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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유고( 巍巖遺稿) 12 잡저 ( 雜著 )

잡저雜著 - Egloospds17.egloos.com/pds/200910/05/25/oeamyugo_12_13.pdf · 2009-10-05 · 도이고 고르고 평평하니, 이것이 이른바 ‘음이 양의 반인 것이 리수(理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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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3

    한홍조(韓弘祚)의 의 뒤에 붙여

    말하다.[天地辨後說]1)

    객이 말했다. “그대는 일찍이 한영숙(한홍조)의 천지설에 대해 변론한 적이 있는

    가?” 말했다. “그런 적이 있다.” 말했다. “그것이 어찌 변론할 거리가 되는가? 유학

    자가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몸과 마음이

    나와 가장 가깝고 일용(日用)이 나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급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저런 천지설을 우선하는 태도는 이미 잘 생각하는 방법이 아닌

    데다 더욱이 이른바 ‘한가로운 때에 문답한 것’2)은 곧 미혹되고 허황된 것이니 아

    마도 괴망(怪妄)하다고 해도 부족할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여기에 사설을 낭비하

    여 마치 강론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으니 너무 골몰한 것이 아닌가?

    客曰: “子嘗辨乎韓永叔之天地說, 有之乎?” 曰:“ 有之矣.” 曰: “夫何足辨也, 儒者窮格之

    方, 固非一端, 而莫近乎身心, 莫切於日用. 此之不急而惟彼之先, 已非善思之道, 而况其所謂

    ‘餘暇問對’者, 則直是迷謬虛眩, 盖不足以恠妄目之矣. 子於是費了辭說, 有若講論者然, 無乃

    汩乎?”

    1) 한홍조(韓弘祚)의 의 뒤에 붙여 말하다. [天地辨後說] : 이 글은 한홍조(韓弘祚)

    의 육면세계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당시 권상하 문하에서는 지구가 육면체이고 6개의 각각

    의 면 위에 초목․금수․인간이 사는 세계가 있다는 이른바 ‘육면세계설’이 논의되었는데, 신유․

    한홍조․현상벽 등이 이를 주장하고, 최징후․한원진․이간 등은 이에 반대했다. 이 글은 현상벽

    의 과 더불어 육면세계 논쟁의 가장 핵심적인 자료이다.

    1706년 봄 신유가 사망하자 한홍조는 이해 여름에 제문을 통해 신유가 주장했던 육면세계설을

    공개적으로 찬양했고, 이 해 겨울 이간은 이 글 을 지었다. 그러나 이간은 이 글을

    공개하지 않았고 이후 권상하 문하 내부에서 이간과 한원진을 중심으로 인물성론과 미발심체론이

    논쟁되는 과정에선 이 문제가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1723년 겨울 이간은 그간 방치해 놓았던

    에 후기를 덧붙였고, 1727년 이간이 사망한 이후 이 글이 동문들 사이에서 회람되

    면서 논의가 재연되었다.

    권상하 문하에서 전개되었던 육면세계설 논의에 대해서는 임종태의 (≪한국사연구≫138)에 자세하다. 이

    글의 번역은 이 논문과 그가 제공한 초역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아직도 명쾌하게 번역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물론 이는 번역자의 능력 부족에 기인한 것이다.

    2) 한가로운 때에 문답한 것[餘暇問對] : 1705년 한홍조가 이간에게 보낸 육면세계설이다.

  • 내가 말했다.

    “그렇다. 친구들끼리 강론하는 도는 그 주제가 한가로운 것이건 긴요한 것이건

    간에 한쪽에서 이미 시작했으면 다른 한쪽에서는 응답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인 까닭

    에 처음에 한 번 주고 받으면서 논변한 것이 약간 있었다. 한때 지나친 실수를 했다

    고 해서 애초부터 그를 치지도외하면 그건 너무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데 나중에 그가 홀연히 글을 지어 붕우들에게 두루 돌리고 또한 장황하게 신백겸

    (신유)의 제문을 지어 귀신에게 질정하니, 그 때야 비로소 나도 모르게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대개 천지의 물 됨은 비록 그 리수(理數)가 심오하지만 법상(法象)은 아주 분명

    히 드러나 있고 비록 그 범위는 광대하지만 권형(權衡)은 매우 간략하다. 그런데 이

    친구는 그 드러나 있고 간략한 것(법상과 권형)에 애초부터 망연히 요령을 잡지 못

    하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허황되어 수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선유들이

    이른바 ‘대군의 기병이 너무 멀리 나가 돌아올 수 없다’3)는 것도 아마 이와 같이

    탈공(脫空)한 데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미 강론으로 이름이 나고 교육으로 공을 이루었는데도 내가 도리

    어 헤아리지 않고 논변하기에 족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 언론 됨이 스스로

    너무 높아 중(中)을 잃는 것을 면치 못하는 것이고 그 마음씀씀이도 매우 공손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듯 너무 높고 공손하지 않은 것이 또한 어찌 몸과 마음, 일용에서

    소홀히 할만한 것이겠는가?”

    余曰: “然. 朋友講論之道, 無論閑緊, 彼旣發端, 則此不應無話, 故從初一酬一酢, 薄有言

    說. 而余意其爲一時汎濫之失, 初亦置之則劇矣. 末後渠忽定著成說, 遍誘朋友, 又張皇祭文,

    質之鬼神, 而後始不覺愕眙失圖也. 大家天地之爲物也, 其理數雖奧, 而法象則甚顯, 其範圍雖

    3) 대군의 기병이 너무 멀리 나가 돌아올 수 없다[大軍遊騎出太遠而不得返] : 이는 정자의 말로, 격물

    (格物)은 제대로 효도하는 방법 등 일상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규범을 탐구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힘쓰지 않고 다만 세상의 모든 이치를 널리 보고자 하기만 하는 것은 마치 대군의 기병이 너무

    멀리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5

    大, 而權衡則甚約矣. 而此友於其顯而約者, 初盖茫然不得挈其要領, 故末後虛荒, 至沒可收殺.

    先儒所謂大軍遊騎出太遠而不得返者, 疑不至若是脫空矣. 然彼旣以講論爲名, 開牖爲功, 而此

    反不入商量, 謂無足於辨, 則其爲言論, 自不免於過高失中, 而意象亦殊不恭矣. 過高與不恭,

    又豈身心日用之所可忽者乎?”

    객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 변론한 설을 대강이라도 들어볼 수 있겠는가?”

    客曰: “然則其所辨之說, 亦可槩聞乎?”

    말했다. “그의 설은 비록 많지만 그가 입을 열어 말한 첫 번째 강령은 곧 ‘무상하

    (無上下)’ 세 글자일 따름이다. 무엇을 ‘상하가 없다.’라 하는가? 그는 ‘하늘이 땅 밖

    에서 감싸고 있고 땅은 하늘 안에 있으니, 비록 하늘과 땅의 사이에 잠정적으로 하

    늘을 위라 하고 땅을 아래가 한다 하더라도 천지 전체를 통틀어 말한다면 천지는

    원래 아래와 위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 위 상하 사방에 모두 세계가 있고 사람

    과 만물이 번성하여 마치 밤송이에 가시가 송송히 박혀있는 것 같다.’고 하니, 이것

    이 그가 가장 자신있게 주장하는 내용이다.”

    曰: “彼說雖多, 而其開口第一綱領, 卽無上下三字耳. 何謂無上下? 彼曰: ‘天包地外, 地在

    天中, 雖天與地之間, 姑以天爲上地爲下, 而擧天地全體而通貫言之, 則天地原無上與下矣.

    故地面上下四方, 均有世界, 人物林林, 譬如栗房四外, 稜刺鬆鬆然’, 此其大拍頭也.”

    내가 말했다. “옛사람이 ‘작은 의혹은 한 지방을 바꾸지만 큰 의혹은 세상을 바꾼

    다.’4)라 하였는데, 지금 이 상하가 없다는 설은 곧 진실로 바꾸지 않을 바가 없는

    것이다. 대개 내가 알기로는 우주에 오행만 있을 따름이다. 그 기가 밖에서 운행하

    는 것을 천(天)이라 하는데 크기가 애초에 한계가 없으며 오행의 질(質)이 가운데에

    서 엉겨 굳은 것을 지(地)라 하는데 그 쌓인 두께는 겨우 천의 중앙까지만 미칠 정

    4) ≪장자(莊子)≫의 에 나온다.

  • 도이고 고르고 평평하니, 이것이 이른바 ‘음이 양의 반인 것이 리수(理數) 자연의

    실체’라는 것이다. 까닭에 남극이 땅 아래로 들어가 있고 북극이 땅 위로 올라가 있

    는 각도가 모두 36도이고 북극에서 남극까지, 남극에서 북극까지는 또한 각각 182

    1/2도이니, 이것이 근거할만한 법상이고 기준으로 삼을만한 권형이 아니란 말인가?

    余曰: “古人謂‘小惑易方, 大惑易世’, 今此無上下之說, 則眞無所不易矣. 盖聞宇宙之間, 五

    行而已, 其氣之運行於外者, 謂之天, 而其大初無限際, 其質之凝確於中者, 謂之地, 而其積實

    之厚, 則廑及天之中央而一齊平正, 此所謂‘陰半於陽, 理數自然之實體’也. 故南北極, 入地出

    地, 皆三十六度, 而北極至南極, 南極至北極, 又各爲一百八十二度半强, 此非法象之可據, 權

    衡之可準者乎?

    더욱이 이 오행 중에 반드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수(水)이고 평평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수이니, 오직 수 하나만이 천지를 저울질하고 상하를 정할 수 있는 것이

    다. 그는 “‘사방에서 하늘과 닿아있는 물’이란 우물만 아는 좁은 소견으로, 마땅히

    바다를 바라보아야 한다.”5)고 했지만 작은 것은 큰 것의 그림자이다. 곧 이 눈 앞의

    사물을 놓고 생각해보면, 시냇물이나 웅덩이 물이라도 물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 없으며 웅덩이나 높은 곳을 만나면 평평하게 채우지 않음이 없다. 우리 유학

    자들이 사물의 이치를 공부하는 도리가 애초에 실제 일에 근거하지 않았다면 그만

    이지만 (만약 실제 일에 근거한다면) 저 ‘한 줌 흙의 커다람’과 ‘한 잔 물의 많음’이

    어찌 눈 앞의 사물이 아니겠는가?6) 천지에 있는 사물의 이치가 모두 상하가 없다

    면 그만이거니와 그가 반드시 ‘상하가 일면에는 있지만 육면 전체에는 없다.’고 말

    하는 것은 비록 자신의 설에 비추어보더라도 끝내 정합적일 수 없을 것이다.

    况此五行之中, 必下者水也, 莫平者水也. 惟水一物, 已足以衡天地定上下. 彼‘四圍際天之

    5) 바다를 바라본다[望洋] : 강의 신 하백이 바다를 보고서야 자기 안목의 한계를 깨달았다는 이야기

    (≪장자(莊子)≫ )에서 나온 말이다.

    6) ≪중용≫ 26장에 나온다.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7

    水, 則局於井榦者, 固宜所望洋’, 而小者, 大之影也. 卽此眼前物事, 涓流蹄涔, 水無有不下,

    遇坎止險, 水無有不平. 吾儒窮格之道, 初不據實事則已, 彼撮土之大, 一勺之多, 寧獨非眼前

    物事乎? 天地之間, 事物之理, 都無上下則已, 其必謂有於一面而無於全體者, 雖於自家之說,

    終無可濟之日矣.

    그가 말하기를 ‘도랑과 시내, 강과 바다는 본래 땅의 육면을 횡행․주선하고 있

    어서 사람이 만약 장수하여 강건히 돌아다닐 수 있다면 뱃길과 육로를 통해 모두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고, 또한 ‘육면 세계의 인물

    들은 비록 거꾸로 매달려 있음을 서로 기롱하지만 그들이 각각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있는 것은 다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彼謂‘溝瀆江海, 本自橫行周繞於地之六面, 人若壽而健行, 則木道旱路, 皆可往還於彼此世

    界.’, 又謂‘六面世界人物, 雖則互譏其倒懸, 而其各戴天履地, 則自不害於通同耳.’

    대개 이러한 허황한 설은 진실로 객의 말씀과 같이 변론할 만한 것이 아니다. 오

    로지 수(水)만이 진실로 상하에 구분이 없는 것인가? 천지에 정말로 상하가 없다

    면 비록 물이 아래로 흐르려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래로 갈 곳이 없는 것이니, 단지

    엉긴 기름이나 얼음처럼 땅 위에 붙어서 절대 조금도 흐르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러나 지금 물은 그렇지 않아 반드시 흘러가니 왜 그런가? 실제에 근거하고 간략함

    을 얻은 조짐은 오직 수(水)가 매우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홀로 누누이 말

    했지만 허황하게 되어 모든 것을 거꾸로 설명하니 또한 어찌 할 수 없다.

    凡此虛眩之說, 誠如客言, 無足於辨者. 而獨水信無分於上下乎? 天地果無上下, 則水雖欲就

    下, 實無下可就矣, 只當如凝脂成氷, 緊緊束縛於地面, 絶些流動, 而今水不然, 必流動, 何也?

    據實納約之幾, 惟水甚明. 故此獨縷縷於言, 而滚被虛眩, 一切倒蹋, 正亦沒奈之何矣.

    그는 또 ‘낮과 밤은 곧 추위와 더위의 그림자이다. 이쪽이 낮이면 저쪽은 밤이고

  • 이쪽이 밤이면 저쪽은 낮이다. 그러므로 이곳의 춘분은 사실 저곳의 추분이고, 이곳

    의 하지는 곧 저곳의 동지이다.’라 하니, 이 또한 그가 자신있게 주장하는 것이다.”

    彼又曰: ‘晝夜, 卽寒暑之影也, 此晝則彼夜, 此夜則彼晝, 故此界之春分, 實彼界之秋分,

    此界之夏至, 卽彼界之冬至.’, 此又其大拍頭也.

    내가 말했다. “이 땅이 여섯 면의 세계로 나뉘어 있다는 것은 진실로 무슨 말인

    지 알겠다. 그대와 내가 그 땅을 직접 밟아보기 전에는 그대의 설은 아직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오직 하늘에는 일기(一氣)만 있을 따름이니, 그것이 빨리 운행

    하는 것은 잠시도 멈추지 않지만 그것이 점차 조화하는 것은 하루에 돌 수 있는 것

    이 아니다. 지금 각면 세계에 근거하여 그 따뜻하고 시원하고 춥고 더운 기후와 낳

    고 자라고 이루어지고 저장되는 공이 하루 낮밤 사이에 비록 곳에 따라 감응하여

    각 세계마다 나누어주고자 하여도 하늘이 어느 겨를에 그렇게 하겠는가? 이것이

    첫 번째 의문이다.

    또한 하늘엔 단지 사 계절만 있을 뿐인데 땅은 육 면이 있다니 그 수가 이미 서

    로 맞지 않는다. 설령 그 상하동서 사 세계에 춘하추동을 배정하더라도 각 세계의

    인물은 또한 자기 눈에 근거할 것이니 마땅히 다른 기후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없

    다. 오직 남북 양단의 세계만 나머지 네 세계의 남은 시절과 기후가 반드시 일시에

    머리를 가지런히 하여 몰려 들 것이니 한 척의 눈과 무릎까지 오는 풀, 활짝 핀 꽃

    과 말라죽은 나무들이 눈 앞의 지척지간에 펼쳐질 것이다. 이는 조화는 물론이고

    그 광경이 황홀하여 괴상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두 번째 의문이다.”

    余曰: “以地段分爲六面世界, 則固聞命矣. 子與我, 未及親履其地之前, 子說可濟矣. 獨天

    有一氣耳, 其運行之速, 則無一刻暫停, 而其造化之漸, 則非一日可周, 今據各面世界, 其溫凉

    寒暑之候, 生長收藏之功, 雖欲隨方感應, 逐界分俵於一晝夜之間, 而天其暇及乎哉? 此一疑

    也. 且天只有四時, 而地則有六面, 其數已不相準, 設其上下東西四世界, 則以春夏秋冬, 逐面

    排定, 而各界人物, 亦各據眼前, 宜不見有異候矣. 惟南北端兩世界, 則彼四世界餘光末候, 勢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9

    必齊頭輻輳於一時, 盈尺之雪, 沒膝之草, 紛敷之花, 枯落之木, 擧集於眼前咫尺之間矣, 此不

    論造化, 其光景無乃爲恍惚疑怪乎, 此又一疑也.”

    그가 이에 말했다. “반드시 사 계절이 짝을 지어 한꺼번에 모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밤 낮과 밝고 어두움으로 미루어 보면 여기는 봄이고 저기는 가을이고 여

    기는 여름이고 저기는 겨울이니 또한 당연히 두 가지 기후가 서로 짝을 이루어 순

    환하는 것이다.”

    彼乃曰: “非必謂四時相配而並萃也. 以晝夜明暗推之, 此春彼秋, 此夏彼冬, 亦當有兩般氣

    候相配而循環矣.”

    내가 말했다. “이는 진실로 이른바 조삼모사와 같은 설이다. 그 겨울과 여름의

    세계가 서로 경계를 이루는 곳에서는 한 걸음 안에 이 사람은 화로를 끼고서 춥다

    고 하고 저 사람은 부채를 부치면서 땀을 흘릴 것이니 또한 앞의 이야기를 고친 것

    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 허황함의 여증과 같으니 진실로 하나하나 따져

    보고 싶지 않고 회옹(주희)이 천지에 대해 논한 것만 봐도 또한 상세하다. 그가 주

    자의 설을 부정하면서 말하는 높고 깊고 광대한 광경은 이미 몸으로 직접 밟아보고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선각(주희)이 이미 정한 논의를 어찌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유추할 수 있겠는가?

    余曰: “是眞所謂狙公三四之說. 而其冬夏相界處, 跬步之內, 這人則擁爐呼寒, 那人則搖扇

    流汗, 亦無改於前觀矣. 然此都似虛眩之餘證也, 誠不欲逐一究詰, 而獨晦翁之論天地也, 盖亦

    詳矣. 彼高深廣大之垠, 旣不能身踐而目睹, 則先覺已定之論, 其可不據實而反隅乎?

    회옹의 말씀에 ‘땅의 아래는 물이 받치고 있다.’7)라 하였고, 또 ‘땅의 아래와 네

    주변에는 모두 바닷물이 흐르고 땅은 물 위에 떠 있으며 물과 하늘이 맞닿고 하늘

    7) 주희의 ≪주자어류≫ 권45의 30조목에 나온다.

  • 은 물과 땅을 감싸고 있다.’라 하였고,8) 또 말씀하시기를 ‘바다 저 끝은 곧 하늘과

    맞닿아 있고 바닷물은 끝이 없으니 단지 기가 쌓여 그런 것이다.’라 하였고,9) 또

    ‘중국 땅덩어리의 남쪽 끝은 비록 바다와 가까우나 지형(地形)은 다하지 않았고, 바

    다 밖에 섬나라 오랑캐 여러 나라와 같은 것들도 땅이 여전히 그곳과 연결되어 있

    어 바다도 여전히 땅바닥이 있으며, 바닥이 없는 바다에 이르러서야 지형이 비로소

    다한다.’라 하였다.10)

    많은 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이 몇 가지 설을 상식적으로 살펴보면 천지

    를 알 수 있고 상하를 구분할 수 있으니, 육면 세계에 대한 여러 설들은 또한 공격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깨질 것이다. 한영숙은 ‘하늘이 한수(漢水)와 연결되어 있다

    .’11)는 것을 소재로 삼아 여러 말을 하지만 한결 같이 회암의 정론을 뒤집는 말이

    다. 대개 그의 설은 ‘비록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 하늘과 한수는 일찍이 서로

    연결된 적이 없으니, 회옹의 말씀 또한 이와 같을 따름이다.’라 하니, 아! 그 어리석

    음이 한결같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晦翁之言曰: ‘地之下是水載’, 又曰:‘地之下與地之四邊, 皆海水周流, 地浮在水上, 水與天

    接, 天包水與地’, 又曰: ‘海那邊便與天接, 海水無邊, 只是氣蓄得在’, 又曰: ‘中國地段, 南邊

    雖近海, 然地形則未盡, 如海外有島夷諸國, 則地猶連屬彼處, 海猶有底, 至海無底處, 地形方

    盡’云. 不在多說, 只此數說, 若以常情而觀之, 則天地可知, 上下可辨, 世界人物, 種種說話,

    亦可無攻而自破矣. 彼乃以連天漢水, 廣作話頭而一並翻案, 盖其說以爲‘雖言連天, 而天與漢

    水, 未嘗相連, 晦翁之言, 亦如此’云耳. 噫, 其愚惑一何至此歟?

    그는 또한 말했다. “진실로 회옹의 말씀과 같이 땅의 아래와 네 변이 모두 물이

    라면 해와 달은 운행하면서 장차 물과 충돌할 것이다. 그러면 햇빛이 어찌 만장이

    나 되는 혼탁한 물을 뚫고 달을 비출 수 있는가?”

    8) 주희의 ≪주자어류≫ 권2의 74조목에 나온다.

    9) 주희의 ≪주자어류≫ 권2의 77조목에 나온다.

    10) 주희의 ≪주자어류≫ 권2의 74조목에 나온다.

    11) 왕유(王維)의 ≪왕우승집(王右丞集)≫ 권8의 에 나온다.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11

    彼又曰: “地之下與四邊皆水, 信如晦翁言, 則日月之行, 將衝水而行矣, 日光, 安得射出萬

    萬丈混濁之水而被月之魄乎?”

    내가 말했다. “대저 이른바 땅이라는 것은 원래 어떤 것인가? 오행이 뒤섞인 질

    전체를 통틀어 땅이라 하는 것이니, 물은 애초에 땅과 다른 것이 아니고 본래 또한

    땅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붙어서 비록 한 터럭의 틈도 없다

    하더라도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니 그 범위와 둘레가 서로 섞이지 않는다. 게

    다가 저 해와 달의 운행은 하늘에 있지 땅에 있지 않으니 비록 물과 충돌하고자 하

    더라도 가능한 일이겠는가? 물과 부딪힌다는 말은 이미 하늘과 땅을 구분하지 않

    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고서 천지를 논하려 하는 것이 논리 정연할 수 있겠는가?”

    余曰: “夫所謂地者, 元來是何物也? 五行磅礴之質, 擧全體而謂之地, 則水初非別物, 而不

    過本亦地段也. 天與地依附, 雖間不容髮, 而天自天地自地, 其範圍匡郭, 自不相混, 彼日月之

    行, 在天而不在地, 則雖欲衝水而行, 得乎? 衝水二字, 已不辨於天與地界分矣. 如是而欲論

    天地, 其能沛然乎?”

    그가 또 말했다. “진실로 회옹의 말씀과 같이 땅이 물 위에 실려 있다면 땅은 이

    미 흩어져 버린 지 오래일 것이다. 만약 흩어져 버리지 않는다면 바람을 만나면 반

    드시 표류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왜 그렇지 아니한가?”

    彼又曰: “地載水上, 信如晦翁言, 則地已渙散久矣. 而如不渙散, 則遇風必飄流矣, 今何不

    然也?”

    내가 말했다. “회옹은 ‘천지가 혼돈할 때에는 단지 물과 불 두 가지만 있었는데

    물의 찌꺼기가 땅이 되었다. 지금 높이 올라가 여러 산들을 바라보면 모두 파도의

    형상이다.’라 하셨고,12) 또 말씀하시기를 ‘물 중에 가장 탁한 것이 땅이 되었다.’하

  • 였으니,13) 이에 근거해보면 물과 찌꺼기가 혼륜하여 땅덩어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

    다. 그 중에 흙과 돌에 나아가 보면 매우 탁한 것들이 섞여서 응취하여 질을 이루었

    다. 물은 오행 중에서도 그 비율이 가장 많고 그 성질은 아래로 스며드는 것이기

    때문에 사방 밖에 두루 가득 차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땅이 물 위에 실려 있다는

    것이고 전체를 들어 말하면 하늘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흩어지거나 표류한

    다는 걱정은 기우가 아닌가?”

    余曰: “晦翁謂‘天地混沌時, 只有水,火二者, 水之滓脚, 便成地, 今登高而望群山, 皆爲波

    浪之狀.’又曰: ‘水之極濁便成地.’ 據此則水與滓脚, 混淪爲地段可見, 而就其中土石, 則磅礴

    凝聚, 極濁成質, 水則於五行, 分數最多, 而其性又滲漉就下, 故遍涵於四外, 此所謂地載水上

    也, 而擧全體言, 則並包於天之範圍矣. 渙散飄流之憂, 無乃類於杞人歟?”

    객이 말했다. “남북극 운운하는 것은 실로 그로서는 불리한 부분인데 그가 반드

    시 이걸 화제로 삼는 건 왜인가?”

    客曰: “南北極云云, 實彼自落之公案, 而彼必以此爲話頭, 何也?”

    내가 말했다. “그렇다. 그가 진실로 신중하게 궁리한다면 어찌 남북극을 가지고

    유추하여 말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땅덩어리가 육면체라 하고 남북극으로써 입지

    와 출지를 논하였으니, 그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단지 한 면에 의거하여 그 출입을

    논한다면 그 출입처의 계한(界限)은 모서리 수의 차이에 따라 알 수 있지만, 오직

    북극의 나옴과 남극의 들어감은 윗면의 경우에는 단지 한 모서리, 하나의 세계를

    사이에 두고 있고 아랫면의 경우에는 세 모서리와 세 세 개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양극이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가지런해 질 수 없을 것 같다. 만약 이 곳과 저

    곳을 통틀어 약중(約中)을 출입의 계한으로 삼는다면 네 모서리가 방정한 물체에서

    12) 주희의 ≪주자어류≫ 권1의 33조목에 나온다.

    13) 주희의 ≪주자어류≫ 권1의 33조목에 나온다.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13

    그 계한을 어디로부터 기준을 삼아 보아야 각각 36도가 된단 말인가?14)

    余曰: “然. 彼苟愼於窮格之方, 則反隅之端, 何待南北極而後可喩也? 但彼以地段作六面方

    正之物, 而以南北兩極, 論其入地出地, 未知彼意. 只據一面而論其出入, 則其出入處界限, 從

    稜角差分曉, 而獨北極之出, 南極之入, 上面則只隔了一稜角一世界, 下面則便隔了三稜角三

    世界, 兩極相距長短, 似不成齊整. 若通彼此, 約中爲出入界限, 則四稜方正之物, 其界限, 從

    何所準觀, 以爲各三十六度云耶?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땅을 하나의 얇은 판자라 한 후에야 그 피차의 도수를 바

    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육면 세계는 사면 세계를 줄일 수밖에 없게

    되니 남는 것은 단지 이 곳과 저 곳 두 개의 양면만 있게 될 따름이다. 그가 이를

    바라겠는가? 또한 이 양극은 이미 하늘의 양쪽 끝을 지탱하고 있고 해와 달은 항상

    양극의 가운데에서 왼쪽으로 돌고 있다. 상하 동서 사면의 세계라면 진실로 낮밤의

    밝고 어두움이 있지만 남북 두 세계의 경우에는 해와 달이 사방의 산꼭대기에서 오

    랫 동안 횡으로 돌아서 만고를 통틀어 낮도 없고 밤도 없어야 할 것이다. 천지간에

    이 또한 바뀔 수 없는 이치가 될 수 있겠는가?”

    不然則必把地作一薄板子, 而後可準其彼此度數, 而但如此, 則六面世界, 不免减了四面,

    見在者只彼此兩面耳. 彼無乃不欲乎? 又此兩極, 旣持天之兩端, 而日月常周繞左旋於兩極相

    去之中央矣. 上下東西四面世界, 則固有晝夜明暗, 而至於南北頭二面世界, 則日月似應長時

    橫繞於四際山頭, 通萬古無晝無夜矣. 未知天地間, 此亦爲不易之理事耶?”

    14) 이간은 땅을 육면체로 볼 경우 하늘의 북극과 남극을 잇는 우주의 축이 휘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

    다. 일상의 관측에 따르면 하늘의 북극은 지평선 위로 36도 올라가 있고, 남극은 36도 아래에

    숨어있다. 그런데 이 수치를 육면체 모델에 적용하면 하늘의 북극과 남극을 잇는 축이 직선을

    이루지 못하고 굽어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그 결과 우리 세계에서 보면 남북 양극이 땅의 한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아래 쪽 세계에서 보면 땅의 세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

    져 있는 형국이 된다. 이간은 우주가 이렇게 비대칭적인 모습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늘의

    회전축인 북극과 남극은 일직선을 이루어야 하며, 그러려면 땅의 모양 또한 전통적인 상식에

    따라 얇은 판자 모양이어야 했다. 임종태, 앞 논문, 98쪽.

  • 객이 말했다. “그대가 변론한 것 또한 좋다고 하기 어렵다. 지금 어찌 반드시 끝

    장을 보아 여지를 남기지 않는가? 그냥 남겨두고 한가한 날에 심심풀이거리로 삼

    는 것이 옳은 듯하다. 다만 그의 이러한 주장이 생겨난 근원이 있는가?”

    客曰: “子之所辨正, 亦好則劇. 今何必傾倒, 使無餘味也? 留爲暇日破閑之資, 可矣. 而但

    彼一初所從而入處, 厥有源委乎?”

    말했다. “명나라 때 구라파에서 온 마테오리치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천하를

    두루 돌아보면 중국 세계 같은 것이 5개가 더 있다’고 했으니, 이것이 육면세계설의

    시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연행 가서 그 말을 듣고 왔는데, 우리 당 중에서도 신

    백겸이 그 설의 허탄하고 고원하여 거리낌 없음을 가장 먼저 좋아하여 곧 궁리의

    재료로 삼았다. 또한 마테오리치의 본래 설을 짐짓 숨기고 채서산(蔡元定)이 ‘땅 위

    가 곧 하늘이다’15)라고 한 것을 화두로 삼아 벗들을 은근히 깨우치면서 말하기를

    ‘이 말에는 정밀하고 오묘한 의리가 담겨 있으니 사람들이 그 원리를 궁구하여 핵

    심에 이르면 부지불식간에 손과 발이 춤을 추게 된다.’라 했다.

    曰: “皇明時, 歐邏國有利瑪竇者, 自謂博觀天下, 則有如中國世界者, 又有五焉, 此其說宗祖

    也. 嚮者東人之燕行者, 得其說而來, 吾黨中申伯謙, 首喜其虛遠無礙, 便把作窮格材料. 而又

    姑隱其本說, 乃以蔡西山‘地上便是天’五字作話頭, 綽略點醒於士友曰: ‘此語自有精義妙理, 使

    人推索到頭, 則自不覺手舞足蹈.’

    대개 서산의 본지는 ‘하늘은 막다른 데 이른 후에야 하늘이라 하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 떨어지자 마자부터 하늘에 속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정자께서 이른바 ‘천

    지간에 있는 모든 기는 하늘이 아닌 것이 없고, 형체가 있는 모든 것은 땅이 아닌

    것이 없다.’16)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신백겸이 이른바 ‘정밀하고 오묘한 의리’

    15) 주희의 ≪주자어류≫ 권1의 29조목에 나온다.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15

    라는 것은 채서산의 말이나 정자의 말씀이나 모두 육면세계와 통한다는 것이고 이

    육면세계설로 그들의 말을 활간(活看)해야 한다는 것일 따름이다. 이에 복희의 선

    천방원도(先天方圓圖)와 주역대전의 ‘하늘은 존귀하고 땅은 비천하다’17)는 말과 주

    렴계(周敦頤)의 태극 음양의 설을 모두 한결같이 활간하여 책이 나온 이래로 모든

    성현의 말씀이 상하가 없는 육면세계설이 아닌 것이 없으며, 오직 그 말하지 않은

    정묘한 부분과 전하지 않은 비밀만을 자신이 이야기한 것이라고 했다. 까닭에 그가

    이른바 ‘손과 발이 춤춘다.’는 것이 이것이요, 이른바 ‘이것이 의리의 핵심이고 여

    기에 상합하면 합하지 않을 곳이 없다.’라 하는 것도 이것이며, 이른바 ‘친구들 중

    에 송백순(송일원)과 성달경(성만징)은 말하면 바로 나와 뜻이 맞으니 공경할 만하

    다.’고 한 것도 또한 이것이다.

    盖西山本旨, 則謂‘天不到穹然而後天也, 纔離地上便屬天’, 此程子所謂‘天地間, 凡有氣莫非

    天, 凡有形莫非地’之義也. 而今伯謙所謂精義妙理, 則乃在通彼此, 六面世界, 皆可以此活看

    云耳. 於是, 以伏羲先天方圓之圖, 大傳天尊地卑之句, 濂翁太極陰陽之說, 一例滚入於活看

    而後, 凡自載籍以來, 諸聖賢之言, 莫非無上下六面世界之說, 而惟其不言之妙, 不傳之秘, 則

    實自渠發之云, 故自家所謂‘手舞足蹈’者此也, 自家所謂‘此是義理大頭腦, 於此相合, 則無處不

    合’者此也, 自家所謂‘朋友中宋伯純成達卿言下卽契可敬云’者, 亦此也.

    한영숙은 또한 그것을 가장 돈독하게 믿는 사람으로 백겸을 위해 지은 제문에서

    ‘정자께서 천지가 어디에 있는가라고는 하셨어도 그것이 있는 곳은 말씀하지 않았

    는데 700여년 뒤에 노형이 이를 말했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이른바 ‘말했다.’고

    하는 것은 곧 상하가 없는 육면세계의 설이다. 그 근원과 본말에 내력이 있으나 요

    컨대 미혹되고 잘못되어 허황되다고 할 수 있으니 진실로 객이 말한 바와 같다.

    而至於永叔, 則又其篤信之尤者, 其祭伯謙文, 乃曰: ‘程子言天地安在, 而未嘗言其在處,

    16) 정호․정이의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 권6에 나온다.

    17) ≪주역(周易)≫ 상에 나온다.

  • 七百有餘年之後, 老兄言之,’ 所謂‘言之’者, 卽無上下六面世界也. 此其源委本末, 煞自有來歷,

    而要之全丳, 盖不出於‘迷謬虛眩’四字, 誠如客之所言矣.

    대저 그가 이렇듯 두서없이 변론한 것은 유학자들이 실제 일을 궁리하는 데에 그

    들의 총명함을 어지럽게 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요즈음 친구들 중에 오직 윤

    회보(윤혼)를 제외하고는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사람들(현언명-현상벽과 최성중-

    최징후)도 의심을 품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이상하고 개탄할 만한 일이다. 나는 오

    직 신백겸의 설에 대해서만 자세하게 변론하였는데 그가 그렇게 말을 잘 하면서도

    끝내 나에게 한마디도 대응을 하지 않았으니, 혹 백겸의 경우에는 이미 그 사이에

    마음을 돌이켰는데 한영숙만 홀로 끝내 백겸이 버린 설을 지켜서 그가 죽고 난 후

    에도 제문을 지어 질문을 하는 데 이른 것이 아닌가?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객이 알았다고 하고 물러났다. 그 전말을 기록하여 로 삼는다.

    凡於儒者, 窮格實事, 粗辨頭緖者, 則固未足以疑亂其聰, 而同時士友, 惟一尹晦甫外, 靡然

    聽瑩, 其不至甚者(玄彦明,崔成仲), 亦常抱不决之疑, 此眞可異而可慨矣. 余之前後辨難,

    獨詳於伯謙, 而夫以伯謙之雄辯, 終不以一言對辨, 無或伯謙則已有所取舍於中, 而永叔獨死

    守其筌蹄, 至質於存亡之際耶? 是未可知也. 客唯唯而退. 因錄其顚末, 以爲天地辨後說.

    땅은 물 위에 실려 있다는 주자의 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이와 같

    다면 해와 달이 반드시 물과 부딪히면서 운행하는데 햇빛이 어찌 달에 이를 수 있

    겠는가?”라 하는데, 이것은 그가 자신있게 주장하는 내용이다. 그림을 그려보면 하

    늘과 땅의 구분이 자재하고 해와 달의 운행은 원래 땅과 물의 범위 밖에 있다는 것

    이 밝게 드러나고, 또한 지면은 정확히 하늘의 중앙에 해당하기 때문에 남북극과

    지면의 각도, 그리고 피차의 거리와 도수가 딱 들어맞는 것 또한 이에 근거하면 손

    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명확하다. 또 그가 이야기하는 육면세계에서 동지 하지

    가 서로 배합한다는 설에 대해서도 그림을 그려 그 득실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으

    므로 함께 그려서 아래에 붙여 놓는다.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17

    朱子地載水上之說, 彼旣聽瑩, 以爲“如此, 則日月必衝水而行, 日光安得被月之魄乎”, 此其

    大拍頭也. 聊作圖子, 以明其天與地界分自在而日月之行本在地水匡郭之外, 又地面, 正當天

    之中央, 故南北極出地入地及彼此相距度數之恰準者, 亦據此, 可指諸掌上矣. 又彼所謂六面

    世界, 冬夏兩至相配之說, 不可不作圖以觀其得失, 故並著于下方.

    * 그림 첨부할 것

    햇빛이 달에 다다르는 그림

    日光被月魄圖

    * 그림 첨부할 것

    육면 세계에 겨울과 여름, 동지와 하지가 배치되는 그림

    六面世界冬夏兩至相配圖

    그의 설에 의거하여 시험 삼아 이 그림을 그렸지만 작게 잘리고 조각조각 분열되

    어 천지의 모양 같지 않으니 어떠한가? 겨울과 여름의 여섯 달이 서로 짝지어 순

    환하면 봄과 가을의 여섯 달이 들어갈 틈이 없으며, 봄과 가을의 여섯 달이 서로

    짝지어 순환하면 겨울과 여름의 여섯 달 또한 들어갈 틈이 없다. 그렇지 않고 겨울

    과 여름의 여섯 달과 봄과 가을의 여섯 달이 서로 번갈아 출입한다고 하면, 지금

    이 그림에 의거하여 말해보자면 저 5월 하지와 11월의 동지의 칸에는 네 개의 중

    월(仲月)이 매번 상치하고 맹월(孟月)과 계월(季月)의 칸에는 맹월과 계월이 매번

    상치하니 일년 안에서 하나의 칸에 만나는 것이 원래 단지 네 달의 절기 뿐인가?

    그렇지 않고 이것과 저것을 통틀어 중간을 나눠 단지 하지와 동지로 분배한다고 한

  • 다면 그 겨울과 여름이 서로 나뉘는 곳에서는 한 사람의 몸 중에 왼쪽은 화로를 끌

    어안고 오른쪽은 부채를 부치는 격이 되고 또 그것이 머리를 나란히 하여 몰려드는

    곳은 한 몸의 전후좌우에 12 달 24 절기가 일시에 모여드는 격이다. 소자(소옹)가

    이른바 ‘만고천금(萬古千今)’에 또한 어찌 이와 같은 이치와 일이 있을 수 있겠는

    가?

    一依彼說, 試爲此圖, 而但區區阻絶, 片片分裂, 不似天地貌㨾, 奈何? 冬夏六朔相配循環, 則春秋六朔, 無隙可入, 春秋六朔, 相配循環, 則冬夏六朔, 亦無隙可入矣. 不然而謂冬夏六朔

    與春秋六朔, 迭相出入而遞番云, 則今據圖言之, 這五月十一月間架, 則四仲月每每相値, 孟

    季月間架, 則孟季月每每相値, 一年之內, 一間架所値者, 元只四朔之候乎? 不然而謂通彼此

    約中, 只以夏至冬至分配, 則其冬夏相界處, 一人之身左邊擁爐, 右邊搖扇, 又其齊頭輻輳處,

    則一身前後左右, 十二氣二十四候, 一時並萃矣. 邵子所謂萬古千今, 又寧有如此底理事乎?

    위의 설은 곧 병술년(1706) 겨울에 지은 것이다. 천지에 상하가 없다는 논의는

    내가 한영숙에게 처음 들었는데 그것은 원래 백겸이 주장한 것이었다. 영숙은 나

    와 계속 만났으므로 서로 논쟁하면서 하지 않은 말이 없었지만 처음부터 글로 남겨

    놓은 것은 없었다. 백겸은 나와 얼마간 떨어져 살았으므로 편지로 질문한 것이 수

    천 자가 넘지만 그는 한 번도 조목조목 대답하지 않고 매번 단지 “고요한 밤에 산

    창(山窓)에서 조용히 생각하고 완색한다.”고만 하였기 때문에 이 또한 웃고 내버려

    둔 것이다.

    右說, 乃丙戌冬所錄也. 天地無上下之論, 余始聞於永叔, 而原其所出, 則盖自伯謙而發之

    也. 永叔則尋常會合, 故其相對辨難之辭, 固亦無所不至, 而初無現成於紙墨者. 惟伯謙, 相住

    稍間, 故輒以書質問者, 不啻屢數千言, 而彼一無條答, 每只曰: “山窓靜夜, 默念而玩索云”,

    故此亦笑而置之矣.

    을유년(1705) 여름에 영숙이 이른바 ‘한가로운 때에 문답한 것’이라고 보내니 또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19

    한 단지 예전에 대화한 것을 모아놓은 것으로서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병술년

    (1706) 여름에 한영숙이 백겸에 대한 제문을 지었는데 여기에서 비로소 그의 정론

    을 이야기했다. 그해 겨울 간략하게 문답 형식을 빌어 이 후설을 지었다. 처음에는

    영숙에게 보내 토론하려 했지만 돌이켜보니 서로 동의하지 않는 논설을 보내봐야

    도움이 되지 않겠다 싶어 그만두었다. 몇 년이 되지 않아 두 친구들이 모두 고인이

    되어 버렸으니, 아! 슬프도다.

    乙酉夏, 永叔以所謂‘餘暇問對’者投示, 亦只收拾其前日對話者, 而無甚別說. 至丙戌夏, 祭

    伯謙文出, 則此始審其爲實見定論也. 其冬, 略設問答, 作此後說. 初意欲送永叔相質, 而旋念

    此不相入之說, 送之亦似無益而止矣. 未數年, 二友俱作古人, 嗚呼噫矣.

    지금 옛 궤짝 속에서 우연히 이 종이를 발견하고 꺼내 원래 글을 보니 (육면 세

    계설은) 이미 백겸에게 보낸 편지에 상세하기 때문에 이것은 곧 그에 대한 후설이

    다. 문장을 약간 고치고 여기에 수록하여 옛 친구들의 평소 모습을 그려보고자 하

    나 오직 그 원래의 변론이 애초부터 초고로 남은 것이 없는 상황이 한스럽다. 그리

    고 백겸 측에 있었던 것 또한 장례를 치루고 이장하는 통에 산실되어 끝내 다시 징

    험할 방도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강의 본말은 단지 이 설에 근거하여도 하나

    둘은 미루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붕우 가운데 아직 살아있는 자들이

    이를 다시 살펴 읽는다면 그가 가리키고 가르치려한 바가 또 어떤 학설에서 나왔는

    지 모르겠는가?

    계묘년(1723) 삼짇날 다음날에 쓰다.

    今於舊篋中, 偶檢出此紙, 盖其原辨, 則已詳於伯謙書, 故此乃其後說也. 語句間, 略加點

    刪, 聊爲收錄於此, 要以當故友平日之顔面, 而獨恨夫原辨此初無留草者. 其在伯謙邊者, 亦

    散失於死喪遷移之際, 卒無復可徵矣, 然其梗槩本末, 只據此說, 亦可以推見一二. 顧今朋友

    之見存者, 若復省覽於此, 則其所指敎之者, 又未知出於何說耶歟? 癸卯上巳後日書.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21

    이이(李珥)의 ‘이통기국’에 대한 논변[理通氣局辨]18)

    계사(癸巳)년, 숙종 39년(1713)

    ‘이통기국’ 네 글자는 율곡(李珥) 선생께서 리와 기의 큰 근원을 통찰하신 것으로

    이기론에 대한 탁월한 길잡이이다. 선생의 주장은 우계 선생과 주고받은 편지19)에

    갖추어져 있는데, “리와 기는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바

    로 그 핵심이다. 원래 서로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형체․본말․선후가 없는 것이 리의

    ‘통’이고, 형체․본말․선후가 있는 것이 기의 ‘국’이다. 이것이 바로 이통기국의 핵심

    에 대해 명명백백하게 밝힌 것이다.

    ‘理通氣局’四字, 此栗谷先生洞見大原, 逈出常情之大端也. 其說具在原書, 而“理氣元不相

    離”一句, 卽其頭腦也. 元不相離中, 無形而無本末無先後, 理之通也, 有形而有本末有先後,

    氣之局也. 此卽其頭腦上八字打開者也.

    율곡 선생의 뜻은 천지 만물은 기국이고 천지 만물의 리는 이통이지만, 이른바

    ‘이통’이라는 것은 기국과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기국에 나아가 기국과 섞이

    지 않는 그 본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지금 수암선생의 20)는 곧 이통을 따로 뽑아 위쪽에 그리고, 또 기국을 아래 쪽에 따로 그려서 두

    개의 동그라미로 잘라서 그렸으니, 상하가 분명히 나뉘어져서 이통은 기국의 앞에

    18) 이이(李珥)의 ‘이통기국’에 대한 논변 [理通氣局辨] : 이 글은 1713년(숙종 39, 37세)에 작성된

    것이다. 이간은 이 글에서 이이가 리와 기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면서 제시한 ‘이통기국(理通氣

    局)’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권상하와 한원진에 맞서 이통기국에 대해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이이의 대표적인 주장에 대한 양자의 해석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어

    율곡학파의 분기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19) 이이의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0의 에 나온다.

    20) 수암선생의 [先生]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5의 에 보면 천명도를 받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 천명도가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있고, 기국은 이통의 밖에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리, 하나의 기 사이가

    너무 심하게 떨어지니, 율곡선생의 설이 어찌 이렇겠는가?

    盖栗谷之意, 天地萬物, 氣局也, 天地萬物之理, 理通也, 而所謂‘理通’者, 非有以離乎氣局

    也, 卽氣局而指其本體不雜乎氣局而爲言耳. 今先生, 則乃以理通, 爲一頭地, 而圖

    於上方, 又以氣局, 爲一頭地, 而圖於下方, 截然作兩箇圈子, 上下截拍分明, 理通在氣局之

    先, 而氣局在理通之外矣. 一理一氣之間, 離之無乃已甚, 而栗谷之說, 曷嘗有如此者哉?

    심지어 ‘태극’과 ‘천명’을 사람과 만물이 아직 태어나기 전의 천(天)의 리라 하여

    이통의 권역에 두고 그것을 곧 명(命)이요 근원[源, 源頭]이라 하고, ‘오상’과 ‘물성’

    을 인물이 이미 태어난 후의 사물의 리라 하여 기국의 동그라미를 메우고 그것을

    곧 성이요 유행[流行, 流]이라 하니, 이 무슨 말인가?

    至於以太極天命, 爲人物未生時在天之理, 而安於理通節拍, 卽命也源也. 以五常物性, 爲

    人物已生後在物之理, 而塡於氣局圈子, 卽性也流也, 此何謂哉?

    태극과 오상은 단지 리이다. 천하의 사물 중에 리보다 더할 것이 없으므로 ‘극

    (極)’이라 한 것이고, ‘태(太)’는 그것을 높이는 말이다. 천하의 변화무쌍한 현상 속

    에서도 그 리를 변하게 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상(常)’이라 한 것이고, ‘오(五)’는

    그 숫자를 일컫는 것이다. 천에서는 태극은 되지만 오상은 될 수 없으며 물에서는

    오상은 되지만 태극은 될 수 없는 이치가 천하에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아직 태어나기 전이면 태극은 되지만 오상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이미 태어나면 오

    상은 되지만 태극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치가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이통기국’이 아직 태어나기 전과 이미 태어난 후, 원(源)과 류(流)로 나누어 이름붙

    인 것이겠는가? 천이 없으면 성이 나올 수 없고 물이 없으면 명이 부여될 곳이 없

    으니, 성이란 것은 물에만 있고 천에는 없으며, 명이란 것은 천에만 있고 물에는 없

    는 것인가? 비록 일물(一物)에 근본하더라도 천에 있는 것은 명이라 하고 성이라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23

    할 수 없고 물에 있는 것은 성이라 하고 명이라 할 수 없다면 반드시 천과 물이 둘

    다 존재한 후에라야 비로소 성과 명이 갖추어질 것이다.

    太極五常, 只理也. 天下之物, 無加於理, 故謂之‘極’, 而‘太’其尊辭也. 天下之變, 不易其

    理, 故謂之‘常’而‘五’其名數也. 天下豈有在天則爲太極而不得爲五常, 在物則爲五常而不得爲

    太極之理哉? 亦豈有未生則爲太極而不得爲五常, 已生則爲五常而不得爲太極之理哉? 況‘理

    通氣局’, 是未生已生源流之名歟? 無天則性無所出, 無物則命無所寓, 不知性者在物而不在

    天, 命者在天而不在物乎? 雖本一物, 而在天爲命而不得謂之性, 在物爲性而不得謂之命, 則

    必天與物兩存而後, 性命方備矣.

    그러나 선후의 시간은 병립할 수 없으니, 비록 천하에서 뛰어나게 지혜로운 자라

    하더라도 태어나기 전의 명과 태어난 후의 성을 어찌 일시에 병존시킬 수 있겠는

    가? 그렇다면 이른바 ‘성’과 ‘명’은 전․후로 나뉘는 것이 될 수밖에 없게 되고 ‘이통’

    과 ‘기국’이란 것 또한 마땅히 고(古)와 금(今)의 일로 나뉘게 될 것이다. 정말 그러

    한가?

    但時之不可並者, 先後也, 未生之命, 已生之性, 雖天下之絶智, 豈得以並存於一時也? 然

    則所謂‘性命’者, 未免爲前後之物, 而‘理通氣局’者, 亦當爲古今之事矣. 是然乎?

    만약 “사람과 만물이 성을 받은 후에 따로 태어나기 전의 명이 있어 사람과 만물

    의 심에 모두 나란히 병립한다.”고 한다면 일성(一性)과 일명(一命)이 겹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만약 “사람과 만물이 성을 받은 것 이외에 따로 태어나기 전의

    명이 있어 하늘에서 주장하고 추동한다.”고 한다면 바로 또한 하늘과 땅이 곧 황홀

    하고 괴이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 몇 가지 설 이외의 것들이 곧 나의 설이다. 그렇

    다면 만물이 태어난 것은 유행이 되고 태어나게 한 것은 근원이 되며 천지는 태어

    나게 하는 것이고 만물은 태어난 것이니, 태극과 천명은 근원이 되고 오상과 물성

    은 유행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 如曰: “人物受性之後, 別有人物未生之命, 齊頭並立於人物之心”, 則一性一命, 未免重倂疊

    積. 如曰: “人物受生21)之外, 別有人物未生之命, 主張機緘於太空之中”, 則一霄一壤, 正亦

    怳惚疑怪. 外此數者, 則卽鄙說矣. 然則凡物之生者爲流, 而生之者爲源, 天地是生之者, 而萬

    物是生者也, 太極天命之爲源, 五常物性之爲流, 其謂是歟?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천지는 진실로 만물의 아버지이지만, 천명도 과연 오상

    의 아버지인가? 만물은 진실로 천지의 아들이지만 오상도 정말 태극의 아들인가?

    아버지의 경우에는 ‘통’이라 하고 아들의 경우에는 ‘국’이라 한다면 어디에 그 무형

    함이 있겠는가?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고 근원이 있고 유행이 있는데 어디에 그

    본말이 없고 선후가 없는 것이 있겠는가? 게다가 천지가 진실로 만물을 낳고 원기

    가 또한 천지를 낳는데 이렇게 되면 원기가 이통(理通)이 되고 천명이 도리어 기국

    (氣局)이 되는 것인가? 만물이 진실로 천지에서 생겨나고 만물은 또한 만물을 낳을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앞의 만물은 태극이 되고 뒤의 만물은 오상이 되는 것인

    가? 천지의 앞에 여러 천지가 있고 만물의 뒤에야 비로소 만물이 생겨나는데, 그렇

    다면 태극과 오상은 본래 정리(定理)가 없고 이통기국(理通氣局)은 특정하게 가리키

    는 것이 없게 되니, 이것들이 낳고 낳아진 바의 사이에 선전하는 ‘허위(虛位)’에 불

    과한 것이란 말인가?”

    曰: “天地固萬物之父也, 天命, 果五常之父乎? 萬物, 固天地之子也, 五常, 果太極之子

    乎? 在父則通, 在子則局, 惡在其無形乎? 有父而有子, 有源而有流, 惡在其無本末無先後

    乎? 況天地固生萬物, 而元氣又生天地, 到此則元氣爲理通, 而天命反爲氣局歟? 萬物固生於

    天地, 而萬物又能生萬物, 到此則先萬物爲太極, 而後萬物爲五常歟? 天地之先, 有多少天地,

    萬物之後, 有方生萬物, 然則太極五常, 本無定理, 理通氣局, 元無定指, 不過爲生與所生之

    間, 禪傳之虛位歟?”

    21) 인물수생(人物受生) : ‘生’은 ‘性’의 오자인 듯하다.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25

    어떤 이가 말했다. “기로 말하면 천 또한 기이니, 그 천이 기국에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리로 말하면 원래 기와 떨어지지 않는 것이니 그

    리가 허공에 걸려서 고립될 수 없는 것 또한 명백하다. 그렇다면 수암 선생의 뜻은

    또한 이 기국에 나아가 겸지한 것을 오상이라 하여 아래에 그리고 단지한 것을 태

    극이라 하여 위에 그린 것에 불과하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런 것이지 실제로 양자를 그렇게 떼어놓고 설명하려 한 것은 아니다. 그대는 어

    째서 말 꼬투리를 잡아 뜻을 흐리면서 이 그림에 대해 그토록 심하게 문제제기하는

    것인가?”

    或者曰: “以氣言則天亦氣也, 其不能獨尊於氣局也審矣. 以理言則元不離氣, 其不能懸空而

    孤立也亦明矣. 然則先生之旨, 亦不過卽此氣局, 以兼指者爲五常而圖於下, 以單指者爲太極

    而圖於上. 作圖不得不然, 而其實非以此離彼而言也. 子何執辭迷旨, 深病於是圖歟?”

    대답했다. “설사 그대의 말과 같다 하더라도 그 겸지한 것은 오상이 되고 단지한

    것은 태극이 되는데, 이미 모두 의혹이 더 해진다. 주자께서 ‘성은 형이상자로 태극

    이 혼연한 본체이고 그 커다란 강리(綱理)를 인의예지라 한다.’22)고 하셨으니, 이에

    근거한다면 태극과 오상이 어찌 단지(單指)와 겸지(兼指)로 나눌 수 있는 것이겠는

    가? 또한 사람은 인의롭고 소와 말은 밭 갈고 짐을 싣는 등 정연하게 조리가 있으

    니, 이는 실로 천명의 정분(定分)이 그런 것이다. 이외에 다시 단지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물며 선생께서는 본디 ‘태어나기 전’과 ‘태어난 후’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말씀하셨으니 단지와 겸지가 어찌 이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는가?”

    曰: “縱如子言, 其兼指爲五常, 單指爲太極, 已是大家疑晦矣. 朱子曰: ‘性形而上者, 是太

    極渾然之體, 而綱理之大者曰仁義禮智.’, 據此則太極五常, 豈可以單指兼指分張之物乎? 且

    人而仁義, 牛馬而耕載, 井然而有條, 此實天命之定分然也. 外此而復所單指者, 果何物歟? 況

    先生之敎, 本以‘未生’‘已生’爲言, 則單指兼指, 曷嘗干涉於是哉?

    22) 주희의 ≪회암집(晦庵集)≫ 권58의 에 나온다.

  • 어떤 이가 말했다. “천명지성, 천지지성, 본연지성은 모두 단지한 일설이다. 인

    물지성, 기질지성의 경우에는 그 일설 중에 또한 구별이 없을 수 없겠는가?”

    或者曰: “天命之性, 天地之性, 本然之性, 是皆單指之一說也. 至於人物之性, 氣質之性,

    則是一說之中, 又不能無別耶?”

    내가 말했다. “이 또한 일설이다. 원래 기질지성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예컨대 사람이 인의롭고 소가 밭을 갈고 말이 짐을 싣는 것은 기질이 치우치고 온

    전함에 따른 큰 구분이고 선 일변에 나아간 것이다. 사람이 불인 불의하고 소와 말

    이 밭 갈고 짐을 싣지 못하는 것은 치우치고 온전한 구별 중에 세분되어 악 일변에

    나아간 것이다. 지금 그 큰 구분으로써 ‘인물지성’이라 하고 세분한 것을 ‘기질지

    성’이라 하여 둘로 구별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잘못된 것이다.”

    曰: “是亦一說也. 元來氣質之性, 也有善, 也有惡. 如人之仁義, 牛耕馬載, 是偏全之大分,

    而卽善一邊也. 其不仁不義不能耕載, 是偏全中細分, 而卽惡一邊也. 今以其大分謂‘人物之

    性’, 細分謂‘氣質之性’, 別而二之, 則誤之亦無疑矣.”

    “그렇다면 자사께서 말씀하신 ‘솔성지도(率性之道)’는 바로 인간은 온전하게 받은

    것이고 동물은 일부만 받은 것인데, 이것을 기질지성으로써 설명할 수 있겠는가?”

    “然則子思所謂‘率性之道’, 正是人物偏全之分也, 此可以氣質之性言之乎?”

    말했다. “그렇지 않다. 천명과 솔성 두 구절은 원래 모두 인간과 만물에 나아가

    그 성과 도를 단지한 것이다. 성은 일본(一本)이고 도는 만수(萬殊)이니, 이미 만

    수라 했으면 치우치고 온전하고 넓고 좁은 것으로 리가 같지 아니한 바이다. 그러

    나 자사의 의도는 도에 있지 일찍이 기(器)에 있지 아니하니, 어찌 여기에 기질을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27

    섞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윗 구절은 성에 대해 말한 것이고 아래 구절은 도에 대

    해 말한 것이라 체와 용의 사이에 그 구분이 자재하니, 이른바 ‘성’이라는 글자를

    여기에서 의론할 수 있는 바가 아님에 있어서랴? 주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명지

    성은 리를 전언(專言)한 것이니 만약 기를 겸하여 말한다면 솔성지도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23)’라 하셨으니, 이 구절이 만약 기질로써 말씀하신 것이라면 상

    지․하우가 모두 솔성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주자께서 어찌 나를

    속이셨겠는가? 자사의 뜻과 주자의 말씀이 이와 같은데 지금 수암선생께서는 천명

    의 성에서부터 곧바로 상지․하우의 일정한 선악으로써 말씀하시니, 이는 내가 알

    수 없는 차원의 이야기로 끝내 혼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曰: “不然, 天命率性此兩句, 本皆卽人物而單指其性道. 性則一本, 道則萬殊, 旣曰萬殊,

    則偏全闊狹, 理所不齊. 而然其指在道, 未嘗在器, 則豈可以氣質混而汨之於此哉? 況上句是

    性, 下句是道, 體用之間, 界分自在, 則所謂‘性’字, 非所可議於是者乎? 朱子曰: ‘天命之性, 是

    專言理, 若兼氣言, 則便說率性之道不去.’ 此句若以氣質言之, 則上智下愚, 擧皆率性大大說不

    去矣. 朱子豈欺我哉? 子思之旨, 朱子之言如是, 而今先生乃從頭天命之性, 直以上智下愚善惡

    之一定者言之, 此愚所以滋惑於語氷, 終不能有以自解者也.

    어떤 이가 말했다. “수암이 해석한 이통기국도 율곡의 뜻이 아니고 수암이 해석

    한 천명․솔성도 자사의 뜻이 아니라면 그대는 이 그림이 전혀 참고할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옛사람이 ‘자신할 수 없으면 스승을 믿으라.’고 했는데, 그대는

    자신하지 못하면서 어찌 조급히 스승의 설을 이와 같이 강고하게 불신하는가?”

    或者曰: “理通氣局, 旣非栗谷之意, 而天命率性, 又非子思之旨, 則子謂此圖全局, 全無可

    據者歟? 古人曰: ‘不能自信, 信其師.’, 子非自信之時也, 何遽不信師說如是之固歟?”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진실로 남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23) 주희의 ≪주자어류≫ 권62의 44조목에 나온다.

  • 나는 자신하지 못하기에 장차 스승을 믿으려 한다. 까닭에 밤늦도록 생각하고 아침

    에 또 생각하면서 스승님의 권위와 존엄에도 불구하고 묻고 따지기를 그치지 않았

    던 것이다. 그 어리석음은 진실로 가련하지만 그 뜻은 또한 볼 만하다. 선배들의 말

    씀을 돌아보지 않고 사실을 탐구하지 않으며 그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오직 스

    승의 말씀만 믿는 것이 어찌 스승을 믿는 도이겠는가? 이 말을 함께 실어 이통기국

    변으로 삼는다.

    曰: 否否. 子誠淺之爲知言矣. 柬不能自信, 將以信師, 故中夜以思之, 平朝以念之, 干冒威

    尊, 問辨而不已. 其愚誠可憫, 而其志亦可見矣. 不稽前言, 不究事實, 不得其旨, 而惟言之是

    信, 豈信師之道哉? 並載其言, 爲理通氣局辨,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29

    미발 상태의 심체에 선악이 있다는 설에 대한

    논변[未發有善惡辨]24)

    명덕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은 것으로서 허령(虛靈)하고 밝아 중리(衆理)를 갖추

    고 온갖 일에 응하는 것이다. 기품(氣稟)에 구속되고 인욕에 가리어지면 때때로 어

    두워지기도 하지만 그 본체의 밝음은 일찍이 그친 적이 없다.【≪대학장구≫】

    明德者,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 則有

    時而昏, 然其本體之明, 則有未嘗息者. 【≪大學章句≫】

    [이간의 생각] 명덕은 성인과 범인이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저 기품에 구속

    되고 인욕에 가리어지는 것은 그 어둡고 밞음에 진실로 만 가지로 차별이 있게 되

    는 것이지만, 그 허령하고 밝은 본체만은 성인과 범인이 애초에 무슨 차이가 있겠

    는가? 그렇다면 구속되고 가리어져 때때로 어두워지기도 한다는 측면에서 미발의

    본체를 논해야 하겠는가, 아니면 본체의 밝음이 일찍이 그친 적이 없는 측면에서

    미발의 본체를 논해야 하겠는가? 이에 대해 논의하면 미발의 진정한 경계가 무엇

    이지 확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按. 明德, 是聖凡之所同得者也. 夫氣稟所拘, 人欲所蔽, 其昏明固有萬不齊矣, 獨其虛靈不

    24) 미발 상태의 심체에 선악이 있다는 설에 대한 논변 [未發有善惡辨] : 문집에 수록된 순서로 볼

    때, 이간은 1713년(계사, 37세) 을 작성하고 이 글을 쓴 후 1714년(갑오, 38세) 을 지은 듯하다. 이간은 1709년(기축, 33세) 이후 한원진과 성리설에 대한 논쟁을 하면서

    스승 권상하에게 질정을 청했는데, 1712년(임진, 36세) 권상하는 한원진의 편을 들며 이간에게

    논쟁을 그만둘 것을 지시했다. 이간은 권상하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는

    한편 1713년에서 1714년에 걸쳐 , , , (1714)

    등을 지어 자신의 이론을 정리하였다(은 1719년/기해/43세에 지음). 이간은 이 글

    에서 미발에 대한 한원진의 견해를 “미발에 선악이 있다는 논리”라고 규정하고 이를 비판하고

    있다.

  • 昧之本體, 則聖凡初何間然也? 然則未發之體, 當論於所拘所蔽有時而昏者乎, 抑當論於本體之

    明有未嘗息者乎? 於此有一轉語, 則未發眞境界, 當有不易之所在矣.

    사람의 일심(一心)은 텅 빈 거울과 평평한 저울과 같이 담연히 텅 비고 밝아 한

    몸의 주인이 되는 것으로 진실로 그 본연한 진체(眞體)이다. 그것이 외물과 감응하

    기 전에는 지극히 텅 비고 고요하니, 이른바 ‘텅 빈 거울과 평평한 저울’의 본체는

    비록 귀신이라 하더라도 그 사이를 엿볼 수가 없다.(≪대학혹문≫)

    人之一心, 湛然虛明, 如鑑之空, 如衡之平, 以爲一身之主者, 固其眞體之本然. 故其未感之

    時, 至虛至靜, 所謂‘鑑空衡平’之體, 雖鬼神, 有不得窺其際者. (≪大學或問≫)

    [이간의 생각] 사람의 일심(一心)이라 하는 것은 성인의 마음만을 가리키는 것인

    가, 아니면 사람의 마음이 아직 외물과 감응하지 않은 본체를 통틀어 말한 것인가?

    이른바 ‘미발’, 이른바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은 중(中)’, 이른바 ‘천하의 대본

    (大本)’은 텅 빈 거울과 평평한 저울과 같이 담연히 텅 비고 밝은 이 마음의 본연한

    진체에 나아가 말한 것으로, 그 말은 매우 순하여 아마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

    런데 지금 기어이 기품에 구속되고 인욕에 가리어 그 진체의 본연을 얻지 못한 바

    에 나아가 단지 그 마음이 사물과 응접하지 않은 것에만 의거하여 이를 미발이라

    한다면, 이 어찌 미발의 본지이고 그 말이 순한 것이겠는가?

    按. 人之一心云者, 獨指聖人之心歟, 抑通言人心未感之本體歟? 所謂‘未發’, 所謂‘不偏不倚

    之中’, 所謂‘天下之大本’, 就此心之湛然虛明鑑空衡平眞體之本然者言之, 其言甚順, 恐未可易

    矣. 今必就氣稟所拘, 人欲所蔽, 不得其眞體之本然者, 只據其不應接事物而謂之未發, 則此豈

    未發之本旨而其言果順乎哉?

    앞의 두 단락은 미발의 본체에 대해 경계를 구분하고 실정을 감정하는

    큰 단서이다.(右兩段, 於未發之體, 辨境界勘情實之大端也.)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31

    대저 미발에 대해서 주자께서 세 가지 맥락에서 설명하셨는데, 단지 ‘보통 사람

    들이 사물을 접하지 않았을 때’를 가지고 얕은 차원에서 미발을 말씀하신 것, ‘근원

    에 나아가 보통 사람이나 성인이나 모두 한결 같은 것’을 가지고 깊은 차원에서 미

    발을 말씀하신 것, 그리고 이 마음의 존망(存亡)으로써 얕은 차원과 깊은 차원의

    미발을 통틀어 갖추어 말씀하신 것이 있다. 이 말씀들에 대해 꼼꼼히 따져보지 않

    을 수 없으니 지금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

    大抵未發, 朱子有只以衆人之不接事物淺言之者, 有就原頭上一齊深言之者, 又有以此心存

    亡通淺深而備言之者. 其說不可不攷, 今錄于左.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기뻐하는 등의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았는데도 치우치

    고 기울어진 것[不中]은 어째서 입니까?’ 주자께서 대답하셨다. ‘이것은 기질이 혼

    탁하여 그것이 미발했을 때 단지 단단한 돌덩이 같아서 깨어도 열리지 않는 것이

    다.’”25) 또 말씀하셨다. “보통 사람이 비록 이 마음을 갖추고 있더라도 미발의 때에

    이미 스스로 어지러우니 외물과 감응할 때 어떻게 성인처럼 중절할 수 있겠는가

    ?”26)

    “‘喜怒哀樂未發而不中者, 何?’ 曰: ‘此是氣質昏濁, 其未發時, 只是塊然如頑石相似, 劈斫

    不開.’” 又曰: “衆人雖具此心, 未發時已自汨亂了, 至感發處, 如何會得如聖人中節?”

    이상은 얕은 차원에서 미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右一段, 淺言之

    者.)

    “‘≪중용≫에서 말하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하지 않은 중[未發之中]은

    25) 주희의 ≪주자어류≫ 권62의 118조에 나온다.

    26) 주희의 ≪주자어류≫ 권95의 2조에 나온다.

  • 보통 사람과 성인이 모두 같다.’ 어떤 이가 말했다. ‘보통 사람의 미발과 성인의 미

    발은 다르지 않습니까?’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미발은 다만 아직 발하지 않은 것

    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대본(大本)이 없는 것이니,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이가

    말했다. ‘보통 사람은 미발의 때에 어둡지 않습니까?’ 말씀하셨다. ‘어둡고 밝은 차

    별이 없어야 모름지기 그것을 미발이라 한다. 본원을 논하면 미발은 모두 같은 것

    이다.’”27) 또 말씀하셨다. “미발의 때에는 요·순으로부터 길거리의 사람들에 이르기

    까지 모두 한가지이다.”28)

    “‘喜怒哀樂未發之中, 衆人與聖人都一般.’ 或曰: ‘恐衆人未發與聖人異否?’ 曰: ‘未發只做

    得未發. 不然, 是無大本, 道理絶了.’ 或曰: ‘恐衆人於未發, 昏了否?’ 曰: ‘這裏未有昏明, 須

    是還他做未發. 若論原頭, 未發都一般.’” 又曰: “未發之時, 自堯舜至於塗人, 一也.”

    이상은 깊은 차원에서 미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右一段, 深言之

    者.)

    “이 마음을 보존하면 적연(寂然)할 때에는 모두 미발의 중이요, 감통(感通)할 때

    에는 모두 중절(中節)의 화(和)가 될 것이다. 마음에 보존됨이 없다면 적연은 목석

    (木石)이 될 뿐이요 대본(大本)은 서지 않음이 있을 것이고, 감통(感通)은 마구 달릴

    뿐이요 달도(達道)에는 행해지지 않음이 있을 것이다.”29)

    “此心存則寂然時, 皆未發之中, 感通時, 皆中節之和. 心有不存, 則寂然木石而已, 大本有

    所不立也, 感通馳騖而已, 達道有所不行也.”

    이상은 깊은 단계와 얕은 단계를 통틀어 미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27) 주희의 ≪주자어류≫ 권62의 115조에 나온다.

    28) 주희의 ≪주자어류≫ 권26의 16조에 나온다.

    29) 주희의 ≪중용혹문≫에 나온다.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33

    (右一段, 備言之者.)

    수암선생의 편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람의 기질은 타고나는 것으로,

    비록 미발의 때라 하더라도 좋고 나쁜 기질의 차별은 존재한다.”30)

    函丈書曰: “人之氣質, 得於有生之初, 雖未發之前, 美惡自在.”

    [이간의 생각] 사람의 기질이 타고나는 것이라는 말씀은 매우 옳다. 그러나 이

    것은 바로 주자께서 이른바 ‘기품에 구속되는 명덕’이지, ‘일찍이 쉼이 없는 허령불

    매한 본체’는 아니다. 기품에 의해 구속되는 것은 그 어둡고 밝고 좋고 나쁜 것이

    만 가지로 다르니, 이는 곧 주자께서 말씀하신 바 ‘미발이지만 중하지 않은 것’이

    다.【공자께서 말씀하신 ‘서로 가까운 성’ 이래 퇴계와 율곡께서 “성 또한 선악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의 성까지 모두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謹按. 人之氣質得於有生之初此一句, 極是. 但此正朱子所謂‘氣稟所拘之明德’也, 非‘虛靈不

    昧之本體有未嘗息’者也. 氣稟所拘, 其昏明美惡, 有萬不齊, 則此正朱子所謂‘未發而不中’者也.

    【孔子‘相近之性’以下, 退栗“性亦有善惡”者, 皆指此也.】

    이는 빈 거울과 평평한 저울과 같이 담연히 텅 비고 밝은 진체의 본연이 아니고,

    지극히 텅 비고 고요하여 귀신도 그 사이를 엿볼 수 없는 것이 아니며, 깊은 단계

    의 본원적인 미발로 성인과 범인이 모두 같은 것이 아니고, 요·순과 길거리의 사람

    이 한가지인 미발이 아니다. 만약 진실로 어둡고 나쁜 것이 심체에 자재한다면 그

    것이 미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본래 밝은 본체가 아니라는 점은 이미

    명백하지 아니한가?

    非湛然虛明鑑空衡平眞體之本然也, 非至虛至靜鬼神有不得窺其際者也, 非原頭未發都一般

    30) 권상하의 ≪한수재집(寒水齋集)≫ 권13의 에 나온다.

  • 者也, 非堯舜塗人一也者也. 若眞有昏惡者自在於心體, 則其未發與否, 則未知, 而其非本明

    之體, 則不已昭昭乎?

    ‘어둡다’ 하고 ‘나쁘다’ 하면서 또한 이를 가리켜 ‘담연하다’고 할 수 있다면 이는

    무슨 이치인가? 어둡고 나쁜 기질이 있으면, 그 거울은 이미 어둡고 막힌 것이니 어

    찌 ‘비었다’고 할 수 있겠으며, 그 저울은 이미 기울어지고 치우친 것이니 어찌 ‘평평

    하다’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진체의 본연이 어떤 개념이길래 어둡고 나쁜 것을 진

    체본연이라 할 것이며 지극히 텅 비고 고요한 것이 어떤 경계길래 어둡고 나쁜 것을

    지극히 텅 비고 고요한 것이라 하겠는가? 사물과 접하지 않은 것을 거칠게 미발이

    라 한다면 그것을 어둡고 나쁜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만, 치우치지도 기울어지지도

    않은 천하의 대본을 어둡고 나쁜 것과 결부시킨다면 이는 미발에서 리와 기가 그 실

    질을 달리하고 심과 성이 달라지는 것이다.31) 문제가 있지 않겠는가?

    曰‘昏’曰‘惡’, 而又可以‘湛然’目之, 是甚情理耶? 昏惡自在, 則其鑑也已昏塞矣, 何可謂‘空’

    也, 其衡也已敧側矣, 何可謂‘平’也? 況眞體本然, 是何等名實, 而以昏惡者爲眞體本然, 至虛

    至靜, 是何樣境界, 而以昏惡者爲至虛至靜歟? 以不接事物粗謂之‘未發’, 則昏惡固未害也, 至

    以不偏不倚天下之大本而安泊於昏惡, 則是理氣殊實, 心性異致矣. 無乃未安乎?

    대저 심의 본체를 논하면서 한편으로는 ‘텅 비고 신령하며 두루 밝다.[虛靈洞徹]’

    라고도 하고, 한편으로는 ‘신령하고 밝아 헤아릴 수 없다.[神明不測]’라고도 하며,

    “본심은 원래 선하지 않은 경우가 없으니, 선하지 않은 것도 심에서 나오기는 하지

    만 이것이 심의 본체는 아니다.”라고도 한다.

    大抵論心之本體者, 一則曰: “虛靈洞澈”, 一則曰: “神明不測”, 又曰: “本心元無不善, 其不

    31) 리와 기가 그 실질을 달리하고 심과 성이 달라지는 것 [理氣殊實, 心性異致] : 이간은 “이기동실(理

    氣同實), 심성일치(心性一致)”를 중요한 테제로 제시하면서 리와 기가 실질적으로 같게 되고

    심과 성이 일치하는 경지를 추구하는 것을 수양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미발이란 바로 이러한

    경지라고 주장하며 미발을 단지 외물과 접하기 전의 상태로 이해하는 한원진과 대립했다.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35

    善者, 亦出於心而非心之本體也.”

    무릇 심은 하나이다. 그 어둡고 밝고 좋고 나쁜 것이 비록 만 가지로 다르다 하

    더라도 그 차이는 또한 마음을 보존하고 잃어버리는 사이를 뛰어넘지 않는다. 진

    실로 그 ‘텅 비고 신령하며 두루 밝고’ ‘신령하고 밝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마음

    속에서 주재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주자께서 말씀하신 ‘이 마음이 보존되어 적

    연할 때에는 모두 미발의 중이 된다.’는 것이고, ‘본심은 원래 선하지 않음이 없다.’

    는 것이다. 두루 밝고 신령스럽고 밝다면 이미 밝은데 어디에서 다시 어둠이 있을

    수 있으며, 원래 선하지 않음이 없다면 이미 선한 것인데 악이 어디에서 다시 드러

    나겠는가?

    마음 속에서 주재하지 못하면 이는 바로 주자께서 이른바 ‘심이 보존되지 않으면

    적연(寂然)하여 목석(木石)일 뿐’이라는 것이고 ‘대본(大本)에 서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이다. 어둠과 밝음이 뒤섞여 있는 것인데 어찌 ‘진체’라 할 수 있으며 선악이 고

    르지 않은데 어찌 ‘본연’이라 할 수 있겠는가?

    夫心一也, 其昏明美惡, 雖有萬不齊者, 而其分亦不越乎存與亡之間也. 苟其虛靈洞澈, 神

    明不測者, 爲能主宰於中, 則此正朱子所謂‘此心存而寂然時, 皆未發之中也’, ‘本心元無不善’

    者也. 洞澈神明, 則已明矣, 昏何所復在, 元無不善, 則已善矣, 惡何所復見?

    不能主宰於中, 則此正朱子所謂‘心不存, 則寂然木石而已’者也, ‘大本有所不立’者也. 昏明

    雜糅矣, 何可謂‘眞體’也, 善惡不齊矣, 安得爲‘本然’也?

    “오직 외물과 아직 접하지 않아 기가 용사(用事)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성은 담연

    하고 선하기만 한 것이다.”32) 또 말씀하셨다. “기질은 심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33)

    【앞에서 인용한 문단에 이어서 수암선생의 편지이다.】

    32) 권상하의 ≪한수재집(寒水齋集)≫ 권13의 에 나온다.

    33) 권상하의 ≪한수재집(寒水齋集)≫ 권13의 에 나온다.

  • “惟其外物未接, 氣不用事, 故本性湛然, 有善無惡.” 又曰: “氣質, 指心而言也.”(連上段,

    並函丈書.)

    [이간의 생각] “기가 용사하지 않는다.”는 이 한 구절은 본래 주자의 말씀이다.

    겹겹이 의미의 층이 있어 진실로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만약 단지 외물과 접하

    지 않은 것을 기가 용사하지 않는다고 하여 ‘미발’이라 한다면 어찌 보통 사람만 그

    렇겠는가? 비록 흉악한 도척과 장교의 무리나 어리석은 금수들이라 할지라도 외물

    을 접하지 않을 때는 많을 것이니, 그렇다면 자사께서 이른바 ‘미발의 중’은 도척․

    장교, 금수도 항상 가지고 있는 것인가?34)

    보통 사람의 마음은 비록 사물과 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둡지 않으면 방종하

    게 된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모두 아울러 가리켜 미발이라고 말한다면,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어두움이 없고 방종함이 없는 것이 바로 거울처럼 텅 비고 저울처럼 평

    평한 진체의 본연인데, 이른바 ‘자재(自在)하는 악’은 이때에 어디에 자재한단 말인

    가? 하물며 완전히 어둡고 진짜 악한 것이 그 속에 자재하겠는가?

    按. “氣不用事”此一句, 本朱子語也. 有幾重關鎖, 誠未敢容易打透, 而但若以不接外物爲氣

    不用事而謂之‘未發’, 則豈惟衆人也? 雖跖蹻之凶, 禽獸之頑, 不接外物之時亦多矣, 然則子思

    所謂‘未發之中’, 是跖蹻禽獸之所常有乎?

    衆人之心, 雖不接事物, 而不昏昧則便放縱. 若竝指此而爲言, 則方寸之地, 無一分昏昧, 無

    一分放縱, 這正是鑑空衡平眞體之本然也, 所謂自在之惡, 此時自在於何面耶? 況純昏眞惡,

    自在裏許?

    그리고 위에서 말씀하신 ‘성리는 담연히 순선한 것이다.’라는 것은 이것이 만약

    사물의 원리를 널리 논하고 그 기와 뒤섞이지 않은 초탈한 본연에 대해 궁구한 것

    이라면 괜찮지만, 만약 사람의 올바른 본심, 아직 외물에 감응하지 않은 본체, 성

    34) 기가 용사하지 않는다 [氣不用事] : 한원진은 “기가 용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외물과 접하지

    않는다.”의 가치 중립적 의미로 이해했다.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37

    도(性道)의 대원(大原)에 나아가 이와 같이 말한다면 이것이 어찌 천명과 인심 전

    체의 실덕(實德)이겠는가?

    而上面‘性理湛然獨善’者, 此若汎論事物之理原, 究其超脫不雜之本然則可, 若就人本心之正

    未感之體性道之大原而如是言之, 則是豈天命人心全體之實德哉?

    논자【‘논자’이하의 내용 중 어떤 것은 덕소의 말이고, 어떤 것은 덕소의 논지이

    며, 또한 어떤 것은 제대로 논변을 진행하기 위해 내가 스스로 설정한 말이다.】는

    “한번 미발하게 되면 보통 사람의 기질이 변화하여 성인이 된다고 하니 철이 금이

    되는 것이 어찌 그렇게 쉽겠는가? 그러다가 예전처럼 돌아가면 바로 성인의 기질

    은 다시 중인의 기질이 되어 버리니 향초가 띠풀이 되는 것이 또한 어찌 그렇게 신

    속한가?”35)라고 한다.

    이 설은 그럴 듯하지만 진실로 따져볼 것이 없을 수 없다. 대개 마음의 어둠과

    밝음은 마치 손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는 것과 같다. 엎어진 것을 뒤집어서 한번 뒤

    집히면 다시는 엎어진 것이 아니고, 뒤집힌 것을 엎어서 한번 엎어지면 다시는 뒤

    집힌 것이 아니지만, 뒤집고 엎는 기틀은 본래 한 손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어두

    운 것이 밝게 되어 한번 밝아진 것은 어두운 것은 아니고 밝은 것이 어두워져 한번

    어두워진 것은 밝은 것이 아니지만, 어둠과 밝음의 사이에 또한 한 터럭의 사이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說者【說者以下, 或德昭之言, 或德昭之旨, 亦或有自設之辭以盡其辨.】謂“一有未發, 而

    衆人氣質, 變作聖人, 則鐵之成金, 何其易也? 纔過依舊, 而聖人氣質, 復作衆人, 則荃化爲茅,

    又何其速也?”

    是說似然, 而眞不無勘究者. 盖心之昏明, 正猶手之飜覆也. 飜者覆而覆則非飜矣, 覆者飜而

    飜則非覆矣, 而飜覆之機, 本不隔一手也. 昏者明而明則非昏矣, 明者昏而昏則非明矣, 而昏明

    之間, 亦不容一髮也.

    35) 한원진의 ≪남당집≫ 권10의 에 나온다.

  • 이러한 까닭에 주자께서는 “끝내 어두워질 수 없는 본래 밝은 본체는 비록 그 어

    둡고 가린 것이 극심하더라도 잠깐 사이에 그 본체가 통연해진다.”36)라 하셨으니,

    여기에서 잠깐 사이는 쉬운 것인가 어려운 것인가? 통연한 본체가 금인가, 철인가?

    만약 본체의 이면에 진짜 악이 자재하고 통연의 이면에 순전히 어두운 것이 여전히

    있다고 한다면 이는 진실로 내가 더 이상 언급할 바가 아니다.

    是故朱子曰: “本明之體, 終不可得以昧者, 雖其昏蔽之極, 而介然之頃, 其本體已洞然矣.”

    介然之頃, 是易耶難耶? 本體洞然, 是金耶鐵耶? 若謂本體裏面, 眞惡自在, 洞然裏面, 純昏

    依舊, 則誠非鄙見之所及矣.

    율곡선생은 “보통 사람의 마음이 혹 미발하면 전체가 담연하여 성인과 다름이

    없지만 잠깐 사이에 그 본체를 다시 잃어버린다.”37)고 하셨다. 대개 잠깐 사이에

    보존되는 것은 본래 밝은 본체이고 별안간 잃어버리는 것은 기품에 의해 구속되어

    그런 것이다. 이른바 ‘향초가 띠풀이 된다’는 그의 논의는 어찌 그리도 한결 같이

    그저 논변에만 치중하면서 실제 이치를 고찰하지 않는가? 마음을 보존하고 잃어버

    리는 기틀이 기품의 구속됨에 따라 같고 다른지 따져본다면 괜찮겠지만 보존한 바

    의 실질이 본래 밝은 본체에서 같고 다름을 따진다면 이는 진실로 내가 언급할 바

    가 아니다.

    栗翁曰: “衆人之心, 或有未發, 則全體湛然, 與聖人不異, 而惟其瞥然之際, 還失其體.” 盖

    介然而存者, 本明之體也, 瞥然而失者, 氣稟之拘也. 所謂‘荃化爲茅’者, 何一向馳驟於辯給而

    不考實理也? 此若計較其存亡之幾, 異同於氣稟之拘, 則可, 計較其所存之實, 異同於本明之體,

    則誠非鄙見之所及矣.

    36) 주희의 ≪대학혹문(大學或問)≫에 나온다.

    37) 이이의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0의 에 나온다.

  • 외암유고(巍巖遺稿) 권 12 잡저(雜著) | 39

    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정(動靜) 간에 항상 밝은 것이 성인이며, 어떨 때

    는 밝고 어떨 때는 어두운 것이 보통 사람이다. 밝은 것이 성인과 보통 사람 사이

    에 진실로 별 다른 점이 없다고 하는데, 기질이 다시 어두워지는 것은 보통 사람에

    게만 있고 성인에게는 없으니, 이렇듯 다른 것은 왜 그런가?”

    說者, 謂“動靜常明者, 聖人也, 旋明旋昏者, 衆人也. 明底聖凡眞無間然, 則復昏之幾, 在

    凡而不在聖, 是何其異歟?”

    이는 진실로 제대로 된 질문이다. 자세히 말해보겠다. 심을 기질이라 하는 것은

    큰 줄기만 말한 것이다. 몸에 충만해 있는 혈육의 기 중 그 무엇이 기질이 아니겠

    는가? 그러나 한 몸의 기강이 되고 만 가지 변화를 주재하는 것은 단지 방촌(마음)

    일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주자께서 이른바 ‘기의 정상(精爽)’이니, 성과 비교한다면

    은미하게나마 자취가 있고 기에 비교한다면 자연스럽고 또한 영험한 것이다.

    是固會問也. 請索言之. 盖以心謂氣質者, 是大綱說也. 血肉之氣, 充於一身者, 夫孰非氣質

    也. 惟綱紀一身, 主宰萬變, 則特方寸地耳. 是朱子所謂‘氣之精爽’, 比性則微有迹, 比氣則自

    然又靈者也.

    심은 주자께서 이른바 ‘하늘로부터 얻은 것으로서 허령하고 밝은 것[所得乎天而虛

    靈不昧]’이고 주자께서 이른바 ‘허명통철하여 만리를 모두 갖추고 있는 것[虛明洞澈

    而萬理咸備]’이고 주자께서 이른바 ‘신명불측하여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사라지는

    것[神明不測而操存舍亡]’이며, 주자께서 이른바 ‘올바르고 통한 기를 얻어 만물 중에

    서 가장 영험한 것[得氣之正通而靈於萬物]’이다. 그러하니 대저 사람의 방촌의 사이

    에 있는 혈육 형질의 기, 그 사재(渣滓)가 ‘정상(精爽)’이겠는가? 혈육 형질의 기, 그

    청탁수박(淸濁粹駁)이 만 가지로 다른 것이 성인과 보통 사람이 같은, 본래 밝은 본

    체이겠는가?

  • 朱子所謂‘所得乎天而虛靈不昧’者也, 朱子所謂‘虛明洞澈而萬理咸備’者也, 朱子所謂‘神明不

    測而操存舍亡’者也, 朱子所謂‘得氣之正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