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Embed Size (px)

Citation preview

Page 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1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1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1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1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1

수, 무, 그리고 무한

수, 무, 그리고 무한 Number, Nothingness, and Infinity

오석관 영상정보실

2009. 10. 15

이국운 교수 : 반갑습니다 저는 법학부에서 가르치고 있고요, 학문과신앙연구소장을 하고

있는 이국운 교수입니다. 오늘 처음으로 콜로키움이라는 형식으로, 예전에는 좀 했었는데,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데, 여러분들이 많이 참여해주셔서 감사하고요, 오늘 우리 모임 주제를 잠시 설명을

드리기 전에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이 좋은 가을 저녁에 함께 모여서 우리

실생활과는 별로 상관 없는, 공부하고 생각하는 재미있었던것 혹은 잘 풀리지 않아서 힘들었던 것

이야기를 하면서 한시간 반정도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우리 한동 공동체가

여러가지 실천적인 일들에 많이 개입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지만 또 하나님 안에서 지식을

사모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그걸 기뻐하고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모시는 학술적인 공동체가

되기를 또한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 학교에 대학원생도 많지 않고 또 연구하는 시설이나

분위기도 많지 않지만 오늘 이 자리에 모여서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동안 그런 귀한 연구의

계기들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시고 특별히 이야기손님으로 오신 네 분 교수님들을

축복하여주시어서 교수님들에 말씀들 안에서 우리가 혜안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옵소서.

시종을 의탁 드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할때 잠깐 말씀드린 꼴이 되었는데요. 콜로키움은 우리가 한동대학교 안에서

대학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만한 여러가지 중요한 토론, 생각의 나눔들이 너무 적지 않은가 하는

반성에서 출발했고, 이렇게 기획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천적인 문제 또 아주 우리 학교에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들과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되어야겠고 또 많은 일들이 이루어져야겠지만

말씀드린대로 우리가 대학으로 모였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제가 언제까지 학문과신앙연구소 소장을 할지 모르지만, 그 동안은

Page 1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2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우리가 한 학기에 세번 정도는, 아주 프렉티컬한 문제들을 꼭 다루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비슷한 일들로 함께 모여보려 합니다.

오늘 첫 번째 출발하는 주제로 저희들이 '수, 무, 무한'이라는 주제를 잡았습니다. 이

제목을 지은 사람은 저예요. 제가 뭘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여러 선생님들이 하시는 말씀들을

들어보니까 이런 형식으로 문젯거리를 던져드리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겠다는 감이 와서 일단 그

감에 제가 준수를 하려고 했고요, 전체 기획하는 제 나름대로의 입장에서는 제가 앞서

말씀드린것처럼 실천적인 문제들과 일부러 좀 결별하고, 별로 실생활에 도움 안되는 이야기를 좀

하자고 할 때, 제일 충격적으로 그렇게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수학 물리학 하시는 교수님들께

말씀을 듣고 뭔가 뜬구름 잡는 소리를 진탕 해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 역발상의 기획으로

시작을 했다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꼭 이것만 있는건 아니고요.

제가 기억하는 또다른 생각은 이렇습니다.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 다가가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터인데 그 중에 제일 근본적이고 기본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는 아마도 세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셀 수 있는 것으로 바꾼 다음에

세는 것. 그런데 이 세상을 센다고 하는 관점이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어야 하니까 세는 사람과 세임 당하는 것이 분리된다고 하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다고

하는 어떤 철학적인 전환이 이 센다고 하는 것 안에 들어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겠고요. 그렇기

때문에 말 그대로 세계 속에서 인간이 있다가 인간이 그 세계를 자기 바깥으로, 객체로 하는거, 그런

어떤 시작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두번째 중요한 것은 세상을 셀 수 있게 만든다고 하는 것은, 영어에도 count하고

account하고 서로 연관되는 말이지 않습니까. 아마도 세상을 질서있게 만들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책임질 수 있는 것과 만드는 것과 상당히 관련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셀 수

있어야만 셈에 대상이 되어서 분명해져야만 책임을 질 수 있다, 이런 논리적인 연관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센다고 하는 것, 소위 가장 근본에 두는 인간에 행위라고

하는 것은 어찌보면 인간의 문명을 추구한 다음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좀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세상을 셀 수 있는 것으로 바꾼다고 하는

것. 조금 우리가 그걸 통해서 이런 고민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모신 교수님들께서 더 잘 해주시겠습니다만, 저는 전혀 문외한입니다만, 제가 생각해봐도

분명히 삶에 세상에 셀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아름다운 것일수록 셀 수 없는 것이 더 많은

Page 1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3

수, 무, 그리고 무한

것 같은데, 셀 수 있는 것으로 바꾼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게 만들고 책임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문명화하는 것으로 놓으면, 과연 셀 수 없는 것들의 가치는. 이렇게 자꾸 세다가 셀 수 없는 것이

자꾸 줄어든다고 하는 것은, 셀 수 없는 아름다운 것들을 우리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좀 해보게 됩니다. 특별히 문학이나 현상학이나 저처럼 법학 중에 공법학이나 이런걸

공부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셀 수 없는 것 안에 더 근본적인 가치가 있는게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수학을 못하는게 자랑스럽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청중 웃음)

오늘 여러분들 앞에 이 모임을 기획한 제가 좀 꺼내놓고 싶은 것은 세려는 것과 세어야 할

이웃들 그리고 셀 수 없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세어서는 안되는 것 사이에 이 긴장과 갈등이 어떤

의미에서는 모순인. 오늘 이 이야기를 풀어주실 선생님들 네 분을 모셨습니다. 제가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제 옆에 잘 아시죠? 물리학 가르치시는 우리학교에 대표적인 물리학자이신 조현지

교수님 모셨습니다. 이재영 교수님은 비행기에서 이제 내리셨을 것 같습니다. 이재영 교수님 계시면

좀더 이재영 교수님 페이스로 이야기가 될 것 같고요. (청중 웃음) 교수님 오시기 전에 우리끼리 막

할 때 이재영 교수님 8시 가까이 돼서 들어오셔서 무슨 말씀을 하시게 될지 저도 너무 기대가

되는데요, 오시면 박수를 다시 하겠지만 우리학교에 핵 공학자 핵물리학자 이면서 도대체 전공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천재임이 분명한, 이재영교수님, 안 계시지만 박수 한번 하겠습니다.

그 옆에 계시는 선생님은 우리 교수님들에는 굉장히 잘 알려진 분이신데, 여러분들 중에는 처음

뵙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웃한 학교 포항공과대학에 산업경영학과에서 가르치시는

장수영교수님이십니다. 장교수님은 저희 학교에 여러 교수님들의 공부모임에 늘 나오시는데 저희

학교 교수님들보다도 더 열심이시고 늘 새로운 통찰은 어떻게 하면 나누시지 못해서 더 나눌까 이걸

늘 고민하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이런 데서 말씀드리기 좀 그렇습니다만, 이재영교수님과 누가 더

천재인가 저는 늘 한편으로 생각합니다. (청중 웃음) 마지막으로 이한진 교수님. 우리학교에

수학베틀을 열면 아마도 현재까지로는 김승옥 교수님과 함께 제일 윗자리에 가시지 않을까 근거

없이 생각하는 이한진 교수님 모셨습니다.

제 말은 여기까지고요, 진행을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한진 교수님이 뭘 만들어오셨는데,

이교수님부터 시작해서 각각 교수님들이 10분 동안 이 주제에 대해서 말씀하실 거리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하실지 전혀 모릅니다. 이교수님부터 한 10분 정도

말씀하시고, 더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장교수님, 이재영 교수님 오시면 하시게 되겠지만. 10분 정도

하시면 한 여덟시 정도에 듣는 순서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그 뒤에 말씀하신 선생님들

사이에 먼저 분명히 하는 시간을 가지고요, 그 뒤에 여러분들에게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여덟시 15분 정도부터, 준비하셨다가, 예를 들면 뚜벅뚜벅 걸어 나오셔서 저기다가 문제를 쓴

Page 1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4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다음에 교수님 저거 풀어보세요 이렇게 하셔도 좋습니다. (청중 웃음) 이렇게 여러 생각들을 나누고

제 계획은 여덟시 45분정도까지는 이 모임을 마치는 건데, 혹시 이야기가 길어지면, 글쎄요, 저희

학문과신앙연구소에 약간의 예산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면 피자를 제가 사겠습니다.

먼저 이한진 교수님에게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이한진 교수 : 네 반갑습니다. 밤인데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놀랍고요.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시고 기회를 주신 이국운 교수님 감사드리고 함께 하신 여러 교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10분 정도 시간이 저한테 주어져있는데요. 저는 크리스쳔으로서 수학을 어떻게 볼까 아니면 수학에

대해서 어떤 의미있는 질문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아주 일반적인 주제죠. 그런 이야기관점에서

수학을 보는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데요. 하나의 키워드에 집중하고 싶어요. 진리. 수학에 있어서

진리란 무엇인가. 수학자들은 진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이야기를 했으면 합니다. 성경 말씀이

생각나는게 있는데, 법정에 예수님이 서 있는데 빌라도가 예수님한테 질문을 여러가지 하는데

그중에 한 질문이 진리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하였는데,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서 대답을

안하시죠.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거든요. 진리가 무엇인가.

그래서 구분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제가 이야기를 꺼낼까 하면, 수학의 역사가 굉장히

긴데요. 언제 시작됐는지 그 기원 조차도 우리가 알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오래됐고 그런데, 수학의

역사가 인간 지성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고 인간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는데, 수학의 역사에 있어서 좀 특이한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관계된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이 굉장히 당황스럽게 하고 고민스럽게 하는 그런 시기들이 있었고, 그런 시기들에

있어서 그런 문제들과 질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어볼까 합니다, 들으시면서 제가 의도하는

바는 여러분이 더 많은 질문을 갖고 그 의문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게 저의

의도입니다.

일단 시작은 이렇게 하기로 하죠. 고대 문명 중에 이집트문명이나 바빌론 문명이나 수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졌던 고대문명들이 있는데,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것과 굉장히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양한 문명들하고 굉장히 구별된 문명이 있었어요. 기원전 600년경에

그리스인들이 있었는데요, 그 이전에 다른 문명들하고 굉장히 자연을 보는 방식과 수학과에 있어서

좀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분들의 특이한 점은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성을

사용했다는 점인데, 무슨 뜻이냐면, 자연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관찰을 하고 데이터를

축적하고 과학적인 탐구를 하는데 그런 것이 자연을 공부하는 적절한 방법이라기보다는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대담한 사색들, 날카로운 추측, 뛰어난 직관 이런 것이 더 필요하다는 상당히 아주 어떤

Page 1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5

수, 무, 그리고 무한

문명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현대인들인 우리가

누리고 있는 수학적인 시스템의 출발점이라 볼 수 있는데요.

대표적인 주자들이 여러분 잘 아시는 피타고라스가 있습니다. 피타고라스와 그 학파들이

있는데, 이분들의 생각은 이랬어요. 여러가지 다양한 현상들이 있는데 양적인 관점에서 동일한

수학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학적 성질들이야말로 이런 현상들에 본질이다. 그래서 수를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한 사람이었던

피로라우스같은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약 수의 성질이 없다면 어떤 사물이나 또는

그것과 다른 것의 관계에 분명한 것은 없다. 인간의 행동과 사고 안에서 또 모든 기술과

음악에서조차 수가 행사하는 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자연 자체에 대한 관찰보다는

그거를 수학으로의 시스템으로 바꾸어서 수학으로의 시스템으로 바꾸어서 수학 자체를 연구하는

그런 것의 시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는데 화음같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를들면 현악기에 줄의 길이에 따라서 다른 소리가 나죠. 그런데 화음이라는 것은

줄의 길이의 비가 정수 비를 이룰 때 화음이 난다. 수학의 관계로 굉장히 멋있게 설명이 되는겁니다.

더 발전돼서 플라톤과 그의 학파들에 이야기를 보면 그당시 사실 천문학에 대한 공부와

질문들이 굉장히 주된 것이었는데, 수학이 중요한 천문학을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은 천체를 관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천체를 관찰했을 때 그런 현상들도 놀랍고

아릅답고 그렇지만 정말 의미있고 중요한 것은 어떤 수학적 하늘의 참된 별의 운동 법칙을 다루는

것, 그러니까 그것을 수리화 했을 때 수리로 하면 더이상 하늘을 보지 않게 되죠. 정말 수식과

관계식으로 표현된, 그것을 수학적인 하늘이라고 표현했는데, 거기서 운동법칙을 다루는데, 그것이

정말 의미있는 것이라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어떤 일련의 고대 그리스인들의 자연관, 이성을

사용해서 자연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그런 부분들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데, 우주의 운행은

인간의 사고에 의해서 발견이 가능한 수학적 법칙과 일치한다. 그리스인들은 자연의 수학적 설계에

관한 진리를 추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리스인들이 가졌던 질문은,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보장하겠는가. 그런 질문으로 귀착이 됩니다. 세가지 원칙을 가졌는데, 첫번째는

수학의 추상적인 개념을 다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학에서 직선이라는 것이 있는데, 직선은

직선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면, 팽팽한 빨랫줄 같은거, 자에 가장자리나 아니면

창문을 열었을때 들어오는 빛의 광선 그런 것들이 직선이 대표할 수 있는 건데, 이런 것들은 두깨나

빛깔이나 분자구조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만 수학적인 직선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

Page 1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6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않습니다. 추상적인 내용을 다루는 것, 굉장히 이상적인 것, 어떤 지적인, 그런 것을 다루겠다는거죠.

그다음에 공리라는 것이 필요한데, 수학이 어떤 체계를 쌓기 위한 기초로서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의 어떤 자명한 진리, 그거 위에다 수학적인 체계를 쌓겠다는 것이 이들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자명한 진리라는게 도대체 뭔가.

플라톤같은 사람은 이렇게 이해했어요. 진리의 객관적인 세계가 존재했다.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

영혼으로써 다른 하나의 세계를 경험하였지만 그 영혼은 기하학의 공리가 진리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전생의 경험을 기억해내는데 자극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니까 그렇게 믿고 인간은 알고

있다는거예요 단지 기억해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플라톤이 가진 진리의 개념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같은 경우는 좀 달랐는데, 의심의 가능성을 넘어서 정신에 호소하여 이해되는 원리.

틀림없는 직관에 의해서 참이라고 알려진, 이걸 진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리스인들이 가졌던

두번째 중요한 요소는 공리고요, 그다음에 추론의 방법이죠. 공리로부터 어떻게 중요한 정리나

결론들을 이끌어낼 것인가 그래서 연역적인 추론이 있죠. 사람은 죽는다 피타고라스는 사람이다

피타고라스는 죽는다. 이 세가지가 그리스 수학을 굉장히 강하게 만들었던 요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부분이 어떻게 현대적인, 물론 2000년 전의 이야기인데 오늘날과 같은 수학이 시작된

기본 뿌리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은 이 안에도 많은 질문들과 자명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사물을 보고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독특한 이해과정들이 숨어있습니다. 그다음에

역사적으로 굉장히 특이한 점이 등장을 하는데, 그걸 이야기 하기 전에, 여러분이 중학교때, 저희도

그렇지만, 대부분 어느 나라나 중요한 교육과정으로서 기하학을 배웁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배우죠. 그리스 수학에서 수학이 집대성되었고 그걸 한 사람이 유클리드라 할 수 있는데요, 유클리드

기하학이 시작한 데 공리들이 있습니다.

굉장히 오랫동안 사람들을 괴롭혀 온 공리가 하나 있습니다. 다섯번째 공리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면 좋을것 같군요. 일명 평행선 공리라고 알려져있는 건데요, 다음을 공리로 잡았어요.

두 직선과 만나는 한 직선의 동수내각의 합이 180도보다 작을 때에는 두 직선을 연장할 때 두

직선은 두 내각의 합이 180도보다 작은 쪽에서 만나게 된다. 말이 되게 어렵죠, 그런데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평행선 공리는 이것입니다. 한 직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직선

위에 있지 않은 주어진 점이 또 있을 때 그점을 지나고 주어진 직선과 만나지 않는 직선은 그 점과

그 직선에 대해서 유일하게 존재한다. 평행선이 존재한다는 의미인데, 이거의 문제점은 그렇습니다.

만약에 아까 한 이야기를 두 직선과 만나는 한 직선의 내각에 합이 180도 이면 두 직선은 만나지

Page 1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7

수, 무, 그리고 무한

않는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상당히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실 무한의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까와 같이 이야기 할 때에는 두 직선을 연장을 하면 만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평행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무한직선에 대해서 이야기해야하는데, 유클리드 자신도 무한직선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을 상당히 꺼렸습니다.

그러니까, 공리라는 것을 만들때는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 이것이 어느정도 진리라고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공리로 삼는데, 무한히 연장할 수 있는 직선이라고 하면 경험으로써 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아까와 같이 말을 어렵게 이야기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 불만이 있었어요,

이게 도대체 뭔가. 유클리드 자신도 여기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고, 이게 사실은 수학사에 있어서

시한폭탄이 될줄은 아무도 몰랐던거죠. 굉장히 오래동안 사람들이 고민했습니다. 사람들이 이게

뭔가 범상치 않은게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거의 18세기 19세기에 들어와서 알게되었는데, 사람들이 고민하면서 발견한 것이

그렇습니다. 이 공리가 진리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 공리하고 다른걸 택하면

혹시 유클리드의 정리들하고 모순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예를들면 어떤 직선이 있고 그 직선 밖에

어떤 점이 있을 때 그 점을 지나고 주어진 직선과 평행한 직선은 없다 그런 공리로 시작을 하면

어떻게 될 까 그런데 해보니까 정말 모순들이 생겨요. 아 그러면 그렇지 역시 유클리드가 맞았어

그런데 그거 말고도 다른 식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를들면, 한 직선이 있고 그 점

바깥에 있는 점을 지나고, 아까 그 직선과 만나지 않는 직선이 서로 다른 두 직선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그림의 도움을 받으면, n과 n2는 서로 다른 직선입니다. 그러나 둘다 n하고 만나지

않는다는. 아무리 연장을 해도. 모르죠 무한히 가는 거니까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인다고 해보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모순이 일어나는 거였어요. 그래서 공리가 문제가 없다. 그런데 해보니까

모순이 생기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당황한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뭔가. 없던 일로 하자고 덮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게 그런게 아니라 다른 종류의 기하학을 발견한게 아니겠어요.

오늘날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발견하게 됐는데, 예를들면 구면에서 기하학을

생각해보면 구면에서의 직선은 대원입니다. 지구 위에서 생각을 해보시면 북극과 남극을 지나는 큰

원인데요, 거기서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많이 다른거죠. 유클리드 기하학은 평향이라는 개념이 있죠.

평행한 직선 두개가 아무리 연장되도 만나지 않죠. 그런데 구면에서는 모든 직선이 항상 두 점에서

만나요. 전혀 다른 종류기 때문이죠. 처음에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다른 종류의 기하학이

있다는 것이 나타났을때, 그러면 진리라는 것이 뭔가. 철석같이 믿었던 평행선 공리가 이제

흔들리는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이걸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여기에

Page 2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8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요,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정리를 하고 이해한 사람이

가우스였는데요, 유클리드 기하학이 우리 실생활에서 경험하는 기하학을 성공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진리라고 믿었지만 오히려 비 유클리드 기하학도 물리적인 공간의 성질을 기술하는데

성공하죠, 아까 이야기 했던 구면의 기하학, 구면에서의 지구의에서 작은 삼각형 같은 경우에는

유클리드기하학입니다. 하지만 정말 큰 삼각형, 삼각형의 세 꼭지점중 하나는 북극에 있고 하나는

적도의 어떤 섬에 있고, 하나는 또다른 적도의 어떤 섬에 있고, 굉장히 큰 삼각형이죠. 이런

기하학을 하려면 더이상 유클리드 기하학이 작동하지 않는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깨달은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을 갖게 되냐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거죠. 모든 수학적인 건설과

같이 가우스가 친구한테 편지를 보낸건데요, 모든 수학적 건설과 같이 독선적인 함수도 우리 자신의

창조일 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며, 시작할 때의 정의가 의미를 지니지 못할 때 그것이

무엇인가 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미있게 남으려면 무엇을 가정하는 것이 편리한가를 생각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랑 생각이 많이 달라졌죠. 가우스가 이 이야기를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가지 종류의 기하학, 유클리드 기하학만 있고, 이상한

기하학은 그거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거죠.

사실은 이 부분이 수학에 있어서 많은 부분들, 수학을 무엇으로 봐야하는가, 어떤 자연에

대한 훌륭한 설명으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창조물이고 자연의 현상을 잘 설명하는 것과 관계

없는 인간의 지성의 시스템인가 하는 그런 질문에 대한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많이 해서 제가 몇가지 이야기만 좀 인용을 하고 바톤을 넘기려 합니다. 파스칼이 한 말을

제가 나누고싶은데요, 파스칼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도대체 인간이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한에 비하면 무이고 무에 비하면 전체이니 무와 전체 사이에 중심적이어서 어느것도

이해하기는 까마득히 먼 존재이다. 사물의 끝과 시작은 간파할 수 없는 비밀 속에 인간이 공격할 수

없게 숨어져 있다. 그는 그를 태어나게 한 무와 그를 감싸게 한 무한을 똑같이 알 수 없다.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면서 제 발제를 마치겠습니다.

장수영 교수 : 좀 어렵네요. 수 이야기를 하니까. 저는 그냥 짧게 간단히 이야기 하죠.

수라는 것을 늘 생각을 하면 이국운 교수님 시작하실때 이야기 하셨지만,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이,

우리가 세기 시작하면서 셀 수 없는 것들을 잃어버린다고 이야기 하셨는데,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수라는 것이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다 이렇게 해석하고 사실 과연 그런게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하나 더하기 하나를 해서 둘이 되는게 있을까? 여기 있는 사람 한사람 과 또

한사람이 있으면 두사람이라고 하는데 정말 정확한 표현은 이사람이있고 이사람이 있는거죠. 그런데

내가 두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게 되서 거기에 한사람을 빼면 한사람이 남느거다, 이렇게 생각을

Page 2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9

수, 무, 그리고 무한

하게 되면 그 생각이 나에게 효용을 갖기는 하죠. 왜냐하면 밥을 한그릇을 내놔야 할지 두그릇을

내놔야 할지 준비를 할 수가 있고 이야기 할 수 있고 효용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처음부터 수라는

것이 사실은 현실로부터 벗어나면서 어떤 효용을 얻기 위해서 강조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가장 아쉬운 것은 우리에게서 미스터리를 가져가버린다는게 좀 아쉬웠었어요. 우리

학생들에게 설계를 하라고 하고 그런 강요를 합니다만 사실은 설계를 하면 이게 같은 설계에서 나온

제품이지만 이상하게도 어떤 차는 똑같은 소나타인데 오래 가고 어떤 차는 오래 안가고 그렇잖아요.

사실 정확히 한번 생각해보면 그게 다 다른 차인데 같은 것이 여러대 나왔다고 편의상 이야기 하고,

효용을 얻는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도 좀 그렇다는 생각을 어느 날 문득

했었어요. 소나무를 이렇게 보면서, 뽀족뽀족한 잎들을 보면서, 저것들 중에 같은게 있을까 생각을

해봤어요.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같은건 없을 것 같아요. 정말 우리가 과학적으로 정말

정교하게 해서 이 두개가 같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실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여러분들이 사실 내가 나뭇잎을 세장 떼왔으면 사실은

세장이 아니라 이 나뭇잎 하나, 저 나뭇잎 하나, 또 하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 같고, 그런

삶이 훨씬 더 풍성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 혼란스러워지잖아요. 무질서해지고 계획할 수 없고, 또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수학이라는 것이 주는 효용을 얻기 위해서 미지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또 재미있는 것은 수라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오늘 모임을 준비하면서 수 무

이런걸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재미있는 수열이 있었더군요. 1-1+1-1+… 이국운 선생님 좋아하시는

진리는 어쩌면 ? ! ? ! ? ! …. 알 것 같으면 모르겠고, 모를 것 같으면 알 것 같은 것이 어쩌면

진리일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전에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이거죠. 인가 아닌가 인가 아닌가

이렇게 계속 가는 생각이 있을 수 있잖아요. 이렇게 만드는게 뭐냐하면 1에서 하나 빼면 다시 0이고

다시 더하면 1이고 뺴면 0이고 더하면 1이고 이렇게 가는 것이거든요. 제 머리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이게 영원 전부터 시작해서 영원 후로 가는 이런 수열이다. 그런게 있을까.

수학적으로 저런 것이 있냐 하면 있죠. 식을 방금 정의했잖아요. 전혀 모호성이 없도록 정의했으니까

있는것 아닙니까. 그러면 저게 뭐냐 이렇게 되죠.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할거예요. 이걸 이렇게

(1-1)로 짝을 짓자. 그러면 다 0 아닌가. 그러면 뭐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그러면 다 무다. 그러면

한 사람이 앞에 나와서 얘네들이 특이하다 그러면 맨 앞에 1 빼놓고 그다음에 이렇게 보려한다. (-

1+1)도 0, 이것도 0, 저것도 0 그러니까 이건 1이다. 저게 존재하는 수열이 하나라고 했죠, 그러면

저 게 0이기도 하고 1이기도 해요. 그러면 0과 1이 같아요? 0과 1이 다른데. 그랬더니 어떤

창의적인 사람이 나와서 하는 말이. 이렇게 이야기 해요. 이걸 두개씩 묶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Page 2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0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2-2+2-2 이렇게 볼 수 있다는 말이지요. 맞습니까? 저는 이 2가 이게 특이하거든요. 그러면 이거

뺴놓고 계산하면 2+(-2+2)+(-2+2)…… 뭐가 되죠? 2가 되죠. 0이 1이기도 하고 2이기도 하네요.

3이기도 하고 4이기도 하고. 뭐든지 되잖아요.

그러니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를 같이 토의하면서 물어보고싶은게, 저런게

존재한다. 무한이 우리에게 주는 효용이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끝까지 위험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게, 그런가 했다가 아닌 것 같다고, 그런 것 같아요.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도 어떤때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모르겠는것 때문에 저한테 굉장히 소중해요. 왜냐하면 그게

새롭거든요. 새록새록. 저는 이걸 보면서 책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저는 0으로 보고

살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 나는 1로 보고 살겠습니다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2로

보고 살수도 있고, 우리에게 그런 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논리라는게 있고, 다 없어지는데

이건 남았지 않느냐. 무한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순간 우리가 어떤 미지를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는 힘이 있다는거죠.

저는 성경에서 아담이 일컫는 바가 이름이었다는 것에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아담이

이름을 맞추더라. 그 이름이 코끼리 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름을 맞추더라고 처음에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잘 봤더니 아니예요. 일컫는 바가 이름이더라. 우리가 세상에 성질을 줄 수

있다는거죠. 그리고 그걸 가지고 세상을 살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셨다는거예요. 하나님이

이름으로 불러내시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면서 너는 이걸 뭐라고 부를레, 저는

0이라고 보겠습니다. 1로 보겠습니다. 2로 보겠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셨다는거죠.

그리고는 야 저걸 1로 보는게 낫지 않냐 하는게 하나님이고 우리는 그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한

것을 결산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 수라는 것도 무한이라는 것도 우리가 머리 속에

잠깐 잡은 것 같지만 사실은 머리 속에서 금방 벗어나요.

괴델이 한 증명을 갑자기 이해는 못하지만 재미있게 쓴 책을 읽어보면서 그런 말이

나오더군요. 괴델이 정리한 것이 뭐냐면, 모든 형식적인, Formal system들은 그 체제 안에 절대

증명도 부정도 할 수 없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명제가 있게 마련이라는 이상한 말을

해놨어요, 그 예를 듭니다. 예는 이해하실거예요. 예를 들어서, 여기 방에 있는 사람은 전부

거짓말쟁이이다. 라고 말을 했다고 생각해봐요. 그 말이 맞으면 제가 거짓말을 한거죠. 그 말이

틀리면 제가 거짓말을 한 것이므로 그 말이 맞는거죠. 이 안에서는 아무리 증명을 하려 해도

불가능하죠. 증명할 수 없어요. 우리 손 박에 있는거예요. 어느 순간에 알 수 있는가.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사람들 맞아요. 저사람들 다 거짓말쟁이예요. 라고 이야기 하면 맞아요. 반드시 그

Page 2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1

수, 무, 그리고 무한

시스템 밖에서 이것을 조망했을 때 그것에 대한 판정이 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우리가 처해있는

우리의 삶에, 유한한 존재들, 유한을 살고 있으면서. 그런 것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

이세상을 살면서 안에서 긴장감 속에 있는 존재들,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려워요?

조금 쉽죠 비유를 드니까. 조교수님은 물리로 갈 테니까.

조현지 교수 : 예전에 콜로키움 같은데 가서, 콜로키움을 잘 한다고 하면 한 3분의 1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이해하고 3분의 1은 말하는 사람만 아는걸 하고, 3분의 1은 말하는

사람도 모르고 듣는 사람도 모르는걸 하면 성공적인 콜로키움이라고 들은 기억이 납니다. (청중 웃음)

그런데 그분도 유명한 사람의 말을 인용해서 하셨는데, 그것도 쉬운건 아니겠다. 왜냐하면 도저히

나는 남이 모르는걸 아는게 없는것 같아서. 내가 알고 여러분이 아는것 반 나는 모르고 여러분이

아는거 반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청중 웃음)

저는 이국운 교수님께서 수 무 무한이라는 이야기를 저한테 하셨는데, 이 주제를 왜

정하셨는지 모르고요. 저는 그냥 이거에 대해서 이야기 해달라고 하시길레 생각난게,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이 생각이 났어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은 수죠. 땅에 떨어져 죽으면 무가 되죠.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면 당장은 무한이 아니겠지만 많은 세대를 걸쳐 열매를 맺으면 무한이 되겠죠. 그렇게 이야기

하면 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너무 짧잔아요. (청중 웃음)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오늘

학문과신앙연구소에 간다고 왜이렇게 초췌하냐고 몇 날 밤을 설쳤습니다. 공부하느라 잠을 설친게

아니고 악몽을 꾸느라. 여러분들 앞에 놓고 할 말이 없어서 헤매느라고. 오늘 이제 무슨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왔습니다.

오늘 주제가 이렇게 주어졌는데,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게 과학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데 이해하고 있는게 얼마나 됐는가 물어보기도 했습니다만 너무 광범위 하고 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길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물리학에서 길이만 생각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인터넷에

가면 나 나오는겁니다. 거기 보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수가 있는데 큰 수 이름도 나오고 작은 수

이름도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위에 있는 수가 큰 수 입니다. 일 십 백 천 만 억, 억이 만개 모이면

조가 되고, 그래서 우리가 우리나라 예산이 얼마다 몇조다 하면 조까지는 조금 익숙한데 해 이렇게

해서 무량수까지 무량수도 무한은 아닌거같아요. 10의 28승이라고 나와있는걸 보니까. 그까지

있고요. 1보다 작은 것으로도 이렇게 있습니다. 그래서 정까지. 10의 마이너스22승이죠. 말로 이렇게

하면 굉장히 어려운데 십의 지수로 표시하면 쉽죠. 이런게 있는데, 우리가 1부터 보면 1000미터

정도. 에베레스트가 8848m이고 그렇게 있고 태양 크기가 10의 9승, 그러니까 위에는 수 이름이고

Page 2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2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밑에는 수가 나타내는 값입니다. 접두사를 쓸 때 테카 헥토 킬로 메가 기가 이렇게, 영어 접두사는

103씩 늘어나니까요. 이렇게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이런 것들을 생각을 할 때, 만물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그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뭔지 이런 것들을 연구를 시작하고 공부를 시작해서 지금은 우주까지 연구영역이

넓어지고 있는데요, 우리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차원 안에서는 거기가 경험상으로도 우리가

실험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뉴턴이나 맥스웰 전자기연구로 잘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태양계

정도, 그 밑에 센티미터 밀리미터 까지는 쉽게, 쉽게는 아니죠, 열심히 공부해서 잘 이해 했습니다.

19세기 전에. 19세기 전후에. 20세기 들어오면서 탐구영역이 미시세계로 들어가게 되죠. 원래

물질이 원자로 만들어졌다고 할 때 더 나눌 수 없는 물질의 기본구조가 있을 것이라는게 나왔는데,

과학적으로 이해가 된 것은 20세기 들어서 양지물리가 이해가 되면서 그때부터 해서 양자론이

원자를 설명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보면, 원자의 크기가 10-10정도, 그 전까지가 20세기 초반까지

우리가 봤던 영역들입니다. 거기서부터 더 발전이 돼서 그 밑에 보면 전자기파거든요. 전자기파를

보면 microwave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x-ray등 이런 것들을 다 성질이 같은, 이게 다

같은거라는게 맥스웰 전자기파를 통해서 밝혀지면서 거기에 아주 짧은 파장도 나오게 되고요.

감마파같은 경우에는 10-13. 여기 미터로 해서, X-ray는 10-12 이렇게 있고 해서. 아주 짧은

길이까지 이해를 했고 지금 우리가 가장 짧게 이해하는 것은 전자가 10-18m보다 작을 것이다.

그정도로 알고요. 더 밑으로 내려가면 이름도 없는데, 10의 -34승에 밑에 플랭트랭크라는게 있어요.

이건 이론적으로 양자물리가 뭐냐면 에너지나 이런 값들이 연속되는게 아니라 단위가 있어서 단위의

정수배 만큼의 에너지를 갖는다는게 양자물리인데, 길이도 이보다 더 작은 길이는 젤 수 없고 이게

기본단위가 돼서 길이가 만들어질거라고 만들어지는 길이가 플렝크 랭크 길이가 10-34m, 지금

물리학에서 다루고 있는 길이 중에서 가장 작은 단위가 10-35m정도 되고요. 위로 올라가면 쭉, 요즘

코스몰로지 해서 우주가 자꾸 팽창한다는 것이 관찰이 되고, 그걸로 해서 우주 밖에서 오는 파장을

제서 지금 우리가 관찰가능한 우주가 1026m까지. 이정도까지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범위입니다.

물리학적으로.

이정도가 있는데, 그러면 그 밖에는 뭐가 있겠는가. 1026보다 큰 것은 뭐고 10-35보다 작은

것은 무엇인가. 여기는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앞으로 우주가 더 커지면 더 커지겠다

하겠지만, 이한진 교수님이 하신 파스칼이 이야기한, 사람들은 무와 무한 사이에서 있으면서 무와

무한을 알 수 없다 이렇게 이야기 했는데 제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아요. 하나님은 무한하시다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으시다고 이야기 하고 영원하시다 말씀을 하는데 그 무한하신

하나님이 무에서 유한한 우리를 만들었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유한한 것인 것 같습니다.

Page 2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3

수, 무, 그리고 무한

그러면 기독학자로서 물리를 한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걸 잠깐 생각을 해봤는데,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생각을 하면 공학은 사람들에게 편리한 것을 만들어주는 일을 하죠.

그런데 과학은 공학에서 사람들에게 편리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에 있는 재료를 쓰거나

그것을 이용해서 가공을 하거나 해야 하므로 물질의 성질을 이해하고 또 할 수 있도록 공학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뿐만이 아니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과학을 한다는 의미는 과학은 실험적인 방법으로 수학이라는 언어를 통해서 탐구하는게 과학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보이는 세상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기독교 과학자들에게 자연은 성경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또다른 책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과학하고 기독교, 하나님이 모순이 되는것 같지만 하나님의 God's

world와 God's word가 모순이 될 수 없다. 모순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성령을 잘 모르고 있거나

자연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도 거기 동의합니다.

제가 물리를 가르치면서 의미가 큰 말씀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이고 로마서

1장 20절 말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신 것이

같은 것을 보더라도 같은 사물, 같은 현상, 예를 들어서 유선형 물고기를 보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한테는 그것이 하나님이 물고기가 잘 돌아다니라고 물고기를 배려하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지혜의

상징이 될 수 있고요 진화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물고기가 오래 물속에서 살다보니까 살기 편하게

진화가 되었다는 그런 설명이 될 수 있거든요.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어떤 세계관을 가지는가로

달라지기 때문에 증명으로 알 수 있는게 아니라는, 아까 장수영 교수님 말씀하셨듯이 이 안에서는

증명을 할 수 없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발가락을

찾기 위해서 한다고 하거든요. 발가락이 영어로 뭡니까. TOE죠. Theory Of Everything(TOE),

거창하게 대문자로 TOE 이렇게 쓰거든요. 그런데 읽어보면 발가락이 됩니다. (청중 웃음)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어떤 법칙을 찾아낸다고 하면 어떤 방정식이나 이론이 될 텐데 그 이론이

그 현상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 이론이 우주가 지금처럼 돌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스티븐 호킹이라는, 여러분들 다 아시죠. 이분이 한 이야기를 인용을 하고

끝내려고 합니다. 오직 하나의 통일이론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건 꿈이예요. 모든 과학하는

사람들의 꿈입니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드는거. 그러나 그런게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방정식의 집합일 뿐이다. 이 방정식에 생기를 불어넣어 우주를 만든 것은

무엇일까. 우주는 왜 존재해야하는가 과학의 방법으로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Page 2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4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의미에서 과학은 해야하고 설명할 가치가 있는거라고 생각을

하죠. 제가 이 말을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부끄러운 것은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과학을 하지

못했어요. 하나님은 믿고 있었지만 내가 하는 공부와 그런 것이 하나님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꼭 해야될만큼만, 더도 덜도 아니고 꼭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만큼만 하고 열심히 하지 못했던게 많이 후회가 되고요. 제가 여러분들한테 부탁하고 싶은게,

느헤미야서 말씀을 보면 성을 재건축하는데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그런 말이 나와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싸울 수 있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저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는데 왜 싸워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최근 들어서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때 싸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열심히 싸우고 해야할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여러분은 치열하게 살고 치열하게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국운 교수 : 조교수님하고 저하고 같은 고향에서 컸어요. 그런데 조교수님보다 제가

한살 더 많은 것 같은데 마치 거의 끝난 것처럼 하셔서 아직 싸우실 일이 많이 남았는데, 이재영

교수님이 늦게라도 오시면 좋고요 아니면 우리끼리라도 이재영 교수님의 빈 공간을 즐기면서

교수님들에게 다시 마이크를 드리기 전에 제가 오늘 세분 말씀을 들으면서, 다들 그렇게 느끼셨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원래 생각했던 것 보다는 상당히 경건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이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그런데 제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한가지 단어가 있는데, 과학주의라고 하는,

오늘 선생님들 말씀하신 것 처럼만 하자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과학주의라는 말이 센 모습으로

우리들 주위에 돌아다니는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된건가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이걸 포함해서

혹시 덧붙일 말씀이 있으신가요?

이한진 교수 : 조현지교수님이 마지막에 스티븐 호킹의 말씀을 인용하셨던게

인상적이었는데, 놀라운게, 수학의 발전의 역사를 보면 어느 순간에 보면 수학을 발전시켰던

그리스인이나 이런 사람을 보면 예수님을 알았거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믿었거나 알고 있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영원한 것, 궁극적인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런 것들에 관심이 많았고 고민이

많았다는 점인데, 이 고대 수학이 긴 세월을 거쳐서 유럽으로 오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고

사람들이 수학을 공부하면서 굉장히 열심들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대표적인 수학자들, 또는 과학자들. 코페르티쿠스나 케플러, 이런 사람들, 뉴턴, 라이프니츠, 같은

사람들은 굉장히 신앙심이 강했고 뉴턴같은 사람은, 뉴턴을 유명하게 했던 것은 20대에 다 했고 그

이후는 신학논문을 쓰면서 성경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보냈다고 해요, 라이프니츠같은 사람도

신앙심이 강했던 사람이죠.

Page 2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5

수, 무, 그리고 무한

그런데 재미있는게, 오히려 이분들의, 중요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는데, 오히려

아이러니하게도 이분들의 열심과 철학적인 지식들이 이성만능주의를 가져오게 됬어요. 그 다음에

나오는 수학자들은 굉장한 지적 오만에 빠집니다. 납득하기가 힘든게, 수학자들이 수학으로 자연

현상을 잘 설명하고 천체의 운동같은 것을 설명하고 그러면서 우리가 자연을 이해하고 너무나 잘

설명하는데, 왜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것이 점점 자신의 이성을

맹신하고 자신들이 뭔가 이해할 수 있다는 것들에 대해서 과신하는 그런 현상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아까 장교수님도 말씀하셨지만 그러다가 수학이 시스템 안에서 모순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게 맞는지 안맞는지 결정할 수가 없는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이성이라는게 정말 우리가 그렇게

맹신 했던것 만큼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마음이 급한 사람들은 진리가 없다 혹은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없다고 그런 극단적인 생각을 했고, 굉장히 혼란도 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굉장한 수학 지식을 갖고, 수학에 대한 이해가 많다고 해도 우리가 모래알 하나

만들 수 없고 별의 움직임 하나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수학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누구인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듭니다. 우리가 자연을 바꿀 수

없죠. 우리가 우리가 보는 것을 이해하는 입장인데,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누구여야하는가 그런 질문에 대한 고민과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 되는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전문적으로 수학을 하는 수학자들을 만나보면 참 생각이 많이 다르고

자신이 하고 있는 수학으로서의 유희에 갇혀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얼마 전에 100년된 문제가 풀렸었어요, 푸앙카레의 컨젝션이라는 문제가 풀렸는데, 왜

유명하냐면 뉴 밀레니엄이 되면서 2000년이 되면서 전 세계 수학자들이 우리가 꼭 풀어야 할

일곱가지 문제를 정하자고 해서 그걸 정했어요. 그래서 일곱가지 millennium problem을 정했는데

각 문제당 100만달러의 상금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수학자들이 쉬운 문제만 매달리지 말고

정말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문제들에 도전하도록 권하자 해서 어떤 돈이 많은 사람이 기부해서

문제당 100만달러 해서 일곱문제. 이 문제들은 몇 백년 동안 풀리지 않은 아주 어려운. 그 중에

하나가 몇년 전에 풀렸는데, 푸앙카레의 컨셉에 관한건데 그게 뭐냐면 3차원 다양체가 있어요.

다양체가 뭐냐면 어떤 기하학적인 공간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국소적으로 유클리드 공간으로

보이는 3차원 다양체라고 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수학적으로 3차원 다양체죠. 3차원

다양체에 닫혀있고 유한하면서 모든 폐곡선이 한 점으로 모일 수 있는 삼차원 다양체는 3차원

구밖에 없다는 공리가 있는데 그게 몇년 전에 풀렸습니다. 그게 풀리고 나니까 사람들이 전부 하는

질문이 그겁니다. 그래서 도대체 우주의 모양이 어떻게 생긴거지 라고 물었어요 그런데 협회의 답은

Page 2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6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거지?’. 생각이 많이 다르죠.

아까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우리의

창조주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에 관한 그런 문제들과 연관된것 같아요.

우리가 수학 이런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는. 저는 우리가 적절한 개인적인 것이라고 할 지라도

적절한 질문을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런 질문을 하다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하고 우리 유한한 삶 속에서 무한한 하나님을 알려고 한다는게 무슨 뜻일까 하나님이 정말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 안다고 하는게 정말 하나님 아는 것일까 그런 질문들 하고 맏닿아 있다는 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장수영 교수 : 과학주의가 과학 안에 그렇게 논리적인 결합이 있고 완전하지 않은. 괴델에,

완벽하면 inconsist하고, 완벽하지 않은 만큼 consist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사이에

과학주의가, 모든 것들이 과학에 의해서 될 수 있고 그렇게 될까 하는게 이국운 교수님의

질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 말씀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C.S. 루이스가 했던 말이 기억이

나네요. C.S. 루이스가 어떤 이야기를 했냐 하면, 이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험하고 힘들고

악한 모양이 되 있는 것이, 우리들의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욕심이 적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한다. 진짜 바라는 것이 무엇이고, 진짜 좋은게 뭔지 몰라서 엉뚱한 것을 바라고 있다고.

마치 주말에 아름다운 바닷가에 가서 할 수 있는게 뭔지 모르는 어린 아이가 조그만 흙탕물 하나

발견하고 거기서 퍼덕거리고 있는 아이와 같다고. 저는 과학에 빠지는 이유가 그렇다고 생각해요.

대단해 보이는거죠. 저거 어떻게 했데. 과학이라는게 그걸 가능하게 했대. 사실은 우리를 현혹했던.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가치가 아닌 유한하고 별거 아닌 가치들인데 그것이 다인것처럼 생각하는거.

이런 것들에 우리가 현혹되서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하나님은 십자가 이야기 하고 희생

이야기 하고 헌금하라 그러고 봉사하라고 하고 이런 이야기나 하는데 이런거 알아봐야 도움이

안되는것 같고, 저는 그 밑바닥에 배가 있지 않나 생각을 해요. 우리 배가 만족하는 것에 따라

과학에서 만족을 얻고 과학주의를 고집하는 것이지 그것이 유일한 진리거나 혹은 우리에게 진정한

진리를 주기 때문은 아닌것 같다. 이런 생각을 문득 해봅니다.

조현지 교수 : 제가 아까 말씀 드렸는데, 제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많고 설명하지

못하는 것도 많다고 했는데, 또 다른 한편으로 이런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때 사람들이 그걸 설명하려고 만들어 놓은 그 부분이 이해가 되면 그 부분에

더이상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그래서 창조도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갖다붙인거지 과학이 발전되면 하나님은 더이상 필요없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Page 2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7

수, 무, 그리고 무한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크리스쳔 과학자보다는 비기독교 과학자가 많은 것이

현실이고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그게 자기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해결을 하는가 그것 때문에

결정이 되는 것이지 어떤 한쪽도 내가 옳다 내가 그르다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래서 크리스쳔들이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한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과학자들이 그런 주장을 할 때 그거 틀렸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는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장수영 교수 : 자꾸 거룩한 방향으로 나아가네요. (청중 웃음) 사실 그런 거룩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생각을 해보면 그래요. 우리가 과학이라고 이야기 하고

기술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하는 생각을 할 때. 정말 나를, 도대체 내

안에는 어떤 갈증이 있지? 어떤 바람이 있지?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한 질문인것 같아요. 무엇이 더

가치있는 일일까? 그 이유로 갖다 붙이는 것이. 이재영 교수님 오셨네요. 저는 과학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그것이 우리에게 정말 뭔가를 줄 것인가 아니면 주는

것보다 가져가는 것이 더 많은지 그런 걱정을 해요. 그래서 그러니까 과학주의 아니면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 거냐, 아니면 쉽게 크리스쳔이니까 성경의 진리를 이야기 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제가

그쪽에 치우쳐있다기 보다는 다른 가치가 있으면 이야기 해보라는 이유로. 그러니까 먼저 앞서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거죠. 어느것이 더 논리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가 될 수 없다고.

이국운 교수 : 교수님 바쁘셔서 오늘 된 이야기를 제 나름대로 잠깐 요약을 하고 마이크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원래 제가 예상 했던 것에 비해서는 오늘 이야기가 너무 경건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오늘 주제말이라고 생각하는 세 단어 중에 ‘수’ 하고 ‘무한’을 주로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거기다 없음 부재를 어떻게

설명해주십사 제안을 드리는데 교수님들께서 ‘없음’, ‘없음’을 다르게 표현하면 ‘죽음’, ‘무’, ‘버려짐’

이런데, 그런 말씀을 잘 안하셔서 우리가 너무 희망적인 방식으로 이야기가 되게 만드는 원인이

아닌가. 그래서 이교수님이 혹시 안오셨으면 이교수님의 부재, 혹시 하나님이 일부러 자리를

비우신게 아닌가. 이렇게 이야기를 해보려 하는데 교수님 오셨으니까 그렇게 가기는 어렵고,

준비하신 말씀 뭐든지 이야기 해도 좋습니다.

이재영 교수 : 여러분들 만나서 반갑습니다. 좋은 주제인데. <존재와 무> 이런 책을 쓴

사람이 사르트르인가요? 사실 또 <존재와 시간>이 하이데거 인가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존재,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최근 들어서 사실 제가 동양적인 가치, 그거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요.

Page 3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8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그러니까 특별히 제가 과학을 좀 하는척 하면서 우리가 원자론적인 과학적 설명에 너무 익숙해졌고

그래서 어느날 우리가 모든 물질에 대해서 이해를 하는게 원자론적을 이해하게 됬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이 물하고 흙하고 공기하고 불이라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리고 우리 동양인들은 음과 양이라는게 있고, 목화토금수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분명히 원자론적으로 보면 틀린 이야기죠. 나무를 구성하는 것은 분명히 탄소와

여러가지 그런 건데, 탄소를 묵상해볼 때 뭔가 와 닿지 않죠. (청중 웃음) 그렇지만 나무를

생각해보면 여러가지 것들이 떠오르잖아요.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emptiness, 여기 이국운 교수님께서는 무라고 표현하는

이것에 대해서 동양인들은 굉장히 오랫동안 묵상을 했어요. 공(空)이라고 하죠. 그런데 원자론적인

묵상에서 공에 대한 묵상이 소멸되어버렸죠. 존재만 다루고 존재자의 관계만 다루니까. 그래서 여기

이한진 선생님께서는 수를 다루시니까 거기 대해서 많이 말씀을 하셨을거라 생각을 하는데요,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칼제비가 있는데 그 칼제비가 미야모토 무사시의 칼싸움 학교를 예전에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학교에 교육 방법을 다섯가지로 했어요. 그게 뭐냐면, 첫번째가 토(土), 토가

뭐냐면, Foundation이예요. 우리 학교에서는 이러한 Foundation위에서 교육을 하겠다. 그다음에

수(水), 물이죠. 물은 모든 무사가 다루어야 할 마음의 평정심. 마음하고 물이 있어요, 그리고 불(火).

조금이라도 높은데 서서 눈을 치켜 뜨고 소리를 질러라, 이런 것들이 다 있어요. 그리고 풍(風),

바람이 있는데. 그게 스타일이예요, 우리 한동대학교에도 풍이 있어요. 한동풍이라고 (청중 웃음)

그거죠. 학풍. 너희 학풍이 뭐냐, 가풍, 이런게 스타일이예요 그리고 마지막에 미야모토 무사시가

무엇을 이야기 하냐면 공(空)을 이야기해요. 그래서 무사가 싸움에 임해서 죽을수도 있잖아요,

자기의 모든 marcial activity를 하늘에 돌리는것. 그러면서 미야모토 무사시는 자기가 볼 때 진정한

공은 없다고 고백을 해요. 스님들은 있다고 주장을 하지만 자기가 볼 때는 없는데, 하늘에 이치와

일치할 때가 자기가 볼 때는 공이라고 나름대로 해석을 하죠. 그러면서 불교에 보면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요. 미야모토 무사시는 그런 묵상을 안했겠지만 현대 물리학에서는

그게 사실이거든요. 파동이면서 입자이고, 그런 관점들이 있습니다.

저는 공에 대해서 많이 묵상을 해요, 한동대학교도 내 일생도 어떤 존재들이 Emptiness에

어떻게 도달 할 수 있는가. 아까 이국운 선생이 죽음도 이야기 하고 이런. 어떻게 보면 우리가 죽어

없어지는것. 그게 물질이 소멸되서 정신만 남겠죠. 그것은 물질의 입장에서는 공이 되는건데, 정신의

입장에서는 그게 가장 완전한 것이 되겠죠, 그런 류의 생각들. 그러고 나서 우리가 Emptyness가

됬을때 영원함에 도달할 수 있지 않나.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 육체가 영원할 수

없겠죠. 이 모든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모두 제각기 흩어지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에

Page 3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9

수, 무, 그리고 무한

그래서 우리가 육체에 잠시 머무는 것이고요. 그래서 그러한 이야기를 좀 하고싶었어요.

이국운 교수 : 저처럼 머리카락이 아직 많은 사람이 ‘공’ 또는 ‘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좀

안어울리는데, (청중 웃음) 농담이고요. 플로어에 계신 선생님도 좀 계시고요 학생들도 있는데,

선생님들이 어떤 분에게 질문을 해도 좋고요. 아니면 그냥 하고싶었던 말 혹은 이 안내를 보고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도 좋습니다.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하고싶은

말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학생 1 : 저는 04학번 법학부 김경찬이라고 합니다. 아까 장수영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1-1+1-1+1… 그런 식으로 나가서 결국에는 자기가 주체들이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것이 1이다

0이다 그런 것으로 나누어진다고 하셨는데, 결국에 마지막 발제를 마치시면서 결국 우리는 시스템

안에서는 그 시스템이 옳은지 틀린지를 증명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교수님이 그렇게

설명하시는 것이 과학이라는 것이 어떤 직관적인 문제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관적인

주체들에 가치문제로서 환원되는 것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렇게 되면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신이 있다는 것이 그런 문제가 가치문제라고 할 때 그런 가치문제를 넘어서 어떻게 신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가 궁금한 점이 생겼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장수영 교수 : 저는 사실 그 이야기를 할 때, 그 수열을 잘 보면 0도 되고 -1도 되고 1도

되고, 0하고 1이 같은게 되어버리고 나면 모든게 무너져요. 무한이라는 개념이 다시 나오는데. 물론

그렇게 묶는 것을 자꾸 하다보면 셋이 묶기도 하고 넷이 묶기도 하고 해서 무한대에 이루면,

무한에서 무한을 빼도 무한이니까 그렇게 되는데요. 제가 사실 말하려고 했던게 무엇이냐면, 내가

어떻게 보기로 작정을 하던지 그것이 논리적으로 흔들 수 없는 굉장히 단단한 기반 위에 설 수

있다는 것 같아요. 저는 왜 저 사람들은 예수를 안믿을까 왜 저 사람은 저런데 빠져있을까 하고

이야기 하고 왜 저런 허황된데 빠져있을까 의문을 가질때 마다 그 사람 안에서는 그게 굉장히

정교하게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오히려 많이 하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그렇기 때문에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너는 왜 이걸 선택했느냐 내가 누굴 도울 수도 안도울 수도 내가

누구를 해칠 수도 해치지 않을 수도 있는. 내가 이것을 이용해먹을 수도 있는데, 이용을 안할 수도

있는. 이용하는 것에 충분한 논리가 있을 수 있고 안하는데 충분한 논리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럴 때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책임이라는 것이 이야기가 되는데, 반대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저는 그것을 탓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논리적으로 그렇게 살았으니까.

Page 3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30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C.S.루이스의 ‘인간편지’에 나오는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모든 것들이 다 투명하게

보이면 정말 보고 있는게 있는 것이냐. 다 투명인간이면 아무것도 못보는 것이죠. 우리가 가려지고

이해될 수 없는 지점에서 반사가 돼서 오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는 거라는거. 우리 인간성에

대해서 다 설명하려고 하는데, 설명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냐 다 설명되면 우리의 존재가

자연이라는 것에 의해서, 가만히 놔도 가는 것에 의해서, 그러면 인간 자체는 폐지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데요. 결국은 논리적으로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책임을 이야기하고싶었어요. 그 수열을 보면 0도

되고 1도 되고 -1도 되고 무한대도 되고 이렇게 되거든요. 어떻게 보고 살 것인지. 당신 안에는

어떤 갈증이 있는지, 이것을 무엇으로 보고싶습니까. 그러면서 이런 삶은 어때요 라고 그런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이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마음 속에 어떤 갈증들이 생기겠죠. 나도 이렇게

멋있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게 가치 있는것 같아. 그래서 세상을 내가 구성하고, 같이 구성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이렇게 사는게 우리 운명인것 같아요. 이야기가 조금

지루했는데, 포인트가 빗나간거 아니예요?

학생 2 : 우리가 현상을 볼 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대상을 볼 때

여러가지 학문에서, 여러가지 신학이라던지 과학이라던지 수학이라던지. 우리가 학문을 관점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학문을 만들었는데, 그 학문이 점점 더 발전됨에 따라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없어지고 인본주의적으로만 발전이 됐는데, 어떤 친구랑 이야기를 하면서 학문이 신학도

그렇지만 신학이건 과학이건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있어야 우리가 신앙인으로 학문을 해야 정말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장수영 교수 : 사실 황당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을 갖고

미분방정식을 풀고 삼각함수를 계산한다는것 하고 그냥 미분방정식을 풀고 삼각함수 계산하는 것이

차이가 있을까요?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까요?

학생 2 : 이한진 교수님께서 말씀하실때 수학자들이 수학을 할 때 자신의 세계, 아까

교수님께서 바닷가에서 흙탕물에 그런거라고 이야기하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을

깔아놓고 공부를 하는 것과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마음을 근저에 깔아놓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냐고 교수님께서 물으셨는데

장수영 교수 : 어떻게들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어찌보면 그것에 대해서 답을 얻을 수

Page 3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31

수, 무, 그리고 무한

있을지. 제가 생각하는 답은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떤 답을 가지고 있어요?

학생 2 : 저는 그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까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장수영 교수 : 방금 그 이야기 했잖아요. 하나님을 떠난 학문과 하나님을 기조로 한

학문이 있고. 나는 미분방정식 풀고 계산하고 그런걸 하고 있다보니까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과

그렇지 않은데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인데 잘 모르겠어요.

이한진 교수 : 어떤 성찰의 노력이 부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고요. 우리가

어떤 멋있는 문제를 풀고 할 수 도 있지만 어떻게 내가 이걸 풀 수 있었을까 이게 풀린걸까

그러니까 그런 질문을 하는건 다른 차원인것 같아요. 여러분이 잘 아는 피타고라스 정리가 있는데

그 증명으로 멋있는 그림이 있죠. 빗변에다 사각형을 붙여서 증명하는데, 피타고라스를 증명하는

방법이 서른세가지지 정도가 있데요 더 있을건데, 저는 얼른 생각해봐도 다섯가지 이상 생각을

못했거든요. 그런데 그런거죠. 아니 뭔가가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방법이

있는걸까 그것도 서로 다른. 그다음에 어떤 아까 이야기한, 문제를 풀고 나는 똑똑해 이런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그걸 음미하는거죠 이렇게 멋진건데, 왜 이렇게 멋진걸까 멋지다고

내가 느끼는 이유가 뭘까 그런 질문을 하다보면, 수학을 하는 나는 누구인가. 컴퓨터가 발전해서

컴퓨터가 철학문제를 푼다고 하고 또 문제를 줬는데 컴퓨터가 학습을 해요 그래서 컴퓨터가 문제를

풀었어요. 풀 수는 있지만 컴퓨터가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요? 정말 미에 대해서 묵상을 할 수

있을까. 컴퓨터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세상의 시작,

내가 어디서 왔을까 그다음에 나를 만든 분이 존재한다면 누구일까 하는 질문도 이것을

아름다워하고 인간이라는 더 넓은 범위에 대해서. 그 질문에 대해서 하나의 답을 해볼 수 있는

맥락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른 맥락도 있을 수 있고 좀더 개인적으로 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 나는 굉장히 좋은 질문인것 같아요. 우리가 그렇게 쉽게 답을 줄 수 있는 질문은 아닌것

같습니다.

장수영 교수 : 저는 그래요. 그게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하고 있는 것이.

이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추가로 생각을 한두가지 해야하는건 맞는 것 같습니다. 펜실베니아의

탄광에 들어가는데 이렇게 써놓은 데가 있데요. 우리는 하나님의 보물을 케낸다. 그날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갈때 먹고 살려고 내려간다는 사람이 있을거고 나는 여기 하나님의 보물을 케러

내려간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건데 그 두사람이 똑같이 땀을 흘리고 곡굉이질을 하겠지만 두사람은

Page 3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32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다른걸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거 같다고 생각하면 같은것일 수 있을것 같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그런거예요. 어떤 때는 정말 의미 없는 일을 하는것 같을 때도 있어요. 한 열페이지 계속 같은

문제를 풀 때 답은 안나오고, 페이지수 다르게, 그리고 계산하다가 자꾸 틀리고 이거 내가

뭐하는건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안에 우리가 많이 망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우리가 알고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거든요. 뭘 잡는다고 이야기를 해요. 잡았다 놨다 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아는

걸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알까요. 우리 머리 속에 생각이라는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움직이게 하고 그래서 하는지.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내 안에 일어나는 경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저는 그게 창의라고 생각해요. 사람에게만 있는 놀라운 것이거든요. 저는 봅니다.

시편기자들의 고백들이 다 그거거든요. 우리가 공부하는 순간순간 무슨 문제를 풀고 있든지 뭘

공부하든지 저는 그게 찬양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학생 3 : 사회과학이나 법학 이런 것들을 전공하는 분들은 남을 돕고 이런 일에 남을 돕고

하는데 학문에서 열의를 낼 수 있지만. 예를 들면 우리학교가 모토로 삼고있는 배워서 남주자 이게

실현될 수 있는거죠. 그런데 수학과목같은건 이걸 배워서 남을 어떻게 돕겠는가. 이런 고민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학문분야보다 수학을 전공하는 기독교 학자들이 굉장히 적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까 장수영 교수님 C.S. 루이스를 이야기 하셨는데, 저도 C.S. 루이스를 조금 알고 많이 사랑하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복 자체를 추구해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지만 진리를 추구할때 행복은

덤으로 온다고 이런 말을 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드는 생각으로는 수학문제를 풀면서 이걸가지고

개인적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실재 한동대학교 학생들이 이걸 배워서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는가 하는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고 계신지 궁금하고요 두번째는 제가

지식이 빈약해서 조현지 교수님께 묻고싶은건데요. 최근에, 꽤 많이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창조과학회와 양모 교수님사이에 사건이 있었지 않습니까. 젊은 지구론 늙은 지구론이 있을때,

조현지교수님의 입장을 여쭙고싶습니다.

이한진 교수 : 좋은 질문이라 생각을 합니다. 몇가지 가능한 답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냥

프리먼 다이슨이라는 수학자, 원래 물리학자였습니다만, 수학자가 됬는데, 프리먼 다이슨이라는

사람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디라는 영국의 유명한 수학자가 어떤 이야기를 했냐면 자기는 자기가

만들어내고 증명한 그 수학이 그 어떤 것에도 이용되지 않는 것에 의해서 자기는 매우 만족하고

기쁘다고, 그사람이 정수론을 했거든요. 정수론이라는 분야는 수 자체, 여러분이 잘 아시겠지만

페르마의 정리, 하디가 그런걸 했는데, 그사람이 그런 말을 한데는 이유가 있겠죠. 수학의 절대적인

그런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해서. 프리먼 다이슨이 그사람 말을 인용하면서 나는 그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공부하고 했던 수학이 적어도 그것들이 파괴하고 그런데 쓰이지 않아서

Page 3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33

수, 무, 그리고 무한

감사하다고. 그사람이 뭘 했냐면, 동남아시아에 캄보디아나 그런데 내전을 많이 했거든요. 지뢰를

탐지하기 위해서 수학적인 알고리듬 이런걸 만드는데 기여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는데,

아마 직접적으로 아니면 행동적으로 현실적인 응용과 그런 부분에 있어서 내가 공부한 수학이

수소폭탄을 만드는데 쓰이지 않고 어린이들 구하기 위해서, 대인지뢰를 찾는 알고리듬에 쓰이는,

윤리적인 차원의 문제가 걸리죠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부분에 대한 논의는 사실 많이

있습니다. 그렇죠. 과학기술자들에 있어서도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 저도 아까 그 질문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도 해 봤어요.

당장 이 강연을 듣고 나가서 한동에서 우리 동료들과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내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내가 발견했는데 그것이 다른 친구들을 섬기는데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아까 제가 답변했던 것과 좀 연관이 있는것 같은데요, 저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자기 가치,

자기가 인간으로서 존귀한 가치, 내가 이런 놀라운 문제를 풀었기 때문에 나는 대단해. 나는

대단하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야겠다. 그렇게 갈 수도 있어요. 그런 사람도 있겠고,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이런걸 풀 수 있었을까. 이 사람은 시간이 있는거겠죠. 하나님이 나를

신묘하게 만드셨구나. 내가 이렇게 막 살 수 없겠구나. 내가 나에 대해서 잘해줘야 되겠다. 그

이야기가 뭐냐면,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잘해줘야 되겠다. 그러니까 수학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내가 문제를 잘 푸는 기계가 아니라 내가 그 아름다움을 안다는 이야기죠. 아까 장수영 교수님도

말씀하셨지만, 일본사람들은 벗꽃이 봄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무사적인 의식 이런걸

생각했지만, 로렌스 형제같은 경우에는 봄에 꽃이 활짝 피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전능을 생각하는.

같은 현상이지만 왜 그렇게 다르게 생각하는건지. 놀라운 수학문제를 풀고 아름다운 정리를 보고

나서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을 때, 친구들 만났을 때 더 잘해줄 길이 있죠. 그게 당장 보이지는

않죠. 하지만 아마 자신의 능력에 심취해서 한동안 친구들이 불러도 듣지 못할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결국은 저는 그런 맥락, 우리가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사회적 책임에 무관심한 것은 자기가

자기로서의 존엄성과 본분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닐까. 내가 나에 대해서 내가 존귀하다는 것을

깨닫고 발견하고 찾고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도 그런건데, 그렇다면 내가 이웃을 향해

나아가고, 내가 이웃을 섬기고 그들에게 귀한 것을 나눌 수 있는, 귀한 것이 있으니 귀한 것을 나눌

수 있겠죠. 아름다움을 알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죠. 그러니까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하고 그 음악을 공유하고 싶죠. 같이 듣고싶죠. 멋있는 그림을 보면 내가

그 그림을 봤는데 너한테 보여주고싶어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멋있는 문제를 풀었을 때

친구한테 물론 그걸 설명해주고싶고, 글쎄요. 어떤 긍정적인 의미라면 내가 좀더 존귀한 사람으로써

그런 것으로 나갈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Page 3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34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조현지 교수 : 제가 제 질문에 답을 안했는데 이한진 교수님이 답을 해주셨네요. 젊은 지구론하고

늙은 지구론 말씀을 하셨는데 둘이 싸웠습니까? 둘이 싸워서 결판이 났습니까? 결판이 안났다는

것은 아무도 누구가 옳고 누구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을 못해서, 자기 생각이 이렇고 네 생각은

이런데 네 생각은 못받아들이겠다 이건데, 결국 그분들도 어떤게 옳은지 답할수가 없어요. 제가

그만큼 잘 알고있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서로 의견이 다른거잖아요. 그분들이 그거가지고

싸우는 이유가 각자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할거란 말이죠 그 해설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기가 힘드네요.

이재영 교수 : 제가 볼때는 오늘 늦게 와서 분위기를 파악을 잘 못해서 이렇게 있는데,

저는 오늘 이한진 교수님께 드리는 질문에서 한동대가 가지고 있는 강박증의 증세. 그걸 느꼈어요.

이웃을 사랑하는데 쓰여야 한다는 이런 강박, 이웃에게 안주면 안됩니까? 꼭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까? 반드시 이웃을 위해 주어야 하는가? 그러면 이웃이 누구인가. 이웃이라는게 그야말로,

우리가 이웃의 범위를 얼마나 확대하는가로 이야기가 달라지거든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의

후손까지 이웃으로 세는. 이것은 기독교인이 아닌 그냥 생태학자들, 녹색주의자들의 사유에 아주

보편적으로 되어있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지금 현재 우리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환경을 파괴하는건

앞으로 우리의 후속세대에 대해서 이웃으로 초대하지 않는것이거든요. 그러면 당장 이거 어디

쓸거냐. 지금 당장의 이웃에 쓰일 수 없지만 언젠가 이것에 쓰임을 발견할 수 있고 이것이 필요한

이웃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들을 받아들이고, 또 하나는 왜 개념이 두개가 있는데 하나만

생각하는가. 너의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거. 하나님의 속성이 진리와

아름다움. 그냥 찬양하는거예요. 피타고라스의 정리 500번째 증명방법. 그거 뭐에 쓸건가. 그렇지만

나는 이걸 위해서 하나님이 직각삼각형에 내린 계시를 묵상할 수 있는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은 순수학문, 수학을 비롯해서 시를 쓰거나 순수미술 이 모든 영역이 우리가 그것을 왜 쓰나

이런 천박한 질문을 해서는 안된다는거죠. 내가 말을 좀 잘못한것 같은데. 이러한 질문을 하기보다

우리가 생각을 좀 열어야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질문 중에 어떤 사건에 대해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무엇을 하는것 하고

비기독교적인 관점을 하는 것이 다르지 않는가. 저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라요. 왜냐하면

기독교인이 이세상 모든 것을 다 이루어내야하는데, 실제 정확하게 보면 기독교인 보다는

비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더 많이 발견해왔던 것이 사실이예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반

지성적인, 마치 뭘 아는듯이, 혹은 어떤 경우에는 그만큼만 알면 된다고 하면서 이런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는게 사실이고. 그리고 자기 마음편하면 된다. 신앙적 불편함만 해소하면 더이상 나아가지

않아요. 그러니까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적다는거죠. 저는 사실 한동에서 그거에 대해서 불만이

Page 3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35

수, 무, 그리고 무한

많아요. 우리만 편하고.

아까 그 질문이 그거거든요. 양승훈 박사와 창조과학회에서. 이거는 한동대에서 치열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는 문제이죠. 왜냐하면 그 파문, 이것은 중세때, 여기 써있는 케플러같은 경우 그

어머니가 마녀로 몰려서 화형당할뻔 했고, 사실 양승훈 박사가 창조과학회에서 파문된 일은 중세로

이야기하면 화형을 당한 것과 똑같은거에요. 저는 분노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창조과학회를

탈퇴하려고 생각했습니다. 모르겠어요 제가 이런 말을 한 것에 대해서 어떤 교수님은 저런 사람이

한동대에서 가르치나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만약에 내가 그 생각을 고쳐야지만 화형을

안당한다. 그러면 저는 처자식이 딸려있으니까 살기 위해서는 수를 내야되겠죠 그렇지만 지금같은

시대에 태워 죽이지는 않을거니까 이야기를 하는 건데, 저 개인적으로 그러한 정도의 기독교인들의

편협함, 그다음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해와 달과 별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일들이 있는데, 시간이

있는데 그게 24시간이라고 주장하는 그것이 옛날에 브루노가 지축이 24.5도 기울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시편에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이 하늘과 이 땅이 어떻게 기울 수 있는가’ 라며 브루노를

8년간 고문하고 10만명의 성난 군중 앞에서 태워 죽였던 중세의 심판과 다를게 뭐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거죠. 그렇습니다.

장수영 교수 : 그것에 대해서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가 성경을 수호하고 있는가

성경의 해석을 수호하고 있는가 잘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는 누구나 해석을 가지고 있거든요.

우리 마음속에 ‘야 그거 아니야’ 라고 하나님이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상태 그것이 기독인이

가져야 할 자세라고 하는데, 저는 이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가 성경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던지 하나님이 계시고 안계시고 하는 문제나 그리스도의 사역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부정하거나 다른 생각을 가질 수는 없죠. 그러나 그 이외의 해석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만드셨는가 이런 것들, 그것에 해석에 대해서 내가 다른 사람을 구박하고 이런 것들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더 있어요. 저는 포항공대에 있잖아요. 포항공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남을 돕지 않고 다 자기를 위한 일을 하고 있는 셈인데요. 그걸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저는

첨단기술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 기술의 오묘함을 보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이야기 하는데, 열번 물으면 일곱네지 여덟 번은 제가 진급도 해야되고

쪽팔리기 싫고 후배한태 안밀려야되기 때문에. 내가 하고 있는 수학이 정말 하나님에 대한 찬양인가

저도 정말 그게 맞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아마 사실 이건 어려울 거예요. 목사님들도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건지, 내가 설교해야 먹고사는건지, 이걸로 고민하실거예요. 이게 아마

Page 3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36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끝없는 질문이겠지만 그래도 해야할 이유는 있습니다. 이거 내가 정말 왜 하지? 혹시 누구한테

보이려고? 하나님을 찬양하려고? 뭔가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빠져나가는 그런 순간들이 있어요.

고백입니다.

강철구 교수 : 국제어문학부에 강철구입니다. 저도 잠깐 생각을 해봤는데요, 예를 들어서

경제학이나 통계학 같은데서는 숫자를 이야기 할 때 사람을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어린아이도 있고 성인도 있는데 그러면 원뿔순으로 된단말이예요, 그런데 아까 조현지교수님 같은

경우에는 스티븐 호킹을 이야기하면서 무에서 무한대 사이에 우리가 존재하고 그 숫자를 이야기

한다고 하는데, 그 숫자도 예를 들어서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에 다른 색을 입히는거예요.

예를 들어서 음계를 봤을때, 도래미파솔라시도라는 것을 숫자로 바꾼다거나 아니면 빨간색이나

파란색을 숫자로 바꾼다거나 해서 인문학적인 숫자를 집어넣는다면, 그 결과가 단순한 숫자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와서 해석을 달리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봤어요. 왜냐면 통계에서도 볼때 숫자를 달리 해석할 수 있거든요. 여러가지로. 그렇다면

우리가 무한이라고 봤던 것을 유한이라고 우리가 정의를 내리는 거예요. 하니님은 무한이시고

하나님이 유한한 것을 만드셨다면 그 무한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하나님이 유한한 것을

만드셨다는 것의 의미가 끝이 있다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예를 들어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면 창조했을때 우리가 모르는 숫자의 개념을 창조했을것 같아요. 카이스트에서

휴보라는 로봇을 만들었을때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데 몇억이 들었다고 하는데,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우리를 창조하셨을때 분명히 뭔가의 계산에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숫자로 만들어진

지구와 우리의 창조의미를 봤을 때, 그 숫자를 우리가 계속해서 발견해나간다면 하나님이 제가

성경말씀을 정확히 기억을 못하는데, 내가 너 안에 있고 너가 내 안에 있으면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하나님 안에 우리가 존재한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공계열의

교수님들 같으면 그 무한함을 유한함으로 바꾸고 각자 가지고 있는 숫자에 다른 색을 입혀서 해석을

달리해서 한번 연구하시면 어떨까 그냥 이런 생각을 잠깐 해봤습니다.

손화철 교수 : 시간이 많이 됬지만 교수들이 연구하면서 굉장히 짜릿했던 순간에 대해서

한번 말씀 듣고싶습니다. 현실에 도움은 별로 안되겠지만, ‘우와 이 문제를 풀었어’ 문제를 하나 풀면

친구를 만나도 지나칠 것 같다고 그랬는데, 그런 순간을, 어떤 뭔가를 발견하고 되게 좋았을때.

이국운 교수 : 라운드를 새로 하시자고 말씀하신것 같은데 (청중 웃음)

Page 3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37

수, 무, 그리고 무한

조현지 교수 : 저는 그런것을 중학교때 경험을 했습니다. 별거아닌데, 중학교때 학교를

다니면서 그때는 물리가 아니고 물상이라고 배웠는데, 저는 너무 재미가 있고 그런데 저는 여학교를

다녔는데, 여학생이었으니까. 저는 너무 재미있고 너무 쉽고 이해가 쏙쏙되는데 주변에 친구들은

하나도 모르는거 그거를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못알아듣는거예요. 그게 저는 정말로 즐거웠던

시간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물리를 해야되겠다고 생각을 해서 물리를 시작했는데 막상 물리를

하고부터는 그런걸 못느꼈어요 왜냐면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너무나 잘하는 사람들이라.

그때는 너무 재미있었어요.

이재영 교수 : 저같은 경우는 글쎄요. 사실은 어느 순간을 이야기하기는 뭣하고 솔직히

이야기 하면 저는 제 생활이 굉장히 행복해요. 특별히 제가 다루는 것들이 대부분 하나님하고

연결이 되어있어요. 그게 뭐냐면 제가 엔지니어링 하지만 저는 유체역학 에너지 이쪽을 하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예요. 바람이 여기서 흘러서 저기로 하는거. 이것은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이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는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우리

기계과에서도 로봇을 만든다거나 프로그램을 짜는건 전적으로 인간의 일일 확률이 높아요. 왜냐하면

그 프로그램의 모든 규칙을 우리끼리 정해요. 그다음에 로봇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칩이나 이런 것도

다 우리끼리 정한 거예요. 여러분 휴대폰도 거기서 기이한 일이 생기면 안되죠 거기서 뭐 신의

음성이 들린다거나. (청중 웃음) 그러니까 실제로 보면 대부분의 공학적 Device들은 인간이

창조한거예요. 그런데 저는 제가 하는 모든 일들 중에 제가 뭘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매일매일 놀라는거예요. 아 이런일이 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해서 겸손해지고 그리고

새로운 일이 생기면 너무 황홀하고, 최근에 어떤 소설가가 ‘황홀한 글감옥’이란 책을 썼다는데,

‘황홀함’ 에피쿠로스적인 가치와 ‘글감옥’ 스토아적 가치를 섞는거죠. 그런데 저한테 대면 ‘황홀한

실험감옥’ 이런데 빠져있는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매일매일, 그리고 일이 꼬이면

더 재미있어요. 꼬이면 꼬일수록 하나님 나한테 Hard time을 주는건데, 내가 더 분발해서 하나님

뜻을 따라야하는거죠. 내가 어찌 할 수 없어요. 여러분들한테 권하고 싶은 것은 엔지니어링 하실

분도 혹시 있을텐데 할 수 있으면 좀 인간이 터치할 수 없는 영역이 개입되어있는, 신의 영역이

들어와 있는 분야를 하시면 되게 좋다. 왜 좋냐고 하면 그 문제는 우리가 끝까지 못풀어요. 지금은

우리가 무지 잘난척을 하지만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를 시뮬레이션 못해요. 30초

시뮬레이션을 하면 그다음부터 틀려요. 슈퍼컴퓨터를 돌려도. 그러니까 우리가 고백해야되요

하나님에 놀라움에 대해서.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영원하심처럼 그 분의 영원한 미스터리가

존재하고, 그 미스터리가 재미있잖아요. 그리고 내가 틀려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어차피 틀릴거니까

(청중 웃음)

Page 4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38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이국운 교수 : 교수님 말씀들으면서 제 마음 속에 어떤 감정이 일어났는데, 이게 시셈인지

뭔지 아니면 질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장수영 교수 : 기계공학자들한테는 그런게 많이 있을 것 같아요. 한 40~50km/h로

날아가던 새가 바람이 휘 불면 날아가다 멈춰서 전봇대 위에 서는 그런 컨트롤을 기계공학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저한테는 두번 있었던것 같아요. 증명을 한 순간입니다. 무엇을 막

풀어야 하는데, 틀림 없이 잡은것 같은데, 제가 하는건 수학이거든요. 수학자들이 보면 그건 수학도

아니라고 하는데 제가 하는 최적화는 종이하고 연필만 있으면 되죠. 우리는 아무 실험실도 필요

없어요. 종이하고 연필만 있으면 되는데, 한번은 우리학교에 박사가, 지금은 교수를 하고 있는데,

우리 대학원생 박사하고 졸업할때 썼던 논문을 일반화하는 것이었어요. 별거 아니라고 우리

시작해보자 한 아이 졸업하는데. 막 하다가 두세시간이 됬는데 딱 되는거예요. 세사람 입에서 동시에

beautiful! 이렇게. 하나 더 있었는데, 이게 되네 이게 안될 것 같았는데 되네, 될거라는 생각은

있었는데 정말 되네 하는 순간이 있었어요.

박사과정할 때도 이게 유한하다는 것을 증명해야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 과정이 절대로

돌지 않고 다시 돌아가지 않고 끝난다는 것을 증명해야되는데 한 두어달을 들여다보는데

안나오는거예요. 그래서 저는 어떤식으로 공부하냐면 저는 스케치북을 들고 합니다. 항상 저는

논문을 쓰건 뭘 하건 종이 한장에 쓰여지지 않으면 저는 논문이 된것 같지 않아요. 항상 조그많게

깨알같은 글씨로 써서 박스도 치고 해서 전체 논문의 구조가 나와야 속이 시원한데 박사학위를

받아야 하는데 아직 그게 확실히 않은거예요. 그래서 그날 근엄하게 제 아내한테 오늘 증명 안되면

안들어올거라고 24시간 하는 도서관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옆에 스케치북 하나 들고 내려왔어요.

그래서 저녁을 커피 한잔에 베이글 하나 먹고 단 한시간만에 증명을 했어요. 그리고 나서 이거 왜

못했지, 그때 집에 들어가서 발뻗고 자겠더라고요. 그때 빨리 가서 만나보고싶어서 막 조바심 냈던

그런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짜릿짜릿한 순간이 있습니다. 빈틈없이 딱 맞아들어갈때.

그리고 하나는 뭘 하나 증명을 했는데 최악의 경우를 계산을 하는데 거기에 그것도 보고는 어떻게

이런게 나오지 하는데. 찬양이 나오죠.

이한진 교수 : 저는 대학교 2학년때 현대대수학이라는 과목을 들었었는데 거기서

수학전공과목으로는 처음 들은거였어요. 숙제를 내주셨는데 숙제들이 어려워서 시간이 많이

들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군(Group)이라는 것을 배웠는데 덧셈에 대해서 닫혀있는 집합의 원소들이,

그런 성질 중에 어떤 것을 증명하는 것이 원소를 계속 더하면 항등원이 된다는 것을

Page 4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39

수, 무, 그리고 무한

증명하는거였는데 어떻게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는거예요. 일주일이 제출 기한이었는데 일주일을

매일 밥먹으면서도 생각하고, 도서관가서 생각하고, 그다음날 생각하고 해도 모르겠는거예요.

그러다가 거의 일주일이 다된 어느날 아이디어를 얻은거예요. 그때 종이에 써보기 전까지 아직

확신이 안서는거예요. 머리 속으로는 된 것 같은데. 종이를 꺼내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썼는데

풀이가 맞은거예요. 그 순간에 안도감 내 생각이 틀리지 않고 풀었구나. 세벽 두시라도 켐퍼스를

혼자 걷고싶더라고요. 이렇게. 기분도 좋고 굉장히 아주 독특한.

장수영 교수 : 충만함. 누가 차로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해도 걸어가겠다고 하는

이국운 교수 : 밤세서 이야기 해도 될 것 같은데 이정도에서 보내드려야 성령 충만함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 들으면서 이런 자리를 만들기를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맨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만드신 세상을 순수하게 알려고

하는것, 호기심 하나만을 가지고 알려고 하는것, 그래서 알게 됐을 때 하나님 안에서 그때 그 느낌이

충만함. 골로세서에 그런 비슷한 말씀이 나와요. 저는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셈에 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아마도 인간이 셈에 관해서 뭔가 알려고 할 때 제일 원초적이고 기본적이고 제일

합리적인 것에 가까운 것이 세는 것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책임의 문제와 관련되어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셀 수 없는 것들, 심지어는 세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여전히 세상에 존재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셈과 관련시킬 것인가. 그런 관점에서 없음. 공, 그리고 무한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값지지 않은가.

그 이야기를 해보자 시작을 했었는데. 마지막에 든 생각은 두가지 입니다. 아까 선생님

말씀하실때, 저는 애가 좀 많은 사람인데요, 애가 넷이나 되는데요. 큰애는 저보다 수학을 훨씬

잘합니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때 고등학교 문제를 푸는데, 우리 큰애가 저한테 ‘아빠 이거좀

풀어보세요’ 라고 들고 하면 저는 주눅이 듭니다. 그 아이도 저보다 수학을 못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저희 쌍둥이 둘은 1학년인데 저보다 수학을 훨씬 못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선생님들께서 다 어린

아이가 되어서 수학문제를 푸는, 문제를 풀고 기뻐하는 그 관점에서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말씀을

들으면서 외람되게도 아빠의 관점에서 그 아이를 보는 느낌을 가져봤어요. 제가 몇 번 봤거든요.

큰애가 크면서 뭘 맞췄을 때 그 맞춘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맞춘게 아니라 내 아이가

맞췄는데 제가 제 아들놈한테 저의 만족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상당히 노력을 했습니다. 아마 그

선생님들한테 짜릿한 충만의 시간들이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충만하셨을까.

다시 원래 제가 출발한 출발점으로 돌아와서 다시 셈을 이야기하고 마칠까 합니다.

Page 4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40 2009년 가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마태복음 7장 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헤아린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 받을

것이요. 역시 저는 좀. 앎의 세계 그 자체에 빠져서 사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제가 늘 고민하고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 죽였거나 싸웠거나 권력으로 다투거나 이혼하거나 이런 사람들의 세계이고요.

그 세계 쪽에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런 모든 앎 그 자체와 관련된 시도들이 그 자체로 귀하지만

반드시 우리가 감안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알았고 우리가 충만하다고 생각하는 그 차원에서 이제

적어도 그 차원에서 하나님 우리를 헤아리기 시작하실때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께 하나님이 지금

잘못 헤아리시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줄어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헤아림의

문제.

이런 모임은 어떤 결론을 낸다기 보다는 이렇게 또다른 문제를 던져드리고 마치는게

모임의 성격에 부합하지 않을까 해서. 이번 학기에 두번 더 이런 기회가 열려있습니다. 법을

가르치시는 분들과 함께 법을 소송기술 법률가들의 테크닉으로 가르쳐 온 것이 그동안의 관행인데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자유인이라는 core liberal arts로 법을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이 무엇인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학교에 예배의 기초를 놓으셨다고 할 수 있는 김영섭

교수님하고 황영호 목사님하고 이문원 교수님 조준모 교수님을 모셔서 우리가 알고 있는 예베라고

하는 것을, 크리스쳔 리츄얼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진정성을 경배하고 만나가고 있는 다른 가능성이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고요. 오늘 멀리서 오셔서 우리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신 장수영 교수님에게 마치는 기도를 제가 청하려고 합니다.

장수영 교수 : 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희 마음 속에서 무엇을

넣어놓으셨는지 정말 모르겠는데, 그게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또 놀랍게도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말을 하고 듣고 또 이렇게 서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신비스럽고요. 정말 신묘막측하고 이

아름다움을 겪고 기뻤던 시간들을 우리가 같이 나눕니다. 주님 이 학교라는 데가 주님께서 지으신

세상에 대해서 더듬더듬 찾아서 보물 찾듯이 이리 만져보고 저리 만져보는 기쁨의 곳인데 작은

것들이 들어와서 우리를 많이 힘들게 합니다. 먹고 자는 일 잘나가는 일, 이런것들 때문에 하는것

같아서 할 수 없이 한숨 쉬면서 일할 때도 종종 있는것 같습니다. 오늘 나눈 이야기들 마음 속에

심어서 하루하루 지내면서 연구하는 일들이, 또 시험 보는 일들이 주님 안에서 잘 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자리가 예배의 자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오늘 정말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함께해주신것 감사드리고, 이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하나님

인도해주시고. 예수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립니다.

Page 4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4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4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4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4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45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Law as Liberal Arts in Christian Perspective

언어교육원 105호

2009. 11. 3

이국운 교수 : 반갑습니다. 저는 학문과 신앙 연구소장 하고 있는 이국운 교수입니다. 오늘

2009학년도 2학기 두번째 학문과 신앙 콜로키움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제는 Law as

Liberal Arts in Christian Perspective. 여러분들에게 광고가 되기는 Perspective가 어디로

가버리고 in Christian 까지만 그렇게 되있던데, 아마 그냥 알아서 짐작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을 혹시 해보자면 Liberal Arts라는 말이 상당히 번역하기 어려운데, 저는 이것을 자유인이 되는,

자유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통찰, 자유인으로서 삶에 대한 지혜, 이런 생각들을 모아서 자유인의

기예로서 법,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이렇게 번역을 해보았습니다. 얼마나 적합한 번역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 모임을 시작하기 전에 제가 잠깐 기도하고 함께 하나님의 도리를

구하겠습니다. Let us pray.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들이 학문과 신앙 콜로키움 이번 학기 두번째

시간으로 모여서 자유인의 기예로서 법에 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모신 패널 네 분

교수님에게 축복하여주시고 또 이분들이 가진 생각들을 우리 앞에 내어주실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여주시어서 교수님들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잘 전달되게 해주시고 또한 우리

가운데 생각이 일치되는 것도 있겠지만 생각에 불일치가 있겠사오니, 그 불일치를 우리가 기뻐하게

해주옵시고, 우리가 서로에게 더 많이 배우고, 또 서로의 그 다름을 통하여 우리가 함께 더 풍성한

것을 목적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한동 공동체 안에서 법을

배우는 것, 가르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세계에서 우리 한동 공동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법을 생각해야 되는지 문제까지도 함께 논의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의 대화를 통하여 30년 40년 뒤에 어떤 일들을 계획하고 계신지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하나님 오늘의 우리의 대화를 주님께서 경청하여주옵시고, 또한 우리들을 통하여 친히

말씀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시종을 주님께 의탁드리오며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 올립니다. 아멘

Page 4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46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앉아서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이야기의 형식에 대해서 처음 참석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편의를 위해서 오늘 이야기의 공식적인 언어는 한국어로 하기로

했습니다. 영어로 말하고싶은 사람은 영어로 해도 됩니다. 너무 부담갖지 말고요. 진행순서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아주 간단한 기획의 말을 하고요, 그 뒤에 오늘 네분 선생님을 모셨는데, 네분이

오늘의 주제에 관해서 제가 좀 일찍부터 생각을 모아주십사 부탁을 드렸어요. 그리고 지난주에

우리가 한번 만나기도 했고, 또 여러분 잘 아시지만 우리 한동 공동체는 교수님들끼리 친하고

백교수님만 로스쿨에 계시지 우리는 다 같은 학부에 있기 때문에 맨날 이렇게 이야기 하고 또

백교수님도 몸은 주로 로스쿨에서 가르치지만 제가 벌써 한 5년째 백교수님을 보는데 Liberal

Arts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네분 교수님께서 각각 10분 정도 이

주제에 관해서 생각을 나누어주시겠습니다. 아마 그 이야기들 중에 서로 같은 점도 많이 있겠지만

제가 주문하기는 같은 점은 이제 아니까 가능하면 다른 점을 이야기 해주십사 그렇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각각 10분씩 말씀하신 뒤에 일단 교수님들 사이에 조금 다른 점들에 관해서

clarification 하는 시간, 그리고 약간의 Discussion이 필요한 부분들을 나누는 시간을 15분에서

20분 정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면 한시간 정도가 지나겠지요. 그 뒤에 여러분들에게 이 세션을

오픈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그 뒤에 코멘트를 해도 좋고 질문을 해도 좋고

아니면 다른 perspective를 덧붙여도 좋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이야기 하는 시간을 30분 정도

가지려고 하고 가능하면 1시간, 제가 closing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한시간 40분 정도에 모임을

마치려고 하는데, 지난번 첫번째 콜로키움도 그러려고 하다가 2시간 45분이 되었고 그것도

안끝나시겠다는 것을 제가 억지로 끝내고, 얘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일단 1시간 40분 정도를

예정을 하고 진행을 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끝날지는 한번 우리가 열어놓고 생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오늘 패널 네분 선생님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맞은편에 김성훈 교수님이십니다.

김성훈 교수님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시고 아주 우수한, ‘우수운’이 아니고,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시고 판사와 검사의 길을 마다하시고 우리나라의 아주 훌륭한 로펌,

율촌이라는, 법동네라는 로펌에 취직을 하셔서 공정거래 분야에 숨은 실력자로 오랫동안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타운 로 센터로 가셔서 LLM도 하시고 뉴욕주에

변호사가 되시기도 했고요 또 베이징으로 옮겨가셔서 본인 분야에 큰 로펌에서 일도 하시고, 그

뒤에 한국에 돌아오신 다음에 우리 한동 법학부에 끈질긴 구애를 뿌리치지 못하시고 1년 반이 지난

다음에 작년부터 우리 학부에 부임하셔서 여러 우리 학부의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계신

교수님이십니다. 지금 UIL주임교수님이시기도 하고 여러 방면에서 여러 법학부 학생들을 만나고

Page 4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47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계십니다. 박수 하겠습니다. 유감스럽지만 김성훈 교수님은 아주 예쁜 자매님이랑 결혼을 하셔서

아들을 둘 두셨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좀 있으면 알게될겁니다.

그다음에 우리 코델 슐튼 교수님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아마 이번학기에 오셨기 때문에

여러분들 중에 잘 모르는 학생들도 있겠습니다만 UIL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는 드디어 UIL 코스에

임자가 오셨구나 하는 생각을 다들 하게 만들고 계시는 아주 훌륭한 선생님 이십니다. 코델

선생님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제가 플로리다 더스틴에서 열렸던 Christian lawyers

conference에 갔다가 같은 패널에 앉아서 알게된 교수님인데, 그 뒤에 여차저차 이렇게 돼서

하나님이 은혜로 인도하셔서 한동대학교까지 여러분들을 가르치러 오시게 되었고요. 우리 교수님은

미주리 분이십니다. Saint Leuis에서 대학을 졸업하시고 로스쿨도 마치시고, 10년 동안 Practice를

하시다가 뜻하는 바가 있으셔서 이제 학자의 길로 가시기로 하셔서 신학공부를 하시고, 지금은 이제

법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하고 계시고. 저는 코델 선생님께서 한동에 좀 오래오래 계셔서 같이 남의

신학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고, 우리 법 신학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코델 슐튼 교수님은 할아버지 이시기도 합니다. 코델 슐튼 교수님, 환영하겠습니다.

그리고 한동에 옥스퍼드 가이, 하버드 가이 우리 백은석 교수님. 여러분 잘 아실 줄 압니다.

백교수님께서는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조금 다니시다가 미국으로 가셔서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으로 옮겨가셔서 법학 공부를 하셨고, 다시 미국으로

오셔서 미국 변호사가 되셨다가, 한국에 오셔서 그 누구의 인도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본인 스스로 한동에 걸어와서 나 여기서 가르치고 싶다 이렇게 하셔서 2004년부터

우리학교에서 가르치고 계시고, 김성훈 교수님 이전에 UIL 주임 교수님으로, 갈데 없는 UIL

학생들을 돌봐주신 교수님이십니다. 다들 알지요. 미혼이십니다. (청중 웃음)

제 옆에 계신 장철준 교수님. 오늘 결혼한지 3개월밖에 안된 신삥 새신랑입니다.

장교수님은 연세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셨고요. 석사과정까지 다니시다가 코넬 로스쿨에 가셔서

석사를 다시 하시고 JSD라는 학위를 하셨습니다. 지난학기에 부임을 하셨고요 오실 때는

총각이셨는데 오시자마자 결혼을 하셔서 뭇 한동의 젊은 여성들에게 기회를 박탈하는, 상당히

discrimination 비슷한 것을, 제가 농담이 길어진 것 같습니다. 장철준 교수님 입니다.

오늘 이 주제를 꺼내놓는 기획의 말을 잠깐 말씀 드리겠습니다. 법에 관해서 자유인의

기예의 일종으로 생각을 해보자 하는 이 하나의 주제가 여러분들을 상당히 당황스럽게 또는

생경하게 느끼도록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사실 제가 오늘 이 토론을 통해서 문제삼고 싶은 것은

Page 5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48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바로 그 생경함 또는 그 당황함 입니다. 법은 아주 오랫동안 소송의 기술 또는 재판을 이끄는 법리

같은 형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져오고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 로스쿨이라고 하는 직업적인

법률학교가 하나의 개혁적인 이상으로 부각되게 된 이후로 법은 어떤 당연히 소송의 테크닉인것처럼

그렇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처럼 알려져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도 한국에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시험을 통해 국가 권력을 대신 행사해주는 법률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어떤

지식체계, 기술체계인 것으로 그렇게 이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나 제가

자유로운 기예로서의 법이라고 하는 하나의 테제 앞에서 상당히 낯설게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법의 오랜 역사를 생각해보면 법은

원래 소송기술로서의 유래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자유인의 기예로서의 유래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널드 드워킨이라고 하는 유명한 법철학자의 이야기를 잠깐 언급하고자 합니다. 로널드

드워킨은 ‘Hard cases’라고 하는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법의 세계에 있어서는

이미 밝혀져 있는, 주어져 있는 규칙을 적용해서 해결 할 수 있는 그런 simple case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이미 밝혀져 있는 규칙을 적용하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아주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하는 점들을 이야기 했습니다. 드워킨의 주된 논지는 그렇기 때문에

하드 케이스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리, 법의 원리, principle로 돌아가서 심지어는 서로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principle들 사이에 얼마나 시의 적절하고 합당한 답을

reasoning해낼 수 있는가, 추론해낼 수 있느냐가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된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로널드 드워킨의 이와 같은 생각을 ‘Law as Integrity’하라고 하는 로널드 드워킨의 보다

중심적인 테제와 관련시켜보고 싶습니다.

근본적으로 이처럼 사전에 존재하는 규칙이 없는 상황에서 문제를 풀어야 되기 때문에

결국 그 Hard case를 풀어낼 때 그때 제공되는 법은 모순적일 수 있는 법 원리들 사이에서 자기의

답을 만들어내는 판사, 또는 이 드워킨의 용어로는 Hercules 라는 건데 헤라클레스, 또는 High

priest, 법의 제단에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나아가는 최고의 제사장으로서의 법관에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Law as Integrity라고 하는 로널드 드워킨의 표어는 우리에게 법이라고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소송의 기술로 또는 국가적인 통치를 수행하기 위한 관료적인 기술로 환원될 수

없는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내놓지 않으면 안되는 차원을 딛고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법은 소송기술로서 만이 아니고 자유인이 무엇에 기초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택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소재였고 가르침이었고 지혜의 덩어리였다 라고

생각합니다.

Page 5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49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이것은 법의 역사를 생각해 볼 때에 동양이나 서양이나 공통적으로 가르쳐졌던 것입니다.

서양 역사는 조금 머니까, 우리가 다 아는 우리나라 역사들만 보아도 조선의 선비들의 교육,

과거시험을 통해서 길러내는 목민관의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정해진 룰을 어떻게

적용하는가 그런 기술적인 차원의 공부라기 보다는 룰이 없을 때 다양한, 수많은 요소를 함께

고려해서 가장 합당한 답을 어떻게 찾아내 가는가에 관한 공부였다고 생각합니다. 다산선생의

묵민심서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사상도 결국 이 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 더해서 저는 크리스천으로서 한가지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덧붙여보고 싶습니다.

만약에 법이 technician들, legal technician들의 문제들이기만 하다면 하나님이 법을 법률가들에게만

주셨어야 할겁니다. 그러나 구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하여

신약이 다시 한번 제 확인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법은 법률가들 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어져 있습니다. Legal technician을 길러내는 것만이 법 이라고 하는 것은 때때로 우리를 법률가

패권주의로, 법률가들의 독점주의로 이끌어가는 경향이 있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Christian

perspective를 가진다고 할 때 그때의 법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것이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라고 하는 이유는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법이 법률가에게 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주어져있다고 하는 사실에서 출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조금 전에 기도할 때 제가 언급했지만 우리

한동대학교는 미국법을 가르치는 상당히 낯선 실험을 벌써 8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총장님을 여러번 설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설득에 실패해서 우리는 한국법을

대학원에서 가르치는 한국법 로스쿨은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한동대학교 안에서 법을

어떤식으로 가르치고 어떤식으로 배워야 할 것인가. 저는 오늘 토론을 통해서 그 부분에 관한

대단히 실제적인 방향지움도 우리들 사이에서 발생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제 개인의 생각은 Law

as Liberal arts라고 하는 이 하나의 케치프레이즈가 적어도 그 방향지음에 있어서 한동대학교에서

법에 교육이 법에 관한 담론이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하나의 좋은 Insight를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해줄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획한 사람이 너무 말이 많았습니다. 오늘은 제가 사실은 할 말이 많은 사람인데요

가능하면 저는 좀 말씀을 줄이고 다른 선생님들에게 말씀하실 기회를 드리는데 저는 주력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제가 조금 흥분해 있으면 ‘어허 사회자는 조용히 하라’ 이래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Page 5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50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말씀이 좀 길었습니다. 그러면 순서에 따라서 먼저 주임이신 김성훈 교수님께서 이 이야기에 관해서

가지신 생각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성훈 교수 : 김성훈교수입니다. 일단은, 제가 맨 처음 하는 이유는 쉬운 이야기부터

시작을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면 갈수록 어려워질 겁니다, 그러니까 쉬운걸 다 듣고,

이미 어려워졌습니다만. 제가 잠깐 쉽게 하고 다시 어려워질건데, 제가 지금 UIL주임교수이기는

하지만요, 여기서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은 국내법과 UIL다 합쳐서 이야기하는 거라고 말씀을 드리면

되겠고요. 또 하나는 Liberal Arts로서의, 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이다. 이것은 저한테도 그 표현

자체는 생소한거였는데, 재미있게도 제가 여기 오면서, 그리고 그 전에 제가 실무를 하면서 느꼈던

것, 그래서 법을 공부한다면 이걸 가르쳐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 했던게 사실은 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이라고 하는 개념과 상당부분 유사한게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제가 생각할 때 법은

이렇게 배웠어야 했다. 법은 내가 가르친다면 이렇게 가르친다. 이런 것들을 말씀을 드리고요. 그게

오늘 말하는 주제랑 어떤 식으로 연관이 있을 것 같다 말씀을 조금 드리려고 합니다.

일단은 정말 쉬운 것부터 이야기 하면, 실무에서 법을 하다보면 거의 이거입니다.

첫번째로는, 이 법조문이 뭐를 뜻하는가? 라는 한국 말을 해석하는겁니다. 왜냐하면 법 자체가

한국말이 되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국말 자체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이것을 해석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아주 고도의 가치판단까지는 필요없고요 이 법과 저 법, 저 법과 이

법을 짜맞추면서 통합적으로 각종 문헌들을 이해하는 측면에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가 방금

말한 상황은 변호사가 많이 맞닥뜨리는 상황입니다.

두번째로는 판사가 맞닥뜨리는 상황이 있는데, 뭐냐면, 아까 이국운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법이라는거 해석을 한다는게 불명확한 개념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컨대 합리적인, 불공정한,

이런 굉장히 불명확한 개념입니다. 그건 사람에 따라서 구체적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그런 개념들을 해석하다 보면 굉장히 근본적인 가치에 맞부딪치게 되고요 그러면 가치와

가치를 어떻게 형량하고 가치와 가치를 어떻게 해결하고 어떻게 화해시키고 그게 아주 어려운

문제가 되는데, 통상적으로 우리가 과거에 배운 법기술로는 해결을 못합니다. 왜 해결을 못하냐면

우리는 항상 어떻게 배웠냐면 법이 이렇게 있고 이건 이렇게 해석해왔다. 다수설은 뭐고 소수설은

뭐다 판례는 뭐다 이렇게만 배워왔기 때문에 실제 그런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면 생각을 못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바보가 됩니다. 이거 녹음되고 있죠 이거는 삭제해주세요. 갑자기 멍해집니다.

세번째로는 더 멍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까지 제가 해석론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Page 5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51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마지막으로는 입법론, 전통적인 틀에 의해 말씀드리고 있는 건데 입법이 잘못되었다. 혹은 아예 법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법을 만들어야 하는가 여기에서 더 멍해집니다. 왜그러냐면, 배운 적도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입법을 하려면 근본적으로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었고 어떻게

돌아가고 어떤 이해관계의 구조가 있고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하느냐 하는 여기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하는데 전통적인 방식으로 법해석학을, 개념 법학을 배운 사람은 그걸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온다면 그리고 이미 왔고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나중에 대화를 하는 것을 듣다보면 아시게

되겠지만 저는 지금 계속해서 실정법 자체를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좀 있다 다른 내용이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것만 가지고 일단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근데 적어도 우리 사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실정법을 배울 때 그걸 배울 때 이게

무슨 내용이다 알겠냐 이렇게만 한다면 도저히 정말로 우리 사회에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법을

해석할 때 혹은 새로운 법을 만들려고 할 때 합리적인, 그리고 많은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기준을

도출해낼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재로 제가 실무를 할 때도 항상 좀더

깊은 내용의 그런 공부에 목이 말랐고요 여기에 와서도 저는 예컨대 이런겁니다. 경제법 공부하려면

현대 경제법 자체만이 아니라 국부론도 읽어야 하고 다음에, 우리가 독일에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발터 오이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유주의 경제학자인데, 그 사람 책도 읽어야 하고, 논어도

읽어야 하고 한비자도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양 있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가치를 어떻게

형량해야하는가. 가치가 형량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한차원 높은

단계에서 생각해낼 수 있고 그거를 실정법 해석에 녹여낼 수 있다. 그게 안된다면, 실정법에

녹이는게 안된다면 입법론으로서 녹여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조금 더 높은 의미에서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정법을 배울 때 자유인 기예와 좀 연결을 시키면 첫번째로는, 저는 실정법을

배울 때요 법이 이런 내용이다 알것냐 이렇게만 배워도 충분히 상당부분 교육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면 실정법 자체가 상당히 이미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습니다. 계약 자유의 원칙. 그것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전재로 만든 것입니다. 다음에 민주주의, 그런 모든 것들은 여러분이

깊게 공부하고 깊게 엄청난 철학적 공부를 안해도 그게 옳다고 그게 법이다. 라고 배우면 그게

옳다고 생각을 하고, 예를 들면 실재로 필드에서 다툴 때, 어떻게 합의가 없이 일방적으로 그럴 수

있느냐 그거는 근본적으로 계약자의 원칙과, 사람들이 평등하고 나에게 의무 지우려면 내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법 자체만 배워도, 그냥 그 자체만 배워도 거기

내장돼 있는 가치를 여러분이 배웁니다. 그래서 그 자체가, 실정법의 내용 자체를 배우는게 잘

Page 5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52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배우는 기회라고 생각을 하고요 두번째로는, 실정법을 배우는데 있어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개념법학적으로만 배운다면 더 중요한 어려운 판단이 있어야 할 경우에 다음에 입법론을 해야 할

경우에 멍해진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멍해짐이 없으려면, 내가 한마디 하려면, 내가 사회적으로

발언을 하려면, 우리의 삶을 조금 더 증진시키려면, 좋게 만들려면, 개선하려면, 그러려면 법 자체가

아니라 그 뒤를 감싸고 있는 각종, 예를 들면, 사회학공부든지 철학 공부를 해야 한다. 저는 조금 더

실무적인 입장이고 실정법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반복하지만요, 그런 것을 알고

있다는 지적 만족을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 법을 적용할 때의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고,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해석을 할 수 있고 입법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일단은

마치겠습니다.

Prof. Cordell Schulten : My introduction is interpreted? or no? (no). Ok, very good, I

want to start with explanation of liberal education. Law as liberal arts, studying law as liberal

art, prom says to us thinks about what is liberal education. What do we mean when we talk

about the liberal arts and liberal education? One of the best books to read about the traditional

liberal arts education is book by Allen Bloom, in title <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 it

came out about 1987, I believe, and it was a critique of what was happening in the American

universities mainly on the 1960s, 1970s, and 1980s, Allen bloom, the author of this book taught

as some of the leading universities, in United states of Colombia university and university of

Chicago, the name of few, but he defines liberal education. He says this. "a liberal education

means precisely helping students to pause the questions of what is man, what is it mean to be a

human being. What is the purpose of life? What is truth? What is beauty? These are the what

are often times to refer the persistent questions of life. One of those questions is what is justice.

So, he said that the liberal education means precisely helping students to pause these questions

to themselves, to become aware that the answers are neither obvious nor simply unavailable.

And there is no serious life which these questions are not a continuous concern.

Thinking about the persistent questions of life. so, what is the mean of truly,

completely human being. What is it mean to be a good person? What is good society? These are

the persistent questions that humans at every culture. We have been thinking about and talking

about as long as humans have been thinking and talking. No matter what their culture, they

think about the eastern. He goes on to say this. despite all the efforts to prove it, the questions

that every young person ask who am I, the powerful urge to follow the deltic command no die

Page 5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53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itself, work deify which is born in each of us means in the first place, what is man. This is the

one of the most persisting questions of life. What is it mean to be a truly human person,

complete person? And in our chronic lack of certainty this is what his attacking.

The lack of certainty that comes from the ideas of relativism rather than

understanding there is truth, there is truth below skate? out of ourselves. In our chronic lack of

certainty, this is comes down to knowing the alternative answer and thinking about the liberal

education provides access to these alternatives, many of which against the grain of our nature.

And of our times. And here is the most essential statement. The liberally educated person is

one who is able to resist the easy and preferred answers, not because he is abstinent but

because other possible answers are worthy of consideration. I think that general explanation of

what the liberal education supposes to a quick a studs with is very helpful to understanding a

study of law as a liberal art. You see because of what we do, as we study law as liberal art, as

look at law as a way of understanding, how have human beings though out history been trying

to answer these persistent questions of life. What is it mean to be good. What is good? What is

good society. What is justice. And so we examine law. and I would like to use this knowledge,

and maybe this is helpful.

We can thank about the study of music. And if I talk about the study of music and if I

study of music, I want to equip you with the skill to play an instrument, now I am teaching music

as technique. in a technical way. so I teaching you to play an instrument. I'm tacking you, well, I

wouldn't teach you, I don't know how to play any instrument, maybe I can play a trumpet little

bit French horn very poorly, very poorly, If I were able, If I would teach you how to play the

piano, I teaching you a technique. You know. Knowing the notes, knowing which, how to read

the music. That technical knowledge of it. but just technical knowledge of that doesn't produce

a musician. The musician takes something more. Those of you who are musicians know. It is

something more than technique. Ok, now you have technique, but you have something more.

And the something more is appreciation of music. and we can teach everyone, even if you are

not skilled to play an instrument, not skilled to play the piano, are like my one daughter play the

saxophone, and my other daughter play the flute, and my son play the violin and my oldest son

play the guitar. And I can't play any of those. But every one of us learns to better appreciate

music to appreciate music, and How do we learn to appreciate music? We learn to appreciate

Page 5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54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music by listening to of wide variety of music. Understanding the history of music, learning

musical theory, understanding the different cultural contributions that are made to music. Why

Indian music sounds one way and why native American music sounds different way, and yet

being able to appreciate all of the various musical varieties. This is a knowledge. This is a

knowledge to studding law as liberal art. I'm not seeking to teach law so that you become a

technician, using law to either advocate for a cases or legislate, not to make law or change law,

that's not the purpose which I'm equipping you with techniques so that law as an instrument in

your hands.

Rather, I teaching law as liberal art, so that you appreciate how law has influenced to

us as human beings, How law is pervasive. throughout all of our lives. We can get up in the

morning, but we are subject to law. you know if you, there is security guard, driving around the

campus. and if you park in the wrong spot, you know, If you go too fast, you know, we are

always, laws are always around us in many many ways. We have to understand how law

influences the way are institutions are formed, and also the understand as professor Kim was

talking about. How law helps us make sense of things. How we interpret meaning, and how we

prove things and How we seek to persuade others. So I was study law I was study law across

the brought the history of law, across the broad cultures of law with the object with the

understand of law hapless us to ask and begin to consider the alternative answers to these

persistent questions of life. and I studies law as liberal art to hone my appreciation to sharpen

my appreciation so that when I hear something I go Ah, Bach all over here, Ah, Mozart, you

know I now have a greater appreciation for the contributions of a music or if I here silence I go

Ah. John cage. The strange ones but the knowing that the broad varieties. so,

I see the opportunities to explore the possibilities of Law as liberal arts very very

important. it is a means by which we can better equip one another to be able to ask these

persisting questions of life, think through them and take action because studying anything as

liberal art is not sufficient simply to seat around the classroom and pause questions, consider

possible alternatives, there must be an object or goal in mind and that goal is haloing one

another become more fully formed humans who are actively engaged in acting responsibly in

the concert realities of life. we engage, we don't just set back, we do examine, and we do think

through but toward the end of taking action. so it will ultimately help us to better form and

Page 5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55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reform the institutions of our society the relationships that we have, with one another both

formal relationships and informal relationships, the study of law as liberal art has that potential I

believe to further equip us to become people who resist easy and preferred answers, not

because we are abstinent, but because we know that others are worthy of thoughtful

consideration evaluation and ultimately taking action.

백은석 교수 : 김성훈 교수님이 우리말로 말씀해주시고 코델 슐튼 교수님께서 영어로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머리 속에 다음에 내가 우리말로 해야하나 영어로 해야하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국운 교수 : It's up to you.

백은석 교수 : Law as liberal arts, Law as part of liberal education, Law within liberal

arts education 여러가지 개념으로 Law as liberal arts를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테마에

대해서 아주 오랫동안 깊이 있게 생각해보지는 못했어요. 그대신 나 자신의 스토리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나누면 나름 또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왜냐하면 지금 이자리에 나를 포함해서

네분의 한국 교수님이 계신데요 유일하게 학부에서 법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나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학부에서 다 법을 전공하시고 계속해서 법을 공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Law with

liberal arts, in Christian perspective가 오늘 주제인데, Law after liberal arts도 가능할지 모른다면

내가 나누는 이야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왜냐하면 저같은 경우에는 Law를, liberal arts를

먼저 한 다음에, after liberal arts를 한 다음에 Law를 한 케이스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 대학 학부

과정에서도 쭉 현재 HILS에서 가르치고 그와 동시에 UIL쪽에서 가르치기에 그 과정을 이야기

하면서 그 과정과정마다 나름 가졌던 생각이라던지 관점들을 먼저 나눈 다음에 법이라고 하는 쉽지

않은 주제에 관해서 일반적인 생각들을 우리가 나누었으면 합니다.

이국운 교수님께서 아주 맛깔 나게, 늘 하시듯이 이렇게 소개를 해 주셨는데, 학부에서

저는 철학을 공부했어요 왜 그것을 하게 되었느냐 이런 것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사실 고등학교에서

진로를 결정할 때 계속 법을 하고 싶었어요 법을 학부과정에서 하고싶었어요 법학과를 지원하고

싶었었는데 제 아버님께서 법학 교수를 하고 계셨었는데, 좀 입김이 강하셨죠 그래서 별 다른

생각이 없던 가운데서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시키시는대로 잘 따르는 순종형 아들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런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쉽게 이야기 하자면 그때, 상당히 시간이 지났지만,

Page 5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56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왜 학부과정에서 법이 아닌 소위 말하는 Liberal arts를 ‘자유인의 기예’라고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할거냐, 아니면 흔히들 이야기하는 ‘비전문 인문교양교육’ 이렇게 번역을 한다면 왜 그런 루트를

통해서 통적을 구분하는 것이 더 좋느냐 라고 하는 질문이 남잖아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생각하면서 우리 아버지 말씀이, 법이라고 하는 것은 고등학교 마치고나서, 대학에 바로 진학 해서

책 몇권 보면서 접근 할 것이 아니다. 법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총체적인 것이고 종합적이며, 쉽게

이야기 하자면, 아까 교수님 말씀하신, 머리가 좀 이렇게 커져야 한다. 보는 관점도 넓어져야 한다.

사람 사는게 뭔지도 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뭔가 바로 법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다른 것을 통해서

법으로 가는 것이 좋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잘 모르잖아요. 그쵸. 모르는 가운데서 그냥

그럴싸하게 들리고, 그 과정에서 나름 진통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고등학교를 다니다

보니까 학교 선생님들이 원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런 등등해서 쉽지는 않았는데 한번은 저희

아버지께서 학교에 오셨더라고요. 고등학교를, 왜냐하면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많이 힘들게

만드십니다.’ 그랬더니, ‘그래 내가 가지’ 하면서, 오셨던데, (청중 웃음) 오셔가시고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들 다 앉혀놓으신 다음에 한시간 반, 두시간 강연을 하셨어요. 왜 법을 앞으로 할 사람이 법을

안하고 이렇게 일반 교양 과목을 통해서 법으로 가야하는지 강의를 하셨더라고요. 그 다음부터 담임

선생님이나 진로 지도 선생님이 아무 말씀도 안하시더라고요. 아버님 대단하시더라 하고, 그

당시에는 나의 생각이 있어서 이러한 과정을 선택했다기 보다는 아버님의 영향이 가장 직접적으로

강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나고 나서 다른 나름대로의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내가 그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그것이 잘 되었다고 정당화 한다기 보다는 진정으로 내가 다시 나의 진로를

선택한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라고 묻는다면 또다시 나는 liberal arts 과정을 통해서 법으로

오기를 원할 것 같고 내 자녀도 앞으로 법을 하려고 한다면 이러한 과정을 추천하지 않을까 이렇게

봐요. 결과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밟은 결과물로서의 내가 지금 현재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느냐

그거와는 별개로, 그건 내가 항상 자신 없는 부분이지만, 과정으로 보았을때 어떤 과정으로 나는, 내

개인적으로는 Liberal arts과정을 거쳐서 법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소망하는 과정, 그래서 이렇게, 이것이 옳은 것이다 그른 것이다 이런 관점보다는,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좋은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다음에 학부에서 법을 한 다음에, 법이 아니죠, 법을 안한 다음에 Law after liberal

arts를 했잖아요 법을 하려고 하는 점에 있어서, 미국에서 학부를 마쳤으니까, 시작은 한국에서

학부를 해서 미국에서 철학을 했는데 그 선택을 하게 된 이유에도 몇가지가 있겠죠 사실은. 사실

철학이라고 하는 것도 특히 인문학, 인문 교양학 전반적인 풍토, 학교적인 분위기라는 것이

Page 5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57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우리나라가, 요즘은 좀 바뀌었으리라고 봅니다만 제가 학부를 시작했을 때만 보더라도 사실 그렇게

제대로 이해라던지 정착이 되어있지 않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점이 하나 있었고

직접적으로 제 은사 교수님께서 그분도 학부를 미국쪽에서 하신 분인데, 그분과의 커넥션이

중요하죠, 커넥션, 서포트 이런 등등해서 그쪽으로 가게 되었는데 아무튼 학부에서 철학을 마친

다음에 법을 할 때가 됐는데, Law after liberal arts니까, 법을 하려고 할 때, 미국쪽에 있다보니까

미국 로스쿨을 가는 옵션이 하나 있었고, 그때 또 다시 이야기가 되었던게 미국법도 영미법 체계

안에 있으니까 영미법의 모체인 영국 쪽으로 가서 한번 분위기를 훑어보는게 어떻겠는가 왜냐 하면

항상 처음부터 법을 하고싶었다고 할 때도 법을 해야겠다고 할 때도 practitional 변호사로서의,

약간 더 negative하게 이야기 하자면 Legal technician 으로서의 법을 하고싶은 생각은 없었거든요.

어차피 그걸 학문이라고, 학자라고 하는 거창한 용어를 안쓰더라도 뭔가 좀 여유있게 법을 접할 수

있는, 비록 돈은 안따라오겠지만, 그런 관점에서도 그런 취지에서 법을 접근하고 싶었기에 학부를

마치고 나서 법을 어디서 할까 결정을 함에 있어서 미국 로스쿨은 좁은, 법학전문교육을 하는

곳이고, 또 직업 법학 교육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래도 조금 나오서는 안맞을 수 있겠다. 그와

동시에 영미법 체계 안에서 모체인 영국 쪽에 가서 분위기를 훑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영국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영국이나 유럽의 국가들은 법학 교육을, 올해 초에

한국에서 시작된 법학 전문 대학원 과정이 이전에 있었던 학부과정에서 법학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영국도 마찬가지고, 비록 법을 하지만 영국에 갔을 때 사실 학부과정의 법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법을 하는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대학에 들어와서 법을 하죠

물론 영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왔다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 보다 상당히 Advanced한 애들이 많습니다. Advanced level 이라 해서 말하자면

대학 1학년 교양에 해당하는 과목들을 미리 고등학교 과정에서 하고 나서 대학 과정도 4년이

아니고 3년이거든요 그래서 막상 그쪽에서도 학부에서 college에 들어온 영국학생들을 접할 때 미국

쪽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들어온 학생들 보다는 모양부터 약간 어른스러워 보이더라고요.

나중에 알게된 거지만 계들이 요구를 많이 해서 좀. 학부에서는, 제가 다녔던 영국 로스쿨 쪽에서는

tutorial 이라 해서 교수님 한분과 학생 한명 두명이 대화하면서 수업을 합니다. 강의식이 거의

없어요. 자기가 이렇게 essay를 써와서 essay를 가지고 학생이 읽으면서 교수님과 이렇게 읽으면서,

교수님에 따라서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아예 그 세션을 시작할 때 would you like to

have a glass of wine? 이러면서 그렇게 하시는 교수님도 몇분 계신다고 하더라구요. 50명, 60명

되는 학생이고 교수님이고 거나하게 반쯤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형이상학을 논하면서 재미있게

tutorial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하더라고요. 학부과정에서 Law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만 저같은

경우에 학부에서 이미 철학을 하고 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 과정 자체는 학부과정이지만 내가

Page 6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58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접하는 법은 그래도 고등학교 마치고 대하는 법은 아니었던거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괜찮았었는데,

그때 봤던게 고등학교를 거기서 바로 마치고 그존에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졌던 체계와

비슷한 시스템 안에서 법을 학부과정에서 접하는 하나의 동료 법 학생들을 봤을 때 저건 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냐하면 그게 좀, 법을 학부과정에서 하면서 교양으로서 하는게 아니라

전문 법학 교육분위기도 내야 하거든요. 왜냐하면 그걸 마치고 나서 바로 솔리스트 베스터러로

나가야 하는 과정이라서 중간에 special training 이라 하는 1~2년 과정이 있습니다만 이러한 것을

같이 하려고 하다보니까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은 분위기도 들더라고요. 저같은 경우에는 학부에서 다른 것을 하고 갔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실질적으로는 대학원 레벨, professional level의 law를 접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는 없었는데,

바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접하게 되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동료 학생들과 이야기 하는 중에 깨달은

것은 이건 좀 무리가 있을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여하튼 Law after liberal arts한 다음에

이제 좀 제대로 된 Professional Law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 전까지 내

입맛에 맞는 부분만 이렇게 했었는데, 그래서 다시 미국으로 와서 LLM을 했어요. 그래서 미국

로스쿨에서 학부 JD 3년 과정에서 과목들을 선택해서 듣는, 그들과 같이 수업을 듣는, 김성훈

교수님 잘 아시겠지만, 그런 과정을 하면서 Professional legal education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뚜벅뚜벅 걸어와서 한동에서 가르치게 되었는데, 또 재미있는게 HILS에서는

로스쿨이기 때문에 법학 전문교육을 하잖아요, 전문 법학 교육을 하고 학부과정에서는 또 UIL을

하는데, 제가 이 두가지를 다 가르치게 되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한편으로는 정체성이 없어요.

전공이 법을 한 사람인지 아니면 liberal arts를 한 사람인지 내 소속이 로스쿨인지 학부인지 내가

하는게 전문 법학교육을 해야 하는 것인지 인문 교양으로서 학부 법학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인지 막

혼동이 되는데, 나름 또 그것을 즐기는것 같아요. 이렇게 딱 define 되기 힘든, 규정하기 힘든,

정의하기 힘든, 그러한 존재감 자체가 별로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여러분께

참고드리싶은 말씀은 로스쿨에서 teaching하면서 관찰했던 점이라 할까 그 부분에 있어서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로스쿨이라고 하는 것은 저 HILS와 약간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전문법학교육을 하는 곳이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다루는, 접하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실질적인 법 운용 측면을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 법이 어떻게 운영되어지며,

돌아가느냐가 사실 중요하잖아요. 법을 앞으로 실질적으로 다루어야 할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다보니까 사실 로스쿨, 저희 로스쿨도 마찬가지로, 미국에 다른 로스쿨도 상당히 그런 점이

있을것 같은데 로스쿨에서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들 보면 학부전공이, 우리 로스쿨은 아니긴

합니다만, 공학을 전공한 사람도 있고, 수학을 한 사람도 있고, 이런 학생들이 로스쿨 성적이 아주

Page 6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59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우수한 경우가 많아요. 그게 약간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지 않겠는가. 왜냐 하면

전문법학교육을 하다보니까 당연히 법의 실질적인 운영면에 초점을 둘 수 밖에 없고 그렇다 보니까

이러한 전공을 한 사람들이 오히려 유리할 수 있겠다. 정확하게 구별을 하고, 또 예리하게,

수량적으로 판단하는 것 이런 기본적인 자질, 소양들이 오히려 전문 법학 교육을 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그러나 제가 하나 느끼는 제한점은, 가르치는 과목이, 제가 헌법 쪽을 가르치는데요,

헌법수업을 하다보면 실질적인 법의 운영면 만을 가르칠 수가 없잖아요. 법이라는것 자체가. 조금

뭔가 현재 있는 그대로서의 법 보다는 법이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이것을 어떻게, 존재,

당위라고 할 수도 있고, 있는 현상으로서 법, 또 법의 적용측면 과 더불어 법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아까 김교수님 말씀해주신대로 입법의 문제, 또 법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영어로

쓰자면 Descript 측면이 있고 normative 측면, evaluate 측면, 또 prescriptive 측면 이렇게 다. 또

다르게 이야기 하면 Law application, Law understanding, 측면, 그리고 law making 측면 이

두가지 측면이 있는데 후자, 평가하고 Law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고 Law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오기 시작하면, 사실 학생들이, 상당수의 학생들이 관심이 없고, 또 관심을

갖고싶어도 너무 어려워해요. 그렇게 함에 있어서는 학부과정에서 그래도 뭔가 인문학적인 맛이라도

본 학생들이 차이가 나더라 이거죠. 로스쿨 쪽에도 UIL 출신 학생들이 있습니다만 UIL을 통해서

그래도 Law as liberal arts의 맛을 좀 본 학생들 중에서는 그러한 부분 후자, Law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Law가 어떠한 형태를 갖추어야 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denormative 측면에

봐서는 차이가 나더라 이거죠. 덜 부담스러워 할 뿐만 아니라 그런 부분에 있어서, 법의 실질적인

운용 부분을 이야기 할 때는 약간 졸다가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눈이 반짝반짝해지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법에 양 측면이 있잖아요, 이 양 측면을 다 아우르는 교육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professional Law school, 전문법학교육에서 할 수 있는 부분은 한 측면에 제한되지 않겠는가. 물론

양자를 다 같이 하면 좋겠지만 그 양자를 다 같이 하기에는 법의 실질적인 운용 만을 가르치는

로스쿨 프로그램 그 자체 만으로도 사실 빡빡하거든요. 그래서 이러한 법의 양 측면을 다 아우르기

위해서는 Law as liberal arts 아니면 Law as a part of liberal arts, Law within liberal arts

education, 이런 측면이 어떻게 보면 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하기위해서는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개인적으로 합니다, 물론 내가 거쳐온 과정에 반영일 수도 있겠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생각을 상당히 편협하게, biased 되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만 그래도 내가 다시 선택을

한다면, 혹시 내 자녀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하면 똑같은 이러한 과정을 추천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Page 6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60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시간이 너무 길어졌는데요. 한가지만 더 주가하자면 학부, 한동대학 내에서 학부,

법학부에서의 교육에서 초점이 어떻게 되어야 하냐는 이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글쎄요,

다른 법학부 소속 교수님께서 오래동안 많이 고민하신 부분들이고 그것이 상당부분, 올해 초부터

실시된 학부 법학교육 개정에 반영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세가지 지향점이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봅니다. 한동 법학부에. 나는 기본적인 법적인 소양과 법률적인 지식을 갖춘

민주사회에 일반사회의 일반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한 꼭지가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다른 한

꼭지는 예비 법조인, 또는 예비 법학자로서의 소양이나 자질을 갖추며 동시에 법조인, 법학자로 살

수 있는 학문적인 기반을 닦는 것이 다른 한 꼭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요,

나머지 하나는 사실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과 법과의 관계를

어떻게 분별해 갈 것인가 하는 이런 이슈를 다루어 가는 이것이 한동 학부과정에서 법학 교육이

지향해야 할 세가지, 세가지 만은 아니겠지만 세가지 중에 여러가지 중에 세가지가 아닌가 이렇게

보는데, 이 각 어느 항목을 보더라도 Liberal arts, 어떻게 보면 liberating arts 잖아요. 틀에 박힌

사고방식이 아니라 좀 이렇게 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이 세 꼭지의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정말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실 제가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질문 하나는 있어요. 앞으로 professional legal

education, 전문 법학 교육, 또 직업 법학교육을 받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학부과정에서 할 때 법을

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어떻게 보면 더 제대로 된 liberal arts, Philosophy든, History든,

Economics든 이 둘 중에 무엇이 앞으로 궁극적으로 전문법학교육을 받을 때 어느 것이 더 좋을

것인가?에 대한 이슈에는 아직까지 대답이 없어요 나는 개인적으로는 제가 밟아온 과정이 있기

때문에 그냥 일반 교양 교육을 거쳐서 법학을 접하는게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나의 제한된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 일 수 있는데 아무튼 그 이슈는 아직까지 남는거

같아요. 그러나 그것을 Law as liberal arts, Law as a part of liberal arts, 어떻게 정의를 하든

이러한 법을 두 양 측면을 다 아우를 수 있는 제대로된 법학 공부를 하고 법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liberal arts를, 그것이 Law전공이라는 과정이든지 아니면 Law의 다양한 측면을

다른 학문을 통해서 접근을 하든 어떤 식이 되든 Liberal arts education을 거쳐서 법을 접하게 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철준 교수 : 제가 미국생활 4년에 배운게 미국사람 말하는 기술을 좀, 좀 심각한

컨퍼런스나 회의를 하면서 막 시작하기 전에 좌중을 한번 막 웃겨주면 굉장히 화기애애해 지고 잘

돌아가더라고요. (청중 웃음) 벌써 웃으면 안되죠. 주로 그걸 하는 방법이 바로 앞에 말씀하셨던

분에 말씀을 인용해서 그 인용하는 쉬운 기초적인 방법이 게그의 방법이죠. 백교수님을

Page 6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61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백은석 교수 : 뭐 괜찮습니다. (좌중 웃음) 전혀 부담갖지 말고, 저는 liberating art

education을 받아서 진짜 괜찮습니다.

장철준 교수 : 아주 멋진 영어가 처음에 나오시다가 갑자기 경상도 사투리가. 저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있습니다. 이때 웃어야 되는데 (좌중 웃음), 죄송합니다. 아직 제가 내공이. 제가 이

말씀을 드려도 학교에서 징계가 올지 오지 않을지 저는 아직 확신이 안서는데요, 제가 서약을

해가지고, 엊그제 실은 면접을 봤습니다. 여러분들 후배. 장래 후배가 될 사람들 면접을 했는데 질문

중에 어려운 내용이 있어서요. 그걸 좀 구체화 시켜서 쉽게 만들어주느라고 제가 질문을 한게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마초를 피면 불법인데, 다른나라, 예를들어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는

그게 아무 범죄가 안된단다. 그런데 니가 우리나라에서는 대마초를 피다가 걸린 사람들이 나는

억울하다 왜 우리나라는 법을 이렇게 만들어서 나를 처벌하느냐 다른나라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면 너는 어떻게 말을 할레, 이렇게 물어봤더니 그럼 네덜란드 가서 살아라고 그러죠

이렇게 말을 하는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하라는대로 해야하는거 아닌가요? 이러는거예요. 너

나중에 우리나라 졸업해서 뭐 하고 싶냐고 그러니 사회사업가를 하고 싶다고 해요. 안웃겨요?

사회사업가를 하려고 하는 학생이, 저도 법을 공부하지 못했다면 그런 똑같은 대답을 했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 대답을 듣고, 과연 아무것도 아직 뭐가 들어가지 않은 정말 깨끗한 백지라고

만약에 여러분들 후배를 생각을 한다면 그 상태에서 생각할 수 있는 상식 Common sense라는게

저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토머스 페인이 미국국민들을 설득했을 때 상식을 들고나왔던

것처럼 과연 우리가 대학이라는 과정에서 법을 공부할 때 제대로 된 상식만 들어갈 수 있도록

가르쳐줘도 우리가 그걸 공부할 수 있어도 저는 크게 성공한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냐면, 도무지 요새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판결들을 보면 상식적으로 참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과연 저사람들이 과연 제대로 상식을 배운 다음에 법을 공부했으면 판결이

저렇게 나올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게되요. 그래서 교수님 지적해주신 바에, 어떻게 보면

하나의 대안을 드릴 수 있을것 같은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Law as liberal arts 그 자체는 Law 자체를 위해서도 좋고 liberal

arts를 위해서도 좋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무슨말이냐면 Law를 위해서도 좋다는 것은 나중에

여러분들이나 교수님처럼 Law after liberal arts를 하시든 하시게 된 분들 나중에 직접적인

전문적인 법을 공부하시게 될 분들을 위해서 정말 제대로 된 상식에 입각한 판결을 할 수 있도록

제대로된 생각을 부어넣어 줄 수 있다는 관점에서 Law를 위해서 좋은 것이고, liberal arts를

위해서도 좋다는 것은 여러분들 백날 정의가 뭐고 공정한게 뭐고 책으로 이해해봐야, 책으로

Page 6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62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이해하려고 노력해봐야, 아리스토텔레스의 배분적 정의가 뭐다 이거이거이거다 책을 읽고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 봐야 제대로 된 우리 사회에서의 실증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직접적으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학문적인 경험이 없다면 제대로 된 liberal arts를 하기에도 힘들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법을 공부하는게 제대로된 교양교육을 위해서 법을 공부해야한다고 생각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사를 받다가 죽었어요. 그런데 그게 정의의 관점에서 봐서 그게 참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 우리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법적인 관점에서 이게 옳은 일이냐 과연 그

사람이 죄를 저질렀느냐 그렇지 않느냐. 상식적인 생각에서 이 사람이 잘못 했느냐 잘못하지

않았느냐. 기독교인의 입장으로 그 사람이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 우리는 그런 법적인 실증의

예가 필요합니다. 실증적인 사고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반드시 교양교육을 위해서 법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의가 뭔가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가 직접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다고 밖에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된 판결이 나고 제대로 된

사법정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한데, 딜레마는 있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변호사가

될거냐 판사가 될거냐, 판결문을 멋지게 쓰는 판사가 될거냐, 아무것도 안될거냐. 그런 의미에서

나중에 제기하는 하나의 질문은 우리가 학부과정에서 법을 가르칠 때, 어떤 목표로, 법을 배우는

여러분들이 뭘 원하는가? 또 고려를 해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나중에 변호사가 되고싶으니까

말싸움, 논리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법적인 문제에서.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가르쳐야

되고요. 저는 정말 누가 봐도 상식이 통하는,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있는 멋진 판결문을 쓰고 싶다면

우리가 그것을 가르쳐야합니다. 정의에 관점에서 정의에 입각한, 우리 사회에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검사가 되고싶어요. 그렇게 용기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법이라는 학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깊은 본성에서 일어나는 학제간 이런 Interdisciplinary라는 관점에서 법이야말로

사회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고 사회를 벗어나서는 법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또

이론적인 측면에서 철학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사고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면 Law &

philosophy, Law & society 정말 배울게 무궁무진 할 수 있다는거죠.

하나는 선택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과연 성경적 관점에서 우리가 교양의

측면에서 순수한 교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교양이라는 측면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우리가 배우려고

할 때 하나님의 도를 배우려고 할 때 사랑과 온유와 자비와 양성과 수많은 개념이 있습니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실천하는 속에서 우리가 채득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려면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 직접적인 Legal professional, 법조계에서 일을 하시든지

안하시든지, 교양으로서 법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요.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 그런

차원에서 법학교육을 해주는 법학부가 없어요. 거의. 대부분 학생들이 지금까지 저를 포함해서,

Page 6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63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법학과에 들어오면 바로 사법고시를 봐야합니다. 그것만이 우리사회가 법학도들에게 요구했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거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현실도 고려를 해야하죠. 여러분들

커서, 저도 아직 덜 컷습니다만, 정말 필요한 사람 되고, 이것저것 하고싶은 것 하셔야죠. 그렇다고

우리가 멋진 사람 되게만 가르치면 안되잖아요. 필요한 사람 되고 되고싶은 사람 되게 해 드려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배우는 여러분들 에서도 지향점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법을 공부하면서

뭘 위해서 공부하느냐, 할건가 하는 측면에 여러분이 목표지향점을 좀 세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설령

저희들이 그걸 욕구를 충족을 못시켜 드리더라도 여러분 스스로 사고하시고 좀 찾아나가실 수 까지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본적인 방향성, 제가 생각하는 방향성은 이렇다는걸 밝혀드리고 한계와

함께 제 말씀을 이것으로 갈음하겠습니다.

이국운 교수 : 네분 말씀을 우리가 차례로 들었습니다. 우리 김성훈 교수님은 역시 이

practianer를 practianer identity를 가지신 체로 Technique으로서의 하나의 완결된 System of

rules로서의 실정법에 대한 정의가 반드시 필요하고 여차 하면 실정법으로 돌아와서 사고하는 것도

결코 나쁘지 않다. 다만 해석의 문제, 또 입법의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으로 그 점에서 liberal arts를

말씀해주셨고요. 코델 슐튼 교수님께서는 Liberal education이 뭔가. 인간과 사회와 역사 또 자연에

궁극적인 물음들에 관해서 쉬운 대답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그 물음을 물음들로

지키고 계속해서 그것을 추구하려 할 수 있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하는, 그런 관점에서 법을

설명해주셨고요, 저는 백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심지어는

제가 애가 생기면 제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청중 웃음) 본인도 본인이 걸어온 길을 enforce

하시겠다는 말씀. 마치 as his father did, 아주 저한테는 상당히 감동적으로 들렸습니다.

백은석 교수 : 어느 부분이 감동적이었는지 (청중 웃음)

이국운 교수 : 장교수님, 상식. 상식을 모르는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법률가가 되고 또

기계적으로 판결을 하니까 이따위 판결들이 나와서 온 법률가들을 다 부끄럽게 만들지 않느냐 라는

상식에 입각한 말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다시 한번 질문을 드렸으면

좋겠는데요. 드리기 전에 한가지 오늘 우리의 이야기에 전제가 Liberal education을 받고 나서,

After liberal education으로 법을 공부하는 것이 하나의 정상적인 과정으로 전제가 돼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영화제목만 보아도 Lawyer liar라는 제목도 있고, 짐 케리,

Page 6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64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Devil's advocate, 알 파치노의 영화도 있다고 기억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문적인 법을 배우러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악마와 동침하러 간다는 그런 의미도 좀 있는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한동대학교의 학부가 특별히 Law as liberal arts를 케치프레이즈로 걸고 그렇게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 결과로 학교에 많은 다른 학부의 교수님들은 우리가

마치 free law를 할 것처럼 당연히 여기 졸업하면 로스쿨로 진학 하는 것을 정상으로 하는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제가 정말 만나보고싶은 한동 법학부의 졸업생은

4학년이 되어서 4학년 2학기쯤 한 3박 4일쯤 금식기도를 한 다음에 제 방에 와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Professor, I decided not to apply the law school. 나는 로스쿨에 apply 하지

않겠습니다. 내 길은 그것이 아닌것 같습니다 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거.

여러분 그 좀 joke를 하자면 Lawyer들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Client입니다.

Client. I should be a client, rather than an lawyer, 나는 좋은 client로서 lawyer들을

먹여살리겠습니다. 나는 결코 로스쿨에 가지 않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비전이

로스쿨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학부 4학년 동안에 liberal arts의 공부를 통해서 발견했습니다. 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좀 많이 나오고, 그래서 그런 확신을 가지고, 법률가직으로의

안부르심의 확신을 가지고 주부가 된다거나 목사님이 된다거나 아니면 MBA로 간다던가 아니면

성석제씨처럼 소설을 쓴다던가 저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저에게

받아들여져야할 전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로스쿨을 가기 위해서 liberal arts를 공부해야한다.

글쎄요. 말씀 듣고 보니 저도 처음에 그렇게 시작했던것 같은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점을

확인해두고싶고요.

교수님들에게 질문을 드려보고싶은게 있습니다. 아까 우리 백교수님께서 이미 말씀을

하신건데 liberal arts와 관련해서 전통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근본적 문제를 태클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방법들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이 쓴 글, 아주 좋은

글을 공부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문학이거든요. 그죠. 다른 사람들의 아주 articulate한

생각들을 공부거리로 삼고 자기의 생각을 별러가는 것 이걸 철학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온 자취들을 쫓아가는 것 이것을 History라 하지요. 역사. 라고 합니다. 크게 이

문사철 세분야가 문과쪽에서는 liberal arts를 하는 주된 방법이었습니다. liberal arts가 문과

쪽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과 쪽에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과 쪽에는 대게, 크게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자연 그 자체의 속성, attribute에 집중 해서 그 속성, 예컨대 화학적 속성, 물리적 속성

등등에 주목해서 자연을 이해해가는 것. 그것 말고 이것 말고 이 모든 것을 number, 샘으로

환원해서 수학으로 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크게 이렇게 다섯개 정도의 분야가 있고 그것 말고 Art.

아까 music 말씀하셨는데, 그림이나 음악이나 연극이나 연극은 굉장히 좋은 liberal arts의 방법이라

Page 6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65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생각하는데, 그런 art의 방법으로 하는게 있었습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질문은 첫번째 질문인데요,

질문이 한개 더 있습니다. 법을 문학 철학 역사 또는 이학 수학 그리고 이것을 와 같은 전통적인

liberal education의 방법들 말고 법을 liberal arts로 가르친다는 것에는 어떤 통찰이 개입될 수

있겠는가. 법을 Law after liberal education, 그런 관점도 가능하지만 법을 끌어내려서 liberal

arts의 일종으로 가르치고 배운다고 하는 것은 문사철 이학 수학 그리고 예술 이라는 전통적인

liberal arts의 방법론에 비해서 이건 어떠한 강점을 우리에게 주는 것일까 하는 질문 한가지. 우리가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또한가지는. 바로 질문 다 드려놓고 말씀들을 한번 듣는게 좋을것 같은데요. 사실 우리가

크리스쳔으로서 liberal education으로 법을 생각한다고 할 때 성경을 열어보면 성경에는 너무나

성경에 기본적인 가르침, 복음과 대적되는 의미로서 법이 많이 쓰이기 때문에, 예컨데 로마서에서는

법으로는 구원될 수 없다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요, 복음서에는 법률가들이 예수님에 반대하고

죽이려고 했다 이런 소리만 계속 나오고 이렇기 때문에 반드시 복음과 법이 적대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있겠습니까만은 일단 그런 관계가 있다고 전제하시고 법을 liberal arts의 일종으로 배우고

가르친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 인으로써 법에 다가가는데 어떤 좀,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겠는지. 생각을 해보고싶습니다. 혹시 가능하시면. 미리 짠 질문은 아닌데요 혹시 가능하시면 이

질문에 대해서 답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혹시 답변이 가능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서로 다른

교수님들에게 질문을 하셔도 좋겠습니다. 시간을 벌어드리는 의미에서 우리 liberal arts education을

하시는 손교수님 오셨습니다. 박수 한번 하겠습니다. 혹시 하실 말씀이?

손화철 교수 : 네 없습니다. (청중 웃음)

백은석 교수 : 손교수님은 liberal arts after liberal arts 하셨군요.

이국운 교수 : 이럴 때는 좀 약올릴려면 ‘법 좀 아세요?’ (청중 웃음)

손화철 교수 : 법 하시는 분들이 liberal arts하신다면 웃죠 (청중 웃음)

이국운 교수 : 이제 본 게임이 좀 되는것 같습니다.

백은석 교수 : 우리는 들러리였던거야

Page 6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66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이국운 교수 : liberal arts, would you please start?

Prof. Cordell Schulten : In response with your question, Christian perspective, and how

that can help us, I think explore more broadly, and more deeply these questions as we look at

law, the develop of law as history or particular cases that are preventative to us for my

Christian perspective, I reminded how Jesus rebut the lawyers of his day, the lawyers were the

religious lawyers the Pharisees and the seduces, and he said you strain at nets and you swallow

mammals they were great technicians they were able to apply law technically but he said you

have forgotten the way the matters of law. Justice, and righteousness, and faithfulness and I

think we can say what Jesus was in a way criticizing the lawyers of his day was they have very

precise technical knowledge of law but they have no broad and deep understanding of the

purpose of the law and role of the law and the role of law. Role was to advance the values of

justice, and righteousness. These are the ideas that cannot be defined purely in legal terms. the

law is in itself in advocate to answer to give us the insights that are necessary to pursue this

questions in our broader and more deeper way. So I think Jesus was only criticizing the farces,

particularly his day was saying they did not have this proper perspective, proper view, proper

world view. That comes from right relationship with God. And right understanding of where law

comes from. And how we as human beings responsible in our relationship as one another. to

administer law. so I think depth that can be gain and of breath, that can be gain from Christian

biblical perspective of basic question, source of law, the purpose of law, there most famous

lawyer in united states, history of law in united states is justice all of window, homes Junior.

And homes said the purpose of law is to give those in power ability to virgins to back of the

week that they do not wish to bear. That is entirely against of biblical view. of the source, or

the purpose of the law. This is a view of law, view of the purpose of the law that is very much

moms from the idea of the strong stronger survive and so we use law to impose heavier burden

on the weaker members of society this is law without values. This is law viewed as a narrow

instrument. in another itself without a proper understanding of relationship of law to all of

human institutions and duties and responsibilities, Law needs more than just Rules, statues and

regulation, in one another themselves they advocate so which law as liberal art, this opens up

the opportunities for us to demonstrate how important understanding Christian worldview of

law is to give us the insights into the source of law the foundations for the law the purposes for

Page 6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67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the law in relationships and in society in institutions, so.

이국운 교수 : 교수님 스스로 질문하신, 질문 있으면 답은 대게 답에 방향은 대게

있는건데.

백은석 교수 : 답에 방향도 없으면서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이국운 교수 : 유도심문이었습니다만 넘어가지 않습니다.

백은석 교수 : 이런걸 배우는겁니다. (청중 웃음)

이국운 교수 : 다른 교수님들 혹시

장철준 교수 : 일단 첫번째 질문에 관해서 제가 좀 언급을 했던 것 같습니다만 일단 그

소위 말하는 인문학이나 교양이라는게 우리가 배우는 이유가 만약에 인간과 자연과 사회에 대해서

그것을 알고 어떻게 알고 또 그것을 알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옳고 아름답게 사는 것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면 법을 교양으로서 가르치는 장점은 뭐랄까요, 현실세계에서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법이라는 게, 두 극단에서, 법이라는게 그 자체 순수한 도그마 안에서만 해결이 되어야 한다. 하는

입장과 또 그 반대편에 아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거다 그냥 정치일 뿐이다 정치의

하나에 형태일 뿐이라고 하는 두 양 극단 사이에서 우리가 그것을 왔다갔다 하면서 우리가 과연 이

세상의 실체에서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한다면 우리가 인간을 알고 자연을 알고 사회를 알아야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한번 실질적으로 손에 잡히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그게 법학, 교양으로서의 법학이 발생할 수 있는 하나의 장점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성훈 교수 :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요. 저도 한마디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질문을 하기 시작한지 어언 2년이 됐고 학기 안받기 시작한게 한 2년 돼서 갑자기 받으니까 좀

어려운 질문인것 같거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는 우선 제가 이해하는 것을 우선 말씀드리면

법을 제대로 해석하고 입법론 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할 때 제 말의 취지는

Page 7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68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뭐였냐면요. 그러니까 정치학 공부도 해야하고 사회학 공부도 해야한다는 취지였어요 기본적으로는,

그런데 질문은 무슨 취지로 보이냐면은요, 그거 말고 법 자체를 가르치는 것이 정치학 사회학

그것과 동률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인가.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걸로 이해가 됩니다. 그거 할

때는 저는 이걸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약간 오버해서 이야기하는건데 실정법들은,

환경법이든 경제법이든 헌법이든 뭐든 일종의 다 합의문이거든요. 그 안에는 표현 자체는 굉장히

재미 없어도 엄청난 가치가 투영되어있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피와 고통이, 피는 너무 심한가.

헌법에는 피가 들어가 있죠. 헌법에는 피가 들어가 있고 다른 법에는 굉장히 많은 굶주림과

목소리가 들어가 있죠. 보통은 그렇죠. 굶주림은 단식투쟁할 때 굶주림 이야기하는 거고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법 자체를 구체적으로 배운다는 것 자체가 문학 읽으면서 문학 자체에 감동받는 사람도

있지만 그때의 시대 상황을 이해하고 사람의 삶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법도 현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역사예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의 역사고

그래서 법 자체를 공부하다는 것 자체는 여러 법이겠죠. 물론. 헌법일 수도 있고 민법일수도 있지만

그것 자체는 그것 자체로서 굉장히 많은 감동을, 많은 사람들에 주장과 열정과, 현 사회에서 요구가

되는, 말하자면 숙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그래서 잘만 이해한다면 감동을 줄 수 있는 굉장히

구체적인 감동을 줄 수 있는 100년 전 거 읽어도 그냥 감동 받고 끝나지만 법을 잘 배우면 현대를

사는 우리가 현대에 대해서 감동받을 수 있는 그런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문사철과

동등한 지위에서 법을 배운다 할지라도 제가 법 자체만 공부해도 감동, 내장되어있는 가치 때문에

여러분이 인문학적 공부를 하는 거다 여러분이 liberal arts 공부를 하는거다 말하는게 그런

취지거든요. 감동받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보통을 감동을 안받는다 이거죠 문제는. 왜. 그 형식때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것을 해석해주는 선생님이 필요하다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이랑 비슷한거예요.

성경도 제일 처음에 마태복음 읽었을 때 아브라함이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하다가

예수님까지 오는데 무슨 의미인지 하나도 모르잖아요 감동도 전혀 없고. 나중에 보니까 그 중간에

다윗도 있고 그 중간에 기생 라합도 있고 그 중간에 룻도 있고 있는걸 보면서 감동받고 하잖아요.

성경을 읽다가 그 깊은 의미를 알면 알수록 감동받는것처럼 법도 그 깊은 의미를 알면 알수록 그

자체로 감동 받을 수 있을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저는 현 상황에 합의문, 현 상황에 그래도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가치들을 파악하는데 가장 정확한 것은 현행법이다 그리고 그것을

잘만 해석한다면 우리가 큰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점에서는 조금 더 좋은 의미가 있는게 아닌가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age 7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69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백은석 교수 : 제가 했던 이야기 끝자락에 질문의 형식으로 던지면서 나는 아직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개인적으로 확실하게 정리를 하지 못하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질문이 뭐냐하면. Law as

liberal arts, Law as part of liberal arts education, Law within liberal arts education. 어떤 식으로

오늘의 주제를 이해하든 그러한 교육과정이 전문 법학 교육, 또는 직업법학교육을 전제로 했을때

과연 최고의 준비과정이 될 지 아닐지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질문을 할 때 잘

모르겠다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그런 의미에서 자기가 선호하는 답은 윤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만 오히려 전문법학교육 또는 직업법학교육을

전제로 했을 때에 학부 과정에서 Law as liberal arts로 하는게 좋을지, 아니면 문사철이라던지 또

더 오랜 전통을 가지고, 보통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인문 교양 분야를 하고 전문법학교육과정을

접근하는 것이 제 개인적으로는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그러한 접근법이,

그러한 route가 절대적으로 좋다기 보다는 오히려 Law as liberal arts education을 거치고

전문법학교육을 받을 때 이미 그 법을 접할때 상당한 또는 폭넓은 perspective, 관점을 가지고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또 그런 의미에서 장점이 될 수 있겠지만 또 어떻게 보면 법 자체를

상당히 특정 관점에서 보려고 하는 이러한 경향성도 그 결과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사실 전제가 Law as liberal arts 가 liberating arts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라고 보통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정말 제대로 되면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 과정을 거쳐서도 전문 법학교육을

접하면서 부정적인 측면이 없지않아 있을 수 있겠는데, 제가 그런 의미에서 생각이 정리가 안된

상태이죠. 그런데 어떤 관점에서 본다면 Law as liberal arts보다는 Liberal arts as liberal arts

education in christian perspective 를 통해서 전문 법학 대학원이나 로스쿨 과정을 거치는게

어떻게 보면 법의 총체적인 측면을 다 아우르면서 접근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러나 그것이, 왜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국운 교수님께서 패널의 내용을 요약

하시면서 가장 내가 보고싶어하는 한동의 학부학생은 3년 4년동안 저는 로스쿨 갑니다. 가겠습니다.

갈거고 하다가 마지막에 하나님의 뜻을 정말 신실하게 분별하는 가운데 저는 Lawyer 되는게 전문

법조인이 되는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는 그 선택 자체가 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과정에서 또 그것이 참 너무나 Lawyer가 되고싶었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

뜻을 분멸하다 보니까 그것이 참 힘들게 판단을 합니다 하는 그 고백하는 학생이 가장 어떻게 보면

4학년 2학기때 만나고싶어하는 학부 학생이 아닌가 하는 그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 말씀에 방향에서

생각을 하자면 사실 Law as liberal arts education, Law as part of liberal arts education, 했을 때

그 가치는 저는 엄청나다고 봅니다. 아까 내가 가졌던 그 질문이라는 것은 전문법학교육을 전제로

했을때 이것이 과연 Best, 준비가 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였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서 가치가

Page 7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70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충분만이 아니라 아주 귀한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말씀드린대로 법학 한동 법학 교육이 지향 해야할 점들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그중에 하나가 아까 말씀드린대로 법적인 소양, 어느정도의 법률지식을 가진, 또 법적인 소양이라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에 규범지식이라던지 아니면 아까 말씀드린, 법적인 상식을

가지고 접근을 하는 기본 자세라던지 또 정의에 관한 실천적 측면의 인식이 있게된다던지 이런 모든

것을 법적인 소양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것을 기본적으로 갖춘 민주사회에 일반 시민을 기른다고

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전문법학교육 전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게 없을때에 더 Law as liberal arts

education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요. 물론 앞으로 법조인이나 법학자가 될 때에

결과적으로 또 하나님 뜻을 분별해서 Lawyer는 안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또 법을

학문으로써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가는 경우도 있을거고 또 그런 부분에 있어서도 좋을것 같고요

가장 전문법학교육을 전제로 하지 않는 Law as liberal arts의 가치가 어디 있을까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제가 보기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신앙인으로서 법이라고 하는, 다른 패널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겁니다. Law is everywhere. 그런 말 하잖아요. Law is

ubiquitous라고. 우리가 어디를 가든 Law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실 선택해서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법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이냐 정의를

해야 할 것은 아주 근본적인 질문 같은데, 그것은 꼭 법을 전공을 하고 혹은 앞으로 법조인이 되고

학자가 되든 안되든 우리가 다루어줄 수 밖에 없는 이슈라고 본다면 그러한 이슈를 접근함에

있어서는 전문 법학 교육에 대한 전제가 없더라고 그러한 교육에 대한, Law as liberal arts

education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귀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스클쪽에서 가르치다보니까 경험에 기반해서 한가지 여러분에게

나누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실 로스쿨 쪽에서 사실 HILS에서는 이것을 강조합니다. HILS라고

하는 학교 자체가 Law in faith, 그리스도인으로써 신앙과 법이라고 하는 것이 이분법 적인

이원론적으로 할 수 없다라고 하는 전제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교육과정 전반적인 전반을 통해서,

또 학교 생활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주도하는 바는 학생들이 바로 이 문제, Law in faith, 하나된,

어떻게 해야 그것이 하나가 될 것인가, 신앙인으로서 법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슈에

첨착해서 다양한 컨텍스트에서 생각하도록 만들겠다 하는 그런 것이 교육, 비전에 미션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도 로스쿨 학생들이, 법학부 졸업생 지금 현재 HILS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 보이는데, 사실 그 이슈를 로스쿨 컨텍스트에서 전문 법학 교육 과정에서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문법학교육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커버해야할 내용이,

기본적으로 법의 실질적인 운영 부분에 있어서 해줘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하다보면, 광범위한

Page 7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71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의미에서 신앙과의 통합이라던지 아우름에 있어서는 해줄 수 있겠지만 많이 제한이 됩니다. 그래서

정말 신앙인으로서 법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신앙 과의 관계 이런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은 오히려 Law as liberal arts라고 하는 이 과정을 통해서 좀더 제대로 접근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다분히 역설적인 것 같은. 차라리 법학 전문 교육을 하지 않고 Law as liberal arts를

할 때 이 부분에서 만큼은 오히려 제대로 접근할 수 있지 않겠는가. 법학전문교육 또는 로스쿨

이기때문에 해야만 하는 그러한 부분에 제한점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그런 의미에서 liberal 하게

정치 이념으로서의 liberal도 있지만 liberarting하는, 자유함으로서 이것을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국운 교수 : 교수님 더 덧붙이실 말씀 있으신가요? 아직은. 좀더 기다리겠습니다.

법률가가 이렇게 말할때에는 사실은 먼저 말하게 해야 내가 좀 유리하기 때문에 (청중 웃음) 글쎄요

여러분에게 기회를 주기 전에 내가 질문을 했으니까요. 법을 liberal arts로 가르치는 것은, 저는

그렇게 해야한다고 믿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지금 전통적인 방식의 liberal arts education과

비교해서 강점이 있다고 하는 제 생각을 조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저는 무엇보다도 법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아주 속물적인 부분을 변명하지 못할 수준으로 드러내 보이는 그점에서 상당히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이 포착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거죠. 아주 유명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철학교수님들이 철학토론을 열심히 하셨어요. 각각 다 큰 책을 쓰셨고

사람들이 다 그걸 보고 다 이렇게 하고 아주 정말 멋진 그런 토론이 있었고 대게 멋진 철학 토론은

끝이 안나거든요. 그렇게 해서 하는데, 법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 토론 그 자체에도 관심이 있지만

사실은 그 두분 사이를 정말 practically 사이 나쁘게 만들고 있는 문제, 예를 들면, ‘A라는

교수님에게 연구실이 왜 B라는 교수님의 연구실보다 더 큰가. 에 관해서 B라는 교수님이 가지고

있는 불평등하다 이건.’라는 식의 학부장에 대한 claim, 왜 누구에게는 대학원생이 더 많고 장학금이

더 많이 가고, 왜 나는 대학원생이 적고 장학금을 안주는가에 관한 claim, 글쎄요 그것이 이제 학부

차원에서 문제가 되고 양쪽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래서 A라는 교수님에 대해서 B라는 교수님이 이제

조금 뭔가 반격을 해서 상당히 다른 favor를 얻게 되었다던지 한다면 법은 훌륭한 철학토론 그

자체에 관심이 없는게 아니라 그것도 보지만 그 바깥에 이분들 관계를 진짜 규정하고있는, 어떤

의미에서는 더 보통사람스러운, 치졸해보이는 그런 문제들도 함께 보게 만든다는 그런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언제나 아주 구체적인 분쟁을 전제로

대게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분쟁은 대체로 양쪽이 아주 핏대를 내고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아주

치졸하기 짝이없게 주장하는 그런 관계를 전제합니다, 그래서 법은, 제가 생각할 때는 사람이

어느수준까지 치졸해 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단히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Page 7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72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대개 이것은 철학보다는 문학이, 문학보다는 역사가 그 것을 보여주거든요. 그런데 문학은

픽션이라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라는 약점이 있어요

여기에 비해서 법은 각각이름을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이 아주 구체적인 문제들로 얼마나

치졸해질 수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넘기기 위해서 얼마나 속물적이 될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제가 말하는 Hard case라고 하는 것은 그건 기본이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기존에 실정법적인 지식들을 총동원했는데도 만족할만한 정당화의 논리가 나오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경우에는 판사가 자기 인격을 걸고 개입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거기

Law as integrity 라고 하는 유명한 법의 정의가 등장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요, 그런 관점에서는 제

생각에 법은 바로 이 측면을 가지기 때문에 철학도 그 안에 가지고 있고, 역사도 가지고 있고,

문학도 가지고 있고 그 이상도 가지고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인문학자가 둘로

나뉠 수 있는데, 법을 아는 인문학자와 법을 모르는 인문학자 (청중 웃음), 법을 모르는

인문학자들은 대체로 초학자에 불과하다. (청중 웃음). 제 말씀이 아니고 괴테와 쉴러가, 막스 베버가,

칼 막스가 다 학부에서 법을 전공했던 사람들이다 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와

같은 이분법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한동은 법을 아는 일급 인문학자들이

어느 학부에서든 탄생하는 좋은 college가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아마 손교수님

하실 말씀이 준비가 되었지 않을까. 손교수님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에게 open up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질문도 좋고 코멘트도 좋고 아니면 뭔가 생각을 더하는

것도 좋습니다. 아주 practical 한 내용도 좋고 대단히 이론적인 질문도 좋습니다. 넋두리를 해도

좋습니다. 무슨 질문이든지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드립니다.

백은석 교수 : 이교수님 말씀하신거 제가 잠시 받겠습니다. 방금 이야기하신 유명하신

분들, 막스 베버, 기타등등 그분들이 학부에서 법을 하셨는데 그분들이 Law as liberal arts로

하셨는지 아니면 Law as Law로 하셨는지 두 철학교수님의 관계의 실체를 규정하는 문제는 왜 all

nations 3층에 법학부 오피스는 이렇게 큰데 2층에 있는 로스쿨 오피스는 작으냐 이런 것이 두 철학

교수님의 실체를 규정하는데 측면이다. 관점 자체가 법학자 혹은 법률가의 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국운 교수 : 기울어지는거 같으니까 중심을 균형을 잡으시는 것으로 믿고 여러분들에

세션이 있습니다. 자 여러분들 중에 하실 말씀이 있으면. 이제 Jump in 하십시오. 다들 눈치만 보고

얘기가 없네.

김성훈 교수 : 저는 보통 이럴때 시킵니다. (청중 웃음)

Page 7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73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이국운 교수 : 콜로키움에서 시킬 수는 없으니.

학생 1 : 저는 김성훈 교수님께 질문이 있는데요.

김성훈 교수 : 질문을 시키네 (청중 웃음)

학생 1 : 04학번 법학부 이름은 정일석이라고 합니다. 교수님들 말씀 잘 들었고 굉장히

감명 깊게 들었는데 김성훈 교수님께 들었던 법 자체를 어떤 문학이나 역사와 같은 수준으로 놓고

그 안에서 감동을 받고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관점에는 충분히 동의를 하고 굉장히 많은

공감이 갔는데요. 한가지 의문점이 있다면 제가 굉장히 어쩌면 실정법적으로 파악해서 질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법 자체가 그런 의미에서 감동을 받을 수도 있지만 저는 다른 측면에서 생각을

하면 법 자체도 어떻게 보면 승자의 기록이라는 측면도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보면 만약 보통 법을 제정하는 과정도 생각하면 여당과 야당이 치열하게 싸우다가 결국은 어떤 승자

측이 있으면 승자의 기록과 승자의 입장에 의해서 법이 입법되는 것으로 크게 보면 생각할 수 있고,

최근 우리나라 국민들이 생각하는 과정들은 어떤 입법과정에서 큰 불만 자체가 그 법이라는게 어떤

공정성이냐 정의라는 것보다도 둘 사이의 싸움의 과정에서, 정의와는 상관 없이 이긴 자의 입장이

반영되는 것이 실정법이나 어떤 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보고 또 본다면 단순하게 감동이나 그런

측면보다 좀 더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측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김성훈 교수 : 역사도 감동 받다가 분노하고, 문학도 법도 감동받다가 분노하고 법도

감동받다가 분노합니다. 법 이야기 할 때는 그냥 법 하면 햇갈리니까 두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판결문 자체 or 법률 자체인데요, 제가 하고싶은 말은 뭔가 떠드는 사람이있으면 뭔가 무슨 말이

들어갑니다. 제가 하고싶은 말은, 예컨데 A라는 입장이 있고 B라는 입장이 있다. 그런데 A라는

입장과 B라는 입장에 관해서 법을 짓는다. 그러면 반드시 정치 과정에서에 논란이 있고요 A가

win해도 그러나 이런 예외가 있다 해서 B의 입장이 들어가게 되어있고요. B가 승리해도 정당한

이유가 없는한 이라고 해서 A의 입장이 들어가고 그렇습니다. 그거를 읽어낼 수 있다면 오히려

이것을 이렇게 해석을 하게되는거죠 이 법은 A라는 입장과 B라는 입장이 있는데 현재 한국 사회의

현재 속에서 예컨대 A가 원칙으로 채택이 되었으면요 A가 좀더 큰 합의인데 B가, B입장이 minority

로 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거거든요. 그러면 거기에 분노할 수도 있고 거기에 거부할 수도 있고

그렇죠. 그때는. 여전히 제가 최초에 말했던 법이 그냥 현 사회를 읽는 텍스트 혹은 현 사회에 대한

Page 7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74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사람들의 합의문이라는데 감동받을 수도 있고 분노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승자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냐고 할 때도 사실은 패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논리도 조금씩은 들어가기 때문에, 안그러면

유지 자체가 안되요. 그 법의 규범성 자체가 유지가 될 수 없어요. 그게 쏙 들어가지 않으면.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 그런 상황을 고려한다 할 지라도 똑같다. 역시 그 사회를 반영을 한거고

그것을 읽으면서 한국 사회의 권력의 구조, 가치의 구조도 들어갈 수 있고 분노할 수 있고 감동할

수 있고 어떻게 바꾸어야 된다고 생각할 수 있고 어떻게 해석해야 된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렇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국운 교수 : 성령께서 누군가에게 질문의 영을 주시기를 (좌중 웃음)

학생 2 : 안녕하세요 저는 국제어문학부 지금 4학년 2학기이고 UIL을 전공을 하고 영어를

전공을 했고요. 어쩌면 이국운 교수님이 아까 말한 4학년 2학기에 법을 공부를 하더니 법학자의

길을 가는게 내 길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어쩌면 내 소명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고백할 수

있겠다는 시기에 있는 학생인데요,

이국운 교수 : 잘못 말한것 같다 (청중 웃음)

학생 2 : 저는 한동대학교를 잘 몰랐는데 여기가 미국법을 가르치는 유일한 학교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 실험에서 3년 동안 장점과 단점들을 겪으면서 liberal arts로서의 법도 배워보고

동시에 법이 아닌 다른 전공도 하면서 법이 아니었으면 내가 다르게 접근했을 수도 있는 전공에

대해서 내가 다른 관점에서 비교도 해보고 이랬다고 나름 생각을 하는데요, 일단 저는 영어를

공부하기 전에 경제와 법을 공부를 했었는데 그때 제가 경제에 접근하던 방법이 법을 공부 하기

이전에 접근했던 것과 법을 배우고 나서야 경제에 접근하는 방법이 달라졌다는 것을 어느순간,

지금와서 느낍니다. 왜냐하면 일단 법이라는 것을 배우면서 총체적인 사회의 구조를 제가 배우게

됐거든요. 그런데 UIL을 배우면서 법학부 한국법을 배우는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내가 뭘 배웠는지

모 를때도 있어요. 왜냐하면 어떤 실정법을 구체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교양으로서의 법을

배웠지만 이게 돌아보면 생각하는 방법을 그냥 훈련 받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그러면서 어떤 일이 생겨서 경제학을 배우는 것을 잠시 그만두고 언어를 먼저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제가 왜 언어와 법의 관계에 대해서 집중을 하고 그 두개에 대해서 생각을 했냐 하면

영어로 법을 배우면서 보니까 한국의 법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영어에서는,

Page 7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75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영어로 써 있는 법은 웬만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법이 법을 서술하고 있는 언어에 접근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 한국에서 법을 서술하고 있는 언어는 내가 20년 넘게

한국어를 모국어로 취해왔지만 그 한국의 법에 체계에 접근하기 위한 언어는 따로 배우고 따로

훈련받아야 할 굉장히 어려운 덩어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어요. 그래서 아까 드워킨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학자가 언어와 법의 관계에 대해서도 어떤 서술을 한 부분이 있는 것을 제가 어디서 본

것이 있는것 같은데, 법학자들이 쓰는 언어는 너무 그들의 세계 안에 갇혀있는것 같고 일반 대중과

소통하기에 장막을 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고 그 언어의 문제 때문에 오히려 법이 다른

학문들의 위에 서서 liberal art의 수준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왜냐면 법을 먼저 공부하고 다른

liberal art에 접근하는 것이 오히려 더 우리에게 큰 Structure를 보여주고 다른 인문학을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복잡한 언어체계로 인해서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권리나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저는 들거든요. 그래서 언어의 문제에

대해서 한국법을 공부하시는, 사법고시를 공부하신 교수님들이시고 사법고시를 하지 않으시고

학자의 길로 가신 교수님도 계시고 한국법을 공부하다가 미국에서 또 공부를 하신 교수님도 계시고

아예 철학을 하시다가 미국에서 법을 하신 교수님도 계신데 다양한 교수님들이 계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법과 언어에 대해서 좀 광범위하게 넓혀졌을 수도 있지만 그 인식의 기회나 언어의

측면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생각들이 있으시다면 여기서 미국법을 공부하다가 다시 사법고시나

한국법으로 가면 한국법이라는 새로운 언어체계에서 법을 배워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되거든요. 코멘트를 해 주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김성훈 교수 : 제가 짧게 해 드릴 수 있겠는데요, 일단은 영어도 법문, article 자체를

읽으면요 한문장이 스무장은 되요. 한문장이. 그래서 미국사람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한국사람은

당연히 무슨 말인지 못읽고요. 한국법도 마찬가지고 독일같은 경우도 한 Article이 열 몇 줄

되거든요, 도무지 해석이 안됩니다. 사실은 법조문 자체가. 그래서 사실 우리나라가 기형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마음을 좀 안심시켜드리고 싶고, 또 왜 그렇냐. 왜 그런지는 모르겠고 우리나라

이야기를 하자면 예외는 아니지만, 그러면 좋은 현상이냐 좋은 현상은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통상적으로 왜 그런 일이 벌어졌냐 한국에서 왜 그런 일이 벌어졌냐고 설명할 때 설명되는

이유는 일본에서 법을 치자해 통치하는 사람이 법을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어려운 말을 썼고 법을

처음부터 못알아듣게 했고 그게 한국에 와서도 비슷하게 했기 때문이다. 라고 통상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특별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연히 서서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중력이 있어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냐 여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개인적인 복안은 없고요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현실적으로는 법을 배워야되고 판결문 읽어야

되고 한문장이 한페이지인 판결문을 읽어야 되고 도대체 이게 주어가 어디 있는지 서술어가 어디

Page 7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76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있는지 모르는 판결문을 읽어야 되고 그게 문제거든요. 현재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은 아쉽지만, 그게

해결책이야? 라고 그러겠지만, 아쉽지만 튜터링을 받는수 밖에 없어요 여기서 말하는 튜터링은

옥스퍼드 튜터링이 아니고요 수업을 들으면서 이게 무슨내용이다 저게 무슨내용이다 이해를 하고

많이 읽으면서 대강 이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고싶을 때 이런 문장을 쓴다는 것을 배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현재는. 이렇게 짧게 말씀드립니다.

장철준 교수 : 그게 어떤 심오한 철학 체계를 가지고 쓴 언어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웬만큼

읽으면 읽어집니다. (좌중 웃음) 특별히 한동대학교에서 제대로된 교양 교육을 받으신 분이라면 좀

training 하다보면 저는 극복가능한 문제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저는 제 특수한 입장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언어체계에 묻어가기를 거부하고 주로 그런 체계에 저항하면서 살기를 결심한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교양교육으로 무장한 언어체계가 일반 대중을 설득하기는 훨씬 쉽죠. 그런

어려운 언어체계에 저항해서 좀 새로운 체계를 다시 만들자 고 할 때는 문학에 기반한 언어체계가

훨씬 더 저한테 도움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법체계에 묻어서 같은 권력 안에서

살아가기 원한다면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훈련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한동에서 교육받은 분으로써 뭔가 의미있는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저는 우리의 경험으로

충분히 극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별거 아닙니다.

이국운 교수 : 제가 한마디 덧붙이자면 법이 전문영역으로 남아있는 한 언어, jargon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것 같아요. 더더욱이 법도 하나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약

100여년 전에 독일에서 개념법학 운동이라고 하는 아주 재미있는 운동이 시작이 됐었는데 그

운동에 핵심 아이디어는 이거예요, 한 개념은 하나의 의미만을 가지게 하자. 이렇게 명료하게 개념을

만들고 그 개념들을 소위 유사소학적인 연결로 legal reasoning을 대체해보자 그런 생각이고

법학에는 그런 식의 하나의 Dream이 로망이 결코 포기되지 않을것 같아요. 그런제 제가 희망을

보는거는 민주주의예요. 민주주의.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세상은 법이 민주주의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라는 명제를 하나의 체제의 근본에 가지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법률가들이 아무리 화려한

자기들만의 논변을 만들어도 그 결론이 대중들에게 국민들, 표를 가지고 있는 대중에게 이해되지

못하면 국민 대중은 그건 법이 아니다. 그건 당신들의 법이지 우리의 법은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고 그게 지금 우리나라 헌법 재판소가 지난 일주일동안 부딪치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 Law as liberal arts의 교육을 통해서 제가 만약 아까 말한대로 Lawyer의 길을

가지 않겠다 했다면 그것도 정말 감사한 일이예요.

만약에 lawyer의 길로 간다면 정말 우리 졸업생 중에 이럴 수 있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은

Page 7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77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정치인이예요. 정치인. 어떤 사회가 부딪쳐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부딪쳐있는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태클해서 그것을 넘어서서 한 단계를 점프하게 만들 수 있는 정치인. 그 정치인은

법률가의 jargon만을 알아서 법률가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 만 가지고는 전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예가 버락 오바마 지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작년에 한참

president campaign 이 될 때 2월 3월에 자기가 출석하던 교회 목사님이 God dam America 하는

것 때문에 아주 큰 위기에 처했었는데 그때 제 기억이 아마 3월 1일에 필라델피아에서 한

연설이었을 거예요, 자기가 그 교회를 더이상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미국 헌법의 한 구절을

인용해서. more perfect America, 더 완벽한 미국을 만드는 장정에 우리가 모두 참여하기를 원한다

나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내가 정말 사랑하는 목사님이고 사랑하는 교회지만 이제 나가지 않겠다

하는 것이거든요. 아주 practical 한 rhetoric이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법을 모르는 사람.

법의 jargon을 잘 모르고 그걸 어떻게 advocacy를 할 수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구사하기 어려운

대단히 sophisticated 한 Rhetoric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결국 그런 Rhetoric앞에 백인들이 결국

표를 주기 시작했던게 아닌가 싶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결국 민주주의의 문제가 여기 대단히

걸려있다. 결국 대중을 설득하는 문제는 Rhetorically, strategically 그래야 하는 문제가 아니고,

이제 민심이 곧 법이다 라고 하는 전제를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한

대중을 설득하는 plane language로 법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부담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

그러려면 liberal arts로서 법을 공부하시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확실히 유리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좀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요 다른 질문이나 코멘트 있으면 조금 더 하고

학생 3 : 09학번 배신우라고 합니다.

이국운 교수 : looks 04학번 (청중 웃음)

학생 3 : 크리스쳔으로서 법을 보게되면 일반 안락사 문제나 다른 사회적 문제를 봤을 때

그것이 개정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어떤 것을 결정할 때 그 근거로서 사회적인

감정들이 공감들이 아직 그쪽으로 많이 쏠리지 않았다. 많이 모이지 않았다. 또는 이렇게 많이

변했다 라는 근거로 해서 법이 세워지고 변하게 되는 경우가 많게 되는데 크리스쳔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분명히 안락사같은 문제를 보았을 때 크리스쳔의 관점과 다른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공감이 그렇지 않고 다들 안락사를 찬성하거나 범위를 좀더 개방적으로 늘리거나 하는

그런 식으로 흘러갈 때가 많은데 그렇다면 법이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에 기초해서 그렇게 흘러가는

것 자체가 크리스쳔이 세상을 바꾸자 하나님의 뜻으로 다시 이끌어 가자 그러한 측면에 조금

Page 8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78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어긋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법철학자나 법학자의 입장에서 또 아니면 liberal arts로 법을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개선해나갈 수 있는가? 하는데 의문이 있습니다.

이국운 교수 : 헌법학자들이 서로 떠넘기고 있어.

백은석 교수 : 질문이 뭐였습니까

이국운 교수 : 굉장히 traditional 한 시간을 버는 그런데 요지는 결국은 제가 지금 이야기

하는 것에 counter argue라고 생각하는데요, 민주주의라는 것, 백성이 원하는 바, 그렇게 가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어긋나는 결론을 법이 지지해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는냐 그 tension은

어떻게 하느냐? 지금 질문 한겁니다. 제가 잘 이해했나요? 저는 제 job을 했으니까.

장철준 교수 : 아까 우리 학생 하신 말씀과 연결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법이 승자만의

기록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게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원리에도 기반하고 있지만 법치주의도

있거든요. Rule of Law라고 하는 원리가 같이 전제하고, 그러니까 반드시 다수의 논리에 따라서

휘둘리지 않는 가능성을 법이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Rule of Law가 반드시

크리스쳔 faith와 일치하는가? 하지않느냐는 잘 모르겠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과연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크리스쳔으로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엔가 한번쯤

문제제기가 되어볼 필요가 있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특별히 법을 공부하면서 그런 기회는

많이 늘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그런 우리 안에서 있는 개방적 질문이 우리의 법적

사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까지 더 확실하고 굳건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어요. 과연 안락사를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우리나라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진짜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한번 해 볼 수 있는겁니다. 동성애가 나쁜 것이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성경에서.

그런데 그 사람들한테 소위 말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이냐

한번쯤 우리 안에서 생각해볼 여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거기에 찬성하고

그런다는것만이 중요한게 아니라 법의 원리, 인간의 기본권을 존중해야한다는 원리를 생각한다면

한번쯤 우리 안에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는거죠. 드워킨의 Hard cases에서 정말 풀기 너무나도

어려운 질문을 우리가 접했을 때 그래도 인간의 기본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생각하자라고 했던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조금 위험한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질문과

대답이 저의 믿음을 더 깊게 해준다고 생각을 하고싶습니다. 그거는 하나님이 개인을 통해서 분명히

저는 학문적으로나 믿음으로 저는 확충시켜주리라고 보상해 주리라고 믿는데, 법을 공부하면서

Page 8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79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오히려 그런 문제에 더 많이 노출되고 더 많이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법이라는 논리는 다수와 승자의 논리만은 아니다. 민주주의 자체도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뿐이거니와 우리는 법치주의라는 것입니다.

이국운 교수 : 혹시 법학부 할거야?

학생 3 :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국운 교수 : 하지 (좌중 웃음)

학생 3 : 법학 입문때는 훌륭한 성적으로 잘 마쳤습니다.

김성훈 교수 : 잘 마친건 맞는데, 훌륭한 성적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나는데. (좌중 웃음)

이국운 교수 :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했는데요, 그 질문에 관해서 민주주의를 해치지

않고도 답하는 아주 고전적인 방법은 민주주의는 어떤 시대에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의 합의로

자네는 지금 전재하고 있거든, 그런데 그렇게 볼 어떠한 근거도 없어요. 그래서 아까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신 Rule of Law라 할 때 Law라는 것을 교수님은 민주주의와는 약간 대치되는 것으로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만약 우리가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 왔던 사람들 지금 있는 사람들 앞으로 올 사람들

다 합쳐서 모든 정보를 함께 공유한 뒤에 모두가 합의 한다면 어떤 합의가 있을 수 있을까. 존

로스라고 하는 사람이 비슷한 제안을 우리한테 하는데, 그걸 전제로, 그걸 추론해서 아마 이게 그럴

경우에 나올법한 결론이겠거니 라고 생각해서 역으로 연역해서 그걸 우리가 법의 지배라고 우리가

하는지도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크게 한비퀴 돌리면 민주주의는 이리 가는 것이고

법치주의는 이리 가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두개가 같은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나옵니다. 그렇게 주장하시는 법 철학자들도 굉장히 많아요. 더이상 이야기 해주는 것은 법학부 하면.

(청중 웃음)

백은석 교수 : 그러니까 그 아까 여학생 질문했던 것을 부분적으로만 잠깐 하면 다른

교수님이 다 이미 말씀 하신 것인데 UIL을 통해서 법의 맛을 본 상태에서 법과 언어에 대한 문제

구체적으로 그렇게 본 것에 다시한번 더 추가를 하자면 UIL과정에서 접하는 미국법이라고 하는

Page 8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80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것은 또는 전문적인 아주 기술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미국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UIL을 통해서

접하는 미국법과 한국법만큼 20년 동안 20몇년 동안 언어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당연시, 쉽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한국법이라고 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지만 또

한국법은 그만큼 우리가 또 수준이 있기 때문에 전문적인, 기술적인 측면까지 다루려고 또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볼 때 어렵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UIL에서 접하는 영어에

미국법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기본적인 부분이고, 그래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성격상 다분히

전문성, 기술적인 측면이 없을 수 없고 또 언어라고 하는 것에서 약간 구별이 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참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질문은 어떻게 보면 법 문화에 대한 질문일수밖에 없을것 같은데요,

미국이나 영국같은, 미국같은 사회 안에서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인식되어져

왔는가라고 하는. 또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인 민중과 시민 사회에서 법이 어떻게 받아들여져 왔는가

라고 하는 것. 법감정 법문화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 양 사회가 법사회가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것이 어떻게 보면 언어에 어느정도 반영 될 수도 있겠다 하는, 물론

또 대법관들이 쓴 헌법 관련 판례들을 그런건 일종에, 이국운 교수님 장철준 교수님 다 헌법 분야에

분들인데, 대법원 판례를 읽다보면 참 이양반들 아는거 엄청 많네 이런 생각을 들 때가 있어요.

이국운 교수 : 미국 (청중 웃음) 한국 말고

백은석 교수 : 그래서 그 말은 이 사람들이 liberal arts를 받고 Law를 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그냥 자기도 그걸 표를 내요. History도 있고 철학도 있고 정말 폭이 넓거든요 그런 의미에

있어서 전문성, 기술성이라기보다는 그런 의미에서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대법원의 헌법 관련

판례란는 것이, 미국 연방 헌법관련 판례라는 것이 법 언어로서는 최고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기술적인 전문적인 측면이 아니라 그 사안의 중대성 이런 면에서 그래도 일반 사람들이

접근하기에 그런 의미에서는 접근성이 상당히 높은 편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 판결문을 읽어보면

안그렇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법문화 법 감정, 그리고 법 사회 안에서 일반인이 인식하고

있는 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또 법을 다루는 사람이 어떻게 접근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 에 대한, 이런것이 정책적으로 반영된다고 할 때 미국 법 사회와 한국 법

사회가 차이가 많이 있는것 같고 또 같은 내용을 약간 다르게 이야기 하면 한국사회에 법사회에서

법을 다루는 법률 전문가들이 가지고 있는 법은 이러이러해야만 한다 라고 하는 생각들이 미국

사회에서 법을 다루고있는 법률 전문가들이 가진 생각과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분히 한국 법 사회에서는 법률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일반인과 뭔가 이렇게 구별을 두려고

하고 문턱을 좀 높이려 하고, 이런 의미에서 민주성이 다분히 떨어지지 않느냐,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그쪽 사회에서는 법을 이해함에 있어서 보다는 민주성이라는 것을 별다른 특별한

Page 8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81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테제라고 접근 하지 않고 당연히 그렇게 돼야 한다고 하는 생각 자체가 한국 법 사회 특별히 법을

전문으로 하는 전문 법률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훨씬 더 널리 확신되어있다고 봅니다.

미국 법 사회에서는. 그런데 한국 법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법의

민주성에서 차이가 있고, 아까 학생이 질문한 것도 어떻게 보면 이국운 교수님 말씀하신데 counter

arguments라고 이야기 했었는데 그 질문의, 이국운 교수님 바로 지적하셨듯이. 전제부분이

생각해볼 부분이거든요. 법이 민주성을 확대해갈 때에, 민주적 저변을 확대해갈 때에 그것은 흔히

말하는 크리스쳔으로서의 접근법과 사고방식과는 어떻게 보면 배치되는, 반대방향으로 갈 수 있지

않느냐, 최소한 그정도의 전제는 하고 질문을 한 것 같은데, 장교수님 이교수님 말씀하신데 한가지

덧붙여서 말씀을 드리면, 과연 특정 사안에 대해서 크리스쳔적인 관점이 무엇이냐 고 하는. 그것이

그렇게 똑 부러지는 정답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일반 원리에서는 많은 크리스쳔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있지만 그런 원리를 구체적인 사안에 적용하는데 있어서는 신실한 크리스쳔들도 다양한 답을

제시할 수 있는, 이견이 다분히 있을 수 있는 문제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가장 크리스쳔으로서

그런 의미에서 Law as liberal arts라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학생이 law를 전공

해야하는 이유가 아닌가 (좌중 웃음), 어떻게 보면 그것이 내가 가진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또 성경적인 관점이 성경적인 유일한 답이 아닐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죠. 그러한

liberating thinking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가장 핵심적인 아이디어가 아닌가 기독인으로서

가져야 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Law as liberal arts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그자체만으로서 아주

가치가 있는 것이라 이야기 할 수 있다는거죠. 물론 정답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이 그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은 어떻게 보면 내가 늘 쓰는 표현인 지식적인,

학문적인 겸손함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이 회의론이라던지, 상대주의라던지 이런쪽으로 가는 것은

전혀 아니겠죠. 하나님 주권 하에서의 진리의 실제성, 그리고 절대성을 믿음과 동시에 우리가 그

진리를 찾아가는 능력은 제한 됩니다. 그것을 인식할 때에 내가 가진 생각이 크리스쳔들에게 정답,

성경적인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볼수 있고 그것이 어떻게 보면 가장 크리스쳔으로서 가장

필요한 liberating thinking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성훈 교수 : 방금 말씀하신 한국 법조계와 관련해서 조금 더 첨가하고싶은게,

첫번째로는 실제로 그렇게 조금 자기네들을 높게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이 줄어들고 있지만,

사법시험 합격자 수가 늘어날수록 줄어들고 있어요 확실히 여기도 희소성의 원칙이 적용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또하나의 문제가 뭐냐면요 그 사람들도 불쌍한 측면이 있어요. 그러니까

잘해주고 싶어도 말하자면 그냥 상식에 부합하는 논리로 설명하는 훈련을 한번도 못해봤기 때문에

해줄수가 없어요. 잘해주고 싶어도 내가 뭔가를 설명해주고싶을 때 legal jargon을 쓰지 않고는

Page 8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82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설명을 못해요. 그러니까 다시 legal jargon으로 이야기를 하게되고 상대방은 이해를 못하고 그러면

짜증나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아까 말씀드린 Law as liberal arts하면서 입법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 했는데 또 하나가 이미 다른 교수님들이 잘 지적을 해주셨지만, 상식이

통하는 논리로 이해시켜주기, 또 충분히 자유인의 기예로서 저도 염두에는 두고 있었던거예요.

법공부하는 사람들 특별히 국내법 공부하는 사람들 그런 경험 많이 했을거예요. 막 이해를

시켜주려고 하는데 법공부 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면 어떻게되냐, 저러면 어떻게 되냐, 이해가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아 모르겠는데 법이 그래, 이런 경험을 많이 했을 걸로 저는 생각이

되요. 저도 그랬으니까. 막 설명을 하다가 결국 이해를 못시켜. 그러면 한국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냐면, 현실과 법은 따로논다, 이렇게 됩니다. 사실은 그러면 안되는건데. 그러면 그런

측면에서도 법을 제대로 가르쳐야 되고, 제대로 가르친다는 의미는 자유인의 기예라는 말을 꼭

써야하는지는 잘 몰라도 그런 측면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런 측면에서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국운 교수 : 지금 김교수님의 이 말씀을 변호로 들어야 할지 자기 자랑으로 들어야 할지

(좌중 웃음) 제가 옆에서 듣기에 우리 이제 손교수님이 충분히 데워지신것 같은데 데워지셨다가 좀

식으셔서 옷을 지금 입으시는건지. 손교수님 하실 말씀.

손화철 교수 : 이 모임이 철학적인 모임인지 법학적인 모임인지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제가 보기에는 둘다 아닌것 같은데, 법학교실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안할테니까. 법학이 아니고

철학수업이 아닌 이유는 철학 수업에는 약간의 sarcasm이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에는 계속 답을

구하고, 다 법대 교수님들이 모여서 Law as liberal arts하는 것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좌중 웃음)

김성훈 교수 : 겉으로만 그런겁니다. (좌중 웃음)

손화철 교수 : 처음에는 Law as liberal arts라고 그래서 저는 약간 황당했어요. 철학

전공으로써. 아 이제 이사람들이 하다하다 못해서 철학까지 잡아먹으려고 드는구나 (좌중 웃음)

이국운 교수 : 여기서 이 사람은 나를 가리키는

손화철 교수 : 법학부가 교만하다 못해서 liberal arts까지 자처를 하는구나 우리동네까지

Page 8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83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막 들어오는구나 굉장히 웃긴다. 그런 생각을 처음에 했어요. 그런데 또 4학년 2학기가 되어서

학생이 와서 ‘법을 안하겠습니다’. 이런 것을 바란다고 하셨는데, 별걸 다 흉내를 내는구나. 그런

일은 철학과에서 비일비재로 일어나요. 철학과 학생들이 집에서 가출을 하고 철학과에 들어와서

서른명 중에 스물아홉명이 교수님한테 ‘저 철학공부 하려고 했는데 그만둡니다.’하고 나가요.

철학과에서 늘 일어나는 일인데 법학부에서는 안일어나요. 왜 안일어날까. 그렇죠. 왜 안일어날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게 법학과 liberal arts의 차이일거예요, 아마. 처음에는 그렇게, 참 진짜

해도해도 너무한다. 별 흉내를 다 내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마지막이 되니까 어떻게 되냐면

law as liberal art가 약간 반성문식으로 돼서, 우리가 말도 너무 어렵게 했다. (좌중 웃음), 법학자도

많이 잘못했다. law as liberal art는 사실은 기존의 liberal arts를 먹겠다는게 아니고 사실은 우리도

좀 잘해보겠다. 그럼 나는 왜 굳이 law as liberal arts라고 해야되는가. 그냥 law를 law답게 잘

해야되겠다. 그렇게 하면 될 것을. 제 생각에 저는 일단 지금까지 감동하는 분위기여서 분위기를

깨는게 철학자의, 아 그얘기도 있었죠. 맨 처음에 당황했던게 법을 아는 인문학자예요 (좌중 웃음)

이국운 교수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손화철 교수 : 저로서는 굉장히 제가 스스로 난 사람이라고 생각을 안하기 때문에 저는

법을 몰라서 low level이라 생각한 적은 없는데 왜 법을 모르면 low level이 될까. engineering을

모르면 괜찮은가. 저는 만약에 기회가 주어지면 기계공학과에 가고싶거든요 법학부에 갈 생각은

별로 없어요, 왜 하필이면 법이 들어와요. Engineering as liberal arts는 왜 안되는가 거기서는 뭐

감동이 없나. 한번 생각을 해봐야되요. 제 생각에 argument하기 위해서 한다면 liberal arts를

규정하는 것은 신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비로움. 그 이야기는 뭐냐면 법전을 이렇게 펼쳐보면

신비롭죠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그 신비 말고 문학과 역사와 철학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를 계속해서 내어놓고 그것을 내어놓음으로써 갖는 기쁨이 있어요. 반면에 liberal arts가 아닌

것은 항상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을 해요. 그 대표적인 예가 뭐냐면, 아까 한 단어에 한가지 뜻만

하려고 하는. 가장 simple하게 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게 제 생각에는 Law as

liberal arts는 조금 힘들것 같아요. 신비가 있어야되는데, 자연과학에서도 공학에도 마찬가지로. 제

느낌에는 이건 제가 아직 low level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는 법학이 engineering과 더

가까운가, 철학에 더 가까운가라고 생각하면 아직까지는 많이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아까 또

말하기를 왜 law는 법이 왜 liberal arts의 레벨로 내려오지 못하는가. 그게 아니라니까요. liberal

arts에 이르지 못한거지, (좌중 웃음) 이게 중요하거든요 Law에서 과연 신비를 바로 알 것인가.

궁극적인 그 인간이 풀래야 풀 수 없는 신비를 발견하려고 하는 것인가 신비한 인간의 삶을 이렇게

이렇게 규정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을 해 봤을 때, 제 생각에는 해결에 좀 더

Page 8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84 2009년 가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가깝지 않은가 그렇다면 law as liberal arts는 너무 큰 꿈을 꾼게 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국운 교수 : law level 하고 low level하고 두개가 상당히 겹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인것 같아요. 법은 전통적인 liberal arts에 비해서 근본적인 한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은 문제를 해결한다는거예요. 법은 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살인법으로

규정하고 처벌하고 죽어버린다는. 두사람 사이에 두 남녀 사이에 아직 애정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미스테리어스하게 남기지 않고 그걸 이혼을 선언해버리는. 잘못은 양쪽다 했지만

51대 49, 그러면 51. 잘못하면 liability를 인정하고 그에게 물어주라 라고 인정을 해버려요. 그 법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법은 폭력을 동원해서 그 명령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은 이빨이 있습니다. Law has teeth. 아담슨 홉의 말입니다. 법은 sanction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전문적인 liberal artist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법은 언제까지나 테크닉으로 다시

물러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말로 번역을 할

때 ‘기예’라 한거예요. 기예.

어떤 의미에서 법은, 전통적으로 법은 전통사회에서 두가지 레벨에서 가르쳐져왔거든요.

하나는 판사의 레벨이고 다른 하나는 중인의 레벨에서. 판사가 결정을 하면 중인, 형방, 아전이

그것을 실천합니다. 지금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무리 그렇게 해봐야 결국 철학자의 레벨에는

올라오지 못하고 철학자들은 여전히 고민하고 argue할 거리가 남아있는데 너희들은 중인 법률가가

되서 사람 죽이러 가지 않느냐 그 점에 있어서는 상당히 저질이다 그렇게 하신 것으로 이해하는데

맞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법은 저질이에요. 그렇기때문에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이 로스쿨에 가고

법률대학원도 가고 법률가도 되고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더 근본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책임지지 않는, 코델 슐튼 교수님의 last

name, Schulten, 이 어원을 쫓아가자면 schult에서 온 말인데, 그 독일어 어원이 ‘죄책’이라는 뜻도

있고 ‘책임’이라는 뜻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교수님 처음에 코델 이라는 first name에 뜻은 요전에

배웠고, 그 전에도 선생님이 슐튼 씨라는 것을 알고, 아 이분은 크리스쳔 법학자일수밖에 없겠다

생각했습니다.

법은 근본적으로 책임을 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률가는, 제가 보기에는 전문적인

liberal artist 들에게 문제를 던지는 사람이에요. 그 문제를 푸는 사람. 던져진 문제를 푸는 역할을

하는 사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대화. 이론에 영역에 계신 분들하고 practice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 하고 법률가들은 주로 practice의 영역에 있지만, 때로는 Law as liberal art라는 위치를

Page 8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85

기독교인(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

가지고 조금 더 이론의 영역에 들어갔다가 다시 문제들 속에서 화들짝 놀라서 practice로 돌아오고

다시 오는. 근데 흥미로운 것은 실제로 이 역할을 누군가는 해줘야 세상이 돌아가는데 그 역할은

철학자들은 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반격을 한건데. (좌중 웃음)

자 오늘 더 덧붙일 이야기가 있습니까? 오늘 아주 제가 예상한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토론이 된 것 같고 사실 이렇게 법학자들, 법공부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이야기를 두시간 넘게 진행해 보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데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오늘 굉장히 좋은

경험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있어서 조금 뿌듯함이 있습니다. 오늘 했던 이야기들 생각들을 모아서

우리 법학부나 법률대학원이 법을 가르치고 공부하는데 방향을 잡는데 조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요. 저는 학문과 신앙 연구소장으로 오늘 이 모임을 준비했는데 학문과신앙연구소에서도 이

법에 관한 조금 더 근본적인 성찰에 관해서 앞으로 기회가 닿는대로 노력할 것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특별히 오늘 informal translator로 고생을 많이 한 우리 목영훈 군에게 박수한번

하겠습니다. 그리고 why don't we invite Cordell schulten, and please bless us,

Prof. Cordell Schulten : Our gracious God, Heavenly father. thank you for your

goodness to us throughout this evening, thank you for the opportunity that we have had your

children as students of the law, students of human life, and questions that in front of us to come

together and to speak and to listen to consider how we might better pursue the calling that you

have up on our lives. So we thank you for the opportunity with have to engage in conversation

and discussion and we prayed helped us all to be a better listeners, to one another, better

listeners to you. And so as you were continue to work within us, form us to your servants, your

faithful followers to serve you. to live you, and to serve others to show to love others as you

have loved us. So we seek your blessing now. a part of evening, we pray with your grace,

mercy and peace. would be upon us through your son, our savior, and we thank you in Jesus

name. Amen.

Page 8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8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9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9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9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9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91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Protestant worship as Ritual

오석관 영상정보실

2009. 11. 26

이국운 교수 : 오늘의 주제는 ‘예식으로서의 개신교 예배’입니다. 영어로는 Protestant

worship as ritual. 여기 아마 예식이라는 말이 무슨 뜻으로 쓴 걸까 좀 생각을 하셨으리라고 봅니다.

제가 그냥 만든 말인데요, ritual에 해당하는 한국말이 뭐가 있을까, ‘의례’라고 번역을 했는데,

의례라는 말 속에 제가 뜻하려고 하는 바가 잘 담기지 않아서 굳이 조금 비틀어서, 결혼 예식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예를 갖추어서 누군가를 만나거나 어떤 모임을 한다고 할 때 그때

우리가 쓰는 말로 '예를 갖춘다‘고 뜻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ritual을 ‘예식’이라 번역을 해봤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프로테스탄트 신앙 속에서 예배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

왔습니다마는, 제 생각에는 그 많은 가르침이나 깨달음들이 한 방향으로 방향 지어졌던 것은 아닌가,

무슨 말씀이냐 하면, 우리가 교회에서 주일날이나 다른 날에 공적으로 함께 드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그 예배 속에서 늘, 고린도성경에 사도바울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성전'이 함께 모여 있는 그게

성전이 아니고, 그 건물이 성전이 아니고, 신자들 각각이 하나님의 영을 모셨다고 하는 의미에서

'거룩한 성전', 또 그 신자들의 연대가 또 교회이고 그렇게 배웠지 않습니까? 예배도 꼭 마찬가지로

주일날 11시쯤에 함께 드리는 그 공예배만이 예배가 아니고,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는 모든 삶의 행위들이 다 예배이다. 그래서 유명한 말씀, 거룩한 산 제사로

너희 삶이 돼야 한다, 이런 말씀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 생각은 결국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하나의

ritual로 드리는 그 공예배에서 출발해서 우리의 삶을 향해서, 그 국면들을 향해서 좀 진출하고

나아가는, 말하자면 발산하는 그런 측면의 이야기들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 그 출발점에서 너무나 형식화되어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어서 카톨리시즘에 대한

반대에서 출발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도 해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오늘 모임을 기획한 사람으로서 오늘 이 시간만은 좀 방향을 바꾸었으면

Page 9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92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합니다. 우리의 삶의 국면 국면들에서 다 우리가 거룩한 산 제사로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예배로

드리지만, 그와 같은 우리의 삶이, 주일날 드리는 공예배라든지, 채플이라든지, 몇몇 사람이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라든지, 그 예배라고 하는 ritual이라고 하는 그 형식 속에 얼마나 아름답게 담겨

있는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개신교 예배를 드리면서 어떨 때는 '과연 내가

하나님 앞에 예를 갖추어서 나아가는가'에 관해서 좀,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여러 번 있습니다.

절에 가면, 석가모니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 오체투지를 하면서, 땅바닥에 엎드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사도 베드로께서 예수님을 처음 만나서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장면, 땅에 엎드리는 모습. 제가

어렸을 때는 전 개척교회 담임목사이신 아버님 밑에서 컸는데, 저희 교회는 착석이 아닌 곳이어서,

예배시간엔 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근데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서는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경우는 있습니다마는, 무릎 한번도 꿇지 않고 다리 꼬고 앉아서 드리지 않는가. 과연

하나님 앞에 우리가 마음과 몸을 모두 예를 갖춰서 나아간다고 하는 그 부분에 관해서 우리가 너무

많은 부분을 잃고 있지는 않은가 라는 생각을 했고요. 여기 모신 네 분들에게 각각 이런저런 기회에

우리가 좀 방향을 바꿔서, 그 동안에 발산하는 쪽에서 예배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신앙을 발전시켜

왔다면, 이제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수렴하는, 우리 삶을 ritual 속에 담는다고 하는 차원에서 이야기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말씀을 드렸고, 여기 계신 네 분들께서 허락을 해 주셔서 이 자리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자, 오늘 모신 네 분 선생님들 여러분 앞에 소개하겠습니다. 이게 사실 다 잘 아는

분들이라서 소개하는 게 좀 그런데, 맨 저쪽에 우리 학교에서 제일 늙은 학생 되시는 황영호

목사님이십니다. 황 목사님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셨고 벤쿠버에서 신학공부 하시고, 여러분들

아시죠? 한국에 오셔서 여러 가지 사역을 아름답게 하시는 덕택에 아이가 이제 두 명째 뱃속에

들어있다 합니다.

김영섭 교수님 부총장님이신데, 이 자리에 귀한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김영섭 교수님은

목사님이시기도 하고요, 연세대학교 졸업하시고, 미국의 앨라배마에서 학위 하시고 한국의

지리정보시스템을 먼저 수입하셔서 여러분들 모두가 지금 위치추적 당할 수 있고, 네비게이션 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드신 박사님이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제가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는, 어떨 때 보면, 제 친동생이 독일에 가 있는데, 내 동생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는, 노래 잘 하는 조준모 교수님. 조준모 교수님께선 중학교 때까지

한국에 계시다가, 캐나다로 가셨고, 토론토 대학에서 공부하셨고요, 저희 학교 오셔서 가수로서, 또

선생님으로서 열심히 섬기고 있습니다.

Page 9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93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이문원 교수님께서는 성균관대학교에서 공부하시고 또 미국에 가셔서 여러 가지 다양한

연구를 하셨는데, 연극연출만 하신 걸로만 알고 계시지만, 사실은 신학 공부도 하셨고요, 그래서

오늘 여러 가지로 귀한, 감독의 측면에서 과연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좀 뭔가 빠진 데가 없는지

귀한 말씀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한 10분 정도씩 황목사님부터 이야기를 하시는 게 입체적이

되겠다 계획을 했습니다. 황 목사님부터 시작하시겠습니다.

황영호 목사 : 감사합니다. 준비했을 때는 15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더 하셔도 됩니다.) 이

15분 다음에 더 하라고 하면 제가 한 2시간을 준비했는데, 근데 사실 예배란 주제는 우리가 몇 십

년을 걸려도 엄청난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예식이라는 것은 그 예배를 우리가 어떻게 제일 잘 할

수 있을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모였을 때. 그런데, 개인적으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배하는

것과, 우리가 모여서 예배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예배를 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였을 때는 어떻게 제일 잘 갖춰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너무나도 큰 질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 드리는 모습이 미숙할

모습이 있을까 했을 때, 분명히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임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 하나님이 기쁘게, 우리가 모였을 때 하나님 기쁘게 하는 예배를 더 잘 드릴 수

있을까? 그래서 제가 몇 가지 중요한 걸 말씀 드리고 싶은데, 예배의 핵심이고 제일 중요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표현, 우리의 문화. 우리 가정은 이렇기 때문에, 이 음악이 내가 좋기 때문에,

이것이 내 감정을 만지기 때문에 핵심이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중요하십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인 이유는 하나님. 우리를 모이게 하시고,

하나님 때문에, 그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모임도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Individual Personal Communal Worship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이 예배란 단어는 엄청난 큰 단어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계속 더 자라야 되고,

완벽한 예식은 없는 것 같습니다. 더 중요한 건, 완벽한 마음으로 해야 되는데 그것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예수님 은혜로 얻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잠시 30초 짧은 역사를 얘기하자면, 예배는 하나님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자마자 하나님을 인식하고 예배가 나옵니다. 주권을 인정하고. 예배란 단어는 여러

표현이 있지만, 그 표현 중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엎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숨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그러니까 ritual 라는 단어는 ‘our work’라는 뜻입니다. 우리 온 삶이 주님께 드려진다는

Page 9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94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의미입니다. 그래서 할 수밖에 없이 예배는 우리가 주일날 모여서 한 시간 반으로만 하면

큰일납니다. 온 삶입니다. 그렇지만, 같이 모였을 때 우리가 어떻게 제일 잘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가 예배가 이제 유대인들이 예배를 많이 symbolic하고 temple 워십을 많이 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 했으니까.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오시면서 이를 분명히 했습니다. 어떤 자리가 아니고,

영으로, 진실로 할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임재를 우리 마음에 두시고 공동체에 계시고

교회를 하나님 몸으로 섬기시고. 근데 이제 제일 처음 부분의 예배는 신약에서 보면 제일 좋습니다.

Very organic. 신약에서 봤을 때는 기쁨이 있었고 나눔이 있고 떡 뗌이 있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것이 있고 찬양이 있고, 그래서 몇 가지 말씀이 있는데, ‘Let the word of Christ dwell in you richly

in all wisdom; teaching and admonishing one another in psalms and hymns and spiritual songs,

singing with grace in your hearts to the Lord(골 3:16). 그래서 말씀도 있고, 감사도 있고, 찬양도

있고, 나눔도 있고. 아니면 1 Corinthians 14, What then shall we say, brothers? 그거예요. When

you come together, everyone has a hymn, or a word of instruction, a revelation, a tongue or an

interpretation. All of these must be done for the strengthening of the church(26절). 같이 모였을

때 은사도 있었어요. 그리고 찬양도 있고, 말씀도 있고. 그런데 Acts 20장을 보면, 1st day of the

week, 만났을 때 사도바울이 밤 새면서 가르쳤어요. 그렇게 보면 가르침이 굉장히 중심적인 것

같아요. 예수님도 모였을 때 가르침이 많았고,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만났을 때는 Apostolic teaching.

사도들의 가르침, 그리고 섬김, 나눔, 뭐 그런 것이 신약에서는 그렇게 나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house church. 집 안에서 모여서 만나고, 말씀 보고, 읽고, 찬양하고, 이런 모습들에 힌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 2, 3세기 때에는 로마 문화와 만나면서 약간 formalized ritual이 많이

생겼어요. 근데 그 ritual 핵심은 성찬식이 굉장히 중요한 자리를 잡아서, 그것이 이제 가톨릭

교회까지 갔는데, reformation이 나올 때는 신학적인 문제도 가지고 있는데, 가톨릭에서 얼마까지 그

문제가 진보가 됐냐 하면, 교회는 하나님 백성들의 교회가 아니고, 조직적인 Catholic government가

교회였고, 예배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다시 죽고 다시 그것을 replay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짜

피가 되고, 진짜 몸이 되고,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죽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다시 경험하는 게

예배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진짜 그것이 신학적으로 옳다면, 무섭죠 예수님께서 또 오늘

죽으시니까. 그게 핵심적이라서 The symbol became the essential part of gather worship.

그리고 목사가 아니고 priest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그걸 미리 하는 역할을 해서

사람들에게 이걸 나눠주면서 구원을 다시 주는, became sacrament that offer grace. 그래서

역사적으로 볼 때는 성찬식을 안 줬기 때문에 온 나라가 지옥 간다고 믿는 역사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Catholic worship은 좋은 점도 많아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먹고 느끼고

기억한다는 의미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예배 안에서는 ritual이 굉장히 symbolic한 점이

Page 9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95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많았습니다. 그래서 손짓도 하고, 옷도 여러 의미 있는 옷, 여러 제스처, 향도 뿌리고 물도 뿌리고,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굉장히 high symbolic했죠. 그것도 약간 중요했던 것은, 그 때는 성경을

읽지 못하고 말로 이해를 못하니까 그림으로 보여주겠다 하는 이런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reformation(종교 개혁)이 오면서 강조했던 것이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이

있어야지 우리가 하나님을 말씀 안에서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경험하고, 말씀에 반응을 해야지

그것이 올바른 예배다. 그것이 요즘까지 계속되는 reformation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1960년대 목사는 약간 자유된, 성령의 은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반응. 한 노래, 한 노래가 아니고 길게 기도를 할 수 있는 그런 움직임이 있어서 요즘은

contemporary worship service란 것도 생겼죠. 하여튼 그게 짧은 역산데, 제가 예배 부분에서 몇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예배가 무엇이냐 했을 때 이것을 답해야 합니다.

예배의 핵심은 이것인 것 같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하시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예배는 진리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복음과 Who he is and what he`s done 그걸 계시를 하고 보여주면 그걸

우리가 알고 그것을 우리 삶으로 반응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revelation and response.

그것이 예배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로마서 12장도 Therefore in view of God`s mercy, offer your

life.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mercy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삶을 드리는 것이고, 그리고 신명기

6장(4절), Hear O Israel: The Lord God is One who rescued you.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한 분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다음에 마음으로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분을 예배 드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죠. 아시는 분을

예배해야 합니다. 이사야 6장에서도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고 그의 거룩하심을 알고, 거기서 반응이

고백하고 회개하고 섬기고 자기 삶을 섬기고. 그런 movement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실로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거기에 반응하는 것이 핵심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worship은 개인적으로 살아있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같이 모여 있을 때 살아 있는

하나님의 계시와 반응을 같이 표현을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lifestyle worship이 더 중요할까요?

아니면 우리가 표현하는 ritual이 더 중요할까요? 구약을 계속 보면, 하나님께서는 ritual을

좋아하시지만, 거기에 알맹이가 없으면 안 좋아하셨습니다. 이사야 1장도 그렇고, 미가서 6장도

그렇고 God does not desire just mere formal ritualism. He wants the content.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둘 다 원하시지만, 하나님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lifestyle과 우리의 마음으로

Page 9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96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하나님을 진정하게 예배 드리는 것을 먼저 원하시고, 삶이었습니다. 그 삶을 포함한 우리 표현을

주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worship은, 제가 요즘 아쉬운 것은, 요즘 사람들이 예배라는 것에서 그저

구경꾼이 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 모였을 때도 우리 마음과 정신과 우리 온 삶이, 생각과

눈과 코와 몸이 주님께 엎드리고 기도하고 찬양 드리는, full participation of person and

community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듣고 반응하고, 듣고 반응하고 보고 반응하는

것이 worship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가 revelation하고 respond할 때는 우리가 예식이라고 했는데, 제가

예식을 굉장히 많이 들여다봤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주일날 우리가 모였을 때 카톨릭이든 정교회든

어떤 교회든 몇 가지의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것은 적어도 기도가 있고, 적어도 말씀 읽는 것이 있고,

그리고 노래가 있고, 노래는 한 사람이 부르던지 같이 부르던지 성가대가 부르던지. 노래가 있고,

그리고 어떤 가르침이 있고, 또 헌금이 있고 성찬식이 있고. 그것이 여러 교회에 있습니다. 거기에

좀 더하면 creed, 우리 믿음 고백도 포함될 수 있고, 아니면 영적 은사로 예언 이런 것도 있을 수

있겠고, 그리고 침례 세례, 아니면 죄의 고백, symbol, 향이나 벨 같은 것들, 아니면 testimony,

간증, 아니면 침묵 이런 것들을 표현하겠죠. 그런데 그것이 몇 백 가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한 범위에서 어떤 교회는 더 비중을 두던지 아니던지 그 차이이지, 제가 말하는 것이 예배라는

것은 어떤 역사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겁니다. 분위기가 엄숙할까, 기도를 길게

할까, 노래를 한 사람이 할까, 노래를 길게 할까? 그러나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죠. 그래서 가르침, 말씀 읽고, 믿음 고백 그런 게 있겠죠. 성찬식도

하나님께서 revelation, 구원에 대해서. 그리고 반응은 우리의 기도와 고백과 찬양 그런 것들로

반응을 해야겠죠. 그런데 같이 반응하는 것이 예배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한 예식의 형식, 그러니까 there is style, and there is substance.

그릇이 있고 거기에 담는 알맹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알맹이가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알맹이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우리의 감사와 믿음과 사랑과 고백, 서로의 사랑.

그렇기 때문에 그 알맹이를 어떻게 잘 표현할까 하는 껍데기가 필요합니다. 껍데기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예배를 어떻게 잘 담을 수 있을까? 그래서 there is a style and substance, there is form

and content.

그래서 제가 믿는 것은 여러 style과 여러 content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진정한 예배가

Page 9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97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여러 가지 다양한 형식에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기도하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

우리 안에서 어떤 형식이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영광과 거룩한 진실의 복음을 잘 받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우리 공동체 안에서 잘 담을 수 있을까? 그것이 질문이기 때문에 오늘

만났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여러 형식이 가능하고, 그런데 이 형식은 나쁘고 이 형식은 좋다 라는

논리보다, 이 형식의 좋은 점이 무엇이 있을까? 이 형식의 좋은 점은 무엇일까? 여기는 또 좋은

점이 무엇이며 위험한 점은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위험한 점은 우리가 지혜롭게 잘 피하고

걷어내면서 좋은 것을 취해서 한동에서 좋은 주님께 진정한 신념과 진정으로 다 같이 드리는 그런

form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근데 어떤 곳은 또 form이 없대요. 역사에 있습니다. 퀘이커 그런 분들은 form을 싫어해서

나왔는데, 아마 싫어해도 form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 분들도, 언제 만날래? 주일 7시. 누구

집에서? 둥그렇게 앉을래 길게 앉을래? 이런 식으로 form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form만

있고 주장하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안 좋아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form, 좋은 예배를 담으려고 우리가 계속 연구를 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영섭 교수 : 목사님께서 신학적인 입장에서 예배에 대해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국운

교수님께서 저를 부르실 때 제가 나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국운 교수님께서 보태라고

하시니까, 뭐였냐 하면요. 한동대에서 어떻게 예배가 시작되었는지, 그 역사적인 얘기를 좀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거라면 제가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 몇 가지 여러분께 말씀 드리면 좋을 것 같아요.

95년도 1월 달에 교수님들이 대부분 모였습니다. 그때 한 30명 오셨고요. 그 때 1월

초인데, 우리 학생들 처음 95학번 모집하고 그런 때였습니다. 입시 철이었고. 그래서 교수님들이

초에 모였는데 새벽기도를 시작하게 되었고요, 매일 기도했고. 총장님도 그 때 오셨죠. 그렇게

기도회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가 생겼습니다. 교수님들이 포항에 모였는데 갈 곳이

없는 거예요. 주일에 가실 교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어느 교회 갈지도 모르고

포항 사람 하나도 없고. 그래서 저희들이 자연대 4층 같은 빈 강의실에 모여서 같이 예배

드렸습니다. 기도 하고. 그 때 한 30분 모였는데 목사님이 한 분도 안 계셨어요. 참 이게 ironic하죠.

기독교 대학이라고 시작했는데 목사님을 초빙해야겠다는 생각이 누구에게도 없었어요. 저도 그

당시에는 목사님이 아니었고요. 그래서 우리끼리 이제 예배 드리고 찬송 하고 해서 첫 예배를

감격적으로 드렸습니다. 마침 제가 그 당시에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소문이 나서, 저보고 다들

맡으라고 하셔서 할 수 없이 제가 예배도 인도하고, 기도회도 인도하고 그 다음에 교수님들 가운데

달란트를 가지신 분이 많더라고요. 현창기 교수님 자리 인도 하시고, 또 여러 분들이 협력 해주셔서

Page 10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98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예배가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개학을 했어요. 3월 달에 개학을 했는데, 그 때도 목사님이 안 계셨어요. 한 학기

내내 안 계셨어요. 그러면 당장 채플은 준비해야 하는데, 채플은 언제 할 거냐? 예배당도 없었습니다.

효암관은 한참 뒤에 생겼고요. 그래서 큰 교실, 본관 4층 운동장 보이는 그 쪽, 지금은 아마

컴퓨터실일 겁니다. 거기가 복도 합쳐서 400명 들어가는 강의실이었어요. 거기 한 번 채워지면

빈틈이 없을 정도로 꽉 찼습니다. 채플이 언제 할 거냐 하는 문제도 있었어요. 채플은 수요일

아침이다. 왜냐하면 그 주 중에 가장 중심 되는 날이잖아요. 그래서 우리 삶의 중심. 우리가 한동대

온 이유가 예배하기 위해서 온 것이잖아요 사실. 미국 대륙을 발견하고 선교사들이 도착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예배 드리고 교회 짓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저희들이 처음에 한 일이 그거였어요.

교수님들이 모여서 새벽기도 하고, 그 당시에는 5시에 했습니다. 예배 드리고 채플이 시작되고 주일

예배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벽 기도가 5시에 매일같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주일, 여름 방학

때도 하루도 안 빠지고 계속 새벽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을 안 모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구성원들이 너무 힘든 거예요. 저도

도저히 끌고 갈 수 없고, 또 사실 예배를 드릴 때 목사님이 있어야 하잖아요. 신학적인 부분은

나중에 말씀드릴 수도 있겠지만요. 그래서 목사님을 수요일마다 외부에서 초빙을 했습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의 지원을 받아서 수요일마다 목사님들이 한 분씩 왔다 갔다 하셨어요. 어떨 때는 주일도

목사님을 초빙했고요. 그래서 2학기가 돼서야 우리에게 정말 전임 목사님이 필요한 것을 서로

인식하게 되고, 필요하게 되고 그래서 온누리교회에서 파송 받았어요. 첫 목사님이 부임하셨는데요,

6월 달인가 오셨는데, 오시자마자 다시 또 훈련 받으러 3개월 가셨어요.

또 목사님 없이 1학기와 여름방학이 끝났습니다. 그래서 한 10월쯤 돼서야 그 분이 다시

오셔서 그 때부터는 온전하게 목사님 한 분 계시고 교수님들 같이 모여 있는, formal한 교회가

성립이 되고, 주일 예배, 수요 채플 등등 해서 그렇게 1년이 지났습니다. 근데 그 다음 해에 또

400명 학생들이 들어오잖아요. 학생들이 너무 많아졌어요. 그래서 주일날 한 번에 못 드리고 수요일

날 두 번에 나눠서, 96년부터 채플이 시작됐어요.

근데 2학기 때는 도저히 5시에 새벽기도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걸 6시로

바꿨어요. 교수님들이 너무 힘드셔서. 그런데 6시에 했는데도 잘 안 나오시는 거예요 학생들도 잘

안 나오고. 여러분들 요즘도 그렇잖아요. 학기 중간에는 못 나오잖아요. 그래서 6시로 바꿨다가

그래도 안 나와서 7시로 바꿨습니다. 7시로 바꿀 때 제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15년 전인데,

Page 10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99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이걸 새벽기도라고 부를 수 없다 생각해서 한동인의 첫 시간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7시에

하는 한동인 첫 시간이 아마 95년 1학기 말부터 시작됐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한동인의 첫 시간이 한

10여 년 동안 진행이 됐고요. 그 다음에 최해일 학생이 혜성같이 나타나서 새벽기도 5시를

부활시켰어요. 제가 그 때 너무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보다 낫다, 믿음이 크도다 생각했어요. 그렇게

새벽기도가 부활되고 계속되고, 7시 한동인의 첫 시간 계속되고, 또 5, 6년 전부터 한동인의 끝

시간도 새로 시작돼서 진행이 됐습니다.

우리 한동대학교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정말 기도로 한동을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채플이

중심이었고요, 대학 교회가 중심이었고요, 언제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공동체가 전부 다 함께

받을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진행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저희는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 가지 기억하는 건요, 95년 1학기는 축제를 안 했으니 2학기 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 때

제가 첫 시간을 진행하면서 학생들과 말씀을 나누는데, 그 때 창문 축제라고 이름 지었잖아요? 그

학생을 기억합니다. 어느 날 아침에 첫 시간을 끝내고 4층 강당에 앉아 있는데 어떤 학생이

헐레벌떡 뛰어 옵니다. 정승희 학생이. 그 로고송 작사한 친구 있죠? 그 친구가 2학기 때 축제

이름을 지었대요. 노래 부르다가 창문을 보고 창문이라고 외치면서 뛰어왔대요. 그래서 그 날 아침에

저와 만났는데, 그 날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여기 제가 찾아 봤는데요, 여호수아입니다. 그 날 아침

이 말씀으로 우리가 한동인의 첫 시간을 나눴거든요. 그리고 그 학생은 창문이 이 첫 축제의

이름이라고 뛰어왔습니다. 그 때 이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수아서 2장 21절입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주잖아요? 숨겨주고 창문에 붉은 밧줄을 내려 놓아라, 그러면 너희 집을 구해주겠다 약속을

합니다. 그 때 이 말씀이었어요.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그래서 저는 축제 때만 되면 이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우리 학생들이 가을마다 창문

축제를 하는데, 그 창문에 깊이 담긴 뜻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어떤 ritual 같은 것이 그런 것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이 창문 축제 하면 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이 창문 축제 하는데 그

당시 95년도에 정말 붉은 밧줄을 우리 학교 어디선가 내려놓는다면 얼마나 멋질까 그게 그 날

아침의 말씀이었는데.’ 그런 상상을 저 혼자 합니다. 그러면서 예배를 생각해요. 예배 때 정말 우리가

ritual, 어떠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예식이 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채플은 보통 교회와는 다르잖아요? 특별한 목적이 있는 예배 장소거든요. 그러한

채플에서도 우리 학교는 좀 특이하게, 세족식을 한다던가 혹은 성찬식을 곁들여서 한 학기에 한

번이라도 같이 하면, 예수님을 강력하게 상징하는 의미가 더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Page 10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00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봅니다. 그래서 창문 축제를 생각하면서 ritual로 붉은 밧줄을 내려 놓는 상상을 한 번 해보고요,

채플을 드릴 때 성찬식을 한 번 해 보면 어떨까, 세족식을 한 번 해 보면 어떨까, 그런 ritual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간단하게 한동대의 채플과 예배의 역사를 말씀 드렸습니다.

조준모 교수 : 저는 오늘 이 마이크에 에코가 많이 들어갔잖아요? 그래서 제가 생각이 든

게, 여기 되게 어색하다, 마치 노래방에 와 있는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그래서 사실 제가,

저는 이제 기타를 메고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평신도로써 그런 일을 한 것이 20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런 일을 하면서, 예배에 참여를 하면서 간혹 이런 느낌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내용은 좋은데 담긴 그릇이 굉장히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이죠. 지금 이야기하는

이런 분위기와 에코가 안 어울린다고 느끼는 것처럼, 그런 것들을 경험했던 것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같이 질문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두 가지 경험을 말씀 드리면, 불과 1~2년 전에 아주 유명한 찬양 인도자가 찬양을

인도하는 교회에서 참 좋은 음악이 있었습니다. 국악을 접목해서 찬양을 인도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예배 드리기가 참 어려웠어요. 찬양 드리기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일단 제 목소리를 제가 들을 수 없는 음향이었습니다. 찬양 인도하시는 분이 참 노래를 잘

하시는 분이셨어요. 말씀 드리면 누군지 다 아실 만한 좋으신 분이에요. 그런데 그 분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이었어요. 그뿐만 아니고 그 분에게 핀 조명이 떨어져 있었어요. 나는 공동체 예배에 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마음가짐이 있었는데, 자꾸 그 분위기는 제가 편안히 앉아서 그 분을 쳐다보고

있어야 될 것 같은 분위기를 경험하고 참 어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2008년 여름에, 아주 유명한 워십 컨퍼런스에 가서 제가 찬양 인도한 적이

있었는데, 어노, 무슨 컨퍼런스에서, 근데 제가 그 컨퍼런스에 거의 매년 참여해서 인도하고 음반을

만들어서 판매를 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하고 있는데요. 2008년에 찬양 인도하던 제가 되게 힘든

경험을 했습니다. 뭐냐 하면, 저는 나름대로 너무 젊은이들만 소유하는 예배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의도적으로 찬송가를 많이 편곡해서 찬양 인도하려고 했는데, 제가 처음에 반주가 멋있게

나오니까 앉아 계시던 분들이 앞 쪽으로 막 나오셨어요. 가만 보니까 뛸 준비를 하면서 나왔는데, 첫

곡이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찬송가를 아름답게 편곡한 것이었는데, 그래서 어쩌려고 저러나

그러다가 그 분들이 그래도 앞에 나와서 선 상태로 예배 드리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을 가졌으나, 그

기대감을 저버리고 그 분들이 그대로 다시 돌아가시더라고요. 찬양을 인도하고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 소리가 나오는데, 되게 불편한 박수소리였습니다. 이게 하나님께 드리는 박수 같지 않았고,

니들 참 잘했다. 그래서 제가 한국 교회에 소위 우리가 ‘경배와 찬양’이라 부르는 contemporary

Page 10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01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worship에 대해서 저 자신도 책임을 느끼고 고민을 하는 계기가 여기저기서 많이 있어서, 오늘은

그런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을 보면요, 제 경험도 마찬가지고 우리 전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과

만남을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실제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경배와 찬양 운동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수동적인 예배,

개신교에서의 말씀 선포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아까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선포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예배를 자꾸 관망하게 되고 예배를 보게 되고, 예배를 드리지 않게 되었는데, 이런

새로운 운동으로 인해 예배를 드리는, 참여하는 발전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배와 찬양이 발전했었던 여러 가지 요인들 중에 몇 가지를 짚어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대부분 교회에서 소위 말하는 contemporary band를 사용하죠. 음향 시스템을 놓고.

이런 것이 어떤 예배의 개혁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기보다 많은 경우에는 이것이, 먹힌다. It works.

되게 실용적인 측면에서 교회에서 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예배를 섬기는 팀,

소위 말하는 찬양 팀을 세울 때 예배의 신학적인 성경적인 정신을 배우고 훈련하기보다, 그런 것에

앞서서 미리 악기를 구입하고 엄청나게 비싼 음향 시스템을 구입하고. 저는 사실 우리 한국 교회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음향 시스템을 많이 보게 되는데, 저는 너무너무 화려하고 너무너무 돈을

많이 쓰는 음향 시스템을 볼 때마다 너무 놀랍니다. 저것이 정말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근데 그것이 이제,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죠 음향 시스템이 무슨 죄를 졌겠어요? 근데 그런

악기나 음향 시스템을 예배 정신을 심어주기 전에 먼저 구입해서 준비되지 않은 음악 하는 사람들.

교회에는 요즘 음악 하는 사람들만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면이 있었고요.

그리고 이제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contemporary worship song들이 나오는데, 또 한국

안에서도 그런 CD들이 많이 나오고, 대부분 이제 싱어송라이터들이 쓰는 CD는 거의 안 나가고요,

worship CD는 상당히 많이 나갑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그만큼 그 예배 찬양 곡들을 많이

카피한다는 얘기거든요. 실질적으로 가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카피해서 예배를 드리는

경우지요. 어떤 의미에서 예배의 개혁을 위해 개교해서 했다기보다 다른 의도가 있지 않았는가 하는

점을 지적하고 싶고요.

세 번째는 이 contemporary worship에 있어서 예배의 공동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씀들을 하는데,

그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 중에 하나가 신앙의 개인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Page 10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02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인격적으로 personal하게 하나님을 맞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당연히 중요한 것이고, 우리

삶에 있어서도 개인적인 골방의 예배가 꼭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과 동시에 공동체를

이루고 교회를 이루고 공동체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도 동시에 중요한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극히 개인화된 신앙을 갖고 있어요. 성경에는 분명히 ‘너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이러는데 그렇지 않고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순간적으로 해석을 그렇게 하고, ‘너희 가운데 선한 일을 행하신 이가’에서는 분명히 너희,

너희들이라는 말인데, 우리 가운데 선한 일을 행하신 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개인의 삶에

기대하시는. 물론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심하게 신앙을 개인화 하는데, 예배에

있어서도 그런 면들이 자꾸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찬양 곡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 선곡이 함께 드릴 수 있는 찬양이라기보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쉽게 드릴 수 있는 찬양, 그리고 어쩔 때 심할 때는 찬양 팀만 부를 수

있는 찬양. 그래서 마치 한국 사람이 아프리카에 가서 찬양을 인도할 때 국악 찬양을 할 수는

없잖아요? 정말 영적으로 뛰어난 곡이라면서? 거기에서는 그 사람들이 같이, 그들의 음악의 옷을

입고 하나님께 마음을 담아 드릴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것들이 사실은 좀

없었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찬양 팀 만날 때마다 그런 말씀을 좀 드려요. ‘너희들만 드릴 수 있는

찬양은 하지 말아라’ 그래서 공연할 수 없는 음악적 장르가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이지만 사실은 음악적인 문화를 봤을 때는 상당히 다양한 음악적인 문화들이 있는데, 그

문화들을 아울러서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에 중점을 두지 못하고, 마치 2000년 후에 나오는

찬양들만 명작 음악인 것처럼, 사람들이 느끼기에. 새로운 음악이 너무너무 중요해서 새로운 음악을

가르치는 것이 찬양 팀의 중요한 임무가 되어 버린. 어떻게 생각하면 거의 말이 안 되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뭐 특정한 음악인들, 특별히 서양적인 contemporary

음악이, 힐송이라든지 Hosanna integrity라든지, 이런 종류의 음악이 사실은 어떤 세대에는 그것이

자신들의 음악인 장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 혹시라도 그것이 더 영적인 장르라고 생각해버리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마치 옛날에 그레고리안 챈트가 아니면 안 된다. 사실 똑같은 발상입니다.

그리고 공동체 의식이 결여됐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음악의 볼륨에 있습니다. 되게

우스운 얘기일 수도 있는데, 저는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 한국 교회처럼 음악 소리가 크게 나오는

데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직까지 경험은 못 했습니다. 상당히, 앞에서 연주하는 음악이 엄청나게

크게 들리는 것 같아서 드리는 찬양의 목소리가, 찬양 팀들이 마이크를 하나씩 들고. 함께 드리고

뒷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고 우리 목소리가 들리고. 우리가 공동체가 하나의 목소리로 주님께

고백하는구나, 라는 경험을 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 계속 압도당해야 하는 모습을

Page 10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03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보면서 어색한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네 번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적인 관점이라든지 영성이 예배의 의식, 우리가 알게

모르게 만들어낸 이 그릇에 드러나는 것 같은데, 예를 들어서 기독교적인 영성의 실체가 세상과

단절해야만 한다는 오해가 예배에 자꾸 드러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

하나님께서 주신 노동, 그 거룩함과 연결돼 있는 것이 지금 공동체의 예배여야 할 텐데, 예배를 드릴

때 저희는 자꾸 창문을 닫습니다. 열려 있는 걸 보면 자꾸 닫아요 다들. 저희 학교에서도 마찬가지고.

주일 아침에 그 아름다운 자연광이 들어오는데, 물론 눈부시면 좀 닫아야겠지만, 굳이 닫아 놓고

되게 artificial한 조명으로 무대를 비추는데, 저는 그게 좀 아쉽고 어색합니다. 간혹 유럽 같은 곳을

가서 정말 아름답게 지어 놓은 예배의 장소를 볼 때는, 그 분들의 식견에서는 자연광이 떨어지는

것이 너무너무 영적인 표현이라고 믿던 것을, 저는 그런 경험을 해 봤는데요. 어떤 영적인 훈련을 할

때에도 창문을 온전히 닫는 것을 권하지 않나.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알게 모르게 생각하는

영성에 대한 오해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또 하나는, 즉흥적인 것이 곧 영적이다, 아니면 초월적인 것만이 영적이다 라는 그런 생각.

하나님께서는 즉흥적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초월적이시고 질서를 만드신 분이시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질서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질서를 뛰어넘으신 것을 보고도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듯이. 그런데 이제 contemporary

worship의 가장 두드러지는 면모 중 하나가 즉흥성입니다.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상당히 부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즉흥적인 것이 더 영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죠? 우리가 잘 준비해서 기도하면서 계획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안 받을 수도 없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은 즉흥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라고

잘못 formula를 만들 때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well planned된 예배에

대한 거부감이 오히려 있거나, 성령의 의식과 같은 그런 routine한 ritual routine 이게 연결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것에 대한 기본적인 거부감이 자꾸 생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고백하는 교독문 같은 것이 많이 없어졌죠? 성 만찬도 ritual

routine하게 되어버리고, 쓰여진 기도문을 함께 읽으면서 기도 드리는 공동체의 기도문. 이런 것들이

혹시 우리 영성이, 영성에 대한 이해가 되게 즉흥성과 관련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는, 가장 심각한 것일 수 있는데, ‘예배의 이벤트화’, 라고 생각해 봤습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포커스가 하나님이라고 황영호 목사님께서 잘 정리해 주셨는데, 자꾸

포커스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기보다 얻어가는 예배. 오늘 예배 참 좋았다는 것을 충분히

Page 10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04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경험할 수 있고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면, 하나님 중심이라기보다는 예배자 중심, 그리고

예배자라기보다도 오히려 소비자. 소비자로 보는 견해가 점점 많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인데요. 그래서 예배라는 것은,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노동하게 하시고

1일 동안 안식하게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 생활의 리듬. 그래서 제가 열심히 노동하다가 순간 무릎을

꿇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성경 말씀을 읽고. 이렇게 내 생활에 있어서 그 어떤 routine일 수도

있고 아름다운 리듬일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이벤트라는 것은

끝장을 봐야 되는 거잖아요? 그 때 왔을 때. 한 번 예배 보고 죽을 것처럼 끝장을 봐야 되고 은혜를

끼쳐야 되고. 그래서 물론 그 예배를 돕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그 사람들이 도를 넘어서,

예배를 드리는 역할을 하기보다 은혜를 ‘끼치려고’ 하는데, 뭔가 임펙트를 주려고 인위적으로 하기

때문에 상당히 예배가 힘든 경우도 있었습니다. 말씀 교독이 사라졌는데, 이런 좀, 제가 나름대로

개인적으로 다시 recovery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부분이고요.

그렇게 이벤트화가 되어 버리니까 찬양 팀의 위치와 설교자의 위치가 거의 예배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그 비중이 상당히 커지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Physical한 위치도 되게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저는 캐나다에 있으면서 어떤 옛날에 지은 예배당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organist의 위치와 성가대의 위치가 예배 앞에 있지 않고 뒤쪽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It makes sense! 이들은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도록 돕는 위치에 있는, 도우미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구나. 근데 쳐다보고 우리들끼리 왔다 갔다 그것이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점점,

우리는 무대 중심의 예배, ‘무대’라는 말 함부로 쓰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갑자기 드는데요. 사실은

한국에 와서 학생들이 stage라는 말을, 예배 찬양 팀 학생들이 실수로 했는데, 저는 깜짝 놀랐어요.

‘나는 예배당에 stage가 있는지 몰랐는데?’ 저쪽에 무대가 있고, 그것이 중심이 되고, 거기에 조명이

있어야 되겠지만 너무 그들을 보고 entertain을 받아야 될 것 같은 전반적인 set up. 또 지나치게

multimedia한. Multimedia한 게 제가 주일날 앉았겠지만, 자극적인 것에. 음악이나 영상이나 이런

것들.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겠지만, 고민이 많이 되는 부분입니다. 교회 앞에 큰 스크린이 있고,

수십만 명 모이는 빌립 전도 집회가 아니고 2~300명이 모이는 정말 아름다운 예배인데, 목사님

얼굴이 수십 배가 돼서 앞에 나타나니까 이게, 예배가, 예배가 뭔가? 하는 질문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죠. 과연 우리 일상에서의 예배. 묵상하고 침묵하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창조를 음미하고, 이런

것만이 다는 아니겠지만 물론, 그런 예배의 요소와 그 한 시간~한 시간 반 동안에 엄청나게 나를

자극하는 multimedia적인 것들과 연관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배와 전도는 차이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좋은 예배에는 전도의 요소가 담겨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전도가 예배의 주된

Page 10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05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죠. 전도 집회에서는 저는 여러 가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예배는 조금 다를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예배와 노동과 이런 균형 잡힌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벤트적인 예배는 꼭 일을 위해서 힘을 얻어야 되는 예배로 잘못 해석될 수 있다. 예배는 내가

노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가 되지 않기 때문에 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두서없이 이런 저런 질문들을 나눠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문원 교수 : 할 얘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여러 가지 말씀들을 들으며 생각만 더

많아져서 힘드네요 제일 먼저 해 버릴걸? 좀 졸리니까 뾰족하게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황영호

목사님께서 사실 형식보다는 에센스, 그렇죠. 모든 예배가, 우리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나

프로스퀴네오라든지 사하라는 그런 말이든지 전부 다 사실은 우리가 kneel down 하는 거죠

prostrate. 사실은 어떤 예배의 정통성으로 봤을 때는 무슬림들이 시간 정해가지고 하나 깔고 코가

땅에 닿도록 납작 엎드리는 게 피조물이자 죄인이고 구원을 받은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취해야 할 육체적인 자세인 것이죠. 예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하나님 앞에

우리가 공동체로서나 개인으로서 분명히 특별한 관계가 있어야 하겠죠. 아무도 모르는 타자 앞에

그럴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얼굴도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제가 신학교 다닐 때

people in the presence of God. 제목이 참 멋있죠? 근데 사실은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앞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이나 아니면 앉아서 말씀을 경청하는 성도들이건 간에 우리는 모두 사실은

하나님의 face 앞에 하나님의 presence 앞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하는 이런 예배의 기본 자세들.

이런 건 뭐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근데 여기서 조금 더 잘라서 들어가자면,

저희 연극을 가르칠 때 누가 연기 잘하고 못하는가를 다 알거든요. 여러분 TV나 영화를

보면 ‘저건 나도 하겠다’ 그러죠? 그런데 그런 학생들이 이제 수업 들어와서 한 두주 지나면 글 쓰는

학생들도 마찬가지고, 굉장히 겸손해져요. 왜냐면 자기가 그게 안 되거든요. 될 줄 알았는데. 그래서

제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몸이 알 때까지는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말을

어떻게 하면 다 알아요. 차를 멋지게 모는 법은 자기가 멋지게 몰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엄청난

기계덩어리가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기어를 바꾸고 움직일 때의 그 경악은 안 느껴 본 사람은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성경에서도 얘기하는 기네스코와 오이다. 그러니까 인식적인 지식, 차를

매뉴얼을 보고 하는 것과 경험적인 지식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죠? 이 얘기를 왜 하는지

상기하며 말씀을 드리면,

황영호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형식이 무엇이던 간에 우리는 방관자가 되어선 안 되고,

전심을 다해서 반응을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몸이 반응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Page 10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06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이게 사실 굉장히 신체 정신 상관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구약에서도 레위기

1장에서 보면, 제사의 방법도 다르지 않았습니까? 구약에 나오는 출애굽 이전, 아브라함이라든지 그

아버지들의 시대에는 단을 쌓았고, 광야에서 방황하던 그 사람들이 썼을 때는 임시 성막을 지고

다니면서 예배를 드렸고, 그 다음에 솔로몬 이후에 temple이 지어졌고, 그리고 나서 바빌론에

쫓겨가서 유수 당했을 때 70년 기간 동안에는 시나고그라는 게 생겼죠. 그래서 사실은 많은

개신교에서 캐리그마(말씀) 중심의 예배, 말씀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게 어찌 보면 유사한 관례를

찾자면 시나고그와 가장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죠. 그러고 이제 성령이 오시고 사실 우리가 또

소그룹 교회에서의 형태가 아까 황영호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것처럼

굉장히 자유분방 했습니다. House church였기 때문에 찬송시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고 계시도

있고 방언도 있고 통역하기도 했고, 심지어 사도바울의 편지를 읽어주기까지 했겠죠? 그리고

빌립보서 보면 공개적으로 예배 중에 혼나기도 하고, 그 순두분지 순두겐지 정신 차리라 그러고.

거기 굉장히 강한, 왜냐하면 정말 아버지와 같은 리더였기 때문에, 그런 훈계까지도 가능한 그런

공동체 예배가 또 있었다는 것이죠.

그로부터 또, 아까 너무 엄청나서 말씀 못 하신다고 그랬는데 맞습니다. 엄청난 관례들이

있었는데, 문제는 어찌됐건 간에 그 Catholic에서 이어져 온 굉장히 의식화되어 있는 sacrament,

성례를 통해서 나오는 그 일방적인 은혜 그리고 vernacular, 자국어로 성경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정말 크리스천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진짜 일자 무식쟁이에 책을 본 적도 없고 성경을 읽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 저 떡이 예수님 살로 바뀌고 피로 바뀐다고 하니까 그걸 보고서 굉장히

일방적인 수혜를 받은 거죠. 왜냐하면 그 의식 자체가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saving

grace가 정말 그걸 통해서 자기한테 흘러 든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나온 단어가 영어에도 hocus

pocus가, 그게 사실은 라틴어로 있는 게 뭔진 모르겠는데 hocus pocus 비슷한데 그런, 떡이 예수님

살로도 변하고 이런 마술과 같은 것 그게 그 단어 하나가 사실은 일반 민중이 갖고 있었던 어떤

영적인 quality를 얘기한다고 할 수도 있죠.

그러다가 이게 아까 말씀하셨지만 좀 부언을 해보자면,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사실은

가장 필요했던 것이, 정말 성경도 한 번도 읽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줘야 되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굉장히 말씀이 강조되고, 그리고 사실은 이제 퓨리턴이나 이런 쪽으로 가게 되면,

기도서부터 말씀 봉독서부터 사실은 그런 모든 것들이 다 클라이맥스로 sermon을 치게 돼 있습니다.

모든 것이 sermon을 보좌하게끔 형식이 돼 있고, 물론 이 생명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중요한

것인데, 근데 이제 지금 생각을 해 보면, 전 항상 연극을 하면서 헷갈리는 게 뭐냐 하면, 이게

굉장히 그 audience와 performer의 relationship이 상당히 이중적입니다. 예배가, 아까 그 위험성에

Page 10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07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대해서도 조준모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목사님이건 찬양 예배자건 성도건 간에

사실 우리는 모두가 하나의 코이노니아로서 body of Christ가, 정말 주님, 그 worship이란 것도

사실 중세 앵글로색슨에서 나온 worthship이잖아요? 그러니까 가장 가치 있는 우리의 것을 진짜

living sacrifice로 드리는 주체인 거죠? 그러니까 어찌 보면 우리가 performer예요 모두가. 그리고

사실 그것을 흠향하시고 받으시고, 또 받으실 뿐만 아니라 계시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mission을 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정말, 우리 안에 막 운행하시는, 사실 그 하나님을

audience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근사하게 해 보자면.

바로 그거죠 사실. 요한계시록에서 보면 그 마지막 절정이 뭡니까? 정말 모든 싸움과 이런

것들이 끝나고, 그 하나님의 엄청난 영광 앞에 성도들이 끝없이 찬양을 드리는 거거든요. 거의

설교도 없고 전도도 없습니다. 그게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이 끝나면서 종말론적으로 얘기했을 때

우리가 앞으로 영원히, 영원히 이거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인생은 하나님의 먼지 만큼의 길이도 안

되지만, 영원히 드려야 될 예배의 형태가 이제, 결국 우리는 그 쪽으로 지향하게 돼 있는 것이죠.

근데 이제, 가는 동안에 우리가 우여곡절이 굉장히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또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잊어버렸는데요. 저는 몇 가지 예배 형태가 생각이 났어요. 그러면서 우리 한동에, 물론 어떤 형태건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않는다면, 그 형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약간 우리가 뭔가

어그러지고 어색하고 촌스럽고 경직이 됐더라도, 나 하나가 정말 주님을 예배 때마다 만나는 그런

겸손함과, 그런 갈급함이 있다면 또 형식이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되겠습니까?

근데 이제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아무 얘기도 못하는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몸이

알 때까지는 안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한 공동체의 예배 의식은 사실 어떻게 보면 몸을 길들이는

역할을 해 준다는 것이죠. 밖에서 굉장히 어떤 이질적인 예배와 여러 가지 다양한 것을 하더라도,

우리가 4년 동안 여러 분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한동에서 한동의 예배를 드리게 되면, 어떻게 보면

그게 이제 몸에 익게 되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그게 어떻게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그런 spiritual한

여러 가지 것들을 영향을 주게 되고, 그것은 졸업하고 나가서 여러분들을 또 영향을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저도 그렇다면 항상 궁금해 하는 것이, 한동에서 우리가 채플을 드리고, 근데 굉장히

특수한 상황이죠? 우리가, 한동이 공동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공동체이기는 좀 힘든 이유가, 이런

얘기 하면 좀 안 되나요? 조금 있다 얘기를 할지 안 할지도 모르지만, 굉장히 다양한 것들을 저는

그래도 좀 다니면서 관심을 갖고 봤는데요.

프랑스 몽마르트에, 도저히 발음할 수 없는 교회가 있는데요. Sacred heart라는, 거룩한

심장이라는 교회죠? 그게 굉장히, 많이 관광지로 돼서 들어갔다가 떠들면 혼내고 막 이러는데,

Page 11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08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거기에 보면, 저쪽 스테인드글라스에, 아까 자연의 빛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정말 강당이나

어디보다도 높은 창 위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를 맞아 주시는 엄청난 사이즈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어요. 근데 물론 이제 우리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주로 이제 캘빈은 음악을 때려잡았고, 그 다음에

마르틴 루터는 이제 시각적인 아이콘들 우상들, 이런 것들을, 뭐 그럴 만도 했죠. 왜냐하면 면죄부

팔고 다니면서 뭐 돈이 떨어지는 순간, 이런 거 했으니까. 그거는 이해가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또 그것이 그 예술 거장의, 누군지는 모르지만 신앙의 고백이었겠죠. 마치

제가 연극이나 작품을 어떤 sacrifice로 드리듯이 드렸을 거란 말이죠. 근데 그것을 보면서, 저것을

보고 과연 누가 우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님은 저 빛보다도 더 영롱하시고 더

아름다우시고 더 사랑이 크신 시뻘건 더 큰 심장을 갖고 계시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이렇게 focus가 모아지면서, 주님이 항상 나를 보고 계시다는, 여기에 앉아 있으면.

그런 제가 무한한 감동을 느끼고 그 자리에 몇 십 분을 앉아 있다 나온 적이 있었고요.

그 다음에 미국에 갔을 때 캘리포니아에서, 흑인들 오순절 교회를 갔어요. 근데 이제,

흑인이 아닌 사람은 저희 일행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면서 난리가 난 거죠 뭐. 설교를 하는데 우리는

아멘 잘 안 하거든요. 근데 거기는 뭐 영화에서 많이 보시죠? 할렐루야 막 이러고, 목사님이 두 마디

하면 반드시 한 마디씩은 해요. 이게 화답이 되는 거예요. 좋아하면서 이름 부르고 사람들이

불러다가 앞에 세워가지고 막 예를 들어주고 근데 제가 깜짝 놀란 게, 그러면 모든 게 저는

의식이나 public한 행사 이런 것들을 저는 굉장히 performance의 관점에서 인류학적으로 관찰을

하는 본능이 있는데요. 그래서 봤더니, 드라마의 클라이맥스가 어딜까? 이 예배 드라마의

클라이맥스가 어딜까? 보통은 이제 목사님의 설교, 거기서 이제 축도 이런 걸로 바로 끝내 버리는데,

그게 아니라 저도 그걸 이제 같이 서서 했는데, 이제 헌금 하는 시간이 됐는데, 모든 사람들이, 체격

좋은 자매님들부터 막 부채 들고 다 일어나가지고 다 찬양을 하면서 중앙 통로로 행진을 하는

거예요 찬양을 하면서. 근데, 저는 헌금하면서 기뻐하는 모습, 집단적으로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 본

거예요. 그래서 ‘아니 어떻게 헌금이!’ 그러니까 자기를 드리는 표시인 거죠? 근데 이게 어떻게

예배의 클라이맥스일 수 있는가? 저는 너무너무 놀랐던 거죠. 그걸 보면서 ‘와 이게 참 많이

다르지만 주님의 화단은 빛깔도 다양하셔라’ 하고 굉장히 은혜를 받았고요.

마지막 하나는, 제가 예수님을 영접한, 미국에 있던 교회는, 거의 소위 말하는 cell

church를 처음으로 시작했던 교회였는데, 그 교회의 예배의 클라이맥스는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서 드라마 사역하면서도 정말 말씀을 100% 드라마로 보조할 수

있도록 계속 연구하고 쓰고 이렇게 해서 몇 년을 사역했지만, 말씀이 너무나 파워풀하고 기도가

너무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정말 믿는 사람들 많이 나오고 또 주님의 사랑에서 떠나 있던

Page 11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09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사람들이 많이 돌아오는데, 그 예배의 클라이맥스는 뭐냐 하면, 상당히 양방향적이죠. 말씀을 전하고

그 다음에 초청의 시간을 가져요. 침례교에서 그런 걸 많이 하죠? 근데 초청의 시간에 보통

200~300정도의 교인이 있다면 보통 20% 이상이 헌신을 해요. 그리고 헌신을 하고 앞에 나와서

기도를 하면 일일이 교역자들이 나와서 혹은 셀 리더들이 나와서 같이 기도하고 카드를 읽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절정이 사실은 설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반응해서 결단하는 성도들의 그 이야기를 다 읽어 줘요. 몇 십장을 다 읽어주고. 그래서 예배가 어떨

때는 두 시간만이 아니라 세 시간 반씩 할 때도 있는데, 어느 누구도 그걸 싫어하지 않고, 거기서 또

셀 식구들은 끝나고 나면 붙들고 울고, 그래서 묘하게 이거는 개신교의 어떤 굉장히 설교가 집중이

돼 있는 그런 예배였지만, 결국 이게 누가 손님이고 뭐랄 것 없이 사실은 설교를 듣는 순간에 함께

중보하고 기도하고, 그래서 뭐 안 믿는 사람만 믿게 되는 역사가 아니라 정말 부활하신 주님의 날에

주님을 계속 새롭게 만나는, 그런 혈액순환이 엄청나게 잘 되는, 그런 공동체의 교회에도 제가

있었고요.

그래서 끝으로 이제 결론을 내리자면, 저는 우리가, 한동이, 사실은 채플이 저는, 장점일

수도 한계일 수도 있고, 기회일 수 있는 것은, 어쨌든 쓰고 들어왔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채플을 안 믿는 학생들, 종교적인 게 무엇이건 관심사가 무엇이건 간에 와야 한다. 그건 굉장히 좋은

전도이고, 그러니까 엄청난 하나님의 섭리로 이 학교로 부르신 거죠. 그런데 두 번째로 또 뭐냐 하면,

정작 우리가 예배라고 부를 때에는 사실은 이게 마치 유대 민족들이나 아니면 신약에 나오는 정말

거듭난 자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 어쨌든 우리가 믿는 자들의 교회고 믿는 자들의 예배라는

것이죠. 근데 이제 그게 굉장히 그 synergetic하게 섞여서, 섞여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게 됐을 때,

과연 우리가 말씀이나 그 모든 것들, 그리고 이제, 함께 기도를 해야 될 문제죠. 저는 너무나

교목실한테 감사하고 황영호 목사님 말씀 너무 은혜 받으면 감사하다고 밀고, 한 번 밖에 안

드렸는데(좌중 웃음) 어쨌든, 떨어졌던 저를 굉장히 말씀으로 일으켜 세워 주시는, 참 굉장히 제가

표현한 것보다 위로를 굉장히 많이 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것이

과연 우리 학교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 제가 아까 말한 여러 교회의 형태들처럼, 각각의 교회들이

space부터 예배의 형식, 그 다음에 어떤 그 말씀의 방향, 그런 모든 것들을 합쳐서 우리가 예배라고

부를 때, 과연 이 한동이, 정말 그 한동다움. 하나님 꽃밭에 가장 한동이 아름답게 꽃을 피는 그

빛깔에 지금 우리가 도달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국운 교수 : 혹시 교수님 네 분 중에 더 푸시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없으세요? 딱히

충돌되는 말씀을 하신 것 같지는 않은데, 특별히 조준모교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오늘 아예 작심을

하시고, 이걸 회개라고 들어야 되는지, 아니면 도발로 들어야 되는지, 아무튼 너무 감사합니다. 네 분

Page 11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10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선생님들 사이에서 얘기가 더 될 것 같지는 않고요, 시간도 조금 갔기 때문에 floor에 바로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계시는 선생님들도 좋고 학생들도 좋고요, 질문 있으면 하셔도 좋고 본인 생각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구시든지 말씀을 더 하기를 원하는 분은 해 주세요.

학생 1 :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04학번입니다. 교수님들 말씀 너무 감사하게 잘 들었고요,

저는 이제 조준모교수님께서 특별하게 지적하신 어떤 무대 중심의 예배 형태가 한국 교회에서

특별하게 나타나는 캐리그마 중심의 예배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셨던

목사님 설교 중심의 예배, 그리고 찬양단 중심의 예배가 결국에는 이전에 한국 교회에 존재했던,

목사님이 모든 걸 이끌어가시는 중심의 예배에서 파생된 개념이 아닌가 생각이 들고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찬양 인도자들도 어떤, 설교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그 예배를 책임지고 이끌어가야

된다는 생각들이 무의식적으로 묻어나기 시작하면서, 어떤 무대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됐다고, 그런 게 많이 생겨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황목사님 말씀을 들으니까,

캐리그마 중심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거기에 비해서 이문원 교수님은

캐리그마 중심 보다는 코이노니아라든지 아니면 공동체가 같이 누릴 수 있는 형식을 더 많이

개발해야 된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전 개인적으로 이문원교수님의 말씀에 좀더 동의하는 편입니다.

무대중심적인 한국 교회와 관련해서, 제가 또 어떤 말을 듣기로는, 이런 얘기도 들었거든요.

21세기의 신도가 20세기에 지은 예배당에서 19세기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런

것들이 지금 너무 틀에 박혀버린 형식들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 대해서 황목사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황영호 목사 : 저는 revelation response 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Revelation의 중요한

부분은 많습니다. 그러나, revelation했을 때도 사실 icon, testimony, performance, special music도

revelation에 충분히 도움이 되고 중요합니다. 그래서 Catholic church에 대해서 icon하고 어떤

표현이 그 시대에는 무너질 필요도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다시 recover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We want to know who God is and what he`s done. 그것이 말씀 중심, 그리고 +many

other ways. 그래서 우리가 want to know who God is. 그리고 주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이 드리는 반응이 중요합니다. 반응은

기도도 되고 찬양도 되고 testimony도 되고. 근데 제가 너무 감사한 것은, 지금 이 세상에 다양한

예배의 형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양한 예배의 형식에서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고 계시다는

것이죠. 영광을 받고 계세요. 그래서 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 1년 동안 한 15개의

교회를 다녀본 적이 있어요. 선교회를 포함해서. 라틴어로 써있기 때문에 무슨 말 하는지 전혀

이해를 못했어요. 그리고 설교가 없었어요. 수염이 긴 아저씨가 모자 쓰고 와서 말하고, 들어갔다

Page 11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11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나오고. 근데 그것도 의미가 있겠구나. 내가 여기서 몸담고 정말 배우면.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를 하는데, 진정한 예배가 가능한 것 같습니다. 여러 행위들에서. 그리고 그런 여러 표현도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저는 Black Gospel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밴쿠버에서는 그게 없었어요. Black

Gospel 갔으면 분명히 좋았을 텐데.

하여튼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채플 예배랑 주일 HIC 예배랑 11시 예배랑 다릅니다.

Ritual이 달라요. 그리고 새벽기도도 다르고, 소그룹 예배도 다릅니다. 다 다를 수밖에 없어요. How

can we contain all the aspect of perfect ritual into one service? 채플은 또 색깔이 다르고

구성원도 다르고 기대가 다르고 필요가 다르고. 그리고 저녁예배도 좀 다르고. 그래서 다양한 것도

저는 아름답다고 보지만, 우리의 계속적인 기도는 주님,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주님께 합당한, 주님을

제대로 보고 올바르게 보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리고 조준모교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어떤

form에도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contemporary worship의 긍정적인 요소도 있고 위험한

요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다 그렇습니다. 장로교의 예배, 아니면 퀘이커 예배.

그것도 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그걸 우리가 잘 생각하면서, minimize unimportant thing and

maximize our community worship onto the Lord. 그래서 조준모교수님께서 강조하신 것 이

community였고, people worship people center 너무 유용합니다. 그러나 contemporary worship도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걸 잘 생각을 해서 좋은 것을 계속 만들어야

합니다.

근데 한가지, 볼륨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저는 두 가지 다 경험을 했습니다.

Contemporary worship은 제가 많이 했기 때문에 비판도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contemporary라고

다 진정한 예수님이 있고 성령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도 ritual이 돼요. 빠른 노래

세 개, 기도 한 번. 그러니까, any form could be just form.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감정도 그래요.

지금 방언으로 기도합시다! 하는 것도 짜여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용한 기도에도 정말

움직일 수 있고, 그리고 또 시끄러운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you cannot just literally equate

form with experience. 저는 큰 음악을 보면서 사람들을 보면 알아요. 어떤 예배를 드릴 때는

굉장히 볼륨이 높은데, 저를 포함해서 사람들을 볼 때 앞에 있는 사람들을 상관하는 것, 살아계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시끄러운 예배가 가능해요. 어떤 때는 시끄러운데 사람들 보니까 그냥

인도자만 보고 있어요. 아니면 박수는 치는데 예배가 없어요. 그럴 수 있어요. 조용히 해도 예배가

없고 그냥 내 생각만 할 수도 있고, 조용히 하나님과 같이 예배드릴 수도 있어요. 그래서, I think

it`s possible both scenario. 근데 그런 possible은 있지만 그렇다고 maybe one form maybe more

dangerous. 그래서 우리가 그걸 논의해보고 reflect하고 바꿀 건 바꾸고 해야 할 것 같아요.

Page 11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12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저는 우리 공동체의 예배를 비판하거나 하는 관점 보다는 우리 공동체가 갖고 있는 상당히

중요한 기능적인 장점을 생각해보는 데서 오늘 얘기가 좀더 진전됐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여기는

대학이고 가르치는 곳이고 배우는 곳이고, 한국교회가 교파의 차이 없이 비슷한 측면은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어떤 신학적인 배경 신앙적인 배경 역사적인 배경 문화적인 배경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고, 우리 학교가 상당히 radically globalize하면서 다른 문화와 섞이게

됐고, 그렇다면 여기 그 각각의 전통들이 함께 어우러지고 서로 만나고 다른 식의 예배를 경험할 수

있고, 그래서 피차 가지고 있는 어떤 전통을 지키면서도 더 좋아질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힘이 있지 않나, 생각하기에 따라서. 과연 우리가 지금 그 장점, 가능성을 어느 정도

실현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는가 생각합니다.

학생 2 : 생명과학부 학생입니다. 교수님들 말씀 너무 감사하게 잘 들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인데, 모태신앙이 넌크리스천을 만났을 때 대화하면서 가졌던 궁금한 점을 묻고 싶습니다.

아까 조준모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상 문화의 발전에 맞추어 즉흥적이고 멀티미디어적인 것에

젖어 있고, 그것이 우리를 결국은 단절되게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교회를 방문하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은 하나님은 그런 예배적인 요소 때문에 다름을 느끼고 거기에 대한

충격이나 어떤 작용을 통해서 더 교회로 걸음을 하기도 하는데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예배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인지 경건하게 자제하면서 예배 드리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올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어느 정도 맞춰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같이 찬양을

드리고 싶어도 우리는 익숙하기 때문에 쉽게 찬양할 수 있지만, 처음 오는 사람들은 가사를 보면서

따라 부르기도 하고, 가사를 안 보고 자기들끼리 해석을 하기도 하거든요. 어디에 키포인트를 맞춰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찬양이나 멀티미디어 요소가 없어도 은혜 받고

충분히 예배를 즐기고 갈 때가 많거든요.

학생 3 : 언론정보문화학부 07학번 추은혜입니다. 저는 아까 신앙의 개인화 차원에서

생각이 들었는데, 제가 아는 선배와 친구들이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자기도 그렇게 믿고 하나님

믿는데, 그런데도 교회를 안 나간다는 사람을 주변에 많이 봤는데요. 함께 모여서 거기서 시너지

효과가 나서 같이 은혜 받고 나누고 더 풍성해지면 이상적인 초대교회의 예배가 되겠지만, 주변 큰

교회에 가면 목사님께서 이념, 색깔 가지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저 자리에서 저 말을 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들 때도 있고, 그렇다고 해서 개척교회에 가면 교회의 부흥이나 그런 것만

강조하시고, 교회가 커지고 큰 교회가 돼야 하는 것만 강조하시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보면 기독교인이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

Page 11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13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이해가 되는데, 저는 부모님이 항상 강조하셔서 안 나갈 용기는 없고요. 그렇게 생각했을 때,

기독교가 프로테스탄트로 오면서 개인화 돼서, 내면 신앙으로 강조하는 측면이 있어서 그런

공동체성을 강조하며 성도들에게 공동체가 되어 살아가라고 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종교적 지도자들의 역량이나 자질 같은 것들이 더 강조가 되고 개혁돼야 할 부분이 아닌가.

그런데 보통 세미나강의나 그런 것들을 들어 보면 그런 부분 보다는 개개인의 변화를 더 강조하는

걸 많이 들어서 그런 부분을 질문하고 싶습니다.

조준모 교수 : 먼저 뒷부분에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저도 동의합니다. 동의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이국운 교수 : 안 나갈 용기가 없다는 말인가요? (좌중 웃음)

조준모 교수 : 공동체의 중요성을 얘기할 때, 좋은 공동체를 얘기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영적 리더들의 퀄리티라던지 그런 것이 중요할 수 있지요. 이렇게만 얘기할게요. 아까 저기

생명과학부 학생께서 멀티미디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정말 좋은 지적인 것 같습니다. 저는 두

가지를 구분하고 싶은데요, 예배자들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과 자극적인 것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말로 찬양하고 한국말을 듣고 한국적인 톤을 가지고,

무슨 노래를 해도 우리 아버지는 한국적으로 부르시는데, 이 cross-cultural한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양하게 만드셨기 때문이죠. 다양한 것들에 대한

민감함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거는 제 생각에는 예배자들의 문화적인

배경이라고 생각하고요. 제 입장에서는 전도와 예배는 구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에

있어서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에 대해서 우려를 말씀 드렸던 것은, 스크린에 있어서 가사를 보거나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가 될 수 없죠. 그렇지만, 스크린이 없으면 예배가 안 되거나,

스크린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스크린을 위해서 조명을 다 꺼야 하고 스크린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그걸 위해서 해야 하는 스크린 중심적인. 한 가지 얘기를 드리자면, 백 몇 명 나오는

교회에서 광고시간이었습니다. 광고시간은 사실 성도와 성도와의 교제시간, 누굴 위해서 기도하고

누굴 기뻐하는 정말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광고시간에 갑자기 영상이 탁

떠오르면서, 정말 아름다운 KBS 아나운서와 같은 목소리로 ‘오늘 광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온 몸이 오그라들면서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전혀 몰랐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컨퍼런스라던지 하는 곳에서는 그런 도움이 꼭

Page 11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14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잘 사용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예배적인 요소가 어떻게 가미되어야 하는지 그걸 잘 봐야 할 것이고, 무분별하게 2만 명에게 쓰이는

멀티미디어 테크닉을 2백 명 모이는 예배에서 자꾸 쓰려는 현실을 보면서 그걸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고요. 그것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저는 그것

자체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priority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입장이 사람들마다 다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예배와 전도를 구분해야지 풀릴 문제가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영섭 교수 : 좋은 말씀 해주셨습니다. 예배와 전도를 구별해야 한다는 말씀에

동의하고요. 저는 거기에 한 가지 덧붙이면요, 우리가 예배 드리는 언어도 우리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예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학생들 흔히 영어공부 하기 위해서 영어 채플에

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물론 처음에 훈련하기 위해 가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위해서는 정말 자기 언어로 예배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그것인 것 같아요. 우리 초창기에 열심히 하나님을 구하며 우리가 허허벌판, 지금은 나아졌는데

정말 허허벌판이었잖아요. 그런 데서 우리가 예배할 때, 정말 우리가 공동체로서 하나됨을 예배를

통해서 항상 체험했습니다. 모든 결정할 때에도 예배와 기도가 있었고, 또 왜 우리가 남송리

3번지에 와 있는지 그런 존재의 목적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대학에 와 있다는 것, 특별히 한동대에 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다양한 경험을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황 목사님 말씀 하셨듯이 다양한 예배가 있듯이, 다양한 literary가 있듯이 그런 걸 다 경험할

수 있는 너무 좋은 장소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목사님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시고 와서

말씀 전하기 원하시는 그런 곳이 한동대입니다. 여기 와서 여러분들이 있을 때 정말 다양한 예배,

워십, 다양한 목사님을 경험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채플이고 새벽기도고 금요 강물예배고 첫

시간이고 끝 시간입니다. 그래서 좀 이 대학 채플이나 대학 교회나 예배를 통해서 다양한 경험을

하시고 은혜를 받고 나가서 사회 어느 교회를 가든지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는 그런

대학 생활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채플이 더 다양화 됐으면 좋겠고요. 좀더 다양한

실험적인 예배도 도입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학생 3 : 질문이 아니라 방금 여기 분께서 하신 생각을 저도 했고, 정치적인 부분도 제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있어서 더욱더 불편하게 하는 예배에 참가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여러 번 오랫동안 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나서 말을 더 하게 됐는데요. 그건 너무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참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별로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가 크리스천, 목사님도 저도 크리스천으로서 각자 하나님을 예배 드리기 위해 모였고 그것이

Page 11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15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어떤 교회의 시초일 텐데, 너무 소비하는 입장이 아닌가. 가르침을 받고 선생님을 선택해서 만나는

것처럼, 예배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입장을 간과하는 태도가 아닐까, 나는 크리스천이지만 교회에

가지 않겠다 하는 태도는, 그럼 좋은 예배 올바른 예배는 누가 드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걸 너무 간과한 태도는 아닐까, 그것이 좀 위험하고 지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말을 하게

됐습니다.

학생 4 : 저는 08학번 생명과학부 학생입니다. 황영호 목사님께 질문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혼란스러웠던 게, 저는 대학교회 다니고 거기서 예배를 드렸고, 서울에서는 찬송가만

부르며 박수만 치는 예배를 드리고, 포항에서 지역교회를 다니고 싶어서 이런저런 교회를 다녔는데

다 너무 좋아서 어딜 다녀야 할지 모르고 있는데, 서울 교회에 다닐 땐 친구들이 고등부 때는 또

contemporary 식으로 드리다가 어른 같이 예배를 드리다 보니까 사람들이 많이 떠나더라고요. 그런

것처럼 그 모든 게 다 예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각자가 원하는 것을 소비자처럼 선택해서

교회를 옮겨 다니고 예배를 찾아 다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학생 5 : 저는 국제어문학부 03학번 신치헌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이문원교수님께 말씀을

여쭙고 싶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잠깐 시간을 보냈는데, 거기서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 같은

경험들을 했습니다. 특별히 예배를 드리면서 기차놀이처럼 돌기도 하고 헌금을 내러 나가면서 춤을

추고 하는 모습들이, 참 인상적이면서도, 저는 거기서 참여자가 아닌 방관자 같은 느낌을 받았고요,

동시에 거기 있는 다른 보수적인 미국 예배에 참여했을 때는 오히려 너무 가만히 있는 모습들, 제가

참여자고 그분들이 예배를 드리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예배의 형식이나

그런 모습들이, 그리고 사람들의 역사적인 아니면 문화적인 배경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저희도 그런 모델들이 있는데, 저희는 또 한국인으로서 유교적인 전통이나 문화의 영향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것들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무엇보다 아까 한동의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 한동이 한동으로서 갖고 있는 어떤 고유의 문화나 배경으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예배는 어떤 모습이 있을까? 그런 것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외에

주제가 예식으로서 예배니까, 형식적인 부분에서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는 없지만 제안을

하신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런 것들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학생 6 : 안녕하세요. 경영경제학부 05학번 임지훈입니다. 컨텍스트가 비슷한 질문이어서

곧바로 질문 드리고 싶었는데, 저도 외국 나갈 때마다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충격을 많이 받았는데,

시리아에 있을 때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마저도 여자들이 천을 안 쓰면 예배에 참석을 못 하고 방언을

Page 11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16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하자마자 쫓겨나가는 예배를 보면서 한 번 충격을 먹었고, 흑인 예배에서는 두 세 시간 동안 춤만

추는 것에 대해서 또 한번 충격을 먹었고요, 또 힐송 처치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거긴 이제

관객석은 다 까맣고, 마치 Rock 콘서트에 온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앞에 나와서 날뛰는데 저 혼자

뒤에 앉아서 이건 뭔가 하면서 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고, 또 아르메니아 교회에 가서는 목사님이

회중을 한 번도 안 돌아보시면서 한 마디도 안 하고 향만 피우고 물만 뿌리고 거기서 충격을 받았고,

Catholic 가면 또 거기 나름대로 충격을 받고. 그러니까 다양한 교회와 다양한 문화권에 있는

프로테스탄트를 방문해서 예배에 대해서 2~3년 동안 끊임없이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데요.

그러면 저는 조준모교수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게, 바람직한 건 뭐냐 라고 질문을 한다면, 결국 제

개인적으로는 ‘문화적 컨텍스트를 우리는 다 중요하게 생각을 해야 하지만, 문화적 컨텍스트에 관계

없이 그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만 가장 중요시하게 여겨지고 어떤 entertainment적인 요소가,

자극적인 요소를 충분히 경계하고 있다면 어떤 형태의 모습을 띠던지 우리는 그 교회를 바람직한

교회라고 얘기할 수 있다’ 라는, 포스트모던적인 결론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더라고요. 이 부분에

대해 조준모 교수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국운 교수 : 콕 집어서 조준모 교수님인가요?

학생 6 : 꼭 안 집어도 되는데, 여러 교수님들께 질문 드리겠습니다. (좌중 웃음)

학생 7 : 너무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국제어문학부 06학번 류수경이라고 합니다. 저는

목사님과 교수님들께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언어 사용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예배를 드리면서 가끔 느낀 것이,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특별한 단어들과 언어들,

표현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너무나 자주 사용되고 흔하게 사용돼서 가끔 이것이, 일반 바깥 사회에

나가면 어떤 단어만 써도 ‘아 저 사람 교회 다니는구나’ 이렇게 알게 될 때도 있어서 뭔가 일반

대중과 그리스도인 언어가 너무 유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고, 또한 예배

안에서 너무나 소중한 가치들이기 때문에 자주 이야기하고 우리 안에서 말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너무, 중요도라든지 강조라든지 가치나 의미에 대한 우리의 동의와 생각과 그런 것들이 없을 때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복음이 너무나 가벼워지고 값싸지는 경우가 생기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는데, 물론 그것들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사랑이나 축복이나 소망 이런 것들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자주 우리가 단어들을 말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게도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예배 안에서 우리가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여쭙고 싶습니다.

Page 11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17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학생 8 : 감사합니다. 저는 상담과 공연을 전공하고 있는 상담사회복지학부 04학번

박영글이라고 합니다. 저도 불편한 예배를 굉장히 많이 경험해왔고 굉장히 많이 생각해왔던 사람 중

하나인데, 그럴 때마다 어느 한 순간만큼은 예배자, 특별히 앞에 선 예배 인도자의 예배 드리는

태도를 보고 다시금 제 자신도 하나님을 향한 시각을 회복하는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인도자나

설교자가 말이나 어떤 노래가 아니라 마이크를 하나 잡는다든지 이런 사소한 것만 가지고도 그

사람이 얼마나 예배를 귀하게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고 있다는 것을 제 자신이

느끼고, 경험했습니다. 이문원교수님도 아시겠지만, 배우가 연기를 함에 있어서 관객이 봤을 때 이

사람이 얼마나 진실된 연기를 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얼마나 전달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있는지

그것이 느낌이 올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도 예배 인도자, 앞에 선

팀, 설교자가 예배를 드릴 때 회중들도 그 예배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예배자가 얼마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예배 드리고 있는지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고 있고

느끼고 있다고 보고요. 저도 이제 예배를 인도해 본 경험이 있고, 인도자의 자리에 있어서 제 자신이

온전히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 회중들도 얼마나 하나님 앞에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지 많이

경험했습니다. 제가 회중에 있을 때도 상대 인도자들이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얼마나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보면 사람을 보고 하나님 온전히 경외하고 있는지 그 시각을 판단하게

되는 위험한 생각이긴 하겠지만, 이런 점에서는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 드리고

있는지를 판단하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국운 교수 : 교수님들만큼이나 학생들이 예배에 생각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주로

대화 많이 하는 젊은 사역자들이 가나안 교회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나안 교회는 다른 게

아니고, 이런 고민들을 하면서 ‘교회 안 나가!’해서, ‘안 나가’ 를 거꾸로 한 말입니다. 안 나가를 다시

나오게 하려면 가나안. (좌중 웃음) 이문원교수님부터 한 마디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문원 교수 : 강의 중에 저희 학부에서는 그런 농담을 하면. 참 너그러운 학생들입니다.

(청중 웃음) 시간이 많이 갔으니까 간략하게 말씀 드리면, 물론 그렇죠. 저도 그 Black Gospel

오순절 교회에 헌금하면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건 남의 옷을 입은

거랑 똑 같은 거죠. 그래서 사실 그 표현의 양식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우리가

손뼉을 치기도 하고 벌거벗고 춤을 춘 다윗도 있었고 소고를 치기도 하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하고

시를 짓는 사람도 있고 다윗처럼 곡을 지어 부르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데요. 받으시기에 합당한 사랑을 드리는 것인데, 그게 어떻게 일률적일

Page 12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18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수 있겠습니까? 그건 내가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생체적 리듬과 또 우리의 환경, 문화적인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가장 좋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 드리는데 필요한, 가장 창의적인 것들을

우리가 사랑 때문에 만들어 내는 것이겠죠.

그럼 뭐가 옳은 것이냐? 분명히 있습니다. 아까 교수님들께서 말씀하신 것은, 예배의

정의와 또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 누구고, 또 우리가 가장 빠져들기 쉬운, 공연에서 봤을

때의 그 duality. 그게 사실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공연자로서 우리의 모든 전심을 다 드려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관객을 audience로 보기 시작하고 회중들은 앉아서

목사님을 performer로 봐서, 주일 예배 끝난 다음에 점심 반찬이 목사님 설교 라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정말 잘못된 태도라는 거죠. 목사님의 설교가 무슨 뭐가 있었건 과는 별개로. 그래서 상당히

명확하다는 것이고요. 저는 단지 회복돼야 될 우리의 밸런스의 문제에 있어서, 어찌 됐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건 딱 두 가지거든요. 세례를 주라는 것과, 또 하나는 나를 기억하라. 기념하라고 해서

정하신 사실 Lord supper죠 성찬식. 그건 사실은 초대교회부터 계속 강조가 돼 왔어요. 어찌 보면

사실은 종교 개혁 이후에 급격하게 시들어가기 시작했고, 현대 교회는 개 교회마다 별다른 신학도

없이 사실 그걸 절기별 행사로, 자꾸 번거롭고 시간도 많이 걸리고 하니까.

그런데 저는 예수님께서 정말 유대교 회당에 다니시고 그러셨지만, 예수님께서 그 이전에

있었던 구약적 전통의 유대교와 완전히 도끼로 끊어버린 것 같은 그런 radical한 말씀이 뭐냐 하면,

옛날에는 레위기에도 나와 있지만, 우리가 동물을 잡아서 제사장이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그

어린양의 피와 같은, 그러니까 대용품인 거죠.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이 죄의 대가가 얼마나 크고,

그리고 이런 희생물을 바쳐야만 너희가 죄의 대가를 씻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라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고 자녀라 불림에 있어서 합당치 않은 존재인가를 계속

remind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전통 속에서 아직까지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뒤에도 베드로랑

이 사람들은 성전에 예배 드리러 나갔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거기서 말씀 하신 건 뭐냐 하면,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했어요. 그건 사실은 정말 성막을 찢으신 거거든요. 이것처럼 radical한

유대교와의 결별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항상 여러분들이 초대교회사 읽어보면 알겠지만 핍박의

역사 속에서, 로마 제국이 얘들 굉장히 이상한 애들이다, 이단이니까 잡아 죽여야 되겠다 해서

죄목에 나온 것 중에 하나가 cannibalism이었어요. 왜냐하면 맨날 모이면 살과 피를 먹는다고

하니까 그 영적인 의미는 이해하지 못하고, 이것들은 애도 잡아먹는다더라 하면서 사실은 사회교란

죄 이런 걸 덮어씌워서 추방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별 신경을 안 쓴 거죠.

그런 것처럼 저는 오늘날에 있어서 당연히 회복이 어느 정도 밸런스가 맞춰지고 회복이

Page 12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19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돼야 할 것은, 바로 주님이 기념하시라고 한, 여기에는 토를 달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찬을 떼면서 이제는 옛날의 그림자와 같은 성막과 구약적인 제사를 완전히 대체해버린,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의식적으로 ritual로써 먹고 마시고 기억을 하라. 왜냐?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몸이 알기 전에는 사실은 아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걸 그냥 읽기만 해도

되는데 왜 하겠습니까? 마치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침례와 세례의 형식을 봤듯이, 이것도

주님께서 명하신 두 가지 명령, 의식적인 명령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고,

세례도 마찬가지지만 성찬식도 당연히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과 우리의 합당한 위치에서 그 분께

모든 경배를 드려야 하는데, 그런 예배의 과정 속에서 이게 센터가 돼야 한다는 것은 아무런 이론의

여지가 없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 돼서인지 오늘날 예배의 형식을 보면, 어쨌든 이 성찬식은 시즌에

한 번 하는 특별식 같은 게 됐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건 이걸 계속 먹고 마시라는 거죠. 먹고

마실 때마다 생각을 하라는 거죠. 저는 그것만큼은 어느 정도 회복을 보여야 될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에 근거한 예배의 핵심. 저는 이게 그다지 깊게 들어가진 않았지만, 무슨 책인지도 모르겠어요.

정의와 예배, 개신교 예배 의식의 비극이라는 챕터의 제목이 붙어 있는데요, 여기서 바로 비극인

이유가 무엇이냐, 캐리그마가 예배를 억누르고 있다는 굉장히 심플한, 그러나 굉장히 마음을 다해서

풀어놓으신 말씀인데, 어느 정도까지는 저도 여기에 동의를 한다는 말씀을 드리며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조준모 교수 : 이문원교수님께서 대답을 다 해주신 것 같은데, 문화적으로 다이나믹한데

아무거나 다 괜찮다는 말은 아니겠죠. 예배에 대한 구체적인 것이 성경에 없어야지 맞는 것이고,

너희들 느끼는 대로 그리스도를 통해야 하는 것이고, 그 안에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도 있고. 그리고

제가 불편함을 느꼈던 부분들은 성경적으로 얘기하는 예배의 의식과 지금 경험하는 것의 차이에

있다고 봅니다. 문화적이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할 것 같아요.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저보고

불어를 쓰면서 예배 드려라 그러면 문화적으로는 아닌 것 같죠. 그런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할 것

같고요.

불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 다음에 수경 자매가 질문한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지극히 너무 종교적이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서 이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잘

지적하셨는데요. 이것이 저는 되게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곳에 오셔서 쉽게

말씀하신 것 같아요.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incarnation하셨다는 것은 우리 레벨로 오셔서

말씀하신 거잖아요?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그리고 신약성서가 쓰여졌을 때는, 저는 고전 헬라어를

배웠는데, 고전 헬라의 입장에서는 신약성경에 쓰여진 코이네 글이 너무 쉽고 우스운 거였어요. 그

말은, 코이네라는 말은 시장 헬라어라는 말이거든요. 너무나 평범한 헬라어. 성경 말씀은 그

Page 12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20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시장어로 써졌다는 말이죠. 예수님도 다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말로 얘기하셨는데, 우리는 웬만하면

못 알아들을 말로 종교적인 말을 만들어내고, 그래야 other world. 여기를 떠나서 어딘가 있는.

그러니까 영성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지 못했다는 것이죠. 일상과 노동과 삶의 실체가 자꾸

떨어져 있어야지 영성이라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지금 현재는 이런 말을 쓰는데도 성경은

고전으로 된 것을 편안해하고 그걸 어떤 미학적인 의미에서 편안한 것은 괜찮지만, 그것만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KJV만이 하나님 뜻이라고 추앙하는 분들이 있지요. 저는 언어학을 하는

입장에서 너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 부분은 예배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예배를

떠나서 전반적인 우리 신앙생활과 관계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영섭 교수 : 제가 지역 교회 사역 3년 동안 협동 목사로 봉사한 적이 있는데 그

교회에서는 성찬을 매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게 됐는데요, 아까 이문원교수님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 의식을 지키고 기념하는 그런 것들은 우리 마음 속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성찬을 매주는 못하더라도 한 학기에 한 번 정도는 과감하게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요. 또 다양한 형태. 제가 좋아하는 과일 중에 하나가 석류입니다. 며칠 전에 석류를

먹었는데 너무너무 하나님에게 감사했어요. 하나님 어떻게 이렇게 예쁜 과일을 만드셨습니까?

그러면서 그 다양한 석류, 그 안에 꽉 찬 빨간 것. 그걸 보면 너무너무 신기하죠. 그리고 또 키위.

씨가 가운데 동그랗게 들어가 있는 키위와 씨가 바깥에 뿌려져 있는 딸기를 보면서 정말 하나님

다양하시다. 그러면서 우리가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어떠한 예배를 우리가 잘못됐다고 하겠습니까?

예배 참여자의 입장에서는,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은 그냥 임재함을 느껴요. 하나님을 임재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무릎 꿇으면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 지성소를 만들고 지성소에서

예배하면 되는 거거든요. 예배를 리드하시는 분도 리드하시는 분대로 또 어떻게 그릇을 잘 만들지

그걸 정말 마음을 다 해서 해드리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과일이 다양한 것처럼 하나님도

너무 다양하셔서 우리가 어떻게 예배하던지 하나님께서는 받으실 겁니다. 우리 마음에 중심을

보시고요, 기뻐 받으실 겁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예배 처소에 있던지

그걸 다 흡수, 이해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예배 드리는 그런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황영호 목사 : 잘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하실 말씀 하시는데, 가끔 가다 우리

안에서 할 수 없이 소비자의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중심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나한테

어떻게 맞을까? 나는 불편하다. 저 예배자 얼굴 싫다, 몸매가 싫다, 발음이 싫다, 저 사람 옷이 왜

그래? 불평, 길다 짧다. 그 마음 자세가 위험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벽하신 하나님, 진실을

다 담고 계신 하나님. 너무 아름다우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그때 유대 시나고그를 다니셨습니다 매주.

Page 12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21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예수님께서 은혜를 받으셨을 것 같습니까 안 받으셨을 것 같습니까?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교제가 됐던 것 같습니다. 그 모습, 본인보다 훨씬 떨어지는

사람들, 이상한 풍습 그런 것들 예수님께서 그 마음들을 꿰뚫어 보시는데, 예수님은 그래도 아버지께

예배를 드린 것 같습니다. 그 뜻은, 여러 질문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어떤 교회는 찬송가만 부르는

교회에 가고 어떤 교회는 다른데 다 그러긴 어렵죠? 근데 왜냐하면 우리 교회 생활이 예배 생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배라는 단어는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일날 배우는 두 시간만

가지고 이 교회를 가겠다 하지 마세요. 정말로 여기 형제가 말한 것처럼, 예배에는 캐리그마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특정한 단어를 쓰는데, 섬김이 있어야 하고 코이노니아. 그런 것들 다 예배

안에 있겠지만, 다 예배 안에서 찾지 마세요.

왜냐하면 우리 공동체 삶이 7일 24시간인데 그 2시간 잘못 들었다고 욕하고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거기도 잘 해야 하죠. 근데 그 아름다운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보내셨으면, 그

2시간에서 내가 좀 싫어하는 노래 있다고 해서 떠나는 게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핵심은 love

each other. 정말 이 공동체가 내가 섬겨야 할 공동체라면 목사님께서 좀 저쪽 얘기를 하셔도

기도를 해 줘야죠. 그리고 배울 건 배워야죠. 정말 이단적인 말씀을 안 하신다면. 정말로 성경적인

가르침이 있고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있다면, 물론 완벽하진 않겠지만, 그러면 내가 소비자가 아니기

때문에 섬겨야죠. 그렇기 때문에 노래 같지 않다, 기타 친다, 박수 친다 그것이 내가 교회를 떠나고

안 떠나고 하는 것은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종이기 때문에, 나는 예배자이기 때문에, 나는

그래도 박수 치는 사람 안 좋아하지만 형제이기 때문에, 나는 박수 안 침으로 하나님 예배 드리고

치면서 예배 드리는 걸 인정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관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오순절 교회에서 자랐습니다. 시끄러운 걸 좋아합니다. 시끄럽게 사람들 소리 지르면

좋아해요. 기도가 잘 나와요. 그러나 몇 년 동안 굉장히 조용한 교회를 다녔는데 그것도 너무

좋더라고요. 만약 하나님께서 이 교회다 그러시면 소리 안 질러도 될 것 같습니다. 혼자 지르죠.

이해하시겠습니까? My expression is not the heart of worship. It`s not my expression, my taste.

But it`s gather commitment to God. 하나님께서 gather하는 방식이 다양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 culture 얘기했는데, 어느 교회는 춤을 두 시간 춘다 어쩐다 하지만, 제일 처음 우리 인간의

reflex은 그걸 비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다르니까. 뭔가 다르면 비판하고 싶어요. 근데 제일

첫 마음은 목사님 말씀하신 것처럼 첫 마음은 겸손해야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 분들이

몇 년 동안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런 공동체가 살아 있는데, 그 표현이 모이면 이 표현인데,

적어도 내가 다르다고 비판하기에는 It`s too early. 정말 특별히 삶을 보고 진실을 알고 서로

사랑하고 예수님을 순종하고 존중하고 이런 사람들이 이런 표현을 가질 수 있다면, 적어도 좀

Page 12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22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비판하는 것보다는 배우는 마음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Is it possible to express revelation

response to this? 그렇다고 모든 표현이 다 합당한 것은 아닙니다. 좋은 표현도 있고 나쁜 표현도

있고 좋은 표현을 나쁘게 할 수도 있고 나쁜 표현을 좋게 할 수도 있는, 여러 가지 커뮤니케이션이

있습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은 아닙니다. 정말로 진정한 기준과 살아 계신 하나님이 영광 받고. 그런

것들 비판은 해야 되지만 좀 겸손히 천천히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으면 내 언어로 하는 게 진정하겠죠. 그래서 어느 얘기를 하는데 교회 언어, 어느 곳에서는

두 가지가 생각이 났는데, 하나는 어떤 언어라도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위험성은, 우리가 기독교적인 언어를 쓰면서 의미가 없어질 수가 있어요. 의미가 없으면서 세상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안 되고 우리들한테도 은혜 받았다 성령 뭐 이런 게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어떤 단어들은 의미를 회복해야 합니다. 어떤 그릇에 담던지. 그래서 은혜라는 단어는, 다른 표현

쓰면 좋아요. 그런데 그런 의미를 담을 수 있는 표현을 우리가 자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많은 언어가 싸구려가 됐어요 이 세상에. 그래서 우리는 그 의미를 다시

회복하고 단어들을 다시 회복하는 것도 생각해봐야 돼요. 그리고 우리가 어떤 면에서 의미도

중요하고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합니다. 전달. 그 사람과 내가 진정한 의미가 전달이 되고 있느냐?

그럼으로써 내가 만약에 우리 가족에서 쓰는 게 기쁨의 의미로 단어를 쓰더라도 다른 사람한테는 그

단어를 안 쓸 수도 있겠죠. 그런 지혜가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한 거죠. 그렇다고 우리가 의미 있는

단어를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와 바뀌는 사람도 알 수 있는 표현. 만약에 제가 교회

바뀐 사람에게 은혜라는 표현을 썼다면 그걸 꼭 설명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Sin도

가르치면서. 그것이 사랑이고 지혜일 것 같습니다.

아까 조준모교수님께서 워십 리더 자리 얘기를 하셨는데 사실은, 어떤 누군가가 어떻게

예배를 드리던지 예배는 형식이 비슷하다는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드리는

등. 그런데 그것을 누가, 어떻게 인도하는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기도 인도자나 목사님이 있겠죠?

그런데 어떤 표현을 하든 누군가는 기도하자는 말을 해야 해요. 그러나 초점이 너무 방해되는

스타일인가, 마음이 없는 스타일인가, 어떤 형제 얘기는 목사님이나 기도 인도자 말을 들어 보니까

가짜 같다. 제가 부탁 드리는 건, 판단을 너무 쉽게 하지 마세요. 그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알아요?

나는 은혜를 못 받았다 그렇게 얘기할 수는 있지만. 그리고 반대로 얘기하면, 저도 그렇고, 예배

인도하는 사람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방해가 될 수 있어요. 그런데 하여튼 누군가 해야 됩니다.

집단이 하던지 사람이 하던지.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도와주는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정말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게 기도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또 너무 사람들을 비판하지 마세요.

Page 12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23

예식(禮式)으로서의 개신교 예배

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 초청하시길 바랍니다. 근데 찬양 리더 아니면 성경 읽는 사람, 말하는 사람

누군가 하기 때문에, 그건 누군가 하는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잘 할 수

있도록 다 같이 열심히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

인도자가 하고 목사님이 안 했다고 욕하지 마세요. 목사님이 해도 못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다 같이 worship leadership in theologically informed and well-trained. And each song is

to be good revelation and good response to God. 그렇게 정리해 봤습니다. 길게 얘기해서

죄송합니다.

이국운 교수 : 목사님 말씀하시고 나서 길게 얘기해서 죄송하다고 하시네요. (청중 웃음)

여러 가지 얘기를 만들어 봤는데, 더 해도 되겠습니다마는 이 정도에서 그냥 적당히 마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저에게 있습니다. 오늘 제가 이 모임을 준비하면서 이 모임의 성과가 어떻게

이어졌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게 있어서 잠깐 나누고 싶고요. 아 그보다 먼저 아까 이문원교수님

언급하신 짧은 챕터는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있는 책의 제 7장, 개신교 예배 의식의 비극이라고 하는 제목입니다. 우리 이 모임을

준비하면서 함께, 이 장을 읽으셨나요?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서 읽으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 학교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예배라고 하는 ritual을 통해서 가르치고

배우고, 또 함께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을 실험도 하고 그렇게 대단히

전략적으로 좋은 장점이 있고요. 우리가 신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교단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다른 많은 여러 접점들을 함께 만날 수 있는 결절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좋은 그릇이 예배라고 하는 것인 것 같고요. ritual로서의 예배. 그걸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 준비하고 드려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생각도 모아가고 실험을 많이 해야 한다면 그

실험을 책임지고 이끌어가고 또 결과를 축적하고. 연구소 같은 게 하나 있으면 좋겠다. 제가 맥컬린

컬리지에 한번 갔었는데 학부에 이런 연구소가 있어서 다양한 전통의 예배를 알리고 예배를

개혁하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을 봤는데, 이제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오늘 여러 선생님들 말씀들과 또 학생들의 질문을 들으면서 제가 생각한 것과는

얘기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간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사실 아까 조준모 교수님 말씀 중에 좀

있었는데, ritual의 흉한 측면을 routine화 해서, 우리가 삶 속에서 우리 열광적이고 깊은 임팩트가

있는 것이라도 우리 일상 속에 좋은 의미로 일상화되지 않으면 그것이 항구성을 갖기가 어려운데,

routinization을 잘 하는 방법으로 고안해놓은 것이 ritual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어가고 느낄 것인가 라기보다는 예수님을

하루 이틀 누릴 게 아닌데 그 은혜와 감격을 어떻게 하면 내가 소비해 버리지 않고 잘 보존하면서

Page 12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24 2009년 가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그걸 은근히 잘 빼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그런 마인드로 조금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이런 의미의 reutilization으로서의 ritual을 생각할 때 늘 마음에 떠올리는 것은

식사를 준비하는 것. 우리가 이제 밥은 누구나가 다 먹는데, 그 밥을 먹는 걸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그 준비된 밥을 다가가서 우리가 함께 나누고 먹고 내 것으로 한 다음에 빠져 나오는 과정. 이것이

우리 인간이 누구나 다 하루에 두 번 세 번씩 늘 겪는 아주 보편적인 ritual.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을 씻고 우리 자신을 확인하고 또 우리 자신이 갱신되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 한동에 꼭

맞는 곳. 한동이 크니까, 자꾸 커지고 하긴 해야겠지만, 좋은 모습은 누군가 목사님들이나 아니면

예배 인도자들이, 마치 집에서 제 아내가 밥을 주기 위해서 쌀을 씻고 준비하고, 큰 아이가 반찬을

놓고 둘째 딸 아이가 수저를 놓고 그렇게 하거든요? 그런 의미로 섬기는 의미에서 밥상을 차리고

밥상 앞에 둘러앉고 하나님 임하심을 찬양하고, 글쎄요. 저는 신학공부를 한 사람이 아닙니다마는,

이렇게 먹는 것과 관련하여 묵상을 하면 예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니까 나를 먹어라’ 하신 말씀이

굉장히 physical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모임을 그냥 이렇게 먹는 것과 관련된 하나의 이미지를 나누는 것으로 마쳤으면

합니다. 맨 처음 학교에 오셔서 말씀 들어 보니까 참 어려운 일이 많으셨고, 특별히 새벽 5시에

새벽기도를 계속 인도하시느라 얼마나 힘드셨겠으며 결국 그것을 너무 힘들어서 놓으실 때, 그땐 또

마음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리고 지난 15년 동안 여러 순장을 맡으셨는데 여전히 처음과 같은

마음을 갖고 계시는 우리 교수님께 마치는 기도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청중 웃음)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김영섭 교수 :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저희들이 기억합니다.

이렇게 남송리 3번지에 하나님의 대학을 세우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곳에 모여 함께 예배하며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우리들 이곳에 모임이 헛되지

않게 하시고 이곳에 저희들이 기도하며 무릎 꿇을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이곳에 기름 부어 주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오늘 참 의미 있는 모임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예배를

잘 드릴까 고민하는 첫 모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 모임을 통해서 우리들의 고민이 계속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깨달음이 계속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하나님의 대학이 되게 해 주시고 우리 한동인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앞으로 드려질 예배, 앞으로 드려질 우리가 드릴 예배를 주님께 맡기오며 예수 이름으로

기도 드렸나이다. 아멘.

Page 12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12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12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13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13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29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Christian Community and the Prejudice on Social science

올네이션스홀 302호

2010. 4. 13

이국운 교수 : 반갑습니다. 저는 학문과신앙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이국운 교수입니다. 저희

연구소에서 작년 2학기부터 한 학기에 세번 또는 네번 정도 주제를 정해서 우리 학교 안밖에 계시는

귀한 패널 선생님들을 모시고 주제에 관해서 한두시간 정도 깊이있게 토론하는 콜로키움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학기에 세차례에 걸쳐서 '수, 무, 그리고 무한'이라는 주제, 그리고 '자유인의

기예로서의 법학'이라는 주제, 그리고 '개신교 예식으로서의 예배'라는 주제를 가지고 아주 재미있는

토론, 깊은 토론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토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 자리에서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이 더 깊어지고 그것들이 나누어지고, 그 과정에서 많이 얻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그 첫번째 모임으로 이자리에서 ‘기독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오늘 토론하는 모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오늘 콜로키움에 네 분 패널

교수님들을 모셨습니다. 저쪽 끝에서부터 법학부에 김성훈 교수님, 경영경제학부의 김재홍 교수님,

상담사회복지학부에 전명희 교수님, 그리고 국제어문학부의 윤상헌 교수님 모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오늘 만들고 보니까 교수님들이 많이 긴장을 하고 오셨는지 평소에 보지

못하던 예쁜 옷들을 다 입고오셨어요. (청중 웃음) 학생들 앞에 놓고 학예회 분위기가 되어버렸어요.

(청중 웃음). 아마도 하나님이 오늘 우리 대화 속에서 큰 가르침을 주시겠구나, 선생님들의

옷차림에서부터 그것을 예감하게 합니다.

일단 오늘 시간 씀에 대해서부터 잠깐 말씀드리고 그 뒤에 제가 짧은 기획의 말씀을

드리고 패널선생님들을 초청해서 말씀을 듣는 순서로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시간 사용은 이렇습니다.

제가 지금 이 안내말씀을 드리고 나면 약 2~3분 정도 짧은, 이 모임을 만든 기획자로서의 말씀을

좀 드리려고 합니다. 그 이후에 네분 선생님께서 10분짜리 이야기를 만들어오시라 부탁을 드렸는데,

그 이상이 되어도 좋습니다. 그 이하가 되면 조금 그런데, 아마 하실 말씀이 많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말씀들을 듣고 저희들이 그 말씀을 각각 10분씩 약 8시 조금 넘는 정도까지 들으려고

Page 13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30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생각합니다. 네분께서 각각 말씀하시고 나면 그 과정에 서로 좀 생각이 갈리는 부분도 있을터이고

또 생각이 같더라도 조금 더 명확하게 해야할 부분도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토픽들이 드러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이후로

약 15분 정도 시간을 써서 네분 패널 교수님 사이에서 좀 토론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여덟시

20분 정도가 되리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이후로 저희들이 모두, 이 방에 계신 모든 분들이 함께

참여하는 콜로키움으로 돌입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께서 어떤 코멘트를 해주셔도 좋고,

문제를 제기해도 좋고, 아니면 질문을 하셔도 좋습니다. 아니면 노래를 부르셔도 됩니다. 그 이후에

저희가 원래 한 45분에서 50분 예정을 해서, 9시 10분 정도에 모든 모임을 마치는 것으로 예정을

했었습니다만, 작년에 있었던 세번의 콜로키움 모두 10시까지 모임이 진행되었습니다. 오늘 이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상당히 뜨거운, 또, 사회과학자로서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어떤 고백들과 한

같은 것들이 토로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헌법 가르치는 선생인데요, 이 나라는

관습헌법이 지배하고 있는, 9시 10분에 마치기로 했어도, 관습법에 따라 10시까지는 가게 되리라

예상을 합니다.

그러면 잠시 제가 기획의 말씀을 말씀드리고 이 자리를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저는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사람입니다. 사회과학 중에서도 응용하는 학문이라는, 오해 아닌 오해를

받고 있는 법학을 전공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회과학으로서의 법학을 전공하면서 크리스쳔

공동체 안에서 보이게 보이지 않게 여러가지 의심 또는 혐의를 받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20세기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과학이 근본적으로, 인본주의적인, 또는 세속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같은 의심이 크리스쳔 공동체 안에서

사회과학 또는 사회과학자들에 대해서 일정한 불온한 시각으로 그 사람들을 보는 것과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이 믿음을, 그것도 절대자에 대한 근본적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하면, 사회과학을 이끌어가는 합리적 의심의 지향이 불화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언제나 긴장이 있고 그 긴장 속에서 때로 갈등이나 혹은 투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땅히 20세기 21세기에 사회과학을 하는 크리스쳔들이

감내하고 확인하고 극복해야할 긴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긴장과 불화를 창조적인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사회과학자로서는 우리 기독공동체에 중요한 계기가 존재한다, 라고도 저는

생각해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한동대학교가 크리스쳔 공동체로서 15년 성상을 지냈습니다. 이 안에

앞에 계신 김재홍 선배님을 필두로 십여 분이 넘는 사회과학자들이 이곳에서 사역하고 계십니다.

열다섯살이나 먹었으면 이제는 이 문제를 좀 드러내고 과연 20세기 학문이라 할 수 있는

Page 13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31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사회과학을 이끌어가는 것이 합리적 의심이라고 하는 이 전재는 과연 온당한 것인지 만약에 그

전제가 온당하다면 기독교 신앙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긴장을 크리스쳔

공동체는 어떻게 성숙한 방식으로 해소해 가는 것이 더 바른 방법인지, 이런 이야기들을

해보고싶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사회과학 그 자체가 완전 세속적인 것이고,

기독교적으로 제 정의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못박고 시작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존 밀뱅크라는

영국의 신학자 한분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존 밀뱅크에 의하면 사회과학을 이끌어가는 세속적인

전제를 하나의 정치신학으로 이해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과학 전체를 제 규정할 수 있는 길이

있고, 크리스쳔들은 마땅히 그것을 해야한다. 물론 그분은 신학자셨지 사회과학자가 아니니까 속

편하게 그런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만 사회과학자들로서는 존 밀뱅크의 세속주의적 테제로서

사회과학을 이해하는 것에 관해서 깊이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저희가 제목을

Christian community and prejudices on social science 이렇게 잡았습니다. 그런데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을 오늘 우리가 이야기 해도 좋겠고요, 그것이 조금 불편하시면 사화과학 그 자체가

하나의 편견은 아닌지를 이야기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어느 방향으로 갈 지 저도

잘 모릅니다.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이 모임을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학문과신앙연구소에 저 앞에

두분의 선배님이 소장으로 일하셨습니다. 학문과신앙연구소를 만드셨던 옆에 계시는 초대 소장님

윤상헌교수님에게 짧은 기도 부탁드리는 것으로 오늘 모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윤상헌 교수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저녁에 이곳에 저희들 모여있지만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더욱 기쁘고 감사합니다. 한동에서 이렇게 학자들이 모여서 허심탄회한 속

이야기를 나누게 하시고 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눈빛을 교환하는 시간이 강의 외에 있어야 할

터인데 많지 않아서 이러한 모임이 참 기쁘고 감사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아버지게 계셔서 더

감사합니다. 크고 두려운 광야 길을 걸을 때 우리가 홀로 걷지 아니하고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면

우리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우리의 행할 바를 지시하신 하나님

아버지, 한번도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으신 주님께서 오늘도 당신의 자애로운 손길로 그렇지만

우리의 정신은 오롯하게 깨어나는 당신의 만져주심을 이 저녁에 구합니다 저희들의 말과 나눔과

우리의 교감 가운데 성령께서 운행하셔서 이 남송리 벌판에 대학을 세우신 하나님의 열심, 지금도

이땅을 보시며 견딜 수 없어하는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의 정욕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이땅을 진정 하나님의

원래 계획대로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알아 준비하고 실천하고 부족한 가운데서도

우리의 노래를 쉬지 않는 그런 한 시간 그것과 이어지는 귀한 고리가 되는 시간으로 삼아주옵소서.

Page 13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32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김성훈 교수 : 법학부에 김성훈 교수입니다. 저부터 시작하면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거고, 윤상헌 교수님부터 시작하면 위에서부터 밑으로 내려오는건데,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전략을 쓰시겠다고 합니다. (청중 웃음) 아무래도 밑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옷까지 제대로 안입고 오면

성의 없다 할것 같아서, 일단 외모에는 자신 있으니까. (청중 웃음) 저는 2008년도에 여기에 왔고,

그 전에는 변호사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자라고 할만한 경력 자체가 2년입니다. 이국운

교수님은 한 20년은 하셨는데, 저는 조금 공부라고 한 게 고작 2년이라서 아무래도 이국운 교수님

옆에 있으면 그늘에 가립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 나를 차별화시킬 거냐, 실무를 부각시키자. 이게

저의 기본적인 전략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떤 전략을 쓸거냐, 너무 거창하게 나가면 제가 스스로

햍갈려요, 그래서 제가 스스로 경험한것 위주로, 그리고 내가 생각한것 위주로 말을 하는데, 저는

항상 답은 모범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범적인 답을 기대하시고 제 말을 들으시면 됩니다.

저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 편견이 있다' 이걸 전제로 말씀을 시작 하신다고 했는데요,

일단은 저는 법률가니까, 기독공동체가 뭐냐. 이거부터 시작을 할텐데, 쉽게 저는 정의내리는 것은

힘드니까 쉽게 교회 정도면 기독교 공동체겠다. 한동대, 그정도면 기독교 공동체겠다. CCC

네비게이터 정도면 기독교 공동체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데에서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이

있느냐. 일단은 저는 기본적으로 편견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려는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제가

91학번이기 때문에 1991년에 대학교에 들어왔는데, 19년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데요, 네비게이터에서 워크샵 같은 것을 해서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네비게이터에

들어갈까 말까 하던 차에 갔었는데 어떤 분이 간증을 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철학책 같은 것을

읽지 않아서 좀더 순수한 마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되게 감동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사람들

사이에 그런 동의가 있는가보다. 많이 공부하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머리가 복잡해지면 믿음에서는

좀 멀어진다는 생각이, 제가 예로든 것은 네비게이터기는 한데 기본적으로 기독 공동체들에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좀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몇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예컨대 주위에

사람들이 봤겠죠, 말 잘 듣던 친구가 갑자기 대학가서 철학읽고 하더니 또 성경이 꼭 옳은건 아니다.

이런 사람을 봤을 것이고, 또 설교를 하는데 바울 선생이 그리스 아테네 가서 철학으로 논쟁을 해서

이기긴 이겼는데 선교는 실패한게 아닌가. 결국은 그러는거 아니다. 믿음으로 하고 말씀으로

하는거다. 기독교신앙은 단순해야한다. 이런거.

그런것이 퍼지다 보니까 역시 기독교 신앙은 단순해야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Page 13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33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그런게 아닌가싶은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사회과학을 많이 공부해서,

철학공부를 많이 해서, 혹은 법학공부를 많이 해서, 혹은 다른거 공부 많이 해서 신앙이 더 깊어지는

경우도 있고, 더 안깊어지는 경우가 있는것 같습니다. 안깊어지는 경우는 눈에 확 띄고, 깊어지는

경우는 눈에 안띄니까 확 띄는 그것만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는 근거로 씀으로써, 아 이거

공부 많이 하면, 사회과학공부 많이 한 사람들은 뭔가 성경에서 좀 벗어나려 한다. 이런 인식이

생기는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제가 느끼는 것으로는 사회과학 공부 많이해서 신앙에

영향을 미칠 수도 안미칠 수도 있다. 그런데 기독공동체에는 영향이 나빠지는 것을 그 케이스만

빼서 전반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경향은 제 생각에는

좀 잘못된거다. 실재로 신앙이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 있고 또 굉장히 좋은 예가 있습니다. 바울선생

자체가 그리스 철학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신학을 그렇게 잘 쓰실 수 있었고,

예를들면 안디옥 같은 경우에, 안디옥이 헬라 문화권이었는데, 안디옥이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라

이름을 받게 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그런 지역이었거든요. 그런데

처음에는 바나바가 갔는데 성경에 정확히는 안나오지만 약간 힘이 딸렸던거같아요. 그래서 바울을

불러서 안디옥에서 같이 사역을 합니다. 그것은 추측컨데 바울이 희랍철학에 정통하니까 그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가르치면 더 잘 가르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가져간걸로 추측하는데,

이것은 저 혼자 추측한 것이 아니라 이번주에 우리 교회에서 특강하신 이만열 교수님이

추측하신거니까 아마 맞을겁니다. (청중 웃음) 그래서 여기서 이만열 교수님이 누구십니까 이런 말씀

하시는 분 있으면 곤란합니다. (청중 웃음)

제가 생각하기에는 충분히 Yes 인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실재로 혹시 사회과학은

위험하다, 신앙에 걸림돌이 된다는건 기본적으로 통계학적 오류, 옆에 교수님도 계신데 제가 말 잘못

꺼냈습니다. (청중 웃음) 기독교인들이 공부를 좀 하면,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 분명히 신앙이 더

강화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할거냐. 저는 개인적으로 사상에 완전히 자유로운

신앙은 기독교인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더 백지상태로 놓고 뭐가 맞는지,

기독교가 맞는지 아니면 무교가 맞는지 생각해봐라는, 혹은 유신론이 맞는지 무신론이 맞는지

생각해봐라, 이거는 현실적으로 어렵기도 하고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성경에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일단 그 믿음 가운데 출발해야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는 한데, 그

상태로만 지나가면 외부의 공격에 취약해지는 것, 첫번째로는 아는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무슬림이

나타나서 우리 코란에도 예수님이 나온다고 하면 핻갈리기 시작하죠. 정말 코란에는 예수님이

나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선지자라고 나올 뿐이죠. 아브라함도 나오고요. 그런거

모르고 있다가는 내가 믿는 것이 진리가 아닌가, 속았나. 이렇게 밖에 안되는겁니다. 그래서 더

크기위해서는 더 많은 영양분을 흡수해야하는거고, 더 많은 영양소는 많은 지식도 포함이 된다고

Page 13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34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생각됩니다. 지적인 측면에서는, 그런 측면에서 사회과학이 자신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측면에

충분히 도움이 많이 되겠다고 생각 하나가 있고요. 또 하나는 저같은 경우에는 법률가로서

공정거래법을 하는 사람인데, 성경 아무리 열심히 봐도 공정거래법의 구체적인 규정들이 나와있지

않습니다. 상법도 가르치는데, 매매법 계약법 이런 것도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아요. 성경에.

그러니까 그런 법 만들지 말자. 라고는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총 동원해서,

우리가 하나님 형상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를 총 동원해서 결과적으로 선한 방향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구조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되고, 성경에 직접 나와있지 않을지라도 그런 것들을

개발해내야될 개발해야될 필요도 있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직관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느낌 하나도

안옵니다. 그렇게 하려면 성경만 공부해서 되는게 아니라 사회과학도 공부해야합니다. 아까 이국운

교수님 말씀하신 거랑 저는 약간 다를 수 있어요. 왜 그러냐면 저는 실무가였기 때문에, 여기서 약간

차별화가 되는데, 원래 깊이 안들어갑니다. 좋으면 좋다.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는데 잘 하면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더 지식이 많아야 하고 좀더 경험이 많아야 한다. 이렇게 되다보니까 이게

하나님 맞냐 틀리냐 이렇게는 고민하지 않고요, 성경에 근본적으로 배치되지만 않으면 일단 다 좋다.

이런 입장을 기본적으로 저는 취하고 있거든요.

근본적으로 배치되는게 뭡니까. 이것도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일단 그건 웬만한 사람들이

다 분별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나를 위해서 오셨다. 이건 웬만하면

거의다 근본적으로 동의하는거죠. 예컨데 이런건 핻갈려요. 위에 있는 권세에 승복하라. 제가

학교다닐때는 좀 불의해 보이는, 실재로 불의했죠. 그런 정권이 있었는데, 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이

위에 있는 권세에 순복하라로 다 순복했어요, 그런데 그 바로 다음에 뭐라 되어있냐면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것으로서 나쁜 사람을 징벌하고 의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 나와요.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은 분들을 뭐냐. 그렇게 하지 않는 권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건데,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권세니까 그 권세에 승복해야 하는가 하고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충분히

문제거리가 될 수 있고 충분히 논의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해요. 정치세계는 정치세계고 종교 세계는

종교세계다. 그러니까 헌금은 하나님께 바치고 세금은 가이사에게 바쳐라, 이렇게 이야기 하고요,

어떤분은 어떻게 이야기하냐면, 가이사의 모습이 세겨진 금화기 때문에 가이사의 것이거든요,

예수님의 논리가 그것이거든요, 네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된 사람이니까 너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니까 너를 하나님께 바쳐라, 그러니까 더 큰 것을 요구하시는거다. 그렇게 이야기해서 정교

분립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까지 종교가 잡아먹어야 한다 이런 말로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어요.

얼마든지 근본적인 것 외에는 굉장히 열린 자세로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나아갈 수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Page 13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35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그래서 그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데

있어서는 아주 핵심적인 것 말고는 상당 부분을 열어놓고 대화를 하고 공부를 하고 또 공부한 것을

적용하는데 훨씬 더 신앙적으로 맞는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요약하면 편견이 있는것

같다. 그런데 그 편견이 잘못된것같다. 그러면 그 잘못된 편견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되는가.

적어도 가장 핵심적인게 아닌이상 대화의 틀을 열어놔야 한다. 그리고 첼린지를 해봐야 한다.

바꾸도록 노력을 해봐야 한다. 그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기 때문에. 예컨데, 제가 알고

있기로는 아우그수티누스, 그분은 성경의 비유적 해석을 굉장히 중시했어요. 지금 이해하는건

도저히 이해가 안되었어요. 예를 들면 굽이 있는 것을 먹지 마라. 그때는 어떻게 해석했냐면 굽이

이쪽 것은 세상이고 이쪽것은 하나님 은혜의 때다. 굽이 이쪽과 저쪽으로 갈라져있는 것처럼 세상과

저쪽 은혜로운 어떤 믿음의 공간들을 완벽히 구분해야한다. 그렇게 해석을 했어요 지금 그 해석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아우그수티누스는 엄청나게 유명한 서양에 영향을 미친

분이거든요. 그때 당시에는 그게 최상의 해석이었던거죠. 지금은 그게 최상의 해석이 아닌게 되었고.

그렇다고 해서 아우그수티누스가 이단이라고 아무도 안그러고, 저희가 이단이라고 아무도

안그럽니다. 그런 측면에서 정말 핵심적인것이 아닌이상 모든 것을 열어두고 본다면 훨씬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고 나누고싶었던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김재홍 교수 : 이국운 교수가 저한테 ‘선배님’ 할 때 조심해야되요. (청중 웃음) 어느날

갑자기 선배님 하더니 콜로키움에 나오라고 해서, 아시다시피 저는 이런데 결코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데, 제가 심한 I (MBTI검사-내향)이기 때문에, 군중들 앞에서 이야기 하는걸 심히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나오지 않는데. 상황적 특수성이 이국운 교수를 불쌍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교수가 부탁하는 모든걸 내가 들어줄 수 밖에 없게되었어요 (청중 웃음)

이국운 교수 : 할렐루야 (청중 웃음)

김재홍 교수 :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어제까지 저는 이게 뭐하는건지 잘 몰랐어요.

뭐 리엑션도 없고, 10분을 만들어오라고 했다는데 나는 들은 적도 없고 (청중 웃음) 일단 주제가

뭔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잘 보세요. Christian community and prejudices on social science 이렇게

했는데 잘 보면 경제학자가 제일 싫어하는게, 잘 정의되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겁니다.

(청중웃음) 그리고 제가 선동적인 구호에 굉장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멋있잖아요.

기독공동체, 사회과학, 편견. 원래 제목은 더 강했습니다. Phobia라는 엄청난 단어를 써가면서,

Page 13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36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그런데, 가만히 따져보면 아까 교수님도 말씀하셨지만 기독공동체가 무엇인지. 사회과학이 무엇인지,

또 편견이 있는지, 저는 편견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한동대 16년 동안. 그런데 이국운 교수가

자기가 편견을 받았다고 해서 저까지 편견을 받고 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걸 들여다보기

시작했더니, 기독공동체가 뭐냐 아까 교회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원래는

한동을 이야기 하고 싶었겠죠. 이국운 교수가. 그런데 한동이 기독공동체냐, 아니라고 그러기에는

너무 심하겠죠. 그런데 표준적인 기독공동체냐. 저는 거기 동의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이상적인 기독공동체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독 공동체가 갖는 편견이

아니라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십몇년 동안 우리가 겪었던 주관적 경험을 회상하면서

한동대학교가 사회과학및 사회과학자에게 편견이 있었는가, 억지로 편견을 찾아내는거죠 지금.

그래서 제가 드리는 말씀은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그런 가장 오래 있었고,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사회과학에 꽃이죠. 당연히 (청중 웃음)

첫번째는 이런겁니다. 제가 생각할때 관찰을 해봤어요. 어제 밤부터 쭈욱 돌려가면서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특징지워지는 것이 뭐가 있을까. 몇가지, 대단하지 않습니까, 제가 강의노트도

없는 사람이 오늘 이걸 적어왔습니다. (청중 웃음) 이런것 같아요. 편견이 뭐냐면, 사회과학은

기본적으로 세속적인 과학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사회과학자는 기본적으로 세속적인 과학자이다

라는 것이 암암리에 깔려 있는 모든 편견에 바탕이겠죠. 그렇다고 한동대에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특징을 나타낸다고 하는게 창조과학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자연현상에 대해서 하나님과 창조법칙이

적용되고 있고, 지금도 그렇고, 그래서 자연에서 일어난 모든 현상들은 하나님의 완벽하신 계획

하에서 일어나는 선한 것이고, 그 법칙을 우리가 찾는 것이 마땅히 우리가 해야할 것이다. 라는 것이

우리가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와 반대로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에

대해서는 창조과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것 같아요.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이기 때문에. 여기는 창조과학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기본적인 편견이 깔려있지 않나.

왜냐면 경제학을 가르치면 당연히 사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물의 으뜸이고, 자연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회라는 것도 하나님의 창조물일진데, 인간의 사회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창조법칙이

있어야 마땅하고 그 창조 법칙에서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사회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마땅하다는거죠.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하나님의 창조법칙이 모든 인간에게서 배재됬는가? 결코

그럴 수 없죠. 그러면 우리의 신앙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또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것을 자연법칙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배가 고프고, 자기 앞에 좋은 것이 있을 때

갖기 원하고 유혹이 있으면 흔들리고 하는 모든 것도 어떻게 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본성이란 말이죠, 그러면 인간이 가진 사회적 현상도 역시 창조과학에 대상으로 봐야한다. 그래서

더구나 기독교 대학이라고 한다면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하나님과 창조의 법칙과 섭리와 진리를

Page 13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37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발견하려는 노력이 그 어느 대학보다 강해야 우리가 기독교대학이라고 내세울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한동대학은 아직 우리는 완전한 기독대학이라고 볼 수 없고, 같은 예로 지금 사회과학에

대해서 굉장히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것이 아마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제가 한 첫번째

생각입니다.

두번째는 이게 아마 재일 어려운 문제 같아요. 이게 악이죠. 악. 사회적인 현상이 잘만

돌아가면 아무 문제 없겠으나 그러나 악이 찰궐하고, 우리가 숨쉬는것 자체가 악이고, 따라서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가 악인데, 두번째 굳이 억지로 편견을 찾아낸다면 사회과학자들은 개인적인 악에

대해 너무 용납적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거다 이거죠. 왜냐하면 한동대학은 제가 경험한

주관적인 판단에 의하면 개인적인 악에 과도하게 민감하고 엄격합니다. 그 세상 어느 조직보다

개인적인 악에 엄격성을 요구하고 또 실제 엄격하게 평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어떤 의미로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이렇게 생각해요, 저는

여기에 대해서 이게,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나? 하는 것을 조금 더 생각해보면 한동대학의 신앙이

극히 개인적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선과 악에 관심을 갖는 것이 필연적일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사회과학자들은, 사회현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악에 민감할 수 밖에 없고,

사회적인 악을 고발할 수 밖에 없고, 여기서부터 괴리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세번째는 그 사회적인 악에 원인에 대해서도 굉장한 차이가 있는것 같아요. 한동대학에서

크리스쳔이다는 사회적인 악의 원인은 개인의 타락한 죄성때문이다. 맞죠. 그러나 거기서 끝이라는

거죠. 어떤 사회적인, 제도적인 악이나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서 인간의 죄성을 발휘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요인에 대해서는 굉장히 간과하고 있는것 같아요. 그래서 철저하게 모든 사회적인 악은 개인의

죄성이다. 그에 비해서 사회과학자들은 그것을 인정하지만 인간이라는 것이 제도적인, 환경적인

법적인 제약조건 때문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더 나아가서는 사회적인 독제의 악이라던지

사회의 조직화된 악에 더 민감할 수 밖에 없겠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마지막 더 큰 괴리는

이어지는 거거든요.

그러면 악을 어떻게 고칠것이냐에 대해서도 상당한 괴리가 있다. 역시 한동의

기독정신이라는 것은 개인의 구원과 성화과정을 통해서 개인이 변화되고 교정됨으로써 사회적인

악을 치유할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하다 라는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것 같으나, 경제학자로서

볼때는, 개인적인 죄성을 극복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불가능하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인간의

죄성을 최소화하고 그나마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선한 모습들이 드러나도록 유도하는 사회적인

구조와 제도, 이런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져요. 그래서 인간을 바꿔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Page 14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38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불가능하다. 극히 어렵다는 것이, 이런 차이 때문에 어떻게 보면 경제학 첫시간에 학생들에게,

인간의 기본적인 죄성을 인정하고 들어가죠. 인간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산다라는 것을 가리키는 순간 한동대 학생들이 막 반감을 가지고 대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한테

95학번 어떤 학생들은 손을 번쩍 들더니 교수님 그렇게 살지 마세요 라고,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라는, 그러니까 바로 이거예요. 그러니까.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그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로 인정하는 것에서 사회과학이

출발한다면, 한동의 기독정신은 굉장히 모순적이죠, 왜냐하면 성경에 인간은 죄인이라고 선언한

것에 동의하면서도 그러나 실재 한동의 모습은 인간의 죄성을 교정하고 순화하고 성화시킴으로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라는 굉장히 자가당착적인 논리와 실재적인 행동과 정책을 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동이 사회과학자들에 대해서 경제학자에 대해서 혹은 저에 대해서 당연히 인간의 죄성에

대해 너무 용납적이지 않는가라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밖에 없겠다.

세번째는, 이게 다 연결된건데, 한동의 영성이라는 것이 굉장히 당위적인, Normative한,

Should, 물론 성경에서도 그렇게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해야한다는 당위론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이 드는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선해져야 한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 라는 식의 당위론적인 가르침과 구호가 한동에 강하고, 또 많은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그런 당위론에 동의하고 있지만 경제학자로서는 사실 그런 당위론는 결코

동의할 수 없겠다. 왜냐하면 IQ 80밖에 안되는 학생한테 너 1등 해야 된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거든요. 공부하기 싫은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내가 공부에 취미를 가지고 과연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사회과학적인 방법론이라고 한다면 당위론적인 구호로 끝나는것은

굉장히 비 현실적이고, 그럼으로써 과연 한동대가 추구하는 세상을 바꾸고 하는 것이

이루어질것이냐,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한동의 사례가, 좀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한동에서 일어나는 많은 구호들, 이국운

교수도 여기 엄청난 구호를 썼지만 기독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가만히 보시면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과연 이 말에 진실성이 있는지, 실현 가능한지, 그것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지 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알지 모르지만, 마찬가지, Why not change the

world, 정말 가슴을 뜨겁게 하죠. 세상을 변화시키자.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되게 뭔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과연 그 뜻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냐는 말이죠. 그러나

당위론적 이런 구호들은 굉장히 파워가 있어요, 선동적인 파워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경제학자는

과학적인 접근법은 그런 구호나 당위론적인 것에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실증적인 분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과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것이냐 라는 과학적인 분석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그런

Page 14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39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구호는 공허하고 스스로 모순적이고, 오히려 진실성 결여했다 라는 차원에서 사회과학자들이 갖는,

바꿔 이야기 하면 너희들은 왜 그렇게 냉담하냐 라고 할 수 있을거예요. 불같은 뜨거움을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자는 깃발 아래 왜 뭉치지 않느냐 하는 냉담함에 대한 비난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거죠.

그다음에는 아까 모두의 이국운 교수께서 이야기 했지만 사회과학이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 자유주의 사상 이게 기본적으로 신본주의와 어긋나고, 그런데, 뒤집어보면 바로 그런

현상 때문에 한동대에서는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굉장히 거부감, 자유는 곧 방종이고 죄악이고,

타락한 인간에게 자유를 주면 계네들이 뛰어나와서 할 짓이 뭐가 있겠는가? 죄를 범하는 것 밖에

없을 것이고, 세상은 Chaos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는 통제되어야 한다 라는

사상이 굉장히 강하고, 실제적으로 정치가 그렇게 이루어지고, 많은 학생들이 거기에 동의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인간이 굉장히 죄성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통제 외에 인간에 의한 통제는 결코 인간의 죄성을 교화할 수도 없고 또다른 사회적인 죄악을 낳을

수 밖에 없다는 차원에서 반대할 수밖에 없고, 또 하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죠.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가 정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인간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면 세상은

금방 망해야되죠. 서로 헐뜯고 물어뜯고 죽이고 그렇게 해야되는데, 한번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면서

인간을 바라보시면 세상을 바라보면, 놀랍게도 세상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 사회적인 현상은 사실은 놀라울 정도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죠.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통치라고 봅니다.

물론 경제학에서는 다르게 설명하지만 결국 모든 진리의 근원이 같다고 한다면 인간의 그런,

형편없는 인간들이 모여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라는거죠.

제가 수업시간에 가끔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어원이 오이코노이아라고 해요

헬라어로. 재미있는 것은 오니코노이아에서 나온 두가지 용어가 Economics고, 또 하나가

에큐메니컬인데요. 여러분 잘 아시는 일치운동입니다. 이 두가지 단어의 어원이 하나님의 경륜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 필연성에 대해서 저는 동의합니다. 왜냐면 경제학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 다양하게 지으신 개별적인 특성을 인정하되, 그것들이 모여서 놀랍게 조화를 이루는 그

비밀을 깨치는 것이 경제학의 주된 주제이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어원이 같을 수 밖에 없겠다.

에큐메닉 운동이라는 것도 모든 사람의 특성을 무시하고 획일화하는, 그런 것이 하나님 원하는

일치운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각자에게 부여하신 다양성과 독립성을 가지고 조화를 이루는 것을

우리가 에큐메닉이라고 한다면 경제학이 추구하는 것과 경제학이 전재하는 것은 놀랍게 일치한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대에서 생각하는 통치와 경륜이라는 것은 획일화, 인간에 대한 통치,

Page 14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40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그래서 오히려 경제학자, 사회과학자에 대한 비난은 오히려 스스로 받아야 될 것이다라는 편견을

갖습니다. 경제학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은 자유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가 자 자유주의자는 아니지만 자유에 대한 왜곡된 생각, 또 통제를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세상을 과연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으로 만들 수 있다라는 정말 잘못된 생각이 오히려 한동대에 오히려 더 많지 않은가 생각을

합니다. 그만할까요?

이국운 교수 : 더 하셔도 됩니다.

김재홍 교수 : 아까 제가 이야기 하려 했는데, 제가 수업시간에 법학부 학생들을 심히

괴롭히고 있는데 (청중 웃음), 지금 생각해보니까 이국운 교수님과 김성훈 교수님이, 이국운 교수가

‘선배님’ 하는 순간 저는 당했고, 아까 김성훈 교수님이 여기가 꼴찌다 했으니 저는 꼴찌에서 두번째

인데, 자기는 스스로 잘생겼기 때문에 옷을 잘 입고 왔다고 했는데 저는 옷도, (청중 웃음) 일단

이렇게 하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기로 하겠습니다.

이국운 교수 : 김재홍 교수님은 70년대 대학을 다니셨고요, 윤상헌 교수님하고 저는

80년대 대학을 다녔는데, 윤상헌 교수님은 80년대 아주 앞쪽에, 저는 좀 뒤에 다녔고, 그리고 두분

교수님은 90년대에 주로 다니셨고 80년대 입학 하셨습니다. 너무나도 예쁜 전명희 교수님에게.

전명희 교수 : 사실 어떤때보다 떨려서, 제가 말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서, 저는 상담사회심리복지학부에서 사회복지를 가르치고 있고요.

김성훈 교수님과 같이 2008년, 2년 전에 한동대에 왔습니다. 저는 학부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했던

공부라고는 사회복지밖에 없습니다. 제가 연세대학교를 나왔는데, 처음에 과 이름이

‘사회사업과’였어요. 사회사업과를 들어갔을때 그 과가 신학대학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사회사업에 태생이, 공부를 하다 보면 알게되겠지만, 기독교 쪽에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그런 일들이

자선 사업으로 시작하다가 어떤 학문으로 구축되다보니까 신학대학 안에 신학과와 사회사업학과

두개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들어갈때는 목사님 추천서도 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제가

3학년때 사회과학 대학으로 옮습니다. 저희학부 교수님들, 기독교인이었지만 정말 사회과학

대학으로 옮기고 싶어하셨어요. 일단 첫번째 거기가 점수가 더 높고, 훌륭한 학생들이 많이 온다.

이런 생각도 있었겠지만 신학대학 안에 있어서는 학문이 발전할 수 없다라는 동의가 굉장히 강했기

때문에 정말 사회과학대학으로 옮기는 활동을 열심히 하셔서 결국은 성공하셨고 지금은

Page 14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41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사회과학대학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사회학과 심리학은 인문대학에

있었고 법학부는 따로 있었기 때문에 저는 법학이 사회과학이었는지 오늘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청중 웃음)

편견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고 해서 처음한 질문이 사회과학에 대해 편견이 있나요? 라고

제가 여쭤봤더니 있는가 없는가 로도 토른을 할 수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 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이

주제를 가지고 제가 지금까지 편견을 받아왔나, 제가 많은 사람에 편견을 가졌어도 제가 편견에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었는데, 제가 편견의 대상으로 있었던 것인가를 회상하게

되는데, 더 비참한 답을 얻었던 것은 제가 이것을 나름 준비하면서 사회과학에 대해서 기독교

공동체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사회과학에 대해 기독교공동체가 무지하지 않는가. 왜냐면

편견을 받게 될 것이라면 관심은 적어도 있고, 그게 뭐하는 건지를 조금이라도 그런게 있어야

되는데 특별히 관심조차 없고, 논의의 대상이 안되기 때문에 사회과학 자체에 무지하고 안쳐주는 것

있잖아요. 그것도 편견이라면 편견인데, 거의 무지에 가깝다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는것 같아요.

가장 최근에도, 제가 기분 나빴던 것이 있었는데, 제가 잘 아는 목사님께서 저를 앞에다 두고

사회복지 박사과정가면 뭘 공부하시나요? 그렇게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제가 무슨 생뚱맞은

질문이신가 해서 네? 했더니 뭐 박사까지 공부 안해도 할 수 있을건데 거기서 굳이 박사까지

공부하는지 모르겠어요.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럴때 화를 내지 않고. 저는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목사님 굳이 답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부드럽게 이야기 했습니다. 상대방이

무지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제가 강의를 할 수는 없잖아요. 개론부터.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돼서,

어쩌면 논의에 조차 올리려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그건 비단 교회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가끔 그런걸 느끼는데, 여기서 사실

사회과학에 대한 정의가 많이 다를 수 있는데 저는 사회과학에서 제가 커버하고 있는 학문의

분야라면 심리학, 상담학, 사회복지학 이런 분야에서 인간과 사회와, 특히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

현상에 대해서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고 치료하고 극복할 것인가? 라는 그런 주제에서

사회과학이나 조사방법론 같은것을 다루는데요, 이를테면 인간이 어떤가. 라는 것이, 심리학은 인간

내면에 관한걸 이야기 하고 있는데, 심리학도 굳이 사회과학이라고 포함해서 넣는다면 최근에

우리를 약간 어색하게한 책이 한권 있어서 가끔 우리학부 학생들이 토론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어요.

<심리학에 물든 기독교>라고 하는 책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저는 혼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 사람

한테 가서 말은 못했고요. 그 책을 낸 저자분인지 출판사인지 모르겠지만 심리학에 물들었다고 하는

그 세일즈가 심리학적인 것을 자극했죠. 왜냐면 본인이 대형교회 목사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그걸

내세우지 않고 그냥 책을 쓰셨다면 나름 주장을 하시는구나 생각을 할 것 같은데 유명한 목사님의

Page 14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42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아들이신데 그게 서문에 나온단 말이죠. 그 책에 서문에 나오면서. 너무나 사람심리를 잘

이용하고있는, 또하나, 그 존경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피규어에 심리적인 우리가 이야기하는 투사,

projection이 본인에게 옮겨져서 그 책이 너무나 많이 읽히고 팔리도록 만드는, 심리학을 비판하는

책 치고는 너무 심리학적이지 않은가. 생각을 했거든요. 인간은 죄성이 있고 또 특히나 죄성을

이야기할 때 심리적인 부분의 타락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창조된 부분과

죄성이 어우러져서 현존하는 우리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면 과연 어떤,

그 다음 단계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저는 해보게 되요.

그래서 교회공동체나, 학교에서 하면 사회과학적인 방법론, 사회학이 아니라 과학이

붙었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여기서 객관성이든 타당성이든 합리성이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그

틀을 통해서 나온 결과를 진리는 아니지만 가설에서 어느정도 이론 정도로 차용하는, 그런 방식을

의사결정과정에서 거의 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목사님들의 설교나 학교 의사결정권자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것이 통계결과입니다. 학생들의 몇 %가 무엇을 했다 이런 것에 굉장히 의존하고

싶어하거든요. 그럼에도. 마음속으로는 굉장히 차용하고 있지만 실제 우리 앞에 문제가 닥쳤을 때

그런 사회과학적인 비판의 틀을 가지고 그걸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서 저도 이런 학문에서 훈련을 오래 받다보니까 좀 많이 변한 부분이 있는데, 무서워 졌다고

너무, 너무 냉담하고 무서워졌다고, 예전에 안그랬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왜그러냐면 저 혼자

생각에 그래요. 우리 학부 학생들에게도 이야기하는데 사회과학도다 이렇게 이야기 할 때 예를 들면

우리학교 학생들이 전공 선택에 굉장히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 다음에는 열가지

이상의 질문이 한꺼번에 올라와요. 이를테면 도대체 몇% 정도가 그런 어려움을 겪을 것인가,

2학년때 겪을 것인가 이과생이 더 많이 겪을 것인가 겪는 과정에서 어떤부분에, 가을인가 개인이

겪는 과정에서 어떤 것이 한동대에서 주로 되는 것인가 이런 모든 질문에 답을 안가지고 있는거예요.

그래서 답을 알고싶거든요, 그런데 답을 아는 방법이 바로 과학적인 방법이어야 하는가 라는게

사회과학도의 질문인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가만히 보면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 선배님께서 한동대

이야기를 하셨으니까 저도 살짝 하면, 그 연구를 하거나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한테 그런걸

조사해봐라 그런건 잘 안하시지만, 이야기를 같이 하다보면 나름대로 직관이나 아주 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서 답을 내리고 계시는 것을 많이 보거든요. 그래서 저분은 조사해보셨나. 답을 물어봤나,

열명한테라도 물어봤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거기에 자신의 관심이나 편견이나 이런게 투영되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결정하는 결론이 난다는거예요. 그럴 때마다 저는 약간 올라오는. 마음

속에서 일이 이게 이렇게 되도 되는가? 물론 사회과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아까 이야기한

객관성이라던가, 과학성의 한계가 있는 것은 틀림없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대상은

되어야 그 다음단계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요.

Page 14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43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어쨋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본주의적인 함정이 굉장히 많다는 것은 그것도 맞는 말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혼자 생각할 때 우리가 예를들어, 인간에 대해서 이해할 때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다 라는 것이 하나는 기회가 되지만 하나는 위험성이 되는 것이죠.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거죠. 인간이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에

관심을 가질 수 없는데, 그런데 그것 자체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지만 우상숭배를 할 수 도

있는 거죠. 영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방향 문제는 있지만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발견은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거죠. 제가 하는 영역에서는

인간이나 가족이나 사회가 어떤가라는 것을 질문 할 때 그것이 기독교적으로 옳은가 틀린가 이전에

창조적인 원리가 타락의 상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생각을 하면서 가능하면 인본주의적인

것을 넘어서는 대 전제를 깔고 봅니다. 대 전제가 창조 타락 구속의 역사관 안에서 어떤 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굉장히 크리스쳔 사회과학도로서 가질 수 있는 좋은 자세인것 같아요. 우리가

의사소통을 할 때, 이것도 이론이지만 의사소통 이론가들이, 메세지가 전달되면 Content, 내용이

있고 Context 맥락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밥을 먹었는가 확인하는 것도 밥 먹었니? 라고

물어보는 것도 있고, 지금까지 밥도 안먹고 뭐하고 돌아다녔다고 하는 뉘앙스나 컨택스트가

다르잖아요 그 어떤 내용이 전달될때는 맥락, 관계성, 그사람과 나와의 Messenger과 Receiver

간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그 내용이 온전한 자리를 잡는다고 생각하는데, 연구를 하는 저희같은

학도들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을 올바로 잡은 컨텍스트 안에서, 똑같은 이야기지만 그

컨텍스트와 맥락을 가지고 그 이야기를 해주면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 커다란

맥락을 그려주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했건 안했건

어떤 연구 결과가 나왔을때 커다란 기독교 세계관 안에 창조 타락 구속 회복 치유 해결, 복지에서는

주로 거기 관심을 갖는데, 그런 맥락에서 이게 제 자리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작업을 나름대로는

해보고, 그것이 약간의 인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구나 하는

것을 확인을 하고요.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는데,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기독교상담자 몇명과

워크샵을 갔던 적이 있었는데, How can I forgive you. 라고 하는 제목의 워크샵이었어요. 그 책

제목이기도 한데, 배우자가 외도를 한, 그래서 상처를 받은 나머지 배우자들이 상대방을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가 또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치유해야 하는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한

워크샵이어서 굉장히 나름대로 그 분야에 권위가 있으신 분이거든요. 그분이. 유명하신 분인데.

보니까 기독교인이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무엇을 이야기하셨냐면 그분이 계속 용서를

이야기하는거예요. 용서에 대해 계속 강조를 하는데 그 내용은 전혀 기독교적인 단어는 안쓰는데 그

Page 14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44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Flow가 거의 기독교적인 맥락을 이야기하는데, 저는 거부반응이 있었어요. 정말 참된 용서는

예수님만,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건데, 아류적인 용서를 가지고 이렇게 책을 쓰고 팔고 하면 어쩌냐고

했는데 옆에 같이 가신 크리스쳔 상담사분께 질문을 했더니, 그분이 했던 이야기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용서라는 것은 있어야하는거 아닌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을 때 믿는 부모가

아니라도 자식을 사랑할 줄 알고 그걸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고있는데, 궁극적으로 그 사랑의

행위를 해봤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도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면서 또 하나는

인본주의적인 사랑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는게 우리 인간의 현존인것 같아요. 그래서 용서라는

개념이나 우리가 세속적으로 이야기하는 은혜라는 개념, 우리가 좋게 이야기 하는 가치, 우리가

정직이라고 이야기하는 개념 같은게 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있는 거지만, 그것이 꼭

바른 방향을 잡는 것은 아닌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의 좋은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되고 그런 경험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회복으로 가는 루트를 발견할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믿던지 믿지 않던지 비슷한 모형과 같은

방식의 답을 할 수 있게 되겠다고 나름대로 생각을 하게됐어요.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었던 시야가

조금 더 넓힐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면에서 인간이나 사회의 문제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국운 교수 : 잠시 진행하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바깥에 아마 많은 분들이 서 계신것

같아요. 그래서 가능하면 자리를 좀 마련해서 앉을 수 있게 했으면 좋겠고요. 저는 사실 부흥강사집

아들이라 상당히 익숙합니다만 뒤에, 밖에 계신 분들이 불편하지 않으시면 앞쪽으로 들어오셔서

바닥에 앉으셔도 될 것 같고요 혹시 청바지를 입고 있는 남학생들인 경우에는 자리를 양보해주시면

바닥에 내려앉아주시면 여러가지로 좋을것 같습니다. 많은 교수님들이 이자리에 계시고 또 왔다

가시고 관심을 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사회과학자가 아니시지만 사회과학자들과 아주

친하신 인문학자가 한 분 와 계십니다. 패널로 와 계십니다. 앞에 계십니다 윤상헌 교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기독공동체 안에서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또는 무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아마 제 생각에는 인문학도 어쩌고저쩌고다 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네번째 마지막 패널 말씀을

듣겠습니다.

윤상헌 교수 : 국제어문학부 윤상헌입니다. 고명하신 네분의 사회과학자선생님에, 사실

저는 안해도 될 것 같아요. 바로 토론으로 가는게 더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면서도 아까 우리

김재홍 교수님께서 경제학이 사회과학의 총아라고 하셨어요. 꽃이다. 제가 인문학의 꽃인 언어학

(청중 웃음). 이게 브릿지 학문입니다. 앉아계신 네분을 다 연결할 수 있는, 심리언어학 사회언어학,

경제언어학은 없습니다만 제가 말의 경제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경제라는 말씀을 할 때 귀가 솔깃

Page 14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45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했습니다. 저는 인문학자입니다만 사회과학을 하는 형제자매들 볼때마다 힘을 많이 얻습니다. 제가

사회라는 골목 혹은 광장 이런데를 지나다니기 때문만은 아닌것 같아요. 70년대 후반 80년대 초에

기독교회가 많이 부흥할 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평생을 제자로 살고싶다는 마음, 그 속에 있었는데

돌아보면 당시 이공계통의 형제들은 참 많았는데 인문사회 쪽에는 헌신하고 준비했던 그런 동지들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옆에 계신 네분의 형제자매 교수님들이 참 귀합니다. 저는 늘

말을 공부하면서 말이라는게 혼자서 하는게 아니고 최소한 두사람 이상 있어야 말이 성립되잖아요.

어느 부족의 언어가 사라진다고 할 때는 실재로는 최후의 언어 화자가 숨을 거둘때 그 언어는

없어졌다고 이야기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사람 이전에 상대자, 다른 타자 한분이 세상을 떠나면 그

언어는 사실상 없어지는 겁니다. 사회라고 하는 것과 땔래야 떌 수 없는 것이죠. 네분이 아주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잘 하셨는데 제가 하면 분위기가 가라앉는 느낌이 들어서 (청중 웃음) 10분은

죽음입니다. 저더러 10분을 이야기 하라고 하는 것은 인사하고 이렇게 객적은 소리 하다가 10분이

지나가는 사람인데, (청중 웃음) 제가 교회 장로라 가끔 설교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굉장히 자기

부인이 필요로 하는, (청중 웃음)

저는 편견에 대한 더 근본적인, 이 편견을 기정사실로 하고, 아까 편견을 넘어 무지

이런말까지. 사실인것 같습니다. 사실인데, 그 편견에 무지, 그거면 괜찮은데 오만하기까지 해요.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되는데, 내가 모르는 지점을 넘어서 그냥 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것이

많이 힘들어요. 한동 뿐만 아니라 삶이 고단해서 가끔 제가 그런 경우가 되는 경우도 있는것 같고.

그런 편견과 무지, 그리고 도무지 이대로 살다 죽을레, 건들지 마 하는 태도 속에 깔려 있는 아주

강구한 의식이 뭔가. 저는 그런데 관심이 많습니다. 이 신앙을,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몇가지 사실이

있는데, 특별히 인간의 경험과 존재에 있어서 신앙이 주변적이고 정서적인 것이다 치부하는 근대

후기, 후기기독교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는 정황적 사실이 보도가 되고 있고, 인간의 존재와 경험의

부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에 연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관계의 회복이 결코

생략될 수 없는 중요한 시작이다. 시작이라는거죠.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이

시작 지점에 그리스도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이 자리하고 있다는 고백, 일치, 그것에 대한

전제가 우리가운데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 가운데서 제가 사실 일확 많습니다. 한동에. 한동대 사람을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몇가지 일화를 적어왔는데 그 첫번째 일화는

성조기 관련된 일화인데 제가 그건 안하기로 했습니다. 안하는게 좋을것 같고요. 두번째 일화가

체플의 한 풍경입니다.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 즈음에 대학교회 강단에서 특정한 목사님들이

설교 가운데 특정 정당을 옹호하는 정치적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몇년 몇월 몇일이라고

Page 14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46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이야기 할 수도 있으나 시간이 없기 때문에 (청중 웃음)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해요. 이게 소소한

재미입니다. (청중 웃음) 제 기억으로는 예배가 계속되면서 제 속에는 열불이 났지만 전혀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작년에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어떤 언급을 했던 설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정치적 발언이었다고 아주 문제를 삼고 항의하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었고요.

최근에도 있었던 일입니다만 어떻게 보면 축제의 자리이기도 하고 경축의 자리이기도 하고 축복의

자리이기도 한 자리에서 오고간 그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당신이

연구하고 강의하고 그런것 외에 한동에 기여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재미있게도 그 질문을 받은 선생들이 사회과학자들이예요. 그런 일화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

속에서 그런 이야기가, 아까 이야기 했던 성경에 메타 이야기, 이런걸 다 포함해서 우리들의 이야기

이런걸 다 포함해서 여기 큰 배움터에서 대학인으로서 의미. 또 기독 대학의 소명. 이런 것을 묻는

질문과 우리가 맞물려있다는거죠. 대학의 의미가 무엇이고 기독 대학의 소명이 뭔가 이런 생각을

얼핏 해보게 됩니다.

좀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보이는 물리적 우주가 실재의 전부라고 말하는

유물론적 자유주의. 인간이야말로 만물의 척도이며, 세계 존재와 구조는 다름 아닌 인간 의식의

구성적 반영이라 이야기 하는 창조적 반 실제론, Creative anti-realism같은거예요. 진리의 일관성,

절대성이 뭐 있냐 그런거 없다하는 상대주의, 이런게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그게

학문의 영역은 아주 민감하지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변혁적 은혜에 의지하여 여러

학문분야의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일관된 전체의 부분으로 상호 연관되어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뭐든지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천명하고 그 속에 참된 확장을

통해서 구체적인 사회, 정치적 삶의 영역과 문화의 공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케 하는 것.

현재적 실재를 경험케 하는것. 죽어서 가는게 아니고. 거기 있습니다만. 죽어서 가는게 사실이라면

여기서도 사실이어야 하고 또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작업은 매우 의미가 있죠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구체적인 준비와 도구가 이땅의 대학의 의미이고 기독 대학의 소명이라고 지금도 한동에

그 소망이, ‘이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만 ‘되겠지’를 넘어서서 되어야 한다.

아까 당위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아직은 그 당위가 저를 오늘도 강의에서 흰소리를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제가 4,5,6교시 연타였어요. 지금 7,8,9입니다. (청중 웃음) 저는 이

지점에서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겠지만. 인식과 의식을 우리가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인식과

의식. 그러니까 Why not. 이거 있죠. 요즘은 이게 안들어와요. 세상 변혁이라는 신앙 의식을

앞세움으로 사실을 바탕으로 한 광범위한 자료와 정확한 논리를 바탕으로 분석적이면서 종합적

해석을 구사해야 하는 세계 인식적 관점과 실천에 복무하지 않을 때 치명적인데, 그럴 때

Page 14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47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결과적으로 신앙의식, 아주 멋있는 신앙의식, 우리가 두문자어 만드는데 도사에요 잘만들어요.

구호가 아주 끝내줘요. 그것도 은사입니다. Arise and Shine, (청중 웃음). 문제는 그런 철저한

인식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의식은 혼란스러워져요. 그리고 공허하고 무력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는 안되었는데, 안되어야 되겠죠. 저는 개인적으로 세계상의 확보다. 세계상의 확보를

실패하면 아무리 멋있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도 저는 기독교 세계관은 동네관이 아니고 세계관이고,

기가막힌 것이거든요. 고성능 망원경을 가지고 실내에만 머물러 있는거예요. 고성능 망원경을 들고

나에게 익숙한 지형만을 살피는, 안방에서 호랑이 잡는, 그러니까 망원경이 쓸 데가 없는거지.

그러니까 세계관에 대한 유효성도 이상해지는거예요.

저는 기독교수의 소명이, 우리 강영안 선생님이 쓰신 글 가운데서 인용을 했는데,

기독교수란 죄를 통해 왜곡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회복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연구와

교육의 섬김을 통해서 참여하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말에 동의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과학자란 저같은 인문학자에 약간의 응원과 격려와 도움과 기도를 받으면서 역동적인 견인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사회의식을, 이게 필요하거든요. 차갑고 정떨어지는 세상에 좀 뜨겁게 사는건

필요한데, 문제는 이 사회의식이라고 하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사회인식, 아는 만큼 보이는

거란 말이죠.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는 것이예요. 물론 안다고 사랑하지는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표현,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 사람으로 더불어 사는 하나님, 예수님의 방식인데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이중의 운동. 이것을 제가 사랑하는 김준형 교수님, 이국운 교수님, 세분도 있으셔요.

보고싶어요. 그것을 볼 때 기쁩니다. 볼거라고 믿고요.

저는 그런 부분에 사회과학이 제가 하는 인문적인 과목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정서에

기초한 의식만이 아니라 실제로 사실, 제가 늘 강조하는 하나님에 관한 사실, 진실 Fact에 집중해라.

그게 제가 네비게이터 훈련을 받은 적이 좀 있는데, 거기서도 늘 그래요. Fact가 중요하고 그다은

Fate고 그다음에 feeling이라고 해요. 사실을 믿는거죠. 그것을 믿고 그다음에 기쁨이 오는거예요.

그건 옛날에 배웠던 아주 기초였는데 그건 여전히 학문의 영역에서 적용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학문과 신앙은 구체적인 문법이 다를 뿐이지, 어휘가 다를 뿐이지 근본적인 Universial grammer를

공유하는 영역이다. 학문과 신앙은 다른 영역이 아니다. 왜. 사실에 집중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유의미 하지요. 그런데 그런 편견 가운데

깔려있는 것 중 하나가 세속화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세속화. 그런데 기독교적 성격을 표방했던

하버드나 예일 이런 미국 대학들이 초기에 종교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disestablishment의 과정을

겪는, 것을 연구하셨던 분이 조지 마슨입니다. 이분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원인, 예전에 하버드가

지금의 하버드가 된 이유, 그 원인 중에 하나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19세기 당시에 기독교가

Page 15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48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실용적인 도덕이나, ‘컨닝하지 마라’ 그런거, 그린켐퍼스, 이런거, (청중 웃음), 기독교가 실용적

도덕이나 종교적인 감성만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주류 과학과의 대화가 단절되어 그당시

근대성이라고 하는 파도가 막 밀려올때예요. 모더니티라고 하는 세력을 균형있게 통제할 수 있는

지적인 신학이나 교육의 전망을, 그런 관점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세속화를 무서워서

그것을 안했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담장을 무너뜨린 Driving force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잘 배우지 못하는 인간들이지만 생각해봐야합니다.

마지막으로 전(前)경과 전(全)경, 앞에 보이는 전경, 그리고 온전한 전경, 전경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이라고 하는 것이 모름지기 민주경영에 대한 비전과 안목이 있다고 하면

좀스러워서는 안된다는거죠. 전체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창조 타락 회복의 전체 그림을 봐야

하고, 각 창조 타락 회복이라는 영역안에 있는 전인를 보려 해야하고, 전체 영역을 보려고 해야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앞 전(前)자의 전경만 주로 보려고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 기독교는 굉장히

축소되어있다. 축소된 기독교는 복음의 풍성한 스펙트럼을 도무지 경험할 수 없다. 복음의 풍성한

스펙트럼을 경험하는게 기도제목도 아니예요. 주여 내가 장신께서 주기 원하시는 생명의 풍성한

삶을 살아생전 우리 교회가 그 공동체를 경험하고. 우리 학교 예를들면, 이런 기도를 하지도 않죠.

이미 축소되어있다고 하는 증거가 아닐까 해요. 우리 신앙이 창조 타락 회복의 실제에 구체적으로

닿아있지 않으면 역사와 상황 속에서 인식되고 경험되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 중심성, 죽음의 절망과

공포에 따라 왜곡되고 축소될 수 밖에 없어요. 니버가 지적한바, 문화와 사회제도에는 함무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norm이 있어요. 물리적인것 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적인 부분에

하나님의 norm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일시적인 요소가 존재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할

수 밖에 없는 하부구조를 근본적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했던 종합주의자들의 오류가 있는데, 오늘

한국적 상황에서 복음주의적 통합론자들이, 학문과 신앙의 통합, 문화와 신앙의 통합을 말하면서

실재로는 인간의 상황과 문화를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적분한단 말이예요. 결국 자신들에

익숙한 체제의 수호, 자신들의 교파, 자신들의 신앙의 습속에 익숙한 어떤 것을 가지고 그게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거예요. 거짓말이예요. 결국 자기의 체제 수호, 아주 까놓고 이야기 하면 자기

욕심, 자기의 정치적 야심, 습관, 이런 관성을 유지하는 것, 그것을 추구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거예요. 기독교 대학, 학문과 신앙의 통합 다 해도 다 간판이예요. 하나님의 음성을 반영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타락한 죄성을 지닌 인간의 얕고 편향된 이해는 실제 가지고 있는, 옆에 있는

형제가 가지고 있는 중의성이 있어요. 사람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알것 같지만 다 모른다고요.

모호성. 내 옆에 이 이국운 선생 앉아 있지만 우리가 얼마 됬어요? 만난지?

이국운 교수 : 12년 째입니다.

Page 15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49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윤상헌 교수 : 12년째예요. 그런데 사람이 의뭉스러운데가 있어서 (청중 웃음), 개인적인

것도 공개적으로 까고 그래요. 내가 안다고 생각하고 많이 알아요 그런데 나름 애증이 겹쳐있는.

그런 중의성이 있어, 모호성이 있어요. 문장에만 모호성이 있는게 아니예요. 이 시간에 언어학 강의

나가면 안되니까 그만하고. 난해하다고요. 그리고 완고해요. 그렇게 쉽고 만만한게 아니예요. 나는

너를 내 손에 넣고 이런건 웃기는 소리예요. 심지어는 하나님도 파악하는 사람이 있죠. 하나님 다

아는것 처럼. 그런데 결국 그게 자기중심적 환원론에 귀착되는거예요. 요새 저희가 시간과 타자 읽고

있는데 그 공부 하는거예요. 결국 그렇게 축소되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포괄적인데. 증거는 전도하고

전도를 깨우는 이야기란 말이예요. 말로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은 중요한데, 그거 소홀하게

이야기하면 안되요. 나는 삶으로 전해, 말로도 전해야되요. 말도 삶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 그런데

전도와 증거는 그 이상의 것이라고요. 그런데 그런 포괄적 선교를 감당하기 너무 어렵죠.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근거해서 개개인에게 회심을 하게하고, 아까 우리 김대옥 선생님한테도

말씀하셨지만 사회 전체나 삶의 구조를 배상을 하는 것. 하나님나라와 정의를 구현하는 양쪽에 불을

지르는 것이죠.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형성하는 사상과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것. 그리스도의

구속은 그것까지 포함된다는 말이예요. 저는 그런 부분에서 우리 한동을 돌아보면 대학구성원들의

담론 가운데 이야기하는게 고등학교 학생들 모여있는 강의실 같아요. 내가 고등학생들 무시하는거

아니예요. 다 큰 녀석들 무시하면 어떻게. (청중 웃음). 체플 보면 이게 대학체플 맞는지. 고등학교

4학년 5학년들이 모여있는것 같아. 그리고 수업도 그런 느낌이고. 이게 정서 그런게 아니고. 우리

대학구성원의 담론에 4대강 문제, 이런거, 양극화 문제, 민족 분단문제, 네가 김성훈 교수님과 같은

교우입니다. 이만열 장로님이 지난주에 오셨는데 그분이 38년 생이신데 당신이 늘 기도하시는

문제가 민족 통일 문제인데, 자기 아들들한테, 조손 관계가 돈독하잖아요. 손자들에 분단체제를 그냥

넘겨주는게 가슴아프다고 그러세요. 그런데 그게 멋있는 레토릭이 아니예요. 진짜 가슴아파파시는것

같아요. 민족분단 문제. 그리고 점심 굶는 애들이 있거든요. 요즘 다문화 가정 문제. 다문화 가정이

해체되면서 애들이 버려져요. 조부모가 자기 손자로 생각을 안하는거예요. 이거 우리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 건들지 않으면 나중에 엄청난 사회문제로 부메랑이 될겁니다. 칼맞는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우리가. 할게 많은거죠. 입시문제, 파행적 교육문제. 이런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부담감으로 자리잡고있지 않아요. 그러면서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아주 엄청난 말을, 저는 그 말을 포기하자 계속 했으면 좋겠는데, 이게 뭘

말하는건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됩니다. 제가 이미 큰일 났어요. 이정도로 하고 계속 이어보죠.

고맙습니다.

이국운 교수 : 감사합니다. 우리 예정보다 30분 정도가 더 지났는데, 얼마나 오늘

Page 15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50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선생님들이 하실 말씀을 많이 가지고 오셨는가.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따로 정리를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고, 다음 순서를 이어가기 위해서 선생님들이 하셨던 말씀을 조금

되짚어보려고 합니다. 네분 선생님들께서 우리가 전공하는 또는 다른 교수님들이 전공하시는

사회과학이 또는 과학 그 자체가 세속주의적인, 인본주의적인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감하신것 같아요. 그런데 그 위험을 관리하거나 또는 극복하는 문제에 관해서 아마도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선생님들이 제일 큰 책임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 하신 말씀들이 그냥 하나의

관전평이 아니고 본인 스스로가 복무하면서 사시는 영역에서 실재로 겪고 계시는 문제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하신 말씀들 제가 조금 요약해보면 먼저 '자유'라는 말씀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학문에

관한 자유, 가능하면 그 자유를 넓게 인정하라. 뭔가 알고싶어하고, 그 안것에 관해서 말하고 그것을

함께 생각해보는 그 자유가 어쩌면 네분 선생님들의 말씀을 이끌어가는 아주 중요한 화두가

아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또 특별히 김재홍 교수님께서 '사회'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회과학자들은 개인의 문제보다는 그 개인들이 함께 모여있는 사회 또는 그 사회의 중요한

측면으로서의 사회구조, 특별히 사회 구조 속에 구조화되어있는 악의 문제를 이야기 하려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훨씬 더 힘들고 버거운데, 우리 기독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이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다 환원하는데 너무 익숙해 있어서 어려운 사회의 문제, 구조의 문제를, 윤상헌 교수님 많이

말씀하신것처럼 역사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우리를 도무지 알아주지 않는다. 그 말씀을 저는

아주 무겁게 들었습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전명희 교수님께서 '무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편견이

아니고 무지가 아니겠는가. 제가 사실 처음에 준비를 하면서 phobia, 사회과학 공포증이라는 말을

썼는데, 지난주까지 제가 그걸 유지를 했었는데, 그냥 그렇게 할껄 그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지가 만약 문제라면 그 무지를 좀 해소시키는 어떤 치료가 필요하지 않겠나 생각을 좀 했습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윤상헌 선생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 인식의 문제, 의식의 문제. 사실에 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인식 없이 당위를 가지고, 욕망을 가지고 덮어씌워서 사실인체 하는 그 태도.

그것에 우리가 너무 깊이 빠져 있는 것이 아닌지. 윤상헌 교수님 말씀이 늘 상당히 메타포가 많아서

하나 하나 전달되지 않습니다만 큰 덩어리로 (청중 웃음) 물론 저에게는 음흉하다는 말을 해소할 수

없는 데미지가 되어서

윤상헌 교수 : 의뭉이라고 했어

이국운 교수 : 조금 나아졌습니다. (청중 웃음) 그렇긴 합니다만 어쩌면 바로 그것이

무지를 해소하는, 공포증을 없애는, 그 문제에 있어서 맨 처음 치료가 시작되어야하는게 아닌가 하고

Page 15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51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들으면서 제 가슴을 조금 힘들게 했던 한 단어가 있습니다. 김재홍

선배님께서 쓰신 '냉담'이라는 단어입니다. 냉담이라는. 사회과학자들은 아마도 너무 분석하는

대상과 친해지면 분석적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우니까 일부러라도, 사회과학만이 아니라 학문

전체가 조금 냉담함을 유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학교에 계신 여러

선생님들 중에 특별히 류대영교수님의 표정에서 (청중 웃음) 절대 학생들 앞에서 웃지 않겠다 라는

그 역사가로서의 냉담함을 애써 유지하고 계신 것을 제가 보는데, 한편으로는 그 냉담함을 깊이

존중하고 사랑하지만, 역시 그 냉담함이 또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드리기 전에 선생님들 중에 혹시 이 말씀은 덧붙여야겠다. 라는 생각이

있으시면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경제학이 왕이라 알고있는데 오늘은 꽃이 되었어요.

김재홍 교수 : 주제와 상관 없는 이야기를 해도 되죠? 나 오늘 진짜 잘 온거 같아요.

그래서 돌아가야겠어요. 우리 윤상헌 군이 (청중 웃음) 내가 좋아하는 후배이자 동료이자 존경하는

장로님인데, 이국운군을 향해서 음흉하다고 해서 통쾌했어요. (청중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윤상헌 교수의 말씀을 알아듣습니까? 윤상헌 교수하고 이야기 할 때 이 화려한 언변과

성과 속을 넘나들면서 내공 가득한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데 정말 말 잘한다. 나도 저렇게 됬으면

좋겠다고 굉장히 열등감을 느끼다가 어느 순간 이거 말을 못하는거 아냐? 그래서 이국운군이 전체는

못알아듣겠지만. 그렇죠. 우리 인본주의라는 말이 고단함을 갖게 하죠. 인본주의라는게. 저는

한동안에 잘못된 판단이 모르겠지만 하나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는 인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 고민하고 많은 학생들이 찾아와서, 여러분의 고민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 제가 평생 고민하고 기도하고 하면서 내린 결론은 하나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당연히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은 짝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입장에서는 인본주의가 맞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우리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신본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러면서 유명하신

목사님이 하신 말씀만 제가 전하고, 인간 사회에서 진정한 신본주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간들

사이에서는 민주주의가 되어야한다. 왜, 인간이 권력을 잡는 순간 하나님의 자리를 배신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본주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하는 권력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라는 민주주의가 성경적으로 옳다는 것에 절대적으로

동의합니다.

이국운 교수 : 갑자기 정치학 선생님이, 헌법 선생님이 되셨습니다.

윤상헌 교수 : 내가 해명을 해야겠어 음흉하다고 안했어요. 의뭉스럽다고 했어요.

Page 15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52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이국운 교수 : 그렇게 좋은 뜻은 아닌것 같습니다. (청중 웃음)

윤상헌 교수 : 음흉은 굉장히 냉정한 말인데 의뭉은 좀 정의 담긴 말이죠.

이국운 교수 : 아무튼 회복은 안되고요. (청중 웃음)

윤상헌 교수 : 제가 2분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김재홍 교수님 말씀하신 인본이라는 것,

그게 사실 크리스쳔 휴머니즘이라는게 가능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인본주의라고 하는

것이 여러가지 다른 억측과 파생의미를 낳으니까 인간존중, 인간을, 인간에 대한 사랑. 지난번에

이배움선생님이 오셔서 여러분들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그분이 뒷부분에, 제가

설교노트를 하면서 설교를 듣다가 그날 적을게 있어서 감사했어요. 세종류의 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결국은 사람에 대한 사랑.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목표이고 대상인 사람들에 대해서, 굉장히 사람을 졸로 아는 이유는 뭔가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거예요. 인본주의라고 하는 단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애정, 그리스도가

품으신, 사랑만하신게 아니라 사람이 되셨잖아요. 우리를 감격스럽게 하는게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쳔 휴머니즘 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그런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저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아까 김성훈 선생님이 이야기 하신 바울의

선교가 과연 실패한 것인가? 저는 누가지 이야기를 다 들어요. 두가지 이야기. 어떤 철학적 토론에

있어서 에피큐리안과 붙어서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들하고 철학적 담론을 나눈것이 과연 설교로서

실패한 것인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실패인가. 저는 그 판단에 상당히 의구심이 있어요. 그것을

김성훈선생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 그런 주해에 대한 은혜로운 반감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김재홍 교수님께 질문을 드리고싶은 것은, 저는 굉장히 동의합니다. 이땅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름다워요. 회복된 땅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제가 감히 상상을

해보는데 상상이 잘 안되요. 저의 상상력이 부재해서. 조화로운 하나님의 하모니가 있다는 것은

중요해요. 분명한 섭리, 경륜. 이땅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잃게 하지 않으시고 주님 돌보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표현이시다. 저는 아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그냥 하모니가 역사하지

않는다는거죠. 조화로운데 지금도 조화롭지 않은 부분이 많아요. 그런 부분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를 우리가 인정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고백과 삶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Something Real. 진짜 문제가 작동하고 있잖아요. 그런부분에 있어서는 우리가 부르는

안티테제적인 행위가 필요할거란 말이예요, 그것의 전위로서 기독교 대학을 생각을 하는데, 그것을

Page 15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53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말씀하실때 저한테 군이라고 부르실순 있어요. 교수님이 굉장히 젊어보이시는데 굉장히 연로하신

분이십니다. (청중 웃음) 제가 노인되기를 사모합니다. 이상입니다.

이국운 교수 : 회복의 시간이군요. 질문도 하셨는데 여러분들 중에 지금 계신 교수님들도

계시고요. 누구든지 좋습니다. 질문을 하셔도 좋고요, 그냥 나는 이 말 해야되겠다 하셔도 좋고요.

문제를 제기하셔도 좋습니다. 아니면 그냥 뺵 소리를 지르셔도 좋습니다. 누구시든지 여러분의

시간입니다. 포항공대 장수영 교수님이십니다.

장수영 교수 : 제가 앞에 선생님들에 동의를 하는데, 동의만 하면 너무 재미가 없을것

같아서 Devil's advocate를 해보겠습니다. 이런 표현이 있더라고요. 저도 기술을 공부하다 보니까

기술에 대한 생각 중에 하나가. 니 포스먼이 강의하는 테이프 중에 어떤 구절이 나왔었냐면

기술이라는게 이코노미컬하다 이런 말도 하면서 우리가 어떤 지식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우리의

삶을 전부 물들여버린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색깔가지게 한다. 망치를 든 사람 눈에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사회과학에 대한 공포나 기피증이

어디서 기원하게 되었는가. 사회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서 사람의 행동이나 혹은 인성이나 이런

것들을 파악하고난 후에, 그것을 그냥 용감하게 외연을 해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온 세상이 못으로 보이는 것. 망치를 들었다는 이유로. 아마 그런 공포 때문이 아닌가

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선생님들은 어떻게 극복하고 계시는지, 저도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문제제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갖는 사회과학에 대한 phobia는 그냥 phobia가

아니라 상당히 걱정해야할 지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국운 교수 :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시작된 이 경제위기에 대해서 왜 한동에 경제학자는

사회과학의 꽃을 다루고 있으면서 아무말 하지 않는건가. (청중 웃음) 죄송합니다 이런 표현을 써서,

비겁하다. 이런식의 말씀으로 저는 이해 했습니다. 답변이 기대가 됩니다. (청중 웃음) 다른 질문이나

코맨트 뭐든지 좋습니다. 네 백은석 교수님.

백은석 교수 : 의뭉스러우심과 언어는 화려하신데 무슨 뜻이지 잘 모르는 연로하신

선생님들이 모여서 말씀을 나누신것 같은데, 사실 사회과학에 대해서, 그전에 Arise and Shine은 제

아이디어였습니다. (청중 웃음) 저도 사회과학을 하고 있습니다. 한동대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한동대학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좀더 정확히 잡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와 관련된

부분은 아니지만 사회과학에 대해서 건전한 정도의 회의는 필요하지 않냐는 생각이 듭니다.

Page 15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54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편견이나 오만 혹은 무지는 안되겠지만 사회과학을 함에 있어서 특히 그리스도인으로 유지 해야하는

건전한 정도의 회의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는데, 그런부분에 대해서 전문 분야별로 패널

교수님들의 의견을 듣고싶습니다.

이국운 교수 : 아주 무거운 질문이십니다. 학생들이 시작을 해야 이게 재미 있어질 것

같은데요.

학생 1 : 저는 05학번 경영경제학부 이신일입니다. 오늘 한 주제가 제 생각에는 주제가

결국은 교회에서까지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 이유가 지금은 한동이라는 공동체로

좋은 정보나 지식을 많이 나누고 하지만 결국 저희한테 중요한 것은 졸업하고 나서 사회에서 어떻게

무슨일을 하는가가 중요한 일이잖아요. 그렇다면 저희가 결국 저희에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신앙관을

형성하는 것은 교회인데 따라서 교회가 굉장히 중요한데, 현재 교회에서, 한국 교계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이 반지성주의로 제가 알고 있는데요. 문제가 뭐냐면 김재홍 교수님께서

오이코노미아를 말씀하시면서 에큐메니컬과 이코노믹스의 어원이 되었다고 하셨는데 예를 들어서

그런 오이코노미아라는 어원을 가지고 어원주의적인 관점으로 그것을 제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랑 이야기를 하면서 그이야기를 꺼낸다고 생각해보면 목사님 제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결국

애큐메니컬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하면 분명히 돌아오는 대답은 그런거 어디서 배웠냐,

누가 그런거 가르쳐줬냐, 누가 그런 책 줬냐 하는 그런, 제가 실재로 신앙생활 하면서 그런

궁금증이나 새로운 지식을 교회에 이야기 하려는 것을 담임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막고, 어디서

그런걸 줏서들었는가? 하는 이런 식으로 반응 하는 것을 많이 봤는데요. 그럼 과염 저희가 이런

새로운 지식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교회상황에서 이렇게 논의되는 과정들을 어떻게 하면 교회

안에서도 소통할 수 있게 하는지 그것이 정말 궁금합니다.

청중 1 : 장성동에 조그만 교회에 있는 광야교회 최병률 목사라고 합니다. 학생이 소개가

있어서 기쁨으로 참석을 했는데 떨리네요. 먼저, 무지 편견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편견이 좀 있죠. 무지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제가 대학

청년부 학생들과 8개월 동안 50여권의 책을 같이 읽고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 법정의 무소유를

같이 읽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고려대 사학과를 나오고 대학원까지 나온 친구가 공교롭게도

무소유로 살고 있습니다. 왜그러냐 했더니 목사님한테 배웠다고. 그런 경우도 있어요. 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 좀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아까 김재홍교수님께서는 personal evil 문제와

Social evil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Personal evil 문제에 너무 근접해있는것이 아닌가 하면서 Social

Page 15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55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evil 문제도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씀 하셨는데, 거기에 동의를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신약

신학자이기도 하지만 워터링크라고 하신 분이 파고를 연구 하시면서 공중권세 잡은 자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가지고 이런 대답을 합니다. System으로 보셨거든요. 그러면 System 안에 분명한

악들에 해소점은 무엇인가. Personal evil의 문제에 대한 해소 없이 Social evil을 과연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드리고싶습니다.

이국운 교수 : 감사합니다. 저희가 네번째 밖에 안되는데 바깥에서 손님들이 오고계십니다.

한분정도만 말씀을 더 듣고 교수님들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학생 2 : 05 국제어문학부 이수호입니다. 정말 좋은 강의 잘 들었고 너무 감사한데, 일단은

제가 생각하기에 사회과학이라는 말 자체에 어떻게 보면 문제제기를 하고싶은데요. 사회학과 과학이

합쳐진 언어일텐데, 사회학은 기본적으로 학문 특성상 비판과 의심을 통해서 확실성을 찾아가는

학문이기는 하지만 자연과학의 특징적으로 특별한 어떤 확실성을 어느정도 찾아낼 수 있는 분야인

반면, 인간에 대한 연구와 사회에 대한 연구를 하는 사회학은 제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과학적

확실성을 찾기에는 너무 어려운 학문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가지 담론들이 그렇게 많이

존재하고 그런 담론들이 섞이면서 더욱더 확실성을 찾지 못하는 그 어떤 무지의 상황에서 더 많이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것 같은데요, 기본적으로 사회학, 그리고 인문학이 있는 의심이 있을텐데, 그

의심 안에서 제가 생각하기에 백은석 교수님께 제 나름대로의 답을 해보자면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써 사회과학 자체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는다면 사회과학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백은석 교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사회과학이 인간 대한

의심을 가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꾸준히, 남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서 기본적으로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기자신에 대한 비판이

자기가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을 하고요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윤상헌 교수님께 직접적으로

질문을 드리고싶은데, 어떤 신앙적 측면의 세계와 인간적 측면의 세계와 통합된다. 어떤 Universal

한 grammar에서는 어떤 언어에서 특별한 통일성이 있다고 말씀 하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어느 특별한 말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서 좀더 집중하고 거기에 대한 합리적인 과학적인

이야기를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겸손한과 능력의 제한,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우리가 초월적인 것을 이야기하기보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초월적인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어떤 겸손함을 전제한 다음에 우리가 초월적인 것을 이야기 하기보다 우리의 무지하고 알 수

없음을 전제한 뒤에 우리의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야기과 문법을 초점을 그곳에 더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기독교를 믿는 사람으로써 충분히 가질 수 있는 태도라고 생각을 하는데 거기에

Page 15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56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쭤보고싶었습니다.

이국운 교수 : 자연과학자들에게 왜 당신들은 사회을 연구하지 왜 자연를 연구하는가 하는

그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간단한 요약이었고요. 혹시 교수님들 중에 지금 나온 이야기들에 대해서

꼭 답변을 안하셔도 되는데, 하시고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재홍 교수님

말씀 안하시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김재홍 교수 : 또 나온게 후회스럽기 시작했습니다. (청중 웃음) 당연히 후회스러울 수

밖에 없는게, 이게 경제학 세미나라면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더구나 여기 신앙이 결부된

문제이고. 만인이 알다시피 한동대에서 제일 영성이 떨어지는 자가 신앙과 학문을 연결한다는 것이

사실은 두렵죠. 오류가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이 들어왔으니까 답변을

하겠습니다. (청중 웃음)

첫번째 윤상헌 교수님께서, 인간에 어떤 한계나 그런걸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래도

사회적인, 뭔가 잘못된 것을 교정해야하는 의무가 있지 않나 질문을 하셨는데, 그런데 그게 딜레마죠.

그게 어렵죠. 과연 답이 없는데, 그래도 직접적인 답을 드리기보다는 이런 오해를 하지 말라는 것이

세상이 굉장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편 없는 죄성과 탐욕을

고려할 때 이정도 유지된 것은 정말 엄청난 기적이다라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거예요. 현대가 결코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다면 우리가 고민하고 이런 토론을 할 필요가 없겠죠. 인간의 정말

타락된, 정말 봐줄게 하나도 없는 그 죄성을 고려할 때 그럼에도 놀랍게도 조화로운데, 그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속에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말씀드렸고, 그와 맞물려서 제가 그런 고민을 해요. 뭔가 우리가 고쳐야 한다. 특히 개인적으로. 뭔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할 때, 저도 그랬지만 제작 정말 신앙에 불 붙었을때, 그때는 저도 그런

생각을 가졌었어요. 내가 성경에 써 있는 모든 것을 내 살아 생전에 다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죽으리라. 나는 자신있었거든요. 왜냐면 하나님 말씀은 거짓이 아니니까. 그러고 내가 고치리라.

내가 성화되고 완벽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리라 하는 자신감이 있었으나 훗날 그게 굉장히

큰 오만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우리가 인간을 고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완벽하게 고친다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한것 같아요. 아까 한동이나 기독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특히 한동이 가지고 있는 오류

중에 하나는 어떤 완벽성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인간에게 완벽성은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적당히 지저분하고 적당히 있는 것이 그게 차선일것이다. 어떻게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데 인간이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불가능한 것을 강요하려는, 당위론적 차원에서. 그러면서

판단과 정죄와 우리의 고뇌가 시작되는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말씀드린거고.

Page 15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57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그 뒤에 왜 서브프라임 모기지, 비겁하다 라는. (청중 웃음) 사실 그 말밖에 생각이

안나는데, 한가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 경제학을 알면 제가 얼마나 알겠습니까. 경제학도

제대로 모르는데 하나님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래서 아까 윤상헌 교수님이 하나님을 다

안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제가 굉장히 정말 공감합니다. 정말 세상의 학문조차도 극히

일부분을 알 뿐인데 감히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가. 한동대학교 와서 제가 놀란

것이, 3000명이 하나님을 다 알더라고요. 무섭더라고요. 다 자기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고, 왜 나만

모르지 하는 율법주의적인 중압감에서 살고 있는데, 비겁하다는 면에 대해서는 제가 1996년에

한동대에 부임하고, 여러분 알겠지만 97년에 소위 말하는 IMF금융위기가 왔습니다. 96년에 제가

한동대에 부임하니까 포항지역에 종합대학으로서 첫번째 경제학 교수인거예요. MBC에서

심야토론에 나와달라. Why not? 그죠? (청중 웃음) 당시 제가 경제전문가로 나왔어요. 거기서 주어진

질문이, 우리나라가 남미사태같은 금융위기가 올 것이냐 하는 질문을 했어요. 저는 그 면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는데, 통계를 보니까 괞찮더라고요. 절대 안온다 했죠. IMF사태가 나고 그 이후로

저를 불러주지 않더라고요. (청중 웃음) 제가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해서 뭘 알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평생을 학문을 하고 유학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서 지금 20년 이상 제가 했던 한

분야는 정부 규제, 정부가 하는 어떤 정책과 규제로 인해 사람들을 옭아매고 새로운 비효율성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엄청나게 많은 사회적 악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제도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것이 고쳐지기가 쉽겠습니까? 안됩니다.

김재홍의 한마디 했다고 뭐가 되나요? 아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지만 제가 몇 십년 동안 경험하고

지금도 믿고 소신이 있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겁니다. 계속 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대에

깨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여러분 후세나 동료들이 같이 치다 보면 언젠가는 그 바위가 깨지는 것을

제가 경험을 했고, 지금도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란으로 바위치기 해야한다 이거죠.

그정도밖에 저는 할 수 없다고 말씀 드리고,

아까 학생이 이야기한 반지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저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다

그런 고민을 했을거예요. 우리가 우리의 신앙이 맹신이라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따질거 다 따져보고 굴복할 수 밖에 없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한다면 지금우리 교회 안에서 한동대 안에서 젊은 기독 지성인들이

철저하게 고민하고 철저하게 반론하고 물어보고 해서 결국 내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라는 것에 이르러야 우리 한동대가 하나님의 대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아까 김성훈 교수님

말씀하신 같은 사도바울 같은, 정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맹신했겠습니까. 부정해보려고 그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지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그것이 우리 젊은이들의

Page 16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58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간증한다면, 저 역시 그런 고민을 했어요. 제가 우리 팀 학생들에게도 이야기

했지만 제가 예수믿을때 가장 큰 고민은 뭐였냐면 예수님 돌아가시고 3일동안 행적에 대해서 제가

알 수 없었어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어요. 왜냐면 하나님 구원의 사역이 완벽하다면 예수님이

고통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서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시고 육체적인 죽음을 당하신것 까지는

인정하겠으나, 육체적인 죽음이 어떻게 우리의 영적인 죽음을 대신한다는 논리에 허를 저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영적인 죽음, 영적인 형벌에 대해서 무엇을 예수님이

대신했는가? 하는 것에 관해서 저는 항상 물음표였습니다. 3일동안 행적이 성경에 어디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어느 목사님이 쓰신 책을 읽다가 사도신경을 봐라. 사도신경을 영어로 읽다

보니까 He was crucified and he buried and he descended into hell이라는 것. 보세요. 그게 얼마나

신학적으로 정확하고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저에게는 논리적인 질문이 풀리는 거였어요. 그렇지

예수님이 descended into hell 하셔서 나와 여러분이 받아야 할 모든 지옥의 형벌을 받았으니까

예수님이 나 대신 돌아가셨고 죄의 대가가 다 치뤄졌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까 그런

지성적 고민을 저도 하고 모든 교수님들이 하고 물론 여러분들이 해야 당연히 맞다고 봅니다. 지금

교회나 한동대에서도 그런 지성적인 기독교에 가르침이 부족하다는 것에 관해서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맨 마지막에 최목사님에 대해서는 제 소신이 교역자들에게 절대 순종하자는 것이 제

소신인데, 이런 고민 해보세요. 왜 개인의 죄에 학생들이 민감하고 사회적 악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않느냐에 대해서 제가 안타까운 것은 김재홍의 개인이 어떤 악을 범하면 그로 인해서 고통받는 것은

저와 제 주위에 있는 소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회적 악과 어떤 권력, 노골적으로 독제하는

그런 악이 행해졌을 때는 그로 인해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사회적인,

제도적인 권력의 악에 대해서 우리가 더 민감해야한다는 것은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를

돌보아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넓게 해결하는 것을 왜 기독교인들이 왜 그렇게 둔감하냐는 저의

안타까움입니다.

이국운 교수 : 감사합니다. 이제 조금 방향을 더 확장해서요 사회과학자가 가져야 할

태도의 문제와 함께 사회과학자의 실천의 문제까지도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그 문제까지를 포함해서 무슨 말씀이시든지 하시고 다시 가보겠습니다.

학생 3 : 안녕하세요 상담사회심리복지학부 08학번 이하영입니다. 아까부터 질문을 하려고

Page 16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59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계속 고민을 했는데 질문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김성훈 교수님하고 김재홍 교수님께서

초반에 자유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제가 강의를 이해하기로는 사회과학은 인본주의적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래서 인간이 사회과학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에 대한 자유를 통제한다면 그

통제도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모순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메커니즘 안에서라면 사실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사회과학을 음미하는 사람들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같은 모순점을 보이지 않는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자유에 대한 통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에 좀 충격이었습니다. 상사를 전공하면서 그게 힘든 사람이거든요.

저는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고 그래서 자유가 절제라는 이름으로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이어서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싶습니다. 사회과학에 대해 자유가 정말

허용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묻고싶습니다.

이국운 교수 : 점점 무거운 질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성훈 교수 : 방금 전에 말씀하신 것에 더해서 몇가지 오해가 축적됐다고 생각이 되니까,

전명희 교수님이 법학이 사회과학인지 오늘 처음 아셨다고 그러니까, 저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청중 웃음) 왜 그러냐면, 과학이란 말 자체가 뭔가 측정 할 수 있는 것으로 측정하자 이거니까.

사회를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계량화 시켜보고 싶지 않을까? 객관적인 증거로. 이렇게

이해한다면 법은 제가 이해하기로는 현실이 뭔지 잘 몰라도 가야할 길, 규범, 이게 뭔지를

발굴해내보고 그것으로 현실을 견인해나가보자 이렇게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다녔던 학교도 당연히 법과대학은 별도로 있었고 사회과학생보다는 우리가 좀더 났다 그랬는데,

(청중 웃음) 어차피 저는 김재홍 교수님 손자뻘 되기 때문에, (청중 웃음) 그랬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실재로 법을 공부하다보면, 특히 실무를 하다보면 좀 공허함이 있어요. 남이 만든걸 해석할 수 는

있는데, 니가 만들어봐 하면 만들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이 대화를 할 때 실무를

한 분으로써 이국운 교수님과 저를 차별화시키려고 하는게 이국운 교수님은 뭐가 되어야 한다는걸

아시는 분인데 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는 어려운 사람이예요 된게 뭐다는 것은 제가 말할

수 있고 이걸 회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있는데, 뭐가 되야한다고 말하기는

되게 어려워요. 그래서 사실은 저는 이런 모든 질문들이 별로 안 힘들어요. 왜 힘들지 않냐면 제가

오해인지는 몰라도 이해하기는 쉬운데,

예를 들면 망치는 사람 눈에는 모든게 못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을 하셨지만

실무가의 입장에서 사실은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이 법적

조치가 필요하면 이 법적 틀이 필요하면 이 틀을 사용하고, 저 틀이 필요하면 저 틀을 사용하고,

Page 16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60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그렇기 때문에 원래부터 망치를 들면 못만 보이지 않고요. 못을 봤을 때 망치를 들고요. 목제를 보면

톱을 들고, 이런 것이기 때문에 법 하는 실무가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측면이 기본적으로 있어요.

사실은 사회과학자라고 왔는데 저는 스스로 제가 사회과학자인가 핻갈리는 겁니다. 그런게 좀

있고요.

예컨대 이진희 학생이 교회에 관성. 교회가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했을 때 저는 대답이

별로 안 어려운데, 그거는 목사님들이 경험적으로 복잡한 이야기 하는 애들은 곧 떠나더라. (청중

웃음)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냐면, 안떠나면 되는것이거든요.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떠나지 않으면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다른 애들 괜히 부추겨서 수련회 갔을 때 갑자기 국악 하면서 우리

사회참여해야한다 하면서 막 이러지 않고, 시키는거 다 하는데 복잡한 이야기도 하면서 안떠나면

그러면 phobia가 사실 사라질 것 같거든요. 사실은. 상당부분 경험적인 것이기 때문에 경험을

변형시켜주면 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하는게 어려운거지 그 자체에 있어서 어려운게 별로

느껴지지 않아요. 자유도 말을 했는데, 그 자유가 절제가 필요하지 않은가? 상담공부 하셨다고

하시면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근본적 자유를 고민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인간의 근본적 자유는 난 잘

모르겠고, 구체적으로 눈앞에서 이사람이 예컨데 연애할 자유를 뻇는다. 이 사람이 공부할 자유를

뻇는다. 이 사람이 A 밥집 갈 자유를 뻇는다 이건 곤란하지 않느냐. 조금 더 나아가면요. 이사람이

A라고 말할 자유를 뻇는다. B라고 말할 자유를 뺏는다. C라고 말할 자유를 뻇는다. 이건 곤란하지

않는가 이정도예요. 더 근본적인 개인의 실존에 깊이 들어가는 자유가 아니고. 그리고 왜 그렇게

하느냐. 인간 중에 악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보니까 이사람이 이럴 수도 저사람이 저럴 수도

있는데, 여러 사람이 그 자유를 발의해서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행동하다

보면 그중에 괜찮은게 나타날 것이고, 또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하나님 주신 이성으로 보면

저게 괜찮다 하면 그걸로 따라 하고 형성될거니까, 그러면 가장 좋은 어떤 결단, 행동 그런게 나오지

않을까, 이런 측면에서 자유를 이야기 한 것이고요. 그게 똑같은거죠. 어떤 분은 그게 보이는 자유가

너무 넓다고 이야기 하시고 어떤 분은 현재 있는 자유가 너무 좁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렇기는

한데 자유가 넓냐, 좁냐 생각할 때는 아무래도 벤치마킹 할 대상이 있어야 되고 벤치마크할 대상이

바깥이라면 바깥에도 인정되는 자유는 100일 때 여기서 인정되는 자유는 5이다 그러면 너무

극단적인게 아닌가. 적어도 60정도는 인정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저는 개인적으로 하는

겁니다..

이국운 교수 : 제가 순간적으로 존 스튜어트 밀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환청을 들었습니다.

이걸 제가 농담이라고 한건데. (청중 웃음)

Page 16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61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장철준 교수 : 제가 웬만하면 자제를 하는데 몇마디 하겠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던 그

이야기. 사회과학에 가장 중요한 화두라고 할 수 있는 정치 이야기가 안나와서 그냥 넘어가려다가

이야기 하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테마를 기독인들 사이에서 놓치고 있지 않은가 합니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라는 사실에, 우리 인간이 가진 정치성을 너무 일부러 무시하려는게 아닌가

합니다. 실제 우리가 정치적이라고 하는 말에 굉장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고, 알러지 반응까지

일으키고 있고, 특히 교회 안에서 정치적이라는 것을 금기시까지 하는 마당인데, 과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치를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정치적이지 않은가?’ 라고 물어봤을 때 솔직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어느 분야보다 더 치열한 정치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교회가 아닌가

싶은데, 너무 제가 비판적으로 보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세속에서 하는

정치적인 게임과 우리가 소위 기독공동체 안에서 할 수 있는 정치적인 게임을 놓고 봤을때 어느

쪽이 더 공정하고 어느 쪽이 괜찮고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게임인가. 우리가 한번

반성해봐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보는데요, 정치를 하면서 그나마 제대로 된 규칙을

만들어놓고 제대로 된 공정한 게임을 하자고 하는게, 또 정치를 보완할 수 있는 법치라는 것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놓고 정치를 제대로 해보려 노력 하는데 과연 기독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정치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실재로 우리가 얼마나 깨끗하게 얼마나 우리가 차원있는

정치를 해오고 있는가 하는 반성을 해보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더욱 더 정치적이라는

상투적인 언어에 굴레를 씌우면서 더욱더 제대로 된 정치를 막고있지 않은지.

제가 수업시간에 이번 학기에 Freedom of speech를 학생들한테 가르치는데, 자기가 가진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른 학교에 강의 나갔을 때와 비교해 보면

너무나 눈에 띠게 그 사실을. 내가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굉장히 힘들어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모습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게 당연히 자신한테 부여된 자유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하고 너무나도 힘들어하는 모습들을 보고 좀 안타까웠습니다.

우리가 정치라는 과정을 통해서 정치를 건강하게, 제대로 된 기독 정치인을 양성, 정치인이라는게 꼭

국회에 나가서 활동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우리 삶을 정치라고 봤을 때 우리가 제대로 된 정치를

과연 해 오고 있는가라는 것을 반성해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작년 사태를 회상해보면, 물론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소위 학생대표라는 사람이 상대방의 행동을 비난하면서

들었던 잣대가 정치적이란 것이었습니다. 그 정치적인 표현이 너무 정치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봤습니다. 실재로 자기가 얼마나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상대방에게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좀 안타까웠습니다. 제대로 된

정치인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특히 우리학교에서 더 필요한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Page 16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62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이국운 교수 : 감사합니다. 김준형 교수님 원래 이 자리에 발제자의 한분으로 오시기로

지난 금요일까지 약속이 되어있으셨어요. 그런데 오늘 본인 어머니의 1주기를 맞으셔서 지금

대구에서 온 식구들과 함께 추도예배를 드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지금 오지 못하셨는데,

그 대역을 장철준 교수님이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자 우리 모임을 마무리해야할

시간이 가까워 온 것 같습니다. 혹시 이 이야기를 안하고 가면 안되겠다고 하시는분 손들어주세요.

학생 4 : 안녕하세요 저는 08학번 유아셀입니다. 저는 말씀을 너무 잘 들었는데 계속해서

이 질문이 떠올라서 교수님들께 여쭤보고싶은데요, 이런 한동대에 가장 중요한 꼭지 중에 하나가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교수님들께서는 이런 사회과학들을 사회과학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삶으로 살아가고 계신지 질문드리고싶었고요. ‘어떻게’에 대한

문제가 참 어려운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그냥 자유롭게 교수님들 생각을 듣고싶습니다.

학생 5 : 국제어문학부 03학번 신치현입니다. 교수님들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이렇게

교수님들을 감히 선배님들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선배님들께서 시대양상 그 속에서 가지고

계셨던 고민들과 저희들이 한동이라는 폐쇄된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가진 고민들이 많이 다른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여러가지 이념이나 선배님들께서 고민하신 것들이 죽고사는

문제로 볼 수 있을텐데, 저희가 가진, 적어도 저 자신은 제가 가진 고민은 열두광주리에서 주는

오병이어를 먹느냐 탕수육을 시켜 먹느냐 이러는. 서로 고민양상이 다른데, 이런 세계관을

말씀해주셨는데 세계관을 동네관으로 가지고 방안에만 머물러 있는 한동의 제자 후배들에게 그리고

구조적인 이야기나 그런 문제보다 아직 개인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한동의 후배들에게

조언해주시는 말씀들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마치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그런 문제와 씨름하고

고민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하신것 따라서 유월절을 지키면서 후대들에게 가르치고

지키라고 하지만 후대들은 그걸 경험해보지 못했고 그걸 이야기로만 들을 뿐이지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공감하기는 많이 부족한데, 저희들에게 실제적으로 한동의 학생들이 많이 고민도 하고

있을것 같아요. 교수님들께서도 고민하실건데, 어떤 답을 주실 수 있을지 합니다.

학생 6 : 안녕하세요 저는 국제어문학부 07학번 박예은입니다. 아까부터 말씀 드릴까 말까

계속 고민을 하다가 이대로 가면 너무 후회할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리는데요. 먼저 너무너무

감사드리고 너무 귀한 시간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주제가 기독공동체 안에서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이었고, 이 포럼의 목적은 어느 정도 편견을 해소하기 위함이라고 저는 생각을

했는데, 들으면서 그 편견이 정말 많이 해소되었는데 아직도 많이 해소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Page 16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63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마지막으로 질문을 드리고싶습니다. 지금 말씀해 주신 것이 크게 두가지가 있는것 같은데요. 인식에

대한 것. 기독교와 사회과학이 있을때 기독교가 세계관을 한정적으로 적용하고 실증적인 분석을

하지 않고 굉장히 개인의 감성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에 많은 부분을 동의를 했고

그 부분에 대해서 사회과학적 방법이 크리스쳔으로서 많이 필요한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두번째로

김재홍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신 부분에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개개인에 대한 개인에 대한 속물적 구호나 규범적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 개인의 완벽성을

요구하는게 아닌가 하고 말씀해주셨고 또 사회과학은 좀더 겸손하고 진솔하게 그런 인간을 파악하는

것이라 말씀해주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인간 개개인에 대한 구호를 외치고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

인간 자체 안에 있는 죄성을 인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

밖에서 해결점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과 아까 말씀 하셨던 것 같은 계란으로 바위치는 것이라는게

오히려 이쪽이 아닌가, 그리고 구조적으로 어떤 해결점을 찾으려 하시고 그런 죄성을 최소화 하려는

구조를 찾으려 하시는데, 구조라는게 굉장히 정확도를 필요로 하는 것인데, 그것이 오히려 완벽성을

많이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것 같아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이국운 교수 : 안미영 교수님 오랫동안 계셨는데요. 예쁜 교수님 한분 더.

안미영 교수 : 많이 배우려 왔고요, 오늘 아무 말도 안하려고 했는데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장철준 교수님께서 정치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는 정치학을 공부하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서

한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한동대학교에서 한 5년 정도 일을 하면서 짧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한 정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을 보면, 정책이라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면 한번 선이 그어지면 한 시스템 안에서 승자와 패자가 반드시 갈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동이라는 사회는 목적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고 이해하고 싶고요 그 목적을 이루어내기 위해

정책은 존재하는데, 제가 이해하는 정책의 형성과 발전의 단계가 참 안타까운 현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점이 많습니다. 한동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크리티컬 아젠다로 떠오르는

과정 속에서, 어떤 이슈가 떠오르면 interest body가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interest body가

그들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자발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많이 막혀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어떤 정책이 만들어져서 그것에 대한 대안형성이라던가, 그중에서 어떤 기준으로

어떤 정책이 선택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이 적은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한 정책이 한번

결정이 되어서 implementation 될 때에, 모든 것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정책은 항상 문제를

인식하고 좀더 나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그 implementation 되는 과정 가운데

다수의 합의에 의한 정책이라면 그 역시도 그 기준에 따라서 정책이 실현되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Page 16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64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않은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한동이 정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기 원한다면 정말 위험한

선을 긋는 정책의 형성과 실현 과정에서 우리가 좀더 많은 관심과 투철한 지성의식을 담아서

진행해야하지 않나 생각을 하고요, 가르치는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이야기 하고싶은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마음과 눈을 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공부 하시면서

한동이 가진, 그리고 사회가 가진 문제에 눈을 뜨시고 그 문제들에 서로 다른 의견을 같은 무게로

받아들이는 노력과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학생 7 : 안녕하세요 05학번 생명과학부 구오병입니다. 저는 기독교 공동체에 가장

만연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지금 특히 한국 교회 공동체가 많이 추구하는 선교라는

것, 선교를 나가고 선교를 하는 것이 특히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공동체에서 단기선교를

통해서 정말 공격적이고 별로 그 사회에 대해 인식과 이해 없이 단기적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행하는

기독교 공동체들의 행위를 과연 우리가 사회과학으로 어떻게 이해되고 특히 그것을 선동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그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그 사회에 대한 이해와 그 종교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선동하고 또한 주변에 그런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꺼냈을때 사실 실질적으로 잘 알지 못하고

나가는 이러한 현상들이 만연하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 우리가 어떤식으로 생각을 해야하고

어떻게 현상을 정당화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학생 8 : 05학번 이기홍입니다. 저는 다윗의 이야기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 이는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하면서 외치지만 않고 기도만 하지 않고 물맷돌을 들었는데, 사회과학을 물맷돌로 비유하고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교수님께서 법이 사회과학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저는 법은 사회과학의

적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재홍 교수님이 경제학이 사회과학의 꽃이라면 저는 그

꽃이 원하는 시기에 피게 할 수는 없지만 그 꽃을 피우게 할 수 있는 것이 법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이국운 교수 : 어떻게 해서든지 법대생이 뭘 해보려고 (청중 웃음)

학생 8 : 하나님을 다 안다고 하는 자들이 가장 무섭다는게 저도 옳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런 와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적용시키거나 설득을 하는게 가장 무섭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런 와중에서 사회과학자들이 취해야할 성경은 요한복음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아까 말씀하셨듯이

긍휼히 여기는것, 애통이 여기는 것, 그리고 화평케 하는 것,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Page 16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65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대한 주림이 있는것 이것이 사회과학자들이 취해야할 어떤 다른 성경구절보다도 요한복음이

사회과학자들에게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취해야할 집단과 집단간이 취하는 정치적인

문제라던지 그런것에 요한복음이 맞지 않나 생각하는데, 그게 어떤지 궁금합니다

장수영 교수 : 제가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아까 전달이 잘 안된것 같아서요. 제가 망치

이야기 했던것은 법에서, 이법 저법에서 다른 망치가 아니고, 어떤 문제를 법으로 address하려는,

그것을 말씀을 드렸는데 여전히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도 되는데, 저는 충돌이 일어난다면 다른것

간에 충돌이 일어날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이 정치기 때문에 정치와 충동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회과학이기 때문에 사회과학과 충돌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공포는 뭐냐면, 설익은

사회과학으로 사회과학을 누르려고 하는 것이지 완전히 다른 것이 충돌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사회과학이 우리에게 생각의 틀을 제한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바라보게 하고 인식하게 한다는,

그런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것 말고 없기 때문에. 반대편에서 왜

사회과학을 하냐 성경으로 다 이해가 되는데 라고 하는 것은 그사람이 성경으로 사회과학을 하고

있는거지 않느냐. 이런 생각이 좀 듭니다. 그런 것을 좀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사화과학이든 그건 자기 해석이고 자기의 interpretation이라는 겸허함을 우리모두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공통점을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었는데 제가 의도가 잘 전달이 안된것 같아서

이국운 교수 : 사회과학자 판이라 공학자께서 말씀하신게 잘 안통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말씀은 전달이 잘 되었습니다.

학생 9 : 안녕하세요 06학번 국제어문학부 양보람입니다. 오늘 정말 좋은 시간이었고요

마무리 하는 시간에서 저는 제가 가진 의문에 대해서 교수님들에 각자의 의견을 듣고싶습니다. 오늘

들었던 강의는 주로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사회과학을 대할때 어떤 인식을 가지고 대하여야 하는가.

사회과학이라는 판에 뛰어들기 이전에 사회과학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편견에 대한 것을 제고하고

우리가 어떻게 사회과학자로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어떻게 보면 약간 전초전의 의미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취업과 동시에 대학원에 가서 사회과학도의

길을 걸어갈때 이미 사회과학자의 삶을 사신 교수님들께서는 사회과학자가, 특히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때 어떤 부분에 있어서 실천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 저는 개인적으로

듣고싶습니다. 사실 지난주에 이국운 교수님에 강의를 들었는데요, 거기서 교수님께서 소명으로서

학문 부분을 이야기 하셨을 때 교수님이 가지고 계신 다른 사람의 노동에 기대서 노동에 직접참

여하지 않는, 제가 느끼기에는 죄책감이라고 하는, 현장에서 끝없이 발을 빼야 하는 것에 대한

Page 16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66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죄책감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느꼈거든요. 그런데 저에게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점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학자라는 정체성과 더불어 기독교인이 어떻게 세상에 참여할때 사회과학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교수님들의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답을 듣고싶습니다.

이국운 : 각자 선생님들에게 2분 이상의 시간은 못드리겠습니다.

전명희 교수 : 저는 2분 안에 할게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다 뭉뚱그리면 저는

사회를 이해한다는게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사람은

다 파워를 가지고 있는데, 둘이 합쳐짐과 동시에 누가 더 파워를 많이 갖는가 하는 이슈가 힘의

불균형이 생긴다고 생각하는데, 정치도 그거에 대한 이슈이고 법도 그거에 관한 이슈이고 제가 너무

축약하는지 모르겠는데, 가족이 제 주전공인데 가족도 그 안에서 끊임없이 남녀간에 파워 이슈와

자녀와 부모간에 그런 파워를 더 많이 가진 사람이 그것을 더 많이 행사하고 누림으로써 일어나는

죄의 결과들이 항상 있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우리가 보는 대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런 성찰이 필요한 것 같아요.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교수가 됨으로써 느끼게 되는

권력과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제한하게 되는 엮어져 있는 복잡한 끈을 이해하는 것과 목사님이

됨과 동시에 순수하게 성도들을 섬긴다고 하지만 목사님으로서 권력을 우리가 표진하게 되는것.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권력싸움을 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는

것을 인식하고 철저하게 자기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만 투영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을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해서 고민하고 답을 얻어내는 과정으로 가는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걸 자기인식이라는 그런, 사회인식 전에 실존적으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자기인식이 되는 것이 기본적인 소양이 아닐까 그리고 저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부분입니다.

윤상헌 교수 :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다행인 것은 모든 것이

못이 아니라는게 굉장히 다행스러운데. 그렇게 보이는 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아까 장수영

박사님 말씀하신 것을 들으면서 참 제가 공감하는, 오늘 얻은 문장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망치를 들고 있을 때 망치를 들지 않고 붓을 들고 있을 때, 이런 형제들과 나눔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눔을 때고, 기독대학에 학문을 수행하는데 있어 땔래야 땔 수 없다.

저는 개인적으로 Discipleship은 기독교 대학의 영혼의 닺과 같고, 우리의 Scholarship은 기독대학

정신은 정신의 노와 같으며 Fellowship은 제자도와 학문정신을 이어주는 설계와 같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 구분으로 교수들 가운데서 다른 전공의 형제자매들과 나눔이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가

Page 16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67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진작하고 격려해야하는 것이, 한동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게, 있으면 좋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하는 공감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일주에 한번씩 우리의 연장을 놓고 하나님

앞에 안식하는 것이 이런 ecology에 희생이 되지 않는. 하다 보면 정말 못으로 보이잖아요 그래서

한번의 개인의 사바트를 가짐으로 Discipleship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고. 아까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자유와 억압이라는 안티테제로 보고, 일단 자유를 경험하는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봐요.

용서하십시오 제가 메타포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고래는 바다를 헤엄치면서 자기

이마가 바다 바닥에 닿을 것을 염려하지 않아요. 알바트로스는 날개짓을 하면서 자기의 머리가 하늘

천장에 닿을 것을 염려하지 않아요. 바다와 하늘은, 하나님의 공간은, 생명의 공간은 매우 넓습니다.

저는 한계까지 가보아라. 물론 망가지면 안되고. 우리가 언어로 하나님의 진리를 다 담을 수 없지만,

실상은 말을 떠난다는 말은 일리가 있지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바보가

되어서는 안되지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놀라우신 coresis, pericoresis 이런

것들을 담아보려고 노력해보는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언어로 삼위일체의 비밀을 담을 수 없어요.

그러나 담아보려고 노력해보는 것입니다. 언어의 한계까지 가 보면 그 이상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내 골방에 머물러 있으면 세계에 찬란함을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거죠.

아까 시대상황과 고민을 이야기 했는데, 여러가지 말이 있어요. 이게 쉽게 이야기 할 수도

있는데 저는 좀 어렵게 이야기 하는 편이라, 쉽게 이야기 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오병이어 먹는거나,

저희 때도 먹는거 가지고 걱정하고 그랬어요. 죽고 사는 문제로만 고민한건 아니예요. 밤세면셔 왜

사나 고민한적 별로 없습니다. 실연당해서 밤세서 걸어본 적은 있지만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할까

하면서 밤을 막 지세우고 하는 적은 별로 없었던것 같아요. 시대적 상황을 어떻게 같이 고민할

것인가. 공부를 좀 하자. 그만 싸우러 다니고 공부하자. 그거 하나 하고, 예배가 좀 회복되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 다 아시기 때문에 말씀하셔요. 저는 정말 개인적으로 전도하고 예수님

영접하고 그사람이 그 구주의 제자가 되면 전두환 같은 정권은 안생겼을 거라고 정말 믿었어요.

끌려가는게 무서워서 돌을 안던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그러고

돌아다녔어요. 그랬는데 그때는 제도에 대한,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묵상시간을 통해서, 책을 떠오르게 하시고,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께닫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회복이 되면 그게 공예배든 개인 예배든 내가 죽는 예배를 경험하면

소망은 있어요.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우리가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겸손해야 하지만 또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가르쳐 주셔요. 그래서 소망을 가지고 나갈 수 있죠. 고민하자.

진정한 예배를 드리자. 주위의 사람들이 똥을 싸고 개독에 그런 모습을 보여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Page 17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68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버리지 말자. 예배는 스킵하지 말자. 그리고 공부하자. 2분 넘었죠?

김재홍 교수 : 자유라는 것. 말만 들어도 설레죠. 당연히 저도 평생 자유. 여러분만한 젋은

시절에 예수님 만나려고 고민하고 내가 어떻게 사는게 올바르게 사는건가 고민할 때에 저에 평생의

화두는 역시 자유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동대 와서 정말 제일 충격이었던게 바로 자유입니다. 저는

기독교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진리라고 늘 그렇게 기도하는데, 한동대처럼 인간을

속박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행하고 가르치는 곳을 저는 평생 본적이 없어서 어떻게 이렇게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가가 한동대에서 제가 제일 자유롭지 못하고 당혹스러운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윤상헌 군이 저하고 예전에 같은 책을 읽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공부할 때 어떤 목사님이 자유라는 것은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자유에 비유해요.

물고기가 방종해서 물 밖으로 뛰어나오는거 봤나 이거죠. 같은 이야기 일거예요. 가장 편안한 상태가

자유함에 정의라고 한다면 자유를 이야기할 때 방종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거든요.

자유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된, 정말 자유함을 맛보자는 윤상헌 군의 말에 저는 절대적으로

동의하는데, 왜 그러지 못하느냐. 자유라는게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은혜와 연결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렇자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그분의 용서하심과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뭔가 제한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또 제가 읽은 어떤 책에 목사님이 목사님을 향해서 쓴

어떤 신학 서적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어느 교회 가서 설교 했을 때, 만약에 네 설교를 듣고

정말 방탄아가 나오면 네가 하나님 은혜에 대해서 제대로 설교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은혜에 대해서 제한하면서 설교하고 있으니까 그런지 알라고 하는 말씀. 그정도입니다.

구호에 대해서 받는 또 하나 불편함은. Why not change the world, 멋있잖아요. 그런데

Why not change the world a little bit. 이게 구호가 됩니까? 안된단 말이지요. ‘공부해서 남주자’

근데 ‘공부해서 필요한거 조금만 주자’ 이게 구호가 되냐는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구호라는 것은

우리가 뭔가 사실 본성과도 다르고 그렇게 할 의지도 없고 현실 가능성도 없는 것에 대한 굉장히

당위론적인, 선동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거고요. 사회과학이 추구하는, 과학이기 때문에 제도적인

사회적인 악의 원인과 해결방법을 추구할 때는 완벽성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결코 완벽한 제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것이 사회과학입니다. 예를 들면

한동대학교가 클린켐퍼스, 이건 사회과학 입장에서 100% 말이 안되는거예요. 왜냐하면 100%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걸 추구하는 것에 따른 수많은 부작용과 인간에 대한 정죄와

이런 것들이 너무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사실은 지금 같은 데서 담배 피우게 하는 것조차도 지나친

속박일 것이다. 너무 완벽성을 추구한다는 거죠. 그 이야기는 왜하냐면, 완벽성의 극단은 죄짓지

말라는 거겠죠. 불가능한 일을 우리에게 강요한다는 거죠. 그래서 그 완벽성에 근거한 구호나

Page 17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69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가르침이 과연 신앙적으로 옳은거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냐. 우리

인간이 완벽하다면 하나님 왜 필요하고 예수님 왜 필요한가 하는 질문을 합니다.

김성훈 교수 : 저는 이런게 있으면 꼭 제가 말씀드리는게 있는데, 제생각도 그래요. 신앙을

가지는게 누군가 가지라고 해서 하는게 아니고, 자기가 아는 것들 모두를 합쳐서, 그래도 성경이

진리인것 같다고 고백하는데, 그게 실존적인 고백인데, 그 고백을 쉽게 할 수도 있죠. 그래도 좀더

어렵게 해야하는게 아닌가. 좀더 비싸게, 좀더 어렵게 해야 하는게 아닌가. 그러려면 여러개를

공부를 하고, 혹시나 내가 기독교 신앙을 떠날지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진리를

찾아가야하는게 아닌가. 그것을 한 다음에 얻은 것이 진정한 신앙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가끔 해요.

제가 그정도로 엄청난 위험을 감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약간 낮은 정도의 위험은

부담했다고 생각은 해요. 그러고 난 다음에 나는 고백을 했고 그 고백이 귀하다고 생각을 하고.

언더우드도 100년 전에 그랬었는데, 제가 지금 말한 것과 비슷한건데요. 사람들이 아주 쉽게

고백하고, 아주 쉽게 믿고, 언더우드가 한 말이 그래요. 이상하다 한국 사람들은. 되게 어려운건데

어떻게 쉽게 믿고 눈물 흘리고 고백하지? 했대요, 우리가 그러는 것은 아닌가. 자기 실존적

고백이니까 리스크를 부담을 해라. 그리고 한번 도전해봐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데, 진리가 결국

이긴다. <꽃들에게 희망을> 이런거 읽어봐도, 번데기가 되면 나비가 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이

없는거예요. 그런 말을 하고 싶고요. 그거에 관련해서, 검사출신 변호사님이 제가 오늘 이거 한다고

하니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던데, 마약이 꼭 먹어봐야 마약인지 아나. 마약은 먹으면 안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거예요. 마약이 마약인지 어떻게 확인하냐면, 마약을 먹어본 사람을 관찰해보면

아는거죠. 사회과학을 열심히 해본 사람을 관찰해보니까 적어도 마약은 아니다. 그거는 적어도

영양소는 영양소다. 그러니까 사회과학을 함으로써 영양소가 돼서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요.

또 하나는 아까 법학부 학생으로 추정되는 학생이 물맷돌 이야기했는데, 물맷돌을 다윗이

몇개를 집어갔는지 여러분 혹시 아세요? 다섯개 집어갔어요. 그런데 첫번째 한방에 맞습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갔지만, 골리앗이 두번째에 갈지 세번째에 갈지 모르는거죠. 일단 다섯개 준비를

해간거죠.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 올지 모르는거예요. 그런데 사회과학 한다고 하면 적어도 다섯개는

준비해야한다. 첫번째로 끝난다고 믿고 하나만 가져가지 말고, 첫방에 끝나도 다섯개는 가져간다.

제가 생각 했던건 그거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법이, 특히 실무를 하면

있는 법을 해석하는건 쉬운데 법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하는건 어려워요. 저는 공정거래법을

하는데 경쟁을 촉진하는 법을 하는데 거기 관련된 소스를 주는 것이, 말하자면 김재홍교수님께서

공부하시는 정부규제 이런 것이거든요. 그런걸 공부를 해야, 알아야 결국 법이 어디로 갈지 압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저 학생이 비유한게 꽤 적절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김재홍 교수님 공부하신

Page 17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70 2010년 봄학기 제1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경제학은 꽃인데, 법공부하는 사람은 법 공부한 사람은 그 꽃을 따다가 대중에게 파는 꽃집

주인이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적용을 해서 실재로 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그런 역할을 하는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법을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치겠습니다.

이국운 교수 : 저는 이 모임을 기획한 사람으로써 이 모임을 준비하면서 제가 가졌던

생각을 아주 간단히 여러분들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법학을 전공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법학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공동체가 편견, 또는 Phobia, 심지어는 차별의식,

아니면 일종의 핍박, 핍박하는 감정을 가지는 것이 상당히 정당하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펼쳐보면, 특별히 신약성경에 예수님 잡아죽인 사람들이 영어성경에는 다 Lawyer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사실 법학이라는 이름은 사실 잘못 붙은 이름입니다. 저희가 전공하는 법은

법학이 아니고 불법학이예요. 법학은 모든게 잘 돌아갈 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고요. 뭔가 어겨질

때 잘못될 때. 누군가 나쁜 짓을 했을 때, 그때야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때문에 사실

기독교 공동체에서 법학이 필요없는 상황이 오는게 어쩌면 더 아름다울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이

이야기는 한동대학교 와서 처음 하는데, 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법학하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기독인으로서 법학하는 사람들은 굳이

편견 핍박 안하셔도 마음 속에 깊은 열등감이 있어요. 우리가 우리가 가진 법을 이렇게 저렇게

협작을 해서 우겨싸서 억울한 한 사람을 죽인 그 학문을 하는 인간들이다. 우리는 불법학을 하기

때문에 불법에 가장 가까이 있다. 그런데 제가 이 모임을 기획한 의도는 한동공동체가 불법학이

필요한 그런 상황으로 가고있는게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한동 공동체가

법학을 이렇게 아주 융성하게, 거의 아래층에 법률대학원까지 합하면 20여분 가까운 교수님들을

모아서 이렇게 로스쿨을 만들고 이렇게 하게된 제일 실재적인 계기는 이 학교의 출발점에

바깥으로부터 법을 통한 공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법을 이용하여 막으려고 우리 신교수님이나

저나 다른 교수님들이 부름 받아서 왔고, 예수 잡아죽인 그 법에 잘못쓰임이 없었다면 한동대학교에

법학부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잘 된 일인지.

법학부의 흥행이나 생존을 보면 이게 불법이 벌어져야 법학부가 계속 가는건데. 잘 된 일인지 못된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한동공동체가 불법을 다루는 사회과학적 기술이 필요한 시대로

가고있지 않은가 이걸 어떻게 제 스스로 감내를 해야되겠는가. 제 스스로 좀 판단의 방향이 잘 서지

않아서 여러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면서 모시고 사회과학자로서 우리가 먼저 Speak out하고.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하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Page 17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71

기독 공동체와 사회과학에 대한 편견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 특별히 사회과학을 하는 많은 한동 학생들을 포함해서 저 부터도

말하는것 만큼 듣고있는 자신을 보게됩니다. 이 들음을 통해서 무엇을 더 이룰 수 있을지는 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자유에 관한 이야기 많이 했는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아닙니까. 결국 자유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추구하는것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든지 간에 사회과학을 평생에 업으로 전공하는 사람들은 사회과학을

통해서 진리를 추구하고,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자유를 맛보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 점에서는 우리가 외통으로 걸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 모임을 공학자

이시면서 포항공대에서는 월급을 받으시고, 저희 학교 오셔서 모든 일에 참여하시고 너무나

풍성하게 만들어주시는 장수영 교수님 모셔서 우리를 대표해서 기도해주시는 것으로 오늘 모임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장수영 교수 :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참 예상하지 않은 포식을 하게 하셔서 배가 정말

부릅니다. 그저 늘 목도 마르고 그저 뭐가 부족한지 그저 여기 저기 배고픔에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불러주셔서 우리 선생님들 모여서 저의 마음속에 그저 풍성한 이야깃거리들을 꺼내놓게 하시고 참

반세기쯤 대학을 다닌 경험들이 이 방안에서 다 나온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시간을 어떻게 이렇게

쓰시고 우리 마음속에 서로 나눌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생각들을 이야기하는데 독백이 안되게

하시고 반영있게 하시고 들리게 하시고 생각하게 하고 하심이 정말 놀랍습니다. 주님 참 우리

살면서 우리 생각들이 다르기 때문에 또 사실 생각 다른것 까지도 아니면서도 그저 우리 표현이

안되서 또 여러가지 부질 없는것 때문에 보지 못해서 닫힌 우리 상처들 참 많습니다. 주님께서

아시고 지금 이 시간 주님 마음 속에 오셔서 괜찮다. 견딜만할거다. 이거 다 지나면 주님 안에서

우리 풍성하게 누릴 수 있다고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얻게 되는 모든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주님께서 그저 내 풍성함이 어떤지 알라고 하셨고, 내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어떤건지

알라고 하셨는데, 그저 어떤것, 받은거 찾으려고 더듬어 찾으려고 한동 동산에 와서 공부합니다.

주님 밤시간에 그렇게 풍요롭게 해주셔서. 정말 아름다운 밤 허락해 주신것 감사드리고, 오늘 나눈

이야기들 그저 마음에 품고, 그래도 아직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 생각해보면 참 답답합니다. 끝이

날지 끝이 어디일지.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실지. 그저 보이지도 않고 잘 알 수 없지만, 우리

마음속에 그려주신 소망들이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 믿을 수 있는건, 견딜만 할거다는 주님의 약속만

그저 붙듭니다. 견딜만 할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정금처럼 나올 수 있는, 그런 시간 우리가

소망하면서, 이 밤에 모든걸 감사드리고, 수고해주신 선생님들 마음에 풍성하게 위로 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넘치는 배부름 체워주시기를 간구드리고, 모든 말씀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렸습니다.

Page 17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17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17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17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17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17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77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Public Speech in Christian perspective

마틴 루터 킹의 모델에서 배울 것

Lessons from Martin Luther King Jr.’s Model

올네이션스홀 302호

2010. 5. 4

이국운 교수 : 안녕하십니까 저는 학문과 신앙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이국운

교수입니다. 아무도 박수를 쳐주지 않는군요. (applause) 감사합니다. 이번 학기 두 번째

콜로키움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주제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public speech, 공적인

연설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고 또 그것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이

주제에 관해서 아마 누구든지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고 또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좋은

모범이라고 생각되는 Martin Luther King Jr.의 'I Have a Dream' speech를 오늘 우리가 함께 보고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제가 잠깐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오늘 이 자리에 모여서 함께 기독교적으로

말하기. 특별히 책임을 가지고 public하게 말하기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Martin Luther King Jr. 라는 훌륭한 목사님을 모범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오늘 그에 speech를 생각하고 분석하지만, 또 그 사람을 생각하고 또 기념하게

주옵시고 또 그가 따르려고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공적 연설의 모범을 이 시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옵소서. 오늘 특별히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주시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 다른

나라에서 이곳을 찾아온 International member들에게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로 함께 하여주시기를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 올립니다.

오늘 네 분의 Panel들을 모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이 모임에 오셨기 때문에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잘 아시겠는데요 우리가 먼저 네 분의 페널들에게 각각 10분씩의 기회를 드려서

발제를 듣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발제 내용에서 서로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갖고요, 그 뒤에,

Page 18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78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그러면 약 한 시간쯤 흘러가는데 그 뒤에 floor에 문제를 열어서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자세히 살펴보셨다가 아마 8시 15분 정도 이후에는 함께 토론하는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먼저 오늘 모신 네 분의 선생님을 소개 드리겠습니다.

Prof. Antony Beckham: My name is Antony Beckham, I am from California, I'm

assigned to 'global EDISON academy' as a professor. (It is) very nice to meet you. (Applause

and Laughter)

Prof. Cordell Schulten: Good evening, my name is Cordell Schulten, I am a visiting

professor of the American Law in the Undergraduate School of Law. I am from St. Louis,

Missouri. My home university is Fontbonne University where I served as a senior lecturer in

interdisciplinary studies and taught there a lot about the impact of religion, of our faith, on our

active life, our political life. So, this topic in this evening is very, very much one of my key

interest areas so I’m looking forward to our discussions this evening. (Applause)

김진승 교수 : 네 반갑습니다. 저는 88학번이고요. (Laughter) 교목실에서 섬기고 있는

김진승 목사입니다. 지금 Christian Foundation 을 가르치고 있고, 제가 지금 목소리가 안 좋습니다.

주일 저녁에 목소리를 질러서 절제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 원래 이거보다 목소리가 좋은데

양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Applause)

양희송 대표 : 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양희송이고요 저는 87학번입니다. (Laughter)

기독교세계관과목 한동대에서 6년째 강의를 하고있고요 매주 화요일 서울에서 내려와서 서울에서

내려와서 강의하고 또 저녁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지금 6년째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시작을 했다가

여기까지 해오고 있고요, 최근에 마침 Martin Luther King Jr. 이분과 관련된 강의를 불과 지난주에

할 기회가 있어서 최근에 다시 본 적이 있어서 오늘 이 자리에 좋은 기회로 생각을 하고 같이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Applause)

이국운 교수 : 네, 오늘은 순서를 전과 좀 다르게, 먼저 Martin Luther King Jr. 목사님

암살당하셨지만 살아계실때 찍은 유명한 Speech의 film이 있습니다. 우리가 같이 불을 끄고 이게 약

17분 보다 조금 더 걸리는데요, 이 speech를 우리가 함께 먼저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 뒤에

페널들의 토론을 듣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연설의 원고가 배포되어있을 것입니다. 함께 보셔도

Page 18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79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좋겠습니다.

Dr. Martin Luther King Jr. <I Have a Dream>

I am happy to join with you today in what will go down in history as the greatest

demonstration for freedom in the history of our nation. Five score years ago, a great American,

in whose symbolic shadow we stand today, signed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This

momentous decree came as a great beacon light of hope to millions of Negro slaves who had

been seared in the flames of withering injustice. It came as a joyous daybreak to end the long

night of their captivity.

But one hundred years later, the Negro still is not free. One hundred years later, the

life of the Negro is still sadly crippled by the manacles of segregation and the chains of

discrimination. One hundred years later, the Negro lives on a lonely island of poverty in the

midst of a vast ocean of material prosperity. One hundred years later, the Negro is still

languished in the corners of American society and finds himself an exile in his own land. And so

we've come here today to dramatize a shameful condition.

In a sense we've come to our nation's capital to cash a check. When the architects of

our republic wrote the magnificent words of the Constitution and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hey were signing a promissory note to which every American was to fall heir.

This note was a promise that all men, yes, black men as well as white men, would be

guaranteed the "unalienable Rights" of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It is obvious

today that America has defaulted on this promissory note, insofar as her citizens of color are

concerned. Instead of honoring this sacred obligation, America has given the Negro people a

bad check, a check which has come back marked "insufficient funds."

But we refuse to believe that the bank of justice is bankrupt. We refuse to believe that

there are insufficient funds in the great vaults of opportunity of this nation. And so, we've come

to cash this check, a check that will give us upon demand the riches of freedom and the

security of justice.

We have also come to this hallowed spot to remind America of the fierce urgency of

Page 18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80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Now. This is no time to engage in the luxury of cooling off or to take the tranquilizing drug of

gradualism. Now is the time to make real the promises of democracy. Now is the time to rise

from the dark and desolate valley of segregation to the sunlit path of racial justice. Now is the

time to lift our nation from the quicksands of racial injustice to the solid rock of brotherhood.

Now is the time to make justice a reality for all of God's children.

It would be fatal for the nation to overlook the urgency of the moment. This sweltering

summer of the Negro's legitimate discontent will not pass until there is an invigorating autumn

of freedom and equality. Nineteen sixty-three is not an end, but a beginning. And those who

hope that the Negro needed to blow off steam and will now be content will have a rude

awakening if the nation returns to business as usual. And there will be neither rest nor

tranquility in America until the Negro is granted his citizenship rights. The whirlwinds of revolt

will continue to shake the foundations of our nation until the bright day of justice emerges.

But there is something that I must say to my people, who stand on the warm threshold

which leads into the palace of justice: In the process of gaining our rightful place, we must not

be guilty of wrongful deeds. Let us not seek to satisfy our thirst for freedom by drinking from

the cup of bitterness and hatred. We must forever conduct our struggle on the high plane of

dignity and discipline. We must not allow our creative protest to degenerate into physical

violence. Again and again, we must rise to the majestic heights of meeting physical force with

soul force.

The marvelous new militancy which has engulfed the Negro community must not lead

us to a distrust of all white people, for many of our white brothers, as evidenced by their

presence here today, have come to realize that their destiny is tied up with our destiny. And

they have come to realize that their freedom is inextricably bound to our freedom.

We cannot walk alone.

And as we walk, we must make the pledge that we shall always march ahead.

We cannot turn back.

There are those who are asking the devotees of civil rights, "When will you be

satisfied?" We can never be satisfied as long as the Negro is the victim of the unspeakable

horrors of police brutality. We can never be satisfied as long as our bodies, heavy with the

Page 18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81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fatigue of travel, cannot gain lodging in the motels of the highways and the hotels of the cities.

We cannot be satisfied as long as the negro's basic mobility is from a smaller ghetto to a larger

one. We can never be satisfied as long as our children are stripped of their self-hood and

robbed of their dignity by signs stating: "For Whites Only." We cannot be satisfied as long as a

Negro in Mississippi cannot vote and a Negro in New York believes he has nothing for which to

vote. No, no, we are not satisfied, and we will not be satisfied until "justice rolls down like

waters, and righteousness like a mighty stream."

I am not unmindful that some of you have come here out of great trials and tribulations.

Some of you have come fresh from narrow jail cells. And some of you have come from areas

where your quest -- quest for freedom left you battered by the storms of persecution and

staggered by the winds of police brutality. You have been the veterans of creative suffering.

Continue to work with the faith that unearned suffering is redemptive. Go back to Mississippi,

go back to Alabama, go back to South Carolina, go back to Georgia, go back to Louisiana, go

back to the slums and ghettos of our northern cities, knowing that somehow this situation can

and will be changed.

Let us not wallow in the valley of despair, I say to you today, my friends.

And so even though we face the difficulties of today and tomorrow, I still have a

dream. It is a dream deeply rooted in the American dream.

I have a dream that one day this nation will rise up and live out the true meaning of its

creed: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of Georgia,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n the state of Mississippi, a stat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injustic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oppression, will be transformed into an oasis of

freedom and justice.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I have a dream today!

I have a dream that one day, down in Alabama, with its vicious racists, with its

governor having his lips dripping with the words of "interposition" and "nullification" -- one day

Page 18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82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right there in Alabama little black boys and black girls will be able to join hands with little white

boys and white girls as sisters and brothers. I have a dream today!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ry valley shall be exalted, and every hill and mountain

shall be made low, the rough places will be made plain, and the crooked places will be made

straight; "and the glory of the Lord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

This is our hope, and this is the faith that I go back to the South with.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hew out of the mountain of despair a stone of hope.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transform the jangling discords of our nation into a beautiful

symphony of brotherhood. With this faith, we will be able to work together, to pray together, to

struggle together, to go to jail together, to stand up for freedom together, knowing that we will

be free one day.

And this will be the day -- this will be the day when all of God's children will be able

to sing with new meaning:

My country 'tis of thee, sweet land of liberty, of thee I sing.

Land where my fathers died, land of the Pilgrim's pride,

From every mountainside, let freedom ring!

And if America is to be a great nation, this must become true.

And so let freedom ring from the prodigious hilltops of New Hampshire.

Let freedom ring from the mighty mountains of New York.

Let freedom ring from the heightening Alleghenies of Pennsylvania.

Let freedom ring from the snow-capped Rockies of Colorado.

Let freedom ring from the curvaceous slopes of California.

But not only that:

Let freedom ring from Stone Mountain of Georgia.

Let freedom ring from Lookout Mountain of Tennessee.

Let freedom ring from every hill and molehill of Mississippi.

From every mountainside, let freedom ring.

And when this happens, when we allow freedom ring, when we let it ring from every

village and every hamlet, from every state and every city, we will be able to speed up that day

when all of God's children, black men and white men, Jews and Gentiles, Protestants and

Catholics, will be able to join hands and sing in the words of the old Negro spiritual: Free at last!

Page 18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83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Free at last! Thank God Almighty, we are free at last! (end of speech, Applause)

이국운 교수 : 네, 오늘 모임을 준비하면서 제가 네 분 교수님에게 네 개의 key term을

생각하시고 오늘 말씀을 준비해주십사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첫째로는 Form, 다음에

Substance, Person, Audience, 이렇게 네 단어입니다. 이 연설에 있어서 Form, Substance (or

Context), Person, 그리고 Audience, 이 네 key concept을 가지시고 교수님들께서 편하게 말씀을

주시겠습니다. 누가 먼저 하시겠습니까? Cordell, would you please start?

Prof. Cordell Schulten: That speech was presented in Washington D.C. in August 1963,

47 years ago, and every time, I see it and I listen to it, I still get goose bumps, and I still am

motivated to respond to a responsibility to take an active part in seeking justice, in doing justice

in this world. I believe that Dr. King's speech is probably one of the greatest speeches in the

20th century that shows to us what public speech – public speaking for a Christian perspective

– is to be.

I believe, he demonstrated to us four at least, four essential qualities of public speech

from a Christian perspective. I would suggest those four central qualities are these: This

speech is a responsible speech; secondly, it is a prophetic speech; thirdly, it is authentic speech;

and finally it is a risky speech. Let me explain to you.

First is the responsible speech. By that, I mean Dr. King spoke to the issues of the day.

This was not something new, for Dr. King. This is in 1963; he was born in 1929; when Dr. King

was fifteen years old – when he was fifteen years old – he wrote a letter to the Atlanta

Constitution, the biggest newspaper in the city of Atlanta. And in that letter to the editor, he

wrote this: “(Speaking on behalf of African American population in the United States, and he is

fifteen years old) we want in our end and are entitled to the basic rights and opportunities of

American citizens: the right to earn a living at work for which we are fitted by training and

ability; equal opportunities in education, health and recreation and similar public services; the

right to vote; equality before the law; some of the same courtesy and manners that we

ourselves bring to all human relations.”

(Dr. King, when he wrote this, was) 15 years old; he had just started as a freshman at

Page 18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84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Morehouse College when he was fifteen years old. You see, this was a part of who he was. It

came from his mother and his father; it came from a long line of history from his family, a long

history of the African American experience in United States. So it was responsible speech – he

spoke of issues of his day.

Second, it was prophetic speech. That means he brought God’s word, the Scriptures,

to bear on these issues of his day. He brought God’s word. If you listened and read the speech,

and my colleagues will speak of this more specifically later, the word of God goes all

throughout his “I Have a Dream” speech. Let me read you the comments of Professor Stephen

Carter regarding the prophetic quality of Dr. King’s speech. Dr. Carter said this, “It is easy to

forget, and some historical texts seem to make virtue of forgetting, that Martin Luther King Jr.

was a preacher before he was an activist. And that he always preceded the Christianity for both

motivating and leading, and strengthening him to persevere.” Here’s the point. King never tired,

excuse me, King never tried to hide the religiosity of his message, even for secular audiences.

Here’s a quote:

“Both God’s will and heritage of our nation speak through our echoing demands,” he

told the national press club in 1962, and in 1961 at address he said in effect that whites need

not be argued for “to discover where they come from is necessary to move back behind

dimness of eternity, for they are God-given.” You see, Dr. King’s speech is a model for us

because it shows us how to speak prophetically to the issues of our day, to bring God’s word to

bear on those issues.

Thirdly, it was authentic speech. It was a speech that was born out and spoke from

his own, genuine lead character. One of the most famous quotes from the speech we just

listened to was that “I have a dream that my children one da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The reason that proclamation resounds to us

even 47 years later, and how the speech does not only to what has taken place but continues to

take place with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all throughout the world is because all those

words were spoken authentically because Dr. King lived that life. He lived that life and spoke

authentically to others.

Finally, his was a risky speech. That is, he spoke truth to power. He spoke truth to

Page 18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85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power. Every time Dr. King stood up to speak publicly; he was putting himself at risk. We will

talk more of this later this evening; my colleagues will discuss the context of which Dr. King

spoke, but he was always at risk. He had just come from being jailed in Birmingham, Alabama

earlier 1963 where he wrote famous “Letters from Birmingham Jail.” Another book that I

brought here which I’ve been reading and studying is a book entitled “Stone of Hope.” You

heard that phrase being used by Dr. King in the speech. The Stone of Hope. That is the literal

translation of the word “Ebenezer.” Ebenezer means the stone of hope, and listen to how Dr.

King spoke and his speech was a risky speech. This is a quote from David Chapel, the author of

this Stone of Hope. He (Dr. King) frequently referred to “prophetic Christianity in his later

writings and speeches and cited Jeremiah, Amos and Isaiah as examples of brave men who

sacrificed their social positions and standings, if not their lives, when they preached to society

of its corruption and insisted on total, rather than incremental reformation.” You see, Dr. King’s

speech was a risky speech. He was always bringing himself on a line and he paid the ultimate

price because at the age of thirty-nine, he was gunned down by an assassin’s bullet. Thirty-

nine years old, and yet in those thirty-nine years, he left a mark upon not only 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but the history of the world that that speaks to us today. One he spoke

responsibly, prophetically, authentically, and one he spoke at risk of his own life and well-being.

(Applause)

김진승 교수 : What I am going to do is to focus on the characteristics of Martin

Luther King Jr. as a preacher. I know it is very hard to evaluate certain preaching

characteristics of one pastor as a pastor. You know, I am a pastor; and it is very hard for me to

evaluate certain characteristics of a pastor as a pastor. But since I’ve struggled to improve my

preaching skills, as you might know, that’s what I asked Professor Tony Beckham to draw a

conclusion of this part so that I can be here as a spokesman about what he wanted to talk about

this issue, because he has prepared a lot to share more than me. Just kidding. (laughter) So, as I

am doing my part of concentration on his speech as a pastor, I will focus on how he was using

the Scripture on his speech, and then how he engaged those Scriptures with his own theological

stands. We can hardly avoid the fact that in that historic monumental speech ‘I have a dream,’

he refers to various biblical verses, whether he directly or indirectly quotes to allude to specific

verses.

Page 18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86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원래 제가 목사로서 이것을 준비하면서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목회자로 본 그는 공적인 연설가로 서있지만, 저는 이번에 person, personality 흑인지역의 Black

American African 사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로서, 심각한 위기에 있는, 자유의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

미국인 사회에서 어떻게 그 사회를 선지자적인, 예언자적인 입장에서 말씀을 했는지, 어떤 목사님의

평가를 제가 목회자로서 한다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give up하고 Tony Beckham

교수님께 맡기려고 했는데 그 분이 더 많이 준비했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원고를 달라고, 제가

읽겠다고 했는데 unfair 이라고 하셔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이 연설에서 말하고 있는 성경의

인용에 대해서 어떻게 그분이 성경을 인용하고 있고, 어떤 구절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아니면

암시적으로 인용하고 있는지 그 부분들에 대해서 말하고, 그리고 이 분이 어떻게 성경에 접근하고,

어떻게 성경과 씨름하고 있는지, 어떻게 성경과 씨름하여서 예언자적인 시대 적용을 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In the first part, I have picked three important verses which were in quotes or alluded

(in the) dream speech from the bible. First, he mentioned ‘No, no, we are not satisfied, and we

will not be satisfied until "justice rolls down like waters, and righteousness like a mighty stream.’

Which is taken from Amos chapter five verse 24, ‘우리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가게 하고, 공의가 하수같이 흐르게 되기까지는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라는

그런 연설 부분 속에서, 그가 직접 KJV를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인용하고 있는 구절이 Isaiah 40:4-5인데,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ry

valley shall be exalted, and every hill and mountain shall be made low, the rough places will be

made plain, and the crooked places will be made straight; "and the glory of the Lord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간 모든 계곡이 메워지고,

모든 언덕과 산이 깎이고, 울퉁불퉁한 곳은 평탄해지고 휘어진 곳은 곧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꿈이 있습니다.’ 라는 부분에서 그가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특별히 모든 불평등 함들과 모든 굴곡들과 모든 자유의 유린, 그런

모든 것들이 그가 계곡이 높고 낮은 곳, 평탄하게 되지 못한, 평등이 실현되어지지 못하고 있는

자유의 진정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그러한 현상으로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이사야의 예언적인 종말론적인 메시야 예언을 그대로 인용하여서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평등의,

하나님의 자유의 누림이 주는 어떤 의미들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그가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Page 18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87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그리고, 세 번째, I also want to focus on his perspective on slavery. How he confronted

the idea of slavery over the abolition of slavery. First, I’d like to recognize what kind of law God

gave to Israel in regard to the slavery in Leviticus 25:42, ‘Because the Israelites are my

servants, whom I brought out of Egypt, they must not be sold as slaves.’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바 나의 품군인즉 종으로 팔리지 말 것이라.’라는 레위기 25:42 말씀이

암시적으로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This is what Dr. Schulten has found in the first part of his speech. ‘It came as a joyous

daybreak to end the long night of their captivity.’ ‘이 선언은 노예로서 살아온 기나긴 밤의 끝을

알리는 기쁨에 찬 여명이었습니다.’ 라는 연설 서두에 나오는 말에 대해서도, This speech can

remind us of Psalm 30:5 ‘Weeping may remain for a night, but rejoicing comes in the morning.’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이런 시편의 말씀이 동시에 암시적으로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성경의 구절구절들을 아주 symbolic하게, 아주

절묘하게 연설의 문장 속에 스며들게 하고 있는지, 그의 어쩌면 목회자적인, 설교자적인, 예언자적인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Lastly, I want to refer to his using of the constant theme of justice, suffering,

redemption, and transformation, and so forth. 마지막으로, 제가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정의와,

고난의 문제, 그리고 변혁의 문제, 두 번 언급된 변화, changing and uplifting, 올라가는 이 현실에서

고양되어서 조금 더 높은 이상의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transformation 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빌립보서 3:22절에 있는 말씀 언젠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변화될 것이라는 그 말씀. 물론, 종말론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지만 그의 모든

언급 속에 이러한 transformation의 language가 스며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Now, I’m going to do my second part for focusing on how pastor king engaged the

Scripture. Martin Luther king’s preaching can show us a lot of practices and interpreting

Scripture. I believe his preaching is fostered by the rich biblical allusion and fine and timely

application of those verses for convergent (impending) circumstances for his age. I consulted

with Richard’s book, 제가 두 번째로 말씀 드리고 싶은 부분은요, king 목사님이 어떻게 성경과

씨름했는지에 대해서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마틴 루터킹 목사님의 설교는 성경 해석의 실제에

대해서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의 설교가 풍부한 성경 암시와, 절제되고도

적절한 성경 메시지의 현실에 임박한 상황에 대한 적용에 대해서 강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Page 19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88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저는 Richard Lischer의 책 설교자 킹 목사 the Preacher King 을

참고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King’s formation in African Baptist Church

prepared him to be a public educator of God’s justice for Black people in America which in the

African American tradition meant that he would take a church and preach. From this

environment, he absolved key theological strategy for dealing with injustice that he would never

relinquish. He learned more from the Negro preacher’s methods of sustaining people and being

ready for action than from any of his courses and graduate school. He absolved more from his

own church identification with the suffering servant than anything that he read in Gandhi. 그가

쓰고 있는 직접 인용 부분을 설명 드리면, 아프리칸 침례교회에서 킹 목사님이 교육을 받아왔는데,

그가 미국 내에서 흑인들을 위해서 정의를 공적으로 변호해주는 이러한 일을 준비해 준

교회였습니다. 그가 받은 전통은 African American 즉 Black theology 전통 가운데서 교회와

설교를 함께 섭렵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현실과, 그 현실 속에서 설교가 어떻게 전달되어야

할지, 어떻게 교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어떻게 바른 identity 를 자리매김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가 부단히 노력하고 고민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가 결코 근절시킬 수 없었던

불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가 핵심적인 신학적인 전략들을 흡수하도록 만들었는데, 그는

또한 흑인 설교가로서 동족들을 지탱시키고 뭔가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설교적

방법론을 통해서 배운 것들이 그가 대학원에서 간디를 연구한 박사과정에서 배운 것보다 어쩌면

그에게 더 큰 impact를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그의 Richard Lischer의 인용을

통해서 제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어떠한 교회냐 현실이냐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더 옳고 덜

옳고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와 청중과 그가 처한 상황을 같이 볼 수 있는 그런 목회자적인 마인드가

아니면, 또한 동시적으로 그것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목자적인 마인드가 아니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그런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I mentioned earlier that King located Black struggle for freedom in the

context of Israel’s deliverance from the slavery of Egyptian king Pharaoh. It seems to me that

the words of the Scripture significantly shaped king’s practice as well as his rhetoric. 그의

설교가 그의 수사학적인 연설의 모든 방법론에 있어서 어쩌면 방법이, 기교가 그를 이끌었다기

보다는, 그의 깊은 곳에서 동족에 대한 뜨거운 문제의식, 현실인식에 대한 깊은 고뇌가 그를

설교가로서 upgrade 시키고, 그런 것에 부딪혔을 때, 그가 당당하게 연설할 수 있도록 그를

안내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 코멘트로서, King’s resume also shows us that he engaged in the scholastic

Page 19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89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study of the Scripture throughout his former education at Morehouse College, Crozer seminary,

and in the graduate program at Boston University. Those engagements with scripture were

informed by the liberal theological tradition that had shaped his social activism, though it senses

that his firm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 was shaped far more by the sophisticated patterns

of allegory and typology. King has shown us fundamental biblical principles and biblical themes

of love, suffering, deliverance and justice to put into practice in the ground of our actual life. His

sermon and speeches show the power and interpretive freedom of one whose scripture

imagination was so fertile that he could move America through the power of the words of God,

even when he didn’t explicitly express any biblical and theological language.

목사님의 설교 속에서, 물론 제가 약간 보수적인 목사로서 제가 가진 고민은, 한국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King 목사님이 너무 liberal 하다, 너무 자유신학적인 전통이 서있지 않은가 하는

편견들이 있습니다. 저도 미국에 가서 공부하기 전에, 미국 LA에 있는 Martin Luther King Jr.

Blvd를 다니기 전까지, 미국의 신학교에서 이분의 축제를 벌이고, 이분의 전통을 연구하는 것을

직접 접해보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그분이 인권 운동 혹은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갔었는데 미국 교회는 교파에 관계없이 이 분의 유산에 대해서 이분을

기념하고, 그 영향에 대해서 회상하는 것을 보면서, 어쩜 우리가 보기에는 자유신학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이것이 social activism 으로 이끌어 내는 데 있어서 그 impact 이 강하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은 신학은 죽은 신학이라고 말까지 하면서 그렇게 나아가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누구나

자유주의적인 색채가 깊다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 당시 교회가 처한 상황이었고, 흑인 사회가

처했던 상황의 시급성을 생각해봤을 때, 그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런 예언자적인 목소리였음을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오히려 여기에서 성경적인 바른 신학의 적용, 말씀에 대한 깊은 해석이

실제적인 생활의, 인종과 민족적이고 사회, 정치적인 모든 이슈와 무관할 수 없는 것임을 우리가

분명히 그의 설교 메시지 속에서, 그 설교를 삶으로 살아내는 삶 속에서 볼 수 있었고, 이것이

미국을 움직여 나갔던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근본적인

적용의 포인트들을 놓치지 않고 그것은 모든 복음주의 신학의 유산으로 남아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Applause)

이국운 교수 : Thank you Pastor Kim.

양희송 대표 : A week ago, I had a privilege to speak for Martin Luther King Jr. last

week in Seoul. And I saw two or three more video clips which were about the speech. It’s a

Page 19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90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great opportunity and privilege here again that I can present a small hope with different

audiences.

As you know already he came out of the time of turbulence, there was a very many

difficulties and as well as racial segregation. So, this is the great beginning of civil rights

movement in the U.S.A. I can just look at the chronology of Martin Luther King Jr. I was very

surprised by that he lived a very short life. He began his public career as a civil rights

movement from the age of 25 or 26 in 1945. He was behind of the famous Montgomery bus

boycott. Actually he was there as a pastor of a local community. So it was a very early stage of

a young pastor at the age of 25. He began his career. And he was arrested in 1963 in

Birmingham. And he wrote a famous letter ‘From Birmingham jail.’ In the same year, he had a

big Washington March. Next year, 1964, he got the Nobel Prize. he was the youngest. It was

fast. The time was short and he became a nationally and internationally famous person as a civil

rights activist. And then he had several other marches and campaigns and 1968, while he was

striving for sanitization of black workers, he was shot and died in Memphis, TN. At that time,

his age was 39.

The first thing I was amazed was this short period of time he had done a great work,

and he lived a life we can never imagine and expect. The reason I mentioned his life span is

that he came out of the people, African American who were oppressed in American society. He

speaks from the people and for the people. And that’s the one reason we can easily identify him

with a person who can speak for us. Nonetheless, we are black and white and in other colors,

we can easily identify his speech coming within the people. When I listened to the speeches, I

can just find at least four different points here.

First, he opened a common ground for the audiences. You noticed that his mention in

the early part of his speech, he spoke about the Constitution, and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nd several other famous and important documents or teachings of American heritage. That’s

the first page that he opened the common ground so that everyone there including people who

were watching TV, they are invited to the speech so that they can identify the issues. We can

easily say that he specifically came from the Christian background but nonetheless, he set his

position in a very strong American civil religious tradition, I think. So, it isn’t necessarily defined

Page 19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91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as Christian, but he includes more religious backgrounds and traditions so that he set up a

common ground as far as he can.

Second one is that he brought audiences from the outside to the core of the issue.

African Americans in the US at that time, they were outcasts in the society. They were

oppressed, but in his speech, he brought people to the core of the issue by saying below in the

First chapter. ‘They came there to their nation's capital to cash a check’ which means that this

nation already promised people for their freedom and justice. But they were not working

promptly. So King invited people from victim to a person who can demand the nation to cash a

check.

Third one is that King gave them a dignified position, which is that now audiences are

on morally higher ground than people who don’t care about the racial issues. By doing them, the

whole situation was turning backward. So the victimized could speak for themselves, and speak

to the core issues.

The fourth point is to invite them to the transformation of the nation. In this point, we

need to note that Washington speech and demonstration itself wasn’t just showing the strength

of Black community. We know from the history. There is a kind of negotiation was going on

between JFK’s government and the civil rights movement leaders, so this march should be done

in a measured way. So that was very tricky one. Some of the leaders opposed to this

negotiation, so King was in a very uneasy position to deal with this problem. I think that’s one

reason that his speech didn’t specifically deal with the current issues, but focused more on the

ethical side and emphasized more on morally high ground. So, I think by doing his speech in this

way, he brought his audience from the outside to the core and gave them dignity to deal with

this issue in a morally high ground and invited them to participate in the transformation of the

social issues and transformation of the nation. I think that’s the how he handled with his speech.’

One thing I want to note is the sheer simplistic and directness of his speech. He

doesn’t tone his speech down, instead, he just goes directly to the core of the issue, and he

speaks from the people and he identified a sympathy and bitterness and oppressed feelings of

people in a direct way so that he can move audiences whatever their position is, whatever their

Page 19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92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background. They can sense the direct address of his speech. I think it resembles to the

biography of Barak Obama. Authenticity of hope. Hope comes from authenticity. Speak directly

from the core. I think that is very important for us to note. Thank you.

Prof. Anthony Beckham : Hi, I want to ask you for a favor, I would like to have you

sing this with me, okay? (Laughter) I will give you the words, and we are going to sing this. The

words are “We shall overcome someday.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day” Ready? Then let’s stand up! The reason for doing this is because you all have been

sitting still for an hour and half, and have been listening to the professors talking to themselves

(Laughter) You are my words, you are my mouth! I just wanted to do something to wake you

up~

Everyone is singing

“We shall overcome (x2)

We shall overcome someday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day” (Applause)

Think of your life at Handong and sing that in solidarity. Sit! I did go to Morehouse

College (Dr. King’s alma mater). I did attend Morehouse College, not the same time as him.

Actually his son went to Morehouse College, Martin Luther King IV; he went to Morehouse also.

The truth is his father and grandfather went to Morehouse, also. So, he is a third-generation

preacher. So you guys say you have a trouble being a PK(pastors’ kids). Well, he was a third-

generation PK. His son, Martin Luther King IV, is also a PK and a pastor. He worked in his

father’s church while he was attending seminary and doing jundosanim, then he was assigned to

a church after that. One of the beauties of Morehouse College is that it is a historical Black

College, which means it was a college designed for men, an all-male school. And it was

founded to help African-American men understand issues of morality, character and faith. So,

part of the ethos was that we as the Morehouse men had a responsibility to give back to our

community; it was not an option. We were socialized to believe – there is a social theory that

says talented tenth – ten percent of the top in our ethnic, racial group are responsible for other

ninety percent. Since we have an opportunity for education, we were responsible for other

Page 19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93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ninety percent to lift (and lead) the community. So that was the part of his (Martin Luther King

Jr.) socialization in training when he was between the age of fifteen to nineteen. But he did not

graduate from high school; he left high school, he skipped tenth grade and twelfth grade and

went to Morehouse. Then he graduated from Morehouse with a Bachelor’s degree, then went to

seminary, and did a doctorate at Boston. But all the while he was doing that, he had this training

from his father and grandfather that helped him to be who he was. There was a dark side to

Martin Luther King that also expresses his humanity but I won’t offer that tonight since we are

trying to be positive. (Laughter) But in his speech, he used – since we are looking at public

speaking – he used what is a Black oral tradition called ‘oral manuscript.’ So he had written out

the speech, but in his writing of the speech, he used, he played along with the Black oral

tradition. He used a lot of metaphors, imagery and symbolism; but it is sort of like a song, you

are composing a song. So the manuscript (has the feel of being) is alive. And Martin Luther

King had ‘hooks’ in the speech. “I have a dream.”, “Let freedom Ring.”… Those are hooks that

grab you like a nice little jingle in an advertisement. And that is sort of like Black homily or

Black preaching style.

Another thing about African American, or Negro, Church was that Negro Church was

the center point of community. For those of you who are maybe, may be familiar with the

America a little bit, those are like an immigrant church. So it is where people gather on social

level, on spiritual level, on emotional level. It was the support place. It was the only place where

Negro of that time felt like a human being because outside of that environment, they were

dehumanized. Just like Korean-Americans. Just like Korean American Church historically has

been the gathering place. Because in dealing with the mainstream America, you are

marginalized and disfranchised. But in Korean church, you can speak Korean. You can have

Korean food and everybody knows. So it is where you breathe and relax and re-affirm that you

are a human being. That’s the role of Black Church; it was a civil place; it was the place where

politics were dealt with, the politicians came to church when they tried to campaign because the

church became the power place for everything that happened in community, which is a little bit

different from the contemporary churches in the US right now. We do not have the prophetic

voice at all - The American Church. So that’s the richer part of the traditions that he came out

of and cracking the speech. On a personal level, at he was twenty five, he did not want to get

involved with any of the movement. (He) had no interest. But something inside him moved

Page 19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94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toward responding to the needs of his people.

Another thing I wanted to point out is the SCLC,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it was a student movement. It was (made of) renegade college students that were

advocating the issue. And with SCLC, there were a lot of NGOs that were involved in civil

rights issues during that time. SCLC, NAACP, the Black Panther party, the Black Muslims.

When you look at the speech (clip), you see a lot of men with white hats on, they were Muslims.

So Negro was looking for a religion that connects them, their identity of being a Black man or

Black people. And Christianity was not something that was truly viewed as authentically Black

religion. They felt that Christianity was white man’s religion. And the Nation of Islam, which is

the Black Muslims, they felt that the prophet Muhammad was more true to the values of African

Americans. So there was that tension between King as the Black Protestant, King as the Jew

Lover, and there was this militant group that’s saying, “let’s be violent and destroy the white

men,” so all those pressures around him were there at the time when he was giving ‘I have a

dream’ speech. And he had to learn how to navigate through all of that stuff, as an articulate

African American male that has doctor’s degree but also has the understanding of the audiences

that are listening to the speech. So as a public speaker, being aware of who you are talking to,

drawing people to the core issue, but doing it in a way that is inviting and not violent, and if you

notice the speech patterns as he began to talk, his emotion began to arise. And he uses a

technique called “Callers’ response” which is classic in Black church. The call is an invitation to

respond to the preacher. You hear “I have a dream that one day” and the background goes

“Amen!” So, he’s calling you to acknowledge that you understand what is being said. And then

there is a response of “Yes”, “Amen”, or “I hear you”, “I feel you” or they throw something at

you because they really didn’t like what they heard or something (Laughter and applause) So

it’s very emotive, it’s emotional; He does the cognition as well as the emotion. He does the

whole person engaged in a dialogue; it is not a monologue, it becomes a dialogue. So a public

speaking technique, he solicits a dialogue. In public speaking, it is a dialogue not a monologue.

So that was mine, thank you.

(Professors and other panelists asked Professor Beckham to share more about the

experience as a black man in America)

Page 19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95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My mother was forty two when she had me. Yes, I know she was Sarah. (Laughter)

And the stories that my sisters said, they were African American children in predominantly

white suburbs because my parents wanted them to get better education. Actually, I was the

only black kid in all-Jewish elementary school. They would tell me about what they were

experiencing because they grew up in the cities. As a result of that, my sisters were very

ethnocentric. They embraced black theology and are very aware of what the struggle was

because they were the ones who were getting beat up or attacked. I grew up in Ohio, which is

not Deep South. Usually in Southern parts, racism was very aggressive. It would be like

Japanese occupation.

For me, I heard stories. I didn’t deal with institutional racism; I didn’t deal with overt

racism as they had to. But I heard their stories and I heard their pain. I mean, my parents were

the first African Americans to live in certain community, and that tension of being the first was

not fun. Imagine signs that say “Koreans Only” or “Americans Only.” I mean, does that really

make you be a part of? Part of his statement ‘we come to cash our check’ deals also with the

fact that they promised the end of slavery. “You will get a mule and forty acres of land.” That

was a promise. So, another symbolism that King was speaking about is that promise. ‘I want my

mule and my forty acres.’ But it didn’t happen. So personally, I get the issues, I understand the

issues of civil rights and part of me should be angry because of what has been done in America.

As a Christian I have to walk in love and forgiveness, but as a Black male Christian, knowing

what my family has walked through on a personal level, walking in love, doing justice is a

challenge because of the story.

But there is a higher narrative that helps me not to eliminate my civil understanding, it

wasn’t liberal gospel, the US Protestants see it as a liberal gospel. But in remembering the role

of Black Church as the center point for the community; from that context, it is not a liberal

gospel, it is the gospel. But when we talk about social justice, typically we evangelical

Christians feel that it is a compromise, it is not appropriate to have an ecumenical gathering of

people of different faiths. We see it as a heresy. From very conservative, Korean perspective.

So how can we do justice and embrace community when we are so isolated and insulated from

the world of reality? And as a public speaker, my speech then becomes jaded by my own

narrow view. But on a personal level, if truth be told, I wouldn’t be sitting here in this room if I

Page 19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96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were stuck in time because as an African American male, I should not be sitting in Korea,

talking to you. In the year 2010. Not 60s. Current reality, as an African American male, I should

not be here in this room. I should be advocating for our rights because we are still marginalized

and disfranchised. And the immigrants are taking over, so we hate ‘em, even more. On a

personal level. I love everybody. (Laughter) I am just saying the reality of the issues, how the

mindset is, because civil rights is still engrained in Morehouse today that the mantra message is

the exactly the same as the time when King was there. It is an elite, black male school. And you

are required, you get character formation, your chapel stuff is mild compared to the chapels we

have. It was very spiritual time of building faith, very inspirational time of chapel for us, and it

was mandatory. Every day we had chapel, but we enjoyed it because they were bringing the

kings – the Jesse Jacksons of black communities – came and spoke in our chapels. So we are

seeing them as role models to mirror our lives after. Anyone who was doctor, lawyer, and

engineer, anyone famous came to Morehouse and speak. So that’s what I got exposed to. So it’s

not a poor black child with an attitude and a gun. It’s understanding of the larger world reality of

the African American voice and African American journey. Of our Negro journey, I use these

words. Before Negroes, we were colored, then Negroes, then Blacks, now African Americans.

Maybe someday we’ll be just human beings, I don’t know…… (laughter) (applause)

Prof. Cordell Schulten : Actually, I’ve got a question with respect to the speech,

because you spoke to the style and corresponse. Listening to the speech, just hearing the audio

of the speech, you focus on the words, but the benefit of both hearing and seeing Dr. King

present the speech, I think you notice something particularly interesting. As Tony mentioned,

the emotion continued to swell and grow and grow. And this is my question. When he gets to

“Let us not wallow in the valley of despair, I say to you today, my friends“ and moves into the

“I have a dream,” he looks up and he is not looking down at the prepared text anymore. In fact,

he is pausing, then, he hates to slow down substantially. And I wondered, did he actually begin

to improvise out of the fullness of how God’s words, God’s words just fills his mind, but when

he started quoting Isaiah 40, we saw him, he was looking out everyone, and that quotation was

just flowed out of who he was. So my question is, is that part of speech improvised or was it

prepared? Does anyone know?

양희송 대표 : I have seen it from a documentary. Actually, one person behind that

Page 19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97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scene testified that the part was kind of his repeated one. So, he started from the prepared

script but in some parts, he stopped reading the script and began to preach what he has always

done. So, you can see the difference.

이국운 교수 : 한국 말로 하면 이 I have a dream part는 킹 목사님 18번이었다고… (웃음)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이 discussion을 여러분께 open 하겠습니다. Is there any student or

professor who has a question or comment? Please raise your hand; I will give you a chance.

학생 1 : Professor Schulten, you were talking about prophetic… the quality of his …

very remarkable, it’s very evident speech, but I think the social context that we are now in is

very different from the one that was in the sixties. In the sixties, as professor Beckham has

mentioned, the church was the core of community, so it was allowed, there was more room for

prophetic public speech. But now, in a postmodern, very pluralistic, and in a social context

where people believe that religions should be kept inside of the private section, if King were

about to speak in this social era, would he have done the same thing, not trying to hide the

religious message?

Cordell Schulten : I have a quick answer. To examine that question, listen to president

Obama’s inauguration speech. Hear how many times he alluded to the scripture, or religious

type of language. I would offer president Obama’s inauguration speech as an exhibit in

demonstrating that a public speaker who was motivated from his religious faith. He was

authentically; speak prophetically into the issues of the day as Dr. King did. After that, my

response.

학생 1 : Do you think that president Obama is a religious.. as much as of Christian

speaker as Martin Luther King was

Prof. Cordell Schulten : There is a clear difference. Dr. King grew out of a preacher

heritage and his education was predominantly theological also but also sociological. His major at

Morehouse was sociology. And his PHD, I think it was sociology and religion. So, by the way,

when he applied to the seminary, he had to fill out the application, and the application asked

Page 20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98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Describe your personal call to ministry,’ and this is what he wrote. By the way, all the episodes

are available on the internet, if you search, Martin Luther King Jr. Papers Project Stanford

University, all of his documents are online. This is what he wrote on his application when he

applied to go to seminary in 1948. He was 19 years old. “My call to the ministry was quite

different from most explanations I’ve heard. This decision came about in summer of 1944 when

I felt inescapable urge to serve society. In short, I felt a sense of responsibility which I could

not escape.” A 19-year-old Martin Luther King Jr. wrote those words. That showed the depth

of his own personal formation through his family and through his experience at Morehouse at

that time. Now,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Dr. King and President Obama. President Obama,

although he came through and experienced, where he was given the opportunity for education

at Harvard Law school, he does not have the same level of personal life experience that puts it

in connection with theological way of looking at life. I would rather acknowledge that, but I

believe President Obama demonstrates that his personal faith does have an impact on the way

he looks at issues and analyze the issues and that he used notions of justice and equality that

were formed not simply by secular political theory, but by a foundation that roots that in a

biblical perspective, but I would concede that we don’t have the same measure of life

experience to acknowledge clear minds of connection. But I still would not retreat from offering

president Obama’s inauguration address was a good example of prophetic speech today.

이국운 교수 : Do you want to follow up more? Religious 한 argument들을 public

speech 에 사용하는 것이 이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과연 유효한가?라는 질문이었고 고델

선생님의 답은, 버락 오바마의 취임연설을 들어보면 비교할 수 있겠다. 그거하고 같은 기준에서 볼

수 있는 근거는 뭐냐? 정확한 답은 아니셨어요. (웃음)

양희송 대표 : (He wanted to add more on the issue.) I’d rather recommend Robert

Balance’s article from 1968 which is civil religion in America. Famous social logical article

which analyzes the language of inauguration addresses of the US president and that’s what

actually you want, I think. The issue is not the language itself, but religious imagery, metaphor

and language can be used quite safely within the civil religion tradition in the U.S. I consider

King’s speech can also be situated in the civil religion tradition very safely. And Barack Obama

is as well. But when it comes to controversy, Dr. King had another very famous but

controversial speech on the Vietnam War. “Beyond Vietnam” which is done in 1967. And from

Page 20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199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then on, the situation became worse because before that, Dr. King criticized… he speaks from

the Vietnamese African Americans, but still that can be under the promise of the American

Constitution. But when it comes to the Vietnam War, he attacked and criticized the legitimacy or

doing injustice. Side of the USA itself, the government and political structure itself, and then he

became very difficult. Even his friendly audiences also questioned whether he was not

prophetic enough or not. So, I think the more controversial issue comes from whether the

speech is within the civil religious tradition or outside. Then, it becomes very different.

이국운 교수 : 제가 아까 이야기 했지만, 네 개의 key terms, I would like to expand the

audience from the audience in the film and the audience including you and me; we are the

audience of the speech. In that sense, we can find… there must some legacy that Martin Luther

King introduces even to people in Korea.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1960년대의 미국의 상황에 갇히지

말고, 그것에서 나와서 오늘 주제하는 Christian public speech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컨텍스에서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Please.

학생 2 : I wonder if there is a certain difference between America and Korea. I had

this moment when I travelled in Sweden. She told me that she didn’t go to church, she is not

evangelical, and she didn’t say she believes in Jesus, but she said “I believe in God. And I know

that God is watching over me. In America, almost everyone confess God… whatever it is. But In

Korea, there are a lot of Christian people here, but we got more used to the Confucianism and

Buddhism. I remember that President Lee said, “I devote Seoul to God” when he was a mayor

of Seoul. But that became very controversial because he was a Christian and not everyone in

Seoul was Christian. I was glad by his remark but felt so uncomfortable when people were mad

at that. I was so confused as a Christian. How would I take his remark in this context? I found

that kind of difference. Give me answers.

이국운 교수 : 미국하고 우리하고, 미국은 심지어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도 크리스천

헤리티지 안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 나라의 경우는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퍼블릭 스피치를 기독교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나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한

두 사람 정도 더 질문 받겠습니다.

Page 20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00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학생 3 : As you guys (professors) were saying that, I have noticed that there were a

lot of public speeches, in a prophetic sense, I would like to ask… For me, when I thought about

Obama’s speech, he was kind of fulfilling the speech that Obama had made… it was kind of…

continuing expanding the civil rights to the gays, minorities and other people whose voices had

been suppressed. In a prophetic sense, it kind of relates to the first question. In the pluralistic

and postmodern society, how that could be transformed in that sense and continue in our age.

But at the same time, it is very parallel, in the 60s, that was very controversial and our age…

I’m asking, is that the same scale as it was back then, or do you think it was more comfortable

for Obama to do that? Do you guys understand my question?

이국운 교수 :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아마, 60년대 시대와 오바마 시대와 어떤

continuity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것 자체를 크리스천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implication을

담고 있는 것 같은데…

학생 3 : There is continuity, but I’m asking if the scale of the risk that Obama has

taken and that risk that Martin Luther King has taken… was it safer for Obama to take that risk

in this kind of social cultural context compared to Martin Luther King. For him, he was more

pushed by African American community because of the church-centered community. In that

sense, I’m just asking about the scale of the risk that they had taken.

학생 4 :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굉장히 emotional 하다고 말하셨잖아요.

근데 그런 스피치가 설교 스타일이라는 게 있을 수 있고, 그 공적인 연설에 있어서 개인의 스타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어떤 영어와 한국어의 언어학적인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궁금했던게,

흑인들이 신체구조적으로 성량이 높아서 (웃음) 그런 언어학적인 차이나, 신체적인 차이가 언어

전달하는데 tradition 이라는 것도 있지만, 성경을 읽을 때도 예수님이 “come and see” 라고 말하는

거랑, “와서 보아라” 이렇게 말하는 게 언어학적으로 설교하시는 입장에서나, 강의를 전달하시는

입장에서 보셨을 때 그런 차이가 많은 차이를 불러오는 건지 아니면 개인의 차이인 건지 궁금합니다.

김진승 교수 : I have a quick comment on these two… Grace Park and Sunday school

teacher (Moses). (Laughter) I just classified these questions into the same category about how

we differentiate our context and their context. Historical question. 이명박 had a different

Page 20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01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context from American churches. Also, the scale of the risk… I believe that there is a

fundamental different scale of risk or degree of the methodology or circumstances. We have to

respect that kind of situation and we need to avoid that kind of wrong logical conclusion such as

a hasty generalization. But we need to respect Christian as Grace Park mentioned about how

we improve our public speech scale. For me, there is a total different setting. Actually, we see

that Martin Luther King Jr. had an open public setting, so as a pastor, I think that it is not a

worship setting but it is more public open setting which is different from local church setting.

Every setting has its own distinguished moment and their uniqueness should be respected. Each

one has to be evaluated on its own setting, not the historical generalization.

이국운 교수 : As a Korean Christian, ours are different from theirs. We are

experiencing that kind of separation of language. Actually, in church, in God’ university, we use

some distinctively Christian language. We are all accustomed to do it. But in the secular, even in

the public square, we use different language, but the problem is that we don’t know how to

connect those two languages. We need translators, or need to be translators for ourselves. I

think the crucial point that President Lee has brought was that he had no translator, and he was

not a translator, either. We need some ways to reach and overcome the separation of two

different language communities. I think that is not my challenge, but yours. (laughter)

Prof. Tony Beckham : Going on that, the language that King used in church is the same

language he used at the... There is no difference. The language that Obama used in the speech

is the same language he used in his church. No difference. Obama built on King’s speech

because that’s what the expectation of the masks he was. There was a background voice of

King’s dream a lot. So the white man who wrote Barack Obama’s speech for him who is in late

twenties, he is a speech writer, built on the mood of the audience and helped to crack the

speech that brought history forward, having used that as political leverage to help to move, yes,

we can forward. So that was the, in a sense, the same, but he piggybacked on that. So, as

Christian, we are so compartmentalized. We have our Christian world and language, and we

have our secular world and language. But in Korean Christianity, there are syncretism and the

Korean bible is filled with Confucianists’ ideology. So, as you as Koreans interpret and translate

that, what you label as Christianity, as an outsider of looking in, looks a lot like Confucianism to

me. And biblical texts support cultural ethos. African Americans, the slaves, embraced the

Page 20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02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white men’s religion which was used to reinforce slavery. Southern Baptist, Wesley monks,

they used the scripture to support their position on slavery. So, how do we as Christians truly

take the text? It allows being incarnated, and alive, not having this dualistic understanding.

Postmodernity, pluralism is not something new to God, and it doesn’t make us nervous. But we

as human beings become nervous because we think postmodernity, there is no one truth. That’s

all relativism. But how we embrace that from Christian perspective (Christian cultural

perspective), we have to look beyond whether it is obvious and stop taking our cues from

morals. And really need to do justice and really be into studying the Scripture without our

cultural rinses. But that’s hard.

Prof. Cordell Schulten : And the way that it happens is we develop that in community.

That’s the way cultural rinses come off. That’s because we study together and that’s I think

what Dr. Kim meant, that’s why when the camera panned out to that audience, did you see who

was there in the audience? Not just African Americans, and if you go back into some of the

great documents about civil right movement, for example, there is a wonderful documentary

that deals with the cities in TN, at the department store lunch counter, you will see the news

footage that there were African American young men and women, white American young men

and women, they were sitting together in solidarity, opposing the injustice of those shop owners

who excluded African Americans from eating lunch. At their store, they could not eat lunch at

their lunch counter. And because Dr. King and those who work together with him led the

movement that did bring together foundational human values, that’s what made the movement.

I would want to pick up also the notion of postmodernism. One of the benefits of

postmodernism is that it says every voice is welcome at the table. That’s true postmodernism.

Postmodernism does not say we can only have rational scientific presentations. It says every

voice has legitimate place coming and participating at the table. So, you don’t have this notion

that if anyone speaks and they have religious solutions, in his public speech that seems to

suggest his ideas about justice, equality, fairness had been formed by religious ideas. That type

of person is excluded, and cannot speak in the public square? No. The truth, the benefit of

postmodernism is that everyone is encouraged to participate in public discourse. So, I see that

we are at today, have all the much more opportunity to speak authentically.

Page 20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03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We cannot compartmentalize our lives. That is the danger of institutional view of

Christianity. A fragmental view of life rather than saying like as a whole, and integrated whole.

So, the way that God’s words has transformed our thinking about what is justice, fairness,

mercy… these things flowed through our lives and motivate us to act responsibly. In the light of

the needs that we see in front of us today, wherever those might be in, God has prompted you

so that you might be able to say with Dr. King, “I feel a sense of responsibility, which I cannot

escape.” That’s the call from Dr. King’s model.

이국운 교수 : 포스트모더니즘이 기독교가 이야기 할 수 있는 더 좋은 platform을 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진승 교수 : I have a quick response to Tony. By what kind of audience are we

surrounded? Public speech may be secularized, nonchristianized. If that’s the case, we need to

be very careful to choose our language. We shouldn’t deliver (our message) in a dualistic way.

We, Christian, have confronted many rejections which come from dualistic mentality. Also, we

need to be careful about the audience. When I was one of the audiences, when I was using

McDonald at the international airport, I couldn’t understand some English expressions like ‘for

here or to go.’ I had to wait for ten minutes. So, I was rejected from the McDonald. (laughter)

We need to understand what type of audience is, where they come from. President Lee had to

be careful to choose his language but he was with one mind, not dualistic mind.

Prof. Tony Beckham : We did respond with emotion thing. Was it a personal issue or

public issue?

The thing that I was thinking when you questioned was traditional Korean folk music.

It is very emotional, and its story that comes from the place of pain. Your generation doesn’t

know ‘fact’ because you haven’t gone through that pain but a lot of that traditional folk music, if

I’m listening as an outsider, I would say all Korean people are like that. But I understand the

story, I hear the narrative, I hear the message. The audience is irrelevant because that person

is speaking from their heart, authentically saying this is what I have lived through. And they

reinforced the intensity of the message. I don’t understand the words but I can connect it to

Page 20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04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pain.

이국운 교수 : 이것을 준비하는 중에, Tony 교수님과 함께 오래 이야기를 한 것이, 이

연설에 흐르는 흑인들의 깊은 소울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우리

판소리를 여러 번 들었는데 he felt the same kind of soul and pain from the Korean song. 문제는,

저 분은 저렇게 느끼셨는데 (웃음) 우리는 그렇게 못 느끼고!

양희송 대표 : Can I add some more to that question? I think your generation just

missed great days of Korean public speech. During the struggle for democracy in the 70s and

80s, we had public speakers who can speak to hundreds of thousands of people. Then, they

moved to other nations, we can name some of them. 문익환, 백기완, most recent one is 노무현.

He can give some hint of the speech which is Korean, using the strength of our language still

moving people.

학생 4 : That is one thing that I wanted to add to the education thing. I mentioned that

is it verbal or linguistic issue or physical issue, um… 그니까요. (웃음) 베컴 교수님의 답변은 마틴

루터 킹 스피치 그 자체에 대해서는 굉장히 좋은 답변이 되었는데, 이것이 more general issue 로

보면, 이것이 한국말로 설교를 전할 때와 영어로 설교를 전할 때, 그 emotion 을 전달하는 데

차이가 있잖아요. 근데 그것이 설교에서뿐만 아니라 연설에서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글을 읽어보면, 미국은 200년 밖에 역사가 안됐지만, 그런

명연설이라든지 위인들을 많이 발굴해내고 대중에게 알리려고 교육을 많이 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교육이 안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연설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요소들 가운데… 언어학적인

부분이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연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김진승 교수 :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밥을 먹느냐 안먹느냐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웃음)

Prof. Tony Beckham : Can I ask the audience who questioned about? Was she speaking

with emotion, yes or no? (Yes) Was she passionate in her expression, yes or no? (Yes) Black

people have old tradition, so we know story. Korean people have old tradition, so you know

story. You forgot your history. But it is still in you, and your DNA. What she just communicated

Page 20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05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was ‘I have a dream,’ small Korean version. You are looking out for something that is inside.

You can’t get that in school.

이국운 교수 : 질문이 더 있으십니까? 혹시 덧붙이실 말씀이라도…

최병률 목사 : 퍼블릭 스피치, 아까 말씀하신 대로 7,80년 대 그 분들은 그 시대에

요청되어지는 것에 대한 responsibility, 내면의 욕구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 분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지… 그러니까 퍼블릭 스피치 할 때, 목사로서 스피치와 설교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있어요. 분명히 다를 텐데, speaker 과 preacher은 어떻게 다른가. 그런 면에서

우리 목회자들이 밖에 나와서 King 이 목회자로서 연설을 했고 그것이 영향을 주었잖아요. 우리도

어떻게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있을것인가? 아까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을 바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은 스피치라기 보다 정치적인 것이고… 그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사회의 어떤 현상들에

대해서 신학적인 책임을 지어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저도 잘 못하지만, 그것들을

읽어내서 할 수 있는 능력들을 고양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부분들을

읽어냈고, 또 그런 삶을 살아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이 잘 안되는데 (웃음) 목사님, 같은 목사로서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아마 여기서 예배드릴 때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논크리스천이 있을텐데, 아까

이야기 했던 church setting은 안돼있을 수 있거든요. 그렇다면, 그 때는 speech 인지 sermon 인지

어떻게 구분을 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김진승 교수 : 중요한 질문 감사합니다. 저도 고민하고 있는 중이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제가 설교를 하는지 강의를 하는지 모를 때가 많고요. 물론, 예배의 자리에서는 설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예배의 인도자로서, 설교자로서 목사가 해야 할 소임 중에 하나가 내가 어떤

상황 속에 들어와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분별이 있어야 하지 않나 내 이야기를 말하는 자리가 되어도

되나,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인가 확실한 분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일단, 제 개인적인 견해는, 개인적인 자리나 강의실에서, ‘나는 이런 생각이 있다’고 말하고

싶을 떄가 있지만, 그것들을 학생들에게 초점을 두어 말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학생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는 저를 단순히 인생의 선배로서, 신앙의 동역자로서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좋겠는데 어떤 때는 그냥 설교가라는 렌즈를 끼고 보는 것이 부담스러워요. 주중에는 교수로 일하고,

밤이나 주말되면 목사로 변신하고, 그런 자리로 저를 몰아가진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학생들에게 의견을 어필할 수 있는지 분별해야 되겠고 또 공적인 청중 앞에서 하나님

Page 20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06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말씀을 전할 때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인식이 되어야 그 이후로 솔직히 털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국운 교수 : 한 분만 더

학생 5 : 저는 법을 잘 모르는 학생이지만, 어떤 책에서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을 읽었을

때 저는 마치 신학서적을 읽는 것과 같은, 사람을 향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꼈고, 또 문익환

목사님께서 쓰신 찬송가를 부를 때도, 단순히 그 찬양 제목이 교회이지만, 그것을 뛰어 넘어 민족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는데, 그러한 맥락에서 초신자나 이미 믿는 자들을 향해서 현대에 맞는

언어로 풀어낸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이 굉장히 의미 있다고 양희송 교수님께서 추천사를 쓰신

것을 봤는데 그런 의미에서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세상과 소통할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마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스피치에 크리스천으로

살아야 하는 core value가 실렸듯이 우리가 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How should we then

talk and communicate with people in the world? 라는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이국운 교수 : I’d like to give one minute to each person. Please use one minute for

closing remark.

양희송 대표 : I think you raised a valuable question, and mostly, your questions are

related to the civil religious tradition in the U.S. There are many insights there. How does

religious language communicate over the various and different backgrounds? The different

between Korean context and American one is that Christianity is a dominant religion (also can

be called a dominant religious language) in the American society. But here, protestant

population is less than 20 percent. Buddhists are more than 30 percent and Catholics are about

10 percent. Almost half of the population is atheists. So still the religious language is not

dominant one in Korean society. When we use religious language, we should be careful about

how it could be understood by audience. So, we need to be wise and effective in conveying our

messages and intention. I still think that we can use Christian metaphors and quotations but in

the context that people can understand why and what the main purpose of the language is. If we

think deeply, then, probably we can convey our intentions without distortion. I think that’s the

natural wisdom rather than a technique. Thank you. (Applause)

Page 20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07

기독교적 관점에서 공적 연설

김진승 교수 : For me, I believe Mr. Yang wisely answered to that question. (Laughter)

We will talk about it later.

Prof. Cordell Schulten : I think this is more of a question, not of what words we choose

to use to communicate but what forms us as a person and what forms our understanding of very

fundamental ideas such as what is justice? what is equality? what is fairness? these are

persistent questions of life as we think through them as we talk about these things. Then, we

began to enter into a dialogue that will further form us and also by God’s grace, transform

others and transform the communities that we are a part of. I’m very apprehensive about

calculated speech. If my speech does not flow from me, from who I am as a person, if I have to

calculate the words that I choose, I’m somewhat concerned about the authenticity of the

message. That’s not the saying that there isn’t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the context of

my audience, I value those insights but there is also more fundamental notion. I believe that’s

what Dr. King shows us and demonstrates us today. He spoke out of who he was as a person.

These are ideas, words and thoughts that have forwarded him. That’s why I made reference to

going back to reading what Dr. King wrote when he was 14 years old. That speaks about who

he was as a person, and how he was formed. This is what we need to be concerned about no

matter where we are at a path of personal growth and formation. What are the messages that

are forming us right now? We need to listen. I need to listen more than anyone. (Laughter) I

appreciate my brothers and everyone that helped me continue the journey of formation.

Prof. Tony Beckham : Thank you for allowing me to be here. Though few people

verbally spoke, nonverbally I’ve heard what we communicated. And I deeply appreciate your

physical presence, and your interests in taking a journey of being more effective in public

speaking. As well as, trying to be able to figure out how to navigate faith, secularism, all the -

ism s; the thing that we put a label, and you are struggling with that. None of us knows the

answer. We are still learners.

이국운 교수 : Thank you. Professor Tony, professor Cordell. By virtue of your

contribution, we could see Martin Luther King not as American hero, but as a Christian role

Page 21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08 2010년 봄학기 제2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model. He is not only a great African American speaker, but also our role model. To close the

meeting, I would like to introduce a website address: www.americanrhetoric.org. It is not a

theory for you to become a great public speaker, but practice or having experiments which

makes you a great speaker. God needs great messengers. God needs ambassadors. You have

good reason to be a great speaker not for yourself but for God and people who need your

message delivery. I’m really thankful for your unofficial… Let me invite a pastor. Please give us

closing remarks. 다같이 기도하는 것으로 오늘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최병률 목사 : 사랑의 아버지, 고맙고 감사합니다. 주님의 위대한 종, 마틴 루터 킹을

통해서 퍼블릭 스피치를 두고 함께 귀한 나눔을 할 수 있게 하심 감사합니다. 그가 그 시대에

부응해서 답변했던 것처럼, 우리들의 삶의 자리 속에서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에 감당해야 할

부분들이 있음을 믿습니다. 때로는 그처럼 귀한 스피치를 필요로 할 때가 있음을 기억합니다. 아버지,

이 귀한 학교를 통해서 귀한 훈련들을 통해 하나님의 귀한 종들이 많이 배출되어 이 사회를 살리고,

정의를 세워갈 수 있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로 훈련되게 하여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되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너와 내가 함께 복되어지며 기쁨이 있는

자리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이 밤도 함께 하심을 감사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Page 21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21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21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21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21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13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Denominations and Denominationalism - Autobiographical Approach

올네이션스홀 302호

2010. 6. 1

이국운 교수 :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다른 두 분 교수님들은 아직 안 오셨지만 이야기할

거리들이 많기 때문에. 이제 문을 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학문과신앙연구소장을 하고 있는

이국운 교수입니다. 박수를 치시려면 치시고요. (청중 웃음) 저희 연구소에서 작년부터 한 학기에 세

번 네 번 정도씩 콜로키움을 하고 있습니다. 콜로키움은 여럿이 같이 모여서 한 사람이 주로 말하고

받는 분위기가 아니라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생각을 모아서 기탄없이 말하고 서로 배우고,

주제에 관해서 할 수 있는 생각들을 다 꺼내어 놓는 그런 이야기마당을 말하는 것인데요. 오늘이

작년부터 시작해서 여섯 번째인데, 생각보다 하면 할수록 큰 은혜가 임하고 배움이 있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콜로키움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약간 안내를 드리자면, 제가 앞에 잠깐 소개를 하고요. 네 분 교수님이 각각 10분 정도, 아마

오늘 더 하시게 될 거 같은데, 이 주제에 대해서 약속된 말씀들을 하시게 됩니다. 그것이 끝나고

나면 교수님들이 하신 말씀들 중에서 패널들 사이에서 혹시 답해야 될 부분들이 있으면 같이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 15분 정도면 충분했던 거 같아요. 그것이 끝나면 한 시간쯤 지나게 되니까요.

우리 예상대로는 8시 반쯤 될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 여러분들의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을 하셔도 좋고,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셔도 좋고, 문젯거리를 던져 놓아도 좋고, 그래서 그

주제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고, 되게 9시 반 정도에 끝나려고 하는데, 그동안의

경험을 보자면 이야기가 재미있어지고 점점 더 깊어져서 예외 없이 앞의 5번 정도는 10시 이후까지

넘더라고요. 오늘도 어떻게 될지, 우리 대화를 이끄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니까 성령 하나님께 의탁해

보려고 합니다.

자, 오늘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보려고 하는 주제는 ‘교파와 교파주의’ 라고 이름을

Page 21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14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정해보았습니다. 우리 한동대학교가 초교파 대학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 안에 여러 색깔의

신앙인들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사실 어떤 종교적인 이유로 우리 학교에 들어온 것을 막거나 할 수

있는 장치가 우리 학교, 대한민국의 헌법 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혹시 이단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도 있을 수 있고, 또 신앙이 없는 학생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다양한 종교의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현실인 것 같아요. 초교파

대학으로 특별히 신학 과정을 만들지 않고, 평신도라는 말은 좀 어패가 있습니다만, 좀 쓰자면,

평신도들이 중심이 된 그런 대학으로 우리 학교를 만들었을 때에는 다양한 색깔과 다양한 어떤 관점,

또 다양한 지향을 가지고 있는 프로테스탄트들이 함께 모여서 서로가 서로에게서 좀 배우고 그래서

서로의 다름을 확인해서 점점 더 갈라지기 보다는 그 시대와 그 공간 속에 함께 확인해야 될

공통적인 것들을 점점 더 만들어 가는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시작했던 분들에게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제가 이 학교에 온지 12년 째인데, 제 경험만 되돌아 보더라도 그런 여러 색깔,

여러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인들이 함께 모여서 좀 하나의 공통된 뭔가를 만들어

본 경험은 그렇게 많이 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냥 당연히 이렇겠거니 전제하고 그 전제 위에서

이런 저런 행동들을 먼저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본인이 A라고 생각하고 했던 일들을 다른

분들은 B나 C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저는 우리가 한동 공동체가 초교파적인 프로테스탄트 대학,

평신도 대학으로 시작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을 점점 더 튼튼하게

해가기 위해서는 마땅히 먼저 한 단계가 거쳐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뭐냐면, 함께 모인

사람들이 자기가 어떤 신앙 배경을 가지고 있고, 어떤 내용을 거쳐서 어떤 관점의 어떤 지향의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탄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그 과정을 거쳐 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여기에 함께 모이게 하신 이유가 있고, 우리의 다른 점들을 발견하고 가슴

아파하기 보다는 뭔가 공통의 것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콜로키엄을 기획하는 입장에서는 이제 우리 학교 안에서 본인의 신앙에 노선이 뭔지,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등등을 좀 이야기하는 것이 별로 쑥스럽지 않고, 자기 검열의 대상이

되지 않는 풍토를 만들어가는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모임을 기획했다는 점을

여러분들이 좀 봐주셨으면 좋겠고, 오늘 그래서 네 분 선생님들을 모셨는데. 이 네 분은 제가 좀

삼고초려를 해서 우리 학교 안에 계신 교수님들이나 학생들의 신앙적인 배경을 가능하면 넓게

담아볼 수 있는 교수님들을 모시려고 했습니다. 오늘 네 분 교수님들에게 제가 부탁드린 것은 ‘나는

왜 무슨 무슨 교인이다.’ 침례교인이다, 장로교인이다, 아니면 순복음교회 교인이다를 이론적으로

말고, 본인의 자서전을 쓴다고 생각하시고 나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은

Page 21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15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이유를 좀 진솔하게 듣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오늘

아직 김형겸 목사님이 아직 안 오셨지만 감리교 목사님이시고, 그 옆에 계신 유장춘 교수님은

안식년이신데도 불구하고 제가 나오시라 부탁했어요. 침례교회에서 목사를 오래하신 침례교인이시고,

다음에 우리 옆에 계신 한윤식 선배 교수님께서는 원래 북에서 내려오신 아주 장로교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계시다가 여러분도 잘 아시죠? 한 교수님은 집에 가셔도 교수님이 계세요. 같이 댁에 이불

덮으시는 박 교수님이 순복음교회 출신이시기 때문에 결혼하시고. 저는 사실 교수님을 모실 때는

포항에 있는 대표적인 순복음교회의 장로님을 하시기 때문에 순복음 신앙을 말해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모셨고요. 그리고 우리 손화철 교수님은 저도 비슷한 케이스인데 태어나보니까 집이

장로집이었던.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앞에 교수님들과는 조금 다르지만 여러분들과는 가까울 수

있는.. 혹시 PK 있으신가요? 손 들지 마세요. 태어나보니까 집이 세탁소도 아니고 문방구도 아니고

교회 집인. 그 배경에서 고신측 장로님 아들로 자라오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분명히 답답했을

거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 네 분 선생님들을 모셨습니다.

일단 각각 10분씩 좀 말씀을 제가 청해서 들으려고 하고요. 그 뒤에 이야기를 진행했으면

좋겠습니다. 원래 우리 교수님들하고 이 모임을 시작하기 일주일쯤 전에 먼저 작전을 짜요. 그런데

이번에는 어찌하다보니까 기회를 잘 만들지 못해서 그 작전 짜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좀

겹치실 수도 있으실 텐데, 제가 네 분 모시면서 공히 한 가지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나는 왜

침례교인이가를 얼마든지 말씀 하셔도 되는데, 나는 왜 장로교인이 아닌가는 얘기하기 없기.

아닌가로 자꾸 이야기하다 보면 종교전쟁이. 저는 사실 침례교 목사님 아들인데 300년 전 쯤

영국에서는 장로교인하고 침례교인하고, 지금은 잘 지내지만 옛날에 장로교인들이 침례교인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몰라요. 가슴 아픈 피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 우리가 나는

왜 장로교인인가를 쭉 말씀하시고, 나는 왜 침례교인이 아닌가는 가능하시면, 뭐 열받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안 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김형겸 목사님은 조금 늦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장로교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장유유서가 있는데, 그래도 찬물도 위아래가 있으니까.

손화철 교수 : 네, GLS 학부 손화철입니다. 늦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갑자기 우리 집에

날 뛰는 어린이가 한 명 있는데, 자동차와 한 번 맞짱을 떠보려고. 어제 이국운 교수님이 처음

저한테 말씀하셨을 때에는, 이국운 교수님이 출신이 이단이다, 이런 식으로 농담을 하다보니까.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가보다, 하라고 하면 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이게 이상한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은 질문 자체가 왜 나는

장로교인인가, 또 그 때는 왜 나는 장로교인이 되었는가 라고도 말씀 하셨는데, 영양가가 없는

질문이죠.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니까 별로 의미가 없는 질문이죠. 나중에 구성을 보니까 두 분은

Page 21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16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목사님이고 한 분은 장로님이고 저만. (청중 웃음) 그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한동대학교에

와서 3년 째인데, 한동대학교에는 이상하게 개신교의 대표는 장로교인데, 한동대학교에서는

장로교가 푸대접을 받는 거예요. 장로교인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게 정말

왜 이런가. 대한민국에서 장로교가 하도 개판을 치고 있으니까 한동대학교에서는 푸대접을

받는가보다 라는 생각을 좀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도 저 보고 먼저 하라고 하시니까, 이게 굉장히

불리하거든요. 약간 억울한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왜 다른 교파인이 아닌가를 말씀하시

말라시는데, 그것은 완전 교회사를 무시하게 되는 건데요. 우리는 쌓아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이야기

자체가 싸움을 빼면은 이야기가 안 되는 거예요. 개신교는 가톨릭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야기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재미가 또 별로 없는 것 같네요. (청중 웃음)

제가 장로교인인 이유는 제가 장로교회의 장로,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장로는 아니었고요.

저희 아버지가 곧, 상당히 어린 나이에 장로가 되셨습니다. 제가 장로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대학교에 들어가서이지, 그 전에는 그냥 교회 다녔으니까요. 나중에 제가 알고 보니까 장로교인으로

키워졌던 것이고, 그러나 주체적인 identity를 가지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입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알게 되었고, 저는 장로교의 일반적인 특징들에 대해서, 제가 이해하는 장로교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평범한 이야기이긴 한데, 그러나 저는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이론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배워서 이런 것이다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고. 제가 학생 때 SFC라는 학생신앙운동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강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라고 외치는 것이 있는데 거기 맨 마지막에 우리의 생활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것이 장로교를

상당히 잘 요약하는 세 가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 일반에 대해서도 좋은 요약이죠.

그러나 앞으로 제 말씀을 들으면 이것을 좀 과하게 적용하면 장로교라고 할 수 있어요.

누구나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중심인데 그런데 장로교는 약간 이것에 대해서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어, 라는 말은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타자이고,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분입니다. 하나님 중심은 하나님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거기에 대해서

토를 달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장로교인이 되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물음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나는 장로교인인가.’라고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되었는가’는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교파를 고르고 선택한다는 것은 말이 성립을 안 한다는 거죠. 장로교인은 장로교인으로 된

것이고, 내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장로교인의 아들로 나서 내가 장로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은 굉장히 장로교적인 발언입니다.

Page 21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17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그 다음 성경 중심은 절대적 타자인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고 그것만이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래서 따로 직통 계시를 받거나, 다른

식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사실은 별로 장로교에서는 환영하지 않는 표현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감동을 주셨다는 것을, 감동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교가 보수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글로 써서 주신

계시의 말씀이 있고, 그것은 완전한 계시이고 그 이상은 없다. 그래서 그 장로교의 신앙이 더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 당시의 우리의 전통은 성경이 가는데 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춘다. 더 이상 상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이 거기서 멈추면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이 말을 안 해줬으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알아내려고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잘

모르겠으면 우리는 잘 모른다고 이야기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이 어떻게 되었습니까’에

대한 장로교의 대답은 ‘모른다’죠. 예를 들어서 예정론을 잘못 이해해서 하나님이 미리 찍어놨다

하는 것은 나에 대해서 고백할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지 이순신을 선택했거나 쟤를 선택했거나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경이 나를

선택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을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이 가는데 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추니까 약간 납득하기 어려운 말을 한 다음에 모른다고 하는 거죠.

말씀은 끊임없이 다시 공부되어야 하고 말씀 전체로서 공부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알려고

하는 집착과 장로교에서, 장로교뿐만 아니라 개신교 전체의 산물이지만 문답, 그런 것들이 줄줄이

나오는 이유가, 성경을 통째로 보면서 요약을 어떻게 하면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외운 다음에 한 부분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장로교에서는 전체를 공부하려고 노력한다는 교리에 대해서 신경을 더 많이 쓰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중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여기서 교파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교파가 여기 있으니까

우리가 교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거죠. 그러나 사도신경에 나와 있는 ‘거룩한 공회와’ 라고 얘기할

때, 종교개혁 이전의 사람들이 '거룩한 공회와‘를 이야기 했을 때에는 당연히 가톨릭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다음에 종교개혁 이후에 장로교인들이 ’거룩한 공회와‘라고 이야기했을 때는 당연히

장로교를 생각했습니다. 거기에는 적어도, 가톨릭을 빼고 우리 ’공회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이야기 하는 거죠. 그러니까 교파가 여러 개 있으니까 같이 이야기하는

Page 22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18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상황은 특이한 상황이죠, 사실은. 이상적인 상황이 아니예요. 물론 제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있을 때에는 개신교도들 중에 이단이 아닌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보았습니다. 벨기에에서 유학을 하면서, 벨기에는 가톨릭 국가거든요.

공부를 하면서 이게 지금 하나님 중심이라고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절대적 타자성을 이야기 한다면

내가 아는 하나님을 내가 아는 곳에 하나님을 묶어 둘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것은 나는 장로교로서 남아 있지만 하나님은 장로교보다 크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는 교회에 대한 강조는 장로교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훨씬 더

specific하다고 생각되는데요. 교회는 계시를 받는 곳이 아니라 계시를 지키는 곳입니다. 성경이

교회를 통해서 보존이 되고 교회를 통해서 해석이 됩니다. 개인이 해석을 할 수 있지만 교회를

강조할 때에는 반드시 신학교를 통해서 선생들이 해석을 해주어야 합니다. 개인이 해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해석할 때의 위험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직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완전한 곳으로서의 조직이 아니라 사람이 약하기 때문에 죄 짓지 않기 위해서

조직을 만들어서, 그 조직을 통해서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공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교회가 맛이 가니까 문제죠. 그래서 개혁교회는 언제나 끝도 없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었습니다. 기독교인의 노력은 교회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이지, 개인이 바로 서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중심이라고 이야기 할 때 그리스도인의 삶은 개인적으로

융성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는 함께 같이 가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중요성은. 삶의 바탕이자 증거가 되고, 신앙의 정통성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장로교에서

이해하는 교회는 두 세 명이 모인 곳에 주님께서 함께 있다는 말씀은 위로하는 말씀으로 이해하지

그것을 교회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좀 더 타이트하게 봅니다. 두 세 명이 있을 때도 물론

주께서 함께 하시지만, 공교회라고 이야기했을 때는 거기에 조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개혁자들은 가톨릭 교회로부터 나온 것이 교회를 부정한 것이 교회를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가 문제가 너무 많아서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상실했다고 새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새

신앙을 세웠다기보다는 새 교회를 세워서 그 교회에서 신앙을 이야기 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제가 너무 오래 이야기 했나요. 금방 끝납니다.

이국운 교수 : 아닙니다. 더 이야기 하세요.

손화철 교수 : 예, 전 이제 결론만 이야기하면 됩니다. 제가 이해하는 장로교입니다. 얼핏

보면 제가 이론적인 이야기를 한 것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저 나름대로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가톨릭 등 제가 기독교 강요 이런 것 읽고서 가톨릭 강연에는 뭐라고 쓰여 있냐면 ‘저 개들이 짖는

Page 22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19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것을 들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이 90%가 넘는 나라에 가서, 벨기에 가서

크리스천이라고 이야기하면 가톨릭인 줄 알아요. 개신교도들은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러요.

프로테스탄트들은 ‘개기는 아이들’이라는 뜻인데, 넌 프로테스탄트냐고 물어본단 말이예요. 그런

곳에 가서 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있다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제 나름대로의 정리를 해 본 것입니다. 장로교의 위상은 기독교에서

아주 중요해 보입니다. 장로교의 신학은 종교개혁을 이론적으로 확립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교파들이 장로교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혹은 장로교를 부정하거나 일부분을 동의하지 않으면서

나왔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뿌리에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 이용하되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특히 장로교의 특징과 전통을 공부해야 할

사람들은 장로교인 자신입니다. 장로교인들이 그렇게 많지만, 정말 진정한 장로교인들이 얼마나

많은 가에 대해서 저는 회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나라에 주를 이루는 장로교인들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 교회를 ‘사람 중심’, ‘설교 중심’, ‘예배당 중심’으로 바꾸었습니다.

성경은 설교가 아닙니다. 성경을 공부해야 하지 설교를 공부할 필요는 없는 거겠죠.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지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교회, 공교회라는 것은 조직을 의미하는 것이지

예배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배당 중심, 설교 중심, 사람 중심 때문에 장로교가 앞장

서서 기독교의 물을 흐리고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과연 한동대학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 유일한 계시로서의 성경, 교회의 권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저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학생들은 과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배우고 있는가. 유일하고 완전한 계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 계시를 과연 인정하고 있는가. 교회 권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가. 교회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를 알고 있는가. 언젠가 채플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교회로 옵니다. 예수님 계신 곳’ 무지의 극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데 예수님은 교회에 계신 것이 아니죠. 장소적인 의미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 손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무지한 곳이구나를 느꼈습니다. 저는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국운 교수 : 처음에 말씀하셨으니까 나중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한윤식 교수 : 네, 저는 한윤식 교수입니다. 전산전자공학부고요. 학부 때 기계공학 했고,

박사과정에서 전자를 해서, 기계도 아니고 전자도 아니고. 제 신앙의 여정은 공학은 왜 해야 하는가,

크리스천은 공학을 왜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지금까지도 제게 아주 큰 문제로, 그 답을 찾아서

Page 22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20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신앙 여정을 간략하게 이야기하면서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 부모님은 이북 출신입니다. 부산으로 피난 와서 이북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에 다녔습니다. 제

주위에서는 늘 평안도 사투리가 들리는 교회에서 자랐고요. 고등학교 때 저의 교회는 굉장히

은사주의적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주로 설교 내용이, 특강 내용이 귀신 잡는 법, 평양 신학교의

전통을 이어 받아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매일 듣는 은사주의적인 교회에서 어느정도 제 신앙을

가지고 신앙고백을 했고, 헌신도 했었고요. 그런데 대학 들어가서 제가 떠났습니다. 떠나서 한

7~8년간 방황을 하고,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정말 나 혼자 살 수 없어서 어떻게 제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저에게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다시 돌아왔고요.

교회에서 다시 한 번 회개를 하고,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고, 성경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8년 후에 신앙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읽었던 책이 IVP의 손 목사님이 지으신 성경공부 책으로 제가 굉장히

좋아했고, 그리고 연구소 친구들과 함께 CCC교재로 공부를 했던 것은 네비게이터 책입니다. 완전한

헌신을 요구하고, 조금의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는 강인함이 좋았고, 그것이 저한테 딱 맞았죠.

왜냐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렇게 강력한 삶을 살아라고 해주었기 때문에

그 길로 좇아 갔고. 성경공부를 통해서 제 인생이 변화되기 시작했고, 유학을 가야 되겠다, 결혼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열심히 기도해서 박혜경 교수를 만났고. 그런데 순복음 교회 집안이거든요.

그 교회에 가보니까 전혀 달라요.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무슨 예배를 이렇게 보냐,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돌아와서 제가 제 교회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랑 결혼해도 되겠습니까.” 당시에 80년대에는 순복음교회에 대해서 이단 시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절대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하셔서 결혼을 하게 되었고요. 그래서 순복음

교회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말씀에는 강점이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참 자유하고, 그러다가 결혼하고서 유학을

갔습니다.

유학을 가서 제가 제일 처음 만난 친구가, 저한테 제일 먼저 접근해서 구원받았는가를

테스트 하고 나서부터는 ‘brother’ 하면서 2년 동안 그 그룹에 다녔어요. 예수라면 모든 것을 다

던지고 하는 그룹들이랑 같이 지냈고, 그 다음에 제가 한인 교회를 나갔는데, 한인 교회는 학생들이

중심인 교회였어요. 그 교회는 학생들이 굉장히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 주도적인 교회였는데,

거기에 주도적인 인물이 한 그룹은 CCC 출신이었어요. 베레야 그룹에 들어가서 그 분들이 저를

케어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놀랍고 그 사람들은 미심쩍었고, 물론 저도 캠퍼스에서 같이 방언도

하고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베레야 사람들은 더 해요. 저도 쫓아다니면서 한참 하다보니 이게 내가

Page 22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21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알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배웠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대조하면서 제 신앙을 형성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베레야를 극복하고, 베레야는 이런 점에서

굉장히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복하고 독립 노선을 취했습니다. 제가 성경공부 리더가

되어서 많은 그룹들을 인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나서 시간이 나면 공부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성경공부를 원정도 가는 등으로 지냈습니다. 저희 그룹이 굉장히 잘 나갔었는데 어느

날, 우리 그룹에 구원파 한 명이 왔어요. 그래서 2-3년간 구원파랑 전쟁을 했어요. 구원파 두목의

조카인데, 구원파 사람들은 굉장히 양반이예요. 점잖고.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 구원파 사람들이랑

많은 토론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고백을 경험하게 됐고요. 그래서 저 나름대로

유학기간 동안에 성경공부 중심으로, 그 당시에 저 같은 경우에는 은사주의적이기도 하고

장로교적이기도 하고.

그런 상황에서 저한테 생기는 고민이 그렇게 하나님 일에 열심인데, 내가 공학을 왜 하나,

이것을 하면 뭐하나, 이거 잘하면 나중에 하나님이 잘 했다고 하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선교사님이 저희 교회에 와서 책을 팔았어요. 그 때 제가 책을 두 권을 샀는데 그 중에 한 권이

‘기독신앙과 전공과목’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신앙과 전공과의 관계를 고민하게 하는 책인데, 제가 그

책에 클릭이 됐어요. 그래서 계속 제가 활동하고 공부하고 왔다갔다 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고민이,

제가 종교중심적이고 복음증거, 하나님 말씀, 교회 등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이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공부를 마치고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하게 되니까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어요. 학생 때에는 공부시간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지만 직장에 들어가게 되면 훨씬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고 시간은 들여야

되는데 시간을 들일 형편은 안 되고, 교회 일은 무지 많고. 그래서 내가 굳이 이것을 계속 해야 하나.

목사님도 다같이 일을 하는데 도대체 왜 나는 두 가지 일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정상적인 삶인가를

가지고 고민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묻기 시작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답을 주지 못해요.

대충 해라, 균형을 잡아라. 결국은 공부라는 문제에 대해서, 전공, 직장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은, 평신도들은 고통을 받으면서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고, 그 자체로 하나님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주지 못했었어요. 그래서 주위를 한 번 돌아다녀봐도, 책을 찾아봐도 답이 안

나와서 왜 사람들이 신실한 크리스천들은 저와 동일한 고통을 갖고 있고, 이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그러면 이것을 찾아보자. 이것을 찾아서 목사님들에게 좀

가르쳐드려야겠다. 이것을 제 삶의 소명으로 알고 하고 있던 차에 한동대학교를 오게 되었습니다.

한동대학교에 와서, 오기 직전에 제가 처음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접했는데, 그 사람을

만나니까 제가 추구하던 문제에 대한 답을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답이

Page 22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22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결국은 우리가 왜 공부해야 되고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체계적인, 신앙적인

성격에 기초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제 신앙과는 너무 다르다는 거죠. 그래서 한동에 와서

그것을 본격적으로 추구하기를 시작했고, 그것이 결국은 개혁주의 신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제

기독교 세계관인데, 한국에 들어와보니까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책들이 한국에서 굉장히 많이

유행이 되어서 책들도 많이 나와 있더라고요. 그것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정말 내가 그동안

풀지 못했던 문제의 답을 주는구나. 그래서 이것은 내 삶의 원칙으로 지향할 것인가를 하려고

하니까 지나치게 어렵고, 지나치게 이론적이고 철학적인거예요.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보니까

그것에 대한 비난이 있어요. 저것들은 세계관에 대해서 말만 앞서고 행동은 안 따르고, 교회 비판만

하고 굉장히 이론에 대한 비판들이 많기 때문에 저것이 과연 진리인가, 저것이 과연 내가 정말

성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으로 내 삶의 원칙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회의, 걱정과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안식년에 캘빈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고, 캘빈에 가서 제가 그 문제에 대한 답을

구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신앙과 삶이 융합된 삶을 한 번도 들은 적도, 본적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책으로밖에 접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뭔가 어색하지만 미국 캘빈 가서 보니까, 이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이것을 철저하게 배워서 그대로 살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이 이론이 아니고 삶이구나. 그 사람들을 보니까 너무 경건하고 너무 이론적이고,

겸손하고. 제가 봤을 때는 굉장히 환상적인 분들이라고 느꼈어요. 한동에 와서 그 일들을 계속

추구하고 있습니다.

한동에서의 문제가 많은 교수님들이, 대부분의 학생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신앙과 전공의

문제를 연결 못 시키고,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선교 많이 하시는 교수님들이 내가 선교지에

가야하는데 내가 여기서 논문 쓰고, 수업 준비하고 하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하는 갈등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한동 초창기 교수님 가운데에 세계관 그룹이 있었고, 선교 그룹이 있었고, 둘

사이에 갈등이 있었어요. 세계관 그룹은 선교 그룹 교수님들로부터 ‘저 사람들은 행동은 안 하고

말만 하는 사람, 따지기만 하는 사람’, 선교 그룹은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반목이 좀

있었고, 지금은 이제 다 없어졌는데. 서로에 대한 의문과 오해가 없어졌지만. 선교와 세계관이라는

것이 대립될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선교 그룹에 들어가서 교수님들이랑 열심히 교제하면서 선교

교수님들을 좀 지적을 했고요.

그 다음에 한 것은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선교를 하게 되었을 때 굉장히 뛰어난 것

Page 22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23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같더라고요. 개혁주의 신앙이 기독교 세계관이 이 땅에서의 삶을 굉장히 잘 설명해 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제가 겪고 너무너무 시원했었고요. 우리 한동대학교의 공학 교육이 기독교적인가.

다른 대학교의 공학 교육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를 제가 고민했고, 이를 위해서

공학교육인증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는데 잘 되었고, 그 다음에 적정기술이라는 것으로 공학교육의

기독교화를 잘 하고 있습니다. 해보니까 선교로 바로 들어가게 되니까 굉장히 파워풀한 선교가

되고요,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선교가 기술로 하는 선교보다도 하나님 나라를 잘 선교할

수 있다는 그런 즐거움을 맛보고 있습니다.

최근의 저의 화두는, 한동 학생들이나 제가 가졌던 문제점이 무언가 하면, 우리가 지금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이 복음이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과 맞나. 제가 굉장히 의심을 하자면 다른 것

같다. 우리가 지금 전하고자 애쓰는 복음, 제가 전하고자 애쓰는 복음과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은 뭔가 다른 것 같다. 요즘 제가 지금 그것을 회복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굉장히

영적인 것, 비현실적인 부분, 현실성이 없는 부분을 추구하고 있고, 예수님이 전했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었고, 결국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나 미래적이고, 현실적이 아닌, 물질적이 아닌 영적인 세계의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최근에는 복음의 역사성, 복음의

현재성, 결국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는 것이 예수님 당시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구약 때부터

예언되어져 왔고, 기다려져 왔던 그 내용의 복음인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복음은 구약에서 말하는

복음과 상관 없는 전혀 동떨어진 우리가 현재시대에 만들어낸 미래적인 영적인 그런 복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다 스며들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저는 지금 신앙을

보게 되면 굉장히 은사주의적인 신앙에서 개혁주의적인 신앙으로 가고 있습니다.

저의 멤버십은 미국의 CRC라고, Christian Reformed Church라고, 화란개혁주의교회인데,

우리 아들을 거기서 유아 세례를 받게 하기 위해서 거기서 멤버십을 얻었고 그 멤버십을 유지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안식년 갔다 와서는 순복음교회에서 제 처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제가 한동대

처음 올 때 거기에 굉장히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순복음 사람들이 장로교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장로교는 싫다 그래서 거기 가서 제가 장로를 받을 때에는 순복음 교회도 좋은 점이 많지만,

성직자와 비성직자의 구분이 가톨릭적이고, 그런 점들은 견디기 힘들어서 장로가 되면 바꿀 수

있을까 해서 장로가 되었는데 장로가 되어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교회 분란만 일으킬 뿐이여서

지금 장로직은 휴무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저는 한국의 교직이 순복음 교회에 휴직상태에 있는, 제

마음 속은 CRC 교회에 있고요. 그런 교회를 굉장히 찾고 있습니다.

Page 22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24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제가 생각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기 위한 전초 기지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실 때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가져오시기 때문에 그 일을 행하는

어떤 집단이 하나님이 만드신 집단이 교회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고, 또 한가지는 한동에 있어,

한동대학교가 기독교 대학이니까 한동대를 대표하는 신앙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에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분들은 반대를 하는 입장인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한동대학교는 하나의

신학으로 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신학과가 생기면 한동의 정체성이 굉장히 오염이 있는 것

같아요. 한동의 신학이 만약에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할 때, 한국교회가 필요로 하는 신학은

현실성이 있고 일관성이 있고 그리고 개방성이 있는 그런 신앙이예요. 우리가 보통 세계관을 이야기

할 때 현실 문제를 성경에 비추어 풀어낼 수 있는 신학이라야 하겠다, 대부분의 한동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왜 공부해야 하는가, 내가 왜 열심히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이 잘

안 이루어지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 같아요. 비현실적인 것까지, 현실을 제외하는 것까지 가지는.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은 현실의 문제를 미래의 세계와, 영의 세계와 더불어서 풀어내는, 현실성이

있는 신앙이어야 하겠고, 일관성이 있어야겠고, 전부 통합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어야겠어요. 그리고

이것이 오픈되어져서 계속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개방적인 신앙을 가져야겠다. 거기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하니까 제가 생각할 때 reformed 신앙인 것 같아요. 저는 아까

초교파가 되기 위해서는 개혁주의가 한동대에 실현되어야 하지 않을까. 저는 교파주의자입니다.

마치겠습니다.

이국운 교수 : 먼 길을 돌아서 오셨는데 25분 동안 돌아서. 말씀을 10분 하시기로 했는데.

좌우간 reformed이십니다. 유장춘 목사님이십니다.

유장춘 교수 : 저는 목수예요. 목사이면서 교수인데, 학교에서 강의하다가 보면은 학생들이

목사님 같다 그러고요 교회에서 설교하다 보면 교수님 같다 그래요. 사실은 교회에서 목회를

했었는데요, 교인들이 아무래도 목사님은 교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밀어내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교수 쪽으로 돌아섰는데 이게 교수를 하다보니 또 목사가 더 맞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학생들이 해서. 둘 다 잘 못하는 구나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까 우리 손교수님은 장로교 장로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장로교라고 하셨는데요,

저는 장로쪽 목사님의 아들이예요. 그런데 침례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님께서 제가

신학교를 결정할 때에 침례교를 가도록 주선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만 침례교로 밀어 넣으신 것이

아니라 제 동생도 밀어 넣고, 제가 1호 신학생이었는데 우리 아버님 교회에서 신앙적으로 성장한

형제들, 자매들이 대거 침례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침신대를 졸업한 학생들이 30명 정도,

Page 22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25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그래서 침례교단에서 우리 아버님에게 특별 감사장을 드려야 된다고 얘기를 했어요. 근데 한 십여년

침신대로 젊은이들을 보내고, 어떤 해에는 5명씩 보낸 적도 있고요. 그래서 어떤 교수님은 아무개

목사님이 침례교를 말아 잡수려고 한다고 그런 얘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막상

장로교회에 돌아와서 교회를 섬기고 목회를 도와주는 동역자가 같은 교회에서 나오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장로교랑 침례교랑 둘로 나눠서 보내시기도 했었습니다. 저는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서 침례교 목사가 된, 어떻게 되면 진골이고요. 침례교 성골은 이국운 교수님, 침례교

목사님의 아들로서 침례교 교인이기 때문에 성골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국운 교수 : 아직 저를 잘 모르셔요.

유장춘 교수 : 저의 아버님은 아주 독특한 신앙의 입문 과정을 겪으셨어요. 그래서 굉장히

과격한 정치, 일종의 열혈 정치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구 선생님을 따라 다니고, 조서암

따라다니고, 조서암 선생님이 납북 되고 나서는 혁명을 하려고 하다가 사형 선고를 받고 감방에

들어갔다가 5.16혁명 때 정치범 석방으로 석방되셨어요. 굉장히 열혈 정치론자죠. 그리고 대정교의

전국 총무를 하실 정도로 아주 열정적인 분이신데, 이분이 감옥에서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민주당

정권에 의해서 사형 선고를 받고 아주 급박하게 사형을 집행하려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과정

속에서 쪽복음을 얻게 되었는데 요한복음이었어요.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까 우리 아버님이 가지고

계셨던 여러 종교들에 대해서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죠. 저희 할아버지가 한학자셨어요.

그래서 유교에 대해서 굉장히 해박하고 주역을 외우고 계신 분이 우리 아버님이세요. 아버님이

유교의 교리대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도무지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거예요.

내가 생을 모르고 어떻게 사를 논하리오. 이런 것이 유교였으니까. 그래서 유교를 포기하고 그

다음에 불교. 불교에도 정을 두고 시주를 많이 하시는 분이신데 불교의 교리대로 생각해보면 굉장히

욕심쟁이이고 투쟁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천지옥에 갈 수 밖에 없어요. 천도교를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천국이 있다는 이야기는 하고 있는데, 어떻게 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요한복음을 공부하시면서 거기에 죽음도 있고, 부활도

있고, 영생도 있고, 그래서 이게 기독교에는 해결점이 있구나는 것을 알게 되셨죠. 그래서 기도를 할

때 단군님도 부르고, 석가모니, 부처님도 부르고 기도하다가 예수님도 계시다면 나를 좀

구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는 기도를 하다가 드디어 구원이 되셨죠. 그래서 예수를 믿기

시작하셨는데, 처음에는 엉터리 신자였는데요. 굉장히 방언, 진동, 다섯가지 은사를 한꺼번에

받으시면서 기독교에 입문하셨다고 말씀하셔요. 아주 성격대로 믿으시는 분이예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제가 자라났으니까요 굉장히 과격, 열혈이었죠. 그래서 초등학교

Page 22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26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4학년 때 제가 아주 부흥집회에 어른들의 부흥집회에, 7시부터 시작하면 12시에 끝나는 부흥집회에

철저하게 참석하고. 또 다른 사람 다 집에 가면 지하실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부흥집회가 끝나면

학교에 갔다가 집에 와서 교회로 가서 지하실에서 3시간 기도하고. 전도지를 들고 불광시장 한

가운데 서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외치고 나눠주면 어른들이, 제가 초등학교 때는 정말

키가 작은, 맨 앞에서 두 번째 세 번째 되는 작은 키였는데, 지금도 좀 작지만 그 키에 어린 아이가

시장 한가운데 서서 열심히 구원받으라고 소리 지르면서 전도지 나눠주고, 동네방네 붙이고

다니면서 노방전도하고, 그러면서 지냈습니다. 고등학교 때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신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신학교 가게 되었고요. 그 신학교에서 목사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했는데, 목사만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됐고, 교회가 가장 부족한 부분을

위해서 일해야 되겠다 해서 교회사회사업, 교회사회봉사분야를 공부하고 그 분야를 위해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왜 침례교인이 되었는가를 이야기하는 대신에, 왜 다른 교파가 아닌가는 얘기 하지

말라고.

이국운 교수 : 말씀하셔도 됩니다.

유장춘 교수 : 우리 아버님이 장로교 목사님이시면서도 저를 침례교에 보내신 이유는 그

때 두 가지를 중요하게 말씀을 하셨는데. 첫째는 침례교회가 굉장히 복음적이다. 성서 중심적이다.

그런데 장로교도 사실 그런데요, 침례교는 더 성경 중심적이다라는 생각을 우리 아버님이 하고

계셨어요. 왜냐면 우리 아버님과 교제했던 목사님들이 침례교 목사님들이 많았기 때문에. 또 하나는

침례교는 장로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장로교 목회를 하시면서 제일 어려웠던 부분이 장로님

단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장로교 목사보다는 침례교 목사가 되라고 하시면서 저의 진로를

말해주셨는데요. 저는 침례교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침례교 목사가 된 것을 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요. 늘 아버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침례교회는 사실 정통주의냐, 자유주의냐. 이렇게 부를 때에는 자유주의라 속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신앙의 권위를 정통으로, 보수적으로 정통적으로 내려오는 신앙에 대해서 스스로

거부할 수 있고, 그런 권위를 벗어나서 자기의 신앙을 선택할 수 있는 신앙의 개인적 자유를

보장하는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서 중심이냐 이성 중심이냐, 성경보다

이성을 위에 두느냐, 이성 위에 성경을 두느냐 할 때는 성경 중심입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이면서

성경 중심주의. 왜 침례교라고 합니까? 침례를 주기 때문에 침례교라고 생각한다면 굉장한 오해죠.

왜냐면은 침례교는 성경을 그대로, 성경의 정신과 원칙을 그대로 존중하면서 신앙생활을 해보자라는

정신이 있기 때문에 성경의 침례의 방식이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침례이기 때문에 침례를 준다는

Page 22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27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것이죠. 그리고 왜 침례교에는 장로가 없느냐. 성경의 장로는 목회자였거든요. 그래서 성경에 모든

장로는 목회자인데, 목사가 있는데 장로가 있다는 것은 성경에 없는 하나의 직분이 교회에 설정된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 장로직을 두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한국에 모든 교파들이 사실은 장로교를 따라가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교

장로교, 기독교 장로교,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장로교, 이런 식으로 장로교의 교단의 특성을

따라가느냐고 침례교도 장로를 둡니다. 어떤 침례교에는 그것에 대해서 반대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침례교는 자유주의이면서 성경 중심적, 복음주의다 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고요. 굉장히 성경

원래의 정신대로 살아가자는 생각이 투철했기 때문에 성경이 아니라는 것과는 타협하지 않는 것이

침례교 정신이여서 교회사적 흐름 속에서 침례교는 항상 생뚱맞은 진보주의자들이었고요,

개혁주의자들이었어요. 그래서 항상 박해의 대상이었고 소수의 작은 무리였습니다. 그것이 19세기,

20세기를 거쳐서 세계에서 가장 큰 교단을 이루게 되었는데요. 남침례교는 주일학교 운동을 통해서

성경을 교회가 중심적으로 가르치는 운동을 했기 때문에 굉장히 빨리 성장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큰 교단이 되고 나니까 보수화 되었어요. 보수화 침례교는 침례교의 원주류의 흐름 속에서

굉장한 교단이 되었죠.

침례교는 동시에 성경을 강조하면서도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노나이터의 경우에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원칙을 따라가면서도 현실로부터

분리되어져 나가는 정책을 쓰고, 그런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데 침례교는 이를 따르면서 현실에

참여하는. 그래서 남북전쟁 할 때, 독립전쟁 할 때 목회자들이 군인을 모집하는 모병관 역할을

했어요. 전쟁에 나가서 싸울 군인들을 침례교단 교회에서 모병하는 역할을 할 정도로 아주 적극적인

현실 참여주의자들이예요. 대표적인 침례교도들은 존 버니안, 빌리 그레이엄 같은 분이 되겠고요.

특별히 침례교는 종교의 자유를 굉장히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아까 우리 이국운

교수님께서 잠깐 말씀하셨지만 장로교회가 카톨릭으로부터 굉장한 박해를 받았는데요, 동시에

침례교도를 굉장히 박해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입니다. 특히 칼빈이 있는 제노바에서는 ‘너는 물속에

들어가서 오래 살아라’ 그러면서 물에 500명 이상을 익사시키는 역사적 사실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굉장히 박해를 받는 역사적 과정을 가졌기 때문에 개인의 종교적 자유에 대해서 굉장히 집착을

했어요. 그래서 윌리엄스라는 침례교 지도자는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서 영지를 만들고 거기에 주

헌법을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게 로드 아일랜드가 되죠. 로드 아일랜드의 헌법이

결국 미국 헌법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헌법의 배경에는 침례교

정신이 흐르고 있다는 얘기도 하게 됩니다. 또 침례교에서는 반드시 믿는 자의 침례를 주장합니다.

Page 23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28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믿는 자의 침례라는 것은 자기가 믿음으로 결정하고, 영접해서 구원의 확신에 이른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침례를 준다는 것이죠. 그래서 유아 세례를 받아들이지 않는 특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장로교단, 침례교단 이렇게 다녔지만 사실은 교단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교단이라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틀입니다. 영성적인 사람들은 종교적인

틀을 초월할 수가 있어요. 종교라는 것은 영성이 경건이 되고, 경건이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깊은 영성 속에 들어가서 영성을 가지고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경건한 삶이 되죠. 그 경건한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고 믿고 그것을 문화와 전통으로 만드는 것이 종교인 것이죠.

그래서 어떤 좋은 전통도 하나의 종교로서 규격화되면, 틀에 들어가게 되고 그 틀에

박히게 되면 자유로운 영혼으로 성경을 따라 살기가 굉장히 어렵다 이거죠. 우리 한 교수님께서

reformed 이야기를 했지만 reformed도 날마다 개혁해야 한다는 개혁주의 사상도 전통이 되면

개혁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문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영성이라는

것을 종교성과 구분을 해야 합니다. 영성과 종교성이 함께 가면 이상적이지만 종교성에서 영성이

빠져나가면 아주 편협해지고, 고질스러워지고, 공격적이고, 편강주의적인 특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중세 때 종교 재판을 하던 종교인들은 영성보다는 종교성에 몰입된 형태라고 볼 수가 있죠.

우리 한동은 교리화되고 규격화되는 틀로서 설정된 그것을 초월해서 유연하고 포용력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면과 교제가 가능한 영성운동에 더 집중해야 되지 않을까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마무리를 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형겸 목사 : 예, 제 차례 오래오래 기다렸습니다. 말씀 잘 들었는데요. 제가 여기 있는

목적이 ‘왜 감리교입니까’ 입니까?

이국운 교수 : 그것을 지금 말씀드렸는데, 앞에 하신 교수님들 보시고 생각나신 거 있으면

다 말씀해 주세요.

김형겸 목사 : 저는 감리교인입니다. 제가 누군지는 다 아시죠? 감리교인인데 오늘 보니까

장로교, 침례교 서로 말씀들 많이 하시는데 감리교는 한 번도 언급을 안 하시네요. 좀 소외감

느낍니다. 경상도 지역이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몇 년전만해도 감리교라고 하면 이단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Page 23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29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손화철 교수 : 제가 감리교 목사님 사위입니다.

김형겸 목사 : 사위시군요. 반갑습니다. 솔직한 심정은 감리교인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하고

싶은데. 한윤식 교수님 reformed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고 한동대에 하고 싶으신 소원과 열정

가지고 계신데, 조금 유감스럽게도 christian foundation2를 가르치는 사람이 감리교인입니다. 제가

그런 균형을 갖추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제가 왜 감리교인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장로교에서는 예정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저는 그런 것을 넣을게요. 감리교인으로 태어나려고 예정되었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사람입니다, 사실은. 제 아버님이 감리교에서 목회를 하셨어요. 그런데 신학교를 못 나오셨어요.

부흥에 은혜를 받으셔가지고, 유장춘 교수님 아버님과는 조금 달리 저의 아버님이 ‘아 내가 복음을

전해야 겠다’ 하셔가지고 시골에 들어가셔서 목회를 하셨는데, 그 때 감리교에서 신학교를 안 나온

사람도 교회 없는 지역에 가서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자격을 줬어요. 전도사에요. 아버님이 그것을

받으셔가지고 공주의 아주 촌에 들어가셔서 목회 하셨는데, 6.25가 바로 끝났을 때라 생활도

어려웠고, 교회도 목회자를 제대로 support를 못해요. 그래서 아버지가 밭 갈고, 닭 키우고, 돼지를

키웠어요. 제가 바로 그 아버지 밑에서 컸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들은 것은 웨슬리예요. 웨슬리를 보라고. 뭔지도 모르고 웨슬리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제가 지금에 와서 감리교인으로 서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감리교인인

것이 정말 행복하다. 이렇게 느낍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로교, 침례교인 형제, 자매들을 다르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형제, 자매이지만 내 전통에 어떤 기쁨이 있습니다. 그 만한

사실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제 아버님이 교회 부흥회에 가셔서 뭘

느끼셨는데, 기독교에 대해서 내가 알아보자 성경을 사서 문을 잠그고 들어가서 ‘아무도 문 열지

마라, 내가 성경을 통해서 내가 기독교를 찾기 전에는 안 나간다’ 그러신 거예요. 그러고서 정말

체험을 하셨어요. 무슨 체험을 하셨냐면 십자가 체험을 하신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가 나를

살렸구나를 체험하시고는 아버님의 목회 중심에는 늘 십자가가 있었어요. 십자가가 여러분을

살렸다면서 내 십자가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런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버님의 spirit이 어디

간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 아들이 세 명인데 그 아들 중에 막내인 저한테 전수가 된 것 같아요.

저는 십자가를 참 중요시 여깁니다. 십자가 중심 신앙을 제가 가지고 있는데, 여러분 나이 때 간증을

하겠습니다. 개인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에 대한 문제가 너무 괴로워서 오랫동안 기도를 한다고 하고

여기 저기를 다 쫓아 다니다가 교회에서 제가 혼자 기도하다가 십자가의 체험을 했습니다. 십자가

Page 23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30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안에서 내가 용서되었고 하나님이 받아주셨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핵심을 제가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가 나중에 감리교 신학을 해보니까 존 웨슬리가 똑같은 갈등을 하였더라고요.

감리교의 중심에는 이 spirit이 있어요.

첫 번째가 뭐냐면 복음적 성령 체험이라고 하는 것, 존 웨슬리라고 하는 사람이

옥스퍼드에 다니면서 holy club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찰스 웨슬리하고, 찰스 웨슬 리가 찬송가

작사가예요. 자기 동생하고 하나님 앞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말 엄격한 규율에서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이런 엄격한 생활을 했어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것을 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저 사람들 뭐야, 규칙만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흉을 보고 손가락 질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존 웨슬리가 사실은 옥스퍼드대 성공회 담당 목사가 돼서 목회를 하러 갔는데,

옥스퍼드가 프라이드가 대단하죠. 웨슬리는 자기의 영의 중심에서의 하나님 앞에 서서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집요하게 죽도록 정직했습니다. 그것을 했던 사람이 사실 마틴 루터죠.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이 확실한가, 근데 뭔가 빠져 있는 거예요.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것을 추구한 거예요. 기독교에서 엄청나게 이야기하는 능력이니 사랑이니 등 굉장한 언어들이

있는데 웨슬리는 느낀 게 뭐냐면, 자기에게는 없는 거예요. 언어는 있는데 능력이 없는 거예요.

그것을 굉장히 고민해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미국에 선교사로도 가보고, 집회를 하고 그랬는데,

모라비안이라는 독일 계통의 체험주의적인 그룹이 있는데 영국에, 거기 지도자를 가서 상담을 하러

가요. 큰 교회 목사님 한 분이 어느 날 교인들에게 ‘제가 구원의 확신이 좀 없습니다.’ 하고 시골

교회에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다녀 오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랑

똑같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웨슬리가 그것을 한 사람이예요. 피터 먼로라고 하는

모라비안 지도자를 향해서 묻습니다. ’없습니다. 기독교의 핵이 없습니다‘ 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피터 먼로가 이야기를 해줬어요. ’내가 없는 설교를 계속 해야 할까요‘ 하니까 피터 먼로가 ’하십시오.

하되 그것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설교를 하고 당신도 그것을 계속 추구하십시오.‘ 라고 해요. 현명한

친구예요.

그러고서 웨슬리가 계속 그런 갈등을 하다가 나중에 월드 셋이라는 영국 거리에 저녁에

저널을 썼어요. ’만일 내키지 않는데 내가 월드 셋 거리에 나갔다. 그런데 이름 없는 선교자가

루터의 강해를 읽고 있었다. 읽고 있었는데, 읽는 순간에 내 마음이 뜨거워졌다. 뜨거워졌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이 용서가 되고 구원이 되었다는 확신이 내게 오고 있었다. ‘ 그런

체험을 씁니다. 이를 감리교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추구를 해서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십자가의 사건을 실제로 우리에게 와서 확인시켜 주는 경험이죠. 그것을 웨슬리가 체험을

하고 나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다 달라집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United Society에서 기독교의

Page 23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31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말하자면 성령충만, 복음의 내면화, 하나님의 형통한 복음의 내면화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한

것이 나중에 발전이 돼서 M 교회가 되었어요. 감리교를 보면요. 기독교의 진리의 내면화, 성령의

내면화를 굉장히 강조하면서 웨슬리즘이 항상 두려워했던 것이 뭐냐면 다른 것이 기독교를 대변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 했어요. 감리교는 standard가 없어요. 열 가지의 신조를 만들어 놓으면 어느 날

그것이 기독교가 되어서, 우리 영을 치료해야 하는데 글자가 기독교를 대신하게 된다는 거죠. 이런

것을 두려워해서 감리교는 그것을 안 만들고, 미국 찬송가에는 보면은 그래서 우리의 신조라던지

감리교 정통에서 스스로 만든 것을 집어 넣어놨어요. 그래서 미국 찬송가에 한국어로 번역해서

넣어놨어요. 한국 감리교, 어렸을 때부터 늘 외우던 교리가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감리교의 특징이 뭐냐면, sprit과 말하자면 복음의 성령의 체험적 확신, 성령의

내적 증거를 중시하다 보니까 글자로 기독교를 대변하는 것을 두려워하다 보니까 그런 신조 같은

것을 하나 대표적인 것을 내세우는 것을 두려워하다 보니까 감리교의 어떠한 약점이 생기게

되었냐면은, 이런 약점이 생기게 되었죠. 감리교는 웨슬리라는 사람이 굉장히 탄력 있는 사람이라서

자신이 감리교가 되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나중에 감리교가 되었지만, 복수주의 감리교예요.

감리교인이 웨슬리 정신이 ’배우자!‘예요. 아무데서나 배우자. 하나님의 세상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잉글리쉬 컬처의 정통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카톨릭 교회에서도 많이 배우고 동방 교회에서도 많이

배웠어요. 그리고 웨슬리 성결주의 같은 것은 동방 교회에서 배운 것이거든요. 보면 모라비안에서

체험을 배웠죠, 합리주의자에 대해서 배웠어요. 감리교가 굉장히 다양한 소스에서 배우자라는

정신이 있었는데, 후에 그 영성 중심, 여러 소스에서 배우자 같은 것들이 후대의 감리교인들 중에서

성경의 계시성이나 이런 것들에 진지하지 않은 리더들이 교회 안에서 그런 감리교의 정통을 환원을

해버렸냐면, 시각적 자유로 환원을 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에서 배우자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옳다로 변한거예요. 감리교가 미국에서 자유주의, 말하자면 성령의 계시성을 무시하는

인본주의적인 방법을 앞장 서서 받아들이는 불행스러운 역사가 좀 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 많이

회개를 하고 본래의 감리교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을 많이 합니다. 한국 감리교도 보면 그 영향으로

지금부터 수십년 전에 다원주의라고 하죠, 다원주의는 복수주의와 다르거든요. 다원주의는 기독교의

고유성을 무시하는 것이 다원주의인데, 한국 교회가 그런 영향권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요새는 현재

감리교 총장님이신 김 총장님은 미국 보스턴에서 저랑 같이 공부한 분인데 아주 복음적인 분입니다.

그래서 감리교의 원래 정신이 복음적이고, 사실. 그래서 그런 특징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짧게

할게요.

감리교의 특징으로 이야기 해야 할 것이 뭐냐면 감리교는 알미우스라는 화란이 원래

칼빈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와 정치가 함께 되어 밀고 나갔을 때에 거기에 대자라고 하는 칼빈의

Page 23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32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사위가 강조했던 것이 칼빈의 5대 강령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아직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런

교리 중에 하나가 뭐냐면 ‘예수님이 택한 자들만을 위해서 죽었다. 불택자들 위해서는 죽지 않았다.’

이런 교리가 있었습니다. 칼빈 파학자 한 명이 ‘이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위해서 죽은

것이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당시에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허용이 안 돼서

많이 박해를 받았어요. 그래서 이 사람의 제자들이 박해를 받았죠. 역사에 그런 게 있었어요.

알미니우스가 강조한 것이 뭐냐면, 보편성. 예수님은 모두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책임의 실재성. 인간은 정말 책임졌다. 칼빈적 시스템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렵거든요. 그것과 동시에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워요. 그래서 알미니우스가 보편과 자유의

실제성과 책임의 실재성이 성경이 정말 가르치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얘기를 해온 정통을 나중에

웨슬리가 그것을 잡아서 발전시키죠. 그래서 웨슬리의 감리교의 흐름이 칼빈주의가 알미니우스를

대항에서 만든 5대 강령 아닙니까. 5대 강령하고 감리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교리하고 서로

대조적입니다. 신학적 관점이 많이 달라요. 그런 차이점이 있어요.

요새는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차이점을 사람들이 잘 몰라요. 차이점이 없어요. 하지만

교리적 차이 때문에 자신의 교파들이 진지하게 서로 갈라진 거예요 알고보면. 그래서 이런 것이

감리교의 정통 속에 있어서 감리교에서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포인트가 바로 ‘성결’입니다. 성결이

뭐냐면, 루터와 칼빈 이쪽으로 엄청 강조했던 것이거든요. 구원은 용서다. 용서를 엄청

강조하다보니까 구원이 진짜 뭔지에 대한 전반적인 그림을 못 그린 거죠. 그래서 존 웨슬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본질의 변화를 위해서다. 진정한 변화, 천국에서

진정한 변화된 사람을 위해서 용서를 하는 것인데 용서 얘기만 해서 성경이 아니다.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성결, 진정한 변화, real change.’ 성결 교리를 중점적으로 구원의 전면적으로

강조한 것이 존 웨슬리와 그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이를 텍스트라고 할 수 있겠죠. 감리교 중심에는 구원에 관한

전면적인 신의와 성결을 전면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감리교가 이것을 많이

잃어버렸어요. 한국의 감리교회를 보면 저는 이런 이야기를 못 들어요. 유감스럽죠 사실은. 이를

회복을 해야 해요.

이 얘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감리교는 감독제예요. 감독이 뭐냐면, 감독 중심으로

시스템이 다 되어 있어요. 장로교는 장로 중심이죠. 감리교는 감독 중심이어서 감독이 파송을 합니다.

목사가 목회를 할 때 감독이 파송을 합니다. 미국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한동대학교회로 오게

되었는데 ‘한동대학교회를 가야겠습니다.’ 할 때 감독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감독이 어떻게

허락을 하면, 기술적으로 한동대로 파송합니다. 저 같은 경우 감독이 한동대로 파송을 한 거예요

Page 23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33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사실은. 누가 파송하라고도 안 했는데 파송 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런 절차를 밟아요.

감리교에서는 장로라고 하는 말이 성경에서 목회자라고 하는데 이를 감리교에서는 시스템화

해버렸어요. 감리교에서 안수를 받으면 집사라고 해요. 정회원 목사가 되면 장로라고 해요. 저는

감로교에서 엘더, 장로입니다. 정회원 목사예요. 엘더가 되면 감독이 소위 목회자를 항상 파송을

해줘야 합니다. 의무적으로. 그래서 저는 미국에서 직업을 잃어버릴 걱정은 없습니다. 감리교는

파송을 해야 하니까. 그런데 저는 미국에 돌아갈 마음은 없고요. 어쨌든 감리교의 특징은 이런 것이

있고요. 감리교의 특징 중에 또 하나는 ritual을 강조합니다. 이는 앵그리 교회의 영향이예요. 그래서

감리교에서는 굉장히 교회력을 중요시 여깁니다. 교회를 처음 시작하는 것이 감절, 성탄절, .. 부활절,

오순절, 감사절. 로 끝나죠. 감리교에서는 이를 굉장히 중요시 여겨서 목회할 때에는 그 절기마다

항상 색깔을 바꿔요. 그것에 따라서 성경 구절이나 이런 것을 예배에 적용하고 이런 것들을 철저히

하는 교파입니다. 네 이렇게 간단히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국운 교수 : 워낙 다양한 배경에서 살아오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하실 말씀이 많으셨을

거예요. 우리 손교수님, 맨 처음 하시느라 불리하셨는데 더 말씀하시겠습니까.

손화철 교수 : 장로교인이 워낙 살인을 많이 해가지고. (청중 웃음)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초반에 가톨릭에서 탄압을 많이 받았죠. 그 때는 아직 순복음도 없고, 감리교도 없을 때

루터라는 교회가 온몸으로 다 받았을 때 그것이 한이 되었나봐요. 네. 제가 지금까지, 저도 감리교

목사 사위고, 장모님이 성령 운동, 은사를 받으셔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필리핀에서 돌아다니고

계십니다. 저는 장풍 선교라고 부르는데. 저희 장모님이 돌아다니면 다 쓰러져요. 그러면 입신을

합니다. 저는 되도록 근처에 안 가고 있습니다. 장모님도 저를 입신 시키려는 생각은 별로 안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김형겸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저희 장모님은 필리핀에 주로 계시면서

원주민을 선교하시고, 대전에는 조그만 방을 얻어서 계신데. 그 집에 항상 십자가를 붙여 놓고

계세요. 저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것이 다 맥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냥 제가 느낀 것만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아까 목사님께서

감리교인이라 행복하다. 장로교인들은 내가 장로교인이라 행복하다는 것을 배우지는 않습니다.

장로교에서는 항상 죄를 강조하기 때문에 죄를 강조하니까 용서를 강조하게 되죠. 그래서 하나님이

항상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했을 때에는 별로 와 닿지가 않고, 하나님은 진짜

무서운 분이세요. 너는 그렇게 죄를 많이 짓는데 예수님이 그런 너를 구원해 주셨다. 얼마나

고마우냐. 너는 죄 지을 가능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조심해라. 알아서 기어라. 이렇게 모든 룰에는

인간에 대한 철저한 불신이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까 복음의 내면화, 성령의 증거,

Page 23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34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개인적인 체험의 중요성, 이런 것에서 장로교는 상대적으로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규격 안에

넣으려고 노력을 하는 이유는 규격, 종교성을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인간의 죄에 대한 아주 깊은,

현실에 대한 깊은 ‘나는 해도 안 된다’라는 것이 굉장히 강하고, 그것이 약간 집착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저는 제 스스로를 말씀을 들으면서 많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속한 정통이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 정통이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으니까 그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새로운 교파들이 생겨났겠죠. 그것에 대해서

결국은 모든 교단들이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우리는 옛날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장로교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아까 모든 교단들이 장로교의 특성을 따라가고

있다고 하셨는데, 교파의 특성을 따라가고, 외형을 따라갈 지는 모르지만 장로교의 정신을 따라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장로교 자신이 그 정신을 많이 따라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좀

문제가 있고, 결국은 장로교인이 가장 장로교인다워질 때에 감리교인, 침례교인이 가장 감리교인

침례교인다워질 때에 진정한 전쟁이 아닌 소통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국운 교수 : 앞에 계신 분들은 진정한 장로교인들이 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좀 얘기를

여러분들에게 꺼내놓기 위해서 한두 가지 좀 이야기에 반영되지 못했던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통들이 다 기본적으로는 서구사회, 유럽에서 벌어졌던, 영국에서 미국에서까지

벌어졌던 서양적 기독교의 프로테스탄트적 혁명 이후에, 그 맥락에서 벌어진 대립이고 싸움이고

발언이고 갈래고 그렇다는 거죠. 감리교는 조금 그 뒤에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감리교는 아까

김형겸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기본적으로 영국 국교 속에서 성장해온 그 개혁 모델로 성장해온

것이고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로 이르는 동안 감리교 안에서도 지금 우리가 성결교라고 부르는

오순절이라고 부르는 운동,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대단히 자유주의적인 그런 기독교의 모습 등등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게 보면 서양, 루터 칼빈이 일으켰던 종교 개혁, 혁명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아직까지 그 갈래 갈래가 계속되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신앙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만약에 우리가 재벌 포에 내렸던 두 분

선교사 중에 누구를 만났느냐에 따라가지고 많은 것이 결정된 것이었다면 뭔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겠는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류대영 교수님이 교회사 강의를 하시는 걸로 제가 아는데, 그 강의에서 아마 한국

교회사를 여러분들이 들으면 존 레비어스라고 하는 분의 이름을 들어 봤을 줄 압니다. 못 들어본

사람은 지금이 듣는 날입니다.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님들이 주로 이쪽에 오셨어요. 처음에 오신

Page 23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35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선교사님은 한국 전쟁 이후에 미국의 남북 장로교가 갈리었으니까 북감리교회 분들이 오셨는데

선교를 하려고 하는데 자꾸 다툼이 일어나니까 중국에 내지 선교로 오랫동안 하셨던 선교 본부에

계셨던 선교 전략가인 존 레비어스 목사님을 모셔와서 우리 조선 반도에 선교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여쭙는 워크샵을 하고 나서 레비어스 목사님이 제시한 방법을 채택했어요. 그런데 그게

뭐냐면, 각 교단 별로 선교구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김 목사님께서 경상도 지역에 오면

감리교는 이단이라는 소리를 한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그 이유가 감리교회가 처음에 선거구를 나눌

때 경상도 지역을 분배받지 못 했어요. 그래서 경상도 지역은 주로 장로교가 전도를 했고요.

감리교는 지금으로 치면 황해도, 충청도는 완전히 감리교 판입니다. 저는 충청도 대전 사람인데요.

대전에서는 감리교인 아니면 아예 내놓지를 못 해요. 왜 예전에 불륜에 빠지셔가지고 군수를 때려

치우시고 김포공항으로 나가시다가 잡히신 그 분 있잖아요, 김모 군수님, 당진 군수님. 당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에 다니셔요. 웃자고 한 얘긴데 너무 험해지네요.

초대 이승만 대통령께서 감리교인으로 하셨는데, 그 사람만의 내력이 있습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지역이 장로교들이 많고, 그 분들이 나중에 월남 하셔서 6.25 전쟁 이후에 한국

교회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반봉 기독교를 이끌어 오셨는데, 서북지역은 왜 장로교가 되었느냐.

역시 존 레비어스 목사님의 충고를 따라서 나눠 가질 때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함경도하고

평안도 색깔이 많이 달라요. 함경도 쪽에 계셨던 분들은 지금으로 치면 기독교 장로회 쪽에 많이

계시고, 호남의 장로교와 서북 영남의 장로교하고 또 많이 달라요. 그것도 캐나다 장로회가 설교를

했느냐 호주 장로회가 설교를 했느냐에 따라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혹시 여기 거제도 출신들 있나요.

없나요? 거제도 출신들은 굉장히 반공적이고, 보수적이고 그럴 텐데 그 많은 이유를 하나는 호주

장로교의 보수적인 선교를 통해서 들어갔다는 점. 둘째는 반봉건 석방을 통해서 거제도가 일시에

반공 장로교의 아성이 되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오늘 여러 손님들이 자서전적으로 말씀하시는

데서 일부 드러났습니다만 이것이 개인이 선택한, 아주 깊은 신학적 철학적 고민을 통해서 선택한

요소도 분명히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특히 미국에 있는 교단으로 나누어진 각 교단들에 의해서

선교가 이루어졌다는 점. 존 레비어스 목사님의 선교 정책을 따라서 지역구로 나누어서 되었기

때문에 어떤 지역에서는 아예 선택할 수 있는 교회가 장로교회 밖에 없었고, 어떤 지역에서는

감리교 밖에 없었고, 이런 지난 세기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겪어야 했던 일종의 존재론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좀 알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시간이 많이 갔는데, 제가 제 얘기를 한 3분만 할게요.

저는 침례교 목사님 아들입니다. 침례교 목사님 중에도 전도사 때부터 전국에 전도를

다니신 부흥 강사 목사님 아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에는 저희 집이 천막이었는데요, 천막

안에는 늘 울고 계시는 분들이 계셨고, 늘 안수, 안찰 기도가 늘 있었어요. 장로교인 눈으로 보면

Page 23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36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이단 출신이라고 볼 거예요. 어르신 설교는, 지금도 그러시는데요, 설교의 핵심은 딱 두 가지예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어떻게 받은 생명인데 헛투로 살 수 없다 예수 잘 믿자. 설교를 막

세시간 네 시간 하셔도 예수 십자가, 예수 잘 믿자, 이것으로 설교가 다 요약이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제 신앙 전통에서는 요한복음 신앙, 요한복음 말씀을 제가 어렸을 때부터

들었는데, 그것을 읽을 때마다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나요. 그런데 우리 어르신은 침례교

목사님으로 세례를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한남대학으로 불리는 대전에 있는, 그 대학이

원래는 장로교 학교예요. 그 다음에 공부를 하시기도 하셨어요. 침례교 공부는 3년 밖에 안 하시고

나머지는 다 장로교에서 공부를 하셨다 하시고요. 침례교회가 가지고 있는 아까 말씀하신

민주주의적이고, 근본적으로 개인의 선택을 신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성, 그 면에서 대단히

딱하다는 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하셨어요.

저는 재수를 한 다음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게 되었는데, 아주 우연찮은 기회에 사랑의

교회 대학부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옥한흠 목사님이 계시던 교회고요, 대표적인 장로교

교회 중에 하나인데. 거기서 장로교인으로 제가 훈련을 많이 받았던 것 같은데요. 제일 큰 것은

성경을 묵상하고 그 성경을 나누고, 사실 진짜 장로교인을 보니까 성경을 자기는 묵상 안 하고

목사님한테 성경을 늘 듣는 것으로 되어 있던데 저는 약간 그 점에서는 조금 이상한 장로교의

노출에 되었던 것이고요.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장로교에서 보내신 우리 손 교수님은 은혜 가운데

감리교 장모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저는 은혜 가운데 장로교 목사님 딸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옛날 같으면 종교 전쟁이 벌어져야 할 판인데 네 명 아이들도 함께 지금은 모교회는 침례교로 하고,

여기 와서는 집 앞에 있는 장로교회에 출석하고 있어요. 장로교회에 다니면서도 제가 포항에 와서

아이를 셋이나 다 낳았기 때문에 몇 번 좀 제 신앙의 바탕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장로교회에 출석하니까 유아 세례 받으라고 하잖아요. 그 때 제가 일주일 깊이 기도하고,

나는 유아세례를 받을 수 없다고 결정을 했는데, 제 신앙의 확신으로. 대단히 감사하게도 저의

집사람이 장로교회의 가부장적인 세계관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자기 남편의 가부장적인 것을 존중해

주어서 본인은 유아 세례를 받고.

유장춘 교수 : 그것은 아주 침례교 적이 아니네요.

이국운 교수 : 제 설명이 좀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 청을 받아들여 줘서 저희 집은

현재로서는 장로교에 출석하지만 유아세례는 받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식의 장로교인은 장로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상당히 조금 뭐랄까. 독립화 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좀 길게 저 얘기를 했고요. 원래 우리가 계획 했던 것 보다 한 시간 정도 길어졌는데, 그래도

Page 23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37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아마 여러분들이 재미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20분, 30분 정도 시간을 더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좀 늦게 시작하기도 했고. 여러분들 중에 교수님들 말씀 들으면서 이것은 좀

물어봤으면 좋겠다 하는 것 있으면, 아니면 나는 이 얘기를 좀 해야겠다 어차피 자서전 적으로

했으니까 40년, 50년, 거의 60년 가까이 말씀도 들었지만 20 몇 년 밖에 안 된 내 것도 한 번 얘기

해야겠다 하시는 분은 이야기를 하면 좋겠습니다. 누구시든지 먼저 손을 들어 주시면 이야기를

모아서 하겠습니다.

학생 1 : 네, 저는 경영경제학부 07학번 김강석입니다. 사실 원래 비기독교인이었는데

정말로 아주 힘들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까 감리교에서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체험을

제가 했었고, 그리고 장로교에서 말하는 깊은 죄인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깊은 죄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십자가를 거칠 수밖에 없었고요. 제가 세례를 받기 전에, 예수님을 영접한

시기와 세례를 받는 시기 간에 좀 간격이 있었어요. 확신이 없어서. 침례교의 유아세례를 거부한다는

것처럼 제가 세례의 확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세례를 받은지 돌 지나가 두

돌 다 되어 가는데 아직 교파가 없습니다. 요즘 드는 생각은 교파를 선택을 반드시 해야 하는지,

아니면 교회는 나가는데 서울에 가면 사랑의 교회를 나가고 포항에서는 솔직히 저희 대학교회

예배가 설교말씀이 좋아서 대학교회를 나가는 것이고. 아직까지 사실상 다 맞는 말 같고 그래서

교파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이 있는데. 그런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물음이 생겼습니다.

이국운 교수 : 알겠습니다. 다음 분 좀 발언하시고요. 질문이 있으면 질문을 한 두 개 좀

더 받고요.

학생 2 : 국제어문학부 07학번 백승현이라고 합니다. 말씀해주시는 가운데 들으면서 제

지경이 넓어졌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항상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교파에 대해서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던 것들을 소개해주시고,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다 등 많은 것을 배웠는데요. 네 분 교수님 말씀

듣고 들은 생각이, 시작과 항상 드는 딜레마적인 질문인데요. 예를 들어 전혀 기독교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할 때 아주 쉽게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교회 안 다닐거야. 차라리

성당을 다니겠어. 하나님이 진리라면서 어떻게 교파가 나뉘고, 잘 모르겠지만 카톨릭은 하나이지

않느냐. 너희 기독교는 그렇게 많이 교파가 나뉘어 있으면서 그러냐.’ 이런 얘기들로 싸우기도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드는 생각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분명 하나이고, 성경도

하나의 진리고 말씀도 절대적인데 이것이 교파적으로 많이 분류가 되는 것들이 과연 이것을 우리

Page 24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38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 마치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똑같이 안 지으셨다는 섭리에

뭔가 모르게 비슷한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진리는 복수가 아닌

단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교수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국운 교수 : 이야기가 점점 더 무거워져서 시간을 더 드려야 될지도 모르겠네요.

학생 3 : 05학번 입니다. 제가 최근에 본 책에 의하면 카톨릭 이전의 초대 교회에서는 유대,

구약 시대에 이루어져 오던 모습들이 쭉 이어져서 초대 교회들의 모습들은 상당히 유대적인

모습들이었고, 그 이후에 카톨릭과 함께 변화되었고. 지금 다시 메시안 교회 등 예수님을 다시 믿는

사건 등을 통해서 그 책의 모습에 보면 유대적으로 지켜왔던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들을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개신교도들은 어떻게 이해를 하고 각

교파들을 어떤 식으로 이야기 해야 될지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이국운 교수 : 교수님, 답을 하시겠습니까. 유교수님

유장춘 교수 : 어떤 교파를 설정할 것이냐. 또 왜 교파들이 갈라져 있느냐. 이런 질문들을

들을 때 참 가슴이 아파요. 왜냐면 하나님의 교회가 갈라져 있을 때 그것은 사실 예수님의 몸이

찢겨져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말 할 수 있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는 대안이라는

것이, 사실 우리가 영성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아까 결론적으로 했던 말씀인데,

우리가 영성을 따라가게 되면 교파를 초월해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침례교 교회의

합동 목사로서 작은 시골 교회에 예배를 참석하고 있어요. 주일 낮 예배를 거기서 드리고 교제하고

그 다음에 진해에 있는 장로교회로 갑니다. 거기서 청년부를 위해서 설교를 하고 있어요. 청년부

교육 목사이기도 하죠. 그래서 소속은 침례교이면서 목회는 장로교에서 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단이

중요하냐, 안 하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미션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의

부름심의 소명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거리를 주실 때 거기에 복종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냐. 아까 십자가의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저는 아직 잘 이해가

안 돼요. 십자가 체험이라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거든요. 십자가를 져야만 십자가의 체험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십자가의 영성, 그것을 그 삶 속에 받아들일 때에는 교단이나 교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만 설정이 되면 아주

자유로운 상태에서 유연하게 순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Page 241: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39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이국운 교수 : 그래도 질문은 어디서 시작할 것이냐. 하는 건데요.

유장춘 교수 : 그러니까 제 말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미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부름 받았을 때 그 부름에 따라서 순종하기 위해서 찾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윤식 교수 : 저는 교파를, 장로교나 CRC나 비슷한 성격이지만 저는 끊임없이 교파를

탐색해 왔다고 볼 수 있는데요. 교파를 우리가 다 같은 것이라고 뭉뚱거리기 보다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의 문제지 내적인 문제나 영적인 문제 만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정말 내가 이 신앙으로 살아내기 위한 방법들이 각 사람마다 달란트, 취향,

성향에 따라 달라요. 저 같은 사람은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게 설명이 되지 않으면 갑갑한

사람이예요. 그래서 이것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면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정말 체계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교회에서는 너무나도 통쾌하고 시원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다는 것을 알게 되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이 너무 갑갑하다 느끼면 좀

더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찾게 되죠. 결국 기본 모양은 나의 미션이 어디 있느냐도 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나아가서 내가 어떻게 살거냐, 어떻게 삶에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교파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어떤 것이 자기에게 맞는지, 어떤 것이 정말 내 신앙에 필요한 것인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확신을 가지고. 그렇지 않고 뭉뚱그려 놓으면

신앙이 추상적으로 되고 삶이 추상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굉장히 구체적인 체험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 방법에서의 선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국운 교수 : 진리는 복수인가 단수인가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좀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손화철 교수 : 일단 가톨릭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저는 가톨릭 국가에 있었잖아요.

가톨릭은 교황이 한 명이니까 하나의 교회 같지만 사실은 그 안은 전혀 하나가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거기에 엄청난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남미

해방신학으로부터 남자가 아니면 신부가 될 수 없다 해서 교황까지 스펙트럼 사이에는 개신교와

비교가 안 되는 분야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교황에게 서품을 받고 신부를 하면서 굳이

가톨릭에서 나가려 하지 않고, 굳이 쳐 내지 않기 때문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저는

교파의 분리에 대해서 유장춘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몸이 찢어지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는

Page 242: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40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이 있고, 역사가 이야기해주지면 동시에 그것은 무한한 하나님을

알려는 제한된 인간의 노력은 그렇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단순히 복수라는

것이 아니라 물론, 단수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복수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가 그것을

단수로 알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수학적인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1+1=2처럼 문제를 넣으면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는 거죠. 장로교인으로서 가장 고고하고 규칙 중심적인

생활을 실제로도 하고 있지만, 그러나 말씀하신 복음의 내면화, 내적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 무언지

궁금하고, 그것을 언제가는 장로님께 가서 여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추구하면서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몸이 찢어진다고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봅니다.

김형겸 목사 : 저도 한 마디. 교파를 이야기 했을 때 감리교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청중 웃음) 저만 웃자고 이야기이고. 개인적으로 솔직히 이런 게 있어요. 내 친구가 예수님을

믿었어요. 교회를 소개해야 하는데 내 친구가 울산에 살아요. 교회를 나가야 되는데 감리교회를

찾아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야기하냐면, ‘ 이단만 아니면 돌아다녀 봐. 돌아다녀봐서

너에게 영적으로 도움이 되는 교회를 찾아라. 교회 다니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엄청난 투자를

하는 것인데 너가 10년, 20년 다니는데 배우는 것도 없는 교회를 가면 장로교든 감리교든 가치가

없다. 목회 앞에서 진실하시고, 설교 열심히 하시고, 무언가 본질을 붙잡는 그런 교회를 찾아라.’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 깊이 ‘이왕이면 감리교에 가라’ 라는 것은 있습니다. 사실은

내가 만일에 내 아들, 자식이 있다면 자식이 신학교를 간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지

감리교에 보내고 싶어요. 왜냐면 한 정통이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감리고 전통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감리교에서 잘 못 하더라도 괜찮아요. 감리교라는 뿌리 자체에서 주는 것이 있습니다. 언제나 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신학도 전통이 있기 때문에. 저에게 가까운 자식이라면 그것을 붙잡기를 원하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장로교나 침례교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는 제가 정말 존경하는

신학자들이 장로교, 개혁주의, 침례교 계통 분들입니다. 아까 이야기 했죠. 감리교는 어디서나

배운다. 그런 사실이 저도 많이 괴롭히지만 정말 systematic하게 정말 장로교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요지를 조금만 보충을 하면. 왜 교파냐, 저는 교파는 기독교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손화철 교수님께서 잘 지적하셨는데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언어,

전통으로 담아놓을 수 있는 분이 아니죠. 진리이기 때문에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을 이미 기독교가

가지고 있고 그것을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거죠. 저는 모토를 가지고 있는데 essential한

Page 243: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41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기독교의 진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인데 그런 것들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이 unity를

가지고 있어요. 그렇지만 non essential한 것에서는 unity를 인정한 것은 참 멋있는 거죠. 그리고

장로교는 장로교대로 공헌하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하게 강조했고, 감리교

쪽으로 와서는 상대적으로는 책임성, 성경의 중요성, 침례교에서는 종합적인 것 등 나름대로의

기여하는 것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날줄과 씨줄처럼, 자신의 값을

해주고 있으면서 탄탄하게 기독교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제도라는 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필요했고, 그래서 사도들이 했어요. 역사적으로 제도가 발전해올 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카톨릭은 카톨릭 나름의 제도를 가지고 공헌을 한 것이 있지만 가톨릭에서는 제도, 교회를 중심으로

했어요. 개혁주의에서 다른 것을 중시했다고 해서 제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항상 역사

안에서 다양한 각도로 봐야 합니다.

유장춘 교수 : 말씀을 듣는 중에 제가 생각 난 것이 있어요. 제가 믿는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우리 교회도 삼위일체의

본질을 따라가야 한다고 봐요. 이는 개별성과 공동체성이 하나 되어 있는 것이지요. 교파가 나뉘는

것은 개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공동체성이 있어야 해요.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공동체성의 나눔이 우리 교회에 비극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죠. 손 교수님이나 조금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서, 삼위일체적 교회. 교회의 개별성과 공동체성이 다 하나가 되는 그런 원칙을

우리가 마음에 가질 필요가 있지 않나 합니다.

이국운 교수 : 한 라운드만 더 하겠습니다.

학생 4 : 안녕하세요, 08학번 서두원입니다. 말씀 감사히 잘 듣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아까 말씀하신 과거의 장로교에서 침례교를 이단으로 규명했던 것도 그렇고 요즘도 장로교에 총회에

이단 규정위원회가 있고 지역적으로 나누어져서 노회 안에 또 이단규정위원회가 있고, 이단

규정위원회가 바르게 판단을 하느냐. 성경에 의해서도 잘못 판단해서 이단이라고 규정할 때도 있고.

이단만 아니면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단인가 아닌가의 규정이

잘못되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한편으로는 교파끼리 우리가 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주서려고만 하느냐, 우리가 손을 잡고 나가자고 하면서 다름을 인정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한동

대학교회에서 초교파적인 학교에서 다른 것, 틀림에 대한 구분은 어떻게 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대응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가 궁금해서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Page 244: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42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학생 5 : 안녕하십니까, 저는 04학번 송진열입니다. 잠깐 저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침례교 출신이고 한 교회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20년간 살다가 한동대학교에 왔습니다. 한동대학교에

와서 개인적으로 참 좋았던 것은, 교파라던지 같이 어떤 mission,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어서 참 좋았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다시 교회로 돌아가게 되면 항상 저는

어떤 정죄감이라던지 초교파에 대한 정죄감이 많았습니다.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면서 중요한 것을

깨달았는데, 미션과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래서 어떤

정죄감보다 희망이 될 수 있는 메시지들을 하나씩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이국운 교수 : 저부터 답변 드린다면, 장로교 자매를 어떻게 해보세요. (청중 웃음)

학생 6 : 07학번 김대열이라고 합니다. 말씀 들으면서 생각도 났고, 평소에 궁금했던

질문이기도 한데요.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 진리고 비본질적인 것이 조화를 이룬다고 할 때에,

저로서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단어가 너무 애매하게 느껴져서. 누가 말하는 것이

근본적이고. 문장 자체는 아주 맘에 들고 멋있는데, 이 문장이 성경에 드러난다고 할 때 무엇이

본질적이고 비본질적인지를 구분하는 것조차 우리 가운데 어느 정도 기준이 있을 텐데, 교파주의나

교파 이야기를 나눌 때 그 문장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실제적으로. 답변 들을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이국운 교수 : 교수님들, 제가 2분 정도 시간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조금 더 하셔도

되긴 합니다마는. 마지막 말씀을 겸해서 세 질문 다 아주 무서운 질문들인데. 손교수님이 아까 맨

처음에 말씀하셨으니까 이번에는 거꾸로 가시는게 어떠시겠어요?

김형겸 목사 : 우선 본질, 비본질. 언어에 대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본질에 있어서 어떤

물체와 비본질에 있어서 풍토가 매우 추상적으로 들린다는 것이 사실인데, 단지 이것은 하나의

가이드로 던져주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교회가 씨름을 해야죠, 본질이 정말 뭔지. 본질이 뭔지에

대해서 각 정통마다 씨름이고, 정통과 정통 사이에 해야 될 씨름이고. 금방 답을 빨리 달라고

하기보다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해야겠죠. 그러나 조금 더 큰 그림에서 실제로

essential하다고 하는 부분에 대한 동의는 사실 있거든요.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라고 하면, 이것은

매우 중요한, essential한 기독교 정체성에 들어갑니다. 이것에 대해서 누가 부인을 하겠냐는 거죠.

어느 지방 교회가 자꾸 자신은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데, 책을 읽어보니까 삼위일체는 설명했는데

정확하게 이단을 규명하더라고요. 그런 문제거든요. 이단이예요. 삼위일체라는 문제에 대해서

Page 245: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43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기독교의 맥락과 같이 숨을 쉬지 않기 때문에. 본질적인 문제라고 이야기 할 때 그렇게 애매하기만

한 것은 아니예요. 그것이 장로교와 감리교가 서로 기독교인 이라고 할 때 무언가가 있습니다. 같이

추구하는. 물론 차이점도 있죠. 틀림과 다름의 구분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한 가지 슬픈 것은 제가

어떤 교파에 대해서 이단으로, 왜 이단으로 하는가에 있어서에 큰믿음 교회가 이단인가에 대하여

분석을 한 것 중에 하나가 알미니안 주의다. 장로교라 하는 어떤 교회가 이렇게 규명을 했더라고요.

알미니안 주의는 결국 정확하게 감리교입니다. 큰믿음교회가 이단인데 알미니안 주의다. 이것이

현실이예요. 이것을 이해해주세요.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 사이에서도 씨름

하는거예요. 감리교에서는 우리는 이단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하죠. 결국 정말 기준이고, 정말 성서의

계시적인 것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결국은 시간의 testing을 받아요. 처음에는 이단이라고 아니라고

해도 나중에 보면 이단이고, 이단이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이단이 아니고. 그래서 항상 우리가 너무

지금 여기서 이거냐, 저거냐 하기 보다는 항상 dynamic하고 historical한 면을 기독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시고. 항상 대화하고 이해하고 더 경험하는 각오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유장춘 교수 : 교수님 잘 말씀해 주셔서요, 제가 조금만 더 보충하자면. 이단의 문제,

다르냐 틀리냐 하는 문제인데요.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단에 속한 사람들을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죠. 사랑을 해야 하는데 이단의 행태에 대해서, 분열시키고, 깨트리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여러 가지 건강한 가정이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태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히

틀린 것을 지적하고 공격해야 됩니다. 동시에 우리 정통이라고 하는 교단 내에, 교회 내에 이단적

요소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대치해야 합니다. 교회에 이단적 요소가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이단들이

판치는 거거든요. 어느 정도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의 책임을 절감하고, 이단적 행태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대립하고, 그러면서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해요. 하나의 종교적인 힘, 헤게모니 싸움,

패싸움, 이런 것으로 상대를 누르려고 하는 것은 성공할 가능성이 별로 없어요. 진정으로 사랑하고,

눈물로서 그들을 돌보기 위해서 애를 쓴다면 해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윤식 교수 : 어떻게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고, 이단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하고 본질,

비본질 문제에 대해서. 저는 이 말이 생각이 나네요. 모든 점을 다 믿지 말고 시험해보라. 우리가

영을 시험해 볼 필요가 있는 거 같아요. 영을 시험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행실을 보고 판단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좇아가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생명과, 자유와

풍성함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느냐 아니면 자유를 속박하고, 억압하느냐가 상당히 중요한

판단자가 될 거 같아요. 그랬을 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사람들은 올바른 주장을 하지만

그 사람 스스로가 죄성에 갇혀서 어떤 자기 말대로 살지 못하고 죄성을 드러내는 경우를 보고 그

Page 246: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44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사람의 주장을 틀렸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몰라요. 정말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살아냈을 때 어떠한 뜻이 오는지,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해요. 그러려면 결국 성경을

표면적,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이게 요구하시는 바를 잘 알고 그것을 그

사람이 실천하는 것은 사람마다 특성마다 다양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결국 신앙이라는 것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영을 의심해 보라는 것은 우리들의 행실로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럴 때 기본적으로 죄성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틀려버려요. 그런

점에는 주의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손화철 교수 : 철학에는 변증법이라고 있습니다. 이를 보통 정반합이라고 하는데, 무엇에는

반드시 반대가 있고 그 반대에도 반대가 있겠죠. 반대의 반대에는 뭐겠어요. 아까 그거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정반정이 아니라 정반합이라고 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한 번 갔다 오면 그게 다른

거예요. 맨날 우리 동네에 살다가 다른 동네 갔다 오면 우리 동네가 예뻐 보일 수도 있고 후져 보일

수도 있고. 20년 동안 침례교에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 돌아가면 굉장히 다를 거예요. 우리 교회가

달라 보이고, 왜냐면 다른 것을 경험했으니까. 저는 한동대 있는 동안 그것을 경험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봐야 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해요. 우리나라 장로교인이 장로교가 뭔지 잘 몰라요. 감리교인은 웨슬리를 잘 몰라요. 침례교인은

교회사를 잘 몰라요. 잘 살아가고 있어요. 결혼도 막 하고. 그런데 제가 뭘 모르니까 투철한

감리교인이 아니니까 감리교인과 결혼을 했겠죠. 그러나 감리교인과 결혼 한 이상 감리교를 알게

되고, 감리교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궁금해질 것 아니예요. 제가 싫으나 좋으나 감리교 가서 예배

드리게 되고 그러는 거예요. 저는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자기를 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한동대는 굉장히 좋은 곳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선.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알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알았기 때문에 나에 대해서 알 수 있고. 그런

어떤 변증법은 항상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더 많이 알게 되고. 감사합니다.

이국운 교수 : 오늘 제가 이 모임을 만들면서 목적했던 많은 바를 오늘 확인할 수 있는 것

같아서 감사하고요. 한 두가지만 끝내는 김에 말씀을 드리면, 먼저는 우리 학교가 김총장님을

비롯해서 학교를 이끄시는 분들이 에큐메니컬하게 globalization을 하시는데 기본적으로 찬성입니다.

에큐메니컬하게 할수록 아마도 가톨릭 국가에서 우리 쪽으로 오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고 미사를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동방 교회가 커버하던 지역이

공산권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 생각을 안 하는 것은 아닌데, 벌써 20년 정도 동방 교회가

커버하던 지역이 이제 좀 민주 자유 세계로 넘어와서 경제도 어느정도 발전을 했기 때문에 그 쪽에

Page 247: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45

교파와 교파주의 – 자전적 접근

있는 외국인들 등이 오게될 가능성이 많이 있고,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좋은 의미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서 교파가 다른 것 가지고 혹은 불편해 하면서, 혹은 variety를 즐기면서 같이 살지만,

우리가 radical하게 globalization하면 가까운 장래에 가톨릭 형제들은 누구인지, 가톨릭하고

동방교회는 서로 파혼도 하고 그래서 ‘너희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라고 한 적이 있어요. 가톨릭의

적이었던 동방교회로 보는 것인지. 말이야 바른 말로 이디오피아에 있는 신앙의 형제들이

한동대학교에 장학금 받아 가지고 와서 공부하게 된다면 우리 눈에는 샤머니즘과 다를 것이 없이

보이는 그분들의 2000년 묵은 예배 의식을 여기서 하게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해요.

기독교의 2000년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많은 다양한 신앙의 전통들이 그 나름의 몫을 가지고

한동대학교가 가려는 방향으로 계속 간다면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좀 근본적으로 오픈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아까 다양성에 대해서 저는

평신도라고 생각하지 않고요. 그냥 신도로서 제 짧은 교회사 공부로도 니케아 종교에까지 고대의

일곱 번의 종교회의가 있었는데, 그 때 우리가 합의한 사도들의 신경으로 같이 묵상하고 있거든요.

물론 가톨릭 쪽으로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 정도의 일치의 근거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역사적으로 마련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그 면에

있어서는 개개인으로 한다기 보다는, 한동 공동체가 Christianity 전체를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묵상,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 저기 서울에 강연을 다니는 경우가 제법 있는데요. 아주 재미있는 현상은 저희

대학교에는 신학과 대학이 전혀 없고, 목수들도 좀 계시고, 목사 목수도 아닌데 수업 시간에 설교

잠깐씩 하는 그런 교수님들도 계시고 그런데. 제가 가보니까 장신대학에도 우리 한동 출신들이

굉장히 많아요. 작년에는 제가 총신대원에 특강을 하러 갔는데 30명 가까이가 와서 밥 사달라고

해가지고 특강비 받은 것 보다 더 쓰고 왔어요. 한국 교회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젊은이들이 한동

공동체에서 훈련 받고 또 다양한 전통으로 가게 되는 것. 앞으로 사제가 될 사람들이 왜 없겠어요.

그런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뭔가를 하시겠구나 생각하고. 우리 김형겸 목사님이

지금부터 한 5-6년 전에, 저도 그 멤버 중에 하나였습니다마는 하나의 어떤 가이드라인으로서 한동

공동체의 신앙고백이 필요하다고 해서 한동 신앙고백을 1,2년 작업해서 작성한 것이 있어요. 그 때

우리 김목사님이 main writer였어요. 그것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오늘과 같은 모임을 하게 만든

하나의 근거를 마련했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헌법 선생 노릇만 잠깐 하고 김목사님 마지막 기도해주십사 모시려고 합니다. 우리

헌법, 한국 헌법 읽어보면 굉장히 중요한 단어들이 몇 개가 나옵니다. 자유, 민주, 공화, 그리고 국가.

이 국가라는 말은 주권이라고도 다시 읽을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헌법 시간에 잘 안 하는

Page 248: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246 2010년 봄학기 제3회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이야기에요. 사실 이 안에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이 다 들어있다고 봅니다. 자유라는 표현은

다른 누구보다도 아까 말씀하신 감리교인들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인의 어떤 것도

넘볼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밖에 없다. 민주라고 하는 표현은 사실 우리 침례교인들의

표현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도 더 위에 있을 수 없고 누구도 종이 아니다. 우리는

평등하다.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민주주의 외에 다른 정치체제는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

있어서 장로교인들은 반성해야 한다. 다음 공화. 공화는 사람이 그렇게 잘난 것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죄성이 있기 때문에 권력은 언제나 다른 권력에 의해서 견제가 되어야 한다. check a

balance가 존재해야 한다. 하나님도 세 분으로 나타나셨지 않느냐. 삼권분립이 몽테스키외가

발명해낸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혀 잘못 생각한 것이예요. 일반 계시로는 로마,

아리스토텔레스부터지만, 특별 계시로는 교회 안에, 특별히 장로교인들 안에 성경을 열심히 읽고

모세의 정치체제 등으로부터 가지고 와서 삼권분립의 정치체제를 만들어 낸 거예요. 마지막으로

주권. 주권은 철저하게 가톨릭적인거예요. 주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대단히 가톨릭적인 연원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가르치는 헌법 시간에 얘기 전혀 안 했죠. 저는 우리 헌법 안에 자유의 정신,

민주의 이념, 공화라고 하는 지혜, 그리고 주권이라는 것이 함께 다 들어 있다. 이것을 함께 배워갈

수 있는,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헌법 가르칠 때 그

감격을 가지고 늘 가르쳐요.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이 여러 가지 중요한 기본적인 이념들이예요.

우리가 조금 균형론적으로 더 치우치게 잡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배치해 놓으신 것일 수도 있지만, 결코 틀림이 아니고 다름의 문제로, 그렇지만

그 다름이 우리 안에서 같음을, 공통적인 것을 확인하게 하는 비밀의 출발점으로 이해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만드는데 몇 년 전에 우리가 썼던 한동 신앙 고백문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main writer셨던 김형겸 목사님 모셔서 마치는 기도

부탁드리겠습니다.

Page 249: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
Page 250: 09-2_10-1 학문과신앙연구소 콜로키움 자료집