophecy is not the world of God

but the word of man, not the same as like teaching of the Bible, and

not only special man or limited man but also every one who has

revelation from God can say prophecy. The article indicates that the

prophecy has a purpose which is to give virtue for man and church

and to give an sign of assurances for unbeliever. This prophecy must

be carried on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e Bible and with mind of

love and humility and must be judged whether it is acted by the Holy

Spirit or by the Satan.

The second part shows five points on the healing. First, the illness

was causes by result of man’s sin. Second, in order to cure the illness

there are four methods that are the laying on of hands (in prayer),

prayer of faith, by the Word of God, and by oil. Third, we must accept

the medicine or medical practice to cure the illness because medicine

2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김영선, 예언과 신유의은사에 대한신학적 이해 215

Page 10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신학의과제와설교의과제의일치성에대한연구

칼 바르트의신학과설교를 중심으로

박성규(장로회신학대학교교수)

I. 문제제기

1. 설교와하나님의말씀

먼저 전혀 조직신학적인 주제로 보이지 않는 설교라는 주제를 조직

신학적 입장에서고찰하고비평해 보려는 시도는 한편으로는낯설어 보

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험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설

교하면 흔히 조직신학의 주제라기보다는 실천신학의 주제로 먼저 분류

시키려는 선입견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설교라는 주제는

단순히 실천신학의 주제이기 이전에 조직신학의 주제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설교”하면곧바로 실천신학의주제로 분류해서예배학의한

부분으로 치부해버리기 쉬운데, 이러한 이해가 곧 설교의 위기를 불러

왔던 예들을 교회사와 신학사(神學史)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 대

표적인 예가바로종교개혁이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신학적

인 원인제공을 한 중세의 설교 이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설교가 단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217-252

Page 11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나님의 교회로서의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기실 설교는 교회의 내적인

근거가 되고, 교회는 설교의 외적인 토대가 된다. 따라서 전통적인 교의

학, 특히 종교개혁적인 개신교 교의학에서 교회론을 다루기에 앞서 반

드시은총의 수단으로서의 말씀론과 성례론을다루었던것은결코우연

히 된 일이아니다. 이러한 교의학적인배열순서는 교회의 근본바탕은

설교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 만큼 설교는 교회에서 중

요한, 아니중심된 위치를 차지한다고볼 수 있을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교회와 예배의 중심된 위치를 차지하는 설교란 무

엇인가? 설교에 대해보다더 본질적이고도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

보고자 한다. 즉,“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가?”하는 질문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연시 되고 있는 교회와 사회에서“설교가 하나님

의 말씀인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전혀 낯선 질문이거나 아니면 궤변

과 같은질문으로 치부될 수도있을것이다. 그렇다면이 질문을 다르게

던져 보자.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

이며, 또 어느 선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겠는가? 실재로 설교자

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특정한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경우를 많

이 경험하게 되는 현실에서 이런 질문은 신학적 대답이 요구되는 질문

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전혀 새로운 질문이 아니라

신학과 교의학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며 제기되어 왔으며, 특히 바

르트가 심도 있게 고민했던 질문이란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이 문제에

대한논의를전개해 나가보기로하겠다.

2. 설교의독점문제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연시함으로써 발생할 위험요소는 없는가? 즉,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

으로 당연시됨으로써 설교가 특정인들에게 독점되고, 그럼으로써 설교

가 남용되고 악용될 위험가능성은없는가? 우리는 여기서 설교가 특정

순히 교회성례의 한 수단혹은 부록으로 전락되면서설교의 위기가 왔

고, 이 설교의 위기는 곧바로 교회의 위기로 연결되었으며, 이는 곧 종

교개혁의 역사적 필연성을 야기했던 것이다. 설교는 단순히 교회 예전

의 한 부분이 아니라, 설교가 오히려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특징이며,

좀 더 적극적으로말하자면설교가 교회를 가능케 하는기반이 된다. 이

런 의미에서 본고의 주제는 설교가 단순히 실천적인 예배학의 한 부분

으로 치부되어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는기회가 될

것이고, 또 설교의 본질을 재확인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는 점에서 연구의 가치가 충분히 있을것이다.

가톨릭 신학자라면 모를까 개신교 신학자라면 설교가 교회 예배의

중심이라는 명제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교

회의 권위와 예전에 하나님의말씀과 동등한 권위 내지는 그보다 더 높

은 권위를 부여하던 가톨릭 교회의 신학자들조차 오늘날에는 태도를수

정하여 위의 명제를 수용하려는 학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 설교는 교회

가 교회되게하는가장중심적인기능과 역할을 감당할 뿐만아니라, 교

회에존재론적인의미를 준다고 볼 수 있다. 설교가 빠져버린 교회를 상

상할 수 있는가? 설교 없는 예배를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에서조차설교없는교회가 가능할 것처럼 인식되

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배가 영성 위주의 예전으로 회귀하고 설교의 강

대상이 무대로 전락하면서, 개신교회가 가톨릭 흉내를 내려고 하는 현

실에서 설교의 신학적 문제를 되짚어 보는 것은 한국교회에 종교개혁

정신을 회복하는시도가 될 수 있을것이고, 이는특히개혁교회의 신학

적 정신인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와도 부하되는 일이

될 것이다. 교회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교회에서 하나님

의 말씀선포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개혁 신학은 교

회의 표지(notae ecclesiae)로서 순수한 말씀 선포와 그 말씀에 일치하

는 성례전 집행두 가지를 대표적으로들고있는것이다. 교회는 말씀이

선포되는 장이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가치를 지니며, 하

2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19

Page 11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야 할 것이다.

3. 설교와신학의관계문제

신학은 원래 설교였다. 설교가 곧 신학이었고, 신학이 곧 설교였다.2)

이는 어원적으로 따져 봐도 그렇고, 성서의 형성사를 보아도 그렇고, 또

우리 개신교 신학의 근원인 종교개혁 사상의 측면에서 보아도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설교가 더 이상신학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는데

에 문제가 있다. 설교가 더 이상 신학이 아니어도 된다는 사고, 거꾸로

신학은 더 이상 설교와는 상관없어도 된다는 사고는 신학사(史)에서 끊

임없이 있어왔다.

설교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많은 신학자들가운데 특히 칼 바르트

에게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

는 그가 다른 신학자들보다 뛰어나게 설교를 잘 했다거나 아니면 새로

운 설교학을 창시해서도 아닐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그가20세기에 설

교의과제를 신학과제와 접목시킴으로써설교의 과제와 신학의 과제가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은 아니지만, 새롭

게 발견하고이를새로운 방식으로천명했기때문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세 가지 현실적이고도 신학적인 문제제기를 근거

로 삼아 우선, 바르트의 신학이 지속적인 변천의 과정 속에서도 일관성

인에게 독점됨으로써 발생한 복음의 진리의 훼손에 대항하여 종교개혁

을 일으켰던마틴루터의정신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러한 정신을 우

리는 마틴 루터가1520년에 썼던 대표적인 세 논문에서 찾을 수 있다.

그중에 특히 그의 논문“독일 귀족에게 고함(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v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 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루터는 이 논문에서 특히 말씀해석의 독점의

문제를 제기하고있기때문이다.1) 그에따르면 로마가톨릭 교회는 삼중

으로 고립되고 말았다. 첫째는, 사제들과 평신도들을 사제서품을 통해

너무 엄격하게 분리시켜놓음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고립을 초래하고말

았다. 이는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근거 없이 사제에게 특권을 주고 말았다

는 것이다. 둘째로, 교황과 가톨릭주의자들은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스

스로 주장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고립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에 반대

해서 루터는 모든그리스도인들이신학적인 판단력을 지니고 있으며성

서를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셋째로, 오직 교황만이 종교회의를 소

집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가톨릭 교회는 고립되고 말았다는 것이

다. 루터의 관점에 따르면 오히려 자유로운 교회회의가 교황의 세속적

인 간섭을 막아야 한다. 교황은 황제 위에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으

며, 오직 설교와 죄 용서의 선포에서만 황제 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루터의 지론이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두 번째 항목이다. 성서 말

씀에 대한 해석이 비록 사제라 할지라도 독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런 종교개혁 정신을 너무 망

각하고 있는 것은아닌가? 말씀 해석과 말씀선포에 대한독점의식으로

말씀을 임의대로 해석하고, 말씀을 사사로이 해석 또는 선포하고, 혹은

하나님의 말씀 아닌 인간의 말만 선포하고 있다면 루터가 종교개혁 당

시 로마가톨릭 교회를 향해 쏟았던 화살을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돌려

2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21

1 ) W A 6; 404-469.; Cf. Beutel, Albrecht, hrg., Luther Handbuch (Tübingen: Mohr

Siebeck, 2005), 266f.

2) 참고, Wolfhard Pannenberg, Systematische Theologie I (Göttingen: Vandenhoeck &

Ruperecht, 1988), 11.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신학이 오늘날에는 학문적인 전문분야로

이해되고 있지만,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스토아 학파의 전통에서는 원래

“시인들의 연설이나 노래 속에 들어 있는 신성에 관해 알려주는 로고스”였다. 이는2

세기의 기독교적인 표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스에

따르면 신학이란 로고스에 관한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로고스 자체의“하나님 선

포”였다고판넨베르크는밝히고 있다. 따라서 신학자는하나님으로부터영감을받아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이고, 이러한 선포가 신학이다. 이러한 관점은 후대의

신학적인언어용법에서도그대로살아있다고 판넨베르크는말하고있다.

Page 11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신학,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

해 부르시고, 세우시고, 파송하시는 교회를 통해 시대와 역사에 계시하

시는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 그 주어진 말씀을 증거하는 신학이었다. 바

르트의 신학을 쉽게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신학은 그야말로“되어감의 신학(Theologie im Werden)”이다. 따

라서 그의 신학의 모든 저작들에‘공사중’이라는 팻말을 붙여야 할 정

도로 그의 신학은 진행형의 신학이었다. 따라서 바르트의 신학을 한마

디로“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또는“신정통주의 신학”이라

고 부르는 것도, 또는“변증법적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또는“교회교

의학신학”이라고 부르는 것도모두적용하기에는조심스러운칭호들이

다. 사실 바르트는 스위스의 한 라디오 방송“스위스 라디오 D R S ”

(Schweizer Radio DRS)와의 인터뷰에서“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자유

주의 신학자라고 부르는데, 당신도 동의하는가?”라는 질문에 스위스 특

유의 억양으로“네인(Nein, 아니오)”이라고 분명하게 대답한다.3)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심해야할 칭호가“신정통주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이는

바르트의 신학에 대한많은오해와 선입견을불러일으키는 칭호이기때

문이다. 사실 바르트의 신학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독일에서는 바

르트의 신학을“신정통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변증법적신학”이라는 것도 사실은 시간적 제한을 반드시 염두에 두고

불러야 할 칭호다. 즉, 바르트가1921년 괴팅엔 대학의 신학부에“유급

교수(Honorarprofessor)”로 부름을 받고 이듬해 1922년“변증법적 신

학”이 결성되고 그 다음해인1923년 변증법적 신학의 기관지인“시간들

사이에서”(Zwischen den Zeiten)가 출간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기관지가 바르트의마지막 글인“결별”(Abschied)이 발표되면서 해체되

던 해인1933년까지를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을 유지하고 있음을 밝힐것인데, 그러한 일관성은다름아닌“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에 있음을 증명해 보고자 한다(I I). 그런 다음 바르트의 신

학이“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에서 일관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

는 당연한 귀결점으로서“설교의 과제와 신학의 과제의 동일성”(I I I)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바르트가 신학의 과제와 설교의 과제를 동일

한 것으로 규정했다면 이제 바르트 자신이 한 설교들에서 그런 신학적

일관성과 과제의 동일성이 실재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실재로 바르트의 설교의 시대적 변천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I V). 그런다음마지막으로바르트의 신학과 설교의 과제의

동일성의 관점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설교의 방향 설정을 위한 제언

을 해보고자 한다(V).

I I. 바르트의신학적변화속의일관성: 하나님의말씀의신학

20세기의 다른 신학자들과는 달리 바르트의 신학을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그의 변증법적 신학의 동지들이었던 불

트만(R. Bultmann)의 신학을 실존주의적 케리그마 신학, 브룬너( E .

Brunner)의 신학을 자연신학, 그리고 그 다음 신학 세대들 중 대표적으

로 몰트만(J. Molltman)의 신학을 희망의 신학, 판넨베르크(W. Pannen-

berg)의 신학을 보편사의신학으로특징지어부를수 있는반면에, 바르

트의신학은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가쉽지않다. 이유는 그의신학이 끊

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사실 바르트만큼이나 신학적 변화의 굴곡이 심하고 또 그 변화

의 폭이 넓은 신학자도 찾아보기 드물 것이다. 신학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이 아니며, 또 신학이 책상에서만 만들어질 수 없으며, 따

라서 신학이 강단에만 머물 수 없다는 신학 그 자체에 대한 진리를 그

의 신학적 여정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신학은 끊임없이 자신의

2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23

3) Karl Barth, “Wortmeldungen: Vorträge, Reden und ein Interview,” Schweizer Radio

DRS: Radio-Originalaufnahmen Karl Barths (Zürich: TVZ , 2002. -2 Audio-CDs).

-3-290-17249-X.

Page 11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을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팅엔의 신학부에 개혁신학 전담 교

수로 초빙을 받을수 있었던 것은바로 그가목회하면서 자신의 서재에

서 집필한 저 유명한『로마서 강해』때문이었다.5) 그의 아카데믹한 신학

여정의 출발 자체가 바로“하나님의 말씀”인『로마서 강해』였던 것이다.

그는 말씀에 집중함으로써 목회 현장에서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세계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신학여정은 바로이렇게 로마서, 즉“말

씀”으로부터 출발해서 교회교의학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신학

원리와 방법론, 즉 말씀 중심의 원리는 그의 마지막 대작『교회교의학』

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 신학 여정에 걸쳐 일관성 있게 유지되고 있다.

그의『교회교의학』이 다른 모든 교의학 주제들 가운데“말씀론( D i e

Lehre des Wortes)”으로시작하고있으며, 이 말씀론 자체가 그의『교회

교의학』의 프롤레고메나가 되고 있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은 바르트의 신학

여정전부를 일관성 있게정의할 수 있는틀을제공한다. 앞서말했듯이

바르트의 신학은 로마서를 주석하는 것 즉, 사도 바울의 말씀들 속에서

되찾게 된 하나님의말씀을 해석하는것이그 출발이었는데, 바로이 점

이 바르트의 신학을 독특하고 고유한 신학으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

다. 바르트 자신은 이를『로마서강해』1판 서문에서“우선적으로 유급교

수가되는길을열어주었고, 다음으로는 학문의 하늘로 가는길을열어

주었다”6)고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윙엘의 판단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는 명칭은 바르트가 그의 자유주의 신학의

스승들과 결별한 후 무수한 신학적인 변화들과 굴곡들로점철된 신학여

정을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그의신학의 과정이 전체적으로는어떤연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명칭이기도 하다.7)

리고“교회교의학신학”혹은“도그마 신학”은 그가 1932년 본(Bonn)에

서“교회교의학”1권을 쓰면서부터 그의 신학 여정이 끝나는1967년까

지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신학은 발전의 단계마다 나름대로

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신학에 칭호를 붙이는 일에조심스

러워야 한다. 따라서 바르트 신학을 정의내릴 때 그 때와 장소 그리고

시대적 정황에 대한 명시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모든 조심스

러운 전제를 염두에 두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신학 전체를

한마디로 정의내리는 시도를 해 본다면, 무엇이 가장 적절한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이에대한가장 설득력 있는대답은 역시 에버하르트 윙

엘(E. Jüngel)의 견해처럼“하나님의말씀의 신학(Theologie des Wortes

Gottes)”4)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신학은 말씀에서 출발해서

말씀으로 마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그의 신학을“말씀의

신학”으로 특징짓게 하는가? 굳이따진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 아

닌 신학이 어디있겠는가? 말씀을 전제로 하지않은 신학이 또 어디있

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신학을“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으

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가 바로 오늘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테마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바르트의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으로 성격화됨으로써 결국은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의 형태인 설교와 불가분의 밀접한 관련을 필연적으로 맺게 되기

때문이다.

바르트의신학을“하나님의말씀의 신학”으로특징지을 수 있는이유

가 몇 가지 있다. 그 중 첫 번째 이유는 우선 그의 신학 이력에서 독특

한 출발과 관련되어 있다. 바르트는 사실 아카데믹한 신학자로 출발하

지 않았다. 그는사실신학으로 박사학위를받은후에교수로 초빙된 것

이 아니었고 스위스 자펜빌의 목사로 그의 넓은 의미에서의 신학 여정

2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25

4) Eberhard Jüngel, Barth-Studien (Zürich, Köln: Gütersloher Verlaghaus, 1982), 127.

본 논문에서 바르트의 신학을“하나님의말씀의 신학”으로 성격 짓는 점은윙엘의 관

점에크게의존하고 있음을밝힌다.

5) Ibid. 128

6) K. Barth, Der Römerbrief 1. Aufl. (Zürich: TVZ, 1919), (Unveränderter Nachdruck

1963), 1-4.

7) 참고, Jüngel, Barth-Studien (1982).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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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10) 기독교 교의학에서 프롤레고메나가 갖는의

미는 대단히 크다. 프롤레고메나는 그 교의학이 갖게 되는 신학적 성격

과 특징과 사상적 성향뿐만 아니라 신학 방법론과 인식 방법론까지도

결정짓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교의학 전체를

담는 그릇이요, 그 교의학의 방법론적인 틀이요, 그 교의학을 한 눈에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런데 바르트가 교의학의 서론이어야 할 프롤레고

메나에서 벗어나서 본론인 기독론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서론인 프롤레

고메나에서할 말을 다할수 있다고 본 것은프롤레고메나가갖는 중요

한 교의학적인 의미 때문만은 아니다. 바르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있다: 즉, “Wir sollen als Theologen von Gott reden. Wir sind

aber Menschen und können als solche nicht von Gott reden. Wir

sollen Beides, unser Sollen und unser Nicht-Können wissen, und eben

damit Gott die Ehre geben.”11)“시간과 영원의 무한한 질적 차이”(Der

unendliche qualitative Unterschied zwischen Zeit und Ewigkeit)를 강

조하고,“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Gott ist im Himmel

und du auf Erden)라는 신학기치 아래 하나님의 전적 타자성(totaliter

aliter)을 강조하던 변증법적 신학 시기의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었다. 따라서 우리 인

간은 하나님에 관해서 제대로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방

식대로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해야 한다”와

“할 수 없다”의 긴장관계, 즉“필연성”과“불가능성”의 긴장관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신학이 바로“변증법적 신학”이다. 이렇게 함으로써“인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보다도 더 적합하게 바르트 신학의 연속성을 드

러내 줄 수 있는 명칭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는 그의 도그마 신학, 즉

교회교의학의 신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그의 교회

교의학에서는“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란 표현의 사용 빈도가 점차 줄

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교회교의학I I/1부터는 신학의 중심

개념을 담당하는 기능이“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개념에서“예수 그리스

도”라는 이름으로 점차 옮겨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하나님의 말씀”개념이“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의해 완전

히 밀려났다고는 볼 수는 없고, 오히려“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개

념이“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의해 내용적으로 보다 더 분명하게

되고 구체화 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바르트의 후기 신학, 즉 교

회교의학 신학의 단계도 역시“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으로 규정지어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서 바르트 후기 신학에 중심적으로 나타나는“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개념이 말할 수 있는 것

의 본질적 내용이다.8) 사실 바르트가 교회교의학I I/1부터“하나님의 말

씀”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데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지당

시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던 불트만과 그의 학파의 케뤼그

마-신학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을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것

이 윙엘의 판단이다.9)

그리고 바르트의 신학을“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는두 번째이유는 그가1922년에행한변증법적신학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보인다고 할 수 있는 강연“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

씀”(Das Wort als Aufgabe der Theologie)에서 했던 주장과 관련이 있

다. 그는 이 강연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끝맺고 있다:“신학이 프롤레

고메나(Prolegomena)를 넘어서 기독론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그리고

꼭 그렇게 해야하는가? 프롤레고메나로사실상 모든것이 다 말해졌다

2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 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27

8) Ibid.

9) Ibid.

10) K. Barth, “Das Wort Gottes als Aufgabe der Theologie,” Das Wort Gottes und die

Theologie, Gesammelte Vorträge, Bd.I, (Zürich: TVZ, 1924), 178.

11) Ibid, 158.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대표적인 바르트의 명제이

기에 일부러 독일어 원문으로 실어 보았다. 번역하면 이렇다:“우리는 신학자로서 하

나님에 관해말해야만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며, 그러한인간으로서우리는 하나

님에 관해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즉 우리의 (말) 해야 함과 할 수 없음을

알아야하며, 바로그렇게함으로써만우리는 하나님께영광을 돌릴수 있게된다.”

Page 11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스탄트주의의 실증-자유주의 혹은 자유-실증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그와 동시에 인간신(Menschgott)에 대항하여,‘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을 주창하는 것이그 당시젊은목사들이었던우리가 하고자 했던 일이

었는데, 이는 성서에 이미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고, 또 종교 개혁가들에

의해 모범적으로 추진되었던 일이었다.”14) 이어서 바르트는“‘변증법적

신학’이라는 이름은 그 해에 어떤 이름 모르는 구경꾼에 의해 붙여진

것이었다”15)고 덧붙이고 있다. 바르트 자신의 이러한 분명한 입장표명은

바르트의 신학을“변증법적 신학”이라기보다는“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으로 규정짓는 것이 훨씬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바르트의 소위 말하는“변증법적 신학”과의 결별 그 자체가 이

미“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에 대한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더 분명해진다. 앞서 말한 대로 바르트는 프롤레고메나에서 해야

할 말은다할수 있다고 보고, 따라서 본론인 기독론으로나아가는 것에

대한 회의를 표시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변증법적인 관심 뒤에는 이

미 그러한 변증법적인 길 너머에 시작되는 보다 더 큰 관심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하나님에 관해서 말해지는 곳에서 하나

님 스스로가 말씀하실 가능성은 그러한 변증법적인 길 자체에 있는 것

이 아니라 그 변증법적인 길이 끝나는 바로 그곳에 있다”16)는 것이다.

바르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하나님의 자유”에 대

한 사상 때문이었는데,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영과 마찬가

지로 그 어떤 것에도 메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하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신다”는 말은 신학에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

인지를 드러내 주고있다.“바르트 자신의 변증법적인길이끝나는 지점

간을 향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중심으로 확립하고자했던 바

르트의 의도는 어느 정도 실현 가능한 것이 되었고,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바르트신학을“하나님의말씀의 신학”으로규정지을수 있게된다.

여기서“변증법적신학(Dialektische Theologie)”이라는 칭호에 대해

서도잠간언급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바르트 자신이 이 칭호에 대해

부적절함을 강조했고, 그럼으로써 그의 신학이“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으로특징지을 수 있는가능성을더욱분명히 해주고 있기때문이다. 일

반적으로“변증법적신학”이라 함은일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독일과

스위스에서매우빠르게 확산되어많은 영향을 미친신학운동을일컫는

데,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F r i e d r i c h

Gogarten), 그리고 칼 바르트(Karl Barth)와 그의 친구 투르나이젠

( T h u r n e y s e n )에 의해 주도되었다. “변증법적 신학”이란 명칭은 물론

“변증법”이란용어가 가장많이사용된 데에서 연유하기도했지만, 무엇

보다도 앞에 언급한 그 대표자들의 결정적인 사상들, 특히 바르트가 자

신의『로마서 강해』2판을 쓰는 목적을 신학적“사안의 내적인 변증법”

(die innere Dialektik derSache)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서문에서 밝

힌 데에서 가장 크게 연유하고 있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와 그

의 변증법적신학동지들은 이러한 칭호가 자신들의신학을 나타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고, 오히려 자신들의 신학을“하나님의 말씀의 신

학”으로이해되기를 바랐다. 1933년 변증법적 신학의 기관지인「시간들

사이에서」(Zwischen den Zeiten)와「결별」( A b s c h i e d )을-이「결별」은

실제로 그때 그가 쓴 논문의 제목이기도 하다13)-선언하면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시간들 사이에서」를 창간할때에만 해도 우리

가 하고자 하는일에 있어서 모두가 뜻을 같이하고있었다.”“신 프로테

2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29

12) E. Jüngel, Barth-Studien (1982), 127.

13) Cf. K. Barth, “Abschied von den ‘Zwischen den Zeiten’,” ed. Jürgen Moltmann,

Anfänge der dialektischen Theologie, Teil I I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67),

313-330.

14) Ibid, 536-544, 특히 536.

15) Ibid.

16) K. Barth, “Das Wort Gottes als Aufgabe der Theologie”(1924), 156-178, 특히178.

K. Barth, “Brief von Barth an Thurneysen vom 19. Dez.1922, in Briefwechsel,”

GA. Bd.2, 125-127, 특히 127.

Page 11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지난 몇 년간 가르쳤던 경험을 통해 얻은 내 나름의 안경으로 그 연구

를 다시들여다보니, 그것은 우선내가찾고또 발견한 안내서와는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19) 괴팅엔 교수 시절 바르트에게서 이런 인식은 더욱

분명해진다. 즉, 지금까지 해왔던 자신의 신학적 인식이 모두 종교개혁

신학이 아니라, 종교개혁 이전 신학의 입장을 대변해 왔음을 새롭게 자

각한 것이다.“직접적으로 종교개혁 신학이 아니라, 종교개혁이 태동한

모태가 되었던 명목주의, 어거스틴 신학, 신비주의, 위클리프 등등의[종

교개혁 이전 신학들] 사이의 어느 구석에”있는 입장을 그는 대변해 왔

다고 느낀 것이다.20)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이제야 나

는 종교개혁가들과그들이 가르친 복음, 즉 죄인의칭의와 성화에 관한

복음, 신앙에 관한, 회개와 선행에 관한, 그리고 교회의 본질과 한계 등

에 관한 복음을 올바르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

을 완전히 새롭게 배워야만 했다.”21) 이로써 무비판적인 자세는 아니지

만, 아주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바르트는“‘종교개혁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괴팅엔 당시의 신학적 작업은 바르트를 불가

항력적으로“종교개혁가들의 성서이해와 하나님 이해에로 인도했다.”2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쿠터를 넘어 블룸하르트를 거치는 우

회로에서 배웠던 것이 완전히 뒤로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아니었다.”23)

이런 사실은 특히 그가1922년 로스톡(Rostock)의 조직신학자 파울 알

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에 신학이 가능하고,

바로 그 때문에 우리도 거기서 계속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있다는 사

실을 인식한 지점이었다.”17) 바르트의 이러한 신학적 기본 인식의 전환

을 바로그의변증법적신학으로부터“유비의신학”으로의“전환”이라고

한다.18) 그렇다고 한다면 바르트의“유비의 신학”의 출발점 역시“하나님

의 말씀의 신학”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한 번

얼마나 바르트 신학이“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변증법적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

한 진지함을 강하게 부각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적인 위치를

해복해보고자 했던 신학이라고 한다면,“유비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

의 가능성을“스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찾은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제 바르트의 신학의 단계들 전체가“하

나님의 말씀의 신학”으로 관철된다. 즉, 변증법적 신학, 유비의 신학, 교

회교의학 신학 모두가“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는 큰 틀 속으로 포

괄됨을 보게된다.

바르트의 신학을“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세

번째 이유는, 그가 자신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출발과 근거를 종교개

혁의 원리중 하나인“sola scriptura”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그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듯이 사회주의 정신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여겼

던 자펜빌의목회시절에는종교개혁 신학의 원리를 알고는 있었으나종

교개혁 신학의 의미를 피부로느낄정도로 정확하게파악하지는못하였

다. 그가종교개혁신학의 핵심에 접근하게된 것은그가괴팅엔 대학의

명예교수로 초빙되어서 칼빈과 쯔빙글리 등 개혁신학을 강의하기 시작

하면서부터였다. 당시의 사정을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물론 나는 루터와 칼빈을 어느 정도 범위에서 연구했다. 그러나 내가

2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31

17) Jüngel, Barth-Studien (1982), 129.

1 8 ) H. U. von Balthasar, Karl Barth, Darstellung und Deutung seiner Theologie

(Zürich: TVZ, 41976), 93ff.

1 9 ) K. Barth, “Selbstdarstellung,” 자서전적인 글 (1964). E.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Nach seinen Briefen und autobiografishen Texten (Zürich: TVZ, 2005),

156.

20) K. Barth, Briefwechsel Karl Barth-Eduard Thurneysen, 1914-1925. Siebenstern-

TB 71(1966), 30. E.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2005), 156.

21) E.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2005), 156.

2 2 ) K. Barth, “Rückblick,” Das Wort sie sollen lassen stehen, Festschrift für Albert

Schädelin, eds., Hans Dürr, Alfred Fankhauser & Wilhelm Michaelis (Bern: Verlag

Herbert Lang & Cie, 1950), 5.

23) Ibid.

Page 11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충분히 설명되었으리라본다.

바르트의“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의 특징은 다음으로 그의“바르멘

신학 선언”에서빛을 발한다. 그의“바르멘 신학 선언”이야 말로 바르트

의“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의 결정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르멘 신학선언은 모두 여섯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제1조가“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적 특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제1조는 나머지 다섯 조항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다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제1조는 다

음과같이시작하고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내가 진실로

진실로너희에게이르노니양의 우리에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자이며 강도이다. 내가 문이니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구원을 얻으리라”(요 10:19).

“성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 할 단 하나의

말씀(das eine Wort Gottes)이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나 죽으

나 신뢰하고 순종해야 한다. 이 한 분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사건이

나 능력이나형상이나 진리를 설교의자료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것처럼전하는 그릇된교설을우리는 배격한다.”28)

바르멘 신학선언에서 천명하고 있는 바대로“우리가 사나 죽으나 듣

고 순종해야 할 유일한말씀”그리고“교회가 그 선포의 자료로 삼아야

할 유일한말씀”의 원리는 이 이후의 바르트의신학여정, 즉그의 교회교

의학에서도일관성 있게지속됨을우리는 이미앞에서 살펴보았다.

트하우스(Paul Althaus)와 벌였던 논쟁“기독교 사회윤리의 기초”

(Grundlagen der christlichen Sozialethik)에 잘 나타나 있다.24) 거기서

그는 자신이 종교-사회적인 관심들을 완전히 잊은 것이 아니라, 단지

“죄인의 칭의”(Rechtfertigung des Sünders)에 근거해서만 그러한 관심

들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바르트가 자펜빌 목회 시

절에 발견했던 신학사상과 당시 종교개혁가들에게서 발견했던 신학사

상이 결합되어 이제자신만의 고유한 신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다

시 말해서“바르트 초기의 인식이 새로운 근거를 획득함으로써 하나의

다른 신학적 무게를 지니게 되었고, 그러나 또한 종교개혁 신학도 바르

트에 의해 하나의 특별한 해석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25) 바르트의 신

학여정에 나타난 이러한신학적 명제의종합은 다름아니라바로“하나

님의 말씀”의 신학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종합된 신학에서 가장 두드

러진 성격적 특성은 우선“하나님의 말씀”에로의 집중이었는데, 이러한

명칭은 그 신학 자체의 고유한 사고방식과도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를 지배하고 있던‘종교적 인간’의 역사적-심리학적 자기

해석과는 반대로”이 신학에 두드러진 특징은“모든 개별적인 인간의

자기이해에 한계를 설정하고 또 그러한 자기이해를 결정지어주는 보다

더 높은것, 새로운 것에 대한물음”이었는데, 그러한 새로운 것이란 다

름 아닌“성서에 나타난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었다.”26)“‘변증법적’이란 표현도

다름 아니라 주권적으로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 속에

나타나는 사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2 7 ) 이로써 바르트의 괴팅엔

(Göttingen) 시절로 대변되는 변증법적 신학이 사실은 얼마나“하나님

의 말씀의 신학”으로 보다 더 일관성 있게 설명될 수 있는지에 대해

2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 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33

24) E.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2005), 156.

25) Ibid., 157.

26) K. Barth, “Brief an Kröner-Verlag,” 7. 3. 54.

27) Ibid. 28) 김명용, 『칼바르트의신학』(서울: 이레서원, 2007), 96.

Page 11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트는 자신은 학문적 신학에 반대한 것이결코 아니라, 현대적인 형태의

신학이“자신의 테마, 즉 종교개혁을 통해 명료해진 신학의 테마로부터

멀어지고”있는것에반대한 것이라고 응수한다. 문화와 역사적 지식그

리고 도덕 등을 통해“하나님을 향하도록 교육”할 수 있다고 믿었던 베

를린의 스승의 가르침에 반대하여괴팅엔의젊은 신학자 바르트는 오로

지 예수그리스도의말씀을 대안으로내세웠던것이다.“나를 보내신 아

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자는 그 누구도 내게로 올 자가 없느니

라…”. 그러나“신학의 과제와 설교의 과제는 하나다”라는 바르트의 테

제에 대해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였던 하르낙은“대학 강단을 설교 강단

으로”바꾸어서는안 된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어떻게 해서그리고 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설교의 과제와 신학의 과제가 동일시 될 수 있었던

가? 그 이유는“복음의 중심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인

식의 신뢰성과 공공성은 하나님에 의해일깨워진 신앙의 신뢰성과 공공

성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때문이다.30) 특히 설교가 신앙을 일깨우는 역

할을한다면 신학의 과제와 신앙의 과제는 동일시 될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신학의 과제도 설교의 과제와 마찬가지로“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라는 차원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설교와 신학이 방

법론적인차이를 갖는것은바르트 자신도 인정하고있다. 그러나 그 둘

의 과제는“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라는 차원에서 일치하고 있고

또 일치해야 된다고 보는 것이 바르트의 시종일관된 입장이었던 것이

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일 때 제 사명을 다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을 때에는 더 이상 설교의 과제를 포기하는것이 되고따라서

더 이상 설교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학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일 때에야 비로소 신학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 신학의 과제를 포기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더 이상 신학일 수 없다

는 것이다.“하나님의말씀의 신학”으로서의 바르트 신학의 기조에 대해

I I I. 설교의과제와신학의과제의동일성의문제

우리는 앞에서 바르트의 신학의 전(全) 여정이 얼마나“하나님의 말

씀”의 관점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고, 따라서 바르

트의 신학이“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타당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바르트의 신학을 이처럼“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으로

정의 내리는 것은 바로 본고의 주제인‘설교’와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설교의 과제와 신학의 과제를 동일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신학의 과제를 설교의 과제와 동일시한 것

은 당시의 학문적 신학의 배경에서는 정말 이례적인 것이었다. 신학과

철학, 교회와 국가,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왕권을 동일시했던19세기의

“적용신학”혹은“문화신학”이 설교를 교회 설교 강단 내에서만 영향력

을 발휘하는 것으로 환원 내지는 축소시켰던 것에 반대하여 바르트는

설교의 과제와 신학의 과제를 동일한 것으로 주장했던 것이다. 실제로

“변증법적신학”의 기관지였던「시간들사이에서」(Zwischen den Zeiten)

가 탄생하고, 또“변증법적 신학”이 자기 나름대로 대외적인 방향설정을

해 나가던 시기에 바르트는 자신이 전에 몸담고 있던 종교사회주의 운

동의 기관지였던「기독교세계」(Christliche Welt)에서 그의 스승이었던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과 논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

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항상자기소리를 내어왔던자유주의신학에

대항하여 심도있는논쟁을 전개하게된다. 두 번의편지로바르트와하

르낙은 신학의 학문성에 대해 논쟁하게 되는데, 거기서 하르낙은 자신

의 옛 제자인 바르트가“학문적 신학을 무시한 자”(Verächter der

wissenschaftlichen Theologie)라고 맹렬히 비난한다.29) 이에 대해 바르

2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35

2 9 ) A. von Harnack, “Fünfzehn Fragen an die Verächter der wissenschaftlichen

Theologie unter den Theologen, Christliche,” Christliche Welt 37(1923), Sp. 6-8,

K. Barth, “Theologische Fragen und Antworten,” G e s a m m e l t e Vorträge, Bd.3

(1957), 7-9. 30) Ibid., 13.

Page 11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부른다.”33) 곧 이어서 그는 자신의 교의학의 과제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

서 기술하고 있다:“교의학은계시와 성서그리고 기독교 설교로서의하

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이다. 결국 (성서신학도 아니요, 교회론도 아니

요, 신앙도 아니요, 종교의식도아니요, 오히려) 실재로 설교된 기독교 설

교 즉, 성서와 계시에 연관을 맺음으로써 한편으로는‘하나님의 말씀’으

로 결정되고, 다른 한편으로는-이것이 바로 교의학을 하게 되는 목적

인데 -그‘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비판적으로 결정되는 설교가 가장

우선적인 [교의학의] 대상이다. 그러니까 교의학이라는 개념은 계시와

성서에 근거한 기독교 설교의 원리들(=Dogma)을 생산해 내는 것을의

미한다.”34) 이 시기의 바르트에게 있어서 설교란 신프로테스탄트주의에

서 말하는경건한 인간의 자의식의 자기표현도아니요,『로마서강해』에

서 말하는것처럼 개인적인사고의 노력도 더 이상아니었다.

바르트의 이 최초의 교의학 시도는 그가 뮌스터 대학에 정식 교수로

초빙된 후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바르트는 밤낮으로

이“교의학에 새로운 모습을 주기 위해”작업한 결과 결국에는1927년

『기독교 교의학 기획』(Die christliche Dogmatik im Entwurf, 앞으로 기

독교 교의학이라 칭함)이라는 제목 하에 새로운 교의학이 출판되게 된

다. 비록 바르트가 본(Bonn)으로 옮긴 후 1932년에 이 교의학은『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이라는 또 다른 형태로 거듭나기는 하지

만 1927년에 그가 쓴 교의학에서 그의 교의학적 사고의 맹아들을 확인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겠다. 바르트는1927년판『기독교

교의학』에서 자신이『로마서 강해』에서 했던 사고, 즉“하나님과 인간의

실제적인 차이에 관한 사고를 폐기시킬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음을 새롭게 배웠다”고 고백한다.35) 그리고“예수

그리스도를 파악하고, 그를 사고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옮겨야 했다”고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37

33) Ibid., 251.

34) Ibid.

35) Barth, “Brief an Nelly Barth,” (1941. 8. 17).

서는앞장에서우리가 충분히 살펴본 바 그대로다.

신학의 과제와 설교의 과제를 동일시하는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기조

는 비록 변증법적 신학의 관점에서 행한 하르낙과의 논쟁에서 뿐만 아

니라,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을 쓰기 전에 괴팅엔 시절 최초

로 시도된 교의학『기독교 강의』(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

gion, 1924)에서 이미 설교를“교의학의출발점이요 목표”로 삼고 있다

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31) 이 기독교 강의를 기획하면서 바르트는“정

통주의”신학뿐만 아니라 고대 교부들 그리고 심지어는 적은 부분이긴

하지만 가톨릭의스콜라 신학의 영역에서도 여전히 잘 알려지지않았던

가능성들까지도 폭넓게 수렴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렇게 함

으로써 자신의 교의학이 너무 지나치게‘프로테스탄트 사상’에 고착되

는 것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기획한 교의학이“정통주

의”라거나 스콜라 신학이란 말은결코아니다. 오히려 그의최초교의학

시도에서 새로운 것이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니라(“항상 다시금 그리고

모든 측면에서 강대상 위의 설교자의 상황”32)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고집스러울 정도의 일관성에 있다. 설교의 과제를 신학의 과제와 동일

한 것으로 여기는 바르트 신학 기조가 여기서도 여실히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 첫 장에서 바르트는 전체의 계획을 밝히고 있는데,

그 주제 문장이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교의학의 문제는 하나님

의 말씀에 대한 학문적인 이해인데,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

의 계시 속에 말씀되고,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성서에서 다시 주어진, 그

리고 오늘날 기독교적인 설교에서 표현되고 들려질 뿐만 아니라 또 당

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말씀을 말한다. 이러한 이해의 대상과 필연성과

방법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의 시도를 우리는 교의학의 프롤레고메나라

2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31) K. Barth,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Bd. I: Prolegomena (1924), Han-

nelotte Reiffen, ed., 28.

3 2 ) K. Barth, Briefwechsel Karl Barth-Eduard Thurneysen, 1 9 2 1-1930, ed. E.

Thurneysen (Zürich: TVZ, 1974), 224.

Page 12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전제가 아니라 교의학 내용그 자체를 보여주는 교의학의일부분으로서

의 서론이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여기서 바르트의 설교관을 생각해

본다면, 설교는 일반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또 그 전제들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

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부터 설교의 서론이 나와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설교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 교회의 표징

(notae ecclesiae) 중 첫 번째가 바로 순수한(pure) 하나님의 말씀의 선

포라고 보고있는종교개혁적인교회관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I V. 바르트의설교적관심의변천

우리는 앞서 바르트의 신학이 얼마나“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으로서

의 일관된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또 그에 일치하여 바르트의“설교의

과제와 신학의 과제의 일치성”을 살펴보고 또 확인해 보았다.

그러면 이제 실제로 바르트의 설교가 그의 신학 변천 과정에 일치하

여 어떤 단계로 변천해 왔는지를 그가 한 설교들과 또 그가 펴낸 설교

집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본고의 주제로 볼 때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물론 여기서 바르트의 학문적 전기와 목회적 전기가 일치하지

않기때문에 그의설교변천의과정이 그의신학여정의 변천과정과 완전

히 일치할 수는 없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설교의 변천을 몇

가지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을것이다.40)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39

4 0 ) 이 점에 관련해서 본고는 Albrecht Grötzinger, “Predigen im Pluralismus. Anre-

gungen aus dem Verständnis der Predigt bei Karl Barh,” Letter from the Karl

Barth-Archives (Nr.5, 2003. 12. 10)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힌다. 칼 바르트의 설교의

변천에관해서 가장탁월한논문으로여겨지기때문이다.

바르트는 고백한다. 나아가서“주관성(Subjektivität)을 더 이상 진리로

여길 수 없게됨으로써키에르케고르와의짧은인연을 다시금 멀리해야

만 했다”36)고 밝히고 있다. 이 27년도 판의『기독교 교의학』에 관련하여

그가 쓴 편지에서도 바르트는비로소 키에르케고르를넘어서 예수그리

스도를 자신의 사고의 중심으로 모셔 들이는 길에 서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에게 방향을 제시했던 결정적인개념은 바로“하나님의말씀”이

었는데, 이는 후에“예수 그리스도”라는이름으로대체된다. 여기서 바르

트는“교회가 순수하게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그 자체가

말씀이다”37)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그 관계는 우리 인간에 의해 말해

짐으로써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아니라, 오히려 근원적인 것이다”38)라고

밝힌다. 바르트는 괴팅엔 시절에서처럼“교의학”을 계속적으로 설교와

연관시키고 있고 또 실재로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제 교의학을“설교

속에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자체에 대한 의미파악으로 보다 더 철저하

게 이해하고자 한다. 특별히 이 27년 판『기독교 교의학』의 프롤레고메

나는 신프로테스탄트의 교의학에 대응하는 비판적 대립물로 형성된다.

신프로테스탄트, 즉 1 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교의학이 프롤레고메나

(Prolegomena)에서 기독교 신앙의 일반적인(종교철학적, 심리학적 등

의)“전제들”과 조건들을 다루었던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던 반면에, 바

르트는 프롤레고메나를철저히“교의학 그 자체의 레고메나(Legomena)

로부터 전체를 그려주는 부분”39)으로 파악한다. 즉, 교의학 그 자체의 내

용으로 바로 뛰어 들어갈 수 있는 우선적인 형태의 서론으로서 프롤레

고메나를 파악함으로써기독교 신앙그 자체는 그런일반적인 전제들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또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다. 다시 말해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프롤레고메나는 더 이상 일반적인

2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36) Ibid.

37) Ibid.

38) Ibid.

39) Ibid.

Page 12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 하나님-진술(Gottes-Rede)의 위기에 대한 경험으로 이해했다.“자

신의 신학 스승들의 문화-프로테스탄트주의가 하나님-진술의 근거를

종교와 문화의 일치에서 찾으려고 했던 반면에, 바르트에게 있어서 이

제 설교는 모든신학과 당시 당연시되고 있던하나님에 관한모든 진술

의 근원적인 위기로 파악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지 않음

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막기도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

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막

을 수 있다는 사실에 바르트는 주목했다.”43) 이렇게 설교를 지나치게 당

연시하는 태도를 바르트는 당시 용납할 수 없었다. 바르트는 이를 당시

유행했던 표현주의 문체를 빌려 세심하게 주제화시킨다. 예를 들어 그

의『로마서 강해』2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교회의 주제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 처음과 나중에 관한 말씀, 창조자와 구원자에 관

한 말씀, 심판과 의에 관한 말씀인데,-인간의 귀로 듣고 인간의 입술로

말해진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교회란 하나님의말씀을 듣

고 말하는 인간들이 항상 다시 형성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런 상황으로 인해 드러나는 현실이 있다. 즉, 인간의 귀와 인간의 입술

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항상 끊임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는 반면에 하나

님의 말씀은 포기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다시 하나

님에게서 참인 것을 들어야하고 또 말해야 하지만, 교회의 주제가 참인

것이지, 교회 그 자체로는 결코 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듣고 말함으

로써, 참이었던 것이곧 다시더 이상참이아니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다음 기적이 일어나긴 하지만,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래적인 위기이다.

교회는 자신을 세운것을통해심판받게된다. 교회는 자신의 근거가 되

고 있는 것에 의해 무너진다. 교회는 자신을 살리고 있는 것에 의해 죽

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교회의 축복인 동시에 경악스러운 주제이기 때

문이다. 바로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 하나님의 말씀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41

4 3 ) Grötzinger, “Predigen im Pluralismus. Anregungen aus dem Verständnis der

Predigt bei Karl Barh” (2003), 6.

1. 1919-1922년 사이의설교

바르트는 자신의 설교를 처음부터 일관되게 시대적 상황의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이러한 바르트의 설교이해는 이미 일찍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 시기는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이 태동하던 시기인데, 이

때에 벌써 바르트는 자신의 친구 투르나이젠에게 쓴 편지에서“우리는

오직 성서와 신문을 같은 정도로 펼쳐놓고서야 신학을 할 수 있다”41)고

피력한 바 있다.

초기 변증법적 신학의 시대적 상황이란 일차세계대전으로 대변되는

서구 문화의 몰락이었다. 바르트 자신은 초기 변증법적 신학의 태동의

원인을 자신의 신학 스승들 대부분이 황제 빌헬름2세의 전쟁 선포를

축복해 주었다는 경악할 사실에 돌린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바르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그런 다음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나에게는-벨

기에 중립 선언이 무너진 것보다 더 나쁜-소식, 즉 93명의 지성인들이

황제 빌헬름2세와 그의 수상 베트만-홀벡(Bethmann-Hollweg)의 전

쟁 정치에 동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전쟁 선포에 서명한 사람들

가운데서 거의 모든 나의 독일 스승들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절망감을

느꼈다. 신학적 주석, 윤리, 교의학 그리고 설교, 이 모든 것들을 그 당시

까지만 해도나는믿어 의심치 않을것으로 여겼는데, 이로써…그 근원

으로부터뿌리째 흔들리는 것을느끼게 되었다.”42)

이러한 근원이 흔들리는 경험은 바르트 혼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초기변증법적신학은 시대에 대한저항이라기보다는차

라리당시시대의 표현이었다고보는편이더 나을것이다. 그렇다고해

서 변증법적신학이 폄하되는것이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중요성을드

러내게 된다. 바르트는당시의 위기의 경험또한다름아닌설교를 포함

2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41) Barth, “Brief an Thurneysen” (1918. 11. 11).

4 2 ) K. Barth, “Nachwort,” ed., Heinz Bolli, S c h l e i e r m a c h e r-A u s w a h l (München und

Hamburg: 1968), 293.

Page 12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인 위치를 부여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아돌프 히틀러의 때는“하나

님의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독일그리스도 연맹에 가

입했던 사람들을 단순히 맹목적인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빠진 나치스트

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들 가운데는 정말로 진지한

신학자들도 있었는데,“그들은 하나의 새로운 선교의 때가 도래했다고

믿었다”,“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의 운동은 그 핵심에서 볼 때에 하나의

선교적 운동이었고, 이 선교적 운동을 통해 그들은 잃어 버렸던 대중들

을 다시교회안으로끌어들이고자했던것이다. 정치적인새로운 출범

의 순간은 선교적 출범의 순간으로 이용되어야만 했다.”47) 오늘날의 관

점에서 되돌아 보면 샴페인을 먼저 터뜨린 것과 같았던 오토 디벨리우

스(Otto Dibelius)에 의해 발표된 선언“교회의 세기”(Das Jahrhundert

der Kirche)가 이제 최종적으로 현실화되어야했다. 이러한 선교적 순간

을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은 예배와 설교여야 했다. 그리고“독일 그리스

도 연맹”은 그와 함께 일순 성과도 거두었다. 이러한 국민적 선교 액션

의 최고봉은 소위“포츠담 국회”였는데, 첫 테러의 위협들에도 불구하고

진행되었던 새로운 의회의 날이었다. 이 의회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예

배로시작되었다.

사실“나치 정부는 바르트가 말한 하나님과 세계,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양자를 하나의 동등한 문화적 고리 속에상호 연결

시킴으로써 예배와 설교를 정치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48) 바르트가

1932/33년 겨울학기와1933년 봄 학기본(Bonn) 대학에서조직신학과

목으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설교 준비를 위한 연습”이란 제목의

세미나를 예언자적인 시각으로 개최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이 아니었

다. 바르트는 거기서 설교가 철저하게 말씀에 입각해야 한다고 호소했

다. 하나님을“전적인 타자”로 보는 신학 명제는 이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에 설교학적-전략적으로 성서의 텍스트에 접근했던 것이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43

47) Ibid.

48) Ibid.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일어난다. 즉, 하나님은 참이시지만, 모

든 인간은 거짓말쟁이다.”44)

여기에 나타난 바르트의 이러한 입장을 신학적인 과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상실된, 그렇기에 되찾게 된 하나님-진술의 자리

에 대해서 당시의 문화세계의 표현주의적인 언어로 표현해 낸 세밀한

신학적 반성으로 볼 수도 있을것이다. 바르트가되찾은 하나님-진술은

교회의 설교 단상과 세상의 왕권의 문화적-기관적인 결합을 종결짓는

것이었다. 이 당시의 자신의 신학적 단계와 일치하여 바르트의 당시의

설교 역시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의 철저한 구분에 집중하고 있

는 것을 볼 수 있다.“전적인 타자로서의 하나님”-이 명제는 당시의

변증법적 신학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설교를 특징짓는 상표이기도 했

다.45) 이는 철저하게 역설적인 신학적 명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하

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가 이 명제를 통해상호분리된다. 이로써 하

나님은 개인적인인간생애들과는큰 거리를 두게되어, 인간은 이 하나

님과 더 이상 아무것도 시작할 줄을 모르게 된다.“그러나 이러한 신학

적 명제는 그 자체로 다시 하나의 구원하는 구분으로 이해될 수도 있

다. 즉 인간의 행위들을신격화 하는것을막아줌으로써 인간을 구원으

로 인도하는 구분”46)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바르

트의신학은 전혀다른상황에서도유효성을입증하고있다.

2. 1933-1935년의설교

1933년“독일 그리스도 연맹”(die Deutschen Christen)이 출범하고,

그들이 자신들을 즐겨 불렀던 대로“아돌프 히틀러의 선교”에 메시아적

2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44) K. Barth, Der Römerbrief (Zürich: TVZ, 1984), 325f.

4 5 ) Grötzinger, “Predigen im Pluralismus. Anregungen aus dem Verständnis der

Predigt bei Karl Barh” (2003), 7.

46) Ibid.

Page 12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는 것만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자신의 무수

한 신학적 굴곡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성과 인간성이 각각

자신의 분명하고도 고유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만큼은 철저한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 위치란 다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인격안에서 하나님의신성과 인간의 인성이 드러나고 있다

는 것이다.“누가 그리고 무엇이 하나님이며, 누가 그리고 무엇이 인간

인가 하는것은우리가 단순하게 연구하거나 구성할 수 있는것이 아니

다. 그것은 그 양자의 진리가 거하는 곳,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

된 그 양자의 함께함, 그 양자의 연합, 그 곳에서만진실로 발견할 수 있

다.”53)

이렇게“하나님의 인간성”을 재발견한 자신의 신학과 일치하여 바르

트의 설교 이해는 이제“이웃 사람에 대한 인사로서의 설교”로 규정된

다. 즉, 이렇게 강조점에 있어 변화를 겪은 설교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

과 인간은 이제 초기 바르트 변증법적 신학에서처럼“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인간)는 땅에 있는”그런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형성

된 파트너 관계로 정립된다. 따라서 이제 설교란 하나님과 인간의 파트

너의식에 관한 인간의 진술이다. 즉,“하나님에 의해 파트너로 선택되어

서 하나님과의 파트너 의식에 관해 설명할 수 있는인간의 진술”54)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설교 이해는 그의『교회교의학』1권에 결실물로 나타

난다.“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증언이란 다름 아닌 내 이웃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인사이다.…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한 형제

요 따라서 내 자신의 형제이기도 한 그런사람을 발견하게 되기를 기대

하면서 다가가서 그 사람과 나는 공동체임을 알리는 그런 인사이다.…

이때 증거자란 보호자도 교육자도 아니다. 증거자는 자신의 이웃에게

바로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이웃을‘상품처럼 다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45

53) Ibid., 11.

54) Grötzinger, “Predigen im Pluralismus. Anregungen aus dem Verständnis der Predigt

bei Karl Barh” (2003), 11.

다. 성서 텍스트는 이제 하나님과 세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원론적

인 차이를“지켜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르트가1935년 행

했던 강연“설교의 교회 적합성”에 관한 강연도 이해될 수 있다. 바르트

에 의하면 여기서“교회”는“지도자가 앞서고 우리는 따라가는 그런 추

종이라고 부르는 것”과는다르다.“교회에서중요한 것은세상적인 공동

체 관계가 아니고, 또 지도자가 전체의 대표자가되고동시에 자신의 이

름으로 모든것을 다하는 그런 지도체제도 아니다.”49) 이것은 바로 시대

적 상황과 관련된, 시대 비평적인, 가장 현실적인 설교학이었다. 이러한

바르트의 설교학은 고백교회를 통해 실현되어 나갔다. 바르트가 말한

“교회에 적합한 설교”란 다름 아닌“하나님의 말씀에 봉사하는”50) 곳에

서 나타났던 것이다.

3. 1956년도의설교

바르트는1935년 히틀러에 의해 추방되어 스위스로 돌아온 뒤, 1956

년 9월 25일 아라우(Aarau)에서 유명한 강연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

로“하나님의 인간성”(Die Menschlichkeit Gottes)이다. 여기서 그는 자

신과 그의 변증법적 신학의 동료들이 문화 프로테스탄트주의에 대항해

서 싸우면서 펼쳤던 사상을 뒤엎는 선언을 하게 된다. 즉, 문화 프로테

스탄트주의가“하나님을 희생하고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었다”51)는 점

에 극단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 그 당시 자신들은“인간을 희생하고 하

나님을 위대하게 만들고 말았다”52)는 신학적 반성을 시도했던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반성은 이제하나님의 신성이 인간의 인간성과대립하

2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49) K. Barth, “Die Gemeindemäßigkeit der Predigt,” ed., Gert Hummel, Aufgabe der

Predigt (Darmstadt, 1971), 164.

50) Ibid.

51) K. Barth, “Die Menschlichkeit Gottes,” Theologische Studien 48 (Zlikon-Z ü r i ch:

1956), 5.

52) Ibid., 8.

Page 12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V. 한국교회의설교에대한신학적반성과제언

이상에서 본 논문은 우선 바르트의 신학의 정체성과 일관성이“하나

님의 말씀의 신학”에 있음을 증명해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에 입각하여 바르트에게 있어서 설교의 과제와 신학의 과

제의 필연적인 동일성의 문제를 해명해 보았다. 나아가 바르트 자신이

한 설교들에서 그런 신학적 일관성이 어떻게 관철되고 있는지, 그리고

신학의 과제와 설교의 과제의 동일성이어떻게 나타나고있는지에 대해

서도살펴보았다.

이러한 바르트의“신학의 과제와 설교의 과제의 동일성”의 원칙이

오늘날 한국 신학과 설교의 장에서 매우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실정이

다. 물론바르트의 설교이해가 절대시 될 수는 없을것이다. 사실교회

교의학에서 행한 무수한 바르트의 성경 주석에는 역사-비평학적인 관

점에서의 주석적인 기준이 없다는 비판을 많이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

다. 그러나 바르트의 설교 이해는 말씀의 신학에 입각해서 시대의 맥락

과 끊임없이 논쟁하고 대화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

다고본다.

우리는 한국 교회의 설교 현장을 보면서 바르트의 설교 이해에 견주

어 다음과 같은몇 가지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것이다. 설교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행해지고,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은가? 설교자의 권

위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인가? 설교의 과제와 신학의 과제가 일치하

고 있는가?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봉사하고 있는가? 설교가

시대정신에 함몰되고 있는가 아니면 시대의 파숫꾼으로서의 역할을 하

고 있는가? 설교가 친근한 이웃의 인사로 다가가고있는가?

이런 몇 가지 질문은 오늘날 우리 설교의 현장에 많은 신학적 반성

과 도전을 이미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런 현실에서 바르트의“말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47

57) Barth, Predigten 1954-1967, ed., Hinrich Stoevesandt, Karl Barth-Gesamtausgabe,

Abt. I (Zürich: TVZ, 2003), 161.

루지’않을 것이다. 증거자는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라도 이웃을 자신의

행동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증거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가운데서만 존재하며, 따라서 나로부터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고모든것을 하나님으로부터기대해야 하는다른사

람을 최대한 존중하는 가운데 존재한다.”55) 여기서 설교는 하나님과 인

간을 존중하는 인간의 언어로 이해된다. 바르트는 여기서“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요청하는 그런 설교도 아니며, 인간을 희생으로 하나님을 크

게 만들거나역으로 하나님을희생시킴으로써인간을 크게만드는 그런

설교”도 아니다.56) 이러한 바르트의 설교관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설교

가 1959년 12월 27일 스위스 바젤의 교도소에서 바르트에 의해 행해진

이사야54장 10절에 관한 설교이다. 바르트는 여기서“자비로우신 하나

님”에 관해설교하는데, 이 설교의 마지막에서그는하나님과 인간사이

의 위대한 파트너 의식을 역설하고 있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의례 소원을 빕니다: 행운과 축복, 그리고 건강

과 즐거운 날들 등과 같은 소원을 빕니다. 아름다운 일이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또한 서로 그런 소원을 빌어 줍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은 저에게 소원을 빌어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가 서로 소원을 빌어 줄 수 있는 좋은 것이란 원칙적으로 말해서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를 실제로 바로 세우고, 붙

잡아 주며, 위로해 주고, 또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하신 분은 어

떤 한 인간이 아니라, 바로‘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이시기 때문

입니다. 아멘.”57)

2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55) Barth, KD I/2, 487.

56) Grätzinger, “Predigen im Pluralismus. Anregungen aus dem Verständnis der Predigt

bei Karl Barh,” (2003), 11.

Page 1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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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ötzinger, Albrecht. “Predigen im Pluralismus. Anregungen aus dem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일치성에대한연구 249

씀의 신학”의 일관성과 그의“신학의 과제와 설교의 과제의 동일성”의

원칙은 그러한 문제극복을 위해많은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본다.

주제어

바르트, 신학, 설교, 과제, 관계, 말씀.

(Barth, Theologie, Predigt, Aufgabe, Verhältnis, Wort.)

접 수 일 2009년 11월 22일

심사(수정일) 2009년 12월 07일

게재확정일 2009년 12월 15일

2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Page 12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Identität der Aufgabe von Theologie und Predigtbei Karl Barth

Park, Seoung Gyu

Professor

Presbyterian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In dieser Abhandlung handelt es darum, die Identität der Aufgabe

der Theologie und der Predigt in der Theologie Karl Barths zu zeigen.

Um dieses Ziel zu erreichen, muss es zunächst gezeigt werden, dass es

sich trotz der ständigen Wandlung seiner Theoloie noch eine Mitte

befindet, mit der die ganze Theologie Barths konsequent bezeichnet

werden. Eine solche Mitte soll vor allen Dinge durch die Bezeichnung

der Theologie Barhts als die “Theologie des Wortes Gottes, gefunden

werden. Alle andere Titeln, die angewendet worden sind, um die

Theologie Barths zu bezeichen, z.B. “Liberale Theolgie”,

“Dialektische Theologie”, “Neo-Orthodoxie”, die “Theologie der

analogia”, und schließlich “Dogmatische Theologie”, sollten

zeitbedingt gebraucht werden. Auf diesem Konseqqunz der Theologie

Barths beruhend kann es dann erörtert werden, warum und wie Barth

die Aufgabe Theologie und die der Predigt für identisch gehalten hat.

In dieser Abhandlung ist es versucht worden, zu beweisen, dass alles

davon abahängig ist, die Theologie Barths konsequent als Theologie

des Wortes Gottes zu bezeichnen. Wenn die Aufgabe der Theolog mit

der der Predigt identifiziert werden kann, dann soll es gezeigt werden,

wie solche Identität in der von Barth selbst gehaltenen Predigt

박성규, 신학의 과제와설교의과제의 일치성에대한연구 251

Verständnis der Predigt bei Karl Barh.” Letter from the Karl Barth-

Archives. Nr.5, 200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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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che Welt 37, 1923.

2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Page 12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회회칙

제1조명칭

본 회는“한국조직신학회(Korean Society of Systematic Theology)”라 칭한

다.

제2조목적

본 회는회원상호간의학문적교류와공동연구를통하여우리의조직신학

을 정립 발전시킴으로써한국과세계의교회와신학계에공헌함을목적으로

한다.

제3조사무실

본 회의사무실은회장이임직하고있는학교나근무지에두는것을원칙으

로 한다.

제4조사업

본 회의목적수행을위하여연구발표및 학술대회, 학회지출판및 기타사

업을한다.

제5조회원의자격

본회의회원은다음과같다.

1. 정회원: 본 회의정회원은조직신학및 인접학문분야에서박사학위를

취득하였거나또는대학이나이에준하는기관에서조직신학을교수하

고 있는자로한다.

2. 준회원: 준회원은조직신학및 인접학문분야에서박사학위취득과정

에 있는자로한다.

3. 특별회원: 특별회원은임원회의제청에의해서총회에서허락을받은

한국조직신학회회칙 253

durchgeführt worden ist. Geanu das hat diese Abhandlung getan. Zum

Schluß ist es in dieser Abhandlung versucht worden, diese von Barth

behauptete Identität beider Aufgaben von Theologie und Prdigt auf

die Situation der koreanischen Predigt anzuwenden. Damit kann es

gehofft werden, die angegbene Einsicht Barths für die Verbesserung

oder Entwicklung der Erkennnis des Verhälnisses von der Theologie

und der Predigt etwas beizu tragen.

Um das Ziel dieser Abhanldung zu erreichen, sollte die Unters-

uchung auf einige wichtigsten Hauptstücke von den Werken Barths

beschränkt werden. Nicht alle Predigten Barths können behandelt

werden. Trotzdem kann alles, was die vorliegene Abhandlung zeigen

wollte, kann gezeigt werden, weil das Hauptthema der Predigten

Barths immer mit dem siner Theologie einig gewesen ist.

Von dieser Untersuchung kann nun erwartet werden, erstens das

Verständnis des Verähältnisses von Theolgie und Predigt verbssert zu

werden, und zweitens sich die weiteren Forschungen über dieses

Thema zu ergeben.

2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Page 12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12조임원회

임원회는회장이필요시수시로소집하고, 총회에서위임된업무를처리한

다.

제13조편집위원회

편집위원회는본 회의학술지간행및출판사업을주관하며편집위원회에

관한규정은따로둔다.

제14조재정

본 회의재정은회원의입회비와연회비, 찬조금그리고기타수익금으로

한다.

제1 5조부칙

1. 본회의회칙은통과일로부터시행된다.

2. 회칙은정기총회에서출석회원2/3 이상의찬성에의해서수정할수 있

다.

3. 본 회칙에명시되지않은사항은정기총회및 임원회의의결과통상관

례에따른다.

한국조직신학회회칙 255

자로한다.

제6조회원의가입

제5조의자격을갖춘자로서본 회에가입하고자하는자는소정의입회원

서를제출하여총회의허입을받아야한다.

제7조회원의권리

본 회의정회원은의결권, 선거권및 피선거권을가지며본 회의각종학술

활동에참여할수있다.

제8조회원의의무

본 회의회원은회칙을준수하고소정의회비를납부해야하며본 회가주

최하는학술대회에참석하고학회지에기고해야한다.

제9조임원

본 회는학회운영을위하여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회계, 대외협력부장,

편집부장, 감사각 1인의임원을둔다. 필요시학문적교류를위하여지회와지

회 임원을둘 수있다.

제10조선거와임기

본 회의임원은총회에서2인 이상의추천과최다수득표로선출하고임원

의 임기는2년으로하되, 회장과부회장임기는각각1년으로한다.

제11조총회

본 회의정기총회는매 년마다회장이‘한국기독교공동학회’기간중 소집

하고회칙수정, 임원선거, 사업및 예결산승인, 회비결정, 회원허입, 특별회

원 추대등의회무를처리한다. 임시총회는회장이학회운영을위하여불가피

하다고판단되었을때에임원회의결의에따라소집한다.

2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Page 12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판 업무를주관한다.

제6조학술지명칭

본회가 편집 출판하는 학술지는「한국조직신학논총」(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이라칭한다.

제7조학술지발간

「한국조직신학논총」은 매년3회( 6월 3 0일, 9월3 0일, 12월3 0일) 발간함을원칙

으로한다.

제8조학술지편집

논문은투고순서에따라심사에회부하며, 책의구성및 편집에관한모든사항

은 편집위원회에서결정한다.

제9조통보

편집위원회는투고논문의접수, 심사및 게재여부에관련된사항을투고자에게

통보한다.

제10조원고료및 게재료

편집위원회는학술대회를위하여채택한특별한주제에관해연구위촉한논문

에 대하여는소정의원고료를지불하고, 외부연구비지원에따른연구결과물게

재시편집위원회에서정하는소정의게재료를납부해야한다.

제11조학술지배포

본회학술지는연회비를납부한한국조직신학회회원에게무료로배부하며, 도

서관및 학문연구를위하여구입을희망하는자에게는회비에상당하는후원금을

받고배부한다.

한국조직신학회편집규정 257

한국조직신학회편집규정

제1조명칭과사무실

본회는한국조직신학회회칙제13조에 따라한국조직신학회편집위원회라칭

하며, 사무실은편집위원장이소속된학교나근무지에두는것을원칙으로한다.

제2조목적

본회의목적은한국조직신학회에소속된회원들의학문적교류를원활히하고

자 회원들의연구결과를수록한조직신학전공학술지를출판하는데있다. 또한이

러한출판사업을통해회원들의연구업적이소속기관및 학계에서공정하고객관

적으로평가받도록협조하는데있다.

제3조위원구성및 임기

본회의위원은한국조직신학회임원회에서추천한약간명으로구성된다. 위원

장은본 학회편집부장이담당하며, 편집위원은국내외대학에서조직신학분야의

박사학위를취득한후 동일전공분야에서5년이상연구활동을계속한자로연구및

학술실적이우수한자여야한다. 편집위원의임기는2년으로한다.

제4조회의소집

편집위원회는편집위원장이소집하는것을원칙으로하되필요시인터넷상에

서 회의할수 있다. 또한편집위원과반수 이상의요청으로회의를소집할수 있

다.

제5조업무

편집위원회에서는한국조직신학회정기학술대회주제에대한 논문 기고자를

위촉하고, 논문심사위원선정및 우수논문을심사하며, 한국조직신학회의모든출

2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Page 130: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제1조목적

본 규정의목적은한국조직신학회학술지에논문을투고하고자하는자가준수

해야할사항을정하는데있다.

제2조투고자격

본회회원으로서정기적으로본회소정의연회비를납부하는자는누구든지투

고할수 있다. 본회회원이아니라도편집위원회의허락을받아투고할수 있다.

제3조투고신청서양식

투고자는본회‘논문투고신청서’를 작성하여제출한다. 투고신청서양식(양

식 1 )은 조직신학회홈페이지에서다운받아사용할수 있다.

제4조구성요소

투고논문은다음의5가지구성요소를갖춰야한다. 1. 논문2. 각주및 참고문헌

목록3. 외국어초록(abstract) 4. 한국어주제어5. 외국어주제어(key word)

제5조논문

1. 모든논문은한글혹은외국어로된 다른학술지에발표되지않은것이어야

한다.

2. 본회학술대회발표원고도규정에따라투고해야한다.

3. 「한국조직신학논총」과「한국기독교신학논총」등학술지에관련된선행논

문들이있을경우, 이를참고하여인용하고, 각주, 참고문헌에그 사실을표

기한다.

4. 고전어(히브리어, 헬라어)는원어사용을원칙으로하되, 음역할수도있다.

5. 내용구분은I, II → 1, 2 → 1), 2) → (1), (2) →a), b) →(a), (b)의순으로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259

제12조발행및인쇄

본회학술지의발행인은한국조직신학회회장으로하고, 인쇄출판및 배부에

관한세부사항은편집위원회에서결정한다.

제13조판권

본회에서출판된모든글의판권은저자가소유한다. 단, 인터넷출판의경우학

회가그판권을소유한다.

▣부칙

1. 본 규정은한국조직신학회임원회에서승인즉시발효하며, 이규정에명시

되지아니한기타자세한사항은관례에따른다.

2. 본규정은편집위원2/3 이상의찬성으로개정할수있다.

2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Page 131: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10조제출방법

투고자는‘논문투고신청서’(양식1 )와 함께논문을E-m a i l로 제출함을원칙으

로 한다.

제1 1조제출기한

원고마감은출판3개월전으로하고, 제출된원고는반송하지않는다.

제1 2조게재논문제한

논문은연속으로게재되지않는것을원칙으로한다.

▣부칙

1. 본 규정은한국조직신학회임원회에서승인즉시발효하며, 이규정에명시

되지아니한기타자세한사항은관례에따른다.

2. 본규정은편집위원2/3 이상의찬성으로개정할수 있다.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261

한다.

제6조각주와참고문헌

1. 논문은각주를사용해야한다. 각주및참고문헌의양식은표1을참조한다.

2. 논문에서언급된것만을참고문헌목록에포함한다.

제7조외국어초록

1. 내용

논문의목적, 연구방법론, 연구내용및연구성과등제시

2. 분량

A4 1매이내혹은외국어3 0 0단어내외

3. 제목및인적사항

논문제목, 성명, 학위, 직위, 소속, 소재지를기재

예) K y u n-Jin Kim, Dr. Theol.

Professor, College of Theology

Yonsei University

Seoul, Korea

비전임의경우직위를L e c t u r e r로 표기함

제8조주제어

한국어와외국어주제어를각각5개이내로작성한다.

제9조원고분량

투고논문(본문10p, 각주9p, 바탕체, 줄간격1 6 0 )은 A 4용지1 5매 이내로작성

한다.

2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Page 132: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pretation 49 (January 1995): 229-280.

2) 저서인용의경우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I』(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135.

Peter C. Hodgson,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67.

3) 편·역서인용의경우

위르겐 몰트만/이신건옮김, 『희망의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56.

Dietrich Bonhoeffer, The Way to Freedom, trans.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32.

Helmut Thielicke,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43.

Donald K. McKim,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Cam-

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51.

Peter C. Hodgson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56.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4.

4) 학위논문인용의 경우

김철수,“우리말 사도신경에 삭제된‘음부에 내려 가사’에 대한 연구,”(계명대

학교박사학위논문, 2004), 12-23.

H y u n-Shik Jun,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western University, 2001), 68.

2. 참고문헌작성법

1) 전체 구조는 한국어 자료를 앞 쪽에 배치하고, 그 뒤에 외국어 자료를 배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263

「한국조직신학논총」각주및 참고문헌작성법 (투고규정표 1)

*각주 및 참고문헌에서의영문 표기는“시카고 스타일”을 따른다. The

Chicago Manual of Style, 15th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3). 각주 및 참고문헌 작성에 있어서의“시카고 스타일”의

대한 간단한 용례(Chicago-Style Citation Quick Guide)는 다음을 참

고할 것: http://www. chicagomanualofstyle.org/tools_citationguide.

html

I. 한국어 학술지

1. 각주표기원칙

·논문의 제목은 쌍 따옴표(“ ”)로, 학술지나 정기간행물 이름은 외 꺽쇠

괄호(「 」)로, 한국어 도서의 경우는 쌍 꺽쇠괄호(『 』)로 표기한다. 단,

외국어 책 제목과학술지 제목은모두이탤릭체로표기한다.

·동일한 논문이나 책을 바로 다음에 다시 인용할 경우: 앞의 논문(또는 앞

의 책), 30.

·동일 저자의논문이나저서를 각주한 개 이상 건너뛰어 다시인용할 경

우: Tillich, Systematic Theology (1957), 34.

1) 논문인용의경우

황승룡, “폴 틸리히의 신학에서의 그리스도론의 위치,”「조직신학논총」6

(2001), 101-119.

김균진,“인간복제,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인가?”「기독교사상」506(2001, 02):

96-115.

Jack Dean Kingsbury, “The Resurgence of Systematic Theology,” I n t e r-

2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Page 133: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McKim, Donald K.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Thielicke, Helmut.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by John W. Dober-

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I I. 외국어 학술지

1. 각주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동일한 페이지에 있는 글을 연속적으로 인용할 경

우: Ibid.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다른 페이지에 글을 연속적으로 인용할 경우:

Ibid., 34.

·동일한 논문이나 책의 글을 각주 1개 이상 지나서 다시 인용할 경우:

Tillich, Systematic Theology (1957), 34.

1) 논문/학위논문의경우:

Jack Dean Kingsbury, “The Resurgence of Systematic Theology,”

Interpretation 49 (January 1995): 229-280.

H y u n-Shik Jun,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western University, 2001), 68.

2) 저서/편역서의경우:

Dietrich Bonhoeffer, The Way to Freedom, trans.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32.

Helmut Thielicke,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43.

Donald K. McKim,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한국조직신학회투고규정 265

치하는 것으로하되, 반드시 각주에서사용된 자료만을제시한다.

2) 국문자료의 경우저자의 성명에따라가, 나, 다 순으로, 영문 및 외국자

료의경우는 알파벳순으로제시한다.

3) 저자 및 책명에는 마침표를 붙이고, 출판지, 출판사, 출판 연도를 표기함

에 있어서는괄호를삭제한다.

4) 외국인 이름 혹은 한국인의 영어명은 성, 즉 가족명(family name)을 앞

에 쓰고 이름을뒤에쓰며 그 사이를콤마로구분한다.

5) 동일한 필자에 의해 쓰인 논문/저서는 아래 하이픈( 하이픈을 6번

누름)을 써서 동일 필자에 의한 논문/저서임을 밝히되, 최근에 출판된 것

부터먼저 제시한다.

6) 논문명 혹은 책명이 길어서 둘째 줄까지 사용하게 될 때는 저자명이 잘

드러나게9칸 들여서글을 쓴다.

김균진.“인간복제,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인가?”「기독교사상」506(2001, 02):

96-115.

. 『기독교조직신학I』.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김철수.“우리말 사도신경에 삭제된‘음부에 내려 가사’에 대한 연구.”계명대학

교 박사학위 논문, 2004.

몰트만, 위르겐/이신건 옮김. 『희망의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56.

황승룡.“폴 틸리히의 신학에서의 그리스도론의 위치.”「조직신학논총」6(2001):

101-119.

Bonhoeffer, Dietrich. The Way to Freedom. Trans. by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Hodgson, Peter C.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Jun, Hyun-Shik.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

western University, 2001.

2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Page 134: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회심사규정

제1조 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한국조직신학회 학술지에 투고된 논문의 심사에 관한 제

반 사항을 정하는데있다.

제2조 투고에서발송의 과정

편집위원회는아래와 같은일을수행한다.

1. 논문투고안내를 학회홈페이지및 회원들에게E-mail로 공지한다.

2. 투고된 논문의 구성요소(투고 규정4조 참조)들이 미비할 경우 투고자의

수정을거친 후, 논문접수를통보한다.

3. 편집위원회의에서 익명으로 처리된 각 논문에3인의 심사위원을 배정한

다.

4. 심사결과를 종합하여 편집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게재여부를 결정하며, 1

주일이내에 심사결과를투고자에게통보한다.

5. 게재 논문은1, 2차 교정을 거쳐 인쇄하며, 인쇄된 학술지는 모든 회원에

게 발송한다.

제3조 심사위원자격

본회는 논문심사를 위해 국내외 대학에서 해당 전공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

한 후 5년 이상 전공 관련 주제에 관한 강의 또는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온 자

가운데 편집위원회에서 의뢰한다(양식2 논문심사 의뢰서). 심사의뢰 시 소정의

심사료를지불한다.

제4조 심사기준

심사위원은 아래의 심사기준에 따라서 기일내에‘논문심사결과서’(양식 3)

를 제출하여야한다.

한국조직신학회심사규정 267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51.

Peter C. Hodgson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56.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4.

2. 참고문헌작성법

*위에서 제시한한국어 논문작성법용례의 경우와동일하다.

Bonhoeffer, Dietrich. The Way to Freedom. Trans. by Edwin H. Roberts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66.

Hodgson, Peter C. Winds of the Spirit: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 and Robert H. King, eds. Christian Theology. 2nd 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Jun, Hyun-Shik. “Tonghak Ecofeminist Reinterpretation of Sin, Evil and

Spirituality in Relation to the Ecological Crisis.” Ph. D. diss.

Northwestern University, 2001.

McKim, Donald K.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rtin Luth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Thielicke, Helmut. Man in God’s World. Trans. and ed. by John W.

Doberstein. New York: Harper & Row, 1963.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2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Page 135: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결과는 필자 이외에 타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심사위원은 심사대상, 내용 및

결과와 관련된모든정보를 타인에게누설하지않는다.

제7조 심사결과통보

투고자에게심사결과를즉시통보한다.

제8조 재심신청

심사위원3분의2 이상으로부터‘수정 후 재심’판정을 받은 논문제출자는지

적 사항을 수정한 후 재심을 신청할 수 있으며, 재심을 포기할 경우는 게재불가

로 판정한다. 재심을 청구할 경우 동일 심사위원의 재심을 통과해야 차호에 게

재할 수 있으며논문재심 신청은1회에한 한다.

▣ 부 칙

1. 본 규정은 한국조직신학회임원회에서 승인 즉시발효하며, 이 규정에 명

시되지아니한 기타자세한사항은 관례에따른다.

2. 본 규정은 편집위원2/3 이상의찬성으로개정할수 있다.

한국조직신학회심사규정 269

1. 논문형식심사

투고된논문의 구성요소들이미비되었을경우수정을 요청한다.

2. 논문내용심사

1) 논문구성의완성도(20점)

논문의 구성상 목차와 내용 전개가 논리적이며 참고문헌 및 문장은 적절

한가?

2) 연구주제의 타당성및 심도(20점)

주제에 관한연구가타당하며, 충실하고심도 있게이루어졌는가?

3) 학문적 독창성(20점)

주제의 선정과내용전개 및 결론제시가독창적인가?

4) 학문적 공헌도및 적용성(20점)

주제에 관한 연구가 국내외적으로 학문적 공헌도가 있으며, 교회와 사회

에 적용성이있는가?

5) 연구방법, 선행연구및 통합학문적지향(20점)

연구방법은 타당하며, 선행연구의 검토와 통합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졌는

가?

제5조 심사판정

1. 제출논문은 관련전공자인3인의심사위원에게심사를위촉한다. 심사점수

가 90점 이상‘게재가,’89-80점‘수정 후 게재,’79-70점‘수정후 재심,’69점

이하‘게재불가’로 판정한다.

2. 심사위원2/3 이상이‘게재 가’또는‘수정 후 게재’(즉 80점이상)이면‘게

재가’로 판정하고 투고자에게 수정 부분을 고치게 한 후 게재한다. 심사위원

2/3 이상이‘수정 후 재심’또는‘개재 불가’(즉 79점 이하)이면‘게재 불가’로

판정한다.

제6조 비밀유지

심사과정에서심사위원이나 논문제출자는모두 익명으로하여야 하며, 심사

2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Page 136: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① 연구윤리확립에관한사항

② 연구부정행위의예방, 조사에관한사항

③ 제보자보호와비밀유지에관한사항

④ 연구윤리위반검증, 검증결과처리와후속조치에관한사항

⑤ 피조사자명예회복조치에관한사항

⑥ 기타위원회위원장이부의하는사항

제5조(구성)

위원회의구성은위원장을포함하여총 5명으로한다. 회장이위원장및 위

원을임명하고, 이중1명을택하여필요한행정업무를관장하게한다.

제6조(임기)

위원의임기는해당사건의종결시까지이다.

제7조(회의)

① 위원장은위원회의회의를소집하고그의장이되며, 회의를주재한다.

② 회의는재적위원과반수이상의출석과출석위원과반수이상의찬성으로

의결한다. 단, 징계판정에서제1 7조의④-⑥에해당하는의결은재적위

원3분의2이상의출석과출석위원3분의2이상의찬성으로의결한다.

③ 위원회의회의는비공개를원칙으로하며, 필요에따라관계자의출석을

요구하여의견을청취할수있다.

제8조(권한과책무)

① 위원회는조사과정에서제보자, 피조사자, 증인, 참고인에대하여출석

과자료제출을요구할수있다.

② 피조사자가정당한이유없이 출석또는 자료제출을거부할경우에는

혐의사실을인정한것으로추정할수 있다.

③ 위원회는연구기록이나증거의멸실, 파손, 은닉또는변조등을방지하

기위하여그에상당한조치를취할수있다.

④ 위원회위원은심의와관련된제반 사항에대하여비밀을준수하여야

한국조직신학회연구윤리규정 271

한국조직신학회연구윤리규정

제1조(목적)

본 규정의목적은연구자의연구윤리와부정행위의규제에관한제반사항

을 정하는데 있다.

제2조(적용대상)

본 규정은본 학회에소속되어있는회원으로서한국조직신학회가간행하

는 학술지나저서에기고하는자에한하여적용한다.

제3조(연구부정행위의범위)

연구에서의부정행위는연구의제안과수행, 연구결과의보고및 발표등에

서 행해진다음각호의행위에해당한다.

①존재하지않는데이터또는연구결과등을허위로만들어내는행위

② 다른사람의독창적인연구내용과결과를정당한승인또는인용에대한

정확한정보의기재없이표절하는행위

③ 연구내용및 연구결과에공헌한사람에게정당한이유없이논문저자/

역자의자격을표시하지않는경우, 반대로아무런공헌이없는자에게

감사또는예우를목적으로부당하게논문저자/역자를표시하는행위

④ 동일논문을반복하여게재하거나이미발표된자신의논문과현저하게

유사한논문을이중으로발표하는자기표절행위

⑤ 학계에서통상적으로허용되는범위를심각하게벗어난부정행위로위

원회의자체적인조사가필요하다고판단되는부정행위

제4조(연구윤리위원회의설치와운영)

제3조의부정행위를규제및 조치하기위한연구윤리위원회(이하위원회)

를두며, 이위원회는연구윤리와관련된다음각호의사항을심의, 의결한다.

2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Page 137: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제1 4조(기피, 제척, 회피)

① 위원에게공정성을기대하기어려운사정이있을경우에제보자또는피

조사자는그 이유를밝혀기피를신청할수 있다. 기피신청이인정된경

우에기피신청된위원은당해조사와관련하여배제된다.

② 당해조사와직접적인이해관계가있는자는안건의심의, 의결, 조사에

관여할수없다.

제1 5조(이의제기및 소명기회의보장)

위원회는제보자와피조사자에게의견 진술, 이의제기 및 변론의권리와

소명의기회를충분히보장해야할의무를갖는다.

제1 6조(조사, 심의및판정기간)

① 위원회는부정행위에관한제보가접수된날로부터6개월이내에조사,

심의및 판정을내려야한다.

② 제보의접수일로부터역산하여만 5년이경과된부정행위는원칙적으로

처리하지않는다.

제1 7조(징계판정)

심의결과부정행위로판정될경우아래의징계들을판정할수있다.

① 경고

② 논문불인정

③ 일정기간논문투고금지

④ 제명

⑤ 일정기간재가입불허

⑥ 해당기관장에게통보

제1 8조(결과의통지)

위원장은조사결과에대한위원회의결정을서면으로작성하여지체없이

제보자및 피조사자등 관련자에게이를통지해야한다.

한국조직신학회연구윤리규정 273

한다.

제9조(부정행위제보및 접수)

제보자는한국조직신학회임원회및 편집위원회에직접또는서면, 전자우

편 등으로제보하되논문명(또는연구과제명)과구체적인부정행위의내용과증

거를제시하여야한다.

제1 0조(부정행위조사)

위원회는구체적인제보가있거나상당한의혹이있을경우에는부정행위

의 존재여부를조사하여야한다.

제1 1조(출석및자료제출요구)

① 위원회는제보자, 피조사자, 증인, 참고인에대하여진술을위한출석을

요구할수있으며, 이경우피조사자는이에반드시응해야한다.

② 위원회는피조사자에게자료의제출을요구할수 있으며, 증거자료의보

전을위하여해당연구기관장의승인을얻어부정행위관련자에대한해

당 연구자료의압수, 보관등을할 수있다.

제1 2조(제보자의권리보호)

① 위원회는제보자의신원을보호해야할의무를지니며, 제보자의실명은

공개되지않도록해야한다.

② 제보내용이허위임을알고도이를신고한제보자에대해서는신원보호

의 의무가요구되지않으며, 사안에따라관련사실을해당 소속기관에

통보할수있다.

제1 3조(피조사자의권리보호)

위원회는부정행위에대한사실규명의조사가종료될때까지피조사자의

명예나권리가침해되지않도록해야하며, 무혐의로판명될경우피조사자의명

예회복을위해노력하여야한다.

2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Page 138: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임 원

회 장 서창원 (감리교신학대학교)

부 회 장 윤철호 (장로회신학대학교)

총 무 정홍열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

서 기 이승갑 (장로회신학대학교)

회 계 황돈형 (중앙신학교)

편 집 부 장 이세형 (협성대학교)

대외협력부장 김성원 (나사렛대학교)

미디어 부장 최광진 (호서대학교)

감 사 구춘서 (한일장신대학교)

편집위원장 이세형 (협성대학교)

편집위원

김성원 (나사렛대학교) 김재진 (숭실대학교)

신재식 (호남신학대학교) 심광섭 (감리교신학대학교)

윤철호 (장로회신학대학교) 이정배 (감리교신학대학교)

장윤재 (이화여자대학교) 황재범 (계명대학교)

제1 9조(재심의)

판정에대한재심의요청의경우, 판정이후3개월이내에해야하며, 재심

의 요청이있을경우위원회는6개월이내재심의하여결정을내려야한다.

제2 0조(비밀엄수)

위원회는제보, 조사, 심의, 판정, 재심의및 건의조치와관련된일체의사항

에 대해비밀을지켜야할 의무를갖으며, 여기에직- 간접적으로참여한자 역

시도모든정보에대하여비밀을지켜야한다.

제2 1조(기록의보관및공개)

① 조사와관련된기록은조사종료시점을기준으로5년간보관하여야한

다.

② 판정이끝난이후의결과는학회상임이사회에보고해야하며, 제보자,

조사위원, 증인, 참고인, 자문에참여한자의명단등 신원과관련된정

보에대해서는당사자에게불이익을줄 가능성이있을경우에위원회의

결의로공개대상에서제외할수있다.

제2 2조(운영예산)

위원회운영및 조사와관련하여필요한예산은별도로책정하여지급할수

있다.

<부칙>

1. 이규정은2008 년1 2월1 9일부터시행한다.

2. 이규정은윤리위원회의결의로개정할수있다.

3. 이규정은학회임원회의승인하에효력을갖는다.

2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Page 139: korea systematic theological journal

한국조직신학논총제25집

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2 0 0 9년1 2월 2 0일 인쇄

2 0 0 9년 1 2월 3 0일발행

편집 한국조직신학회편집위원회

발행 한국조직신학회

주소 서울시서대문구신촌동134

전화 2 1 2 3-5920

Email: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