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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영락지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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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영락지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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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

토론토영락교회 담임목사 송 민 호

말씀이 신앙생활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너무나 큽니다. 특히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의 경

우에는 절대적입니다. 카톨릭교회나 러시아 정교회를 보면 말씀 보다는 성례전에 더 많은

비중을 둡니다. 러시아 정교회를 가면 '예배를 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입니다. 예배당

안에 들어가면 당연히 있어야 할 예배석이 없습니다. 모두들 서서 두시간이고 세시간씩 예

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방에는 아이콘이 있습니다. 성경이야기를 비쥬얼하게 만든 것입니

다. 촛불과 향로도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에도 정교한 예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다릅니다. 특히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성경 말씀이 예배의 한 복판에 들

어왔습니다. 개신교 예배당에 들어가면 가장 중심에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단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말씀을 중요시 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을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번역

해서 일반 성도가 읽을수 있도록 했고, 칼빈은 성경을 주석하는 작업에 그의 평생을 받쳤습

니다. 개신교의 영적뿌리는 말씀선포와 교리교육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한국교회

의 시작도 역시 말씀입니다. 복음주의 노선의 선교사들로 부터 전수된 우리의 신앙은 철저

하게 말씀 중심이었습니다.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존 로스 선교사가 최초로 한

일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것입니다. 1872년 만주에 도착한 로스는 한글을 배우기 위해 무

던히도 노력을 했고 극적으로 이응찬을 언어 조사로 고용합니다. 그리고 10년 후인 1882년

드디어 마가복음을 번역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뿌리입니다.

성도는 말씀을 더욱 사모해야 합니다. 말씀을 깊이 알고 그 뜻을 깨달아 경건의 삶을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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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몇 년전부터 성경 일독을 강조해 왔습니다. 하루 평균

넉장을 읽으면 일년에 구약 한번과 신약 두번을 읽게 됩니다. 하루에 30분만 투자하면 됩니

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입니다. 성경을 꾸준히 읽으면 성경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신구약 66권을 통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됩니다. 그래

서 우리는 말씀 읽기를 삶의 우선순위로 놓아야 합니다.

말씀읽기와 같은 습관은 하루 아침에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을 현실로 나타나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토 도미오 교수는 새로운 습관이 나의 것이 되기까지는 꾸

준함, 자리 잡음, 자신감, 확신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꾸준함 - 매일 반복하고 모니터링 한다

자리 잡음 - 나의 삶에 중요한 부분이 된다

자신감 -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확신 - 이 습관이 나에게 궁극적으로 선을 가져다 준다는 확신을 갖는다

우리도 이런 각오를 갖고 노력하면 매일 성경을 읽는 거룩한 습관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말씀 안에서 주시는 성령

의 감동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말씀에 붙잡히

게 됩니다. 2차 전도여행 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

게 예수는 그리스도’(행 18:5) 라고 증언했다고 합니다. 바울처럼 말씀에 붙잡히는 삶을 산

다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삶이 아닐까요?

개신교의 영성은 우선적으로 말씀에 뿌리를 내린 영성입니다. 강단에서는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어야 하고, 성도의 삶 속에서는 말씀이 체계적으로 읽혀지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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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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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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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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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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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여든다섯

글 | 소망을 위해 기도하며 사는 에녹회원 K 집사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는 나이를 살고 있다.

성경 말씀에도 건강해야 산다는 80 고개를 넘은 지도 오래되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

일제 치하와 6.25등 수많은 역경을 지나 이제 90을 바라보며 지나온 나의 인생을 되

돌아본다. 그저 부끄럽고 곤고한 삶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사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셨다는 그 은혜를 믿고 산다.

얼마 전, ‘코델코’라는 분이 9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운동을 하며 육상 대회

에 출전할 계획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내가 속한 건강과 친목을 위한 모임(현대 노년 건

강 연구회)에도 96세가 되도록 아내를 태우고 손수 운전하여 다니신 분이 계시며, 지난

1월에는 에녹회의 임복남 권사님의 100세 축하연에 참석하기도 했다. 100세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하고 즐거운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내 나이 이제 85세, 이런 분들을 보며 나의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본다.

가끔 자녀들이나 친지들에게 아무쪼록 오래오래 살라는 인사를 받곤 한다. 요즘 노인

들 사이엔 ‘99.88.2.3.4’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앓고 죽는 것’이란 뜻이란다. 나는 여기서 ‘99’는 빼고 ‘88’(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만에 하나님 나라를 가는 것이 소원이다. 오래 사는 것보다는 건강하게 살면서 자손들

에게 짐이 되지 않고, 내가 사는 나라에 손해를 끼치지 않으며, 이웃에 폐가 되지 않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내 남은 삶은 이러한 나의 소망을 위해 기도하며 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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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기획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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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 (1/4)성지 순례 - 순례인가 관광인가?

글 | 송민호

교회사 2천년을 돌아보면 수많은 신도들이 성지순례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성지순례

는 기독교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에서도 중요하게 말하고 있다. 아니,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성지순례가 5대 의무 사항 중에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핫지(Hajj)라고 불리는 이 행위는 경

제적, 신체적으로 허락이 되는 이슬람교도라면 평생에 한번은 참여해야하는 성지순례이다.

라마단을 지내고 2개월 후에 이슬람교도들은 메카를 다녀온다. 이때 일상의복을 벗고, 남성

은 바느질이 되지 않은 흰 천을 몸에 두르며, 여성은 무늬가 없는 옷을 입는다. 핫지를 시작

하는 때를 이흐람(Ihram) 상태에 들어간다고 말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순례자는 경건과

금욕을 필수적으로 지켜야 한다.

이슬람교와는 달리,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성지순례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기독교

의 성지순례는 순례보다는 관광이라는 이미지를 벗기 어렵다. 성지순례가 여행사의 한 상

품으로 소개되고, 가격을 낮추기 위해 이런 저런 프로모션을 하다보니 성지의 성스러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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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상품의 경제성이나 상품의 가치를 더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천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성지 순례에 임해야 할 것인가? 순례인가 관광인가?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기독교의 성지순례가 이슬람교도들이 생각하는 필수사항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하여,

성지순례를 관광 정도로 생각해서도 안된다. 물론 관광의 형태는 부정할 수 없다.

일단 성지에 가면 참여자들을 맞아주는 관광사 가이드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고, 준비

된 버스에 태워 지정된 곳을 방문하게 된다. 더군다나 중간에 식당과 선물센타에 들리는 것

도 빠질수 없는 일부분이 되다보니 성지순례는 어김없이 관광상품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

들다. 그러나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적어도 두가지 이유로 성지순례는 관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첫째,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가며 주님을 묵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작년 2월, 노회원들과 함께한 이스라엘 성지순례 중, 나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제자들

을 가르치시고 함께 기도하셨던 곳을 지나갈 때마다 전율을 느꼈다. 베들레헴에서 가버나

움 회당까지, 갈릴리 호수에서 유다 광야까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갈보리 언덕까지 다니며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시고 삶을 나누셨을 것을 상상해 보았다. 특히 갈릴리 호수 위에 배

를 타고 2천년전 베드로와 함께 하셨을 주님을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한가지 개신교도들이 카톨릭교회나 정교회 신도들과 다른 점은 너무 장소나 자

리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들레헴에 갔을 때 이야기이다. 그곳에 예수 탄생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어머니 성 헬레나의 요청에 의해 339년에 건립한 교

회다. 원래는 로마의 아도니스 신을 위한 신전이 있던 자리였는데 헬레나가 이곳에 예수님

이 탄생하신 동굴에서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아들에게 동굴 위에 교회를 지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래서 황제는 신전을 헐고 예수 탄생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1.2 미터 밖에 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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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작은 문을 통해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바실리카 구조의 예배당이 나오고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작은 동굴이 나타난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한 곳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

이 감격 속에 그 자리를 쳐다본다. 지금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한복판에 ‘베들레헴의 별’

을 만들어 예수님이 태어나신 자리를 표시했다. 이 표시는 1717년 카톨릭교회가 만들었는

데, 이 별을 둘러싸고 러시아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 사이의 권한 다툼이 일어났다. 러시아

정교회가 별을 없애버렸고 원상회복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급기야 1853년부터 1856년까

지 러시아제국과 연합군 사이에 크림반도 전쟁으로 번졌다.

예수 탄생 교회에는 예수님의 탄생 자리 뿐만아니라, 외양간 자리, 동방박사들이 묵었던

곳, 헤롯대왕의 명령에 의해 살해당한 두 살 이하 아이들의 무덤도 있다. 카톨릭교회나 정교

회 신도들에게는 그 자리 자체가 성스러운 곳이 될지 모르겠지만, 개신교인으로서 나는 그

자리 자체가 성스럽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주님께서 태어나셨고 경배를 받으셨을 것이라

고 추정되는 장소에서 다시금 우리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 사

건을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을 생각해 보는 좋은 동기를 주는 곳이다. 성지라고 해서 베들레

헴 별 근처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는 사람도 보았지만, 나의 신앙은 다르다. 돌은 돌이고

자리는 자리일 뿐이다.

성지순례가 귀한 이유는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가며 주님을 묵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를 주기 때문이다. 감람산에 갔을 때 이야기다. 예루살렘 성전 동쪽에 있는 감람산은 그 말

그대로 감람나무(올리브 나무)가 많이 있는 곳이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머무시면서 예루

살렘을 오고가실 때마다 걸으셨다는

고갯길을 걸어 보았다. 베다니에서 감

람산을 타고 올라가면 산 위에서 예루

살렘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기에(눅19:41)

라틴어로 Dominus Flevit Church라고

불리우는 이 교회는 현재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다. 그 교회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바라보셨을 예루살렘 성을 쳐다보았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황금 돔 사

감람산 눈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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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에 가려져 다른 모습이 되어 버렸다.

눈물 교회 안에서 나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느끼셨던 그 감정을 느껴보려고 했다.

그 당시에도 예루살렘은 여러 사람들이 기득권을 놓고 전쟁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결

국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되고 주님께서는 그 일을 예고하시면서 회

개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놓고 눈물을 흘리시지 않았는가? 오늘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아

직도 이 땅에는 평화가 없고 이제는 성지를 놓고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분쟁을 하고

있지 않는가? 왠지 모르게 나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답답했다.

갈릴리 호수에 가서 배를 탔을 때 나는 그 때 그

기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곳이 예수님

께서 베드로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하신 장소라는 생

각을 해보며, 또 한밤중에 물 위를 걸어오셔서 제자

들이 마치 유령을 본 것처럼 겁에 질렸던 장소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그 동안 내가 읽고 또 읽었던 복음서의 내용들이 역사적인 사건들로 마음

에 들어온 것이다.

특히 갈릴리 가버나움에 갔을 때, 그곳에 지금도 남아 있는 2천 년이 넘은 회당을 보았다.

누가복음 4장 31절 이하에 보면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

매…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

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라고 적혀 있다. 특

히 회당의 바닥은 여러 층으로 되어 있는데, 예수님 당시에 깔았던 바닥 층을 알아볼 수 있

었다. 순간 나는 다시 한번 온 몸으로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아! 내가 지금 예수님께서 귀신

을 쫓아 내신 그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

시매…”(요1:14)라는 성육신의 교리가

더 이상 딱딱한 교리가 아니라, 실제로

성육신화 되어 나의 삶 속에 다가왔다.

성경 안에서만 존재하던 갈릴리 호수가

내 눈 앞에 펼쳐지고, 가버나움 회당 이

야기가 새롭게 다가왔다.

갈릴리 호수

가버나움 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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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성서 지리를 확실히 아는 기회가 된다.

노회원들과 함께한 코스는 8박 9일의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 기간에 이스라엘과 요르단

두 곳을 다 본다는 것은 무리였지만,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올 것인가 생각하며 모두들 진지

하게 참여했다. 무엇보다 감사했던 것은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동서남북을 거의 다 돌았

던 것 같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성지의 지리를 파악하는 것이었

다. 성경에 보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 이스라엘의 최북단의

도시 단으로부터 최남단의 도시 브엘세바까지 라는 뜻으로, 우리로 말하면 ‘백두에서 한라

까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전에는 이런 표현을 별 생각없이 읽었지만, 막상 이스라엘을 다

녀오고 나니 단에서부터 유다 네게브 광야의 브엘세바까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거리도 거

리지만, 단에서 유다 광야까지 가는 동안 지형이 바뀌고 기름지고 푸른 땅이 황폐한 광야로

바뀌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걷던 길들, 전

체 땅의 60퍼센트를 차지하는 사막이

얼마나 적막한 가를 알게 되고, 그 가운

데에서도 물이 나는 여리고와 엔 게디

가 왜 그렇게 중요한 땅인지, 갈릴리 호

수가 얼마나 귀한 호수인지를 새삼 깨

닫게 되었다. 그동안 성경을 신학적으

로 이해했지만,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

에 대한 나의 지형 지식이 얼마나 피상적이었나 느끼게 되었다.

지형을 알고 나니까 확실히 성경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을 느끼겠다. 그래서 성경을 이해

하는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4장 2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온 갈릴

리에 두루 다니시며 사역하신 내용이 나온다. 여러 지명들이 나오는데 이전에 미쳐 깨닫지

못했던 순서가 보였다.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

루살렘과 유다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 많은 무리가 따르니라”(마 4:23-25), “갈릴리에서

수리아로, 갈릴리에서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단 강 건너편으로…” 이런 내용

이 이제는 의미 심장한 순서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유다 광야의 오아시스 엔 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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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를 부르셨던 곳, 오병이어의 기

적을 베푸셨던 곳, 산상수훈을 가르치셨던

갈릴리 호숫가가 모두 다 마음 속에 남아

서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오

른다. 수리아 하면 어디인지 금방 들어오고

데가볼리도 어렵지 않다. 입체적 관주라고

할까? 성지를 다녀오고 난 후 무엇보다도

성경을 꼼꼼히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특히 지명이 나올 때마다 집중하는 습관이

생겼다.

성지 순례를 제대로 하려면 가기 전에

먼저 성지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 성경

시대의 역사, 지리, 문화를 알면 알수록 짧

은 여정 가운데 가이드가 하는 말을 놓치

지 않는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도는 머리

속에 미리 넣고 가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가이드가 ‘오늘은 엔 게디를 갑니다’ 하면

‘그곳은 바로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었던 유다 광야의 굴들이 많은 곳’이라고 마음 속으로

답하며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결론

“성지순례는 꼭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그렇습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물론

성지를 다녀오는 비용이 만만치는 않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잘 준비해서 평생 기억에 남

을 여행을 다녀오길 권한다. 성지순례는 주님을 깊이 생각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될

것이기에 축복된 여행이 될 것이며, 성지의 지리를 훨씬 더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기 때문

에 성경을 읽는 눈이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성지순례란 무엇인가? 개신교의 입장에서 엄격히 말한다면 순례나 관광이라기 보다는

연구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성지연구, 그렇다. 성경을 더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

래서 결국은 말씀으로 오신 주님을 더 확실히 알고 본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익한

경건 훈련 중에 하나라고 본다. †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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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 (3/4)<예루살렘>나는 이렇게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윤광희

아주 어릴적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주님전을 드나들며 말씀과 기도

와 찬양속에 살다 보니 어느새 하나님은 나의 부모가 되어버렸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하나

님은 어떤 존재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난 그분 앞에서 목 놓아 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삶의 수많은 순간순간 위기속에서 나를 다독이시며 함께 하신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으

로 말미암아 회복이 있었습니다. 나의 눈물을 닦으시며 말없이 나를 기다려 주시고 언제나

사랑 그 자체이신 어머니 같은 분, 난 그분을 많이 사랑하고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원하시고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어렴풋이 알뿐,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 배경, 지리적 상황, 복잡한 인물관계 등 논리와 체계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

러나 성경을 의심하지 않았고, 믿기지 않는 사실들도 그저 막연히 믿었고 어려운 대목은 그

냥지나가고, 지명이나 인명은 당연 스쳐 지나 갔고, 그것들을 외우고 아는 것이 꼭 필요하다

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적으로 의지적으로가 아

닌 체험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은 나의

참 좋으신 그리고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입니다.

세상의 공부는 항상 배우고 싶고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욕심이 많은데 왜 성경 지식

은 그렇게 알고 싶은 욕심이 없고 아는 게 없을까? 성경을 읽어도 서정적인 부분만 들어올

뿐 알려고 해도 잘 알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난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내가 성경

지식까지 많이 알면 교만한 교인이 될까봐 그저 미련한 듯 잘 순종하고 따듯한 마음으로 주

님과 교통하라고 그러시는거야. 성경지식은 목사님들 몫이고 난 목사님의 설교를 잘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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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기도하고 섬기면 되지' 라고…

그런데 믿음의 연륜과 삶의 연륜이 쌓이니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자 앞에서 조금은

나 자신이 부끄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남편은 나보다 훨씬 하나님을 늦게 알았으면서도

아는게 많습니다. 가끔은 날 무식하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지요.

그러던 어느날 몇몇 집사님들과 성지순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바쁜 업무로 피곤한 심신

을 달랠 겸 여행이나 가볼까 하며 그냥 친구 하는 대로 편히 묻어가자 생각했는데 막상 알

아보니 비행기표는 비싸고 가이드도 없고 숙박이며 일정도 아직 안잡혀 있었습니다.

일정을 짜고 경비를 계산하고 규칙적으로 만나 자료를 update하고, 그 모든것이 오히려

더 스트레스로 다가왔습니다. 신나고 편안한 여행을 꿈꾸었는데 날마다 이스라엘 지도를

펴놓고 4복음서를 읽어야 하고, 성지순례 가이드 책을 몇 권이나 돌아가며 읽어도 별로 이

해도 안되고 기억도 안되고 괜히 가기로 했나 후회가 됐습니다.

이제라도 그만둘까? 그래도 혼자가는 여행이 아니어서 그만둘 수도 없고 난 울며 겨자먹

기로 따라갔습니다.

그렇게 우린 3-4개월을 준비하고 드디어 이스라엘에 도착했습니다.

그 무더운 여름날씨에 첫날 보았던 욥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당시 레바논의 백향목

이 바로 이 항구를 통하여 들어왔다고 합니다. 난 아무것도 생각하지않고 바다 속으로 뛰어

들고 싶었지만 일행중 누구도 동조하지 않아 아쉬움을 뒤로한 채 무더운 순례를 계속해야

만 했습니다.

욥바와 지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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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물이 변하여 포

도주가 된 혼인잔치의 기적을 베푸신 가나,

많은 무리에게 “심령이 가난한자는 …”이

라고 팔복을 가르치신 팔복교회, 그곳에서

내려다 보는 갈릴리 호수와 아름답게 가꾸

어진 무성한 나무의 정원, 길 양쪽의 수녀

원 정경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천국 동산이 이런곳일까? 이곳에서 예수님은 참 행복하

셨겠다’ 잠시 부러웠습니다. 더위와 피곤을 잠시 식히고 순례는 이어져 예수님께서 제자들

과 함께 가버나움까지 걸으셨던 그 길을 걸으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과 함께 걷고

있는듯한 감격과 함께 갈릴리 호숫가 디베라, 베드로 고기 등 성경에서 읽었던 것들을 이렇

게 직접 보고 느끼고 걸어보니 예수님의 시대에 내가 지금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

니다. 그저 그랬었구나 막연히 생각하고 믿었던 성경이 비로소 사실적으로 입체적으로 내

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건너셨던 갈리리 호수에 우리도 배를 타고 나갔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며,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꾸짖으시

며 파도를 잠잠케 하신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며 그 두려움에 떠는 제자가

바로 나 자신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믿고 신뢰한다고 하나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눈

앞에 보이는 장애물 앞에 그만 믿음이 없어지는 나 자신을 말

입니다. 위기 속에서 “너희 믿음이 어디있느냐” 주님의 음

성을 듣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해 봅니다.

갈릴리 호수

팔복교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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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 많은 무리에게 육성으로 설교를 하

시고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천명을 먹이

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던 빈들에서의 예수

님, 바람의 방향을 이용해 확성기 없이도 소리가

전달되었을 것이 이해가 되었고, “내 양을 먹이

라(Feed my Sheep)”고 말씀하시며 낙심한 베드

로의 마음을 위로하고 회복시켜 주셨던 자상한

주님을 내가 만났습니다.

중풍 병자, 귀신들린 자, 손마른 자 등 많은 병든 자, 가난한 자, 약한 자들을 위하여 기적

을 베푸셨던 가버나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신앙고백을 했던 가이샤라 빌립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세례를 받는 요단

강 세례터,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 450명과 영적 대결에서 승리한 갈멜산 ‘엘리야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 갈멜산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찬양이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이렇듯 성경에서 보았던 지명들, 어떤 곳은 인명인지 지명인지 불분명했던 곳을 직접 보고

나니 ‘과연 성경은 살아있는 이야기이구나’ 더욱 실감이 나고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

가 얼마나 무지했었나를 또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남편으로부터 토론토에서는 똑똑한데

여기선 왜 그렇게 바보같냐고 한소리 듣기도 했답니다.

예루살렘 성의 최대 약점인 물의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바위터널을 뚫어서 기혼

샘의 물을 실로암 연못까지 끌어오는 수로인, 겨우 한사람만 통과할수 있고 물은 허벅지까

지 닿는, 히스기야 터널을 작은 불빛하나로 통과하며 성취감을 느꼈고, 날때부터 맹인된 사

갈멜산 정상

네 양을 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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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에게 “실로암 연못에 씻으라” 하시니 씻고 밝은

눈이 되었다던 실로암물에 나 또한 눈을 적셔 보며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시력이

조금 좋아진 듯합니다.

40도 광야의 무더위와 위험도 아랑곳 하지않고

남자 집사님들과 함께 무너진 여리고 성의 잔해들

을 보며 내 안에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 성이 무너지

기를 기도하며, 그리고 원하는것들이 이루어지기

를 기도하면서 한바퀴 돌았습니다. 마음은 일곱

바퀴를 돌고 싶었는데 무더운 날씨와 일행의 일

정으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그곳을 떠나 다윗이

사울왕의 추격을 피하였던 엔게디를 오르다 바

위속에서 많은 동굴을 보았습니다. 그곳 어느 곳

에 숨어있던 다윗이 사울왕의 옷자락만 베어 결

코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를 해치지 않겠다는

용맹과 믿음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한참을 가파르게 올라가서 다윗의 폭포 앞에

나는 온몸을 던졌습니다. 광야에서 샘을 만났습

니다. 지치고 곤한 나의 육신은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생물이 살지 않는 43도의 사해 바다. 맑고 영롱한 사파이어 색깔은 그 어느 보석보다도 눈

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너무 짜서 눈과 입에 들어가면 안된다는 가이드의 말에 두렵긴 했

무너진 여리고 성을 돌며

엔게디의 다윗폭포

히스키아 터널의 종점, 실로암 연못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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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뜨는 방법을 알고나니 나오기가 싫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

로 오고가시던 길에 더위를 피하여 작은 동굴에 들어

가서 제자들과 말씀도 나누시고, 쉬시기도 하고 “그

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며 기도하는 법(주

기도문)을 가르치신 주님, 기드온 계곡과 왼쪽에 펼

쳐지는 힌놈 골짜기를 건너서 급격한 경사의 분지 위

에 건축된 성벽으로 둘러 쌓인 천혜의 요새 예루살

렘. 감람산 자락에서 예루살렘성을 바라 보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 하시며 눈물을 흘리

시던 예수님,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전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 방울이 핏 방울이 되도

록 기도하시며 “이 고통 쓴 잔 내게서 멀어지게 하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간절히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자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하며 안타까와 하셨던 주님을 내가 보았습니다.

십자가형을 받으시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까지 걸으셨다는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슬픔의 길을 나도 걸으며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을 입

고 십자가를 메고 가신 주님을 생각하게 되었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크게 외치며 숨

을 거두신 주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울컥거렸습니다.

이렇게 성경 속의 많은 이야기들을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하고 나니 성경은 더이상 이야

기가 아니었습니다. 전체적인 이해없이 부분적으로만 이해했던 성경이 이제 조금이나마 머

리속에 그려집니다. 이해가 갑니다. 이스라엘에서 보았던 지명들, 인명들, 이야기들 그리고

과일들이 나오면 신이나서 성경이 절로 읽어집니다.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감람

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이제 왜 무화과 나무를 비유하고 감람나무를 비유하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많은 무화과 열매가 있었고 2천년전부터 있음직한 감람나무들의 열매

가 무성하였습니다. 에셀나무를 보았습니다. 전엔 한번도 보지 못한 것 같은 단어이었는데

갔다와서 성경을 보니 에셀나무가 많이 보였습니다. 무더운 날씨와 빡빡한 일정, 배낭여행

같은 불편함이 있었지만 참 유익한 여행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한번쯤은 꼭 다녀와야

할 성지순례인것 같습니다 .

건강주셔서 모든 환경들을 잘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함께 동행할 수 있

는 믿음의 친구들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일정 가운데 함께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겟세마네 동산의 감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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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 (4/4)주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서최행순

예수께서 성장하신 나사렛을 거닐며

설렘과 두려움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올랐다. 11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텔아비브 벤

구리온 공항에 도착하여 성서 속에서만 보아온 예수님의 탄생지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니 가

슴이 벅찼다. 입국수속을 마치자마자 순례여정이 시작되었다. 처음 방문하게 된 곳은 이스

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나라가 공존하는 곳이다. 욥바항구를 거쳐 이곳에서 가장 큰 이즈르

엘 평야를 지나던 중 정말 멋있는 건물과 사원이 많았다. 특히 유대인 지붕은 흰색 물탱크

가, 팔레스타인 지붕 위에는 까만 물탱크가 매달려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대부분 이슬람교도인 팔레스타인사람은 이스라엘 민족보다 더 먼저 이곳에 살았단다. 젖

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바로 가나안 땅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매스컴 통해서 보고 들으

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살아서 놀랐다. 이스라엘은 1948년에 독립하고 귀환법을

만들어 유대인이면 어느 곳에 살든지 이 나라로 들어와 살라는 귀환정책을 쓰고 있는데 혈

연주의가 아닌 종교문화적으로 모여 사는 정책이라 우리네 상식으로는 다소 특이해 보였다.

예수님께서 성장하신 나사렛에 숙소가 있어서 가는 도중에 보이는 지명들이 성서 속에

서 본 것들이어서 눈에 쏙 들어왔다. 나사렛은 팔레스테인사람이 많이 살고 무슬림을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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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다양한 종교인들이 사는 이스라엘의 축소판 도시란다. 재미있는 것 중에 하나로, 이곳

은 정결음식법(Kosher)이라는 것이 있는데, 다른 곳에서 가지고 온 음식은 소지할 수도 없

고 먹지도 못한다고 한다. “염소새끼를 어미젖에 삶지 말라”(신 14:21)는 구약성서 말씀에

따라 유제품과 고기류 등은 같은 시간에 먹지 않으므로 아침식사는 유제품으로 먹고, 저녁

식사는 고기종류로 먹고 담는 그릇도 씻는 곳도 다르다고 한다.

주님이 물위를 걸으시던 갈릴리에서

팔레스타인은 목요일 해진 후부터 안식일로 지키며 아무데도 돌아다니지 않고, 음식도

하지 않고, 자동차는 물론 비행기도 타지 않고, 방송도 중단하고 황금사원으로 기도하러

가는 날이다. 갈멜산 엘리야 선지자의 불의 재단이 있다는 곳에는 수도원이 세워져 있으며

그곳에 올라가니 기손강과 도시들이 한눈에 보인다. 열두동이의 물을 붓고도 주님의 불이

내려와 그 흐르는 물을 말리고 제단과 제물을 불로 살라 응답하셨음을 실감케 하는 곳이

었다. 호텔에서 바라보는 갈릴리호수는 참으로 평온해 보였다.

갈릴리 호수길을 산책하면서 지금은 이스라엘의 상업적인 관광지 중에 하나지만 이곳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기도 했던 곳이자 오병

이어의 기적이 인근 벳세다에서 일

어난 곳이라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치 역사 속을

거슬러 올라가듯 모든

것이 생생하기만 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

두실 곳도 없이 떠돌아다

니시며 복음을 증거하셨는데,

우리는 이렇게 편한 곳에서 잠을 자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주님의 고난 당하신 길을 여행

한다고 생각하니 송구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이라 거리는 너무 한산했다. 생산적인 일을 모두 중단하고 검

은색 중에서 제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모든 상점은 문을 닫고 통곡의 벽으로 기도하러

가는 그들이 눈에 들어왔다. 숙소에서도 토요일은 안식일이라 음식을 새로 하지 않고 금요

갈릴리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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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수가 나오고있는 가이사라 빌랍보 반석

일에 만들어놓은 음식을 내놓았다.

45분 동안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는 선상에서의 성찬식은 우리에게 너무나 뜻깊

은 예식이었다. 예식 후 선상에 태극기를 올리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니 갑자기 애국자가 된

듯 눈물이 흘러내렸다. 갈릴리 호수, 디베리아 호수, 혹은 가이사라 호수 등은 전부 같은 이

름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가이사라 빌립보 도상에서의 예배

우리는 가이사라 빌립보 도상에서 주일을 맞이했다. 박미라 목사님 집례로 모두 둘러앉

아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이 너무 신선하고 좋았다. 웅장한 암벽

밑에서 물이 솟아나와 요단강 줄기를 타고 흘러내

리는 생명의 원천수를 보았다.

비도 오지 않고 물도 귀한 이곳에서도

요단강이 마르지 않는 이유는 이 생명

의 원천수 때문이라고 한다.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

라”는 견고한 신앙고백이 있는 이곳에

서 흐르는 생명수는 우리에게 영적인 메시

지를 느끼게 해 주었다.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

을까?” 근심 걱정하지 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디베리아 호숫가

에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내 양을 치라”고 지팡이

를 주시는 형상의 동상 또한 흥미로웠다. 힘없이 세 번이나 “주님 사랑하시는 것 아시잖아

요.” 똑 같은 말을 했을 때 우리도 겸손하고 굳건한 신앙을 지켜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가버나움에는 베드로의 집터가 있었고 그 위에 회당을 지어놓은 것을 보았고 점심식사

로 그곳에서 베드로 생선을 먹었는데 그 맛이 평상시 먹어왔던 생선의 맛이 아니고 역사 속

의 현장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운 맛을 더했다.

올리브 나무와 아론의 지팡이라고 하는 아몬드나무가 있는 가로수를 지나는데 길가에

쇠기둥들이 가로등처럼 서 있어서 놀랬는데 그것은 안식일에는 이쪽 동네에서 저쪽 동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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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깃도에서 바라본 나사렛 평야

사해 사본이 발견된 쿰란 동굴

물건을 가지고 가면 안 된다는

경고의 기둥들이라고 하여 긴

장감이 느껴졌다.

예수님이 첫 번째로 기적을 행

사하신 가나 혼인잔치교회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그 돌 항아리도 보았고 옆

에 가까이에서 그곳의 포도주 맛도 보았는데 매우 달았다. 골란 고원에서 시리아와의 국경

지대 아주 높은 전망대위에 올라가 시리아를 내려다 보면서 내전이 빨리 끝나기를 기도 드

렸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 강원도만한 땅이란다. 어느 곳을 가든지 성경 속의 지명들을 볼

수 있었고 돈의 단위도 세겔로 성경에 나오는 그대로이다.

유대광야는 평편한 광야가 아니라 모래색깔의 화강암에 주름을 잡아 세워 놓은 산들로

척박한 돌산이었다. 그 가운데에도 듬성듬성 난 풀을 따라 양떼가 노닐고 있고 간간이 작

은 싯딤나무가 서있는 것도 보였다. 그 쓸모 없는 나무로 법궤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나

무를 통해서 보잘것 없는 우리를 주님께서 귀하게 쓰시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꿀과 젖이 흐르는 땅에서 일어나는 끝없는 전쟁

요르단과 이스라엘 국경 사이에 있는 비무장지대를 통과하여 예수님의 세례지로 갔다.

냇물 같이 폭이 좁은 곳은 이스라엘이고 건너편은 요르단이다. 중간에 철사줄로 반을 갈라

놓았다.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 받으신 곳에서 손도 씻고 발도 물에 담가 보며 거듭나는 우

리의 삶이 되기를 기원했다.

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 유적지, 동굴이 200여 개가 넘는 곳에서 1948년도에 발견된 성

경사본으로 이사야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유대광야를 지나 여리고로 들

어갔다. 그곳은 팔레스타인사람만 살고 유대인은 못 들

어 가는 곳인데 여리고 성터가 있던 곳은

등성으로 남아 있어 우리나라 허

술한 시골 동네를 연상케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마사다로 올라가 헤

롯왕이 세운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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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곳의 성을 보고 롯이 아니냐고 질문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특히 마사다는 마지

막으로 사람들이 자살했던 장소로 다

윗이 사울 왕을 피해 숨어살았다는 곳

이다.

그 당시 지위 높은 삭개오가 예수님

을 보기 위하여 올라갔다는 뽕나무를

보았는데 이 나무를 삭개오 뽕나무라 이

름지었다. 삭개오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에야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되새기는 순간이었다.

광야를 지나 베두인이 사는 계곡지역을 지나면서 열악한

상태로 천막 집에서 사는 사람들도 보였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검문소를 거쳐 베들레헴으로 들어서는 길은 높은

분리장벽이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으로서 유대인들은 비자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

다. 우리나라의 산동네처럼 이곳은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이지만 이스라엘에 의존하고 있으

며 건장한 남자들이 분리장벽을 거쳐 이스라엘로 일하러 갔다 오는 모습도 보였다. 아브라

함과 사라의 묘가 있는 헤브론에는 유대인 경찰과 군인들이 입국 심사하듯 조사가 심했다.

무덤을 중요시 여기는 풍습 때문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갈등이 두 번째로 심한 곳으로

무모한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예루살렘은 분지 위에 세워진 곳 같이 언덕위로 산꼭대기위로 집과 아파트들이 있는데

모두 회색이었으며 집들은 지붕이 붉은색이었다.

감람산길은 가파른 언덕으로 유대광야와 예루살렘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히브루대학

과 병원이 있고 주위에는 옛 무덤이 많았다. 대부분의 가족묘지들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성

경의 ‘열조에게 돌아갔느니라’라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곳이었다.

기도문을 적어서 통곡의 벽에 끼우고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통곡의 벽은 헤롯에 의하여 세워진 성벽 중에 유일하게 남은 부분

이다. 건기에도 불구하고 아침 이슬이 많이 내려 벽 위에서 이슬이 물이 되어 밑으로 흘러

내리는 것을 보니 정말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것처럼 보여 통곡의 벽이라는 이름이 실감났

삭개오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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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원래 이 벽은 유대인들이 성전

이 파괴된 것과 나라를 잃은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며 이곳에 와서 통곡하였기 때문

에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우리 일행도 이곳에 들어가 기도제목을 나누고 종이에 기도

문을 적어 벽 틈에 끼우고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

기 때문에 주님이 못들으실까봐 기도문을 적어 틈새에 끼운다는 것 또한 재미있게 느껴졌

다. 안식일이 시작되면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오므로 사진촬영이 금지되기도 한다. 기도제

목이 적힌 쪽지들은 랍비들이 일년에 두 번 수거하여 감람산에 묻어주기도 하는데 크리스

마스가 되면 전세계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보내는 편지’가 배달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나와 기도론 골짜기를 내려오면서

여러 사람의 묘지를 보았고 예수님

께서 눈먼 소경을 고치신 실로암

의 물로 눈도 씻어 보았다. 예

수님께서 암문 곁에서 앉은뱅

이로 38년이나 된 병자를 고

치셨다는 벳세다 연못에 이르

렀다. 이 병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다시 태어나는 영광을 누렸다.

베데스다 연못곁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태어났다는 장소에 세워진 안나 교회(St.

Anne’s Church)에서 우리는 찬송가를 부르며 많은 은혜를 받기도 했다. 또한 시온 게이트

로 나와 예수님이 심문을 받으셨던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터 위에 세워진 베드로의 통곡교

회를 방문했다. 예수께서 체포되어 선고 받기 전에 하룻밤을 머무셨다고 여겨지는 지하감

옥을 보았는데 지하라 소리가 울리고 어둠침침해서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홀로 외로이 계

셨을 예수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 왔다.

통곡의 벽에 끼워진 기도문들

통곡의 벽

안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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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형을 받으셨던 빌라도의 뜰에 세워진 선

교교회 마당에 섰을 때 채찍을 맞으셨던 주님이 십

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걸어가시다가 처음으로 쓰러

지셨다는 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고 참았던 울음이 급기야

터지고 말았다.

십자가를 대신 지어준 구레네 시몬처럼 ‘우리도 남의 십자가

를 대신 지어 줄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머물렀는데 ‘다른 사

람의 십자가를 지게 된다면 쓰러지지 말고 굳건히 걸어갈 수

있어야겠다’라는 다짐도 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

하여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실 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하려 울라”고 여자들에

게 말씀하셨다. 우리도 나와 나의 가족들만을 위하여 살지 말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위하여

살 것이며 힘들 때 지칠 때 십자가를 보고 당당히 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가 예수님이 못박혀 죽으신 곳에서 한 사람씩 밑으로

꿇어 앉아 손을 깊숙이 넣고 소원의 기도를 드린 후 계단으로 내려와 주님의 시신을 뉘신

돌판에 손을 얹고 기도 드렸다. 그 옆에 주님의 무덤이 있었다는 곳에 따로 제단이 마련되

어 있다.

이번 성지순례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여행으로 1500년 전부터 세계의 많은 순

례자가 돌아보고 간 곳이다. 우리 주님께서 걸으셨고

보여주셨던 기적의 현장을 따라서 걸으면서

예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돌아와서 성지순례를 되돌아보며 성

경을 읽으니 구약시대부터 신약시대

까지를 순례하고 온 기분이 들었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던 순간

들이 영원히 각인되기를 소망한다. 척

박한 땅이지만 예수님이 함께하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처럼 우리네 인생도 주

님의 축복 속에서 거하기를 기도해본다. †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시신을 뉘였던 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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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말씀이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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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 (4/4)<예루살렘>예루살렘-오천 년의 수난과 영광

글 | 강철원

기원전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예루살렘은 기원전 3000년 경부터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

로 밝혀졌다. 성경에서 다윗이 여부스 족을 내쫓고 예루살렘을 차지한다는 기록은 기원전

1000년 경의 사건으로 추정된다. 다윗은 이 도시를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했다.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은 모리아 산의 큰 바위에 제단을 쌓았다. 이 제단이 유대교의 성전이 된다.

로마의 지배

폼페이우스가 기원전 63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후부터 유대는 로마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로마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피정복

자들 고유의 삶의 방식을 최대한 존중해 주었다는 점이다. 로마는 피정복지의 언어와 종교

현재의 예루살렘 성은 둘레 6km 정도의 크기이다. 이 안에 천 여개의 골목이 있고, 3천

여개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아직도 고대의 흔적이 남아 있고 4개의 문화권으로

나뉘어 있다. 아랍인 구역, 그리스도교인 구역, 아르메니아인 구역, 유대인 구역으로 4등분

되어 있다. 예루살렘은 해발 700미터 높이의 구릉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중해의 야파

(현 텔아비브)로부터 60km 떨어져 있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제한된 지면 안에서 거론한다는 것은 자칫 연대기의 나열 수준을 넘

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역사적 사건을 품고 있는 예루살렘은 장대한 규모의 기

록으로 남을 만큼 그 안에 숱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이 글은 오천 년의 예루살렘 역사를 특정한 몇몇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될 것이다. 예루살

렘의 역사는 결론부터 말하면 ‘수난과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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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그들만의 문화에 간섭을 배제하고 로마의 문화를 강요하

지도 않았다. 로마의 권위를 인정하고 ‘팍스 로마나’ 즉 ‘로마에 의한 평화’라는 통치 철학

만 따라주면 피정복지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견지했다. 즉 로마는 제국의 통치 이념을 보편

성에 두었다. 그러나 유대는 자신들의 선민의식에 바탕을 둔 유일신 숭배라는 특수성에 집

착했다. 다신교를 믿는 로마는 유일신 숭배를 통해 그들만의 문화에 집착하는 유대를 인정

하고 큰 말썽이 없는 한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로마는 유대가 신권정치를 하려는 시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유대인은 팔레스티나뿐만 아니라 시리아와 이집트 등 중근동 일대에 두루 퍼져 집

단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로마는 신권정치가 유대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방관

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양측의 입장차는 결국 로마와 유대가 반목으로 치닫게 되는 불씨

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숨겨진 불씨는 네로가 로마황제 자리를 유지하던 시기에 유대를

지배하던 로마의 유대장관들의 악정이 이어지면서 결국 폭발되고 말았다.

유대 전쟁

서기 66년 유대장관 플로루스는 유대가 1)속주세를 체납하자 예루살렘 신전으로 들어가

그 안에 숨겨진 보물창고에서 17탈렌트의 금화를 몰수했다.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유대

인이 가장 신성시하는 신전을 이교도가 들어가 신에게 바쳐진 금화까지 몰수한 것은 유대

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대는 이에 맞서 폭동을 일으켰다. 시리

아 총독 케스티우스가 유대로 출동했으나 폭동을 진압하지 못하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수

천의 로마 병사가 희생됐다. 급기야 네로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총사령관으로 내세워 유대를

향하게 했다. 6만의 군사를 이끈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전역을 초토화 시키면서 예루살

렘으로 향했다. 이 로마군에 맞서 유대를 이끈 이는 약관 29세의 요세푸스였다. 그는 유대

의 명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유대의 각 지파들을 섭렵하며 일찍부터 지도자의 자질을 갖

추었다. 그는 어떤 사안에 부딪혔을 때 순간적인 대응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

1)속주세 당시 로마 시민이 아닌 속주민들은 수입의 10%를 속주세로 내야 했다.

이 속주세는 일종의 안전보장세의 성격이었으며, 기독교의 십일조 헌금은 바로

속주세에 그 기원이 있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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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이끄는 로마의 정예군단을 유대의 민중이 맞서기는 너무 버거웠다. 요세푸스는 기발

한 전략으로 로마의 군단을 47일간이나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뛰어난 지략과 전술을 갖춘

장군은 아니지만 성실성과 부하들의 존경을 받는 베스파시아누스는 끝내 갈릴리 근처의 요

타파타에서 유대군을 요절내고 만다. 유대군의 피해는 사망자가 4만명을 넘었다. 요세푸스

는 도망쳐 동굴에 숨었으나 결국 로마의 포로가 된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그는 모험을 한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와 단둘이 대면한 자리에서 베스파시아누스가 장차 로마의 황

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준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요세푸스의 말을 겉으로는 무시하

는 척 했지만 내심 그 예언이 사실이 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 이유는 요세푸스의 아버지

가 유대의 대제사장이었으므로 요세푸스가 예언의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다. 아뭏든 이 예언으로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뿐 아니라 그의 아들 티투스의 절대 신

임을 받는 자가 되었다. 당시 로마는 네로의 자살로 장군끼리 황제의 자리를 놓고 내전이 격

렬하던 시절이라 베스파시아누스도 황제로 추대될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고 마침내 황제가

되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예언 하나로 인생의 전기를 맞은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로부터 로마의 씨족 이름 하나를 선물로 받는다. 이 선물을 얹어 ‘요세푸스’는 ‘요세푸

스 플라비우스’가 되었다. 그는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에서 여생을 보내

며 저작에 전념했다. 그가 남긴 <유대 전쟁기>는 로마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

다.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은 유대인이 가장 경멸하는 이름이 되었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서기 70년 봄,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이끄는 4개의 로마 군단은 예루살렘 성

벽을 포위했다. 예루살렘은 높은 언덕에 서 있는 천연의 요새다. 게다가 3중의 성벽과 곳곳

에 탑과 돌벽으로 둘러싸인 성채가 우뚝 솟아 있다. 한마디로 난공불락의 요새다. 그래도

성의 북쪽은 평지여서 로마군은 북쪽에서 집중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로마군은 ‘아리에스’

라는 성벽 파괴용 장치를 이용해 성벽을 무너뜨렸다. 로마는 항복을 권고했지만 강경파가

이끄는 유대군은 결사항전을 고집했다. 로마의 항복 권고를 따르려는 온건파 유대인은 강경

파의 칼을 맞고 쓰러졌다.

5개월의 격전. 격전이라는 한마디에 전투의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세부

적 묘사가 필요치 않은 5개월의 격전은 모든 것을 초토화 시켰다. 서기 70년 8월 10일, 예루

살렘 대신전은 불길에 휩싸였다. 유대의 강경파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9월 20일, 유대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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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저항은 끝나고 예루살렘은 로마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서기 313년 6월에 로마 제국 전역에 공포된 ‘밀라노 칙령’엔 이렇게 쓰여 있다.

(중략)그것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어떤 종교를 신봉하는 자에게도 각자가 원하는 신을 믿을

권리를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중략)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어떤 종교든 관계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받는다. 그것은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애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면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공동 명의로 공포된 이 밀라노 칙령은 서방 세계에 기독교

가 공인됨을 의미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게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안에 성묘교회를 세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기독교의 신앙적 뿌리를 전세

계의 순례자들에게 심어주게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성격적으로 광포한 면과 기이성이 있지

만 그의 각성과 결단이 예루살렘의 영광을 세운 것이다.

이슬람의 예루살렘 정복

마호메트가 예언자로서의 권위를 확립하고 첫번째 모스크를 메디나에 세운 후 기도의

방향을 정한 곳은 예루살렘의 성전이었다. 마호메트가 이슬람의 자체 의식을 만들면서 유

대교와 그리스도교 의식을 많이 모방했기 때문이다. 특히 유대인은 마호메트가 예언자로

서 자리를 잡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후 유대인의 저항이 나타나자 마호메트는 기도의

방향을 메카로 바꿨다. 마호메트를 따르던 군사 지도자들은 미래에 있을 최후의 심판이 예

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리라는 것을 믿기 시작하면서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표적이되었다.

636년 8월 이슬람의 전사 칼리드는 시리아와 요르단 그리고 이스라엘 사이를 흐르는 얄묵

강에서 비잔틴군을 섬멸했다. 이 전투로 세력을 잃은 비잔틴 제국은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

력에게 넘겨주게 된다.

시리아를 토대로 한 우마이야 왕조의 제1대 칼리프 무아위야는 예루살렘을 동경한 나머

지 예루살렘을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싶었다. 그는 성전에 대한 유대 전통을 빌려 “예루살

렘은 심판의 날에 모여지고 부활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덧붙여 “장차

지어질 모스크(바위 돔 사원)의 두 벽 사이는 지구의 나머지 보다 더 귀중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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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무아위야에 대해 그리스도교들은 평화적이고 관용적이라고 환영했고, 유대인은 무

아위야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자’라고 추켜세웠다. 무아위야는 자신이 꿈꾸던 솔

로몬의 성전 터 위에 세울 모스크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뒤를 이은 우마이야 왕조

의 제2대 칼리프 알 말리크는 성전산의 바위 위에 7년에 걸쳐 모스크를 짓기로 결정했다. 이

계획은 정교하면서도 간결하다. 약 18미터의 팔각형 통에 얹힌 돔의 모습이다. 이 돔의 정교

함과 단순함 그리고 아름다움은 신비할 정도이다. 알 말리크는 이 사원의 원형을 성묘교회

의 웅장함에서 가져왔다. 이 사원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곳이라기보다 성묘교회와 대비할

수 있는 이슬람의 상징적인 성전으로 지은 것이다. 이 사원의 터가 된 바위는 아담의 천국이

요, 아브라함의 제단이며, 다윗과 솔로몬이 계획한 성전으로서, 훗날 마호메트가 환상 속

에서 체험한 ‘밤의 여행’중 들른 곳이다. 오늘날 예루살렘의 상징처럼 된 이 ‘바위 돔 사원

(일명 황금 돔 사원)’은 알 말리크가 유대교 성전 바위 위에 알라 신의 계시를 받을 곳으로

믿고 세운 사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십자군의 영광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의 성지회복 설파에 감동을 받은 유럽의 봉건 제후들은 자신의

재산을 십자군 결성에 헌납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했다. 5,000킬로미터의 대장정을

거쳐 1099년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유럽의 봉건 제후들은 40일 간의 공방전 끝에 예루살

렘을 회복했다. 그들은 성내의 유대인과 이슬람 교도를 무참히 살해했다. 신의 이름으로 자

행된 이 살육은 예루살렘의 회복이라는 영광을 피로 얼룩지게 만드는 오명을 안았다. 십자

군의 예루살렘 왕국은 시리아의 안티오카로부터 남쪽의 이집트 국경까지 아우르는 영토를

지배했다. 1187년 이슬람의 명장 살라딘에 의해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 세력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십자군과 살라딘의 이슬람군 간에 벌어진 공방전

은 영화 ‘Kingdom of Heaven’을 보면 실감할 수 있다. 성지를 잃었다는 소식에 유럽의 왕

들이 일어섰다. 영국의 리처드는 거칠 것 없이 내달리는 용맹함으로 이슬람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살라딘의 이슬람군은 리처드를 사자의 심장을 가진 왕으로 불렀다. 사자심

왕 리처드는 영국내의 반란으로 예루살렘 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러

나 리처드와 살라딘이 맺은 강화 조약으로 그리스도교도는 예루살렘의 순례를 이어갈 수

있었다. 교황으로부터 예루살렘 회복을 강요받은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황제는 이슬

람 측과의 협상을 통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1229년에 예루살렘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

교도 의 피를 밟고서 입성해야만 진정한 회복이라는 주장을 편 로마 교황의 주장에 프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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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의 예루살렘 회복은 그리스도교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1291년, 야코 공방전을 최후로 십자군의 역사는 팔레스티나에서 사라졌다.

오늘날의 예루살렘

유대전쟁으로 더 이상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에서 살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은 전세계로

흩어졌다. ‘디아스포라’라고 불리는 이 흩어짐은 세계 각지에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숱한 핍박과 학살을 당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자 하는 열망을 멈출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오니즘이란 운동으로 유대인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팔레스티나의 아랍 민족과 지난한 투쟁 끝에 1948년 ‘이

스라엘’이라는 독립국가를 세웠다. 독립 당시만 해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영토에 포함되

지 않았다. 1967년 아랍 연합국과 벌인 ‘6일전쟁’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후, 이스라엘이 예

루살렘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아직 소유권 분쟁이 일고 있지만 예루살

렘 시가지는 이스라엘의 관공서와 대학 등이 들어서 이스라엘의 상징적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올드시티와 성벽 밖의 신시가지로 구분된다. 그러나

역사상에서 거론되는 예루살렘이란 성벽 안의 예루살렘이다. 이 안의 성지를 두고 이슬람

과 그리스도 세계가 1500년 이상 투쟁을 해왔다. 예루살렘을 순례했거나 여행한 사람이라

면 이런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 곳은 과연 신의 도시구나!” 그렇다. 유대교가 모리아 산의

큰 바위 위에 신전을 세웠다. 로마는 그 신전을 불태웠다. 마호메트가 나타나 이슬람교가 창

궐하면서 예루살렘은 그들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그들은 유대교 신전의 바위 위에 황금 돔

사원을 세웠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성묘교회를 세웠다. 6일 전쟁 후 예루살렘을 차지한 유대인은 신전의 마지막 잔해

인 돌벽(일명 통곡의 벽)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걸어서 한나절이면 돌아볼 수 있는 이 작은 예루살렘 성 안에는 아직도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모르고 걷는 사람들 뿐일까. 5,000년의 역사를 지닌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숱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적 능력을 주셨다. 자신이 세상에 줄 마지

막 말씀이 예루살렘 어딘가에 있을테니 끊임없이 찾을 것을 계시하는 것은 아닐까. †

<참고 문헌 >

· JERUSALEM (Simon Sebag Montefiore / Vintagebooks)

·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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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상)<역사기행>마사다

글 | 조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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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연설

열심당(Zealots:일명 혁명당)원들을 이끌던 유대인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가 유

대교 회당에 모인 백성들을 향해 최후의 연설을 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로마를 섬기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 섬겼다. 하나님의 은총

으로 우리는 자유롭고 고귀하게 죽을 수 있다. 살아 노예가 되어 치욕을 당하는 것

보다 자유를 위한 고귀한 선택을 하자. 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이

다. 만약 우리가 산 채로 로마의 수중에 들어가면 노예가 될 것이며, 모든 것이 끝

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명예롭게 자유인으로 죽을 수 있

으며, 이 특권을 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아내들이 욕을 당하지 않

은 채 죽게 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노예의 기억 없이 세상을 떠나게 하자. 청년들이

계속되는 고문에도 생명이 끊어지지 않고 고통받는 것을 생각해 보라. 어느 남편은

능욕당하는 아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또 두 손이 묶여서 ‘아빠’하고 소리치는

어린 자식들의 목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자! 우리의 손이 자유롭게 칼을 들 수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자유인의 몸으로 세상을 하직하자.”

유대인 회당에 모인 백성들 앞에서 벤 야이르가 피를 토하듯 내뱉는 최후의 연설은 듣는

사람들의 가슴에 비장한 각오를 하게 만들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도 상

당수 있었다. 아니, 미동도 하지 않는 건장한 사내들도 마음속으로는 다가오는 최후의 공포

에 심장이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내 모두 최후를 맞이하기로 결심을 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피맺힌 절규의 현장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우리를 살려주세요. 원수의 무리가 우리를 다

죽이려고 3년 동안 성벽을 쌓아 올라왔습니다. 원수의 노예가 된 우리 동포들이 쌓아올린

성벽을 밟고 로마 군병들이 내일이면 밀어닥칠 것입니다. 이것이 정녕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이제 우리의 영혼을 받아주옵소서. 하나님께 달려가겠습니다. 주여!!!!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시옵소서~~~”

이들이 최후로 읽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이 살아나게 하시는 내용이 나오는 에

스겔서 37장 말씀이다.

j ~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에스겔 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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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비록 자신들은 로마 군병이 들이닥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스라엘은

회복되고 반드시 부활할 것을 확신하면서 죽어갔다.

마사다여 영원하여라

거대한 메사(mesa: 꼭대기는 평평하고 주위는 벼랑인 지형) 위에 자리 잡은 ‘마사다(Masada,

,는 시편 18편에 나오는 산성, 요새, 바위라는 뜻의 히브리어다. 이스라엘 남쪽 100km’(הדצמ

유대 사막 한가운데 우뚝 솟은 높이 434m인 거

대한 바위 절벽은 그 자체가 천혜의 요새다. 사

해를 바라보는 마사다는 깎아지른 절벽에 지어

진 고대의 왕궁이자 요새다.

원래 마사다는 기원전 35년 유대인들의 반란

을 두려워한 헤롯 대왕이 피신처 겸 궁전으로

지었다. 정상 둘레에 높이 3.5m의 성벽을 쌓고,

38개의 망루를 설치해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

어진 마사다. 2001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

으로 지정한 이곳에는 헤롯 대왕의 두 개의 궁

전과 수천 명이 몇 년간 먹을 수 있는 식량 창

고, 빗물을 저장했던 25개의 거대한 수조, 로마

식 목욕탕과 유대 반란군의 막사, 창고도 갖추

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마지막까지 마사다와 함께 한 사람들은 헤롯 대왕이 아닌, 유대인

들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63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서기 64년 로마를 통치하고 있던 네로황제는 헤롯의 손

자였던 아그립바 2세를 이스라엘의 분봉왕으로 세우고

아그립바 2세는 풀로루스를 유대 지역 총독으로 임명

했다. 그런데 풀로루스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참다못한 유대인들은 서기66~70년 독립전

쟁을 일으켰다. 네로는 “이스라엘을 삽으로 깊이 떠서 지중해 바닷속에 던져 버리라”고 명

마사다 전경

동편 물 저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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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했다. 로마의 대화재 사건 후 자살한 네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

티투스 장군에게 반란진압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70년 4월 유월절에 시작돼 8월 28일에 종

결된 진압 작전은 유대인들을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로마 군단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무려 110만 명의 유대인을 살육했다. 110만 명이 로마의 칼과 창으로 난자당한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피가 강을 이뤄 목까지 차올라왔을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30여 년 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자신을 보며 울던 여인들

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던 말씀은 마치 유대인의 비극을

알고 하신 것일까?

옥쇄(玉碎)

슬퍼할 겨를도 없는 참혹한 죽음에 맞서 저항하던 유대인 열심당원들은 쫓기고 쫓겨 마

사다로 피신했다.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모두 960여 명의 유대인들은 서기 73년 5월 2일 최후

를 맞이할 때까지 3년을 절벽 위 요새에서 자유를 향한 최후의 결사항전을 시작한 것이다.

로마는 이들의 뒤를 쫓아 실바 장군의 지휘하에 10군단 1만 5천 명이 마사다로 진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깎아지른 바위 암벽으로 된 천연요새인 마사다는 결코 보통의 전투 방

법으로는 올라갈 수조차 없는 험준한 절벽이었다. 아무리 돌포탄을 퍼부어도 유대인을 항

복시킬 방법은 없었다. 용감한 로마 군병들이 절벽을 기어오르면 유대인들은 뜨거운 기름과

화살 그리고 돌을 퍼부었다.

로마장군 실바는 무수한 포위공격에도 끄떡하지도 않는 마사다에 오르기 위한 비책을

강구했다. 그는 마사다의 서쪽 약간 낮은 지역에 경사로를 쌓기로 결정했다. 지구전이 전개

된 것이다. 흙과 돌과 나무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들어지는 토성은 무려 3년에 걸친 대 토

목공사였다. 그런데 이 토성을 쌓은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유대인 노예들이었다. 자신들의 동

족이 강제로 동원되어 채찍질을 맞아가며 쌓아올리는 토성은 바로 마사다를 공격하기 위한

로마군 돌대포 돌포탄 화살과 창을 날린 전쟁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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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로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날마다 쌓여 올라오는 토성을 내려다보는 유대인들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

마사다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동포가 로마 군사의 채찍질을 맞으며 강제노역에 투입되어 쌓

아올리는 성벽을 향해 펄펄 끓는 기름과 화살을 퍼부을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서는 동포를 죽여야만 하는 기가 막힌 상황 앞에서 마사다 유대인들은 이를 악물어야

만 했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막는 것만이 마사다 유

대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벼랑 끝에서 바라본 하나님

서기 73년 5월 2일 밤에 이루어진 유대인의 집단 자살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숨을 끊는 단

말마의 고통과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서글픔이 하늘을 향해 치솟게 했다.

다음 날 아침, 드디어 공성을 위한 성채가 마련되자 공성기를 이용해 성벽 일부를 깨뜨

리고 마사다 요새로 진입한 로마군은 960구의 시체와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식량 창고를 제외한 요새 안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타고 있었으며, 부둥켜안고 최후를 맞이

한 유대인의 주검들이 즐비하게 누워있는 걸 발견했다. 유대교 율법은 자살을 금지하고 있

었기에 유대인들은 10명을 제비로 뽑았다. 뽑힌 10명이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남은

로마가 쌓은 마사다 토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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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 중의 한 명이 9명을 죽인 뒤 마지막 한 명은 자살을 했던 것이다. 마사다에서 살아남은

것은 수로에 숨어있던 여자 두 명과 다섯 명의 아이들뿐이었다.

이스라엘은 신병훈련을 마사다에서 마치게 한다. 신병들은 이곳에서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게 하지 않는다!”고 맹세하는 의식을 가진다. 이곳은 이스라엘 젊은이라면 필수적으

로 방문하는 곳이다. 아울러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피맺힌 역사의 현장을 찾아와 그들

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죽으면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이 끝난다. 하지만 그 죽음마저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이 있었

다. 그것은 영원한 ‘팍스 로마나’를 이룰 것으로 생각했던 대제국 로마의 힘과 폭력도 결코

정복할 수 없었던 죽음마저 넘어선 신앙이었다. †

마사다 요새로 행군하는 이스라엘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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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상)그림_댕기머리 처녀 박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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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1)주님의 손과 발 되어Ohsweken 원주민 선교

글 | 청년1부 전제연

원주민 아이들과의 첫 만남

열 두명 으로 구성된 우리 팀은 3박 4일 동안 Ohsweken침례교회에서 “Dream in Jesus!”

라는 주제를 갖고 유치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Summer Bible Camp를 운영하며 찬양, 말

씀, 레크리에이션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다.

사역 첫째 날, 프로그램을 어떻게

진행하고 이끌어야할지 아침부터 걱

정이 밀려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걱

정하지마, 내가 도와줄게” 하고 격려

해주셨다. 열 명 넘게 모인 원주민 아

이 중에는 백인과 원주민 혼혈도 있어

서 생김생김이 이국적이었고 이름도

독특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마음을 금세 열어주었다. 오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예수님을 생

무더위가 한창이던 2013년 7월의 어느 날

나는 청년부 단기선교팀과 함께 교회 밴을 타고

Branftford 부근의 Ohsweken라는 원주민 마을에 갔다.

Six Nations of the Grand River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인디언 보호구역이다.

북미에서는 유일하게 Iroquis 여섯 부족이 모여 사는 이곳은 캐나다에서

가장 많은 12,000명 정도의 원주민이 살고 있다.

Ohsweken 마을에 들어서니 평온한 시골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창 밖을 보니

길 양쪽에는 옥수수밭이 펼쳐졌고, 집들은 띄엄띄엄 떨어져 있고, 교회가 간혹 보였다.

대형마트와 Mall이 곳곳에 널려있는 토론토와는 달리

Ohsweken은 아직 개발이 덜 되어있었고 고립되어 있는듯한 모습이었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는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을 보기가 힘들었고

사람 사는 즐거움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팀이 섬겼던 Ohsweken Bapt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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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하며 예수님은 우리의 Best Friend이기 때문

에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도움이 필요할 때 항상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원주민) 아이들에게

는 너희와 같은 선교사들을 만

나는 순간이 일 년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

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너희가

알았으면 좋겠어” 라고 누군가

가 알려주었다. 원주민 아이 중에는 겉으로는 싫어하는 척하고 말이나 행동이 거친 아이도

있지만, 이런 아이들일수록 관심

과 따뜻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 한

명 한명이 자신이 소중하고 존귀

한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

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

는 Max Lucado목사님의 “A little rain can straighten a flower stem, a little love can

change a life”라는 말이 생각났다.

워터트럭의 등장 - 필요함을 채우시는 하나님

사역 둘째 날 필요함을 채워주시는 하

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 우리 팀은 미니

올림픽을 위해 3x3미터나 되는 outdoor

pool에 물을 어떻게 채우면 좋을지 고민했

다. 교회 안에서 물놀이 장소까지 물을 끌

어오기에는 호스가 너무 짧았다. 그런데

웬걸, pool에는 이미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알고 보니 교회 앞에 사는 어떤 원주민 집사님께서 워터트럭을 불러주셨

다. 필요할 때 은혜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앞으로도 나의 모든 걱정과 필요를 하

우리는 하루 일정을 시작하기전 먼저 기도로 사역을 준비하였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자기소개 시간)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원한 물놀이 시간

(진일영 팀원과 원주민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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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 앞에 내려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티나와의 특별한 만남

사역 셋째 날, 아이들과 근처 피자집에서 피자를 즐겁

게 먹던 중 Teenager로 보이는 원주민 소녀, 크리스티나

가 들어와 기타를 꺼내 찬양곡을 연주했다. 그녀는 아름

다운 목소리와 뛰어난 보컬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캠프파이어를 하

며 원주민의 삶에 관해 들었다. 그녀

는 이곳 원주민 청소년들은 건강한 가

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삶

의 목적과 가능성을 깨닫지 못한 채 희망을 잃기 때문에 알코올과 마약중독에 빠질 확률이

높다고 했다. 그녀는 2012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열 명의 친구가 자살을 해 깊은 슬픔에 빠

져있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의 마음은 주체

할 수 없이 아파 눈물이 쏟아

져 나왔다.

우리는 교회 밖 잔디밭에

함께 누워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을 바라보았다. 시편 147편 4

절 말씀이 떠올랐다. “그가 별들의 수효

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

는도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

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나는

Ohsweken의 청소년들이 이 말씀을 생

각하며 그들의 아픈 사연을 주님께 말씀

드리고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고통

을 극복하며 비전을 갖고 살기를 바랬다.

Ohsweken 찬양사역자 크리스티나

Our God is a Great Big God 찬양 시간

집중해서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원주민 아이들

함께 기도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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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sweken에서의 찬양의 밤

마지막 날 저녁 우리는 Ohsweken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찬양의 밤을 가졌다. 함께 예배를

드리고 간증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이틀간 배운 찬양과 율동을

아이들이 부모님께 발표하는 시간

도 준비했다. 또한, 청년1부 찬양팀,

키르키즈, 인도 단기 선교팀이 먼

길을 달려와서 드라마와 워십댄스

를 선보였다.

예배가 끝날 무렵, 나는 크리스

티나의 친척이 그녀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하

나님께서 크리스티나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을 그 친척에게 깨닫게 하신 것

일까? 비록 조촐한 찬양의 밤이었지만 우리가 Ohsweken에서 함께 올려드린 예배를 하나님

께서 기쁘게 받아주셨으리라 믿는다.

선교적인 삶을 향한 비젼

이번 선교를 통해 나는 내 삶이 늘 하나님을 향하고 모든 일을 통해 선교적인 삶을 살고

싶은 비전을 갖게 되었다.

자신들의 땅과 문화를 빼

앗기고 캐나다 사회와 격

리되어 사는 원주민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타

인에 대한 반감과 불신,

상처와 아픔이 있었다. 그들의 상처와 슬픔을 치유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주민 커뮤니티와 좀 더 가깝고 꾸준한 관

계를 유지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토론토로 돌아오는 길

에 바라본 Ohsweken의 하늘엔 온통 하트 모양의 구름이 가득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사역을 기뻐하시며 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 같았다. †

성경책을 사랑하는 Xavier

캠프파이어를 하며 팀원 모두 마음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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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교육)교회사 이야기 제9편19세기 위대한 부흥사 드와이트 무디

글 | 송민호 목사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19세기 후반 북미에 대부흥을 일으킨 무디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대단한 목회적 배경도, 학력도 갖추지 못한 무디는

19세기 후반 미국, 캐나다, 영국에 대 부흥을 가져다 준 열정적 전도자였다.

지금도 시카고 다운타운에는 그가 시작한 교회와 신학교가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이름을 따서 건실하게 남아 북미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바로 무디 기념교회와 무디 성경학교이다.

하나님께서 무디를 사용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무디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기에 그로 인해 북미의 부흥 뿐만 아니라

세계 선교에 커다란 공헌을 하도록 인도하셨을까?

드와이트 무디 (Dwight L. Moody) 는

1837년 메사추세스 노스필드에서 별로 자

랑할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

났다. 그의 아버지는 벽돌장이였는데 알콜

중독으로 41세의 나이에 일곱 자녀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드와이트의 나이는 4

세, 엄마 뱃 속에는 한 달 후에 태어날 쌍둥

이가 잠을 자고 있었다. 무디의 어머니 베치

(Betsy Holton Moody)는 남편없이 아홉명

의 자녀를 키우려 노력했지만, 밀려오는 가

난의 힘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삶이

었다. 이런 환경으로부터 탈출을 원했던 무

디는 학교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채, 17세

가 되던 해 보스톤의 외삼촌 구두 가게에 취

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삼촌이 제시한 조건

이 하나 있었다.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한다

는 것이었다. 왠지 교회하면 지루하고 식상

한 느낌을 억제할 수 없었던 무디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형식적으로 출석하는 정도였

다. 떠돌이처럼 교회에 나오곤하던 무디를

눈여겨 본 범상치 않은 인물이 무디가 출석

하던 마운트 버논 회중 교회에 있었다. 주일

학교 교사 에드워드 킴볼이었다. 구두방을

직접 찾은 킴볼은 무디에게 예수님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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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 구주로 모셔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어렸을 때 교회를 잘 나갔는데요'라는 무

디의 대답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킴볼 선

생은 다시 물어본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

셨는가?’ 무디에게는 불편하게 다가오는 질

문이었지만, 언젠가는 분명한 답이 필요했

다. 그날 무디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영접기도를 드렸다. 1855년 4월21일, 방황하

던 무디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시카고 사역

다음 해 무디는 보스톤을 떠나 시카고에

정착하게 된다. 그의 나이 19세, 그 당시 시

카고는 외지에서 몰려오는 사람들로 인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1830

년에만 해도 불과 350명 정도 밖에 인구가

되지 않던 미시간 호수 남서쪽 지역에 20년

후인 1850년에는 거의 3만명의 인구로 늘

어났고, 1860년에는 11만명이 넘게 되었다.

젊은 무디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두 개의

소용돌이가 힘차게 돌고 있었다. 하나는 많

은 돈을 벌어보겠다는 욕심이었다. 정확하

게 말해서 10만불을 벌고 싶었다. 그 당시

인부의 일당이 1달러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실로 엄청난 돈이 아닐수

없었다. 또 하나는 죽어가는 영혼을 주님께

로 인도하고자 하는 구령의 열정이었다. 어

떻게 상반되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

하려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않지만, 무

디의 독특한 개성으로는 가능했던 것 같

다. 그는 열심히 일해서 재산도 모으고, 동

시에 열심히 믿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

고 싶었다. 매일 저녁 그는 기도회 모임에

참석하면서, 한편으로는 구두 판매원의 수

입과 부동산 투자와 금리 수입등으로 발빠

르게 재산을 축적해 나갔다. 팽창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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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고에는 젊은이를 유혹할 술집, 사창가, 도

박소들이 즐비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무

디는 이런 곳을 피해갈 수 있었다.

시카고에 온지 4년 만인 1860년에 그는 1

만불이상의 돈을 저금할 수 있었다. 목표

의 10%를 달성한 것이다. 또한 무디는 이 기

간 동안 엄청난 영적 성장을 경험한다. 하

숙집 여주인 미세스 필립은 제일침례교회

의 성도였는데, 무디는 그녀가 인도하는 저

녁기도회에 매일 참석하면서 기도의 힘, 성

경연구, 말씀 암송, 그리고 영혼구원의 열정

을 배운다. 아울러 어린이 전도와 제자훈련

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배운다. 이 때 무디

의 영적 선생이 한 사람 더 있었다. 아버지

뻘 되는 40대 전도자 스틸슨 (J.B. Stillson)

이었다. 그는 청년 무디를 데리고 다니며 선

원 전도와 빈민촌 전도를 가르치면서 영혼

의 의사가 되는 길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스

틸슨을 통해 무디는 또한 기도의 아버지 조

지 물러를 소개 받는다. 물러의 책 <A Life

of Trust>을 빌리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으

면서 무디는 다시 한번 기도의 절대적 중요

성을 깨닫는다. 이 때 받은 실질적인 기도와

말씀의 훈련은 사역자가 되는 무디에게 있

어서 가장 중요한 훈련 중에 하나가 된다.

비록 20세에 불과한 청년이었지만, 무디

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어린 무디에게 생명

의 말씀과 용기를 불어 넣어준 세 명의 영적

스승이 있었다 ─ 킴볼, 필립스, 그리고 스틸

슨. 우리는 이 세 사람 모두가 평신도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디 역시 평신도였다. 신학교를 가본적

이 없고 안수를 받지 않은 평신도 사역자 무

디를 사람들은 ‘미스터 무디’라고 불렀다.

평신도 사역자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무디는

하나님 나라를 크게 확장시켰다. 특히 무디

는 어린이 전도에 관심이 깊었다. 알코올중

독자들과 마약중독자들이 많은 살았던 시

카고 우범 지역의 어린이들을 전도하고 싶

었다. 샌드즈 (the Sands)라고 불렸던 이 지

역은 아동학대, 성범죄, 영양실조, 알코올

중독, 도박, 싸움, 성매매 등등 어린 아이들

이 정상적으로 자라기에는 도저히 불가능

한 환경이었다. 이곳의 아이들은 방치되어

학교 교육은 커녕 기본적인 의식주도 제대

로 해결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있었

다. 무디는 이런 아이들에게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드디어 1858년 비어있는 술집을 빌려 깨

끗이 개조했다. 그리고 ‘Sabbath School’이

라는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매 주

일 저녁 2시간씩 방치된 아이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쳤다. 이

런 일에 몰두한 무디의 별명은 ‘미친 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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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 Moody)라고 불렀다. 제정신이라면

어느 누가 그런 험한 곳에 자진해서 들어가

겠느냐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미친 사람

들’이다. 술집을 개조해서 시작한 학교는 몰

려오는 아이들로 인해 도저히 감당할 수 없

는 협소한 장소가 되어 버렸다. 무디는 다시

새로운 장소를 빌려 수많은 아이들에게 성

경을 가르쳤다. 집중력이 극히 떨어지는 아

이들에게 무디는 혁신적인 교육방법으로 그

들의 집중력을 향상시키며 성경을 가르쳤기

때문에 시카고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그

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1860년

에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브라함 링컨이

무디가 가르치는 1500명의 아이들을 직접

보기 위해 견학을 오기도 했다.

한편, 무디의 비즈니스는 계속해서 성장

했고 이제 그의 수입은 연 5천불이나 되었

다. 사람들은 그의 비즈니스 센스와 능력을

인정했다. 무디가 하는 일은 언제나 성공한

다고 믿은 한 과부는 15만불이나 되는 재산

을 무디에게 맡기며 관리를 해 달라고 할 정

도였다. 무디의 마음 속에서는 커다란 갈등

이 일어났다. 계속해서 비즈니스 맨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올 인

할 것인가?

무디는 얼마 전부터 그를 부르시는 하나

님의 음성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이

제 단호한 결정을 내릴 시간이 온 것이다.

무디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고, 순종

과 함께 심플 라이프 스타일을 택하게 된다.

이 때부터 무디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서

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신학교를 가본 적

이 없는 사람이지만, 무디에게는 분명한 성

령체험이 있었고 복음에 대한 확고한 이해

가 있었다. 비록 그의 최종학력이 초등학교

4학년에 불과했어도, 그는 겸손한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를 늘 의지했다.

시카고 대 화제가 일어나기 전까지 무디

의 활동량은 참으로 대단했다. 1858년 노스

파크 주일 학교 창립을 시작으로 1863년에

는 YMCA 시카고 도시 선교사로 임명을 받

았다. 그의 사역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된 많

은 사람들이 교회를 시작하자는 제안에 무

디는 1864년 일리노이주 스트리트 교회를

창립한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교회에 들어

왔다. 그는 맡은 모든 일에 열심을 다했다.

1866년에는 Chicago YMCA 지부 총책임자

가 될 정도였다. 문제는 그 당시 무디의 삶

이 위험할 정도로 분주해졌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무디는 자신도 모르게 심한 탈진 현

상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가 삶을 돌아볼 때

분주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

라는 확신을 갖는다. 무디 역시 고민하기 시

작한다. 한편으로는 YMCA 사역과 동반하

는 사무행정 및 모금운동이 있었고,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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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전도하는

일이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두 가지 일

다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결론을 갖게 된다.

시련과 고난

하나님께서는 무디를 위해 특별한 방법

으로 그의 지친 삶을 해결해 주셨다. 1871

년, 시카고는 대 화제로 화염에 쌓이게 되

고, 화재로 인해 무디의 사역에는 엄청난 제

동이 걸리게 된다. 오히려 탈진한 자신을 돌

아보는 좋은 기회가 된 것이다. 그의 집과

교회가 전소되었고 그가 지부장으로 섬기

던 YMCA 건물 마져도 모두 다 전소된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 막막

했다. 무디는 모금 운동을 위해 뉴욕에 왔다

가 월스트리트 거리에서 뜨거운 성령체험

을 한다. 무디를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

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그는 건물

을 다시 지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

께서는 무디를 향해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

셨다.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이제는

복음만을 전하며 복음으로 사람을 바꾸는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이 때 무디는 표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하

면서, 새로운 사명을 받게 된다.

시카고로 돌아온 무디에게는 이제 ‘우리

시대에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로’라는 위

대한 목표를 갖고 전도자로서의 활동을 시

작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시카고 화제가 복

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가장 중

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화제는 그동안 무디가

갖고 있었던 모든 분주한 스케줄을 백지화

시켰다. 순식간 무디는 스케줄로부터 ‘자유

인’이 된 것이다. 무디는 전도집회에 동역할

찬양 사역자를 찾고 있었다. 집회마다 새로

운 찬양자를 세운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어느날 무디는 산키 (Ira David

Sankey, 1840-1908)의 찬양을 듣고 흥분 속

에 그에게 묻는다.

f 어디에 사십니까? 결혼은 했습니까?

무슨 일을 하는 분입니까?’

산키가 순서대로 답을 했다.

f 펜실베니아 주에 삽니다. 결혼해서 아내와

아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무청에서 일합니

다.’

무디는 느닷없이 말했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와 함께

일 해야 합니다.’

갑자기 엉뚱한 명령을 받은 산키는 당황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거절하는 눈 빛

을 보이자 무디는 당당하게 말했다.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나는 지난 8년

동안 형제 같은 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무디와 산키는 복음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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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동역을 하게 된다. 1873년

어떤 목사로 부터 초청을 받아

영국에 부흥 집회를 인도하게

된다. 이때 무디는 산키와 최

상의 콤비를 이루게 된다. 산키

가 먼저 찬양을 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이 때 무디가 나와서 열정적

인 설교를 하고 나면 이어서 산키가 아름다

운 바리톤 목소리로 회심을 권하는 노래를

부르는 순서였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허락 하시사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 주소서

영국 순회 집회는 상상 외로 성공적이었

고 스코트랜드와 아이랜드를 포함해서 2년

간 진행되었다. 특히 스코트랜드 집회에서

산키는 ‘양 아흔 아홉 마리’ 라는

시에 곡을 붙여서 노래를 불렀다.

스코트랜드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음조로 불리워진 이 노래는

대성공이었고 글라스고우 집회에

서만 3천명이 회심하는 역사가 있

었다.

산키와 무디는 동역자로 거의

4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복음을 전하게

된다. 부흥집회 마다 먼저 산키는 본인이 직

접 작사하거나 작곡한 노래들을 부르며 청

중과 교감대를 이루었고, 그의 노래는 집회

가 끝나고도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때 부른 노래들이 19세기 복음성

가의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내는데, 오늘날

우리 찬송가에도 ‘나 주의 도움 받고자’(214

장), ‘양 아흔 아홉 마리는’(297장), ‘십자가

군병 되어서’(353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357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419

장), ‘어려운 일 당할 때’(543장) 등으로 실

려있다. 샌키는 <Sacred Songs and Solos>

라는 제목으로 악보를 출판해 복음성가가

널리 불려지게 했다.

무디의 집회에서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은혜로운 작사 작곡가들이 많았는

무디와 산키의 동역

산키와 복음성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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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특히 D. W. Whittle, Philip Paul Bliss,

James McGranahan 의 찬송은 무디 부흥

집회 때 널리 불려졌고, 이런 노래에 은혜를

받은 선교사들의 보급으로 오늘날 한국교

회 찬송가의 일부가 되었다.

설교자로서 무디

무디의 복장은 비즈니스 맨이 입는 신사

복 차림이었고, 그의 음성이나 단상의 매너

또한 평범했다. 그는 안수를 받지 않은 평신

도 설교자이었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자

유로왔다. 집회 장소로 교회를 사용하기 보

다는 강당이나 오페라 하우스, 심지어 시장

터에서도 가능했던 것이다. 특별히 무디의

가슴에는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

만 복음 전도자로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

는 평신도를 훈련시키는 일에 관심을 가졌

다. 특히 무디는 여성 지도자를 훈련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무디의 메시지는 비교적 단순했지만, 항

상 복음적이었다. 3R로 요약할 수 있다.

1. Ruined by sin (죄로 인한 파멸)

2. Redemption by Christ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

3. Regeneration by the Holy Spirit

(성령으로 거듭남)

무디에게는 19세기 미국의 프린스톤 신

학자 챨스 하지나 벤자민 워필드에게 찾

아볼 수 있는 깊은 신학적 통찰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죄의 바다에서 허덕이며

익사하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구명보트를

던져주고 싶은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

부흥사로서의 무디 뿐만 아니라 훈련자

로 선교동원가로서 무디의 역할은 대단했

다. 평신도를 위한 성경 훈련기관이 나중에

무디성경학교 (Moody Bible Institute)가

되었고, 그의 고향인 메사추세스 노스필드

에서 여름마다 시작한 선교대회는 급기야

1876년 학생자원운동 (Student Volunteer

Movement)라는 어마어마한 학생 선교운

동을 낳게 된다. 무디와 산키는 가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을 일으켰다. 아니,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부

흥을 일으키셨다. 무디가 부르심을 받고 헌

신한 40년 동안 그는 일억 명에게 복음을 전

해서 수백만 명의 영혼이 회심하는 것을 보

았고, 그 외에 그가 시작한 일들은 지금까지

도 막중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Moody Bible Institute

56

Page 59: 2014-영락지 봄호

무디가 쓰임 받게 된 이유

무디와 함께 사역했고 무디 성경학교 초

대 교장을 지냈던 R. A. 토레이는 그의 책

<하나님은 왜 무디를 사용하셨는가?>에서

무디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말해준다.

1.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한 사람 (a Fullly

Surrendered Man)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한 삶이란 하나님

께 모든 것을 다 드린 사람인데, 그런 삶

을 상상하기 어렵다. 무디는 그의 모든 것

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다. 모든 것을 다

드렸다는 것은 드리고 난 후에 내가 주장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닌가?

2. 기도하는 사람 (a Man of Prayer)

무디는 열심히 기도했다. 무디는 설교자

로 유명했지만 무디를 잘 알았던 토리는

무디가 설교자 보다는 기도자로 더 훌륭

했다고 적었다. 무디는 어떤 일을 시작하

기 전에 하루 종일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

이 예사였다고 한다.

3. 성경을 깊이 공부한 사람 (a Deep and

Practical Student of the Bible)

무디는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신학을 공

부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는 성경을 공

부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그는 말

씀을 연구했다.

4. 겸손한 사람 (a Humble Man)

토리는 그가 만난 사람 중에서 무디가 가

장 겸손한 사람이었다면서, 말씀 사경회

에 여러 강사가 있으면 무디는 항상 다른

강사에게 기회를 주고 자신은 뒤전으로

물러나곤 했다고 적었다. 무디의 명성이

국제적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항상 겸손

함을 잃치 않았다.

5. 돈을 사랑함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

(His Entire Freedom from the Love

of Money)

무디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돈에 매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벌은 돈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토리의 표현이 흥미

롭다. ‘Millions of dollars passed into

Mr. Moody's hands, but they passed

through; they did not stick to his

fingers’(무디의 손에 수백만 달라가 지

나갔지만 한푼도 그의 손가락에 끼지 않

았다). 즉 공금은 한푼도 개인의 편익을

위해 착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6. 구령의 열정 (His Consuming Passion

for the Salvation of the Lost)

무디가 회심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다. 하루 24시간을 넘

기기 전에 반드시 한 영혼에게 복음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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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바

빠도 이 원칙을 지켰

다. 때론 침대에서 어

느 길을 걷다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Sir, are

you a Christian?’하

고 물었다. 상대방은

‘You, mind your own

business’라고 하니까, 무

디는 ‘This is my business’

라고 답을 했다. 전도를 받은 사람은

‘Well, you must be Moody’라고 말할

정도였다.

7. 위로 부터 오는 능력을 받은 사람

(Definitely Endued with Power from

on High)

무디는 성령의 능력, 성령의 임재를 체험

한 사람이었다. 무디는 자신이 경험한 성

령의 임재를 (성령 세례라고 표현함) 사

역자들이 체험하기를 원했다. 성령의 능

력없이는 주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는 철저하게 깨달았기 때문

이다.

무디의 좌우명은

‘Consecrate, then

concentrate’(헌신하라

그리고 집중하라) 였다.

하나님의 뜻과 기쁨을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하

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원

하시는 그 일을 위해 집중하는 것

이었다. 그래서 그가 즐겨 사용했던 문장

은 ‘This one thing I do’(내가 하는 이 한

가지) 였다. 그의 모든 일은 ‘한 가지’로 정

리되었다. 바로 복음 전파였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올 인했

다. 무디의 전기를 쓴 작가들은 무디를 19세

기가 낳은 최대의 부흥 전도자로 꼽으면서,

지금처럼 교통이 쉽지 않았던 그 당시 이미

수백만 명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한 무디

의 열정에 감동한다. 나의 삶도 무디의 삶처

럼 ‘이 한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면, 하나님

께서 나를 어떻게 사용하실까? †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바

빠도 이 원칙을 지켰

business’라고 하니까, 무

디는 ‘This is my business’

는 철저하게 깨달았기 때문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하

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원

하시는 그 일을 위해 집중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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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61: 2014-영락지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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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나의 고국

글 | 성춘자

최근에 저는 한국에서 소중한 경험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고마운 고국이라고 정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한창 어려운 시절이었던

60년대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였습니다. 파독 50주년을 맞아 정부가 초청한다는 말만 믿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습니다. 언론보도를 통해 아셨겠지만, 공짜관광 사기 사건으로 다 드러

났던 그 사건 속 한 명의 피해자였습니다. 그 당시 237명이나 되는 동료들 모두가 분별력을

가지고 꼼꼼하게 따져 보지 못한 것은 그 기획의도가 너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나 자신을 스스로를 위로 하자면, 젊은 시절 독일에서의 간호사 생활이 마냥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기에, 토론토에 살면서 발전한 고국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고 꼭 한번 죽기 전에 가 봐

야 되지 않을까 하는 조급한 마음이 있었던 까닭이었습니다.

그런데 사기사건 이라니?

그런 언론 보도마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감정은 섭섭함이었습니다. 기대에 대한 반대 심리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

다는 젊음에 대한 회환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40년 전에 조국을 떠날

때 그 청춘을 회상 속에 두고, 말 그대로 나이 먹어 총명함이 사라진 그 자리에 어리석게 서

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기에, 섭섭함을 갖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습니다.

잠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친척들이 제게 연락을 해 왔었습니다. 하지만 동료

들 곁을 떠나 혼자 친척 집에서 머무르며 편히 지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곧 소식을

접한 한국관광공사에서 모든 일정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했고, 7박8일의 일정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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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말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비무장지대를 방문했을 땐 세계유일의 분단 국가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포항

제철을 둘러보고 포스코 연수원에 잠을 자 보기도 했고, 삼성전자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선

물로 받기도 했고, 그들은 진심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노고가

오늘의 조국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전력에서도 우리를 환대했습니다. “여러분의 헌신을 결

코 잊지 않겠습니다.” 라는 글귀가 건물 초입에 붙어 있었습니다.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칠 순이 넘은 늙은 몸, 검은 머리카락이 백발이 되어 찾아온 고향은 그야 말로 변화 그 자체

였습니다. “We won’t forget you” 당신을 잊지 않겠어요 라고 적힌 케익 위의 글귀에 우리

가 비로소 한 마음을 갖고 있는 동포였구나. 그 동포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환대를 받았

고, 따뜻한 정을 느꼈습니다.

대단히 유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런 지면을 통해 한국에서 받은 환대를 이야

기할 기회를 허락 받은 것도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실한 사랑으로 보듬어 준

나의 고국에 감사했으며, 정말 참석하기 잘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 고국 방문을 마치면서 나의 조국에 대한 의미를 가슴 깊이 새겨 보았습니다. 파독50

주년을 맞아 광부와 간호사들이 한국의 발전상 볼 수 있게 해주신 한국정부 관계자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남은, 여생 살면서 고마운 고국을 음미하며 열심

히 살아가야겠습니다. 그리고 제게 고국방문 기회를 허락하시고, 또한 지면을 통해 이해를

받을 수 있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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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

글 | 주정희

하나님!

나의 주 하나님,

오늘도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동안 세상의 왕 사단에 둘러싸인 저는

그의 앞잡이 되어

교회 안에서도 믿음은 뒷전이요

교제에만 힘쓰는 묘한 이중적인 신앙으로

포장하고, 교만과 어리석음으로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다 알게 된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졸업사 말씀

“제군들은 이 시대의 선택받은 사람들,

어렵고 소외된 모든 세상 사람들과

하나되어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열어가기 바란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저는 허영과 추함

내 편한대로 살고싶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부질없고 부질

없다’는 성경 구절로 부인했었던 주님.

저 편할때, 필요에 의해서만 불렀던 하나님

그런 저를 궁휼이 여기시어

놀라운 구원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게 하시고,

그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

가정 복음화로 얻은 굳건한 믿음과 기쁨은

하나님의 시간표였습니다.

평화와 온유로 저를 겸손케 하시며

모든 한분 한분을

귀하게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 내려 놓고 보니

내 안에 ‘나’ 된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주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부족함 많고 어리석은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복음으로 채워 주신 참 생명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오늘도 찬양드리며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살아가길

기도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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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 Loves You

글 | 유일섭

저의 부족한 간증을 조금 나누어볼까요? 귀엽게 봐 주십시오.

나는 ‘착하고 부지런히만 살면 되지.’라는 자만하고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요. 그러

나 27년전 사랑하는 부인의 삼일 금식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성령께서 나를 초청하여 주셨

고, 그 후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만나서 손잡아 보아

야 믿겠다며 주일 예배는 물론, 수요, 금요, 새벽예배, 부흥회 및 성경공부는 물론 다른 교회

부흥회나 높은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여’를 외쳐 보았지만 되돌아

오는 건 메아리뿐이었지요.

그러던 중, 어느 새벽 설교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산꼭대기나 들로 헤매지만 말고

성경 말씀 속에서 만나라’는 말씀을 듣고 틈나는 대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말씀을 읽는

중에 성령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나는 죄인이구나!’라고요. 또 성경을 두번, 세번 반복

하여 읽는 동안 말씀 속에서 세상을 살아갈 지혜를 주셨는데, 그것은 말에나 일에나 무엇을

하든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주님 앞에서 하는 것같이 하여 언행을 삼가고, 탐심을 버리

며,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함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1988년, 올림픽을 순탄하게 치르기 위해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삼일 금식 기도회에 이어

10월에 열린 국제 금식기도회에 참여하여 조국 통일을 위해 울부짖으며 기도하던 중에 ‘기

다리며 요셉처럼 오직 기도하라.’라는 응답을 받았으며, 이 기도는 1989년 캐나다에 이민한

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오직 자랑하고 전할 것은 ‘Jesus Christ Loves You’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사랑이 널리 퍼져 토론토의 교회가 부흥하

며, 모든 성도의 가정이 에덴동산이 되어 평강을 누리기를 기대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두서없이 적어 보았습니다만, 귀엽게 봐 주시고 보신 분들에게는 갑절이나

더 큰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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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신랑의 두루마기가 만들어지는 과정

글 | 이원화

두루마기를 만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더욱이 혼례 때 입을 새 신랑의 두루

마기를 만드는 일은 무척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일이다. 두루마기를 만들기 위해 먼저 딱딱

한 목화 씨앗을 땅에 심어야 한다. 목화씨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아름다운 꽃이 피고 목

화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가 솜으로 변화 되기 때문이다. 솜은 솜 나름 탈수기계로 짜 내어

지는 고통을 감당한다. 땅에 떨어져 죽어가는 목화씨의 흔적도 두루마기 만드는 삶으로부

터 온 고단한 노동의 흔적도 두루마기가 탄생된 후에는 모두 사라진다.

아마도 목화씨의 희생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구세주 예수님의 모습과 닮은

것은 아닐까?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 죄를 대신해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처럼, 목화 솜이 물레 속으로 들어가 많은 고통을 당하고 뜨거운 가마솥과 독한 양잿물

속에서 오랜 시련을 거쳐 베틀로 들어가 무명 베로 짜여 나온 것같이, 우리도 예수님으로

인해 자유인이 되었다.

무명베가 하얗게 되었을 때 처럼, 우리도 정결케 될 삶의 무게로부터 나오는 미움과 원망

그리고 불평과 유혹 조차도 과감히 물리쳐야 한다. 무명베 역시 뜨거운 가마솥에서 나온 뒤

에도 한 동안 방망이질을 감내해 내야하고, 광목에 베인 누런 땟물이 다 빠질 때라야 진정

하얀 두루마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광목의 자격이다. 햇볕에 널어서 하얗게 발하면,

빳빳하게 풀을 먹인 후 다시 다듬이 방망이로 마구 친 후에 재봉틀로 박고 뜨거운 다리미로

다린 후에야 새 신랑의 겉옷 두루마기로서의 가격을 인정 받는 것이다. 하잘것없는 목화 솜

에서도 예수님을 만났다. 목화 조차도 수많은 고통과 환난의 과정을 거쳐야만 새 신랑이 입

을 수 있는 두루마기가 되는 데 거룩한 성도란 이름을 갖고 희생과 곤란 그리고 시험을 다

피하면 언제 마음의 때를 깨끗이 할 수 있을까?

무명베는 냇물에서 빨지만 우리 마음의 죄는 우리 눈에서 나오는 뜨거운 눈물로 씻어내

야 한다. 우리는 깨끗한 마음과 정결한 몸으로 저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

가 되기 위해 아름답고 선한 일에 더욱 매진하는 성도가 되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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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글 | 이경재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의 말씀을 그 느낌 그대로

기억하기 위해 때론 짧게 때론 길게 메모를 해 오고 있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으로써 성

경공부는 내 메모의 양을 늘렸고 난 그 메모를 통해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신천지 같은 신기한, 그러면서도 잘 정돈된 무언가를 적어 나간 기분이 들었다.

이 책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은 내게 실제적이고 개인적이며 지속적인 주님과 나와의 관

계를 유지하는 것에 동기부여를 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 내게 많은 질문과 해답을 안겼다. 답을 스스로 찾게 했고, 당장 또는 오랜 묵

상 끝에 얻기를 요구하기도 했으므로, 생각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런 생각 굳이 강요된 묵상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가끔은 강요당하는 기분을 떨쳐버

릴 수가 없었던 그 생각 속에는, 깊은 사고를 요구하는 책들을 선호하지 않았던 오래 묵은

독서습관에 대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 책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과의 만남을 통해 내게 일어난 변화는 앎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게 된 것 중 하나는 내가 만난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소중하고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 가는 동안에 가졌던 어떤

편견과 교만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던져 버릴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고, 무슨 일이든지

내 삶에 의미 있었던 일들은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신 결과로 내 생애 대부분의 순간들

이 여기에 포함된다는 믿음을 얻게 되었다.

내가 태어난 일, 대가족을 이룬 일, 결혼한 일, 엄마가 된 일, 학부모가 된 일.

셀 수 없이 소중한 찰나들이 내게 있었다. 매 순간 주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셨다. 나는 하

나님의 선택 받은 자녀라는 그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주는 언제나 나를 이끄시는 분임을

아는 까닭에, 그 믿음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야겠다. 양이 목자의

목소리를 아는 것처럼 나도 나의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분별해서 그 목소리를 따라 절벽으

로, 낭떠러지로 가지 않고 푸른 초목으로 갈 것을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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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68: 2014-영락지 봄호

어머니의 이름으로

글 | 이욱자

어머니

어느 수도사가 “사람이 죽을 때의 모습은 살아온 모습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옥색 한복

을 곱게 입으시고, 단아하게 주무시듯 관 속에 누워 계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

웠습니다. 100세까지 무병장수하신 어머니의 죽음을 두고 모두들 “복된 죽음”이라고 위로를

해주시더군요.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어머니가 그리워 가슴이 저려 옵니다.

어머니

이 세상에서 어머니의 이름보다 더 귀한 이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리 불러도 싫

증나지 않고, 마냥 불러도 부르고 싶은 이름입니다. 어머니를 생각만 해도 솟구치는 뜨거운

감정을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밤 꿈에 보이더구나, 별일 없느냐? 보고 싶다. 한 번 다

녀가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리도 바빴는지, 이렇게 저렇게 둘러대며 전화를 받

고서야 찾아가 문안 드리고는 선 걸음으로 돌아오곤 했으니 얼마나 서운한 것 있었을까?

어머니

꽃다운 20세 때 자란 환경과 동떨어진 곳으로 시집을 오셔서 아버지를 타작기계 발명가

로, 7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시려고 손금에 모두 닳아 없으셨지요? 그 부지런한 손으로

스무 명이 넘던 식솔들을 위해 꼭두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산토끼처럼 뛰어다니시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가방 들고 출장만 다니셨던 아버지를 단 한번도 탓하지 않으셨던 어머니

께서는 우리 집 안의 기둥이셨어요. 가난한 이웃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시고, 해산한

가정에는 쌀과 미역을 전해 주시고, 군에 입대하는 청년들에겐 주먹 밥과 용돈까지 챙겨주

셨으니 어머니는 과연 크게 베푸는 손을 가지셨던 분이셨습니다.

어머니

비록 60세에 늦은 나이에 주님을 영접하셨지만 어머니는 믿음의 수장이셨어요. 정결한

마음으로 하루에 두 차례씩 시간을 정해 놓고 가정 예배를 드리시던 어머니의 믿음을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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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69: 2014-영락지 봄호

어찌 따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어느 일요일 성경일독 한 사람에게 주는 상패를 전체 교인

중에서 홀로 받으시고, 시편 23편을 큰 소리로 암송하실 때에는 제 가슴이 벅차 오르며 저

의 어머니임에 감사하고, 당신의 딸인 사실이 대단히 자랑스러웠습니다. 작년에 어머니께서

출석 하셨던 양무리 교회에서 어머니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예배를 드리지

못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되 하나님 말씀을 기준해서 효도 하라.”는 목

사님의 설교는 저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성가대의 찬양을 들으며 어머니의 넓은 사랑에 감

격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오늘 포도를 사 왔습니다. 포도 알을 따면서 어머니와의 추억도 함께 따 고향 짐에 잠시

놓았습니다. 맛 있는 냄새로 온 집안이 흐뭇하고, 악기소리가 들리고, 웃음소리가 넘치던 우

리 집은 즐거운 집이었어요. 지금쯤 세상 짐 다 내려 놓으시고, 하늘 나라에서 저희들을 위

해 기도하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아버

지께서는 저희의 대학진학을 반대하셨습니다. 그 힘든 시기에도 끝내 아버지를 설득하여 사

범대학을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입학금 마련을 위해 백금 손목시계와 양수기를 처분해

주신 어머니의 결단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제가 있었겠습니까? 어머니 기억하세요? 여고

1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시내로 몸배바지 차림으로 찾아오신 어머니가 부끄러워

등을 떠밀어 돌려 보낸 일이 지금까지도 후회가 되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머니

저도 어머님처럼 살다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를 떠나지 않으셨고, 저는

어머니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랑합니다. 천국에서 다시 뵈올 때 까지 안녕히….

2014년 어머니의 큰 딸 욱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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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간증)죽음에서 건져 올린 신앙

글 | 강서경

어린 시절

나는 4대째 독실한 기독교 집

안에서 태어나 형제자매와 친

척, 친구들까지도 모두가 예수

를 믿는 신앙 속에 자랐다. 의

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물질

적으로 늘 풍족했지만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겨울에 감기만 오래 지속되어도 폐렴이 되곤 하였다. 막내인데다

이렇게 병치레를 하다 보니 부모님의 과잉보호 속에서 자랐다.

교회 생활과 학교, 그리고 집밖에 모르는 나는 교회에 가는 것을 마냥 즐거워했다. 그런

데 찬양팀 멤버가 되어 명동거리에서 찬양도 하고 전도도 해보았지만, 무엇인가 마음에 채

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 늘 허전했다. 머릿속이 아니라 가슴속 깊이 성령님과 인격적인 만

남이 갈급했는데 그런 성령체험이 없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는 뜨겁게 기도 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겉으로는 그저 초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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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해 보이는 그들이 간곡하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걸 보며 ‘하나님이 그들을 더 사랑하면

어쩌지?’ 라는 질투의 감정을 느꼈다. 성령님은 성령체험을 사모하는 자에게 때가 되면 채

워주시는 분이시라는 걸 깨닫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신혼 단꿈도 꾸기 전에

세월은 흘러 학교 서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한 남자를 만나 열렬한 연애 끝에 결

혼했다. 남편은 결혼 전에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진 않았지

만 참으로 착한 남편이었다. 나를 너무 위해주는 남편을 주님보다 더 사랑한 나머지 나의 신

앙생활은 어느새 형식적으로 변해갔다. 그런데 남편은

고시에 실패하는 바람에 결혼한 지 한 달도 안되어 군

에 입대하게 되었다. 나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피아

노학원 강사로 취직하였고, 하루에 40명씩 레슨을 하

며 무리하게 일을 했다. 그리고 2주에 한 번, 토요일이

면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먼 시골로 면회하

러 갔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남편을 면회하기 위

해 오랜 시간 기다리던 나는 하얀 눈 위에 선홍색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결핵 중증 3기

병원에서 나온 진단은 사망선고와 다름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결핵에 걸려

나았는데 이번이 세 번째 재발이다. 그동안 먹은 약만 해

도 하루에 30알씩, 양쪽 엉덩이에는 주삿바늘 자국이 가

득해서 딱딱해지는 증세까지 생겼건만… 그뿐인가. 하도

약이 독해 얼굴 피부병이 가득하고 설사가 끊이지 않았어

도 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난 이제 어찌하오리까?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때부터 병마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몸은 앙상한 가

지처럼 말랐고 몇 달째 계속 잦은 기침이 나왔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숨이 차고 속에서 피

가 올라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입에서 피가 쏟아져 취미인 물구나무서기도 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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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고 좋아하는 피아노도 칠 수가 없었다. 결국은 의사인 오빠가 나를 데리고 결핵협회 권 박

사님께 찾아갔다. 기독교인이신 권 박사님은 여러 가지 검사를 하더니 한쪽 폐는 완전히 구

멍이 뚫려 못쓰게 되었다며 결핵 4기라는 진단을 내리시며 “더 이상의 약도, 주사도 이젠

쓸 수가 없으니 공기 좋은 요양원으로 가면 남은 생애를 편히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씀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혹시 믿으십니까?”라며 긴 여운을 남겼다.

엄마는 통곡하며 “절대로 요양원에 보낼 수 없으니 죽더라도 집에서 지내자”고 하셨다.

나는 집안 식구들에게 전염될까 봐 24시간 마스크를 쓰고 방에서 꼼짝없이 혼자 식사하고

모든 옷가지와 수건들을 철저하게 소독하기

시작했다. 혼자 남을 남편을 생각하니 너무 기

가 막히고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그러던 어느 날, 병자를 위한 예배가 우리

집에서 낮 12시에 열린다는 연락이 왔다. 내겐

마지막 좋은 기회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환자들만 30명 정도 온다고 했다. 그들이

결핵을 앓고 있는 나를 싫어할까 봐 두려움이 앞섰다. 나는 창백하게 병든 모습을 보이기 싫

어 화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고

싶으니까 어서 낮 12시까지 고속버스터미널로 나와”라며 애절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무

슨 운명의 장난인가?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아니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모를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러 갈 것인지, 아니면 병이 기적적으로 나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건지 도저히 분간이 안 갔다.

나는 방에서 준비기도 하는 것처럼 엄마를 속이고, 경비 아저씨가 잡아준 택시를 타고 남

편에게로 달려갔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나를 만난 남편은 반가와서 어쩔 줄 모르다가 나의

근심 어린 얼굴을 알아채고 “무슨 일이 있느냐?”며 사연을 물었다. “집에서 병자를 위한 예

배가 있는데 몰래 빠져나왔다”고 하자, 그때까지만 해도 믿음이 별로 없었던 남편이 “지금

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가보라”고 했다.

“지금 달려가도 집에 도착하면 2시인데, 12시에 시작한 예배는 이미 끝났을 텐데…” 하며

죄송한 마음으로 집에 몰래 들어가는데 집에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이미 예배 끝나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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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갔나 보다”라고 생각하는데 엄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천사 같은 얼굴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엄마는

“네가 말도 없이 사라져 매우 화가 나 있었는데 이상

하게도 너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

인지 갑자기 목사님으로부터 두 시간 늦춰 오후 2시

쯤 오겠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이

과연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둑알처럼 커지는 성경 구절

엄마와 나는 부둥켜안고 실컷 울었다. 울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되었다. 나는 눈

물을 깨끗이 닦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내 방에서 준비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기도하는데 폭

포수같이 눈물이 쏟아지며 그동안 살면서 지었던 죄악들이 영화 스크린 돌리듯 빠르게 낱

낱이 지나갔다.

회개와 감사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눈물, 콧물이 범벅되었는데 펼친 성경 말씀이 바둑판

네모 칸 만하게 커져서 눈으로 글씨들이 막 들어왔다. “나는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이

렇게 핍박하느냐”는 말씀과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

도다”(시편 19:10)는 말씀이 글씨 하나하나가 눈으로 점프가 되어 들어왔다.

성령의 불세례

그렇게 하나님께서 준비를 충분히 시키고 있는데 드디어 “띵똥” 초인종이 울리며 목사님

과 몸이 불편한 환자들이 몰려 들어왔다. 목사님과 인사를 나누는데 목사님께서 “자매님

얼굴이 환하게 광채가 난다”고 의미 있는 말씀을 하시더니 “시간이 없으니 빨리 기도부터

하자”며 서두르셨다. 정성스레 차림 음식상을 뒤로 한 채 목사님께서는 내 몸이 진동하며 뭔

가 꿈틀거리며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을 미리 아시는 게 분명했다.

30명이 둘러앉아 있는 가운데, 중풍으로 쓰러져 고생하시던 아버지께서 먼저 목사님의

안수를 받고 있는데, 불쌍한 아버지를 위해 매달려 기도하던 나의 뱃속에서 갑자기 용광로

같이 뜨거운 성령의 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뜨거워 앉은 자세에서 길길이 뛰고

말았다. 그때 혀가 감기며 방언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곳에 모였던 분들이 일제히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마가의 다락방을 방불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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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6월 14일(토). 그날 나는 새로 태어났다. 그날 이후 성경 말씀이 너무 입에 달아서

책상에 몇 시간씩 앉아 있어도 피곤하지 않았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정도로 하루

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성경 말씀 중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

야 53:5)는 말씀이 내게 레마

(Rhema)로 들어와 나의 몸 안

에 있는 나쁜 결핵균을 완전히

불로 태우고 있었다.

도마의 의심

불세례를 받은 후, 기침도 멈

추고 피도 토하지 않아 기쁜 마

음으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

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

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 4:6)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였

다. 그런데 틈만 나면 마귀가 찾아와 내 귀에다 “너 곧 죽어. 성령 받은 것도 방언 받은 것도

다 거짓이야” 라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예수님 다음으로 사탄의 힘이 크다는 것을 익히 알았지만, 이 정도로 괴롭힘을 당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매일 성경 말씀으로 무장하고 찬송하고 마귀를 물리치는 기도를 세게 하라

고 하는가 보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골방에 앉아 은밀하게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가 보

다. 엄마는 “의심하지 말고 도마의 믿음도 믿음이니 어서 병원에 가서 확인하고 오라”고 그

랬다. 나는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도 찍고 가래 검사 등 각종 검사를 받고 돌아왔다.

여호와 라파

결과를 기다리는 1주일 동안 얼마나 부르짖고 기도했는지…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시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드디어 기다리던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 성령

의 불을 받은 날부터 한 달도 안되었지만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에 도착했다.

권 박사님은 이미 주위에 의사들을 불러모아 놓고 내 엑스레이 사진을 펼쳐놓고 흥분된

목소리로 “의사생활 17년 만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면서 눈물을 훔치셨다.

“할렐루야” 결국 주님께서 성령의 불로 나의 결핵을 말끔히 고쳐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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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까지 28년 동안 결핵은 재발하지 않았으며, 나는 감기도 잘 걸리지 않고 건강

하게 잘 지내고 있다. 의사들은 내 몸이 너무 약하므로 아기는 낳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나

는 그 후 두 아이를 자연 분만했다. 그것도 아들은 몸무게가 4kg으로 낳았다.

삶 너머의 삶을 바라보며

죽을 병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은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나는 이미 죽어야 할 생명인데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 나의 폐는 결핵과 사투를 벌이던

자국이 하얗게 구멍이 송송 뚫린 흔적으로 남아있다. 덤으로 허락하신 삶은 하루하루가 소

중할 뿐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한순간 한순간 이어지는 삶 자체가 기적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세상의 헛된 것에 대한

욕심을 다 내려놓을 수 있게 될 때 진정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세월

이 흐르면서 더 절실해진다. 나의 삶을 오직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향기나

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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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내가 믿는 하나님'을 읽고글 | 김종호

국민학교 다닐 때 이혼을 한 어머니는 그 괴로움을 종교적 신앙으로 채우려 한 것 같다.

형과 그도 어머니를 따라 마지못해 성당에 나가게 되었다. 교회 뜰에서 야구를 하며 놀다가

신부님이 나눠주시는 과자는 좋았으나, 모아 놓고 하시는 성경 이야기에는 재미가 없어 공부

시간에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형이 자기 옆구리를 쿡쿡 찌르곤 했다.

기독교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몸에 잘 맞지 않는 양복 같은 것이었다. 자신은 된장국

과 단무지를 먹고 싶은데 서양 냄새가 나는 음식을 주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타성

적으로 계속 교회에 다녔는데 거기에는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으려는 효심이랄까 그런 것이

작용한 것 같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렀고 다른 아이들 하는 대로 세례도 받았다. 그때는 그

중요성을 알지도 못했지만 입으로만 시인했던 서약이 다소나마 반평생을 좌우했던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청년이 되어 프랑스로 유학을 갔는데 그곳은 하늘을 보고 땅을 보아도 온통 기독교적인

문화로 가득한 세계였기에 유럽 기독교가 자기를 압박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급기야는

병까지 얻어 하루빨리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소설가가 되었으나 중병에 걸

려 약 3년 병상에 누워있었는데 수술에 여러 번 실패하고 의사도 단념한 상태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로서는 글을 써야 돈이 생기는데 이렇게 누워있으

니 생활비, 병원비를 어떻게 감당할까 하는 걱정 외에도 죽음의 공포 따위가 좀 더 크게 작

용한 탓인 듯하다.

기독교라는 것이 유럽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양복을 화복(일본 옷)으

로 바꿀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된 것이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자 한밤중에

문득 눈이 떠지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는 하염없는 생각에 젖어들었다.

사람들은 남에게 알려지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만큼의 자기만의 비

저는 가끔 도서관에서 일본 서적을 뒤적거립니다.

일본 현대 기독교 작가의 한 사람인 엔도 슈사쿠의 책들입니다.

그의 저서로는 <침묵> <위대한 몰락(사무라이)> <깊은 강> 등이 있는데,

그는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오른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가이며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그의 자전적 신앙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내가 믿는 하나님> 에 대해 간추려 옮겨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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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을 누구든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일생을 사는 동안에 자기로 인해 어떤 사람이

상처를 입고 앞길이 망쳐진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중한 범죄는 아니라 할지라도 상

처를 주거나 피해를 준 그 사람에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든 그

사람에게 복이 내려 주기를 기도하는 수밖에는.

마치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과거의 잘못한 일을 가지고 누군가 계속해서 시비를 건다하

더라도 괴로워 하지 말고 상쾌한 기분을 가지라고 충고하는 사람이 있다. 게다가, 자기 힘으

로 자기 인생을 헤쳐나갈 테니 종교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

을 그는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력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그로서는 사무라이처럼 자기 주인에게

몸과 생명을 맡기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가 신의 존재를 느낀

것은 자기 과거를 쭉 돌아보면 자기를 사랑하거나 도와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사람들이 무

질서하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하나의 실로 연결되어 작용했음을 강

하게 느낀다. 반드시 좋은 일뿐만이 아니라, 신은 누군가를 통하여 내게 작용하는 것 같다.

신은 눈으로 보는 대상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 사람 안에서 사람을 통해서 활동하시

거나 혹은 어떤 사람의 등 뒤에서 그가 움직이도록 밀어주시는 존재인 것 같다.

한 때는 유럽적 기독교를 멀리하고 싶었고, 타성적이었지만 오랜 종교생활로 남들에게 그

는 잘 믿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을 열심히 믿게 되었다고 나쁜 일을 하지 않

게 된 것도 아니다. 옛날보다 그리스도에 대해 많이 생각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신앙

생활 중에도 나쁜 생각과 일이 혼재되어 살아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가 병원에 있을 때 그곳에 입원하고 있던 아이를 보고 신의 사랑을 의심했다. 손도 발도

없이 태어난 아이가 있었는데, 3개월밖에 살 수 없었다. 어째서 이런 고통을 죄도 없는 아이

에게 주시는 것일까 하고 원망스러운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신앙이란 90%의심과 10%희망이라고 한다. 그도 이 말에 공감한다. 아니, 그 10%가 90%

보다 강할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신앙이란 최후까지 절름발이처럼 뒤뚱거리며 의심과 희

망을 계속적으로 반복해 가는 과정은 아닐지?

때론 머리를 하늘에 꼿꼿이 쳐들기도 하고, 때론 땅에 납작 엎드리기도 하면서 90%보다

강한 10%의 희망을 찾아가는 순례자의 길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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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갱년기 5인조의 유쾌한 일탈

글 | 신성원

짜증스런 갱년기와 치열한 전투중에 있는 다섯 명의 아줌

마들이 매일이 하루같은 일상으로부터 유쾌한 일탈을 시도한

다. 느닷없이 날아온 돌발 메시지임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이

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ㅇㅋ!” “조아조아!” 번개같이 반응

한다. 주중 나홀로 외출이 결코 수월치 않은 이 아줌마들이

이렇게 과감해질 수 있는 건 나름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투병 중인 한 친

구와의 동행이 어떠한 이유든지 그녀들의 일탈을 감히 방해할 수 없게끔 훌륭한 대의명분

이 되어준다. 좋은 시간 가지라는 맘씨 착한 남편들의 다소 질투 섞인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이 아줌마들의 영혼은 이미 가출한 지 오래전이다.

한참 넋 나가게 일할 이 시간에 이게 웬 횡재냐, 날씨는 또 어쩌면 이렇게 착할 수가 있냐,

에라 좀 덜 벌어서 굶은들 어떠하리 등등을 연발하는 동안 그들은 농한기 단체 관광 버스

에 올라탄 아낙네들로 제대로 빙의한다. 심지어는 투병중인 친구가 고맙기까지 하다는 농담

인지 진담인지 모를 멘트까지 날아 다녀도 아픈 이 친구도 주책을 상실한 그 친구도 그저 좋

기만 하단다. 동쪽 동네 대표 드라이버는 올림픽에 운전 종목이 있었다면 여자 국가대표가

됐을 거라더니 일방통행이 난무하는 공원 안팎을 연거푸 들락거리면서 방향 감각이 영 예

전같지 않다며 연신 투덜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승한 아줌마들은 꿋꿋이 자기들끼리의

수다에만 끝까지 집중한다. 서쪽 동네에서 온 일행들에게 늦었다고 면박을 받지만 그저 룰

루랄라일 뿐이다.

녹음이 우거진 나무들, 눈부시게 반짝이는 강물, 그 강가와 맞닿은 푸른 잔디밭, 세련되

게 가꿔진 정원의 꽃들이 한 장의 그림 엽서다. 10여 년 넘게 이 곳에 살면서도 30여 분 거리

에 이런 멋진 곳이 있단 사실에 무지했던 것이 마치 자신들의 잘못이라도 되는 양 자책까지

해가면서도 그녀들은 신나서 죽는다. 당장이라도 원빈 이나영 커플이 로맨틱한 한 컷을 만

들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아름다운 배경에 정확히 엑스트라 비쥬얼인 이 다섯 여인들이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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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게 등장하여 피크닉 장면을 연출

한다.

훌러덩 벗어 던지고 햇살에 온 몸을

맡긴 저 탱탱한 걸들처럼 도발적인 장

면도 한 번쯤 만들어 보고 싶다. 그러나

언덕을 타고 올라오는 강바람에 무릎

부터 으실으실하더니 급기야 담요가 목

밑까지 휘감고 올라와 있다. 화끈한 마음과 하나 되지 못하는 갱년기 육신은 참으로 매정하

다. 그래도 큼직한 썬글라스와 알록달록한 원색 쟈켓으로 나름대로 멋을 낸 그들은 제법 그

럴싸하게 나온 사진에서 각자 본인만을 뚫어져라 들여다 보고는 아직은 30대 후반 정도로

는 보인다고 확신하며 눈을 뗀다.

전쟁같은 항암 치료의 고비를 넘기고 겨우 한숨을 돌린 친구, 재정의 문제를 안고 춥고

캄캄한 터널 한 가운데를 걷고 있는 친구, 우여곡절로 숨가쁘게 달려온 비지니스 레이스에

막 마침표를 찍고 다음 레이스를 위해 숨을 고르고 있는 친구, 그 친구의 마침표를 부러워

하며 그 날을 꿈꾸는 또 다른 한 친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친구들의 일에 일일이 참

견하느라고 너무나 바쁜 오지랖 퀸이자 이 날 일탈의 주모자. 이 오묘한 조합의 5인조는 그

간 그들의 마음을 눌러온 무거운 짐들을 눈앞의 강물에 내던져 버리고는 무개념 컨셉 수다

파티 속으로 냅다 뛰어든다.

이들이 그래 봬도 교회에선 각자 여기 저기서 열심히 섬기고 있는 집사들이다. 또 이들을

꽤 괜찮은 믿음의 선배들로 여기는 젊은 자매들도 있다. 물론 그들에 관한 평판이 약간 과장

되고 포장되긴 했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사실 그들이 아주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도 이렇게 모이기만 하면 피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과 마주한다. 그건

바로 뭐니 뭐니해도 수다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뒷담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최근 업데이

트된 사건과 인물들을 하나 하나 도마위에 올려 놓고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며 도마질을 주

고 받는다. 뒷담화란 것이 성경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바람직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하지

만 그 고급스럽지 못한 말질 이면에서 때로 그들은 전혀 기대치 않았던 힐링의 선물을 받기

도 한다. 괜찮아 보이던 저들의 삶도 내 것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는 찌질한 안도감, 문제

의 그 사람을 꼼꼼히 스캐닝하던 중 거기서 별안간 내 모습이 또렷이 보여서 철렁했던 순간,

해결되지 않던 내 안의 오랜 답답함을 남의 얘기에 슬쩍 얹어서 휘익 흘려 내보냈을 때의 짜

릿한 카타르시스. 비겁한 방법이긴 하지만 뒷담화는 이렇게 그녀들에겐 꽤 유용한 대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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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처방이다.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에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

로 있다. “너 진짜 괜찮아?” 이 한마디 대놓고 묻고 싶

어도 이 소심한 아줌마들은 애꿎은 수다만 주고 받으

며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이다. 묻지 않기로 한다. 음성만 듣고도 표정만 보고도 서로의 맘

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그들은 안다. 그들의 마음을 번갈아 만져 주면서 소통을 돕는, 보이

지 않는 그들만의 여섯번째 베스트 프렌드가 거기에 함께 있다. 참 배려 깊은 친구다.

난 무릎이, 난 허리가, 난 머리가, 난 온 몸이… 저마다 질세라 각자가 겪고 있는 온갖 갱

년기의 증상들을 쏟아 낸다. 운동만이 살 길이라며 그녀들은 의기를 투합하여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서 포부 당당하게 트레일로 들어선다. 수풀 향기 가득한 공기를 한껏 들이 마시면

서 신선한 산소로 가득찬 피가 온 몸으로 퍼져 나가는 기분 좋은 그림을 상상해 본다. 부디

뇌쪽으로 건강한 피가 많이 가서 그 놈의 깜빡깜빡 증상이 제발 더뎌지기만을 간절히 소원

한다. 요렇게 하면 모델처럼 팔이 날씬해진다는 한 친구의 말에 나머지 팔랑귀 아줌마들도

앞다투어 손목과 팔을 요리조리 돌리고 휘저어대며 요란스럽게 걷는다. 탄탄한 몸매를 뽐

내며 그들 옆을 쌩하니 달리는 젊은 언니들에게 감출 수 없는 부러움의 눈길이 따라간다. 좀

전보다 한층 더 격렬하게 손목과 팔을 휘둘러본다. 민소매 쫄티와 쫄반바지를 보란듯이 입

어주고야 말 그 찬란한 날을 꿈꾸며.

자정은 멀었건만 가족들의 끼니에 관한 한은 사명 의식이 유난히도 투철한 이 다섯 신데

렐라 아줌마들은 서둘러 가정으로 귀의한다. 짧았지만 재미났던 그들만의 일탈에 대한 리

뷰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계속 된다. “좋았다, 좋았지? 너무 좋았어!” 이 세 마디가 이 아

줌마들의 짧은 표현력의 시작이자 끝이다. 각자 돌아오는 길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서로는

다 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함께 해줘서 고마워…”

어떤 길을 걸어가든 함께 걷고 계심을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그 분의 소원이라

던데, 그런데도 특별히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은 보이지 않는 그 분의 임재에 대

해 점점 더 불안해 하고 너무나 힘들어 하니까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을 함께 묶어

주시나 보다. 내 등 뒤에 계신 그 분은 잘 안보였

는데 그 친구 뒤에 계신 그 분은 너무나 잘 보인

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하고 각자가 걸어내야 할

그 어두운 터널로 다시 향할 수 있다. 내 손을 잡

아주는 친구의 손에서 그 분의 온기를 느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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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를 위한 기도

로리가 벌써 첫 돌이 되었어요. 이렇게 기쁘고 복된 날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 시간까지 모든 순간마다 모든 성장을 열어주시고 로리를 통하여 온 가족이 더욱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시고 화목한 가정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

버지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로리! 우리 로리가 기었고, 아장아장 걸어서 성인이 되는 날에

도,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돌아가기까지 로리를 사랑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우리 가족 모두가 로리를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고

좋은 선생님들, 좋은 친구들,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게 하셔서 그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며 살게 하옵소서. 몸과 마음과 영혼이 건강하고 튼튼하

며 선한 마음을 주시고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주님을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로리가 평생에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 우리 로리에게 밝혀 보여 주시고 그 분야에서 뛰

어나며 로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옵소서. 존귀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로리

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지식과 지혜와 분별력을 주시어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며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진 로리가 되게 하옵소서.

로리가 부모를 잘 순종하고 곤경하며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로리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복의 통로

가 되어 은혜와 덕을 입히게 하오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우리 가정의 기쁨이

되는 로리가 되게 하옵소서. 로리가 일생 복된 삶을 살아가게 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로리에덴의 첫 돌을 맞는 날

글 | 김영희

로리가 벌써 첫 돌이 되었어요. 이렇게 기쁘고 복된

날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 시간까지 모

든 순간마다 모든 성장을 열어주시고 로리를 통하여 온 가족이

더욱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시고 화목한 가정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로리!

우리 로리가 기었고, 아장아장 걸어서 성인이 되는 날에도,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돌아가기까지 로리를 사랑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우리 가족 모두가 로리를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

시고 좋은 선생님들, 좋은 친구들,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게 하셔

서 그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며 살게 하옵소서. 몸과 마음과 영혼이 건강하고 튼

튼하며 선한 마음을 주시고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주님을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로리가 평생에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 우리 로리에게 밝혀 보여 주시고 그 분야에서 뛰어

나며 로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옵소서. 존귀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로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지식과 지혜와 분별력을 주시어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

이 이루어지며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진 로리가 되게 하옵소서.

로리가 부모에게 잘 순종하고 공경하며 부모의 마음

을 기쁘게 하는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로리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복의 통로가 되어 은혜와 덕을 입

히게 하오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우리 가정의 기쁨이 되는 로리가 되게 하옵소

서. 로리가 일생 복된 삶을 살아가게 하오

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

합니다. 아멘 †

79

Page 82: 2014-영락지 봄호

쪽글(1) 빅토르 안글 | 김태완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인들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이름은 아무래도 ‘빅토

르 안’이다. 2006년 토리노에서 3관왕의 위업을 달성한 그가 2010년 밴쿠버 올림픽 한국 대

표팀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빙상연맹과의 갈등 그리고 심각한

무릎부상 등으로 졸지에 영웅에서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된 그에게 러시아가 러브 콜을

보냈고 그는 ‘러시아인’이 되었다. 그리고 2년 뒤 그는 ‘새 국적’ 러시아 땅에서 열린 동계올

림픽에서 보란 듯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그는 얼음판에 입을 맞

추며 울었고, 관중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그의 아버지도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아냈다.

“오죽했으면…”, “그래도 국적을 바꾸면서 까지…” 크게 두 가지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찬반양론이 인터넷과 TV와 신문을 장식했다. 어떤 미국 언론은 안현수가 따낸 금메달을 한

국에 대한 ‘복수(revenge)’라고 표현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더 빨리, 더 높게, 더 힘차게(Citius, Altius, Fortius)”라는 슬로건으로 아마추어리즘에

서 출발한 올림픽이 이미 돈과 명예와 성공에 대한 야망이 판치는 스포츠마케팅의 각축장

으로 변해 버린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거기에 더하여 올림픽은 선수 개인의 경쟁이

아니라 나라간의 순위와 자존심 경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이런 환경은 마치 프로 스포츠선

수가 소속팀을 옮기듯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국적을 옮기는 것을 더 이상 애국심이나

다른 어떤 가치로도 쉽게 논박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빅토르 안을 보면서 이민자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국가를 대표할 만큼의 유명인을

보면서 가졌던 개인과 국가, 인간의 행복과 애국심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은 과연 보통 이민

자들에게는 어떤 의미와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안현수가 평창에서 태극

기를 달고 환호하는 모습을 기대해 보는 것은 철없는 애국심일까? 이민자의 질정 없는 행복

찾기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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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83: 2014-영락지 봄호

<지휘자>기획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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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 (1/4)<지휘자> 가브리엘(이귀연)가브리엘(이귀연)취재 김태완

연습만이 살 길

1부 예배가 끝나면 이렇게 다음 주일에 부를 찬양 곡을 연습한다. 이귀연 집사는 성가대

각 파트별 음을 짚어주며 직접 노래도 부른다. 교회 본당에서 성가대를 지휘할 때는 볼 수

없었던 노래 실력을 들을 유일한 기회인 것 같았다. 성악을 전공하고 한때 오페라 가수도 했

던 관록이 묻어 나온다. 풍부한 성량으로 노래 솜씨를 발휘하며 동시에 손뼉도 치면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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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85: 2014-영락지 봄호

나, 둘, 셋!” 구령과 함께 박자를 끌고 간다.

성가대와 같은 합창단을 지휘하는 것은 레고를 맞추는 작

업이 아닐까? 부분부분 혼자서는 아무런 의미를 만들지 못하

는 조각을 조립하는 것처럼, 조립 후 만날 수 있는 완성품에

대한 확신과 기대감을 바탕으로 쌓아 올리는 정성스러운 과

정을 연상시켰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 파트 별로

연습할 때는 그 전체 모습이 무엇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소프라노에 알토가 화

합하고 다시 거기에 테너와 베이스가 조화되니 하나의 완성된 곡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

했다. 마치 오랜 산고 끝에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새 생명과 같이.

연습이 끝날 무렵이 되자 다음 예배에서 우리가 듣게 될 찬양 곡에서 뜸이 잘 든 밥 냄새

가 났다. 아니 여러 가지 좋은 재료를 잘 섞어 맛있게 비벼낸 비빔밥 냄새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어느 것 하나 자신의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하면 그만큼 맛이 떨어지는

비빔밥. 하지만 제대로 맛을 내는 여러 재료가 어우러졌을 땐 짐작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차

원의 맛을 만들어 내는 오묘한 조화. 지휘자 이 씨는 비빔밥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의 간을

맞추고 양을 조절하여 재료 각각의 맛보다는 함께 비벼졌을 때 만날 수 있는 조화로운 맛

을 창조해 내는 마스터 셰프 같았다.

연습실에서는 다음 주일에 부를 찬양곡만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 그다음 주 곡이나, 그

이후의 곡이라도 쉽게 넘어갈 수 없어 연습이 필요한 대목은 한 번씩 짚고 넘어간다. 마치

제대로 된 도자기를 만들어 내기 위한 초벌구이와 같다. 기본적으로 4개월 동안 소화해내

오페라가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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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86: 2014-영락지 봄호

야 할 찬양 곡을 CD로 구워 성가대원들에게 사전에 배포하고 자신의 파트에 대해 감각을

익히도록 한다니 꾸준한 연습을 할 수 없다면 성가대에 설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브리엘 성가대와 함께한 3년

영락교회 1부 성가대는 60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브리엘 성가대가 2부, 3부 성가대

와 조금 다른 것은 성가대 구성원의 상당수가 70대를 넘은 어르신들이라는 점이다. 20대의

구성원들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50대의 성가대원이 자신을 막내뻘이라

고 얘기할 정도이니 전체 연령대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이귀연 씨의 가족은 2003년 몬트리올에 이민을 왔

다. 그리고 2007년부터 영락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캐나다 생활 10년이 지나는 동안 초등학생이었던 두

딸은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다. 4살이었던 막내가 엄마

보다 훨씬 키가 큰 9학년이 되었으니 세월의 흐름이

새삼 느껴진다. 감사하게도 두 딸은 성가대에서 자신

의 시간에 맞게 봉사하고 있다. 성가대에서 베이스를

맡고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 하는 남편(박정

규 집사)과 엄마 아빠 때문에 항시 교회 본당 제일 앞

줄에 출석하여 예배를 보는 막내까지 합치면 가히 모

든 가족이 성가대와 함께한 3년 이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성가대 지휘자가 되기

전 이미 장례예배 성가대인 쏠라시움(Solacium)의 지휘를 맡아 지금까지 섬기고 있다. 무엇

보다도 사람의 인생 중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 우는 자의 손을 잡아주는 일이기 때문에 가

브리엘 성가대를 섬기는 것 못지않게 보람되고 애착

이 간다.

이렇게 온 가족이 교회를 중심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은 두 집안 모두 예수님을 섬기는 기독교 가정 출신

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모태신앙으로 자란 그녀는 오

빠를 목사님으로 두었다.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는 남 어린이합창단 지휘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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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87: 2014-영락지 봄호

편 박정규 씨의 형님도 목회자로 섬기

고 있다. 이귀연 씨 본인은 성악을 전

공한 덕에 20대 초반에 이미 어린이

합창단의 지휘를 맡았고 얼마 되지 않

아 수요 성가대를 지휘하며 성가대 지

휘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찬양은 함께하는 예배

이귀연 씨가 생각하는 성가대원의 자격은 아주 독특하다. ‘세례 교인이고, 3개월 이상 영

락교회에 출석한 사람’이라는 공식적인 자격 요건 외에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사적인 기준

은 “인물 되고, 립싱크가 되면 된다”는 것이다.

언뜻 농담처럼 들리는 이 성가대원 선별기준에는 성가대와 그것을 구성하는 대원에 대한

그녀의 평범하지만 명쾌한 철학이 그대로 배어있다. 한마디로 그녀가 얼마나 조화를 중시

하는 지휘자인지를 깨닫게 한다. 성가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음악 하는 사람, 노래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찬양하는 사람을 원한다. 음악만을 하려면 성가대원이 될 필요가 없다. 아니

그런 사람이 성가대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다. 성가대원은 노래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찬양은 예배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찬양은 개인 삶의 실제적 얘기가 바탕이 되어야 한

다. 거짓말로 노래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짓으로 예배 드리

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찬양할 때 마음과 행동은 모두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찬양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정

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감사함을 더 얹어야 한다. 감사할 것이 없으면 찾아야 한

다. 이귀연 씨는 모든 성가대원이 이런 진실한 마음으로 찬양에 임해야 그들의 찬양이 비로

소 성도들에게 제대로 전달된다고 믿는다.

찬양이 완벽한 예배의 한 과정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이귀연 씨

는 찬양을 듣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요청했다. “성가대의 찬양을 들을 때는 그 곡에 맞게 같

몬트리올 선교합창단 지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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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88: 2014-영락지 봄호

이 찬양하고 호응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그냥 노래로, 음악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

니라, 가사를 되씹으며 마치 성경 말씀을 묵상하듯 자기 나름의 해석과 다짐을 곁들이며 적

극적인 호응과 반응을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가대와 성

도가 함께해 완성하는 참된 찬양, 참된 예배가 될 것이다.

다시 함께 할 2014년

그녀에게 2013년은 어느 해보다도 바삐 산 한 해였다. 특히 12월 15일에 올린 크리스마스

칸타타의 총지휘를 맡으며 4개월 남짓 연습에 몰입했다. 가브리엘 성가대를 중심으로 어린

이와 청년, 중장년의 팀들이 합류해서 영락교회 온 세대를 망라하여 모두 함께하는 칸타타

를 올려드린 것에 감사한다.

보통 찬양 곡을 선정할 때는 계절이나, 시기, 절기 등을 고려하여 적절한 주제를 선정한

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얘기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지휘자인 그녀가

직접 선곡했다. 2014년에는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다. 찬양곡 선정하

는 방식을 참여형으로 바꾸고자 한다. 성가대원들이 ‘내 인생의 찬양’을 직접 선곡하도록

해서 매월 1회씩 대원들이 선정한 곡을 1부 예배 찬양 시 올릴 예정이다.

이 새로운 방식은 지휘자 이씨가 평소 찬양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 즉, ‘찬양은 개인의

삶의 실제적인 얘기’임을 실천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의 얘기와 동료

들의 경험과 삶이 얽힌 얘기가 뒷받침되는 찬양은 더욱 은혜롭고 감동 넘치는 살아있는 찬

양이 되어 울려 퍼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뢰가 만들어 내는 합창

60여 명으로 구성된 조직이 원활하게 움직이려면 뭔가 행동강령, 하다못해 가끔 멤버십

트레이닝 같은 것을 해서라도 분위기를 다잡을 필요가 있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어르신들이 솔선하여 분위기를 잘 이끌어 주므로 별도의 시간을

낼 필요가 없다. 평소의 연습 모임으로도 서로 간의 정을 나누고 팀워크를 다지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오히려 그녀는 지휘자로서 가브리엘 성가대원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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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에 시작하는 1부 성가대에 서려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한다. 이른 시간임에도 모든 대원

이 30분 정도 일찍 나와서 정시에 시작하고 정시에 끝낼 수 있도록 서로서로 돕는 분위기가

너무도 고맙다. 연세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찬양을 위해 순종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녀는

자신이 만약 지휘자라는 책임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렇게 매일같이 새벽 시간에 나올 수 있

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지휘자 이 씨에 대한 성가대원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궁금해졌다. 지휘자에 대한 평

소 느낌을 솔직하게 들려달라는 질문에 성가대원들의 대답은 '음악'과 '믿음' 두 개의 키워

드로 집약되었다.

자신을 30년 이상 성가대 생활을 했다고 소개한 어떤 대원은 “음악에 문외한인 내게 음

악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사람”이라고 지휘자 이 씨를 칭찬했다. 그리고 항상 대원들을 배려

하고 친근감 있고 격의 없이 대해주는 소탈한 성격을 큰 장점으로 꼽았다.

그리고 또 다른 성가대원은 “음악성은 말할 나위도 없고, 믿음이

좋은 신앙인”이라고 얘기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지휘

자라는 귀띔도 빼놓지 않았다. 여기에 더하여 성가

대원 들이 이구동성 입을 모으는 것은 무엇보다

도 시니어인 자신들이 편하고 즐겁게 성가대 활

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데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가브리엘 성가대에는 이귀연 지휘자를 중심으

로 서로서로 신뢰하고 칭찬해 주는 아름다운 그리

스도인의 덕이 선순환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러한 신뢰의 바탕 위에 만들어내는 그들의 합창

은 ‘새벽을 여는 영혼의 울림’이 되어 모든 교인

의 마음속에 다가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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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 (2/4)<지휘자>호산나(송은강)취재 | 계정림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영락교회 2부 호산나 성가대 지휘자 송은강은 복음을 위하여 종목과 지경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고 있는 우리 교회의 사도바울 같은 존재이다. 지휘자, 성악가, 캐나다 한인 교회음악

협의회장(2009,2013), 영락시니어컬리지 담당부장, 6.6 구역장, 중앙아시아 키르키즈 선교부

장(2013), 영락교회 주차요원, KCCM 한글학교 이사장 등이 모두 그를 칭하는 호칭이다.

성가대의 지휘자는 손가락 끝에서 다양한 음색과 성량을 조율하여 화음을 창조하며, 높

은 지휘대위에서 베일에 싸인 듯이 신비한 모습으로만 남아 있어야만 할 것 같지만, 그는 자

기 부친의 가르침처럼 ‘성도들과 많이 교감하고, 가까운 곳에서 섬기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진정한 사역’임을 따르고 실천하고 있다. “사실, 음정, 가사, 박자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

우다 보면, 뜻밖에 스트레스가 쌓이는 경우도 있고, 가끔 예민해지면서 주워진 사역이 벅차

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도 가운데 찾아낸 해결방법은 오히려 더 많은 사역

을 감당하는 것이었고, 더불어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에 도전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주차장에서 만난 송은강 지휘자는 질서정연하게 차량을 정렬하고 있었다.

주차를 못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없도록 한 대라도 더 질서 있게

주차시키기 위해 그의 손과 눈동자가 매우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그는 마치 차량을 지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 성가대 지휘자가 차량까지 지휘하고 있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그에게 말씀과 교회에 대한 헌신과 순종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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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부인이 하기 귀찮아하는 가사를 꾸준히 하거나

교회의 주차요원 등 나 자신에겐 다소 도전이 될 수

있는 사역들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깨달음이 있었습

니다.”라고 그는 언급했다.

평범한 것에서 영적 의미를

실제로 이 같은 송 지휘자의 생

각은 제럴드 L. 싯처의 저서 “The

Will of God as a Way of Life”에

서 “우리가 가장 큰 도전에 부딪힐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웅적,

희생적 삶을 요구하실 때가 아니라

매일의 일상에 충실하도록 부르실 때이며, 평범한 것의 영적 의미를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

님이 주시려는 놀라운 선물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선물은 바로 그분의 사랑의 인재다”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또 사도 바울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

하여 하라.” 했듯이 그는 주워진 사역에 수동적 책임을 수행하기보다는 찾아서 사역하며,

1990년 귀국 독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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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를 큰 영광의 자리로 키워가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게 된 동기는 부친

의 가르침 말고도 송은강씨의 여러 인생 여정을 통한 세월의 교훈도 큰 몫을 했다.

이탈리아에서

음악교수가 되

어야겠다는 집

념의 5년이 있었

고 대전의 한 대

학에서 9년간 성

악과에서 교수

로 재직했었다.

서울 시립오페라 단원 등 수십 편의 오페라, 오라토리오 무대와 다수의 국제 콩쿠르에 입상

도 했지만 절제된 하나의 화음으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찬양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상의 헌신일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조금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게 최

선의 노력을 통해 최고의 완성도 높은 찬양을 드리는 성가대의 지휘자로 남는 것이 가장 큰

그의 희망이다.

32년간의 지휘경력 중 반을 영락과 함께

송씨가 토론토 영락교회를 섬길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부친의 영향이 컸다. 그의 부친께

서는 3형제 중 장남이었던 그의 이민을 반대하셨지만, 그분에게 많은 영향을 주신 임일준

장로님이 섬기는 교회를 간다면 허락하겠다는 조건을 다셨다. 이런 연유로 인해서 캐네디언

오페라 컴퍼니(CCO) 오디션에 참가하고 영락교회의 수요예배 특별찬송을 드린 후부터 시

작된 그의 사역은 재작년 부친께서 돌아가셨던 적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주일을 빠진 적

이 없을 만큼 호산나 성가대의 사역에 헌신적인 사명감으로 임하고 있다.

1988년 이태리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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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신앙이었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났고, 비록 고3 때 경영학

을 선택하였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고 한다. 급기야 대학 3학년 때 전공을 다

시 성악으로 바꾸었고, 졸업 후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부인인 이부성 씨를 만난

것도 이러한 음악과 믿음생활 속에서였고, 이부성 씨는 현재 호산나 성가대에서 오르간 사

역을 맡고 있다.

음치, 박치 모두 환영!

매년 11월이 되면 새로운 성가대원을 선발하고 있는데 이때는 신규대원을 찾는 것도 어

려울 뿐 아니라, 이들을 적응시키기까지는 최소한 3개월 이상이 소요되는 어려움이 있다. 이

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그만의 성가대 운영방식 중의 하나가 미리 1년 치 곡을 절기

에 맞춰 웹에 올려놓고, 미리 연습하기 힘든 대원이나 추가로 연습이 필요로 하신 분들의 편

리를 돕는 거다. 특히 송지휘자는 호산나를 처음 시작하면서 5년동안은 항상 새로운 곡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대원들에게 약속했고 그 약속이 8년째 이어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소

장하고 있는 5000곡이 넘는 성가 집의 몇 쪽에 무슨 곡이 있다는 것을 거의 암기할 정도로

신곡 발굴에 중점을 두고 인터넷을 통해서 다른 교회들의 찬양 또한 눈여겨본다고 한다.

호산나 대원들의 성가대에 임하는 모습에 대해 송지휘자는 “대부분의 호산나 성가대원

은 2~3가지 봉사에 솔선수범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성가대 참여 권유를 받았

을 때 바쁘거나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절을 하며, 단 한가지 봉사조차도 꺼

려합니다. 이런 분들께 꼭 성가대에 도전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한인들은 노래방을 찾아가서까지 노래를 부를 정도로 노래를 사랑하는 민족인데, 단조로

운 방법으로 이어지는 세상곡들에 비해 요즘 찬양은 Syncopation(당김음)이 많아서 다이

내믹하면서도 경쾌한 피아노와 포르테가 조화를 이루는 음악들도 많고, 아기자기한 멋이

나면서도 아주 박진감이 넘친다는 것을 모르세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네 파트로

어울리는 화음의 찬양을 통해 주께 드리는 신앙고백의 뜨거운 체험을 누구나 하실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한다.

2007년 부활절 뮤지컬 ‘기적으로 이루다’는 한인사회 단일 공연상 사상 최다인 2천 명의

청중이 예배당을 가득 채웠었고, 2012년 ‘다 함께 크리스마스를’ 공연에서는 교회 역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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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2회 연속공연을 했을 뿐 아니라 2000년 이후 최고의 찬양이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음

악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대원들의 열성으로 만들어낸 창작 뮤지컬이었으며 지금도 뉴욕

지역의 교회 등 많은 교회에서 대본과 자료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있을 만큼 좋은 평가를 받

고있다. 장장 11개월이라는 오랜 연습시간에도 불구하고 불평 없이 연습에 몰두해준 대원들

과 한마음으로 연습했던 뜨거운 경험은 모두에게 귀중한 간증이 되었으리라고 그는 회상한

다.

20~60대가 만들어가는 천사의 합창

“저희 호산나는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된 총 70여명의 성가대입니

다”라고 소개하는 송지휘자는 그 동안 아이들의 예배시간을 맞춰야 하는 이민교회의 특성

상, 부모들이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대략 40대 후반의 나이가 돼서야 성가대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즈음은 남편들이 아이들을 돌봐주는 경우가 많아져서 젊은 엄

마들의 참여가 높아지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다양한 연령층의 성가대 특징은 높고 밝은 소

리를 내야 하는 소프라노부터 중후하고 안정적인 알토까지 고른 하모니를 낼 수 있어서 화

음의 멋을 실을 수 있다는데 있다. 그는 또 너무 ‘감정’에만 호소하는 분들에게는 ‘소리’를,

‘소리’에 너무 역점을 두는 분께는 ‘감정’을 실어 표현해달라고 요청한다. “제가 가족 다음

으로 자주 만나는 분들이 성가대원들인데 진심으로 웃으며 함께 찬양 준비를 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죠”라고 말하는 송 지휘자는 “요즘 경기가 않좋아서 비즈니스가 점점 어려워지

는데도 힘든 내색을 하지않고 지친 삶 속에서도 열심으로 찬양을 드리니 정말 ‘천사들의 합

창’입니다”라고 덧붙인다.

‘한국사탕’이 넘치는 호산나

한국방문을 다녀온 한 대원이 사탕 한푸대를 가져왔던 것이 관례가 된 후 한국방문이 잦

은 대원들은 방문 때마다 사탕 나누기를 잊지 않으셔서 하루도 사탕이 떨어지는 날이 없다

고 한다. “성가대 세미나를 할 때나 다른 교회 성가대의 문제점을 보면 불협화음이 가장 큰

이슈라고 하는데 비해 호산나 성가대는 다들 사명감으로 순종을 한다”고 소개한다.

한 대원에 따르면 “송지휘자는 보기보다는 정말 부드러운 사람입니다”라고 그를 소개하

면서 “싫은 소리 못하시고 대원들의 소소한 가족사까지 전부 챙기는 자상한 분이시죠”라고

말하면서 “이번에 국회의원 경선에 도전하는 대원을 돕고 있는 송지휘자를 보면서 깜짝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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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95: 2014-영락지 봄호

랐어요.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열정과 행

동을 보여준다”고 송지휘자를 평

한다. “앞으로 바라는 것은 ‘더

수준 높은 찬양’에 다같이 도전해

보는 것 입니다. 물론 서로가 더욱

하나가 되어야 하고, 더 많은 연습을 해야 하니 더 많은 희생이 당연히 요구됩니다.

그가 음악의 미개척지와 같았던 캐나다를 선택한 이유 중의 또 하나는 가족이 뿌리내리

기에 좋을 만큼 건전한 분위기와 아이의 교육환경이 매우 만족스러웠다는 점인데 당시의

이 판단은 지금까지도 흔들림이 없다. “저는 정말 아이들과 잔디 위를 뛰어다니면서 혹은 집

에서 빨래와 설거지를 하면서도 가끔 감사의 눈물이 나요. 특히 9살이나 많은 남편 때문에

친구보다는 나이 많은 분들과 어울려야 하기에 늘 설거지를 도맡아야 하는 부인에게는 항

상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부인과 매일 한 시간씩 조깅하고, 주일예배 후에는

성가대원들과 함께 한 시간 반씩 베이뷰와 커머에 있는 계곡을 따라 10~15명이 모여 산책하

는 등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누구나 초기 이민자로서 겪어야 할 정

착의 어려움 또한 영락교회 발전속도만큼이나

빨리 극복하고 있으며, 점점 늘어가는 사역을 통

해 그는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

고 있다. 송지휘자는 낮은 자리에서 더 많이 섬

길수록, 더 깊은 은혜를 받고 기쁨에 충만하게

됨을 깨닫고 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자신이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족함을 깨닫고 스스

로 더욱 기쁨과 영광에 이름임을 나날이 더 실천

하고 있다. 이를 보는 성가대원뿐 아니라 모든 성

도가 더욱 은혜받고 복음을 더 많이 전할 수 있게 되기를 오늘도 기도하고 있다. †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린도전서 9: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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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 (3/4)찬양은 나의 기쁨, 나의 숙명임마누엘(박철 지휘자)

취재 | 김소연

3부 임마누엘 성가대의 박 철 지휘자,

그가 통통 튀는 몸짓, 때론 코믹하고 때론 진중한 표정, 그리고 웅숭깊은 목소리로 온몸

을 사용하여 지휘하는 동안 각 파트를 맡은 대원들은 진지한 눈길로 악보와 지휘자를 번갈

아 바라보며 소리를 모아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로 시작되는 시편 121편의 말씀, 어렵고 힘겨울 때 실족하

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메시지는 성가대 연습실을 가득 채운 운율을 따라

더욱 강력한 메시지를 만들어 가슴을 한가득 채웠다.

성가대 연습실.

“자~ 날 봐요, 날!”

“조금만 더 끌어올려 볼 수 있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지 !

그 음, 중~요한 음이에요. 즐기세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느끼며~ 그렇죠! 감정 백배!!”

더덩실 춤을 추듯 몸을 움직여 지휘하던 그는 찬양곡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검지로 하늘을 수차례 찌르더니 큰 원을 그리며 모든 소리를 순식간에 잠재웠다.

“잘했어요. 박수!”

‘물개 박수’를 치는 그의 얼굴에 한가득 미소가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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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그는 마포에서 오랫동안 목회를 하

신 아버지 덕에 늘 교회 안에서 자

라났다. 초등학교 시절엔 어린이 성

가대의 단원으로 활동하였고, 중 고

등학교 시절엔 중창단을 결성하여 문

학의 밤을 통해 공연하는 등, 어려서부

터 찬양과 매우 밀접한 삶을 살아왔다. 그래

서였을까? 숙명여대 음대의 교수였던 교회 권사

님으로부터 성악을 전공하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들었을

때 그는 어렵지 않게 마음을 정할 수 있었고, 짧은 기간의 준비 끝

에 85학번으로 연세 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열정을 가졌던 그는 학창시절 내내 이화여대와 연세대 성악과

학생들로 이루어진 ‘다락방 선교회’라는 노래 선교단을 통해 교도소나 병원, 농촌 지역을

방문하며 찬양 선교에 힘썼다.

그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부정이나 의심을 해본 일이 없다.

“흔히들 말하는 ‘Born Again’(다시 태어남)의 경험은 없어요. 신앙은 제게 자연스러운

옷같은 거예요. 한치의 의심과 신앙의 갈등 없이 하나님을 믿게 해 주신 것도 참 감사하죠.”

이탈리아, 로맨스, 그리고 결혼.

오페라를 더 깊이 공부하고 싶었던 그는 졸업한 다음 날, 이탈리아를 향한 유학길에 올

랐다. 유학생활을 시작

한 지 일년 뒤, 학비 지

원을 더는 받을 수 없게

되자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피렌체의 국립 오

페라 합창단에 지원하

였고, 치열한 경쟁을 뚫 오페라 ‘세빌리아 이발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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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98: 2014-영락지 봄호

고 오디션을 통과해 유일한 동양인

단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는 이

기간에 현존하는 최고의 마에스트

로라는 평가를 받고있는 주빈 메타

에게 합창을 배우고, 파바로티와 함

께 레퀴엠을 공연하는 영광을 누리

기도 했는데, 특히 주빈 메타의 지

도를 받으면서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행복감’을 맛보았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생활한 지 4년 차 되던 해, 그는 평생의 반려자인 장성란씨를 만나게 된다.

1993년 당시 그녀는 토론토대 미대 학생으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이탈리아에 와 있

었는데, 한인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린

후 찬양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며 그에게 인

사를 건네온 게 그 만남의 시작이다. 낭만적

인 그곳에서 목회자의 자녀라는 공통분모

를 가진 그들은 강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급

속도로 가까워졌고, 사랑에 푹 빠졌다. 그리

고 6개월간의 연애 끝에 1994년 여름, 그들

은 결혼식을 올린다.

이 과정 중 비자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

그는 결혼을 결심하고 인사차 연인의 부모님을 찾아뵙기 위해 캐나다를 방문하려 하였으

나, 취업을 위한 시도라 생각한 캐나다 정부는 그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았다. 몇 차례나

비자 신청이 거부되던 차에 역사적인 한국과 캐나다 간의 비자 면제 협정이 체결되었다.

1994년에 일어난 일로, 운전 면허증을 시험 없이 교환 발급받을 수 있게 된 일과 더불어

캐나다에 거주하는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캐나다 역사의 한자락이다. 무비자

협정이 체결된 직후에 오른 여행길, 스위스에서 무비자일리 없다며 비행기를 태워주지 않는

바람에 하루 더 체류하는 웃지 못할 촌극도 겪었다고 한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방문한 캐

나다에서 부모님의 허락을 받은 후, 그는 장성란 집사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마술피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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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큰 전환점, 이민.

결혼 후 4년 뒤, 8년간의 이탈리아 생활을 마치고 그는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여

모교에서 시간 강사로 교편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그는 다른 대학들에서 오페라 앙상블을

가르치는 등 전임 교수가 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의 가정에

고민이 시작된다. 아홉 살 어

린 나이에 캐나다에 발을 디

딘 아내 장성란씨에게 있어

한국의 일자리 문화는 이해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가족

중심의 캐나다 생활과는 달

리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지

내며, 밤에도 수시로 불려나

가는 남편을 보며 목이 죄어

오는 느낌을 받았고, 한국에

서의 생활이 불행하게 느껴졌다. 학원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근무한 터라 한국의 교육 환경

에 대해 잘 알고 걱정스러운 시선을 갖고있던 그녀는 자신이 자라난 캐나다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어했다. 친정이 있는 캐나다에서 작은딸을 낳은 후 그녀는 캐나다에서의 삶을 가

늠해 보기로 하였고, 부부가 떨어져 지내는 일년 동안 교사가 되는 대학 과정을 마친 후 초

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아내가 그 어린 것들을 데리고 참 억척스레 공부했어요.”

그 시절을 떠올리니 감회가 새로운지, 지나온 이야기를 쏟아내던 그가 잠시 이야기를 멈

추고 숨을 고른다.

이탈리아에선 유럽 배경의 음악을 해왔던 터라 캐나다로의 이민은 그동안 쌓아올린 경력

을 버려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큰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2005년, 그는 고민과 갈등 끝에 우선순위로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을 결정한 후 캐나다로

향했다. 처형 내외의 도움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그분들이 섬기던 영락교회에서 공석이었던

시온 성가대의 지휘를 맡으며 그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삶을 이어가기 시작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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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 이야기 - 찬양은 나의 숙명

3부 성가대원들에게 박 철 지휘자의 지휘 특징을 묻자 여러 사람이 ‘재밌다’는 대답을 해

주었다. 성가대원들의 반응을 들려주자 그 또한 자신의 지휘 스타일은 ‘재미’인 것 같다며

‘껄껄’웃는다.

“왜 재미있느냐? 이 모임은 주일 아침

에 주님을 찬양하는 아마추어들의 모임

이에요. 기쁨이 넘쳐야 해요. 기쁨이 넘

쳐 찬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모임이 성

가대거든요. 화를 낼 이유도 없고, 오면

항상 즐거워요.”

영적으로 충만한 것이야말로 아름다

운 성가대의 모습이라 말하는 그에게 찬

양이 주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오페라는 세상 음악이에요. 음악적

자존심이 세서 음악적으로 교만하고 하

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어요. 세상 음

악은 충실히 준비하면서 교회 음악은 대충 하는 시기도 있었지요. 캐나다에 와서 비즈니스

를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나의 자세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고, 하나님이 회개의 시간

을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내가 죽고 하나님이 드러날 때 진짜 아름다운 찬양이 만들어

져요.”

모든 대원이 찬양을 사모하고 갈급해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릴 때, 그 찬양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찬양이 된다고 말하는 그는 ‘오디션은 없다’며 찬양에 관심이 있고 등록한

지 6개월 이상된 교인은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다며 성가대 광고를 잊지 않는다.

그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들려준 추억의 찬양곡 ‘창문 두드리며 비가 오네’를 들으며

혼자 듣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혹시 달란트를 활용하여 찬양곡을 들려줄 계획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연말에 메시아 전곡을 성가대 연합공연으로 준비하려 합니다. 120~150명 규모의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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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이 될 거예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들도 초청하여 교민을 대상으로 한 공연을 준비

하려 해요.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3~4월에 단원을 모집, 5월경에는 연습을 시작하게 될텐

데, 그땐 저도 함께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에게 있어 찬양은 기쁨이자 숙명이다.

찬양을 듣지 못하거나 몸이 아파 교회에 출석하기 힘든 이들을 위한 찬양사역을 해결해

야 할 과제로 여기는 그가 하나님 안에서 그 길을 잘 모색하게 되길, 그리고 기쁨으로 준비

하고 드리는 임마누엘 성가대의 찬양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예배가 되며, 성도들에게

단비와 같은 은혜가 되길, 그리고 연말에 있을 연합 성가대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통해

예배당 가득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퍼지길 기대해 본다. †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 시편 100편 4,5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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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 (4/4)클라리넷에 실은 사랑조상두 지휘자의 음악과 신앙 (사진1-타이틀)

취재 | 조성진

조상두 목사가 지휘하는 모습은 매우 특이하다.

제스처가 큰 정도가 아니라 화끈하다.

열정적으로 두 팔을 벌려 지휘하는 그의 모습이 이채롭다.

마치 한 마리 학이 날갯짓하듯 지휘봉의 춤사위가 커다란 원무를 그린다.

음악에 몸을 실어 표현해내는 그는 연주자들 한명 한명과 눈길을 마주치며 호흡을 한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그의 몸짓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사진2)

농부의 아들, 리코더를 불다

조상두 지휘자는 전라북도 김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를 타고 놀며 전원생활

에 젖어있던 그가 어떻게 음악인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그의 외가는

월성 교회를 세울 정도로 신실한 신앙의 뿌리를 간직한 집이다. 그를 음악의 길로 빠져들게

한 처음의 사건은 아마 초등학교 때 누님이 바이올린을 사준 일이다. 그 바이올린으로 그는

미술학원 선생님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리고 리코더도 배웠다.

음악적 소질을 타고난 그는 초등학교 때 음악 시간에 풍금이 없으면 담임 선생님께서 그

에게 리코더를 연주하라고 시킬 정도로 연주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골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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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서 벌어지는 농악을 자주 구경할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그런지 장구 소리와 창 소리

에 유난히 귀가 틔었던 것 같다. 흥겨운 농악을 구경하면서 어린 소년의 무의식 속에는 음악

에 대한 동경이 싹트고 있었다. 당시 농악은 단순한 음악의 차원을 넘어서 시골 동네의 한

바탕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저잣거리에서 벌어지는 전통 민속 음악을 들으면서 어린 조상두

의 마음속에는 언젠가 음악인으로 우뚝 서는 설레는 상상이 싹트고 있었다.

클라리넷에 실은 사랑

농촌 소년 조상두는 김제고등학교 브라스 밴드에 들어

가서 클라리넷을 불었다. 당시 음악 선생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이 브라스 밴드 멤버들을 음악의 세계

로 끌고 들어가셨다고 한다. 그들이 전국 콩쿠르에서 우

승한 곡은 주페의 ‘시인과 농부’와 ‘경기병 서곡’이었

다. 깊은 영혼의 세계와 맞닿는 클래식을 청소년기에

접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한걸음 가까이 다가서는 것

과 같다. 심장이 뛰게 만드는 오케스트라의 한가운데

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조상두 학생의 얼굴에 환희

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음악의 호수에 침잠했을

때 나오는 평온함과 행복감이 그를 포함한 단원 모

두의 가슴에 벅차게 밀려들었다.

그는 대학교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했다. 캠퍼스에서 만난 아내는 플루트를

전공하는 여학생이었다. 클라리넷과 플루트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깊은 우물에서 두레

박을 길어올리는 듯한 클라리넷의 음색과, 향기로운 유채꽃밭을 거니는 청초한 여인을 느끼

게 하는 플루트의 상큼한 선율이 어우러져 영혼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방공호 바닥에 엎드려

그는 공군 군악대에서 연주 생활을 하던 중 전립선암 판정을 받았다. 한창 젊은 나이에 내

린 청천벽력같은 암 선고. 살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의학적인 소

견은 절망적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기도할 곳을 찾던 그는 새벽에 방공호에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방공호 흙바닥에

농촌 소년 조상두는 김제고등학교 브라스 밴드에 들어

가서 클라리넷을 불었다. 당시 음악 선생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이 브라스 밴드 멤버들을 음악의 세계

로 끌고 들어가셨다고 한다. 그들이 전국 콩쿠르에서 우

승한 곡은 주페의 ‘시인과 농부’와 ‘경기병 서곡’이었

다. 깊은 영혼의 세계와 맞닿는 클래식을 청소년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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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04: 2014-영락지 봄호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흙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을 부

르짖는 공군 병사 조상두.

그의 두 뺨을 타고 하염없

이 눈물이 흘렀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그는 눈

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매달

렸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

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순수한 기도일 것이다. 모든 걸 내려

놓아야 하는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 피를 토하듯 부르짖는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셨다. 새벽 미명에 죽을

힘을 다해 기도하는 그의 입에서 뜻 모를 “골골골”이라는 방언이 터져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히브리어로 “맡겨라”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하나님께 맡겨라”. 이 소리는 그의 신앙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그

날 밤 그는 군악대장의 도움으로 미 공군 항공의료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기적적으

로 살아났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그에게 임하셨던 것이다.

여호와 라파

그는 대학 졸업 후 음악의 본고장 폴란드 쇼

팽 음악원으로 유학을 갔다. 클래식의 고향 유

럽에서 음악의 심원으로 천착해 들어간 그는

늘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음악은 하

나님과 통하는 언어이기에 그의 클라리넷 소

리는 단순히 목관악기를 통해 나오는 떨림판

의 울림에 그치지 않았다. 떨리는 선율이 공기

의 파장을 타고 퍼져나가면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영혼의 공명(共鳴)이 그의 내면을 흔들

어 깨웠다.

음악은 그에게 영혼의 세계를 여는 창문과

군악대 야외 연주 중에

클라리넷과 음악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준

폴란드 쇼팽 음악원의 폭스빈스키 교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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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05: 2014-영락지 봄호

같았다면, 기도는 하나님과 교

통하는 통로와 같았다. 유학생

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강남

에 오케스트라 아카데미 학원

을 운영하며 프라임 오케스트

라 단원으로 클라리넷 연주자

로서의 생활을 했다. 그런 그에

게 하나님께서는 수시로 그와

가족에게 병마와 싸우는 고통

을 허락하셨다.

예술의 전당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에게 삐삐가 다급하게

울렸다. 아내는 아이가 선천성원형탈골로 큰 수술을 해야 한다는 병원 측의 진단을 알려주

었다. 기가 막힌 이야기였다. 어린아이에게 철심을 박아 뼈를 이어야만 하는 매우 위험한 수

술을 해야만 한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정릉교회 위 삼각산에 올라가서 기도했다.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을 찾는 그의 신앙.

보통 사람들 같으면 좌절하고 원망하고 싶은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께 낱낱이 아뢰고 부

르짖었다. “하나님. 이 아이를...” 그에게 다가와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어린 자식의 수술날

짜를 받아놓고 불안에 떠는 그의 가족에게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다. 아이의 뼈가 저절로

붙은 것이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

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

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

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말라기 4:2)

자연으로 돌아가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그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신학대학교 대학

원에 들어갔다. 3년간 어려운 신학 공부를 마친 그는 신도봉 교회 부목사 생활을 하던 중,

합창발성의 거장 샬로미노비치(좌) 그리고

오라토리오 지도 교수 미야끼(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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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이민 목회의 꿈을 안고 캐나다에 건너왔다.

이민 온 지 1년 조금 넘어섰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을 주셨다. 그는 대장에

악성종양이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앞이 깜깜한 상황에서 그는 또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계곡에 가서 기도하면서 그는 자연히 자연 속으로 들어

갔다. 그는 문제가 생겼을 때 골방 기도뿐만 아니라 방공호, 산이나 계곡과 같은 자연 속에

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간절하게 찾는 자녀의 소리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계신다는 걸 깨달

았다. 병 고침을 주셔도 하나님의 뜻이고 안 주셔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걸 사람들은 뒤늦게

깨닫는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이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또다시 의사들이 기적

이라고 인정할 정도로 기적적인 병 고침의 은혜를 받았다. 그가 말하는 “맨주먹, 붉은 피”는

척박한 이민의 삶에서 한인들이 겪는 외로움과 절박함을 잘 표현했다.

자연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특별하다. 그는 캐나다의 들과 산에 조그마한 땅을 빌려 양

봉과 허브 농장과 유기농 채소를 키우며 살고 있다. 그는 자연 속에서 꿀벌과 채소를 보살

피면서 클라리넷을 연주한다. 그러면 꿀벌과 채소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물 모자를 쓰고 꿀벌들을 보살피는 그를 보면 영락없는 농사꾼 모습이다.

각종 채소와 달걀을 키워내는 그에게서 자연의 싱그러움과 향기가 느껴진다.

시온 성가대를 지휘하며

지난 세월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체험하며 그가 느낀 것은 인생길에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깨달음이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그 권능의 손으로 우리의 삶을 터치하고

만져주신다는 걸 직접 체험으로 깨달았기에 이제 그의 삶은 기도이고 호흡이자 찬양이 되

었다. 그에게 찬양 드리는 일은 곧 살아 있다는 것이다.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로 경

배드릴 수 있었던 다윗의 신앙이 그의 삶에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늘 감사이고 행복이다.

그가 영락교회 시온 성가대를 맡게 된 지도 벌써 넉 달째로 접어들었다.

그는 수요예배에 찬양으로 헌신하는 대원들을 보면서 감동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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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찬양드리기 위해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교회로 달려 나

와, 삶으로 드리는 대원들의 찬양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고 그들의 삶의 터전과 가정에 마

음껏 축복하시리라.

모차르트의 ‘레퀴엠(Requiem)’을 좋아하는 조상두 지휘자.

그는 “삶 속에 녹아 있는 찬양과 함께하는 것이 기쁨이고 행복”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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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뼈를 묻은 사랑 (타이틀 사진)Vision fellowship 선교관 여행

글 | 조성진

선교관의 아침이 밝다

찬 바람이 살을 에는 주말 토요일 이른 아침 눈을 뜨기가 무섭게 나들이 채비를 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오늘은 비전펠로우쉽 선교관 트립을 가는 날이다. 여느 소풍처럼 김밥도 음

료수도 없는 그냥 구경 그 자체를 하러 가는 여행이다. 어찌 보면 참 재미없는 여행처럼 보

이기도 하지만, 이 소풍은 기독교 선교의 발자취를 더듬어 올라가는 매우 역사적인 나들이

인 셈이다. 애당초 비전펠로우쉽 선교관이 워털루에 있는 것으로 착각했을 때는 그곳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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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메노나이트들이 19세기식 삶을

고집하고 사는 메노나이트 마을도

둘러볼 참이었는데, 선교관이 매우

가까운 험버컬리지 레이크쇼어 캠

퍼스 부근의 서머나 교회에 붙어있

다는 것을 알았을 땐 못내 아쉬웠

다. 차를 타고 멀리 가는 여행의 맛

을 느끼기엔 선교관이 토론토 바로

옆 동네인 에토비코에 있어서 여행

가는 기분은 덜했지만, 선교관에 도착했을 때 우리 일행은 색다른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향기나는 미소에 취하다

선교관의 아침은 고드름에 비추인 아침 햇살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서머나 교회

에 도착한 일행은 교회 안에 들어가서 사무실 직원을 찾았지만 아무도 없어 자못 당황했다.

“아니, 미리 연락을 하고 시간 맞춰 왔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다니... 혹시 까마득히 잊어버

리고 집에서 쿨쿨 자고 있는 건 아니야?” 참을성 없는 성질은 여지없이 불평으로 튀어나왔

다. 전화도 하고 두리번거리며 교회 주변을 둘러보던 중 교회 옆으로 튀어나온 건물이 아무

래도 확인해야 할 것 같아 문을 두드렸다. 아까 살짝 노크했을 때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

긴가민가했는데 혹시나 하고 다시 한 번 노크를 해보았다. 이번에는 아주 세게 “쾅쾅쾅!” 소

리 나게 두드렸다.

누군가 계단을 급히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뾰족구두가 나무계단에 부딪히는 소

리로 봐서 여자인 것 같았다. “네에~~~” 하면서 뛰어 내려온 이미나 간사가 빼꼼히 문을 열

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침 햇살만큼 화사한 미소다. 화난 듯이 문을 쾅쾅 두드린 게 미안

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기도회를 하는 중이라 얼른 나오지 못해서 죄송해요. 어서 오세

요.”라며 처음 방문한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캐나다에 살면서 이렇듯 살가운 마

중을 받아보기도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 평상시 마주치는 친지와 이웃에게 우리는 얼마나

친절하고 선하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지 뒤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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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내지 않음에 반하다

나무계단을 올라가니 일단의 교인들이 아침 기도모임을 막 마친 상태였다는 걸 알아챘

다. 처음 보는 낯선 이방인인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은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의

신사분이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알 리가 없는 나는 악수를 청하면서 이름을 여쭈었다. ‘최

선수’라고 그랬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장로라고 누군가 귀띔해 주었다. 선교관과 무슨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는 추측만 했다. 과일과 과자를 들라고 건네주는 마음씨 좋은 장로님

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출입구 한쪽 귀퉁이에 놓인 ‘선교는 나에게 축복이었다’는 제목의 책이 눈에 들어

왔다. 집어 들고 훑어보니 최선수 장로는 치과대학을 나온 의학박사로 부귀영화를 누릴 나

이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중국과 북한을 품고 북방선교에 헌신해 온 분이었다. 그리고 그분

이 우리가 오늘 찾은 ‘비전펠로우쉽 선교관’이 있게 한 중추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라는 것

도 알았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쉽게 판단했던 것이 참으로 죄송스러워졌다. 책을 낼 정

도로 귀한 사역에 헌신하신 분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숨어서 하나님

을 섬기는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겠구나 하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다.

선교사의 삶에 눈물이 나다

오전 9시 반이 되니까 영락교회 성경암송반 팀이 단체로 교회 버스를

타고 선교관에 도착했다. 토요 성경암송반을 마치고 내친김에 모두 함

께 이곳에 온 그들의 마음이 대견해 보였다. 그들과 함께 지하에 마련된

선교관으로 안내되었다. 이지나 간사가 섹션마다 선교사 개인과 기독교

역사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구한말부터 한국에 복음을 전하고자 모든 삶을 송두리째 바친 캐나

다 출신 182명의 선교사 중 1888년부터 1945년까지 56명의 초기 선교사들

의 삶과 신앙, 헌신의 발자취를 조망할 수 있는 비전펠로우쉽 선교관에서 과거로의 시간여

행이 시작되었다.

황해도 소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외롭게 세상을 떠난 매켄지 선교사의 후임으로 내한

했던 로버트 그리어슨에서부터 시작된 비전트립은 토마스 하디 선교사 앞에서 한동안 발걸

음을 멈추게 했다. 평양 대부흥운동이 있기 전에 원산 대부흥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에 눈길

을 뗄 수가 없었다.

도로 귀한 사역에 헌신하신 분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숨어서 하나님

을 섬기는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겠구나 하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다.

다 출신 182명의 선교사 중 1888년부터 1945년까지 56명의 초기 선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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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대학교 의대 출신으

로 25세의 나이에 한국에 와

헌신한 하디의 이야기는 한

국의 평양 대부흥운동의

불씨가 된 선교사다. 평양

대부흥운동이 있기 4년

전인 1803년 8월 30일 성령 충만한 하디가 원산

감리교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적 허물과 교만, 특히 백인으로서 가졌던 우월

감에 대해 고백하며 용서를 빈 하디의 철저한 회개는 원산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결국은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제임스 게일 선교사도 토론토대학교 의대를 졸업하

고 25세의 나이에 100에이커나 되는 아름다운 농장을

뒤로 두고 낙후되고 빈곤한 한국 땅에 와서 성경번역과

영한사전을 편찬했을 뿐만 아니라 천로역정은 물론 심

청전 등 한국 고전문학을 번역해 해외에 소개했다고 한

다. 한국말을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으면 그런 일까지 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닥터 홀의 가정은 2대에 걸쳐 네 명의 의사들이 72년간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 한국의 의

학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한다.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선교사인 셔우드 홀과 그

의 아내인 메리안 홀은 최선수 선교사가 1991년 밴쿠버의 어느 병원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

들이 소천하기 전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한국의 최 선교사를 만나 손을 잡고

얼마나 기뻐 했는지 상상이 갔다.

낯선 조선 땅을 위해 갓 쓰고 한복 저고리

를 입은 벽안의 내한 캐나다 선교사들은 우

리나라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독립유

공자, 의료선교사, 복음선교사, 목회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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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교육선교사 등으로 다양한 기능

을 수행하며 기독교 복음을 널리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

당시 땅끝인 극동 아시아에서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청춘을 아낌없이 불사른 그들

의 숭고한 신앙에 머리가 숙여진다.

진정한 제자도를 생각하다

구한말 내한 캐나다 선교사들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인간적

인 명예와 부를 내려놓고 은둔의 나라, 피폐한 조선 땅에 건너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꼬

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헌신할 수 있었던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해

진다. 우리도 그들처럼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위해 인생을 내어줄 수 있을까? 과연 진정한

제자도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게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나의 모든 죄와 아집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이 지신 십자

가를 짊어지고 가는 참된 제자의 길은 멀기만 해 보이는데,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은 언제 가

능할지...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순교를 당하는 선교사들이 많다는데 나는 무얼 할 수

있을지 깊이 성찰해 본다. 플로렌스 머레이 선교사가 은퇴할 때 했다는 “내 목숨이 사는 날

까지 제 2의 조국 한국과 백성을 위해 기도하겠다.”라는 말이 귓가에 맴돈다.

우리도 이처럼 살았으면

무서운 순교를 달게 받아들인 초기 기독교인들이나 평생을 조선 땅에 바친 구한말 내한

선교사들처럼 살기는 힘들다 하더라도 적어도 선교사들의 숭고한 뜻은 배우려고 노력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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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는 생각이 든다.

은퇴 후 제2의 삶을 평생 선교와 선교관 일에 매진하고 있는 최선수 선교사와 이지나 간

사. 그리고 그 옛날 캐나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가서 복음을 전했듯이, 이제는 한국에서 캐

나다에 와서 내한 캐나다 선교사들의 발자취와 신앙을 정리하고 널리 알리는데 헌신하고

있는 비전펠로우쉽 선교관의 아름다운 마음을 본받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

선교관을 방문한 성경암송반과 영락지 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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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용덕 목사

(예배/교육)성경 이야기 5부작 제3편그 시대에 성경은 어떻게 전수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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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15: 2014-영락지 봄호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

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

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

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

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

니 곧 내가 나의 법을(말씀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말씀을) 기록하여 나

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1-

33)

이 말은 하나님이 그렇게 강조하셨던 말

씀의 기록을 이제 백성들의 마음 판에 새겨

서 그들이 진정으로 그 말씀을 따르게 되

어 내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새

언약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드디어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요10:14-16)

성령께서 오신 이후에 구체적으로 신자들

의 마음 속에서 응답된 것입니다(요14:26;

16:13). 즉, 임마누엘의 하나님되신 주님이

이제 성령으로 신자들의 마음에 거하시면

서(고전3:16) 구약과 신약을 통해 주신 말씀

들을 깨닫게 하시고 떠오르게 하시고 그 말

씀으로 영혼들을 회복하고 살게 하신다는

것(히4:12)입니다. 결국 이 약속은 이제 기

록된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거하시는 말씀

으로(요1:14) 바뀌었다는 의미로 이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의 역사도 우연히 혹

은 갑자기 된 것은 아닙니다. 롬10:14절에서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

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

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말씀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멀리 바벨론 땅으로 포로로 보내셨지만 그

땅에서 회당이라는 곳에 모여서 잊어버렸

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게 하셨고 심

지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즈음에는 오

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문자적 의

미에 지나치게 몰입할 정도로(마23:23) 분

위기가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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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에 이러한 회당제도는 사도 바울의 선

교의 거점이 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 교회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으며 나아

가 수도원이나 학교의 모델이 되기도 한 것

입니다.

정리하면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역사를 통하여 기록된 말씀이 성령을 통하

여 각각의 신자들에게 체득화(말씀의 내면

화) 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준비하셨고 이

를 통하여 신자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구현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록된 성경의 전수

그러면 이러한 놀라운 일을 가능케 한 가

장 기초적인 요소로써 ‘기록된 하나님의 말

씀’은 과연 어떻게 다음 세대들에게 전수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즉 이

말은 앞장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시대에 말씀을 기록하셨는가를 다루었

다면(성경의 원본 문제), 이제는 그 기록된

말씀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전할 수 있도

록 하셨는가 하는 문제(성경의 사본과 전수)

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몇가

지 사항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문제임을

알게 됩니다.

첫째, 우리는 더 이상 다음 세대에게 전

할 그 어떤 성경의 원본도(기록된 말씀의 원

본)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

른 말로 하면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성경의 내용들은 하나님이 원래 계시해 주

셨던 원본을 누군가가 다음 세대의 사람들

에게나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필사한(손으로 베껴 쓴) 사본을 다양

한 언어로 번역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래서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사실인

데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번역 성경에는 비록 구원과 신

앙의 교훈에 관해서 문제가 없지만 그럼에

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한 편으로, 우

리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번역본

이나 사본이 다른 것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좋다고 말할 수도 없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

서 계속해서 새로운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번역본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소위 ‘말씀보존학

회’에서 말하는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

의 유일한 말씀이라는 생각을 배척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을 바

로 알고 찾으며 알리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

리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최초 사본 파피루스(약 125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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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구약성경은 대략 BC 1,500년부터

BC 400년까지 1,100년의 기간 동안 기록되

어져서 모아진 책이고 신약성경은 AD 50-

100년 사이에 기록되어져서 모아진 책입니

다. 그래서 전체로 보면 성경은 대략 1,600년

이라는 매우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지역에서

여러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어졌고 현재까지

그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되기까지는 길게는

3,500년에서 짧게는 거의 2천년의 시간이

지나왔기 때문에 어떻게 우리가 현재 가진

성경이 원본에 가까운 성경인가 혹은 내가

읽고 있는 이 본문이 과연 그 시대에 하나

님이 주신 그 말씀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혹시 누군가가 그 긴

시간 동안 원본을 고치거나 자기의 입맛대

로 수정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

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해 주는 학문이 바로 ‘사본학’(Codicology)

입니다. 그리고 특히 수 많은 사본들 가운

데 보다 원본에 가깝고 오류가 없는 것을

밝혀내는 학문이 바로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입니다.

여기서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이라

는 것은 단순히 사본들을 비교하는 것도 아

니고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각조각 쪼

개는 성경에 대한 모독 행위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상 우리말 번역의 본문비평

이라는 말보다 오히려 ‘사본비평’이라는 말

이 정확한데 왜냐하면 본문비평은 여러 사

본을 비교하여 가장 ‘적절한 본문 읽기’를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본문비평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본문 읽

기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

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비록 사본과 번역본들에 어떤 인간적인 오

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

본학, 고고학, 고문서학등의 눈부신 발전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최대한 그 시대에 하나

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셨던 ‘그 말

씀’을 거의 신뢰할 만큼의 수준에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수 천

년의 시간의 흐름과 지리적,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재 가지고 읽

은 성경 말씀은 그 말씀이 처음 기록되었던

그것과 그렇게 큰 오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반과학에서 사용하는 고서

검증법(Bibliographical Test)에 따라서 성

경의 신뢰도를 검사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서 ‘고서 검증법’이란 현재 갖고 있는 사본

들끼리 서로 비교하여 보아 원본과의 정확

성 정도를 알아보는 방법인데 이 방법에 따

르면 사본의 수가 많을 수록, 사본이 원본

으로부터 만들어진 시간적인 차이가 적을

수록, 또한 사본과 사본 사이에 오류가 적

을 수록 그 사본이 원본과 가까운 사본이라

는 결론을 얻게 되는 방법입니다. 즉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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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18: 2014-영락지 봄호

방법에 의하면 신약성경 사본들 같은 경우

는 전체 사본의 숫자는 약 5,500개, 원본과

의 사본의 시간적 차이는 최소 25년, 사본간

의 오류의 차이는 겨우 0.5%로 성경은 인류

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고서들보다 신뢰도

에 있어서 원본에 가깝다는 결론을 얻게 된

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성경은 그토록 오랜 시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경을 전문적으로 필사하는 작업

을 시켜 오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 말은 신

약 성경과 달리 구약성경을 필사하던 사람

들은 처음부터 훨씬 더 전문적으로 사본을

만드는 전문적인 서기관들이 존재해 왔고

그들의 엄격한 훈련과 규율으로 인해 성경

을 필사하는데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

고 인간적인 실수를 최소화 해 왔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예는 바로 그 유명한

1947년부터 1956년까지 사해 서편의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에 대한 이야기

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해사본은(대략 주전3세기에

서 주후1세기 사이에 기록된 내용들) 그동

안 우리가 갖고 있던 맛소라 사본에(7-10세

기경) 의한 구약성경보다 무려 1,000년 정도

앞선 본문으로 그곳에서 발굴된 히브리어

사본의 내용들이 1,000년 후의 맛소라 사본

과 비교할 때도 작은 오차를 제외하고는 거

의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다시 말하면 1,000년의 차

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본의 내용이 95%이

상 일치를 하고 있다면 그 이전의 구약성경

의 내용과도 거의 틀림이 없을 것임을 추측

케 해 준다는 것입니다.

구약 AleppoCodex 맛소라 사본 (약 950년경)

사해사본 기원전 120년쯤 쿰란동굴에서 발견(구약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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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외에도 수 많은 사본들(바티칸,

시나이 사본 등등) 뿐 아니라 고대의 성경

번역본들(70인역, 사마리아역, 시리아역, 불

가타역 등등), 그리고 성경본문을 담고 있던

성구집들까지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고 읽고 있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

씀이 거짓이 없이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전

달되어 왔음을 알려주는 증거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성경이 사실임을

믿을 수 있는 가장 큰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지 종이에 기록된 글자만이 아니

라 그 말씀을 읽고 믿고 삶에 실천했던 수

많은 믿음의 선조들입니다. 기독교의 역사

는 순교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 누구도 거짓

말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지 않습니

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모든 과정에는 말씀

을 함께 전해주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버렸

던 수 많은 순교자들과 선교사들이 있었습

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처음 전

해주었던 그 믿음을 지금도 동일한 내용으

로 우리의 자녀들과 다른 사람들

에게 전하고 있고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

다. 사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

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각 세

대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 가르쳐 주시고 전해주고 계시며 심지

어 말씀의 순수성과 확실성이 훼손되지 않

도록 지켜 주십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과연

하나님의기록된 그 말씀이 어떻게 우리들

에게 전해졌고 전해질 것인가?) 여타 과학

이 발전하면서 더더욱 밝히 드러나고 있는

사실일 뿐 아니라 언제나 우리에게 믿음과

순종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

시내사본(신약 전권 포함)

티쉔도르프가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 발견(4세기경)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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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축복이글 | 서민정

“축복아, 축복아!”

할아버지의 다급한 외침에도 불구

하고 어린 새는 열린 현관문을 틈타 바

깥으로 순식간에 날아갔다. 식구들이

서둘러 뒤를 쫓았지만 눈앞에 들어온

건 앞을 가리는 눈 부신 햇살 뿐, 빛

을 좋아하는 녀석은 눈에 들어온 세

상이 마치 신천지인양 그만 유혹

에 이끌리고 말았던 것이다. 녀석

을 데리고 날마다 외출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방향으로 찾아 나서야 할지 난감하

기만 한데 동네를 오가는 바람은 낙엽만 무심히 쓸고 다닌다.

축복이가 바깥세상을 처음 본 건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 안겨 가게로 출퇴근하기 시작

한 생후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솜털조차 나지 않아 피부 속이 투명하게 비칠 듯한 작고 여

린 몸, 밖으로 크게 불거진 두 눈이 몹시 애처로웠다. 그날은 아기 새의 첫 출근 날. 할머니

가 만들어 준 조그만 요람에 담겨 이후에도 계속 그렇게 출퇴근을 했다. 요람 속엔 담요와

조그만 전기 매트도 깔려 있다. 담요를 목까지 덮어주면 그곳이 엄마 품속인 양 잠을 자고,

“자, 밥 먹을 시간이다. 일어나야지.” 하며 주사기에 넣은 먹이를 가까이하면 목을 쭉 내밀

며 입을 크게 벌려 씩씩하게 받아먹던 녀석.

봄기운이 도는 어느 아침, 아기 새는 엄마의 품속에서 부화된 네 마리의 형제들 중 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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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혼자 살아남은 녀석이다. 혈통이 ‘핀치’인 엄마 새는 여러 차례의 부화와 양육의 실패

를 겪은 뒤 간신이 이 아기 새 한 마리를 얻은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간절한 기도와 보

살핌 속에서 태어난 아기 새에게 온 가족은 기뻐 축복하면서 이름을 ‘축복이’라고 지어주

었다. 엄마 아빠 새의 이름은 ‘해피’와 ‘죠이’. 그런데 해피와 죠이는 알을 낳아 부화한 이후

제 아기를 보살피는 일은 미숙했다. 축복이가 태어난 지 이틀째 날, 할머니 할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땐 아기 새 네 마리가 모두 둥지 밖으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중 축복이만 간신이 숨을 쉬고 있었고,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출퇴근 길은 이렇게 해서 시작

되었다.

생후 일주일이 되니 축복이는 작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열 하루째에는 깃털이 나기 시작하고 바로 그 다음 날에는 눈도 조금 뜨는가 싶더니, 또

다음 날에는 여느 새들과 같이 머리를 날개 쪽으로 묻고 자는 것이 아닌가. 이제 안심을 해

도 되려나. 축복이가 성장의 과정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보여드리면서 나날이 튼튼해져

갔다. 세상의 어떤 것이 이보다 더 신비하고 감동적일까? 축복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할

까?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유식은 물론 샐러드도 무공해로 직접 재배해 먹였다. 모이를 물

에서 싹을 틔워 자라게 해 아침마다 그 잎을 잘라 먹이는 것이다. 비타민을 많이 먹여서일까

재잘대는 목소리도 점점 또렷해져갔다. 오후엔 가게 밖으로 데리고 나가 면역성을 키우기

위한 일광욕도 잊지 않고, 밤에는 행여 무슨 일이 일어날까 노심초사 할머니 할아버지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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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뉘여 잠을 재웠다.

사자소학(四字小學)에는, 夏則扇枕(하즉선침) 하고 冬則溫被(동즉온피) 하라 했다. 즉,

축복이가 할 수만 있다면 이 다음에 이런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여름에는 베갯머리에 부채

질해드리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입혀드리라고 일러 줄 일이다.

동네의 은행나무들이 가지마다 열매를 옹골차게 키워갈 무렵 축복이도 어느덧 청년이

되었다. 덩치도 제법 자라 할아버지의 엄지손가락과 비견하고 빛깔은 영락없는 색동저고리

를 입혀놓은 듯, 목소리도 그간 제 아비의 발성법을 잘 배워 자신의 독특한 소리로 재잘댄

다. 이젠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집에 남아서 제 부모와 몇 달 후 태

어난 동생들과 하루를 잘 보내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퇴근해 집에 들어오면 반가워 어쩔

줄 몰라 깡충깡충 내리뛰며 춤을 추는 녀석은 오직 축복이 이다. 녀석의 귀여운 탭댄스를

동영상으로 담아두는 건 필수, 성장 과정을 앨범과 육아 일기로 모두 기록해 나갔다. 새장

문을 열어주면 할아버지 할머니 어깨로 날아와 떨어질 줄 모르고, “뽀뽀.”라고 말하면 얼른

입으로 다가와 제 부리를 들이댔다. 찬송을 즐겨하며 고개를 까닥이던 녀석. 오호, 눈에 넣

어도 아프지 않을 녀석.

녀석을 찾으러 온 가족이 투입되어 현관에서 가까운 쪽부터 뒤뜰, 옆집으로 이어지는 나

무들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살펴나간다. 행여 바닥에 내려앉아 있을까 발걸음도 조심하지않

을 수 없다. 한번도 멀리 날아 본 적이 없었던 점을 고려해 가까운 곳을 꼼꼼히 살피건만 축

복이는 기어이 보이지 않는다. 부득이 할아버지가 큰 도로를 건너 공원으로 들어선다. “축

복아, 축복아~.” 커다란 나무 위를 살피며 애타게 불러도 응답이 없다. 길 건너에선 드디어

할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축복아 ~.”

핀치새의 지저귀는 소리는 실제로 모깃소리만 한데다,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에 축복이가

응답한다 해도 들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혜를 구한 할아버지가 다시 시도한다. 자동차가

지나가지 않는 틈을 타 녀석을 부름과 동시 귀를 모으고 눈은 커다란 나무 위를 살피고 있

다. 바람이 공원을 훑고 지날 때마다 녀석을 이대로 영영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감은 커져만 간다. 한순간의 부주의로 녀석을 잃게 한 가족이 원망스럽고, 나뭇잎 사이로 보

이는 저 파란 하늘이 이리도 서러울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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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23: 2014-영락지 봄호

“오, 주여! 저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가 들리시나요? 저의 기도를 들어 주소

서! 잃어버린 우리 축복이를 찾아주소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들으셨던 주님,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기도를 들으셨던 주님,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기도를 들으셨던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들어 주소서!”

다시 주변이 고요한 틈을 타 녀석을 부르기 시작한다. ‘축복아.’라고 부르고 응답을 듣기

위한 몇 초간의 시간을 주기를 반복, 그렇게 긴장감은 흐르고 다음 나무 밑으로 발을 옮기

려 하는 순간, 어디서인가 축복이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재빨리 나무 위를 다시 살피지만

녀석의 모습이 쉽게 띌 리 없다. 환청일까, 나뭇잎이 바람에 움직여주길 기다리며 또 불러본

다. 믿기지 않는 녀석의 소리가 다시금 머리 위에서 또렷이 들려온다. 눈을 고정하고 위를 가

만히 올려다 보니 녀석이 그곳에서 겁에 질려있지 아니한가. “축복아, 나야, 할아버지. 자, 여

기로 내려앉아! 어서!” 할아버지가 녀석을 향해 집게손가락 하나를 길게 뻗어주니 축복이가

아래로 단번에 내려 와 앉는다. 그리곤 여느 때와 같이 할아버지의 셔츠 속으로 파고드는

데 녀석의 심장도 터질 듯 팔딱이고 있다. “돌아왔구나, 네가 정말로 돌아왔구나! 어서 집으

로 가자.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눅15:11-32>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

고 신을 신겨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 듯, 우리도 잔치

를 하자.”

코스모스 너울너울 춤추는 길을 따

라 집으로 돌아간다. 녀석은 생각하고 있

을까? 광활한 대지, 먼 거리에서도 서로

를 알아볼 수 있었던, 오직 성령으로만이<슥

4:6> 이루어진 이 꿈같은 은총에 대해 ….

할아버지의 따스한 품에 녀석이 얼굴을 깊이

묻고 있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내 주인을 떠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듯. †

<이 글은 영락교회 김경덕 & 이효순 님 댁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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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대동강은 흐른다

글 | 김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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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 그것은 가족의 생이별과 비극의 대명사가 아닐까?

지난 달에는 4박 5일의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해서 평양에서 숙박을 했다.

평양은 내 어머니의 어린 시절 고향

이다. 어머니가 국민학교를 다니셨던

모란봉 올라가는 동네 언저리도 가보

았고, 을밀대도 올라가 보았다. 어머니

가 수영을 즐기기도 하고, 빠져 죽을 뻔

도 했었다는 대동강도 숙소에서 멀지

가 않아서, 아침 식사 후에는 짬을 내서

세 번이나 산책할 수가 있었다.

전쟁 중에 피난길로 이용하셨던, 그

러나 그 당시에는 끊겨져 있었기에 다

리 위로는 건너지 못하셨다는, 그 대동강 다리도 걸어서 왕복했다.

어머니를 대신해

서 이렇게 어렵고 먼

길을 어머니가 고향

을 떠난지 62년이 훌

쩍 지나버린 지금에라

도 찾아오면, 막연하

게나마 어머니를 알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턱도 없는 감상에 젖

어보기도 했다.

대동강 언덕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임신 7개월의 스무 살 새댁

이 무거운 몸으로, 일부 가족은 남겨둔 채 고향을 떠나야 하는 불안감과 공포에 싸였던 마

음이 어떠했을지 나는 알겠건만 저 강은 전혀 모르는 듯 그때처럼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무거운 몸으로 강을 건너서 오시는 스무 살의 어머니를 만날수 있기라도 하려는 듯한 착

1940년 9월 평양 능라도에서 바라본 대동강을

하반영 화백이 촬영한 사진으로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

경의선 철교, 황포 돛배 등이 보인다. ⓒ 하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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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26: 2014-영락지 봄호

각과 그 뱃속에 있던 나를 만날수 있을 듯한 착

각이 들면서, 지나간 62년의 어머니의 잃어버린

세월은, 잃어버린 가족과 고향은 누구에게 부탁

하면 돌려드릴 수가 있는 것일까 ?

그 강 언덕에서 이렇듯 덧없는 질문을 나 혼

자서 해보았다.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찾아온

어머니 고향에서 조차도 아무런 대답을 찾을

수가 없음이 너무 애통하다는 생각으로 눈앞이

뿌옇게 되면서, 흐르는 대동강 물 위로 스무 살

의 모습은 간 곳 없고 이제는 팔순을 넘긴 할머

니가 되어서 야위어 가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물에 젖은 사진이 되어 지나간다.

그때도 끊어진 대동강 다리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삼키기도하고, 또 살얼음을

잘 못 내디뎌서 빠지는 사람들을 아무런 주저함 없이 받아들이던 저 대동강은, 62년 전에 이

곳을 떠나야만 했던 어머니만큼 처절한 마음으로 내가 찾아온 것도 모르고 무심하게 흘러

만 가고 있다.

이렇게 나도 다시 떠나가버리면, 어머니의 고향은 언제, 누가 찾아드릴 것인가?

어머니를 대신해서 회한에 젖어봄이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은 아닐는지?

나는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던

그러나 어머니가 너무나도 그리워하시는,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을 줄 몰랐던 그곳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줄 몰랐던 할머니, 할아버지,

여섯 명의 동생들, 고모들, 이모들, 시부모님, 시누이들 그리고 스물세 살이던 남편,

나 또한 사무치게 그리워, 그리워서 찾아와서는,

진종일 대동강 언덕길만 헤매다가 가네.

그렇게 헤매기만 하다가……… 가네.

스무 살 어머니만 그 강 언덕에 외로이 남겨둔 채 떠나려니 절통하건만,

대동강은 흐른다. †

1951년 끊어진 대동강 다리를 건너는 피난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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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2014년 제1차 유년부 자체 교사교육을 마치면서…글 | 정영애

이번 교사교육을 통해

다시 한 번 복음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나는 어떠한 교사였나? 그 동안 교사를 오랫

동안 하다보니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것 같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믿음으로 나가기보다 내 경험

과 내 능력을 믿고 교사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 교사 교육을 통해 나의 문제점들을 하나 둘 씩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단호한

결단과 결심 없이는 이 교사 교육이 일상적 이론교육으로 끝날 것 같아 지금 간절한 마음

으로 기도하며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우리 유년부(예루살렘)에서 부터 온 교

회(유다)와 이웃(사마리아)들과 열방(땅끝까지)으로 퍼져 나가서 하나님의 증인된 삶을 살

아가는 나와 우리모든 교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2-3주 동안 체험한 것을 나누려고 합니다. 얼마전부터 나의 마음에 거룩한 부담과

갈등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젊은 선생님들이 있는데 아이들과 젊은 선생님들을 위해

서 이제는 내려와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때문에 고민 하던 중 어느 은퇴 장로님 부부의 모

습을 통해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많은 직분자들이 잘 섬기시다가 은퇴를 하시면 동시에 섬

김도 그만두시는 것 같은데 이 부부(장로님, 권사님)께선 겸손히 묵묵히 그 사역을 도우시

고 섬기시며, 손수 일거리를 찾아하시는 모습이 어찌 그리 아름답고 존경스런지요.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선 두 분의 모습을 통해 나를 바라보게 하시더군요. 그렇다면 난 얼마나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갖고 있었나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내 생각과 내 판단을

갖고 결정하려 했던 일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하며 이제는 겸손히 주님이 부르신 자리

에서 더욱 겸손히 섬기면서 주님 주신 믿음으로 충성할 것을 다짐합니다.

끝으로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

로 나를 혼자두지 아니하심이라.” 이 말씀으로 우리 교사들을 위해 헌신과 봉사로 수고하

신 이상혁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

Page 128: 2014-영락지 봄호

(신앙생활)제목: One Million Miles

글 | 임종환

2013년 4월 25일 오후, 알라바마 주의 버밍햄에서 몽

고메리를 향해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드디어 백마 37

호가 주행거리 백만 마일을 기록했다. 하이웨이를 달리

고 달려서 백만 마일(160만 km), 적도기준으로 지구를

40바퀴나 돌고 온 셈이다. 몇 날 며칠을 달릴 수 있도록 하이웨이를 건설하고, 다리를 놓고,

도로변에서 유지보수에 수고하는 인부들을 볼 때 나는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신6:11)

근무시간 중에 뜨겁고 황량한

모하비 사막을 크루즈 놓고 달리면

서 호텔 캘리포니아를 목청껏 부를

수 있는 직업이 트럭 운전사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라스베가스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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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29: 2014-영락지 봄호

8년 넘게 북미대륙을 달리면서 동고동락을 같이 해온

백마 37호, 플로리다 주에 있는 Cape Canaveral의 케네

디 우주센터에서 Atlantis 호가 우주 정거장에 수리할

부품을 운송하고 그곳에서 일하던 엔지니어들을 싣고

귀환하는 임무를 띠고 출발했다. 발사대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바람을 가르며 한 점 불꽃으로 사라지는 광경

을 지켜보면서 느끼던 감동적인 순간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3분쯤 지났을까, 지표면으로부터 전달되어 오는

미세한 진동을 하반신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잠시 후에

발사대를 중심으로 버섯구름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겨울날, 폭설이 내리는 캐나디언 로키를 넘어가다가 밴프 국립공원 입구에서 트레

일러가 미끄러져 눈밭으로 변해 버린 경사진 도랑을 따라 수십 미터를 끌려 내려가면서 오

늘부로 트럭일을 접어야 하는가보다 걱정하며 초조하게 트럭이 멈추기만을 기다리던 그 때

에도 백마는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웨스트 버지니아 주, 섬머빌 근처 지방국도를 밤에

달리던 중 도로에 떨어진 견고한 장애물에 부딪혀 연료탱크가 터지면서 경찰과 소방차가

달려오고, 자정이 넘어서야 개인 정비소에 견인되어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던 그 밤에도 말

없이 함께 있어 주었다.

나는 운전을 좋아한다. 아리조나의 붉은 바위산과

곳곳에 서있는 지층의 잔해들, 그리고 모래사막 위에

선인장들이 우뚝우뚝 도열해 있는 도로를 재즈를 틀

어놓고 진한 커피향을 맡으면서 몇 시간이고 달려보

았는가?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로키산맥의 만년

설로부터 발원되는 콜로라도강의 상류에서부터 계곡

을 따라 내려가면서 쇼팽의 녹턴이나 베토벤의 월광을 들어 보았는가?

아팔라치아의 봄의 왈츠는 홍매화로부터 시작된다. 매화가 퇴장을 할 즈음이면 테네시의

산 굽이굽이마다 이미 거목이 되어있는 야생 라일락과 아카시아가 환상의 콤비를 이루면서

초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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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30: 2014-영락지 봄호

테네시 왈츠,

어디선가 낡은 레

코드 판에서 흘러

나오는 패티 페이

지의 목소리가 들

리는 듯하다.

오대호 주변의

가을은 글보다는

그림으로 표현하

는 것이 더욱 실

감이 난다. 망망대해처럼 드넓고 푸르른 물과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씻기운 호숫가의 모

래와 자갈은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절벽 위에서 황금빛 햇살을 머금고 팔랑거리는

자작나무의 노오란 잎새들, 작은 바위섬에 빽빽하게 들어선 침엽수림, 그리고 해질 무렵까

지 고요하게 떠있는 낚싯배는 한층 정겨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피곤할 때 나의 휴식

처가 되었고, 침실과 서

재이면서 나만의 기도실

이고 희로애락의 동반자

로서 이렇게 많은 행복

을 가져다준 백마였지만

못된 주인을 만나 신발

도 제때에 사주지 못했

다. 지난 겨울에는 배터리가 여러 차례나 방전이 되었는데도 한 번도 투정을 부리지 않고 마

치 링거를 맞고 회생하듯이 다른 트럭으로부터 충전을 받고 기운을 차려야만 했다. 또한, 장

시간 주차로 인해 배터리가 방전되는 것을 줄여보려고 밤마다 냉장고와 전기밥솥을 꺼놓고

잠을 자기도 했었다. 드디어 백만 마일 돌파를 축하하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우선 배터리 4

개를 모두 새것으로 바꿔 주었다.

자스퍼에서 바라본 로키

슈피리어호의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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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31: 2014-영락지 봄호

죽을 힘을 다해 졸음과 싸우

던 그 무수한 밤길도, 눈보라 휘

몰아치는 산자락에서 체인을 맬

줄 몰라 트럭 바퀴를 끌어안고

땀 흘리며 씨름하던 그 고통의

순간도 모두가 백만 마일을 달

려가는 과정에 있었던 것일까?

마치 푯대만을 향해 돌진하듯 10년 가까이 고독한 광야와도 같은 시간의 긴 터널을 지나

온 것 같다. 지치고 힘이 들 때마다 나를 위로해준 한 마디가 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1:9)

그래서 나는 외롭지

않다. 이제 얼마를 더

달려야 은퇴할지는 아

직 잘 모르겠지만, 비

내리는 밤도 눈 내리는

밤도 숙명처럼 달려야

만 하는 백마 37호를 더

욱 아끼고 사랑해야겠

다. †

노스다코타의 협곡(Painted Canyon)

위니펙의 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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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32: 2014-영락지 봄호

(신앙생활) (타이틀사진)국자에 사랑을 담다

밥 퍼주는 부엌에 사랑이 영글다

글 | 조성진

새벽 미명이 채 가시기도 전인 주일 아침 7시에 영락교회 부엌에는 쌀을 씻는 소리가 ‘서걱서

걱’ 들린다. 누가 이 시간에 쌀을 씻는지 너무 궁금하다. 아침 8시에 열리는 주일 1부 예배 참

석자들 외에는 대부분의 교인이 아직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 시간인데... 살며시 부

엌에 들어가 보았다. 인기척이 오는 줄 모르고 열심히 고무장갑을 낀 양손을 큰 쟁반에 담긴

차가운 물 속에 담그고 쌀을 씻는 손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손이 시리도

록 차가운 물에 손은 벌겋게 달아오르는데, 이마에 번지는 땀방울을 훔치며 쌀을 씻는 그 손

들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사진1)

쌀을 씻는 박순복 권사와 정미희 권사 130

Page 133: 2014-영락지 봄호

빨간 고무장갑에 서린 정성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쌀을 씻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 가족을 위해 쌀을 씻으셨다. 지금이야 잘 갖추어진 실내 부

엌에서 수돗물에 쌀을 씻었지만 몇십 년 전에는 차가운 우물물을 길어다가 부엌 부뚜막에

서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면 쌀을 씻으셨던 기억이 났다. 내 눈앞에 지금 빨간 고무장갑을

낀 권사님 두 분이 쌀을 씻고 있다. 이 시간에 쌀을 씻으러 오기 위해서는 적어도 새벽 5시

반에는 일어나야 한다. 가족의 아침 준비를 하고 이것저것 챙겨 교회로 달려오는 시간도 빠

듯함이 분명해 보였다. 여자라면 화장과 몸단장에 1시간을 걸려도 모자랄 텐데 그런 사치는

권사님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된 지 오래다.

박순복 권사와 정미희 권사는 부엌 반

장에 해당한다. 식권관리를 비롯해 부엌의

모든 일을 총괄하고 지휘하는 사령관 자리

에 앉은 이들은 가장 힘든 일을 먼저 솔선

수범해서 해야 한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

에 오를수록 편하게 지시와 감독만 하면 되

는데, 교회에서는 중직자 반열에 들을수록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이 많다. 새벽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손을 넣고 쌀을 씻는 일을 한 번도 아니고 매주

한다는 건 분명 ‘희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주일 아침 소중한 시간을 새벽부터 오

후 2시 넘어까지 부엌에서 전쟁을 치르는 봉사자들의 수장으로서 묵묵히 헌신하는 이들의

모습에 가슴이 찡해졌다. “어서 서둘러요. 오늘 밥 먹으러 오는 사람들 많을 것 같으니까…”

“밥과 국을 푸는 사람 팔이 너무 아프니까 남자 집사님 도움을 요청하자고요.” 쌀을 씻으며

주고받는 이들의 대화 속에 녹아든 사랑은 피곤함마저 씻어주고 있었다.

밥솥에 피는 사랑

9시 좀 넘은 시간 1부 예배가 끝나자 오늘의 부엌일을 담당할 남선교회와 여선교회 자원

봉사자분들이 부엌으로 몰려들었다. 주로 여자분들이 오고, 남자분들은 가물에 콩 나듯 부

엌봉사에 온다고 한다. 김범기 장로와 박순복 권사, 정미희 권사 그리고 자원봉사자분들이

식권을 정리하는 정미희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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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그렇게 모여 기도드리는 모습이 눈에 박혔다. 주일 평균 600여 명의 밥을 준비하는 부엌

봉사팀의 기도는 벌써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었다. 두 세 명이 모여 기도하는 곳에는 예수님

께서 함께하신다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혼자 기도하는 것도 아

름답지만 두 세 명이 모여서 기도

하는 모습은 아름다움이 훨씬 증

폭되는 것 같다.

600여 명을 먹이려면 40파운드

쌀 네 포대로 밥을 지어야 한다. 군대로 치면 연대급에 해당하는 인원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2부 예배가 끝나는 11시 15분 경이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

는데 그전까지 정신없이 밥을 하고 반찬과 국을 준비해야 한다. 밥이 익어가는 소리가 대형

스팀기계에서 지글지글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쪽에서는 미역국을 끓이고 있는데 국이 대

형 가마솥 바닥에 눌어붙지 않게 하려고 건장한 청년이 연신 물을 조금씩 넣어가며 기다란

국자를 휘젓고 있었다.

반찬을 준비하며

이이분 권사를 포함해 자원봉사 나온 여선교회 성도 분들이 모여 서서 반찬을 철판 식기

에 담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600여 개의 철판에 두 가지 반찬과 과일을 분배하는데 일손이

부족할 정도로 엄청나게 일감이

많았다. 대형 대야에 담긴 반찬을

보니 하루 전부터 준비하지 않으

면 감당하기 힘든 양이었다.

메뉴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장

을 보고 준비하는 손길은 주일

아침부터 전쟁을 치르는 부엌 현

장에서는 볼 수 없다. 눈에 보이

지 않는 정성이 얼마나 더 큰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행여나 음식에 머리카락이라도 들어갈세라, 모두 하얀 망사두건을 쓰고 옹기종기 모여 서

서 열심히 손을 놀린다. 말을 할 틈도 없다. 아니 말을 거의 하지 않아야 한다. 침이라도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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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튀기면 안 되겠기에… 배가 고픈 구경꾼은 반찬을 집어 먹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정신

없이 일하는 분들 옆으로 가서 어묵 반찬 하나를 슬그머니 집어 얼른 입속에 넣었다. 맛있는

내음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눈이 스르르 감겼다. 시

장이 반찬인지 혓바늘이 톡톡 터지는 것만 같았다.

어서 밥을 넣어 달라고 위가 요동을 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식판을 담은 랙이 주욱 늘어서 있다. 랙 하나에

반찬을 담은 식판이 40개 정도 들어가니까 15개의

랙을 준비해야 한다. 늘어선 랙을 보니 가히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병사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려고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보였다. 예수

님이 그랬지 않은가. 예수님께서 장정만 5천 명을 먹이기 위해 일으키신 오병이어의 기적, 그

리고 제자들을 위해 친히 생선을 구우신 예수님의 사랑이 길게 늘어선 식판 랙 위에 함께하

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밥 퍼주는 손

밥이 다 되었다. 스팀 기계 레버를 돌리고 문을 열자 하

얀 수증기가 “치이익~~~” 소리를 내며 피어올랐다. 마치

증기 기관차가 달려갈 때 내는 하얀 수증기 같았다. 뜨거

운 열기가 “후욱!”하고 콧구멍으로 밀려 들어왔다.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테만 있는 안경이

었기 망정이지 보통 안경이었으면 김이 서려 한 치 앞도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식판 위에 밥들이 알알이 정렬되어 빼곡하게 익은 모습이 너무 예뻤다. 그리고 구수한 밥

냄새가 코를 벌름거리게 하였다. 이렇게 밥냄새가 좋은지 몰랐다. 어릴 적 담임선생님을 따

라갔던 평화로운 시골 초가집에서 나는 밥 냄새가 생각났다. 그때는 그게 밥 냄새인지도 몰

랐는데 지금 식판에 가지런히 놓인 밥알들의 합창을 보면서 입에 침이 돌기 시작했다. 주걱

으로 밥을 고실고실하게 만든 후에 배식대 위에

올려놓았다.

반찬을 배식한 식판들을 포개어 놓고 맨 오른

쪽에는 미역국이 담긴 커다란 원통을 갖다 놓았

다. 국통은 뜨겁고 무거워서 장정이 아니면 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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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36: 2014-영락지 봄호

일 수 없었다. 사람들이 밀려오자

박순복 권사가 나서서 밥과 국을

배식했다.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망

사 두건을 쓰고 행주치마를 입었

다. 예배 후 국을 퍼주는 일일 ‘국

퍼’ 도우미를 하기로 했다.

국자에 듬뿍 사랑을 담아

예배가 끝나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밥을 먹으러 오는데 마치 인해전술처럼 꾸

역꾸역 줄이 늘어지고 있었다. 밥을 먹으러 식당에 늘상 갈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오늘은 반

찬이 왜 이렇게 입에 안 맞는 거야!” 하면서 투정하기가 일쑤였는데… 입장이 바뀌어서 국

을 퍼주는 자리에 서 보니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사람들에게 미역국을 하나씩 퍼주기 시작하는데 생각처럼 국이 잘 퍼지질 않았다. 국물

따로 건더기 따로 노는 뜨거운 미역국을 국자로 잘 휘저은 뒤에 적당량을 퍼야 하는데 이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어찌나 국이 뜨거운지 휘젓기도 힘들었다. 국을 푸면 풀수록 손

목은 끊어져 나갈 듯이 아파 왔다. 잠시 쉴 틈도 없이 국을 푸는데 몇십 명분을 푸고 나면 국

이 바닥이 났다. 부엌 저쪽에서는 연이어 국을 만들어 배식대 쪽으로 보내왔다.

연달아 다가오는

교인들에게 국을 퍼

주면서 “안녕하세

요?” 또는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을 하

는데 사람들이 거의

다 밝은 미소를 띠며

“감사합니다”고 화답

해 주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몸은 힘든데 왜 이렇게 마음은 날아갈 것만 같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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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로 푸는 것은 국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과 함께 국자에 듬뿍 담긴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을 녹인다. 국자를 든 손과 식판을 들고 있는 손이 아름답게 만나는 진실의 순간이 마

주하는 눈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밥을 퍼주고 국을 퍼주면서 느낀 선한 감정의 교류는 그

어떤 성경 말씀보다 몸으로 체험하는 또 다른 사랑의 실천이다.

밥 한 알의 소중함을

“배식에 실패한 자는 용서가 안 된다”는 군대 용어가 아니더라도 배식은 오래 숙달된 동

물적인 감각으로 해야 한다. 처음에 너무 듬뿍듬뿍 국을 배식하다 보니 나중에 오는 사람들

에겐 조금밖에 줄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골고루 넉넉하게 배식해야 하는

데 초보자가 감을 잡는데 쉽지 않았다.

그래도 마냥 행복했다. 함께 밥을 나누는 것도 기쁜데 난생처음 연대 규모의 교인들에게

일일이 국을 배식하는 영예를 누리다니…

먹다 남은 밥과 반찬이 잔반통에 쌓이는 걸 보니 속이 상했다. 이 아까운걸…

이 세상에는 아직도 먹을 것이 턱없이 모자라 굶어 죽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데, 버

려진 밥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 알의 밥알이 식판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땀방울이 함께 했는지 알게 된다면… 밥 한 알에 담긴 정성과 사랑을 생각하며 이

젠 함께 나누는 기쁨과 행복을 말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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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수필)살며 생각하며풋고추와 수제비 점심을 먹으며

글 | 박찬효(FDA 약품심사관)

근래에 한국에는 은퇴하여 집에 있는 남편들을 비하하는 조크가 많은듯 하다. 자기가 알

아서 세끼를 다 처리하는 남편은 ‘영식님’, 한끼 부탁은 ‘일식씨’, 두끼는 ‘두식이놈’, 그리고

세끼 다 부인 손을 빌리는 사람은 ‘삼식이 XX’라고 한단다. 본인은 아직 은퇴하지 않았지

만, 사무실에는 도시락을 가지고 가고, 집에서 일할때는 점심을 얻어먹으니 틀림없는 ‘삼식

이 XX’다. 간식까지 달라는 사람은 ‘간나XX’라고 한다나.

며칠전 직장 동료가 텃밭에서 기른 유기농 풋고추와 호박을 주었다. 싱싱하게 윤빛나는

진초록의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고, 아내가 끓여준 호박을 썰어넣은 수제비와 곁들여 아

주 토속적인 점심을 즐겼다. 어쩐지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소리나게 씹어 먹는것은 한국사

람의 정서를 잘 나타내는것 같다. 안양의 미군 부대에서 군복무를 할때 그곳 주민을 돕고

또 유대도 강화하기 위해 벼농사 추수때면 미군들과 같이 가서 거들어 주곤 했다. 유난히

기억나는 것은 땡볕에서 땀흘린 후 그 주인이 차려준 밥상에 오른 막걸리와 더불어 먹은 풋

고추와 된장, 그리고 돼지고기를 숭숭 썰어 넣고 고추장을 풀어 넣은 두부찌개가 유난히 맛

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입안에 군침이 돈다.

수제비는 조상들이 고려때부터 먹기 시작했다는데 한때는 돌잔치 등 특별한 날에만 먹었

다니 그들의 가난이 쉽게 짐작이 간다. 요새는 별식으로 간간이 음식점의 메뉴에 오르기도

하지만 한국 전쟁이 끝나고 곧 학교에 들어간 나로서는 수제비는 그리 유쾌한 음식이 아니

었다. 밥이 없어 먹는 대용품, 그리고 밀가루도 조악하고 양념도 부족해 억지로 먹었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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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난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니

자식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 어머니들의 심정이

얼마나 아팠을지 쉽게 짐작이 간다. 정말 우리 어

머니 세대들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하

루종일 일이 있다. 일어나면서부터 세끼 식사 준

비에, 설거지, 청소, 빨래, 다듬이 질, 다림질, 바느

질 등 종일 일이 끊어질줄 몰랐다. 그들은 그렇게

체념적 수용을 하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오락이나

여가선용, 취미생활 또는 여행은 타인들의 용어

였다. 철들고 이러한 생각을 하여서인지 정지용의

서정시 ‘향수’ 노래를 처음 들었을때 “아무렇지

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

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줍던 곳”이라는 대목에

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농사는 지으시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겪었던 질고의 삶이 나의 가

슴을 후벼팟기 때문일 것이다.

심순덕 시인의 시처럼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고 생각하며 살은것 같아 때로는

회한이 사무친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는 다음 끼니만 있으면 다

른 걱정을 할 여유가 없이 사는 사람들이 엄청 많

다. 남보다 선한 것도, 잘난 것도 없는 본인이 가

장 풍요한 나라 미국에 살면서 일용할 양식을 걱

정하지 않고 사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다.

이 은택을 잊은 배은망덕한 자가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할 일이다.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여름 뙤약볕을 머리에 인 채 호미 쥐고 온 종일 밭을 매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고된 일 끝에 찬 밥 한덩이로 부뚜막에 걸터 않아 끼니를 때워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 겨울 꽁꽁 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해도 그래서 동상이 가실 날이 없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난 괜찮다 배부르다 너희들이나 많이 먹어라

더운 밥 맛난 찬 그렇게 자식들 다 먹이고 숭늉으로 허기를 달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가 추위에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고 손톱이 깎을 수 조차 없게 닳아 문들어져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술 좋아하는 아버지가 허구헌날 주정을 하고 철부지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느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외할머니 사진을 손에 들고 소리죽여 우는 엄마를 보고도

아! 그 눈물의 의미를 이 속없는 딸은 몰랐습니다.

내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낡은 액자 속 사진으로만 우리 곁에 남아 있을 때

비로서... 엄마는 그러면 안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엄마는...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 출처: 심순덕 시인의 시집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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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감사의 샘물이 넘친다면강성옥

어느 가난한 시골학교에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었다. 피아노가 없어 고민하던 그는

대재벌 회사인 포드자동차 회장에게 학교 사정을 이야기하고 “존경하는 회장님께서 저희

학교에 피아노 한 대를 기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읽

은 회장님은 100불을 넣어 보냈다. ‘대기업에서 고작 100불이라니!’ 라고 불평을 할 수도 있

었을 텐데 그는 감사한 마음으로 땅콩 종자를 사서 학교 용지에 씨를 뿌렸고, 수확해서 얻

은 수입을 몇 년 동안 모아서 피아노를 한 대 살 돈을 마련하였다. 피아노를 마련한 그는 회

장에게 “저희 학교 학생들을 위해 100불을 기부해 주셔서 이제 피아노를 구매하게 되었습니

다.” 라는 감사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회장은 즉각적인 답신을 통해 “피아노를 장만하게 되

어 축하합니다. 저희 회사에 많은 사람이 기부금을 청탁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기부금을 받은 후 감사 편지는 커녕 돈의 액수를 따지면서 대기업에서 고작 요까짓

것을 기부하느냐며 불평을 가득 늘어놓는데 선생님은 다르시군요.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

다. 만 불을 동봉해서 보냅니다.” 라고 적힌 편지와 함께 금일봉을 보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수많은 감사할 거리는 강물에 띄워 보내고, 마음에 서운한 것들은 육비에 새겨 마음이 강

팍해지지 않았는지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오늘도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눈을 뜬다.

‘아~~~ 천장이 보이네.’

늘 곁에 있는 사물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2년 전 눈이 뿌옇게 되며 아른거려 백내장

수술을 하고 보니 눈이 제구실하는 것 같아 너무 감사하다. 손을 뻗어 곤히 자는 남편의 손

을 만져본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어머나! 아직도 생명의 피가 흐르고 있네.’

이 또한 감사하다. 잠자리에서 다리를 바닥에 내린다.

‘내 다리가 움직여지는구나.’

참으로 감사하다. 팔을 걷어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는 일상들의 순간순간이 새삼 신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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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고 소중하다. 평범할 것 같은 이런 일들이 언젠가 삐걱 된다면 나는 어찌할까? 참으로 이

모든 것들이 보석 같다. 그럼에도 이런 일들이 항상 그러려니 하고 믿고 있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인가. 매일매일 반복되는 삶 속에서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

하나님께 목소리 높여 곡조 있는 기도를 부를 수 있는 입, 무상으로 주시는 공기를 통해 호

흡할 수 있는 코, 생각하며 지혜를 구할 수 있는 머리, 삶의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는 뜨거운

가슴과 마음, 팔다리를 통해 봉사하며 섬길 수 있는 일 등, 무궁무진하게 감사할 것들이 지

천으로 깔렸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귓

가에 맴돈다. 새해 벽두부터 수천 번을 하나님을 향해 ‘Thank you!’를 외쳐본다.

나의 일상을 더듬어 보면서 감사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미국의 한 청년이

남아프리카로 인턴십을 하러 떠났다. 집도 없이 방황하는 배고픔에 지쳐 삐쩍 마른 모습들

의 아이들을 보면서 이 청년은 자신의 지갑을 열어 빵을 사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먹을 것을 준비하지 못해 아이들을 그냥 지나치게 되었는데 한두 아이가 돌팔매질하더니

급기야 떼를 지어 그를 향해 욕을 하며 못된 짓을 했다.

‘이 아이들이 왜 이럴까? 늘 받기만 하고 베푸는 삶이 무엇이며 감사함이 뭔지를 태어날

때부터 배우지 못해 이런 현상이 있지 않나!’ 라고 상념에 잠겼다.

값진 생명을 대가 없이 대속해 주시고, 주홍같이 붉은 죄라 해도 깨끗하게 도말하시며,

외롭지 않게 늘 동행해 주신 친구 되신 분, 방황할 때 곁에 계셔서 위로해 주신 이, 죽을 것

같이 몸이 아플 때 치유의 손길을 뻗어주신 주님을 떠올리니 ‘넘치는 사랑과 수많은 복을

세어도 모자람 없이 주셨는데….’ 라고 생각이 들며 ‘감사도 배워야 함’을 절실히 느껴본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의 샘물’이 넘치면 행복이 봇물처럼 밀려온다는 것을 굳게 믿으며,

“주님! 2014년 청마해에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끝없이 펼쳐진 소망과 희망의 평원을 멋지게

달리고 싶습니다. 주님! 주님은 간절함으로 드리는 기도제목과 마음까지도 아시지요?” 라고

힘차게 외쳐본다. -23도 되는 추위에도 감사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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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상)‘오늘의 양식’ 30년글 | 손정숙 (Elder. Trinity Presbyterian Church. London)

캐나다한인문서선교회 창립 30주년이 되었다.

1978년 Michigan주 Grand Rapid에 있는 Radio Bible Class Ministries(RBC)의

Richard De Haan목사가 런던의 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수년 전부터 병원에서

RBC의 작은 책자 ‘Our Daily Bread'가 회복기의 환자들에게 큰 치유력을 발휘하는 영적

감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직접 경험한 송세훈 박사와 나는 이 책자를 한글로 번역하고 싶다

는 의사를 밝혀 쾌히 승낙을 받았다. 당시 한인사회의 형편으로는 번역할 인적자원이 턱없

이 부족하여 시일을 끌 던 중 미국 Baltimore에 있는 벧엘 교회의 김상복 목사님이 번역을

신청하게 되어 결국 번역권을 벧엘(Bethel)교회에 양도하고 지부로 남기로 하였다.

1983년 초, RBC와 벧엘 프레스, 캐나다한인문서선교회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합동회의

를 열어 한국판의 번역과 공급본사는 '벧엘 출판사'(odb)로, 한국 ‘오늘의양식사’와 ‘캐나다

한인문서선교회’는 해외지사로 위치를 고정하였다. 캐나다한인문서선교회는 미국과 한국

을 제외한 전 세계(중국 아프리카 러시아..)에 ‘오늘의 양식’ 책자를 보급하게 된 것이다.

1984년 캐나다한인문서선교회는 ‘Korean Bible Conference(KBC)’로 온타리오 주정부

에 정식으로 자선단체 등록을 하였다. 문서선교 외에 유사한 선교를 첨가할 수 있게 하였다.

임원진으로는 회장 송세훈, 원영수, 김치국, 유영일, 김동선, 손정숙, 백낙도 등이었다.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드에 있는 ‘라디오 바이블 클래스’는 1956년 외과의사 닥터 M. R.

De Haan에 의해 수술 후 회복기에 있는 환자들의 영적 치유를 위해 시작하였다고 한다.

사역을 시작할 당시 저자는 두 사람에 불과하였으나 현재는 3대 Martin De Haan총재

를 비롯 15명의 집필진과 300명이상의 크리스천 사역자들을 확보하고 있다. 세계 20개국에

사무소가 있으며 자국 언어로 번역 출간하고 있다. 1994년에 RBC로 명칭을 바꾸고 ‘Our

Daily Bread'뿐만 아니라 Discovery Digest 등 많은 신앙서적을 번역하며 성가테이프,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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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43: 2014-영락지 봄호

앙영상물 제작, 라디오 TV 방송 등 다 방면의 선교사역을

펼치고 있다.

벧엘출판사가 정식으로 한국판 번역을 시작한 것은

1980년 초 부터였다. 초창기의 한글판 ‘오늘의 양식’

은 타자로 일주일분씩 번역 복사하여 ‘7분간의 신

앙’양식으로 배포하였다. 순 한글판 책자로 출간되

다가 초기 영한대조판, 그리고 현재의 포켓사이

즈 영한대조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현재 40명

의 번역편집위원이 RBC로부터 영어원문을 수

령하여 번역 편집하고, 3차의 교정과 페이지메

이커, 최종교정, PDF 전환의 과정을 거친 후

RBC및 한국 ‘오늘의 양식사’로 전송하면 인쇄 출판

발송이 이루어진다.

지난 2005년 벧엘교회에서 ‘오늘의 양식’ 창간25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

서 RBC총재 Martin De Haan목사는 KBC(송세훈 장로, 김치국 장로)와 김상복 목사,

Dennis J De Haan목사, 그리고 20여년 이상 헌신한 분들께 감사패 수여식을 하였다.

캐나다한인문서선교회는 어느 종파나 종교단체에 소속하지 않는 순수 평신도선교단체

(Lay people's)이며 오직 헌금에 의해 비용을 충당한다는 원칙을 지켜오고 있다. 책은 비

매품이나 번역비와 인쇄비, 운송비와 발송하는 비용은 선교회가 부담하여야 한다. 처음엔

200권의 책을 친지들께 배포하고 발송비를 줄이기 위해 직접 다니며 전달해 주기도 하였다.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 원영수 장로, 김치국 장로, 백낙도 권사, 김동선 집사는 고인이

되고 이형국 장로, 최창운 장로, 황호연 장로가 합류하였다. 보급책자도 5,500여권에 이르

게 되었다. 중국에 교회를 세워주고 성경보급을 하였으며 케냐에 오디오 선교센터와 도서

관 건립, 러시아와 스콧트렌드 선교사역지원을 할 수 있었다.

신앙생활의 지침이 되는 이 작은 책자는 틈나는 시간에 쉽게 읽을 수 있는 친근함이 있

다. 오늘의 모든 성취는 항상 넘치도록 공급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우리 모

두 서로 합력하여 열성과 충성을 다한 사랑의 결실임을 확신하며 감사드린다. 이제 KBC는

목적과 초지의 굽힘이 없이 새로운 발걸음을 힘차게 떼어놓으려고 다짐한다. †

앙영상물 제작, 라디오 TV 방송 등 다 방면의 선교사역을

벧엘출판사가 정식으로 한국판 번역을 시작한 것은

1980년 초 부터였다. 초창기의 한글판 ‘오늘의 양식’

은 타자로 일주일분씩 번역 복사하여 ‘7분간의 신

앙’양식으로 배포하였다. 순 한글판 책자로 출간되

다가 초기 영한대조판, 그리고 현재의 포켓사이

즈 영한대조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현재 40명

의 번역편집위원이 RBC로부터 영어원문을 수

령하여 번역 편집하고, 3차의 교정과 페이지메

RBC및 한국 ‘오늘의 양식사’로 전송하면 인쇄 출판

지난 2005년 벧엘교회에서 ‘오늘의 양식’ 창간25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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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44: 2014-영락지 봄호

(선교/전도)캄보디아 커뮤니티 센터

글 | 손경국 영락교회 고아사역위원회

지난 2014년 2월 20일, 캄보디아의 생명의 샘 고아원에서는 커뮤니티 센터 준공 예배가

드려졌다. 캄보디아의 고아들을 돌보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양육하여 캄보디아

복음화를 위한 지도자를 양성해 내고자 2011년 캄보디아에 생명의 샘 고아원이 세워진 지

거의 3년 만의 일이다.

생명의 샘 고아원은 40여명의 아이들을 입양하여 주님의 사랑으로 양육하는 한편, 입양

된 아이들과 함께 인근 마을 아이들도 함께 가르치는 방과 후 학습(After School)을 진행해

왔다. 이 프로그램은 마을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 참여를 희망하는 이웃 마을 아이들의

수가 계속 증가했으며, 그 수가 250여명에 이르게 되자 아이들의 수업을 진행할 교실이 절실

히 필요하게 되었다. 게다가 고아원 사역과 더불어 캄보디아 고아원 선교 사역의 주요 목표

로 삼은 청소년과 이웃 주민 복음화를 고려해 볼 때에도 커뮤니티 센터의 마련은 꼭 필요한

터였다.

그리하여 2013년 9월 기공예배를 시작으로 영락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지원을 받아 커

뮤니티 센터를준비해 왔으며, 2014년 2월 20일 준공예배를 드림으로 캄보디아 깜풍스푸

(Kampong Speu)에 교육과 복음을 위한 전초기지를 확립하게 되었다.

생명의 샘 커뮤니티 센터는 2층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은 4개의 교실과 사무실,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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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2개의 교실과 예배와 지역 주민을 위한 큰방으

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들

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방과 후 학교(After School)를 잘 정착시키고 양질의 교

육을 제공한다. 이곳에서는 캄보디아어, 수학, 영어, 한국어, 그리고 컴퓨터 수업이 진행

되며, 세명의 전업 교사와 한명의 시간제교사가 약 250명의 학생을 돌보게 된다.

둘째, 직업 훈련을 위한 한개의 교실을 운영한다.

이곳에서는 IT(Information Technology) 반을 운영하며 기본적인 컴퓨터 사용법을

알려주어 나중에 직업을 찾을 때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

셋째, 예배 사역을 통해 그동안 마을에서 드려온 예배를 이곳 커뮤니티 센터에서

진행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마을 주민의 집을 이용하여 예배를 드려 왔으나, 이제 20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2층의 방을 활용하여 마을 분들을 초청하여 예배나 모임의 공간으

로 사용하려 한다. 이곳이 어르신들의 쉼터로 활용하는 등 교회가 세상으로 들어갈 공

간으로 사용되길 희망한다.

넷째, 청소년을 대상으로 교육 및 복음을 전파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청소년들의 특

징을 고려, 성경 관련 영화를 상영하거나 스포츠나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공간

을 제공하고 아이들이 모이는 친근한 곳으로 만들 계획이다. 단기 선교팀의 방문시 캠

프나 찬양 집회 등의 모임이 이루어질 공간으로도 사용되게 된다.

앞으로 이 공간이 이웃 주민들을 섬기며

캄보디아의 교육과

복음화를 위해 귀

중하게 쓰일 수 있길

소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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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글(2)소박한 권위글 | 김수향

청려장은 명아주 풀로 만든 지팡인데, 해 마다 어버이날이 되면 백 세 이상 분들

에게 대통령이 마련해 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이런 전통은

신라시대 때부터 내려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도 이 청

려장을 선물 받고는 ‘가볍고 탐스럽다’고 찬탄했다.

하회마을 사람들이 건넨 선물이니, 이것을 ‘향장’으로 불러도 좋을 듯하다.

향장이란 청려장의 또다른 이름인데, 육 십 세가 된 어른에게 동네에서 만들어

준다고 해서 향장이라한다. 청려장은 어른만이 지닐 수 있는 권위와 존경의 상징이

지만, 나이를 묻지 않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풍속은 생경스러울 수

있겠다.

저절로 먹는 나이 뭐가 그리 고마울까 싶어 꺼려진다 하더라도, 청려장은 나이

듦에 대한 배려와 소박한 권위가 애틋하다.

2500년 전 오이디푸스 신화 속에도, 늙음에 대해 ‘저녁에 세 발로 걷는 사람’으

로 묘사했다. 지팡이를 제 3의 발로 묘사한 재치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상을 누르고 선 지팡이가 그 시대에 필수 아이템이었던 것 만은 틀림없

는 사실이었다. 물론 성경 속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취했던 지팡이는 홍해

의 물을 가르고, 바위를 쳐서 물을 내게 하는 권능의 지팡이였으니, 그것과는 비교

할 수는 없겠지만, 아들이 나이든 아버지을 위해 만들었을 인간적인 선물에도 하

나님이 허락하신 세상에 대한 지혜가 숨어 있으리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여정에 소박한 권위를 청려장에 새겨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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