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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92 1. 2. 3. 19

근서l의 일산 - memory.library.kr우리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한 1990년의 한강 대홍 수를 훨씬 그 규모 변에서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진 1925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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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산 새도시 개발지역 촉품조사보고 2, 1992 역사배경

    근서l의 일산

    류 기 선

    (단국대학교 한국민족학연구소)

    1. 머리말

    2. 근대이후의 지역사

    가-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나. 광복부터 저12공화국까지

    다 저13공화국이후

    3. 마을개관

    가 일산리(-山里) 지역

    나. 주엽리(注葉里) 지역

    다. 장항리(獲項里) 지역

    라. 마두리(,휩흉里) 지역

    마 백석리(白石里) 지역

    바. 대화리(大化里) 지역

    19

  • 1. 머리말

    고양군 지역은 통일로와 경의선 철도를 기준으로 크

    게 세 부분으로 나닐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지역은 통일

    로의 동북쪽 지역으로서 추가령 지구대와 임진강 사이

    에 놓인 구릉지대의 일부이다. 이곳은 고양군에서 지역

    적으로 한 켠에 치우쳐 있지만, 조선시대 9대로의 으뜸

    인 관서로가 통과하고 관아가 자리잡아 옛부터 고양의

    중심 역할을 해 왔다‘ 둘째 지역은 통일로와 경의선 철

    로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서 야산지대이며 지리적으로

    고양시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다 원당읍이 그 한복판에

    있다 셋째 지역이 경의선 철로의 서님쪽 지역으로서 평

    야지대이며 유명한 일산미가 나오는 곳이다 둘째 지역

    과 셋째 지역의 경계선이 되는 경의선 철로를 따라 일산

    읍과 지도읍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사회민속조사의 대상이 된 일산새도시 개발지역은

    바로 이 셋째 지역에 위치한다. 보다 자세히 말하면‘ 일

    산새도시 지역은 경의선 첼로의 왼쪽‘ 일선뜰에 있는 수

    로의 오른쪽‘ 남으로는 개발제한구역 바깥쪽 지역, 곧

    경의선의 철로, 일산뜰의 수로, 개발제한구역의 경계 등

    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행정구역상으로 이 개발지역

    은 일산읍 일산 9.10 ‘ 11 . 12리와 백석 1.2. 3.4 .6리 , 주엽

    1.2.3.4.5.6리 , 마두리 1.2.3.4리 장항 1.2리 동을 포함

    하는 일산읍 지역의 대부분의 지역과 송포면의 일부인

    대화 3.4.5리를 그 경계 인-에 담고 있다

    바로 이 지역을 대상으로 근대이후의 지역사를 간단히

    살펴 보고, 각 마을들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2. 근대 이후의 지역사

    여기서는 일산새도시 지역에서 이루어져 왔던 사건들

    을 이 지역의 마을과 주민들의 생활에 미친 효과를 중심

    으로정리해보고자한다

    근현대사에 있어서 전국적인 커다란 역사적인 사건들

    도 물론 이 지역에 영향을 미쳐 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20

    사건들이 이 지역에 미치는 영향은 언제나 이 지역의 특

    성에 매개되어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또한 이 지역의 성

    격을 형성하는 데는 그러한 사건들뿐만 아니라 이 지역

    에만 해당되는 국지적인 사건들도 작용하였다 그래서

    이 두 부류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 지역의 특성을 살펴

    보고자한다

    가-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무엇보다도 이 지역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살펴 보아

    야 하는 것은 1908년 경의선 칠로의 부설이 이 지역에

    미친 영향이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확립하기 위한 경의

    선 철로의 부설로 말미암은 교통의 발달에 따라 일본의

    상권이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도 그 손길을 뻗쳤다 효율

    적이며 안정된 대량유통 수단인 철로의 개통은 이전의

    수로(水路) 중심의 교통망을 대체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편승하여 일본 상권의 손길이 본격적으로 이 지역

    에 뻗쳐 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철로가 부설되기

    이전 이 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이었던‘ 한강에 근접한사

    포장과 백석장은 점차 그 힘을 잃고 사라져 간 것에 비

    례하여 철도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주거지와 시장이 형

    성되어 갔다 그 결과 이 지역은, 작게는 상업이 일찌기

    발달한 다른 지역 상인들(예컨대 개성상인)에게 싱권을

    빼앗기게 되고, 보다 크게는 일제의 식민경제구조 속에

    포섭 편입되는 길에 접어 든 것이다 사포장과 백석장을

    대신하여 이 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이 형성된 곳은 역이

    세워짐에 따라 커진 일산읍괴 지도읍이며, 일본인들도

    이 곳에 정착하였다, 이 곳은 칠도가 지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적한 농촌지역이었을

    뿐이다

    1910-1918년에 실시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생산

    수단인 토지와 농민을 묶고 있던 봉건적 고리를 풀어 농

    민을 자유로운 노동력의 소유자로 변화시켰다- 그결과

    로 직접적인 생산자인 농민은 전통적으로 세습되어 왔

    던 경작권을 상실하고 지주와 불안정한 소작계약을 맺

    는 위치로 전락하였고, 이러한 자본주의적인 형식 속에

    서는 경영의 실질적인 권한은 지주에게 있었다 직접적

    인 생산자인 농민들 가운데 많은 수가 토지로부터 유리

    되어 각종 토목공사의 날품팔이로 되거나 경작면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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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당읍

    벽제읍

    파주군

    솜포면

    21

    능곡

    ~ [그 월산 새도시개발지역

    *--- 수로 -‘-‘ 옵면경계

    김포군

  • 영세성으로 농한기에는 다른 직종의 노동자로서 일하게

    되는 불안정한 생계방식을 유지해야 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한 1990년의 한강 대홍

    수를 훨씬 그 규모 변에서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진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가 있고 난 뒤 . 1920년대 말에

    서 1930년대 초에 걸쳐 한강뚝이 축조되었다. 이 지역

    의 촌로들에게는 ‘대보뚝’ 으로 알려져 있는 이 한강뚝

    은 물론 일제가 식민지적 착취를 증대하려는 의도로 축

    조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한강뚝의 축조 또한 이

    지역에 미친 영향이 크다 이 지역은 지대기- 낮기 때문

    에 옛부터 침수지역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뿐만 아

    니라 한강뚝이 생기기 이전에는 지금의 넓다란 별은 농

    사를 못 짓는 갯펄이 대부분이었다. 밀물 때면 조수가

    밀려 들어오고 홍수가 나면 피 땀 흘려 지어 놓은 논을

    수마가 휩쓸고 지나갔다 농민들은 많이 젠 물이나 조수

    를 용두레로 퍼내는 싸움을 하였다 이 한강뚝의 축조는

    어느 면에서 오늘날 경작지의 확대와 이 지역의 잘 갖추

    어진 기계화 농경에 이르는 첫 큰 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1970-90년대의 경

    지정리와 수리시설이 갖추어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 때까지는 뚝이 축조되었어도 배수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 여전히 땅에 물이 많이 찌었다 농민들은 많이 씬

    물을 용두레로 퍼내다가 발동기가 들어온 뒤로는 발동

    기로 물을 퍼 내어 빨밭을 차차 논으로 이루아 갔다 그

    렇지만 농민들의 부단한 개간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

    분의 땅이 그다지 쓸모 없는 불모지로 남아 있었다 아

    무튼 한강뚝의 축조는 물의 공급과 배수를 용이하게 하

    는‘ 훗날 이루어진 수리시 설의 설비를 위한 중요한 전제

    가 되었으므로 ‘대보뚝’ 의 건설은 이 지역을 대표적인

    미작지대로 북돋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유명한 미작지대로 되었다고 하더

    라도 일제 시대 이 지역의 농민들이 그러한 성과를 누렸

    던 것은 아니다.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배는 이 지역 농

    촌에 사는 농민들에게도 혹독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일

    제는 부족한 일본의 식량을 메꾸기 위하여 생산량의

    60% 이상을 거두어 갔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

    제가 패배의 길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착취는 더 해 갔

    다. 한 주민은 ‘온갖 잡세가 70여가지나 될 정도’ 였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할당된 양이 실제 생산량보다 많은

    22

    경우도 있었으며 이를 내지 않을 경우는 닥달을 하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쌀의 공출을 피하기 위해 짚가리 속이

    나 셋간의 재 속에 쌀을 숭기기도 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강제공출로 인해 모자라게 되는 식량은 만주에서 들여온

    묵은 조나 수수, 기름 뺀 콩, 무거리 둥을 배급하였지만

    배급량은 언제나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벼를 직접 땀 흘

    려 기른 이 지역의 농민들은 쌀밥을 먹지 못히고 잡곡이

    나 강냉이로 연명을 해야 하는 역설을 낳았다 묵은 만주

    좁쌀로 죽을 끌여 먹는 것이 오히려 ‘다반사’ 였다 보릿

    고개 때에는 보리와 설익은 콩 동을 먹었다. 덜 익은 수

    수를 갈아서 %땀을 가라앉힌 후에 수수도가니를 해 먹

    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쌀 공출을 피하여 가능한 한 많으

    쌀을 남겨서 양식에 보태기 위해. 타작할 때에 이삭이 덜

    떨어지게 히여 북대기에 많이 남긴 뒤 . 나중에 몰래 도리

    깨질을 해서 쌀을 거두었다. 그래도 식량이 부족하면, 썩

    은 벼를 떼어 와서 씬 후에 그것을 말리고 다시 멧돌에

    갈아 껍질을 벗져 선밥을 해 먹기도 했다

    일제의 농촌에 대한 수탈은 식량 공출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 농그릇, 수저‘ 요강은 물

    로 랭기리 같은 농악기 둥을 가져 갔다 말기에는 군용

    으로 쓰기 위해 개가죽. 소가죽까지 약탈해 갔다. 또한

    일제는 물자 공출에서 나아가 전쟁으로 부족한 노동력

    을 보충하기 위해 강제로 일본으로 한국 사람들을 끌어

    갔는데‘ 이 지역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제의 징용으로

    끌려 갔다가 북해도 광산에서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다

    해방이 되어 귀국한 사람도 있고, 해방이 펼 때까지 살

    아남지 못하여 이국에서 뼈를 묻은 사람도 있다. 정용으

    로 붙잡혀 가는 기차가 언덕으로 오르느라 속력을 줄였

    을 때 뛰어 내려 도망쳤던 마두리 사람의 무용담이 아직

    도 이 지역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기도 하다. 이

    러한 ‘인간공출’ 은 언론에 떠들썩했던 ‘정신대’라는

    ‘처녀공출’ 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인간공출’

    은 농민의 생활방식에 영향을 미쳐 , (아마도 일제의 물

    자수송을 위해 동원되는) 마차를 운용하는 사람은 징용

    에 해당이 안 된다고 하여 마차를 구입해서 운용히는 사

    람도 더러 생기게 되었고‘ ‘처녀공출’ 을 피해 10대초반

    에 혼인시키는 조혼의 풍습이 유행하기도 했다. (물론

    여자의 이른결혼이 어려운살림에 빨리 ‘먹는입’을줄

    이려는 다른 이유가 있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에

  • 농민들이 빈궁에 허덕인 것은 일제의 잘못된 농정 탓임

    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조그만 땅돼기를 가지고 있

    는 농민들도 필요한 생활자금와 농경자금을 얻기 위해

    동양척식회사에서 땅을 담보로 돈을 빌어 갚지 못해 땅

    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

    튼 일제의 수탈이 심하여 이를 견디지 못해 만주나 중국

    으로 이민을 간 사람들도 있고 소작에서 쫓겨나 서울로

    품팔이를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마을은 반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기도 하였다.

    일제치하에서 농업의 상업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

    다. 일본인이 이 지역에 뽕나무를 심어 조선인 노동력을

    고용하여 누에농사를 하기도 하였고, 이 지역 사람 가운

    데 땅을 좀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생엽으로 삼을 심어 기

    른 뒤에 배로 개성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일제는 한국의 농촌 수탈을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해,

    두레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결과에 기초하여 일제

    통치 말년에는 징용에 더 많은 사람을 끌어 가고 아울러

    징용으로 인해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작업조직으로서 ‘작업반’ 이라는 반강제적인 조직을 만

    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병참기지토서 원활한 군수물자

    의 수송을 위하여 ‘보국단’이라는 것을 만들어 도로의

    확장과 철로 보수 공사에 주민들을 동원함으로써 노동

    력을착취하기도하였다

    나 광복부터 저12공화국까지

    한국의 농민들로 하여금 일제의 올무를 벗게 한 8.15

    해방과 그것에 뒤이은 토지개혁은 이 지역에 오랫동안

    내려온 토지소유관계를 변화시켰다. 이 지역 주민들의

    대부분은 서울에 살고 있는 지주들의 땅을 소작하던 사

    람들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소작권이 불안정하여 이 지

    역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다음 해에도 소

    작을 하려면 마름에게 잘 보이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명

    절 때마다 선물을 사 들고 마름에게 인사를 가야 동}는

    동 많은 애를 먹었다. 해방 이후의 토지개혁은 불철저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자기 땅을

    지님으로써 인간적인 수모를 당히-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농민들의 자기 토지를

    소유하게 되자 생활이 안정되어 그 전보다 생산력의 발

    전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떤 농민들은 양심

    때문에 소출을 그대로 갖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지주에

    게 넘겨 주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우리 민족 전체의 불행한 일로서

    우리 사회에 커따란 영향을 주었는데, 일산 지역도 이러

    한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러한 불행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자국을

    이 지역에 남기고 있다- 그것은 한국전쟁 때의 월남민들

    이 고향에 돌아 가고픈 생각으로 고향에 가까운 이 지역

    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피난 월남민들은 토

    칙민들이 사는 기존의 마을에 들어가서 실-기도 하지만,

    한국전쟁 직후에 형성된 수용소를 그 전신으로 하는 마

    을들을 형성하여 살고 있기도 하다 수용소가 발전히-여

    이루어진 마을들은 대표적인 장성마을(대화5리) 이외에

    도. 새도시개발지역 안에는 일산11리(문화촌)와 주엽 1

    리(신촌)가 있다. 월남 피난민들을 수용했던 수용소는

    새도시개발지역 밖의 송포면 구산1리 , 대화6리(벽절)에

    도있었다.

    다- 저13공화국이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3공화국을 세운 뒤에 이

    어지는 새마을 운동과 산업화 정책은 이 지역에도 커다

    란 변화를 가져 왔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농촌에 직접

    연관된 것은 아마도 ‘새미을 운동’ 일 것이다 다른 지역

    의 농촌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근면, 자조, 협동’ 을

    이념으로 한 ‘새마을 운동’ 은 생활환경개선에 그 춧점

    이 모아졌다 그리히-여 도로의 확장과 포장, 하수구 설

    치. 주택지붕개량(이영 대신에 기와와 슬레이트 사용),

    화장실과 헛간의 개조‘ 주택건축재료의 변화(흙을 대신

    한 모래와 시벤트의 사용) 퉁이 이루어졌다. 주민들에

    게 미친 효과가 아주 커서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부정

    적인 평가도 가능하다 마을 내부에서 새마을운동을 두

    고서 세대 간에 입장이 나뉘어 학교교육을 받은 젊은이

    들은 적극적으로 새마을운동을 옹호하였고 전통적인

    세계관에 젖어 있는 노인들은 새마을운동에 대하여 부

    정적이거나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이 정부에

    의해 강압적으로 진행된 측면이 있는데, 시행과정 중에

    이장에게 명예경찰직을 위임하여 추진력을 얻으려 시도

    23

  •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주민들 가운데 일부는 새마을운

    동의 결과로 “협동심이 생기고 부지런해졌다”는 평가

    늘 내리는가 히-면. 일부는 새마을운동으로 나아진 것은

    “마을도로나‘ 그 당시 적은 일하고 노임을 받았다는 정

    도뿐이며‘ 많은 혜택을 받지는 못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새마을운동의 결과로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생

    활도구들은 급격히케 소멸하기에 이르렀음은 부인할 수

    없는사실이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변화는 직접적인 생활양식 상의

    변화만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면에서도 이루어졌다 곧

    영농의 기계화와 이를 위한 여건확보를 위한 정지정리

    와 수리시설의 건설 등이 행해졌다. 행주 부근에 양수장

    을 설치하여 한강물을 끌어들여 갈대밭이나 황무지였던

    강변의 너른 벌판에 댐으로써 가뭄에 대비할 수 있었으

    나‘ 물이 많이 끼게 되어 개간된 논은 그디-지 쓸모가 없

    었다 그 뒤에 한강 상류 쪽인 행주근방에서 받아들인

    물을 빼내는 배수시설이 하류 쪽의 송산변 지역에 설치

    됨으로써 이 지역의 농민들은 많은 소출을 가져 오는 비

    옥한 ‘수리안전도F 을 갖게 되었다 수리시설과 경지정

    리의 시행으로 이 지역의 농촌은 큰 변화를 겪게 되었

    다 점차 소들 이용하는 쟁시는 경운시나 트랙터로 대체

    되었고, 모내기는 이앙기로 수행되기에 이르렀으며, 김

    떼기는 제초제로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요즈음

    에는 수확작업까지도 기계화되었다 이로부터 증대된

    식량으로 오랫동안 이 지역 농민의 한해살이에 있어서

    도 넘기 어렵던 보리고개가 사라졌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정부의 식량증산 노력은 수출위주의

    개발정책 추진괴 무관하지 않다 새마을운동이라고 불리

    우는 농촌의 생활개선운동이라는 것과 영농의 기계화 등

    도 결국은 수출위주의 개발정책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수출 위주의 개발정책에

    따른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대외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은 수준에서 묶어둘 필요가

    생기고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재생산비용에 중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쌀값을 낮추지 않으면 안 되고‘

    쌀값을 낮추기 위해서는 쌀의 증산을 위해 영농의 기계

    회를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지역의 특성과 관련하여 주목되어야 할 현

    상이 있다- 곧 산업화는 일반적인 한국의 농촌에 이농을

    24

    가져와 농촌인구의 감소현상을 야기하였으나‘ 이 지역

    에서는 거꾸로 인구의 증대를 가져와 부심화 경향까지

    나은 것이다 즉 경지정리로 인한 경작지의 확대는 토지

    수용능력의 확대와 더불어 지가의 하락을 가져와 이 지

    역으로의 인구의 흡인력을 높여 , 외지 농민의 인구 유입

    으로 인구가 증대되었다 그래서 경상도나 전라도, 충청

    도 사람들이 대거 이 지역에 정착하였다 물론 이러한

    인구유입을 통한 인구의 증가의 다른 - 아마도 진정한

    - 원인은 이 지역이 서울에 밀접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서울로 출되근이 기-능하며 냉전에 따른 ‘남침

    위협’ 으로 땅값과 집값이 싼 이 지역에 , 특히 경의선이

    통과하는 일산읍이나 백마역 가까운 곳에 다른 지역으

    로부터 농민 이외에도 노동자들이 정칙-하였다 서울에

    서 철거된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 지역에 정착하기도 하

    였다 그리히여 자영엽을 하거나 서울로 출퇴근하며 봉

    급생활을 하는 동시에‘ 농사도 짓는 사람들도 생겨 났

    다 곧 이 지역은 디-른 지방 사람들의 서울 진출 거점으

    로도 혹은 서울 생활로부터의 후되지로도 역할을 히였

    디 그래서 한국전쟁과 산업화 등의 결과로 이 지역에는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전

    쟁으로 이북 지방의 사럼들이 내려 왔고‘ 산업화의 기간

    에 여러 가지 경로를 거쳐서 남쪽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이 지역에 마을들이 생긴 이래로아마도가장큰 변화

    는 1990년에 시작된 일산 새도시 개발사업이다 몇 백

    년이 된 마을들이 하루 아침에 한꺼번에 사라지게 된 것

    이다 이 지역에 사람들이 땅을 일구어 온 이래로 오랫

    동안 많은 소출을 가져 왔던 논밭과 그러한 풍요로운 생

    산을 지배한다는 신령이 깃들어 있던 산천은 깎이고 대

    신 회색의 시멘트 건물군와 아스팔트로 뒤덮이게 되었

    다 자연의 구체적인 부띤들에 대한 개별적인 적응과 이

    용으로 이루어지던 생활 및 주거형태에서. 일정한 지역

    의 전범위에 걸쳐 단지 평면적인 아파트 건물군의 입지

    로서만 자연이 그 유용성을 인정 받는 새로운 생활 및

    주거형태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주

    거와 생산이 함께 이루어지는 현장이 아니라 외부에 일

    터를둔주거지의동장을가리킨다 여기서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동기와 과정이다. 이러한 변

    화는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에 붙밖고 살이온 원주민들의

  •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민의 의사와는 거꾸

    로 전적으로 중앙의 한 개인의 발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

    이다 따라서 착공과정에서 원주민의 거센 반발을 일으

    켰다. 비록 원주민에게 입주권이 주어지는 등의 원주민

    에 대한 배려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개발은 기본적

    으로 서울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주민

    에게 입주권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큰 건축비와 땅값

    을 감당할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모든 것은 화폐로 계산이 가능한 상

    품으로 변화될 것이 강요되었다 농민들이 일구어온 생

    산수단(토지)과 생활수단(집 등) 및 정신적인 것까지를

    포함한 존재의 모든 측면‘ 예컨대 일생 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추억까지도, 이것들이 곳곳에 묻혀 있고 스며 있딘

    마을괴 뒷동산‘ 논뚝길 동과 함께 ‘보상가격’ 이라는 이

    름의 교환가치가 매겨졌다

    3 . 마을 개관

    이 지역의 마을들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살펴 보

    기로 하자. 이를 통해서 이 지역의 역사를 읽어 낼 수도

    있을것이다.

    가. 일산리(-山里) 지역

    일산리 지역은 법정리인 일산리를 가리킨다 일신리

    는 일산역을 중심으로 있는 마을들을 포함하는 지역이

    다 일산리는동쪽으로는풍리, 마두리와 경계하고있으

    며 , 서쪽으로는 송포변의 대화리‘ 덕이리와. 남쪽으로는

    주엽리. 장항리와 북쪽으로는 탄현리 및 벽제읍 성석리

    둥과 이웃하고 있다. 일산리지역은 일산 사거리를 중심

    으로 송포면과 금촌, 서울, 능곡, 봉l일천 동을 연결해 주

    는 여러 도로와 경의선이 통과하고 있어 교통의 요지가

    되고 있다 법정리인 일산리에는 행정리로 일산1리부터

    일산13리까지 있다‘ 이 가운데 일산9.10.11.12리만이

    1) 李錫햄 {高|楊컴j)찮、} (1755) 참조

    새도시 개발지역에 포함되었다

    고양시가 생기기 이전의 행정구역인 일산읍은 지금

    다루려고 하는 일산리 이외에도 풍리‘ 장항리‘ 주엽리,

    백석리‘ 마두리, 탄현리 둥을 포함한다. 그런데 ‘일산’

    (일산리건 일산읍이건)이라는 지명은 원래부터 이 지역

    에 있던 것이 아니라‘ 일제기- 경의선 철로를 부설히-고

    이 지역에 세운 역의 둘레에 생긴 시장과 거주지에, 당

    시 인근에 있는 가장 큰 마을이며 고양시 승격 이전의

    송포면 덕이(德耳) 2리인 ‘할미’ ({『高陽那誌』}에서는

    ‘寒山’으로 표기했으나. ‘큰 산’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

    며 인근에 고봉산이 있다)라는 마을의 이름을 따서 ‘일

    산’ 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생긴 것이다 이러한 지

    명의 부여는 두 가지 면에서 왜곡을 가져오게 된다 그

    첫째는 전래되는 우리말 지명의 한문표기(짧山 혹은 寒

    山)를 일제가 새로 만들어 낸 말(-山)로 바꾼 것이고,

    둘째는 철로의 부설을 통해 생긴 거주지의 변화와 행정

    구역 개편이다 원래 한산은 조선시대후기에 송신면(松

    山面)에 속해 있던 곳이고 그 뒤 (?)로는 1992년 2월 1

    일 고양시 숭격 전에는 옛 송산면(松山面)과 사포변( t:,

    浦面)이 합쳐서 된 송포면(松때며i)에 속해 있었다 그런

    데 고양시 숭격 직전의 일산읍에 속하는 대부분의 지역

    (장항리. 풍리, 주엽리, 백석리, 마두리 둥)은 조선시대

    후기에는 중떤(中面)에 속했던 곳이다, 요컨대 송포면

    지역에서 따온 지명을 중면 지역에 붙이게 되었다 ” 일부의 마을은 역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으나. 일부

    의 마을은 역이 생기면서 더불어 생긴 마을들이고 어떤

    마을들은 6.25전쟁의 결과로 생겼고‘ 또 어떤 마을은 한

    강 홍수로 벌쪽에 있다가 이 쪽으로 이주해서 만든 것이

    이 지역에서 오래 된 마을은 일산9리 (밤가시)와 일산

    10리(뒷골)이다‘ 일산9리는 율동(果洞) 혹은 빔-가시라

    고 불리며. 단양(꺼陽)이씨의 집성촌이다 이 밤가시 마

    을에는 단산부원군(升山府院君) 익평공(짧平公) 이무

    (李皮)의 손자인 호조참찬행한성부윤(戶팽參贊行漢城

    府尹)에 증직 en뺀았)된 이영득(李榮得) (太宗8년 1409년

    생)의 묘가 있으며, 이무 떼 (1390년경)부터 이 마을에

    정착했다고 한다. 인구는 1989년 현재 74가구 293명

    25

  • (남 141. 여 152)으로. 1974년의 334명의 인구에서 87

    7%로 오히려 인구가 감소했다. 이 지역의 213.6%의

    각 마을 평균 인구증가율에 비하면 큰 차이를 보여 준

    다 이것은 이 마을이 일산리의 다른 마을들보다 일산역

    으로부터 가장 먼 거리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야산

    에 의해서 일산읍의 시가지와는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

    다 일산10리는 ‘뒷골’ 이라는 자연촌락명을 가지고 있

    으며, 진주강씨가 5-600넌 동안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다고 한다 단양이씨도 이 마을에 진주강씨와 더

    불어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일산10리는 일산9리와

    더불어 이주직전까지 하나가 되어 산신제를 지내 왔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 이주해 옹 사람들

    이다 일산10리는 일산11 리. 12리 둥과 더불어 일산역

    에서 철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여 산

    업화가 본격화되면 많은 인구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

    다 그래서 1989년 현재 6457}구 2.330명에 달하며 ‘

    1974년의 991명의 인구를 기준으로 할 때 무려 225%

    의 인구증가율을 기록하였다

    일산11리와 일산12리는 본래부터 존재하던 마을은

    아니다. 일산11리는 ‘문화촌’ 이라 히는데, 이는 6.25전

    쟁 뒤에 피난월남민들이 거주하던 수용소가 발전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호주의 원조로 이른바 ‘문화주택’

    을 건설하게 됨으로써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현

    재 대부분의 인구는 타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1989년 현재 일산11리는 그 인구가 209가구 853명으

    로, 1974년의 563명에서 151.5%가 증가한 인구를 지

    니고있다

    일산12리는 다른 말로 ‘신동(新洞)’ 이라고 불리운다

    1966년 장항4리 사람들이 홍수로 지대가 낮은 별쪽을

    피해 이주해 와서 이룬 마을이다 그 때문에 일산리 지

    역에 있으면서 한 동안 행정적으로는 장항4리에 속해

    있다가 l975년에야 일산12리로 독립하였다. 일산10리‘

    일산11리 등과 함께 일산역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 뒤

    에 타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1974년의 인구통계에

    는현재의 장헝4리인구에 지금의 일산12리의 인구가포

    함되어 있어서 지금의 일산12리의 인구증가 크기만을

    떼어내어 헤아리기가 어려우나, 장항리 지역이 지리적

    으로 주요교통망으로부터 벗어나 이 기간 동안의 인구

    증가율이 거의 답보상태인 점을 감안하여 얻어진 1974

    26

    년의 인구 240명선에 비하면, 1989년 현재 일산12리의

    인구가 274가구 1 . 069명이 되어 엄청난 증기를 하였던

    것으로보인다

    일산l리부터 일산8리까지는 경의선이 통과하고 일산

    역이 생기기 이전에는 마을들이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그렇게 큰 마을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일산역이

    생긴 뒤로는 인구가 많이 정착하여 일산읍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렇듯이 일산리지역은 일산9리를 제외하면 일산역

    에 가까이 위치하여 타지역 사람들이 흘러들어오면서

    비약적으로 인구가 증가해 왔다 그러나 일산10리 ,11

    리‘ 12리 등은 일신역 주위에 있어서 마찬가지로 비약적

    인 인구증가를 보이고 있는 일산1리부터 일산8리까지의

    마을들과는 약간 다른 경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일산1리부터 일산8리까지는 일산역 앞쪽으로 위치하고

    310번 도로를 끼고 있는 등 사방으로 뻗어가는 길들이

    교차히는 지역이므로 시장과 상가가 발전한 번화가라

    고 할 것 같으떤, 일산10리, 일산11리, 일산12리 동은

    일산역의 뒤에 위치하여 철로가 가로지트는 제약으로

    번화가로서보다는 주거지로서 성격을 굳혀 왔다

    나 주엽리(注葉里) 지역

    주엽리는 일산리를 기준으로 볼 때 서남방향 한강 쪽

    에 있는 마을들을 통칭승}는 법정리 명칭으로서, 주엽리

    지역은 동쪽으로는 장항리와‘ 서쪽으로는 송포면 대화

    리와, 남쪽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김포군과, 북쪽으

    로는 일산읍과 이웃하고 있다 이 지역의 마을들은 뒤로

    는 자그마한 야산을 끼고 앞으로는 널따란 벌을 가지고

    있는 논농사 지대이다 이 지역의 마을들은 주엽 1리를

    제외하면 이전부터 있던 마을들이다

    주엽2리는 달리 ‘오마리 (五馬里)’ 라고 불리는 해주오

    씨의 집성촌이다 주엽리 오마 해주오씨 1684년 이래로

    이곳에 살아 왔다고 전한다 오마리의 인구는 1989년

    현재 547}구 243명으로서 1974년의 인구 204명에 비

    해 119.7%의 인구증가를 보이고 있다 주엽3리는 ‘문

    촌(文村)’ 또는 ‘민마루’ 라고 불리우는데, 『高陽那誌」

    (1755)에 ‘주엽리(注葉里)’ 아래에 ‘독종촌리(秀宗村

    里)’ 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때부터 있어 왔던

  • 미을로 보인다 여기에는 해주오씨와 밀양박씨들이 많

    이 거주하고 있다. 주엽3리의 인구는 1990년 통계를 볼

    때 58가구 230명이었다 1986년도의 조사통계로 주엽

    2리와 주엽3리에 457}구 245명의 해주오씨들이 살고

    있었던것으로보인다

    주엽4리는 ‘강선’이라고도 하는데, 논농사를 위주로

    하나 밭농사도 조금 짓고 있다. 주엽4리는 달성서씨의

    집성촌이다 1980년대에 들어 몇 개의 공장이 들어섰

    다 주엽 4리의 인구는 1989년 통계를 볼 때, 109가구

    457명이었다. 주엽5리는 ‘상주(上注)’ 를 자연지명으로

    가지고 있다‘ 주엽5리는 달성서씨와 전주이씨들이 이루

    어 놓은 집성촌이다 주엽5리의 인구를 보면, 1974년에

    297명이던 인구가 1989년에는 244명 (62가구)으로 그

    수가 줄어 들어 ‘ 1989년의 인구가 1974년 대비 82.2%

    에 해당된다. 주엽6는 달리 ‘하주(下注)’라고도 불리우

    는데, 주엽5리와 마찬가지로 달성서씨와 전주이씨들이

    모여 산 마을이다. 주엽5리와 마찬가지로 1974년 328

    명이던 인구가 1989년 226명 (58가구)로 줄어들어‘

    1989년의 인구가 1974년의 인구의 68.9%에 머무는.

    이 지역에서는 드문, 그러나 일반적인 한국농촌의 현실

    을 반영하는 현상을 가져 왔다. 주엽4리. 주엽5리, 주엽

    6리 둥은 모두 1800년경에 이 지역에 정착한 달성서씨

    가 지배적인 성씨로 되어 있다‘ 1986년 통계로 이 세 마

    을의 달성서씨는 35가구 175명에 이르렀다‘

    주엽 1리는 본래 있던 마을이 아니라 6.25전쟁 뒤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촌’ 이라고 불리운다‘ 이곳에 한

    두 집이 살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6.25전쟁 이후에 장딘

    군의 난민들을 이곳에 머물게 한 수용소가 발전하여 된

    마을이다. 1974년의 인구 287명이 1989년 현재 947}구

    355명으로 증가함으로써 이 기간 동안의 인구증가율

    123.7%를 보이고 있다

    1974년부터 1989년까지 주엽리 마을들의 평균 인구

    증가율은 108.9%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이 지역이 1974

    년부터 1989년까지 일산새도시개발지역 마을들의 평균

    인구증가율 173.8%보다훨씬 떨어진다 이것은주엽리

    가 한강 별 쪽에 위치하여 주요 도로로부터 떨어져 있는

    탓이다 주엽리 마을들 가운데서는 일산리에 이웃해 교

    통이 좀 더 편리한 주엽 1리와 주엽2리는 그 기간 인구

    증가율이 123.7%와 119.7%로서 . 보다 벌 쪽에 위치한

    다른 주엽리 마을들(주엽3리 ,4리 .5리 ,6리 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인구증가율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

    타났다.

    다 장항리(獲項里) 지역

    장항리 지역은 일산리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

    쪽으로는 미두리와 백석리와 이웃하고, 서쪽으로는 주

    엽리와 경계하며, 남쪽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김포

    군과 마주한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논농사를 위주로 하

    는 지역이다. 장항리에는 용수로를 기준으로 그 안쪽으

    로는 일산 세도시개발지역에 들어간 장항1리와 장항2리

    가 있고‘ 용수로 바깥으로는 새도시개발지역에 포함이

    안 된 장항3리 .4리 ,5리 둥이 있다. 장항1리와 장항2리

    는 일산새도시지역의 대표적인 산인 정발산(해발 59.

    3m)의 서남쪽 자락에 놓여 있고. 장항3리. 장항4랴. 장

    항5리 둥은 널따란 별 한 가운데에 있다 장항3리 , 4리 ,

    5리에 사는 사람들을 다른 마을 사람들은 ‘별사람들’ 이

    라고부른다-

    장항1리는 ‘닥밭’ 이라고 불리운다- 오늘날 닥나무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나, 옛날에는 이 지역에 아주 많았

    던 것으로 보인다 『高陽君|‘誌』 0755)에 정발산을 가리

    켜 「盤據千格田之地」라 하고. ‘저전이패리(橋田=牌

    里)’에 ‘장항리(繹項里)’를속해 놓았기 때문이다 아무

    튼 장항1리는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의 자손들이 머물러

    왔다. 장항1리는 1989년의 인구가 83가구에 329명으

    로, 1974년의 358명에 비하여 오히려 줄어들었다. 장항 2리는 달리 ‘놀메기’ 라고도 하는데‘ 각성 마을이다 그

    렇지만 64호 가운데 밀양박씨가 9호, 해주최씨가 8호,

    김씨가 5호 정도 되었다고 한다. 장항2리도 다른 장항

    리 마을들처럼 1974년에 비하여 1989년에 오히려 인구

    가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1989년 현재 장항2리

    는 64가구에 290명이 거주했다.

    용수로 바깥 벌판에 있는 마을들은 장항3리(무검),

    장항4리(통일촌), 장항5리(산염), 장항6리(노첨) 퉁이

    다. 이 마을들 가운데 장항4리(통일촌)을 제외한 마을

    들은 1918년 지도에 따르면. 이미 존재하고 있다. 또한

    『高陽那誌』 (1755)에 中面에 관한 호구수를 다루는 항목

    에 「島中里四낙----戶 . 上앞村, 無:l;j耐」이라는 기록이 있

    27

  • 는 것으로 볼 때, 이들 마을들 가운데 적어도 장항3리가

    된 무검만은 1755년에는 존재하고 있었다 통일촌이라

    고 불라는 장항4리는 6.25전쟁후에 피난민들이 세운 마

    을, 곧 수용소가 발전한 것이다

    라 마두리(馬頭里) 지역

    마두리는 정발산 동남 쪽의 산자락에 걸쳐 있는 마을

    들을 가리키는 법정리 영칭이다 마두리는 동쪽으로는

    벡석리 및 풍리와 이웃히고, 서쪽으로는 장항리와 맞대

    어 있으며, 북으로는 일산리와 경계하고‘ 남으로는 장항

    리 및 백석리와 잇닿아 있다. 일산읍지역의 다른 곳처럼

    마두리도 쌀농사 지대이다 이 지역은 마두1리를 빼 놓

    고는 벡마역이 가깝고 능곡괴 일산을 연결하는 398번

    도로가 지나가 근래에 들어서 외지인의 인구가 급격히

    늘었다. 경의선이 마두3리와 마두4리를 스쳐 나 있는

    바. 과거에는 기차역이 〔서울 신촌 수섹 능곡 일산〕

    의 순서로 이어져 마두리 인근 지역에는 역이 없어서 8

    km라는 맨 거리를 능곡끼지 걸어다녔다고 한다 6.25전

    쟁 직후에 능곡역과 일신-역 사이에 백석리와 마두리를

    경계로 백마역이 생겼으며, 이에 따라 신엽화가 되면서

    이 지역에 서울 사땀이 늘어 L..~는 등 인구가 팽창하여 벡

    마국민학교가설립되기에 이트렀다

    마두리에는 마두1리부터 마두5리까지 있는데‘ 1리부

    터 4리까지는 조선시대부터 존재하던 마을이고‘ 마두5

    리는 서울 지역의 재개발에 따라 이 지역으로 이주한 사

    람들이세운마을이다.

    마두1리는 ‘낙민’ 이라는 자연 지명을 지니며, 초계정

    씨가 1450년 경에 정착하여 만든 마을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정발산 남녘이어서 장항2리와 이웃하고 있다.

    백마역 쪽에서는 마두2리를 지나서만 도달할 수 있다

    이 지역의 간선도로인 398번 도로와 백마역으로부터 떨

    어져 있어 외지인의 유입이 비교적 적은 지역임을 인구

    통계로 알 수가 있다 즉 1974년 마두1의 주민은 354명

    이었으나, 1989년의 주민은 326명 (76가구)로 오히려

    인구가감소되었다

    마두2리는 ‘강촌’이라는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듯이 ,

    진주강씨 통계공파가 300년전에 정착하여 이루어진 마

    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인근 산에 강씨의 묘소가 128구

    28

    있었다고 한다 큰 마을인 윗말에 진주강씨가 살았지만,

    작은 마을인 아랫말과 구석말에는 경씨가 살았다고 한

    다 그러나 이주 직전의 마두2리는 백마역 인근에 위치

    한 관계로 타지역 출신 세입자 수가 급격히 늘어 나고

    가까이에 서울 철거민들이 정착하여 분위기가 많이 달

    라졌다 마두2리의 1974년 인구는 452명이고 1989년

    인구가 733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1974년 인구는 마

    두5리가 떨어져 나가기 이전의 인구가 합쳐진 것이므

    로, 이 통계수치로는 순수한 마두2리의 인구증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마도 마두2리의 인구증가율은 마

    두2리보다 백마역에서 더 밸리 떨어진 마두4리의 1974

    년도 대비 인구증가율 185.2%보다는 높았고, 백마역에

    서 마두2리와 비슷한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마두3리의

    2280%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두3리는 ‘설촌’ 이라는 자연지명을 지니듯이 ‘ 개성

    설씨가 1593년 경부터 살아온 것으로 알려진 동족마을

    이었다 주민의 말에 의하면 15대를 살았다고 한다 개

    성설씨는 1986년 통계로 이 마을에 38가구 245명 이 살

    고 있었다. 능임-골은 안동김씨 선산이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렴에는 이미 타지인 세입자의 유입으로 주민의 대

    부분은 세입자가 차지하게 되었다 즉 1986년의 마두3

    리의 주민은 700명에 150가구였다 이 마을에로의 타지

    인구의 유입이 많다는 사실은 1974년 대비 1989년의

    인구증가율이 228.0%에 이르는 것을 볼 때 더욱 확실

    해진다

    마두4리는 해주최씨의 동족마을로 ‘냉촌’ 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해주최씨가 300여년 전에 정착했다

    고 주민들은 말한다 마두4리는 1974년 230명이었던

    주민 수가 1989년 426명으로 늘어나 185.2%의 인구증

    가율을보이고있다

    마두5리는 ‘산동네’ 라고 하는데, 근래에 생긴 마을이

    다 10여년 전에 구파발 철거민들과 연희동 산28번지

    철거민들이 원거주지에서 무상으로 쫓겨나 원래 묘지였

    던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행정적으로 한 동

    안은 가까운 마두2리에 속하였다 그래서 마두2리로부

    터 떨어져 나온 뒤 일산새도시개발로 이주하게 될 때까

    지 마을회관, 교회, 구판장 등을 마두2리와 공유하였다

    주민들은 농사짓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노동자들이 대

    부분이어서 가난하여 원주민들의 농작물을 몰래 훔쳐

  • 먹는다고 하여 원주민과 처음에는 사이가 좋지 않기도

    하였다 1989년 인구통계로 19 17t구, 743명을 기록하

    고있다.

    마. 백석리(터右里) 지역

    백석리는 일산읍 법정리 가운데 능콕에 가까운 마을

    들이다 백석리는 남으로는 지도읍 신평리와 경계하며 ,

    북으로는 미두리 및 풍리와 이웃하고 있다 또한 서로는

    장항리 및 마두리와, 동으로는 일산읍 풍리 및 산황리와

    맞닿아 있다. 백석리에는 백석 1리부터 백석6리까지 있

    는데, 능곡에서 일산으로 이어지는 398번 도로가 백석4

    리 , 백석3리, 백석2리, 백석 1리를 꿰듯이 지나가고 있

    다 그리고백석리와마두리라는지명의 앞글자를따서

    이름붙여진 ‘백마역’ 이 이 지역의 관문 역할을 맡고 있

    다 그 사이에 아무런 역이 없던 능곡역과 일산역 사이

    에. 1970년 무럽에 곡산역과 백마역이 생겼는데, 개발

    제한구역 내에 있는 곡산역 주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

    지만 개발제한구역 바깥에 위치한 백마역 일대는 산업

    화 시대에 들어서면시 서울로 쉽게 출퇴근이 가능한 시

    울의 배후지가 되어 번창하게 되었다. 이 지역도 마찬가

    지로 쌀농사로 유명한 곳이다‘

    백석 l리부터 백석4리까지는 조선시대 후기에도 있던

    마을들이나‘ 백석5리와 백석6리는 뒤에 생긴 마을들이

    다 한강 뚝이 생기기 이전에는 섬이었던 지도읍 신평리

    와 셋강을 사이에 두고 ‘백신’ 이 라고도 불리는 백석5리

    가 있다‘ 1918년 일제가 만든 1/50.000지도를 보면‘ 이

    자리에 신촌(新村)이라는 마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벡

    신’ 은 그 무렵에 빨밭을 개간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생긴 마을로 보인다 백석6리는 서울 지역 철거민들이

    자신들의 생계의 근거지가 서울에 있으므로 서울에 출

    퇴근하기가 좋은 백마역 근처에 정착하여 이루어진 마

    을이다 이 마을들 가운데 백석5리만이 용수로 바깥에

    위치하여 새도시개발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백석 1리는 ‘방터골’ 이라고 불리우는데, 방씨들이 이

    곳에 터잡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설명을

    한다- 실제로 방씨들은 6.25전쟁 이 래로 이 마을에 살지

    않았고 창녕조씨들이 많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산새도시개발에 따른 이주 보상을 받을 때 조씨들이

    경작하던 땅이 모두 방씨들의 소유로 판명이 나서. 토박

    이 경작자들은 집값 밖에는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즉 이 방터골 사람들은 옛부터 일제시대까지 온양방씨

    들의 소작을 살아 오다가 토지개혁으로 자기들 땅이 된

    줄 알고 있다가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것이다 마을 사

    람들에 따르면 이 마을에 심씨가 제일 먼저 살았고 그

    뒤를 방씨가 이었고 마지막으로 조씨가 들어왔다고 한

    다 백석 1리는 1974년 인구가 301명이었다가 1989년

    591명 os61t구)으로 늘어나 동기간 동안 196.3%의 인

    구증가를보였다,

    백석2리는 ‘샘푸리’ 라고 하는데, 다시 ‘편촌(말)’ 과

    ‘강촌(말)’ 두 마을로 나뉘어 있었다. 그래서 당시 50년

    대에는 편씨가 37호‘ 강씨가 15호 정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값이 싸고 가까이에 백마역이 있어 서울로 출

    퇴근하기가 쉬워 많은 사람들이 흘러 들어오고 같은 이

    유로 서울에서 철거당한 사람들이 근처 ‘동굴매’ 라고

    부르는 백마역 앞에 집단으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인구

    가급증하여 1987년 7월1일 철거민들이 많이 몰려 살던

    벡마역 앞 일대가 백석6리로 분리되어 나갔다 다름 아

    닌 백석6리는 술집, 다빙, 식당 둥이 자리잡고 있어 한

    때 ‘백마’ 로 통하면서 서울시내 대학생들의 ‘MT' 장소 로 각광을 받았던 곳이다 백석6리의 주민들은 대부분

    서울의 회사나 공장에 다니거나 이 지역에서 술집을 열

    고 있다 백석2리와 백석6리의 인구는 1974년에 545명

    이었으나, 1989년에는 3.388명에 달해 15년 동안 무려

    621% 증가히-였다‘

    백석3리는 ‘난산’ 혹은 ‘알띠’ 라고 불리며, 전주이씨

    의 동족마을이었다. 1637년 경에 그 선조가 이 지역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1986년에 조사된 바에 따르면. 난

    산에 전주이씨는 54가구 284명이 살고 있었다. 백석4리

    는 ‘백석’ 또는 ‘흰돌’ 이라고 불린다 ‘백석’ 은 이 마을

    도당굿의 대상인 도당산에 있는 직사각형 형태의 흰돌

    로 말미암은 이름이다 인조 때 최지연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밀양박씨‘

    언동장씨, 통린최씨 둥이 많이 살았으나, 새도시개발에

    따른 이주 직전에는 그 동안의 외부 인구의 유입으로 원

    주민이 전체 주민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졌다.

    1974년에 백석 3리와 백석4리는 모두 통일하게 인구가

    541명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1989년에는 백석3리가

    29

  • 796명 096가구), 백석4리가 642명 (1567}구)이 되어,

    각각 147.1%와 118.7%의 인구증가율을 보였다 백석 1

    리와 백석2리의 인구증가율에 비교할 때 인구증가율이

    현격하게 떨어지는 까닭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백석4

    리가 백석3리에 비해 인구증가율이 떨어지는 까닭도‘

    이 지역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백마역으로부터의 거

    리의 차이로 설명될 수가 있을 것이다 백석3리와 백석

    4리는 모두 벡석 l리와 맥석2리보다 백마역에서 더 멀

    고, 백석4리는 백식3리보다 백마역으로부터 보다 멀리

    398번 도로를 따라 능곡 쪽에 자리잡고 있다 맥석4리

    에는조선시대 후기에 ‘백석장(흰돌장)’이 있었다,

    바- 대화리(大化里) 지역

    대회리는 일산으로부터 교히- 방면으로 나 있는 310번

    도로를 타고 오다가 일산2리를 지나 나타나는 삼거리에

    서 법곳리 이산포로 가는 307번 도로로 접어들어 lkm

    정도 들어오게 되면서부터 도로 주위에 퍼져 있는 마을

    들이다 대화리는 동으로는 일산읍 주엽리와 이웃하고‘

    서쪽으로는 송포면 법꽂리 및 가좌리와 맞닿아 있고, 님

    으로는 김포군과 경계하며 북으로는 송포면 덕이리와

    접하고있다

    대화리는 지금까지 디-룬 지역들이 일산읍에 속했던

    곳인 데 반해서. 대화리는송포면에 속해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송산면(松山面)과 사포면(E浦面)으로 나뉘어

    있던 두 떤이 1914년 부령 제 11호에 의한부 · 군 · 변 통

    폐합 때 송포면(松浦面)이라는 이름으로 합해졌다 뿐만

    아니라 그 이전까지 사포띤을 구성하고 있던 3개 리인

    대화리(大1 r.里), 성저리(뼈&里), 이산리(二山里) 가운

    데 대화리와 성저리를 합하여 하나의 법정리로 만들어

    대화리라 명명하였고 이산리는 법꽂리리-는 독립된 법정

    리로 만들었다 새도시개발 바로 전에 대화리는 대화1리

    부터 대화8리까지 있었다, 이 가운데 일산새도시 개발지

    역에 포함된 곳은 대화3리, 대화4리, 대화5리이다

    대화1리는 ‘김동’ 과 ‘양촌’ 이라는 두 자연마을로 구

    성되어 있고, 대화2리 역시 ‘내촌’ 과 ‘백암’ 이라는 두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대화7리는 ‘김서’ 라는 자연 ---

    지명을 지니고 있는데, 대화1리로부터 5. 16 이후에 떼

    어져 나왔고, ‘깅서’ 라고 불리는 대화8리는 1982년 대

    화2리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다- 이들 대화1리, 대화2리‘

    대화7리‘ 대화8리는 조선시대 후기부터 대화리에 속해

    있던 마을들이며 , 금릉김씨가 지배적인 곳이다.

    대화4리는 ‘성저리’ 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듯이 ,

    조선시대 후기에는 대화리와는 독립된 하나의 행정단위

    였고 그 하위 자연촌락인 신촌2)은 가장 큰 마을로 성주

    이씨 동족마을이며 몇 백년 동안 이곳에 세거해 왔다고

    한다 또 다른 하위 자연촌락인 ‘가와지’ 는 박씨들 몇

    집으로 구성된 마을로서 그다지 오레된 마을은 아니다‘

    대화4리는1974년 인구가 487명이었으나, 1989년에는

    651명 (175가구)으로 증가하여 같은 기간 동안 133.7%

    의증가율을보였다

    대화3리는 ‘정촌’이라고불리우띠 ‘長村j 으로표기된

    다 그리고 이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마을이 길다 하여

    장촌이라고 했다는 설, 정(鄭)씨들이 많이 살아서 ‘정

    초’ 이라 하던 것이 와전되었다는 설과 나란히 ‘장이 섰

    던 마을’ 이라는 설 둥이 있는데‘ 가까운 논에 ‘장터논’

    이라는 지명이 있고, 『林園經情志』에 군(那)에서 삼십

    리 떨어진 사포띤( I그浦面) 지역에 사포장(E.浦場)이 있

    다는 설명과, 『高陽那誌』에 ‘성정리(城低里)’에 ‘장리

    촌(場里村)’ 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大東地誌』에도

    ‘사포장( i=,浦場)’ 이 나와 있는 것 동을 두루 헤아렬 때

    에‘ 장촌은 조선후기부터 한말까지 장이 섰던 마을로 보

    인다 아무튼 오늘날 대화3리에는 장이 섰던 흔적은 하

    나도 남아 있지 않다‘ 대화3리는 1974년 인구가 322명

    이었으나, 1989년에는 343명 (90가구)으로 늘어나 106.

    5%의 증가율을보였다

    대화5리는 ‘장단사람들이 이룬 마을’ 이라는 뜻으로

    ‘장성(長成)마을’ 이라는 자연명칭을 지니고 있듯이 6.

    25전쟁 뒤에 장단군 지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머물렀

    던 수용소가 발전한 마을이다 대화5리는 1974년 640

    명이던 인구가 1989년에는 810명 (196가구)로 늘어나

    126.6%의 인구증가율을 보였다, 이런 수용소가 발전해

    서 이루어진 또 다른 마을로는 대화6리(벽절)가 있다

    2) r高陽빼誌」 (1755)에도 ’新村/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볼 때 .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던 마올임에는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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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 1) 일산새도시 지역의 마을들

    구 ~ 지배적 성씨 비 고 }」

    일산 9 (票洞〔밤가시〕) 단양이씨 1390년 경 정착

    일산10 (後洞〔뒷골〕) 진주강씨, +단양이씨

    일산11 (문화촌) 6.25전쟁 피난민촌이 발전한마을

    일산12 (신동) 1966년 장항4리 사람들이 홍수로 이주하여 이룬 마을

    주엽 1 (신촌) 6.25전쟁후 장단사람들이 정착한 수용소가 발전한 마을

    주엽 2 (오마리) 해주오씨 1684년 경 정착

    주엽 3 (文村〔민마루〕 해주오씨,밀양박씨

    주엽 4 (강선) 달성서씨

    주엽 5 (상주) 달성서씨,전주이씨

    주엽 6 (하주) 달성서씨,전주이씨

    장항 1 (닥밭)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장항 2 (놀메기) 각성 밀양박씨, 최씨, 김씨 등

    백석 1 (방터) 해주조씨

    백석 2 (천청 〔샘푸리〕) 절강편씨‘진주강씨

    백석 3 (”H山〔알미〕) 전주이씨 1637년 경 정착

    백석 4 (白石〔흰돌〕) 밀양박씨‘인동장씨,

    통린최씨

    백석 6 (동굴매) 서울철거민촌

    마두 1 (낙민) 초계정씨 1450년 경 정착

    마두 2 (강촌) 진주강씨통계공파 300년전 정착

    마두 3 (설촌) 개성설씨

    마두 4 (냉촌) 해주최씨

    마두 5 (산동네) 서울의 재개발로 옮겨 온 사람들이 건설

    대화 3 (장촌)

    대화 4 (성저리) 성주이씨

    대화 5 (장성마을) 6.25 전쟁 피난민촌 (장단군 출신들)

    〈표 2) 일산새도시개발지역의 1974년부터 1989년까지 인구증가율

    전 체 171.5%

    일산리지역 213.6%

    백석리지역 281.0%

    마두리지역 218.1%

    주엽리지역 96.0%

    장항리지역 82.4%

    대화리지역 124.8%

    31

  • 〈표 3) 마을별 인구

    ~ 1974 1984 1989 증가율

    인구 호수 총인구 남자 여자 호수 총인구 남자 여자 (%)

    일산 9 334 81 338 167 171 74 293 141 152 87.7 일산10 991 379 1.779 916 863 645 2.330 1.163 1.167 225.0 일산11 563 163 770 385 385 209 853 425 428 151.5 일산12 240? 228 1.076 541 535 274 1.069 520 549 445 ‘4 주엽 1 287 76 338 180 158 94 355 186 169 123.7 주엽 2 204 55 275 144 131 54 243 126 117 119.7 주엽 3 329 48 258 136 122 58 230 119 112 70.7

    주엽 4 384 92 411 210 201 109 457 119.0 주엽 5 297 60 308 160 148 62 244 82.2 주엽 6 328 60 274 122 152 58 226 68.9 장항 1 358 81 362 197 165 83 329 180 149 91.9 장항 2 393 64 332 174 158 64 290 149 141 73.8 백석 1 301 122 511 244 267 156 591 278 313 196.3 백석 2 545 650 2.932 1‘455 1.477 411 1.701 841 860 312.1 백석 3 541 159 760 383 377 196 796 397 399 147.1 백석 4 541 129 612 313 299 159 642 329 313 118 ‘7 백석 6 (백석2리에 포함) 500 1.687 마두 l 354 72 353 171 182 76 326 152 174 92.1 마두 2 452 105 493 277 216 225 733 378 355 162.2 마두 3 322 150 700 362 338 195 734 388 346 228.0 마두 4 230 96 411 208 203 118 426 216 210 185.2

    마두 5 210 973 511 462 191 743

    대화 3 322 56 297 154 143 90 343 106.5 대화 4 487 107 558 292 266 175 651 333 318 133.7

    대화 5 640 165 746 395 351 196 810 126.6

    전체 9‘970 3.408 15.267 4.523 17 ‘ 102 171.5

    • 주엽 3리의 인구통계는 1990년도의 것이다‘

    • 백석 2리의 1974년, 1984년의 인구통계는‘ 지금은 백석2리에서 분리되어 있는 백석 6리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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