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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리즈 시절’은 언제였나요. MBC <그녀는 예뻤다>는 시청자들 각자가 자 신이 가장 빛났던 시절이 언제였는지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극 중 혜 진(황정음)의 ‘리즈 시절’은 초등학교 시 절이다. 당시의 그는 학교에서 가장 예쁜 데다가 똑똑해서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 고, 외톨이였던 성준(박서준)에게 먼저 손 을 내밀어줄 정도로 정도 많았다. 하지만 리즈 시절이 있다는 것은 그 시기를 제외 한 모든 순간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 을 의미한다. 제목이 ‘예쁘다’가 아닌 ‘예 뻤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 혜진은 청 소년기를 거치면서 이른바 ‘역변’했다. 아 버지에게 물려받은 홍조가 나타나면서 악 성 피부 트러블로 고생한 것은 물론, 집은 경제적으로 힘들어졌다. 결국 좋은 대학 에 들어가지 못해 이른바 스펙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응시하는 곳마다 낙방하는 취업준비생이 됐다. 혜진이 처음부터 자신이 ‘역변’했다는 사실을 치명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 다. 그러기에 혜진의 삶은 너무 바빴다. 혜 진이 과거와 현재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 끼는 것은 어린 시절 외국으로 나가면서 헤어진 첫사랑 성준과 오랜만에 만나기로 약속한 날 이후부터다. 다른 사람에게 마 음을 잘 열지 못해서 친구를 잘 사귀지 못 했던 성준은 ‘정변’의 청소년기를 거쳐 외 모부터 능력까지 근사한 어른으로 자랐 다. 통통했던 과거와 달리 몰라볼 정도로 외모까지 준수해진 성준은 재회하던 날 혜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그 순간 자신이 예전과 달리 ‘예쁘지 않 은’ 모습임을 자각하게 된 혜진은 단짝 친 구 하리(고준희)에게 자신인 척 대신 연기 를 해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어찌어찌 위 기를 벗어나기 위해 임시방편을 내세웠지 만 그 뒤에는 더욱 좋지 않은 상황이 기다 리고 있었다. 하리는 성준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고, 성준과 혜진이 「모스트」 잡지 부편집장과 인턴사원의 관계로 다시 엮이게 된 것이다. 드라마에서 성준은 혜진과 앞으로 로맨 스를 펼칠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리즈 시절’에 견주어 별 볼 일 없 는 현재를 각성케 하는 존재다. 때문에 성 준이 눈앞에 있는 인턴사원이 자신의 첫 사랑이라는 것을 늦지 않게 알아차린다거 나 하는 기적은 초반부터 일어나지 않는 다. 대신 별명이 ‘지랄준’인 성준이 혜진에 게 더욱 ‘지랄 맞게’ 구는 모습이 한동안 등장한다. 일처리를 시원찮게 한다는 이 유로 거의 폭언까지 들으며 혼이 나고, 구 멍 난 양말을 애써 감추는 등 비참한 상황 이 이어진다. 이것은 디테일과 정도의 차 이가 있을 뿐 누구나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왕년에 스타였지만 지금은 한물간 연예인까지 가지 않더라도 소포모 어 징크스를 걱정하는 2집 가수도 유사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사소해보이지만 각 자에게는 사소하지 않은 이유들도 더러 있 다. 예전만큼 머리가 빨리 돌아가지 않아 서, 예전처럼 밤을 새는 일이 거뜬하지 않 아서, 피부가 예전 같지 않아서, ‘대시’ 하 는 사람이 예전보다 줄어서 현재가 초라하 게 느껴지기도 한다. 유독 혜진이 만나는 좌절의 순간에 현실의 그림자가 강하게 느 껴진다면, 그만큼 시청자들이 공감할 만한 요소 또한 많아질 수밖에 없다. 혜진과 성준의 연애가 비로소 진전되는 시점은 필연적으로 열패감의 극복과 맞물 린다. 혜진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도 성준은 그에게 첫사랑의 흔적을 발견 하는 동시에 조금씩 호감을 느끼지만, 쌍 방 로맨스가 진행되는 것은 혜진이 성준, 즉 자신의 과거를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 킨 이후이기 때문이다. 혜진은 더 이상 성 준을 피해 도망다니지 않는다. 패션지라 는 생소한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일에 욕심도 생겼다. 외모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머리 스타일을 바 꾸고 화장으로 그의 주근깨와 홍조를 가 린다. 성준이 혜진의 바뀐 외모에 크게 반 응하는 예상 가능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 는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혜진의 외모가 바뀌었다는 단편적인 사실보다는 그의 태도가 변했다는 것에 방점이 찍힌 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라기보다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완벽하게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 다는 것을 인정한 후 과거를 끌어안은 것 에 가깝다. 그저 지금 가능한 일들을 해나 가는 것이다.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외모 에 투자하지 못했던 돈을 비로소 쓸 수 있 게 되면서 혜진은 악성 곱슬머리는 피는 데 40만원을 투자할 수 있었고, 백화점에 서 옷도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예전 과 똑같은 외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현 대 의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이미 망가 진 피부가 도자기처럼 매끈하게 바뀌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다만 혜진은 매일 아침 홍조와 주근깨를 가리기 위해 공들 여 화장을 하고, 곱슬머리를 펴기 위해 주 기적으로 미용실에 가서 관리를 받을 뿐 이다. 시술을 자주 받기 위해서는 평소 머 릿결에도 그만큼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노력한다고 해서 출신 대학이 바뀌거나 드라마틱한 인생 대역전극이 펼 쳐지지는 않는다. 대신 패션잡지 인턴사 원이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패션에 대 해 잘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갈 뿐이다. 이것은 드라마틱하게 혜 진이 과거와 똑같은 위치를 탈환하는 전 개보다 훨씬 현실적이며, 태도 면에서도 성숙하다. 혜진이 과거를 마주하게 만드는 또 다 른 동력은 과거의 기억을 공유해야만 가 능한 판타지, 즉 첫사랑이란 소재다. 이것 은 첫사랑 판타지가 불가능한 하리의 상 황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 다. 성준 앞에서 혜진인 척 연기를 할 때 성준의 가정사를 미처 알지 못해 말실수 를 할 만큼 하리는 그의 과거에 대해 잘 모르고, 담벼락과 관련된 과거의 추억을 나눌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신호등 초록 불이 켜졌을 때 “가시요!”를 외치는 버릇 을 갖고 있는 혜진은 성준의 과거 기억을 소환하며 그를 ‘심쿵’ 하게 만들지만 하리 는 그러하지 못한다. 반면 혜진과 성준에 게 과거사의 공유는 첫사랑 판타지가 성 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 심지어 과 거의 추억은 캐릭터들이 로맨스의 결실을 맺는 진주인공이 되느냐 아니냐를 결정짓 는 요건이기까지 하다. 혜진에게 지독한 열패감을 안겨주는 성 준 대신 ‘역변’한 혜진에게 예쁘다고 말하 며 관심을 보이는「모스트」의 에디터 신 혁(최시원)은 일견 로맨틱 코미디의 남자 주인공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혁은 철저 하게 혜진의 현재만을 보고 판단을 내린 다. 혜진이 모스트의 인턴사원이 되고 나 서야 시작된 관계이기 때문에 신혁은 혜 진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일이 없고, 혜 진은 그의 앞에서 과거에서 기인한 어떤 불안감도 느끼지 않는다. 혜진이 신혁을 좋은 동료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 는 그가 매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마침내 사랑의 결실을 맺 게 될 동화 속 주인공 커플이라면 필수적 으로 갖춰야 할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예뻤다>에서 로 맨스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넘어서야 할 위기는 과거와 현실의 괴리에서 시작된 거짓말 그리고 근간에 깔려 있는 좌절감 이다. 다시 말해, 신혁은 혜진과 갈등을 빚 으며 극복해나가야 할 ‘난관’이 없고, 따 라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성준 과 혜진이 과거를 함께 했기 때문에 난관 에 봉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이 이 유 때문에 두 사람은 연애물의 진주인공 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예뻤다>가 초반에 과거를 열등 감의 원인, 떨쳐내야 할 짐처럼 묘사했다 면 전개가 이어질수록 과거는 오히려 현 재라는 결과물을 구성하는 재료가 된다. <그녀는 예뻤다>에서 혜진과 하리의 자 매애가 혜진과 성준의 로맨스만큼이나 중 요하게 다뤄지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절된 적 없이 과거로 부터의 연장선상 위에 있다. 극 중 혜진 과 하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친구가 된 것 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묘사되는데, 그만 큼 하리는 혜진의 리즈 시절을 비롯해 별 볼일 없던 시절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과거와 현재는 분리된 것이 아니며 지금 과 다르다고 해서 옛날로 돌아가기 위해 혹은 돌아가지 못해 안달할 필요는 없다. 그저 과거에서부터 조금씩 증축된 현재를 긍정할 뿐이다. <그녀는 예뻤다>라는 제목의 시제는 과 거형이다. 태생부터 과거에 대한 이야기 일 수밖에 없는 이 드라마는 과거 때문에 생긴 열패감 혹은 과거를 공유하지 못한 데서 오는 한계를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예뻤다>의 사각관계는 과거가 있기에 가 능한 판타지를 보여주면서 과거에서 기인 한 열패감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 다. 어느덧 마지막 회를 앞두고 있는 <그 녀는 예뻤다>는 그래서 그들은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암시하는 미래 형으로 끝맺음할 가능성이 높지만, 방송 이 끝난 후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는 것은 각자의 과거다. 우리는 지금보다 소위 ‘잘 나가던’ 과거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과 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비슷한가. 그리고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내가 된 방식 에 대해서 말이다. 12 문화 2015년 11월 9일 월요일 대학신문 과거가 주는 부담에서 벗어나기 잘 나가던 과거 vs 별 볼 일 없는 현재 <그녀는 예뻤다>, 과거형이 던지는 질문 대중문화웹진 ize 임수연 기자 [리뷰 한 편] MBC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과거를 긍정해야 가능한 판타지 과거를 마주하는 법을 아는 그녀는 예뻤다 삽화: 최상희 기자

[리뷰 한 편] MBC 드라마 과거를 마주하는 법을 아는 …pdf.snunews.com/1912/191212.pdf · 구 하리(고준희)에게 자신인 척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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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리뷰 한 편] MBC 드라마  과거를 마주하는 법을 아는 …pdf.snunews.com/1912/191212.pdf · 구 하리(고준희)에게 자신인 척 대신

당신의 ‘리즈 시절’은 언제였나요. MBC

<그녀는 예뻤다>는 시청자들 각자가 자

신이 가장 빛났던 시절이 언제였는지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극 중 혜

진(황정음)의 ‘리즈 시절’은 초등학교 시

절이다. 당시의 그는 학교에서 가장 예쁜

데다가 똑똑해서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

고, 외톨이였던 성준(박서준)에게 먼저 손

을 내밀어줄 정도로 정도 많았다. 하지만

리즈 시절이 있다는 것은 그 시기를 제외

한 모든 순간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

을 의미한다. 제목이 ‘예쁘다’가 아닌 ‘예

뻤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 혜진은 청

소년기를 거치면서 이른바 ‘역변’했다. 아

버지에게 물려받은 홍조가 나타나면서 악

성 피부 트러블로 고생한 것은 물론, 집은

경제적으로 힘들어졌다. 결국 좋은 대학

에 들어가지 못해 이른바 스펙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응시하는 곳마다 낙방하는

취업준비생이 됐다.

혜진이 처음부터 자신이 ‘역변’했다는

사실을 치명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

다. 그러기에 혜진의 삶은 너무 바빴다. 혜

진이 과거와 현재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

끼는 것은 어린 시절 외국으로 나가면서

헤어진 첫사랑 성준과 오랜만에 만나기로

약속한 날 이후부터다. 다른 사람에게 마

음을 잘 열지 못해서 친구를 잘 사귀지 못

했던 성준은 ‘정변’의 청소년기를 거쳐 외

모부터 능력까지 근사한 어른으로 자랐

다. 통통했던 과거와 달리 몰라볼 정도로

외모까지 준수해진 성준은 재회하던 날

혜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그 순간 자신이 예전과 달리 ‘예쁘지 않

은’ 모습임을 자각하게 된 혜진은 단짝 친

구 하리(고준희)에게 자신인 척 대신 연기

를 해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어찌어찌 위

기를 벗어나기 위해 임시방편을 내세웠지

만 그 뒤에는 더욱 좋지 않은 상황이 기다

리고 있었다. 하리는 성준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고, 성준과 혜진이 「모스트」

잡지 부편집장과 인턴사원의 관계로 다시

엮이게 된 것이다.

드라마에서 성준은 혜진과 앞으로 로맨

스를 펼칠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리즈 시절’에 견주어 별 볼 일 없

는 현재를 각성케 하는 존재다. 때문에 성

준이 눈앞에 있는 인턴사원이 자신의 첫

사랑이라는 것을 늦지 않게 알아차린다거

나 하는 기적은 초반부터 일어나지 않는

다. 대신 별명이 ‘지랄준’인 성준이 혜진에

게 더욱 ‘지랄 맞게’ 구는 모습이 한동안

등장한다. 일처리를 시원찮게 한다는 이

유로 거의 폭언까지 들으며 혼이 나고, 구

멍 난 양말을 애써 감추는 등 비참한 상황

이 이어진다. 이것은 디테일과 정도의 차

이가 있을 뿐 누구나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왕년에 스타였지만 지금은

한물간 연예인까지 가지 않더라도 소포모

어 징크스를 걱정하는 2집 가수도 유사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사소해보이지만 각

자에게는 사소하지 않은 이유들도 더러 있

다. 예전만큼 머리가 빨리 돌아가지 않아

서, 예전처럼 밤을 새는 일이 거뜬하지 않

아서, 피부가 예전 같지 않아서, ‘대시’ 하

는 사람이 예전보다 줄어서 현재가 초라하

게 느껴지기도 한다. 유독 혜진이 만나는

좌절의 순간에 현실의 그림자가 강하게 느

껴진다면, 그만큼 시청자들이 공감할 만한

요소 또한 많아질 수밖에 없다.

혜진과 성준의 연애가 비로소 진전되는

시점은 필연적으로 열패감의 극복과 맞물

린다. 혜진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도 성준은 그에게 첫사랑의 흔적을 발견

하는 동시에 조금씩 호감을 느끼지만, 쌍

방 로맨스가 진행되는 것은 혜진이 성준,

즉 자신의 과거를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

킨 이후이기 때문이다. 혜진은 더 이상 성

준을 피해 도망다니지 않는다. 패션지라

는 생소한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일에 욕심도 생겼다. 외모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머리 스타일을 바

꾸고 화장으로 그의 주근깨와 홍조를 가

린다. 성준이 혜진의 바뀐 외모에 크게 반

응하는 예상 가능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

는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혜진의

외모가 바뀌었다는 단편적인 사실보다는

그의 태도가 변했다는 것에 방점이 찍힌

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라기보다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완벽하게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

다는 것을 인정한 후 과거를 끌어안은 것

에 가깝다. 그저 지금 가능한 일들을 해나

가는 것이다.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외모

에 투자하지 못했던 돈을 비로소 쓸 수 있

게 되면서 혜진은 악성 곱슬머리는 피는

데 40만원을 투자할 수 있었고, 백화점에

서 옷도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예전

과 똑같은 외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현

대 의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이미 망가

진 피부가 도자기처럼 매끈하게 바뀌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다만 혜진은 매일

아침 홍조와 주근깨를 가리기 위해 공들

여 화장을 하고, 곱슬머리를 펴기 위해 주

기적으로 미용실에 가서 관리를 받을 뿐

이다. 시술을 자주 받기 위해서는 평소 머

릿결에도 그만큼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노력한다고 해서 출신 대학이

바뀌거나 드라마틱한 인생 대역전극이 펼

쳐지지는 않는다. 대신 패션잡지 인턴사

원이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패션에 대

해 잘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갈 뿐이다. 이것은 드라마틱하게 혜

진이 과거와 똑같은 위치를 탈환하는 전

개보다 훨씬 현실적이며, 태도 면에서도

성숙하다.

혜진이 과거를 마주하게 만드는 또 다

른 동력은 과거의 기억을 공유해야만 가

능한 판타지, 즉 첫사랑이란 소재다. 이것

은 첫사랑 판타지가 불가능한 하리의 상

황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

다. 성준 앞에서 혜진인 척 연기를 할 때

성준의 가정사를 미처 알지 못해 말실수

를 할 만큼 하리는 그의 과거에 대해 잘

모르고, 담벼락과 관련된 과거의 추억을

나눌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신호등 초록

불이 켜졌을 때 “가시요!”를 외치는 버릇

을 갖고 있는 혜진은 성준의 과거 기억을

소환하며 그를 ‘심쿵’ 하게 만들지만 하리

는 그러하지 못한다. 반면 혜진과 성준에

게 과거사의 공유는 첫사랑 판타지가 성

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 심지어 과

거의 추억은 캐릭터들이 로맨스의 결실을

맺는 진주인공이 되느냐 아니냐를 결정짓

는 요건이기까지 하다.

혜진에게 지독한 열패감을 안겨주는 성

준 대신 ‘역변’한 혜진에게 예쁘다고 말하

며 관심을 보이는 「모스트」의 에디터 신

혁(최시원)은 일견 로맨틱 코미디의 남자

주인공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혁은 철저

하게 혜진의 현재만을 보고 판단을 내린

다. 혜진이 모스트의 인턴사원이 되고 나

서야 시작된 관계이기 때문에 신혁은 혜

진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일이 없고, 혜

진은 그의 앞에서 과거에서 기인한 어떤

불안감도 느끼지 않는다. 혜진이 신혁을

좋은 동료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

는 그가 매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마침내 사랑의 결실을 맺

게 될 동화 속 주인공 커플이라면 필수적

으로 갖춰야 할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예뻤다>에서 로

맨스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넘어서야 할

위기는 과거와 현실의 괴리에서 시작된

거짓말 그리고 근간에 깔려 있는 좌절감

이다. 다시 말해, 신혁은 혜진과 갈등을 빚

으며 극복해나가야 할 ‘난관’이 없고, 따

라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성준

과 혜진이 과거를 함께 했기 때문에 난관

에 봉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이 이

유 때문에 두 사람은 연애물의 진주인공

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예뻤다>가 초반에 과거를 열등

감의 원인, 떨쳐내야 할 짐처럼 묘사했다

면 전개가 이어질수록 과거는 오히려 현

재라는 결과물을 구성하는 재료가 된다.

<그녀는 예뻤다>에서 혜진과 하리의 자

매애가 혜진과 성준의 로맨스만큼이나 중

요하게 다뤄지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절된 적 없이 과거로

부터의 연장선상 위에 있다. 극 중 혜진

과 하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친구가 된 것

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묘사되는데, 그만

큼 하리는 혜진의 리즈 시절을 비롯해 별

볼일 없던 시절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과거와 현재는 분리된 것이 아니며 지금

과 다르다고 해서 옛날로 돌아가기 위해

혹은 돌아가지 못해 안달할 필요는 없다.

그저 과거에서부터 조금씩 증축된 현재를

긍정할 뿐이다.

<그녀는 예뻤다>라는 제목의 시제는 과

거형이다. 태생부터 과거에 대한 이야기

일 수밖에 없는 이 드라마는 과거 때문에

생긴 열패감 혹은 과거를 공유하지 못한

데서 오는 한계를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예뻤다>의 사각관계는 과거가 있기에 가

능한 판타지를 보여주면서 과거에서 기인

한 열패감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

다. 어느덧 마지막 회를 앞두고 있는 <그

녀는 예뻤다>는 그래서 그들은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암시하는 미래

형으로 끝맺음할 가능성이 높지만, 방송

이 끝난 후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는 것은

각자의 과거다. 우리는 지금보다 소위 ‘잘

나가던’ 과거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과

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비슷한가.

그리고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내가 된 방식

에 대해서 말이다.

�1�2� 문화

2015년 11월 9일 월요일 대학신문

과거가 주는 부담에서 벗어나기

잘 나가던 과거vs 별 볼 일 없는 현재

<그녀는 예뻤다>,과거형이 던지는 질문

대중문화웹진 ize임수연 기자

[리뷰 한 편] MBC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과거를 긍정해야 가능한 판타지

과거를 마주하는 법을 아는 그녀는 예뻤다

삽화: 최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