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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상가 김 선 욱 (숭실대학교,철학) 1. 한나 아렌트의 학문적 인생여정 한나 아렌트는 1906년 독일의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양친인 폴 아렌트와 마르타 아렌트 는 모두 칸트(Immanuel Kant)가 활동했던 쾨니히스베르크 태생으로 아주 부유하지는 않았 으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문에서 성장하였다. 이들은 당시 불법이었던 사회당 당원이었으 며 종교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의 조부모가 어린 한나를 유대교 회당에 데리 고 다니는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1919년 일어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등의 실패한 혁명은 어린 아렌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이후의 정치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아렌트는 10대에 이미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칸트, 야스퍼스(Karl Jaspers) 등의 저작들을 읽었고, 대학에서 신학연구를 계획하고 있었다. 1924년 마부르크대 학에 들어간 한나 아렌트는 바로 35세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 매혹되었다. 이때 하이데거는 나중에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으로 출간될 내용을 강의하고 있었다. 1925년 봄에 이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상황이 작용하여 아렌트 는 그해 여름에 야스퍼스의 지도를 받기 위해 하이델베르크로 옮겨갔다. 스승인 야스퍼스와 이때 맺은 우정은 훗날까지 계속해서 지속되었다. 야스퍼스의 지도 아래 아렌트는 성 아우 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1929년 아렌트는 베를린에서 유대인 지식인이자 작가인 귄터 슈테른과 결혼하였다. 이때 아렌트는 독일의 시온주의자 조직에 속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된다. 아렌트는 그때도 그리 고 그 후에도 시온주의에 대하여는 심각한 회의를 품고 있었다. 이미 아렌트는 모든 시민들 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워가는 다원주의 모델에 깊이 몰두해 있었던 것이 다. 비록 아렌트가 시온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운 시 대적 환경 속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남편의 파리 망명 이후에도 아렌트는 베를린에 서 그들을 계속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1933년에 8일 동안 구류되어 심문을 받고, 석방 후 어머니와 함께 아무 증명서도 갖지 않은 채 독일을 떠나 프라하와 제네바를 거쳐 파리로 망 명하였다. 베를린에 있는 동안 아렌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붕괴되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참여자로서 활동하였다. 이때 당한 구류는 그녀로 하여금 후에 적어도 무엇인가를 했다.1는 안도감을 갖게 했다. 1931~1932년의 기간 동안 한나 아렌트는 라헬 파른하겐(Rahel Varnhagen 1771~1833)의 전기를 썼다. 이 책은 1958년에 한 유대인 여인의 삶이라는 부제를 달 고 출간되었다. 라헬 파른하겐은 부유한 유대인으로서 독일 낭만주의 사상가에 속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방문하게 되는 살롱을 열었었다. 파른하겐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으나 후에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파른하겐을 통해 아렌트는 자신의 여자됨과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관점의 독특 성을 갖게 된다. 즉 그녀는 여자, 유대인, 망명자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파리아(pariah)로서 의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게 된다. 아렌트는 사회적 주류에 속하거나 변방에 머물게 하는 이 유들을 적극적으로 자각하고 수용하여 결국 그것들을 자신의 고유한 시각으로 승화시킨 것

김선욱, 한나아렌트-어두운 시대의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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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김선욱, 한나아렌트-어두운 시대의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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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상가

김 선 욱 (숭실대학교,철학)

1. 한나 아렌트의 학문적 인생여정

한나 아렌트는 1906년 독일의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양친인 폴 아렌트와 마르타 아렌트

는 모두 칸트(Immanuel Kant)가 활동했던 쾨니히스베르크 태생으로 아주 부유하지는 않았

으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문에서 성장하였다. 이들은 당시 불법이었던 사회당 당원이었으

며 종교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의 조부모가 어린 한나를 유대교 회당에 데리

고 다니는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1919년 일어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등의

실패한 혁명은 어린 아렌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이후의 정치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아렌트는 10대에 이미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칸트, 야스퍼스(Karl

Jaspers) 등의 저작들을 읽었고, 대학에서 신학연구를 계획하고 있었다. 1924년 마부르크대

학에 들어간 한나 아렌트는 바로 35세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 매혹되었다. 이때

하이데거는 나중에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으로 출간될 내용을 강의하고 있었다.

1925년 봄에 이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상황이 작용하여 아렌트

는 그해 여름에 야스퍼스의 지도를 받기 위해 하이델베르크로 옮겨갔다. 스승인 야스퍼스와

이때 맺은 우정은 훗날까지 계속해서 지속되었다. 야스퍼스의 지도 아래 아렌트는 성 아우

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1929년 아렌트는 베를린에서 유대인 지식인이자 작가인 귄터 슈테른과 결혼하였다. 이때

아렌트는 독일의 시온주의자 조직에 속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된다. 아렌트는 그때도 그리

고 그 후에도 시온주의에 대하여는 심각한 회의를 품고 있었다. 이미 아렌트는 모든 시민들

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워가는 다원주의 모델에 깊이 몰두해 있었던 것이

다. 비록 아렌트가 시온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운 시

대적 환경 속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남편의 파리 망명 이후에도 아렌트는 베를린에

서 그들을 계속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1933년에 8일 동안 구류되어 심문을 받고, 석방 후

어머니와 함께 아무 증명서도 갖지 않은 채 독일을 떠나 프라하와 제네바를 거쳐 파리로 망

명하였다. 베를린에 있는 동안 아렌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붕괴되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참여자로서 활동하였다. 이때 당한 구류는 그녀로 하여금 후에

적어도 무엇인가를 했다.1는 안도감을 갖게 했다.

1931~1932년의 기간 동안 한나 아렌트는 라헬 파른하겐(Rahel Varnhagen

1771~1833)의 전기를 썼다. 이 책은 1958년에 한 유대인 여인의 삶이라는 부제를 달

고 출간되었다. 라헬 파른하겐은 부유한 유대인으로서 독일 낭만주의 사상가에 속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방문하게 되는 살롱을 열었었다. 파른하겐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으나 후에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파른하겐을 통해 아렌트는 자신의 여자됨과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관점의 독특

성을 갖게 된다. 즉 그녀는 여자, 유대인, 망명자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파리아(pariah)로서

의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게 된다. 아렌트는 사회적 주류에 속하거나 변방에 머물게 하는 이

유들을 적극적으로 자각하고 수용하여 결국 그것들을 자신의 고유한 시각으로 승화시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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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아렌트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슈테른과 이혼을 한다. 또 이 시기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과 하인리히 블뤼허를 만나게 된다. 아렌트는 어렵사리 미국행 비자를 받아 1941

년 5월 미국 뉴욕에 도착한다. 무국적 상태(모든 권리, 특권, 보호의 상실)로 지낸 이 시기

의 경험으로 인해 아렌트는 권리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법 차원에 속한다는 것을 인식하

게 된다. 또한 권리란 정치 조직체의 형성을 통해서 창조되며 그 조직체의 구성원들만이 향

유할 수 있고, 따라서 권리란 그 조직의 법에 속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2 이러한 인식

은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이해의 지반이 된다.

전체주의는 정치영역의 파괴를 바탕으로 성립한다. 유럽의 도덕이 총체적으로 붕괴

된 것은 전체주의자들이 정치부재의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

(1951)을 쓰게 된 것은 이러한 전례 없는 상황인 전체주의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다. 전체주의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용서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현상을 가능하

게 만든 세계와 화해함으로써 그 속에서 전체주의와 투쟁할 수 있는 참된 길을 발견하기 위

한 것이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반유대주의의 근원들과 제국주의의 여러 요소들을 분석한

다. 이 저술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아렌트의 전체주의에 대한 통찰과 독특한 방법

론은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아렌트는 여기에서 역사를 이용한 전체주의의 분석`3

이라는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거쳐 현대의 관료적 자본주의에서도

전체주의적 요소를 찾아내는 통찰을 보여주었다.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전체주의의 필수

요소로 공포(terror)와 이데올로기(ideology)를 지목한 부분이다.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성과 건전한 상식에 의존하여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국가 전반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도록

전체주의 국가는 죽음의 수용소나 집단 수용소와 같은 시설을 마련하고, 그렇게 해서 대중

화된 사람들에게 체계적이고 논리적이지만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사고와 판단

의 기준으로 사용되도록 주입시킨다. 이렇게 전체주의 국가는 그의 시민들에게 체계적 거짓

말을 시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적 거짓말은 언젠가는 현실과 충돌하여 붕괴되고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방식으로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몰락을 예견하였고, 이

러한 예견은 동구권과 구 소련의 몰락으로 그 타당성이 입증된 셈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분석을 끝낸 뒤, 아렌트는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비판서를 준비한다. 상

당한 분량으로 연구를 진척시키던 중 아렌트는 이를 보다 포괄적인 맥락에서 새롭게 전개하

여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1958)이라는 결실을 맺게 된다. 예루살렘의 아

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과 더불어 현재 가장 널리 읽히는 저술이다. 이 책에서 아

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 등 세 가지로 구분하고 이것들 간의 차별성을 강조

한다. 정치의 본질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간의 정치적 활동을 행위에 한정하는 현상학적 분

석을 펼친 것이다. 이것은 노동을 중심으로 정치에 접근하는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근본적

인 비판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정치영역의 존립이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는 입론을 풍부한 자료와 통찰력으로 입증한다. 복수로 존재하는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모

습을 지니고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현대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분석은 아렌트 사상의 독

창성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판단 문제에 대한 아렌트의 고민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본격화되어 과거와 미래 사

이(Between Past and Future)(1968)에 수록된 논문들 속에서 언급된다. 판단이론을 형성

하는 문제의식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미 시작되며, 1950년대에 쓰여진 <이해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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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standing and Politics)>와 같은 논문들에서 나타난다. 전체주의는 전례가 없는 새로

운 현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규정할 수 있는 개념이나 사고의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

가 없는데 어떻게 길이를 잴 수 있으며, 수 개념이 없는데 어떻게 물건을 셀 수 있을까?이러한 문제의식은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칸트의 반성적 판단 개념의 도움을 받아 전개

된 정치적 판단이론을 통해 대답되어진다.

1960년부터 벌어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사건은 아렌트에게 또 다른 문제의식을 제공한

다. 히믈러 아래 제2인자로 유대인 학살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진행시킨 아돌프 아이히

만은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숨어살다가 후에 그 존재가 노출된다. 1960년에

이스라엘 비밀경찰은 아이히만을 예루살렘으로 납치해 세기적 재판을 연다. 아렌트는 미국

의 저명한 잡지인 <뉴요커(New Yorker)>의 통신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 재판

을 참관한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악마나 괴수의 모습이 아니라, 누구나 범할 수 있는

평범한 악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뉴요커>에 게재된 보고서는 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

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1963, 1965)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아렌트의 보고서는 즉

각적으로 엄청난 반응을 얻는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대학살의 책임자

에게서 발견한 악이 평범한 것이며, 현대인 누구나 범할 수 있는 것이라는 분석은 아이히만

에 대한 증오에 불타는 유대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더욱이 같은 유대인에

의한 분석이었으니 말이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은 당시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

니라 아직도 윤리학적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이 점은 아렌트의 통찰력이 얼마나 놀라운 것

인지를 증명한다. 한편 이 경험은 아렌트를 인간의 정신에 대한 새로운 연구로 이끌게 된

다. 아렌트의 연구는 아이히만에게서 보여진 평범한 악, 즉 무사유(thoughtlessness)가 어

떻게 가능하며 또 도대체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인간의 정신능력을 분석함으로

써 대답하려 한다. 이는 철학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연구로서 정신의 삶

(The Life of the Mind)라는 제목하에 사유(thinking)와 의지(willing), 그리고 판단

(judging)의 세 부분으로 계획되었다. 처음 두 부분을 완성한 뒤 아렌트는 심근경색으로 유

명을 달리하게 되었고, 판단에 관한 것이라고는 타자기로 찍혀진 판단이란 제목과 두

개의 머리인용문뿐이었다. 정신의 삶의 제3부가 될 판단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렌트의 제자였던 베이너는 칸트 정치철학에 대한 아렌트의 강의내용을 정리하여 칸트 정치철학 강의(1982)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로써 아렌트가 기획한 제3부 판단의

내용을 우리가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가 아렌트 정치 사상의 정점에 해당된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전체주

의의 기원과 초기의 글들에서 형성된 문제 관심인 정치의 본질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 이

책은 처방을 제시하는데 이르기 때문이다. 초기의 글들에서 아렌트는 정치의 핵심 요소로서

인간의 복수성과 “정치적인 것”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하였다. 이러한 통찰은 아렌트의 패

리아의 관점을 통해 이룩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점은 인간의 조건에서 명확하게 분석되었

다. 아렌트에 따르면 정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면서 서로 다른 개성을 드

러내는 가운데 공동의 생활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아렌트의 정치 개념의

핵심에는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존중이 자리잡고 있다. 다양한 개인들이 함께 모여 정치 공

간을 마련하고 여기서 언어를 사용하는 가운데 의사의 합일을 이루어 나가고 또 합의된 생

각을 바탕으로 공동의 행위(action-in-concert)를 이룩하는 것이 정치의 원초적 모습이다.

이러한 정치는 경제적 이해관계라는 사적인 문제가 공적인 관심을 점유하면서 위기를 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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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된다. 또한 진리 주장을 통해 다양한 의견의 개진을 원초적으로 봉쇄하는 것도 정치를

소멸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전체주의의 기원들 가운데 하나인 제국주의를 분석하면서, 부

르주아들의 경제적 요구에 따라 국가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국가 차원에서 비즈니스에

관심을 쏟으면서 정치 공동체가 파멸되고 개인이 개성을 상실하여 집단의 일원으로 몰락하

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이는 시대를 넘어 바로 오늘날의 경제지상주의가 지배하는 정치 세

계에 대한 적절하고 타당한 경고가 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은 정치 개념은 이전의 정치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플라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주요 정치 사상가는 다양성의 존중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을 근원

적으로 부정하는 진리 주장을 중심으로 정치사상을 구성해 왔다. 따라서 아렌트의 정치 사

상은 기존의 정치철학사의 연장에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의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철학자들 가운데 아렌트가 예외적으로 생각하면서 정치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부분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세 번째 강의에 거론된 마키아벨

리, 보뎅, 몽테스키외 정도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칸트도 예외가 아니다. 칸트의 실천이성의

원리에 기초한 정치철학을 아렌트는 거부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칸트의 판단력 개념에서 진주와 같은 것을 발견한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개별적인 것, 다양성을 보편적 원리로 환원하거나 그의 적용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개별자를 개별자 자체로서 다루는 유일한 것으로 칸트의 미적 판단력 개념을 발견한 것이

다. 이 때문에 아렌트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Critique of Judgment)에 의지할 수밖에 없

었다. 나아가 아렌트는 칸트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의 본래의 정치철학은 실천이성이 아니

라 판단력에 근거했던 것임을 이 강의의 전반을 통해 분석하려고 한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

에 감추어져 있는 “원래의” 칸트의 정치철학을 구명하는 아렌트의 작업은 정신의 삶의 제

3부의 내용이어야 했을 “판단”과 내용적으로 일치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신의

삶 이전의 여러 논문들에서 단편적으로 보여졌던 판단에 대한 논의들이 이 강의의 내용과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구명하였던 “정치적인 것”을 다루는 정신적 기재를 판단력이

라고 보았고, 판단력의 작용으로 정치적 판단의 작용과 가능성을 분석, 설명하는 것이 칸

트 정치철학 강의의 핵심 내용이며 목표이다. 이는 과거의 분석적 작업에서 이제는 구체적

인 지침을 제시하는데 까지 나아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지침이란 바람직한 정치체

제의 제시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는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명백하게 나눈다. 해야 할 것이란

“세계적 관찰자”의 시각을 갖는 것이며, 해서는 안 될 것이란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해관계

에 의해 공정한 관찰자로서의 시야가 가려지는 일이다.

2. 유대인 문제, 유대인 정치

아렌트가 유대인과 관련하여 쓴 글들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8년에 론 H. 펠

드먼이 쓴 패리아 유대인1)을 통해서였다. 아렌트가 남긴 유대인 문제 관련 저술들 가운

데 특정 시기의 글에 집중되어 있었던 이 책은 오랫동안 절판 상태로 있었는데, 2007년에

그동안 아렌트의 유고집을 꾸준히 발간해 온 제롬 콘이 론 펠드먼와 공동 편집하여 유대

인에 대한 저술이라는 제목으로 유대인과 관련된 대부분의 주요 저술들을 총망라하여 수록

1) Ron H. Feldman, The Jew as Paria: Jewish Identity and Politics in the Modern Age (New York:

Grove Press,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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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세상에 내 놓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아렌트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이해의 전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제롬 콘은 아렌트의 유대인으로서의 경험이 다섯 개의 주요시기로 구분된다고 한다. 첫째

시기는 1932년에 쓴 “계몽주의와 유대인 문제(The Enlightenment and the Jewish

Question)”에 담겨있는 것으로, 당시 20대였던 아렌트의 일차적 관심은 독일계 유대인들에

게 있었다. 자신의 땅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땅에 살면서 발생하는 문제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유대인 문제가 이해되었으며, 계몽주의가 유대인들을 어떻게 유럽 사회에 동화시켰

는가가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아렌트에 따르면, 예컨대 레싱과 멘델스존과 같은 계몽기 초

기의 사상가들은 유대인 해방의 가능성을 당시의 계몽의 정신에 따라 유대인들도 다른 인류

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계몽주의의 정신에 있어

서 유대인 해방의 목적은 그들에게 비-유대인들이 향유한 인권을 부여하는 것”2)이었다.

두 번째 시기는 1933년 6월에 아렌트가 시온주의자 친구들을 돕다가 독일경찰에게 붙들

려 심문을 받고는 풀려나와 체코 국경을 넘어 프라하를 지나 제네바로 갔다가 파리로 도망

을 간 시점에서 시작하여 유럽에서 체류하며 유대인 문제에 관심을 갖던 시기이다. 이때 아

렌트는 자신이 더 이상 독일 시민이 아니라는 정치적 각성을 가지며, 사회적 동화를 이루어

내었던 독일계 유대인들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자신의 처지를 통해 예감할 수 있었다. “사회

적 동화의 실패가 갖는 정치적 귀결은 … 독일에 있던 유대인들에게서 가장 ‘기본적인 인간

적 권리’의 박탈”3)이었던 것이다. 아렌트는 파리에서 시온주의자 조직을 위해 거의 시온주

의자와 다름없이 일을 했었다. 그녀가 일을 했던 조직인 청년 알리야(Youth Aliyah)는 13

세에서 17세 사이의 유럽의 유대인 청년들이 유럽 생활을 중지하고 팔레스타인으로 옮겨

살 수 있도록 하는 수단과 훈련을 제공하는 시온주의자 기관이었다. 이때의 아렌트는 “사회

사업가와 심리상담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자신이 살던 지역 공동체에서 외톨이가 되고

부모의 절망에 고민하던 한 유대인 청년을 상담하던 가운데 아렌트는 그의 개인적 불행이

사실상 그 개인의 것이 아니라 유대 민족의 전체의 불행임을 자각하게 하였다. 이 상담 이

야기는 1935년에 쓴 “어떤 젊은이는 고향을 간다(Some Young People Are Going

Home)”에 나온다.4) 그런데 같은 해 아렌트가 청년 알리야 훈련생들과 처음으로 팔레스타

인으로 여행을 했을 때 시라큐스를 방문하여 처음으로 그리스 신전을 보았고, 또 트랜스요

르단의 페트라를 방문하여 거기서 로마의 신전을 보았다. 여기서 아렌트가 받은 인상은 유

대인들이 정착할 지역인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여 보았던 그 어떤 것들보다도 더 생생하고 지

속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몇 년 뒤에 시라큐스를 다시 방문하기도 한다.5) 이 시기에 파리에

서 쓴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는 글은 이후 전체주의의 기원의 제1부인 “반유대주

의”와 대부분 일치한다.6)

세 번째 시기와 네 번째 시기는 아렌트가 1941년 5월 22일 뉴욕 항에 도착한 때로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인데, 이때 아렌트는 폭넓은 주제를 가지고 유대인 문제를

다루었다. 이 시기의 앞부분, 즉 세 번째 시기의 아렌트의 생각은 주로 뉴욕에서 발간된 독

일계 유대인 신문 아우프바우(Aufbau)에 기고한 글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데, 이때부터

2) Jerome Kohn, “Preface”, Hannah Arendt, The Jewish Writings ed. by J. Kohn and Ron H. Feldman

(New York: Schocken Books, 2007), p.xv.

3) 위의 글, p.xvii.

4) 위의 글.

5) Richard J. Bernstein, Hannah Arendt and the Jewish Question, p, 102

6) Jerome Kohn, "Preface", p.x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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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글에 자신의 분노와 열정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아렌트는 유

대인들이 하나의 독립된 민족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어떤 행위(action)을 할 것을

주장하며, 국제유대인군대를 만들어 유대인의 깃발을 달고 나치스와 싸우는 전투에 직접 참

가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 와중에 독일계 유대인들이 나치스에 의해 체계적으로 파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아렌트는 더욱 강력하게 이 주장을 펼치게 된다.7)

아렌트는 일찍이 1926년부터 친구 한스 요나스의 영향으로 시온주의에 대한 강의를 들었

는데, 이를 계기로 유대인 정치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접하게 된다.8) 이후 베르나르드 라자

레와 헤르츨을 통해 유대인 정치의 노선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특히 헤르츨의 생각은

20세기 시온주의 운동의 노선을 결정하게 된다. 헤르츨이 유대인의 증오를 유대인 국가 설

립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부분에 대해 아렌트는 반대했고 또한 시온주의자들의 정치적 노선

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지만, 그래도 당시에 유일하게 정치적 운동을 하는 것이 시온주의자

들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아렌트는 이들과 협력적 관계를 갖게 되고 그들의 활동을 인정한

다.

네 번째 시기는 아렌트가 유대인 문제들을 다루면서 정치적 입장이 보다 성숙해진 때를

가리킨다. 이 시기에 아렌트는 유대인 민족과 국가를 구분하며, 라자레를 통해 유대인이 민

족적 패리아라는 자각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자각한 패리아로서의 유대인의 역할에 대해

주장을 한 때이다. 이 시기의 글들은 펠드만의 편집서인 패리아 유대인을 통해 이미 알려

졌던 것이기도 하다.9) “권리를 가질 권리”라는 개념이 이 시기에 형성이 되며, 팔레스타인

에 이스라엘을 건립할 때 어떤 국가 구조를 가질 것인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유대인들로부터 악명을 얻기 이전에 아렌트는 이러한 활동으

로 인하여 이미 그들 사이에 패리아가 되어 있었다.10)

다섯째 시기는 이상과 같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글들을 써 오던 때로부터 수년간의 공백

기가가 있은 다음에 나온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출간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 책에 담긴

아렌트의 주장은 유대인들의 격렬한 비난과 저항을 받았고, 아렌트 자신은 유대인 사회에서

축출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유대인 사회에서 패리아로 남아있게 된다. 지금까지 아렌트의

저술 가운데 히브리어로 번역된 것은 2000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처음이었고 아직

도 다른 책들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질 않고 있을 정도이다.11) 예루살렘의 아이히

만에 대한 공격의 포문은 당시 히브리 대학 교수였으며, 유대교 신비주의인 하시디즘의 연

구가로 명성을 얻고 있던 시온주의자 거숌 숄렘(원래의 독일 이름은 게르하르트 숄렘이었으

나 이스라엘로 들어간 뒤 이름을 히브리 식으로 바꾸었다)에 의해 열렸다.

아렌트를 비판하는 숄렘의 글(오히려 비난에 가까운 글)12)은 체계가 잘 갖추어진 글이라

기보다는 동일한 논지를 산만하게 열거하면서 감정적인 평가어를 곳곳에 섞어 실망감과 분

노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 볼 때 그의 글에서 동족으로

서의 배신감을 강하게 표현하면서 그 배신감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펴는 부분이 돋보인다.

7) 위의 글, p.xxiii.

8) Elisabeth Young-Bruehl, Hannah Arendt: For the Love of the Worl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2), p.71.

9) Jerome Kohn, "Preface", p.xxiv.

10) Richard J. Bernstein, Hannah Arendt and the Jewish Question, p, 105.

11) 졸고, 「한나 아렌트 탄생 100주년 기념 컨퍼런스 참가기」, 철학과 현실 철학과현실사, 2007년 여름호,

p.308 참조.

12) Gershom Scholem, “Eichmann in Jerusalem: An Exchange of Letters between Gershom Scholem and

Hannah Arendt”, Encounter, 22/1 (1964),

Page 7: 김선욱, 한나아렌트-어두운 시대의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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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렘의 비난의 핵심은 아렌트가 민족애를 결여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숄렘은 유대인의 전통

가운데 “유대 민족에 대한 사랑(Ahabath Israel)”이라는 개념이 있음을 알리며, 아렌트는

이 사랑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13) 그리고 나아가 전체 유대인의 3분의 1이 파멸을

당한 사건에 대해 다룰 때는 “가장 오랜 방식으로 [즉 전통에 입각하여 민족에 대한 사랑에

충실하여], 가장 사려 깊게, 가능한 가장 엄격한 방식으로”14) 다루어야 한다고 쓰면서, 아

렌트의 글의 어조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한다. 숄렘의 논지는 민족적 특수성에 근거한 호

소라는 점에서 동일한 정체성 집단의 일원에게 당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거숌 숄렘의 비판에 대한 아렌트의 응답은 단호하고 분명하다. 아렌트의 대답은

민족애의 정치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이루어진다. 우선 아렌트는 숄렘과 같은 시

온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익숙한 논리와 주장이 아니면 도무지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

는데, 이러한 태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이 친이스라

엘적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음을 알린다. 다시 말해, 아렌트는 자신이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독립적인 사상가라고 주장한다.15) 즉, 자신을 있는 그

대로의 한 개인으로 봐 주어야지, 자신을 어디어디에 속한 존재로 또는 어떤 특정한 정체성

을 가진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유대

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더 근본적인 개인적 정체성에 주목해 줄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렌트

의 입장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입장은 ‘인간의 복수성(the human plurality)’에 대한 그녀의

주장16)과 일치하는데, 민족적 특수성의 요구보다 더 철저한 특수성의 요구가 된다.

또한, 숄렘이 유대 민족에 대한 사랑을 언급한 부분도 아렌트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었다. 우선 유대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유대인들 사이의 전통이었다는 점에 대해 동

의하지 않았다. 유대 민족의 전통은 유대인의 유일신에 대한 사랑에 있는 것이므로, 민족에

대한 사랑이 신에 대한 사랑보다 앞서는 것을 유대의 전통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유대인들을 ‘사랑’하지 않으며, 그들을 ‘믿지’도 않습니다. 저는 당연한

사실로서 논쟁과 논증을 넘어, 그들 가운데 단지 속해 있을 뿐입니다.”17)라고 아렌트는 말

한다.

또한 아렌트는 사랑이 정치 영역에서는 부정적 기능을 한다는 점을 곳곳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사랑이 무세계성(the worldlessness)을 본질로 갖고 있

으며, 따라서 사랑은 “비정치적일 뿐 아니라 반정치적이다”라고 까지 말한다.18) 사랑이 정

치 공동체 내에서 핵심 원리가 될 때 개인 간에 비판적 토론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결국 파시즘과 같은 위험한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19) 아렌

트는 이 같은 사례를 프랑스 혁명의 과정에서 찾는다.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동정

이 야기한 문제가 결국 프랑스 혁명을 실패한 혁명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아렌트는 혁명론에서 분석한다. 물론 한 사람의 유대인으로서 유대 민족에 대한 사랑을 가질 수 있기 때문

13) 위의 글, p.51.

14) 위의 글, p.52.

15) Hannah Arendt, “The Eichmann Controversy: A Letter to Gershom Scholem”, The Jewish Writings, p.470.

16) 졸저, 정치와 진리(책세상, 2001), pp.21-26 참조.

17) Hannah Arendt, “The Eichmann Controversy: A Letter to Gershom Scholem”, p.467.

18)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Chicag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8), pp.53,

242.

19) 사랑이 정치 영역에서 작용할 때 발생하는 부정적 기능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졸고, “정치 공동체 형성 원리

로서의 사랑에 대한 연구”, 한국정치사상학회 정치사상연구 제10집 1호 pp.193-2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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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유대 민족의 잘못에 대해 다른 민족의 일 보다 더 마음이 아플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

서 그러한 ‘마음(heart)’이 정치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수상한 일이 될 것

이라고 말한다.20)

이러한 반론에는 민족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도 함축되어 있다. 단적으로 말해 민족이

이즘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아렌트가 시온주의를 비판하는 기본 논거 가운

데 하나이다. 유대인 정체성의 문제도 민족 정체성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

개인이 생래적으로 갖게 되는 특징인 민족 귀속성의 강조로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정체성의 작용 방식도, 한 개인이 귀속되는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생래적으

로 규정되어 한 개인의 삶 가운데 표현되는 방식으로서 이다. 즉 개인이 민족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개인 속에 나타나는 방식으로서 그 정체성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그 중

요성이 인정된다는 말이다.

숄렘은 아렌트가 시온주의를 조롱했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답하면서 아렌트는 시온주

의자들의 근본적 문제점을 비꼬아 비판한다. 아렌트는 “시온주의자 집단에 있는 수많은 사

람들이 관습적인 데서 벗어나거나 또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일치하지 않는 의견이나 논거

에 대해서는 잘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는 점을 제가 알지 못했더라면, 제 책이 ‘시온

주의에 대한 조롱’이라고 당신이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하는 점은 완전한 미스터리였을 것

입니다.”21)라고 말한다. 하나의 사상에 지나치게 경도된 (숄렘을 포함한) 시온주의자들은 자

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말귀를 전혀 알아먹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는 비판이다. 또

한 숄렘에 대한 답변 가운데 아렌트는 홀로코스트 과정에서 유대인 지도층에 문제가 많이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을 한다. 아렌트의 초점은 그들이 영웅적 행위를 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행위를 함

으로써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임박한 위협 속에 있지 않았으며, 따라

서 그들에게는 비록 제한적으로나마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는 것이다.22)

이상과 같은 응답을 통해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숄렘의 비판이 함축하고 있는 아렌트의

입장에 대한 주장이다. 숄렘은 아렌트가 보편주의적 입장에서 아이히만을 비판함으로써 아

이히만의 재판이 가진 유대인의 문제의 특수성이 무시되고 있다고 지적하는 점을 함축적으

로 주장한다. 아렌트는 숄렘과의 논쟁 이후에 나온 판본에 추가된 “후기(postscript)”에 “모

든 재판의 초점은 개인의 역사, 특질과 고유성, 행동 유형, 상황 등 항상 독특성을 지닌, 살

과 피를 가진 한 인간인 피고의 인격에 있다. … 피고가 접촉하지 않은 모든 것, 또는 그에

게 영향을 주지 않은 모든 것은 재판 과정에서 생략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에 대한 보고서

에서도 생략되어야 한다.”23)라고 쓰고 있다. 아렌트는, 재판은 정의의 실현에만 관심을 두

어야하며, 아이히만이라는 개인과 관련된 정의가 재판 및 재판의 보고서인 자신의 저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이란 “살과 피를 가진” 인격체

를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아렌트가 갖고 있다고 숄렘이 비판한 보편주의적 관점과는 거리

가 멀다. 오히려 민족이라는 집단 보다는 한 개인에 더 주목하고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다.24)

20) Hannah Arendt, “The Eichmann Controversy: A Letter to Gershom Scholem”, p.467.

21) 위의 글, pp.469-470.

22) 위의 글, p.469.

23) 한나 아렌트, 졸역,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파주: 한길사, 2006), p. 389.

24) 아렌트와 숄렘의 논쟁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졸고, 「아렌트와 거숌 숄렘과의 논쟁-아이히만 재판에서의 유대

인 정체성 문제」 사회와철학 제15호 사회와철학연구회 (200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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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렌트에게 유대인, 유대민족, 유대인 정치가 어떤 모습으로 이해되고 주장되는

가?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아렌트는 라자레를 통해 유대인 문제와 유대인 정치에 대해 깊은

이해를 얻게 된다.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했던 라자레에게서 아렌트는 “동류 유대인들

로부터 종국에는 무시되고 고립되었던 모습”25)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자각적 패리아(the

conscious pariah) 개념을 배웠다. 패리아는 파브뉴와 쌍을 이루는 개념으로, 불가촉천민을

말하며, 사회의 계급질서 자체에서 벗어나 있는 국외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렌트의 유대

인으로서의 자기의식은 이러한 패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사학위논문을 쓴 직후에 아렌트가 쓴 라헬 파른하겐 전기에서부터 유대인의 정체성이

문제된다. 1957년에야 출간이 된 그녀의 책의 부제목 “한 유대인 여성의 삶”이 시사해 주

듯, 이 책에서 유대인 정체성 문제에 대한 고투를 중심으로 라헬의 생의 이야기가 전개된

다. 패리아는 우선 국외자라는 신분 때문에 독립적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특정한 도그마

나 이데올로기에 메일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패리아는 사유를

무기로 한다. 그래서 아렌트가 수시로 자기를 지칭하면서 하는 말이 독자적 사유를 하는 자

라는 것이었고, 앞의 장에 나온 거숌 솔렘에 대한 답변에서도 자신이 독립적 사상가임을 지

속적으로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렌트는 이데올로기를 싫어했고, 이데올로기에 메여 독

립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경직된 사고를 한 시온주의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패리아의 두

번째 특징은 자유에 대한 의식이다. 공적영역에서 물러나야 한 패리아는 사상의 자유 속으

로 후퇴하게 된다.26) 패리아로서 자신에게 억지로 떠 맡겨진 버림받은 상태에 반항하고 이

를 자신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도전으로 변형하는 것을 ‘의식적 패리아’라고 부른다.

의식적 패리아와 대립되는 유대인 파브뉴는 벼락부자를 의미하는 말로, 이들은 “자신의

버림받은 상태로부터 탈출하여 유대인을 패리아로 취급하는 사회에 수용되고 동화되려고 필

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열망,

그리고 진정한 정치와 자유,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한다. 사회 속에 동화되려는 노력은 이러

한 것을 감수해야 하고, 따라서 동화(assimilation)란 단순히 한 집단에 섞여 융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의 희생을 대가로 요구하는 과정이며, 결국은 자기기만 행위가 된다.

이러한 사회적 동화뿐만 아니라 계몽주의가 주장하는 보편적 인간의 권리의 인정 또한 문

제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유대인으로서의 유대인의 권리’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보편적

인권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인권이 전제하는 인간관은 보편적 인간(Man)이지 다

양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구체적 인간(men)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번스타인

의 지적처럼 “계몽주의에 의해 형성된 ‘해방’은 어떤 이의 유대인임으로부터의 해방(즉 유대

인으로서의 유대인의 해방이 아니라 유대인의 자살)을 뜻하게 되었다.”27)

이처럼 정체성의 상실의 요구를 거부하고, 또한 추상적 개인으로 동화되는 것을 거부할

때 이러한 자각한 패리아로서의 유대인이 취할 것은 스스로 정치적 공동체를 조직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은 반역자가

되는 길이다.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패리아가 정치의 광장으로 입장하자마자,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정치적 용어들로

25) Richard J. Bernstein, Hannah Arendt and the Jewish Question, p, 16.

26) Hannah Arendt, “On Humanity in Dark Times: Thoughts about Lessing” in Men in Dark Times, p.9.

cf. Richard J. Bernstein, Hannah Arendt and the Jewish Question, pp.41-2.

27) Richard J. Bernstein, Hannah Arendt and the Jewish Question, p.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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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자마자, 그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반역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라자레의 생각은 유

태인이 패리아의 대표자로서 공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억압에

저항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패리아가 불운자의 특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망상과 공상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서 자연의 안락한 보호를 포기하

며, 남자들과 여자들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는 것을 요구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사회가 그에게 한 일에 대해 그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그가 느끼기를 원했다.

그는 그가 잘 난 척 하는 냉담한 태도 속에서, 혹은 인간 그 자체의 본성에 대한 거

만하고 엘리트적인 인식 속에서 해방을 구하는 것을 멈추기를 원했다. 아무리 많은

유태인 패리아가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부정한 분배의 산물이라고 하더라도 … 정치

적으로 말해서, 반역자가 되기를 거부했던 모든 패리아는, 그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그와 함께 그것이 대표하는 인류에 대한 오점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었다.28)

아렌트는 반역자의 길이 “억압에 저항하는 길”이고, 이 길을 걷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

고 한다. 그런데 라자레를 인용하면서 아렌트는 유대인이 패리아의 대표자로서 공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한다. 이제 아렌트는 패리아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으로서의 유대인

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이 된다. 그 유대인은 정치적 책임을 깨달아야 한다. 즉 패리아의 대

표로서 유대인은 정치적 활동을 수행해야만 하는 의무를 아렌트는 느끼게 된 것이다. 유대

인이 처한 현실에 유대인은 책임이 있으며, 현실에 대한 책임은 유대인 파브뉴가 아니라,

반역자가 되기를 거부했던 유대인이라는 말이다. 반역자로서의 정치적 활동을 수행하기 위

해서 유대인은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생각해야 한다.

유대인이 가져야 할 이러한 민족 개념에 대한 아렌트의 주장은 유대인 정치에 대한 독특

한 결론에로 이어지게 된다. 우선 유대인은 정치적 공동체를 가져야만 한다. 모든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상실했던 유대인의 경험은, 그러한 경험의 근원이 단지 권리를 빼앗겼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자신들이 속할 정치적 공동체의 상실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아렌

트는 주장한다. “그들의 곤경은 그들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한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탄압을 받아서가 아니라 아무도 그들을 탄압하

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단지 긴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 비로소 그들의 생명권이 위

협을 받는다.”29) 모든 것은 정치적 공동체를 갖지 않음으로써 권리를 가질 권리를 상실하게

되었기에 발생한 문제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어떤 종류의 조직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권리를 잃고 다시 얻을 수 없게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런 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

닫게 되었다.30)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가 존재한다는 것은 근대의 인

권개념에서도, 인권선언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권리를 가질 권리 개념이 갖는 중요한 정치적 귀결로 번스타인은 두 가지를 지적

한다. 첫째는 주권개념, 그리고 주권국가 개념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이다.31) 주권은 민족의

자결권이나 국민의 합법적 권리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국민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국민이

주권을 갖게 되면서 형성된 주권국가 개념에는 국가의 주권행사의 무제한성이 포함되어 있

었다. 그래서 한 국가 내에 거주하는 다른 민족들에 대해 그들의 시민권을 박탈할 정도로

28) Hannah Arendt, “The Jews as Pariah: A Hidden Tradition”, The Jewish Writings, pp.284-5.

29)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295,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I p.531,

30)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295,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I p.533,

31) Richard J. Bernstein, Hannah Arendt and the Jewish Question, p.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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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이 행사되었다. 이러한 주권의 주장이 결국 유대인의 시민권 박탈과 생존권 박탈로 이

어지게 된 역사를 볼 때, 주권 개념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은 당연하게 보이기도 한다.

둘째의 귀결은 정치적 평등에 대한 아렌트의 주장이다. 아렌트는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

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평등권을 서로 보장하는 우리의 결단의 힘으로, 한 집단

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된다.”32)라고 말한다. 평등은 정치적 공동체를 떠나서 확보될 수

없고, 또한 공동체 내에서 우리 스스로가 평등하려는 확고한 의지와 그 의지를 수행하려는

행위를 통해서만 확보되는 것이다. 평등을 사회적 균등성으로 이해되는 것을 아렌트는 거부

한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평등은 가능하지 않은 것

이며, 어떤 점에서는 “시기와 원한”에 기초한 것이라고 확신했다.33)

이러한 개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아렌트와 시온주의자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아렌트는 시온주의 운동이 당시 유대인으로서 행했던 유일한 정치 운동이었

다는 점에서 그들의 운동에 동의를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치적 노선에 있어서 아렌트는

위와 같은 주권국가에 대한 거부와 정치적 평등의 주장이라는 생각, 즉 ‘권리를 가질 권리’

가 모든 인간에게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 이스라엘 건국과 강력한 유대인 주권국가의 건립

을 지상목표로 삼은 시온주의의 노선에 반대할 수밖에 없 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강대국들과 반유대적인 성격을 가진 국가

들과도 함께 일을 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에 아렌트는 근본적

으로 반대한다. 시온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유대인을 제거하기를 원했던 나치스가 유대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고 하려는 취지에서 이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것을 도운 것에 대해

협력을 하였지만, 아렌트는 이러한 협력적 관계에 대해 냉소를 보냈다. 그래서 아렌트는 이

러한 반유대주의적 국가의 “도움”에 감사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한 아렌트의 대안은 라자레

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반유대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들에 대항하는

민족의 동원”이었다. 유대인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34)

시온주의자들은 1942년에 빌트모어 프로그램(Biltmore Program)을 채택했는데, 이에 따

르면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그 당시 소수민족이었음)이 그들의 ‘조국’에서 실제적인

다수자(아랍인들)에게 그들의 소수자의 권리를 부여하도록 되어있었다.” 나아가 미국의 시

온주의자들은 1944년 10월에 하나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 이 결의안은 이후 세계시온주

의조직에 의해 승인된 것이었다. 그 내용은, “분할되지 않고 축소되지 않은 팔레스타인 전

체를 포괄하는 … 자유롭고 민주적인 유대인 국가”의 설립을 요구하는 것이었다.35) 아렌트

는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관계라는 현안을 무시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내용

의 결정들을 내리는 것에 분노했다. 아렌트는 “시온주의 다시 보기(Zionism

Reconsidered)”라는 글에서 “이 결의안에서 아랍인들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으며, 명

백히 그들에게 자발적인 이주나 이등의 시민권 간의 선택만을 남겨 놓은 것이다.”36)라고 비

난하고 있다.

시온주의자들의 목표는 주권이 있는 유대인 국가의 건설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살고 있

던 아랍인들을 고려하지 않고, 팔레스타인들을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진 주권국가의 건설은

결국 그들을 “권리를 가질 권리”를 박탈하는 결과는 낳게 되었다. 그래서 아렌트는 이러한

32)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301.

33) Richard J. Bernstein, Hannah Arendt and the Jewish Question, p. 86.

34) 위의 책, p.103.

35) 위의 책, p.104.

36) Hannah Arendt, “Zionism Reconsidered”, The Jewish Writings, p.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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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를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유일하게 해결할 수 없는 것으

로 간주되었던 유대인의 문제가 전후에-말하자면 식민지화되고 뒤이어 정복된 지역에 의해

-정말 해결되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소수민족들의 문제나 무국적인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

았다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반면에, 사실상 우리 세기의 모든 사건들처럼, 유대인 문제의 해

결책은 새로운 범주의 난민들, 즉 아랍인들을 만들었고, 그것에 의해서 무국적인들과 권리

가 없는 자들의 수가 다시 70만 명에서 80만 명 정도가 더 증가했다.”37) 민족주권국가에서

는 소수민족 거주민은 항상 문제가 되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대인의 민족주권국가를 건설

함으로써, 자신이 점한 지역에 사는 거주민들의 운명을, 나치스 독일과 그 시대의 유럽에서

의 유대인의 운명과 동일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결코 유대인들이 취해야 하는 대안은 아니

었다고 아렌트는 주장하는 것이었다.38)

아렌트의 대안은 유대인 국가와 유대인 주권국가 개념을 엄밀하게 구분하는데서 실마리가

나온다. 지금과 같은 주권국가를 거부하며 다른 형태의 국가를 생각한 이는 아렌트 혼자가

아니었다. 번스타인은 아랍인들과 유대인의 공동의 이익을 위해 주장한 팔레스타인 거주 시

온주의자 소집단의 존재를 소개한다. 이들이 가진 시온주의는 앞서 유대인 주권국가 건설을

주장한 수정주의적 시온주의와는 다른 노선의 시온주의이다. 주로 지식인과 대학교수들로

구성된 이들은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똑같은 권리를 갖는 이중 민족국가를 주창했다. 이들

은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영국이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에 그들의 민족국가를

건설하게 해 주겠다고 한 벨푸어 선언조차도 반대했다. 이 선언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찬

성하고 반겼던 것인데, 이 소수의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이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을 주겠

다고 ‘약속’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지극히 인기 없는 입장”39)을 취했다. 아렌트는 이들의 입

장과 자신의 입장을 동일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렌트의 대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아렌트는 아랍인과 유대인들의 공

동체를 중심으로 평의회를 형성하고 그에 기초한 연방 국가를 건설할 것을 주장한다. 팔레

스타인을 분할하여 여러 지역으로 나눈다면 지역 간의 갈등은 불을 보듯 뻔하므로 아렌트는

연방제가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연방적 구조는 유대인-아랍 공동체 위원

회에 기초를 주어야만 할 것이고, 이 위원회는 유대인-아랍 갈등이 근접성과 이웃 간의 경

계선에 있어서 최하위의 단계에서, 그리고 가장 유망한 단계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의

미하게 된다.”40)라고도 말한다.

아렌트가 주권국가로서의 이스라엘 건국에 대해 반대했을 때, 그러한 국가의 건설을 기정

사실로 받아 들였던 수많은 시온주의자, 비시온주의자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구체적 정치 행로에 있어서 아렌트는 어떠한 중요한 영향력도 미치지는 않았다고 번

스타인은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아렌트는 “기껏해야 현실정치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이

없는 지적인 이단자로 취급되었고, 아무리 나쁘다하더라도 시온주의자의 목적에 대한 배반

자 정도였다. 시온주의의 역사의 견지에서 보면, 아렌트는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이 자신의 문제에 ... 솔직

히 직면하지 않을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한 그녀의 구체적인 경고들은 ... 오늘날에도 우리에

37)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290.

38) Richard J. Bernstein, Hannah Arendt and the Jewish Question, pp.107-109.

39) 위의 책, p.109.

40) Hannah Arendt, “To Save the Jewish Homeland”, The Jewish Writings, p.400. 아렌트가 평의회 체제에

대해 말했을 때는 헝가리혁명 등이 일어나기 전이었고, 혁명론에서 보듯 평의회를 통해 혁명의 영향력이

지속되도록 하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 보다 앞선 일이었다.

Page 13: 김선욱, 한나아렌트-어두운 시대의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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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많은 적실성을 갖고 있다.”41)

3. 전체주의의 문제

전체주의의 기원은 반유태주의의 연원을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동시에 제국주의의 발생

과 전개 과정을 상론하면서 이 양자가 나치즘에서 어떻게 종합적으로 작용하고 또 전체주의

로 전환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전체주의의 기원의 목표는 전체주의에 대한 이해

(comprehension)이다. 전체주의란 20세기 에 발생한 전례 없었던 새로운 현상으로서, 그

체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세상살이를 편안하지 않게 만들어 마치 뿌리를 잃고 사는 사람

들의 삶처럼 만들어 버렸다. 전체주의는 상식도 통하지 않고, 자기 이해에 따라 타산적으로

사는 삶의 방식조차도 일반적으로 적용이 되지 않는 체제였다. 인간성을 파괴하고 인간의

본질을 궤멸시키는 악의 근본적 특성을 드러내는 전체주의를 이해한다는 것은 전체주의의

잔혹성의 연원을 잘 알아봄으로써 이를 용서하려는 시도가 결코 아니다. 또한 전례 없었던

일들을 분석하여 그와 유사한 과거사를 연관짓거나 또 유비의 방식이나 일반화를 통해 합리

적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전체주의가 주는 충격을 완화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이

그 무엇이든 간에 그것에 대해 사전에 이론적인 무장이 없이 나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것을 대면하고 또 거기에 저항하려는 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이해”의

방법이고 취지이다.42)

전제주의의 근원으로서 아렌트는 근대 유럽 사회의 주요한 두 흐름, 즉 반유태주의와 제

국주의를 분석한다. 반유태주의와 연관하여 수많은 신화적 가설과 풍문이 있다. 예를 들면,

반유태주의는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근대에까지 이어졌다는 설이 있다.

유태인들의 여호와 신들이 유태 민족을 선택하였고, 신은 그들에게 고난의 운명을 부여하여

현재에까지 이른다는 생각이다. 아렌트는 이러한 생각은 역사적 연구를 통해 입증될 수 없

는 주장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반유태주의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19세기에 이르기

까지 전무하며, 반유태주의는 유태인들이 유럽의 정치 현실에서 문제가 되었던 18세기나

19세기에 와서야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유태인들의 독특한 생활 방식과 개성은

단지 그들의 민족적 또는 인종적 차원에서의 특성이었을 뿐 그것이 곧 차별로 이어졌던 것

은 아니라는 지적이다.43) 또한 민족주의가 과격해 지면서 반유태주의의 풍조가 발생했다는

것도 잘못된 가설이라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오히려 민족국가의 붕괴와 민족주의의 쇠퇴와

더불어 유럽에서 반유태주의가 발생했기 때문이다.44) 유태인들이 정치적 맥락에서 희생양이

되었다는 주장도 풍문에 불과하다. 이는 유태인들이 사지로 끌려 들어간 현상이 가진 고유

한 중요성과 반유태주의의 심각성이 망각되도록 유도하는 이론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아울

러 아렌트는 역으로, 반유태주의적 경향을 이용하여 유태인들의 힘을 결집하려는 많은 유태

인 시온주의자들의 시도에 대하여도 반대한다.45)

반유태주의로 표현되는, 유태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증오의 근원은 유럽의 정치사적 분

석을 통해만 명확히 밝혀질 수 있다. 유태인들에 대한 증오는 그들이 부를 가지고 있지만

공적 영향력을 상실할 때 유럽에서 발생하였다. 마치 프랑스 혁명 때 귀족들이 아무런 사회

적 기능을 하지 않으면서도 부만 축적하고 향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민중들이 증오를 표현

41) Richard J. Bernstein, Hannah Arendt and the Jewish Question, p. 103-4.

42) OT pp.vii-viii.

43) OT p.xii.

44) OT p.3.

45) OT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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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유태인들이 유럽의 정치적 맥락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근

대 민족국가의 탄생과 더불어서 라고 아렌트는 분석한다. 유태인들은 전통적으로 정치 문제

에 개입하지 않은 채 경제적 활동에만 종사해 왔고, 자신들의 거주지를 형성하면서 다른 사

람들과 구별된 생활을 추구해 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런 식으로 살도록 강요되어지기도 했

다. 그런데 절대 군주의 지배하에 민족국가가 형성되었고, 이 과정에서 군주는 상당한 양의

자본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각국의 군주는 부유한 유태인들에 주목하고 이들이 자신을 위

해 일하는 궁정의 재정 관리인으로 삼았고 이를 통해 민족국가의 군주들과 중서부 유럽의

부유한 유태인들이 결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새롭게 자본가 집단, 즉

부르주아 집단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국가 내에서 산업을 통한 경제 활동에만 전념을 했다.

이들의 자본의 규모가 커지고 또 자본의 재형성 과정에서 국내 산업만으로는 충분한 이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을 때 이들은 해외시장의 개척을 열망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팽창의 이러

한 귀결로 인해 국가간의 경쟁이 발생하게 되고, 국가 권력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무력이 이용되면서 제국주의적 경쟁상태가 국제적 차원에서 발생하게 된다. 이 과정

에서 유태인들은 과거에 가졌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지위를 상실하기에 이른다. 결국 제국

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유태인들의 부가 지녔던 정치적 중요성이 상실되기에 이르렀고 급기

야 유태인들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46)

이런 분석은 유태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겪었던 과거사에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어떤 잘못

을 범했는지를 반성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이는 보편화 가능한 부분으로, 반유태주

의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정치적 공동체를 적극적으로 형성하지

않고 정치적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결국 사회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끌려가 그 결과에

수반되는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족국가의 형성기에 부유한 유태인들이 궁정

재정 담당이 되었을 때 유태인들은 역사상 가장 큰 정치 권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유태인들은 자신의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했고, 또 권력을 가진 유태인들간

의 국제적 연대 조직도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고 아렌트는 지적한다. 이처럼 독자적인 정치

적 권력 기반을 갖지 못했기에 우연적인 역사의 행로의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맡길 수 밖

에 없었던 것이다. 부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의 정치적 중요성을 적절히 파악하

지 못하여 결국은 제국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유태인들은 일반적인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하

고 만 것이다.47) 물론 이렇게 된 것은 2천여 년에 걸쳐 국가 없이 떠돌아다닌 디아스포라

로서의 비애가 있을 것이다. 정치적 경험의 결여가 정치적 감각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자신

들을 정치 영역으로부터 스스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자신의

정부가 없었던 유태인은 어떠한 정부와도 관계를 가져야 했고, 따라서 그 관계 속에서 형성

되는 자신의 역할의 정치적 중요성을 자각하지 못함으로써 민족적 비극에 봉착하게 된 것이

다.

한편 제국주의는 앞서 언급한 부르주아들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발생되었다.

아렌트는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1884년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를 유럽의 제국주의시기로 간주한다. 이 기간의 가장 특징적인 정치적

상황은 부르주아의 정치적 해방이다. 부르주아는 원래 사적인 특성을 갖는 경제적 관심을

가진 개인을 의미한다. 부르주아의 도덕은 홉스(Thomas Hobbes)가 설명하는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개인으로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몰두함으로써 갖는 정신 자세이다. 이들에게 있어

46) OT pp.4, 11-15.

47) OT, pp.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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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인생이란 더 부유해 지려는 항구적 과정일 뿐이다. 민족국가와 더불어 발생한 이런 성격

의 부르주아들이 자본주의의 팽창과 더불어 국가와 사회간의 갈등을 야기하였고, 나아가 자

본의 법칙인 팽창(expansion)을 국가의 대외 정책의 궁극 목표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제

국은 완전 무장한 비즈니스적 관심을 본질로 하며 “팽창”을 중심 원리로 삼는다. 그런데 자

본은 무한 확장을 향해 나아가지만 정치 구조가 마찬가지로 무한 팽창할 수는 없다. 특히

민족국가는 이러한 팽창에 대한 제약으로 등장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제국주의는 정치체가

가진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는 정치권력의 팽창을 추구하게 된다. 해외로 진출한 자본이 위

험을 배제하고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국가의 물리력을 요구하게 되고 이와 더불어 무한

한 권력만이 무한한 부를 기약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48)

흥미 있는 것은, 정치 사상사적으로 볼 때 권력이 정치의 본질로 이해된 것이 바로 이 시

기라는 점이다. 권력의 본래적 근원인 정치 공동체는 제국주의의 경제 팽창의 노력 가운데

붕괴되고, 대신 국가의 행정력과 관료 조직의 작용에 의한 국가적 의지의 실현이라는 개념

으로 권력이 이해되었다. 이와 더불어 권력과 폭력의 구분이 희미해지면서 국가 조직에 의

한 폭력적 잠재력이 무한히 집적되는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폭력과 권력의 무한

집적은 전체주의로 나아갈 길을 열어 주게 된다.49)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는 이상과 같은 반유태주의와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형성된다. 전체

주의는 일반적으로 공포(terror)와 이데올로기(ideology)를 중심으로 기능 한다. 독일의 나

치즘이 만든 죽음의 수용소나 소련의 스탈린주의가 만든 시베리아 수용소는 단지 우연한 현

상이 아니다. 그것은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 가운데 근원적인 공포를 체험하도록 하여

전체주의가 기능 하도록 만든 필수적 장치였다. 전체주의 정부가 형성하는 공포는 개인들

간의 자유로운 소통(communication)과 협력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 공포는 사람들 간에 형

성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을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정치를 위한 공적 공간이 형성될 수 없게

만든다. 이 때문에 소신을 가질 수 없게 되어 버린 군중들은 자신들의 신념과 행위의 내용

으로서 국가가 제공하는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게 된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 전체주의가 목

적으로 하는 것은, 인간을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주체에서 주어진 자극에 따라 반응하는 수

동적인 집단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50)

이러한 분석을 통해 아렌트가 지적하는 것은 전체주의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파괴하

며, 이렇게 파괴되는 본질적 요소란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차원이다. 완전한 전체주의

정부 하에서 인간은 개인의 고유한 모습, 즉 인간의 복수성(plurality)을 잃게 되고 모두가

오직 하나의 인간(one Man)으로 변하게 된다.51) 전체주의는 다수가 합의에 의해 통치한다.

그러나 이 다수는 개성을 가진 정치적 행위자들로 이루어진 다수가 아니다. 반대로 주체적

의지를 상실한 대중이 국가가 만든 이데올로기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전체주의의

체험은 대중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정신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을 보여주는 듯 하다. 대중은 사실상 정치적으로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통치는 소수의 엘

리트들에 의해 이루어질 뿐임을 전체주의는 보여주었다. 민주적 자유는 법 앞에 모든 사람

이 평등하다는 생각에 기초하는 것이지만 전체주의는 사회 정치적 조직체를 결성하여 개인

을 그 조직의 수직적 위계질서 가운데 한 지점에 놓고 통제를 일삼았었던 것이다.52)

48) OT pp.123-126, 135-137, 139-145.

49) OT, pp.137-138.

50) Canovan, Hannah Arendt: A Reinterpretation of her Political Thought, p.60 참조.

51) Hannah Arendt, On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p.465-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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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논점을 가진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방대한 분석인 전체주의의 기원들은 독일의 나치즘과 구소련의 스탈린주의를 싸잡아 전체주의라는 하나의 범주로 넣음으로서

수많은 찬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단순한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한 범죄뿐만 아니라 유태

인 학살이라는 인륜적 범죄를 자행한 히틀러의 나치즘과 “수용소 군도”를 만들어 공포 정치

를 만들어낸 마르크스주의의 변종인 스탈린주의를 동일한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유태계 정

치학자들이나 좌파 지식인들의 시각으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매카시즘의

돌풍이 몰아친 미국에서 그 책의 출현은 양심적 좌파들에게 더욱 의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

이다.

그러나 아렌트에게는 독일 나치즘과 구소련의 스탈린주의의 피상적 차이를 넘어 이 두 체

제가 공유하는 조직과 문화면에서의 동일성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정치 지도

체제 원리를 중심으로 보면,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구소련은 개인의 자발적 참여보다는 대

중 동원을 이끌어 내고 일당독재를 시행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며, 또한 구체적 방법에 있어

서는 다르지만 이 양자는 모두 궁극적으로 국가를 제국의 형태로 확장해 나가려는 근본적인

열망을 수행하려 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또한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 스탈린 치하의 구소

련에서 반유태주의가 작용한 기능은 서로 달랐지만, 사회 계급간의 심각한 부조화가 존재하

는 가운데 체재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지배와 탄압의 대상을 명확히 하려는 필요에 따

라 기능 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였다.53)

이러한 동일성을 가진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구소련은, 비록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지만 현

실에서 완전히 유리된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통제하고 지도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이론적 제계화의 결과물일 뿐이므로, 이는 결국 국

가 권력을 통해 국민들을 체계적으로 기만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마치 아무리 잘 짜여진

거짓말도 언젠가는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들통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아렌트는 이러한 이

데올로기 지배체제는 언젠가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54) 이러한 주장, 즉 전체주의

도 결국은 현실의 힘에 의해 붕괴되리라는 아렌트의 예견은 동구권과 구 소련의 붕괴로 그

타당성이 입증되었다. 이는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옳음을 보여준

것이다.

독일의 나치즘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아울러 구소련의 전체주의도 붕괴되었지만, 지금

에도 전체주의의 기원들의 가치는 여전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반유

태주의의 기원과 문제점에 대한 분석이 다소 생경한 주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은 경제주의와 관료적 자본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 힘을 가지고 있다. 제국주의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정치에 무관심한 채 경

제력 향상에만 몰두했던 부르주아들이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권력과 결탁하면서

였다. 이러한 부르주아들을 “인생을 보다 부유해 지려는 항구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사람

들”55)이라고 하는 아렌트의 지적은 시대를 넘어 오늘의 현실 경제에 몰두한 사람들을 지칭

하기에 전혀 문제가 없다. 이런 점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조건의 병리학

적 진단은 제국주의에 대한 전체주의의 기원의 분석과 직결된다. 그러므로 아렌트가 전체

주의의 문제와 현대성의 문제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56) 전

52)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312 참조.

53) Irving Louis Horowitz, "Totalitarian Visions of the Good Society: Arendt" p.263.

54) OT

55) OT, p.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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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주의가 파괴하는 인간 행위의 자발성이나 정치 공동체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분석은 이제

인간의 조건의 몫이 된다.

4. 아이히만

아렌트는 독일에서 시온주의자들의 활동을 도와주다가 경찰에 체포당해 조사를 받았고,

그 직후 어머니와 함께 나치스 치하에서 독일을 떠났다. 아렌트 자신은 시온주의자가 아니

었지만 시온주의자들의 정치적 활동을 도왔다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아렌트가 프랑스

로 와서 활동하던 중 비시정권이 들어서면서 구어스(Gurs)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탈출

하여 결국 미국으로 가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지난 뒤 유태인 학살 소식이 전세계에 알

려졌을 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렌트도 그것이 진실이라고는 믿지 못했지만 결국

그 소식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라 할 수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해

잡혀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아이히만은 독일패망과 더불어

아르헨티나로 도망가 잠적했던 것이다. 아렌트는 예정되었던 대학의 강의를 취소하고, 미국

의 교양잡지 『뉴요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이로써 이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탄생한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잡지『뉴요커』를 통해서였다. 1963년 2월

부터 다섯 차례로 나뉘어 기사로 게재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글 제목은 “전반적인 보고: 예

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후 1965년에 이 보고서가 책의 형태로 간행되었

을 때, 아렌트는 여기에 후기(postscript)를 덧붙여 지금과 같은 모양의 책을 만들었다. 이

처럼 이 책은 학술적인 저술이 아니라 처음부터 대중을 위한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엄청난 학술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그 논점도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 책과 더불어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책의 부제에 들어있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의 의미이다. 『뉴요커』에 이 글이 게재될 때의 제목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전반적

인 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고 되어 있었었을 뿐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은 제목에

서 나타나지 않았다. 본문 중에서도 다만 마지막 글인 다섯 번째의 글 말미에 오직 한 차례

만 등장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맥락은 처형장에서의 아이히만의 모습과 함께였다. 이후 아

렌트가 덧붙인 ‘후기’에서 악의 평범성은 몇 가지 예와 더불어 설명되었다. 아렌트는 이 개

념이 셰익스피어 희곡에 나오는 이아고나 맥베스, 그리고 리차드 3세 등과 같은 인물의 특

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분명히 말했다. 특히 리차드 3세는 악을 일상적으로 범했던 자였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p.287)였던

점에 악의 평범성의 특징이 있다.

여기서 ‘평범성’이라고 번역한 banality은 ‘진부성’이나 ‘일상성’이라고도 번역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단어가 아렌트의 원의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가이다. 앞

서 언급한 아이히만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악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음

을 아렌트가 우리에게 말하려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banality를 ‘진

부성’이라고 번역한다면 우리는 이 말을 “평범하고 또 익숙할 정도로 많이 접해서 진부해졌

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며, 결코 “시간적으로 오래되었다”거나 “구식(old-fashioned)”이

라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 말을 ‘일상성’이라는 말로 번역한다면, 그 의미를

56) Canovan, Hannah Arendt: A Reinterpretation of her Political Thought,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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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 일상적일 정도로 자주 일어나서 그만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게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악의 평범성을 터무니없는 잔혹상이 일반화된 것

을 표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렌트의 본의와는 거리가 아주 멀기 때문이다. 이 번역서

에서 banality를 ‘평범성’이라고 옮긴 이유는,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다는 의미를 담는, 원의에 가장 가까운 단어라고 생각해서이다.

아렌트는, 1959년 독일의 함부르크 시에서 제정하여 세계 평화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레싱 상의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아렌트에게는 이 상의 수상을 수락할 것인가의 여부

로 상당히 고민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렌트는 자신의 답을 그 상의 이름이 된 레싱의 정신

에서 발견하고 이를 수상수락연설에서 밝힌다. 아렌트는 이 연설에서 레싱이 쓴 희곡, 『현

자 나탄』을 인용하면서 모든 종교와 민족을 넘어서 인간에게는 공통적으로 ‘인간됨

(humanness)’의 원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57) 『현자 나탄』에서는 유태인인 나탄이 젊은

기독교인에게 설득하는 가운데 자기들은 특정한 민족이기 이전에, 특정한 종교인이기 이전

에 먼저 인간이 아닌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나탄은 서로가 소통과 공생할 수 있는

근거로서 인간됨의 사실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아렌트는 영락없는 보편주의자이지만, 아렌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

다. 즉, 앞서 언급한 레싱의 입장을 넘어, 우리가 서로 정치적으로 소통하고 좋은 삶을 나누

는 근거로서의 인간됨이라는 것이 있음을 입증하려 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인간성이 마치

인간의 본질로서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입장을 거부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그 책의 제목이 그 같은 고정된 인간성이 있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염려를 하기도

했다.58) 뿐만 아니라 긍정적 의미의 인간성이 존재한다는 일상적 믿음이 잘 드러나는 예인

양심의 문제에 있어서도 아렌트는 회의적이었다. 양심에 바탕을 둔 시민 불복종의 경우에도

아렌트는 양심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확증될 수 있는 정도의 보편성을 지닌다는 믿음에 대

해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아이히만의 경우는 더욱 분명한 예가 되었다. 유태인의 학살을 나치스가 제도적으로 체계

적으로 추구한 ‘최종 해결책(the final solution)’을 열정적으로 실행에 옮겼던 아이히만에

대해 그가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적이 없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을 때 아이히만은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명령받은 일이란 물

론 “수백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

는 일”(p.25)을 말한다. 또한 아이히만은 전쟁이 끝날 무렵 자신의 부하들에게 “나는 내 무

덤에 웃으며 뛰어들 것이다. 5백만 명의 유태인들의 죽음에 내 양심이 거리낀다는 사실이

나에게 대단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p.47)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에 대해 아렌트는 전적으로 아이히만의 허풍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양심이라는 말에

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허풍을 보았을 뿐 아니라, “일반인”이라면 느꼈을 법한 양심의 가

책의 징후를 아렌트는 한 번도 발견한 적이 없었다. 아렌트에게 있어서 양심은 인간에게 본

연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과 사회적 여건에 이미 제약되어있는 것일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보편적 이상에 대해서도 그것이 구체적 삶과 충돌을 한다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렌트는 분명히 말했다. 아이히만은 주로 저명한 시온주의자였던

유태인 지도층 인사들과 가졌던 개인적 접촉에 대해 대단히 만족했었고, 그들이 문제 삼았

57) Hannah Arendt, "On Humanity in Dark Times: Thoughts about Lessing" Men in Dark Times,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68).

58)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Chicago: The Chicago University Press,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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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소위 유태인 문제에 대해 매혹되었던 이유에 대해 자기 자신이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라

고 설명했다. 유태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동화의 길을 선택했던 동화주의자들이나 정통파 유

태인들과는 달리 시온주의자들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이상주의자라고 아이히만은 설명했다.

아이히만에 따르면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하는 사람”, “자신의 이

상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 아니 모든 사람을 다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p.41)을 의미했

다. “그가 필요했더라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경찰심문에서 말했

을 때,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는지만을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니

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이상주의자’로서 살아왔던가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완벽한 ‘이

상주의자’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개인적인 느낌과 감정을 지니고 있지만, 만

일 그것이 그의 ‘이상’과 충돌을 일으킨다면 그것이 그의 행동을 방해하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p.42) 아이히만이 자신을 시온주의자와 동일시할 수 있었던 이상주의자라

는 공통적 근거가 가진 문제는 현실을 전적으로 부정한 채 추구하는 소위 “보편적” 가치의

위험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렌트를 보편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데는 분

명히 무리가 따르며, 아렌트에 대한 부당한 비난이 될 수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이

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서로 긴밀히 연결된 세 가지의 무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말하

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그것이다.(p.49)

그런데 세 번째의 무능성은 곧 판단의 무능성(inability to judge)을 의미한다. 그리고 판단

능력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을 의미한다. 판단이란 사유와 의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아렌트는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이 이러한 판단의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렌트는 어떻게 설

명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말하는 능력이 사유 능력과의 연관성뿐만

아니라 그 밖의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

히만』에서 하고 있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여기에 해당된다.

말의 능력과 관련하여 볼 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가장 흥미 있는 이야기이지만

주목을 별로 받지 못하였던 것이 독일 개신교 목사인 그뤼버 감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독일인으로 유일하게 예루살렘 법정의 증언대에 서서 검찰 측을 위한 증인이 되었다. 그는

유태인을 구하기 위해 아이히만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었고 또 기독교로 개종한 유태인들에

게 사태의 위험성을 알리는 등의 일을 했다. 그에 대한 반대심문에서 아이히만의 변호사인

세르바티우스는 그에게 “당신은 그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애를 써보았습니까? 목사로서

당신은 그의 감정에 호소하고, 그에게 설교하고, 그에게 그의 행위가 도덕성에 모순된다고

말하려고 시도해 보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여기에 대해 그는 “행동이 말보다 더 효과적입

니다.” “말해 봤자 쓸데가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아렌트는

그뤼버 감독의 대답이 상투어(cliché)를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아렌트는 단순히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행동일 수 있으며, 또한 목사로서의 그의 임무는 말이 쓸모가 있는지

의 여부를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p.131) 말 자체가 행위라는 것을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이미 말했다.59) 그런데 이때 과연 아렌트는 말의 쓸모가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이 책에 담긴 다른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최종 해결책

을 추진하면서 나치스는 유태인 학살과 관련한 언어규칙을 만들었다. 이 언어규칙이란 학살

59)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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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유태인의 이송과 같은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우회적 표현법을 만들어 대신 사

용한 것을 말한다. 예컨대 학살은 최종해결책, 완전소개, 특별취급으로, 유태인의 이송작업

은 재정착, 동부지역노동 등으로 불렀다. 이러한 언어규칙을 사용해야만 하는 사람과 사용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구별되었다. 후자는 히틀러로부터 유태인 학살에 대한 명령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로 소위 “비밀을 가진 자”라고 불렸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암호

화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일상의 업무 수행과정에서는 자신들 간에도 암호화

된 언어를 사용했다. 그 효과에 대해 아렌트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다른 사람

들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살상과 거짓말에 대한 그들의 오랜 ‘정상적(normal)’ 지식

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것”(p.86)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이

문제를 다루는데 본질적이었던 수많은 아주 다양한 협조체제를 이루어 가는데 질서와 정신

을 유지하는데 엄청난 도움”(p.85)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이 하는 역할은

실재(the reality), 즉 현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말은 우리를 현실과 연결시켜준다. 나치스가 언어 규칙을 만든 이유는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말은 현실의 힘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 아이히만이 상투어를 사용하고 판사들이 그의 말에서

공허감을 느꼈을 때, 판사들이 그에게서 바란 것은 사실에 충실한 언어였다. 공허하다는 것

은 현실의 힘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의식에 가득 찬 상투어들은 아이히만이

현실의 힘을 느끼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이다. 상투어들은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심지어 죽음

의 힘조차도 느끼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현실을 느끼고 알 수 있는 능력, 나아가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결여되었다고 생각

하지는 않았던 것을 그뤼버 감독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아렌트는 그뤼버가 감독이 아이히

만에게 말을 했어야 했다고 하였다. 말의 유용성은 말이 현실을 알게 하여 사람에게서 변화

를 기대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고 아렌트는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목사

의 임무가 말이 과연 쓸모가 없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목사가 영향력 있

는 존재라면 그 영향력은 전적으로 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아렌트는 생각한 것이다.

상투어나 관용어, 또는 최종 해결책 수행을 위해 고안된 암호화된 언어도 말이나 일상 언

어와 마찬가지로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 양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자연어인지, 인공적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져 반복적으로 사용된 인공어

인지의 차이로 보인다. 상투어나 관용어 등은 늘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특징을

갖는다. 현실-말-사유의 관계와 유기적이지 못하고, 언어가 고정되어 버림으로 해서 사유와

판단이 현실과 유리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아렌트가 이야기의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풀어 낸 이유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단순히 과거를 기술하고 이해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미래 지향적으로 이해가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벤하비브의 말처럼, “마음을 미래로 향하게 해 줄 수 있는 이야기”60)를 얻기 위

해서라는 것이다.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야기는 이론과는 달리 현실의 힘을 반영하는 일상 언어를 사용한

다. 일상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질 자격을 갖춘다. 구체적

인 현실의 힘을 반영하면서도 보편적 설득력을 가질 자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구체

와 보편의 양 측면의 힘을 동시에 반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어떤 이론이 정치적

으로 수용가능한지를 검증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은 곧 아렌트에게

60) Benhabib, "Hannah Arendt and the Redemptive Power of Narrative",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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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받아들여지기 위한 첫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수용이 될 것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제시될 수 없다. 그 기준을 제시한다면 자유주의적 준거를 제시하는 것과 같은 특성

이 될 것이겠으나, 동시에 그것은 공허하게 될 것이다. 수용의 여부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가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되는가와 연결

이 된다. 이때 전제되는 것은 보편적 원리나 준거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

람의 존재이다. 이를 달리 표현한 것이 『칸트 정치철학강의』에서 아렌트가 제시한 공통감

(sensus communis) 개념이다.

5. 정신의 삶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일이나 충실히 하면서 편안히 살아가는 삶은 엄청난 악행을 유발

할 수 있다. 이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사상가인 한나 아렌트가 1960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깨달은 것이다. 아이히만은 히틀러 치하의 2인자인 히믈러

의 오른팔로서 유태인들을 학살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브레인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

어진 유태인 학살의 임무를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경제적인 방식으로’ 수행했다. 법정에

선 아이히만에게서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야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는 평범한 가장이요, 자상한 남편이요, 충실한 직장인일 뿐이었다. 월급을 받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히

만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도무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묻지 않고 그저 충실히, 열심히 살면서 그는 결국 유태인 대학살의 절대 공로자가

되었다. 아이히만에게서 보여진 무사유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 속에 깃들 수

있는 악이다. 이를 아렌트는 평범한 악 이라고 부른다.

악의 평범성은 ‘사유가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에로 아렌트를 인도했다. 아

렌트는 자신의 대답을 《정신의 삶: 사유》에 담았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검토가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렌트는 이 말이, 생각 없이 사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생각은 사태를 알아차리는 인지작용이나 문제를 푸는 계산과는 전혀

다른 정신적 기능이다. 생각 또는 사유는 자신과의 대화이며, 바람처럼 다가와 고착된 사고

와 관습과 행위의 기준을 근본으로부터 흔들고 다시금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사

유는 모든 독단에게 큰 위협이 된다. 물려 내려온 권위와 관습의 힘을 근원적으로 반성하게

하며, 그 속에서 유지할 가치가 있는 것을 가려내고 무가치한 것을 파괴한다. 기득권을 가

진 수구세력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에 저항하는 행위의 근저에는 사유의 작용이 있다. 생각

없는 민족은 역사에 죄를 짓고, 생각하는 민족만이 자신의 존재를 세계 속에 당당히 드러낼

수 있다.

사유하는 것과 살아 있다는 것은 동일하다. 사유에는 삶이 동반된다. 삶 가운데 발생하는

일들의 의미는 생각 속에서 언어로 제공되며, 정의와 행복과 미덕은 사유를 근거로 수립된

다.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악행을 하느니 당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생각

하는 사람은 자신의 악행이 초래하는 내적 모순을 견딜 수 없어한다는 뜻이다.

걸프 전쟁 당시 쿠웨이트에서 도망치는 이라크 탱크를 포격하던 한 중무장 헬기 조종사는

포격을 하기 전 먼저 탱크 위를 몇 차례 선회했다. 탱크 운전병이 도망을 치도록 하기 위해

서였다. 그 이유를 조종사는, 운전병까지 죽여서는 내가 내 자신과 평화롭게 살 수 없을 것

같아서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생각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냉소주의와 허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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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빠지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사유는 우리를 궁극적인 허무과 냉소로 인도하지 않는다.

독단과 기존의 가치체계에 무비판적으로 몰입했던 사람들은 사유가 불러일으키는 생동감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가치를 대체할 새로운 독단을 요구하기 쉽다. 일제에 협력했던 사람

은 쉽게 독재에 협력하고, 독재에 협력했던 사람들은 쉽게 불합리한 전통의 수구적 집착에

몰입한다.

사유는 모든 독단을 위협한다. 그런데 사유는 스스로 독단을 제시하지 않으며, 파괴된 독

단의 대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각한다는 것은, 생활 속에서 어려움에 직면하는

매순간 새롭게 마음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적 위기가 다가올 때 우리는 새

롭게 판단을 내리고,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의견을 부단히 나누며, 공동 행위를

통해 자신을 분명히 표현해야 한다. 사유는 판단을 바르게 하고, 판단은 거리에서 이루어지

는 공동 행위를 통해 힘을 가지게 되는데, 그 힘은 공동 행위자의 뜻을 지속적으로 표현할

새로운 법과 질서의 구축을 통해 유지된다.

공화국의 위기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학문적 응답이지

만 그 근본정신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에 있다

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구체적인 응답을 이루는 가운데 아렌트는 중요한 개념들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함께 생각의 길을 걷도록 이끌고 있다.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이 책은 한국에서 정치를 고민하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문제

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성격의 작업은 아렌트의 말로 하자면 “판단(judging)”의 작업이며, 여기서 아렌트는

이런 판단 작업에 대한 이론적 규명으로 나아갔다.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일들에 대

한 적절한 답을 줄 수 있는 원리와 원칙, 혹은 이론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

고 삶을 진행하기 위해 그런 일들에 대하여 입장을 세우고 주장을 제시해야만 할 때, 우리

가 해야 하는 작업이 판단이다. 이는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설명한 ‘반성적 판단’과 같

은 구조의 작업으로,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평가할 보편적 원리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에도 그 사안에 대해 내릴 수 있는 판단의 방식을 말한다. 아렌트는 이러한 판단의 방식을

정치적 판단에 적용하여 어떻게 정치적 판단이 가능한가를 밝히고자 했는데, 이러한 작업의

단초들은 1950년대와 60년대의 저술들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나 그녀가 남긴 마

지막 학문적 작업의 정점에서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도록 되어 있었다. 유고로 나온 정치

의 약속과 과거와 미래사이의 일부 논문에서 그에 대한 단편적 언급이 등장하지만, 아렌

트가 3부작으로 기획했던 3부작 정신의 삶의 마지막 부분으로 그의 최종적인 모습을 가

져야 했었다. 하지만 이는 그녀의 ‘때 이른’ 죽음으로 말미암아 불발되었고, 비교적 완성된

형태를 이루고 있는 첫 2부만 유작으로 1권 사유, 2권 의지라는 소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3권이 되었어야 할 판단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게 되었지만, 아렌트가 뉴

스쿨에서 강의한 내용을 그의 제자였던 로널드 베이너가 편집하여 그 대략적인 아이디어는

알 수 있게 만들어 세상에 내 놓았는데, 그것이 칸트정치철학강의이다. 70세의 나이로 사

망한 아렌트의 죽음에 대해 ‘때 이른’이라는 표현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이유는 ‘판단’ 작업

을 완성하지 못한 채 남겨 놓아야만 했던 까닭이다.

아렌트의 또 다른 작업은 시대적 현상에 대한 분석의 지속적인 수행이다. 전체주의라는

현상으로 나아간 역사적, 철학적 작업을 수행한 전체주의의 기원은 아렌트를 본격적인 정

치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고,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을 분석한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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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도 동일한 성격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작업에서 아렌트는 논의를 전개하는 과

정으로 소위 ‘내러티브’의 방식을 사용하여 역사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고, 기존의 정치

이론에 근거하여 논의를 전개하지 않고 현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 정치 현상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정치학자들에게 제공하였다. 물론 아렌트의 작업이 모든 학자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의 새로운 작업 방식과 내용은 항상 논란을 불러 일으

켰지만 지금까지 그 영향력이 지속된다는 사실은 그녀의 작업이 갖는 힘을 충분히 입증한다

고 할 수 있다.

이 두 책이 나온 중간 기간에 발간된 인간의 조건은 이 두 작업의 근저에 있는 철학적

작업의 핵심을 보여준다. 인간의 조건의 앞부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공적/사적 구분과

사회적/정치적 구분은 혁명론의 테제들을 전개해 나가는 근본 개념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후의 ‘노동’ 장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적 작업과 인간의 활동에

대한 분석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다루어진 전체주의의 사상적, 인간학적 근원에 대한 통

찰과 연결된다.

아렌트 자신이 처음부터 기획한 것이 아니면서도 그녀의 생각을 온통 사로잡아 학문적 작

업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던 것은 아돌프 아이히만과의 만남이었다. 1960년 봄 학기 강의를

마친 아렌트와 남편 하인리히 블뤼허는 뉴욕주 동부에 있는 캣츠킬 지역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이때 뉴욕 타임즈에서 아이히만의 체포 소식이 보도되었다. 아렌트는 《뉴요커》

의 편집장인 윌리엄 숀에게 연락하여 자신의 재판 참관자로 보내줄 것을 제안하였고, 이 제

안이 받아들여지자 원래 만들어져 있었던 자신의 빡빡한 일정들을 전면 재조정하여 이스라

엘로 갔다.61) 거기서 이루어진 작업은 뒤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

고라는 제목으로 처음에는 《뉴요커》에 연재되었다가 나중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작업을 통해 ‘악’의 문제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하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정신의 삶 제1

권 사유로 나아가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이 중간단계를 이루는 작업은 유고집으로 나

온 판단과 책임에 게재된 논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상과 같이 아렌트의 작업들을 대략적으로 구분해 보았으나 이 작업들은 사실상 서로 긴

밀하게 연결되어 거대한 하나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다양하게 전개된 작업

의 정점에는 판단이론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지금 우리의 손에 들려 있는 공화국의 위기는 아렌트의 정치적 판단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6. 공화국의 위기

공화국의 위기에 수록된 세 편의 논문은 미국의 상황에 대한 아렌트의 판단의 결과물이

다. 아렌트 전기를 쓴 엘리자베스 영-브륄은 공화국의 위기를 저술할 당시를 ‘어두운 시

절의 미국’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미국의 모습에 대한 아렌트의 응답이 공화국의 위기라는 것이다. 이 시기에 흑인의 민권운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났고, 케네디 대통령과 마

틴 루터 킹 Jr.가 암살당하고, 대학에서 학생소요가 일어나고,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패배

하는 등의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 미국을 어둡게 만든 것은

아니다. 미국이 어두움에 빠지고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흑인의 민권운동

이 단지 흑인들의 권리 회복이라는 명분에 묻혀 그 이름으로 진행되는 다양한 운동 가운데

61) 엘리자베스 영-브륄, 홍원표 역 한나 아렌트 전기: 세계 사랑을 위하여 (인간사랑, 2007) pp.537-539 참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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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호되어야 할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 암살 사건이 발생한 것 자체

보다는 그러한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파헤쳐지지 못하는 현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수많은

시민들이 제대로 비판을 하고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비판적 견해들이 미국의 전

쟁 개입을 근본적으로 반성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계속적으로 헛발질만 하다가 망가진 모습

으로 베트남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과정 등이다.

이러한 사태들로 인해 아렌트는 「정치에 있어서의 거짓말」을 통해 미국 정치에서 거짓이

누적되고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 메커니즘을 살펴보게 되었고, 「시민불복종」을 통해

서 미국의 법이 갖는 특성과 국가에서 법의 준수와 불복종 행위를 통한 법의 개선이라는 변

증법적 과정을 검토하게 했다. 「폭력론」을 통해서 아렌트는 국가 혹은 집단,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힘의 행사가 폭력과 권력으로 나뉘는 분기점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려

했다. 이러한 작업의 특징은 한 마디로 ‘현상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이나 사상에 의해

현실을 보는 눈이 제약을 받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정확히 읽음으로써 제대로 된 관점과

정책, 나아가 이론이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작업의 기초에는 정치학의 기본적

개념들, 예컨대 권력, 폭력, 권위, 법, 계약 등과 같은 개념들을 실재에 기초하여 정확하게

이해하는 작업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치에 있어서의 거짓말」은 소위 <펜타곤 문서>의 누출과 관련하여 작성된 논문이다.

<펜타곤 문서>의 공식 명칭은 <1945-1967년 미베트남 관계: 국방부 연구 문서>였다. 이

문서는 미 국방부의 일급기밀문서였으나, 1971년 6월 13일자 《뉴욕 타임즈》의 1면 기사

를 통해 공개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펜타곤 문서>는 이처럼 공개된 이후에 붙

여진 별명이다.

<펜타곤 문서>는 1967년 6월 17일에 당시 미 국방부장관 로버트 S. 맥나마라가 베트남

연구 태스크 포스 팀을 꾸미고 이 문서를 만들 것을 명령함으로서 탄생하게 되었다. 이 문

서를 작성한 목적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백과사전적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실제적인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한 채 남아 있다. 아마도 차기 대통령 출마를 계획

하던 로버트 케네디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추정이 이후에 이루어지기는 했다.

국방부 내에는 역사자료관이 있었지만 맥나마라는 그를 이용하지 않고 자신의 측근들을 동

원하여 총 36명(18명의 군 장교, 18명의 싱크탱크, 대학 및 정부부처 출신 민간인)의 TFT

를 구성하여 활용했다. 이들은 자신의 작업이 공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군대나 백악관,

연방 관료들과의 인터뷰를 일체 수행하지 않았고 오직 국방부 내의 자료만을 참조하였다.

그래서 백악관 안보담당관이던 월트 W. 로스토우 조차 이 일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 연구

는 3천 페이지의 사실분석, 4천 페이지의 정부문서 원본으로 이루어져 총 47권이나 되었고

“일급비밀-민감 사안”으로 분류되었는데, “민감 사안”이란 공식 분류는 아니었고 이 문서가

공개되면 난처한 일이 발생될 수 있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었다.

<펜타곤 문서>를 공개한 대니얼 엘스버그는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년

간 해병대 중대장으로 복무를 했었는데, 맥나마라 장관이 만든 TFT의 리더들을 잘 알고 있

었다. 원래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던 그는 1969년 10월에 공개를 목적으로 이 문건을 복사

했고, 1971년 3월에 《뉴욕 타임즈》에 그 자료를 제공하여 발췌 본을 신문에 연재하여 공

개하기 시작했다. 공개된 <펜타곤 문서>의 핵심 내용은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폭격, 북

베트남 해안에 대한 폭격, 해병대의 상륙작전 등을 통해 전쟁을 고의적으로 연장했던 사실

등인데, 가장 심각했던 점은 트루먼 대통령에서 존슨 대통령에 이르는 4개 행정부가 미국

시민들에 대해 기만적으로 대했다는 점이었다. 예컨대 존슨 대통령은 1964년 선거운동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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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전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전쟁을 확대해 나갔다. 엘스버그의 폭로는 베트

남 전쟁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약화시켰으며, 결국 이 일은 뒤이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연결

되어 닉슨 대통령의 사임에 기여하였다. 원래 <펜타곤 문서>의 공개와 관련된 재판은 존슨

대통령과 그의 민주당 정부에 대한 심판이 핵심이었으나 닉슨 행정부로 하여금 정부의 정보

누설 방지에 집중하게 하여 결국 워터게이트 사건과 연관되어버리게 된 것이다.

아렌트의 논문은 전통적으로 정부가 국가기밀이라는 이름으로 정보를 독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정부의 작동 과정에서 거짓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작동하게 되는지에

집중한다. 아렌트는 정치 혹은 정치가에게서 거짓이 작용하는 것은 인간의 죄성 때문에 발

생하게 된 것이 아니라 홍보의 과정에서, 문제해결사들이 일하는 방식을 통해 현실에 대해

생생한 감각을 갖지 못하게 됨으로써 발생한 일임을 분명하게 한다. 거짓은 현실과 다른 것

을 상상할 수 있는 기능에서 발생하므로, 정치적 행위 또한 현실과 다른 것을 꿈꾸며 진행

되기 때문에 정치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인 상상력(imagination)의 작동을 요구한다.

거짓은 진실보다 더 그를듯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성을 활용하여 판단하려는 우리에게 진실

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와 우리를 기만하지만, 아렌트는 “진리는 거짓에 대해 확고한 우

선성을 갖는다”(번역서 44쪽)임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탐색하지 못

하게 하는 정신습관”을 이겨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62)

아렌트의 두 번째 논문 「시민불복종」은 미국에서의 흑인 민권운동과 학생운동을 배경으로

쓰인 것이다. 이러한 운동들은 현행 법질서를 위반하는 불복종 운동을 포함하였는데, 이러

한 운동은 불복종 행위자들이 속한 주의 법과 연방법의 입장 차이와, 대법원에서 이루어지

는 사법심사의 문제까지 연관이 된다. 법은 자기유지를 요구하며 법에 따라 통치를 이루려

는 공화정의 이념의 근간이 된다. 하지만 시민의 요구는 법의 개정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시민불복종이라는 말은 헨리 소로가 처음 사용한 말로 알려져 있고, 또 이러한 시민불복

종의 정당성의 근거를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연관시켜 이해하기도 하고 또 양

심에 근거시키기도 한다. 아렌트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운동이 어떻게 해서 정치

적으로 중요한 상황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시민불복종이 양심에 근거하기에 정당

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을 거부한다. 양심은 순수하게 주관적이며 공적, 정치적 성격을 갖

지 않기 때문이다. 양심은 “~하지 말라”라는 부정적 방식으로만 작동하며, 자기관계에 근거

를 두므로 생각하는 자에게만 자명한 것으로 드러날 수 있으나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관계

를 맺고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생각을 하더라도 자기 성찰에 이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라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한 사람의 양심이 다른 사람의 양심과 대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으므로 일반화가 가능하지 않다. 이 점은 ‘양심의 가책’을 운운하였던

아이히만의 경우를 보아도 분명하다. 아렌트가 소로의 방식으로 시민불복종을 설명하기를

거부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경우를 법과 시민의 관계에 두질 않고 개인의 양심이 명하는 도

덕적 의무라는 방식으로 풀어가기 때문이다.

불복종의 정당성은 불복종하는 자들의 숫자와 그들이 제출하는 의견의 질에 달려있다. 불

복종은 개인이 아니라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의견에 기초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의미가

62) 이러한 내용 때문에 이 논문의 제목을 「정치에서의 거짓」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낫지 않은가를 깊이 고민하

였다. 정치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현실의 왜곡하는 거짓의 기제를 짚어보는 작업이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

이다. 하지만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거짓이 거짓말 행위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최초의 번역대로 「정치에서의 거짓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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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며, 또한 그것이 단순히 숫자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다수를 설득할 힘이 있는 의견이라

는 데 의미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다수가 자신의 의견이 다수주의의 횡포일

가능성을 열어 놓고 수적으로 소수인 이들의 합의된 의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될 것

이다.

아렌트는 법이 변화에 대항하여 사회에 안정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하지만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며, 궁극적으로 시민의 반응과 연관하여 적용과 폐지가 이루어지는

점에도 주목한다. 예컨대 적법절차 등을 다룬 미국의 수정헌법 14조와 금주령을 담은 수정

헌법 18조는 모두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취지의 법이지만, 전자는 시민불복종을 통해

남부에서 흑인과 백인 시민의 태도가 명백해 졌을 대 법원에서 그 적용을 감행할 수 있었던

반면, 후자는 금주령이 강제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명이 되자 폐지되었다. 나아가 시

민의 의견과 법이 충돌할 경우 이루어지는 사법심사가 중요하다. 한국의 경우 사법심사는

헌법재판소의 권한으로 있으나 미국의 경우에는 대법원의 결정으로 이루어진다. 미국에서

사법심사 행위는 시민의 불복종행위가 정당한 것인지를 가림으로써 법과 사회의 변화를 열

어갈 수 있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는 여론의 영향을 받아 사법심사 자체를

대법원이 거부함으로써 응답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아렌트의 시민불복종 행위에 대한 논

의는 미국에서의 시민의 계약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 법의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작업은 법에 대한 아렌트의 관점을 보여줌으로써 아렌트의 공화주의적 시각

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게 된다.

「폭력론」은 미국에서 점차 강력한 활동력을 보여준 블랙 파워 운동, 그리고 대학교에서

일어난 학교본부 점거 등으로 나타난 학생운동에 대한 아렌트의 응답에서 시작되었다. 그리

고 프랑스에서 발발하여 전세계적으로 그 영향력이 전파된 1968년의 68혁명에 대한 아렌

트의 응답을 포함하고 있다. 아렌트는 68혁명이 본질적으로 비폭력적이었다고 생각했으나

많은 사람들은 폭력과 권력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폭력을 옹호하는 듯한 양상

을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폭력론」의 구상은 1967년 12월 17일에 《뉴욕 리뷰 오브 북스》가 주최한 토론회에 참

여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는 노암 촘스키도 함께 패널로 참여하고 있었으며, 청중들

가운데는 수잔 손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아렌트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주장들을 비판

적으로 검토하였으며, 촘스키와 더불어 비폭력이 전술적인 이유 때문에 평화운동에는 본질

적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아렌트는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대해 영국이 일종의 행정적 대학

살을 통해 제약을 가하려고 했다는 점을 살펴보면서, “미국인들은 시민의 비폭력에 가해지

는 행정적 폭력이 ‘공화국의 종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63)이라고 주장하였다.

1966년 시카고대학교에서 학생들의 집단 시위가 있었다. 당시 시카고대학교 당국은 높은

성적을 거둔 학생들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채택하려 하였는데, 학

생들은 재산이나 학업능력 등을 이유로 징집에 차별을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아렌트는 이러한 학생의 의견에 동조하였고,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뒤 제1차 세계대전 참

전 유대계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에 대한 나치스의 추방 면제령을 거부했던 사실을 학생들에

게 말하여 주기도 했다. 아렌트는 이 학생들과 학생운동에 감명을 받았고, 학생들도 아렌트

63) 엘리자베스 영-브륄, 앞의 책, p.673. 「폭력론」의 배경에 대한 논의는 이 책의 pp.669-684와, 필자의 지도

교수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아렌트에게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James Lawler의 미간행논문 "Ethics, Politics

and the Judgment of Taste: Arendt contra Kant", 그리고 Richard Bernstein의 미간행논문 "Hannah

Arendt's Reflections on Violence and Power"를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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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감명을 받아 학생들의 동맹휴업에서 아렌트의 수업을 면제하기로 투표를 통해 결의하

기도 했다.

2년 뒤인 1968년 4월에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 아렌트는 이를 인정

하였다. 학생들은 대학과 국방연구원의 제휴, 그리고 전쟁관련 연구 중단요구를 하였을 때

아렌트는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학생들이 대학교를 장악하고 대학 자체의 운영을 불가능하

게 하는 등의 불법적 공격을 하였을 때 비판적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아렌트는 대학의 타락

때문에 폐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리 추구의 독립된 장소이자 유일한 가능한

지반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아가 아렌트는 대학이 학생들의 재산이면서 동시에

교수와 직원들의 재산이라고 생각하여, 할렘 공동체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은 흑인 학생들이

컬럼비아대학교의 본부 건물을 무력으로 점거한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상과 같은 경험들을 통해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의 차이, 공동으로 활동하는 인간의 능

력, 그리고 집단이나 개인의 특권이 될수 있는 도구 사용의 차이를 정교하게” 밝힐 수 있게

되었다. 1968년 여름부터 아렌트는 폭력에 관한 논문의 집필을 시작하여 초안을 완성하였

다. 「폭력론」의 완성본은 나중에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고, 또 공화국의 위기의 한 부분

으로 포함되어 출간되기도 했다.

공화국의 위기의 마지막에 수록된 인터뷰 기사인 「정치와 혁명에 대한 소고: 하나의 주

석」은 독일어로 이루어진 아렌트와의 대담 내용을 영어로 옮겨 포함시킨 것이다. 그 내용은

「폭력론」에 담긴 아렌트의 주장들을 보다 명백히 해명하는 데 할애되고 있지만, 그에 머물

러 있지 않고 나아가 폭력과 혁명의 관계에 대한 논의들을 통해 공화국의 위기과 혁명론

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필자에게 이 인터뷰는 특히 세 가지 점에서 흥미가 있었다.

첫 번째는 이 대담에서 ‘공적 행복’에 대해 다시금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

렌트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학생운동을 통해 학생들이 그런 정치적 행위가 즐거움

과 행복을 가져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학생들의 행위는 아주 오랜만에

일어난 “자발적 정치운동”임을 지적하면서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단지 단순

하게 선전 차원에서만 운동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행위 차원에서 더욱이 거의 전적으로 도

덕적 동기에 기초한 행위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권력 혹은 이해관계의 플레이로

통상 간주된 것 가운데에는 거의 드문 경우인 이러한 도덕적 요인과 더불어 우리 시대에 또

다른 경험이 정치 게임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행위를 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입니다. 이 세대는 18세기에 ‘동적 행복’이라고 불렀던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사람이 공적

삶에 참여할 때 스스로 인간 경험의 한 차원을 열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험 차원이

란 다른 식으로는 그에게 열리지 않는 것이면서도 여하튼 완전한 ‘행복’의 한 부분을 구성

하고 있는 것입니다.”64) 두 번째는 평의회체제(the council system)에 대한 아렌트의 설명

이다. 혁명론에 이어서 여기서도 평의회체제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민족국가 이후의 체제에 대한 아렌트의 대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제3세계의 성격에 대한 아렌트의 언급이다. 아렌트는 「혁명론」에서 제3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언급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정화열 교

수도 이러한 언급이 제3세계의 현실에 대한 아렌트의 몰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다.65) 그러나 이 대담에서 아렌트는 제3세계라는 개념이 현실에 바탕을 둔 정확한 개념이

64) 번역본 203쪽. 필자는 이러한 공적 행복의 경험이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경험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1898

년의 만민공동회의 경험과 2008년의 촛불집회의 경험이 대표적인 공적 행복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졸저, 행복의 철학: 공적 행복을 찾아서 (길, 2011) pp.51-5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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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이데올로기로 윤색되어 현실을 호도하는 개념일 수 있다는 점을 재차 강조한다.66)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 볼 때 아렌트의 견해가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이 부분은

독자의 판단에 맡겨 보도록 하자.

공화국의 위기는 우리에게 아렌트의 정치적 판단력이 얼마나 명석하고 또 깊게 전개되

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화열 교수의 지적처럼 아렌트는 ‘공공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가운데 우리 한국처럼 격동하는 사회를 이해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

는 데 필수적인 개념들에 대해 고민하게 우리를 이끌어 준다. 물론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은

미국의 상황에서 제기된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아렌트의 구체적인 응답이다. 그래서 우리

가 만일 아렌트의 구체적인 답이 우리의 답이 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읽는다면 우리는 지적

으로 게으른 독서광에 머물러 버릴 것이다. 이 책은 우리를 정치적 사유에로 초대하므로,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루어야 할 것은 아렌트와 더불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개념들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법, 계약, 불복종행위, 폭력, 권력 등의 단어들이 우리에게 진

정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곱씹어보고, 그렇게 스스로 이해하고 확신하게 된 개념의 틀

에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진단하고 판단하는 노력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렌트는 죽은 뒤 한참이 지난 1990년 후반에 미국에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공화주의

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공화주의란 미국의 공화당의 이론적 입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학계에서 형성된 이론을 말한다.) 공화국의 위기에 실린 논문들이나,

이보다 앞서 쓰인 혁명론의 내용은 아렌트가 미국을 놓고 수행한 지적 고민의 결실이다.

오늘날의 미국의 공화주의자들은 정치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고대 로마의 정치이론에서,

혹은 마키아벨리에 대한 새로운 독해를 통해서, 혹은 미국 건국기의 정치 이해에서 찾으려

고 한다. 아렌트의 연구는 이 가운데 세 번째의 작업들과 연계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형성되고 발전되고 있는 정치이론은 서구에서 형성된 것에 비해서는 깊이와

폭에 있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왜소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독특한

정치적 경험과 상황이 있으므로 서구에서 형성된 이론이 여기서 그대로 적용될 것을 바랄

수 없다. 아렌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아렌트 사상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현실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도록 이끌어 준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공

화국의 위기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스스로 생각하도록 도와주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7. 판단 이론

정신의 삶의 제3부가 될 판단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판단의 내용

에 대한 관심에 호응하여, 아렌트의 제자였던 베이너는 칸트 정치철학에 대한 아렌트의 강

의 내용을 정리하여 칸트 정치철학 강의(1982)를 세상에 내놓았다. 칸트 철학, 특히 칸트

의 판단력 개념이 아렌트에게 중요하게 된 것은 아렌트의 독특한 정치 개념 때문이다. 아렌

트의 정치 개념은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을 배경으로 인간의 현실적인 삶에 대한

통찰에 바탕을 둔 것이다. 따라서 칸트 정치철학 강의를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

저 아렌트의 정치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정치

원리를 구명하는 것은 정치의 본질에 대한 왜곡된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이 때문에 칸트의

실천이성의 원리에 기초한 정치 철학을 아렌트는 거부한다. 정치란 보편적인 원리가 부재한

65) 정화열, 위의 논문, p.--.

66) 번역본 pp.210-2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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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복수의 인간이 모여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드러내는 공적 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정치 행위에 대하여는 그것을 규정할 수 있는 원리나 법칙이 부재하다는 것과, 이러

한 정치 이해를 중심으로 볼 때 기존의 정치 철학은 잘못된 길을 걸어갔다는 아렌트의 주장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정치 개념에 가장 적합한 정신 기제로

서는 칸트의 미적 판단력 개념이 유일하기 때문에 아렌트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렌트의 판단 개념은 앞 절에서 설명한 것처럼 두 개의 문제 관심이 수렴되는 것이다.

첫째는 아렌트의 초기 저술에서부터 나타나는, 보편적 원리가 존재하지 않은 가운데 개별적

사례를 다루는 문제이고, 둘째는 정신 활동으로서 사유와 의지와 연결되어 구명되어야 할

정신적 기능에 대한 관심이다. 이처럼 두 개의 문제 관심이 결합되는 곳에 판단 개념이 자

리하게 됨으로써 아렌트의 판단 이론에 대해서도 상이한 해석이 있게 된다. 많은 학자들은

강하게는 이 두 판단 이론에서 내용상의 모순점을 지적하기도 하며, 약하게는 이 두 이론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제출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모순이란 인간의 조건에 나오

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의 관점에서 논의되는 정치사상과, 정신의 삶과 칸트 정치철

학 강의에 나오는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의 관점에서 논의되는 정치사상의 내용

적 충돌이 이들 각각을 반영하는 두 판단 이론에서도 발견됨을 지칭하며 하는 말이다. 아렌

트의 입장 변화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제임스 T. 노어, 리챠드 J. 번쉬타인, 그리고 이 책을

편집한 로날드 베이너 등에 의해 주장되었고, 아렌트의 오랜 친구인 한스 요나스도 아렌트

의 관심이 정치에서 초(超)정치적인 것에로 옮겨졌다는 증언을 하였다.67)

베이너에 따르면 아렌트에게는 두 개의 판단 이론이 존재하는데, 초기의 판단 이론은 과

거와 미래사이에 수록된 논문들에 나타나며, 후기의 판단 이론은 “사유와 도덕적 고려점들

(Thinking and Moral Considerations)”(1971)과 그 이후에 나온 정신의 삶 및 칸트 정

치철학 강의에 나타난다고 한다. 초기의 판단 이론에서는, 판단이 대표적 사유

(representative thinking)를 통해서 산출되는 것으로 설명되며, 현실의 사태에 대한 일차적

반성(first-order reflection)이고, 구체적인 정치 행위의 지침으로 작용되는 실천적 성격을

가지며, 정신의 세 기능에 대한 구분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후기의 판단 이론에서는, 판단이 구체적 정치 행위자의 입장이 아니라 역사가나 이야

기꾼의 회고적 판단의 성격을 갖는 관조자의 판단으로 설명되며, 관조자의 비참여적 특성으

로 인해 가능하게 되는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을 그 특징으로 하고, 정치 행위자의 판

단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판단이므로 이차적 반성(second-order reflection)이며, 정치 행위

와 상반되는 관조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설명된다.

판단 이론에 이처럼 성격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 이유는, 아렌트가 그 동안 해결하지 못했

던 많은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판단 개념을 통해 제시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베이너는 주장

하는데, 그 문제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신의 삶의 둘째 부분인 의지가 봉착한

난점이라고 한다. 이 난점이란, 자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탄생성

(natality)의 개념을 도입하여 의지의 자유를 설명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설명되는 자유는 자

의성을 가진 의지의 자유일 뿐 더 이상의 자유에 대한 자세한 논의가 전개되지 않는 문제를

67) James T. Knauer, "Hannah Arendt on Judgment, Philosophy and Praxis", International Studies of Philosophy vol.21, (1987), p.71, Richard J. Bernstein, "Judging-the Actor and the Spectator",

Philosophical Profile: Essay in a Pragmatic Mode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86), 그리고 Ronald Beiner, "Interpretive Essay: Hannah Arendt on Judging", Lectures on Kant's Political Philosoph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082) ed by Ronald Beiner.

Page 30: 김선욱, 한나아렌트-어두운 시대의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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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다. 즉 자의성으로만 자유를 설명해서는 자유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이 나오지 않

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렌트가 제시하려는 것이 판단 개념이 된다. 판단은

개별성이 가진 우연 속에서 긍정적인 기쁨의 요소를 발견하게 해주는 정신의 기능이다. 개

별자를 보편자에 귀속시키지 않고 다룰 수 있는 판단 작용을 통하여 우리의 개체적 생에 즐

거움을 주는 요소를 분별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평가하게 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다. 판단은 주관성의 변덕에 휘둘리지 않고 동시에 객관적인 필연에 구속을 받지 않는 나름

대로의 타당성을 제시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판단의 타당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렌트는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어떻게 미적 판

단이 가능한가의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렌트는 미적 문제와는 다른 정치적 문

제에 대한 판단을 다루면서, 판단의 타당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식의 요소, 즉 인지적

요소가 판단 속에 있지 않은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

람의 자질이 어떤 것인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베이너는 주장한다. 특히 판단

력과 유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phronēsis 개념과 대조해 볼 때, 판단을 내리는 자가 관조자

인지 정치 행위자인지가 확정되어야 하며, 또 신중성(phronēsis)과 같은 요소가 판단에 필

요한 것인지에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후자의 질문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리스토텔

레스의 철학이 가진 목적론 개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판단이 어떤 목적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판단은 수단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베이너는 판단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판단이란, 개별자를 적절

히 평가하는 잠재적 대화 상대자들로 이루어진 상상적 공동체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

하여 무관심적 반성이라는 반 사실적(counterfactual) 상황으로 자신을 투사하는 정신적 과

정이다.”68) 이 정의에 사용된 단어를 살펴볼 때, 여기에 주를 붙여 베이너가 하버마스를 언

급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베이너는 하버마스의 영향을 받은 논의를 계속한

다. 인지적 요소가 배제되어서는 판단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는 주장이다. 만일 인지적

요소가 전적으로 배제된다면 아렌트의 판단 이론은 결국 정치의 미학화에 빠질 수밖에 없다

는 지적을 한다. 칸트에 있어서 판단은 고도로 형식주의적으로 설명되지만, 어느 순간에 와

서 판단이 어떤 실질적 내용과 연관하여 문제 제기가 되지 않는다면 복수로 존재하는 판단

의 우열을 가릴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라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베이너는 아렌트가 좀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지(phronēsis)와 연관하여 정치적 숙고의 목적과 연관하여 판단을 설

명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라고 지적한다.

정치와 판단의 연관 관계에 대해 아렌트의 최종적 대답은 판단과 정치의 단절이었다고 베

이너는 해석한다. 즉 판단을 더 이상 정치 행위자의 기능으로 생각하지 않고 관조자의 기능

으로 생각함으로써, 정신의 활동으로의 자리 매김을 확실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정

치에 대한 판단의 역할은 단지 위기의 순간에만 파국을 방지하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69)

68) 로널드 베이너, “해설 논문”, p.120.

69) 여기서 요약한 베이너의 해석에 대해 역자는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비록 아렌트에게는

상호 모순되는 두 개의 판단 이론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자에는 보다 근원적인 일관성이

존재하며, 모순되어 보이는 점들도 이 일관성과 정합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해석

은 졸고 “한나 아렌트 정치사상의 해석성의 문제”(철학연구 제53집, 한국철학회, 2001 여름)에

서 상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