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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종교 이야기-대종교 4 103 대종교의 인간 이해 차 옥 숭 한일장신대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종교학 지난 호에서는 대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고 생 명의 근원이며 만물과 백성을 교화하고 다스리시는 세검 한몸이신 한 배검 즉 한얼님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대종교 의 인간 이해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대종교의 인간 이해 삼일신고(三一神誥)진리훈(眞理訓)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태어날 한얼님으로부터 세 참함(三眞)인 성품()과 목숨 ()과 정기()를 받는다. 사람은 그것을 옹글게 받으나 만물은 치우 치게 받는다. 참 성품은 착함도 악함도 없다. ()은 영각(靈覺)

대종교의 인간 이해saegilchurch.or.kr/SGS/18_07.pdf · 2008-06-25 · 의 인간 이해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대종교의 인간 이해 『삼일신고(三一神誥)』의「진리훈(眞理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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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웃종교 이야기-대종교 4

    103

    대종교의 인간 이해

    차 옥 숭한일장신대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종교학

    지난 호에서는 대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고 생

    명의 근원이며 만물과 백성을 교화하고 다스리시는 세검 한몸이신 한

    배검 즉 한얼님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대종교

    의 인간 이해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대종교의 인간 이해

    『삼일신고(三一神誥)』의「진리훈(眞理訓)」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태어날 한얼님으로부터 세 참함(三眞)인 성품(性)과 목숨

    (命)과 정기(精)를 받는다. 사람은 그것을 옹글게 받으나 만물은 치우

    치게 받는다. 참 성품은 착함도 악함도 없다. 성(性)은 영각(靈覺)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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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理)를 구비하고 있어 이것에 통하면 상철(上哲)로서 만물에 두루

    통하여 막힘이 없다. 참 목숨은 맑음도 흐림도 없다. 참 목숨인 명

    (命)은 생존(生存)의 리(理)를 구비하고 있어 그것을 알면 중철(中哲)

    로서 모든 경우에 원만히 대처하여 미혹함이 없다. 참 정기는 후함

    도 박함도 없다. 참 정기인 정(精)은 운동(運動)의 리(理)를 갖추고 있

    어 그것을 보전하면 하철(下哲)로서 만 가지 일에 부딪쳐도 이지러짐

    이 없다. 그러나 육체가 이루어지면서 마음(心)과 김(氣)과 몸(身)의

    세 가달(三妄)이 이루어진다. 성(性)은 선․악(善․惡)의 상대적 속성

    을 포함하는 마음으로 드러나 착하면 복되고 악하면 화가 된다. 명

    (命)은 맑고 흐림의 가변성을 갖는 기(氣)로 나타나 맑으면 오래 살

    고 흐리면 일찍 죽는다. 정(精)은 후하고 박함의 차이를 갖는 신(身)

    으로 나타나 후하면 귀하고 박하면 천하게 된다. 참과 가달이 서로

    맞서 세길(三途) 즉 느낌(感)과 숨쉼(息)과 부딪침(觸)을 이룬다. 이것

    은 다시 각각 여섯 가지씩 열여덟 가지를 이룬다. 느낌에는 기쁨․

    두려움․슬픔․성냄․탐냄․싫어함, 숨쉼에는 맑은 김․흐린 김․찬

    김․더운 김․마른 김․젖은 김, 부딪힘에는 소리․빛깔․냄새․

    맛․음탕함․살닿음이 있다. 세 가달에 끌리어 함부로 살아가다 보

    면 인간은 태어남, 자람, 늙음, 병, 죽음의 괴로움에 떨어진다. 그러

    나 어진 이는 느낌을 그치며(止感), 숨쉼을 고르며(調息), 부딪침을

    금(禁觸)하여 세 가달을 돌이켜 참된 본성을 통달하고 공적을 다 닦

    아 세 참함에 이르고(返妄卽眞), 세 참함을 돌이켜서 한얼에 돌아가

    는 것(返眞一神), 즉 세 참함으로 하나에 돌아가는 것(三眞歸一, 三眞

    卽一)이다.

    人物 同受三眞 曰, 性命精 人全之 物偏之 眞性無善惡 上哲通眞命無淸

    濁 中哲知眞精無厚薄 下哲保返眞一神 惟衆迷地 三妄着根 曰心氣身 心依

    性有善惡 善福惡禍 氣依命有淸濁 淸壽濁妖 身依精有厚薄 厚貴薄賤 眞妄

  • 105

    모든 종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열려진 가능성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똑같

    은 단일한 신비 속에 놓여진다. 태어남이 막힘을 뚫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

    왔듯이 죽음 또한 막힘을 뚫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對作三途 曰, 感息觸轉成十八境 感喜懼哀怒貪厭 息芬爛寒熱震濕 觸聲色

    臭味淫抵 衆善惡淸濁厚薄相雜 從境途任走 墮生長肖病歿苦 哲止感 調息

    禁觸一意化行 返妄卽眞 發大神機 性通功完 是.1)

    세 가달을 돌이켜 세 참함으로 돌아와 성통공완(性通功完)을 이룬

    어진이들은 한얼님에게 돌아간다. 그러면 한얼님이 계시는 곳은 어떤

    곳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천궁(한얼집)

    모든 종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열려진 가능성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똑같은 단일한 신비 속에 놓여진다. 태어남이 막힘을 뚫고 새

    로운 가능성으로 나아왔듯이 죽음 또한 막힘을 뚫고 새로운 가능성으

    로 나아가는 것이다.『삼일신고』에 기록된「천궁훈(天宮訓)」은 대종교

    인들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죽은 후의 저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

    는가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삼일신고』에서는 하늘나라를 다음

    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울은 한얼님의 나라이라 한울집이 있어 온갖 착함으로 섬돌을

    1)『譯解倧經四部合編』, 27~33쪽.

  • 106

    하고 온갖 덕으로서 문을 삼았느니라. 한얼님이 계신 곳으로서 뭇

    신령과 모든 밝은 이들이 모시고 있어 지극히 복되고 가장 빛나는

    곳이니, 오직 참된 본성을 통달하고 모든 공적을 다 닦은 이라야 나

    아가 길이 쾌락을 얻을지니라.”

    天神國 有天宮 階萬善 門萬德 一神攸居 群靈諸哲護侍 大吉祥 大光明

    處 惟性通功完者 朝 永得快樂.2)

    한얼님이 계시는 천국은 지극히 복되고 빛나는 곳으로 뭇 신령과

    밝은 이들이 한얼님을 모시고 있다. 그곳은 성통공완(性通功完)을 이

    루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필자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그곳의 온갖

    착함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섬돌과 온갖 덕으로 되어 있다는 문이다(階

    萬善 門萬德). 지감․조식․금촉(止感․調息․禁觸)을 통해서 성통공완

    에 이르러 천궁에 오르는 것은 마치 개인 구원의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계만선 문만덕(階萬善 門萬德)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는 바로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서의 실천을 의미한

    다. 내가 선을 행할 때마다 하나하나 오를 수 있고, 내가 덕을 쌓을

    때마다 하나하나 열 수 있는 문이다.

    또한「천궁훈」의 주(注)에 보면 천궁에는 윗 글에서 설명한 한얼님

    이 계시는 천궁, 이 지상에서의 천궁,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천궁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곳의 천궁은 결국 하나라고 설명

    하고 있다.3) 결국 이것은 한얼님이 계시는 저 세상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한얼님이 창조하시고 항상 같이하시는 이 세상, 그리고

    한얼님을 모시고 있는 인간 모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앞의 책, 20쪽.

    3) 앞의 책.

  • 107

    결국 이것은 한얼님이 계시는 저 세상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한얼님이

    창조하시고 항상 같이하시는 이 세상, 그리고 한얼님을 모시고 있는 인간 모두

    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종교에서 개인 구원의 내용이 성통공완을 통한 삼진귀일(三

    眞歸一) 즉 한얼님께 돌아가는 것이라면, 대종교에서 지향하는 사회적

    구원의 내용은 홍익인간 이화세계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여 서로

    돕고 상생하는 평화로운 복지사회를 이 땅에 이룩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종교의 중요 교리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대종교의 이

    러한 가르침들이 대종교인들의 삶 속에 어떻게 현재화되고 있는지 대

    종교인들의 종교경험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사례에서는 종교와

    관련된 경험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경험들도 함께 다루었다. 그것은 비

    일상적인 경험도 일상적인 경험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도 하고 일

    상적인 경험들과의 연관 속에서 종교경험들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종교인들의 종교경험

    사례 1: 이상훈(1999년 현재 89세, 前 대종교 총전교)

    대담 장소: 안산시 이상훈 선생 자택

    대담 일시: 1999년 1월 19일 오후 2:30~5:10

    대담 내용: “나는 충청북도 제원군 금성면 포전리 산촌마을에서 태

    어났다. 선친께서는 학문을 하시면서 농사를 지으셨다. 성품이 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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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시고 인자하셨다. 어머님은 자유로우시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셨다.

    1녀 4남 중 3째로 태어났다. 가계 형편은 중농 정도였으나 집안은

    대체적으로 편안했다. 우리 집은 제법 안채, 사랑채를 갖추고 있었고

    명절 때면 유일하게 동네 풍물놀이의 장소가 되는 넓은 마당도 있었

    다. 마당가에는 큰 대추나무와 집 뒤에는 감나무 둔지 산소 주변에

    는 잣나무, 밤나무들이 많이 있어서 철 따라 과일들이 풍성했다. 어

    렸을 때 우물가에서 놀다가 미끄러져서 우물에 거꾸로 박혀 앞머리

    에 흉터가 생긴 것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나는 여섯 살 때 천자부

    터 시작해서 동몽선습, 계몽편, 통감 셋째 권까지 아버지께 배웠다.

    농사를 지으시면서 틈틈이 가르쳐 주셨다. 아홉 살이 되어 소학교에

    들어갔다. 내가 자란 곳이 읍내에서 멀고 숙부님 댁이 제천 읍에 있

    어서 숙부님 댁에서 제천보통학교에 들어갔다. 형님께서 수안보 교

    원양성소를 나오신 뒤 수안보에 있는 보통학교 교편을 잡고 계셔서

    나는 그곳으로 전학해서 4학년을 다니고 충주보통학교와 청주 남일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결국 청주보통학교에서 졸업을 했다. 나는 무

    려 다섯 군데를 다녔다.

    이듬해 봄에 나는 청주 도립사범학교에 들어가 3년 동안 자전거로

    통학을 하면서 학교를 마쳤다. 우리 집안은 전통적인 유교 집안이었

    는데 사범학교 다닐 때 교회에 열심히 다닌 친구의 소개로 교회에

    나갔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5년 동안 교원생활을 했다. 중학교 3학

    년 때 큰형님께서 서울로 출장을 가셨다가 그때 처음으로 나온 크레

    용과 스케치북을 사다주신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어려서부

    터 소질이 있다고 칭찬을 받곤 했지만, 그때 형님이 크레용과 스케

    치북을 사다주신 것이 내가 그림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범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미술은 언제나 칭찬받는 과목이었다. 그

    래서 언제부터인가 3년간의 의무연한만 마치면 일본에 건너가 미술

    공부를 하리라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 109

    1937년 여름 방학 때 아무도 모르게 만주에 갔다. 나는 봉천, 신경, 하루빈을

    거쳐 동만주의 신흥도시 목단강으로 갔다. 그곳의 한국인 아는 분을 찾아가

    재만 한인교육에 투신하고 싶다고 간청을 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시골학교에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일요일이

    되면 화판을 둘러메고 산과 들을 헤매며 수채화를 그리곤 했다. 5년

    동안 교원생활을 하고 동경에 갔다. 그곳 일본 미술학교를 3년 다니

    면서 ‘이렇게 미술을 하면 되겠구나’ 하는 것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

    곳 생활은 내게 망국의 설움, 민족의 장래를 뼈저리게 느끼고 생각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내가 가르친 아이들의 편지가 계속

    나를 교육에 대한 관심에서 떠날 수 없게 만들었고 20세에 결혼해서

    가족이 있고 고학으로 미술공부를 지속하는 것이 힘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교직은 나의 직업이고 미술은 취미로 하기로 생각을 했

    다.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왔지만 조금도 그것이 섭섭하지도 않았고

    후회가 되지도 않았다. 그 후에도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계속 되었다.

    그 뒤 오랜 후에 국립사범학교 미술교사로 있을 때에 제9회, 제10회,

    제11회 국전에 작품을 출품해서 입선을 한 일이 그림을 그린 사람으

    로서 체면 유지를 할 수 있게 했다. 일본에서 돌아와 석 달 후에 다

    시 보통학교에 복직하였고, 대동아 전쟁으로 전시체제가 되어 여러

    가지로 나라 전체가 어수선하고 내선일체를 내세워 일본은 우리에게

    일본어 상용과 창씨개명을 강요해 왔다. 일본에서 우리의 서러운 처

    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돌아 온 나로서는 이에 대한 분노와 고통이

    남다르게 컸다.

    1937년 여름 방학 때 아무도 모르게 만주에 갔다. 나는 봉천, 신

    경, 하루빈을 거쳐 동만주의 신흥도시 목단강으로 갔다. 그곳의 한국

    인 아는 분을 찾아가 재만 한인교육에 투신하고 싶다고 간청을 했다.

  • 110

    쾌히 승낙을 받고 돌아와 사표를 내고 만주 목단강시 장안국민학교

    교사로 옮겨갔다. 그때 내 나이 27세였다. 그 무렵 나는 나에게 있어

    서 커다란 영향을 준 두 분 선생님을 만났다. 한 분은 당시에 동만

    영안현 동경성에 본부를 둔 대종교 3세 교주인 단애 윤세복 선생님

    이셨고 다른 한 분은 신경왕도 서원 원장이었던 일본인 교육자 히다

    까 씨였다. 윤 선생님께서는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며 사명이

    라고 일깨워 주셨고 하다까 선생님은 칠십이 넘은 노인으로 ‘내가

    죽거든 용정 한인학교인 광명중학 뒷산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할 정

    도의 친한파 일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교장으로 있던 광명학교에 묻

    혀 조선사람들이 옛날의 강토였던 만주까지 되찾아 발전해 가는 모

    습을 지하에서나마 지켜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었다. 이 두 분의

    가르침은 그 후에도 나에게 큰 영향을 주어 오직 교직에만 전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한 신념 속에 일을 하면서 수업능률도 오르고

    사회적 신임도도 높아져 30세 때 40학급이나 되는 이 학교의 교장

    서리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의 압력으로

    일인 교장이 취임하고 나는 같은 시내의 19학급의 신설 학교를 맡게

    되었다. 정덕이라고 이름 붙여 교사도 새로 짓고 교정도 꾸며 순전

    한 한국인 학교를 이룩했다. 교직원, 학생이 혼연일체가 되었으므로

    2년 후에는 만주 각지에서 교육자들이 찾아와 교육 모습을 참관했다.

    교육에 몸담고 있으면서 큰 보람과 긍지를 느끼던 시절이었다. 거기

    에서 교원 생활을 하면서 해방된 후인 1946년 4월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목단강에서 교육생활을 하면서 나는 대종교를 알게 되었다. 대종

    교 총 본사가 동경성(발해의 고도)에 있었는데 목단강에서는 거리가

    멀어 찾아가지를 못했다가 대종교의 임오교변이 일어나 대종교 간부

    들이 목단강 감옥에 수감된 사건이 일어나면서 나는 더욱 깊은 관심

  • 111

    우리의 바른 역사와 바른 국어를 가르쳐야 하는데 마땅한 인재가 없었다. 궁리

    끝에 나는 대종교 총본사로 단애 윤세복 선생님을 찾아 상의했다. 윤 선생님께

    서는 훌륭한 계획이라며 직접 교사들에게 우리 역사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강의해 주셨다.

    을 갖게 되었다. 종전이 되고 목단강 감옥에 계시던 10분이 돌아가

    시고 단애 종사가 살아 나오셔서 그분을 직접 만나 뵈었다. 나는 그

    때까지 내가 뵌 어른 중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이 되어 존

    경을 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1일 목단강시에 소련군의 폭격이 시

    작되면서 우리 대부분은 피난을 갔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피난

    을 갔다 돌아왔을 때에는 시내가 폐허로 변해 있었고 심혈을 기울여

    가꾼 정덕학교 역시 온데간데 없었다. 일본군이 물러간 후에 국부군

    과 공산군의 충돌이 심해져 만주 전체가 수라장이 되었고 주민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는 이런 때일수록 교육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창고를 빌려 한국인 자녀 700여명을 모았다. 그러

    나 교원이 많이 부족했다. 우리의 바른 역사와 바른 국어를 가르쳐

    야 하는데 마땅한 인재가 없었다. 궁리 끝에 나는 대종교 총본사로

    단애 윤세복(당시 64세) 선생님을 찾아 상의했다. 윤 선생님께서는

    훌륭한 계획이라며 직접 교사들에게 우리 역사와 한글 맞춤법 통일

    안을 강의해 주셨다. 선생님은 목단강시 여관에 열흘 동안 머무시면

    서 우리들에게 열심히 강의해 주셨다. 교사들이 필기도구를 가지고

    가서 열심히 기록하고 배우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다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때 얼마나 그분에게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나는

    대종교와의 인연이 깊어졌다.

    그 후에도 단애 종사님을 몇 번 뵈었는데 한번은 단애 종사께서

    나에게 대종교를 깊게 알고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나는 기독교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솔직하게 고백을 했

  • 112

    는데 단애 종사님께서 그런 것과는 관계없으니 대종교를 제대로 알

    고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기독교인이 되

    어 있었다. 목단강에서 친하게 교원으로 있던 정홍석이라고 하는 분,

    그분은 해방 후 마산에 와서 목사가 되셨는데, 그분이 권유해서 나

    는 목단강 한인교회에 나갔다. 그 당시에 그곳에 한인이 5만이나 살

    았는데 교회에 나가보니 알력과 분파가 심했다. 그것이 싫었다. 일본

    교회는 교인은 작지만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고 해서 나가보니 정말

    전혀 달랐다. 그래 한 일 년 동안 일본인 교회에 나가다가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윤세복 선생님의 도움으로 교육체제를 갖출 무렵, 또다시 비운이

    닥쳐왔다. 그해 11월 만주 전역이 공산군의 손에 들어가 더 이상 독

    자적인 교육을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살아남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때였다. 10월이 되니 공산

    당 시정부가 설립되고 공산당 장교 군인이 시장이 되었다. 시정부

    안에 부시장을 둘 두는데 한 사람은 중국인, 한 사람은 한국인 김동

    렬이라는 사람이 되었다. 그 사람은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었

    다. 교육국에 감독하는 독학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중국인 한 사람,

    한국인 한 사람을 두었는데 그 사람의 추천으로 내가 독학을 맡아

    교육 재건을 담당했다. 그 당시에는 목단강에 한국 사람이 많아 한

    국 사람을 시정부에서 등용했던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교육열이 있

    어 임시로 거처를 마련해 임시로 묵는 동안에도 자녀들을 학교에 보

    냈다.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고 부시장 김동렬 씨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시정부에 직책을 갖고 있던 사람이 그것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그만 두겠다는 말을 하지 말고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서 중간에 서면으로 사직서를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빈, 봉천으로 돌아서 고향으로 향했다. 그 당시에는

    군용열차뿐 이었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목단강 역에서 만나기

  • 113

    그때 나는‘나는 기독교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솔직하게 고백을 했는

    데 단애 종사님께서 그런 것과는 관계없으니 대종교를 제대로 알고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로 해서 그곳을 떠났다.

    목단강을 떠나 하루빈역으로 가는 도중 해림역에서 대종교 총본사

    간부 여러분들이 단애 종사를 모시고 환국을 하는 도중에 만났다.

    그 분을 만나 나는 무척 반가웠다. 고향까지 오는데 한 달이 걸렸는

    데 중간에 군용열차가 어느 역에서든지 서게 되면 한국 사람들은 그

    곳에서 내려서 5리나, 10리를 걸어 한국인 농촌에 찾아 들어갔다. 수

    도 없이 많은 피난민들이 찾아올 텐데 그 때는 인심들이 아주 좋았

    다. 그렇게 찾아오는 피난민들에게 방도 빌려주고 그렇게 오느라고

    얼마나 수고했느냐고 먹을 것도 주곤 했다. 그리고는 다시 역으로

    나와 군용열차가 오기를 기다려 타고 또 다시 고향 가까이 가다가

    내리곤 했다. 봉천 부근에서는 팔로군과 국부군의 접전이 심해서 우

    회해서 오느라고 한 달이 걸렸다. 사리원에서 대종교인들과 헤어져

    왔다. 밤길을 넘어 청단이라는 곳에 오니 검역을 하고 수속을 밟아

    서 서울까지 왔다. 남대문 앞 피난민 수용소 같은 건물에 가서 어렵

    게 지내다가 돈암동 친척집을 거쳐 충청도 고향 제천에 가서 부모님

    과 형제를 뵙게 되었다. 그곳에 가서 며칠이 안 되어 청주 학무국

    기별이 와서 한수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가르쳤다. 조금 있다 교

    장을 하라고 해서 한 1년 동안 교장을 했다. 제천군 장학사로 있는

    데 충주에 국립사범학교가 생겼는데 그곳에 교감으로 오라고 해서

    갔다. 거기서 교감을 하고 있는 도중에 6.25사변이 터졌다. 미처 피

    난을 못한 나는 학적부 등 학교 서류를 땅에 묻기 위해 학교엘 갔다

    가 폭격을 만나 5개월의 중상을 입었다. 몇 달 동안 치료를 받고 1.4

  • 114

    후퇴 때 국군이 내려와 가족들을 놓아두고 나 혼자 마산에 갔다. 정

    홍석 목사 덕분에 그분 집에 머물렀다. 거기서 미군을 대상으로 초

    상화를 그려 주었다. 수입이 그런 대로 괜찮아 잘 지냈다. 그곳에서

    한 1년 정도 일을 했다. 나는 그 전에 학교를 위해 남아 있다가 고

    생을 했는데 남하를 못했던 사람들 죄를 물었다. 그래서 2개월 징계

    조치를 받았다. 교육자의 양심으로 사범학교 교감으로 당국의 징계

    를 받았다는 것이 싫어서 그곳에 가지 않고 마산에서 1년을 있었다.

    그러면서 해직이 되었다. 그 후 충주여자고등학교 교감으로 복직을

    했다.

    나는 서울에 이따금씩 오면 대종교 본부에 들러 단애 종사님을 뵙

    곤 했다. 대종교에서는 나를 대종교 사람으로 여겼다. 서울사범학교

    미술교사로 올라와서 5년 동안 거기에서 일을 했다. 그 학교가 사범

    대학으로 만들어지면서 대학에 남아 있고 싶은 사람은 남아 있고 아

    니면 다른 공립학교로 가도 좋다고 해서 공립학교로 가겠다고 했는

    데 교장이 나를 그냥 남아 있게 했다. 인촌 선생님이 설립한 중앙중

    고등학교가 학교 분위기도 좋고 평소 인촌 선생님이 내가 존경하는

    분이셔서 그곳 중앙중학교 교감으로 가서 잘 있었다. 그 후 서울시

    장학관으로 2년 있다가 광희중학교 교장으로 나가 그곳에서 정년을

    했다.

    광희중학교는 교장 6년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내 삶의 보람을 느꼈

    던 곳이기도 하다. 일생을 교육을 한다고 하는 사람이 마지막 교육

    생활을 잘 하고 싶다는 이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임했던 것 같다. 그

    러나 교육이라는 것이 교장 한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사

    들이 잘 따라주지 않은 것 같아 속이 상하기도 하고 한동안 깊은 딜

    레마에 빠져 있었다. 정년 4년이 남았지만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

    을 했다. 그때 우리나라에 카운셀러 제도가 막 들어올 때였는데 나

    는 카운셀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광주에서 아는 분이 겨울방학

  • 115

    그 회의에서 나는 교사들에게“내가 돼먹지 않은 교장이었다는 생각에 여러분

    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말하고“여러분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안전

    을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안심하고 같이 열심히 일하자.”고 말하

    니 교사들이 놀래는 눈치였다.

    에 일본인 강사를 모셔다가 카운셀링 워크샵을 갖자고 해서 4박 5일

    동안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인격적인 변화가 왔다. 돌아와서 그해

    여름방학 일본 카운셀러 협회에서 초청을 받아 몇 명 일행들과 함께

    그곳에서 세 차례 모임을 가졌다. 그러면서 나는 다시 소생을 했다.

    내 위주로 생각하고 거기에 맞추어 주지 않는 교사들을 원망했는데

    그것이 아니고 나를 돌아보고 내 잘못을 생각하게 되었다. 여름방학

    이 끝나고 돌아와서 나는 교사회의를 소집했다. 그 회의에서 나는

    교사들에게 “내가 돼먹지 않은 교장이었다는 생각에 여러분에게 진

    심으로 사죄한다.”고 말하고 “여러분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안전

    을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안심하고 같이 열심히 일하자.”고

    말하니 교사들이 놀래는 눈치였다.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혹시 이러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에는 언제나 교장실을 노크하고 들어와 충

    고해 달라’고 말했다. ‘여러분들도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을 텐데 교

    장인 내가 이렇고 저렇고 일일이 간섭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다’고 그들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그때부터 학교 분위기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전교사를 이끌고 나는 정릉 청수정에 가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교육에 대해서 자유로운 토론을 했다. 그러면서 교사는 학생

    들을 유도하고 이끌어 내는 자율학습 방향으로, 생활지도는 처벌위

    주가 아니고 절대 때리지 않는다는 교육방침을 교사들과 의논해서

    얻어내었다. 그때 교육받은 아이들은 지금도 그때 학교생활을 이야

    기한다. 따라서 나는 마지막 정년 4년을 보람있게 잘 보냈다. 그때

    광희중학교가 많이 알려졌다.

  • 116

    나는 강신명 목사하고도 친했고 서울에서는 새문안교회에 나갔다.

    기독교를 배반한다는 생각 없이 교회에 나가면 예배보고 또 대종교

    에 나가면 경배보곤 했다. 나는 봉교식을 한 적은 없지만 대종교인

    이 되었다. 정년퇴직을 하고 나니 대종교인 몇 분이 대종교에 나와

    일을 좀 하라고 해서 대종교에 전적으로 나가서 일을 했다. 나는 대

    종교에서 설립한 대종학교에서 일을 했다. 이 학교는 불우 아동 일

    백 여명을 모아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나는 이 학교 교장을

    맡았다. 이 학교는 무료 수업은 아니지만 교인들의 성금, 불우 아동

    들이 내는 약간의 수업료는 학교 운영비에 절대도 미치지 못하고 있

    었다. 따라서 나는 무료 봉사하는 교장이었고, 아동들을 가르치고 있

    는 열 명의 교사들에게도 교통비 정도만 지급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지도에 열중하고 아동들도 열심이어서 수업 분위

    기를 돌아볼 때는 거룩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랜 교단생활에서 절실히 느낀 것은 인성개발의 필요성이다. 인

    간의 성품은 본디 순수하고 착한 것이다. 그러나 주위의 환경 등에

    오염이 되어 이 인성은 자칫 흐려지기 쉬워서 착한 인성을 그대로

    지니기가 힘든 것이다. 따라서 인성개발은 타고난 인간성을 되찾아

    바람직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생활은

    한없이 편리하고 풍요만을 갈망하고 있지만 인간성을 상실하고 기계

    화되고 있는 오늘날 인성개발이야 말로 우리의 가장 시급한 과제라

    고 생각한다.

    1979년에는 춘파 정관 씨가 총전교를 하셨는데 너무 노령이셔서

    젊은 사람이 총전교를 해야 된다고 해서 79년에 나는 총전교를 맡았

    다. 단애 종사께서 나에게 기독교 세례를 받았어도 괜찮다고 하신

    것이 대종교에 몸담고 있으면서 교리가 다른 종교를 배척할 필요 없

    이 안을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총전교를 2년 하고서

    1982년에 나는 자진 사퇴를 했다. 나는 종교 지도자로서는 자질이

  • 117

    이 세상에 우리는 일을 하러 나왔다. 일은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인가? 남을

    위해서 이롭게 하는 것이 직업이고 일이라고 생각한다. 보람을 느끼고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을 크게 유익하게 했을 때이다.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내가 총전교를 맡고 있는 것은 대종교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자진 사퇴를

    했다. 신철호 씨라고 하는 분이 청년 때부터 대종교 활동을 열심히

    한 분이어서 내가 그만두면서 그분을 후임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권태훈 씨라는 분이 의회에서 총전교로 선

    출되었다. 권태훈 씨가 인격적으로는 좋은 분인데 종교 지도자로서

    는 신철호 씨가 좋겠다고 그 당시 나는 생각했었다. 권태훈 씨가 된

    후에는 그 분을 지지하고 대종교를 같이 걱정하곤 했다. 그 후 안호

    상 씨가 총전교가 되었다. 그분이 되고 나서 전교회의가 만들어져서

    나를 불러내어 나는 대종교가 잘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나가서 조

    금 도왔다. 이번에는 이영재 씨가 총전교가 되었다. 지지를 하건 안

    하건 일단 총전교가 되면 그분을 지지해 주면서 잘되게 도와야 한다

    고 생각한다. 현 총전교는 나와는 같은 고향 사람으로 선친께서 임

    오교변으로 목단강 감옥에 계실 때 목단강에서 옥바라지 하느라고

    그곳에 와 있을 때 알고 지냈던 분이다. 그 사람이 삼일원장으로 일

    을 좀 해달라고 해서 지금 나는 그 일을 맡고 있다.

    홍익인간 이화세계는 대종교의 중심사상이다. 21세기에 인류는 반

    드시 홍익인간 이화세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처럼 무

    한 경쟁사회에서 경쟁으로 치닫는 경우 인류는 제대로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서로 돕고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으로 나가

    야 한다.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

    세상에 우리는 일을 하러 나왔다. 일은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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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을 위해서 이롭게 하는 것이 직업이고 일이라고 생각한다. 보람을

    느끼고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을 크게 유익하게 했을 때이다. 돈을 벌

    어도 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남에게 유익되게 하기 위한 것

    이어야 한다. 개인을 위해 나만을 위한 것은 천리를 위반하는 것이

    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니 인류를 살리는데 홍익인간

    이화세계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인성교육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식과 학문이 되고 그 다음 방법과 기술이 되어

    야 하는데 지금은 방법과 기술에만 치우치는 것 같아 참으로 아쉽게

    느껴진다.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 나는 나름대로 대

    종교인들에게 ‘민족 얼 찾아 세우기’ 강의를 주로 하는데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일을 계속하려고 한다. 인성교육은 아이를 가슴에 안고

    젖을 입에 물리고 있을 때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이면서 대종교인으로 사셨던 이상훈 선생님의 종교 경험을

    자세하게 실었다. 그분이 사셨던 시대적인 배경, 나라 잃은 그 당시

    어른들의 삶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내용이다.

    다음 호에 계속해서 대종교인 몇 분의 경험을 더 소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